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공영방송의 공공성, 공정성, 독립성을 확보하자/이인희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방송계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 우여곡절 끝에 KBS와 MBC의 경영진 퇴진을 요구하는 구성원들이 프로그램 제작 중단에 나서고 두 공영방송의 노동조합은 총파업 찬반 투표를 진행, 파업을 예고했다. 28일부터 일부 라디오 프로그램은 “방송사 사정으로 정규 프로그램 대신 음악으로 대체해 방송한다”는 메시지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기류는 총파업 찬성 쪽으로 흐르는 분위기 속에 국민들은 9월에 ‘방송대란’이라도 터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박근혜 정부 때 임명된 두 공영방송 사장들이 방송의 공공성, 공정성, 독립성을 지키지 않은 결과 공영방송의 신뢰를 잃게 했다는 책임을 묻는 데 있다. KBS 고대영 사장과 MBC 김장겸 사장은 그 책임론을 인정하지 않고 각자 법률상 보장된 임기를 마치겠다며 사퇴를 거부한다. 노조 측은 사장이 구성원의 지지를 받지 못한 이유가 자신을 임명해 준 정권의 입맛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비협조적인 제작진에게 부당한 인사권 행사로 ‘탄압’했다고 주장한다. 사측은 파업이 정치 권력과 노조의 방송 장악을 노리는 행위라고 맞대응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노측과 사측이 대화를 통해 대립을 해결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국민들은 공영방송의 파행이 하루빨리 해소되고 정상화되기를 바라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앞으로 어떠한 과정을 겪더라도 해결의 마무리는 공영방송의 공공성, 공정성, 독립성을 확보하는 데 있어야 함에 노측, 사측도 이견이 없을 터이다. 현 상황이 수습될 수 있는 몇 가지 방향을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KBS 고대영 사장과 MBC 김장겸 사장이 사퇴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공영방송 최고경영자(CEO)로서 구성원들의 신임을 받지 못한 경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조직을 다시 순조롭게 이끌어 가기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공영방송의 배가 좌초되기 직전에 놓였는데 물러나지 않겠다고 버틸 수 있는 명분이 약하다. 자칫 공영방송 문제가 정쟁으로 확대되기까지 한다면 KBS, MBC는 난파선이 되고 전파 주권자인 국민들만 피해를 보게 된다.
둘째, 공영방송 이사회를 보다 민주적인 기구로 만드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신임 사장은 현재 이사회의 임명권을 존중하되 구성원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절차를 도입해 선출하도록 한다. 지금까지 여당과 야당이 공영방송 이사 추천권을 가졌으나 장기적으로는 방송법 개정을 통해 이사 추천 방식을 보다 합리적으로 개선하고, 사장 선임에 필요한 이사회 의결정족수를 3분의2로 정하는 것이 여당의 독선을 막을 장치가 될 수 있다. 이사회 구성에 사학법의 개방형 이사제와 유사한 개념을 도입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만하다.
셋째, 공영방송의 경영권과 편집권 분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래야 보도의 공정성과 독립성이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은 한국을 언론 선진국으로 만들기 위해 공영방송에 대한 구태의연한 기득권을 내던지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난달 국경없는기자회(RSF) 크리스토퍼 들루아르 사무총장이 방한해 “최근 프랑스의 민영 언론사에서 편집권을 두고 소유주와 편집진 간에 갈등이 있었던 사례를 계기로, 소유주에게 언론사의 공정 보도와 독립성을 보장하게 하는 의무 규정이 생겼다”고 밝힌 것은 오늘 한국의 공영방송 파행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며 일부에서 ‘방송 장악’ 운운하는 모습을 보니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국민의 대다수가 소셜미디어와 포털 사이트를 통해 뉴스를 접하는 이 시대에 더이상 ‘장악할 방송’도 ‘장악될 방송’도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미디어로서 존재감이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는 지상파 방송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근시안적인 노력인지, 오히려 투명한 프로그램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을 필요가 있다. 세상은 변했다. 더이상 방송이 정권의 입이 되는 시대가 아니다. 방송의 민주화야말로 언론 선진국이 되는 핵심 역량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공영방송은 명백하게 퇴보했으며 그 후유증이 지금 도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한국도 언론의 공정성, 독립성이 보장되는 나라라는 상식을 세워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