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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의 달 전국서 다양한 축제

    ◎“1등나라 1등국민 문화가 만듭니다”/전시·문화장터·공연·음악회 잇따라 개최/전국 8개 시·도별로 종합예술제도 열려 10월은 문화의 달.20일 「문화의 날」에 이어 21일 「미술의 날」,22일 「문학의 날」이 이어진다.이 문화의 달을 맞아 전국에서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펼쳐진다. 문화체육부는 문화의 날인 20일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시상식을 겸한 기념식을 갖는 것을 비롯해 이날부터 22일까지를 「문화축제주간」으로 정해 서울 동숭동 마로니에공원과 예술의 전당 야외무대등에서 전시와 문화장터·공연·음악회등을 다채롭게 마련한다.이와 함께 문화의 달 기념 학술심포지엄(17일 상오10시·프레스센터·주제 「뉴미디어시대의 문화정책과제」)도 개최하며 10월 한달동안 전국 8개 시·도 종합예술제를 비롯한 6백46개의 지방문화행사와 93개 중앙문화행사를 연다. 「일등나라 일등국민 문화가 만듭니다」란 주제 아래 열리는 이번 문화의 달 행사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20일부터 22일까지 계속되는 문화축제주간 행사.예년에 주로 마로니에공원에서만이루어지던 것에서 탈피해 올해는 예술의 전당 야외무대에서도 공연과 전시가 열리는 게 특징이다. 우선 문화의 날인 20일 하오3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는 문화예술유공자 포상에 이어 「문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란 주제 아래 무용·노래공연·축시낭송으로 짜여진 기념공연 한마당이 열린다.이날 기념식에 앞서 마로니에공원 특설무대에서는 서울전미례재즈무용단의 경쾌한 재즈무용공연이 열린 후 서울풍물패와 국악실내악단 다스름의 길놀이 비나리공연등 시민과 함께하는 기념잔치로 이어진다.또 하오4시30분부터 문예회관 소극장에서는 종로구청장과 의회의장등 종로구 주요인사와 노인·소년소녀가장등을 초청한 가운데 우리극연구소의 창작연극 「산너머 개똥아」 공연이 열린다. 21일 「미술의 날」과 22일 「문학의 날」에는 각각 미술과 문학특성을 살린 행사가 마련되는데 「문학의 날」마로니에공원에서 하오1시부터 엄마 아빠 얼굴그리기와 인형극공연·시민위안공연 등 예술인 큰잔치에 이어 설치미술작가 이환씨의 환경미술작품 설명회 및 사인회가열린다.또한 마로니에공원에서는 상오10시30분부터 한국출판문화협회가 각종 문학상 수상작품을 모아 판매하는 문학상수상도서전,시문화회관이 시낭송등 시를 주제로 하는 공연으로 꾸민 가을날의 시잔치가 이어진다. 한편 축제주간에 마로니에공원일대와 예술의 전당에서는 전시감상과 공연프로그램·생활문화장터등이 마련된다.이 가운데 마로니에공원과 대학로일대에서 열리는 생활문화장터에서는 판화·도자기·짚·풀등 생활공예품·왕골공예품을 직접 만들어 싸게 판매하고 재생문화상품과 환경문화상품·고구려문화상품·팬시디자인상품·전통음식도 전시,판매한다.이밖에 전통민속놀이와 종이접기강습·녹차보급시음회도 마련된다. 또 예술의 전당 야외무대에서도 축제주간인 20일부터 22일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오케스트라 브라스 앙상블의 야외음악회와 청음농아극단의 공연 「장애인과 함께」,서울예술단의 가무악 공연,슬기둥의 야외음악회가 매일 저녁 차례로 이어진다.
  • 각저총 고구려 부인상(한국인의 얼굴:46)

    ◎작고 붉은 입술·도톰한 볼의 미인/단정한 몸가짐… 고구려 여인 기품 간직 고구려 고분의 벽화는 고대인들의 생활상은 물론 신비로운 정신세계 까지 반영했다.중국 길림성 통구지방의 각저총은 그러한 유형의 5세기말 벽화 무덤이다.각저총은 얼핏 한 쌍을 이룬 무덤(쌍분)으로 착각할 만큼 무용총 바로 이웃에 있다. 이 무덤 이름을 지어준 각저라는 말은 씨름을 의미한다.그러니까 씨름하는 그림이 있어서 무덤 이름이 각저총이 되었다.씨름 그림은 널방(현실) 동쪽 벽에 그려 넣었다.또 동쪽 벽 다른 한켠에는 부엌 그림도 있다.이들 벽화는 북쪽 벽에 그린 무덤 주인공과 가족들의 생활도와 더불어 풍습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그리고 해와 달과 별 자리가 있는 일월성신도에는 영적 감각의 내세관념이 어렸다. 이들 벽화에서 만나게 되는 가장 뚜렷한 인물은 여인상이다.무덤이 각저총 이라고는 하지만 두드러진 인물은 무덤 주인공과 가족들을 묘사한 북쪽 벽 생활도에 나온다.다만 주인공 얼굴은 오랜 세월을 두고 스며든 물기가 지워버렸다.그러나 두부인 가운데 주인공 가까이 앉아있는 부인 얼굴은 아직 분명하다.얼굴 뿐 아니라 단정한 몸가짐도 읽을 수 있다.그래서 별로 빛 바래지 않은 어여쁜 고구려여인을 지면에 끌어내게 되었다. 여인은 고개를 약간 떨구었다.다소곳 하기 이를데 없다.그리고 합장한 자세로 무릎을 꿇어 더욱 얌전하고 조용한 기풍이 우러난다. 이 정숙한 여인은 남편을 바로 치켜보지 않고 눈매를 살포시 깔았다.자그마하나 예쁜 코와 앵두 같이 작고 붉은 입술이 도톰한 볼과 어울렸다.귀는 비록 두건아래로 흘러내린 검고 실한 머리칼에 가려 보이지 않을지라도 나무랄 데가 없는 얼굴이다.여인이 머리에 쓴 두건은 고구려 고유의 귁건이라는 이야기가 있다.옷 매무새 역시 고구려 스타일이다.여인은 무늬가 들어간 검정색 긴 저고리를 입었다.깃과 소매 끝을 조금씩 남기고 붉은색 회장을 단 두루마기 만큼 긴 웃옷이다.섶은 왼쪽으로 여민 이른바 좌임인데,이는 고대 동북아시아 의상에 흔히 나타나는 전통이기도 하다.여인이 무릎을 꿇고 모루 앉아서 치마 끝 자락이 드러났다.요즘말하는 긴 벨 스커트형의 주름치마와 너무 흡사하다는 사실이 이채롭다.각저총 부부상 여인들의 옷 차림은 무용총과 개마총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 무덤 부부상에 두명의 여인이 등장한 것으로 미루어 주인공은 두 부인을 두었던 모양이다.고구려의 다처제 기록은 뚜렷하지 않으나 형이 세상을 떠났을 때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는 취수혼은 존재했다.어떻든 각저총에 그린 두 부인중에 주인공 곁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여인이 본실일 것이다.부부를 묘사한 벽화는 황해도 안악3호분(서울신문 9월1일자 12면)과 평남 용강 쌍영총에도 나온다.그러나 각저총 그림이 훨씬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 칠순 아버지 고인된 아들/수필집 2권 함께 출간

    ◎김풍식 박사 「세월은…」·도형씨 「나는…」/부­예총 지부장 역임한 병원장의 향토애·자식사랑 그려/자­의협심 강한 의사 지망생의 현실 갈등·효심을 일기로 고희를 맞은 의학박사 아버지와,의대 재학 중 세상을 떠난 아들의 글이 각각 한권의 책으로 나란히 발간됐다. 아버지 김풍식 박사(충주 호서병원장)의 자전적 수상록은 「세월은 가고 그리움은 오고」(의계신문사 펴냄).신경외과 의사인 김박사는 서울신문 향토문화상 후보 추천위원을 비롯해 충주시 문화원장,국제라이온스 충북총재협의회장,한국예총 충주지부장 등을 지내며 다방면에서 향토사랑을 실천해 왔다.특히 우륵문화제 창설과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발굴에 큰 공헌을 했다. 따라서 그의 수상록에는 의사생활의 회고,문화재 사랑,자식을 잃은 슬픔 등 다양한 감정과 경험이 유려한 문장에 담겨 있다. 함께 나온 「나는 하얀 새가 되어」(영언문화사)는 지난 92년 숨진 김박사의 아들 도형군이 남긴 일기와 시,아버지에게 보낸 엽서,학술교육보고서들로 구성됐다.또 아버지가 아들을그리며 쓴 시들도 들어 있다. 도형군은 아버지를 뒤이으려고 순천향의대에서 공부하다 본과 1학년 때 22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재학 중에는 의대생의 학업 부담에도 불구하고 학생회 교육부장을 맡는 등 적극적이고 의협심 강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고2 때부터 쓴 일기에는 청년기의 고뇌와 의학도로서의 각오들이 솔직하게 표현돼 있고 부모에의 효심도 잘 나타난다.이와 함께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회모순에 대한 분노·절망도 틈틈이 엿보인다.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산 70평생과,20여년만에 끝났지만 활기찼던 삶이 얼핏 대비되는듯 하지만 부자가 쓴 이 두권의 책은 풍성한 가을에 인생을 다시한번 되짚어 보게 만든다.
  • 무용총 수렵도의 사냥하는 사람(한국인의 얼굴:45)

    ◎호랑이 쫓는 무사 당당한 위용/기마인물상… 머리엔 귀족신분의 조우관 한국인의 얼굴 45 중국 길림성 통구지방 여산 남쪽의 무용총에는 춤판벽화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용맹스럽고 활달한 사냥 그림 벽화가 있다.바로 무용총의 수렵도인데,널방 서쪽벽에 그렸다.심산궁곡의 산악이 보이는 한폭의 풍경화 속에 말을 타고 사냥하는 인물들과 쫓기는 짐승 무리가 역동적으로 투영되었다. 이 벽화에 등장한 인물들은 말을 탔다.모두가 발거리를 밟고 고초 선 자세를 했다.마상의 인물들은 힘이 넘친다.그래서 시위를 당긴 활이 부러질 듯 휘었는데,더러는 달리는 말잔등에서 몸을 뒤로 틀었다.말을 타는 재주나 활 쏘는 솜씨가 범상의 경지를 넘어섰다.그런 탓인지 몇 필의 말이 사람을 업고 뛰는 사냥터에 천군만마와 같은 위용이 가득 어렸다. 말발굽 소리에 놀란 짐승들이 우르르 튀어나와 다급히 꽁무니를 뺀다.유순한 산짐승 사슴이 있고 산중의 왕이라는 호랑이도 보인다.수렵도 벽화고분이 자리한 통구에서 백두산이 그리 멀지 않으니까 벽화의 호랑이 고향은 백두산일 것이다.이들 동물은 성격에 따라 대칭적 위치에 배치되었다.사슴은 상단 왼쪽에,호랑이는 하단 오른쪽에 그린 것이다.달아나는 방향도 대칭을 이루어 흥미로운 구도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수렵도에는 검은 개도 한 마리가 따라 붙었다.마상의 인물이 쫓는 호랑이를 같이 공격하고 있다.호랑이는 그야말로 비호처럼 도망치는데,마상의 인물이 활 시위를 당겼다.시위를 막 벗어나기 직전인 화살이 호랑이 꽁무니에 정조준 되었다.고니를 잡은 손가락을 떼기만 하면 화살이 호랑이 꽁무니를 궤뚫을 판이다.수렵도의 백미는 호랑이를 공격하는 그림이다.고구려의 기상이 그대로 어렸다. 그러니까 고구려인의 용맹성을 가장 잘 드러낸 그림은 호랑이를 쫓아 말을 모는 기마인물상이다.비록 사냥을 나왔을 지라도 의관을 제대로 갖추었다.그 매무새 못지않게 용모 역시 준수하다.나이가 그리 들어보이지 않은 얼굴에 비해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기마인물상은 앞서서 도망치는 호랑이를 응시했다.그러나 눈매는 살기를 담지 않아 사나워 보이지 않는다.살생의도 보다는 호연지기의 심성이 더 짙게 배어있는 것이다. 호랑이를 쫓는 기마인물상은 조우관이 분명한 관모를 썼다.이 관모는 역사를 기록한 여러 사서가 고구려의 관모로 밝히고 있다.「신당서」 동이전은 「고구려에서 대신은 청라관을 쓰고 그다음은 깃털 두 개를 꽂은 항라관을 썼다」고 적었다.호랑이를 쫓는 기마인물상의 조익관과 일치하는 기록이다.또 조익관은 대신 바로 아래 계층이 쓰는 것이라고 했으니 신분은 귀족일 것이다. 이 벽화는 고대산수화의 형성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산과 나무를 그리면서 먼것은 위쪽에,가까운 것을 아래쪽에 배치했다.이를테면 산수화의 공간개념이 비로소 도입된 것이다.
  • 고구려 무용총의 춤추는 여인(한국인의 얼굴:44)

    ◎오목조목한 얼굴에 콧날 오똑/작은 입에 수줍은 눈매의 미인형/5세기 춤판의 특징·의복 엿볼수 있는 자료 고구려 사람들은 벽화가 있는 고분을 즐겨 만들었기 때문에 벽화속에 다양한 인물상을 남겼다.특히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지방 여산남쪽 산자락 무용총의 인물상들은 여러 특성을 드러낸 벽화다.주로 동적 표현을 빌려 묘사한 이들 인물상 가운데 춤꾼과 소리꾼이 한 무더기로 어울린 그림은 유명하다. 무용총은 앞방(전실)과 널방(현실)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이실분)이다.이 무덤은 앞방 한복판에 널길(선도)이 달렸고 앞방과 널방을 잇는 통로가 마련되었다.그림은 앞방과 널방의 네 벽과 널방 천장에 그렸다.인물,풍속,사신도 등의 그림을 회칠을 하고 채색벽화로 처리했다.일단의 춤꾼들이 무리지어 춤추는 유명한 그림은 주실 동벽의 벽화다.무덤의 이름을 무용총이라 한 연유도 춤추는 그림의 벽화를 앞세운데 있다. 이 벽화의 전체구도를 채운 그림 내용은 사실상 가무도다.다시 말하면 가락이 있는 춤판인 것이다.그러나 소리꾼들은 춤판을 위해 배치했다.그래서 소리꾼들이 춤판 아래 쪽에 자리잡았다.이는 춤에 더 비중을 둔 것인데,춤꾼들의 표정이 살아있다.사뭇 율동적인 춤사위가 화려한 색깔의 의상과 조화를 이루었다.비록 고대 춤판이기는 하나 현대무용이 추구하는 예술적 조형의 근간을 모두 함축했다.왜냐하면 움직임과 가락,색깔과 빛이 보이는 춤판이기 때문이다. 춤판을 그린 벽면에는 14인의 인물이 등장한다.이 가운데 5명이 춤판을 벌였다.그러나 맨 앞의 인물은 깃털관(조우관)을 쓴 남자 앞소리꾼(도창)이고 나머지 4명이 춤꾼이다.소리꾼 뒤에는 두루마기 차림과 또 바지에 저고리를 받쳐입은 춤꾼을 붙였다.춤꾼들은 모두가 뒤로 손을 뻗어 춤사위를 연출했다.흰색 바탕에 검정색 둥근무늬와 노란색 바탕에 빨간색 둥근무늬가 들어있는 무복을 입었다. 얼굴은 한쪽 귀를 겨우 가릴 만큼의 옆 모습이다.소리꾼을 바싹 뒤따른 춤꾼의 얼굴은 오랜 세월 탓에 깡그리 뭉개졌으나 다른 얼굴들은 또렷하다.소리꾼으로부터 세번째 춤꾼은 동그란 얼굴인데 머리가 유난히 짧다.단선으로 처리한선묘기법을 통해 얼굴을 오목조목하게 그려냈다.콧대가 세지는 않으나 오뚝해 보이는 코,수줍은 눈매,작은 입이 어여쁘다.그러니까 절세미인은 아닐지라도 예쁜 고구려 여인이다. 무용총 벽화의 춤판 그림은 「삼국사기」나 「구당서」가 기록한 고구려 춤의 내용과 일치했다.4명의 춤꾼이 짝을 지어 춤을 춘다는 점이 그것이다.그리고 이들 사서가 소개한 춤꾼들의 옷 매무새와 색깔도 무용총 춤판 그림과 거의 들어맞는다.사서의 내용과 무용총 벽화를 통해 고구려 춤사위의 특징을 알게되었다.고구려 사람들은 오늘날 한삼에 비교되는 긴소매 저고리를 입고 어깨를 으쓱이며 엉덩이를 뒤로 내민 그런 춤을 추었다. 고구려 도읍지였던 통구에 자리한 무용총은 5세기쯤에 축조되었다.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에 축조했을 가능성이 크다.
  • 달라진 혼인풍속(압록강 2천리:6)

    ◎사라진 전안례… 기러기 대신 통닭이…/신부는 치마·저고리에 서양식 너울 쓰고/교배례 생략 중국식 본떠 깍지걸이 건배/혼수감으로 가전제품은 필수… 사회문제로 장백조선족자치현 용강향 이도강촌에 머무르는 동안에 재수가 좋아서 결혼식을 만났다.신랑은 조선족기숙제소학교 이헌(46)교장의 아들 남일(24)군이고 신부는 이성숙(23)양이었는데,둘 다 소학교 교원이었다.말하자면 부부교원이 될 이들의 결혼식은 상오11시쯤 신랑과 신부가 승용차를 타고 신접살림을 차릴 집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후덕한 인심은 그대로 이들의 신접살림집은 그냥 빌린 것이다.이도강촌에서는 셋집이란 말이 통하지 않는다.돈을 내놓지 않고 살 집이니까 「빌려든 집」이 적절한 표현인지도 모른다.신랑 신부에게 집을 내준 집주인의 이야기 속에는 이도강촌 고산지대 마을의 후덕한 인심이 그대로 배어났다.도시생활이랍시고 연길에서 살아온 나 자신이 후덕한 인심 앞에 사뭇 왜소해질 뿐이었다. 『돈을 어찌 받겠습니께.아들 장가가면 들일라고 지은 집이라 지금은 어짜피 비울 집인데….사람 들어서 집 보아주면 좋지비.너 좋고 나 좋고인데 돈을 받는다는 게 말이나 되우.신랑 신부,이 집에서 돈 많이 모아 나가면 되지비.나 아무 생각 없수다』 이러한 인심 한 복판에서 베풀어지는 혼례인지라 산골마을이 온통 박신댔다.차에서 내린 신랑 신부가 쌍 희자를 거꾸로 오려 붙인 대문께로 다가서자 폭죽소리가 갑자기 진동했다.기다란 장대끝에 매달린 폭죽이 연신 터졌다.매캐한 화약연기가 사방을 덮고 폭죽 부스러기가 능지처참을 당한 꼴로 땅바닥에 너부러져 나뒹굴었다.폭죽소리에 액귀가 놀라 도망가는 대신 행복이 쌍을 지어 들어오라는 중국식 혼례풍습이 어느 사이 조선족사회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옛날엔 색시가 첫날 신에 흙을 묻히면 안된다고 해서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이나 짚을 밟고 지나갔다.그런데 지금은 신랑이 신부를 번쩍 안아들고 들어갔다.첫날 대낮부터 신랑품에 드는 행복을 만끽한다고나 할까.신랑은 양복을 입고 신부는 치마저고리차림을 했다.그러나 뒤집어쓴 너울에는 서양식 레이스가 달렸다.그리고 색동옷을 입은 동남동녀가 꽃바구니를 들고 꽃보라를 날리면서 신랑 신부를 인도해왔다.동서양 혼합절충식의 혼례였다. 신부가 신랑집 대반의 안내에 따라 방으로 들어가 사뿐히 자리를 잡았다.신부의 너울 뒤로 한쌍의 원앙을 수놓은 벽보가 보였다.원앙은 중국 한족들이 사랑의 상징으로 여기는 새다.오늘날 조선족 젊은이들이 쌍기러기를 원앙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이 혼례집에서도 원앙새가 기러기자리를 빼앗아버렸다.그러니 전통혼례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전안상은 물론 전안례도 생략되었다. 조선족 전통혼례식의 전안례는 고구려시대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기러기는 사랑의 상징 신랑이 신부를 맞을 때 흰 색깔의 산 기러기 한 마리를 품에 안고 가서 전안례를 치른 뒤 날려보냈다.그러다 번거로운 산 기러기 대신 나무기러기(목안)로 바뀌었다는 것이다.그런데 지금은 나무기러기마저 사라졌다.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전안례 발상지이자 고구려 강역이었던 압록강유역 조선족사회 혼례에서 나무기러기도 보이지 않고 있는 사실이….압록강유역에는 감동적으로 유전되는 전안례 전설이 있다.그 옛날 패수(압록강)벌에 살던 총각 길랑과 처녀 미월이 사랑을 맺었다.그들은 우연히 다리가 부러진 기러기를 구해다 키웠다.길랑이 과거를 보러가던 날 미월은 아리랑산까지 배웅하고 이별의 아리랑을 불렀다.길랑이 떠나고 해가 바뀐 어느 단옷날 그네 뛰는 미월의 미색에 반한 마을의 원 김호가 첩을 삼기 위해 납치했다. 미월이 말을 듣지 않자 옥에 가두었다.미월은 눈물어린 사연을 적은 쪽지를 자신이 보살피던 기러기 다리에 매달아 날려보냈다.길랑은 기러기편에 보낸 쪽지를 받았다.암행어사가 된 길랑은 귀로를 재촉하여 처형 직전의 미월을 구하고 김호를 처단해버렸다.「길림성 민간문학전집」 장백조선족 자치현편에 나오는 이 전설은 「아리랑」과 「춘향전」을 기묘하게 합성한 느낌을 준다.어떻든 기러기는 사랑과 믿음,화목과 정절을 의미하는 날짐승이라 할 수 있다. 전안례가 사라진 이도강촌 혼례상 위에는 부리에 고추를 문 삶은 통닭 한마리가 올라 있었다.웃음이 절로 났는데,삶은통닭은 소래기에 잔뜩 담아 놓은 팥속에 다리를 묻고 서 있는 포즈를 취했다.마을 총각 둘이서 상을 맞들어 움직여놓자 대반으로 앉은 아주머니가 포도주를 따라 상 위로 세번을 돌려 신부를 주었다.신부는 세 모금으로 꺾어 포도주를 마셨다.이어 신랑은 풍덩하게 생긴 주례격의 아주머니가 따라 준 술잔을 비웠다. ○바가지 엎어지면 아들 그리고 나서 주례격의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바가지에서 과자를 꺼내 한 입을 물고 바가지를 내동댕이쳤다.바가지가 엎어졌다.그것을 바라본 하객들이 좋아라 하면서 손뼉을 쳤다.바가지가 엎어졌기 때문에 아들을 본다는 것이었다.아들이건 딸이건 조선족이 또 한번 생명의 씨앗을 뿌릴 수 있게되었다는 사실이 대견스러웠다.어느 틈에 신랑이 신부 곁으로 바싹 다가갔다. 신랑 신부는 오른 손에 술잔을 받아들었다.그리고 깍지걸이로 키스라도 하듯 얼굴을 맞대고 술을 마셨다.교배례를 대신한 모양이다.그럭저럭 혼례절차가 끝났다.대반을 맡은 아주머니가 신부집에 보낼 상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주머니는 우선 고추를 문닭목을 비틀어 빼고 나서 종이에 둘둘 말아 신부 치마폭에 싸주었다.신랑도 신부집에서 닭모가지를 얻어오는 것은 마찬가지다.혼속이 자꾸만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전안례나 교배례 같은 전통의식이 사라진 대신 신부 혼수가 자꾸 늘어나 딸가진 부모들의 걱정도 크다. 이날부터 신혼살림을 차릴 방에는 신부가 해가지고 온 혼수가 그들먹했다.윗방에 놓인 옷장과 이불장에는 신부 친정에서 마련한 이불이며 옷가지가 가득한 것은 물론 텔레비전과 전축·전기밥솥이 한쪽에 따로 자리를 차지했다.그래서 늘그막 남정네들 사이에 『장가 한번 더 갈걸…』하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겨났다.
  • 호암갤러리 「대 고구려국보전」을 보고/안휘준 서울대 교수·미술사

    ◎선조들 뛰어난 예술혼 살아숨쉬는 듯/관람객 배려한 세심한 작품배치 돋보여 고려는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통일의 위업을 이룬 왕조로서 불교를 기반으로 하여 높은 수준의 문화를 발전시켰다.또한 고려는 고대와 근세를 잇는 중세로 일컬어지기도 한다.고려초기의 미술에 통일신라시대의 영향이 엿보이는 점이나 조선초기의 미술에서 고려후기의 전통이 간취되는 사실은 고려의 중세적 성격을 말해 준다.이러한 점들에서 고려시대의 미술을 총체적인 측면에서 제대로 조망하고 규명하는 일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작업은 이루어지지 못했었다.이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바 있는 고려청자전이나 호암미술관이 열었던 고려 불화전은 고려시대 미술의 이해에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나 종합적인 조명의 필요성은 여전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아쉬움을 가셔주는 최초의 전시회가 지금 호암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대고려국보전」(10일까지)이다.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 전시회가 지닌 의의를 대충 짚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이 전시회는 고려시대 미술문화재 전시로서는 규모가 가장 크고 내용이 제일 다양하며 종합적이라는 점이 주목된다.회화·서예·조각·도자기·금속공예·나전칠기 등등 다양한 분야의 걸작들이 1백83점이나 망라,출품되어 있다.이 작품들은 주최자인 호암미술관,국립중앙박물관을 위시한 국내의 각급 박물관들과 개인소장가들,일본·미국·영국·프랑스의 여러 소장처들로부터 협조를 받아 힘들게 한자리에 모아진 것들이다.이번 기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귀중한 작품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전시의 규모와 내용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출품된 작품들을 통하여 고려 미술문화의 특성과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한자리에 모아진 다양한 분야의 대표작들이 한결같이 화려하고 정교하며 고아한 특성과 함께 높고 빼어난 격조를 드러낸다.고려시대의 불교회화와 청자에서 이미 확인된 바와 같은 깔끔하게 다듬어진 귀족적 취향이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이번 전시를 통하여 또한 절감하게 되는 것은 비단 조형적 측면만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한 과학기술적 측면이다.회화에 설치된 불변의 안료,청자에 구현된 천하제일의 비색,각종 공예에 구사된 다양한 기술과 기법 등에는 당시의 첨단 과학기술이 뒷받침되었음이 간취된다. 출품작들의 외형에 나타나는 제반 양상들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고려시대 예술가들과 장인들의 정신과 자세라고 하겠다.탁월한 창의성,지극한 정성,섬세한 감각,세심한 배려 등이 작품마다에서 감지된다.불교에 대한 독실한 신심이 대부분의 작품에 짙게 배어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보편적인 특성이다. 이밖에 이 전시회와 관련해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전시의 방법과 수준이다.귀중한 문화재의 안전한 보존을 위해 독일에서 특별히 주문한 특수진열장,쾌적한 관람에 도움이 되도록 최대한 배려한 격조높은 전시,작품의 보존과 전시효과를 고려한 조명,원만한 동선 등은 우리나라 전시문화의 수준을 높여 놓은 훌륭한 전시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이 덕분에 고려의 명품들 하나하나가 그 진면목과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고 보는 이들의 마음이 흡족하게 된다.이 전시를 보고 나올 때마다 고려시대 선조들이 일군 위대한 미술문화에 대한 감동과 재인식,옛날에는 엄두도 못냈을 전시가 실현되는 현실에 대한 기쁨이 힘든 일을 가능하게 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진지하고 질서있는 관람객들의 문화애호심에 대한 가슴 뿌듯함 등을 느끼곤 한다.
  • 황해도 안악 고구려고분 여인화(한국인의 얼굴:43)

    ◎큰 귀에 실한 턱… 전형적 귀부인/얼굴은 풍만한데 눈·코·입 작은편/한국 초상화의 시원… 팔자수염 남편그림과 나란히 고대인은 무덤의 벽화를 통해서도 사람의 얼굴을 그려냈다.이들 그림은 밀폐된 무덤의 구조적 특성 때문에 오늘날까지 그 필치를 거의 다 간직했다.고대 벽화에서 얼굴그림은 옛 고구려 강역의 고분에 많이 남아 있다.고구려의 도읍지를 따라 압록강유역과 대동강유역에 주로 분포되었다.그리고 고구려 도읍지로부터 떨어진 황해도와 더 멀리는 경상북도 북부지역 고분에서도 더러 얼굴그림이 나왔다.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 안악3호 무덤 널방(묘실)벽에는 유명한 부부상 그림이 있다.이 무덤 벽화에는 「동수」라는 사람 이름과 서기 357년에 해당하는 중국 동진의 연호 「영화13년」을 먹글씨로 쓴 묵서명(묵서명)이 보인다.그래서 인악3호 무덤 말고 이른바 동수묘(동수묘)라는 이름이 더 붙어 있거니와 무덤을 축조한 시기도 명확히 밝혀졌다. 인악3호 무덤은 석회암으로 축조한 돌방무덤(석실분)이다.남쪽인 앞으로부터 널길(선도),앞방(전실),널방인 주실로 연결되었고 주실 좌우에 옆방(측실)이 1간씩 달렸다.이들 각 방의 벽에는 부엌,외양간,말갖춤 곳간(마패고)등을 그리고 맨 앞에는 집을 지키는 위병상을 그려넣었다.무덤에 묻힌 주인공 부부가 생전 살던 주택을 재현한 것이다.여기에는 물론 고구려인의 내세관도 깃들여 있다. 부부상은 주실 오른쪽 옆방 벽에 그렸다.부인은 매우 후덕한 모습을 했다.후덕한 느낌을 주는 까닭은 우선 얼굴이 풍만한 데 있다.사람의 외양을 대표하는 오관중에 귀를 빼놓고 눈·코·입은 작다.눈섭도 그리 길지 않으나 귀는 풍만한 얼굴과 걸맞게 크다.턱 역시 얼굴과 귀 못지 않게 실하다.헤어스타일은 검은 머리를 높이 올린 고계다.그리고 머리꾸미개(수식)를 늘어뜨렸다. 부인의 얼굴은 고대인이 선호한 귀부인상에 틀림없다.특히 얼굴과 턱·귀는 고대인이 평가하는 귀인 기준과 맞아떨어진다.인악3호 무덤이 축조된 4세기 중반에는 상법이 어느 정도 보편화되었을 것이다.그러한 가능성은 중국의 상고시대인 주대에 이미 얼굴의 골격을 근거로 사람의 품성과 장래의 길흉을 가늠하는 상법을 퍼뜨렸다는 학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부인상의 얼굴은 옆에서 그린 측면화다.얼굴과 옷매무새가 세련된 필치로 묘사되었다.그래서 인물화로서는 주인상 남자얼굴보다 부인상이 더 성공을 거둔 작품인 것이다.주인상 남자는 묵서명 기록대로 해석하면 요동지방에서 스스로 고구려를 찾아온 연의 무장 동수다.비단관을 쓰고 손에 부채를 잡은 주인공 남자상은 팔자 수염을 길렀는데,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을 했다. 이 부부상 벽화를 간직한 인악3호분을 동수묘가 아닌 고구려 미천왕릉에 초점을 맞춘 견해도 있다.그러나 누구의 무덤이라는 논란을 떠나 인물상 채색벽화는 우리나라 초상화의 시원이라는 점에 큰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 이도학 박사,저서 「…고대국가 연구」서 주장

    ◎“백제뿌리는 고구려 아닌 부여”/4세기에 2차 남하… 3년만에 비약적 발전/국호변경·왕성계보·모제등을 근거로 제시 한국 사학계에서 가장 논문을 많이 내는 학자,새 학설을 가장 자주 발표하는 학자로 꼽히는 이도학 박사(38)가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모은 저서 「백제 고대국가 연구」를 최근 냈다(일지사 출판).백제사를 포괄적으로 다룬 국내 학자의 연구서가 많지 않은 학계 현실에서 이 책은 커다란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저서에서 이씨는 지난 10여년동안 발표한 논문 40편을 바탕으로,백제의 기원에서 4세기 집권국가 체제를 확립하기 까지의 과정을 새롭게 구성했다.그가 세운 백제사의 틀은 다음과 같다. ­백제 세력은 원래 부여족의 한 갈래로 서기 1세기 무렵 남하,한강 유역에 마한 소국 가운데 하나인 「백제」를 형성한다.이어 4세기 때 중국 동북부에서 활동하던 부여족 일파가 또 백제지역으로 남하한다.한뿌리에서 나온 두 세력은 충돌없이 타협해 「백제」를 형성한다.2차 남하집단은 철갑으로 중무장한 기마병단으로서,우월한 무력을 바탕으로 마한제국을 정복해 나간다.이것이 「일본서기」에 기록된 근초고왕의 마한 정벌이다.이후 백제는 노령 이북을 통치하는 한편 가야와,영산강 일대 마한 잔여지역에 대해서도 통치권을 간접 행사한다.이같은 세력확대를 바탕으로 백제는 국내에서는 율령을 정비하는 등 집권체제를 확립한다… 이씨의 이론틀을 구성하는 부분부분들은 각기 논문으로 발표될 때마다 학계로 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은 새 학설(신설)들이다.이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받은 학설이 「4세기 부여족의 2차남하로 백제가 비약적 발전을 이뤘다」는 주장이다.「정복국가론」이라고 부르는 이 학설을 일본·미국 학자들이 일부 제기하긴 했지만,이씨가 이를 구체적으로 입론했다. 그는 『4세기에 백제는 한차원 높은 국가적 발전을 이루는데 이에 소요된 기간이 3년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이는 외부 세력 영입없이는 불가능하며,그 「외부」의 정체는 만주의 부여족 일파(곧 백제족)라고 주장한다.그 근거로 「백제가 요서지방을 점령,한동안 통치했다」는 중국 사서 기록을 든다.이사료는 그동안 「백제 요서경략설」의 토대가 돼 왔지만 이씨는 거꾸로 「한반도 백제 세력이 요서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백제족이 원래 만주에 있었다」는 증거로 해석한다.그는 자신의 설을 한국·중국의 문헌과 고고학적 성과로 뒷받침하고 있다.이씨는 4세기에 백제 왕실이 교체됐으며,이에 따라 백제사는 마한 소국 단계인 「백제」와,고대국가를 완성한 「백제」로 구분된다고 결론지었다. 「정복국가론」못지않게 중요한 학설이 백제의 기원을 부여에서 찾은 것.학계 통설은 백제를 고구려계로 보았지만 이씨는 백제 개로왕의 상표문,묘제,백제의 왕성,「남부여」로의 국호변경등을 근거로 제시했다.이밖에 ▲백제 「칠지도」의 기본성격 ▲고대국가에서 소금교역,제의권이 갖는 역할을 밝힌 것들이 이씨가 세운 주요 학설들이다. 지난 91년 「백제 집권국가 형성과정 연구」로 한양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씨는 요즘 연세대·한양대등에 출강하고 있다.그는 『백제의 집권체제 확립후 백제말까지를 다룬 후속 저서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그 작업이 끝나는대로 『고조선에 버금가는 노대국이자 고구려·백제의 뿌리』인 부여사 연구에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 고구려 지명새긴 기와 첫 발견/반월산성서/포천 옛이름 「마홀」입증

    경기도 문화재 제48호인 포천군 군내면 구읍리 산5­1 반월산성에서 고구려시대의 옛 지명이 정확하게 새겨진 기와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단국대 사학과팀(단장 박경식교 수)이 지난 7월1일부터 반월산성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여와 25일 공개한 기와는 폭 4.3㎝,길이 19.5㎝ 크기의 회백색 연질로 「마홀수해□」란 글자가 뚜렷하게 양각돼 있다. 삼국사기 권35 잡지 제4지리2는 『견성군은 본시 고구려의 마홀군인데 경덕왕이 개명하였다.지금의 포주니 영현이 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단국대 사학과팀은 따라서 『포천은 고구려 당시 마홀군으로 불려졌음을 알 수 있으며 기와의 명문이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는데 삼국시대의 지명이 기와로 확인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박경식 발굴조사단장은 『명문기와의 발견으로 반월산성이 고구려에 의해 처음으로 축조됐을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면서 『출토된 기와의 처리수법과 문양을 볼때 앞으로 남한지역에서 출토되는 고구려 기와 연구에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장백진의 탑산(압록강 2천리:3)

    ◎발해의 기상 말하듯 「5층 전탑」 고고히…/높이 12.64m의 네모꼴… 꽃무늬 벽돌로 쌓아/조선인 2가구 19세기 이주,현재 4만명으로 중국 길림성 장백조선족 자치현 장백진의 탑산은 산에 탑이 서 있기 때문에 탑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그 탑산의 탑은 이른바 영광탑인데 벽돌을 쌓아 만든 5층 전탑으로 되어있다.네모꼴을 기본형으로 한 이 탑의 높이는 12.64m에 이른다.탑 꼭대기 지붕(옥개)위에는 마치 조롱박 5개를 포개 올린 것처럼 보이는 높이 1.98m의 청동제 상륜을 세워놓았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불탑이다.청회색 꽃무늬 벽돌을 쌓아 마감한 상층기단 남쪽에는 아치형 문을 냈다.그리고 각층의 탑신 남쪽 벽에 네모꼴 창을 뚫었다.지붕의 추녀와 추녀 받침은 벽돌쌓기를 통해 마치 목조건물이 풍겨주는 것과 같은 그런 멋을 부렸다.상층기단 아래에는 길이 3.2m,너비 3.4m,깊이 1.49m의 지하공간 지궁을 갖추었다.지궁 뒷벽에는 사리함을 봉안했던 것으로 보이는 대좌가 마련되었다. ○청동제로 상윤 세워 이 탑이 후대에 들어 발해의 탑으로 고증된 것은 19 82년께다.중국 동북고고대의 소춘화와 중국과학원 장어환 교수가 2년에 걸친 검증에서 발해시대 불탑임을 확인했던 것이다.그러나 어느때 누가 세웠는지,또 불탑의 이름이 무엇이었는 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으로 담아있다.다만 19 08년 청나라 장백부 관리였던 장풍대가 이 탑을 보고 생김새가 노나라 때 영광전을 닮았다고 해서 영광탑으로 불러왔다. 이 탑에 대한 전설도 있다.장백조선족자치현 문화관 이성태 관장이 들려준 전설은 발해의 퇴락을 간접적으로 이야기 한성 싶다.전설에 의하면 어느 해 어느 날 괴상한 사람들이 탑속으로 스며들어 이레를 보냈다.그리고 금불상을 훔쳐 배에 싣고 가다 배가 뒤집히는 통에 금불상이 강에 가라앉았다고 한다.그 뒤에 늘 빛을 훤히 드러내던 탑은 광채를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그러자 독사가 탑주변에 살면서 사람과 가축을 마구 잡아먹었다는 것이 전설의 요지다. 장백현 일대는 발해가 융성한 시기의 강역 압록부에 해당한다.그 중심지 서경이 하류에 있었는 데 장백진에서 그리 멀지 않다.이 탑은 물론발해가 융성했던 시기에 세웠을 것이다.오늘 날도 탑이 있는 산아래 압록강변 장백진의 벌이 탑전이고 보면 탑산의 탑은 아직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이 탑의 영향력이 어디 장백진에만 국한했으랴.강건너 북한땅 혜산시 역시 옛 발해의 압록부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압록강 유역의 양안은 본래 고구려 강역이었다.그러나 고구려는 당에 정복되어 장백진에는 정복자의 전설이 더 많이 남아있을 뿐이다.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이 함께 세운 발해가 멸망한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더 많은 세월을 지배했기 때문에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는 쇠잔하기 이를 데 없는 잔영에 불과했다.그런 탓인지 탑산에는 당의 장수 설인귀의 전설이 남아있다.탑산에 세운 한 비석에다 설인귀가 말에 올라 군사를 호령했던 자리라고 기록해 놓았다.그리고 말발굽자리처럼 자연적으로 푹 파인 커다란 화산돌은 설인귀가 탔던 말발굽자리라 해서 과마석으로 묘사했다. ○정복자의 전설남아 역사의 흥망성쇠를 두고 「삼국지연의」머리시는 「한 마당 꿈」이라고 했다.정녕 그런 것인가.민족의 고대국가 강역에서 중국의 역사도 흥망성쇠를 거듭했다.발해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면서 요,금에 이어 명이 숨가쁘게 지나가고 청이 시작되었다.청은 중국의 동북을 만족(만주)자신들의 발상중지로 여기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봉금령을 내렸다.그리고 나서 청은 16 77년 백두산과 압록강,두만강 이북의 1천여리 넓은 땅을 봉금구로 정했다.특히 장백현은 경위장이라는 이름의 그들 사냥터가 되었다. 그러니까 장배현은 짐승들만 들끓는 무인지경이었다.19세기 초엽에 와서야 밥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이다. 「장백현황」에 따르면 청나라 연호로 도광 11년(서기18 31년)오늘날 길림성 임강 부근인 모아산 북탕하지방에서 조선인 2가구를 발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이어 도광25년에 조선인 10여명이 임강으로 건너왔고,함풍 2년(서기 1852년)에는 함경도 단천군 사람들 10여명이 와서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함경도서 많이 이주 이들이 바로 압록강을 건너온 이주민 선구자들이다.그로부터 세월리 흘러 20세기에 접어들어 19 05년에는 압록강 유역 장백·임강·집안 등지에 사는 조선족 이주민은 8천7백가구 3만9천4백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그 무렵 장백현으로 들어온 평안도 출신의 이주민2세 이동근(82)노인은 압록강을 건너와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던 뼈 아픈 사연을 회고했다. 『고향을 떠나서리 들어온 데가 장백진 탑전 사탕골이었댔시요.내 나이 연네살이었는데 자꾸 고향 생각이 납데다.그런 판에 부친은 한 해치 품삯 60원을 받고 연치산이라는 조선족 집에 머슴으로 들어가고 모친은 삯일을 했수다.부친이 만 네해 머슴을 살고 여섯식구가 다시 모였디요.기쁜 맘도 잠시고 여러 식구가 먹고 살게 있어야디.그래서 내 열여섯살 나던 해에 김세익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갔시요.저 노친(김증손·77)이 겨우 열한살이었던가 기래요.다섯 해 데릴사위 노릇을 하다보니 어린 처가 숙성해집데다.그래서리 결혼을 해버렸디요』 이 노인은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딸들은 모두 인근으로 출가하고 막둥이로 둔 아들도 커서 장가를 들었다.아들은 장사를 하는데 조선(북한)을 자주 드나든다는 이야기다.노인은 묻지도 않았는데 『조선에 물건만 가지고 가면 다 돈이 된다고 기래요』라는 말을 했다.노인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해관(세관)이 있는 압록강변 국경지대로 짐을 실은 차들이 몰려들었다.물건이 잔뜩 든 골판지 상자와 큰 부대자루들이 장백진 쪽에서 통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 장백현의 아침(압록강 2천리:1)

    ◎백두산 병사봉 아래서 압록강 발원…/백두산 자락 오솔길엔 아픔드리 나무숲/상류에 163개 작은 섬… 92개는 북한 소유 서울신문은 광복 50주년을 맞아 압록강유역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 민족의 삶을 진솔하게 그린 「압록강 2천리」를 중국 연변 조선족 작가 유연산씨의 집필로 주 1회씩 연재합니다.서울신문 사진부 김명국기자와 동행한 작가는 민족의 개척정신이 면면히 이어진 이른바 서간도땅 압록강유역을 굽이굽이 누비면서 소수민족으로 살아온 동포들의 애환을 소설보다 흥미롭게 엮어나갈 것입니다.그리고 압록강의 대안북한땅을 예의주시하는 가운데 가지 못하는 산하의 모습과 북녘 사람들의 근황을 듣고 본대로 전할 예정입니다.특히 압록강유역은 고구려가 발흥한데 이어 발해가 기상을 떨친 우리 고대국가의 강역이었다는 점에서 역사기행 성격도 지닌 시리즈가 될 것입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정부 소재지 연길에서 장백현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중국 동북의 대지를 박차고 막 솟아오른 8월의 태양과 동행한 버스가 백두산 자락이 드리우기 시작한 안도현 이도백하에 이르자 벌써 한낮이 기울었다.갑자기 해를 가린 아름드리 나무그늘로 하여 길은 저녁나절 처럼 어둠침침했다.백두산의 그 많은 나무 가운데 미인이라는 홍송과 백송,사시나무가 어우러진 산자락에는 만화방초가 피어났다. 여름날 백두산 숲길은 참으로 아름다웠다.얼마를 달렸을까,종종걸음을 치듯 골짜기를 흘러내려온 물이 신작로 곁을 따라 철철 넘치듯 모여들었다.압록강 윗물을 만난 것이다.불타는 석양이 미인송의 아름다운 자태를 그림자로 만들어 버린 해거름녘이었다.터덜거리는 버스가 달려 내려갈수록 물빛깔은 푸르름을 더했다.녹음이 짙을대로 한창 짙게 물들어버린 나무 그림자가 수면과 기묘하게 조화되었다. ○홍·백송 어우러 장관 그제서야 압록이라는 의미를 깊이 깨달았다.압록강의 물빛이 오리머리 빛과 같이 푸른 색깔을 하고 있다(수색여압연)란 말을….「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그리고 「사기」나 「한서를 보면 압록강을 패수,염난수,청수라고 불렀다.고구려에서는 청하라고도 했고 중국에선 얄루장으로 부른다.어떻든 이 국경의 강은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장백조선족자치현의 현정부 소재지 장백진에는 좀 늦은 저녁시간에 도착했다.여관에서 저녁밥상을 물리고 미리 약속한 김학현(60)선생을 만났다.그는 길림성 장백조선족자치현 문화관장으로 근무중인데 변계조사조의 일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그러니까 김선생은 중국과 북한 사이에 체결한 변계조약(변계조약·국경조약)에 따라 1963년에 실시한 경계조사에 참여했던 것이다. 국경에 관한 이야기를 밤이 늦도록 나누었다.그러나 백두산 천지 아래서부터 시작된 국경조사와 거기에 얽힌 사연은 다음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다.그 이유는 김선생의 말을 들어보면 납득이 갈 것이다. ○여름 장마로 길 끊겨 『백두산 국경비는 천지서남쪽 바로 아래에 있디요.맨 위에서 부터 일련번호를 매겨 내려오는데,1호가 3개,2호가 2개고 나머지 5호까지는 각각 1개씩을 세웠댔습니다.그러니끼리 모두 8개의 국경비가 있다 이 말입네다.그 국경비가 있는 백두산을 가자면 중국쪽 초소는 물론 조선(북한)쪽 초소도 지나가야 하디요.그런데 올 여름 장마에 길이 다가 떠내려가서리 지금은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이요.도로가 복구되면 안내할테니 좀 기다리시라요.실사구시라고 현장을 안보고 백두산 국경을 어떻게 쓰겠습네까?』 그래서 백두산 국경선 답사는 일단 뒤로 미루었다.자동차를 타지않고 높디높은 백두산,그것도 국경 고산지대를 도보로 등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김선생에게 뒷날 백두산 국경비답사에 동행해줄 것을 부탁하고 마음을 고쳐먹었다.물길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장백진에 기왕 도착했으니 이곳에 우선 관심을 두기로 작정을 댄 것이다.올라가지 못할 나무 바라보지도 말라고 했던가.길이 떠내려가 못 오를 산을 포기하고 우선 이곳의 압록강 답사에 신경을 쏟기로 했다. 압록강은 널리 알려진대로 백두산 최고봉인 병사봉아래 남동쪽에서 발원한다.처음에는 작은 시냇물을 형성하여 흐르다가 가림천과 오시천이 합수하면서 물길이 넓어진다.그러니까 장백진은 물길이 넓어진 압록강변에 자리했다.압록강은 장백진을 지나면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버린다.그러면서 얼마를 흐르면 수력발전으로 유명한 장진강과 허천강을 만나는 것이다. ○강넘어 북한땅 함남 장백진을 지나가는 압록강 길이는 2백57㎞에 이른다.6백리가 좀 넘는 길이인데,압록강 전체 길이의 3분의1에 약간 못미친다.변계조사에 참여한 김선생에 따르면 장백현을 통과하는 압록강 상류 수계에는 섬과 사주가 1백63개나 된다고 한다.그 가운데 중국에 들어온 것이 71개이고 나머지 92개는 북한에 귀속되었다는 것이다.이렇듯 수계를 통한 국경개념이 뚜렷해지면서 웃어넘길 수 없는 일들도 일어난다는 것이 김선생의 귀띔이다. 『강에 있는 섬들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 때가 더러 있습네다.자기 나라 땅이거니 하고 무심히 발을 디뎠다가 기절초풍을 하는 수가 있디요.내 한족 친구 한 사람은 일생에 딱 한번 외국땅을 밟았는데 그것이 압록강 조선(북한)수계에 들어간 섬이었댔습니다.무심히 섬에 올랐더니 옥수수를 따던 조선사람들이 어서 돌아가라고 손짓발짓을 해서 도망쳐 나왔다고 합데다.국경은 그만큼 무서울 때가 있고,자칫 잘못하면 죄인이 되기도 하디요』 김선생과 밤 늦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그런데도 새벽에 해발 2백80m가 되는 탑산에 오를 요량으로 일찍 일어났다.탑산에 오르고 나서 장백현에서,아니 좀 더 시야를 넓히면 백두산에서 뜨는 아침해를 맞았다.새벽 어스름이 걷힌 압록강이 확연하게 시야로 들어왔다.그리고 강 건너로 옛 함경남도 땅인 북한의 양강도 혜산진시가지와 그 뒷산 멀리에 펼쳐진 개마고원의 옹기종기한 묏부리들이 보였다.
  • 남북한학자/「한반도 문명기원」 논란 예상

    ◎일 오사카 국제학술심포지엄에 16명 함께 참석/한국­“위만조선이 최초의 고대국가” 역설/북한­정권 정통성 위해 “대동강 중심” 주장 광복 50주년을 앞두고 남북의 역사·고고학자들이 일본에서 만난다.오사카경제법과대 주최로 오는 8월4∼6일까지 이 대학에서 열리는 국제학술심포지엄 역사부회가 그 자리.「동아시아의 원시·고대문명의 재검토」를 주제로 한 이번 회의에는 남북학자 16명이 참석한다.러시아·중국·일본학자도 5명이 참석하지만 발표주제는 주로 남북학자들에게 할애되었다. 한국학자들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참가하는 반면 북한학자들은 획일화한 주제를 채택했다.특히 북한은 대동강유역의 문명과 고조선·단군에 대해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여기에는 북한정권의 정통성을 고조선과 고구려에서 찾고,한반도 고대문화에서 대동강유역문화를 우위에 두고자하는 정치적 복선이 깔렸다.그리고 주제발표자들도 북한정권이 설립한 조선사회과학원 소속 학자들이 일색을 이루었다. 그 발표내용을 보면 ▲새로운 발견,대동강유역 고대문명의발생과 발달사(이순진·조선사회과학원) ▲고조선시기의 지석묘와 석관묘(석광준·〃) ▲대동강유역의 고조선유적과 유물(송영헌·〃) ▲단군 말살운동및 민족말살정책의 산물(강용성·〃)로 되어있다.이밖에 ▲고조선시기의 고대성곽(김종혁·〃) ▲고조선사 재정립에 따른 민족사적 의의(김철식·〃)등이 포함되었다. 발표주제가 암시하는 대로 북한은 종래의 주장을 되풀이 할 가능성이 크다.지난 93년10월 단군릉 및 단군유골 발굴 발표이후 대동강유역과 평양을 한반도 고대문명의 중심지라는 주장을 재론할 것이라는 관측이다.그 허구성은 한국학계가 여러차례 지적했지만,북한이 이 문제를 해외에까지 들고나옴으로써 남북학계가 논쟁을 불러일으킬 여지도 안고있다. 그러나 한국학계는 북한과 의도적으로 대응할 조짐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한국측 발표자는 주최측의 개별접촉에 의해 선정되었고,발표내용도 「동아시아의 원시·고대문명의 재검토」라는 주제에 맞추어 학자들 스스로 결정했기 때문이다.다만 성균관대 손병헌 교수(고고학)의 「고선사에대한 연구현황과 과제」와 서울대 최몽룡 교수(〃)의 「고대국가의 성립과 발전」에서 북한 발표내용과 상반된 견해가 제시될 것으로 보인다. 최몽룡교수의 「고대국가의 성립과 발전」은 한국역사속에 잘 알려진 위만조선(위만조선·기원전 194∼108)을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국가로 본 논문이다.위만조선은 사회조직,직업적인 행정관료,조직화된 군사력,행정중심지로서의 왕검성 존재,왕권의 세습화를 통해 국가체제를 갖추었다는 것이다.이와 더불어 고고학 편년으로 초기철기시대(기원전 300∼0년)에 해당하는 위만조선은 세형동검 계통의 유물과 돌무덤(석관묘),움무덤(토광묘),독무덤(옹관묘)등의 유적을 제시했다. 이는 결국 북한이 발굴했다는 단군릉의 인골 분석결과를 서기전 3018년으로 발표한 절대연대 주장은 물론 고조선의 국가실체를 부정하는 것이다.북한이 주장한 인골 분석연대는 과학적인 고고학 편년상 신석기시대 중기(서기전 3000∼2000년)나 후기(서기전 2000∼1000년)다.그래서 서울대 임효재교수(고고학)는 원시사회의 문화상을 밝히는 연구논문 「5천년전의 한국」을 발표키로 했다. 그리고 국립민속박물관 조유전관장(고고학)은 남북한 학자들이 참가한 이번 학술회의에서 「남북학술교류 제의」를 주제로 한 발표문을 통해 그 가능성을 타진할 계획이다.광복5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학술교류는 한번쯤 딛고넘어갈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 백령도 지진(외언내언)

    우리나라에서 지진이 발생한 첫 기록은 고구려 유리왕 21년.이후 조선조까지 1천8백여회의 지진이 일어난 것으로 삼국사기와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이를 시대별로 보면 삼국시대 1백2회,고려시대 1백69회,조선시대 1천5백60여회.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서기 1002년과 1007년 두 차례에 걸쳐 제주도에 불기둥이 솟았고 불덩이가 인가를 뒤덮어 인축의 피해가 컸다고 한다.중종실록에는 15 18년7월2일 서울에도 지진이 일어나 담과 집들이 무너져 모두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잠을 잤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리나라에 현대식 지진측정기가 처음 설치된 것은 1905년.그래서 1905년이전에 발생한 지진을 「역사지진」,그 이후를 「계기지진」이라고 한다.계기지진중 가장 큰 피해를 준 것은 19 36년 지리산 쌍계사지진과 78년 홍성지진.모두 진도 5의 강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집이 무너지는등 큰 소동을 빚었다. 우리나라는 일반적으로 지진안전지대로 인식되어 있다.그러나 지질학적으로는 한반도 역시 환태평양범지진대에 속해 있어 전문가들은 일본에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것은 사실이나 한반도도 결코 지진안전지대가 아니라고 경고하고 있다. 기상청 통계에 따르면 1978년부터 지난해까지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지진횟수는 2백83회였으며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정도의 지진도 연평균 5회가 일어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올들어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지진은 18회로 사람이 감지할 수 없는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24일 서해 백령도 근해를 진앙지로 하여 일어난 지진은 서울과 일산신도시 등 경기 서북부지역에서 창문이 흔들리고 탁자위에 놓아둔 커피잔등이 움직이는 진동을 보였다.피해는 없었지만 지진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음을 경고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겠다.
  • 「대륙의 한」 1∼2권 펴낸 이문열씨(저자와의 대화)

    ◎“백제의 요서점령은 자랑스런 역사”/4∼5세기에 진출… 북위침략군 수십만 격퇴/「근초고왕의 조카 여광이 주역」 허구 도입 이 시대 최고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문열씨(47)가 잃어버린 백제사를 되찾는 긴 여행에 나섰다.이씨는 4∼5세기 백제의 중국 요서진출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 「대륙의 한」1∼2권을 최근 냈다(둥지 펴냄).중국 고전소설 「삼국지」「수호지」들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웅장하고 세련된 문체를 뽐낸 그가 이제 우리 역사의 작품화에 본격 나선 것이다. 『백제가 오늘날의 산동·화북 어름에 본토보다 몇배 넓은 지역을 차지해 다스리고 있었고,더욱이 중국 북위의 침략군 수십만을 격퇴했다는 사실은 고구려의 살수대첩이나 안시성싸움처럼 호쾌한 느낌을 주었습니다.또 중국 역사책에 나오는 백제계인 백지래왕,요서8왕 이야기도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소설 「대륙의 한」은 4세기 근초고왕 시대에서 시작한다.근초고왕은 남으로 마한의 잔여세력을 통합하고,북으로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이겨 국토를 넓힌 정복왕.소설은 이같은 역사적 사실에다 「근초고왕에게 왕위를 뺏긴 조카 여광이 있었다」는 허구를 접목한다.여광이 성장해 왕위를 되찾으려다 실패하자 그의 세력이 중국으로 건너가 요서 일대를 정복,통치한다는 줄거리이다.여기에 다양한 인물을 설정,치열한 책략과 뛰어난 무예를 곁들임으로써 스케일 큰 대하소설을 구성했다. 사실 이 작품은 이번에 처음 소개된 것이 아니다.80년대 초 신문에 연재되다 중단된 것을 그뒤 2개 출판사가 각각 「그 찬란한 여명」과 「요서지」란 제목으로 출간했다.그럼에도 이번에 다시 책을 낸 까닭을 작가는 『소재가 워낙 아까워서』라고 말한다. 『한 작품을 세번째 낸다는 게 꺼림칙해 무척 망설였습니다.그렇지만 결코 미완성인 채 놓아둘 수 없다는 생각에 10년만에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가 「요서 진출」에 집착하는 것은 그 자랑스러운 역사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현재 중고교 국사교과서에 내용이 실려 있긴 하지만 워낙 빈약한데다 그동안 일반에게 소개된 적이 없어 국민 마음에 아직 그 역사가 자리잡지는 못했다고 보고 있다. 이씨는 『앞선 작품이 여광일당의 중국 도착에서 사실상 끝나고 뒷부분은 설명식으로 마무리해 아쉬움이 많았다』면서 「대륙의 한」에서는 요서를 정복해 가는 과정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까지를 구체적으로 소설화하겠다고 밝혔다.따라서 작품을 두부분으로 나눠 ▲1부에서는 여광 등이 요서에 자리잡을 때까지를 ▲2부는 그들의 후손이 북위의 침략을 물리치는 등 대활약을 펼치는 모습을 그릴 예정이다.모두 8∼9권으로 계획한 가운데 현재 1부의 마지막 부분인 5권째를 쓰고 있다. 작가는 앞으로의 줄거리 전개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역시 자료의 빈곤』이라면서 그렇다고 허무맹랑한 내용을 담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그는 리얼리즘을 확보하지 못한채 선조의 업적을 과대포장하는 것은 『싸구려 국수주의』에 불과하며 이는 『작가가 꼭 경계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 위례산성/백제 유물 대량 출토/서울대 조사단

    ◎세발토기·토우·철기 등 발굴/첫 도읍지 「직산 위례성설」입증 충남 천안시 북면 운용리 산81일대 위례산성에서 백제시대 토기와 철기등 많은 분량의 유물이 쏟아져나와 문헌연구를 통해 주장해온 백제 초기 도읍지 직산 위례성설을 어느정도 뒷받침할 수 있게 됐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고고학발굴조사단(단장 임효재)이 충남 천안시 예산지원을 받아 지난 5월4일∼7월12일 실시한 발굴조사결과 이 산성일대에서 백제특유의 세발토기(삼족토기)와 말모양 토우(토우) 각각 2점,철제 낫(철겸)과 창고다리(철준) 각 1점,각종 토기및 기와조각 7백여점을 수습했다. 이번에 나온 토기 가운데 3개의 다리에 잔모양을 한 세발토기는 삼국중 백제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적인 토기다.그리고 고구려와 깊은 연관을 갖는 백제의 유물인 말모양 토우는 의례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이밖에 백제토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멍석무늬(승석문)가 찍힌 토기도 포함되어 위례산성이 백제시대 산성임을 입증했다. 위례산성은 천안·직산·입장·안성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차령산맥의 준봉 위례산 정상(해발 529.5m)에 위치했다.퇴뫼식(산정식)과 포곡식(포곡식)으로 이루어진 이 산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토석혼축성과 돌로 쌓은 석성이 서로 연결되었다.산성 안에서는 우물 1곳과 성문자리(성지)를 확인했는데,이번에 발굴한 유물은 거의가 우물과 문자리 주변에서 나왔다. 백제의 초도 하남위례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뚜렷한 정설이 없는 가운데 ▲서울 몽촌토성일대 ▲경기도 광주군 춘궁리일대 ▲천안의 직산 위례성설이 제기되어왔다.그러한 점을 고려하면 이번 위례산성 발굴결과는 천안의 직산 위례산성설에 접근할 수 있는 기초자료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발굴단장 임효재(고고학)교수는 『백제의 특징을 지닌 출토유물로 미루어 이 산성은 백제시대에 축조되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밝히고 『연차적인 정밀발굴을 통해 보다 중요한 자료를 더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 서예가 여초 김응현(이세기의 인물탐구:77)

    ◎비학과 첩학을 접목한 온자한 서풍/우리 전통서예 존중,「옛것」 부활 노력/동방연서회 설립… 후학 7천명 양성/보통학교때 붓글씨 시작… 단 1점의 타작도 안써 「고졸하나 우둔하지 않고 활달하나 법도가 있고 염미하나 속되지 않고 웅혼하나 패도하지 않아 강과 유가 서로 돕고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룬다」,즉 『글자마다 생동미 넘치는 운필은 자연스러운 리듬과 균형미에 따라 「중화의 기」가 흐른다』는 뜻이다.이는 여초 김응현 서법에 대한 종명선 교수(서안교대)의 평이다.종교수는 현재 중국서협 학술위원이며 평론가,중국서법대가의 한 사람이다.지난 92년 한·중건교기념 김응현서법전에 붙여진 이 찬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북경사범대 교수이며 당대 명서법가로 명성을 떨치는 계공은 여초의 서법을 전대의 대가인 추사와 비유하는데 아무 주저함이 없다.우선 두 사람이 모두 「금석고고학에 대한 조예가 깊고 비학과 첩학의 접목을 중시하여 자재로운 천취를 얻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단지 추사의 글씨가 「바람을 끼고 비를 몰고오듯 유유자적하게 걸어나오는 데 비해 여초의 서법은 유고유아한 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70년대 북경서 초대전 널리 알려지다시피 여초는 우리 서예계에서 옛것을 존중하여 전통을 부활시키며 이를 연구하여 마침내 새로운 것을 이뤄내는 데 전생애적 노력을 기울여온 원로다. 그는 일찍이 국제무대로 눈을 돌려 70년대 중반에 대북과 도쿄에서 각각 초대전을 가졌고 80년대말에는 본격적으로 중국본토에 진출하여 북경의 계공,상해의 사치유·왕북악등과 교분을 트면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북경 천안문광장 혁명기념관에서 개인전을 개최,연변·장춘·심양등을 순회하여 그곳 서예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특히 중국여행중 발표한 「당대의 해서가 동국에 미친 영향」 「안진경이 한·일서법에 끼친 영향」제하의 논문은 「중원시대의 문자와 단군시대의 문자,중원서법과 고구려의 인연관계」를 정밀하게 파헤쳤고 「동방의 금석은 자발적으로 진전됐으며 서체 또한 중국 영향권에만 있어왔다는 통념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여 한·중 학자간의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그러나 「심도 있는 견해와 견실한 입론,광활한 사로로 펼쳐진 그의 문장은 추호의 빈틈 없는 치학태도」로 평가되어 오히려 중국 서법가들의 공감과 호감을 산 바 있다. 여초의 초기의 서법은 주로 진의 왕희지,당의 구양순,원의 조맹부에 영향을 받아 「새벽바람 속의 잔월(효풍잔월) 같은 청려,대해파도 같은 웅호,뜬구름 스치듯한 표일,고하고 졸하며 기하고 위한 여러 글씨체를 지나」비학을 통한 광개토왕비체와 훈민정음체를 탐구하면서 「화려와 아첨(유미)을 몰아낸 강건한 주경을 성취」한 것으로 대찬되고 있다. 그는 18대째 서울에서 살고 있는 사대부명가의 후손이다.그의 증조부는 구한말 종일품벼슬을 지내다 경술국치때 순국한 김석진 학자이며 조부는 비서원승직을 지낸 동강 김영한,창문여고 설립자인 김윤동씨의 5남3녀중 3남으로 태어나 숭인보통학교에 다니면서 그는 벌써 붓글씨를 쓰기 시작했고 휘문중시절 동몽선습과 명심보감,율곡의 격몽요결 등 옛명현의 시문에 접근해 있었다.그러다가 1944년 아무 연고없이 일경에 연행됐다가 풀려나온 데 대한 후유증으로 도봉동 초가에 묻혀 그때부터 법첩으로 독학한 것이 친형인 김충현·창현 등과 함께 서예의 길을 걷게 된 동기다. ○불의에 타협않는 성품 성품이 꼿꼿하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그는 50년대 중반 「평론 없는 분야는 독립된 분야로 성립될 수 없다」는 자각에서 60년대초까지 스스로 필봉을 휘둘러 「붓에 먹을 찍어서 종이에 긋기만 하면 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문의 뜻도 모른 채 쓰거나 글씨를 그림그리듯 하거나 남의 글씨를 임서하거나 손끝의 재주로 숙달된 필체」가 아닌,「오랜 서법에 의해 연마되고 탁마된 고매한 인격에서 우러나온 작품」을 주장해왔고 국전 서예부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선현의 가언경구나 명문장을 선택하여 민족의 나갈 바를 열어주는 진취성 있고 주체적인 내용」,그리고 「아무리 원로라도 공부하지 않는 원로」는 심사위원으로 추대할 수 없으며 「추호의 사정이 깃들이지 않은 엄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심사원 선출」을 역설하여 서예계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또 개인적으로는 서예계의 난맥상을 쇄신한다는 차원에서 56년 체계적인 서예연구와 보급을 위해 지금의 동방연서회를 창립,전예해행초 오체의 철저한 연구와 훈련끝에 그동안 배출한 서예인만도 7천여명,서예전문지 「서통」을 지난 30년간 개인의 힘으로 꾸준히 발간해오고 있다. 그가 평생을 두고 신조로 삼는 것은 노자의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라는 글귀다.「스스로의 만족됨을 알게 된다면 부끄러움이 있지 아니하고 그칠 바를 알아서 위태롭지 아니하여 오랠 수 있다」는 경구다. 그런 그에게 사욕이란 있을 수 없다.더구나 지난 91년 봄 손위 형인 창현씨가 「대화도중 갑자기 쓰러져 타계」하는 것을 보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인생」에 무상을 절감한 나머지 그해 여름 자신의 사재 18억원을 출연,「사람은 사라져도 세상에 무엇인가 의미있는 것」을 남긴다는 취지와 함께 동방연서회를 재단법인으로 재출범시켰다. 그는 지금도 새벽이면 도봉동에 있는 그의 집을 나와 아침 8시 서실이 있는 동방연서회에 도착,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서실은 글씨를 쓰는 책상외에 방안 가득히 서법에 관한 서적이 산적해 있고 행길가인데도 난향과 수석과 녹차향 때문일까,온자한 서풍이 감도는 속에서 그는 「오늘은 심선이 그려질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엄숙히 자문해본다.낙관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라도 그는 한점의 타작도 용납치 않으려는 주의다.그래서 한평생 붓을 잡으면서도 지금까지 아무 때나 기분내키는대로 가볍게 붓을 잡은 적은 한번도 없다고 말한다.심기가 평화롭고 사방이 청결하고 날씨가 화창하면 그날은 왠지 일점일획에도 오차가 없는 「정수」가 탄생될 것을 기대해 볼 뿐이다. ○세속적 취향과는 멀어 전보다 많이 옳은 말을 줄이고 일체의 세속적 취향에 타협하지 않는다.예를 들어 골프를 하고 싶어도 「자연을 훼손하는 일에 일조」하는 것같아 철저히 외면한다.물론 서예와 관련된 모든 잡사에도 끼어들지 않는다.하오에는 문중 사람을 더러 만나지만 특별히 친분 있는 사람도,그렇다고 서로 소원할 필요도 없이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시기다.다만 그의 개인전을 집중적으로 주선해온 동방화랑의 서정철사장과는 30여년간 난향 같은 청교를 나눈다.가족은 부인 강영순 여사와 5남매,서예를 잇는 자녀는 없다.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안되는 것이 글씨다.서법은 쓰는 사람의 내면의 성숙과 외율의 조화이기 때문에 천질만으로도 부족하고 노력만으로도 미치지 못한다.따라서 서예는 미숙만이 있을 뿐 영원한 프로는 있을 수 없다」.이는 여초의 변이다. 그러나 그 서체가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어 「천외천,예술외 예술」로 찬사되고 있는 시점에 서 있다.명지대 진태하 교수의 평처럼 「고희를 내년으로 앞둔 여초의 세계는 문자향과 서권기가 넘치는 가운데 원숙과 창로의 경지에 들어 혼연천성하고 묘합자연하여 자신만의 서법언어를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이제 그로서는 「예술이상과 예술도에 이른 자신의 지음을 눈부신 지면에 향기로 뿌리는 일만이 남았다. □연보 ▲1927년 서울 출생 ▲46년 휘문중 졸업 ▲51년 고려대 졸업 ▲50∼61년 국회보 주간,국회도서관 창설참여 ▲56년 동방연서회 창립멤버 ▲60년 국전 추천작가 ▲69년동방연서회 이사장 ▲70년 숙대·홍대·성균관대 강사 ▲71년 동방연서회 회장 ▲74년 방화전(중국국립 고궁박물원) ▲75년 국전 초대작가,한중 서법학대회 대회장 ▲76년 현대화랑초청 개인전 ▲78년 동방화랑초청 개인전 ▲79년 국제서도연맹초청 개인전(도쿄),중국국립 역사박물관 초청 개인전(대북) ▲80∼현재 한국전각학회 회장 ▲82년 동방화랑초청 개인전 ▲83년 신가파 중화서화협회고문 ▲84년 이마미술관 초청 개인전 ▲86년 중앙일보사 초청 개인전 ▲89∼현재 사단법인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이사장,동방연서회 서법교류 방중단단장 ▲90년 김응현서법전(중국북경 천안문광장 혁명기념관),신가파 제1회 국제서법교류대전 ▲91년 염황예술관이사회 명예이사,절강성박물관·서호서원 명예원장,서안 중국서법예술박물관·종남인사 예술고문,서안서학원 특격원위 ▲92년 김응현·김종길시화전,죽산 조봉암 선생 추모의전(추모의전),김응현서법전(서안 중국서법예술박물관 및 상해) ▲93년 산동대학 동방서화연구원 고문겸 교수,김응현서법전(정주 하남성서화원),하남성서화원 고문 ▲94년 김응현·계공서법전(북경 영보재) 김응현서법전(서울 동방화랑) ▲95년 7월3일부터 8월7일까지 한·중·일 산경 서법전(한국 김응현·중국 계공·일본 임금동 일본 동경 선샤인문화회관)예정
  • 와타나베 미츠노시 저 「일본천황 도래사」 번역 출간

    ◎“일 왕가의 뿌리는 비류백제”/“비류백제 설왕이 360년 일 건너와 건국”/일 학자로는 처음 「천황 한민족 설」 인정 일본왕(천황)가의 시조를 한국 왕조에서 찾은 일본 사학자의 연구서 「일본천황 도래사」가 최근 국내에서 번역,출간됐다(채희상 옮김,지문사 펴냄).이 책은 일본 학자가 「천황 한민족」설을 처음으로 공식 발표한 것이어서 지난 93년 출판됐을 때 일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지은이는 아직 한국에서 널리 인정받지 못한 「비류백제」설에 바탕을 두고 논리를 전개해 이번 국내 출간이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비류백제설은 지난 82년 재야사학자 김성호씨가 제시한 학설로,온조가 건국한 백제말고도 그의 형 비류가 세운 또 하나의 백제,곧 비류백제가 있었다는 것.비류백제는 한반도 서남부를 중심으로 4백년 가까이 강력한 국가로 존재했으며 4세기말 고구려의 침략을 받자 왕가가 일본열도로 건너가 세운 망명정권이 천황국가라는 내용이다. 지은이 와타나베 미츠토시(도변광민)씨는 이같은 학설을 모두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비류백제가 실재했으며 천황가의 뿌리라는 큰틀은 인정했다.그가 정리한 일본왕가의 성립과 흐름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에서 남하한 비류·온조 형제는 각각 나라를 세운다.온조는 위례성에 백제를,비류는 미추홀에 또다른 나라를 건국했다.이 나라가 곧 목지국으로 삼한을 지배했다.서기 2세기 중엽 일본 큐슈에서 비류계 구노국이 일대를 통합한다.그 왕 비미궁호가 제1대 천황인 신무이다.한때 일본에는 비류계와 신라계 왕조가 함께 서 세력을 다툰다.360년 비류계인 백제 설왕이 일본으로 건너오니 이이가 곧 응신 천황이다.현재 일본 천황가가 건국신으로 모시는 대상은 고구려 시조 주몽과 그의 아들 비류이다… 지은이는 일본 최고의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이같은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고 주장했다.결국 고사기는 비류왕조의 역사를,일본서기는 이에 백제왕조사를 더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일본 황국사관의 대표격인 「신공 황후의 신라정벌」설에 대해 신공황후는 가공인물이라며 이를 거짓으로 판정했다.일본서기에는신공이 신라를 정복한 것처럼 기록돼 있고 일본 학계는 이를 근거로 일본이 삼국시대 때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고 주장해 왔다. 와타나베씨는 일본인류학회 회원으로 자신의 이론에 한국·중국·일본의 역사서는 물론 동아시아 각 민족의 언어 및 풍속을 두루 활용했다.현재 공주대와 백제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있는 그는 『비류계 국가의 존재와 거기서 일본 왕가가 시작됐다는 사실을 아직 한국에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밝혔다.
  • 종교계 대북접촉 과열경쟁/북의 통일전선전술에 말려들 우려

    ◎정치집회장 뻔한 8·15공동예배 합의/단군릉 기념제 참석… 선전에 이용당해 최근 우리측 종교단체들에 대한 북한의 연대공세가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 종교계 내부에서도 대북접촉 과열경쟁양상을 보여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북한은 최근 정부의 8·15 판문점집회 불허방침에 맞서 한국내 각종 종교 및 재야단체들에 대한 편지공세를 재개했다.기독교연맹·천주교인협회·불교도연맹등 북한단체들 명의로 우리측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천주교중앙협의회 및 정의구현사제단·평화통일추진 불교인협의회·전국불교운동연합등에 편지를 보내 반정부 「통일투쟁」을 선동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개신교·천주교·불교등 우리 주요종교단체 인사들의 남북종교교류를 위한 방북신청과 제3국에서의 북한 관계자 접촉신청도 경쟁적 양상을 띠고 있다.이를테면 지난 5월중순 김수환 추기경 방북을 협의하기 위한 북경회동이 북한 천주교인협회 장재철 위원장의 회피로 불발됐음에도 불구,일부 신부가 올 6월 미국을 방문할 예정인 장을 현지에서 만날 계획을세우고 있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이에 따라 이 종교인들이 남측 기업들처럼 상호경쟁을 벌이느라 결과적으로 북측의 통일전선전술에 말려드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북측이 책임있는 당국간 대화채널은 차단하면서 종교등 민간차원의 접촉확대를 기도하는 것 자체가 우리 정부와 민간을 이간시키려는 전형적 통일전선전술인 탓이다. 예컨대 지난 4월 정부의 허가 없이 입북한 대종교 안호상 총전교일행이 어천절기념제를 당초예정대로 대종교의 성지인 구월산에서 치르지 못하고 북측의 「유도」에 따라 단군릉에서 거행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의도와 상관없이 결국 북한의 정치선전에 이용당한 꼴이 됐다는 얘기다.북한당국이 93년 이후 민족사의 정통성이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으로 이어진다고 선전하기 위해 대대적 단군릉 성지화작업을 벌여왔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지난 4월 KNCC측이 일본에서 북측과 「8·15 판문점 남북공동예배」에 합의하면서 ▲국가보안법등 통일의 법적 장애제거 ▲미전향출소자 송환등 5개항의 「정치성이 가미된」 공동선언문을 채택한 것도 마찬가지다.이 공동선언문은 강제납북자문제등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선 전혀 언급이 없어 형평성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점은 순수종교교류목적이 아닌 정치성 집회로 변질될 게 불을 보듯 뻔한 판문점집회를 합의한 사실이다.이 때문에 정부로선 이 집회를 허용치 않을 방침이다. 뿐만 아니라 북측은 우리 불교계와의 접촉과정에서도 공동법요식등 순수종교행사보다는 「8·15 통일대축전」등 정치적 행사의 성사에 집요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측 종교계 일각에서 남북종교행사 공동개최의 성사에만 집착,상당한 후유증이 예견되고 있다.이를테면 북한의 정치적 의도가 담긴 제의에 분명한 선을 긋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인 셈이다.
  • “「동해」명칭 삼국사기 첫 등장”/국제세미나서 이상태 연구관 주장

    ◎“고구려 동명왕 동해변 가섭원서 건국”/일본해는 18세기말 「막부」때부터 표기 「동해(East Sea)」표기분위기를 국제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국제학술세미나가 24일 프레스센터에서 이틀간의 일정으로 시작됐다.「동해연구회」(회장 김진현서울시립대총장)가 국제교류재단의 후원을 받아 개최한 이번 세미나에는 우리나라를 비롯,일본·중국·러시아·몽골 등 주변4개국 지리·역사학자 12명이 참가,논문발표와 함께 토론을 벌였다. 관심을 끈 것은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 교육연구관의 발표논문.이씨는 우리나라 문헌상 「동해」명칭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동명왕가사」라는 것이다.동명왕가사는 『북부여국 재상이 왕께 이르기를,…나의 자손(동명성왕)이 나라를 세울 곳이니 이곳을 피하여 동해변의 가섭원이라는 곳으로 옮기라』고 돼 있다.북부여가 동해변으로 가 동부여를 세운 시기가 BC 59년쯤되므로 「동해」라는 명칭은 삼국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사용돼왔다는 것이 이씨의 주장이다. 블르디미르 쿠소프 모스크바대교수도 「17∼19세기 러시아 지도상의 한국」이라는 주제의 발표에서 『한국이 러시아 지도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1673년』이라면서 『18세기 러시아 지도상에 동해는 대부분 「Korean Sea」로 표기돼 있다』고 한국측의 입장을 대변했다. 「일본해」명칭의 최초등장과 관련,아오야마 히루(청산광부)일본 니가타대 교수와 중국 과학원의 시궈진(해국금) 교수는 각각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를 근거로 16세기말부터 17세기초에 「일본해」명칭이 성립됐다고 주장한다.아오야마교수는 『문헌을 볼 때 「일본해」명칭의 정착시기가 서양에서는 18세기말경,일본에서는 막부말기부터 메이지시대 초기』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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