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고고학
    2026-04-10
    검색기록 지우기
  • 운전기사
    2026-04-10
    검색기록 지우기
  • 가전업계
    2026-04-10
    검색기록 지우기
  • 한국 수출
    2026-04-10
    검색기록 지우기
  • 기술이전
    2026-04-1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832
  • 페루에서 잉카문명 ‘개 미라’ 무더기 발견

    페루에서 잉카문명 ‘개 미라’ 무더기 발견

    남미 페루에서 잉카문명 때의 것으로 보이는 사람과 동물의 미라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페루 파차카마크 지방에서 어린이 미라 4개와 개 미라 6개가 발견됐다고 현지 언론이 1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라는 보름 전 발견됐지만 이날 뒤늦게 알려졌다. 미라가 발견된 곳은 수도 리마로부터 약 25Km 떨어진 곳으로 7번 피라미드와 연결되는 통행로 지역이다. 어린이와 개는 모두 천에 곱게 싸인 채 발견됐다. 개는 보존상태가 뛰어나 털과 이빨이 그대로 남아 있다. 미라 발굴작업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개의 털, 이빨, 턱이 완벽하게 보존돼 있다.”면서 “천이 감겨 있는 형태로 볼 때 동물들이 어린이들과 함께 제물로 바쳐진 듯하다.”고 말했다. “중요한 인물이 사망한 뒤 제물로 바쳐진 것인지를 가려내기 위해선 보다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개는 특히 관심을 모으고 있지만 아직 종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지 언론은 페루 고고학 전문가 말을 인용해 “강한 턱뼈를 가진 것으로 보여 당시 집에서 기르던 사냥개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페루에선 1993년 이후 1000년 이상 된 개의 화석이나 무덤이 자주 발견되고 있다. 지금까지 900~1350년 사이의 것으로 보이는 개의 무덤 82개가 발견됐다. 사진=코메르시오 서울신문 나우뉴스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부고]한국미술사학 초석 다진 진홍섭 박사

    한국미술사학계 거목인 수묵(樹默) 진홍섭 박사가 5일 오전 3시 20분 별세했다. 92세. 고인은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자로 평가되는 우현(又玄) 고유섭(1905~1944)을 사사했다. 황수영 박사·고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과 더불어 한국미술사학계의 ‘개성 3인방’으로 광복 이후 한국미술사의 초석을 다졌다. 1918년 3월 8일 개성에서 출생한 고인은 1936년 개성상고를 졸업하고 1941년 일본 메이지대 정경학부를 마쳤다. 1942년 대전 호수돈여중·고 교사를 거쳐 광복 직후인 1946년 김재원 박사가 이끌던 국립박물관에 투신, 1962년까지 이곳에 재직하며 개성분관장과 경주분관장을 역임했다. 공직을 떠난 뒤에는 1963년 이화여대 교수로 자리를 옮겨 이곳 박물관장으로 재직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고고학 발굴에도 깊이 관여했다. 이화여대 퇴임 뒤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와 동아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1993∼1995년에는 문화재위원장을 지냈다. 1998∼2000년에는 연세대 국학연구원 용재석좌교수로 있으면서 학구열을 불태우기도 했다. 저서 가운데 ‘한국미술사자료집성’(전7권)은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한국불교미술’ ‘한국석조미술’ ‘한국의 불상’ 등은 여전히 한국미술사 필독서로 꼽힌다. 은관문화훈장과 학술원상, 월간미술대상, 용재석좌교수상 등을 받았다. 우순애씨와의 사이에 아들 화수(국립진주박물관장)씨를 두었으며 빈소는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7일 오전 8시. (02)2258-5951.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한·중 학술교류 큰 자취 남기시고…

    한·중 학술교류 큰 자취 남기시고…

    아시아 구석기고고학계의 큰 별인 손보기 선생님께서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놀라움 속에 듣고, 저와 동료들은 모두 심심한 애통의 마음에 빠져들었습니다. 선생님은 한국 구석기고고학의 개척자이자 또한 국제학술계에서 드높은 위상을 지닌 선구적 고고학자였습니다. 공주 석장리 유적 발견과 연구는 한반도 구석기고고학의 서막을 열었으며, 고인류가 한반도에서 생존한 역사를 수 만 년 앞당겼습니다. 그 후 한반도 구석기 유적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과 연구로 뛰어난 학술성과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인재를 훈련시키고 발굴현장에서의 작업 규범을 세워, 후속 세대가 발전해갈 수 있도록 견실한 기초를 닦으셨습니다. 또한 한반도에서 구석기인이 생존했던 역사를 복원하는 데에 중요한 공헌을 하신 것은 물론 박물관 설립을 계획하고 지원하여 선사문화를 알리는 등 그 학술적인 영향과 사회적인 영향 역시 넓고 깊게 이뤄놓으셨습니다. 특히 선생님은 우리 중국학자들과의 교류에 관심을 기울여, 중국과학원 고척추동물·고인류연구소를 비롯한 여러 학술기구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많은 동료들과 깊은 우의를 쌓으셨습니다. 1989년에는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학술대표단을 이끌고 베이징을 방문하여 우리 연구소가 주관한 ‘베이징원인 제1두개골 발견 60주년 기념 국제학술토론회’에 참가하셨는데, 이는 한중학술교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저우커우뎬(周口店)유적 관련 자료집의 영문판 출판을 적극 기획하고 독려하여, 베이징원인에 관한 지식과 연구 소식을 홍보하는 데에도 특별한 공헌을 하셨습니다. 이렇듯 다양한 중국의 학술활동에 참여하고,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중국에서 온 학자들을 맞는 등, 양측의 학술 교류와 협력을 열과 성을 다하며 독려하시니 중국학자들로부터 높이 칭송을 받으셨습니다. 이에 중국과학원 고척추동물·고인류연구소와 중국고인류·구석기고고전업위원회를 대표하여, 손 선생님의 가족, 친구, 그리고 한국구석기고고학회에 비통한 마음을 전합니다. 또한 선생님이 문을 연 한국 구석기고고학 연구가 계속적으로 발전하기를 충심으로 축원하며, 아울러 양국의 우의와 협력이 긴밀히 발전해가기를 염원합니다. 손보기 선생님의 안식을 기원합니다. 카오싱(高星) 중국과학원 고척추동물·고인류연구소 부소장
  • [부고] 한반도 구석기문화 입증 손보기 前교수

    [부고] 한반도 구석기문화 입증 손보기 前교수

    고고학 분야에서 한반도에 구석기 문화가 존재했음을 입증하고 인쇄술 분야에서 한국 금속활자가 서양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200년이나 앞섰음을 입증한 손보기 전 연세대 교수가 31일 오후 7시 노환으로 타계했다. 88세. 1943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문과를 졸업한 고인은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등을 거친 뒤 미국 유학을 가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3년 귀국해 연세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고인은 1964~74년 충남 공주 석장리 유적을 발굴해 한반도에 구석기 문화가 존재했음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했다. 또 1974~80년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구석기 동굴 유적인 충북 제천 점말 동굴을 발굴하는 등 한국 고고학의 초석을 다졌다. 고인은 1972년 한국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활자보다 200년 이상 앞섰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파른 손보기 기념관’이 지난해 석장리 유적지에 세워지기도 했다. 파른은 늘 푸름을 뜻하는 고인의 아호. 외솔상 문화부문 학술상(1976), 옥관문화훈장(1990),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세종성왕상(2000), 위암 장지연 기념사업회 위암 장지연상(2003)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서영씨와 장남 명세(연세대 의대 교수), 장녀 송이(미국 매사추세츠대학 교수), 차남 경세(미국 뉴욕주립대 교수)씨가 있다.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3일 오전 7시. 장지는 경기 분당 메모리얼 파크. (02)2227-7550.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시론]서울 유일의 신라석실고분 현장 보존을/이형구 동양 고고학연구소장·전 문화재위원

    [시론]서울 유일의 신라석실고분 현장 보존을/이형구 동양 고고학연구소장·전 문화재위원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글로벌교육시설 건축부지에서 신라 석실고분과 신라토기가 발굴됐다는 뉴스에 깜짝 놀라 눈을 의심하고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서울 4대문 내부는 조선 건국 이래 도시화가 이루어진 만큼, 신라 유적이란 큰 충격이고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번에 발굴된 석실고분 2기는 상부가 많이 소실되었다고는 하지만 무덤의 하부구조와 그 안에 시신을 안치했던 시상대(屍床臺)와 석실 벽의 축조 방법을 가늠할 수 있는 석벽의 일부가 남아 있어 중부지역에서 유행한 신라의 대표적인 묘제인 석실고분임을 알 수 있다. 석실 내부에서 고배(高杯), 고배뚜껑, 토기대접 등 전형적인 신라토기가 발굴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그동안 잃어버린 서울 역사의 중요부분을 복원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자료이기 때문에 기쁨을 넘어 감개무량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신라고분이란,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과 같이 서울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증명해 준다. 1990년대에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에서 백제 왕궁유적이 발견되어 한성백제시대를 열었다. 또 2000년대 초에는 경복궁 안에서 흥경각터를 발굴하다가 고려시기의 건물 유구가 발견됐다. 12세기 초 고려 숙종이 천도를 위해 추진한 남경신궁(南京新宮) 유적일 것으로 추정되어 고려시대 서울이 실제로 ‘고려삼경’의 하나였음이 확인되었다. 이번 신라고분의 발견으로 백제시대와 고려시대 사이 비어 있던 서울의 역사를 복원할 수 있게 된 것은 서울역사의 행운일 뿐만 아니라 한국역사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삼국시대 서울은 500년 가까이 백제의 수도였다. 백제가 475년 공주로 내려가고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장악하지만 백제는 551년부터 553년까지 신라와 연합하여 서울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와의 연맹을 깨고 한강유역을 장악하면서 서울은 신라의 차지가 된다. 이로써 신라는 중국과 교류하는 해상교통로를 확보하여 삼국을 통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는 553년 이곳을 새로 개척하고 신주(新州)를 두었는데, 557년에는 이를 폐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두었다. 태종무열왕은 659년에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莊義寺)를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장의사는 창의문(彰義門) 밖 장의사지당간지주(보물 제235호)가 있는 오늘날의 서울 종로구 신영동이다. 이로 미루어 신주나 북한산주 혹은 한산주를 다스리는 주치(州治)는 오늘날의 서울 종로구 일대로 추측된다. 그렇기 때문에 종로구 명륜동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유적과 유물의 가치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발굴된 서울의 신라 석실고분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보존되어야 한다. 유사 이래 서울의 유구한 역사를 증거하여야 하는 것은 물론 역사연구에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 무수한 유적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개발이란 명목으로 사라져 갔음를 보아왔다. 경기·충청 일원에서 긴급구제 발굴되고 있는 한성백제의 중요한 유적들을 발굴하자마자 유적은 갈아엎고 그 자리에 건물을 짓고 기록만 남기는 이른바 ‘기록보존’으로 역사연구는 물론 역사 복원에 결함이 되는 통한의 사례를 많이 보아왔다. 마치 경주의 신라고분을 발굴조사한 뒤 고분은 없애고 사진만 보고 상상하여 역사를 연구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역사적 유적은 역사의 현장에 있어야만 한다. 서울에 단 한 군데밖에 없는 신라 유적이 어떤 방법으로든 현지에 잘 보존되어 서울 시민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서울 속 신라역사의 실체를 실감할 수 있도록 국가와 해당기관의 큰 용단이 있기를 바란다. 이번 성균관대학교 글로벌교육시설 건축부지는 굴착할 때 전문가가 입회조사하는 조건으로 발굴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앞으로 서울의 모든 건축행위는 ‘착공 후 입회조사’를 지양하고 착공 이전에 발굴조사하는 ‘발굴조사 후 착공’ 방안을 제도적으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
  • [데스크 시각] 쌀·반도체·핵융합 발전/김경운 산업부 부장급

    [데스크 시각] 쌀·반도체·핵융합 발전/김경운 산업부 부장급

    한반도가 학계의 통설보다 8000년이나 앞서 벼농사를 시작했고,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에 신품종 벼를 보급했다는 최신 글을 읽고 잠시 기분이 우쭐했다. 원로 사회학자 신용하 교수가 지난 8월 15일에 펴낸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라는 단행본을 통해서다. 신 교수는 나름의 고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해석하면서 한반도의 신석기인들이 기원전 1만년에 한강과 금강 유역에서 단립종 벼(자포니카 쌀)를 처음 재배했다고 했다. 이것이 지금 동아시아인들이 주식으로 먹는 쌀이다. 인도에서 처음 재배된 장립종 벼(인디카 쌀)보다 향과 맛이 좋고 찰기가 있다. 우리 조상들은 아열대 기후에 더 적합한 벼를 재배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물을 끌여들인 무논 환경을 조성하고 까다로운 생육 조건을 맞추는 데 성공했다. 이 질 좋은 쌀로 밥과 떡, 과자, 된장, 술 등을 만들었다. 조상들은 안정적인 식량 사정 등을 토대로 광활한 영토를 자랑했던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을 건국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 경제는 ‘전자산업의 쌀’이라는 반도체 덕분에 다시 한번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반도체는 모든 디지털 기기에 빼놓을 수 없는 부품인 만큼 과연 쌀에 비유될 만하다. 반도체는 우리나라 무역 흑자의 약 47%를 차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35%를 장악했고 이를 50%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최근 거액의 투자를 결정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이 함정에는 삼성전자가 아니라 한국 경제가 빠질 수 있다. 한국 경제의 버팀목인 메모리 반도체가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20~25%. 나머지는 한국이 뒤처진 시스템 반도체와 아날로그 반도체이다. 시스템 반도체는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CPU), 휴대전화의 모뎀칩 등에 쓰이는 일종의 인공지능(AI)이고, 아날로그 반도체는 빛과 소리·압력 등을 디지털 신호로 바꿔주는 첨단 센서. 이런 반도체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다양한 모델에 맞춰 설계해야 하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늘 수요가 널뛰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잘 버틸 수 있겠지만 실적이 부풀려진 한국 경제는 자칫하면 무역수지 악화와 금융시장 불안, 국가신용도 추락 등을 부를 수 있다. 우리는 ‘불안정한 쌀’에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기원한 밀국수는 동쪽으로 전해져 물 국수 형태로 발전했고, 서쪽 사막을 건너간 마른 국수는 무슬림을 거쳐 9세기쯤 지중해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다. 이 마른 국수를 시칠리아인들은 주변에 흔한 듀럼밀로 만들었고, 이것이 스파게티와 마카로니로 이어진다. 우리 쌀과 듀럼밀은 공통적으로 비타민B 덕분에 활발한 신진대사를 도와주고 비만 예방 효능도 지녔다. 그 옛날 우리 쌀이 한강을 벗어나 널리 퍼졌듯 우리의 정보기술(IT)과 일꾼들도 반도체 공장을 벗어나 ‘미래의 쌀’을 찾아 나서야 한다. 다행히 정부가 차세대 먹거리 산업 중 하나로 원자력발전을 꼽았다. 원전 수출도 탄력을 받은 듯하다. 원전은 원자핵의 분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말한다. 아울러 원자핵의 융합을 통한 엄청난 에너지는 방사능 문제가 없는, 그야말로 우주시대의 힘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의 핵융합 초전도 연구장치인 ‘KSTAR’가 중수소 핵융합 반응에 성공했다. 핵융합 발전은 아직 먼 일이겠지만 어서 한국이 세계 최초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으로부터 137억년 전 빅뱅 직후 우주에 흔한 수소(H) 원자들이 초고온과 초고압 상태에서 융합 또는 분열을 통해 헬륨(He), 탄소(C), …철(Fe), …코발트(Co), 니켈(Ni), …우라늄(U) 등 무수한 원자들을 만들었다. 미래의 쌀은 가장 먼 과거부터 이미 존재했던 셈이다. kkwoon@seoul.co.kr
  • [루브르박물관 복원연구소를 가다] “복원기술 발전 힘은 투자 KIST 연구자 수준 높아”

    [루브르박물관 복원연구소를 가다] “복원기술 발전 힘은 투자 KIST 연구자 수준 높아”

    “연구소의 장비를 단순히 유지하는 데에만 매년 200만유로(약 32억원)가 넘는 금액이 투자됩니다. 실제 복원에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복원을 의뢰한 각 박물관에서 지원하죠. 끊임없이 복원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프랑스가 최고의 박물관을 가질 수 있는 이유입니다.” C2RMF 소장인 필리페 월터는 루브르의 힘을 ‘투자’라고 강조했다. 루브르 안에는 복원 및 보존 연구소뿐 아니라 작품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보관하는 도서관과 데이터베이스, 작품을 돋보이도록 하는 전시기술만 연구하는 파트가 각각 따로 운영되고 있다. 이 모두가 대대적인 투자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월터 소장은 “연간 100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루브르를 찾는 것은 최고 수준의 작품을 최고의 환경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라며 “1920년 루브르에서 처음으로 엑스레이를 이용해 그림을 촬영한 뒤로 복원기술은 시시각각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C2RMF에서 일하는 보람에 대해 월터 소장은 “매일매일 세계 최고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그를 비롯한 C2RMF 연구원들은 모나리자를 비롯해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밀로의 비너스’ 등 수많은 걸작들을 분석하고 연구하고 있다. 모나리자의 경우 1930년, 1960년, 2004년에 복원실로 옮겨져 보존상태에 대한 분석작업이 진행됐고, 2008년에는 연구원들이 직접 장비를 들고 박물관 내에서 연구를 진행했다고 월터 소장은 설명했다. 월터 소장은 루브르가 갖고 있는 복원 노하우에 대해 “단순한 기술로만 복원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명의 C2RMF 연구진의 전공을 살펴보면 미술, 고고학, 역사, 동양학, 아프리카학, 디자인, 물리, 화학, 원자력 등 사실상 모든 학문이 총망라돼 있다.”면서 “세계 각국에 기원을 갖고 있는 수많은 작품을 연구하는 데 이 같은 다양성이 큰 무기가 된다.”고 밝혔다. C2RMF는 지난해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함께 공동연구를 진행 중이다. 기초기술연구회가 지원하는 KIST 문화재 보존과학기술사업단 이정인·이연희 박사팀이 C2RMF와 함께 전통염료 분석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월터 소장은 “공동연구를 하면서 KIST 연구자들의 수준이 의외로 높다는 점에 놀랐다.”면서 “KIST에서 가속기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는데, 루브르에서 선형입자가속기(AGLAE)를 통해 얻은 성과를 생각하면 한국의 문화재 연구가 크게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파리 박건형 순회특파원 kitsch@seoul.co.kr
  • ‘파리 톱시크리트’ 루브르박물관 복원연구소를 엿보다-한국언론 첫 공개

    ‘파리 톱시크리트’ 루브르박물관 복원연구소를 엿보다-한국언론 첫 공개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을 찾은 사람들은 계단 한가운데에서 두 날개를 펼친 채 환한 햇살을 받고 서 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자태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1863년 프랑스 영사 샹푸아소가 사모트라케섬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 그는 100여개의 돌덩이에 불과했다. 오늘날 우리가 니케상을 볼 수 있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문헌을 찾고, 상상력을 보태 기원 전의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루브르 복원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함무라비 법전에서 나폴레옹 3세의 샹들리에까지, 밀로의 비너스에서 모나리자까지. 수천년의 시간을 이어주는 30여만점의 소장품. 관람하는 데만 5일이 걸린다는 세계 최대의 보물창고 루브르 박물관. 그 지하와 방문이 굳게 잠긴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인류의 유산에 쌓인 시간의 흔적을 되돌려 원형을 찾아가는 복원기술의 노하우는 어떤 것일까. 이 같은 궁금증을 풀기 위해 지난 13일(현지시간) 루브르궁 안의 ‘프랑스 복원 및 보존연구소’(C2RMF)를 찾았다. 한국 언론 최초로 이루어진 C2RMF 방문은 한국 기초기술연구회의 주선으로 3개월 만에 성사됐다. “1998년 12월, 곳곳에 산재돼 있던 복원 및 보존 관련 연구소를 통합해 설립된 C2RMF는 1000여개가 넘는 프랑스 전역의 박물관과 미술관 소장품을 모두 관할합니다. 가지 수로는 최소한 50만점이 넘죠. 작품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면서 연구를 할 수 있는 첨단 기술력과 기원 전부터 16~18세기의 작업방식을 그대로 계승한 작업방식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C2RMF 홍보디렉터인 소피 르페르는 기자가 들고 있는 카메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촬영이 가능한 곳과 아닌 곳을 철저히 구분했고, 확신이 서지 않으면 담당자에게 일일이 확인하기도 했다. 그는 “아직 박물관에서 공개하지 않은 작품이 많고 진품 감정 중인 물건도 있다.”면서 “어떤 작품이 복원이나 연구가 진행 중인지 자체가 대외비”라고 설명했다. 작품이 보관돼 있는 수장고는 극히 제한된 인원만이 출입할 수 있다. 르페르는 “최소한 수십억원이 넘는 작품들로 가득차 있는 만큼, 어떤 작품이 있다거나 하는 사실이 밝혀지면 도난의 위험이 따른다.”고 강조했다. C2RMF는 크게 연구소와 복원소로 나뉘어 있다. 작품에 대한 성분 분석과 원형연구, 복원방식 등은 과학자들이 중심이 된 연구소에서 진행한다. 200명의 과학자들은 모두 박사급으로, 대부분 고고학이나 미술학 관련 학위를 동시에 갖고 있다. 전국의 박물관에서 매입을 검토 중인 작품에 대한 감정 역시 중요한 업무다. 르페르는 “연구소에서 모조품으로 판명이 나 매입을 취소한 경우가 여러 건 있다.”면서 “진품 여부는 개인의 이익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박물관 측에만 통보되고, 소장자에게는 알려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기초연구가 끝난 작품이나 유물은 엘리베이터를 통해 복원실로 옮긴다. 복원은 루브르궁과 베르사유 궁전 지하 등 두 군데에서 진행된다. 각각 1만 5000㎡가 넘는 규모다. 연구소와 달리 복원소에는 정규직 직원보다 외부 전문가들이 많다. 복원소 디렉터인 로베르타 코스토파시는 “가구만 해도 시계나 피아노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하다.”면서 “그림도 시대와 화가에 따라 전문가가 다르기 때문에 전문가풀을 만들어 놓고 프로젝트별로 고용한다.”고 설명했다. 파리 박건형 순회특파원 kitsch@seoul.co.kr
  • [열린세상]외국인 거주자들이 한국사회에 애착 갖도록/배기동 한양대 고고학 교수

    [열린세상]외국인 거주자들이 한국사회에 애착 갖도록/배기동 한양대 고고학 교수

    몇년 전, 테헤란의 그랜드 바자에서 낯선 이란 젊은이가 다가와서 한국말로 “교수님, 저 한국에서 살았어요. 정말 반갑습니다. 우리 집에 가셔서 차 한 잔 하세요.”라고 말을 걸어왔다. 경기도 안산에 근무하는 학교가 있어서 많은 외국인을 보아 왔지만, 만리타국에서 안산에 살다 온 이란인을 만나고서 ‘아하, 이게 바로 세계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외국계 주민이 200만명을 넘었고 이들 중에는 한국관광공사 사장인 이참씨처럼 정부의 고위직을 맡은 사람도 있다. 최근 우리 정부는 외국인 거주자나 외국계 한국민의 편의와 동질화를 위하여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해 왔다. 그러나 아직도 외국문화에 대한 이해가 그리 깊다고 할 수는 없다. 자문화중심의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는 경우가 많고 문화평등주의나 인본주의에 입각한 외국문화의 이해는 깊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인식은 베트남 신부가 살해된 사회적인 배경이기도 하고, 앞으로 우리 사회에 어려움이 닥친다면 심각한 인종차별 또는 민족차별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만일 민족 집단 간의 차별대우로 갈등이 내재하고 깊어지면 우리 사회는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시련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외국인 거주자들이 우리 사회에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백의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민족의 동질성을 강조했고, 또한 우리가 단일민족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교육받았다. 어떤 민족이든지 어느 정도 타민족과 혼합이 이루어지게 되고, 우리같이 반도에 사는 경우에는 대륙과 해양으로부터 이주하여 오는 여러 민족의 유전자 혼합과 문화혼합이 이루어진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이러한 다민족적인 혼혈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강한 체질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된다. 고대나 중세시대 우리의 문화는 상당히 개방적이었다. 신라 처용의 존재나 고려시대의 기록에서 보이는 내용에서도 그러한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겪으면서 민족주의적이며 배타적인 순혈주의를 강조하게 되었고, 현대에서도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남게 된 것이다. 경제의 외국 의존도가 높고 국제적인 교류가 우리 사회 발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의 과정은 숙명적인 과제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특히 산업인력 보충이나 결혼을 통해서 들어오는 외국인들이 우리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 필수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장기적으로 제3세계의 많은 젊은이가 대학에서 우리의 기술과 관습을 배우도록 하여 모국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우리 대학의 국제적인 경쟁력 유지에 필수적인 관건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 사회의 미래 과제 중 중요한 것은 앞으로 늘어갈 타민족집단과 혼혈집단을 어떻게 우리 사회에 동질화시키고 또한 사회적으로 왜곡된 시각을 줄일지가 문제이다. 오늘날 국제적인 분쟁에서 잘 볼 수 있듯이 다민족국가나 다문화국가에서는 차별적인 시각이 분쟁을 유발하게 한다. 차별적인 시각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하루속히 다민족 그리고 다문화사회를 인간평등의 시각에서 받아들이고 제도적으로 확고히 보장해야 한다. 문화다양성의 정도가 사회의 건전도를 나타내고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외국인 거주자들이 한국 사회에 애착을 두고 공헌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 또한 중요한 관건이다. 이들에 대한 배려가 바로 우리나라에 대한 애착을 가져오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도록 학교에서 가르치고 또한 그들이 이곳에서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다문화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세계문화박물관과 같이 그들의 문화를 자랑하고 우리가 그들의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 고미술품 불법유통과정 추적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의 재력가 코시모 메디치(1389~1464)는 가업인 메디치 은행에서 축적한 막대한 재산을 예술과 학문 등 다양한 문화활동을 후원하는 데 사용했다. 17세기까지 메디치 가문은 문예부흥의 선각자로 추앙받았다.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20세기. 또 한 명의 메디치가 문화예술계의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자코모 메디치. 그런데 역사의 우연일까, 아이러니일까. 문화예술 후원자의 명예 대신 이번엔 희대의 고미술품 불법 유통업자란 오명으로 정체를 드러냈다. 1972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고대 그리스의 에우프로니오스 도기를 100만달러의 거액에 사들여 논란을 빚었다. 사상 최고가의 액수도 문제였지만 도기의 입수 과정도 불투명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맥도널드 고고학연구소 연구원인 피터 왓슨은 이런 의문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메디치의 음모’(김미형 옮김, 들녘 펴냄)는 세계 각지의 유적지에서 도굴된 미술품들이 어떻게 해외 유명 박물관과 미술관에 전시될 수 있는지 그 불법 여정의 시작과 끝을 낱낱이 폭로한 책이다. 이 과정에서 자코모 메디치는 고미술품의 불법 유통을 주도하는 핵심 인물로 드러난다. 시작은 1994년 이탈리아 중부 도시 멜피의 멜피박물관에서 벌어진 강도 사건에서 비롯됐다. 범인들은 박물관이 소장한 고대 에트루리아 도기들을 훔쳐 달아났다. 이탈리아 문화재 전담 수사국은 즉시 수사에 착수했다. 독일 경찰의 제보를 받고 뮌헨 골동품상 집을 압수수색한 이탈리아 경찰은 엄청난 양의 고대 토기, 항아리 등과 함께 메디치를 비롯한 도굴꾼과 밀거래 조직의 계보도를 손에 넣었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메디치의 창고에선 골동품 수천 점이 발견됐다. 2005년 이탈리아 법원은 그에게 징역 10년형과 1만 6000유로의 벌금을 선고했다. 기자 출신인 저자는 이탈리아 수사팀의 수사 과정을 한편의 흥미진진한 드라마처럼 극적이고, 현장감 있게 그려냈다. 수사로 드러난 도굴 미술품 유통 경로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세계 유수의 경매 회사와 박물관, 미술관, 유명 컬렉터들은 실상을 알면서도 메디치 같은 유통업자에게서 미술품을 샀고, 버젓이 세상에 이를 내놓았다. 불법 고미술품의 유통이 성행하는 것은 바로 이들 작품의 수요자인 박물관과 미술관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비판이다. 2만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日 오키노시마 유적 학술회의 참가

    임효재(고고학) 서울대 명예교수는 2~4일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리는 ‘오키노시마 제사 유적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제2차 국제 전문가 학술회의’에 초청받아 전북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과의 연관성을 살피는 현장조사를 벌인다.
  • 백제 3세기 강원 화천까지 진출

    백제 3세기 강원 화천까지 진출

    백제가 3세기 무렵에 이미 지금의 강원도 화천 일대까지 진출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나왔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예맥문화재연구원(원장 정연우)은 4대강(북한강) 살리기 사업 구간에 포함돼 연꽃단지 조성이 예정된 화천군 하남면 원천리 42-1일대 강변 충적대지 1만 7500㎡를 발굴조사한 결과 빠르면 2세기 말, 늦어도 3세기 무렵(한성도읍기·BC 18~AD 475)에 등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단위 마을유적을 확인했다고 15일 밝혔다. 현장에는 청동기시대 집터 20곳과 석관묘(石棺墓) 1곳, 한성 백제시대의 가장 뚜렷한 유산으로 간주되는 평면 呂자형 집터 136곳과 수혈유구(竪穴遺構·구덩이흔적)다수, 도랑 흔적 등이 발견됐다. 조사단은 “집터와 유물 출토 양상으로 볼 때 한성백제의 북한강 상류 진출 양상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유적”이라고 말했다. 3세기 무렵 완연한 백제 색채를 띠는 대규모 마을 유적이 화천에서 발견됨에 따라 백제가 이미 시조 온조왕 시대인 기원전 6년에 지금의 춘천 일대로 생각되는 주양(朱壤)까지 진출했다는 기록이 사실일 가능성이 한층 커진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이번 발굴로 4대강 사업의 일환인 연꽃단지 계획이 변경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날 현장을 찾은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유적 처리와 관련해 “지도위원회와 문화재위원회가 결정하는 대로 원칙에 따라 하겠다.”고 말했다. 지도위원들은 회의에서 일단 ‘조사 후 보존’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시론] 원로 사회학자에게 보내는 박수/황규호 언론인

    [시론] 원로 사회학자에게 보내는 박수/황규호 언론인

    어떤 이들은 서구 열강이 세계를 마음대로 나누어 차지했던 영토제국주의시대는 제2차 세계대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고 말한다. 그 대신 문화제국주의라는 새로운 침략 수단이 빈자리로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제국주의는 이 시기에 국한한 현상만은 아닌 듯하다. 오늘날 중국이 주권국가인 우리네 역사를 무시한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속내를 들여다 보노라면, 더욱 그렇다. 이같은 중국의 역사 왜곡은 자기네를 세계 한가운데 놓고, 다른 이웃을 전적으로 얕잡아 보는 역사를 쓰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니까 기원전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악명 높은 지배 이데올로기 중화주의(中華主義)가 오늘의 21세기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 며칠 전 한국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한 중국인 유엔 고위직 외교관이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는 말을 떠올리면,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땅 한 뼘이 삶보다 중요하다.”는 그의 주장을 곱씹을 때, 지금 중국은 영토제국주의와 문화제국주의가 맞물려 돌아가는 시대를 맞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네 자존에 올가미를 씌운 중국 동북공정에 맞설 뚜렷한 학술적 이론은 정녕 없을까. 그렇지 않다는 믿음을 심어줄 저술 한 권이 최근 세상에 나왔다. 이는 역사학자의 저술이 아니거니와, 역사학과 아주 가깝다는 고고학 전공도 아닌 사회학자가 썼다는 점에서 펴뜩 눈길을 끈다. 그동안 고고학계가 밝힌 여러 편린의 학술적 성과를 모아 한국상고사(上古史) 실체에 접근한 저술이고 보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을 실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에 원로 사회학자 신용하 교수가 내놓은 ‘고조선 국가 형성의 사회학’에 박수를 보낸다. 사회사로 온통 일관한 저술로 여길지 모르지만, 지은이는 먼저 고고학 쪽에서 한국상고사의 실마리를 찾는다. 이를테면 인류가 혹독한 추위의 구석기시대 빙하기를 용케 버틴 지역을 북위 40도 이남으로 보고, 이때 살아남은 무리가 신석기인으로 진화한 최초의 한국인 원류에 해당하는 한(韓·桓·馬于)부족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원전 1000년쯤부터 한반도에 나타난 신석기시대 유적에 주목하면서, 경기도 양평 앙덕리 등지의 한강 유역에 분포한 덮개돌식(蓋石式) 고인돌을 들추었다. 이와 더불어 남한강 유역의 신석기시대 집자리 출토품인 뾰족밑 빗살문토기에서는 수확한 곡물을 갈무리할 만큼 생산기반을 갖추었던 농업구조 흔적을 찾아냈다. 그리고 이들 농경문화 주체의 근거지는 한강 분수령을 경계로 물길이 남하한 금강 상류까지를 싸잡아 한강문화권에 넣었다. 그 경제기반으로는 일찍 벼를 심기 시작한 금강 상류의 충북 청원 소로리를 비롯, 한강 하류인 경기 고양 가와지와 김포 가현리 등지의 고대 볍씨 출토 지역을 꼽았다. 어떻든 남성 군장(君長)을 우두머리로 삼은 부계공동체 사회였던 한강문화권의 ‘한’ 부족 주체세력은 북으로 올라가 대동강 유역에 새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맥(貊)’부족 및 ‘예(濊)’부족과 서로 어울려 선돌에 덮개돌을 얹은 덩치가 큰 탁자식 고인돌을 지었다. 탁자식 고인돌은 왕의 권력과 권위를 상징하는 거석문화(巨石文化)인데, 이를 축조할 무렵인 기원전 30세기~기원전 24세기쯤에는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이 건국되었다. 이 때 고조선 왕을 배출한 ‘한’부족은 혼인동맹을 통해 ‘맥’부족을 건국세력으로 끌어들였다고 한다. 중국이 마냥 자랑하는 대릉하 유역의 우하량(牛河梁) 유적 출토 토제여신상(土製女神像)은 여자를 부족장으로 삼았던 ‘맥’부족의 모계사회를 상정한 유물로 풀이했으니, 중국은 허탈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더구나 논픽션의 기자(箕子)동래설을 앞세워 한국상고사의 고조선 실체를 얼버무린 중국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한국을 착한 이웃으로 생각한다면, 동북공정 같은 악성 문화정책보다는 남을 존중하는 상대문화주의의 길로 나오기를 바란다.
  • [씨줄날줄] 라스코 동굴 벽화/함혜리 논설위원

    1940년 9월12일. 프랑스 남서부 도르도뉴 지방의 몽티냐크 마을에 사는 4명의 10대 소년들이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베제르 계곡 탐험에 나선다. 중세시대의 고성으로 이어지는 비밀통로가 있다는 전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소나무가 우거진 언덕에서 갑자기 사라진 개를 찾다가 덤불로 가려진 굴 입구를 발견했다. 굴 입구를 6~7m쯤 기어 들어가다가 갑자기 10m를 미끄러져 떨어졌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천장이 높고 상당히 넓은 굴이었다. 다음 날 램프와 밧줄을 가지고 다시 탐험에 나선 소년들은 동굴 벽을 비춰보고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수만년 동안 어두운 동굴 속에서 평화스럽게 잠자고 있던 선사시대 들짐승들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빙하기 말기 인류가 추위를 피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라스코 동굴은 주 동굴과 3~4개의 좁고 긴 방으로 구성된다. 벽면은 800여점의 벽화와 암각화로 아름답게 장식돼 있다. 목탄이나 망간으로 선을 그린 뒤 광석을 으깨 검정, 빨강, 황토색, 갈색으로 채색한 동물 그림들은 매우 다양하다. 거대한 들소부터 말, 사슴, 돼지, 이리, 곰, 새, 그리고 뿔이 하나인 상상의 동물과 점성술사처럼 보이는 인물상도 묘사되어 있다. 1만 8000년 전 구석기 시대에 존재했던 인류가 그렸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역동적이며 사실적인 모습이다. 동물 몸체나 동물 가까이에 그려진 수많은 화살과 덫을 통해 이 동굴 벽화는 오랫동안 사냥과 주술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사용됐다고 믿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이 동굴은 1948년 본격적인 관광명소로 개발됐다. 벽화의 불행도 시작됐다. 역사학자, 인류학자, 고고학자 등 학자들뿐 아니라 대규모 일반인 관광객들까지 몰리면서 동굴의 유물은 훼손되고 벽화에 곰팡이까지 감염돼 급속도로 손상됐다. 급기야 프랑스 정부는 1963년 이 동굴을 폐쇄하고 이곳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실물과 같은 형태로 ´라스코 2´를 만들어 1983년부터 일반에 공개해 왔다. 문화적 가치가 워낙 크기 때문에 비록 가짜이긴 하지만 매년 25만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아 아쉬움을 달랜다. 라스코 동굴 발견 70년을 기념해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 내외가 실제 라스코 동굴을 한 시간여에 걸쳐 관람했다. 동굴벽화 보존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이들이 누린 ‘특별한 혜택’에 비난이 쏟아졌다. 우리나라의 공정사회 논란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아무래도 좀 씁쓸하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사비성을 통해 본 기술강국 백제

    사비성을 통해 본 기술강국 백제

    13~15일 오후 9시50분 EBS 다큐프라임은 ‘역사복원 대기획 3부작-사비성 사라진 미래도시’ 편을 방영한다. 사비성(지금의 충남 부여) 천도를 둘러싼 기술적·정치사회적 변동을 완전히 복원하기 위해 EBS가 야심차게 준비한 기획 다큐멘터리물이다. 사비성은 성왕이 백제 부흥을 내걸고 세 번째 도읍지로 정한 계획도시다. 당대로서는 최첨단 기술이 동원된 거대한 토목사업이자 기득권 세력에게는 혁명적 변화였을 것이다. 그래서 다큐의 초점은 패배한 국가 백제가 아니라 ‘기술·콘텐츠 강국 백제의 복원’이다. 최근 고고학계의 발굴작업이 진전되면서 사비성이 계획적인 신도시였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방어를 위한 외성, 신분에 따른 주거지역 구분, 바둑판처럼 정연하게 구획된 도로와 배수로 등을 검토해 보면 한반도뿐 아니라 동아시아 도성사에서도 특출한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다 ‘구드래’ 국제항까지 갖췄다. 원래 사비성 일대는 습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습지 위에다 이만한 계획도시를 들어앉히기 위해서는 최소한 15년에 걸쳐 200만명의 노동력이 동원됐을 것이라 학계는 보고 있다. 1400년 전에 그 작업을, 대체 어떻게 해냈을까. 다큐는 고고학자, 역사학자, 건축학자 등 전문가 13명의 고증을 받아 이 작업을 생생하게 복원한다. 1부는 무령왕에 이어 왕위에 올랐던 성왕이 사비 천도를 단행하는, 도시 건설 전반부를 다룬다. 어린 나이임에도 성왕은 당차게 천도를 추진하지만, 대다수의 보수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들어 반대에 나선다. 성왕은 개의치 않고 사비를 신도시로 낙점한다. 백마강 덕분에 이웃 나라들과의 교류가 쉽고, 곡창지대를 끼고 있어 경제적 기반도 탄탄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문제는 습지. 성왕은 습지라는 악조건을 역이용해 대형 연못을 만들어낸다. 질척한 물을 농수확보와 홍수조절에 쓸 물로 바꾼 것이다. 2부는 고구려의 남침과 홍수를 이겨내고 마침내 사비성을 완성시키는 단계를 다룬다. 외부 성곽 공사에 이어 내부 공사를 어떻게 하느냐가 핵심 관건인데, 이는 정치 개혁과 맞물려 있다. 성왕은 시가지를 조성하면서 5부 25항이라는 행정체계를 구축하고, 중앙 귀족의 권력 약화를 위해 22부사를 만든다. 1·2부가 보는 재미를 위해 드라마적인 요소를 많이 넣었다면, 3부는 본격적으로 사비성 건설의 비밀을 파헤친다. 사비 땅이 얼마나 습했는지, 시가지 구획이 얼마나 정교했는지, 지금으로선 금강 하류에 불과한 백마강에 어떻게 큰 배가 드나들 수 있었는지, 사비성 외곽에 크게 두른 나성이 어떻게 지형지물을 정교하게 이용해 쌓아졌는지 등을 전문가들의 분석과 실측을 통해 제시한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시론] 2000년전 왕성유적을 저주하게 만드는 나라/이형구 동양고고학연구소장·전 선문대 대학원장

    [시론] 2000년전 왕성유적을 저주하게 만드는 나라/이형구 동양고고학연구소장·전 선문대 대학원장

    지난 2004년, 수도 이전 문제로 전국이 떠들썩할 당시 서울시장이던 이명박 대통령은 오늘의 서울이 한성백제 수도로 시작하여 정도 2000년에 이른 세계적인 수도이기 때문에 ‘천도’는 역사적으로도 부당하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연장선상에서 기원전 18년에 서울에서 건국하여 500년 가까이 도읍했던 한성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한데 모아 전시하고 교육하는 한성백제박물관을 서울에 건립하겠다고 천명했다. 그 결과 오늘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한성백제박물관 건설공사가 2012년 완공을 목표로 한창 진행되고 있다. 한성백제박물관이 문을 열면 아직은 서울시민조차 잘 모르는 한성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되살려 보여주고 알려주는 훌륭한 장소가 될 것이다. 필자는 1980년대 서울 강남이 개발됨에 따라 도로가 나고 주택이 들어서면서 한성백제 시기의 왕릉과 유적이 파괴되고 있는 것을 보고 보존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정부가 한성백제 유적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519억원의 예산을 책정한 것은 1985년 7월1일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잘려나간 석촌동 백제왕릉을 지하도를 파서 연결하고, 사라질 뻔했던 방이동 고분군도 다시 역사공원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1990년대에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이 재개발되면서 성 내부의 유적이 파괴되는 것을 막고자 관계기관에 건의서를 내고 주민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여기에 많은 사람의 노력이 더해졌고, 결국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후손들이 조상의 귀중한 유산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백제가 남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자리 잡은 근거지였는지를 확실히 파악해 후회하지 않도록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풍납토성 내부의 재건축은 사실상 전면 중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풍납토성은 학계의 노력이 뒷빋침되면서 한성백제의 왕성으로 확실하게 규명되었다. 그러나 풍납토성 내부에서 살아가는 5만명 남짓한 주민들은 이때 공포된 문화재보호법 시행령에 묶여 낡은 집을 재개발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이웃 동네에 비하여 부동산 가치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등 재산상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꼭 5년 전 정부가 ‘8·15부동산대책’으로 송파신도시 건설계획을 발표했을 때 문화재 보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풍납토성 주민의 이주계획도 함께 세우도록 당시 국무총리에게 건의했다. 하지만 이 건의는 당시 건설교통부로 넘겨졌고, 송파신도시는 주민 이주대책으로 추진하는 사업이 아니라는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앞으로 일부 행정기관이 세종시로 옮겨 간다고는 해도 서울은 수도의 정통성을 이어 나갈 것이다. 지난 광복절에는 광화문이 제 모습을 찾았고, 내년에는 남대문이 아름답게 재건된다. 서울은 풍납토성을 비롯하여 몽촌산성, 석촌동과 방이동의 백제고분 등이 조선시대 수도 유적과 함께 공존하면서 2000년 수도로 명실상부하게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렇듯 500년에 이르는 한성백제의 왕경유적은 경주나 공주·부여와 다르지 않은 역사적인 도시유적이다. 그러나 정부는 185년 동안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와 부여에는 유적보호와 관광개발에 수조원의 국가예산을 투입하고 있음에도, 그 뿌리인 한성백제의 왕성인 풍납토성 내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이주 문제는 외면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풍납토성의 한성백제 왕경유적은 풍납동 주민의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의 유적이다. 보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풍납토성 주민들에게만 고통을 안겨줄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이 조금씩 고통을 분담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더 이상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땅 밑에서 2000년 전의 왕성 유적과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을 축복은커녕 저주로 받아들이는 안타까운 상황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한성백제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명박 대통령이 풍납토성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고, 그래서 한성백제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도록 통큰 결단을 다시 한번 내려줄 것을 기대한다.
  • 황남대총 발굴 36년만에 오롯이 만난다

    황남대총 발굴 36년만에 오롯이 만난다

    국내에서 가장 큰 무덤인 경주 황남대총의 유물 특별전이 발굴 36년 만에 최대 규모로 열린다. 봉분 두 개가 남북으로 나란히 붙은 쌍분(雙墳)으로 길이 120m, 높이 23m에 이르는 황남대총은 1973~1975년 대대적인 발굴을 실시해 총 5만 8000여점의 유물을 거뒀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이 용산 이전 5주년 기념으로 7일부터 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특별전시실에서 개막하는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은 이 가운데 황금 장신구와 귀금속 그릇, 서아시아산 유리그릇, 철기 등 1268점을 엄선해 선보인다. 황남대총의 금관과 금장식 일부 등이 공개된 적은 있지만 신라 왕릉 하나만을 주제로 이처럼 대규모 전시를 열기는 처음이다. 이번 전시는 황남대총 출토 유물을 재조명하고, 과학적 분석성과를 공개하는 한편 동북아시아에서 황남대총의 학술적 가치를 평가하는 데 역점을 뒀다. 황남대총은 신라 마립간(4세기 신라에서 사용한 왕의 칭호) 시기의 왕릉으로 추정될 뿐 무덤의 주인공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눌지 마립간(눌지왕·417~458)설과 내물 마립간(내물왕·356~402)설이 유력했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 실성 마립간(실성왕·402~417)설이 새롭게 제기됐다. 마립간은 황금을 통해 나라의 위계를 새로 만들었다. 마립간을 중심으로 일정 범위에 속하는 왕족은 황금제 장신구로 꾸민 복식을 착용하는 등 ‘황금의 나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황남대총 출토물은 동북아시아 고고학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고구려 계열의 다양한 문물들은 중국 지안에서 발굴된 고구려 태왕릉의 주인공을 밝히는 데 단서를 제공하고 있으며, 일본 고훈 시대의 연대 추정에도 새로운 학설의 근거를 마련해 준다고 국립중앙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선 황남대총의 구조를 쉽게 알 수 있도록 전시장에 실물 95% 크기의 무덤 구조물을 재현하는 한편 고분 내부 구조를 입체적으로 보여 주는 3D 홀로그램 영상물도 마련했다. 전시는 10월31일까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주민행복 인문학 속에서

    주민행복 인문학 속에서

    지방자치단체에 ‘인문학’ 훈풍이 불고 있다. 지자체들이 주민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를 잇달아 개설하는가 하면 아예 ‘인문학의 메카’로 만들겠다고 나선 곳도 있다. 경북 칠곡군은 민선 5기 출범과 함께 중장기적인 인문학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등 칠곡을 인문학의 중심지로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라고 25일 밝혔다. 군은 2011년까지 ‘주민이 행복한 인문학 강좌’ ‘인문 광장 운영’ ‘인문 국제 포럼’ 등 인문학 프로그램을 개설, 운영할 계획이다. ●칠곡군, 김용택 시인 등 초빙 올 연말 개관을 앞두고 있는 평생학습관에 인문학 박물관과 인문학 도서관을 만들어 다양한 체험 학습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하기로 했다. 군은 지난 5월부터 매달 두 차례씩 고전평론가 고미숙씨, 김용택 시인, 문무학 시인, 이화여대 정재서 교수, 큐레이터 김옥렬씨, 서울대 배철현 교수 등을 초빙한 인문학 아카데미를 열고 있다. 군위군도 다음 달 7일부터 11월16일까지 ‘동·서양 철학과 군위지역 역사·문화’란 주제로 인문 교양 강좌를 개설하기로 하고 이달 말까지 참가자 신청을 받고 있다. 참가 제한은 없다. 또 삼국유사 인문 강좌 개설을 위해 지난 24일 영남이공대학과 업무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군은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군위 인각사에서 집필한 점을 적극 홍보하는 등 지역 알리기에 나서고 있다. 9월8일부터 12월8일까지 12주간 학생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개설될 이번 강좌를 통해 인문학 교육 붐 조성은 물론 삼국유사에 대한 이해 증진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강사진은 임재해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 신선희 장안대 디지털문예창작과 교수, 고운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손인영 나우무용단 예술감독 등이다. ●군위군·경산시, 일연 등 성현강의 원효·설총·일연 등 삼성현(三聖賢)을 배출한 경산시도 지난 4월부터 12월까지 ‘삼성현 아카데미 인문 강좌’를 열고 있다. 매주 수요일 시민 200여명을 대상으로 열리는 이 강좌는 대학 교수 등이 강사로 나서 삼성현을 비롯해 철학과 문학, 역사학, 고고학 등을 강의한다. 울산 북구도 맞춤형 인문학 강좌 ‘내 고향 북구’를 운영 중이다. 강의는 울산의 명소와 그에 얽힌 설화, 풍수지리 정보, 각종 문화재, 울산이 낳은 위대한 인물, 현장탐방 등 인문 분야에 망라됐다. 대구 동구는 다음달 7일부터 11월30일까지 12회(매주 화요일 오후 7~9시)에 걸쳐 ‘찾아가는 시민 인문 강좌’를 연다. 인천시도 다음달 14일부터 연말까지 ‘인천 시민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지자체 관계자들은 “인문학은 인간의 다양한 삶의 방식과 문화를 읽고 생각하고 대화하며 사물을 보다 큰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능력을 키워 준다.”며 “이 같은 점에 착안해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됐으며, 주민 삶의 질 향상과 정서 함양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전국종합·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열린세상]새 광화문, 시멘트 광화문 그리고 땅속의 한양/배기동 전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

    [열린세상]새 광화문, 시멘트 광화문 그리고 땅속의 한양/배기동 전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

    광화문이 당당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북악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그 모습은 광화문 광장의 제1경으로 세계에 자랑해도 될 것 같다. 지난 100년 동안 광화문의 수난 역사는 서울의 그 어떤 문화재보다도 우리 현대사의 고뇌를 잘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왕궁의 정문이었지만 일제에 의한 경성 개발과 한국전통문화 말살 정책으로 그 위치를 건춘문의 북쪽으로 옮겼고, 한국전쟁 중 화재로 상부가 타서 없어진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시멘트로 복원했다. 정부에서 원위치로 되돌릴 것을 결정하고 복원사업에 들어간 것인데, 이제 드디어 그 대업이 완성된 것이다. 앞으로 숭례문이 복원되면 이 두 대문은 서울을 명실상부한 조선의 고도로서 그 면모를 새롭게 하게 된다. 광화문은 일제에 의한 조선정신 파괴의 상징으로서 존재하던 건물이다. 경복궁 안에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우고 완전히 없애버리려 했지만 일본의 조선미술사학자이던 야나기 무네요시가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라는 격정적인 문구가 담긴 글 ‘사라지는 조선건축을 위하여’를 통해 반대여론을 형성하여 그나마 옮겨서라도 살아남았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서 사라졌지만 그 조선총독부 건물의 일부나마 가려 보려고 시멘트로 건조한 광화문은 원래의 자리에서 약간 삐뚤어진 위치에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광화문의 삐뚤어진 방향조차 일제의 잔재로, 조선총독부가 남산의 일본신궁 정면을 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경복궁에 남아 있던 일제의 가장 아픈 상처가 사라진 셈이다. 그래서 특히 이 문의 복원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광화문의 복원을 보면서 문화유산보존에 대한 감회가 있다.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세운 시멘트 광화문이다. 이제는 사라지고 톱으로 자른 그 일부 표본만이 경복궁의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곧 철수되어 다른 곳에 보관될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본다면 왜 당시에 나무로 제대로 만들지 못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 시대의 애틋한 생각을 감출 수가 없다. 가난해서 시멘트를 사용해서라도 만들고 싶었던,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애절한 욕망에 애틋한 마음이 솟는 것이다. 아마도 그 시멘트 광화문은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시멘트 구조물이었을 것이다. 누구가 그러한 거푸집을 만들어서 그 복잡한 목조건축의 공포를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가?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시멘트 광화문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해도 될 그러한 우리 전통정신과 전통기술의 표현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아 전통문화사랑, 시멘트 광화문! 경복궁의 복원과 서울성곽의 복원으로 복잡한 빌딩 숲 속에서도 한양-서울 600년 도읍지의 면모가 이제 조금씩 빛을 발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읍지로서 서울의 모습이 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삶의 현장으로서의 서울이라는 도시는 바로 우리의 발 아래 있다. 근래 도심지 개발을 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규모의 고고학적 도시 유적들이 드러났다. 종로 피맛골을 따라서 조선시대의 육의전 터가, 광화문 네거리 공사에서는 육조거리가, 동대문운동장터에서는 훈련원터와 도성의 치성, 서울시청에서는 무기고가 발견됐고, 수도국군병원 자리에서도 종친부 터가 드러나서 복원을 기획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불도저 같은 것이 없던 때여서 건물을 폐기하면 그 위에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조선 50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서울의 도심 땅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도심개발의 과정에서 많은 유적들이 사라지고 있다. 아마도 오래지 않아 서울의 조선 도읍 흔적은 궁궐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것이고 한양인들의 삶의 흔적은 사라질 위기에 처할 것이다. 이제 국력이 커져서 조선총독부 건물도 부숴버렸고 광화문도 아름답게 복원됐는데 서울 땅 속의 한양은 사라져야 하는가? 경제적인 부로서의 국격보다는 문화적인 부를 가지고 국격을 높여야 할 시기가 됐고 더욱 세련된 도시개발정책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새로운 광화문의 빛이 서울 땅 속의 조선시대 유산에도 비춰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발굴현장서 만나는 생생한 역사의 진실

    2009년 1월19일 오후 전북 익산 미륵사지에 각 언론사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미륵사지 서탑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의 명문에 관한 발표를 듣기 위해서였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미륵사를 창건한 이가 ‘서동요’의 주인공인 신라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의 귀족가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것이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서동과 선화공주의 국경을 뛰어넘는 사랑이야기가 단숨에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발굴은 이처럼 사라진 역사의 실체적 진실로 우리를 안내하는 표지판이다. 알던 길을 흐트려놓기도 하고, 온 길을 돌아가게도 하지만 발굴의 성과들이 쌓이고 쌓여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로 하나하나 복원된다. 고고학자인 조유전 경기도문화재연구원장과 문화재 전문기자 이기환씨가 쓴 ‘한국사 기행’(책문 펴냄)은 발굴 현장 답사를 통해 우리의 역사를 되짚는 책이다. 이들은 이미 발굴했거나 지금도 조사 중인 주요 유적지를 해당 발굴 담당자들과 함께 답사하면서 현장의 목소리와 발굴 비화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쉽고, 재밌다는 것이다. 발굴 유물 사진과 현장 지도는 물론 발굴 당시 현장 상황을 꼼꼼히 기록한 전문가의 메모 등 풍부한 사진 자료들은 읽는 재미를 더한다. 먼저 떠난 남편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편지 내용과 머리카락으로 엮은 미투리로 이른바 ‘조선판 사랑과 영혼’으로 불렸던 경북 안동 원이엄마, 삼국통일 이후 당나라와 격전을 벌여야 했던 신라의 절박함이 깃든 경주 사천왕사터, 주인을 따라 순장된 창녕 송현동 소녀 미라의 발굴 스토리 등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더불어 고려시대 석곽묘 4기가 사업시행자에 의해 포클레인으로 밀린 이야기, 인골이 확인된 고인돌의 덮개들이 조형물로 사용된 사례 등 발굴과 보존의 어려움도 짚었다. 2만 4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