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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북선 인양(외언내언)

    「언론고고학」이란 말이 있다.신문이나 방송이 문화재 관련 보도에 지나치게 흥분하여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할 경우를 일컫는 용어.기사의 상품성을 추구하는 언론뿐 아니라 학문적 업적을 쌓으려는 학자들의 과욕이 언론고고학을 거들기도 한다. 이 언론고고학에 의하면 땅속에 묻혔다 발굴된 유물은 국보나 보물이 되기 십상이다.심지어는 시중에 판매되는 우산꽂이가 세종대왕이 만든 측우기로 둔갑하고 「삼국사기」에도 기록돼 있고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 대왕암이 새삼스레 「발견」되기도 한다. 거북선에 장착돼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승자총통」이 또 발견됐다.거북선은 언론고고학의 가장 매혹적인 소재.세계 최초의 철갑선으로 임진왜란 당시 맹활약,우리민족의 자부심이 되고 있지만 아직 그 실체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펄에 묻힌 폐어선을 거북선으로 둔갑시킨 재미교포의 수중음향탐사 소동을 비롯,거북선 찾기 작업은 지난 60년대부터 이미 시작된 일.그럼에도 거북선 찾기는 우리의 시선을계속 잡아당긴다.행여 언론고고학이 될지라도 거북선에서 사용됐음직한 총통의 계속적인 발굴은 거북선의 발굴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물론 그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도 많다.해군을 중심으로 지난 89년 「충무공해전유물 발굴단」이 구성돼 첨단장비를 동원,거북선 발견가능지역(2백86㎦)의 본격 탐사에 나섰으나 63% 지역의 탐사를 끝낸 지금까지 아직 거북선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거북선에는 침몰할 정도의 하중이 주어지지 않아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거북선보다 약3백년 앞서 만들어진 중국의 무역선이 신안 앞바다에서 이미 건져진바 있고 1천여년전의 바이킹선도 인양된바 있다.『한강에서 바늘찾기보다 어렵다』지만 우리의 거북선도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지 모를 일이다.
  • 동양최고의 공예품(백제를 다시본다:2)

    ◎용봉향로는 백제문화의 「집약체」/용무늬는 왕실의 상징… 탄생설화 묘사/도교적요소는 정치적 이상향 나타내/700년 시공 뛰어넘어 한대작품 능가하는 미 창조 충남 부여 능산리고분(사적14호)과 나성(사적58호) 사이의 건물터에서 지난해 연말 출토된 김동용봉봉래산향로는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축약한 문화사 바로 그것이다. 이 향로는 전체높이 64㎝로 크게는 뚜껑과 몸체 두부분으로 이루어졌다.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뚜껑 꼭대기의 봉황장식,뚜껑,몸체,용모양의 다리부분 등 네부분으로 구성되었다.특히 뚜껑부분은 삼산형의 문양장식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윗단에는 5인의 주악상을 앉혔다.이들 주악상의 인물은 모두 머리 오른쪽의 머리카락을 묶어 내려뜨렸다. 그리고 그 밑에는 다섯개의 산을 들리고 산꼭대기에 앉아 있거나,혹은 날아가고 있는 새모양을 조각해 놓았다.이 향로의 제작연대는 연화문을 비롯한 여러 양식의 수법으로 보아 부여시대(사비시대·서기 538∼660년)의 마지막 6∼7세기 경으로 추정된다.특히 발굴당시 이 향로가 매장된 장소의 정황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는 숨가쁜 순간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뚜껑엔 삼산형문향 이제까지 향로가 실물로서 출현한 예로는 중국의 화북성 만성현 능산의 중산왕류승의 묘(전한·기원전 154년 재위·기원전 113년 사망),평양 서암리9의 219호낙랑고분,신안 해저출토 청동제 박산향로(원대 14세기)등을 들 수있다. 박산로는 중국의 경우 전국시대 말기에 출현하여 한나라때 전성기를 맞는다.그 후 위진남북조를 거쳐 당과 원나라에까지 사용된 것같다.그러나 박산이라는 이름이 지칭하는 뚜렷한 지명은 없고,당시 황실이나 귀족사회에서 유행하던 신선사상이 중심이 된 도교사상에서 유래하는 상상의 지명으로 보인다.그런가 하면 이런 향로에는 불교적 색채도 보인다.향로가 향을 피우는 불구이며 박산이란 이름이 수미산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러하다.또 이번에 발견된 것처럼 향로의 몸체 주위에 돌아가며 앙련복변판련화문이 새겨진 것도 바로 이러한 불교사상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따라서 이 향로의문양만 보더라도 백제사회에 도교와 불교사상이 깊이 침투해 있음을 알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15대 침류왕 원년(서기 384년) 진나라에서 온 호승 마라난타에 의해서이다.불사는 그 이듬해 한산에서 이루어져 그곳에 도승이 10여명 거주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도교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최근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매지권(국보163호)의 말미에 쓰여진 불종율령이란 단어가 도교의 주술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옳다면 이는 백제왕실 깊숙히 도교가 들어와 있었음을 입증해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심취했던 도교의 신선사상의 주제는 고구려고분의 벽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그리고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던 백제의 공주 송산리6호와 부여 능산리 2호 고분에서 보이는 사신도,부여 규암면 외리에서 발견된 용봉문전과 산경문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앙련복판화문은 백제 전래품으로 추정되는 일본 나라 법륭사소장의 귤부인념대 아미삼존불 몸체 대좌에서도 보인다. ○5인주악사을 앉혀 사실 삼국가운데 중국의 앞선 문물을 가장 빨리 받아들여 이를 백제화 시키고,더 나아가서 일본에까지 전파시킨 당시 발빠른 백제의 문화감각으로 볼때 도교는 이미 상류층의 사상과 정치구현의 기조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불교와 도교의 사상이 표현된 이 향로는 일찍이 서왕모가 중국임금인 황제에게 바친 신물이었다는 전설과 함께 태자를 책봉할 때 봉정했던 왕통의 상징일 가능성도 이야기되고 있다.여기에 표현된 용봉의 문양이 왕을 상징한다.또 몸체의 연화문가운데 상투를 하고 태껸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한 어린 소년이 주목된다.이소년이 왕태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도 이러한 배경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이제까지 백제인의 얼굴이나 모습은 별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양서 직공지에 실려있는 백제국사,서산마애삼존불(국보 84호)과 금동삼산관반가사유상(국보 83호)등에서 보이는 얼굴이 고작이다.그러나 이 백제 왕태자로 추정되는 얼굴 옷과 상투는 앞으로 백제인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 향로에는 재미있는 요소들이 많다.전문가들의 구체적인 견해가 나오겠지만 몸체 아랫부분에 표현된 용의 존재가 그 하나라 할 수 있다.이 용은 바로 왕가의 「탄생설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경우 해모수와 하백녀 사이에서 나온 주몽은 난생개국신화를 가지고 탄생한다.그리고 동부여에서 부인 예씨로부터 얻은 아들 류이에게로 이어지는 왕권세습을 통해 건국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소년은 왕태자 추정 그러나 백제 건국자 온조는 주몽 서소노 우대라는 복잡하고도 현실적인 관계에서 출발한다.그러면서 고구려 제2대왕 유리(기원전 19∼기원후 18년)를 피해 남천,하북∼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개국하는 것이다.이러한 사연들 때문에 왕통에 대한 정통성 부여가 필요하게 되었고 따라서 태자책봉으로 이어지는 왕권세습에 꽤나 신경을 썼으리라는 짐작이 간다.그래서 신화보다는 용으로 상징되는 왕계의 탄생설화를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향로는 바로 이 탄생설화를 구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 표현된 탄생설화도 그 누구를 구체적으로 지목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다만 왕통을 잇는 백제왕실의 상징물이나 신물로서의 역할과 기능이 탄생설화를 담은 향로를 만들게 한 요인으로 풀이할 수 있다.그렇다면 몸체위의 뚜껑에 표현된 도교적인 요소는 백제왕실의 사상이나 정치적 이상향의 표현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능산리에서 새로이 발견된 향로는 기본적인 형태를 서기전 113년 중산왕의 한묘에서 출토된 금으로 상감된 청동제박산로를 법본으로 삼고 있음을 알수 있다.그러나 백제인들은 이것이 제작된지 약 7백년후에 봉·용을 뚜껑과 몸체에 덧붙여 백제화된 향로로 만들어 낸다.이는 예술작품으로도 전례가 없는 걸작품에 속할 뿐만 아니라 기록에 전하지 않은 백제사와 문화의 여백을 상당부분 메워 주는 중요한 고고학 자료가 될 것이다.이것이 바로 이 향로가 주는 값진 의미이다. ◎향로의 유래/서방의 훈향풍습따라 제조/남북조시대 불교적 색채… 활짝 핀 연꽃 장식 향로는 중국의 전국시대말과 한초부터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이 가운데 중앙에 다리 하나를 세우고 몸통의 뚜껑이 산모양을 이룬 것을 박산향로라고 부른다. 이 향로의 산 부위 곳곳에 구멍을 뚫어 향을 피우면 그 연기의 모습이 봉우리 주변으로부터 솟아 올라 마치 생동하는 산의 기운을 보는 것 같다고 한다.당시의 향로는 서방의 훈향풍습이 전해지면서 처음 만들어졌다.그래서 향로는 일반적으로 훈로를 말하고 있다. 박산이 신선사상,즉 도교사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고려도경」에 나온다.이 도경은 한대의 문헌기록을 빌려 접시는 대해를,뚜껑은 봉래산에 비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그러면서 대해속의 거북등에 봉황이 딛고 서서 봉래산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라고 덧붙인다.여기에 향을 피우면 뚜껑으로부터 피어오르는 향연은 신선이 내뿜는 안개와 같다는 향로 예찬론을 펴고있다. 향로에 불교적 색채가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남북조시대.이 시기의 대표적 박산향로는 용문석굴 21호굴의 상자모양 윗덮개와 정광3년(서기 522년) 새김글자가 있는 화상석에서 볼 수 있다.이때 비로소 몸통 아래 부위에 활짝핀 연꽃을 둘러향로를 떠받치게 된다.그리고 인동당초문등 여러 문양을 첨가함으로써 장식적 요소가 늘어난다.화려한 장식문양과 함께 향로도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숫자도 많아진다.자재도 금속 뿐 아니라 도자기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왕통의 계승을 의미하기도 했던 향로는 당·송·원대까지 계승되었다.하지만 신안 앞바다에서 건진 14세기 원대 청동제 향로에서 보듯 일체의 문양이 사라지는 향로 변천과정을 보게 되는 것이다.
  • 궁남지 발굴 중단 위기/올예산 전혀 책정안돼 백제사 구명차질 우려

    ◎“안압지 능가할 백제유물 보고” 평가/고고학적 가치 커 지속적 탐색작업 필요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출토로 백제사 전반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해지고 있으나 백제사 규명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부여 궁남지(사적 제135호) 발굴작업이 예산이 없어 중단될 처지에 놓였다. 궁남지 발굴작업을 벌여온 국립부여박물관(관장 신광섭)에 따르면 지난 90년 1차 발굴 이후 지난해 3차 까지 충청남도의 용역사업비로 발굴작업을 벌여 왔으나 올해는 전혀 예산이 편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궁남지는 지난해 말 3차 부분발굴에서 삼국시대 최초의 논이 확인된 것을 비롯,수레바퀴와 새(조)모양목기등 귀중한 유물을 쏟아냈었다. 궁남지는 「삼국사기」백제본기 무왕35년조(634년)에 기록이 남아있는 유적.지난 67년 현재의 모습으로 아무런 고증없이 정화 돼 있기때문에 원래의 규모보다 훨씬 작아졌다.게다가 현재 궁남지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그 연못인지 조차 불분명했던 것.따라서 3차에 걸친 부여박물관의 발굴조사도 현재의 궁남지가 백제시대의 바로 그연못인지를 규명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지난 90년의 1차조사에서는 남동쪽 호안 및 물이 흘러들어가는 시설의 일부를 파악했고 91∼92년의 2차조사에서는 북동쪽 호안의 일부를 확인했다.이번 3차에서는 남동쪽 호안의 일부가 파악된데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정황을 충족시켜주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일단 「현재의 연못이 백제의 궁남지」라는 결론을 내릴수 있었다. 부여박물관에 따르면 이제 궁남지의 고고학적 가치가 증명된 만큼 당장 전면발굴은 어렵더라도 축조될 당시 궁남지의 전체 호안을 확인하는 부분적인 탐색발굴은 절대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에게 물에 잠긴 유적은 유물을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보전해 주는 보물창고처럼 인식된다.공기중에 노출된 유물이 빨리 부식되는데 비해 물속에 잠겨있으면 금속은 물론 목재까지도 원형을 오래 유지하기 때문이다.또 도굴등 후대의 훼손 위험도 크게 줄여준다.능산리 백제향로도 수맥이 지나가는 곳에 묻혀있어 손상을 거의 입지않았고 궁남지의 새모양목기나 수레바퀴도지하수에 둘러싸여 있어 거의 제모습대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물에 잠겨있는 유적의 중요성은 신라의 고도 경주의 안압지에서 더욱 극명하게 증명된다.지난 76년말 전면발굴이 끝난 안압지는 신라생활상 연구를 진일보케한 1만7천여점의 유물을 남겨 경주박물관의 제2별관을 안압지 전용으로 꾸미게 했으며 안압지 자체는 80년말 복원되어 현재 경주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고 있다. 역사·고고학자들이 궁남지 발굴을 역설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궁남지는 분명 안압지를 능가할 마지막 백제 유물의 보고라는 것이다.또 안압지는 궁남지를 본 떠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안압지가 14년전 복원까지 이루어진 상황에서 궁남지는 현재 전체 규모 조차 파악되지 못한채 발굴작업이 중단될 위기에 있다는 것은 국민화합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 도읍 공주서 부여로(백제를 다시본다:1)

    ◎부여 금동용봉향로가 말하는 사비시대/풍요로운 곡창서 「사비문화」 무르익다 백제는 곧잘 잃어버린 왕국으로 간주되어왔다.그 까닭은 정사성격의 사료부족과 또 승자에 의한 문화유산파괴에서도 찾아진다.이러한 상황속에서 지난 연말 발굴된 부여 능산리 출토유물 김동용봉봉래산향로는 백제사 연구의 한줄기 빛으로 떠올랐다.서울신문은 이를 계기로 전문학자들이 백제사를 새롭게 해석하는 장기기획물 「백제를 다시본다」를 주1회씩 연재키로 했다.금동향로가 제시하는 자료를 근거로 백제사 복원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이 시리즈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넓은평야 끼고 있어 “3국중 가장 자족”/도성체제 완벽… 5부 구획에 2중 방어/국방 한창 뻗어나갈때 나·당 연합군 침공으로 비명에 저버려 일찍이 조선후기의 대실학자인 정채산은 국가의 운명이 수도의 입지조건에 의해서 크게 좌우된다고 보았다.그런만큼 반드시 요충지대를 점거하여 위압의 형세를 이루어야만 일단 위기가 닥치더라도 능히 이를 극복하여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의하면 백제의 첫 도읍지이던 오늘날의 서울은 문자 그대로 김성탕지와 같은 곳이라서 건국이래 4백93년간이나 국세를 유지했으나,한번 웅진(공주)으로 옮겼다가 다시 사비(부여)로 옮긴 뒤에는 1백85년만에 망했다고 한다.사비시대는 웅진시대 63년을 제외하면 겨우 1백22년에 지나지 않는다. ○각부는 또 5권으로 큰 들녘의 한복판에 위치한 사비도성은 확실히 한성(서울)과 같은 천연적인 요새는 아니다.그렇다고 백제의 지배층이 도성의 방어체제를 게을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지난 십수년간 백제문화권개발사업이 지속적으로 추진된 결과 우리들은 사비시대의 도성계획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사비도성은 기본적으로 부소산성을 배후에 두고 외곽의 요해지에 부분적으로 나성을 쌓아 방어체제를 이중으로 견고하게 다졌다. 그런 다음 왕궁은 부소산성밖 남쪽에 세웠다.이는 웅진시대 왕궁이 공산성 내의 광장에 구축된 것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옛 문헌에 의하면 사비도성의 시가지는 크게 5부로 구획되고 또한 각부는 5권으로 나누어지는등 실로정연한 체제를 갖추었다고 한다.한마디로 사비도성은 백제의 역사에서 볼 때 가장 잘 디자인된 수도였다.한국고대의 도성제 발달사상 거의 완성된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백제가 공주에서 서남쪽으로 30㎞쯤 떨어진 부여로 천도한 것은 일세의 영주인 성왕 16년(서기538년)봄의 일이었다.실로 국가재흥을 목적으로 한 웅대한 경륜에서 나온 결단이었다.백제는 이보다 앞서 서기 475년 서울로부터 공주로 천도했는데,이는 고구려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고 개로왕이 피살되는 등 급박한 국가위기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그러나 부여천도는 이와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공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는 유리한 점이 있으나 그자체는 고립된 곳이고 수도가 들어시기에는 너무나 협소했다.이 야영도시를 벗어나 평야지대로 진출하여 본격적인 수도를 건설하는 것이 공주시대 역대 군주들의 꿈이었다.마치 고구려가 압록강가의 산악지대인 집안으로부터 평양으로 천도하려 한 것과 같은 취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동성왕때부터 부여의 중요성에 주목한 백제의 최고지배층은 이곳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할 요량으로 사냥을 겸하여 자주 이곳에 들러 지세를 살피는등 전반적인 입지조건을 예의검토해왔다.금강가에 위치하면서 산으로 둘러싸인 부여지방은 방어에도 적합했을 뿐 아니라 더욱이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경제적으로도 풍요한 곳으로 비쳤다. 그리고 지리상 호남평야의 경영이나 가야지방으로의 진출에도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백제조정은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유역의 땅을 이 기름진 곡창지대를 적극개발함으로써 보상하려고 했다.요컨대 부여천도는 장기간에 걸친 준비작업 끝에 마침내 단행된 것이었다. ○결실못본 화평세계 이처럼 사비시대는 개막되었다.당시는 삼국간의 항쟁이 극심한 전란기였다.영토확장을 목표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삼국간의 국경선은 수시로 뒤바뀌었다.이같은 살벌한 시대풍조 속에서도 백제는 삼국중 가장 자족함을 알며 인을 실현코자 노력했다.한성시대인 근소고왕때 장군 막고해가 승승장구 고구려군대를 추격하던중 수곡성(황해도 신천)북쪽에 이르렀을 때 스스로회군을 결행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그런데 사비시대 법왕은 서기 599년 즉위하자마자 살생을 금하는 칙령을 내린다.이에따라 민가에서 기르던 매를 놓아주도록 했으며 사냥도구와 그물마저 태워버리게 했다.이는 같은 시대 신라와는 크게 대조되는 현상이다.즉 신라왕의 최고고문이었던 원광법사는 바로 이때 「살생유택」의 덕목이 들어 있는 세속5계를 제정하여 비록 조건을 달았지만 살생을 인정했던 것이다. 백제가 신라에 패망한 궁극적인 원인중의 하나가 바로 이같은 데에 있었는지도 모른다.어쨌든 백제의 지배층이 국가의 위기상황 아래서도 인을 구현하려는 열의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은 주목되는 사실이다. 사비시대 화평의 세계를 실현하려던 백제인의 웅지는 끝내 결실을 하지 못했다.무왕의 야심에 찬 팽창정책과 그 아들 의자왕의 거듭된 실정은 신라를 자극했다.그래서 신라로하여금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아예 지도상에서 말살하려는 비밀외교에 열중하게 만들었다.신라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당과의 군사동맹이 체결되었고 양국 연합군은사전계획에 따라 서기 660년 전격적으로 백제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였다.마침내 사비도성은 함락되고 백제는 그 찬란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수도의 지세를 중요시하는 정다산은 백제의 멸망원인이 사비도성의 집중성 결여에 있는 것인 양 설명하고 있다.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그 방위체제는 결코 허술한 것이 아니었다. ○우아·격조 높은 문화 한 시대의 문화는 정치를 비추는 거울이다.흔히 이야기되고 있듯이 사비시대야말로 백제문화가 그 절정에 도달한 황금기였다.얼마전에 별세한 삼불 김원용선생은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의 미술은 민족이나 국가가 무기력해질 때 생기는 퇴폐나 타락의 양식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소멸되어버렸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것은 백제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사비시대의 백제문화 역시 쇠퇴·타락의 징후는커녕 완숙의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고 있다.결국 백제는 쇠퇴기에 접어든 끝에 멸망된 것이 아니라 한창 국력이 뻗어나갈 즈음 칼에 등을 찔려 비명에 간 것임을 알 수 있다. 해방 직후일제가 이른바 부여신궁을 지을 목적으로 거두어들인 석재더미 속에서 백제말기 대좌평이었던 사택지적의 당탑 건립기념비석이 일부 파괴된 채로 발견된 일이 있다. 이로써 사비시대 백제문화의 우아하고도 격조높은 기품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요 백제말기 정치사를 해명하는 데 유력한 단서를 얻게 되었다. 지난해 연말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 근처의 한 건물지에서 새로운 유물들이 출토되었다.여기서 나온 금동제 향로를 비롯한 사비시대 후기의 유물들을 통해서 우리들은 완숙기에 접어든 백제문물의 찬란함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되었다.또 덧붙여 말하거니와 신비스러운 빛깔로 떠오른 새로운 문물 금동용봉봉래산향로를 대하면서 백제를 뒤돌아보고 재음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비시대의 문화상/출토유물 통해 「선진문화」 확인/능산리·궁남지유적발굴로 실체 드러나 사비시대 백제(AD538∼660년)의 문화상은 고분과 절터·성곽유적 등에서 출토된 매장문화재를 통해 드러난다.신라와의 각축에서 패망의 길을 걸은 백제는 외형의 문화유산을 철저히 파괴당했기 때문에 땅속에 묻힌 유물만이 겨우 백제의 잔영을 남기는 비운의 역사를 겪었다. 이 시대의 백제고분은 충남 부여군전역에 분포되어 있다.마지막 도읍지 부여를 중심으로 능산리등 13개 고분군이 대표유적으로 꼽힌다.거의가 돌방무덤(석실분)인 고분유적은 껴묻거리(부장품)라는 유물이 많이 매장되었다는 점에서 고고학이나 역사연구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사비시대 고분 가운데 고고학적으로 처음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15년 능산리 고분군 발굴이후부터다.1917년까지 모두 6기가 발굴되었다. 능산리 고분에서 사신도벽화가 있는 1호분이 특히 유명하다.널길(선도)이 달린 굴식돌널무덤(횡혈식석실분)이 주류를 이루는 능산리 고분군에서는 금동투조식금구 등이 발굴되었다.그리고 일찍부터 왕릉으로 전해왔다.이번에 햇빛을 본 금동용봉봉래산향로도 바로 능산리 고분군 이웃에서 출토되었고,마주보고 있는 나성의 일부도 발굴되어 사비도성 방어요새가 밝혀진바 있다. 최근에는 금동향로가 출토된 능산리지역 말고도 궁남지유적 3차발굴사업이 진행되어 벼농사유적인 논유구와 함께 목각의 새와 수레바퀴 등을 출토하는 수확을 거두었다.이밖에 정림사터를 비롯,부소산성 도성내의 도시계획 유구 등이 발굴되어 사비시대 백제의 선진문화상을 속속 보여주었다.특히 사비시대 백제문화권을 전북 익산지역으로까지 확대,백제 최대의 가람 미륵사터를 발굴함으로써 불교문화의 실상을 가늠하게 되었다. 그리고 웅진시대(AD475∼538년) 유적으로는 세기적 발굴이라 할 수 있는 무령왕릉을 비롯,공산성과 임류각 발굴도 고고학 성과로 치부된다.이와 더불어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발굴된 한성시대(AD18∼475년)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서울 몽촌토성과 백제 초기의 건국집단의 무덤으로 보이는 서울 석촌동 돌무지무덤(적석총)도 백제연구 고고학자료가 되고 있다.
  • 백제향로/보존처리 늦어 녹슨다

    ◎박물관측 “청동병은 긴세월 매몰로 인한것”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출토 김동용봉봉래산향로(서울신문 93년 12월 23일∼25일자보도)가 보존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청동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2월12일 출토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진 이 청동향로의 표면에는 육안으로 식별될 정도의 녹이 슬어있는 상태라는 것.이는 지난달 28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지기까지 보존처리시설이나 보존장치가 없는 국립부여박물관에 16일동안 보관되었기 때문이다.특히 향로의 족대부분이 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문가들은 특히 발굴 직후 향로 표면에 붙어 보호막 구실을 했던 진흙등의 이물질을 모두 물로 닦아냄으로써 녹이 빨리 번진 것으로 보고있다.표면의 이물질은 거푸집용 점토와 같은 유기질 물질은 물론 당시 자연환경을 밝히는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고고학 분석자료 하나는 상실된 것으로 지적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에따라 현재 이 향로를 온·습도가 자동조절되는 수장고(에어 타이트 보관장)에 보관하고 있으며 오는 2월말쯤 예정된 특별전시 때에도 이 방법을 이용할 계획이다. 이 금동향로는 한국원자력연구소,산업과학기술연구소,문화재연구소의 첨단장비를 빌려 올해말쯤 완전 복원된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측은 『현재 나타나고 있는 청동병은 긴 세월동안의 매몰로 인한 것으로 발굴당시부터 문제되었던 사항』이라고 말하고 『앞으로 문화재연구소 등 관계연구기관과 합동으로 펼치고 있는 과학적 조사를 토대로 고고학적 증거자료물 보호조치 및 분석실험,표면부식 이물질 제거,청동병 유발성분 추출 등 내부 부식인자 처리,도금표출,청동병 예방 및 활성억제 처리,방식코팅등을 통한 항구적 보호피막처리 등을 통해 완벽하게 보존하겠다』고 밝혔다.
  • 백제왕족 수레 복원길 열린다

    ◎부여 궁남지서 발굴된 나무조각 용도 규명 계기/“직경 140∼150㎝ 수레바퀴 조각” 결론/전문가,“농사용보다 커 귀족의 용품”/인근 부소산성서 수레용 금동장식도 발굴… 가능성 높여 사비시대(AD538∼660년) 백제의 왕이 타던 수레의 바퀴인가,아니면 평범한 농사용 오차의 바퀴였을까.국립부여박물관이 지난해말 부여 궁남지에서 발굴한 수레바퀴의 용도에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수레바퀴는 지난해 12월29일 궁남지 발굴작업 당시에는 목선의 부재인지 바퀴조각인지가 채 규명이 되지않았다.함께 출토된 특이한 형태의 새(조)모양목기에 관심이 집중되어 가치가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최근 부여박물관의 실측 결과 이 나무조각은 직경 1m40㎝∼1m50㎝짜리 대형수레바퀴의 부재라는 결론을 얻었다.이는 삼국시대 유적가운데서 최초의 수레바퀴로 밝혀졌다. 한국 고대사회의 수레는 현재 두방향에서 찾아볼수 있다.첫번째는 4세기 중반의 안악3호분등 모두 10여개가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나온다.또 하나는 기원전 1∼2세기 위만조선시대의 마차.이것은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카우치 마쓰다네교수가 위만조선시대의 차축이 발굴되자 이를 근거로 1979년에 당시의 마차를 추정해 복원한 그림이다. 고구려 벽화고분의 수레와 마쓰다네가 복원한 위만조선의 수레는 모두 두바퀴 짜리로 매우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다만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수레는 모두 한마리의 소가 끄는 반면 위만조선의 수레는 두마리의 말이 끈다.또 햇빛가리개가 고구려 것은 넓은 채양을 단 반면 복원된 그림에서는 일산을 달고 있다는 점만이 다르다. 서울대고고학과 최몽용교수에 따르면 이같은 형태의 수레는 한대의 것이 한반도에 들어온뒤 위만조선과 낙랑을 거쳐 삼국시대까지 일반적인 왕족 또는 귀족들이 타는 수레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이다.따라서 백제시대 당시에도 왕 또는 귀족이 타던 수레라면 이와 비슷한 모양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문제는 궁남지에서 출토된 바퀴가 높은 신분층이 타던 수레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이에대해 신광섭부여박물관장은 『농사용 수레는 수레바닥이 낮아야 짐을 싣고부리기에 편하기 때문에 바퀴의 높이 또한 1m20㎝ 안팎인 것이 보통』이라고 말한다.그러면서 『아직은 무어라 확언할수는 없지만 고구려벽화에 나오는 수레바퀴를 소의 크기와 비교하면 축척상 농사용보다 상당히 크다는 점에서 궁남지의 바퀴는 일단 높은 신분의 사람이 쓰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한편 최근 부여문화재연구소가 부여 부소산성에서 발굴한 금동일산살대투겁(김동개궁모)의 한자 뜻은 수레에 달린 일산꽂이장식이라는 점에서 이 수레바퀴와 관련해 새롭게 주목되고 있다.이 일산꽂이장식은 특히 그 정교함과 화려함에서 적어도 왕족 이상 신분을 가진 사람의 용품으로 추정된다.또 궁남지는 백제의 왕궁터로 전해지는 옛부여박물관 자리에서 일직선상에 자리잡은 이궁의 정원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때 궁남지 수레바퀴의 발굴은 비록 4조각의 나무조각에 불과하지만 사비시대 백제왕족의 화려한 수레를 복원할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 남북국시대(온가족이 함께 읽는 우리역사:26·끝)

    ◎발해는 만주지배한 「한민족국가」/「고구려계승」 주변국인 신라·일본서도 인정/무덤의 양식·숱한 유물 등 고고학서도 입증 신라는 676년 3국을 통일한 뒤 935년 신흥국가인 고려에 항복했다.또 발해는 698년 건국돼 926년 거란에게 망했다. 「남북국시대」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기간즉 698∼926년의 2백28년 동안을 뜻한다. 우리역사를 파악하는데 있어 이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규정한 것은 최근 몇년사이의 일이다.이는 발해가 한민족의 국가로 받아들여진 결과이다. 그렇다면 발해가 최근에야 한민족의 국가로 받아들여진 까닭은 무엇인가. 발해가 건국 초부터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자처했으며 신라·일본등 주변국들도 그 사실을 인정했음은 분명하다. 일본의 역사서인「속일본기」759년 기사에는『고려국왕 대흠무가 국서를 보냈다』는 부분이 나온다.이 때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918년)하기 전으로 고려국왕은 고구려왕을 의미한다. 또 대흠무는 발해의 제3대 문왕(737∼793년)의 이름이다.따라서「속일본기」의 기사는 발해의 문왕이 고구려(고려)의 왕을 자처해 일본에 국서를 보냈고 일본측도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일본 조정이 발해사신을 고구려사신이라고 불렀다든지 발해의 음악을「고려락」으로 표현하는등 일본이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자로 본 사실은 여러 사서에서 인정된다. 한편 고고학적으로 보아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그 대표적인 예가 1949년 길림성 돈화현 육정산고분군에서 발굴된 정혜공주(문왕의 둘째딸)의 무덤이다. 정혜공주묘는 돌방무덤(석실묘)인데다 무덤의 천장이 말각천장의 구조로 돼 있는등 전형적인 고구려 무덤양식을 그대로 실현했다.이밖에도 현재 발굴된 숱한 발해의 유물들이 문화면에서 고구려를 뒤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발해가 고구려를 뒤이은 한민족의 국가임이 확실한데도 이를 인정받지 못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통일신라이후 고려·조선등 역대 왕조가 스스로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3국의 항쟁­신라에 의한 통일­고려의 계승­조선의 역성혁명」을 한국사의 주요흐름으로 강조해 온 점을 들 수 있다.이같은 입장에서는 신라와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발해가 한국사의 곁가지로 치부되거나 아예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발해 멸망후 그 본거지인 만주의 동북부일대가 민족의 주활동무대에서 벗어난 점도 발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줄인 요인이다. 신라가 3국을 통일해 민족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은 틀림없다.이와함께 당의 야욕을 무력으로 물리쳤다는 사실은 인*정받을만 하다. 그러나 외세를 끌여들여 통일을 추구했다든가 그 결과 국토통일이 대동강이남에 국한됐다는 점에서 그 한계성도 분명하다. 만주는 발해가 멸망한 뒤로 지금까지의 1천여년동안 한민족의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그러나 고조선에서 고구려를 거쳐 발해에 이르기까지 그곳은 수천년간 우리의 땅이었다. 발해의 역사를 되찾는 것은 잃어버린 민주사의 일부를 회복하는 작업이랄 수 있다.
  • 단군릉/축조형태 고구려 양식

    ◎본사,북의 단군릉 발굴관련 보고문·논문 긴급입수… 최무장교수 분석/“김일성이 단군 실체인물로 찾아줬다” 주장/고고학자료까지 정치에 이용,주민을 기만 북한 사회과학원은 『단군의 무덤을 발굴했다』고 지난 10월2일 공표한데 이어 이와 관련한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학술발표회』를 같은달 12∼13일에 평양인민학습당에서 가졌다.서울신문은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소개되었던 북한 사회과학원의 『단군릉 발굴 보고문』과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학술논문』을 긴급입수,생생한 사진과 함께 건국대 최무장교수(고고학)의 해제 및 북한의 단군릉 주장에 대한 고고학적 견해를 싣는다. 발굴 보고문에 따르면 이른바 단군릉은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에서 서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대박산의 기슭에 위치한다.릉은 돌로 쌓은 고구려 양식의 돌칸흙무덤(봉토석실묘)으로 반 지하에 축조한 주검칸(묘실)의 크기는 동서 2백73㎝,남북 2백76㎝,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1백60㎝이다.벽체는 돌로 쌓은뒤 뚜껑을 덮었고 입구도 돌로 막았다.출토물은 남녀2인의 사람뼈로 모두 86개이며 이 가운데 단군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키는 1백70㎝정도이다.이 뼈는 전자성공명법으로 측정 한 결과 지금부터 5011년 전이라는 수치가 나왔다.사람뼈 이외에는 금동왕관편 2점 및 토기편,관못 6개가 나왔고 무덤앞에는 단군릉이라 새긴 표식비와 화강암제의 상돌,무덤좌우에 돌사자가 각각 하나씩 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단군의 무덤이 고구려 무덤 양식으로 되어있는 것은 그 시기에 개축했기 때문』이라며 『고구려 사람들은 시조인 동명성왕과 함께 단군도 숭배했다』고 쓰고 있다.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학술발표회』에는 모두 15명의 학자가 나섰다.먼저 전영률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대한 수령님이 단군을 실체한 인물로 믿아주시었다…』는 식.이어 고고학연구소의 박진욱과 장우진 김고경이 차례로 나서 『장지연의 「위암문고」권7에 평안도 강동군의 서쪽에 단군묘가 있다고 분명히 기록되』면서 『이번에 나온 단군의 뼈는 북한에서 나온 신석기시대 이후 인골 가운데 가장 크며 이뼈를 사회과학원의 전자상자성공명연대측정장치로 누적선량을 각각 30번과 24번 측정한 결과 50 11년이 산출됐다』는 주장을 폈다. 다음은 고조선이 뛰어난 문화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 중심지는 평양이었다는 주장이 주류를 이룬다.김일성종합대학의 현명오는 『첫 문명국가인 고조선의 도읍지는 바로 평양』이라며 『건국연대는 절대연대로 5011년,즉 기원전 3천년대 초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이번 발표와 연관시키고 있다.또 고고학연구소의 석광준과 언어연구소의 유열은 『평양은 고대문화의 중심지로 단군조선 시기부터 「심지글자」라는 민족글자를 가졌었다』고 주장했다. 이 학술발표회는 역사연구소의 조대일과 손영정이 나서 『평양의 단군사당과 강화도 마니산 첨성단등지의 단군숭배와 관련된 의례는 오랜 풍습이었다』면서 『조선은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이후 반만년동안 하나의 핏줄로 이어왔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종합하면 보고문에 이어 무려 15명에 이르는 학자들의 발표내용은 한결같이 너무 정치적이고 유치하다.위에 인용한 내용은 발표의 핵심적인 내용을 거의 담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독자들의 냉정한 판단을 바란다. 필자는 북한학자들이 주장하는 「단군릉」을 고구려무덤으로 본다. 북한학자 자신들도 무덤자체는 고구려 양식의 돌칸흙무덤으로 개축되었고 벽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그러면서 그 안의 사자는 지금부터 50 11년전 묻혔고,바로 단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무덤의 축조형태는 완전히 고구려 양식이다.출토유물중 금동관편과 관못6개는 무엇을 말하는가.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금속을 사용한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문명이 기원전 3천5백년,인도의 인더스문명이 기원전 2천5백년,중국의 황하유역의 상문명이 기원전 1천5백년이라는 사실은 세계가 주지하는 바이다. 고고학은 역사의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고 없는 부분을 보충하며,더 나아가 인류의 기원을 찾는 학문이다.북한은 그러나 「단군릉」에서 보듯 아직도 고고학적 자료를 정치에 이용하여 북한주민을 기만하고 「위대한 수령」을 찬양하는데 열중하고 있다.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이른바「단군릉」도 그 자체로 고구려의 유적으로는 대단히 큰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어진다.필자는 북한학계가 이러한 왜곡이나 과장에서 벗어나 정도를 걷는다면 이제부터라도 민족사의 빛나는 성과를 거둘수 있게 될것으로 확신한다.
  • “일선 볼수없는 최고 걸작품”/일언론,능산리 향로에 큰 관심

    ◎“백제문물의 일전래과정 밝힐 중요자료”/컬러사진 곁들여 주요지면서 상세 보도 국립부여박물관이 22일 공개한 백제말기의 국보급 금동용봉봉래산향로에 대해 백제문화에 관심이 많은 일본도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일본의 아사히(조일)신문은 23일 「백제보물 대량발굴」이라는 제목으로 이를 컬러사진과 함께 1면 두번째 큰 기사로 보도했다.도쿄신문도 이날 사회면에 사진및 발굴지점 지도와 함께 상세히 보도하고 마이니치(매일)신문은 24일자 1면에 보도했다. 아사히신문은 서울발 특파원기사에서 우아한 금동제향로가 거의 원형 그대로 발굴되는등 백제유물이 대량 발굴되었다고 상세히 보도하고 일본전문가의 해설을 통해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한국고대사전문가인 이노쿠마 나라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지도부장은 아사히신문 해설에서 『출토된 향로는 5세기말에서 6세기 작품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고 『출토된 현장상황을 볼때 극도로 절박한 상황에서 땅속에 숨긴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그는 『백제멸망후 다방면의 기술자와 학자등이 일본으로 대량 망명,일본문화와 기술를 크게 변화시켰다』고 전제하고 앞으로의 연구로 지금은 일부 문헌에만 기록돼 있을뿐 실상이 거의 알려지지않은 백제몰락기의 시대상황과 백제문물의 전래과정을 상당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신문은 한병삼 전한국국립중앙박물관장(고고학)의 말를 인용,이번에 발굴된 향로는 고대 공예품의 최대 걸작품이라고 보도했다. 그는 도쿄신문해설에서 『한국에서 발굴된 문화재가운데 전례가 없는 형식의 향로이며 백제문화가 많이 전래된 일본에서도 볼 수 없는 최고 걸작품』이라고 설명하고 『다른 유물에도 일본에서 발견된 같은 시기의 고고학자료와 유사한 것도 있어 고대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해명에 큰 도움이 될 것같다』고 말했다.
  • “백제역사·미술·음악사의 총합체”/「금동용봉향로」발굴의의를 말한다

    ◎“불교·도교사상에서 신앙·풍속까지 포용/“퇴폐로 내부붕괴” 기존의 시각 완전 불식/정밀투시촬영 통해 명문 찾아내면 획기적 자료 고대왕국 백제의 신비를 간직한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출토는 무녕왕릉에 이은 백제강역 최대의 고고학발굴 성과로 꼽히고 있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출토된 이 향로는 특히 백제 후기 시대사연구의 귀중자료로 부각되었다. 이와 더불어 미술사 및 음악사·사상사·민속연구 등에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학계는 전망했다. 그래서 서울신문은 이 향로의 발굴성과를 정리하고 학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전문학자의 대담을 마련해보았다. ▲최몽용교수=한해가 저물어가는 마당에 부여에서 소위 박산로가 하나 나왔습니다.삼불 김원용선생이 돌아가신 것과 함께 올해 역사·고고학계의 큰 일로 기억될 것같습니다.이 박산로는 철저히 파괴되었으리라는 마지막 도읍지 부여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물건이 아닌가 합니다.해외에 내보내도 정말 손색이 없는 유물 하나를 건진 셈입니다.무령왕릉 발굴이후 최대의 경사입니다.그러나 나온 물건이 워낙 대단하다보니 유물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느낌입니다.박산로가 나온 배경도 좀 살펴봐야하지 않을까요. ▲이기동교수=그렇습니다.그동안 백제말기의 분위기는 퇴폐적인 것으로 묘사되곤 했습니다.그런데 문화는 국력에 비례하게 마련이지요.백제말기에 이런 탁월한 공예품이 나왔다는 점에 미루어보면 백제가 노쇠기에 접어들어 내부붕괴가 가속화되는등 지리멸렬해져 멸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고구려의 경우도 말기인 6·7세기의 벽화를 보면 웅혼한 기상이 살아있어요.국력이 쇠퇴하면 미술이나 공예도 타락상을 보이는 법입니다.그러나 고구려나 백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특히 백제의 경우는 비록 전성기는 아니라 하더라도 한창 국력이 뻗어나가려는 즈음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최교수=중국 한대에 박산로는 왕통을 잇는다는 상징성을 지닌 물건이었습니다.태자를 지명할때 박산로를 주었지요.또 박산로는 귀족도 아닌 왕의 무덤에서만 출토됐습니다.이렇게 볼때 비록 7백여년의 시차가 있지만 능산리 박산로는 백제의 왕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박산로가 출토된 곳은 나성의 동문밖입니다.발굴유구를 보면 이 박산로는 그 자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국가존망의 위기가 아니었으면 그런 곳에 묻혀있을리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이때문에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패주하다가 묻었을 것이라는 추정이지요.당시의 다급했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이교수=이 박산로의 제작시기는 6세기후반이라기보다는 7세기전반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물론 만들어놓고 오랫동안 간직했을 수도 있어요.하지만 백제말기에 해당하는 무왕과 의자왕시대는 사원의 건축이 활발했을뿐 아니라 공예도 융성했던 시기였습니다.박산로가 만들어진 시기도 그 연장선상에서 보아야할 것같습니다. ▲최교수=어떻습니까.이 향로가 앞으로 여러 방면의 학자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지 않겠습니까. ▲이교수=그렇습니다.얼핏 생각해도 역사학과 미술은 물론 수많은 주악상은 우리 음악사를 규명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겠지요.여기에 불교와 도교사상등 신앙과 풍속까지를 포함했기 때문에 향로 하나가 수많은 과제를 안기고 있습니다. ▲최교수=얼마전 스위스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미이라 하나가 생활연구에서부터 해부학까지 연구에 큰 진전을 가져온 것과 비슷하군요.이 박산로로 또 「백제의 얼굴」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지금까지 백제인의 얼굴이 드러나 있었던 것은 서산마애불과 산경문전 뿐이었어요.백제인의 얼굴이 부드러운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던 것도 이때문이지요.부처님 얼굴이었으니까요.그런데 이 박산로의 인물상을 보면 악기를 타면서도 얼굴표정이 약간은 경색되어 있어요. ▲이교수=향로의 제작연대 추정과 무관치않은 지적입니다.그 시기는 결국 삼국항쟁의 마지막 고비였어요.장기간에 걸친 전란속에서 먹느냐 먹히느냐는 사활이 걸린 상황에서는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문화는 사회상을 반영하니까요. ▲최교수=한대 박산로가운데는 한사군설치의 주역인 무제의 형인 중산정왕의 능에서 1972년에 발굴된 것이 있습니다.기원전 154년에 즉위했다가 기원전 113년에 죽었지요.이것을 하한으로 이후 것은 중국에서는 나오지 않고 있어요.국립중앙박물관에는 유력자가 중국에서 얻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낙랑시대 박산로가 있습니다.이것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지요.한대 박산로와 능산리의 그것은 약 7백70년의 공백이 있습니다.둘은 몸체는 비슷하지만 뚜껑 위쪽의 봉황과 다리부분의 용은 완전히 다릅니다.그렇다해도 앞으로 능산리 박산로가 백제 것이냐 수입품이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결국은 백제가 그 주역으로 결론이 내려지리라는 생각입니다만.백제의 공예기술이 뛰어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이교수께서 깊이 연구하셨지요. ▲이교수=청동기시대의 청동기 장인은 왕이나 귀족에 버금가는 신분으로 대접받았습니다.신라의 경우에도 성덕대왕신종이나 황룡사종을 주조하는 전문기술자에게는 관직을 부여할 만큼 우대했어요.그들은 당당한 관인이었습니다.마르크스는 이들 기술자를 노예라고 생각했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제가 알기로는 백제의 경우는 공예가들에 대해 더욱 남다른데가 있어요.백제하면 와당이 떠오르지요.일본측 기록을 보면 6세기말 백제의 와박사와 노반박사를 초청했다는 대목이 있어요.노반박사는 뛰어난 금속공장에 대해 국가가 부여한 지위입니다. ▲최교수=사실 신라는 백제기술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이교수=신라의 1급문화재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백제의 도움을 받았지요.황룡사탑을 백제의 아비지가 세웠다는데서도 알 수 있지요.경주의 안압지도 사실 사비성시대 부여의 궁남지를 모방해 만든 것입니다. ▲최교수=결국 그같은 백제의 기술자육성정책이 뛰어난 박산로를 만들 수 있게 했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끄는군요.이제부터 문제는 박산로가 백제문화의 정수를 아낌없이 보여주었지만 그 기원을 어디서 잡아야 하느냐는 겁니다.냉정하게 백제문화가 어디까지가 본질적인 것이고 외부로부터는 얼마만큼의 영향을 받았느냐는 것을 따져보아야 하겠습니다. ▲이교수=백제의 역사나 문화에 있어 중요하게 고려해야하는 것은 그 지리적 위치입니다.육로로는 고구려를 통해 북방문화를받아들이고 바다로는 중국 특히 양자강이남 오·월의 문화를 받아들였어요.중국의 문화를 수입하는데도 북쪽의 야성적인 호주의 문화와 우아하고 섬세한 한주의 문화를 받아들여 융합시켰어요. ▲최교수=박산로에서도 백제적 요소가 많이 드러나지요.연화문과 산경문이 특히 그렇습니다.이것들은 백제의 심벌과도 같은 것이지요. ▲이교수=이 박산로를 보면 도교신앙이 의외로 백제의 민간이나 지배층에 유행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고구려의 경우 연개소문이 도교에 깊이 빠지는등 번창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백제나 신라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요.그러나 백제에서 도교가 성행했다는 것은 여러가지 자료를 통해 추측만을 했을 뿐이지요.근초고왕의 북진의욕에 대한 막고해장군의 『분수를 알고 나아가지 말자』는 진언이 그것입니다.또 무령왕릉 지석의 「불종율령」도 좋은 예가 되지요.「불종율령」은 「왕은 법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식으로 글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마치 「수리수리마수리」와 같은 상투적인 도가적 주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일본의 우에다교수같은 학자는 일본의 고대도교도 백제에서 건너갔을 것으로 생각하더군요.능산리 박산로는 그 관계를 밝히는 유력한 물적자료가 될 것입니다.이처럼 사상적으로 볼때에도 이 향로는 백제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모자람이 없습니다. ▲최교수=무령왕릉은 발굴결과 기록과 부합되었지요.이 향로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교수=아직은 명문이 발견되지 않았다지요.그러나 명문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칠지도와 일본 하치망의 인물화상경에서도 뒤늦게 명문이 발견됐지요.일본에 있는 가야의 환두대도에도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금속제품에는 이처럼 명문은 새기는 것이 상례입니다.능산리 박산로도 꼭 정밀투시촬영을 해보아야 합니다.여기서 명문이 확인된다면 그야말로 미술뿐 아니라 역사를 구성하는데도 아주 긴요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긴급대담◁ □이기동 ◇서울대문리대 사학과 동대학원졸업 ◇경북대교수 ◇현 동국대교수 ◇저서:「신라골품제 사회와 화랑도」등 많음 □최몽용 ◇서울대문리대 고교학과 동 대학원졸업 ◇미하버드대 대학원(석,박사) ◇현 서울대교수 ◇저서:「한국문화의 기원을 찾아서」등 많음
  • 야간작업 3시간만에 완형확인/금동용봉향로 발굴기

    ◎“백제인물상·복식사 연구에 획기적 자료” 금동용봉봉래산향로가 발견된 부여 능산리고분군과 나성사이의 지역은 오랫동안 논밭으로 이용되어 왔다.1992년 초 정부는 백제권유적정비사업의 하나로 이 지역을 개발하기 위하여 땅을 매입하게 되었다.이 지역에 능산리고분군,나성과 연계되는 관광객 편의시설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는 1983년부터 연꽃무늬수막새를 비롯하여 다량의 기와물이 발견되었으므로 개발에 앞서 유적의 정확한 위치 및 범위를 알고자 먼저 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그 결과 능산리 3백92의1 일대 약 3천평에 걸쳐 건물지 가마터 등 방대한 유적이 분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이에따라 국립부여박물관은 충청남도와 학술용역조사를 체결하여 정밀조사에 들어갔다. 정밀조사에서 확인된 유적은 건물지 3동이었다.이들 건물은 각각 주요한 목적을 가지고 세워졌는데 그것을 확인한 일은 백제사 연구초유의 사건으로 기록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제1 건물지는 불씨를 저장하는 시설물이며,제2건물지는 담장 또는 진입로로,제3건물지는 사비시대 최고위층에서 관여하였던 공방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물론 이 3개의 건물지들은 어떤 중요건물의 부속건물들로 추측된다.이중 제3건물지는 동서 양편에 퇴간(차양간)을 갖춘 본체 정면 9칸,측면 2칸의 평면구조를 하고 있다.본체는 다시 3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각 방에 목적에 따라 시설물들을 배치한 공방시설이었다.지붕형태는 맞배지붕이다.공방시설로 보는 이유는 각 방에서 소토층과 배연구시설,도가니,토제범을 비롯,동이나 유리재료 등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 제3건물지의 본체 내부는 물론이고 사방에서 금·금동·철·유기·칠기로 만든 제품과 재료가 상당량 발견되었다.김동광배편,금구슬,김동투조장식,유리구슬,채색한 칠기,특이한 토기류들은 사비시대 백제 문물을 연구하는데 지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특히 본체 중앙칸 서쪽에 있는 길이 1백35㎝,폭90㎝의 수혈에서 백제 최상급의 보물인 김동용봉봉래산향로가 발견되었다.제3건물지 상부에는 건물의 지붕을 덮고 있던 기와가 그대로 무너져 내린 상황이어서 수혈 상부에도 기와가 덮여 있었는데 약간 함몰된 상태였으며 밑에서 물이 스며올라오곤 하였다.지붕에서 무너져 내린 기와를 제거하였을 때 수혈의 윤곽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는데 그 표면은 흑색의 점질에 모래가 약간 섞인 층으로 덮여 있었다.내부조사를 위하여 남북으로 반을 갈라 조사하게 되었는데 표토층을 제거하자 기와편과 토기편들이 꽉차 있었다.20㎝ 깊이로 들어갔을 때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일부가 드러났으나 그 시간이 이미 하오5시에 접어들어 주변이 어둡게 변해가고 있었다.그러나 유물의 중요성을 인지한 조사단은 전 장비를 동원하여 주위를 밝게 비추고 야간작업에 들어갔다.유물의 중요성뿐만이 아니라 날씨가 추워 작업속도가 매우 느리게 진행되어 거의 3시간이 지나서야 유물의 모습이 완전하게 나타났으며 사진촬영을 마치고 수습하여 조심스럽게 박물관으로 옮겼다. 향로는 전체높이가 64㎝로 뚜껑과 몸체 2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전체적인 구성으로 볼때 개정부장식,개신부,신부,대족부의 4부위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개정부에는 웅비하는 봉황이 있고,개신부는 4∼5단의 삼산형의 문양대로 장식되어 있는데 주락상(신상),각종의 인물상,동물상,화염문,폭포 등의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신부는 3단으로 연꽃이 배치되어 있고 꽃중앙과 꽃사이에 인물상,물고기와 각종 동물상을 베풀었다.대쪽에는 1마리의 용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받들고 승천하는 형상으로 몸통을 떠받들고 있는데 머리·뿔·비늘·다리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용의 하반부는 구름을 생생하게 양각하였으며 구름과 다리사이에도 6엽으로 된 연꽃무늬 3개를 표현하여 놓았다.이로 볼때 용의 세다리와 구름이 원형을 구성하게 하여 안정감있는 구도를 나타내게 하고 있다.이 향로의 제작연도는 6세기후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묻힌 시기는 7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이 향로는 학술적인 가치가 높고,향로에 표현된 산·바위,주악상에 보이는 머리카락을 오른쪽으로 묶어내린 형상 등은 백제 특유의 것으로 주목되는데 자료가 빈곤한 백제시대 복식사,인물상및 동물상을 연구하는데 획기적인 자료이다.앞으로 백제고고학사에 영원히 남을 이 유물에 대하여 고고학,미술사,사상 등 여러가지 방향에서 세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백제문화 발굴사업 본격“시동”/부여능산리 유물 대량출토가 촉매역할

    ◎신라유적에 치중,백제권발굴은 부진/정부,“부여 나성·동서고분군 복원 박차”/백제를 패배의 역사만으로 봤기때문에 빛 못봐 금동용봉봉래산향로를 비롯한 4백50여점의 귀중한 백제 유물을 찾아낸 부여 능산리 집터 발굴작업은 새정부들어 적극 추진되고 있는 백제문화권개발사업에 박차를 가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동안 우리의 삼국시대사 규명작업,그 가운데서도 발굴및 복원부문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쪽에 치중되어 있었다.불가피하게 신경을 쓸수 없는 고구려의 경우도 해석의 방향은 빗나가지만 북한당국에 의해 어느 정도 빈곳이 메워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백제문화권의 발굴및 복원작업만이 지지부진했던 셈이다. 이렇게 된데는 오랫동안 어어져 온 권위주의 정부의 이른바 「승자의 논리」가 문화재보존정책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여기에 신라의 경우 통일신라와 고려를 큰 변란없이 거치며 어느 정도 유적·유물의 보전이 가능했다.그러나 백제의 그것은 땅속에 묻혀있지 않는 한 단절이 불가피했던 것.집권자들의 출신지에 따른 영남지역 우선개발 정책도 정책이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문화에 대한 열악한 안목도 문제였다.백제를 패배의 역사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라는 유행가가 있다.이 노래는 흔히 백제 패망의 구슬픈 역사를 담은 흘러간 옛 노래로 치부된다.그러나 이 노래가 1936년 일제에 의해 금지곡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일본에 문화를 전해주고,일본의 고대사를 정립해 준 백제시대를 그리워하는 반일적인 노래』라는 이유에서 였다고 한다.이 간단한 예에서도 백제사의 중요성은 폐부를 찌른다. 백제문화권정비계획은 지난 88년 시작됐다.그러나 백제문화에 대한 역사인식의 전환에 따른 정책추진이었다기 보다는 신라문화권과 상반되는 극단적인 투자외면과 이에따른 해당지역민의 불만을 아우른다는 정치적 이유가 컸다.이 계획은 93년으로 제1단계가 마무리되고 문민정부가 출범한 올해부터 제2단계 사업에 들어갔다.그 결과 이제는 문화재예산도 백제문화권이 신라문화권에 비해 많아졌다. 능산리 유물의 발굴은 백제문화권정비사업을 화합차원에서 더욱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문민정부에는 하나의 큰 선물이다.이와함께 능산리 유물이 정부에는 백제문화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포함한 지속적인 관심을 요구하는 무거운 짐이기도 하다. 이민섭문화체육부장관이 22일 발굴현장에서 『부여의 나성 및 나성동문,건물지유적,동·서고분군을 일체화해 정비 복원하는 한편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다른 백제권개발사업도 더욱 힘을 기울여 착실히 수행해 나가겠다』고 밝힌 것도 새정부가 추진한 사업의 성과를 과시하고자 하는 뜻과 함께 이같은 부담을 표현했다고 할수 있다. 이처럼 능산리 유물의 출토는 국가적 보물이 하나 더 나왔다는 것 보다는 역사해석에 있어 거리낄 것이 없는 새정부 출범 이후 국민과 정부 모두에게 백제문화에 대한 재인식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발굴시기가 절묘했다는 것이 역사·고고학계의 뒷이야기이다.
  • 개발앞서 철저한 유적조사를(사설)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6세기 백제시대의 김동용봉봉래산향로는 찬란했던 백제문화의 실체를 재확인시켜주었다.능산리 고분군 근처 옛 건물터에서 금속제품등 4백50여점의 유물과 함께 수습된 이 금동향로는 삼국시대 유일한 향로일뿐 아니라 그 형태의 아름다움이나 완벽한 기법,세련된 미의식등에서 금속공예품의 극치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백제의 유물은 신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어 고고학계는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실증하는데 어려움을 느껴왔다.1971년 공주 무령왕릉의 발굴을 통해 백제 예술의 진수가 쏟아져 나와 백제 문화사의 공백을 메워줄수 있었다.이번 금동향로의 발굴은 무령왕릉 출토품에 버금가는 고고학적 성과로 평가된다. 이 향로에는 뚜껑 꼭대기의 날아갈듯한 봉황이며 뚜껑과 몸체에 가득 새겨진 진락상과 산수화등 각종 조각,그리고 꿈틀거리는 듯한 반용의 유려한 다리받침등이 모두 세련된 주물기법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백제 사람들의 뛰어난 주조기술을 엿보게 해준다.이 유물의 또다른 중요성은 공방으로 추정되는 확실한 건물터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이다.유물은 출토지가 분명할때 학술적 가치가 한층 높아진다. 향로 발굴과 함께 조사된 3채의 옛 건물터는 초석과 기단이 잘 남아있어 이 또한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문화재관리국은 88년부터 경주지역 정화 개발에 비해 낙후된 백제문화권의 정비사업을 추진해왔다.올해는 2단계사업의 첫해로 14개 단위사업에 55억원이 투입된다.이와는 별도로 건설부는 공주·부여·논산·익산군 일대를 백제문화권 특정지역으로 지정,오는 2001년까지 집중개발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8년동안 1조원을 투입하여 문화유산을 발굴 조사하고 관광및 편의시설을 대폭 확충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우리는 건설부의 백제문화권 개발이 자칫 유적의 보존·발굴보다는 밀어붙이기식 개발위주의 공사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바 크다.과거 70년대 경주개발에서 우리는 그같은 시행착오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국토개발에 앞서 매장문화재의 발굴조사는 반드시 선행되어야만 한다.그래야만 개발이 초래하는 문화재나 유적의 파괴를 막을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백제금동향로는 국립부여박물관이 나성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주변정비를 하던중 우연히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만일 토목공사로 밀어붙였다면 그 결과가 어떠했을까.아찔한 생각이 든다. 우리는 발굴조사단의 노고에 치하를 보내면서 이제 출토유물의 과학적인 보존방안과 유적의 영구적인 보존관리에 만전을 기해주기를 바란다.
  • “국보중 국보” 상기된 표정/발굴팀/완벽한 형태에 모두 탄성

    『금동용봉봉래산향로는 삼국시대의 모든 것과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국보중의 국보입니다』 삼국시대의 예술과 기술을 다시 정리해야 하는 큰 유물을 발굴한 국립부여박물관 신광섭관장은 아직도 지난 12일 발굴 당시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듯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그러면서 『이제 고고학도로서 더이상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이 향로는 지난 12일 하오5시쯤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신관장등은 인부 10여명과 함께 능산리 건물지발굴 현장에서 작업을 하다 향로의 뚜껑을 처음 발견,손으로 조심스레 흙을 파냈다.『보통 것이 아니구나』라고 직감한 발굴단은 작업을 일단 중지했다. 백제유물 발굴의 베테랑인 신관장은 그때만 해도 현장경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아 귀중한 유물을 함부로 꺼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신관장은 인부들이 모두 퇴근한 뒤인 하오8시쯤 김정완 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장등 연구원 4명과 함께 다시 현장으로 갔다. 그때부터 불을 밝히고 재차 발굴작업에 들어갔다. 향로를 파내기 30여분.발굴팀은 완벽한 형태의 유물이모습을 드러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야』하는 탄성을 질렀다.영하의 차가운 날씨에 손과 발은 꽁꽁 얼어붙었으나 보물중의 보물을 발견한 기쁨에 모두 흥분상태였다.향로는 신관장이 직접 가슴에 품고 3㎞쯤 떨어진 부여박물관으로 달렸다. 신관장등은 박물관에 도착하자마자 보존작업에 들어갔다.중국의 어떤 향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걸작품이라는데 또한번 놀랐다. 밤새 뜬눈으로 지샌 발굴팀은 이튿날인 13일 문화체육부와 국립중앙박물관등에 보고하고 이에 대한 조치를 구했다. 이같은 보고를 받은 정양모중앙박물관장을 비롯한 전문가들은 현지로 즉시 내려와 이를 확인했다.한결같은 결론은 『중국 한나라때 유행하던 박산로와 비슷하지만 세부적인 기술과 예술성에서는 전형적인 백제의 작품이다.크기나 기법에 있어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국보급』이라는 것이었다. 아직 주조기법상 어떤 노하우를 가지고 제작했는지는 가려지지 않았다.그러나 규모나 세공기술상 삼국은 물론 중국·일본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걸작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 동양최고의 걸작 백제금동향로 출토

    ◎5인의 주악상 등 문양 1백개/높이 64㎝/부여능산리 집터서/6세기유물 4백50점 발굴/“빠른 시일내 국보지정”/문체부 【부여=최홍운기자】 문화체육부는 22일 국립부여박물관이 발굴중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백제시대 집터에서 우리나라 고대사의 신비를 풀어줄 김동용봉봉래산향로를 비롯한 4백50여점의 유물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민섭장관이 현지발표를 통해 이날 공개한 유물은 김동용봉봉래산향로와 김동인동문광배편,금동제방울,원반형장식,풍탁초,김동투조장식구등의 금동제품과 금제구슬·유리구슬·칠기·철기류·기와류·토기류등으로 되어있다. 특히 김동용봉봉래산향로는 전체높이 64㎝로 한반도를 비롯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출토된 향로 가운데 최고의 미적 수준을 나타내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전체 4개부분으로 구성된 이 향로의 뚜껑장식은 한마리의 봉황이 여의주를 목에 끼고 날개를 활짝 펼쳐 비상하는 모습이며 그 아래의 뚜껑에는 비파·피리·북·현금·소를 연주하는 5인의 인물상·동물상·기마상·기마수렵상·화염문등 1백여개의 화려한 문양이 배치되었다. 향로의 몸통에는 24개의 연꽃잎이 3단으로,또 각 연꽃잎과 그 사이에 물고기·가릉빈가·천인등 각양각색의 신격화된 부조상들을 배치했다.대족부는 한마리의 반용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형상으로 위의 몸통을 입으로 받들고 있다.아래쪽은 서운과 인동을 소용돌이치는 모습으로 장식함으로써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었다. 정양모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들 문화유산은 1972년 무령왕릉 발굴 이후 백제고고학이 거둔 최대급 성과로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는 물론 동아시아 고대문화연구의 획기적 자료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 중,사상최대 발해고분 발굴/작년부터 2백92기

    ◎“역사 공백메울 귀중한 가치” 【홍콩 연합】 중국은 흑용강성 녕안시 발해진에서 발해고분 발굴사상 최대규모의 발굴작업을 벌여 모두 2백92기를 발굴했으며 출토된 7백여건의 유물들은 『국내외의 발해국 역사및 고고학 연구의 공백을 메웠다』고 「홍콩중국통신사」(HKCNA)가 11일 보도했다. 홍콩중국통신사는 이날 고고학자들이 발해진 소근채하 남안 모래구릉에서 지난해 1백10기에 이어 올 6월부터 11월말까지 1백82기등 2년간 모두 2백92기의 고분을 발굴했다고 전하고 이는 『중국의 발해고분 발굴사상 규모가 가장 크고 그 수효도 가장 많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통신은 흑용강성문물고고연구소 고고학자들이 모래구릉내 총1만여㎡에 이르는 고분군중 8천3백여㎡를 발굴했다고 전하고 고분군 주변이 토지유실이 심하고 현지주민들이 벽돌을 제조하기 위해 모래를 마구 운반해가 보호차원에서 발굴을 하게 된것이라고 말했다. 발굴된 고분들은 대다수가 봉토석실묘이고 형태는 도형·장방형·산형 등이다.고분들은 벽돌 또는 벽돌과 돌로 혼합해 건축된 것이었고 방향은 대부분 남향이었으며 석관묘는 비교적 적었다. 발굴된 유물들도 너무 다양해 생활용구·생산도구·장식품·병기등이 동기·철기·김은기·옥기·골기로 만들어져 있었고 동종과 동방패는 『극히 보기 드문 것들이었다』고이 통신은 소개했다. 홍콩중국통신사는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이 고분군의 전면적 발굴은 극히 중대한 학술가치가 있으며 연대를 구분할 수 있는 유물들은 국내외의 발해국 역사및 고고학 연구의 공백을 메웠다』고 전했다.
  • 시나이반도 유물탐사 한창/이집트,고대 파라오왕조 성터 발굴 큰성과

    「산 자가 죽은 자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갖는다」는 아랍 속담도 같은 아랍문화권인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개발현장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요즘 「평화수로」건설사업이 한창인 시나이 반도에서는 오히려 죽은 자가 산 자보다 더 많은 권리를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땅속에 묻힌 문화유물이 철저히 개발사업에 우선해 고려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 정부로서는 이 관개사업이 인구분산을 위한 중요하고도 시급한 국책사업이다.이집트에서는 5천9백만 인구 대부분이 전 국토의 4%에 불과한 나일 계곡에 몰려 살고 있다.따라서 이집트 정부는 시나이 반도의 메마른 땅을 농지로 전환,30만 인구를 이주시킬 원대한 계획 아래 나일강 삼각주에서 이곳으로 이어지는 물길 건설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업의 진행과정에서도 유물에 대한 사전탐사는 어김없이 지켜지고 있다.사전탐사에 의해 물길이 지나갈 자리에 유물이 없다는 판정이 내려진 뒤에라야 공사가 진척된다.운반 가능한 유물이 발견될 경우는 이전작업이 이뤄지고 현장보존이 필요한 유적지가 발견되면 물길을 돌린다.현재도 유물매장 여부에 대한 조사가 20군데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발굴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독일의 건축가 피터 그로스만씨는 『불도저는 유물이나 유적지가 묻혀 있는지 여부를 감지할 수 없다』며 사전탐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보존가치가 큰 유적지가 발견되면 그 지점을 섬처럼 남겨둔채 공사가 진행된다』고 설명한다. 이같은 노력에 의해 칸타라 알 샤크 지방에서 고대 파라오 왕조의 거대한 성터가 발굴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발굴작업의 가장 큰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고고학자들은 이 성터를 파라오 왕조의 군대가 근동지역을 정벌하기 위해 행진해갔던 「전쟁길」 개척의 시발을 알리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물보존을 위한 작업은 건설당국과 이집트고대유물기구(EAO)의 합작으로 이뤄진다.유물및 유적 발굴에 드는 비용도 건설당국과 EAO가 공동부담하고 있다.이렇게 해서 지난 한햇동안 발굴작업에 투입된 비용만도 60만 달러(약 4억8천만원)에 달했고 향후 5년간 2백30만 달러가 더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유적발굴에 드는 비용을 「미래에 대한 투자」로 생각하고 있다.그리고 그 투자가치는 오래전부터 현실로 입증돼왔다.이집트가 지난 한해에만 문화재 관련 산업으로 30억 달러를 벌어들인 것은 그 좋은 예이다.이는 문화유물이 산 자를 위해 그만큼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는 현실적 입증이기도 하다. 이집트인들의 문화재 보존에 대한 열정은 얼핏 너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리는 「산 자가 죽은 자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갖는다」는 속담의 숨은 뜻을 암시해주고 있다.다시 말해 이 속담은 「죽은 자」의 가치존중에 대한 강한 역설인 셈이다.
  • 한·중·일학자들 「임나일본부설」 논쟁

    ◎중 학자 “2∼3세기 왜여왕 한반도 지배” 주장/한국측 “왜통일 안된 상태·입증유물 없다” 반박 한일 고대사의 주요쟁점들인 「임나일본부설」「칠지도 명문 해석」등이 한·일·중·몽골등 4개국 역사·고고학자들이 참석한 국제학술회의에서 제기돼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20∼21일 이틀동안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4회 아세아사학회 서울연구대회에 참가한 중국측 학자들은 논문발표를 통해 「2∼3세기에 위의 세력이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일본에 소장중인 칠지도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사여한 것」이라고 밝혀 한일 양국 학자들로부터 집중공세를 받았다. 이 대회 중국측 대표인 왕중수교수(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는 「3세기의 동아시아」란 기조강연을 통해 『일본 기내지방에 근거지를 둔 사마대국의 비미호여왕은 2세기 말부터 3세기 초 전왜국의 왕이 되었으며 한반도 남부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이같은 해석은 비미호를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공왕후와 같은 인물로 본 것으로,결국 일본학계에서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삼국시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진출,가야에 임나일본부라는 기구를 두어 직접 통치했다)을 인정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이기백대표(한림대 교수)등 한국측 참석자들은 ▲왜가 그 당시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지 못했음은 일본 학계도 시인하고 있고 ▲따라서 한반도에 진출할만한 능력이 없었던데다 ▲고고학적으로도 이를 입증하는 유물들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는 점등을 들어 그의 주장을 강력히 반박했다. 한편 또 다른 쟁점인 「칠지도」에 대해서는 왕위교수(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백제왕의 하사품』이라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현재 일본 나양현 천이시 석상신궁에 보관중인 칠지도는 3∼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그 표면에 새겨진 문구를 해석함에 있어 국내에서는 『백제왕이 아랫사람인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일본 학계는『백제왕이 왜왕에게 바친 것』으로 각각 보고 있다. 이밖에 길림성박물관의 왕칙 역사부주임이 『길림성 집안현 집안고성은 고구려 초기의 도읍지인 국내성이 아니라 사실은환도성』이며 『국내성은 통설과는 달리 한반도 북부지방인 낭림산맥 동쪽에 있었다』는 새 주장을 폈으나 한일 양국의 학자들로부터 『고구려의 발흥지를 한반도 내로 국한하려는 의도이며 학술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 서울연구대회를 주최한 아세아사학회는 지난 90년 한국의 김원용(작고),북한의 김석형사회과학원장,중국의 왕건군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장,일본의 강상파부 동경대명예교수등 4개국의 원로 역사·고고학자들이 결성한 단체로 매년 고대 동아시아사에 대한 학술대회를 열어왔다. 북한측은 「한국내 상황이 학술대회를 열기에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참석을 거부,이번 대회에는 몽골이 대신 참여했다.
  • 「한줌의 시간속에서」 이 영화제서 작품상

    ◎백일성감독/존재하는것들의 아름다움 영상화/낙향한 노교수의 눈통해 삶의가치 발견 흥행을 염두에 두지않고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영화는 자본의 예술」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화 한편을 만드는데 드는 돈이 한두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달 이탈리아 아그로폴리에서 열린 제46회 살레르노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백일성감독(47)의 「한줌의 시간속에서」는 흥행보다는 작품성에 힘을 기울인 「예술영화」다.백감독으로서는 처녀작인데다 오랫동안 강단에서 영화이론을 강의해온 이론가답게 영화전편에 의욕과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이 영화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인간뿐 아니라 벌레·동물·작은 풀한포기까지 영원한 시간속에서 생멸한다는 것을 형상화하고 있다. 1930년대 충남의 한적한 해안마을이 주된 무대가 된다.이곳에 독일 유명대학의 고고학교수(전무송분)가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찾아든다.예전에 융성했던 자신의 집은 이미 폐허가 된 상태.외로운 나날을 보내는 노교수는 아련한 향수에 젖어 이 세상에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어렸을 때의 자신,어머니,아버지,여자친구 영애-을 회상하며 인간의 삶은 과연 무엇인가를 되새긴다. 그러나 백감독이 보는 삶은 허망하지만은 않다.결국 「한줌의 시간속에서」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말지만 그 생은 진정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동네에 사는 미모의 무녀와 문둥이를 대비시킴으로써 이 세상에 존재했음,살아있었음만으로도 아름답고 보람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노교수가 동네 무녀를 보고 여러차례 『아름다워라』라고 한다든가,어렸을 적 어머니가 임종하는 자리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던 말을 반추하는 것은 이 영화의 주제를 강하게 암시한다.물결치는듯한 보리밭 전경을 비롯,아름다운 자연의 변화와 사계를 담은 영상은 시간의 영속성과 자연섭리속에서 인간의 삶은 「한줌의 시간」도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상징되어진다. 전체적으로 대사가 극히 절제된데다 영상으로만 표현하다 보니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움은 있지만 『시간만 허비했다』는 느낌은 받지 않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국내 상영관을 찾지못해 일반인들에게 선보일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이제 우리 영화계에도 이런 류의 영화가 상영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지 않을까.
  • 「옛총독부 선철거」 대의따른 결단

    ◎경복궁 하루빨리 복원,민족정기 회복해야 옛 총독부 건물 철거를 둘러싸고 대립되는 양상을 보였던「선철거론」과「선건립론」중에서 정부는 최근「선철거론」을 택했다. 그럼에도「선건립론자」들은 아직도 그 결정에 불만이 있는 듯하기에 다시 한번「선철거」의 당위성을 밝힌다. 「선철거론」과「선건립론」은 양측 다 헐자는 데에 이의가 없다.다만 허는 시기가 논쟁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선건립」의 주장이 전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원로 고고학자인 손보기선생이 10월31일자 서울신문에서 이미 제시한 바와 같이,「문화재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비가 새는 총독부 건물보다는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 시급하기 때문이다.특히 수장문화재 12만점 가운데 현재 전시되고 있는 것은 7천여점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것을 옮기는데는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논쟁을 겪어오면서 말할 수 없는 비통함을 느꼈다.광복이 된지 48년이 지난 지금 이런 논쟁이 일었던 자체가 부끄럽다. 돌이켜 보면 우리 민족은 국토를 일제에 의해서 강점당한 뒤 갖은 민족적 모멸을 받아왔다.급기야 그들은 조상이 물려준 성과 이름까지 빼앗고,우리 민족 전체를 말살하려 하지 않았던가.이렇게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던 세력의 상징인「옛 총독부」가 아직도 버티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이것은 민족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다.옛 총독부를 서둘러서 헐어야 할 대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함께 우리의 전통왕궁인 경복궁 앞에「옛 총독부건물」이 온존해 있다는 것도 상식밖의 일이다.경복궁을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기 위해서도「옛 총독부 건물」을 허는 일은 하루가 급하다. 현재 우리가 당면한 역사적 과제는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여 조국통일을 성취하는 일이다.따라서 국가·민족이란 대의를 위하여 개인인 소아는 희생시키야 한다.이런 뜻에서 경복궁 복원·옛총독부 철거·국립중앙박물관의 이전이 맞물려 있는「선철거」와「선건립」의 선택 과정에서 정부는 대의와 실리를 냉철하게 판단했다.이것을 어찌 인기영합으로 매도할 수 있겠는가. 민족의 숙원인 민족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는 먼저「총독부」를 헐어 일제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정부의 총독부건물 조기철거 방침을 다시 한번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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