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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속 8명… 사회파장 최소화/검찰의 「5·18」재수사 2개월

    ◎“쿠데타 반드시 단죄” 선례확립 큰 의미/특별법 헌의결정 필요… 재판 늦어질듯 5·18사건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가 30일 정호용·허삼수·허화평의원 등 현역의원 3명을 내란 등 혐의로 사법처리함으로써 사실상 일단락됐다. 지난해 11월 말 5·18사건에 대한 재수사에 착수한 지 2개월만이다. 검찰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비롯,모두 8명을 구속했고 3명을 불구속 기소했다.핵심 관련자들로 처벌 대상을 최소화했다는 것이 검찰의 설명이다. 검찰을 이번 수사를 통해 쿠데타는 발생 시점이 언제든 반드시 단죄한다는 선례를 확립했다.「역사 바로 세우기」에 대한 김영삼대통령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됐다고도 할 수 있다. 검찰은 이날 정의원 등에 대한 구속영장에서도 드러났듯이 군권을 장악한 12·12사건과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후의 과정을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시키지는 않았다.그러나 5·17 이후의 일련의 집권 시나리오가 80년 5월12일 신군부세력이 마련한 「시국수습방안」에 따른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집권시나리오의 창출에서부터 내란이 완성되는 81년 1월24일 비상계엄해제에 이르기까지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허삼수 당시 보안사 인사처장과 허화평보안사령관비서실장을 구속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에게 내란목적살인 혐의가 적용된 것은 전두환·황영시·이희성·주영복씨 등과 함께 자위권 발동이라는 명목으로 시위대에게 발포토록 하는 등 유혈진압을 진두지휘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정씨에게는 따라서 내란목적 살인죄가 추가 적용됐다. 검찰은 5·18 사건을 엄하게 단죄하면서도 사건수사가 몰고올 지도 모를 정치·사회적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상당히 고심한 것으로 알려졌다.처벌대상을 일단 13명으로 압축한 것도 이 때문이다.광주에 투입된 일선부대 지휘관들을 명령에 따라 작전을 수행한 「생명이 있는 도구」로 규정,무혐의 처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지난해 7월 5·18 사건의 관련자들에게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린 점을 고려할 때 검찰의 재수사 자체가 스스로 명예를 훼손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수사 과정에서 신군부측의 집권시나리오와 발포를 용인하는 자위권 발동 사실 등을 새롭게 밝혀내는 등 오히려 검찰에 대한 신뢰를 조금이나마 회복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검찰은 앞으로 5·18사건 피고인들이 5·18특별법 등에 대해 계속 위헌공세를 벌일 것으로 보고 법리 대응에도 주력한다는 방침이다.검찰은 이를 위해 이 사건에 대한 사법처리가 마무리될 때까지 특별수사본부를 존치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5·18특별법 등의 위헌여부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빨라야 다음달 말쯤에야 내려질 전망인데다 전두환전대통령이 단식 후유증으로 빠른 시일안에 법정에 출두할 수 있을 지도 미지수여서 이 사건에 대한 본격재판은 상당기간 지연될 것으로 보인다.
  • 「5·18」 3의원 구속영장 요지

    ▷정호용◁ 피의자는 전두환·노태우·유학성·황영시·차규헌·주영복·이희성·허삼수·허화평·이학봉 등과 순차 공모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해산해 계엄해제 요구권 행사를 봉쇄한 상태에서 입법·사법·행정을 통제하는 초 헌법적 비상기구를 설치,국정을 장악해 집권하고 나아가 그 기반을 공고히 할 목적으로 80년 5월초 전두환 등과 함께 「시국수습방안」을 수립한 다음 5월17일 하오 9시 42분쯤 무장병력이 배치된 가운데 비상국무회의에서 계엄법상의 요건에 위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의결시켜 이날 자정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음. 5월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시위가 발생하자 피의자 등의 정국장악에 상당한 장애요소로 판단,언론보도를 통제하면서 공수부대를 광주로 투입,강력히 진압하고 광주 시위대를 무장폭도로 규정,계엄군으로 하여금 광주 외곽을 봉쇄하고 자위권발동이라는 명목으로 실탄을 분배해 발포케 하고 광주 재진입작전인 상무 충정작전을 실시해 광주 시민인 이정연 등을 살해했음.5월27일 국보위를 발족시켜 31일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으로 취임한 다음,공직자 숙정,언론통폐합,언론인 해직 등 각종 정책을 수립·시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국보위 상임위원회가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각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해 헌법기관인 행정부와 그 수반인 대통령을 무력화시킴으로써 그 권능행사를 불능케 했음. 계엄하에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돼 81년 1월23일 김대중의 사형이 확정되자 동일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그 다음날인 24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해제하는 등 피의자는 중요임무 종사자로서 헌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해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등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내란함과 동시에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하고,광주 시민들을 살해한 자로서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음. ▷허삼수·허화평◁ 피의자는 전두환·노태우·유학성·황영시·차규헌·주영복·이희성·이학봉 등과 순차 공모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해산해 계엄해제 요구권 행사를 봉쇄한 상태에서 입법·사법·행정을 통제하는 초헌법적 비상기구를 설치,국정을 장악해 집권하고 나아가 그 기반을 공고히 할 목적으로 80년 5월 초 전두환 등과 함께 「시국수습방안」을 수립한 다음 5월17일 하오 9시42분쯤 무장병력이 배치된 가운데 비상국무회의에서 계엄법상의 요건에 위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의결시켜 이날 자정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음. 5월17일 하오 11시쯤 사회혼란 조성 및 학생·노동계 소요의 배후조종 혐의로 김대중 등을,권력형 부정축재라는 불분명한 혐의로 김종필 등을 각각 체포하고 18일 무장병력으로 하여금 국회의사당을 점거,8월30일까지 국회의원 등의 출입을 통제하게 해 헌법기관인 국회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했음. 5월27일 국보위를 발족시켜 31일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으로 취임한 다음,공직자 숙정,언론통폐합,언론인 해직 등 각종 정책을 수립·시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국보위 상임위원회가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 각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해 헌법기관인 행정부와 그 수반인 대통령을 무력화시킴으로써 그 권능행사를 불능케하고 7월 중순 국보위 법사분과위원들을 동원해 개헌안 시안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전두환·노태우·이학봉 등과 함께 간선제 대통령 선출안 등을 결정하고 피의자 등이 운영하는 국보위 상임위원회가 국정을 장악하고 대통령과 행정 각부를 무력화시킴으로써 대통령으로서의 권한 행사에 한계를 느낀 최규하전대통령이 8월16일 하야하자 18일 서울과 제주를 필두로 잇달아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 안보보고회의에서 새 대통령 후보로 전두환장군을 추대토록 하는 한편 8월21일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에서도 전두환을 국가원수로 추대하기로 결의하고 8월27일 전두환이 제 11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9월1일 취임했음. 집권에 이르는 과정에서 취한 조치들을 헌법에 반영하거나 완결하고 언론을 순화시키며 신당을 창당해 정계를 개편하는 등 향후 집권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계엄상황을 계속 유지하면서 9월 20일 피의자 등의 의견이 반영된 제 5공화국 헌법개정안을 마련,29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공고,10월22일 국민투표로확정된 헌법개정안을 27일 공포하고,제10대 국회를 해산시키면서 국가보위 입법회의로 하여금 81년 4월10일까지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게 하고 80년 6월20일부터 신당 창당을 추진하여 특정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하는 한편 정보·수사기관 관계자들의 주도하에 민주정의당을 창당했음. 계엄하에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돼 81년 1월23일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김대중의 사형이 확정되자 동일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그 다음날인 24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해제하는 등으로 피의자는 중요임무 종사자로서 헌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해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등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내란함과 동시에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한 자로서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음.
  • “전씨 등 4명 내란목적살인죄” 검찰

    ◎「5·18」 핵심 노씨포함 8명 기소/“자위권행사 지시”는 발포명령 간주/광주 일설 지휘관들은 무혐의 처리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서울지검3차장)는 23일 광주민주화운동 진압과정에서의 발포명령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희성계엄사령관·황영시육군참모차장·주영복국방부장관·정호용특전사령관 등 5명에 의해 사실상 하달된 것으로 밝혀냈다. 검찰은 이날 전두환·노태우전대통령 등 5·18사건 관련자 8명을 기소하면서 수사결과를 발표,이에 따라 국회가 개회중이라 이번 기소대상에서는 빠진 정호용의원(무소속)을 제외한 나머지 4명에게 내란목적 살인죄가 추가적용됐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들 5명은 80년 5월21일 일련의 회의를 통해 광주 시위대를 무장폭도로 규정하고 사상자가 생기더라도 조속히 진압하기로 결의,이날 하오 7시30분 방송을 통해 이희성계엄사령관이 자위권 행사를 지시했고 이는 일선 지휘관들에게 발포명령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계엄군들은 전씨 등의지시에 따라 정권찬탈의 의도를 모르는 상태에서 광주에 투입,「생명이 있는 도구」로 이용됐다고 지적,따라서 계엄군의 일선지휘관들은 무혐의 처리키로 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어 5·18 사건은 전씨 등 신군부측이 집권시나리오인 이른바 「시국수습방안」에 따라 비상계엄 전국확대,광주민주화운동 과잉진압,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와 국가보위입법회의 설치 등을 통해 정권을 찬탈한 내란이었으며 이에 따라 이 사건의 공소시효 기산점은 5·17 비상계엄이 해제된 81년 1월24일로 잡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전씨 등 신군부측은 최규하전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국보위를 설치해 내각을 무력화시켰으며 결국 입법·행정·사법권을 총괄하는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발족,헌법기관의 기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날 추가기소된 전·노씨를 비롯,황영시씨,유학성 당시 3군사령관,이학봉보안사대공처장 등 5명을 구속기소하고 이희성씨,주영복씨,차규헌 당시 육군사관학교장 등 3명을 불구속기소했다. 이들에게는 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목적살인·반란수괴·불법진퇴·지휘관계엄군지역수소이탈 등 9가지 혐의가 2∼5가지씩 적용됐다. 검찰은 이번 임시국회가 끝나는 대로 정호용·허화평·허삼수·박준병의원 등 4명도 사법처리할 방침이다. 검찰은 이날 발표에서 『광주진압군의 지휘체계가 뚜렷하게 이원화된 것은 아니지만 전두환·정호용씨가 정식 지휘체계에 뛰어든 것은 사실』이라며 지휘체계가 일원화됐다는 전씨측의 주장을 일축했다. 또 전씨 등은 80년 5월17일 임시국무회의가 열린 중앙청 안팎에 무장병력을 배치,위압적인 분위기속에 비상계엄확대를 결의토록 한 사실 등이 확인돼 군사반란죄가 추가됐다고 밝혔다. 전씨는 특히 80년 7월 권한행사에 한계를 느낀 최규하전대통령이 사임을 결심하자 8월10일 노태우씨를 만나 대통령에 취임하는 문제를 논의한 뒤 각 지역 보안부대장들에게 지시,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자신을 지지토록 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80년 언론통폐합 조치도 전씨 집권계획의 일환으로 자행된 내란의 주요과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 검찰의 전씨측 위헌공세 대응

    ◎“5·18재수사는 「사정변경」 해당돼 정당”/법원의 공소시효 인정도 검찰 입장 “부축” 5·18특별법에 대한 전두환·노태우전대통령측의 위헌공세가 가열되고 있다.검찰의 5·18사건 기소를 하루 앞둔 22일 전씨측은 「헌법소원 보충이유서」를 통해 또다시 검찰수사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등 집요한 법리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전씨측은 지난 18일 장세동전안기부장 등에 대한 법원의 영장심사 단계에서 전격적으로 위헌심판제청을 신청,특별법의 위헌성에 대해 「포문」을 열었다.또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헌재에 위헌심판을 제청한데 고무돼 이틀 뒤인 20일에는 새로운 시각에서 검찰수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다.94년과 지난해에 12·12와 5·18사건에 대해 각각 「기소유예」와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리고도 검찰이 이를 뒤엎고 재수사에 착수,관련자들을 사법처리하려는 것은 부당한 공소권행사라는 주장이었다. 노씨 역시 22일 한영석변호사를 통해 같은 취지의 헌법소원을 냈다. 전씨측은 특히 이날 헌재에 낸 「보충이유서」에서 『헌재의 결정은 법원의 확정판결과 마찬가지로 「기판력」이 있으므로 검찰은 재수사 및 공소제기 등 어떠한 결정이나 처분도 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지난해 1월 헌재가 12·12사건에 대한 검찰의 기소유예처분은 타당하다고 결정했으므로 검찰은 재수사나 공소제기 등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전씨측은 그 근거로 「헌법소원의 인용결정은 모든 국가기관을 기속한다」는 헌법재판소법 75조를 제시했다. 전씨측은 23일 5·18사건 관련자들이 기소되고 담당재판부가 정해지면 또 다시 위헌법률제청신청 또는 헌법소원을 낼 계획이다.이 때에는 노씨측도 전씨측과 공동전선을 펼 것으로 보인다.전씨측 변호인인 석진강변호사는 이날 『검찰의 공소장을 면밀히 검토한 뒤 담당재판부를 통해 내란죄에 대한 위헌신청을 할지,아니면 헌재에 곧바로 헌법소원을 낼지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은 전씨측의 이같은 공세를 일축하고 있다.특별법 제정 등 「사정변경」의 사유가 있었으므로 재수사의 부당성을 따지는 전씨측의 주장은 이유가 없다는 지적이다. 검찰은특별법에 규정된대로 12·12 및 5·18사건과 헌정질서파괴사범에 대해서는 국가소추권의 행사에 장애가 존재한 기간동안 공소시효가 중단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즉 내란주동자가 정치권력을 장악한 경우 비록 범죄는 성립했지만 공소시효는 정당한 국가기관이 그 기능을 회복한 이후부터 비로소 진행된다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검찰은 특히 5·18사건에 대해서는 특별법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현행법에 따라 법원이 시효기산점을 비상계엄해제일인 81년 1월24일로 인정했으므로 부담이 없다는 입장이다. ◎위헌법률심판제청과 헌소의 차이점/법원만이 신청 가능­위헌심판/사건 당사자가 청구­헌법소원 위헌심판제청과 헌법소원은 어떻게 다른가. 우선 위헌법률심판제청은 법원만이 할수 있다.헌법 제111조는 법률의 위헌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 때에는 법원이 직권 또는 사건 당사자의 신청을 받아 헌법재판소에 위헌여부를 제청,헌재의 심판에 따라 재판하도록 하고 있다.「재판의 전제가 된 때」의 재판에는 영장 심사도 포함된다는 것이 헌재의 판례다.전씨측이 지난 17일 장세동·최세창씨등에 대해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위헌제청신청서를 낸 것도 이에 근거한 것이다.또한 법률의 위헌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됐기 때문에 헌재의 결정이 나기까지 일반적으로 재판이 중지된다. 따라서 전씨측은 앞으로 5·18 사건이 법원으로 넘어가 재판의 전제가 되면 특별법이 위헌이라든가 5·18 사건의 공소 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로 다시 담당 재판부에 위헌제청 신청서를 낼 수 있다. 헌법소원은 법원이 아닌 사건 당사자가 직접 헌법재판소에 낸다는 점에서 위헌제청과 다르다.또 법률의 위헌 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헌법소원이 제기되더라도 재판은 중지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법 68조는 공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로 인해 헌법상의 기본권을 침해받은 자,또는 위헌여부 심판의 제청 신청이 법원에 의해 기각된 때에는 헌재에 헌법소원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전씨측이 지난 20일 낸 「검사의 공소권 행사에 대한 헌법소원 심판 청구」는 바로 이 조항을 근거로 한 것이다.전씨 주장에 따르면 12·12 및 5·18 재수사 및 공소 제기는 「공권력의 행사로 기본권을 침해」당한 것이 된다.또한 전씨측은 5·18로 기소된 뒤 재판부가 5·18 특별법 등에 대해 위헌제청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이 조항을 근거로 헌법소원을 제기할 수 있다.
  • 집중심리로 두달내 결론 내릴듯/「5·18법 위헌심판」 어찌 되나

    ◎특별법 합헌 여부·공소시효가 최대 쟁점 헌법재판소는 20일 법원으로부터 5·18특별법이 위헌의 소지가 있다는 위헌법률심판제청서가 접수됨에 따라 곧바로 심리에 착수했다.헌재는 화요일과 금요일에 사건을 배당해 온 관례를 깨고 사건이 접수된지 1시간여만에 김문희재판관에게 배당,「속전속결」의 의지를 나타냈다. 앞으로 진행될 헌재 심리의 쟁점은 대략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12·12와 5·18사건 피고소·고발인들에 대해 공소시효를 정지한 특별법이 헌법에 위반되는 지 여부에 관한 것이다.검찰은 이에 대해 특별법에 규정된 것과 마찬가지로 헌정질서파괴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국가 소추권의 행사에 장애사유가 존재한 기간,즉 전두환·노태우전대통령이 재임기간인 93년 2월24일까지는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되는 만큼 관련자들을 사법처리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그러나 전씨측 변호인들은 특별법상의 그같은 규정은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형벌 불소급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두번째의 쟁점은 공소 시효의 기산점에 관한것이다.만약 헌재가 헌정질서 파괴사범에 대해 공소시효가 중단된다는 결정을 내리면 12·12 및 5·18관련자들은 특별법에 따라 모두 사법처리할 수 있다.그러나 전씨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특별법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리게 되면 현행법에 따라 공소시효 기산점을 따져봐야 사법처리 여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찰은 이와 관련,12·12사건은 이미 15년의 공소시효가 만료된 것으로 보고 있다.따라서 12·12사건 관련자들은 특별법에 의해서만 사법처리가 가능하다.반면 5·18사건 관련자들은 특별법에 의해서는 물론 현행법으로도 처벌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5·18사건 공소 시효의 기산점은 81년 1월24일 비상계엄해제일로 보아 만 15년이 되는 오는 23일까지 관련자들을 기소하면 된다는 것이다.전씨측은 이에 대해 12·12의 공소시효 기산점은 79년 12월12일,5·18은 최규하대통령이 하야한 80년 8월16일로 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따라서 전씨측 주장에 따르면 두 사건의 공소시효는 만료된 셈이다. 세번째로는 검찰의 공소권행사에 관한것이다.전씨측은 이날 낸 헌법소원 심판청구서를 통해 『12·12와 5·18사건에 대해서는 검찰이 이미 기소유예,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을 뿐 아니라 이 사건 고소·고발인들이 소를 취하해 이미 처분이 종결된 것』이라면서 『이제 다시 두 사건 관련자를 기소하는 것은 재소금지 및 검찰 동일체의 원칙등에 위배된다』고 위헌론을 폈다.검찰은 그러나 특별법에 의해서는 물론 12·12 및 5·18재수사를 통해 새로운 범죄사실,예컨대 80년 5월17일 열린 비상계엄확대국무회의가 공포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것 등으로 확인된 만큼 사정변경의 원칙 등에 따라 사법처리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헌재는 앞으로 매주 전원재판부 평의를 열어 재판관들의 의견을 모은 뒤 두달안에는 결정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또한 두 사건이 서로 연관돼 있는데다 법률적인 쟁점도 유사해 같은 재판부가 병합심리토록 하는 등 집중심리방식을 채택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5·18 특별법 헌재 결정 시기와 전망

    ◎수사기록 검토 최소 2개월 소요/사안 성격상 합헌·위헌중 택일 가능성 높아/여권선 총선 악영향 우려 3월말 결론 희망 총선을 앞둔 정국에 한바탕 위헌회오리를 몰고 온 「5·18특별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심판은 어떤 절차를 거쳐 언제쯤 어떻게 결정이 내려질까. 헌법재판소는 19일 대법원으로부터 위헌법률심판제청서가 도착하면 소재판부에 배당,제청서가 요건을 갖추었는 지를 검토한 뒤 곧바로 전원재판부에 회부할 방침이다.다른 사안과 비교할 때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빠르다. 현 시점에서 헌재가 가장 우려하고 있는 점은 결정의 내용이 미칠 파장보다는 오히려 촉박한 시간이다. 헌재의 한 관계자는 『법원에 접수된 수사기록만 9만여쪽이어서 실제 헌재에 접수될 기록은 이보다 휠씬 많을 것』이라면서 『여기에다 외국의 판결사례 및 법무부측의 변론자료 등을 모두 검토하려면 기록검토에만 최소한 2개월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자연 검찰과 법원으로서는 답답해질 수 밖에 없다.헌재의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12·12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검찰의 사법처리와 이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이 중단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여권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신한국당은 4·11 총선 전에 12·12및 5·18사건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 해소되기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다.사건이 장기화될 수록 선거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이다.헌재의 여러가지 어려움을 감안하더라도 늦어도 3월말까지 결론을 내려주기를 바라고 있다. 앞으로 헌재 결정과정에서 최대 쟁점이 될 부분은 12·12사건 관련자들을 소급해 처벌할 수 있는 지 여부와 5·18사건의 공소시효문제다. 장세동씨와 최세창씨에 대한 영장발급이 유보된 데서도 드러나듯이 법원은 12·12가 지난 94년 12월12일로 15년의 공소시효를 넘긴 것으로 보고 있다.다만 지난해 말 국회에서 제정된 특별법에 근거해 처벌할 수 있는 지 여부를 헌재는 판단해야 한다. 5·18내란행위의 공소시효문제도 난제중의 난제다.헌재는 지난번 5·18헌법소원사건에서 내부적으로 최규하전대통령의 하야일인 80년 8월16일을 공소시효의 만료일로 잡은 바있으나 소취하와 상황변화로 기속력을 상실했다.따라서 헌재가 검찰이 다시 제시하고 법원이 인정한 81년 1월24일(비상계엄해제일)을 5·18사건의 공소시효만료일로 받아들일 것인지가 관심사다. 이 문제에 대해 헌재가 내릴 수 있는 결정으로는 ▲위헌 ▲합헌 ▲한정합헌 ▲한정위헌 ▲헌법불합치 등이 있다.그러나 사안의 성격상 「어정쩡한」 변형결론을 내릴 가능성은 예상하기 어렵다.「도 아니면 모」로 위헌 혹은 합헌 둘중 하나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위헌결정을 내릴 경우 5·18특별법은 자동 폐기되며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제외한 나머지 관련자는 처벌할 수 없다.단 5·18내란관련자의 경우 공소시효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공소시효가 남았다고 판단하면 현행 법률로 처벌할 수 있으며 공소시효가 완료됐다고 결정할 경우 전·노씨는 물론 나머지 관련자도 내란죄로는 처벌받지 않게 된다.
  • 「특별법 위헌 심판」 제청이후 수사 전망

    ◎검찰 「12·12」 사법처리 궤도 수정 불가피/관련자 기소 헌재결정 이후로 늦춰져/5·18 사건은 재판 일정에 큰 차질 없어 법원이 5·18특별법에 대해 「내란과는 달리 군사반란은 국가의 존립과 안전등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정면으로 유린한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위헌심판을 제청함으로써 사법 처리의 궤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헌법재판소가 특별법의 위헌여부를 최종결정할 때까지 검찰이 12·12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를 단행하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물론 법원이 장세동씨등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를 보류하고 위헌심판을 제청하기는 했으나 검찰은 12·12관련 피고소·고발인 38명 가운데 5·18과 중복되지 않은 나머지 20명에 대해 불구속 기소,공판을 청구할 수는 있다.그런데도 검찰이 헌재결정 이후로 기소 시점을 미루게 된 배경에는 독자적 의견만을 내세워 이들을 기소할 경우 법원이 김문관판사의 결정에 준해 관련자들의 위헌법률심판제청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5·18사건과 관련해서도오는 22일 전두환·노태우전대통령과 이학봉·황영시·유학성씨 등 5명을 구속기소하고 이희성전계엄사령관등 3∼4명만을 불구속 기소키로 하는등 사법처리의 범위를 대폭 줄였다 이는 5·18 사건의 수뇌부를 제외하고는 공수부대 여단장 등 현장지휘관들이 내란죄의 구성요건인 「국헌을 문란케 할 목적」으로 유혈 진압에 가담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위헌제청으로 향후 재판일정 등은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5·18사건 재판이 연기되거나 공전될 가능성은 적은 편이다. 담당재판부인 형사합의30부(재판장 김영일부장판사)가 12·12 및 5·18사건을 심리하기에 앞서 전·노씨 비자금사건을 종결한다는 방침을 세운데다 현재 노씨 재판이 예상보다 가열돼 결심공판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또 전씨측이 5·18의 공소시효를 비상계엄해제일인 81년 1월24일이라고 본 법원의 결정에 불복,헌법소원을 내기로 방침을 굳힘에 따라 특별법의 위헌문제와 관련해서 재판이 지연될 가능성은 더 낮아졌다.법원이 위헌심판을 제청한 경우와는 달리 신청인들이 위헌신청 기각결정에 대해 헌법소원을 내면 재판은 헌재결정과는 무관하게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전씨측의 5·18관련 위헌신청을 받아들여 위헌제청을 하더라도 「긴급한 사정이 있을 때는 헌재결정이 나오기 전이라도 심리를 진행할 수 있다」고 헌법재판소법에 규정돼 있어 재판부의 의지 여하에 따라 신축적으로 재판일정을 조정할 수도 있다. 한편 재판부는 지난 18일 전씨가 낸 12·12사건 위헌신청에 대해 『헌재의 결정을 기다려야 할지 적극적으로 헌재에 위헌을 제청해야 할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고 밝혀 내부적으로 의견을 조율하고 있음을 내비쳤다.그러나 지난 18일 같은 사안에 대해 위헌심판이 제청된 상태이고 이 사건에 대한 전씨의 공소시효가 남아 있어 위헌제청의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 “내란죄시효남아 3명은 제청기각”/2명영장보류 김문관판사 인터뷰

    ◎전씨는 담당재판부서 결정하는게 적합 장세동·최세창씨에 대한 구속영장발부를 보류한 서울지법 형사합의21부 김문관판사(32)는 18일 상오 5시20분 14시간여나 걸린 마라톤 심사를 마치고 기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김판사는 인터뷰를 한사코 사양했으나 기자들이 『결정문에 대해서만 질문하겠다』고 조건을 달자 대화에 임했다.다음은 일문일답. ­내란중요임무종사혐의 등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이학봉씨 등 3명에 대해서는 위헌제청을 기각했는데. ▲내란죄의 공소시효 기산점을 81년1월24일 비상계엄해제일로 본 검찰측의 판단을 받아들였다.따라서 내란죄부분은 특별법과는 관계없이 아직 공소시효가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내란죄만으로도 구속사유가 된다고 판단했다. ­검찰측이 구체적으로 어떤 법에 근거해 장씨등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해 왔나. ▲검찰이 17일 하오 8시쯤 특별법에 근거했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보내왔다. ­전두환전대통령도 위헌심판제청신청을 함께 냈는데 이에 대한 판단이 결정문에서 빠진 이유는. ▲변호인측에서 이학봉씨 등 5명에 대해서만 위헌심판을 제청한다는 보정서를 제출했다.전전대통령은 이미 12·12사건으로 기소돼 재판부가 정해진 만큼 담당재판부인 합의30부에서 결정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전전대통령의 위헌심판제청신청은 현재 30부에 계류돼 있다. ­변호인측이 구체적으로 특별법의 위헌조항을 적시했는가 아니면 김판사의 독자적 판단인가. ▲변호인측이 특별법 제2조1항과 2항 등 항목을 명시했다. ­변호인들이 처음 제출한 신청서는 구속영장이 청구된 이씨 등 5명에 대한 변호인선임계가 누락돼 있었다.그런데 법원측이 서류상 요건을 갖추지 못한 신청에 대해 기각하지 않고 변호인선임계 등 요건을 갖춰 다시 제출하라고 요청한 이유는. ▲위헌제청신청 절차는 민사소송법 절차를 따르도록 돼 있다.민사소송에서 소장에 미비한 점이 있을 경우 법원은 당사자에게 서류를 완비할 것을 요청한다.이와 마찬가지다. ­결정이 나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는데. ▲사건기록이 방대했기 때문이다. 김판사는 『오늘 재판이 있다.집에 가서 잠깐눈을 붙여야겠다』고 말하면서 자리를 떴다.부산 배정고와 서울대 법대대학원을 나온 뒤 33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김판사는 사법연수원(23기)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 「12·12」「5·18」단죄수순 돌입/핵심관련자 5명 영장 안팎

    ◎정국파장 등 고려 구속 최소화 선회/나머지 15명 일괄 불구속 기소할듯 장세동씨 등 12·12 및 5·18 사건 핵심 관련자 5명이 군사반란임무종사 등의 혐의로 17일 일괄 구속됨으로써 검찰의 수사가 단죄 수순에 접어들었다.지난해 11월24일 김영삼대통령이 5·18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발표한지 50여일만이다. 검찰은 신병 확보의 어려움 등을 감안,이들에 대한 사법처리 방침을 일체 비밀에 부치다 이날 하오 전격 공개했다. 검찰은 정호용·허화평·허삼수씨 등 현역 국회의원들은 국회 회기가 계속되고 있는 만큼 체포동의안을 제출해 사법처리 수순을 밟거나 국회 회기가 끝난 뒤 사법처리한다는 방침이다.김상희주임검사는 이와 관련,『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또 『공소 시효와 관련해 위헌 시비를 없애기 위해 81년 2월24일 비상계엄해제일을 기산점으로 삼을 때 공소시효 만료일인 오는 24일을 이틀 앞둔 22일쯤 관련자들을 기소할 계획』이라면서 『관련자가 기소되면 공범에 대해서는 시효가 정지되기 때문에 현역 의원들을 추가로 사법 처리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검찰은 당초 이날 10명 안팎을 구속한다는 방침이었으나 「역사 바로 세우기」 정신을 유지하면서도 향후 정국과 사회전반에 미치는 후유증 등을 고려,구속자는 줄이는 대신 불구속 기소자를 늘리는 쪽으로 사법처리의 방향을 선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환서울지검장은 이날 상오 김기수검찰총장을 만나 사법 처리의 폭을 최종 결정한 뒤 『예상보다 구속자 숫자가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구속된 사람들과 현직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관련자 15명 안팎도 오는 22일 전두환·노태우전대통령 등에 대한 추가기소 때 일괄 불구속 기소한다는 방침이다.따라서 의원 신분이 아닌 나머지 관련자 가운데 추가 구속자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결정은 두 사건 피의자들에 대한 무더기 구속과 재판이 정국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5·18 사건 피해자들이 특별법에 따라 사법처리 결과에 대해 불복해 재정신청을 낼 가능성에대비,불기소 또는 기소유예 처분은 가급적 줄이고 불구속 기소자를 늘리기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그동안의 수사 결과 37명을 1차 사법처리 대상으로 정해 12·12 및 5·18 사건 당시의 역할,계급,가담 경위와 정도,개전의 정 등 7∼8개의 기준에 따라 사법처리 수준과 경중을 정한 것으로 전해졌다.이종찬본부장은 그러나 이날 『구체적인 사법처리 기준은 기소하면서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특히 장세동씨를 또다시 구속한 것과 관련,『장씨는 12·12 당시 수경사 30경비단장으로 「경복궁 모임」의 장소를 제공,지휘부 구성 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당위성을 강조했다.
  • 색깔논쟁과 재야출신 주자들

    ◎이재오씨­민중당 총장 출신… 은평을 출마/김문수씨­5·3사태 주도… 부천 소사 나서/김근태씨­재야의 상징… 도봉갑에 초선도전/장기표씨­전민련 사무처장 지내… 동작갑에 여야간에 색깔논쟁이 가열됨에 따라 새삼 각 정당내에 어떤 재야출신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고,다가오는 총선에서 유권자들로부터 어떤 심판을 받을 지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신한국당◁ 서울 은평을의 이재오(51),금천의 이우재(59),강북갑의 정태윤(42),경기 부천 소사의 김문수위원장(43)은 민중당에서 각각 사무총장,공동대표,대변인,노동위원장을 지낸 인사들이다. 이재오씨는 71년 민주수호청년협의회장으로,이우재씨는 유신말 크리스천아카데미사건으로,정씨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각각 투옥·수배된 경력을 갖고 있다.71년 유신반대투쟁으로 서울상대에서 제적된 김문수씨는 80년대초 서울노동운동연합을 창립,86년 5·3인천사태때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신범부대변인(서울 양천을·46)은 69년 3선개헌반대운동,80년 김대중씨 내란음모사건 등에 연루돼 4차례 복역했다.대전 중구의 안양로위원장(48)도 74년 민청학련사건과 80년 기자협회보편집장때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복역했다. 김영춘(서울 광진갑·34),이성헌(서울 서대문갑·38),심재철씨(안양 동안갑·38)는 80년대초 각각 고려대·연세대·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운동권출신.서강대교수를 지낸 광명을의 손학규대변인(48)도 재야학자출신으로는 성공한 케이스. 서울 강북을의 이철용전의원(48)은 빈민운동을 해오다 13대때 원내에 진출했다.서울 관악을의 박홍석씨(45)는 71년 서울대 재학시절 유신반대투쟁으로 투옥됐다.서울송파갑에 내정된 이영희전여의도연구소장(54)은 6·3세대. 안양 동안을에 내정된 정진섭방송개발원이사(43)는 서울법대 재학때 유신반대운동을 했다. ▷야권◁ 국민회의는 전·현직 의원을 포함해 20여명이 출마한다.먼저 지난해 2월 통일시대국민회의를 이끌고 통합민주당에 합류한 김근태부총재(48)가 도봉갑에서 초선에 도전한다.재야의 상징으로 민청련 초대의장과 전민련 정책실장을 거쳐 지난 92년부터 통일시대 공동대표를 맡아 왔다. 통일시대출신으로 지난 80년 민주회복국민회의 중앙의원으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됐던 심재권정책위부의장(49)은 강동을에,「여성의 전화」공동대표를 맡았던 김희선지도위원(52)은 동대문갑에 각각 나선다. 또 89년 민청련의장과 90년 전민련대변인을 맡았던 박우섭씨(43)는 인천 남갑에서,지난 77년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르고 통일시대 홍보위원장을 맡았던 김영환부대변인(41)은 안산갑에서 출마한다.민변출신으로 통일시대 사무총장과 정치위원장을 지낸 천정배(41)·유선호(43)변호사는 안산을과 군포시에서 각각 나선다. 민주당에서는 30여명에 이른다.당직자로는 지난 77년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구속된 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출신의 김부겸부대변인(38)이 과천·의왕에서 출마하고 영입케이스로 전민련 사무처장과 민중당 대표를 역임한 장기표당무위원(50)은 동작갑에 나선다.역시 영입인사로 전 민변대표인 홍성우최고위원(57)이 강남갑에 나서고 전·현직의원으로 이부영전의원(54·강동갑),제정구의원(52·시흥시),유인태의원(48·도봉을),원혜영의원(45·부천 오정),박계동의원(44·강서갑)등이 있다.
  • 「가담 경위」 등 감안 구속 결정/이종찬수사본부장 일문일답

    ◎“관련 현역의원 사전영장 청구 고려안해/핵심 5명 기소때 전씨도 내란죄로 기소” 12·12 및 5·18사건특별수사본부 이종찬본부장은 17일 하오 장세동씨 등 관련자 5명에 대해 반란중요임무종사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한 뒤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가졌다. ­관련자들에 대한 구속과 불구속의 기준은. ▲관련자가 가담하게 된 경위와 정도·사안의 경중·성행·개전의 정 등은 물론,당시 직책과 5·6공에서의 역할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됐다.수사는 계속되므로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인가는 기소단계에 가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 5명에 대한 구속영장은 군사반란혐의만 적용된 것인가. ▲영장에는 대표적인 죄명 하나만 기재하면 되므로 대표죄명인 반란 하나만 썼고 적용내용에는 내란죄도 포함돼 있다. ­기소는 언제쯤 하나. ▲수사진척에 따라 먼저 사법처리한 사람 순서대로 할 것이다. ­전두환씨에 대한 내란죄 추가기소는언제쯤 할 것인가. ▲이들의 기소때 추가한다. ­(81년 1월24일 계엄해제일로부터 산정,공소시효 만기일이 되는)오는24일전에 관련자 사법처리를 다 끝내야 하지 않나. ▲현재 여러가지 상황과 조건을 고려해 수사를 하고 있으므로 그때까지 될지 어떨지 모르겠다.말하기 어렵다. ­현역의원 가운데 구속대상자는 국회 회기가 끝나면 하나,아니면 회기중 체포동의서를 제출하나. ▲지금 말하기 곤란하다. ­이들에 대한 사전영장도 가능할텐데. ▲그런 것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사실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역의원을 제외한 추가구속자는. ▲더 생각해보자.구속자는 수사보안상 이 단계에서 말할 수 없다. ­장세동씨의 구속사유는. ▲12·12 당시 30경비단장으로서 30단장실에서 있었던 경복궁모임에 장소를 제공했다.이는 굉장한 의미다.일몰때는 수경사령관조차도 대통령 경호실장의 허락없이는 못들어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또 모임의 일원으로서 반란지휘부를 구성하는 역할을 했고 허삼수보안사인사처장이 정승화총장을 연행할때 자신의 5분대기조 부하 80명을 김진영33경비단장에게 파견,허처장을 돕도록 했다.또 이희성중앙정보부장 서리에게 부탁해 육본 병력의 출동을 저지토록 하기도 했다. ­유학성씨는. ▲12·12와 관련,사전모의에 가담했으며 상대편에 전화를 해 육본병력 출동을 저지했고 5·18때는 시국수습방안논의에 참여,내란모의를 한 것이다. ­황영시씨는. ▲12·12때 1군단장으로 2기갑여단을 중앙청에 진주시키고 휘하 박희모30사단장에게 병력을 고려대에 진주시키도록 했다.고대 진주는 육본 진압병력의 통과를 막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또 5·18때 시국수습방안을 논의하고 광주민주화운동을 강경 진압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 「12·12」·「5·18」 핵심 5명 영장

    ▷유학성◁ 피의자는 사전계획에 따라 노태우·황영시·차규헌·박준병 등과 함께 79년 12월12일 하오 6시부터 7시 사이에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그곳 참석자중 최상서열자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 모임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함. 하오 9시30분쯤 자신의 주도하에 전두환·황영시·차규헌 등과 함께 국무총리공관으로 찾아가 최규하대통령에게 집단적으로 정승화총장의 연행조사를 재가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함. 그 무렵 육군 정식지휘계통에서 피의자등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진압할 움직임을 보이자 정승화총장 연행에 항의하는 장태완수경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이쪽으로 오라』고 회유함. 또 하오 9시부터 11시 사이에 윤성민참모차장,김용휴국방차관,1·2군사령관,제3군사령부 참모장 등에게 전화를 걸어 육본측 지시에 따른 병력출동의 저지를 부탁한 것을 비롯,출동가능성이 있는 제9공수여단 제26사단 수도기계화사단 등에 전화를 걸어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아달라고 회유하는 등 각 부대의 출동을 사전에 저지함. 전두환등과 함께 80년5월27일 국무회의에서 대통령령으로 제안된 국보위설치령을 의결하게 한뒤 공직자숙정계획에 따라 공직자 8천6백1명에게 사임을 강요하고 각 언론사에 언론인 3백36명의 해직을 종용하는 등 계엄하의 고유업무와 무관한 조치들을 결정함. 이를 통해 전두환등의 국정수행능력을 내외에 과시,유일한 집권세력으로 부각시키는데 이용하면서 행정부와 그 수반인 대통령을 무력화하고 10월29일부터 81년 4월10일까지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도록 함. 80년 9월1일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언론을 계속 통제한 상태에서 집권과정의 제반조치들을 헌법에 반영하고 신당을 창당,정계를 재편하는 등 향후 집권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81년 1월24일까지 비상계엄상태를 유지함. 이로써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해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자로서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음. ▷황영시◁ 피의자는 사전계획에 따라 노태우·유학성·차규헌 등과 함께 12월12일 하오 6시부터 7시 사이에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해 유사시 자신들의 병력을 신속히 동원할 수 있는 지휘부를 결성,그곳 참석자중 최고령자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 모임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함. 하오 9시30분쯤 자신의 주도하에 전두환·유학성·차규헌 등과 함께 국무총리공관으로 찾아가서 최규하대통령에게 집단적으로 정승화총장의 연행재가를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또 육군 주요지휘관이나 참모장에게 전화를 걸어 육본 정식지휘계통에 따른 병력출동을 저지하는 한편 12월13일 0시30분쯤 이상규에게 중앙청으로 병력을 출동시키도록 지시하고 1시10분쯤 박희도에게 고려대학교로 병력을 출동시키라고 지시하는 등 전두환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반란을 일으킴. 80년 5월초 전두환·노태우·유학성 등과 함께 수시로 만나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시국수습방안을 지지하는 결의를 하도록 한뒤 이를 추진하기로 모의함. 5월17일 전군에 소요진압부대 투입작전명령을 하달,5월18일 하오 2시30분쯤 광주의 전남대·조선대를 포함한 전국 92개 주요대학과 국회 및 신민당사와 공화당사,언론기관,공공기관등 1백36개 주요 보안목표에 계엄군 2만5천여명을 배치하여 각 해당시설을 점거함. 5월18일 상오 1시쯤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고 국회의원들의 국회출입을 저지함으로써 국회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함. 피의자등의 정국장악을 위한 비상계엄확대조치와 계엄군 투입 및 정치인들의 체포에 반대하고 전두환의 퇴진과 민주화추진을 요구하는 광주 학생·시민들을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발포하는 등 강경진압함. 이후 공직자 숙정,언론 통·폐합,국가보위입법회의 설치등 자신들의 향후 집권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81년 1월24일까지 비상계엄상태를 유지하는 등 폭동하여 내란을 일으킴. ▷최세창◁ 피의자는 1957년 6월 육군사관학교를 제13기로 졸업했으며 10·26사건 당시에는 제3공수여단장으로 근무했던 자임. 피의자는 10·26사건과 관련,정승화육참총장을 강제 연행해 군 지휘권을 박탈하는 한편 군의 정식지휘계통이 이를 저지할 경우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제압해 군의 주도권을 장악한다는사전계획을 세웠음. 이에 따라 노태우·유학성·황영시·차규헌·박준병·백운택·박희도·장기오·장세동·김진영 등과 함께 12월12일 하오 6시쯤부터 하오 7시쯤까지 사이에 경복궁내 수경사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유사시 병력을 신속히 동원할수 있는 지휘부를 결성했음. 피의자는 같은날 하오 11시30분쯤 자신이 여단장으로 있는 특전사 제3공수여단 육군중령 박종규에게,직속상관인 특전사령관 정병주를 체포하라고 지시했음. 박종규는 이날 자정쯤 서울 송파구 거여동 특전사령부에서 제3공수여단 제15대 소속 1개 지역대 병력 38명에게 사령부 외곽을 포위하도록 지시했으며 이에 따라 육군대위 김홍열·육군대위 나영조·육군중사 신현수·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육군하사 6명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 정병주와 비서실장 육군소령 김오랑이 집무실에 있는 것을 확인했음.이어 육군하사 6명이 이들에게 M16소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해 김오랑을 살해하고 정병주에게 중상을 입힘. 피의자는 또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을 위반하고 다음날인 13일 상오 2시쯤서울 송파구 거여동 제3공수여단 연병장에서 2개 대대병력 6백여명을 인솔하고 천호대교·강북로·한남동을 거쳐 3시경 경복궁으로 진주했음. 피의자는 이같이 반란군 지휘부 결성과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자신의 부하인 박종규에게 지시하여 직속상관인 정병주를 체포하고,제3공수여단 2개대대 병력을 인솔하여 경복궁으로 진주하는등 전두환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일으킨 반란중요임무종사자로서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음. ▷장세동◁ 피의자는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이 전두환의 잦은 월권행위와 지휘체계 문란행위 등을 문제삼아 인사조치할 것으로 알려지자 그 지휘권을 박탈하고 무력으로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로 결의함. 사전계획에 따라 노태우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박준병 등과 함께 12월12일 하오 6시부터 하오 7시 사이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유사시 자신들의 병력을 신속히 동원할 수 있는 지휘부를 결성함. 하오 7시40분쯤 허화평으로부터 정승화총장을 무사히 연행하였으며 전두환이 정승화총장 연행조사문제를 보고하기 위해 총리공관에 갔다는 전화연락을 받고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해 있는 장성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줌. 잠시후 허화평으로부터 총장연행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연행하러간 우경윤대령이 부상을 입었으며 동원된 제33헌병대 병력이 공관경비를 맡고 있는 해병대 병력에 포위되었다는 전화연락을 받고 장성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준 뒤 제33헌병대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김진영으로 하여금 제30경비단 소속 5분대기중대 병력 80여명을 인솔하고 총장공관으로 가서 사태를 수습하도록 조치함. 수경사에서 비상이 발령되고 장태완수경사령관으로부터 주요 지휘관 비상소집 명령이 하달되었음에도 소집에 응하지 않음. 제30경비단 상황실로 전파되는 상황과 각 부대에 전화하여 파악한 상황등을 통해 육본 수뇌부가 비상을 발령하고 정승화총장의 행방을 확인하기 위해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과 제9공수여단 제26사단 수도기계화사단 등에 병력출동을 전제로 한 준비명령을 하달된다는 첩보 등을 수집,제30경비단장실에 모인 장성들에게 전파함. 중요임무종사자로서 반란군 지휘부 결성과정에서 장소를 제공하고 정승화총장 연행,부대동향 및 병력이동 상황을 수시 파악,지휘부에 전파하면서 총장공관에 억류된 합수부측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무장병력을 출동시키는 등 전두환 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한 자로서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음. ▷이학봉◁ 피의자는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인 「10·26사건」당시 보안사대공처 대공수사과장으로 근무하고 육군준장으로 전역한 뒤 13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자임. 1,79년 「10·26」사건 합수부본부장으로 임명된 전두환은 계엄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마찰을 빚어왔음.이에 정총장의 지휘권을 박탈,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김재규의 범행에 관련됐는지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정승화총장을 강제연행키로 결의했음.연행일을 12월12일로 결정한 전두환으로부터 연행장소 등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를 허삼수 등에게 통보했음.또 79년 12월12일 하오 6시20분쯤 대통령 의전수석비서관 정동렬과 함께 전두환을 수행해국무총리 공관으로 가서 정총장의 연행재가를 요구했음. 피의자는 중요임무종사자로서 정총장에 대한 연행이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연행장소를 결정했음.허삼수등이 정총장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합수부수사관 7명을 지원하는등 전두환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반란을 일으킴. 2,80년 5월초 군이 전면에 나서 정국을 장악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라는 전두환의 지시를 받았음.그뒤 전국계엄의 실시,과도정부적 성격의 소극적인 내각을 통제하기 위한 비상기구 설치 및 국회해산 등 「시국수습방안」을 추진했음.5월16일 보안부대 대공과장들을 보안사로 불러 소요 배후조종자 및 권력형 부정축재자등의 검거대상자 명단을 주고 검거를 지시,사회혼란 조성등 혐의로 김대중 국민연합공동의장,문익환목사등을 체포하고 권력형부정축재라는 불분명한 범죄혐의로 김종필 공화당총재,이후락·박종규국회의원등을 구속했음.11월12일 45개 언론사 사주들로부터 언론통폐합 조치에 이의가 없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았음. 피의자는 중요임무종사자로서 주요정치인·재야인사에 대한 수사계획을 수립,이들을 체포·구속했음.국가기관을 강압으로 전복하거나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했으며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일으킨 자로 도망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음.
  • 5·18관련 유죄판결 80명 「특별법」이후 첫 재심청구

    ◎이우재씨 등 “민주화위한 정당 행위” 지난 80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계엄포고령 위반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계엄포고령 피해자협의회」(대표 이우재)소속 회원 80명은 『당시 시위는 민주화를 위한 정당한 행위였다』면서 이 사건 재심청구서를 10일 서울고법에 냈다. 지난달 19일 제정된 5·18특별법에 근거해 이뤄진 재심청구는 이번이 처음으로 앞으로 비슷한 소송이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서울고법은 구속중인 전두환전대통령이 5·18사건과 관련,유죄판결을 받게되면 재심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씨등은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을 경우 전과기록의 말소는 물론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낼 수 있다. 이씨등은 청구서에서 『특별법은 12·12 및 5·18사건을 전후해 발생한 헌정질서파괴 범죄를 저지 또는 반대한 행위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 재심청구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면서 『당시 광주사태의 진상규명과 비상계엄해제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여 유죄판결을 받았으므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씨등은 80년 5월17일 비상계엄전국확대와 동시에 내려진 계엄포고령 10호를 위반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수도군단 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2년을 선고받고 항소해 81년5월 서울고법에서 징역1년의 형이 확정되는등 각각 선고유예에서 최고 징역3년의 판결을 받았었다.
  • 허화평씨 등 5명 조사/정호용·소준열씨 오늘 소환/5·18 수사

    12·12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서울지검3차장)는 8일 80년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씨,인사처장 허삼수씨,대공처장 이학봉씨,언론대책반장 이상재씨 등 보안사 관계자들과 3공수여단장 최세창씨 등 5명을 불러 조사했다. 검찰은 이와 함께 80년 당시 특전사령관 정호용씨와 전교사사령관겸 전남북 계엄분소장 소준열씨 등 2명을 9일 소환,광주 현장 지휘체계와 발포명령 등에 대해 조사하기로 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보안사 관계자들을 소환한 것과 관련,『보안사팀들이 12·12사건 이후 5·17비상계엄확대에서부터 81년 1월24일 비상계엄해제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 깊이 관여한 사실이 밝혀져 각 사건의 구체적인 경위를 확증하기 위해 재소환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보안사팀들을 상대로 당시 전두환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임하게 된 경위와 광주에 계엄군을 출동시킨 과정 및 보고체계,계엄확대 전날인 5월16일 보안사에서 전국보안부대 대공과장회의를 소집한 이유,국보위의 설치를 기획한 의도 등을 조사했다.
  • 시신 암매장 집중조사/「5·18」 현장수사

    ◎12개 마을 40명 소환 방침 【광주=최치봉·김태균 기자】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 광주현장조사팀과 광주지검 공안부(이귀남 부장검사)는 29일 5·18당시 민간인이 학살된 주남마을과 송암동,광주교도소 주변 등 세곳의 목격자와 피해자들을 참고인으로 소환해 계엄군의 발포상황,사체 암매장여부 등에 대해 조사했다. 검찰은 특히 당시 간호보조원 김순희(35·여)씨를 불러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의 정확한 사망자수와 피습시간 및 부상자 추가사살경위 등에 대한 진술을 들었다. 김씨는 검찰에서 『80년 5월23일 하오3시쯤 집중사격을 당한 미니버스에 올라가보니 유일한 생존자인 홍금숙(당시 17세·춘태여상1년)씨와 부상당한 남학생 2명만이 살아있었고 남학생 2명은 계엄군이 차에 싣고 화순쪽으로 갔다』고 말했다. 검찰은 앞으로 화순 너릿재터널 등 계엄군에 의해 양민학살이 자행된 광주·전남지역 12개 마을의 목격자및 피해자 40명을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할 방침이다. ◎5·18때 주남마을서 사체 21구 수습 주장/40대 시민 【광주=최치봉 기자】 80년 5·18 당시 양민이 학살당한 주남마을에서 민간인 사체 21구를 수습했다는 주장이 나왔다.이는 주남마을에서 10여명이 사망했다고 밝힌 지난 7월의 검찰 발표보다 훨씬 많은 사망자이다. 당시 앰뷸런스로 시민군 부상자와 사망자를 수송했다는 박대성(42·광주시 북구 문흥동 한신아파트 101동 1301호)씨는 29일 『미니버스 총격사건 다음 날인 80년 5월24일 하오 군의 요청으로 주남마을 도로변과 야산에서 시신 21구를 수습해 도청으로 운반했다』고 말했다.또 『당시 안내하던 사병으로부터 암매장한 시신이 더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 5·16과 제4공화국(새로쓰는 한국현대사:49)

    ◎무력으로 장기정권 인수… 합법 권력장악 추진/민정이양선언 파기… 유신까지 18년 집권 1961년 5월16일 상오 3시,한강 쪽에서 새벽 공기를 가르는 총성이 울렸다.권력이 총구로부터 나온 그 순간을 기다린 국민은 아무도 없었다.그러나 나른한 봄밤을 깊은 잠으로 보내고 깨어났을 때 새벽에 바뀐 불행한 역사 현실을 알아차렸다.이날 상오 5시 KBS 첫 방송이 정규프로를 접어둔채 성공한 쿠데타 소식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쿠데타 주역은 이날부터 18년을 독재권력 정상에 군림한 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이었다.그리고 해병대 사령관 김동하 소장과 김종필 중령등이 주체세력으로 떠오른 군사쿠데타에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이 들러리를 섰다.장도영은 쿠데타가 성공한 첫 날에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 되었다.국민의 기본 권리를 묶어버린 혁명공약과 각종 포고문이 그의 이름으로 시간시간 전파를 탔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유엔군사령관 매그루더 장군은 쿠데타 반대성명을 발표하면서 진압의사를 밝혔다.그러나 윤보선 대통령은 군사쿠데타의 필연성을 인정하고 매그루더의 쿠데타 저지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미 국무성도 군사혁명위원회 지도자들의 반공친미성향을 긍정적으로 주목했다.이는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에서 미국의 이익과 엇갈리지 않는 중요한 요소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국민의 기본권리 박탈 군사혁명위는 쿠데타 첫날 포고령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이어 다음날은 장면정권을 정식 인수했다고 밝혔다.군사혁명위는 18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꾸었다.최고회의는 6월6일 공포한 국가재건최고회의법에 따라 최고권력기구로 등장했다.이와는 별도로 5월20일 장도영을 수반으로 하는 혁명내각이 출범한데 이어 부정축재처리위원회와 혁명재판소,혁명검찰부가 설치되었다. 군사쿠데타는 군인들이 장악한 권력 그 자체보다 쿠데타 이후 군인들의 행동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그 행동은 목적을 달성한 이후 병영으로 돌아가는 중재자형과 장기간 공공연히 정치에 간여하는 감독자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1961년 쿠데타로 권력을 쥔 당시 한국의 군부도 초기에는 혁명과업을 2년내에 완수하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고 약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주변의 소수 장교들은 군정하에서 장기집권 계획을 세웠다.그 계획의 하나가 최고회의 직속의 중앙정보부(중정) 창설로 나타났다.미국의 CIA를 표방한 것이라고 하나 성격이 전혀 달랐던 중정은 창설 초기부터 무소불위의 감독자 증후군을 다양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1961년 6월에 창설한 중정은 막강한 권부의 핵으로 민주공화당(민주공화당·공화당) 창당을 위한 사전조직을 주도하는등 장기집권 포석을 깔기 시작했다. 공화당 창당은 19 61년 8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2년내 군정을 끝내고 민정으로 이양하겠다는 약속을 발표한 이후 비밀스럽게 추진되었다.그 정당의 골격은 군사혁명 정부 2년간 통치에 이어 계속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패권정당이었다.그러니까 군부는 혁명과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군인이 예편한뒤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다시 권력을 장악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군부는 이를 끝내 실현해냈다.군사혁명 포고령 제4호로이른바 구시대 정치인들의 발목을 모두 잡아두었던 군사정권은 그것도 공화당 사전 조직으로 먼저 뛰었다. 군사정부는 1962년 11월 민정이양을 위한 헌법개정안을 국가재건 최고회의에서 의결하고 이를 12월17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했다.12월12일 국민투표를 거친 개헌안을 정식 가결한 최고회의는 1963년 1월1일 포고령으로 묶었던 정당·사회단체의 정치활동 금지조항을 없애버렸다.1년7개월만에 정치활동이 재개된 것이다.그러나 오랫동안 휴면기를 살았던 기성 정치인들은 뒤늦게 스타트라인에 서야하는 불리한 입장일 수 밖에 없었다. 공화당은 63년 2월26일 김종필이 사전조직한 재건동지회를 기반으로 창당되었다. 그러면 군사정권의 정상 박정희 장군은 약속대로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할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가.물론 아니다.그는 1963년 2월18일 민정불참을 선언하고 선서식을 일단 갖기는 했다.그러나 1주일뒤 원주발언에서 자신의 민정불참 선서에 대해 부정시각을 드러냈다.이어 3월16일 현시국은 과도적 군정이 필요하기때문에 4년간 군정연장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그의 폭탄선언이 나왔다.그는 이 선언을 자신의 민정참여를 기정사실화 하는 계기로 삼아 4·8성명을 내놓았다. ○헌정 짓밟은 반역 기록 그해 5월27일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박정희 장군은 8월13일 지포리에서 군복을 벗는 전역식을 가졌다.대장 계급장을 단 전역식에서 「나 같이 불행한 군인이 없도록」 하자는 말을 남겼지만 그 아류의 정치군인들도 뒷날 네 개의 별을 달고 나서 정권을 잡는 전철을 밟았다.그래서 5·16군사쿠데타 연결선상의 군사정권이 장장 30여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했다.그것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었거니와 헌정질서를 뒤흔든 반역으로 기록되고 있다. 어떻든 박정희 장군은 1963년 10월15일 대통령선거에서 범 재야세력의 민정당 후보 윤보선을 겨우 15만표차로 누르고 신승했다.윤보선과 또 한차례 격돌을 벌인 대통령 박정희 장군은 1969년 9월14일 국회 변칙개헌으로 3선을 향해 줄달음쳤다.그리고 한 차례 더 대통령선거를 치르고 나서 1972년 10월17일 영구집권으로 가는 유신을 선포했다.박정희 정권의 제4공화국의 종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부국장급 ▲이상용 문화부부차장 ▲김성호 문화부부기자 ▲김영중 조사부 기자 ◎「5·16성명」 미국무성 보고서/주한 미대표부 이한림 장군 충고로 쿠데타 반대/본국과 협의없어 “합법정부 지지” 표명/워싱턴 명령에 「간섭」 배제… 경비만 강화 한국에서 박정희 소장이 이끈 5·16 군사쿠데타와 당시 미국의 관계를 확인하는 2건의 새로운 문서가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에 의해 미 워싱턴 케네디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발굴되었다.이들 문서는 1961년 5월16일 쿠데타 첫날 미 국무성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주한미국대표부 성명의 배경」과 11월28일 박정희 장군이 맥아더 원수에게 보낸 친서 등으로 되어있다. 미 국무성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주한 미국대표부 성명서의 배경」은 5·16당일 M 그린 주한미대사 대리와 C B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이 발표한 성명서 내용을 우선 거론했다.이들의 쿠데타 반대성명은 국무성과 사전협의한 내용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쿠데타 반대성명이 나온 배경을 설명했다.그 배경은 매그루더의 해명을 인용한 것으로,쿠데타 반대성명은 한반도 군사분계선 방위담당 지휘관인 한국군 1군사령관 이한림의 충고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주한미대리 대사와 유엔군사령관의 성명에는 5·16 군사쿠데타를 직접 반대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다만 「한국 국민의 선거에 의해 구성된 합법정부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담았을 뿐이라고 보고한 것으로 되어있다.그 이후 매그루더는 명령에 따라 군사쿠데타에 간섭하지 않고 경비강화에만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도 보고서에 기록했다. 이밖에 또 다른 문서 박정희 장군의 친서에는 맥아더 원수에게 전하는 감사의 뜻을 담았다.1961년 11월14일∼25일까지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최고회의 의장자격으로 보낸 것이다.뉴프론티어의 기수를 자처한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 등을 통해 한국 군사정부가 지지를 받기까지 미국의 각계각층 인사들과의 긴밀한 협조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 「12·12」 기소이후 「5·18」 수사 전망

    ◎전씨 내란·수뢰혐의 곧 추가기소/최씨 하야까지의 정권찬탈 과정 규명/관련자 새달 중순 일괄 사법처리할듯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이 12·12 사건과 관련해 21일 군사반란 등의 혐의로 기소됨으로써 앞으로 12·12 및 5·18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의 수사는 5·18과 전씨의 비자금 사건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물론 12·12 사건에 대한 보강수사는 계속된다.12·12 사건은 5·18에 이르기까지 「다단계 쿠데타」의 첫 단추에 해당하기 때문이다.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신군부측에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을 재가한 과정 등이 보강 수사의 한 예다. 검찰이 5·18 사건 피고소·고발인들을 소환해 집중적으로 조사할 부분은 ▲80년 4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 겸직 경위 ▲5·17 비상계엄 확대 경위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병력 출동 경위 ▲광주에서 진압군 발포 명령 하달 및 양민학살 경위 ▲80년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과정 등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12·12에서부터 5·18과 최전대통령의 하야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이 신군부의 정권 찬탈 계획에 따라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 기소되기는 했지만 전·노씨에 대한 수사도 계속된다.지금까지는 주로 12·12 군사 반란혐의에 대해서만 조사했기 때문이다.다만 전씨가 계속해서 식사를 거부하면 수사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게 될 수도 있다. 검찰은 신군부에 대한 조사를 내년 1월 중순쯤 마무리하고 일괄 사법처리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전씨측은 21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특별법에 대해 위헌소송을 내겠다고 밝히고 있다.대통령 임기중에는 공소시효가 정지된다는 것,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나머지 관련자들도 소급 처벌하겠다는 것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주장이다.따라서 특별법에 근거한 5·18 재수사 자체가 위헌시비에 휘말릴 소지도 없지 않다. 그러나 검찰은 이같은 위헌 시비를 피하기 위해 5·18 사건 공소시효의 기산점을 81년 1월24일 비상계엄 해제일로 잡는다는 방침이다.그로부터 15년이 되는 내년 1월23일까지 기소하면 특별법에 대한 위헌시비에 상관없이 관련자들을 처벌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와 함께 검찰은 전씨 비자금 사건에 대한 수사에도 힘을 기울여 이달말쯤 전씨를 특가법상의 뇌물수수혐의로 추가 기소한다는 계획이다.예상과는 달리 이날 검찰이 전씨를 뇌물수수혐의로 기소하지 않은 것은 잔액규모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현재 검찰이 밝혀낸 전씨의 비자금 조성 규모는 3천억원,보유 잔액은 3백억원 가량이다. 비자금 수사는 기소 후에도 계속된다.이종찬 본부장은 물론 수사 실무진도 『전씨 친인척과 측근들의 것으로 보이는 1백83개 계좌의 자금을 추적하려면 최소한 2∼3개월은 걸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검찰은 전씨 비자금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핵심 측근들의 부정축재 등 비리가 드러나면 모두 사법처리한다는 방침이다.
  • 5·18특별법 제정후 검찰 재수사 수순

    ◎「다단계 쿠데타」 입증… 내란죄 추가기소/12·12핵심­광주투입 지휘관 모두소환/관련자 1월 중순까지 일괄 사법처리 검찰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군사반란 혐의로 21일 기소하기로 한데 이어 5·18 사건 관련자들의 내란 혐의를 규명하는 수순에 들어갔다. 검찰은 20일 5·18특별법에 근거해 지금까지 비공식적으로 진행해 오던 5·18사건 수사를 표면화시켜 관련자들을 소환하는 한편 법리 검토 작업도 계속했다. 지난번 5·18수사 때에는 「성공한 내란은 처벌할 수 없다」는 사법심사 배제론을 근거로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을 뿐,내란과 내란 목적살인 등 혐의에 대해서는 사실상 판단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환 서울지검장은 이와 관련,『신군부측이 합법적인 외양을 갖추기 위해 세심한 배려를 한 것은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법 운영 이면에는 불법적인 저의가 상당 부분 드러나고 있다』며 내란 혐의의 입증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검찰은 우선 5·18 피고소·고발인 53명 가운데 전·노 두전직대통령을 비롯,이미 소환 조사를 마친 28명 이외의 나머지 피고소인들을 조사하는데 주력할 방침이다. 조사를 받은 피고소인에는 전·노 두 전직대통령과 황영시 전1군단장,허삼수 전보안사 인사처장,박준병 전20사단장 등 12·12사건과 연관된 핵심관련자 13명 중 11명이 포함되어 있다. 검찰은 당시 20사단 61연대장이었던 김동진 합참의장과 20사단 62연대 2대대장이었던 유효일 소장 등 5·18 당시 일선 지휘관 자격으로 광주에 투입된 현역 군인 9명에 대해서는 군검찰에 수사를 맡겼다. 이처럼 5·18 관련자들을 재소환하는 이유는 이른바 「다단계 쿠데타론」을 입증,내란 혐의를 적용하기 위해서다.물론 지난번 수사 기록도 최대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12·12사건으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측이 정권 찬탈을 목적으로 4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서리겸임­5·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5·18 광주사태 무력진압­5월20일 임시국회저지­5월30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80년 8월16일 최규하 전대통령 하야­9월1일 대통령선출­81년 1월24일 비상계엄해제­3월3일 대통령취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행동이 사전 계획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 위한 것이다. 검찰은 또 위헌 시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 사건의 공소시효 기산점을 최전대통령 하야일인 80년 8월16일에서 비상계엄해제일인 81년 1월24일로 늘려 잡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는 1월 중순까지는 5·18 관련자들을 사법처리한다는 계획 아래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여기에다 검찰은 피고소·고발인들의 개개인들에 대한 구체적인 혐의를 확증하기 위한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즉,12·12 및 5·18사건에서 핵심 역할을 한 보안사 4인방,경복궁 모임 가담자 10여명,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한 신군부측 인사 등 가운데 사법처리 대상자를 선별,내년 1월 중순 일괄처리할 예정이다.
  • 전씨 오늘 「반란수괴죄」 기소/검찰

    ◎정호용씨 등 관련 20여명 금명 소환/공소시효 기점 「계엄 해제일」로 잡아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 서울지검3차장)는 20일 전두환 전대통령을 21일 군형법상 반란수괴죄 등으로 구속기소한다고 밝혔다. 검찰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혐의로 구속기소된 노태우 전대통령도 군형법상 반란모의 및 중요임무종사 등 혐의로 추가기소키로 했다. 검찰은 특히 5·18특별법에 대해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위헌시비에 상관 없이 관련자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공소시효 기산점을 비상계엄이 해제된 81년 1월24일로 잡기로 내부적으로 결정,그로부터 15년이 되는 내년 1월23일까지 관련자들을 기소키로 했다. 검찰은 이같은 원칙에 따라 전전대통령에 대한 내란죄는 내년 1월 중순쯤,전씨의 비자금과 관련한 뇌물수수혐의는 오는 29일쯤 각각 추가기소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12·12 핵심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도 내년 1월 중순쯤,5·18사건 관련자들과 함께 일괄 처리할 예정이다. 검찰은 21일 전씨를 기소하면서별도의 수사결과는 발표하지 않고 공소장만 공개하기로 했다. 한편 검찰은 이날 5·18사건 당시 윤자중 전공군참모총장,김종곤 전해군참모총장,전주식 전33사단장,정영진 전20사단 61연대 1대대장 등 4명을 소환조사했다. 검찰은 윤·김씨에게는 지난 80년 5·17 당시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결의한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 참여한 경위와 이 회의의 주요 목적,회의 때의 강압적 분위기 여부,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역할 등에 대해 신문했다. 검찰은 33사단장을 지낸 전씨를 상대로 80년 5월20일 군병력을 동원,국회의사당을 봉쇄한 경위와 주요 임무등에 대해 집중 추궁했다. 정씨에게는 광주사태 당시 발포경위와 지휘체계 등을 조사했다. 검찰은 정호용 신한국당의원 등 아직 소환되지 않은 관련자 20여명을 금명간 모두 소환키로 했다.
  • 최 전대통령 「권총위협 목격」 논란

    「수경사출신 최병수씨 김광해씨 진술 반박/“당시 청와대 경비… 사건현장과는 거리”­최씨/“최씨 목격사실 부인할것” 미묘한 여운­전씨 12·12당시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에 대한 연행재가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권총으로 협박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으로 알려진 최병수 당시 수경사 대위(현주베트남 한국대사관 건설관)는 12일 서울신문과의 국제전화에서 『터무니없는 사실무근』이라며 목격사실을 전면부인했다. 반면 최씨의 「권총협박목격담」을 전해 들었다고 지난주 검찰에서 진술한 김광해씨(당시 하소곤 육본작전참모 보좌관)는 이날 이와 관련,『최씨에게는 전화연락이 되더라도 목격사실 자체를 부인할 것』이라고 미리부터 장담해 묘한 여운을 남겼다. 다음은 최씨와의 일문일답. ­전씨가 최전대통령을 권총으로 협박하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12·12당시 총리공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따라서 그같은 장면을 보지도,듣지도 못했다. ­사건당시 어디에 있었나. ▲수경사 소속으로 청와대외곽경비를 서기 위해 파견나가 있었던 것같다.청와대경비를 서면서 총리공관쪽으로 근무지를 이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다시 말하지만 사건현장과는 분명히 동떨어져 있었다. ­「권총협박」사실을 공표한 김광해씨는 아는 인물인가. ▲신문에 보도된 사진을 봤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81년 예편하기 전에 동해경비사령부에 근무했는데 김씨도 이때 함께 근무하면서 내 이름을 익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검찰로부터 연락이 있었나. ▲아직까지는 연락이 없었다.만약 김씨의 주장에 조금이라도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됐다면 귀국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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