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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겨운 풍악소리 어깨춤이 절로~

    ‘국악의 대중화’ 혹은 ‘생활 국악’을 얘기할때 빼놓을 수 없는이름이 국악실내악그룹 ‘슬기둥’이다.지금은 일상용어가 된 ‘국악가요’‘국악동요’등의 장르도 80년대 중반 이들이 처음 세상에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젊은감각으로 대중국악의 산실노릇을 해온 ‘슬기둥’이 창단 15주년을맞아 오는 13일 오후8시 LG아트센터에서 자축공연을 갖는다.(02)732-4690슬기둥은 85년 KBS국악관현악단 멤버를 주축으로 한 신세대 국악인 8명으로 출발해 지금은 원일 김용우 허윤정 등 2기 멤버 9명이 활동하고 있다.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생활속의 국악을 만들자는 취지로모인 이들은 그간 7장의 앨범과 200여회가 넘는 공연을 통해 국악과대중의 거리를 좁히는데 많은 역할을 해왔다.거문고,가야금, 태평소등의 국악기에 기타,신시사이저 등의 서양악기를 적절히 가미한 이들의 음악은 현대인의 정서에 맞는 전통음악의 멋과 향기를 잘 살려냈다는 평을 받으며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뒀다.우리 귀에 익숙한 ‘산도깨비’‘소금장수’등의 노래는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도 실려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들어 국악의 현대화를 내세운 실내악그룹들이 여럿 생겨나고,멤버 개개인들의 활동영역이 넓어지면서 한동안 슬기둥은 공백상태에 빠졌다. 이번 무대도 2년만에 갖는 단독공연.지난 15년간의 활동을 정리하고슬기둥의 새로운 도약을 다짐하자는 뜻에서 1·2기 멤버 전원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이기로 했다. 초창기부터 참여한 리더 이준호씨(경기도립국악단 음악감독)는 “멤버들이 서로 너무 바빠 한번 모이는 것도 쉽지 않다”면서 “그러나슬기둥이란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한 공감대가 있기 때문에이번 15주년 공연이 전열을 새롭게 가다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말했다. 아닌게 아니라 슬기둥 멤버 모두는 요즘 국악계가 가장 주목하는 차세대 국악인들이다.원일만 해도 국립무용단 음악감독과 타악그룹 ‘푸리’의 멤버로 활동중이며,최윤상은 창작타악그룹 ‘공명’,허윤정은 프리뮤직그룹 ‘상상’단원으로 참여하고 있다.권성택과 정길선은각각 국립국악원과 경기도립국악단에 적을 두고 있다. 공연 레퍼토리는 ‘한계령’‘꽃분네야’‘고구려의 혼’‘신푸리’등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대표곡과 함께 ‘티벳의 하늘’‘평화의 소리’‘바람’등 오랜만의 신곡들도 포함돼있다.‘푸리’‘공명’‘상상’등 동료 연주자들의 축하공연도 예정돼있어 더욱 풍성한무대가 기대된다. 이순녀기자 coral@
  • “고려 문화재 100여점 개성에 묻었다”

    한국전쟁 당시 국립 개성박물관이 소장한 100여점의 고려시대 문화재가 국군이 후퇴할 때 후방으로 옮겨지지 못하고 현지에 매장됐다는증언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소속인 민주당 심재권(沈載權)의원은 당시 개성박물관장이었던 원로 미술 사학자 진홍섭(秦弘燮·82·) 박사로 부터 최근 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20일 밝혔다. 심의원에 따르면 진박사는 박물관 소장유물을 안전하게 보전하기 위해 한국전쟁 발발 1년전인 1949년에 쌍영총 고구려 벽화조각 3점을비롯해 중요 유물 대부분을 서울로 후송했다. 진박사는 다음해 전쟁이 일어나고,그해 10월 함락됐던 개성이 수복되어 박물관에 복귀했으나 중공군 참전으로 다시 피난길에 오르게 되자곧 수복되리라는 생각에 마을사람 2명·수위 1명과 함께 개성박물관이웃에 문화재 100여점을 묻었다는 것이다. 진박사는 이때 매장한 문화재 가운데는 모양이 특이하고 우수해 가끔학술지에 소개되고 있는 민천사(旻天寺) 고려석불과 청자 다수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현재 개성박물관은 옛 건물을 헐고 1980년대에 신축한 것으로 알려졌으나,이 때 땅속에서 문화재가 나왔다는 소식이 없는 만큼 아직 그곳에 묻혀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서동철기자 dcsuh@
  • 판소리·무용·전통무예 어우러진 총체극 ‘우루왕’

    한때 신라 궁궐의 중심이었던 경주 반월성터.지금은 조선시대때 축조됐다는 석빙고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 세월에 씻겨 옛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대신 울창한 소나무숲과 너른 뜰을 가득 채운 잔디밭으로경주 시민들이 즐겨찾는 나들이 장소가 됐다. 지난 13∼15일 밤 이곳 특설무대에서 선보인 국립극장의 총체극 ‘우루왕’은 천년고도의 신비와 전설이 깃든 옛 왕궁터를 배경으로 하기에 제격인 공연이었다.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서사무가 ‘바리공주’의 설화를 한데 뒤섞은 드라마틱한 구조도 그러려니와 판소리를중심으로 굿,전통무예,춤 등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연극적 판타지는 2,500여명의 관객들을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 신화의 세계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고조선무렵으로 설정된 먼 과거,우루왕에게는 가화,연지,바리 세딸이있었다. 우루왕은 감언이설로 효심을 표한 가화와 연지에게 땅을 둘로 나눠주고,꿈에 나타난 어머니의 불길한 예언을 전하며 양위를 반대한 바리는 성밖으로 내쫓는다.그러나 우루왕은 곧 두 딸들에게 배신당하고,그 충격으로 미치광이가 되어 광야를 헤맨다.한편 바리는아버지의 광증을 전해듣고 치료약인 천지수를 구하러 험난한 길을 떠난다. 인간의 아집과 욕망을 정교한 서사로 풀어낸 ‘리어왕’의 비극은,이작품에서 부모의 병을 고치기위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생명수를구하러 다니는 ‘바리데기’설화와 만나 원작과 전혀 다른 상생의 메시지로 결말을 맺는다.대본을 쓰고,총감독한 국립극장 김명곤 극장장은 “서구의 대결과 갈등의 문화를 감싸안는, 구원과 상생의 한국적 세계관을 나타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우루왕’은 극단,창극단,무용단,국악관현악단 등 국립극장 산하단체가 모두 참여했다.바리의 죽은 어머니역을 맡은 명창 안숙선,뮤지컬배우 김성기(우루왕)신예 이선희(바리공주)를 비롯해 무대에 서는출연진만 70여명.여기에 국악관현악단과 타악그룹 공명,첼로 주자 등30여명의 연주팀도 라이브로 참가해 국악과 양악을 넘나드는 독특한음악을 선사했다. 총체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판소리와 성악이 공존하고,전통 한국무용과 광대의 몸짓이 조화를 이룬다.특히 전 출연진이 등장해 전통무예와 고구려 벽화를 응용한 춤으로 역동적인 움직임을 연출한 전투 장면과 대나무잎을 흔들며 굿을 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9m높이의 망루와 기와문양 등으로 무너진 왕궁을 효과적으로 재현해낸 3층 규모의 무대세트도 인상적이었다.안숙선의 소리는 중요한대목마다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으며, 광대들을 비롯한 조연들의 연기도 감칠맛났다.다만 바리공주역의 이선희는 소리는 좋으나 무대경험이 없어서인지 어색한 연기와 동작으로 배역의 비중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해 아쉬웠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2000’초청작으로 야외무대에서 먼저 공개된 이작품은 오는 12월15∼17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재공연된다. 경주 이순녀기자 coral@
  • 서울대 박물관서 고구려 패션쇼

    벽화로만 볼 수 있었던 고구려 시대의 의상과 장신구가 13일 서울대박물관에서 재현됐다. 서울대 교수 4명과 서울대 출신 의상디자이너,디자인·공예전문가 49명이 참여한 ‘역사와 의식,고구려의 숨결을 찾아서’라는 주제의패션쇼는 서울대 개교 54주년을 맞아 박물관이 마련한 특별기획전 행사의 하나다. 고구려 무덤 무용총에 묘사된 뿔나팔 부는 신선,수산리 벽화의 행렬도 등을 근거로 고구려 시대의 남녀 귀족,평민,시종,기병과 보병의복식과 장신구를 복원한 작품 8점을 비롯해 고구려의 형(形)과 색(色)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만든 작품 50여점도 모델들을 통해 선보였다. 특히 이날 패션쇼에서 서울대 음대생들이 피리,대금,해금,아쟁 등전통악기로 궁중음악을,가야금으로 비발디의 4계 중 겨울을 연주해분위기를 돋우었다. 이종상(李鍾祥)박물관장은 “전통과 현대,과거와 미래를 잇는 창의적인 문화의 장을 마련하고자 행사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8~9세기… 신라의 위상’ 학술대회

    이른바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고 신라를 삼국의 패자로 만든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그러나 통일 이후 국제사회에서 신라의 지위를 깊이 생각해 본 사람은 많지않을 것 같다. 한국사학회와 백산학회가 6∼7일 경주에서 가진 ‘8∼9세기 아시아에 있어서 신라의 위상’학술대회는 그런 점에서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경주세계문화엑스포 행사의 하나로 열린 이 대회에 일본과 중국의 학자가 참여하여 다양한 시각을 보여준 것도 뜻깊었다. 이기동(李基東) 동국대교수는 9세기 일본 승려 엔닌(遠因)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바탕으로 당시 중국 도처에 깔려있던 신라인의눈부신 활약상을 강조했다.실제로 미국 하버드대교수 출신으로 케네디행정부 시절 주일대사를 지낸 에드윈 라이샤워가 지적한대로,당시일본인들이 중국을 왕래하려면 신라상인의 배편을 이용하지 않고는불가능했을 만큼 신라인들은 동아시아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윤명철(尹明哲) 동국대교수도 “통일신라인은 고구려와 백제의 개척정신과 해양능력을 계승하여 부를 창출하였고,당연히 국제환경속에서 정치 외교적 위치도 비중있게 격상됐다”면서 “동아지중해가 완벽하게 지중해적 성격의 기능을 발휘한 시대가 이 시기”라고 신라의지위를 높이 평가했다. 나아가 변인석(卞麟錫) 아주대교수는 “그동안 서안(西安)과 종남산(終南山) 일대를 답사한 결과 적지않은 신라의 사적을 찾아냈다”면서 “신라인들이 당나라가 이룩한 국제적 문화창출에 큰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적극적 해석을 하기도 했다. 반면 첸샹솅(陳尙勝) 중국 산뚱대교수는 “현재의 산뚱성에 설치됐던 신라원을 신라 교민활동의 결과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당나라가신라승려들의 구법활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썼음을 증명해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면서 “신라관은 당 조정이 신라에서 온 조공사절단이 묵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전용여관일 뿐”이라고 국내학자들과는 다른 시각을 내놓았다. 서동철기자
  • [각료에세이] 열린마음으로/ ‘빠름’과 ‘느림’

    두꺼운 책 한권 분량의 원고를 탈고해 교정까지 마치고 출판사로 넘기기 직전 낱말 하나를 잘못 쓴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다고 치자.이를 테면 ‘고려’로 써야 할 것을 실수로 죄다 ‘고구려’로 적었다.옛날 같았으면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잘못을 바로잡자면 원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일일이 ‘고구려’를 찾아내 ‘고려’로 바꿔야 한다. 오늘날 이런 실수는 클릭 두번으로 간단히 해결된다.워드 프로세서화면 메뉴바에서 ‘찾기/바꾸기’ 항목을 찾아 클릭하면 창(窓)이 뜬다. 그러면 ‘찾을 문자열’과 ‘바꿀 문자열’을 써 넣을 공간이 위 아래로 나란히 나타난다.윗칸에 ‘고구려,아랫칸에 ‘고려’라고 쓴 다음 커서를 움직여 ‘모두 바꾸기’ 단추 위에 놓고 클릭하면 컴퓨터가 순식간에 모든 교정작업을 대신해 준다. 멀리갈 것 없이 이것이 바로 디지털의 힘이다.디지털 신호에 따라움직이는 컴퓨터는 지능이 없는 기계이므로 한글을 읽지 못한다.지능만 없는 게 아니라 의지도 없는 쇠붙이에 불과한 까닭에 당연히 학습할 능력도 의욕도 없다. 그러나 이 기계는 ‘0’과 ‘1’의 조합(組合)인 디지털신호라면 그것이 한글이건 영어건 자동적으로 읽어내게끔 프로그램되어 있다.그것도 전광석화처럼 순간적으로 판독해 낸다.디지털은 빠르다. 안정적 수입이 보장되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상대적으로 봉급이 적은인터넷 벤처기업으로 옮기는 젊은이들 가운데는 잘 하면 목돈을 손에쥘 수 있는 스톡옵션에 이끌려 전직을 결심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의반타의반으로 스톡옵션 행사를 포기하는 사례가 쏟아지고 있다.주식값 폭락으로 옵션이 오히려 손해인 경우가 자의파(自意派)라면,통상 입사 후 3년인 옵션행사 가능시점이 도래하기도 전에 회사가 문을 닫는 경우는 타의파(他意派)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에는 어지러울 정도로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간다. 대부분의 민주국가에서 정치인들은 4년만에 한번씩 유권자의 심판을 받는다.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 준다.세계화와 디지털화의 불가피성을 논한 저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그는,오늘날 진짜 유권자는 클릭 한 번으로 국제 투자자본을 빛의 속도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기는 ‘전자투자가’집단이라고 소개한다.시장에서는 평가가 광속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빠름은 적절한 느림으로 완충될 때에만 현기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른 아침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아파트 주변을 최대한 ‘느리게’ 거닐어 본다.디지털 시대 속도전에 출전할 힘을 기르기 위해. 田允喆 기획예산처장관
  • [대한광장] 直指와 구텐베르크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젠 싱거워져버린 지난 천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금속활자라고 한다.그런데 그 문명사적 의미는 독일 마인츠시의상인이자 발명가였던 구텐베르크에게 돌아가버렸다.이에 분노한 한국인들이 말하기를 어찌 1455년 간행된 구텐베르크 성서가 1377년 간행된 금속활자본 ‘직지(直指)’보다 의미가 있을까 보냐고 흥분을섞어서 강력한 항의를 보낸다.그렇다면 이 항의가 타당할까? 타당하기도 하고 타당하지 않기도 하다. 예로부터 고려의 금속활자는 세계에서 가장 일찍 주조(鑄造)되어 쓰였다고 알려져 왔다.그런데 현재 세계문화사에서는 그런 역사적 사실을 공인하지 않고 있다.그렇다면 알고는 있으되 인정하지 않는 명확한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여기에 함정이 있다.고려 금속활자를 서양문화사의 잣대로 바라보았을 때 생기는 필연적 함정이깊이 파여 있는 것이다. 문화나 예술은 고도의 정신적 산물이므로 애초부터 연대를 가지고다투거나 할 일이 아니다.문화예술이나 지식정보는 올림픽경기가 아니다.마찬가지로 직지를프랑스로부터 찾아와야 한다고 하는 흥분은시대착오적이다.프랑스인이 정당하게 구입해간 직지를 무슨 명목으로반환하라고 말할 수 있는가?오히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것이여러모로 의미 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지난 천년 인류문화사에서 금속활자가 그토록 중요하게 인정받는 까닭은 지식정보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했기 때문이다.즉 지식정보의 독점을 해체하고 소통의 민주화를 이룩하는 상징이자 신호탄이기에 중요한 것이지 금속활자 주조(鑄造)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과학의 진보를 통해서 금속활자가 발명되고 역으로 금속활자는 과학문명의 발달에 기여하는 상호작용의 근대화가 바로 금속활자의 문화사적 본질이다.여기에 인식의 착오가 있었다.왜냐하면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는 서구문명사적 관점이 아니라정신사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비로소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수 있기 때문이다.한국의 금속활자는 산업과는 별개로 정신적인 차원에서 주조된 정신문화적인 측면이 강하다. ‘직지’는 지극한 정성,욕망의 절제로서의 보시(布施),경건함,기원,자비 그리고 깨달음 등의 정신문화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대량생산이라는 근현대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직지’는 존재하는 것이다.문화사적으로 보면 ‘직지’는 금속활자라는 진품성과 불교문화의 분위기(aura)가 그 정수(精髓)였다.그렇기때문에 서구문명사나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고려의 금속활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려 금속활자의 정신은 다량생산의 상업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량생산과 정신문화에 있다.고려의 금속활자가 정신문화적 측면에서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은 ‘직지’의 뜻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곧바로 가르쳐주고 정확하게 깨닫도록 한다’라는 주제가 곧 직지의 정신이다.그러니까 자본주의의 상업화와 산업사회의 대량생산이라는 각도에서 직지를 바라보지 말고,정신문화의 깨달음과 교육과 통합문화의각도에서 바라보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 바로 2000년 오늘이다. 바로 여기 21세기 빌 게이츠 패러다임의 사이버시대에 한국인이 가져야 하는 미래사적 전망이 놓여 있다.구텐베르크와 직지의 차이를정확하게 분석하는 한편 ‘직지’반환운동 역시 현실적이지 못하다는것도 고통스럽지만 인정하면서 새로운 전망을 세워가야만 한다.그러므로 과거의 문화유산을 미래의 문화정보 자본으로 재창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새 천년의 시대에 새로운 전망으로 새로운 틀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고려인들이 가졌던 도전과 용기의 정신이면서 민족문화의 저력이라고 믿는다. 고구려와 고려인들의 뜻을 이어 과거의 문화자산을 미래의 문화예술정보 자본으로 재창조하면서 세계문화사에 야심찬 도전을 감행해 보자. ■김 승 환 충북대 교수·국문학
  • [외언내언] 쌀눈쌀

    쌀이 우리나라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고조선 후기로 추정된다. 경기도 고양군 일산읍 토탄층에서 기원전 2400년대의 최고(最古) 볍씨가 출토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보리나 조,수수보다 재배가 늦기는 했지만 잘 익고 먹기가 좋다는 점 때문에 금세 곡식중에서도 제일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고구려 안악3호 고분에 곡물을 시루에 찌는 장면이 나오는 벽화가 있는 것을 보면 우리 민족이 밥을 지어먹기시작한 것은 대략 1,500년전쯤으로 짐작된다. 쌀의 한자어인 ‘미(米)’는 ‘여덟 팔(八)’자 두개가 합쳐져 있는모양새다. 쌀을 거두려면 모내기에서부터 하얀 쌀이 되기까지 여든여덟번의 손이 가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그만큼 농사짓기가 어렵다는 얘기일 것이다.고려가요인 ‘상저가’에는 “들커덩 방아나 찧어게궂은 잡곡밥이라도 부모가 잡수시고 남으면 내가 먹겠다”는 구절이 나온다.쌀이 무척이나 귀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조선시대에도 쌀밥은 ‘옥밥’이었고 명절이나 제삿날,생일에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그래서 물에 만 흰밥을 하늘에 뜬 흰 구름에 비유해‘운자백(雲姿白)’이라고 숭앙했다.따지고 보면 ‘키를 켤 때 쌀을날리면 남편이 바람난다’거나 ‘쌀을 밟으면 발이 비뚤어진다’는속담도 쌀에 대한 외경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쌀 자급자족이 어려웠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쌀밥은 ‘만들어 놓으면 무조건 먹는 밥’이었다.‘맛과 영양이 좋아 먹는 밥’이 아니라‘배고파서 먹는 밥’이었던 셈이다.쌀이 영양학적으로 매우 우수하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오래전 일이 아니다.20세기에 와서야 쌀이풍부한 탄수화물과 단백질,무기질을 갖고 있음이 알려졌다.과학자들은 쌀이 대장(大腸)에서 발효되는 과정에서 낙산(酪酸)이 생겨나 대장암 발생을 억제한다거나,혈중 콜레스테롤을 낮추어 준다는 사실을밝혀냈다.최근에는 쌀 윗부분에 붙어 있는 쌀눈(배아)에 토코페롤과비타민 성분이 많아 노인의 치매를 예방하고 말초혈관의 혈액순환을촉진한다는 것이 입증됐다.그래서 영양학자들은 쌀눈을 ‘영양의 보고(寶庫)’라고 일컫는다.그런데도 쌀 가공과정의 불가피성 때문에그동안 우리는 영양덩어리인 쌀눈을 정작 식탁에서 만나지 못했다. 최근 쌀눈이 80% 이상 붙어 있는 ‘살아있는 쌀’ 가공법이 개발되어 화제가 되는 모양이다.쌀의 고부가가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무척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2∼3년전부터 ‘쌀눈쌀 열풍’이불고 있는 일본에 견주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쌀눈쌀이 2004년 쌀시장 개방을 앞두고 외국산 쌀에 대항할 수 있는 새 상품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박건승 논설위원 ksp@
  • 한완상 상지대총장 백두산 등정기

    *白頭 햇볕으로 ‘냉전 외투’ 벗을 날이…. 이번 제1차 남북교차관광단의 자문위원장 자격으로 6박7일의 짧고도긴 백두산관광을 마치고 이 글을 쓴다.하기야 중국을 거쳐 백두산을이미 세 번이나 보았다. 특히 1989년 5월말 눈덮인 백두산 정상을 세시간이나 걸어 올라가 기진하였을 때 다음번 우리의 영산을 찾는다면 반드시 우리땅 백두고원과 개마고원을 당당히 밟고 오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이번에그 소망이 이루어졌다. 조국 땅에서 바라보는 백두와 천지의 모습은 중국 쪽에서 보는 것과아주 달랐다.한마디로 우리 민족과 우리 역사의 보물이라는 자긍심을느꼈다. 백두산의 웅장함은 말할것도 없고,그 웅장함 속에 금강산의섬세한 아름다움이 담겨있었다.작은 고무보트로 비로봉과 만물상 곁을 가보았더니 또 하나의 금강이 그곳에 있었다. 중국쪽에서는 볼 수 없는 절경이었다.코발트 빛 천지물에 투영된 백두·금강의 아름다움.바로 이것이 우리민족 전체의 영원한 자산임을확인하였다.백두산 정상에서의 느낌과 천지 물가에서의 느낌이 다르듯,그것을 멀리 보는 맛 또한 각별했다.백두고원에 펼쳐진 침엽수의넓은 바다를 지나면서 한반도 남쪽에서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광활함에 새삼 놀랐다.한때 북방을 지배했던 고구려의 기백이 바로 이고원지대에서 잉태되었으리라.울창한 이깔나무 숲속에 고즈넉이 자리잡은 삼지연에서 백두산을 바라 보노라면,그것은 후지산처럼 홀로 우뚝하지 않았다.겸손하고 너그럽게 펼쳐진 백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그런가 하면 개마고원에서 바라보는 백두의 모습 또한 새롭다. 가림천이 압록강과 만나는 곤장덕 언덕에 서면 아래로 압록강이 굽이치고 눈앞에는 중국땅너머 은은하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백두가 눈에 들어온다.백두산은 멀리 볼수록 그 봄(觀)의 빛(光)이 밝아지는듯하다.한마디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면 백두산의 자태는 많은 자식들을 품어주고 다독거려 주는 어버이 같은 따스함을 지닌다. 그곳을 떠나는 날,삼지연 비행장에서 보니 백두의 모습은 맑디맑은아침 공기 속에서 더욱 정답게 다가온다.비행기 머리와 우람한 산의흰머리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정말 백두산 주변의 공기는 맑고 신선했다.서울의 하늘에서는 이미사라져 버린 북두칠성이 바로 머리 위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온다.하기야 이번 여행 자체가 타임캡슐을 타고 지난날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깨끗한 밤하늘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으니,어린 시절 꿈의 세계로 저절로 되돌아가는 듯 했다. 우리를 영접해준 사람들 중에 북한 여성들이 퍽 인상적이었다.코스모스꽃 같은 청초한 모습.나는 얼어붙은 듯 빛바랜 사진속에 서 계신우리 어머님의 처녀시절 모습을 보았다.우리가 묵은 소백수 초대소뜰에 길게 늘어서서 환영해준 그들은 영락없는 우리 어머니,할머니의젊은 시절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초대소 다방에선 마침 봉선화 노래 가락이 은은히 흘러나오는데,다방의 장식꽃옆에 처연하게 서있는 의뢰원 아가씨 모습이 바로 봉선화처럼 여겨졌다. 노래가락과 젊은 여성의 모습이 이토록 어울릴수가 없었다. 여하튼 백두산과 그 주변을 관광하는 동안 하늘은 맑고,바람은 잔잔했으며,햇빛은 밝았다.햇볕정책의 따스한 햇볕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받았다.남북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은 햇볕정책을 자주 오해한다.북한체제의 옷을 벗기는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햇볕정책의 따스한 햇살이 벗길 옷은 북한 나름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도 아니요,남의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다.그 햇살은 남북간의 냉전적 불신과 대결이라는 낡은 옷을 벗기는 힘이다.남북 한쪽의 낡고 두터운 옷을 벗기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공원같은 평양의 아름다움과 활기찬 그곳 동포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우리가너무나 오랫동안 냉전의 옷을 두텁게 껴입고 있었음을 새삼 확인했다.6·15로 ‘햇살’이 비로소 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나,봄을 시샘하고 따뜻한 햇볕을 질시하는 냉전 강풍은 아직도 때늦은 반격을위해 숨을 고르고 있는 듯 하여 불편하였다.허나 누가 이 새 역사의흐름과 새 햇살의 밝고 맑은 힘을 거역하겠는가.나는 이번 여행에서바로 이 빛(光)을 보고(觀) 왔다고 믿기에 참다운 관광을 했음을 고백하고 싶다. 한완상 상지대총장
  • [‘6.15’이후의 북한] (1)북한의 변화상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 이후 평양은 어떤 표정일까.본지 신준영 기자는 지난 8월 29일부터 9일까지 12일간 평양과 묘향산 일대를 방문,최근의 북한 모습을 취재하고 돌아왔다.본지는 최근 북한의 변화상과 사회상,그리고 각계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특집 시리즈로 연재한다.98년 이후 4차례 북한을 다녀온 신 기자의 이번 방북취재는 북한 각계 인사들에 대한 장기취재계획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평양은 그 분위기가 크게 바뀌고 있다.기자를 대하는 북한사람들의 태도가 지난 3차례의 방북취재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남북정상회담,이산가족 상호방문,뒤이은 비전향장기수 송환 등이 남측에 대한 북한의 인식을 크게 바꿔놓은 듯 했다. 아울러 북한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변화의 움직임도 곳곳에서 목격됐다.지도층의 인식변화는 북한주민들의 말과 행동에서 그대로 묻어나고 있는 듯 했다. 8월30일 일요일 저녁 광복거리 교예극장에서는 시원한 수중교예가 무더위를 식혀주고 있었다.교예극장 중앙무대가 갑자기 풀로 변하더니10m 높이의 분수가 치솟는가 하면 수영복 차림의 인어같은 여배우들이 7m 상공에서 연속 다이빙해 각종 꽃무늬를 그려냈다. 평양의 대표적 유원지 중 하나인 대성산 자락에는 안학궁터 등 고구려 유적지를 비롯해 동물원 식물원 유희장 등이 모여 있다.250정보(75만평)의 광대한 식물원에는 총 2,800 종의 식물이 있다고 했다. 내심 놀랐던 것은 원내 여기저기 피어있는 무궁화들이었다.평양시내 연못동 로터리,보통강변은 물론 황해도 신천,구월산 가는 길 곳곳에서도 활짝 핀 무궁화를 볼 수 있었다. 동물원에 들어서자 마자 관리공(동물조련사)과 함께 산책나온 ‘평화’‘통일’이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 6월 정상회담때 김대중 대통령이 선물로 기증한 진돗개 한 쌍이다.녀석들은 평양동물원의 귀빈인 듯했다.구내 잔디밭 위에서 제세상 만난 듯 뒹굴며 장난치고 있었다.‘평화’‘통일’이는 동물원을 찾는 평양의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대단하다고 한다.김 대통령이 선물한 진돗개를 한번 만져보려고 너도나도 달려든다는 것이다. 묘향산에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세계 각국에서 받은선물들을 전시해놓은 국제친선전람관이 있다.기자는 98년 첫 방북때이곳을 참관했다.그런데 최근 ‘남조선관’이 신설됐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한번 국제친선전람관을 찾았다.과연 현대의 자동차,삼성,LG의 평면 브라운관 텔레비전,컴퓨터,첨단 전자제품 등을 비롯해 대우,통일그룹,에이스,정몽준 축구협회장,동아일보,한겨레신문사 등에서보내온 각종 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김대중 대통령이 선물한 ‘實事求是(실사구시)’라는 휘호가 쓰인 그림접시도 눈에 띄었다.2년만에 다시 만난 해설강사 정순향씨는 접시를 가리키면서 “전람관을 찾는 외국손님들에게 북과 남이 이제 선물도 주고받은 관계라는 것을보여주게 되어 너무나 기쁘다”고 했다. 북의 최대 사찰인 묘향산 보현사에는 ‘역사박물관’이 있다.이 곳에는 1,159권의 8만대장경 목판인쇄본이 보관되어 있다.인쇄본들은아르곤가스가 채워진 유리상자속에 보관되어 있었다.보현사의 리금옥 해설강사는 해인사 8만대장경 목판의 보관방식,보관상태,전시방식등에 대해 기자가 대답하기 힘들 정도로 꼬치꼬치 물었다.리금옥씨는 “8만대장경 목판이 정말 보고 싶다”고 했다.8만대장경 목판과 인쇄본도 ‘상봉’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번 방북취재중 놀라웠던 일 가운데 하나는 비록 일본 NHK BS(위성방송)를 통해서 였지만 KBS 뉴스를 시청할 수 있었던 점이다.기자는남북장관급회담 소식이나 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 전날 모습,병원폐업 등 주요 뉴스들을 평양의 호텔방에서 시청할수 있었다.6.15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취재중 만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 평양특파원 김지영 기자는 “92년 기본합의서 채택때와 지금의 분위기는 확실히 다르다”고 평했다.기본합의서 채택때는 어느 정도 선전적 측면이 느껴졌는데 6.15공동선언은 말그대로 ‘실천을 위한 합의’라는 것이다. 그는 “통일은 사람이 하는 것인데 김정일 위원장님이 내린 용단이실제로 인민들이 이전과 다르게 움직이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평양 신준영기자 junyoung@
  • [외언내언] 시드니의 쾌거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朱蒙)의 이름은 부여(扶餘)말로 선사(善射),즉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뜻에서 왔다는 기록이 있다.한편 서양의 전설적인 명궁(名弓) 로빈 후드의 이름은 오늘날 과녁에 꽂힌 화살을 다른 화살로써 맞혀 갈라지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활의 유형은 지중해형,몽골형,해양형 등으로 구분되는데한국 고유의 국궁은 몽골형에서 유래된 것이고 양궁은 지중해형에서발전된 것이다. 영국의 헨리 8세에 의해 스포츠화된 양궁이 유럽에서 미국을 거쳐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1900년.그러나 1920년 이후 약 50년 동안 사라졌다가 1972년 뮌헨 올림픽때 채택돼 오늘에 이르렀다.남자부에서는 미국이,여자부에서는 한국이 최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지난 올림픽까지 미국 남자팀은 모두 6개의 금메달을 땄고 한국 여자팀은 7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한국은 새천년 올림픽의 첫 금메달도 19일 양궁에서 따냈다.역시 여자팀이 금메달뿐만 아니라 은메달·동메달을 한꺼번에 거머쥐어 2000년 올림픽이 열린 시드니 하늘에 3개의 태극기가 나란히 펄럭이게 했다.세계 최강팀의 당연한 성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금·은·동메달을 함께 제패하기는 지난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12년 만의 쾌거다. 경제불안과 정치파행,의료계 파업 등으로 우울한 국민들에게 모처럼시원한 소식을 전한 시드니의 여자양궁 선수단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더욱이 이번 양궁경기에서는 북한 선수가 4위를 차지해 ‘동이(東夷)족’의 기상을 전세계에 과시했다.‘동이’는 흔히 ‘동쪽 오랑캐’로 풀이되지만 최근 연구에 의하면 중국에서 ‘동이’를 오랑캐 개념으로 본 것은 송나라때 중화(中華)사상이 형성된 이후라고 한다.‘동이’의 ‘이(夷)’는 큰 활(大弓)을 의미하며 오랑캐가 아니라 활을잘 쏘는 민족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것이라는 주장이다.그러나 ‘동이족’의 자부심보다 더욱 값진 것을 우리는 이번 경기에서 얻었다.남북 선수와 응원단이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따뜻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시드니 올림픽이 개막되기 전 체육 관계자들은 “여자들만 믿는다”고 말했다.한국 여자 선수들의 메달 획득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한국 선수가 올림픽에 참가한 이후 얻은 총 109개의 메달중 여자 선수들이 따 낸 메달은 32%(혼합복식 제외)인 35개에 불과하다.그러나 여자 선수들이 본격 출전하기 시작한 21회 대회때부터 여자 선수들은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특히 단체전에서는 63%의 메달을 획득했다. 남자 선수들도 분발해서 남은 경기에서 많은 메달을 따 내기를 기대한다. 임영숙 논설위원실장 ysi@
  • 국립경주박물관 ‘아름다운 신라기와‘ 특별전

    ‘아름다운 신라기와,그 천년의 숨결’특별전을 둘러보고 국립경주박물관을 나서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신라기와도 이제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고려청자나 분청사기·조선백자와 같은 반열의 ‘미술품’으로 대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지난달 29일 막을 연 ‘아름다운 신라기와…’는 체계적인 기와전시회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것이다.일본의 기와연구가 저만큼앞서간 마당에 너무 늦었다는 학계의 자성속에서도 개막 이전부터 적지않은 화제를 모았다. 이 전시회의 상징성은 ‘아름다운…’이라는 이름에서 부터 드러난다.사실 그동안 신라기와 연구는 대부분 고고학적 측면에서 이루어졌다.그러나 특별전을 둘러보노라면 전체적으로 암회색 톤이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음에도,고고학 유물 전시회에서 느낄 수 있는 무거움 보다는 미술관에서 느끼는 가뿐함이 앞선다.처음에는 불필요해보였던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도 신라기와를 미술사적으로 접근하기 위해노력했다는 말없는 설명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신라시대기와는 모두 10만여점에 이른다고 한다.이번에 역시 처음으로 만든 기와도록 ‘신라와전(新羅瓦塼)’에 1,400여점을 뽑아 담았고,전시회에는 다시 900여점을 엄선했다.주변국가와의 영향을 비교하기 위해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중국과일본의 기와도 일본 나라박물관 등에서 빌어오기도 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먼저 ‘중국의 옛기와’가 눈에 들어온다.동아시아의 기와는 기원전 11세기 서주시대부터 등장했다고 한다.이어지는‘한국의 고대와’와 ‘기와를 통해본 신라의 대외교섭’‘독자적인신라양식의 성립’코너는 고구려화한 기와의 양식과 백제화한 양식을 신라가 어떻게 받아들여 발전시켰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통일신라시대 고승으로 와공(瓦工)이었던 양지(良志)는 이 전시회에서도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그는 사천왕사 소조사천왕상을 만든 것이 확인되어 ‘한국 고대미술사에서 작가론이 가능한 유일한 예술가’가 됐다.전시회에는 이 사천왕상이 복원되어 선을 보였다. 문양과 종류별로 신라기와 및 벽돌(塼)의 양상을 보여주는 코너는 전체 전시장의 3분의 1쯤을 차지한다.관람객들은 이쯤해서 신라기와의뛰어난 예술성과 다양성에 한번쯤 감탄사를 토해내지 않을 수 없게된다.전시는 기와를 찍어내는 틀인 와범(瓦范)을 보여주고,경주일대의 기와가마터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기념품가게도 그냥 지나치기 힘들다.70여종이나 되는 복제기와가 4,000∼7,000원,기와문양의 탁본이 2,000원 정도지만,이것도 부담이 된다면 스탬프로 기와문양을 공짜로 찍어갈 수 있는 코너도 마련되어있다.한국적인 문화상품의 개발이 우리 문화관광 정책의 과제라면 이곳에 전시된 기와문화상품들은 훌륭한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아름다운 신라기와…’특별전은 경주에서 열리고 있는 ‘2000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공식행사의 하나이기도 하다.이 전시회만을 위해경주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문화엑스포를 보러가서 경주박물관에 들르지 않는다면 후회할 일이다.특별전은 오는 11월12일까지 열린다.월요일은 문을 열지 않는다. 경주 서동철기자 dcsuh@. *미술사학자 강우방씨 “기와에 새겨진 모습은 龍얼굴”. “귀신얼굴기와(鬼面瓦)가 아니라 용얼굴기와(龍面瓦)다”‘아름다운 신라기와…’특별전을 준비한 강우방 전국립경주박물관장(이화여대 초빙교수)은 이렇게 주장한다. ‘귀면와’는 일본인학자들이 붙인 이름이지만,한국에서도 보편적으로 쓰인다.그러나 강교수는 “왜 지붕을 귀신얼굴로 장식하려 했을까”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보통 귀신은 죽은 사람의 혼이나 악귀를 의미하는데,악귀를 물리친다고 같은 귀신얼굴로 지붕을 장식하는 것도 납득할 수 없었다. 강교수는 1997년 성덕대왕신종의 용머리를 자세히 조사할 기회가 있었다.신종의 용은 중국의 용 도상 규정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고 한다.신종의 용을 관찰하고 안압지나 사천왕사지의 이른바 귀면와들을다시 보니,그것들이 바로 용의 얼굴이더라는 얘기다. 강교수는 용면와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무엇보다얼굴모습이 신종에 나타난 용과 똑같고 ▲안압지 출토품 등에는 용이아니고는 불가능한 여의주를 물고 있다.▲이마에 임금 왕(王)자를 돋을새김한 것은 용이 왕을 상징하기 때문이고 ▲입에서 두갈래로 나오는 운기문(雲氣文)도 용을 상징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왜 분노하는 용의 모습을 지붕에 장식했을까. 강교수는 “용은 근본적으로 물을 상징하는 만큼 목조건물의 화재를방지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용면와는 용의 고향인 중국에도 유례가 없다고 한다.대신 평양 상오리 마루기와나 안학궁 암막새에서 원형을 찾아을 수 있다.용면와는고구려가 창안하고 통일신라가 확립한 우리민족의 독창적 예술품이라고 강교수는 평가한다. 서동철기자
  • 대한매일을 읽고/ 세계문화유산 지정 가능성에 흐믓

    평양소재 고구려 벽화가 보존이 완벽하며 뛰어난 가치를 인정받아내년에 세계문화유산 지정이 매우 낙관적이라는 기사(대한매일 8월 23일자 26면)를 읽고 가슴 뿌듯한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미 불국사 석굴암을 비롯해,해인사 팔만대장경판,종묘,수원 화성등이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 만방에과시하고 있는 터다. 북한 역시 지정을 앞둔 고구려 벽화 외에도 수많은 우수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요즘 정상간의 만남으로 다방면에서 남북교류가 이루어지고 있고 상호 협조체제가 잘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문화 부문의 협력및 공조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해 고구려벽화의 세계문화 유산 지정에 있어 남북한이 공조해 꼭 지정될 수 있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미라[서울 구로구 구로5]
  • “평양 고구려벽화 내년 세계문화유산 지정”

    [베이징 김규환특파원]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의 마쓰우라 고이치로(松浦晃一郞)사무총장은 유네스코가 평양의 고구려 벽화를 이르면 내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22일밝혔다. 마쓰우라 총장은 19일부터 22일까지 평양에서 강능수(姜能洙)문화상등 북한고위 관리들과 이 문제를 협의한 뒤 베이징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이 밝혔다. 그는 “고구려 벽화가 완벽하며 뛰어난 세계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서 세계문화유산 지정에 아주 낙관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khkim@
  • [김삼웅 칼럼] 역사에서 본 한반도중심론

    송도(개성)를 지날때 황진이 무덤에 술을 따라 올리고 추모시를 읊는 것이 발령받은 임지에 닿기도 전에 조정에 알려져 이른바 ‘기녀성묘(妓女省墓)사건’으로 파면된 조선전기의 문인 임제(林悌)는 당대인들이 ‘법도(法度)외의 인물’로 치부할만큼 호방하고 재기넘치는 인물이었다. 그가 죽을때는 자식들에게 “사해제국(四海諸國:일설에는 四夷八蠻)이 다 황제라 일컫는데 우리만이 그러지 못했다. 이런 미천한 나라에태어나 어찌 죽음을 애석해 하겠느냐”며 곡을 하지말라고 유언했다.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기며 사대의식과 주자학에 찌든 조선시대에 어떻게 그와 같은 문인이 태어났는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고려 인종때황제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는‘칭제건원(稱帝建元)’운동이 김부식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세력에의해 멸문지화를 당한지 실로 450여년 만에 이땅에서 비록 유언일망정 ‘칭제’의 소리가 나왔다. 그로부터 다시 310년 후인 1897년 조선조 고종이 우리나라가 청나라의 제후국과 같은 위치에서 벗어나자주독립국임을 내외에 선포하면서 이제껏 쓰던 청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독자적으로 광무(光武)라는연호를 사용하고 임금의 칭호도 대왕에서 황제로 격상하는 이른바 ‘건원칭제(建元稱帝)’를 단행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국운이 기울어져서 ‘황제’의 권위나 힘을 갖지 못하는 허세에 그치고 말았다. 어쨌거나 황제의 칭호를 하게 되었으니 지하의 임제나 묘청·정지상 등이 기뻐했는지, 슬퍼했는지는 알길이 없다. 김대중대통령은 8 ·15경축사에서 “우리나라는 해양에서 대륙으로진출하는 거점이 되고, 대륙에서 해양으로 나아가는 전진기지가 될것이다.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주변국가가 이제 당당히 세계의 한 중심국가가 되는 것이다. 바야흐로 한반도시대가 온다”고 선언했다. 사람에 따라 실현가능성의 비전으로도, 허황한 꿈으로도 비쳐질 ‘한반도 중심론’은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이래 주변국으로 전락해온한민족이 다시 중심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적어도 그러한 꿈과 비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평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DJ는 “이것은 결코 꿈이 아니다.” 며, 한강의 기적·외환위기의극복에 이어 다시한번 세 번째의 기적을 만들기 위해 일어설 것을 호소했다. 개인이나 국가나 기회가 온다. 다만 그 기회를 선용하느냐 못하느냐는 자신과 국민의 몫이다. 묘청과 정지상등 개혁·자주세력이 칭제건원과 서경천도를 통해 국정을 쇄신하고 국력을 결집하여 고토를 회복하자는 운동은 시의적절했다. 그러나 수구세력에 의해 토벌당하고 30여년 후 무신정변과 몽고침략의 국난으로 이어졌다. 후일 단재 신채호는 묘청의 난이 “낭가(郎家)사상·불가(佛家)사상과 문벌귀족들의 사대적 유가사상의 대결이며,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함으로 해서 한국사가 사대주의로 기울고 민족이 쇠하는 근본적 계기가 되었다” 라면서 이를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평가했다. 고종이 황제권을 강화하고 자위군대의 강화에 역점을 둔 광무개혁은다소 시기가 늦기는 했지만 마지막 기회로서 국정 쇄신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내적으로 독립협회와 황국협회가 충돌을 빚고, 친일파와친로파가 투쟁을 벌이고, 개화파와 수구파가 사사건건 대립하여 나라꼴이 심히 어지러웠다. 이런 가운데 러·일 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승리함에 따라 을사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고 나라는 망국의 길로 빠져들었다. “기회를 선용하지 않으면 역사가 보복한다”는 말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2,000년대는 한민족에 행운이 따르는 것같다. 첫해부터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이산가족상봉·남북직항로개설·경의선복원·개성을 통한육항로 개설등이 이루어지고 남북이 손을 잡으면 한반도는 물론 아시아와 유럽·태평양으로 활동영역이 확대될 것이다. 이른바 철의 실크로드, 한민족 일천년래의 기상이 현실화 된다. 문제는 정치권은 물론 우리 내부의 총체적 수용능력과 화합이다. 과연 우리에게 다가오는 기회를 선용할 자격이 있는가. ‘서경천도’와‘광무개혁’의 실패한 역사, 좌절의 역사가 지켜보고 있다. 김삼웅 주필 kimsu@
  • 한강에 철갑상어 살았다니…

    ‘평범한 사람들에게 캐비어(철갑상어 알젓)’라는 세익스피어의 대사가 있다.맛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최고급 음식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그래서 흔히 ‘돼지목의 진주’라고 번역하곤 한다.서양 귀족문화를 상징하는 음식이 바로 카스피해 연안에서 주로 난다는 캐비어다.이런 물고기를 옛날 마포 뱃사공들이 먹을 수 있었을까. 오는 10월23일까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한민족의 젖줄,한강’기획전에 가면 해답을 얻을 수 있다.철갑상어는 과거 한강하구에살며 산란기가 되면 상류가 거슬러올라가 알을 낳았다는 사실을 어류학자 최기철이 소장하고 있다는 이 물고기의 박제를 통하여 확인할수 있기 때문이다.‘한강’전은 지난 9일 막을 열었다. 흔히 독일의 경제부흥을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하듯,한국의 경제발전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한강은 강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한국을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 때문인지 전시회를 둘러보다보면 내용은 한강주변의 역사에 한정되어 있음에도,그것이 곧 우리 역사의 축소판일 수 밖에 없음을자각하게 된다.한편으론 너무 가까이 있어 무관심했던 한강에 대한 무지를 깨우쳐주는 계기도 될 것 같다. 이번 전시회는 그 의미에 못지않게 볼거리도 풍성하다.야외전시장에는 마포새우젓으로 유명하던 마포나루의 객주가가 재현됐다.이제는찾아볼 수 없는 나룻배와 함께 주점·객방·창고가 실물크기로 관람객을 맞는다. 기획전시실은 ▲한민족과 함께 한 한강 ▲삶의 터전,한강 ▲문화와생태 환경의 심장부,한강이라는 3개의 주제로 구성됐다.전시장 중심의 13m 길이로 재현된 장사거룻배가 구경거리.40여년 동안 한선(韓船) 제작에만 매달려온 손낙기옹이 소금장사를 하던 동네분들과 옛날처럼 황포돛대로 내달리고픈 소원을 담았다고 한다.정선의 뗏꾼 신경우옹이 만든 뗏목도 한강하구에서 강원도 오지에 이르는 ‘교통로로서한강’의 역할을 보여준다. ‘삼국의 격전지,한강’에는 서울 구의동의 고구려화살촉과 이성산성의 신라 화살촉,미사동의 백제 청동거울 등을 나란히 전시하여 한강을 사이에 둔 삼국의 각축을 무언으로 웅변한다.‘교역의 장으로의한강’에서는 구한말 객주풍경 등을 담은 사진과 함께 창고에 물건을보관할 때 받은 영수증인 임치증(任置證)과 소작료로 보이는 곡식을실었다는 확인서인 선복기(船卜記), 물건을 배에 실어보냈다는 증명서인 선도록(船都錄) 등 체계화됐던 조선시대 상업활동의 기록들이눈길을 끈다.1994년 무너졌던 성수대교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 것은아마도 산업화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아야하지 않겠느냐는뜻으로 읽혀졌다. 어른이건 어린이건 발걸음을 쉽게 떼지못하는 곳은 두개의 한강에 사는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는 두개의 대형어항앞.쉬리·몰개·참종개등이 지천으로 찾아지는 등 이 강이 다시 살아났을 때 제2의 한강의기적도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는 것이 민속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이다. 서동철기자 dcsuh@
  • 남북이산상봉/ 서울방문단 개별상봉 백태

    남북 이산가족 상봉 이틀째인 16일 북측 가족들은 숙소인 워커힐호텔에서 남측 가족들과 2시간 동안 개별적인 만남을 가졌다.남북의 자식들은 돌아가신 부모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올리거나,북에서 온형님의 생일잔치를 열었다.만남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사진과 비디오카메라 등으로 가족들의 모습을 담는 이들도 있었다. ■전날 치매에 걸린 100세 노모 조원호씨를 만났던 이종필씨(69)는호텔 객실에 동생 종국씨(53)가 가져 온 아버지의 영정과 술·건포·과일·향 등 제수용품을 놓고 그 동안 지내지 못했던 제사를 지냈다. 북에서 내려와 두 형을 만난 김인수씨(68)도 “형제가 함께 모여 부모님 제사를 모시는 것이 소원이었다”면서 호텔 객실에서 형님 가족들과 함께 제사를 올렸다. ■위암 2기로 서울중앙병원에 입원 중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50년전 헤어진 장남 안순환씨(65)를 만났던 이덕만(87·경기도 하남시 초일동)할머니는 순환씨가 묵고 있는 워커힐호텔에서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장남의 생일잔치를 열었다. 이 할머니는 전날 아들을만나고 숙소인 올림픽파크텔로 돌아온 자리에서 자식들에게 “19일이 네 맏형의 음력 생일”이라면서 “상봉기간 중 맏형의 생일잔치를 열어주자”고 말했고,가족들은 케이크를준비해 조촐한 생일잔치를 마련했다.19일은 3남 문환씨(56) 생일도겹쳐 가족들은 합동 생일잔치를 벌였다. ■전날 노모를 만나지 못해 주위의 안타까움을 샀던 안인택씨(66)는앰뷸런스를 타고 워커힐호텔로 찾아온 병석의 어머니 모숙자씨(89)를극적으로 만났다. 안씨의 딱한 사정을 접한 대한적십자사는 모씨의 막내아들 안인석씨(58)에게 연락해 “16일 기회를 갖자”고 요청했고,결국 모씨는 이날오전 며느리 임영순씨(50)의 손을 잡고 앰뷸런스 편으로 워커힐호텔을 찾아 반세기 동안 헤어졌던 장남과 만났다. ■치매 때문에 상봉자 명단에서 제외됐던 김점희씨(79·경기도 연천군 전곡읍)는 아들 주준형씨(48)로부터 ”북에서 온 삼촌이 찾는다”는 말을 듣고 기적처럼 정신을 차린 뒤 동생 영기씨(67)를 만나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워커힐호텔로 달려왔다.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을 나서던 영기씨는 로비에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던 누나를 발견하고 “누님” 하며 와락 끌어안았으며,점희씨는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리며 동생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평양음악무용대학 교수 김옥배씨(62)는 15일 첫 상봉에 이어 하루만에 숙소인 워커힐호텔 1409호실을 들어서는 어머니 홍길순씨(87)를보자 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옥색 한복을 입은 김씨는 어머니께 큰절을 올린 뒤 교수증과 박사증을 꺼내 놓고 “장군님께서 이렇게 키워주셨고 행복하게 살았다”고‘응석’을 부렸고,어머니 홍씨는 “시집갈 때 끼워주려고 했다”면서 옥배씨의 혼기가 차 40년 전 마련해 고이 간직해 오던 백금반지를옥배씨 손에 끼워주었다. ■류미영 단장을 비롯한 북측 가족들은 개별상봉이 끝난 뒤 오전과오후 2개 조로 나뉘어 잠실 롯데월드 민속관의 선사시대,고구려 유적지 전시관 등을 둘러봤다.북측 가족들은 민속관을 관람한 뒤 ‘저자거리’에서 롯데월드측이 제공한 식혜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롯데월드측은 ‘환영 남북 이산가족 상봉 서울방문단’이라는 대형현수막을 내걸었으며,26명으로 구성된 롯데월드 마칭밴드(marching band)는 ‘고향의 봄’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을 연주하며 환영했다. 특별취재단
  • [외언내언] 닥종이

    1966년 10월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을 보수하기 위해 해체했을 때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일이 일어났다.제2층 탑신부에 봉안한 사리외함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된 것이다.이 다리니경은 일본의‘백만탑다라니’(770년경 간행)를 누르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인정받았다.당나라의 측천무후 집권 당시(690∼705년) 일시 만들어 쓴 무주제자(武周制字) 네 글자가 사용된데다 석가탑을 세운 해가 751년이어서,제작연도가 그 사이로 추정됐기 때문이다.두루말이 형태의 다라니경은 총 길이 641.9㎝ 가운데 앞부분 250㎝만 습기와 산화작용 탓에 부스러지고 조각났을뿐 뒷부분은 완벽한 상태였다.1,200년의 세월을 겪고도 온전한 그 종이의 질에 세상은 또 한번감탄했다. 다라니경에 사용한 종이가 신라의 닥종이다.종이는 서기전 40∼50년에 중국에서 발명돼 105년경 후한의 채윤이 획기적으로 품질을 개선했다고 한다.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종이를 썼는지 정확한 기록이남아 있지 않지만,일부 학자들은 백제의 아직기와 왕인박사가 일본에전적을 전했다는 284년 무렵으로 본다.610년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일본에 종이제조 기술을 전했다는 기록도 사서에 남아 있으니 늦어도그 이전에 이미 우리 조상들이 종이를 만들어 썼음이 분명하다. 신라 닥종이에 관해선 더욱 확실한 기록이 있다.755년 제작한 ‘대방광불화엄경’(호암미술관 소장)에는 “닥나무에 향수를 뿌려가며길러 껍질을 벗긴 다음 맷돌에 갈아 종이를 만든다”는 구체적인 방법이 적혀 있다.이렇게 만든 종이는 희고 질겨서 ‘백추지’라 불렸고 중국·일본에서도 천하제일로 인정했다.그 전통은 이어져 고려시대에는 원나라에서 한번에 10만장씩 수입해 가기도 했고,17세기 중국의 기술서적 ‘천공개물’에서는 “조선 백추지를 어떻게 만드는지모르겠다”고 표현했다.그만큼 품질이 뛰어났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있다. 조선 이후 한지(韓紙)로 불려온 닥종이의 전통을 기리는 ‘원주 한지문화제 2000’이 9월 1∼6일 원주시내 곳곳에서 열린다.올해로 2회를 맞은 국내 유일의 이 한지축제에서는 ‘한지 패션쇼’ ‘세계 전통종이전’ ‘일본화지(和紙)작가 초대전’ ‘닥종이 인형 등 한지공예품 만들기’ 같은 다양한 행사를 벌인다고 한다.원주는 신라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지생산의 중심지였던 자랑스런 역사를 갖고 있다. 우리가 세계를 향해 ‘유구한 문화민족’임을 내세우는 근거는 인쇄문화가 어느 곳보다 일찍 발달했고 그에 따라 생산된 많은 서책이 우리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해주었기 때문이다.그 바탕이 되는 우리의종이,한지의 축제에 참여해 전통문화의 뛰어남을 스스로 배우고 자랑해보자. 이용원 논설위원 ywyi@
  • [김삼웅 칼럼] 변화와 위트를 모르는 국회

    “하늘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란 명제는 변증법철학의 본질이다.불교철학도 생로병사라는 변화의 법칙을 기조로 삼는다.“나날이 새롭다”는‘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동양철학도 변화의 원리를 말한다. 지난 총선 때 ‘바꿔’의 열풍은 변화를 바라는 시대의 요구였다.그런데 거의 변하지 않은 것이 우리 국회의 행태인 것같다.변할수록 옛모습을 닮는다더니 숫제 변하지 않음으로써 옛모습을 닮는다.다른 나라의 의회라면 6·15선언, 특히 ‘남북연합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 등 국가적 대사가 발생하면의사당에 불을 켜고 밤을 새워서 토론하고 전문가를 불러 대책을 마련할 것이다.그런데 우리 국회는 단독처리와 농성으로 세월을 축내던 관행에서 크게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국의사당의 빅 벤(Big Ben)종소리가 울리고 템스강변의 의사당에 불이 켜져 있으면 국민은 편안히 잠자리에 든다는 것은 중학생도 다 아는 상식이다. 그런 영국의회는 논의를 연설(speech)이라 하지 않고 토론(debate)이라 한다.민주정치의 본질은 토론이기 때문이다.우리국회는 ‘토론’이 실종되고 ‘연설’만이 난무한다.비인격과 욕설이 뒤섞인 연설로 국정을 어지럽힌다. 영국의원들은 흔히 쓰이는 ‘거짓말쟁이’라는 말도 금기어가 되어 ‘정직성의 부족’이란 대용어를 사용한다.“당신은 거짓말쟁이다”라고 표현할 수없기에 결국 “당신의 정직성이 부족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얼마 전 서영훈 민주당대표의 ‘개판’발언도 “귀하나 없는 대인(大人)같은 정치판”이라 했으면 위트가 있었을 것이다.(犬字를 뜯어보면 귀가 하나뿐인 大人이된다) 웃으면서 토론하고 절제된 언어, 상대방의 자존심과 명예를 해치지 않고서도 뜻을 관철할 수 있는 국회가 우리에게는 불가능한가. ■해학과 여유의 전통 우리 조상들처럼 해학과 여유를 가진 민족도 흔치 않을 것이다.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각박해지고 해학을 잃고 정치인들은 만나면 싸움질인가. 수나라가 30만 병력으로 고구려를 침략하여 평양성에 진격할 때 을지문덕장군은 적장 우중문(于仲文)에게 시 한편을 보냈다.“당신의 신기한 책략은하늘의 이치를 다하고(神策究天文)/ 오묘한 계획은 땅의 이치를 다했노라(妙算窮地理)/전투마다 이겨서 그 공이 높으니(戰勝功旣高)/만족함을 알면이제 그만두기를 바라노라(知足願云止)”란 내용이다. 마지막 구절의 ‘知足願云止’는 ‘노자(老子)’에 나오는 “만족할 줄 알면 욕을 안보고 멈출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의 글귀를요약해서 만든 시구다.적군과 치열하게 대치된 상황에서도 도가(道家)의 글을 시로 써서 적장을 나무라는 을지문덕의 지혜가 돋보인다.이러한 ‘기세(氣勢)의 싸움’에서 고구려는 막강한 수나라 대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하회탈놀이’의 대사를 살펴보자.선비와 양반이 누가 지체와 학식이 높은가를 따지는 대목이다. ▲선비:지체란 높은 것이 제일인가? ▲양반:그럼 또 뭐가 있겠는가?▲선비 :첫째 지식이 있어야지.나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 읽었네. ▲양반:뭐 사서삼경, 나는 팔서육경(八書六經)도 읽었네. ▲선비 :도대체 팔서육경이 뭐냐. 이때 양반의 하인 초쟁이가 “나도 아는 육경 그걸 몰라요.팔만대장경, 중어바람경,봉사안경,처녀월경,약국길경,머슴쇄경”하고 뇌까린다. 조선조의양반과 선비의 부조리를 통렬하게 고발하는 한마당을 보고 백성들은 손뼉을치며 용기를 얻는다.(‘해학과 우리’,시공사) 걸핏하면 매카시적 발언이나 일삼고 뚱딴지 같은 행동으로 국회를 파행으로몰아가는 일부 의원들의 행태는 그야말로 ‘개판’정치의 한심한 수준을 말해준다.요즘의 정치권을 두고 “여당은 남북문제로 내정(內政)을 덮으려 하고 있고 야당은 내정문제로 남북문제를 희석하려는 지도부의 논리가 국회파행의 주요 원인”(김석준 이화여대 교수)이란 분석은 정곡을 찌른다. ■유머와 풍자의 국회상을 야당의원이 처칠 총리의 연설을 방해하고자 소란을 피우자 처칠은 “가마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같아 나는 아무렇지도 않소이다”라고 했다.야유했던 의원이 조사해보니 ‘구약성서’전도서의 말씀에 “어리석은 자의 웃음은 가마밑에서 타는 가시나무 소리와 같으니 이 또한 헛되도다”라고 되어있었다.크게 한방 먹은 것이다.변화와 위트와 풍자의 국회상이 그립다.
  • 하남 이성산성 발굴 의미

    한양대박물관의 이성산성 발굴조사 결과는 ▲삼국각축기의 역사를 재정립하고 ▲고구려의 지방통치사 및 생활사 연구에 전기를 맞을 수 있는 중요자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이성산성은 한강의 남쪽유역에 위치하면서 주변의 다른 성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이었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하남위례성에 도읍한 뒤 475년 고구려에 점령될 때까지이 지역을 차지했다.백제는 551년 신라의 지원으로 탈환하나,553년 신라의진흥왕이 백제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이 지역을 점유했다.이 시기 신라가 이성산성을 처음 쌓았다는 설이 그동안에는 지배적이었다. 이에 앞서 정약용(鄭若鏞)이나 이병도(李丙燾)·천관우(千寬宇)는 이 지역일대를 백제의 하남위례성으로,조선 말의 홍경모(洪敬謨)는 백제 온조의 고성으로 각각 추정했으며,최몽룡(崔夢龍)서울대교수와 권오영(權五榮)한신대교수는 백제 근초고왕이 천도한 한산(韓山)이라는 학설을 펴기도 했다.이번발굴 조사 결과는 상당한 학설의 수정을 불가피하게할 것이다. 이 곳에서 발굴된 고구려 자(尺)는 그 존재 여부가 논란이 되어왔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끈다.일본의 아라이 시로이는 ‘환상의 고대사-고구려자(高麗尺)는 없다’는 책에서 그 존재를 부정했었다.이번 조사 결과로 이런 논란은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게 됐다.발굴된 고구려자는 일부가 파손되어 35㎝ 정도가 남아있다.고구려자는 길이가 35.6㎝로 알려져있다. 요고(腰鼓)는 길이가 42㎝,양측면의 지름이 16㎝이고,가운데 잘록한 부분은7㎝이다.장고와 비슷한 모양이나 요즘 것보다는 크기가 작다.나무로 만든 염주알은 삼국시대 불교의구(儀俱)를 연구하는데도 좋은 자료이다. 서동철기자 dc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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