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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접 잠수해 ‘바닷속 문화재’ 찾아내…수중발굴 경험 연구인력 전국 9명뿐

    직접 잠수해 ‘바닷속 문화재’ 찾아내…수중발굴 경험 연구인력 전국 9명뿐

    낚시꾼들이 팽팽하게 걸린 손맛에서 희열을 느끼듯 양순석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뿌연 물속에서 손끝에 전해지는 유물을 찾는 손맛을 찾아 바다를 뒤진다. 그렇게 바닷속에서 잠자고 있던 조선 중기 개인용 화기였던 소소승자총통(小小勝字銃筒)과 고려청자를 비롯한 유물 수만 점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3일 인사혁신처 도움을 받아 20년째 수중문화재 발굴 한 길을 걷는 공무원을 만났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 “국내에서 유일한 수중문화재 발굴 기관이다. 전남 목포시는 사실 연구소를 두기에 최적지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부산, 전남 여수에서 개경이나 한양으로 갈 때는 모두 목포 앞바다를 지났다. 중국을 오가는 무역선도 목포 주변을 많이 지났다. 1975년 전남 신안군에서 이른바 ‘신안선’을 발견한 게 우리나라 수중발굴의 첫 사례였다. 당시는 문화재관리국 시절이라 문화재는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고 선체와 목재 보존을 위해 만든 목포보존처리장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뿌리가 됐다. 신안선 보존 처리가 1990년대 완료되면서 해양유물전시관으로 정식으로 새 출발한 게 1994년이었다. 전시관 소속 학예연구실로 있다가 기관 및 연구 기능을 확대하면서 2009년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수중발굴과도 그때 생겼다.” -수중문화재발굴은 언제부터 하고 있나. “목포대 환경공학과에서 보존과학을 전공했다. 석사를 마치고 우연한 계기로 1994년 국립해양유물전시관 학예연구실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그 뒤에 잠수도 배우고 물리탐사장비를 맡았다. 수중발굴에 참여한 건 2002년부터였다. 고고학이나 역사학 관련 공부는 일하면서 독학으로 했다고 할 수 있다. 발굴부터 보고서 작성까지 모든 단계가 우리 업무에 속한다.”-바닷속에서 유물을 찾아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수중문화재 발굴은 장비부터 시작해 성격 자체가 육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수중에선 해양물리탐사장비를 사용해 해저지형을 본다거나 해저지층을 단면으로 자르면서 탐사를 한다. 그다음에 수중문화재를 육안으로 확인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장비가 있더라도 문화재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면 잠수해서 육안으로 확인해야 한다. 연구소 직원들은 모두 잠수사 자격증이 있다.” -유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기분이 남다를 것 같다. “2007~2008년 충남 태안에서 도자기 운반선 발굴할 때는 주꾸미가 건져 올린 도자기가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5월에 갔는데 도자기가 많이 흩어져 있었다. 긴급발굴해야 한다고 보고를 했다. 바로 발굴허가를 받아 한 달가량 발굴을 했다. 말 그대로 물 반 고기 반이었다. 고려청자 2만 5000점에 묻혀 있던 선박까지 발굴했다. 제주 신창리 앞바다에선 13세기 남송 도자기 운반선 유물을 조사했는데 도자기 2000여점을 찾아냈다. 특히 납으로 봉한 함 안에 들어 있는 나무 인장, 그리고 인장에 묻은 인주까지 확인할 수 있었던 건 특히 보람 있었다.” -언젠가 거북선 유물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이 많다. “진도 울돌목에서 남쪽으로 4~5㎞ 떨어진 곳에 있는 벽파진에서 발굴작업을 하고 있는데 현재 목표에 비해 20%도 채 하지 못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유물이 골고루 나오고 있다. 아직까진 판옥선이나 거북선 유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찾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유물은 어떤 것인가. “지금도 2012년에 소소승자총통 3점을 최초로 발견했을 때 느꼈던 희열을 잊을 수 없다. 바닷속에선 앞이 거의 안 보이는데 제토를 하다가 손에 막대 같은 게 잡혔다. 쇠 종류인 것 같다는 느낌만 있었다. 물 위로 갖고 올라와서 보니 총통 종류였다. 총통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4년 전인 1588년에 전라좌수영에서 제작했다는 명문도 나왔다.” -출장이 엄청나게 많을 것 같다. “발굴뿐 아니라 신고가 들어오는 현장을 조사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1년에 200일 넘게 출장을 한 적도 있다. 과거엔 출장비는 적고 일은 해야 하니까 아예 현지파견근무 형식으로 근무하곤 했다. 출장수요에 출장예산을 맞추는 게 아니라 출장비 예산에 출장수요를 맞추는 식이었다. 지금은 출장비 예산이 늘어서 다행이다. 나는 행정업무도 해야 하니까 출장은 줄었지만 그래도 1년에 두세 달은 출장이라고 보면 된다. 다른 직원들은 지난해에도 발굴현장에서 150일가량 출장을 했다.” -앞으로 과제가 있다면. “태안 해역과 울돌목 등은 발굴해야 할 수중문화재가 얼마나 많이 갯벌에 묻혀 있을지 짐작조차 안 된다. 현재까지 발굴한 난파선이 14척인데 거북선이나 판옥선이 나올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할 일이 엄청나게 많은데 일할 사람이 부족한 게 아쉽다. 연구인력 충원과 교육프로그램 확보가 특히 시급하다. 우리나라에 수중발굴 경험과 능력 있는 연구인력이 나를 포함해서 연구사 6명, 전문임기직 3명으로 전국에 9명밖에 없다. 그나마 수중문화재 발굴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가르칠 교육 프로그램이 전무하다 보니 직원들이 새로 들어오면 선배들이 하나씩 알려 주는 식이다. 10명도 안 되는 인력으로 1년에 9건가량 신고 들어오는 걸 조사하고 정기적인 발굴도 하고 있다.”-그런 와중에 연구보고서에 논문까지 쓰려면 부담이 클 듯한데. “책임운영기관이다 보니 학예연구관들은 의무적으로 2년에 한 편은 논문을 써야 한다. 현장에서 작업하다 보면 연구논문 쓸 시간이 부족하다. 잠수 자체도 힘든데 유물 발굴해서 분류하고 정리하는 것까지 하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다. 유물 발굴과 정리, 보고서 작성으로 1년이 다 간다. 민간 잠수사 하루 인건비가 최소 30만원은 되는데 우리는 위험수당으로 한 달에 5만원 받는 게 고작이다. 우스갯소리로 공무원 퇴직하고 민간잠수사로 아르바이트하는 게 급여가 몇 배는 더 될 것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보람과 자부심으로 일하긴 하지만 솔직히 처우 개선이 시급하다.” 
  • 군산 바닷속 잠든 고려 유물 200점 깨어났다

    군산 바닷속 잠든 고려 유물 200점 깨어났다

    전북 군산시 선유도와 무녀도 인근 바다에서 고려청자와 백자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 200점가량이 발견됐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새만금방조제 중간 지점에 있는 고군산군도 해역에서 약 60일간 조사를 진행해 고려청자 125점, 백자 49점, 분청사기 9점, 닻돌(닻이 물속에 잘 가라앉도록 매다는 돌) 3점 등을 발견했다고 14일 밝혔다. 연구소는 지난해 말경 고군산군도 일원에 수중문화재가 있다는 신고를 받고 올해 초부터 조사를 벌여 왔다. 그중 고려청자 81점은 그릇과 접시가 포개진 형태로 확인됐다. 화물로 선적했다가 배가 난파하면서 그대로 가라앉은 유물로 추정된다. 바다에 침몰한 옛 선박의 부재로 짐작되는 나무 닻과 노도 발견돼, 인근에 옛 선박이 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소 관계자는 “닻은 근대에 잘 사용하지 않는 형태로 옛 선박에서 떨어져 나온 듯하다”며 “고선박이 네 척이나 확인된 충남 태안 마도 해역에서도 청자 다발이 발견된 적이 있어 고군산군도에 난파선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이어 조선 후기에 편찬된 사료인 ‘고군산진 지도’에 “조운선을 비롯해 바람을 피하거나 바람을 기다리는 선박들이 머무는 곳”이라는 설명이 있어 조사 지점이 태안 마도 해역처럼 배들의 정박지였을 수 있다고 밝혔다.
  • [영상] 군산 고군산군도 해역서 유물 무더기 발견

    [영상] 군산 고군산군도 해역서 유물 무더기 발견

    군산 고군산군도 해역에서 유물들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소장 김연수)는 2021년 고군산군도 해역에서 수중 문화재 탐사를 한 결과, 난파된 고선박을 비롯해 수중 유물 200여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확인된 유적은 작년에 접수된 수중문화재 발견 신고를 토대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올해 50여일 고군산군도 해역을 조사해 그 존재를 파악한 곳이다.연구소는 이곳에서 고선박을 비롯해 고려청자 125점, 백자 49점, 분청사기 9점 등 유물 200점가량을 발견했다. 특히 81점의 청자발과 접시는 다발로 포개진 선적 화물 형태로 확인됐다. 난파될 당시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로 마든 닻, 노, 닻돌 등 선박에서 사용되는 선구도 여러 점 함께 발견됐다. 연구소 측은 조사 해역 인근에서 고선박이 난파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했다. 연구소는 고선박과 관련 유물 확인을 위해 2022년 고군산군도 해역에 대한 정밀발굴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 고려청자로 꾸민 특별전 ‘고려음(高麗飮), 청자에 담긴 차와 술 문화’

    고려청자로 꾸민 특별전 ‘고려음(高麗飮), 청자에 담긴 차와 술 문화’

    국립광주박물관이 고려청자들로 꾸민 특별전 ‘고려음(高麗飮), 청자에 담긴 차와 술 문화’를 연다. 국립광주박물관은 전국 국립박물관과 유관 기관이 소장한 도자기 중 다구(茶具·차를 만들고 마시는 도구)와 주기(酒器·술 마시는 그릇)를 엄선해 선보인다. 전시에는 고려청자 200여 점과 중국 자료 등을 포함해 유물 250여 점이 나왔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주전자, 잔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최명지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고려청자가 당대에 어떻게 사용됐는지 알아보자는 취지로 전시를 기획했다”며 “고려시대에 차와 술이 중요한 문화로 자리매김하면서 세련미 넘치는 청자 도구들이 제작됐다”고 강조했다. 전시의 첫번째 공간은 중국 그림 등을 참고해 청자 다구와 주기를 분류하고, 사용법을 설명한 공간이다. 이어 다구, 주기가 각각 변화한 양상에 대해 살피고,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시가 새겨진 도자기’ 등을 통해 고려 사람들의 풍류도 논한다. 마지막 공간에서는 무덤에 부장품으로 묻힌 차와 술 관련 도구를 다룬다. 고려 수도 개성뿐만 아니라 각지 무덤에서 출토한 청자를 통해 고려시대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최 연구사는 “이번 전시를 통해 색과 형태의 미감이 뛰어난 고려청자가 기능성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며 “고려청자의 새로운 면모를 알리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13일부터 내년 3월 20일까지 이어진다.
  • 인간에 대한 그 ‘리움’

    인간에 대한 그 ‘리움’

    미술관의 첫인상인 로비부터 확 달라졌다. 둥근 유리 천장이 있는 로툰다 주변에 검은 기둥과 의자들이 조형 작품처럼 간결하게 놓여 있고, 한쪽 벽면에는 가로 11m, 세로 3m의 초대형 미디어 월이 자리했다. 안내데스크, 사물함, 카페까지 검은색으로 통일해 격조와 세련미가 한층 두드러졌다.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이 8일 다시 문을 연다. 삼성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미술관은 ‘국정농단’ 사태 여파로 2017년 홍라희 관장이 물러나면서 소장품 상설전만 운영해 오다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지난해 3월 휴관했다. 1년 7개월 사이 미술관은 로고를 교체하고 로비 공간을 리뉴얼하는 등 ‘제2의 개관’에 준하는 대대적인 변신을 꾀했다. 전시 변화도 획기적이다. 한국 고미술과 현대미술 상설전을 7년 만에 전면 개편했다. 고미술 상설전은 ‘푸른빛 문양 한 점’, ‘흰빛의 여정’, ‘감상의 취향’, ‘권위와 위엄, 화려함의 세계’ 네 가지 주제로 나눠 각각 청자, 분청사기·백자, 조선시대 그림·글씨, 금속공예·불교미술을 선보인다. 국보 ‘청자동채 연화문 표형주자’, 김홍도 ‘군선도’ 등 국보 6점을 포함한 고미술 154점을 펼쳤다. 사각형 고려청자 향로, 흥선대원군의 ‘석란도 대련’처럼 지금까지 공개된 적 없는 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다. 세계 거장들의 명작을 모은 현대미술 상설전도 대폭 바뀌었다. 동서양 미술에 자주 등장하는 검은색에 집중한 ‘검은 공백’, 빛과 움직임 등 비물질 영역으로 확장시킨 ‘중력의 역방향’, 현실 너머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상한 행성’을 주제로 회화, 조각, 설치 작품 76점을 전시했다. 2004년 개관 이후 리움의 기획전은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이끄는 선두 주자로 미술계의 각별한 주목을 받아 왔다. 이 때문에 4년 만에 귀환하는 기획전에 쏠리는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리움은 ‘인간’이란 거대 담론을 택했다. 태현선 학예연구실장은 “광범위하고 어려운 주제이긴 하나 코로나19 팬데믹이 심화시킨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고민 등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피해 갈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인간-일곱 개의 질문’은 20세기 중반 전후 미술을 시작으로 반세기에 걸친 인간에 대한 예술적 탐색의 결과물들을 선보인다. 전시장 입구에 놓인 거장 세 명의 조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평소에 보기 힘든 걸작들이지만 맥락을 갖춘 배치로 인해 전시의 흐름을 미리 보여 주는 예고편의 구실을 한다. 골격만 앙상하게 남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 Ⅲ’(1960)은 인간의 실존적 고민을 드러내고, 신체를 단순하게 묘사한 앤터니 곰리의 ‘표현’(2014)은 몸이 품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생각하게 한다. 무표정한 얼굴의 도시인 여섯 군상을 조각한 조지 시걸의 ‘러시 아워’(1983)는 공존해야 하는 인류의 숙명을 암시한다. 전시장에선 7개 질문별로 국내외 51명 작가의 작품 130여점을 만날 수 있다. 다만 소주제에 따른 작품 특성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아 동어반복이 되는 듯한 점은 아쉽다. 김성원 리움 부관장은 “재개관을 계기로 열린 미술관, 소통하는 미술관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상설전 무료 운영은 문턱을 낮추는 변화의 하나다. 기획전도 연말까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 격조는 높이고, 문턱은 낮추고…새롭게 문 연 리움미술관의 변화

    격조는 높이고, 문턱은 낮추고…새롭게 문 연 리움미술관의 변화

    미술관의 첫인상인 로비부터 확 달라졌다. 둥근 유리 천장이 있는 로툰다 주변에 검은 기둥과 의자들이 조형 작품처럼 간결하게 놓여 있고, 한쪽 벽면에는 가로 11m, 세로 3m의 초대형 미디어 월이 자리했다. 안내데스크, 사물함, 카페까지 검은색으로 통일해 격조와 세련미가 한층 두드러졌다.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이 8일 다시 문을 연다. 삼성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미술관은 ‘국정농단’ 사태 여파로 2017년 홍라희 관장이 물러나면서 소장품 상설전만 운영해 오다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지난해 3월 휴관했다. 1년 7개월 사이 미술관은 로고를 교체하고 로비 공간을 리뉴얼하는 등 ‘제2의 개관’에 준하는 대대적인 변신을 꾀했다.전시 변화도 획기적이다. 한국 고미술과 현대미술 상설전을 7년 만에 전면 개편했다. 고미술 상설전은 ‘푸른빛 문양 한 점‘, ‘흰빛의 여정’, ‘감상의 취향’, ‘권위와 위엄, 화려함의 세계’ 네 가지 주제로 나눠 각각 청자, 분청사기·백자, 조선시대 그림·글씨, 금속공예·불교미술을 선보인다. 국보 ‘청자동채 연화문 표형주자’, 김홍도 ‘군선도’ 등 국보 6점을 포함한 고미술 154점을 펼쳤다. 사각형 고려청자 향로, 흥선대원군의 ‘석란도 대련’처럼 지금까지 공개된 적 없는 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다. 세계 거장들의 명작을 모은 현대미술 상설전도 대폭 바뀌었다. 동서양 미술에 자주 등장하는 검은색에 집중한 ‘검은 공백’, 빛과 움직임 등 비물질 영역으로 확장시킨 ‘중력의 역방향’, 현실 너머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상한 행성’을 주제로 회화, 조각, 설치 작품 76점을 전시했다.2004년 개관 이후 리움의 기획전은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이끄는 선두 주자로 미술계의 각별한 주목을 받아 왔다. 이 때문에 4년 만에 귀환하는 기획전에 쏠리는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리움은 ‘인간’이란 거대 담론을 택했다. 태현선 학예연구실장은 “광범위하고 어려운 주제이긴 하나 코로나19 팬데믹이 심화시킨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고민 등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피해 갈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인간-일곱 개의 질문’은 20세기 중반 전후 미술을 시작으로 반세기에 걸친 인간에 대한 예술적 탐색의 결과물들을 선보인다. 전시장 입구에 놓인 거장 세 명의 조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평소에 보기 힘든 걸작들이지만 맥락을 갖춘 배치로 인해 전시의 흐름을 미리 보여 주는 예고편의 구실을 한다.골격만 앙상하게 남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 Ⅲ’(1960)은 인간의 실존적 고민을 드러내고, 신체를 단순하게 묘사한 앤터니 곰리의 ‘표현’(2014)은 몸이 품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을 생각하게 한다. 무표정한 얼굴의 도시인 여섯 군상을 조각한 조지 시걸의 ‘러시 아워’(1983)는 공존해야 하는 인류의 숙명을 암시한다. 전시장에선 7개 질문별로 국내외 51명 작가의 작품 130여점을 만날 수 있다. 다만 소주제에 따른 작품 특성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아 동어반복이 되는 듯한 점은 아쉽다. 김성원 리움 부관장은 “재개관을 계기로 열린 미술관, 소통하는 미술관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상설전 무료 운영은 문턱을 낮추는 변화의 하나다. 기획전도 연말까지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 고려인의 삶·문화, 술과 차로 通하다

    고려인의 삶·문화, 술과 차로 通하다

    보물 3점 포함 133점 진열… 역대 최대연계 전시에선 백남준 미디어아트 선봬옛 문헌에 나오는 주자(注子)는 물이나 술 따위의 액체를 담아 잔에 따르기 위한 그릇이다. 손잡이와 부리, 뚜껑이 달려 있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주전자(酒煎子)와 형태 및 기능이 같다. 9세기 초 중국 당나라에서 처음 등장한 주자는 음주와 차문화가 발달한 고려시대에 특히 전성기를 누렸다. 정교하고 세밀한 공예문화의 정수로 평가받는 고려청자의 제작기술은 매병(梅甁)과 더불어 주자에서 활짝 꽃을 피웠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고려주자의 진면목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가 서울 강남구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에서 열리고 있다. ‘따르고 통하다, 고려주자’ 특별전에 박물관이 소장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3점을 비롯해 다양한 재질의 고려주자 133점이 한꺼번에 진열됐다. 고려시대 주자를 주제로 한 전시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주자와 함께 사용된 술잔과 찻잔, 중국 백자주자 등을 더해 전체 전시품은 210여점에 이른다. 유진현 호림박물관 학예연구부장은 “술과 차를 나누며 소통했던 고려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로서 고려주자를 재조명하는 자리”라고 설명했다.전시는 세 가지 주제로 구성됐다. 1부 ‘고려 공예의 꽃, 주자’에선 고려 초기인 10세기 무렵부터 말기인 14세기까지 고려청자 주자를 연대순으로 살펴볼 수 있다. 고려 특유의 비색과 상감 문양이 영롱한 보물 1540호 ‘청자표형주자’(12세기)와 보물 1451호 ‘청자상감운학국화문병형주자’(13세기), 고려 후기 청자주자를 대표하는 ‘청자상감국화문표형주자’(13세기 후반~14세기 전반) 등 시대별 명품들을 일목요연하게 펼쳤다. 아울러 15세기 상감분청사기와 백자 주자 등 조선시대 주자도 일부 선보인다. 2부 ‘주자, 술을 따르다’는 고려주자 가운데 술주전자로 사용된 작품들을 소개한다. 술주전자와 차주전자가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고려 왕실이 국가 의례에 사용한 주자, 술과 관련한 시구가 새겨진 조롱박 모양의 주자들을 모았다. 3부 ‘주자, 차를 따르다’는 참외 모양 과형(瓜形)과 금속제 주자를 모방한 유형을 차주전자로 분류해 소개한다. 각각의 전시공간에 고려시대 주점과 다점 풍경을 재현한 모습도 흥미롭다. ‘만남과 소통’이란 전시 주제에 맞춰 연계 전시 ‘통하고 만나다, 다반향초’도 열린다. 백남준의 미디어아트 ‘W3’, 이수경의 ‘번역된 도자기’ 작품으로 팬데믹 시대에 더욱 절실해진 소통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전시는 12월 31일까지.
  • 고려 청자 속 아이, 이중섭 그림에 짠?

    고려 청자 속 아이, 이중섭 그림에 짠?

    김환기의 추상회화 ‘전면점화’ 양옆에 15세기 분청사기인화문병 두 점이 나란히 놓였다. 무수한 점들이 만들어 내는 역동성과 조형미가 심오한 흡인력을 발산하는 1971년작 ‘19-Ⅵ-71 #201’이다. 그런데 점의 형태와 배열이 분청사기에 새겨진 문양과 놀랍도록 닮았다. 500년 시공간을 뛰어넘은 문화재와 현대미술의 조응을 한 공간에서 마주하는 경험은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과거 없는 오늘은 없고, 현재는 미래의 전통이 된다. 앞서 살아간 이들이 남긴 예술품이 박제된 유물로 남지 않고, 법고창신의 정신으로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되는 이유다. 국립현대미술관이 8일 덕수궁관에서 개막하는 ‘DNA: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은 문화재와 근현대미술의 동시 진열을 통해 한국의 미를 재조명하는 보기 드문 통섭형 전시다. ‘한국의 미가 무엇인가’에서 출발해 한국미의 원형을 탐색하고, 그것이 어떻게 계승·발전되어 왔는지를 흥미롭게 펼친다. 이를 위해 국보 기마인물형토기 주인상, 보물 서봉총 신라금관을 포함한 문화재 35점, 근현대미술 130여점, 자료 80여점을 모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문화재를 본격적으로 전시하는 건 처음이다. 특히 근현대미술 전시작에 이건희 삼성회장 유족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 1448점 가운데 이중섭의 ‘은지화’ 1점, 도상봉의 ‘포도 항아리가 있는 정물’, ‘정물 A’ 2점, 박영선의 ‘소와 소녀’ 등 4점이 나와 눈길을 끈다. 전시는 고유섭, 최순우, 김용준 등 근대 미학자들이 연구한 한국미 이론을 토대로 대표 문화재 10점을 선정하고, 이를 ‘성(聖), 아(雅), 속(俗), 화(和)’ 등 네 개 키워드로 나눠 문화재와 근현대미술품을 함께 소개한다. 종교적 성스러움과 숭고함의 가치를 조명하는 1부에선 고구려 고분벽화, 석굴암, 고려청자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 선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담긴 천상세계에 대한 염원과 석굴암에 투영된 깨달음에 대한 갈망은 이숙자·박노수의 회화와 권진규의 조각으로 이어졌다. 고려청자의 뛰어난 장식 기법과 도상은 이중섭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고려시대 ‘청자상감 포도동자문 주전자’에 새겨진 천진난만한 표정의 동자와 포도송이 문양은 이중섭이 그린 ‘봄의 아동’(1952~1953)과 구도가 유사할 뿐 아니라 청자의 음각 기법처럼 보이는 윤곽선에서도 닮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맑고 바르고 우아하다’를 주제로 한 2부에선 해방 이후 서구 모더니즘에 대한 대항으로 한국미술 정체성 찾기에 몰두했던 시기에 조선 백자가 지속적으로 창작의 원천이 돼 온 과정 등을 살펴본다. 도자기 애호가였던 도상봉은 달항아리를 소재로 한 정물화를 많이 남겼다. 작가가 실제 작품 소재로 사용했던 도자기들이 전시장에 나란히 자리해 감상의 깊이를 더한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전통과 맥이 닿는 단색화가 윤형근의 ‘청다색’, 이철량의 ‘도시 새벽’도 눈길을 끈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를 각각 이종상의 ‘장비’, 천경자의 자전적 여인상 ‘탱고가 흐르는 황혼’과 조응시킨 3부도 흥미롭다. 마지막은 1990년대 이후 달라진 한국미의 변화에 주목한다. 특히 오세창, 전형필, 나혜석, 백남준 등 100년에 걸친 한국미술계 인물들을 흑백사진처럼 한 화면에 담은 조덕현의 가로 8.3m, 높이 3.5m 초대형 회화 ‘오마주 2021-Ⅱ´는 전시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 10월 10일까지.
  • 분청사기 문양 닮은 김환기 ‘점화’…현대미술에 깃든 한국미 DNA

    분청사기 문양 닮은 김환기 ‘점화’…현대미술에 깃든 한국미 DNA

    김환기의 추상회화 ‘전면점화’ 양옆에 15세기 분청사기인화문병 두 점이 나란히 놓였다. 무수한 점들이 만들어 내는 역동성과 조형미가 심오한 흡인력을 발산하는 1971년작 ‘19-Ⅵ-71 #201’이다. 그런데 점의 형태와 배열이 분청사기에 새겨진 문양과 놀랍도록 닮았다. 500년 시공간을 뛰어넘은 문화재와 현대미술의 조응을 한 공간에서 마주하는 경험은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과거 없는 오늘은 없고, 현재는 미래의 전통이 된다. 앞서 살아간 이들이 남긴 예술품이 박제된 유물로 남지 않고, 법고창신의 정신으로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되는 이유다. 국립현대미술관이 8일 덕수궁관에서 개막하는 ‘DNA: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은 문화재와 근현대미술의 동시 진열을 통해 한국의 미를 재조명하는 보기 드문 통섭형 전시다. ‘한국의 미가 무엇인가?‘에서 출발해 한국미의 원형을 탐색하고, 그것이 어떻게 계승·발전되어 왔는지를 흥미롭게 펼친다. 이를 위해 국보 기마인물형토기 주인상, 보물 서봉총 신라금관을 포함한 문화재 35점, 근현대미술 130여점, 자료 80여점을 모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문화재를 본격적으로 전시하는 건 처음이다. 특히 근현대미술 전시작에 이건희 삼성회장 유족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 1448점 가운데 이중섭의 ‘은지화’ 1점, 도상봉의 ‘포도 항아리가 있는 정물’, ‘정물 A’ 2점, 박영선의 ‘소와 소녀’ 등 4점이 나와 눈길을 끈다.전시는 고유섭, 최순우, 김용준 등 근대 미학자들이 연구한 한국미 이론을 토대로 대표 문화재 10점을 선정하고, 이를 ‘성(聖), 아(雅), 속(俗), 화(和)’ 등 네 개 키워드로 나눠 문화재와 근현대미술품을 함께 소개한다. 종교적 성스러움과 숭고함의 가치를 조명하는 1부에선 고구려 고분벽화, 석굴암, 고려청자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 선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담긴 천상세계에 대한 염원과 석굴암에 투영된 깨달음에 대한 갈망은 이숙자·박노수의 회화와 권진규의 조각으로 이어졌다. 고려청자의 뛰어난 장식 기법과 도상은 이중섭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고려시대 ‘청자상감 포도동자문 주전자’에 새겨진 천진난만한 표정의 동자들은 이중섭이 그린 ‘봄의 아동’(1952~1953)과 구도가 유사할 뿐 아니라 청자의 음각 기법처럼 보이는 윤곽선에서도 닮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맑고 바르고 우아하다’를 주제로 한 2부에선 해방 이후 서구 모더니즘에 대한 대항으로 한국미술 정체성 찾기에 몰두했던 시기에 조선 백자가 지속적으로 창작의 원천이 돼 온 과정 등을 살펴본다. 도자기 애호가였던 도상봉은 달항아리를 소재로 한 정물화를 많이 남겼다. 작가가 실제 작품 소재로 사용했던 도자기들이 전시장에 나란히 자리해 감상의 깊이를 더한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전통과 맥이 닿는 단색화가 윤형근의 ‘청다색’, 이철량의 ‘도시 새벽’도 눈길을 끈다.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를 각각 이종상의 ‘장비’, 천경자의 자전적 여인상 ‘탱고가 흐르는 황혼’과 조응시킨 3부도 흥미롭다. 마지막은 1990년대 이후 달라진 한국미의 변화에 주목한다. 특히 오세창, 전형필, 나혜석, 백남준 등 100년에 걸친 한국미술계 인물들을 흑백사진처럼 한 화면에 담은 조덕현의 가로 8.3m, 높이 3.5m 초대형 회화 ‘오마주 2021-Ⅱ‘는 전시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 10월 10일까지.
  • 시카고 미술관 속 ‘한국 전시실’… 전직 대한민국 공무원의 솜씨

    시카고 미술관 속 ‘한국 전시실’… 전직 대한민국 공무원의 솜씨

    국립고궁박물관 개방형직위 3년간 근무한국서 첫 직장… 공무원 성실함 자극받아“공직과 민간, 서로 배우는 기회 많아지길”미국 시카고미술관은 대도시 시카고를 대표하는 관광명소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이지만 한국전시실은 협소하고 전시물도 고려청자 정도에 불과해 한국 미술을 느끼기에는 아쉽다는 지적이 많았다. 지난해 2월부터 시카고미술관 첫 한국미술 담당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지연수(52) 큐레이터는 26일 인터뷰에서 “한국미술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한국의 높아진 위상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한다”며 “코로나19로 계획보다 늦어지긴 했지만 앞으로 한국미술실 개편과 교육프로그램 강화를 준비 중”이라고 소개했다. 지씨는 우리나라의 ‘전직 공무원’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큐레이터로 일하다가 2017년부터 2020년까지 개방형직위로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으로 일했다. 그는 “공직 경험이 없는 데다 한국 직장에서 일해 본 적도 없어 처음에는 걱정도 많았다”면서 “큐레이터로서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조선시대의 유물을 연구하고 전시하고 싶다는 욕심에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그는 고궁박물관에서 일할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로 “미국에서 환수된 문정왕후어보와 현종어보 기획전시”를 꼽은 뒤 “당시 귀국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공무원의 책임감과 성실함을 보고 배우면서 많은 자극이 됐다”고 회상했다. 그는 “미국미술관에서 일한 경험이 한국에서 전시를 하는 데 도움이 됐고, 한국박물관에서 일한 경험이 지금 하는 일에 원동력이 된다”며 “한국미술 관련 일을 하다 보니 문화재청·국외소재문화재재단 등과 협업할 일이 많은데 고궁박물관에서 일할 당시 알게 된 분들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개방형직위 제도를 활용해 공직과 민간이 서로 배우는 기회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더 많이 교류하면 서로 더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좀더 많은 민간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안정된 근무 조건 마련이 필요하다”며 “공직에 적응하면서 본인의 역량을 발휘해 성과를 보여 주기에는 3년은 충분하지 않다. 업무 방식과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만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위계질서가 약한 미국에 비해 한국 공직은 상하관계가 뚜렷하고 업무 결정도 여러 단계를 거치는 게 낯설었던 게 사실”이라면서도 “나에게 공직 경험이란 그동안 민간에서 배운 것들을 정부에서 일하는 분들과 나누면서 재점검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것을 배운 중요한 기회였다”고 말했다. 그는 “민간에서 일하는 다른 이들에게 개방형직위에 도전해 보라고 추천하곤 한다”고 덧붙였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명량대첩’ 바닷속 보물이 세상으로 나온 건 도굴꾼 덕?

    ‘명량대첩’ 바닷속 보물이 세상으로 나온 건 도굴꾼 덕?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2012~2020년 진도 명량대첩로 해역에서 모두 7차례 수중발굴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개인화기 소소승자총통(小小勝字銃筒)을 비롯해 고려청자, 닻돌 등을 거뒀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2014)에서 보여 준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활약상을 재조명하고, 찬란한 해양 실크로드 문화를 소환하며, 여몽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삼별초항쟁을 보여 주는 출토품들이다. 이 유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도굴꾼들의 내분 덕분(?)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고려청자 도굴 제보, 도굴꾼 내분이 발단 2011년 일이다. 진도 앞바다에서 고려청자를 도굴했다는 제보가 연구소에 들어왔다. 도굴한 향로가 제값을 받지 못하자 도굴꾼끼리 싸움이 일었다. 도굴품 중 고려시대 ‘청자 버드나무·갈대·물새무늬 향로’는 이미 보물로 지정한 ‘청자괴물향로’와 그 형태가 매우 유사했다. 그런데 골동품상이 향로 표면의 패각류와 이물질을 제거하려고 염산 등을 무분별하게 사용했는데, 청자 본래의 자연미가 퇴색하고 유약변질 등을 이유로 구매자가 값을 후려쳐 거래가 불발됐다. 이런 갈등 탓에 거래가 지연되면서 문화재청과 서울경찰청은 수사를 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2011년 11월 문화재청과 서울경찰청이 합동으로 청자 베개 등을 거래하는 현장에서 도굴꾼들을 검거했다. 조사해 보니, 도굴꾼들은 전남 진도·신안해역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뒤 잠수장비를 착용하고 바닷물이 빠질 때를 기다렸다가 수심 7∼15m 바닷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고려시대 강진에서 출발한 도자기 운반선의 항로를 파악하고, 침몰지점을 추정해 도굴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물길 험하지만 선박왕래 잦았던 명량대첩로 명량대첩로 해역은 남해와 서해를 연결하는 길목으로, 예로부터 선박들이 끊임없이 왕래했다. 이 해역은 물살이 빠른 울돌목으로, 태안 난행량 등과 함께 험한 물길로 유명했다. 고려와 조선 때에 전라도, 경상도 지역에서 거둔 세곡과 화물을 실어 나르던 조운선과 무역선의 통로였다. 강진과 해남에서 생산한 청자를 개경으로 운반하는 ‘세라믹 로드’이자, 한중일을 연결하는 ‘해양 실크로드’였다.발굴지역은 울돌목에서 남동쪽으로 약 4㎞ 떨어진 벽파항 일대다. 벽파항 인근에 고려 희종 3년인 1207년 만든 정자인 벽파정이 있는데, 고려는 이곳에서 외국 사절을 맞이했다. 이곳은 고려시대 삼별초가 용장산성을 근거지로 삼아 여몽연합군과 맞서 싸운 곳이기도 하다. 앞서 1991~1992년에는 벽파항 인근에서 진도 통나무배를 발굴하기도 했다. 중국 남부 푸지엔에서 만든 배로, 고려시대 해상교류를 미루어 알 수 있다. 이곳은 또 일본군을 대파한 명량대첩의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 수군은 벽파진에 주둔하며 왜군의 기습공격을 방어했다. 울돌목을 배후에 두는 게 좋지 않다고 판단한 조선 수군은 명량대첩 하루 전 해남에 있는 전라우수영으로 이동했다. 왜군이 다음날 133척 배를 이끌고 울돌목으로 이동하자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은 울돌목에서 13척 배로 31척 왜선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뒀다.●도굴품 정보로 탐사… 여러 시대 유물 나와 도굴품의 정보를 배경으로 2012년 9월부터 명량대첩로에서 수중발굴을 시작했다. 발굴해역 수심은 5~20m, 밀물과 썰물의 차이는 3~4m 정도였다. 밧줄로 바둑판 모양의 그리드를 설치하고, 진흙이나 개흙의 침전물을 퍼 올리는 슬러지 펌프를 사용했다. 수중 시야가 나빠 수중과 해저면에 있는 문화재를 탐지하는 수중초음파카메라도 활용했다. 유물은 넓은 범위에 흩어져 묻혀 있었고, 또 층위가 구분되지 않고 여러 시대 것들이 뒤엉켜 나왔다. 빠른 조류 때문에 소용돌이가 생기는 와류현상 때문이었다. 2012년 10월 발굴조사가 가장 주목받았는데, 12∼13세기 고려청자 등 90여점이 나왔다. 소소승자총통 3점도 최초로 빛을 봤다. 다른 유물로는 고려시대 도자기, 조선시대 백자를 비롯한 총통·석환·금속유물·닻돌 등 1000여점이다.가장 많이 나온 유물은 도자기였는데, 조사 구간 전역에서 넓게 발견됐다. 강진·해남 등에서 만든 고려청자는 베개·잔·접시·유병·향로·붓꽂이 용도로 쓴 것들이었다. 특히 기린·오리·원앙모양의 상형청자향로뚜껑, 청자삼족향로, 청자기와 등은 가치가 아주 높았다. 이외에 토기·백자·분청사기·흑유 등도 함께 출수됐다.금속유물들은 주로 무기류였다. 총통과 발사장치가 달린 활(쇠뇌)과 방아쇠 등 전쟁 유물이었다. 석제유물은 나무로 만든 가벼운 닻을 물속에 가라앉히는 용도로 쓰이는 닻돌이 많았다. 닻돌은 일부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오면서 총 60여점이나 출수됐다. 석환(돌포탄)도 나왔는데, 해전에서 전함끼리 근접전을 벌일 적에 상대의 머리에 큰 타격을 가하는 유용한 병기였다. 삼별초나 임진왜란 전투 때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 유물은 닻돌, 북송대 동전, 흑유완 등인데 고려시대에 진도 벽파항을 거점으로 한중일을 잇는 해상교류가 활발하였음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다.●문헌기록에 없던 소소승자총통 최초 확인 도굴범들의 뜻하지 않은 길잡이 덕에 발굴된 소소승자총통은 명량대첩에서 사용한 무기류 역사의 한 장을 열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군 소총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비해 열세였다. 그러나 화포는 조선군 총통이 우세했다. 명종 때부터 왜구를 상대하려고 대형화기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과 판옥선에 천자총통·지자총통·현자총통 등 대형화포를 선박 전후좌우에 장착해 포전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했다. 왜군은 중·소형선과 조총으로 배를 뱃전에 붙이는 백병전 위주여서 원거리 화포전이 벌어지는 해전에서 연전연승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개인용 화기인 소소승자총통은 실물뿐만 아니라 문헌기록에도 없는 무기였던 터라 이때 처음으로 실체를 확인했다. 그동안 조선시대 소형화기로는 세총통·승자총통·별승자총통·차승자총통·소승자총통 등이 알려져 왔다. 승자총통은 조선 선조 때 개발한 소형화기인데, 총구에 화약과 탄환을 장전하고 손으로 화약선에 불씨를 점화해 탄환을 발사하는 유동식화기이다. 이를 개선한 게 소승자총통, 소소승자총통이다. 특히 소소승자총통에는 모두 명칭이 표기돼 있고, 소(小)와 승(勝)자 사이에 두 개의 점을 겹쳐 새겼다. 현재 가늠자와 가늠쇠가 남아 있지 않지만, 가늠자·가늠쇠를 부착한 흔적으로 보인다. ●소승자총통 개량한 소소승자총통으로 승리 소소승자총통이 중요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소소승자총통에는 ‘만력무자삼월일 좌영 조소소승자 중삼근오량 장윤덕영’(萬曆戊子三月日 左營 造小勝字 重三斤五兩 匠尹德永)이라는 명문(明文)이 있다. 1588년 3~5월 좌영의 장인 윤덕영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소소승자총통은 조선 중기 국토방위와 화기 제조의 실태를 확인할 수 있는 유물로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명량대첩로 해역에서 발굴했고, 좌영에서 제작한 명문도 확실하다. 결국 제작시기, 발굴지역 등을 고려할 때 1588년 제작해 1597년 명량대첩에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문과 총통, 발굴 지역만으로 이 총통을 전라좌수영에서 제작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휘하 전라좌수영 수군이 사용했을 것이다. 또한 이 총통은 소승자총통을 개량한 화기로서 현존하는 소승자총통과 비교할 때 총신 길이가 575~578㎜로 길지만, 구경은 12㎜로 매우 작다. 화기의 화약 소모량과 사거리 등 성능을 개선한 이 무기로 명량해역에서 대승을 거뒀다.명량대첩로에서 출수된 도기와 토기, 고려청자, 진도 통나무배 등은 해양 실크로드의 실제 증거이며, 총통·석환 등 무기류는 삼별초 항쟁과 명량대첩을 재인식시켰다. 목포에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교류실에서는 명량대첩로에서 찾아낸 도자기와 총통 등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소소승자총통 3점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되는 절차를 밟고 있다. 명량대첩로 해역도 사적으로 가지정해 보호한다. 수중발굴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김병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 IOC, 도쿄올림픽 불참선언한 北 직접 설득한다

    IOC, 도쿄올림픽 불참선언한 北 직접 설득한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단은 7월 개최되는 도쿄하계올림픽에서 금메달 7개를 획득해 종합 순위 10위를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대한체육회는 14일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에서 ‘도쿄하계올림픽 D-100 미디어데이’를 개최해 선수단 예상성적과 단복 등을 공개했다. 신치용 선수촌장은 “금메달 7개로 종합 10위에 오르는 것이 목표”라면서 “금메달 7개면 10위에서 12위 정도가 예상된다.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는 대회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국가대표 선수는 코로나 19와 후쿠시마산 방사능 식자재, 욱일기 등 여러 악조건을 극복해야 한다”며 “선수단이 외적 이슈에 흔들리지 않고 그간 준비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탁구 국가대표인 신유빈은 “실전을 통해 보완할 점을 챙기지 못한 건 아쉽지만 연습에 집중하면서 좋은 부분도 있었다”며 “단식에는 아직 누가 출전할지 모르겠지만 단식에 출전한다면 메달이 목표”라고 말했다. ‘제2의 박태환’으로 불리는 수영 경영의 황선우도 “남은 100일 동안 열심히 올림픽을 준비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다”고 강조했다. 선수단은 대회 참가 전 전원이 코로나19 백신을 맞을 계획이다. 백신 접종과 관련, 체조 양학선은 “전 국민이 백신을 맞으므로 우리도 백신을 접종할 것”이라고 했다. 펜싱 구본길은 “코로나에 대해 실감을 잘하지 못했는데 바로 옆 동료인 오상욱이 확진을 받는 순간 몸소 와 닿았다”고 털어놨다. 선수들은 기대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나타냈다. 체육회는 일정이 시급하지만 최대한 빠르게 백신 접종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체육회는 이와 함께 선수단의 단복도 공개했다. 정장 단복 상의는 고려청자 비색의 화려함을, 안감은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를 모티브로 용맹성을 각각 담았다. 조선백자의 소박한 순백색은 바지에 표현됐다. 상하의 모두 흰색 바탕으로 제작되는 시상용 복장은 소매 왼쪽에 파랑과 빨강의 태극 문양을 상의 뒤는 건곤감리를 각각 형상화했다. 한편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직접 북한의 도쿄올림픽 참가를 설득하고자 김일국 체육상과 통화 일정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진천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조선 얼리 어답터 양반들 독일산 광천수 ‘SELTERS’ 마셨을까

    조선 얼리 어답터 양반들 독일산 광천수 ‘SELTERS’ 마셨을까

    14세기 청자상감버드나무갈대무늬대접 한 점신안보물선보다 10년 앞선 첫 수중 신고유물고대부터 中도자기 아시아 넘어 전 세계 유통이집트 푸스타트 유적에선 모방품 발굴되기도 2002년 군산 해역서 ‘SELTERS’ 인장 병 발견獨 천연 광천수 브랜드… ‘젤터스’ 샘물의 기원폴란드 발트해에서도 인장 찍힌 병·물건 발굴도기 병 근대 해양실크로드 연구의 연결 고리1967년 5월, 바닷속 유물이 긴 침묵을 깨고 빛을 봤다. 전남 강진군 마량 앞바다에서 강모씨가 14세기 청자상감버드나무갈대무늬대접 한 점을 신고하면서다. 1975년 어부 최모씨가 존재를 알리면서 발굴이 시작된 신안보물선보다 10년이나 앞선, 우리나라 최초 수중발견 신고유물이다. ●수중 유물 발견 신고 421건 2168점·압수 655건 659점 수중에서 발견해 신고한 유물은 지금까지 421건 2168점이다. 이 유물은 1967년부터 50여년 동안 우리나라 서남해안에서 집중적으로 나왔다. 2004년부터 현재까지 무단으로 도굴된 유물을 압수한 건수는 655건, 659점에 이른다. 발견 지역은 고군산군도를 중심으로 한 전북 군산해역에 집중돼 있으며 전남 신안·완도 해역, 충남 보령·태안 해역과 경기만 일대에서도 신고가 많이 들어온다. 이렇게 찾은 수중 유물은 청자, 백자, 도기, 토기 등 도자기류를 비롯해 동전, 마제석검 등도 있다. 마제석검은 청동기시대 유물로 손잡이가 있는 유병식 한 점과 손잡이를 결합해 사용하는 유경식 석검 한 점인데, 각각 전남 무안군 해제면 도리포 앞바다와 함평군 손불면 월천 앞바다에서 나왔다.토기는 청동기시대 붉은 간토기, 삼국시대 항아리, 시대 미상의 토제품 등이 있다. 동전은 중국 전한의 무제 때부터 사용했던 오수전과 조선시대에 제작한 다양한 상평통보 종류다. 오수전은 전남 여수시 삼산면 서도리 해역에서 발견됐고 상평통보는 충남 보령시 무창포 앞바다와 불모도 앞바다, 태안군 안면도 방포 앞바다에서 신고가 들어왔다. 이 외에 고려시대 동곳(상투가 풀어지지 않도록 고정하는 장신구)과 청동 숟가락, 철제 화포도 있다.●범선 머물던 기착지 도자기는 신안 증도면 방축리 인근 해역에서 신고된 중국 송·원대의 자기가 많은 양을 차지한다. 근대 중국·일본·독일 등에서 생산된 도자기도 포함됐다. 고대부터 중국의 대표 특산품이었던 도자기는 아시아를 넘어 세계 각지로 유통됐다. 당대 이후 활발했던 중국의 도자 수출은 송·원대 적극적 교역정책으로 교역량과 교역 범위가 확대된다.징더전요, 룽취안요, 딩요, 루요 등에서 생산한 중국 도자기는 한국·일본·동남아·페르시아만 연안·아프리카·인도양 연안·홍해유역·유럽 등의 해안과 수중에서 발견된다. 중국 자기가 인기를 끌면서 국제적으로 수요가 증가했고 모방품이 나오기도 했다. 이집트 푸스타트 유적에서는 중국 룽취안요에서 생산된 뚜껑 있는 주름무늬항아리 청자와 닮은 도기질의 주름무늬항아리 뚜껑 편이 발굴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서남해안은 고대부터 한중일 선박이 왕래하던 주요 뱃길이었다. 19세기 초부터 한반도 주변 해역에는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무역 활동을 하던 외국 상선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범선이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서해안 연안을 항해하려면 바람과 조류의 흐름을 잘 이용해야 한다. 조류는 하루에 썰물과 밀물이 두 번씩 약 6시간 간격으로 반복된다. 서해에서 밀물은 남서에서 북동으로, 썰물은 북동에서 남서로 흐른다. 범선은 조류를 기다려야 하는데, 선원들이 사용할 물품을 공급받을 장소가 필요했다. 범선이 머물렀던 기착지는 험난한 항해 구간을 지나기 전 조류를 기다리기에 좋은 장소였다. 그래서 기착지 주변 해역은 수중발견 유물이 주로 신고되는 주요 지점이기도 하다. ●세계 곳곳서 발견된 ‘SELTERS’ 인장 2002년 전북 군산시 옥도면 야미도리 해역에서 ‘SELTERS’ 인장이 찍힌 도기 병을 박모씨가 발견한 적이 있다. 도톰한 입술부와 짧은 목의 이 병은 어깨 부분 한쪽에 손잡이가 붙어 있고, 반대편에는 동그란 인장과 명문이 찍혀 있었다. 인장은 왕관을 쓴 사자 한 마리를 중심으로 ‘SELTERS’라는 문자가 둘러싸고 아래에 ‘○○○THUM NASSAU’라는 명문이 있었다. 이 병은 2002년 신고된 이후 국가 귀속 절차를 거쳐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됐다. 병에 찍힌 ‘SELTERS’는 독일 타우누스산맥의 헤센주 젤터스(Selters) 지역에 있는 수원지에서 공급된 천연 광천수 브랜드다. 이 광천수는 청동기시대부터 알려진 유명한 천연 탄산수로, 현재 유명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젤터스’ 샘물의 기원이다. 16세기에 귀족과 왕족을 중심으로 이 광천수 수요가 많아졌다. 젤터스 광천수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도기로 만든 병에 담아 전 세계로 수백만개가 수출됐다고 한다.최근 폴란드 발트해 해안에서도 군산 옥도면 야미도에서 발견된 ‘SELTERS’ 인장이 찍힌 병과 유사한 물건이 발굴됐다. 폴란드 그란스크 국립해양박물관 고고학자 토마즈 베드나르즈 박사와 폴란드 고고학자들은 발트해 12.2m 아래에서 난파선을 발견했는데, 이 난파선에서도 200년 된 ‘SELTERS’ 인장이 찍힌 도기 병과 코르크 마개, 도자 편 등이 함께 나왔다. 2001년, 말레이시아 조호르 데사루 해안에서 약 2해리(3.7㎞) 정도 떨어진 지역의 수심 20m에서 1830년대 선박과 중국 징더전요와 더화요에서 생산한 청화백자병이 발굴됐다. 자줏빛 흙으로 만든 항아리로 유명한 이싱요에서 생산한 찻주전자와 함께였다. 1956년 미국 정부는 미네소타 스넬링 요새의 유적을 보존하고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고자 발굴했다. 이 요새는 1946년 군대가 해체할 때까지 다양한 군사 기능을 수행했다. 스넬링 요새는 1820년 미국 정부가 서부 영토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미시시피강과 미네소타강이 합류하는 곳에 설립했는데, 미국 미네소타 역사협회(MNHS)의 낸시 벅 호프먼은 이 요새 복원 중에 발견한 ‘SELTERS’ 문장과 그 아래에 ‘HERZOGTHUM NASAU’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독일 도기 병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왜 1만여개의 호수가 있는 땅에서 무거운 도기 병에 담긴 물을 머나먼 유럽에서 수입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는 그 이유를 해상 운송 시스템의 뒷받침과 건강에 관심이 많았던 19세기 중반의 사회현상으로 보았다. ●獨 상인 1868년 조선과 통상 요구하며 군산으로 들어와 군산 야미도에서 나온 도기 병은 폴란드 발트해 연안 난파선, 말레이시아 데사루 해안 난파선, 미국 미네소타 스넬링 요새 등에서 발굴된 독일 병과 함께 근대 해양실크로드 연구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한다. 이 도기병은 근대 한반도 서남해안의 외국 범선의 항해와도 관련 있는 유물이다.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조선과의 통상 요구를 강화하고자 충남 덕산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기로 했다. 그 일행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소총과 도굴용 도구를 구입한 후 ‘차이나호’와 ‘그레타호’라는 두 척의 기선을 이끌고 덕산군 구만포에 들어왔다. 군산 야미도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구만포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주요 기착지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 해역은 2006년부터 3년에 걸쳐 12세기 고려청자 4000여점이 발굴된 곳이기도 하다. 목포에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우리나라 수중발견 신고·압수유물을 정리해 2010년과 2020년 두 차례에 걸쳐 2권의 도록으로 발간했다. 일부 유물은 연구소 전시실에서 직접 감상할 수 있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세상에 나온 수중발굴 유물과는 달리 긴 세월 동안 관심 밖에 있던 수중발견·압수유물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김애경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 어부들의 개밥그릇·재떨이로 ‘천덕꾸러기’… 700년 만에 보물로 깨어난 침몰선 도자기

    어부들의 개밥그릇·재떨이로 ‘천덕꾸러기’… 700년 만에 보물로 깨어난 침몰선 도자기

    1970년대 어부 그물에 도자기 자주 걸려당시 중요성 몰라 다시 바다에 던져 버려1976년 도굴꾼 유물 팔려다 존재 알려져 수중발굴 경험 없어 해군 등과 합동조사세계 수중고고학 사상 대규모 유물 나와금속품·도자기 등 2만 4000여점 찾아내 목간 글씨 연구 결과 원나라 국적 밝혀져당시 항로·유물 추정… 고려 거쳐 日향한 듯신안보물선 14세기 해양 실크로드의 실증1970년대 중반 보물선 신드롬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당시 발굴된 신안보물선에서 값진 고려청자와 송·원대 도자기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수중 발굴은 물의 흐름, 기상조건, 기압차이 등에 따라 매우 한정된 시간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까다롭기 짝이 없고, 고가의 발굴 장비와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수중고고학은 신안보물선 발굴 전까지 국내에서 매우 생소한 학문이었지만, 이 일을 기점으로 급속히 발전했다.●어부 그물에 걸린 도자기 6점의 가치 신안보물선은 1975년 8월 처음 확인됐다. 어부 최모씨 그물에 도자기 6점이 걸려 올라온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다른 어부들은 도자기가 올라오면 바다에 다시 던져 버리거나 집으로 가져가 개밥그릇이나 재떨이로 썼다. 최씨도 도자기의 중요성을 몰랐지만, 당시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의 동생은 달랐다. 동생의 관심으로 신안군청에 신고해 나온 감정 결과, 중국 송·원대의 도자기였다. 그 이듬해 침몰선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무려 700년 동안 깊은 바닷속에 잠들었던 보물선이 비로소 물 위로 떠올랐다. 이듬해 9월 도굴꾼이 잠수부를 고용해 유물을 건져내 팔려다 검거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후에도 도굴이 잇달아 일어났고, 발굴 해역 주민들도 도굴에 가담했다.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관계 당국은 조사를 서둘렀지만 수중발굴 경험이 없던 탓에 유물을 건져 올릴 수 있는 도구나 장비도 딱히 갖추지 못했다.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 국립중앙박물관과 해군해난구조대 등이 합동조사단을 꾸렸다.신안보물선의 발굴 위치는 전남 신안군 증도 해역이다. 증도는 전남 목포에서 서북 방향으로 약 40㎞ 떨어진 섬이다. 발굴 현장은 증도와 임자도에서 각각 4㎞ 떨어진 해역이었다. 여기서 1976년 10월 26일 우리나라 최초의 수중발굴이 시작됐다. 이후 약 10년 동안 조사가 이어진다. 밀물과 썰물의 차가 커서 물의 흐름이 바뀌는 정조 시간에만 발굴할 수 있었다. 수심은 평균 20m 정도였는데, 수중 시야가 좋지 않고 조류가 빨라 조사에 어려움이 상당했다. 1977년 제3차부터 바둑판 모양의 철재로 된 ‘그리드’를 설치해 육상 발굴처럼 조사 결과를 기록했다. 해군이 발굴하고, 학자들은 유물과 도면을 정리했다. 이렇게 해 선박과 송·원대 도자기 등 무려 2만 4000여점이 최종 출수됐다.신안보물선의 국적은 뜨거운 관심사였다. 고려냐, 중국이냐, 아니면 일본이냐로 의견이 속출했다. 연구 결과 중국 선박으로 최종 밝혀졌다. 신안보물선에서 나온 ‘지치삼년’(至治參年)이라고 새겨진 목간의 글씨가 중국 원 영종 3년(1323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국가와 연대가 확인된 것이다. 선박의 구조는 어땠을까. 당시는 고려시대로, 우리나라에서 수중발굴된 선박은 모두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었지만 신안선은 중국 선박으로 배 밑이 ‘V’자 모양인 첨저선이었다. 신안보물선은 중국 푸젠 지역 첨저선으로, 수심이 깊은 해역에서의 운항과 파도를 가르기에 적합하고, 배를 만들 때 무사 항해와 안녕을 기원하는 보수공이 있어 중국 선박임을 확인할 수 있다. 보수공은 선수·선미 용골재 연결부에 위치한다. 선수 수직접합면 원형 구멍에는 청동거울을 넣었고 선미에는 송대 화폐인 태평통보를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치했다. 선체는 모두 720여편(조각)으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20여년 동안 보존처리 후 복원했다. 추정 실물 크기는 길이 34m, 폭 11m, 깊이 3.7m이다. ●신안보물선에 고려인들도 승선한 듯 신안보물선의 유물은 도자기 2만여점, 금속품 1000여점, 자단목 1000여점, 향신료, 약제품, 석제품, 목제품, 유리·골각제품, 동전 28t(약 800만개) 등이다. 도자기는 길이 50~70㎝, 너비 40~60㎝, 높이 40~60㎝ 정도 나무상자에 10~20개씩 포개서 끈으로 묶어 적재했다. 배의 균형을 잡고자 자단목을 배 밑에 골고루 깔고 그 위에 28t이나 되는 동전을 쌓았다. 동전 상단에는 도자기와 칠기·금속제품 등을 수납했다.우리나라 유물은 청자 매병과 청자 베개, 선원들이 배 위에서 사용하던 청동숟가락 등이 있다. 고려청자는 12~13세기 강진 사당리요와 부안 유천리요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중국에서 수집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인이 쓰던 것으로 보이는 숟가락이 나온 것으로 보아 고려인들도 승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당시 신안보물선의 항로나 유물로 봐서는 고려를 거쳤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고려 왕실과 귀족들에게는 중국의 영향으로 차를 마시고, 향을 피우고, 꽃을 감상하는 문화가 있었다. 이 취향은 실용성과 예술성을 갖춘 공예의 발전을 이끌어 고품질 상감청자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본 유물로는 세토매병과 나막신, 칼코 등이 있다. 일본 가마쿠라시대는 중국과 외교 관계가 중단된 상태였지만,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교류는 활발했다. 차 마시고, 향 피우고, 꽃을 감상하는 문화가 선종사찰, 가마쿠라 막부의 주요 인사와 상급 무사들 사이에서 더 인기가 있었고 이런 문화를 즐기고자 관련 기물을 중국에서 수입했다. 이와 관련한 유물들이 향로, 향합, 꽃병, 잔, 주전자 등이다. 신안선에서 나온 유물 중 가장 많은 것은 도자기·토기류로, 2만 660여점에 이른다. 도자기는 청자와 청백자가 다수였는데 대부분 중국 용천요와 경덕진요계였다. 도자기 분류로 편년과 생산지 등도 밝혀냈는데, 이렇게 대량으로 출수된 도자기는 지금까지도 세계 수중고고학 사상 유례가 드물다. 금속 유물은 1000여점으로 분향구, 불교의식구, 주방용구, 생활용구, 금속정 등 다양했다. 금속덩어리인 금속정은 녹여서 불상이나 기타 기물 제작에 사용하고자 했을 터다. 주석정과 철정이 340여점으로 가장 많고 ‘왕구랑’(王九郞)이라는 장인의 이름이 새겨졌다. 특히 ‘경원로’(慶元路)가 새겨진 청동추 덕분에 선박 출항지가 중국 경원로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목제유물로는 목간, 목기발, 목제반, 칠기완, 자단목 등이 나왔다. 목간 360여점은 화물표이니만큼 화물주·적재품 단위 등을 밝히는 데 요긴하게 쓰였고 침몰연대를 분석하는 데에도 사용됐다. 이 중 목간에서 언급한 ‘도후쿠지’(東福寺)는 일본 교토시 도잔구에 있는 임제종 사찰을 가리킨다. 1319년 화재로 소실됐다가 1325년 가마쿠라 막부의 도움으로 재건됐다. ‘도후쿠지’ 목간은 1323년 도후쿠지 사찰 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는 신안보물선을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묵인 아래 파견된 무역선으로 보는 근거이기도 하다. 식물류는 후추, 은행, 빈낭(기호식품), 여지(과일) 씨 등이 나왔다. 이러한 식물은 한약재와 향료 등이 거래되거나 구급약, 혹은 식용이었을 가능성을 보여 주며 당시 해상운송의 규모와 교류 정도를 가늠케 한다.●출항한 신안보물선, 최종 목적지는 신안보물선의 항로는 두 갈래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추정은 중국 푸젠성 취안저우항에서 연안 항로를 따라 온저우 등을 거쳐 칭위안으로 북상해 무역품을 싣고 고려, 일본으로 향하는 항로다. 중국 저장성 칭위안항을 출발한 배는 고려 개경을 중간 기착지로 삼았을 것이다. 배의 발굴 지점은 한중 항로인 서남해사단항으로, 기상재해 등 돌발 상황으로 인해 침몰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다른 추정은 중일 무역이 활발했던 일본 후쿠오카 하카다항이 목적지인 항로다. 중국에서 출발해 일본으로 직항하던 무역선이 남송·원대의 중국과 일본 간 주요 무역품이던 도자기와 동전들을 싣고 표류하다 침몰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화물주는 일본인과 기관의 대리인 등이 많았으며 목간에 새겨진 ‘조자쿠암’(釣寂巖), ‘하코자키’(筥崎) 등은 규슈의 사찰로, 하카다항과 관련이 있다. 출항지는 청동추에 새겨진 대로 ‘경원로’이다. 칭위안은 현재 중국 저장성 닝보 지역으로 남송대에 광저우, 취안저우와 더불어 국제항으로 성장한 곳이다. ‘지치삼년육월삼일’(至治參年六月二日) 목간은 신안선이 6월 남풍 시기에 출항했음을 알려준다. 신안보물선과 유물은 14세기 전후 해양 실크로드 무역의 실증이며 고려·일본 유물도 출수돼 한중일 관련성도 증명한다. 당시 중국 범선의 무대는 고려·일본과 동남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였다. 신안보물선이 고려를 경유해 일본으로 갔는지, 아니면 바로 일본으로 갔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출수가 우리나라 해역인 것은 분명한 만큼 우리나라가 해양 실크로드의 일원이었음을 대변한다. 신안보물선 수중발굴은 우리나라를 아시아 수중고고학 선도국가로 자리매김했다. 복원된 신안보물선의 선체와 다양한 도자기, 자단목, 목간, 금속제품 등 유물은 목포에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전시하고 있다. 연구소를 방문하면 영상과 전시를 통해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신안 증도 발굴해역은 현재 사적 제274호로 지정돼 안내판과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생생한 해양 실크로드를 보고 싶다면 직접 방문해 볼 만하다. 김병근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 백자 하나가 기마병 600명 값… ‘화이트 골드’의 세계

    백자 하나가 기마병 600명 값… ‘화이트 골드’의 세계

    17~18세기 유럽 왕족과 귀족 등 부유층 사이에선 중국 청화백자 수집이 최고의 사치였다. 얇고 매끄러우면서 투명한 하얀빛과 신비로운 푸른색이 조화를 이룬 중국 자기를 ‘화이트 골드’라 부르며 열광했다. 작센 공국의 아우구스투스 2세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가 소장한 1m 높이의 청화백자 화병을 기마병 600명과 바꿨을 정도로 당시 가치는 어마어마했다. 독일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성의 ‘자기의 방’처럼 중국 자기 수집품으로 방 전체를 장식하는 특별한 문화도 유행했다. 값비싼 중국 자기에 대한 막대한 수요는 유럽 도기 제작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 장인들은 코발트 안료와 투명한 유약을 사용해 중국 자기를 모방한 저렴한 도기 제품을 만들었다. 1709년 독일 마이센이 유럽 최초로 자기 제작에 성공한 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영국 등이 자기 기술을 익히면서 세계 자기 생산 중심지는 중국에서 유럽으로 이동했다.최근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3층 세계문화관에 문을 연 세계도자실에선 ‘도자기에 담긴 동서교류 600년’을 주제로 중국 청화백자, 고려청자, 일본 아리타 자기, 네덜란드 델프트 도기, 독일 마이센 자기 등 총 243점을 전시 중이다. 이 중 절반 가까운 113점이 네덜란드 프린세스호프 국립도자박물관과 흐로닝어르박물관 소장품이다. 도자기는 중국에서 처음 만들기 시작해 한반도와 일본, 동남아시아 등에 전해졌다. 1976년 신안 앞바다에서 발굴된 신안선도 14세기 일본으로 향하던 무역선으로, 중국 각지에서 만든 도자기 2만여점이 실려 있었다. 고려청자 7점도 함께 발견됐다. 16세기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중국 자기는 유럽에 소개됐고,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도자기 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른다.전시장은 신안선에서 발굴된 자기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유럽에서 유행한 중국 청화백자를 일목요연하게 배열했다. 중국 자기의 수출이 금지된 시기에 유럽 틈새 시장에서 명성을 높였던 일본 자기들도 다채롭게 소개한다. 일본 최초의 백자는 임진왜란 때 납치된 조선 도공 이삼평의 손에서 만들어졌기에 감상이 남다르다. 그릇 하나하나에 담긴 동서양 교류의 흔적을 찾아내는 재미가 크다. 유럽에서 주문 제작해 가문의 문장이나 서양 인물, 유럽 신화 등이 중국 문양과 함께 그려진 청화백자 ‘크락 자기’는 동서양 교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는 내년 11월 13일까지 열린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고려청자 낚은 주꾸미, 숨겨진 고려의 비밀을 열었다

    고려청자 낚은 주꾸미, 숨겨진 고려의 비밀을 열었다

    1975년 5월 전남 신안 앞바다. 조업을 하던 어선 그물망에 걸린 수십 마리 물고기 사이에 예사롭지 않은 빛깔을 뿜는 도자기가 숨어 있었다. 어부의 우연한 발견으로 1976년부터 본격적인 바닷속 탐사가 시작됐고, 무역선 ‘신안선’의 존재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세계적으로 손에 꼽는 수중 발굴조사로 꼽히는 신안선이 나온 지 45년. 그간 수십 차례 발굴을 통해 건져 올린 보물들은 개발의 손을 타지 않은 모습 그대로, 당시 문화와 생활상을 고스란히 보여 줬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타임캡슐’을 통해 그 보물들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신안선 발굴 이후 한국의 수중 발굴 역사를 새로 쓴 중요한 유적을 꼽으라면, 충남 태안군 근흥면에 있는 태안 대섬과 태안 마도 수중유적을 들 수 있다. 태안 마도 해역은 2008년부터 현재까지 9차례나 발굴이 이루어졌을 만큼 수중 문화재의 보고로 유명하다. 이렇게 발굴된 고선박만 4척이나 되고, 고려청자와 도기, 조선시대 분청사기 등의 도자기와 목간·죽찰, 쌀, 메밀 등의 각종 곡물, 여러 가지 동물뼈, 선원들의 생활용품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와 고려시대 생활과 문화를 그대로 보여 준다. ●9차례 발굴… 고선박 4척 찾아 2007~2008년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고려시대 청자 운반선이 발굴됐고, 이어 2009~2010년 태안 마도 인근 해역에서는 고려시대 곡물 운반선인 마도 2호선이 발견됐다. 이 2척의 배에서 나온 수중 유물 중 5점이 우리나라 수중문화재로서는 처음으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에 보물로 지정됐다. 보물로 지정된 유물 5점은 두꺼비 모양의 청자 벼루와 음각과 상감으로 장식된 청자 매병 2점, 죽찰 2점이다. 태안 대섬에서의 수중 발굴 시작이 사뭇 재밌다. 2007년 5월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김모씨가 설치해 놓은 소라 통발에 걸린 주꾸미가 고려청자를 끌어안고 있었는데, 이런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이 일대에 대한 탐사에 나섰다. 이후 수심 12m 바닷속에서 수많은 청자들을 확인했다. 그해 7월부터 이듬해까지 두 차례 조사를 거치면서 난파된 고려시대 선박은 물론이고, 무려 2만 5000여 점이나 되는 고려청자와 목간(문자를 기록한 나뭇조각)이 쏟아져 나왔다. 최초의 고려시대 목간에는 먹으로 ‘탐진(현재의 강진)에서 개경에 있는 대정(隊正·하급 무반) 인수 집에 도자기 한 꾸러미를 보낸다’는 내용과 ‘대경(大卿)이라는 관직을 지낸 최씨 성의 사람에게 보낸다’는 내용이 기록됐다. 이를 통해 이 배가 전남 강진에서 제작된 청자를 싣고 개경으로 가다가 난파돼 태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사실을 확인했다. 배에 실린 발, 접시, 잔, 완, 주자, 향로 등의 청자는 12세기 고려청자의 우수성과 예술성을 유감없이 보여 줬다.●두꺼비 모양의 유일한 도자기 벼루 철화와 퇴화기법으로 장식하고 두꺼비 모양으로 만든 청자 벼루 ‘청자철화퇴화문두꺼비모양벼루’는 보물로 지정될 만큼 단연 눈에 띄었다. 고려시대에는 사자, 용, 오리 등 동물과 복숭아, 참외 등의 과일을 비롯해 식물, 불교·도교의 인물 등을 형상화한 각종 청자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두꺼비 모양으로 제작된 도자기 벼루는 태안선에서 나온 이 벼루가 유일하다. 두꺼비는 고개를 위로 들었고, 손과 발은 웅크린 채 앉았다. 겉에는 산화철의 안료와 백토로 점을 찍어 오톨도톨한 피부 돌기를 나타내 질감 표현을 극대화했다. 눈동자는 흑색과 백색이었고, 곡선과 가로로 길게 선을 새겨 꼭 다문 입술을 묘사했다. 뒤집어 안을 들여다보면 속은 비어 있다. 이것은 보통 점토 덩어리로 형태를 만든 후 속을 파내는 방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인데, 휴대를 위한 용도를 고려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높이 7㎝, 길이 14㎝로 작고 무게도 가볍다. 먹이 닿아 갈리는 부분인 연당은 물이 모일 수 있도록 아래로 경사가 졌다. 연당에는 유약을 바르지 않았고, 가장자리에는 켜켜이 쌓인 반원을 새겼는데 마치 두꺼비가 알을 품은 모습이다. 특히 이 부분은 먹이 직접적으로 닿기 때문에 먹이 잘 갈리도록 하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아 있지 않지만 연당 윗부분은 두꺼비의 등을 형상화한 뚜껑을 덮어 먹물이 마르지 않도록 했을 가능성도 있다. 두꺼비는 우리나라 전래동화와 여러 설화에도 등장할 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이다. 특히 물두꺼비는 물속에서 알을 낳고, 대개 물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알려진 만큼 벼루의 소재로서는 제격이었을 터다.●유려한 곡선 자랑하는 매병 보물로 지정된 또 다른 유물은 태안 마도 2호선에서 나온 ‘청자상감유로죽문매병 및 죽찰’(보물 제1783호)과 ‘청자음각연화절지문매병 및 죽찰’(보물 제1784호)이다. 2010년 수중 발굴에서 건진 청자 매병은 풍만한 어깨, S자의 유려한 선을 자랑하는 형태와 각종 문양을 다채롭게 표현해 절정기 고려청자를 대표한다. 이런 모양의 병은 사극에서 왕실이나 귀족의 생활장면을 묘사할 때도 단골로 등장하는 병으로, 고급 고려청자로는 으레 이 매병을 떠올릴 만큼 상징적이다. 매병은 박물관이나 개인들도 소장을 많이 하고 있지만, 대부분 출토지가 명확하지 않다.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매병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대를 명확히 알려 주는 죽찰과 함께 난파선에서 발굴된 고려청자 매병은 학계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발굴 당시 상감 매병과 음각의 매병이 위아래로 겹쳐진 상태였다. 특히 매병은 죽찰과 함께 발굴됐다. 음각 매병의 죽찰은 매병의 입 부분을 살짝 덮은 상태로, 상감 매병의 죽찰은 매병 입 부분 옆에서 나왔다. 다른 목간의 사용례를 비춰 보면 죽찰은 매병 입 부분에 매달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점의 청자 매병은 높이가 39㎝로 같고, 풍만한 어깨에 유려한 S자형을 그린다. 상감으로 문양이 장식된 매병은 몸체의 여섯 면에 세로로 골을 내 참외 모양을 띠고 있다. 여섯 면으로 나뉜 부분에는 커다란 능화창 안에 각각 국화, 모란, 황촉규(닥꽃), 버드나무, 갈대, 대나무를 표현했는데, 흑백의 상감기법으로 효과를 줬다. 흥미로운 것은 여섯 면의 모든 문양 아래에는 물가에 노니는 오리를 표현했고, 화와 모란, 황촉규에는 꽃을 찾아 날아든 나비를 그려 넣은 점이다. 매병 아랫부분은 유약이 뭉쳐져 청자의 바탕이 드러나지만, 유색이 맑고 뛰어난 편이다. 음각기법의 또 다른 매병은 몸체 4곳에 연꽃무늬를 정교하게 새겼다. 문양의 테두리는 칼을 비스듬히 뉘어 굵고 깊게 깎아냈고, 문양의 안쪽 부분은 가늘고 얕게 새겨 표현했다. 특히 연꽃의 줄기 밑 부분은 유약을 바른 윗면에서 뾰족한 도구를 사용해 점을 찍는 방식으로 연꽃줄기의 가시돌기를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한 게 인상적이다. 유약이 매병 전체에 고르게 시유됐고 유색도 뛰어나다. 매병은 12세기 말~13세기 초에 부안 지역 가마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예측되며, 고려 중기 정점을 찍은 고려청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고려시대상 알려주는 죽찰도 나와 보물로 지정된 2점의 죽찰에는 고려시대 무반의 최고 협의기구인 중방에 소속된 도장교(都將校·정8품 이하 하급 무반)에게 보내는 것으로, ‘준(樽)에 참기름과 꿀을 담아 올린다’는 내용이 적혔다. 통상적으로 매병은 술을 담는 용기로 알려졌는데, 술이나 물뿐 아니라 꿀과 참기름 같은 귀한 음식 재료도 담았다는 사실과 고려시대 때는 지금의 매병을 ‘준’이라고 불렀다는 새로운 사실도 같이 알린 문화재다. 또 매병은 당시까지만 해도 대체로 귀족 전유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하급 무반의 신분계층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도 알려졌다. 유물을 국보나 보물 같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는 데는 여러 기준이 있는데, 해당 문화재의 가치와 함께 관리·보존할 대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도 있다. 수중문화재 중 처음으로 보물로 지정된 이들 5점의 유물은 제작 시기가 비교적 확실하고, 당시 용도와 이름을 알 수 있으며,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데다가 형태가 특이하고 조형미가 뛰어나 예술적 가치 또한 높게 평가받은 것들이다. 고려인들은 당시 최고의 기술력으로 그들의 사상과 생활, 취향, 예술적 감각을 담아 고려청자를 만들었는데, 바닷속에서 찾은 보물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수중문화재는 바닷속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일상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다. 결국 어민들이 조업 중에 발견해 신고하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문화재를 찾아내는 이들의 간절한 마음과 노력이 더해져야 세상으로 나올 수 있기에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명옥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양유물연구과 학예연구사
  • 대동여지도에 컬래보된 기술을 고르시오

    대동여지도에 컬래보된 기술을 고르시오

    대동여지도의 가치가 계승된 GPS 조선 회화 ‘동궐도’ 부감법과 드론 등 첨단 기술과 박물관 속 문화재 연결 전통 유산 속 기술은 변주하며 현존 미래 그리는 통찰력 키울 수 있을 것 뛰어난 전통 유산에는 당대 최고 기술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런 기술 중엔 지금도 구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것도 있다. 이준호 고려대 신소재공학부 교수는 고려대 박물관이 소장한 문화재와 공과대학의 첨단 기술을 연결해 보고 싶었다. 고려대 인문대학과 공과대학 교수진이 모였고, 여기에 학예사와 전통기술 복원자를 비롯한 문화유산 전문가들이 합세해 대중강연을 기획했다. 2019년 10~12월 열린 10회짜리 ‘우리 유산에 새겨진 첨단 미래를 읽다´ 얘기다.‘첨단×유산’은 이 강연을 글로 풀어 엮었다. 책은 우수한 유산에 현대의 첨단 기술을 적용해 설명한다. 예컨대 조선 회화의 정수로 꼽히는 궁궐 그림 ‘동궐도’의 부감법을 최첨단 드론 기술과 비교해 보자. 동궐도는 어느 정도 높이에서 그린 그림일까. 지금으로 치면 서울 종로 5가에 있는 30층 높이 건물에서 내려다본 것과 비슷했다. 동궐도는 위로 갈수록 더 가까이 있는 것처럼 표현했는데, 먼 것일수록 작게 그리는 서양의 원근법과는 정반대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며 입체감을 살리고, 동시에 먼 곳도 세밀하게 살린 독특한 방식이다. 최신 드론 기술은 시선은 비슷하지만, 나아가 3D 화상까지 구현한다. 드론이 이동하면서 수천장의 사진을 찍으면 이를 연결해 3D 도면으로 만들 수 있다. 최신 드론으로 오차 범위를 2% 이내까지 줄였다. 책은 고려청자의 뛰어난 빛깔을 디스플레이와 묶어 설명하기도 한다. 중국 송나라 사신들을 위한 길잡이 책 ‘선화봉사고려도경’ 21권에 고려청자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엷은 청색)이라 하는데, 근래 들어 제작 기술이 정교해져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는 내용이다.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비색의 비밀은 흙에 있다. 청자는 점토를 이용해 만든다. 그러나 아무 흙이나 사용하지 않는다. 강진과 부안 지역 논밭의 1m 아래에 있는 태토를 사용한다. 이 태토에 들어 있는 1~2% 철분이 오묘한 색을 낸다. 여기에 유약으로 납이 아닌 나무 재를 바르는 점도 특징이다. 그렇다면 디스플레이 기술로 이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을까. 빛의 삼원색인 빨강, 초록 파랑을 뜻하는 RGB 값으로는 고려청자의 색을 구현하기 어렵다. 그린그레이와 같은 회청색도 아니고, 블루그린처럼 청록색도 아니다. 그러나 최근엔 양자점 발광 다이오드를 사용하는 QLED 기술까지 이르렀다. 정확한 색 구현을 넘어, 휘고 접고 말 수 있는 3차원 형상을 만들어 내는 일도 가능하다. 이 밖에 대동여지도와 사람 없이도 도로 위를 달리는 자율주행차를 비교해 보는 일도 재밌다. GPS 기술을 바탕에 둔 자율주행기술의 발전상을 살펴보며 자율주행기술에서 대동여지도의 가치와 정신이 어떻게 계승됐는지 확인해 본다. 또 탄생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태를 담아 묻었던 조선의 태항아리와 최근 주목받는 냉동 인간과 유전자 가위 등 바이오기술을 교차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고민해 보는 일도 의미 있을 터다. 전통 유산에 담긴 기술들은 그저 지나가버린 게 아니라, 변주하며 현재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발전하는 과학기술은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미래를 가져다줄지 궁금해진다. 전통 유산의 기술을 잘 살펴보면, 미래에 관한 통찰력도 키울 수 있지 않을까.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이천오층석탑 환수, 자선당 유구 찾아 온 삼성의 도움 필요“

    “이천오층석탑 환수, 자선당 유구 찾아 온 삼성의 도움 필요“

    “한국 땅을 바라보며 100년 넘게 서 있는 이천오층석탑을 외면하는 것은 일본제국주의 강제 수탈을 인정하는 꼴 입니다. 이천오층석탑은 우리 것이 명백하고 불법 반출이기 때문에 반드시 돌려받아야 합니다.” 17일 서울신문과 만난 이상구(67) 이천오층석탑환수위원회위원장은 지난 12년 간의 반환운동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며 한숨부터 쉬었다. 이천오층석탑은 고려 초에 만들어진 균형미가 뛰어난 국보급 문화재로 이천 향교옆에 자리했었다. 문화재 수집광이자 일본의 기업인 오쿠라 기하지로의 수중에 들어가 1918년 인천세관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됐다. 이후 도쿄 오쿠라호텔 정원에 평양 율리사 터에서 반출한 같은 고려시대 석탑인 팔각오층석탑과 함께 외로이 서 있다. 이 위원장은 이날 “오쿠라가 경복궁 자선당 유구(기단과 주춧돌)가 1995년 12월 삼성그룹 삼성문화재단을 통해 돌아온 선례가 있다”며 “지난 12년간 불교계와 국회 등 통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진척이 없었다. 실낱 같은 희망이지만 오쿠라호텔측과 친분이 있는 삼성그룹이 이천오층석탑 반환에 나서주면 가능 할 수도 있을 것” 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또 이천오층석탑 반환으로 냉각된 한일관계 개선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경복궁 자선당은 세자가 기거하던 곳인데 1915년 오쿠라 기하치로에 의해 일본으로 헐려 가서 오쿠라호텔에서 ‘조선관’이라는 이름으로 별채로 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소실 되었다. 이후 자선당의 기단과 주춧돌은 불에 그을린 채 방치되다가 1993년 당시 김정동 목원대 명예교수가 찾아내어 다방면의 노력끝에 삼성의 신라호텔이 오쿠라호텔과 자매호텔 관계라는 인연으로 삼성문화재단이 반환 받아서 국가에 기증한 것이다. 이 위원장은 “1918년 오쿠라와 조선총독부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오쿠라는 먼저 이축한 경복궁의 자선당에 꾸밀 석탑이 필요해 평양 전차장 앞 6각 7층 석탑을 요청했지만, 조선총독부는 사람의 왕래가 많다는 이유로 이천오층석탑을 추천했다”며 “총독부의 허가는 이천오층석탑의 명백한 일본 정부차원의 불법 반출의 증거”라고 강조했다. 이천오층석탑환수위원회는 2008년 8월15일 광복절을 맞아 이천시민단체 32개가 발대식을 통해 환수운동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 위원장은 “환수위의 석탑과 고려청자 영구교환, 임대 협상 등의 노력과 32차례의 방일 협상에도 오쿠라문화재단은 이천오층석탑은 법인등록이 된 것으로 돌려주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고 있다”면서 “환수위의 영구임대 제안에 오쿠라문화재단은 보물급 이상 수준의 문화재와 맞교환을 요구하는 등 사실상 거부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여러 번에 걸친 해체·복원으로 훼손이 심한 석탑 이음 부분을 석회로 덧칠하는 등 훼손이 심각하다”며 “오쿠라재단은 석탑 보수 전문가를 보내 보수하겠다는 환수위 측 요청도 거절했다”고 분노했다. 이 위원장은 “지난달 시민 모금으로 환수염원탑을 실물 크기로 제작해 시청 광장에 설치했다. 석탑의 웅장함과 멋을 이천시민에게 보여드려 후대에서라도 이천오층석탑을 환수하자는 결연한 의지를 담고자 했다”고 밝혔다. 엄태준 시장은 “이천오층석탑은 일본이 아닌 바로 이곳, 이천에 있을 때 가장 어울리고,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모형탑이 세워졌다고 말했다. 글·사진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박물관 속 석탑… 쓰라린 역사 품었네

    박물관 속 석탑… 쓰라린 역사 품었네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손정미 지음/경인문화사/260쪽/1만 8000원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1층 로비에는 13m에 이르는 고려 경천사십층석탑이 있다.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 충목왕 시대에 만든 탑으로, 기황후 세력인 강융과 원나라 환관 고용봉의 시주로 세웠다. 안정감을 주는 기단부와 팔작지붕을 얹은 탑신부의 조형미가 빼어나다. 그런데 이 석탑은 왜 경천사가 아닌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을까.일제강점기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는 탑의 사진을 접하고 욕심을 냈다. 그는 1907년 1월 ‘고종이 하사한 탑’이라는 거짓 문서를 내밀고 무장 일본군 200여명을 동원해 반대하는 주민을 진압하고 탑을 해체해 자신의 집으로 실어갔다. 당시 대한매일신보 기사로 이런 만행이 외국에 알려졌지만 다나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1916년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총독이 독촉하자 1918년 마지못해 탑을 조선에 보냈다. 1995년 중앙박물관이 복원 작업을 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들어섰다. 책은 일제강점기와 현재까지 8점의 국보급 문화재를 둘러싸고 벌어진 비화를 실었다. 일본의 국보가 된 조선 막사발의 사연을 비롯해 부여 부소산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반가사유상에 관한 가짜 판정 소동, 세계 인쇄사를 다시 써야 할 만큼 귀중한 고려 금속활자(일명 ‘증도가자’) 논란, 고려청자 가운데 창의적인 유약을 사용한 고려 철채청자에 관한 이야기 등이 생생하다. 저자는 “문화재만으로도 아름답고 귀하지만 역사적 배경을 알고 보면 감동이 몇 배가 넘는다”고 말했다.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읽고 나면 문화재를 보는 눈도 달라질 것이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소문난 미술 애호가”...리움 건립·백남준 후원한 회장

    “소문난 미술 애호가”...리움 건립·백남준 후원한 회장

    25일 별세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고미술 애호가이자 든든한 미술계 후원자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부친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영향으로 미술에 관심을 가진 고인은 다양한 미술품을 수집하고 미술계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특히 문화재에 남다른 애착을 가졌던 고인은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 국보 제217호 ‘금강전도’, 국보 제118호 ‘금동미륵반가상’ 등 국보 20여점을 소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으로는 국내에서 국보를 가장 많이 보유했다. 삼성문화재단도 국보 133호 ‘고려청자동화연화문표주박모양주전자’와 보물557호 ‘신라시대 금귀걸이’ 등 다량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이 회장은 삼성미술관 리움 건립으로 미술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삼성그룹은 지난 1965년 삼성문화재단 설립 이후 수집한 문화유산을 용인 호암미술관 등을 통해 선보였다. 이 회장은 이어 2004년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리움을 개관했다. ‘이(Lee)’와 미술관(Museum)의 ‘움(um)’을 조합해 지은 이름이다. 세계적 건축가인 마리오 보타, 장 누벨, 렘 콜하스가 설계를 맡아 화제가 된 리움은 수준 높은 소장품과 전시로 한국을 대표하는 사립 미술관으로 자리 잡았다. 리움은 문화재뿐만 아니라 국내외 거장들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고인의 부인 홍라희 전 관장이 이끈 리움은 대형 전시 개최와 작가 지원으로 한국 미술계에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인은 미술 작가 지원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이 회장과 깊은 인연이 있는 대표적인 예술가는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다. 1987년 이 회장은 백남준과 처음 만났으며, 이후 삼성전자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공식 후원했다. 이후 일본 소니 제품을 사용했던 백남준은 삼성전자의 TV모니터로 작품을 제작하게 됐다. 국내 작가인 이우환도 삼성이 해외 전시 등을 후원했다. 이우환은 구겐하임미술관 회고전 등으로 세계적인 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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