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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론] 8·15 민족대회에 담는 소망

    8·15 민족통일 대회가 2001년 평양대회에 이어 2002년 서울대회로 열리게 되었다.6·15 선언 후라 해도 서해교전 직후에는 감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 민족대회가 가지는 의미는 우발적이건 그렇지 않건 일단 일어난 충돌사건을 전에 없었던 유감표명으로 풀어냄으로써 성립하게 된 민족대회라는 점에 있다. 휴전조약 후 남북사이에 많은 충돌이 있었으나 솔직한 유감표명으로 문제를 풀어간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다시는 그 같은 충돌이 일어나지 말아야 하지만,앞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또다시 어떤 일시적 장애요인이 생긴다 해도 그것에 구애되지 않고 쉽게 풀어 가는 전례를 만들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민족문제를 실질적으로 풀어 가는 것은 물론 정상회담·장관급회담 등 정부차원 회담이다.그러나 그것들이 가능하게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은 남북민간에 의한 통일운동이라 할 수 있다.이번에는 장관급회담과 민간운동이 동시에 이루어졌지만,앞으로는 설령 정부 차원의 접촉이나 회담이 어렵게 된경우라 해도 민간 차원통일운동이 그 실마리를 열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 민족통일대회는 지난해 평양대회와 함께 남북의 많은 민간인이 접촉한다는 점에,그리고 특히 남쪽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6·15 공동선언 후 남북 사이의 인적교류가 크게 활성화한 것은 사실이다.평양의 보통강여관에서 자고 아침 먹으려 식당에 가면 여기가 서울인지 평양인지 모를 정도로 남쪽 사람이 많은 것에 놀란다.그러나 6·15 공동선언 후 급증한 남북 사이의 인적교류,특히 민간교류는 주로 남쪽 사람이 북에 가는 교류에 한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민족대회가 북쪽 사람이 남쪽에 오는 인적교류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이번 대회에 처음으로 100명의 북쪽 민간인이 남쪽에 오고,앞으로 남북축구대회 및 부산 아시아경기대회를 통해 많은 북쪽 민간인이 남쪽에 오게 되었다.특히 아시아경기대회에 응원단이 온다니 북쪽 사람이 남쪽에오는 인적교류에 큰 획을 긋는 일이 될 것이다. 말이 같고 풍습이 같은 동족이지만,남북 사이에는 분단 이후 오랫동안인간적인 진솔한 접촉이 거의 없었으며,그 때문에 처음 만나면 어색하고 겉치레가 앞서게 된다.그러나 몇 번 만나면 같은 민족으로서의 인간적 신뢰가 쉽게 생기고,동년배면 술자리라도 만들고 말을 놓고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체제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것을 한 꺼풀만 넘어서면 그 속에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 있고 동족이 있게 마련이다. 이번 민족대회는 100명의 북쪽 민간인이 남쪽에 와서 동족으로서의 인간적 교류를 가진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짧은 기간이지만 모든 것을 넘어서 다만 인간으로서의 교류,동포로서의 교류만이 이루어지고,100명의 교류가 앞으로 1000명,1만명,나아가서 7000만의 교류로 확대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리하여 경의선과 동해선이 이어지고 금강산 육로관광 길이 열려서 휴전선이 군사대결선이 아닌 이름뿐인 경계선이 되어,남쪽 초·중·고·대학생들이 수학여행 가서 저 웅대하고 화려한 고구려 문화유적을 보고,북쪽 학생들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신라·백제 유적을 보러 수학여행 오는 데까지 남북관계가 진전되기바란다. 남북을 막론하고 그 기성세대는 민족사의 내일을 짊어질 2세 젊은이들에게 조상들이 남겨놓은 값진 문화유산을 고루 보여주어야 하는 책임,어떤 이유로도 거역할 수 없고 변명할 수 없는 엄숙한 민족사적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할수 있다. 이번 8·15 민족대회가 그 책임을 완수하는 데까지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강만길 상지대 총장
  • “레드족 고대문화에 뿌리”삼성경제硏 보고서

    “월드컵 거리응원은 고대 원시축제에서 유래했고 ‘레드(RED)족’은 고구려의 후손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8일 ‘월드컵과 사회·문화적 변화’ 보고서에서 한·일월드컵 거리응원을 주도한 레드족은 동맹(고구려),영고(부여) 등 고대 부족축제의 맥을 이은 민족공동체라고 분석했다. 폭발적인 응집력으로 한반도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레드족은 기존의 오렌지족,엄지족,보보스족과 확연히 다른 열린 우리 고유의 존재족이란 설명이다.또 이들은 기(氣)와 주술적 요소를 강조하며 ‘한국고유의 집단축제문화’를 전세계에 알린 유일한 공동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심상민(沈相旻·36)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온 국민이 한국축구대표팀을 한마음으로 응원하고 ‘꿈은 이뤄진다.’고 믿었던 것이 바로 한국고유의 정신”이라며 “이같은 민족적 공감대는 동양적인 사고에서 나왔다.”고 설명했다.그는 “서구에서 유입된 보보스족·코쿤족 등은 소비중심의 집단문화에 불과하며,서양문화에서는 레드족에서 볼 수 있는 정서적 공감대를 찾기가 쉽지않다.”고 말했다. 보보스족은 부르조아와 보헤미안의 합성어로 예술적 취향에 따라 아낌없이 돈을 쓰는 미국 엘리트층을 일컫는다.코쿤족은 PC방 등을 전전하는 20대 실직자 등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의 틀 안에서 살아가는 족속을 말한다. 정은주기자 ejung@
  • 문화광장/ 미술

    ◇ 육인육색전= 8월6일까지 종로갤러리 (02)737-0326.강상복 김충식 박요아임갑재 최길순 최동춘 등 여적회 소속 6인의 한국화가가 그림 한폭을 공동작업. ◇ 이동미술관-부산의 풍경전= 8월13일까지 부산학생교육문화회관 (051)740-4241.부산시립미술관 소장품 특별전으로 미술관에 가보지 못한 일반인과 학생들을 위한 순회공연전.장욱진 설종보 등 작품 30여점. ◇ 최창진전 =8월6일까지 단성갤러리 (02)735-5588,작가의 두번째 개인전으로 캔버스를 직사각형·삼각형으로 쌓은 뒤 그린 그림이 규격 파괴적. ◇ 김현숙전= 8월6일까지 공화랑 (02)735-9936.고구려 벽화에서 영향 받아 민화 소재들을 벽화 기법으로 표현. ◇ 백자위의 그림전= 8월6일까지 공화랑 (02)735-7436.김소선 김현숙 박윤희 박재순 등 4인의 그림 도자전.접시 종시 등에 그려낸 산수화 등을 산뜻하게 표현. ◇ 김미란개인전 =8월6일까지 경인미술관 (02)733-4448.풍경과 들꽃,인물 등의 수채화.누드 크로키도 함께 선보인다. ◇ 양혜숙개인전-시간의 풍경= 8월8일까지 송은갤러리 (02)527-6282.시간의 흐름에 따라 빠르게 변해가는 거대한 욕망의 덩어리를 피어오르는 스산한 붓자국과 흘러내리는 물방울로 그림. ◇ 심근영개인전 =8월6일까지 덕원미술관 (02)723-7771.녹음방초 등 생기넘치는 기운을 수용,소화한 한국화와 유화로 그려낸 추상화.
  • KBS 역사스페셜 여름방학특별기획 방송

    KBS ‘역사스페셜’(토 오후 8시)은 새달 3일부터 교사와 학생들이 흥미롭게 여기는 역사이야기 5편을 선정,‘여름방학 특별기획’으로 방송한다. 첫날인 3일 ‘고구려-당 전쟁,안시성 싸움 고구려는 어떻게 이겼나’를 방송하는데 이어 10일 ‘조선 최대의 음모,광해군은 왜 쫓겨났나’,17일 ‘만주 독립운동의 거점,신흥무관학교’편을 연속적으로 선보인다. 이어 31일 조선여인의 다양한 모습과 삶의 사례를 재조명하는 ‘조선여성의 삶과 사랑’을,9월7일 고려 북방정책의 실체를 알아보는 ‘고려의 북방개척, 윤관의 9성과 이성계의 만주정벌’을 차례로 방송한다.
  • 톡톡튀는 아이디어 ‘봇물’, 광진구 직원대상 공모 660건

    ‘아차산에 신라·백제·고구려 삼국의 병영을 만듭시다.’‘각 통별로 담당 공무원 1명을 정해 주민불편을 전담 해결해 주는 마을 도우미제를 운영합시다.’등등. 광진구가 1100명 전직원을 대상으로 지난 4일부터 2주동안 공모한 ‘민선3기 구정발전방안’에 무려 660건의 아이디어가 봇물을 이뤘다. 행정 서비스를 개선하고 새로운 구정을 펴기 위해 실시한 이번 공모에 직원들의 톡톡튀는 아이디어가 쏟아져 선정 작업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가운데는 ‘워커힐호텔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을 아차산으로 유도하기 위한 체험관광지 개발안’ 등 벤치마킹 가능한 ‘돈되는 것’도 상당수 있어 눈길을 끈다. 분야별로는 복지분야가 134건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이 민원서비스 82건,업무개선 71건,도시건설 47건,환경위생 33건,구민홍보 32건,교통행정 30건 등의 순이었다. 구는 직원들의 우수 아이디어를 구정에 반영하기로 하고 팀장 등 3명으로 구성된 ‘심사평가반’과 18명의 심의위원회를 구성했다.최우수 제안자에게는 ‘특별승진’의 혜택이 주어진다.정영섭 구청장은 “직원들의 빛나는 아이디어를 적극 반영해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일선행정을 펼쳐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동구기자 yidonggu@
  • 화제의 책/ 한권으로 읽는 한국사-한·일간의 역사 쟁점 집약

    ‘한반도에서 청동기 시대는 언제 시작됐는가?’‘발해는 고구려를 잇는 우리의 주류 역사 속 국가였을까?’ 우리 역사엔 이처럼 아직 의문부호를 달고 있는 학설이 많다.관련 사료가 부족한데다 사료 해석에서도 학자들간 의견이 엇갈리기 때문.특히 한국과 일본 학자들간엔 민족주의적 시각까지 개입돼 쟁점의 차이가 더 크다. ‘한권으로 읽는 한국사’(휴머니스트,최재성 옮김)는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그리고 재일한국인 사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한·일간 역사인식과 역사해석의 쟁점을 집약한 한국사 통사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지난 87년 일본에서 출판돼 97년과 지난 3월 각각 개정판을 내는 등 일본인들 사이에선이미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다. 김양기 일본 도코하대학 교수와 윤한택 경기문화재단 연구원,정석종 전 영남대 교수,나카야마 기요타카(中山淸隆) 일본 여자성학원 단과대 교수 등 한·일 양국,재일한국인 학자들이 고루 참여해 집필했다.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독자들이 한국 역사 속의 논란거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시대별 본문 뒤에 주요 쟁점에 대한 해설을 별도로 실은 것. 고조선 성립시기와 맞물린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시작’문제,삼한과 고대국가 형성 시기에 관한 논란,가야연맹의 변천 및 발해의 실체,조선시대서원의 역할 등 주요 쟁점 10가지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본문은 민족이나 국가라는 개념을 떠나 독자들이 역사적 사실들과 얼마나 제대로 마주할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필자들이 전공에 따라 기술했다.특히 500여장의 사진과 그림을 수록,책장을 넘기며 그림을 따라가기만 해도 역사적 흐름을 알 수 있도록 했다.1만 4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
  • [씨줄날줄] 통일축전

    축제는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한다.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을 섬기며 인간끼리 ‘하나’가 되는 잔치판으로 축제가 펼쳐졌다.우리나라에도 고대 부족국가 시절 부여의 정월 영고를 비롯해 고구려의 동맹,예의무천 등이 있었다. 서양 역시 고대 그리스 아티카주의 바쿠스 신전에서 디오니소스 축제가 행해졌다.서구문화의 원천인 그리스극과 시는 바로 이 축제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기독교 또한 여러가지 축제를 창조해냈다.이중 부림절은 세계에서 가장 큰축제의 하나로 손꼽힌다.구약성서 에스더서를 보면 이 축제는 유태인이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기원전 6∼4세기 유태인이 학살될 운명에서 거짓말처럼 살아나 학살음모를 꾸민 페르시아인들에게 복수를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됐다.부림은 페르시아말로 제비라는 뜻의 푸림에서 유래됐는데 당시 페르시아인들은 유태인의 학살날짜를 제비뽑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런 축제의 모습을 보고 프랑스 학자 장 뒤비뇨는 ‘축제와 문명’에서 “축제는 인간을 구조나 법률이 없는 세계,즉 자연의 세계와 마주보게 한다.”고 갈파했다.현대의 축제는 신이 사라진 대신,‘개인’을 ‘우리’로 회복하는 통합적 기제로 작동한다. 올해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8·15통일축전을 치르기 위한 논의가 열린다.오는 20일 평양에서 나흘간 남북 민간단체 대표들이 모여 행사 참가 문제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 통일축전은 여태껏 한번도 조용히 넘어간 적이 없다.6·15 남북공동선언 이전인 90년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남북공동선언 직후인 지난해에도 우리 사회에 숱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만경대 정신’서명과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참관 등을 둘러싸고 정부와 민간,정당과 정당,언론과 언론,보수와 진보 등 온 나라가 갈기갈기 찢어졌다. 올해는 사태가 작년보다 더욱 심각할 것으로 우려된다.연말 대선을 앞두고 있는 데다 6·29 서해기습도발로 남북관계가 여름철 무더위가 무색하게 꽁꽁 얼어붙어 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전쟁을 하지 않을 바에는 민간부문의 교류는 이어져야 할 것이다. 코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신은 인간이 숯처럼 타버리게 될 때 인간을 구제한다.” 자칫 이말처럼 우리 민족의 속이 새카맣게 탄 다음에야 구제받는 아픔을 겪어서 되겠는가. 박재범 논설위원 jaebum@
  • 클로즈 업/ KBS1 ‘역사스페셜’- 가야에서 조선으로 떠나는 무기여행

    동북아시아의 강자인 고구려,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해상왕국 고려,왜구를 격퇴한 조선은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나름대로 최첨단 비밀병기를 만들어냈다.각 시대마다 어떤 병기가 최고였고 그것은 국력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KBS1의 ‘역사스페셜’(오후 8시)은 ‘철갑 옷에서 신기전 로켓까지 한국의 무기와 갑주’편을 통해 우리나라 역사 속의 첨단무기를 알아본다.우선 고대 왕국 가야.뛰어난 철제기술로 인체의 굴곡에 알맞게 만든 철갑옷을 선보인다.가야 철갑옷은 투구와 팔가리개,목가리개 등으로 몸통뿐 아니라 머리·목·팔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방어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고구려는 철갑기병으로 구성된 동북아 최강의 군대를 조직했다.긴 철판을 이어 만든 판갑과 달리 철갑은 비늘 모양의 작은 철판 조각을 꿰어 만들기 때문에 몸에 완전히 밀착돼 움직임을 자유롭게 해준다. 신라의 비밀병기는 장창.장창은 당나라 기병을 제압하느라 고안됐으며 말위에 탄 사람이 아니라 말의 가슴이나 목을 겨눈다. 이밖에 고려시대 때 화약을 태워서 생기는 힘을 추진력으로 스스로 날아가도록 만든 로켓과,조선시대의 최고 무기 거북선도 들여다본다.
  • [2002 길섶에서] 인터넷 터키사랑

    어느 포털사이트의 터키 카페.“터키는 지금 엄청 벼르고 있더군요.삼바가 이러다 지르박 되는 게 아닐는지….” “안타깝습니다.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일본 원정응원은 무산됐습니다.” “신촌 홍익대 정문앞 호프집 TSR로 모이세요.” 26일 4강전에서 브라질과의 재격돌을 앞두고 터키팀을 응원하는 격문들이다.또 다른 격문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터키인의 조상인 돌궐은 고조선,고구려,발해 때 우리와는 한나라를 이루었던 부족연맹이었습니다.당연히 그들은 우리의 형제입니다.” 서울 상암구장에서 터키·중국전이 있던 날.인터넷에서 만난 이들 ‘터키 서포터스’ 회원들은 입장권을 구하지 못하자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경기장이 내려다 보이는 주변 야산으로 올라가 대형 터키국기를 펼쳐 들고 장외 응원을 펼치기도 했다. 요즘 인터넷에는 터키팀을 응원하는 커뮤니티가 100개를 넘어서고 있다.1만 5000여 투르크(터키의 현지식 발음) 전사들이 한국전에 참전해 피를 나눈지 벌써 반세기.까맣게 잊고 지낸 보은의 터키 사랑이 50년 늦게 인터넷에서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염주영 논설위원
  • 월드컵/스페인전 이모저모

    ◇연장 전반 10분쯤 스페인 모리엔테스의 슛이 한국의 골포스트를 맞고 나오자 관중석에서는 “이겼다.”라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는 이번 대회서 프랑스 등 강팀들이 골포스트를 맞춘 뒤 득점을 하지 못해 탈락하는 등 ‘골포스트를 맞히면 진다.’는 징크스 재현을 기대했기 때문.모리엔테스도 골든골의 기회를 놓치자 머리를 감싸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스페인 일부 선수들은 22일 한국과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하자 심판을 위협하는 추태를 보였다. 홍명보의 마지막 킥이 골네트를 흔들며 한국의 승부차기 5-3 승리가 확정되자 벤치에 앉아 있던 스페인 선수들이 심판을 향해 달려나가 위협했고 가이스카 멘디에타 등 일부 선수들이 이를 말리는 등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다.스페인의 주장 페르난도 이에로는 눈물까지 흘리며 그라운드를 떠났다. ◇이날 ‘붉은 악마’ 응원단은 광주 월드컵경기장 북쪽 스탠드 전체를 활용해 ‘PRIDE OF ASIA’(아시아의 자존심)라는 대규모 카드섹션으로 응원전을 펼쳤다. 한국 경기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카드섹션을 선보인 붉은악마는 이날 한국이 아시아 국가중 유일하게 4강에 도전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같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또 남쪽 관중석에 자리잡은 붉은악마는 경기에 앞서 국가가 울려퍼질 때 태극기와 함께 고구려벽화 그림 바탕에 한자로 ‘고구려지손 대한민국(高句麗之孫 大韓民國)’이라고 쓴 깃발과 함께 히딩크 감독을 위해 ‘네덜란드에 감사한다(Thanks,Kingdom of Netherlands)’고 적힌 깃발을 내걸었다. ◇히딩크 감독은 지난 18일 이탈리아전에 이어 22일 스페인전에서도 후반 막판 공격력을 강화하는 카드로 수비수를 빼고 공격수를 투입하는 강수를 두었다. 전·후반 들어 2명의 선수를 교체한 히딩크 감독은 90분 경기가 끝나가던 후반 45분 공격수 황선홍을 왼쪽 수비수 김태영과 교체 투입했다. ◇광주 월드컵경기장 맞은 편에 위치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국경일이 아닌데도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해 한국 선수들의 선전을 기원했다. 한편 입장권을 구하지 못한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기장 밖에서 응원전을 펼쳐경기장 안과 다를 바 없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히딩크 한국 감독은 승부차기 끝에 패해 비탄에 잠긴 스페인의 라울과 이에로를 껴안으며 위로했다. 히딩크 감독은 이어 끝내 울음을 터뜨린 페르난도 모리엔테스를 품에 안고 쓰다듬어 주기도 해 스페인리그 레알 마드리드 감독 시절부터 다져진 각별한 ‘애정’을 보여줬다. 광주 안동환기자 sunstory@
  • “신라역사는 2000년이다”서강대 이종욱교수 저서 ‘신라의 역사’서 주장

    지난 89년과 95년 필사본 ‘화랑세기’두 종류가 발견된 뒤 이를 진서(眞書)로 인정해 기존 사학계와 격렬한 논쟁을 벌여온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교수가 새로운 화두를 또 던졌다.최근 발간한 저서 ‘신라의 역사’(2권·김영사)에서 신라사에 관한 기성 학계의 통설을 근본적으로 뒤엎는 충격적인 주장들을 내놓은 것이다. 이교수가 말하는 신라의 역사는 ‘적어도’2000년에 이른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사로 6촌’이 신라의 출발점이며,이 촌장사회에서 만들어 세운 지석묘가 서기전 12세기 이전에 축조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곧 지석묘는 권력자의 등장을 말해 주는 징표이고 경주를 지역기반으로 한 ‘사로6촌’은 신라의 전신이므로,이를 신라의 출발로 보아 그 역사를 2000년 넘게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아울러 그는 신라의 역사발전 단계를 촌장사회,소국-소국연맹-소국병합 단계-마립간 시대로 이어지는 초기국가 시대,성골왕 시대,대신라 왕국으로 정리한다.이같은 시대구분론 자체가 기존학설과 크게 다르지만 특히 충격을주는 것은 이교수가 삼국 통일과 통일신라라는 용어 대신에 ‘삼한(三韓)통합’과 ‘대신라 왕국’이라는 새 개념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이교수는 고구려·백제·신라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기본전제를 거부한다.그것은 후대 사가들이 3국을 한 틀에 넣어 보려는 데서 나온 발상일 뿐,당대의 3국인들은 스스로를 같은 민족으로 여기지 않았고 ‘민족’이라는 개념조차 갖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따라서 신라가 중국 당(唐)의 군대를 동원해 고구려·백제를 멸망시켰다고 비난하거나,신라가 통일한 탓에 만주 땅을 잃어 그뒤 민족의 영토가 한반도로 국한됐다고 아쉬워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그같은 이교수의 인식은 고구려·백제멸망 이후의 신라를 통일신라가 아니라 대(大)신라라고 정의하는 것으로 귀결된다.이교수의 신라사 인식은 이처럼 기존 학설을 부정하고 포기한다.이교수 스스로 “실증사학을 중시해 온 현대 한국사학이 만들어낸 신라의 역사와,소위 실증사학의 속박을 푼 필자의 신라사는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정도로 평행선을 달린다.”고 밝힌원인은 무엇일까. 이교수는,기성 학계가 신라사를 삼국사기가 아닌 중국사서 ‘삼국지’한(韓)조 중심으로 재구성해 왔기 때문이라고 밝힌다.그 결과 신라의 건국에서 내물왕(서기 356∼402년)까지의 역사가 은폐·말살됐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화랑세기 필사본을 진서로 인정해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와 ‘역주해화랑세기’를 펴내면서 이교수는 화랑세기의 진위 여부에 자신의 학자적 생명을 건다고 공언했다.이제 ‘신라의 역사’를 내면서 그는 사학자 대부분을 적으로 돌리는 쉽지 않은 싸움을 다시 한번 걸고 있다.허나 승패와는 상관없이,신라의 통사(通史)를 정리한 변변한 사서 하나 없는 현실에서 ‘신라의 역사’가 갖는 가치는 누구라도 부인하기 힘든 성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임창용기자 sdragon@
  • 5편선정, 한국역사 외국인에 알리기

    KBS는 6월 한달동안 외국인에게 한국의 역사를 설명해 주는 ‘월드컵 특별기획 역사스페셜’(오후8시)을 방영한다.그동안 방송한 ‘역사스페셜’중에서 쉽고 재미있는 내용 다섯 편을 선정,우리말과 영어로 음성다중 제작했다.타이틀과 주요자막도 영어를 병기했다. 1일 방영하는 제1편 ‘고인돌과 고래사냥의 땅,한반도의 선사시대’는 고래잡이가 성행하던 3000년 전의 한반도 이야기.우리나라는 4000여 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는 세계 최대의 고인돌 왕국이다.대단히 치밀한 공법이 요구되는 고인돌 건축술과 함께 고대국가의 탄생을 의미하는 강력한 지배세력의 존재 여부를 고인돌이라는,당시에 일반화한 무덤 양식을 통해 알아 본다. 이어 8일에는 제2편 ‘고구려 고분벽화,살아나는 고대’를 통해 북한지역의 고대사를 소개한다.15일 제3편 ‘황금의 나라,황금의 역사’는 신라시대의 금공예를 탐방하고,22일 제4편 ‘철갑옷에서 신기전 로켓까지,한국의 무기와 갑주’편에서는한국의 철기문화를 조명한다.마지막인 29일의 제5편 ‘별자리와 시계로 보는한국의 천문과 우주’에서는 발달한 한국의 자연과학 기술을 짚어 본다. 이송하기자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秘史] (7)불꽃튀는 러,日 첩보전

    러시아 문서보관소 서고속에 묻혀있다 100년만에 햇빛을본 제정 러시아시대의 비밀문서중에는 군사첩보와 관련된전문이나 보고서들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대한제국과 만주에서의 주도권다툼에 열을 올리고 있던 러시아와 일본은 외교라인과 군부를 총동원,첩보전을 전개한 것이다.러시아는 모든 면에서 불리했지만 연해주지역에 이주해 있던 한인들을 첩보요원으로 활용하는 이점이 있었다.러시아의 대일(對日) 첩보전은 러·일전쟁(1904∼1905)을 전후한 시기에 가장 첨예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한 이후 일본군의 동향 관찰과 대한제국군의 개편 상황을 감지하기 위한 상주 군사첩보원의 필요성이 긴박해지고 있다.이 비밀첩보 임무로 제2시베리아 보병사단 포병여단의 비류코프 대위를 일본주재 군사무관의 부관으로 임명하여 보내기로 되어 있다.비류코프는 10년간 대한제국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다.(1906년 2월13일 러시아군 총참모부장이 외무장관에게 보낸 공문) 비류코프가 군사무관 사모일오프의 부관으로 부임하게 되면 일본이 바로 의심하게 되어 첩보활동이 어렵게 될 것이다.(1906년 7월14일 도쿄주재 바흐메티예프 공사가 외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두 건의 비밀문서에 등장하는 비류코프는 대표적인 군사첩보원이었다.1907년 그가 서울로 오자 당시 서울주재 총영사였던 플란손은 이토(伊藤博文) 통감에게 “서울에서러시아학교교사로 일하던중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현역에 소집돼 근무했으며 포츠머스 평화회담후 다시 예비역으로 편입돼 정들었던 서울에 다시 와 교사직을 알아보려고 왔다.”고 소개했다.이토는 비류코프에게 동정적으로 대해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비류코프는 서울의 러시아학교 교사 신분으로 국내에서 10년동안 암약하면서 알게된 한인학생 10여명을 러시아의하사관학교 등에 국비유학생으로 입교시켰고 전쟁이 나자소집해 예하의 비밀첩보원으로 활용했다.이후 1911년까지4년동안 원산주재 영사로 근무하면서 첩보수집활동을 했다.그는 1904년 1월 “한국어를 말하고 한복으로 변장한 일본인은 전쟁이 나면 러시아군을 감시할 것이며 또 통역이나 안내원으로 봉사하겠다고 자청할 수 있다.일본인은 용모 등이 한인과 비슷하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대단히 어렵다.그러나 걷는 모습을 잘 관찰하면 한인은 성큼성큼 걷는 반면 일본인은 촘촘히 걷는다.”는 첩보를 공사관에 올릴 정도로 한국과 한국인에 정통했다.또 러시아군이 만주와남우수리지방에서 대한제국으로 진격할 수 있는 3개의 길과 그에 관련된 상세한 정보를 보고하기도 했다. 그는 한인생도 출신들의 첩보활동에 대해 “생도들은 고종황제와 조국을 위해 열심히 첩보활동을 하고 있다.한군과 강군은 나와 함께 활동하고 있고 이군은 북청에서,현군은 노보키예프스크,구군은 경성(鏡城)에서 각각 정찰임무를 맡고 있다.”고 1904년 10월19일 보고했다. 서울 불어학교교사로 고종의 헤이그밀사파견 사실을 러시아 극동총독부에 알렸던 프랑스인 마르텔과 프랑스 신문‘저널’지의 도쿄특파원 발레,블라디보스토크주재 프랑스상무관 플라르 등 프랑스인들이 러시아의 비밀첩보원으로활약했던 사실도 흥미롭다. 발레가 페테르부르크에 왔다.그는 전쟁중의 일본의 정세에 관해 흥미있는 정보를 러시아에 전해 주었으며 이제 외무부에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해 왔다.(1905년 5월22일외무부에서 육군장관에게).발레의 정보제공 제의는 수락되었다.정보비로 그에게 매월 600루블이 책정되었다.(1905년 6월15일 육군장관이 외무장관에게). 러시아는 일본과의 첩보전에서 대단히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첩보의 통로인 우편 및 전신시설과 전달수단인 철도등 교통시설을 일본이 선점,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2년 니콜라이2세가 외무장관 람즈도르프에게 “서울주재 파블로프 대리공사의 보고서가 늦게 상신되는 이유가무엇이냐.”고 묻자 람즈도르프는 “파블로프의 보고는 비밀스런 성격이 있기 때문에 일반 우편시설을 이용하지 않고 믿을 만한 기회(인편)나 아니면 가끔 대한제국 항구에입항하는 러시아 선박을 통해 발송해 오기 때문”이라고해명하기도 했다.다음 문건은 러시아측의 애로사항을 잘보여준다. 고종황제가 소장하고 있는 러시아 외무부와의 연락용 암호 통신문이 궁정(덕수궁)화재로소실됐다.혹시 일본이 훔쳐 보관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 미리 방비하라.(1904년 5월16일 서울주재 파블로프 공사가 외무부에 보낸 보고서) 서울에서 파블로프 공사가 보낸 전문을 받았지만 내용이훼손돼 읽을 수가 없다.일본전신국이 조직적으로 교묘하게 비밀전문을 파손시켜 배달하고 있으며 이는 우연한 왜곡이라고 볼 수 없다.일본은 통신문을 제때에 배달도 하지않는다.모든 우편,전신국은 러시아에 적대적인 일본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대한제국과의 교신도 불가능하다.배달과정에서 내용을 알 수 없도록 손상시켜 놓은 몇통의 전보문을 첨부한다(1903년 12월7일 일본 나가사키 주재 가가린영사가 도쿄주재 공사에게 보낸 보고문) 대한제국의 우편시설을 장악한 일본이 서울의 러시아공사관에서 보내는 외교행낭을 손상시키거나 배달을 지연시키는 일이 잦아지자 러시아는 임시방편으로 제물포에서 상하이노선을 운항중인 동청철도(東靑鐵道) 소속 여객선을 이용해 외교문서를 발송하고 수신하기도 했다.2주에 1회 왕복운항하는 이 여객선도 비밀문서 수발에는 지장이 많았다.두만강 인접 도시 노보키옙스크지역과 한국간의 전신선을 육상으로 연결하려고 계획했으나 일본의 끈질긴 방해로실패했다.러·일전쟁 이후 한-러간의 통신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해저선을 통했다.러·일전쟁의승패는 통신을 장악한 일본쪽으로 이미 기울어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앞으로 러·일간에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대한제국에서 러·일은 사활을 건 혈전을 벌일 것이며 영국이 가담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대한제국이 전쟁터가 될 경우 러시아의 남우수리지방은 후방작전 기지가 될 것이다.일본의 병력을 고려할 때 러시아는 10만명이상의 병력과 2만명분 이상의 식량을 확보,비축해야 한다.연해주,아무르주,자바이칼주에는 1년간 공급할 식량을 비축해야 한다.일본군의 병력현황은 다음과 같다.(1899년 3월9일 알프탄 대령이 ‘러·일충돌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작성,보고한 문서) 이 보고서는 4년후 러·일전쟁 발발을 이미 예측하는 등러시아측 정보의 정확성과 뛰어난 분석력을 보여준다.이후 육군장관에 오르는 사하로프 중장이 1902년에 작성한 보고서도 일본 수비대의 주둔지와 규모,철도 및 전신성 공사 현황,저탄장,거주자들의 취득부동산 등 세세한 항목에 이르기까지 보고하고 있다. 무기도입 및 밀수와 관련된 첩보도 자주 등장한다.일본이 대한제국을 경유해 만주로 무기를 밀수출하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일본이 고물 함정을 거액에 대한제국에 팔았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일본은 사용하지 않는 구형 총기를 만주로 수출하고 있다.어느 지방을 통해 어디로 보내고 있는지 추적하라.청국에무기를 공급해 주는 사람에게서 받은 정보에 의하면 일본이 청국의 여러 성(省)에 18만정의 구식 소총을 매입하라고 제의했다고 한다.(1902년 3월29일 하바로프스크의 그로드스키 장군이 서울공사관에 보낸 비밀전문) 주한공사관 쉬테인 공사의 보고에 의하면 미쓰비시사는 8문의 함포가 장착되고 200명의 해군을 태울 수 있는 순양함을 대한제국 정부에 납품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1903년 2월3일 람즈도르프 외무장관이 도쿄주재 이즈볼스키 공사에게 보낸 전문). 순양함은 오는 4월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기념행사때 축포를 발사할 목적으로 석탄선을 개조해 함포만 탑재시킨 것으로 외형만 해군함정으로 보일 뿐이라고 한다.일본의 고무라(小村) 외무상은 고종황제의 순양함 도입계획이 일본에 유익하지 못하다는 말을 했다.(같은해 2월9일 람즈도르프 외무장관이 서울공사관에 보낸 전문) 모스크바와 서울,도쿄를 오간 이들 비밀전문을 보면 순양함을 도입하려던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의 국제무기거래 사기극에 속은 것을 알 수 있다.당시 자료에 따르면 이 순양함의 가격은 55만엔이었고 3년 분할상환 조건이었다.대구경 대포 4문과 소구경 대포 4문이 장착되고 장교 25명과해군 200명이 승선하게 돼 있었다. 일본의 첩보망도 만만찮았다.1903년 제물포 부영사 팔야오프스키의 서북지역 출장보고서에는 “평양에는 일본의첩보기관이 있다.일본인들은 시내의 모든 약국을 운영하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피고 있다.이곳에는 약 300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지방행정권은 일본영사의 수중에 있다.”고 보고하는 등 일본첩보조직의 촉수가 대한제국의 정부는 물론 지방에 이르기까지 거미줄처럼 뻗어있음을 알리고 있다. 간도의 일본 총영사관에는 비밀첩보과가 있다.그 과에는일본인,청국인,그리고 한인이 암약할 것이다.통감부와 헌병사령부 소속의 밀정만도 약 760명에 이른다.이들의 주요 임무는 의병을 추적하는 것이다.밀정중에는 여성도 있는데 대부분 기생이다.벌써 많은 의병을 경찰에 밀고하였다.(1909년 10월23일 소모프 총영사가 외무장관에게 보낸 비밀보고서) 새로 발굴된 문서에는 이밖에 러시아 극동지방에서 일본비밀첩보원으로 활동한 한인 명단(1898년),대한제국내 비밀첩보망 구축안(1905년),흑룡강지방의 조선인 첩보원 명단(1912년) 등도 들어있다. 대한제국을 독식하기 위해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스파이전쟁에 이용당하거나 희생된 한국사람들의 이름이다. 노주석기자 joo@ ■러 문서에 나타난 대한매일 보도 인용 전 서울 불어학교 교사 마르텔을 비밀첩보원으로 대한제국에 파견했다.그는 일어에도 능통하다.그에게 첩보임무와개인암호를 주었다.그에게 The Korea Daily News(대한매일신보의 영문판 제호)를 늘 잘 살피라고 지시했다.(1904년12월4일 중국 상하이에서 파블로프 서울주재 대리공사가그루세스키장군에게 보낸 보고서) 러·일전쟁(1904∼1905)의 패배로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한 러시아는 이후 2∼3년동안은 그동안 심어놓았던 첩보망과 청,일주재 외교라인 등을 통해 극동정세를 그럭저럭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다.하지만 한일합병시기를 전후해서는 ‘정보부족증’에 걸렸다.그래서인지 1908년 이후에는 국내 언론과 일본 신문 기사를 발췌해 본국에 보고하고 있었다. ‘00년 00일부터 00년 00일까지의 일지’‘대한제국내 폭동에 대한 신문스크랩’ 등 러시아문서보관소에서 발굴된수백건의 정보보고가 그것이다.이중 80% 이상 인용된 신문이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1904년 발간)였다. 서울주재 공사관이 폐쇄된 이후 만주로 건너가 극동지역첩보수집총책임자로 일한 파블로프가 프랑스인 비밀첩보원 마르텔에게 “대한매일신보를 잘 살피라.”고 지시한 것도 그때문이었다. 26일 하얼빈역에서 5명의 한인이 이토에게 권총을 발사,이토는 곧 절명했다.전 고종황제는 식사중에 이 소식을 듣고 수저를 상에 떨어뜨렸다.(1909년 10월28일자).안응칠(안중근의사의 아호)은 항일운동을 하며 이강,유동설 그리고안창호와 비밀연락을 했다.(1909년 10월30일자).오늘 관보에 지난 9월4일 청·일이 간도에 대해 체결한 조약문이 발표됐다.(1909년 11월9일자) 대한매일신보는 러시아와 중국,그리고 일본인의 간담을서늘하게 한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사건을 “고종이 수저를 떨어뜨렸다.”는 촌철살인의 한 문장으로 전달하고있으며 고구려와 발해의 옛땅 간도를 청국에 통째로 넘긴일본의 외교술책도 간도협약 체결 기사를 통해 짚어내고있다.무엇보다 대한매일신보의 의병활동 보도는 러시아문서가 인용하고 있는 국내외 신문의 보도를 내용이나 횟수,정확도 면에서 압도하고 있다. 경기도에 군사훈련을 받은 2000명이상의 의병이 집결해 있다.(1908년 2월19일자).대한제국에는 모두 5만명의 의병이 있다고 한다.결정적인 의병소탕을 위해 일본군이 또다시상륙한다고 한다.(1909년 7월29일자).이토가 사살된 이후러시아로 한인이주가 급증하고 있다.(1909년 11월27일). 대한매일신보 1911년 2월15일자와 2월21일자에는 의병장강기동(姜基東)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기사 2건이 실려있다. 지난 2월12일 원산의 한 일본식당에서 의병대장 강기동이체포됐다.(1911년2월15일자)그는 4년동안 경기도에서 의병 200명과 함께 항일투쟁을 했다.강기동은 여객선편으로 서울로 이송된 이후 지금까지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체포당시 주머니에는 일본돈 2엔 밖에 없었으며 손과 발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1911년2월21일자) 노주석기자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비사] (6)러와 淸,日 3국 국경분쟁

    한국과 러시아,중국 3국의 두만강쪽 국경은 1860년 당시러시아와 청 두 나라가 맺은 베이징조약에 의해 일방적으로 획정지어졌다.당시 청의 속국으로 여겨졌던 조선은 협정대상에서 아예 배제됐다. 이로써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조선은 유럽국가인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지만 1861년 8월1일 청,러 양국이 동부국경 최남단을 뜻하는 국경표지인 토자비(土字碑·러시아측은 이 비석을 세운 러시아군 장교의 이름 첫자를 따 T자비라고 불렀다.)를 두만강 연안에 세울 때까지 조선은 이같은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베이징조약의 영토조항인 제1조에 의해 러시아는 서북쪽으로는 아무르강,동쪽으로는 타타르스키해협과 동해를,남서쪽으로는 두만강하류에 이르는 이른바 연해주땅을 통째로 집어삼켰다.이 지역에는 원나라때부터 여진으로 불려왔던 말갈족과 고구려인,돌궐인,위구르인,거란인 등이 살고 있었으며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古土)였다. 연해주가 러시아의 영토가 되면서 1872년 러시아 극동함대가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왔다.극동노령의 최동남단이며 조선국경과 가까운 블라디보스토크가 러시아 극동함대의 기항이 됐다는 사실은 앞으로의 한·러관계에 엄청난 파장을 예고한다. 러시아군이 마적단과 청국 패잔병을 추격하면서 대한제국의 북방 국경선 인접지까지 접근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대한제국과 청국의 국경선은 세계 각국의 지도(독일판,영국판,대한제국판)에서 동북방면으로는 두만강,서북방면으로는 혜산산맥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그러므로 두만강과 혜산산맥을 중립지대로 보는 의견이 있다.러시아군이 부지불식간에 대한제국 북방 국경선을 침범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할 수 있도록 한·청 국경선이 정확히 어디인지 밝혀주길 바란다.(1901년 4월 육군장관 쿠로파트킨이 외무장관 람즈도르프에게 보낸 통신문) 외무부가 갖고 있는 자료에는 대한제국과 청국의 국경 경계는 항상 두만강으로 인정되어 왔다.현재 한인 스스로도 간도(間島)를 청국영토로 인정하고 있다.1894년까지 효력이있던 조·청조약에서도 두만강 좌안지대에서 혜산산맥까지는 중립지대로 인정되어 이곳에 조·청 양국인의 거주가 금지되었다.청·일전쟁이후 한인들이 이곳 두만강 좌안에 무단 이주,점거하고 있지만 여전히 청국영토의 일부로 인정받고 있다.(1901년 10월4일 외무장관이 육군장관에게 보낸 회신) 이 회신은 조선과 청국의 국경선은 두만강이라는 러시아측의 공식입장을 담고 있다.러시아측 해석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할 수도 있지만 엄연히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해당사국의 해석이라는 데 무게가 실린다.역사적으로 보면 간도에는 오래전부터 한인이 거주했던 사실은 확실하지만 한인들의두만강 도강을 금한 법을 제정한 1870년까지 간도지방에는극소수의 한인이 살았다.1870년 이후 한인 농민들의 이주가 시작됐고 얼마 뒤 산동지방에서 청국인들이 건너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조·청 국경은 두만강이며 간도는 청국의 땅이었을까.여기에서 우리는 두만강쪽 한·청 국경과 관련된 케케묵은 논란에 다시 휩싸이게 된다. 926년 발해의 멸망이후 무주공산(無主空山) 상태였던 2만1000㎢의 더넓은 간도들판(길림성 연변자치주지역)의 주인은 누구였을까.1710년(숙종36년) 청국은 간도지방에서 일어난 한인에 의한 청국인 살해사건 조사단을 현지에 파견,“압록강의 서북은 중국,동남은 조선땅이다.그리고 토문강 서남은 조선,동북은 중국의 영토이다.”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1712년 양국은 백두산 정상에서 가까운 지점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이후의 쟁점은 토문강(土們江)의 실체에 관한 문제에 모아졌다.토문강이 도문강(圖們江)이라고도 불린 두만강의 별칭이냐,아니면 전혀 별개의 강이냐를 놓고 오랫동안 맞섰다.대한제국이 개국선포(1897년)와 함께 청의 연호를 버리면서 청과 조선의 관계는 끊어졌다.이때부터 ‘두만강과 토문강은 별류(別流)의 강’이라고 주장했지만 진전이 없었다.러시아도 남만주를 차지한 1895년 이전에는 간도를 한국땅으로 여기고 있었다.실제 러시아측 자료에도 ‘토문강은 압록강에서 송화강으로 흐르는 지류’라고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앗아간 일본은 간도에 임시파출소를 설치한 뒤 ‘간도는 일본의 지배를 받는한국의 영토’라고 인정했으나 1909년 태도를 돌변,베이징에서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을 체결하면서 두만강을 국경으로 인정해버렸다.청·일협약의 결과 일본은 남만주철도부설권을얻는 대신 청에 간도의 소유권을 넘겼다. 청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라는 이유 때문에 소유권을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했던 조선은 일본의 만주진출이라는정치적 협상에 다시 한번 희생됐다.러시아와 청,일 3국은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남의 나라 국경을 마음대로 긋고 바꾼 것이다. 대한제국과 만주 남방 국경선의 획정에 관해 러시아에서 지도를 다시 제작한다면 한·청 국경선의 중요성에 비춰 수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러시아 지도에는 국경선이 혜산산맥을 따라 표시돼 있다.실제적으로 한·청 두 나라의 경계는1710년에 형성됐었다.두만강하구에서 백두산까지이다.1897년 대한제국이 청국에서 독립하면서 두만강 좌안을 소유하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한·청 국경선으로 다시 이전의 국경선을 인정하고 말았다.(1901년 3월11일 서울주재군사무관스트렐비스키 대령이 참모본부에 올린 보고서) 서울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파블로프도 1901년 “압록강과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는 한인과 청국인에 관해 합의한 한·청국경조약에 따르면 압록강과 두만강 좌안에 거주하는 한인은 세금을 청국정부에 냈고 우안에 사는 청국인은 세금을 대한제국에 냈다.”라고 외무부에 보고하고 있다.실제 우안에 사는 조선인은 거의 없었던 점으로 미뤄 이때부터 청의 간도에 대한 기득권이 인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이 두만강 국경선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일본은 두만강 좌안(간도)은 이전에 조선영토였으며 현재 청국 영토라고 하더라도 한인이 거주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두만강좌·우안 모두를 법적으로 확보하려고 한다.그런데 국방부는 두만강이 오래전부터 한·청 국경선이라는 통지를 1904년 아무르 군관구 사령관에게서 받은 바 있다.(1905년 10월6일 극동제1군 총사령관 리네비치가 참모총장에게 보낸 보고서) 또 1908년 3월 서울 총영사관에서 외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도 “청국과 대한제국이 간도소유문제로 분쟁을 빚고 있다.일본군 사이토 대좌의 정보에 따르면 간도에는 한인촌 529곳이 형성돼 있으며 이곳에 7만2076명이 살고 있다.청국인은 209곳에 2만2983명이 살고 있다.한인이 압도적으로 많다.간도의 영토는 넓이가 50마일,길이가 75마일이다.이곳은 형식적으로 청국영토에 속해 있으며 토지의 절반이상을 청국인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한인은 임대를 한다.”라고 밝혔다. 일본은 조선인들을 청국,그리고 압록강변 및 간도로 이주하도록 부추기고 있다.일본은 이 지역 4곳에 영사관을 설치하고 일본 국민으로서의 조선인 이주자들을 통해 세력을 확장시킨다.…일본의 의도를 뒤늦게 파악한 청국이 조선인들을추방하기에 이르렀다.일본측 통계에 의하면 1910년 한해동안 약 10만명의 조선인이 이주해왔고 전체 이주자는 20만명을 넘는다.청국이 조선인을 추방하려하자 일본은 조선에 사는 4만명의 화교를 추방하겠다고 맞대응했다.현재 이 문제로 청·일 양국이 협상중이다.(1910년 12월16일 소모프 총영사의 외무부 비밀 지급전보) 청,일두나라의 국경분쟁을 지켜보는 러시아측의 이해관계는 가능하면 간도가 청국영토로 남아있기를 희망했다. 간도가 대한제국의 영토로 귀속된다면 일본이 간도를 전략적인 목적으로 이용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더욱이 러·일전쟁이 발발하면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가 점령당할 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다.국경방위의 약화를 우려한 것이다. 두만강 국경선 분쟁은 당초 조선과 청국의 직접 분쟁에서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을 접수한 일본과 만주지역을 차지한 러시아의 대리전으로 변질됐다.일본은 간도의 소유권을 주장함으로써 만주와 연해주로의 접근로를확보하려고 한 반면 러시아는 청국의 손을 들어줘 일본과직접 맞대지 않는 완충지대를 유지하려했다.정답을 찾을 수 없었던 이 문제는 결국 1985년 구 소련의 외무장관 그로미코와 북한 김영남 외무상간에 조·소국경조약 체결로 일단락됐다. 100년전 살길을 찾아 두만강 건너편 간도땅으로 건너갔던한인들이 지금은 중국동포가 되어 한국으로 되찾아 오고 있지만 당시 러,청,일 3국의 이해득실에 의해 타율적으로 상실했던 ‘토문강 서남쪽’간도땅을 되찾을 기약은 없다. 노주석기자 joo@ ■용암포 개항사건의 진실 러,일,청 3국이 두만강변에서 끊임없이 국경분쟁을 벌인까닭이 간도(間島)의 소유권에 대한 다툼이었다면 1903년러시아가 압록강변의 벌목 목재 집산지 용암포를 독점점유하면서 불거진 용암포개항 사건은 압록강유역에 대한 3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한 또 다른 국경분쟁이었다. 용암포사건은 표면적으로는 러시아의 압록강 산림이권 독점에 대한 영국,일본,미국 등 열강의 견제였지만 실제로는만주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러시아의 압록강 국경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산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강했다.러시아는 한때 용암포를 기점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르는 한·만국경1300㎞에 만리장성과 견줄 만한 방책선을 두른 뒤 요새를구축하려는 야심찬 계획도 추진했었기 때문이다. 여순에서 개최된 특별회의의 결정사항은 다음과 같다.대한제국 정부의 압록강 개항승낙이 일본과의 개전사유는 될 수 없다.한국과 일본정부에 각각 압록강 개항은 러시아의 이해관계에 적대적인 행위임을 경고해야 한다.개항문제에 관한 한 러시아의 항의는 공격적인 성격을 띠어서는 안된다.(1903년 7월18일 여순에서 알렉세예프 극동총독이 외무부에보낸 통신문) 러시아 극동총독부가 옮겨와 있던 여순에서 열린 이 특별회의는 용암포문제에 대한 러시아측의 종합적인 입장정리란 측면에서 중요하다.용암포의 개항을 최대한 저지시키되 전쟁으로까지 발전되는 극단의 경우는 피하겠다는 것이다.이회의에는 쿠로파트킨 육군장관,레사르 북경주재 공사,파블로프 서울주재 공사,알렉세예프 극동총독,베조브라조프 극동특별위원회 회장,플란손 극동총독 외교담당관 등 러시아극동정책의 수뇌부가 총출동했다. 당시 압록강 산림벌목이권을 놓고 러시아 내부는 두갈래로 나눠져 있었다.비테 재무장관,쿠로파트킨 육군장관,람즈도르프 외무장관은 극동지역의 러시아군 전력의 열세를 들어일본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쪽이었다.하지만 베조브라조프,아바자 해군제독,플레베 내무장관,알렉세예프 극동총독,파블로프 서울주재 공사 등은 양보는 양보를 낳아 결국 만주지역에서의 영향력 상실로 이어질 것이라며 적극 정책을 주장했다.니콜라이2세도 이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다. 러·일전쟁 개전의 결정적인 빌미가 된 용암포사건은 영국 극동함대의 거문도점령 사건(1885년)과 함께 한반도에 열강의 이목을 집중시킨 세계적인 사건이었다.용암포의 개항은 곧 만주에 대한 개항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러시아는용암포를 끝까지 사수하려고 했으나 열강의 압력에 굴복한대한제국정부의 일방적인 한·러조약 및 이권취소로 인해독점적 지위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서울주재 프랑스 공사대리 퐁트네 자작의 서신에 의하면 고종은 서울주재 영국과 일본대표들로부터 조약의 폐기선언을 하도록 3개월동안 강요받았다.고종이 반대하면 폐위시키거나 시해할 수도 있는 강압적 상황이었다.고종은 강요에 못이겨 선언한 조약파기 칙령은 기회가 오는 대로 철회하겠다는 말을 러시아에 전해 달라고 말했다.(1904년 상하이주재부영사 클레이메노프가 외무부에보낸 비밀전문) 결과적으로 용암포사건은 일본과의 전쟁은 피하되 한반도와 만주에서의 영향력은 유지하려 한 러시아의 유약한 전략이 노출된 사건이었으며 1년후 발발한 러·일전쟁의 패배로 러시아가 그동안 개척한 모든 성과는 물거품이 되었다. 노주석기자
  • 제주도민 방북 이모저모/ 대우 기대이상…노동신문 크게 보도

    북한 방문길에 올랐던 제주도민 253명이 5박6일의 방문일정을 마치고 지난 15일 오후 대한항공 전세기편으로 무사히 귀환했다. 방북단장인 강영석 남북협력 제주도민운동본부이사장은 16일 도청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방북 당시인 지난 14일 북한 민족화해협의회 관계자들에게 오는 11월 제83회 제주 전국체육대회를 전후해 제주와 북한간 탁구·축구 교류와 민화협 관계자들의 체전 참관 등을 요청,체전 개최 1개월전까지 회신하겠다는 답변을 얻었다.”고 밝혔다.강 단장은또 “민화협측과 이미 합의한 북한 고인돌 학술조사 등에 관한 언론인 교류도 조속한 시일내에 이뤄질 것으로 본다.”며 방북 성과를 검토해 성과가 있다고 판단되면 도민 재방북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0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방북단에 대한 입국심사는 기내에서 신분 확인만으로 통과됐고,민족화해협의회 허혁필 부회장과 관계자들이 공항영접차 나오는 등 방북단에대한 북측의 대우는 기대 이상이었다.이날 고려호텔에서 열린 환영만찬에서 민화협 허 부회장은 “조국 최남단 제주도민들이 직항로를 통해 북녘에 온 것에 7000만 겨레가 기뻐하고 있다.”며 “제주인민들이 동포애 깃든 감귤을 보내준 데 대해 뜨거운 사의를 표한다.”고 인사했다.북측은 체류기간중 기독교인들이 주일예배를 요청하자 숙소인 고려호텔 회담장을 예배공간으로 제공,일요일인 12일 부단장인 김정서목사 집도로 30여교인들이 예배를 봤다. 노동신문은 15일 ‘남조선 제주도민방문단,평양과 지방의여러 곳 참관’ 이라는 제목으로 만경대와 백두산,을밀대 등을 방문한 제주도민들의 방북소식을 크게 보도했다.방북단이 순안공항을 출발할 때도 민화협 이문환 부회장 일행이 나와 따뜻하게 환송했다. ●방북단은 북한체류 6일동안 소년문화궁전,고구려시조 동명왕릉,평양지하철,주체사상탑,18층 높이의 단군릉,모란봉,칠성문,평양성,평양곡예단 곡예,묘향산,보현사 13층 석탑,서해갑문 등을 둘러봤다.백두산 천지는 해발 2600m 고지에서 눈보라가 날리는 악천후를 만나 관람에 실패했다.아리랑축전은 북측에서 관람을 권하는 바람에 ‘보자’‘보지말자’로 의견이 분분했으나 통일부가 관람불가를 조건으로 방북을 허용했다는 남북협력운동본부측의 설명으로 ‘안 보기’로 일단락됐다. ●방북단중 김연희(65·서귀포시 ) 성복경(75·서귀포시) 전형주(57·제주시)씨 등 6명은 방북기간중 친지 상봉을 기대했으나 아무도 성사되지 못했다.김씨는 제주 출신으로 북한에서 영웅과학자로 칭송받는 오빠 상옥(67)씨를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북한측의 거부로 출발 전날까지 만나지 못하자 평양을 떠나는 버스에서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 전통寫經 전시회 갖는 김경호씨 “”고려청자보다 값진 문화재 원형 살려 복원·보존 시급””

    “사경(寫經)은 어찌보면 고려 청자보다도 더욱 가치있는 문화재인데도 잘못된 인식 탓에 원형복원 노력과 연구가전무한 실정입니다.” 15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백상기념관에서 전통사경 전시회를 갖는 김경호(40)씨.“사경이야말로 우리 문화의 독보적인 우수성을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흔치않은문화재인만큼 원형 복원과 보존이 시급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김씨는 중학교 때부터 불교에 깊이 빠져 불경을 한 자 한 자 그대로 옮겨 쓰는 사경을 시작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고교시절 출가해 1년간 행자생활을 했으나 부모의 만류로 귀가,어렵게 고교를 졸업했다.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한뒤 사경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입학했지만,기본자료조차 없는 실정을 개탄, 사경 복원에 고군분투해 왔다. 고교시절부터 친다면 23년간사경 외길을 걸어온 셈이다. “우리의 사경 역사는 고구려 소수림왕때 불교가 전래되면서부터 시작됐습니다.절정기를 이루었던 고려시대엔 중국이 오히려 고려에 와서 사경을 배워갈 정도로 번창했지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사경은 아주 드물게,그것도단지 서예 차원의 경전 베껴쓰기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지요.” 고려사 충렬왕·충선왕·충숙왕조 기사에 따르면 당시 중국 원 조정에서 많게는 한 번에 100명씩 고려에 관리를 파견해 사경을 제작해갔다고 한다.사경 기술은 중국에서 전래됐지만 전성기인 고려시대의 사경은 서예,회화,금은 공예 등 모든 면에서 중국보다 월등한 종합예술로 꽃피웠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과거 그토록 번성했지만 국내엔 옛 사경을 추적할만한기초 자료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그에 비해 일본에선 오래전부터 사경연구가 활발히 전개돼왔지요.” 그동안 국내 박물관을 샅샅이 뒤졌으나 신통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었고 일본 측 자료에 많이 의존했다고 한다.그런 점에서 현재 호암미술관이 소장한 국보196호 ‘대방광(大放光)불화엄경’은 주목할만한 유물이라고 강조한다. “8세기 통일신라시대 때의 사경인 ‘대방광불화엄경’은 연대가 분명한 사경중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이 사경은먹으로 쓴 것이면서도 표지그림과 경 내용을 설명하는 변상도를 금·은으로 그려 당시 금은 공예가 얼마나 발달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유물입니다.무엇보다 통일신라기인 일본 천평(天平)시대 전국적으로 흥했던 일본 사경의 모태가 됐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김씨가 치중하는 것은 단순한 흉내내기가 아니라 우수한우리의 사경을 원형 그대로 살려내 발전시킨다는 점.표지와 뒷 발제,경전,변상도로 구성된 양식을 옛 모습 그대로복원하는 것이다.사경작업을 하면서 불교 경전의 원뜻이많이 왜곡된 것을 발견하곤 자구 수정과 일반인들이 알기쉽게 풀어쓰는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우선 우리 사경의 의미와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게 중요합니다.내년말쯤 그동안 해왔던 작업을 묶어 교본을 낼계획입니다.옛날엔 사경작업이 분화됐었는데 모든 작업을일일이 혼자 하자니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뜻있는 이들이많이 생겨났으면 합니다.” 이번 전시에는 금강경,부모은중경,천수경,법화경 약찬게,화엄경 정행품 약찬게 등 50점을 내놓는다. 김성호기자 kimus@
  • 책/ 고구려 건국사

    활쏘기의 명수로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朱蒙) 신화는 허구일까,사실일까?.대륙에서 활달한 기개를 날렸던 고구려의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고구려 건국 설화는 대중은 물론 역사학계에서도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심증이 간다해도 딱부러진 근거를 제시하지 못해온 것이 현실이었다.‘고구려 건국사’(김기흥 지음,창작과비평사)는 주몽신화의 피륙에서 상상력과 사실의 올을 한 가닥 한 가닥 가려내고 사료라는 물증을 들이밀며 잃어버린 고구려 초기의 역사 되찾기를 시도한다. 건국대 인문학부 사학과 교수인 저자(47)는 2년전 광개토대왕릉비문을 읽다 연구를 시작했다고 밝힌다.지금까지 일본학자들의 이른바 ‘실증적’연구에 따르면 주몽신화는부여의 ‘동명(東明)전설’을 개작한 허구에 불과하다.이들은 주몽에서 유리왕,대무신왕,민중왕,모본왕에 이르는고구려 초기 왕계를 조작된 왕계라고 결론짓고 아울러 6∼9대왕(태조대왕,차대왕,신대왕,고국천왕)도 조작된 왕으로 보아 제10대 산상왕(197∼227년)부터가 고구려인들 자신이 확실히 알고 있는 실재한 왕이었다고 주장했다.이에 반해 남북한 사학자들은 일본학자들처럼 조작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주몽신화는 고구려 후반기인 5세기 이후 완성된 것으로 보고 고구려 건국사로서의 역사성은 주장하지못하고 있는 실정. 저자는 건국신화가 자연 발생한 것이든,조작된 것이든 간에 그것이 꼭 필요했을 건국과정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전설로 희미하게 전해지다가 수백년 후에야 체계화되었다는것은 수긍할 수 없다는 의문을 기둥삼아 연구에 들어갔다. 그 결과 저자는 3세기 후반에 편찬된 중국 사서인 ‘삼국지’동이전의 고구려의 동맹(東盟)제 관계 기록에 주몽신화가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밝혀냈다.이 기록은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수신(굴의 신)을 맞이하여 동쪽 강가에 돌아와서 제사지냈다는 내용을 전하는데 이는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와 태양신인 해모수의 설화가 이미 확립돼있음을 뜻하는 것이다.저자는 고구려 제3대왕인 대무신왕3년에 동명왕묘가 세워지면서 주몽이 고구려의 시조신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아 그에 관한 기본적인 신화가 체계화했다고 결론짓고 2001년 이를 논문으로 발표했다.저자는 또한 주몽신화가 상당한 정도의 역사성을 가지고 있음도 확인했다고 밝힌다. ‘고구려 건국사’는 이같은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주몽에서 모본왕에 이르는 고구려 초기 5대왕의 역사를 이야기형식으로 구성해 보인다.동부여 왕의 서자였던 주몽이 형제들의 질시를 피해 말을 달려 압록강의 지류인 비류수 강가에 정착하는 장면에서부터 모본왕이 폭정끝에 살해됨으로써 영웅시대가 끝나는 장면까지가 신화와 사실의 세심한 구별 속에 생생하게 서술된다. 이어 후반부는 골격만 전해오는 주몽신화에 살을 붙여 역사가적 상상력으로 이를 복원하는 데 할애된다.아름답고신비로운 신화의 복원은 독자들에게 그리스신화나 요즘 영화 못지않은 민족적 판타지를 만끽하게 해준다.9500원. 신연숙기자yshin@
  • 백제 온조왕 묘 복원 추진

    서울 강동구(구청장 金忠環)가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 되살리기에 나섰다. 고구려의 동명성왕과 신라의 박혁거세는 평양과 경주에 무덤이 보존돼 있으나 삼국의 한 축이었던 온조대왕의 흔적은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 구청장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며 번성했던 백제가 외세를 업은 신라에 패망하면서 시조의 무덤조차 사라졌다.”며 “백제 초기 도읍지인 강동구에서부터 뿌리찾기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강동구는 이에 따라 상반기 중에 저명인사 100여명이 참여하는 온조대왕 기념사업추진위를 구성한 뒤 정확한 고증을통해 온조대왕 묘를 복원할 계획이다. 또 온조대왕이 BC 18년에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웅진(현재의 공주)으로 천도하기까지 백제의 700년 역사 중 500여년간 도읍지였던 강동구지역을 중심으로 중·장기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강동구는 이와 관련,최근 지명위원회를 열어 현재 건립중인 구민체육센터를 ‘온조대왕 문화체육관’으로 개명했다. 최용규기자 ykchoi@
  • [공직자 에세이] 열린 마음으로/ 황사와 자연의 섭리

    비는 비대로 눈은 눈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각각 낭만과애환이 있지만 여러 기상현상 중 주로 봄철에 나타나는 황사는 낭만보다는 생활에 불편함을 더 많이 느끼는 것 같다. 서기 174년 신라 아달라왕 때 ‘우토(雨土)’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오고,고구려 보장왕 때인 서기 644년 10월“평양에 내린 눈이 붉은 색이었다.”,고려 명종 16년 “눈비가 속리산에 내려 녹아서 물이 되었는데 그 색이 핏빛과 같았다.”,조선 명종 5년 3월22일 “서울에 흙비가 내렸다.”는 기록을 보면 황사가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관측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황사는 입자의 크기가 약 1∼10㎛로 미세한 누런 흙먼지다.중국에서 날아오면서 큰 입자는 지면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우리나라에까지 날아오는 황사는 주로 알갱이가 작은 것들로 황사의 발원지에서 1∼5일 걸려 이동해 온 것이다.발원지에서 불려 올라간 먼지량을 100%라 할 때 보통 30%가 발원지에 다시 가라앉고,20%는 주변지역으로 수송되며,50%가 한국,일본,태평양,미국까지 날려간다. 황사가 주로 봄에 나타나는 것은 겨울철 얼어있던 황사발원지의 건조한 토양이 부서지면서 흙먼지가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한반도주변의 기온,강수,풍향 등의 조건 때문에 여름,가을,겨울철보다는 봄에 더 자주 발생한다. 황사는 폭우나 태풍과는 달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은 아니었기에 지금까지는 기상재해로 취급되지 않았다.그러나 최근 발생 횟수가 늘어나더니 급기야 올 봄 들어 숨쉬기가 거북하고 앞이 안보일 정도로 농도가 짙은 황사가발생해 초등학교가 휴교하는 등 큰 불편을 가져와 사회적인 관심대상으로 떠올랐다. 따라서 기상청은 올 4월부터 황사를 한반도에서 발생하는 중요한 기상현상으로 인식하고 강한 황사가 올 것으로 예상되면 호우,폭설,태풍처럼 기상특보를 발표하게 되었다.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황사의 이동 경로와 정량적인 예측을 위해 장단기 계획을 세웠다. 국내에 황사 관측망을 늘릴 뿐만 아니라 중국의 관측자가 지상에서 육안으로 관측해 보내오는 자료나 위성으로 추정한 영상자료 이외에 우리나라가 직접 황사 발원지인중국에 관측망을 깔아 도대체 얼마나 많은 양이 불려 올라갔는지를 알고,이러한 정량적인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수치모델 개발을 서둘러서 황사 예측의 정확도를 더욱 높일 계획이다. 황사 먼지로 인해 호흡기 질환,안질환 등 보건위생학적인 피해와 함께 태양빛을 차단시켜 시정이 악화되고,항공기엔진,반도체와 같은 정밀기계 손상과 가축의 질병 발생 등 황사가 주는 피해는 다양하다.하지만 토양의 산성화를 막고,해양 생태계에 영양을 공급해주고,토양 속에 숨겨있는다양한 성분을 날라다 주는 등 긍정적인 도움도 준다. 며칠 전에 황사가 올 것을 예측한다고 한들 우리 인간이이를 피할 수는 없는 일.올 봄 황사를 겪으면서 흙먼지를멀리까지 옮겨주는 자연의 섭리는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황사 발원지인 그 곳,척박한 흙먼지 속에서도 웃음짓고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 기상청 탐사단의 보고다. 안명환 기상청장
  • 한국고대사는 ‘四國시대’

    ◇ 미완의 문명 7배견 가야사(김태식 지음/푸른역사 펴냄).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전 3권,김태식 지음,푸른역사)는 우리 고대사를 주도해온 ‘삼국시대’ 논리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다분히 신라인의 시각에서 정립된삼국시대라는 개념은 우리 역사 속에서 가야사를 소외시켰고,이는 결과적으로 삼국시대 이전의 천년 세월을 방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이 책의 서설 제목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를 제창하며’는 저자(홍익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이러한 출발점에서독자를 향해 던지는 ‘새로운 고대사 인식’을 위한 명제다. 저자는 왜 한국 고대사가 삼국시대가 아닌 사국시대로 설명돼야 하는지에 대한 명제풀이를 통해,가야가 왜(倭)나백제의 속국이었다는 주장이 난센스이며, 가야사 복원이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입증하고자 한다.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을 추려보자. 왜 사국시대이어야 하는가.먼저 역사상 ‘삼국시대’는가야멸망(562년)후 백제멸망(660년)까지 98년에 지나지않아 한국 고대사를 설명할 수 없다.때문에 가야 연맹이 등장한 기원전 4세기 경부터 562년까지를 사국시대로 설정해 한국 고대사를 재구성해야 한다. 지배면적으로 볼 때도 가야는 경상남·북도의 낙동강 유역과 그 서쪽 일대를 점유했다.최전성기엔 전라남·북도동부지역까지 지배했다. 이는 전성기의 고구려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백제나 신라에 비하면 손색이 없다. 가야가 소국 연맹체제에 머무른 채 고대국가를 완성하지못해 하나의 국가로 취급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그러나 가야연맹은 고구려·백제·신라와 관계를 맺을 때 하나의 정치체제로서 역할을 하였다. 또 출토 유물 등으로 미루어 개별 소국들의 생산력이나 기술수준도 매우 높았다.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기원전 1세기부터 700년 가까이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독자적인 역사를 유지했다. 고대사에서 가야사가 소외된 또 하나의 이유는 근대 이후 연구주체가 일본 학자들에게 넘어가면서 가야사가 임나일본부설을 중심으로 한 고대 한일관계사로 변질됐다는 것이다.왜국이 200년가까이 가야를 지배했었다는 이 학설은일제강점기때 일본의 한국지배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임나일본부설은 그러나 가야지역에서 일본문명의 흔적을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현재 한국은 물론 일본학계에서도 설득력을 잃고 있다.여기서 가야사 복원은 변질된 한일 고대 관계사를 바로잡는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지난 92년 서울대에서 ‘가야제국연맹의 성립과 변천’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십수년간 가야사 연구에 매달려 왔으며,학계에서 ‘김가야’란 별명을 얻을만큼 독보적 위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번 책은 지금까지 나온 가야사 관련 자료와 연구성과물을 집대성했다는 점,그리고 관련 지도 58장,유물·유적 실측도 111장,사진 254장 등을 첨부하는 등 우리나라에선 거의 유일하게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춘 가야사 개설서란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1·3권 각 2만9800원,2권 2만8800원. 임창용기자 sd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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