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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키섬의 성모궁(일본속의 한국문화:12)

    ◎신공황후의 신사… 임난·일제침략 악용/“궁밑에 적의 목10만구 묻었다” 악감정 촉발/성모상은 한국과 일본 잇는 “뱃길의 수호신” 신공황후를 모신 이끼섬의 성모궁은 크지도 않고 오래되어 보이지도 않았다.그러나 통신사가 이곳에 묵고 가던 3백년전에도 확실히 성모궁이 있었으니까 상당히 오래된 신사임에 틀림없다. 옛날의 통신사들은 성모를 모셨다는 설명을 듣고 일본인들의 미신을 비웃었다.그런 신공황후라는 무당이 신자를 정벌했다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한국침략의 구실로 이용되었다.한가지 신화가 이토록 오래 침략전쟁에 이용된 예는 달리 없다할 정도로 성모궁에 모신 귀신은 우리에게 무서운 마귀인 것이다. 중상씨가 두주를 찾는동안 안내판을 들여다 보았더니 엄청난 거짓말이 적혀 있었다. 중애천황의 부인 신공은 구주의 당진에서 이끼섬을 향해 3천2백70척의 군선을 출발시켰다.그때 배가 항해하는데 좋은 동풍이 불었다.일기를 그래서 풍본이라 했는데 황후는 이곳에서 잠시 바람을 기다려 다시 대마도의 악포로 갔다.삼한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황후는 이곳에 다시 들러 앞서 지어주신 풍본이란 이름 대신 승본이라 지어주셨다. ○안내판에 학살 숫자 안내판을 읽고 있노라니까 사주가 흰 제복을 갈아 입고 나왔다.손에는 항아리 하나가 쥐어져 있었는데 표면의 커피색 유약이 일부 떨어지고 깨어지기까지 한 골동품이었다. 『이것좀 보아 주십시오.혹시 도자기를 볼줄 아신다면 이 항아리의 제작연대를 가리켜 주십시오』 속으로는 웃음이 터져 나올듯하였으나 웃을수는 없었다.도자기 감정을 할 처지도 아니었지만 신공황후라는 무녀의 존재 자체가 하늘로 올라간 이마당에 이 항아리 하나를 가지고 다시 지상에 끌어내릴수 없기 때문이었다.항아리에 쓰인 글귀는 이러했다. 『진입,일본이끼섬 풍본궁 성모대보살 귀신을 위한 다항아리.이것을 바치나이다.희재 백양내촌생천정 20연 경백』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항아리가 제작되었다는 천정20연이란 해다.본시 천정은 19년으로 끝나고 임진위란이 일어나는 천정20년을 문록 1연으로 고쳤다.그래서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을 문록·경장의 역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항아리가 제작된 해가 1592연 바로 임진년이었다.그러고 보니 이 항아리의 내력을 알법도 하다. 희재 백양내촌이란 자는 풍신수길의 침략군이 대거 이끼섬에 도착하니까 기뻐서 이 항아리를 성모궁에 바친 것이다.그 뜻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신공황후가 옛날에 삼한정벌을 하고 돌아왔듯이 이기고 돌아오게 해달라는 기도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안내판의 끝부분을 읽어보니 끔찍한 학살사실이 숫자로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적의 목 10만1천5백을 들고 돌아온 황후는 풍본의 해안가에 굴을 파서 묻고 그 위에 석축지를 쌓아 보전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성모궁의 기원이다』 ○조작된 역사의 표본 필자는 10만1천5백의 목을 잘라서 바로 이 성모궁 밑에다 묻었다는 구절을 보고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물론 신공황후의 이야기는 후대에 조작된 역사왜곡의 표본이지만 이 거짓말이 그뒤 정말 있었던 일처럼 꾸며져서 일본인의 대한인감정을 촉발시키고 그것을 다시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침략전쟁을 자행하여 수백만명의 인명을희생시켰으니 치가 떨리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신공황후의 신화는 임진왜란때 이용되었을 뿐 아니라 19세기에 와서는 일제침략전에 이용되어 『한국은 본시 일본땅이었다』『조선은 신공황후때부터 일본의 지배를 받아 왔다.그러니 지금의 한일합방은 잃었던 우리땅을 되찾는 것이고 조선인은 본래의 주인을 찾아 돌아오는 것이다』라는 침략논리를 발전시켰다. 일본식민주의 사학자들은 신공황후의 신화만 가지고서는 증거가 불충분하니까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문을 훼손하여 1백년,2백년 틀리는 기사를 신공황후에 맞추는가 하면 백제왕이 위왕에게 하사했다는 칠지도를 거꾸로 위왕이 백제왕에게 바친 것처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 지금도 비교적 양심적이라 평가되고 있는 고대사학자,예컨대 이노우에 히데오(정상수웅)와 같은 일본학자가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아주 부정하는데 망설이고 있다.신공황후의 이야기는 어린이용 만화같은 것인데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 우화 하나때문에 한 민주이 한 민주을 증오하고 죽이고 한 2천년 역사가실제로 벌어지고 만 것이다. 과거의 일은 앞으로도 일어날수 있다. 물론 일어나지 않을수도 있다.그러나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이끼섬의 성모궁 같은 것을 과감히 헐어 없애거나 본래의 성모상으로 되돌려 보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성모는 한국과 일본을 잇는 항군의 수호신의 어머니였다.뱃사공들이 그녀에게 빌고 그녀를 배안에 간직하고 떠나면 반드시 살아서 돌아온다는 해신이었다.그런데 어느듯 위구가 이바다에 득실거리게 되자 도적놈들과 침략자들의 목숨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바뀌고 말았다.성모가 어디 도적놈을 지켜주어서야 되겠는가.도적을 막아주어야 한다.침략자를 응징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한 마귀할머니란 누명은 벗기 어려울 것이다.
  • 단군릉/축조형태 고구려 양식

    ◎본사,북의 단군릉 발굴관련 보고문·논문 긴급입수… 최무장교수 분석/“김일성이 단군 실체인물로 찾아줬다” 주장/고고학자료까지 정치에 이용,주민을 기만 북한 사회과학원은 『단군의 무덤을 발굴했다』고 지난 10월2일 공표한데 이어 이와 관련한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학술발표회』를 같은달 12∼13일에 평양인민학습당에서 가졌다.서울신문은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소개되었던 북한 사회과학원의 『단군릉 발굴 보고문』과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학술논문』을 긴급입수,생생한 사진과 함께 건국대 최무장교수(고고학)의 해제 및 북한의 단군릉 주장에 대한 고고학적 견해를 싣는다. 발굴 보고문에 따르면 이른바 단군릉은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에서 서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대박산의 기슭에 위치한다.릉은 돌로 쌓은 고구려 양식의 돌칸흙무덤(봉토석실묘)으로 반 지하에 축조한 주검칸(묘실)의 크기는 동서 2백73㎝,남북 2백76㎝,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1백60㎝이다.벽체는 돌로 쌓은뒤 뚜껑을 덮었고 입구도 돌로 막았다.출토물은 남녀2인의 사람뼈로 모두 86개이며 이 가운데 단군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키는 1백70㎝정도이다.이 뼈는 전자성공명법으로 측정 한 결과 지금부터 5011년 전이라는 수치가 나왔다.사람뼈 이외에는 금동왕관편 2점 및 토기편,관못 6개가 나왔고 무덤앞에는 단군릉이라 새긴 표식비와 화강암제의 상돌,무덤좌우에 돌사자가 각각 하나씩 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단군의 무덤이 고구려 무덤 양식으로 되어있는 것은 그 시기에 개축했기 때문』이라며 『고구려 사람들은 시조인 동명성왕과 함께 단군도 숭배했다』고 쓰고 있다.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학술발표회』에는 모두 15명의 학자가 나섰다.먼저 전영률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대한 수령님이 단군을 실체한 인물로 믿아주시었다…』는 식.이어 고고학연구소의 박진욱과 장우진 김고경이 차례로 나서 『장지연의 「위암문고」권7에 평안도 강동군의 서쪽에 단군묘가 있다고 분명히 기록되』면서 『이번에 나온 단군의 뼈는 북한에서 나온 신석기시대 이후 인골 가운데 가장 크며 이뼈를 사회과학원의 전자상자성공명연대측정장치로 누적선량을 각각 30번과 24번 측정한 결과 50 11년이 산출됐다』는 주장을 폈다. 다음은 고조선이 뛰어난 문화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 중심지는 평양이었다는 주장이 주류를 이룬다.김일성종합대학의 현명오는 『첫 문명국가인 고조선의 도읍지는 바로 평양』이라며 『건국연대는 절대연대로 5011년,즉 기원전 3천년대 초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이번 발표와 연관시키고 있다.또 고고학연구소의 석광준과 언어연구소의 유열은 『평양은 고대문화의 중심지로 단군조선 시기부터 「심지글자」라는 민족글자를 가졌었다』고 주장했다. 이 학술발표회는 역사연구소의 조대일과 손영정이 나서 『평양의 단군사당과 강화도 마니산 첨성단등지의 단군숭배와 관련된 의례는 오랜 풍습이었다』면서 『조선은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이후 반만년동안 하나의 핏줄로 이어왔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종합하면 보고문에 이어 무려 15명에 이르는 학자들의 발표내용은 한결같이 너무 정치적이고 유치하다.위에 인용한 내용은 발표의 핵심적인 내용을 거의 담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독자들의 냉정한 판단을 바란다. 필자는 북한학자들이 주장하는 「단군릉」을 고구려무덤으로 본다. 북한학자 자신들도 무덤자체는 고구려 양식의 돌칸흙무덤으로 개축되었고 벽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그러면서 그 안의 사자는 지금부터 50 11년전 묻혔고,바로 단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무덤의 축조형태는 완전히 고구려 양식이다.출토유물중 금동관편과 관못6개는 무엇을 말하는가.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금속을 사용한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문명이 기원전 3천5백년,인도의 인더스문명이 기원전 2천5백년,중국의 황하유역의 상문명이 기원전 1천5백년이라는 사실은 세계가 주지하는 바이다. 고고학은 역사의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고 없는 부분을 보충하며,더 나아가 인류의 기원을 찾는 학문이다.북한은 그러나 「단군릉」에서 보듯 아직도 고고학적 자료를 정치에 이용하여 북한주민을 기만하고 「위대한 수령」을 찬양하는데 열중하고 있다.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이른바「단군릉」도 그 자체로 고구려의 유적으로는 대단히 큰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어진다.필자는 북한학계가 이러한 왜곡이나 과장에서 벗어나 정도를 걷는다면 이제부터라도 민족사의 빛나는 성과를 거둘수 있게 될것으로 확신한다.
  • 성탄절… 라이 따이한을 생각한다(박갑천칼럼)

    『피가 켕긴다』는 속담이 있다.『피가 당긴다』고도 한다.핏줄끼리는 저도 모르게 서로 끌어당기는 친화력이 있음을 두고 쓰인다.늘봄 전영택의 단편 「후회」에서 지긋지긋한 남편 명구가 거지 몰골을 하고 아내를 찾아온 대목을 묘사하면서도 나오는 말이다.『…아무리 내외간이나마 몰라보게 되었다.어린 것들이 알아본 것이 용하다 하였다.피가 켕긴다는 말이 과연 옳다 생각하였다』 그러기에 예씨에게서 난 주몽의 아들 「유리」(한자표기는 유이·유이·유류등 여러가지)는 피가 켕겨 망명한 아버지를 그린다.「일곱모난 돌위의 소나무 아래」감추어둔 아버지 유품을 찾아 산골짝을 헤맨다.드디어 자기집 소나무기둥 주춧돌 사이에서 도막난 칼을 발견한 그는 졸본으로 가서 아버지 동명성왕을 만난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 이게 핏줄의 부름이다.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장자」(장자:외편산목)에도 자상호란 사람이 공자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보배 보다 더 보배로운 핏줄의 얘기를 써놓고 있다. 가국의 임회란 사람이 천금의 보배는버려둔채 갓난애만 업고 도망친다.어떤 사람이 묻는다.『돈을 위해 하는 것이라면 보배 보다 갓난애 값이 싸지 않은가.번거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라면 갓난애 쪽이 더 번거롭지 않은가.그런데도 천금의 구슬을 버려두고 갓난애를 업고 달리는 까닭이 무엇인가』 이에 대한 임회의 대답은­『천금의 구슬은 나와 이익으로 맺어져 있지만 이 갓난애는 나와 운명에 의해 맺어져 있다』.이익으로 맺어진 것은 위급할때 버릴수 있으나 운명에 의해 맺어진 것은 그럴수록 거두어들이게 마련이라는 뜻이었다.「장자」는 이 얘기로부터 담담하여 오래가는 군자의 교제와 달콤하여 이내 끊기는 소인의 교제의 차이로 자연스럽게 말줄기를 옮겨가고 있다. 우리나라와 베트남의 수교 한돌을 맞으면서 『라이 따이한(한국­베트남 혼혈아)을 돕자』는 움직임이 번져나고 있다.우리와는 척진일도 없으면서 국제역학관계 따라 그나라 싸움판에 끼어들게 되었고 그 와중에서 우리 젊은이와 그곳 여성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라이 따이한이다.그 우리의 핏줄들이 서러운 생활을이어오고 있다는 소식은 간간이 전해 들어오는 우리들이다.전란을 겪은 우리들은 혼혈아의 아픔까지도 알고 있는 처지가 아닌가. 나라와 겨레의 「운명에 의해」맺어진게 라이 따이한이다.어려웠을 땐 잊고 지냈다 치자.뿌린 씨앗에 무심해서는 안된다.피가 켕기지 않은가.오늘이 크리스마스다.
  • “백제역사·미술·음악사의 총합체”/「금동용봉향로」발굴의의를 말한다

    ◎“불교·도교사상에서 신앙·풍속까지 포용/“퇴폐로 내부붕괴” 기존의 시각 완전 불식/정밀투시촬영 통해 명문 찾아내면 획기적 자료 고대왕국 백제의 신비를 간직한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출토는 무녕왕릉에 이은 백제강역 최대의 고고학발굴 성과로 꼽히고 있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출토된 이 향로는 특히 백제 후기 시대사연구의 귀중자료로 부각되었다. 이와 더불어 미술사 및 음악사·사상사·민속연구 등에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학계는 전망했다. 그래서 서울신문은 이 향로의 발굴성과를 정리하고 학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전문학자의 대담을 마련해보았다. ▲최몽용교수=한해가 저물어가는 마당에 부여에서 소위 박산로가 하나 나왔습니다.삼불 김원용선생이 돌아가신 것과 함께 올해 역사·고고학계의 큰 일로 기억될 것같습니다.이 박산로는 철저히 파괴되었으리라는 마지막 도읍지 부여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물건이 아닌가 합니다.해외에 내보내도 정말 손색이 없는 유물 하나를 건진 셈입니다.무령왕릉 발굴이후 최대의 경사입니다.그러나 나온 물건이 워낙 대단하다보니 유물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느낌입니다.박산로가 나온 배경도 좀 살펴봐야하지 않을까요. ▲이기동교수=그렇습니다.그동안 백제말기의 분위기는 퇴폐적인 것으로 묘사되곤 했습니다.그런데 문화는 국력에 비례하게 마련이지요.백제말기에 이런 탁월한 공예품이 나왔다는 점에 미루어보면 백제가 노쇠기에 접어들어 내부붕괴가 가속화되는등 지리멸렬해져 멸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고구려의 경우도 말기인 6·7세기의 벽화를 보면 웅혼한 기상이 살아있어요.국력이 쇠퇴하면 미술이나 공예도 타락상을 보이는 법입니다.그러나 고구려나 백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특히 백제의 경우는 비록 전성기는 아니라 하더라도 한창 국력이 뻗어나가려는 즈음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최교수=중국 한대에 박산로는 왕통을 잇는다는 상징성을 지닌 물건이었습니다.태자를 지명할때 박산로를 주었지요.또 박산로는 귀족도 아닌 왕의 무덤에서만 출토됐습니다.이렇게 볼때 비록 7백여년의 시차가 있지만 능산리 박산로는 백제의 왕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박산로가 출토된 곳은 나성의 동문밖입니다.발굴유구를 보면 이 박산로는 그 자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국가존망의 위기가 아니었으면 그런 곳에 묻혀있을리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이때문에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패주하다가 묻었을 것이라는 추정이지요.당시의 다급했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이교수=이 박산로의 제작시기는 6세기후반이라기보다는 7세기전반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물론 만들어놓고 오랫동안 간직했을 수도 있어요.하지만 백제말기에 해당하는 무왕과 의자왕시대는 사원의 건축이 활발했을뿐 아니라 공예도 융성했던 시기였습니다.박산로가 만들어진 시기도 그 연장선상에서 보아야할 것같습니다. ▲최교수=어떻습니까.이 향로가 앞으로 여러 방면의 학자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지 않겠습니까. ▲이교수=그렇습니다.얼핏 생각해도 역사학과 미술은 물론 수많은 주악상은 우리 음악사를 규명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겠지요.여기에 불교와 도교사상등 신앙과 풍속까지를 포함했기 때문에 향로 하나가 수많은 과제를 안기고 있습니다. ▲최교수=얼마전 스위스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미이라 하나가 생활연구에서부터 해부학까지 연구에 큰 진전을 가져온 것과 비슷하군요.이 박산로로 또 「백제의 얼굴」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지금까지 백제인의 얼굴이 드러나 있었던 것은 서산마애불과 산경문전 뿐이었어요.백제인의 얼굴이 부드러운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던 것도 이때문이지요.부처님 얼굴이었으니까요.그런데 이 박산로의 인물상을 보면 악기를 타면서도 얼굴표정이 약간은 경색되어 있어요. ▲이교수=향로의 제작연대 추정과 무관치않은 지적입니다.그 시기는 결국 삼국항쟁의 마지막 고비였어요.장기간에 걸친 전란속에서 먹느냐 먹히느냐는 사활이 걸린 상황에서는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문화는 사회상을 반영하니까요. ▲최교수=한대 박산로가운데는 한사군설치의 주역인 무제의 형인 중산정왕의 능에서 1972년에 발굴된 것이 있습니다.기원전 154년에 즉위했다가 기원전 113년에 죽었지요.이것을 하한으로 이후 것은 중국에서는 나오지 않고 있어요.국립중앙박물관에는 유력자가 중국에서 얻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낙랑시대 박산로가 있습니다.이것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지요.한대 박산로와 능산리의 그것은 약 7백70년의 공백이 있습니다.둘은 몸체는 비슷하지만 뚜껑 위쪽의 봉황과 다리부분의 용은 완전히 다릅니다.그렇다해도 앞으로 능산리 박산로가 백제 것이냐 수입품이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결국은 백제가 그 주역으로 결론이 내려지리라는 생각입니다만.백제의 공예기술이 뛰어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이교수께서 깊이 연구하셨지요. ▲이교수=청동기시대의 청동기 장인은 왕이나 귀족에 버금가는 신분으로 대접받았습니다.신라의 경우에도 성덕대왕신종이나 황룡사종을 주조하는 전문기술자에게는 관직을 부여할 만큼 우대했어요.그들은 당당한 관인이었습니다.마르크스는 이들 기술자를 노예라고 생각했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제가 알기로는 백제의 경우는 공예가들에 대해 더욱 남다른데가 있어요.백제하면 와당이 떠오르지요.일본측 기록을 보면 6세기말 백제의 와박사와 노반박사를 초청했다는 대목이 있어요.노반박사는 뛰어난 금속공장에 대해 국가가 부여한 지위입니다. ▲최교수=사실 신라는 백제기술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이교수=신라의 1급문화재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백제의 도움을 받았지요.황룡사탑을 백제의 아비지가 세웠다는데서도 알 수 있지요.경주의 안압지도 사실 사비성시대 부여의 궁남지를 모방해 만든 것입니다. ▲최교수=결국 그같은 백제의 기술자육성정책이 뛰어난 박산로를 만들 수 있게 했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끄는군요.이제부터 문제는 박산로가 백제문화의 정수를 아낌없이 보여주었지만 그 기원을 어디서 잡아야 하느냐는 겁니다.냉정하게 백제문화가 어디까지가 본질적인 것이고 외부로부터는 얼마만큼의 영향을 받았느냐는 것을 따져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교수=백제의 역사나 문화에 있어 중요하게 고려해야하는 것은 그 지리적 위치입니다.육로로는 고구려를 통해 북방문화를받아들이고 바다로는 중국 특히 양자강이남 오·월의 문화를 받아들였어요.중국의 문화를 수입하는데도 북쪽의 야성적인 호주의 문화와 우아하고 섬세한 한주의 문화를 받아들여 융합시켰어요. ▲최교수=박산로에서도 백제적 요소가 많이 드러나지요.연화문과 산경문이 특히 그렇습니다.이것들은 백제의 심벌과도 같은 것이지요. ▲이교수=이 박산로를 보면 도교신앙이 의외로 백제의 민간이나 지배층에 유행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고구려의 경우 연개소문이 도교에 깊이 빠지는등 번창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백제나 신라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요.그러나 백제에서 도교가 성행했다는 것은 여러가지 자료를 통해 추측만을 했을 뿐이지요.근초고왕의 북진의욕에 대한 막고해장군의 『분수를 알고 나아가지 말자』는 진언이 그것입니다.또 무령왕릉 지석의 「불종율령」도 좋은 예가 되지요.「불종율령」은 「왕은 법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식으로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마치 「수리수리마수리」와 같은 상투적인 도가적 주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일본의 우에다교수같은 학자는 일본의 고대도교도 백제에서 건너갔을 것으로 생각하더군요.능산리 박산로는 그 관계를 밝히는 유력한 물적자료가 될 것입니다.이처럼 사상적으로 볼때에도 이 향로는 백제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모자람이 없습니다. ▲최교수=무령왕릉은 발굴결과 기록과 부합되었지요.이 향로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교수=아직은 명문이 발견되지 않았다지요.그러나 명문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칠지도와 일본 하치망의 인물화상경에서도 뒤늦게 명문이 발견됐지요.일본에 있는 가야의 환두대도에도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금속제품에는 이처럼 명문은 새기는 것이 상례입니다.능산리 박산로도 꼭 정밀투시촬영을 해보아야 합니다.여기서 명문이 확인된다면 그야말로 미술뿐 아니라 역사를 구성하는데도 아주 긴요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긴급대담◁ □이기동 ◇서울대문리대 사학과 동대학원졸업 ◇경북대교수 ◇현 동국대교수 ◇저서:「신라골품제 사회와 화랑도」등 많음 □최몽용 ◇서울대문리대 고교학과 동 대학원졸업 ◇미하버드대 대학원(석,박사) ◇현 서울대교수 ◇저서:「한국문화의 기원을 찾아서」등 많음
  • 백제문화 발굴사업 본격“시동”/부여능산리 유물 대량출토가 촉매역할

    ◎신라유적에 치중,백제권발굴은 부진/정부,“부여 나성·동서고분군 복원 박차”/백제를 패배의 역사만으로 봤기때문에 빛 못봐 금동용봉봉래산향로를 비롯한 4백50여점의 귀중한 백제 유물을 찾아낸 부여 능산리 집터 발굴작업은 새정부들어 적극 추진되고 있는 백제문화권개발사업에 박차를 가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동안 우리의 삼국시대사 규명작업,그 가운데서도 발굴및 복원부문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쪽에 치중되어 있었다.불가피하게 신경을 쓸수 없는 고구려의 경우도 해석의 방향은 빗나가지만 북한당국에 의해 어느 정도 빈곳이 메워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백제문화권의 발굴및 복원작업만이 지지부진했던 셈이다. 이렇게 된데는 오랫동안 어어져 온 권위주의 정부의 이른바 「승자의 논리」가 문화재보존정책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여기에 신라의 경우 통일신라와 고려를 큰 변란없이 거치며 어느 정도 유적·유물의 보전이 가능했다.그러나 백제의 그것은 땅속에 묻혀있지 않는 한 단절이 불가피했던 것.집권자들의 출신지에 따른 영남지역 우선개발 정책도 정책이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문화에 대한 열악한 안목도 문제였다.백제를 패배의 역사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라는 유행가가 있다.이 노래는 흔히 백제 패망의 구슬픈 역사를 담은 흘러간 옛 노래로 치부된다.그러나 이 노래가 1936년 일제에 의해 금지곡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일본에 문화를 전해주고,일본의 고대사를 정립해 준 백제시대를 그리워하는 반일적인 노래』라는 이유에서 였다고 한다.이 간단한 예에서도 백제사의 중요성은 폐부를 찌른다. 백제문화권정비계획은 지난 88년 시작됐다.그러나 백제문화에 대한 역사인식의 전환에 따른 정책추진이었다기 보다는 신라문화권과 상반되는 극단적인 투자외면과 이에따른 해당지역민의 불만을 아우른다는 정치적 이유가 컸다.이 계획은 93년으로 제1단계가 마무리되고 문민정부가 출범한 올해부터 제2단계 사업에 들어갔다.그 결과 이제는 문화재예산도 백제문화권이 신라문화권에 비해 많아졌다. 능산리 유물의 발굴은 백제문화권정비사업을 화합차원에서 더욱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문민정부에는 하나의 큰 선물이다.이와함께 능산리 유물이 정부에는 백제문화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포함한 지속적인 관심을 요구하는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 이민섭문화체육부장관이 22일 발굴현장에서 『부여의 나성 및 나성동문,건물지유적,동·서고분군을 일체화해 정비 복원하는 한편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다른 백제권개발사업도 더욱 힘을 기울여 착실히 수행해 나가겠다』고 밝힌 것도 새정부가 추진한 사업의 성과를 과시하고자 하는 뜻과 함께 이같은 부담을 표현했다고 할수 있다. 이처럼 능산리 유물의 출토는 국가적 보물이 하나 더 나왔다는 것 보다는 역사해석에 있어 거리낄 것이 없는 새정부 출범 이후 국민과 정부 모두에게 백제문화에 대한 재인식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발굴시기가 절묘했다는 것이 역사·고고학계의 뒷이야기이다.
  • 국립중앙박물관장 정양모씨(인터뷰)

    ◎부여 능산리 백제유물박물관 지휘 책임자/“능산리 향로는 분명 백제 것”/전체적 조형·용·연꽃모양 중국과 큰 차이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은 23일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김동용봉봉래산향로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일수도 있다」는 일부의 문제제기에 대해 『백제미술의 특성을 전혀 모르고 하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 산하 부여박물관이 맡고 있는 능산리 백제유물 발굴작업의 지휘 책임자이자 지도위원이기도 한 정관장은 『우선 전형부터가 중국것과 완전히 다르다』고 강조했다. 『향로는 전국시대말에서 한대와 육조시대를 거쳐 원대까지 이어져 왔습니다.현재 중앙박물관에는 중국 향로의 원형을 보여주는 원대 도자 박산로가 있어요.신안앞바다에서 건진 겁니다.능산리것은 준수한데 반해 중국것은 펑퍼짐하고 안정감이 있습니다.산의 배치등 비례부터가 분명히 다릅니다』 정관장은 『전체적인 조형외에도 대략적으로 살펴봐도 용이나 인물들이 중국것은 권위적인데 비해 능산리것은 사실적이고 간결하게 표현되는등 백제적인 특성이 명확히 나타난다』고 밝혔다. 『몸체부분의 연꽃판도 우리 양식입니다.중국향로의 연꽃은 끝이 뾰족하고 과장되어 있지만 우리것은 우아합니다.특히 맨아래 연꽃판에 양각의 문양대신 음각선을 두른것은 백제특유의 기법입니다.또 다리부분(대족부)의 용은 이것이 한국용이지 중국용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할 얘깁니다.또 뚜껑부분에 나타난 새나 산,바위는 부여 규암외리에서 나온 산경문전의 그것이며 산 밑의 화염문도 부여에서 나온 금동제품과 유사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관장은 「이처럼 화려한 백제유물이 출토된 예가 지금까지 없지않느냐」는 일부의 「전래가능성」주장에 대해서는 『그것이 백제문화가 지금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원인이었다』고 말했다. 『이번 경우는 조금 예외지만 금동향로류의 귀중한 유물은 무덤아니면 나올 곳이 없습니다.그런데 백제무덤은 횡혈식으로 도굴꾼들이 마음대로 출입할수 있어요.일제시대 일인도굴꾼들이 다 훔쳐 갔습니다.좋은 유물이 남아있을리가 없지요.이런상황은 고구려도 마찬가지예요.벽화밖에는 남은것이 없지 않습니까.신라도 도굴이 가능한 묘제로 바뀐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정관장은 『훌륭한 유물이 출토된 것도 경사스런 일이지만 이번 발굴로 백제문화에 대해 재인식할수 있는 계기를 만들게 된 것이 더욱 의미있다』고 기쁨을 표시했다.
  • 도교·토속신앙 가미… 독창적 백제유산/부여능산리 유물 출토 의미

    ◎정교한 공예기술 “최상급”/당시 시대상 밝혀줄 사료 이번에 공개된 능산리유물은 가장 백제적인 고대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왜냐하면 한성시대(AD18∼475년)를 고구려문화 영향기로,웅진시대(AD475∼538년)를 중국 남조문화 수입기로 본다면 부여시대(AD538∼660년)는 외래문화를 고유화한 본격적인 백제문화기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유물 김동용봉봉래산향로를 포함한 능산리 출토품은 그 시기가 백제후기로 편년되고 있다.일명 박산로로 불리는 6세기 중반이후의 이 금동향로는 삼국시대 유물로는 처음 출토되어 국보급으로 평가되었다.박산로가 지금까지 출토된 예는 일제시대인 1932년 「조선고적조사보고서」가 밝힌 전평양출토품 낙랑유물밖에는 없다. 그러나 낙랑의 박산로는 당시 중국의 한대유물에 지나지 않는다.따라서 이번 능산리 출토품은 백제문화를 함축했다는 점이 다르다.백제인 본래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많은 인물과 나무와 산이 있는 돋을 새김 그림의 선경인물도가 그것이다. 문양기법으로 볼 때 규암외리에서 출토된 대표적 백제미술품의 하나인 산경문전등의 문양전과 비교되는 이 유물은 백제문화의 우수성과 독창성이 한층 돋보인다.하늘을 지배하는 봉황,수중을 지배하는 용등 우주의 삼라만상이 표현되었다.사상적인 측면에서는 신선사상을 바탕으로 한 도교사상에 우리나라의 토속신앙이 가미되어 당시의 관념세계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그리고 백제의 사상과 공예기술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최상의 국보급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이 김동용봉봉래산향로는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왜냐하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족좌에 보이는 봉황의 형태라든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때 봉황이 웅비하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시가가 6세기 이후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이와 비슷한 형태의 향로가 중국 수나라의 도자기향로에서도 보인다.또한 연꽃의 표현이 6세기에 나타나는 고구려 벽화무덤에서 발견되는 연꽃과 유사한 점을 갖고 있다. ▷향로의 유래◁ ◎일명 박산로… 중국 한초부터 사용/황실·귀족등 상류사회에서쓰여 향로는 중국의 전국시대말 한초부터 사용되었다.향로 가운데 승반의 중앙에 다리 하나를 세우고 향로 몸통의 뚜껑이 산모양을 이룬 것을 박산로라고 한다.산모양 부위 곳곳에 구멍이 있어 향을 피우면 그 연기의 모습이 마치 봉우리 주변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생동하는 산의 기운을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볼수 있다는 것이다.당시의 향로는 서방의 훈향풍습이 전해지면서 처음 만들어졌다.이는 일반적으로 「훈로」로 불리웠으며 불교와는 관련이 없었다.박산은 동해중의 신산이라는 봉래산을 지칭한다든가 중국의 서쪽 화산을 지칭한다든가 하는 여러 설이 있다.하지만 명확한 지명이 아닌 당시 황실 귀족등 상류사회에 널리 유행하던 신선사상,즉 도교사상과 관련된 상상의 지명이라는 해석이 옳을 것이다. 박산은 수미산을 본뜬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것은 불교적인 관점에서 본 것이며 역시 상상의 산임은 물론이다.불교적인 색채는 남북조시대부터 등장하며 대략 이 시기부터 박산이라는 일반적인 명칭이 부여되었다.이 시기의 대표적인 박산로는 용문석굴 21굴 상형천개와 정광3년명(522년)화상석에서 볼수 있다.
  • 민족 수호신 양만춘(온가족이 함께 읽는 우리역사:24)

    ◎안시성전투서 「수십만명의 당군」 물리쳐/살수·한산도대첩 못지않은 위대한 승전/“정사에 기록없다”… 국사교과서에 안실려 645년 6월 중국 당나라의 태종은 수십만명의 병력으로 고구려의 안시성(현 중국 요령성 해성현 영성자고성)을 에워쌌다. 당에 앞서 중국을 통일한 수왕조가 598∼614년 4차례에 걸쳐 고구려에 침입했다 모두 참패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 침략군은 사기가 드높아 안시성쯤은 금세 함락시킬 듯했다.당군은 이미 개모성·비사성·요동성·백암성등 주변의 주요성들을 빼앗은데다 고구려의 구원병 15만명을 격파했기 때문이다. 안시성은 고립무원의 상태였다.그러나 당군의 총공격에도 안시성은 끄덕도 하지 않았고 침략군은 60여일만에 포위를 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안시성전투는 고구려의 살수대첩(612년),고려의 귀주대첩(1019년),임진왜란 때의 한산도대첩(1592년)에 못지않은 한국사상 위대한 승전이었다. 역사에 있어서「가정」이란 의미없는 것이긴 하나 만약 안시성이 당군에 함락당했다면 이후의 한국사는 어떻게 전개됐을까.고구려는 당시 정예군 15만명을 요동일대에 보내 당군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섬멸된 뒤였으므로 당태종이 친히 이끄는 침략군에게 멸망했을 가능성이 높다.또 대륙세력의 침입에 방파제 구실을 해왔던 고구려의 멸망은 백제·신라의 존립에도 큰 영향을 미쳐 결국 한민족의 국가는 사라지고 이 땅은 중국의 변경지대로 전락했을 것이다. 당이 이후 혼자의 힘만으로는 고구려를 정복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신라와 연합,고구려·백제를 멸망시키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신라가 독립을 유지해 민족의 정통성을 이은 것과는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현행 고교 국사교과서는 안시성전투의 승리를『백제·신라까지 보호하는 민족수호의 의의를 지닌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시성싸움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는 누구인가. 살수대첩의 을지문덕,귀주대첩의 강감찬,한산도대첩의 이순신등이 그 이름을 후세에 남겨 길이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과는 달리 안시성을 지킨「민족의 수호신」은 그 실체가 뚜렷하지 않다. 현재 나와 있는 많은 역사책 가운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나온「한국사」등 일부 사서에서만「양만춘」을 안시성주라고 밝히고 있을뿐 고교 국사교과서를 비롯한 대부분의 역사책은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그의 이름이「삼국사기」「삼국유사」등 우리의 정사는 물론 중국의 어떤 정사에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조선 중기이후 나온 윤근수(1537∼1616)의 월정만필,김시량(1581∼1643)의 부계기문,성호사설의「경사문」,동사강목의「고이」,박지원의 열하일기등에는 양만춘을 안시성주로 기록하고 있다.특히 월정만필과 부계기문은「양만춘」이야기가 중국측 사서인「당태종동정기」「당서연의」등에 나온다고 밝히고 있어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의 정사가 그들이 거꾸러뜨리지 못한 적장의 존재를 묵살한 것은 이민족과의 관계에서 당한 수치를 기록하지 않는 그들의 일관된 역사서술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역사책에서마저「양만춘」을 부인할 이유는 없다.자랑스러운 선조를 한명 발굴한다는 의미말고도 중국측에 의해 왜곡된 우리 역사를 되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 시급한 한·중 문화교류/서동철 문화부기자(오늘의 눈)

    중국이 최근 발해유적 발굴사상 최대 규모인 2백92기의 고분을 발굴했다고 외신은 전한다.장소는 흑용강성 녕안시 발해진 남쪽 모래언덕이라고 한다.발해가 오랜세월을 두고 도읍했던 상경성이 있는 바로 그 자리이다.당의 장안성과 흡사했다는 상경성은 당시 아시아에서 두번째 가는 큰 도성이었다. 그 광대무변한 발해의 도성 가까이에 많은 무덤이 있고 많은 유물이 매장되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그러니 외신보도에 새삼 놀랄 일도 아니다.문제는 외신이 전한대로 이 고분들의 묘제와 「극히 보기 드물고 연대구분이 가능해 학술적 가치가 높은」유물들을 중국측이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는 점이다.그들은 지금까지 발해를 자국의 역사에 편입시켜 왔기 때문이다.중국측은 발해 정효공주묘의 안내문에 적은대로 「발해는 속말말갈사람들이 AD698∼926년에 우리나라(중국)동북과 지금의 연해주 지역에 세웠던 지방정권」이라는 것이 공식 입장이다.안내판 바로 밑에 있는 묘비가 발해왕을 「황상」이라하여 당의 황제와 대등한 위치임을 증명하고 있음에도 그렇다. 주지하다시피 영주(지금의 조양)에서 요하를 건너 지금의 돈화까지 2천리를 달려와 발해를 건국한 주축세력은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이었다.역사는 분명히 그렇게 기록하고 있으며,고분이나 성곽등에서도 고구려의 전통이 확연히 드러난다.또 오늘날 중국 동북지방인 만주는 역사적으로 이른바 중원과는 구분된다는 것이 정설이다.따라서 발해사는 중국사의 일부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그럼에도 중국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역사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보는 실사구시의 학문이다.그럼에도 그동안 한·일교섭사 못지않게 한·중관계사도 서로간의 이견이 적지않았다.자민족 중심주의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왕래가 없었던 탓도 클 것이다.이제 발해사의 올바른 평가를 위해 두나라의 학술교류가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그것은 국가차원의 외교적 노력이 뒷받침 될때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 주도권 잡는 신라(온가족이 함께 읽는 우리역사:23)

    ◎진흥왕때 국력배양… 3국통일기반 닦아/한강유역 확보… 중국직교류의 발판구축/호국불교 널리 퍼뜨려 국민 일체감 조성 고구려·백제·신라가 한민족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3국을 통일한 나라는 만주의 지배자 고구려도,건국 초부터 중국·왜등지로 활발히 대외진출을 했던 백제도 아니었다. 한반도 동남쪽 좁은 지역에서 뒤늦게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던 신라였다.신라가 결국 3국간 싸움에서 승리한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신라가 3국을 통일하는데 토대가 된 국력배양은 제24대 진흥왕(540∼576년)때 그 기초가 이루어졌다. 진흥왕때 신라의 국력이 일취월장한 요인으로는 ▲활발한 정복 활동 ▲한반도의 허리,한강유역의 확보 ▲「국사」편찬등을 통한 왕권 확립 ▲적극적인 불교 확산에 따른 국민적 일체감 조성 ▲화랑제도를 통한 청소년교육과 전사양성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한 요인을 들라면 역시 한강유역의 확보를 꼽아야 할 것이다. 한강유역은 한반도의 허리 부분으로 예부터 이곳을 북쪽 세력이 확보했을때는 남쪽 세력이 궁지에 몰렸고 남쪽 세력이 차지하면 북쪽 세력이 약화되기 일쑤였다. 백제가 한성에 도읍한 이래 한강유역은 5백년 가까이 백제의 땅이었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을 받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피살되자 백제는 이 지역을 포기하고 475년 웅진(현 충남 공주)으로 도읍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절치부심하던 백제는 550년 신라의 진흥왕과 동맹을 맺어 고구려를 격파해 한강 하류 유역을 탈환했다. 이때 신라는 한강 상류유역인 죽령이북 고현(지금의 철령)이남의 10개 군을 차지했다. 진흥왕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553년 동맹관계인 백제를 기습해 한강유역 전부를 독차지했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함으로써 통일을 위한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한 것은 물론 고구려·백제의 직통로를 차단하는 동시에 스스로는 대중국 교류의 기지를 확보했다. 진흥왕은 이후 더욱 활발하게 정복전을 펼쳐 562년 가야를 완전정벌했으며 동북쪽으로 진출해 함경북도 일부지역까지 차지했다. 그 당시 진흥왕이 넓힌 영역은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서울 북한산 ▲함남 함주군 하기천면 진흥리 ▲함남 이원군 동면 마운령에 세운 4개의 진흥왕순수비에 잘 나타나 있다. 이와함께 진흥왕은 대내적으로 551년 개국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왕의 권위를 높이고 자주성을 표방했다. 또 「국사」라는 역사책을 펴 유교통치 이념을 강화하는 동시에 호국불교를 널리 퍼뜨려 국가통치에 적극 활용했다. 이밖에 화낭도를 창설,청소년의 기개를 드높였으며 전장에서는 이들을 전사로 활용했다. 진흥왕은 한반도 한구석에 쳐박혀 고구려·백제로부터 번갈아 시달림을 받던 소국 신라를 중흥시킨 것이다. 이때의 국력배양이 1백년쯤 지나 3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힘의 바탕이 되었다. 7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43세에 생을 마감한 신라 24대 진흥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버금가는 위대한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 향토문화 역군(외언내언)

    1979년 충북 중원군 가금면 입석마을에서 1천5백년전 고구려의 비석이 발견되어 학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마을 어귀에 서 있던 이 선돌(입석)의 이끼를 제거했더니 4백50여자의 비문이 나왔고 이를 해독한 결과 한반도에서는 처음 발견된 고구려비석임이 판명되었다.고구려의 많은 관직명이 나오고 고구려가 영토를 확장한 사실을 기록한 탁경비임이 밝혀졌다.뒤에 중원 고구려비로 명명된 이 중요한 유적을 발견한 것은 전문학자들이 아닌,충주지방의 향토문화 애호가들로 구성된 「예성(성:충주의 옛이름)동호회」였다.휴일이면 충주와 충북일대의 절터와 유적지를 답사하던 아마추어 회원들이 한국사연구의 획기적 자료인 고구려비를 발견한 것이다. 지방에는 대개 향토사를 발굴하고 유적을 답사하며 향토지를 발간하는등 향토문화를 지키는 숨은 일꾼들이 있게 마련이다.이들은 전문학자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분야를 부지런히 탐구하고 조사한다.이 향토사가들의 끊임없는 노력은 향토문화의 맥과 전통을 이어주는 역할을 해줄 뿐아니라 때로는 그들의 업적이 역사의 공백을 메워주는 복원의 기능을 하는 수도 있다.고구려비의 발견이 그러한 대표적 예다. 이렇게 향토문화를 가꾸고 지키는 「파수꾼」들에게 서울신문사는 향토문화대상을 수여하고 있다.전통문화부문과 함께 현대문화부문도 수상대상으로 포함시키고 있다.지방에서의 문화예술활동은 아직도 희생과 악전고투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지난 81년 제1회 시상식때 현대문화부문 장려상을 받은 지방도시의 극단대표는 고속버스로 상경하면서 계속 울었다고 한다. 신문사에서 자기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인정하고 수상자로 뽑아준 데 대한 감격 때문이라고 했다.12년이 지난 지금 그 지방극단은 탄탄하게 성장해 있다.오늘은 제9회 향토문화대상 시상식이 열린다.향토문화의 역군들에게 아낌없는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 소년장사,씨름판에 돌개바람을(박갑천 칼럼)

    씨름의 모래판에 돌개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소년은 하얀 살갗의 귀공자다.17살 미성년자이니 소년이라 부르는 것이지만 헌헌장부지 어찌 소년인가.백승일.그는 엊그제 천하대장사 타이틀까지 차지함으로써 삼성들린양 올해 5관왕을 거머쥐었다.이름높은 언니씨름꾼들이 막내인 그앞에 시르죽어버린다.화려한 기술을 적절하게 고루 섞어쓰고 이어쓰는 그를 이겨낼 적수는 당분간 없을것 같다는 얘기들이다. 이 소년장사를 보면서 무신으로서 공적이 빛나는 장무공 황형의 소년시절 일화를 떠올린다.그또한 나이 열여섯에 이미 건장한 성인의 기골을 갖추었던 듯하다.그 무렵부터 씨름판이면 모두 찾아다니면서 휩쓸어버린다.그러자 그가 나타나면 씨름꾼들이 꽁무니를 빼는 바람에 씨름판이 깨졌다고 한다.삼포왜란(삼포위란)때 왜적들이 떨었던 장수,북쪽 반란야인들의 오금을 못펴게 했던 장수가 그 아닌가. 소년장사를 말하려면서는 이징석·이징옥형제를 빼놓을 수 없다.무신인 그들은 단종이 손위하는 계유정난에 공과가 엇갈리는 것이지만 소년시절부터 힘으로알려진 형제였다.형인 징석이 열여덟살,아우 징옥이 열네살이 되던 해의 어느날 어머니가 살아있는 멧돼지고기를 먹고싶다고 말한다.형 징석은 곧 멧돼지를 화살로 쏴 잡아가지고 와서 어머니를 기쁘게 했다. 아우 징옥은 이틀후 돌아왔는데 어머니말에 따라 멧돼지를 산채로 잡아왔다.그후 징옥은 호랑이를 때려잡고도 있다(차천로의「오산설림초고」).기록에 안보여 그렇지 그 또한 전국의 씨름판을 누비고 다닌 것인지 모른다.오늘의 소년장사와 장무공 아니면 이징옥이 샅바를 잡는다 할때 결과는 어떨 것인지. 씨름은 아득한 상고시대부터 있었던 힘겨룸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고구려의 태조 주몽이 왕위에 오르기전 오부족장들이 벌인 고추가(고추가:족장의 존칭)겨룸의 경기종목 가운데 씨름(각저)이 끼여있는 것도 그를 말해준다.고구려 고분의 씨름무덤(각저총)벽화는 그 사회에서의 씨름의 비중을 말해준다고도 할것이다.그런만큼 씨름은 우리겨레와는 길고긴 역사를 함께 살아 내려오는 배달겨레의 경기이다.다른 경기와 똑같이 볼수 없는 까닭이거기에 있다.온겨레가 나서서 활성화하면서 보다더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야 마땅하다. 백승일 같은 씨름판의 보배가 계속 나와야 한다.나올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묻혀있는 재목을 캐내야 하고 그재목을 키워내야 한다.기량은 끊임없이 연구개발돼야 하고 세련된 경기운영의 전통도 세워나가게 돼야겠다.
  • 한·중·일학자들 「임나일본부설」 논쟁

    ◎중 학자 “2∼3세기 왜여왕 한반도 지배” 주장/한국측 “왜통일 안된 상태·입증유물 없다” 반박 한일 고대사의 주요쟁점들인 「임나일본부설」「칠지도 명문 해석」등이 한·일·중·몽골등 4개국 역사·고고학자들이 참석한 국제학술회의에서 제기돼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20∼21일 이틀동안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4회 아세아사학회 서울연구대회에 참가한 중국측 학자들은 논문발표를 통해 「2∼3세기에 위의 세력이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일본에 소장중인 칠지도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사여한 것」이라고 밝혀 한일 양국 학자들로부터 집중공세를 받았다. 이 대회 중국측 대표인 왕중수교수(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는 「3세기의 동아시아」란 기조강연을 통해 『일본 기내지방에 근거지를 둔 사마대국의 비미호여왕은 2세기 말부터 3세기 초 전왜국의 왕이 되었으며 한반도 남부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이같은 해석은 비미호를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왕후와 같은 인물로 본 것으로,결국 일본학계에서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삼국시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진출,가야에 임나일본부라는 기구를 두어 직접 통치했다)을 인정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기백대표(한림대 교수)등 한국측 참석자들은 ▲왜가 그 당시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지 못했음은 일본 학계도 시인하고 있고 ▲따라서 한반도에 진출할만한 능력이 없었던데다 ▲고고학적으로도 이를 입증하는 유물들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는 점등을 들어 그의 주장을 강력히 반박했다. 한편 또 다른 쟁점인 「칠지도」에 대해서는 왕위교수(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백제왕의 하사품』이라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현재 일본 나양현 천이시 석상신궁에 보관중인 칠지도는 3∼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그 표면에 새겨진 문구를 해석함에 있어 국내에서는 『백제왕이 아랫사람인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일본 학계는『백제왕이 왜왕에게 바친 것』으로 각각 보고 있다. 이밖에 길림성박물관의 왕칙 역사부주임이 『길림성 집안현 집안고성은 고구려 초기의 도읍지인 국내성이 아니라 사실은환도성』이며 『국내성은 통설과는 달리 한반도 북부지방인 낭림산맥 동쪽에 있었다』는 새 주장을 폈으나 한일 양국의 학자들로부터 『고구려의 발흥지를 한반도 내로 국한하려는 의도이며 학술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서울연구대회를 주최한 아세아사학회는 지난 90년 한국의 김원용(작고),북한의 김석형사회과학원장,중국의 왕건군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장,일본의 강상파부 동경대명예교수등 4개국의 원로 역사·고고학자들이 결성한 단체로 매년 고대 동아시아사에 대한 학술대회를 열어왔다. 북한측은 「한국내 상황이 학술대회를 열기에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참석을 거부,이번 대회에는 몽골이 대신 참여했다.
  • 사찰/해방이후 80% 파괴… 61곳 남아(오늘의 북한)

    ◎사찰문화연 밝혀/종교보다 문화재 보호차원서 보존/평양 광법사­정릉사포함 25개 고려 이전 창건/봉산 성불사등에 국보­보물급­사적 58점 보유 현존하는 북한의 사찰은 모두 61개로 해방직전 3백60여개에 비해 50년 가까운 공산통치하에서 상당수의 사찰이 파괴된 것으로 밝혀졌다.그나마 현존하는 사찰들도 종교적 측면은 배제되고 단순한 문화재보호 차원에서 국가적으로 보존돼온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들 사찰내에는 현재 북한의 국보급 유물중 38%,보물급 유물중에는 66%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사찰이 신앙의 대상이나 기도처로서의 역할보다는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사실은 최근 사단법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회장 서의현) 부설 사찰문화연구원이 펴낸 자료집 「북한사찰연구」에서 밝혀졌다. 남북분단 50년만에 북한 사찰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서로는 최초로 발간된 이 책은 북한의 현존사찰에 대한 개황을 사진과 함께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현존하지는 않지만 과거의 유명한 사찰들에 대한 소개,그리고 북한의 불교문화재 등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특히 북한의 사찰재산을 별도의 장으로 분류,사찰보유 토지·임야등 재산을 일제때 조사자료를 토대로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현재 북한에 있는 사찰은 평안도가 26개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황해도 12개,함경도 10개,강원도 9개,경기도 3개,양강도 1개등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들 사찰중 가장 오래된 것은 고구려시대 창건으로 추정되는 평양의 광법사(AD3세기경)와 장수왕 15년(427년)에 창건된 정릉사.이들을 포함,고려시대 이전에 창건된 사찰은 25개.특히 이 가운데 함경북도 명천군 칠보산 개심사는 826년 설립된 발해의 사찰로 유명하다.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은 태조 왕건이 세운 개성 안화사등 13개가 있다.이들은 영변의 서운사와 고성의 석왕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종8년(10 42년)이전,즉 고려초기에 창건됐다. 조선시대에 창건된 사찰은 영변 천주사등 11개.태조4년(13 95년)에 세운 함북 영안의 쌍계사와 세종조에 세운 북청의 광제사와 나진의 청계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후기 숙종 이후에 창건됐다.그밖에 근대 들어서 건립된 사찰은 19 20년 평양의 용화사 하나 뿐이며 나머지 사찰들은 창건 연대가 불분명한 것으로 돼있다. 한편 이들 사찰이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는 국보급이 신라 효공왕2년(898년)에 창건된 봉산의 성불사등 19점,보물급 문화재는 평양의 부벽루등 35점,사적 4점등으로 모두 58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북한에서는 분단 직후인 19 45년 12월 북조선민주주의통일전선산하에 북조선불교도총연맹을 설립,본격적인 불교탄압을 시작했다.이듬해인 46년 3월부터는 토지개혁을 실시,종교단체가 소유한 토지 1만5천1백95정보(1정보 약3천평)를 무상으로 몰수했다.특히 사찰재산의 경우 5정보이상은 모두 몰수,농민에게 분배했다.더욱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여 승려를 노동현장에 부역시켰고 탁발을 금지시키는 등 북한불교를 폐허화시켰다. 북한에서 종교인은 반혁명계층으로 분류되어 특별감시의 대상이 됨에 따라 철저히 탄압을 받아왔으나 70년대 들어 김일성 주체사상에 종교사상까지 흡수,선전하면서 80년대 들어서는일부 사찰을 복원하고 고려대장경을 번역했으며 또 89년에는 김일성대학에 종교학과를 개설하고 92년 신헌법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등 외형상의 변화를 보여왔다.그러나 북한당국의 종교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불교전문가들의 견해다.
  • 중원 고구려비(온가족이 함께 읽는 우리역사:22)

    ◎“대왕의 나라” 비문… 중국 맞먹는 대국 표방/79년 발견… 5세기 한강유역점령 기념 세운듯/신라를 동이로 지칭… “군대 주둔” 기록도 남겨 지난 79년 4월8일 단국대학술조사단은 충북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서 커다란 돌기둥을 발견했다. 높이 2백3㎝,너비 55㎝로 사각기둥 형태인 이 돌은 발견당시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이끼가 잔뜩 끼어있어 민간신앙의 대상이나 됨직한 평범한 물체로 보였다. 그러나 정밀조사결과 이 돌기둥은 고구려 석비임이 판명됐다. 그때까지 고구려 석비로 확인된 것은 만주의 광개토대왕비뿐이어서 이 비는 두번째 고구려비로 또 한반도에 남아 있는 고구려비로는 유일한 것으로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았다. 「중원고구려비」라 이름붙여진 이 석비는 곧 국보 제205호로 지정됐다. 이 비는 마모가 심해 판독이 가능한 글자가 4백여자밖에 되지 않는데다 학자들간에 자구해석에 차이를 보이고 있어 앞으로의 연구성과를 더 기다려야 하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에는 5세기 당시의 ▲고구려 영역 ▲고구려·신라의 관계 ▲고구려의 국가의식등을 알려주는 단서들이 단편적으로나마 들어 있다. 석비가 위치한 중원지역은 남한강을 끼고 있는 교통의 요지여서 삼국의 중요한 쟁탈대상이었으며 여러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는 고분군·산성·마애불상과 기왓장등의 삼국시대 유물·유적이 고루 발굴되었다. 특히 지난1915년에는 가금면과 서쪽으로 맞닿은 노은면에서 5세기 후반에 제작된 고구려 불상이 발견됐었다. 이 비를 세웠다고 추정되는 인물은 장수왕이다. 남하정책을 적극 추진한 그는 5세기 후반 한강을 따라 상류쪽으로 점차 영토를 넓혔다.드디어 이 지역을 점령,한강유역을 모두 차지하자 그 기념으로 비를 세운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함께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명확히 나타나 있다. 비문은 고구려와 신라가 「영원히 형제국」으로 지낼 것을 맹세하기 위해 만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양국의 대표는 고구려태자·신라왕이었고 고구려태자는 신라왕과 그 수행원들에게 옷과 수레장식품등 선물을 하사하고 있다. 또 고구려는신라영토내에 군대를 주둔시키기도 했다. 「신라토내당주」란 고구려의 직책이 비문에 등장하는데 이는 신라 영토를 관할하는 지역부대장의 의미이다. 「고구려군의 신라주둔」사실은「일본서기」에도 기록돼 있지만 국내 자료에서 확인되기는 이 비문이 처음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귀중한 내용은 당시 고구려의 국가의식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고구려는 이 비문에서 스스로를 「대왕(천자)의 나라」라고 칭하고 신라를 「동이」라고 불렀다. 동이라는 말은 원래 중국이 우리 민족을 낮추어 부르던 표현이다. 5세기의 고구려는 중국과 대등한 관계임을 자부했으며 이에따라 신라를 변방의 소국으로 치부했음을 우리는 이 비문에서 알 수 있다.
  • 중국내 고구려유적 비디오 공개/신영식교수 촬영

    국내 사학자가 중국의 길림·요령성일대에서 직접 찍은 고구려 유적 비디오가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5일 상오10시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장에서 열리는 「한국민족사의 제문제」심포지엄에서 신영식 이화여대교수가 상영할 비디오에는 광개토대왕비·장군총을 비롯해 장천1호·무용총·각저총등의 고분벽화,요령성 일대의 안시성·백암성·건안성등 산성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특히 고구려가 당의 침략군을 격퇴한 요령성 해성현의 안시성(현재이름 영성자고성)과 그 주변 산성들의 형태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이어서 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끌고 있다. 신교수는『지난해 9월부터 지난 8월까지 연변대에 교환교수로 가 있는 동안 고구려 유적들을 두루 답사,촬영했다』고 밝히고 이번에 공개하는 비디오는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널리 알려진 유적을 중심으로 30분짜리로 편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고대 한·일 관계:중(온가족이 함께 읽는 우리역사:20)

    ◎“일 응신왕은 비류백제의 마지막 왕”/나라 망하자 일 기내지방 건너가 위왕에 올라/김성호씨등 주장… 고분서 백제마제유물 출토 「백제인이 일본을 세웠다」는 학설이 80년대에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그러나 이를 정립한 공은 80년대에 이 분야를 집중 연구한 재야사학자 김성호씨와 최재석 고려대명예교수에게로 돌아가야 할 듯하다. 먼저 김씨가 82년에 발표한 책「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에서 주장한 일본왕조의 설립과정을 알아본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396년 비류백제를 기습공격하자 왕은 왕족·신하들과 함께 위열도의 구주로 달아난다.그곳은 서기 1백년 무렵 비류백제의 혈주에 의해 개척된「담로」,즉 구주위가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구주왜는 원주민들의 반발로 이미 유명무실해져 비류백제의 왕은 기내(나양지방)로 가 다시 위왕으로 즉위했다.그가 일본의 15대째 왕인「응신」이다.이후 비류백제의 유신·유민들이 대거 망명해와 응신의 기내위 왕조는 국가의 기틀을 세운다. 660년(온조)백제가 신라·당의 연합군에게 멸망하고 668년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자 기내위는 670년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고 「일본서기」등의 사서를 편찬했다.비로소 비류백제땅의 회복을 포기하고 독립국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김씨는 이같은 학설을 입증하기 위해 일본측 사서인 「일본서기」 「고사기」등을 정밀해부,드문드문 남아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추려내 한국의 「삼국사기」,중국의「삼국지 위지 동이전」등과 비교·분석했다. 그는 우선 응신의 즉위 직후 「일본서기」에 여러차례 등장하는 백제인의 집단망명 기사를 주목했다.응신 14년(403년)과 20년(409년)의 기록에는 백제의 1백20현,17현의 주민들이 대거 왜로 건너왔다는 기사가 나온다.김씨는 이처럼 대규모의 주민이동 사실을 하나의 국가가 자리를 옮긴 것으로 보았다. 이와 함께 응신이후 일본 국왕의 성씨가 비류백제의 왕성인 「진」씨를 이었음도 일본 상류측의 족보인 「신찬성씨록」을 통해 밝혀냈다. 이같은 김씨의 학설은 고고학 측면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지난 50년대 후반 기내지방의 우예야시에서는 응신왕의 고분이 발견됐다.일본의 고고학계는 응신의 묘를 발굴하는 대신 배총,즉 부속되는 묘를 발굴했는데 백제의 전형적인 마제유물들이 대량 출토됐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는 「일본서기」속에 숨어 있다.(온조)백제가 망한뒤 주유성에서 벌인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났을때 기내사람들이 보인 반응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백제 주유성이 함락되었구나.이 일을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겼으니 선조의 묘소를 어찌 왕복할 수 있단 말인가』 (온조)백제가 망하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통곡한 당시의 일본인들.그들을 백제인이 아니라고 강변할 사람이 있을까.
  • 고대 한·일 관계(온가족이함께 읽는 우리역사:19)

    ◎“백제유민이 4세기에 일본 건국”/강력한 수군 앞세워 규슈지방 등지에 진출/80년 연구 진전… 일선 임나일본부설 고집 우리의 고대사에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부분 가운데 하나가 삼국과 위의 관계이다.삼국과 가야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왜와 정치적·문화적으로 밀접한 접촉이 있었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 실체는 오랫동안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채 한·일양국(또는 양국의 사학자들)은 각기 자국에 유리한 쪽으로만 한일 고대사를 해석해왔다.좀더 엄밀하게 말하면 근대 역사학을 먼저 도입한 일본측이 적극적으로,또 공격적으로 고대사를 왜곡한 반면 국내 사학계는 방어에 급급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야마토(대화)조정이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에 식민통치기구인 임나일본부를 설치,백제·신라·가야를 2백년 가까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일본측이 내세운 대표적인 억지이론의 예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측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지난 79년부터 82·90년 3차례 개정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백제­위관계」에 대한 서술 변화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 가운데 82년판과 90년판이 큰 차이를 보인 점은 유의할만한 사항이다. 79년판에는 『4세기 중엽 백제가 남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고대 무역국가로 발전』(19쪽)했으나 고구려가 북중국의 전진및 신라와 연맹해 압력을 가하자 백제도 남중국의 동진,바다건너 왜와 연결해 이에 대항하였다』(23쪽)고 밝혔다.이후 『한반도안에서 고구려·신라가 협격하게 되자 백제가 일본 지역에 구축하였던 세력도 약화됐다』(25쪽)고 서술했다. 이에 비해 82년판 교과서에서는 『백제는 4세기 중엽 우세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산둥지방과 일본의 여러 지방에까지 진출하였다』(23쪽)고 써 양국의 관계를 대등한 관계라기 보다는 백제가 왜에 세력이 미쳤음을 표현했다. 90년판에는 훨씬 적극적인 표현들이 등장한다. 『백제는 수군을 증강시켜 중국의 요서지방으로 진출하고 이어서 산둥지방과 일본에까지 진출하는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였다』(38쪽)고 왜에의 진출을 부각시킨데 이어 『삼국중 왜와 가장 긴밀한관계를 유지했던 나라는 백제였다.이는 다수의 백제유민이 규슈지방등지에 진출하여 국가건설에 이바지하였기 때문이다』(41쪽)고 밝혀 백제가 일본 건국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같은 서술은 80년대 진행된 사학계의 연구성과를 일부 받아들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그러나 연구자들은 「이바지했다」라는 표현에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그들은 「백제 유민이 일본국을 직접 건설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 「발해 2백년사」 책으로 나왔다

    ◎송기호교수,서울신문 연재 글 정리 「발해를 찾아서」 발간/만주­연해주 현지답사… 민족자취 서술/인접국들 역사왜곡 바로잡는 지침서 될듯 우리는 발해를 우리역사의 한부분이라고 배워왔다.그러나 고구려의 옛장수 대조영이 세웠다는 사실등 몇가지를 제외하면 발해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잊혀진 역사였던 셈이다.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발해가 위치해 있던 만주와 연해주가 그동안 우리에게는 갈수없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서울대 송기호교수(국사학과)가 펴낸 「발해를 찾아서」(솔출판사간)는 중국과 구소련과의 수교 이후 그 잊혀진 역사를 되살리자는 역사학계와 언론계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는 최초의 성과이다. 「발해를 찾아서」가 나오게 된 근원은 지난 19 90년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당시 서울신문사는 중국과 구소련의 문이 열리자 발해유적조사단을 구성했다.송교수는 바로 이 조사단의 일원으로 만주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모두 네차례에 걸쳐 만주와 연해주를 찾아 발해의 역사를 추적했던 것.송교수는 그 답사기록을 서울신문에 92년9월부터 지난 7월까지 30회에 걸쳐 「발해2백년사 현장탐구」라는 제목으로 연재했고 그 글들을 정리, 이 책을 냈다. 「발해를…」은 우리에게 잊고있던 발해를 다시 일깨워주는 이상의 의미가 있다.그것은 우리가 발해사 연구에 한계를 가질수 밖에 없던 사이 인접국들의 역사왜곡이 심각하기 때문이다.중국은 발해 유적과 유물에 접근하는데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서 70년대말 본격화된 발해연구를 통해 「발해는 속말말갈주이 세운 당왕조에 예속된 일개 지방정권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또 러시아 역시 발해사를 소련 원동의 소수민족인 말갈족의 역사,나아가서 러시아 역사의 한부분으로 파악하려하고 있다. 이 책의 머리부분 「발해는 우리의 역사인가」에서도 송교수는 이 문제를 낙관하지 않는다.만주에는 발해 역사의 현장이 널려 있지만 교과서에서 배워온 것처럼 우리역사의 전유물로 인정하기에는 난관들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에따라 송교수는 어떤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발해의 역사에서 차분하게 한민족의 숨결을 찾으려하고 있다. 송교수는 발해건국자 대조영이 처음으로 도읍했다는 동모산을 한국인으로는 처음 오르고 흑수말갈의 고향을 찾아 그들의 후예인 나나이족을 만나는 등 만주와 연해주의 유적 곳곳에서 우리 민족의 체취를 확인하는 과정을 감격속에도 차분하게 서술하고 있다.이 책은 또 충실한 지도와 다양한 원색사진을 함께 실어 발해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과 함께 점차 늘어날 이 지역에 대한 답사여행의 지침서로도 손색이 없다. 송교수는 『앞으로의 발해연구는 북한과의 협조가 필연적』이라면서 『가까운 시일내에 북한지역의 발해유적답사가 이루어져 이 책을 증보할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을 밝혔다.
  • 비류백제설:중(온 가족이 함께 읽는 우리역사:17)

    ◎“광개토대왕비에 2개백제 명시”/잔국=비류백제·백잔국=온조백제 해석/“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왕족 묻힌곳”주장 서기전 18년부터 396년까지 한반도에 제4의 국가로 존재했다는 「비류백제」.이를 입증하는 자료란 어떤 것들일까. 재야사학자 김성호씨가 「비류백제」를 주장하는 근거는 다양하다.그 가운데 중심이 되는 것들이 ▲비류가 자살하지 않고 강국을 이루었다는 일부 사서의 기록 ▲광개토대왕비문 중에서 2개의 백제를 시사하는 부분 ▲(온조)백제가 한때 도읍했던 웅진(현재의 공주)지역의 유적분포상황등이다. 백제의 건국을 다룬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지난 회에 밝힌 「비류의 자살」기사에 이설이 덧붙여 있다.삼국사기 편찬자는 『일설로는 시조 비류왕이 미추홀에 정착했다.또 중국의 사서인「북사」와 「수서」는 주몽의 후손인 구대(구이)가 대방땅에서 처음 나라를 세워 나중에 동이강국이 되었다고 했다.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김씨는 「삼국사기」 편찬자가 비류의 기사에 연결해 구이의 활약상을 소개한 이유는그들을 같은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보았다.그는 각종 사서에 씌어진 그들의 활동시기·지역·내용등을 비교한 뒤 「비류와 구이는 동일인」이라고 결론지었다.또 『구이의 묘가 웅진에 있다』는 기록에서 비류백제의 도읍지를 웅진으로 잡았다. 백제본기중의 이설이 비류백제의 성립을 가능케 한 것이라면 광개토대왕 비문에 보이는 백제정벌 기사는 한시기에 2개의 백제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는 게 김씨의 논리다.비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396년 광개토대왕은 수군을 이끌고 「잔국」의 성 55곳을 함락시켜 토벌했다.귀환하는 도중 백잔왕의 저항을 받자 대왕은 한강을 건너 백잔국의 성 3곳을 빼앗았다.백잔왕은 백성 1천명등을 바치면서 영원히 복종할 것을 맹세했으며 대왕은 백잔왕을 용서했다.「잔왕」의 동생과 신하 10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김씨는 비문의 내용상 「잔국」과 백잔국이 엄연히 구분돼 있다고 지적했다.「잔국」은 ▲성 55곳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충남일대에 위치했으며 ▲고구려군에게 멸망(토벌)했고 ▲왕의동생등이 포로로 잡혀갔다.반면 백잔국은 ▲공격받은 성이 한강 북쪽에 있었으며 ▲왕이 공물을 바치고 용서를 받았다. 즉 2개의 나라이름이 등장하는데다 자리잡은 지역,전쟁결과에 따른 처리등에 큰 차이가 나므로 「잔국」과 백잔국은 서로 다른 나라라는 주장이다.김씨는 「잔국」을 비류백제로,백잔국을 온조백제로 보았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비류백제의 도읍이 있었다는 웅진에 그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기록상 (온조)백제가 웅진에 도읍한 기간은 63년(475∼538)이며 이곳에 묻힌 왕은 무령왕등 4명이다.그러나 현재 웅진에는 왕릉규모의 고분 십여기를 비롯,수백기의 대형무덤이 남아 있다. 김씨는 『온조백제가 웅진을 도읍으로 삼은 63년동안 그처럼 많은 대형무덤을 남길 수는 없다』고 지적하고 이들 무덤의 주인은 4백여년 도읍했던 비류백제의 왕과 왕족들이라고 주장했다. 김씨는 이 연구에 한·중·일 3국의 관련사서를 두루 동원했고 「통계적 지명고찰」이란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는등의 노력으로 매우 탄탄해 보이는 논리를 짜냈다.그럼에도 기존 학계에서 그의 학설을 「이단」으로 취급했다.그 이유는 다음회에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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