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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인의 도기문화(백제를 다시본다:7)

    ◎7세기초 유약 입힌 녹유기 첫 등장/능산리출토 기대,뛰어난 제조술 입증/통일 신라에 이어 고려청자에도 영향/불상대좌·벼류등 많은 융제품 남겨… 동아시아 문화대국으로 우뚝 백제역사에서 사비시대(AD538∼660년)는 문화의 황금기다.부소산 남쪽에 왕궁이 건조되고 외곽에는 나성을 쌓아 왕도의 모습을 갖추었다.부여에는 정림사,익산에는 미륵사가 세워졌으며 부여릉산리에 고분이 영조된 것도 이 시기다. ○선진적 생산기법 사비시대 문화 가운데 간과할 수 없는 분야가 있다면 도기문화도 그 하나로 꼽힐 것이다.인간은 태초를 약간 비켜난 신석기시대부터 진흙을 이겨 그릇을 구워냈다.그러나 도기문화,다시 말하면 질그릇문화는 그릇의 생김새에서 찾아지는 감각적 예술성,얼마나 강한 그릇을 구워낼 수 있는가에 대한 기술성에 따라 가늠되었다.사비시대 백제인들은 뛰어난 감각과 기술을 가지고 도기문화를 발전시켰다. 사비시대 백제도기에서 주목할 그릇은 녹유기다.강도가 높은 질그릇에 녹갈색의 유약을 입힌 이 그릇은 7세기 초기에 나타난다.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녹유그릇받침(기대)이 바로 그것이다.이 그릇은 조각으로 출토되었으나,복원작업을 거친 결과 나팔모양을 한 녹유그릇받침으로 판명되었다.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질그릇에 유약을 입히는 기법의 도기라 할 수 있다. 이 선구적 질그릇인 녹유기는 통일신라로 이어져 널리 사용되기에 이른다.위에 톱니바퀴 모양의 장식이 있고 세로로 붙은 와선무늬 장식의 띠 사이사이에 구멍이 뚫린 그릇받침은 사비시대 백제 녹유기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질그릇에 유약을 입혀 녹유기를 구워내는 백제 도공들의 생산기술은 가히 선진적이었다.그릇에 유약을 입히는 시유술은 뒷날 고려청자와 같은 본격적 도자기를 생산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익산 미륵사 절터에서도 7세기 전반쯤의 도기들과 기와편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모두 표면에 녹갈색의 녹유를 입혔다.녹갈색의 산화연을 저화도에서 입히는 방식으로 녹유를 시유했다.녹유가 시유된 기와에서 백제는 7세기 전반쯤에는 그곳 말고도 기와와 같은 도제품에 녹유를 보편화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그 녹유가 결국은 통일신라에 널리 전파되는 것이다. 백제도기나 도제품의 우수성은 생산기반시설과 견주어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7세기 전반에 과학적인 질그릇 가마를 만들었다.지난 86년 사비성 고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청양 본의리 한 구릉에서 발견한 반지하의 계단식 등요가 그 시기의 가마다.바닥은 계단식이고 가마벽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가마의 길이는 7.4m,폭 1.4m내외,천장은 가장 높은데가 1.5m에 이르고 있다. 이 가마에서는 놀라운 유물들이 출토되었다.도제의 불상대좌 조각들이 대량으로 발견된 것이다.이들 조각을 꿰맞추어 복원해 낸 대좌를 보노라면 절로 감탄할 수밖에 없다.옷자락을 펼치고 앉은 모양(상현좌)을 한 대좌는 예술품이다.옷자락이 늘어지고,또 주름이 더러 잡혀있는 이 대좌는 흙을 구워만든 딱딱한 도제품이 아니라 포근하고 부드러운 비단의 질감을 안겨주고 있다. ○높이 1m의 대작 대좌는 높이 1백㎝,너비 2백80㎝나 되는 장대한 것이어서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제작,조립하는 수법을 썼다.이 제작기법에서도 백제인들의 지혜가 엿보인다.대좌가 이렇듯 아름다울진대,대좌 위에 안치되었을 부처님은 어떤 형상이었을까.결가부좌하고 앉아 계실 백제 특유의 자비로운 부처님모습이 떠오른다. 청양 본의리 출토품 불상대좌와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도제유물들은 더 있다.지난 80년대 부여 정림사 절터에서 나온 도용들은 매우 주목되는 도제품으로,특히 인물상들이 이채롭다.농관,물결이 치는듯한 머리카락,깊은 눈과 높은 코 등이 서역적인 풍모를 보여준다.이들 테라코타는 사비로 도읍을 옮긴 직후인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중국 북위에서 유행한 이들 유물로 미루어 백제는 활짝 열린 서해라는 해상루트를 통해 남조와는 물론 북조와도 활발한 문화교류를 해온 것으로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사비시대 백제의 도기와 도제품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와류다.국립부여박물관이 최근 발굴조사한 부여 정암리 기와가마터(와요지)가 기와류를 만들어 낸 대표적 유적으로 부여 시가지 남쪽 백마강 언덕에자리하고 있다.언덕의 석비레층을 파고 들어가 터널식으로 구축한 굴가마들이다.길이 4.5∼6.5m 크기의 평요 2기와 등요 2기 이외에 작업장까지 발견되었다. 이들 가마군에서는 주로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해 망새편,암수키와 등의 기와류가 주로 나왔다.그리고 상자형 전돌과 자배기,벼루 등도 출토되어 도와전류는 물론 도기류까지 생산한 중요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오늘날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대할 수 있는 도제유물의 얼마쯤은 정암리 가마에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문화가 발전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사비시대가 백제문화의 황금기라면 도기나 도제품의 수요가 왕성했을 것이다.이는 백제의 도기제조술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흔히 호자로 불리는 부여 군수리 출토도기인 소변기로부터 뼈항아리 골호에 이르기까지,또 일상용기와 종교적 성물인 불상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그리고 궁궐과 사찰 건축에 따른 거대한 망새(시미)나 기와류,산경산수문전처럼 아름다운 벽돌이 있다.때로는 도기와 도제품은 껴묻거리(부장품)의기로 수요되기도 했다. ○와전토 존재한듯 백제 도기항아리는 어깨가 넓어 광견호라는 이름의 항아리.발이 셋 달린 삼발이항아리,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등 여러 기형이 있다.목이 긴 병을 비롯해 자라병이 있는가 하면 바가지모양의 도기,등잔,잔,삼발이잔,주전자,동물모양의 그릇 등 백제도기는 실로 다양한 형태를 이룬다.납작한 원형판에 마치 동물의 다리를 연상시키는 다리가 다닥다닥 이어진 사비시대의 도제품 벼루는 뒷날 통일신라와 일본에 전파된다. 이들 명품은 고대사서가 기록하고 있는 백제 기술집단의 하나인 와박사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켜준다.백제의 기술집단은 사비시대 사회가 요구하는 보다 많은 문물을 창출함으로써 백제를 동아시아의 문화대국으로 우뚝 세웠다.특히 당시 도기제조술이 이룩해 낸 백제 최초의 녹유기가 나온 능산리에서 김동용봉봉래산향로가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도기 제조솔/질그릇 가마 과학적으로 축조/경사지 반지하식 등요… 고화도 유지 백제의 도기제조술은 아주 뛰어났다.특히 사비시대의 백제는 도기표면에 녹유를 입히는 선진기술을 습득함으로써 다른 주변국가를 압도했다. 사비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도기나 도제품을 제작한 가마터(요지)는 현재 충남 청양 본의리(7세기 전반),부여 정암리(7세기),전북 고창 운곡리와 익산 신용리(6세기 중반),전남 영암 구림리(6∼7세기)등에 남아있다.이들 가마터는 모두 80년대와 90년대 접어들어 발견되었다.사비시대 가마들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상당히 과학적으로 축조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비시대 가마들은 거의가 경사진 언덕을 따라올라가 축조한 반지하식 등요로 이루어졌다.이는 고화도를 효율적으로 유지,보다 견고한 도기를 만들기 위한 과학적 방법이라 할 수 있다.청양 본의리 등요는 오늘날에도 사용하고 있는 재래식 사기가마처럼 계단식등요로 밝혀졌다.사비시대 이전의 가마 거의가 평요이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익산 신용리 가마는 반지하식 등요로 천장평면은 독사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이와 같은 형식은 일본의 스에무라(도읍)가마군으로 연결되었다.영암 구림리에서 발굴된 가마 역시 반지하식이고 평면은 독사머리를 했다.다만 영암 구림리 가마는 고화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창불구멍을 낸 것으로 조사되어 기능상 한단계 더 발전한 가마로 여겨진다. 사비시대 이전의 가마터도 더러 남아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전남 승주 대곡리(3∼4세기),충북 진천 산수리(4세기)등이 이시대의 가마다.이러한 최근의 발굴자료들은 3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동안 백제 도기가마의 변천및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다.
  • 탁월한 백제공장들(백제를 다시 본다:4)

    ◎“6∼7세기 문화선진”… 신라·일에 기술 전원/황룡사 9층탑·안압지 백제장인 손길/와·노반박사 일서 가람 짓고 향로 제조/금속공예·건축기술 당시론 최고수준… 장인들은 관인으로 대우 신라통일기 장인들의 탁월한 기량을 얘기할 때 흔히 거론되는 것이 이른바 만불산이란 공예품이다.신라 경덕왕은 당나라의 대종황제가 불교를 숭상한다는 소문을 듣고 공장에게 명하여 만불산을 만들게 했는데,「삼국유사」에는 그 모양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만불산은 한 발쯤 되는 가산에 험한 바위와 괴이한 돌,동굴을 장치하여 여러 구역을 만들었다.각 구역마다 춤추며 노래하는 사람의 모습과 각국의 산천형상을 새겨넣어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벌과 나비가 날고 제비와 참새가 춤을 추어 언뜻 보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궁남지 본떠 건립 그 뿐이 아니다.그 한가운데는 크고 작은 만불을 안치하고 주위에는 각종 장식품,천여구의 승려 조각과 누각 그리고 자줏빛 종을 벌여놓았다.바람이 불어 종이 울면 승려들이 모두엎드려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은은히 염불하는 소리가 나도록 기막히게 장치되었다고 한다.그리하여 이 만불산을 선물로 받은 대종은 『신라의 기교는 하늘의 조화이지 사람의 기교가 아니다』라고 깊이 탄복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같은 신라의 기술은 본래 백제로부터 전수받은 것이었다.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신라의 호국사찰 황용사 9층탑을 제작한 것은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였다.신라는 삼국통일 직후 왕궁 옆에 못을 파서 안압지를 만들었는데,그 의장이나 기법은 모두 백제의 궁남지를 본뜬 것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무왕 35년(634)3월에 궁성 남쪽에 못을 파고 물을 20여리나 끌어들여 궁남지를 만들었는데 못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속에 인공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에 비겼다고 한다.뒤에 못가에 망해루를 지어 국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연회를 즐겼다.이기백선생이 추리하듯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사비도성에 입성한 신라의 최고지배층은 이 궁남지와 망해루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듯하다. 그리하여 당나라를 상대로 한창 피나는 전쟁을 치르는 긴박한 상황속에서도 서둘러 안압지와 임해전을 축조했다.앞서 얘기한 경덕왕때 황룡사 연기법사의 발원으로 화엄경을 베끼는 사경작업이 진행되었는데,16년전 세상에 공개되어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화엄경사경의 발문을 보면 광주,남원,장성,고부등 옛 백제지역 기술자들이 종이를 만든다거나 경문을 쓰는 일을 맡았던 것이다.백제는 그 지리적 조건에 힘입어 일찍부터 여러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흡수했다.건국 초기에는 북쪽에 인접한 낙낭군을 통하여 중국 한대문화를 받아들였다.낙랑군이 멸망된 뒤로는 고구려와 접촉했다.그런데 고구려는 중국 뿐아니라 만리장성 이북의 유목민족과도 접촉이 많았기 때문에 백제는 고구려를 통하여 야성적인 호주문화까지 받아들인 셈이다. 한편 백제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서해안을 끼고 있어 일찍부터 해상교통이 발달하여 바다 건너 양자강유역의 세련되고 우아한 중국 남조문화와 접촉했다.백제문화의 특징은 이처럼 각지에서 흘러들어온 외래문화에 끊임없이 자신의 독자적인 미의식을 가미하여종합하려고 한 점에 있다.삼국 중 가장 기름진 농경지를 확보하고 있어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즐겼던 백제였던 만큼 느긋한 마음으로 풍요로운 예술을 꽃피울 수 있었다. ○기술자 박사 칭호 흔히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고대의 기술자들을 한결같이 노예계급으로 보면서,삼국시대의 명품들은 어디까지나 지배층에 강제된 노예노동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그러나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견해이다.삼국시대 및 통일기 신라의 기술자들은 국가로부터 전문 박사칭호를 부여받았을 뿐아니라 관등까지 받은 어엿한 관인신분이었다. 일본측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실로 많은 백제 기술자들이 등장한다.6세기 초 이래 백제로부터 일본조정에 유교경전이나 의학,역학,역학을 지도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끊임없이 파견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뒤로는 사찰건물이나 불상,기와,향로를 제작하기 위해 노반박사,와박사 등이 파견되었다.현재 알려져 있는 수많은 금동제 불상이나 무령왕릉에서 나온 각종 금속제품을 통해서 알수 있듯이 당시 백제의 금속공예기술은 최고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서기 588년 일본왕실의 외척으로 권세가였던 소가(소아)씨가 법흥사(일명 비조사)건립에 착수했을 때는 실로 많은 백제의 일급 기술자들이 초빙되어 갔다.당시 일본에 건너간 노반박사 백매순은 덕장이란 관등을 갖고 있었는데,그는 문헌기록을 통해서 확인되는 유일한 백제의 금속공예기술자이다.한편 「원흥사가람연기변류기자재장」에는 그를 「누반사」백매순이라 표기하였는데 이는 그가 다름아닌 누금세공기술자였음을 말해주고 있다.누금세공이란 금판와 금입에 금판을 붙이는 방법이다. 사비시대의 백제는 대외관계에 있어서나 국내정치면에서 실로 다사다난한 때였다.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백제가 그동안 축적한 기량이 최대로 발휘된 일대 황금시대였다.바야흐로 국교의 지위를 차지한 불교가 이 시기 백제문화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한편으로는 도교사상이 스며들어 전란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유토피아사상이 싹트게 했다. ○문화 견인차 구실 야심만만한 정복군주였던 무왕은 불교와 도교 모두에 심취해 있었다.그가 궁남지에 인공섬을 만들어 방장선산에 비긴 것은 도교사상에서 영향받은 것이다.한편 그가 전북 익산 금마에 미륵사를 창건한 것은 유명한 사실인데 이밖에도 그는 부소산성과 마주보고 있는 금강 대안의 울성산성 근처에 또 하나의 호국사찰을 완공했다.바로 왕흥사였다. 왕흥사는 오랜 공사끝에 무왕 35년(634)2월에 낙성되었는데,왕은 때때로 이 절을 찾았다.무왕은 먼저 금강 언덕에 있는 바위에서 멀리 부처를 바라보며 예불을 한다음 배를 타고 절에 가서는 법회에 모인 승려들에게 향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향을 피워 부처와 보살을 공양하기 위해서였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그토록 융성했음에도 불구하고 향을 피우는데 필수적인 이 시대의 향로가 발견되지 않은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었다.마침 작년 말에 부여 능산리에서 금동향로가 나온 것은 기적같은 느낌이 든다.의장의 풍부함이라든가 현란한 장식성으로 볼 때 문득 신라의 만불산을 연상케 하는 이 진품의 작가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 끝내 유감일 따름이다. ◎백제 기술집단/노반박사는 금속공예의 명인/와박사도 뛰어난 녹유계통의 토기 만들어 우리는 오랫동안 일본의 기록을 통해 백제의 기술과 공장들의 모습을 가늠해 왔다.그러나 최근 이루어진 고고학 발굴에서 그 생생한 백제 기술의 실상을 비로소 가늠하게 되었다.그 대표적 케이스의 하나가 지난해 연말 부여 능산리 출토 금동용봉봉래산향로라 할 수 있다. 세기적 보물이기도 한 능산리 금동향로의 출현은 백제의 기술과 우선 노반박사의 존재를 떠올리게 했다.「일본서기」등과 같은 일본쪽 기록에 보이는 백제최고 기술집단의 하나인 노반박사는 금속공예의 명장이고,바로 능산리 금동향로를 제작한 기술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들의 활동은 불교미술에도 큰 영향을 끼쳐 불상이나 탑의 상륜부 등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일본 나라(나양)의 이소노카미(석상)신궁에 비장된 백제전래품 칠지도는 백제의 금속공예술이 이미 상당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새김글씨를 금으로 상감한 4세기경의 칠지도는 금속의 정련과 주조기술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따라서 6∼7세기경 사비시대 백제의 기술은 능산리 금동향로를 만들어낼 만큼 더욱 발전되었다.심미안적 세공에 의해 제작된 틀,소재의 정선,주조술,가공,도금술이 어울려 이룩한 걸작의 종합금속예술품이 능산리 금동향로인 것이다. 그리고 와박사 역시 넓은 영역에 걸쳐 활동한 공장이다.단순히 건축물의 지붕을 덮는 기와 뿐 아니라 테라코타불상,토기 제작에 관여했을 것이다.특히 삼국 가운데 기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녹유계통의 토기를 만들어 낸 이들도 바로 와박사로 보여진다.녹유토기는 후대 고려청자의 모태를 어느 정도 이루었고,사비시대 백제의 대가람이었던 익산 미륵사 터에서 발견되고 있다.
  • 일본에 감춰둔 한국문화재 많다

    ◎국제교류재단,「일본소장 한국문화재 1」 도록펴내 실상 밝혀/도쿄 등 세 박물관에만 3천6백점 소장/재일 한국유물목록서 1천점이상 빠져 일본에 건너간 우리나라 문화재 상당량이 아직도 공개되지않은채 박물관 수장고 속에 깊숙이 비장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이는 지난 91년과 지난해등 2차례에 걸쳐 일본지역 3개 박물관을 대상으로 한국유물 소장실태 조사에 나섰던 한국국제교류재단(이사장 손주환)이 24일 그 일부로 문화재도록을 펴냄으로써 밝혀지기 시작했다. 국제교류재단이 조사대상으로 삼았던 박물관은 도쿄국립박물관을 비롯,일본민예관·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등 3개소다.예용해문화위원을 단장으로 김광언교수(인하대·민속학) 윤용이교수(원광대·도자미술사) 유홍준교수(영남대·미술사)등 문화재 전문가 4명이 조사에 참여했다.이들의 조사에 따르면 도쿄국립박물관에는 2천여점,민예관에 1천5백여점,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에 1백여점 등 모두 3천6백여점의 우리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오사카동양도자박물관에소장된 1백여점의 도자기는 거의 국내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명물중의 명물들이다.거의가 국보급에 해당하는 이들 유물은 일본이 자랑하는 한국문화재들이다.지난92년11월 고려청자를 비롯,조선분청과 사기등을 포함한 일부 유물을 보여주는 명품전을 개최,세계 도자기 애호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은바 있다. 또 도쿄국립박물관에는 일제시대 대구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재를 전문으로 수집했던 오쿠라(소창무지조)의 컬렉션 1천여점이 들어있다.이 가운데는 가야와 신라의 고분유물과 금동제장신구·무구류·토기등이 포함되어있다.이밖에 고려청자·조선 분청사기와 백자등의 도자명물도 컬렉션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국립박물관측은 오쿠라컬렉션 1천점 말고 나머지 한국유물 1천점에 대한 공개는 꺼린 것으로 전해졌다.그러나 조사단은 다른 경로를 통해 소장품리스트를 입수,도쿄박물관 소장 한국 문화재의 실상을 벗기게 됐다는 것이다.여기에 포함된 유물은 한·일회담 당시 일본이 제시한 한국문화재목록에도 들어있지 않아 외교적인 쟁점이 될 소지도 안고 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은 이들 문화재 가운데 일본 민예관 소장품으로 구체적인 사진자료가 입수된 3백16점의 사진을 모아 「일본소장 한국 문화재1­일본 민예관편」을 발간했다. 이 도록에는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열·1889∼1961년)가 19 36년에 개관한 일본민예관 소장 우리 문화재 가운데 회화 53점,도자기 1백40점,목공예 56점,주전자·맷방석·비 등 기타 67점의 사진과 일본민예관 소장 한국문화재 1천5백점의 목록이 수록돼 있다. 우리 문화재를 직접 대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안고 그림으로나마 다시 우리의 것을 보게 되었다.
  • 강연/경매/전시/고미술품 복합전시

    ◎김정희 서화 등 애장희귀품 93점 모아/「민족문화유산」 애호가 저변확대 겨냥/“외국사 진출따라 경매제도 정착의 디딤돌로” 고미술업계가 오랫동안 계속된 불황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구책으로 「계유송년 고미술품 교환경매전」을 마련했다.국내 골동가를 대표하는 한국고미술협회가 주최한 이 행사는 서울 인사동 고미술협회 특설화랑(732­2240)에서 지난11일 개막,17일까지 작품을 전시하고 이날 하오3시부터 교환경매에 들어간다. 출품되는 고미술품은 93점.작품숫자는 올해가 93년도이기 때문에 여기에 맞추었다.도자기 38점·서화 26점·목기 18점·금속 5점·석물 3점·민속품 3점등 고미술협회 8백여 회원들의 애장품가운데 정선을 거듭하여 내놓은 희귀고미술품이 상당량 들어있다. 도자기의 경우 한국도자기의 발전사를 조망할 수 있도록 전시품목을 배려했다.고려청자부터 조선시대 분청사기로 이행되는 과정은 물론 백자의 세계까지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구름과 학이 있는 청자운학문매병(청자운학문매병),작은 꽃들이 앙증스럽게박힌 분청사기인화문대접(분청사기인화문대접),순백의 백자항아리(백자호),용이 꿈틀대는 듯한 청화백자용문항아리(청화백자용문호)등의 명품들이 나와있다. 서화부문에는 조선시대화가 박기순의 색깔고운 영모도,심사정의 산수도가 눈에 띄며 근현대 한국화단을 풍미했던 장승업·김은호·이상범·이응로·변관식의 그림이 저마다 독특한 화풍을 자랑하고 있다.또 추사 김정희가 활달한 필치로 쓴 대련칠언시도 빠뜨릴 수 없는 명품으로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공예부문에서는 고려시대 금속공예의 진수인 청동정병이 눈길을 끌고 있으며 조선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이 삶의 흔적으로 남긴 가구와 떡살·다식판등 각종 목공예품들이 애호가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 고미술품 교환경매전은 여느 전시회와 달리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전시회를 통해 고미술 애호인구의 저변확대를 꾀함과 동시에 관련학자인 허영환교수(성신여대 미술사)를 연사로 초청,전시장에서 학술강연회(17일하오1시)를 열고 곧바로 경매에 들어 가는것.즉 전시회·강연회·경매등 세가지기능이 연속적으로 복합된 이례적인 행사를 갖는다는 점이다. 한국고미술협회는 이번 행사를 계기로 고미술경매를 정례화할 계획이다.가격이 공개되는 밝은 거래가 경매라는 사실을 중시한 협회측은 경매제도가 정착할 경우 새로운 유통질서 확립과 함께 민족문화유산의 가치를 더욱 드높이는 효과를 거둘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특히 소더비 크리스티등 외국 미술품경매회사의 국내진출에 따라 고미술업계는 자칫 자신들의 입지가 위축될 것에 대비하여 고미술 경매제의 정착을 서두르게 됐다고 배경을 강조하고 있다.
  • 인사동 골동품상가/신라토기서 조선가구까지 다양(전문상가)

    ◎40여곳 밀집… 고려청자 소품 20만원선 언제부턴가 골동품을 실내장식에 이용하는 예가 많아졌다.우리의 옛 미의식을 간직하고 있는 골동품은 수집 취미의 대상으로 뿐만아니라 쉽게 싫증이 나지 않는 은은한 아름다움으로 집안을 꾸미는데도 톡톡히 한몫을 거든다. 이에따라 서울 인사동 골동품상가를 드나드는 일반인의 발길도 늘고 있다.「인사동 거리」하면 으레 골동품을 떠올릴 정도로 인사동은 골동품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곳.안국동과 종로2가를 잇는 대각선도로 양편 인사동및 관철동 골목에는 화랑·표구상·필방 등과 함께 40여곳의 골동품 점포가 줄지어 들어서 있다.진열돼 있는 골동품은 신라시대 토기에서부터 조선시대 가구에 이르기까지 우리 선조들의 내음이 밴 간단한 집기와 생활용구를 비롯해 도자기·가구·서화류 등 종류가 다양하다. 구한말 가세가 기울어 가던 양반들이 거간꾼들을 통해 집안의 가보들을 하나둘 내다 팔던 이곳은 일제시대에는 일본이 골동품을 사들이는 집산지가 됐으며 광복이후부터 본격적인 골동품상가로서의면모를 갖추게 된다.이후 성장을 거듭해 70년대말 전성기를 이뤘다가 제2차 석유파동으로 내리막을 걸어왔다.그러나 2년전부터는 서울 장안평 골동품상가의 침체로 상대적인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주로 들르는 고객은 미적감각이 뛰어난 30대후반에서 40대중반에 이르는 장·중년층.80년대 들어서부터는 원화 가치의 상승으로 외국인은 그리 많이 찾지 않는 대신 골동품에 대한 안목과 소양은 전문수집가에 뒤지나 순수하게 골동품을 장식용 등으로 즐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크게 늘었다는게 두초이갤러리 주인 최명언씨의 설명이다. 이에따라 그다지 비싸지 않은 소품들도 크게 인기다. 일반인들은 골동품은 굉장히 값비싼 것으로 생각해 인사동거리를 숱하게 지나면서도 진열대에 눈을 돌리지 않지만 생각보다 싼 골동품들이 의외로 많다.먼저 토기는 연대가 오래된데 비해 가격이 매우 싼편이다.1천년이 훨씬 넘은 신라시대 토기가 15만∼20만원선.고려시대 상감청자와 질그릇도 10만∼20만원선이면 구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 접시류도 최하 3만원선부터 20만원까지 싼 것들이 다양하게 나와있다. 전문성이 많이 요구되는 고서화의 경우에는 초보자에게 무난한 10만∼20만원선의 간찰(편지글)들을 쉽게 구할수 있다.이밖에 7만∼20만원하는 조선시대 다식판,8만∼15만원하는 호족반(소반),20만원 가량하는 창호로 장식적 효과를 한껏 낼 수도 있다.이와 같은 가격대는 80년대에 비해 별로 오르지 않은 것으로 현재 약보합세를 유지하고 있다. 최씨는 초보자가 골동품을 고를때는 『희소성·보존상태·연대 등을 참고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자기의 취향을 스스로 비하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대마도의 토속신앙(일본속의 한국문화:6)

    ◎돌 쌓은 소도 해변에… 우리풍습 그대로/우리땅 향해 세워… 제사도 서낭당제와 비슷/“죄인 숨어도 못잡는다” 고속 이곳에도 남아 백제산성보다 훨씬 더 원초적인 우리나라 고대문화유적이 대마도에 남아 있다.그냥 죽은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고 있다.바로 소도가 그것이다.소도는 흔히 솟대라고도 부르고 있는데 두가지 형태가 있다.그 하나가 긴 장대위에 세마리의 새를 조각하여 올려 놓은 목제소도이고 다른 하나는 돌을 차곡차곡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린 적석(돌무더기)소도가 그것이다.이 두 가지 소도는 옛날에 우리나라 어느 고을이나 마을에 반드시 수호신으로 설치되어 있었던 것인데 최근에와서야 새마을운동을 한다고 많이 헐려서 지금은 산간벽지나 바닷가 어촌 그리고 섬마을에만 남아 있다. ○삼근마을에 위치 정 대마도에도 이 적석소도가 남아 있는데 일명 석탑이라 불리고 있다.대마도의 소도는 우리나라 남해안과 면한 이섬의 서해안에 특히 많이 남아 있다.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나 이곳에서는 마을마다 매년 여름에 보리농사를 마칠 무렵 「야쿠마제」라는 하수감사제를 올려왔다.6월초오일이다.이날 하루는 각자 돌을 날라서 탑을 쌓고 치성을 드리며 말타기와 씨름을 하면서 즐겁게 하루를 보내게 되어있다. 우리가 찾아 간곳은 대마도의 윗섬에 있는 삼근정,일명 봉정(미네정)이라는 고을이다.미네(삼근)란 세 뿌리란 뜻이어서 삼신신앙과 관련이 있고 또 봉이라 전사하여도 천신산이 있는 고을이란 뜻이 되어 그 원의를 살려 주고 있다 할 것이다. 우연치않게 우리를 안내해주고 있는 아비류(아비루)씨와 영류씨의 고향이다.특히 아비류씨는 대마도주 종가가 이 섬을 지배하기 이전의 호주으로서 다분히 우리나라에서 바다를 건너 이 섬에 정착한 여기서 말하는 소위 도래씨주이다.지금도 대마도에서는 아비류씨의 세력이 막강한데 우리로서는 여간 대견스럽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다.참고로 말해 두어야 할 것은 이 아비류씨 고가에서 세종대왕 한글 창제이전의 옛 한글 38자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이 문자를 일본에서는 아비류문자로 알려지고 있고 일면 신대문자라고도부르고 있다.이 문자 하나만 가지고서도 소도가 있는 마을 미네(삼근)정의 유래와 대마도의 호주 아비루씨의 뿌리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삼근정에는 이 고을 독자의 역사민속자료관이 있고 유물들이 가득 전시되어 있으나 사진찍는 것만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그냥 보기만 하고 돌아섰다.그리고 대망의 대마도 소도를 보러 떠났다.소도는 우리나라를 건너다 보는 바닷가에 하나가 아니라 서너개 무더기로 서 있었다.어쩌면 그렇게도 정답게 고개를 북쪽으로 돌려서 있는지 갑자기 향수를 느끼는 듯한 기분이 들어 가슴이 뿌듯했다. ○신사에다 모신 곳도 『역사는 가고 없으나 이름만은 남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 옛날 이곳 대마도를 찾아온 님들의 발자취는 지워져서 없으나 돌무더기 솟대만은 남아서 우리를 반겨주고 있는 것이다.소도가 있는 해안가를 지나 조금 들어 가면 거기 또 하나의 신라금동불이 우리를 반긴다.김동불뿐만 아니다.동검 동모 동경을 비롯하여 토기 고려청자까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물론 소도보다 훨씬 뒤에 조국에서 가져온보물들이다.그들이 훔쳐 왔든 사왔든 그것은 모두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제품이다.이렇게 귀중한 보물을 간직한 신사의 이름이 해신신사인데 뒷산 이름은 이두산(이즈산 즉 성산,천신산)이라 한다.이 이즈산에서 북쪽을 내려다 보면 바닷가에 소도가 서있고 바다 건너에는 우리나라 산들이 아롱거린다.왜 바다신을 모시려 했는지 알법도 하다.바다신이 아니라 바다건너에 보이는 조국의 신이 곧 바다신으로 변한 것임을 알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도를 쌓아 바다 건너 조국을 바라 보고 서 있는 망향의 신사가 이밖에도 여럿 있다.모두 대마도 서해안에 자리잡고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이 섬 최북단의 좌호천도신사이고 다른 하나는 최남단의 두두(소두)의 천도단이다.둘다 경내에는 본당이 없고 돌로 쌓은 신단만 있다.다시 말해서 당집이 없고 제단과 소도 그리고 성스러운 수풀(성림)만 우거져 있는 것이다. 일본학자들은 일본신도신앙의 원점을 대마도의 이 천도신앙으로 보고 있다.그렇다면 이 천도신앙의 원점은 어느 나라에 있다는 것인가.두말할 나위도 없이 한국의 단군신앙이 그 원점이다. 대마도를 지금 쓰시마 즉 「두 섬」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말의 본래 뜻은 우리나라 말의 「다물」(다물)이라는 설이 또한 있다.쓰시마가 우리의 「두섬」이란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까지 완강히 부인하는 그들이기 때문에 「다물」이 대마도의 원명이라고 하면 성을 낼지도 모를 정도로 거부감을 갖는다.과연 옳은 태도인가. ○“삼한시대 유물” 놀라 앞서 지적한 대마도 최남단의 천도신사는 우리나라 삼한시대의 소도가 그대로 이 곳의 신앙으로 옮겨져 온 것인데 그 이름까지도 소즈(졸토)즉 소도란 말로 사용되고 있다.이 소즈만은 상설화되어 있으나 나머지 바닷가의 소도제 즉 소위 야쿠마제는 해마다 파도에 휩쓸려 쓰러지기 때문에 다시 쌓아 복원하고 그러고나서 그 앞에다 고기와 술을 놓고 마을 사람 모두가 절을 하며 음복까지 한다.우리나라 서낭당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집수리를 할때 흰 쌀에 흰 소금 그리고 흰 무를 상에 올려놓고 맹승이라는 무당이 만신이름을 연호하는 광경도 우리 산신제를연상시키는 것이었고 『밤에 손톱을 깎지 말고 휘파람을 불지 마라』는 우리나라 속신까지도 고스란히 대마도에 건너가 있다. 놀라운 것은 범인이 소도를 모신 성역에 도망해 들어가면 아무도 그를 붙잡지 못한다는 삼한시대 고속이 이곳에 남아 내려 왔다는 사실이다.민속신앙은 본고장을 멀리 떠나면 떠날수록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여기서 다시 확인할수 있었다.이렇게 볼때 대마도는 가깝고도 먼 섬이 아니라 가깝고도 가까운 섬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 문화재 도굴단 일당 7명 검거

    【마산=강원식기자】마 산동부경찰서는 24일 김해군 일대 가야고분을 도굴하는등 전국을 무대로 문화재를 도굴해온 이정호씨(40·마산시 회원구 회원1동)등 7명을 붙잡아 문화재 보호법위반 혐의로 입건,조사를 벌이는 한편 도굴품인 고려청자 21점과 이조백자 2점,가야토기 45점등 모두 68점의 문화재를 증거물로 압수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등은 이날 새벽 김해군 주촌면 원지리 뒷산 가야시대 고분군에서 토기 6점을 도굴하는등 전국을 무대로 각종 고분을 도굴한 혐의다.
  • 맹인재작 「생활용품세트」/공예품 경진대회서 대상

    제23회 전국공예품 경진대회에서 영예의 대상은 고려청자의 상감기법과 양각을 이용,문양처리한 「생활용품 소품세트」(맹인재씨 작)로 결정됐다. 금상은 오세준씨가 출품한 「목재생활용구 세트」가,은상은 전통풍속을 소재로 한 장식품 「한국의 미」(권대렬씨 작)와 전통문양을 활용한 「실크 신변장신구」(황갑수씨 작)가 각각 차지했다.동상은 각 나라 꽃을 소재로 한 「세계의 나라 꽃 장신구」(양승석씨 작)등 10개가 선정됐다. 이 대회는 공예품의 수출상품화를 위해 중소기업진흥공단이 지난 71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다.이번 대회에는 전국 15개 시·도에서 6백3종,1만5천14점이 출품돼 입선 6천2백10점,특선 1천9백11점,장려상 1천7백55점이 뽑혔다.선정된 작품은 30일부터 한국종합전시장(KOEX) 대서양관 제5전시실에서 다음달 10일까지 전시된다.
  • 수출구조 소비재중심 전환(오늘의 북한)

    ◎고부가제품보다 토산품 등에 승부걸어/인삼화장품·송이버섯·한약재 등 주력상품화/“조선특산”·“강장­항암­장수 특효”대대적 선전/작년 9억불 수출에 수입은 15억불 규모 북한이 최근 수출을 늘리기 위해 토산품·한약제등 온갖 상품들을 내놓고있다. 이는 대외무역 활성화를 통해 외화를 한푼이라도 더 벌어들이지 않으면 안될 만큼 북한이 당면한 경제적 어려움이 심각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북한은 특히 소비재 생산과 수출에 전력투구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과거 주력 수출품목이었던 석탄등 광물류와 철강·아연괴 등 중화학제품이 에너지 부족과 투자부진에 따른 설비노후화로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측이 국제 소비재 시장을 겨냥,「조선의 특산」이라는 식으로 희소성을 강조하는 독특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도 과거와는 달라진 모습이다.높은 기술수준이 요구되는 고부가가치 제품보다는 천연원료로 제조한 토속제품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개성산 인삼으로 만든 주류와 화장품 및 약품 등이대표적 사례다.인삼화장품만 해도 수출용으로 인삼크림·인삼살결물(스킨로션)·인삼향분(파운데이션)등 수십가지를 생산,수출하고있다.북한당국은 『얼굴색이 맑아지고 피부세포의 노화를 막는데 특효가 있다』는 식으로 대외적으로 선전하고있다.「인삼보양알약」「고려인삼황」「고려인삼정액」 등의 이름으로 수출시장에 나와 있는 인삼약품의 경우도 어김없이 『강장제,항암제,보신제,장수제로 특효』라는 식의 구매유인 광고 문안을 첨부하고 있다. 함남 신창지방의 소나무 숲에서 생산되고 있는 송이버섯도 일본 등으로 수출되는 토속품이며 만수대창작사 소속 도예가들이 만드는 도자기제품을 북한측은 「현대고려청자기」「현대백자기」라는 이름으로 해외시장에 내놓고 있다. 90년대 이후 개발된 북한의 주요 수출품으로는 각종 한약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중 두꺼비의 유효성분을 주원료로 만들었다는 「호심환」이 특히 눈길을 끌고 있다.최근 평양에서 개최된 「국제청년 발명 및 새기술 전람회」에서 금메달을 받은 이 「호심환」은 신경성 부정맥과 가슴통증등에 임상효과가 입증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러시아와 중국이 원유 구입시 경화결제를 요구한 이후 외화부족현상이 더욱 심각해진 북한이 이처럼 소비재 수출에 총력을 기울임에 따라 북한의 교역대상으로서 남한의 비중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이는 한약재·주류·냉동생선·건채소류등 북한의 주력상품들이 우리 기호와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이같은 싱황을 감안,통일원은 최근 북한으로부터 반입한 물품에 대한 한국의약품연구소·식품검역소·화학시험연구소등 전문기관의 객관적인 품질분석 자료를 내놓았다. 이 자료에 따르면 창출·백출등 한약재와 인삼화장품등 일부 특산 소비재의 경우 중국등 여타 국가 수입품보다 품질이 양호한 것으로 평가됐다.그러나 어패류나 생사등 일부 섬유류의 경우는 품질이 그다지 신통치 않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소비재 수출은 아직은 낮은 기술수준으로 품질경쟁 보다는 가격과 호기심에 크게 의존하는 초기단계이다.지난해 북한의 수출은 9억1천6백6만달러였고 수입은 15억5천4백22만달러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소련박물관에 고대 예술품 대량 기증(북한의 이모저모)

    ◎저질화장품탓 여성 피부질환자 늘어 ○변함없는 충성 강조 ○…북한은 최근들어 주민사상문제를 빈번히 거론,난국을 타개하는 길은 변함없는 충성과 신념 뿐이라면서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충성불변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은 최근 3∼4일 동안에만도 충·효일심,사상적 순결성,필승의 신념 등을 요구하는 논조의 기사를 당기관지 노동신문에 잇따라 게재했다. 당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 24일자에 「필승의 신심과 낙관에 넘쳐 힘차게 전진하자」제하의 사설을 게재한 것을 비롯해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철저히 세우는 것은 우리당의 일관한 노선」(5·25 노동신문 논설) ▲「우리 혁명대오를 충효일심의 결정체로 만들자」(5·26 노동신문 사설)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 교양을 더욱 심화시키자」(5·27 노동신문 사설)등을 계속해서 내보냈다. 북한은 「필승의 신념」에 대해 난관과 시련앞에서 좌절하면 재생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안팎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김일성부자가 있는한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을 확고히 견지할 것을 요구했다.○고려청자 등 포함 ○…북한은 지난 50년대 모스크바주재 북한대사관을 통해 많은 고대 예술품들을 옛 소련에 기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스크바방송은 25일 모스크바소재 「국립동방인민미술박물관」개관 75주년 관련기사에서 이 박물관의 「조선부」에 소장되어 있는 다수의 고대 예술품들은 북한이 50년대에 대사관을 통해 기증한 것들이며 나머지는 수집가들로부터 구입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방송은 이어 「국립동방인민박물관」에 소장된 조선예술품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8세기께 화강암으로 제작된 관음보살상과 고려청자,회화작품,그리고 16세기에 그려진 고려시대의 한 고관의 초상화라면서 고대 조선예술품들의 예술성을 극찬했다. ○「의무화장」이 주원인 ○…북한여성들의 상당수가 저가 화장품의 사용으로 인하여 각종 피부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북한을 다녀온 중국 동포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피부질환은 심한 가려움증에서 부터 발진,수포 발생 등 각종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환자들 대다수가 변변한 치료를 받지못하고 민간요법에만 의존,병을 악화시켜 마치 천연두를 앓고난 것처럼 얼굴에 보기흉한 흉터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북한여성들이 이처럼 피부질환을 앓고 있는 것은 「의무화장」등이 주원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무화장이란 김일성 부자 생일을 비롯한 주요 국경일날 행사에 동원될 때나 외출시 반드시 화장을 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화장을 하지 않고 행사에 참석하거나 외출하여 「도로정화원」에게 적발됐을 경우에는 심한 질책과 함께 당에 대한 충성부족으로 문제가 제기되어 자아비판을 받는 등 곤욕을 치르고 있다. ○조각천 팬티 인기 ○…북한의 젊은 여성들 사이에 혼수용품으로 「조각천 팬티」가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때문에 결혼을 앞둔 젊은 여성들은 물론 혼사를 앞둔 부모들은 딸과 며느리에게 줄 「조각천 팬티」구입을 위해 고심하고 있으며 이를 이용한 조각천 팬티 암거래상까지 등장했다.암시장에서 조각천 팬티는 1장당 20원의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조각천 팬티는 각 도·시·군 소재 수출 피복공장에서 수출용피복을 재단하고 남은 자투리 천을 이용하여 만든 「삼각팬티」로 북한의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여러가지 천을 이용하여 만들어 색상과 문양이 화려하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 고려청자 가라터/봉천서 4곳 발표

    【내외】 북한은 최근 황남 봉천군(평천군) 원산리에서 고려초기와 그 이전시기의 청자가마터 4개를 발굴했다고 월간 대중잡지 천리마 최근호가 보도했다. 야산 농선에서 발굴된 4개의 가마터 가운데 제2호 가마터의 최상층부에는 「순화 3년(992) 태묘 제4실 제사그룻 장공인 왕공탁 만듬」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그릇과 함께 수십종의 도자기들이 출토됐다.
  • 비리감사에 노하우 가지가지/감사원

    ◎외곽정보 수집한뒤 핵심 파고들기 두루 활용/특수분야엔 전문가 초빙… 「배 만지며 등치기」도 감사요원들에게는 각자 나름대로의 감사기법이 있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마치 고려청자를 만들어내듯 오랜 경험을 통해 얻는 축적된 노하우가 있다는 것이다. 감사의 방법은 성격에 따라 여러가지 복잡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흔히 생각하는 감사의 전형은 특별감사. 비리의혹이 있는 특정분야를 집중적으로 파헤치기 때문에 계통감사라고도 한다. 계통감사에 들어가려면 우선 검찰이 내사를 벌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료수집에 들어간다. 자료수집은 감사대상으로 지목한 기관의 외곽에서 비위와 관련한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언론의 보도나 증권시장의 루머도 체크대상이다. 감사에 직접 들어가게 되면 피감기관과의 머리싸움과 함께 감사외적인 요소들도 감사요원을 압박해오기 시작한다. 회유와 압력,반발과 협박이 따라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감사를 해나가며 감사요원 나름대로는 『이 부분만은 자신있다』는 전문분야를 내심 손꼽기도한다. 물론 특별히 전문성을 요구하는 분야에는 외부에서 전문가를 초빙하는 경우도 있다. 또 감사원내에도 각 분야의 전문가가 많다. 현재 5백70여명의 감사요원 가운데특별한 자격을 가진 사람은 1백35명. 경영지도사가 99명이나 되며 공인회계사가 11명,세무사가 9명,감정평가사가 2명이고 변호사와 관세사 손해사정인자격증을 가진 요원이 각각 1명씩이며 기술국에도 기술사자격자가 9명,건축사 2명이 포진되어 있고 박사학위를 가진 요원도 상당수다. 자격소지자의 대부분은 4·5급의 젊은 요원들. 이에 비해 3급이상의 베테랑요원들은특별한 자격증이 없어도 『어딜 치면 뭐가 나오는지 알고』『배를 쓰다듬어 주면서 뒤통수를 치는 기술이 있다』는 것이 주위의 설명이다. 감사요원들은 현상을 꿰뚫어 숨겨진 비리를 발견해내는 치밀함과 함께 최고사정기관요원으로서의 품위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감사원에 첫 입사를 하거나 다른 정부부처에 근무하다가 전입하는 요원들에게는 6개월간의 실무교육이 실시된다. 예·결산 수입·지출 금궤 계약 직무감찰 전산등 감사와 관련한 부분에 대한 집중교육이 이루어지지만 이와 함께 예절과 교양도 빠질 수 없는 주요과목. 바하 이후의 서양 고전음악부터 판소리 사물놀이등 우리의 소리까지 딱딱해지기 쉬운 감사업무를 부드럽게 감싸줄 수 있는 과목들이 곁들여 있다.
  • 도예가 황종례씨(이세기의 인물탐구:23)

    ◎예술혼 담긴 「귀얄문양」 대가/탁월한 기품·여성스런 섬세함 한획으로 표출/망망대해·일렁이는 갈대숲 등 깊은맛 일품/32세 “늦깎이” 입문… 남을 의식않고 제작에만 몰두 벽제의 하늘은 아름답다.청자의 비색처럼 영롱하다.산자락에 걸친 구름은 분청사기의 문양인듯 엇비슷 비껴있다.이곳이 바로 현대도예에서의 일인자 위치를 지키는 도예가 황종례씨의 작업실이다.절간같은 고요,사람의 기척이라곤 별로 없이 작가 혼자서 흙으로 성형하고 소성한 도예에 그림을 그릴 뿐이다. 그가 벽제에 온것은 72년 초봄이다.그때까지만 해도 진흙구덩이가 푹푹 패이는 삭막한 황무지였으나 도심에서는 가마를 가질수가 없어 일찌감치 이곳 정착을 서둘렀다. 그리고 드넓은 터에 장작을 때는 흙가마와 기름을 때는 현대식 가마를 갖추었다.그로서는 가마를 갖게된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었다.그동안 축적한 것을 이뤄나가면 그만이다. 새벽 6시면 그는 벌써 작업실로 내려온다.직접 흙을 반죽하고 까다로운 여러 공정을 거쳐 유약칠과 채식에 들어가 한 획으로 문양을 넣기 시작한다.물론 널리 알려지다시피 그의 도예에서의 특징은 귀얄문양이다.그는 이 과정에서는 거의 몰아의 경지다.느긋하고 너그러워 호들갑스러운 데가 전혀 없으나 이때만은 비호처럼 날쌘,귀신같은 솜씨를 발휘한다.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그 순간을 포착하기 힘들다.그때도 그의 얼굴표정에는 온화한 여유가 만만하다. 처음에는 힘없는 붓이 자꾸 흙에 달라붙어 기면의 흡수에 비해 둔한 붓놀림이 따르지 못하자 유화붓을 쓰거나 강도가 센 페인트 붓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귀얄만으로 능란하게 그림을 구사하게 되었다. 귀얄문의 특징은 그릇의 표면이나 내면에 속도감있게 붓자국을 내며 돌리지않으면 습기있는 기면이 당장 흡수해버리기 때문에 단숨에 그릴 수 있는 기량과 기술이 필요하다.그릇의 한면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미리 구상해두었던 그림을 일순간에 성립하는 식이다. ○분청사기에서 힌트 옥색하늘이 아득히 푸르르고 망양한 바다와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숲,희미한 새벽 서광과 붉게 타는 낙조등 도예기가 보여주는 회화세계는 화선지에서와는 다른 그나름대로의 참신하고 깊은 맛이 일품이다.안료의 농도에 따라 얼마든지 절묘한 표현을 자유자재롭게 만들어 나갈수 있는 것도 한 장점이다. 물론 이런 필력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그는 60년대 초부터 청전 이상범에게 붓놀림과 먹의 농담이용법,옥산 김옥진에게 사군자,오당 안동숙에게 풀 나무 산과 바위를 사사하면서 수년간 자기표현을 위한 기초적 탐색을 감행해 왔다. 그의 귀얄무늬는 물론 분청사기에서 쓴 귀얄문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고려상감(상감)같은 상감을 이용한 화장법을 거쳐 분청사기의 귀얄무늬를 추상적 회화로 모색해 나갔다. 그 시절의 그런 그릇에 왜 귀얄 붓자국을 썼는가,시간틈틈이 골동품가게나 박물관을 기웃거리며 관계서적과 도록을 빌려다가 밤을 지새워 연구하기도 했다. 발이나 호·기에다 투각수법의 무늬로 부분장식을 표현하거나 단일색인 소문백자의 경우엔 부드럽게 흐르는 몸체에서 무한한 품위가 배어나왔다. 더구나 화사기에서 쓰이던 회청·회회청의 코발트색깔은 지금도 창조하기 힘든 기발한 색조임에 스스로 탄복해 마지 않았다.꽃잎흩날리는 비화문이며 풀잎 나뭇잎 얼킨 초엽문의 활달한 율동감,살얼음이 깨어진 듯한 빙렬등은 현대도예에서도 시도해 봄직한 분방한 방법임에 틀림 없었다. 황종례의 그릇의 형태는 비교적 큼직하고 대담한 편이다.쑥쑥 뻗은듯 휘어진 곡선을 지니면서 탁발한 기품과 여성적인 섬세함을 담고 있다.너무 작아 조잡하거나 너무 우람하여 넘치지 않는다.야무진 티나 인위적인 기교는 없다.꾸미지않은 순결함속에 오랜 전통을 바탕에 둔 든든한 경륜의 실력이 이를 보는 사람들에게 안심과 환희를 안겨준다. 도예의 기물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들을 파악하자 이번엔 좀더 새로운 세계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시도에 앞장 섰다.무한한 가능성에 비해 시간이 짧기만 했다. 몇사람 되지않는 창작도예에서 「독자성」을 두루 인정받고 있으면서도 그는 『도예의 길은 멀고 그리고 어렵다』고 말한다. ○성취가 일생 과제로 고전하여 어렵게 이룬것만큼 높이 평가되지 않는데 대한 불만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도무지 그런 울결(울결)과 방종에서 벗어나 흔연한 자세다. 남에게 관심을 갖거나 남을 의식하지도 않는다.그런 자자분한 세상사에 눈돌릴 겨를이 없다.예술가의 자세란 작품에 밀착하여 새 세계에 도전하는 일,그리고 성취만이 평생의 과제이며 목적이다. 그는 인건비등으로 다투는등 사람들에게 시달리기도 싫어 인부들과 손을 끊고 몇년전부터는 흙만드는 일을 직접하고 있다. 12번째 개인전을 연후 수많은 해외전시에 참가,틈틈이 86년 13번째의 개인전을 앞두고 준비해온 1천여점의 작품을 하루 아침에 망친 사건이 있었다. 어느때보다 실험작품이 많아 스스로 기대에 부풀었던 그는 눈앞이 캄캄했으나 「허허!」 한바탕 웃는 것으로 이를 단념해 버렸다.이미 끝난것에 집착하는 것은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원인은 간단하다.필요한 양을 정확하게 혼합하는 과정에서 인부들이 물과 흙의 분량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이를 지켜보지못한 자신의 불찰로 돌렸다.광주나 이천에 나가면 만들어진 흙을 얼마든지 사다 쓸수 있는것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직접만들어 쓰려다가 생긴 이 낭패가 그로서는 여간 섭섭하지 않았다. 그후론 아직 결혼전인 차남(영학씨·조각·상명여대 출강)이 어머니를 돕고 있다.엎친데 덮친격으로 같은 시기에 그의 도예일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주던 부군 이진우박사(전 영동피부과 제일의원)가 몸져 눕는 바람에 한동안 간호에 매달리느라 이럭저럭 작업을 미룰수 밖에 없었다. 황종례씨는 고려청자의 재현이라는 전통도예를 가업으로 가진 황인춘씨를 부친으로 역시 원로 도예가인 황종구씨(전 이대교수)가 그의 오빠다. 어릴때 영등포 대방동에 있던 그의집 과수원속에 부친의 가마가 있었고 그는 그릇을 빚고 건조시키고 조각하고 백토칠에다 다시 이를 벗겨내고 유약등 까다로운 작업을 지켜보는 유년시절에도 하나의 사기나 파와(파와) 한쪽을 어루만지면서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옛 고려왕조·이조왕조의 생활이 따뜻하게 전해졌다고 기억한다. 그후 국민학교 1학년때 조선총독부에 의해 가족이 강제로 개성에 이주,일인들이 선죽교부근에 마련해준 연구소에 살면서 호수돈여고에 다녔다. 미대진학을 꿈꾸며 그림을 그리던 그에게 스승이던 유달영선생의 가르침은 「버려진 제것에 대해 눈뜨라」는 것이었고 특히 졸업을 앞두고 「청년이어 일어나라」는 교훈은 그에게 「나도 무엇인가 나의 일을 하겠다」는 의욕을 심어주었다. 집안형편이 극도로 어려웠으나 그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에 있는 이대미술학부에 진학,어릴때 손바닥 감촉으로 느꼈던 사기의 온기를 못잊어 대학졸업 9년만인 32살때 뒤늦게 대학원에 들어가 도예를 전공했다.그때도 부군이 그의 협력자가 되어주었다. 대학원 졸업전인 61년에 첫 개인전,청자의 태토에 백토로 분장하고 그곳에 단숨에 귀얄문을 그려내는데 매력을 느낀것은 68년 6번째 개인전때부터다. ○“독보적 존재” 평가 「청·백자의 선이 아무리 탁발하다 해도 이를 단순히 재현하는데 그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조작적이고 기교적이 아닌,이른바 이조자기에서 볼수 있는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멋』을 담아 새롭게 선보였다. 실내장식품에 지나지 않던 도예를 널리 일상생활에 참여시킨일종의 도예의 활성화 시도였다. 『몇 안되는 창작도예를 만드는 도예가중에서 독자적인 색유사용으로 새 경지를 개척해 왔다는 점에서 황종례는 현대도예에서 단연 독보적 존재』라는게 미술평론가 박래경씨의 평이다.1천여점 작품실패로 9년간 미뤘던 13번째 개인전은 오는 13일 신세계 미술관에서 열리게 된다. 흰색으로 시작됐던 그의 귀얄문은 더욱 다양한 아름다운 색깔로 변모되었고 매끄러운 표면은 입체감과 함께 품위있는 추상회화로 조형효과를 이뤄내고 있다. 청자빛 하늘과 파도치는 바람,흩날리는 꽃잎등 조선시대의 사람의 감정과 미의식을 담은 그의 현대적도예 세계는 그의 성격처럼 온유하고 따뜻하여 번거로움과 무질서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인정과 사색,그리고 은은한 기쁨을 넉넉하게 뿌려주는 안식의 경지다. □연보 ▲1927.12.9 서울출생 개성호수돈녀고 26회 졸업 ▲1945.∼1950.5 이화여자대학교 예림원 미술학부 서양화과(학사) ▲1959.9∼1962.2 이화녀자대학교 대학원(도예전공·석사) ▲1963∼19 81 이화녀자대학교 미술대학 도예과 출강 ▲1965.3∼1966.2 상명녀자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조교수 ▲1975.3∼현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공예미술학과 교수 ▲1961.12 도예개인전(서울중앙공보관) ▲1963.10 도예개인전(〃) ▲1964.11 도예개인전(신문회관) ▲1966.5 도예개인전(신문회관) ▲1967.8 도예개인전(미팔군전시장) ▲1968.8 도예개인전(일본,경도 조화랑) ▲1971.9 도예개인전(신세계백화점 전시장) ▲1975.4 도예개인전(신세계미술관) ▲1978.9 도예개인전(신세계미술관) ▲1981.1.20 도예개인전(미국 뉴욕) ▲1982.1.29 도예개인전(미국 로스앤젤레스) ▲1984.4.24∼4.29 도예개인전(신세계미술관) ▲1961∼1983 대한민국 미술전 출품 ▲1968.7∼1981 대한산업디자인전 초대작가(디자인 포장센터)심사위원 ▲1973 한국현대도예작가전 초대전(신세계미술관) ▲1975 전국공예가 초대전(미술회관)문예진흥원 주최 ▲1976 여유도예전 초대전(신세계미술관) ▲1977 역대 국전수상작품전(국립현대미술관) ▲1979 한·중·일 국제도예전 초대출품(일본명고옥) ▲1979 한국도예가회 창립전(신세계 미술관) ▲1979 한국미술전람회(뉴질랜드) ▲1980.9.27 한국도예가전 회원전 2회(신세계미술관) ▲1980 국전 초대출품(국립현대미술관) ▲1980.7.10∼7.16 도예2인전 일본 매일신문사 주최(일본 동경도 대환백화점) ▲1981 한국도예가회 회원전 3회(신세계미술관) ▲1982.3.6 도예2인전(일본 구주 복강시) ▲1983 도예2인전(일본 대판시) ▲1984.3.15∼3.20 도림전 출품 ▲1981 서울신문사 도예공모전 초대출품 ▲1981∼1990 현대도예전 일본 순회전(10연간) ▲1982 제1회 대한민국미술제 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1982 서울신문사도예공모전 초대출품·심사위원,한미수교 100주년 기념출품(미국) ▲1982 한국현대도예가 회원전 9회(신세계미술관) ▲1983 한독수교 100주년기념출품(독일) ▲1983 서울신문사 도예공모전 초대출품 ▲1968.8 국제미술교수협회 주최 도예세미나(일본,경도) ▲1975.5 한국도예특강 초대(일본 요업시험소) ▲1980.2 자유중국 교육시찰 ▲1983.8.2∼8.20 한일교류전 출품및참가(일본 구주) 대한산업미술가협회 주최 ▲1983.12 MBC초대전 출품(MBC별관 전시관) ▲1986.9 한국현대도예가회 일본 전시 ▲1987.6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출품 ▲1987.8 대한산업미술가협회 출품및 참가(일본 구주) ▲1987.9 서울신문사주최 도예공모전 심사및 초대출품 ▲1989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및 운영위원장 ▲1988 대한산업미술가 협회 이사장 역임 ▲1990 서울현대도예비엔날례 초대출품 ▲1991 대한민국 미술협회 부이사장 ▲1992 서울 공예대전 출품 ▲1993 벨기에 앤트워프 박물관 주최 ▲1993.3.26 한국도예문화 특별전 출품 ▷작 품 집◁ 황종례 도예작품집(미진사간) ▷수상◁ 국무총리상·국전 초대작가상·대한민국 문화예술상 ▷현재◁ 경희대 수원캠퍼스 출강·대한미술산업가협회 회원·한국도자기문화진흥협회이사
  • 개량종 「키작은 자두나무」 전국 보급(북한 이모저모)

    ◎초물·고려청자 등 공예품 증산 주력 ○수확량도 4∼6배 많아 ○…북한은 최근 관리 및 수확에 드는 노동력을 크게 절약하면서도 수확고를 획기적으로 높인 「키작은 추리(자두)나무」를 전국에 보급하고 있다고 평양에서 발간되는 화보「조선」 최근호가 보도했다. 평양시 남새연합기업소의 한 기술지도원이 지난 10여년의 연구끝에 품종개량에 성공한 이 나무는 종전 자두나무에 비해 키가 4분의 1밖에 되지 않아 수확이나 나무관리에 드는 노동력을 40∼50% 줄이면서도 정보당 수확고는 4∼6배 이상 높다는 것이다. ○김일성 현지지도 지시로 ○…북한은 최근 개성시의 특산품인 초물공예·고려청자 등의 생산력증대에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지난해 5월 김일성이 개성시를 현지지도하면서 이 지방에 풍부한 원료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특산품의 개발 및 생산증대를 지시함에 따라 그동안 생산시설·기술 등을 강화해 왔는데 올해는 지난해보다 30여종의 공예품을 새로 개발하고 생산량도 2배로 늘인다는 목표로 이에 주력하고 있다고중앙방송이 보도했다.
  • 문예출판사 「한국의 도자기」(책의 해/우리가 만든 책:3)

    ◎출판사 자천도서 시리즈/청자·백자 등 도자사 총체조명/「한국미술총서」중 하나… 정양모씨 논문 모음 우리나라 고도자연구의 선두주자 정양모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30년 도자기연구사를 결산한 「한국의 도자기」(91년3월초판발행)는 학술서적 전문출판사로 이름높은 문예출판사(사장 전병석)의 야심작 「한국미술총서」전9권가운데 3번째 편이다. 우리 미술의 큰줄기가 공예이며 공예중에서도 그 핵심이 도자기라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이 책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도자기역사를 지녔으면서도 후대의 연구가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는데 주목하고 있다.그래서 저자는 연구의 근본자료가 되는 가마자리와 도편이 파괴·인멸되어 가는 현실을 안타까워 한 나머지 문예출판사와 합작으로 이 책을 저술했다. 국학자 위당 정인보선생의 자제이기도한 지은이는 스승 최순우선생을 이어 30년을 줄곧 중앙박물관에서 도자기연구에만 매달려온 외길학자.그를 지켜본 김원용교수(한림대 객원교수)의 말처럼 자신이 터득한 불가양의 도자지식을 글로 써서 발표하는데 인색하고 또 붓을 들어도 쓰는 속도가 느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 그가 지금껏 써온 18편의 귀중한 논문을 모아 난생 처음 단독저서로 펴낸 것이 바로 「한국의 도자기」다.논문 한편 한편을 발표할 때마다 우리 도자사를 고쳐 써야할 만큼 학계의 반향을 불러 일으킨 점으로 미루어 환갑을 눈앞에 둔 저자가 필생의 공을 들여 그간의 연구실적을 결집한 이 저서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총론」「고려청자」「조선분청사기」「조선백자」등 4부의 본문과 부록,1백33장의 귀중한 원색자료사진으로 구성됐다.백미는 고려청자의 발생시기를 신라말기에서 9세기까지 끌어 올려 청자발생의 편년을 고쳐 놓은 「고려청자」부분이 단연 꼽힌다.6편의 조선백자관련 논문가운데 「백자론」은 꼬박꼬박 힘들여 쓴 감동적인 노작이라는 세간의 평을 받았다.이와함께 부록으로 게재한 3백47곳의 고려·조선시대 자자요지분포현황은 위치·종류·연대를 포함한 최신의 목록으로 자료가치가 높다. 초판발간 1년만에 4판인쇄에 들어가는 이 책은 도자기를 통한 한국정신탐구라는 점에서 일독을 권할 만한 한권의 책으로 손색없다. 전병석사장(57)은 『편집과정에만 2년의 시간을 들일만큼 출판사로서는 출혈과 희생이 뒤따랐다』고 말한다.그래서 이 책에는 세월이 지난뒤에도 고서방 서가에 꽂혀 있고 후학들이 즐겨 찾는 가치있는 책을 만들겠다는 지은이와 출판사의 신념이 넘쳐 난다.
  • 하버드대서 한국도자기전

    ◎전 주한외교관 헨더슨 소장품… 1백50점 공개 「그레고리 헨더슨 한국도자기전」이 12일 미국의 하버드대학 미술관에서 개막됐다. 새해 3월28일까지 계속될 이번 한국도자기전은 우리의 미술품이 세계적인 학문의 요람인 하버드에서 일반에게 널리공개 된다는 것은 큰 뜻을 지닌다.나아가 이 전시회를 계기로 93년 봄학기부터 「한국미술사」(도자기사)가 이 대학의 공식 학과목으로 개설된다는 점 또한 대단한 일이다. 「헨더슨전」이란 미국인 그레고리 헨더슨이 일생동안 수집한 한국의 도자기 1백50여점을 전시하는 것으로 일부는 헨더슨이 작고한 89년이후 그의 부인 마리아 헨더슨이 하버드에 기증한 것이며 나머지는 하버드대학이 유족으로부터 직접 사들여 모은 것들이다. 헨더슨 콜렉션은 일본의 아다카(안택)콜렉션과 함께 외국인이 모은 우리도자기 콜렉션으로는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아다카가 고려청자를 중심으로 국보급이 허다한 명품만을 모은 것으로 유명하다면 헨더슨 콜렉션은 1세기쯤 삼한시대 토기에서부터 19세기말 조선조 분청사기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자기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훑어볼수 있도록 시대별로 수집했다는 점에서 유명하다. 새학기부터 하버드에서 한국미술사를 강의하게 될 로버트 D 마우리교수는 『헨더슨 콜렉션은 한국밖에서는 가장 방대하고 학문적으로 가장 중요한 수집품들』이라고 평가한다. 하버드대 출신으로 학생시절부터 아시아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헨더슨도 외교관이 돼 48년부터 50년까지와 58년부터 63년까지 두차례에 걸쳐 한국에서 근무하면서 우리도자기를 집중적으로 수집해온 인물.
  • 국보급예술품 전문절도/경찰 적발/대학박물관·호텔 등서 5억대 털어

    ◎고려자기·정선산수화 포함/운보그림 등 호랑에 “헐값 매각” 대학박물관과 호텔 등이 소관,전시하고 있는 50여점(5억여원상당)의 국보급 골동품과 미술품을 턴 전문절도단이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강남경찰서는 29일 오명구씨(29·전과7범·중랑구 면목동3의27)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습절도)및 공문서변조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박정업씨(30)등 3명을 같은 혐의로 수배했다. 경찰은 시가7천5백만원짜리 고려시대 분청어용형수주등 도자기와 불상등 골동품 12점과 시가5천만원짜리 겸재 정선의 산수화등 미술품 30점등 모두 42점,5억여원어치의 골동품·미술품을 증거물로 압수했다. 이들은 지난 7일 하오5시쯤 서울 덕성여대박물관 창문을 뜯고 들어가 전시중인 고려청자 4점,금동불상 2점,산수화 7점등 시가3억8천여만원어치의 고려시대미술품을 훔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또 지난 5월28일 상오1시쯤 서울 강남구 청담동 리베라호텔에 투숙객을 가장해 들어간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폐쇄회로TV를 뜯어내고 로비에 걸려있던 운보 김기창화백의 7천5백만원짜리 「갑자하수」등 1억여원어치의 미술품 9점을 훔친 것을 비롯,지난 5월부터 5차례에 걸쳐 모두 5억3천여만원어치 골동품과 미술품 50여점을 훔쳤다는 것이다. 조사결과 이들은 신분을 속이기위해 주민등록증의 생년월일 등을 위조하고 일제소형무전기 2대를 이용,망을 보며 범행을 저질러 온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오씨가 훔친 미술품을 시가보다 5배 싼값에 용산구 K화랑(대표 윤모씨)등에 팔아왔다는 말에 따라 이들 화랑에 대해 수사를 펴고있다.
  • 과기정책은 전문가 손으로/전일동 연대교수·핵물리학(해시계)

    우리 조상들은 고려청자나 조선조 백자같은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어 내는 재능과 기술을 갖고 있었다.또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몇백년 동안이나 완벽한 상태로 보존할 수 있는 보관소의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과학적이다.이러한 우리기술이 임진왜란때 많은 도공(도공)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뿌리를 내려 오늘날 일본 도자기를 낳게 된 것이다. 어떤 면에서 국산도자기보다 앞선 기술을 개발해 냈고 이제 우리쪽에서 그 기술을 역수입하고 있는 형편이다.같은 뿌리에서 나오고 같은 사람들이 계승한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몇백년 동안에 이렇게 차이가 난 것이다.양쪽 도공들이 서로 노력을 했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 수준에 차이가 난다면 그것은 외적요인때문임이 분명하다.어떤 역사학자는 임진왜란의 본질적인 목적은 바로 기술약탈에 있었다고 하였다.즉 기술이전을 폭력을 갖고 이행시킨 것이다.이렇게 선진기술을 갈망하고 있었던 당시 일본의 위정자들은 약탈해간 기술을 아끼고 보호하고 육성하였다.그 하나의 결과가 오늘날의일본 도자기이다.이 작은 역사를 살펴보아도 과학기술정책의 중요성과 그것이 가지고 오는 엄청난 결과를 실감할 수 있다. 과학기술정책은 누구나 쉽게 세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과학기술이 지니고 있는 역사성과 사회개발의 원동력 또한 경제발전과의 연관성,포괄적으로는 인간과의 상관관계에서 가치관까지 그것이 미치는 영향의 중대성등을 비추어 볼때 조예가 깊은 전문가가 담당해야 한다.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전문가가 별로 많지 않은것 같다.과학기술정책 수립과 동시에 정책전문가 양성도 추진해야 한다.대학에서 과학정책에 대한 강좌를 개설하여 고급전문인력 양성에 나서야 할 때이다.한편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중에서 과학기술에 조예가 깊은 인재가 얼마나 될까? 단순히 과학기술의 중요성만 외쳐봐야 과학기술발전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요는 그것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국정에 반영되게 행동을 옮길 수 있는 의원이 얼마나 있는가에 달렸다.기술 선진국에서는 그러한 인재들이 국회의원으로 많이 있고 또한 로비스트로 활동도 많이 한다.우리나라에서도 과학기술을 올바르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각 정당내에 과학기술정책 소위원회를 발족시켜야 하며 과학기술 담당 대통령 보좌관을 확충하여 실질적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과학기술처와 교육부간의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협력체제를 강화해야 한다.과학기술은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야만이 비로소 우리손에 쥘수 있게 되고 우리에게 커다란 경제적 발전과 번영을 가져다 준다.과학기술정책 담당자와 과학기술자가 일체감을 가졌을 때 우리는 처음으로 과학입국으로의 면목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 고려청자·조선백자/밀거래한 5명 영장

    【부산=이기철기자】 부산경찰청 강력수사대는 26일 문화재급 고려청자와 이조백자를 밀거래한 골동품 중매상 김수곤(39·전북 김제군 죽산면 죽산리 242),안영욱(35·경기도 광명시 하안동 주공아파트 109동 706호),이성천씨(55·전북 남원군 아영면 봉대리 679)등 5명을 문화재보호법 위반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은 또 이연호씨(36)등 3명을 같은 혐의로 수배하는 한편 이들로 부터 고려상감청자 국화문 매병 1점과 고려청자 백색상감 기사문 접시 3개등 고려청자 9점과 이조백자 매병 1점등 도자기 10점을 압수했다.
  • 고려청자 22점 출토/충주 단월동 고분서

    【충주=한만교기자】 충주시 단월동 고분군에서 11∼12세기때의 것으로 보이는 고려청자 20여점과 청동병 등 유물 수십점이 출토됐다. 충주박물관 고분군 발굴조사단(단장 류희철·충주박물관장)은 1일 지난 한달동안 충주시 단월동 천주교 공원묘원 일대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9기의 석곽묘와 6기의 토광묘,2기의 회곽묘,1기의 석실분 등에서 고려 청자류 22점과 청동병 및 청동합·동전 등 유물 수십점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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