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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망과 투혼의 계절/전인영 서울대 교수(서울광장)

    지난 25일 김대중 대통령은 그의 취임사에서 지도층의 잘못으로 죄없는 국민이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치르게 되었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그는 6·25 이후 최대의 외환위기라는 국난을 맞아 물가는 오르고 실업자가 증대하며 소득이 감소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위기국면 타개를 위해 온 국민이 애국심을 발휘해 달라고 호소했다.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맞아 길고 험난한 고난의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국민에게 취임 초부터 고통감수와 희생을 요구해야 하는 대통령의 마음도 매우 괴롭고 아팠을 것이다. ○국민고통 감수·희생 요구 우리는 정말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다.요즈음 신문 방송 매체들은 사업실패와 실직 및 생활고 등으로 인한 비극적 사건들을 잇달아 보도하고 있다.IMF 사태는 건전한 기업들을 포함한 수많은 기업들을 도산시키고,충실한 직장인들을 불안과 실직상태로 몰아넣고 있으며,서민들의 경제·사회생활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극소수지만 경제난으로 절망감을 못 이겨 소중한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마저 나타나고 있다.오죽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면 귀중한 목숨마저 버려야 했을까를 생각할 때 실로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기막힌 수난사를 돌이켜 볼 때,오늘의 상황이 최악의 절망적 상황이 아님을 알 수 있다.가난하고 외세가 좌우하던이조 말기의 절망적 상황,나라를 잃고 고유의 언어·이름마저 쓸 수 없었던 일제 36년동안의 탄압과 치욕,수 백만의 인명을 앗아간 동족상잔의 한국전쟁과 눈물겨운 피난생활,식량난으로 쓰러져 가는 북녘의 우리 동포들을 생각할 때,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가리켜 절망적 상황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극심한 고통과 절망감에 쉽게 굴하지 말고,또 한번 위기극복을 위한 투혼을 발휘해야 한다.인간의 능력은 무한에 가깝다.절박한 위기상황이나 열악한 환경하에서 인간은 믿기 어려운 강인함과 위대함을 발휘할 수 있다.오늘날 우리가 처한 힘든 상황이 무한히 지속될 리는 없다.최악의 상황을 인내와 노력으로 극복해 나간다면 재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사업에 실패하여 한때 생을 끊으려 했던 사람이 마음을 고쳐먹고 재기에 성공한 사례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있다.배우자를 잃은 평범했던 주부가 자녀들을 위해 강인한 생활력을 지닌장한 어머니로 변모하는 모습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인간은 위기와 절망적 상황에서 쇠처럼 강해질 수도 있다.절망적인 사람에게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다면,그 자체만도 큰 축복이요 희망임을 명심하고 시간과 인내와 노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인내·노력으로 위기 극복 우리는 위기상황을 맞아 굴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구한 인물 및 민족들의 경험으로부터 용기와 소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임진왜란 중 이순신장군은 고립무원과 열세의 절박한 상황하에서 왜군의 서해 진출을 끝까지 차단함으로써 일본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1950년 6∼7월 기간 한국군은 불의의 기습과 무기·장비의 열세로 인하여 군사적 패배를 거듭하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사력을 다해 싸웠었다.그 해 여름 내내 워커 장군은 인민군의 결사적 공격으로 낙동강 방어선 일부가 붕괴되는 절망적 상황을 맞으면서도 인천 상륙이 성공할 때까지 방어선을 끝내 사수했다. ○“우리경제 강화” 단련기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처칠 수상은 절망적 사태 전개에 굴하지 않고 영국인을 단합시켜 히틀러의 야욕을 꺾었다.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해 소련을 구한 주코프 장군과 그를 믿고 따른 러시아 국민들의 인내와 투혼도 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심각한 외환·재정위기가 우리에게 무한의 인내와 고통 및 희생을 요구하고 있지만,우리가 굴복하지 않는 한 절망은 없다.역사는 전쟁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절망적 상황을 극복한 인간의지와 투쟁의 승리사이다.“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는 말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새로운 힘과 희망을 주는 진리이다.우리 격언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다.사람은 순탄할 때 보다 험난할 때,더욱 강해지고 성숙해 지기 마련이다.현 IMF시대는 우리 국민과 경제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시련기이며 단련기이다.대통령을 위시한 온 국민이 국난극복을 위해 혼연일치로 단결하고 불굴의 투혼을 발휘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경제전쟁에서 승리하고 말것이다.
  • 이인제 후보­박찬종 고문 돈암장 회동

    ◎“세대교체 노력” 합의… 연대 가능성은 불투명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와 신한국당 박찬종 고문의 16일 돈암장 회동은 이후보로선 만족할만한 성과는 없었다.다만 ▲세대교체를 통해 낡은 정치를 청산하고 ▲이런 과제의 실현방안을 계속 논의키로 한 회동 발표문은 고립무원의 이후보에겐 적잖은 힘이 된 것 같다.박고문의 한 측근은 “비록 박고문의 몸이 실리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실렸다”면서 “(박고문의)결단이 임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보와 박고문의 연대가 이뤄질 것이라는 이후보측 주장은 다소 성급한 감이 있다.박고문은 회동직후 “여권과 지역분열을 막기 위해 하나가 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그가 강조해온 이회창·이인제 후보 연대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박고문은 “이후보에게 많은 충고를 했다”면서 “이회창 후보도 전부 남의 탓이고 내 탓은 없다는 것은 잘못됐다”고 두 이후보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
  • “당결속 저해”­“불가피” 엇갈려/여 중진 입장

    ◎대통령 탈당요구 득표에 전혀 도움안돼/“고립무원 입장서 자립노린 행동” 시각도 신한국당 이한동 대표와 김윤환 박찬종 김덕룡 공동선대위원장 등 당지도부는 김영삼대 통령의 당적 이탈을 요구한 이회창 총재의 기자회견을 못마땅해하는 기류가 강하다.특히 이대표는 이총재의 기자회견장에 배석해서도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그는 이어 선대위원장들과 자신의 방에서 만나 이 문제가 미칠 파장등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이대표는 이들과의 회동후 “이 시점에서 명예총재에게 당적 이탈을 요구한 것은 당의 화합과 결속에 문제가 있다는게 선대위원장들의 공통인식”이라면서 “절차와 시기,내용에도 문제가 있고 선대위가 추구해야 할 득표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밝혔다.전체적인 기조는 상당히 비판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박위원장은 이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명예총재로 남아있는 것과 공정선거관리는 별개”라면서 “더욱이 이총재가 택한 방식과 절차는 국민을 불안케 할 우려가 크다”고 비판했다.그는 한술 더떠 “지금과 같은 정치풍토에서는 누구도 정치자금으로부터 자유로울수 없다”면서 “검찰 결정도 고뇌 끝에 나온 것으로 사실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덕룡 위원장도 “대통령의 당적이탈요구는 당에서 중지를 모으는 공식 절차를 밟았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김윤환 위원장은 이총재가 김대통령과의 결별을 선언할 수 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그는 기자간담회에서 “집권당후보인 이총재가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마당에 자립을 하겠다는 심정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한다”고 이총재를 두둔했다.그러나 김대통령의 당적문제는 11월중순이면 정리될 것으로 생각했고 그런 점에서 적절한 협의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은 문제라고 덧붙였다.이총재와 김대통령 사이에서 더욱 입장이 난처해진 강삼재 사무총장은 “참담하고 안타깝다”고 자신의 심경을 피력했다.이를 반영하듯,강총장은 당무회의가 끝난뒤 이총재의 기자회견에 배석하지 않고서 외부로 향했다.곧 거취표명이 있을 것이라는게 측근들의 전언이다.
  • 대선총력체제 다지는 이 대표

    ◎반이 중진급인사 속속 합류… 자신감 회복/청와대 지원사격 업고 내부전열 재정비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가 대선을 겨냥한 총력체제를 다지고 있다.5일 주례보고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거듭된 지지선언에 힘을 얻은 이대표는 내우에서 눈을 돌려 본격적인 대선행보에 나설 태세다. ○내주부터 상황 호전 이대표는 전날 귀국한 이한동 고문과 서청원 김운환 의원 등 반이쪽에 섰던 일부 인사들이 이대표쪽으로 서서히 ‘U턴’하고 있다고 판단,자신감을 회복하고 있다.이대표가 이날 구기동 자택에서 기자들과 만나 “다음주부터는 상황이 호전될 것”이라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오는 8일 원내외 위원장 연석회의와 청와대 만찬을 계기로 당내 돌출언행은 명분을 잃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당대표실 항상 개방 특히 이대표는 이날 당내 일각의 잡음을 줄이고 의사결정과정에서 일부 의원들의 소외감을 없애기 위해 당 대표실을 원내외 위원장들에게 항상 개방토록 비서실에 특별 지시했다.이대표의 한 측근은 “이인제 지사가 독자행동에 나서려 한다면 고립무원의 지경에 빠질 것”이라며 “8일 연석회의에서 당내 인사들의 중지가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모일 것”이라고 강조했다.이 측근은 “이제 비주류는 없다.적극적 지지자와 소극적 지지자가 있을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와함께 이대표는 다음주초 강재섭 정치담당 특보와 동급인 분야별 특보 5∼6명에 대한 인선을 마무리할 방침이다.여기에는 장관급 인사와 학계인사,원내 중진의원 등이 포진할 것으로 알려졌다.기존의 특보단도 ‘직급 인플레’를 걷어내고 실무위주로 재편할 계획이다.이대표는 비주류에 대한 ‘가지치기’를 마무리하고 참모진의 면모를 일신하는 등 내부전열을 가다듬는대로 대선 총동원령을 내릴 작정이다. ○이미지 부각에 역점 특히 대선기획단은 추석전 이대표의 이미지를 제고시킬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강구중이다.급격한 지지율 반등은 힘들겠지만 대선이 화두가 될 ‘추석민심’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취지다.이를 위해 대선기획단 홍보본부는 이대표를 상징화할 수 있는 캐치프레이즈를 신문광고를 통해 공모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다.신경식 홍보본부장은 “이대표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부각시켜 여론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경제난 해결 방안(김정일의 북한:12)

    ◎“위기의 경제 탈출구는 중국식 개혁·개방”/‘우리식 사회주의’란 방어·수동적 개념 생존전략/한시 외자유치도 미봉책… 닫힌 체제빗장 풀어야 김정일체제가 들어서면서부터 북한은 ‘우리식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구호 아래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모색해왔다.‘우리식 사회주의’란 동구 사회주의권이 해체돼 고립무원의 상태에 처한 북한이 종래의 공세적이고 능동적인 차원과는 달리,방어적이고 수동적인 차원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하나의 시도라고 분석된다. ○성공 가능성 극히 희박 우리에게는 마지막 절규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러한 시도는 연이은 자연재해와 북한체제의 구조적인 모순이 겹쳐 이제 성공할 가능성이 극히 적다는 것이 국내외 북한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견해였으며,금번 서울신문사와의 접경지대 현지조사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급변하는 국제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폐쇄정책을 버리고,체제를 개혁·개방하는 것 외에는 달리 왕도가 있을수 없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 등소평이 등장한 이후 ‘사회주의 시장경제’를표방하면서 불합리한 제도와 체제를 과감하게 개혁하고 외자를 적극 유치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방정책을 취했다.이러한 정책이 결실을 거둬 이제 중국은 만성적인 식량부족 상태를 극복하고,의식주를 비롯한 기본적인 생활문제는 해결한 상태이다.이로 인해 중국은 사회주의체제에서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한 성공적인 사례가 됐으며,북한도 결국은 중국이 취했던 것과 같은 길을 밟지 않으면 체제 자체의 존속이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북한이 현재 취하고 있는 조치들은 이와는 거리가 멀거나,극히 제한적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이중 어느 방식을 따르더라도 북한이 처하고 있는 현재의 위기상태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군부를 비롯한 강경파의 경우 ‘우리식 사회주의’를 고수하며 사회주의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고 애써 주장하고 있다.이들은 사회주의가 현재 곤경에 처한 것은 사실이나 사회주의는 과학이기 때문에 결국은 승리할 것이며,경제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물질적인 자극이 아니라 인간의 사상 의식이라고 강조하는 김정일의 주장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이에 따라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모든 것을 결정하는 철학적 원리’임을 역설한 주체사상의 학습이 중요한 과업으로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구호보다 옥수수 원해 그러나 구호를 먹고 살 수는 없기 때문에,금번의 현지조사에서도 확인한 바와 같이 북한 주민들은 허황되고 거창한 구호보다는 허기진 배를 채울수 있는 한줌의 옥수수가루를 더 필요로 하고 있었다.한적한 중국거리가 교통체증을 일으킬 정도로 목재를 실은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북한으로부터 나오고 있었고,이들은 다시 옥수수나 밀같은 먹거리를 싣고 들어갔다.이로 인해 북한의 산들은 벌거벗은 민둥산으로 변하고 있으며,중국측 접경지대에는 산더미처럼 나무를 쌓아놓고 이를 가공하는 목재소들이 즐비했고,이들은 한껏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장백에서 만난 중국인 관리조차 북한이 나무를 다 베어내면 자신들의 경제가 위축될지 모른다고 우려할 정도로,엄청난 규모로 벌채가 이뤄지고 있는 형편이다. 극심한 식량부족으로 주민이 굶어죽어가는 절박한 상황에서 제시된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구호는 식량난과 경제위기 타개의 비전이나 정책이 결코 될 수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지도부가 개혁·개방을 외면하며 ‘우리식 사회주의’를 계속 고수할 경우,북한의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고 이럴수록 대외의존은 불가피할 것으로 분석된다. 의식개혁과 사상교육을 강화한다고 해서 식량과 교환할 산림이나 지하자원이 솟아나는 것도 아니며,공장을 가동시킬 에너지가 생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따라서 주민들의 의식주 문제를 국제사회의 인도주의적 원조에 의존해 해결할 수 밖에 없는 딜레마에 처하는 것이다.이처럼 ‘우리식’을 강조하는 것이 결국은 더욱 많은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도 임시방편일뿐 언제까지고 외부에 의존하고 있을 수는 없기에,‘우리식 사회주의’는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고 할 수 있다.또한 북한의 현 지도부도 무책임하고 무능하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계속 외면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외부 사정에 비교적 정통하다는 온건파의 경우도 사회주의 체제의 유지라고 하는 대전제 아래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개방만을 하려는데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이의 전형적인 실례가 지난 91년12월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 설치의 공표였다.이는 중국의 사례에서 나타난 것처럼 선진국의 자본과 기술의 도입 없이는 경제난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판단에서 나온 조치였다.그러나 외자 유치에 따른 ‘자본주의적 오염’이 북한체제에 미치는 영향은 한사코 차단해야 한다는 전략으로 인해,그리고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한국기업의 진출이 이뤄지지 않는 탓으로 인해,지금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신용도 낮아 투자 꺼려 이와 아울러 북한 사회는 당간부의 지시나 명령이 법이나 제도보다 우선시돼 장기적이고 합리적인 사업계획의 수립이 불가능한 데다,대외신용도 마저 낮고,나진·선봉지역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사회간접자본 시설에 대한 투자가 낙후돼 외국인들은 투자를 기피하고 있는 실정이다.투자를 기피하게 하는 또하나의 요인으로는 제도상의 미비점과 시행착오를 들수 있으며,이로 인한 피해도 적지 않아 커다란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다.이 분야에 정통한 연변의 한 조선족 교수는 초기에 나진·선봉지역에 투자했던 조선족 동포들이 7억원(한화 약 700억원)이나 떼였으며,이 과정에서 북한 역시 1억원(약 100억원)정도 사기를 당한 상태이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투자를 꺼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볼때 제한적인 범위내에서의 개방조치는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며,경제난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책이 될 수 없다고 분석된다.따라서 최악의 경제위기에 처해 있는 북한이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대외 개방정책의 채택으로 선진기술과 자본을 도입하고,제도와 체제의 개혁으로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해 나가는 중국의 방식을 취하는 것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집필=심지연 경남대 교수·정치외교학〉
  • 한총련 가투 엄벌하라(사설)

    친북성향의 소위 「주사파」가 주도하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제5기 출범식을 경찰이 원천봉쇄한 가운데 대학생들이 달리는 열차를 강제 정차시키고 무단 탑승하는 소동을 빚었다.시대착오적인 극좌이데올로기와 북의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있는 한총련은 다수 학생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자 오히려 화염병 시위 등 과격투쟁 일변도로 나서더니 이제 서부영화속의 갱이나 자행하는 「열차세우기」에 이르렀다. 광주·전남지역총학생회연합(남총련)소속 대학생 1천여명이 한양대학 출범식에 참가하려 검문·검색이 강화된 역을 피해 건널목,간이역 등 네곳에서 달리는 열차를 세워 집단 탑승하는 위험한 작태를 연출한 것이다.부산·경남총련 소속 대학생 500여명도 열차를 타고 영등포역에 도착한뒤 경찰을 피해 떼를 지어 철책을 넘어 달아나는 위험한 탈주극을 벌였다. 우리는 이것이 21세기 진입을 코앞에 두고있는 이 시대 지성인인 대학생들이 할 짓인지 묻지않을수 없다.더구나 「주체사상 설계사」황장엽의 한국망명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교훈을 깨닫지못하는 그들의 경직된 사고에 새삼 실망을 금할 길이 없다.공공교통수단의 안전운행을 방해하는 행위는 사회의 기초질서를 뒤흔드는 중대한 위법행위가 아닐 수 없다.한꺼번에 수백,수천명을 태우고 달리는 열차를 급정거시킬 경우 대형 인명피해를 수반하는 탈선·전복 등의 사고 가능성이 크다.철책을 넘고 역구내를 마구 달리는 것도 인사사고의 위험 때문에 금지된 행위이다. 한총련의 시대착오적 노선과 함께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빗나간 행위,화염병을 마구 던지며 시위를 벌여 도심을 마비시키는 과격행위는 결국 그들을 동료 대학생과 국민들로부터도 지탄받고 외면당하는 고립무원의 처지로 내몰 것이다.당국은 열차 강제정차소동 및 화염병 시위의 주동자들을 색출하여 엄히 제재해야 한다.
  • 북 도발에 철저한 대비를/사회불안·경제침체는 없게(사설)

    북한의 적반하장격 보복위협이 날로 도를 높여 한반도에 일촉즉발의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꼬리를 잡힌 무장공비 남파에 사과를 해도 부족한 마당이다.그럼에도 지난달 27일 자신들이 오히려 피해자라며 「백배 천배의 보복」을 공언하고 나섰던 북한이 이제는 판문점 군사정전위 비서장급 접촉에서 『남측에 보복을 할테니 미국은 개입치 말라』는 최후통첩식 협박을 하기에 이르렀다. 보복을 해야할 쪽이 있다면 그것은 남한측이다.한반도에 다시한번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어서는 안되겠기에 은인자중하고 있는 우리를 저들은 짐짓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최소한의 양심마저 저버린 저들의 적반하장격 보복위협의 부당함에 대해 거듭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북측 지도부를 더이상 이성을 갖춘 집단으로 상대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북한기도 원천봉쇄 해야 20세기말 세계사적 대세인 사회주의체제의 몰락속에 고립무원 신세가 된 북한 지도부는 당면한 경제 파탄과 식량난을 극복할 합리적 방안을 찾을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진것으로 파악된다.약체 김정일의 지도력 혼조가 불러온 경제·사회 각분야의 효율성 감소와 동요로 저들은 더 늦기전에 「마지막 카드」로 기습전에 의한 적화통일 시도라도 해봐야하는 것 아닌지 하는 초조감에 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총련 사태가 수습된 상황에서 남한 내부를 다시한번 흔들어 놓을 요량으로 침투시키던 무장공비가 중도에 노출·섬멸됨으로써 오히려 국제적 지탄과 고립만 자초하게됐고 이 위기를 최강의 역공,덮어씌우기 전술로 탈출하려 시도하기에 이른 것이다.북은 전면 기습전에 의한 적화통일전략은 일단 묻어놓고 국지도발에 의한 긴장고조로 선거를 앞둔 미 클린턴 행정부로부터 또다시 양보를 얻어내며 위기를 돌파하려 들 것으로 예상된다.아울러 우리 재외공관원,상사원,유학생을 납치·테러하거나 항공기 납치·테러,남한내 고정간첩을 이용한 공공시설 폭파,요인테러 등으로 사회불안 조성도 노릴 가능성이 크다. ○중요한 것은 침착한 대응 정부는 무엇보다 철저한 군사적 대비태세와 경찰력으로 북의 이같은 기도를 원천봉쇄해야 한다.원활한 한·미 공조로 북의 이간책이 먹혀들 소지를 없애는 한편 한·미 양국의 군사적 대비태세도 강화해야 할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침착한 대응이다.지나치게 허둥대거나 동요하여 경제활동이 침체되거나 사회 불안이 조성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그간 대북시각의 혼선이 초래했던 흐트러진 국민적 안보의식을 다잡아 차분하게 정리하고 일부 사병들의 탈선 등 해이된 군의 기강을 다시 추스리는 것도 중요하다.북의 기도가 무엇이며 우리 안보의 허점이 무엇이었던가를 하나하나 냉철하게 가려내어 완벽한 보완조치를 취할 것을 당부한다.
  • 설땅 없는 한총련/구본영 정치부 기자(오늘의 눈)

    밀입북한 한총련 소속 대학생 2명이 21일부터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이다.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해프닝의 연출자는 역시 북한당국인 것같다.북측이 이를 소재로 22일부터 언론매체를 총동원,대남 선동공세를 펴고 있음이 이를 입증한다.북한내 각종 정당. 사회단체 명의의 성명을 통해 한총련 폭력투쟁을 거듭 비호. 찬양하면서 지속적인 반정부투쟁을 부추키고 있는 것이다. 이 와중에 한총련 산하 서총련 소속 학생들이 22일 야당당사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상황은 차라리 희화적이다. 이들은 혹시 우군이 아닌가 하고 찾아갔던 야당측으로부터 철저히 불청객 취급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연대사태로 구속된 동료들의 석방을 관철시키기 위해 국민회의와 민주당 당사를 농성장으로 제공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됐다. 더욱이 『그동안의 친북발언을 반성해야 한다』는 등 핀잔까지 들어야 했다. 이쯤되면 연대 사태 이후 한총련의 설땅이 얼마 만큼 좁아진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국민정서와는 동떨어진 급진성향의 논리에 근거한 「통일운동」과 과격시위가 결과적으로 그들의 입지를 옥죈 셈이다. 따지고 보면 8·15 범청학련대회를 무대로 한 한총련의 통일운동은 처음부터 무모한 도박이었다. 연방제 통일,미­북 평화협정 체결등 북한의 주장에 편승했기 때문만은 아니다.무엇보다 일부 핵심지휘부가 주체사상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이념에 경사돼 고립무원의 처지를 자초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체사상은 이미 이 지구촌에서 「헐벗은 신화」에 다름 아닌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주체사상에 기반을 둔 이른바 「우리식 사회주의」가 북한당국으로 하여금 온세계를 상대로 식량구걸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까닭이다. 농성중인 학생들과 북한당국이 금세기의 석학 폴 새뮤엘슨 교수의 경구에 귀를 기울였으면 싶다. 새뮤엘슨 교수는 대안이나 비전 제시없이 그의 주류경제학에 시비를 거는 신좌파학자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여러분이 후세에게 알려지기를 원한다면 빛과 과실을 남기는 것 이외엔 길이 없다』고.
  • 북은 4강 거부반응 주목해야(사설)

    북한의 정전협정 백지화를 겨냥한 비무장지대 무력시위는 결국 외교적 역풍만 자초한 꼴이 됐다.그들이 노리는 대미 단독평화협정체결에 유리한 여건조성은 커녕 중국 러시아로부터도 차가운 눈총을 받는 신세가 됐다.휴전선에 전쟁위기를 조성하여 한·미간 불협화를 유도하고 북·미 평화협정을 위한 단독대화 테이블을 마련해보려던 북의 무모한 「벼랑끝 전술」이 국제적 고립만 불러오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우리는 이번 북한군의 비무장지대 무력시위 사태와 관련하여 한반도 주변4강이 보인 거부반응을 북한측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본다.요약하자면 미국은 한반도 평화체제문제를 북한이 재미를 보았던 「북핵문제」방식으로는 처리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더이상 위기조성 전술에 말려들지 않겠으며 확고한 한·미공조 아래 당근아닌 채찍으로 대응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일본도 북의 한반도 긴장조성이 일·북관계 개선에 걸림돌이 될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중국의 반응이다.북한측 요청에 따라 군사정전위에서 대표를 철수한 바 있는 중국이지만 북의 기대와는 달리 새로운 평화보장체제가 확립되기까지는 현재의 정전체제가 유지돼야하며 평화협정은 미·북간이 아니라 관련 당사자인 남·북한간 협상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러시아역시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으로 무력충돌이 일어날 우려가 있음을 경계하며 북한이 전쟁을 도발할 경우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하고 있다.또한 11일 열릴 유엔 안보리도 어떠한 형식으로든 이같은 4강의 견해를 취합,대북 경고메시지를 채택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국제적 고립무원 신세가 된 북한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국제여론에 승복,가당찮은 전쟁위협을 걷어치우고 92년 발효한 남북기본합의서대로 정전협정을 준수하는 한편 평화정착을 위한 남북 당국간 대화에 호응해 나서는 길뿐임을 깨닫기 바란다.
  • PCS경쟁「연합전선」윤곽/데이콤,금호컨소시엄에 참여 최종입장정리

    ◎한솔­효성 컨소시엄 구성 합의… 지분 등 조율/LG 독자노선·대우는 비제조업군에 탐색전 개인휴대통신(PCS) 사업권 획득을 둘러싼 경쟁구도가 윤곽을 드러냈다. 통신장비 비제조업체군의 한솔과 효성그룹은 22일 PCS사업권 획득을 위한 공동컨소시엄을 구성키로 하고 지분은 두 그룹이 20%씩,컨소시엄 참여 대기업 20%,중견·중소기업군 각각 20%씩 나눠 갖기로 합의했다.또 이들 두 그룹은 서울의 경우 강남과 강북,전국은 동과 서로 나눠 서비스권을 갖기로 의견을 조율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솔­효성컨소시엄에는 쌍용·한화·고합등 대기업이 주요 주주로,진도·내외반도체·대웅제약·경동보일러·큐닉스컴퓨터등이 중견 주주로,엘렉스컴퓨터·써키트등이 군소 주주로 각각 참여했다. 통신업계 관계자들은 이처럼 데이콤이 막판들어 금호컨소시엄으로 기운 것은 금호가 도덕성 시비에 휘말린 적이 없는 데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라는 요구에 어느 정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로써 통신장비 비제조업체군의 PCS사업권수주전은 사실상 한솔­효성,금호­데이콤 2자간 연합군의 맞대결 구도로 좁혀질 전망이다. 장비 제조업체군에서는 삼성­현대 연합컨소시엄과 LG독자컨소시엄의 대결로 굳어진 상태이다. 그러나 「빅4」중 삼성·현대가 일찌감치 손을 잡고 LG마저 독자노선을 고수하는 바람에 고립무원의 신세가 된 대우의 경우 계속 『PCS사업만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어 대응방향이 주목된다. 통신업계는 이같은 상황을 종합해 볼 때 대우가 「빅4」군에서는 사업권획득이 사실상 불투명해진 만큼 비제조업체군의 금호­데이콤 컨소시엄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 일진·고합·해태·아세아시멘트·동아·한라·대륭정밀등 8개 기업이 경쟁을 벌이고 있는 국제전화부문에서도 조만간 연합컨소시엄이 구성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 부문에서는 전국규모의 통신망을 갖고 있는 한전의 향배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가운데 롯데­동아,한라­해태­일진,대륭정밀­아세아시멘트등 3개그룹으로 나뉘어 합의점을찾고 있다.그러나 결국에는 3∼4개 그룹이 짝을 지어 2개의 컨소시엄이 생겨날 것으로 통신업계 관계자들은 내다보고 있다.〈박건승 기자〉
  • PCS사업권 “혼전”/심사기준 변경후 유력사 견제·로비 등 치열

    ◎삼성­현대 제휴·한솔「뇌물파문」·기협 빠른 행보/「비 통신장비 그룹」 1장 따내기 데이콤행보 변수 개인휴대통신(PCS)사업자선정이 혼전이다. 삼성이 현대와 공동 컨소시엄을 전격 구성키로 해 세간의 예상이 허를 찔렸고 비통신장비그룹에 할당된 한장의 PCS티켓에 유리한 위치에 섰던 한솔도 공정거래위 뇌물공여사건으로 사업자선정의 중요기준인 「도덕성」에 스스로 먹칠을 해 전도가 불투명해졌다.이런 가운데 박상희 중기협회장이 PCS사업을 따내기 위해 발빠른 행보에 나서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게 됐다. 알려진대로 PCS사업은 문민정부 최후,최대의 이권사업.정보통신부가 이미 사업권 3장 중 한장은 한국통신 몫으로,나머지 2장 중 한장은 삼성 LG 현대 대우 등 4대 통신장비그룹에,다른 한장은 한솔과 금호·효성·중기협 등 비통신장비업체에 배정키로 방침을 세웠다.정통부는 최근 사업자선정기준을 바꿔 컨소시엄 대주주의 경우 ▲참여업종수 ▲최근 5년간 기업인수 및 신규업종 진출유무 ▲기업경영의 도덕성을 중요 심사기준으로 삼겠다고 발표했다. 이같은 심사기준 발표가 있고 난 뒤 그간 물밑작업을 해온 참여희망업체들이 본격적인 합종연횡에 나서 「적과의 동침」으로 불리는 적대적 제휴를 하기에 이르렀다.삼성의 현대 끌어안기는 LG에 뒤떨어지는 기술력을 뒤받침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지만 각 그룹의 각개약진을 전제로 전략을 짜온 LG에겐 기습이었다.LG는 『양자의 제휴는 세불리를 시인한 야합』이라며 숫적인 힘보다 개발실적과 기술력을 무기로 밀어부치겠다는 입장이다.LG는 대우와의 연대도 모색치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고립무원의 대우가 삼성­현대의 컨소시엄에 참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 한솔은 최근 아남산업과 고합그룹에 이어 한화그룹의 한화전자정보통신까지 컨소시엄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그러나 19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그룹으로 급성장한데다 뇌물사건이 치명타가 돼 중기협에 쫓기는 입장이 됐다.박상희 회장은 최근 이석채 정통부장관과 최종현 전 경련회장을 잇따라 만나 PCS티켓의 중기협 할애를 요청했다.이밖에도 테이콤을누가 잡느냐 역시 비통신장비그룹에 할당된 티켓에 큰 변수다.금호와 효성이 연합해 데이콤을 끌어들이면 사정은 또 역전된다.
  • 통일 끈기있게 대처하자/송복 연세대 교수·정치사회학(시론)

    지금 한국에서는 북한이 곧 붕괴하고 멀잖아 통일이 되리라 믿는 사람이 많다.이 지구위에 남은 마지막 분단국가이니만큼 통일의 열망도 그만큼 세다.갈라진 나라로는 대만·중국이 있다 해도 인구로 보나 크기로 보나 이들 나라는 분단국가라 하기 어렵다. 어떻든 우리도 월남이나 독일처럼 그렇게 소원하던대로 통일할 수 있을까.월남과 독일 통일의 공통점은 다른 한쪽이 저절로 「무너져 준 것」이다.전쟁을 치른 월남의 경우 사정이 전혀 다르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미군 철수후인 75년,북쪽이 본격적으로 공격도 하기 전에 남쪽이 먼저 무너져 내린 것이다.그 대표적 예가 월남 중부의 요충지인 퀴논의 월남군이다.당시 퀴논에 포진해 있던 월남군 최정예부대 15만명이 월맹군 불과 7백명의 교란으로 군단장은 배를 타고 도망가고,사병은 뿔뿔이 흩어져 싸움 한번 해보지도 않고 부대가 내려앉은 것이다.지금도 하노이에선 그때 어떻게 그렇게 빨리 쉽게 통일할 수 있었는지,신기해 하기만 하는 회고담을 늘어놓고 있다. 그렇다면 미 CIA 도이치국장이 얼마전 말한것처럼 북한도 월남이나 동독처럼 「붕괴」할 것인가.그리고 그 붕괴는 우리의 많은 사람들이 믿는대로 통일로 이어질 것인가. 그러나 분명히 나눠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그것은 바로 북한의 「붕괴」와 한반도의 「통일」이다.붕괴와 통일을 등식으로 볼 것이냐,안볼 것이냐이다.확실히 월남과 독일의 경우 「붕괴」는 곧 「통일」이라는 등식이 성립됐다.그러면 우리도 그러한가.이 물음에 앞서 이들 나라는 어떻게 한쪽의 붕괴가 통일로 이어질 수 있었느냐의 풀이가 중요하다. 월남의 경우 남쪽 월남이 무너짐과 함께 그 정부를 떠받쳐줄 외부세력이 없었다는 것,그것이 통일의 필수요건이다.월남 스스로 붕괴했다 해도 외부세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새 정부를 세우고 군대를 재정비할 수 있다.그러나 월남은 2차대전 직후의 영국 세력도,그후의 프랑스 세력도,그리고 맨 마지막의 미국세력도 물러가고 국제적으로 고립무원의 상태였다.그 고립무원이 붕괴와 통일을 등식으로 만들어준 주요인이 된다. 이것은 독일의 경우에도 다르지않다.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때 거대한 소련제국도 붕괴되었다.이 두 사건은 거의 동시에 전후해서 일어난다.동독을 밀어주고 재건해 줄 외부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독일 또한 「붕괴」는 곧 「통일」이라는 성취가 이뤄졌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러한가.우리는 불행히도 21세기 초강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중국이 북한의 배후세력으로 버티고 있다.북한이 「붕괴」되면 그 뒤에 있는 중국이 월남의 미국이나,동독의 소련처럼 팔장을 끼고 보고만 있을 것인가.중국과 북한은 수비동맹을 맺고 있다.그 시효가 만료되는 올해 더 이를 여지도 없이 연장할 것이라고,지난번 한국을 방문하기 직전의 중국당 총서기 강택민이 기자회견에서 토로한 바 있다. 도이치 국장의 말대로 북한의 붕괴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 해도,김정일 체제가 무너지면 또다른 「김정일 체제」를 중국은 북한에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이는 러시아도 똑같이 시도할 것이라는 것은 오랜 역사의 경험에서 불을 보듯 명백하다.그렇지 않고 북한의 붕괴가 남에 의한 통일로 이어지려면,중국에도 러시아에도 이 통일이 이익이 돼야 한다.현재의 분단이라는 현상유지보다 미래의 통일이라는 현상타파가 중국에도 러시아에도 이익이 되는 상황은 어떤 상황일까.혹은 조건이 있다면 어떤 조건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통일 통일」하며,그들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다.자유주의·자본주의가 좋다고 그들에게 선전하지 않는 것이다.「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구호만큼 지금 통일의 장애요소는 없다.자유민주주의를 외쳐대는 것만큼 통일의 저해요인은 없다.적어도 통일에 관한한 우리는 독일이나 월남만큼 운이 좋은 나라가 못된다.특히 월남과 달리 우리 주변엔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강대국이 너무 많다.북한이 아무리 「거짓된 세뇌와 억압과 공포의 복합체 국가」라 해도,그것이 냉혹한 국제관계를 바꿔놓지는 못한다.북한이 아무리 국민을 헐벗고 굶주리게 하는 무능력 집단이라 해도 그때문에 중국이 수비동맹을 폐기할 가능성은 없다. 너무 통일을 초조히 기다릴 필요가 없다.한 50년 더 끈기있게 참고 준비나 하자는 다짐이 가장 좋은 통일방안일지도 모른다.
  • 「비자금 장부」 파기에 의문 일어/노씨 1차공판 뒷 얘기

    ◎노씨 진술 오락가락… 목격자도 없어/재판부 “전 대통령 당당함 볼수 없었다”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에 대한 18일 첫 공판은 전직대통령과 재벌총수들,전 정권의 핵심실력자 등 15명이 한꺼번에 피고인으로 등장한 세기적 재판이었던 만큼 뒷이야기도 무성했다. 무엇보다 노씨의 왕성한 식욕이 화제의 대상.18일 63년 동안의 일생에서 가장 길고 고단한 하루를 보낸 「피고인 노태우」는 서울구치소로 돌아간 직후 순두부찌개와 오징어튀김,배추김치 등이 제공된 저녁식사를 남김 없이 비웠으며 19일 아침식사도 거르지 않았다고 법무부는 밝혔다. 이날로 17일째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는 전두환 전대통령과 비교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른바 「이현우 리스트」로 알려진 비자금장부를 노씨가 정말 파기했을까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정치권의 민감한 현안인 대선자금으로의 유출내역도 기재됐을 것으로 보이는 장부를 무작정 없앴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지적이다.장부 자체가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인 노씨에게는 경우에 따라 가장 효과적인무기로 활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이현우 전청와대경호실장은 대통령취임이후 기업인들로부터 받은 비자금의 입출금내역을 4권의 장부에 일일이 기록해 관리해 왔으며 민주당 박계동 의원의 폭로 다음날인 지난 10월20일 노씨가 직접 파쇄기에 넣어 없애버렸다고 진술했다.노씨도 나중에는 이를 시인했다. 그러나 문제는 『노씨가 자신이 직접 2층에서 없애겠다며 장부를 들고 간뒤 한참 뒤에 빈손으로 내려 왔다』고 밝힌 이씨의 진술.장부파기를 직접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또 노씨의 진술이 오락가락한 점도 의혹을 부추긴다.노씨는 검찰 직접신문에서 『10월27일 대국민사과문 발표이후 장부를 보고 비자금규모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이를 그대로 인정한다면 이현우씨에게는 파기하겠다고 해 놓고 그대로 놔두었다는 얘기가 된다. 검찰의 애매모호한 태도도 미심쩍기는 마찬가지.검찰은 그동안 한차례도 비자금장부에 대해 언급한 일이 없으며 언론에 의해 기정사실화된 「이현우 리스트」의 실재 여부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 확인해주지 않았다.노씨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도 실시하지 않았다. 노씨의 전직 대통령답지 않는 법정태도에 대한 재판부의 따끔한 질책도 이야기거리. 공판내내 노씨를 정면에서 바라본 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는 공판이 끝난 뒤 『재판을 받는 태도가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라고 느끼게 할만큼 당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몹시 불안해 하고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노씨는 인정신문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 앉았다가 재판장으로부터 일어서라는 주의를 받고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뒤이어 재판장이 『주거지는 어디입니까』라고 묻자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하고 머뭇거렸고 재판장이 『사는 곳은 어디있니까』로 고쳐 묻자 비로소 『연희동입니다』라고 대답해 방청객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 미 최우량기업 DMS사 이종문 회장(세계속의 한국인:3)

    ◎“빌 게이츠에 버금”/미 컴퓨터업계의 실력자/그래픽 관련제품 시장점유율 1위/93∼94년 연속 「올해의 기업인」 선정/「동양예술박물관」 건립에 120억원 쾌척 “화제”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파크 안에 있는 「동양예술박물관」에 자랑스럽게 새겨진 한국인의 이름 이종문. 미국의 유일한 아시아예술 전용 박물관인 이곳 중앙 현관 머리에 이종문 아시아예술문화센터라는 이름이 새로 새겨졌다.샌프란시스코 사람들에게는 「드 영」박물관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박물관에서 지난 10월19일 있었던 명명식은 자랑스런 한 한국교민의 오랜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그 꿈의 실현은 부와 명예의 단순한 「아메리칸 드림」의 차원을 넘어 한민족의 문화사랑과 민족정신의 우수성을 알리는 한편의 「인간 드라마」이다. 그의 이름을 딴 예술센터가 만들어진 것은 그가 이 박물관에 1천5백만달러(약 1백20억원)라는 거액을 기부한 데 따른 것이다.미국인들도 놀라게한 이종문(67).그는 실리콘밸리의 최우량기업으로 꼽히는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시스템」사(DMS)의 창업자이자 회장이었다. ○한인 문화사랑 정신 과시 1천5백만달러란 금액은 문화예술 관련 기부금으로는 가히 천문학적인 돈이다.게다가 그돈은 순전히 그의 개인재산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말이 쉽지 사재를 1천5백만달러씩이나 선뜻 내놓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특히 현금으로 단돈 1백달러를 손에 쥐기가 쉽지 않은 미국사회에서 볼때는 더욱 그러하다. 이 박물관의 한국과 큐레이터 백금자씨는 『이회장의 기부금은 앞으로 미국 전역의 대학에서 한국미술전공자들이 얼마든지 학위논문을 쓸 수 있고,결국 미국내 각 박물관에서 한국관에 관심을 갖는 엄청난 계기를 만들었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그의 기부금 쾌척은 한인교포사회 뿐 아니라 미국사회에도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킨 하나의 사건이었다. 미국의 컴퓨터업계에서 그는 컴퓨터계의 제왕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못지 않은 저명인사다. 그는 93,94년 연속 북캘리포니아의 「올해의 기업인」으로 선정됐을 만큼 실리콘밸리를 주도하는 하이테크 기업인이다.이 상은 미국 경영자협회를 비롯,CBS방송,하이테크산업을 전문으로 다루는 경제잡지 「잉크(Inc.)」,나스닥(NASDAQ)주식시장등 5개 기관에서 공동으로 평가해 주어지는 것인만큼 상당한 권위가 있다.이회장이 82년 창업해 이끌어온 DMS는 93,94년 「잉크」지에 의해 미국의 비상장기업 500개사 가운데 최고속으로 성장하는 기업 17,18위로 각각 평가되기도 했다. DMS는 컴퓨터의 그래픽기능을 향상시켜주는 그래픽액셀러레이터 관련 제품을 주로 생산,이 분야에서 선두였던 캐나다의 ATI사를 제치고 93년 하반기부터 시장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특히 DMS의 멀티미디어 관련 소프트웨어는 호환성이 60%정도인 일반제품에 비해 무려 98%를 웃돌아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95가 공식 스펙리스트에 올려놓고 있다. ○고속성장 17위기업 평가 한국종합기술금융 실리콘밸리지사장 박태완씨(44)는 『DMS는 지난 4월 주식을 공개하기 전까지만해도 벤처캐피틀회사들이 가장 탐냈던 기업이지만 외부의 투자를 거부할만큼 자기자본력이 막강하다』고 전하고 있다. DMS의 영업담당 책임자인 김용태씨는 『91년10월 이후 은행빚이 단 1센트도 없는 부채율 제로의 회사』라고 자랑한다.더욱 놀라운 것은 94년말 현재 종업원 1백85명의 1인당 매출 1백10만달러에 이익율이 9.5∼10%나 된다는 사실이다.부실채권율은 0.5%밖에 되지 않을 정도다. 하이테크산업의 치열한 경쟁속에서 이처럼 탄탄한 첨단기업이 한국인 이회장의 손으로 실리콘밸리에 뿌리내린 것은 한국교민의 자랑이 아닐수 없다. 그는 60년대말까지만해도 국내에서 알아주던 기업인이었다.제약회사 종근당의 창업주인 이종근씨의 친동생.69년까지 종근당의 전무로 일하며 오늘날의 종근당이 있게한 기반을 닦은 인물이 바로 이회장으로 알려져 있다. ○종근당 이종근씨의 동생 제약회사에 관여하기 전에는 한국도서관학의 기초를 잡기도했다.국내에선 처음으로 도서관법안과 정기간행물 색인을 만들었는가 하면 십진분류법을 소개하기도 했다.국내에서 남부러울 게 없던 그는 70년 홀연 미국이민길에 올랐다. 『종근당에서 형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데다 3공화국에서 정부에 들어와 일하라고 귀찮게해 건너왔지.난 군인들이 정권잡는 것을 강도짓이라고 생각했기에 그건 정말 싫었어』라고 그는 이민 배경을 설명한다. 미국에 온 그는 5년쯤은 골프용품을 비롯한 각종 운동기구를 일본으로 내다 파는 일로 먹고 살았다.76년 갓 보급되기 시작하는 컴퓨터의 부속용품으로 무역품목을 바꾸어 다시 5년여를 수출업으로 지냈다.그러다가 애플과 IBM의 운용시스템이 다른 것에 착안,호환기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자동차는 크라이슬러 제품이든,포드 것이든 운전하는 사람이 다 움직일 수 있는데 왜 컴퓨터는 안되느냐는 의문으로 제품마다 다른 오퍼레이팅 시스템에 다리를 놓아야겠다고 생각했지』.알아보니 그것은 30만달러의 연구비로 6개월이면 가능한 작업이었다.82년 그는 자본금 10만달러로 마침내 전자산업에 직접 뛰어들어 DMS의 전신 「다이아몬드 컴퓨터시스템」을 설립했다. 큰 어려움없이 하드웨어를 만들어냈다.그러나 소프트웨어건 하드웨어건 애플사가 걸어놓은 특허의 종류가 무려 40가지에 달해 그 거미줄같은 특허망을 빠져나가는데 무려 6년을소비했다.라이프사이클이 엄청나게 짧은 컴퓨터업계에서 6년이란 세월을 허비했으니 대실패는 당연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그는 타사제품들의 호환성이 60%에 그치는 데 착안,이를 높이면 승산이 있다고 보고 6년세월을 더 매달렸던 것. 그 사이 여기저기서 불러모았던 기술자들은 모두 떠나갔다.85년초 단 한명 남았던 기술자 허형회씨(44·현 DMS기술담당이사)마저 떠나려할 판이었다.『그 친구의 바지가랑이를 잡고 내가 무릎을 꿇고 빌었어.네가 가면 난 죽는다고 말이야』 결국 그는 호환성이 무려 98.2%에 이르는 컴퓨터보드 「트랙스타」를 개발했다.세계최초의 IBM­애플 호환기판이었다.85년말 녹스빌에서 열린 컴덱스에 내놓자 「텐디(TANDY)」사와 납품계약을 하게됐고,87년에는 IBM과 공급계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러한 성공 뒤에는 6년여동안 3차례나 자살을 시도했을만큼 처절한 실패와 고립무원의 절박한 아픔이 있었다.그러한 고난의 날들을 극복한 값진 경험이 결국은 90년대에 DMS를 고속성장기업으로 달리게한 촉매가 됐다. 지난 4월 그는 회사를 상장했다.앞으로 4년동안 회사를 계속 성장시키면 3천6백만달러를 손에 쥐게하겠다는 계약으로 미국인 전문경영인을 사장으로 앉히고 자신은 경영일선에 물러났다. 주당 17달러에 상장된 DMS의 주가는 요즘 평균 27∼28달러에 거래되고 있다.잡급직까지 나눠받은 주식으로 DMS는 실리콘밸리의 어느 회사보다도 사원들의 업무만족도가 높은 회사로 소문나 있다. ○세차례 자살기도 아픔도 『종업원들에게 현금을 쥐어주는 방법은 주식공개 밖에 없었어.주변에선 어떻게 일으킨 회사인데 경영권을 포기하느냐고 말렸지만 죽을 고비에서 회사가 살아난 것은 천운으로 돌릴 수밖에 없어.하늘이 도와준 회사가 어떻게 내 것이야.난 한번도 「마이 컴패니(나의 회사)」라는 말을 쓴 적이 없지.그저 나를 거쳐서 어디론가 흘러가는게 기업이지』라고 그는 말한다. ○벤처캐피틀 회사도 설립 그는 DMS의 종업원 가운데 단 한명도 혈연을 끌어들인 적이 없음을 자부하고 있다.혈연을 끌어들이면 잡음이 들리게 되고,결국 직원들이 부담을 갖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자신의 기업이라는 식으로 소유개념을 갖는 것은 『돈 가진자들의 더러운 욕심』이라고 잘라 말한다. 고희를 바라보는 그는 DMS에서는 손을 뗀 상태이지만 다시 새로운 벤처캐피틀사업을 도모하고 있는 중이다.『전자사업은 아주 익사이팅해.스포츠게임과 같지.그 사업체들 가운데서 유망한 것들을 골라내 투자하는 일을 할 거야』 그는 돈을 쓰기 위해서 더 벌어야한다고 했다. 『한국인은 세계 어디에서 살든 수천년이 지나도 제 음식과 제 말을 버리지 않는 유일한 민족이야.이민생활을 하면서 우리 민족성과 우리 문화의 정신을 후세들에게 전하는데 내 돈을 다 쓸거야』.그의 이름과 기업정신은 이종문아시아예술문화센터로 이름이 바뀐 이 박물관의 소중한 예술품들과 함께 영원히 빛날 것이다. □이종문 회장 신상메모 ▲1928년 8월1일 서울출생 ▲중앙대 법대졸 ▲미8군 극동사령부보좌관(53년) ▲국비유학생으로 도미(58년) 조지 피바디대학에서 도서관학,데이터경영학 전공 ▲고려대 경영대학원 연구과정 수료(59년) ▲국립중앙도서관사서관(60∼62년) ▲연세대,성균관대 강사(63년) ▲종근당제약 전무이사(67∼69년) ▲한국사이클연맹회장(68년)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중소기업연구과정수료(76년) ▲다이아몬드컴퓨터시스템사 설립(82년) ▲산호제이한인회 이사장(92년) ▲실리콘밸리한인상공회의소 이사장 및 샌프란시스코동양예술박물관 커미셔너(현재) ▲국민훈장 목련장(93년) ▲벤처캐피틀회사 AMVEX설립(95년)
  • “사면초가” 국민회의/김대중 총재의 「5자회담」 구상 무산

    ◎믿었던 자민련 마저 등돌려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사면초가」에 빠졌다. 김총재가 3일 정국수습책으로 제의한 5자회담을 여야가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바람에 여권의 독주를 견제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빼앗으려는 김총재의 의도는 물거품이 됐다.게다가 최근 밀월관계를 모색하던 자민련과의 공조도 사실상 무산돼 김총재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됐다. 김총재는 처음부터 회담의 성사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고 득의만만한 민자당이나 김총재와의 앙금이 가시지 않은 민주당이 5자회담에 응할 리 없다고 본 것이다.그럼에도 김총재가 회담을 제의한 것은 자민련을 믿었고 5·18 문제를 논의하고 정국불안을 해소하자는 회담이 국민여론에 먹혀들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적 해결을 모색한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고 극구 만류한 측근들의 충언도 뿌리쳤다.설령 오해를 받고 회담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정국불안의 책임을 여권에 떠넘길 수 있다는 것이다.또한 야당총재로서 『할 만큼 했다』며 대대적인 장외투쟁을 벌일 명분도 얻게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김총재는 자민련을 지나치게 믿은 것 같다.자민련은 4일 5자회담을 가질만한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고 회담을 거부했다.나아가 국민회의와의 중진회담에 대해서도 시기상조라고 국민회의에 등을 돌렸다. 자민련으로서는 국민회의와 나란히 서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모든 화살이 김대중 총재를 겨냥하고 있는 마당에 괜히 방패막으로 나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5·18관련자 처벌과 정치인에 대한 사정을 앞두고 국민회의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어책으로 생각한 것이다. 민자당과 민주당도 『국정을 논할 자세가 돼있는 지,단순한 정치공세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손학규 대변인) 『노태우씨로부터 20억원을 받은 사람은 비자금을 논의할 자격이 없고 5·18문제는 이미 국민의 손으로 넘어갔다』고 김총재의 회담제의를 일축했다.세대교체와 3김 청산을 주장하는 터에 김대중총재를 위한 무대를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결국 민자당의 독주를 견제하고 야권공조의 틀을 짜려던 김총재의 묘수는 스스로 올가미를 씌운 자충수가 된 셈이다.
  • 4천년 유랑 쿠르드족“고립무원”/터키 대공세에 이라크선「묵인」입장

    ◎미는 터키 지지… 독립국가 건설 “요원” 터키군의 쿠르드반군에 대한 사상 최대 규모의 무장공격은 11년째인 터키내 쿠르드족의 반란을 뿌리뽑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지난 18일 터키군 15명이 반군에게 살해된 뒤 시작된 터키군의 총공격이 모든 쿠르드반군 기지가 소탕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란 탄수 칠레르 총리의 선포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터키와 이라크,이란,시리아,아르메니아 지역 등에 2천여만명이 거주하고 있는 쿠르드족은 4천년 동안 남의 지배를 받으며 유랑해 왔다.그러나 이들은 아직까지 고유 언어와 문화풍습을 간직하고 있고 독립국가를 건립하는 것이 최대 소원이다.독립을 쟁취하려는 노력은 많았지만 각 국의 방해공작으로 번번이 실패했다.이라크내 쿠르드족은 91년 이라크의 걸프전 패배를 계기로 서방의 군사적 보호 아래 자치지역과 자치정부를 설립했지만 이라크의 경제봉쇄로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 가장 활발한 독립 움직임을 보이는 곳은 터키내 쿠르드족(1천2백만명).78년 결성된 쿠르드노동자당(PKK) 주도로 84년부터 본격적무장투쟁을 벌여 1만5천명 이상이 숨졌다. 이번 터키군의 군사공격에 대해 미국은 「적절한 공격」이라고 지지했으며 유엔과 유럽연합측은 공격 대상에 민간인이 포함돼 있는 점을 들어 터키정부를 비난했다.그러나 이들도 쿠르드족의 독립운동에는 별 관심이 없다.또 이라크는 자국의 쿠르드기지까지 침입한 터키군에 대해 예전처럼 「주권침입」이라는 등의 논평을 일체 하지 않고 있다.이같은 상황에서 터키는 군사력을 총동원,쿠르드를 평정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어 쿠르드의 입지는 크게 좁아진 셈이다.
  • 대중국 외교(백제를 다시 본다:29)

    ◎4세기 서해안항로 개척… 동진과 첫 교류/송·진등과 교역,국력강화 계기삼아/6세기말 적극 외교… 수와 동맹까지/의자왕때 외교주도권 상실… 중국과의 해상통로도 막혀 고립 백제의 웅진천도는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에 따른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러나 웅진시대(475∼538년)는 문주왕을 거쳐 삼근왕(477∼479년),동성왕(479∼501년),무령왕(501∼523년),그리고 성왕(523∼554년)까지 5대왕의 통치기간으로서 백제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 특히 기존의 진·해씨 세력이 약화되고 백·목씨등의 신흥세력이 강화되었고,실추된 왕권의 보강을 위해 정치적 개혁이 모색되었다. 우선 동성왕은 문주왕때 중수한 궁궐을 다시 고쳤다. 그래서 화려한 임류각을 세워 왕실의 위엄을 드높이기도 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민의 관심을 밖으로 돌려 고구려와 신라를 정벌하여 위축된 국력을 회생시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어 무령왕은 백씨세력을 제거시킨후 양나라와 교섭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는 동시에 고구려에 대한 정벌을 적극 꾀함으로써 군사적 도발로 전제왕권을 추건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비천도가 준비될 수 있었다. ○선진문화 수용 의의 따라서 사비천도는 위축된 왕권을 재건시켜 웅진시대후기부터 이룩된 전제왕권을 재확립하려는 야심찬 국력만회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우선 이지역의 토착세력인 사씨와 제휴하면서 중앙관제를 기존의 좌평제에서 22부의 일원적 지배질서로 개편하였다. 특히 왕실(내관)과 행정(외관) 사무의 분리,중앙행정 각부와 왕과의 직결제,그리고 효과적인 지방제도개편을 통해 세련된 관료제를 모색하였다. 또한 무령왕은 빈번한 고구려정벌과 낙동강하류의 가야세력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함으로써 성왕의 중흥정치를 뒷받침할 수 있었다. 여기에 유학과 불교의 혁신이 사상적 배경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근초고왕때 성립된 학교교육은 무령왕을 거쳐 성왕때 다양한 교육제도의 정비로 나타났으며 율종을 중심으로 불교교단을 통합하여 흐트러진 민심의 수습과 국민적 단합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사비시대의 정치적 중흥과 국력만회는 활발한 외교로 이어진 동시에외교를 통한 국가재건을 꾀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백제는 372년(근초고왕 27년)에 동진과 처음으로 외교관계를 맺은후 송·남제·양·진 등 주로 남조와 교섭을 하였다. 고구려가 남북조 여러나라와 활발한 관계를 갖고 있음에 비하여,백제는 서해항해라는 어려움 때문에 외교적 진출이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조공이라는 대중국외교는 단순히 중국적 세계질서에의 편입이 아니라,선진문화의 수용이나 국가적 자립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대중국교섭은 불가피 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서해를 바로 건너가지 못하고 고구려 해안을 따라 북상한후 요동반도 남단에서 등주로 건너가야 했던 탓에 험한 파고보다는 고구려의 방해가 문제였다. 따라서 근초고왕이후 적극화된 요서진출은 독자적인 서해직항로의 개척에 아른 결과인 것이다. 백령도부근(초도)에서 적산까지는 2백여㎞에 불과하지만 이 직통항로 개척에는 3백여년의 긴 세월을 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에 의한 관미성(한강하구)의 함락과 한강유역 상실에 따른 웅진천도는 어렵게 확보한 서해항로를 고구려·신라에게 양도하는 결과가 되었다.그러므로 웅진시대의 백제는 안전한 서해항로의 확보에 따른 대외관계의 모색이 국력만회의 전제가 될 수 밖에 없었다.따라서 무령왕·성왕때의 남조(양·송·남제)와의 교섭은 서해를 남으로 가로지르는 위험한 항로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나 6세기 초·중엽의 백제의 대외관계는 또하나의 활로로서 왜와의 문화전파·기술이전을 용이하게 만들었다.웅진시대 이후로 발전된 유학과 불교는 결국 일본(왜)문화개발이라는 현실로 나타나 중흥기 백제인들의 긍지를 그나마 심어줄 수 있었다. ○사신 가장먼저 파견 그러나 진·수·당등이 북방에서 자리잡게 됨에 따라 6세기말이후 백제 다시 서해 직항로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어 신라와의 충돌은 불가피하였다.더구나 수나라의 등장(581년)으로 삼국간에는 새로운 외교전쟁이 전개됨으로써 가장 불리한 여건의 백제는 대중외교에 국가의 활로를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백제는 일찍부터 발달된 항해술과 조선술을 활용하여 수나라 38년간(581∼618년)동안 고구려나 신라에 뒤지지 않는 교섭을 펴나갔다.삼국 중에 제일 먼저 사신을 파견하여 책봉을 받게된 까닭도 여기 있다.무엇보다도 성왕의 피살로 국가적 난국을 맞은 위덕왕(554∼598년)은 진(4회)·북제(3회)·북주(2회)등과 교섭을 계속하였다.특히 수나라에는 진의 평정을 축하하는 사신은 물론,수의 고구려정벌에 안내자 역할을 자청할 정도였다.이러한 위덕왕의 친수정책은 고구려가 양원왕이후 정난에 휩쓸린데다 돌궐관계로 어려움이 있음을 이용하려든 것이다.동시에 신라 진평왕(579∼632년)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목도함으로써 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도 깔고 있었다. ○중국 진출 봉쇄당해 그러나 당의 등장(618년)으로 외교적 주도권이 신라로 돌아감에 따라 무왕은 15차에 걸친 사절을 당에 보내 적극적인 접근을 꾀하였다.이에 맞서 신라 역시 진평왕이후 친당외교를 펴나가 김춘추 외교가 결실을 맺음으로써 대당외교를 주도하게 된다.여기서 백제는 무모한 신라와의 전쟁으로 난국을 수습하려 하였다.위덕왕은 2회,무왕은 13회,그리고의자왕은 11회에 걸친 신라와의 충돌을 시도 하였으나 외교적 주도권을 장악한 신라의 신흥세력(김춘추·김유신)에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국력탕진으로 이어졌다.서해직항로의 해로를 장악한 신라는 백제의 대중국 진출을 봉쇄하였으며,고구려정벌에 실패한 당나라와 쉽게 연결될 수 있었다. 결국 백제는 중국과의 통로가 봉쇄되었다.그리고 무모한 신라와의 충돌로 국력을 낭비한 의자왕은 정치적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백제의 멸망은 외교적 주도권을 빼앗긴 고립무원의 결과였다.간헐적인 왜와의 교섭으로는 중국과의 외교적 손실을 메울수가 없었던 것이다. ◎삼국의 외교전/대중관계따라 한반도 역학구도 재편/당과 손잡은 신라 결국 삼국통일 삼국의 분립은 역사발전과정에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성읍국가의 성장에서 비롯되었다.이들 고구려·백제·신라는 고대국가의 기틀을 잡으면서 한결같이 민족통일을 꿈꾸었다.삼국이 경쟁적으로 영토를 넓히기 위한 정복전쟁을 수행하는 가운데 다른 민족국가와 동맹을 맺은 까닭도 민족통일과 맞물려 있었다. 고대 동북아의 국제질서 속에서 백제는 AD371년 고구려와 정복전쟁을 통해 만난다.중국 연의 침략으로 위기를 맞은 고구려를 침공,평양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게 된다.그러나 고구려는 연을 멸망시킨 중국의 전진과 재빠른 친교를 맺어 일단 난국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백제가 AD475년 고구려 장수왕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도성인 한성을 잃는다.그 무렵 중국은 남북조로 분열되어 있었다.그래서 고구려가 북조의 위와,백제는 남조의 송·양과 연결고리를 맺는다.이는 결국 북위·고구려·신라를 연결하는 세력과 송·백제·위로 이어지는 관계로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재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가장 뒤늦었던 신라가 법흥왕(재위 AD514∼539년)과 진흥왕(〃AD540∼575년)을 거치는 동안 크게 발전한다.신흥세력으로 등장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다투던 한강유역을 점령,남양만에서 중국과 교통할 수 있는 해로를 확보하게 된다.그리고 동해를 따라 북상,함남 인원까지 진출하는 한편 가야까지병합하는 것이다. 이어 또 한차례 국제질서가 개편되는 시기를 맞는다.AD589년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은 수가 통일하는 것이다.그러나 수는 AD618년 당에게 중국대륙을 내주고 만다.고구려는 수와 당으로 이어지는 동안 중국과 70여년의 세월을 전쟁으로 보냈다. 그 전쟁의 여파는 한강유역으로 몰아닥쳐 삼국이 각축을 벌였다.그러나 신라는 당과의 외교에 성공,나당연합국을 만들어 AD660년 백제를,AD 668년 고구려를 각각 멸망시킴으로써 삼국시대가 막을 내렸다.
  • 카스트로정권 목죄기 가속/미의 대쿠바 단계 제재

    ◎“난민 차단” 명분,민주화 압력/송금금지 등 통해 체제붕괴 노려 카스트로 쿠바정권에 대한 미국의 목조르기가 본격화될 것같다.클린턴미대통령이 지난 19일 쿠바난민정책의 일대전환을 밝힌데 이어 20일엔 대쿠바송금금지,전세항공기 운항축소 등 추가경제제재조치를 발표했다.21일엔 리언 파네타 백악관비서실장이 미ABC­TV와의 회견에서 카스트로정권이 민주화와 개혁으로 나가지 않을 경우 쿠바를 해상봉쇄하는 방안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파네타실장의 언급은 해상봉쇄를 당장 단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카스트로가 민주화를 위해 합법적인 조치를 취해나가는지를 지켜보면서 앞으로 검토할 방안의 하나』라고 완곡한 표현을 쓰고 있다. 표현이야 어쨌던 미국의 이같은 단계적인 쿠바 목조르기작전은 분명 난민탈출러시를 막는다는 물리적인 목표에 그치지 않는 것같다.카스트로정권의 붕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분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 클린턴대통령은 송금조치 등을 발표하면서 쿠바국민들을 향한 라디오·TV 선전방송을 강화하고 유엔의 대쿠바 추가제재를 위한 지속적 외교노력을 펴겠다고 밝혔다.이 자리에서 클린턴은 『쿠바의 많은 문제들은 통제불능의 난민대탈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쿠바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클린턴대통령의 인식은 이번의 난민탈출러시를 계기로 카스트로정권을 아예 무너뜨리고 새로운 자유민주의의 지도체제 아래 신쿠바건설을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을 적극 조성해나가겠다는 것처럼 비쳐지고 있다. 클린턴대통령이 밝힌 추가경제제재조치에 따라 미국거주 쿠바계 이민자들이 본국 친척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추산되는 연간 5억달러의 송금이 완전히 중단되면 대외결제수단이 거의 없는 쿠바는 최악의 경화부족에 시달릴 것이다.미국방부는 대쿠바 선전방송 활동강화를 위해 군용기를 특별배치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해상봉쇄조치가 당장 이뤄질 것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만약 그같은 사태가 오면 이미 식량부족·전력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있는 카스트로정권은 완전히 고립무원에 빠질 것이다. 파네타비서실장이 언급한 해안봉쇄방안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이 될지는 모르나 식량·원유할 것없이 모든 외국과의 교역을 봉쇄하는 방안이 취해질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국은 지난 62년 케네디대통령 시절 카스트로가 소련의 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려던 소위 「미사일 위기」당시 경제금수조치와 함께 일시적 해안봉쇄를 단행한 적은 있지만 사실상의 전쟁선포와 마찬가지로 이해되는 이같은 극단조치를 굳이 취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클린턴정책은 대증요법식이지 결코 근원적인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하원의 조즈 세라뇨의원(민주)같은 이는 『미국의 대중국통상조치처럼 대쿠바 금수조치 등을 하나하나씩 풀어나감으로써 오히려 쿠바지도부를 평화의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있다. 비판론은 ▲쿠바지도부를 민주개혁방향으로 유도하고 ▲쿠바와 건설적 외교관계를 추진해야한다고 지적하고있다.말하자면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은 강풍이 아니라 따스한 햇살」이라는 것이다.또 이들은베트남과 북한에 대해서는 「당근」을 사용하면서 유독 쿠바에만 「채찍」을 구사하느냐고 지적하고있다. 미국이 강온 어떤 정책을 취하든 쿠바는 「외부로부터의 변화」압력을 크게 받을 것이다.
  • 1백여명의 마지막 농성/김학준 전국부기자(현장)

    ◎“이렇게 끝날 줄 몰랐다” 풀죽은 목소리 30일 하오 장마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 서울 중구 명동성당앞 지하철노조원들의 농성장. 파업농성이 7일째 계속되고 있었지만 인원이 전날밤부터 급속히 줄어든데다 각종 구호도 거의 찾아볼수 없어 파장분위기가 물씬 났다. 전날밤의 폭우로 일시 귀가했던 노조원들이 이날 상오부터 시작된 경찰의 입구봉쇄로 복귀하지 못해 고립무원상태가 된 1백여명이 천막안에서 삼삼오오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표정에서는 더이상 투쟁의지를 찾기란 힘들었고 우선 비 피하기에 여념이 없는듯 했다. 『오늘 저녁에 위원장이 파업중단선언을 한다든데…』 『복귀하자는 노조원들은 조계사로 모이라는 긴급지시가 내렸다는데…』 확인되지 않은 여러 풍문은 계속 나돌았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자신있게 말하지 못했다.그동안 이들을 지휘하던 중간급 간부마저 빠져버려 졸지에 오합지졸 신세가 된 이들에게 귓불을 때리는 것은 『성당을 제발 비워달라』는 독촉뿐이었다. 성당측은 지난 26일부터 『특별한명분도 없이 시민의 발을 묶어놓은 사람들을 무한정 머무르게 할수는 없다』며 노골적으로 나가줄 것을 요구해왔다. 더욱이 이날 정오쯤에는 명동성당에 김수환추기경과 강원용목사·이세중대한변협회장등 각계 원로들이 나와 파업근로자들의 현업복귀를 강력히 촉구하고 나서 성당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여온 근로자들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집행부와 연락이 끊긴 이들로서는 어떠한 결정도 내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파업이 더이상 무의미하다는 공감대가 이들사이에 이미 번져있었지만 그렇다고 파업중단을 외칠 분위기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지루하게 전개되던 농성과는 달리 이들의 바람은 의외로 빨리 이루어졌다. 모든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노조지도부는 이날 하오 7시 명동성당에서 조합원 비상총회를 열어 파업중단을 전격선언했다. 『9천 동지들의 이름을 빌려 7월 1일부터 전노조원들이 현장에 복귀할 것을 명령한다』고 김연환위원장이 울먹이며 선언하자 조합원들은 관성적으로 『투쟁』을 외쳐댔지만 이미 「전의」는 상실한 채였다. 어둠이 깔릴 무렵 명동성당을 하나 둘 빠져나오는 지하철 노조원들의 어깨가 왠지 무거워 보였다.
  • 민족 수호신 양만춘(온가족이 함께 읽는 우리역사:24)

    ◎안시성전투서 「수십만명의 당군」 물리쳐/살수·한산도대첩 못지않은 위대한 승전/“정사에 기록없다”… 국사교과서에 안실려 645년 6월 중국 당나라의 태종은 수십만명의 병력으로 고구려의 안시성(현 중국 요령성 해성현 영성자고성)을 에워쌌다. 당에 앞서 중국을 통일한 수왕조가 598∼614년 4차례에 걸쳐 고구려에 침입했다 모두 참패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 침략군은 사기가 드높아 안시성쯤은 금세 함락시킬 듯했다.당군은 이미 개모성·비사성·요동성·백암성등 주변의 주요성들을 빼앗은데다 고구려의 구원병 15만명을 격파했기 때문이다. 안시성은 고립무원의 상태였다.그러나 당군의 총공격에도 안시성은 끄덕도 하지 않았고 침략군은 60여일만에 포위를 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안시성전투는 고구려의 살수대첩(612년),고려의 귀주대첩(1019년),임진왜란 때의 한산도대첩(1592년)에 못지않은 한국사상 위대한 승전이었다. 역사에 있어서「가정」이란 의미없는 것이긴 하나 만약 안시성이 당군에 함락당했다면 이후의 한국사는 어떻게 전개됐을까.고구려는 당시 정예군 15만명을 요동일대에 보내 당군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섬멸된 뒤였으므로 당태종이 친히 이끄는 침략군에게 멸망했을 가능성이 높다.또 대륙세력의 침입에 방파제 구실을 해왔던 고구려의 멸망은 백제·신라의 존립에도 큰 영향을 미쳐 결국 한민족의 국가는 사라지고 이 땅은 중국의 변경지대로 전락했을 것이다. 당이 이후 혼자의 힘만으로는 고구려를 정복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신라와 연합,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키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신라가 독립을 유지해 민족의 정통성을 이은 것과는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현행 고교 국사교과서는 안시성전투의 승리를『백제·신라까지 보호하는 민족수호의 의의를 지닌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시성싸움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는 누구인가. 살수대첩의 을지문덕,귀주대첩의 강감찬,한산도대첩의 이순신등이 그 이름을 후세에 남겨 길이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과는 달리 안시성을 지킨「민족의 수호신」은 그 실체가 뚜렷하지 않다. 현재 나와 있는 많은 역사책 가운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나온「한국사」등 일부 사서에서만「양만춘」을 안시성주라고 밝히고 있을뿐 고교 국사교과서를 비롯한 대부분의 역사책은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그의 이름이「삼국사기」「삼국유사」등 우리의 정사는 물론 중국의 어떤 정사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조선 중기이후 나온 윤근수(1537∼1616)의 월정만필,김시량(1581∼1643)의 부계기문,성호사설의「경사문」,동사강목의「고이」,박지원의 열하일기등에는 양만춘을 안시성주로 기록하고 있다.특히 월정만필과 부계기문은「양만춘」이야기가 중국측 사서인「당태종동정기」「당서연의」등에 나온다고 밝히고 있어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의 정사가 그들이 거꾸러뜨리지 못한 적장의 존재를 묵살한 것은 이민족과의 관계에서 당한 수치를 기록하지 않는 그들의 일관된 역사서술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역사책에서마저「양만춘」을 부인할 이유는 없다.자랑스러운 선조를 한명 발굴한다는 의미말고도 중국측에 의해 왜곡된 우리 역사를 되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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