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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광장] 누굴 위한 고대사 폄하인가/박홍환 논설위원

    [서울광장] 누굴 위한 고대사 폄하인가/박홍환 논설위원

    “다음 중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반도 북부에 설치한 한군현(한사군)이 아닌 것은? ①동예 ②낙랑 ③대방 ④현도” 초등학교 때부터 달달 외워 답을 맞혀야 했던 국사 시험 문제다. 선생님들은 우리 땅이 중국 한나라의 식민지였다는 어두운 고대사를 무비판적으로 학생들에게 주입시켰다. 그 기초는 일제의 관변 학자들이 만들었다. 식민사관이다. 일제는 세키노 다다시, 구라야마 슌이치, 이마니시 류 등이 평양 등에서 발견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를 들이밀며 한국사를 타율의 역사로 규정짓는 ‘한반도 한사군’을 단정적으로 확정지었다. 일부 해석이 바뀌긴 했지만 지금까지도 우리 주류 학계는 여전히 역사적 사실처럼 신봉하고 있다.일제의 의도는 뻔했다. 한국의 역사는 식민지로 시작했으니 일본의 지배가 당연하다는 논리를 저변에 깔고 있다. 그런데 이런 고대사 폄하가 시정되기는커녕 광복 후 70년인 오늘까지도 여전하다는 점이 오히려 놀랍다. 게다가 중국, 일본의 역사 왜곡을 바로잡겠다는 취지로 혈세를 투입해 설립한 동북아역사재단마저도 이런 논리에 편승, 2012년 미 의회조사국에 ‘한반도 한사군’을 기정사실화하는 내용의 자료를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백번 양보해 설령 사실이더라도 우리가 전파해 득이 될 게 뭔가 묻고 싶다.얼마 전 만난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한반도에 한사군이 설치돼 있었다는 주장을 장시간 조목조목 반박했다. 고조선 강역(영토) 축소, 임나일본부설 등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한반도 침략에 이용하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제가 사실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주류 학계로부터 배척받는 이 소장은 그동안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우리 안의 식민사관’ 등의 저술을 통해 우리 학계 저변에 흐르는 식민사학의 전통을 강도 높게 비판해 온 문제의 사학자다.이 소장은 한사군 설치와 근접한 시기에 작성된 중국의 1차 사료들을 근거로 제시했다. 한서, 삼국지, 후한서, 진서 등에 일관되게 한사군의 위치를 요동으로 쓰고 있고, 중국의 지리서 등에 따르면 당시의 요동은 지금의 허베이(河北)성 일대라는 것이다. 고조선 강역을 고려해도 한반도에 한사군이 설치될 수 없다는 주장도 내놓았다.이 대목에서는 대만의 국립대만대 초대 총장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학자 푸스녠(傅斯年)의 역사서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을 인용했다. 푸스녠에 따르면 옛 숙신은 한나라 때의 (고)조선으로, 산둥(山東)반도를 지배했던 제나라와 동북쪽으로 이웃하고 있었다.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그렇다면 평양 인근 등에서 대거 출토된 낙랑 유물은 무엇인가. 이 소장은 “일부는 일제 학자들이 조작했고, 일부는 확대 해석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인적·물적 교류의 흔적을 마치 낙랑군의 통치 증거인 양 과대 포장했다는 것이다. 사료적 근거가 빈약한 우리 고대사를 실증사학이라는 미명으로 폄하했다는 뜻이다.물론 주류 측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이 소장 등이 오도된 민족주의에 편승해 역사를 제멋대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한반도에 한사군이 설치돼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유물 등을 통해 검증됐다고 일축한다. 뒤집힐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얘기다. 과연 그럴까. 온전한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 2000년 전의 역사를 유물 몇 개로 단정지을 수 있을까.훨씬 큰 문제는 우리가 고대사를 폄하하는 사이 중국은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중국은 은밀하게 ‘동북고대방국속국사’(東北古代方國屬國史)를 집필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인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을 포함해 중국 동북 지방에서 흥망성쇠했던 16개 왕조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고, 정식으로 자국사에 편입하고 있는 것이다. 동북공정의 ‘완결판’으로 곧 실물이 나오게 된다.중국의 최대 인터넷 검색 사이트 바이두(百度)는 한사군의 의의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한사군 설치는 한 무제가 한반도 북부 지역을 이미 한 제국의 통치 범위에 포함시켰다는 것을 입증한다.” 무비판적으로 한반도 한사군설을 수용해 우리 스스로 고대 한반도 북부를 한 무제의 수중에 갖다 바친 것은 아닐까.
  • [서울신문이 만난 사람] ‘국내 4년제 대학 유일 외국인 총장’ 존 엔디컷 우송대 총장

    [서울신문이 만난 사람] ‘국내 4년제 대학 유일 외국인 총장’ 존 엔디컷 우송대 총장

    반핵운동가 겸 한반도 문제 전문가. 두 차례에 걸친 노벨 평화상 후보. 국내 4년제 대학 총장 중 유일한 외국인 총장. 직접 강의도 하는 총장. 대전에 있는 우송대 존 엔디컷(79) 총장이다. 2007년 미국에서 솔브릿지대학 교수로 부임, 2009년부터 7년째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대학가의 해외석학 초빙 사업이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는 가운데 외국인으로서 국내 대학 총장으로 일하는 그를 만나 대학 운영과 정부의 고등교육 정책에 대한 입장 등을 들어 봤다. 인터뷰는 지난 5일 우송대 솔브릿지 경영대학 내 사무실에서 했다. →두 차례나 노벨 평화상 후보로 올랐다고 들었다. -지난 20년간 조지아공대 교수 및 국제전략정책센터 소장으로 근무하며 동북아 정세를 연구했다. 1991년 한반도·일본·대만·몽골·시베리아·중국 동북부에서 핵무기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국제 민간운동인 ‘동북아제한적비핵지대화회의’(LNWFZ-NEA) 개념을 이끌어 내는 등 동북아 비핵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2005년에 LNWFZ-NEA 사무국과 함께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으며 2009년에도 올랐다. 2005년에는 후보 랭킹 7위였다. →한국과의 개인적 인연이 있다면. -처음 한국을 방문한 건 미 공군 장교로 일본에서 근무하던 시절이다. 1959년이다. 오산 미 공군기지에서 2주간 파견 근무했다. 국민소득 60달러였을 때로 민둥산에 황량한 분위기였다. 이후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이나 김신조 습격 사건 등 남북 간 중요 사건이 있을 때도 방문했다. 제 분야가 동북아 연구였던 만큼 한국에 언제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 공사 교수로 있을 때는 ‘동아시아의 정치학’이라는 입문서도 공동 저술했다. 한국, 북한, 일본 부문 기록을 내가 맡았다. 고향인 애틀랜타의 한인들과도 교류하고 미 중서부 상공회의소 소장도 맡은 적이 있다. 베트남 복무 시에는 따뜻한 된장찌개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며 백마사단 관계자와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총장 취임 당시 다짐과 성과에 대한 평가를 한다면. -총장직을 수행하기 시작할 때 설정한 목표는 학생들에게 최상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육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학생들의 소프트 스킬, 그러니까 인간적 기반 능력 자체를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1991년부터 동북아시아 비핵화 운동을 하며 세운 ‘이웃 사촌 아시아’라는 개념의 현실화 또한 부수적인 목표로 세웠다. 개인적으로 평가하자면 전자는 매우 성공적이며 후자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현재 우리 졸업생들은 사회에서 기대하는 인재상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고, 우송대는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특성화 대학으로 성장하고 있다. 솔브릿지대의 경우 2007년 개강 당시 학생 29명에 교수 8명으로 출발했으나 지금은 유학생만 38개국에서 1000명 이상이 와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모든 수업은 영어로 진행하며 유학생들에게는 한국어를, 한국 학생들에게는 중국어를 의무과정으로 3년간 듣도록 하고 있다. 성적을 매기자면 5점 만점에 4.5점이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총장이면서 직접 강의도 한다고 들었다. -그렇다. 일반적으로 미국도 총장이 강의하는 것은 드물다. 하지만 나는 내 관심 분야에서 학생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게 좋다. 지금은 미국사 강의를 하고 있으며, 다음 학기에는 동북아 정치를 할 계획이다. 한번은 중국 유학생이 고구려는 중국 역사라고 하길래 그렇게 생각하느냐며 웃으며 말해 주었다. 역사적으로 한국 역사라고 말이다. →우송대는 1년 4학기제를 운용하는데 2학기제와 비교해서 어떤 이점이 있나. -내가 오하이오주립대를 다녔는데 4학기제였다. ROTC 후보생이었던 관계로 다른 학교 생도들보다 4개월 일찍 임관하면서 더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 와 보니 방학기간이 너무 길더라. 방학이 길면 외국어를 배우더라도 까먹는다. 집중도가 떨어진다. 그래서 2010년부터 4학기제를 운영하고 있다. 간호학과처럼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학과생들과 필요에 의해 졸업을 늦추려는 학생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3년 6개월 만에 졸업하고 있다. 졸업생들이 사회 진출 준비를 집중적으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본다. 다른 대학에서도 우리를 벤치마킹하러 온다. 4학기제를 다른 대학들도 도입할 만하다고 본다. →교수진의 연구 역량 강화, 학생 취업률 제고, 대학 경영 개선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게 국내 대학의 현실이다. 대학 총장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연구 부문에 중점을 두고 답변드리자면 우송대는 연구 중심 대학이 아니라 교육 중심 대학이다. 물론 교수 연구를 독려하고 우수한 연구자에게는 충분한 인센티브를 부여하지만 연구의 전반적 방향성은 주로 학생들의 수혜를 목표로 한다. 취직의 경우는 취지는 잘 이해하고 있다. 대졸자들이 직장을 찾기 힘든 것은 세계적 문제다.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로 전국 대학 총장들을 초대한 적이 있다. 학생들에게 좋은 직장을 갖게 노력해 달라고 했는데 공감했다. 다행히 우리 대학은 특성화 대학으로서 이 분야에서 꽤 훌륭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하지만 정부 압박으로 인해 대학가 전반에서 “우리가 취업 알선가인가, 교육자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개인적인 의견은 약간 부담이 될지라도 대학이 학생들의 취업에 도움을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어려운 여건 아래 대학 총장이 할 일은 학교의 상징으로서 우뚝 서고 교원, 직원, 학생들의 잠재력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각종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학술적, 윤리적 표본으로서 모두에게 각인되고, 대학에서 행하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요지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학생들이 우리의 미래 아닌가. →등록금 규제나 대학 총장 간선제 등 정부의 고등교육 정책은 어떻게 보나. -선거를 통해 임명된 게 아니기에 한국 대학의 총장 선거에 대해서는 제 의견을 피력할 수 없음을 알아주셨으면 한다. 등록금 규제 문제의 경우 미국에서도 부모 지원보다는 학생 대출에 의존하는 관계로 졸업생들이 20만 달러(약 2억 2000만원) 이상의 빚을 지는 모습이 흔할 정도다. 정부의 고등교육 정책은 교육 발전을 위한 정책이어야지 규제를 위한 정책이 돼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자유경쟁이라는 시장 논리로 해결될 수 있는 과제를 억지로 붙들어 매는 형태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들에게 최선, 최신의 교육을 제공하려면 등록금은 교육 방식의 발전에 따라 증가한 비용을 반영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연구윤리 위배 등 교수 사회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에 대해서는. -전 부정에 대해서는 누가 됐든 타협하지 않는다. 윤리란 국가와 국민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인 만큼 관계가 어떻게 되든 그 누구도 예외가 돼서는 안 된다.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횡단보도의 초록불에 멈추는 것부터 페리선의 선박 규정까지 법과 규정은 동일한 관점으로 엄중히 관리, 집행돼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다른 이의 학술적 성취를 무단 도용하는 것은 절대로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취업 때 지원자 학벌보다 실력을 중시하는 채용 문화가 한국에 형성됐다고 보는지. -50년간 사회인으로서 활동한 제 경험에 기반해 말씀드리면 개인의 능력이 학력을 압도하는 현상이 점점 증가 추세에 있다고 본다. 아직도 사람의 배경이 취직 첫 단계에서는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그 단계를 넘어가고 실무에 투입됐을 때는 결국 업무 능력에서 승부가 갈리게 돼 있다. 물론 고학력이 요구되는 직종은 유형별로 다른 과정이 있을 수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대한민국 교육열기 칭찬에 대한 견해는 어떻게 보나. -제가 보기에 오바마 대통령의 한국 교육에 대한 감탄은 한국 학생들의 PISA 시험 점수 통계에 기반한 게 아닌가 싶다. PISA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를 대상으로 시행하는 국제 학생 평가 프로그램으로 한국 학생들은 대체로 수학과 과학 부문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를 토대로 미국도 한국처럼 가족 전체가 학생들의 학습과 성취에 관심과 열정을 가졌으면 하는 기대감을 표출한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PISA 시험은 교육 성과의 수많은 스펙트럼 중 일부만을 보여 줄 수 있다. 혁신성, 창의성, 유연성 등에 대한 평가는 결여돼 있는 체계다. 미국의 교육 방식은 PISA 시험 점수는 낮게 나올지는 몰라도 위의 3대 요소에서는 더욱 우수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카이스트 로플린 박사나 서남표 박사가 대학 개혁 문제로 내부 구성원들과의 갈등 끝에 총장직에서 중도 낙마했다. 외국인 총장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로플린 총장의 경우는 잘 모르겠다. 서 총장의 경우 내가 한국에 있을 때 있었던 일로 비극적인 일이라 안타깝다. 관찰자 입장에서 보자면 너무 상의하달 식으로 대학 구성원들을 몰아붙인 게 부작용을 가져온 것 아닌가 싶다. 여유를 갖고 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카이스트는 정년을 보장받은 교수가 많은 등 기득권 체제가 있어 갈등이 있을 수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우송대는 신생 대학으로서 그런 점에서 갈등 요인이 없었다. 게다가 저를 조직의 일원으로서 받아줄 만큼 개방적인 교수, 직원과 학생들이 있었다는 것도 저로서는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서울신문은 해외 석학 초빙사업이 빈껍데기라는 취지로 보도한 바 있다. 해외 연구진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대학에서 제대로 활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 -해외 석학 활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지 부문으로 이를 위해 소속감을 부여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교수회의를 예로 들면 외국 교수들의 참석을 요구하지만 그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 교수 회의에 아예 참석을 요청하지 않는 것과 같은 행위가 이들로 하여금 조직의 일원으로 느끼기 힘들게 한다. 우리는 외국 교수들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오랜 시간 동안 충실히 한다. 공문서는 기본적으로 한글로 작성하지만 영어 등 외국어 구사가 가능한 직원을 외국 교수 연구실에 배치해 의사소통 문제를 최소화하고 있다. 내가 주재하는 회의도 사전에 한국말로 번역해 자료를 배포한다. 외국인 교수 자녀에 대한 지원도 생각해야 한다(서울은 기회가 많으나 대전은 연간 2만 달러가 들어가는데 부담이 된다. 외국인 교수 유치를 위한 지원책이 있으면 좋겠다). 박현갑 부국장 eagldudo@seoul.co.kr >> 엔디컷 총장은 엔디컷 총장의 첫 인상은 79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친다는 점이다.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덕담에 환하게 웃으며 뭐든지 물어봐도 좋다고 말할 정도로 유머 감각도 넘친다. 직접 강의도 하며 손자 손녀뻘 되는 학생들과 격의 없이 소통할 정도로 열정적이다.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광팬이기도 하다. 두 차례에 걸쳐 시구도 했다. 이뤄지기 힘들지 모르나 한화가 코리안 시리즈 우승하는 걸 보고 싶단다. 두 명의 자녀는 미국에 있으며 한국에는 일본인 부인과 함께 있다. 부인도 이 대학에서 일본어를 가르친다. ●1936년, 미 오하이오주 출생. 58년 오하이오주립대 졸업. 1973년 하버드대, 터프츠대 공동 운영 과정 프레처스쿨 외교학 석사 및 국제학 박사 취득. 1989~2007년 조지아공대 국제전략기술정책센터 소장 겸 샘넌 국제대학원 교수. 미 국방부 산하 국가전략연구소장. 1996년 미·일 간 극동아시아 비핵화지대위원회 위원장. 2005년, 2009년 노벨 평화상 후보.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9] 용미리석불입상이 상징하는 고려시대 사회안전망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9] 용미리석불입상이 상징하는 고려시대 사회안전망

     혜음령은 경기 고양시 고양동과 파주시 광탄면을 잇는 고개다. 지금은 자유로와 통일로가 서울과 개성을 간선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고려나 조선 시대에는 혜음령을 지나는 의주대로가 한양에서 개성은 물론 평양, 의주를 잇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삼국시대 한강과 임진강 일대는 치열한 격전장이었다. 고구려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려 각축을 벌이던 당시 임진강을 넘나드는 통로는 오늘날의 적성·연천 일대였다. 임진강에서 갈수기에는 걸어서도 건널 수 있는 최남단 지역이다. 옛 장단 땅인 연쳔 장남면에 고구려의 호로고루, 적성에 신라의 칠중성 등 국방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려시대가 되면 남북 통행로는 당연히 수도인 개경, 즉 개성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고려는 장단대로에 위치해 갈수록 규모가 켜져가던 양주를 문종 21년(1067)에 남경(南京)으로 승격시킨다. 이후 남경의 중심이 한양 일대에 자리잡으면서 상당한 거리를 돌아야 하는 장단길보다 개성에서 임진나루를 거쳐 곧바로 남하하는 ‘의주대로’를 자연스럽게 선호하게 된다.  혜음령은 고양향교가 있는 고양동에서 흔히 용미리공동묘지로 불리는 서울시립용미리공원묘지로 넘어가는 고개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의주대로는 지금 고양시와 파주시의 협력으로 조선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게 정비되어 있다. 서울시와 경기도가 경계를 이루는 고양시 삼송동에서 임진강과 만나는 임진나루까지는 걸어서 탐방할 수도 있다.  혜음령과 광탄면 사무소 사이에는 혜음원(惠陰院)터와 용미리석불입상이 있어 의주대로의 역사를 알려준다. 혜음원은 고려시대 개경과 남경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자 예종 17년(1122) 세운 국립 숙박 시설이다. 왕의 행차를 위한 별원(別院)과 사찰도 있었다. 발굴 조사에서는 한자로 ‘혜음원’이라고 새겨진 암막새 기와가 출토됐고, 동서 104m, 남북 106m에 걸친 9개 석단의 27개 건물터와 연못터를 비롯한 놀라운 규모의 유구가 확인됐다.  혜음원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나타나는 장지산 기슭에 높이 17.4m의 우람한 석불입상이 세워진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2구로 이루어진 용미리석불입상은 일반적으로 고려시대 불상으로 알려지고 있었지만, 불상에 남아있는 명문을 토대로 성화 7년(1471) 조성한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성화(成化)는 명나라 헌종의 연호다. 명문에는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도 줄줄이 면면도 적혀있으니 석불입상의 조성과 연관짓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석불입상에 얽힌 구전설화와 혜음사 창건 배경을 담은 김부식의 글을 찬찬이 읽다보면 석불입상의 고려시대 조성설(說)에 다시 마음이 기운다. 설화에 따르면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를 맞이했는데, 여전히 태기가 없었다.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궁주의 말을 들은 왕이 그들이 있다는 곳을 찾아가게 했더니 과연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었다. 왕이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불공을 드렸더니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김부식은 ‘혜음사 신창기’(惠陰寺 新創記)에서 이 길을 두고 ‘산이 깊고 초목이 우거져 범과 이리가 떼 지어 모이고, 도둑의 무리도 숨기 쉬워 통행하는 사람들이 무리를 모으고 병기를 휴대해 (혜음령을) 지나가는데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 자가 한해 수백 명’이라고 탄식했다. 이런 실상을 파악한 신하가 ‘허물어진 절을 새로 지어 중을 모으고, 그 옆에 집을 지어 노는 백성들을 정착시킨다면 짐승과 도둑의 해는 절로 멀어져 통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질 것’이라고 진언하고, 왕이 그대로 따르자 ‘무서운 길이 평탄한 길이 되었다’는 것이다.  용미리석불입상 창건 설화와 혜음사 신창기는 의주대로 주변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면에서 일맥상통한다. 단순히 산도적을 토벌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빈민의 배고픔을 막아 도둑의 길에 빠져들지 않게 한다는 적극적 사고는 오늘날에도 배울 만하다.  석불입상의 창건 설화는 상징성의 강한 설화의 특성상 구구절절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신창기 방식의 사고를 함축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용미리석불입상은 의주대로의 안전을 위해 비슷한 시기 혜음원과 일종의 세트로 조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조와 정희왕후가 일시에 깨달을 것을 미륵에 기원했다’는 명문에서 비롯된 조선시대 창건설(說)은 아무런 감동이 없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시리즈 전체보기
  • [우리동네 흥겨운 축제] 광양불고기의 특징

    불고기구이는 고구려 시대에 돼지고기를 꼬챙이에 꿰어 숯불에 구워 먹던 ‘맥적’(貊炙)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고려 말에 이미 ‘설야멱’이란 이름으로 불고기나 갈비구이가 요리의 한 형태로 정착된 것으로 보고 있다. 광양의 숯불구이는 예부터 광양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전통음식으로 백운산에서 자생하는 참나무로 만든 참숯을 담은 화로 위에서 굽는다. 조선시대 김해김씨 성을 가진 부부가 사연 끝에 아들을 데리고 광양으로 들어와 성 밖 김씨 성을 쓰며 광양읍성 밖에 거주했다. 성 밖 인근에는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 귀양 온 선비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선비들은 성 밖에 사는 주민의 아이들을 가르치게 됐고 김씨 부부는 그 보은의 정으로 어린 송아지나 연한 암소를 잡아 갖은 양념을 해 참숯불을 피우고 구리 석쇠에 구워 접대했다. 그 선비 중 혹간 귀양에서 풀려나 다시 관직에 복귀한 사람이 한양에 가서도 광양에서 맛본 그 고기 맛을 못 잊어 ‘천하일미 마로화적’이라며 광양불고기의 맛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광양불고기 맛의 비결은 얇게 다진 소고기와 집집마다 특색 있는 양념을 버무려 백운산 참숯을 담은 화로 위에 구운 데 있다. 참숯이 탈 때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향이 육질에 스며들면서 훈연의 맛이 나야 진짜 광양불고기이다. 한우 중에서도 광양불고기에 쓰이는 부위는 따로 있다. 불고기감으로 쓰이는 채끝살이다. 지방이 적고 부드럽기 때문이다. 일반 구이용 고기와는 달리 최대한 얇게 썰어서 부드러운 맛을 살리는 게 관건이다. 광양불고기의 가장 큰 특징은 양념에 있다. 몇 시간씩 양념에 고기를 재는 타 지역 불고기와는 달리 광양불고기는 양념을 즉석에서 무쳐서 조리하는 게 특징이다. 고기에 양념 맛이 곁들여지는 것이지 양념에 고기를 의존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자극적인 양념이나 부수적인 채소가 들어가지 않아 고기의 맛이 중요하다. 최소한의 양념만 넣는 대신 고기의 맛을 살리기 위해 백운산에서 나는 참나무를 직접 가공해 만든 참숯으로 조리한다. 참숯으로 구워 내면 참숯이 탈 때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향이 육질에 스며들면서 훈연의 맛이 난다. 화력이 센 불로 빨리 구워 먹어야 육즙이 촉촉하게 남은 고기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광양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잊혀진 한국 고대사 700년 부여의 모든 것

    잊혀진 한국 고대사 700년 부여의 모든 것

    처음 읽는 부여사/송호정 지음/사계절출판사/256쪽/1만 8000원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494년 왕과 일족이 고구려로 망명, 항복할 때까지 700년의 시간을 관통하며 버텨낸 나라다. ‘사출도’(四出道)라는 제도로 중앙과 지방의 분권을 유지했다. 높은 수준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해 선조 이래 다른 나라에 패한 적이 없는 연맹체 나라였다. 우리 고대사의 잊혀진 조각, 부여다. 부여의 역사가 일반인의 인식에서 희미해진 것은 여러 요인이 있다. 멀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부터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그리고 최근 역사교과서에 이르기까지 부여의 존재와 강역, 국가의 구성, 의미 등은 중히 다뤄지지 않았다. 물론, 중간중간 의미 있는 연구 작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신채호는 ‘조선상고문화사’ 등에서 ‘부여족 주족론’(主族論)을 내세우며 부여사가 북방 중심 고대사 인식 체계에서 주요한 왕조의 역사로 자리잡게 만든 공이 크다. 지금이야 부정적인 의미로 더욱 많이 통용되지만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신채호는 ‘국수(國粹) 보전론’을 주창했고, 주체적 역사의식의 필요성은 부여·가야·발해의 재조명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부여사에 대한 연구의 발걸음은 거기에서 성큼성큼 나아가지 못했다. 그사이 중국은 동북공정, 그리고 최근에는 ‘랴오허(遼河) 문명론’을 통해 끊임없이 역사전쟁의 정지작업을 이어왔고, 선양 랴오닝성박물관 부여전시장에 ‘부여는 중국 역사상 중요한 소수민족이다’로 시작하는 설명 자료를 붙여 놓았다. 그나마 최근 들어 옛 부여 강역 곳곳에서 발굴이 진행되면서 학계 일부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와 더불어 부여, 가야를 포함시키는 ‘5국 시대’ 제안이 나오는 등 다시 부여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점은 다행스럽다. ‘국내 고조선 박사 1호’라는 별칭으로도 통하는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인 저자는 한국 고대사를 제대로 복원하려면 고조선사와 고구려사만큼 부여사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부여가 한국 고대사의 전개에 끼친 영향과 유산이 지대한 만큼 부여를 중국의 역사가 아닌, 예맥족이 세운 한국 고대의 역사로 제자리를 찾아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형해화한 주장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정확한 사료와 발굴 자료를 통해 실증해야 한다’는 신념을 내세운다. 그리고 부여의 기원과 성쇠, 제도, 생활문화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 저서를 부여사에 관해 가장 객관적이고 충실한 연구라고 자부한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바티칸 미술관 천장의 성화(聖畵)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바티칸 미술관 천장의 성화(聖畵)

    2007년 11월 1일 필자의 새로운 학문적 여정을 여는 ‘한국미술의 탄생’이 찍혀 나오는 광경을 인쇄소 2층에서 내려다보며 ‘저 책이 세계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미 2005년 나의 운명을 결정지은 첫 그리스 여행에서 서양 미술 전체를 풀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세계 미술사의 정립을 위한 서장(序章)’이다. ‘세계의 조형예술 용으로 읽다’는 그리스 첫 여행을 생각하면 꼭 10년 만에 쓰는 셈이다. 꿈이 이루어져 현실이 된 것이다. 빙켈만이나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은 유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에 가지 않았다. 필자의 그리스 여행은 앞으로 서양 미술사에 등장할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필자가 그리스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서양미술사학은 어둠 속에 영원히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이제 비로소 진정한 ‘세계의 르네상스’가 올 것이다. 서양의 르네상스는 참된 르네상스가 아니었다. 코린트 주두는 물론 아칸서스도 잘못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재생 혹은 부활을 이르는 르네상스라 할 수 있겠는가. 중세 미술에 비하면 르네상스 미술은 세속화됐다는 느낌을 가져왔다. 동양 미술사가 연꽃 모양을 실제 연꽃으로 잘못 알았던 것을 무량보주로 바로잡은 것처럼 잡초에 불과한 아칸서스라는 특정 식물이 서양 미술사를 지배했던 것을 만물생성의 근원인 영기잎, 즉 무량보주로 바로잡게 됐다. 그 계기를 마련한 ‘한국미술의 탄생’이 인쇄되고 있었을 때 바닥에 굴러다니는 광고 쪽지를 주워 보고는 깜짝 놀랐다. 꽤 높은 수준의 그림이었다. 하지만 어느 성당의 그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천장의 네모 틀 안 그림 밑에 적힌 ‘성 미카엘이 가르가노 산에 현신하다’(S Michael In Monte Gargano Apparet)라고 쓴 것을 실마리로 오랫동안 추적해 이 그림의 화가를 천신만고 끝에 알아냈다. 체사레 네비아(1536~1622). 대천사 미카엘을 주제로 한 그림은 바로 로마시대 지도가 양쪽에 전시된 바티칸 교황궁 미술관 ‘지도갤러리’(gallery of Maps)의 120m나 되는 엄청나게 긴 궁륭천장에 그려진 화려하고 웅장한 그림들 가운데 있음을 알았다. 8년 전 인쇄소에서 주운 그림을 추적해 오늘 채색분석하고 있으니 운명적인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터널 볼트에 그려진 장식들은 체사레 네비아와 지롤라모 무치아노 등 매너리스트 화가들이 그린 것이다. 미카엘 대천사 그림의 위아래에는 여인으로 표현된 두 천사의 영기화생 도상, 구획마다 무량하고 다양한 보주의 조형들, 괴기한 조형들과 다른 형태의 용들이 수없이 많다. 사방 한 면을 채색분석해 보니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즉 체사레의 그림 주변 그림들을 서양 학자들은 그로테스크라 부르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무엇인지 모르면 무조건 문양 혹은 장식이라 부른다. 그러면 성화를 유명한 화가가 그렸다면 서양 학자들이 그로테스크하다고 하는 조형들은 누가 그렸을까? 전혀 다른 양식의 그림을 한 사람이 그릴 수 있을까? 아마도 이름 없는 수많은 유능한 무명의 장인들이 참여했을 것이다. 유학자들이 말하는 ‘괴력난신’의 세계가 말 그대로 파노라마처럼 장엄하게 펼쳐지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은 대개 유명한 화가가 그린 미카엘 대천사의 현신을 보려고 가는 교황 일행 장면만이 눈에 보일 뿐이다. 그러나 그 장면을 화생하게 하는 그 주변의 그림들은 생명 생성의 놀라운 세계다. ‘주변’이 아니고 오히려 ‘주체’가 된다. 그 무엇인지 모를 조형을 최초로 밝혀 보여 드리려 한다. 미카엘 대천사는 천사들의 대군단을 이끌고 악마를 퇴치하므로 기독교는 물론이고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 수호신으로 경배한다. 그러므로 그림 양쪽의 천사는 아마도 미카엘 대천사가 이끄는 천사들을 상징하며, 나아가 성 미카엘 대천사의 영기화생을 웅변하는 것이 아닐까. 원래 미카엘 대천사는 미청년으로 묘사되다가 점점 여성적으로 나타난다. 마치 관음보살이 원래 대장부이나 점점 여성적으로 표현돼 가듯 천사들은 여성적으로 변화한다. 동서양의 같은 현상이다. 영기문은 생명이 생성하는 과정을 표현한 것이므로 반드시 채색분석해 단계적으로 보여 드려야 한다. 필자가 천사의 영기화생을 단계적으로 채색한 것은 무려 50단계가 넘는데 그중 일곱 단계만 보여 드리기로 한다. 첫 번째 단계는 선으로 그린다 ②. 그다음, 실은 천사의 몸부터 채색해야 하나 끝부분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끝의 영기문에서 천사가 화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릴 때 영기화생하는 조형 과정은 역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끝 부분은 빨간 세 가닥 조형이 있는데, 동양에서도 용의 꼬리 끝을 이렇게 표현해 꼬리로부터 용이 화생하게 한다. 그런데 뜻 밖에도 용 같은 몸의 등에 작은 보주들이 표현돼 있지 않은가. 그 용 같은 꼬리와 몸은 놀랍게도 아칸서스라고 부르는 두 갈래 영기문 조형에서 나오고 있다. 즉 천사의 치마 같은 연두색 영기잎 부분에서 녹색 영기잎이 화생하고 다시 그 영기잎 갈래에서 용의 꼬리가 화생하고 있다 ③. 즉 천사의 두 다리는 용의 형태를 이루고 있으니, 천사는 용성(龍性)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한다. 용의 꼬리에 걸쳐 있는 빨갛고 커다란 제1영기싹은 만물생성의 근원으로 그 끝에서 아기 천사가 화생하고 있다. 천사 역시 현실에 없는 영기화생한 영기문이다. 마침내 하반신의 영기문에서 천사의 몸이 화생하고 ④ 다시 두 팔이 영기잎(아칸서스 모양)으로 변한다. 그 영기잎의 두 갈래 사이로부터 줄기가 제1영기싹 모양으로 도르르 말리며 나오고 ⑤, 그 끝에서 영기꽃이 피며 무량한 보주가 나오고 있다 ⑥, ⑧. 만일 필자가 보주를 몰랐다면 상태가 안 좋은 사진에서 작은 보주들을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고려 사경 표지의 조형에서, 영기꽃의 씨방에서 보주가 무량하게 쏟아져 나오는 광경을 밝히지 못했더라면 이 르네상스 시대의 조형을 읽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국내에서도 고려사경 표지를 읽어 내지 못하는 까닭은 씨앗(종자)이 보주로 승화한다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인데, 아직도 연꽃이니 모란이니 보상화니 학자들마다 제각각 부르고 있다. 일본 대승사 소장 고려 사경 변상도의 표지 그림을 밝힌 적이 있다 ⑨. 마지막으로 날개 모양이 천사의 몸에서 영기문으로 발산하고 있다. 마치 동양 비천의 천의는 천의가 아니고 영기문이듯 날개는 날개가 아니고 제1영기싹으로 이루어진 영기문이다. 그 증거로 날개가 녹색으로 칠한 영기문에서 날개 모양이 화생하고 있지 않은가 ⑦. 좌우 대칭이므로 한쪽만 읽으면 전체를 읽을 수 있다. 장엄한 천사의 영기화생 광경이며 결국 무량한 보주를 발산하고 있다. 동서양이 이처럼 같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넓은 구획선에는 갖가지 모양의 보주들이 빼곡히 그려져 있다. 서양 학자들이 ‘달걀’이라 부르는 것들도 있고 ‘로제타’라도 부르는 모양도 있지만, 이미 언급한 것처럼 모두 보주, 즉 무량보주의 표현이다. 즉 천사로부터 발산한 무량한 보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틀 위 중심에 영적 존재의 얼굴이 있고, 용의 입에서 양쪽으로 영기문이 발산하듯 아칸서스 모양 영기문에서 줄기가 화생하며 끝에서 무량보주꽃, 즉 영기꽃이 핀다. 마치 아래 천사의 영기화생을 간략화한 것 같다. 그 양쪽으로 놀랍게도 용 두 분이 꼬리가 얽히며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①. 사진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얼굴의 윤곽은 뚜렷하며 용의 배 부분에 연이은 제1영기싹 영기문이 있어서 용을 영기화생시키고 있음을 어렵게 찾아냈다. 이것도 고구려 벽화의 사신도 가운데, 특히 용의 영기화생 조형과 똑같다. 고구려 용이 연두색 제1영기싹이 연이은 영기문에서 화생하듯이 이 르네상스 시대의 용도 아칸서스가 아니라 연이은 제1영기싹 영기문에서 화생하고 있다. 그 꼬리도 빨간 제3영기싹이 아닌가. 그런데 서양 학자들이 그로테스크하다고 일축했던 엄청난 양의 조형들이 성당에 가득 차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성당에는 예수 혹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경배의 대상으로 돼 있다. 그 두 존재는 이미 현실적인 인간이 아니라 불교의 여래와 보살처럼 영기화생한 만물생성의 근원임을 다음 회에서 증명할 것이다. 성령(聖靈)으로 잉태했다는 것은, 즉 성령화생(聖靈化生)이며 바로 영기화생(靈氣化生)을 뜻한다. 영기는 곧 성령이다. 그러면 왜 괴력난신의 세계, 그로테스크한 광경들이 사찰이나 성당에 많은가. 현실에서 본 형태로는 그러한 세계를 표현할 수 없다. 장인들은 하나님(神)처럼 새로운 조형을 창조해야 한다. 장인들은 보이지 않는 우주의 대생명력을 보이도록 창조해 표현했으므로 사제들이나 인문학자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장인들은 마음 놓고 진리의 세계를 조형적으로 표현해 왔다. 그 대생명력, 즉 성령이 바로 하나님이다. 기독교에서는 수호신 성 미카엘이 퇴치하는 악마들이 많지만 대표적인 것이 기괴한 용이다. 그러나 성당에 얼마나 용의 조형이 많은가. 영기화생하는 용을 보면 악마로 보이지 않는다. 특히 이 천장에는 형태가 다른 수많은 용 그림이 가득 차 있다. 성당이야말로 생명이 영원히 생성하는 거룩한 생명의 성전이 아닌가. 예수님이 바로 만물생성의 근원이 아닌가. “보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니 나는 세상의 생명이요 빛이니라.” 바로 이 선언이 이미지로 창조돼 우리가 수천 년 동안 보지 못했던 괴력난신의 세계, 그로테스크의 세계가 역동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중앙의 유명한 그림보다 무명의 장인이 그린 주변의 넓은 공간에 가득한 기괴한 조형들이야말로 영원한 생명 생성의 세계를 표현한 참된 성화(聖畵)들이라 할 수 있다. 현대 과학의 천문학, 생물학, 의학 등에서는 허블 망원경을 발명해 눈에 보이지 않던 더 멀리 있는 별들의 존재를 밝힐 수 있었고, 눈에 보이지 않던 바이러스를 전자현미경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그 도구들이란 불교의 말을 빌리면 방편반야(方便般若)라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관찰하기 위해 그 도구들이 탄생한 것이다. 목적이 도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문·예술 분야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지만, 진즉 본 사람은 없다. 필자는 그 보이지 않는 조형을 눈으로 보고 조형 원리를 파악한 후에 사상과 연관시켜 공부하고 있다. 그런 후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도구가 채색분석이다. 지금 채색분석을 통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조형을 단계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채색분석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은 분은 필자 홈페이지의 ‘학문일기’에서 ‘채색분석법(彩色分析法)이란?’을 검색해 읽어 보시기 바란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아칸서스 잎 모양에 숨겨진 참뜻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아칸서스 잎 모양에 숨겨진 참뜻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아칸서스라는 식물은 주로 열대지방에 많으나 지중해 연안이나 인도네시아·아프리카·브라질·중앙아메리카·한국 등 전 세계에 분포돼 있다. 약 250속 2500종이어서 모양도 여러 가지다. 바늘 모양이나 톱니 모양의 엉겅퀴와 비슷한 잎이 달리고 가시가 많다. 지중해 연안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라 해 아칸서스 잎의 모양은 고대 그리스 이래 고전주의 미술의 주요한 장식 모티브의 하나가 됐다. ●아칸서스 문양 코린트식 건축 주두 장식에 주로 사용 특히 건축에서는 코린트식의 주두(柱頭) 장식에 두드러지게 사용됐다. 아칸서스는 근대에 이르도록 주두 장식에 계승됐을 뿐 아니라 유럽의 대부분 공예 의장(意匠)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칸서스 문양은 그리스, 로마에서 이란과 인도로 퍼졌다. 한편 간다라를 통해 중국과 한국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는 사이 많은 변형이 이뤄졌고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서 고도의 완성을 보게 됐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세계적으로 많은 아칸서스의 조형에 대해 왜 아칸서스여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 사람은 세계에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보잘것없는 관목이 세계 조형예술의 숨통을 막아 버리고 있어도 답답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용의 조형적 본질을 파악하면서 아칸서스라고 부르는 식물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 용은 물을 상징하는 제1영기싹과 보주로 이뤄졌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해 왔는데, 바로 이것이 용성(龍性)이다. 아칸서스 모양이 물을 상징해 제1영기싹과 보주와 함께하는 아칸서스는 현실에서 보는 특정의 식물일 수 없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세계의 그 수많은 아칸서스 조형이 순식간에 영기문이 돼 일체 조형이 영기화생(靈氣化生)하는 경이적인 광경으로 변할 것이다. 아칸서스 모양의 조형을 분석해 보면 제1영기싹 및 무량보주와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서양의 조형예술에서는 아칸서스 모양의 영기문에서 일체가 화생한다. 그 첫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프랑스 직물박물관 소장 ‘달마티카’ 영기문 생성 원리 표현 15세기 달마티카의 무늬다(①). 달마티카는 시리아에서 기원한 동양계 T자형 겉옷으로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지방에서 착용한 것을 3세기 이후 로마에서 도입했다. 6세기 이후에는 종교 예복이 돼 오늘날 가톨릭과 그리스정교회의 신부복으로 사용되고 있다. 프랑스 리옹의 직물박물관이 소장한 달마티카의 ‘아칸서스 무늬’를 살펴보자. 필자는 조형언어를 문자언어로 읽으려 한다. 조형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고구려 벽화의 영기문이라는 생명 생성의 전개 원리와 똑같다. 맨 밑의 중앙에 출발점인 작은 영기잎이 있다. 그 위로 제3영기싹이 솟아오른다. 갈래 사이에서 나온 것이 이른바 아칸서스다. 그런데 팔메트 같기도 하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아칸서스가 팔메트에서 비롯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오류가 오류를 낳는 또 하나의 예다. 좌우대칭이므로 왼쪽 것만 설명하면 모두 설명한 것이 된다. 작은 아칸서스 모양 좌우로 제1영기싹이 발산하고 있다. 그리고 좌우로 뻗어 나간 긴 영기잎은 곧 밝혀지겠지만 잎이 아니고 연이어진 제1영기싹 영기문이다. 그 끝은 제1영기싹이고 거기에서 다시 무수한 제1영기싹 모양의 파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한번 접힌 아칸서스 사이에서 네 개의 영기문이 나오고 있다. 즉 처음에 가장 간단한 제1영기싹이 1개. 그다음에는 긴 강낭콩 같은 것이 나오는데 무량보주다. 그 끝에서 제1영기싹이 발산한다. 그다음 영기문은 길고 굵은 새싹이 제1영기싹처럼 뻗어 나가고 끝은 제1영기싹으로 마무리 짓고 제1영기싹 모양의 파동이 세 번 일어나나 무한히 파동을 이루는 것과 같다. 좌우로 연이어 같은 영기문이 전개해 나가는데, 세 번째 잎은 아칸서스 모양을 띠기 시작하며 그 갈래 사이에서 영기줄기가 나와 중앙의 하얀 아칸서스 모양을 거쳐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아칸서스 모양의 영기잎을 낸다. 거기에서 먼저 하얀 아칸서스 모양 영기잎들이 나오다가 역시 하얗고 둥글둥글한 보주가 연이어 나오며 제1영기싹으로 마무리 짓는다. 그리고 잎에서 다시 잎이 나오면서 좌우로 전개해 나가며 제1영기싹 파동이 일어난다. 끝은 아칸서스 모양을 이루며 처음에 밑으로부터 전개해 나간 영기문과 서로 걸친다. 좌우대칭이므로 아래에서 양쪽으로 전개한 영기문이 위 중앙의 흰 아칸서스 모양을 거쳐 다시 양쪽으로 뻗어 나가며 중앙에서는 하얀 영기잎에서 작고 노란 영기잎이 양쪽으로 뻗어 나가고 다시 각각 제1영기싹이 좌우로 발산한다. 독자 여러분은 인내를 가지고 필자의 설명에 따라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아칸서스가 아칸서스가 아님을 아는 감격을 누릴 것이다. 조형언어를 문자언어를 한 자 한 자 읽듯이 읽어 보기 바란다. 우리가 문자언어로 된 문장을 한 자 한 자 읽듯이 조형언어도 한 자 한 자 읽어 나가야 한다. ●용처럼 물 상징하는 제1영기싹·보주로 이루어져 있어 그러는 사이 아칸서스 모양의 실체를 자연히 알 수 있다. 용은 제1영기싹과 보주로 이뤄졌다. 마찬가지로 여래의 광배도 제1영기싹과 보주로 이뤄져 있다(②, ③). 14세기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금선(金線)으로 그린 화엄경 권12 그림의 주인공인 비로자나불의 광배를 보자. 맨 가의 것을 불꽃무늬라고 부르지만 그려 보면 연이은 제1영기싹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이은 제1영기싹은 물, 즉 생명 생성의 근원을 상징한다. 그 안쪽으로는 보주와 제1영기싹 사이에 다시 영기문이 나오는 제3영기싹으로 돼 있다. 독자 여러분도 문자언어를 쓰듯이 조형언어를 그려 보면 매우 재미있을 것이다. 이후 코린트식 주두의 지붕의 한 부재를 떠받치고 있는 아칸서스 모양의 구성을 그려 보면 여래의 연이은 제1영기싹과 똑같음을 알 수 있다(④).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이은 제1영기싹을 그려 봐도 어느 경우든 같은 조형언어다. 즉 어느 특정한 아칸서스가 아니라 물을 상징하는, 대(大)생명력을 상징하는 영기잎을 그리스인은 창조한 것이다. ‘영기잎’이란 말은 무량한 보주를 발산하는 잎이라는 뜻이다. 꽃에서만 무량한 보주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잎에서도 나온다는 것을 알았을 때 보주의 본질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서는 느낌이었다. ●프랑스 ‘샤토 메종의 쇠창살’ 영조가 화생하는 조형 보여 그런데 가장 큰 충격을 준 작품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한 ‘샤토 메종(어느 고위층의 집)의 쇠창살’이다(⑤). 1670년쯤 작품이다. 정교한 쇠창살에 독수리같이 생긴 영조(靈鳥)가 화생하는 조형이 있지 않은가. 자세히 보면 맨 위에 독수리 모양이 있지만 현실에서 보는 독수리가 아니다. 마치 용이 항상 분노하는 눈 모습을 띠듯 영조도 분노하는 눈이다. 그리고 영조의 입에서 얼굴 없는 뱀처럼 길게 전개하며 덩굴 모양과 얽히며 올라가다가 끝맺음하고 있는데 바로 그 끝을 영조가 물고 있다. 즉 영조가 입에서 발산하는 보주줄기다. 영조 머리 뒷부분을 보면 아칸서스잎 모양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갈래 사이로 매우 굵은 기둥 같은 것이 나오고 그 속에서 다시 큰 아칸서스잎 같은 것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길고 다른 하나는 짧다. 그것은 영기문이 방향을 틀 때 그런 조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짧은 것은 제1영기싹으로 끝나지만 긴 것은 전개가 끝없이 뻗어 나가 이뤄진다. 잎이 아니라 힘찬 물줄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그 갈래 사이에서 가는 영기문이 바로 둥글게 꼬부라져 강력한 제1영기싹을 이루며 줄기가 끝에서는 영기잎으로 변하면서 끝을 맺는다. 한편 굵은 기둥 같은 것이 동시에 나오며 영기잎이 다시 나오면서 갈라지고 그 사이에서 영기문이 끝없이 전개해 나간다. 그런 가운데 입에서 발산하는 긴 영기문은 머리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가는 용 같은 강력한 영기문이 함께 얽혀 있어서 이 조형에 역동성을 준다. 아랫부분에서는 제1영기싹의 끝에 영기꽃이 핀다. 이 그림은 샤토 메종 쇠창살의 3분의1 부분으로 위에 있는 한 단위의 영기문을 택한 것이다. 다시 거시적으로 이 그림을 보면 그 긴 S자 모양은 영조의 꼬리에 해당한다. 조형예술에 나타나는 영조나 영수는 모두 꼬리에서 영기화생한다. 그러므로 꼬리 부분이 엄청난 영기문으로 이뤄져 있다. 방향으로 보면 영조 머리에서 아래로 향하고 있으나 조형언어를 읽을 때에는 끝에서부터 시작해 영조로 가야 한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엄청난 힘을 가진 영조의 초자연적인 탄생이다. ●14세기 피렌체파 역시 무량보주 상징하는 작은 꽃 그려 피렌체에서 일어난 새로운 양식의 조형을 살펴보자. 흔히 플로렌스파(派)라고도 하는데 피렌체를 영어로 플로렌스라 부르고 있으나 피렌체라는 말을 써야 한다. 피렌체파는 14세기 피렌체에서 발달한 명암법과 원근법 등 자연주의 양식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을 말한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마사초 등 르네상스의 쟁쟁한 화가들과 그 화풍을 가리킨다. 아칸서스가 아니라는 것을 강력히 보여 주고 있는 참으로 놀라운 조형이다(⑥). 피렌체 예술가들은 어떻게 아칸서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까. 그러면서 왜 계속 아칸서스라 불렀을까.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뤄진 조형은 실로 충격적이다. 양옆이 좁은 공간 안을 보면 맨 밑의 붉은 띠로 맨 노란 보따리 아래로 영기잎이 발산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아칸서스란 말을 쓰지 않기로 한다. 중간의 영기잎에서 위로 노란색으로 칠한 부분이 부풀어 오르고 있는데 이 조형이 그림의 중심적 역할을 한다. 그 아래로 영기잎이 퍼지면서 발산해 노란 보따리를 감싸고 있다. 보따리는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 위로 세 갈래 넓은 영기잎이 나오는데 놀랍게도 무량한 빨간 보주들을 감싸고 있다. 그 사이사이로 가는 영기줄기가 나오면서 작은 영기꽃을 피우고 있다. 즉 영기꽃은 무량보주를 상징하니 비록 작은 꽃이나 ‘큰 영기잎들이 감싼 무량보주’와 같은 값을 지닌다. 더 놀라운 것은 최근 보여 드린 사방으로 확산하는 무량보주가 무량한 보주를 감싼 영기잎들에서 발산하고 있지 않은가. 서양에서 장미창이라 부르는 것이 무량한 보주가 사방으로 확산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다음에 이 조형을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12세기 창건한 프랑스 중부 부르주 교외의 ‘생 위르생 예배당’에는 돌로 만든 문 장식이 있다. 아랫부분에 영기문띠가 있으며 ‘아칸서스 당초문’이라고 부른다(⑦). 채색 분석해 보면 절묘한 영기문을 이루며 갈래 사이에서 보주가 하나씩 생겨나고 있다. 영기문 전개 원리에 충실하다. 그 아래 영기문을 간략화해 그려 보니 필자가 발견한 영기문의 전개 원리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가. 천재라고 불리는 대표적 근대 예술가인 윌리엄 모리스는 아칸서스를 주제로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그 여파가 우리나라에도 미치고 있다. 그런데 그는 과연 아칸서스의 본질을 알고 창작했을까, 아니면 그저 옛날 것들을 모방하되 다르게 변형시켰을 뿐인가. 그러나 만일 그가 그 본질을 알았다면 놀라서 자세히 설명했어야 한다. 그는 끝내 가장 많이 창작했던 아칸서스의 상징과 조형원리를 알지 못하고 타계한 셈이다. 이제 아칸서스는 더이상 아칸서스가 아니다. 만물 생성의 근원인 영기잎이다. 용이 제1영기싹과 보주로 이뤄진 것처럼 아칸서스도 제1영기싹과 보주로 이뤄져 있다. 저 오랜 그리스의 코린트식 주두에 표현됐다고 하는 아칸서스는 반드시 보주들과 보주로 이뤄진 제3영기싹으로 표현된 이래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데, 이제 모두 더이상 아칸서스라고 부르지 말자. 인류의 고귀한 조형의 올바른 이해와 창작을 위해 만천하에 선언한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19] 도굴꾼에 남아나지 않는 묘지명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19] 도굴꾼에 남아나지 않는 묘지명

    조선시대 장례의식의 마지막 절차는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고 지석을 묻는 것이었다. 묘표(墓標)나 묘갈(墓碣), 신도비(神道碑)라고 하는 묘비에는 죽은 이에 관한 정보가 담기게 마련이다. 신도비는 일반적으로 묘표나 묘갈보다 죽은 이의 행적을 더욱 자세히 새겨 놓은 것을 일컫는다. 신도비는 글자 그대로 ‘귀신이 오가는 길에 세워진 묘비’라는 뜻이다. 죽은 이의 혼령이 비석이 세워지는 무덤 동남쪽으로 오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석(誌石)은 별도로 만들어 봉분 앞에 묻는다. 죽은 이의 행적을 담는 것은 묘비와 다르지 않지만 무덤의 위치와 방향이 내용에 덧붙여진다. 조선시대 문집을 엮은 ‘대동야승’(大東野乘)은 ‘묘갈은 묘밖에 세우고, 지석은 묘 앞에 묻는 것인데, 이는 만일 세월이 오래되어 비갈이 없어지면 지석을 상고하여 누구의 묘인가를 알고자 하는 데 있다’고 적었다. 죽은 이의 덕과 공을 후세에 전하고자 묘비나 지석에 적는 글이 묘지명(墓誌銘)이다. 죽은 이의 성씨와 벼슬·고향 같은 기본적인 정보를 지(誌)라 하고, 죽은 이를 칭송하는 문학적인 글을 명(銘)이라 했다지만 실제로는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요즘엔 지석이라는 표현과 묘지명이라는 표현도 굳이 구별해서 쓰지 않는 것 같다. 지석의 가장 이른 사례는 4세기 중엽 고구려 안악3호분에서 보인다. 백제 무령왕릉의 주인을 알 수 있었던 것도 지석 때문이었다. 1971년 발굴 당시 널길 입구에서 2개의 장방형 판석을 발견했는데, 무령왕(462~523)과 왕비의 지석이었다. 특히 왕비의 지석 뒷면에는 왕의 매지권이 새겨져 있었다. 매지권(買地券)이란 죽은 사람이 지신(地神)으로부터 묻힐 땅을 사들인 증서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불교의 화장 풍습으로 지석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같은 불교국가라도 고려시대로 접어들면 화장 이후 매장하는 풍습에 따라 검은 석판에 글을 새겨넣은 지석이 보인다. 조선시대가 되면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매장이 일반화됐고, 도자기 산업의 발전으로 도자 지석이 크게 유행한다. 도자 지석은 시기별로 청자, 분청, 백자, 옹기 등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문제는 이 지석을 무덤이 아니라 무덤 앞에 묻은 만큼 도굴꾼의 손을 타기 쉽다는 것이다. 지난해는 한 사립 박물관장이 무려 558점의 지석을 숨기고 있다가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모두 도굴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1536∼1593)의 지석도 같은 운명이 됐다. 송강의 무덤은 경기 고양시에서 현종 6년(1665) 충북 진천으로 이장됐다. 그런데 진천의 송감 무덤 앞에 묻혀있어야 정상인 묘지명이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는 것이다. 대전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가 붙잡은 장물아비의 치부책에 송강 묘지명도 들어있었다고 한다. 26.5x18㎝ 크기의 사각형 백자 23개로 이루어진 송강 지석은 조선시대 묘지명의 백미라고 해도 좋다. 중앙박물관은 이 묘지명을 지난 2000년 안팎에 구입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송강의 후손들은 묘지명이 도굴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도굴 사실이 확인되면 묘지명은 송강 후손들에게 다시 돌려주게 된다고 한다. 도굴꾼과 장물아비는 법에 따라 처벌을 받을 것이다. 그래도 죽은 자의 안식마저 빼앗은 죄에 대한 하늘의 처벌은 남는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시리즈 전체보기
  • [자치단체장 25시] 대가야 고분군·역사길 ‘갈고 닦기’… 다시 빛나는 古都

    [자치단체장 25시] 대가야 고분군·역사길 ‘갈고 닦기’… 다시 빛나는 古都

    경북 고령은 찬란한 역사문화도시임을 자랑한다.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과 함께 고대 국가로까지 당당히 성장했던 대가야(42~562)의 도읍지였다. 하지만 오랜 기간 경주와 부여·공주의 위세에 눌려 제대로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정부의 고도(古都) 문화권 보존 및 개발 사업에서 고령이 철저히 소외됐던 탓이다. 결국 고령은 인구 4만명에도 못 미치는 농업 위주의 조그마한 중소도시, 보잘것없는 역사문화도시로 전락하고 말았다. 침체일로인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대가야의 재도약을 이루겠다며 불철주야로 뛰는 사람이 있다. 곽용환(57) 군수다. 그는 굵직굵직한 대가야 문화융성 정책들을 끊임없이 개발해 적극 추진하고 있다. 다른 역사문화 도시들을 따라잡겠다는 각오다. 예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번쩍이는 아이디어와 추진력이 남달라 해결사로 통한다. 곽 군수는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장 가운데 입지전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9급 공무원 출신으로 당당히 군수 자리까지 꿰찼다. 그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와 지원은 전폭적이다. 재선 단체장이다. 특히 지난해 지방선거 때는 무투표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지난 10일 기자가 동행한 곽 군수의 행선지는 주로 대가야 역사·문화 재현 현장이었다. 오전 8시 30분쯤 막바지 정비 공사가 한창인 ‘지산동 대가야고분군’(사적 제79호)을 찾았다. 2018년 세계유산 최종 등재를 앞둔 중요한 현장이라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현장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둘러본 그는 관계자에게 고분 경관을 헤치는 리기다소나무를 베어 낼 것을 지시했다. 또 유네스코의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절차가 남아 있는 만큼 조그마한 하자도 절대 용납돼서는 안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가야국역사루트 재현 사업 현장으로 향했다. 도중에 대가야 기마 문화체험장에 잠시 들렀다. 지난 1일 개장 이후 첫 방문이었다. 유치원 어린이 100여명이 승마 체험을 하고 있었다. 곽 군수는 배은미(43) ‘신나는 어린이집’ 원장이 “시골 아이들이 난생처음 말 타는 재미에 흠뻑 빠졌다”며 “군수님 덕분”이라고 감사 인사를 하자 그 보답으로 어린이들을 위해 깜짝 마부(馬夫)로 변신했다. 현장 관계자에게는 안전사고 예방을 신신당부했다. 바로 옆이 가야국역사루트 재현 현장이었다. 책임자로부터 간략한 보고를 듣고 “인근 농경지 주민들이 제기하는 침수 문제를 책임지고 근본적으로 해결하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 표정엔 긴장감이 묻어났다. 가야국 역사 루트 재현 사업은 대가야읍 고아리 일대 부지 10만 2000㎡에 국비 등 총 573억원을 투입해 가야문화권 최대 관광지로 개발하는 프로젝트다. 30여분을 현장에 머문 뒤 국내 최장 보행자 전용 다리가 건설 중인 대가야교(길이 305m, 폭 4m) 현장, 우곡면 낙동강 레저·레포츠 단지 조성 현장과 스마트팜 농장 등을 잇따라 방문했다. 현장을 찾아 산 넘고 물 건너 다니는 2시간 여 동안 곽 군수는 차 안에서 ‘가야문화권 개발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정의 배경과 당위성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우려도 나타냈다. 그는 “이 법안은 낙후된 가야문화권의 체계적인 정비를 위한 제도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으로, 영호남 가야문화권 5개 시·도 15개 시·군(고령·성주·달성·합천·거창·함양·남원·산청·의령·장수·창녕·하동·함안·광양·순천)이 법안을 마련하고 공청회를 개최하는 등 갖은 노력 끝에 지난 4월 국회에 제출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얼마 남지 않은 19대 국회 회기 내 처리되지 않으면 자동 폐기되지만 국회에서 계속 낮잠만 자고 있어 답답하다. 당장 제정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곽 군수는 ‘가야문화권 지역발전 시장·군수협의회’ 회장을 올해로 5년째 맡아 모임을 이끌고 있다. 어느새 낮 12시가 훌쩍 넘었다.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읍내 5일장에 있는 돼지국밥집을 찾았다. 때마침 식사를 하던 손님 50여명이 군수에게 달려들어 악수를 청했다.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다. 일부는 군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고령 토박이인 곽 군수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그는 소탈한 성격이다. 사람도 음식도 가리지 않는다. 점심을 해결한 뒤 다시 움직였다. 곽 군수는 군청으로 직행해 미리 대기하던 민원인들을 차례로 만났다. 인사와 함께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건넸다. 면담을 끝내고 결재를 시작했다. 곽 군수는 도중에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전화식(58) 도 문화관광체육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가야 종묘(宗廟) 및 봉화(烽火)산 조성 사업을 위한 예산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전 국장은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고령군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막역한 친구 사이다. 오후 3시쯤 비서가 일정이 급하다며 결재를 중단시키고 곽 군수를 군청 인근에 새로 지은 ‘대가야 문화누리’로 안내했다. 초현대식 건물 2층에 마련된 ‘선비 아카데미’ 강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잠시 교육생들과 환담했다. 이어 곧장 1층 실내 수영장으로 내려갔다. 곽 군수가 이용객들에게 “혹시라도 불편사항은 없느냐”고 묻자 “끝내줍니다”라며 환호성으로 답했다. 문화누리 사무실을 찾아서는 16일로 예정된 건물 준공식과 개관 기념행사 준비에 만전을 기해 줄 것을 당부했다. 다시 군청으로 돌아와 2층 가야금방에서 열린 ‘대구가톨릭대병원·고령군 우호 교류 협약식’에 참석해 최경환 의료원장과 함께 협약서에 서명하고 공동 노력 방안에 대해 구체적인 의견을 교환했다. 이어 군수실에서 지역 중소업체로부터 교육발전기금 200만원을 전달받았다. 오후 6시 30분쯤 군수실을 나섰다. 바로 문화누리 헬스장을 찾아 주민들과 어울려 운동을 즐기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눴다. 8시 무렵 헬스장을 나서는 곽 군수에게 “하루하루가 참 고단하겠다”고 인사를 건네자 되레 유쾌한 답이 돌아왔다. “아닙니다. 고령을 위한 ‘행복한 여행’을 하고 있는걸요.” 그의 밝은 웃음에서 고령의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글 사진 고령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주말 하이라이트]

    ■무한도전(MBC 토요일 오후 6시 20분) 해외에서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 따뜻한 밥상을 배달하는 ‘배달의 무도’ 네 번째 이야기. 지난 방송에서 일본으로 간 하하는 유재석과 함께 우토로 마을을 방문해 마을 사람들과 1세대 할머니와의 만남을 가진 후 특별한 밥상을 선물했다. 이번에는 일본 하시마섬을 찾는다. 하시마섬은 올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세계의 주목을 받은 곳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강제 노역을 해야 했던 섬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기도 했던 곳인데…. 한편 유럽 대륙을 담당한 정형돈과 황광희가 독일을 찾는 모습도 공개된다. ■오 마이 베이비(SBS 토요일 오후 5시) 리키김 가족이 할머니를 만나러 하와이로 떠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들은 하와이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두 번 갈아타야 하는 머나먼 여정을 견뎌야 한다. 1년 새 훌쩍 자란 모습을 보여 드리기 위해 할머니를 찾아 떠난 리키김과 태남매의 유쾌하고 애틋한 이야기를 전한다. ■역사저널 그날(KBS1 일요일 밤 10시 35분) 대제국의 기틀을 세운 광개토대왕은 만주 벌판을 시작으로 송화강, 그리고 한강까지 광활한 영토를 거침없이 내달렸다. 그가 꿈꾸던 고구려는 어떤 모습일까. 단순한 영토 확보가 아닌 경제적 이득으로 이어진 정벌. 정복 활동에 가려진 고구려 경영 군주 광개토대왕의 면모를 낱낱이 알아본다.
  • 관악 역사공부 길잡이 ‘관악백과사전’ 나왔다

    관악구는 8일 ‘삼국사기’와 같은 역사서부터 참고해 구의 역사, 인물, 문화재 등을 모두 모아서 정리한 ‘관악백과사전’을 펴냈다. 유종필 관악구청장은 “관악구의 역사와 전통을 알리고 교육자료로 활용하고자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 아우르는 자료집인 ‘관악백과사전’을 발간했다”며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의 탄생으로 역사가 시작된 관악구는 지식문화도시, 인문학도시로 위상이 변모했다”고 말했다. 관악구청 도시계획과 직원들이 3년여에 걸쳐 완성한 ‘관악백과사전’은 역사와 인물 등 인문자원, 건축물과 같은 시설자원, 자연환경을 소개했다. ‘삼국사기’부터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역사서를 참고했으며 백과사전 발간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중 서울대학교 박물관 수장고에서 강감찬 장군의 한시를 발굴했다. 1987년 고사한 후 사라진 강감찬 생가터의 향나무를 찾아내 구청 로비에 전시하기도 했다. 강감찬 장군이 한시를 지은 시점은 명확하지 않지만 활달한 필치가 장군의 풍모를 떠올리게 한다. 내용은 가을 찬바람에 술 한잔 나눌 이 없다는 외로운 마음을 담은 것으로 매년 10월 열리는 낙성대 인헌제에서 관악구민들에게 선보였다. 강감찬 장군 외에 박종철 열사 등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현대 인물 20명의 생애도 자세하게 담았다. 고구려 때 잉벌노현이라 불렸던 기록부터 2000년 신림9동 인구 2만 6000명 중 60%가 고시생이었던 현대사까지 소개했다. 자료 수집뿐 아니라 백과사전의 집필, 편집 등 구성도 관악구청 공무원들이 직접 맡아 발간에 필요한 예산 2억원을 아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국내여행 | 숱한 시간의 흔적 교동도

    국내여행 | 숱한 시간의 흔적 교동도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걸까?소곤소곤 들려오는 교동도의 옛 향기에 차분히 집중했다.디디는 발걸음마다 애틋해진다.비로소, 한 발 더 가까이 멀게만 느껴졌던 교동도가 가까워진 지 벌써 1년이다. 섬에 들어가기 위해 강화도에서 배를 타야만 했던 불편이 지난해 7월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해소되는 듯했다. 하지만 교동도는 연백평야까지 불과 3.2km인 민통선(민간인 출입통제선) 안에 속한다. 자국민일지라도 신분증을 검사받는 등 군부대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다. 외부인은 일출 전 30분부터 일몰 후 30분까지만 교동대교를 통행할 수 있었다. 반가운 소식은 지난 6월부터 방문객에게 교동대교를 자정까지 연장해 개방한다는 것. 비로소 교동도에 한 발 더 가까워진 셈이다. 주민들에게 24시간 통행이 허용된 것도 지난 6월 초부터였으니 교동대교의 의미를 되새겨 볼 만하다.교동도는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이다. ‘구름에 뜬 섬’이라는 뜻의 대운도戴雲島가 원래 이름이었다. ‘하늘에 닿을 새’라는 의미로 달을신達乙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구려 때 처음으로 현縣을 두어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했고 신라 경덕왕 때 교동현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강화 나들길의 교동코스 중 하나인 ‘다을새길’은 옛 지명 달을신의 소리음인 다을새의 이름을 따서 탄생했다. ‘나들길’이란 나들이 가듯 걷는 길이라는 뜻으로 1906년, 화남 고재형 선생이 강화도의 유구한 역사와 수려한 자연을 노래하며 걸었던 강화의 끊어진 길을 연결했다. 총 19개의 코스, 20개 구간으로 310.5km에 이른다. 이 중 교동도에는 2개의 코스, ‘다을새길’과 ‘머르메 가는 길’이 있다. 월선포를 출발하여 교동향교, 화개사, 화개산 정상, 석천당, 대룡시장, 남산포, 교동읍성, 동진포를 둘러보는 9코스(교동 1코스)는 약 16km. 장장 6시간이 걸리는 걸음이었지만 애틋하기만 했던 교동도 이야기.화개산 아래로 보이는 시간의 흔적 비가 제법 잦아들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해발 259.6m로 비교적 낮지만, 교동도에서는 가장 높은 화개산을 오르기에 선선한 날씨다. 오르는 내내 눈에 들어오는 푸름과 중턱에서 보이는 교동도의 모습이 정상을 더욱 기대하게 한다. 다소 가파르지만 속도가 더디어도 곳곳에서 소곤소곤 들리는 옛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화개산 약수터, 화개산성의 외성과 내성의 북벽이 교차하는 지점인 북벽망루北壁望樓, 자연숭배 신앙의 흔적으로 보이는 성혈바위 등 볼거리가 쏠쏠하기 때문.정상에 다다르자 한 장의 정지된 사진을 보는 듯 모든 것이 멈춰 있는 풍경과 마주한다. 드넓은 교동평야 뒤로 섬들과 산이 교차하여 내다보인다. 교동도에는 논이 약 2,640만 평방미터, 밭이 660만 평방미터로 모두 3,300만여 평방미터의 농경지가 자리한다. 간척사업을 통해서 농경지가 마련된 것으로 강화도에서 경작지 면적이 가장 넓고, 호당 경지면적도 가장 넓다. 동쪽 교동대교를 시작으로 오른쪽으로 조금씩 눈을 돌리면 석모도, 상주산, 남산포, 기장섬, 주문도, 미법도, 서경도를 차례대로 음미할 수 있다. 흐린 날씨 탓인지 지도상의 ‘말도’는 눈으로 짚어지지 않았다. 반대쪽으로 발길을 돌리다 보면 서북쪽 휴전선 너머로 너무 가까워 믿기 힘들 정도의 거리에 황해도 연백평야가 뿌옇게 펼쳐져 있다.교동도는 연산군 유배지로 유명한 섬이기도 하다. 고려 희종,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폐비 류씨, 익평군, 영선군, 은언군 등 이곳으로 많은 왕과 왕족, 귀족이 유배됐다고 한다. 교동도는 ‘돌아오지 않는 섬’이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도 있는데, 유배당한 이들 대부분이 이곳을 빠져나오지 못해 얻은 호칭이다. 하지만 옛날 사적은 물론 유배지도 분명한 자료가 남아 있지는 않아 전설과 추정으로만 전해지고 있다.조선시대 선조들도 찜질방을 즐겼던 걸까. 연산군 유배지로 추정되는 화개산 서쪽 자락에는 돌무덤으로 보이는 한증막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문화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조선 후기에 만들어져 1960년대까지도 간간이 사용했을 거라 추정된다고 한다. 화개산은 이 모든 역사를 보고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야외 박물관인 셈이다.그 많던 제비는 대룡시장에 있었다 옛것이 그대로 보존된 곳이 있다고 소문나면 너도나도 그 모습을 담아 오려고 애쓴다. 교동대교가 들어서기 전 대룡시장은 그런 이들에게 호기심과 정복의 대상이었다. 1960~70년대의 영화세트장을 옮겨 놓은 것 같은 골목은 옛것을 흉내 낸 것이 아니라 물들지 않은 역사 그대로의 모습이다. 연백군에서 피난 온 실향민들이 고향에 있는 연백장을 본떠 만든 골목시장으로 활기도 잃고 촌스럽지만 정겹고 순박하다. 기나긴 시간이 흘렀지만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실향민들 때문인지 아련한 공기가 감돈다. 그나마 몇 개 남지 않은 점포들이 있는 시장을 둘러보려면 10분도 넉넉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이곳을 느리게 또 느리게 둘러본다. 2명이 오갈 수 있을 법한 좁은 골목도 한산하다. 관광객보다 주민을 마주치는 일이 더 어려울 정도로 적막하다. TV를 통해 그나마 낯익은 교동이발관, 동산약방, 거북당이 외지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할 뿐.고요함을 뚫고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 있으니 다름 아닌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제비다. 애잔한 실향민들의 보살핌으로 매해 둥지를 틀었나 보다. 처마 밑 곳곳에 제비집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운 좋게 새끼 제비들이 있는 둥지를 찾았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 귀여운 모습을 사진으로 담자니 미안한 마음이다. 새끼 제비가 불안하지 않게 거리를 유지해 주어야 할 것 같다.최신식으로 보태어 꾸미지 않아 더욱 소중했고 어디를 둘러봐도 옛것 그대로의 교동도다운 모습을 담아 올 수 있어서 뜻깊다.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옛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교동도에서는 따스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학문적인 지식은 조금 흘려 지나도 괜찮다. 멈춰 있는 시간에 다가갈 수 있는 의미 있는 연결고리가 있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는 자연이 기다리고 있으니.▶travel info 교동도인천유형문화재 28호 교동향교 가장 오래된 향교 중 하나인 교동향교喬桐鄕校는 고려 인종5년(1127년)에 화개산 북쪽에 지었으나 조선 영조17년(1741년)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 고려 충렬왕12년(1286년) 당시, 안유선생이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공자와 십철十哲의 초상을 모셔 왔다고 전해진다. 제사와 교육의 공간이 결합해 있는 향교에서는 매년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을 추모하고 덕을 기리기 위한 ‘석전제釋奠祭’ 행사가 펼쳐진다. 8월 말까지 교동향교 내 전통건축물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다.인천기념물 23호 교동읍성화개산 남쪽의 읍내리에 있는 교동읍성은 조선조 인조7년(1629년) 수영이 설치되었을 때 축조된 것으로 도읍 전체를 둘러싸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아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했다. 성의 둘레는 약 430m, 높이는 약 6m로 동, 남, 북에 3개 성문이 있었다. 현재는 반원 형태의 남문인 홍예문만 남아있다.교동 정미소50년 역사를 자랑하는 삼선리 교동 정미소는 부부가 20년 넘게 운영하는 교동도에서 가장 오래 된 방앗간이다. 대룡시장의 모습처럼 옛 자취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하루 평균 350가마를 찧는데, 쌀이 되는 과정을 여과 없이 모두 지켜볼 수 있다. 전기 대신 아직도 기름으로 모터를 돌려 쌀을 찧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교동도는 섬임에도 불구하고 논과 밭이 많고 벼농사가 발달했다. 축산농가가 없어 맑고 깨끗한 농업용수로 농사를 지을 수 있다.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교동북로 183 삼선리정미소 032 932 1887강화 교동 나들길 여행상품DMZ와 접경지역 10개 시·군을 대상으로 관광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DMZ관광주식회사(대표 장승재)에서 교동대교 1주년 기념으로 출시한 교동도 당일여행 관광상품. 나들길 화개산과 연계한 교동문화 중심의 A코스와 역사 문화 농촌 관광자원 중심의 B코스로 운영될 예정이다. 7월부터 매주 주말 출발하며 단체의 경우 주중 출발도 가능하다.02 706 4851 www.dmztourkorea.com 3만3,000원에디터 손고은 기자 글·사진 Travie writer 유리취재협조 DMZ관광주식회사 www.dmztourkorea.com☞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각자전수동문 기획전 ‘칼로 새긴 사군자전’ 개최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각자전수동문 기획전 ‘칼로 새긴 사군자전’ 개최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각자전수동문회’가 매년 새롭게 선보이는 기획 전시회가 올해로 8회째를 맞았다. 금년의 기획 주제는 “칼로 새긴 사군자전”으로 오는 9일부터 15일까지 서초구 서초동 ‘한전아트센터 갤러리 기획전시관’에서 개최된다. 각자(刻字)란 목판이나 현판을 제작하기 위해 나무에 글자(혹은 그림)를 새기는 일을 말한다. 일부에서는 각서(刻書)나 서각(書刻)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刻字匠)’이라는 공식 명칭이 말해 주듯이, 이제는 각자(刻字)라는 용어로 통일해야 옳다. 각자를 하는 장인을 각자장 혹은 각수(刻手)라고 부른다. 1996년에 고 철재 오옥진(2014년 작고) 선생께서 초조(初祖)로 보유자 지정을 받았으며, 그 뒤를 이어 2013년 3월에 현 고원(故源) 김각한(金珏漢) 선생이 2대 보유자로 지정을 받아 국가 중요 전통 공예의 맥을 잇고 있다. 각자(刻字)는 오랜 연원의 우리 역사와 늘 함께 해 왔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 바위나 동굴 등에 암각화나 벽화의 형태로 그 흔적을 남겼던 각자는, 불교와 유교의 이입 이후에 그들 철학을 전파하는 핵심 수단이 되어 전통 문화의 고갱이 반열에 올라섰던 것이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서 비롯하여 광개토대왕비, 중원 고구려비,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지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126호), 팔만대장경(국보 32호),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 등의 판각에로 나아간 우리의 전통 각자는, 우리 민족사에 이처럼 뚜렷이 지울 수 없는 족적을 각인하여 왔다.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는 현 ‘한국문화재재단’이 각자(刻字)를 비롯한 전통공예의 보급과 저변 확산을 목표로 1989년부터 운영해오고 있는 한국 전통공예 교육의 요람으로서, 모두 15개 전통 공예와 건축 분야에서 전수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고원(故源) 김각한(金珏漢) 선생은 2004년부터 이 학교 각자전수반을 지도하며 후진을 양성해 오고 있다.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 각자전수반’에서 고원 선생의 지도하에 전통 각자 기예의 연찬에 노력한 졸업생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각자전수동문회>가 조직되었고, 지난 2008년부터 매해 동문 기획전을 열어 오늘에 이르렀다. 사군자란 곧 선비 정신의 정화(精華)인 것. 우리 문화사에는 사군자를 소재로 한 회화서부터 사군자의 정신을 노래한 서예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줄이어 왔다. 어몽룡, 강세황, 김정희, 김규진, 손재형, 김충현, 서희환 등 우리 문화사를 수놓은 고금의 예인들이 끼친, 이 숨결들을 재해석하여 나무에 아로새겨온 <각자전수동문>들의 고민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확인해 볼 일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갑작스레 면모를 일신한 이즈음, 계절의 변전 못지않게 마음의 변화도 기다려진다. ‘칼로 새긴 사군자전’이 이런 관객들의 마음에 삽상한 쉼표를 찍어줄 것이다. 일별을 권한다.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언론인 김호준이 본 유라시아의 들꽃, 고려인의 파노라마] (상) 대륙 개척의 전위

    [언론인 김호준이 본 유라시아의 들꽃, 고려인의 파노라마] (상) 대륙 개척의 전위

    광복 70주년을 맞아 지난 8월 ‘유라시아 친선특급열차’가 아시아·유럽 두 대륙을 달렸다. 박근혜 대통령이 2년 전 발표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을 따라 미리 가 보는 길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횡단 철도를 거쳐 베를린까지 이어지는 장장 1만 4400㎞의 대장정이었다. 150년 전부터 우리 동포들은 그 길을 따라 디아스포라의 수난을 겪으면서도 근면과 교육열로 다시 일어섰다. 대륙 곳곳에 똬리를 튼 우리 동포들의 어제와 오늘을 ‘유라시아고려인 150년’의 저자이자 이 특급열차에 동승했던 언론인인 김호준 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의 집필로 3회에 걸쳐 조명해 본다. 고려인은 구소련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려인이란 호칭은 한민족의장혈통을 지니고 있지만 남한의 한국인도, 북한의 조선인도 아니라는 함의가 크다. 과거엔 주로 ‘조선인’이라고 불렸던 이들은 냉전 종식 후 자신들의 호칭을 ‘고려인’으로 통일시켰다. 양분된 조국과 관련해 그들의 고뇌를 엿볼 수 있는 호칭이다. 고려인은 우리 민족사에서 ‘북상(北上)개척’을 선도한, 대륙 진출의 선구자다. 고구려·발해 멸망 이후 비좁은 한반도에 갇혀 살던 한민족의 지평을 저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으로 넓힌 주역이 바로 고려인이다. 고려인의 러시아 이주는 제국주의 시대인 1863년에 시작되었다. 그때 기근과 봉건적 탐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선의 콜럼버스’ 최운보 양응범이 이끈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두만강 너머 연해주로 이주해 정착했다. 1902년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노동자로 태평양을 건넌 하와이 이민보다 39년이나 앞선, 우리 근현대사 최초의 국외 진출이다. 구한말 연해주고려인 사회는 만주, 용정과 함께 항일 구국투쟁을 선도한 해외기지였다. 조선 강점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준비한 곳이, 1919년 3·1운동 후 최초로 임시정부를 세운 곳이 연해주다. 고려인들은 연해주에서 70여년간 민족공동체를 운영하며 블라디보스토크를 주도(州都)로 하는 고려공화국 건립 운동을 벌였다. 비록 소련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이 운동 역시 역외 건국운동의 효시다. 1937년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는 해외 한인이 겪은 시련 가운데 가장 큰 아픔이다. 강제 이주에 앞서 스탈린은 고려인의 저항을 막기 위해 지도층 2500명을 무더기로 체포, 일본 간첩이란 누명을 씌워 처형했다. 적성(敵性)민족으로 몰린 고려인 18만명은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내던져졌다. 그때 처형, 기아, 질병 등으로 희생된 고려인은 총 1만 6500여명에 달했고 그들이 원동에서 살던 606개 촌락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이런 참담한 역경 속에서도 중앙아시아고려벌들은 근면을 바탕으로 농업의 성공 신화를 쓰며 소련 제1의 소수민족으로 우뚝 섰다. 당시 소련이 세계에 자랑한 모범농장 폴리트오트젤과 김병화 농장 등은 모두 고려인이 운영한 집단농장이었다.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탄생한 15개 민족공화국의 소수민족 차별은 고려인의 이동을 촉발했다. 이슬람 문화권인 중앙아시아에 살던 고려인 10만 명이 슬라브 문화권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 이주했다. 그 결과 최대 20여만명을 헤아리던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수는 13만명 수준으로 격감했다. 내전이 터진 타지키스탄에선 고려인 사회가 무너져, 한때 1만 3000명에 달했던 인구가 이젠 60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현재 고려인 최다 거주국인 러시아의 고려인 인구는 공식통계상 15만명이다. 무국적자와 불법체류자를 포함하면 20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 밖에 카자흐스탄에 10만 3000명, 키르기스스탄에 1만 7000명, 우크라이나에 1만 2000명이 거주하고 있다. 총 48만명에 달하는 고려인은 유라시아 대륙의 대표적인 분산민족이다. 고려인은 대륙의 어디든 없는 곳이 없다지만 그렇다고 민족자치를 거론할 만큼 다수파로 밀집해 사는 곳도 없다. 광활한 대륙에 마치 하늘의 별처럼 점점이 흩어져 살고 있는 것이 고려인이다. 고려인들은 19세기 말 이래 시베리아철도를 따라 서진(西進)을 계속하며 자신들의 영역을 꾸준히 넓혀 왔다. 최근에는 러시아 남부와 볼가 강 유역으로 뻗어나가 그곳에 새로운 고려인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모스크바 등 대도시 지역의 고려인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사안이다. 이렇게 우리 동포의 생활 영역이 확장되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려인들은 기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국 해방을 위해, 또 탄압과 차별 때문에 유랑을 계속했지만 그것만이 동인(動因)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려인에겐 일찍부터 글로벌시대에 걸맞은 진취성, 모험성, 개방성 등이 있었다. 그것이 고려인들로 하여금 광활한 유라시아를 떠돌며 한민족의 영역을 넓혀 나간 저력의 근원이 아니었을까.
  • ‘광개토대왕’ 적힌 신라그릇 등 문화재 3점 국가 보물로 지정

    ‘광개토대왕’ 적힌 신라그릇 등 문화재 3점 국가 보물로 지정

    문화재청은 고구려 ‘광개토대왕’ 글자가 적힌 유일한 청동 호우를 비롯해 조선시대 회화 2점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했다고 3일 밝혔다. 보물 제1878호가 된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는 1946년 경주 은령총과 함께 발굴한 호우총에서 출토된, 뚜껑이 있는 그릇인 유개합(有蓋盒)이다. 415년 제작된 광개토대왕 호우 10개 중 현존하는 유일한 것으로, 고구려가 아닌 신라 고분에서 출토돼 고구려와 신라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보물 제1879호로 지정된 ‘희경루방회도’(喜慶樓榜會圖)는 1546년 증광시(增廣試·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임시로 실시된 과거시험) 문·무과 합격 동기생 5명이 1567년 전라도 광주의 희경루에서 만나 방회(榜會·과거 합격자 동기모임)를 가진 기념으로 제작했다. 보물 제1430-2호가 된 ‘봉수당진찬도’는 1795년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행차했을 때의 주요 행사를 그린 8폭 병풍 ‘화성행행도병’ 중 1폭으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이자 중요 행사였던 진찬례(進饌禮)를 그린 것이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무량사 극락전과 제우스 신전의 ‘공포’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무량사 극락전과 제우스 신전의 ‘공포’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한국의 목조 건물은 1308년 창건된 수덕사 대웅전을 중심으로 14세기 이전 것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수덕사 대웅전은 창건 연대가 확실하며 아름답고 당당해 항상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008년 창건 700주년 기념전시회가 수덕사 근역성보관(槿域聖寶觀)에서 열린 것을 계기로 필자는 기념 강연을 했다. 건축에 처음으로 인문학적 접근을 시도해 대웅전 건축과 그 안의 불상대좌, 불탁(향로와 광명대 등을 놓는 탁자) 등 종합적 강연을 대웅전에 대한 찬가로 바쳤다. 한국 목조건축의 공포와 서양의 석조 공포를 비교한다. 그리스 신전도 처음에는 목조건축이었다. 사찰과 궁궐 건축은 지붕을 바치는 공포부(栱包部)가 있다. 공포라는 것은 목조건축의 넓고 두터운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고자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종과 횡이 만나는 구조를 일컫는다. 공포의 부재 중에서 안팎으로 뻗어 나간 것을 순우리말로 ‘살미’라 부른다. 살미는 아래로부터 끝이 길게 뻗쳐 내려간 것은 쇠서형, 즉 소의 혓바닥 모양이라 하고, 길게 올라간 것을 앙서형(仰舌形)이라 불러 혓바닥으로 인식했다. 새 날개처럼 탄력 있고 뾰족하게 뻗은 것은 익공형(翼工形), 구름처럼 둥글둥글하게 생긴 것을 운공형(雲工形)이라 부른다. 소의 혓바닥, 새 날개, 구름 등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살미는 조선시대, 특히 전국이 초토화된 임진왜란 이후 화려하게 꽃피운다. 목조건축의 꽃이라 할 공포의 구조와 상징은 오랫동안 오해와 오류 속에 잠들어 있었다. 일본 학자들은 쓸데없이 공력을 들였다고 하며 번잡해서 혐오스럽다고까지 폄하했다. 한국 목조건축의 넓고 두터운 기와지붕은 공포부와 함께 비중이 가장 큰 만큼 급속히 좁아지는 축부(기둥들이 만든 부분)와의 비례가 극적이어서 중국과 일본 건축보다 조형미가 뛰어나다. 중국은 축부에 벽돌을 많이 쓰고 일본은 단순해 한국 건축 같은 장중한 미감을 내지 못한다. 그런 지붕부를 받치기 위해서는 공포부가 넓고 높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기능에 한국의 장인들은 엄청난 형이상학 의미를 부여했다. 사상(思想)이 공포의 형태를 결정한 것이다. 2001년 겨울 어느 날 필자는 전남 영광 불갑사로 홀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전에 보았던 그 현란한 대웅전의 내부 장엄에 이끌렸던 것이다. 그런데 대웅전에 들어가서 위를 본 순간 무엇인지 몰랐던 내부 공포가 처음으로 시선을 꽉 붙잡았다. 공포라는 조형언어를 순간적으로 완벽하게 해독했을 때의 희열과 놀라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감히 말하건대 생애에서 처음으로 체험하는 정각(正覺)이었다. 그 경이에 힘입어서 여러 사찰을 답사하며 공포를 집중적으로 분석해 2002년에 한국건축역사학회에서 초청 강연으로 발표했다. 몇몇 교수들은 전화를 걸어와 한국 건축이 그렇게 위대한지 몰랐다고 했다. 마침내 기존 논문을 한 편도 읽지 않고 2004년에 논문으로 발표했으며, 10년 후 한국 공포를 종합적이며 체계적으로 연구해 다시 발표했다. 그러는 동안 괘불의 조형언어를 해독하며 환희에 춤을 추었고, 계속 범종을 해독해 가는 등 모든 장르에 지속적으로 눈뜨는 감격을 누리고 있으며, 마침내 그동안 무엇인지 몰랐던 세계의 조형예술도 해독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의 첫 단추가 공포의 깨달음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점차 정립해 온 ‘영기화생론’에 입각한 주제로 수많은 강연을 국내는 물론 대만, 일본, 미국, 그리스, 독일, 프랑스 등의 학회에서 중요한 주제를 처음으로 밝혀 발표하거나 대학에서 강연했다. 조선시대 중기에 창건된 부여 무량사는 당당하고 위압적인 중층(重層) 건축이다 ①. 무량사의 안살미에서는 제3영기싹 영기문 사이에서 용이 화생하며 손으로 보주를 꽉 쥐고 있다 ② ④. 만일 용의 입에서 보주가 나오는 것을 표현하면 보주가 작아지고 강력히 발산하는 영기 표현도 어렵게 되므로 보주를 크게 만들어 쥐게 했다. 오랜 후에 용의 입에서 무량하게 보주가 발산하는 것을 이런 방법으로도 표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위의 봉황은 연꽃 모양을 물고 있다. 그러나 연꽃 모양 자체가 무량보주가 돼 보주를 무한히 발산한다는 것을 안 것 역시 요즈음이다. 즉 연이은 제3영기싹 영기문에서 화생한 용과 봉황이 각각 무량한 보주를 발산해 대우주에 가득 차게 한 것이다. 밖살미에는 같은 영기문에서 봉황만이 화생해 역시 무량한 보주를 발산하고 있다. 이렇게 영조(靈鳥)나 영수(靈獸)가 연꽃 줄기를 입에 문 것이 보주를 발산하는 것임을 안 것은 고구려 벽화와 고려청자에서였다. 건축 안과 밖 살미를 ‘안살미’와 ‘밖살미’라고 부른 것은 필자다. 밖살미에서 밖은 공간이 넓으므로 소우주인 건축으로부터 영기를 한없이 마음껏 뻗어 나가도록 한 것이다③. 형태는 다양하나 처음부터 끝까지 일사불란하게 전개 원리를 지키며 살미를 만든 나라는 한국뿐이다. 필자가 한국 건축에 매료하는 까닭이다. 기둥 위에 활짝 핀 살미 부분을 포함한 공포는 가히 우주목, 혹은 생명수(生命樹)라 할 만하고 이 우주목에서 만물이 탄생한다. 아시리아의 우주목들은 건축의 기둥이 우주목임을 만천하에 천명한 조형이다. 그런 조형은 역사적으로 단순한 것부터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개해 온 것이나, 실제 건축에서 기둥을 우주목이라고 하고 나아가 보주목(寶柱木)이라 부른 것도 필자다. 가장 오랜 아시리아의 BC 3000년 우주목은 이후 전개되는 다양한 우주목의 기원이 된다 ⑥. 아시리아의 BC 9세기 우주목은 아예 기둥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반드시 양쪽에 영조와 영수가 있는데 우주목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이 탄생하는 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아시리아의 우주목은 기둥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 그 맥은 우리나라 목조건축 기둥으로 이어져 무량사에서처럼 기둥, 즉 우주목에서 용과 봉황이 화생하고 있다. 무량사의 기둥과 공포를 합해 다른 예를 참고하며 우주목으로 필자가 그려 만들었다 ⑤. 서양에서는 살미에 해당하는 그리스의 건축 부재는 주두(柱頭·Capital)라고 한다. 그런데 그저 주두라고 하면 독립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기둥의 일부가 돼 버리고, 지붕을 받치는 개념이 희박하므로 필자는 지붕부를 받치는 기능을 하는 서양의 주두를 공포라고 부르기로 한다. 서양 건축학자들 가운데는 이 주두, 즉 공포의 상징을 밝힌 사람이 아직 없다. 필자는 지난해 그리스 신전의 공포를 그리스에서 르네상스에 걸쳐 그 본질을 새로이 밝히며 기둥과 공포를 합쳐 우주목이라 해석하고 신전 건축은 ‘우주목의 숲’을 건축화한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반응이 컸다. 그 후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을 처음으로 답사했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동쪽에 있는 신전으로, 올림포스 신들 가운데 최고의 신 제우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BC 6세기 아테네 시대에 건설이 시작됐지만, 고대 세계 최대의 성전 완성은 2세기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아테네의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은 올림포스 산의 제우스에게 바친 신전이지만 지금은 폐허에 일부 기둥들만 남아 있다 ⑦. 4세기경 고트족의 침입으로 파괴되기 전에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웅장했다고 한다. 원래 84개의 기둥이 있었으나 지금은 15개만 남아 있다. 너무 높아 줌렌즈로 사진을 찍었더니 뜻밖에 공포의 형태가 다양했다. 이곳 공포와 비슷한 대리석 공포를 파르테논 신전을 걸어서 올라가다가 폐허에 겨우 하나 남은 것을 보았다. 매우 비슷하므로 다음 회에 다루기로 하고, 무량사 극락전의 공포와 맥을 같이하는 로마시대 공포를 분석해 보기로 한다. 아마도 제우스신전에는 이런 형태의 공포도 있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공포는 제우스신의 영기화생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포에는 앞에서 보면 양쪽에 두 영조가 있으므로 무량사 극락전의 공포와 맥을 같이하여 만물이 탄생하는 것을 상징한다. 공포를 채색 분석해 보면 밑 부분에는 처음에 서양건축에서 말하는 이른바 ‘아칸서스’의 잎이 네 개 나오며 끝을 밖으로 탄력 있게 구부렸다 ⑧. 그 사이사이에서 긴 아칸서스가 길게 힘차게 뻗쳐 오르며 역시 끝을 탄력 있게 구부렸다. 옆에서 보면 제1영기싹 모양이다. 그런데 양쪽에 영조를 두었으며 중앙에도 같은 모양의 몸인데 얼굴은 없다. 그러나 중앙의 아칸서스 뒤에 새의 몸이 보이고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 새의 얼굴에 해당하는 부분에 꽃받침 같은 것이 있고 그곳에서 소용돌이치며 싹 같은 것이 올라가고 그 끝에서 제우스의 얼굴이 화생한다. 그런데 밑의 새 얼굴 부분으로부터 날개를 활짝 펼치는 갈래 사이에서 직선과 곡선의 화살 모양들이 나오는데 그것은 번개를 상징한다. 제우스는 번개의 신이다. 가장 강력한 영기를 발산하는 것이 번개인데 제우스는 번개를 지물(持物)로 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공포의 네 군데에는 독수리를 배치했고, 보주꽃 대신 제우스 얼굴을 두었다. 이런 공포는 제우스신전에 헌정됐으리라고 이탈리아 건축가 자코모 비뇰라(1507~157)는 말하고 있다. 비뇰라가 펴낸 ‘5개의 오더’는 알프스 이북의 여러 나라에 영향을 끼쳤는데 이 글의 흑백 도면은 그 책에서 선정했다. 1세기 로마시대의 유명한 건축가 비트루비우스는 서양건축의 바이블이라 할 ‘건축에 대한 10장’이라는 저서에서 주두의 식물을 아칸서스라 불렀다. 그 이후 지금까지 모두 보잘것없는 관목인 아칸서스로 알고 있으니 그리스 신전의 중요한 상징을 밝힐 수 없었다. 비트루비우스의 언급이 서양 미술사학의 발전을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이다. 그리스 신전의 주두뿐만 아니라 이후 건축의 모든 주두의 식물을 아칸서스라 불렀으며, 조각, 회화, 금속공예, 도자공예의 식물들도 모두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서양의 조형예술에는 아칸서스가 무수히 많아서 아칸서스가 틀린 용어이고 그런 식물 모양의 본질을 파악해 아칸서스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면 서양 미술사학은 순간적으로 활로를 찾게 된다. 필자는 한국의 공포를 해석해 냈기 때문에 서양의 신전이나 성당의 주두가 아칸서스가 될 리 없다는 것을 증명할 확신이 있다. 수천 년 동안 아무도 의심하지 않은 아칸서스를 다음 회에서 해독할 것이다.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파리 노트르담성당의 무량보주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파리 노트르담성당의 무량보주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서양 미술에는 로제트(rosette)라는 국화같이 생긴 조형이 있다. 문양집에는 ‘장미’항(項)에 로제타 조형이 들어 있다. 실제로 로제트라는 말은 장미(rose)의 축소형이지만 무늬에만 쓴다. 그런데 장미와 로제트는 조형이 전혀 다른데 왜 이런 오류로 혼란을 일으킬까. 로제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1. 장미꽃 모양의 다이아몬드 2. 땅 위에 붙어 방사상으로 퍼져 나는 잎. 또는 잎이 그러한 모양으로 나는 식물 3. 꽃잎을 방사상으로 그린 둥근 모양의 장식 등의 뜻이 있지만 장미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세계 학자들이 로제트라고 부르는 조형을 살펴보면 ‘꽃잎을 방사상으로 그린 둥근 모양의 장식’을 일컫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화나 연꽃 모양에 가깝다. 그런데 꽃의 모양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국화 모양이고 연꽃 모양이다. 그런데 왜 이런 조형이 세계 곳곳에 보편적으로 있을까. 그렇다면 로제트의 순수 조형은 어느 특수한 식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보편적인 상징을 띠는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바 로제트라는 조형은 고대 아시리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인도, 한국 등에 널리 퍼져 있다. 그 가운데 고딕 성당의 거대한 투명 원형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로제트 창’이라 부르지 않고 ‘장미 창’이라 잘못 부르고 있다. 즉 장미와 로제트는 전혀 다른데 이처럼 큰 오류는 어찌 된 것일까. 동양에 이르면 같은 조형을 보고 ‘국화’라고 부른다. 그 조형이 만일 보편적인 상징을 띤다면 특정한 장미가 아니듯 특정한 국화가 아닐 것이다. ●고대 아시리아, 이집트, 그리스에 널리 퍼진 ‘로제트’ 조형 어느 날 ‘꽃잎을 방사상으로 그린 둥근 모양의 장식 무늬’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채색 분석을 하다가 이렇게도 시도할 수 있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용기와 결단성이 없으면 어렵다. 위아래 조형은 다르나 같은 개념이다①. 즉 로제트나 국화 모양은 중앙에 보주가 있고 주변에 보주가 둘려 있는 무량보주가 된다. 그런데 동양에서와 마찬가지로 BC 700~600년 그리스 항아리에 그려진 신화 배경에 중앙에 보주가 있고 주변에 보주가 둘려진 무량보주들을 보고 놀랐다②. 조선 불화의 검은 하늘에 있는 무량보주와 똑같았기 때문이다③. 즉 로제트의 채색 분석에서 중앙의 보주와 주변의 보주들만 남기면 무량보주가 되는데 그저 정적인 상태가 아니고 주변으로 무한히 확산하는 역동적인 보주의 무량한 확산이 된다. ●채색 분석에서 중앙·주변 보주만 남기면 ‘무량한 확산’ 우리 교육 과정은 지식의 수집에 익숙해 인식의 문제는 등한시하는 것 같다. 인식은 끝없는 체험의 과정이다. 이 연재는 학교 교육 과정에 배우는 것처럼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조형의 인식 과정을 쓰지 않을 수 없으므로 간혹 중대한 것을 발견할 때마다 감성적 표현을 아니 할 수 없다. 특히 조형예술 분야는 요즘 에피소드 중심의 답사기가 유행하면서 인식 면에서는 오히려 퇴보해 가는 것 같다. 위대한 조형예술 작품을 대하면 놀라기도 하고 감동을 느낀다. 인간은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감성이라는 것을 지니고 있지만, 상대 개념인 이성과 균형과 조화를 지키지 않으면 미술사학은 연구할 수 없다. 감성이 결핍돼 있는 사람은 작품 앞에서 아무 느낌이 없어서 감성적 표현을 부정하기까지 한다. 놀라거나 감동을 받지 않으니 작품의 진위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성과 이성의 분별이 어디 있으랴. 만물생성의 근원인 ‘무량보주’라는 용어는 필자가 만들었으나 요즈음 ‘보주의 무량한 확산’이라고도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새로이 느낀다. 처음에 이른바 로제트의 조형언어를 채색 분석하기 시작하면서 직감이지만 방사선으로 뻗어나간 긴 잎은 잎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긴 잎 모양의 끝 부분 안에는 완벽한 원이 내재돼 있다는 확신이 들어 원을 그려 채색 분석해 보니 과연 완벽한 원이며 보주였다. 그리고 보니 중앙의 보주에서 많은 보주가 사방팔방으로 확산하는 조형이 아닌가. 그런데 과연 이렇게 해독해도 될까.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경이를 느꼈다고 해도 증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며, 분명히 증명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 있었다. ●크노소스 궁전 천장에는 백제 동하총과 똑같은 연꽃 크레타의 수도 헤라클리온에서 5㎞ 남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크노소스 궁전은 BC 1700년 건축됐으며, BC 1400년까지 이용됐다. 그 스타코 천장에는 놀랍게도 백제의 수도 웅진(공주) 능산리 왕릉 군 가운데 하나인 동하총(東下塚) 천장과 똑같이 연꽃같이 보이는 무량보주가 영기문과 하나가 돼 소용돌이치고 있다④, ⑤. 그리스 것은 양식화됐고, 백제 것은 자유분방하고 역동적이되 영기문은 형태는 다르나 모두 제1영기싹의 변형일 뿐이다. 크노소스 궁전이나 백제의 무덤이 모두 영기문에서 무량한 보주가 확산해 소우주인 궁전에 대생명력이 가득하고, 역시 소우주인 백제 왕릉 안에서 우주의 대생명력이 보주로 형상화돼 가득 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 놀랍다. 고구려 무덤벽화 천장에는 대부분 큰 연꽃이 그려져 있다. 왜 천장에 연꽃이 그려져 있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으며 아무도 의문을 제시한 사람도 없었다. 일본 학자들은 천장에 그려져 있으니 하늘에 있는 연화, 즉 천연화(天蓮花)라고 불렀고 아무 설명도 하지 못했으며 우리도 그 용어를 따랐다. 그러나 그 조형들을 수없이 그려 보고 채색 분석하면서 보주의 무량한 확산이라고 해독하고 나니 이 소우주인 무덤 안에 대우주의 대생명력을 보주가 가득하도록 천장에 조형화했음을 알 수 있었다. 연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기와를 연구한 필자는 의문점이 많았다. 조형상의 연꽃잎에서는 한 개 혹은 두 개의 타원체 혹은 구체(球體) 모양이 생겨나고 있는데, 일본학계에서는 돌기가 하나 있으면 단판(單瓣·하나의 꽃잎)이라 부르고⑥, 두 개가 있으면 복판(複辦·많은 연꽃잎)이라 부른다⑦. 그런데 그 얇은 연잎에 그런 팽만감 있는 돌기가 따로 한 개 혹은 두 개가 있을 리 없으며, 그대로 쓸 것이면 복판도 쌍판(雙瓣)이라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돌기는 하나이거나 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세계적으로 기와 연구가 가장 활발하다. 한국의 기와 전공자는 일본의 엄청난 연구 성과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기와의 조형과 상징의 본질이 새로이 밝혀진 지금 수백 년 연구 성과는 물거품이 돼 버리고 만다. 그런 가운데 한국의 와당 가운데 통일신라 월지 출토 수막새 조각은 연잎이 아예 없고 중앙에 보주가 있으며, 주변이 보주들로만 이루어진 것을 보고 놀랐다. 중국 북제의 와당을 보고는 더욱 그런 조형이 완벽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이것은 불교미술 연구의 대전환점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이런 기와들로 단판이나 복판이라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됐다. 더 나아가 넓은 잎 전체가 풍만해지면서 보주화하는 조형도 눈에 새로이 인식하게 됐다. 연꽃의 씨앗들만 보주가 되는 것이 아니고, 뜻밖에 연잎들도 모두 보주화해 가는 과정을 찾아내면서 큰 놀라움에 흥분했다. 이것은 세계미술사학 연구사에서 중대한 발견이기 때문이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에도 같은 조형 중국 수나라 석불의 연화대좌를 보면 넓은 연잎에서 각각 두 개의 보주가 생겨나는 듯하다. 이것을 복판이라 했으니 그 말 자체가 틀리다. 필자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공부하면서 높이 5m에 이르는 드높은 석등을 매일 대하면서도 하대의 연잎에서 큰 반구형 보주가 생겨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것이 보주로 보인 것은 보주가 무엇인지 밝히고 난 다음이었다. 지난봄 건축학회 발표차 프랑스에 갔을 때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보고 경악했다. 1190년 완성된 초기 고딕 양식의 웅장한 대성당 천장 바로 밑 부분에 화려하고 큰 영기창의 조형은 거대한 보주의 무량한 확산이었으며, 보주마다에서 성스런 조형들이 화생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다⑧. 그 조형을 단순화해 채색 분석하여 보니 와당에서 일어나는 보주의 무량한 확산과 똑같지 않은가⑨. 그 성당의 여러 장미창(Rose Window·실은 ‘보주창’이라 불러야 한다)은 조금씩 다를 뿐 모두가 보주의 무량한 확산을 보여 주는 조형이었다. ●그리스 문명 이전의 미케네 문명 발굴품, 한국 와당과 유사 그러면 서양에서는 언제부터 무량보주 혹은 보주의 무량한 확산의 조형이 만들어졌는가. 지난해 여름 아테네 국립박물관에서 그리스 문명 이전의 미케네 문명 발굴품을 보면서 완벽한 금제 무량보주 조형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런 금제 조형이 만들어진 곳은 그리스 남부 아르골리스의 선사시대 도시 티린스다. 이 문명은 BC 1400~1200년 절정을 이루었는데 출토품에서 눈을 의심할 만큼 우리나라 와당의 무량보주와 똑같은 조형을 보았다10. 연꽃의 꽃잎이 씨앗과 더불어 보주화돼 갈 뿐만 아니라 보주의 무량한 확산이라는 개념을 얻어 가는 과정과 이를 뒷받침하는 동서양의 작품들을 발견할 때마다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이었고 세계 조형예술의 많은 부분이 풀리는 감동적인 시간들이었다. 대우주에 가득 찬 보주를 ‘보주에서 무량하게 확산하는 조형’으로 표현한 것은 동서양이 같았으나, 수천 년 동안 이 모든 무지와 오류들이 축적돼 온 것은 지금까지 보주의 개념을 알아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용에서 알아낸 보주이기에 용의 본질을 모르면 세계 조형예술은 풀리지 않는다. 서양에는 동양에서와 같은 용은 그리 많지 않으나 용성(龍性)을 지닌 조형들은 많기 때문에 ‘세계의 조형예술, 용으로 읽다’라는 연재의 표제가 가능했던 것이다. 서양에는 서양인들에게 보이지 않았던 용성을 지닌 조형들이 너무나 많아서 필자가 하나하나 소개해 나가는 동안 여러분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놀라움이란 철학의 시작이며, 인식의 극치에서 큰 놀라움을 체험한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新국토기행] 경기도 안성

    [新국토기행] 경기도 안성

    경기도 남쪽에 자리한 안성시는 다양한 즐거움을 지닌 매력적인 도시다. 메트로 시티인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이지만 자연환경과 풍경을 농촌의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한 곳이 많다. 지역 여기저기가 느리지만 정성스러운 완곡한 우리 민족의 ‘흥’을 느낄 수 있는 예술문화도시이다. 국가 지정 또는 도 지정의 무형문화재가 7명이 있고 300명이 넘는 유·무명 예술인들이 활동하고 있는 곳이다. 아슬아슬 손에 땀을 쥐는 어름산이의 공연과 신명 나는 가락이 어우러지고, 볼거리와 먹거리 또한 가득하다. 아이들은 물론 어르신까지 복합적인 세대가 한 가족이라면 이들의 오감을 만족하게 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 바로 안성이다. >>볼거리 ●아슬아슬한 흥겨움 선물, 안성남사당 공연장 전통공연과 문화예술을 체험하는 안성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이다. 안성에 가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안성남사당공연장’을 비롯해 도심 속 천문대로 각광받는 안성맞춤천문과학관, 안성맞춤공연문화센터, 사계절 썰매장, 잔디공원, 분수광장, 야생화단지, 수변공원 등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가득하다. 남사당공연장에서는 조선 최초이자 유일한 여자 꼭두쇠 바우덕이의 생애를 중심으로 무동놀이, 버나놀이 등 남사당놀이 여섯 마당 공연을 볼 수 있다. 특히 외줄에 올라 걷고, 뛰고, 하늘로 솟구치다가 줄 위에서 재담을 펼치는 바우덕이 역의 어름산이 묘기는 아슬아슬하면서 감동적이다. 공연이 끝난 후에 풍물단과 관객이 함께 어우러지는 신나는 뒤풀이와 기념사진 촬영을 할 수 있다. 상설공연은 3~11월 매주 토요일 오후 4시, 일요일 오후 2시에 진행된다. 공연을 본 후 많이 찾는 인근 안성맞춤천문과학관은 국내 최대 구경을 자랑하는 300㎜ 굴절망원경과 3축식 4D 영상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어린이들에게는 천문과학에 대한 꿈과 희망을 키우고 바쁜 일상에 지친 어른들에게는 어릴 적 별자리를 바라보던 추억을 되살릴 수 있어 인기가 높다. 안성맞춤공예문화센터에는 도자·금속·목공·섬유·한지·페인팅 등 6개 분야 8개 공방이 입주해 시민과 학생들에게 다양한 공예기술을 전수한다. ●유기 제작 과정 볼 수 있는 안성맞춤박물관 유기는 안성의 대표 상품이다. ‘안성맞춤’이라는 말도 안성 유기에서 비롯됐다. 안성맞춤박물관에서는 유기그릇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한다. 고운 빛깔을 내기 위해 장인이 직접 놋쇠를 수천 번 두드려 형태를 잡는 초기 제작에서부터 완성에 이르는 과정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유기의 제조 방법으로는 두드려서 만드는 ‘방짜기법’과, 쇳물을 녹여서 만드는 ‘주물기법’, 그리고 그 중간 형태인 ‘반방짜기법’ 등이 있다. 안성은 이 중 일제강점기 이후 주물유기 제작으로 유명했다. 유기전시실에서는 이와 같은 주물기법 유기의 제작 과정과 특성을 모형과 영상을 통해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몽환적 풍경에 매료되는 금광·고삼 호수 안성은 호반의 도시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호수(저수지)가 많다. 이 가운데 금광호수는 빼어난 경관으로 뭇사람들의 시선을 잡을 만하다. 새벽 물안개가 피어오를 무렵이면 호수의 경치는 절정을 이룬다. 차를 멈추고 호숫가를 바라보면 반짝이는 은빛 물결이 마음에 평온을 선사한다. 고삼호수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섬’의 촬영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른 아침 물안개가 선사하는 몽환적인 풍경과 저수지 물 위에 떠 있는 수상 좌대, 그 위에서 세월을 낚는 강태공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안성 8경’에도 이름을 올렸다. 물안개 속 연꽃처럼 피어오르는 일출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주말이면 수많은 사진작가가 몰려온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2014년 고삼지를 ‘사진 찍기 좋은 명소’로 선정했다. 금광호수와 고삼호수는 붕어 등 씨알 굵은 민물고기가 잘 낚이는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호반을 따라 연결된 드라이브 코스는 낭만을 더해 준다. 주변에 장어구이집, 매운탕집 등 솜씨 좋은 맛집이 많아 당일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어사 박문수·궁예의 흔적 간직한 칠장사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현산 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는 천년 고찰이다. 신라 선덕여왕 5년(636년)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졌다. 국보 296호인 오불회괘불탱과 칠장사 혜소국사비(보물 488호), 인목왕후어필(보물 1627호) 등 귀중한 문화재들이 많다. 조선 명종 때 임꺽정이 스승 병해 스님과 함께 10여년간 머물던 사찰로,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일곱 도적과 갖바치 스님 이야기의 배경이 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어사 박문수가 칠장사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난 뒤 장원급제했다고 해서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후고구려 왕이었던 궁예는 칠장사에 머물며 불교 수행과 무술을 익혔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을 키웠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칠장사에는 한눈에 ‘궁예’를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벽화들이 있다. ●남사당패 본거지 청룡사·워터월드 갖춘 청룡호 고려 공민왕 13년(1364년)에 나옹화상이 중창한 유서 깊은 고찰로 경내에 대웅전, 영상회괘불탱, 감로탱 등 많은 불교문화 유적이 있다. 특히 청룡사는 전국을 떠돌며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 주었던 남사당패의 본거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청룡사 주변은 우리나라 포도의 주된 생산지로 당도 높은 포도를 맛볼 수 있다. 인근 청룡호수는 수질이 깨끗하고 주변 경관이 수려한 것으로 유명하다. 모터보트, 수상스키 등 수상레포츠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는 워터월드가 있어 주말 가족 나들이 코스로 인기가 있다. 진천 방향 38번 국도는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청룡사를 품은 선운산(547m)은 산세가 부드럽고 아담해 당일 산행지로 손색이 없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의 격전지 죽주산성 죽주산성은 고려 때 몽골군으로부터 여러 차례 공격을 당했고, 임진왜란·병자호란 때도 격전지로서 조상들의 호국정신이 깃든 역사의 현장이다. 안성시 북동쪽에 있는 해발 372m 높이의 비봉산 동쪽 자락에 있다. 금강 유역에 속하는 진천, 청주지역과 안성천 유역권에 속하는 안성·평택지역과 접하고 있어 타 지역으로 나가는 관문 구실을 했다. 이런 지리적 조건 덕분에 고대부터 죽산은 교통의 중심지,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받았다. 성안은 사방이 나무로 둘러쳐진 오목한 산세가 비바람을 막아준다. 산성 안에는 고려 때 죽주산성에서 몽골군을 물리쳐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에 오른 송문주 장군 사당이 있다. 세월의 흔적을 말해 주는 이끼 낀 성곽 둘레길을 걷다 보면 안성은 물론 이천·장호원이 시야에 시원스럽게 들어온다. ●김대건 신부의 시신 안장된 미리내성지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이 이곳에 안장되면서 순교 사적지가 되었다. 천주교 103위의 성인 시성을 기념하려고 세운 웅장한 성당이 있다. 성지로 가는 길은 입구부터 숨이 멎을 만큼 고요하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미리내성지에 도착하면 각각의 의미를 지닌 조각상들이 길을 안내한다. >>먹거리 쌀과 포도, 한우, 배, 인삼은 안성 5대 특산물이다. 특산물은 ‘안성마춤’이라는 공동브랜드를 달고 소비자들에게 간다. 소비자들이 귀하게 대접한 덕분인지 안성마춤 브랜드는 전국 지자체 가운데 최초로 9년 연속 퍼스트브랜드 대상을 차지했다. 명실상부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다. 안성에는 맛집도 즐비하다. ‘안성국밥’, ‘한우탕’,‘안성쌀밥’ 등이다. ●품질경영시스템으로 엄격 관리하는 안성쌀 안성 쌀은 청정지역의 기름진 들에서 생산해 최신식 도정시설인 미곡종합처리장에서 가공했다. 좋은 원료로만 엄선해 최신 설비와 최고의 기술로 돌, 뉘, 겨 등의 물질을 제거한 청결미이다. 생산-보관-가공-판매의 전 과정을 ISO 9001에 의한 품질경영시스템과 이력제, 우수농산물인증(GAP)으로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 ●입안 가득 톡 터지는 단맛 쏟아내는 포도 안성은 국내 포도 재배의 효시 지역으로 알려졌다. 드넓은 포도밭에서 당도 높은 고품질의 포도가 생산된다. 특히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이어지는 제철에 서운면 일대의 대단위 포도농장을 찾으면 입안 가득 톡 터지며 단맛을 쏟아내는 안성 포도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안성마춤 포도는 경기도 품평회에서 2년 연속 대상을 받았다. ●사포닌 함량에서 앞서가는 6년근 인삼 안성은 차령산맥 기슭에 있어 온난하며 강수량이 적고, 특히 밤낮의 기온차가 높아 6년근 인삼(홍삼) 재배의 최적지로 인정받고 있다. 몸체가 길고 단단하며 지근이 잘 발육된 안성인삼은 향이 강하고 사포닌 함량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높다. 소비자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안성의 인삼재배 시초는 1945년이다. 피난민 윤석품씨가 경기도 장단구에 인삼재배를 한 것에서 유래를 찾는다. 1961년부터 재배 지역이 대덕면 건지리, 삼죽면 미장리, 내강리 등지로 확산돼 본격적인 대규모 경작이 시작됐다. 안성의 인삼은 최고의 성숙기인 6년근이 되면 몸체가 길고 단단한 것이 특징이다. ●달고 육질 부드러워 궁중에 진상되던 배 안성은 전국의 5대 배 주생산지다. 안성 배는 당도가 높은 데다 과즙이 풍부하고 육질이 부드럽다. 저장력이 강해 궁중에 진상되던 한국 배의 대명사이다. 빛깔이 담황색이고 열매껍질이 고와서 아름답고 무게는 개당 500~700g으로 크다. 과육은 순백색으로 연하다. 당도는 평균 13도 이상이다. 2008년 ‘전국으뜸농산물 전시회 및 품평회’에서 대상을 받으며 전국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았다. ●바코드로 출생부터 사육 관리받는 명품 한우 안성 한우는 출생에서부터 바코드를 부여해 성장과정과 사육관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안심클릭시스템으로 특별관리하고 있다. 특히 지방이 얇고 육질이 부드럽고 감칠맛이 뛰어나 최상품 한우로 손꼽힌다. 안성은 소를 사육하기에 알맞은 구릉지, 목야지 등이 많아 일찍이 축산업이 발달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선사시대부터 현대사까지 한 걸음 한 걸음 ‘역사 산책’

    서울 노원구는 상계동 마들근린공원 산책로 주변에 테마가 있는 ‘역사의 길’(560m 트랙)을 조성했다고 24일 밝혔다. 이는 구가 행복한 교육도시를 만들기 위해 추진하는 ‘마을이 학교다’ 사업의 일환이다. 마들스타디움을 둘러싼 공원숲 산책로를 따라 만든 역사의 길은 선사,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사의 순으로 구성했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세계사의 흐름을 53개의 테마로 나누어 만들었다. 선사시대에는 움집과 화덕, 빗살무늬 토기 등의 모형을 볼 수 있다. 청동기 시대에는 고인돌과 군장(제사장)의 모습을 연출했고 고대시대는 고구려의 고분벽화인 수렵도와 백제의 금동대향로 모형을 전시했다. 고려시대에는 팔만대장경과 직지심체요절 등 인쇄술의 발달 과정, 고려청자 및 백자를 볼 수 있게 했다. 조선시대 공간에는 훈민정음 자음 14개를 의자 형태로 만들었고 중심에는 측우기 등의 복제품을 배치해 세종공원을 만들었다. 근대시대에는 강화도 조약,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등을 패널로 설명했다. 특히 ‘평화의 소녀상’ 조형물을 만들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고찰할 수 있게 했다. 현대사 부분에는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기리는 4·19 혁명 기념탑과 5·18 기념탑을 축소한 ‘민주주의 언덕’을 조성했다. 구는 25일 오후 2시 마들근린공원 중앙광장에서 개관식을 연다. 김성환 구청장은 “역사의 길은 광복 70주년에 조성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 크다”면서 “구민들이 공원 내 산책로를 걸으면서 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러 연해주 발해 유적서 고구려 양식 토기 발굴

    러 연해주 발해 유적서 고구려 양식 토기 발굴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의 발해 유적 발굴지인 염주성터에서 발해 모든 시기(698~926)를 담고 있는 문화토층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고구려 양식의 토기가 이곳에서 발견됨에 따라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됐다. 동북아역사재단은 21일 “러시아과학원 극동역사고고민족학연구소와 함께 지난달 15일부터 지난 14일까지 염주성터를 공동 발굴 조사한 결과 230년에 걸쳐 존재한 발해의 전시기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6개에 걸친 토층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재단 측은 “특히 최하층에서는 고구려 양식을 가진 토기가 조사돼 각 토층에서 채취한 목탄의 연대 측정에 따라 염주성의 축조 시점은 물론,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염주성은 발해 62개 주 가운데 하나인 염주의 행정기관으로 발해와 신라·일본 간 교류의 거점지였다. 동북아역사재단은 2007년부터 러시아과학원과 함께 염주성터 발굴을 계속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발해 유물로서는 처음으로 가로 1.8㎝, 세로 1.9㎝ 크기의 청동 쌍봉낙타상이 발견돼 발해가 서역과 활발히 교역했음이 확인됐다. 또한 한 군데 밀집된 저장 구덩이 4기에서 편병(扁甁), 동물뼈, 대형 토기 조각, 부싯돌, 기와조각, 방추차 등 다양한 생활 유물이 발견됐다. 발굴 과정을 총괄한 김은국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한쪽 면이 납작한 편병은 신라시대 청해진 장도 유적에서 발굴한 것과 크기와 형태가 같아 발해와 신라 장보고 선단의 교류를 추정할 수 있다”면서 “발굴 10주년을 맞는 내년에는 염주성 관청터를 발굴할 예정이어서 새로운 발해문자 관련 자료가 나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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