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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효 음식 이야기] 다시 뜨는 국민酒

    [발효 음식 이야기] 다시 뜨는 국민酒

    쌀·누룩·물이 빚어낸 전통주의 모체생막걸리 100㎖당 유산균 최대 1억마리웰빙 열풍 맞물려 인기 쑥쑥 막걸리는 우리 전통주의 모체다. 막걸리를 맑게 거르면 약주나 청주가 되고, 증류하면 증류식 소주가 된다. 힘든 농사일을 마치고 목을 축이던 ‘노동주’에서 지갑이 얇은 젊은이를 위로하던 대학가 ‘청춘주’에 이르기까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대 덕분에 서민의 술로 불린 막걸리는 우리네 삶의 굴곡을 함께해 왔다. 한때는 ‘마시고 나면 머리 아픈 술’이라는 오명과 함께 화려한 외국 술에 밀려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웰빙’ 열풍과 함께 다시금 그 가치를 재조명받고 있다.막걸리는 쌀과 누룩으로 빚은 술이다. 발효가 끝나면 여과하지 않고 고운 채에 막 걸러 낸다고 해서 ‘막걸리’라고 부른다. 누룩은 밀이나 쌀 같은 곡식을 메주와 같이 덩어리지게 물로 반죽해 곰팡이가 피어나도록 발효시킨 것이다. 누룩은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전통주를 빚을 때 흔히 쓰이는 재료다. 일본은 주로 쌀누룩을 사용하고 중국과 한국은 밀누룩을 주로 쓰는데, 특히 우리나라는 밀을 껍질째 반죽해 누룩 틀에 담고 덩어리로 만든 ‘막누룩’을 사용한다.서민들 굴곡진 삶과 함께 막걸리는 사랑받은 세월만큼이나 별명도 많다. 맑지 않다고 해서 ‘탁주’라고 불리기도 했고, 나라를 대표하는 술이라는 의미인 ‘국주’, 농사짓기에 필요한 술이라는 뜻의 ‘농주’, 색깔이 하얗다고 해 ‘백주’, 집집마다 담근다고 해서 ‘가주’ 등으로도 불렸다. 시인 조지훈은 쌀과 누룩, 그리고 물 3가지 재료로만 만들었다고 해서 ‘삼도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막걸리는 6~8%의 낮은 도주다. 100㎖를 기준으로 열량은 40~70㎉에 불과해 와인(70~74㎉), 위스키(250㎉) 등에 비해 낮다. 생막걸리에는 발효주답게 효모와 유산균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장(腸)을 깨끗이 하는 정장작용에 도움을 주며, 식이섬유와 비타민 B·C도 함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막걸리 100㎖ 당 유산균이 10만~1억 마리 들어 있다. 또 막걸리를 가만히 놔두면 가라앉은 하얀 고형물질은 대부분 ‘비소화성 식이섬유’로 이뤄져 있는데, 포만감은 주지만 칼로리가 낮고 장내 독소성분을 쉽게 배출하도록 돕는다. 뿐만 아니라 막걸리 한 병(750㎖)을 만드는 데는 약 100~125g의 쌀이 들어가 농촌의 쌀 수급 문제에도 도움을 준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부여, 진한, 마한, 고구려의 제천행사에서 밤낮으로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시기에 이미 고구려 등에서는 누룩을 사용해 술을 빚는 방법이 완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농업 기술서 ‘제민요술’에도 고구려의 주조 기술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또 일본의 고사기 ‘중권’에는 백제 사람 ‘수수보리’(술 거르는 이)가 일본에 가서 응신천황에게 누룩과 술을 빚는 법을 전했다는 일화가 나온다. 조선 성종 때의 농서 ‘사시찬요초’에는 “3복 중에 보리 10되와 밀가루 2되를 섞어 녹두즙에 반죽해 밟아서 떡처럼 만들어 연잎으로 싸서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걸어 말린다. 누룩은 반죽을 단단히 하고 강하게 밟아야만 좋은 누룩이 된다”는 누룩 제조법이 소개돼 있다.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여성이 집필한 조리서이자 첫 한글 조리서이기도 한 조선 현종 때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에도 “밀기울 5되에 물 1되씩을 섞어 꽉꽉 밟아 디디고, 비 오는 날이면 더운물로 디딘다. 시기는 6월과 7월 초순이 좋으며, 더울 때이므로 마루방에 두 두레씩 매달아 자주 뒤적거린다”는 누룩 제조법이 나온다. 막걸리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전체 술 소비량의 약 80%를 차지하던 명실상부 ‘국민주’였다. 가격이 저렴할 뿐 아니라 포만감이 높아 특별한 안주가 없이도 마실 수 있는 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4년 식량 부족을 이유로 막걸리 제조에 쌀 사용이 금지되면서 막걸리의 전성시대에 본격적으로 먹구름이 드리웠다. 밀가루 80%, 옥수수 20%의 혼합 양곡으로 막걸리를 빚게 되면서 품질은 급격히 떨어졌다. 그 뒤에 쌀 생산량이 늘고 소비량은 줄어 쌀이 남아돌게 되자 1971년부터 쌀막걸리를 다시 허가했지만, 옛 명성을 되찾기는 어려웠다.와인보다 도수 낮아…건강까지 책임 또 생산단가를 맞추고자 카바이트(탄화칼슘)와 물을 섞어 인위적으로 열을 내 강제로 빠르게 숙성시킨 ‘카바이트 막걸리’가 등장한 것도 막걸리의 침체를 부추겼다. 이 같은 속성 발효 막걸리를 마시면 다음날 머리가 아프고 트림을 하는 등의 숙취로 고생하게 된다. 이 때문에 막걸리는 ‘머리가 아픈 술’이라는 오명을 쓰고 점점 더 소비자의 외면을 받게 됐다. 여기에 1960~1970년대 경제개발 계획에 필요한 재정수요를 확보하고자 주세를 손질하는 과정에서 관리의 편의성을 위해 막걸리 제조 산업을 규제한 것도 악재가 됐다. 막걸리 양조장을 지역단위 조합으로 만들고, ‘공급구역 제한제도’라는 법으로 막걸리를 생산하는 양조장이 위치한 해당 시·군 내에서만 판매가 가능하도록 제한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품질경쟁이 이뤄질 수 없었고, 지역 영세업체나 일부 탁주조합들의 독과점식 공급으로 소비자 만족도의 하락을 가져왔다. 희석식 소주와 맥주가 잇달아 대중화되면서 결국 막걸리는 서민층 소비자는 희석식 소주로, 중산층은 맥주로 각각 빼앗기면서 국민주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최근 막걸리 시장이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양조기술이 발달하고 공급구역제한이 풀리면서 품질이 좋아진 데다 웰빙 트렌드와 맞물려 발효주인 막걸리의 영양학적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제조업체들은 과일 등 다양한 맛을 가미한 신제품을 개발하는 등 젊은 소비자 공략에 나서면서 ‘제2의 전성기’에 시동을 걸고 있다.젊은층 공략…제2 전성기 시동 대표적인 곳이 국순당이다. 국순당은 지난해 4월 국내 최초로 막걸리에 바나나를 접목한 ‘쌀 바나나’를 선보여 같은 해 9월 말까지 약 5개월 만에 판매량 300만병을 돌파했다. 인기에 힘입어 7월에는 ‘쌀 복숭아’를, 9월에는 크림치즈와 우유를 첨가한 ‘쌀 크림치즈’를 출시하는 등 신제품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국순당 관계자는 “막걸리가 수입맥주 등 다른 주류와 경쟁하려면 시장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젊은층을 사로잡아야 한다”며 “이를 위해 기존에 없던 독특한 맛의 제품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배상면주가도 대표 제품인 ‘느린마을 막걸리’를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에 따라 구분해 선택의 폭을 넓혔다. 지난해 겨울부터는 계절별 고유한 디자인을 적용한 한정판 막걸리를 시즌별로 선보여 인기를 끌고 있다. 올여름에 선보인 여름 한정판은 출시 20일 만에 1차 초도 물량이 매진되기도 했다. 이 같은 인기에 힘입어 느린마을 막걸리는 4년 연속 평균 15%의 매출 상승률을 보이고 있다는 게 배상면주가 측의 설명이다. 배상면주가는 2010년 서울 강남구 양재동에 막걸리 전문점인 ‘느린마을양조장&펍’(현 명칭 ‘느린마을양조장&푸드’) 1호점의 문을 연 데 이어 현재 전국에 11개 매장을 운영하면서 소비자들과 직접 만나고 있다. 또 지난 7월부터 전통주의 온라인 판매가 허용되면서 지난 10월 온라인 전용 상품을 출시하고 판매에 나서는 등 변화하는 주류 소비문화에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는 평이다. 지평주조는 주류시장의 저도주 열풍에 발맞춰 2015년 대표 상품인 ‘지평 생쌀막걸리’의 알코올 도수를 기존 6도에서 5도로 낮췄다. 이후 부드러운 목 넘김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지난해 매출 성장률 28%를 돌파한 데 이어 지난 7월에는 출시 약 2년 만에 판매량 1500만병을 넘어섰다. 지평주조 관계자는 “시장 트렌드를 빠르게 받아들여 제품을 출시한 데다 한정상품을 내놓는 등 젊은층을 겨냥한 마케팅이 주효했다”면서 “막걸리 업체들이 저마다 고정관념을 깨고 ‘젊은술’의 이미지를 소비자에게 확산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그래픽 강미란 기자 mrkang@seoul.co.kr
  • [이덕일의 역사의 창] 새로 쓰는 국사는?

    [이덕일의 역사의 창] 새로 쓰는 국사는?

    고구려 영양왕(嬰陽王)은 재위 11년(600)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에게 고구려의 고사(古史)를 요약한 ‘신집’(新集) 5권을 편찬하게 했다. 이를 전하는 ‘삼국사기’ 영양왕 11년 조는 의미심장한 내용을 덧붙이고 있다. “개국 초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할 때 어떤 사람이 역사 사실을 ‘유기’(留記) 100권에 기록했는데, 이에 이르러 다듬고 수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국 초에 100권에 달하는 역사서를 쓸 만큼의 내용이 있느냐는 점에서 의문이 따른다. 그래서 ‘유기’는 고구려의 전사(前史)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삼국유사’ 왕력(王歷) 조는 시조 동명왕에 대해서 “성은 고(高)씨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인데, 다른 본 ‘일작’(一作)에는 추모(鄒牟)라고도 한다. 단군(壇君)의 아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일연이 본 다른 역사서는 추모왕을 “단군의 아들이다”라고 쓰고 있었다는 뜻이다. 추모왕을 단군의 아들로 보면 고구려의 국시(國是) 다물(多勿)에 대한 의문도 풀린다. 동명왕은 개국 이듬해(서기 전 36) 비류국 송양이 나라를 들어서 항복하자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임금으로 봉했다. ‘다물’이란 용어에 대해 “고구려 말에 옛 땅을 수복하는 것을 다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건국한 고구려에 수복할 ‘옛 땅’이 어디였을까? 이 역시 고구려인들을 시조 추모왕을 “단군의 아들”로 여긴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고구려의 국시는 단군 조선의 옛 강역을 회복하는 ‘다물’이었고, 그래서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한나라와 충돌했다. 한나라가 고대 요동에 설치한 낙랑·현도군 등을 서남쪽으로 밀어내며 강역을 되찾았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고구려 조는 “고구려인들은 그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기질과 힘이 있어서 전투에 능하고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라고 비판한다. 고구려인들이 한나라에 맞서 자주 군사를 일으켰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는 단군 기사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 또한 오해다. 고구려는 동천왕 20년(246) 2월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략으로 수도 환도성(丸都城)이 일시 함락되는 곤욕을 치렀다. 동천왕은 함락당했던 곳을 다시 수도로 삼을 수 없다고 도읍지를 옮기는데 그곳이 평양(平壤)이다. ‘삼국사기’ 동천왕 21년(247) 2월 조는 “평양이란 곳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옛 터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선인 왕검’이란 물론 단군왕검을 뜻한다. 동천왕이 천도했던 평양성은 장수왕이 재위 15년(427)에 천도한 평양성과는 다른 곳으로 요동에 있던 곳이다. 평양은 특정 지역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고구려 수도를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고구려는 단군 조선을 계승한 국가라는 의식에서 국난을 극복한 후 단군 조선의 옛 터로 수도를 이전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국사 ‘신집’을 편찬한 때는 중원을 통일해 크게 기세를 떨치던 수(隋) 문제(文帝)의 30만 침략군을 궤멸시킨 다다음해였다. 중원의 패자 수나라를 꺾어 천하의 패자로 우뚝 선 고구려의 위상을 ‘신집’으로 나타낸 것이다. 백제와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백제는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편찬했고, 신라도 세력을 떨쳐 나가던 진흥왕 6년(545) 대아찬 거칠부(居柒夫)가 ‘국사’(國史)를 편찬했다. 모두 국력의 융성기에 자국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담은 국사를 편찬했다. 우리 사회는 그간 국사를 반성의 거울이 아니라 정권의 도구로 생각하는 바람에 국사 자체가 정쟁의 도구가 되었다. 정작 국정은 물론 검인정 국사 교과서도 그 내용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덮였다. 국정, 검인정을 막론하고 현재의 국사 교과서는 극도의 중화 사대주의 사관인 조선 후기 노론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새로 편찬할 국사 교과서는 좌우를 떠나 우리 2세들이 자국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역사관과 내용으로 채워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폐 중의 적폐인 식민사학 적폐 청산 소리는 들리지 않는 지금 상황으로 봐서 과연 그런 교과서가 나올까 회의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 [월요 정책마당] 고구려인은 사마르칸트에 왜 갔을까?/우병렬 기획재정부 대외경제국장

    [월요 정책마당] 고구려인은 사마르칸트에 왜 갔을까?/우병렬 기획재정부 대외경제국장

    우즈베키스탄에는 사마르칸트라는 유서 깊은 도시가 있다. 과거 실크로드의 중심지였고 지금은 중국이 내세우는 ‘일대일로’의 한 축이 되는 곳이다. 놀랍게도 여기에 있는 벽화에 7세기 고구려 사신들이 등장한다. 지난달 방한한 우즈베키스탄의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환영식에 등장한 전통 군악대가 새 깃털이 꽂힌 모자를 쓴 것을 보고 사마르칸트의 고구려 사신 모자를 이어받은 것이냐고 물으며 관심을 표했다. 시대를 초월해 중앙아시아와 교류 협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개방 경제인 우리나라가 살길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경제 협력을 강화하는 데 있다. 그래서 새 정부는 신북방 정책과 신남방 정책으로 활로를 찾으려 하고 있다. 신북방 정책은 유라시아 지역과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새로 출범한 북방경제협력위원회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중국의 일대일로 구상에 참여하는 한편 남북한과 러시아 간 3각 협력을 위한 기반도 마련해야 한다. 지금은 군사적 긴장으로 인해 여건이 어렵지만 남·북·러 간 물류·에너지 분야의 공동 협력 사업을 벌일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신북방 정책이 대륙과의 협력이라면 신남방 정책은 해양을 통한 협력이라 할 수 있다. 아세안(ASEAN) 국가들과의 관계를 한반도 주변 4대국 수준으로 높이고 인도와도 협력 관계를 더욱 튼튼히 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최근 상황을 통해 주변 4대국을 넘어 협력 관계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고 있다. 신북방 정책이나 신남방 정책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 비전은 사람(People), 평화(Peace), 상생협력(Prosperity)이라는 ‘3P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먼저 사람이 활발히 교류해서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되고, 모든 국민들이 핵 위협과 테러로부터 안전한 평화공동체를 이루며, 무역과 투자의 혜택을 함께 누려서 더불어 잘 사는 상생협력체가 되는 것이 글로벌 협력을 통해 꿈꾸는 미래다. 우리나라는 발전 경험을 개발도상국에 전수하는 지식공유사업(KSP)을 통해 지난 10여년간 많은 나라에서 성과를 내고 그들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하고 있다. KSP의 도움으로 베트남은 2006년 우리나라와 유사한 수출신용제도를 도입하고 수출입은행을 설립했다. 캄보디아는 선진 금융결제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2015년부터 우리나라 금융결제원,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협력하고 있다. 몽골에는 2012년 지능형 교통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조언을 해주었고 2014년에는 우리 기업이 관련 사업을 수주하기도 했다. 세계은행도 이러한 노력을 인정해 “한국이 지식 공유의 챔피언”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정치적, 군사적 긴장 탓에 경제 협력이 쉽지 않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노력은 꾸준히 해나가야 한다. 우리나라는 2005년부터 북한, 중국, 러시아, 몽골과 함께 광역두만개발계획(GTI)이라는 국제협의체를 만들어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북방경제개발을 모색해왔다. 2009년 북한이 탈퇴해 동력이 약화됐지만 지금도 여전히 교통, 에너지, 환경, 농업 등 여러 분야에서 역내 협력사업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북한 경제에 대한 연구도 지속되고 있다. 지난주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날, 공교롭게도 여러 국책연구기관에서 북한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개발연구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통일연구원, 농촌경제연구원 등에서 북한 경제를 분석한 결과를 공유하고 토론했다. 연구자들은 북한에 여러 번 가 본 선배 학자들과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신진 학자들로 나눌 수 있었는데 이는 남북 관계의 변화를 상징하는 듯했다. 극히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힘든 연구를 지속하는 연구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지진이 나더라도 수능 공부는 해야 하듯 미사일이 날아다녀도 남북 관계 개선과 통일에 대비한 연구는 게을리할 수 없다. 먼 옛날 고구려인들은 왜 그 먼 곳, 사마르칸트까지 갔을까? 이미 선조들은 무역과 교류가 상생 번영의 길임을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전국의 문화 버무린 서울… 이젠 고유의 맛 물려줄 때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전국의 문화 버무린 서울… 이젠 고유의 맛 물려줄 때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7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5회차 ‘서울의 멋과 맛’ 편이 지난 25일 서울 인사동과 을지로 일대에서 진행됐다. 올해 마지막 탐사였다. 지난 5월부터 장장 25주 동안 매주 토요일 오전에 계속된 미래투어를 통해 시민들의 뜨거운 서울 사랑을 확인했다. 6개월간 회당 평균 35명씩 모두 875명이 서울미래유산의 가치에 공감하고, 그 향기를 공유했다. 이날 일행이 인사동 목인박물관 옥상에 올라가 단체사진을 찍을 즈음 함박눈이 내려 행사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축하해 주는 듯했다. 보신각에서 시작된 탐사는 청계천 마전교 위에서 3시간 만에 완료됐다. 해설과 진행을 담당한 서울미래유산팀 이소영·전혜경·박정아·황미선·김은선·최서향 지도사와 일반 참가자들이 어울려 방산시장 안 은주정에서 삼겹살과 김치찌개로 조촐한 쫑파티를 가졌다. 해설은 노주석 서울미래유산 지도사가 맡았다.현대는 지구도시화(Gluurbanism)의 시대이다. 국가보다 도시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도시의 경쟁력이 곧 국가의 경쟁력인 시대가 되었다. 도시는 미래의 질서이며, 도시문화는 미래사회 최고의 가치로 떠올랐다. 서울은 명실공히 한민족이 창조한 최고의 도시이다. 서울은 미국의 워싱턴과 뉴욕, 일본의 도쿄와 교토, 중국의 베이징과 상하이를 합쳐놓은 국내 위상을 갖고 있다. 산과 강, 바다를 동시에 끼고 있는 천혜의 도시는 서울밖에 없다. 서울이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이 곧 서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을 떠나 대한민국을 논하기 어렵다. 도시문화란 도시의 정체성이다. 도시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가치이며 정치적 미래를 결정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서울문화란 다른 도시가 흉내 낼 수 없는 서울만의 독톡한 색깔과 향기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서울의 고유성, 서울의 특성을 나타내는 서울문화의 원형은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됐을까. 서울은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지만 불행하게도 스스로 빛나지는 않는다. 서울의 중앙집중력은 강력하나 지역적 특성은 허약한 탓이다. 서울문화는 서울이 낳은 자체적 고유문화라기보다는 전국적 문화콘텐츠의 종합 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국문화의 비빔밥 격이다. 서울의 고민은 지나친 중앙 집중성으로 말미암아 지역 고유성을 상실한 데 있다. 서울이 고유한 지역적 특성을 갖추지 못한 까닭은 서울의 생성과 진화가 외부의 힘에 의해 비롯됐기 때문이다. 서울의 기원을 이루는 2000년 전 한성백제의 수도 위례는 고구려의 유민이 일궜고, 조선의 수도 한양의 상층부는 고려 개성에서 옮겨 온 개성주민이었다. 일제강점기 경성의 주도권은 현해탄을 건너온 일본인에게 넘어갔다. 서울의 터줏대감들은 계속해서 외곽으로 밀려났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이북 피란민들과 전국에서 상경한 지역민들이 서울의 주인 행세를 했다.왕의 도시라는 점도 한계이다. 서울은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덕수궁 등 5대 궁과 종묘·사직으로 이뤄진 궁궐과 제례의 도시이다. 1개의 도성 안에 5개의 궁궐을 가진 세계 유일의 역사도시이다. 왕과 관직을 독점하는 극소수 경화사족(京華士族)이 움직이는 행정도시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서울인구 20만명 중 1만명이 과거와 관련된 유동인구일 정도로 교육이 지배하는 도시였다. 또 전국의 상권과 유통망을 장악한 시전상인들, 잡역을 도맡은 아전과 노비들이 뒤를 받쳤다. 서울은 자체 생산력은 없는 철저한 소비도시였다. 서울은 왕과 종친, 경화사족, 양반이 10% 이내의 지배층을 구성했고,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거주하는 군인과 아전·서리 같은 중인계층, 시전상인 등 장사꾼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나머지는 하인과 노비였다. 서울문화 자체가 궁중문화와 중인문화로 양분됐다. 서울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아내와 엄마로 살아가는 낡은 세대의 여인네 같다. 서울에서 태어난 서울사람이 인구의 절반인 500만명에 육박하지만 여전히 서울은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만인의 타향’이다. 수도, 중앙, 특별시에 현혹돼 서울 본연의 가치와 서울 고유의 전통을 창조하는 데 실패했다. 이 때문에 서울시민 대부분이 서울을 고향으로 여기지 않는다. 서울이라는 도시 고유의 문화정체성을 정립하는 일이 시급하다. 서울 본연의 색깔을 되찾고, 서울 고유의 향기를 만들어서 미래세대에게 물려줘야 한다. 더이상 이주민들의 도시가 아니라 뉴요커, 파리지앵처럼 자부심을 가진 원주민의 도시로 거듭나야 한다. 궁궐의 도시, 성곽의 도시 같은 도시 이미지를 단박에 나타내는 정체성과 자신을 서울토박이, 서울내기라고 당당하게 나타내는 도시멤버십의 정립이 필요하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를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내년에는 더욱 알찬 프로그램과 코스로 찾아뵙겠습니다. 기사와 자료는 서울미래유산(futureheritage.seoul.go)과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단종 복위 꿈꿨던 금성대군… 순흥서 스러져 ‘산신령’으로 남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단종 복위 꿈꿨던 금성대군… 순흥서 스러져 ‘산신령’으로 남다

    순흥(順興)은 오늘날 경상북도 영주시의 일개 면(面)일 뿐이다. 하지만 순흥의 역사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삼국시대 순흥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대였다. 고구려는 장수왕 시절 죽령을 넘어 영주 일대까지 장악했다. 죽령을 사이에 두고 영주와 이웃한 충청북도 단양에 고구려 온달장군의 전설이 어린 온달산성이 남아 있는 것도 이런 역사와 관계가 있다.순흥에 고구려의 장례 풍습을 보여주는 벽화고분이 남아 있는 것도 그렇다. 풍경화를 방불케 하는 연꽃 그림은 일본 미술에도 영향을 미친 고구려 특유의 표현이라고 한다. 가까운 부석사의 창건설화도 그렇다. ‘삼국유사’에는 의상대사의 부석사 창건을 방해하는 ‘500명이 도둑’이 보이는데, 학계는 이들을 신라에 협력하지 않은 고구려계 주민으로 본다. 고구려 통치 시대 순흥은 급벌산군(及伐山郡)이었다. 이후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이 급산군(及山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는 흥주(興州), 순안현(順安縣), 순흥부(順興府)로 잇따라 개칭했다. 순흥은 조선 초기 전국 75개 도호부의 하나였다. 하지만 1457년(세조 3) 도호부는 폐지되고 땅덩어리는 풍기·봉화·영주 세 고을로 분산됐다.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사건 때문이었다.오늘날 영주의 양대(兩大) 문화유산이라면 부석사와 소수서원을 꼽아야 할 것이다. 이 고장의 유교문화와 불교문화를 상징한다. 이들을 돌아보려면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을 이용하게 마련이다. 풍기는 인삼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이맘때 찾으면 사과가 지천이다. 풍기에서 소수서원이 있는 순흥을 거쳐 부석사에 이르는 길은 문화유산 순례길이다. 순흥 벽화고분도 이 길 주변에 있다. ●역적의 땅 된 순흥, 이름마저 200년간 사라져 소수서원에서 나와 부석사로 방향을 잡으면 곧바로 왼쪽에 금성대군신단(錦城大君神壇)이 보인다. 그냥 지나치기 일쑤지만, 잠시 둘러보기를 권한다. ‘역적의 땅’이 되어 순흥이라는 이름마저 200년 넘게 사라지게 했던 역사가 담겨 있다. 정축지변이란 금성대군이 주도하고 순흥부사 이보흠이 뒷받침한 단종 복위 운동과 뒤따른 대학살 사건을 이른다. 세종은 6명의 부인과 18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정비인 소현왕후 심씨와 사이에는 8남 2녀가 있었다. 첫째가 세종의 보위를 이은 문종이고 둘째가 문종의 맏아들인 어린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곧 세조다.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이 뒤를 이었다. 그러니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섯 번째 적자(嫡子)다.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금성대군에 앞서 목숨을 잃은 형제는 안평대군이었다. 시문(詩文)과 서화(書畵)에 능했던 안평대군은 문종 시절 조정의 실력자 역할을 하면서 김종서를 비롯한 주요 문신과 가까웠으니 수양대군과는 라이벌이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킨 1453년 반역을 도모했다는 구실로 유배지 교동도에서 사사(賜死)한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금성대군은 단종의 측근을 제거하려는 수양대군의 뜻에 따라 1455년 오늘날의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을 아우르는 삭녕에 유배된 데 이어 경기도 광주(廣州)로 이배된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넘겨받은 해다. 이듬해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이 단종 복위를 노리다 실패한다.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다. 이미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된 단종은 1457년 영월로 유배되는데, 이때 금성대군도 순흥에 위리안치된다. 금성대군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는 데는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가 도움이 된다. ‘공이 순흥부에 이르러 이보흠과 마주하여 눈물을 흘리고 산호 갓끈을 주었다. 드디어 주변 지역 인사와 몰래 결탁하여 상왕(上王)을 복위시킬 계획을 하고 이보흠을 불러 좌우를 물리고서 격문(檄文)을 기초하게 하였는데, 순흥의 관노(官奴)가 벽에 숨어 들은 뒤 공의 시녀와 교통하여 초안을 훔쳐 달아났다.… 공과 이보흠이 잡혀 죽었고, 지역과 주변 인사 중 사형에 연좌된 자도 많았다.’ 금성대군은 순흥에서 의거를 일으키면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도 선비들이 대거 뜻을 같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 영월 청령포에서 노산대군을 모셔와 다시 임금으로 세우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강원도 영월과 경상도 순흥은 심리적 거리가 멀지 않다. 비록 좁은 산길이지만, 태백산이 끝나고 소백산이 시작되는 곳에 고치령이 있다. 이 고개 정상에는 산령각(山靈閣)이 있다. 단종과 금성대군을 태백산 산신과 소백산 산신으로 각각 모셨다. 역사를 민중의 시각에서 해석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금성대군은 안동부 관아에서 사사됐다. 시신이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무덤도 없다. 순흥에는 금성대군이 피를 흘리며 죽은 자리에 신단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지만, 전설일 뿐이다. 순흥이 복읍된 것은 숙종 시절이다. 이후 금성대군신단은 1719년(숙종 45) 설치했고 1742년(영조 18) 정비했다고 한다. 신단은 품(品) 자 형태로 3개의 단을 설치했다. 가운데가 금성대군, 왼쪽이 이보흠, 오른쪽이 순절의사를 기린다.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라고 새긴 비석도 세웠다.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물론 화를 입은 사람들 모두를 추모하는 제단이라 할 수 있다. 금성대군의 아들 이맹한은 충청도 청주에 유배됐다. 이후 중종 시절인 1519년 함종군에 복작되며 명예회복이 이루어진다. 충북 청주 미원면 대신리에는 금성대군 제단(祭壇)이 있다. 그를 정점으로 하는 전주 이씨 금성대군파 묘역이다. 제단 오른쪽에는 부인 전주 최씨의 무덤이 있다. 합장묘라는 상징성을 부여한 것이다.●충북 진천·영월에도 금성대군 사당·위패 보존 청주 제단에서 자동차로 20~30뿐쯤 걸리는 충북 진천 초평면 용기리에는 금성대군의 사당인 청당사(靑塘祠)가 있다. 사당을 지은 시절에는 진천이 아닌 청안 땅이었다. 영조 16년(1740) 세웠지만, 흥선대원군이 훼철한 것을 1974년 중건했다고 한다. 충북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주변은 정리되지 않았고, 쓸쓸한 느낌마저 든다. 금성대군은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의 배식단(配食壇)에도 배향되어 있다. 정단(正壇) 32인과 별단(別壇) 236인 등 268인의 위패를 봉안한 제단이다. 금성대군의 위패는 육종영(六宗英)의 일원으로 정단에 봉안되어 있다. 육종영은 안평대군을 비롯한 여섯 종친을 뜻한다. 고치령 산령각에서 보듯 금성대군은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더욱 각광받았다. 서울과 경기 지역에도 금성대군을 모신 여러 곳의 굿당이 있었다. 이 가운데 서울 은평뉴타운 한복판의 금성당은 한때 사라질 위기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금성당 건물은 샤머니즘박물관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해마다 5월이면 금성당제도 열린다. 지하의 금성대군도 자신이 ‘아파트 타운 축제’의 주인공이 될 줄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서동철 칼럼] 정족산성의 기억

    [서동철 칼럼] 정족산성의 기억

    한자에 첩(捷) 자가 있다. ‘이길 첩’이라고 새긴다. 그러니 ‘대첩’(大捷)이란 크게 이긴 싸움을 가리킨다. 우리 역사에서 ‘대첩’이라고 이름 붙여진 싸움은 많지 않다. 고구려가 수나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과 고려가 거란군을 무찌른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정도가 생각난다. 고려시대에는 황산대첩도 있다. 조선왕조를 창건하기 이전 이성계 장군이 전라도 지리산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싸움이다. 살수대첩과 귀주대첩은 존망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승리이다. 황산대첩도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중요한 싸움이었다. 왜구는 이미 소규모 해적 떼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오늘날의 남원 땅인 황산은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이다. 지리산까지 몰려들었다는 것은 삼남 전체가 왜구에게 유린되고 있었음을 뜻한다. 임진왜란의 3대첩 역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 김시민 목사의 진주대첩,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이 그것이다. 한편으로 의령 의병 곽재우의 솥바위 전투, 옥천 의병 조헌의 청주 수복 전투, 함경도 의병 정문부의 길주 전투를 의병 3대첩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장덕산대첩(長德山大捷)이라고도 하는 길주 싸움의 전말은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어난 수많은 의병의 처절한 싸움 가운데 단순히 이기고 진 것을 가려 3대첩이니 하고 부르는 것 자체가 한심하다는 반성을 해야 할 것 같다.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신했던 선조는 ‘승전’이 ‘조선에 파병한 명나라의 은혜’라 하지 않았나. 임진왜란을 ‘이긴 전쟁’으로 해석하는 움직임은 우리 역사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겠다는 뜻이라면 수긍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그 긍정의 주체가 사실상 왜란을 불러온 국왕이고 조정 대신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오래전 강화도 전등사를 찾았을 때의 당혹감을 잊지 못한다. 이 절을 둘러싸고 있는 정족산성의 동문으로 들어서면 나타나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摠梁公憲洙勝戰碑) 때문이었다. 흔히 ‘양헌수 승전비’라 부른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이곳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한 양헌수 장군을 기리는 비석이다. 프랑스군은 병인양요 당시 갑곶돈대를 공격하며 강화도에 상륙해 강화성을 점령한 데 이어 염하(鹽河) 건너 김포의 문수산성과 통진부에 진주하기도 했다. 강화부에서는 약탈과 방화를 일삼아 외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던 왕실 의궤를 훔친 뒤 건물에 불을 질렀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프랑스군은 갑곶돈대와 문수산성에서는 조선군이 저항에 부딪혀 사상자를 내기도 했지만, 강화성과 통진부는 무혈입성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물론 양헌수의 승전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순무 천총이란 당시 그의 직함이었다. 조선은 전쟁이나 민란 같은 위기가 발생하면 순무영(巡撫營)이라는 임시 군사조직을 가동했는데, 천총은 중상급 지휘관에 해당한다. 500명의 육지 포수를 이끌고 정족산성에 잠입해 프랑스군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술과 부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이런 군인이 있었나 싶다. 정족산성 전투의 승리를 전쟁의 승리로 인식해 쇄국을 강화하는 데 이용한 것은 대원군이었다. 1871년 미국이 강화도를 침공한 신미양요 때도 다르지 않았다. 대원군은 미군을 기습공격으로 몰아냈다며 승전으로 간주했고,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통상수교금지정책을 강화했다. ‘두 전쟁’에서 ‘이겼다’는 인식은 결국 조선을 멸망으로 이끌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야구계의 격언은 여기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당대가 아니라 역사가 이겼다고 평가해야 진짜 이긴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는 오늘날의 우리 정치도 한번 새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지금이 아니라 훗날의 평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대원군의 쇄국정책도 당시에는 민심의 일방적 지지를 등에 업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하자는 대로 한다고 반드시 좋은 결과만 뒤따르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dcsuh@seoul.co.kr
  • 물들어 볼까 더 늦기 전에

    물들어 볼까 더 늦기 전에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한국관광공사에서 ‘만추여행’을 테마로 11월에 가볼 만한 곳을 선정했다. 낙엽 밟으며 걸을 수 있는 명소들이다.서울 아차산, 울긋불긋 단풍… 파노라마 전망 아차산은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도심 속 단풍 여행지다. 야트막하고 산세가 험하지 않아 누구나 오르기 쉽다. 어떤 코스든 느릿하게 걸어도 정상까지 40~50분이면 충분하다. 등산로에 야자 매트가 깔려 걷기도 수월하다. 능선을 따라 걷는 길은 감탄의 연속이다. 고구려 건축 양식을 본뜬 고구려정, 해맞이광장, 아차산5보루 등 전망 좋은 곳이 늘어서 굳이 정상까지 가지 않아도 아차산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전망 포인트에 서면 유유히 흐르는 한강과 고층 건물이 빼곡한 시가지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차산생태공원과 단풍 명소인 워커힐로를 함께 둘러봐도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여기에 구리시 고구려대장간마을과 유네스코 세계유산 동구릉을 포함하면 하루 코스가 완성된다. 광진구 문화체육과 (02)450-1320.한탄강벼룻길, 낙엽 따라 걷는 자연사 시간 여행 한탄강 주변으로 용암이 만든 검은 현무암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경기 포천시 등에서 한탄강 일대의 독특한 자연과 주민들의 문화를 엮는 지질트레일을 조성 중이다. 총 4개 코스 가운데 현재 개통된 곳은 1코스 ‘한탄강벼룻길’이다. 부소천협곡에서 멍우리협곡을 지나 비둘기낭폭포까지 이어진다. 거리는 6.2㎞. 길이 순해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한탄강벼룻길은 특히 늦가을에 낙엽을 밟으며 걷는 맛이 각별하다. 낙엽과 현무암 절벽, 그리고 에메랄드빛 폭포가 어우러진 비둘기낭의 자태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황금빛 협곡이 굽이치는 강물을 따라 4㎞ 넘게 뻗은 멍우리협곡과 구름다리로 계곡이 이어진 부소천 협곡도 인상적이다. 가을을 더 느끼고 싶다면 명성산에 오르면 된다. 은빛으로 물결 치는 억새의 바다와 만날 수 있다. 포천시 문화체육과 (031)538-3027.노추산 모정탑길, 어머니 마음 닮은 붉은 돌탑길 노추산은 여느 단풍명소처럼 북적이지 않아 사색을 즐기며 가을을 만끽하기에 맞춤한 곳이다. 어머니의 마음을 떠올리게 하는 모정탑길도 있다. 3000여 기에 달하는 돌탑들이 산정 언저리까지 늘어선 길이다. 돌탑은 고 차순옥 할머니가 2011년 모진 삶을 마감할 때까지 무려 26년 동안 쌓아올린 것이다. 규모도 방대하지만, 돌탑 하나하나에 깃든 모정이 더욱 심금을 울린다. 낙엽 밟으며 모정탑길을 걷다 보면 가을이 가슴 속으로 들어온다. 노추산 정상에 오르면 파도처럼 물결치는 산세가 들어온다. 자연과 어머니의 넉넉함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구름이 손끝에 닿을 것 같은 안반데기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고, 커피커퍼커피박물관에서 향긋한 커피 한잔 기울이는 것도 좋겠다. 솔향 가득한 강릉솔향수목원도 빼놓을 수 없다. 강릉시종합관광안내소 (033)640-4414.보은 세조길, 속세 넘어 왕이 거닐던 길 뚜벅뚜벅 속리산은 고운 최치원의 ‘산은 사람을 떠나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떠나는구나’(山非離俗 俗離山)라는 시가 전해 오는 명산이다. 속리산의 산세는 한마디로 기골이 장대하다. 최고봉인 천왕봉, 문장대 등 장대한 바위가 솟구쳤다. 그 험준한 산세가 유순한 길을 품었다. 그게 ‘세조길’이다. 조선 7대 임금 세조가 요양 차 복천암에 온 역사적 사실에 착안해 붙인 이름이다. 세조길은 법주사 매표소부터 세심정 갈림길까지 이어진다. 거리는 2.5㎞ 정도다. 왕복 5㎞에 달하는 산길이지만 급한 오르막이 없어 산책하듯 설렁설렁 다녀올 수 있다. 거리가 짧다고 생각되면 오리숲길과 세조길을 함께 걷고, 이어 복천암과 비로산장을 둘러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인근에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있다. 동학농민군이 최후를 맞은 북실 전투를 기리는 곳이다. 속리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 (043)542-5267.순창 강천산, 고추장보다 더 빨간 단풍 전북 순창의 가을은 고추장 빛깔로 물든다. 단풍 명소인 강천산은 왕복 5㎞의 맨발산책로만 걸어도 가을 정취를 만끽하기에 충분하다. 길이 평탄해 아이들이나 어르신, 유모차나 휠체어 이용자 등 누구나 즐길 수 있다. 맨발산책로에서 만나는 병풍폭포, 구장군폭포는 산수화처럼 아름답다. 강천사, 삼인대, 수령 300년 넘은 모과나무도 꼼꼼하게 챙겨 보자. 강천산의 랜드마크인 현수교(구름다리)도 잊지 말고 올라야 한다. 강천산 일대는 물론 멀리 담양의 금성산성까지 보인다. 강천산 초입의 메타세쿼이아길도 가을빛이 멋지다. 순창장류박물관, 순창옹기체험관, 순창군승마장 등 순창전통고추장민속마을 근처에 여행 명소가 여럿이다. 읍내에는 금산여관, 방랑싸롱, 순창농부의부엌, 일우당 같은 곳이 젊은 감성으로 인기다. 순창군 문화관광과 (063)650-1648.밀양 재악산 사자평습지, 억새 산행 길에 선물 같은 풍경 경남 밀양의 사자평습지는 영남알프스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재약산 남동쪽 사면 해발 750m 부근에 형성된 국내 최대 산지 습지다. 한때 육지화의 위기를 맞았으나 지속적인 복원 사업을 통해 습지 생태계가 되살아났다. 표충사에서 사자평습지로 가는 등산로가 여럿이고, 케이블카를 이용해 천황산과 재약산을 거쳐서 가는 방법도 있다. 케이블카를 타면 해발 1020m 지점까지 10분 만에 올라 영남알프스 경관을 360도로 조망하며 비교적 수월하게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천황산, 천황재, 재약산, 사자평습지로 이어지는 능선은 억새를 감상하며 가을 정취를 만끽하는 코스로 꼽힌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를 추모하는 유교식 사당이 있는 점이 독특하다. 밀양강을 굽어보는 영남루, 소나무 9500여 그루가 울창한 기회송림도 빼놓을 수 없다. 밀양시 문화관광과 (055)359-5646.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함혜리 선임기자의 예술산책>현대미술을 품은 천년 고찰 전등사

    <함혜리 선임기자의 예술산책>현대미술을 품은 천년 고찰 전등사

    강화도 전등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인 서기 381년 (고구려 소수림왕 11년) 아도화상이 진종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1282년 고려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송나라에서 펴낸 대장경을 펴내 봉안하도록 하면서 옥등을 시주한 것을 기념해 ‘불법의 등불을 전하는 사찰’이라는 뜻을 지닌 전등사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른다. 전등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장소로 꼽힌다. 사찰을 에워싸고 있는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인 부여, 부우, 부소가 쌓았다고 전해지는 성이다. 산의 지형을 이용해 능선을 따라 축조한 성의 길이는 2300m나 된다. 고려시대에 전등사는 대몽항쟁의 근본 도량으로 팔만대장경을 판각했으며 조선시대엔 가람 뒤편의 정족산 사고에서 250년간 조선왕조실록과 왕실문서를 보관했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엔 프랑스군을 물리친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국가사적 삼랑성과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각종 탱화 등 소중한 문화유적과 문화재가 가득한 전등사는 국내 유일의 현대미술 사찰로 새롭게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1600년을 이어온 유서깊은 사찰에서 현대미술을 만난다는 것은 파격 그 자체다. 전등사에서는 2008년부터 매년 10월 삼랑성역사문화축제가 열리는 시기에 맞춰 정족산 사고에서 매년 현대 미술특별전시를 열고 있다. ‘현대 중견작가전’이라는 타이틀로 소개된 현대미술 작가들이 지금까지 수십 명에 이른다. 그동안 수집한 현대미술 작품은 300여점에 이른다. 2012년 “21세기 시대정신이 담긴 불사(佛事)”를 자랑하며 241㎡ 규모로 신축한 무설전(無說殿)에서는 ‘국내 유일의 현대미술 사찰’ 전등사의 파격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말없이 설파한다는 뜻을 지닌 불국사 ‘무설전’에서 착안해 이름을 지은 이곳은 조성 당시부터 국내 대가들의 작품으로 법당을 꾸며 화제가 됐다.무설전의 석가모니불과 보현·문수보살 등 불상은 광화문 세종대왕상으로 유명한 조각가 김영원 홍익대 교수가 제작했다. 불상은 청동으로 불상을 만든 후 금박을 입히는 대신 자동차 도색에 쓰이는 흰색 우레탄 도료를 입혀 현대적인 아름다움이 풍긴다. 본존불의 얼굴은 석굴암 본존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지만 보살상의 얼굴은 요즘 세대에게 친숙한 인상을 찾아 이미지를 부여했다. 본존불 뒤편의 후불화는 오원배 작가가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린 것이다. 오 작가는 석굴암처럼 둥근 공간에 부처님을 중심으로 가섭과 아난존자 등 십대제자를 배치한 후불화를 프랑스 유학시절 배운 정통 프레스코 기법으로 완성했다. 서양의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진 부드러운 색감과 불제자들의 친근한 표정은 보는 이를 다가서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지닌다. 법당 내부의 전체 공간구성은 이정교 홍익대 공간디자인과 교수가 맡았다. 천장에 단청을 칠하지 않고 일반적인 법당에서 흔히 보는 연등 대신에 분홍색의 꼬마 연등 999개를 설치작품처럼 배치해 불교의 정적인 분위기와 현대적인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한다. 서운스님을 기리며 ‘서운 갤러리’라고 이름 붙인 무설전 내의 상설전시공간에서는 종교와 무관하게 전등사가 소장한 현대미술가들의 작품을 번갈아 소개하고 있다. 민정기, 서용선, 곽훈, 노상균, 김태호, 문범, 한만영, 강애란, 조덕현, 문경원 등 쟁쟁한 현대미술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가람의 뒤편 산길을 따라 5분 남짓 올라가다 보면 커다란 은행나무가 한 켠에 서있는 정족산사고가 있다. 조선 태조에서 철종까지 25대 472년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곳이다. 1181책에 이르는 정족산사고본은 실록 중에서 유일하게 전책으로 남아 현대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조선시대 역사기록을 보관했던 역사적인 장소에서 열리는 ‘중견 작가전’이 올해로 10회째를 맞아 성황리에 열렸다. 꺾어지는 해인 만큼 많은 공을 들인 올해 전시의 주제는 ‘성찰(省察)’이다.첫회 째부터 전시기획을 맡아온 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는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 역사발전의 견인역할을 한다”면서 “역사적 장소인 전등사 경내에 조선시대 역사기록을 보관한 사고에서 현대미술 특별전시를 연다는 것 자체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윤교수는 “첫 회를 시작할 때만해도 이렇게 오래 지속될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열 번째를 맞게 됐다”면서 “전등사와 인연이 깊은 중견작가들을 초대해 전등사 대웅보전과 성찰이라는 두가지 주제로 신작을 발표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에는 10년간 빠짐없이 참여한 오원배 동국대교수를 비롯해 강경구, 공성훈, 권여현, 김기라, 김용철, 김진관, 이종구, 이주원, 정복수 등 10명의 중견 작가들이 동참했다. 전등사의 대웅전은 아담하지만 내용은 그 어느 사찰의 대웅전 보다 충실하다. 조선시대 중기 건축으로 보물 제 178호로 지정된 대웅전의 기둥은 배흘림 기법을 보이고 있고 목조석가여래삼존불(보물 제 1785호)의 수미단과 닻집의 조형성이 탁월하다. 도편수와 마을 주모의 사랑과 배신이야기를 담은 처마밑의 특이한 조각상도 유명하다. 작가들은 대웅전의 구석구석을 답사하며 예술적 영감을 얻고 작품을 제작했다. 오 교수는 대웅전 불상의 뒷모습과 인간의 시선, 강화도의 옛 지도를 바탕으로 한 자연의 모습이 이어진 3편의 연작을 선보였다. ‘관자재’와 ‘운석’을 출품한 강경구 작가는 “수백년 간 건물의 일부로 안과 밖의 세상을 연결해 준 대웅전의 문과 우주 속의 운석처럼 막막한 세계를 떠도는 인간의 삶을 생각해 봤다”고 설명했다. 공성훈 작가는 불상 앞의 촛불 그림과 함께 무심하게 흘러가는 하늘의 구름과 시간을 품은 아침바다, 권여현 작가는 일상 속의 성찰을 표현한 ‘병목생화’와 ‘인타라망’을 출품했다. 김기라 작가는 두 개의 원형 LED로 만든 ‘광배-두개의 둥근 원’과 설치작품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을 선보였다.강화에서 태어나 전등사와 인연이 깊은 김용철 작가는 대웅보전 내부에 있는 이미지를 이용해 큰 사랑을 표현한 작품을 완성했다. 김진관 작가는 대웅보전 지붕의 네 귀퉁이를 받치고 있는 유명한 나부상을 한지에 채색으로 그렸고 이주원 작가는 여의주를 한지에 그리고 LED조명을 비추는 작품을 선보였다. 푸른 밤하늘에 떠있는 달과 전등사 대웅보전을 그린 이종구 작가의 ‘대웅보전-전등사’는 보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진다. 정복수 작가는 자신의 독특한 기법으로 불상을 재해석한 ‘불성의 초상’을 선보였다. 전통 고찰에 현대미술을 끌어들인 주인공은 전등사 회주 장윤 스님이다. 장윤 스님은 “전통적으로 불교 사찰을 조성할 때 당대 최고 장인들을 모셔다 조각과 회화 작업을 하게 했다”면서 “문화재 사찰이라고 해서 고려시대 조선시대 양식의 불상과 불화를 찍어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작품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당대 최고 작가들의 작품으로 무설전을 조성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불교가 전통만을 고집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신라와 고려의 승려들이 멀리 유학을 가서 앞선 문화를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전통을 지니고 있다”면서 “전등사도 전통사찰이지만 현대미술을 비롯해 음악회, 연극, 마당놀이 등 현대인이 좋아하는 문화예술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려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강화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역사의 망각’에서 깨어난 백제의 첫 왕도를 거닐다

    [2017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역사의 망각’에서 깨어난 백제의 첫 왕도를 거닐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7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9차 ‘서울의 가을 은행 노랑-호수와 공원으로 가을여행’ 편이 지난 14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일대에서 진행됐다. 석촌호수와 몽촌토성의 단풍은 도착 전이었지만 2000년 전 한성백제 시대를 사색하기에 딱 좋았다. 추석 연휴로 2주를 쉰 때문인지 정규 예약인원 30명에, 대기자 10명까지 40명이 만원사례를 이뤘다. 참가자들은 잠실역 11번 출구에서 집결, 석촌호수와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을 거쳐 몽촌호 음악분수와 몽촌토성 길을 따라 걸었다. 한성백제박물관과 야외조형전시장을 지나 장미정원에서 2시간여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지난 7월 가리봉동 편에 이어 두 번째 기가폰을 잡은 전혜경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조선시대 이야기꾼 전기수(傳奇叟)처럼 노련한 솜씨로 2000년의 세월을 요리했다.서울에 사는 상당수가 한성백제를 모른다. 부여와 공주에 가야 백제 문화가 있다고 여긴다.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의 관계를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위례성이 뭔지, 위례가 어딘지는 모른다. 몽촌토성은 도대체 어디에 붙어 있는지 가물가물하다. 석촌호수에 간혹 가지만 그곳에 호수가 있는 이유는 생각해 본 적 없다. 위의 나열은 대다수 사람이 앓고 있는 증상이다. 왜 그럴까. 혹시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글로벌 도시 서울에 살고 있을 뿐 서울이라는 오래된 도시가 가진 본연의 역사와 고유의 문화를 등한시하고 도외시한 때문은 아닐까. 송파는 한성백제의 옛 땅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원전 18년 백제의 시조 온조가 위례성에 세운 건국 수도다. 위례성이 곧 풍납토성이고, 백제의 첫 왕도이자 서울 최초의 수도다. 서울이 1394년 강북 사대문에서 조선 건국과 함께 기원한 것이 아니라 2000여년 전 백제를 기점으로 한강 남쪽에 터를 잡은 점이 흥미롭다. 백제는 공주로 옮겨가 부여에서 망하기 전까지 무려 493년을 서울에서 보냈다.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서울 강남시대는 일종의 백제 부흥이다. 1997년 풍납동 한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처음 발견된 유물과 그 후 14년간 진행된 발굴을 통해 한성백제는 역사의 망각에서 벗어났다. 토성 안 ‘세 줄의 둥근 해자’ 삼중환호(三重環濠)는 토성 축조 이전에 이곳에 강성한 세력이 거주했음을 알려 주는 증거다. 해자 주변은 높이 13m, 너비 43m, 둘레 3500m의 거대한 토성이 둘러싸고 있었다. 연인원 138만명이 동원돼 흙을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아 올린 풍납토성은 당대 동아시아 최대의 방어 및 경계시설로 평가된다.몽촌토성은 또 어떤가. 한강변 풍납토성과 내륙 석촌동 고분 사이에 위치한 언덕 위 몽촌토성은 한성백제사에 비친 한 줄기 빛이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둔 1983년 잠실벌에 경기장과 선수촌, 올림픽공원을 만들기로 하면서 문을 연 것이다. 당시 곰말(꿈마을), 일리내, 잣나무골, 큰말이라는 4개의 자연부락이 토성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발굴을 통해 3~5세기 목책과 해자, 건물터가 확인됐고 다량의 유물이 출토됐다. 다행히 몽촌토성은 올림픽공원 아래 숨은 덕분에 개발의 광풍을 비껴갔다. 그러나 백제왕국의 유적지가 아니라 올림픽공원이라는 문화체육시설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72년까지 허허벌판이었던 풍납토성에는 공장이 들어섰다가 지금은 인구 4만명이 사는 아파트와 빌라의 숲으로 변했다. 일제강점기 290여기가 남아 있던 석촌동 적석총 고분군은 다 파괴되고 달랑 6기만 남았다. 돌무덤은 마을 담벼락으로 쓰이다가 석재로 반출됐고, 한때 폭 40m의 도로가 지나가면서 쑥대밭이 됐다. 우리의 부끄러운 문화재 수난사 현장이다. ‘근초고왕이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는 371년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서울의 옛 지명 한산이 곧 한성이다. 북한산은 한산의 북쪽이요, 남한산은 한산의 남쪽을 일컫는 지역명이다. 북한산이나 남한산은 산 이름이 아니다. 우리가 북한산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산의 참이름은 삼각산이다. 4세기 들어 백제의 위상에 걸맞게 ‘울타리’를 의미하는 위례라는 도시명을 중국식으로 바꾼 것이 한성이다. ‘큰 강’ 한강과 마찬가지로 ‘큰 성’이라는 뜻이다. 이 지명이 조선시대 서울의 정식 명칭 한성부로 이어졌다. 한성백제 시대 한성의 도시구조는 왕성이자 북쪽 성 풍납토성과 남쪽 성 몽촌토성 그리고 왕릉인 석촌동 고분 등 3개 구조물로 뼈대를 이뤘다는 것이 정설이다. 학자에 따라 풍납토성을 대성, 몽촌토성을 왕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두 성의 거리는 불과 700m이고, 성내천이라는 하천이 예나 지금이나 흐르며, 위풍당당한 돌마리 왕릉이 자리했다. 몽촌토성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백제를 점령한 이후 아차산 보루와 함께 고구려군의 주둔지였다. 그러나 551년 한강 일대가 신라 수중에 들어가고,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역사의 뒤꼍으로 사라졌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땅이 뒤집히면서 기적적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민 한성백제의 고토는 1970~1980년 강남과 한강 개발의 물결을 타고 1400년 만에 역사의 전면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서울의 가을 단풍 빨강 - 강남 세계가 즐기다 ■일시 : 21일 오전 10시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2번 출구 앞 ■신청(무료) : 서울시 서울미래유산(futureheritage.seoul.go)
  • [열린세상] 우리 민족의 외교 유전자/이현주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총장

    [열린세상] 우리 민족의 외교 유전자/이현주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총장

    지난 추석 연휴 때 영화 ‘남한산성’을 보았다. 늘 그랬듯이 적전 분열과 삼전도의 굴욕 장면을 보며 우울해지지 않으려고 일부러 교훈을 찾아야 했다. 그 굴욕은 당대의 백성들에게는 어떤 의미였고, 우리 세대에겐 어떤 교훈이 될까. 우리는 환난과 치욕의 역사를 일상생활처럼 무심하게 되새겨 왔다. 필자가 학생 시절 배웠던 고조선의 역사는 한나라에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실상은 고조선이 1년 이상을 분전했고 한나라는 육군과 해군 장수를 모두 처벌할 정도로 고전했다. 단지 지배층 내부의 분열로 패망했을 뿐이다. 우리가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역사를 우리 민족사의 원류로 소중히 하는 것은 그 대륙적 야성에 대한 향수 때문일 것이다. 우리 민족은 그 야성을 언제부터 상실했을까. 현대의 우리 민족에게 그 야성적 민족 유전자는 남아 있는지, 아니면 그저 외세에 굴종하는 변이 유전자만 물려받았는지, 시대를 관통하는 일관된 원형이 있기는 한지 알 수가 없다. 한 명의 대통령이 오래 집권하던 시절에는 그러려니 했겠지만, 우리 정치가 민주화된 오늘날 어떤 유전자와 전통이 대외 관계에서 작동하고 있는지, 정치지도자들은 어떤 원칙에 따라 외교 전략을 설계하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북핵 위기와 외교안보의 딜레마 속에서 더욱 궁금해진다. 필자는 40년 전 외교사가 재미있어 외교관의 길로 들어섰다. 근대 아시아 외교사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중일전쟁과 미·일 관계에 관한 것이었는데 한국은 강대국 간의 전쟁과 흥정의 대상으로만 등장했다. 모두가 남들의 외교사였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정리한 외교사가 아직 없다. 중국은 10여년 전에 이미 ‘신중국외교사’라는 책이 몇 종류나 있었다. 평화공존 5개 원칙을 축으로 하는 1949년 이후 중국 외교의 특징을 ‘대국주의와 (아편전쟁 이후) 100년의 콤플렉스’라고 했다. 일본은 2013년 이와나미(岩波)서점이 6권 분량의 ‘일본의 외교’를 간행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2015년부터 한국 외교사 프로젝트를 시작해 3년째인 내년에 8권으로 구성되는 ‘한국 외교사’를 편찬할 예정이다. 좀 과도한 욕심을 내서 고대 중국과 고조선 간의 전쟁에서부터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을 거쳐 항일투쟁과 대한민국의 1980년대까지를 관통하는 대외 관계사를 펼쳐 내기로 했다. 필자는 40년을 기다려 온 수요자로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두 가지 소망을 담았다. 우선 우리 민족 외교의 실패와 성공의 사례 속에서 그 유전자와 변이 과정을 찾는 것이다. 그러자면 치욕으로 얼룩진 근대 외교사만이 아니라 더 멀고 긴 역사 속에서 우리 조상은 내외 정세 변화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세심히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국절 논쟁도 민족사의 긴 여정에서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 유전자를 찾을 수 있다면 앞으로는 정치인들이 국가의 품격이나 국민의 안위와 관련되는 안보 문제를 보수와 진보로 분열된 진영 논리만으로 함부로 논하지는 않겠지 라는 소망이다. 우리 민족사의 긴 여정에서 국가 누란의 위기 때마다 지배계층 내부의 분열은 민족의 치욕을 초래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가을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명의 심유경(沈惟敬)이 휴전 조건으로 조선의 분할을 논의한 것이 외세에 의한 최초의 민족 분단 획책이었다. 300년 후인 19세기 말 청?일, 러?일 간의 한반도 분단에 관한 흥정은 결국 미국과 소련에 의한 남북 분단으로 이어졌다. 고조선이나 고구려, 백제의 멸망도 지배층 내부의 분열에 의한 요인이 컸다. 병자호란 때 주화론과 주전론이나, 조선 말기 수구파와 개화파의 대립도 그렇다. “문제는 우리 내부에 있었다”는 교훈뿐 아니라 저항과 단합을 통한 재건과 부흥의 성공 사례도 새롭게 부각될 것이다. 한국 외교사 편찬 사업에는 시대별로 유수의 학자들이 참여하고 있어 좋은 결과물이 기대된다. 물론 첫술에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 외교의 역사적 유전자를 찾는 과정의 시작이라는 의의는 크다. 계속해서 보완해 가면 훌륭한 한국 외교사가 완성될 것이다. 정치지도자들은 앞으로 외교안보 위기를 극복하는 통찰력을 여기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 사물 품은 회화, 경계는 없다

    사물 품은 회화, 경계는 없다

    그림인지, 조각인지, 설치인지…. 작가 한만영(71)은 익숙한 동·서양 거장들의 작품에서 차용한 이미지와 다양한 일상의 오브제를 결합하는 작업을 이어 왔다. 그런가 하면 작가 김덕용(56)은 나무 위에 전통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영롱한 색채를 지닌 자개를 결합시키는 독창적인 기법을 구사한다.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 언어로 회화의 경계를 허물어온 두 작가의 실험성 넘치는 신작들을 선보이는 개인전이 가을 화단을 풍성하게 수놓고 있다.한만영 작가는 오브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작품에 반영하며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허물어 왔다. 1980년대부터 ‘시간의 복제’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작품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 유물부터 르네상스의 걸작, 18~19세기 대가들의 작품, 고구려 고분벽화, 신라시대 토우와 불상,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인물화 등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이미지가 등장하고 철사, 거울, 악기 등 다양한 오브제들이 배합된다. 종로구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이매진 어크로스’라는 주제로 선보인 신작 16점도 흐름은 같지만 소재적인 측면에서 색다른 변화를 시도했다. ‘시간의 복제-K뷰티’는 신고전주의 작가 앵그르의 작품 ‘마드무아젤 리비에르’(1806)에서 초상의 주인공 리비에르의 이미지를 정교하게 재현하고 휴대전화 부속품들을 화면 위에 부착했다. 작가는 “신고전주의 시대의 시간과 감성을 상징하는 작품과 오늘날 IT 산업의 선두주자인 한국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환기시킨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시간의 복제-익스플로러’, ‘시간의 복제-3:27’은 과거에 부분적으로만 사용했던 거울을 좀더 과감하게 전면에 등장시킨 작품이다. 작가는 “거울을 부착함으로써 작품이 놓이는 장소에 따라 현재의 이미지가 화면에 병치되는 효과를 준다”면서 “과거의 이미지에서 소멸과 허무를 느끼지만 거울 속에 새로운 이미지가 생성되는 것을 보면서 생성과 소멸이 결국은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합성목재인 MDF로 청화백자의 이미지를 저부조로 만들고 이미지를 그린 후 캔버스에 부착한 작품도 새롭게 선보였다. 청명한 하늘빛 바탕에 놓인 청화백자가 한점의 구름처럼 보인다. 전시는 11월 5일까지.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김덕용 작가는 화선지가 아닌 나무에 그림 그리는 작업을 30년째 이어오고 있다. “동양화를 전공하면서 우리 미술의 근원이 무엇인지 탐색하던 중 재료에 관심을 갖게 됐고 나무에 눈길이 갔다”고 나무와의 첫 인연을 소개한 작가는 “고택이나 고궁을 보면 모두 나무로 돼 있는데 나뭇결 속에 시간이 담긴 점도 그렇게 좋더라”고 덧붙였다. 나무 작업의 첫 번째 단계는 소나무 조각을 깎고 다듬어 화면 위에 창이나 문, 누마루 등을 짜맞추는 것이다. 그 위에 다양한 염료를 이용해 그림을 그린다. 창문 너머로, 혹은 문 뒤로 순하고 착해 보이는 아이들이나 쪽진 머리의 단아한 여인, 매화나무, 정돈된 이부자리 등이 보이는 풍경이 그의 단골 소재들이다. 작가는 2000년대부터 나무에 자개 작업을 결합시켜 한국 전통예술의 다양한 형식과 기법을 적극적으로 회화에 재현시키고 있다. 여인의 저고리와 치마, 배경에 놓인 장롱과 책을 자개로 처리해 입체감과 질감을 풍부하게 살렸다. 김 작가는 서울 종로구 율곡로 이화익갤러리에서 11년 만에 갖는 개인전에서 ‘오래된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신작회화 25점을 선보였다. 인물보다는 우리 전통 주거 형태를 기반으로 한 ‘공간’의 표현에 집중한 점이 두드러진다. 그는 “방안과 바깥 풍경을 구분하는 창의 역할에 주목했다”면서 “창은 우리 전통건축의 차경(借景)을 위한 프레임일 뿐 아니라 시간을 넘나드는 통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소쇄원의 정자를 떠올리며 그린 ‘결-제월당’은 나무에 단청 기법으로 그린 작품으로 실제로 나무의 결이 살아 있는 정자에 앉아 밖을 보는 것 같다. ‘관해낙조’는 정자에 앉아 책을 읽다 해 저무는 바다를 바라보았을 다산 정약용의 심정을 떠올리며 만든 작품이다. 물결 위에 햇살이 부서져 반짝이는 바다, 펼쳐진 여인의 치맛자락이 자개로 표현되니 황홀하게 아름답다. 전시는 31일까지. 글 사진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씨줄날줄] 당진 합덕제/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당진 합덕제/서동철 논설위원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냇물과 연못은 농업 진흥의 근본이니 수리 행정은 성왕(聖王)도 중히 여겼다’고 했다. 더불어 ‘바닷가에 조수를 방지하는 제방을 쌓고 안에 기름진 농지를 만들면 이것을 해언(海堰)이라 한다’고도 강조했다. 당시에도 간척과 수리 시설의 중요성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실제로 우리 간척의 역사는 뿌리가 깊다. 강화도가 넓은 농토를 가진 오늘날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도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왕조가 임시수도로 삼은 이후 지속적으로 간척사업을 벌인 결과다. 농업용 수리 시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공 방죽(저수지)의 역사는 더 깊다. 흔히 제천 의림지,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를 우리나라 3대 방죽이라고 하는데, 모두 삼국시대 지어졌다. 별도로 김제 벽골제, 연안 남대지, 당진 합덕제는 조선시대 3대 방죽으로 부르기도 한다. 충남 당진의 합덕제는 특히 간척 사업으로 만들어진 광범위한 농토에 물을 대기 위한 대형 수리 시설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관개(灌漑)의 역사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한다. 합덕제는 흔히 소들강문들이라 부르는 삽교천 하구의 우강평야(牛江坪野)에 자리 잡고 있다. 소들(牛坪)을 거쳐 바다로 흐르던 강을 막아 새로 생겨난 넓은 농토를 가리킨다. 공주 유학자 이병연(1894~1977)은 지리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350여년 전 토정 이지함이 아산현감 시절 한진 앞바다가 크게 터졌는데 이후 100년 남짓 토착민이 둑을 쌓아 논을 만들어서 큰 들이 되었다’고 적었다. 합덕제는 후백제 견훤이 후고구려와의 결전을 앞두고 군마에게 물을 먹이고자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 1473년 ‘성종실록’에는 ‘합덕제는 고려 때 쌓기 시작한 것을 조선조에서 다시 축조했는데 길이 2700척에 일곱 고을이 혜택을 입는다’는 내용이 보인다. 간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제방 규모를 키웠을 것이다. 연산군의 총애를 받은 장녹수가 합덕제와 황해 연안 남대지를 하사받아 경작했다는 ‘중종실록’의 기록은 흥미롭다. 주변 농토가 가뭄 피해를 입건 말건 저수지 물을 빼고 벼를 심었다는 뜻이니 백성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합덕제는 1979년 삽교천방조제가 준공됨에 따라 수리 시설로 기능을 하지 않게 됐다. 상당 부분 농토로 바뀌었지만, 방죽으로 기능을 되돌리는 공사가 한창이다. 때마침 멕시코에서 열린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 세계총회에서 합덕제가 수원 만석거와 함께 ‘세계관개시설물유산’에 등재됐다는 소식이 반갑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이덕일의 역사의 창] 동북공정은 진화 중

    [이덕일의 역사의 창] 동북공정은 진화 중

    한국 고대사는 현재진행형의 첨예한 현대사다. 2017년 4월의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라고 말한 것은 이를 사실로 확인해 준 사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박은식, 초대 국무령 이상룡, 법무총장 이시영 등이 모두 한국 고대사에 관한 저술을 남긴 것 또한 마찬가지 이유다. 일제강점기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한 영토전쟁이었던 한편 역사 해석을 둘러싸고 싸웠던 역사전쟁이었다. 그 역사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동북공정의 정식 명칭은 ‘동북 변경의 역사와 현상계열 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이다. 중국사회과학원 주관으로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수행한 대규모 역사 연구 프로젝트다. 동북공정은 만주(동북 3성)는 물론 북한 강역도 중국의 역사 강역이었다는 논리다. 동북공정 자체는 2007년에 끝났지만 중국의 국책 역사 프로젝트는 ‘중화문명 탐원공정’(探源工程?2004~2015)과 ‘국사 수정공정’(修訂工程?2010~2013)으로 계속됐고, 지금은 이를 전 세계에 퍼뜨리는 ‘중화문명 전파공정’(2016~)이 진행 중이다. 이에 맞서야 할 우리의 역사 관련 국책기관들, 즉 국사편찬위원회나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등은 침묵하거나 거꾸로 이에 동조하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으니 전 세계인들이 한국을 중국의 일부로 알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최근 중국에서 ‘동북 고대민족 역사 편년총서’(東北古代民族歷史編年叢書) 중의 일환으로 출간한 ‘백제역사편년’은 “그간 백제를 한국사의 범주로 인식했지만 백제 전기 역사는 중국사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백제사까지도 중국사라는 논리다. 이런 논리의 단초는 동북공정이 진행 중이던 2003년 6월 26일자 광명일보(光明日報)에 실린 ‘고구려는 중국 동북 지역에 있던 변방민족 정권이다’라는 논문에 이미 들어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일반 공산당원을 상대하는 ‘인민일보’와 지식인 공산당원을 상대하는 ‘광명일보’를 발행하는데, 이 논문의 필자 볜중(邊衆)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 지도부다. 볜중은 이 논문에서 “서기 668년 당나라는 마침내 고씨 고려를 통일함으로써 고씨 고려의 영토는 당나라 안동도호부에 의해 관할되었다”라고 주장했다. 고씨 고려란 고구려를 뜻하는데,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새로운 용어를 만든 것이다. 볜중이 당나라가 고구려를 ‘통일’했다고 쓴 것은 고구려가 나라가 아니라 당나라의 한 지방정권이란 뜻이다. 더 심각한 것은 왕건이 세운 고려에 대한 인식이다. 볜중은 “고려(왕건)는 고씨 고려의 후예가 아니다. … 중국학자가 고증한 바에 따르면 왕건은 서한(西漢) 시절 낙랑군에 있었던 한인(漢人)의 후예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한다”고 썼다. 현재 중국은 조선총독부의 견해에 따라 낙랑군의 위치를 지금의 평양이라고 주장한다. 왕건이 지금의 평양에 살던 한족(漢族)의 후예라면 고려는 한족(漢族)이 세운 나라가 되는 셈이다. 중국의 수많은 1차 사료는 낙랑군이 평양이 아니라 지금의 허베이(河北)성 일대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나라의 국책 역사기관들은 이런 사료들은 짐짓 못 본 체하면서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고 동북공정에 동조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해방 후에도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는 식민사관이 역사학계를 장악한 결과다. 트럼프는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시진핑이 말한 “한국은 북한이 아니라 한국 전체”(Not North Korea, Korea)였다고 전했다. 중국의 국가주석이 한국 전체가 자국 것이었다고 망언했는데도 한국은 조용하다. 한 나라가 진정한 독립국가로 대접받으려면 자국의 정신, 곧 역사에 대한 주체적 시각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국사를 통째로 빼앗기고도 조용한 이 나라가 주체적 역사관을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초기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예관(?觀) 신규식(1879~1922) 선생은 “우리나라가 망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죽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 나라를 둘러싼 정세가 점점 구한말 비슷하게 흘러간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이 나라, 이 정부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묻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 강감창 서울시의원 “석촌고분, 세계적 AR게임 메카 될 것”

    강감창 서울시의원 “석촌고분, 세계적 AR게임 메카 될 것”

    “2천 년 전,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아십니까?한성백제의 왕도가 세워지면서 백제의 최전성기가 시작된 곳입니다. 2천년 후, 이곳에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인그레스(AR게임)의 꽃, 어노말리가 열렸습니다!이제 이곳 석촌고분이, 세계가 주목하는 AR(증강현실)게임의 메카가 될 것입니다!”지난 23일 화려한 조명의 무대 위에 올라선 한 남자의 목소리가 송파구 석촌고분을 뒤흔들었다. 이는 문화유적과 첨단AR기술의 만남을 통해 지역경제와 지역문화의 발전을 도모하는 새로운 시도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역사적 선언이었다. 바로 송파구 출신 강감창 서울시의원의 이야기이다. 지난 22일부터 24일까지 석촌호수와 석촌고분 일대에서는 서울시와 나이언틱이 주관하고 마을기업 한성백제 협동조합이 참여하는 ‘서울시민과 함께하는 AR VR 국제페스티벌’이 개최됐다. 이 행사에서 가장 주목 받은 행사는 바로 ‘인그레스 어노말리’였다. 전 세계적으로 현재 500만여 명의 유저가 이용하고 있는 인그레스(Ingress)게임은 분기별로 프라이머리(Primary)급으로 어노말리(Anomaly) 행사를 진행하는데, 작년 홍콩대회에는 6천여 명, 도쿄대회에는 1만여 명이 참가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룬 바 있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지난해에 프라이머리급 어노말리 대회가 석촌호수 일대에서 열렸으며, 석촌고분 일대에서 개최된 이번 2017 서울 대회에서도 1만 여명이 참가해 게임을 즐기며 송파구의 문화유산을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이중 무려 85%가 외국인 게이머였다. 이들은 특히 위치 기반 AR 게임인 인그레스의 특성을 살린 ‘오퍼레이션 클리어 필드’라는 행사를 통해, 참가자들이 팀을 이뤄 송파구의 랜드 마크와 유적지를 만났다. 예를 들면, 특정 명소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거나 인간피라미드를 쌓고, 관광객에게 길을 안내하거나 이웃에게 따뜻한 음식을 사주는 등의 미션을 수행하면 점수를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국제적 행사를 2년 연속 서울시 송파구에 유치한 주역은 강감창 의원이다. 지난해에 이어 금년까지 2번에 걸쳐 인그레스 서울 어노말리 홍보대사에 임명된 강 의원은 실제 인그레스 게임의 상위 레벨 12에 랭크된 유저이기도 하며, 증강현실게임을 통해 한성백제의 역사를 내외국인에게 알리기 위해 대회유치와 서울시 예산편성에 앞장서 왔다. 지난 8월에는 나이언틱과 한성백제 협동조합을 연결하여 ‘2017 인그레스 서울 어노말리’를 지원하기위한 『마을기업 한성백제와의 협약식』을 주최했고, 이러한 노력에 따라 지난해에 이어 2017 인그레스 서울 어노말리의 홍보대사로 재위촉됐다. 이 대회를 마무리하는 행사인 애프터파티(After-party)에서, 강감창 의원은 수천 명의 국내외 참가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송파에 꽃피웠던 한성백제의 문화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 나아가 석촌호수와 석촌고분 일대에 4차산업을 꽃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번 행사는 역사문화 유적과 AR첨단기술의 접목을 통해 3천 4백여 명의 외국관광객에게 2천년의 역사도시 서울과 송파구의 문화유산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한꺼번에 수천 명의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석촌고분을 알린 사례는 전무하다. ● 석촌동고분군 국제학술대회에 쏠린 국내외 학자들의 눈 한편 지난 22일, 송파구 한성백제박물관 강당에서는 ‘백제 초기 고분의 기원과 계통’이라는 주제로 백제왕릉지구 석촌동고분군 국제학술회의가 개최됐다. 이번 학술대회는 2016년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개최한 ‘근초고왕과 석촌동’ 이라는 국제학술대회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리는, ‘백제왕릉지구 석촌동고분군’을 재조명하는 자리로서 중국을 비롯하여 국내 각지에서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이인숙 한성백제박물관장의 개회사와 강감창 의원 축사로 시작된 학술대회에서는 ‘한강 중상류역의 적석총과 석촌동 적석총과의 관계’(심재연 한림대 교수), ‘고구려 석실계단적석총과 비교해 본 석촌동 적석총의 원형 추론’(강현숙 동국대 교수), ‘석촌동 토광묘의 기원과 부여 고분’(이종수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 등의 연구 성과가 발표됐다. 이밖에 중국 지린대, 난징박물관 관계자도 발표에 참여하여 중국의 연구사례에 대해 설명했다. 이어 종합토론 시간에는 임영진 전남대 교수를 좌장으로 깊이 있는 토론이 이뤄졌다. 서울시의회 강감창 의원은 축사에서 “이번 국제학술대회는 마침 송파구에서 매년 개최하고 있는 한성백제 문화축제와 같은 기간에 개최돼, 관련 분야 연구자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백제 왕릉지구인 석촌동고분군이 지닌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라며 학술대회의 의미를 부여했다. 아울러 강의원은 “여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역사유산을 활용해 지역경제를 활성화시켜 문화유산의 가치를 재창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송파주민들과 함께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국제학술대회는 시민들의 서울 백제왕도유적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학술적 기반을 조성해 나가는 데 기여했다는 평이다. ● 마을 주민의 손끝에서 탄생한 석촌고분 사진전 석촌고분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알리는 데 시의원과 학자들만 앞장서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을기업 한성백제 협동조합에서는 행사기간 동안 석촌고분을 방문한 국내외 참여자들에게 석촌고분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은 물론 한성백제의 값진 문화유산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석촌고분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로 사진전을 개최했다. 석촌동 주민대표들이 모여 만든 한성백제 협동조합은 백제역사·문화의 복원과 계승, 새로운 문화상품개발을 통한 관광활성화 및 지역경제 활성화에 힘쓰며, 석촌고분을 활용해 백제문화를 전파하고 민관거버넌스를 활용해 공익적 가치를 실현하는 마을기업이다. 한성백제 손병화 이사장은 “참석자의 절반 이상이 외국인 게이머들이다. 이들에게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왕도를 건설하고, 무려 500년에 이르는 장구한 시간동안 백제 첫 번째 도성으로서 역할을 했던 이곳 송파의 모습을 알리고 싶었다”고 사진전 개최의 취지를 밝혔다. 사진전에는 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왕릉과 지배계층의 무덤인 석촌동고분군과 방이동고분군 등 중요한 유적들의 발굴 당시 사진과 아름답게 복원된 현재의 모습 등을 포함한 다양한 희귀사진들이 전시돼 호평을 받았다. 사진전을 돌아보던 송파주민 권순규(가명)씨는, “송파구에 오래 살았지만 석촌고분이 발굴된 과정을 보여주는 이런 사진들을 전혀 본 적이 없다.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석촌고분의 가치를 새삼 깨닫게 해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 바야흐로 석촌고분을 주목할 때 이처럼 서울시, 학계, 지역주민이 삼위일체가 되어 석촌고분의 가치를 재창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문화유적과 첨단 AR기술의 만남을 통해 지역경제와 지역문화의 발전을 도모하려는, 지금까지 전혀 시도된 적 없는 창의적 발상으로 열정을 쏟는 강감창 의원이 있다. 강 의원은 “송파에 꽃피웠던 한성백제의 문화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 나아가 석촌호수와 석촌고분 일대에 4차 산업을 꽃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역사문화컨텐츠와 최첨단기술의 융합, 그리고 이를 통해 외국 관광객들에게 서울을 알리고 석촌고분 일대의 미래가치를 만들어가는 일을 주도해 나가는 한 시의원의 창의적인 발상이 석촌고분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백제의 전성기인 근초고왕 시대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석촌고분이 AR(증강현실)게임의 메카로 부활해 첨단 4차산업의 전성기를 구가할 날이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철은 권력… 철은 예술… 철은 삶이다

    철은 권력… 철은 예술… 철은 삶이다

    한·중·일 등 730여점 전시무덤 속 덩이쇠들 ‘권력’ 상징63빌딩 높이와 맞먹는 양 출토 비격진천뢰는 왜군 격퇴 필살기‘예술’된 철불… 기술 발달 시사“시대의 큰 문제들은 말이나 다수결이 아닌 ‘철’과 ‘피’로만 해결된다.” 유럽 평화 구도와 독일 통일을 이룬 ‘철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말이다. 이 한 문장에 인류사를 이끌어온 ‘철’의 막강한 힘이 압축돼 있다. 우주에서 날아온 운철로 만든 히타이트 제국의 고대 무기부터 현대의 우주선까지, 철은 인간과 가장 가까운 금속으로 역사를 움직여 왔다. 문명의 이기로 인간을 이롭게 하면서도 살상의 도구로 인간을 해치기도 했던 철. 그 다채로운 속성이 피워낸 문화사를 한국, 중국, 일본, 서아시아 등에서 출토된 유물 730여점으로 짚어보는 전시가 열린다. 26일부터 11월 26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특별전 ‘쇠·철·강-철의 문화사’다.철은 ‘권력’이었다. 고대 무덤의 부장품은 곧 무덤 주인이 지닌 정치·사회적 권력의 크기였다. 특히 신라 왕릉인 경주 황남대총에서 무더기로 출토된 덩이쇠들은 철이 권력의 상징이자 화폐의 가치를 지녔음을 보여 준다. 무덤에서 나온 3200여점의 철기 부장품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는 덩이쇠들을 일렬로 늘어놓으면 243m로, 서울 여의도 63빌딩 높이와 맞먹는다.1부 전시가 인류와 철의 첫 만남을 세계사적으로 조명했다면 2부 전시 ‘철, 권력을 낳다’에서는 한반도에 철기가 등장한 이후 고대부터 조선까지 철과 권력의 관계를 보여 주는 다양한 철기 유물이 등장한다. 특히 권력욕이 촉발시킨 전쟁이 낳은 갖가지 철제 무기와 갑옷들이 눈길을 끈다.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서 발견된 고구려 벽화무덤 퉁거우 12호분 벽화 속 개마무사(갑옷과 투구로 중무장한 말 탄 병사)에서 기원한 신라와 가야의 철갑 무사의 면면을 10여점의 갑옷과 투구, 입체 영상으로 구현한 전시는 전장의 한가운데 선 듯, 실감을 더한다. 보물 857호인 대완구와 대완구로 쏘면 사방으로 철 파편이 튀어 적을 공격하는 공 모양 포탄 비격진천뢰도 전시장에 나왔다. 비격진천뢰는 폭발하면 하늘을 뒤흔드는 우레 소리가 난다고 해 붙여진 이름으로,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과 함께 왜군을 물리친 조선 최고의 무기였다.철은 ‘예술’이었다. 9세기에 만들어진 서산 보원사지의 철불 철제여래좌상은 양감이 넘치는 웅장한 체구,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과 유려한 옷주름 등으로 ‘통일신라의 걸작’ 석굴암 본존을 연상시키며 관람객을 사로잡는다. 거친 금속인 철로 부드러운 표면과 자연스러운 표정, 옷 주름 등을 묘사한 세부 표현은 통일 신라 이후 일상으로 들어온 철을 예술로 빚어낼 만큼 선인들의 철을 다루는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했음을 보여 준다.금과 은으로 천마의 화려한 자태를 새겨 넣은 ‘철제금은상감 발걸이’에는 통일신라 시대 뛰어난 금속 공예 기술이 압축돼 있다. 3부 전시 ‘철, 삶 속으로 들어오다’에서는 이처럼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일상에 스며든 철이 생활 도구를 넘어 종교적 상징물, 예술품으로 거듭나는 극적인 변화상을 선보인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동서양을 넘어 인류가 가장 널리 사용해 온 금속인 철은 역사의 전환기를 이끄는 동력이었다”며 “인류사에서 철이 지닌 가치와 역할을 조명하는 이번 전시를 통해 지금까지는 물론 미래에도 우리의 일상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할 철의 속살을 되짚어 보시길 바란다”고 소개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일왕 부부, 고구려 神 모신 고마신사 첫 참배

    일왕 부부, 고구려 神 모신 고마신사 첫 참배

    아키히토 일왕 부부가 20일 일본 내 고구려 왕족 및 신(神)을 모시는 사이타마현의 고마(高麗)신사를 참배했다. 역대 일왕 부부 가운데 처음으로 고마신사를 참배한 것이다.교도통신은 20일 일왕 부부가 이날 ‘사적(私的)인 여행’으로 사이타마현 히다카시를 방문해 고마신사를 찾았다고 전했다. 교도통신은 또 일왕 부부의 여행 목적에 대해 “다양한 역사를 접하기 위한 것”이라며, 아키히토 일왕이 2001년 생일 기자회견에서 “내 개인으로서는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쓰여 있는 데 대해 한국과의 연(緣)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고 이례적으로 소개했다. 일왕은 사이타마의 고마신사를 찾기 전에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渡來人)과 도래인 문화에 대해 전문가로부터 설명을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왕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궁내청은 2013년부터 1년에 2차례 일왕의 ‘사적 여행’을 마련해 왔으며, 이번 여행은 8번째 ‘사적 여행’이다. 일왕과 고마신사 측은 일왕 부부가 신사 참배를 한 배경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년 퇴임이 예정된 아키히토 일왕이 퇴위 전에 일본 내에서 한반도를 상징하는 고마신사를 찾아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반성과 함께 화해 메시지를 한국과 한국인에게 보내려고 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퇴임을 앞둔 일왕으로서 과거사와 한·일 관계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고, 이를 상징적으로 밝히려 한 행보라는 해석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재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한국 방문을 희망하고 타진해 왔지만, 정치적 상황 속에서 성사되지 못했다. 그의 방문에 부정적인 일본 보수세력과 한국 내 사과 요구 입장 등이 방문의 발목을 잡아 왔다. 일왕은 과거사와 관련, ‘가해’ 언급마저 피하고 있는 아베 신조 총리와 대비되는 행보를 보여 왔다. 일왕은 지난달 15일 태평양전쟁 패전일 희생자 추도식에서 “과거를 돌이켜 보며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재차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3년 연속 ‘반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고마신사는 고구려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한 고구려 왕족 약광(若光)을 모시기 위해 730년 설치됐다. 고마는 고구려를 의미한다. 고구려 마지막 임금 보장왕의 아들인 약광은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민들을 모아 716년 자치지역인 고마군을 창설한 뒤 수장을 맡았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아키히토 일왕 부부가 고구려신사를 참배한 이유는...보장왕 아들 기려

    아키히토 일왕 부부가 고구려신사를 참배한 이유는...보장왕 아들 기려

    아키히토(明仁) 일왕 부부가 20일 일본 내 고구려 왕족을 모시는 사이타마(埼玉)현의 고마(高麗·고구려)신사를 참배했다고 교도통신이 20일 보도했다. 일왕 부부는 이날 ‘사적(私的)인 여행’으로 사이타마현 히다카(日高)시를 방문해 고마신사를 찾았다. 일왕 부부가 고마신사를 참배한 것은 처음이다.고마신사는 고구려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한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아들인 약광(若光)을 기리기 위해 730년 설치됐다. 약광은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민들을 모아 716년 고마군을 창설한 뒤 수장을 맡았다. 그는 730년 사망했지만 후손들은 그를 위해 고마신사를 세웠고 지금까지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교도통신은 일왕 부부의 여행 목적에 대해 “다양한 역사를 접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여행으로 풀이된다. 아키히토 일왕이 2001년 생일 기자회견에서 “내 개인으로서는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쓰여 있는 데 대해 한국과의 연(緣)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스스로 백제의 후손임을 인정한 일왕은 “무령왕의 아들인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과의 교류는 이것만이 아니었다”며 “이를 잊어서는 안된다”고도 했다. 이후 3년만인 2004년 일왕의 당숙인 아사카노미야가 충남 공주시의 무령왕릉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2005년 6월엔 사이판의 한국인 전몰자 위령지인 ‘한국평화기념탑’을 참배하는가 하면, 1989년 즉위 이후 “(방한의) 기회가 있다면 친선관계 증진에 노력하겠다”며 방한하고 싶다는 뜻도 밝혔다.일왕과 고마신사측은 일왕 부부가 신사 참배를 한 배경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내년 말쯤으로 예상되는 생전 퇴위 전에 한반도에 반성과 화해 메시지를 보내려고 참배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일왕은 지난 3년간 2차대전 패전일 희생자 추도식에서 ‘반성’을 언급해, ‘가해’ 언급마저 피하고 있는 아베 신조 총리와 대비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일왕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궁내청은 2013년부터 1년에 2차례 일왕의 ‘사적 여행’을 마련하고 있다. 이번 여행은 8번째 ‘사적 여행’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일왕 부부, 일본 내 고구려 마을 고마신사 첫 참배

    일왕 부부, 일본 내 고구려 마을 고마신사 첫 참배

     아키히토 일왕 부부가 20일 일본 내 옛 고구려 유민 및 그 후손들이 유지해 온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의 고마(高麗)신사(사진)를 참배한다. 역대 일왕이 고마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마신사는 19일 웹사이트 등을 통해 일왕 부부의 20일 신사 방문 소식을 알렸다. 아키히토 일왕의 고마신사 참배 배경 등은 공식적으로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내년 퇴위를 앞둔 아키히토 일왕이 퇴위전에 한반도를 상징하는 고마신사를 방문해, 반성과 화해 메시지를 보내려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돌고 있다. 아키히토 일왕은 재임 기간동안 여러 차례 한국 방문을 희망해 왔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그의 방문을 만류하는 일본 보수세력과 사과를 요구하는 한국측 입장 등이 엇갈려 그의 방문의 발목을 잡아왔다. 일왕의 고마신사 방문은 한국 방문을 대신한 측면도 있다.  그는 일본의 침략전쟁 등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입장을 강조해 왔고, 특히 퇴임을 앞두고 아베 신조 총리의 헌법 개정 등에 부정적인 입장도 간접적으로 전달해 왔다. 일왕은 지난달 15일 태평양전쟁 패전일 희생자 추도식에서 “과거를 돌이켜보며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재차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3년 연속 ‘반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지난해 퇴위 의사를 밝힌 아키히토 일왕의 생전 퇴위는 올해 특별법으로 인정돼 내년 말 이전에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예정이다.  고마신사는 고구려 마지막 임금 보장왕의 아들인 약광(若光)이 세운 자치지역인 고마(고구려를 의미하는 고려의 음역)군 (현 히다카시)에 세워졌다. 고마신사의 대표인 궁사는 성을 고마씨를 쓰고 있는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51)로 약광의 60대 후손이다.  약관은 고구려 멸망후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민들을 모아 716년 고마군을 세우고, 수장을 맡아왔다. 고마신사는 730년 약광의 사망 이후 그를 모시기 위해 설치됐다. 고마군은 창설 이후 1000년 이상 유지되다가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군에서 폐지됐고, 1955년 행정구역명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고마신사를 중심으로 한 히타카시 일대는 하천, 언덕 등 여러 지명에 고구려란 뜻인 고마라는 이름이 남아있다.  지난해 4월 23일에는 고마신사에 고마군 창설 1300주년 기념비가 세워졌고, 당시 기념시 건립 행사에는 아키히토 일왕의 사촌 동생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의 부인인 히사코, 하세 히로시 일본 문부과학상, 야가사키 테루오 히다카 시장 등이 참석했다.  지난 2010년 6월에는 고마군과 약광을 기리기 위해 재일교포들이 중심이 돼서 고마약광회가 구성돼 활동하고 있다. 고마신사는 고이소 구니아키·와카쓰키 레이지로·하토야마 이치로 등이 이 신사에서 기도한 뒤 총리대신이 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본내에서 영험하기로 이름이 나 있는 신사로 꼽힌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자치단체장 25시] 한방+바이오 메카로 열리는 동대문… 그 시작은 ‘서민경제’

    [자치단체장 25시] 한방+바이오 메카로 열리는 동대문… 그 시작은 ‘서민경제’

    “서울 동대문구는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서민 경제를 꽃피울 수 있는 개발 사업에 매진하고 있습니다.”유덕열 동대문구청장은 18일 서울 구청 사무실에서 이뤄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동대문구의 발전 철학을 이같이 요약했다. 민선 2기에 이어 5~6기 구청장을 지내며 서울한방진흥센터 준공부터 서울 부도심으로서의 청량리 역세권 재개발 추진까지 서민 경제 부흥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활성화 사업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동대문구는 다음달 국내 최대 한약 유통 중심지인 제기동 서울약령시에 서울한방진흥센터를 개관한다. 총 465억원을 투입해 연면적 9604㎡ 규모로 건립한 센터는 지하 3층, 지상 3층 건물에 한의약박물관, 한방체험시설, 한방 뷰티숍 등 테마 시설을 갖춘 한방 복합문화체험시설이다. 지역경제의 한 축인 한방 산업을 부활시켜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유 구청장이 제안해 이뤄졌다. 유 구청장은 “조선 보제원을 뿌리로 하는 동대문 서울약령시는 전국에서 유통되는 한약재의 약 70%가 거래되는 한방 메카”라며 “한방 산업이 다소 주춤해졌지만 센터 개관을 계기로 각종 한방 프로그램을 다채롭게 구성한다면 약령시는 세계적인 관광지로 성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경동시장 인근에 터를 잡고 1970~1980년대 급성장한 서울약령시는 1995년 서울시로부터 정식 한약시장으로 승인받아 서울약령시 대축제를 하는 등 전국 최고의 약령시장으로 성장했다. 최근 대체 건강식품 발달 등으로 한의약 산업이 전반적으로 침체기를 맞고 있지만 서울한방진흥센터를 발판으로 약령시가 한의약 산업 제2의 르네상스를 열어 간다는 복안이다. 서울한방진흥센터는 관광객들이 침을 맞거나 인삼을 먹어 보는 것은 물론 족욕이나 목 찜질을 즐기고 한방요리도 배울 수 있는 각종 체험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전통적인 한방 느낌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옥 양식으로 건립했고, 그동안 약령시 이용에 장애로 꼽혀 온 지역 주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약 200대의 차를 세울 수 있는 지하 주차장도 조성했다. 서울한방진흥센터 건립은 유 구청장의 동대문 발전 철학과 관련이 있다. 그는 “좋은 도시란 도시가 만들어 온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고, 공동체가 살아 있고, 사람들이 연대하는 그런 도시”라면서 “동대문구에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19개의 오래된 대형 전통시장이 자리하는 만큼 전통시장을 부흥시키는 것은 동대문 도시 개발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유 구청장은 전통시장 상인들을 유통 재벌들로부터 지켜 낸 주인공으로 불린다. 당초 24시간 풀가동되던 대형마트 영업시간이 오전 10시에서 밤 12시까지로 제한되고, 월 2회 일요일은 의무적으로 문을 닫도록 전통시장 보호 규제가 만들어진 데는 유 구청장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그는 2012년 ‘동대문구 유통기업 상생 발전 및 전통상업보존구역 지정 등에 관한 조례’를 만들어 대형마트 영업시간 규제를 처음 내놨다. 롯데, 신세계, 홈플러스 등 대형마트들은 이에 반발해 영업시간 제한 처분 취소소송을 냈으나 대법원이 2015년 동대문구의 손을 들어주면서 대형마트 영업시간 제한 및 의무휴업일 운영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서울한방진흥센터 건립도 서민 경제를 살리고 전통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한 정책의 하나로 나온 작품이다. 유 구청장은 미래를 지향하는 개발 사업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당장 연내 착공하는 청량리4구역 재개발 사업이 완료되면 동대문구의 위상이 크게 변할 것으로 기대된다. 청량리4구역 재개발 사업으로 청량리역 인근에 65층 규모 주상복합건물 4개 동과 호텔, 백화점 등을 갖춘 42층 건물이 연내 착공하고 인근 동부청과시장 부지에는 50여층 규모의 주상복합 4개 동이 들어선다. 서울의 대표 부도심인 청량리는 집창촌 형성과 함께 주변 지역에 교통 거점이 속속 생겨나며 역할이 퇴색됐지만 청량리4구역 재개발 사업이 급물살을 타면서 과거 전성기 시절을 넘어서는 위상을 구축할 것으로 전망된다. 청량리역과 가까운 전농11구역과 답십리18구역을 포함해 지역 내 50여곳에서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특히 동대문구 홍릉연구단지 내에 들어서는 한국판 ‘보스턴 바이오 클러스터’ 격인 ‘서울바이오허브’ 조성 작업이 속도를 냄에 따라 젊은 일꾼들이 모이는 도시로 변신 중이다. 내년 개관을 목표로 하는 서울바이오허브는 병원·기업·연구소를 모아 벤처 생태계를 구축하는 사업이다. 주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과학기술원(KAIST), 고려대병원, 경희대병원 등의 연구기관·병원뿐 아니라 100개 이상 벤처기업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세계 최대 제약사 존슨앤드존슨(J&J)이 홍릉 바이오 허브 입주를 검토 중이다. 이달 들어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을 리모델링한 허브 본관 건물이 입주를 시작한 가운데 문화 벤처기업의 콘텐츠 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콘텐츠시연장도 오픈했다.유 구청장은 문화를 활용해 경제 가치를 만드는 ‘컬처노믹스’ 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연내 삼국시대 유적인 배봉산 보루성의 역사적 의미를 살린 테마공원을 완성하는 게 대표적이다. 보루(堡壘)란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낮은 봉우리에 쌓은 소형 석축산성으로, 산성에 비해 규모가 작은 군사시설이다. 구는 지난해 9월 사도세자의 처음 무덤 터였던 배봉산 정상에 생태공원을 조성하다가 고구려 유적인 배봉산 보루성을 발굴해 지난 2월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받고 이곳을 서울의 명소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앞서 2015년 선농단 역사유적 정비 사업으로 선농단 역사문화공원과 선농단 역사문화관을 개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선시대 임금이 풍년 기원 제사를 올리던 선농단을 고증자료를 통해 복원하면서 선농단 역사문화공원을 만들고 그 지하에 선농단의 역사와 전통을 기억할 수 있는 선농단 역사문화관을 건립했다. 구는 매해 4월 선농대제 행사를 벌이는 것은 물론 선농단 역사문화관에서 농사와 관련된 이론교육 프로그램인 도시농부학교를 운영하는 등 사람들을 동대문으로 끌어모으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유 구청장은 “민주화운동 정신을 삶의 근간으로 삼아 온 만큼 봉사의 마음으로 지역 발전에 힘써 왔다”며 “존경받는 동대문의 이웃으로 남을 수 있도록 열심히 뛰겠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유덕열 동대문구청장은 누구 부마항쟁 당시 동아대 시위 주도… 민주화 인사 출신 전남 나주 출신인 유덕열 서울 동대문구청장은 1979년 10·17 부마항쟁 당시 동아대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수배령을 받고 도피 생활을 하던 중 이듬해 발발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계엄이 확대되면서 검거돼 고문을 당한 민주화 인사 출신이다. 1985년 김영삼·김대중을 공동의장으로 출범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선전부장을 시작으로 동대문이 지역구인 민주당 최훈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며 동대문을 제2의 고향 삼아 민선 2기에 이어 5~6기 구청장을 맡고 있다.
  • [발효 음식 이야기] 콩이 낳은 3형제, 그 깊은 맛

    [발효 음식 이야기] 콩이 낳은 3형제, 그 깊은 맛

    ‘한 마을의 정치는 술맛으로 알고 한 집안의 일은 장맛으로 안다’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장’(醬)은 오랜 세월 우리 음식의 뿌리로 기능해 왔다. 장이란 콩을 삶아 소금에 절인 것을 발효시켜 만든 전통의 조미료를 말한다. 역사적으로 장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3세기 중국의 문헌 ‘주례’(周禮)에 고기로 만든 육장에 대해 언급한 것이 최초다. 그러나 콩으로 만드는 ‘두장’(豆醬)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발효라는 독특한 제조 방식과 한반도가 원산지인 콩이 만나 우리의 고유한 식문화 기틀을 이룬 셈이다. 오늘날에는 짠 음식을 기피하면서 장류의 입지도 흔들리고 있지만, 적정량을 사용하면 음식의 맛과 영양에 깊이를 더해 주는 고마운 음식이다.국내 문헌에 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1145년 ‘삼국사기’에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편에 “신문왕(神文王) 3년(서기 683년) 왕실의 폐백 품목 중에 장, 삶은 콩을 발효시킨 시(?)가 포함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이전부터 대두를 활용해 만든 발효식품들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방증이다. 또 중국 역사서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고구려인은 장 담그는 솜씨가 훌륭하다”, “발해의 명물은 책성에서 생산되는 된장”이라는 등의 기록이 나와 우리의 장맛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콩으로 만든 장, 우리나라서 탄생 오늘날 우리 식탁에서 가장 두루 쓰이는 장은 고추장이다. 고추장의 역사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호초’(胡椒)나 ‘천초’(川椒)와 같이 매운맛을 내는 재료를 사용해 만들어 오다가 16세기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들어오면서 기존의 된장을 만들던 콩 가공 기술과 고추라는 신재료가 만나 지금의 고추장이 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과거에는 집집마다 고추장을 2~3종류 담가 두고 음식에 따라 구별해 사용했다. 그중 찹쌀가루를 엿기름 물에 풀어 끓여 만드는 찹쌀고추장을 가장 귀하게 여겨 음식의 색을 낼 때 쓰고, 다른 고추장보다 단맛이 적고 칼칼한 보리고추장은 쌈장을 만들 때 주로 사용했다. 또 밀가루로 만든 고추장은 찌개나 국을 끓일 때, 장아찌를 만들 때 조미료로 썼다. 고추장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순창 고추장’과 관련해서는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스승인 무학대사를 만나러 순창에 갔을 때 고추장의 전신으로 알려진 ‘초시’를 먹어 보고 그 맛을 잊지 못해 조선을 건국한 뒤에도 진상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800년대 초의 문헌 ‘규합총서’에도 순창과 천안의 고추장이 팔도의 명물 중 하나로 소개됐다. 대상 청정원이 1989년 전북 순창에 공장을 건립하고 ‘순창 고추장’을 출시해 시장 1위를 석권하면서 그 이름이 더욱 대중적으로 유명해졌다. 항아리의 숨 쉬는 원리를 이용해 인위적인 미생물 접종 없이도 효소 활성화가 가능한 전통의 발효숙성 방식인 ‘항아리 원리 발효공법’ 및 태양광을 활용한 살균공법을 적용하는 등 전통 제조 방식을 고수해 깊은 맛을 구현해 냈다는 것이 대상 측의 설명이다. 최근에는 미국, 중국, 일본 등 전 세계 72개국으로도 수출하고 있으며, 지난 5년 동안 해외 매출이 연평균 10%씩 성장해 지난해에는 3000만 달러를 돌파했다. 고추장은 특유의 감칠맛 나는 매운맛 덕분에 외국에서도 가장 인기 높은 장류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장류 수출 비중은 고추장이 59.3%로 선두를 달렸다. 이어 간장 25.4%, 된장 15.3% 순이다. 그러나 장의 원조는 콩을 발효시킨 된장이다. 된장의 ‘된’은 물기가 적고 점도가 높다는 의미로 액체 형태의 간장과 구분되지만, 지금처럼 간장과 된장이 따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라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장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매뉴얼까지 등장했다. 당시 문헌 ‘구황보유방’에는 “콩 1말을 무르게 삶아 밀 5되를 볶아 함께 섞어서 메주를 만든다”고 나와 있다. 지금같이 콩만으로 메주를 만들어 된장을 담그는 방법은 ‘증보산림경제’에 나오는데 “콩을 물에 씻고 하룻밤 물에 담갔다가 건져서 익힌 것을 절구에 찧어서 둥글게 메주 모양으로 만든 다음 한 치 정도의 반월형으로 썰어 만든다”고 설명돼 있다. 이처럼 제조법이 보편적으로 알려진 덕분에 된장은 고추장과 간장에 비해 오늘날까지도 집에서 직접 담그는 ‘재래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다. 업계에 따르면 소비자의 약 50%가 자가 조달을 통해 된장을 먹는다고 알려졌다.●고추 도입 전 고추장에 호초·천초 등 사용 그러나 간장과 고추장에 비해 레시피 개발이 이뤄져 있지 않은 데다 맞벌이 가정과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최근 몇 년 동안 된장 시장은 정체 상태다. 지난 5년 동안 된장 시장 규모는 약 500억~600억원대에 머물러 있다. 간장과 고추장이 약 1300억~1900억원대 수준인 것에 비하면 절반에도 크게 못 미치는 셈이다. 쌈장이 2011년 630억원에서 2016년 700억원으로, 초고추장이 2011년 310억원에서 2016년 400억원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과도 대비된다. 업체들은 저마다 연구개발에 공을 들이며 현대인의 입맛에 맞춘 각종 제품을 출시하는 등 ‘된장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대상 청정원은 전국 각지의 균주 1000여종을 수집한 끝에 메주를 발효에 사용하는 ‘바실러스’라는 균주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또 순창 지역 명인들과의 협업을 통해 선별해 낸 발효 균주를 활용한 ‘순창발효메주’도 개발했다. 샘표는 자체적인 된장의 맛을 좌우하는 곰팡이와 향을 결정하는 고초균을 함께 사용하는 자체 ‘복합 발효’ 기술을 개발했다. 또 콩알 하나하나에 고초균을 결합하는 ‘콩알메주공법’으로 특허를 받았으며, 콩을 절구에 찧어 메주를 만들던 전통 방식에서 착안해 절구와 같은 온도와 압력, 물의 양으로 메주를 만들어 내는 기술도 자체 개발했다는 설명이다.●1890년대 이후 개량식 간장 보급 된장의 동생 격인 간장도 우리 식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조미료다. 간장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조선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콩으로 만든 메주를 이용해 간장과 된장을 함께 얻는 ‘병용장’을 만드는 방법이 18세기 ‘증보산림경제’에 등장하는데, 이 방법이 오늘날의 간장 담그는 방법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1890년대에는 일본에 의해 개량식 간장이 보급됐으며, 이후 1940년대 대량 유통되기 시작했다. 업체별로 분류가 조금씩 다르지만, 간장은 제조 방식과 사용법에 따라 종류가 나뉜다. 한국의 전통 제조 방식에 따라 100% 콩으로만 만들어진 간장을 ‘조선간장’이라고 하는데, 염도가 높고 색상이 옅어 음식의 본래 색을 유지하면서도 간을 맞출 수 있다. 이 때문에 주로 국, 찌개 등 국물 요리의 맛을 내는 데 주로 쓰이며, 각종 나물을 무칠 때도 사용된다. 콩과 소맥을 발효시켜 만드는 ‘양조간장’은 감칠맛이 뛰어나고 깊고 풍부한 향이 특색이다. 열에 의해 향이 사라지기 쉽기 때문에 열을 많이 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부침 요리나 생선회를 찍어 먹는 소스, 무침, 샐러드 드레싱 등으로 쓰기에 적합한 간장이다. 그러나 워낙 감칠맛이 뛰어나 일반적인 볶음이나 구이, 찜 요리에도 두루 쓰인다. 일반적인 양조간장에 맛의 주성분인 아미노산 함량이 높은 간장을 혼합한 것은 ‘진간장’이라고 한다. 양조간장의 풍미를 유지하고 있는 데다 열을 가해도 맛이 잘 변하지 않아 가장 많이 사용되는 간장이다. 장조림, 갈비찜, 간장게장 등에 주로 쓰인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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