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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고 오늘 대선 결과 예측 불허

    [베오그라드 AFP AP 연합] 신유고연방이 24일 대선과 총선을 실시한다.야당의 보이슬라브 코스투니차 후보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에 압승을 거둘 것으로 예상되지만 코소보전쟁으로 국제전범으로기소된 밀로셰비치가 권력을 포기하고 스스로 법의 심판대 앞에 서겠느냐는 점에서 부정선거가 자행될 가능성도 우려되고 있다. 밀로셰비치는 비상사태 선포 가능성을 내비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유권자들의 안정희구 심리를 유발하려 하며 중립적 태도를 보여온군부도 미국과 유럽연합(EU)의 노골적인 ‘밀로셰비치 목죄기’와 관련,“서방의 선거 방해가 계속되면 군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며 반발하고 나서 무력개입과 계엄발동 가능성을 시사했다. 모미르 불라토비치 총리가 “대선에서 패하더라도 대통령은 헌법상내년 중반까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언급,유고 정국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판세 야당의 코스투니차 후보가 7∼20%포인트 차이의 압도적 우위를 보이고 있다.그러나 밀로셰비치가 과거 10년 집권 동안 4차례의발칸전쟁을 일으켜 한번도 이기지 못했으면서도 권좌를 계속 유지한점에 비춰 이변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밀로셰비치가 패배할 경우 소요사태를 일으켜 계엄이나 비상사태를 선포,야당에 권력을 넘기지 않고 권좌를 유지하는 편법과 술수를 쓸 가능성이 있다는것이다. ◆서방국가 부정선거 경고 서방측은 선거에서 패하면 정치적 생명이끝나는 것은 물론 유고전범재판소의 심판대 위에 서야 하는 밀로셰비치가 선거조작을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고 자유로운 감시활동이보장되지 않으면 선거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경고하는 한편 곧바로 유고선거 특별감시반을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밀로셰비치 진영 기류 밀로세비치 대통령이 낙승을 거둘 것이라고주장하면서 서방의 퇴진압력을 일축했다.이들은 또 야당의 부정선거주장은 패배를 예상한 야당이 변명거리를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야당 반응 승리는 무난하다고 보고 있다.다만 군부의 선거개입 시사와 밀로셰비치측의 대통령 임기 고수 발언 등이 집권측 내부의 심상치 않은 기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일수도 있다고 보고,만약의 경우에 대비하는 등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 후지모리 ‘억지 권력’ 무너지는가

    알베르토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의 10년 아성이 무너졌다.후지모리대통령은 16일(현지시간) 대통령 선거와 의회 선거를 새로 실시하되자신은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혀 권좌에서 물러날 뜻을 표명했다.선거의 구체적 시기는 밝히지 않았지만 후지모리의 퇴진은 기정사실화한 것. 후지모리 대통령은 야당의원 매수 사건으로 물의를 빚은 국가정보부(SIN)를 해체하고 당국에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다고 밝혔다.그러나야당의원 매수의 장본인인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 SIN 부장의 거취문제는 언급하지 않아 군부 쿠테타를 포함한 갖가지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후지모리 대통령이 이끄는 ‘페루 2000’은 4월 총선에서 120석의의석 중 53석 획득에 그쳤으나 이후 야당의원 영입을 통해 70석 가까운 절대 과반수 의석을 획득,야당측으로부터 공작정치를 중단하라는끊임없는 시위에 시달려왔다. 그런 가운데 후지모리의 최측근인 몬테시노스 정보부장이 야당인 ‘페루의 가능성’ 소속 루이스 알베르토 쿠오리 의원을 돈으로 매수하는 장면이 15일 현지 케이블 TV에방영된 것.공개된 58분짜리 비디오 테이프에는 몬테시노스 정보부장과 쿠오리 의원이 매수금액과 탈당시기를 놓고 흥정하는 대목 등이 담겼다. 야당은 테이프가 공개되자 “후지모리 정권의 밀실정치와 철권통치및 부정부패의 실상이 분명히 드러났다”며 대통령의 즉각 사임과 정보부장의 구속,과도정부의 구성 등을 주장했다.당시 1만5,000달러를현금으로 받은 것으로 알려진 쿠오리 의원은 TV 방영 직후 “돈을 받았지만 빈민자들에게 생선을 나눠주기 위한 냉동트럭 구입용으로 1만달러를 빌렸을 뿐”이라고 수뢰를 부인했다.그는 야당인 ‘페루의 가능성’ 소속에서 지난달 후지모리가 이끄는 여당 ‘페루 2000’으로당적을 옮겼다. 후지모리 대통령이 TV 방영 하루만에 선거를 다시 실시하겠다고 밝힌 것은 10년 철권통치에 비하면 극히 이례적이다.국민과 야당의 요구에 굴복한 셈이지만 선거 일정 등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아 일각에선 쿠테타가 일어나 축출됐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야당 의원들은 “군부의 지지를 받았더라면 후지모리가 방송연설을하지 않았을것”이라고 말했다. 페루는 5월 치러진 대선의 부정의혹 시비로 최근까지 시위가 끊이지 않다 미주기구(OAS) 등 국제사회의 요구에 따라 여야간 민주화 일정에 합의한 뒤 정국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리마 시민들은 후지모리의 연설 이후 수천명이 거리로 몰려나와 “독재가 무너졌다”며 승리의 환성을 지르고 자동차 경적을 울렸다.경찰들도 이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지난 대선에서 야당후보로 나섰던 알레한드로 톨레도는 새 대통령선거에서는 야당 단일 후보를 내세워야 하며 대통령의 퇴진 결정에어떠한 외부요인도 가로막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백문일기자 mip@. *몬테시노스는 누구. 몬테시노스 국가정보부(SIN) 부장(53)은 지난 10년간 SIN 부장으로재직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대통령인 후지모리를 능가하는 권력자’라는 평을 들어온 인물. 92년 친위쿠데타 당시 의회 해산과 법원 봉쇄 과정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95년 후지모리의 재선 성공뒤에도 그의 능수능란한 공작정치가 있었다.96년 코카인 밀반출을 묵인해주는 대가로 매달 5만달러씩 받았다는 폭로 이후 끝없는 마약조직과의 연루설에 시달려왔으나 매번 사법당국의 철저한 보호로 위기에서 벗어났다.그가 후지모리에 관한 정보를 너무 많이 갖고 있어 사실상 제거가 불가능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77년 육군 대위 시절 미 정보요원에 국가기밀을 팔아넘긴 혐의로 불명예제대했다. 유세진기자 yujin@. *후지모리 대통령은 누구. [리마 연합] 알베르토 후지모리(62) 페루대통령은 일본인 이민 2세출신으로 대통령에 3번이나 계속 당선됐다. 지난 5월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결선투표를 강행,3선에성공한 그에 대해서는 ‘정치·경제적 안정을 달성한 실용주의자’,‘철권통치를 자행한 독재자’ 등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페루로 이민온 나오치 후지모리와 마츠에 이노모토 부부의 5남매중 차남인 그는 리마 출생으로 대학총장을 지냈으며,대학총장연합회장으로 피선된 것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했다. 1990년 ‘캄비오(개혁) 90’이라는 신당을 급조,같은 해 실시한 대선에서 여당후보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를 근소한 표차로 따돌리고권좌에 올랐으며 95년에는 유엔 사무총장 출신인 하비에르 데 케야르후보를 물리치고 재선됐다. 그는 첫 임기 중반이던 92년 정국불안이 심해지자 군부의 지지아래계엄을선포,친위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에콰도르와의 국경분쟁이 발생하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등 철권대통령으로서의 이미지를 굳혔다. 1996년 좌파 반군들이 4개월간 일본 대사관저를 점거했을 당시 군대를 진두지휘,인질 71명을 구출함으로써 전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정계진출 선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부인 수사나 히구치 여사의 영부인 자격을 박탈,딸 케이코를 영부인으로 임명한 뒤 부인과 이혼했는가 하면 97년에는 자신의 3선 연임에 걸림돌이 되는 헌법재판관 3명을 제거했을 정도로 앞뒤를 가리지않는 냉정하고 권위적인 독재자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 [외언내언] 尹潽善家

    서울 종로구 안국동 8-1번지.고 윤보선(尹潽善)대통령 사저,대지 1,411평에 건평 250평의 99칸 한옥은 안채,사랑채 그리고 그 부속건물들까지 조선조양반가옥의 풍모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130여년전 고종조(高宗朝) 세도가 여흥민씨 소유였다가 철종(哲宗)의 부마박영효(朴泳孝)를 거쳐 고 윤보선 대통령의 조부가 사들여 오늘에 이르렀다. 78년 서울시가 민속자료(27호)로 지정한 이 한옥은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윤보선 전대통령에 의해 가구에서부터 기왓장 하나에 이르기까지 전통의 숨결이 잘 보존돼 왔다.건축사적으로는 19세기 서울 북촌의전통 양반가옥이면서 보기 드물게 5대째 90여년을 사람이 살고 있는 문화재다. 윤보선 전대통령이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 이 한옥의 사랑채는 한국정치의 한 부분을 증언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 산실이었으며 60년대에는 야당의 회의실이자 야당인들의 사랑방이었다. 5·16후계엄하에서 유진산(柳珍山)씨가 넝마주이로 변장해 이 집에 들어와 윤전대통령과 함께야당 재건의 밑그림을 그린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이래 저래 이 한옥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이 집에 살고 있는 윤상구(尹商求)씨 가족이 주인이라기보다는 관리인으로 이런 저런 불편을 감수하면서 힘겹게 유지하고 있는 것도 선대(先代)의 유산이자 시민 모두의 유산이라는 의무감 때문이리라. 그런데 최근 이 윤씨 가족에게 고민이 하나 생겼다.후원 담장과 잇대어 4층짜리 시멘트 건물이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후원과 안채를 훤히 내려다볼수 있도록 설계된 이 건물은 그러나 건축법상 하자는 없다고 한다.99년 5월규제개혁 차원에서 문화재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100m 이내 건축물의 건축허가 사전 승인규정이 폐지됐기 때문이다.서울시에서 뒤늦게 문제를 인식하고건축주에게 2층만 건축하도록 종용하는 등 손을 쓰고 있으나 별무소득이라는것. 이 한옥의 대문 바로 앞에는 사랑채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꼴불견 건물이 하나 있다.알 만한 사람은 아는 얘기지만 3공화국의 정보정치를 상징하는건물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또 하나의 시멘트 건물이후원을 들여다 보면서올라간다.‘산수화에 자동차’ 같은 이 건물은 2000년대 관료들의 법형식주의의 증거물이 될 듯싶다. 金在晟 논설위원 jskim@
  • 전국민연대회의 주최 국회 공청회

    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전국민연대회의 주최로 열린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공청회’에 민주당 임종석(任鍾晳·초선·서울성동)의원과 한나라당 김원웅(金元雄·재선·대전대덕)의원이 패널로 참석,평소 소신을 밝혔다. 두 의원의 토론내용을 요약·정리한다. [임종석의원] 국가보안법은 궁극적으로 폐지돼야 한다.통일 시대를 맞아 북한은 대화·화해·협력의 대상인 동시에 안보상의 위협이 되는 존재다.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통일의 대상이다.따라서 국가보안법의 기본 내용이 적으로규정한 북을 상대로 만들어진 것인 만큼 법 자체의 존재가 부적절해진 것이다. 국가보안법에 따르면 방북하고 돌아온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그 수행원일행 모두가 위법 행위를 저지른 것이 된다.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은 대화의 대상이 아닌 만큼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처해야 할 수괴다. 국가보안법에 미련을 두는 것은 안보상의 문제 때문이다.이는 형법상의 내란·외환죄를 보강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북측도 마찬가지로 그들 형법에서남측의 민족개방운동을 지원한다는 등의 내용들을 대폭 삭제해야 한다. [김원웅의원] 국가보안법은 냉전시대의 대표적 유물로 폐지되어야 한다.만약김구(金九) 선생이 좀더 생존했다면 아마 국가보안법으로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이 법은 평화통일을 가로막고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질서에도 어긋나는법이다. 국가보안법의 존재로 인권후진국이란 평가를 받아 국제사회에서의 우리나라 위상을 깎아내리고 있다.우리와 비슷한 입장에 있어왔던 독일에는 국가보안법 같은 악법이 없고,타이완도 지난 91년 우리의 국가보안법과 같은 성격의법인 비상계엄법을 폐지했다. 국가보안법은 모호한 개념을 사용해 필연적으로 인권침해를 초래하게 되어있다.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유민주주의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된다. 오풍연 주현진기자
  • [끊어지지 않는 지구촌 분쟁](4)티베트의 홀로서기

    반세기동안 계속되는 티베트의 독립·분리운동은 중국에게는 피하고 싶은아킬레스건이다.티베트내의 인권상황은 중국을 국제사회에서 곤혹스럽게 한다.97년 장쩌민(江澤民) 중국 주석의 미국 방문때 공식거론 여부를 놓고 막판까지 논란이 됐었고 최근 티베트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방한문제로 한-중간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올초에는 티베트 불교계 서열 3위인 카마파 라마(14세)가 인도로 월경,중국-인도관계가 불편해졌다. 비폭력 독립운동을 이끌어온 달라이 라마가 98년 11월 티베트 독립 포기를선언하고 ‘완전 자치’를 요구하면서 티베트 문제는 새 국면에 들어섰다.공은 중국 정부에게로 넘어갔다. [분쟁의 역사] 티베트는 13세기 이후 중국과 영국의 통치를 번갈아가며 받아왔다.1911년 신해혁명이후 한족을 몰아내고 1950년 중국이 지배권을 주장하며 무력 침공할 때까지 독립을 유지해왔다.중국은 1906년 티베트에 대한 권리를 인정한 영국과의 조약을 근거로 티베트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고 있다. 1951년 5월 베이징 정권이 무력을 이용,달라이 라마 정부와 17개조의 ‘티베트 평화해방협정’을 체결했다.정교일치 체제의 존속은 인정하되 토지개혁을 포함한 사회개혁을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그러나 1959년 중국의 점령에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중국군에 의해 진압됐다.이후 79년까지 100여만명의 희생자가 생겨났다. 달라이 라마는 59년 추종자 6,000여명을 이끌고인도로 망명했다. 중국 정부는 65년 티베트에 자치구(서장)를 세웠다.67년 문화대혁명(∼1977년)이 시작되면서 역사적 유산이 모조리 파괴됐다.마오쩌둥(毛澤東) 사망을계기로 화해를 시도했지만 티베트 민족주의 저항은 약해지지 않았다.봉기 30주년인 1989년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결국 90년 5월까지계엄체제가 지속됐다. [분쟁원인]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으로서는 ‘살아있는 부처’인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한 신권정치를 인정하기 힘들다는 입장이다.티베트가 갖는 군사적·지리적 요충지로서의 의미도 빼놓을 수 없다.인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티베트 고원은 지리적으로 무기배치와 개발에 이상적이다.중국의 로스알라모스(미국 뉴멕시코주에 있는 원자력 연구 중심지)에 해당하는 ‘제 9아카데미’가 티베트 북동부에 주둔하고 있다.중국과 인도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던 티베트가 미사일 및 핵시설등을 갖춘 중국의 전진 군사기지화되면서인도의 견제가 심화됐다. 중국은 목재·수자원·광물자원과 세계 최대의 우라늄 광산에 대한 개발권도 놓치고 싶지 않다.여기에 티베트의 독립 내지는 완전자치가 다른 소수민족에 미칠 파급효과를 우려하고 있다. [전망] 중국은 헌법에 소수민족의 자치를 인정하고 있다.하지만 티베트에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풍부한 자원개발 및 전략적 요충지인 티베트 고원에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 일을중국이 선택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당분간 무리일 것 같다. 김균미기자 kmkim@. *티베트 분쟁 일지. ●1913.1 달라이 라마 13세,티베트 독립 선포. ●1950.10 중국군,티베트 무력 점령. ●1951.5 티베트,중국 서장자치구에 편입. ●1959.3 티베트서 독립요구 대규모 시위, 달라이 라마 인도로 망명. ●1965.9 중국,티베트 자치구 성립 선언. ●1987.9 달라이 라마 ‘평화 5항목’제안,중국 거부. ●1987.10 대규모 독립요구 시위. ●1989.3 59년 독립시위 30주년 대규모 시위로 6명 사망,100여명 부상.중국사상 최초로 계엄령 선포. ●1989.10 달라이 라마,노벨평화상 수상. ●1992.4,1993.10 티베트서 폭동 발생,사원들 폐쇄. ●1998.11 달라이 라마,티베트 독립포기 발표. *열매 맺는 망명정부 외교.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인도 다람살라의 티베트 망명정부는 인도와 네팔 부탄 등에 흩어져 사는 13만여 티베트인들의 중심이 되고 있다. 망명정부는 완전 자치를 쟁취하기 위해 대(對)유엔,미국,유럽 등 국제적인지원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이같은 노력의 결과 미국은 특히 티베트 문제를중국의 민주주의,인권문제에 포함시켜 미국의 대중국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망명정부는 사법부인 티베트 최고사법위원회와 입법부인 국민대표국회,행정부로 이뤄져있다.내각과 국회는 5년마다 선거로 구성원들을 선출한다.또 뉴델리와 뉴욕 런던파리 등 10여개 도시에 대표사무소를 설치,티베트의 상황을 세계에 알리는데 활용하고 있다. 현재는 ‘국제 티베트 운동’의 후원 아래 세계 곳곳에 있는 수백개의 ‘티베트 우호회’ 지부들이 티베트 돕기에 나섰다.특히 미국의 영화배우 리처드기어 등 헐리우드 인사들이 티베트 돕기운동에 동참하고 티베트 관련 영화‘쿤둔’과 ‘티베트에서의 7년’이 개봉되면서 티베트에 대한 세계인들의관심이 높아지고 있다.티베트의 인권보호와 문화를 지키기 위한 ‘세계 티베트의 날’ 행사가 매년 열리는 등 국제적인 지원행사가 끊이질 않고 있다.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운동과는 별개로 티베트 독립운동세력은 한때 미국과타이완의 지원을 받아가며 중국에 무력으로 대항하기도 했다. 하지만 70년대이후 미국과 중국관계가 호전되면서 지원이 끊어졌고 지금은 비조직적인 소요가 산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김균미기자. * 印 다람살라 망명정부 르포. [다람살라(인도) 김성호기자] 인도 동북부 해발 1,900m의 산악지역인 다람살라.망명자들을 비롯,티베트와 인도 전역에 퍼져 사는 티베트인들이 고유의종교와 문화를 잃지 않으려 몸부림치며 자치에의 염원을 이어가는 이색지대다.마치 일제하 상하이 임시정부를 연상시키는 듯하다. 중국의 폭압이 한창이던 59년 6,000여명의 측근과 함께 티베트를 탈출한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네루 당시 인도 총리의 주선으로 정착하면서 세계의 이목이 쏠리게 된 망명도시.89년 달라이 라마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뒤 본격적견제에 나선 중국 정부와 이에 맞선 티베트인들의 줄다리기가 오늘도 팽팽히 벌어지고 있다. 망명 티베트인 1만명이 사는 고지대와 인도인 2만명이 거주하는 저지대를합쳐 인구는 총 3만명.소형차 한대가 간신히 통행할 수 있는 비좁은 길을 따라 상가와 집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다.망명정부 청사가 자리잡은 거리를중심으로 사원과 학교가 산재하며 어느 곳에서든 티베트 승려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거리에는 티베트 불교가 좋아 무작정 찾아든 서방세계의 젊은이들이 불상이며 탱화를 벌여 놓은 좌판 주위에 몰려 있는 모습이 쉽게 눈에 띈다. 손님 주위에는 어김없이 인도 걸인들의 구걸이 이어진다. TCV(Tibetian Children’s Village)와 도서관은 티베트의 전통과 종교를 이어가려는 노력이 가장 두드러진 곳.달라이 라마의 누이동생 제툰 페마가 총괄하는 TCV는 일종의 종합학교로 티베트 불교 중심의 9년 과정.인도 전역에7개의 학교가 운영되는데 다람살라에는 700명이 수학중이며 한국 학생도 4명이 있다.59년 망명 때 티베트인들이 등짐을 져 날라온 경전 7,000종이 고스란히 보관된 도서관엔 각국 학생·승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티베트 문화의 진수를 볼 수 있는 곳은 역시 사원.조캉사원엔 티베트에 불교를 전한 파드마삼바바와 관세음보살상 옆에 60년대 문화혁명 때 티베트에서 파괴된 불상의 목 2개가 함께 봉안돼 있다.티베트 불교와 티베트인들의비극을 그대로 보여준다.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에 파괴된 티베트 사원은 6,000여개.산꼭대기 달라이 라마의 거처 주변에 자리잡은 중앙대회당에는 1년에한번씩 달라이 라마의 법어가 내려지며 남걀사원 역시 정월 대보름 달라이라마의 법문을 듣기 위해 북새통을 이룬다.사원 곳곳에서 손을 뻗고 엎드려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는 승려와 일반인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예비 비구니들이 10년에 걸친 교육을 통해 사미계를 받는 비구니 강원을 들어서면 파르라니 깎은 머리의 예비 승려들이 읽는 독경소리가 신비감을 전한다. 토속 주술신앙과 티베트 불교가 혼합된 독특한 형태를 갖춘 네퉁사원은 신통을 받은 승려가 달라이 라마에게 행동지침을 전하는 신탁의 장소다. 정부 청사거리.달라이라마가 신왕(神王) 위치에 있지만 총리 1명,장관 7명으로 구성된 내각 카샥과 망명 티베트인들이 뽑은 46명의 의원이 모인 의회등 나름대로 자치의 틀을 갖추고 있다.중국 대륙을 통일한 공산당이 50년 티베트를 쳐들어오면서 트기 시작한 비극의 싹이 결국 이곳으로 귀결된 것이다.59년 중국 침공에 맞선 독립시위에는 잔혹한 진압이 따랐고 그때 티베트 전체 인구의 20%인 12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정치적인 이유로 감옥에 갇히거나행방불명된 이들은 헤아릴 수 없다.티베트에서 최근 망명한 전직 경찰관 탐딘 체링씨(56)는“폭압의 잔혹성은 59년 끝난 게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있다”면서 “60년 이후 약 20만명이 더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옛 티베트의 면모를 아스라히 풍기면서도 차츰 현대문명의 물결이 스며들고있는 다람살라가 언제까지 티베트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티베트인들이 더이상 달라이 라마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상황이될 때 나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란 달라이 라마의 말이막연하게나마 다람살라의 앞날을 점쳐볼 수 있게 한다.
  • 5·18 ‘가짜 피해자’ 무더기 적발

    5·18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허위로 보상금을 타냈거나 이를 도와준 관련단체 회원과 의사 등 35명이 구속기소되고 78명이 불구속 입건됐다.또 이들에게 부당하게 지급된 13억1,400여만원이 국고에 환수된다. 광주지검 반부패특별수사본부(金正基 부장검사)는 23일 허위로 보상서류를꾸며 5·18피해자 보상금을 수령한 5·18민중항쟁 부상자회 조직국장 최인기씨(41)등 28명을 사기 등 혐의로 구속했다.검찰은 이에 앞서 1억1,500만원을 챙긴 5·18민중항쟁 구속자회 이사장 이무헌씨(43)등 7명을 같은 혐의로 구속했었다. 구속된 최씨는 경찰관을 허위 목격자로 내세워 지난 80년5월 파출소안에서계엄군에게 구타를 당했다고 꾸며 4,287만여원을 타냈고 의사 김성용씨(58)는 허위 진단서를 발급해 주고 2,000여만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5·18 당시 병원치료 기록 등 객관적인 자료를 확보하기 어렵고 목격자 진술에 의존한다는 점을 악용,교통사고나 허리디스크 등 병력을 이용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특히 5·18관련단체 회원들이 구속자전체35명중 23명이나 됐다. 이들은 지난 90년부터 3차례에 걸쳐 이뤄진 보상에서 3,863명이 2,100억여원을 받아갔다. 검찰은 지난 2월에 받은 올 4차 보상금 신청자 868명을 상대로 허위보상 신청 여부를 밝히는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광주 남기창기자 kcnam@
  • 문화부-해직언론인협 ‘해직언론인 보상’ 갈등

    80년 당시 계엄당국의 언론탄압에 맞서 검열 및 제작거부 운동을 펼치다 강제해직된 기자들의 명예회복·배상문제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최근 주무부서인 문화관광부 측이 해직언론인들은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펴 해직언론인들로 부터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지난달 19일 문화부는 ‘5·18 해직교수 손해배상 관련 해직언론인 배상검토’라는 문건을 통해 “해직언론인은 5·18민주화운동과 관련이 없고 5·18관련 해직언론인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이미배상조치됐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회장 이경일)는 지난달 30일 한국기자협회·언론노련과 공동으로 문화부장관 앞으로 제출한 공개질의서에서 “80년 언론인 강제해직은 신군부가 광주학살을 자행하면서 내란을 시도한데 대한 언론인들의 집단저항에 대한 보복조치임이 대법원 판례에서 확정된 바 있다”면서 “교육부가 최근 5·18과 관련해 해직된 대학교수들에 대한 원상회복조치와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어 “해직 언론인들의 언론민주화운동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에 대한 역사적 자리매김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15대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80년 해직언론인배상 특별법을 상정해놓고도 그 처리를 미룬 것은 규탄받아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80년 당시 해직언론인은 5·18직후 검열·제작거부 참가자 700명과 이 해 11월 언론사 통폐합 과정에서 해직된 300여명 등 모두 1,000여명에 이른다.이들 가운데 정부의 배상조치를 받은 사람은 당시 구속됐던 16∼17명이 전부다. 해직기자 출신인 최형민씨(50·신문윤리위원회 심의위원)는 “문화부가 법리적 문제나 형평성을 이유로 해직언론인들의 민주화 공로를 폄하하는 것은반민주적 작태”라고 비난했다. 정운현기자
  • 피지군부 지도자 “대통령으로 통치”

    [수바 AFP AP 연합] 계엄령을 선포한 피지 군부의 최고 지도자 프랭크 바이니마라마가 31일 새 헌법이 제정되고 총선거가 다시 실시될 때까지 “2∼3년간 대통령으로 통치하겠다”는 입장을 공식 발표했다고 호주 ABC 라디오가보도했다. ABC는 또 바이니마라마가 지난 29일 하야한 라투 시르 카미세세 마라 대통령의 사위인 나이라티카우 전 군사령관을 임시정부의 총리로 지명했다고 전했다. 나이라티카우는 특정 정파와 연관이 없는 군 및 전문직종 출신의 인사들을새 내각의 장관으로 임명할 것이라고 바이니마라바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이와 함께 피지 외교통들은 87년 두번에 걸쳐 쿠데타를 시도했던 시티베니라부카 전 총리가 군사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99년까지 총리로 재직했던 라부카는 자문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되며 8명으로 구성될 이 자문위원회는 피지 군부의 전·현직 구성원들로 구성된다.한편조지 스파이트의 쿠데타를 지지하는 청년들이 31일 군부의 계엄령을 무시하고 인도계 기사가 몰고 있는 택시들을 납치해 국회 인근에서 폭행했다고 뉴질랜드 라디오가 방송했다.
  • 피지軍 계엄령 선포

    피지군 총사령관 프랭크 바이니마라마 제독이 29일 지난 19일 조지 스파이트가 일으킨 쿠데타에 반대하는 역쿠데타을 일으켜 계엄을 선포하고 행정권을 장악했다. 바이니마라마 제독은 이날 성명을 통해 “최근에 벌어진 사태에 대해 온 국민이 슬퍼하고 있다”면서 “하는 수 없이 행정권을 장악하게 됐다”고 밝혔다. 바이니마라마 제독은 19일부터 인질 사태가 계속되고 있는 국회의사당에 출입하는 일은 꼭 필요한 서비스를 제외하고는 제한하겠다면서 국민들에게는등화관제에 협조해줄 것을 당부했다. 바이니마라마는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외교소식통들은 바이니마라마 제독이 대통령을 몰아내고 자신이 총리에 취임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에 앞서 피지 군부는 수도 수바의 전략적 주요 거점 등 수바 전지역을 장악한 뒤 29일 오후 6시(현지시간)부터 48시간 동안 통행금지를 선포했다.군부는 이와 함께 통행금지 위반자에 대한 발포 및 사살 명령을 내렸다. 28일에는 쿠데타 지도자 스파이트의 지지자들이 수바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면서 총기를 난사,경찰관을 살해하고 수바내 TV 방송국을 파괴했다. 한편 카미세세 마라 피지 대통령이 29일 오후 사임했다고 피지의 한 라디오방송이 보도했다. 피지 군 지도자인 프랭크 바이니마라마 준장은 비티FM 라디오 방송과 가진인터뷰에서 “마라 대통령이 초저녁에 사임했다”고 밝혔다. 수바 AFP 연합
  • “광주민주항쟁 왜곡 보도 많았다”

    언론단체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5·18 당시 우리 언론은 당시 광주민중항쟁을 왜곡,보도했다”는 뼈아픈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난 15일 언론재단과 기자협회는 광주전남기자협회(회장 임영호·광주CBS정치행정팀장)와 공동으로 ‘5·18 민중항쟁에 관한 왜곡보도와 그 후 20년’이라는 주제로 제6회 기자포럼을 개최했다.이날 토론회에서는 80년 5월과그 이후 ‘광주민중항쟁’과 관련한 국내언론의 왜곡보도 실태가 낱낱이 공개됐으며,이에 따른 언론의 사죄와 반성이 뒤따라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날 행사에서 기조연설자로 나선 리영희 한양대 교수는 “광주항쟁 당시소수 기자들의 저항도 있었지만 저항과 비판,민중의 방패로서의 언론은 그날로 끝났다”고 지적하고 “‘군사정권 치하’라는 당시 상황은 언론의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성 5·18기념재단 기획위원장은 서울지역 신문의 기사 70건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분석에 따르면,당시 언론보도 가운데 5·18에 대한 ‘왜곡보도’가 41.4%로 가장많았고,‘사실보도’ 25.7%,‘어느 정도 사실보도’ 21.4%,‘보도 않음’ 11.4%순으로 나타났다. 또 80년 이후의 보도를 분석한 송정민 전남대 교수는 ▲광주항쟁은 시위·추모의 틀로 범주화 됐고 ▲이 때문에 항쟁의 원인,학살책임자 등의 문제가가려졌으며 ▲결국 5공∼문민정부 하에서도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고지적했다.송 교수는 또 “광주항쟁을 데모 전문가들의 집단행위 또는 제사의식으로 만들어버린 언론은 보도행태에 대한 최소한의 자성이라도 있어야 한다”며 언론계의 진지한 반성을 촉구했다.한편 지난 12일 순천향대에서 열린언론학회 학술행사에서 이민규 순천향대 교수는 “79년 10월 27일부터 계엄이 해제된 81년 1월 24일까지 총448일간 계엄당국이 검열한 기사는 27만 7,906건이며 이 가운데 9.8%인 총 2만7,058건이 전체 혹은 부분 삭제됐다”면서“그동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당시 언론인들이 광주항쟁의 진실을 보도하려고 노력했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했다”고 밝혔다. 정운현기자 **
  • [‘3共통치일지’로 본60년대](4.끝)언론정책

    60년대 3공의 대(對)언론정책은 철저한 사전 검열과 통제로 요약된다.당시통치일지는 곳곳에서 이같은 기조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군사 쿠데타 일주일 뒤인 61년 5월23일 일지에는 ‘최고의(最高議) 포고 11호로 사이비 언론기관을 정비’한다고 ‘혁명’난에 기록돼 있다.27일에는‘일간신문 76건,일간통신 305건,주간신문 453건의 등록을 취소’했다는 내용이 ‘중요업무’에 실려있다. 62년 일지는 여러 곳에 필화(筆禍)사건에 관한 기록을 담고 있다. 11월29일치 일지는 ‘사회노동당 기사관계로 한국일보사에 자진 정간(停刊)을 권고하는 공한을 28일 전달’했다는 사실을 ‘국내외뉴스’를 인용,적시하고 있다.뒤이어 12월1일에는 ‘한국일보가 사회노동당 기사에 자책,3일간근신휴간’이라고 적었다.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언론계 대표와 만남을 갖고 유화책을 모색한흔적도 찾을 수 있다.64년 1월6일의 일지 ‘주요정무’난에는 ‘12월28일 발표한 대혁신운동의 첫 방안…거국적인 단결을 모색하기 위한 계획의 첫번째로 전국신문편집인협회,발행인협회 대표인사들을 초청해 간담’했다고 기록했다. 6·3사태 하루 뒤인 64년 6월4일치 일지에는 ‘언론출판 보도 사전검열’,‘유언비어를 날조·유포치 못한다’는 내용 등을 골자로 하는 계엄사령부포고 제1호가 ‘주요정무’난에 실려있다.특히 계엄사령관 담화문을 요약하면서 ‘유언비어를 선동하면 엄단’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같은달 6일 한일회담 반대투쟁 보도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동아일보사에난입,행패를 부린 사건도 기록해놓고 있다.‘동아일보 침입사건의 최대령 등장교 8명을 구속’이라는 기록이 6월8일 일지의 ‘참고사항’에 포함돼 있다.6월18일에는‘계엄령 선포후 당국에 구속된 인원수는 348명’이며 이가운데 ‘언론인은 7명’이라고 밝혔다.‘주요행사’난에는 박 대통령의 언론사 사장이나 주필과의 개인 면접 일정도 적혀 있어 ‘채찍’과 ‘당근’이오간 권력과 언론간 유착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그해 8월 여당단독으로 국회에서 통과시켜 언론파동을 몰고 온 언론윤리위원회 법안에 대해서도 기록이 남아있다.‘1일부터 언론윤리위원회법을 준수하지 않고 법시행에 협력을 거부하는 언론기관이나 개인에게 정부의 특혜나협조를 일절 해주지 않기로 함’(9월1일),‘언론윤리위 소집을 반대하는 신문,경향·동아·조선·매일’(9월2일) 등이다.군사 정권이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반대하는 신문사들을 ‘특별관리’하고 있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해주는대목이다.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비민주적인 악법으로 규정,법철폐투쟁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언론계의 움직임도 ‘주요행사’난에 실었다.9월 8일 일지에는 박 대통령이 ‘유성 만년장 호텔에서 언론윤리위법 철폐투위 대표 유봉영 고재욱최석채 홍종인 김길환 이환의씨 등 6명과 만나 당과 국회와 상의하여 선처하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적고 있다.‘투위대표들은 자율적인 규제를 더욱 강화하여 실천할 것을 다짐하면서 언론윤리위법 시행을 보류할 것을 요청했다’는 점도 덧붙였다. 기동취재소팀 김성수기자 sskim@
  • [대한광장] 5·18과 386세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싸우자던 뜨거운 맹세…산 자여따르라!’. 만주일대를 휩쓸던 독립투사들의 장엄한 절규같은 이 노래는 식민지 시대 행진곡이 아니다. 바로 ‘80년의 봄’ 광주의 노래다.‘빛고을의봄’ 당시 민주화운동의 중심 세대였던 소위 386 세대가 이번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5·18 민주항쟁 정신’이 금배지의 젊은 대열로 대거 여의도 행군으로 들어서게 한 것이다. 5월 18일 아침,날씨 맑음,그러나 전남 도청은 그 전날부터 어두움의 깊은공포로 웅크리고 있었다.전날밤 자정을 기준으로 정동년,김상윤 등 복학생과전남대 총학생회 간부들이 무자비하게 끌려가고 01시,시계가 땡! 울리는 것과 동시에 광주일원에 공수부대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다.한편 01시45분경,무장한 제 33사단 병력을 계엄군으로 해서 국회의사당을 포위하였다.이렇게 5·18의 새벽은 피튀기는 살육의 전야제로 시작된 것이다. 작전 개시 전야,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인사가 사전에 체포되었고,전국의 대학교 등에는 탱크가 위협하고 있었다.그 중심에 있었던 80년대학번들인 386 세대가 이제 30대가 되어 ‘바꿔 바꿔’ 열풍을 타고 탱크가가로막고 있던 바로 그 여의도에 다시 입성하게 된 것이다.금남로 일대의 이현장기록이 나중에 ‘타임’지에 의해 전 세계로 찍혀나가자 그 필름을 숨죽여 보던 사람들은 시린 어금니를 딱딱거리며 치를 떨었다. 빛고을 뿐이랴,이미 그 전 해의 12·12사태 이후부터 전국적으로 양심세력과 대학생들이 분노하고 있었다.5월 17일 계엄확대는 신군부 ‘하나회’를중심으로 한,전두환 군사정권의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었다.이번 총선에서의‘낙천낙선’운동의 주역들도 이들이다.참여연대 등 각 사회단체의 중심세력들도 이들 386이다.‘반영남-반호남’의 지역대결로 38선보다 더 분명하게갈라진 이번 총선에서 ‘우리들 386 초선의원들은 당의 단순한 거수기가 아니다’며 언성을 높이는 것도 5·18정신의 계승과 무관하지 않다. 과연 여야 흑백대결로만 구도화된 여의도 정치관행에서 이들의 언성이 얼마나 실현될 지는 두고 보아야 하겠지만 우선은 당을 초월하여‘386 시대정신’으로 결집한다는 의지는 신선하다.민주당 총재 비서실장인 김민석 의원이한나라당의 남경필 의원 등을 만나서 ‘새천년 새청년’ 정신으로 여의도를바꾸자는 깃발이 좋다.어찌 보면 마피아 조직보다도 더 경직된 정치조직의벽을 이들이 어떻게 깰 것이냐가 지금 486 세대들에겐 흥미거리이다. 그 결과가 펜티엄세대는 물론이지만 밀레니엄시대 한국정치의 향방을 가늠하는 또 하나의 실험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이들의 병역 납세 재산 등의문제는 ‘총선시민연대’ 등을 통해서도 이미 깨끗하게 통과되었다.위법적문제를 무릅쓰고 결행된 ‘낙천낙선’운동이 없었더라면 과거와 같이 또 구린내가 나는 전과자들이 타이어같은 낯가죽으로 대거 여의도를 거들먹거렸으리라.그래서 이번의 검증절차는 ‘필요악’이었다.앞으로는 미국 등과 같은‘선거시민’ 운동이 ‘필요선’이 될 것이다. 97년 대선에서 돈과 조직이매우 빈약했던 이인제 의원이 거의 500만표 가까운 지지표를 얻었다는 것도높아진 시민의식의 반증이 아니겠는가.앞으로의 대선이나총선도 더욱 이러한 민주의식으로 고양될 것이다. 그것은 386 세대들이 5·18 민주 정신으로 우리 사회를 중심적으로 이끌어가는 청장년세대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그 연장선 상에서 당시 ‘5·18’ 주체의 핵심 가운데 하나였던 김대중 대통령이 이제는 청와대의 주인으로서 평양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포옹도 예견되고 있다.5·18 정신이 ‘햇볕정신’으로 승화되어 남북한의 민주화가 오기를 기대해 보아도 좋을 꺼나? 신상성 용인대교수 소설가.
  • [‘3共통치일지’로 본 60년대](2)6·3사태 전말

    ‘20시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선포…방종 난동 참을대로 참다 사회질서 회복위해 단안’‘비상계엄 오기까지 학생 극한 데모…중앙청에 불덩이(화염병)던짐’ 박정희(朴正熙)정부의 통치일지는 64년 6·3사태를 파괴와 혼란의 위기 상황으로 기록했다.60년대 최대의 학생시위로 꼽히는 한일회담 반대 투쟁의 배경이나 원인을 유추할 수 있는 구절은 통치일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63년 12월 박 대통령 취임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에서 ‘대통령 비서실’로 작성기관이 바뀐 일지는 시위대의 일부 움직임을 간헐적으로 적고 있을 뿐이다.그것도 시위대의 과격성을 부각시키려는 듯 ‘탈취’‘점령’‘불덩이’ 등 극한 용어를 주로 사용했다. 일지에 드러난 6·3사태의 전조는 5월19일치 ‘서울대학에서 한일굴욕외교반대 성토대회’라는 기록에서 비롯된다. 20일 ‘서울대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성토대회’,‘데모학생 107명에 영장신청’에 이어 6월3일치 일지에는 ‘학생데모대 국회의사당 앞서 연좌’,‘학생데모대 파출소 세곳 파손…안암동 로타리에서 운반중인 가스탄 탈취’라고 적혀 있다.4일 ‘상황보고’란에는 ‘경관 848명 부상,학생 시민부상수는 미상.파출소 점거.시경 무기고 점령.군관용차 탈취’라고 당시 상황을 요약했다. 반면 정부의 지시사항이나 수습 대책,계엄령 선포 상황 등은 ‘설득’,‘단안’,‘불가피’ 등 여과된 표현을 써가며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했다.‘청와대서 단식데모하려던 학생대표 32명’을 ‘문교부장관이 중앙청에서 설득’(6월1일)했고,당시 정일권(丁一權) 총리는 ‘국회에서 비상계엄이 불가피하다고 보고’(11일)했다.학생시위에 체제전복 등 모종의 음모가 개입된 것 처럼 직·간접으로 언급한 점도 눈에 띈다. 5월26일치 ‘참고사항’에 ‘양 내무(楊燦宇),학생데모 배후에 정치인 간여있다고 언명’,6월3일 ‘기타’란에 ‘정부전복 등 선동하던 간첩 2명 체포’라고 적었다.3일 ‘주요업무’ 항목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가 ‘학생동태를 분석’한 사실을 적시했다. 5일 ‘주요정무’로 기록된 ‘양 내무,파괴로 쏠리는 군상을 막고 무기고지켜준 학생 28명,민간인 1명에게 감사장 수여’라는 대목에서는 당시 6·3사태를 둘러싼 정권 수뇌부의 시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앞서 63년 3월16일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군정연장 성명 직후 재야지도자의 시위 상황을 기록한 방식도 비슷하다.다만 시위 인사의 움직임을 주로 ‘국내외뉴스’란을 통해 ‘담담하게’ 실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재야정객 군정연장 반대 관철키로 진로를 결정’(3월19일),‘윤보선,허정 양씨 산책이라는 구실로 시청앞에 나타나 단독시위’(20일),‘재야인사들민주구국전선 결성선언대회 뒤이어 데모’(22일) 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22일치 ‘국내외뉴스’란에는 ‘미국 케네디 대통령 한국사태에 언급,정정(政情)안정의 갈망과 민주정치 부활에 지대한 관심표명’,‘3군 지휘관회의 소집,3·16성명 절대지지와 군단결 해치는 언동 불용을 결의’ 등 친(親)정부 성향의 내·외신을 집중 부각시켰다.61년 쿠데타 직후처럼 일지 작성의 주요 기준은 여전히 ‘정권 안보’였다. 기동취재 소팀 박찬구기자 ckpark@
  • [승화되는 ‘5·18’정신](3)치유되지 않은 상처

    5·18은 80년대의 어둠을 뚫고 나가는 선봉에 선 거대한 횃불이었다.‘산자여 따르라’는 외침처럼 지식인들은 행동에 나섰고 민중의 힘도 이와 함께했다.그 힘은 민주화와 정권 교체를 가능하게 했다.하지만 횃불의 그늘에는아직도 아픔을 안고 신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참상의 아픔은 ‘현재진행형’이다.아픔엔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다. “끌려간 다음에 많이 맞았어.머리가 아파” 지난 97년 어딘가를 떠돌다가 경찰에 의해 전남 무안의 한 부랑인 수용시설에 들어온 김모씨.자신의 가족과 나이,주변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 어디선가 맞았다는 기억만 흐릿할 뿐. 그는 5·18피해자로 등록돼 보상금을 지급받았다.그뒤 보상금을 챙긴 가족이 떠나버리고 지금은 복지시설에 수용된 채 쓸쓸하게 보내고 있다.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5·18 때 겪은 참상의 후유증으로 인한 정신질환자는 사망한 30여명을 빼고도 120여명에 이른다. 이들 대부분은 머리를 심하게 다쳤거나 여자인 경우 집단 성폭행당한 경험을갖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의 불행을넘어 가족에게도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의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80년 5월 11공수여단 소속으로 진압작전에 투입됐다가 정신질환으로 병원을전전하다 최근 숨진 하모씨(전남 나주시).그의 어머니 김모씨(65)는 “5월만 되면 가슴이 저며온다”고 말한다.아들은 5·18을 겪은 후 “누군가 날죽이려고 해요… 살인마가 와요”라고 넋두리를 하며 고통에 시달렸다.그 모습을 생각하면 어머니 김씨는 지금도 온 몸이 떨린다. 광주시립 S병원에 입원중인 김모씨(38)는 80년 당시 전교 1∼2등을 다투던고교 3년생이었다.하지만 5월19일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에게 맞아 피투성이가 돼 집으로 돌아온 김씨는 6월쯤부터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병아리새끼를 죽인다.나와”하고 악을 쓰거나 혼잣말을 해댔다. 그는 모 의과대 장학생으로 입학했으나 정신분열증으로 판명돼 학업을 중단했다.이어 82년 겨울에는 철도레일에 오른팔을 올려 놓고 자해를 했다. 이들 말고도 당시의 충격으로 알코올중독에 시달리거나 이혼 등으로 가정파탄에 이른 피해자가 갈수록늘고 있다고 5·18기념재단 관계자는 전했다. 광주시립정신병원 정신과 최재영(崔宰榮·35) 전문의는 “5·18 피해자들이공통적으로 겪는 질환으로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우울증’‘불안장애’ 등을 꼽을 수 있다”며 “이들은 사고 당시의 기억이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악몽에 시달리고,심해지면 정신분열증까지 앓게 된다”고 말했다. 이들은 특수정신질환 치료를 위한 병원 설립을 희망하고 있지만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은 그동안 보상이 충분히 이뤄졌다며 병원 설립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 *20년째 유족회 활동 鄭水萬회장. 정수만(鄭水萬·53) 5·18유족회장은 5·18 20주년을 맞는 감회가 남다르다. 80년 동생(31)을 잃고 유족회를 이끈 지 20년째를 맞은 그는 수많은 좌절과고통을 감내하면서도 5·18의 위상을 오늘에 이르게 한 핵심 인사중의 하나다. “5·18이 세계 인권과 평화·민주주의의 견인차로 우뚝 서게 된 데는 광주시민과 국민,전세계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힘이 컸다”고 말했다. 그런의미에서 5·18은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5월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켜가는 ‘현재진행형’,나아가 ‘미래진행형’이라고 덧붙였다. 5·18 정신선양을 위한 투쟁과정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다. 81년 5·18 구 묘역에서 열린 첫 추모제 행사 때는 경찰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수백명의 인파가 몰렸다. 그는 추모제를 주도하면서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현장에서구속된 뒤 검찰 조사과정에서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추가돼 8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추모제 때 제물을 마련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제는 5·18이 국민통합과 지역·계층간 갈등을 해소하는 매개체가 돼야합니다”정회장은 정치적·지역적 이유로 5·18의 전국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광주 최치봉기자. *진실규명 앞장선 해외인사 방문. 지난 80년 이후 5·18 진실규명에 큰 도움을 준 다른 나라의 민주인사들이16일 대거 광주를 찾았다. 5·18 광주민중항쟁 20주년 행사위원회가 ‘보은’의 뜻으로 이들을 초청했다. 특히 해외인사 중에는 81년 광주방문 체험담을 담은 ‘거대한 강물처럼 한국의 기억’이란 책을 펴낸 루이스 M 윌슨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의장과 광주항쟁 3일 후 희생자와 유가족 후원활동을 위해 독일 교회 대표로 당시 광주를 방문한 헬무트 알무쉐 목사가 이곳을 다시 찾았다. 또 이날 광주를 방문한 해외인사는 패리스 하비 국제노동권리재단 사무총장과 댄 존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대표,폴 슈나이스 독일 동아시아 선교회 의장 등 모두 12명이다. 이들은 18일까지 광주에 머물며 비엔날레를 관람하고 5·18 전야제 및 기념식 등 각종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다. 한편 이날 오전 5·18묘역에서는 전국 시사만화 작가회의 주관으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친숙한 만화를 통해 광주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5·18 시사만화 전시회가 열렸다. 광주 남기창기자. * 5·18 광주민중항쟁 20주년…대구서도 다양한 기념행사. 5·18 광주민중항쟁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대구지역에서도 다양한 행사가열린다. YMCA를 비롯한 대구지역의 23개 시민단체들은 광주민중항쟁 20주년을 맞아18일 오후 7시 대구 YMCA강당에서 ‘5·18정신 계승 결의대회 및 기념강연회’를 개최한다.또 대구참여연대는 이날 오후 3시 중구 동성로 대구백화점앞광장에서 광주항쟁 사진전과 홍보 캠페인을 벌이고 희망의 시민포럼은 17일부터 사흘간 경상감영공원에서 광주항쟁 사진전을 갖는다. 이밖에 극장 ‘열린공간 큐’는 17일부터 사흘간 영화 ‘꽃잎’ 등 광주항쟁 관련 영화 6편을 상영하는 ‘광주항쟁 영화제’를 개최한다.한편 대경연합은 이미 지난 14일 200여명의 회원들이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고 돌아왔다. 대구 황경근기자 kkhwang@. *5·18광주민주화 운동…망월동묘역 정치인 발길 줄이어. 5·18 광주민주화운동 20주년을 맞아 망월동 묘역에는 여야 정치인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는 16일 정권교체 이후 처음으로 강창성(姜昌成)부총재,이부영(李富榮)총무,권철현(權哲賢)대변인,맹형규(孟亨奎)총재비서실장,이원창(李元昌)총재특보 등 당직자들과 함께 망월동 묘역을 찾아헌화·참배했다.이총재는 지난 96년 총선과 97년 대선을 앞두고 ‘전략적’ 차원에서 망월동을 방문했었다. 허경만(許京萬)전남지사와 고재유(高在維)광주시장이 이총재를 영접했고,묘역에서는 정수만(鄭水萬)5·18유족회장 등이 안내를 맡았다. 이총재는 “5·18은 특정지역 사람만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주의발전에 큰 획을 그은 역사적 사건으로 거듭나고 있다”면서 “이를 계기로전 국민의 통합과 지역발전을 이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8일 광주에서 열리는 5·18 기념식에는 민주당 김옥두(金玉斗)사무총장,박상천(朴相千)원내총무,이해찬(李海瓚)정책위의장,정동영(鄭東泳)대변인 등당 지도부가 대거 참석한다. 이에 앞서 여야 386 당선자 16명과 원외 지구당 위원장 4명은 17일 오후 망월동 묘역을 공동 참배한다.민주당에선 김민석(金民錫)의원과 임종석(任鍾晳)·장성민(張誠珉)·정범구(鄭範九)·송영길(宋永吉)·김성호(金成鎬)·이종걸(李鍾杰)·함승희(咸承熙)당선자,한나라당에선 원희룡(元喜龍)·오세훈(吳世勳)·김영춘(金榮春)·안영근(安泳根)·정병국(鄭柄國)·심규철(沈揆喆)·김부겸(金富謙)·심재철(沈在哲)당선자가 공동참배단에 합류한다. 광주 최치봉기자. *5·18광주민주화 운동…계엄군 훈·포장 영예인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위를 진압하거나 시민군과의 전투에서 공을세웠다는 이유로 일부 계엄군에게 수여된 훈·포장은 과연 영예인가? 5·18 광주 진압작전인 충정작전에 계엄군으로 참가해 훈·포장을 받은 사람은 장성 3명,영관장교 7명,위관장교 11명,하사관 19명,사병 28명 등 모두69명에 이른다. 이들은 충정작전이 마무리된 직후인 8월20일 훈·포장을 받았다.포상 이유는 광주시내 일원에서 벌어진 시민들의 시위와 시민군을 효과적으로 진압해공을 세웠다는 ‘충정작전 유공’이다. 이 가운데 훈장은 36명,포장은 33명에게 수여됐는데 5·18에 대한 사법적,역사적 평가가 광주사태에서 민주화운동으로 바뀐 이후에도 이를 반납한 사람은 현재까지 1명도 없다.다만 당시 특전사령부 정호용 소장과 제3특전여단최세창 준장 등 2명만이 지난 김영삼 정권때 5·18재판으로 형을 받아,수여받은 훈장이 정부에 의해 박탈됐을 뿐이다. 이에대해 5·18관련단체들은 당시 계엄군의 활동이 엄연히 불법적인 것으로확인된 만큼 그들이 받은 훈·포장은 당연히 자진 반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수만 5·18유족회장은 “용서와 화해는 죄를 뉘우치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라며 “5·18로 받은 훈·포장을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용서와 화해의 손짓을 할 수 있겠느냐”며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다. 광주 남기창기자
  • [김삼웅 칼럼] 분노도 슬픔도 잃은 광주항쟁 20년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이다.”(철학자 아도르노), “아,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 처참하지 않았으리.”(김남주 ‘학살1’)그래서 어쨌다는 말이냐고 묻는가. 과거보다 현재,미래지향,국민화합,상생정치가 중요한 마당에 어쩌자고 과거사를 꺼내느냐고 힐난하는가. 해방후 친일파 척결하잘 때도 그랬고 4·19후 반민주행위자 처벌하잘 때도 비슷했고 89년 5공청산때도 똑같았고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다. 이런 악순환으로 역사는 역류하고 국민은 피를 흘렸다.청산할 때 청산하지않고 범법자들을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나타난 역사의 악순환인 것이다. ‘게르니카의 학살’보다 더 처참한 광주학살은 지금 ‘역사의 평가에 맡기는’것으로 매듭지어진 상태다.“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E H카)라는 것은 중학생도 아는 상식인데 당대사의 진실을 과거라는 무덤에 매장하고 우리는 지금 ‘화해’와 ‘상생’의 신소리나 외쳐댄다.회칠한 무덤가에서 양심에 털난 위선의 합주곡이랄까. 우리는 광주항쟁의 역사성과 혁명성 그리고 현재적 실천성을 거세하고 광주학살을 과거완료형으로 묻어두길 바란다.‘흘러간 과거사’로 화석화하고 ‘광주지역사건’으로 지역화시키면서 ‘오래된 사건’의 하나로 박제(剝製)화를 노린다. ■프랑스혁명과 광주항쟁. 발포명령자,학살자 등 가해자들의 반성과 참회가 없는 터에 피해자들만 용서하고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설익은 ‘용서의 미학’을 비웃기라도 하듯 민주주의를 압살한 무리들이 민주의 가면을 쓰고 날뛰고,인권을 유린한 자들이민주투사로 행세하고,광주항쟁을 폭도로 매도한 언론인들이 유력한 논객행세를 한다.한 줄기 분노도,슬픔도 잃어버린 당대사(인)의 모순,허위 그리고이중성이여! 근대의 역사는 프랑스혁명·산업혁명과 함께 시작됐다고 한다.이미 토크빌이 지적했듯이 혁명가(프랑스)들이 군주제를 철폐하고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보냈음에도 결국 혁명은 중앙집권화를 추구하던 절대주의의 오랜 역사적 과제를 계승해 완성하게 됐다.광주학살은 ‘단두대’는커녕 가해자들의 사과한마디도 받지 못했다.프랑스혁명이 반봉건·반귀족의 부르주아 혁명이라면광주항쟁은 “4·19의 자유민주주의 혁명으로 반독재 투쟁에 머물렀던 한계를 극복하고 그것과 결탁한 외세의 제국주의 침략까지 분쇄하고자 했던 민중해방운동”(전남사회문제연구소·1988)으로서 ‘현대사의 일대 분수령’이다. 80년대 이후의 민족민주운동은 광주의 피를 먹고 자랐다.광주의 피가 아니었다면 6월항쟁은 상상하기 어렵고 6월항쟁이 아니었다면 군부독재의 종식은불가능했다.1789년 프랑스에는 단 하나의 혁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연쇄적인 충돌을 일으킨 세 종류의 혁명 즉 도시하층계급의 분노와 농민들의 불만이 짧은 기간에 지도적인 개혁가들의 의지와 마주치게 되면서 시민혁명으로 나타났듯이 광주항쟁도 현대사의 제반 모순에서 역량을 키워온 민족·민주·민중 세력에 의해 분출됐다.5·18광주민중항쟁은 민주화운동인 동시에궁극적으로는 민족통일운동에 연결되는 위치에 있다.특히 갑오농민전쟁·호남의병전쟁·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전통에서 5·18의 성격은 그참모습을 찾게 된다. ■무장한 비폭력저항. 신군부가 다시 광주를 무력으로 장악하면서 시민들의 무장은 시작됐다.아우슈비츠나 게르니카에 못지않는 학살에 대항하는 자위수단이었다.그러나 많은 총기가 시민들 손에 쥐어졌는데도 항쟁기간 10일동안 은행·백화점·금은방은 물론 구멍가게 한 곳도 털리지 않았다.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고립무원의 공간에서 라면과 김치를 나눠먹고,총상으로 피가 부족하자 헌혈자들이 줄을 이었다.노점상과 부녀회원들은 김밥과 음료수를 시위대원은 물론 계엄군에도 나눠주었다. 세계혁명사상,민중봉기사상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이런 광주항쟁을 일부에 서 폭력성으로,지역주의로 매도했다.폭력이 아닌 ‘무장한 비폭력주의’의 성격과 함께 왜 광주에서만 항쟁이 일어났는가를 묻기 전에 왜 다른 지역은 침묵했는가를 먼저 물어야 옳다. 광주학살로 희생된 259명의 영령과 지금도 고통을 겪고 있는 수백명의 부상자들 앞에 분노도 슬픔도 잃어버린 생자(生者)들은 어찌해야 하는가.5월은 묻고 있다. 김삼웅 주필 kimsu@
  • [‘3共통치일지’로 본 5·16](1)5·16이후 한달

    16일은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한 지 39년이 되는 날이다.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 치하의 18년은 아직까지 많은 논란의 대상이되고 있다.그러나 최근 발견된 ‘國家再建最高會議(국가재건최고회의) 議長室(의장실)’의 ‘日誌(일지)’는 당시 시대상황을 쿠데타 세력의 시각에서생생하게 기록한 데다 종래의 다른 자료와는 달리 윤색되지 않았다는 점에서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최초로 공개된 쿠데타 세력의 공식일지를 통해 쿠데타 직후부터 1968년까지의 상황을 4회에 걸쳐 정리한다. ‘未明(미명) 軍部(군부)에서 無血革命(무혈혁명).軍事革命(군사혁명)委員會(위원회) 設置(설치).政權引受(정권인수)를 宣言(선언).全國(전국)에 非常戒嚴令(비상계엄령)’-60년대 우리 현대사의 굴곡은 한줄의 검은색 펜글씨로시작되고 있었다. 지난 61년 5·16쿠데타 당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이 작성한 ‘日誌(일지)’ 첫페이지 첫째줄이다.오른쪽 상단에는 ‘4294.5.16.火’라고 적혀 있다.‘4294’는 단기로 1961년을 뜻한다.A3용지를 가로로 뉘어 한줄씩 국한(國漢)혼용으로 기록한 일지는 ‘혁명’‘중요업무’‘국내외뉴스’ 등의 항목별로 분류돼 있다. 특히 5·16 이후 한달 남짓 기간에는 입법·행정·사법 등 주요부문의 장악상황,정치·경제·사회 등에 걸친 사후조치,쿠데타를 긍정 평가한 국내외 언론의 기사제목 등을 주로 기록했다.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쿠데타 세력의 속내를 반영하고 있다. 16일치 일지는 ‘未明…非常戒嚴令’에 이어 ‘혁명위,각급 의회 해산.전국무위원 체포 명령’‘혁명군 전국 중요도시 장악.전기능 일시 완전 정지’‘UN군 사령관,질서회복과 휘하 장병 금족령(禁足令)’‘그린 대리대사 윤대통령과 회담’ 등으로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요약했다. ‘각급교 임시휴교 상태,관청 집무정지,시가 평온,상가 한산,전방 이상없음’이라는 대목에서는 당시 쿠데타 세력의 상황 판단을 읽을 수 있다.이들의자체 평가는 다음날 일지에 ‘군부무혈 쿠데타 완전 성공,혁명위 3권 완전장악’이라는 문구로 드러난다. 이때부터 최고회의는 쿠데타 정권의 권위를 세우고 민심 동요를 막기 위해용공혐의자,반혁명세력,부정축재자,폭력배 등을 집중 단속한다.공직자 가운데 병역미필자,축첩자,무단 결근자 등도 철퇴를 맞았다. 17일에는 ‘용공분자 단속을 지시’했고,18일에는 ‘폭력배 1,500명을 검거’했다.‘용공분자 2,000여명을 검거’(22일)했고 ‘깡패를 탄광으로 보내근로정신을 체득토록 지시’(23일)했다.‘일간신문 76건,일간통신 305건,주간신문 453건의 등록을 취소’(27일)하고 ‘국민학교 과외수업을 엄금토록지시’(29일)한 점도 눈에 띈다. 또 일지에 적힌 국내외 동향은 대부분 친(親)쿠데타 성향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통치일지가 정사(正史)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감안하면,쿠데타 세력이 역사적·국제적 정통성 확보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18일 육사생에 이어 19일에는 공사생이 ‘혁명대열에 하늘과 땅에서 입체적 시위’를 벌였다고 적었다. 때로는 남북 대치 상황이 쿠데타 정권의 정당성 확보 논리로 동원됐다.‘공산세력 지구 남반부로 침투,미국 케네디 대통령 연설’(6월2일),‘재일동포에 반공이념 재교육 의결’(8일),‘국방장관 임전태세 완비 천명’(9일),‘월남 공산반도 100여명 사살’(11일),‘한국 군사혁명정권은 방공 강화,맥나마라 국방장관 상원 외교위서 증언’(15일) 등을 부각시킨 점이 이를 방증한다. 기동취재소팀. *JP와 5·16. 4·13 총선 이후 신중한 행보를 거듭하고 있는 자민련 김종필(金鍾泌·JP·)명예총재가 5·16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다. 한 측근은 JP가 16일 오전 서울 한 호텔에서 열리는 5·16 민족상 시상식에참석한 뒤 국립묘지에 들러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 내외 묘소를 참배한다고 밝혔다.18일에는 재단법인 ‘5·16 민족상’ 임원과 오찬도 함께한다. 5·16 39주년을 맞은 JP의 심정은 대단히 착잡한 듯하다.총선 참패로 정치적 입지가 위축된 데다 ‘보수본류’의 법통을 잇는다고 자처한 자민련도 창당 이래 최대위기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15일부터 나흘간 열리는 자민련 낙선자 권역별 간담회에 참석할 계획이었으나 돌연 취소했다.측근은 “날마다참석하기 어려워아예 처음부터 불참하기로 했다”고 밝혔다.이런 와중에 지난해 결별했던 한국신당 김용환(金龍煥)의장의 갑작스런 방문은 그에게 다소 힘이 된 것처럼 보인다.JP는 지난 13일 밤 청구동 자택을 찾은 김의장을 반갑게 맞아들이며 “선거때 고생이 많았다”며 격려했다고 한다. 5·16때마다 ‘내각제’를 비롯한 정치적 화두를 던져온 JP가 과연 올해에는 어떤 속내를 비칠지 주목된다. 황성기기자 marry01@
  • 기사 하루 124건 삭제 당했다

    80년 신군부의 5·17조치 이후 당시 계엄당국의 언론검열로 보도되지 못했던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기사들이 한 언론학자의 노력으로 20년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 12일 순천향대학교에서 열리는 언론학회(회장 박영상) 2000년 봄철 정기 학술발표회에서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이민규(40)교수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언론보도 분석:검열 삭제된 기사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통해 당시 신군부의 언론검열과 이로 인해 보도되지 못한 기사들의 실상을 심층적으로 분석,발표한다. 이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당시 계엄당국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서명한 ‘5·17 계엄지역 확대조치 및 포고령 제10호에 의한 보도통제지침’에 의거,언론매체에 ‘칼질’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논문은 광주항쟁 발발 다음날인 5월 19일부터 6월 1일까지 2주 동안의 검열삭제된 기사를, 매체별로는 신문 7,통신 2,방송국 5개 등 총 14개의 언론매체를 분석 대상으로 하였다. 한편 10·26사건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79년 10월 27일부터 계엄이 해제된81년 1월 24일까지 총448일간의계엄기간 동안 계엄당국이 검열한 기사는 모두 27만7,906건으로 하루평균 620건을 검열한 것으로 나타났다.이 가운데 전면삭제 1만1,033건(4%)과 부분삭제 1만6,023건(5.8%)을 포함해 총 2만 7,058건의 일부 또는 전체가 검열로 잘려나간 것으로 집계됐다. 매체별로는, 전체 27만여건 가운데 검열빈도는 11만 6,000여건으로 통신이가장 높았다.그러나 삭제건수는 총2만7,000여건 가운데 신문이 1만1,485건(43%)으로 가장 높았고 방송(26%),통신(25%)순이었다.계엄발표 이후 날짜별 검열·삭제비율은 80년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전후가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특정일의 경우 검열기사 대비 삭제기사 건수가 54%에 달하기도 했다.검열기사의 절반이 삭제된 셈이다. 한편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검열 건수는 총1만1,616건. 이 가운데 삭제된기사는 모두 1,739건으로 검열대비 삭제 비율은 15%로 전체평균인 9.7%를 웃돈다.구체적으로는 하루평균 829건의 기사를 검열했고,124건이 삭제된 것으로 나타났다. 논문에서 이 교수는 “그동안 알려진 것과는 달리 광주항쟁 당시 진실을 보도하려 했던 언론인들의 노력을 곳곳에서 발견했다”며 “당국의 검열조치앞에서도 직필을 굽히지 않았던 투철한 기자정신이 오늘의 언론자유를 쟁취하게 된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밖에도 ▲광주민주화운동의 첫 희생자는 5·17포고령 직후인 18일 새벽 교내에 진입한 계엄군을 피해 달아나다 추락사한 전북대생 이세종군(당시 20세)이며,▲국제통화기금(IMF) 협의단이 이 기간중 방한,정부 관계자들과 경제정책에 대해 협의한 사실 등을 새롭게 밝혀냈다. 정운현기자 jwh59@
  • 3共 朴正熙시대‘통치일지’발견

    청와대는 지난 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68년까지 국가재건최고회의 및제3공화국 대통령 비서실에서 작성한 국정 일지를 발견,11일 공개했다. 청와대 공보수석실 통치사료비서관실은 최근 청와대 도서관 창고의 자료를정리하는 과정에서 5·16 이후 집권한 최고회의 수뇌부 일지 및 63년 12월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취임한 뒤 68년까지 5년동안 대통령 비서실이 작성한 일지 총 15권중 67년분 1권을 제외한 14권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자료는 검은색 하드커버의 겉장에 ‘日誌’라고 한자로 적혀 있으며,국가재건최고회의 통치기 및 제3공화국의 주요 사항을 항목별로 나눠 펜글씨로기록하고 있다. 일지에 따르면 첫날인 61년 5월16일에는 ‘혁명’이라는 항목에 ‘미명 군부에서 무혈혁명,군사혁명위원회 설치하고 정권인수를 선언,전국에 비상계엄령,혁명위 각급회의를 소집하고 전 국무위원을 체포할 것을 명령’이라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또 61년 10월18,19일 이틀동안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일본 오키나와(沖繩)의 미 제7함대 항공모함을 비공개로 시찰했다는 등 비공개 기밀사항도 수록되어 있다. 아울러 61년 9월7일자 ‘중요업무’란에는 ‘백범 암살범 안두희가 특수폭행으로 서울지검에 송치됐다’는 내용과 함께 ‘각 정당 및 사회단체에 대한동향을 내사중’이라는 보고사항이 들어있다. 정 비서관은 “특히 최고회의 초기에는 ‘외교’를 제1항목에 두어 최고회의가 쿠데타 성공뒤 국제여론을 민감하게 체크했음을 반증한다”면서 “현대사학계의 검증을 거친 결과,당시의 통치활동을 기록한 유일한 일지임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대통령 관련 기록물은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라 후대 역사의 심판이나 국정운영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국가자산이라는 게 김 대통령의인식”이라면서 “이달중 정부기록보존소로 자료를 이관해 국가자료로 영구보존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양승현기자 yangbak@
  • 광주항쟁 장편소설 문순태‘그들의 새벽’

    문순태의 장편소설 ‘그들의 새벽’이 나왔다. 소설류를 별로 내지 않아온 한길사가 펴낸 2권짜리 이 장편소설은 5·18 광주항쟁을 다루고 있다.사람을 떠난 권력이 얼마나 비인간적일 수 있는가와너나를 가리지 않는 공동체가 얼마나 인간적인 삶을 창조할 수 있는가라는관점에서 5·18은 희귀한 소설적 광맥이다.그러나 5·18에 관한 일반의 관심이 아직도 지역적으로 보편화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 소설적 광맥에 관심을기울이는 소설가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그리고 이 광맥을 차분히 천착하기에는 지금껏 여기에 눈길을 주어온 소설가들의 피돌기는 너무 빠르다. 문순태는 “이 소설을 탈고하고 나서 20년 만에 비로소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고 말한다.20년 전 5·18 당시 신문사 부국장이었던 작가는 항쟁기간 내내 광주에 남아 모든 것을 직접 보고 겪었다. 이 직접 체험은 커다란 자산이기도 하지만 소설을 쓰는 데 꼭 좋은 것만은아니라고 작가 스스로 말하고 있다.거대한 역사적 경직성 앞에서 소설적 형상화 작업의 어려움을끊임없이 실감한다는 것이다.“진실 드러내기와 문학적 형상화 사이에서 그동안 많은 갈등을 겪었다”면서 작가는 “진실 드러내기보다 소설미학에 치중하게 된다면 영령들의 죽음을 욕되게 할 수도 있기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새벽’은 진실접근을 주로,소설적 형상화를 종으로 삼았다. 그간심심찮게 제기된 ‘5월문학은 이제 식상해 있으니 버전을 바꿔야 한다’는소리를 무시하고 정공법을 고집한 것이다.아직 밝혀야 할 5·18의 진상이 수두룩한 것과 마찬가지로 5·18을 우회하지 않고 제대로 다룬 소설 또한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작가 문순태의 판단이다.기껏 재작년 임철우의‘봄날’과 올 초 송기숙의 ‘오월의 미소’ 정도인데 내면화 등 새로운 형식을 요구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되도록 실체를 수용하면서 광주 사람들이 어떻게 당시 상황에 대응했는가를그리고자 한 ‘그들의 새벽’은 특히 계엄군 철수후 구성된 시민군의 핵심을이룬 사회 밑바닥의 기층민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구두닦이,양아치,철가방,호스티스,가정부,공장 직공 등 밑바닥 청소년들이 무엇 때문에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끝내 죽음을 선택했을까 하는 의문을 풀어보기 위해이 소설을 썼다”는 작가의 말에 ‘그들의 새벽’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항쟁이 터지기 전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했던 이 젊은이들은 항쟁 초기엔계엄군과의 대적을 대학생들이나 다른 번듯한 사람들이 할 일로 시답지 않게여겼지만 점차 목숨을 바칠 자기 일로 받아들인다.그들은 계엄군의 최종 진압이 가까와 지면서 얼마든지 도청을 빠져나와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사수하다 죽음을 맞았다.작가는 그들의 이 선택을 ‘생존을 위한 마지막 자존심’으로 풀이하고 있다. 항쟁 기간을 정공법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만큼 ‘그들의 새벽’에는 소설외적인 사실자료가 많고,기층민 주인공들의 사연과 소설적 얽힘에는 통속적이고 억지스러운 데가 없지 않다.그러나 이는 양적으로 분명 ‘초기’ 수준인5·18 소설문학의 어쩔 수 없는 흠점으로 보인다.문학 바깥에서 5·18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지역적으로나 여러 모로 보다 광역·보편화할 때 보다 ‘소설적인’ 작품이 자연스럽게 터져나올 것이다. 김재영기자 kjykjy@
  • 허위진단서로 ‘5·18보상금’

    허위 진단서와 인우보증서 등을 이용,5·18 광주민중항쟁 피해 보상금을 타내도록 도와준 뒤 사례금을 챙긴 5·18 단체 간부와 의사 등 7명이 검찰에구속됐다. 광주지검 반부패특별수사부(부장검사 金正基)는 10일 평소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5·18 피해자로 꾸며 보상금을 받게 해준 대가로 1억1,000여만원을받은 5·18 광주민중항쟁 구속자회 이무헌(42)회장을 사기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또 이씨와 함께 인우보증서를 작성,각각 1억3,000여만원과 8,000여만원을 받아 챙긴 이모씨(38)와 정모씨(48) 등 가짜 5·18 부상자 5명과 다친 사실이 없는데도 허위 진단서를 꾸며준 뒤 1,000여만원을 받은 전 광주 S병원 의사 김모씨(46)를 구속,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씨는 고향후배 등 평소 친분이 있는 이들이 5·18 당시 부상을 입지 않았는데도 광주시내에서 시위를 벌이다 계엄군에 맞고 상무대 영창에서 고문 등을 당했다는 등 허위 인우보증서 등을 작성하고 의사 김씨에게 부탁,치료 확인서 등을 만들어 보상금을 타도록 도와준 뒤 보상금의 40∼60%를 챙긴 혐의다. 이씨는 자신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여부 심사분과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진료기록이 제대로 보관돼 있지 않아 사실확인이 어려운 점을 악용,이같은 허위 5·18 부상자를 만든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조사결과 이들은 평소 지닌 상처를 5·18 당시 시위도중 입은 부상으로둔갑시키거나 정신적 후유증을 앓는 것처럼 치료확인서와 진단서를 만들어보상 심사를 통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광주 남기창기자 kc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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