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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은 민주화 승리의 역사란다” 현직 교사들이 전한 그날의 진실

    “5·18은 민주화 승리의 역사란다” 현직 교사들이 전한 그날의 진실

    “청소년들은 5·18민주항쟁이 비참하고 슬픈 일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5·18민주항쟁은 민주화의 기폭제가 됐다.” 1980년 5·18민주항쟁 10일 뒤인 5월 27일, 계엄군은 무력으로 전남도청을 점령한다. 이 사실만 보면 마치 시민군이 패배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긴 역사에서 보면 5·18은 민주화를 이룬 ‘승리한 역사’이다. 중·고교 교사들이 집필한 신간 ‘5월 18일, 맑음´(창비)이 제목에 역설적으로 ‘맑음’을 넣은 이유다. 책은 5·18기념재단에서 기획하고 임광호 광주 첨단고 교사, 배주영 경북 광평중 교사, 이민종 경기 수원 청명고 교사, 정수연 광주 두암중 교사가 공동집필했다. 총괄 저자인 임 교사는 19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연 출간기념 간담회에서 “2008년 중고생들을 위해 5·18 인정교과서를 만들었지만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도록 일반도서로 새로 만들었다”면서 “5·18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20·30대 독자가 읽기에도 좋은 책”이라고 설명했다. 책은 1, 2부로 나뉜다. 1부에서는 유신시대를 비롯해 5·18부터 5월 27일까지 열흘간의 항쟁을 주로 다룬다. 2부에서는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 그리고 민주화 과정을 담았다. 두 개의 큰 줄기는 다시 항쟁 기간을 상징하는 10개의 장으로 나뉜다. 정수연 교사는 “역사적인 사실만 다루거나, 소설처럼 모호하게 표현한 대부분의 5·18 관련 책과 달리 이 책은 5·18에 관한 가치 중심으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2부인 7~10장은 세계의 민주화와 함께 다룬 점이 돋보인다. 우리의 ‘오월어머니집’은 1977년 아르헨티나의 ‘5월광장 어머니회’, 전두환·노태우 재판은 1997년 프랑스 전범재판 ‘모리스 파퐁’을 엮는다. 책을 기획한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책을 읽고 5·18의 의미를 되새긴다면 최근 자유한국당 의원 망언, 전두환 회고록 등 왜곡과 극단적 주장은 뿌리내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글로벌 인사이트] SNS 소통·첫 유권자 표심이 태국 정치 구도 큰 변수로

    국민 74%가 SNS 사용… 첫 유권자 비율 14.5% 정부의 통제 안 받는 정치권 비판·분석 글 전파 8년 만에 치러지는 24일 태국 총선에서 소셜미디어 역할이 정치 변동 한가운데에 섰다. 2014년 쿠데타 이후 군부 정권에 친화적이던 TV, 신문 등 기존 언론이 못했던 비판과 공론의 장을 소셜미디어가 만들어 나가고 있다. 가디언은 최근 “태국 국민들의 인터넷 사용시간은 전 세계 3위이고 국민의 약 74%가 소셜미디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태국 페이스북 사용자는 4900만명 이상으로 세계 여덟 번째로 정부 통제를 받지 않는 정치권 비판과 분석들의 전파원이 되고 있다. 소셜미디어 사용에 적극적인 젊은층의 상당수가 이번 총선에서 처음으로 유권자가 되는 점도 소셜미디어가 더 주목받는 이유이다. 이번 총선에서 생애 첫 유권자는 약 740만명으로 전체 유권자(5100만명)의 14.5%나 된다. 방콕대의 최근 여론조사 결과 이들 가운데 86%는 총선 정보를 소셜미디어를 통해 얻고 있다고 답했다.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이 사상 처음으로 태국 정치의 주요 의사 전달 수단이자 변수가 된 것이다. 이들은 태국 정당 대립 구도에서 비교적 자유로워 각 정당의 표심 공략 표적이 됐다. 군부 정권도 소셜미디어 영향력을 경계하는 분위기다. 태국 선관위는 ‘온라인 워 룸’을 설치하고 각 정당과 후보들의 온라인 활동을 살펴보고 있다. 시민들은 “소셜미디어가 이번 총선에서 군부 지배를 벗어나게 할 잠재력이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태국 군부 과도의회인 국가입법회의(NLA)는 지난달 28일 사이버 안보법안을 통과시켰다. 오는 6월 발효되는 이 법은 총리 직할 기구인 국가사이버보안위원회(NCSC)를 설립해 사이버 안보 관련 인프라를 확충하고 관련 범죄를 보다 강력히 단속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NCSC는 인터넷 등 네트워크에 대한 광범위한 접근권을 지니며 “심각한 사이버 위협”이 예상될 때는 법원 명령 없이도 관계자를 소환하거나 현장을 수색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시민사회는 “사이버 계엄령”이라며 반발했고 구글, 페이스북 등 글로벌 정보기술(IT)기업 연합체인 아시아인터넷연합(AIC)은 “비상이나 예방조치라는 명목으로 온라인 트래픽을 감시할 전적인 권한을 정권에 부여했다”며 비판했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학생단체, 전두환 자택 앞 시위 “시민 학살한 죗값 치러야”

    학생단체, 전두환 자택 앞 시위 “시민 학살한 죗값 치러야”

    한국대학생진보연합 소속 20여명은 16일 정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두환씨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의 민주주의 열망을 짓밟은 반(反)민주의 상징 전두환은 국민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들은 “전두환은 이달 11일 광주법원에 출석한 자리에서 무릎 꿇고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 한 기자에게 ‘이거 왜 이래’라고 화를 냈다”며 “1980년 5월21일 시민을 향한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증언이 보도됐고, 전두환의 발포 명령으로 당시 광주 시민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 소속인 이화여대 학생 정어진씨는 “전두환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지 않았다고 회고록에 거짓을 말했다”며 “발포를 명령하고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은 응당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날 기자회견을 하면서 ‘전두환=박근혜=황교안=나경원’, ‘5·18 발포 명령 학살자 전두환 구속하라’, ‘전두환은 국민 앞에 사죄하라’ 등이 적힌 피켓을 들었다. 또 회견을 마친 뒤 전 전 대통령의 얼굴이 찍힌 사진을 긴 주걱으로 때리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전두환씨는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를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불구속기소 됐다. 5·18 민주화운동 39년 만에 피고인 신분으로 광주 법정에 선 전씨는 당시 시민을 향한 발포 명령이나 헬기 사격에 대한 질문을 외면하거나 전면 부인했다. 다음 재판은 증거 정리를 위한 공판준비기일로 진행되며 오는 4월 8일 오후 2시에 열린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계엄군 들어오기 전, 헬기가 전일빌딩 향해 사정없이 쏴 부렀어”

    “계엄군 들어오기 전, 헬기가 전일빌딩 향해 사정없이 쏴 부렀어”

    ‘5·18 헬기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비난해 11일 광주의 법정에 선 피고인 전두환은 “헬기 기총소사(항공기가 근거리에서 지상 표적이나 선박을 사격하는 것)는 얼토당토않은 얘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피로 물든 1980년의 광주를 지켰던 시민들은 “내가 헬기 사격의 목격자”라며 반박한다. 이들은 ‘전두환’이라는 이름 앞에 치를 떨면서도 폭력적 대응보다는 “진정 어린 사과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광주시민들의 목격담을 통해 그날의 진실과 이후 시민들이 감내해 온 울분에 대해 들어 봤다.“헬기 밑에서 불이 번쩍 나면서 전일빌딩을 향해 사정없이 쏴 부렀습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이었던 박남선(65)씨는 지난 10일 광주 금남로의 전일빌딩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 빌딩에는 헬기 기총소사의 증거가 남아 있다. 박씨는 “그해 5월 27일 도청 정문 앞에서 시민군 병력배치를 하고 있었는데 총소리가 났다”며 “새벽 3시쯤 계엄군이 밀고 들어오기 전에 빌딩 옥상의 기관총을 향해 헬기에서 사격한 것을 봤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이날 함께 만난 최운용(75·당시 민주헌정동지회 광주전남조직책임원)씨도 헬기 기총소사 목격자다. 5월 21일 오후 1시쯤 공수부대와 경찰들이 도청 방향에서 금남로의 시민들을 향해 총을 쐈다. 시민들은 물러섰고, 최씨는 관광호텔 쪽에서 쓰러진 청년을 인도 쪽으로 끌어낸 후 다시 이동했다. 10분 정도 더 걸어가 도착한 곳이 불로교였다. 최씨는 “오후 2시 30분쯤 불로교를 건너기 전 머리 위쪽으로 헬리콥터가 날아왔다”며 “헬리콥터가 불로교 위에서 총을 도청 방향으로 쏘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최씨의 목격은 고 조비오 신부의 증언과도 대체로 일치한다. 조 신부는 1995년 광주 5·18 특검에 출석해 21일 오후 1시 30분에서 3시 사이에 헬기가 도청에서 광주공원 방향으로 가면서 불로교 인근에서 사격하고 백운동 방향으로 날아갔다고 증언했었다. 당시 선교를 위해 광주에 머물렀던 아놀드 피터슨 목사도 특검에서 호남 신학대와 기독교병원 인근에서 오후 3시 15분부터 5시 사이에 기총소사를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이에 전두환 전 대통령은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헬기를 이용한 기총소사까지 감행했다는 등 차마 말로 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들이 더해져 전해지고 있다”며 “조비오 신부는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일 뿐”이라고 했다. 피터슨 목사에 대해서는 “목사가 아니라 가면을 쓴 사탄”이라고 비난했다. 박씨는 “조비오 신부님뿐만 아니라 저와 최운용 선생님도 직접 목격을 했다”며 “우리들의 존재와 증언이 증거다”고 반박했다. 2018년 국방부 5·18 특별조사위원회는 육군이 1980년 5월 21일과 5월 27일 광주시민들에게 헬기 사격을 했으며, 공군이 무장 전투기를 대기시켰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앞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도 전일빌딩 10층 외벽 등에서 발견된 탄흔을 호버링(hovering·항공기 등이 일정 고도를 유지한 채 움직이지 않는 상태)하던 헬기에서 발사된 것으로 보인다고 감정했다. 최씨는 “2016년 전일빌딩을 주차장으로 만든다고 했을 때 정말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면서 핏발을 세우고 싸웠다”며 “그때 건물을 보존하지 못했으면 헬기 기총소사의 증거가 사라질 뻔했다”고 말했다. ●전두환 초도순시 막아선 최운용 어머니 5·18 희생자들이 잠든 광주 북구 ‘5·18 구묘역’ 추모객들은 입구 땅속에 묻힌 비석을 발로 밟고 참배를 시작한다. 비석에는 ‘전두환’, ‘이순자’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전씨 부부가 1982년 3월 10일 전남 담양군 고서면 성산마을에서 숙박한 것을 기록한 민박기념비다. 이 비석을 구묘역에 가져다 둔 사람이 최씨와 광주전남 민주동우회 회원들이었다. 최씨는 “1989년 초 기념비석의 존재를 알고 ‘살인마가 어떻게 전남에서 자고 기념비까지 만들 수가 있느냐’고 분노했다”며 “오월 영령을 달래기 위해 거사를 해야겠다고 의견이 모였다”고 했다. 동우회원 30여명은 1989년 1월 13일 망치를 들고 전남 담양 성산마을에 갔다. 그런데 비석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정보가 샌 것이다. 이들은 비석을 세웠던 돌 공장을 찾아가 “어떻게 했느냐”며 주인을 다그쳤다. 주인은 “오늘 새벽 이장한테 장비를 가져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비석을 파서 논두렁에 두고 지푸라기로 덮어 놨다”고 고백했다. 최씨는 “비석을 망치로 다 두들겨 깬 후 일부를 5·18 묘 인근에 묻었다”며 “당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전씨는 1981년 대통령 신분으로 광주에 초도순시(지역을 돌며 상황을 살피는 것)를 왔다고 한다. 전씨가 당당하게 광주에 입성한 것을 막아선 것은 박씨의 어머니다. 어머니가 플래카드를 들고 전씨 행렬에 뛰어들었다. 당시 박씨가 사형선고를 받았기에 어머니는 두려울 게 없었다. 박씨는 “그날 어머니는 아스팔트에서 경찰들에게 엄청나게 두들겨 맞고, 영장도 없이 5일간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고 말했다. ●“삼촌이 저를 통해 싸우신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0일 광주 북구 용봉동 성당에서 저녁 미사를 마친 후 집무실에서 만난 조영대 주임 신부는 “(삼촌인) 조비오 신부님은 살아생전에 전두환과 5·18을 왜곡하려는 세력들과 쉼 없이 싸웠다”면서 “돌아가셔서도 5·18의 진상 규명을 위해서 싸우고 계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조비오 신부가 전씨 회고록을 통해 명예훼손을 당하지 않았다면 재판정에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비오 신부는 5·18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 16명과 함께 신군부의 도청 진압작전을 막기 위해 행진에 나섰다가 내란음모 핵심 동조자로 몰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조영대 신부 역시 5·18 당시 고교 1학년생으로 학살을 목격했다. 그는 삼촌을 대신해 전씨를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인물이다. 조영대 신부는 성직자인 삼촌을 비방한 전씨를 향해 “조비오 신부님은 2008년 교황께서 고위 성직자 품위인 몬시뇰 명의를 수여한 분”이라면서 “광주 교구에서 사제가 몬시뇰에 임명된 것은 47년 만이었을 정도로 교구의 대표 성직자셨다”고 말했다. 조비오 신부는 5월만 되면 미사 중에 전두환과 군부세력들이 광주에 저질렀던 만행을 언급했다. 조영대 신부는 “조비오 신부님은 회개할 줄 모르는 전두환에게 분노하시고 마음 아파하시고 속상해하셨다”며 “한숨을 푹 내쉬며 진상 규명이 잘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전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전씨를 사면할 때는 “광주에 저질렀던 죄악이 얼마나 큰데 뉘우침도 없고 진상 규명도 안 된 상태에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분개했다고 한다. 아직도 광주시민들은 전두환씨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조영대 신부는 “(전씨를 단죄하라는 주장이) 단순히 보복이나 분노의 차원은 아니다”라면서 “민주화를 위한 밑거름인 광주정신을 되살려 가는 차원에서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으로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광주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광주로 출발’ 전두환, 광주지법 도착…취재진에 “이거 왜 이래”

    ‘광주로 출발’ 전두환, 광주지법 도착…취재진에 “이거 왜 이래”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 사자(死者)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돼 11일 재판 출석을 위해 광주로 향한 전두환씨가 광주지방법원에 도착했다. 이날 오전 8시 32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광주로 출발한 전두환씨는 낮 12시 34분 광주지법에 도착했다. 승용차에서 내린 전두환씨는 경호원의 부축을 받지 않고 스스로 걸어서 법정동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전두환씨는 차에서 내린 뒤 취재진과 시민들을 한 차례 둘러본 뒤 살짝 비틀거리며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신뢰관계인으로 동행한 부인 이순자씨도 전두환씨 바로 뒤를 따라갔다. ‘광주시민들에게 사과할 생각이 없냐’는 취재진의 물음에 전두환씨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호원의 제지를 받던 한 취재진이 손을 뻗어 “발포 명령 부인하십니까”라고 질문하자 “이거 왜 이래”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후에도 “광주시민들에게 사과할 생각 없으신가”라는 질문이 빗발치자 고개를 돌려 흘겨본 뒤 건물로 들어갔다.(동영상이 보이지 않으면 클릭) 전두환씨는 이동 중간에 점심을 먹고 오후 1시 30분쯤 법원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한 차례 휴게소에 들렀을 때 취재진이 접근하자 이를 피해 쉬지 않고 광주로 직행했다. 전두환씨는 법정동 2층 내부 증인지원실에서 도시락을 먹고 대기하다가 재판에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과 경찰은 전두환씨가 자진출석함에 따라 출석을 강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법원과 협의해 구인장을 집행하지 않았다. 전두환씨는 2017년 4월 펴낸 회고록에서 고 조비오 신부를 ‘거짓말쟁이’로 비난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조비오 신부는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인물이다. 전두환씨가 법정에 출석하는 것은 1979년 12·12 사태와 1980년 5·17 계엄 확대 및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 진압 등의 혐의로 1996년 12월 항소심 선고 공판에 선 지 23년여 만이다. 전두환씨의 재판은 이날 오후 2시 30분 광주지법 201호 형사대법정에서 형사8단독 장동혁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23년 만에 법정 서는 전두환…이번엔 ‘골목 성명’ 없었다

    23년 만에 법정 서는 전두환…이번엔 ‘골목 성명’ 없었다

    전두환씨가 약 23년 만에 다시 법정에 선다. 23년 전엔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학살 및 내란 등의 혐의로, 이번엔 5·18 희생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다. 전씨는 11일 오후 2시 30분 광주지법에서 열리는 공판기일에 출석하기 위해 이날 오전 8시 30분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나와 승용차를 타고 광주로 출발했다. 부인인 이순자씨도 동행했다. 전씨는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지 않고 집에서 혼자 걸어 나와 아무 말 없이 바로 승용차에 올랐다. 전씨는 2017년 4월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 당시 계엄군 헬기사격을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의 증언을 거짓이라고 주장해 조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지난해 5월 3일 불구속 기소됐다. 전씨는 회고록에서 조비오 신부를 ‘가면 쓴 사탄’이라고 지칭했다. 앞서 전씨는 1995년 12월 21일 반란수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 등의 혐의로 노태우씨와 함께 기소된 적이 있다. 당시 검찰은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해 ‘12·12 군사쿠데타’(전두환·노태우를 앞세운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킨 사건)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및 학살의 주범인 노씨와 전씨를 수사해 재판에 넘겼다. 검찰은 1995년 12월 2일 전씨에게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해 조사를 받을 것을 통보했다. 하지만 전씨는 연희동 자택 앞에서 “종결된 사안에 대한 검찰의 수사 재개는 진상규명이 아니라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것이므로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골목 성명’을 발표하고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내려가 버렸다. 이에 검찰은 전씨에 대해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다음 날인 1995년 12월 3일 법원이 영장을 발부해 전씨는 안양교도소에 수감됐다.검찰은 1996년 8월 1심 재판에서 전씨에게 사형을, 노씨에겐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1심 재판부는 전씨에게는 검찰 구형대로 사형을, 반면 노씨에게는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했다. 두 사람은 그해 12월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으로 감형받았다. 결국 전씨는 항소심 선고공판 출석 23년 만에 다시 법정에 서게 된 셈이다. 이후 노씨는 1997년 4월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7년을 선고받고 추징금 2688억원 납부를 명령받았다. 전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추징금 2205억원 납부를 명령받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같은 해 12월 김영삼 정부로부터 사면을 받았다. 이번 전씨의 ‘5·18 사자 명예훼손’ 사건은 광주지법 형사8단독 장동혁 부장판사가 심리한다. 전씨는 이날 공판 전까지 세 차례 재판 연기와 관할지 이전을 요구하며 법정을 피해왔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5·18 명예훼손’ 전두환 연희동 자택 출발…이순자씨도 동행

    ‘5·18 명예훼손’ 전두환 연희동 자택 출발…이순자씨도 동행

    전두환씨가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광주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11일 자택을 출발했다. 부인인 이순자씨도 동행했다. 전씨는 이날 오후 2시 30분 광주지법에서 열리는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오전 8시 30분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출발했다. 전씨는 말없이 이씨와 함께 승용차에 탑승했다. 전씨는 2017년 4월 출간한 회고록에서 5·18 당시 계엄군 헬기사격을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의 증언을 거짓이라고 주장해 조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지난해 5월 3일 불구속 기소됐다. 전씨는 회고록에서 조비오 신부를 ‘가면 쓴 사탄’이라고 지칭했다. 전씨는 오후 1시 30분쯤 광주지법에 도착할 예정이다. 전씨가 도착하면 경찰은 법원이 발부한 구인장을 집행한다. 다만 자진 출석과 고령임을 이유로 수갑을 채우지는 않는다. 전씨의 ‘5·18 명예훼손’ 사건 심리는 광주지법 형사8단독 장동혁 부장판사가 맡았다. 그동안 전씨는 공판기일 출석을 계속 미뤄왔다. 전씨 변호인은 지난해 5월 28일로 예정된 첫 재판을 앞두고 재판 날짜를 바꿔달라고 신청했다. 이 신청을 받아들여 재판부는 지난해 7월 16일 첫 공판기일을 열기로 했다. 그런데 전씨 변호인이 또 기일을 변경해달라고 신청해 첫 재판이 지난해 8월 27일로 연기됐다. 하지만 전씨는 재판을 하루 앞두고 법정 불출석 의사를 밝혔다. 당시 이순자씨는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 명의의 입장문을 통해 2013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전씨가 “지금까지 의료진이 처방한 약을 복용해 오고 있다”면서 “회고록 출판과 관련해 소송이 제기돼있는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들어도 잠시 뒤에는 설명을 들은 사실조차 기억을 하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전한 바 있다. 이날 공판 전까지 전씨는 지난해 5월~올 1월 세 차례 재판 연기와 관할지 이전을 요구하며 법정을 피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3·1운동 100년] 평화행진 첫날부터 발포한 日, 만행·사망자 조직적 은폐·축소

    [3·1운동 100년] 평화행진 첫날부터 발포한 日, 만행·사망자 조직적 은폐·축소

    “서울에서 발생한 일이다. 어린 학생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자 일본 헌병이 칼로 그의 오른손을 잘랐다. 오른손이 잘린 학생은 다시 왼손에 국기를 들고 더욱 높은 소리로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헌병은 그의 왼손마저 잘랐다.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한 서양인이 사진을 찍어 남기려다가 헌병에게 끌려갔다.”(1919년 4월 12일자 중국 국민공보) “체포된 한인들은 밤낮으로 잔인한 고문을 당한다고 한다. 한인 가운데 죽은 자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서울에서 50마일(약 80㎞) 이내 무수한 촌락이 불탔다. 시체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1919년 5월 19일자 국민공보)●시위 확산 3월 말부터 조준 발포… 희생 급증 일제는 3·1운동에 나선 조선인들을 총칼로 탄압했다. 그들의 눈에 태극기를 든 시위대는 식민지 체제를 전복하고자 선량한 조선인들을 선동하는 폭도에 불과했다. 만행과 학살이 일상이 됐다. 총을 든 일본군과 경찰, 시위 주동자에게 다가가 몸에 색분필을 발라두는 조선인 밀정까지 뒤섞이면서 만세운동은 시작과 동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곤 했다. “파리채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단호한 처치만 필요할 뿐”이라던 한 일본 경찰의 외침 속에 3·1운동을 대하는 일제의 태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26일 국사편찬위원회의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3·1운동 참가 인원 가운데 사망자는 최대 934명으로 집계된다. 일제가 파악한 사망자 553명보다 두 배 가까이 많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내놓은 7483명, 박은식(1859~1925)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분석한 7509명에는 크게 못 미친다. 이와 관련해 국편 측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망자수가 최소 934명이라는 것”이라며 “자료의 오류 수정과 추가 발굴 등의 연구가 진행되면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사망자수에서도 알 수 있듯 일제의 만행은 도를 넘었다. 3·1운동 첫날인 1919년 3월 1일부터 발포가 이뤄져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점이 최근 연구에서 드러났다. 만세운동이 격화된 3월 말~4월 초 사이에 사망자가 집중됐다는 사실도 재확인됐다. 실제로 3월 1일 평양에서 주민 5000여명이 참가한 시위를 기록한 외국인 자료에는 “총상 환자 5명이 병원에서 숨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같은 날 평북 선천에서도 시위 중 체포된 11명의 학생 가운데 3명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있다. 이들은 가혹한 태형으로 중상을 입고 숨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시위 첫날부터 무자비한 폭행이 가해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이계형 국민대 특임교수는 “아무래도 서울 시내는 외국인이나 선교사 등 보는 눈이 많아서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도 발포가 조심스러웠을 것”이라면서도 “(더는 서양인의 눈치를 보지 않기로 결심한) 3월 말부터 사람을 직접 조준 발포가 잦아졌다”고 말했다. 국편이 파악한 3·1운동 관련 사망자 934명 가운데 47.6%(445명)가 3월 28일~4월 6일 사이에 몰려 있다. 서울에서는 사망 추정자가 3명에 불과하지만 외국인이 거의 없던 평안도에서는 423명이나 됐다.●日軍 4만여명 준계엄체제… 2만 6713명 검거 3·1운동이 대부분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진행됐음에도 시간이 갈수록 사상자수가 늘어난 것은 시위가 사그러들지 않고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총독부가 강경 대응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수시로 총독 명의의 유고(諭告·담화문)를 발표했다. 3월 7일에는 “허튼소리로 인심을 흔드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4월 10일에는 “지방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중앙정부에 군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으니 화를 입지 말도록 하라”고 최후통첩성 발언을 내놨다. 일본 군경의 총기 사용을 용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일본측 발포가 없는 날은 7~8일에 그쳤다. 이양희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은 “1919년 3월 11일쯤 일본 육군성 차관이 만세운동 초기 진압에 실패한 것을 두고 조선총독을 질책했다”면서 “무력 탄압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 내각의 명령에 의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3·1운동 기간 중 최악의 사태로 꼽히는 ‘제암리 학살 사건’도 일본의 강경 진압이 최고조에 달한 1919년 4월 15일 발생했다. 보병 79연대 중위 아리타 도시오는 “화성 발안장 만세운동의 주동자를 검거한다”며 제암리 마을에 들이닥쳤다. 15세 이상 남자들을 교회당 안으로 몰아넣은 뒤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때 한 부인이 어린 아기를 창 밖으로 내놓으며 “아기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일본 군경은 아이마저 찔러죽였다. 일제는 만행의 증거를 없애고자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으로 제암리에서만 23명이 목숨을 잃었고 인근 지역 참살까지 포함하면 사망자가 30명을 넘는다. 고주리에서는 일가족 6명의 목을 쳐서 죽인 뒤 시신을 토막 내 짚가리 위에 올려놓았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조선군사령관으로 재직 중이던 우쓰노미야 다로가 쓴 일기에는 “일본군이 약 30명을 가두고 학살과 방화를 했다.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고 처분하면 간단하지만 이렇게 되면 학살을 자인하는 꼴이 돼 제국의 입장에서 불이익이 크다. 이 때문에 간부회의에서 조선인들이 저항해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적혀 있다. 일본 스스로도 정당한 행동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국제 여론이 나빠지자 사건을 일으킨 아리타 중위는 재판에 회부됐지만 4개월 뒤 무죄로 풀려났다. 4월 초 일본에서 조선으로 추가 파견된 ‘임시조선파견보병대대’도 조선 민중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3·1운동 확산의 원인 가운데 하나를 병력 부족으로 본 일본 내각과 조선총독부의 이해가 맞물린 것으로, 6개 대대 4200명 규모였다. 3·1운동 발발 당시 일본군 2개 사단이 상주해 3만~4만명가량 군이 있었던 점을 감안해보면 1919년 4월 일본군은 최대 4만 5000명까지 늘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임시파견대대는 1905년에 개발된 근접 전투용 무기인 ‘38년식보병총’과 기관총, 수류탄을 소지하고 있었다. 이양희 연구원은 “임시파견대대는 시장에서 무장을 한 채 훈련을 하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하려는 조선인들에게 겁을 주는 행동이 잦았다”며 “일제가 3·1운동에 대해 준계엄 체제로 대응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조선총독부 내부 자료를 보면 3·1운동 시작부터 4월 30일까지 약 두 달간 검거된 조선인은 2만 6713명이었다. ●3·1운동 약화 유화책 펼쳐… 단속·감시 체계화 일제는 3·1운동을 약화시키고자 무력 진압 외에도 의료선전 활동, 시장 개시(開市) 독려 등 유화책을 썼다. 당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3·1운동에 참가했다가 부상당한 이들을 무료로 진료할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나온다. 서울시내 유력 상인 40여명을 설득해 상점을 다시 열게 하는 등 조선인들이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뒤로는 경비인력을 늘리면서 3·1운동이 재발하지 않도록 조치를 이어갔다. 3·1운동 이전 1만 3230명 수준이었던 경찰 수는 1921년 2만명을 넘어섰다. 일제의 단속과 감시가 더욱 체계화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주옥순 엄마부대 대표 등 태극기집회 참가자 ‘내란선동’ 무혐의…군인권센터 항고

    주옥순 엄마부대 대표 등 태극기집회 참가자 ‘내란선동’ 무혐의…군인권센터 항고

    이른바 ‘태극기 집회’에서 계엄령 선포 등을 촉구해 사회 불안을 야기할 수 있는 발언을 했다며 내란선동 혐의로 고발됐던 집회 참가자들이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시민단체 군인권센터는 “주옥순 ‘엄마부대’ 대표 등 5명에 대해 서울중앙지검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면서 “피고발인 말만 믿고 무혐의 처분을 내린 검찰에 항고장을 냈다”고 25일 밝혔다. 군인권센터는 2017년 주옥순 엄마부대 대표, 장경순 전 국회부의장 및 전 대한민국 헌정회장, 한성주 공군 예비역 소장, 윤용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회장 등 5명을 내란선동 혐의 등으로 고발했다. 군인권센터는 고발 당시 “주옥순 대표 등은 집회에서 ‘군대여 일어나라’, ‘계엄령을 선포하라’ 등을 표어로 군대 투입을 통한 시민 학살을 촉구하는 주장을 펼쳤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집회 현장의 발언 내용만으로 이들이 국헌 문란(헌법 기본질서에 대한 침해)의 목적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부족하다”면서 “피의자들의 변명을 뒤집고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불기소 이유를 밝혔다. 군인권센터는 “검찰은 피의자들이 검찰 수사에서 ‘계엄령 선포는 헌법상 대통령의 권한으로 국가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발동하는 헌법적 조치로, 자신은 집회에서 그 권한을 행사하기를 촉구하는 주장을 했을 뿐, 국헌을 문란하게 하거나 국토를 참절할 목적 내지 폭동을 일으킬 목적이 전혀 없었다’고 진술한 것만 믿었다”면서 “평화 촛불집회를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는 행위는 엄연한 내란”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이들은 홧김에, 충동적으로 이러한 발언을 한 것이 아니고 조직적으로 피켓을 인쇄해 배포하거나 유튜브 방송 등을 통해 홍보하며 전국을 돌며 집회를 개최하고 같은 주장을 반복했다”면서 “군대를 선동하고자 하는 목적도 없이 이러한 일들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낮 도심에서 헌정 진서를 부정하는 주장을 펼쳐도 무혐의 처분을 내린다면 수사기관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라면서 “면밀한 재수사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36번 광수’의 분노… 그날 이후 난 최룡해가 됐다

    ‘36번 광수’의 분노… 그날 이후 난 최룡해가 됐다

    “도청 못 지키고 살아남아 평생 죄책감… 5월을 모독하지 말라”“그라믄 내가 쩌기 위에(북한) 있어야 할 거 아니여.” 극우 인사 지만원(77)씨로부터 ‘광수’ 36번, 최룡해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으로 지목된 양동남(58)씨는 “내가 광수 중에 서열이 제일 높다. 서열 2위가 뭐 한다고 여기서(한국) 살고 있겠느냐?”며 허탈하게 웃었다. ‘광수’는 ‘광주시민군으로 위장한 북한 특수군’을 지칭하는 지씨의 표현이다. 웃음으로 승화했지만, 그는 39년 전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지난 13일 역사 왜곡에 항의하기 위해 국회를 찾은 그를 만났다. 양씨는 “처음에는 황당해서 사진을 보고 나라고 말도 안 했다”며 “유치한 장난을 계속 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5·18 유공자에 대한 능멸이 계속되자 양씨는 2016년 말 지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양씨는 지난해 서울중앙지법에서 지씨의 변호사가 “왜 광대뼈가 튀어나왔느냐는 질문을 했다”며 “변호사가 법정에서 그게 물어볼 이야기냐”고 황당해했다. 양씨는 재판정에서 이렇게 성토했다고 한다. “당신들도 잡혀가서 한 5개월 두들겨 맞으면서 조사받아 봐라. 한 끼니에 군용 숟가락으로 세 숟가락 뜨면 식사가 끝났다. 하루에 밥을 열 숟가락도 못 먹었다. 그렇게 하면 당신들도 광대뼈가 나올 것이다.”광주 시민군 제1 기동타격대 소속으로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을 마지막까지 사수하다 체포된 양씨는 조사를 받을 때 북한군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고 했다. 담당 수사관은 “김대중이가 만약 대통령이 되면 너에게 광주경찰서 서장 자리 준다고 했지”라는 질문만 했다. 양씨는 “자기들(김영삼 정권)이 5·18 특별법까지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북한군 주장을 하고 있다”며 “지만원이의 뇌 구조를 한번 보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앞서 지씨가 광수로 지목한 이들의 안면 분석을 했던 최창석 명지대 정보통신과 교수는 “딱 봐도 아닌데 아니라고만 할 수 없어서 객관적 비교를 했지만 역시 아니었다”고 말했다. 서울신문의 의뢰로 광수 36번, 양씨, 최룡해의 사진을 분석한 최 교수는 “광수 36번과 양씨의 눈썹, 눈, 코밑, 입의 간격이 일치했다”며 “반면 광수 36번의 콧대는 죽어 있는데 최룡해의 콧대는 서 있고, 코도 더 길다”고 전했다. 최 교수는 “광수 36번의 턱이 가려져 있고 두건을 쓰고 있어서 정확하게 보기는 어렵다”면서도 “그러면 최룡해라는 근거도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씨와 함께 이날 국회를 찾은 5·18 관련 단체들도 북한군 개입설을 반박했다. 김후식 5·18 민주화운동 부상자회 회장은 “1988년 청문회 당시 군과 정부(자유한국당 전신인 민정당 정부)가 내놓은 자료에도 북한군이 내려왔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북한군이 개입됐다면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이 가만히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양희승 5·18 구속부상자회 회장도 “북한군이라고 지목한 무명 열사 묘지를 파헤쳐 DNA 검사를 했는데 5세에서 7세로 나타났다”며 “지씨 말대로라면 북한 특수군이 5~7세에 내려왔다는 얘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북한군 묘지라고 파보면 5~7세 아이들”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도청을 장악했다. 새벽 5시쯤 마지막 순간에 시민군 박남선 상황실장은 “니기들이 마지막인 것 같다. 니기들이라도 살아서 최후진술을 해라”고 말한 뒤 총을 빼앗아 복도에 던졌다고 한다. 양씨는 계엄군의 대검에 찔려 체포돼 내란실행 혐의로 기소됐다.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그는 같은 해 12월 29일 군사고등법원에서 형집행정지를 선고받고 석방됐다. 그는 “광주와 관련된 일에 절대 가담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석방됐다”며 허공을 쳐다봤다. 양씨에게 80년 광주는 평생의 아픔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자고 다짐했는데, 살아남았다.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안고 지금까지 살아왔다”며 고개를 숙였다.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그는 석방 이후 감시를 받으면서도 5·18을 다룬 황석영의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 사진, 영상을 들고 전국을 돌며 광주의 진실을 알렸다. 양씨 같은 피해자들의 노력 덕택에 광주의 진실은 역사에 기록됐다. 그러나 양씨는 지금도 5월이 되면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그는 “취직을 해도 봄이 되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몇 번이나 직장을 그만뒀다”며 “1990년 이후까지 신경안정제를 먹어야 잠을 잘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양씨는 “바라는 게 없다”고 했다. 그냥 5월을 모독하지만 말라는 것이다. 양씨는 “내 주변에서만 2명이 생활고와 트라우마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며 “제대로 일도 못 하고, 빚을 내어 구입한 안정제로 버티는 이들을 모욕하지 마라”고 했다.●“깡패가 막아도 진실 알려… 두렵지 않다” 어두웠던 양씨의 표정은 딸 이야기에 이르자 비로소 밝아졌다. 이날 아침 고등학교 3학년인 딸이 “신나게 싸우고 오라”고 응원을 해 줬다는 것이다. 국회 쪽으로 걸어가니 태극기 부대가 보였다. 두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저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깡패들이 항쟁 사진전을 막으려고 위협했을 때도 진실을 알렸다”며 웃어 보였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고혜지 기자 hjko@seoul.co.kr
  • 국회 공청회에 지만원 불러들여 5·18 모독한 자유한국당

    국회 공청회에 지만원 불러들여 5·18 모독한 자유한국당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공청회를 열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고 매도하고 5·18 유공자들을 “괴물 집단”이라고 폄훼해 논란이 되고 있다. 지난 8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자유한국당의 김진태·이종명 의원 주최로 ‘5·18 진상규명 대국민 공청회’가 열렸다. 공청회에는 이종명 의원을 비롯해 같은 당의 김성찬·이완영·백승주·김순례 의원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육군 대령 출신의 이종명 의원은 5·18 민주화 운동을 ‘사태’, ‘폭동’이라는 말로 명명했다. 그는 “5·18 사태가 발생하고 나서 5·18 폭동이라고 했는데, 시간이 흘러 민주화 운동으로 변질됐다”면서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변질된 게 아니라 정치적·이념적으로 이용하는 세력에 의해 폭동이 민주화 운동이 됐다”고 했다. 김순례 의원은 “저희가 방심한 사이 정권을 놓쳤더니 종북 좌파들이 판을 치며 5·18 유공자라는 괴물 집단을 만들어내 우리의 세금을 축내고 있다”고 했다. 특히 ‘5·18은 북한군 선동에 의해 발생한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극우 논객 지만원씨가 공청회 발표자로 나서 더욱 논란이 됐다. 지씨는 이 자리에서도 “5.18은 북한 특수군 600명이 주도한 게릴라전이었다”면서 “이른바 ‘광주의 영웅’들은 북한군에 부화뇌동 부역한 부나비, 무개념 아이들과 무고한 피해자들”이라고 했다.더 나아가 지씨는 “전두환은 영웅”이라면서 “그 순발력과 용기가 아니었다면, 이 나라는 쿠데타 손에 넘어갔을 것”이라고도 했다. 지씨는 5·18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이 북한에서 침투한 간첩이라고 비방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2016년 12월 이미 재판에 넘겨진 상태다. 지난해 7월에는 5·18 당시 계엄군에 체포된 시민들이 ‘북한 특수군’이라며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민주평화당, 정의당은 이날 공청회를 일제히 비판했다. 민주당의 설훈 최고위원은 “지만원이 주장하는 허무맹랑하고 사기에 가까운 ‘북한 특수부대 광주 잠입설’을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5·18 진상규명의 주제로 내세운다는 자체가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라면서 “지금도 고통받는 5·18 피해자와 광주의 원혼들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라고 지적했다. 평화당의 김정현 대변인은 논평에서 “자유한국당은 5·18에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해괴한 주장을 한 지만원에게 국회 토론회라는 멍석을 깔아준 국회의원들을 그대로 방치했다”면서 “공당의 간판을 내려야 한다”고 비판했다. 정의당의 최석 대변인도 논평을 통해 “국회에서 국민과 광주를 우롱하는 자리를 만든 자유한국당에 강한 유감을 표한다”면서 “왜곡과 날조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세력을 국민들이 두고만 보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이날 5·18 유족회 회원들은 행사장 앞에서 “부끄러운 줄 알라”고 외쳤고 ‘광주를 모욕하지 말라’, ‘진실은 거짓은 이긴다’라고 씌여진 현수막을 펼치며 공청회 개최에 강력 항의했다. 그러자 보수 단체 회원들이 “빨갱이들은 입 다물라”고 소리쳤고, 급기야 물리적 충돌까지 벌어졌다. 일부 보수 단체 회원들은 유족회 회원의 멱살을 잡거나 밀어 넘어뜨렸다. 이 과정에서 보조의자를 들며 위협 행위를 하거나 뒷덜미를 잡아끄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경찰이 출동하고 상황을 수습한 뒤에야 공청회가 열렸다. 한 5·18 유족은 “제1야당이라는 자유한국당이 신성한 국회에 (지만원씨를 불러) 옹호하느냐”면서 울분을 토로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박건승 칼럼] ‘전두환 골프’ 실종 사건

    [박건승 칼럼] ‘전두환 골프’ 실종 사건

    골프는 ‘멘탈게임’이라고 한다. 그만치 심리적인 요소가 많이 작용한다는 뜻이다. ‘골프는 90% 심리 게임이다’라거나 ‘골프는 과학이다´와 같은 책이 인기를 모으고, ‘마인드 골프´나 ‘골프 심리´란 용어가 자연스럽게 회자하는 것을 보면 골프는 정신력이 강하게 지배하는 운동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서울대병원이 제공하는 ‘의학정보´에 따르면 알츠하이머 환자는 기억력 쇠퇴 말고도 전형적으로 인지기능 장애와 시공간 파악 능력 저하, 운동력 장애, 판단력 저하 증세를 보인다. 중증 알츠하이머와 골프는 양립할 수 없는 관계란 얘기다. ‘손혜원 투기 의혹’에 묻혀 묵과한 것이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이른바 ‘알츠하이머 골프’ 사건이다. 2013년 이후 6년째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는 전씨가 광주 재판을 앞두고 지난해 두 차례(8월, 12월) 부인 이순자씨 등과 골프를 쳤다는 것이다. 전씨 측근도 부인하지 않은 데다 골프장 종사원들의 다양한 증언을 토대로 운동한 날짜까지 확인된 사안이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고 해서 골프를 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런데 2~3분 전의 일도 기억하지 못해 하루에 열 차례씩 양치질을 한다는 사람이 멀쩡히 필드에 나가 골프를 쳤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골프 스코어를 손수 계산할 정도로 정신 상태가 아주 양호하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세계 의학계에 기적의 사례로 보고해야 할 일이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 전씨는 2년여 전에 펴낸 ‘전두환 회고록’에서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이라고 표현한 혐의(사자 명예훼손)로 재판에 회부돼 있는 상황이다. 광주지법은 2017년 8월 27일 첫 재판을 열었으나 그는 알츠하이머를 이유로 불출석했으며 지난 7일에도 독감과 고열 등을 내세워 나오지 않았다. 물론 운동 삼아 골프를 칠 수는 있다. 그러나 알츠하이머 증세가 워낙 심해 재판에도 못 나갔다는 사람이 멀쩡한 정신으로 라운딩했다는 사실 앞에선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부질없는 소리지만 김영삼 정권이 좀더 사려가 깊었더라면 1997년 12월에 전씨를 사면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풀어 주더라도 구속집행정지 조처를 택했더라면 전씨가 이처럼 함부로 국민을 기만하거나 사법체계를 비웃지는 못했을 것이란 얘기다. 그는 지금까지도 광주 시민에게 제대로 사죄한 적이 없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진실성을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다음 광주 재판은 3월 11일 열린다. 그때 가서 또 무슨 핑계를 댈지 알 수 없지만, 3월 재판은 역사가 전씨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 괴이한 일들이 잇따르는 것은 허투루 볼 일이 아니다. 자유한국당은 유일하게 ‘전씨 골프’에 대해 논평 한 줄 내지 않았다. 아무리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은근슬쩍 전씨를 비호하는 듯한 냄새를 풍겨서는 곤란하다. 이 당은 ‘알츠하이머 골프’ 사건 직전에는 보란 듯이 극우적 성향의 인사를 ‘5·18 진상조사위원’으로 추천했다. 그 가운데는 “계엄군은 시위대를 조준 사격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시위대가 군경을 위협했다”고 언죽번죽 말하는 사람도 있고 “5·18은 시민들이 선동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오죽했으면 “진상조사위원에 ‘조사 대상´을 추천했다”는 말이 나올까. 이들이 왜곡되거나 은폐된 5·18의 진실을 균형되고 객관적으로 규명해 국민 통합에 기여할 적임자들이라는 제1 야당의 평가를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정부와 여당에도 책임이 없진 않다. 반역사적인 일들이 공공연히 펼쳐지고 있는데도 그때마다 논평 하나 달랑 내놓고 할 일 다했다는 식의 안일함과 무기력증을 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전씨가 한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았다’는 부인 이순자씨의 코미디 같은 말을 듣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다. 많은 사람은 이런 것에 분노하고 절망한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젊은층의 결속력이 크게 약화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과거 청산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지기 때문이란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유모차 부대나 젊은이들이 광장에 뛰쳐나와 소리 높여 외친 것은 과거로부터 켜켜이 쌓인 찌꺼기를 걷어 내자는 요구였다. 누가 뭐래도 촛불정신은 이 시대에서 가장 소중하고 의미 있는 가치다. 역사가 전씨의 ‘놀이터’가 되는 일은 더이상 없어야겠다.
  • 검찰 ‘계엄 문건’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 강제송환

    검찰 ‘계엄 문건’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 강제송환

    검찰이 국군기무사령부 계엄령 문건 의혹의 핵심 인물인 조현천(60) 전 기무사령관의 강제송환 절차에 착수했다. 22일 검찰과 법무부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양중진 부장검사)는 미국 외교·사법당국에 조 전 사령관에 대한 범죄인인도를 요청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청구서 번역 등 실무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범죄인인도 청구서는 대검찰청과 법무부·외교부를 거쳐 늦어도 이달 안에 미국 사법당국에 접수될 전망이다. 조 전 사령관은 2017년 9월 전역한 뒤 같은해 12월 미국으로 출국해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계엄령 문건 관련 의혹 군·검 합동수사단’은 지난해 조 전 사령관의 자진귀국을 타진했지만 여의치 않자 지난해 9월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강제 신병확보를 준비해왔다. 조 전 사령관은 이후 외교부의 여권 반납 통지에도 응하지 않아 여권이 무효화됐다. 수사단은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에도 조 전 사령관의 수배를 요청했다. 다만 인터폴의 수배 발령은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다. 미 당국이 조 전 사령관의 신병을 확보해 범죄인인도 결정을 내리면 실질적인 송환절차가 시작된다. 다만 조 전 사령관이 현지에서 소송 등으로 이의를 제기하면 송환이 길게는 수 년 간 지체될 수 있다. 검찰은 조 전 사령관이 자진귀국할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조 전 사령관은 2017년 2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앞두고 ‘계엄령 문건 작성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문건을 작성하도록 지시하고 이를 한민구 당시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문건에서 조 전 사령관은 계엄령 시행 중 경찰과 국정원, 헌병의 기능과 역할을 총괄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을 맡는 것으로 돼 있다. 계엄문건 수사단은 박 전 대통령과 황교안 전 대통령 권한대행,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 한민구 전 국방부 장관, 장준규 전 육군참모총장 등에 대해 조 전 사령관의 소재가 발견될 때까지 참고인 중지 처분을 내렸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무죄받은 제주 4·3] “재판이 뭐야, 그냥 쏴죽일 땐데… 앞줄 15년, 뒷줄은 무기 이랬지”

    [무죄받은 제주 4·3] “재판이 뭐야, 그냥 쏴죽일 땐데… 앞줄 15년, 뒷줄은 무기 이랬지”

    제주 4·3사건은 한국 근대사의 ‘대학살극’이다. 2003년 발표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른 공식 희생자(사망, 행방불명 등)만 1만 4000여명이다. 추정되는 희생자는 그 두 배가 넘는다. 세상이 이승을 떠난 수많은 넋을 기리는 동안, 억울하게 전과자가 돼 몸을 낮추고 살아야 했던 불법 군사재판의 피해자들은 71년을 더 살아왔다. 이름도 불리지 않고 형량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전국 각지 형무소에 흩어져 청춘을 허망하게 보내버린 18명의 피해자들이다. 육체에 남은 크고 작은 흉터만큼, 이들에게 남겨진 전과기록도 수십 년 동안 끈질기게 몸과 마음을 괴롭혔다. 서울신문은 구순이 다 돼서야 공권력이 찍은 낙인을 떨치게 된 이들의 한 맺힌 삶을 들었다. 인터뷰는 제주 4·3 생존 수형인 18명이 청구한 ‘불법 군사재판 재심’ 선고를 하루 앞둔 지난 16일 피해자들의 자택에서 진행됐다.●“그냥 살았는데 내란죄래… 따지지도 못했어” 4·3이 극으로 치닫던 1948년 10월. 군경 토벌대는 제주도 해안에서 5㎞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기로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토벌 작전으로 희생됐다. 미처 해안가로 이주하지 못해 사살된 주민들도 있었고, 뒤늦게 내려온 주민들도 ‘폭도들을 지원했던 것 아니냐’며 무차별적으로 끌려갔다.양근방(86) 할아버지도 군경 작전으로 부모님과 떨어지고 형제도 잃었다. 중산간 마을에 혼자 남아 총살될 위기에 처했던 양 할아버지는 겨울이 되자 산에서 버틸 수 없어 헌병대에 자수했다. 곧바로 군사재판에 넘겨져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배에 실려갔더니 인천형무소였어. 마당에 줄줄이 앉혀 놓더니 ‘이 열은 7년, 이 열은 15년, 이 열은 무기(징역)’ 이러더라고….” 6·25 전쟁이 발발해 인민군에 의해 풀려난 양 할아버지는 광주까지 갔다가 다시 붙잡혀 형이 추가됐다. “광주고법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넌 북한군이 풀어줬으니 도피자다’라면서 징역 10년을 더 때리더라고. 그땐 10년인 줄도 몰랐어. 최근에 광주형무소에 신원조회해서 알았지.”부원휴(90) 할아버지도 학교에 다니던 19세 때 집에 들이닥친 계엄군에게 체포돼 군사재판을 받았다. 지금도 봉투에 싸서 고이 간직하고 있는 ‘제주공립농업중학교 학생증’을 황급히 내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군 막사에 붙잡혀 갔는데 ‘너 삐라 같은 거 안 뿌렸냐. 산사람들한테 쌀 갖다주지 않았느냐’ 하더라고. ‘학생이어서 그럴 시간도 없었다’고 하니까 봉으로 마구 팼어.” 전주형무소로 갔다가 인천형무소로 이감된 부 할아버지는 1948년 12월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유는 ‘내란죄’라고 했다. 왜 내란죄냐고 미처 따지지도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7년, 15년 선고받았는데 ‘난 살았다’고 생각했지. 그땐 재판 없이 가두고 쏴 죽이고 아주 무법천지였어.” 형무소 시설이 좁고 수형자 관리가 엉망이어서 부 할아버지가 있던 전주형무소에는 전염병이 돌았다. “세면장에 가면 피고름이 섞인 똥이랑 온갖 이물질이 쌓여 있었어. 제대로 먹질 못해서 이질(설사병)도 걸리고 많이 죽어나갔지.” 1949년 7월 열여섯 살이던 김순화(86) 할머니도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 갇혔다. 변론할 기회도 없었고, 몇 년 형인지도 몰랐다. 당시 상황을 묻는 질문에 김 할머니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이유가 뭔지. 재판도 안 받고 붙잡혀 있다가 배 타고 형무소로 갔어.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토벌대가) 부모님을 왜 죽였는지도 모르겠어.”●“전과자 낙인 찍히니 육지로 돌아다녔지” 형을 마치고 살아 나왔지만 흉터는 진하게 남았다. 김 할머니는 왼쪽 팔에 있는 콩알만 하고 동그란 초록색 문신을 보여 줬다. “형무소에 같이 수감됐던 분이랑 각자 왼팔에 바늘로 이렇게 새겼지. 나중에 만나서 알아보게.” 함께 문신을 새긴 김경인(87) 할머니와는 69년 뒤 같이 재심을 청구하는 동지로 다시 만났다. 작은 문신은 71년 세월을 버텼고, 김 할머니의 아픈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다 끝났으면 좋겠어. 피곤해. 그냥 묻어버리고 싶어. 생각만 하면 너무너무 속상해.” 양 할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가장 한이 맺힌 일이 있다”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1960년 10월 출소해 고향으로 돌아오자 불과 7개월 전에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1960년 3월에 아버님이 형무소로 면회를 오셨어. 내가 나갈 시한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니까 아버님이 ‘너를 두고 어떻게 제주로 가느냐’ 하시고, 돌아서서 막 눈물을 흘려. (나도) 감옥에 돌아가서 한참 울었어.” 양 할아버지의 부친은 제주로 돌아온 뒤 일주일 만에 숨졌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면회를 다녀온 뒤 식사를 하지 않고 줄곧 피를 쏟아내더니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고향에 돌아온 양 할아버지는 10년 만에 육지로 발걸음을 돌렸다. 4·3으로 10년 가까운 형을 산 양 할아버지는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 돼 있었다. 일을 해 모은 돈으로 밭을 살 때도 조총련과 연통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야 했다. 결국 연고도 없는 경기도 파주로 거처를 옮겨 목장 일을 하며 20년을 살았다. 그렇다고 정부의 감시망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었다. “전과자가 신고도 안 하고 제주도에서 없어지니까 ‘북한으로 가려는 거 아니냐’면서 제주도로 다시 잡아가더라고. 남의 목장에서 월급 받고 산다고 말해서 하룻밤 조사받고 풀려났어.” 양 할아버지가 다시 제주로 돌아온 건 1990년이었다. 전과기록 탓에 자꾸만 찾아와 감시하는 경찰들 때문에 부 할아버지는 본적도 바꿨다. “원래 본적이 화북리였는데 이도1동으로 옮겼어. 옮겨도 얼마간은 찾아오더라고.” 부 할아버지는 이후 19년간 공직에 몸을 담았지만 전과 기록 때문에 하마터면 운명이 달라질 뻔했다. “공무원도 전과가 있어서 못할 뻔했어.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서 된 거야. 제주 사람들은 4·3으로 억울하게 형무소 갔다 왔다는 걸 다 아니까.” ●“만시지탄… 그래도 새로 태어난 기분” 재심이 시작될 수 있었던 토대가 된 ‘수형인 명부’는 1999년 추미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처음 발견했다. 이후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졌고, 진상보고서는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4·3사건에 대해 직접 사과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불법재판의 피해자들이 유죄의 낙인을 지우는 데는 그로부터 15년이 더 걸렸다. 재심 당사자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정기성(97) 할아버지는 치매가 악화돼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진 후부터 공판에 출석하지 못했다. 형사재판은 피고인 출석이 원칙이지만 재판부는 정 할아버지의 상태를 고려해 진단서로 대신하면서 공판을 진행했다. 부 할아버지는 인터뷰 도중 거듭 “만시지탄”이라고 되뇌었다.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에 양 할아버지는 연방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목소리를 높였다. “험하고 험한 가시밭길을 걸어 오늘에 왔어.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야.” “이제 우는 것도 귀찮다”던 김 할머니도 기뻐했다. 김 할머니는 4·3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자식들에게까지 함구한 채 살았다고 한다. “내가 형무소에 갔다 왔다는 기록만 없어졌으면, 아이들에게도 그(형무소에 갔다 왔다는) 기억만 없어졌으면 좋겠어.” 글 사진 제주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 전두환 측 “골프와 법정진술은 별개” 평화당 “구속해야”

    전두환 측 “골프와 법정진술은 별개” 평화당 “구속해야”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 명예훼손)로 재판에 넘겨진 전두환(88) 전 대통령이 지난해 8월 알츠하이머병을 이유로 첫 형사재판 출석을 거부한 가운데 같은 해 4월 골프를 친 것으로 17일 알려졌다. 전 전 대통령 측은 언론 인터뷰에서 “운동과 법정 진술은 다르다”며 골프장에 간 것을 인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 전 대통령은 2017년 4월에 펴낸 ‘전두환 회고록’에서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이라고 표현해 불구속기소됐다. 광주지법은 지난해 8월 27일 첫 재판을 열었지만 전 전 대통령은 알츠하이머 증세를 이유로 출석하지 않았다. 지난 7일 두 번째 재판에도 독감을 이유로 나오지 않았다.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 관계자는 전 전 대통령이 강원도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쳤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 관계자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고 골프를 칠 수 없는 것은 아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골프를 친다는 건 신체 운동을 한다는 것 아닌가. 이와 달리 법정 진술은 (정신 건강이 확보된 상태에서) 정확하게 사고할 수 있고 인지할 수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전 전 대통령 측 민정기 전 비서관은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알츠하이머가 누워 있는 병도 아니고 원래 신체는 건강하시니까 일상생활이나 신체 활동을 하시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순자 여사가 식사, 골프, 여행을 같이하는 친목 모임이 두세개 있는데 이 여사가 가끔 식사 초대 모임이나 골프 모임을 갈 때 (전 전 대통령도) 같이 가시는 것 같다”고 전했다. 박주현 민주평화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내고 “두 번의 불출석 당시 모두 골프장에서 목격됐다”며 “여유 있게 골프를 쳤다니 여지 없이 법정 구속감”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5·18이라는 희대 살인극을 벌인 자의 이런 사법농단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된다”며 “법정 구속해서 사법부의 엄중함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불법재판으로 옥살이한 제주 4·3 수형 생존자, 70년 만에 무죄 인정

    불법재판으로 옥살이한 제주 4·3 수형 생존자, 70년 만에 무죄 인정

    부당한 국가폭력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제주 4·3 수형 생존자 18명이 70년 만에 사실상 무죄를 선고받았다. 제주지법 제2형사부(부장 제갈창)는 제주 4·3으로 군사재판에 넘겨져 징역을 지낸 제주 4·3 수형 생존자 18명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불법 군사재판’ 재심 청구사건 선고공판에서 청구인에 대해 공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공소기각’은 공소제기 절차가 법률에 위반해 무효일 경우 유·무죄 판결에 앞서 소송을 그대로 끝내는 결정 또는 판결을 말한다. 결국 이번 재심 사건에서 공소기각 판결이 나왔다는 것은, 제주 4·3 당시 이뤄진 군사재판이 불법적으로 이뤄져 재판 자체가 무효임을 뜻하는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제주 4·3 수형 생존자들)에 대한 군법회의는 법률이 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로 재심을 청구한 제주 4·3 수형 생존자들은 사실상 무죄를 인정받았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일관되게 ‘어떤 범죄로 재판을 받았는지 모른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 당시 제주도에 소개령이 내려진 시기 등 제반사정을 종합할 때 단기간에 그 많은 사람들을 군법회의에 넘겨 예심조사나 기소장 전달 등 절차가 제대로 이뤄졌다고 추정하기 어렵다”면서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는 절차를 위반해 무효일 때에 해당한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즉 제주 4·3 당시 공소제기 절차가 법률의 규정을 위반해 무효인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공소기각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번 판결은 제주 4·3 당시 계엄령 아래 이뤄진 군사재판이 불법이며, 그로 인해 감옥에 갇힌 수형인들이 무죄임을 인정한 최초의 사법적 판단이다. 앞서 검찰도 지난달 17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청구인들에 대한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았다며 ‘공소기각 판결’을 선고할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다.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 미군정 경찰이 제주도민을 향해 발포한 사건을 시작으로 좌익 진영의 무장대가 1948년 4월 3일 일으킨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무장대와 군·경 토벌대 간 무력 충돌, 그리고 군·경이 토벌대를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대 약 3만명의 도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 중 제주 4·3 수형인은 당시 불법 군사재판으로 영문도 모른 채 서대문형무소와 대구·전주·인천형무소 등 전국 각지로 끌려가 수감된 사람들을 말한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수형인 명부에는 2530명의 명단이 올라 있으며, 상당수가 행방불명되거나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재심을 청구한 수형 생존자 18명은 1948∼1949년 내란죄 등 누명을 쓰고 징역 1년에서 최대 20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이들 외에도 10여명의 수형 생존자가 더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알츠하이머라더니…재판은 안 나가고 골프 친 전두환

    알츠하이머라더니…재판은 안 나가고 골프 친 전두환

    알츠하이머병을 이유로 재판에는 출석하지 않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부인 이순자씨 등과 골프를 쳤다는 보도가 나왔다. 전 전 대통령은 2017년 4월에 펴낸 ‘전두환 회고록’에서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이라고 표현해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해 8월 첫 재판이 열렸지만 전 전 대통령은 알츠하이머 증세를 이유로 출석하지 않았다. 지난 7일 두 번째 재판에도 독감을 이유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2017년 4월만 해도 전 전 대통령이 골프를 쳤고 지난달에도 부인 이순자씨와 같은 골프장에서 목격됐다고 한 언론이 보도했다. 전 전 대통령 측 민정기 전 비서관은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전 전 대통령이 골프를 쳤는지는) 모르겠다. 일상생활 일정을 알지도 못한다”면서 “알츠하이머가 누워 있는 병도 아니고 원래 신체는 건강하시니까 일상생활이나 신체 활동을 하시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그는 “이순자 여사가 식사, 골프, 여행을 같이하는 친목 모임이 두세개 있는데 이 여사가 가끔 식사 초대 모임이나 골프 모임을 갈 때 (전 전 대통령도) 같이 가시는 것 같다”며 “(골프를 친 것으로 알려진) 강원도 골프장은 사장 부인이 이 여사와 모임을 같이하는 멤버라고 하고, 전에 골프 모임을 같이 했던 사이로 안다”고 덧붙였다. 그는 그러면서 “전 전 대통령을 뵈면 조금 전에 한 이야기를 1시간 동안 열번, 스무번 되묻고 대화 진행이 안 된다. 가까운 일들을 전혀 기억을 못 하신다”며 재판 출석을 하기엔 무리가 있는 건강 상태라고 설명했다. 전 전 대통령이 법정 출석을 거부했던 무렵 골프를 친 것으로 알려지자, 여야 정치권은 논평을 내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정 대변인은 논평에서 “골프를 즐겼다는 보도를 지켜본 국민들은 큰 충격을 넘어 전 전 대통령이 진정 인간이라면 이럴 수 없다고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민주평화당 김정현 대변인은 논평에서 “알츠하이머병 환자가 골프 치러 다닌다니 세계 의학계에 희귀사례로 보고될 케이스”라며 “이래 놓고 광주 재판에 참석할 수도 없고 5·18 진상 규명에도 협조할 수 없다니 천인공노할 일”이라고 일갈했다. 정의당 정호진 대변인은 “전 세계 의학계가 놀랄 ‘세상에 이런 일’이다. 심지어 전 재산이 29만원뿐인데 골프를 치러 다니다니 국민들은 기막힐 따름”이라며 “더는 어떠한 핑계도 용납할 수 없다. 끝 모를 국민 기만과 사기극 막기 위해 법의 심판대에 조속히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사설] ‘광주’ 모독에 황 전 총리 입당, ‘도로 새누리’ 된 한국당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자유한국당이 과거와 일획을 긋고 새로운 보수 정당으로 거듭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생각하는 국민이라면 당연히 갖고 있는 기대다. 하지만 한국당이 지난 2년간 보여 온 행보는 정부와 여당을 견제하는 대안 정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개혁하고 쇄신하며 미래로 나아가기는커녕 과거 회귀에 계파 정치, 정부 정책에 사사건건 발목 잡기 등 실망의 연속이었다. 한국당이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은 넉 달이나 질질 끌어 오던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 추천 명단을 어제 발표하면서 확인됐다. 한국당 추천 몫으로 임명된 3인은 하나같이 5·18 관련 단체들이 반발하는 사람들이다. 계엄군 진압이 과장됐다는 요지의 기사를 쓴 장본인이 있는가 하면, 북한군의 광주 남파설을 퍼나른 인물도 있다. 군 장성 출신이지만 5·18과 관련해 어떠한 전문성도 없는 인사조차 들어 있다. 뿐만 아니다. 국정농단 사태의 핵심 인물인 황교안 전 총리가 슬그머니 한국당에 들어갔다. 차기 대선 후보군 중 보수 진영에서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황 전 총리가 전당대회를 한 달 앞두고 입당한 것이다. 황 전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지난 정부 국가적 시련으로 국민들이 심려를 갖게 한 점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도 “국정 전반에 농단이 이뤄졌다 생각하는 분은 없다”고 반성이나 사과와는 판이한 인식을 보였다. 황 전 총리는 전당대회 출마도 시사했다. 한국당이 청산하지 못한 친박계를 대표할 가능성이 높아 여야 정당이 일제히 비판하는 ‘제2의 박근혜당’ 우려가 현실화할 공산도 커졌다. 한국당은 탄핵 이후 국정농단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와 반성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 전 총리 입당도 별 저항 없이 수용한 것이다. 한국당이 ‘반문 연대’를 위해 사람을 가리지 않겠다는 ‘도로 새누리당’으로 가고 있는 점, 개탄스럽다.
  • 유가족단체 “한국당, 5·18 부정한 진상조사위원 철회하라”

    이동욱, 계엄군 사격·성폭력·고문 부인 차기환, 세월호 특조위 방해 고발 당해 군인 출신 권태오 상임위원도 ‘도마위’ 민주 “즉각 취소” 바른미래 “靑 검증을” 광주 시민단체 오늘 추천철회 기자회견 자유한국당이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으로 5·18 민주화운동의 의의를 폄훼한 인물들을 지난 14일 추천하면서 비판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유가족 단체들은 “5·18 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인물들”이라며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당이 추천한 3명 중 특히 이동욱 도서출판 자유전선 대표, 차기환 변호사는 5·18 운동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15일 원내대책회의에서 “한국당이 추천한 5·18 진상조사위원은 진상규명과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을 바라는 국민의 바람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라며 “3인에 대한 추천을 즉각 취소해야 한다”고 했다. 월간조선 기자 출신의 이 대표는 1996년 ‘검증, 광주사태 관련 10대 오보·과장’이라는 기사에서 시민들을 향한 계엄군의 사격과 성폭행, 고문 등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해 논란이 됐다. 판사 출신 차기환 변호사도 2012년 트위터에서 ‘북한군 광주 5·18 남파 사실로 밝혀져’라는 기사를 공유한 적 있다. 북한 특수부대원의 5·18 개입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지점이다. 이재정 대변인은 “비상식적 주장과 가짜뉴스를 퍼 나르기로 유명한 인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대표와 차 변호사의 주장과 달리 국방부는 2013년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 북한군이 침투하거나 개입한 사실이 없다고 발표했고, 지난해 국방부의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 조사단’은 확인된 성폭행만 17건이라고 밝힌 바 있다. 특히 차 변호사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비상임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특조위의 활동을 방해해 유족들로부터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당했다. 상임위원으로 추천된 권태오 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은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부 특수작전처장과 육군본부 8군 단장을 지낸 군인 출신이다. 5·18 운동 관련 단체는 “군 복무 시 작전 주특기를 가졌던 인물”이라며 “개인적 흠결을 떠나 과연 5·18 진상규명을 위한 역사적 의지를 갖췄는가 의심스럽다”고 했다. 보수야당인 바른미래당도 청와대가 위원 후보자에 대해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채이배 의원은 “이 대표는 검찰의 5·18 민주화운동 재수사 결과 관련 언론보도가 가장 왜곡돼 있다고 주장했고 차 변호사는 광주의 진실을 밝히려는 단체와 개인들을 좌익으로 규정하는 극우인사”라며 “대통령은 자격요건의 부합성을 엄중히 따져 임명해 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문정선 민주평화당 대변인은 “5·18에 대한 진실규명이 아니라 어떻게든 광주의 진실을 묻고 진상규명을 파투 내겠다는 노골적 표현”이라며 “스스로 진상조사위의 자격을 반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5·18 기념재단 이기봉 사무처장은 “한국당이 이번에 추천한 인물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5·18의 정신과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들로 확인됐다”며 “이는 5월 단체와 광주시민을 모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5·18 단체가 포함된 광주지역 60여개 시민단체는 16일 광주 5·18 민주광장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한국당 위원 추천 철회를 요구할 예정이다. 서울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서울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사설] 한국당, 5·18 정신 훼손하는 진상규명 위원 추천 안 돼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과 관련한 자유한국당의 ‘역주행’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9월 관련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지 넉 달이 지나도록 자기 당의 진상규명위원회 조사위원 추천을 미루는 것도 모자라 부적절한 인사를 추천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한국당은 최근 진상규명위 조사위원으로 1980년 5월 민주화운동 당시 공수부대 지휘관 출신인 변길남씨를 추천받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변씨는 3공수여단 13대대장이었으며, 3공수여단은 그해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투항 요구에 불응한 시민군을 상대로 도청 진압 작전을 완료했다. 한국당은 이 같은 변씨의 이력이 논란이 되자 “변씨가 거절 의사를 표했다”고 밝혔지만 진상규명위가 조사해야 할 인사를 되레 조사 주체로 고려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다. 진상규명위 구성을 둘러싼 한국당의 이해할 수 없는 행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극우 논객 지만원씨를 조사위원으로 추천하려다 당내외 반발에 철회한 바 있다. 지씨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북한 특수부대 개입설 등을 주장해 민·형사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허위 사실을 유포하고 있다. 한국당은 당초 지난주까지 조사위원 추천을 마칠 예정이었지만 지도부 교체를 빌미로 후보군을 다시 모집하겠다고 최근 입장을 뒤바꿨고, 이 바람에 진상규명 일정은 기한 없이 미뤄지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은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비극이지만 종합적인 진상규명은 되지 않고 있다. 국회는 군의 최초 발포와 책임자 및 경위, 헬기 사격 등 남은 의혹을 파헤칠 목적으로 특별법을 만들었고, 한국당도 여기에 동의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한국당 행보를 보노라면 “진상규명을 방해하려는 세력과 같은 대열에 있다”는 비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진상규명에 의지가 없어 보인다. 한나라당은 당리당략을 떠나 객관적이고 독립적으로 진상규명을 할 수 있는 위원을 추천해야 할 것이다. 진상규명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일 거면 차라리 조사위원 추천권을 반납하는 게 그나마 책임 있는 공당의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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