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읽는 동화] 다시 쓴 초대장/배익천
‘흐흥, 흐흥!
지태는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내일 이맘때면 선물 더미에 파묻혀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게 아닐까?’
오직 그게 걱정이었다.
‘방학과 함께 맞는 생일, 초등학교 마지막 생일을 정말 멋지게 보내야지.’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언제나 내 편인 엄마는 오늘부터 바쁘시겠지?’
지태는 바쁜 어머니를 어서 보고 싶었다. 빨리 걸었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가 굼벵이처럼 느렸다.
땡,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바쁜 걸음으로 문 앞으로 가 섰다. 딩동! 딩동! 벨이 울려도 기척이 없다.
‘시장 가셨나?’
들뜬 기분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지태는 가방을 고쳐 메고 힘없이 벽에 기대 섰다.
1001
아파트 호수를 이마에 붙이고 있는 회색 문이 갑자기 솟을대문처럼 보였다. 지태는 장난기가 일었다. 텔레비전 연속극의 한 장면처럼 짐짓 뒷짐을 지고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말했다.
“이리 오너라!”
금방 어머니가 깔깔 웃으며 나올 것 같아 몸이 배배 꼬였다.
“니가 오니라!”
“어!”
어머니 목소리가 아니라 아이 목소리였다. 배배 꼬이던 몸이 기름에 튀긴 꽈배기처럼 빳빳해졌다.
“이리 오너라!”
얼떨결에 다시 나온 말은 화난 목소리처럼 컸다.
“아이구! 도련님이시군요. 죄송해요. 조금 전에도 어떤 아이가 장난질을 했기에…….”
삐이걱, 대문을 밀고 나온 아이는 머리카락을 궁둥이까지 땋아 내린 지태 또래의 아이였다. 반쯤 열린 대문 안에서 꽃향기가 더운 바람처럼 쏟아져 나왔다. 벌렁벌렁, 지태의 코는 저절로 벌렁거렸다.
“도련님, 서당 다녀오십니까?”
대문 밖으로 나온 아이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이라니? 나는 지금 학교에서 온단다.”
“도련님, 오늘도 서당에서 말썽부리셨지요? 마님께서 조금 전에 훈장님 전화를 받고 아주 슬프게 울고 계신답니다.”
아이는 지태의 말에는 아랑곳 않고 자기 말만 했다.
“서당과 훈장님은 뭐고, 전화는 웬 전화냐?”
지태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이리 오세요. 오늘은 마님이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테니까요.”
아이가 지태의 손을 잡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고린내가 나는 신발장이며 복닥복닥 들어앉은 가구는 간 데 없고 대문 안은 넓은 흙마당이었다. 마당 저 끝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보이고, 군데군데 서 있는 나무는 환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이는 지태를 장독대 곁으로 데리고 갔다. 크고 작은 장독이 넘어가는 햇빛에 맨질맨질 빛나고 있었다. 장독대 둘레에는 웃자란 상사화가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듯 잎사귀를 늘어뜨리고 제비꽃이 무리지어 다소곳이 피어 있었다.
“도련님, 왜 남의 귀한 도련님을 자꾸 때리세요?”
아이가 반반한 장독대 축돌 위에 지태를 앉히며 나무라듯 말했다. 지태는 가슴 한복판으로 서늘한 물줄기 하나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지태네 반 아이들이 알고, 선생님이 아는 일이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까맣게 모르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걸 선생님이 말씀하셨단 말인가? 그래서 어머니가 울고 있단 말인가?’
지태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생일 선물 더미 속에 파묻혀 숨도 못 쉴 것 같은 즐거운 마음에 얼음물이 끼얹어졌다.
갑자기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마치 남의 집 아들처럼, 술만 취했다하면 머리고 뺨이고 가리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손찌검을 하는 아버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새우처럼 몸을 오그렸다. 퍽, 퍽, 퍽. 귓속 가득 주먹 맞는 소리가 들어왔다.
“죽어요. 죽어! 이러다 아이가 죽어요.”
어머니의 비명 소리다.
“죽어, 죽어! 다 죽어!”
어머니 머리 위에도, 어깨 위에도 아버지 주먹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지태는 아버지에게 맞은 주먹을 아이들에게 다 돌려주었다. 조금만 거슬리면 주먹부터 날렸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머리고 뺨이고 가리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날렸다. 시원했다. 새우처럼 오그라들었던 몸과 마음이 쭉 펴지는 것 같았다. 울고 있는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이 지태 편이던 어머니다. 지태가 또 두들겨 맞을까봐 아무 것도 아버지에게 이르지 않던 어머니다. 그런 어머니가 자기 때문에 울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나, 엄마에게 데려다 줘.”
“마님은 아직도 울고 계십니다. 오래오래 우실 것입니다. 도련님은 오늘도 귀한 집 도련님들을 많이 울리고 왔으니까요.”
“아니야, 오늘은 아무도 때리지 않았어.”
“꼭 주먹으로 때려야 때리는 게 아닙니다. 마음으로도 얼마든지 때릴 수 있지요. 도련님은 오늘 동우 도련님에게 생일 선물로 울트라 슈퍼 디럭스를 사오라고 했지요?”
“네가 그런 것도 아니?”
“왜 몰라요. 별의 커비에 나오는 거잖아요. 그게 얼만지 알아요?”
“삼, 삼, 삼만…….”
“그래요. 삼만 원도 넘어요. 그러면 동우네 마님께서 무얼 하시는지 아세요?”
지태는 잘 알고 있다. 동우 어머니는 우유 배달을 한다. 1교시가 끝나는 시간이면 학교에도 배달을 한다. 선생님 책상 위에도 우유 하나를 올려놓고 간다.
“그 우유 하나를 배달하면 100원 남는다고 쳐요. 3만원이 되자면 몇 개를 배달해야 할까요?”
‘100원이 열이면 1000원, 100이면 10000원…….’
지태는 눈덩이 굴리듯 머릿속에서 숫자를 굴렸다.
‘300개!’
말없이 교실을 빠져나가는 동우 어머니 뒷모습이 떠올랐다. 코끝이 찡했다. 아버지의 주먹을 맞았을 때처럼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동우 도련님은 지금도 떼를 쓰며 울고 있어요. 그걸 사달라고요. 그래서 동우네 마님도 함께 울고 있어요.”
지태는 가슴 깊은 곳에 살얼음이 어는 것처럼 시렸다.
“어디 그 뿐이세요? 상수 도련님은 왜 오지 말라고 했어요?”
“너, 지금 뭘 보고 말하니?”
지태는 가슴이 뜨끔했다. 아이는 오늘 낮에 지태가 반 아이들에게 돌린 생일 초대장 내용을 훤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상수는 모든 아이들이 싫어하는 아이야.”
“그렇지만 도련님이 상수 도련님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상수 도련님처럼 가난하고 공부도 못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될 수는 없어. 우리 집은 이미 엄청난 부자고, 나도 공부를 엄청 잘해. 그리고 모두들 나를 좋아해.”
“천만에요. 도련님을 좋아하는 건 도련님의 주먹 때문이에요. 억지로 좋아하는 거란 말이에요.”
“아니야. 내일 와 봐. 우리 반 아이들 모두가 올 거야. 손에손에 선물을 들고.”
지태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가슴에 얼었던 살얼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아니에요. 한 명도 안 올지도 몰라요.”
“설마?”
“두고 보세요. 닌텐도 디에스는 있어도 닌텐도 윌은 없으니 그걸 사오라고요? 울트라 슈퍼 디럭스보다 엄청 비싼 그걸 사올 도련님이 어디 있겠어요?”
지태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동우의 울트라 슈퍼 디럭스는 물론이고 산더미처럼 쌓인 선물 속에는 닌텐도 윌이 한 개쯤은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다 알아요.”
“뭘?”
“도련님이 도련님보다 센 주먹 앞에서는 맥도 못 추고 쩔쩔맨다는 것을요.”
“그건 무슨 말이니?”
“기억 안 나세요? 지지난 수요일 도련님이 준표 도련님 주먹 한 방에 풀썩 쓰러진 거, 그리고는 이제까지 쩔쩔매고 있다는 거, 도련님들이 다 보고 다 알고 있지요. 그리고 모두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지요. 자기들도 도련님을 그렇게 한 방에 쓰러뜨려야겠다고.”
지태는 으스스 추워지는 것을 느꼈다. 가슴 깊은 곳에 또다시 사르르 살얼음이 얼었다. 무서웠다. 준표 주먹은 무서웠다. 아버지 주먹처럼 무서웠다. 아이들이 저마다 오른쪽 주먹을 치켜들었다. 작은 주먹들이 점점 커지더니 태권브이 주먹처럼 지태 눈앞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살려 줘. 살려 줘!”
지태는 손바닥을 쫘악 편 채 두 팔을 앞으로 내밀며 소리쳤다.
“진정하세요, 도련님!”
아이가 지태를 어깨동무하며 살풋 껴안았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다시 쓰면 돼요.”
“뭘?”
지태가 아이의 가슴 속에서 귓속말처럼 물었다.
“초대장을요.”
“정말?”
“그래요. 그리고 끝에 한 줄 더 쓰세요. ‘내 주먹은 이제 영원히 잠자는 주먹’이라고요.”
“하지만 어쩌지? 생일은 바로 내일이고, 지금은 아이들이 하나도 없는데…….”
“자. 걱정 말고 쓰세요. 마음으로. 제가 모두 전해드릴 테니까요.”
지태는 아이의 가슴에 안겨 초대장을 다시 썼다. 달싹달싹, 마음의 연필로.
-친구들아, 미안해. 아까 전해준 내 생일 초대장은 가짜야. 모두 농담이야. 선물은 아무 것도 필요 없어.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모두 와 줘. 우리 집에는 울트라 슈퍼 디럭스도 있고 닌텐도 디에스도 있어. 모두 재미있게 놀자. 그리고 내 주먹은 이제 영원히 잠자는 주먹이야. 영원히. 그럼 내일 봐.-
달싹달싹 초대장을 다시 쓴 지태가 아이를 빤히 쳐다봤다.
“그런데 너는 누구니?”
아이가 흠칫 놀랐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저, 저요? 저는 복숭아꽃이에요.”
아이가 방긋 웃었다. 아이의 입에서 분홍빛 꽃잎이 쏟아져 나왔다. 하나, 둘, 셋, 넷……. 그것들은 친· 구· 들 · 아 · 미 · 안 · 해 하고 꽃잎 하나하나마다 분홍빛 글자를 물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이도 꽃잎과 함께 사라졌다.
-매력적이어서 남을 유혹하기도 하지만 용서와 희망을 품고 있기도 하지.-
어디선가 선생님 목소리가 들렸다. 복숭아꽃 꽃말을 설명하시던 선생님의 예쁘고 고운 목소리다. 복숭아꽃이에요, 하던 바로 그 목소리다.
“아니, 지태야!”
땡,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어머니 목소리가 지태를 확 덮쳤다.
“어, 엄마! 안 울었어?”
“이 뚱딴지!”
“엄마!”
1001. 아파트 호수를 이마에 붙이고 있는 회색 문 앞에서 지태가 가만히 무릎을 꿇었다. 까만 주름치마, 어머니 두 다리를 꼬옥 잡고. 복숭아꽃 향기가 사방으로 은은하게 퍼졌다.(*)
●작가의 말
아이들을 가르치는 맨 처음의 선생님은 부모님이다. 폭력적인 아이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 뒤에는 폭력적인 부모와 맹목적인 사랑이 숨어 있다. 사랑에도 방법이 있지 않을까. 용서와 희망을 가르쳐주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난 아이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약력
▲1950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남
▲197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동화집 ‘별을 키우는 아이’, ‘잠자는 고등어’, ‘내가 만난 꼬깨미’ 등
▲대한민국문학상, 세종아동문학상, 소천아동문학상, 윤석중문학상 등 받음
▲부산MBC ‘어린이문예’ 편집 주간, 동의대 문창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