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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법 등 후속조치 가시화… 발포명령자 등 진상규명 주목

    특별법 등 후속조치 가시화… 발포명령자 등 진상규명 주목

    국회 특별법안 발의된 상태… 민주·국민의당 입법화에 적극적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열린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5·18 진상규명’ 의지를 거듭 강조하면서 헬기사격, 발포명령자 등 관련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이 본격적으로 이뤄질지 주목된다.정부와 정치권은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 후속 조치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회에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민간인에 대한 헬기사격 의혹 등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안’이 발의돼 있다. 특히 집권여당인 민주당과 호남에 기반을 둔 국민의당이 입법화에 적극적이다. 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참석 뒤 기자들과 만나 “특별법의 입법화 노력을 협치의 첫 번째 시험대 및 과제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해당 특별법을 대표 발의한 국민의당 김동철 원내대표도 “적극적으로 협조해 조기에 입법으로 완성하겠다”고 말했다. 국방부도 진상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문상균 대변인은 “국방부는 객관적 진실 규명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고 국회 입법을 통한 진상조사가 추진되면 필요한 조치를 이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는 “문 대통령은 기념식장뿐 아니라 5·18 단체 관계자들과 오찬을 하면서도 5·18 진상규명에 대해 언급했다”면서 “완전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문제 인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향후 절차와 관련해 “실무진들이 (진상규명을 위한) 절차와 기구를 연구하고 논의하는 과정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그동안 5·18 진상규명 활동은 ▲1989년 국회 청문회 ▲1995년 검찰 수사 ▲2007년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 조사 등을 통해 진행됐지만 아직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1989년 국회 청문회에서는 5·18 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헬기사격을 가했고 사상자까지 발생했다는 증언들이 나왔다. 하지만 당시 신군부 세력은 “발포는 군의 자위권 행사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청문회에서는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5·18 민주화운동 진상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았다. 1996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재판에서도 5·18 당시 집단발포 명령자를 확정·처벌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최근 옛 전남도청 인근 전일빌딩에서 헬기사격 흔적으로 보이는 총탄 자국이 발견된 데다 정권도 바뀌어 5·18 진상규명은 새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文대통령, 유가족 추모사에 눈물

    文대통령, 유가족 추모사에 눈물

    文대통령 기념사 23차례 박수… 역대 최대 1만여명 ‘눈물 바다’ 기념식 참석했던 50대男 쓰러져… 대통령 탄 차량, 구급차에 길 양보 자신이 태어나던 날 계엄군의 총탄에 아버지를 잃은 김소형(37)씨는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장에서 아버지에게 보내는 ‘슬픈 생일’이란 제목의 편지를 낭독하다 눈물을 쏟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편지 낭독을 들으며 손수건으로 연방 눈가를 훔치다 김씨가 연단에서 내려오자 벌떡 일어서 김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김씨는 대통령이 뒤따라온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선 고개를 돌렸고, 문 대통령은 흐느끼는 김씨의 손을 잡고 “울지 마세요. 아버지 묘역에 같이 참배하러 가요”라고 말했다. 그러고 김씨를 가만히 끌어안아 다독였다.37년간 가슴 한편에 한을 묻고 살아온 광주 시민과 오월 영령에 문 대통령은 이렇게 위로를 건넸다. 행사가 끝나고 나서도 문 대통령은 김씨의 아버지 고(故) 김재평씨의 묘역을 찾아 “아버지는 숭고한 일을 하셨다. 그동안 혼자 찾아 뵙을 텐데, 힘든 일 다 극복하시라”고 유족들을 거듭 위로했다. 대통령과 포옹한 김씨는 “아빠 품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도 9년 만에 제창 형식으로 18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 기념식장에 울려 퍼졌다. 문 대통령은 이 노래를 작곡한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과 정세균 국회의장 등 내빈들의 손을 잡고 함께 불렀다. 제창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대통령이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참석한 2007년 기념식 이후 처음이다. 시민들은 민주묘지 초입부터 도로변을 따라 ‘당신들의 희생정신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적은 노란 리본을 달았다. 노란 리본 물결 사이로 문 대통령이 입장하자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문 대통령은 차를 탄 채 행사장에 들어갔던 역대 대통령들과 달리 ‘민주의 문’ 앞에 내려 시민들과 교감하며 200~300m 떨어진 행사장까지 걸어서 입장했다. 문 대통령은 방명록에 ‘가슴에 새겨온 역사 헌법에 새겨 계승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기념식에는 피우진 신임 국가보훈처장을 비롯한 정부, 여야 지도부, 5·18 유공자·유족, 세월호 가족 등 역대 최대 인원인 1만여명이 참석했고, 문 대통령이 기념 연설을 하는 동안 23차례 손뼉치며 환호했다. 기념사를 마치자 일부는 기립 박수를 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행사가 끝나고서 근처 식당에 들러 5·18 유가족들과 비빔밥을 먹었다. 배석한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유가족들이 ‘한이 풀렸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광주시민들은 “지난 9년 동안 ‘일베’ 등 5·18을 폄훼하는 세력들이 판을 치면서 자존심에 멍이 들었다”면서 “새 대통령이 진상 규명을 약속하고,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넣겠다는 공약을 재확인해 묵은 체증이 가라앉는 것 같다”며 좋아했다. 기념식에 참석한 이모(51)씨는 “문 대통령이 광주·전남 주민들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 갔다”면서 “감성적이고 진정성 있는 대통령을 가진 우리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대통령 참석 행사는 통상 출입증 역할을 하는 ‘비표’를 사전에 발급받아야 입장할 수 있지만, 이날 기념식은 비표 없이도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국민개방 행사로 치러졌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나중에 대통령이 (주영훈)경호실장에게 ‘오늘 경호하시느라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국민이 좋아하지 않으시던가요’라고 물으시더라”고 전했다. 한 50대 공무원은 “문 대통령이 유가족을 껴안는 모습을 보면서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면서 “기념식 중계가 끝나는 순간, 서울의 딸도 감격스럽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차명석 5·18기념재단 이사장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이렇게 짧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면서 “참으로 감격스러운 날”이라고 말했다. 기념식에는 새 정부의 ‘통합 의지’가 그대로 반영됐다. 진보, 보수 단체 가리지 않고 자리를 함께했다. 공연행사에 참석한 예술가도 전국 17개 대학교수로 꾸렸다.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를 공개 지지했다가 문 대통령 지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가수 전인권씨는 노 전 대통령의 애창곡인 ‘상록수’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열창했다. 한편 문 대통령 탑승 차량과 경호 차량은 기념식 후 이동하다 119구급차를 보고선 갓길에 차를 세우고 길을 양보해 잔잔한 감동을 자아냈다. 구급차에는 5·18 기념식장을 빠져나오다 쓰러진 50대 남성 A(54)씨가 타고 있었다. A씨는 1980년 5월 계엄군에 연행돼 고문을 받고 풀려났지만, 37년이 지난 지금까지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다 이날도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쓰러진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의 양보로 A씨는 병원으로 무사히 옮겨져 안정을 취했다. 광주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서울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구급차 먼저 지나가게 한 대통령 경호실 “현장 정리 도와”

    구급차 먼저 지나가게 한 대통령 경호실 “현장 정리 도와”

    5·18 기념식이 막 끝난 광주 북구국립 5·18민주묘지 관리사무소 앞. 경호원들은 119구급차량이 앞서 나갈수 있도록 인파를 헤치며 주변상황을 이끌었다. 구급차량은 경호원들의 유도로 서둘러 빠져나갈 수 있었다.연합뉴스에 따르면 이날 50대 남성 A(54)씨는 갑자기 쓰러져 구급차량에 실려나갔다. 그는 1980년 5월 계엄군에 연행돼 고문을 받고풀려나 37년 동안 외상후스트레스장애(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환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5·18과 관련된 장소에 가거나 장면을 목격하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갑자기 쓰러지고 호흡곤란 증상을 보이곤 했다. A씨는 이날도 5·18 기념식에 참석한 이후 갑자기 숨을 제대로 못 쉬는 증상으로 쓰러져 119 구급대원들에게 응급처치를 받으며 구급차에 올랐다. 하지만 묘지를 출발한 대통령 경호·의전 차량 행렬과 대통령을 배웅하려고 몰린 시민들로 구급차가 빠져나가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때 문 대통령이 탑승한 차량과 경호·의전 차량 10여 대는 옆으로 비켜서 구급차가 앞서가길 잠시 기다렸다. 덕분에 A씨는 병원으로 무사히 옮겨져 현재 안정을 취하고 있다. 이 장면을 목격한 김모(28)씨는 “대통령이 시민 사이를 걸어 5·18 기념식장에 참석한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것처럼 대통령 의전 차량이 구급차의 앞길을 열어준 장면은 문재인 정부의 ‘열린 경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인 것 같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5.18 민주화운동 유가족 김소형씨 “대통령 품 아버지 같아 울었다”

    5.18 민주화운동 유가족 김소형씨 “대통령 품 아버지 같아 울었다”

    오늘 5.18기념식에서 추모사를 읽은 광주민주화운동 유족 김소형씨가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위로에 대해 고마움을 전했다.김소형씨는 이날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와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5월 18일 자신의 생일, 그리고 3일 후인 21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밝혔다. 아버지는 막 태어난 딸을 두고 3일 만에 광주에서 희생됐다. 김소형씨는 “완도 수협을 다니던 아빠는 시위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 저를 낳기 위해서 광주로 왔는데 길가에 계엄군이 총을 난사를 해서 유리창문을 솜이불로 가리려고 일어났는데 총탄이 창문으로 날아와서 하악골을 맞고 돌아가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추모사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린 것에 대해 “오늘은 되게 대통령님이 말씀하실 때부터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났다. 또 앞에 유족 어머님들이 눈물을 훔치시고 계신 모습을 보니까 같이 눈물이 나왔던 것 같다”고 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그동안 제창되지 못하다 오늘 기념식에서 다시 불려진 것에 대해서도 “그 노래는 그냥 노래가 아니다. 유족들도 마찬가지로 함께 부르면서 한을 달랬던 노래고 그랬던 노래를 오늘 마음껏 부를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추모사를 읽고 퇴장할 때 문 대통령이 꼭 안아줬던 것에 대해서 김소형씨는 “전혀 몰랐다. 대통령님께서 나와서 안아주실 거라는 건 꿈에도 생각 못했고,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멀리서 팔벌려서 오시는 모습을 보니까 그냥 목놓아서 울고 싶어서 저도 한동안 그렇게 기대고 울었던 것 같다”고 벅찬 마음을 전했다. 이어 그는 “같이 공감해 주고, 손 잡아주시면서 울지 말라고 해 주었고, 아빠 묘에 참배 가자고 말씀해 주시니까 너무 감동이었다”면서 “대통령님이 안아주셨을 때 꼭 아빠 품 같아서 정말 많이 울었다. 결혼식 때 손잡고 입장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文 대통령 “헬기 발포 명령자 밝히겠다”로 주목받는 전두환 회고록

    文 대통령 “헬기 발포 명령자 밝히겠다”로 주목받는 전두환 회고록

    문재인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맞아 기념사에서 “시민 향해 군이 헬기 사격한 발포의 진상과 책임을 밝혀내겠다”고 하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 대한 논란이 불붙고 있다. 지난달 전 전 대통령의 아들 전재국씨는 총 3권으로 구성된 ‘전두환 회고록’을 출판했다. 회고록 1권 제4장 ‘5·18신화의 자리를 차지한 역사’에는 전 전 대통령의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사태’라는 생각이 담겼다. 광주사태는 1980년도의 용어로 민주정부 이전에 부르던 명칭이다.전두환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 발포 명령자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무기를 탈취하고 군인들을 살해한 행위를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없다”고도 주장했다. 또 “지금까지 나에게 가해져 온 모든 악담과 증오와 저주의 목소리는 주로 광주사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광주사태로 인한 상처와 분노가 남아있는 한, 그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에 내놓을 제물이 없을 수 없다고 하겠다“고 말했다. 5·18 민주화운동을 ‘사태’로 규정하고 본인을 ‘제물’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회고록 내용은 1982년 보안사령부에서 발간한 ‘제5공화국 전사(前史) 기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료에는 ”계엄군의 자위권 행사 문제는 그 회의에서 자동적으로 결정됐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당시 회의는 전 전 대통령을 비롯한 군 주요 지휘부가 참석했으며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이었던 전 전 대통령이 이를 주도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5·18기념사업회 “전두환 반란수괴 및 내란목적살인죄 유죄 확정받아” 한편 5·18기념사업회는 18일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전두환 회고록 발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내고 “민주화운동 왜곡·비방을 방지하는 입법을 촉구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반란수괴 및 내란목적살인죄로 대법원의 유죄확정판결을 받은 전두환이 회고록이라는 형식을 빌려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문 대통령 울린 5·18 추모글의 주인공…생일에 아버지 잃어

    문 대통령 울린 5·18 추모글의 주인공…생일에 아버지 잃어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던 바로 그날, 김소형(37)씨는 전남도청 앞 한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소형씨에게 생일은 결코 즐거워할 수 없는 슬픈 날이다. 당시 그의 아버지 김재평(당시 29)씨는 전남 완도 수협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재평씨는 그날 밤 11시 11분 딸이 태어났다는 전화를 받고 기쁨에 들떠 광주로 달려갔다. 하지만 소중한 딸을 얻었다는 기쁨도 잠시였다. 재평씨는 주택가까지 날아든 계엄군 총탄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고자 솜이불을 꺼내 창문을 가리던 중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올해로 37주년을 맞은 5·18 민주화 운동을 기리기 위해 18일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기념식(정부 공식 행사)이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1만여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소형씨는 유가족으로 살아왔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아버지에게 추모글를 올렸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글을 읽었다. “철없었을 때는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때로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빠와 엄마는 지금도 참 행복하게 살아계셨을텐데···.’ 하지만 한 번도 당신을 보지 못한. 이제 당신보다 더 커버린 나이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당신을 이렇게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당신이 제게 사랑이었음을. 당신을 비롯한, 37년 전에 모든 아버지들이 우리가 행복하게 걸어갈 내일의 밝은 길을 열어주셨음을. 사랑합니다, 아버지.” 소형씨는 추모글을 읽던 도중 감정에 북받친 듯 울음을 터뜨렸다. 식장은 숙연해졌다. 객석에서 그 장면을 보던 문 대통령은 안경을 벗고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러고는 기념식 무대로 올라가 퇴장하는 소형씨를 안아주며 위로했다. 소형씨는 기념식에서 자신을 안아줬던 문 대통령에게 “5·18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혀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남겼다. 이어 “제 아버지는 여기 누워계시지만 행방불명돼 아직도 찾지 못한 분들이 남아있다”면서 “5·18이 바른 역사로 후손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아래 첨부한 동영상에서 소형씨의 사연이 소개되는 지점은 44분 23초~48분 04초다. (출처 : 유튜브 비디오머그)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이명박근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왜 그렇게 싫어했을까?

    ‘이명박근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왜 그렇게 싫어했을까?

    ‘임을 위한 행진곡’이 9년 만에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제창됐다. 문재인 대통령과 피우진 신임 국가보훈처장 등 정부 주요 인사는 물론 18일 오전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은 1만여 명의 인파 모두 지난 9년 간 ‘제창’이 금지됐던 이 노래를 힘차게 불렀다. 원래 이 노래는 1997년 김대중 정부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면서 5·18 기념식 제창곡이 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내내 기념식에 참석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악보 없이 불렀고, 2004년 기념식에서는 노래는 부르지 않고 태극기만 만지작거리던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면서 노 전 대통령과 대비되기도 했다. 이 노래의 시작은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2월 20일 광주 옛 망월동 5·18 묘역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죽고 없는 영혼 결혼식이 열렸다. 신부는 1978년 광주에서 들불야학을 만들어 낮엔 노동자로, 밤엔 야학교사로 활동하다 같은 해 12월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진 박기순(당시 23세)씨. 신랑은 박씨의 권유로 야학 교사로 참여했다가 1980년 5월 17일 새벽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숨진 윤상원(당시 30세)씨다. 1981년 소설가 황석영은 전두환 정권의 감시를 피해 자택에서 김종률, 전용호, 오정묵 등 광주지역 문화예술인 10여 명과 함께 박씨와 윤씨의 영혼을 기리고, 5월 항쟁을 추모하는 노래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이후 황씨는 시민사회운동가 백기완씨의 옥중 시 ‘묏비나리’의 일부를 차용해 가사를 썼고, 당시 전남대 학생이던 김종률씨가 작곡해 완성했다.광주에서 시작된 이 노래는 대학가는 물론 당시 신군부에 저항하던 세력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김대중 정부에서 국가기념식 제창곡으로 격상됐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노래 제창에도 제동이 걸렸다. 보수 진영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이 북한 김일성 주석을 상징한다 등의 주장을 제기했고, 결국 국가보훈처는 2009년 이 노래를 기념식순에서 제외했다가 2011년 제창이 아닌 ‘합창 공연곡’ 수준으로 낮춰 지정했다. 참석자 다 같이 부르지는 않고, 합창단의 공연을 보면서 따라 부를 사람만 부르라는 것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은 모두 집권 첫해에만 기념식에 참석한 뒤 모두 불참했다.결국 이 노래는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라는 노랫말처럼 9년이 지나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제자리를 찾았다. 문 대통령은 이날 기념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5월의 피와 혼이 응축된 상징”이라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은 희생자의 명예를 지키고 민주주의의 역사를 기억하겠다는 것이다. 오늘 제창으로 불필요한 논란이 끝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문 대통령, 5·18 기념식서 “시민 향해 군이 헬기사격한 진상 밝혀낼 것”

    문 대통령, 5·18 기념식서 “시민 향해 군이 헬기사격한 진상 밝혀낼 것”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로 37주년을 맞은 5·18 민주화운동의 기념식에 참석했다. 취임 후 처음으로 방문하는 정부 첫 공식 기념행사다. 기념식은 18일 오전 10시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5·18 정신을 계승, 정의가 승리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으로 열렸다.이날 행사에는 정부 주요 인사를 비롯해 1만여명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5·18 민주화운동이 정부 기념일로 지정된 1997년 이후 역대 최대 규모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1980년 5월 광주는 지금도 살아있는 현실입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역사”라면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이 비극의 역사를 딛고 섰습니다. 광주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의 민주주의는 버티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어 “5.18은 불의한 국가권력이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유린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었습니다”라면서 “하지만 이에 맞선 시민들의 항쟁이 민주주의의 이정표를 세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광주 민주화운동의 정신이 이번 ‘촛불혁명’으로 부활했다면서 “새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과 촛불혁명의 정신을 받들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온전히 복원할 것입니다. 성숙한 민주주의 꽃을 피워낼 것입니다”라고 다짐했다. 최근 광주시는 ‘5·18진실규명 지원단’을 구성해 지난 3개월 동안 조사를 실시한 결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을 향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이 육군본부 작전지침에 따라 계획적으로 전개됐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광주 금남로 전일빌딩에 실탄사격을 감행한 61항공단 소속 헬기가 202·203대대 10대의 헬기 가운데 어떤 헬기인지 등 구체적인 규명 작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서는 국회가 가칭 ‘5·18 진실규명 특별법’을 제정해 조사권을 확보한 국가 기구가 구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같은 맥락으로 문 대통령은 역시 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을 향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5월 광주를 왜곡하고 폄훼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역사를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일”이라면서 “새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더욱 큰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헬기사격까지 포함하여 발포의 진상과 책임을 반드시 밝혀내겠습니다”라고 밝혔다. 앞서 문 대통령은 ‘2호 업무지시’로 국정 역사교과서 폐기와 5·18 기념 행사에서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지시했다. 문 대통령은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5월의 피와 혼이 응축된 상징입니다.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 그 자체”라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은 희생자의 명예를 지키고 민주주의의 역사를 기억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창으로 불필요한 논란이 끝나기를 희망합니다”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또 기념사 말미에 “5월의 죽음과 광주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세상에 알리려했던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도 함께 기리고 싶습니다”라면서 희생자 일부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아래는 문 대통령의 5.18 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사 전문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오늘 5.18 민주화운동 37주년을 맞아, 5.18묘역에 서니 감회가 매우 깊습니다. 37년 전 그날의 광주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슬프고 아픈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먼저 80년 5월의 광주시민들을 떠올립니다.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이웃이었습니다. 평범한 시민이었고 학생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권과 자유를 억압받지 않는,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광주 영령들 앞에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5월 광주가 남긴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채 오늘을 살고 계시는 유가족과 부상자 여러분께도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1980년 5월 광주는 지금도 살아있는 현실입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역사입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이 비극의 역사를 딛고 섰습니다. 광주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의 민주주의는 버티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저는 5월 광주의 정신으로 민주주의를 지켜주신 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께 각별한 존경의 말씀을 드립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5.18은 불의한 국가권력이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유린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맞선 시민들의 항쟁이 민주주의의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진실은 오랜 시간 은폐되고, 왜곡되고, 탄압 받았습니다. 그러나 서슬퍼런 독재의 어둠 속에서도 국민들은 광주의 불빛을 따라 한걸음씩 나아갔습니다.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일이 민주화운동이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도 5.18때 구속된 일이 있었지만 제가 겪은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광주의 진실은 저에게 외면할 수 없는 분노였고,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는 크나큰 부채감이었습니다. 그 부채감이 민주화운동에 나설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것이 저를 오늘 이 자리에 서기까지 성장시켜준 힘이 됐습니다.   마침내 5월 광주는 지난 겨울 전국을 밝힌 위대한 촛불혁명으로 부활했습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분노와 정의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임을 확인하는 함성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자는 치열한 열정과 하나 된 마음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감히 말씀드립니다. 새롭게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과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맥을 잇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다짐합니다. 새 정부는 5.18민주화운동과 촛불혁명의 정신을 받들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온전히 복원할 것입니다. 광주 영령들이 마음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성숙한 민주주의 꽃을 피워낼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5월 광주를 왜곡하고 폄훼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역사를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룩된 이 땅의 민주주의의 역사에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새 정부는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더욱 큰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헬기사격까지 포함하여 발포의 진상과 책임을 반드시 밝혀내겠습니다. 5.18 관련 자료의 폐기와 역사왜곡을 막겠습니다. 전남도청 복원 문제는 광주시와 협의하고 협력하겠습니다.   완전한 진상규명은 결코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식과 정의의 문제입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함께 가꾸어야할 민주주의의 가치를 보존하는 일입니다.   5.18 정신을 헌법전문에 담겠다는 저의 공약도 지키겠습니다. 광주정신을 헌법으로 계승하는 진정한 민주공화국 시대를 열겠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비로소 온 국민이 기억하고 배우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리매김 될 것입니다.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아 개헌을 완료할 수 있도록 이 자리를 빌어서 국회의 협력과 국민여러분의 동의를 정중히 요청 드립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5월의 피와 혼이 응축된 상징입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정신, 그 자체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은 희생자의 명예를 지키고 민주주의의 역사를 기억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은 그동안 상처받은 광주정신을 다시 살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제창으로 불필요한 논란이 끝나기를 희망합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2년 전, 진도 팽목항에 5.18의 엄마가 4.16의 엄마에게 보낸 펼침막이 있었습니다.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국민의 생명을 짓밟은 국가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한 국가를 통렬히 꾸짖는 외침이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원통함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사람의 존엄함을 하늘처럼 존중하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국가의 존재가치라고 믿습니다.   저는 오늘, 5월의 죽음과 광주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세상에 알리려했던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도 함께 기리고 싶습니다. 1982년 광주교도소에서 광주진상규명을 위해 40일 간의 단식으로 옥사한 스물아홉 살, 전남대생 박관현. 1987년 ‘광주사태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 살, 노동자 표정두. 1988년 ‘광주학살 진상규명’을 외치며 명동성당 교육관 4층에서 투신 사망한 스물네 살, 서울대생 조성만. 1988년 ‘광주는 살아있다’ 외치며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 살, 숭실대생 박래전.   수많은 젊음들이 5월 영령의 넋을 위로하며 자신을 던졌습니다.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국가가 책임을 방기하고 있을 때, 마땅히 밝히고 기억해야 할 것들을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진실을 밝히려던 많은 언론인과 지식인들도 강제해직되고 투옥 당했습니다.   저는 오월의 영령들과 함께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헛되이 하지 않고 더 이상 서러운 죽음과 고난이 없는 대한민국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참이 거짓을 이기는 대한민국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광주시민들께도 부탁드립니다. 광주정신으로 희생하며 평생을 살아온 전국의 5.18들을 함께 기억해주십시오. 이제 차별과 배제, 총칼의 상흔이 남긴 아픔을 딛고 광주가 먼저 정의로운 국민통합에 앞장서 주십시오. 광주의 아픔이 아픔으로 머무르지 않고 국민 모두의 상처와 갈등을 품어 안을 때, 광주가 내민 손은 가장 질기고 강한 희망이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오월 광주의 시민들이 나눈 ‘주먹밥과 헌혈’이야말로 우리의 자존의 역사입니다. 민주주의의 참 모습입니다. 목숨이 오가는 극한 상황에서도 절제력을 잃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켜낸 광주정신은 그대로 촛불광장에서 부활했습니다. 촛불은 5.18민주화운동의 정신 위에서 국민주권시대를 열었습니다.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언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뜻을 받드는 정부가 될 것임을 광주 영령들 앞에 천명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대한민국이 새로운 대한민국입니다. 상식과 정의 앞에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숭고한 5.18정신은 현실 속에서 살아숨쉬는 가치로 완성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삼가 5.18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씨줄날줄] 임을 위한 행진곡/최용규 논설위원

    [씨줄날줄] 임을 위한 행진곡/최용규 논설위원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이라면 최루탄이 난무하는 교정 안팎에서 수없이 불렀거나 들었던 노래가 있다. 생면부지인 사람과 거리낌 없이 어깨를 걸게 했고, 강의실이나 도서관에 앉아 있으면 마음 편치 않게 했던 그 노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젊은이들이 목청껏 불렀던 1분짜리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이처럼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당시 군부독재정권의 탄압과 억압에 저항하는 운동가요의 상징이었으나 출발은 슬픈 진혼곡이었다. 1982년 2월 20일 광주 옛 망월동 5·18 묘역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죽고 없는 영혼 결혼식이 열린다. 신부는 1978년 광주에 들불야학을 창립하고 낮엔 노동자로, 밤엔 야학교사로 활동하다가 그해 12월 연탄가스에 짧은 생을 마감한 박기순(당시 23세)씨. 신랑은 박씨의 권유로 들불야학 교사로 참여했다가 1980년 5월 계엄군의 광주 유린 때 시민투쟁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하다가 5월 17일 새벽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윤상원(당시 30세)씨. 박씨의 황망한 죽음을 접한 윤씨는 안타까운 심정을 절절한 시 한 편에 담아 일기장에 고이 간직했다.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여/왜 말없이 눈을 감고만 있는가/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이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되어/늘 서럽도록 아름다웠지” 1981년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 소문이 돌자 그해 4월 소설가 황석영씨 집에 광주 지역 문화운동패 10여명이 모여 이 둘의 넋을 풀어 줄 노래를 만든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980년 말 서대문형무소 투옥 당시 썼던 ‘묏미나리’를 차용해 황석영씨가 가사를 썼고, 당시 전남대 학생이던 김종률씨가 곡을 붙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30분짜리 노래극 ‘넋풀이-빛의 결혼식’에 마지막으로 삽입된 합창곡이다. 이후 이 노래는 민주화운동 진영에 빠르게 전파됐고, 1997년 5·18이 국가기념일로 승격되면서 5·18 넋풀이 노래로 채택돼 제창됐다. 좌파의 대표곡쯤 되고 우파가 싫어하는 이 노래를 둘러싸고 갈등도 심했다. 2009년 국가보훈처는 5?18 기념식에서 제창을 금하고 합창만 허가했다. 합창은 합창단만 부르면 되지만 제창은 참석자들이 다 불러야 한다. 오늘 역대 최대 규모의 5·18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이 노래가 제창된다. 제창을 통해 보수가 진보에 손을 내밀고 진보가 보수를 껴안는 대통합의 모습을 보고 싶다. 최용규 논설위원
  • 5·18 광주의 숨결 서울 무대서 만난다

    5·18 광주의 숨결 서울 무대서 만난다

    올해 37주년을 맞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뜻깊은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다.연극 ‘짬뽕’은 광주민주화운동이 짬뽕 한 그릇 때문에 일어났다는 설정의 블랙코미디다. 중국 음식점 ‘춘래원’의 식구들은 개업 후 처음 가는 소풍을 하루 앞두고 들떠 있다. 하지만 늦은 시간 탕수육과 짬뽕, 짜장면 주문이 들어온다. 종업원 ‘만식’이 배달을 가던 중 검문 중인 군인들과 짬뽕을 둘러싸고 시비가 붙고 한 군인이 몸싸움 끝에 머리에 상처를 입고 총까지 발사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놀라서 식당으로 돌아온 만식은 식구들에게 이를 알린다. TV에서는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는 소식이 나오고 춘래원 식구들은 자신들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고 생각하게 된다.2004년 초연 이래 매년 5월이면 무대에 오르는 작품이다. 최근 TV 드라마 ‘김과장’과 ‘힘쎈 여자 도봉순’ 등에서 감초 역할을 한 배우 김원해가 중국집 주인 ‘작로’ 역을 맡았다. ‘지나’ 역을 맡은 걸그룹 크레용팝의 멤버 웨이(허민선)는 이 작품으로 연극 무대에 도전한다. 7월 2일까지. 서울 구로구 신도림 프라임아트홀. 4만원. (02)2111-1146. 뮤지컬 ‘비망’은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학생들에게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일깨우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 위해 기획된 프로젝트 공연이다. 작품을 제작한 공연예술창작터 수다는 2011년부터 대학생들을 배우로 공개 모집해 무대를 펼치고 있다. 올해도 총 20명의 아마추어 배우들이 무대에 선다. 출연 배우들은 직접 광주에 내려가 망월동 신묘역을 순례하고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광주민주화 정신을 계승하는 상설음악회 ‘오월의 노래’에 참가해 광주 시민들에게 작품의 주요 장면을 선보이기도 했다. 극은 1980년 봄 광주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고등학교 앞에서 떡볶이 노점상을 하고 있는 ‘덕복’과 1980년 당시 계엄군으로 활동해 늘 죄의식에 시달리며 밤잠을 설치는 아버지를 둔 ‘경아’가 만나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과정을 그린다. 20일 오후 3시, 7시. 서울 구로구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 2만원. (02)2029-1700.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첫 발포 명령자·헬기소사·행불자, 아직도 ‘미궁’

    대법원 판결 등 공식 자료에 발포 명령자는 특정되지 않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7년이 흘렀으나 진상 규명은 현재진행형이다. 헬기 공중사격 등 일부는 ‘진실’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 최초 발포 명령자와 헬기 기총소사, 행방불명자 등 3대 핵심 의혹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광주시민, 새 정부 진상규명 의지에 희망 광주시민들은 새 정부의 진상 규명 의지에 기대를 건다.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위원회를 꾸려 책임자 등을 명확히 가리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관련법을 개정해 전두환 전 대통령 등 5·18 정신 훼손 세력을 엄단하겠다는 공약도 내걸었다. 이런 가운데 최초 발포 명령자가 특정될지 관심이 쏠린다. 2007년 국방부과거진상규명위원회는 ‘5월 21일자 진종채 2군사령관의 작전지침 문건’에서 ‘전 각하(전두환 지칭):초병에 대해 난동 시 군인 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는 수기 문서를 찾아내 공개했다. 1982년 보안사가 펴낸 ‘제5공화국 전사(前史)’에는 21일 당일 국방장관실에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신군부 핵심 지휘관들이 모인 회의에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정당방위 자위권 행사’를 언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주요 지휘관 모임을 주도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5·18 때 학살도, 발포 명령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1989년 국회 5·18청문회, 1995년 검찰조사, 1997년 대법원 판결 자료 등 공식 문서에도 발포 명령자는 특정되지 않았다. 7·11공수대대가 주둔한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5월 21일 오후 1시를 전후해 발생한 집단 발포는 군 자위권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헬기 공중 사격도 부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광주시는 최근 5·18 당시 옛 전남도청 인근 전일빌딩에 대한 진압군의 헬기 공중 사격 사실을 확인했지만 기총소사인지, 탑승 군인의 소총 집단 사격인지는 가려내지 못했다. 또 5월 21일 오후 전남도청 상공에서 헬기 기총소사가 이뤄졌다는 다수의 목격자 증언은 있지만 사실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 ●행불자 타 지역에 암매장 가능성 열려 행방불명자와 이들의 암매장 여부도 오리무중이다. 광주시가 진행한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현황에 따르면 사망자 155명, 상이후 사망자 111명, 행불자 76명 등이다. 행불자의 시체나 흔적 등은 지금껏 미궁에 빠졌다. 한때 광주 망월동 5·18 옛 묘역 등 주민 제보지를 발굴했으나 행불자를 찾아내진 못했다. 나의갑 광주시 5·18진실규명 자문관은 “그동안 공개 안 된 군 기록이 많은 데다 진압군인 공수부대가 항쟁 기간에 헬기 등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횟수가 잦았던 만큼 희생자가 다른 지역에 암매장됐을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보안사, 비밀조직 만들어 ‘5·18 폭동’으로 조작”

    “보안사, 비밀조직 만들어 ‘5·18 폭동’으로 조작”

    보안사령부가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기 위해 1988년 국회 광주 청문회를 앞두고 군 관련 서류를 조작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17일 한겨레는 전두환 등 신군부 집권에 앞장선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가 당시 군 관련 서류를 조작해 계엄군 발포를 자위권으로 옹호하고 광주 시민을 폭도로 몰아갔다고 보도했다. 보안사의 사실 왜곡이 이후 국방부 태도에 반영됐고, 현재 인터넷상에서 나오는 5·18 왜곡 주장의 근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한겨레가 입수한 ‘5·11연구위원회’(약칭 5·11분석반) 관련 기록을 보면 “(5·11분석반은) 국회 (광주)청문회 증언과 문서검증에 대비하고, 광주 합수요원 변절 방지 활동을 하기 위해 설립됐다”고 나와있다. 5·11분석반은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구성(1988년 7월 8일)을 앞두고 1988년 5월11일 보안사가 주도해 국방부·육본·합참·한국국방연구원(KIDA) 소속 위원 5명, 실무위원 15명으로 꾸린 비공개 조직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5·18 군 관련 기록을 검토한 뒤 불리한 사실과 문구를 조작·왜곡해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몰기 위해 증인을 미리 선정한 뒤 예상 질문과 답변지를 작성했다고 한겨레는 밝혔다. 5·11분석반 회의용으로 만든 ‘광주사태 관련 문제점 분석’(1988년 5월)이라는 문서에서는 ‘광주소요사태 진압작전 전투상보’ 등 9개의 5·18 관련 군 서류를 조작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나온다. 조작·왜곡 대상은 계엄군 발포 정당성 확보, 대검 사용 등 잔혹한 시위 진압 관련 내용이다. 5·11분석반은 1980년 5월 21일 오후 계엄군의 집단 발포 이전에 광주 시민이 공수부대에 먼저 총을 쏜 것처럼 조작해 계엄군 발포가 정당한 자위권 발동 차원이고 광주 시민이 폭도임을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1980년 5월 21일 시민군의 최초 무기 탈취시간(전남 나주 반남지서 피습)을 오후 5시 30분에서 집단 발포 이전인 오전 8시로 조작해 국회에 제출했다. 이는 검찰이 1996년 12·12와 5·18 수사 때 옛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로 희생된 시민들의 죽음을 ‘내란목적 살인죄’로 단죄하지 못하게 된 배경이 됐다. 당시 광주에 주둔한 전투교육사령부의 ‘상황일지’(5.14~5.27) 중 ‘5.18 20:15(7공수 총검)으로 진압’이라는 보고 내용도 ‘검토 삭제’ 하도록 육군본부와 특전사 등에 지시했다.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대검으로 잔혹하게 민간인을 살상했다는 ‘유언비어’를 정당화시킨다는 이유였다. ‘특전사 광주소요사태 진압작전 전투상보’(16쪽) 중 ‘5.20 23:00 각종 가스탄(화염방사기, 엠203 발사기, E-8발사통) 등으로 폭도를 제지’했다는 부분은 “(유탄발사기인) 엠203 발사기는 대량살상화기로 시비 가능성이 있다”며 “엠203 발사기 삭제 또는 가스탄으로 수정(작성 부대 통보)”하라고 지시했다. 5·11분석반은 1989년 12월 30일 국회 청문회 종료 때까지 18개월 동안 활동했다. 5·18 연구자 정수만 전 5·18민주유공자유족회장은 “5·11분석반의 5·18 왜곡 시나리오가 지금 인터넷에서 횡행하는 5·18 왜곡 주장의 근거이자 뿌리다. 5·18 이후 보안사의 5·18 왜곡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한겨레를 통해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광주시 “5·18 당시 시민 향한 군 헬기 사격은 계획된 작전”

    광주시 “5·18 당시 시민 향한 군 헬기 사격은 계획된 작전”

    광주시가 ‘5·18진실규명 지원단’을 구성해 지난 3개월 동안 조사를 실시한 결과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을 향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이 육군본부 작전지침에 따라 계획적으로 전개됐다는 결론을 내렸다.시는 “이번 분석 성과는 금남로 전일빌딩에 대한 군의 헬기 집단 발포가 ‘자위권 발동’이라던 신군부 주장의 허구성을 입증한 것”이라고 밝혔다. 광주시는 지난 3개월 동안 약 3만 페이지에 달하는 정부기록을 분석하고 당시 민주화 운동과 관련 있는 사람들의 증언 수집을 통해 위와 같이 결론을 내렸다고 15일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했다. 시는 이날 ‘5·18 헬기사격 종합보고’ 기자회견을 열어 1980년 5월 27일 광주 금남로 전일빌딩에 헬기 사격을 한 부대는 육군본부 예하 61항공단 202·203대대 소속 UH-1H(일명 휴이·HUEY) 수송 헬기라고 밝혔다. 시는 육군본부 작전지침·20사단 작전일지 등 각종 군 자료와 ‘12·12 및 5·18 사건’의 검찰 수사기록을 분석하고, 민주화 운동 관련자 인터뷰 내용 등을 종합해 위 결론을 내렸다.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 투입된 군 헬기의 첫 임무는 (1980년 5월) 21일 금남로 집단 발포 후 전남도청에 고립된 공수대원의 수송이었던 것으로 광주시는 파악했다. 시는 헬기가 시민군을 향한 무장을 갖춘 시점을 육본 작전지침 가운데 ‘Hel기 작전계획 실시’ 명령서가 접수된 1980년 5월 22일 오전 8시 30분으로 추정했다. 이 지침에 따라 1980년 5월 22일 이전에 투입된 헬기에 대한 무장이 진행됐다는 것이 시의 설명이다. 지원단 관계자는 “5·18 당시 UH-1H를 운용한 부대는 61항공단밖에 없고 광주에 투입된 부대는 202·203대대가 유일하다”면서 “헬기가 M-60 거치한 채 출동했다는 증언도 있다”고 설명했다. 광주시는 전일빌딩에 대한 헬기 사격이 이뤄진 시점을 계엄군이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폈던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부터 새벽 5시 30분 사이로 파악했다. 진압작전 당일 3공수여단 작전상황일지 등에 따르면 전남대병원 뒷담을 넘던 공수대원이 전일빌딩 옥상 방향에서 중화기 공격을 받았다. 신군부 지휘부는 전일빌딩에 시민군 3명이 있는 것으로 추정했지만, 시민 증언에 따르면 전일빌딩과 주변 건물에는 40∼50명의 시민군이 배치됐다. 광주시는 다수 시민군과 자동화기가 배치된 전일빌딩과 주변 건물에서 1시간 동안 교전 상황이 이어졌고, 계엄군이 공중 화력을 지원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시는 전일빌딩 외벽에 카빈소총 탄흔을 발견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분석 결과를 주목했다. 시는 이 결과가 전일빌딩의 맞은편 YWCA 건물에 있던 시민군이 계엄군을 향해 사격한 증거라고 추정했다. 다만 광주시는 전일빌딩에서 헬기 사격에 의한 인명 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잠정 결론 내렸다. 하지만 헬기 사격 명령자를 규명하는 일은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행방 불명된 사람들이 집단 매몰된 지역을 발굴하는 일 등과 함께 5·18 진실 규명의 최대 난제로 꼽힌다. 시는 “상공을 비행하는 헬기가 공격을 받지 않는 이상 어떤 자위권을 발동하겠느냐”면서 “5·18 당시 헬기가 공격받았다는 기록이나 증언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광주시는 전일빌딩에 실탄사격을 감행한 61항공단 소속 헬기가 202·203대대 10대의 헬기 가운데 어떤 헬기인지 등 구체적인 규명 작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서는 국회가 가칭 ‘5·18 진실규명 특별법’을 제정해 조사권을 확보한 국가 기구가 구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문재인 대통령 시대] “사랑도 명예도~” 9년 만에 다시 ‘떼창’한다

    백기완 시에 황석영 가사 ‘대표 민중가요’…2009년 제청서 빠졌다가 이번에 ‘재복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교정에서건 거리에서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사랑도~’를 선창하면 이내 모든 이들이 떼창(제창)으로 화답하며 어깨를 걸던 시절이 있었다. 노래의 기원은 애절하다 못해 슬프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 사살된 고 윤상원씨와 광주의 노동 현장에서 ‘들불야학’을 운영하다 사망한 노동운동가 고 박기순씨의 영혼결혼식에 헌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백기완씨의 옥중 장편시 ‘묏비나리’의 일부를 차용해 소설가 황석영씨가 가사를 완성했고, 전남대 학생이던 음악인 김종률씨가 곡을 붙여 1981년 노래극 ‘넋풀이-빛의 결혼식’에 삽입됐다. 일반에는 1982년 2월 윤씨와 박씨의 유해를 광주 망월동 공동묘지(현 국립5·18민주묘지)에 합장하면서 영혼결혼식을 거행할 때 처음 공개됐다. 이후 대표적인 민중가요, 운동가요로 자리잡았다. 매년 5·18 추모행사에서 유족과 시민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1차 ‘복권’은 5·18이 국가기념일로 승격돼 정부 주관으로 첫 기념식이 열린 1997년 이뤄졌다. 이때부터 2008년까지 정부 주관 기념식에서 공식 식순에 포함돼 제창됐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기념식부터 제창 식순이 빠졌다. 반발이 이어지자 2011년 기념식부터는 합창단이 부르고 원하는 참석자가 따라부르는 합창 방식으로 바뀌었다. 2013년 박승춘 당시 국가보훈처장은 별도의 기념곡 제정을 추진한다고 밝혀 거센 반발을 자초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2호 업무지시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9년 만에 이번 5·18 기념식부터 또다시 모든 이들이 제창할 수 있게 됐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 “광주항쟁 왜곡에 맞서 진실 담아내”

    “광주항쟁 왜곡에 맞서 진실 담아내”

    “1980년 광주민주항쟁과 지난해 촛불시위는 닮은꼴입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에 모여 열린 마음으로 민주주의의 가치와 정의를 외쳤죠. 둘 다 우리 국민들의 위대한 민주의식과 정의감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죠. 그래서 개정판 출간이 꼭 필요했습니다.”(정상용 간행위원장)1985년 출간 당시 광주민주화운동의 민낯을 처음 드러내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창비)가 32년 만에 대폭 개정돼 다시 나왔다. 5·18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 기록물로 꼽히는 책은 서슬 퍼렇던 5공화국 시절, 집필자들도 ‘첩보작전 하듯’ 숨겨가며 만들었고 대학가에서도 숨죽이며 읽어야 했던 ‘지하 베스트셀러’였다. 당시 집필에는 전남대 3학년이던 이재의·전용호씨도 참여했지만 초판에는 황석영 작가만 저자로 적시돼 있다. 유명 작가라 대중의 눈길을 끌기도 쉽고 함부로 구속하지 못할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1976년부터 10년간 광주 등 전남 지역에서 살았던 황석영 작가는 11일 간담회에서 부채감이 동력이었다고 돌이켰다. “광주항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민족과 역사 앞에 이 기록을 올바로 남겨야 한다는 부채감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평생 광주라는 곳이 나를 놓아주지 않고 있어서 덕분에 내 문학도 다른 길로 가지 않고 특성을 유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한 달 반을 여관방에 틀어박혀 원고를 써냈던 작가는 “1984년 10년간 써오던 ‘장길산’을 끝낸 상태였기 때문에 ‘구속돼도 괜찮다’란 생각이었다. 구속되면 광주에서 죽어간 젊은이들에 대한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가실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초판본이 항쟁에 참여한 시민 당사자들의 이야기였다면, 개정판은 이후 드러난 계엄군 군사작전 문서와 5·18 관련 검찰 수사, 재판 기록, 청문회 자료 등으로 항쟁의 역사적, 법률적 성격을 규명하는 데 주력했다. 이들은 왜 32년 만에 다시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과거를 돌이켰을까. 새롭게 밝혀진 역사적 사실들을 정리하려는 의도가 컸지만 근본적 이유는 따로 있다. 정상용 위원장은 “박근혜·이명박 정권 9년 동안 이뤄진 5·18에 대한 왜곡과 폄훼 때문에 국민들에게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심정이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책은 최근 회고록에서 자신이 5·18의 피해자이며 계엄군 투입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들이미는 ‘날 선 증거’이기도 하다.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조준사격으로 시민 30~50명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대낮에 수백명이 보는 앞에서 총을 쏘아놓고도 양민학살, 발포 명령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진실을 왜곡하니 꼼꼼히 연구할 기회를 만들어 준 셈이지요.”(공동 집필자 이재의)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방승언의 삐-급 문화 쪼개기] 유행했던 예비군복 인증…전쟁은 게임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방승언의 삐-급 문화 쪼개기] 유행했던 예비군복 인증…전쟁은 게임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미국의 강경한 대북기조에 한반도의 긴장상태가 쉽게 해소되지 않고 있다. 북한의 ‘배째라’식 엄포에는 이골이 난 우리 국민들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돌발행동만큼은 예측하기 힘들다며 불안해하는 상황이다. ● ‘해볼 만한 전쟁’은 없다 긴장 속에서 한때는 미국이 북한을 폭격할지도 모른다는 ‘북폭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일각에선 이 극단적 시나리오를 두 손 들어 환영하고 나섰다. 미국이 압도적 화력으로 북한을 공격하고 나면 국군이 북진해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이길 수만 있으면 전쟁도 나쁘지 않다는 태도는 한반도에 전쟁 위기가 고조될 때마다 등장했던 레퍼토리다. 2년 전 있었던 북한의 ‘준전시상태’ 선언 때에도 일부 예비군들 사이에선 SNS에 “전투준비 완료”를 외치며 군복 사진을 올리는 이른바 ‘예비군 인증’이 유행했었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기 자체는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너무 가벼운 태도였다. 자신만만하게 ‘전쟁 나도 괜찮다’거나 심지어는 ‘전쟁을 내야 한다’고 말하는 일부 예비군들 앞에서 전쟁 발발 즉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현역 장병들과 그 가족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 국방부의 전쟁 게임, ‘국방 FPS’ ‘전쟁불사’를 외치는 일부 국민의 무모함을 자제시켜야 할 책임은 아마도 국군에 있다. 전쟁의 진짜 피해를 가장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집단으로서 국군은 지금도 장병들에게 ‘전쟁 승리’보다는 ‘전쟁 예방’이 중요하단 사실을 강조해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지난 2월 공개된 국방부의 ‘국방 FPS’ 게임 개발 연구 보고서는 국방부의 이런 평소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물건이었다. 개발인력 9명, 예산 60여 억 원, 개발기간 2년으로 현실감 넘치는 온라인 FPS(First Person Shooter·1인칭 총격전 게임)를 개발하겠다는 이 계획은 이미 그 실현가능성 측면에서부터 많은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보다 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부분은 개발목적 쪽이다.국방부는 ‘국방 FPS’의 목적이 “군에 대한 즐거운 간접 체험을 통해 입대 대상자들의 군복무에 대한 공포를 줄이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이는 전투행위를 ‘즐거운 체험’으로 인식시키는 게 이 게임의 최대 목적이라는 의미다. 물론 전투를 재미있는 오락거리처럼 연출하는 작법 자체는 수많은 게임이 공유하는 아주 기본적 요소다.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전쟁을 엄숙히 대해야 할 국방부가 게임 업계의 고질인 전쟁미화 문제를 그대로 답습했다는 것은 한 번쯤 짚어보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게임은 게임일 뿐이다? 게임계에서 전쟁미화에 대한 담론은 아직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십 년 넘게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는 대표적 전쟁게임 ‘콜 오브 듀티’ 시리즈에서도 이 점은 명확히 드러난다. 이 시리즈에 속한 대부분 작품의 주된 줄거리는 약간 과장을 섞자면 ‘시체의 산을 쌓아 세상을 구한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 가능할 만큼 단순하고 자극적이다. 그러나 이 점을 문제 삼는 개인이나 단체는 아직 많지 않다.더불어, 전쟁게임에 부적절한 정치·역사적 뉘앙스가 담기지 않도록 단속하는 일에 있어서도 업계는 아직 서투른 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삼은 전략게임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는 2차대전 최대 피해국이자 공로국인 러시아를 거의 악당 조직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러시아인들 외에 이 문제를 성토하고 나서는 사람은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게임은 게임일 뿐’이라는 기조가 이렇듯 만연해 있더라도 업계가 전쟁묘사 방식에 대한 반성을 아예 포기해선 안 될 일이다. 북미원주민 추방전쟁을 오락거리로 포장한 5,60년대 서부극들에 대한 현세대의 평가는 당시와 많이 다르다. 현대 전쟁게임에 대한 후손들의 평가라고 해서 호의적이리란 보장은 없다. ●게임으로 재해석된 ‘지옥의 묵시록’ 2012년 미국에서 발매된 게임 ‘스펙옵스: 더 라인’(이하 ‘스펙옵스’)은 게임업계에 이런 반성의 분위기를 조성한 최초의 메이저 게임으로 꼽힌다. 이 게임은 자연재해로 고립된 두바이에서 질서유지를 명분삼아 계엄군 행세를 하는 미 육군 33보병대대와, 이들을 물리치려는 미국 특수부대 델타포스 사이의 싸움을 다루고 있다. 6개월 전, 두바이 인근에 주둔 중이던 33대대는 갑자기 불어 닥친 대규모 모래폭풍 속에서 시민을 구조하기 위해 두바이 시내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구조작전은 처참히 실패했고 33대대는 시민들과 함께 완전히 도시에 고립되고 만다. 대대장 ‘존 콘래드’ 대령은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극한 환경 속에서 안전을 내세워 계엄령을 선포한다. 하지만 무력을 앞세운 일방적 통제는 곳곳에서 점차 부조리한 억압과 학살로 이어졌고 33대대는 자각하지 못한 채 폭군으로 군림하게 된다.영국 문학사에 조예가 있다면 콘래드 대령의 이름과 줄거리에서 이미 게임의 주제의식을 일부 간파했을 수도 있다. 콘래드라는 이름은 소설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의 저자 ‘조셉 콘래드’에게서 따온 것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암흑의 핵심’은 19세기 말엽 세계를 물들인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고전이다. 맥락을 고려해보면 안전을 명분으로 억압을 펼치는 33대대의 모습은 세계 경찰을 자처하며 전 세계에 손을 뻗치고 있는 미국의 현대판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은유로 읽힌다. 미군을 정의의 사도로 묘사하는 대신 그들의 오랜 적폐를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게임은 이미 독특하다. 하지만 스펙옵스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은 미국정부의 패권주의에 그치지 않는다. ●‘영웅게임’의 모순 ‘스펙옵스’를 플레이하면 대번에 느낄 수 있는 묘한 사실 하나는 33대대에 맞서는 주인공 ‘마틴 워커’가 도무지 ‘착한 놈’ 같지 않다는 점이다. 이야기 중반부터 워커는 당초 임무였던 생존자 구조보다는 33대대 및 콘래드의 처단에만 집착하며, 이로 인해 수십 명의 민간인을 죽게 만든다. 그런데도 워커는 멈추지 않고 결국엔 두바이 생존자 전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재난을 초래하기까지에 이른다. 악화일로로 치닫는 이런 불편한 전개는, ‘살인만으로 영웅이 되는’ 대다수 전쟁게임의 비현실적인 내러티브를 180도 뒤집어 비꼬려는 제작진의 의도가 담겨 있다. 워커가 마침내 마주한 콘래드 대령의 마지막 대사는 제작진의 비판의식을 잘 요약해 준다. 콘래드는 말한다. “자네는 구원자가 아닐세, 자네의 재능은 구하는 쪽이 아니라 죽이는 쪽에 있었지. 영웅이 된 기분을 느끼려 여기까지 왔지만, 자네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더 나아가, 이 대사는 플레이어를 향하는 제작진의 비판이기도 하다. 자기 행동의 당위성을 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내달린 워커의 모습은, 게임에 표현된 폭력이 과연 정당한 것일지 고민해보지 않은 채 그저 타성적으로 게임을 끝까지 플레이하는 대다수 소비자의 모습을 모사하고 있다. ●‘불편한 게임’을 소망하며 제작진은 단 하나의 이야기로 정부, 게임업계, 소비자라는 세 집단 공통의 문제인 ‘무비판’을 지적해 내는데 성공했다. 자아비판을 모르는 미 정부는 자유세계 수호의 확신에 젖어 세계 각지의 무력분쟁에 개입했고 미국 게임계는 그런 행태를 고발할 생각은커녕 오히려 영웅적 서사로 윤색해내기에 바빴다. 그리고 게이머들은 정부와 업계의 중첩된 무비판이 낳은 결과물을 다시 무비판적으로 소비해왔다. 가장 대중적 미디어인 게임을 통해서도 사회 각 층위의 안일함에 대한 첨예한 비판을 이뤄내는 이런 모습은, 분명 우리가 부러워 할 만 한 것이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 게임이 출시된 지 5년이 지난 현재, 미국 게임계 판도는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점이다.대중문화의 가치 및 외연의 확장은 일부 기업이나 몇 개 작품의 노력만으로 찾아올 수 있는 종류의 변화는 아니다. 엔딩 크레딧에서 플레이어를 깊은 회한에 빠지게 만드는 ‘불편한 게임’이 더욱 많이 출시되기를, 그리고 그런 게임들이 보다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길 희망해 본다. earny@seoul.co.kr
  • ‘그것이 알고싶다’ 북한군 침투설 제기한 전두환 회고록 검증

    ‘그것이 알고싶다’ 북한군 침투설 제기한 전두환 회고록 검증

    SBS ‘그것이알고싶다’에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전두환 회고록을 집중 조명한다. 29일 오후 방송되는 SBS ‘그것이알고싶다’에서는 ‘전두환 회고록’을 면밀히 검증할 예정이다. 전두환은 군사 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권력형 비리에 대한 재판을 거쳐 ‘반란수괴죄’, ‘상관살해죄’, ‘내란수괴죄’, ‘내란목적살인죄’, ‘뇌물죄’ 등 12개 항목의 혐의가 인정돼 1996년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뒤이어 정치적 사면과 복권이 단행됐다. 그런 전두환이 37년 만에 논란의 회고록을 출간했다. 전두환은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 발포 명령자도 없었다”며 자신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과 전혀 무관하다고 회고록을 통해 주장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회고록에서 이른바 북한군 침투설을 제기한 것이다.전두환은 5.18 당시 600명의 북한군 특수부대가 남침해 대한민국의 전복을 시도했다는 지만원 씨 등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무기를 탈취하고 군인들을 살해한 행위를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이튿날인 5월 18일 오전부터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가 학생과 시민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가자 시민들은 저항하기 시작했다.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 모인 10만의 시민들은 비무장 상태로 계엄령 해제와 전두환 퇴진을 요구했다. 그때 시민들을 상대로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일어났다. 수많은 시민들이 속수무책으로 총격에 쓰러졌다. 심지어 시신을 수습하려던 시민들이나 임산부와 어린이 등 무고한 민간인들 역시 비참하게 희생됐다. 국민을 지켜야 할 군대가 국민을 향해 총격을 가한 충격적인 상황. 5월 27일 계엄군이 도청에 재진입하기까지 열흘 동안 확인된 사망자는 160여 명이고, 부상자는 5,000명에 육박하며, 암매장되거나 실종된 이들의 숫자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광주에서의 최초 발포 명령자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시민들의 무력시위에 맞선 자위권의 발동이었다는 전두환 회고록의 주장은 과연 정당한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헬기 사격 목격자 최형국 씨는 “그날 분명히 헬기 동체 좌측에 장착된 그 기관총이 뿜어대는 것을 봤어요”라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국과수 김동환 총기안전실장은 “벽면을 스쳐 맞은 거라든지 그다음에 바닥에 있는 것들은 이것보다 같은 위치거나 높은 위치 아니면 쏠 수가 없는 탄흔이죠. 헬기에서의 사격 가능성이 굉장히 유력해지는 거고…”라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목격자들의 증언이 이어져왔고 얼마 전 광주 전일빌딩에서 기관총 사격의 탄흔까지 발견됐지만 “광주엔 사격이 가능한 헬기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전두환과 군 당국의 주장이다. 공수부대의 발포는 자위권 행사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면서도 헬기 기총소사만큼은 애써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진압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이런 주장과는 다른 내용을 증언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것은 전두환만이 아니었다.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초유의 범죄 행위에도 불구하고 경미한 처벌만 받았던 당시 군 수뇌부들이 37년 만에 털어놓은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이들은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거 자체를 내가 부인해. 무엇이 민주화요 그게 폭동이지”, “광주에 틀림없이 북괴가 습격했을 거예요. 우리가 잘 잡지 못하고 증거가 없어서 그렇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1980년 5월 광주의 진상 규명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은 “전두환은 과연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과 무관한가.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시민을 선동했고 폭도들이 무기고를 습격해 군인을 살상하는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는 그의 주장은 과연 어떤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인가, 이미 법적, 역사적 판단이 내려지고 국가에 의해 기념일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에서도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시민이 저항한 명예로운 사건으로 정의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확인해보려 한다”고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주말 하이라이트]

    ■걸어서 세계속으로(KBS1 토요일 오전 9시 40분) 태초의 자연을 간직한 향기로운 땅 파키스탄. 히말라야, 힌두쿠시, 카라코람 산맥을 따라 대장정이 펼쳐진다. 인더스 강을 거슬러 만년설의 히말라야 고봉, 세상에서 가장 높고 험준한 길 카라코람 하이웨이 등을 통해 깎아지른 듯한 고산준령에서 바라보는 대자연과 그 길 위에서 소박한 삶을 이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본다. 제국의 번영과 몰락을 함께했던 천년고도 라호르는 마지막 통일 왕조인 무굴제국의 옛 수도 역할을 했던 곳으로 변화무쌍했던 역사와 닮은 라호르 성을 비롯해 바드샤히 사원 등 볼거리가 많은 도시다. 과거 번성했던 이슬람 왕조의 건축물들과 도시 곳곳에 쌓인 세월의 흔적을 찾아 떠나본다. ■당신은 너무합니다(MBC 토요일 밤 8시 45분) 지나(엄정화)는 성환(전광렬)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약혼을 발표하고 해진(신다은)과 봉수(김형범)는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다. 한편 지나는 집요하게 자신을 만나려 하는 경수(강태오)를 찾아가고 그 자리에서 자신이 버린 아들이 경수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것이 알고 싶다(SBS 토요일 밤 11시 5분) 지난 6일 출간된 ‘전두환 회고록’ 속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전두환 전 대통령의 주장을 검증한다. 광주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과정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집단 발포는 누구의 명령에서 비롯된 것인지 추적하고 시민들의 무력시위에 맞서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었다는 전 전 대통령의 주장이 정당한지 따져본다.
  • 5월 단체, 회고록 쓴 전두환 고소

    5·18기념재단과 5월 유가족이 27일 ‘전두환 회고록’의 저자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기념재단은 조비오 신부의 조카 조영대 신부가 이날 오후 2시 광주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했다고 밝혔다. 전두환씨는 지난 5일 출간된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계엄군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던 조비오 신부와 피터슨 목사를 “가면 쓴 사탄”이라고 비난했다. 또 전씨는 “조비오 신부는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허위 주장을 번복하지 않았다”며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일 뿐이다”고 주장했다. 기념재단과 5월 단체는 고소장을 제출한 뒤 광주법원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광주시민을 우롱하고, 역사를 농단하는 회고록을 즉각 폐기할 것”을 촉구했다. 한편 5·18기념재단은 조만간 법원에 ‘전두환 회고록’에 대한 판매·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기로 하고 회고록 가운데 사실 관계와 어긋난 대목에 대한 정밀 분석 작업을 벌이고 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5·18 단체 “전두환 회고록 즉각 폐기하라”

    5·18 단체 “전두환 회고록 즉각 폐기하라”

    5·18 관련 단체들이 20일 ‘전두환 회고록’을 즉각 폐기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5·18기념재단과 5월 3단체(유족회·구속자회·구속부상자회)는 20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 앞을 찾아 이같이 주장했다. 이 단체들은 “1997년 4월17일 대법원은 전두환에 대해 반란 수괴, 내란 목적 살인으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며 “전두환은 자신의 죄악에 대해 평생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도 회고록으로 역사에 대한 패악질을 멈추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날 회원들이 자택 바로 앞까지 이동하려 하자 경찰 50여명이 막아서면서 폴리스라인을 둘러싸고 10여분간 소동이 일어났다. 이후 참가자들은 경호 관계자에게 성명서를 전달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일부 참가자들은 분을 못 이겨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기도 했다. 5·18 단체들은 이어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으로 이동해,박근혜 정권 초대 국정원장이던 통일한국당 남재준 대선후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남 후보는 17일 “사법부가 판결한 일부 사상범까지 수감된 교도소를 총을 들고 습격하는 것이 과연 민주화를 위한 것이었느냐”고 말해 민주화운동으로서의 5.18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5·18 단체들은 이날 남 후보에게 광주시민에 대한 사죄, 후보직 사퇴, 선거를 이용한 5·18 왜곡 행위 중단 등을 요구했다. 이들 단체들은 “남 후보가 말하는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은 5·18 당시 3공수여단 병력에 의한 광주교도소 부근의 발포가 정당하다는 주장의 근거”라며 “이는 공수부대의 민간인 학살을 덮으려는 공수부대 대대장의 날조된 증언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전 전 대통령은 최근 발간한 회고록에서 자신이 ‘5·18 치유를 위한 씻김굿 제물이 됐다’고 표현했다. 또 5·18 당시 계엄군 헬기 사격 목격담을 남긴 고(故) 피터슨 목사·조비오 신부를 각각 ‘가면 쓴 사탄’,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5·18 단체들은 전 전 대통령을 상대로 사자(死者) 명예훼손 혐의 고소와 출판금지 가처분 신청 등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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