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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토 파키스탄 정계 복귀 길 열렸다

    오는 18일 망명 10년만에 귀국하는 파키스탄 전 총리 베나지르 부토의 정계 복귀 길이 열렸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이 그녀의 부패혐의를 말소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이르면 3일(이하 현지시간) 부토가 연류된 부패사건과 관련된 정치인들의 일괄 사면을 허가하는 내용의 법령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AP 통신이 2일 전했다. 사실상 정치적 해금조치다. 무샤라프가 부토에게 손을 내민 것은 국민적 인기가 높은 그녀를 국내에 불러들여 정정 불안을 진정시키려는 포석이다. 부토와의 권력분점 협상도 재개해 ‘적과의 동침’을 본격화하고 있다. 이와 관련, 무샤라프는 부토가 차기 총선에서 승리하면 그녀와 권력을 공유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3일 AP가 전했다. 부토는 이슬람국가 최초의 여성 지도자로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총리의 딸이다. 총리였던 아버지가 모하메드 지아 울 하크 육군참모총장의 쿠데타로 실각하고 1979년 처형되자 반정부 운동을 벌였다.1981년 체포돼 3년간 옥살이를 한 뒤 1984년 유럽으로 망명했다. 하크 대통령이 계엄령을 풀자 1986년 4월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1988년 8월 하크대통령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고 실시된 11월 총선에서 자신이 이끄는 인민당이 최다 의석을 획득함에 따라 총리로 취임했다. 이후 군부독재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민주화개혁을 시도했으나 군부와 야당의 견제로 좌절됐고 91년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1992년 정권 퇴진, 조기총선을 요구하며 반정부시위를 주도해 1993년 10월 재집권했다.1997년 부패사건에 연루돼 사임한 뒤 다시 망명길에 올라 두바이와 런던에서 지금까지 망명생활을 해왔다.최종찬기자 siinjc@seoul.co.kr
  • [종교·신념따른 대체복무 허용] “집총 거부하다 주검으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정부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를 허용하겠다는 소식이 어찌나 고마운지 몰라요. 앞으로 이들은 우리 사회에 보다 많은 기여를 하게 될 테니까요.” 18일 정부가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해 대체복무를 허용하겠다는 소식을 들은 자영업자 김윤태(54)씨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들었다.20여년 전 종교적 신념으로 집총을 거부하다 입대 뒤 하루만에 숨진 동생 선태(당시 22세)씨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1981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장사를 시작한 선태씨는 갑작스레 군입대 통지서를 받고 같은 해 8월14일 서울 태릉의 모 사단 훈련소에 입소했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 신도였던 그는 군사훈련 일체를 거부했고, 다음날 부내 내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입대한 다음날 아침 동생이 죽었다는 전화를 받고 온 가족이 부대로 달려갔어요. 주검을 보니 온 몸에 타박상 흔적이 나 있고 특히 가슴과 엉덩이에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어요. 유서도 없었는데 군 당국은 이렇다 할 해명 한 마디 없이 ‘자살했으니 확인서에 서명하라.’는 요구만 했어요.” 당시 군 당국은 “자살 확인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당신도 구속해 버리겠다.”며 선태씨와 같은 이유로 군 입대를 기피하던 김씨를 위협했다. 결국 확인서에 서명이 끝나자 동생은 곧바로 화장됐고, 김씨도 석달 뒤 병무청 직원들에게 이끌려 강제 입영된 뒤 병역 거부로 3년 1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다. “동생이 죽은 뒤로 집안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났어요. 억울한 사연을 알리고 싶었지만 당시는 군사정권이 들어서 ‘계엄상황’이다보니 함부로 말할 수도 없었어요. 어머니는 화병 때문에 8년 전 돌아가셨고요. 저 역시도 수감 후유증으로 몸도 가누기 어렵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등 괴로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어요. 취직도 안 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요.” 그동안 ‘먹고 사느라’ 정신이 없었던 김씨는 지난해에야 동생의 사인 규명을 위해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에 진정서를 접수했다. 김씨는 이번 정부 방침이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전과자가 되지 않고 사회에 온전히 기여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Seoul Law] ‘전문변호사’ 찾아주기 나섰다

    [Seoul Law] ‘전문변호사’ 찾아주기 나섰다

    오는 9월23일 창립 100주년을 맞는 서울지방변호사회 하창우(53) 회장을 26일 만났다. 그는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 사무실에서 ‘변호사 찾기’라는 서류를 보고 있었다. 하 회장은 ‘변호사 찾기’는 시민들이 사건을 맡길 변호사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서울변호사회의 서비스라고 강조했다.1986년부터 21년 동안 변호사 생활을 하다 올해 1월 서울지방변호사 회장을 맡은 하 회장이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의뢰인들로부터 들은 가장 많은 고충은 변호사를 찾기가 힘들다는 것. 변호사 찾기가 힘들기 때문에 법조 브로커들이 생겨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변호사 분야별 구분 승소율 등 정보 제공 하 회장은 “의뢰인들은 사건이 당장 닥쳤는데도 어떤 변호사에게 사건을 맡겨야 할지, 변호사의 전문 분야는 무엇인지, 변호사의 승소율은 어떻게 되는지를 몰라 애를 먹는다.”면서 ‘변호사 찾기’ 서비스를 강화하는 배경을 설명했다. 하 회장은 서울변호사회 100주년 사업으로 변호사 찾기 서비스와 무료법률상담 강화, 시민과 함께하는 마라톤대회 등을 준비하고 있다. 하 회장은 “변호사는 국민으로부터 먼 곳에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면서 “변호사는 앞으로 국민의 곁으로 다가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100주년 캐치프레이즈를 ‘변호사는 여러분의 든든한 동반자입니다.’로 내걸었다. 변호사 찾기 서비스는 변호사의 전문 분야와 주요 승소 사례, 의뢰인과의 상담 사례, 동료 변호사와 의뢰인의 추천 의견, 수상 경력 등을 제공할 계획이다. 징계 내용도 공개한다. 현재 서울변호사회 홈페이지(seoulbar.or.kr)의 유명무실한 ‘변호사 찾기’ 서비스를 확대 강화하겠다는 얘기다. 그래서 의뢰인들은 검색란에 사건의 종류만 쳐도 해당 사건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변호사들의 이름이 뜨도록 만들겠다는 게 하 회장의 구상이다. 예를 들면 이혼 분야뿐 아니라 이혼 뒤의 양육문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변호사 명단을 알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 회장은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피의자가 구치소에 있는 형사사건의 경우에는 가족이나 친지들이 대신 홈페이지를 방문해 전문변호사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변호사법 위반에 징계 강화할 것 하 회장은 최근 변호사의 변호사법 위반사건이 늘어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서울지방변호사회의 분쟁조정위원회에 변호사 수가 적던 시절에 보기 힘들던 생계형 비리가 많이 늘었다.”면서 “징계를 강화하고, 어려운 변호사와 젊은 변호사들에게 무료법률상담이나 법원 조정위원, 검찰 항고심사위원 등에 참여할 것을 권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한경쟁시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변호사들이 무료법률상담에 적극 참여할 것을 주문했다. 무료법률상담은 결국 사건 수임을 늘릴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얘기다. 법원 조정위원과 검찰 항고심사위원을 맡으면 실무경험도 늘릴 수 있다고 조언했다.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서울지방변호사회 어제와 오늘 국내 최초의 소송대리인은 일본에서 법률학을 배웠던 장훈씨. 그는 1900년 일본 상인에게 6200원의 채권을 돌려받지 못한 실업가 이재필의 소송을 대리해 승소 판결을 받아냈었다. 국내 변호사 1호는 1906년 변호사 자격증을 딴 홍재기 변호사다. 이어 이면우·정명섭 변호사 등이 1907년 9월23일 한성변호사회를 결성해 창립인가를 받았다.1905년 국내 변호사 제도가 처음 도입된 지 2년 뒤다. 당시 변호사법이 만들어진 이유는 1903년 러·일 전쟁 뒤 일본인이 한국에 많이 진출, 각종 이권에 개입해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 분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독립운동에 가담한 변호사들도 나왔다. 허헌 변호사는 3·1운동 지도자들의 무료 변론과 신간회 활동을 하다가 4년간 옥고를 치렸다. 광복 이후 변호사들은 고소득·전문직으로 부러움을 샀고,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전국 변호사 수가 1000명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자와 정의를 위해 살던 변호사들도 적지 않다. 고 이병린 변호사는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계엄 해제와 구속자 석방을 건의했다가 구속됐다. 1980년대 대표적인 민주투사인 고 조영래 변호사는 1984년 최초의 빈민 집단소송인 망원동 수재 사건을,1986년 공권력에 의한 여성 인권 유린이 처음 폭로된 부천 성고문 사건을 변론했다. 이 사건은 1987년 민주화 투쟁의 기폭제가 됐다. 강신옥 변호사는 1974년 군법회의 법정에서 ‘민청학련’사건 피고인들을 변론한 게 문제가 돼 기소되는 등 인권변호사들이 고초를 겪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는 올해 100주년을 맞아 김주원 변호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100년사 편집소위를 꾸려 100년사를 작성하고 있다.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한국 현대사 산증인… 영원한 ‘TK 대부’

    26일 타계한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일제시대 때부터 최근까지 정·재·관계를 넘나드는 화려한 이력을 지녔다. 특히 4·19,12·12,80년 ‘서울의 봄’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의 한가운데서 영욕의 현장을 지켜본 20세기 한국사의 산증인이었다. 그는 최근까지 막후 실력자로 ‘TK(대구·경북) 대부’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1920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고 불렸던 신 전 총리는 1943년 경성제대(현 서울대)재학 시절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해 한국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일본 상무성에서 근무했다. 광복 후 대구대 교수로 3년을 보낸 뒤 장택상 전 총리의 권유로 1951년 상공부 공업국 공정과장으로 관직인생을 시작해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전기국장, 광무국장, 공업국장을 두루 맡아 상공부 내 실력자로 알려져 1957년에는 부흥부 차관 겸 외자청장 서리,1959년 3월에는 만 39세의 젊은 나이로 부흥부(현 재정경제부)장관에 임명됐다. 그러나 이듬해 4·19 혁명이 일어난 뒤 국무위원 일괄 사퇴로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3·15 부정선거’혐의로 2년 7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출감 후 쌍용그룹과 함께 사업을 하다가 1973년 공화당 공천을 받아 국회로 진출했다. 그러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에 띄어 1975년 말 보건사회부 장관,1978년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됐다. 10·26 이후 최규하 대통령 과도정부 시절 부총리에서 국무총리가 된 그는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신군부 세력을 규합, 헌법 개정을 적극적으로 주도해 비판받기도 했다. 같은 해 5월 16일 이화여대에서 모인 전국 55개 대학총학생회장단은 당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신 총리의 퇴진을 동시에 요구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5월 17일 그는 비상국무회의를 주재해 전국 비상계엄안을 의결한 뒤 이튿날 총리직에서 사퇴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도 1986년 삼성물산 회장,1988년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2003년 한·일 협력위원회 명예회장 등을 지내며 말년까지 활동을 계속했다. 한편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 빈소에는 26일 김대중 전 대통령, 이용훈 대법원장 등이 보낸 조의 화환과 한덕수 국무총리, 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장,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권오규 경제부총리, 이재정 통일부장관, 이홍구·남덕우 전 총리, 조석래 전경련 회장 등 조문객들이 줄을 이었다.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인혁당 재건위 무죄판결] 인혁당 재건위 사건 일지

    [인혁당 재건위 무죄판결] 인혁당 재건위 사건 일지

    ▲1963.6.3 ‘굴욕적 한·일회담’ 비판시위 확산으로 비상계엄령 선포 ▲1964.8.14 중앙정보부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 발표 ▲1965.1.20 1심 판결,2명만 2∼3년 징역형, 나머진 무죄 ▲1965.6.29 2심 판결,6명 징역 1년, 나머진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1965.9.21 대법원 항소심 판결 그대로 인정 ▲1972.10.17 유신 선포 ▲1974.4.3 박정희 대통령 특별담화 “민청학련 단체, 불순세력 배후조종으로 인민혁명 수행하려 하고 있다” ▲1974.4 긴급조치 4호 발표, 민청학련 범죄단체로 규정, 중앙정보부, 민청학련 배후로 제2차 인혁당(인혁당 재건위)지목 ▲1975.4.8 대법원 인혁당재건위 판결,8명 사형 선고 ▲1975.4.9 사형선고 18시간만에 사형집행 ▲2002.9.12 의문사진상규명위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 조작사건” ▲2002.12.10 인혁당사건 재심 청구 ▲2005.12.7 국정원 진실위 사건조사 결과 발표,“독재권력 연장 위해 고문으로 민주인사를 탄압한 공안사건” ▲2005.12.27 법원, 인혁당 재심 결정 ▲2006.3.20 재심 첫 공판 ▲2006.11.2 유족 국가 상대 340억원 소송 ▲2007.1.23 서울중앙지법 무죄 선고
  • 삼청교육대 死因조작 의혹도

    “몸에 새를 그려 놓은 문신이 있으면 새를 잡는다고, 호랑이 문신이 있으면 호랑이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몽둥이로 집중적인 구타를 당했다.” “한겨울 새벽에 연병장에 알몸 상태로 집합시켜 물 묻힌 빗자루로 물을 뿌린 뒤 움찔거릴 때마다 몽둥이 구타가 이어졌다.” “가장 참기 힘들었던 건 동료를 서로 세워놓고 나쁜 사람으로 평가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 목사)가 10일 밝힌 삼청교육대사건 조사결과에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인권유린과 가혹행위가 피해자들의 입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태도불량자로 찍힌 입소자들은 낮뿐만 아니라 새벽 취침시간에도 1시간30분마다 강제로 일어나 가혹행위를 당해야 했다. 특히 여성들은 돌이 많은 연병장에서 머리를 땅에 박는 ‘원산폭격’을 하다가 정수리가 터진 경우가 많았다는 증언이 나왔다. 계엄사령부는 ‘입소 직후 3∼5일간 공복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육체적인 반발과 저항력을 감소시키라.’는 교육계획을 하달했으며, 식당에는 ‘돼지보다 못하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고 소보다 못하면 소고기를 먹지 말자.’는 구호를 붙인 것으로 드러났다. 과거사위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 6만 755명 중 전과가 없는 경우가 35.9%에 달했다.”며 “불량배 소탕이라는 명분과 달리 다수의 억울한 피해자가 포함됐다.”고 밝혔다.또 입소자 중에는 중학생 17명을 포함해 학생이 980명이나 끼어 있었고, 여성들도 319명이나 끌려갔다고 밝혔다. 과거사위에 따르면, 전두환 당시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상임위원장의 재가를 받아 집행된 삼청교육 기간 중 사망자는 총 54명으로 집계됐다. 조사결과 자살로 발표된 김정호씨의 경우 1980년 8월7일 폭행치사로 최초 보고됐으나 5일 뒤 보고서에는 자살로 변경되는 등 36명의 사인에 상당한 의혹이 있다고 과거사위는 말했다. 그러나 삼청교육 기간(1980년 8월4일∼1981년12월5일)에 숨진 54명 외에 추가 사망자는 없으며 실종자 대부분은 퇴소 후 가출 또는 사망했다고 과거사위는 설명했다. 삼청교육 피해자 단체가 주장하고 있는 한탄강변의 시체처리소각장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조사 결과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과거사위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 중 훈방·재판 조치된 경우를 제외한 3만 9742명 가운데 현재까지 4644명(11.6%)만이 보상신청을 했다고 밝혔다.신청이 저조한 이유는 피해자가 보상 실시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삼청교육 전력이 알려지는 것을 기피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과거사위는 설명했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최규하 前대통령 별세] ‘12·12부터 하야까지’ 역사의 비밀 품고 영면하다

    [최규하 前대통령 별세] ‘12·12부터 하야까지’ 역사의 비밀 품고 영면하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80년대 초 일어난 격동의 현대사에 대한 ‘진실’을 밝히지 않은 채 22일 영면했다. 끝내 12·12 등에 대한 진상을 가슴 속에 묻고 떠난 것이다.‘재임 중의 행위’라는 이유로 당시 일련의 사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던 최 전 대통령은 마지막 순간까지 ‘비밀의 열쇠’를 내보이지 않았다. 결국 숱한 의혹을 낳은 12·12 등의 실체 역시 역사의 베일 속에 가려지게 됐다. 1. 헌정사상 최단명 대통령 최 전 대통령은 분명 10·26에서부터 12·12와 5·18, 대통령 하야에 이르는 혼돈의 정치상황을 거친 ‘비운의 대통령’이었다. 외교관료로 국무총리와 대통령에 올랐지만 8개월 만에 사임, 가장 짧은 임기의 대통령으로도 기록됐다. 최 전 대통령은 80년대 정치적 격랑,‘서울의 봄’ 중심에 있던 국가통수권자였다. 유신체제인 1975년 말 국무총리 서리를 거쳐 이듬해 국무총리로 임명됐다.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대통령권한 대행에 올랐다. 그리고 신군부의 12·12 직후인 같은달 21일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제4공화국과 5공화국 사이의 정치적 격변기에 대통령에 오른 셈이다. 최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정상적인 권한과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12·12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의 ‘위세’에 눌린 탓이다. 최 전 대통령은 취임 8개월 만인 1980년 8월1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특별성명을 발표한 뒤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특별성명에는 “국익 우선의 국가적 견지에서 임기 전에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합법적 절차에 따라 정부를 승계권자에게 이양하는 것도 확실히 정치 발전의 하나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최 전 대통령은 광주민주화운동과도 ‘인연 아닌 인연’을 갖고 있다.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하던 당시 최 전 대통령은 아랍을 순방하다 급거 귀국, 이른바 ‘광주사태’의 수습에 나섰다. 광주에 직접 내려간 뒤 광주 시위군 대표와 담판을 지으려다 신군부 측의 만류로 무산된 적이 있다. 최 전 대통령은 사임 때 ‘광주사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고도 밝혔다. 2. 신군부 권력장악 음모 묻다 10·26 직후부터 신군부의 권력 장악은 숨가쁘게 전개됐다. 전두환·노태우 등으로 대표되는 신군부는 12·12를 일으켰다. 최 전 대통령은 12·12의 핵심인 신군부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에 대한 사전 재가 여부의 진실을 끝내 말하지 않았다.5·17 비상계엄 확대와 사임 과정 등도 마찬가지다. 최 전 대통령은 신군부가 정 총장의 연행 재가를 요구하자,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이 들고온 서류를 대강 검토한 뒤 이례적으로 사인 옆에 일자와 시간을 기입했다고 한다. 엄연히 불법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기 위함에서다. 최 전 대통령은 검찰의 ‘12·12 및 5·18 사건’의 수사에 협조하지 않았다.1996년 11월14일 검찰의 수사와 관련, 강제 구인돼 법정에 서는 불명예를 안았지만 증인 선서와 증언를 거부했다. 법정에서 “재임 중 행위에 대해 일일이 소명이나 증언을 한다면 국가경영상 문제를 야기할 수 있고 전례를 만들어 앞으로 대통령의 직무 수행에 부담을 주는 것은 국익에 손상이 된다.”며 증언 거부의 변만 남겼을 뿐이다. 물론 검찰 수사 및 공판 기록에 따르면 12·12 당시 최 전 대통령은 신군부의 정 총장 연행 요청에 대한 사전 재가를 거부했다. 최 전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 정권이 끝난 뒤에도 당시 신군부와의 구체적인 회유 및 협박 등 갈등 관계에 대해 입을 떼지 않았다. 3. 외교관의 길 최 전 대통령은 1919년 7월16일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현석(玄石)이다. 경성제1고보, 일본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문과와 만주국립대동학원을 졸업했다. 최 전 대통령은 광복되던 해인 1945년 서울대 사범대 교수로 임용됐지만 이듬해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공직에 들어섰다.51년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서리를 거쳐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발탁되면서 직업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박홍기기자 hkpark@seoul.co.kr
  • 천수이볜·아로요 대통령등 ‘탁신 꼴 날라’

    ‘혹시 우리도 탁신처럼’ 무혈 쿠데타로 하루아침에 실각해 다른 나라를 전전하고 있는 탁신 치나왓 태국 총리의 급전직하가 남의 일 같지 않은 국가 지도자들이 적지 않다. 천수이볜(陳水扁) 타이완 총통,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 주르차니 페렌츠 헝가리 총리 등이 피플 파워에 의해 내쫓길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점쳐지는 이들이다. 현재 태국의 정정 불안과 가장 흡사한 모습을 보이는 나라는 바로 타이완. 탁신 총리 사임 여부를 놓고 1년여 정치적 혼란이 지속된 것처럼 타이완 역시 지난 6월부터 총통 퇴진운동이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고 최근에는 수도 포위로까지 번져 일대 위기를 맞고 있다. 집권 6년째를 맞고 있는 천 총통은 부인과 사위 등 일가와 측근의 부패 의혹으로 하야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9일 시작된 수도 타이베이에서의 퇴진 시위는 이날까지 12일째 이어지고 있다. 지난 15일에는 타이완 사상 최대 인원인 100만명이 시위에 가담했고 고교생부터 화이트칼라, 공무원도 동참해 정권 교체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 야당 등은 최대 국경일인 쌍십절(10월10일)에 맞춰 하야를 촉구하는 전국적인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 선거 부정을 저지른 데다 부패 의혹까지 겹쳐진 아로요 대통령은 2년 사이 두번이나 탄핵안이 제출될 정도로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지난 8월 가까스로 탄핵안이 부결됐지만 땅에 떨어진 권위를 되살리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2001년 집권 이후 학생과 정치인 등 730명이 의문사를 당하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면서 사실상 계엄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점도 아로요의 발목을 잡고 있다. 피플 파워에 의해 집권한 그가 국민들의 압력에 못 견뎌 하야한다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주르차니 총리도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음을 시인’한 녹음 테이프가 공개되는 바람에 결정적 위기를 맞고 있다.18일 밤부터 시작된 총리 퇴진 시위는 19일에도 이어져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 앞 광장을 메운 1만 5000여 시위대는 자정을 넘기면서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이들 가운데 수천명은 광장을 빠져나가 여당인 사회당(MSZP) 당사 쪽으로 몰려갔으며 당사 앞에서 진압에 나선 경찰에 돌과 폭죽 등을 던지며 격렬히 저항했다. 특히 이날 반정부 시위는 미슈콜츠, 베케슈처버, 니레지하저, 줄러, 세게드, 에게르, 솜버트헤이 등 전국의 거의 모든 도시로 번져가 주르차니 총리의 속을 바짝 태우고 있다. 그는 “어제는 제3공화국 사상 가장 길고 암울한 밤을 보냈다.”면서 “그러나 나는 떠나지 않고 일을 계속할 것”이라고 퇴진 요구를 일축했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함혜리 안동환기자 lotus@seoul.co.kr
  • 軍과거사 규명 4건 확정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5일 12·12와 5·17 비상계엄확대에 이어 5·18 민주화운동에 이르는 1980년대 초 신군부의 집권 과정에서 발생한 각종 사건과 삼청교육대 사건, 강제징집 등 녹화사업,1960년대 후반 발생한 실미도 사건 등 4건을 1차 조사대상으로 최종 확정했다고 밝혔다. 군 과거사위는 또 10·27 법난(法難), 언론인 해직 및 언론통폐합 사건,5·6공의 민간인 사찰, 재일동포 및 일본 관련 간첩조작 의혹사건 등을 2차 조사대상으로 선정했다고 설명했다.1차 조사에서는 특히 신군부 집권과정에서 벌어진 12·12사건에 관여하고 5·18 민주화운동을 강제 진압한 공로로 표창을 받았던 군 인사들의 포상 내역이 조사 대상에 포함돼 경우에 따라서는 훈·포장이 박탈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과거사위는 신군부가 원활한 권력 장악을 위해 5·17 확대 계엄을 실시하고, 계엄 확대 이유로 내세운 당시 북한의 특이 동향 여부도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함께 5·18 당시 계엄군의 집단 발포 명령체계 및 실종자 행방 등도 의혹을 낱낱이 규명한다는 방침이다.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이 발령된 직후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군 부대 내에 설치한 삼청교육대사건과 관련해서는 최초 계획 입안 및 추진 과정에서의 위법성, 검거 및 교육 과정에서의 인권 유린 실태, 검거자와 입소자의 규모, 사망자 수 등을 집중 규명할 방침이다. 강제 징집 및 녹화사건의 경우,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 여부와 대상자 수, 프락치 공작 실태 및 피해사례 등을 주로 규명하게 된다. 1971년 실미도사건은 공군 684부대(일명 실미도부대)의 창설 배경 및 주체, 훈련병 모집과 훈련 과정에서 자행된 불·탈법적 인권 침해 행위를 집중 규명하고 훈련병의 신원 및 유해 발굴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한편 민간위원 7명과 국방부측 인사 5명 등 모두 12명으로 구성된 과거사위는 지난달 1일부터 민·군 조사관 10명씩을 임명하는 등 본격적인 조사를 위한 기초 작업을 해왔으며, 이번 조사 과정에서 해당 사건의 피해 실태를 파악해 적절한 명예 회복 조치 등도 권고할 방침이다.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5·18 몸소 겪은 아버지 기록입니다”

    “감방(헌병대)의 철창 속에서 은백양나무 사이로 날아다니는 나비를 나는 얼마나 부러워 하였던가….” 1980년 5·18 당시 구속과 해직의 아픔을 겪었던 고 김태진 전남대 교수(영어영문학과)의 옥중편지가 25년 만에 ‘아버지의 5·18’이라는 책으로 발간됐다. 당시 전남대 학생처장으로 근무하던 김 교수는 계엄사에 끌려가 조사를 받던 80년 7월26일∼10월22일 석달 동안 쪽지편지 60여장을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 부인에게 전달했다.그는 담뱃갑이나 메모지 등을 이용한 쪽지편지에 합수부의 내란음모 수사동향, 수감된 교수와 학생의 고통, 군법회의 재판 준비 과정, 전남대의 사태해결 움직임, 가족의 안부에 대한 염려 등을 빼곡하게 담았다.이 책은 279쪽 분량에 쪽지편지 60여장의 원본과 공소장·진술서 등 관련자료 사진을 함께 실어 사료적 가치도 충분하다. 가족들은 그가 1997년 62살로 세상을 떠나자 유품을 정리하다가 쪽지 편지더미를 찾아내 보관해 오다가 이번에 책으로 펴 냈다.그는 80년 군법회의에서 계엄법 위반과 소요방조 등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며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돼 국립 5·18묘지에 묻혔다. 아들인 김강(41) 호남대 교수는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만나면서 학자인 아버지의 삶이 더욱 거칠고 힘들어졌다.”며 “시대적 격랑을 만난 지식인의 고뇌와 대응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어서 출판을 결심했다.”고 말했다.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법조계도 논란 분분

    법조계도 논란 분분

    국가권력 남용 범죄에 대한 민·형사상 시효 적용을 배제하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을 놓고 법조계에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위헌 주장이 있는 반면에 가능하다는 논리도 있다.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 제한돼야” 임상혁 숭실대 법대 교수는 지난해 11월 발표한 논문에서 “국가범죄에 대한 국가의 태도는 배상 제스처를 보이다가 지친 피해자들에게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이라면서 “국가가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제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공복지를 실현해야 하는 국가는 사법적 활동에서도 공공성과 신뢰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국가가 국민에게 합리성이 결여된 행위를 저지르고 소멸시효를 주장하느냐고 반문했다. 1951년 발생한 거창양민학살사건의 유족들은 1998년 2월17일 희생자로 확정받고 2001년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삼청교육대 피해자 강모씨 역시 2003년 대법원이 소멸시효 기산점을 ‘피해보상 약속’을 한 노태우 전 대통령 퇴임시점인 1993년 2월로 보면서 보상을 포기해야 했다. 강씨는 국회의 보상입법이 진행된 2001년 6월을 기산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 교수는 정신대로 일본에 끌려간 한국인들의 배상청구 사건에 대해 일본 하급심 판결을 비교 대상으로 삼았다. 일본 도야마 지방재판소는 기산시기를 한·일협정이 체결된 1965년이 아닌 일본 정부가 “협약은 개인의 청구권을 국내법적으로 소멸시킨 것이 아니다.”라고 발표한 1991년으로 봤다. 임 교수는 “심급을 막론하고 소멸시효 기산점을 삼청교육대 퇴소시나 계엄해제시로 보는 우리 법원에서 보기 어려운 판결”이라고 평했다. 김갑배 변호사 역시 “대통령의 발언은 과거사법에 의해 과거 국가범죄에 대한 진상을 밝히더라도 처벌을 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완해 국가권력에 대한 신뢰를 되찾기 위한 것”이라면서 “조직적인 국가범죄에 의한 피해와 그렇지 않은 사안을 구분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위헌적 조치 분명” 이번 조치가 법적 안정성을 해치고 형평성 논란을 불러올 것이라는 목소리도 높다.‘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 공동대표인 이석연 변호사는 “형법상으로 공소시효를 늘려 처벌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소급입법으로 처벌을 하겠다는 것으로 죄형법정주의나 적법절차 원칙에 저촉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민사상 소멸시효 연장에 대해서는 “어떤 사건의 시효를 연장해줄지 논의가 필요하고 형평성 시비가 불거질 수 있다.”고 경계했다. 하창우 대한변협 공보이사도 “재심청구나 시효에 관한 부분은 법률적으로 정해져 있는 사항”이라면서 “시효를 배제·조정하는 것은 헌법상 형법불소급의 원칙에 반해 위헌 소지가 크다.”고 지적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기고] 미얀마 민주화로 우리의 빚을 갚자/최정의팔 버마민주화 전세계 행동의 날 한국위원회 공동위원장

    지난 6월19일, 미얀마 민주화의 지도자인 아웅산 수치(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60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이날 전 세계에서는 미얀마 민주화와 아웅산 수치 여사를 비롯한 모든 양심수들의 석방을 위해 일제히 공동 행동에 나섰다. 한국에서도 미얀마(1988년 9월24일 군사정부가 독재정권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국명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개명)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버마행동’과 미얀마의 민주화를 바라는 한국의 여러 단체들이 힘을 모아 ‘버마민주화를 위한 전 세계 공동행동의 날 한국위원회’를 조직해 전 세계적인 이 행사에 동참하였다. 미얀마는 40년 군부독재로 인해 국제사회 최악의 인권국가로 지목받고 있으며 1400여명의 정치범이 수감돼 있다. 살해, 고문, 강간, 재판 없는 구금, 강제 이주, 강제 노역 등 인권상황은 최악의 수준이며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도 완전히 봉쇄돼 있다.1988년 8월8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번져가자 군부는 9월19일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시위에 참가한 시민·학생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결국 시위가 진행된 한 달 동안 2만여명의 시민들이 학살당했다.1990년 아웅산 수치의 민족민주동맹(NLD)이 총선에서 압승했지만 군부는 현재까지 정권을 이양하지 않고 있다. 아웅산 수치는 2003년 9월 자신의 지지자들과 친정부 세력이 충돌한 뒤 군부정권으로부터 또다시 가택연금을 당해 지금까지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 미얀마 군부는 1988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17년 동안 아웅산 수치를 연금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제사회는 수치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하면서 미얀마 정부에 가택 연금조치를 해제하고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귀기울여 달라고 했다. 이날 생일을 맞아 달라이 라마 등 그동안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14명도 미얀마의 민주화와 수치 석방을 촉구하는 연대사를 발표했다. 그러나 세계의 민주주의 수호와 자유를 위해 앞장선다던 미국이나 서방 세계도 미얀마의 비민주적인 상황에 대해 내정 불간섭을 내세우며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한국 정부도 미얀마의 군부와 경제적인 이익만을 고려해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미얀마 국민은 우리나라를 군부독재 속에서 민주화를 이루어낸 모범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얀마의 민주화를 바라는 이번 행사가 한국의 국민들과 함께 열렸다는 것은 한국의 민주주의 역량을 국제사회에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도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번 행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만델라의 70회 생일을 기해 전 세계가 함께 캠페인을 벌여 감옥에 갇혀 있던 만델라가 석방되고 그 후 대통령으로 선출돼 남아연방이 민주화를 이루었던 것을 본받은 것이다. 전 세계 공동행동의 날인 이날 미국, 영국, 호주,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에서는 ‘음반작업’이나 ‘하루 가택연금 체험’ 등의 프로그램으로 이 행사에 함께했으며, 한국에서는 이 행사를 위해 미얀마 노래 팀인 ‘S2N’이 직접 작사·작곡·노래·반주 등을 하여 총 2000장의 음반을 제작했다. 또한 한국정부에 엽서 보내기 캠페인을 전개해 약 6000장의 서명을 받았다. 이 엽서는 미얀마의 민주화를 바라는 우리 국민의 의지를 모아 청와대에 보낼 예정이다. 이와 더불어 한국정부뿐만 아니라 유엔인권위원회 및 미얀마 정부에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인터넷 서명운동도 함께 진행했다. 한국이 민주화할 때 이웃나라들의 도움이 큰 역할을 했다. 군부독재와 맞서 투쟁해 민주화를 이룬 경험이 있는 우리가 이러한 빚을 갚을 때가 됐다고 본다. 우리들의 지원과 연대로 미얀마에서 수치의 연금이 해제되고 하루속히 감옥에 갇혀 있는 민주화 인사와 양심수들이 석방되기를 바란다. 이날 용산역에서 열린 국제행동의 날 행사에서 수많은 가수들이 부른 자유와 평등의 노래가 우리 이웃나라에 큰 격려가 되기를 바란다. 최정의팔 버마민주화 전세계 행동의 날 한국위원회 공동위원장
  • [논술이 술술] 시사키워드/박정희 평가

    [논술이 술술] 시사키워드/박정희 평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평가 문제가 다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계간 ‘창작과 비평’은 이번 여름호에서 박정희 재평가를 쟁점 기획으로 다뤘다. 여기서 과거 반독재 지식인 진영의 중심에 섰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민주개혁 없는 경제개발의 추구는 현실사회주의 나라들에서처럼 결국 경제의 장기적 침체와 쇠퇴를 낳거나 이란의 이슬람혁명에서처럼 원리주의적인 신정(神政) 체제로 귀결하기 십상”이라면서 “오늘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어떤 문제점이 있건 제2의 박정희가 해결책이 못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백 교수는 그러나 박정희의 공과를 따져 경제개발의 업적을 인정해 줘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최근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는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주제로 매월 한 차례 콜로키엄(전문가 토론회)을 열고 있다. 또 박 전 대통령의 친일행위를 부각한 만화 ‘박정희’가 지난 16일 출간되자 박정희 추종 세력이 반발하고 있다.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영웅’이면서 ‘독재자’다. 양면성을 가진 박정희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의 본 모습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박정희가 비난받을 점 박정희의 허물로 지적되는 점들은 대통령이 되기전의 친일 행각과 좌익활동, 대통령이 된 다음의 장기집권과 독재정치, 인권탄압 등이다. 반(反) 박정희 진영에서는 박정희가 교사에서 일본군 장교로, 다시 대한민국 장교로,‘빨갱이’에서 반공의 기수로, 충성을 다하는 장군에서 쿠데타의 수괴로 변신을 거듭하며 조국 민족도, 적과 동지도, 양심과 이념도 버린 것은 오로지 권력욕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다음은 반 박정희 진영의 친일에 관한 주장. ▲친일행각=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박정희는 1940년 23세의 나이에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자원 입대, 일본군 장교가 됐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도 했다. 졸업식에서 박정희는 대표로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라고 선서를 했다.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박정희는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썼다. 다시 일본 육사에 들어가 3등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천황에게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는 평을 들었다. 박정희는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을 거쳐 제8군단에 배속돼 독립군 토벌에 출정했다. 독립군 토벌에 나갈 때 “조센진 토벌이다. 요오시(좋다)”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문명자씨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워싱턴에서 벌어진 일들’이라는 책에 나온다. ▲좌익활동=해방후 군 창설에 참여한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를 2기로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한 뒤 좌익활동에 빠진다. 육군본부 정보국 작전과장으로 근무하다 1948년 여수 순천 사건을 계기로 군내 ‘남로당 조직책’임이 드러나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박정희는 자신이 참회했으며 사면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증거로 자신이 맡고 있던 조직망을 폭로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뒤 박정희는 수사에 협력해 공모자들을 수사대에 알려주기도 했고 공모자들의 집으로 수사대를 직접 이끌고 가기도 했다. 동료 장교들의 감형운동으로 석방되어 문관으로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다가 6·25전쟁 이후 소령으로 복귀했다. ▲독재정치·인권탄압=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에 들어간 박정희는 1972년 유신으로 종신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 유신 반대세력에게는 가차없는 탄압이 가해졌다. 수백명의 언론인을 쫓아냈고 수많은 사람을 체포하고 고문했다.1973년 최종길 서울대 교수를 간첩으로 몰아 고문을 해 숨지게 했고 같은 해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씨를 납치했다.1975년에는 인혁당 사건을 조작해 8명을 사형시켰다. 언론인 장준하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18년 집권기간에 100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계엄령, 위수령, 비상령이 발동됐고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1만여명이 검거됐다. ●박정희의 경제적 업적 대통령 취임 이후 박정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하고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추진하는 등 경제성장에 힘을 쏟은 것은 사실이다. 매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열고 해외공관을 통해 수출 확대에 주력했다. 포항제철, 울산 중화학공업 단지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에도 힘썼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등 산업교통망을 늘렸다.‘잘살아 보세’라는 기치 아래 농어촌을 중심으로 새마을운동이라는 개혁 운동을 펼쳤다. 이런 성장정책으로 박정희는 한국을 절대빈곤에서 탈피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1인당 국민소득을 실질소득이 아닌 명목소득으로 계산할 때 박정희가 집권했던 1961년 82달러였는데 죽을 때인 1979년 1636달러를 기록해 외형상 연평균 18%의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특히 수출은 연평균 38% 증가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박정희의 이런 경제적 치적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은 60년대의 고도성장은 다른 개도국에도 나타난 현상이었으며 수출도 늘었지만 수입도 엄청나게 늘어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이면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한다. ●박정희,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인물이든 공(功)과 과(過)가 있기 마련이다. 공 때문에 과가 묻혀서도 안되고 그 반대가 돼서도 안된다. 특히 잘못은 시간이 지나면 묻혀지고 미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 인물과 동시대에 살지 않은 후손들에게 어떤 한 면만 부각돼 인물 평가가 잘못될 수 있다. 따라서 박정희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과를 분명히 따져 객관적인 역사적 평가를 내려놓는 일이다. 경제난이 지속되는 요즈음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살아나고 있다. 그러나 단지 그의 한 쪽면만 보고 무턱대고 추종하는 것은 잘못이고 허물 때문에 공적을 폄하해서도 곤란하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 다만 박 전 대통령이 이룬 경제성장의 업적은 노동자의 희생과 인권침해, 천민자본주의 등의 폐단과 부작용을 낳은 것은 사실이다. 한국의 단기간 성장을 박 전 대통령이나 집권·지도층의 공만으로 돌릴 수 없다. 박정희가 경제적 리더십을 발휘했다면 열악한 조건 속에서 묵묵히 일한 노동자들이 있었다는 점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박정희가 닦은 경제적 기반 위에 1인당 GDP(국내 총생산) 1만달러를 넘는 중진국이 된 한국이 겪고 있는 심각한 빈부격차와 지역갈등은 박정희가 추구한 성장지상주의와 개발편향주의가 한 원인임을 부정할 수 없다. 손성진기자 sonsj@seoul.co.kr
  • ‘反 무바라크’ 시위 대학가 확산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의 장기독재에 맞서 비상계엄 폐지와 연임반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대학가로 확산, 이집트 당국이 긴장하고 있다. 5일(현지시간) 카이로와 나일 삼각주 지역의 대학 5곳에선 1만여명의 학생들이 ‘집권연장과 권력세습 반대’ 등을 외치며 비상계엄의 즉각적인 폐지를 촉구했다. 지난달 31일 이집트 보안당국이 가두시위를 금지한다고 발표하자 야당 연합체인 ‘키파야 운동’과 이슬람 정치단체인 ‘무슬림형제단’이 대학가 시위를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키파야는 ‘이제는 충분하다.’는 뜻으로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상징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카이로의 이슬람 대학인 알-아즈하르에선 4000여명이 승리를 상징하는 ‘V’자를 그리며 코란을 들고 교내를 행진했다. 카이로의 다른 대학인 아인 샴스와 헬완에서도 1000여명이 정치개혁 등을 촉구했다. 나일 삼각주 지역의 카프르 알 셰이크와 만수르 대학에서는 2000여명이 무바라크 대통령의 5선 연임을 반대했다. 앞서 4일에는 카이로의 아메리칸대학에서 400여명이 실질적인 민주개혁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교내 시위를 묵인하고 있으나 대학 정문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내로의 진입은 막고 있다. 보안당국은 지난달 31일 가두시위에서 200여명을 연행,60여명을 구금했다. 야당과 학생들은 비상계엄의 철폐와 대통령의 연임제한, 무바라크의 9월 대선출마 포기, 유엔 감시하의 선거실시, 차남인 가말의 권력세습 반대 등을 요구했다. 이집트 정부는 1981년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의 암살 이후 24년째 비상계엄을 실시하고 있으며 테러 수사뿐 아니라 반정부 시위 등에도 계엄법을 적용, 대내외 반발을 사고 있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이집트 ‘키파야’ 유혈충돌 위기

    시민혁명의 도미노 바람이 이집트에 까지 미칠까. 이집트 정국이 야당의 ‘키파야 운동’, 즉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장기 집권 저지 운동으로 일촉즉발의 충돌 위기를 맞고 있다.‘키파야’는 아랍어로 “충분하다.”는 뜻으로, 무바라크의 24년간 집권은 ‘이제 충분하며 더이상 추가 연임은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27일 무슬림형제단 주도의 대규모 민주개혁 시위에 당황한 정부가 시위 불허를 공언했지만 무슬림형제단 등 반정부 세력은 대대적인 시위를 계획하며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다. 이집트 경찰은 29일(현지시간) 민주 개혁운동 세력과 이슬람 단체의 의사당 앞 시위를 불허하는 등 정치개혁 시위에 대해 강경 대응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키파야 운동’은 30일 예정대로 의사당 앞 시위 강행 의사를 밝혔다. 시위가 강행되면 수도 카이로는 물론 알렉산드리아, 만수라 등 주요 도시에서 충돌은 불 보듯 뻔하다. 자칫 유혈시위까지 우려되는 형국이다. 야권은 오는 9월 대선을 앞두고 5월 집권당인 국민민주당(NDP)이 무바라크나 그의 아들인 가말 무바라크(41)를 후보로 세울 계획이라며 독재종식을 외치고 있다.1981년 이후 통치해 온 무바라크가 24년동안 계엄령도 해제하지 않은 채 독재를 강화하고 있다는 비난이다. 이집트 당국은 당초 지난 4개월동안 야당과 시민운동단체의 소규모 개혁시위를 묵인해 왔다. 그러나 미국 등 국제사회의 압력에 밀려 무바라크 대통령이 지난달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 뒤로 야당의 가두 집회가 대규모로 확산 중에 있자 강경대응으로 방향을 바꿨다. 옛 소련지역 및 아프리카 일부 국가에서 일고 있는 시민혁명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다. ‘키파야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내 가장 영향력 있는 이슬람 정치운동 단체로 사실상 최대 야당이다. 심화되는 빈부격차 등 경제적 불평등의 확산을 틈타 평등한 이슬람국가 건설을 주장하면서 반 무바라크 운동을 확산시켜왔다. 이석우기자 yeekd@seoul.co.kr
  • [월드이슈-亞여성지도자 전성시대] 대통령·총리·당수등 8명… 우먼파워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스리랑카,방글라데시.이들 4국의 공통점은 대통령이나 총리가 여성이라는 점이다.여성이 정권을 쥔 나라가 세계적으로 11개국에 불과한데 비해 아시아지역에 여성 지도자가 많은 것은 이례적이다.중국과 타이완은 여성이 부총리와 부총통이고,인도는 정권의 막후 실세가 여성이다.미얀마의 재야 지도자도 여성이다. 우이(吳儀·66) 중국 부총리와 뤼슈롄(呂秀蓮·60) 타이완 부총통을 제외한 아시아 여성 지도자들은 가문의 후광을 업고 정계에 입문했다는 공통점이 있다.이들은 또 입지를 탄탄히 다진 지도자와 정치력을 시험받는 지도자로 나눌 수 있다. ●‘가문의 후광’형 인도네시아 대통령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57)는 인도네시아 독립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의 딸이다.주위 권유로 1986년 현 투쟁인도네시아민주당(PDIP·투쟁민주당)의 전신 민주당(PDI) 간부로 정계에 입문했다.99년 10월 부통령직에 오른 뒤 2001년 7월 대통령이 탄핵되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미얀마의 야당 지도자 아웅산 수치(59)의 아버지는 1947년 7월 독립을 6개월 앞두고 암살당한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수치 여사는 해외 유학을 마치고 88년 귀국,그해 9월 군부 독재에 반대하는 대중연설로 가택연금됐다.그후 16년 중 9년 가량을 연금생활로 보냈고 현재도 연금 상태다.91년 미얀마 민주화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할레다 지아(58) 방글라데시 총리는 남편이 독립 영웅이다.81년 대통령인 남편이 쿠데타 세력에게 암살당한 뒤 정치권과 거리를 뒀지만 83년 주위의 요청을 받아들여 남편이 만든 방글라데시민족당(BNP) 부의장으로 정계에 입문,84년 의장직에 올랐다.91년 2월 민중봉기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방글라데시 최초 여성 총리가 됐으며,2001년 10월 세번째 총리 연임에 성공했다. 인도의 집권여당 연합을 이끄는 국민회의당 당수 소냐 간디(57)는 인도의 독립 영웅 자와할랄 네루로부터 시작된 ‘네루-간디’가문의 며느리다.이탈리아 태생으로 65년 영국 유학시절 전 총리 라지브 간디를 만나 결혼했으며 83년 인도 국적을 취득했다. 91년 남편이 암살된 뒤 평범하게 살았으나 98년 주위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고,올 5월 집권여당 연합에 맞서 야당연합을 이끌어 정권을 잡았다.‘외국 태생 총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대파의 저항으로 총리직은 고사했지만 막후 실세라는 평이다. 글로리아 아로요(57) 필리핀 대통령은 60년대 필리핀을 이끈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대통령의 딸이다.경제학박사 출신으로 통상산업부 관료로 정부에 발을 들인 뒤 1992년 상원의원에 당선됐고 95년 재선에 성공했다.98년 부통령직에 올랐고 2001년 1월 탄핵 압력을 받아온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찬드리카 쿠마라퉁가(59) 스리랑카 대통령은 부모가 모두 총리를 지냈다.특히 그의 어머니는 여성으로는 세계 최초로 총리가 된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프랑스 파리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으며,1994년 8월 부모의 후광을 업고 총리에 당선됐고 3개월 뒤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2000년 재선에 성공했다. ●‘나 홀로 성공’형 반면 지난해 3월 여성 최초로 중국 부총리가 된 우이는 ‘중국의 대처’ ‘철의 여인’ 등으로 불리는 보기 드문 자수성가형이다.62년 베이징석유학원(대학) 석유정제과를 졸업한 뒤 26년간 석유화학회사에서 근무하다 베이징 부시장이 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98년 주룽지 당시 총리의 총애를 받아 대외경제무역합작부장으로 발탁됐고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등의 공을 인정받아 부총리까지 올랐다. 뤼슈롄 타이완 부총통은 타이완의 민주화운동과 여성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타이완국립대 법학과를 수석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야당 결성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민주화운동을 하다 80년 계엄통치시절 군법재판소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기도 했다.85년 민진당 창당에 관여했고 페미니즘문학 전문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2000년 여성들의 지지 등에 힘입어 부총통에 출마,당선됐다. ●도전받는 지도자들 초등교육 의무화와 여성의 권익향상 등의 개혁 정책으로 정치기반을 성공적으로 다진 것으로 평가받는 할레다 지아 방글라데시 총리 등과 달리 정치력이 시험대에 오른 지도자들도 있다. 메가와티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인도의 소냐 간디,스리랑카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다음달 5일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메가와티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은 불투명하다.최근 여론조사에서 야당 후보에 한참 뒤져 있다.메가와티는 부통령 재임 시절 내세울 만한 업적 하나 남기지 못했고 ‘정무보다 싱가포르에 건너가 쇼핑하고 요리하는 데 더 관심이 많다.’는 혹평을 받았었다.지난 4월 치러진 총선에서 그의 투쟁민주당은 수하르토 독재 정권의 골카르당에 패해 제2당으로 전락했다. 소냐 간디는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집권기간 인도를 중국과 더불어 브릭스(BRICs)의 선두로 이끈 전 정권이 총선에서 진 것은 전체 인구 10억명의 3분의2 이상인 빈민,특히 농민들의 불만이 주요 원인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 해결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소냐 간디의 인도 정부는 전 정부가 추진해온 ‘알짜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재검토하고 농업 부문에 투자를 확대하는 등 저소득층을 위한 정책에 주안점을 두고 있지만 외국 투자가들의 눈치도 봐야한다.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대통령의 최대 난제는 ‘타밀 분리독립문제’다.1980년대 중반 타밀 분리독립단체인 ‘타밀 호랑이’와 정부군과의 교전이 격화돼 수십만명의 타밀 시민들이 스리랑카를 떠나고 수천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치안 문제 해결은 이뤄질 수 없는 상황이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高총리 사표수리] 고건총리 ‘43년만의 마침표’

    고건 국무총리가 25일 43년간의 기나긴 공직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1961년 고등고시 행정과(13회)에 합격해 내무부 수습사무관으로 출발,사상 초유의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지내는 등 공직사회에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37세의 나이로 전남도지사(75년)가 된 이래 청와대 정무수석과 교통·농림수산·내무부 장관 등 세 번의 장관,두 번의 서울시장,두 번의 총리 등 화려한 공직생활을 보냈다.지난 85년에는 전남 군산·옥구에서 12대 국회의원(민정당)에 당선되기도 했다. 참여정부 출범으로 다시 총리직을 맡아 지난 15개월 동안 ‘개혁 대통령’을 보완하는 ‘안정 총리’로서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며 국정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최규하 대통령 시절 신군부세력이 주도한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반대해 청와대 정무수석을 전격 사퇴하고 국보위에 참석하지 않았던 일도 자주 입에 올린다. 생활신조는 ‘돈 받지 말라.’ ‘누구의 사람이라는 얘기를 듣지 말라.’ ‘술을 잘 마신다고 소문 내지 말라.’ 등 세가지로,부친인 고형곤(99·전 전북대 총장) 박사가 공직에 나가는 아들에게 당부한 말이다. 정치인 변신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날 “총리를 두 번 했으니 산에도 오르고 바다에도 좀 가보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조현석기자
  • [高총리 사표수리] 고건총리 ‘43년만의 마침표’

    고건 국무총리가 25일 43년간의 기나긴 공직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1961년 고등고시 행정과(13회)에 합격해 내무부 수습사무관으로 출발,사상 초유의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지내는 등 공직사회에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37세의 나이로 전남도지사(75년)가 된 이래 청와대 정무수석과 교통·농림수산·내무부 장관 등 세 번의 장관,두 번의 서울시장,두 번의 총리 등 화려한 공직생활을 보냈다.지난 85년에는 전남 군산·옥구에서 12대 국회의원(민정당)에 당선되기도 했다. 참여정부 출범으로 다시 총리직을 맡아 지난 15개월 동안 ‘개혁 대통령’을 보완하는 ‘안정 총리’로서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며 국정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최규하 대통령 시절 신군부세력이 주도한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반대해 청와대 정무수석을 전격 사퇴하고 국보위에 참석하지 않았던 일도 자주 입에 올린다. 생활신조는 ‘돈 받지 말라.’ ‘누구의 사람이라는 얘기를 듣지 말라.’ ‘술을 잘 마신다고 소문 내지 말라.’ 등 세가지로,부친인 고형곤(99·전 전북대 총장) 박사가 공직에 나가는 아들에게 당부한 말이다. 정치인 변신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날 “총리를 두 번 했으니 산에도 오르고 바다에도 좀 가보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조현석기자˝
  • 美, 내년 2~3월 모술파병 요청/차영구 국방정책실장 밝혀

    미국은 이라크 추가 파병과 관련,우리 정부가 내년 초 이라크 북부 모술지역에 파병해 줄 것을 희망한다는 뜻을 피력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달 말 미국을 방문,추가 파병 문제를 논의하고 돌아온 차영구 국방부 정책실장은 2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이라크 중부와 남부,중남부는 기존의 관할부대가 유지될 것으로 보이나 북부지역은 내년 2∼3월 변동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해 한국군이 파병될 경우 사실상 모술지역에 배치될 것임을 밝혔다.내년 2∼3월 중 현지에 병력을 배치하기 위해서는 파병군 선발과 실전배치 훈련 등 사전준비를 감안하면 최소한 이달 말이나 다음달 초까지는 파병 여부가 결정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관련기사 3면 모술이 포함된 이라크 북부 5개 주는 평균 고도 3000m의 산악지대로,막강한 화력을 갖춘 미 101공중강습사단 병력 1만 8000명이 주둔해 있으면서 대대적 테러 소탕전을 전개해 왔다.차 실장은 “전쟁 전 모술은 쿠르드족과 후세인 정부,주민간의 갈등이 심해 불안했으나 전후에는 안정됐다는 말을 미국으로부터 들었다.”면서 “파병이 결정될 경우 기간은 이라크의 새정부가 출범하는 내년 말까지 최소한 1년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이어 “전후 테러 등으로 미군과 영국군이 각각 173명,11명이 숨졌으나 다른 다국적군은 인명피해가 경미하다.”고 덧붙였다. 파병부대의 성격과 관련해 차 실장은 “미국은 한국군이 폴란드형 사단의 지휘체계를 갖춰 특정지역의 치안임무를 담당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면서 “사단장은 군정 상태인 현지에서 관할지역의 계엄군사령관 역할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폴란드 사단은 자체 병력 3000명으로 사단 사령부와 1개 여단을 구성,약 20개국으로부터 7000여명을 지원받아 완전한 사단급 부대를 편성해 이라크 중남부에서 안정화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모술은 어떤 곳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400㎞ 떨어진 곳으로 인근에 유전지대가 펼쳐져 있는 인구 80만명의 제3의 도시다.아직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후세인 전 대통령이 이라크 안에서 안전한 피난처로 삼을 수 있는 지역으로 꼽힐 정도로 그의 추종세력이 여전히 강력한 곳이다.후세인의 아들인 우다이와 쿠사이가 지난 7월22일 미군에게 사살당한 곳도 바로 모술이다. 조승진기자 redtrain@
  • 比 ‘1일반란’ 이모저모 / 평화해결 불구 아로요 지도력 타격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마카티 금융지구 내 ‘글로리에타 콤플렉스’를 점거했던 필리핀 반군들의 쿠데타 기도는 반군이 부대 복귀를 약속하고 건물 주변에 설치했던 폭발물들을 자진 철거하면서 21시간 만에 평화적으로 해결됐다. 그러나 반군들의 쿠데타 기도가 평화적으로 끝났음에도 불구,아로요 대통령의 지도력에 흠집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같다.쿠데타군은 어쩌면 처음부터 아로요 대통령에게 흠집을 내는 것을 목표로 치밀한 준비 끝에 행동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28일 아로요 대통령의 국정연설을 하루 앞두고 개혁 부진과 부정·부패 등을 내세워 쿠데타를 기도,대통령의 지도력에 타격을 가했다.필리핀 경제에 대한 신뢰도 저하 역시 불가피할 것으로 보여 훗날 아로요 정부를 전복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반군들 폭발물 자진 철거 반군들은 반란 기도가 끝났다는 아로요 대통령의 발표 직후 건물 주변에 설치했던 부비트랩 등 폭발물들을 자진 철거하기 시작했다고 목격자들은 전했다.현장을 지키던 AFP통신 기자는 반군들은 건물 주위에 모여 있던 기자들을 해산시킨 후 건물 외벽과 나무 등에 부착시켰던 C4 폭발물에 연결된 철선들을 끊었다고 말했다. ●개혁부진·부패 등에 불만 아로요 대통령은 앞서 26일 대국민 담화에서 일부 젊은 군인들의 쿠데타 음모가 드러났다며 이를 주동한 장교 10명을 포함한 70여명을 체포하라고 긴급 지시했다.이들은 그동안 지지부진한 개혁,군대 내의 부정부패와 정실인사,봉급과 주거환경 등 열악한 근무환경에 대한 불만을 토로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쿠데타군들은 새벽에 발표한 성명을 통해 아로요 정부의 퇴진을 요구했다.이들은 아로요 정부가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 등 이슬람 반군에 무기와 탄약을 밀매하고 있으며,반군에 의한 폭탄테러 등을 빌미로 대통령이 권력 유지를 위해 내달 계엄령 선포를 준비 중에 있다고 비난했다.또 자신들의 행위는 쿠데타를 하거나 권력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불만을 표출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군,“사실상 승리했다.” 주장 반군들은 반란 종식을 위한정부 대표와의 협상에서 앙헬로 레이에스 국방장관과 에르모제네스 에브단 경찰청장,빅터 코르푸스 군정보국장 등 3명의 해임과 자신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레이에스 국방장관은 자신의 거취에 대해 아로요 대통령의 결정에 따를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반군들이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부대로 복귀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아로요 대통령은 이날 쿠데타 기도가 평화적으로 해결된 것은 “민주주의의 승리”라면서 쿠데타의 주모자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될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반군들의 부대 복귀가 허용됨으로써 평화 해결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정부가 사실상 반군들의 요구에 굴복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정부가 원칙을 갖고 대응하지 못하고 반군들에 끌려다녔다는 비난을 피하기 힘든 것이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 배후설 이번 사태와 관련,2001년 군부 주도의 민중봉기로 쫓겨난 조지프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배후에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그는 부정부패 혐의로 마닐라 교외의 한 군병원에 수감돼 있었으나 이날 캠프 아귀날도의 군부대로 전격 이감됐다.에스트라다 지지자들은 쿠데타를 기도한 젊은 장교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 위해 이들이 점거하고 있는 마닐라 중심가 쇼핑몰을 향해 시위 행진을 벌이다 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미국 정부는 26일(현지시간) 아로요 대통령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천명하고 쿠데타는 즉각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조앤 무어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누구도 정통성 있는 민간 정부인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 정부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지지를 의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필리핀 정부에 대한 진정한 위협이 있다고 믿을 만한 이유를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전경하기자·외신 lark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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