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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지의 본향 전주에 ‘K 한지마을’ 들어선다

    전북 전주시가 ‘한지의 본향’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K 한지마을’을 조성한다. ‘한지 제작의 전통지식과 기술 및 문화적 실천’이 유네스코에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 신청돼 전주한지가 다시 한번 부흥기를 맞게 된 데 따른 것이다. 전주시는 한지문화산업의 인적·물적 자원을 집적화한 K 한지마을 조성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관련 용역을 발주했다고 9일 밝혔다. 투자계획은 국비 65억원, 지방비 75억원, 민자 등 190억원 규모다. 주요 사업은 닥나무경관림, 한지문화예술촌, 숙박·연수원, 한지역사기록관 조성 등이다. 예정지는 서서학동 일원 흑석골이 꼽힌다. 한지 제조시설을 보유한 전주천년한지관과 가까워 한지문화 홍보와 체험 등이 쉬운 이점이 있다. 지역주민과 한지 작가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전통문화 예술촌이 조성되면 전주한지의 고유한 문화자산을 보전하고 산업화를 촉진하는 효과가 기대된다. 전주시는 그동안 한지를 친환경 건축부재, 각종 생활용품, 섬유, 예술 활동에 두루 쓰이도록 활용의 폭을 넓혀왔다. 전통한지의 명맥을 잇기 위해 4명의 ‘전주한지장’을 선정하고 향토문화유산으로 육성하고 있다. 강갑석(전주전통한지원), 김인수(용인한지), 김천종(천일한지), 최성일(성일한지) 한지장 4명은 30년 이상 한지 제조와 전수에 힘쓴다. 전주한지는 왕실의 진상물로 오랜 기간 높이 평가됐다. 고려시대부터 외교문서와 임금에게 올리는 문서 대부분이 전주한지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전국 한지 생산의 70%가량을 점유한다. 전주한지는 지질이 매우 부드럽고 빛깔이 은은하면서도 고와 물감이나 무늬를 그려 넣기에도 좋다. 서예지, 공예지, 창호지, 장판지, 영구보전지 등 다양하게 쓰인다.
  • [장남원의 도자 산책] 꽃을 든 아이

    [장남원의 도자 산책] 꽃을 든 아이

    부드러운 비취빛 청자 발(鉢)의 내면에는 은은한 포도넝쿨 양각 문양이 가득 차 있다. 그 사이사이 3곳에는 어린아이들이 검고 가는 윤곽선에 백토를 메워 넣은 상감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아이들은 살짝 미소 띤 얼굴로 이리저리 걷거나 뛰고 있다. 그리고 아이들 손에는 저마다 연과 새총, 꽃이 들려 있다. 800여년 전 도자기에는 왜 아이들이 그려졌을까. 국내외 연구들에 따르면 꽃 넝쿨을 짊어진 남자아이들은 이미 로마시대 석관에는 죽음을 애송하는 의미로, 고대 인도의 간다라 지역 스투파 부조에는 붓다에게 공양하는 의미로 장식됐다고 한다. 어린아이는 포도와 함께 묘사되기도 하여 중앙아시아, 중국 등을 거치면서 그림이나 공예품 등에 자주 등장한다. 어린아이 몸체만큼 크고 알알이 탐스러운 포도송이와 그 넝쿨 사이로 올라타고 재주 넘는 천진한 형상은 풍요로운 느낌으로 웃음 짓게 한다. 실제로 포도주가 애호됐던 현상과 연관 짓기도 한다. 현전하는 송나라 그림 속 아이들은 연못이나 정원에서 꽃을 따거나 물놀이를 하고, 새를 잡으러 다니거나 나뭇가지를 꺾어 뛰어가기도 하며, 때로는 공놀이를 하는 생활 장면 속에 그려졌다. 이 같은 도상들은 그대로 중국의 정요(定窯) 백자나 금속공예품들의 도안으로 활용됐다. ‘고려사’ 1078년 기록에 송나라 신종이 보내온 복식류에 동자무늬가 조각된 옥(玉)이 포함됐다고 나오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 다양한 문물이 유입되던 고려 전기에는 이처럼 중국에 정착된 어린아이 도상들이 전해졌던 것 같다. 그리고 이는 고려의 양각이나 상감청자에 자연 속에서 뛰노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그려졌다. 친숙하고 사랑스러운 현실 속 존재로 아이들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사람이 천성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보고 그것이 흐려지지 않도록 국가와 사회가 함께 양육하고자 했다. 10세 이전에 고아가 되면 관청에서 식량을 주어 부양했고, 아이를 유기한 경우 벌을 내렸다. 영아 때 혼자가 된 아이들은 다른 성씨를 가진 집안에서 양육할 수 있었다. 사찰은 종종 소외된 아이들의 교육장이 되기도 했다. 종일 다녀도 어린아이를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은 요즘이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속담이 있다. 어여쁜 그 모습을 그리거나 새겨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장남원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 [황성기 칼럼] 고려 불상을 그냥 보낼 순 없다

    [황성기 칼럼] 고려 불상을 그냥 보낼 순 없다

    이제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돌려줘야 하지 싶다. 2012년 10월 도굴꾼들이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의 절 간논지에서 훔쳐 온 고려시대 불상이다. 불상 제작의 역사적 사실을 들어 충남 서산 부석사가 소유권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원고 1심 승리, 2심 패배에 대법원까지 갔다. 부석사의 소유권은 인정되지 않고 ‘장물’로 확정됐다. 불상은 국립문화재연구원에서 보관 중이다. 최종심 판결이 지난해 10월이었으니 반 년이 흘렀다. 진작에 장물을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환부’를 했어야 했다. 사법부의 오락가락 판결로 10년 이상 끌었다. 선거를 앞두고 또 환부가 미뤄졌다. 이제라도 외교 당국 간 협의를 거쳐 불상 환부 절차를 밟아야 한다. 오랜 세월 일본에 있었던 우리 불상의 절도에 의한 ‘귀환’과 11년간 제 땅에 잠시 머물다 돌아가야 할 불상의 행로에 마음이 복잡하다.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도난 전까지 관리인이 없는 무인 절에 쓸쓸히 있었다. 부석사는 원고 승소가 확정되면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좌상을 맞이할 계획이었다. 불상이 한일 어느 쪽에 있는 게 더 행복한지 혜량할 길이 없다. 불상이 어디 있건 부처님으로 계시면 된다고 교리를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1965년 국교를 정상화한 한일은 일제가 불법으로 수집·반출한 우리 문화재의 반환도 다뤘다.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을 기초로 역대 정부는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간 3200점의 반환을 요구해 왔다. 한일 회담 중 106점을 포함해 협정 이후 1400여점이 돌아왔다. 2005년 북관대첩비, 2010년 조선왕실 의궤 81종 168책이 최근 돌아온 문화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수탈된 문화재 반환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문화재 원산국인 피침략국은 반환을 요구한다. 침략국은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며 문화재를 잘 보존해 온 나라가 관리해야 한다는 논리로 선뜻 내주지 않는다. 한일 간에도 식민지배국과 피식민지배국 구도에 갇혀 우리 땅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문화재들이 적지 않다. 오구라 컬렉션이 대표적이다. 일각에서는 절도나 불법 거래를 해서라도 우리 문화재를 제자리에 둬야 한다는 환수론자들이 있다. 도굴꾼이 훔쳐 온 문화재를 비싼 값에 사들여 혼자서 즐기는 사례도 종종 있다. 일본 효고현의 가쿠린지에서 도난당한 아미타삼존도가 그렇다. 범인은 잡혔으나 아미타삼존도는 몇 차례 지하의 유통 단계를 거치면서 사라졌다. 돈 많은 사람들의 개인 소장품이 된 것을 “제자리를 찾았다” 할 수는 없다. 불상 도난 사건 이후 소유권 다툼에서 1심 재판부가 원고 손을 들어 주자 전에 없던 일이 생겼다. 우리 문화재를 빌려 와 전시하는 교류전조차 일본에서 손사래를 친다. 한번 바다 건너간 문화재는 다시는 못 돌아온다는 트라우마가 일본에서 생겨났다.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는 꽁꽁 숨어 버렸다. 2019년 국내 대기업이 일본 시장에 나온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를 25억원에 구입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은 극히 드문 사례다. 고려 불상의 일본 환부를 섭섭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소탐대실할 건 없다. 그렇다고 정부마저 장물은 돌려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지 걱정이다. 일본도 돌아올 게 돌아온다고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 이후 가장 관계가 좋다는 한일에 불상 환부 이벤트는 더 없는 기회다. 5월 말 한일중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린다. 불상은 조속히 돌려주자. 대신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는 오구라 컬렉션 일부를 들고 서울에 오면 어떤가. 불상을 보내는 부석사와 한국 국민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사인(私人)이 국가에 기증한 문화재이니 일본 정부 내 컨센서스만 만들면 될 것이다. 이번이 너무 촉박하면 내년 국교 정상화 60주년도 좋은 계기라고 본다. 황성기 논설위원
  • “태평성대 기원”… 은평 ‘금성당제’ 오세요

    “태평성대 기원”… 은평 ‘금성당제’ 오세요

    서울 은평구는 국내 유일한 국가민속유산 신당인 ‘금성당’에서 오는 27일 ‘금성당제’를 개최한다고 23일 밝혔다. 금성당제는 나라의 태평성대와 국민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샤머니즘 축제다. 주민과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 아들)의 후손이 참여하는 1부 유교 제례와 2부 전통 신앙 의례로 진행된다. 행사는 황토 물림, 이말산 궁인 혼맞이, 금줄치기, 수양대군에 반발해 단종 복위를 꾀하다 사약을 받은 금성대군을 위로하는 유교식 제례, 제당맞이, 큰거리, 제석굿 등 20여개 무속의례 전 과정으로 이뤄진다. 금성당은 오늘날까지 본 터에 옛 모습을 유지하며 전통을 이어가는 유일한 국가 지정 신당이다. 고려시대에 나주 금성산신을 모시던 금성신앙이 조선시대 한양에 전파됐다. 서울 월계동, 망원동, 진관동에 있었던 금성당은 현재 진관동에만 남아 있다. 2008년 국가민속문화재 제258호로 지정돼 원형을 보존 중이다. 표문송 은평역사한옥박물관장은 “영화 ‘파묘’와 같은 콘텐츠를 통해 한국무속신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만큼 금성당제를 통해 전통문화가 더욱 확대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확 달라진 보성다향대축제, 보성군 9개 축제와 함께 ‘팡파르’

    확 달라진 보성다향대축제, 보성군 9개 축제와 함께 ‘팡파르’

    제47회 보성다향대축제가 ‘천년 차(茶)의 유혹 보성의 프러포즈’라는 주제로 다음달 3일부터 7일까지 한국차문화공원 일원에서 개최된다. 보성군은 전 국민이 함께 즐기는 보성의 대표 축제 9개를 엮은 통합축제형 행사로 준비했다. ‘축제도 이제 융복합 시대’라는 새로운 기틀을 열겠다는 각오로 마련했다. 보성다향대축제는 고려시대 차를 만들어 국가에 공납했던 ‘다소’를 비롯해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보성 차의 역사와 한반도 차(茶) 역사를 조명한다. △ 보성에서 만나는 천년 차(茶) 개막식은 제47회 보성군민의 날과 함께 보성공설운동장 주무대에서 지난 1월 자매도시를 맺은 하동군과 ‘다원결의(茶園結義)’ 설정극(퍼포먼스)을 진행한다. 눈여겨 볼 핵심 콘텐츠는 △애프터눈 티(Tea) 파티 △보성애(愛) 물들다(茶) △보성티마스터컵 △서울 속의 보성다향대축제 주간 △보성 속의 서울 차(茶) 체험 △보성차 만들기 △찻잎따기 등이다. 총 8개 분야 72종의 프로그램을 추진한다. 우리나라의 차 문화와 차 산업뿐만 아니라 세계차 문화와 산업의 현주소를 체험할 수 있도록 보성군과 하동군, 중국·일본 등의 차 문화관을 운영한다. 전통 다례시연, 말차 격불 체험, 차 로스팅 체험, 차 음식 시식회와 대한황실가(家) 다구전 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행사장에서 구입한 차를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다구를 빌려 보성의 넓은 자연에서 차를 마음껏 마실 수 있도록 했다. 디자인 그늘막(아트쉐이드), 쿠션 소파(빈백) 등을 행사장에 설치해 이색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계획이다. △ 보성에서 만나는 소리와 빛의 향연 5월 4일부터 6일까지 보성군 문화예술회관과 판소리 성지에서 ‘제26회 서편제보성소리축제’가 준비됐다. 명창 추모제 및 추모 공연, 명인·명창 고수 경연대회, 전국 판소리 경연대회 등을 통해 예향의 고장 보성 판소리의 명맥을 이어간다는 포부다. 같은 기간 보성역 일원에서 군민과 관광객이 하나되는 ‘데일리 콘서트’도 열린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도록 국내 최정상급 가수들이 참여해 힐링의 시간을 선사할 예정이다. 특히 5월 4일 데일리 콘서트 이후에 500대 이상의 드론을 통해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으로 나아갈 기틀을 만든 보성군 열선루와 천년의 보성 차(茶)를 보여주는 ‘보성 드론라이트쇼’도 진행된다. △ 활기찬 군민 어울림 한마당 5월 3일 보성공설운동장에는 군민들의 화합의 장이 될 ‘제47회 군민의 날’ 행사가 개최된다. 보성군민의 상 수여, 청년 도약 보성 기념행사, 군민 체육대회, 복면가왕(노래자랑) 등 다채로운 어울림 한마당이 펼쳐진다. 5일 어린이날에는 한국차문화공원 잔디광장에서 ‘제102회 어린이날 행사’가 열린다. 아이와 함께 보성을 찾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가족사진 만들기, 풍선아트, 도전골든벨, 경품 추첨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구성된다. △ 천혜의 자연환경, 보성에서 특별한 경험 보성은 드넓은 계단식 차밭, 가슴 시원한 평지형 차밭, 그리고 아름다운 율포솔밭해변 등 천혜의 자연을 간직한 곳이다. 보성다향대축제 기간 동안 보성의 청정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한 ‘제20회 일림산철쭉문화행사’, ‘제19회 보성녹차마라톤대회’, ‘2024년 한국옵티미스트 전국요트대회’가 개막한다. ‘제20회 일림산철쭉문화행사’는 5월 4일부터 6일까지 전국 최대 철쭉 군락지인 웅치면 일림산에서 개막한다. 150㏊의 연분홍빛 철쭉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일림산 정상에서 산신제례를 시작으로 숲속 음악회·산림문화 사진 전시회, 편백나무 잘라가기 등을 즐길 수 있다. △스포츠맨 다 모여라 전국 단위 체육행사도 준비했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따라 달리는 ‘제19회 보성녹차마라톤대회’는 5월 4일 보성공설운동장에서 열린다. ‘2024년 한국옵티미스트 전국요트대회’는 5월 4일부터 이틀간 보성율포솔밭해변에서 경기가 진행된다.보성군 벌교스포츠센터에서는 ‘제2회 전국장사씨름대회’가 4월 19일까지 7일간 진행된다.
  • 600년 만에 공개된 석가모니 진신사리…19일 조계사서 고려사리 고불식

    600년 만에 공개된 석가모니 진신사리…19일 조계사서 고려사리 고불식

    600년의 시공간을 넘어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마침내 한국의 사부대중들에게 공개됐다. 대한불교조계종은 19일 서울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회암사 사리 이운 고불식’을 봉행하고 미국 보스턴에서 귀환한 석가모니 진신사리 등을 공개했다. 사리가 한국인에게 공개된 것은 고려 후기 사리탑에 봉안된 이후 600년 만이다. 사리가 환지본처(還至本處·본래의 자리로 돌아감)한 것 역시 일제강점기 반출 이후 100년만의 경사다.석가모니 사리는 둥근 모양이며 담록색에 가깝다. 크기는 쌀알 정도다. ‘쌀 한 톨에 수미산이 담긴다’는 불교의 경구에 비춰보면 작은 사리 안에 무궁한 진리의 세계가 담긴 셈이다. 가섭불과 정광불, 고려시대 스님인 나옹선사(1320∼1376), 지공선사(?∼1363) 등의 사리와 편(片)은 크기가 매우 작아 훼손 등의 우려로 사리구 재현품에 넣은 상태로 공개했다.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과 봉선사 주지 호산스님 등 종단 주요 직위자와 스님들, 불교 신자 등이 차례로 사리를 친견했다.친견식에 앞서 열린 고불식(부처님께 귀환을 알리는 의식)에는 총무원장 진우스님과 보스턴 환수 대표단을 이끈 봉선사 주지 호산스님, 회암사가 자리한 경기 양주시의 강수현 시장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호산스님이 이운해 온 사리구를 열어 봉안한 불조사리(佛祖舍利)를 부처님 전에 개봉하면서 고불식은 시작됐다. 호산스님은 고불문을 통해 “100여년 동안 청정도량을 떠나 이역만리에 머물렀던 세존의 사리가 마침내 본래의 주처할 곳으로 귀의하게 됐다”며 “원래 봉안되었던 청정도량 양주 회암사로 돌아가 여법하게 봉안될 것”이라고 고했다.진우스님은 치사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이후 부처님의 사리는 불자들의 신앙의 중심에 항상 자리해 왔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길을 따른 고승 대덕 스님들의 사리도 높은 수행의 증거로서 존경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이 사리를 모신 사리 장엄과 탑은 그 시대의 문화를 오롯이 담은 불교 신앙과 불교문화의 정수로 자리매김하여 왔다”며 “현존하여 예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많은 사리 가운데 이번에 환지본처한 보스턴 미술관 소장 사리는 가섭불과 정광불, 석가모니불, 고려말 지공선사와 나옹선사의 사리임이 사리장엄구를 통하여 직접 확인되어 3불 2조사 사리로, 불조사리로 약칭할 수 있으니 그 역사성과 진정성에 있어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말했다. 이어 “오늘 부처님께 환지본처를 고한 양주 회암사 소장 사리는 곧 원래의 자리인 청정도량 회암사로 돌아가 600년 전과 같이 여법하게 모셔질 것이며 원력과 신심으로 모신 사리가 세세손손 모두의 마음을 청명하게 함은 물론이고 지공선사가 고려대찰로 중창한 회암사가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는 데 큰 힘이자 출발점이 될 것이라 믿는다”고 밝혔다. 사리는 앞으로 한 달 정도 조계사 불교박물관 수장고에 머물게 된다. 조계종은 새달 19일 양주 회암사지에서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와 회암사 주최로 ‘회암사 3여래2조사 사리봉안 대법회’를 봉행한 후 회암사에 영구 봉안할 예정이다.
  • [책꽂이]

    [책꽂이]

    세 개의 전쟁(김정섭 지음, 프시케의숲) 20세기 태평양전쟁, 21세기 우크라이나전쟁,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대만전쟁은 공통점이 있다. 외교안보 전문가인 저자에 따르면 이들 전쟁은 모두 강대국의 세력·이익에 대한 사고방식을 보여 준다. 평시에는 모호하거나 은밀히 감춰져 있던 강대국 정치의 민낯은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투명하게 드러난다. 이와 함께 현대 전쟁의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인 민간인 폭격 및 원폭에 관해서도 설명한다. 어떤 논리로 시작됐고 어떻게 정당화됐는지 추적했다. 376쪽. 2만원.온라인 여론과 SNS(설진아 지음, 컬처룩) 우리가 너무도 쉽게 말하는 ‘여론’은 무엇이며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영화 ‘댓글부대’처럼 조작도 가능할까. 미디어와 여론은 어떤 연관성이 있고, 여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소셜미디어(SNS)는 여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했다. 여론 지도자로서 대통령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론을 형성하는 세력은 무엇인지, SNS가 여론 형성 과정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소개한다. SNS를 활용한 여론조사 방법 등을 부록으로 붙였다. 268쪽. 2만원.이규보 선생님, 고려시대는 살 만했습니까(강민경 지음, 푸른역사)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을 중심으로 고려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모두 89꼭지에 담았다. ‘붉은 생선을 회 뜨고 술잔을 기울였다’는 시에서 13세기 초 이미 회를 먹고 있었고, 이규보가 즐겨 마신 ‘백주’ 막걸리를 비롯해 13세기 말 원나라에서 들어온 소주 등 고려시대 술에 대해서도 알려 준다. 권세가의 집에서 키우는 앵무새 등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가족과 백성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잃지 않고 치열하게 분투한 이규보를 통해 고려를 읽는다. 388쪽. 2만원.미술이 나를 붙잡을 때(조아라 지음, 마로니에북스) 큐레이터로 일하던 저자가 감정을 관통했던 미술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시 개막 시기 온갖 신경이 곤두선 찰나, 윤석남 작가의 나무 조각 작품에서 닿고 싶지만 회피하고 싶은 마음을 발견하고, 육아에 지쳤을 때 예술가 바이런 킴의 하늘 그림에서 사소한 오늘의 숭고함을 깨닫는다. 에드워드 호퍼, 고흐 등 명작을 천편일률적으로 분석하기보다 사심을 담아 개인적으로 바라봤다. 이를 통해 미술과 친밀히 관계 맺고 동행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터다. 160쪽. 1만 5000원.
  • 美 보스턴 미술관 소장 고려 사리, 100년 만에 고국으로

    美 보스턴 미술관 소장 고려 사리, 100년 만에 고국으로

    이역만리 미국 땅에 있던 고려시대 스님들의 사리가 마침내 한국의 품에 안겼다. 일제강점기 때 무단 방출된 뒤 무려 100년 만의 환귀본처다. 대한불교조계종은 17일 “(경기 양주) 봉선사 주지 호산 스님과 총무원 문화부장 혜공 스님을 비롯한 대표단이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보스턴 미술관을 방문해 고려 사리 이운 의식을 완료하고 진신사리를 인수했다”고 밝혔다. 사리는 조계종 대표단과 김재휘 주보스턴 총영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불교식 의례를 거쳐 기증 형식으로 조계종 측에 전달됐다. 봉선사는 고려 사리의 원 봉안처로 알려진 회암사의 본사다. 이번에 반환된 사리는 가섭불, 정광불, 석가불, 지공 선사, 나옹 선사의 사리다. 사리구에 적힌 명문을 통해 석가여래와 역대 조사의 진신사리라는 것이 확인됐다. 애초에는 석가모니(1과), 지공 선사(1과), 나옹 선사(2과) 등의 사리 4과만 5개의 작은 사리구 중 3개에 각각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조계종 대표단은 이들 사리 외에 가섭불 및 정광불과 관련된 여러 개의 편(片)도 함께 인수했다. 가섭불은 석가모니 이전에 출현한 과거칠불 중 여섯 번째의 부처, 정광불은 석가모니가 성불할 것이라 예언한 것으로 알려진 부처다. 이들은 현세에 실존한 부처가 아닌 과거불이다. 조계종은 2009년부터 보스턴 미술관과 사리 환수에 대해 협의해 왔다. 2013년 이후 논의가 사실상 중단됐다가 지난해 4월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당시 김건희 여사가 보스턴 미술관을 찾은 자리에서 반환 논의가 재개됐다. 조계종은 “이역만리에 보관됐던 진신사리가 마침내 사찰로 돌아와 예배 대상으로서의 본래 가치를 회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혜공 스님과 호산 스님 등은 사리를 모시고 18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한다. 사리는 봉선사의 요청으로 문화재제자리찾기가 만든 사리구 재현품에 담겨 이운된다. 19일엔 조계종 총무원이 있는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사리의 귀환을 부처님께 보고하는 고불식을 열고 언론에 공개한다. 다음달 19일엔 원 봉안처로 알려진 경기 양주 회암사지에서 봉안 법회를 연다.
  • 바닷속 보물 간직한 고군산군도, 이번엔 또 뭐가 나올까

    바닷속 보물 간직한 고군산군도, 이번엔 또 뭐가 나올까

    ‘고려시대 왕의 임시거주지인 숭산행궁(崧山行宮), 사신이 묵었던 객관(客館), 조선시대 수군 진영인 군산진(群山鎭), 조운선이 정박한 포구…’ 고대부터 많은 선박이 오가던 길목이던 전북 군산 고군산군도. ‘동아시아 보물창고’로 불리는 이곳 해역의 숨겨진 수중 문화유산에 관심이 쏠린다.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와 전북도, 군산시 등에 따르면 오는 18일 성공적인 조사와 안전을 기원하는 개수제를 시작으로 10월까지 고군산군도 해역 수중 발굴조사가 진행된다. 고군산도 해역은 옥도면 선유도·무녀도·신시도 등 16개의 유인도와 47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진 곳이다. 역사적으로 조운선들의 정박지, 수군 진영인 군산진과 사신이 묵었던 객관(客館)인 군산정(群山亭)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과거부터 많은 선박이 다녔던 길목이자 국제무역 항로의 기착지로, 서해 연안 항로의 거점 역할을 했던 해역이다. 그만큼 화물로 선적했던 형태의 청자 다발과 고선박에서 사용한 노, 닻과 닻돌 등 선박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이 흩어진 상태로 출수돼 조사 해역에 난파선이 매몰됐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실제 지난 2020년 선유도 및 장자도 일대에서 수중 문화유산 발견 신고 이후,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수중 발굴조사를 통해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간돌검(마제석감), 삼국시대의 토기, 고려시대의 청자, 조선시대 분청사기·백자, 근대옹기 등 총 929점의 유물이 발견됐다. 새만금으로 확장하면 고려시대 선박 1척과 고려청자 등 1만 6178점이 발굴됐다. 특히 발견된 간돌검의 경우 처음으로 수중에서 발견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인 간돌검은 고인돌과 같은 무덤 유적에서 발견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또 지난해 조사를 통해 고려시대 고선박이 선유도 해역에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확인됐고, 중국 남송시대 유물 등도 발견되면서 고군산군도 해역에 숨겨진 수중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다만 군산에는 수중문화재를 발굴하고 연구할 기관·인력은 물론 유물을 보관·전시할 장소마저 없다. 인양된 수중유물은 인근 지역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이에 지역에선 ‘국립 수중고고학센터’ 건립을 요구하고 있다. 전북도와 군산시는 지난 2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를 방문해 국립 수중고고학센터 건립을 예타 대상 사업에 포함시키기 위한 논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도 관계자는 “그동안 많은 유물이 발견됐지만 여전히 학술 가치와 역사적 의미가 큰 유물이 상당량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집중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라면서 “수중문화재 전문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해 수중유물의 보고인 군산 해역을 보존·관리하기 위한 국립수중고고학 교육훈련센터 건립에도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 美 보스턴미술관 보관 ‘고려 사리’ 18일 돌아온다

    美 보스턴미술관 보관 ‘고려 사리’ 18일 돌아온다

    미국 보스턴미술관에서 보관 중인 고려시대 사리가 오는 18일 한국으로 돌아온다. 또 하나의 관심사였던 사리구는 이번 반환 일정에 포함되지 못했다. 고불식은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대한불교조계종 문화부장인 혜공 스님은 11일 서울 조계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환수 일정을 밝혔다. 혜공 스님에 따르면 고려 사리 환수팀은 15일 출국해 16일(현지시간) 보스턴미술관에서 고려 사리 이운식을 갖는다. 공식 반환된 고려 사리는 곧바로 보스턴에서 출발해 18일 오후 5~6시쯤 인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환수 고불식은 19일 오전 10시 30분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 등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된다. 고불식은 부처님께 귀환을 알리는 의식을 일컫는다. 이번에 반환될 사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1과와 고려시대 지공 스님 사리 1과, 나옹 스님의 사리 2과 등 총 4과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무단 반출된 뒤 1939년 보스턴미술관이 취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리 반환 논의는 지난 2009년 시작됐다. 사리만 내줄 수 있다는 보스턴미술관과 사리가 담긴 사리구 반환까지 요구한 문화재청 간 이견으로 진척이 없다가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해 4월 미 국빈 방문 당시 김건희 여사가 미술관을 방문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고불식 이후 일정은 미정이다. 사리의 원소장처인 경기 양주 회암사에 봉안되는 것은 부처님오신날 이후가 유력하다. 조계종 관계자는 “회암사 안치는 부처님오신날인 5월 15일 뒤로 생각 중”이라며 “대중 공개 역시 (회암사) 안치 이후에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 고려 사리 4과 18일 한국으로…19일엔 조계사서 고불식

    고려 사리 4과 18일 한국으로…19일엔 조계사서 고불식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서 보관 중인 고려시대 사리가 오는 18일 한국으로 돌아온다. 또하나의 관심사였던 사리구는 이번 반환일정에 포함되지 못했다. 고불식은 19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대한불교조계종 문화부장인 혜공 스님은 11일 서울 조계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환수일정을 밝혔다. 혜공 스님에 따르면 고려사리 환수팀은 15일 출국해 17일(현지 시간 16일) 보스턴 미술관에서 고려 사리 이운식을 갖는다. 공식 반환된 고려 사리는 곧바로 보스턴을 출발, 18일 오후 5~6시께 인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환수 고불식은 19일 오전 10시 30분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 등이 참석한 가운데 봉행된다. 고불식은 부처님께 귀환을 알리는 의식을 일컫는다. 이번에 반환될 사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1과와 고려시대 지공 스님 사리 1과, 나옹 스님의 사리 2과 등 총 4과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무단 반출된 뒤 1939년 보스턴미술관이 취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리 반환 논의는 지난 2009년 시작됐다. 사리만 내줄 수 있다는 보스턴 미술관과 사리가 담긴 사리구 반환까지 요구한 문화재청 간의 이견으로 진척이 없다가 지난해 4월 김건희 여사가 윤석열 대통령의 미 국빈방문 당시 미술관을 방문하면서 급물살을 탔다.대여 형식으로 함께 돌아올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구’ 반환은 아쉽게 불발됐다. 사리구는 사리를 담은 고려시대 공예품이다. 당대의 정교한 공예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문화재다. 조계종 관계자는 “사리 반환과 별도 일정으로 협상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고불식 이후의 일정은 미정이다. 원 소장처인 경기 양주 회암사에 봉안되는 건 부처님오신날 이후가 유력하다. 조계종의 한 관계자는 “회암사 안치는 부처님 오신 날인 5월 15일 뒤로 생각 중”이라며 “대중 공개 역시 (회암사) 안치 이후에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 [길섶에서] 징파도 부처

    [길섶에서] 징파도 부처

    몇 해 전 경기 연천으로 조선 중기 대학자이자 이제는 특유의 전서체 글씨로 더욱 명성을 날리고 있는 미수 허목 선생의 무덤을 찾아나선 길에 우연히 석조불상이 있다는 푯말을 보고 골목으로 접어든 적이 있다. 안내판이 시키는 대로 따라 들어갔더니 과연 조촐한 불상이 나타났다. 연천 북삼리 석조여래입상이라고 했다. 아랫동네에 있었던 불상을 분교 마당으로 옮겨 놓았다는데, 이제는 분교마저 문을 닫은 듯했다. 고려시대 불상이라니 오래되기는 했으되 그 자체로 감동적인 솜씨는 아니어서 잊고 있었다. 최근 임진강의 역사를 다룬 글을 읽다가 고려시대 이후 상류의 중요한 나루였다는 징파도(澄波渡)가 어딘지 궁금해졌다. 징파도를 찾아갔더니 바로 북삼리가 아닌가. 징파리를 포함한 강북 3개 마을이 합쳐지며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사공들은 뱃길의 안전을 여래에게 빌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아마도 징파도 뱃사람을 꼭 닮았을 소박한 모습의 불상이 다시 보였다.
  • 한지 세계무형유산 도전… 전주한지 부흥기 맞나

    한지 세계무형유산 도전… 전주한지 부흥기 맞나

    ‘한지 제작의 전통지식과 기술 및 문화적 실천’이 유네스코에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 신청돼 전주한지가 다시 한번 부흥기를 맞게 될 전망이다. 전북특별자치도는 문화재청이 지난달 31일 ‘한지제작의 전통지식과 기술 및 문화적 실천’의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위해 유네스코에 등재신청서를 제출했다고 2일 밝혔다. 이에 한지의 본고장 전주시는 한지산업 육성에 다시 한번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한지의 본향임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한지 생산에 필요한 닥나무 재배 확대, 전문 인력 육성, 관련 산업 개발 등 폭넓은 지원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전주시는 그동안 한지를 친환경 건축부재, 각종 생활용품, 섬유, 예술 활동에 두루 쓰이도록 활용의 폭을 넓혀왔다. 전주한지는 왕실의 진상물로 오랜 기간 높이 평가됐다. 고려시대부터 외교문서와 임금에게 올리는 문서 대부분이 전주한지를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도 전국 한지 생산의 70%가량을 점유한다. 전주한지는 그 지질이 매우 부드럽고 빛깔이 은은하면서도 고와 물감이나 무늬를 그려 넣기에도 좋다. 서예지, 공예지, 창호지, 장판지, 영구보전지 등 쓰임새도 다양하다. 전북자치도 관계자는 “한지는 닥나무 채취부터 제조 전 과정에 장인의 기술과 지식이 수반돼야 하기 때문에 세계유산 등재는 곧 전주한지를 재평가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지 제작의 전통지식과 기술 및 문화적 실천’은 2026년 12월 개최되는 제21차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에서 등재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다.
  • “‘한국 하면 파친코’ 싫어… 평생 도자기 수집”

    “‘한국 하면 파친코’ 싫어… 평생 도자기 수집”

    첫 오사카 총영사 지낸 재일교포日에 유출된 韓 도자기 수집 열성MOCO 300여점 기증… 새달 전시“아버지, 한국 멋 알리고 긍지 선사국보급만 받겠다던 고국엔 실망” “파친코, 야키니쿠(고기구이), 냉면…. 아버지는 한국이 일본에서 그런 이미지로 굳어지는 걸 원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한국 도자기를 일평생 사 모으셨습니다.” 지난 21일 일본 도쿄 유라쿠초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성희(73)씨는 아버지인 이병창(1915~2005) 박사가 한국 도자기에 각별히 애정을 쏟았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박사의 이름은 한국에서는 낯설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한국 도자 미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재일 사업가로 초대 오사카 총영사를 역임한 그는 일본을 비롯해 세계에 흩어진 한국 도자기를 모으는 데 평생을 바쳤다. 이씨는 처음으로 언론과 만나 부친의 기증품이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MOCO)으로 간 배경을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고국에 기증하려고 했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국보급만 줬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한국 도자기라면 가치와 상관없이 모두 모았던 아버지로서는 실망스러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래도 한국 박물관이 소장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몇 점을 기증한 뒤 ‘나중에 보여 줄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보여 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듣고는 더욱 실망했다고 한다. 결국 이 박사는 연고도 있고 언제든 소장품을 볼 수 있는 MOCO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1996년부터 2년간 한국 도자기 301점과 중국 도자기 50점이 MOCO로 옮겨 갔다. 300점을 훌쩍 넘는 도자기 컬렉션의 시작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북 익산 출신인 이 박사는 해방 후 일본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고생 끝에 겨우 살림이 나아지자 참고 버텨 준 아내(작고한 김덕춘씨)가 결혼기념일 선물로 조선백자를 샀다. 당시에는 중국 도자기를 최고로 쳤고 상대적으로 한국 도자기는 홀대받았다. 이씨는 “일본에서 거래되는 한국 도자기는 대부분 한국에서 가져온 것이었고, 심지어 헐값에 거래되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가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떠올렸다. 이를 계기로 1960년대 중반쯤부터 이 박사는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에 흩어진 한국 도자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사업가였기 때문에 손님 접대를 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한국에서 주문 제작한 기념품 등을 선물로 주곤 했다. 이씨는 “일본인들이 이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며 자연스럽게 한국의 멋을 화제에 오르게 하고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했다. 이씨는 “일본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아버지는 이들에게 자부심을 심어 주고 싶어했고 그게 도자기였다”면서 “아버지가 사랑했던 한국의 도자기를 통해 한국인들이 고국의 아름다움을 알아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의 바람대로 최근 2년간 리모델링을 한 MOCO는 다음달 재개관하면서 특별전으로 이 박사의 기증품을 선보이는 ‘신·동양도자-MOCO 컬렉션’을 준비했다.이번 특별전에서 볼 수 있는 이 박사 기증품의 대표적 작품으로 13세기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청자철재상감 시명 병’이 있다. 이번 특별전을 준비한 정은진(52) 주임학예원은 “한 개인이 일본과 해외 각지에 흩어져 있는 301점의 한국 도자를 한자리에 모았다는 것은 단순히 개수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이를 통해 한국 문화에 대한 그의 관심이 얼마나 깊은지 그 뒤에 숨은 노력과 열정을 알게 되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 “日서 한국 이미지는 파친코…그게 싫어서 도자기를 모았다”

    “日서 한국 이미지는 파친코…그게 싫어서 도자기를 모았다”

    “파친코, 야키니쿠, 냉면…아버지는 한국이 일본에서 그런 이미지로 굳어지는 걸 원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한국 도자기를 일평생 사 모으셨습니다.” 지난 21일 도쿄 유라쿠초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성희(73)씨는 아버지인 이병창(1915~2005) 박사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작고한 재일교포 이병창 박사의 이름은 한국에서는 낯설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 도자 미술을 이야기할 때 이병창 박사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재일 사업가이면서 초대 오사카 총영사를 역임했고 일본과 세계에 흩어진 한국 도자기를 모으는 데 평생을 바친 이가 바로 이병창 박사다. 이병창 박사는 수백점의 한국 도자기를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MOCO)에 기증했다. 1982년 개관한 이 미술관은 최근 2년간 리모델링을 한 뒤 다음달 재개관한다. MOCO는 다음달 12일부터 9월 29일까지 특별전인 ‘신·동양도자-MOCO 컬렉션’을 열고 이병창 박사가 기증한 한국 도자기를 소개한다. 이병창 박사가 기증한 301점의 한국 도자기 가운데 73점을 만나볼 수 있다. 이병창 박사의 유족이 언론과 만나 인터뷰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씨는 “리모델링 시간이 꽤 걸렸다. 아버지가 모은 한국 도자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라고 소감을 말했다.이병창 박사가 수집한 한국 도자기가 일본에 기증된 것에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이씨는 “아버지가 고국에 기증하려고 했지만 당시 고국에서는 ‘국보급만 줬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한국 도자기라면 가치와 상관없이 모두 모았던 아버지로서는 실망스러운 이야기였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게 몇 점을 기증했고 나중에 보여줄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보여주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 실망한 아버지는 연고가 있던 오사카에 기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병창 박사는 1996년부터 2년간 MOCO에 자신이 평생 모은 한국 도자기 301점을 기증했는데 여기에는 친한 지인이자 사업가 아타카 에이이치의 영향도 컸다. 아타카는 한중일 3국의 도자기를 수집해왔고 그의 회사가 파산하자 스미토모은행이 이 작품까지 떠맡은 뒤 이를 기증하면서 1982년 11월 오사카시가 MOCO를 세웠다. MOCO는 이병창 박사와 아타카가 기증한 도자기를 전시하고 있는데 한국을 제외하고 이곳에서 가장 수준 높은 한국 도자기를 감상할 수 있다. 지난해 봄 리움미술관 특별전 ‘조선의 백자’에 등장한 작품 일부는 MOCO가 대여해준 이병창 박사의 컬렉션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 한일정상회담 개최와 맞물려 김건희 여사와 기시다 유코 여사가 이곳을 방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일본을 매혹한 한국 도자기에 이병창 박사가 처음부터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씨는 “전북 익산 출신의 아버지가 패전 후 일본에서 사업을 하는 건 쉽지 않았다. 겨우 살림살이가 나아지던 중 어머니(작고한 김덕춘씨)가 아버지에게 결혼기념일 선물을 했는데 그게 조선 백자였다”고 말했다. 중국 도자기를 최고로 치던 시절 한국 도자기는 그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취급됐고 일본이 한국에서 가져간 도자기는 많았다. 이씨는 “일본에 이러한 한국 도자기가 헐값에 거래되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병창 박사는 이를 계기로 1960년대 중반쯤부터 일본을 비롯해 전 세계에 흩어진 한국 도자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사업가였기 때문에 손님 접대를 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한국에서 주문 제작한 기념품 등을 선물로 주곤 했다. 이씨는 “일본인들이 이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며 자연스럽게 한국의 멋이 화제에 오르게 하고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회상했다. 이병창 박사는 꽤 엄격한 아버지였다고 이씨는 회고했다. 일본 땅에서 한국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일본인들보다 더 노력했다. 이씨는 “아버지는 평소 ‘넌 한국인이니까’라는 무시하는 듯한 말을 듣고 오면 나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일본인보다 일본을 더 알 수 있도록 교육하셨다”라고 말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씨가 현지에서 결혼해 자녀 문제 때문에 미국 국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씨에게 이병창 박사는 “네 피를 잊은 거냐”며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이씨는 “1년 넘게 나와 말을 섞지 않았을 정도로 고국을 사랑했던 아버지였다”며 “죽을 때까지 한국 국적으로 한국 여권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고인을 추억했다. 이씨는 아버지가 사랑했던 한국의 도자기를 통해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이 고국의 아름다움을 알아주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는 소박한 조선 백자를 특히 아끼셨다”며 “일본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들에게 자부심을 주고 싶어 했고 그게 도자기였다”고 강조했다.이번 특별전에서 볼 수 있는 이병창 박사 기증품의 대표적 작품으로 13세기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청자철재상감 시명 병’이 있다. 이 병에는 ‘酒為温無毒、茶因冷不香、此酒不可不飲、佳人才子刹逢’(술은 데우면 독이 사라지고 차는 식으면 향기를 잃는다. 이 술을 마시지 않고 있을 수 있겠는가, 아름다운 여인과 재능 있는 청년의 만남에)라는 시구가 새겨져 있다. 소박하면서도 우아하고 요염한 미(美)의 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게 미술관 측의 설명이다. 이번 특별전을 준비한 정은진(52) 주임학예원은 인터뷰에서 “이병창 박사는 고국을 떠나 살고 있는 한국인 2·3세 분들에게 오랜 전통과 풍부한 역사, 문화의 모국을 자랑으로 용기를 가지고 살라고 말했다”고 고인에 대해 추억했다. 이어 “이병창 박사의 소중한 한국 도자를 일본에 기증한 사실로 한국 연구자들이 불편한 마음을 드러낼 때도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런 분위기가 바뀌고 있음을 느낄 때 여기서 근무하는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느낀다”라고 특별전을 개최한 소감을 말했다. 정 주임학예원은 “한 개인이 일본과 해외 각지에 흩어져 있는 301점의 한국 도자를 한자리에 모았다는 것은 단순히 개수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이를 통해 그가 한국 문화에 관한 관심이 얼마나 깊은지 그 뒤에 숨은 노력과 열정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 한국의 산티아고, 명품길 ‘달마고도’를 걷다 [두시기행문]

    한국의 산티아고, 명품길 ‘달마고도’를 걷다 [두시기행문]

    땅끝마을 해남에 위치한 해발 489m 달마산, 12㎞의 능선에 1만개의 기암괴석이 병품처럼 펼쳐진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산세가 웅장해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산으로 공룡 등줄기처럼 울퉁불퉁한 암봉으로 형성되어 있고 억새풀과 상록수, 다도해의 경관까지 어우러진다. 특히 봄에는 암릉과 기암괴석 사이로 진달래와 철쭉이 피고 가을에는 끝없이 펼쳐지는 억새들이 장관을 이루어 전국의 산악인들이 즐겨 찾는 명산이다. 신발 한 짝 들고 남쪽으로 떠났다는 달마대사가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이곳 산에 머물렀다고 해서 산 이름이 달마산이라 불린다 이야기한다. 달마대사가 머물렀던 남도의 명품길이러한 이유였을까. 중국인들은 고려 이전부터 달마산을 신성시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현재는 달마고도(達磨古道)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남도의 명품길이자 한국의 산티아고로 불리게 되었다. 달마산 중턱엔 1300여년 역사를 가진 고찰이자 아름다운 절 미황사가 있다. 이곳은 달마고도의 시작점이자 끝지점으로 축제가 열리는 3월이면 문정성시를 이룬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며 749년(경덕왕 8) 의조가 창건한 미황사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사적비에 따르면 749년 8월 한 척의 석선(石船)이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나 제자 100여 명과 목욕을 하던 의조(義照)가 해변으로 나가니 배가 육지에 닿았고 배애 오르니 금인(金人)이 있었고 금함(金函) 속에는 화엄경, 법화경,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보현보살, 16나한의 탱화 등이 있었다 한다. 하선을 시켜 임시로 봉안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 금인이 나타나 자신은 인도의 국왕이라 칭하고 ‘금강산이 일만불(日萬佛)을 모실 만하다 하여 배에 싣고 갔더니, 이미 많은 사찰이 들어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여 되돌아 가던 길에 이곳이 인연토(因緣土)인 줄 알고 멈추었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모시면 국운과 불교가 함께 흥하리라’ 하고는 사라졌다. 다음날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 일어난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창건하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고 한다.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던 소가 멈춘 곳에 세워진 미황사미황사의 ‘미’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 ‘황’은 금인의 빛깔을 상징한 색에서 따와 붙였다고 한다. 달마고도는 미황사에서 출발하여 큰바람재와 노지랑골, 몰고리재 등을 지나며 달마산의 주 능선을 아우르며 전해 내려오는 12개 암자를 연결하는 순례길이기도 하며 옛 달마산의 옛길이기도 하다 . 중국 선종(禪宗)을 창시한 달마대사의 법신(法身)이 상주한다는 믿음과 더불어 과거 선인들이 걷던 옛길을 복원한 길이다. 달마대사가 걸었고 아름다운 소가 걸었던 옛길에는 고려시대 12개 암자가 차례로 들어서고 조선시대엔 해남 북평면 이진에 도착한 제주도 말이 이 길을 걸었고 봇짐장수, 시집가는 신부의 가마, 5일장을 보러 가는 할아버지도 이 길을 이용했다. 달마산 능선 둘레에 12개 암자가 있었던 미황사는 조선시대 서산대사의 제자 소요대사가 머물면서 더욱 번창의 길을 걷게 되고 그 후 1892년, 중창불사를 위한 군고패(軍鼓牌)가 스님들 중심으로 결성된다. 군고패는 여러 고을을 돌며 중창불사 시주를 받았는데 저 멀리 완도 청산도까지 가게 되었고 청산도로 향하던 중 큰 폭우를 만나면서 스님 40명이 수몰되는 참사를 맞고 이로 인해 미황사는 쇠퇴하고 더불어 12개 암자도 숲 옛길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다도해의 절경이 어우러진 인생 순례길이후 ‘남도길 명소화 사업 기본계획’을 수립해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개발한 여행길인 달마고도는 자연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기계를 쓰지 않고 지게로 돌을 나르고 낫, 곡갱이, 지게 등으로 일일 35명, 10개월간 일만명의 사람 손으로 만들어졌다. 계단과 데크 없이 흙길과 돌길로 조성되어 더 의미가 생기는 것 같다. 빼어난 산세와 다도해의 절경이 어우러지고 너덜겅, 편백나무 숲을 함께 느끼며 걷는 시간을 가지며 공룡의 등뼈 같은 암릉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4개의 코스(17.74㎞)로 이뤄진 달마고도는 매 구간마다 역사자원과 아름다운 다도해 등 색다른 풍광을 선사한다. 걸으며 일상에 지친 나를 돌아보고 여유와 쉼 그리고 힐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인생 순례길이라 생각한다. 총 소요시간은 6시간 30분 정도이고 달마산의 정상 불썬봉까지 다녀온다면 7시간 30분정도 걸린다 매년 열리는 달마고도 힐링축제는 2024. 03. 23(토) 09:00 ~ 16:00로 걷기행사, 힐링음악회, 숲속버스킹, 노르딕워킹 체험, 힐링프로그램(명상, 요가 등), 달마장터(농수특산물 판매), SNS인증 이벤트, 식목일 기념행사 등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관음암터, 문수암터 등 6개의스탬프 인증을 통하여 완주 시 인증서와 메달을 받을 수도 있다. 달마고도 코스정보1코스 : 출가길 (2.71㎞, 50분 소요) 미황사에서 큰바람재에 이르는 길로 달마고도의 시작이자 등산객이 가장 많이 찾는 코스로 미황사, 산지습지, 너덜바위 지대, 떡갈나무 숲 등이 분하고 달마산과 다도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2코스 : 수행길 (4.37㎞, 1시간 50분 소요) 큰바람재에서 노지랑골에 이르는 길로 작은금샘, 큰금생 등이 있다. 소사나무, 사스레피나무, 음나무, 구지뽕나무 등이 대규모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달마산 동쪽 마을과 해안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3코스 : 고행길 (5.63㎞, 2시간 10분 소요) 이진리에서 말을 몰아 십삼모퉁이를 넘어 마봉으로 가던 길로 복층림, 노간주나무 고목, 조릿대군락지, 암석지 등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다도해의 전경을 조망하기 가장 좋은 코스이다. 4코스 : 해탈길 (5.03km, 1시간 40분 소요) 미황사로 돌아오는 마지막 코스로 전 구간이 땅끝 천년 숲 옛길이며 미황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소가 걸었던 길이다. 편백나무 숲과 튤립나무 조림지, 도솔암, 미황사 부도전의 진경을 만날 수 있다.
  • 콧수염만 남기고 삭발 김흥국 “박정희 영화 대박 기원”

    콧수염만 남기고 삭발 김흥국 “박정희 영화 대박 기원”

    “평소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존경했다. 육영수 여사는 우리나라 국모처럼 여겼다.” 가수 김흥국(64)이 콧수염만 남긴 채 삭발을 감행했다. 자신이 제작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고 하얀 목련이 필 때면’의 흥행 기원을 위해서다. 지난 17일 유튜브 채널 ‘김흥국 들이대TV’에서는 김흥국이 삭발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올라왔다. 지난 14일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그리고 하얀 목련이 필 때면’ 제작발표회 행사를 담은 영상이다. 김흥국은 “삭발한 의미는 다른 건 없고 우리 영화의 성공을 위해서 깎고 있다”며 “박정희 전 대통령, 육영수 여사가 나오는 다큐멘터리 영화 ‘하얀 목련이 필 때면’ 영화를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영화는 70% 실록과 30% 재연이 혼합된 120분 논픽션으로 제작된다. 전반부는 이승만, 김구, 박헌영, 김일성 그리고 북한 소련 군정과 남한 미군정의 해방 정국을 조명하고, 중반부는 박정희 참전 기록, 후반부는 5·16부터 산업화 과정, 육영수 여사 서거와 박정희 대통령 국장까지 다룰 예정이다. 김흥국은 이 영화를 위해 자신의 이름 딴 제작사 ‘흥.픽쳐스’를 최근 설립했다. 김흥국은 “그간 두 분을 존경한다고 생각만 했지 감히 영화 제작을 한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면서 “오랫동안 (영화 제작을) 생각만 해오다가 윤희성 감독을 만났다. 윤 감독은 오랫동안 두 분을 공부해 와서 이번 영화를 통해서 두 분에 대해 몰랐던 비화가 많이 나올 것 같다”고 말했다. 윤 감독은 “우리 국민이 고려시대보다 해방정국의 역사에 대해 더 잘 모르는 측면이 있다”면서 “이 영화는 해방정국(역사)과 박 전 대통령, 육 여사 두 분의 개인사가 연결되는 구성”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바른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며 “(개봉 후) 진보·보수 간 논쟁이 가열될 것 같지만, 오히려 논쟁이 돼서 그 부분(갈등)이 해소되고, 좌우가 화합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 “박정희·육영수 존경” 김흥국이 밝힌 다큐 영화 제작 이유

    “박정희·육영수 존경” 김흥국이 밝힌 다큐 영화 제작 이유

    박정희 전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 여사의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인 가수 김흥국은 “평소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존경했고, 부인 육영수 여사는 어머니처럼 여겼다”고 말했다. 김흥국은 지난 14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그리고 하얀 목련이 필 때면’(이하 ‘하얀 목련’) 제작발표회에서 “오랫동안 (영화 제작을) 생각만 해오다가 윤희성 감독을 만났다”며 “둘이 ‘같이 뭉쳐서 한번 만들어 보자’고 얘기가 됐다”고 밝혔다. ‘하얀 목련’은 박 전 대통령과 육 여사의 생애를 다룬 일종의 다큐멘터리로 70%의 실록 영상과 30% 재연을 섞은 120분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다. 김흥국은 이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최근 자신의 이름 딴 제작사 ‘흥.픽쳐스’도 설립했다. 영화 전반부는 이승만, 김구, 박헌영, 김일성, 북한 소련 군정과 남한 미군정의 해방 정국을 조명하고, 중·후반부에서는 박정희 참전 기록, 5·16과 산업화 과정, 육영수 여사 서거와 박정희 대통령 국장 등이 그려진다. ‘하얀 목련’ 연출을 맡은 윤희성 감독은 “우리 국민이 고려시대보다 해방정국의 역사에 대해 더 잘 모르는 측면이 있다”며 “이 영화는 해방정국(역사)과 박정희 전 대통령, 육영수 여사 두 분의 개인사가 연결되는 구성”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자료를 통해 객관성을 유지하려 했다”며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바른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개봉 후) 진보·보수 간 논쟁이 가열될 것 같다”며 “오히려 논쟁이 돼서 그 부분(갈등)이 해소되고 좌우가 화합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강조했다.김흥국은 “평소 박 전 대통령을 존경했고, 육 여사는 어머니처럼 여겼다”며 제작을 결심하게 된 배경을 밝혔다. 그는 또 최근 개봉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일대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을 관람하고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고도 말했다. 보수 정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해온 김흥국은 지난 대선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며 현장 유세를 돕기도 했다. 지난 7일에는 박진 국민의힘 서대문을 예비후보 선거사무소 개소식에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흥국은 “저는 4월 10일날 이 총선이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본다. 목숨을 걸겠다”며 “좌파 연예인들은 (선거 지지에) 앞장서는데 우파(연예인)들은 겁먹고 못 나오고 있다. 왜냐? 한 번 반성하시라. 우파 연예인들 목숨 걸어도 누구 하나 보장됐나”라고 되물었다. 앞서 김흥국은 지난 1일 배우 신현준·정준호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정신업쇼’에 출연해 “이번 총선은 한동훈 위원장이랑 같이 다니고 싶다”고 밝혔다.
  • “세계 미술 풀어낸 열쇠는 ‘용’… 내 인생 2막 연 열쇠는 치열함” [서동철의 노변정담]

    “세계 미술 풀어낸 열쇠는 ‘용’… 내 인생 2막 연 열쇠는 치열함” [서동철의 노변정담]

    조형예술 대가의 ‘쓴소리’요즘 학자들 책 도판 위주로 공부‘전공 세분화’로 좁은 분야만 연구문제의식 없고 작품성 구별 미흡몰입 통해 펼친 ‘인생 2막’전공과 무관한 다양한 미술에 관심치열하게 쓰고 그리며 새 길 찾아 ‘필생의 연구’ 시작은 퇴직한 그날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은 2015년 서울신문에 ‘세계 조형예술 용(龍)으로 읽다’를 연재했다. 마지막회는 동양의 불상과 예수의 부활을 담은 서양 미술이 완전히 같은 원리로 표현돼 있음을 보여 주는 내용이었다. 문자언어는 지역마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조형언어’는 전 세계적으로 하나의 원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원리를 깨우치고자 3만점 남짓한 작품을 채색분석했다. 강 원장이 스스로 개발한 연구방법이다. 서울신문 연재 내용은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더해 곧 책으로 펴낼 것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의 가장 권위 있는 미술사학자 강 원장을 세검정 어귀의 서울 부암동 연구실에서 만났다.강 원장은 대뜸 “요즘은 예술작품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학자가 별로 없다. 아름답다고 느끼면 애정을 갖는데 그런 게 없으니 애정도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대학이나 박물관에 재직하고 있을 때는 열심히 연구 활동을 하던 미술사학자가 퇴임하면 새로운 학문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라지고 마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학문적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놀라운 경험을 했다면 연구를 그만두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다. 그는 그 배경의 하나로 ‘전공의 세분화’를 지목했다. “요즘에는 평생 자기 분야밖에는 모릅니다. 고려시대 불화도 전기불화와 후기불화로 나뉘어졌지요. 이렇게 세분화된 전공의 연구자들은 50대에만 접어들어도 더이상 문제의식을 갖지 못합니다. 너무나 좁은 자기 분야만 공부하다 보니 고려불화 전공자가 고려불화를 가장 모른다는 역설이 나타나지요.” 강 원장은 추사 김정희와 이중섭의 것으로 알려진 작품 가운데 가짜가 많다는 주장을 끊임없이 펴오고 있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주최로 2019년 중국 베이징 중국국가미술관에서 열린 ‘추사 김정희와 청조 문인의 대화’전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강 원장은 “출품작의 90%를 차지한 해괴한 글씨들을 진품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대담무쌍한 국제적 사기극”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202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이중섭’ 전시회 때도 “대부분 구도가 엉망이고 선은 날림이며 색은 가벼워서 들떴으니 모든 요소가 힘이 없다. 경박하고 추해서 도저히 이중섭 작품이라고 볼 수 없다”며 단호하게 비판했다. 강 원장은 “글씨나 그림의 문제를 지적하면 저를 가리켜 그분은 불교조각이 전공이라며 회피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즘 글씨나 그림을 전공하는 학자들은 책의 도판을 보고 공부하니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구별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면서 “저는 실제로 치열하게 글씨를 쓰고 그림도 그린 만큼 가차없는 비판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대학 시절 서예 동아리 모집공고를 보고 찾아갔습니다. 30대이던 여초 김응현 선생 지도로 북위시대 비석을 글씨첩으로 만든 장맹용비첩(張猛龍碑帖)을 열심히 썼습니다. 임서(臨書)는 단순히 글씨를 옮겨 쓰는 것이 아니라 글씨의 구성과 기운생동을 스스로 깨우치는 것입니다. 훗날 작품의 진위를 구별하는 데 큰 힘이 돼 주었지요. 사군자도 열심히 쳐서 조금씩 동양화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여초는 저를 수제자로 키우려 했었지요.” 강 원장은 서예에 몰입하기 시작한 즈음 캔버스를 사서 서양화도 혼자 그리기 시작했다. 유화를 독학으로 그렸는데 옆집에 살던 서양화가 손동진 서울대 미대 교수로부터 ‘초현실적인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손 교수집에서 대학원생들과 함께 데생을 하고 유화도 그렸다. 이젤과 스케치북을 들고 산과 들로 오가며 전국을 안 다닌 곳이 없었다고 한다. 동서양의 예술을 혼신을 다해 체험하며 한때는 작가가 되기를 꿈꾸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대 문리대 독문과 출신이다. 평균 학점은 C였다고 한다. 석사학위도 없다. 그럼에도 하버드대 박사과정에 들어갔으니 우리나라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1980년 미국에서 ‘한국미술 5000년전’이 열렸는데 클리블랜드에 이어 보스턴에서 전시가 예정돼 있었습니다. 클리블랜드박물관에는 특히 인도 불상이 많아 감상할 시간을 자주 가졌는데 다양한 미술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지요. 보스턴에서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미술의 과도기적 양식’이라는 발표를 국제심포지엄에서 했는데, 하버드대의 존 로젠필드 교수가 다가오더니 대뜸 교환교수로 초청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내가 학위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박사과정에 들어오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해서 수락했습니다.” 강 원장은 “미술사학과에 다닌 적이 없으니 미술사학 강의를 들은 적도 없었다”면서 “영어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는데 강의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중국과 인도 미술에 관한 강의를 들었는데, 내용이 그리 들을 만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어떤 나라 미술사 강의든 문제가 많음을 알고 있으니 오류에 가득 찬 강의에서 자유로웠다고 할까요.” 박사 논문을 쓰려고 하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 미미하다는 깨우침이 일었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석굴암이었다고 한다. 그는 석굴암의 불상 조각과 건축은 반드시 함께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제강점기 경주박물관의 일본인 건축직 촉탁 요네다 미네지가 측정해 당나라 시대 자로 환산한 본존불의 치수도 반드시 무언가에 근거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 대학원생들에게 불상 논문을 읽다가 숫자가 보이면 무조건 전화하라고 했다. 어느 날 대만 유학생 그레이스 옌이 당나라 현장법사가 인도를 여행하고 쓴 ‘대당서역기’에서 알 수 없는 숫자를 보았다고 했다. 신라 사람들이 석굴암 본존불을 부처가 깨달음을 이룬 인도 보드가야 마하보리사원의 정각상과 같은 크기로 조성했음을 밝혀낸 순간이었다. 애초에 그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간 것도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 해를 그림과 붓글씨로 보내고 이듬해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2학년에 편입했다. 학사편입이니 3학년에 들어가야 했지만 미학과 학점 40학점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명세를 떨치던 김원룡 교수로부터 미술사학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김 교수가 곧 강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게다가 고고인류학과 강의를 들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렇게 한 학기 만에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67년 여름 서울대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작품도 볼 겸 유물카드를 쓰는 일을 하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조교에게 말했더니 대환영이었고요. 어둑한 수장고에서 유물을 관찰하며 카드에 유물 이름, 작품의 특성과 상태를 열심히 기록했습니다. 그때 정양모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서울대박물관 소장 회화의 낙관을 조사하고 있었는데, 조교에게 박물관 미술과에 사람이 필요하니 한 사람을 천거해 달라고 청한 모양입니다. 마로니에 벤치에서 정 선생과 한참 이야기를 나눴는데, 당장 근무를 제안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박물관에 들어간 지 1년 6개월 만에 사직서를 냈다. 일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고 미술부 내부에 약간의 잡음도 있었다고 했다. 쉬면서 앞날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문득 경주를 떠올렸다. 당시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에게 복직을 부탁하며 경주 이야기를 꺼내니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경주는 좌천을 넘어 유배지였다는 것이다. 1970년 부임하니 관장만 있던 경주박물관의 제1호 학예직이었다. 옛 경주박물관 건물 옆에 조그만 가건물을 붙여 연구 공간으로 썼다. 강 원장과 경주, 나아가 신라의 오래된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강 원장은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장이 됐고 2000년 그곳에서 정년퇴임했다. 퇴임 발표는 기와에 새긴 조각이 귀신이 아니라 용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내용이었다. 귀면와(鬼面瓦)가 아니라 용면와(龍面瓦)라는 인식은 영기화생론의 기반이 됐다. 퇴직한 그날 필생의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용이 세계 미술을 푸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20년이 지나서야 용의 입에서 나오는 무언가가 ‘조형언어’였음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요즘도 “매일매일 새로운 계획을 세워서 직진하고 있다”고 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나는 세상을 위해서 나가는 거야” 하고 스스로 다짐한다는 것이다. ■강우방 원장은 1941년 중국 만주 안둥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오랫동안 재직하며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지냈다. 이후 이화여대 미술사학과에서 후학을 가르치다 퇴직한 뒤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을 열어 오늘에 이른다. 저서로 ‘원융과 조화’, ‘법공과 장엄’, ‘한국불교조각의 흐름’, ‘한국미술의 탄생’, ‘수월관음의 탄생’ 등이 있다.
  • 역사의 흐름을 바꾼 고려거란전쟁의 위대한 영웅 [한ZOOM]

    역사의 흐름을 바꾼 고려거란전쟁의 위대한 영웅 [한ZOOM]

    1010년 11월 거란 황제 ‘야율융서’ (耶律隆緒∙972~1031)가 ‘강조의 정변’을 빌미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2차 고려거란전쟁). 12월 28일 현종은 수도 개경을 떠나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다음해 1월 13일 나주에 도착한 현종은 이 곳에서 태조 왕건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왕건은 호남지역을 두고 후백제의 견훤과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왕건이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용(龍)을 탄 백발노인이 나타나 지금 당장 바다를 건너라고 소리쳤다. 잠에서 깬 왕건은 무엇에 홀린 듯 서둘러 병사들을 이끌고 오늘날 영암군에 있는 남해포(南海浦)로 가서 배를 타고 떠났다. 덕분에 견훤의 기습공격에서 피할 수 있었다. 한편 배를 타고 무안에 도착한 왕건은 매복하고 있다가 뒤따라온 견훤을 공격해 무찔렀다. 이 전투를 계기로 왕건은 나주와 영암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현종은 남해포로 가서 왕건이 꿈을 꾸었다고 전해지는 자리에 제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란의 침공으로부터 고려를 지켜달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다. 현종의 간절함이 닿았는지 이후 고려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현종은 며칠 후 나주를 떠나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구국영웅, 양규(楊規) ‘예전 당나라에서는 강태공(姜太公)을 무성왕(武成王)으로 삼고 사당을 지어 64명 장군들의 위패를 모셨습니다. 우리도 무성묘를 세워 김유신, 을지문덕, 유금필, 강감찬, 양규, 윤관, 조충, 김취려, 김경손, 박지, 김방경, 안우, 김득배, 이방실, 최영, 정지, 하경복, 최윤덕 등 장군들의 위패를 모셔야 할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편집) 1456년(세조 2년) 재상 ‘양성지’ (梁誠之∙1415~1482)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장군들의 위패를 모시자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에 적힌 이름에는 고려의 구국영웅으로 존경받았던 ‘양규’ (楊規∙미상~1011) 장군이 포함되어 있었다. 2차 고려거란전쟁이 일어나자 양규는 고려 최북단 ‘흥화진’에서 3천명의 병력으로 40만 거란군과 맞서 싸웠다. 흥화진이 쉽게 함락되지 않자 거란황제는 40만 대군 중 20만은 흥화진 인근 ‘무로대(無老代)’에 남겨두고 20만을 이끌고 ‘통주성’으로 향했다. 통주성으로 가는 길에는 고려 총사령관 강조(康兆)가 기다리고 있었다. 강조는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국 거란군에게 패해 처형되었고, 남은 고려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강조의 패전 소식을 들은 양규는 7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흥화진을 떠나 통주성으로 향했다. 양규는 통주성 주변을 지키던 거란군 정찰대를 물리치고 통주성으로 들어갔다. 통주성의 전열을 가다듬은 양규는 추가 징발한 1000명을 포함한 1700명 결사대를 이끌고 통주성 아래 ‘곽주성’으로 향했다. 이미 함락된 곽주성에는 6000명의 거란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양규는 한밤중에 곽주성에 들어가 거란군을 전멸시키고 7000명의 포로를 구했다. 양규의 곽주성 탈환으로 거란군의 보급로가 차단되었고, 전쟁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양규는 거란황제가 20만군을 남겨둔 무로대를 기습해 2000명의 포로를 구했다. 양규와 결사대는 기동력을 활용한 기습공격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양규가 구해낸 포로는 약 3만명에 달했다고 한다.1011년 1월 28일 양규는 퇴각하는 거란군 선봉대 1000명을 전멸시켰다. 겨우 전투를 끝냈을 무렵 거란황제가 이끄는 대규모 본대가 도착했다. 양규는 대규모 거란군 본대를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으나 결국 포위되어 온 몸에 화살이 박힌 채 전사했다. 이 전투로 거란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거란군이 늘어갔으며 때마침 내린 큰 비로 인해 거란군의 갑옷과 병기가 녹슬어 갔다.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을 때 흥화진을 방어하던 정성(鄭成)이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 후방에서 거란군을 공격했고 수많은 거란군이 압록강 속에서 죽어갔다.현종의 리더십 2차 고려거란전쟁 이후 약 8년이 지난 1018년 12월, 거란의 총사령관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면서 3차 고려거란전쟁이 일어났다. 소배압은 강동 6주의 성을 정복하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판단하고 주력부대와 함께 빠른 속도로 고려 황제가 있는 개경을 향했다. 2차 고려거란전쟁 당시 현종은 끝까지 개경을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거란군이 개경 입구까지 몰려오면서 어쩔 수 없이 피난을 떠나야 했다. 지난 8년 동안 현종은 백성을 버린 왕이 되지 않기 위해 백성들의 믿음을 얻는 동시에 국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현종은 개경의 백성들을 모두 성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개경 주변의 모든 들판을 불태웠다. 적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물자와 식량을 없애 적을 지치게 만드는 청야전술(淸野戰術)을 쓴 것이었다. 그리고 개경성 안에 있는 백성들을 안심시키며 거란군을 상대했다. 주변에서 고려군이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소배압은 어쩔 수 없이 퇴각을 결정했다. 돌아가는 거란군을 강감찬이 뒤쫓았고 귀주성 동쪽 벌판에서 거란군을 전멸시켰다. 역사는 이 전투를 한국사 3대 전투의 하나인 귀주대첩(龜州大捷)으로 기록한다.자랑스러운 고려인 우리나라는 코리아(Korea), 우리나라 사람들은 코리안(Korean)이라고 한다. 고려시대 아라비아 상인들이 고려를 코리아로 부르면서 우리는 ‘코리아에 살고 있는 코리안’이 되었다. 해석하면 ‘고려에 살고 있는 고려인’인 것이다. 조선인, 조선사람이 익숙했는데 막상 코리아를 고려로 번역하고 나니 재미있다는 느낌도 든다. 고려는 태조 왕건이 세웠고, 무신정권에 의해 나라가 흔들렸으며, 몽골에 의해 지배를 받았던 나라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고려는 동아시아 최강국 거란을 물리쳤고, 이후 거란, 송나라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 강대국이었다. 우리가 대외적으로 고려인인 만큼 이제 고려에 대해서도 관심을 높였으면 한다. 우리는 반만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고려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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