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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공화국과 張勉](19)-요동치는 軍(上)

    1960년 8월27일 민의원에서 총리 취임후 첫 시정연설에 나선 장면(張勉)은긴급과제 6가지에 관한 정부 방침을 역설했다.마지막 항목에서 장총리는 “경제건설과의 균형상 과중한 국방비를 줄이고자 감군(減軍)을 하겠으며 이에 대비해 중장비를 도입하는 계획을 이미 수립했다”고 밝혔다.이어 “국군의 군기를 확립하고 일부에서 있었던 부패를 숙청하는 동시에 군의 정치적 중립을 확보하고 군내 파벌 조성을 방지하기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다짐했다. 장총리가 제시한 군 관련 정책의 큰 줄기는 ‘감군’과 ‘개혁’이었다.또그가 지적한 군의 문제점들은 국민도 충분히 공감하는 것들이었다.이승만(李承晩)정권 아래서 군은 정치에 심하게 오염된 상태였다[별도기사 참조].4월혁명이 일어난 뒤 군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다른 어느 분야에 관한 것 못잖게 높았다. 4월혁명 공간에서 국민과 군의 만남은 충돌 없이 이루어졌다.4월19일 이승만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해 군이 서울 등 대도시에 진주했지만,경찰과는 달리국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지는 않았다. 송요찬(宋堯讚)계엄사령관은 계엄군에게 “민가에 들어가지 말고 절대 음식을 얻어먹지 말 것,어떤 일이 있어도 총을 쏘지 말며 발포한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명령을 내렸다.계엄군인 15사단의 조재미(趙在美)사단장은 19일 고려대를 찾아가 강당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에게 “절대 연행하지 않겠다”는약속을 해 해산시키기도 했다. 60년 4월 중립을 지킨 군의 엄정한 자세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다행스러운일이었다.가령 군이 유혈진압에 나섰다면 그 비극적 결말은 상상하기에도 두려울 정도였을 테고,계엄사태를 빙자해 직접 권력 장악에 나섰더라도 민주화를 이루는 데 큰 타격이 됐을 것이다. 4월혁명 과정에서 군은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초연한 듯이 보였다.다만 장총리의 연설에서 지적받은 자체 문제점들을 처리하려는 움직임이 내부에서일어났다.그것이 바로 정군(整軍)운동이다. 허정(許政)과도정부 시절인 5월2일 군수기지사령관인 박정희(朴正熙)소장은송요찬 육군참모총장에게 편지를 보낸다.“군의 최고 명령자로서 ‘3·15부정선거’에책임을 지고 용퇴하라”고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5월8일에는 김종필(金鍾泌)중령 등 육사 8기생인 중령 8명이 김중령 집에서모였다.이들은 정군운동을 벌이기로 뜻을 모으고 ▲3·15 부정선거를 방조한 군 장성들의 책임 추궁 ▲부정축재한 장성 처단 ▲무능·파렴치한 지휘관제거 ▲파벌 요인 제거와 군의 정치적 중립 보장 ▲군 처우개선 등을 목표로 정했다. 이들은 연판장을 돌려 군내 여론을 불러일으키려고 했지만 즉시 발각돼 김종필 최준명(崔俊明) 김형욱(金炯旭) 옥창호(玉昌鎬) 석창희(石昌熙)등 5명이구속됐다.그러나 여론 악화를 우려한 송요찬은 이들을 바로 석방하고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났다.송요찬의 후임으로는 역시 정군대상으로 꼽히는 최영희(崔榮喜)중장이 임명됐다. 장면내각이 구성되면서 국방장관은 현석호(玄錫虎),정무차관은 박병배(朴炳培)의원(무소속)이 각각 맡았다.장·차관 모두 군이나 국방에 관해서는 백지나 다름없었다.다만 현석호에게 육사 2기생인 현석주(玄錫朱)라는 동생이 있어 그를 통해 군 내부사정을 알아보는 정도였다.장면은 국방부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듯하다.공보비서관인 고 송원영(宋元英,5선의원 역임)은 회고록에서 “장총리는 나이가 지긋한 민간인을 국방장관에 앉힌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다.그러나 국방부의 모든 일은 한계가 있다고 본 것 같다.미군에서 작전권을 가진 이상 국방장관 자리는 한계가있다고 보았던 것이다”라고 밝혔다. 육군 참모총장 자리에는 최경록(崔慶祿)중장을 앉혔다.최중장은 이승만정권에서 정치에 물들지 않은,몇 안되는 고위장성 가운데 하나였다.최영희는 합참의장으로 승진했다. 장면정부 출범후 영관급 장교들의 정군운동이 다시 떠올랐다.9월10일 김종필 김형욱 등 중령 11명이 현석호 국방장관을 방문해 전군을 상대로 정군을 단행할 것을 청원했다.현장관도 필요한 정화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이틀뒤 국방장관이 현석호에서 민주당 구파인 권중돈(權仲敦)으로 바뀐 뒤 권장관은 정화조치의 첫 단계로 3·15부정선거 관련자와 부정축재자를 조사하는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한다. 9월20일 엉뚱한 곳에서 정군운동에 불똥이 튀었다.최영희 합참의장 초청으로 방한한 미국 국방부 군원국장인 윌리스턴 파머 대장이 한국을 떠나면서 정군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한국군 고위장성들이 최근의 사태에큰 불안과 초조를 느끼니 더 이상 조직을 흔들어 군사력을 약화시키지 말라”는 요지였다. 파머의 성명은 큰 반발을 불러왔다.최경록 육참총장이 즉각 “명백한 주권침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9월24일에는 육사 7·9·10기 대표 16명이 최영희 합참의장을 찾아가 “파머를 불러들여 자리를 보존하려고 했다”면서 사임을 요구했다.‘하극상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태의 결과로 김종필·석정선(石正善) 두 중령이 61년 2월 예편당한다.배후로 지목된 박정희는 육군본부작전국장에서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된다. 이후 정군운동은 사라지지만 주동자들은 결국 쿠데타 음모로 돌아선다. 이용원기자ywyi@李承晩정권하의 軍실태 이승만(李承晩)정권 12년동안 군은 외형상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대한민국 출범 당시 국군은 육군·해군을 합해 5만 병력 규모였다.‘6·25’발발직전에 10만명을 넘어섰고 1954년에는 65만명에 이른다.이후 다소 줄어 50년대 중반부터는 통칭 ‘60만 대군’으로 자리잡는다. 반면 이 시대는 군이 정치적인 사건에 자주 동원되고 그 영향으로 분파(分派)가 극심해지는 등 정치에 오염된 기간이기도 했다. 창군(創軍)이후 60년대 초까지 한국군 상층부를 이룬 장성과 고급장교들은출신에 따라 네 부류로 나뉜다.광복군 또는 중국 정규군 출신을 비롯해 ▲일본군 장교·하사관 ▲일본이 창설한 만주군 ▲공산통치를 피해 내려온 이북피난민 출신 들이다. 육군의 전신으로 46년 창설된 조선경비대에서는 광복군의 유동열(柳東悅)송호성(宋虎聲)장군이 초대,2대 사령관을 맡는다.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김구(金九)를 지지하는 광복군·중국군 출신들을 뒷전으로 밀어낸다. 이승만은 초대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참모총장(49년 폐지됨)에 일본군 출신 이응준(李應俊) 채병덕(蔡秉德)을 각각 임명한다.일군 출신들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고 실전 경험도 풍부해 초기 국군이 기틀을 잡는 데 나름대로기여한다. 그러나 일군 출신들도 52년이면 ‘실권’에서 멀어진다.‘발췌 개헌’때 이승만이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에게 2개 전투사단을 부산으로 보내라고 명령하지만 거부당한 일이 계기가 됐다.일본 육사를 나온 이종찬은 “군의 정치적 개입은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한다. ‘만만치 않은’일군 출신들을 배제한 이승만은 후임에 ‘젊고 경험이 부족한’만주군 출신들을 선택한다.대표적인 인물이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정일권(丁一權)과 백선엽(白善燁)이다. 일제가 중국대륙을 침공하려고 관동군 보조병력으로 창설한 만군은 그 위상이 독특했다.정규전 훈련보다는 독립군이나 마적들을 소탕하는 데 필요한 반란진압 전술을 주로 배웠다.독립운동가·공산주의자를 상대하는 바람에 그업무도 상당히 정치적이었다.그래서 흔히 “만군 출신의 많은 장교들은 군내(軍內) 분파주의와 음모의 원천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이승만은 정일권과 백선엽을 교대로 중용하며 충성경쟁을 부추긴다.정일권이 51년 34살에 국군 최초로 중장에 오르지만 대장 계급장은 그보다 3살 아래인 백선엽이 53년 먼저 단다.육군참모총장도 정일권(50년)-백선엽(52년)-정일권(54년)-백선엽(57년)으로 왔다갔다한다.두 사람의 선두다툼은 군부 내에 함경도파(정일권)와 평안도파(백선엽)라는 두 파벌이 형성되는 원인이 된다. 군부내 파벌을 조장해 충성경쟁을 시킨 것 말고도 이승만은 여러 면에서 군을 정치에 악용한다.대통령·국회의원 선거 때 부정투표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되었다.헌병총사령부(사령관 元容德)와 특무대(대장 金昌龍)를 시켜 군 내부를 감시하는 한편 이들을 정적 제거에도 동원했다.‘서민호(徐珉濠)의원 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 정치자금도 군비에서 조달했다.군은 당시 국가예산의 40%이상을 썼고 매년미국으로부터 4억달러 상당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원조받고 있었다.군에서 정치자금을 끌어쓰는 행태는 필연적으로 군 내부에 부패를 불러왔다.군수물자를 빼돌려 사복(私腹)을 채우고 위로는 상납하는 구조가 심해졌다.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군은 자유당·관료층에 버금가는개혁의 대상으로 떠올라 정군(整軍)운동을 불러왔다. 이용원기자ywyi@
  • 「오늘 ‘4·19’ 39돌」4·19세대-대학생 좌담

    4·19는 민주와 자유를 열망하는 지식인과 민중들의 힘이 폭발적으로 분출된 혁명이었다.하지만 39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4·19는 ‘미완(未完)의 혁명’으로 남아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정치·사회·문화적 갈등구조와 맞물려4·19정신이 우리 사회에 제대로 구현되지 못해 왔다는 것이다.4·19세대인이영일(李榮一) 국민회의 의원과 한영우(韓永愚) 서울대 인문대학장,고려대대학원 이준복(李準馥·신방과 석사 과정)씨와 연세대 손수진(孫秀眞·여·신방과 4년)씨의 좌담을 통해 4·19의 의미를 되새기고 4·19정신의 완성을위한 과제와 방안을 짚어본다. 이영일 4·19가 우리 정치사에 준 교훈은 4·19를 계기로 주권재민(主權在民)의식이 국민의 가슴 속에 자리잡았다는 사실입니다.또 우리가 미래에 구현해야 할 비전을 민주주의 형태로 완성했다는 것입니다.4·19가 ‘미완의혁명’이라고 불리는 것은 1년 만에 군사정권에 의해 붕괴됐기 때문입니다.4·19 이후 25년 동안 개발독재를 거치면서 4·19는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국민이 국회의원을 바꿀 힘은 가지게 됐지만 정권을 바꿀 만한 힘은 갖지 못했습니다.그러다가 97년 12월18일 비로소 국민의 손에 의해 정권까지 바꾸게됐습니다.국민의 정부 탄생으로 비로소 4·19의 이념이 구현된 것이지요.그래서 4·19의 지향성이 국민의 정부에서 꽃피웠다고 봅니다. 손수진 ‘4.19세대는 없다’는 주장이 있습니다.4·19세대는 사회적으로영향력 있는 위치를 점하면서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는 지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그래서 4·19세대가 변절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영일 4·19때 반독재투쟁에 앞장섰다는 사실만으로 평생 투사로 살다 죽으라는 논리는 맞지 않습니다.백이(白夷) 숙제(叔齊)처럼 살 수는 없는 것이지요.물론 4.19때 불의에 저항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4·19가 민족 대 반민족의 투쟁이라면 불타협의 투쟁을 계속해야 하겠지요.4·19세대에 대한 평가는 당시 어떤 위치에 있었느냐를 기준으로 이루어져야합니다.4.19때의 활약상을 소개하겠습니다.나는 당시 서울대 문리대 수학과에 다니던 김치호라는 친구와함께 남산합창단 단원이었습니다.종로 5가에서 곤봉을 맞고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문리대 앞 쌍과부집에서 우동을한 그릇 먹은 뒤 그 친구에게 시위하러 다시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그랬더니 그 친구는 도서관에 가방을 가지러 간다고 하면서 경무대로 달려가 죽음을택했습니다.해마다 4·19묘소에 가면 그 친구의 묘에 꼭 들립니다. 한영우 나는 당시 서울대 사학과 4학년으로 후배들을 인솔해 시위를 했습니다.태평로에 있는 옛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할 때 외칠 구호가 없어옆에 있는 조선일보사에서 몇사람이 구수회의를 해 즉석에서 구호를 만든 일이 있습니다. 4·19는 준비된 혁명이 아닙니다.그래서 ‘미완의 혁명’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프랑스혁명은 계몽사상가들이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고 지지세력도 있어 폭발적 힘을 발휘했습니다.하지만 4·19는 혁명 뒤에 이념이 만들어져 왔습니다.당시에는 합의된 이념이 없었습니다.막연한 애국심을 가지고 시작된뒤 나중에 학문적이고 이론적으로 다듬어지기 시작했습니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당,야당,재야,혁신에 이르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화됐습니다.군사정권에 협조한 사람도 있고,군사정권에 대항해 옥살이를 한 사람도 있습니다. 4·19는 작게 보면 3·15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이 도화선이 됐습니다.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선비들이 개혁의 선두에 나섰던 역사의 전통이 반복된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영일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시대에 살고 있습니다.4·19때 87달러에 비하면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시민·사회단체,정당,이익집단,언론 등많은 집단이 더 이상 학생들의 신세를 지지 않고도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학생은 이제 국민의 울분을 대변하는 유일한 집단이 아닙니다.21세기는 정보화시대입니다.정보화에 관한 지식이 가장 중요한 재산입니다.후배 대학생들에게 경쟁력을 갖춘 신지식인으로서 각자 맡은 바 소임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한영우 4·19때 군이 중립을 지켰던 것은 연구 대상입니다.논문에 따르면부정선거와 발포책임자인 최인규 내무부장관 등이 김정렬 국방부 장관에게협력을 요청해 계엄을 선포했는데 국방부 자체가 협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한 것은 미국이었습니다.미국이하야를 요구한 것은 이승만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정권은 한반도를 민주주의 진열장으로 만들려는 미국의 의도에 맞지않았습니다.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한·미·일 연합방위체제를 구축하려는 구상에 맞지 않았습니다.이승만은 강력한 반일(反日)주의자였기 때문에일본과 손을 잡기를 꺼렸습니다. 이준복 현재 전체 대학사회에는 다양성이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고 있습니다.학생운동에 대한 관심과 사회문제에 대한 참여도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떨어집니다.이같은 변화는 93년 들어,특히 93학번부터 뚜렷합니다.90·91·92학번은 87년 6월항쟁의 경험이 있는 87·88학번이 군 복무 뒤 복학했을 때학교를 같이 다녀 80년대 학번들의 영향력 속에서 80년대의 정서를 지니고있습니다.그러나 93학번부터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합니다.이는 고교생 때부터 약자를 배려하는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정의감은 정권을 가진 사람에게 억압당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고민입니다.그런데 이른바 ‘왕따’문화가 약자에 대한 배려를 없앴습니다.또 자기 자식만 생각하는 부모세대들의그릇된 생각과 모 재벌의 광고처럼 1등만 강조하는 분위기가 약자에 대한 배려를 약화시켰습니다.지금의 대학사회는 4·19와 70·80년대의 정신을 구현하려는 노력이 부족합니다. 손수진 4·19가 ‘미완의 혁명’이라는 의견에 동의합니다.혁명은 진보세력이 혁명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비로소 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4·19는 완성된 혁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지식인은 자기 만족에 빠져 자기들만의 우리에 갇혀 있었으며,민주화와 자립경제를 시급하게 수립해야 한다는 문제를 인식했으면 민중과 함께 제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력을 형성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한영우 4·19를 완전 성공으로도,완전 실패로도 보지 않습니다.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4·19는 미성숙 상태에서 일어났으며 지금도 풀어가는 과정입니다.4·19에 0점을 주는 것은 너무지나칩니다.역사는 단번에 100점으로 갈 수 없습니다.현재는 100점으로 가고 있는데 60∼70점에 도달한 상태입니다.지나치게 허무주의적으로 보면 도그마(dogma)에 빠지게 됩니다.도그마에 빠지면 현실에 입각한 생존논리를 주체적으로 만들지 못하고 외래논리를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이준복 해방 뒤 우리는 친일파와 변절자에 대한 청산 과정을 거치지 못했습니다.좌·우 이념대립이 반공주의로 나타나면서 청산의 문제가 흐지부지됐습니다.4·19 뒤 부정부패와 비리 청산이 다시 문제로 떠올랐지만 장면(張勉) 정부에서 청산이 되지 않았으며,군사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청산의 문제는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손수진 저는 4·19가 부패로 점철된 이승만정권을 물러나게 하고 사회운동이 조직화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합니다.한 교수께서는 4·19등 우리나라의 중요한 사건에서 지식인의 노력이 컸는데 지금의 지식인과 학생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영우 4·19를 바탕으로 1년 앞으로 닥친 21세기의 우리 모습을 그려 나가야 합니다.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방적 민족주의입니다.우리 정서에 맞는 민주주의를 해야 합니다.신자유주의 경쟁원리도 적당한 수준에서 받아들여야 하지만 민족주의를 도외시해서는 안됩니다. 이준복 언론은 학생운동의 이념성을 걱정합니다.그러나 그 이념성은 4·19를 촉발한 정의감과 다르지 않습니다.다만 이념이 더 선명해졌을 뿐입니다. 저는 학생운동의 이념이 불순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손수진 학생운동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폐쇄적인 면을 띠고 있습니다.운동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학생운동이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설득력을 잃어가는 이념을 고집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한영우 21세기가 문화의 세기라는 말에 동의합니다.21세기에는 사회과학적 이념보다 전통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 중요합니다.자애(自愛)의식을 기른 뒤 세계와 협력해야 합니다.그리고 전통문화를 정치·경제·사회 등모든 분야를이끄는 견인차로 승화시켜야 합니다.20세기 우리 전통문화를 무너뜨렸던 서양문명과 전통문화를 용해시켜 새 문명을 탄생시켜야 합니다. 이준복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사상적 스펙트럼이 보다 다양화돼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공공연히 언급할 수 있는 분위기가조성돼 있지 못합니다.하지만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포괄하지 못하면 4·19는 영원히 진행형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손수진 자라나는 세대들이 통일 후 ‘우리 민족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면 회의가 듭니다.교육을 통해 인도주의와 민족 동질성을 가르치고,통일이 앞으로 실현해야 할 미완의 과제라는 의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리 조현석 김미경기자 hyun68@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19)정공채 長詩’미8군 차’(上)

    1964년 3월 어느날 정공채 시인은 녹번동 자택에서 ‘반공사상 계몽연구소’ 명의로 된 등기우편물 한 통을 배달받았다.그 순간 시인의 뇌리에는 지난 겨울 직장이었던 일성신약 상무실로 불려가 만났던 말끔한 한 신사가 떠올랐다.‘중앙정보부’ 소속이라고 밝힌 그 신사는 정시인을 명동의 장미다방으로 임의 동행,보통 이상의 자세한 신상명세서를 작성해 갔었다.정시인은이게 필시 ‘현대문학’ 1963년 12월호에 발표했던 장시 ‘미8군의 차’ 때문이려니 싶어 무척 불안했다.그 뒤 몇 번인가 다른 얼굴의 ‘중정’소속 신사가 다녀가곤 해서 초조감은 증폭되었으나 그게 큰 문제로 번지리라고는 생각치 않았던 참에 받은 편지였다.서신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정공채 귀하 귀하는 반공법 피의자로 문의지사가 유하오니 내 30일(금요일) 오전 9시까지 당소에 출두할 사. 추신: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 것.귀하에게 극히 불리함.출두시 인장을 지참할 사. 중앙정보부 수사관 서” 이런 내용에다 약도까지 그려진 이 한 통의 편지가 정공채 시인의 문학적생애는 물론이고 삶의 뿌리까지 뒤흔드리라고는 그 자신도 예상치 못했다.경남 하동 출신의 정시인은 진주 농고를 거쳐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부산일보기자,학원사에 이어 ‘민족일보’기자로 오소백 사회부장 밑에서 시경출입을 하기도 했었다.이어 문화방송 프로듀서로 있다가 일성신약으로 직장을 옮긴,당시 시인으로서는 안정된 직장을 가진 운 좋은 소시민이었다. 정시인의 경력에 등장하는 ‘민족일보’란 어떤 신문이었던가.“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근로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양단된 조국의 비애를 호소하는 신문”이란 기치로 1961년 2월 13일 창간했다가 5·16 쿠데타 3일 후인 5월 19일 종간 당한 분단시대 언론사의가장 비극적인 일간지였다.송지영,이상두,양수정 등 당대의 명논객들을 포함한 13명이 ‘혁명재판’에 회부되어 발행인 조용수는 사형이 집행되고 신문지령은 총 92호밖에 못나온 단명의 바로 그 신문이다.창간호 1면에 김수영의 ‘쌀난리’란 시를 게재했던 이 신문은 이후 ‘다가온 춘궁’(신석정),‘총알은 아직도 날고있다’(김재원),‘4.19시’(김수영),‘핏방울이 고여있던한 컬레의 신발처럼’(신동문) 등 다분히 현실고발적인 작품들을 실었다.이중 주목할만한 두 시인도 있다.‘무섭지 않느냐’는 제목의 시는 오탁번 현고려대교수의 작품인데,당시엔 원주고교생이라고 신분을 밝힌 채 실려있다. 이 시로 오시인이 관계당국에 연행,조사받은 건 말할 필요도 없다.다른 한편은 바로 폐간 하루 전인 5월 18일자 시인데 계엄군의 검열로 제목과 시인의 이름이 완전히 삭제당해 있는데,그게 바로 권용태시인의 ‘구름은 아직도’란 작품임이 최근 밝혀졌다. “병실같은/그늘진 조국의 하늘 아래서/나는,/서러운 식민지의 밤을 걸을때처럼/어두운 가슴으로 살아간다”고 시작되는 이 햇빛도 못 본 시는 권용태시인으로 하여금 수사당국에 연행 당해 고초만 받도록 만들었다. 정공채 시인은 위의 서신이 지시한대로 동대문 운동장 건너편 덕수상고 옆소재 ‘반공사상 계몽 연구소’로 출두,지레 겁먹었던 것과는 달리 로이드테 안경의 수사관에게 신사적인조사를 6일 동안 출퇴근 형식으로 받았다.심문의 초점은 정시인의 사상이 ‘반미주의’에다 ‘교도민주주의자’인가에 모아졌다.6.25 이후 송병수의 ‘쇼리 킴’이나 백인빈의 ‘조용한 강’,오영수의 ‘안나의 유서’같은 몇몇 양공주 등장 소설 말고는 그때까지 미국과 미군에 대하여 입도 뻥긋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미8군의 차’란 제목은 단연불온으로 비칠 수 있었다.그러나 미군만 비판했다고 처벌할 수는 없으니 사상적으로 좌경분자란 낙인이 필요했겠는데,그 논리적 근거를 ‘교도민주주의자’에서 마련할 셈이었다.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가 제창한 ‘교도민주주의’란 반제·민족·사회주의 노선으로 제3세계 지식인들을 잠시 매료시켰던이념이었다. 정공채 시인은 자신이 ‘민족주의자에 민주주의자’라는 입장으로 대응했지만 끝이 안보이는 수사는 불현듯 “이제 조사는 끝나고 구속 될 것같은 예감”을 갖게 만들었다.4월초 수사 6일째인 토요일 아침 정시인은 그날 구속될것같은 낌새로 아예 두툼한 내의에다 외투까지 갖고 출두했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SW-전자제품등 ‘Y2K 피해’ 소송대란 우려/외국의 대책

    컴퓨터 2000년(Y2K)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법적·행정적 정비가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법률 전문가들은 그동안 Y2K에 대해서는 기술적인 문제만 부각돼 왔으나 하자보수 책임,손실보상,소비자보호 및 각종 인증제도에 관한 법적인 준비가미흡하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Y2K 문제에 대한 법령과 제도 정비가 미흡할 경우 소송대란과 국제적인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중앙국제법률특허사무소의 李丙昊 대표변호사는 9일 “Y2K에 대한 법률 문제는 해결 방법이 워낙 복잡하고 다양해 미리 준비를 하지 않으면 낭패를 당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李변호사는 특히 “국내 기업들이 외국업체로부터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면서 “외국의 입법례를 참작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이 강구돼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물품 구입시 하자보증 기간을 별도로 정하지 않았을 경우 Y2K 문제로 인한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 법적인 장치는 현재 민법상 담보 책임시효(6개월)와 소비자보호법으로 정한 품질보증기간(1년)이 전부다.따라서 외국처럼 특별법을 제정,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컴퓨터 관련 제품은 국제 유통이 활발하고 통신망의 발달로 전세계가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다.당사자만 해도 프로그램 제공자,이용자,제3의 피해자 등 각기 다르고 피해장소 역시 피해자의 국적과 해당국이 광범하기 때문에 해결 방법이 복잡하다는 것이다. 정부도 이를 인식,지난해 12월 대통령령으로 ‘Y2K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책 수립 및 지원 등에 관한 규정’을 제정했다. 그러나 지난 2일 국회에서 南宮晳 정보통신부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Y2K 법적 문제’에 대한 토론회에서 이준우 한국법제연구원 법제조사연구2팀장 등 토론자들은 “Y2K의 법적인 문제는 단순한 계약상의 문제로 맡기기에는 그 피해의 범위와 중요성이 지대해 국가의 후견적 책무가 요청된다”면서 보다 구체적인 법적·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는 데 입을 모았다. 한편 이와 관련,중앙국제법률특허사무소를 비롯한 일부 국내 법률회사(로펌)들은 전담팀을 구성,법률적 검토작업에 들어가는 등 대비책 마련을 서두르고있다. - 외국의 Y2K 대책 Y2K문제에 대한 입법 논의는 주로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그 대표적인 예가 지난 98년 10월 제정된 ‘2000년 정보 및 준비 공개법’이다. 이 법안은 ‘2000년 문제 해결과 관련,자유로운 정보의 공개와 교환은 물론 소비자 중소기업 지방정부 등이 신속하게 지원하도록’ 돼 있다. 미국에선 또 주정부별로 Y2K문제에 대한 면책 법안을 입법화하고 있다.조지아주에서는 ‘주정부는 2005년까지 Y2K문제 면책’을,하와이주는 ‘정부는 Y2K문제 관련 소송대상에서 제외’를 각각 법안으로 상정한 상태다.캘리포니아주도 ‘2000년 문제로 인한 비경제적 손실 배상은 2만5,000달러를 넘지 못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법안을 상정해 놓고 있다. 다른 선진국들도 Y2K문제로 인한 사회혼란에 대비,각종 특별입법을 준비중이거나 비상계획을 마련해 시행에 들어갔다. 영국에선 Y2K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기업에 법적 책임을 지우는 입법안을 검토중이다.호주는 지난해 증권거래소를 통해 Y2K문제를해결하지 못한 상장기업은 주식거래를 중지하는 방안이 발표된 바 있다.캐나다도 사회혼란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비상계엄안을 마련해놓는 등 특별입법을 서두르고 있다. 洪性秋
  • [제2공화국과 張勉](8)尹潽善과의 갈등(下)/윤보선과 평가

    1961년 5월16일 새벽2시쯤 張勉은 총리 숙소로 쓰는 반도호텔 809호실에서경호대장의 다급한 목소리에 일어났다.張都暎 육군참모총장이 급한 일로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張都暎은 “육군 30사단이 장난질 하려는 것을 막았고,현재 해병과 공수부대일부가 서울로 들어오려는 것을 한강다리에서 막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어“염려마시고 그저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아십시오”라고 덧붙였다. 張勉은 와서 직접 보고하라고 지시하고 기다리지만 張都暎은 오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총성이 요란하게 들려오자 張勉은 경호대장 등과 함께 지프를타고 반도호텔을 떠났다.거리가 가까운 미국대사관과 대사관 사택을 찾았지만 문을 열지 않아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잠시 몸을 피하려고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혜화동 수녀원으로 갔다”(회고록 중에서).그리고는 55시간이 지난 18일 낮12시쯤에야 모습을 드러내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내각 총사퇴를 발표한다. 尹潽善은 새벽 3시30분에서 4시 사이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張勉과 마찬가지로 張都暎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었다.張都暎은 “쿠데타가 일어나 헌병을 동원해 한강다리에서 저지하려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뚫렸다. 쿠데타군이 시내로 들어왔는데 진압될 것같지 않다”고 우려했다(尹潽善 회고록에서). 尹潽善은 “피신하라는 말처럼 들렸지만 일신의 안전만을 위해 300만 서울시민을 버릴 수 없고” 또 “그들하고 사리를 따져볼 수도 있을 것이요, 설령피살이 된대도 그리 부끄러울 것은 없다고 생각해” 자리를 지킨다. 5·16쿠데타가 발생해 제2공화국이 결국 무너지기까지 국무총리 張勉은 몸을 숨겼고 대통령 尹潽善은 현장에 남아 ‘유일한 헌법기관’으로서 쿠데타세력을 상대한다.쿠데타를 적극적으로 분쇄하지 못하고 자기 한몸 피신하는 데 그쳤던 張勉은 제2공화국 붕괴에 변명할 여지가 없다.그렇다면 尹潽善은 제 할일을 다한 걸까. 16일 낮 쿠데타 주역인 朴正熙소장과 柳原植대령이 청와대로 尹潽善을 찾아왔다.이 자리에는 玄錫虎국방장관과 張都暎 등이 함께 있었다.玄錫虎는 쿠데타 소식을 듣고 반도호텔로 가서 張勉을 만나고 헤어진 뒤 쿠데타군에게 체포된 상태였다. 접견실에서 朴正熙 일행을 만난 尹潽善은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말로 입을열었다.이 말은 훗날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되었다. 尹潽善을 비난하는 쪽은 “쿠데타를 기다렸다는 투의 이 표현이야말로 그가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기까지 쿠데타세력과 관련해 보여준 행동을 설명하는키워드”라고 풀이했다.현장에 있던 玄錫虎는 회고록에서,尹潽善이 이 말에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다”면서 張勉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朴正熙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밝혔다. 尹潽善의 설명은 물론 다르다.“그들(朴正熙 일행)을 대하는 마음이 서글퍼나도 모르게 이 말이 떨어졌고,당시 사회적·정치적 혼란상을 생각할 때 당장 무슨 일이 터지고야 말 것같아서”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尹潽善은 “군인들끼리 피를 흘리는 일이 없도록 잘 수습하라”는 말로 발언을 끝낸다.모두 물러갔다가 朴正熙와 柳原植이 다시 들어왔다.柳原植이 “저희는 이 혁명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면서과거에도 대통령에게 충성을다했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마치 張勉내각이 물러나면 권력을 尹潽善에게 넘길 것처럼 들리게끔 하는말이었다. 尹潽善은 이 자리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미 국무부 자료를 보면,그는 白樂濬 참의원의장을 쿠데타군쪽에 보내 ‘헌법 69조에 따라 尹대통령이 새 총리를 임명한다면 군부가 권력을 이양하고 철수할 것인가’를 타진한다. 한편 朴正熙 일행에 이어 마셜 그린 주한미대리대사와 매그루더 UN군사령관이 함께 尹潽善을 방문한다.두 사람은 이미 “張勉총리 영도 하의 합헌적인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뒤였다.두 사람은 “서울시내에 들어온쿠데타군은 4,000명이 채 안되므로 4만 병력만 출동시켜 서울을 포위해 들어가면 쿠데타군이 항복할 것”이라며 무력진압을 주장했다. 그러나 尹潽善은 “국군끼리 전투를 벌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북한 인민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는 논리로 끝내 반대한다.그린은 “각하의 이번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이라는 ‘경고’를 남기고 돌아간다.매그루더는 尹潽善과의 면담후 본국 합참본부에 전문을 보내“尹대통령은 張총리를 몰아내고 싶어 가능한 법적 절차를 찾고 있다”고 보고한다. 尹潽善은 이날 오후 張都暎이 요청한 계엄령을 승인했으며 17일 오후 2시에는 대국민 성명을 발표해 “군사혁명위원회가 정부 기능을 대신한다”고 밝혀 張내각 퇴진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또 쿠데타를 “애국적인 군사혁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편 張勉은 수녀원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사태의 전개를 알고 있었고 16일아침 그린 대리대사와 통화도 한다(그린의 증언).그는 내각 총사퇴를 결심한 이유를 “미대사관에서 尹씨의 태도를 연락받았는데 그가 쿠데타 진압을 방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회고록에서밝혔다.그러나 張勉은 尹潽善에게 직접 연락해 쿠데타 저지를 논의하거나,최소한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직접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尹潽善은 張勉의 행방을 알지도 못했지만 그와 상관없이 제2공화국을 지키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 정치적 지향과 인적 구성 등에서 이질적이었던 민주당의 신·구파,그리고 그들의 대표격인 張勉총리와 尹潽善대통령의 갈등과 대립은 갓 피어난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히게 하는 크나큰 비극을 초래한다.제2공화국 붕괴의 책임을저울질한다면 張勉과 尹潽善 그 어느쪽으로도 저울추가 결코 기울지는 않을것이다. 이용원- [기고] 張勉과 尹潽善 평가 5·16쿠데타가 일어나 張勉총리의 소재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尹潽善대통령이 “올 것이 왔다”며 쿠데타를 추인한 것은 두 사람의 비극적 결합을잘 말해준다.우리가 슈뢰더 독일총리는 알아도 대통령 이름은 잘 모르듯 내각책임제 아래 대통령은 명목상 존재에 불과하다.그런데도 尹潽善은 대통령중심제의 대통령처럼 행세하다 막상 단호한 조치가 필요한 때 “올 것이 왔다”며 쿠데타를 추인해 버렸다. 尹潽善에게 쿠데타가 ‘올 것’인 이유는 자신의 파벌이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당시 집권당은 한민당 후신인 구파와,재야 민주화세력인 신파의 연합으로 구성된 민주당이었다.申翼熙·趙炳玉같은 비중 있는 지도자가사망한 뒤 구파를 이끌게 된 尹潽善은 전형적인 과거형 정치가였다. 구파의 전신인 한민당은 우익민족주의 세력과 친일파 세력이 혼재한 정당이었다.UN한국위원단이 ‘보수적 지주정당’이라고 지적했듯이 해방직후 토지개혁에 반대하고 반민족행위처벌법에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으며,李承晩의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다.따라서 한민당이 李承晩과 결별하고 야당의 길을걸은 것은 이념과 정책상의 대립이라기보다 李承晩의 권력독점에 대한 반발때문이었다.한민당은 해방이후 좌익세력의 급진성과 李承晩의 독선이 낳은‘반감(反感)’이란 정치적 공간을 적절히 점유해 생존한 과거형 정당인 것이다. 4월혁명후 ‘대통령=구파,총리=신파’라는 합의 덕에 대통령에 선출된 尹潽善이,자파인 金度演을 총리로 지명한 것은 정치적 합의를 휴지조각으로 여기는 과거형 정치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대통령과 총리를 모두 차지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구파는 결국 민주당을 뛰쳐나가 신민당을 창당한다.尹潽善은대통령으로서 이런 분열적 행위를 제지하기보다는 부추기는듯한 처신을 보였고,정부를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해 張勉정부 흔들기에 여념이 없었다.개인과 파벌의 이익을 모든 가치보다 우선시한 행위인 것이다. 반면 신파를 이끈 張勉은 1960년대 한국상황에서는 등장이 너무 빨랐던 미래형 정치가이다.자유민주주의에의 신념과 종교적 경건함이 밴 구도자적(求道者的) 정치가인 張勉은 2000년을 눈앞에 둔 현재에도 시기상조일지 모를 정도로 선진적인 정치가였다.그는 尹潽善이 이끄는 구파의 끝없는 시비를 인내하면서,1960년 10월 제2공화국 경축식에서 말한대로 “정부의 시정목표로서경제제일주의”를 주창한 실질적이고 선각적인 지도자였다. 쿠데타 세력이 마치 자신의 업적인양 내세운 경제개발5개년계획이나 국토건설사업은 모두 張勉정부에서 경제제일주의를 실천하고자 수립한 것들이다.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해 경제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 張勉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 실천되었더라면 5·16이후 정경유착으로 성장한 ‘재벌신화’라는 어두운 경제성장사는 ‘국민신화’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5·16후 두 사람의행보도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張勉은 쿠데타를 막지 못한 역사의 죄인이란 죄의식 속에 참회하다가 죽어간 반면,尹潽善은 ‘올 것이 왔다’던 쿠데타세력의 朴正熙 후보와 1963년과 67년 두 차례 대결했으나 패배했다.현실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꿈을 접었을 무렵인 1980년대에는 全斗煥 정권에 협력하다가 세상을 떠났다.쿠데타후 두 사람의 삶은 현재우리 정치의 낙후성의 한 원인을 말없이 웅변해준다. [李德 一 역사평론가·문학박사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
  • [변혁으로서의문학과역사] (15) 예술활동 보장하라 문화인 성명

    작품에서 ‘나’는 고결한 예술가상으로 부각되어 국민들이 고통을 당하는판에 음악가라고 잘 살 수는 없다고 여기며 부당한 이익이 주어진대도 거절할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다.‘나’는 선전부장관 부인의 우아한 자태 앞에서도 속으로는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나의 아내보다 손톱만치도 어여쁘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고 할 정도였는데,이런 시각으로 본 전시하의 부패타락상에 대하여는 자못 비장하다.“나는 도학자도 아니고,또 무슨 수신선생님도 아니고 노래를 즐겨부르는 성악가입니다.춤인들 왜 싫어하겠습니까! 천만에! 싫어할 이가 있습니까! 나도 이십대 대학생 시대에는 춤에 미쳐서 세상을 모르고 날뛰던 시절도 있었습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피난지에서의 그 광란의 겨울밤을 ‘나’는 “미쳤다! 미쳤어! 모두 머리가 돈 세상이다! 사움은 누가 해주기에.....우리나라 장관이나 고관이나,그리고 그들의 귀부인들은 반드시 댄스 파티를 가지고 거기 도취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고발한다.“버터나 잼이 맛이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그러나 나는 지금 빵이나 버터 보다는 김치 깍두기를 더 소중히 생각해야할 시대와 환경에 있습니다”라는 것이 성악가 ‘나’의 가치관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선전부장관 부인 ‘너’는 댄스홀에서 “어떤 외국 장교같은 사람의 품에 안기어서 미친 듯이 빙빙 내앞을 지나가면서 나에게 던진눈짓”인 “추파”를 보내는 여인으로 그려지는데,그 순간 ‘나’는 “드러운 연!” “일국의 장관의 부인이라는 연이.....”로 명칭을 바꾼다.그러면서도 ‘나’는 ‘너’에게 “온 백성이 다같은 운명에서 괴로운 삶을 이어나가는 것입니다.당신만이 슬프고 당신만이 외로운 것이 아닙니다”고 거듭 충고하며,육욕의 본능에서 헤어날 것을 종용한다. 소설이 이렇고 보면 50년대적인 계엄령 하의 문화풍토에서는 발칵 뒤집힐만한 일이다.그런데 정작 현실비판 의식에 대한 반성은 사라져 버리고 모델문제만 폭력으로 부각되어 버린건 한국적 권위주의 사회의 반영이기도 하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작가에게 폭행을 행사하고 난 뒤의 처리방법이다.변호사와 언론인과 문화인들에 의한 헌법 제14조(학문과 예술의 자유)에 근거한 부당한 처사라는 항의가 잇따랐다.심지어는 현직 대검찰청 검사까지도 폭행사실을 위법이라고 힐난했는데,당국은 아랑곳 없이 이 작품 게재 잡지에 대한압수를 시작(2월 18일)했고 이에 한국기자협회에서 항의하고 나섰다.그러나이철원 처장은 이 소설에서 ‘선전부장관 부인’이란 어휘 중 ‘선전부장관’이란 다섯자만 삭제하고 계속 발매하도록 타협했다는 공문을 보내는 한편으로는 각신문사 편집국장 앞으로 이 기사를 다루지 말아줄 것을 당부하는공문(2월19일)도 보내 더욱 사건을 복잡미묘하게 만들어 버렸다.당연히 비밀로 내려졌을 이 공문은 정부 기관지였던 ‘서울신문’이 사진판으로 그대로공개(2.22)해버림으로써 이 필화는 드디어 언론계에까지 확대되었다. 당시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는 이 사건을 둘러싸고 김광섭·모윤숙의 불문에부치자는 주장과 절대다수의 강경대응책이 맞섰는데,위원장 박종화는 중립적인 입장이었다.이 사건으로 믿던 도끼인 ‘서울신문’에 발등을 찍힌 공보처는 박종화사장의 경질을 노려 경무대 비서 김광섭을 천거했으나 표대결에서박종화에게 고배를 마셨다.그러나 공정보도의 의지를 지녔던 오종식 주필은물러났고,이 사건의 취재를 주도했던 사회부장 역시 일찌감치 퇴사했다는 후일담은 한국 현대언론사의 또 하나의 흑막을 보여준다. 이에 대한 다른 문화인들의 자세는 어땠을까.우선 재구(在邱.대구로 피난한 문화인들)문화인 45명(전숙희·김팔봉·최정희·박두진·조지훈·박목월·정비석·홍성유·박인환 등 문인과 김동원·이해랑·최은희·김승호 등 예술인)은 성명서를 발표(2.21)했는데 그 요지는 인권유린의 폭력범 처벌과,이철원 처장 부인 이씨는 “김광주씨를 비롯하여 전국 문화인에게 신문지상을 통하여 사죄하라”는 것,그리고 “진정한 민주예술 활동의 발전과 보장”이 포함되어 있었다.전시 아래서 이만한 성명이 나온 것은 가히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문학예술을 재단하는데 익숙한 권력은 바로 이런 성명이 발표되던 날 돌연정책을 바꿔 ‘광무신문지법’에 의거해 잡지 ‘자유세계’에서 ‘나는 너를 싫어한다’가 실린 16쪽 전체를 삭제토록 지시했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유족·부상자 220여명,제3공수여단 방문 19년만에 화해

    1일 서울 송파구 거여동 제3공수특전여단에서는 19년 전의 그날을 되새기는화해와 용서의 자리가 마련됐다. 제3공수특전여단은 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에서 저항하던시민들을 최종 진압했던 부대. 5·18 유가족과 부상자 220여명은 19년만에 처음으로 당시의 진압부대를 방문,용서의 뜻을 전달했다.장병들은 국민의 군대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했다. 과거의 앙금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5·18 민중항쟁부상자회 서울·경인지회측이 부대를 방문하겠다는 뜻을 전달했고 부대장이 흔쾌히 수락하면서 마련된 자리였다. 오전 11시30분 유가족과 부상자들이 5대의 전세버스에 나눠타고 부대에 도착하자 300여명의 장병들은 따뜻한 박수와 꽃다발로 환영했다. 부대장인 宋기석 준장은 “후유증으로 고생하면서도 국민 화합의 발판을 만들기 위해 어려운 결단을 내리셨다”면서 “민·군 화합이라는 큰 뜻에서 행사가 이뤄진 만큼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군으로 거듭나겠다”고 강조했다. 부상자 회장 金好成씨(45)는 “지난날의 잘못을 모두 용서한다”면서 “국민 대화합을 위해서는 피해자인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80년 5월 당시 계엄군의 차에 치여 1급 중증장애인으로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 온 張周仁씨(60)는 “처음에는 얼룩무늬 군복만 보면 움찔했다”면서 “이렇게 어울려 이야기를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했다.이어 “잘못된 과거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당시 진압부대 요원이었던 李모원사(45)는 “마음 속에 커다란 짐으로 남아있던 앙금을 씻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사진촬영을 마치고 함께 식사를 하며 ‘화해와 용서의 대화’를 나눴다.이동할 때마다 장병들은 목발을 짚는 부상자의 겨드랑이를 부축해주고휠체어를 밀어주기도 했다.시간이 지날수록 표정도,대화도 부드러워졌다. 유가족들과 부상자들은 부대원들의 태권무 시범을 관람한 뒤 2시간여의 짧은 만남을 끝내고 부대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부대를 나섰다.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18회)-趙泰一시인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일이다//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국토서시’중) 죽형(竹兄) 趙泰一시인(59·광주대학교 예술대학장).그가 70년대 초부터 5년에 걸쳐 쓴 48편의 연작시집 ‘국토’(창작과비평사)에는 조국의 땀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다.황톳빛 서정이 넘실거리고 잊혀져간 민중의 목소리가일렁인다.건강한 민중적 삶의 의지를 이처럼 곡진하게 그린 시가 또 있을까. 그러나 ‘국토’의 운명은 가혹했다.유신시절 ‘국토’는 출간되자마자 긴급조치 9호로 판매금지됐다.“그 당시 긴급조치는 긴급조치 위반사례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하는 기막힌 제도였습니다.‘국토’는 75년 ‘신동엽 전집’,박형규 목사의 수상집 ‘해방의 여울목에서’와 함께 판매금지됐지요.이나라 강토와 민족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쓴 것인데 그것을 범죄시하고 민족정신을 훼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집단이 있었으니….그 뒤로 7년동안 시집을 내지 않았습니다” 30년 넘게 시를 쓰면서 趙시인은 한번도 현실을 외면한 적이 없다.시대의어둠을 가르는 전령으로서 시인의 임무에 충실했다.74년 11월 그는 뜻있는문인들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간사직을 맡아 유신독재에 맞섰다.77년에는 양성우 시집 ‘겨울공화국’ 발간사건에 연루돼 시인 고은씨와 함께 투옥되기도 했다.그의 문학적 시련은 80년대라고 비켜가지 않았다.80년 그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임시총회와 관련,계엄법 및 포고령 위반이란터무니없는 죄목으로 구속돼 5개월의 형을 살았다.87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바뀌면서 그는 초대 상임이사를 맡았다.70년대와 80년대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승과 저승의 삶을,아니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을 도무지 분간할 수 없던 시대”였다. 시인은 흔히 예언자로 불린다.신(神)의 입을 대신하는 사람이 시인이다.76년에 발표된 趙씨의 시 ‘겨울소식’을 보면 그가 얼마나 날카로운 시안(詩眼)의 소유자인지 알 수 있다.“…찬바람 속에서 광주는/큰 애를 뱄다더라//찬눈에 덮여서도 무등산은/그렇게도 우람한 만삭이더라//광주를 온몸에 적셔서/서울의 내곁에 사알짝 놓아두고/터벅 터벅/서울을/떠나버리는 친구!” 그의 시는 광주와 우람한 무등산이 합궁해 낳은 옥동자가 바로 5·18광주민중항쟁임을 웅변해준다.‘겨울소식’은 일종의 예언시 또는 참시(讖詩)로 읽힌다. 이 땅에서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그것은 곧 주어진시대를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이어진다.趙시인은 자신의 시작업을 이렇게 규정한다.“나의 시는 내가 태어난 전남 곡성 동리산 태안사에서 발원해 전국토를 온몸으로 내달려 민족과 역사 앞에 올바르게 서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그에게 고향은 시적 영감의 원천이며,시를 쓰는 것은 시대의 어둠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다. 趙시인의 시를 읽다보면 태안사는 곧 아폴로의 헬리콘산과 같은 존재임을알게 된다.“나의 눈물 속에는/동리산 태안사 밑에 붙어 있던/초가집들이 어른거립니다//…초가집도 죽창도 옛 친구들의 허벅다리도/아아,누나의 옷고름도/소리내어 울고 있습니다”(‘나의 눈물 속에는’중) 시인은 태안사의 승려였던 아버지를 한번도 ‘아버지’라고 편히 불러보지 못했다.그는 ‘신기(神氣)서린’ 아버지를 열 두살에 여의었다.그 어두웠던 유년의 체험,고향의공기를 타고 들려오는 울음소리의 환청을 시인은 끝내 뿌리치지 못한다.그래서인지 그의 시에는 종종 좌절과 체념의 정서가 깔린다.‘눈물’이라는 말이 중심시어로 등장한다.문학평론가 김화영교수(고려대 불문과)는 “조태일은아이러니컬하게도 ‘눈물의 시인’이다.눈물에 생명력을 부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그것은 손끝의 재주가 아니라 영혼의 힘이다”라고 했다.적절한 지적이다. 趙시인의 일관된 문학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월간 ‘시인’지 활동이다.그는 69년 지금의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뒤에 있던 남일인쇄소란 곳에보수도 없이 들어갔다.그곳에서 그는 시전문지 ‘시인’을 창간했다.김지하,양성우,김준태 등 70년대를 빛낸 시인들이 이 ‘시인’지를 통해 등단했다.“당시 ‘시인’지를 주관하며 김지하씨의 시론 ‘풍자냐 자살이냐’를 실은 적이 있습니다.특권층의 권력형 부정과 부패상을 비판한 담시 ‘오적’ 때문에 김씨가 도망다닐 무렵이었죠.당국의 탄압으로 할 수 없이 책을 회수,문제 부분을 잘라내고 다시 배포했습니다.‘시인’지는 1년 남짓 발간되다 결국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때 많은 문인들이 고료 한 푼 받지않고 글을 써준 것이 무엇보다 고마웠다고 회고한다.문학평론가 염무웅씨 같은 이는 ‘시인’지에 ‘서정주와 송욱의 경우’란 평론 한 편 쓴 것이 화근이 돼 S대 전임기용 기회까지 박탈당하기도 했다고 귀띔한다. 趙시인은 최근 외도 아닌 외도를 했다.처음으로 ‘무등(無等) 둥둥’이란창작오페라 대본을 쓴 것.오는 7월쯤엔 여덟번째 시집 ‘도토리들’(가제)도 펴낼 예정이다.“결코 짧지 않은세월 시를 생각하며 시를 보듬고 살아왔지만 시는 점점 낯설고 두렵게만 느껴집니다” 시에 관한한 문리가 트였을법한 그이지만 요즘은 시 쓰는 일이 너무 힘들단다.그의 말마따나 시인은 밤에도눈을 감지 못하는 존재인가보다.金鍾冕 jmkim@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17회)-’해방전후사의 인식’

    역사는 늘 권력을 잡은 자의 기록이 되기 쉽다.권력자는 때로 역사를 왜곡해 왔다.그 결과 세계사의 적지 않은 부분이 정직하지 못한 역사로 얼룩져있다.한국의 현대사도 독재권력에 의해 왜곡됐다.그러나 엄혹한 독재상황에서도 민족의 일그러진 역사현실을 극복해 보려는 의식있는 지식인들의 행동은 끊이지 않았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을 낸 것도 진실을 밝혀 역사의 시계가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데 작은 동력이 되고자 하는 시도였다.송건호 선생 등 12명이 쓴 이 책은 1979년 10월 15일 한길사에서 펴냈다.당시 시대상황에서 이러한 책을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독재권력은 해방후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했다.그러나 어려운 시대의 어둠을 논리적으로 밝히는 일이 필요했다.올바른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을 내기로 했다”고 그 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송건호 선생은 ‘8·15의 민족사적 인식’이라는 글에서 분단의 비극을 안타까와 했다.민족의 비극이분단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분단의 현실은 극복의 대상이었다.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남북갈등과 막강한군사력의 대립으로 언제 또 6·25보다 더 파괴적인 동족상잔이 빚어질지 모르는 불안하고 긴장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민주주의는 시련을 겪고 민족의 에너지는 새로운 군사력을 위해 소모 되고 있는 암담한 상황이 이른바 해방된 이 민족의 현실이다”. 그는 친일파가 다시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는 부끄러운 현실과 분단을 권력유지에 이용하는 독재권력을 비판했다.“친일파 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하여 애국자를 짓밟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분단의 영구화를 획책하여 민족의 비극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는 또 역사의 주체로서 민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민족의 참된 자주성은 광범한 민중이 주체로서 역사에 참여할 때에만 실현되며 바로 이러한 여건하에서만 민주주의는 꽃피는 것”이라며 대중이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송건호 선생의 글을 비롯한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은 해방후 역사현실을 식민사관이나 독재권력의 ‘분단고착화’ 시각으로 보지 않고 분단을 악용하는독재권력,친일파 숙청작업의 좌절 등 해방전후의 역사적 사실과 그 전개과정을 사실적으로 썼다.그것은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역사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이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세상에 나올 때는 유신독재가 말기현상으로 사회적 긴장과 불안을 고조시키며 비극적 몰락의 길을 재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책이 나온 다음날 부마사태가 터졌다.유신정권의 억압이 한계상황에 도달한 것이다.불안한 긴장 속에 책은 빠르게 팔려나갔다.열흘만에 초판 5,000부중 4,500부가 팔렸다.사회과학서적이 그것도 500쪽이 넘는 책이 이처럼 폭발적으로 팔린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유신독재가 10월26일 궁정동의 총성으로 비극적인 막을 내리며 이책도 비운을 맞았다.계엄령이 선포되고 모든 출판물이 군의 검열을 받게됐다.당연히 군 당국은 이 책을 판매금지시켰다. 김언호 대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79년 10월 28일 문공부로호출됐다.‘당신을 구속해야 하지만 처음이니까 관용을베풀겠소.다시는 이런 책 내지 마시오’라고 계엄사에서 파견된 한 문관이 말했다”. 판매금지 사유는 현실 왜곡·부정이었다.그러나 현실을 왜곡한 것은 책이아니라 독재권력이었다.역사를 제대로 보자는 책을 현실 왜곡·부정이라는억지 이유로 ‘금서’로 규정하는 현실은 일그러진 현대사의 부끄러운 한 단면이었다. 이 책은 80년 ‘서울의 봄’이라는 짧은 민주주의 실험때 판매금지에서 해제됐다.민주주의 실험은 강경 군부의 등장으로 광주민중항쟁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의 역사를 만들어냈다.그러나 ‘광주의 비극’과 그 이후의 민주화투쟁은 민주주의라는 찬란한 결실을 맺었다.80년대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이 책은 대학생들이 올바른 역사인식에 눈을 뜨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많은 대학생들이 이 책을 찾았다.베스트셀러가 됐다.80년대 30만부나 팔렸다”고 김언호 대표는 말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1970년대는 민족적 자각이 지식인 사회에서 크게 고양되는 시대였다.깨어있는 지식인들은 한반도의 모든 비극의 근원적 원인은 민족의 분단 때문이라고 인식했다. 분단현실은 남북의 군사대결로 우리 민족의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들었다.친일파들은 반공이데올기라는 가면을 쓰고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복귀했다.친일파와 기회주의자들이 활개치는 현상은 민족의 양심을 파괴하고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다.독재권력은 분단을 권력유지에 악용했다.독재로 민주주의는 꽃피지 못했다.의식있는 지식인들은 친일파와 독재권력이 이러한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인 것을 분단으로 합리화하려 했다고 비판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올바른 역사인식을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책이라고 할수 있다.독재정권은 집권동안 이러한 역사인식을 박제하여 낡은 역사의 창고에 강제로 묻어두려 했다. 그러나 독재권력도 무너지고 그들이 왜곡했던 역사의 진실도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한 때 판매금지됐던 ‘해방전후사의 인식’도 해방전후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었다. 한 시대를 올바르게 정리해야 그 이후의 역사도 정직하게 씌여진다.정직한역사를 통해 역사의 시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 ‘제주 4·3사건은 민중항쟁’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발생한 소위 ‘제주4·3사건’을 두고 그동안 역사의 평가는 엇갈려왔다.한쪽에서는 ‘폭동’으로,다른 한쪽에서는 ‘민중항쟁’ 또는 ‘무장봉기’로.그러나 최근들어 ‘4·3’은 과거 ‘공산폭동’이라는 반공이데올로기적 평가에서 미군정과 경찰의 횡포에 저항한 제주도민의 민중항쟁 또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단독정부수립 반대투쟁으로 재평가되고있다. 최근 역사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제주4·3연구소·한국역사연구회가 공동으로 펴낸 ‘제주4·3연구’(역사비평사 발행)는 ‘4·3’ 재평가의 결정판으로 평가된다.이 책은 작년 3월 제주4·3사건 50주년기념 학술심포지움에 발표된 6편의 논문을 수정·보완하고 여기에 5명의 연구자들의 논문을 보탠 것으로 총11편의 논문을 싣고 있다. 이 가운데서 양정심 역사학연구소 연구원은 논문 ‘주도세력을 통해서 본제주4·3항쟁의 배경’에서 항쟁에 참여했으나 그동안 연구가 부족했던 남로당 제주도당의 조직과 사건 개입과정을 처음으로 밝히고 있다.남로당은 ‘4·3’ 발생 1년전인 47년 3·1절 기념대회에서 발생한 발포사건에 대한 대응책으로 ‘3·10총파업’을 주도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김순태 방송대교수(법학)는 논문 ‘제주 4·3 당시 계엄의 불법성’에서 4·3당시 선포된 계엄은 일제시대 때의 ‘계엄령’을 근거로 한 것으로 불법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정해구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원은 ‘제주4·3항쟁과 미군정 정책’에서 4·3의 발발과 확산,뒤따른 대량학살은 미군정이 항쟁세력에 대해 강온 양면정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정책실패라고 주장했다.또 임대식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논문 ‘제주4·3항쟁과 우익청년단’에서 ‘외인부대’ 서북청년회가 4·3을 촉발시킨 배경,좌우세력이 이들을 이용한 측면을 고찰하고있다. 이책은 결국 ‘4·3’은 단순폭동사건이 아니라 미군정하 경찰과 우익세력의 인권유린,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단독선거에 항의해 봉기한 제주도민의‘민중항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저자들은 앞으로 미국측 자료를 총체적으로 분석,미군정이 강격책을 최종선택한 배경을밝히고 정부차원의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보상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살아남은 자’들의 책무임을 강조한다.
  • [외언내언]컴퓨터 2000문제/임영숙 논설위원

    컴퓨터의 2000년 연도 인식 오류로 인한 오작동 문제인 Y2K(밀레니엄 버그) 공포가 이미 시작됐다.2000년을 1년 앞둔 새해 초부터 컴퓨터 오작동으로스웨덴에서는 여권 발급이 지연되고 노르웨이에서는 주유기가,싱가포르에서는 택시미터기가 고장을 일으켜 환불소동이 빚어졌다.컴퓨터 2000 문제해결에 지구촌이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함을 일깨운 사건이다. 개인의 일상생활은 물론 기업활동과 국가행정에 이르기까지 컴퓨터를 통해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컴퓨터 오작동 파장이 어디까지미칠지는 아무도 정확히 예측하지 못한다.핵시스템에 교란이 일어나 미사일이 멋대로 하늘을 날고 은행과 병원·교통체계가 마비될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전세계적으로 6천억∼1조달러의 경제적 피해가 예상되기도 한다. 다행히 한국은 그 대비책을 잘 세우고 있는 편으로 평가받고 있다.국제 정보통신 자문기관인 가트너그룹이 지난해 10월 세계 각국의 Y2K 대응현황을조사한 결과 미국 영국 캐나다 등이 1등급,한국 싱가포르 대만 등이 2등급으로 밝혀졌다.일본 독일 오스트리아 등이 3등급인 것에 비하면 한국은 상당한 수준인 셈이다. 그러나 이 정도에 만족해서는 안된다.가트너로부터 1등급 평가를 받은 국가들이 지난해 말 취한 조치들은 Y2K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영국 정부산하 밀레니엄 버그 대책단장은 2000년 1월1일을 앞두고 2주일치 식량을 준비해둘 것을 권고했고,미국 연방준비은행(FRB)은 2000년을 앞둔 연말에 고객들의 대량인출 사태에 대비해 금융권에 500억달러의 현금을 확보하도록 지시했다.캐나다 국방부는 계엄령 선포까지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외신은 전했다. 게다가 지난해 12월 감사원은 우리 정부 대책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정부가 각 분야의 Y2K 해결비율을 발표하고 있지만 전체 문제발생 가능성 10개중 5개만 파악하고 이중 3가지를 해결했다면서 60% 해결비율을 공개하는 식의 발표가 많다”는 것이다.이런 식으로 2등급 판정을 받았다면 문제해결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앞으로 남은 1년동안 총력을 기울여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재앙의 2000년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정부는 물론 기업도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철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Y2K는 발등의 불이다.
  • ‘12·12’‘5·18’ 재정 신청 주내 심리

    ◎金東鎭 前 국방 등 28명 재판 회부 여부 관심 12·12 및 5·18 사건과 관련,검찰이 지난 96년 2월 기소유예 또는 무혐의 처분한 金東鎭 전 국방부장관(당시 20사단 61연대장),蘇俊烈 전 전교사사령관,申佑湜 전 7공수여단장 등 28명이 정식재판에 회부될 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법원이 최근 고문기술자 李根安 전 경감과 金相大 전 마포경찰서장에 대한 재정신청을 10여년만에 잇따라 받아들인 데 이어 金 전 장관 등에 대한 재정신청 사건을 2년여만에 심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서울고법 형사3부(재판장 李昌求 부장판사)는 8일 “지난 96년 10월 姜信錫씨 등이 낸 재정신청과 관련,검찰이 불기소 처분 관련자료를 이번 주 안으로 넘겨주기로 해 본격적으로 심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법원이 12·12사태를 통한 군권찬탈과 5·18 광주항쟁 유혈진압의 책임이 金 전 장관 등에도 있다고 인정하면 피고소인 28명은 서울지법에서 내란 등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특히 金 전 장관 등은 광주에서 계엄군의 강경 유혈진압을 진두지휘한 공수부대 여단장 및 사단장급 지위관들이어서 현지 지휘관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을 지가 주목된다.
  • 달라진 한국/잭 앤더슨 미국 신디케이트 칼럼니스트(해외기고)

    ◎강력한 국가통제체제 자유·민주주의로 전환/정치·경제개혁문제 자기희생·노력 따라야 한국을 처음 방문했던 게 50년대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산하는 전쟁으로 처절하게 파괴되어 있었고 생활은 극도의 빈곤으로 피폐해 있었다. 수도 서울은 판잣집 도시였다. 소수의 엘리트가 국가의 부를 축적하고 있었고 대다수 국민들은 생존하기조차 힘든 상태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얼마전 한국을 또 방문했다. 40여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서울에는 판잣집 대신 최첨단 시설을 갖춘 화려한 빌딩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농경사회에서 세계에서 몇째 안 가는 산업민주사회로 변모해 있었다. 선천적인 사회적 지위와 부로 계층화됐던 사회구조는 변신의 기회가 보장되는 ‘기회의 사회’로 성장해 있었다. 달라진 모습은 첫 방문이후 몇년 지나지 않아 한국을 다시 찾았을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게 했다. 당시 막 정권을 잡은 朴正熙 대통령을 만났다. 한국경제를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대답은 간단했다. 한국 상품이 다른 나라의 상품보다 값도 싸고 질도 뛰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한국민들은 커다란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은 ‘수출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각오로 경제를 키워갔다.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국민들에게 혹독한 규제가 가해지기도 했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라면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든 사람들이 같이 희생하도록 요구됐다. 그리고 경제 팽창은 곳곳에서 감지될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은 경제 위기를 맞고 있다. 40여년의 경제적 번영이 환투기와 탐욕,부패로 인해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많은 기업들에서 경쟁력은 정실주의로 대치됐다. 사람들은 무엇을 알고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누구를 알고 무엇을 좋아하는가에 따라 보상이 주어졌다. 수십년동안의 번영은 오늘날의 한국을 가져다준 국가적 희생을 잊게 했다. 한때 계엄령으로 다스려지던 나라에 민주주의가 든든하게 뿌리를 내렸다. 강력한 국가통제는 자유로 대치됐다. 한때 국내외적으로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반독재 인사가 지금은 그를 납치해 살해하려 했던 정부의수반으로 일하고 있다. 모든 것들은 정말 잘된 일이다. 한국은 경제적 번영을 다시 찾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예전(60년대)의 가치들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다시 힘을 발휘할 것이다. 보호무역주의나 단호한 국가통제주의로 돌아가려 한다는 말은 아니다. 한때는 세계적으로 눈길을 끄는 번영을 가져다 주었던 자기희생정신과 근면함을 추스르고 있다는 뜻이다. 한 나라의 힘은 바로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한국인들은 어느 민족보다 회복력이 강하고 교육수준이 높으며 근면하다. 한국민이 잿더미에서 일어서는 것을 목격했다. 그같은 일이 재현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한번 손쉬운 생활의 맛을 본 사람들에게는 더 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나 쉬운 일이지 한번 산꼭대기에 올랐던 사람들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희생을 할 각오가 섰다면 또 한번 산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일이 잘 안될 때에는 다른 사람들을 탓하기 십상이다. 경제위기를 불러온 외환위기를 놓고 정치인들이나,다른 사람들의 돈으로 자기 배만 불린 부패한 관리 등에게 원인을 돌리기 쉽다. 그러나 문제 해결에 도움을 못준다. 한국은 외부세계에 도움을 청하기보다 자신의 경제구조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미국은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을 막아줄 수는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등을 통해 일시적인 자금 유입을 도와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개혁,경제개혁 등은 안에서 강력하게 추진돼야 한다. 자기희생과 피나는 노력만이 경제회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 민주열사 열전:14/신흥정밀 사원 朴永鎭(정직한 역사 되찾기)

    ◎‘노동자가 주인되는 사회’ 외치며 분신/열악한 근무환경 맞서 사업장 조직강화 전력/과학적 노동운동에 헌신… 새로운 지평 열어 평화시장 노동자 全泰壹의 분신 자살은 ‘노동자의 인간선언’이었다. 그는 1970년 11월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의 보장을 요구하며 근로기준법 책을 껴안고 분신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86년 3월17일 한 젊은 노동자가 또 다시 ‘근로기준법 준수’와 ‘노동자가 주인되는 사회’를 외치며 몸에 불을 붙였다. 전태일을 ‘한국의 예수’로 존경했던 27살의 朴永鎭이었다. 볼펜 생산업체인 신흥정밀에 몸담고 있던 그는 인간다운 삶에 더해 사회 주체로서의 노동자 권리를 선언한 뒤 분신,12시간만에 병원에서 숨졌다. 다음날 각 일간지 사회면에는 ‘임금인상 요구 농성 근로자 분신자살’이란 제목의 1단 짜리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1단 짜리 조그만 기사의 가치밖에 없는 그렇게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그의 죽음 뒤에는 노동자 권리를 위한 처절한 투쟁,노동운동의 경직성,경찰의 인권과 생명 경시 풍조 등 그당시 시대상황이 복합적으로 내재돼 있었다. 박영진은 농성 전 임금투쟁을 4·5월로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직역량이 미미해 싸움의 결과가 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별 사업장의 실상보다는 공동보조의 중요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지역연대차원의 모임에서 3월17일의 공동투쟁이 결정됐다. 신흥정밀에서의 다른 활동가들도 이를 따라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투쟁을 늦추어야 한다는 그는 주장을 접어야 했다. 3월17일의 공동투쟁 결정이 내려지자 그는 무모하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을 정리하고 투쟁의 승리를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고위 관리사원 몰래 각 작업장을 돌며 싸움의 당위성을 설득하고 동료들을 조직화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러나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미리 결심하지는 않은 듯하다. 누구에게도 그런 뜻을 비치지 않았고,분신 3일전 회사 여공들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에도 그런 기미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쫓아온 경찰 불끄는 동료 제지 노조가 없던 상황에서 3월17일 박영진 등 30여명은 지역 연대모임의 결정에 따라 임금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17일 낮 식당을 점거한 채 농성을 벌이다 옥상으로 쫓겨 올라갔다. 박영진은 이미 식당에서 난로 석유통을 머리에 들어부어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쫓아 올라온 구사대와 경찰에게 열을 셀 때까지 물러나지 않으면 분신하겠다고 외쳤다. 피를 토하듯 그의 입에서 숫자가 흘러나왔다. “하나,둘,셋,넷,…” 그러나 곤봉과 각목을 든 경찰과 관리직 사원들은 이를 조롱하듯이 다가왔다. 시간이 멎은 듯한 정적에 숫자를 세는 외침마저 묻혀버린 순간,뜨거운 불길이 눈부신 햇살을 태우며 허공에 치솟았다.깜짝 놀란 동료들은 옷을 벗어 불을 끄려 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들을 낚아챘다. 불에 타는 사람을 우선 구해야 할 경찰이 오히려 불을 끄는 사람들을 체포한 것이다. 박영진은 시뻘건 불길속에 엎어진 채 10여분간 방치됐다. 경찰의 행위는 독재권력의 정권유지 도구로 전락했던 일그러진 자화상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박영진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신문팔이,껌팔이,구두닦이 등 잡초같은 삶을 살았다. 노동운동에 눈을 뜬 것은 83년 검정고시를 위해 지역야학이던 ‘한얼야학’에 다니면서부터. ‘전환시대의 논리’‘나의 라임오렌지나무’‘노동법해설’‘미국노동운동사’등을 읽으며 점차 억눌렸던 것이 새로운 힘으로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충동을 느꼈다. 특히 ‘전태일평전’은 그가 검정고시냐,노동운동이냐를 놓고 갈등하게 만든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방위병 복무를 마치고 그는 84년 시흥에 있던 동도전자에 입사한다. 입사하는 날 쓴 일기에 ‘어머니,더많은 다른 부모와 형제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나혼자만의 이기를 위해 안일하게 행동한다면 돈 많이 가진 악덕기업주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이제 내 삶은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사장의 갖가지 비열한 횡포에 항의해 회사를 나오고 만다. 조직적인 대응을 못하고 개인적 분노에 휩싸여 일을 그르쳤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3개월후 구로공단의 동일제강에 입사한다. 여기서 동기회 및 친목회,독서회 등을 조직해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한다. 하지만 구청의 노조설립 신고서 접수 거부와 회사의 어용노조 기습 설립 등으로 또 한번 실패를 맛본다. ○하루 두세시간 자며 동료 설득 박영진이 85년 9월 들어간 신흥정밀은 근무환경이 열악했던 구로공단에서도 악명이 자자했다. 기본 근무시간을 9시간으로 정해 1시간을 공짜로 부려먹고 있었고,월급은 하루 평균 3,080원으로 월 10만원을 넘지 않았다. 월차수당, 특근·잔업수당도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종업원들에게 하루 3시간 이상의 잔업을 강요했다. 그는 하루 두세시간 밖에 자지 않으면서 조직강화에 전력했다. 동료에 대한 애정과 의리는 보증수표였으며,이를 바탕으로 단결을 호소했다. 그러나 조직이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원치 않은 노동투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고,지나치게 책임감이 강했던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소수의 주장을 존중하는 노동운동의 유연성만 있었어도,기업주가 작은 협상의 자세만 보였어도,정권이 생명 존중의 정신을 조금만 가졌어도,치열한 삶을 살아온 한 노동운동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은 없지않았을까. 이봉우 전 구로노동연구소 소장은 “자기 견해와 다른 다수의 결정을 위해 목숨을 던진 조직적이고 의식적이었던 참노동자”라고 박영진을 평가했다. 또 “과학적 노동운동의 새벽을 열었던 첫 닭”이라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약력 ▲1960년 충남 부여에서 박창호·이미선씨의 3남2녀중 장남으로 출생 ▲76년 서울 배문중 3년 중퇴 ▲79년 방위병 입대 ▲83년 한얼야학 입학 ▲84년 동일제강 입사 ▲85년 신흥정밀 입사 ▲86년 3월17일 분신 ◎노동운동의 흐름/신군부 폭압에 정치투쟁 전환 연대투쟁 나서/현장서 유리된 서노련 쇠퇴… 노조중심 정착 신군부 세력은 80년 5월17일 계엄의 전국 확대와 함께 그때까지 힘들게 자라왔던 우리 노동운동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70년대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민주노조 관계자들은 노동운동의 대응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폭력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이들은 임금을 주 타깃으로 하던 ‘경제투쟁’의 한계를 절감하고 전 노동자를 정신적으로 묶을 수 있는 ‘정치투쟁’에 눈을 돌렸다. 쓰라린 패배를경험했던 학생운동가들도 노동현장을 토대로 하지 않은 민주화투쟁은 ‘사상누각’이라는 인식하에 노동야학과 위장취업의 형태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구로공단은 이러한 물줄기를 그대로 타고 있었다. 70·80년대 20여만명의 노동자를 두고 한국수출의 메카 역할을 했던 구로공단에서 85년 6월 공단내 10여개 사업장이 참여한 ‘구로동맹파업’이 있었는데 노동조합 연대투쟁의 형태를 띠었지만 노동운동 학습을 받은 지역활동가들 역할이 컸고 정치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동맹파업은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 구속이 도화선이 됐다. 구로동맹파업의 산물임을 자처하면서 ‘선도적 정치투쟁’을 주창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85년 탄생,각종 가두·점거투쟁,지역연대투쟁을 주도해 나간다. 박영진이 분신했던 3·17투쟁은 이런 지역연대투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는 노동자가 단순한 경제적 만족을 넘어 사회의 주체가 되는 노동운동을 주장했지만 그 바탕엔 현장노동자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래서 현장의 조직역량이 약했던신흥정밀의 동조투쟁에 반대했던 것이다. 정치투쟁을 지나치게 중시했던 이러한 흐름은 86년 이후 쇠퇴기를 맞는다. 현장으로부터 유리된 활동가 중심의 조직활동이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서노련도 86년 5·3인천사태를 고비로 해소된다. 85·86년의 이런 쓰라린 아픔을 겪고 나서 노조를 중심으로 대중적 경제투쟁을 올바로 이끌어가는 가운데 노동자의 정치의식 고양과 이를 바탕으로 한 정치투쟁이 바람직하다는 관점이 자리잡게 됐다. ◎분신현장 동료 姜文英씨/당시 정권수호대 인명 경시/죽음 몰아붙이던 모습 충격 “충격이었어요. 永鎭의 독한 희생도 그랬지만 노동자 한 사람의 목숨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몰아붙이는 정권 수호대의 모습에 치가 떨렸습니다” 분신 당시 옥상에 함께 있던 姜文英씨(37·사업)의 말이다. 박영진은 그가 건네준 유인물에 불을 붙여 분신했다. “그냥 겁만 줄테니 걱정말라”는 말에 건네주었지만 아직도 자책과 아픔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는 점버를 벗어 불을 끄려다 경찰에 나꿔채여 5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나왔다. “지독한 사람이었지요. 항상 단결을 해야한다고 했어요. 구구절절히 옳았지만 부담을 느꼈어요. 그가 조직강화를 위해 제방에 왔을때 문을 잠그고 모른척하다가 밤새워 문앞에 서 있어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그로부터 배웠다”며 “다시는 그같은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姜씨. 그는 87년 박영진추모사업회 결성에 참여하다가 박영진의 여동생 현이씨(34)를 만나 결혼해 살고 있다.
  • 방송인 서유석­가수 안혜경(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말한다:11)

    ◎현실비판·운동권 노래… 고난의 ‘언더’ 인생/가수·방송인 서유석/유신반대 ‘맷돌’ 공연중단 시련/심의 묶인 금지곡만 10여편/방송에서도 강한 정치풍자/‘윗분’에 밉보여 도중하차 가시밭길 “가는세월 그 누구가/잡을 수가 있나요/흘러가는 시냇물을/막을 수가 있나요/…/이내몸이 흙이돼도/내마음은 영원하리”(가는 세월). 70년대 텁텁한 목소리로 사회성짙은 노래를 부르던 청년문화의 기수 徐酉錫씨(53)의 대표곡이다. 가수와 방송인으로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낸 徐씨의 체념한듯 하면서 굽히지 않는 의지가 담겨 있는 노래이기도 하다. 徐씨가 부른 노래는 ‘가는 세월’ 말고도 창작곡만 70곡. 1985년 마지막 레코드 ‘뚝잘라 말해’를 발표할 때까지 낸 음반도 11집이나 된다. ‘타박네’‘파란많은 세상’‘세상은 요지경’‘대답은 없어라’ 등 심의에서 묶인 금지곡도 10여곡. 이가운데 녹음을 끝내놓고도 가사내용 때문에 레코드를 수거당했던 ‘마지막 노래’는 2년뒤 다른 가수가 불러 심의를 통과한 기막힌 사연을 담고 있다. 교통관련방송 프로그램 진행을 20년째 맡아 이젠 가수보다 방송인과 교통 전문가로 더 알려진 徐씨. 세월은 흘렀지만 사회성 짙은 ‘운동권 가수’로 찍힌뒤 극적으로 시작한 방송인 생활의 기억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성균관대 졸업무렵 학교앞 카페 ‘카사노바’에서 지배인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통금직전 具鳳書씨가 徐永春씨(86년 작고)등 연예인들과 함께 들러 徐씨의 노래를 청해 듣고 다음날 다시 TBC 쇼프로듀서와 함께 들러 徐씨를 소개했다. 그 다음날 곧바로 쇼쇼쇼에 출연한게 가수 생활의 시작이다. 그러다가 대학시절 핸드볼선수 경력을 살려 한동안 직장 핸드볼선수로 활약하며 안양예술인학교에서 묵고 있던 70년도 봄이었다. 신세계레코드사 작사가가 찾아왔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을 같이 본뒤 주제가 ‘어타임포어스(A time for us)’를 번안해 레코드를 취입하자고 했다. 쟁쟁한 가수들을 제치고 옴니버스 레코드 타이틀사진으로 실렸다. 노래가 히트하면서 방송국 프로듀서들이 ‘徐씨 모시기’ 경쟁에 나섰다. 이때는 매일 YWCA강당에서 ‘청개구리모임’을 갖던 시절. ‘청개구리’가 알려지면서 통기타 언더그라운드 계열 가수들이 모인게 바로 ‘맷돌’이다. 매주 수요일 명동 코리아나백화점 강당에서 자작곡 공연을 가졌는데 ‘군사독재반대’‘유신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결국 14회 공연도중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쳐 끝이 났다. 그리고 73년 4월 TBC 심야 라디오프로 ‘밤을 잊은 그대에게’ 진행을 맡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가을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이 제2차 한국군 월남파병 압력차 방한했을 때다. 방송도중 UPI 종군기자의 월남전 참전미군의 만행을 기록한 ‘추악한 미국인’을 죽죽 읽어내렸다. 즉각 중앙정보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잡으러 온다”는 말을 듣고 방송국 앞 목욕탕으로 도망,4일간 숨어 지냈다. 그리고 3년간 모든 활동이 철저하게 금지됐다. 그때 당국이 대마초사건을 핑계로 대중가수들을 줄줄이 묶어 들여 빈사상태에 빠진 연예계의 대안을 찾던중 徐씨를 대상으로 삼았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대전까지 내려와서 상경을 권유해 일단 서울로 올라왔다.그리고 당국의 통제를 시험해보기 위해 취입한 노래가 ‘가는 세월’이다. 그때 MBC 라디오에서 ‘정오의 희망곡’ 진행 제의가 들어왔다. 물론 당국의 입김이었다. 같은 방송 라디오프로 ‘안녕하십니까 서유석입니다’와 TV프로 ‘여의도1번지’를 맡아 인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77년 ‘푸른 신호등’을 맡아 진행한지 1년쯤 됐을 무렵 청와대로부터 진행자 교체지시가 떨어졌다. 프로 시작전 항상 정치판과 사회비리를 강도높게 비판한게 문제였다. 그후 동아방송으로 옮겨 ‘명랑 교차로’를 맡았다가 시사풍자 코너 ‘형님 이래도 됩니까’로 인해 79년 단명으로 끝났다. 81년 ‘푸른 신호등’을 맡았고 이후 지난 15대 총선에서 무소속 출마때까지 이 프로를 진행했다. 15대 총선이 끝난뒤 지금까지 줄곧 교통방송 ‘출발서울대행진’을 맡고 있다. 교통관련 논문도 2편을 발표하고 (주)다물대표로 교통관련 기기를 2건이나 상품화하는 벤처사업가로 변신했다. “지난 70·80년대의 언더그라운드 통기타 가수들은 현실과 벗어난 노래를 부르기가 어색했습니다. 사회적으로 만연한 부조리 부도덕을 보고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니 당연 제약이 많았고 음악계로서도 퇴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가수 안혜경/반체제로 옥고 아버지에 영향/성악도서 운동권 가수 변신/계엄령 속에서도 민중가요 배포/여성밴드 결성 ‘저항 노래’ 1970년대말부터 지금까지 대학가에서 변함없이 불리는 ‘민주’란 노래가 있다. 운동권 노래의 고전중 하나지만 정작 이 노래를 만든 이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5인조 여성 록밴드 ‘마고’를 이끌고 있는 安惠敬씨(41). 이화여대 성악과 재학시절 노래운동에 뛰어든뒤 노동·여성·환경과 관련한 메시지 강한 노래들을 쉼 없이 발표해오고 있는 개성파다. ‘까치길’‘민주’‘황혼’ 등 초기의 노래에서 우리 역사와 사회의 모순들을 담았다면 ‘커피카피 아가씨’‘일이 필요해’에선 여성 노동문제의 심각성을 부각시켰다. 또 ‘침묵의 봄’‘검은 민들레’ 등은 환경오염을 다룬 것이고 ‘평화공원’‘너희나라를 위해’등은 반전평화의 메시지가 강렬하다. 모두 현실비판과 역사의식이 흠씬 밴 자작곡이다. “70년대 사회 부조리와 부패에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던 아버님의 영향이 컸지요. 반체제적인 발언으로 옥고를 반복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당부는 제삶을 지탱하는 기둥입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수감중이던 아버지에게 음악대 진학의 꿈을 알렸고 “대중을 위한 진정한 예술인이 돼라”는 아버지의 편지글을 가슴에 깊이 새겼다. 성악과에 진학해 현실과 동떨어진 귀족적인 음악에 반발했고 자신이 할 일에 대해 고민하던중 金敏基씨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에 참여한 게 노래운동의 시초. 1학년때 사전 정보누출로 불발에 그친 집회때문에 줄곧 정보과 형사들의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레슨을 받으러 교수 집에 갈때도 항상 검은 색 짚차에 태워져 갈 정도였다. 졸업음악회 대신 혼자 작업한 노래 16곡을 담은 불법테이프를 만들어 선후배 동료들에게 돌렸다. ‘민주’도 여기에 실려 있다. 이 노래들이 자신도 모르게 대학 노래패들을 통해 퍼졌다. 80년도 대학 졸업후 바로 교사생활을시작했지만 노래 만들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TBC 방송국에서 ‘횃불’‘해방가’‘농민의 노래’ 등 민중가요 20곡을 숨죽이며 녹음해 배포했는데 이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청계천 복사가계에서 복사한 테이프 20여개를 돌렸고 임진각에 가서 통일을 생각하며 이 테이프 1개를 던졌다. 온산 여천공단의 오염실태를 고발한 마당극 ‘청산리 벽폐수야’ 금지도 잊지못할 일. 공연윤리위원회에 심의를 냈는데 전면 공연금지 지시가 떨어졌다. 결국 워크샵 형식을 가장해 서울 아현동 애오개소극장에서 4회공연을 어렵게 가졌다. 87년부터는 여성 환경 시민단체와 연계해 대학 교회무대와 소극장 운동을 벌였다. 92년 첫 공식 음반 ‘여성 환경 노래’를 출반했는데 이때도 노래 ‘평화공원에서’가 탈락됐다. 그리고 95년 2집 음반부터는 비교적 편한 음악을 택해 실었다고 한다. 지난해 여성5인조 록밴드 ‘마고’를 조직해 전국을 다니고 있고 지난 91년 결성된 ‘여성문화예술’에도 기획위원을 맡아 문화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물론솔로로 전국의 공연장을 다니며 공연을 병행한다. 성악과 출신이면서 운동권 가수로 방향을 잡았고 일부러 고전악기를 배웠다는 安씨. 1남1녀의 자녀를 둔 주부 가수지만 남자들만의 영역이란 편견을 깨기 위해 베이스 기타를 배워 그룹 마고에서 베이스를 맡고 있는 고집센 여성이다. 앞으로 계획이 무엇이냐는 질문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원하는 것에 달려들 것”이란 말로 대신했다.
  • 민주열사 열전:9/金宜基 前 서강대생(정직한 역사 되찾기)

    ◎강요된 침묵속 ‘광주 항쟁’ 왜곡 항거/당시 기독교회관서 ‘서울 봉기’ 외치다 추락사/어둠의 시대 역방향 역사에 맞선 ‘진실의 불꽃’ ‘80년 5월의 학살’은 국민들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넣고 침묵을 강요했다. 항쟁 직후 정부와 제도언론에서 연일 뱉어내는 ‘광주폭동’이란 단어에 대해 누구도 ‘아니오’라고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분노를 흠뻑 머금은 침묵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 강요된 침묵을 깨뜨리고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찬 어둠의 시기에 진실을 향한 한줄기 빛을 비춘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의 한 사람이 金宜基라는 젊은이였다. 광주항쟁이 무력으로 진압된 후 사흘째인 80년 5월30일. 서강대 4학년생 金宜基는 그날 오후 5시쯤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떨어졌다. 밑에는 계엄군 장갑차와 군인들이 있었으나 그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대신,주위에 흩어진 유인물을 수거하기에 바빴다. ○가마니에 덮인채 방치 그는 가마니에 덮여 30여분 동안이나 그대로 방치된 채 죽어갔다. 그가 뿌린 유인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은 이렇게 호소하고 있었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동포여 일어나자. 우리의 힘모은 싸움은 역사의 정(正)방향에 서 있다…내일 정오 서울역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바쳐 싸우자. 동포여!” 金宜基는 서울에서의 봉기야말로 짓밟힌 광주를 살리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이를 처음으로 실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젊은 생을 마감했다. 당시 경찰은 그가 유인물을 뿌리려다 발을 헛디뎌 떨어져 즉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가 떨어지는 모습을 확실히 목격한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주위에 있었던 몇몇 사람들은 그가 계엄군에게 발각돼 쫓겨다니며 유인물을 뿌리다 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가 숨막히는 시대와 씨름했던 불꽃같은 투혼은 그의 삶 구석구석 스며있다. 막일로 생활을 꾸리던 부모님과 광부·공장노동자로 일하던 형들을 가슴속에 빚으로묻어둔 채 대학에 다녔던 金宜基. 그러나 그런 부채의식은 집안에서 유일한 대학생으로 장차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야심보다는 도리어 사회모순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졌다. “나를 빼고 모두가 돈을 버는데 우리 가족은 왜 셋방을 전전해야 하나”“농사를 짓는 형님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데 왜 빚만을 불려가야 하는가”그런 의문은 그를 자연스럽게 책으로 안내했고,그는 우리 역사가 바로 서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감상적 농활에 실망 그는 농촌문제 연구에 빠져들었다. 2학년 여름 학교 동아리 ‘한국유네스코 학생회(KUSA)’의 하계농촌봉사활동에 참여했으나 깊은 실망감을 맛보았다. 대개 근로·의료봉사,아동지도 등으로 구성된 당시 농촌봉사활동이 저변에 감상적 인도주의를 깔고 있어 농민과 일체감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막연한 봉사보다는 농민들과 함께 농촌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짚어가고자 했다. 발이 닳도록 농촌현장을 누볐고 농민들과 대화를 나눴다. 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했고 토론을 통해 분석된 결과를 다시 농민들에게 전했다. 그가 얻고자 한 것은 농촌의 실물경제 파악과 그에 대한 농민들과의 공감대였다. 10차례에 걸친 농활과 연구에서 그가 보여준 집중력은 놀라웠다고 한다. 전국농민회총연합 조성우 상임부의장(42)은 “그에게는 대학 출신 농민운동가들이 갖기 쉬운 현장 농민들과의 위화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농민운동은 농민대중에 기반을 둔 자주적인 조직이어야 한다고 믿었고,후일 그와 가깝게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주적 농민관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대학 2학년때부터 서울 신당동 형제교회의 농촌문제연구모임을 이끌면서 농촌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키웠고,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 농촌분과위원회 간사로 활동하는 등 자신의 진로를 농민운동쪽으로 굳혀갔다. 80년 5월18일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의 만행이 본격화할 무렵 그는 광주시내로 들어갔다. 항쟁 실상 파악과 19일 시내 한 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함평고구마사건 승리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는 시민들이 고립무원 상태에서 무참히 살육되는 참상을 목도하고 이를전국에 알리기 위한 방법에 부심했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금요기도회’를 디데이로 잡았다. 기독교회관에는 그가 활동하던 EYC사무실이 있었다. “30일 낮 12시 EYC사무실에 나타난 그가 광주에 다녀왔다며 잠시 좀 쓸게 있으니 사무실을 비워달라고 부탁했어요. 오후 4시쯤 사무실로 돌아오니 그가 작성한 ‘동포에게 드리는 글’ 원본을 건네주더군요. 근처 상동교회에서 청년회장과 그것을 보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기독교회관에 오니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어요” EYC에서 함께 활동했던 변광순씨의 회고다. 떨어진 쌀 수매가에 가슴치던 분노의 주먹. 농활을 준비하던 신명나던 손길. 광주를 향했던 발길. 5월의 학살을 남들처럼 가슴에 묻지 못하고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고 터뜨린 피맺힌 절규. 이들은 모두 역(逆)방향의 역사에 맞섰던 金宜基 열사의 민중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실천 방식이었다. □金宜基 열사 연보 ▲1959년 경북 영주군에서 출생 ▲70년 영주 중부초등교 졸업 ▲76년 배명고 졸업.서강대 무역학과 입학. KUSA 가입. ▲78년 형제교회 농촌문제연구모임 참여.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 참여 ▲79년 서강대 근대사연구모임 주도. ▲80년 EYC 농촌분과위원장으로 활동. ▲80년 5월 광주항쟁 목격. 30일 종로 기독교회관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남기고 떨어져 숨짐 ▲90년 서강대에서 명예졸업장 받음 ◎어머니 권채봉 여사/“5·18 사망자 공식 인정” 소식 듣고 담담/“아들이 이루려 했던 세상보는게 소원” 광주광역시청 5·18 보상지원과에 전화를 했다. 담당 직원은 金宜基 열사가 ‘5·18 사망자’로 공식 인정됐다며 10월쯤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 권채봉 여사(74)는 그 소식에 의외로 담담했다. 아마도 아들의 큰 뜻과 죽음,‘빨갱이 가족’이라는 누명을 강요받아온 기나긴 고통의 세월이 금전으로 바꿔지는 듯한 허탈감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그저 “글쎄 다행인것 같기도 하고. 반갑다고 해야 하나”라고만 말했다. 어머니가 진정 바라는 것은 아들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날(80년 5월30일) 저녁 8시30분쯤 동대문서 형사라는 사람이 와서 宜基가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하는거야. 그런데 그애는 영안실에 있었고,상부 명령이 없다고 다음날 낮 12시까지 시신도 안보여줬어. 사람을 오지 못하게 하고 화장을 하라고 갖은 협박을 했지” 그러나 김동완 목사의 주도로 장례식은 치러졌다. 수백명의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참석,광주항쟁 후 첫 대규모 집회가 됐다. 어머니는 그때 자신의 울음을 신호로 학생들이 일어서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어 그들이 다칠까봐 자식의 관에 꽃을 던지면서도 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권여사는 송파구 잠실의 한 아파트에서 노환으로 거동을 못하는 구순의 시어머니와 중풍을 앓고 있는 남편 김억씨(73)의 시중을 혼자 들며 살고 있다. ◎장석재 형제교회 목사가 전하는 농민사랑/농민과 일체감 위해 극도의 허름한 생활/농촌연구 삶의 일부 농민 향한 애정 각별 金宜基 열사의 농촌문제에 대한 관심과 농민을 향한 애정은 각별했다. 그가 교회에 다니게 된 것도 형제교회의농촌문제연구모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는 김동완 목사가 담임으로 있으면서 빈민·농민 선교를 통해 사회참여에 앞장서고 있었다. 金宜基는 특유의 적극성으로 이 모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농촌문제 연구의 핵심은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형제교회 장석재 담임목사(42)는 “그는 당시 가장 어려운 곳이 농촌이라고 보고 농촌현실에 몰두했던 것 같다”고 했다. “미울정도로 허름한 생활을 했어요. 군복바지에 검정고무신 청자담배 등 가장 싼 것만을 입고 먹었지요. 친구들로터 티내지 말라는 구박도 많이 받았어요”그러나 그것들은 농민과 일체감을 느끼려는 그의 사랑의 표현법이었다고 했다. 교회사적으로 볼때도 金宜基 열사는 ‘사회선교의 순교자’로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장례식때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리다 체포돼 4개월간 감옥신세를 지기도 했던 장목사는 “사회운동가들이 정치인 등으로 기성화하면서 과거의 순수함과 진지함이 굴절돼 보일 때마다 宜基가 생각난다”고 했다. 당시 EYC 농촌분과위원장이었던 전국농민회총연합 조성우 상근부의장도 “金宜基는 현장에서 필요로 하면 두말 않고 달려갔다. 농촌은 그에게 있어 몸에 밴 생활의 일부였으며 농민에 대한 애정과 이해는 혈육에 대한 것 이상의 깊이를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 민주열사 열전:8/金永哲 5·18시민군기획실장(정직한역사되찾기)

    ◎‘광주 고통’안고 18년 투병끝 숨져/‘투사회보’ 제작… 계엄군 잔학상 시민에 알려/좌수족 마비·정신질환 앓다 지난 8월 영면 5·18 광주 민중항쟁도 18년이 지난 올 8월19일 광주시 전남도청 5월 추모탑 앞에서 ‘5월 시민군’ 金永哲 열사의 민주시민장이 치러졌다. 영결식에서 시인 文炳蘭은 영면한 고인을 다음과 같은 조시로 추모했다. …여기 한 사나이는 무너진 도시 캄캄한 절망을 안고 18년을 앓으며 살았다 18년을 죽으며 모질게 살았다. …꽃도 한 줄기 빛도 없이 어둠이 흐르는 정신병동 쇠창살에 18년을 죽어온 당신의 신음소리는 18년을 앓아온 광주의 고통이었다.… 5·18 당시 시민학생 투쟁위에서 기획실장을 맡았던 金永哲은 계엄군 진압대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되고 말았다.질환 초기 몇몇 순간을 제외하곤 사망할 때까지 18년간 대부분을 가족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과거와 현재를 분간하지 못하는 정신병자로 지내야 했다. 5·18때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와 계엄군들은 많은 무고한 인명을 비롯해 숱한사람들의 육신과 정신에 회복할 수 없는 파괴를 가했다.이들은 32세의 金永哲을 18년간의 정신병동 폐인으로 내몰아 죽음에 이르게 했다. 金永哲은 광주항쟁의 시민군 기획실장 이전에 최하층 빈민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온갖 애를 쓴 빈민운동가로서의 면모가 먼저 빛난다.의사였던 아버지가 일찍 작고한 후 어머니가 고아원 보모를 하게 되어 목포의 고아원에서 고아들과 형제처럼 지내며 성장했다.지역 명문인 광주 서중,광주일고를 졸업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대학에 가지 못하고 5급 공무원이 됐다.그러나 면사무소와 농협의 비리에 통탄하고 공무원 생활을 그만뒀다. 군복무를 마친 金永哲은 신문배달 과일행상 목장잡부 우산팔이 등을 하면서 소외받는 사람들과 평생을 같이하며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하겠다는 결심을 한다.결혼한 지 1년도 못된 77년 부터 광주의 빈민지역인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와 주민들과 직접 부딪혔다.시가 피난민 부랑민들에게 지어준 후 판자촌이나 다름없게 황폐해진 이곳에 청년회를 재조직하고 마을청소와 어린이 주말학교를 이끌었으며 신용 협동조합을 정립하고 아파트의 개조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빈민들 삶 개선위해 혼신 78년 7월 이곳 빈곤 청소년들을 상대로 尹祥源과 朴寬賢 등 전남대생들이 강학으로 나선 ‘들불’야학이 시작되고 金永哲은 민주시민 양성을 목표로 한 이 야학의 교장이 됐다. 80년 5·18이 터지자 공수부대원들의 무자비한 만행을 목격한 金永哲은 19일 저녁부터 尹祥源 등 들불야학 팀과 논의하여 공수부대의 잔학상과 이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투쟁 소식을 알리는 ‘투사회보’제작에 나선다.투사회보는 광주시민들이 한데 뭉치는 데 큰 힘을 발휘했으며 고아로서 金永哲과 의형제를 맺고 같이 살던 박용준과 광천동 야학생들이 제작과 배포에 중요한 역을 맡았다.20일 金永哲은 금남로 시위 도중 계엄군이 던진 돌에 왼쪽 어깨를 맞았다.이 부상으로 그는 죽을 때까지 좌수족 불구로 고생했다. 金永哲은 22일 자신이 신용조합 참사로 있던 YWCA의 여성 회원들과 함께 포목점에서 검정 천을 사와 수천개의 검정 리본을 만들어 시민 학생들이 가슴에 달도록 했다.그는 계엄군이 철수한 후 열린 23일의 1차 시민궐기대회에서 투쟁 경과보고를 했다.계엄군에게 무기반납을 주장해오던 기존 수습위가 물러나고 25일 金宗培·尹祥源 등이 주도하는 새 시민학생 투쟁위가 도청에 들어서자 金永哲은 조직 업무를 총괄하여 차량과 유류 통제,도청출입 통제,무기 및 보급품을 관장하는 기획실장 일을 했다. 계엄군이 도청에 재진입해온 27일 새벽 金永哲은 尹祥源 등과 도청을 사수하다 尹祥源이 총탄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붙잡히면 죽음 이상의 고통을 받을 것을 직감하고 자결하려 했으나 계엄군에 체포됐다. ○간첩으로 몰려 자살 시도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간 그는 계엄수사대가 모진 고문을 가하며 자신을 간첩으로 몰고 가자 다시 자살을 결심한다.그는 화장실 콘크리트 모서리 벽에 있는 힘을 다해 이마를 여러 차례 찍었다.이를 발견한 헌병은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바지까지 흥건히 젖은 金永哲을 군화발로 밟고 밖으로 끌어냈다.그들은 그를 긴 곡괭이 자루로 사정없이 내리쳤다.그리고 나서 두 손과 두 발을 포승으로 묶고 국군통합병원으로 실어 갔다.그러나 수술한 이마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상무대 영창으로 끌고왔다.심한 환각과 환청 증세에 시달리며 80년 10월 1심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다.81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지만 이미 金永哲은 왼쪽 다리와 팔을 쓰지 못할 뿐 아니라 머리의 통증을 참지 못해 엉엉 울면서 사방에 머리를 찧고 이상한 소리만 되풀이하는 정신질환자였다.석방된 뒤 몇 차례의 수술에도 불구,정신이상 증세가 더욱 심해져 84년부터 나주 정신병원에서 투병생활을 계속해왔다.그러나 끝내 온전한 정신을 되찾지 못하고 지난 8월16일 세상을 떴다. ◎金永哲 열사 연보 1948년 전남 순천 출생 55년 목포에서 광주로 이사 64년 광주서중 졸업,광주일고 입학 68년 5급 지방 공무원 76년 결혼 77년 광주 광천동 시민아파트 개발운동 78년 광천동 들불야학 80년 5·18 ‘투사회보’제작 참여,시민학생 투쟁위 기획실장 80년 10월 ‘내란중요임무 종사’혐의로 1심 12년 선고 81년 12월 특사 석방 84년 나주정신병원 입원 98년 8월16일 영면 ◎부인 金順子 여사/병수발 18년… 세자녀 키우느라 안해본 일 없어/“야학교장 등 즐겁고 보람된 생활 못내 그리워” 金永哲 열사가 계엄군에 끌려갈 때 당시 26세였던 부인 金順子 여사는 임신 8개월 만삭의 몸이었다.아버지가 상무대에 갇혀 있을 때 태어난 막내딸은 지금 고3이고 그 위의 1남1녀는 나란히 대학2년생이다.18년간 정신이상의 남편을 병수발하면서 없는 살림에 세 자녀를 키우기 위해 金여사는 안해본 일이 없다. 우유배달원,구멍가게,옥수수 행상,과일·채소장사,공장 일,파출부,사글세 음식점 등. “병원에 10여년 입원했었지만 최근에야 정부로부터 기초적인 의료지원을 받았다.부상자에 대한 의료지원 카드도 뒤늦게 발급됐다”고 부인은 말한다.이번 민주시민장도 조의금으로 치러야 했다고 한다. 자녀들과 앞으로 살 일이 막막하기만 하다면서도 金여사는 80년 당시 남편이 ‘광천동 삼화신협 이사장,새마을 지도자,반장,조기 축구회 회장,야학 교장’ 등으로 활동하던 “즐겁고 보람된 생활”이못내 그립다고 말한다. ◎吳壽成 전남대 교수가 분석한 정신손상 유형/기질적 장애­총상·몽둥이 등에 머리다쳐 사고기능 단계적으로 와해/정신분열증­계엄군에 무차별 폭행 당해.감정 통제·현실적 판단 마비/외상후 스트레스­공수대원 고문 후유증으로 군인 공포·모든 일에 무관심 5·18 항쟁의 진압이 잔혹했던 만큼 金永哲 열사 같은 참혹한 정신 손상자들이 많다.전남대 5·18연구소 소장인 吳壽成 교수(심리학)에 따르면 5·18로 인한 정신장애는 3가지로 대별된다. 첫번째는 기질(器質)적 정신장애로 항쟁 와중에 직접적으로 두뇌에 총상을 입었거나 개머리판이나 몽둥이에 머리를 다쳐 뇌의 손상을 갖게 된 경우로 金永哲 열사가 대표적 사례다.그의 병증은 외상(外傷)성 성격장애,정신분열증,간질 및 뇌수종에 의한 기질적 정신장애,기질적 정신병으로 심화됐다.한 마디로 인간이 단계적으로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사고기능이 와해되어 있고 사고 자체가 지리멸렬된 상태다. 두번째는 정신분열증.5·18 당시 아침운동을 하려고 운동복 차림으로 집밖에 나갔다가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이유로 계엄군에 붙들려 눈을 가리운 채 지하실로 끌려간 시민이 있었다.깜깜한 속에서 여러날 전신을 구타당한 뒤 승용차에 태워져 외곽도로에 버려졌다.그후 그는 계속 감시당하고 있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혔고 집에 있으면 무섭다고 하면서 밖으로 뛰쳐나가 여러 날 후에 초라한 몰골로 돌아오곤 했다.집안 사람들을 폭행하고 난동을 부리며 자기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말에 조리가 없으며 연상 장애,비현실적 판단이 두드러진다. 세번째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시위대에 참가했던 한 시민은 공수부대원에게 잡혀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깨어나 보니 여러 명이 같이 손을 묶인 상태로 고개를 땅에 처박힌 채 군화발에 차이고 곤봉으로 맞고 있었다.같이 있던 사람이 저항하다 죽는 것을 보고 제정신이 아니었다.조사과정에서 무수히 맞아서 이빨이 나가고 코뼈가 부러졌다.20여일 만에 석방됐다. 이후 그는 후유증으로 7개월 동안 몸져 누웠고 10여년 동안 직장 한번 제대로 갖지 못했다.당시의 일이 자꾸 기억나고 같이 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군용트럭의 군인들만 보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아직도 두려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못한다.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으며 모든 일에 관심을 잃게 되었다.
  • 민주열사 열전:7/朴寬賢 前 전남대 총학생회장(정직한역사되찾기)

    ◎시민 민주역량 결집한 ‘광주의 아들’/5·18 당시 특유의 지도력으로 평화 시위 주도/교도소내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 단식중 사망 역사는 검은 음모를 뿌리치지 못하지만 가끔 환한 광장으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음모의 시대가 갈듯말듯 하던 1980년 봄 사람들은 광장을 찾았다. 1980년 봄 광주의 도청앞 광장은 일개 지리적 점에서 드넓은 역사적 공간으로 빠르게 변신하고 있었다.이 변신은 朴寬賢이란 촉매제 덕분이었다. 80년 5월14일 박관현이 주도하는 ‘민족민주화 성회(聖會)’가 도청앞 광장에서 개시될 때 1만명의 참가자 중 대학생 아닌 시민은 소수였다.박관현을 아는 시민은 더더구나 적었다.성회 마지막날 5월16일 야간 횃불시위를 마치고 다시 광장에 모였을 때 참가자는 5만명이 넘었고 시민 수가 학생 못지 않았다.그리고 50만명 이상의 광주 시민들이 朴寬賢을 ‘광주의 아들’‘무등의 아들’로 부르고 있었다. 朴寬賢은 광주의 희망으로 우뚝섰다.그러나 도청앞 광장은 그의 존재보다 더 큰 부피로 살아나고 있었다. “민주화의 성스런 횃불이 꺼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꺼진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朴寬賢은 “휴교령이 발동되면 정오에 도청앞 광장에 모이자”고 당부했다.광장은 광주 시민을,역사를 안을 태세가 되었다. 80년 4월9일 직선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에 뽑혔던 朴寬賢은 5·18 광주민중항쟁이란 역사의 핏빛 숲으로 똑바로 난 푸르른 길이다.광주에 박관현이 있음으로 해서,박관현의 결집력과 지도력이 있음으로 해서 5·18의 야만적 폭거와 승화된 공동사회체의 대조적인 두 측면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민주화운동에 남다른 열정 그는 한달이 약간 넘는 짧은 기간에 전남대 학생들과 광주 시민들에 잠재된 민주역량을 깊은 속까지 파내고 정연한 모양새로 다듬었다. 광주 시민들은 이 민주역량의 판석들을 꺼내 비록 가장 불행한 형태이긴 하지만 거대한 항거의 피라미드를 구축했던 것이다. 79년 10월26일 朴正熙 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유신철폐와 민주화에의 기대가 드높기만 했으나 崔圭夏 과도정부는 애매한 이원집정제의 정부주도 개헌을 고집하고 있었다.무엇보다 全斗煥 중앙정보부장 겸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는 비상계엄 상태를 유지하면서 정권찬탈의 야욕을 구체화해 갔다.분열과 대립으로 내닫는 정계보다는 대학이 민주화의 기수로 나섰으며 특히 광주의 전남대가 그러했다.박관현이 4월 27세의 나이많은 법대 3년생으로 총학생회장에 당선할 때 그의 사회 및 학원 민주화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탁월한 대중지도자 자질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소수였다. 고시 합격을 통해 사회정의 실현을 강력하게 꿈꾸었던 그는 1학년 말 야학운동에 뛰어드는 일대 방향전환을 한다.‘들불’ 야학을 통해 박관현은 尹祥源,金永哲 등 광주 빈민·노동 운동의 선구자들을 만나는데 박관현과 깊은 신의를 맺은 이들은 5·18 때 시민투쟁군의 중추로 활약했다. ○현상금 눈먼 동료 공원이 고발 朴寬賢은 5월 중순 단 며칠새 민주화를 희원하는 모든 광주 시민의 가장 믿음직한 아들로 자리잡았다.변혁에 대한 갈망은 리더에 대한 갈구를 깊게했고 민주화 변혁 갈망이 유달랐던 광주에 때마침 청중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 연설력의 박관현이 등장한 것이다.전남대와 박관현의 주도로 계엄령 아래 3일 연속 도청앞 광장에서 열린 민족민주화 성회는 비상계엄 즉각해제를 요구했으나 평화스럽게 마무리되었다.朴寬賢은 이때 방관자,구경꾼으로 머물러 있던 시민들을 민주화 희원의 역군으로 동참시키는 자력을 발휘했다. 그의 이같은 능력은 세계 역사상 드문 5·18 항쟁의 일반시민 주도 사실과 맞물려 전설이 되다시피 했으나 정작 박관현은 5·18 때 현장에 있지 못했다.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확대 쿠데타로 민주 인사들을 사전검거하자 18일 아침 격렬한 논쟁 끝에 학생회장 박관현의 피신이 결정됐다. 인간의 야수적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 만행과 함께 사람들의 더불어 같이 사는 소질이 꽃처럼 만개한 열흘간의 항쟁 상황을 여수 앞바다 돌산섬에서 전언으로만 듣게된다.몇번 잠입을 시도하다 실패한 박관현은 항쟁이 진압된 뒤 6월6일 서울로 도피한다.항쟁후 ‘공수부대원들이 조각조각내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던 朴寬賢은 82년 4월 서울 편물공장에서 현상금을 탐한 동료 공원의 고발로 체포돼 광주로 압송됐다. “도청앞 광장에서 만나자”는 자신의 ‘말’을 금쪽같이 지켜줬던 광주에 23개월 만에 발을 디딘 박관현은 드디어 ‘행동’한다.내란 중요임무 종사 죄목으로 5년형이 선고됐으나 朴寬賢의 눈은 다른 곳을 천착하고 있었다.그는 광주교도소 수감 3개월 후인 7월부터 교도소 내의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하는 단식을 실시한다.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로 육신을 택한 그의 단식은 철저한 것이었고 3개월 동안 3차에 걸쳐 50여일에 달했다. ○단식중 외부진료 한번 못받아 교도소 당국은 처우개선 약속을 조롱하듯 파기하면서 점점 한계 상태로 빠져드는 그를 외부진료 한번 없이 방치했다.10월10일 온 신경이 돌처럼 굳어 도무지 음식을 음식으로 여기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전남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급성 심근경색증에다 급성 폐부증 증세로 12일 새벽 숨지고 말았다.만 29세였다. 朴寬賢의 젊고 강한 넋은 5·18의 핏빛 숲 뒤꼍에 언제나 푸르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朴寬賢 열사 연보 ▲1953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출생 ▲70년 광주동중 졸업 ▲73년 광주고등학교 졸업 ▲74년 군입대 ▲78년 전남대학교 법대 입학 ▲78년 12월 광주공단 노동자실태 조사작업에 참여 ▲79년 광천 들불야학 강학 활동 ▲80년 4월 전남대 총학생회장 당선 ▲80년 5·17조치로 서울 피신 ▲82년 4월5일 체포,12일 광주교도소 수감 ▲82년 7∼10월 3차례에 걸쳐 50여일 간 단식투쟁 ▲82년 9월 ‘내란중요임무종사자’로 5년형 선고 ▲82년 10월12일 전남대 병원에서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사망 ◎누나 朴幸順 여사/어머니는 아들 검거된뒤 생존 사실 알아/동생 죽기전 “전면 단식” 조언 지금도 恨 朴寬賢 열사의 셋째 누나인 朴幸順 여사(49)는 광주대에서 구내매점을 열고 있다. 항쟁이 끝난 후 寬賢이 죽지 않고 서울에 은신한 사실을 서울의 큰언니를 통해 알았지만 寬賢의 부탁대로 아들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는 어머니에겐 체포 때까지 비밀에 부쳤다.아들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래도 어머니의 안색이 달라져 당국의 주의를 끌까 우려해서였다. 체포된 뒤 단식 소식을 전해듣고 찾아간 그에게 寬賢은 새벽 2시 무렵에 고문하는 소리가 수시로 들리고 수형자의 부식비를 빼먹는 비리와 함께 생명 유지도 어려울 정도로 형편없는 음식만 지급한다며 “안에서 이런 악을 해결하지 못하면 바깥에 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누나는 자신의 잘못된 조언이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며 지금도 가슴아파한다.단식이 30일째에 가까웠을 무렵 재소자 폭행 근절,주·부식 정량 지급,정치범 부당 차별대우 개선 등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았다며 다시 전면 단식을 강행할 것인가,부분 단식으로 나갈 것인가를 寬賢이 자신에게 물었다는 것이다.이때 누나는 다소라도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있으면 ‘전면’으로 나가라고 말했는데 동생이 죽기 열흘 전쯤 한 이 ‘매정한 조언이 두고두고 한이 된다는 것이다. ◎동료 宋善泰씨 회고/결벽 심해 현실적 타협 거부/뜻 정하면 끝장보는 성격… 自身에 철저/검정고무신 신고 술·노래 잘하던 학생 朴寬賢 총학생회장 아래서 제2선의 비공식 기획실장 역을 맡았던 宋善泰 현 광주 시의회 전문위원은 “결벽증이 있을 만큼 자신에게 철저했던 朴寬賢은 뜻을 정하면 끝장을 보고 말지 결코 어설프게 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학생회장 취임 직후 학원민주화 현안으로 어용교수들의 퇴진 문제가 대두됐을 때 朴寬賢은 타협안이나 다른 이슈와 함께 추진하자는 의견에 반대,어용교수의 발본색원과 문제의 완전해결을 강력 주장했다.또 학생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간 후 몇몇 집행부 학생들이 투쟁 지도를 위해 김밥을 먹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이를 빼앗아 내팽겨쳐 버렸다고 한다. 소금장수,모기장 행상,편물공장 공원 등으로 서울에 피신하고 있을 때 광주 민주인사들에게 연락을 해 고향에서 잠적하거나,자수를 해서 형을 살고 나와 ‘내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고 본 宋위원도 그의 강직한 성품이 이런 현실적 타협책을 거부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학생회장이 되기 전까지 쭉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학교에 다녔던 朴寬賢은 술도 잘 먹고 노래도 곧잘하는,놀 줄아는 젊은이였다고 한다.
  • 민주열사 열전:6/尹祥源 5·18시민군 대변인(정직한역사되찾기)

    ◎‘폭동’ 아닌 ‘민중항쟁’ 자리매김 큰몫/은행원서 노동운동가로… 광주야학 주도/5·18 鬪士 회보 제작·배포… 막힌 언로 틔워 80년 5월28일자 미국 일간지‘ 볼티모어 선’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있었지만,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80년 5월26일 있었던 광주도청에서의 최초이자 마지막 내외신 기자회견의 모습을 마틴 브래들리 기자는 이렇게 그렸다.기사에서의 ‘그’는 항쟁지도 부인 ‘청년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 尹祥源이었다.그는 다음날 아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상반신이 불탄 시신으로 공개됐다.계엄군은 그를 성명불상자로 처리했지만 주머니에서 나온 10여개의 외신기자 명함은 그가 대변인 尹祥源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尹祥源은 5월 항쟁이 터지자 ‘분노한 시민들의 민주화의지를 어떻게 수렴할 것인가’‘죽음을 무릅쓴 투쟁을 어떻게 조직화하고 가속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그리고 그가 이끌던 ‘들불야학’ 강학(교사)들과 함께 각종 유인물을 대량 제작해 뿌렸다.19일 항쟁관련 첫 호소문 ‘광주시민 민주투쟁회보’를 비롯,9호까지 나온 ‘투사회보’의 편집·제작·배포를 밤을 새워 지휘했다.언론이 눈을 감고 있던 당시 투사회보는 시민들의 눈과 귀가 됐다.시민들은 항쟁의 의미를 깨달았고 투쟁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시종일관 무기반납을 주장하며 투항적 자세를 보여온 5·18 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견제하기 위해 도청앞 광장에서 매일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이끈 이도 그였다.그는 각계 각층이 참가한 광주항쟁에 질서를 부여했으며 이것은 당시 신군부와 얼어붙은 언론에 의해 규정된 ‘폭동’이 ‘민중항쟁’으로 새로 자리매김되는데 실마리가 됐다. 대변인 尹祥源은 26일 밤 총을 달라는 고등학교 학생들을 설득했다.“우리들이 싸울테니 집으로 돌아가라.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마틴브래들리 기자는 이때의 尹祥源 모습에서 “세계 어느 무장조직에서도 볼수 없었던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진정한 투사의 진면목을 발견했다”고 회고했다.그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봤던 이양현씨의 말대로 그는 “광주항쟁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민주투사’란 수식어가 의아스러울 정도로 尹祥源 열사는 지극히 평범한 학교생활을 했다.어려운 살림에 중학교때부터 광주시내에서 하숙을 했지만 부모님 기대에 부응치 못했고 고등학교때는 ‘에덴클럽’이라는 질이 안좋은 서클에 가입해 술과 담배를 하기도 했다.삼수끝에 전남대 정외과에 입학,공부보다는 연극활동과 친구들 사귀는데 1학년을 보내고 군에 입대했다. 그의 삶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것은 한 선배를 만나고부터였다.복학후 외무고시를 준비하던 그는 친구 소개로 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15년형을 받았던 전남대 2년 선배 金相允(50·하실의료기상사 대표)을 만났다.그때부터 尹祥源은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대학인의 정당한 삶 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金相允과 학습모임을 꾸려가며 한국현대사에 대한 시각을 재정리했다.“5·18이 터지자 마자 예비검속으로 끌려간 후 상무대 영창에서 상원의 죽음을 알았어요.그후 오랫동안 祥源이가 도청옥상에서 총을 맞고 저를 부르며 죽어가는 환시현상을 겪었습니다” 金相允씨의 회고다. 졸업후 현실에 떠밀려 주택은행에 입사해 서울서 근무하던 은행원 尹祥源은 6개월만에 사표를 내고 광주로 돌아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자신만을 바라보던 부모님과 동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지만 그의 마음은 확고했다.그는 “부정과 불의가 판치는 이 나라 이 민족의 현실을 좌시할 수 없어 그만두려 하니 용서해 주십시요”란 편지를 부모님께 썼다.그리고 광주 한남플라스틱공장에 일용노동자로 취업하고 광주 광천공단 지역 야학인 ‘들불야학’에 적극 참여하면서 한 사람의 완숙한 노동운동가가 된다. 들불팀은 야학 운영 외에도 광천공단의 노동자 실태를 조사해 언론을 통해 폭로하기도 했으며 지역 주민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그리고 이들은 5·18이 터지자 항쟁 내내 시민들의 눈과 귀가 되는역사적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尹祥源 열사는 들불에서 후일 천상(天上)의 부부가 될 박기순씨와의 운명적 만남을 이룬다.전남대 휴학생이던 그녀는 광주지역 노동운동의 토대를 마련해보고자 들불야학을 연 당찬 여학생이었다.그와 함께 광주·전남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자’로 불리기도 한다.그러나 박기순씨는 선배 尹祥源이 들불의 중심이 될 무렵 연탄가스 중독으로 78년 12월 꽃다운 청춘을 마감한다.몇군데가 얼룩져 있는 12월 27일 일기장에 尹祥源은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여…아무리 쳐다보아도 넌 아직 살아 있을 뿐이다…”라고 기순에 대한 애타는 추모의 마음을 적어놓았다. 82년 2월,5·18 항쟁에서 살아남은 후배들은 유족들과 함께 尹祥源 열사와 박기순씨의 영혼을 불러 혼례의 예식을 치렀다.이 영혼결혼식을 위한 노래굿 ‘넋풀이’가 만들어졌고 그 마지막 소품에 黃晳暎씨가 노랫말을 붙였다.그것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이 노래와 함께 두 젊은 넋은 80년대 이후 노도와 같은 민주화투쟁 현장에 언제나 있었다. ◎그의 가족들/공장다니며 학비 대던 동생들 모두 출가/맏아들 가슴에 묻고 부모님만 생가 지켜 尹祥源 열사는 역사적 영광을 얻었지만 그의 죽음은 육친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아픔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570­1번지(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에서 87년 광주광역시로 편입됨) 尹열사 생가.그가 초등학교 졸업때까지 자란 이곳에는 부모님이 2남4녀의 자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구순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아드님이 자랑스럽지 않느냐는 물음에 어머니 金仁淑씨(67)는 그저 말없이 눈물만 글썽였다.아버지 尹錫同씨(72)도 몇차례나 재촉한 끝에 말문을 열었다. “은행을 그만두고 내려오자 기가 막혔지요.동생들은 형을 공부시키기 위해 낮에 공장에 다니며 야간고를 다녔는데 노동운동이라니….자식취급을 안하겠다고 나무라기도 하고 돈을 벌어 남을 도우면 되지 않느냐고 달래기도 했지요.그랬더니 ‘그래서 몇사람이나도와주겠느냐.구조적 모순을 고쳐야한다’고 하더군요” 尹씨는 “오히려 동생들이 공장에 다니며 터무니없는 착취를 당하는 모습이 祥源이를 부채질한 것 같다”고 했다. 尹열사 대학 시절 광주시내에서 함께 자취를 했던 남동생 정원씨는 “형은 제 갈길을 훌륭히 갔다”고 담담히 말했다.역시 같이 자취를 했던 여동생 현희씨는 “늦게나마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아 위안이 된다”고 했다.정원씨는 당시 조대부고 야간부에 다니며 낮에는 자전거 배달을 했고 현희씨는 야간상고에 다니며 맥주안주 공장에서 돈을 벌었다.이들은 대학생인 祥源에게 용돈까지 주고 밤을 새워가며 시위 유인물 제작을 돕기도 한 착한 동생들이었다. ◎들불야학 동료 林洛平씨/“독재 뿌리뽑는게 산자들의 참된 의무” “도망갔던 사람이 무슨…” 林洛平씨(41·광주 전남 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는 아주 겸연쩍어 했다. 들불야학 때부터 尹祥源 열사와 고락을 같이했던 그지만 항쟁이 터지던 80년 5월18일 광주 인근 친구집으로 피신했기 때문이다.그는 尹열사의 평전 ‘들불의 초상’을 정리했다.“18일 공수부대가 들어와 온갖 만행을 저지르며 시내를 장악하자 사실 모든 상황이 끝난 것으로 보았지요.27일까지 거기 있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林씨는 尹열사를 비롯한 들불팀이 5·18이 ‘사태’나 ‘폭동’이 아닌 ‘항쟁’ 이게끔 계기를 만든 사람들이라고 했다.항쟁초기 지도부가 없는 상황에서 조직적인 홍보·선전활동은 간접적인 지도부가 됐고 너나 없이 무기를 든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尹열사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 그는 “민중적 품성이 물씬 풍기는 사람”이라고 평했다.원칙을 존중하는 그였지만 누구도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친화력이 돋보였다고.“방년 29세 尹祥源입니다”란 첫 인사로 7·8세나 어린 들불 강학들에게 스스럼 없이 녹아들어 이내 그들과 혼연일체가 됐다고 한다.그가 뽑아대는 현대판 판소리 ‘소리내력’의 구성진 가락은 모든 이들의 넋을 빼놓았다고 했다. “祥源이형은 5·18이 부마항쟁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죠.결과를 뻔히 예측하면서도역사적 사건의 마지막 증거로 남기를 바랐던 겁니다” 林씨는 그가 남긴 역사적 증거를 토대로 다시는 독재가 발을 못붙이게 하고 민족통일을 앞당기는 것이 산자들의 참된 의무라고 했다. ◎尹祥源 열사 연보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면에서 출생 ▲63년 임곡초등학교 졸업 ▲69년 광주 사레지오고 졸업 ▲71년 전남대 정외과 입학 ▲72년 군입대.상주에서 일반하사로 복무 ▲75년 복학 ▲78년 주택은행 입사.6개월만에 그만두고 광주 광천공단내 한남플라스틱공장 취업.들불야학 참여. ▲80년 4월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중앙위원 피선 ▲80년 5월19일 들불야학팀들과 함께 항쟁 호소 유인물 제작·배포 시작 ▲80년 5월25일 청년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 ▲80년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 민원실 2층 회의실에서 계엄군에 항전중 사망
  • 리게티 오페라‘그랑 마카버’(명반과 함께하는 음악여행:10·끝)

    ◎죽음의 추문을 씻는 방법/좋은 이들 모두 모르리 자신의 시간 끝나는지/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모든 걸 숨기는 오페라/육체와 죽음의 추문들 씻어내는 현대의 제의/미세 다성음악의 원조 인류 비극 자신에 육화 1.‘대기괴’(大奇怪)쯤으로 번역되는 리게티 오페라 ‘그랑 마카버’는 이런 6중창으로 끝맺고 있다.‘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좋은 사람들 모두/ 아무도 모르지 자신의 시간이 언제 그치는 지를./그리고 그때가 오면 그냥 그렇게 둬…./안녕,그때까지는…명랑하게 살 것’ 중세에 ‘기괴한 춤’이라는 소재가 있었다.아릿따운 소녀를 끔찍한 죽음의 몰골이 껴안는 형상이다.슈베르트 ‘죽음과 소녀’는 그것을 낭만주의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결과다.그리고 케테 콜비츠 판화 ‘딸을 위해 죽음과 싸우는 어머니’는 그 ‘사회주의적 변형’이다.그런 기괴,더군다나 ‘대기괴’의 마지막에 이 무슨 상투적 권하는 말씀? 아니,그 전에,오페라의 줄거리는 정말 말도 안되는 추문의 극치다.모든 것이 괴상망칙한 브뤼겔의 나라.보통사람 피에트가 모국을예찬하면,연인 미란다와 아만도가 합류한다.둘은 성교(性交)중이고 그치지않는 오르가즘을 열망한다.네크로차르(그가 ‘대기괴’이다)가 세상을 끝장내겠다고 선포하고 피에트를 조수로 부린다.두 연인의 성교는 무덤 속으로 이어진다. 장면이 바뀌면 한 천문학자와 부인이 더 열렬하게,그리고 변태적인 성교를 벌이고 있다.남편이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동안 아내는 비너스에게 ‘더 센’ 남자를 보내달라고 간청하는데,그때 대기괴가 나타나 그녀를 과격한 사랑으로 죽여버린다. 대기괴,피에트,천문학자 세사람이 이제 청년 군주 고고의 궁정으로 향한다.궁정에선 흰 장관과 검은 장관이 서로 앙숙이라 골치가 아프다.비밀경찰 총수 게포포가 위협을 알리고 ‘대기괴’가 등장,세계의 종말을 선언한다. 2.음악은 더 뒤죽박죽이다.‘진노의 날’ 선율,몬테 베르디 ‘포페아의 대관식’,베르디 ‘팔스타프’,로시니 ‘세빌랴 이발사’,심지어 베토벤 ‘영웅교향곡’까지 동원되면서 하이 소프라노의 괴성­절규에 찢기고 베이스의 신음­무게에 짖눌린다.그리고 크게왜곡되고 악용된다.값싼 춤음악과 진부한 팡파르들이 세계의 종말에 달한다.그 결말에서 위의,권고의 말씀이라.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죽음은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이 다가오므로,그게 언제인지 알 수조차 없으므로,그때 까지 열락에 몸을 담그라는 뜻? 아니다.리게티는 직접 이렇게 말하고 있다.두려움이 전혀없는 삶,쾌락에 전적으로 바쳐진 삶,그것은 사실 심각하게 슬픈 삶이다….그렇다면? 과도한 음탕이 과도한 죽음을 낳는다.거꾸로도 마찬가지다.즉,죽음은 음탕하고 음탕은 죽음이다.‘그랑 마카버’의 이,매우 우스꽝스러운 깨달음은 음악,특히 오페라음악에 대한 역사적이고 현대적,그러므로 비극적인 통찰의 결과다. 우리는 음악을 듣는다.아니 음악의 아름다운 의상을 듣는다.그렇게 ‘음악속’이 들리거나,보이지 않는다.오페라는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모든 것을 숨긴다.그렇게 이야기의 ‘음악속’이 들리거나,보이지 않는다.왜냐하면 음악은 사랑과 교접사이를 흐르면서 교접을 선율로,미­육체화(美­肉體化)하고 그것을 의상화한다.그러나,본질은?혹 그 모든 것은 육체의,그리고,그러므로 죽음의 추문을 은폐하기 위한 장치 아니었을까? 3.쇤베르크는 음악 의상의 조화를 찢어버렸다.그 깨진 거울 뒤로,음악이전의,성욕(性慾)의 추악한 전모가 언뜻언뜻 보인다.그렇다.‘그랑 마카버’는 추문의 음악화를 통해 음악의 추문을,그렇게 육체와 죽음의 추문을 씻어내려는 현대 제의(祭儀)에 다름 아니다.이 제의 속에서 번제물 역할을 하는 것은 서양음악사 전체이다. 서양음악사,아니 역사는 그렇게 조롱받으며 스스로의 추문을 정화(淨化)할 밖에 없다.쇤베르크 이래 모든 현대음악은 폭로 혹은 자기파멸로만 치달았다.쇤베르크의 기법을 이어 받았지만,쇤베르크가 염원한,파경이후 새로운 음악적 총체는 점점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된다.왜냐하면,인류는 지식을 넓혀갔지만,동시에 자신의 악마성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그래서,그러므로,음악이 음악을,음악적으로,번제물 삼는다.리게티는 헝가리 태생이다.1956년 헝가리 민주화운동을 소련군 장갑차가 진압했을 때 그는 33세,부다페스트에 있었다. 당시 전위음악의 총아였던 슈토크하우젠음악 ‘청년의 노래’를 몰래 라디오로 들으며 그는 창밖으로 계엄령 상황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곧장 서방으로 망명,딱 두 달 만에 콜로뉴 전위음악파의 선두로 부상한다. 그는 서양음악의 현대적인 기법을 두루 탐구하고 발전시켰다.스스로 자신의 음악방식을 ‘미세(微細) 다성음악’이라 명명하면서 그는 1960년 서양현대음악 전체의 최첨단에 달할 수 있었다.1970년대는 오페라 ‘그랑 마카버’ 작곡에 바쳐졌다.그의 모든 기법과 사상이 총동원된 이 오페라 작업은 그로 하여금 현대음악의 막다른 골목에 회의를 느끼게하는 계기로 작용한다.아니,그는 파탄에 이른 현대음악에 회의를 느꼈으므로 이 오페라에 진력했다. 그는 비극적인 청년 시절을 보냈다.아버지와 형은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그도 강제노동에 처해졌다.나치이후 공산주의 정권은 그의 급진적인 음악을 금지했다.그리고,그러나,그 비극성이 그에게 ‘총체성의 마지막 보루’로 작용한다.전 인류의 고통이 그의 고통으로 특수화­심화하면서‘총체를 위한 번제’의 음악이 탄생하는 것이다. 새로운 리듬과 화음을 찾겠다….그는 ‘그랑 마카버’이후 그렇게 공언했다.오늘 소개하는 것은 현대음악 처녀지이자 성지(聖地)인 베르고 레이블이 자랑하는,리게티 자신의 숨결이 연주에 배인 음반이다. 1987.녹음,1991.wergo wer6170­2 ORF­합창단과 아르놀트 쇤베르크 합창단 ORF­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엘가 하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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