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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자호란 다시 읽기] (91) 강화도의 비극

    [병자호란 다시 읽기] (91) 강화도의 비극

    강화도가 함락될 때 김경징, 이민구, 장신 등 조선군의 최고위 지도부는 바다로 도주하여 목숨을 부지했다. 강화도 방어를 책임진 그들은 멀쩡했지만, 그들의 무책임한 행동은 연쇄적인 비극을 불렀다. 그들의 가족을 포함하여 강화성에 있던 피란민들은 모두 ‘도마 위의 고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청군은 성을 점령한 직후 군사들을 시켜 성호(城壕)를 헐어 버리고 행궁(行宮) 관사를 불태운 뒤, 성안에 있던 남녀노소들을 끌어냈다. 강화도의 이곳저곳에서 처참한 장면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도망간 김경징, 삼대 여인들 모두 자결 비극의 손길은 먼저 여자들과 아이들에게로 뻗쳐 왔다. 청군이 몰려오자 여자들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도망치다가, 혹은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때로는 지아비와 아들의 강요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성구(李聖求)와 이지항(李之恒)의 처는 청군의 손에 죽었다. 권순장(權順長)과 그 집안 여자들의 죽음은 특히 참혹했다. 권순장은 김상용과 함께 불붙은 화약 더미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권순장의 아내는 자신의 목을 매기 전 세 딸을 먼저 목매어 죽게 했다. 권순장의 누이동생 또한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민성(閔 )은 먼저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고 자결했다. 비극은 김경징 집안의 여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경징의 모친(김류의 처), 아내(김류의 며느리), 며느리(김류의 손자며느리) 등 삼대의 여인들이 모두 자결했다.‘인조실록’에 따르면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金震標)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협박하여 자결하도록 했다고 한다. 자신의 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김진표의 처가 자결하자 김경징의 어머니와 처도 따라서 자결했다는 것이다. 청군에게 포로가 된 사람도 줄을 이었다. 청군은 젊고 고운 여인들을 사로잡느라 혈안이 되었는데 그 와중에 희생자가 속출했다.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 유근(柳根)의 집에서는 열두 명,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俊謙)의 가족은 열한 명이 포로가 되었다. 한명욱(韓明勖), 정백창(鄭百昌), 여이징(呂爾徵), 신익융(申翊隆), 정선흥(鄭善興), 김반(金槃), 이경엄(李景嚴), 한여직(韓汝稷) 등 사대부가의 부인들이 모두 포로가 되었다. 일반 상민들의 피해도 참혹했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 경기도 연안의 백성들 또한 다투어 강화도 주변의 섬으로 밀려들었다. 반상(班常)을 막론하고 ‘섬으로 들어가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믿음이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과 달리 청군이 상륙하고 강화성으로 몰려오자 그들은 앞다투어 마니산(摩尼山) 등지로 도주했다. 청군은 연일 병력을 풀어 마니산 일대를 수색했고, 백성들은 그 와중에 피살되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왕세손의 비극 청군에 의한 살육과 자살이 속출하는 와중에 왕세손이 강화성에서 탈출에 성공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왕세손은 바로 인조의 손자이자 소현세자(昭顯世子)와 강빈(姜嬪)의 아들이었다. 인조와 소현세자를 이어 장차 보위(寶位)에 오를 인물이기에 청군이 사로잡으려고 혈안이 된 존재이기도 했다. 청군이 강화성으로 밀려들 때, 강빈은 상민(常民)의 복장으로 변복하고 여염에 몸을 숨겼다. 그녀는 자신의 동생 강문성(姜文星)과 김인(金仁), 서후행(徐後行) 등 다섯 명의 내관(內官)에게 원손을 맡겼다. 그들은 원손을 업고 바닷가로 내달렸다. 청군은 추격해 오는데 내관 김인이 탄 말은 제대로 달리지 못했다. 위기일발의 상황이었다. 그들은 송국택(宋國澤)이 제공한 말로 바꿔 타고서야 겨우 해안에 이를 수 있었다. 마침 해안에는 배를 대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고, 원손은 우여곡절 끝에 교동(喬桐)을 거쳐 다른 섬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젖먹이 시절부터 이렇게 간난신고를 겪어야 했던 원손의 운명은 비극적이었다. 그는 강화성 탈출에는 성공했지만, 항복 이후 볼모가 되어 끌려갔던 아버지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원손은 1645년 귀국했지만 아버지 소현세자는 급사했고, 어머니 강빈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 자신 또한 왕세자 자리에 올라보지도 못한 채 숙부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에게 밀리고 말았다. 병자호란은 원손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던 것이다. 강화도 공략을 지휘했던 구왕 도르곤(多爾袞)은 강화성 점령 직후 역관 정명수(鄭命壽)와 김돌시(金乭屎) 등을 시켜 항복을 요구했다. 조선 측에서 원임대신 윤방(尹昉)을 보내 요구를 받아들이자, 도르곤은 휘하의 병력을 들여보내 정전(正殿)을 점거한 뒤 성안에 계엄을 실시했다. 그들은 조선 포로 가운데 지체가 가장 높은 세자빈을 엄중히 감시하는 한편, 호서(胡書)가 쓰여진 신표(信標) 수십 개를 만들어 성을 드나드는 조선 사람들을 통제했다. 신표가 있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여긴 사람들은 그것을 구하려고 아우성을 쳤다. 도르곤은 강화도에서 사로잡은 왕실과 고관들의 가족을 앞세워 남한산성의 저항 의지를 꺾어놓을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점령 직후, 포로들에게 대한 대우는 괜찮은 편이었다. 특히 강빈 일행에 대해서는 각별히 신경을 썼다. 강빈 일행을 이동시킬 때 병력을 풀어 호위하는가 하면, 지나는 길에 도랑이나 험한 곳이 있으면 길을 수리한 뒤 지나가도록 하는 등 호의를 베풀었다. 청군 가운데 만주병들은 군율이 잡혀 있어서 탐욕과 음란함이 덜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몽골병이나 한병들은 달랐다. 특히 공유덕과 경중명 휘하의 병사들이 저지르는 겁략이 심각했다. 그들은 몽골병과 함께 곳곳을 뒤져 여자들을 잡아가고, 주단과 패물을 약탈했다. 강화도를 점령 한 지 9일이 되던 날의 정경은 처참했다. 청군은 포로들을 남한산성으로 몰고 가면서 대대적인 노략질을 감행했다. 관청과 여염에 불을 지르고 반항하는 사람들을 도륙했다. 이날의 참상을 기록한 사서에는 ‘시체는 쌓여 들판에 깔리고 피는 강물을 이루었다.’거나 ‘눈 위를 기어다니거나, 죽거나, 이미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아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군율 시행의 난맥상 그렇다면 강화도의 ‘참극’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는 김경징 등은 어찌 되었을까? 항복 직후, 김경징 등에게 군율을 적용하여 극형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조는 오히려 ‘김경징이 거느린 군사가 적었으며 장신은 조수(潮水) 때문에 배를 통제할 수 없었다.’며 사형은 지나치다고 손사래를 쳤다. 인조는 김경징 등을 서쪽 변방에 유배하는 것으로 그치려고 했다. 언관들의 반발과 비판이 그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에게 사형을 내렸다. 김경징에게는 끝까지 예우를 갖춰 사사(賜死)시켰다. 충청수사 강진흔(姜晉昕)도 참수되었다.‘잘 싸우지 못하여 적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게 했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참으로 억울한 죽음이었다. 김경징이나 장신과 달리 끝까지 청군과 싸우려 했던 그였다. 그를 죽이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충청도 수영(水營)의 군관과 병졸들이 대궐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목놓아 울면서 강진흔의 원통한 정상을 비변사에 호소했다. 억울한 죽음을 앞에 두고도 강진흔은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함께 의금부에 갇혀 있던 김경징이 사형 결정 소식을 듣고 목놓아 울었는데 비해, 그는 태연했다고 한다. 오히려 자신이 차고 있던 칼을 옥졸에게 주며 ‘이것은 예리한 칼이다. 이것으로 내 목을 빨리 벤 뒤 네가 가지고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던 그는 처형을 앞두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김경징의 죽음을 기록한 ‘인조실록´사신(史臣)의 평가는 냉혹했다. 사신은 김경징을 가리켜 한낱 ‘광동(狂童)’이라고 평가했다.‘아는 것이 없고 탐욕과 교만을 일삼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자식을 김류가 잘못 천거하여 나라도 망치고 집안도 망쳤다.’고 적었다. 하지만 고군분투하면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 했던 강진흔이 김경징보다 심한 극형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강진흔과 김경징의 죽음. 그것은 분명 군율 시행의 난맥상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김정일 건강이상설] 주목 받는 北 후계구도

    [김정일 건강이상설] 주목 받는 北 후계구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악화설에 무게가 실리면서 북한 정권의 후계구도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했을 때는 김정일의 세습체제가 확고했었다. 현재는 두드러지는 승계자가 없어 불안정성이 더 높은 것이 차이다. 군 고위관계자도 10일 “뚜렷한 후계구도의 그림이 나오고 있지 않다.”면서 “이로 인한 급변사태에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66세인 김정일 자신은 1974년 김일성 주석이 62세 때 후계자로 선정됐었다. 북한 전문가들은 10일 후계 구도로 부자 세습, 국방위원회 중심의 군부 통치, 군부 및 노동당 지도부의 집단지도체제 등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 가운데 지금 당장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군부 및 노동당 지도부의 집단지도체제 가능성이 가장 높다. 확실한 2인자가 오랫동안 없었던 것도 이유다. 김 위원장 통치 14년 동안 북한은 ‘선군정치’를 강조해오면서 군부에 힘을 실어왔다. 정상적인 정치·경제시스템이 마비된 상황에서 군을 앞세워 사회를 지탱해온 것이다. 비상계엄 형태로 군이 전면에 나서 단기간은 위기관리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북한의 봉건적·가부장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부자세습 가능성도 빼놓을 수 없다. 세 아들인 정남(37), 정철(27), 정운(24)도 후계자로 거론된다. 장남인 정남과 삼남인 정운의 가능성이 차남 정철보다 높다. 정철은 ‘여성 호르몬 과다분비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고, 마약 중독설도 나돌고 있다. 특히 정남은 거주하던 베이징을 떠나 지난 7월 말부터 평양에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후계작업을 위한 포석이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부고]

    황석규(제주역사문화진흥원 연구원)순애(밝은한의원 원장)현숙(신일산업정보고 교사)운영(군산 행복한약국 한약사)씨 부친상 7일 제주대병원, 발인 10일 오전 9시30분 016-586-0410 조재미(전 4·19 서울계엄위수사령관)씨 별세 현종(JADE 대표)미영(재미 음대 교수)인영(평택대 교수)씨 부친상 권공영(의사)김석기(주한미군 시설공병대 전기부장)씨 빙부상 8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0일 오전 7시 (02)3010-2291 이화수(사업)기수(CJ투자증권 리테일영업1판촉팀 부장)강수(사업)씨 부친상 7일 부산 고신의료원, 발인 9일 오전 8시 (051)990-6646 남명진(전 현대상선 상무)광진(미국 거주)씨 모친상 오명남(평안교회 목사)씨 빙모상 8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0일 오전 8시 (02)3010-2265 박석건(단국대 의대학장)씨 부친상 7일 강남성모병원, 발인 9일 오전 5시 (02)590-2352 최명재(육사 8기 육군 중장·전 보훈공단 이사장)씨 별세 종태(태창 대표)종철(사업)종영(태성홀딩스 부사장)씨 부친상 8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1일 오전 6시 (02)3010-2294 오한풍(블루파크 사장)흥천(동서울집중국 우체국)씨 모친상 8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0일 오전 7시 (02)3010-2252 이충희(성동구청)도희(LIG손해보험 홍보팀장)성욱(비앤지 대표)씨 모친상 8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0일 오전 8시 (02)3010-2293 한창균(기아자동차 해외영업본부 상무)영균(대신증권 전무)일균(삼성전기 부장)씨 모친상 8일 서울대병원, 발인 10일 오전 10시 (02)2072-2091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대한민국 술박물관’ 관장 박영국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대한민국 술박물관’ 관장 박영국

    한해 중 가장 취기 오른 달이 막 떠오르려 한다. 휘영청 중추만월이다. 어찌할 거나, 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빠져 죽었다는 이백(701∼762)의 시 한 수를 감상해 보자.‘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酒星)이란 별이 없을 것이오. 땅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천(酒泉)이란 곳이 마땅히 없어야 할 것이로다. 하여, 술을 좋아함을 어찌 부끄러워하리. 옛날에 청주를 성(聖)이라 했고 탁주를 현(賢)이라 했다네. 현도 성도 벌써 술을 즐겨 했는데 굳이 신선을 찾을 필요 뭐 있겠는가.’ 달 그림자와 자작하는 ‘월하독작(月下獨酌)’에 나오는 대목이다. 시를 읊은 속내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술을 예찬했다기보다 술의 ‘진의’를 노래했으리라. 붓을 한번 휘두르면 불후의 명작들을 줄줄 써낸 ‘천상의 시선’이기에 말이다. 민족 최대의 명절 한가위! 이번 주는 이런 분위기다. 만나는 사람마다 고향 가느냐고 안부를 묻는다. 오곡백과가 푸짐한 주안상에 가족 친지들이 정답게 모여앉을 터. 뭔가 꼬인 게 있다면 재미있는 술 얘기로 술술 풀어보면 어떨까.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개산리에 위치한 ‘대한민국 술박물관’을 수소문 끝에 지난 주 찾았다. 야트막한 언덕을 끼고 6600㎡의 부지에 2층 건물의 실내전시장과 야외전시장으로 구성돼 있다. 박물관 마당으로 들어서자 덩치 큰 성인만 한 시석(詩石)이 떡 버티고 있었다.‘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입나 술 사먹지.-소야 신천희 짓고 아무아무개 쓰다.’ 제목이 ‘술타령’으로 애주가들의 심정을 간단명료하게 그렸다. 박영국(53) 관장의 안내를 받아 실내전시장에 들어섰다. 제1전시실은 ‘민속품 전시관’‘우리술 전시관’이었다. 어디서 모았는지 전통술을 빚는 데 쓰이는 여러 양조도구들, 술 관련 고서와 각종 자료 등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박 관장은 이 가운데 조선시대의 주법이 담긴 ‘향음주례홀기(鄕飮酒禮笏記)’를 펼쳐 보이며 “옛날 선비들은 ‘남의 집에 가서 일곱잔 이상 마시지 말고 술잔을 깨끗이 닦아 올린다.’고 돼 있다.”면서 당시의 주법이 엄격했음을 잠시 설명한다. 아울러 조선시대 주조역사를 기록한 ‘조선주조사’ 원본, 전통술 제조의 온갖 비법이 담긴 ‘규중세화’ 등 문화재급 희귀본들에 대한 설명도 이어진다. 뿐만 아니다. 일반 가정에서 술 빚는 것을 금지했던 1910년대, 한 시골 가장이 여동생의 결혼을 앞두고 군수에게 ‘혼사를 앞둔 만큼 술을 빚게 해 달라’고 탄원한 ‘자가양조허가 소원서’, 대한민국 교통부장관이 지정한 ‘관광 민속주’, 비상계엄때 육군 대령의 이름으로 발표한 술에 관한 담화문과 경고문 등도 역시 눈길을 끄는 자료들이다. 술을 다룬 소설책이나 수필·시집 등도 족히 1000여권은 돼 보였다. 그 중 천경자 화백이 쓴 ‘캔맥주 한잔의 유희’도 있었다. 이런 자료들 사이로 전시실 벽에는 술과 관련된 글들이 쭉 붙어 있었다.‘술의 어원을 아시나요’라는 제목에는 ‘술이란 열을 가하지 않아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거품이 괴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수블-수을-수울-술 등으로 변해져 왔다.’고 적혀 있다. 또 ‘중추절에 마시는 술은 신도주(新稻酒)입니다. 한해 농사의 풍년에 감사하고, 가장 큰 만월을 맞이하며 신도주와 송편을 빚어 조상께 감사하고’라는 글귀에도 눈길이 멈춘다. 바로 옆에는 ‘인생에는 술항아리 앞보다 좋은 것이 없고 인생 백년을 보내는 데 술만 한 것이 없으니 술잔이 돌아가거든 남기지 마라.’라는 시구가 절로 주흥을 돋운다. 2층의 제2전시실에는 우리나라 소주, 맥주 등의 변천사와 팔도 막걸리 상표와 홍보물, 각종 도자기와 술 항아리 등도 가득 놓여 있었다. 박 관장이 들려주는 에피소드 한 토막. 하루는 일본 관람객이 찾아왔다.‘군은(君恩)’이라고 이름을 붙인 항아리를 보자 일본인은 일왕(日王)이 하사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대뜸 “이건 우리 술항아리인데”라고 했다. 그러자 박 관장은 항아리 뒷면을 보여주었다. 거기엔 전남 목포에서 만들었다는 제작 이력이 적혀 있었다. 머쓱해하는 일본인에게 우리 술 문화가 일본의 그것보다 왜 우수한지를 한참 설명했다. 이곳에는 외국인들도 소문을 듣고 가끔 찾아온다. 하루 관람객은 보통 100∼200명이다. 허영만 화백의 식객 중 ‘소주의 눈물’편도 이곳에서 시작됐으며 시대극을 찍는 드라마나 영화 관계자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주조회사 관계자들도 찾아와 박물관을 팔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하지만 한사코 거절한다. 어떻게 해서 애지중지 이 박물관을 만들었을까. 술부뚜막과 술방이 있는 야외 전시장 의자에서 박 관장과 마주 앉았다. ▶왜 술 박물관을 만들었나요. “외국에는 술문화를 중요한 관광상품으로 접목시킵니다. 축제도 많지요. 우리나라를 잘 알릴 수 있는 것도 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여러 전통술과 전국에 흩어져서 사라져가는 희귀자료들을 모아야 함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또 춥고 배고팠던 그때 그시절을 알려면 바로 그 술, 경제나 사회, 정치 등 여러 시대상황이 켜켜이 녹아들어 있는 술문화를 봐야 합니다.” ▶비용도 많이 들어갔을 텐데, 처음부터 그런 생각으로 준비했는지요. “군 제대를 하면서 처음에는 먹고살려고 구멍가게를 했습니다. 그런데 가게에 들어오는 술이 천태만상이더군요. 옛날에는 007소주, 이젠백 맥주 등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술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생각에 이르렀지요. 내친김에 술도매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국을 돌아다니게 되고 술과 관련된 자료들을 하나 둘씩 모으기 시작했지요.” 박 관장은 1980년대 초반부터 수원에서 주류 도매상을 했다. 그때만 해도 술박물관을 세운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동생과 함께 전국의 고물상과 양조장을 뒤지다 보니 제법 흥미가 붙었다. 추억 어린 술병과 간판, 그리고 소주 고리(소주를 증류하는 도구), 남들이 관심을 두지 않은 막걸리통도 몇푼씩 주고 사들였다. 사라질 뻔했던 조선시대의 술제조 방법을 기록한 책자나 서류 등도 찾아냈다. 그러는 사이 무려 4만점이나 됐다. 보관해 둘 곳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던 중 부모님의 고향인 안성에 터를 장만했다. 이때가 2004년 11월. 개관한지 얼마 안돼 한 시인이 찾아와 ‘술박물관’이란 이름 앞에 ‘대한민국’을 붙여도 손색이 없다고 했다. 이후 ‘대한민국술박물관’이 됐다. 특정 술에 대한 박물관은 몇 군데 있지만 ‘한국의 술’을 종합세트화한, 그러면서 팔도 주당들의 애환을 가득 담은 유일한 박물관으로 존재의 이유를 드러냈다. 건물 설계도 박 관장이 직접 맡았다. 이곳에 전시된 1만 8000여점 외에 2만여점을 창고에 보관 중이다. 이들도 옛 주막을 재현해 놓은 언덕 위의 전시장에 곧 선보일 예정이다. ▶우리의 술문화를 어떻게 봅니까. “원래 우리 술은 집에서 직접 빚어 어른을 대접하거나 조상 제사를 모시는 엄숙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1907년 조선총독부가 주세령(酒稅令)을 포고하면서 이 풍습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집에서 빚던 가양주(家釀酒)가 이 때문에 자취를 감췄지요. 이후 여러 곡절을 겪은 뒤 1982년에 와서야 전통주 장인들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등 장려에 나섰지만 많은 장인들과 우리의 전통 술들이 세월 속으로 사라진 뒤였습니다.” 박 관장은 이제라도 명맥 끊긴 전통주들을 복원하고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나선다면 와인이나 위스키 못지않게 세계시장에서 호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1∼2년 사이에 술박람회를 꼭 개최할 생각입니다. 그때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주당들이 한 곳에 모여 질펀한 소동을 벌이겠지요. 이런 보람 있는 일을 한 뒤 박물관을 국가에 헌납할 생각입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박영국 관장은 ▲1955년 수원 출생. ▲75년 수원공고 졸업. ▲80년 수원에서 구멍가게 운영. ▲80∼93년 술도매상 운영. ▲89년 술 관련자료 수집 시작. 현재까지 4만여점 수집. ▲98년 경기도 핸드볼협회 회장. ▲2004년 경기도 안성에 ‘대한민국술박물관’ 개관. 향음주례홀기, 조선주조사 등 문화재급 자료와 각종 양조도구 1만 8000여점 전시. #찾아가는 길 평택∼제천고속도로 남안성 나들목에서 나와 중앙컨트리클럽 방향으로 가다가 금광농협 개소지점 근처(031-671-3903)
  • “전직 대통령을 암살하라”

    전직 대통령의 암살 시도를 다룬 강풀 원작의 만화 ‘26년’이 스크린에 옮겨질 계획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영화사 청어람은 29일 “만화 ‘26년’의 제목을 ‘29년’으로 바꾼 영화의 촬영을 9월 중 시작할 예정이며, 류승범, 김아중, 변희봉, 천호진 등이 출연한다.”고 밝혔다. 영화 ‘29년’은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김갑세라는 남성이 자기가 죽인 사람들의 자식들을 모아 당시 계엄군 책임자로 훗날 대통령까지 지낸 ‘그 사람’에 대해 암살을 시도한다는 내용을 담은 일종의 팩션영화. 만화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명시하지 않고 있지만 ‘당시 사건의 책임자’로 대통령을 지낸 인물인 만큼 전두환 전 대통령이 모델이라는 것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영화 ‘29년’은 만화의 틀을 그대로 유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암살을 주 내용으로 하지만 ‘그 사람’의 실명을 언급하지는 않을 계획이다. 제작사 청어람측은 “영화가 명확한 팩션인 만큼 ‘그때 그사람들’처럼 송사에 휘말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면서 “‘그 사람’에 대한 묘사도 실존 인물들과 다르기 때문에 특정 인물의 명예를 훼손할 만한 사안은 없다.”고 말했다.
  • 등돌린 군부·美… 신변위협에 결국 백기

    등돌린 군부·美… 신변위협에 결국 백기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의 측근들은 18일 대국민연설 직전까지도 사퇴 가능성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그럼에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사퇴가 대세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의회의 지지 기반을 잃어버린 데다 믿었던 군부와 미국까지 중립적인 태도로 돌아서는 등 사면초가 양상이었다. 무샤라프는 지난해 10월 야당을 배제한 채 치른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군인 신분으로 출마한 데 따른 법정공방이 벌어지자 11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사실상의 계엄통치를 단행했다. 국민들의 신임을 잃은 지난 2월 총선에선 자신이 이끌던 파키스탄무슬림리그-Q(PML-Q)가 패하면서 야당에 의회와 내각을 넘겨줬다. ‘친정’인 군부도 등을 돌렸다. 대통령 탄핵논의 과정에서 불개입을 천명한 것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75%가 무샤라프의 사임을 원할 만큼 지지율이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섣불리 행동에 나섰다가 쿠데타나 군부통치를 꾀한다는 비난에 직면할 위험이 있었다. 강력한 우방인 미국도 발을 빼는 모습이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17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무샤라프 대통령은 미국에 훌륭한 우방이었다.”고 친미 정책을 호평하면서도 미국 망명을 허용할 것이란 소문에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무샤라프는 어느 한 곳 기댈 데 없는 상황에서 모험을 택하기보다 신변보장과 면책특권 등을 전제로 자진 사퇴를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적이란 판단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무샤라프는 이날 앞으로 거취는 언급하지 않았다. 사퇴를 조건으로 집권 연정과 어떤 밀약이 오갔는지도 분명치 않다. 연정은 무샤라프가 사퇴하면 무혐의 처분하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연정의 한 축인 파키스탄무슬림리그(PML-N)의 나와즈 샤리프 전 총리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무샤라프가 어디에 머물지도 미지수다. 뉴스위크는 사우디아라비아로 임시 망명할 것이란 추측을 내놓았다. 파키스탄 정국은 당분한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PPP당의장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와 PML-N의 수장 샤리프 전 총리가 유력한 라이벌로 분류되고 있다. 누가 권좌에 오르든 25%에 이르는 인플레이션과 전력 부족, 자본 해외 도피, 이슬람 과격 세력 급부상 등 안팎의 난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파키스탄에서 친미 인사 무샤라프가 사임함으로써 미국의 대 테러전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을 전망이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지방시대]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한테서 배우자/김준태 조선대 교수·시인

    [지방시대] 로댕의 ‘칼레의 시민들’한테서 배우자/김준태 조선대 교수·시인

    “전남도청 신관을 헐지 말라!” “5·18항쟁의 마지막 유적지, 영구 보존하라!” 80일 가까이 옛 전남도청-아시아문화전당 공사 현장에서는 농성이 계속되고 있다.5·18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한 ‘기동타격대’를 중심으로 유족회·부상자·구속자들이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 문화전당 관계당국과 사업단측에 분노를 표하고 있다. 도청 본관과 함께 신관(별관)은 5월 항쟁 최대 격전지이며 특히 1980년 5월27일 새벽,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 싸운 최후의 항쟁지로 역사의 증거와 교훈으로 세워두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모은다. 5월 단체와 시민들은 설계를 변경하더라도 ‘신관’을 고스란히 살려두어야 하지, 그러지 않으면 ‘5·18의 1번지’가 반쪽이 돼 버린다고 성토한다.‘아시아문화전당’ 사업 현장에 이런 문제가 생겨서 더욱 떠오르는 역사적 교훈이 있다. 그것은 프랑스의 위대한 조각가 ‘로댕’이 만든 브론즈 조각작품 ‘칼레의 시민’에 관련된 이야기다. 작품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1337∼1453년)의 한 사건을 담고 있다. 이 전쟁은 무려 116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영국군이 프랑스의 거의 모든 지역을 손안에 넣었지만 ‘칼레’라는 도시는 그리 쉽지 않았다. 프랑스왕 필립6세도 방어를 포기한 도시 칼레를 영국왕 에드워드 3세가 끊임없이 포위 공격을 가했다. 칼레로 들어가는 식량 루트를 완전히 봉쇄하고 시민들을 모두 말려 죽이려는 작전을 펼쳤다. 결국 칼레 시는 항복하고, 영국왕은 완강한 저항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시민들 가운데 ‘여섯 명’만을 처형하겠다고 통보해 온다. 그에 응하지 않으면 패배한 칼레 시에 대해 대량 학살을 단행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때 스스로 목숨을 걸고 나간 사람들이 있었으니 칼레 시에서 가장 재력가인 외스타슈, 법률가 데르, 칼레 시에서 도덕적 명망이 높은 비상, 또 한 사람의 비상, 피네, 당드르가 그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 목에 오랏줄을 묶고 맨발로 영국왕 앞으로 걸어갔다. 칼레 시민들에 가해질 대학살극을 막고자 희생양이 돼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그러자 영국왕도 감동한 나머지, 이들 여섯 명의 시민을 놓아주고 칼레 시를 봉쇄작전으로부터 풀어준다. 이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1884년 칼레 시는 조각가 ‘로댕’에게 예의 여섯 사람의 모습을 담은 ‘칼레의 시민’이란 브론즈 조각 작품을 만들게 했던 것 아닌가. 그런데 11년만에 완성된 로댕의 조각 작품(1895년 작)에 대한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백년전쟁 훨씬 뒤에 만들어진 이 조각작품을 어디에다 세워야 하느냐를 놓고 시민들끼리 오랜 논란을 벌인다. 독일의 시인이며 로댕의 비서였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로댕론’을 통해 이렇게 적고 있다. 칼레의 시민들은 여섯 명의 전신상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을 도시의 어디에 세우느냐를 놓고 격론을 벌이다가 마침내 백년전쟁의 최대 격전지인 칼레 시 바닷가에 세우게 된다. 전문가들보다 먼저 칼레 시민들의 의견을 넓게 수렴한 결과이다. 그렇다. 역사적 조각 작품 하나를 세우는 일에도 이렇게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프랑스의 북쪽 도시 칼레의 시민들한테서, 오늘 우리는 큰 교훈을 본받아야 한다.1980년 5월27일 새벽, 최후의 순간까지 광주와 민주주의를 사수한 ‘전남도청’은 그런 의미에서 완벽하게 보존돼야 할 것이다. 벽돌 한 장, 나무 하나라도 똑바로 지켜내야 한다는 마음이야말로 ‘광주정신’을 영원토록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전남도청 신관(별관)은 결단코 허물어선 안 될 것이다. 김준태 조선대 교수·시인
  • [정연주 해임제청안 의결] “공영방송 죽었다” VS “사필귀정”

    KBS 이사회가 8일 정연주 사장에 대한 감사원의 해임 요구에 따른 해임제청안을 통과시키자 정치권의 반응은 극명히 엇갈렸다. 민주당·민주노동당은 “공영방송은 죽었다.”며 반발했고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은 “사필귀정”이라며 정 사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민주당 김유정 대변인은 “8월8일 12시38분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의 조종(弔鐘)이 울렸다.”면서 “국민이 피땀으로 이뤄낸 방송독립과 언론 자유를 이명박 정권은 6개월도 채 안돼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하늘이 두렵지 않고 국민이 두렵지 않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노동당 박승흡 대변인은 “다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려면 차라리 ‘계엄’을 선포하라.”면서 “군사독재정권으로의 회귀이고 20년 동안 일궈온 민주주의의 사망”이라고 혹평했다. 한나라당은 KBS 이사회의 결정을 환영했다. 차명진 대변인은 “정연주라는 좋지 않은 혹을 떼어낸 KBS의 창창한 앞날이 기대된다.”면서 “좌파들이 정 사장을 극렬 비호하는 것을 보니 KBS 이사회가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더 들고 국민의 방송을 좌파코드 방송으로 악용하는 자들이 KBS 카메라를 조종하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은 “정연주 사장은 더이상 국론분열과 사회혼란을 야기하지 말라.”며 정 사장의 사퇴를 거듭 요구했다.나길회 김지훈기자 kkirina@seoul.co.kr
  • [정연주 해임제청안 의결] 정사장 “이사 6명은 역사 앞에 죄인”

    [정연주 해임제청안 의결] 정사장 “이사 6명은 역사 앞에 죄인”

    정연주 KBS 사장은 8일 이사회가 자신에 대한 해임제청안을 통과시킨 것과 관련,“유재천 이사장을 포함한 6명의 이사들은 이제 역사 앞에 죄인이 됐으며, 공영방송 KBS를 유린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사장은 이날 오후 보도자료를 통해 “이사회는 거짓과 왜곡투성이의 감사원 감사보고서에 대한 진지한 검토없이 해임제청안을 통과시켰다.”며 “공영방송의 독립을 KBS 이사회가 스스로 파괴한 행위를 역사가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공권력 투입과 관련,“경찰이 사원들을 폭압적으로 끌어냈을 뿐 아니라, 사장실 등이 있는 본관 6층까지 진출해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면서 “KBS 역사뿐 아니라 군사독재시대 계엄령 아래서도 볼 수 없었던 폭거”라고 비난했다. 그는 또 “이사회가 해임 제청권도 없는 데다 이사회 개최와 관련된 규정까지 어겼기에 오늘 이사회 의결은 인정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 이사회 규정 제9조 3항에는 ‘이사회 소집 일시·장소·부의안건을 별지 제2호 서식에 의해 각 이사, 사장, 감사에게 통보해야 한다.’고 돼 있다. 정 사장 변호인단은 “정 사장은 안건 공식통보를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의견진술의 기회도 부여받지 못했고 참석·발언 요청도 거절됐다.”고 설명했다. 또 “신태섭 전 이사가 아직 이사 지위를 상실했다고 볼 수 없는 상태이므로, 이번 결의에 찬성한 강성철 보궐이사의 이사 자격은 부인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덧붙였다. 정 사장 변호인단은 “이사회 결의는 절차에 있어서 여러가지 결정적인 하자가 있으며, 나아가 실체적으로도 사장의 해임을 요구할 정도의 현저한 비위를 드러내지 못해 내용적으로 무효 사유에 해당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변호인단은 이날 오후 8시 해임제청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서울남부지방법원에 제출했다. 정 사장은 지난 7일에도 서울행정법원에 감사원을 상대로 해임요구 처분 무효확인 청구소송과 효력집행정지신청을 한 바 있다.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정연주 해임제청안 의결] 기자협 “방송쿠데타… 원천무효”

    KBS 이사회가 8일 정연주 사장 해임제청안을 통과시켰지만, 언론·시민단체 등의 반발이 거세 퇴진 과정에서 적잖은 마찰이 예상된다. 한국기자협회와 한국PD협회는 이날 오후 성명을 발표,“이명박 정부가 감사원, 검찰, 방송통신위원회, 교과부 등을 동원,KBS 사장을 교체하려는 의도는 방송을 장악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욕심 때문”이라면서 “KBS 이사회의 이번 불법적인 해임제청 의결은 방송 쿠데타이며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선언했다. 전국 530여개 단체로 이뤄진 방송장악·네티즌탄압저지 범국민행동도 “감사원이 비상식적인 이유를 들어 정연주 사장의 해임을 요구한 것을 이사회가 안건으로 받아들인 것부터가 초법적”이라며 이 대통령에게 “해임제청안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촉구했다. 그동안 정 사장의 사퇴를 주장해온 KBS 노조는 이날 오후 3시 “공권력 투입 규탄과 낙하산 인사 저지”를 외치며 집행부 삭발식을 열었다. 정 사장 퇴진에 반대하는 KBS 직능단체와 지역지부 등은 KBS 노조와는 별개의 조직체인 ‘공영방송 수호를 위한 사원행동’을 구성하기로 하고 11일부터 항의 집회를 열 방침이다. 한편 KBS 측은 경찰력이 불법으로 본사 내에 대거 투입된 사태에 대해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날 경찰 수백명은 KBS 이사회와 안전관리팀의 요청으로 투입돼 직원들의 저지 투쟁을 강경 진압하고 나섰다. 이에 KBS 직원들은 “1990년 5월 서기원 사장 퇴진 투쟁 이후 공권력이 본사까지 투입된 것은 18년 만에 처음”이라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KBS에 대한 경찰력 투입은 국가 1급보안 시설인 KBS 청사에 계엄령과 같은 비상사태가 벌어졌을 때나, 경영진이 직접 요청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KBS 관계자는 “회사가 요청하지 않고 경찰이 언론사에 투입된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었으며,5공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도 없었던 일”이라고 비판했다.KBS는 형법상 현주건조물침입죄 등으로 사법 대응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부고] ‘3선 개헌’ 반대… 헌정사 큰 획

    [부고] ‘3선 개헌’ 반대… 헌정사 큰 획

    24일 83세를 일기로 별세한 심산(心山) 양순직 선생은 헌정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서울신문 25일자 26면 참조> 충남 논산 출신으로 1962년부터 서울신문 사장을 지냈고,6·7·14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서울신문 사장 시절에 대해 그는 “정부 비판기사를 허용하며 편집국 독립을 인정해 신문사가 활기를 찾은 1년 동안이 참 원 없이 일해 본 기억으로 남는다.”고 회고록에서 회상했다. 양 전 사장은 여당인 공화당 의원으로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69년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3선 개헌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앞서 같은 해 4월 공화당 의원들이 당론을 어기고 권오병 문교부 장관 해임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4·8 항명파동’을 주도할 때 예고된 일이기도 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이 암살되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며 계엄이 선포되자 양 전 사장은 재야 운동가인 함석헌·백기완 선생 등과 함께 통대선출저지 국민대회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흔히 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인해 기소된 양 전 사장은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84년부터 재야단체인 민주헌정연구회를 만들어 활동한 양 전 사장은 그 인연으로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정치를 함께 하게 됐다.87년 평민당 부총재를 지냈다. 이후 92년 고인이 된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통일국민당에 합류하면서 DJ와 다른 길을 걸었다. 14대 국회의원을 끝으로 의원직에서 물러난 뒤 양 전 사장은 자민련 고문, 충청향우회장,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등을 지내며 현안마다 방향을 제시하는 국가 원로의 역할을 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5월 영령들 곁에 묻히고 싶어요”

    “5월 영령들 곁에 묻히고 싶어요.” 5·18민주화운동 당시 외신 기자들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렸던 50대 미국인이 ‘국립5·18민주묘지에 묻히고 싶다.’는 청원서를 보내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 24일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최근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한 의료 관련 연구회사 부회장인 데이비드 돌린저(55)가 재미 한국교포 오모(55·여)씨를 통해 자신이 죽으면 ‘5·18묘지’에 묻히고 싶다는 의사를 이메일로 전해왔다. ‘임대운’이란 한국 이름을 가진 돌린저는 28년 전 미국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전남 영암보건소에서 일하던 중 5·18을 직접 겪게 됐다. 1980년 주말을 맞아 영암에서 광주에 온 그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던 5월17일과 18일 공수부대의 유혈 진압을 직접 목격한 뒤 근무지로 내려갔다. 그는 3일 후 석가탄신일을 이용해 다시 광주로 향했다. 그러나 광주는 공수부대가 활개치고, 시민들이 무장에 나서는 등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도시 곳곳에는 계엄군의 총검에 시민들이 쓰러지고, 취재하려는 외신 기자들도 속속 도착했다. 돌린저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매일 일기 쓰듯 피로 물든 광주를 기록했고, 뉴욕타임스 등 외신 기자들의 ‘귀와 입’ 역할을 자청했다. 또 사상자들이 즐비한 전남대·기독교병원 등지를 돌아다니며 피해자들을 직접 인터뷰했고, 이같은 참상을 언론 매체 등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렸다. 그는 ‘5월 항쟁’ 이후에도 “피해자들을 돕고 싶다.”며 1년 더 한국에 머문 뒤 1981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돌린저는 귀국 이후에도 매년 5월이 되면 직장 동료들에게 한국음식을 대접하고,5·18의 진실을 알리는 등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25돌인 2005년 5월엔 가족과 함께 ‘5·18묘지’를 찾아 참배하기도 했다.5·18기념재단 관계자는 “돌린저가 국가유공자가 아닌 만큼 5·18민주묘지에 묻히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광주시 등 관계기관과 협의해 구 묘역에 묻히는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2004년 ‘5월 광주’를 가장 먼저 알렸던 독일출신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71)는 광주시로부터 사후에 구 묘지에 신체 일부를 묻고, 기념비를 세울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사후 20년만에 5·18유공자로 인정

    사후 20년만에 5·18유공자로 인정

    1980년 5월 ‘시민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했던 고 김천배(전 광주YMCA이사·당시 64세)씨가 28년 만에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상이후 사망자)로 인정됐다. 광주시는 30일 최근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를 열어 당시 고문과 투옥 등의 후유증으로 8년 후인 1988년 숨진 김씨를 유공자로 의결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수차례의 유공자 신청에도 불구, 김씨에 대한 유공자 인정이 늦어진 것은 가족들이 신청 여부를 놓고 고심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그의 딸 은경(66·경기 광명시)씨는 “아버지가 공적을 내세우려 하는 성품이 아닌 데다 생존시에도 ‘5·18 참여는 당연한 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가족간에도 이견이 많았다.”며 “그러나 고인이 겪었던 일을 가족사로만 묻어 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신청했다.”고 말했다. 5·18 당시 시민단체 활동에 전념하던 김씨는 5월21일 계엄군에 맞선 시민들이 경찰서 무기고 등을 습격하자 다음 날인 22일 고 홍남순 변호사, 고 이성학 장로, 김성용 신부, 이기홍 변호사 등 광주지역 원로들과 함께 ‘시민수습대책위’를 결성, 항쟁 지도부와 계엄군 사이를 오가며 사태의 평화적 해결에 앞장섰다. 미국 예일대 신학부에서 수학했던 그는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광주 현장을 취재하던 외신기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광주의 실상을 알렸다. 이후 그의 행보는 수배와 도피, 고문과 투옥으로 점철됐다.‘항쟁지도부 쪽을 대변했다.’는 이유 등으로 내란부화수행 및 계엄법 위반 혐의로 수배됐다. 그는 도피생활을 하다 81년 9월 경찰에 체포됐다. 재판과정에서 징역 1년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뒤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그러나 88년 3월 광주 기독병원에서 민주화의 새벽을 보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가족들은 당시 김씨의 유해를 망월동 구 묘역에 안장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美쇠고기 고시 후폭풍] ‘무효화’ 손잡은 3野·대책 고심하는 與

    [美쇠고기 고시 후폭풍] ‘무효화’ 손잡은 3野·대책 고심하는 與

    18대 국회 첫날인 30일 야당측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에 대한 장관고시 ‘무효화’를 위한 총공세를 펼쳤다. 특히 통합민주당,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등 야 3당은 장관고시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포함한 법적 대응과 공동 규탄대회 개최 등 전방위 공조체제를 구축했다. ●손대표 “美쇠고기 먹이려 계엄선포”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이날 오전 서울 당산동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장관 고시가 강행되는 것을 보며 마치 미국산 쇠고기를 먹이기 위한 계엄이 선포되는 것 같았다.”고 직격탄을 날린 뒤 “이명박 정부는 재협상 없이 적당히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기 바란다.”고 경고했다. 전날 장외투쟁을 시작한 민노당 천영세 대표는 이날 오전 서울 청계천 광장에서 가진 17·18대의원 연석회의에서 “대통령은 국민의 대통령이기를 포기했다.”면서 “즉시 장관고시를 무효화하고 전면 재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야 3당의 원내대표·정책위의장 등 6인은 국회에서 회동을 갖고 장관고시 강행에 따른 대응책을 논의했다. 야 3당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고시 효력정지 가처분을 포함한 고시무효 확인 행정소송과 헌법소원 제기 ▲대통령에게 귀국 즉시 야 3당 대표와의 긴급 정치회담 개최 요구 ▲‘장관고시 강행규탄 및 쇠고기 재협상 촉구 야 3당 결의대회’ 개최 ▲내각 총사퇴 요구 등에 합의했다. 그동안 헌법 소원에 부정적이었던 선진당은 고시가 강행됨에 따라 ‘강경 대응’ 쪽으로 방향을 돌려 이날 민주당과 민노당과 뜻을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또 선진당은 한나라당이 국정조사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원구성에 협조하기 어렵다는 방침을 정했다. ●국회서 공동 규탄대회… 장외투쟁엔 시각차 하지만 장외투쟁에 있어서는 야 3당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민노당은 이미 장외투쟁을 선언하고 당 지도부가 청계천에서 단식 농성을 하고 있다. 민주당은 1일 서울 명동에서 시작하는 전국 순회 ‘장외 대회’를 계획하고 있지만 촛불문화제 합류 등 실질적 장외투쟁에 대해서는 머뭇거리고 있다. 선진당의 경우 이미 장외투쟁에 있어서 주도권을 빼앗긴 만큼 뒤늦게 참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게 내부 판단이다. 이에 야 3당은 일단 이날 국회에서 ‘규탄대회’를 갖는 수준에서 단체 행동을 시작했고 장외투쟁에 대한 논의는 다음주 중 다시 회동을 갖고 논의키로 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틀에 박힌 ‘광주정신’ 해석 경계 넘기

    틀에 박힌 ‘광주정신’ 해석 경계 넘기

    ‘광주민주화운동을 다시 본다.’ 1980년 5월 광주는 한국 현대사 ‘상징투쟁’의 최전선이었다. 광주는 험난한 세월을 거치며 ‘폭도의 도시’란 상징조작과 싸워 이겼고,‘민주화의 성지’란 제 몫의 상징을 획득했다. 광주가 확보한 도덕적 상징을 감안하면, 광주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5·18의 비판적 재구성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 전남대 5·18연구소와 5·18기념재단 등이 용기를 냈다.26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5·18 정신을 다시 생각한다’란 제목의 학술심포지엄을 공동 주최한다. 심포지엄은 한국 민주화의 상징인 5·18에 성찰적 평가를 시도한다.‘국가의 민주화운동 승인과 5·18특별법 제정을 ‘호남의 한풀이’로만 인식하는 분위기는 왜 극복되지 못할까.´를 물으며, 이들은 국가와 자치단체 기념행사로 대표되는 5·18의 기억·기념방식에서 일탈을 감행한다. 심포지엄을 기획한 조희연(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 소장은 “민주화운동이란 획일화된 프리즘만으로 바라보기엔 광주 정신은 훨씬 복합적”이라면서 “이제 5·18 정신을 박제된 기념행사 속에서 끄집어내고 광주라는 좁은 지역으로부터도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심포지엄이 5·18에 접근하는 방식은 ‘광주 정신’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발랄한 상상이다. 틀에 박힌 광주를 깨고 새로운 광주를 발견하기 위한 경계넘기다. 호남이 아닌 영남의 시각에서 광주를 바라보고(노진철 ‘영남에서 본 5·18-국가권력에 의한 배제’), 피해 당사자 세대가 아닌 ‘88만원 세대’가 기억하는 5·18을 경청(김보현 ‘88만원 세대가 기억하는 5·18’)한다. 여성의 관점에서 성찰(정희진 ‘여성주의자가 본 5·18-후기 식민국가의 내전’)하고, 코뮨주의(이진경 ‘코뮨주의적 시각에서 본 5·18’)와 자율주의(조정환 ‘자율주의적 입장에서 본 5·18’)적 시각에서 재해석한다. 조 교수는 “각각의 관점이 광주와 접속해 무엇을 길어 올리고 싶은지 특별한 가이드라인 없이 자유롭게 상상해볼 것을 주문했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시각으로 광주를 바라보는 만큼 논쟁적 고찰도 적지 않다. 노진철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5·18에 대한 기억과 망각의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그는 “호남에 지역연고를 가진 정당들은 선거 때마다 5·18정신의 적자임을 내세워 호남표 사냥에 나서고,5·18의 정치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영남 사람들도 지역연고를 가진 정당에 몰표를 주는 자신들의 몰규범적인 투표행위를 정당화한다.”면서 “광주가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있는 기억의 장소로서 호명되면 될수록 이 재기억의 시·공간엔 호남 밖의 사람들이나 보수세력이 참여할 여지가 점점 적어진다.”고 지적했다. ●배제된 자 끌어안는 광주정신 필요 김진호 당대비평 편집위원은 통합과 배제의 구도(‘탈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본 5·18’)로 광주를 성찰한다. 김 편집위원은 “80년 당시 광주 시민이 다 동일했던 것은 아니며 그 속에서도 소수자가 존재했다.”면서 “민주화투쟁이란 추상화된 관점으로만 광주를 복원할 때 과거 광주와 현재 한국사회의 배제된 자들의 이야기는 잊히고 만다.”고 말했다. 예컨대 5·18의 아픔을 표상하는 대표적 사진의 주인공으로,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던 아이(사진 참조)의 고단한 삶은 ‘민주화운동´이란 하나의 단어로 포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광주를 민주화의 상징으로만 모호하게 호명할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 등 세계화시대가 양산하는 사회적 타자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을 수 있어야 현 시대 광주를 제대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기존 5·18 행사는 17일 전야제와 당일 공식행사에 초점이 맞춰 진행되지만, 이번 심포지엄은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입으로 광주항쟁이 종결되기 하루 전인 26일에 열린다. 행사장소를 서울로 정한 것도 ‘5·18 정신의 전국화 및 세계화’를 바라는 주최측 의지의 반영이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사북사건때 고문·가혹행위 인권침해”

    1980년대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됐던 ‘사북사건’의 진실이 규명됐다.‘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3일 “사북사건은 80년 4월 국가 공권력이 열악한 노동환경에 항의하는 광부들의 쟁의에 부당하게 개입해 발생했고, 사건 수사과정에서 관련자들에 대한 고문, 가혹행위 등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가 있었음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사북사건은 80년 4월21일부터 24일까지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 일대에서 탄광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에 항의해 벌인 총파업 사건이다. 당시 광부들과 가족 6000여명은 파업을 진압하러 온 경찰과 대치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70여명이 부상당했다. 신군부는 81명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해 이중 31명에게 계엄포고령 위반, 소요죄 등을 적용해 구속했다. 진실화해위는 조사결과 “합동수사단 수사관들이 조사 전에 미리 주동자 명단과 혐의사실 등을 작성해 짜맞추기식 수사를 벌였고, 물고문과 구타 등 가혹행위뿐 아니라 임산부를 비롯한 부녀자들에게 강제로 옷을 벗긴 후 성적가혹행위를 했다.”고 밝혔다.진실화해위는 “국가는 사북사건 이후 연행·구금됐던 관련자와 가족들이 입은 정신적 피해와 명예 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특파원 칼럼] ‘티베트 사태’ 진실 게임/이지운 베이징특파원

    [특파원 칼럼] ‘티베트 사태’ 진실 게임/이지운 베이징특파원

    46세의 후진타오(胡錦濤)는 중국 공산당이 8번째로 티베트에 파견한 ‘변경 장관’이었다. 전임자보다 8살이나 적은 나이에 부임한 것도 그랬지만, 군인이 아닌 첫번째 ‘문관’이라는 점이 가장 눈에 띄었다. 예상치 못했던 결정이었다. 전임자 우징화(伍精華)는 고산병을 이유로 사임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경질됐다. 그 전임자 인파탕(陰法唐)이 후야오방(胡耀邦)의 뜻에 부응하지 못해 교체·강등됐던 만큼 우징화는 경제를 살리고 정치 권력을 양도하며,‘극좌노선’을 청산하려 애썼다. 후야오방의 하야 이후 그의 회유정책은 설 땅이 없어졌다. 직접적으로는 1987년 10월1일 일어난 작은 시위가 영향을 끼쳤다.40여명의 시위대가 ‘감히’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기념일에 티베트의 국기 ‘설산 사자기’를 들고 독립국가 구호를 외친 것이다. 문화혁명 이후 첫번째 사례로 꼽히는 이 사건은 달라이 라마가 세계의 이목 속에 10일간의 미국 방문을 마친 직후에 일어났다. 이듬해 1988년 3월까지 크고작은 시위가 이어지자 중앙 정부는 그해 12월 후의 파견을 정식 발표했다.1989년 3월10일 티베트 무장봉기 30주년을 앞두고 막 부임한 후진타오 티베트자치구 공산당 서기는 시위 방지에 부산했지만, 필경 일어나고야 말 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자오쯔양(趙紫陽)이 민심 수습을 위해 귀향시킨 10대 판첸이 그해 1월 사망한 것은 중국으로서는 통탄할 일이었다. 개혁·개방이래 첫 계엄령이 내려졌고, 후 서기는 철갑모를 쓰고 현장에 나타났다. 소요는 많은 의혹과 의문점을 양산하며 진위를 밝히기 어렵게 한다. 당시도 그랬고,20년 뒤 반복된 이번 사태도 그렇다. 시위·진압의 폭력성 논쟁부터 희생자 숫자, 진압과정에서의 총격 여부, 사태 배후 규명까지…. 결국 세월과 함께 모호해진 진실만이 남곤 하지만, 이번 ‘진실 게임’은 서로를 물러서기 어렵게 하고 있다. 당장 중국에는 20년전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1989년 티베트 소요 이후 중국은 6·4 천안문 사태를 겪으며 위기에까지 봉착했다. 반면 달라이 라마는 국제적 ‘스타’로 부상하며 그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중국이 1993년 9월 2000년 올림픽 개최권을 시드니에 빼앗기고 눈물을 흘린 것도 멀게는 1989년 사태가 뒤에 있었다. 이번 진실 게임은 5개월여 남은 올림픽에 또 어떤 영향을 끼칠지 헤아리기 어렵다. 예컨대 중국은 ‘라싸에서 살상용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몇차례나 강조했다. 사망자 수를 예상하기도 어려운 판이라 아예 주목의 대상도 못되고 있지만, 만약 라싸에서 총을 쏜 것으로 확인된다면 중국은 지금껏 쌓아온 국제적 신뢰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달라이 집단의 조직적 계획에 의한 사건’ 대목에 중국은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자신했다. 이에 달라이 라마는 시위와의 무관성을 주장하며 국제적 조사단을 꾸리자고 받아쳤다. 베이징에는 “이번 사태는 현지 공안의 일상적인 법 집행 과정에서 빚어진 강압적 행위가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는 소문도 나돈다.3월10일 이후 일어난 승려들의 시위와는 상관성이 적다는 얘기다. 잔학성 논란도 남아있다. 중국은 시위대들의 ‘난동’ 장면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서방 방송사들이 애타게 찾고 있는 ‘강경 진압’ 화면이 나온다면 그 폭발력 또한 가늠하기 어렵다. 24일이면 베이징올림픽 성화가 채화되고, 5월이면 티베트 에베레스트에 도달한다. 중국의 숨막히는 외교전이 시작됐다. 지금 중국 외교부 청사는 베이징 주재 각국 대사관 관계자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사안마다, 수시로 이어지는,‘중국측의 해명을 들으라.’고 불려나온 이들이다. jj@seoul.co.kr
  • “대화로 해결하라” 국제사회 中압박

    |베이징 이지운특파원|‘티베트 사태’가 외교 사안으로 본격 비화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국은 20일 시위대를 완전 진압하기 위해 티베트 지역에 병력을 대거 증강했다. 영국 찰스 왕세자와 고든 브라운 총리가 달라이 라마와 회담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데 이어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티베트 망명정부를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 정부는 이번 사태에 우려를 표명하면서 오는 5월로 예정된 중국 정부와의 개발원조 회담을 보류하겠다고 밝혔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그간의 침묵을 깨고 사태가 폭력을 통해 해결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최근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진력해온 독일과 교황청마저 가세한 상황이어서 중국이 느낄 압박 강도는 더욱 강해 보인다. 영국 BBC는 “400대의 차량이 서부 산악지대를 거쳐 티베트로 이동하고 있다.”고 20일 전했다.BBC는 이번 사태 발생 이후 최대의 병력이동이라고 덧붙였다. 중국은 외교 문제화에 강력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영국 왕세자와 총리의 달라이 라마 면담 계획에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20일 보도했다. 중국은 정보를 차단한 채 선전전에 주력하고 있다. 국제여론 악화와 5개월 앞으로 다가온 베이징올림픽에 대한 보이콧 움직임을 고려한 내부 단속이다. 중국 당국은 티베트 수도 라싸는 물론, 동조 시위가 번졌던 쓰촨(四川)성 청두(成都), 간쑤(甘肅)성 마취(瑪曲), 칭하이(靑海)성 안둬(安多) 등에 증파된 대규모 병력의 지원 아래 사실상 계엄 상황에서 시위자에 대한 검거 작업을 계속했다. 중국 정부는 라싸에서 대규모 유혈 시위에 가담한 시위대 검거에 나선 지 사흘 만에 체포된 혐의자 중에서 24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받았다고 발표했다. 간쑤성의 동조 시위와 관련, 중국은 발생 사실은 인정했으나 외신들이 보도한 19명 사망설에 대해서는 확인을 거부했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이날 보도했다. 한편 한국 대사관은 티베트 수도 라싸에는 한국인이 30여명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사관 관계자는 “피해 상황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jj@seoul.co.kr
  • 시위대 색출 후폭풍에 티베트 ‘피눈물’

    |베이징 이지운특파원·서울 송한수기자|티베트(시짱·西藏) 지역이 중국군의 차단으로 고립무원 상태에 빠진 가운데 검거 선풍이 가속화되고 있다. 특히 투항을 권고한 최후통첩 시간이 지나면서 시위대원들이 피신한 사원들에 대한 군·경의 병력 투입이 임박, 수도인 라싸 등 티베트의 주요 도시들이 폭풍전야를 맞고 있다. ●검거선풍 속 희생자 발생 우려 라싸 주민들은 18일(이하 현지시간) 인터넷을 통해 “무장경찰들이 운전하는 장갑차와 사병들이 탑승한 군용차들이 시내 주요 도로에 진을 치고 있어 마치 비상계엄 상황을 방불케 한다.”고 전했다. 이들은 “시위대가 대피한 시내 주요 사원은 병력이 이중삼중으로 포위하고 있다. 주변 도로에는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 신분증과 여행허가증을 검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라싸 시내 주요 사원에는 시위를 주도한 승려와 시위대가 대거 모여 있어 병력 투입을 단행할 경우 상당수의 희생자 발생이 우려된다. 홍콩 방송들은 “중국군 1만여명이 추가로 라싸 시내에 진입했으며 완전무장한 진압경찰 수천명이 장갑차의 지원 속에 가택수색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인권단체 ‘티베트를 위한 국제투쟁’의 케이트 손더스는 “긴장되고 무시무시한 상황”이라면서 “(티베트에서)봉쇄가 더 철저해져 소식을 얻어내는 것이 더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라싸의 온라인 정보 사이트 티베트인포넷(Tibetinfonet)은 “불안한 침묵이 흐르고 있다.”고 현지 상황을 전하면서 “여전히 상점들의 문이 닫혀 있으며 사람들은 집에 있는 얼마 안 되는 양식으로 버티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둬지츠주(多吉次珠) 라싸 시장은 “질서를 되찾았다.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정부가 구호품 배급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콩기자 15명 강제추방 티베트 정부는 17일 홍콩 기자 15명을 붙잡아 불법 취재보도를 이유로 강제로 비행기에 태워 인근 쓰촨(四川)성 청두(成都)로 내보냈다. 홍콩기자협회는 성명을 내고 “올림픽 개최 전에 더 많은 취재의 자유를 허용하겠다더니 약속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중국 외신기자협회도 “외신기자들의 티베트 접근을 즉각 허용하라.”고 요구했다. 달라이 라마는 인도 다람살라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통제 불가능으로 사태가 확산되면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완전히 사임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달라이 라마 “악화 땐 사퇴” 달라이 라마는 자신이 폭력을 선동하고 있다는 중국의 주장에 대해 “중국인이든 티베트인이든 폭력 행사에는 모두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를 수사하겠다면 환영한다.”며 “어느 집무실이든 모두 확인하라.”고 덧붙였다. 이어 “1000명이 희생한다 해도 중국의 강경한 태도는 바꿀 수 없을 것”이라면서 “중국의 무력 진압과 티베트인들의 폭력시위를 중지시켜 달라.”고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또 자신은 티베트가 중국 내에서 자치를 확대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지 완전독립을 원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1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15개 이사국 대표들과 오찬회동을 한 뒤 “모든 당사자들에게 더 이상의 충돌과 폭력을 피할 것을 촉구한다.”며 중국 정부에 자제를 촉구했다. 반 총장은 그러나 유엔이 티베트 사태에 개입할 계획은 없다고 덧붙였다. 반 총장은 왕광야 유엔 주재 중국대사를 이날 개별적으로 만나 티베트 사태에 대해 우려를 전달했다. jj@seoul.co.kr
  • 티베트로 웃은 자 티베트로 괴롭다?

    티베트에서의 유혈 독립 시위가 발생한 가운데 15일 집권 2기를 시작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티베트와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 후 주석은 1989년부터 92년까지 티베트의 최고책임자인 당 서기로 당시 최고지도부에 강한 인상을 심어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국 BBC는 15일(현지시간) 후진타오 2기 지도부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전했다. 후 주석은 구이저우(貴州)성 서기로 지내다 88년 말 티베트에 부임했다.89년 3월5일 라싸에서 티베트 병합 이후 사상 최대규모의 독립 저항운동이 발생, 계엄령 발동속에 후 주석은 철모를 쓰고 유혈진압에 앞장서 덩샤오핑(鄧小平) 등 당시 지도부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후 주석도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티베트 부임 뒤 고산병으로 고생하면서 인근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 사무실을 두고 ‘원격 근무’를 하면서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그는 92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됐다. 티베트와 이런 ‘인연’을 지닌 후 주석은 올림픽개최의 해에 소수민족 문제라는 난제와 다시 맞닥뜨렸다. 경제개발과정에서 소외된 티베트인과 위구르인들의 독립운동은 강한 탄압속에서도 확산되고 있어 그의 2기 순항에 큰 도전장을 던지게 된 것이다.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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