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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원조 사대문’ 풍납토성 내려보며…한성백제의 밤에 빠지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원조 사대문’ 풍납토성 내려보며…한성백제의 밤에 빠지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2회 강남야행(청담동에서 압구정동까지) 편이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과 압구정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무더위를 피해 야간에 진행하는 첫날이었다. 낮에 한 차례 비가 쏟아지고 갠 뒤라 안심했으나 출발 시각인 오후 6시쯤 비가 다시 뿌리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비’라는 일기예보를 믿고 일단 첫 목적지인 청담동배수지공원을 향해 출발했다. 이동하는 10여분 동안 신발과 옷이 다 젖었지만 공원에 도착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한강의 여름 저녁 풍경을 맞았다. 강남의 야경을 구경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참가자들은 이날 지하철 7호선 청담역 1번 출구에서 만나 청담배수지공원~한강공원~청담동 명품거리~K스타거리~압구정로데오거리~한일관 순으로 한강변과 밤거리를 누볐다. 무더위가 가신 쾌적한 거리를 걸으면서 오디오가이드시스템을 통해 강남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를 들었다. 해설을 맡은 청담동 토박이 이기훈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정감 있는 목소리로 강남의 속살을 조곤조곤 들려줬다.우리는 흔히 ‘조선’이라는 시대적 프레임에 갇히곤 한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조선시대의 전유물이 아니라 백제의 유산이라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원조 서울’은 강북 사대문 안이 아니라 강남이었다. 강남 중에서도 한성백제의 왕궁과 왕릉이 있던 송파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석촌동이 강남 사대문이었다. 서울 2000년 역사 중 1400년을 훌쩍 건너뛴 뒤 조선 건국 이후 600년 역사만 기억하면서 역사의 땅 강남지역을 조선시대 강북 사대문 주민용 초식(草食)재배지로 전락시킨 셈이다. 기원전 18년 고구려의 왕자 온조가 한강을 건너 오늘의 강남땅에 십제(백제)를 세운 이유는 한강을 방어선 삼아 북방의 강국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고자 했다. 475년 웅진(공주)으로 퇴각한 뒤 다시 깨어나기 전까지 ‘망각의 왕국’으로 버려졌다.답사단이 찾은 삼성동 청담배수지공원과 경기고 터는 한성백제의 옛 땅이었다. 고고학계에서 ‘삼성동 토성’이라고 불리는 이 공원은 한성백제시대 쌓은 토성의 흔적이 1980년대 초반까지 남아 있었다. 성 안에 흰 바윗돌이 우뚝 솟아 있었는지 조선 후기 문인 삼연 김창흡이 ‘백석성’(白石城)이라고 노래한 곳이다. 지금은 서울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단지가 옛 토성 터를 둘러싸고 더 높이 솟아 ‘아파트 산성’을 형성하고 있다. 봉은초등학교에서 청담배수지공원의 서북 경사면을 올려다보면 옛 산성의 윤곽이 흐릿하게나마 드러나는 듯하다.청담배수지공원 정자에 오르면 한성백제의 옛 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면 청담대교를 중심으로 동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면 잠실주경기장 너머 123층 롯데월드타워에 이르는 넓은 벌이 펼쳐진다. 바로 백제의 왕성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그리고 왕릉인 석촌리 고분 영역이다. 강 건너 강북 아차산을 마주 보고 고구려 군사와 대치하는 형국이다. 한강 서쪽 남산에서부터 동쪽 광나루까지 탁 트인 조망은 삼성동토성이 포기할 수 없는 백제의 군사요충지였음을 실감케 한다. 삼성동토성은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함께 한성백제의 3대 토성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삼성리 산성은 광주군 언주면 삼성리 봉은사 동북쪽에 있다. 총길이는 170간, 높이 1간의 토루(土壘)가 산허리를 에워싸고 한강에 접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서 1간은 180㎝이니 성 둘레는 500m쯤 된다. 청담역 2번 출구에서 삼성역 방향으로 가다가 경기고 동쪽 영동대로 언덕길에 ‘삼성동토성’ 표지석이 서 있다. 표지석에는 ‘건국 초 한산에 도읍을 정하였던 백제는 고구려 및 신라에 대항하여 한강유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곳 옛 삼성리 일대에서 뚝섬 맞은편까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구릉을 따라 토성을 쌓았다. 토성의 유적이 최근까지 남아있었으나, 강남 개발로 인해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삼성동토성은 탄천이 한강으로 합류하는 서쪽 구릉인 현재의 경기고에서 청담배수지공원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경기고에서 청담동배수지공원을 잇는 산성구간은 영동대로를 놓으면서 도로 아래에 묻혔다.향토사학자들은 지대가 가장 높은 경기고 화동관이 옛 삼성동토성 본성 터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문화유적총람에 따르면 이 성의 길이는 약 350m에서 500m에 이르는 테뫼식 산성(산 정상을 파내 축성하는 형식)이다. 1871년 작 광주부읍지에 보면 대모산 뒤쪽이 대왕면, 탄천 오른쪽이 중대면, 양재천 아래쪽이 언주면이라고 적혀 있다. 오늘날 강남 중심부를 이루는 옛 광주의 3개 면이다. 또 언주면 관내에 선릉과 정릉 그리고 양재역과 무동도 등 4개의 지명이 등장한다. 유감스럽게도 삼성리토성은 등장하지 않는다.삼성리라는 지명은 1914년 언주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봉은사, 저자도, 무동도의 ‘세(三) 땅을 합쳤다(成)’고 하여 만들어진 합성지명이다. 한강에 접한 언주면은 뚝섬으로 건너가는 청숫골 나루가 있던 곳이다. 조선시대 왕의 행차나 충청·경상·전라 삼남지방과의 연결은 주로 송파나루나 광나루를 통했지만 양재역이 번성했던 점으로 미뤄 선·정릉과 봉은사를 오가는 행렬도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삼성동을 이룬 세 곳 중 저자도와 무동도는 압구정동 공유수면 매립공사 때 해체돼 지금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단지 아래로 사라졌다. 압구정동이라는 지명을 남긴 한명회의 압구정 정자는 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 언덕에 있다. 봉은사는 조선시대 강남지역의 압도적인 랜드마크였다. 왕릉을 넘어서는 존재감을 보였다. 본래 성종을 모신 선릉 자리가 절집이었다. 1495년 선릉이 조성될 때 이곳에 견성암이라는 암자가 있었기에, 왕릉 안에서 능을 수호하는 능침사(陵寢寺)의 역할을 맡기면서 견성사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왕릉 안에 절집이 있는 것을 반대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이어지자 선릉의 동쪽으로 이전했다. 1562년 중종을 모신 정릉이 견성사 자리로 옮겨오면서 자리를 비워주고 지금의 수도산 아래로 옮겼다. 이때 80결(1결은 볏단 1000개)의 토지와 200명의 노비를 보유한 대찰로 발돋움했다. 1970년대 강남개발과정에서 봉은사 소유 10만평의 금싸라기 땅이 한 평당 5300원씩 총 5억 3000만원에 정부 수중으로 넘어갔다. 오늘의 삼성동 코엑스와 한전 부지이다. 1974년 서울에 고교평준화가 시행돼 경기고가 강남으로 이전, 학교를 짓는 와중에 한성백제시대 삼성동토성도 덩달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역사는 그렇게 햇볕과 달빛을 번갈아 쬐는 법이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 극장순례(영화의 고향) ●일시 : 8월 4일(토) 오후 6~8시 ●집결 장소 : 지하철 1호선 종각역 3번 출구 앞 ●무료 신청 :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 (futureheritage.seoul.go.kr)
  • 과테말라서 2500년 전 석비 발견… ‘과거사 지우기’ 흔적 나와

    과테말라서 2500년 전 석비 발견… ‘과거사 지우기’ 흔적 나와

    최소한 25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비가 과테말라에서 발견됐다. 특히 유적은 과거 중남미에서 꽃피운 올메카 문명이 지고 잉카 문명이 떠오르는 과도적 시기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20일 과테말라 문화부에 따르면 석비는 타칼릭 아바흐이라는 옛 도시에서 발견됐다. 권력의 상징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석비, 종교의식을 설명한 석비, 무늬가 없는 석비 등 발견된 유적은 모두 3개다. 석비는 올메카 문명의 전성기인 기원전 800~350년의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가 주목하는 건 석비가 발견된 상태다. 권력을 상징하는 석비는 거꾸로 세워진 상태로 발견됐다. 종교의식에 대한 설명을 새겨넣은 석비는 부분적으로 파손된 상태였다. 발굴에 참여한 고고학자 크리스타 쉬에베르는 "누군가 일부러 석비를 깬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과테말라 고고학계는 올메카 문명이 지고 잉카 문명이 떠오르면서 석비가 서 있는 방향이 바뀌거나 누군가 훼손했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새로운 문명이 떠오르면서 구시대의 유적을 훼손한 것 같다는 설명이다. 이런 가설이 가능한 건 유적이 발견된 타칼릭 아바흐의 역사 때문이다. 타칼릭 아바흐는 기원전 1500년부터 기원후 100년까지 올메카 문명의 영향권에 놓였던 곳이다. 그러나 잉카문명이 떠오르면서 도시의 주인은 천천히 바뀌어갔다. 잉카인들이 올메카 문명을 부정하면서 석비를 훼손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가설이 나오는 이유다. 올메카 문명은 서서히 쇠락했고, 잉카는 지금의 과테말라 북부, 멕시코,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등지로 영향권을 확대했다. 발굴팀은 "지배세력이 바뀌면서 옛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이른바 '과거사 지우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어 석비의 발견은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과테말라는 타칼릭 아바흐의 인류문화재 등재를 추진할 예정이다. 사진=소이502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7세기에 숨진 건장한 남성 노인의 뼈…서동요 무왕, 쌍릉 대왕릉 주인 가능성

    7세기에 숨진 건장한 남성 노인의 뼈…서동요 무왕, 쌍릉 대왕릉 주인 가능성

    “당시 사망한 백제왕은 무왕밖에 없어” 기존 여성 치아 발견 등 주장 뒤집어 “소왕릉 주인은 선화공주?” 추가 조사백제시대 왕릉급 무덤인 전북 익산 쌍릉(사적 87호) 대왕릉에 묻힌 주인공이 백제 제30대 임금 무왕(재위 600~641)일 가능성이 커졌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 4월 익산 쌍릉 대왕릉 내부에서 발견한 인골을 분석한 결과 “최소 50대에서 60~70대 남성으로 키는 161~170.1㎝이며 620~659년에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대왕릉과 소왕릉으로 구성된 쌍릉은 향가 ‘서동요’의 배경 설화인 서동설화의 주인공 백제 무왕과 그의 부인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여겨져왔다. 이번 분석 결과를 토대로 대왕릉 피장자의 정체를 무왕으로 본 통설에 힘이 실리게 된 셈이다. 이상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은 “정강뼈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사망연도로 산출된 620~659년 사이에 사망한 백제 왕은 무왕밖에 없다”면서 “그 외에도 무덤 구조와 규모, 유물의 품격, 당시 시대상황 등을 고려했을 때 대왕릉의 주인이 무왕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무왕의 출생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600년에 즉위해 641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다. 연구소는 대왕릉의 주인을 파악하기 위해 고고학과 법의인류학, 유전학, 생화학, 암석학 등 관련 전문가들을 총동원해 인골을 분석했다. 인골함에서 확인된 인골은 모두 102개로, 겹치는 뼈조각이 없어 모두 한 개체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법의인류학 분석을 맡은 가톨릭의대 응용해부연구소의 견해다. 이우영 가톨릭의대 교수는 “팔꿈치 뼈의 각도, 목말뼈의 크기, 넙다리뼈 무릎 부위의 너비 등으로 봤을 때 성별은 남성일 확률이 높다”면서 “넙다리뼈의 최대 길이를 이용해 간접적으로 키를 추정한 결과 약 161~170.1㎝로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인골의 주인보다 훨씬 후대인 19세기 성인 남성의 평균 키가 161.1㎝인 점을 고려하면 비교적 건장한 편이다. 삼국사기에서 무왕을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다’고 묘사한 부분과 일부 들어맞는다. 나이는 최소 50대에서 60~70대 노년층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는 분석이다. 이 교수는 “목 갑상연골에 골화(骨化)가 많이 진행됐고, 골반뼈 결합면의 표면에 거칠고 작은 구멍이 많다”면서 “남성 노년층에서 발병하는 등과 허리가 굳는 증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앞서 2016년 국립전주박물관이 일제강점기 쌍릉 조사 당시 대왕릉에서 수습한 유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찾은 치아 4점을 분석한 결과 20~40세 여성의 것이고, 무덤 내부에서 신라 토기가 출토됐다는 결과를 공개하면서 일각에서 대왕릉의 피장자가 무왕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번 인골 분류 과정에서 추가로 발견한 치아 2점에 대해 이 교수는 “전주박물관이 당시 의견서에 치아만으로 성별을 구별하고 나이를 추정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임을 밝혔다”면서 “유골과 치아를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결과를 확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왕릉과 180m 떨어진 소왕릉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로 남았다. 이 소장은 “현재는 대왕릉 조사에 집중하고 소왕릉 발굴은 내년부터 추진할 예정”이라면서 “소왕릉에서 인골 등 피장자를 추측할 수 있는 자료가 나오면 향후 대왕릉 피장자와의 관계를 규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인류가 빵을 언제부터 만들어 먹었을까

    인류가 빵을 언제부터 만들어 먹었을까

    인류가 언제부터 ‘빵’을 만들어 먹었을까? 인류의 농경문화가 시작되기 훨씬 전인 약 1만 4500년 전에 이미 빵을 먹었다는 것을 증명할 흔적이 발견돼 화제다. 이는 농경 생활이 시작되기 400여년 전으로, 9100년 전 터키 유적지에서 찾은 가장 오랜 빵의 흔적보다도 이른 것이다. 16일(현지시간) 코펜하겐대학 식물고고학자인 아마이아 아란즈-오태귀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은 요르단 북동부 검은사막의 ‘슈바이카 1’로 알려진 나투프 수렵 유적지에서 발견된 숯이 된 음식물을 전자현미경으로 분석해 이런 결과를 얻었다고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 최신호에 밝혔다. 아란즈-오태귀 박사는 “이번 연구에서 분석한 24종의 숯 잔해는 보리와 귀리, 외알밀 등의 야생 곡물을 빻아 체로 거른 뒤 반죽을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면서 “유럽과 터키의 신석기와 로마 유적지에서 발견된 이스트를 넣지 않은 플랫브레드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농경문화가 빵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연구팀은 밝혔다. 선사시대 인류가 야생에서 곡물을 채집해 빵을 만드는 데 시간과 노동력을 많이 투입해야 하는 등 여러 가지로 불편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곡물을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농경사회로 접어들었다는 설명이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창간 114주년 1904~2018] 오피니언 필진 새로워집니다

    [창간 114주년 1904~2018] 오피니언 필진 새로워집니다

    서울신문 창간 114주년을 맞아 7월 18일자로 오피니언면을 전면 개편합니다. 우선 강남순 텍사스크리스천대(TCU) 종교학 교수의 ‘인권과 젠더’와 정대화 상지대 총장의 ‘더 정치’, 곽병찬 논설고문의 ‘역사 앞에서 묻다’, 손성진 논설고문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김균미 대기자의 ‘글로벌 이슈’를 신설해 매주 1개 면씩 싣습니다.또 외국인 필자가 맡는 ‘글로벌 IN&OUT’은 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교수 등 5명이, 젊은이의 삶을 담은 ‘2030’ 칼럼은 양동신 건설인프라엔지니어 등 5명이 집필합니다. 금요칼럼에는 서동철 STV 사장과 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등 6명이 새로 참여합니다. 목요기명칼럼에는 최강욱 변호사와 황규관 시인, 변창흠 세종대 행정학과 교수 등이 합류했습니다. ‘열린세상’에서는 조성대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와 유종필 전 서울 관악구청장 등 14명이 새로 필을 듭니다. 특별칼럼에는 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 교수와 백종천 세종연구소 이사장,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센터장이, 기명에세이에는 대흥사 일지암 주지 법인 스님과 만화 ‘풀’의 김금숙 만화가, 최세일 한건축 대표 등이 새로 참여해 글을 씁니다. 화요칼럼에서는 권성우 숙명여대 국문과 교수와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가, 수요기명칼럼에서는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와 신가영 화가 등이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입니다. 이미혜 미술평론가의 ‘그림 해설’과 박상익 우석대 초빙교수의 ‘사진으로 보는 세상읽기’도 신설했습니다. ‘그림과 시가 있는 아침’의 필자는 곽재구 시인이 맡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새 필진 명단(가나다순).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 곽민수 영국 더럼대 고고학과 연구원, 김영준 ‘골목의 전쟁’ 작가, 김현집 미국 스탠퍼드대 고전학 박사과정, 바실리 블라디미로비치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박광국 가톨릭대 행정학과 교수, 박두복 국립외교원 명예교수,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초빙교수, 박영기 한국공인노무사회 회장, 박조원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이진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배민아 아우내공동체 상임이사, 알파고 시나씨 하베르 코레 편집장, 양중진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장, 유정훈 변호사, 이도헌 농업법인 성우 대표, 이은우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사무총장, 이한상 고려대 경영대 교수, 임명묵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3학년 학생, 저우위보 ‘인민망’ 한국지사 대표, 정종수 전 국립고궁박물관장, 조영학 번역가, 조현욱 과학과 소통 대표, 피터 워드 북한전문 칼럼리스트, 하대청 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육학부 교수, 한승혜 주부, 홍춘욱 키움증권 투자전략팀장.
  • 68년만에 돌아온 한·미 장병 유해 2구, DMZ 묻힌 1만명을 떠올렸다

    68년만에 돌아온 한·미 장병 유해 2구, DMZ 묻힌 1만명을 떠올렸다

    윤경혁 일병 유해 고국 품으로미확인 미군 유해는 미국 송환 6·25세대 고령화로 제보 줄어전투지형 훼손, 유해 발굴 고충 “남북이 비무장지대(DMZ)에서 6·25 전사자 유해를 공동 발굴할 날을 기대합니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은 13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한미 6·25 전사자 유해 상호봉환’ 행사 추모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유해 공동발굴에 대비해 우리는 국방부 유해발굴단의 전문 인력과 예산을 대폭 확충하고 상시 투입태세를 유지할 것”이라며 “6·25전쟁 당시 20만여 명의 한미 장병들이 이 땅을 지키기 위해서 희생하셨다. 그중 국군 12만명, 미군 8000여명은 아직 유해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남한 지역에 9만명, 북한 지역에 3만명, DMZ에 1만명의 유해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날 미국 측이 한국에 전한 유해는 윤경혁 일병이었다. 그는 1950년 11월 28일 북한 평안남도 개천지역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됐다. 1950년 9월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반격작전을 개시했지만 11월 25일부터 중공군의 압박으로 철수했는데, 이 때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윤 일병은 미국 제1기병사단 소속 카투사로 전쟁에 참전했다. 그의 유해는 북·미가 2001년 공동으로 진행한 북한 평남 개천지역 유해발굴 작업에서 수습됐다. 윤 일병의 유해는 유가족의 뜻에 따라 고향인 대구 달성군의 선산에 안장된다.  반면 향후 미국으로 돌아갈 미군 전사자 유해 한 구의 신원은 아직 신원이 확인되지 못했다. 2016년에 강원도 철원에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발굴한 유해로 역시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DMZ 내 유해 발굴은 여러면에서 절실한 상황이다. 우선 거의 10년간 진행한 유해 발굴 사업을 통해 국민의 제보로 발굴할 수 있는 곳들은 대부분 발굴이 완료된 상태다. 특히 6·25 세대의 고령화로 주민 제보의 정확성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  하지만 유족들은 적어도 제삿날이라도 알고 싶다며 힘든 하루 하루를 견뎌내고 있다. 실제 유해 발굴에 참여하는 한 군인은 “가족의 유해를 찾고 싶다고 직접 찾아오는 분들도 있는데, 문헌을 통해 해당 전투 지역을 추적해 찾아내도 DMZ 안이어서 맥이 풀리는 경우가 있다”며 “그럴 때면 고령의 유족이 충격으로 쓰러질까 소식도 전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국토 개발에 따른 지형 변화나 전투 현장의 훼손도 발굴이 힘든 요소다. 하지만 DMZ은 당시 환경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다만 DMZ 내 유해 발굴은 지뢰 등의 안전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군 관계자는 “이미 유해 발굴 시 필요할 때 전문 지뢰제거반의 도움을 받고 있다”며 “군단마다 유해 발굴 팀원들이 200~300명씩 있으며 군 장병들도 고고학, 인류학 등 전공 지원자들로 구성돼 있다”고 말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서로 꼭 껴안은 채 묻힌 3000년 전 ‘부부 유골’ 발견

    서로 꼭 껴안은 채 묻힌 3000년 전 ‘부부 유골’ 발견

    마치 살아있을 때처럼 서로를 꼭 껴안은 채 땅에 묻힌 3000년 전 부부의 유골이 발견됐다. 우크라이나 서부에 있는 테르노필에서 발견된 유골 2구는 3000년 전 해당 지역에 살았던 남녀의 것으로, 남성은 반듯하게 누운 채 머리만 한쪽 방향으로 돌려져 있으며 여성은 남성을 포옹하듯 몸 전체가 남성을 향한 채 누워있는 형태다. 이를 분석한 우크라이나 고고학연구소의 미콜라 밴드리브스키 박사에 따르면, 두 유골의 주인 중 남성은 매장 당시 이미 사망한 상태였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남성은 하늘을 향해 반듯하게 누워있는 반면 여성은 남성을 향해, 남성을 포옹한 채로 누워있으며, 이는 곧 먼저 사망한 남편과 헤어질 수 없었던 여성이 스스로 남편과 함께 산 채로 매장되길 원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의 설명이다. 전문가에 따르면 당시 이 여성은 스스로 독약을 마셨을 것으로 보이며, 독약으로 인해 숨이 끊어지기 전 스스로 무덤으로 들어가 남편의 시신 곁에 누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문화적 특성으로 보아 내세에서도 남편과 함께 하길 바라는 아내의 바람이 투영된 것으로 추측된다. 밴드리브스키 박사는 “만약 매장 당시 여성이 살아있었다면 이런 자세로 묻히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는 커플이었으며, 이러한 매장 형태는 매우 드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두 사람의 얼굴이 매우 가깝게 맞닿아 있다. 특히 이마와 이마가 마치 마주보듯 붙어있다”면서 “두 사람은 청동으로 만든 장식품이 달려있는 옷을 입은 채 매장됐으며, 머리 근처에서는 도자기로 만든 그릇과 병 등이 놓여 있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3000년 전 청동기 시대 후기 당시 사람들은 내세와 영혼의 존재를 믿었으며, 이번에 발견된 유골 역시 이러한 문화적 특성에 따라 다음 세상에서도 부부가 함께 하길 희망했다는 것을 뜻한다고 분석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이광식의 문화유랑기] 대머리 난봉꾼 나가신다! - 로마사의 문제적 인물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광식의 문화유랑기] 대머리 난봉꾼 나가신다! - 로마사의 문제적 인물 율리우스 카이사르

    ‘주사위는 던져졌다!’ 영어로 줄리어스 시저로 불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44)는 로마 제국 천년사에서 최고의 영웅, 천재로 꼽히는 인물로, 카이사르라는 이름 자체가 황제를 뜻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차르’ 역시 이 카이사르가 어원이다. ​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는 황제가 되지는 못했다. 자객들에게 암살당했을 때 그의 직책은 종신 독재관이었다. 로마의 초대 황제는 그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되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토대를 닦은 사람은 다름아닌 카이사르였다. 여타의 장구한 제국들의 역사 중에서 이 인물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례는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1500년 로마사에서도 최고의 문제적 인물이었다. ​​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을 정복하여 로마화함으로써 오늘날 유럽의 기초를 놓았다. 갈리아는 고대 로마인이 갈리아인(켈트족)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살던 지역으로, 북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다. 이곳을 정복한 카이사르는 불멸의 전쟁사인 ‘갈리아 전쟁기’를 남긴 명문장가로도 유명하지만, 그밖에 유명한 고사와 어록들을 남겨 오늘날에도 자주 입길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 중 유명한 것은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말과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이다. 카이사르가 남긴 유명한 어록 중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도 빼놓을 수가 없다. 4년이나 지속된 내전에서 승기를 잡은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정복한 데 이어 소아시아, 튀니지, 스페인 등지의 반란을 평정한 후 원로원에 보낸 편지의 첫 문장이다. 지금도 말보로 담뱃갑에 이 문장이 찍혀 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전략, 전술의 천재로, 어떠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기어히 승리를 엮어내는 데 신묘한 능력을 보여, 패배를 모르는 상승장군이었다. 그는 결국 로마로 진군하여 정권을 손에 쥐게 된다. 여기서 로마는 카이사르가 다스리는 실질적인 제정에 접어들게 되었다. 카이사르가 타고난 재주는 문무를 아우르는 전방위적이지만, ‘색’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뭇 남정네들이 부러워한 능력은 그의 뛰어난 바람둥이 재질이었다.​ 그렇다고 그다지 미남형 사내도 아니었다. 남아 있는 카이사르 조각상을 보면 버쩍 마른 인상이다. 그런데도 그 주위에는 여인네의 분가루 냄새가 가실 날이 없었다. 숱한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고 헤어지기를 거듭했지만, 어떤 여자도 그를 원망하는 일이 없었다니까,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카사노바라고나 할까. 만약 카이사르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썼다면 그의 ‘갈리아 전쟁기’를 능가하는 롱 셀러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정치인이라고 바람기가 없어란 법은 없지만 이처럼 뒤끝을 갈끔하게 처리하는 능력은 필수가 아닐까. 카이사르의 바람기는 뜻하지 않은 때에 그에게 ‘굴욕’을 안겨주기도 했는데, 로마인으로서 최고의 영예라는 개선식을 거행할 때 행진하는 군단병들이 그날 정한 구호가 “시민들이여, 마누라를 숨겨라. 천하의 대머리 난봉꾼이 나가신다!”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병사들에게 항의했지만, 병사들은 구호를 정하는 것은 자기네들의 권리라면서 경애하는 총사령관 앞에서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연도에 늘어선 로마 시민들이 병사들이 외치는 구호에 카이사르의 대머리와 그의 바람기를 연상지으며 얼마나 낄낄거리고 웃었을까 능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바람기가 그의 죽음에 일조한 내력을 보면 덧없는 인간사의 얄궂음에 우리를 묵언 속에 빠뜨린다. 바로 카이사르의 평생 연인인 세르빌리아의 아들 브루투스가 그로부터 20년 후 공화파로서 카이사르를 암살하는 데 주동이 된 것이다. 카이사르는 그에게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내전기에 카이사르의 반대편에 서서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지만, 카이사르는 그를 터럭 하나 다치지 않고 어머니 세르빌리아에게로 돌려보냈던 것이다. ‘브루투스, 너마저도!’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14명의 공화파 자객으로부터 습격을 받아 온몸을 난자당한 끝에 삶을 마감했다. 향년 56세. 평생 수많은 전장을 누비면서도 목숨을 잃지 않았던 카이사르가 동족의 칼에 쓰러진 것이다. 자객들의 칼부림에 저항하다가 그들 속에서 브루투스를 보고 내뱉은 “브루투스, 너마저도!”란 말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브루투스의 얼굴을 본 순간 카이사르는 저항을 포기하고 자신의 토가 자락을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그리고 얼마 후 쓰러졌다. ​그가 쓰러진 3월 15일은 서양사에서 유명한 날이다. 웬만한 서양인들은 이 날짜만 대도 다 안다. 이날은 한국 현대사에서도 유명한 날에 속한다. 이승만의 자유당이 전후후무한 부정선거를 저지른 3.15 부정선거로. 마지막으로 카이사르의 음식관과 재물관에 대해 약간 덧붙이자. 그는 평생 음식 투정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음식에 대해서 불평하는 사람을 보고는 이런 말을 했다.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먹으면 된다.” 그의 음식관은 조선시대 도덕책인 ‘소학’에 있는 다음 말과 상통한다. “음식 밝히는 사람을 비천하게 여기는 것은 작고 사소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큰 마음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재물관은 자신을 위한 부의 축적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기채의 귀재였다. 당시 로마 제일의 갑부에게 꾼 돈만 해도 엄청난 액수였다. 나중에 이 갑부는 제 돈 떼일까 봐 카이사르의 파산을 적극 막아주며 재정 보증까지 서주었다니까, 그 방면에서도 카이사르는 천재 반열에 들 만하다. 그는 그 돈을 사회사업과 군대편성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물론 애인들에게 통 큰 선물도 한 모양이다. 애인 세르빌리아에게는 큰 별장 한 채를 사주었다니까. 그녀는 애인과 아들을 모두 잃은 후 그 집에서 여생을 보냈다. 카이사르 그의 이름은 이직도 우리 주변에 남아 있다. 7월 줄라이(July)는 7월에 태어난 카이사르의 이름 율리우스에서 나왔다. 네덜란드 고고학자들이 카이사르가 살아 있을 때 만들어진 두상을 3D 기술로 스캔, 복원한 얼굴. 이광식 칼럼니스트 joand999@naver.com  
  • “비무장지대 전사자 1만명 유해도 찾는 게 꿈”

    “비무장지대 전사자 1만명 유해도 찾는 게 꿈”

    “비무장지대(DMZ)에 1만명의 미수습 전사자(전체 13만명 중 10%)의 유해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나라도 유해를 더 찾아내 출생일로 제사를 지내는 유족에게 사망일이라도 알려드리는 게 꿈입니다.”서울 용산구 국방부 영내에서 12일 만난 주경배(51) 육군 1군단 유해발굴과장(중령)은 유해 발굴의 필요성을 묻자 유족의 이야기로 답을 대신했다. “몇 년 전 이맘때쯤 한 할머니가 6·25전쟁에서 전사한 오빠의 유해를 찾는다며 절 만나러 왔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생수를 한 병 드렸는데, 그냥 가져갔어요. 며칠 후 손편지가 왔는데 전장에서 물도 못 먹고 갈증을 느끼며 싸웠을 오빠를 생각하며 못 마셨다는 겁니다. 이런 분들을 만나면 호국영령의 유해를 더 찾겠다는 생각이 뼛속에 각인됩니다.” 주 과장은 2007년 유해발굴 관련 업무를 시작해 2016년 우리나라 유해발굴 박사 1호가 됐다. 붓을 들고 섬세하게 유해를 발굴하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삽을 들고 현장에서 발굴지역을 찾아내는 군단급 유해발굴과를 모두 거쳤다. “통상 언론에는 고고학자처럼 붓을 든 국방부 감식단이 조명됩니다. 물론 감식단의 고생은 말도 못합니다. 다만 발굴된 유해에는 삽으로 수백 곳을 1~2m 깊이로 파내면서 유해를 찾아다니는 각 군단 장병의 땀도 배어 있습니다.” 육군은 군단별로 유해발굴팀을 2~3개씩 운영한다. 100명이 한 팀을 이뤄 4주씩 작전지역에서 역사자료, 지역주민 제보 등을 이용해 유해를 찾는다. “지난해 경기 양주 신암리에서 75구의 유해가 한번에 나왔습니다. 한 주민이 제보했는데 소나무 분재를 심은 밭이었죠. 소나무를 피해 20군데를 삽으로 2m가량씩 팠고 마지막으로 진입로 찻길까지 2.5m를 팠는데 유해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10㎝만 더 팔걸 후회하기 싫어 포클레인을 동원해 마지막으로 진입로를 깊게 팠더니 뼈가 걸려 나왔죠.” 작은 면적에서 가장 많은 유해가 나온 사례였다. 하지만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다. 금속탐지기로 수통 등을 감지한 뒤 유해를 찾는 방식이어서 수백 번씩 땅만 파는 헛수고도 많을 수밖에 없다. 170명의 장병이 한 달간 찾았지만 단 한 구의 유해도 못 찾는 경우도 있다. 주 과장은 “그럴 때면 대기업에서 뼈 탐지기를 개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복무하던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진행된 설악산 저항령(해발 1400m) 발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한 등산객이 제보해서 발견했는데 바위틈 여기저기에 유해가 꽂혀 있었죠. 6·25전쟁 때 국군수도사단 1개 중대가 전멸한 곳이었는데 매일 3시간 30분을 등산해 유해를 찾아서 결국 150구를 수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 과장은 국민의 관심을 호소했다. “처음엔 미국을 벤치마킹해 시작했지만 이젠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갖게 됐습니다. 유해발굴과 관련해 적극적인 제보(1577-5625) 부탁드립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주강현 신임 국립해양박물관장

    주강현 신임 국립해양박물관장

    해양수산부는 9일자로 국립해양박물관 제2대 관장에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를 임명한다고 8일 밝혔다. 임기는 3년이다. 민속학 박사인 주 신임 관장은 경희대 중앙박물관 큐레이터를 시작으로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2012 여수세계박람회 전략기획위원, 국회해양문화포럼 민간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특히 해양사와 고고학·민속학·인류학 등 융복합 연구를 수행하면서 우리나라 해양문화에 대한 연구논문 50여편과 저서 50여권을 집필하는 등 전문성을 갖췄다고 해수부는 소개했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2차대전 중 파괴·약탈 막으려”…숨겨둔 고대 유물 발견돼

    “2차대전 중 파괴·약탈 막으려”…숨겨둔 고대 유물 발견돼

    이집트의 역사적인 도시이자 지중해 연안 관광휴양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한 고고학 박물관에서 고대 유물 몇백 점이 발견됐다. 4일(현지시간) AFP통신 등에 따르면, 이집트 고대유물부는 이날 최근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그레코-로만 박물관 정원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은폐 장소를 발견했으며 거기에는 고대 유물 몇백 점이 매장돼 있었다고 밝혔다. 발견된 유물들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콥트, 그리고 이슬람 시대에 만들어진 항아리 등의 도자기로, 최근 박물관 정원을 복구하는 공사 중에 발견됐다. 이집트 고대유물부에서 고대 이집트 유적을 총괄하고 있는 아이만 아쉬마위 책임자는 “이 항아리들은 (영국인) 고고학자 앨런 로우와 박물관 정원 직원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숨겨놨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설명했다. 유물을 숨긴 목적은 “전쟁 중에 반복되는 폭격으로 파괴되거나 약탈당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며 “유물 매장 작업은 문서나 박물관 소장품 목록 등에 기록을 남기지 않고 신속하게 실행됐다”고 그는 덧붙였다. 또 고대유물부 산하 이집트·그리스·로마 유물 중앙부의 책임자인 나디아 카드르는 “은폐 장소에서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도자기들이 발견됐다”면서 “그중에는 그리스 시대에 화장한 유골의 재를 넣어놓으려고 만든 도기 ‘히다리’ 외에도 그리스·로마·비잔틴 시대에 만들어진 채색 항아리와 대접, 식기류 등이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사진=이집트 고대유물부 제공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여기는 남미] 볼리비아 ‘티티카카 호수’에 수중박물관 건립한다

    [여기는 남미] 볼리비아 ‘티티카카 호수’에 수중박물관 건립한다

    관광지로 유명한 볼리비아의 티티카카 호수에 수중박물관이 들어선다. 볼리비아 정부가 티티카카 호수에 수중박물관 건립계획을 공식 발표했다고 현지 언론이 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윌마 알라노카 볼리비아 문화부장관은 "수중박물관이 건립되면 리조트 겸 고고학과 지질학, 생물학의 연구센터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면서 사업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그는 "아마도 지구상에서 유일한 장소가 될 수 것"이라면서 티티카카에 대한 관심이 한층 높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티티카카 호수에 수중박물관 건립이 검토되기 시작한 건 지난해 탐사결과가 공개되면서다. 볼리비아와 브뤼셀리브레대학이 공동으로 실시한 탐사 결과 티티카카 호수는 고대 문명의 흔적을 안고 있는 거대한 유적이었다. 티티카카 호수 바닥에선 동물의 뼈로 만든 도구와 세라믹, 유골, 주방도구 등 유물 1만여 점이 발견됐다. 프레티와나코타, 티와나코타, 잉카 등 티티카카 호수를 끼고 발전했던 문화와 문명이 남긴 흔적이다. 볼리비아 정부는 개발 타당성 연구 끝에 수중박물관 건립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수중박물관이 들어서는 곳은 라파스로부터 약 100km 지점에 위치한 마을 산페드로 데 티키나 인근이다. 건립에는 1000만 달러(약 111억원)이 투입된다. 문화부 발표에 따르면 유네스코와 벨기에가 총 2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해 볼리비아가 조달해야 하는 자금은 800만 달러다. 알라노카 장관은 "재무부와 긴밀하게 협의해 예산의 문제가 없도록 만전을 기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티티카카 호수는 볼리비아와 페루 국경에 위치해 있다. 해발 3800m에 있는 호수로 면적은 8562km2에 이른다. 우유니 소금사막과 함께 볼리비아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진=자료사진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책꽂이]

    [책꽂이]

    피싱(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정미나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바다를 좋아하는 세계적인 고고학자 브라이언 페이건이 취미가 아닌 생존 활동으로서의 고기잡이가 인류를 어떻게 바꾸고 먹여 살렸는지 그 역할과 의미를 규명했다. 568쪽. 1만 8900원.내가 김소연진아일 동안(황선미 글, 박진아 그림, 위즈덤하우스 펴냄) 동화작가 황선미의 신작으로 학교 선생님이 내성적인 진아에게 학교 생활에 적응이 더딘 소연이의 도우미를 부탁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자신의 고충을 알아주지 않는 선생님에 대한 원망, 철저히 혼자인 것 같은 외로움 등 진아의 마음속 사투를 섬세하게 그렸다. 156쪽. 1만 1000원.파리발 서울행 특급열차(오영욱 글·그림, 페이퍼스토리 펴냄) ‘오기사’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오영욱 작가가 지난 4월 프랑스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해 프랑스, 독일, 폴란드, 벨라루스, 러시아, 몽골, 중국, 북한을 지나 한국의 서울역에 도착하기까지 9개 나라 국경을 넘는 대륙 횡단 여정을 담았다. 펜으로 그린 지도 그림과 사진을 곁들였다. 324쪽. 1만 6000원.개와 떠나는 대한민국(성연재·서희준 지음, 그리고책 펴냄) 여행을 떠날 때마다 가족 같은 반려견이 눈에 밟혀 고민이 많았던 애견인들을 위한 여행서. 전국 곳곳에 반려견과 함께 갈 수 있는 여행지 280곳과 반려견 동반 가능 숙소, 맛집, 카페 등의 정보를 상세히 담았다. 396쪽. 1만 9800원.잘 지내나요? 도쿄 책방(요시이 시노부 지음, 남혜선 옮김, 책읽는수요일 펴냄) 독특한 콘셉트를 내세워 오랫동안 사람들 곁을 지켜온 일본의 모리오카 서점, 서점 B&B, 시부야 퍼블리싱 앤 북셀러스 등 도쿄의 동네 책방 10곳을 6년간 답사하고 관찰한 취재기다. 북디렉터와 1인 출판사 대표들을 만나 책과 서점의 미래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도 실었다. 560쪽. 1만 6000원.니키 드 생팔X요코 마즈다(구로이와 유키 지음, 이연식 옮김, 시공아트 펴냄) 20세기 예술 사조 중 하나인 누보 레알리슴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예술가 니키 드 생팔과 우연히 니키의 판화 작품을 보고 매료된 후 니키의 컬렉터로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한 요코 마즈다의 특별한 우정 이야기를 담았다. 372쪽. 1만 5000원.
  • [와우! 과학] 로마 독재자 카이사르의 진짜 얼굴 3D로 복원해보니…

    [와우! 과학] 로마 독재자 카이사르의 진짜 얼굴 3D로 복원해보니…

    “그는 절대 황제가 된 적이 없지만, 그의 이름은 영원히 황제를 뜻하게 됐다” 이는 우리에게 줄리어스 시저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 정치인이자 장군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B.C.100-B.C.44)를 두고 하는 말이다. 로마제국 최고 지배자였던 아우구스투스부터 네로까지 카이사르의 성을 세습하면서 카이사르는 황제 중에서도 실권을 장악하고 마음껏 휘두르는 전제군주나 독재자에게 붙여졌다. 황제를 뜻하는 독일의 카이저와 러시아의 차르 역시 카이사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듯 세계사에 큰 영향을 준 독재자 카이사르는 생전 어떤 모습이었을까. 네덜란드 고고학자들이 카이사르가 살아있을 때 만들어진 두상을 3D 기술로 스캔해 복원한 얼굴 모형을 공개해 화제가 되고 있다. 22일(현지시간) 네덜란드 국립고대유물박물관이 발표한 카이사르의 복원된 얼굴은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 강인한 영웅의 모습은 아니다. 이번 얼굴 모형은 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카이사르의 두상과 투스쿨룸 흉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튜린 박물관이 소장한 두상 등의 3D 스캔 데이터를 이용해 만든 것이다. 카이사르의 얼굴 복원을 주도한 네덜란드 고고학자 톰 뷔텐도르프는 네덜란드 일간 HLN과의 인터뷰에서 “카이사르의 머리에는 꽤 큰 혹이 있다. 이런 혹은 태어날 때 생길 수 있다고 한다”면서 “당시에는 현실적인 작품이 유행이었다”고 설명했다. 복원 작업은 얼굴 복원 전문가인 고고학자 겸 자연인류학자 마자 드홀로지가 주도했다. 드홀로지는 대부분 복원 작업에서 카이사르가 살아있을 때 만들어진 투스쿨룸 흉상의 3D 스캔 데이터를 사용했다. 왜냐하면 네덜란드 박물관이 소장한 두상은 코와 턱 모양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손상돼 있기 때문이다. 한편 카이사르의 복원된 얼굴 모형은 오는 8월 말까지 네덜란드 국립고대유물박물관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사진=네덜란드 국립고대유물박물관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보석부터 거울까지…2000년 전 ‘잠자는 미녀’ 미라 발견

    보석부터 거울까지…2000년 전 ‘잠자는 미녀’ 미라 발견

    2000년 전 고귀한 신분의 ‘잠자는 미녀’ 미라가 발견돼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협회 연구진이 예니세이 강(江) 인근에서 발견한 이 미라는 2000년 전 여성의 것으로, 고급스러운 실크 치마를 입은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장례식 때 쓰인 것으로 보이는 잣과 품질이 좋은 원석 장신구, 중국 스타일의 거울 등이 함께 발견됐다. 연구진은 이 여성이 묻힌 돌무덤의 환경적 특성 때문에 해당 여성의 시신이 자연적으로 미라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여성 미라와 함께 발견된 부장품에는 ‘메이크업 상자’로 불릴만한 유물이 발견됐는데, 여기에는 원석으로 된 벨트 장신구와 거울 등 여성이 외모를 치장하는데 쓰일만한 물품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연구진은 돌무덤에 묻힌 여성이 사망당시 나이가 어렸으며, 실크 치마 등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신분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추정했다. 또 ‘메이크업 상자’는 무덤 주인인 여성의 사후세계를 위해 함께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연구를 이끈 현지 고고학자 마리나 킬루노브스카야 박사는 “미라의 하반신 부분의 보존도가 특히 양호하다. 이것은 일반적인 미라로 보기 어려우며 돌무덤에 갇힌 후 자연환경에 의해 자연적으로 미라가 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 여성 미라와 부장품을 통해 당시의 귀족 풍습과 문화를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궈모뤄와 폼페이오/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궈모뤄와 폼페이오/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지난 12일로 40주기(周忌)를 맞은 궈모뤄(郭沫若)는 ‘20세기 중국 최고의 지성’으로 불린 역사학자이자 고고학자, 작가이자 극작가, 시인이다. 다섯 살 때 사서오경을 줄줄 외워 신동 소리를 들은 그는 고교를 졸업한 뒤 일본 규슈대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장티푸스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어 의학을 포기하고 문학으로 삶의 방향을 틀었다. 문학단체 창조사(創造社)를 결성해 낭만주의 열풍을 일으켰고 여성 해방을 주창한 ‘3인의 반역적 여성’을 내놓으며 극작가로 이름을 떨쳤다. 1927년 국민당 탄압을 피해 일본에 망명해 갑골문과 중국 고대사 연구로 학술 분야에서도 일가(一家)를 이뤘다. 1937년 중·일전쟁 때 귀국한 그는 항일에 참가하는 와중에도 희곡, 산문, 소설을 잇따라 발표하며 작가로서 성가를 높였다. 작가, 학자로 쌓은 탁월한 업적도 그의 끝없이 권력을 붙좇는 모습에 빛을 완전히 잃었다. 공산당이 반성하라면 반성했고 문단 동료를 비판하라면 앞장서 두들겨 팼다. 공자 등 역사 인물을 반박하라면 바로 반대 학설을 내놓았다. “1955년 한 농민이 ‘참새 때문에 농사를 못 짓겠다’는 탄원서를 정부에 보냈다. 농업부는 ‘참새 식성에 대해 연구를 한 적이 없어서 박멸이 필요한지 말할 수 없다’는 답변을 보냈다. 며칠 뒤 마오쩌둥(毛澤東)이 ‘전국 참새를 섬멸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중국문화예술계연합회(文聯) 주석이던 그는 ‘수천 년간 우리 양식을 수탈하여 저질러 온 죄악, 이제야 관계를 청산할 때가 왔다’며 참새를 상대로 선전 포고를 했다.”(‘중국인 이야기’ 중에서) 이뿐만이 아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정치 풍향이 바뀐 것을 재빨리 알아채고는 “지금 보면 내가 이전에 발표했던 문장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수많은 저작을 직접 불태웠다. 소련 방문 때 마오를 수행한 궈는 그를 태양에 비유하는 시를 바쳤다. “1만미터 높은 하늘에서/104호 비행기 안에서/어쩐지 햇빛이 두 배로 밝게 빛나더라니/비행기 안팎에 두 개의 태양이 있구나!” 문혁을 찬양했던 그는 문혁 4인방이 체포되자 “통쾌하도다”라는 글을 썼다. 덕분에 정무원 부총리와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 중국과학원장 등 정치·문화계의 요직을 섭렵하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권력을 누렸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72세 생일을 맞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바친 헌사가 도마에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바를 재빨리 알아내 충실히 대변하고 실행해 온 그는 트위터에 ‘저희 부부는 대통령께서 국민을 위해 일하는 동안 힘과 불굴의 의지를 유지하시길 기원한다’며 ‘국가를 대표해 당신의 밑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황송하다’고 썼다. 의회 청문회에선 “외교정책이 트럼프의 개인 사업과 이해 충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기이한 질문이다. 가짜 뉴스다”라고 전면 부인하며 트럼프 비호에 몸을 던졌다. 일개 하원의원이던 폼페이오가 중앙정보국(CIA) 국장과 국무장관 등 요직으로 승승장구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 일 것이다. 궈모뤄나 폼페이오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곡학아세가 처세의 무기임에 분명한 것 같다. 그렇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khkim@seoul.co.kr
  • 페루 게레로 덴마크전 나서며 미이라들에 고마워할 이유

    페루 게레로 덴마크전 나서며 미이라들에 고마워할 이유

    페루의 주장 파울로 게레로(플라멩구)가 17일 새벽 1시(한국시간) 러시아 사란스크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덴마크와의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 C조 첫 경기에 나선다면 지난 1999년 칠레와 아르헨티나 국경의 해발고도 6400m 지점에서 발견된 세 구의 고대 잉카인 미이라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영국 BBC의 16일 보도에 따르면 게레로가 지난해 금지약물 양성반응이 나와 내려진 출장 정지 징계를 푸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88경기의 A매치에 출전해 페루 역대 축구선수 중 가장 많은 득점(34골)을 기록했고 페루 대표팀을 이끄는 정신적 기둥인 그의 그라운드 복귀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거의 20년 전에 1.5m 흙과 바위 밑에서 발견된 이들 미이라는 CT 촬영 결과 마치 최근에 숨을 거둔 이들처럼 내부 장기가 멀쩡히 남아 있었다. 해서 그들이 화산 폭발로 목숨을 잃기 전 무얼 먹었는지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레로는 지난해 10월 양성반응이 나온 뒤 계속해서 자신은 코카인 약물을 복용한 것이 아니라 몸이 좋지 않아 마셨던 허브차에 코카잎이 들어가는 바람에 성분이 검출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페루인들은 코카잎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다 한 시간쯤 뒤 버리는 식습관을 8000년 이상 유지했으며 고소 증세를 낫게 하려는 목적 때문에 합법이라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 국제축구연맹(FIFA)은 움쩍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지난해 10월 월드컵 예선 마지막 두 경기에 그는 나오지 못했고 아르헨티나와 0-0으로 비기고 지난해 10월 콜롬비아와 1-1로 비기면서 페루는 지난 1982년 이후 처음으로 잡은 본선 진출 기회를 놓치는 듯했다. 그러나 페루 대표팀은 뉴질랜드와 두 차례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벌여 원정 경기를 0-0으로 비기고 홈 2차전을 2-0으로 이기며 극적으로 본선 진출권을 손에 넣었다.더욱 절박해진 게레로와 변호인단은 지난해 12월 FIFA 청문회에 브라질 생화학자 LC 카메룬 박사와 미국 사우스플로리다 대학의 고고학자인 찰스 스태니시 박사를 초빙해 코카 잎을 다른 허브들과 냄새로 구분하기가 쉽지 않아 게레로가 주장하는 일과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명백한 증거가 필요했다. 해서 2013년 이들 미라의 머리카락에 대한 부검 보고서에 게레로의 소변 샘플에서 검출된 벤졸 성분과 똑같은 것들이 나왔다는 점을 덧붙였다. 이렇게 해서 400년 전 이상 화산폭발로 잿더미에 갇혔던 이들 미라에서 검출된 성분과 1859년 독일 화학자 알베르트 니만이 처음 조제한 코카인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니었다. 지난 4월 수도 리마의 스타디움에는 수천명이 운집해 영원한 주장의 컴백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또 유고 요리스 프랑스, 밀레 예디낙 호주, 사이몬 카이예르 덴마크 주장 등 같은 조에 속한 대표팀 주장들이 연서명해 게레로가 나서는 경기에서 대결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렇게 해서 대회 개막을 2주 앞둔 지난달 31일 스위스연방법원은 14개월의 출장 정지 징계를 일단 풀어주기로 결정했고, 국제스포츠분쟁재판소(CAS)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게레로는 16일 덴마크와의 경기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스페인어로 전사란 뜻을 가진 게레로가 페루에게 값진 선물을 안길 수 있을지 지켜보자.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어린이 56명 산 채로…페루서 인신공양 유골 발견

    어린이 56명 산 채로…페루서 인신공양 유골 발견

    페루에서 산 제물로 바쳐져 희생된 어린이들의 유골이 또다시 무더기로 발견됐다. 최근 영국 데일리메일 등 해외언론은 페루 북동부 트루히요시 완차코 해변 인근에서 최대 규모의 인신공양 흔적이 또다시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현지 고고학자인 가브리엘 프리에토 탐사팀이 이번에 발굴한 유골은 어린이 56명과 어린 라마 30마리로 약 600년 전 모두 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앞서 지난 4월에도 같은 탐사팀이 북부 라리베르타드 지역 바다 절벽 위에서 어린이 140여 명과 라마 200여 마리의 유골을 발견한 바 있다. 어린이들이 희생된 단일 인신공양 사건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규모로 유골이 발견된 두 지역 간의 거리는 수㎞에 불과하다. 또한 2011년에도 탐사팀은 라리베르타드 지역에 있는 3500년 된 사찰에서 어린이 42명과 라마 76마리의 유해를 발견해 이때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됐다. 탐사팀에 따르면 이번에 발굴된 어린이들은 6~8세, 11~14세로 모두 옷을 입을 상태였으며 병을 앓았던 흔적은 없이 건강했던 것으로 분석됐다. 또한 어린이들은 모두 중산층 계급 이상으로 정확한 사인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어린이들을 죽음으로 내 몬 것은 당시 이 지역에서 문명을 꽃 피웠던 치무왕국이다. 10세기 초부터 15세기까지 페루 북서부 태평양 해안가를 중심으로 번성한 치무왕국은 잉카 이전 시대의 국가다. 연구에 참여한 미국 툴레인대학 인류학자 존 베라노 교수는 "유골의 흔적이 인신공양의 증거로 보인다"면서 "희생됐을 당시 폭우와 홍수의 영향으로 아사(餓死)가 늘어나자 종교의식에 따라 어린이들이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것"이라고 밝혔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씨줄날줄] 문화재 예산 0.18%/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문화재 예산 0.18%/서동철 논설위원

    문화재위원회는 최근 백제 대통사(大通寺) 터로 추정되는 충남 공주시 반죽동의 주택 신축부지를 보존하기로 의결했다. 발굴조사 결과가 나오자마자 문화재위가 발빠르게 보존 결정을 내림에 따라 문화재청은 공주시와 곧 부지 매입 절차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고도 조성사업에 따라 한옥을 지으려 했던 땅이다.문제는 이번 결정으로 걱정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화재위가 의결한 보존 부지는 204㎡에 불과하다. 대통사는 백제 성왕(재위 523~554)이 중국 양나라 무제를 위해 축조한 사찰로 알려지고 있다. 왕도(王都)에 지은 국가적 사찰의 전체 규모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대통사 터의 유적 성격을 제대로 밝히려면 장기간에 걸친 발굴조사가 불가피하다. 나아가 발굴조사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성과가 축적되면서 대통사 터, 혹은 그에 준하는 대형 사찰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지면 사적 지정도 추진될 것이다. 사적 지정이 중요한 이유는 주변 지역 개발의 제한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대통사 터는 공주 시내 한복판이다. 일제강점기 발굴조사에서 ‘大通寺’라 새겨진 기와 조각이 이미 나왔다. 주변 제민천에 있는 네 개의 마름모꼴 초석은 절로 들어가는 다리의 하부구조로 짐작한다. 멀지 않은 곳에 반죽동 당간지주도 있다. 미술사학자들이 백제가 아닌 통일신라 조각 수법이라는 의견을 내놓는 것도 흥미롭다. 대통사 당간지주로 확인된다면 절의 역사는 다채로워질 것이다. 민가가 빼곡히 들어찬 지역이다. 보존 부지 바로 곁의 공주사대부고도 절터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웅진백제의 왕궁인 공산성과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군 말고는 백제시대 대형 유적이 없는 공주시내다. 대통사의 실체가 드러나면 전체 부지의 보존 압력은 거세질 것이다. 대통사 터를 한성백제의 왕성인 풍납토성의 내부와 비교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통사 터 역시 전체 보존 결정이 내려진다면 정부와 지자체는 최소한의 재산권을 지키려는 주민들과 풍납토성과 비슷한 갈등을 재현할 가능성이 높다. 영남고고학회는 ‘문화재로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려면 2019년도 문화재청 예산이 정부 전체 예산의 0.5%는 되어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문화재 보호와 주민의 이해가 충돌하는 현상은 전국 어디에서나 벌어지고 신라권과 가야권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올해 예산은 지난해보다 오히려 1.8% 줄어든 7746억원이다. 정부 예산의 0.18% 수준이다. 수치를 나열하니 답답한 마음이다. 문화재 보호는 마음뿐 아니라 예산도 필요하다. dcsuh@seoul.co.kr
  • [열린세상] 고대의 전차와 현대의 핵무기/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열린세상] 고대의 전차와 현대의 핵무기/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고고학은 석기, 청동기, 철기 등 사람이 사용하는 도구의 재질로 인류의 역사를 나눈다. 구석기시대 주먹도끼와 석창에서 고조선의 비파형동검, 고구려의 중갑병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은 사실 서로를 죽이고 위협하는 무기였다. 인류의 찬란한 역사를 설명하는 기술의 발달이 결국 사람을 죽이는 무기의 역사라는 역설에도 우리는 당연시 여기며 살고 있다.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능을 삶과 사랑에 대한 욕구인 ‘에로스’와 파괴와 죽음에 대한 욕구인 ‘타나토스’로 나눴다. 인간의 무기는 자기 파괴의 타나토스적 본능이 극도로 발현된 것이다. 파괴본능을 대표하는 무기가 발달하는 만큼 인류는 생존을 위하여 힘을 모으고 필사적으로 멸망을 막아 내면서 살아왔다. 20세기 중반 이후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큰 무기는 핵무기이다. 2차 대전 말기부터 도입된 핵무기는 지난 70여년간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강대국들은 물론 그들에 대항하는 나라들이 경쟁적으로 개발하였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극단의 무기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각 나라는 자신의 지배를 확고하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인류의 역사에서 핵무기와 비슷한 무기가 있었으니, 지금부터 4000년 전 시베리아에서 처음 발명된 전차였다. 초원에서 빠르게 달리는 전차의 속도와 살상력을 당해 낼 전사나 무기는 없었고 곧바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국, 인도 등의 4대 문명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리고 전차는 단순한 무기를 벗어나서 지도자나 신의 절대적인 권력과 지혜를 상징하게 되었다. 구약성경 에스겔서에서 천사는 전차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며, 인도 리그베다에서는 하늘에서 불벼락을 쏘며 적을 죽이는 전차가 등장한다. 심지어 북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해모수도 오룡거라는 전차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런데, 정작 전차가 실제 전쟁에서 활용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조금만 지형이 험하거나 진창을 만나면 무용지물이 되었고 전차를 관리하고 보수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2500년 전을 기점으로 전차는 전장에서 사라졌다. 대신에 전차 하면 떠오르는 영화인 벤허나 글래디에이터처럼 원형경기장의 오락거리로 남았다.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스키타이계 문화의 유목전사들은 무거운 전차를 버리고 가벼운 활과 화살로 무장한 기마부대로 재편했다.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빠르게 변화하였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지금 세계는 한마음으로 핵무기의 종언을 고대하고 있다. 핵무기를 쓰는 순간 전 세계는 불가역적 파국을 맞이한다. 핵무기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무기이다. 곧 열리는 싱가포르의 역사적인 북ㆍ미 회담에서 주요 의제로 북한의 비핵화가 논의된다. 핵을 포기하고 경제적인 번영을 택한 카자흐스탄처럼 북한 역시 핵 대신에 경제 개발을 택하려고 한다. 게다가 최근 디지털 사회가 도래하면서 국경이 무의미해지고 네트워크로 연결되기 때문에 핵무기 경쟁으로 얻는 이익보다는 경제적인 고립이 주는 불이익이 더 커지고 있다. 물론 북한의 비핵화와 관계없이 여전히 핵무기를 주축으로 하는 강대국들의 군비 경쟁은 당분간 이어질 것 같다. 북ㆍ미 회담이 추진되는 동안 러시아는 새로운 대륙간 탄도미사일인 ‘사르마트’와 초음속 핵미사일 ‘킨잘’의 개발을 공식화했다. 북한마저 핵무기 대신에 체제안전과 경제를 택하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핵무기 개발을 지속하는 이유는 서방이나 미국보다 한참 떨어지는 국력으로 그들과 맞서는 주축은 핵무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문명에서 영원한 것은 없듯이, 인간이 만든 무기도 결국 그 한계가 있다. 만약 북한의 비핵화가 성공한다면 한반도는 핵무기가 끌어온 인류 문명의 가장 어두운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주인공이 될 것이다. 인류 문명의 발자취를 보면 언제나 변화에 앞장서는 자들은 역사를 인도했고 과거를 고집하는 집단은 도태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번 회담으로 한반도가 새롭게 시작되는 인류 역사의 중심에 서는 계기가 되고, 남북 관계의 완화가 수천 년의 문명사에서 잊히지 않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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