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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헬기 탄흔의 상처 이겨낸 ‘빛’…핫플, 원더풀 청춘들의 ‘힘’

    헬기 탄흔의 상처 이겨낸 ‘빛’…핫플, 원더풀 청춘들의 ‘힘’

    [이우석의 미시(微視) 여행] <5> 빛고을 광주 동구 비추는 ‘5+1 光’빛고을 광주(光州)의 진정한 빛은 원도심에서 나온다. 광주의 도심 동구가 그렇다. 동구에는 충장로와 금남로가 있다. 그 사이엔 대한민국 근대사의 아픈 상처가 아로새겨진 구 전남도청과 전일빌딩이 있고 그 아래엔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있다. 예술시장인 대인시장과 동명동 카페거리, 아시아음식문화 거리도 그 기억의 틈을 비집고 들어섰다. 1187m 무등산이 굽어보는 지산유원지도 여기 있다. 아름다운 예술과 맛있는 음식, 흥겨운 문화가 함께 공존하는 곳, 그곳이 광주광역시 동구다. 동구 밖엔 아카시아꽃이 활짝 핀 과수원길이 있을까 모르겠지만 동구를 밝힌 다섯가지 빛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여기에 새빛 하나 더. 광주라서 특별한 음식들이 있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주인공 김사복(송강호 분)이 눈물 반, 땀 반 뒤섞어 먹었던 주먹밥 같은 음식들 말이다. 광주 동구에서 이런 음식들은 ‘디폴트값’이나 다름없다.광주는 후삼국 시대까지 무진, 무주 등으로 불렸다. 애초 빛고을이 아니었고 물(水)고을이었다. 영산강이 지나고 광주천, 제법 커다란 저수지 경양방죽(일제강점기에 매립)도 있었다. 물이 많은 분지(벌), 무들(물들)이었다. 무들을 이두로 써 무주(武州)라 적었다. 전북 무주(茂朱)가 아니다. 무등산(無等山)도 무들에서 나왔다 한다. 물과 숲의 고을이 빛고을로 바뀐 것은 940년(고려 태조 23년). 드디어 광주(光州)가 등장한다. 고려 태조 왕건이 무진주에 광주도독부를 설치했다. 고려말 목은 이색은 광주를 ‘빛의 고을’(光之州)로 적었다. 조선을 거쳐 대한제국이 1896년 전국을 13도로 나눌 당시엔 전남도청을 광주에 뒀다. 이때부터 광주는 남도의 중심지로 빛을 발하게 됐다. 1910년 일제는 광주읍성의 3방을 합해 광주면을 설치했는데 그 대부분이 현재의 광주 동구 일대다. 광복 후엔 동구를 중심으로 ‘광주의 빛’이 발현된다. 참고로 광주에는 여타 대도시에 있는 중구가 없다. 이는 동구가 중심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광주는 물론 전남의 중심지였다. 문화와 상권이 금남로와 충장로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서울로 따지면 명동과 을지로, 다동, 종로, 남대문시장을 함께 묶은 동구는 광주의 간판이었다. 호남의 중심도시로 번영을 거듭하던 광주에 어둠이 찾아왔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전대 유례없는 유혈 상황이 발생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다. 광주 일대에서 계엄군이 자행한 만행은 아직까지도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고 있지 않다. 이 안타까운 희생은 처절했지만 훗날 대한민국이 군사독재를 끝내고 민주화를 이루게 된 씨앗이자 자양분이 됐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의 유혈 상황은 종료됐지만 그 아픔은 41년이 지난 지금껏 가시지 않았고 상흔 또한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 모든 일이 동구 금남로 일대를 중심으로 일어났다.40여년이 흐른 후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로 재조명되면서 다시 빛을 내고 있다. 금남로 민주광장 주변에는 옛 전남도청과 전일빌딩245, 상무관 등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니, 이 역시 광주 시민들이 지켜냈다. 몇 번이고 철거될 뻔한 아픈 기억의 유산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해 똑같은 공간을 지키고 있다. 가슴 아리도록 선명한 탄흔이 상흔으로 그대로 남은 채. 전일빌딩245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상징적 건물이다. 당시 광주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던 10층짜리 건물이다. 전일은 ‘전남일보’에서 나온 이름이다. 몇 번 소유주가 바뀐 전일빌딩도 사라질 뻔했다. 리모델링 과정에서 건물 10층과 외벽에 총탄 자국이 다량 발견됨에 따라 이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식 의뢰를 했는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군 당국에서 철저히 부인으로 일관하던 ‘헬기 사격설’의 증거가 바로 이 빌딩에서 나왔다. 헬기에서 발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탄흔 245개가 전일빌딩 10층과 외벽에 집중돼 있었다. 발사 각도 등에서 고공 사격이 분명한 총탄 자국이 드러나면서 신군부와 비호 세력이 숨겨 온 거짓이 비로소 환한 빛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광주시도시공사가 소유하고 있는 전일빌딩은 2017년 28번째 5·18 사적지로 지정됐다. 2020년 리모델링을 완료한 전일빌딩은 헬기사격 탄흔 245개의 의미를 살려 ‘전일빌딩245’란 이름으로 개장했다. 내부는 방문객 누구나 광주 민주화운동의 가치와 정신을 공감할 수 있도록 기념공간과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9, 10층에 마련된 5·18기념공간에는 헬기 기총사격 당시를 재현한 디오라마와 영상물, 그에 관한 전시물이 있으며 탄흔을 직접 살펴볼 수도 있다. 게다가 시원하기까지 하다. 어두운 암실 전시관에서 어두운 기억을 통해 오히려 밝은 내일을 다짐할 수 있다. 옥상에 올라서면 전일마루가 나온다. 옥상정원에 360도 펼쳐지는 조망은 ACC, 옛 전남도청사, 무등산과 조선대 본관 등 지금은 평화롭기 그지없는 광주의 풍경을 담고 있다. 대한민국 5대 도시의 원 도심 동구는 광주 전남 지역과 전국 곳곳에서 놀러 온 젊은이들의 명소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이른바 ‘핫플레이스’가 됐단 얘기다. 동구청 뒤편 동명동 카페거리는 근사한 인테리어와 맛있는 음식으로 입소문 나 젊은 관광객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현지 주민들에게도 인기가 많아 오후 6시쯤이면 금남로에서 슬슬 길을 건너 동명동으로 향하는 청년들의 행렬을 목격할 수 있다. 멋진 차량도 많이 모여든다. 운동장만 한 ACC가 있어 편리한 덕에 인근에서 발생한 모든 ‘약속’을 빨아들이는 ‘만남의 블랙홀’과도 같다.서울의 명소 경리단길에 빗대 ‘동리단길’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오히려 서울 쪽이 옹색하게 느껴진다. 주점보다는 식당, 커피숍, 빵집, 브런치 카페, 에스프레소 바, 호프집 등이 많이 몰려 있어 흥청대는 분위기는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암울한 세상 속에 그나마 하교나 퇴근 후 여유를 찾기 위해 동명동 거리로 나온 젊은층이 낡은 도심에 에너지를 주입하고 있다. 과거 큰 평수의 단독주택이 밀집한 광주의 부촌이어서 그런지 여전히 도심 스카이라인이 나지막하고 골목과 거리 풍경이 멋스럽다. 상권이 계속 확장되고 있지만 아직은 그럭저럭 걸어서 다닐 만한 거리다. 서석초등학교 부근을 돌아 이어지는 길은 좀더 한적하고 여유롭다.특히 서석초교에 심어 놓은 히말라야시더 나무 몇 그루는 이국적인 풍경을 자랑한다. 하늘을 가릴 만큼 30~40m 이상 우뚝 솟은 나무는 모양새가 국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설송(雪松), 개잎갈나무라고 부르는 히말라야시더는 동명동의 하늘을 또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드는 요소다. 광주가 자랑하는 가로 예술품 폴리와도 제법 어우러진다. 가만 둘러보면 한국의 대표 예향(藝鄕)답게 가로를 비추는 조명색, 담장에 입힌 도장 등 어느 하나도 촌스럽거나 부자연스럽지 않다. 오래된 서점과 노포, 청년 셰프의 작은 비스트로 등이 퍽 조화롭게 동명동 한울타리 속에서 자기 몫을 지키며 생명체처럼 진화하고 있다. 예스러운 광주 원 도심은 이렇게 활력을 얻고 있다.타 지역 관광객이 광주 동구를 갈 때 교통편이 너무도 편리하다. 광주공항, 송정역(KTX), 호남고속도로 등 다양한 루트로 접근할 수 있으며 공항이나 역에 도착하면 바로 지하철로 동구 주요 거점까지 이어진다. 동구는 얼핏 구도심 속 즐길 거리만 즐비한 도시형 여행지처럼 보이지만 사실 무등산을 품고 있는 친환경 자연 관광지이기도 하다. 무등산의 해발 고도는 1187m. 세계적으로도 인구 100만명 이상 거주하는 도시가 해발 1000m 이상 산을 품은 경우는 드물다. 국내에도 대구 팔공산 정도가 유일하다. 서울의 북한산은 836m다. 도심과 무척 가까워 동구 어디를 가나 무등산을 등에 지고 있다 생각하면 쉽다. 어디서든 보인다. 덕분에 동구 도심에 있다가 갑자기 무등산을 오르기에 좋다. 원효사까지 올라가는 광주 시내버스 1187번(해발 높이와 같다)을 타면 되니 굳이 차를 운전할 이유도 없다. 산정에는 주상절리가 있으며 너덜강이 흐르는 명산이자 국립공원이다. 도시와 가까운 산이지만 멋들어진 근육질의 산이다. 산을 휘감는 고불고불한 드라이브 코스도 이리저리 근사한 풍경을 쏟아낸다. 특히 지산유원지는 과거부터 리프트를 타고 산을 오를 수 있는 시민들의 놀이공원 역할을 대신했다. 아찔한 경사를 치닫는 리프트를 타고 오르면 중턱에서 내린다. 무등파크호텔 주차장과 연결된 승강장에서 거의 직선으로 산중턱까지 연결한다. 과거 옹색하기 짝이 없는 지산유원지 리프트 사진이 인터넷을 떠돌며 화제가 된 바 있다. 요즘은 훨씬 안정적이며 근사해졌다. 단 20여분 올랐을 뿐인데 이미 도심이 아니라 국립공원 산속에 데려다준다. 오솔길엔 울창한 숲 그림자가 드리우고 매미 울음소리 벗 삼아 10여분 걷다 보면 능선을 돌아가는 모노레일이 기다리고 있다. 모노레일 종점에서 계단을 오르면 전망 좋은 팔각정이 우뚝 서 있다. 2021년 광주 동구를 비춘 또 하나의 강렬한 빛은 바로 관광이었다.광주는 음식이 맛있는 미향(味鄕)으로 소문났다. 오리탕과 육전, 무등산 보리밥, 주먹밥, 떡갈비, 상추튀김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동구에서 시작했거나 오랫동안 인기를 누리는 유명 맛집이 이곳에 있다. 시민이나 관광객 모두에게 인기다. 다만 떡갈비 골목은 송정역에, 오리탕 골목은 북구에 있다. 지산 유원지 오르는 길 옆에 무등산 보리밥 거리가 조성돼 있다. 제철 채소와 고기 등 반찬이 한 상 가득 차려져 나오는데 요즘은 열무쌈을 싸 먹는다. 팔도강산은 젓갈과 김치, 쌈채소 등 하나하나 맛좋은 보리밥 정식(8000원)을 낸다. 밥알이 고슬하니 비벼 먹기 제격이다.젊은층에게 특히 인기 좋은 상추튀김도 충장로에서 유래했다. 고기를 계란물에 적셔 일일이 구워 주는 육전집도 여러 곳 있지만 동명동 미미원(1인분 2만 7000원)이 명성을 지키고 있다. 요즘은 육전에다 민어전(3만원)까지 곁들여 맛보면 더욱 좋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후식 뚝배기정식이다. 웬만한 한정식처럼 차려 낸다.간밤에 술집이 몰려 있는 아시아음식문화거리에서 한잔 제대로 걸쳤대도 시원한 조개해장국을 끓여내는 중앙로 해남식당(8000원)이 있으니 걱정 없고, 날이 더워 입맛이 없을 때는 충장로 1960청원모밀에서 메밀향 그윽한 모밀국수(6000원) 한 그릇을 즐기면 되니 이 또한 아무 탈이 없다.동명동 카페거리에서 뱃속이 허하면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유래한 금상주먹밥세트(맘스쿡·9500원)를, 커피에 질렸다면 말차밀크티(METCHA·6500원)를 마시면 ‘미향 광주, 맛의 동구’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 동구는 원도심답게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빵집 노포들과 새로 개업한 베이커리, 브런치, 디저트 카페 등 ‘빵맛집’이 많다. 드라마 유행어처럼 ‘빵구 동구’라 불러도 손색없다.1973년 개업해 50년을 바라보는 궁전제과는 공룡알빵과 나비파이가 유명하다. 바게트 속에 으깬 삶은 계란과 마요네즈, 게맛살, 오이 피클, 채소 등을 섞은 샐러드로 채운 빵이 공룡알빵이다. 가격이 저렴한 데다 푸짐하고 영양가도 만점이라 전국적으로 입소문을 탄 메뉴다. 옛날식 팥앙금빵과 나비파이 등 전통적 메뉴와 세련된 케이크, 디저트도 함께 팔아 관광객들로부터 필수 방문코스가 되고 있다. 초콜릿 종류 과자나 디저트, 그리고 팥빙수 등도 인기메뉴다.ACC 인근 베비에르(문화전당점)는 현지 젊은층으로부터 인기 좋은 제과 중심 베이커리다. 견과류와 팥소가 든 마왕파이가 시그니처 아이템이다. 사장 부부의 성이 마씨와 왕씨라 마왕파이가 됐다고 한다. 동명동에는 동명식빵과 아티장홍, 코너베이크샵, 윤슬베이커리 등이 유명하다. 글 사진 놀고먹기연구소장 demory@naver.com
  • 용병에게 암살된 ‘바나나맨’… 계엄령 아이티, 혼돈 속으로

    용병에게 암살된 ‘바나나맨’… 계엄령 아이티, 혼돈 속으로

    경찰 “훈련된 용병 4명 사살·2명 체포”대통령 시신에서 총알 자국 12개 발견 개헌으로 독재… 기득권·야권 사임 압박前총리, 의회·대법원장 공백 수습 나서새 총리 반발… 9월 총선까지 정국 혼란국제사회 “극악무도한 행위” 일제 규탄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의 조브넬 모이즈(53) 대통령이 살해당했다. 암살범들은 대담하게 7일(현지시간) 새벽 1시쯤 사저를 공격했다. 배후가 누구인지, 이후 어떤 세력이 국정을 책임져야 하는지 즉답을 못 찾는 수많은 의문 속에서 가뜩이나 안갯속이던 아이티의 정국에 혼돈이 가중되고 있다. 치밀하게 기획된 암살이었다. 사건을 전후해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사저 주변 영상을 공개한 미국 폭스뉴스는 아이티 공용어인 프랑스어나 크리올어 대신 미국식 영어와 스페인어를 구사한 암살범들이 훈련받은 외국 용병처럼 보인다고 전했다. 정문 쪽을 바깥 방향에서 찍어 사저 내부는 확인할 수 없는 영상엔 영어로 “DEA(미국 마약단속국) 작전이다. 모두 물러서”라는 확성기 소리에 이은 30여발의 총성이 잡혔다. 카를 앙리 데스탱 판사는 이날 현지 일간 르누벨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시신에서 12개의 총알 자국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총상은 이마와 가슴, 엉덩이, 배 등에서 확인됐다.또 다른 영상에선 5대의 차량이 사저 정문을 빠져나갔는데, 이는 모이즈 대통령과 함께 ?있다 중상을 입은 대통령 부인 마르틴 모이즈(47)가 후송되는 장면으로 보인다. 마르틴은 미국 플로리다로 긴급 이송됐다. 또 현장에서 ‘DEA’가 언급된 데 대해 미 국무부는 “암살범이 DEA 요원이라는 것은 완전한 거짓”이라고 해명했다고 CNN이 전했다. 보시트 에드몽 미국 주재 아이티 대사는모이즈 여사가 “영부인이 위험에서 벗어났다”며 “계속 회복을 기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티 경찰은 현장에서 4명을 사살했지만, 2명은 생포했다고 밝혔다. 레옹 샤를 아이티 경찰청장의 브리핑에선 암살범들을 일단 ‘용병’이라고 규정했다. 암살의 배후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건 한층 난해한 문제로 보인다. 2017년 2월 집권한 모이즈 대통령의 적이 차고 넘쳐서다. 모이즈 대통령은 집권 이듬해 퇴진 요구 대중시위를 경험한 뒤부터 권위주의적 행보를 걸어왔다. 2019년 예정됐던 총선을 연기했고,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는 개헌을 추진한 그는 지난 2월 법정 임기가 끝났음에도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모이즈 자신은 권위주의 행보를 국민의 60%가 빈곤층인 아이티의 체질을 바꿀 기득권 개혁 조치라고 설명하며, 올해 9월 총선 및 개헌 국민투표를 강행하던 중이었다. 아이티의 경제적 기득권 세력과 야권 전부에게 대통령 암살을 사주할 동기가 있는 셈이다. 당장 급한 건 오는 9월 투표 전까지 두 달의 권력 공백 기간을 책임질 세력을 찾는 일이다. 아이티에선 상·하원 의원을 3분의1씩 순차적으로 교체하는데, 현재 의원정수의 3분의 1만 채워져 있다. 아이티 대통령 유고 시 권력승계 1위인 르네 실베스트르 대법원장은 최근 코로나19에 걸려 사망했다. 의회 리더십을 기대할 수 없고, 사법부도 마비된 것이다. 결국 클로드 조제프 총리가 총대를 메고 이날 아이티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는데, 사실 그는 며칠 전 경질된 인물이다. 모이즈 대통령은 지난 5일 총리 교체를 선언하며 신경외과 의사 출신인 아리엘 앙리를 지명했다. 앙리는 “내가 현직 총리”라며 조제프 총리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았다. 국제사회는 암살 사건에 경악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아이티 정치권에 폭력행위 또는 폭력 선동행위를 삼갈 것을 단호히 촉구한다”고 규탄했다. 한국 외교부는 “단합해 조속히 정치·사회적 안정을 찾기를 희망한다”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극악무도한 행위를 규탄하며, 대통령 부인의 회복을 기원한다”고 애도했다. 국제사회 개입 의견도 제시됐지만, 유엔 평화유지군들이 이미 2004~2019년 아이티에 주둔하며 콜레라를 퍼뜨리거나 현지 소녀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저지른 전력이 적발된 바 있어 이들 또한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다. ■조브넬 모이즈는(1968~2021년)바나나 수출, 자동차 부품사업을 일군 사업가 출신으로 2017년 대통령이 됐다. ‘바나나맨’이란 애칭으로 불렸다. 부패와의 전쟁에 주력해 온 그는 개혁 과정에서 총선 일정을 무시하는 권위주의적 행태를 보여 반발을 샀다.
  • 전두환 비판 유인물 뿌려 옥고 치른 고교생, 41년 만에 재심

    전두환 비판 유인물 뿌려 옥고 치른 고교생, 41년 만에 재심

    광주 5·18 민주화운동 직후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가 계엄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른 당시 고교생이 41년 만에 다시 법원의 판단을 받게 됐다. 4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형사1-2부(부장 엄상필 등)는 계엄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은 이우봉(59)씨의 재심을 열어달라는 검찰의 청구를 지난달 22일 받아들였다. 이씨는 전북 신흥고 3학년으로 재학 중이던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동기들과 함께 같은 해 5월 27일 총궐기를 계획했다가 군 병력 등에 가로막혔다. 이른바 ‘신흥 민주화운동’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이후에도 이씨는 같은 해 6∼7월 두 차례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 전 대통령과 군부의 5·18 민주화운동 진압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전주 시내에 배포했다. 이에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장기 8개월·단기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가 항소심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재판부는 이달 23일 첫 공판기일에서 본격적인 심리에 들어갈 예정이다.
  • “지금도 밀물의 삶 견뎌내는 ‘오월의 청춘’ 위한 응원”

    “지금도 밀물의 삶 견뎌내는 ‘오월의 청춘’ 위한 응원”

    ‘오월 광주’ 배경으로 담은 청춘로맨스송 PD “혹시 누 될까 확실한 역사 다뤄”이 작가 “사실 아닌 건 한 줄도 안 쓰려 해”비극과 마주한 현재의 삶 그리며 공감 41년 전 행방불명자 유골이 최근까지 확인될 만큼 5·18광주민주화운동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영화에 비해 드라마에서는 SBS ‘모래시계’(1995), MBC ‘제5공화국’(2005) 정도를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다룬 적이 없을 만큼 생소한 소재다. 최근 종영한 KBS ‘오월의 청춘’은 이 때문에 더욱 주목받은 드라마다. 1980년 5월 광주를 배경으로 풋풋한 청년들의 로맨스를 펼쳤고, 2021년 주인공 명희(고민시 분)의 유골이 발견되는 장면이 등장하며 비극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송민엽 PD는 “5·18을 다루는 만큼 최대한 조심스레 접근하려고 했다”고 운을 뗐다. 생존자나 유족 등 남아 있는 분들에게 누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확실한 역사만 다루려고 했다는 그는 “‘택시 운전사’나 ‘화려한 휴가’, ‘스카우트’ 등 영화도 참고했다”고 설명했다.대본을 쓴 이강 작가도 서면 인터뷰에서 “부담이 굉장히 컸다”면서 “평범한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있지만 이야기 밑에 흐르는 시대를 표현할 때 역사에 없는 사실은 한 줄도 적지 말자는 각오로 임했다”고 덧붙였다. 전남 출신인 정욱진·김보정 배우에게 광주 사투리 감수를 받고, 당시 시가지 모습을 수원 세트장에 구현하는 등 현실감도 높였다. 드라마는 2013년 출간된 김해원 작가의 동화 ‘오월의 달리기’를 원작으로 한다. 원래 줄거리는 전국소년체전을 준비하던 초등학생 육상선수 명수의 눈에 비친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다. 여기에 명수의 누나 명희 등 네 청춘의 이야기를 더해 확장했다. 광주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독일 유학을 꿈꾸는 명희와 서울에서 귀향한 의대생 희태(이도현 분)의 비극적인 사랑은 물론 학생운동에 나서는 법대생 수련(금새록 분)과 지역 유지의 아들 수찬(이상이 분) 남매, 군에 징집된 운동권으로 계엄군이 된 경수(권영찬 분) 등 집단 속 다양한 개인들을 담아낸다. 명희와 희태처럼 사회 운동에서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이 벼락같은 일을 맞고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는지를 섬세하게 그린다.운명이 바뀌어 버린 보통 사람들의 삶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누나와 아버지를 잃고 성직자가 된 명수,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경수, 응급의학과 의사가 된 희태 등은 당시의 아픔을 간직한 이들을 대변한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십자가를 진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송 PD)는 의도와, “현재도 밀물의 삶을 견뎌 내고 있는 또 다른 희태들이 슬픔에 잠기지 않고 삶을 헤엄쳐 가길 응원하는”(이 작가) 바람이 담겨 있다. 총 12부작에 모든 것을 눌러 담은 드라마는 5%대 시청률을 유지하며 종영했다. “명희를 친구처럼 우려해 주는 시청자 반응을 보며 오월 속으로 한 걸음 다가와 주시는 것을 느꼈다”는 이 작가의 소감처럼, 공감하는 시청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증거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묘4-90 아닌 ‘신동남’…41년 만에 이름 찾은 5·18열사

    묘4-90 아닌 ‘신동남’…41년 만에 이름 찾은 5·18열사

    41년간 이름 없이 5·18 묘역에 묻혀 있던 무명 열사 1명의 신원이 확인됐다.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5일 묘역에 안치된 5기의 유골 가운데 1기(묘 4-90)의 신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무명 열사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총상을 입고 숨진 신동남(당시 30세)씨로 확인됐다. 무명열사 묘지에 안장된 신씨는 2002년 개묘 후 유전자 채취 당시 4~5개의 철사가 유해에서 발견됐는데, 법의학자들은 척추 수술의 잔해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1980년 5월 20일 3공수가 주둔했던 광주역 인근에서 왼쪽 복부에 총을 맞고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시각에 계엄군의 총에 맞았던 5·18 부상자 정현택(65)씨는 “20일 밤 11시쯤 광주역 광장 150여m쯤 앞에서 가슴에 총을 맞고 버스에 올라탔는데 청년 1명이 총을 맞아 버스에 오른 뒤 쓰러졌던 장면이 기억난다”며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함께 버스에 탔다가 숨진 신원불상의 청년이 신씨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상을 입었던 신씨는 다음날 사망했고, 시신은 영안실에 안치돼 있다가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의해 전남도청으로 옮겨졌다. 이때 연락이 두절된 아들을 찾아나선 이금영씨의 어머니가 신씨의 시신을 아들로 착각하고, 장례 절차를 진행했다. 시신은 5·18 구묘역인 망월묘역에 안장됐다. 그러나 한 달도 되지 않아 죽은 줄 알았던 이금영씨의 생존 사실이 확인되면서 시신은 이름을 모르는 무명열사가 됐다. 신씨를 포함한 무명열사는 모두 11기였는데 2001년 구묘역에서 현재의 국립 5·18민주묘지로 이장하면서 뼛조각을 채취, DNA 분석을 통해 6기의 신원을 확인한 바 있다. 지난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조사위도 첫 현장 일정으로 행불자 찾기에 나섰다. 그동안 유전자 검사로 시료가 소진된 3기의 뼛조각을 다시 채취해 DNA를 분석했고, 신씨 가족과의 연관성을 밝혀냈다. 신씨의 가족들은 “병원에서 시신이 사라졌다”며 행방불명자로 신청했지만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공식 행불자로 인정되지 않았다. 신씨처럼 행방불명자로 신고했더라도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한 사례는 158명에 이른다. 5·18 보상이 시작된 1990년부터 2015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행방불명자로 242명이 신고됐지만, 공식 인정된 행불자는 78명에 불과하다. 이날 신씨의 신원이 확인되면서 국립5·18민주묘지에 남아 있는 무명열사는 네 살쯤 된 어린이를 포함해 4명으로 줄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발바닥 다 닳은 등산화 한 켤레와 시인은 늘 사람을 향해 걸었다

    발바닥 다 닳은 등산화 한 켤레와 시인은 늘 사람을 향해 걸었다

    국토서시 발바닥이 다 닳아 새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곡성 동리산 계곡 작은 집에/ 등산화 한 켤레/ 업어가도 모를 수면 중이다/ 기골이 장대한 데다가/ 걸음 또한 느긋한 법이 없어/ 멀찌감치 앞서만 갔으니/ 주인 잘못 만나 고생이 역력하다/ 불의는 걷어차고/ 모종의 감시도 피해/ 산에라도 들어야지/ (중략)험준한 산을 넘어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울컥해지는/ 어느 시인의 등산화/ 스무 해째 잠에서 깨지 않고 있다’(황형철 시 ‘등산화 한 켤레’) 한 켤레의 등산화로 남은 시인이 있다. 아니 시인은 죽어서 전남 곡성 태안사 마당 어귀에 등산화 한 켤레를 남겼다. 대쪽 같은 성정으로 정의와 ‘사람’을 말하고, 많은 이들을 진한 형제애로 대했던 시인 죽형 조태일의 이야기다. 시인은 1941년 태안사 대처승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다른 형제들의 이름과는 달리 태안사(泰安寺)의 태(泰)자를 따서 ‘태일’이라는 큰 이름을 지어 주었다. 훗날에 큰스님이 되라는 뜻이었다. 이름의 일화에 관해 어느 인터뷰에서 시인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스님이 되지 못하고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이나 보편적인 정서를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 말았지만 문학이나 종교가 다 같이 인간을 위한 것에 최종목표를 둔다고 볼 때, 아버지의 바람과 나의 길이 그렇게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소회했다. 태안사 바로 아래에서 살던 시인의 가족들은 1948년에 발발한 여순사건을 계기로 졸지에 광주로 내몰리게 된다. 가족 모두가 생계를 위해 밥벌이를 해야 했지만 유독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했던 조태일은 수재들만 진학한다는 서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고등학생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행상을 하던 큰누나의 한 살배기 조카가 병과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 것을 보고는 시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어린 조카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문학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시를 썼다는 그는 고3 때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다시 포도에서’가, 경희대 국문과 2학년 땐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아침 선박’이 당선됐다 ‘아침 바다는 예지에 번뜩이는 눈을 뜨고/ 끈기의 저쪽을 달리면서// 시대에 지치지 않고, 처절했던 동반의 때에/ 쓰러진 시간들을 하나씩 깨워 일으키고/ 저, 넘쳐나는 지평의 햇살을 보면/ 청명한 날에 잠깨는 출항.’(조태일 시 ‘아침 선박’ 중)1965년부터 조태일은 첫 시집 ‘아침 선박’을 필두로 두 번째 시집 ‘식칼론’과 세 번째 시집 ‘국토’를 출간했다. 그러나 신동엽 시인의 전집과 함께 ‘국토’가 신군부로부터 판매 금지 조치를 당했다. 1974년에 문인들과 함께 뜻을 모아 표현의 자유와 민주화 쟁취를 위해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위)를 창립한 이유다. 자실위 창단에 앞서 월간 시전문지인 ‘시인’을 창간해 김지하·양성우·김준태 시인을 발굴하는 데 앞장섰다. 그 시인들의 저항정신이 조태일 시인의 ‘시와 삶의 정의’와도 맞닿아 있었지만 이는 곧 당국으로부터 폐간조치를 당하는 빌미가 됐다. 저작들이 줄줄이 판금 되고, 잡지 ‘시인’이 폐간되자 조태일은 한동안 시를 세상에 내놓지 않는다. ‘발바닥이 다 닳아 새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조태일 ‘국토서시’) 이 시를 쓴 시인이 직접 겪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야 오죽했을까. 조태일은 계엄해제를 촉구한 지식인 124명 서명에 참여하고 그해 5월 17일 신군부의 예비검속에 걸려 구속 수감됐다. 두 달 후엔 계엄법 및 포고령 위반으로 보통군법회의와 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그는 주변에서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 국가 보상금을 신청하라고 권했지만 일축했다고 한다. “그때 죽은 사람도 있어.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유공자 신청을 해. 다시는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 꺼내지도 말어.” 그리하여 조태일의 사후에 지인들과 유족들이 자료를 모아서 사후 유공자 등록을 추진했고, 2000년 12월에 5·18 민주 유공자로 정식으로 등록돼 경기도 용인에 묻혀 있던 그의 유택을 광주 망월동 5·18 묘지로 이장했다.조태일은 옥고와 관련해 “살면서 정식 구속만 3번이었고, 경찰서를 드나든 것은 수십 차례”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독재 정권 아래 저항하다 구속된 문인 가족들의 생계를 걱정하며 리어카에 쌀 한 가마니를 실어 주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겨울이 되면 그 가족들의 추위마저 걱정해 남몰래 겨울 외투를 사입히고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다 집의 생계를 책임져 주던 아내의 역할이 컸다며 자신의 발자취를 모두 다 아내의 은덕으로 돌렸다. 조태일의 시는 독재에 항거하는 모습과 민중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담은 것만이 아니라 ‘자연’에도 깊게 뿌리를 두고 있다. “현실 쪽으로 지나치게 촉수를 들이밀다 보니 자연이 삶의 보고라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회고로 자연을 노래한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현실과 잠시 거리를 두고자 시를 통해 자연으로 들어간 듯했지만 그때에도 그는 김준태 시인과 5·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오페라 극본 ‘무등 둥둥’을 공동집필했다. 시인과 자실위,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초대 상임이사이기도 했지만 그는 ‘스승’이었다. 광주대 문예창작학과의 교수로 재직하며 초대 예술대학장을 지냈다. 매년 조태일시문학관에서 조태일 문학 축전을 개최하는 그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조태일 시인을 ‘스승’이라 부르며 애틋한 마음을 전한다. 시인 황형철은 “선생님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술자리 에피소드를 빼놓을 수가 없다. 수업이 끝나면 시작된 술자리는 저녁에서 밤으로 이어져 새벽 두어 시는 돼야 끝났는데 그 이후로 운동을 하자며 새벽 5시 광주대 정문으로 나오라는 엄포가 떨어지기 일쑤였다”고 전해왔다. 시인의 제자들은 늘 가난한 학생들의 밥과 술을 가장 먼저, 제일 많이 사주기를 서슴지 않는 스승에게 졸업 사은회 선물로 단골 호프집의 선불 영수증을 건넸다고도 한다. 그 스승의 그 제자들이라고나 해야 할까. 사은회 선물이랍시고 내민 영수증을 들고 스승과 제자가 시와 삶, 세상을 논하며 또 같은 자리에서 그 금액의 절반 가까이를 마셔 버렸다고 했다. 황 시인은 또 그것이 선생의 병세를 재촉한 것 같아 늘 마음에 걸린다고도 했다. 앓아누워 있으면서도 가난한 자취생에게 시집과 고등어를 사서 내미는 스승의 손이라니. 제주 조천에서 ‘시인의 집’을 운영하고 있는 손세실리아 시인 역시도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시도, 시인의 집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전해왔다. 제자들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웠고, 세상의 불의에는 대나무처럼 올곧았던 시인이 아직도 세상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같은 까닭이 바로 이들의 대답이 아닐까.조태일시문학기념관의 이해영 관장은 혼자 매일 이곳 산문의 문을 여닫는 것이 하나의 수행처럼 느껴진다고도 했다. 태안사와 시문학관의 대문이 같다. 일주문을 시문학관의 대문으로 쓰고 있는 셈이다. 관장은 눈발을 뚫고, 비바람을 맞으며 조태일 시인의 발자취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단 하루도 이곳의 문을 닫을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이 있는 동안은 끝내 이 문을 닫지 않을 것이라 힘주어 말했다. 시문학관에는 늘 태안사에 묻히기를 희망했다던 시인의 유택 대신 생전의 그가 지니고 썼던 모든 것들을 옮겨다 놨다. 주민등록증과 수첩, 장서들을 비롯해 그가 늘 신고 다녔던 등산화까지도 그곳에 자리했다. 치열한 삶과 시에 관해 가졌던 태도들이 그가 남긴 것들로 대변되는 공간,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오롯하게 모여 있는 장소다.맨몸으로 있는 힘껏 ‘국토’를 돌아보느라 금세 낡아버린 등산화와 그의 시들은 여전히 세상의 빛으로 누군가의 눈을 밝힌다. 이것은 스승이자 시인이었던 한 사람이 남길 수 있는 가장 큰 발자국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바로 우리가 살면서 언젠가 한 번은 꼭 곡성의 조태일시문학관에 들러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설가 이은선
  • [데스크 시각] 오만한 도쿄올림픽이 되어서야/홍지민 체육부 차장

    [데스크 시각] 오만한 도쿄올림픽이 되어서야/홍지민 체육부 차장

    도쿄올림픽은 참 힘들게 다가온다. 57년 전 ‘동경’올림픽 때도 그랬다. 일제강점기 상흔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시기였다. 굴욕적인 한일협정 추진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6·4항쟁이 있었다. 계엄령에 국가대표 선발전과 훈련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고 한다. 동경올림픽에 그리 우호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도쿄올림픽이 다시 공분을 부르고 있다. 지난해 코로나19로 사상 초유의 연기 사태를 맞은 도쿄올림픽이다. 1년 미뤄진 개막 날짜가 다가오며 점점 더 큰 잡음이 일어나고 있다. 원래 일본은 부흥과 재생을 기치로 도쿄올림픽을 유치했다. 2011년 3월 발생한 동일본대지진, 그로 인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와의 단절을 선언하기 위해 이번 올림픽을 마련한 것이다. 코로나19가 덮치며 계획이 틀어진 것에 대한 조바심은 십분 이해하더라도 요즘 일본의 행보를 보면 우려되는 점이 한둘이 아니다. 독도 문제가 들끓고 있다. 여당 유력 정치인까지 나서 도쿄올림픽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다. 도쿄올림픽 공식 인터넷 홈페이지에 실린 성화 봉송 경로 지도에 우리 영토인 독도가 마치 일본 영토처럼 표시된 게 도화선이 됐다. 비판이 일자 선명했던 표시를 육안으로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만 흐리게 바꾼 게 뒤늦게 확인됐다. 지구촌 스포츠 축제를 이용해 슬그머니 독도가 자국 영토라는 주장을 강변하려는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낸 셈이다. 정부의 삭제 요구에 일본 정부는 거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 팔을 걷어야 할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뒷짐 지는 모양새를 보이며 뒤통수를 치고 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정부는 일본의 입장을 십분 반영한 IOC 권고를 받아들여 독도가 표시되지 않은 한반도기를 사용한 바 있다. 당시 IOC는 스포츠와 정치적 사안을 연결짓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권고해 왔다. 일부 비공식 행사에서 독도 표시 한반도기가 사용되자 정부에 항의했던 게 당시 관방장관이던 현재 일본 총리다. 불과 3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일본이 과거사를 외면하듯 또 기억을 애써 지우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정신 승리를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올림픽 성공 개최를 위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일본의 나 몰라라는 처음이 아니다. 방사능 오염 논란이 있는 후쿠시마산 식자재를 올림픽 선수촌 식단에 올린다거나 전범기인 욱일기의 경기장 반입을 사실상 허용해 파장을 불렀다. 지난 4월에는 국제사회의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해양 방류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실제 방류까지는 2년이 걸린다고 하지만 이 또한 이번 올림픽 개최 목적과 무관한 결정이라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선수 안전과 건강을 보장해야 할 IOC와 일본이 혹시 모를 코로나19 감염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황당한 이야기도 들려온다. 도쿄올림픽에 나서는 선수들이 감염되면 선수 본인 책임이며 주최 측 책임은 없다는 면책 조항에 동의를 받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올림픽이 개최국 입장에서는 국력을 뽐내거나 국민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등 일종의 정치적 지렛대 역할을 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88서울올림픽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다. 도쿄올림픽은 어떤 올림픽으로 역사에 남을 것인가. 물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개최에 대한 불확실성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열린다면 역사상 최악의 오만한 올림픽으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 icarus@seoul.co.kr
  • [포토] 5.18 계엄군 지휘관의 41년만의 사죄

    [포토] 5.18 계엄군 지휘관의 41년만의 사죄

    21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1980년 5월 3공수여단 11지역대대장으로 광주에 투입됐던 신순용 전 소령이 사죄의 뜻을 표명하자 김영훈 5.18 유족회장이 손을 잡아 주고 있다. 옛 광주교도소 총격과 암매장 등 상황을 구체적으로 증언한 바 있는 신 전 소령은 계엄군 지휘관으로는 최초로 이날 5.18묘지를 공식 참배했다. 2021.5.21 연합뉴스
  • 41년 전 오늘 광주역 앞에서 방아쇠 당긴 그, 희생자 묘비 어루만지다

    41년 전 오늘 광주역 앞에서 방아쇠 당긴 그, 희생자 묘비 어루만지다

    41년 전 오늘 그는 광주역 앞에 있었다. 제3공수여단 11대대 소속 지역대장 신순용 전 소령은 그 해 5월 19일 서울 용산에서 비상소집돼 20일 새벽 광주로 이동했다. 다음날 그는 동료 병사들과 함께 적군 병사가 아닌 광주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쏴야 했다. 많은 시민이 지켜본 가운데 이뤄진 광주에서의 첫 발포였다. 그는 “광주에 투입되던 때까지만 해도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전달 받아 병사들은 시민들이 모두 폭도들이라 생각했다”며 “도로를 지나는 시민들을 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시체를 암매장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계엄군들은 군 소속으로 어쩔 수 없는 분위기에서 가혹한 진압을 했다”며 “강압진압에 의해 내고향, 내가족, 삶의 위협을 느끼고 총까지 들고 나오게 된 시민께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했다. 신 전 소령은 21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장된 고(故) 고규석씨와 서만오씨의 묘를 차례로 방문해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고 뉴스1이 전했다. 차종수 5·18기념재단 고백과 증언센터 팀장과 김영훈 5·18민주유공자 유족회장이 함께했다. 신 전 소령은 5월 묘역 도착과 동시에 “죄송합니다”를 연거푸 내뱉은 뒤 담담한 표정으로 방명록에 글을 써내려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그 뒤 민주묘지 안에 들어선 신 전 소령은 미리 준비한 꽃다발을 오월 영령 앞에 헌화했다. 그는 “미안합니다”를 세 차례 외친 뒤 무릎을 꿇고 “죄송합니다. 너무 늦었습니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인 채 오열했다. 김영훈 유족회장으로부터 서만오씨의 동생 등 가족의 사연을 들은 뒤 “제가 죄인입니다”, “부끄럽습니다”라고 말하며 묘비를 끌어안기도 했다. 참배를 마친 신 전 소령은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 뿐”이라며 “5·18 당시 모습이 담긴 다큐멘터리를 보고 마음이 아팠고, 고통을 느낀 분께 사죄하고자 찾아오게 됐다”고 41년 만에야 이곳을 찾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광주 시민들은 폭도가 아니었고, 광주 폭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라도 의문을 벗기고 싶다”며 “진실로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서 다른 계엄군들도 용기내 나와서 진실을 말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김영훈 유족회장은 “선생님도 계엄군으로서 무고한 시민을 죽였다는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이제 고통을 지우고 항시 건강하시기 바란다”고 토닥였다. 이어 “빠른 시일 내로 유족들에게 직접 사죄할 수 있는 화해의 자리를 마련하겠다”며 “용기를 내어줘서 고맙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유족들은 당신을 용서하겠다”고 말했다.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의 뒤늦은 사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공수부대원 출신 최영신 씨는 양심 고백 후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고 증언했다. 또 7공수여단 33대대 8지역대 소속이던 A씨는 지난 3월 16일 5·18민주묘지를 찾아 박병현(당시 24)씨의 묘를 찾아 참회했다. A씨는 그해 5월 23일 광주 밖으로 빠져나가는 사람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고 민간인을 향해 총을 쐈다. 그 바람에 농사 일을 도우러 보성 고향집으로 향하던 박씨가 변을 당했다. 유족과 함께 묘역을 찾아 사죄한 것은 A씨가 처음인데 신 전 소령은 처음으로 실명을 밝히고 묘지를 참배했다. 신 전 소령이 밝힌 대로 더많은 계엄군 병사들이 진실을 털어놓아야 한다. 전두환 도당은 발포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현장 지휘관들이 자위권 차원에서 시민들을 향해 총기를 발사했다고 변명했는데 진위를 꼭 가려야 한다. 계엄군 병사들이 술이나 약물에 취해 학살을 했다는 주장도 끊이지 않았다. 또 허화평, 허삼수, 허문도 등 이른바 ‘스리 허’가 오래 전부터 신군부 집권 시나리오를 갖고 의도적으로 광주에서의 소요를 일으켰다는 지적도 있어왔다. 얼마 전에는 정호용 전 특전사 사령관이 비슷한 얘기를 털어놓았다. 이 모든 진실을 짜맞추려면 계엄군으로 투입돼 명령을 전달하거나 하달한 이들이 보고 듣고 겪은 것들을 고백해야 한다. 그것만이 역사적 과오에 대한 올바른 참회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5·18 41주년] 文 “오늘 미얀마에서 어제의 광주를 본다”

    [5·18 41주년] 文 “오늘 미얀마에서 어제의 광주를 본다”

    “희망의 5월 진상규명·명예회복서 시작”김부겸 “핵심 책임자들도 용서 구해야” ‘5·18 민주화운동’ 41주년 기념식이 18일 오전 10시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엄수됐다. ‘우리들의 오월’이란 주제로 열린 기념식에는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김부겸 국무총리와 여야 지도부, 5·18 유공자 및 유족, 각계 대표 등 99명만 참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희망의 오월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으로 열린다”면서 “지난주 계엄군 장병들의 용기 있는 증언이 전해지면서 우리는 광주의 진실, 그 마지막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오늘 미얀마에서 어제의 광주를 본다. 오월 광주와 ‘택시운전사’의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기자정신이 미얀마의 희망이 되길 간절히 기원한다”면서 “민주, 인권, 평화의 오월은 어제의 광주에 머물지 않고 내일로 세계로 힘차게 나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김 총리는 이날 기념사에서 “화해와 용서는 지속적인 진상 규명과 가해자들의 진정한 사과, 살아 있는 역사로서 ‘오월 광주’를 함께 기억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며 “내란목적 살인죄를 저지른 핵심 책임자들도 진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47분간 진행된 기념식에서는 41년 만에 사진이 발견된 고 전재수군과 5·18 당시 투사회보의 필경사로 활약한 고 박용준 열사의 사연을 담은 영상과 추모 연주·합창 등이 무대에 올랐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누구는 아들 주검 보이고 싶었겠소… 그래도 이 참혹한 5·18 알려야 했소”

    “누구는 아들 주검 보이고 싶었겠소… 그래도 이 참혹한 5·18 알려야 했소”

    “누군 참혹한 아들의 죽음을 공개하고 싶것어. 그래도 여러 사람이 알아야 해서 마음을 비웠어.”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에서 총상을 입고 쓰러진 아들 문재학(당시 광주상고 1년)의 마지막 모습을 마주한 어머니 김길자(81)씨는 17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김씨는 “‘엄마, 나 그냥 여기서 끝까지 남기로 했어’란 생전 마지막 말이 41년 동안 가슴을 후볐다”면서 “그래도 41년 만에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니 이제는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작가 한강이 5·18 민주화운동의 당시 상황과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 소설 ‘소년이 온다’의 주인공인 문군의 마지막 모습이 지난 6일 ‘옛 전남도청복원추진단’이 공개한 외신기자의 사진 속에서 처음으로 공개됐다. 1980년 5월 27일 ‘시민군’으로 끝까지 전남도청에 남았다가 계엄군의 최후 진압 작전에서 총을 맞고 사망한 그는 효심이 깊고 꿈 많은 소년이었다. 다섯 식구가 어렵게 살던 형편 때문에 문군은 대학 진학보다 상고를 택했다. 고등학교 입학 3개월 뒤인 5월 21일, 시내는 계엄군의 첫 집단 발포로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김씨는 “집에서 절대 나가면 안 된다”고 단단히 타일렀으나 아들은 24일 점심 이후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김씨는 다음날부터 25~26일 전남도청으로 찾아가 아들을 만났으나 “곧 집으로 간다”는 말만 믿고 되돌아서야 했다. 26일 오후 7시가 넘어 아들은 전화에서 “차가 끊겨 못 갈 것 같아. (계엄 상황이라 저녁 7시 통금) 계엄군이 쳐들어오더라도 학생들은 풀려나니까 나 여기 남기로 했어”라고 말했다. 이어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 작전이 시작된 27일 오전 2시 30분~3시쯤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도심에 울려 퍼졌다. 한숨도 못 자고 발을 동동 구르던 김씨는 “어제 억지로라도 끌고 데려오는 겐데…” 하는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그래도 살아만 있어 다오’라는 어머니 김씨의 바람과 달리 며칠 뒤 아들은 사망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김씨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계엄군이 사망자를 광목으로 둘둘 감싼 뒤 묘역에 가매장한 상태였다. 김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으로 몸져누웠다. 김씨가 ‘정신 차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그해 가을쯤부터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이 된 이후 각종 항의 시위와 집회에 찾아다녔다. 아들의 ‘폭도’ 누명을 벗기기 위해 주부로서의 일상은 사라지고, 투사로 변신했다. ‘단 한 번도 아들을 가슴속에서 내려놓은 적이 없다. 나이가 들수록 더 보고 싶다’는 그는 밤이면 문을 잠그지 못하는 버릇이 생겼다. 재학이가 찾아왔다가 문이 잠겨 되돌아가 버릴까 봐서다. 김씨는 “5·18 민주화운동이 41주년을 맞았지만, 나의 가슴에 든 멍은 그대로”라면서 “우리 재학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발포명령자 처벌 등이 빨리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 사진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예술로 연대한 민주화의 외침

    예술로 연대한 민주화의 외침

    군홧발에 짓밟힌 채 피를 흘리는 청년, 쓰러진 사람을 품에 안고 군부에 맞서는 시민들…. 이처럼 1980년 5월의 광주와 2021년 5월의 미얀마가 공유하는 참상과 저항정신을 그려낸 전시와 공연이 광주에서 열린다. 광주 전남대에서 진행되는 ‘위드 미얀마’ 전시회가 그중 하나다. 미얀마 작가 20명을 포함해 국내 작가 43명, 영국·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 등 해외 작가 7명을 포함해 73명의 작가가 작품 98점을 냈다.●미얀마·英 등 국내외 작가 73명 작품 전시 이번 전시를 기획한 노정숙(58) 작가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위에 합류한 오빠를 찾으러 집 밖으로 나섰다가 계엄군을 피해 골목으로 뛰어든 순간이 생생하다.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진압하기 전날 스피커에서 나오던 “죽어가고 있다. 살려 달라”는 어느 소녀의 외침은 고등학생이던 그에게 깊은 부채감을 남겼다. ‘상처 속에 핀 꽃-민주화’처럼 5·18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시 준비 중 연락 두절·수배된 작가도 미얀마 예술가들이 작품을 통해 민주화 운동을 기록한다는 소식을 접한 노 작가는 지난 3월부터 전시 준비를 시작했다. 그새 미얀마 군부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수배를 받거나 연락이 끊긴 작가도 생겼다. 한국의 작가들은 그들이 무사하기를 바라며 작품 전시에 매달렸다.●전시 참여 미얀마 작가 “지속적 지지를” 작가들은 시민들의 연대와 예술의 힘이 총칼보다 강하다고 믿는다. 노 작가는 “한 미얀마 작가는 민주화 운동의 피가 다음 세대의 물방울로 바뀌는 작품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과 굳센 의지를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고경일 작가는 고 이한열 열사와 세 손가락을 들고 있는 미얀마 시위자를 연결해 ‘한열이를 살려내라’를 ‘미얀마를 살려내라’로 재탄생시켰다. 주최 측은 미얀마를 응원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온라인 아카이브로 남길 계획이다. 익명으로 이번 전시에 참여한 한 미얀마 작가는 노 작가를 통해 하고픈 말을 전해 왔다. “우리 작품들은 매우 어렵게 전시됐고, 우리는 안전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미래 세대를 위해 한국을 포함한 국제 사회가 계속 지지해 주기를 바랍니다.” 광주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미얀마엔 언제쯤 광주처럼 민주화 올까요”

    “미얀마엔 언제쯤 광주처럼 민주화 올까요”

    미얀마가 광주에게 군인의 총부리가 시민들을 향했다. 전남 나주·화순·담양·장성 사람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 맞서려고 광주에 모인다. 1980년이 아닌 2021년 오늘의 이야기다. 저마다의 이유로 한국에 머무는 미얀마인들은 매주 토요일 저녁이면 종합터미널이 있는 광주 서구 유스퀘어 광장에서 촛불을 켠다. 본국 미얀마에서 군부의 탄압에 신음하는 친구와 가족들에게 보탬이 되기 위해서다. 촛불 시위의 물꼬를 튼 것은 묘네자(38)다. 지난 2006년 취업을 위해 한국에 왔다가 한국인과 결혼해 광주에 정착한 그는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지난 2월 초부터 홀로 피켓을 들고 1인 시위에 나섰다. 묘네자의 소식이 공장과 농장에서 일하는 미얀마 노동자들과 유학생들에게 전해지면서 300여명이 모였고 ‘광주미얀마네트워크’가 결성됐다. 매주 적어도 50명이 넘는 미얀마인이 국민통합정부(NUG)를 지지하는 팻말과 촛불을 들고 광장을 지킨다. 그렇게 3300㎞ 떨어진 미얀마에서 군부가 저항하는 시민들을 학살하는 장면은 모두의 마음속에 41년 전 5월 광주의 풍경을 소환 중이다. 5·18민주화운동을 겪은 광주 시민들의 지지는 이들에게 큰 용기를 줬다. 전남대에서 공부 중인 양곤 출신 미얀마 유학생 A(26)는 “다른 외국인 친구들은 미얀마 상황의 심각성을 얘기하면 실감이 잘 안 난다고 하는데, 비슷한 경험이 있는 광주 사람들은 깊이 공감하고 도울 방법이 없느냐고 묻는다”면서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아들은 얼마 전 군인이 쏜 총에 맞아 숨졌고, 친구의 가족들은 체포됐다. 나도 고국으로 돌아가면 체포될까 두렵지만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미얀마네트워크 대표인 묘네자는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하고 5·18 관련 도서를 읽었다. 그는 “광주 시민들이 연대의 의미로 주먹밥을 나눴듯 미얀마에서도 경제활동이 어려워진 시민들이 함께 버티기 위해 음료수와 라면 등 먹을거리를 나누고 있다”면서 “한국에서 미얀마 노동자들의 비자 연장이 수월해졌고, 유학생들의 학비도 지원해 주고 있어 정말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군부의 무력 진압이 거세지고 시위가 장기화하면서 미얀마 시민들은 지쳐 가고 있다. 묘네자는 “5·18 진압 작전 때 시민을 총으로 쏴 숨지게 한 공수부대원이 지난 3월 유족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고 화해의 포옹을 하는 모습을 봤다”면서 “미얀마에선 41년이 지나도 이런 모습을 보기 어려울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이어 그는 “포스코 등 외국 기업과 중국이 미얀마 군부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끊는다면 미얀마인들을 하루빨리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더에에자(57)는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광주처럼 민주화가 올 것”이라고 오늘도 되뇐다. 양곤대학교에 다니던 그와 함께 8888항쟁(1988년 8월 8일)에 참여했던 친구들은 교수와 교사가 됐고, 지금은 시민불복종 운동에 동참해 도피생활 중이다. 군부가 은행을 장악해 돈줄이 끊긴 친구들을 돕기 위해 촛불시위에 참여하는 미얀마인들은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을 태국 등 국경을 거쳐 송금한다. 더에에자는 “88년만 해도 지금처럼 군부가 민간인의 집을 습격해 영아를 데려가는 일은 없었다”면서 “지금의 상황이 훨씬 어렵지만 젊은 미얀마 세대는 강하고 슬기롭다. 광주가 이겨냈듯 그들이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광주가 미얀마에게…“같이 싸우고픈 마음 담은 주먹밥 보냅니다”1980년 5·18민주화운동 이후 광주 사람들에게 주먹밥은 ‘연대와 나눔의 상징’이 됐다. 5·18 41돌인 올해는 군부에 맞서 민주화 투쟁에 나선 미얀마인들을 위한 주먹밥이 빚어졌다.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와 오월어머니회 등 오월단체는 광주 시민들과 함께 재한 미얀마인들에게 연대의 뜻을 담아 주먹밥을 보냈다. 17일 서울신문와 인터뷰한 박행순(71)씨는 지난 2일 광주 서구 유스퀘어 광장에서 열린 미얀마 군부 규탄 집회에 참석해 미얀마인들에게 따뜻한 주먹밥을 건넸다. 그는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고 박관현 열사의 셋째 누나다. 옥중 고문을 견디며 단식투쟁을 하던 동생이 1982년 숨지자 비슷한 아픔을 가진 어머니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던 그는 2014년 미얀마를 찾기도 했다. 그 곳에서 미얀마 민주화운동 역사에 기록된 1988년 8월 8일 ‘8888항쟁’ 유가족들을 부둥켜안고 함께 울었다. 박씨는 최근의 미얀마 상황에 “남 일 같지 않아 마음이 아리다”고 말했다. 그는 “자식을 잃은 미얀마 어머니들은 마냥 슬퍼하지 않았다. 아이들 사진을 어루만지며 ‘너를 대신해 민주화를 이루겠다’고 다짐하던 강인한 여성들이었다”면서 “광주 어머니들이 전두환의 사과를 촉구하고 정부에 진상 규명을 요구했던 모습과 꼭 닮았다고 느꼈는데, 또 쿠데타가 일어나 아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씨를 비롯한 오월어머니회 회원들은 미얀마 시민에 연대하는 성명을 내고, 쌈짓돈을 모아 100만원을 광주 미얀마인들이 모인 ‘광주 미얀마 네트워크’에 기부했다. 광주 시민들의 지지와 응원은 5·18기념재단 등 광주 시민단체들이 모인 미얀마 광주연대 발족으로 이어졌다. 이명자(71) 오월어머니회 관장은 “미얀마 민주화 운동이 석달째 이어지고 있어 걱정이 크다”면서 “마음 같아서는 미얀마로 같이 가서 싸우고 싶다”고 전했다. 오월 단체들은 오는 23일 광주에서 회의를 여는 재한미얀마인들에게도 주먹밥 도시락을 전할 예정이다. 버스기사였던 남편을 계엄군의 무자비한 구타로 잃은 정성희(67)씨도 “미얀마 군인들이 시민을 폭행하는 장면을 보면 애기 아빠가 생각이 나서 가슴이 떨린다”면서 “주먹밥이라도 보내 그들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 싶다”고 말했다.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는 이날 5·18민주광장에서 시민들에게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알리는 주먹밥을 나눠주기도 했다. 부상자를 옮기다가 계엄군의 조준 사격을 복부에 맞은 뒤 기적처럼 살아난 김광호(61)씨도 소매를 걷어붙였다. 김씨는 “1980년 광주 경찰들은 시민들을 지키려고 노력하기도 했다”면서 “미얀마 군인들도 군인의 본분이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시민들을 위해 ‘불복종 운동’에 동참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위드 미얀마…“예술로 미얀마를 지지합니다”군홧발에 짓밟힌 채 피를 흘리는 청년, 쓰러진 사람을 품에 안고 군부에 맞서는 시민들…. 이처럼 1980년 5월의 광주와 2021년 5월의 미얀마가 공유하는 참상과 저항정신을 그려낸 전시와 공연이 광주에서 열린다. 광주 전남대에서 진행되는 ‘위드 미얀마’ 전시회가 그중 하나다. 미얀마 작가 20명을 포함해 국내 작가 43명, 영국·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 등 해외 작가 7명을 포함해 73명의 작가가 작품 98점을 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노정숙(58) 작가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위에 합류한 오빠를 찾으러 집 밖으로 나섰다가 계엄군을 피해 골목으로 뛰어든 순간이 생생하다.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진압하기 전날 스피커에서 나오던 “죽어가고 있다. 살려 달라”는 어느 소녀의 외침은 고등학생이던 그에게 깊은 부채감을 남겼다. ‘상처 속에 핀 꽃-민주화’처럼 5·18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미얀마 예술가들이 작품을 통해 민주화 운동을 기록한다는 소식을 접한 노 작가는 지난 3월부터 전시 준비를 시작했다. 그새 미얀마 군부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수배를 받거나 연락이 끊긴 작가도 생겼다. 한국의 작가들은 그들이 무사하기를 바라며 작품 전시에 매달렸다.작가들은 시민들의 연대와 예술의 힘이 총칼보다 강하다고 믿는다. 노 작가는 “한 미얀마 작가는 민주화 운동의 피가 다음 세대의 물방울로 바뀌는 작품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과 굳센 의지를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고경일 작가는 고 이한열 열사와 세 손가락을 들고 있는 미얀마 시위자를 연결해 ‘한열이를 살려내라’를 ‘미얀마를 살려내라’로 재탄생시켰다. 주최 측은 미얀마를 응원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온라인 아카이브로 남길 계획이다. 올해 5·18 전야제도 미얀마에 대한 연대 메시지를 보냈다. 1부에는 광주가 아닌 도움이 절실한 미얀마의 이야기를 배치했고, 유튜브로 중계되는 공연에는 미얀마어 자막이 달린다. 총연출을 맡은 남유진(48) 감독은 “1980년 광주가 해외 교포나 외신 기자들의 도움으로 고립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서 “미얀마 시민들이 외롭지 않도록 광주에서,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싸움을 응원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익명으로 이번 전시에 참여한 한 미얀마 작가는 노 작가를 통해 하고픈 말을 전해 왔다. “우리 작품들은 매우 어렵게 전시됐고, 우리는 안전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미래 세대를 위해 한국을 포함한 국제 사회가 계속 지지해 주기를 바랍니다.” 광주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서울시의회 더불어민주당 “5.18 민주화운동 41주년, 시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지켜나가겠다”

    올해는 5.18민주화운동 41주년이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민주영령들의 희생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마음 깊이 명복을 빈다. 41년 전, 광주시민들은 신군부와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과 폭력, 조직적인 은폐 속에서도 타협하거나 무릎 꿇지 않았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이 땅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위한 밑거름이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민주영령의 희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서울시의회 더불어민주당은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하여 2016년 “님을 위한 행진곡 5.18기념곡 지정 촉구 결의안” 채택, 2017년 “서울시 민주화운동 기념에 관한 조례안” 제·개정, 2019년에는 “자유한국당 5.18망언3인방 규탄대회 및 자진사퇴 촉구”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하고 민주주의와 헌법정신을 부정한 김진태, 이종명, 김순례 국회의원 사퇴 촉구 결의안” 채택 등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서울시의회 더불어민주당은 앞으로도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 지원 및 진실규명을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을 약속드린다. 또한 민주영령들이 진정으로 바란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갈등이 아닌 협력과 소통으로, 현재에 안주하지 않은 변화와 혁신으로, 민생의 안정과 일상의 회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다시 한 번 5.18민주화 운동 희생자와 유가족 분들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2021. 5. 17.서울시의회 더불어민주당 공보부대표 이승미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꿈많던 17세 소년 재학 어미의 오월은...서러움 그 자체

    꿈많던 17세 소년 재학 어미의 오월은...서러움 그 자체

    “여러 사람이 알아야 해서 아들 시신 사진 공개를 허락했습니다” 1980년 5·18때 아들 문재학(당시 광주상고 1년)을 잃은 어머니 김길자(81)씨는 최근 ‘옛 도청복원 추진단’이 공개한 외신기자의 사진 속에서 처음으로 교련복을 입은 채 도청 복도에서 숨져있는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마주했다. 김씨는 “웬만하면 잊어불것도 같은데 그럴수록 더 힘들다”며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엄마,나 그냥 여기서 끝까지 남기로 했어’란 생전 마지막 말이 가슴을 후빈다. 1980년 5월 27일 ‘시민군’으로 끝까지 전남도청에 남았다가 계엄군의 최후 진압 작전에서 총을 맞고 사망한 문재학은 효심이 깊고 꿈 많은 소년이었다. “엄나, 나 상고 갈래요” 어머니 김씨는 당시 남편의 사업 실패로 광주 북구 중흥동에 셋집을 마련해 다섯식구가 어렵게살던 터라 고교 졸업후 “취직하겠다”는 아들을 만류할 수 없었다, 고교 입학후 3개월도 안돼서 이런 일이 닥쳐올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그해 5월 21일, 시내는 계엄군의 첫 집단 발포로 수십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그날 이후 재학이는 시내에 나갔다가 밤늦게 귀가하곤 했는데 목소리가 쇠서 말을 못할 정도였다. 김씨는 “집에서 절대 나가면 안된다”고 단단히 타일렀으나 24일 점심 이후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샌 김씨는 다음날인 25~26일 전남도청으로 찾아가 아들을 만났으나 “곧 집으로 간다”는 말만 믿고 되돌아서야 했다. 그날 오후 7시가 넘어 아들은 전화를 통해 “차가 끊겨 못간다.(계엄상황이라 저녁 7시 통금)계엄군이 쳐들어 오더라도 학생들은 풀려나난다. 나 여기 남기로했어”라고 말했다. 이어 계엄군의 도청 진압 작전이 시작된 27일 새벽 2시30~3시쯤 콩볶듯한 총소리가 도심에 울려퍼졌다. 한숨도 못자고 발을 동동 구르던 김씨는 “어제 억지로라도 끌고 데려오는 겐데...”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그래도 살아만 있어다오”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은 머지 않아서 였다. 같은해 6월초쯤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역 신문에 사망자 명단에 재학이 이름이 들어있어요” 김씨는 곧바로 선생님과 북구 망월동 묘역(구 묘역)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선생님의 교무수첩 속 재학의 사진과 시신을 검안한 검사가 찍은 사망자 사진이 똑같았다. 김씨는 그자리에서 기절하고 말했다. 계엄군이 사망자를 광목으로 둘둘 감싼 뒤 묘역에 가매장한 상태였다. 김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으로 몸져 누웠다. 겨우 물만 먹으면서도 3개월을 버텼다. “저러다 재학이 엄마도 제정신으로 살긴 힘들거야”란 이웃의 얘기를 우연히 들었다. 정신 차려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그해 가을쯤 부터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이 된 이후 각종 항의 시위와 집회에 찾아다녔다. 이 과정에서 항의하다가 팔목뼈가 탈골됐고, 머리 등을 경찰이 휘두른 무전기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기 일쑤였다. 아들의 ‘폭도’ 누명을 벗기기 위해 주부로서 일상은 사라지고, 투사로 변신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기까지 그렇게 살았다. “단 한번도 아들을 가슴속에서 내려 놓은 적이 없다. 나이가 들수록 더 보고 싶다”는 그는 밤이면 문을 잠그지 못하는 버릇이 생겼다. 재학이가 찾아왔다가 문이 잠겨 되돌아가 버릴까 봐서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민주화 위해”… 죽음 공포 속 ‘5·18 주먹밥 투혼’

    “민주화 위해”… 죽음 공포 속 ‘5·18 주먹밥 투혼’

    전남도청서 시신 보고 오열… 연대 결심“이거 먹고 민주화 이뤄라” 밥·국 보내 광주 여성 이야기 ‘구술기록집’ 남기기로“인자 한 풀어… 미래세대 역사 기억하길”“학생들이 금남로를 차로 댕김서 ‘전두환 물러가라’ 해서 (당시 보안사령관) 이름을 알았당께. 우린 요로코롬 살지만 애들이 민주화를 이뤄서 좋은 세상을 봐야제 했어.” 16일 광주 서구 양동시장에서 만난 이영애(79)씨는 41년 전인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주먹밥을 만들어 학생들을 비롯한 시민군에게 보낸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시장을 찾은 시위 학생들이 “엄마, 목마르고 배가 고파요”라고 하자, 이씨 등 130여명의 노점상인들은 급한 대로 물도 떠다 주고 빵이나 우유를 쥐여 줬다. 상황은 하루가 다르게 긴박하게 흘렀다. “전두환이 계엄군을 보내 광주시민의 3분의2를 죽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설마 했지만 소문은 학살로 이어졌다. 노점상 염길순(85)씨는 21일 찾아간 전남도청에서 태극기와 흰색 당목을 덮은 학생과 시민들의 시신들을 목격했다. 죄 없는 아들과 딸의 주검 앞에서 광주는 함께 오열했고 또 연대했다. 염씨는 “오메, 그걸 우쩨 잊어. 엄마들이 전남도청에서 죄다 울고 있었제”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오옥순(75)씨는 “다 학생들 편이 돼부렀지”라며 “우리도 셋방에 살았는데 1000원, 2000원씩 걷어서 4만원 하던 쌀 한 가마 사서 주먹밥을 만들었어”라고 했다.과일을 팔던 노점상인들은 지금의 양동행정복지센터 자리에 있던 방앗간에서 쌀을 찐 뒤 손수레에 밥을 실어 날랐다. 감`귤 박스에 몰래 빚은 주먹밥을 가득 넣어 학생들에게 “이거 먹고 힘내서 민주화 이뤄라”며 건넸다. 전남대병원 영안실로도 밥과 국을 보냈다. 옛 영동파출소에 학생들 11명이 잡혀 가자 최루탄을 뚫고 가 “학생들이 뭔 죄냐. 내놔라”며 아우성을 쳤다. 어미의 마음이었다. 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도운 사실을 상인들은 수년간 꼭꼭 숨겨야 했다. “(노점상인들은) 다 빨갱이다. 저 X들 다 죽여야 한다”며 계엄군이 눈을 부라렸기 때문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노점상인들을 향한 탄압이 더 거세지자, 전남대 학생들이 “엄마들 때문에 살았습니다. 쪼까 보답을 해줘야 께”라며 연달아 과일을 사 가기도 했다.41년이 흘렀다. 잰 손놀림으로 주먹밥을 만들었던 130여명의 노점상 대부분은 나이 들어 시장을 떠나거나 눈을 감았다. 남은 이들은 여전히 노점에서 채소와 튀김, 과일 등을 팔아 생계를 꾸린다. 양동시장을 지키는 이씨, 오씨, 염씨와 김정애(74)·오판심(76)·나채순(80)·박금옥(77)·이정순(70)씨는 이날 양동행정복지센터에서 41년 전 그날처럼 주먹밥을 만들었다. 광주 서구청은 이르면 내년 주먹밥 역사관을 만들고,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구술기록집으로 남기기로 했다. “우리가 인제 뭘 바라긋나. 미래 세대가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길 바라제. 인자 한 풀었다.” 광주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5·18 41주년] “‘시체처리반’ 존재 여부가 핵심… 발포명령자, 역사의 심판대 세울 것”

    [5·18 41주년] “‘시체처리반’ 존재 여부가 핵심… 발포명령자, 역사의 심판대 세울 것”

    “5·18 행불자와 암매장지 추적 발굴 등을 통해 그동안 감춰졌던 1980년 5월 ‘광주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파헤쳐 나가겠습니다.” 송선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 위원장은 1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예단과 편견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확인하고 사라진 시민을 찾는 데 온 힘을 쏟겠다”고 밝혔다. 송 위원장은 사라진 78명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는 진압작전에 투입됐던 군인들의 결정적인 제보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제라도 부모와 아들을 잃고 41년을 살아온 오월가족을 위해 나서 달라”고 강조했다. 이하 일문일답. -그간 조사에서 계엄군의 ‘시체처리반’ 운용 여부가 주목받고 있다. “시체처리반 존재 여부는 행불자 찾기와 관련, 중요한 문제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의 보고서를 보면 5·18 직후인 6월 초 11공수여단 장병들이 그들의 주둔지였던 주남마을에 임시로 매장했던 시신 수습을 위해 광주로 내려왔다는 복수의 증언이 있다. 공수부대 시체처리반이 광주로 내려와 자신들이 가매장했던 시신들을 더 깊숙이 묻거나 제3의 장소로 옮겼을 의심이 든다. -가장 중점적으로 살피고 있는 곳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광주 진압군으로 투입된 3·7·11공수여단의 주둔지와 이동 경로를 주목하고 있다. 1980년 5월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 외곽으로 물러나는 과정이나 광주로 통하는 주요 길목에서 양민학살과 암매장이 실존했기 때문이다.” -인정받지 못한 사람도 240여명에 이른다. “불인정된 사람들까지 포함해 전체 신고자 가족의 혈액을 확보해 DNA 데이터 베이스를 만든다. 특히 2019년 광주교도소 안 무연고자 합장묘지 등에서 발굴된 252구의 유해도 이들과 일일이 대조해 행불자를 끝까지 찾을 것이다.” -암매장 여부 등 진실 규명의 최정점인 발포명령자를 특정하기 위한 방안은. “전두환·노태우·정호용 등 신군부 수뇌들의 진실 고백은 기대하기 힘들다. 현장에 투입된 병사들과 피해자의 증언·고백 등을 토대로 상향식 조사를 진행하다 보면 언제가 발포명령자를 가릴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역사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 증언과 재판 기록, 조사 내용 등 발포 관련 모든 정보를 사회관계망분석(SNA) 방식으로 ‘데이터’화한다. 9·11테러 집단을 특정하기 위해 미 정보기관이 적용한 분석 기법으로 알려져 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5·18 41주년] 41구·6구·8구… 계엄군의 고백… 그날, 암매장 진실 파헤쳐질까

    [5·18 41주년] 41구·6구·8구… 계엄군의 고백… 그날, 암매장 진실 파헤쳐질까

    “뼛조각이라도 찾아 묻어 주고 싶을 뿐입니다.” 5·18 행불자 가족인 김금희(76·여·전남 무안)씨는 “매년 이맘때면 가슴이 미어터질 것 같다”면서 “가족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진실만은 꼭 알고 싶다”며 고통의 세월을 되새겼다. 1980년 5월 20일 김씨의 어머니(당시 57세)와 남동생(당시 23세), 또 다른 남동생(당시 14세), 자신의 아들(당시 5세) 등 4명이 모두 광주역 인근에서 실종됐다. 이들은 당시 의정부에 살고 있는 김씨의 언니 집에 가기 위해 무안 몽탄역에서 오전 10시 30분 열차를 타고 광주역으로 향했다. 광주역에서 내려 1㎞쯤 떨어진 광주종합터미널에서 의정부행 고속버스를 갈아탈 예정이었다. 10여일 후 의정부의 언니로부터 “왜 엄마가 안 올라오시냐”는 전화를 받은 이후 41년째 행방이 깜깜하다. 5월 20일은 3공수가 광주역에서 시민 시위대와 대치 중이었고, 같은 날 밤 인근 주택가에 무차별 사격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루 뒤인 21일은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상황으로 이어지는 등 시내는 시위 군중과 계엄군 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때이다. 이 기간, 김씨 가족을 비롯 초등학교 1학년 이창현(당시 7세), 계엄군을 피해 조선대 뒷산으로 숨었던 고교 1학년 임옥환, 학동 삼거리에 나갔던 10세 문미숙 등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들처럼 5·18 이후 종적이 묘연한 수많은 실종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16일 광주시에 따르면 5·18을 전후해 행방불명자로 신고된 이는 242명이다. 심사를 거쳐 관련자로 인정된 사람은 84명이다. 이 가운데 6명은 2002~2006년 ‘무명열사 묘지’ 11기를 파묘한 뒤 DNA 감식으로 신원이 밝혀졌다. 4세가량의 아이를 포함한 나머지 5명은 지금껏 무명열사 묘역에 묻혀 있다. 5·18 공식 행불자로 인정된 사람은 모두 78명이다. 행불자 70여명에 대한 행방 추적이 41년동안 이뤄졌으나 단 한 명의 흔적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수치상 약간의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암매장 의혹’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 조사위원회(조사위)는 최근 중간조사 결과 발표를 통해 “최소 55구의 시신을 추적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각각 광주교도소 일대 41구, 주남마을 6구, 송암동 8구 등이다. 국가기관이 행불자에 대해 구체적 수치를 적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사위는 “이런 정황은 현장에서 암(가)매장을 지시·실행·목격했다는 계엄군 중 제3공수여단 51명의 제보와 진술 등을 기초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주남마을에 주둔했던 제11공수여단 4개팀(1팀 3~4명)이 5·18 직후 광주에 다시 내려와 시체 수습에 참여했다는 증언도 확보했고, 이후 수년간 군과 정보기관의 주도로 ‘시체처리반’이 운용됐다는 의혹도 확인 중이라고 덧붙였다. 추가 사망자 증언이 집중된 곳은 광주 외곽의 북구 옛 광주교도소와 동구 주남마을, 남구 송암동 등지이다. 이들 지역에서는 계엄군의 광주 봉쇄 기간(5월 21~27일)에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광주교도소는 5·18 직후 계엄사령부가 ‘폭도들이 6차례에 걸쳐 교도소를 습격했고, 이 과정에서 시민 등 28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던 곳이다. 당시 교도소 안팎 야산 등지에서 11구의 시체가 가매장 또는 암매장된 채 발견됐다. 하지만 나머지 17명의 행방도 묘연하다. 조사위는 “광주교도소 동서쪽의 광주~순천 간 고속도로와 광주~담양 간 국도를 오가는 차량과 민간인에 대해 최소 13차례 피격이 이뤄졌고, 신혼부부를 태운 차량을 저격·사살했다는 복수의 장·사병 증언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계엄사 발표와 달리 피격 또는 교전 횟수가 2배 이상 차이 나는 만큼 사망자도 늘 것이란 추측이다. 광주~전남 화순 길목인 동구 지원동과 주남마을은 그동안 알려진 마이크로버스와 구급차 피격 사건 이외에 또 다른 승용차와 구급차 등 최소 5대의 차량이 피격됐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광주와 나주를 잇는 남구 송암동 일대는 1980년 5월 24일 오후 1시 30분쯤 주둔지 교체 과정에서 계엄군끼리 오인 사격으로 장교와 사병 등 9명이 숨진 곳이다. 계엄군은 이 교전 직후 인근 마을 청년 등 주민들을 무차별 사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3곳에서만 최소 55구의 사망자에 대한 추가 제보가 이뤄지면서 추적 조사가 진행 중이다. 앞서 광주시는 2000~2009년 ‘행불자 소재찾기사실조사위’를 꾸려 242가족 440여명의 혈액을 유전자 분석용으로 채취했다. 암매장 제보지 64곳 중 옛 광주 군통합병원 담장 밑·건설현장 등 신빙성이 있는 9곳을 발굴해 유골 150여점과 유류품 등을 발굴했으나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어 5·18기념재단도 2017년 옛 광주교도소 안팎·광주~화순 간 너릿재 구간 등 11곳에서 암매장 발굴을 시도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조사위 관계자는 “계엄군의 ‘시체처리반 운용’ 진술 등을 토대로, 사망자(실종자) 일부가 헬기·군 수송기 등에 실려 제3의 장소로 옮겨진 뒤 매장 또는 소각됐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면서 “전국 화장장을 전수조사하고 증언의 사실관계를 확인하다 보면 언젠가 행불자 소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5·18 그날, 흔적 없이 사라진 78명, 뼛조각이라도 묻어 주고 싶은데…

    5·18 그날, 흔적 없이 사라진 78명, 뼛조각이라도 묻어 주고 싶은데…

    조사위, 당시 계엄군 200여명 진술 확보민간 차량 공격으로 숨진 55명 추적 중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사살됐지만 사라진 시민 78명의 행방을 추적하는 작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는 계엄군으로 참가했던 군인 200여명으로부터 유의미한 진술을 확보해 최소 시민 55명의 행방을 추적 중이라고 17일 밝혔다. 이에 5·18항쟁 기간 사라진 78명이 41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조사위는 항쟁 기간인 1980년 5월 18~27일 광주에 투입됐던 3공수와 7공수, 11공수 부대원들의 면담 조사로 밝혀진 18차례의 민간인 차량 공격에서 최소 사망자 55명 이상이 사라진 것으로 보고 이들의 행방을 쫓고 있다. 이들 55명은 공식 행불자 78명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다.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에 주둔했던 3공수는 최소 13차례 이상 민간 차량을 공격한 사실이 드러났다. 복수의 3공수 소속 장교와 사병은 조사위에 “교도소 옆 고속도로를 지나가던 신혼부부를 태운 차량을 저격·사살했다”고 증언했다. 또 11공수와 7공수가 주둔했던 동구 지원동과 주남마을 일대에서도 최소 5대의 차량을 공격한 것으로 조사됐다. 차종수 5·18기념재단 고백과증언센터 팀장은 “41년 동안 땅속에 잠들어 있을 행불자를 찾기 위해서는 진압작전에 투입됐던 군인들의 양심적 증언이 필요하다” 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주먹밥 빚은 여성 노점상인들…“전두환도 몰랐지만 좋은 세상 봐야제 했어”

    주먹밥 빚은 여성 노점상인들…“전두환도 몰랐지만 좋은 세상 봐야제 했어”

    “학생들이 금남로를 차로 댕김서 ‘전두환 물러가라’ 해서 (당시 보안사령관) 이름을 알았당께. 우린 요로코롬 살지만 애들이 민주화를 이뤄서 좋은 세상을 봐야제 했어.” 16일 광주 서구 양동시장에서 만난 이영애(79)씨는 41년 전인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주먹밥을 만들어 학생들을 비롯한 시민군에게 보낸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시장을 찾은 시위 학생들이 “엄마, 목마르고 배가 고파요”라고 하자, 이씨 등 130여명의 노점상인들은 급한 대로 물도 떠다 주고 빵이나 우유를 쥐여 줬다. 상황은 하루가 다르게 긴박하게 흘렀다. “전두환이 계엄군을 보내 광주시민의 3분의2를 죽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설마 했지만 소문은 학살로 이어졌다. 노점상 염길순(85)씨는 21일 찾아간 전남도청에서 태극기와 흰색 당목을 덮은 학생과 시민들의 시신들을 목격했다. 죄 없는 아들과 딸의 주검 앞에서 광주는 함께 오열했고 또 연대했다. 염씨는 “오메, 그걸 우쩨 잊어. 엄마들이 전남도청에서 죄다 울고 있었제”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오옥순(75)씨는 “다 학생들 편이 돼부렀지”라며 “우리도 셋방에 살았는데 1000원, 2000원씩 걷어서 4만원 하던 쌀 한 가마 사서 주먹밥을 만들었어”라고 했다. 과일을 팔던 노점상인들은 지금의 양동행정복지센터 자리에 있던 방앗간에서 쌀을 찐 뒤 손수레에 밥을 실어 날랐다. 감귤 박스에 몰래 빚은 주먹밥을 가득 넣어 학생들에게 “이거 먹고 힘내서 민주화 이뤄라”며 건넸다. 전남대병원 영안실로도 밥과 국을 보냈다. 옛 영동파출소에 학생들 11명이 잡혀 가자 최루탄을 뚫고 가 “학생들이 뭔 죄냐. 내놔라”며 아우성을 쳤다. 어미의 마음이었다. 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도운 사실을 상인들은 수년간 꼭꼭 숨겨야 했다. “(노점상인들은) 다 빨갱이다. 저 X들 다 죽여야 한다”며 계엄군이 눈을 부라렸기 때문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노점상인들을 향한 탄압이 더 거세지자, 전남대 학생들이 “엄마들 때문에 살았습니다. 쪼까 보답을 해줘야 씅께”라며 연달아 과일을 사 가기도 했다. 41년이 흘렀다. 잰 손놀림으로 주먹밥을 만들었던 130여명의 노점상 대부분은 나이 들어 시장을 떠나거나 눈을 감았다. 남은 이들은 여전히 노점에서 채소와 튀김, 과일 등을 팔아 생계를 꾸린다. 양동시장을 지키는 이씨, 오씨, 염씨와 김정애(74)·오판심(76)·나채순(80)·박금옥(77)·이정순(70)씨는 이날 양동행정복지센터에서 41년 전 그날처럼 주먹밥을 만들었다. 광주 서구청은 이르면 내년 주먹밥 역사관을 만들고,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구술기록집으로 남기기로 했다. “우리가 인제 뭘 바라긋나. 미래 세대가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길 바라제. 인자 한 풀었다.” 광주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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