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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발해의 미소/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발해의 미소/서동철 논설위원

    크라스키노는 러시아 연해주의 마을 이름이다. 최근 북한의 나진·선봉 경제특구와 철도로 이어진 러시아 하산 지역에 속한다. 이국적인 지명이지만, 두만강 바로 건너 마을이라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크라스키노의 남동쪽 평원지대에는 8~9세기 토성(土城)이 남아 있다. 남북 400m, 동서 300m 정도인 토성의 성벽은 2.0~2.5m 높이로, 안팎에는 돌을 쌓고 내부에는 흙을 채웠다. 성의 북쪽과 동쪽, 남쪽에서 각각 성문(城門)이 발견됐는데, 모두 옹성(甕城)의 흔적이 보인다. 발해의 염주(鹽州) 성터다. 발해는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고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 세력과 손을 잡아 당나라 손아귀에서 벗어나 698년 지금의 중국 지린성 돈화성 부근 남만주 동모산에 세운 나라다. 고왕(高王) 대조영에 이어 제2대 무왕(武王·재위 719~737)과 제3대 문왕(文王·재위 737~793)은 영토를 넓히면서 내치와 외교에도 힘써 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했다. 이후 제10대 선왕(宣王·재위 818~830)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한 것은 물론 연해주까지 차지하면서 전성기를 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릴 만큼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한 것이다. 크라스키노는 동쪽의 포시예트만(灣)과 맞닿아 있다. 서쪽으로는 중국의 훈춘이 멀지 않다. 훈춘에는 문왕이 한때 수도로 삼았던 동경용원부가 있었다. 이렇게 보면 발해가 염주성을 세운 이유는 뚜렷하다. 이 도시에 한반도 남쪽의 신라, 동해 건너 일본열도의 왜(倭)와 교류하는 창구 역할을 맡긴 것이다. 염주성은 이른바 신라도(新羅道)와 일본도(日本道)라는 교통로의 출발점이었다. 동북아역사재단과 러시아사회과학원의 발굴조사 결과 염주성은 도로를 정연하게 구획하고 설계한 계획도시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발해 유적에서 도로망으로 구획한 계획도시는 상경도성 말고는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한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러시아 연해주 문물전’이 열리고 있다. ‘러시아의 발해 유물, 한국에 오다’라는 부제처럼 한국 관련 유물 500점이 전시되고 있다. 우리 역사의 흔적이지만, 한국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유물이다. 러시아과학원 극동지부 역사학고고학민족지학연구소와 러시아 국립극동대 박물관, 블라디보스토크의 아르세니예프 박물관에서 빌려 왔다. 특히 관람객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염주성 절터에서 출토된 불상이다. 온화하면서도 절제된 미소는 백제의 서산마애불과 닮았으면서도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서산마애불을 ‘백제의 미소’라고 한다면 염주성 불상은 ‘발해의 미소’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싶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해외여행 | 아프리카의 꽃 에티오피아②Axum 악숨, Lalibela 랄리벨라

    해외여행 | 아프리카의 꽃 에티오피아②Axum 악숨, Lalibela 랄리벨라

    ●Axum 악숨 고대 왕국의 수수께끼 먼 옛날, 시바의 왕국에 한 여왕이 있었다. 그녀는 이스라엘 솔로몬왕의 명성을 전해 듣고 그를 시험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상인들과 함께 향료와 금, 보석을 가득 싣고서. 여왕은 왕에게 자신이 궁금한 것을 질문했고 솔로몬왕은 지혜로운 답변을 주었다. 시바의 여왕은 왕의 지혜에 감탄해 가져간 보물을 선물하고 왕과의 하룻밤으로 아들 메넬리크를 낳아 에티오피아로 돌아왔다. 22세가 된 메넬리크는 예루살렘으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의 환대를 받고 3년간 예루살렘에 머문 메넬리크에게 솔로몬은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지만 메넬리크는 고향으로 돌아와 악숨에 수도를 정하고 악숨 제국을 세웠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 받은 십계명을 새긴 돌판을 보관한 언약궤Ark of the Covenant와 함께였다. 에티오피아 건국의 역사적 토대가 된 이 전설은 구약성서로 알려진 히브리 경전의 열왕기 상上, 그리고 역대 하下에 나오는 솔로몬왕과 시바의 여왕 이야기에서 나왔다. 물론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성서에 없다. 삼국유사에 단군신화가 기록된 것처럼 13~14세기에 작성된 에티오피아의 대서사시 ‘케브라 네가스트Kebra Negast’에는 시바의 여왕이 마케다Makeda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면서 솔로몬과 메넬리크로부터 비롯된 에티오피아 왕조의 내력이 담겨 있다. 종교의 역사에 기록된 사실과 이야기는 숨은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에티오피아인들은 자신들이 솔로몬왕의 지혜와 시바 여왕의 미모를 물려받은 민족임을 의심치 않는다. 더 놀라운 것은 악숨의 ‘시온 성 메리 교회St. Mary of Zion Church’의 지성소(하느님이 임재한다는 성전의 가장 깊은 곳)에는 언약궤가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성한 혈통을 이어받은 수도사 한 사람만이 관리하고 대중에게는 공개되지 않았으니, 거기에 정말 언약궤가 있는지 누구도 확인할 길은 없다. 에티오피아 곳곳에서는 ‘타보트Tobot’라 불리는 언약궤의 모형을 만들어 각 교회마다 상징적으로 보관하고 주요한 종교적 행사 때만 일반에게 공개한다고. 4세기에서 6세기경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 사이 종교적 갈등의 역사 속에 세워졌던 시온 성 메리 교회는 1965년 셀라시에 1세에 의해 옛 교회 근처에 새롭게 건축됐다. 악숨 제국은 한때 로마, 한나라, 페르시아와 함께 4대 제국으로 불릴 만큼 강대국이었다. 금과 상아, 철광석을 생산해 아프리카 전역과 로마, 터키와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4세기에는 기독교를 국교화 했고 5세기에는 수도원 제도를 마련했다. 10세기 이후 대가뭄으로 쇠망하기까지 화폐, 건축물, 문자 등 악숨 제국은 그들만의 위대하고 고유한 문화를 탄생시켰다. 기원전 1,000년부터 10세기까지 만들어진 악숨의 오벨리스크군은 악숨 제국의 대표적인 창조물이다. 오벨리스크는 거대한 돌로 만들어진 기념비로, 그 크기로 왕의 힘을 나타낸다. 오벨리스크의 지하에는 왕의 무덤이 있다는데 무게 533톤, 높이 33m의 세계에서 가장 큰 오벨리스크 중 하나는 안타깝게도 지진으로 무너진 상태다. 중간에 자리한 무게 180톤, 높이 27m의 오벨리스크는 1,7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1937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 의해 강탈돼 로마의 콜로세움 근처에 세워져 있다가, 2005년 4월19일 문화재 반환운동에 의해 67년 만에 에티오피아로 돌아왔다. 지지대를 받치고 있는 가장 오른쪽의 오벨리스크는 2,000년간 한자리를 지켜 왔다. “오벨리스크가 다시 세워지는 것이 우리의 바람입니다. 비용이 많이 들어 엄두를 못 내고 있지만, 언젠가 복원될 거예요.” 동행했던 가이드 시세이는 오벨리스크가 아프리카 자주성의 상징이라고 했다. 악숨이 시바 여왕의 영토였음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발길을 옮긴 곳은 둔구르Dungur 유적이다. 여왕이 거했다는 왕궁터는 오랜 세월 보수를 거듭했다. 터만 남은 토대 위에 높이 2~3m의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형태를 복원시켜 놓았다. 에티오피아인들은 시바의 여왕이 목욕을 하고 아궁이에서 밥을 짓던 이곳을 신성하게 여긴다. 사실 고고학적으로 둔구르 유적은 8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드러났다. 시바의 여왕 시기와는 1,700년이라는 차이가 존재한다. 역사적인 신빙성이나 시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에티오피아인들에게는 전설이 곧 진실이다. 그들의 믿음은 종교적 신앙이자 역사적 자긍심이고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픈 놓지 못할 희망이다. 전설은 힘이 세다. ●Lalibela 랄리벨라 아프리카의 예루살렘 7세기 악숨 제국과 함께 기독교가 쇠퇴의 길을 걷는 동안 이슬람은 아라비아반도를 시작으로 이집트와 수단 등으로 세력을 팽창시켜 나갔다. 악숨 제국이 붕괴되고 긴 암흑기가 이어졌던 에티오피아는 13세기에 이르러서야 기독교 왕조인 자그웨Zagwe 왕조로 다시 부활한다. 300년간 수도이기도 했던 랄리벨라의 전성기는 에티오피아 7대 국왕인 랄리벨라1181~1221년가 통치하던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초다. 랄리벨라는 에티오피아인들이 가장 거룩한 장소로 여기는 곳이다. 이유는 에티오피아 기독교 유적의 걸작품인 암굴교회군群 때문이다. 197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한 이곳은 관광객은 물론 예복인 흰 셰마를 두른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자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암굴교회로 가기 위해 해발 3,000m의 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났다. 풍광에 눈을 뺏기고 정겨운 마을을 지나 정상의 뷰포인트에서 잠시 멈추면 랄리벨라의 아름다운 풍광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랄리벨라의 원래 이름은 로하Roha였다. 정설에는 이슬람 세력에 의해 예루살렘으로의 순례가 어려워지자 제2의 예루살렘을 건설하고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서 암굴로 이루어진 교회를 만들었다지만 전설은 랄리벨라왕이 꿈에서 로하에 제2의 예루살렘을 건설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만든 것이라 전한다. 신앙심이 깊었던 랄리벨라왕은 직접 교회 건설을 감독하며 팔레스티나와 이집트의 기술자 등 4만명을 동원해 교회를 만들었다. 실제 교회는 120년에 걸쳐 완성된 것인데, 전설은 천사들이 밤낮으로 도와 23년 만에 완공됐다고 전한다. 암굴교회군은 지상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거대한 암반을 통째로 위로부터 수직으로 깎아내 만들었다. 예루살렘을 본떠 요르다노스강요단강 Yordannos이라 이름 지은 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과 북쪽에 각 5개, 언덕에 1개가 세워졌다. 화산재가 굳어 만들어진 부드러운 적갈색의 응회암 암반을 깎아내 만든 11개의 교회는 모두 미로 같은 지하 통로로 연결된다. 가장 규모가 큰 교회는 ‘구세주의 집’이라는 뜻의 ‘메드하네 알렘 교회Bet Medhane Alem’다. 세로 33m, 가로 22m, 높이 11m로 암반을 통째로 깎아 72개의 4각 기둥으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데, 이곳을 포함한 모든 교회는 유네스코의 지원으로 현재 철제 지붕과 보호 기둥을 세워 보수 중이다. 교회 옆 바위벽에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빈 무덤이 상징적인 장소로 남아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리암 교회Bet Maryam’는 랄리벨라왕이 가장 좋아했다고도 전해지는 곳인데, 벽에는 악숨 왕조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모든 교회를 둘러보는 입장료는 50달러, 제대로 보려면 1박2일은 걸린다니 선택은 ‘기오르기스 교회Bet Giyorgis’일 수밖에 없었다. 가로, 세로, 높이 모두 12m의 정 십자가 모양으로 암반을 파 내려가며 지었다는 이 교회는 그 우아한 건축미가 단연 최고라 인정받는다. 특히 땅 표면에서 보이는 세 겹의 십자가 모양이 압권이다. 조심스럽게 다다른 입구에는 죽어서도 교회를 떠나지 않겠다는 어느 사제의 유해가 암굴 속에 자연 상태 그대로 미이라가 된 채 안치되어 있었다. 순례객들로 들어찬 내부에는 백마를 탄 채 창을 들고 용을 무찌르는 기오르기스 성인이 성화 속에서 교회를 수호하고, 랄리벨라왕이 사용한 도구들이 들어 있다는 올리브나무 상자도 있다. 매년 에티오피아의 성탄절인 1월7일이 되면 전국에서 순례객들이 이곳 암굴교회에 모여 미사를 드리고 사제가 축복한 빵을 나눠 먹으며 기원후 33년부터 이어져 오는 축제를 즐긴다고. 1520년부터 6년간 에티오피아에 머물며 견문을 정리한 포르투갈의 수도사 프란시스코 알바레스Francisco Alvares는 <프레스터 존 왕국의 비밀A True Relation of the Lands of Prester John of the Indies>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이 불가사의한 암굴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교회들에 대해 묘사하는 것은 나를 지치게 할 뿐이다. 왜냐하면 내가 쓴 글을 사람들은 믿지 않을 테니까.” 랄리벨라는 지금도 그렇게 순례자들을 기다린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Travie writer 이세미 취재협조 에티오피아항공 02-733-0325 www.ethiopianairlines.co.kr
  • 죽어서도 노예…쇠고랑 찬 로마시대 유골 발견

    죽어서도 노예…쇠고랑 찬 로마시대 유골 발견

    백골이 되어서도 노예의 굴레를 벗을 수 없는 것일까? 최근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프랑스 남서부 지역에서 로마시대의 집단 무덤을 발견하고 조사에 나섰다. 이 무덤에서는 목과 발목에 여전히 족쇄를 차고 있는 노예의 유골이 다수 발견됐다. 무덤이 발견된 지역은 고대에 전투사(글래디에이터)와 야생 동물간의 전투가 열렸던 원형 돔 경기장이 있던 터이며, 총 4구의 성인 유골과 1구의 아이 유골이 발견됐다. 이 무덤은 서기 1~2세기에 만들어 졌으며, 무덤의 주인은 당시 원형 경기장 근처에서 집단 학살을 당한 노예로 추정된다. 특히 목과 발목에서 발견된 쇠고랑, 족쇄는 200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이들의 몸을 조이고 있어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 이를 연구하고 있는 고고학자들은 “유골들은 나란히 한 방향으로 누운 채 발견됐으며, 정확한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노예들의 집단 무덤이 더욱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받는 이유는 이례적인 위치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로마시대의 집단 무덤은 마을 내부에 만들어지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화장을 하는데, 이번에 발견된 무덤들은 비교적 외곽에 위치한다. 또 무덤의 주인을 나타내는 묘비나 표식이 전혀 없으며, 다만 유골의 목과 발목에 채워진 쇠고랑만이 이들의 신분을 짐작케 할 뿐이다. 유일한 아이 유골의 눈 부위에는 로마시대 관습에 따라 동전이 올려져 있었는데, 이는 망자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강을 건널 때 죽음의 배를 이끄는 사공에게 건넬 뱃삯으로 여겨진다. 고고학자들은 이들 집단무덤의 연구가 로마시대의 노예 문화 및 매장, 풍습 문화 등을 알아내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주워온 문 받침대, 알고보니 7000만원 상당 ‘고대검’

    주워온 문 받침대, 알고보니 7000만원 상당 ‘고대검’

    문 받침대로 쓰던 물건, 알고보니 엄청난 유물? 영국 BBC에 따르면 최근 경매에 나온 이 유물은 길이 68㎝의 청동검으로, 무려 12년 동안이나 영국 일반 가정집에서 문을 고정시키는 의미 없는 물건으로 취급받았었다. 12년 전 한 남성은 숲에서 우연히 이 청동검을 주운 뒤 집에서 문 받침대로 사용해오다 최근 전문가의 감정을 받고 나서야 ‘진귀한 유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절반으로 휘어진 이 청동검은 무려 35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으며, 일반적인 청동기 시대 검에 비해 3배 정도의 크기를 자랑한다. 고고학자들은 이 검이 무기로 사용됐으며, 영국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유물 중 하나라며 큰 관심을 보였다. 고고학자 팀 페스텔은 “3500여 년 전 무기로 사용된 이 청동검은 종교적 의식 절차상 안쪽으로 구부러진 채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영국에서는 1988년 노퍽주에서 이와 비슷한 형태의 청동검이 발견된 바 있다”고 설명했다. 페스텔 박사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의 청동검 유물은 유럽에서 총 6점 뿐이다. 이번에 발견한 청동검을 포함한 2점은 영국에, 2점은 프랑스에, 나머지 2점은 네덜란드에서 보관 중이다. 이 청동검을 문 받침대로 써 온 주인은 3만 9000파운드(약 6800만원)를 받고 문화재청에 이를 판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판매금은 문화재 보호 기금을 통해 마련됐다. 페스텔 박사는 “역사적으로 매우 귀중하고 중요한 유물을 찾게 돼 매우 기쁘다”면서 “이 유물은 과거의 금속세공술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심봤다!” 주워온 문 받침대, 알고보니 3500년 전 청동검

    “심봤다!” 주워온 문 받침대, 알고보니 3500년 전 청동검

    문 받침대로 쓰던 물건, 알고보니 엄청난 유물? 영국 BBC에 따르면 최근 경매에 나온 이 유물은 길이 68㎝의 청동검으로, 무려 12년 동안이나 영국 일반 가정집에서 문을 고정시키는 의미 없는 물건으로 취급받았었다. 12년 전 한 남성은 숲에서 우연히 이 청동검을 주운 뒤 집에서 문 받침대로 사용해오다 최근 전문가의 감정을 받고 나서야 ‘진귀한 유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절반으로 휘어진 이 청동검은 무려 35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으며, 일반적인 청동기 시대 검에 비해 3배 정도의 크기를 자랑한다. 고고학자들은 이 검이 무기로 사용됐으며, 영국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유물 중 하나라며 큰 관심을 보였다. 고고학자 팀 페스텔은 “3500여 년 전 무기로 사용된 이 청동검은 종교적 의식 절차상 안쪽으로 구부러진 채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영국에서는 1988년 노퍽주에서 이와 비슷한 형태의 청동검이 발견된 바 있다”고 설명했다. 페스텔 박사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의 청동검 유물은 유럽에서 총 6점 뿐이다. 이번에 발견한 청동검을 포함한 2점은 영국에, 2점은 프랑스에, 나머지 2점은 네덜란드에서 보관 중이다. 이 청동검을 문 받침대로 써 온 주인은 3만 9000파운드(약 6800만원)를 받고 문화재청에 이를 판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판매금은 문화재 보호 기금을 통해 마련됐다. 페스텔 박사는 “역사적으로 매우 귀중하고 중요한 유물을 찾게 돼 매우 기쁘다”면서 “이 유물은 과거의 금속세공술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석기시대 희귀 돌도끼 발견…자루까지 완벽 보존

    석기시대 희귀 돌도끼 발견…자루까지 완벽 보존

    5500년 전, 석기시대에 쓰인 돌도끼가 원형 그대로 발견돼 학계를 놀라게 했다. 이 도끼는 지금이라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나무 자루 부분도 완벽하게 보존돼 있던 것이다. 덴마크 롤란-팔스테르 박물관은 29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덴마크 남동부 롤란 섬에서 나무 자루가 달린 석기시대의 희귀한 돌도끼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이번 발굴 조사에 참여한 고고학자 쇠렌 앙케르 쇠렌센은 “손잡이는 약 30cm로, 이처럼 손잡이가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특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돌도끼가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로는 묻혀 있는 곳이 진흙으로 공기에 노출이 안돼 모양을 유지할 수 있던 것으로 연구팀은 보고 있다. 이번 조사 과정에서는 나무 자루가 달린 도끼 총 14점 외에도 활 2점, 배를 젓는 노 1점이 함께 발굴됐다. 이들 유물은 모두 땅속에 똑바로 세워진 채 묻혀 있었다. 이는 이들 유물이 의식에 바쳐진 제물이며 의도적으로 묻힌 것을 보여준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연구팀은 앞으로 롤란 섬에서 독일의 페마른 섬을 연결하는 수중 터널 공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남은 1년여간 발굴 작업에 박차를 가해 고대 의식에 대한 단서를 확보할 방침이다. 한편 이들은 이달 초에도 해당 발굴지에서 고대 인간의 발자국들을 발견한 바 있다. 사진=덴마크 롤란-팔스테르 박물관 제공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문 받침대로 쓰던 물건, 알고보니 3500년 전 청동검

    문 받침대로 쓰던 물건, 알고보니 3500년 전 청동검

    문 받침대로 쓰던 물건, 알고보니 엄청난 유물? 영국 BBC에 따르면 최근 경매에 나온 이 유물은 길이 68㎝의 청동검으로, 무려 12년 동안이나 영국 일반 가정집에서 문을 고정시키는 의미 없는 물건으로 취급받았었다. 12년 전 한 남성은 숲에서 우연히 이 청동검을 주운 뒤 집에서 문 받침대로 사용해오다 최근 전문가의 감정을 받고 나서야 ‘진귀한 유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절반으로 휘어진 이 청동검은 무려 35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으며, 일반적인 청동기 시대 검에 비해 3배 정도의 크기를 자랑한다. 고고학자들은 이 검이 무기로 사용됐으며, 영국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유물 중 하나라며 큰 관심을 보였다. 고고학자 팀 페스텔은 “3500여 년 전 무기로 사용된 이 청동검은 종교적 의식 절차상 안쪽으로 구부러진 채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영국에서는 1988년 노퍽주에서 이와 비슷한 형태의 청동검이 발견된 바 있다”고 설명했다. 페스텔 박사에 따르면 비슷한 시기의 청동검 유물은 유럽에서 총 6점 뿐이다. 이번에 발견한 청동검을 포함한 2점은 영국에, 2점은 프랑스에, 나머지 2점은 네덜란드에서 보관 중이다. 이 청동검을 문 받침대로 써 온 주인은 3만 9000파운드(약 6800만원)를 받고 문화재청에 이를 판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판매금은 문화재 보호 기금을 통해 마련됐다. 페스텔 박사는 “역사적으로 매우 귀중하고 중요한 유물을 찾게 돼 매우 기쁘다”면서 “이 유물은 과거의 금속세공술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프랑스 북부서 2만3000년전 여성조각상 발굴

    프랑스 북부서 2만3000년전 여성조각상 발굴

    프랑스 북부 아미앵에서 풍만한 여성을 본떠 석회암으로 만든 2만 3000년 전의 작은 조각상이 출토됐다고 AFP통신이 2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를 발굴한 프랑스 고고학 연구팀은 “이례적인” 성과라고 평가하고 있다. 구석기 시대에 만들어진 이 여성 조각상은 지난여름에 시행된 발굴 조사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프랑스에서 석회암 조각상이 발견된 것은 반세기 만의 일이다. 아미맹 지역 문화재 담당자인 니콜 포유-애디드는 조각상을 공개하며 “이 걸작의 발견은 이례적이며 국제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발굴조사에 참여한 고고학자 클레망 파리는 “세공된 부싯돌이나 뼛조각 등을 찾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조사 이틀째 석회암 조각 더미를 발견했다”면서 “그중에는 인위적으로 여겨지는 파편이 포함돼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날 밤, 우리는 20여 개의 조각을 조심스럽게 이어본 결과, 여성 모습을 한 조각상임을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조각상의 제작 시기는 탄소 연대측정법을 통해 지금으로부터 2만 3000년 전쯤인 것으로 밝혀졌다. 길이 12cm쯤인 이 조각상은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가 표현돼 있지만 머리와 팔 부분은 분명하지 않다. 클레망 파리는 “여성 조각상의 모습이 뚜렷하지 않은 것은 본래 의도가 다산과 관련된 여성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럽에서는 그동안 이런 조각상이 러시아와 중부 유럽을 중심으로 100개 정도 발견됐는데 프랑스에서는 15개 정도로 대부분 남서부에서 발견됐고 북부에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진=ⓒAFPBBNEWS=NEWS1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아마존서 ‘타원형 피라미드’ 발견... 2000년 전 구조물 추정

    아마존서 ‘타원형 피라미드’ 발견... 2000년 전 구조물 추정

    남미 아마존에서 피라미드와 비슷한 독특한 형태의 구조물이 발견돼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중남미 언론에 따르면 볼리비아 아마존 지역에서 발견된 화제의 구조물은 타원형 피라미드처럼 생겼다. 언뜻 보면 큰 원반을 바닥에 놓은 뒤 점차 크기가 작은 원반을 차곡차곡 쌓아 얹은 놓은 구조다. 가장 아래에 깔려 있는 원반의 지름은 180m, 맨위에 있는 원반의 지름은 약 14m에 이른다. 구조물은 아마존 지역을 둘러보던 볼리비아 산타크루스 주의 고고학조사팀이 발견했다. 팀장 다닐로 드리킷은 "구조물을 발견한 건 약 2개월 전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아직 정체를 확인하진 못했다."고 밝혔다. 멕시코 유적지 발굴에도 참여한 바 있는 그는 "돌로 쌓은 건 아니지만 피라미드와 유사한 형태라는 점이 매우 주목된다."고 설명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피라미드를 연상케 하는 타원형 구조물은 중미와 페루에서 사용됐던 건축기법이다. 볼리비아에서 이런 기법으로 만든 타원형 구조물이 발견된 건 처음이다. 드리킷은 "아직은 더 확인을 해봐야 하지만 유적이 맞다면 최소한 2000년 전에 만들어진 구조물일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Q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문화재 복원-伊에서 길을 찾다] ‘복원의 이유’ 끝없이 고민…기술·역사까지 함께 배워

    [문화재 복원-伊에서 길을 찾다] ‘복원의 이유’ 끝없이 고민…기술·역사까지 함께 배워

    “어떤 것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온전히 보존되지 않는다”는 말은 문화재 보호와 존속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엿보게 한다. 시간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유물을 전승하기 위한 고민은 수백년간 문화예술품 보호에 노력을 기울여 온 이탈리아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문화재 복원 교육기관인 국립복원학교(SCUOLA)가 대표적인 사례다. 1939년 고등보존복원연구소(ISCR·옛 ICR)의 산하기관으로 출범해 최근 4년제에서 5년제로 바뀌었다. 지난 5일 로마 도심의 학교에서 만난 도나텔라 카베찰리 교장은 “기술 습득에 앞서 올바른 철학과 학문적 관점을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70년간 세계 곳곳의 문화재 복원 현장에서 활동한 전문가 대다수가 이 학교 출신이다. ‘유물 주치의’로 불리는 학생들은 실습용 흰색 웃옷 차림으로 백열등이 환하게 켜진 1층 연구실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사진). 모조품이 아닌 실제 문화재로 실습하는데, 복원실 앞에는 학생들이 직접 만든 유화, 프레스코화, 수묵화 등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카베찰리 교장은 “실습에 앞서 옛 재료로 만든 미술작품들을 직접 그리게 한다. 그래야 복원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학교는 해마다 10명 안팎의 학생을 선발하는데, 이미 미술사, 고고학, 화학 등 관련 분야 전공을 이수한 인재들이 지원한다. 학부와 석사과정 통합교육으로 곧바로 현장에 투입 가능한 전문인력들이 몰려든다. 신입생의 나이가 20대 중반을 훌쩍 넘는 이유다. 집안 형편에 따라 학비는 연간 500유로(약 70만원)에서 2500유로(약 345만원)까지 다양하다. 스페인에서 유학 온 라켈 델가도(23)는 “교육과정의 절반이 실습으로 꾸려지고, 교수 1명당 학생 수가 5명을 넘지 않는 게 강점”이라며 “졸업 뒤 이집트, 중국 등 세계 각지의 문화재 복원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간 중국인 학생은 있었지만 아직 한국인이 입학한 사례는 없다고 한다. 마리솔 발렌수엘라 목재·조각부문 교수는 “학년별로 석재·회화·고고학 유물·공예품으로 세분화된 교육과정을 갖췄다”면서 “학생과 교수들은 어느 부분이 복원됐는지 알 수 있도록 재료와 붓터치 등에서 차이를 둔다”고 말했다. 또 “도구나 용액 등을 이용하는 기술 못잖게 기법과 복원자에 대한 기록을 빠짐없이 남기도록 교육받는다”고 덧붙였다. 동행한 정수희 프랑스 국립미술사연구소 연구원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대다수 국가의 문화재 보존·복원 기관에선 윤리와 역사, 철학 등을 함께 가르치며 ‘왜 문화재를 복원하는가’란 끊임없는 고민을 품게 한다”고 설명했다. 로마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세계의 창] 평화·공존의 영역 ‘성지’… 이·팔, 목숨 건 ‘성전 전쟁’

    [세계의 창] 평화·공존의 영역 ‘성지’… 이·팔, 목숨 건 ‘성전 전쟁’

    지난 8월 말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싸움이 휴전으로 마무리된 지 불과 석 달 만에 가자지구에 다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는 알아크사 사원 문제가 깔려 있다. 지난달 29일 이스라엘 극우파 예후다 글리크 암살 미수 사건이 발단이 됐다.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이스라엘이 알아크사 사원을 폐쇄하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즉각 봉기했다. 지난 5일 동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인이 승합차를 몰고 경전철 정류장으로 돌진해 1명이 숨졌고, 10일에는 서안지구 정착촌에서 팔레스타인인이 휘두른 흉기에 여성 1명이 숨지고 3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어 18일에는 서예루살렘 하르노프 지역 시나고그(유대교 회당)에 팔레스타인 청년 2명이 난입, 권총을 쏘고 도끼를 휘두르면서 유대교 랍비 4명이 사망했다. 이러다 ‘3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유대인들은 동예루살렘 일대 성지를 템플 마운트(Temple Mount)라고 부른다. 기원전 9세기 구약성경의 솔로몬 왕이 만든 성전(聖殿)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다. 이후 이민족과의 싸움으로 파괴와 재건을 거듭했으나 성전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로마제국이 기원후 70년 3차 성전을 파괴한 뒤 유대인들을 다 내쫓고 쓰레기장처럼 방치해 버린 탓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곳이 바로 ‘통곡의 벽’이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유일하게 남은 성전의 흔적이라고 여긴다. 반면 무슬림에게 이 지역은 하람 알샤리프라고 불린다. 우리말로 풀자면 ‘숭고한 안식처’ 정도 된다. 이슬람의 창시자이자 예언자인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멀리 있는 사원이라는 뜻의 알아크사 사원은 이를 기념하기 위한 곳이다. 무함마드의 탄생지 메카, 무함마드의 무덤이 있는 메디나와 함께 이슬람 3대 성지로 꼽힌다. 양측의 입씨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무슬림은 이스라엘 주장이 억지라고 본다. 몇 번 파괴를 겪다 보니 3차 성전의 위치는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는데 무조건 지금의 위치라고 우긴다는 것이다. 고고학적 증거를 찾는다고 그렇게 들쑤셨는데 아직 관련 유물 하나 나오지 않은 것이 그 증거라는 주장이다. ‘통곡의 벽’에 대해서도 “유대인조차 20세기 초까지 아무 관심 없었던 벽이었는데 갑자기 신성시한다”고 주장한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 같은 곳에서는 아예 “성전산이란 표현 자체를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통곡의 벽’도 그냥 ‘서쪽 벽’이라고만 부른다. 반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메시아가 재림하는 순간 다시 들어설 성전의 자리를 절대 양보할 수는 없다. 무슬림들이 알아크사 사원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워 제대로 된 발굴 조사를 회피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만 캐내다 보니 큰 돌 하나를 찾으면 한쪽은 승천의 증거라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성전의 토대가 있었던 증거라고 주장하는 식의 공방전이 벌어진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 확정되면서 동예루살렘은 아랍권에,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손에 넘어갔다. 요르단 서부 지역 일부를 이스라엘에 떼 주기로 한 유엔 결의를 인정할 수 없었던 팔레스타인은 곧 전쟁에 돌입했으나 패배했다. 더 큰 결정타도 있었다. 흔히 6일전쟁으로 알려진 1967년 3차 중동전쟁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으로 영역을 대폭 확대했고 동예루살렘도 장악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알아크사 사원 자체가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영국 텔레그래프지는 “영적으로 미성숙한 일반 신도들이 최고로 신성한 장소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유대교 계율에 따라 일반 신도들이 기도하거나 출입하는 것이 엄격하게 통제됐다”고 설명했다. 사안의 민감성을 이스라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지나치게 강경한 모습을 스스로 자제하기도 했다 . 이 불안한 균형은 성지 회복을 갈망하는 이스라엘 우익세력에 의해 1990년대 들어 점차 깨지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는 “1990년 일부 과격파가 제3성전의 주춧돌을 놓겠다는 운동을 벌이면서 본격적인 논란이 시작됐고 1990년대 말쯤 이스라엘 극우운동가들이 금기를 깨고 알아크사 사원을 서서히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1967년 이후 사실상 알아크사 사원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불만들이 점차 누적되면서 일부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알자지라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터닝 포인트는 2008년”이라고 지적했다. 일군의 강경파 랍비들이 일반 신도들의 성전산 참배를 금지한 전통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도 알아크사 사원에 들어가 기도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일부는 아예 알아크사 사원을 무너뜨리고 제3성전을 재건하자는 주장까지 내놨다. 지난달 강경파 랍비 예후다 글리크가 팔레스타인 청년에게 암살당할 뻔했던 사건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양측 모두 극한적 대립은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실제 성전산을 정말 깊이 믿는 이스라엘 전문가들 사이에선 성전산 터와 알아크사 사원은 무관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럼에도 이들의 목소리가 널리 퍼지지 않는 것은 그간 서로가 쌓아 온 불신 때문이다. 1967년 전쟁 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유엔 결정에 따라 이스라엘 건국을 승인했던 국제사회는 당연히 이를 불법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안보상 위협을 이유로 원상 복귀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착촌까지 건설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번 달에만 동예루살렘에 정착촌 500채를 건설하는 데 이어 200채 추가 건설을 결정했다. 평화와 공존보다는 야금야금 영역을 넓혀 가겠다는 욕심을 숨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국제적 비난을 사고 있는 원인으로 꼽힌다. 최근 들어 스웨덴, 스페인, 영국, 아일랜드 등 유럽 국가들의 의회에서 잇달아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는 결의안이 통과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평화와 공존 대신 영토를 탐한다면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이자크 라이트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팔레스타인 쪽에서 보자면 헤브론의 경험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헤브론은 1967년 전쟁으로 이스라엘 손에 들어갔다 1997년 협상 끝에 다시 팔레스타인 쪽으로 넘어간 지역이다. 그런데 1967년만 해도 인구의 5%에 불과하던 유대인이 1997년에는 50%를 차지하게 됐다. 처음엔 허름한 예배당을 지어 놓고 기도만 하겠다더니 이렇게 몰려들기 시작한 이들이 정착민으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힘깨나 쓴다는 국가들이 한가롭게 결의안이나 통과시키고 있을 동안 이스라엘이 정착민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만 거주하던 동예루살렘도 헤브론처럼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이런 불신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이미 전례가 있다. 이스라엘 총리를 지낸 아리엘 샤론이 숱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2000년 9월 28일 알아크사 사원 방문을 강행했다. 스스로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러 왔다”고 주장했으나 1000명의 무장병력이 그를 경호해야 했고, 신성한 사원에는 돌멩이와 고무총탄이 날아다녔다. 그리고 5000여명의 사망자를 기록한 2차 인티파다가 시작됐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카페 사르트르(한국사르트르연구회 지음, 에크리 펴냄) 실존주의 철학자,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소설 및 극작가, 실천적 지식인, 여성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의 평생 동반자…. 화려한 수식어를 단 장 폴 사르트르(1905~1980)는 전후 정신적 공황 상태에 있던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는 서구 지성의 대명사가 됐고, 실존주의 철학은 국내 학계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지난 20년 동안 한결같이 사르트르 연구에 매진해 온 한국사르트르연구회 소속 학자들이 연구회 발족 20주년을 기념해 연구서를 펴냈다. 사르트르의 철학이 탄생한 주무대인 파리 생제르만데프레의 카페에서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학자와 연구자들이 다채로운 시각으로 사르트르를 새롭게 읽어낸다. 580쪽. 3만 5000원. 트렌드 코리아 2015(김난도 등 지음, 미래의창 펴냄) ‘대한민국 청춘 멘토’ 김난도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의 2015년 예측 보고서. 연구소가 선정한 내년의 10대 소비트렌드 키워드는 양의 해에 걸맞게 ‘카운트 쉽’(COUNT SHEEP)이다. 도처에 불안한 요소들이 남아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책은 ‘다크호스’를 키워드로 했던 2014년 한 해가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리뷰한 뒤 본격적으로 명암이 공존하는 2015년의 모습을 경제, 나라 살림, 정책 방향, 기술 변화, 사회문화적 동향을 전망한다. 2014년의 소비는 세월호와 함께 차가운 바다에 침몰했고 정치권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다. 책은 2015년의 경우 오프라인 매장과 모바일 앱 기술의 결합으로 소비자에게 끊김 없는 쇼핑 환경을 제공하지만 ‘정답’을 찾지 못하면서 소비는 크게 호전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411쪽. 1만 6000원. 상실과 노스탤지어(이소마에 준이치 지음, 심희찬 옮김, 문학과 지성사 펴냄) 일본의 종교 및 역사학자인 이소마에 준이치 국제일본문화센터 교수가 근대 일본인들의 내면을 분석했다. 저자는 한국의 탈식민주의 연구자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재일 조선인, 소수자, 디아스포라를 주제로 학문적 영향력을 넓혀 온 소장학자다. 그는 책에서 일본의 정체성을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하게 끼인 ‘인 비트윈’(in between)으로 정의한다. 일본의 근대는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과감한 체제개혁을 단행한 메이지 유신으로 시작되어 이후 태평양전쟁에서의 패전으로 수많은 사상자를 낳고 미국의 점령을 받는 등 사회격동 한가운데 놓이게 됐다. 근대 일본이 사로잡혀 있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질감 내지 상실감을 포착해 그 근원을 살피고 나아갈 방향을 성찰한다. 327쪽. 1만 6000원. 유라시아 고고기행(황규호 지음, 주류성 펴냄) 오랫동안 문화재·종교·학술 담당기자로 뛰며 전세계 문명과 종교의 발상지를 답사하고 고고학 발굴현장을 취재해 온 저널리스트가 쓴 대중을 위한 고고학과 미술사 교양서. 저자가 프랑스 파리 고인류연구소에서 열린 한국-프랑스 구석기 워크숍에 초청돼 이 분야의 지식을 나눈 경험에서 비롯된 책은 인류 구석기 메카로 통하는 발로네 동굴, 라자레 동굴 등 프랑스 주요 선사유적을 둘러 본 경험을 소상히 다룬다. 이밖에 파키스탄 정부 초청으로 방문했던 서남아시아의 인류문명과 불교미술 발상지, 시베리아 고고민족학연구소가 주최한 시베리아 100년의 파노라마 국제학술회의 참석 당시 방문한 시베리아와 알타이 문화도 조명한다. 책의 후반부는 약 35년 전 전기 구석기 유물로 만능 연장으로 사용된 아슐리안 주목도끼의 고장인 한반도 중부 한탄강변 전곡리 유적에 집중한다. 동서양의 시공간을 입체적이고 유기적으로 투영해 우리의 고고학에 접근할 수 있는 길잡이다. 258쪽. 1만 5000원.
  • 신라시대 굴식돌방무덤, 양평에서 발견

    신라시대 굴식돌방무덤, 양평에서 발견

    문화재청은 지난 13일 중부고고학연구소가 긴급 발굴조사를 시행하고 있는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대평리 산23-1번지 일원에서 신라 시대 굴식 돌방무덤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양평 신라 돌방무덤은 중부지역에서 발견된 신라 고분군으로는 최대 규모로, 유물은 도굴로 인해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조사팀은 고분의 축조 방법과 석실의 구조로 미뤄 6∼7세기에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중부고고학연구소 측은 이미 이 신라 돌방무덤들은 양평군 내에서는 잘 알려졌으며, 도굴은 이미 30년 이전부터 이뤄졌다고 밝혔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서동철의 시시콜콜] 아브리 파토와 석장리 유적

    [서동철의 시시콜콜] 아브리 파토와 석장리 유적

    ‘겨울비치고는 제법 많이 내린다. 베제르강 깊은 골짝에 어둠이 깔린 지 오래고, 에지드타약(s Eyzies-de-Tayac) 거리에는 인적마저 끊겼다. 이 겨울비가 내리는 날 외진 유적지를 찾는 이들이 없어서 마을이 조금은 을씨년스러웠다. 그래서 빗물이 얼룩진 카페 창가에 앉아 포도주 몇 잔을 기울이고 싶은 밤이기도 했다. 그 자리에 샹송이 깔리면 비 내리는 겨울밤의 운치가 더 살아나겠지….’ 프랑스 남서부의 구석기 유적지 아브리 파토를 묘사하는 대목은 이렇게 시적(詩的)이다. 도르도뉴강 지류인 베제르강 언저리는 후기 구석기 문화 밀집 지역이다. 현생 인류의 조상인 크로마뇽인의 화석이 발굴되고 라스코 동굴벽화와 퐁드곰 동굴벽화도 발견된 ‘유럽 구석기 연구의 수도’다. 그렇다 해도 고고학도가 아닌 일반 관광객이라면 여간해서는 찾게 되지 않는다. 그런데 ‘유라시아 고고기행’을 읽다 보면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용솟음친다. 웬만한 사람은 한두 장 읽다가 지쳐 버릴 전문적 이야기를 주제가 있는 에세이처럼 풀어낸 사람은 문화재 저널리스트 황규호다. 아브리 파토는 후기 구석기 문화가 켜켜이 쌓인 바위그늘 유적이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바위 벼랑 사이에 자연적으로 깊숙이 파인 공간에서 눈비와 사나운 짐승의 공격을 피했다. 이곳의 구석기인들은 3만년쯤 4000년에 걸쳐 10m가량 퇴적된 지층에 모두 14개의 문화층을 남겼다. 발굴은 1898년 이후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아직 3분의1 정도만 판 상태라고 한다. 한 해 10㎝ 이상 발굴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10만점에 이르는 동물뼈가 나왔지만 7명분의 사람뼈가 출토되면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유적 전시관에는 16세로 추정되는 아기 엄마를 복원해 놓았다. 유명한 ‘마담 파토’다. ‘유라시아 고고기행’은 간다라 문화의 본거지인 파키스탄과 한민족의 원류로 알려진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을 망라하고 있다. 그럼에도 유독 아브리 파토를 떠올린 것은 공주 석장리 박물관에서 본 그곳의 흥미로운 유물 때문이다. 바위에 부조 형태로 여인의 모습을 새긴 ‘구석기 비너스’가 그것이다. 그러고 보니 1964년 손보기 교수가 이끄는 연세대 팀이 석장리 발굴을 시작하고 올해로 꼭 50년이 흘렀다. 한반도 남부에서 구석기 시대의 존재를 확인한 ‘사건’이었다. 이후 연천 전곡리와 단양 수양개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구석기 유적 발굴이 이어졌다. ‘유라시아’가 잊고 있던 석장리의 의미도 다시 생각하게 했다. dcsuh@seoul.co.kr
  • 양평 신라 돌방무덤 발견 ‘최대 규모’ 유물은 이미 30년전 도굴 ‘멘붕’

    양평 신라 돌방무덤 발견 ‘최대 규모’ 유물은 이미 30년전 도굴 ‘멘붕’

    ‘양평 신라 돌방무덤 발견’ 양평 신라 돌방무덤 발견 소식이 화제다. 문화재청은 지난 13일 중부고고학연구소가 긴급 발굴조사를 시행하고 있는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대평리 산23-1번지 일원에서 신라 시대 굴식 돌방무덤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양평 신라 돌방무덤은 중부지역에서 발견된 신라 고분군으로는 최대 규모로, 유물은 도굴로 인해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조사팀은 고분의 축조 방법과 석실의 구조로 미뤄 6∼7세기에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중부고고학연구소 측은 이미 이 신라 돌방무덤들은 양평군 내에서는 잘 알려졌으며, 도굴은 이미 30년 이전부터 이뤄졌다고 밝혔다. 이날 발견된 굴식 돌방무덤이란 판 모양의 돌과 깬돌(할석)을 이용해 널을 안치하는 방을 만들고, 널방 벽의 한쪽에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를 만든 뒤 봉토를 씌운 무덤이다. 천장은 조임식(사방의 벽을 좁혀 쌓은 형식)으로 이뤄져 있으며 내부에는 바닥에 시신을 올려놓는 시상대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평 신라 돌방무덤 발견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양평 신라 돌방무덤 발견, 이런 귀중한 유물을 이제야 발견하다니”, “양평 신라 돌방무덤 발견, 도굴꾼들 대단하네”, “양평 신라 돌방무덤 발견, 유물 찾아야 한다”, “양평 신라 돌방무덤 발견, 양평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구나” 등의 반응을 보였다. 사진=중부 고고학 연구소(양평 신라 돌방무덤 발견) 뉴스팀 seoulen@seoul.co.kr
  • 中부유층 ‘운석 수집’ 열풍...가격 폭등

    中부유층 ‘운석 수집’ 열풍...가격 폭등

    중국 일부 부유층 사이에서 고가의 운석 수집이 유행처럼 확산하고 있다. 최고급 스포츠카나 명품백, 대저택 등보다 우주에서 온 돌조각에 더 큰 돈을 쓰고 있는 것이다. A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중국의 수집가들이 운석 시장에 몰려들어 가격 상승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통 시안핑(50)이라는 이름의 중국인 사업가도 그런 이들 중 한 명. 그는 1967년 러시아의 한 강바닥에서 발견된 수십억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게 176kg짜리로 세계 최대 석철운석 ‘세임찬’(Seymchan)을 100만 위안(약 1억 8000만원)에 구매했다. 그는 이 세임찬 운석이 석탄 덩어리처럼 보이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가치가 있다. 우주에서 받은 소식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경매를 통해 수집한 이런 운석을 수십개나 신장위구르자치구 수도 우루무치에 있는 자신의 전시실에 전시하고 있다. 그의 수집품으로는 세임찬과 마찬가지로 100만 위안 정도에 낙찰받았다는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기비언’(Gibeon)이라는 운석의 일부 조각이 있으며 스스로 발굴했다는 탄소질 콘드라이트도 있다. 중국의 새로운 부유층의 화려한 씀씀이는 선망과 함께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회사 창업자나 사장들은 큰 운석을 선호한다”면서 “동료 수집가 중에는 우루무치 최초의 지하철 건설을 수주한 건설사 사장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에게 벼락부자라고 말하는 것은 상관 없지만, 물욕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자동차는 대량으로 생산하지만 운석은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 수집가와 연구자의 협력 관계 운석은 태양계 기원을 밝힐 단서로 여겨진다. 이런 운석이 지구에 생명을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사막이나 북극에서 발굴된 운석은 국제 시장에서 거래된다. 희귀 운석은 경매에서 수십만 달러의 입찰가를 기록한다. 고생물학자와 고고학자들은 자신들의 발굴 현장에서 나온 운석을 경매에 내놓는 것을 비난하지만, 운석 전문가들은 이런 거래를 환영하고 있다. “수집가와 협력 관계에 있다”고 밝히는 모니카 그래디 영국 개방대학 유성학과 교수는 “우리는 스스로 발굴하고 수집할 자금이 없다. 대신 많은 운석 상인들이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발굴된 운석에 얼마나 높은 시장 가치가 있는지는 학자의 보증이 달려 있다고 한다. 이때 관련 학자는 자신의 연구에 운석 일부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 구매 급증, 늘어나는 가짜 하지만 중국인 구매자들이 몰려드는 것으로 운석의 가격은 급격히 상승했다. 오랜 경력의 수집가 사이에서는 가짜 운석이 나도는 것에 크게 우려하고 있다. 미국 애리조나주(州) 사막 투손에서 열린 세계 최대 운석 박람회에서 중국인 수집가 브라이언 리는 “그들은 운석의 가치 밖에 관심이 없다. 그 운석에 감춰진 과학을 이해하지 않는다”면서 “따라서 가짜 운석이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미국 전문지 ‘메테오리트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에릭 트웰커는 “중국 구매자는 큰 운석을 좋아해 값비싼 (운석) 시장에서 그들의 존재감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하지만 중국에서 출품된 운석 대부분은 가짜인데 이는 지난 수년간 계속되고 있는 문제로, 난 중국산 운석 모두에 불신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통 시안펑은 신장위구르자치구에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자신이 “하늘의 선물”이라고 부르는 운석을 찾고 있다. 그는 “혹독한 자연이 덮쳐오는 것조차 즐기고 있다”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사진=ⓒAFPBBNEWS=NEWS1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중국 부자들은 왜 운석을 사 모으나?

    중국 부자들은 왜 운석을 사 모으나?

    중국 일부 부유층 사이에서 고가의 운석 수집이 유행처럼 확산하고 있다. 최고급 스포츠카나 명품백, 대저택 등보다 우주에서 온 돌조각에 더 큰 돈을 쓰고 있는 것이다. A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중국의 수집가들이 운석 시장에 몰려들어 가격 상승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통 시안핑(50)이라는 이름의 중국인 사업가도 그런 이들 중 한 명. 그는 1967년 러시아의 한 강바닥에서 발견된 수십억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게 176kg짜리로 세계 최대 석철운석 ‘세임찬’(Seymchan)을 100만 위안(약 1억 8000만원)에 구매했다. 그는 이 세임찬 운석이 석탄 덩어리처럼 보이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가치가 있다. 우주에서 받은 소식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경매를 통해 수집한 이런 운석을 수십개나 신장위구르자치구 수도 우루무치에 있는 자신의 전시실에 전시하고 있다. 그의 수집품으로는 세임찬과 마찬가지로 100만 위안 정도에 낙찰받았다는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기비언’(Gibeon)이라는 운석의 일부 조각이 있으며 스스로 발굴했다는 탄소질 콘드라이트도 있다. 중국의 새로운 부유층의 화려한 씀씀이는 선망과 함께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회사 창업자나 사장들은 큰 운석을 선호한다”면서 “동료 수집가 중에는 우루무치 최초의 지하철 건설을 수주한 건설사 사장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에게 벼락부자라고 말하는 것은 상관 없지만, 물욕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자동차는 대량으로 생산하지만 운석은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 수집가와 연구자의 협력 관계 운석은 태양계 기원을 밝힐 단서로 여겨진다. 이런 운석이 지구에 생명을 가져왔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사막이나 북극에서 발굴된 운석은 국제 시장에서 거래된다. 희귀 운석은 경매에서 수십만 달러의 입찰가를 기록한다. 고생물학자와 고고학자들은 자신들의 발굴 현장에서 나온 운석을 경매에 내놓는 것을 비난하지만, 운석 전문가들은 이런 거래를 환영하고 있다. “수집가와 협력 관계에 있다”고 밝히는 모니카 그래디 영국 개방대학 유성학과 교수는 “우리는 스스로 발굴하고 수집할 자금이 없다. 대신 많은 운석 상인들이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발굴된 운석에 얼마나 높은 시장 가치가 있는지는 학자의 보증이 달려 있다고 한다. 이때 관련 학자는 자신의 연구에 운석 일부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 구매 급증, 늘어나는 가짜 하지만 중국인 구매자들이 몰려드는 것으로 운석의 가격은 급격히 상승했다. 오랜 경력의 수집가 사이에서는 가짜 운석이 나도는 것에 크게 우려하고 있다. 미국 애리조나주(州) 사막 투손에서 열린 세계 최대 운석 박람회에서 중국인 수집가 브라이언 리는 “그들은 운석의 가치 밖에 관심이 없다. 그 운석에 감춰진 과학을 이해하지 않는다”면서 “따라서 가짜 운석이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미국 전문지 ‘메테오리트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에릭 트웰커는 “중국 구매자는 큰 운석을 좋아해 값비싼 (운석) 시장에서 그들의 존재감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하지만 중국에서 출품된 운석 대부분은 가짜인데 이는 지난 수년간 계속되고 있는 문제로, 난 중국산 운석 모두에 불신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통 시안펑은 신장위구르자치구에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자신이 “하늘의 선물”이라고 부르는 운석을 찾고 있다. 그는 “혹독한 자연이 덮쳐오는 것조차 즐기고 있다”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사진=ⓒAFPBBNEWS=NEWS1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신라시대 굴식돌방무덤 발견, 유물 확인 안 되는 이유는..

    신라시대 굴식돌방무덤 발견, 유물 확인 안 되는 이유는..

    문화재청은 지난 13일 중부고고학연구소가 긴급 발굴조사를 시행하고 있는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대평리 산23-1번지 일원에서 신라 시대 굴식 돌방무덤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양평 신라 돌방무덤은 중부지역에서 발견된 신라 고분군으로는 최대 규모로, 유물은 도굴로 인해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조사팀은 고분의 축조 방법과 석실의 구조로 미뤄 6∼7세기에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중부고고학연구소 측은 이미 이 신라 돌방무덤들은 양평군 내에서는 잘 알려졌으며, 도굴은 이미 30년 이전부터 이뤄졌다고 밝혔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신라 굴식돌방무덤 발견 ‘최대 규모’

    신라 굴식돌방무덤 발견 ‘최대 규모’

    문화재청은 지난 13일 중부고고학연구소가 긴급 발굴조사를 시행하고 있는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대평리 산23-1번지 일원에서 신라 시대 굴식 돌방무덤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양평 신라 돌방무덤은 중부지역에서 발견된 신라 고분군으로는 최대 규모로, 유물은 도굴로 인해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조사팀은 고분의 축조 방법과 석실의 구조로 미뤄 6∼7세기에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중부고고학연구소 측은 이미 이 신라 돌방무덤들은 양평군 내에서는 잘 알려졌으며, 도굴은 이미 30년 이전부터 이뤄졌다고 밝혔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3400년 전 이집트 고대 사원 흔적, 주택가에서 발견

    3400년 전 이집트 고대 사원 흔적, 주택가에서 발견

    이집트 고대 사원, 알고보니 내 집 옆에 있었다? 이집트 기자의 주택가에서 3400년 전 고대 사원의 흔적이 우연히 발견돼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상형문자가 빽빽하게 새겨진 석회암 기둥들과 깨진 조각상 등이 모습을 드러냈으며, 현장에서는 이를 불법적으로 빼돌리려 한 남성 7명이 체포됐다. 이집트 경찰은 이들 7명이 2주 전부터 유물이 발견된 터를 파 왔으며, 무분별하게 땅을 판 탓에 유적지나 다름없는 곳은 곳곳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경찰은 “수상한 사람들이 집 근처에서 땅을 파고 있다는 주민들의 신고를 받았다”면서 “체포된 남성중에는 아마추어 고고학자도 포함돼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유물이 발견된 장소가 고대 사원이었으며, 이미 곳곳에 도굴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도난당한 유물이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행히 회수한 유물 중에는 1.8m길이의 깨진 조각상 일부가 포함돼 있으며, 유물 발굴팀은 더 많은 조각을 회수해 복원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전했다. 한편 이 사원은 기원전 1475년경에 활약했으며 아시아와 누비아에서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며 번성을 이룩한 이집트 제18왕조 제6대왕 투트모세 3세 시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집트 고고학 전문가들은 유물 발굴 전담팀을 꾸리고 대대적인 조사 및 발굴 작업에 착수할 것이라고 전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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