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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10) 유혹하는 그림 ‘춘화’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10) 유혹하는 그림 ‘춘화’

    신윤복의 그림 ‘춘화 감상’이다. 그림은 간단하다. 방안이다. 왼쪽 위편에 상이 놓여 있고, 무엇을 담는 그릇인지는 모르지만 그릇 둘이 있고, 아래에는 화로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아마도 요강으로 보이는 물건이 있다. 두 여자가 무언가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데, 왼쪽 여자는 저고리 깃과 고름 곁마기 끝동을 모두 자주색 천으로 댄 삼회장을 갖추어 입고 있으니, 호사스러운 양반가의 여성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저 커다랗게 틀어 올린 구름 같은 가체(큰머리)를 보라. 이런 큰 가체는 여간한 부자가 아니면 하지 못한다. ●춘화첩 보며 욕망 달래는 소복 입은 과부 왼쪽 여자의 입성에 비해, 오른쪽 여자는 확연히 다르다. 이 여자는 아래 위가 모두 흰옷이다. 저고리 깃도, 옷고름도, 곁마기 끝동도 모두 흰색이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짐작했겠지만, 이 여성은 상중에 있는 과부다. 아마도 남편이 죽었을 것이다. 부모, 시부모가 죽은 사람도 소복을 입기야 하지만, 그 경우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소복을 입은 젊은 여인은 바로 과부일 뿐이다. 두 여자의 앞에 놓인 것은 그림책이다. 그림책을 자세히 보면 예사 그림책이 아님을 알 것이다. 사람 둘이 엉켜 있다. 바로 남녀의 성관계를 그린 것이다. 그림은 여러 장으로 만들어져 있고, 한 페이지씩 넘겨보게 되어 있다. 이 그림은 환하게 그려져 있지만, 사실은 어두운 방안이다. 왜냐고? 그림책 앞의 촛불을 보라. 불꽃은 바람에 날려 오른쪽으로 드러눕다시피 하여 꺼질락 말락 하고 있다. 어두운 밤의 방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은밀히 두 여인이 한밤중에 춘화를 보고 있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과부라 해서 성욕이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과부는 참을 수 없는 욕망을 춘화첩을 보면서 달래고 있는 것이다. 과부의 억눌린 성적 욕망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문제는 춘화의 존재다. 인간의 성적 욕망 내부에는 포르노그래피를 향한 상상력이 존재한다. 성에 관해서는 그 어떤 치밀한 언어적 표현도 시각적 예술을 넘어설 수는 없는 법이다. 어느 고대건 중세건,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성적 상상력을 구체화한 조각과 회화가 존재한다. 오늘날 인터넷에 범람하는 포르노 사이트야말로 인간의 가장 내밀한, 그리고 한없이 복잡하고 한없이 다양한 성적 욕망을 시각화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수면 위에 떠오르지 않는 무량한 그 형상물이야말로 슬프게도 인간의 리얼리티일 것이다. ●인조 때 중국서 ‘성행위 조각품´ 들어와 그 포르노그래피의 한국에서의 원조가 바로 그림 속 두 여성이 보고 있는 춘화다. 춘화는 중국, 일본, 한국에 모두 있고, 또 서양의 경우는 더 풍부하게 남아 있다. 다만 한국의 춘화는 조선후기에 비로소 생산된 것이다. 박식하기로 이름난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여러 글에서 춘화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일부분을 읽어 보자. 일찍이 북경에서 온 그림책을 보았더니 그 속에 남자와 여자가 성관계를 하는 여러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 또 진흙상으로 만든 조각을 상자 속에 넣고 기계장치를 조작해 움직이게 한 것도 있었다. 이름을 춘화도라 했는데, 사람의 성욕을 돋우게 한다 하였다. 대개 북경에서 춘화도가 수입되었고, 때로는 조각품도 있었던 것이다. 특히 진흙으로 만든 조각품 중에는 인형을 상자 속에 넣고 기계장치를 해서 성행위 장면을 재현하도록 하는 신기한 것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규경은 이어서 박양한(1677∼?)의 ‘매옹한록’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책에 의하면, 그런 그림은 춘화라 하고 그런 조각은 춘의(春意)라 한다 하였다. 이규경은 자신은 두견석으로 조각하고 자작나무 갑에 넣은 춘의 조각을 보았는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했다고 한다. ‘매옹한록’의 기록은 계속된다. 중요한 것이니 직접 읽어 보자. 명나라 말기에 음란한 풍조가 날로 퍼져 남녀가 성행위를 하는 모습을 혹은 조각으로 만들고 혹은 그림으로 그렸는데, 조각으로 만든 것은 춘의라 하였다. 사신이 와서 바친 예물 중에 상아로 만든 춘의 하나가 있었다. 인조가 승정원에 내렸는데, 상아로 남녀의 면목을 새긴 것으로 기계장치를 작동시키면 남녀관계의 동작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보지 못하던 것으로 모문룡이 우리를 모욕하려고 보낸 것이라 생각했고, 중국사람들이 평소 이런 것들을 좋아한다는 것은 까마득히 몰랐다. 인조가 마침내 깨부수어 버리라고 명하였다. 이때 조정 신하들 중에 손에 쥐고 감상하는 자가 있었는데, 조정에서 그 일을 비판해 그 사람의 청로(淸路)를 막아버렸다. 우리나라의 곧고 깨끗한 풍속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 기록을 보면 인조 때 처음 남녀가 성관계를 갖는 조각품이 전해져 상당한 충격을 던졌던 것이다. 또 이 기록을 통해 인조 당시까지는 조선에 전혀 춘화나 춘의가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박양한은 춘의를 만지작거리며 감상한 사람의 벼슬길을 막아버린 것을 두고, 조선이 도덕적인 나라라고 했지만, 과연 그럴까. 이런 향락적 문화는 풍요한 경제력 위에서 가능한 법이다. 박양한 자신이 명나라 말기부터 음풍이 번졌다고 하고 있거니와 사실이 그랬다. 중국에서는 춘화나 춘의가 한나라 이래로 지배층 사이에 유행하였다. 다만 그것이 민간의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퍼진 것은 명대 말기에 와서이다. 명대 말기 상품경제의 발달로 도시문화가 꽃피자 자연히 소비와 향락열이 번졌고, 그 중에서도 특히 성적 욕망이 분출되었으니, 춘의와 춘화는 애당초 경제적 풍요 위에 꽃핀 성적 욕망이었던 것이다. 일본에서조차도 에도막부 이후 도시문화의 발달과 함께 춘화가 서민들에게 널리 유행했다. 화려한 채색 판화(우키요에,浮世繪)로 만든 춘화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1719년 제술관으로 통신사행에 끼어 일본에 갔다 온 신유한(1681∼?)은 일본 여행기인 ‘해사동유록(海사東遊錄)’에서 일본의 남자는 품속에 반드시 운우도(雲雨圖)를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성욕을 돕는다고 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지금 일본의 서점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키요에 춘화일 것이다. ●광통교 다리 위에 걸어놓고 팔던 춘화 이규경은 ‘화동기원변증설(華東妓源辨證說)’이란 글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요사이 춘화가 북경에서 들어와 널리 퍼졌다. 사대부들이 많이 돌려가며 보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즉 춘화는 북경에 드나들 수 있는, 또 북경 현지에서 춘화를 구입할 수 있는 세력 있는 양반층이 아니면 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김창업(1658∼1721)은 1712년 연행정사로 중국에 파견되었던 형 김창집을 따라 북경에 다녀와서 기행문 ‘연행일기’를 남긴다. 이 책의 12월23일 조에 춘화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날 선비 차림의 한 사람이 그림을 팔러 오는데, 소년과 미인이 성관계를 하는 그림이었다. 서장관 노세하가 더 들추어 보려고 하자 김창업은 춘화 같다고 하면서 말린다. 김창업은 그 사람을 보고 선비냐고 묻고 그렇다고 답하자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어찌 춘화를 가져와 남에게 보이냐고 힐책하자 그 선비는 그림을 싸서 달아나고 만다. 이 일화에서 김창업이 정확하게 춘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김창업은 그야말로 혁혁한 서울의 명문가 안동김씨 집안 사람이다. 형 김창집이 영의정까지 지냈으니 말해 무엇하랴. 이런 명문가가 되어야 비로소 북경에서 춘화를 구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비록 춘화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고 있지만, 그 자신이 춘화를 보지 않았다면 과연 단박에 춘화라고 하는 판단이 나올 수가 있었을까? 이렇게 하여 전해진 춘화는 드디어 조선에서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사대부가에서 춘화를 가지는 것은 별반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19세기 중반에 창작된 서울의 풍물을 노래한 ‘한양가’에서는 광통교 다리 위에서 걸어놓고 파는 그림을 잔뜩 열거하고 있는데, 그 중 춘화가 들어 있으며,‘춘향전’의 한 이본에도 춘향의 방 안을 묘사하면서 춘화를 꼽고 있다. 춘화를 감상하는 것은 18세기 이래 조선의 성풍속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던 것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5) 목욕터 풍경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5) 목욕터 풍경

    신윤복의 그림 ‘목욕하는 여인들’. 단옷날 여성의 목욕 장면을 그린 것이다. 왼쪽 아래에 젊은 여인 넷이 시냇물에 몸을 씻고 있다. 네 사람 모두 윗도리를 벗었고, 그 중 맨 왼쪽에 서 있는 여인이 치마를 걷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속옷도 아마 입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고, 씻으러 나온 것이 아닌가. ●조선시대 여성 목욕 장면 담은 유일한 그림 오른쪽 위에는 붉은 치마와 노란 저고리로 한껏 멋을 낸 젊은 여인이 그네를 뛰고 있고, 그 옆의 여성은 참으로 거창한 크기의 어여머리를 풀어 매만지고 있다. 두 여자의 옷은 고급스럽다. 저고리의 끝동, 깃, 곁마기, 고름을 모두 자주색으로 하면 삼회장이라 하여 가장 잘 차려입은 것으로 치는데, 그네를 타는 여자와 어여머리를 만지고 있는 여성은 모두 삼회장이다. 다만 맨 오른쪽의 여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흰 저고리를 입고 있는데, 필시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다. 오른쪽 아래의 보퉁이를 이고 오는 여자는 짚신을 신고 행주치마를 두른 것을 보건대 입성이 초라할 뿐만 아니라, 남들 노는 데 심부름이나 하고 있으니, 계집종임이 분명하다. 이고 온 보퉁이에 술병 모가지가 비쭉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옆에 보이는 물건 역시 안주를 담은 찬합일 것이다. 요컨대 단옷날 시내로 나와 목욕하는 여성들(기생으로 짐작된다)이 마시고 먹을 술과 안주를 날라 오고 있는 참이다. 이 그림은 놀랍도록 충격적이다. 조선조 500년에 걸쳐 유사한 그림은 없다. 그 충격의 이유는 여성의 나신을 드러내 놓고 있다는 것이다. 흰 피부에 진홍의 젖꼭지와 입술은 너무나도 선명하다. 특히 여성의 유방을 보라. 인터넷이 온갖 영상을 퍼 나르는 시대에 여성의 나신은 그다지 별스럽지 않다. 하지만 때는 유가의 도덕이 시퍼런 조선시대다. 어찌 충격이 아닐 수 있겠는가. 여성의 젖가슴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그것은 성의 두 가지 기능과 관계된다. 인간에게 있어 성은 쾌락이면서 생식이다. 여성의 가슴 역시 그것에 대응한다. 가슴은 성적 쾌락의 도구, 곧 성기일 수도 있고, 또한 자식을 기르는 수유의 도구이기도 하다. 수유의 도구는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과거 여성들이 공개된 공간에서 자신의 가슴을 열어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것을 보고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것은 모성의 가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보퉁이를 진 여성의 젖가슴을 보라. 이 젖가슴은 신기하게도 성적 상상을 유발하지 않는다. 하지만 목욕하는 여성의 분홍빛 유두와 흰 가슴은 성적 쾌락을 상상케 한다. 저 숨어서 훔쳐보는 젊은 까까머리 스님들의 시선도 분명 성적 쾌락을 향해 있다. 이 그림이 또한 희한한 것은 여성의 조선시대의 목욕 장면을 형상화한 유일한 시각자료라는 것이다. 한국의 전통회화는 인간의 구체적 일상을 담은 그림이 참으로 희소하거니와, 이 그림 외에는 목욕이라는 재제가 등장하는 그림은 없다. 게다가 목욕 자체에 대한 문헌의 언급도 희소하다. 과거 기록에서 목욕은 온천과 관련하여 주로 등장한다. 눈병으로 고통을 겪었던 세종과 심한 피부병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세조는 자주 온천을 찾았다. 따라서 이들의 온천행과 관련된 목욕이란 어휘가 더러 등장한다.30년도 더 된 예전의 일이다. 나는 창덕궁에 갔을 때 궁궐 안에 있는 목욕탕을 보았는데, 그것은 신식이었다. 과거 사람들은 어떻게 몸 전체를 씻었던 것일까. 제사를 지내기 전에 목욕재계하라는 말이 허다하게 나오지만, 나는 정작 그 ‘목욕’재계가 이루어지는 공간과 방법, 도구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세종실록’ 7년 7월19일조를 보면, 세종은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습진과 같은 피부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는 보고를 듣고 선공감에 명하여 욕통(浴桶)을 만들어 지급하게 한다. 이 욕통이란 것이 조선시대의 목욕문화의 핵심일 것이다. 지금처럼 대중탕이나 혹은 집안에 따로 욕실을 만들지 않고, 욕통을 만들어 적당한 공간에 비치하고 물을 데워서 목욕을 하는 것이 목욕문화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것조차 일반적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보편적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인구의 대부분이 소작농이거나 극히 적은 농토를 소유한 자작농이었으니, 삶의 수준이란 것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판에 집집마다 욕통을 갖추어 놓고 물을 데워 목욕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20세기에 들어와서도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전에는, 단독주택에 욕통을 비치할 공간을 거의 마련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린다면, 조선시대의 목욕문화를 대개 짐작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이 자신의 몸을 어떻게 청결히 했을까 하는 것은 더욱 궁금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도 아무런 문헌적 해답은 없다. 상상하건대 아마도 부엌 바닥에 물을 데워놓고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몸을 씻지 않았을까. ●개울에서 목욕하는 것은 오랜 전통 다만 여성이 비교적 자유롭게 몸을 씻을 수 있는 곳은, 개울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을 선택한다. 하기야 늘 그렇듯이 남성의 관음증은 여기서도 멈추지 않아, 훔쳐보는 사람(스님 둘)이 있기 마련이지만. 개울에서 목욕을 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다.1123년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이렇게 말한다. 옛날의 역사책에 고려에 대해 실어놓은 기록에 의하면, 그 풍속이 모두 다 깨끗하다 하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고려 사람들은 늘 중국 사람들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그러므로 이른 아침에 일어나 반드시 먼저 목욕을 한 뒤 집을 나선다. 또 여름에는 날마다 두 번 목욕을 하는데, 거개 시내에서 한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내외를 하지 않고 의관을 모두 벗어 언덕에 던져두고 물가를 따라 벌거벗되 괴이한 일로 여기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위쪽 부분이다. 고려 사람은 청결하고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는 말을 중국인 스스로 하다니 말이다. 서긍의 말에 의하면, 고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목욕부터 하고 외출을 하고, 여름에 하루 두 번 목욕을 한다 하니, 조선과는 사뭇 다른 풍습이다.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여름철 시내에서 목욕을 하되, 남자 여자가 내외를 하지 않고 나신을 드러내고 목욕을 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을 믿는다면, 고려시대에는 남녀의 분별이 없이 옷을 언덕에 벗어놓고 몸을 씻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위의 엿보는 선비도 이런 유구한 전통을 이어받았는지 모를 일이다. 각설하고, 이렇듯 자유롭던 개울가의 풍경이 바뀐 것은 조선조가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조선조는 알다시피 양반-남성 국가다. 양반-남성의 국가는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을 분할,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양반-남성은 ‘소학’의 규정대로 여성의 역할을 조리와 의복에 제한했다. 조리와 의복 마련은 조선에서도 여성이 맡아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고려와 달라진 것이 있었다. 조선의 국가이데올로기 성리학은 남성과 여성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여성을 오직 가정 내부에 유폐할 것을 요구했다. 여성은 밖으로 나다니지 말아라. 여성은 뜰 밖에 나와서도 안 된다. 이것이 양반-남성의 요구였다. ●감추라 하면 더욱 드러내고 싶은 인간의 본능 ‘고려도경’의 언급처럼 고려사회는 시냇가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남자와 여자가 옷을 벗고 목욕을 하는 것을 허락했다면, 조선사회에서는 그와는 정반대의 길로 치달았다. 몸을 가려라. 이것이 여성에 대한 주문이었다. 사대부가의 여성이 외출할 때면 장옷과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렸고, 처녀의 경우 비단보자기를 씌워서 업고 다니기도 하였다. 그럴 형편이 되지 않으면 할 수 없지만, 만약 형편이 된다면,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여성의 신체를 완벽하게 차단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것이 도덕의 명령이었다. 하지만 감춘 것은 더욱 보고 싶은 법이고, 감추라 하면 더욱 드러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양반-남성의 도덕은 여자의 몸을 죄의 근원처럼 여겼다. 과연 그런가. 여성의 몸이 죄의 근원이라면 모든 인간은 죄의 근원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보다 더 큰 거짓이 어디 있겠는가. 혜원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가.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한국인의 질병] (20) 치질

    [한국인의 질병] (20) 치질

    연간 입원 환자 수가 가장 많은 질환은 무엇일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사망자가 가장 많은 ‘암’이라고 답하기 쉽다. 하지만 아니다. 최근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 정부기관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치질’인 것으로 나타났다. 생명을 위협할 만큼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제대로 앉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기 때문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환자가 많다는 것. 지난해 발행된 ‘2006년 건강보험 통계연보’를 살펴보면 한 해에 치질로 입원한 환자는 21만 4500여명으로, 단일 질병 가운데 환자 수가 가장 많다. 치질 입원 환자 수는 2000년 12만명에 불과했지만 6년새 두 배로 증가했다. 그만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표적 질환인 것. 미국에서 발표된 한 보고서에 따르면 50세 이상 환자의 50%가 치질을 경험하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50세이상 50%가 경험… 겨울에 많아 치질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대장·항문 전문병원인 대항병원 이두한(51) 대표원장을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어봤다. “치핵은 풍선을 부는 것과 같은 이치로 생겨납니다. 풍선을 불면 커지는 것처럼 항문에 힘을 주면 치핵이 커지고 힘을 빼면 줄어듭니다. 주로 노인에게 많이 나타납니다.60년 산 사람은 30년 산 사람보다 치핵이 늘었다가 줄어든 경험이 많기 때문에 항문 주변 조직이 많이 늘어질 가능성이 높죠.” 치질은 항문 안팎의 질환을 모두 포함한다. 항문 밖으로 근육이나 혈관 덩어리가 빠져 나오는 ‘치핵’, 항문이 찢어지는 ‘치열’, 항문 주위가 자주 곪아 구멍이 생기면서 고름이나 대변이 밖으로 새는 ‘치루’ 등이 그것이다. 치핵의 대표적인 증상은 항문 조직이 밖으로 빠져나오는 ‘탈항’(脫肛)이다. 치핵이 항문 안쪽에 생길 때 나타나는 탈항은 선홍색의 출혈과 내부 조직의 통증을 일으킨다. 항문 외부에 치핵이 생긴 경우에는 출혈이나 탈항의 위험은 적지만 피부 속으로 출혈이 일어나 피가 엉키는 혈전 증상이 나타난다. ●변기에 오래 앉는 습관이 원인 치루가 생기면 염증이 반복되다가 항문 주변 조직에 구멍이 생기는데, 대개 통증은 없지만 종양 등의 합병증이 생길 수 있으므로 반드시 수술로 치료해야 한다. 항문이 찢어져 출혈이 생기는 치열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질환이지만 무리하게 변을 계속 보게 되면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만성화된다. 치질이 발생하는 가장 큰 원인은 잘못된 화장실 이용 습관 때문이다. 항문에 힘을 뺀 채 변기에 오래 앉아 있게 되면 중력에 의해 항문 주위에 피가 고이고 혈관이 팽창해 치핵으로 발전한다. 즉, 화장실에서 신문이나 잡지를 보거나 장기간 앉아서 진행하는 업무, 쪼그리고 앉는 음주 습관이 주요 원인이 된다. 복압이 올라가는 골프, 보디빌딩, 등산 등도 증세를 악화시킬 수 있다. 여성은 활동성이 떨어져 남성보다 발병 위험이 다소 낮지만 임신 후 골반 근육이 내려올 때 치질의 증상이 나타나기 쉽다. “치핵은 주로 남성에게 많이 나타나요. 오래 앉아 있거나 복압이 올라가는 운동을 많이 하기 때문이죠. 여성은 임신 뒤에 호르몬의 영향으로 항문 주변 조직이 잘 붓게 되죠. 출산 시 과도하게 힘을 주면 항문 안쪽 조직이 밖으로 빠지면서 들어가지 않아 치질이 발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피만 나고 항문 바깥 쪽으로 치핵이 빠져나오지 않은 초기 환자에게는 적외선을 이용한 ‘응고법’, 전기나 레이저를 이용해 조직을 태우는 ‘소작술’ 등이 사용된다. 그러나 이들 시술법은 일시적으로 증세를 호전시키기 때문에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치핵을 뿌리째 뽑기 위해서는 의사가 눈으로 보면서 치핵 덩어리를 절제해야 한다. 치질 수술은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큰 수술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수술에 비해 통증이 크지 않다. 특히 치루는 그냥 낫는 법이 없고 근본 원인인 ‘치루관’을 제거하지 않으면 염증이 재발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수술을 해야 한다. “치질 수술은 무통 주사로 통증을 조절하기 때문에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증상이 심하다고 해도 3∼4일간 입원하면 큰 문제 없이 완치할 수 있어요. 초기에 병원을 찾으면 작은 부위만 절개하면 되기 때문에 치유 기간을 더 짧게 줄일 수 있죠.” ●치루관 뿌리째 제거해야 뒤탈없어 치질을 미리 예방하려면 배변 습관이나 화장실 이용 행태를 개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너무 힘을 주거나 자주 화장실을 찾으면 치핵이 확장될 수 있다. 따라서 변이 조금 남은 느낌이 있더라도 배변감을 참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변의 양이 많으면 배변 시 힘을 주지 않아도 돼 치질의 증상을 호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채소와 같이 섬유질이 많은 음식은 소화는 잘 안되지만 변의 양을 늘리기 때문에 자주 섭취하는 것이 좋다. 혈관을 확장시키고 출혈을 일으키는 음주는 자제해야 한다. 육체적으로 활동력을 높이면 배변이 원활해지기 때문에 가벼운 운동도 좋다. 변비는 항문에 자주 힘을 주도록 하므로 미리 치료해야 한다. 환자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검증되지 않은 무허가 시술법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치핵 조직을 썩게 만드는 ‘괴사제’는 괄약근 조직을 상하게 할 수 있어 위험하다. 괄약근이 약해지면 배변량을 제대로 조절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살이 썩는 약은 비수술적 치료이기 때문에 환자들이 선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재발이 되기 쉽고 합병증으로 근육 조직이 완전히 손상될 수 있어 피해야 합니다.‘획기적인 최신 비법’이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고 경험 있는 전문의를 만나 근본적인 수술법에 대해 상담 받아 보세요.”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25년째 한센인 돌보는 ‘소록도 천사’

    25년째 한센인 돌보는 ‘소록도 천사’

    “고단했던 삶을 놓는 순간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너무나 평안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길에 가족도, 친척도 없는 그들을 지켜볼 때는 가슴이 미어집니다.” 한센인들의 보금자리인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의 천사 김명순(45) 간호조무사가 보통사람의 눈에는 태산보다 높게 보였다. 그는 2007년 ‘숨은 공무원’으로 뽑혀 최근 근정포장을 받았다. 병원에서 국무총리 표창을 신청했으나 현장조사에서 감동받아 한 단계 올라갔다. 김씨는 남편과 초·중학생인 1남 2녀와 함께 소록도 관사에서 산다.1983년 시작해 25년째 한결같이 한센인들을 돌보는 삶을 잇고 있다. 그가 눈뜨면 하는 일이 정해져 있다. 암환자, 간경화 등 중증인 한센인 환자 50명을 찾아가 주사를 놔주고 욕창부위 고름을 닦아내고 소독한다. 식사보조, 대소변 받아내기, 목욕과 이발, 머리빗기, 손발톱 깎기, 세수, 바느질, 산책하기, 노래 부르기, 관절 운동까지…. 허리펼 시간이 없다. 김씨는 지금 10여명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가족 관계를 맺고 며느리가 됐다. 아이들은 재롱을 부리고 말벗이 되는 손주가 됐다. 식사 때면 아이들은 “꼭지(박곡지) 할머니 나 안 보고 싶대.”라고 물어본다. 그는 아이들 손 잡고 할머니 생일날 노래를 불러준다. 설에는 세배하고 세뱃돈도 받는다. 김씨는 “임종 때 할머니들은 우리에게 ‘간호야, 애기 엄마야.’라고 부르면서 ‘너무 미안하다. 고마웠다.’며 눈물을 흘리신다.”라고 말했다. 그가 치르는 장례식만 1년에 50여차례다. “요즘 소록도에 오는 젊은 자원봉사자들을 보면 저도 깜짝깜짝 놀랍니다.‘한센병은 옮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아무렇지도 않게 할머니 얼굴에 대고 비비고 안고 합니다. 이들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워요.” 김씨는 “젊어서 대도시 다른 병원으로 갈까 하고 고민도 많이 했지만 살면 살수록 소록도가 좋다.”며 웃었다. 그의 선친도 소록도와 뭍을 잇던 나룻배 선장이었다. 소록도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3) 우물가의 사랑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3) 우물가의 사랑

    김홍도의 그림 ‘우물가’다. 길 가던 사내는 더운 날씨에 목이 무척 말랐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양태가 작지 않은 갓을 등 뒤에 매단 것으로 보아, 아주 상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웬일인가. 아무리 더워도 그렇지 가슴을 풀어헤치고 물 긷는 젊은 아낙에게 물을 달라니 말이다. 게다가 가슴에는 검은 털이 무성하다. 가슴 털은 성적 기호다. 남성의 떡 벌어진 가슴, 그리고 무성한 털이 성적 기호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성적 분위기 맴도는 우물가 두레박을 건네고 줄을 잡고 있는 젊은 아낙을 보라. 상사람이 분명하다. 하지만 참으로 곱지 않은가. 내 생각에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색시로 보인다. 아낙은 수줍어 얼굴을 돌려 사내의 털북숭이 가슴을 보지 않고 두레박만 건넨다. 젊은 아낙 아래쪽의 머리를 위로 틀어 묶은 중년의 아낙 역시 외면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물 속 두레박만 보고 있을 뿐이다. 단원은 우물가에서 남자와 여자가 은밀하게 성적 기호를 주고받는 장면을 작은 화폭에 담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그림은 신윤복의 ‘우물가의 고민’이다. 그림 위쪽에 둥근 달이 떠 있다. 밤이다. 달이 걸린 나무를 보시라. 붉은 꽃이 피어 있다. 식물에 대해 무지한 나는 저 꽃이 앵두꽃인지, 복사꽃인지 모른다. 아시는 분은 가르쳐 주시기 바란다. 그림 아래쪽에는 젊은 여자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 여자는 우물가에 앉아 두레박 줄을 잡고 있고, 서 있는 여자는 오른손을 턱에 괴고 고민에 빠진 눈치다. 무언가 심각한 사건이 있다. 고민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림은 모든 것을 말하지 않지만, 찾아볼 수 있는 데까지는 찾아보자. 두 여자는 양반집 여자가 아니다. 옷차림을 보라. 둘 다 행주치마를 두르고 있다. 똬리를 머리에 얹고 있는 여자는 흰 민짜 저고리를 입었다. 왼쪽 여인은 녹색 저고리이기는 하지만, 저고리 고름만 자주색일 뿐 다른 장식이 전혀 없다. 또 신은 모두 신이다. 초라한 복색으로 보아 두 여인이 양반집 여자가 아님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두 상사람 여인네는 왜 고민에 잠겨 있는 것인가. 우물이 있는 장소를 보자. 그림 오른쪽 상단에 기와를 얹은 작은 문이 있다.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은 아니다. 큰 양반 가문은 건물이 크고 복잡하며 중간에 무수히 작은 문들이 있다. 이 문 역시 그런 문으로 생각된다. 문제는 담장이다. 담장이 허물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묵은 양반가로 생각되는데, 그 담장에 사내가 하나 서 있다. 사내가 쓰고 있는 양반만이 쓰는 사방관으로 보아, 이 사내는 이 집의 주인 양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사내는 훔쳐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꼿꼿이 서서 두 여자를 정시하고 있다. 다만 이 사내의 표정은 음침하다. 주인 양반이 왜 밤중에 집안 여자들이 우물가에 모여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있단 말인가. 두 여자는 왜 물을 긷다 말고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가, 또 서 있는 여자는 왜 턱까지 괴고 심각한 표정으로 있는가. 그림은 더 이상 말을 하지는 않지만, 이 남자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나는 혜원이 그림 속에 담은 생각이 무엇인가 늘 궁금하였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없으면 상상이다. 담 넘어 서 있는 양반이 서서 고민에 빠져 있는 젊은 여인을 건드렸고, 첩으로 들이려 하자, 그 사실을 여인은 동무에게 털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임신을 시켰든지. 이 그림은 바로 그 고민상담의 장면이라는 것이다. 양반은 이런 이유로 서 있는 여성에게 무슨 제안을 하였고, 그 여성에게 하회를 기다리는 중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이런 해석이라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꼭 그렇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고민에 빠진 여성과 돌담 밖의 남자 사이에 어떤 성적인 관계가 있었다고 추리하는 것은 그리 근거 없지는 않을 것이다. ●유래 오래된 ‘우물과 성의 결합´ 이제까지 본 단원과 혜원 두 그림 모두 우물이 중요한 제재고, 그 우물가에는 성적인 분위기가 맴돌고 있었다. 한데 우물은 원래 성적인 것이다. 물이 솟아오르는, 깊고 어두운 곳, 어딘가 ‘여성’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게다가 우물은 여성들의 공간이다. 우물과 성적인 결합의 연관은 역사적으로 그 유래가 퍽 오래된 것이다. 고려가요 ‘쌍화점’은 우물과 성의 결합을 노래한다. 드레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 우물의 용이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소문이 이 우물 밖에 나며들면 하면 조그마한 두레박아, 네 말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그 잔 곳같이 울창한 곳이 없다. 드레우물의 ‘드레’가 무슨 말인지 알 길이 없다. 한데 용두레우물이란 말이 있다. 만주의 지명 용정(龍井)을 풀면 곧 용드레우물이 된다고 한다. 용드레는 용두레일 것이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해 긴 나무 속을 파서 만드는 물 푸는 도구가 용드레다. 아마도 드레는 용두레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드레는 또 ‘두레박’의 ‘두레’와 같을 것이다. 어쨌거나 물을 푸는 도구임은 분명하다. 여자가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 우물로 갔더니, 우물에 사는 용이 여자의 손목을 쥔다. 이후의 구체적인 과정은 생략하자. 여자는 용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남에게 알려질까 걱정이다. 본 사람, 아니 본 물건은 두레박 밖에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인즉 밖으로 소문이 나면 너 두레박이 한 것이라 말하겠다. 뭐, 이런 뜻이다. 그 뒤의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그 잔 곳같이 울창한 곳이 없다.’는 무슨 말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우물의 용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모른다. 하지만 우물과 용은 긴밀한 관계가 있음은 사실이다.‘삼국사기’를 보면,‘자비마립간’ 4년(461) 여름 4월에 ‘용이 금성 우물 속에서 나타났다.’ 하였고,‘소지마립간’ 22(500)년 여름 4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를 뽑았으며 용이 금성의 우물에 나타났고, 서울에 누른 빛깔의 안개가 사방에 꽉 끼었다.’ 하였다. 이것은 어떤 자연현상을 두고 용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자연현상을 추리할 수 없으니, 답답하기는 매일반이다.‘삼국사기’의 기록이야 1000년 하고도 50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옛 것이지만, 지금과 가까운 조선시대에도 이런 황당한 일이 있었다. 태종 18년(1418) 수군 첨절제사 윤하는 경기도 교동현 수영(水營)의 우물에 황룡이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수영 앞에 우물이 있는데, 수군이 물을 길러 갔더니, 허리가 기둥만 한 누런 색 용이 우물에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다. 분명 무엇을 보기는 본 모양인데, 그것이 과연 어떤 자연현상인지는 알 길이 없다. ●우물가에서 ‘용´을 만난 신덕왕후 우물 용을 이야기 하다가 말이 옆으로 샜다. 어쨌거나 우물은 용과 관련이 있고,‘쌍화점’의 여인은 우물의 용과 성관계를 맺는다. 한데 우물의 용은 아니지만, 용과 다름없는 인간과 관계를 맺는 경우도 있다. 태조 이성계의 이야기다. 이성계의 젊은 시절, 사냥을 나갔다가 목이 말랐다. 돌아보니 우물이 있다. 해서 물 길러 온 젊은 아가씨에게 물을 청했더니, 달고 시원한 물을 한 바가지 떠 준다. 급한 마음에 입에 쏟아 부으려 하는데, 웬걸 물에 버드나무 잎이 떠 있는 것이 아닌가. 잎사귀를 불면서 마실 수밖에. 목을 축인 다음 물었다. 왜 버드나무 잎을 띄웠느냐고? 답인즉 한창 목이 마를 때 물을 급하게 마시면 체한다고, 그러니 잎사귀를 불면서 천천히 마시라는 뜻이었단다. 얼마나 슬기로운가. 그제사 얼굴을 보니, 인물도 곱다. 당연지사 둘은 짝을 지었다. 이 여인이 바로 신덕왕후 강씨(康氏)다. 이성계는 뒷날 강씨의 소생인 방번과 방석을 사랑하여 왕위에 올리고자 했지만, 태종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그건 뒷날 이야기고, 이성계는 용상에 올랐으니, 강씨의 입장에서는 우물가에서 용을 만난 셈이다. 지금도 사람들이 입에 가끔 올리는 대중가요에 ‘앵두나무 처녀’란 노래가 있다.“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로 시작되는 노래 말이다. 우물가에서 처녀들은 서울에 관한 말만 듣고 모두 물동이와 호미자루를 던지고 서울로 달아난다.2절은 그 이후의 이야기다. 동네의 총각도 역시 신부감이 달아난 서울로 달아나 버린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우물가는 남성과 여성의 성적 신호가 오가는 곳이다. 우물도 사라진 지금 그럴 일은 없어졌지만 말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연말 잦은 술, 담배, 남성 전립선 건강적신호!

    연말 잦은 술, 담배, 남성 전립선 건강적신호!

    -남성 전립선 건강,12월 체크 필수 -잦은 소변,잔뇨감,통증,혈흔,전신피로감 등 증상 다양해 한 해의 끝을 앞두고 송년회,동문회 등의 술자리가 잦다.하지만,평소 소변의 문제가 있는 성인남성이라면 이러한 잦은 술자리가 전립선에는 ‘공포의 12월’을 만들 수 있다.간이나 위장 못지 않게 술,담배에 망가지기 쉬운 곳이 바로 전립선이기 때문. 정확한 통계는 나와있지 않으나,전문가들은 국내 성인 남성 2명 중 1명꼴로 전립선 관련 질환을 경험해볼 만큼 흔한 질병이라고 입을 모은다.따라서 잦은 소변,잔뇨감,배뇨통 등의 소변 이상이나 무기력증 만성피로 등을 경험한 이들이라면 연말 술자리를 앞두고 전립선질환에 대한 꼼꼼한 대응책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술,담배에 찬바람까지…12월은 전립선의 적! 전립선이란 방광 바로 밑에 위치한 남성에게만 있는 부드러운 조직체로 정액성분의 약 30%를 차지하며 정자에 영양을 공급,수정이 잘 되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기관이다.하지만 연말 잦은 송년회에서 접하는 술은 전립선을 자극해 충혈을 조장한다.특히 맥주를 많이 마시는 경우 소변을 일시적으로 참는 경우가 다반사.하지만 이런 경우 전립선 주위의 근육들이 과도하게 긴장을 하게 되고,이로 인하여 전립선의 압박으로 인해 각종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술자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담배 또한 인체의 기를 소모시키고 전립선 주변의 혈액순환을 방해해 증상을 악화시킨다.여기에 겨울철 찬바람 또한 질환을 부추길 수 있다.차가운 기운이 몸의 피로와 무기력증을 가중시켜 면역력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근육을 과도하게 긴장시켜 하복부가 당기고,뻐근함과 빈뇨감,잔뇨감이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립선 질환은 크게 전립선염,전립선 비대증,전립선암으로 나뉠 수 있다.치명적이지 않다고 방치하기 쉬우나,증세가 심각해질수록 완치가 어렵고,인체의 각종 문제를 유발하므로 초기에 증상을 파악,적극적으로 치료를 하는 것이 좋다. ●20∼30대 전립선염,40∼50대 전립선비대증 주의! 전립선염은 20∼30대 남성에게 자주 나타나며 전립선질환 중에 가장 흔하게 발병한다.증상을 살펴보면 소변이 자주 마려운 빈뇨감,소변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다급한 것이 특징이다.또 소변을 보려면 잘 나오지 않고,소변 줄기가 가늘고 약해지며 중간에 자주 끊기며,허리 아래와 성기에 통증이 있거나,소변 보기 전 약간의 고름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그밖에 사정시 통증 혹은 정액에 피가 섞여 나오기도 한다.문제는 재발이 잦고,완치가 어렵다는 점.따라서 초기 치료가 시급하다. 전립선 비대증은 40∼50대 남성에게 자주 나타난다.말 그대로 전립선의 크기가 커진 것을 뜻한다.이렇게 되면 요도가 압박되어 소변보기가 힘들다.때문에 소변이 자주 마려움에도 불구하고 화장실에 가면 방울방울 떨어지고,새벽에도 배뇨감으로 여러 번 일어나서 소변을 보는 등의 문제를 겪기 십상.방치할 경우 방광과 콩팥이 손상될 수 있고 심한 경우 요독증 같은 치명적인 합병증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평소 증상이 있었다면 초기치료가 급선무.한방에서는 전립선과 관계된 장기인 비장,신장,방광을 다스려서 근본적인 치료를 하고 있다.황백,지모,금은화,울금 등의 20여가지 순수 한약재를 넣고 금궤신기환 처방을 가감한 이수비뇨탕을 통해 환자의 증상을 바로잡고,전립선 건강을 끌어올리는 것.무엇보다 항생제 내성에 대한 염려가 없어 오랜시간 동안 복용해도 인체에 전혀 문제가 없다. 치료와 더불어 가급적 연말 술자리는 피하며,술을 마신 다음날은 꾸준한 운동과 반신욕,좌욕을 통해 혈액순환을 돋워 전립선 건강을 다스린다.더불어 술자리에서 소변증상이 있다면 참지 말고 곧바로 화장실로 가는 것이 좋으며,술과 함께 즐기게 되는 담배와 커피 등도 되도록 삼가는 것이 좋다. 도움글 : 강남행복한의원
  • [평양을 다녀와서] “‘北 속살’ 볼때 가슴 뭉클”

    [평양을 다녀와서] “‘北 속살’ 볼때 가슴 뭉클”

    이번 수행에서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진 대목은 대통령이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이었다. 수행원들도 함께 걷는 것인가 하는 기대도 가졌었지만,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적어도 구경은 할 수 있겠지 정도로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는 역사적인 그 시간에 먼저 출발한 우리는 이미 개성을 지나 평양∼개성간 고속도로에 들어서 있었고, 그 광경은 그날 밤 평양의 보통강 여관에서 텔레비전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버스를 타고 개망초꽃이 다닥다닥 피어 있는 군사분계선을 넘는 감회도 적은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육로로 평양을 간다는 일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대체로 북한이 드러내기를 꺼려하던 것으로 알고 있던 깊은 내륙을 보게 된다는 상상만으로도 이미 가슴이 설레었다. 군사분계선을 넘으니 길가에는 남쪽이나 조금도 다름없이 코스모스가 한창이었다. 조금 헐벗은 느낌 외에 전혀 다른 것이 없는 우리 땅이었다. 이내 출입국관리소가 나왔고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간단한 검색으로 그곳을 통과했다. 북쪽 안내원 셋을 새로 태우고 출입국관리소를 나오자 바로 개성공단이었다. 많은 환영객들이 길에 늘어서서 ‘우리는 하나’ ‘조국 통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개성 공단에서 일하는 북쪽 근로자들이라는 설명이었는데, 문득 이번 회담이 성공적이기를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흑백사진을 보는 듯한 개성시내는 마침 출근 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손을 흔들어 환영했는데, 하얀 저고리에 검정 치마의 처녀들이 유난히 많았다. 하얀 옷고름이 검정 치마의 아랫단까지 길게 늘어지는 아름다운 조선옷이었다. 두셋씩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가는 처녀들이 많았고, 대개는 손에 책을 들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걷는 처녀도 있어 무언가 연출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는데,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평양에 와서 확인했다. 보통강 여관에 짐을 풀고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다리에서 길을 걸으면서 책을 읽는 30대의 여인을 본 것이다. 개성에서 평양까지는 채 두 시간이 안 걸리는 것 같았다. 지난번 수해가 60년대 이래 가장 큰 수해라고 했지만 수해의 흔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속도로라고는 하나 노면이 고르지 못한지 차가 많이 흔들렸지만, 남쪽이나 마찬가지로 코스모스며 쑥부쟁이가 가득 핀 길은 아름다웠고 멀리 보이는 험준한 산들은 더욱 아름다웠다. 다만 산에 나무가 좀더 많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가까운 야산에 듬성듬성 사과나무가 심겨져 있었는데 나무가 실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큰 수확을 올린 것 같지는 않았다. 내 이런 마음을 알았던지 옆에 앉았던 안내원이 북에서도 요즈음 나무를 많이 심고 있으며 특히 계단밭에 과일 나무를 심어 산도 푸르게 만들고 수해도 방지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평양∼개성 고속도로에는 18개의 굴이 있었는데, 아주 밝게는 아니지만 모두 불이 밝혀져 있었다. 작은 개울 등을 이용한 소규모 수력발전이 많이 개발되어 전기사정이 조금은 나아졌다는 것이 안내원의 설명이었다. 평양 시내 다 와서 비로소 대통령 일행과 동행이 되어 시내로 들어갔다.3대 헌장탑 앞에서부터 환영인파가 보이기 시작하다가 중심지로 가까워지면서 인파는 완전히 거리를 뒤덮었다. 모두들 성장을 했고, 손에는 진홍·분홍·자줏빛 조화들을 들었다. 그 조화들을 흔들면서 “겨레는 하나” “조국 통일” “만세” 등을 소리높이 외친다. 펄쩍펄쩍 뛰는 사람도 있다. 뒤에 들으니 이날 나온 인원이 모두 40만명이라 한다. 열렬한 환영이 고맙기는 하면서도 이들이 20리 밖,30리 밖에서 걸어왔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더러는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왔을는지도 모른다. 교통수단도 마땅치 않으니 대개들 걸어왔을 것이다. 화장실 시설도 충분하지 못하다고 들었는데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환영인파 사이를 지나는 시간이 길었던 것은 대통령이 환영나온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함께 무개차를 타고 행렬 사이를 지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환영회장은 4·25문화회관 앞 광장이었는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도착해서 우리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열 등 공식 행사가 다 끝나갈 무렵 김정일 위원장이 우리가 서 있는 자리로 왔다. 특별 수행원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나누는 그의 얼굴은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 않았지만, 밝았다.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잡는 그의 손에는 힘이 있었고, 카리스마보다는 친근감이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소탈하고 활기 있는 사람이란 느낌도 든다. 2년 전 작가대회 때 왔을 때에 비해 궤도전차도 많아지고 행인도 많아져 시내는 훨씬 활기차 보였다. 아름다운 버드나무 가로수 사이를 지나 보통강 호텔로 가면서 문득 평화와 번영으로 가는 길이 생각하기에 따라 그다지 멀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 [어린이 책꽂이]

    ●아주르와 아스마르(미셸 오슬로 원작·김주열 옮김, 웅진주니어 펴냄) `프린스 앤 프린세스’‘키리쿠 키리쿠’ 등으로 유명한 스웨덴 출신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셸 오슬로의 작품.11월 애니메이션의 국내 개봉을 앞두고 책으로 먼저 찾아왔다. 프랑스어로 파란색과 갈색을 뜻하는 아주르와 아스마르는 서양과 동양(이슬람)을 상징한다. 두 아이의 모험담을 통해 유럽과 이슬람 문화간의 상호 이해의 메시지를 전한다.1만 2000원.●방귀 뀌고 도둑 잡고(서정오 글·임향한 그림, 주니어랜덤 펴냄) 2001년 나온 뒤 4만부가 팔린 인기 도서의 개정판. 곧이곧대로 따라하는 바보 사위, 방귀로 도둑을 잡은 사람, 옷고름에 매달린 주먹밥도 귀찮아서 안 먹고 쫄쫄 굶는 게으름뱅이, 거드름 피우는 양반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는 농부. 선조들의 해학과 슬기가 담겨 있는 우스운 이야기만 모은 책.8500원.●노빈손 정조대왕의 암살을 막아라(남동욱 지음·이우일 일러스트, 뜨인돌 펴냄) 재미없는 역사책은 가라! 모험가 노빈손과 함께 떠나는 역사여행. 우연히 시간을 건너뛰어 정조가 살던 조선후기로 가게 된 노빈손. 실학의 대가 정약용과 함께 정조의 암살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의 흥미진진한 활약이 펼쳐진다. 코믹한 그림과 각 장마다 실려 있는 용어풀이, 역사상식이 역사책이라면 고개를 저었던 아이들의 관심을 살 만하다.9500원.●인생은 달리기 시합인가요?(제이미 리 커티스 글·로라 코넬 그림, 이경혜 옮김, 중앙출판사 펴냄) 엄마, 인생은 달리기 시합이야? ‘준비!땅!’은 누가 외쳤어? 이기면 좋아? 꽈당 넘어지면 어쩌지? 숨차게 질문을 쏟아내는 아들을 엄마가 다독인다.“빨리 달리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란다. 넌 그저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돼.” 예쁜 색감으로 물든 그림처럼 진짜 맛있는 인생을 사는 법을 알려주는 책.8000원.●미술 첫발(정명숙 글·조행희 그림, 문공사 펴냄) 미술의 역사와 사조에 관해 쉽게 풀어놓은, 초등생을 위한 미술 입문서. 일상 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사물에 담긴 미술의 원리부터 미술의 역사와 다양한 사조, 표현 기법까지 친근한 형식으로 소개돼 있다.8800원.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0) 고약장수에서 종6품 오른 피재길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0) 고약장수에서 종6품 오른 피재길

    홍천 피씨(皮氏)는 전형적인 중인 집안이다. 대부분의 중인은 문과를 하던 사대부 집안에서 분파되었는데, 피씨는 문과 급제자가 없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1차 시험이었던 생원 진사시의 합격자 명부 ‘사마방목’에도 피씨는 없으니, 전형적인 중인이라고 볼 수 있다. 중인 집안의 족보를 간추려 모은 ‘성원록(姓源錄)’에는 홍천 피씨가 두 집안 실려 있는데, 중시조인 피수장(皮壽長)과 피하조(皮河照)가 모두 무인 출신이다. 두 집안의 후손들은 역관, 계사, 율관들과도 혼인했는데,‘성원록’을 편찬한 이창현은 이 집안을 의원 집안으로 분류했다. 종기를 잘 고쳤던 피재길(皮載吉)의 후손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 그의 직계에게는 의원의 맥이 끊어진 듯하다. ●어머니에게 처방 배워 고약을 만들어 팔다 의원 피홍즙(皮弘楫)은 주로 종기를 고쳤는데, 백광현과 달리 침으로 째기보다 약을 잘 써서 고쳤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에 재길은 아직 나이가 어려, 아버지의 의술을 이어받지 못했다. 어머니 박씨가 남편 옆에서 보고 들었던 여러 처방을 그에게 가르쳤다. 재길은 의서를 배우지 않았으므로, 약재를 모아 고약을 달이는 법만 배웠다. 종기를 고치는 온갖 고약을 팔러 여염을 돌아다니면서도 의원들과 맞서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염의 민간인뿐만 아니라 사대부들도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다 고약을 사 썼는데, 효험이 매우 뛰어났다. 1793년 여름에 정조 임금의 머리에 헌데가 났다. 여러 가지 침과 약을 써보았지만 오랫동안 낫지 않았다. 헌데가 얼굴과 턱으로 퍼졌다. 게다가 날씨까지 무더워, 정조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의원의 여러 어의(御醫)들도 어쩔 줄 모르고, 대신들도 날마다 모여 의논했지만 대책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정조를 옆에서 모시던 사관 가운데 피재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어, 그를 불러들여 치료법을 물으시라고 추천했다. ●웅담 고약을 처방해 정조의 헌데를 사흘 만에 고치다 피재길은 미천한 신분이었으므로, 임금 앞에서 떨며 땀만 흘리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좌우에 있던 여러 의원과 신하들이 모두 속으로 비웃었다. 정조가 가까이 다가와 진찰하게 하였다.“두려워 말고 네 솜씨를 다하라.” 그러자 재길이 말했다.“신에게 한 가지 처방이 있는데, 이 증상에 써볼 만합니다.” 물러가 약을 지어 바치라고 명하자, 웅담을 여러 가지 약재와 함께 고아서 고약을 만들어 붙였다. 정조가 “며칠이면 낫겠느냐?”고 묻자,“하루면 통증이 멎고, 사흘이면 다 나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사흘 뒤에 정말 다 나았다. 정조가 약원(藥院)에 유지를 내렸다. “전해 오는 약에서 조금 벗어나긴 했지만, 그동안의 괴로움을 다 잊게 해주었다. 요즘 세상에 뜻밖에도 숨은 솜씨와 비장된 의서가 있으니, 의원도 명의(名醫)라 말할 만하고, 약도 신약(神藥)이라 말할 만하다. 그의 수고를 갚을 방법을 의논하라.” 약원의 신하들이 “우선 내침의(內鍼醫)를 맡게 하고 6품을 내린 뒤에 벼슬을 주십시오.”라고 청하였다. 정조가 허락하고 즉시 나주 감목관(監牧官)을 제수하였다. 감목관은 지방의 목장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종6품 관원인데, 대개는 부사나 첨사 같은 지방 수령들이 겸직하였다. 중인이나 서얼이 수령에 천거되려면 먼저 감목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감목관 벼슬을 준 것은 나중에 수령으로 임명하겠다는 뜻이기도 해서,‘성원록’에도 피재길을 의원으로 소개하지 않고 목관(牧官)이라고 소개했다. 의원이 겸할 수 있는 명예직인 셈이다.‘정조실록’ 17년(1793) 7월16일 기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임금의 병환이 평상시대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지방 의원인 피재길이 단방(單方)의 고약을 올렸는데, 즉시 신기한 효력을 냈기 때문이다. 피재길을 약원의 침의(鍼醫)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피재길이 종6품 나주 감목관으로 임명되자, 신의 피재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청구야담’에서는 그의 명성을 이렇게 기록했다.“(감목관으로 임명되자) 약원의 여러 의원들이 모두 놀라 감복했으며, 두 손을 맞잡고 그에게 맞서기를 사양하였다. 이로부터 피재길의 이름이 온 나라 안에 퍼졌으며, 웅담고약이 천금의 처방이 되어 세상에 전해졌다.” ●임금의 목숨을 구해내지 못해 유배되다 천금의 처방을 터득했지만, 그가 갑자기 부자가 된 것은 아니다. 민간의 고약장수가 내의원 침의로 승격했지만, 임금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언제나 목숨을 담보해야 할 정도로 위태하고도 귀중한 일이었다.1800년 여름에 정조가 병에 걸려, 여러 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올려도 쾌유되지 않았다.‘정조실록’ 6월22일 기사에 약원의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는 기록이 실렸다. 도제조 이시수가 안부를 묻자 “잡아당기는 통증이 조금 나은 듯하다.”고 답했다. 화성유수 서유린이 “수라를 이미 드셨습니까?”라고 묻자 “수라를 어찌 챙겨 먹을 수 있겠는가. 겨우 쌀미음을 조금 마셨을 뿐이다.”라고 답했다. 이병정이 “봉해 올린 장고( 膏)는 드셨습니까?”라고 묻자 “지금 같은 입맛으로 어찌 먹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조는 신하들의 안부인사를 다 들은 뒤에 “피재길에게 지방의원 김한주·백동규와 함께 들어와 진찰해 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온갖 음식이 입에 맞지 않고, 마땅한 약도 없었으므로, 믿을 데라곤 웅담고약의 신의 피재길 한 사람뿐이었다. 내의원 의원들이 며칠이 되어도 고치지 못하자, 온 나라에서 이름난 의원들을 모두 불러들여 지방 의원들이 함께 진찰하였다. 피재길이 진찰하고 나자 정조가 “찹쌀밥을 붙인 뒤에 고름이 많이 나왔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나 곪았는가?” 물었다. 김한주는 푹 곪았다 아뢰었고, 백동규는 고름이 많이 나왔지만 아직도 푹 곪지는 않았다고 아뢰었다. 의원들 사이에도 진단이 다르게 나오자, 정조가 “마루 밖으로 나가 앞으로 쓸 처방을 자세히 의논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튿날이 되어도 정조의 종기는 아물지 않고, 오히려 더 커졌다. 등골뼈 아래쪽부터 목뒤까지 여기저기 부어올랐는데, 연적만큼 크게 부어오른 곳까지 있었다. 정조는 도제조 이시수에게 “병이 든 지 오래 되어 원기가 차츰 약해지고 있으니, 지방의 잡다한 의원들은 더 이상 들여보내지 말라.”고 명했다. 피재길을 믿은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또 지나도 차도가 없자, 이제는 피재길도 믿을 수 없었다.24일에는 정조가 “어제 정오부터 나오는 고름이 조금 적어졌다. 이제는 피재길 한 사람에게만 진찰하게 할 수 없으니, 여러 의관 가운데 누가 좀 더 나은가?” 물었다. 그러나 피재길의 치료도 끝내 효험이 없어, 정조는 나흘 뒤인 6월28일에 세상을 떠났다. 순조가 즉위한 뒤에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가 정조를 살려내지 못한 의원들의 죄를 따지는 것이었다.7월4일 사헌부에서 “내의(內醫) 강명길과 피재길, 방외의(方外醫) 심인을 국문해서 실정을 알아냈으니, 속히 형벌을 시행하도록 하소서. 그 나머지 약(藥)에 대해 의논한 의원들도 아울러 엄히 조사하여 해당되는 형벌을 속히 시행하소서.”하고 아뢰었다. 곧바로 피재길을 유배보내라고 명이 떨어졌으며, 언관들은 의원들을 역의(逆醫)라고 명명하였다. 임금을 제대로 치료못한 책임 정도가 아니라, 시해한 혐의까지 덮어쓴 셈이다. 열흘이 넘게 고문당하던 끝에 의원 강명길은 매맞아 죽었으며, 피재길은 7월14일에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되었다. 순조 3년(1803) 2월6일에야 대왕대비의 명으로 대사령이 내려 무산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침술과 고약 하나로 고약장수에서 종6품까지 올랐던 피재길은 결국 침술과 고약 때문에 천리 유배길에 올랐다. 전문지식인 중인의 책임이자 비애라고도 할 수 있다. ●21세기까지 애용되는 고약의 효험 20세기의 고약으로는 이명래고약, 됴고약 등이 유명한데, 이명래 고약은 전통적인 고약과 좀 다르다. 파리외방전교회의 드비즈 성신부가 1895년에 아산 공세리에 부임해 공세창을 헐고 성당을 지었다. 중국을 통해 입국했던 드비즈 신부는 라틴어로 된 약용식물학 책의 지식과 한의학 지식을 응용해 고약 만드는 비법을 창안해내고, 공세리성당 신도였던 요한 이명래에게 전수했다. 이 고약이 처음에는 드비즈 신부의 한국 이름을 따서 성일론(成一論) 고약이라고 불리다가, 이명래의 민간요법까지 더해지며 1906년 아산에서 이명래고약집이 개업했다고 한다. 성한 살은 다치지 않고 굳어진 고름만 골라 뿌리를 뽑는 발근고(拔根膏)가 이명래고약의 핵심인데, 소나무뿌리를 태워 만드는 기름에다 약재를 녹여 만들었다. 발근고가 종기를 터뜨리면 고약이 고름을 빨아낸다. 우리나라 신약 제1호라고 할 수 있는 이명래고약의 비법은 100년 넘게 사위에서 사위로 전수되고 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한중일 청소년 우호 만남’ 베이징 현지 동행 취재기

    ‘한중일 청소년 우호 만남’ 베이징 현지 동행 취재기

    “찌아요!(짝짝 짝)” 지난 20일, 중국 톈진(天津)시 타이다(TEDA) 축구장에 ‘이색 구호’가 울려 퍼졌다. 한·중·일 청소년들이 자신들을 대표하는 연합팀과 톈진시 청년대표팀과의 축구 친선경기에서 연합팀을 응원하기 위해 즉석에서 만들어 낸 구호다. 한국의 대표 응원구호인 ‘(짝짝 짝 짝짝)대∼한민국’, 일본의 ‘니폰(짝짝짝)’, 그리고 중국의 ‘찌아요’를 합쳤다. 구호의 힘이였을까. 이날 처음으로 발을 맞춰본 연합팀은 상대팀에 3대0으로 지다가 후반들어 3골을 넣으며 3대4라는 놀라운 결과를 얻어냈다. 16∼22일 중국 베이징(北京)과 톈진에서 ‘한·중·일 청소년 우호 만남’이 열렸다. 이번 행사는 지난 1월 중국 원자바오 총리의 제안으로 중국이 한·일 청소년을 초청해 마련한 것. 국가청소년위원회와 한국의 청소년 100명을 따라 이웃나라 청소년들과 자연스레 한 목소리를 낸 현장을 동행 취재했다. ●여기선 우리가 한국 홍보대사 “너무 아름다운 모습에 반했습니다. 다음에 꼭 다시 만나요.” 한 중국 남학생이 한국인 참가자에게 100위안짜리 지폐를 반으로 가른 ‘사랑의 쪽지’를 쥐어줬다.16일 저녁, 아세안 10개국 청소년들과 한·중·일 3국 청소년들이 만나는 ‘아세안+3 청년교류회’ 환영파티장에 한복을 입고 나온 모습에 반했단다. 원래 정장 차림으로 오게 돼 있었던 행사장에 한국 청소년 중 일부가 우리 문화를 알리려 스스로 한복을 입고 나온 것. 브루나이에서 온 세잇 메이 치엔은 “전통의상 중 제일 예쁜 것 같은데 옷고름을 매기가 어렵지 않으냐.”며 관심을 표현했다. ●문화의 중요성 몸으로 깨달아 셋째날(19일) 저녁, 베이징 라오서(老舍) 찻집에서 친목 공연이 열렸다. 한달여에 걸쳐 한국 청소년들이 준비한 퓨전 국악 공연과 사물놀이가 시작됐고, 일본의 뱃놀이춤, 중국의 전통예술 ‘캘리그래피’가 이어졌다. 본격적인 교류는 장외에서 펼쳐졌다.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사물놀이팀이 길거리에서 북과 꽹과리를 쳤고,3국 청소년들이 너나할 것 없이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강혁진(25·대학생)씨는 “대화로 쌓은 친밀감보다 부대끼면서 느끼는 공감대가 훨씬 크다.”면서 “국제 교류가 늘수록 문화의 중요성이 커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해의 폭 넓힌 만큼 갈등도 줄어 들길” 마지막 만찬이 열린 뤼써 스 따이 썽 타이 호텔에서는 아쉬움과 친밀감이 교차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번 교류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진지한 대화가 오갔다. 중국청년연합에서 나온 짜오링(29·여)은 “지역적으로 가까운 만큼 갈등을 겪을 일도 많은데 청소년들이 사람대 사람으로 우애를 쌓아야 오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면서 “중국에 이어 한·일도 이 행사를 이어가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한국측 단장으로 참가한 최규종(55) 국가청소년위원회 미래전략팀장은 “교류 활동이 우호를 쌓는 데서 나아가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한국 청소년 대표 안영일(24·대학생)씨는 “베이징 수도 박물관에서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면서 “다양한 교류활동을 통해 청소년들이 외교 문제를 가슴 터놓고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베이징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해외교류 참여 비결은 ‘꿈꿀 수 있다면 이룰 수 있다.’ 오는 9월 하버드대에 입학할 예정인 김은지(18)양은 이번 우호만남에 참여를 신청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김 양은 “해외 나가는 게 집에 돈이 많은 아이들의 특권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면서 “최근 2년 사이 해외 교류가 부쩍 늘어 마음만 먹으면 기회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번 우호만남 참가자들은 해외 교류를 원한다면 적극적으로 정보를 찾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의 참여 비결을 소개한다. ●주요 사이트 정기 방문 필수 해외 교류 정보가 집중적으로 모이는 사이트에 정기적으로 들러볼 필요가 있다. 각 단체 홈페이지 등에 산발적으로 뜨는 교류 공고가 이곳으로 모인다. 대표적인 곳은 다음 카페 ‘미래를 여는 지혜(cafe.daum.net/gointern)’‘인턴뉴스(internnews.com)’‘대티즌 닷컴(detizen.com)’싸이월드 클럽인 ‘씽유(club.cyworld.com/thinkuniv)’. 서울 중구 명동에 있는 서울청소년문화교류센터 ‘미지’와 오프라인 신문 ‘대학내일’에도 관련 정보가 모인다는 게 참가자들의 설명이다. ●참가신청서 공들여야 해외 교류의 인기가 높아진 만큼 높은 경쟁률을 뚫는 것도 관건. 국가청소년위원회 사무관은 “심사할 때 한국을 알릴 만한 장기가 있거나 외국어를 잘 하는지 등을 고려한다.”면서 “무엇보다도 얼마나 교류를 하고 싶어하는지 동기나 의지가 중요하게 평가되므로 지원서를 공들여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7대1 경쟁률 뚫은 참가자 면면 보니… 흔히 ‘청소년’이라고 하면 중·고등학생을 떠올리지만, 이번 ‘한·중·일 청소년 우호만남’에는 그야말로 다양한 직업과 연령대의 청소년들이 참여했다. 지원 대상을 만 16∼26세로 한정했지만 95명 모집에 지원자만 무려 700명.7대1의 경쟁률을 뚫고 행운을 거머쥔 사람들의 참여 소감을 들어봤다. ●공무원부터 고등학생까지 “비로소 세계적 한국인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전주시에서 관광안내를 맡고 있어 매일 외국인을 만난다는 강지선(25·여)씨는 “일주일 동안 외국인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가 훨씬 커진 느낌이다.”면서 “앞으로 외국인들을 안내할 때 한 마디라도 이해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대다수인 청소년 교류 행사에 공무원인 강씨가 도전한 것은 ‘진정한 세계인’으로 다가서기 위해서였다. 강씨는 “오기 전에 약간 부담을 느꼈지만 동생들과 한데 어울려서 지내다 보니 오히려 즐거웠다.”면서 “세계적인 한국인이 되려면 최대한 많은 기회에 도전해 보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조언했다. 본격적인 취업 전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대학생 김태경(25)씨에게도 이번 우호만남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에게 국제 교류 활동은 진로를 바꿔놓을 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대학교 1학년때 국제 교류 캠프에 참여한 뒤 공대에 다니다가 아예 과를 국제관계학으로 바꿨다.”면서 “외국인들과 어울리며 내가 세계 속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한 끝에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고 말했다. 앞으로 아시아를 주름잡는 방송인이 되는 게 목표라는 그는 “국제 교류 활동을 일시적 경험으로 쌓을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어가면 진로를 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일시적 경험으로 그치지 말아야 대다수의 지원자들은 대학 입학을 앞둔 고등학생들. 대원외고 중문과 2학년에 재학 중인 이해솔(18)군은 전문 분야를 강화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군은 “외국어고 중문과에 다니지만 중국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일년에 3번 정도밖에 안된다.”면서 “교류를 통해 중국 친구들을 사귈 수 있고 연락을 이어가다 보면 학교 밖에서 중국에 대해 배우는 게 훨씬 많아진다.”면서 뿌듯해했다. 중국어 통역요원 역할로 이번 행사에 참가한 장선미(18·사직여고 2)양은 이번 활동이 대학 진학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장 양은 “국제 관계 활동은 대학 특별 전형에서 중요한 요소”라면서 “특히 정보가 부족한 지방의 학생들은 이런 행사 참여 기회를 적극 도전해 볼만 한 것 같다.”고 소개했다.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처참한 태국 수용소 탈북자에 의약품을”

    “태국 이민국 수용소에 갇힌 탈북자들은 지난 4월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단식 농성 후 더욱 열악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320여명이 80∼100평 남짓한 방에 갇혀 30∼40도의 찜통 더위와 비위생적인 처우를 견뎌내고 있습니다. 싼값에 옷도 사고, 탈북자도 도우세요.” 8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 홍익대 인근 상점에서는 탈북자동지회 등이 후원하고 국제의료지원기구(AIMS)가 주관한 ‘태국 탈북난민 돕기 바자회’가 열렸다. 7∼8일 이틀간 열린 바자회에는 회원들이 손수 내놓은 물품 1000여점과 한 인터넷 쇼핑몰에서 내놓은 500만원 상당의 재고품이 손님들을 맞았다. 다양한 종류에 10만원을 넘는 고가품이 1만원 안팎의 저렴한 가격으로 팔리면서 많은 고객들로 바자회는 이틀 내내 북적댔다. 바자회는 태국 이민국 수용소에 있었던 탈북자 김모(33)씨가 처참한 이민국 수용소안 생활을 폭로한 한통의 편지가 계기가 됐다. 김씨는 “수용소는 너무 비좁아 사람을 타고 넘어 용변을 보고, 변기를 목에 대고 자는 사람들도 있으며,1명뿐인 의사는 의사소통도 안 되고 주사나 처방 없이 단지 약만 던져주는 수준”이라면서 “방광 줄이 끊어져 호스를 낀 부위가 아프고 피고름이 계속 섞여 나오면서 호스 구멍을 자주 메워 소변보기도 어려웠지만 치료는 전혀 받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 김씨는 탈북과정에서 북송되어 고문을 당해 방광이 터지며 몸을 심하게 다쳤고, 사형집행 직전 극적으로 살아나 1만㎞ 탈북 대장정에 성공했으나 그를 맞은 것은 치료조차 불가능한 이민국 수용소였다고 전했다. 태국 수용소 탈북자들을 돕기 위한 모금운동을 위해 지난 3일 발족한 AIMS 등에 따르면 지난 4월24일 탈북자들이 조속한 한국행과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인 뒤 ‘탈북자 잡아가기’는 더욱 심해졌다. 태국 정부에 붙잡힌 탈북자들은 1인당 약 1만 바트(약 30만원)의 벌금을 내거나 그 벌금 액수에 해당하는 날짜만큼 수용소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AIMS 서세진(29) 대표는 “4월 이후 정부지원이 끊기고 유엔과 한국대사관의 수용소 방문 루트도 닫혔다.”면서 “바자회를 통한 수익금 전액으로 생필품과 의약품을 구입해 29일 수용소 탈북자들에게 전달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모금계좌는 610-20-047082(제일은행). 이경주기자 kdlrudwn@seoul.co.kr
  • [이두한 원장의 건강이야기] 맹장염,터지기 전에

    얼마 전 친구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아들놈의 배가 아파 난리라는 것이었다. 전날 저녁부터 배탈이 난 듯 더부룩해 소화제를 먹였는데 밤 사이 오른쪽 아랫배가 점점 더 아파지더니 아침에는 허리도 펴지 못하고, 토하며, 열도 난다고 했다. 아이는 병원에 들어오면서도 통증 때문에 허리를 펴지 못했으며, 잘 걷지도 못했다. 흔히 우리가 맹장염이라고 부르는 병이 있다. 대장이 시작되는 부위에 충수돌기라는 마치 벌레처럼 생긴 꼬리가 달려있는데, 여기에 염증이 생기는 병이 흔히 맹장염이라고 하는 ‘충수돌기염’이다. 충수돌기염은 대개 충수돌기가 막히면서 시작된다. 충수돌기가 막히면 마치 체한 듯 명치 부위가 더부룩하고 갑갑한 느낌을 받다가 충수돌기에서 염증이 시작되면 통증이 오른쪽 아랫배로 옮겨간다. 통증은 배를 건드리면 더 심해지고, 허리를 펴면 당기듯 아프다. 그뿐이 아니다. 열도 나고, 식욕이 떨어지며, 구토증이 오기도 한다. 이 병은 흔하고 간단한 질환으로 알려져 있어 더러는 환자로부터 “맹장염 하나 확실히 진단하지 못하느냐.”는 핀잔을 들을 때가 있다. 하지만 충수돌기염은 충수돌기의 위치나 염증 정도에 따라 증상이 너무 다양해 종종 외과의사들을 곤혹스럽게 하거나 골탕을 먹이기도 한다. 오죽하면 외과학 교과서에도 ‘급성 충수돌기염 수술 후 진단 정확도가 80% 이상이면 훌륭한 외과의사가 아니다.’고까지 하겠는가. 다시 말해 진단 정확도가 80% 이상이라는 것은 확실한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 수술 시기를 늦췄기 때문이며, 그만큼 충수돌기의 천공 가능성도 높았다는 일종의 질책이기도 하다. 치료를 위해서는 염증이 생긴 충수돌기를 절제하고 주위의 염증을 제거하면 된다. 터지기 전이라면 합병증없이 쉽게 회복되고, 후유증도 없으나 일단 터져서 고름이 복강으로 퍼지면 수술이 어렵고, 복강 내 농양 발생 가능성도 높아지며, 덩달아 회복도 더디다. 따라서 충수돌기염이 의심되면 빨리 확인 절차를 거치는 게 현명하다. 기왕 해야 할 수술이라면 ‘80%의 진단 정확도’에 얽매이지 말고 터지기 전에 손을 보는 게 낫다.
  • [이두한 원장의 건강이야기] 항문이 곪는다면

    항문이 아파서 의자에 앉지도, 그렇다고 서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한 환자를 자주 보게 된다. 최근 필자를 찾은 39세의 건장한 남성이 그런 경우였다. 그는 항문이 아파 어쩔 줄 몰라했다.1주일쯤 전부터 항문이 뻐근하고, 변이 꽉찬 느낌이 들었단다. 동네 의원에서 변비라고 진단해 관장을 하고, 변비약도 써봤으나 증상은 더 심해졌다. 그러더니 3일 전부터는 오한에 열까지 나기 시작했다고 했다. 진찰 결과 항문 주위의 겉모습은 아무 이상이 없었으나 직장 안을 촉진해보니 뒤쪽 깊은 곳에서 통증의 원인인 커다란 농양이 만져졌다. 초음파상에 나타난 농양은 이미 직장의 절반을 감싸고도 모자라 골반 부위까지 파고 들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패혈증까지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항문 주위에는 항문주위샘이라는 작은 관이 괄약근을 관통하여 여러 방향으로 뚫려 있다. 지금은 별 기능이 없는 퇴화된 기관으로 대개의 경우 평생 탈이 없지만, 가끔 이 관에 균이 들어가 곪으면 농양으로 발전하곤 한다. 다행히 농양이 피부 방향으로 생기면 통증은 심하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어 조기 치료가 가능하나 이 환자의 경우처럼 깊은 곳에 생기면 통증이 적어 진단이 늦어지고, 따라서 치료도 더 어려워진다. 치료를 위해서는 농양 부위를 절개하고 고름을 빼내는 것이 우선이다. 그냥 놔두면 고름이 안쪽으로 파고들어가 깊은 치루를 형성, 나중에 치료하기도 어렵고, 심하면 패혈증에 빠져 위험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특히 당뇨가 있거나 연세가 많은 분들은 패혈증을 조심해야 한다. 배농을 하면 절반 정도는 완치가, 나머지 절반은 치루로 발전하는데, 배농 후 한달 반 정도가 지나면 치루 발생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예전에는 배농을 위해 절개할 때 원인인 항문선을 같이 제거하기도 했으나 괄약근 손상이 염려될 뿐 아니라 염증 상태에서는 가느다란 항문주위샘을 찾기도 쉽지 않아, 요새는 일단 배농 처치후 치루가 생긴 경우에 한해 치루수술을 겸해 항문주위샘을 제거하는 방식을 주로 적용하고 있다.(대항병원장)
  • 70년대 아름다운 여성형(女性型)이란?

    길고 무더운 여름의 축제는 바닷가에서 펼쳐진다. 즐거운 나족(裸族)들이 붐비는 모래사장, 인파(人波)를 헤치고 해변을 누비는 풍만한 여체, 좀 더 예뻐지자! 좀 더 매력을 지니자! 좀 더 세련되자! 이렇게 여체(女體)의 마력이 폭발하는 정열의 파도, 작열하는 태양아래 펼쳐지는 이 여름의 축제속에 여심은 마냥 부풀고 꿈과 낭만은 어지럽다. 어떻게 하면 뭇 남성들의 시선을 끌어 세계의 사랑을 독차지할 것인가? 그래서 여성은 그 아름다움을 위하여 무엇이건 아끼지 않는다. 아름다워지려는 것, 이것이 여성이 가지는 고민. 여름철의 노출과 피부의 건강관리! 그러나 아름다움이란 개념도 시대에 따라 변화되고 있다. 50년대의 아름다운 여성상과 60년대의 아름다운 여성상, 70년대의 아름다운 여성상은 자못 다르게 나타난다. 이제 70년대는 노출의 시대, 컴컴한 안방의 그늘에서 감추어졌던「섹스」는 백주의 밝은 대낮으로 점점 세력을 노출했고 이젠 생활의 국면에 서서 가장 인간적인 행위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에 따라 여성을 보는 아름다움의 관점도 자못 달라졌다. 이제 여성의 아름다움은 옷속에 은밀히 감춰지는 육체이기보다 쇼킹하게 노출된 대담한 육체에 있다. 육체 전체에서 풍겨주는 신비한 조화가 여성의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기 위해서 옷을 벗는다. 그리고 자기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보여준다. 즉 벗는 미학(美學)의 시대에 이르른 것이다. 여자가 옷을 벗을 때, 우선 느끼는 것은 그 여자의 싱싱하고 충만한 살결과 건강한 피부다. 우리는 그것들의 신비한 조화를 아름다움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 아름다운 피부를 가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여름철이면 여성들의 가장 골치 아픈 고민의 하나가 될 것이다. 이것을 해결하는것만이 아름다움으로 가는 비결이다. 그러나 피부란 여간 예민한 것이 아니어서 마치 변덕스러운 장마날씨와 같다고 할까. 조금만 외부의 자극을 받아도, 또 조금만 신체내부의 고장으로도 피부는 즉시 달라져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평소에 주의해야할 피부병 피부는 우리몸을 외부의 자극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표면이 넓고 외부와 접촉하고 있으므로 상처나 끊임없는 자극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항상 대하게 되는 태양볕, 바람, 먼지, 물, 세척제 등은 피부를 건조하고 거칠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특히 여성에게 있어서 이렇게 피부가 건조하거나 거칠게 되는 것은 한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더구나 평소에 건강한 피부를 가진 사람이라도 여름철의 강한 햇볕을 쏘이면 일광성(日光性) 피부염을 일으키게 된다. 더욱이 여름철은 땀을 많이 흘리게 되고 피지선(皮脂線)의 기능이 왕성해지며 외출과 여행이 빈번해지는 데다가 피부를 노출하게 되어 불결한 상태에 놓여지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화농성(化膿性) 피부에는 농피증(膿皮症)이 생기게 되며 어린이의 경우는 농가진이 자주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갑자기 피부에 원인모르게 물집이 생기는 것을 말하며 밑에서 고름이 생기고 반원상으로 위에 액체가 고이게 된다. 이것을 긁어서 터뜨리게 되면 피부에 원형의 갑피(甲皮)가 앉게되며 진물이 다른 곳에 전염된다. 그러므로 이런 물집이 생겼을 때는 우선 다른 곳에 닿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며 탈지면을 물에 적셔서 진물을 빨아낸다음 연고제를 바르도록 해야 한다. 일광성 피부염을 예방하려면 평소 햇볕을 점차적으로 쏘여서 피부를 강하게 하는 한편 알카리성 식품과 과즙류를 많이 먹고 짠음식을 적게 먹어 피부의 감수성을 약화시키도록 해야 한다. 건강한 피부미용 조건은 비타민 섭취가 충분해야 ●건강한 피부의 조건 건강하고 아름다운 피부를 갖기위해서는 우선 피부의 조건을 알아야 한다. 피부가 윤택해지고 부드러운 탄력성은 건강한 피부의 조건이라 하겠다.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육안(肉眼)으로 보이지 않는 피부 각질편(角質片)이 각질층(角質層) 표면으로부터 계속해서 떨어져 나가는 각화작용(角化作用)이 순조롭게 진행되어야 한다. 이 각질층의 주성분은 함유단백질(含硫蛋白質)인 캐라틴이므로 신체에 단백질이 부족하지 않도록 보충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 때문에 함유아미노산인 시스틴을 필요로 하게 된다. 또한 피부의 구성에는 비타민 A·D·E도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소에 우리는 피부에 비타민을 충분히 공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피부는 인체내의 여러가지 장기(臟器)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위장이나 간장의 결함은 곧 피부에 나타나기 때문에 피부의 건강과 피부미용은 평소의 건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피부를 아름답고 건강하게 하려면 피부를 아름답고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평소에 영양을 충분히 섭취함은 물론 비타민C 등을 복용하는 것이 좋다. 또한 피부는 식품과도 관련되어 있다. 식품을 크게 나누면 산성식품과 알카리성 식품으로 구분하는데 산성식품은 단백질중의 유황이나 인산을 함유하는 식품이고 알카리성식품은 카리움 칼슘을 함유하는 야채나 과일 등이다. 섭취하는 음식물의 산성식품과 알카리성 식품의 양적균형이 취해지지 않으면 혈액은 산성으로 기울어져 활동이 쇠퇴되고 피로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산성 중독상태를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산성식품의 약4배가량의 알카리성 식품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인체내에 비타민이 부족하면 피부에 여러가지 피부질환이 일어나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아름다운 피부를 간직하려면 항상 피부를 깨끗이 하고 마사지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겠으며 피부에 적당한 영양을 주어 피부의 노화를 막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노출시대의 아름다움은 피부가 고와야 ●피부와 비타민 그런데 이토록 피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영양소중에서 비타민은 피부와 떼어 놓고 설명할 수 없다고할만큼 피부에 있어서는 비타민이 절대적이라 하겠다. 비타민은 물론 먹어서도 효력을 나타내지만 직접 피부에 바르면 잘 침투되어 피부의 건강과 미용에 좋은 효과를 나타낸다. 특히 비타민 A, D, E는 옛날부터 피부비타민으로 알려졌으며 까칠까칠한 피부에 윤기를 내는데 꼭 필요한 비타민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피부의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하여 혈액순환을 돕고, 상처에도 새살이 빨리 돋게 하는데 좋은 효과를 나타낸다. 또한 자극성이 없는 살균제 G-11은 피부에 감염되기 쉬운 세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고 피부의 화농을 방지하는데 우수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각 비타민이 피부에 작용하는 상태를 보면 우선 비타민A는 표피세포의 기능과 관계가 깊으며 표피의 캐라틴형성을 억제하고 피지선과 피부감염력을 저하시키는 작용이 있다. 따라서 비타민A는 표피이상, 각화이상, 여드름, 동상 등의, 외용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비타민 C는 세포의 산화·환원에 관계가 깊어 각종 대사에 관계하여 피부색을 퇴색시키므로 기미·죽은깨 등에 응용되고 비타민D2는 자외선에 의해 피부에서 생성되며 비타민E는 국소작용으로 혈관을 확장하고 혈액의 순환을 양호하게 한다. 피부 노화를 방지하려면 항상 영양크림을 바르고 ●피부의 노화 방지책 피부의 노쇠현상은 24~25세부터 시작되어 30대에 다다르면 20대와 현저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피부의 노쇠현상을 알려주는 징조는 주름살이 나타나고 살결이 거칠어지며 피부의 근육이 탄력을 잃고 피하지방(皮下肢肪)과 수분이 감소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탄력섬유가 퇴화하고 혈액순환이 활발하지 못한 까닭에 충혈량이 부족해져서 얼굴의 윤곽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피부의 노화현상을 방지하려면 피부에 항상 고른 영향을 주고 마사지를 해줌으로써 피부에 자극을 주는 것이 좋다. 또한 피부의 젊음을 연장시키기 위해서는 영양크림을 항상 바르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영양크림에도 그 종류가 여러가지가 있지만 피부에 밀접한 관계를 가진 영양소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비타민인만큼 비타민이 효과적으로 배합되어 있는 크림이라면 더욱 좋겠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영양크림으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영양크림으로는 Y양행의 제품이라 하겠다. Y양행하면 믿을 수 있는 메이커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을 가진 회사로서 제약업계의 굴지의 위치를 자랑하지만 역시 이번에 새롭게 제조된 크림은 비타민 A·D·E 와 무자극성 살균제 G-11이 효과적으로 배합된 국내 최초의 새로운 스타일의 영양크림이라하겠다. 특히 여성들의 <바캉스>에 있어서 피부관리에는 햇볕과 땀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키·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한여름동안 햇볕과 땀에 시달리다가 가을이 되면 피부는 갑작스레 늙어지고 잔주름이 많이 생긴다. 그러므로 항상 피부에 영양을 충분히 보충해 주는 것이 햇볕과 땀을 이기는 피부미용의 기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화장품의 선택인데 Y양행의 영양크림(상품명 오로라크림)은 한국여성의 피부에 알맞게 제조 되었기 때문에 피부에 잘 침투되고 충분한 영양을 공급해 준다. 이 크림의 특징은 국내 최초의 비타민 A·D·E와 무자극성 살균제 G-11이 배합되어 있는 것으로 햇볕이나 자외선에 탄 피부를 부드럽고 깨끗하게 해주고 혈행(血行)이 나빠서 생긴 피부의 얼룩이를 없애준다. 이 크림을 사용할 때는 일반크림과 같이 사용하지만 해수욕후나 자기전에 사용함이 효과적이다. 또한 햇볕에 타서 따겁고 쓰릴 때 마사지하듯 바르는게 좋다. 바를 때는 네손가락을 펴서 두드리듯 고루 마사지해주면 피부에 잘 침투된다. [선데이서울 70년 8월 16일호 제3권 33호 통권 제 98호]
  • 비녀 꽂고 노리개 달고 한복 웨딩마치

    비녀 꽂고 노리개 달고 한복 웨딩마치

    버선 발에 굽 높은 고무신 모양의 구두를 신고 사뿐사뿐 걸음을 뗀다. 비스듬하게 쪽진 머리, 그 위에 꽂힌 비녀 혹은 족두리. 순백색의 웨딩드레스에는 백제 금관 문양이 은박된 옷고름이 나풀거린다. 가슴팍에 걸린 노리개가 유난히 반짝거린다. 지난달 29일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열린 퓨전 웨딩드레스 브랜드 ‘씨실(CISIL)’의 론칭 패션쇼에서 만난 신부들의 모습은 이렇듯 예사롭지 않았다. ‘씨실’은 한복 제작업체 ‘씨실과 날실’에서 “한국식 웨딩드레스의 새로운 정의를 내리겠다.”는 야심을 갖고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인 퓨전 웨딩드레스 브랜드. 발빠른(?) 여자 연예인들의 영향으로 요즘 결혼을 앞둔 신부라면 저 유명한 베라 왕 등 외국 디자이너들의 드레스에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신부가 없을 듯. 이런 판에 한복을 응용해 웨딩드레스로 만든다는 건 모험이 아닐까. 그러나 ‘씨실’에서 내놓은 작품들을 보니 그 가능성을 기대해 봄 직하다. 해외 수출까지 바라보고 있다는 이 업체는 드레스 패턴과 소재는 서구식을 그대로 따랐다.A라인, 머메이드라인,H라인 등의 디자인으로 유행에 뒤지지 않으면서 전통 복식의 화려한 기법들을 드레스에 접목시켜 단아하고 청초한 멋을 지닌 새로운 드레스들을 창조해 냈다. 4개의 주제로 꾸며진 이날 패션쇼에서 선보인 드레스는 20여벌. 한복의 전통미가 가미된 순백색의 드레스들은 은은하면서도 한층 격조 있는 멋을 풍기는 것이 특징이다. 전통 혼례복인 대례복의 패슬과 하피를 비롯해 조선시대 궁중의복인 당의, 고름, 깃 등을 조화롭게 잘 살려 냈으며 자수, 매듭, 금·은박 기법 등을 활용해 고급스러움까지 갖췄다. 수복, 단청, 국화, 연화, 목단 등 전통문양들은 화이트, 아이보리 배색의 드레스에 튀지 않고 부드럽게 녹아 들었다. 작게 축소된 앙증맞은 당의가 드레스 전체에 종처럼 붙은 스타일은 깜찍하고 발랄하게 보이고 싶은 신부라면 욕심낼 만하다. 어깨를 훤히 드러내고 드레스 자락을 허리춤까지 말아올린 어우동 스타일은 당당하고 도도한 매력을 뽐내기에 좋아 보인다. 자수로 새겨진 꽃문양 옷고름이 목선을 타고 몸 전체로 지그재그로 흐르는 드레스는 단아하고 청초한 멋을 내기에 그만이다. 활옷의 사각 소매를 응용해 소매 부분을 풍성하게 연출한 드레스는 화려하고 우아한 자태가 고급스럽다. 궁중당의에 서구의 패이즐리 문양을 은 자가드로 표현한 드레스는 은은한 멋이 일품이다. 바야흐로 결혼 시즌. 색다른 멋을 뽐내고 싶은 예비 신부들이라면 한복 웨딩드레스에 한번 도전해 보는 것은 어떨지. 매장은 이달 10일 서울 강남 신사동에 오픈할 예정이다.(02)547-0261.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개청 30주년 맞은 특허청 ‘어제와 오늘’] 이런 발명, 저런 발명

    [개청 30주년 맞은 특허청 ‘어제와 오늘’] 이런 발명, 저런 발명

    “무릎을 꿇지 않고 걸레질을 할 수는 없을까?”,“손에 끼고 밀면 때를 쉽고 편안하게 밀 것 같은데…” 생활 환경의 호기심이 최고의 발명품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이런 호기심’도 발명품이 됐다. 1966년 실용신안으로 등록된 ‘이태리타올’은 손꼽을 만한 공전의 히트작이다. 정작 이탈리아에는 없다. 개발 당시부터 현재까지, 남녀노소 누구나 사용 중인 생활의 필수품이다. 이태리타올은 우연히 때가 잘 밀리는 천을 발견, 쉽게 밀 수 있도록 손에 맞게 재봉질한 것이 전부다. 그동안 얼마나 팔렸는지 통계 파악조차 불가능하다고 한다.1976년 권리가 소멸되면서 누구나 생산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특허청 기록에는 발명자가 김필곤씨로 돼 있다. 당시 수백억원의 돈을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진 그는 부산에서 호텔을 운영하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온돌문화인 한국에서 걸레질은 주부들의 일상적 작업이다. 무릎과 허리의 고통을 수반하지만 달리 대안이 없다. 걸레질의 고통을 겪는 한 주부가 스팀청소기를 만들어 대박을 터트렸다. 온돌문화에 적합한 스팀청소기로 2001년 특허등록 뒤 건강과 웰빙 붐을 타고 해외로 진출했다.‘한국 여성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반면 MP3 플레이어는 산재권 관리 및 활용의 한계를 보여준 아픈 경험이 됐다. 국내 업체가 개발, 종주국의 위치에 섰으나 권리를 미 업체에 넘기면서 국내 생산업체들이 오히려 로열티를 지급하는 상황이 됐다. 특허청 관계자는 “특허분쟁이 야기될 경우 원천기술이 부족한 국내 기업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한편 국내 특허와 실용신안, 의장(디자인)등록1호는 1948년 11월20일에 배출됐다. 특허1호는 ‘유화(硫化)염료 제조법’, 실용신안1호는 ‘아동용 보건차’다. 의장은 ‘반휘장 옷고름의 모양 및 색채의 결합’이 1호다. 상표는 4년이 지난 1952년 8월31일 1호가 등록됐다. 자신의 회사상호 첫 글자(天)에 원을 씌운 상표였다. 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이런 불행이…” 폭염속 장갑 껴야하는 여성

    “저는 한시도 빼놓지 않고 하루 24시간,1년 365일 내내 양말을 신고 장갑을 끼고 있어야 한답니다.” 중국 대륙에 20대 후반의 한 여성이 손·발가락 등 피부에 먼지나 더러운 물질이 조금만 닿아도 살갗이 썩어들어가는 너무나 악랄한 몹쓸 병에 걸려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8일 심천특구보에 따르면 불운의 여성은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 선전시에 살고 있는 펑(彭·29·여)모씨.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그녀는 튼튼하고 아름다운 두 손을 가졌지만,밥을 하거나 빨래를 하는 등 집안 일을 조금도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연을 안고 있다.먼지 등 더럽고 추저분한 물질이 손·발가락 등 피부에 살짝 닿기만 하면 살갗이 곪고 썩어들어가면서 참기 힘들 정도로 아픈 통증이 오기 때문이다. 펑씨에게 이런 청천벽력 같은 불행이 닥친 것은 벌써 17년 전이다.꿈많은 12살이었던 당시 각기병에 걸렸다.집안 셈평이 그리 넉넉하지 못한 터수라 병원에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그렇다고 괴질을 그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 처지고…. 해서 아주 ‘용하다’는 도사를 찾아가 처방전을 받아 치료를 했다.그 도사는 불로 뜨거운 황토흙을 밟아 발을 쬐기만 하면 각기병은 감쪽같이 치료할 수 있다는 처방을 내렸다.이 말이 마치 복음처럼 들린 펑씨는 고대 집으로 돌아와 황토 흙을 불에 데워 밟았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밤이되자 뜨거운 황토흙을 밟아 덴 발가락 10개가 갑자기 가렵고 아팠다.조금 시간이 지나자 발바닥에 허물이 벗겨지며 고름까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더욱이 이튿날에는 발바닥의 피부가 모두 벗겨져버렸다.질병이 낫기는 커녕 오히려 더 큰 병에 걸려버린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뒤 몇개월 동안 고생을 한 뒤 상처가 아물고 나서 그녀는 밭에서 홍당무를 캐는 일을 했다.그런데 손에 흙이 묻자마자 손가락과 손바닥의 피부가 벗겨지며 고름이 흘러나왔다.게다 그 통증이 너무 아파 참을 수 없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이때부터 손·발가락 등 피부에 조그마한 티끌이나 더러운 물건을 만지기만 하면 이같은 현상이 되풀이됐다. “먼지 같은 것이 손가락의 지문에 묻으면 지문이 서서히 균열 현상을 일으킵니다.이때 몹시 가려운 것은 물론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뒤따릅니다.” 이 때문에 여름·겨울,하루 24시간,365일 동안 양말과 장갑을 끼고 있다는 펑씨는 아무리 조심을 하고 있어도 1년에 6∼7차례에 이 괴질이 도지고,한번 걸리면 짧으면 10일,길면 1개월 가량 통증과의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각기병 비타민의 하나인 티아민의 부족으로 생기는 영양실조 증세중 하나.환자는 항상 다리가 부어 있다.부은 다리를 손가락으로 누르면 들어간 살이 나오지 않는다.초기에는 입맛이 없고 소화가 잘 안되고 팔다리에 힘이 없다.늘 피곤하며 감각이 무뎌지다가 심해지면 다발성 신경염을 비롯해 순환기·소화기의 증세와 몸이 부어 오르는 부종 등이 나타난다.다발성 신경염은 다리 근육이 쓰리고 아프기 시작해 무릎의 반사작용이 떨어지고 근육이 마비돼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는 증세이다.심해지면 사망에까지 이르는 무서운 질병이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설빔! 곱기도 해라

    설빔! 곱기도 해라

    어린 시절 입었던 한복은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다. 수십년 한복만 지어 동네에서 바느질 솜씨 좋기로 소문난 할머니를 찾아가 어머니가 맞춰 오셨다. 색깔 고운 명주천으로 만든 삼회장 저고리의 아름다움은 잊혀지질 않는다. 그땐 한복을 입어야 명절이 오는 줄 알았는데…. 요즘처럼 결혼, 돌잔치에나 입는 예복으로 굳어지는 현실이 아쉽다. 예전처럼 길거리에서나 신혼부부가 북적이는 공항·역사에서도 한복을 입은 사람이 넘쳐 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주 입지도 않는데 뭐하러 비싼 돈들여 한복을 맞추나 하지만 역시 명절엔 한복을 입어야 제맛이다. 다양한 색상과 스타일을 갖춘 대여 업체도 많으니 이번 설에는 꼭 한복을 입어보시길.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의상&도움말 : 황금바늘(김영미 연구원장) 김혜순한복(김혜순 원장) # 여성 한복은 저고리 고름 짧거나 없애 매듭단추로 디자인은 한복 본연의 멋이 풍겨나는 전통 스타일이 여전히 인기다. 단일색보다 훨씬 색감이 뛰어난 반회장·삼회장 저고리가 많아졌다. 길이는 가슴을 자연스럽게 덮는 정도로 내려왔다. 동정이나 깃의 넓이가 넓어 목을 편안하게 감싸준다. 간편함을 추구해 간혹 저고리의 고름을 짧게 하거나 아예 없애고 매듭 단추로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두드러진 경향은 저고리 위에 배자를 착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 원래 한복은 두루마기까지 갖춰 입어야 하나 활동하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기피해 온 게 사실. 저고리와 치마만으로 외출하기에는 차림새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 배자를 걸치면 좋다. 격식도 차릴 수 있고 색다른 멋도 연출할 수 있어 일석이조다. 색상은 예년에 비해 많이 밝아지고 화려해지고 있다. 파스텔톤의 부드럽고 화사한 고운 빛깔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천연 염색 과정을 통해 재현한 동백꽃, 홍시, 앵두, 하늘, 감청, 연보라, 청보라, 먹색 등은 한복의 아름다움을 더욱 살려준다. 전통의 멋을 살리기 위해서 상·하의는 동일 색상으로 하기보다는 보색 대비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재는 한복의 선을 무너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다양한 소재가 채택되고 있다. 이는 한복의 현대화·퓨전화의 영향. 웨딩드레스에서 주로 사용하던 레이스 소재 등 양장지, 서구적인 옷감까지 과감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손으로 짠 것처럼 자연스러운 질감이 돋보이는 옥사 같은 얇은 소재가 여전히 선호되고 있다. 옷의 맵시를 위해 대부분 깨끼(3겹) 바느질을 하기 때문. 추운 겨울엔 역시 도톰한 명주만 한 게 없다. 명주는 질감이 자연스러운데다 은은한 광택까지 있어 고급스러워 보인다. 이번 설에는 옷 선이 둔탁해 보이지 않도록 전통 명주보다 약간 얇아진 원단이 주로 쓰이고 있다. # 남자 한복은 활동성 높은 화섬원단으로 바지 저고리는 고급스럽고 착용감이 좋은 명주로 만들고 조끼나 배자는 차분하면서 중량감 있고 은은한 광택이 나는 모보단으로 만들어서 조화를 이루면 멋스럽다. 활동성을 고려한다면 천연섬유보다 화섬원단을 사용하는 것이 실용적이다. 남자의 경우, 두루마기를 꼭 갖춰 입어야 하는데 수직실크, 모보단, 명주, 양단류가 꾸준하게 애용되고 있다. 남자 한복은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조로워서 싫다면 여밈 부분에 포인트로 자수를 넣어 장식효과를 준다. ■ 체형따라 입기 ●키가 작고 뚱뚱한 체형 먼저 키를 커 보이게 하기 위해 저고리 길이를 짧게 하고 치마 길이를 길게 한다. 이때 치마폭을 너무 퍼지지 않게 하는 것이 좋다. 치마 색은 진감청, 청록색 등 진한 색으로 하고 저고리 색은 같은 계열의 연한 색으로 매치한다. 삼회장 저고리는 어깨가 좁아 보이는 효과가 있다. ●키가 작고 마른 체형 저고리와 치마를 채도를 달리한 같은 계열의 색상으로 하면 키를 커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저고리는 약간 어둡게 하고 치마는 그보다 연하고 화사해 보이는 색상을 입어 풍성한 느낌을 강조한다. 고름을 보색으로 길게 늘어뜨리는 것도 키를 늘리는 한 방법. ●키가 크고 마른 체형 카키, 감청, 홍대추, 먹색과 같은 진한 색상의 치마를 입어 안정감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치마폭을 넓게 하여 주름을 촘촘히 잡아 풍성하게 한다. 저고리는 약간 길게 하고 목이 너무 길어 보이지 않게 깃은 넓게, 길이는 조금 짧게 달아준다. 저고리는 치마와 달리 밝은 색상으로 고른다. ●키가 크고 뚱뚱한 체형 치마색을 진하게 하고 치마 주름을 일자형으로 길게 잡아야 부해 보이지 않는다. 저고리는 연한 색상에 진한 색으로 삼회장 디자인을 하면 몸이 축소되어 보이는 효과가 있다. 저고리에 너무 큰 형태의 자수나 금박장식은 삼간다. 이런 체형은 다소 목이 굵은 편이라 깃을 약간 길게 하여 목선을 길어 보이도록 한다. ■ 맵시를 잘 살리려면 체형에 맞게 한복을 골랐어도 제대로 입지 못하면 한복의 우아함을 살릴 수 없다. 한복은 특히 속옷을 잘 갖춰 입어야 하는 의복이다. 속옷을 잘 입었을 때 아름다운 항아리형 실루엣이 살아난다. 옛 여인들은 속속곳, 바지, 단속곳, 무지기치마, 대슘치마 등 여러 개의 속옷을 겹겹이 입었다. 이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속바지와 속치마는 입는 게 좋다. 좀더 신경을 쓴다면 단속곳까지 입어 상체는 약해 보이고 하체는 풍성해 보이는 한복의 ‘상박하후’의 멋을 더욱 살릴 수 있다. 치마를 여밀 때는 겉자락이 왼쪽으로 여며지게 입는데, 여며지는 정도는 뒷 중심에서 양쪽으로 약 7㎝쯤이면 된다. 저고리를 입을 때 주의할 점은 어깨 솔기가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약간 앞으로 숙여 입어주고 치마 말기 부분이 저고리 밖으로 보이지 않도록 한다. 남자 한복에서 대님치기가 관건이다. 안쪽 복사뼈에 바지의 마루폭 선을 대고 바지폭을 안쪽에서 뒤로 돌려 끝부분을 복사뼈 바깥쪽에 갖다 댄다. 대님 중앙부를 안쪽 복사뼈에 대고 두 번 돌려 묶는다. 매듭이 안쪽 복사뼈에 오도록 한다. 이때 한쪽 끝을 다 빼지 않고 고(옷고름이나 노끈 따위의 매듭이 풀리지 않도록 한 가닥을 고리처럼 맨 것))를 만들어 놓는다. 나머지 한쪽 끈으로 고를 만들어 매듭을 지어 주면 세 갈래 모양이 된다. 이렇게 매는 것이 올바른 매듭법이며 잘 풀어지지 않는다.
  • [이두한 원장의 건강이야기] 만약에 항문에서…

    40여년쯤 전이니까 옛날 얘기다. 시골 고향에 어른 한 분이 계셨는데, 항문 안쪽에 종기가 생겼다. 병원 치료를 받을 형편이 아니어서 고약을 붙여놓고 한 일주일을 앉지도 못하는 고생을 감내한 끝에 고름이 터지고 통증이 가라앉았다. 다들 그 걸로 다 나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종기 자리에 작은 돌기가 생기더니 이후에도 조금씩 고름이 흘러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통증이 없어 그대로 40여년을 살았다고 했다. 그 분이 작년에 필자를 찾았다. 작년부터 종기 자리에서 평소보다 많은 고름이 나오고, 통증까지 느껴져 병원을 찾았다는 것이었다. 살펴보니 7∼8㎝쯤 되는 단단한 덩어리가 만져졌고, 고름에는 피도 섞여 나왔다. 조직검사를 해봤더니 치루에서 발전한 암이었다. 치루는 항문 안쪽에 있는 항문선이라는 작은 관이 곪아 터지면서 구멍이 뚫리는 병이다. 평소에는 조금씩 고름만 나올 뿐 통증이나 불편함이 거의 없어 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찾지 않고 버틴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 방치하면 치루관 안에서 생긴 염증이 주위로 퍼질 수도 있고,10년 이상 묵히면 치루관에서 암이 생길 가능성도 높아 농양 단계에서 치료하는 게 현명하다. 치료도 어렵지 않다. 농양 단계에서는 외래에서 간단히 염증을 긁어낸 뒤 치료를 하면 통증도 바로 나아져 대부분 그대로 치유가 된다. 이런 치료로 치유가 안 되면 입원해 수술을 받아야 한다.수술은 치루관을 열고 제거하는 것인데, 그다지 아프지도 않고 회복도 빨라 1∼2일 입원 후 바로 직장 복귀가 가능하다. 그러나 간혹 치루가 깊은 경우에는 치루관을 막아 항문의 괄약근을 보호해 줘야 하기 때문에 복잡한 수술을 거쳐야 한다. 치루는 유아들에게도 의외로 많지만 절로 낫거나 수술도 아주 간단하다. 앞서 그 고향 어른은 항문과 직장을 절제하고, 인공 항문을 부착하는 큰 수술을 받았으나 다행이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며 종종 안부전화를 주시곤 한다.“그게 암이 될 줄은 몰랐다.”는 후회와 함께.대항병원장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20) 석가 진신사리 모신 오대산 상원사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20) 석가 진신사리 모신 오대산 상원사

    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에서 서북쪽으로 9㎞쯤 떨어진 오대산 산록에 아담하게 앉은 상원사(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건물이래야 목조 문수동자좌상을 모신 주 전각 문수전에 딸린 영산전과 청량선원, 범종각 정도가 고작인 소박한 사찰이다. 가람의 규모가 작은 탓에 흔히 월정사의 ‘산내 암자’쯤으로 인식되지만 숱한 고승을 배출해온 1200년 신라 고찰이자 나라 안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선원이기도 하다. 일반인들에겐 ‘한국 최고의 범종’인 상원사동종(국보 제36호)으로 인해 잘 알려진 사찰. 불교계에선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에,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문수신앙이 보태져 수행하는 운수납자(雲水衲子)와 신도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성지이다. 원래 오대산의 산명(山名)은 처음 산문을 연 개산조인 자장 스님이 문수보살이 머문다는 중국의 오대산에서 꿈속 게송을 받고 돌아와 절을 창건한 데서 비롯된 이름. 자장 스님은 중국 오대산에서 한 노 스님으로부터 “당신의 나라 동북방 명주 땅에 일만의 문수보살이 늘 거주하니 가서 뵙도록 하라.”는 말과 함께 가사와 발우 한벌, 부처님 정골사리를 받고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귀국해 월정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상원사는 한참 후인 성덕왕 4년(705)에 두 왕자인 보천·효명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진여원(眞如院)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는데 당시 오대산은 오류성중(五類聖衆), 즉 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는 아우 효명과 더불어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함께 예배하고 염불하던 중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로, 날마다 이른 아침에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삼국유사) 당시 사람들이 오대산에 찾아와 보천태자에게 신문왕의 후계를 권했지만 보천태자가 한사코 거부해 결국 효명태자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성덕왕이다. 왕위에 오른 효명태자가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 여러 모습의 문수보살을 친견한 뒤 세운 것이 진여원, 지금의 상원사다. 이 설화를 뒷받침하듯 지금도 오대산에는 상원사를 중심으로 중대 사자암, 동대 관음암, 서대 염불암, 남대 지장암, 북대 상두암(미륵암)이 포진해 있다. 이 오대 중에서 상원사가 있는 중대는 바로 오만 보살신앙의 중심으로 여겨진다. 상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아무래도 적멸보궁과 상원사동종.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란 모든 바깥 경계에 마음의 흔들림이 없고 번뇌가 없는 보배스러운 궁전이란 뜻. 욕심과 성냄, 어리석음이 없으니 괴로울 것이 없는 부처님의 경지를 말한다. 국내엔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영취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등 모두 다섯군데의 적멸보궁이 있는데 불교계는 상원사의 적멸보궁을 가장 먼저의 것으로 보고 있다. 이곳을 방문한 조선시대 암행어사 박문수는 ‘천하의 명당’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정식 사리탑은 없고 최근 증축한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 뒤쪽에 1m 높이의 판석에 석탑을 모각한 상징물이 서 있다. 문수전 앞 마당 작은 건물 안에 달려 있는 상원사동종은 종소리와 청동 합금, 주조기술 면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한국종의 모범. 무릎을 세우고 허공에 뜬 채 수공후와 생(笙)을 연주하는 비천상을 비롯한 의장(意匠)과 우아한 문양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종의 마멸과 훼손을 막기 위해 타종을 중단해 지금은 아쉽게도 종소리를 들을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 예종 1년(1469) 윤2월조와 경북 안동읍지인 ‘영가지(永嘉誌) 6권´에 따르면 이 종은 신라 성덕왕 25년(725년)에 제작되어 안동의 누문에 걸려 있던 것을 조선 예종1년(1469년)에 이곳 상원사로 옮겨왔다. 죽령을 넘을 무렵 종이 너무 무거워 애를 먹던 중 종유(鐘乳) 하나를 떼어 안동으로 돌려보내자 종이 수월하게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얽혀 있다. 원래 종의 동서남북 사방 면에는 각각 9개씩 36개의 종유를 만들었는데 1개가 없어진 35개만 남아 있어 흥미롭다. 상원사에서 특이한 것은 불교 중흥기인 고려대엔 사찰의 중창과 관련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오히려 숭유억불책을 썼던 조선조에 왕실의 각별한 비호와 지원을 받았다는 점이다.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는 등 척불에 앞장섰던 태종은 만년에 상원사 사자암을 중건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을 정도였다. 특히 세조와 관련된 흔적은 사찰 곳곳에 남아 있다. 당시 서울에서 상원사까지는 달포나 걸리는 먼 길이었지만 세조는 재위기간 중 3차례나 상원사를 찾았다고 한다. 상원사 주차장 앞에는 세조가 몸을 씻기 위해 의관을 걸어두었다는 관대걸이가 지금도 서있다. 단종을 죽인 세조는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난 뒤 온 몸에 종기가 돋고 고름이 나는 병에 걸리자 오대산을 다니며 기도를 올려 병이 낫도록 발원했다고 한다. 어느날 오대산 계곡에서 목욕을 할 때 우연히 지나던 동자승에게 등을 밀어줄 것을 부탁했는데 동자승이 등을 밀어준 뒤 씻은 듯이 나았다. 이에 감격한 세조가 화원을 불러 그 동자승의 화상을 그리게 했는데 지금 문수전 오른쪽 외벽에 그 모습을 재현한 벽화가 걸려 있다. 문수전 안의 목조 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도 그런 연유에서 조성해 봉안했다고 전해진다. 1984년에 발견된 문수동자 복장에서는 세조의 딸 의숙공주가 문수동자상을 봉안한다는 발원문을 비롯하여 30여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세조의 왕사인 신미 스님이 복을 빌기 위해 상원사를 중수하려 하자 세조가 채색·쌀·무명·베와 철재 등을 보내면서 그 취지를 적었다는 ‘중창권선문’(국보 제292호)도 왕실과 상원사의 관계를 짐작게 한다. 세조가 대(大)시주자로 앞장서자 왕비를 비롯한 궁인, 종실, 조정 신료와 전국의 수령방백들이 앞다투어 시주에 나섰던 사실을 보여준다. 문수전 앞 두마리의 고양이가 나란히 선 석조상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롭다. 고양이가 상원사 법당에 들어가려는 자신의 옷소매를 물고 늘어진 것을 수상하게 여긴 세조가 법당 안팎을 샅샅이 뒤진 끝에 불상 좌대 밑에 칼을 품고 숨은 자객을 찾아냈다고 한다.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세조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상원사의 고양이를 잘 보살피라는 뜻으로 묘전(猫田)을 하사해 상원사는 사방 80리의 땅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세조의 원찰이 되었던 상원사는 안타깝게도 1946년 선원 뒤의 조실(祖室)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건물이 전소되었으며 지금의 문수전과 청량선원 등 대부분의 전각은 모두 그 이후 복원되거나 새로 지어진 것들이다. kimus@seoul.co.kr ■ 천고에 자취감춘 학이 머물렀던… ● 한암 스님과 상원사 상원사는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불리는 경허 스님을 비롯해 수월 운봉 동산 등 역대 선지식(善知識)들이 주석하며 수행했던 유서깊은 곳. 이들 선지식 중에서도 27년간 오대산문을 나서지 않은 채 ‘오대산 도인’으로 통했던 한암(1876-1951)스님은 상원사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선승이다. 금강산에 유람갔다가 발심해 장안사 행름 노사를 은사로 출가한 한암 스님이 상원사에 든 것은 50세 때인 1925년. 당시 서울 봉은사 조실로 있었던 스님은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오대산을 찾았다. 들고 다니던 단풍나무 지팡이를 상원사 산 중턱의 중대 사자암 앞뜰에 심었는데 지팡이가 꽂힌 자리에서 잎사귀와 가지가 돋아 나무가 되었으며 지금도 그 단풍나무가 서있다. 조계종 초대 종정이 된 것도 그 즈음이다. 일제시대 일본 조동종 사토가 상원사로 한암 스님을 찾아와 법거량을 한 끝에 “한암 스님은 세계에서 둘도 없는 인물”이라며 떠난 일은 유명한 일화다. 이 일이 있은 뒤 상원사에는 한암 스님을 만나려는 일본 저명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한다.6·25전쟁 중에는 국군이 “월정사와 상원사가 적의 소굴이 된다.”는 이유로 상원사 법당을 불태우려고 하자 법당에 앉아 “법당을 지키는 것은 불제자의 도리니 어서 불을 지르라.”며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국군이 어쩔 수 없이 법당 문짝만 뜯어내 불지르고 떠나는 바람에 상원사가 남아 있게 됐다고 한다. 한암 스님은 이곳에서 보문 난암 탄허 스님 등 한국불교의 기라성같은 제자들을 키워내다가 6·25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51년 좌탈입망(앉은 자세로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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