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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요칼럼] 범인의 속성/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금요칼럼] 범인의 속성/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건강한 국민의 촛불이 이전 정권을 무너트렸다. 얼마나 할 말이 없었으면, 당시 여당 국회의원들조차 탄핵에 찬성했을까. 정권의 핵심부가 범죄자의 소굴이었음을 인정함으로써 최소한의 양심은 지킨 셈이다. 그래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지 않은 국회의원들과 총리 및 장관들은 사실상 이전 정권의 추악한 범죄행위를 묵인하거나, 이용하거나, 부역한 자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개 공범 내지는 부역자라는 얘기다.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기반을 훼손시킨 범인으로서 석고대죄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요즘 돌아가는 일을 보면 가관이다. 인왕산 자락부터 여의도를 돌아 서초동에 이르기까지 공범과 부역자들이 우글거린다. 국가사회의 공익은 안중에도 없고, 당리당략만 앞세워 목소리를 높인다. 기무사는 사실상 사조직화해 툭하면 계엄령을 만지작거린다. 검찰도 자기들 조직의 이익만 우선할 뿐 공익을 위한 개혁에는 오히려 저항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외교의 일선에 선 외교관이 국가의 고급 외교기밀을 정략적으로 누설하는가 하면, 공범들은 감히 “국민의 알권리” 운운하며 맞장구를 친다. 다들 국민과 민생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그것은 공론(空論)으로 그저 허공을 치는 꽹과리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꽹과리 소리를 높이다 보니, 더 큰 꽹과리 ‘태극기부대’와 손잡는가 하면, 차마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비속어를 원내대표라는 자가 공개적으로 내뱉는다. 대표는 대표대로 독재 타령이다. 정치는 실종된 채, 막말과 깽판만 난무한다. 아무런 내실도 갖추지 않은 채 진정한 행동은 없이 목소리만 높이다가 우리는 국가의 크나큰 치욕을 당한 바 있다. 청나라에 굴복한 삼전도항복(1637)이 그 하나요, 총 한 방 제대로 쏴보지도 못하고 일제에 고스란히 망한 조선과 대한제국이 그 둘이다. 17세기에 이미 조선 위정자들의 이런 무책임과 어리석음을 꿰뚫어 본 청 태종은 조선국왕 인조에게 보낸 서신에서 준엄하게 꾸짖었다.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너는 입과 혀로 큰소리만 친다. 정묘년(1627·정묘호란)의 치욕을 씻겠다며 큰소리쳐 놓고, 왜 당당히 나와 싸우지는 않고 성 안에 들어가 부녀자처럼 숨기만 하는가? 우리나라에는 ‘범인(犯人)은 민첩한 행동을 중히 여기고 겸손한 언사를 중히 여긴다’는 속담이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의 행동이 언사에 미치지 못하면 치욕으로 여긴다. 어찌 너는 이처럼 망언을 늘어놓으면서도 조금의 거리낌조차 없는가?” 이 세상 거의 모든 범인은 자기가 범죄를 저질렀음을 인지한다. 만약 전혀 깨닫지 못한다면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극악한 연쇄살인범이라도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심리문제가 있을 뿐, 살인 자체가 범죄임은 자각한다고 한다. 그러니 자기가 범인임을 최대한 숨기려 하는 게 범인들의 인지상정이다. 청나라의 속담이 함의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다. 범죄 행동에는 영리하고 민첩함이 중요하지만, 언사로는 주변에서 누가 말을 하라며 부추겨도 끝내 사양하고 최대한 입을 닫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나마 최소한의 상식은 통하는 범인이고, 그래야 범죄행위를 숨길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요즘 이 땅의 범인들은 행동거지는 뭐 하나 취할 만한 게 없고, 언사만 꽹과리 난장판이다. 헛된 말로 선동하면 그것은 속임수와 다름없다. 청 태종의 이어지는 말에 따르면 “추하게 속이고(欺罔), 교활하게 속이고(狡詐), 간사하게 속이고(奸僞), 빈말로 속이며(虛?) 큰소리만 치는” 꼴이다. 일반 범인들도 공유하는 최소한의 상식조차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까? 공범임이 이미 백일하에 드러났으니, 현재로서는 목소리라도 높일 수밖에 없기 때문인가?
  •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나는 누구인가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나는 누구인가

    전남 해남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심복례(79)씨의 남편 김인태씨는 1980년 5월 20일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사망했다(당시 47살). 큰아들의 밀린 하숙비 7만 5000원을 내기 위해 광주에 갔다가 계엄군의 진압봉에 맞아 죽은 것이다. 남편이 광주 다녀온다고 떠난 지 한참 지나서 광주시청에서 전화로 사망 소식이 왔다. 밭에 거름을 주러 갔는데 마을회관에서 스피커 방송이 나왔다. 얼른 마을회관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김인태 사망’이라는 소식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심씨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전화받은 다음날 애들 새벽밥을 해 먹이고 서둘러 광주로 향했다. 해남에서 똑딱선 배를 타고 목포로 간 다음 차편으로 광주시청에 갔다. 시청에서는 망월동으로 안내했다. 남편의 관에는 태극기가 덮여 있었다. 당시 심씨 나이는 40살. 아들 넷과 딸 둘을 남겨 두고 남편은 떠났다. 하늘이 무너졌다. 망월동에서 남편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있을 때 누군가 사진을 찍었던 모양이다. 극우 논객 지만원은 1980년 광주에서 찍힌 사진 속의 심씨를 지목해 ‘139번 광수’(5·18 당시 광주에 침투한 북한 특수군 부대원)로 이름 붙이고, 김정일 첫째 부인 홍일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육남매를 키우며 고단한 삶을 살던 양민에게 간첩 누명을 씌운 것이다. 2015년 10월 20일 심씨는 5·18민주화운동 당사자 4명과 함께 지씨를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 혐의’로 광주지검에 고소했다. 심씨는 2018년 10월 2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지씨의 여덟 번째 공판에 참석해 증인신문을 진행했다. 심씨는 재판 참석차 서울로 가기 전부터 분이 치민 나머지 입안이 헐 정도였다. 법정에서 심씨는 분노에 치를 떨며 “신분 확인을 하고 나를 간첩으로 만들어 놓은 거냐?”고 물었으나 지씨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했다. 정치적 목적으로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몰아세우는 악랄한 세월이다. 내가 나 아닌 엉뚱한 인물로 규정당할 때의 당혹감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달리던 청년이 벽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흠칫 놀란다. 나는 누구인가? 우석대 역사교육과 초빙교수
  •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시대의 야만에 맞서는 영화와 책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시대의 야만에 맞서는 영화와 책

    5월이 지나가고 있다. 올해 5월은 유난히도 많은 회고와 재발견, 각별한 분노와 슬픔이 있었다. 과거의 5월에 발생한 역사와 사건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담론과 관점이 생성되기도 한다. 39년 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가공할 폭력과 학살, 야만에 대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새로운 증언과 자료가 제시됐다는 점,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를 맞이했다는 사실 등이 이러한 분위기를 만든 요인이리라. 한여름 같은 오월의 마지막 주말에 심한 몸살감기를 겨우 견디며 한 편의 영화와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우선 오월 광주를 참신한 시선으로 접근한 강상우 감독 영화 ‘김군’에 대해 얘기해 보자. 깊은 여운과 먹먹한 충격을 준 영화였다. ‘김군’은 보수 논객 지만원에 의해 ‘북한군 광수 1호’로 지목됐던 인물, 즉 기관총이 설치된 가스차 위에서 옆을 매섭게 응시하던 사진 속의 시민군 ‘김군’의 존재를 집요한 탐사와 면밀한 추적을 통해 규명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무엇보다 당시 김군의 행방을 찾는 과정에서 그와 함께 항쟁에 참여했던 무장 시민군을 직접 탐문 인터뷰하며 그들의 뜨거운 내면과 억눌린 마음을 생생하게 복원한 점이 돋보인다. 영화는 김군을 목격한 시민의 증언에 의해 그가 당시 광주 학동 원지교 아래에 살던 고아이자 넝마주이였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김군은 1980년 5월 24일 송암동 순찰 과정에서 계엄군에게 사살당했다. 그러하기에 사진 속의 김군은 영원히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는 처연한 사실이 김군의 최후를 목격한 시민군 최진수씨를 통해 언급된다. 끝부분에서 ‘김군’ 주위에 있거나 그와 함께했던 시민군 세 사람이 38년 만에 만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김군’의 집요한 사실 추적은 북한군 투입설을 비롯한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가짜뉴스를 일순간에 잠재우도록 만든다. 이를 광주를 새로운 시선으로 접근한 다큐멘터리 영화 서사의 승리라 부를 만하다. ‘김군’은 시민군의 무장과 저항이 학살과 폭력에 대한 순수한 분노에서 출발한 것임을 드러낸다. “사람들이 이걸 그냥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은데 왜곡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시민군의 담담한 증언은 오월 광주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바라보는 왜곡된 관점에 대한 통렬한 반론으로 기능한다. ‘김군’이 전하는 메시지는 이 영화를 보기 직전에 읽었던 책 ‘다시 책으로’의 주장과 자연스럽게 접맥된다. 최근에 번역된 ‘다시 책으로’의 저자 메리앤 울프는 배경지식과 비판적 분석력의 결여가 어떻게 공인되지 않은 정보나 거짓 정보에 취약하게 되는지를 차분하게 설명한다. 그는 “가짜 뉴스든 날조 뉴스든 불확실한 정보의 희생물로 전락하기” 쉬운 이 시대의 현실이 독서의 퇴조, 다양한 정보 분석 능력의 상실과 연관된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책의 끝부분에서 인용한 “책이 없다면, 실로 문해력이 없다면 좋은 사회는 사라지고 야만주의가 승리한다”는 스티븐 워서먼의 주장은 우리 사회에서 횡행하는 여러 가짜 뉴스에 대한 통렬한 일침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특정한 정치적 관점이나 사회적 의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생각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 문제는 왜곡되거나 편향된 정보에 의해 생성된 견해를 진실이라 우기는 경우다. 이런 추세가 강화되면 명확한 진실조차 가려지며 오만과 편견이 득세하게 된다. 영화 ‘김군’과 메리앤 울프의 ‘다시 책으로’는 이즈음 한국 사회 곳곳에 편재한 새로운 야만주의를 향한 엄중한 경고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1980년 5월 광주를 직접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 역으로 그때의 광주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메리앤 울프의 표현에 따르면 “진실을 찾는 고된 훈련에 나서기도 전에 이미 진실을 안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영화 ‘김군’과 ‘다시 책으로’를 권하고 싶다.
  • 저항시인 조태일 문학상 제정

    저항시인 조태일 문학상 제정

    1970~1980년대 저항시인으로 활동한 고 조태일(1941~1999) 시인을 기리는 문학상이 제정됐다. 사단법인 죽형조태일시인기념사업회는 타계 20주기(9월 7일)를 앞두고 제1회 조태일 문학상을 공모한다고 27일 밝혔다. 기념사업회와 전남 곡성군이 주최하고, 한국작가회의, 광주·전남작가회의, ‘창비’, ‘문학들’, ‘시인’이 후원한다. 상금은 2000만원, 접수 기간은 새달 1일부터 7월 31일까지다. 접수일 기준으로 최근 2년 이내 발간한 시집을 시인이 직접 응모하거나 추천위원 추천을 받아 응모할 수 있다. 시상식은 오는 9월 7일 곡성군에서 열리는 조 시인 20주기 문학 축전에서 진행된다. 자세한 공모 요강은 곡성군 홈페이지 참조. 곡성 태안사에서 대처승의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조 시인은 광주서중, 광주고, 경희대를 졸업했다.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돼 문단에 나왔고, 시집 ‘아침선박’, ‘식칼론’, ‘국토’, ‘자유가 시인더러’ 등을 펴냈다. 1969년 잡지 ‘시인’을 창간해 김지하, 양성우, 김준태, 박남준 시인 등을 발굴했다. 1980년 신군부가 계엄령 전국 확대에 앞서 감금한 예비 검속자에 포함돼 수감생활을 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검찰, 전두환 재판 헬기사격 관련 시민 6명 추가증언 듣기로

    다음달 10일 이어지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재판에서 헬기사격과 관련 6명의 시민이 추가로 증언대에 선다. 광주지검은 25일 5·18민주화운동 기간에 헬기사격이 있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재판에 추가로 증언할 시민들과 접촉하고 있다고 밝혔다. 추가 증언자 가운데 신모씨는 당시 동생과 함께 대인시장 인근에서 자취하면서 5·18 기간동안 수차례 도청 집회에 참가하면서 금남로 일대에서 헬기사격을 봤다고 증언한 바 있다. 배모씨도 1980년 5월21일 도청 인근에 나갔다가 같은날 오후 동구 불로동 다리에서 사격을 하며 자신을 향해 선회하는 헬기를 목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들의 증언이 정확하다고 판단, 추가 증인으로 채택할 방침이다. 검찰은 이와 함께 전직 5월단체 회장도 추가 증인으로 신청했다. 검찰은 앞서 지난 13일 재판에서 자체 선정한 증인 21명 가운데 5명을 선정해 1차 증언을 들었다. 검찰은 또 국회 등에서 5·18 당시 전두환씨의 광주행 등을 밝혔던 김용장씨의 증언을 법정에서 듣기 위한 방안을 마련 중이다. 미 육군 방첩부대인 501정보여단 광주파견대 군사정보관으로 재직했던 김씨는 지난 17일과 20일 두 차례에 걸쳐 광주지검에 참고인으로 나가 80년 5월21일 전 당시 보안사령관이 광주로 내려와 회의를 주재했다는 정보를 미군에 보고한 일이 있다고 진술했다. 김씨는 또 80년 5월21일 낮 광주에서 계엄군이 UH-1H 소형 헬기를 타고 M60 기관총을 쐈고, 27일 광주천 상류에서도 헬기에서 위협사격을 했다는 사실도 미군에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김씨의 증언 내용에 대해 사실 관계를 밝히기 위해 김씨를 증인으로 신청할 지 여부를 검토 중이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전문] 文, 5·18기념사 “공권력이 행한 야만적 학살에 깊이 사과”

    [전문] 文, 5·18기념사 “공권력이 행한 야만적 학살에 깊이 사과”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공권력이 광주에서 자행한 야만적인 폭력과 학살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국민을 대표해 다시 한번 깊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이날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9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기념사를 통해 “진실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을 때 용서와 포용의 자리는 커질 것”이라면서 “진실을 통한 화해만이 진정한 국민통합의 길임을 오늘의 광주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고 이렇게 말했다. 문 대통령은 “광주로부터 뿌려진 민주주의의 씨앗을 함께 가꾸고 키워내는 일은 행복한 일이 될 것”이라며 “광주의 자부심은 역사의 것이고 대한민국의 것이자 국민 모두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기념사 전문이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어김없이 오월이 왔습니다. 떠난 분들이 못내 그리운 오월이 왔습니다. 살아있는 오월이 왔습니다. 슬픔이 용기로 피어나는 오월이 왔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오월 민주 영령들을 기리며 모진 세월을 살아오신 부상자와 유가족께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진정한 애국이 무엇인지 삶으로 증명하고 계신 광주시민과 전남도민들께 각별한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제 내년이면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그때 그 기념식에 참석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올해 기념식에 꼭 참석하고 싶었습니다. 광주시민들께 너무나 미안하고 너무나 부끄러웠고 국민들께 호소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광주시민 여러분과 전남도민들께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80년 5월 광주가 피 흘리고 죽어갈 때 광주와 함께하지 못했던 것이 그 시대를 살았던 시민의 한 사람으로 정말 미안합니다. 그때 공권력이 광주에서 자행한 야만적인 폭력과 학살에 대하여 대통령으로서 국민을 대표하여 다시 한번 깊이 사과드립니다. 아직도 5·18을 부정하고 모욕하는 망언들이 거리낌 없이 큰 목소리로 외쳐지고 있는 현실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헌법 전문에 5·18정신을 담겠다고 한 약속을 지금까지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송구스럽습니다. 국민 여러분,1980년 오월,우리는 광주를 보았습니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광주를 보았고 철저히 고립된 광주를 보았고 외롭게 죽어가는 광주를 보았습니다. 전남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의 마지막 비명과 함께 광주의 오월은 우리에게 깊은 부채의식을 남겼습니다. 오월의 광주와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 학살당하는 광주를 방치했다는 사실이 같은 시대를 살던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아픔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광주를 함께 겪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어디에 있었든,오월의 광주를 일찍 알았든 늦게 알았든 상관없이광주의 아픔을 함께 겪었습니다. 그 부채의식과 아픔이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뿌리가 되었고 광주시민의 외침이 마침내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6월 항쟁은 5·18의 전국적 확산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광주에 너무나 큰 빚을 졌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같은 시대,같은 아픔을 겪었다면,그리고 민주화의 열망을 함께 품고 살아왔다면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5·18의 진실은 보수·진보로 나뉠 수 없습니다. 광주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바로 ‘자유’이고 ‘민주주의’였기 때문입니다.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습니다. ‘광주사태’로 불리었던 5·18이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공식적으로 규정된 것은 1988년 노태우 정부 때였습니다. 김영삼 정부는 1995년 특별법에 의해 5·18을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했고,드디어 1997년 5·18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했습니다. 대법원 역시 신군부의 12·12 군사쿠데타부터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진압 과정을 군사 반란과 내란죄로 판결했고 광주 학살의 주범들을 사법적으로 단죄했습니다. 국민 여러분,이렇게 우리는 이미 20년도 더 전에 광주 5·18의 역사적 의미와 성격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이루었고 법률적인 정리까지 마쳤습니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한 더 이상의 논란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의미 없는 소모일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광주 5·18에 감사하면서 우리의 민주주의를 더 좋은 민주주의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더 나은 대한민국을 향해 서로 경쟁하면서도 통합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가 한 페이지씩 매듭을 지어가며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께서 마음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학살의 책임자,암매장과 성폭력 문제,헬기 사격 등 밝혀내야 할 진실이 여전히 많습니다. 아직까지 규명되지 못한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광주가 짊어진 무거운 역사의 짐을 내려놓는 일이며 비극의 오월을 희망의 오월로 바꿔내는 일입니다. 당연히 정치권도 동참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모두 함께 광주의 명예를 지키고 남겨진 진실을 밝혀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가고 있습니다. 5·18 이전,유신 시대와 5공 시대에 머무는 지체된 정치의식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새로운 시대로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월이 지켜낸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광주로부터 빚진 마음을 대한민국의 발전으로 갚아야 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지난해 3월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핵심은 진상조사규명위원회를 설치하여 남겨진 진실을 낱낱이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위원회가 출범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국회와 정치권이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노력해 주실 것을 촉구합니다. 우리 정부는 국방부 자체 5·18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통해 계엄군의 헬기 사격과 성폭행과 추행,성고문 등 여성 인권 침해행위를 확인하였고 국방부 장관이 공식 사과했습니다. 정부는 특별법에 의한 진상조사 규명 위원회가 출범하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자료를 제공하고 적극 지원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5·18 광주민주화운동 39년이 된 오늘,광주는 평범한 삶과 평범한 행복을 꿈꿉니다. 그해에 태어나 서른아홉 번의 오월을 보낸 광주의 아들딸들은 중년의 어른이 되었습니다. 결혼하기도 했을 것이고,부모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진실이 상식이 된 세상에서 광주의 아들딸들이 함께 잘 살아가게 되길 저는 진심으로 바랍니다. 민주주의를 지켜낸 광주는 이제 경제민주주의와 상생을 이끄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노사정 모두가 양보와 나눔으로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냈고 ‘광주형 일자리’라는 이름으로 사회통합형 일자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모든 지자체가 부러워하며 제2,제3의 ‘광주형 일자리’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광주형 일자리’ 타결로 국내 완성차 공장이 23년 만에 빛그린 산업단지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자동차 산업도 혁신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4차 산업혁명’을 위한 광주의 노력도 눈부십니다. 미래 먹거리로 수소,데이터,인공지능(AI) 산업 등을 앞장서 육성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국내 최초로 수소융합에너지 실증센터를 준공한 데 이어 국내 최대규모의 친환경 수소연료전지 발전소 건설도 추진 중입니다. 도시문제 해결을 위해 지자체와 민간기업이 함께하는 스마트시티 챌린지 공모사업에도 광주가 최종 선정되었습니다. 광주는 국민 안전에도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감염병 대응,국가안전대진단,재해 예방 등을 포함한 재난관리평가에서 광주는올해 17개 광역지자체 중 재난관리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교통사고 사망자 수 감소율 전국 1위를 달성하는 성과도 이뤘습니다. 광주시민과 공직자 모두가 전국에서 가장 안전한 광주 만들기에 노력한 결과입니다. 아픔을 겪은 광주가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앞장서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부는 광주가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항상 함께할 것입니다. 국민들도 응원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오늘부터 228번 시내버스가 오월의 주요 사적지인 주남마을과 전남대병원,옛 도청과 5·18기록관을 운행합니다. 228번은 ‘대구 2·28 민주운동’을 상징하는 번호입니다. 대구에서도 518번 시내버스가 운행되고 있습니다. 대구 달구벌과 광주 빛고을은 ‘달빛동맹’을 맺었고 정의와 민주주의로 결속했습니다. 광주에 대한 부정과 모욕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대구 권영진 시장님은 광주시민들께 사과의 글을 올렸습니다. 두 도시는 역사 왜곡과 분열의 정치를 반대하고 연대와 상생 협력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용서와 화해의 길입니다. 오월은 더 이상 분노와 슬픔의 오월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오월은 희망의 시작,통합의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진실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놓을 때 용서와 포용의 자리는 커질 것입니다. 진실을 통한 화해만이 진정한 국민통합의 길임을 오늘의 광주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광주에는 용기와 부끄러움, 의로움과 수치스러움, 분노와 용서가 함께 있습니다. 광주가 짊어진 역사의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그해 오월,광주를 보고 겪은 온 국민이 함께 짊어져야 할 짐입니다. 광주의 자부심은 역사의 것이고 대한민국의 것이며 국민 모두의 것입니다. 광주로부터 뿌려진 민주주의의 씨앗을 함께 가꾸고 키워내는 일은 행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오월이 해마다 빛나고 모든 국민에게 미래로 가는 힘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내일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추모열기 절정

    내일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추모열기 절정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18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개최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17일 “제39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18일 오전 10시부터 11시 10분까지 5·18민주묘지에서 약 5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은 1980년 신군부 세력을 거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며 일어났던 5·18민주화운동의 민주·인권·평화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지난 1997년 5월 9일 제정됐다. “오월 광주, 정의로운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개최되는 이번 기념식은 내년 40주년을 앞두고 5·18민주화운동의 의미와 역사적 사실을 전 국민이 함께 공유하고 민주화의 역사와 가치 계승을 통한 ‘통합’의 메시지를 강조할 예정이다. 기념식은 오프닝공연, 국민의례, 경과보고, 기념공연, 기념사, 기념공연,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순으로 진행된다. 오프닝공연은 5·18의 역사적 현장인 구 전남도청에서 5·18때 고인이 된 당시 고등학생의 일기를 바탕으로 작곡한 ‘마지막 일기’로 시작된다. 애국가 제창은 당시 참여학교인 전남대·조선대 학생대표 4명과 5·18 희생자 유족 4명이 선도한다. 이어 열리는 기념공연에는 5·18 당시 도청 앞에서 가두방송을 진행했던 박영순씨의 스토리텔링과 고등학교 1학년 신분으로 5월 27일 새벽 최후의 항전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한 고 안종필의 어머니의 이야기로 당시 5·18을 기억하고, 시대의 아픔을 함께 치유하는 내용을 담는다. 이후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과 식후에는 5·18 희생자 묘역을 참배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릴 예정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희생자 묘역 참배 대상으로는 1980년 5월 21일 당시 중학생 시절 친구와 절에 간다며 집을 나섰다가 계엄군의 시민을 향한 집중 사격으로 사망한 김완봉과 같은날 동구청 근처에서 시위 도중 가슴에 총상 맞고 사망한 조삭천, 5월 19일부터 27일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다가 계엄군의 총탄에 사망한 안종필 등이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기념식을 하루 앞둔 오늘 광주에서 추모행사가 진행되며 추모열기가 절정에 달하고 있다. 이날 5·18민주묘지에서는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영령을 위로하고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5·18민중항쟁 제39주년 추모제’가 엄수됐다. 전통제례로 치러진 추모제는 정춘식 유족회장, 김후식 부상자회장, 양관석 유족회 부회장이 각각 초헌과 아헌, 종헌을 맡았으며 이용섭 광주시장과 하유성 광주지방보훈청장 등이 참석해 추모사를 했다. 정 회장은 5·18 유가족을 대표한 인사말을 통해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악의적 왜곡과 폄훼가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는 것은 철저한 진상규명과 국가 이름의 공식 보고서가 발간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5·18 진상규명을 위해 온 힘을 다해 투쟁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영상] 영화 ‘김군’ 강상우 감독, 지만원 만나 경악한 이유

    [영상] 영화 ‘김군’ 강상우 감독, 지만원 만나 경악한 이유

    “지만원이라는 앞잡이 뒤에 계엄군, 가해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봤을 때, 경악스러운 부분이 있었어요. 그들에 대해 제대로 된 처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5·18민주화운동을 ‘광주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지만원씨.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을 연출한 강상우(36) 감독은 “지만원씨 사무실에서 1980년 5월 시민들을 학살했던 공수대원들을 봤다”며 “가해자들이 자신의 과거를 정당화하기 위해 5·18민주항쟁을 광주폭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이유를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지만원씨는 2002년 ‘5·18을 광주폭동’으로 지칭하며 신문광고를 냈다. ‘1980년 5·18 당시 시민군은 없었고, 600명의 북한군이 개입해 폭동을 일으켰다’는 내용이다. 이후 지씨는 2015년 6월 새로운 내용을 추가로 발표했다. 이때 그는 당시 한 장의 사진을 제시하며, 사진 속 시민군인 한 청년이 5·18항쟁을 배후에서 조종한 북한군 특수부대원 ‘제1광수’라고 지목했다.다큐멘터리 ‘김군’은 이 사진이 단초가 됐다. 감독은 사진 속 인물을 아는 주옥(60)씨를 만나게 됐고, 본격적으로 영화제작에 돌입했다. 주옥씨는 5·18 당시 시민군에게 주먹밥을 만들어 나눠준 인물이다. 2015년 5월,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개관식에 갔다가 사진 속 청년의 얼굴과 마주한 주옥씨는 단박에 그가 같은 동네에 살던 20대 넝마주이 청년 ‘김군’임을 기억해냈다. 강 감독은 이후, 5·18 무장 시민군인 ‘김군’을 찾기 위해 4년여 동안 광주 시민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동료를 잃은 채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갖고, 38년을 살아온 광주 시민들의 고백 안에서 새로운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 자체가 지만원씨의 주장에 대해 반박 근거가 됐다. 강 감독은 “지만원씨 이야기가 굉장히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며 “다만, 그의 주장을 보여주는 것이 한국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레드콤플렉스(Red complex: 적색공포증.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을 근거로 인권 탄압을 정당화하거나 용인하는 사회적 심리를 포함하는 극단적 반공주의)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지씨의 주장과 논리를 다루게 됐다”고 밝혔다.이어 그는 “김군 사진을 봤을 때, 어떻게 보면 굉장히 과격해 보인다. 또한 5·18을 모르는 세대가 보면, 북한 군인이라고 믿을 만큼 낯설고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다”며 그럼에도 그를 전면에 세운 것은 “김군으로 대표되는 무장 시민군들의 삶을 조명하는 게 제일 큰 목표이자, 인터뷰이 대부분이 당시 총을 들었던 시민군들”이었음을 알렸다. 무엇보다 강 감독은 이 작품이 결코 “한 보수논객과 힘겨루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그는 “오히려 지씨가 1980년 5월을 거짓으로 재단하려고 한 왜곡의 발자취를 통해 묻혀 있는 진실이 드러나는 역설을 보여주고자 한다”며 동시에 5·18 당시, 이름 없이 싸운 이들과 아직까지 시신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이들을 조명하기 위함이었음을 시사했다. 특히 감독이 직접 인터뷰이들의 오래된 상처를 끄집어낸다는 것이 가장 어려웠을 터. 이에 강 감독은 “인터뷰에 응하셨던 분들 모두 고통스러워 하시면서도 본인들이 증언해야만 왜곡된 주장에 반박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았다. 이름 없이 싸웠던 이들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다”며 역사적 사건이 온전히 기록되고, 기억하고자 하는 생존자들의 바람을 작품에 녹여내고자 공을 들였음을 전했다.영화 제목 ‘김군’은 사진 속 인물의 이름인 동시에 당시 시민군들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강 감독은 “‘김군’은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성씨이기도 하다. 물론 주옥 선생님의 기억 속 구체적인 개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편적이고, ‘어느 누구나’가 될 수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며 제목으로 정한 ‘김군’ 의미를 소개했다. 사실 서울 출신의 강 감독에게 5·18은 수많은 역사적 상흔 중 하나일 뿐이다. 그는 “5·18 관련 영화들을 봤을 때,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분노와 울분으로 들이대는 방식의 작업이 많아서 공감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시민을 지켜야 할 군인이 시민을 학살하는 장면을 목격한 후, 총을 들 수밖에 없었다는 시민군들의 고백을 들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강 감독은 영화 ‘김군’이 관객과 호흡할 수 있는 작품이자 함께 고민의 시간을 갖게 하는 작품이 되길 소망했다. 그는 “5·18에 대해 그릇된 믿음을 가진 분들이 보셨을 때, 그 믿음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며 “다만, 저를 포함해 5·18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많은 분이 이 영화를 본 뒤,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되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한편, ‘김군’ 영화 개봉 소식을 전해 들은 지만원씨는 “황당한 소설”이라며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강 감독은 “유료 관객 한 명이 줄어서 아쉽다. (지씨가) 꼭 티켓을 사서 영화를 보시면 좋겠다”고 답했다. 영화 ‘김군’은 오는 23일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글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영상 문성호 김민지 기자 mingk@seoul.co.kr
  • 5·18 행불자 암매장·발포명령자 안갯속… 그날의 진실 밝힌다

    5·18 행불자 암매장·발포명령자 안갯속… 그날의 진실 밝힌다

    “매년 5월만 되면 아들 생각에 가슴이 아려옵니다. 어떻게 사라졌고, 어디에 묻혔는지 알기만 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라진 아들 창현(당시 7세·양동초 1학년)군을 40년 가까이 기다리는 이귀복(82)씨는 16일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한때 생업마저 포기하고, 흔적을 기대할 소문엔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으나 허사였다.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아들을 향한 그리움도 켜켜이 쌓였다. 그는 지난해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8주년 기념식 야외 상황극에 출연해 “내 아들 창현아!”를 목놓아 외치면서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아들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함께 군용트럭이 전남대에 몰려들던 1980년 5월 19일 광주 서구 양동시장 인근의 집을 나선 후 행방불명됐다.이렇게 5월 항쟁 기간인 5월 18~27일 광주에서 사라진 초·중·고교생은 18명이다. 이들을 포함해 같은 기간 행방불명된 사람은 76명에 이르지만 이들 행방은 지금껏 오리무중이다. 당국이 인정하지 않은 행불자까지 보태면 수백명에 이른다. 암매장 의혹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5·18 기간 민간인 166명과 군경 27명이 총탄 등에 희생되고 4000여명의 구속·부상자가 발생했으나 발포 명령자 역시 특정되지 않은 채 안갯속이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관련법을 제정하고, 국회 청문회, 검찰 수사,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상은 낱낱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문재인 정부는 ‘마지막 기회’란 각오로 지난해 3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하 진상규명법) 시행령을 공포했다. 그러나 여야 대치 정국이 길어지면서 진상규명조사위마저 꾸려지지 못하고 있다. 다만 자유한국당과 더불어민주당, 바른미래당이 각각 조사위원 자격을 완화하는 내용의 특별법 개정안을 냈고, 조만간 국회 법사위가 열릴 예정이어서 신속한 처리가 기대된다.조사위는 국회의장 1명과 여야 정당이 각각 추천하는 4명 등 9명으로 구성된다. 그 아래 50여명으로 사무처를 둔다. 조사위는 가해자·참고인·제보자 등을 강제 소환할 수 있는 동행명령장 발부 등 준사법권을 갖는다. 정부는 독립적인 조사위를 발족해 5·18의 진상을 규명한 뒤 그 결과를 공식 국가보고서로 내놓을 방침이다. 진상 조사 내용별로는 ▲행불자 암매장 ▲발포 명령자 ▲여성 성폭행 ▲북한군 개입설 ▲양민 학살 ▲전두환·노태우 정부의 5·18 실상 왜곡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 이 가운데 5·18 당시 신고된 행불자의 암매장 여부는 39년간 풀지 못한 첫 번째 숙제로 꼽힌다. 현재 5·18 행불자로 인정된 사람은 82명이다. 6명은 망월동 5·18 구묘역에 안장된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고, 나머지 76명의 흔적은 묘연하다. 5·18기념재단이 2017년 말~2018년 초 사이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일대와 동구 너릿재, 서구 상무지구 등 암매장 제보가 집중된 후보지를 었으나 시신 발굴에 실패했다. 암매장 관련 증언은 넘쳐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개발로 인한 지형 변형 등이 발굴의 난제로 꼽힌다. 발포 명령자 특정은 진상 규명의 핵심이다. 특별법은 단순히 5·18의 진상을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주요 책임자에 대해 소추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놨다. 관심의 초점은 신군부 실권자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전씨는 1997년 대법원의 ‘5·18 내란사건’ 판결을 통해 내란수괴·뇌란목적 살인죄 등으로 형사처벌됐다. 적용된 혐의는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 진압작전에 국한됐다. 이 때문에 5월 21~26일 사이 광주시민에 대한 집단 발포에 전씨가 개입한 사실이 추가로 밝혀질 경우 형사처벌을 해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씨는 그간 이뤄진 모든 조사에서 군 지휘계통상 유력한 용의선상에 올랐으나 객관적 증거 부족으로 ‘발포 명령자’로는 특정되지 않았다. 상황을 되짚어보면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쯤 동구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의 집단 발포가 이뤄졌다. 오후 8시 30분쯤 계엄사령부를 통해 공식 자위권 발동 명령이 현장 지휘관에 하달된다. 자위권은 24일 오후 6시 종료된다. 즉 21일 오후 8시 30분~24일 오후 6시 사이 69시간 30분 동안 자위권 명목의 발포가 허용된 셈이다. 자위권 발령에 근거해도 5월 19일 동구 계림동 광주고 인근 첫 발포, 20일 광주역 앞 발포, 21일 오후 1시 도청 앞 집단 발포는 모두 불법이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는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관 등이 참석한 ‘대책회의’ 문서(보안사의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 )에서 ‘전 각하(全 閣下): 초병에 대해 난동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란 수기 메모를 확인, 공개한 바 있다. 자위권 공식 발령에 앞서 진행된 ‘전 각하의 자위권 강조’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최초 발포 명령자를 특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양민 학살 진상도 규명되지 않고 있다. 1980년 5월 23일 오전 9시쯤 11공수여단 병력은 광주 동구 지원동 녹동마을 앞길에서 시민군 미니버스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박모(당시 18세)양 등 10여명이 사망했다. 부상을 입은 남성 2명은 인근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려가 즉결 총살됐다. 24일 오후 1시 30분쯤 남구 송암동 저수지에서 놀던 방모(당시 13세)군과 놀이터에 있던 전모(당시 10세)군은 계엄군 총에 맞아 숨졌다. 같은 날 오후 2시쯤 송암동 남선연탄공장 부근에선 계엄군끼리의 오인 사격으로 9명이 사망했다. 계엄군은 시민군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부근 민가를 뒤져 마을 청년 권모(당시 33세)씨 등 4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지금껏 민간인들에 대해 발포 명령을 내리거나 총격을 실행한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기는커녕 도리어 훈포장을 줘 논란을 빚었다. ●“처벌보다 화해 통한 과거사 정리 초점” 이밖에 광주 진압작전 때 특전사 위주로 운영된 군 지휘계통의 이원화, 무고한 시민에 대한 고문, 여성 성폭행, 북한군 개입설, 헬기사격 명령자, 시민군 무장 시점 조작 여부 등에 대한 조사도 이뤄진다. 1985년 안전기획부 주도의 ‘80위원회’(광주사태진상구명위원회 실무위원회), 1988년 국방부의 ‘511연구위원회’(국방부 국회대책특위 실무위원회)·보안사 태스크포스(TF) 및 511분석반 등이 저지른 5·18에 대한 왜곡과 증거물 훼손·조작 관련자 등을 찾아 책임을 묻는다. 위원회들은 국회 광주청문회에 대응하기 위해 증인을 위한 예상문답 작성 등을 통해 발포, 유언비어 등 쟁점에 대한 짜맞추기를 꾀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송선태 국방부 진상규명 특별법시행 TF 자문위원은 “이번 조사위 활동은 처벌보다는 화해를 통한 과거사 정리에 초점을 맞췄다”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처럼 제보자가 사실에 가깝게 증언할 경우 당사자가 실정법을 위반했더라도 재판부에 감형이나 사면을 요청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군홧발에 의한 20대 자백 진위보다 묻고싶다, 5월 정신으로 살고있냐고”

    “군홧발에 의한 20대 자백 진위보다 묻고싶다, 5월 정신으로 살고있냐고”

    “유시민씨가 보안사에 나를 밀고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보안사에 붙들려 얼마나 고초를 당했을까 늘 안쓰러웠다.” ●“유시민씨가 밀고했다고 생각 않는다” 최근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이 1980년 5월 보안사에 갇혔던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진술서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고초를 겪었다고 주장하고, 유 이사장이 이를 반박해 논란이 됐다. 유 이사장이 쓴 진술서에 등장하는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 사회부장 황광우(61)씨는 심 의원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황씨는 1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어린 대학생을 잡아다 극도의 공포 상태에서 자백을 강요한 전두환의 보안사, 그들의 폭력을 전제하지 않고 우리들이 겪은 지난 시절의 불행을 동료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 계엄포고령 위반자 명단에 ‘황광우’라는 이름이 올라와 쫓기는 삶을 살았다. 1977년 입학한 그가 21년 만인 1998년 졸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진보정당운동에 헌신한 그는 12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황지우 시인의 동생이기도 한 그는 현재 광주에 인문연구원 ‘동고송’을 세우고 인문 통신을 발간하고 있다. 광주에서 출생한 황씨는 심 의원과 광주일고, 종로학원, 서울대를 같이 다녔다. 그는 심 의원을 무턱대고 비난하지 않았다. 황씨는 “서울역 회군의 책임을 심재철 개인에게 묻는 것은 가혹한 처사”라고 지적했다. 서울역 회군은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 모인 대학생들의 주장이 시위를 계속하자는 쪽과 회군하자는 쪽으로 갈린 가운데 후자로 결정되면서 철수한 사건을 일컫는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심 의원은 회군을 결정한 인물로 지목돼 비판을 받았다. 황씨는 “‘서울의 봄’은 오랜 ‘서울의 겨울’ 다음에 온 것”이라며 “당시 학생운동의 의사결정은 (총학생회장이 아니라) ‘서울의 겨울’ 시절에 존속했던 지하그룹에서 나왔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심 의원에게도 부탁하고 싶다”며 “끔찍한 공포 속에서 나온 유시민의 자백을 대승적으로 끌어안아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자유와 평등은 오늘 실천 속에서 가능” 전두환 신군부 일당은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그는 “계엄령이 확대되면 각자의 캠퍼스에서 항쟁하기로 했지만, 나부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며 “광주 민중들이 항쟁에 나섰던 그 열흘 동안 우리는 광주를 외면했다”고 자책했다. 항쟁의 10일, 언론에서는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그는 형님으로부터 내려오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친구 집을 전전했다. 황씨는 “철부지였다”며 가슴을 쳤다. 5월 28일 이후에야 광주의 진실이 서울로 전달됐고, 그때서야 그는 학살 사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서울 곳곳에 뿌렸다. 올해 3월 광주 법정을 찾은 전두환은 학살 책임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거 왜 이래”라는 외마디로 광주를 다시 할퀴었다. 황씨는 “전쟁 중에도 상대가 무장해제되면 포로로 대우하는 것이 국제법의 관례”라면서 “전두환의 군인들은 비무장 시민을 향해 발포했다. 역사는 이 만행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광주를 찾는 황교안 한국당 대표에게도 “헌법이 있는 나라에서 이런 행위가 가능한 것인지, 국민에게 먼저 답변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황씨가 지금 곱씹는 것은 심재철과 유시민의 책임 소재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오월 정신에 맞게 살아가느냐”이다. 그가 정의하는 오월 정신은 불의한 폭력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운 ‘항쟁’과 해방 공간에서 함께 주먹밥을 나누었던 ‘대동’이다. 그는 “입으로는 자유여 평등이여를 외치면서 속으로는 제 잇속만 챙기고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고 했다. 선생이라면 제자들의 고민과 취업을 잘 돌봐주는 것, 나이 든 사람이라면 젊은이의 고민을 껴안고 도와주는 것이 나누는 삶이고 진보적인 삶이라고 했다. 기득권자와 정규직은 기득권을 가지지 못한 자와 비정규직을 위해 무엇을 나눌지 고민해야 한다고도 했다. 윤상원 시민군 대변인은 1980년 5월 26일 “우리는 오늘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를 승자로 만들 것이다”라고 외쳤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시민군의 이 외침을 기억하고 있는가. “오월 광주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우리가 통과한 ‘죽음의 시대’를 후배들이 꼭 기억해 달라.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 황씨의 마지막 당부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5·18 발포하던 날, 헬기 타는 전두환 목격했다” 증언 나와

    “5·18 발포하던 날, 헬기 타는 전두환 목격했다” 증언 나와

    당시 헬기 운용 부대장 운전병 오원기씨, JTBC와 인터뷰서 증언 주한미군 정보요원이었던 김용장씨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기간 중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헬기를 타고 광주에 왔다고 증언한 가운데, 같은 날 서울에서 전두환씨가 헬기를 타고 이륙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인이 나왔다. 서울 대방동 공군 706보안부대장의 운전병이었던 오원기씨는 16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1980년 5월 21일 오전 전두환씨를 용산 헬기장에서 직접 봤다고 증언했다. 오원기씨는 당시 전두환씨가 육군이 아닌 공군 헬기를 이용했다면서 해당 기종이 UH-1H로 당시 공군의 ‘귀빈용 헬기’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전두환씨가 당시에 수행원도 없이 극비리에 와서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출발 상황을 목격한 사람은 자신과 헬기 조종사, 부조종사, 기관사(정비사),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운전사, 전두환씨, 그리고 자신의 부대장이었던 신동만 현 예비역 준장이었다고 설명했다. 앞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활동하던 미 육군 방첩부대 소속 한국인 정보요원 김용장씨는 “전두환씨가 1980년 5월 21일 점심시간 전 K57(제1전투비행단·광주 송정) 비행장에 와서 정호용 특전사령관, 이재우 505보안대장 등 4명과 회의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면서 “오자마자 K57비행단장실에서 회의를 했다”고 증언했다. 전두환씨가 이 회의에서 계엄군에 발포 명령을 내렸을 것이라고 김용장씨는 추정했다. 계엄군은 그날 오후 1시쯤 시민군을 향해 발포했다. 그 동안 전두환씨 측은 당시 광주에 간 바가 절대 없다고 강하게 부인해 왔다. 오원기씨는 전두환씨가 헬기를 타고 출발한 시각을 정확히 기억하진 않지만 오전 10시 30분쯤이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오원기씨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그 동안 전두환씨가 광주에 도착했다는 증언에 서울에서 출발한 상황을 목격한 구체적인 증언이 더해지면서 진실에 좀 더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다만 오원기씨가 헬기 운용 부대의 운전병이었기에 전두환씨가 당시 헬기를 타고 어디로 향했는지 증언하기엔 한계가 있다. 그러나 JTBC는 향후 결정적인 증언이 나올 가능성도 전했다. 바로 오원기씨의 직속 상관인 신동만 예비역 준장의 증언 가능성이다. JTBC는 오원기씨가 당시 신동만 부대장을 수행하던 운전병이라는 사실을 신동만 준장 본인을 통해 직접 확인했다. 그러면서 전두환씨가 당시 헬기를 타고 광주에 갔다는 주장에 대해 묻자 신동만 준장이 이를 부인하거나 하진 않고 ‘전화로 얘기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고 JTBC는 전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아직도 내 몸에 박혀 있는 5·18 총알… 그리고 38년 만의 졸업장

    아직도 내 몸에 박혀 있는 5·18 총알… 그리고 38년 만의 졸업장

    전남도청 앞 금남로 시위서 복부에 총상 “60세가 다 돼 명예졸업… 기쁘고도 착잡”5·18민주화운동 때 입은 총상으로 고교에서 학업을 중단한 50대가 명예졸업장으로 몸과 마음의 상처를 달랬다. 광주 서석고는 15일 교내 체육관에서 열린 개교기념일 행사에서 전형문(58)씨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1980년 5·18 당시 고교 3학년이었던 전씨는 같은 해 5월 21일 전남도청 앞 금남로 시위에 참여했다가 계엄군의 집단발포 때 복부에 총상을 입었다. 총알은 지금도 허리뼈에 박혀 있다. 이런 사연은 최근 5·18기념재단 공모 사업으로 발간된 서석고 학생 체험기 ‘5·18 우리들의 이야기’에 수록되면서 알려졌다. 학교 측은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3학년 2학기 수업일수를 채우지 못한 전씨를 위로하기 위해 명예졸업장을 주기로 했다. 정상적으로 학업을 계속했다면 1981년 2월 5회 졸업생이 됐을 테니 38년을 지각해 졸업장을 받은 것이다. 전씨는 스스로 계엄군에 맞섰을 때와 같은 나이 후배들과 동문의 박수를 받으며 뜻깊은 졸업장을 움켜쥐었다. 전씨는 “60이 다 돼 졸업하니 기쁘면서도 착잡하다”며 “도청에 갔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내 운명이다”고 담담하게 덧붙였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5·18, 그날의 진실을 파헤치다

    5·18, 그날의 진실을 파헤치다

    광수1호 지목된 시민군 정체 다큐 ‘김군’ 택시운전사·꽃잎 등 5·18 영화도 재상영 당시 고교생들 체험 ‘…우리들의 이야기’ 구속자 가족들의 외침 ‘녹두서점의 오월’ 기억 넘어 왜곡된 진실 바로잡기에 초점 “이거는 틀림없이 북한군이다(지만원씨).”, “딱 보는 순간, 김군인가 거기 아니요?”-영화 ‘김군’ “함께 갔던 30대 청년이 권총을 꺼내 내 옆구리를 찔렀다. 군 특수부대의 비밀 공작팀이었던 ‘편의대´ 대원이었다.”-‘5·18, 우리들의 이야기’5·18 광주민주화항쟁을 앞두고 문화계가 책, 영화 등 관련 작품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5·18 항쟁의 상처를 그저 전달하는 데에서 한발 나아가 그동안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는 데 초점을 둔 게 눈에 띈다. 오는 23일 개봉하는 강상우 감독의 ‘김군’은 5·18 항쟁 당시 시민군의 정체를 추적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군사평론가 지만원씨가 당시 광주에 북한 특수군, 이른바 ‘광수’가 투입됐다고 주장한 것을 반박하는 데 중점을 맞췄다. 영화는 북한 특수군 ‘제1광수’로 지목된 시민군 사진 한 장을 단초로 이야기를 펼쳐낸다. 그를 ‘김군’이라 기억하는 시민들 증언으로 당시 북한군 개입설의 진실을 파헤친다. 영화 ‘김군’과 함께 ‘택시운전사´처럼 5·18 항쟁을 다룬 영화들도 다시 소환돼 전국 주요 도시에서 추모객들과 만난다. 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은 광주독립영화관을 비롯해 서울 아리랑시네센터, 부산 인디플러스 영화의전당, 천안 인디플러스, 부천 판타스틱큐브의 5개 예술 영화관에서 모두 12편의 관련 영화를 상영한다. ‘5·18 힌츠페터 스토리’, ‘택시운전사’, ‘오월애’, ‘꽃잎’, ‘박하사탕’ 등 상업성과 예술성을 고루 갖춘 영화로 상영 목록을 구성했다.‘5·18, 우리들의 이야기’(심미안)는 1980년 당시 고교 3학년이었던 광주서석고 제5회 동창회 동기 61명의 체험을 엮은 책이다. 12명의 ‘5·18 체험단 기록위원회’가 2년 동안 동기를 찾아다니며 당시를 재구성했다.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공수부대 집단 발포로 총상을 입은 학생, 전남도청을 지키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 진압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학생, 공수부대원에게 붙잡혀 전남대와 광주교도소에서 46일 동안 고초를 당한 학생 등 생생한 사례를 모았다. 그동안 문서로만 알려진 채 실체가 없었던 계엄군의 ‘편의대’ 활동을 처음 증명한 오일교씨 사례 등은 학술적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김준태 5·18 기념재단 이사장은 추천사를 통해 “그때 광주시내 고등학생들의 마음과 행동과 고통, 분노와 몸부림과 희망을 보여 주는 ‘생체험’이 오롯이 담겨 있어 감동을 준다”고 밝혔다. ‘녹두서점의 오월’(한겨레출판)은 5·18 항쟁 당시 녹두서점을 운영한 서점 가족의 눈으로 본 이야기다. 박정희 정권 시절 광주 유일의 인문사회과학 서점이었던 녹두서점은 5·18 항쟁 당시 대자보와 전단을 만들던 곳이었으며, 시민군의 식당, 회의실 역할도 했다. 녹두서점 가족 김상윤, 정현애, 김상집씨가 각각 감옥, 서점, 거리에서 겪은 일을 담았다. 특히 혐의를 벗은 정현애씨가 녹두서점으로 돌아와 구속자 가족들과 함께 석방운동을 진행하는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구속자 가족들의 노력을 상세히 그렸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5·18 유혈 진압 작전에 전두환 “굿 아이디어” 문건 나와

    5·18 유혈 진압 작전에 전두환 “굿 아이디어” 문건 나와

    5·18 민주화운동의 최후 유혈진압 작전인 ‘충정작전’을 보고 받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굿 아이디어’라고 칭찬했다는 내용의 문건이 나왔다. 15일 공개된 1980년 당시 2군 사령부가 작성한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에 따르면 그 해 5월 23일 당시 진종채 2군 사령관이 대구와 서울, 광주 등을 방문해 충정작전 계획을 건의·보고했다는 내용이 있다. 진 사령관이 방문한 지역 가운데 ‘서울’에 동그라미가 있고, ‘閣下(각하)께서 “Good idea”(굿 아이디어)’라는 손글씨가 적혀 있다. 여기서 ‘각하’는 진 사령관의 작전을 보고 받은 전두환씨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이날 2군 사령부는 육군참모총장실에서 ‘충정작전’이라는 이름의 광주 재진입 작전계획을 건의했다. 2군 사령부는 5·18 진압 작전에 투입된 공수부대와 20사단 등이 배속된 광주의 전투병과교육사령부의 상급부대로 군 작전을 지휘했다. 2군 사령부는 5월 21일 오후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직후부터 재진입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1995년 검찰 수사에 따르면 진 사령관이 최종 진압 작전 계획을 보고하는 자리에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비롯해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씨도 참석했다. 해당 문건 5월 21일자 기록에도 ‘자위권 발동’이 결정된 회의 상황을 기록하면서 같은 필체로 “전 각하: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적혀 있다. 회의 이후 누군가가 전두환씨의 반응이나 지시사항을 추가한 것이다. 전두환씨가 유혈 진압 작전의 최종 승인권자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기록인 셈이다. 이 작전에는 외곽도로 봉쇄도 포함됐고, ‘제파식 공격’ 즉 특정 공격 정면에 공격제대를 연속적으로 투입해 공격하는 전술로, 파상공세를 벌이도록 했다.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철수한 지 이틀 만에 확정된 ‘충정작전’ 계획대로라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러나 작전을 보고받은 전두환씨는 “굿 아이디어”라면서 흡족해하며 이를 승인한 것이다. 2군 사령부는 계엄군이 전남도청에서 시 외곽으로 철수한 21일 이미 진압 작전을 마련하고 23일 오전 2시 작전을 수행하겠다는 계획을 육군본부 회의에서 건의했다. 그러나 참모총장은 한·미간 협의 등을 이유로 24일까지 작전을 연기할 것을 지시해 작전은 미뤄졌다. 군사행동에 반대한 미국의 요청으로 국방부에 의해 제동이 걸린 것이다. 해당 문건에는 “국방부 장관 지침. 5월 25일 오전 2시 이후까지 작전 연기”라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계엄군은 결국 5월 27일 새벽, 광주 재진입작전이 실행됐고, 옛 전남도청 등이 무력 진압됐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뜬금없는 ‘이승만·박정희 국부론’… 71년 정쟁 ‘우율 문묘종사’ 닮았다

    뜬금없는 ‘이승만·박정희 국부론’… 71년 정쟁 ‘우율 문묘종사’ 닮았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 8일 뜬금없이 이승만과 박정희의 ‘국부론’을 다시 꺼냈다.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와 선진화의 아버지가 그것이다. 국부론이 성립하려면 1948년 8월 15일은 건국절이 돼야 하고 상하이임시정부의 법통은 부정돼야 한다. 상하이임시정부 법통론을 두고, 그가 북한 정권 수립을 옹호하려는 것이라는 해괴한 주장까지 제기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국부화는 이른바 사이비 보수주의자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이명박 정부 때 관변 학자들이 나서서 ‘8월 15일은 건국절’이라고 주장했다. 건국절이 된다면, 이승만은 자연스럽게 건국의 아버지가 된다. 박근혜 정부는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통해 역사를 아예 정부가 관장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끝내려 했다.‘국부화’는 이들에게 찍힌 친일과 독재의 낙인을 한 방에 지울 수 있는 수단이었다. ‘대한민국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이 나라의 정통성의 원천으로 공인받는 것으로 그 후예들은 이 나라의 적통이 된다. 역사적 정통성은 현실 정치에서 집권의 정당성으로 이어진다. 이들을 거부하면 체제 부정 세력이 된다.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모 인사가 제기하고 가짜 보수집단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민주화의 아버지 이승만’은 한 발 더 나갔다. 그들은 한국 현대정치의 흑역사를 열어 놓은 이승만의 ‘부산정치파동’(1952년 5월 25일 계엄령 선포부터 같은 해 7월 7일 제1차 개정헌법 공포까지 이어진 정치적 소요)을 한국 최초의 민주화 혁명이라고 주장한다. 건국, 산업화는 물론이고 민주화까지 혈통 속으로 끌어들여 ‘한국판 백두혈통’을 완성하겠다는 것이다. ‘국부화’ 논란은 조선의 문묘종사 정쟁에 연원을 두고 있다. 조선 중기 등장한 붕당은 제각각 자파의 영수를 문묘에 종사하기 위해 대를 이어 가며 정쟁을 벌였다. 문묘에 종사된다는 것은 조선의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의 법통을 승계했음을 공인받는 것이다. 집권의 정당성은 이념적 정통성 위에서 가능하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국부화는 대한민국 역사의 문묘 맨 윗자리에 그 위패를 안치하려는 것이니, 조선의 문묘종사와 다르지 않다. ‘아버지 운운’하는 것이 조선의 ‘현인’ 논란보다 훨씬 더 유치하고 구리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인조 13년(1635년) 성균관(지금의 국립서울대학교에 해당한다)에 난리가 났다. 유생들이 수업 거부, 동맹휴학, 제적, 자퇴, 가투까지 벌였다. 시위대가 대궐 앞까지 진출했으니 왕조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난리였다. 5월 11일, 송시형을 소두(상소의 대표자)로 하여 유생 270여명이 서인의 종장인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른바 ‘우율 문묘종사 상소’다. 그러자 남인 유생 57명이 채진후를 소두로 하여 맞섰다. 농성장인 동학(관립 4부학당 중 하나. 지금의 동대문 옆 옛 이화여대부속병원 자리에 있었다)으로 가면서 지름길인 지금의 대학로를 놔두고 굳이 창덕궁 앞으로 돌아갔다. 대궐 앞 시위를 위해서였다. 인조는 우율 문묘종사를 거부했다. 그러자 인조반정의 공신들이 들고일어났다. 12일 영의정 윤방, 우의정 김상용이 중신 회의에서 우율 문묘종사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13일엔 송시형이 다시 상소를 올렸고 오윤겸, 조익 등 대신들이 두둔했다. 점입가경이었다. 서인은 채진후 등 남인계 유생 6명에게 정거(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 벌) 처분을 내렸고 남인계 유생 50여명은 수업 거부에 해당하는 권당에 들어갔다. 조정에서는 이조판서 최명길이 성균관 관련 직책인 대제학과 지성균관사의 사표를 걸고 3명에 대한 정거를 주장했다. 지방에서도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 전라도, 충청도의 서인 유생들이 릴레이 상소를 했다. 인조는 불쾌했다. 최명길이 낸 대제학, 지성균관사 사표를 수리했다. 지방 유생들의 상소에는 “유생의 본분이나 지킬 일이지 알지도 못하는 일을 거론해 남의 비웃음을 사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우율 문묘종사 청원이 시작된 것은 인조반정 직후였다. 반정에 성공하고 불과 13일 만인 1623년 3월 27일, 서인 유순익이 율곡 이이의 문묘종사를 청원했다. 이에 민성징, 이민구, 유백증 등 반정공신들이 인조에게 윤허를 청했다. 인조는 점잖게 거부했다. ‘중차대한 문제를 쉽게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인조는 문묘종사의 민감성을 잘 알고 있었다. 42년의 논란 끝에 광해군 초 결말이 난 5현 문묘종사의 전말을 지켜봤고 이언적과 이황의 위폐를 문묘에서 빼는 문제(회퇴변척)를 놓고 벌인 북인과 남인의 정쟁도 지켜봤다. 서인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조정을 장악한 것도 모자라 학문과 이데올로기의 정통성까지 독점해 항구적인 집권 기반을 마련하려는 것 아닌가. 재위 기간 내내 상소는 계속됐지만 인조는 외면했다. 정쟁이 다시 불붙은 것은 효종 즉위년이었다. 서인은 왕이 어리숙할 때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1650년 1월 성균관 유생 홍위 등 수백 명이 문묘종사를 청원하는 상소를 했다. 긴장한 남인 유생들은 2월 경상도 진사 유직을 소두로 900여명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영남의 거의 모든 읍이 참가했다. 그러자 성균관의 서인 유생들은 유직에게 삭적과 부황의 처벌을 내렸다. 유생 명부에서 이름을 지워버리고 그의 이름을 쓴 종이를 큰 북에 붙이고 북을 치며 장안을 도는 처벌이었다. 흉악범의 신상을 인터넷에 공개하는 것과 같은 조처였다. 남인 유생들은 공관으로 맞섰다. 일종의 동맹휴업이었다. “과거를 보기 위해 구차스럽게 반궁에 남아 있을 수 없다.” 서인 유생도 염치가 없었던지 공관을 했다. 효종은 속이 끓었지만, 자신의 즉위를 기념해 치르는 증광시가 무산될 수 있어 걱정이었다. 영의정 이경여와 우의정 조익이 부황 처벌만 면제하는 수습책을 냈다. 그러나 서인 유생들은 막무가내였다. ‘선현을 모욕한 자들에 대한 처벌을 철회할 수 없다.’ 효종은 역정을 냈다. “너희는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그러자 서인 유생들은 “‘불학무도한 놈’이 어떻게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느냐”며 다시 수업을 거부했다. 손을 든 것은 효종이었다. 7월 3일 ‘군왕으로서 거친 말을 한 것은 잘못’이라며 유감을 표시했다. 그러자 훗날 소론의 영수가 되는 박세채 등이 우율 문묘종사 청원과 함께 부황 처벌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효종이 상소의 수용을 거부하자 이번엔 승정원에서 치받았다. ‘유생의 상소에 답하지 않는 것은 선비를 대우하는 바른 도리가 아닙니다.’ 효종은 다시 사과를 해야 했다. ‘유생들에게 불평하는 마음을 갖게 만든 내 자신이 매우 부끄럽다.’ 성균관 공관 사태는 이것으로 일단락됐다. 6년 뒤 서인의 두 영수가 직접 소두로 나섰다. 송준길은 1657년 10월, 송시열은 이듬해 12월에 우율 문묘 종사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효종은 거부했다. 서인의 의도와 집요함에 넌더리가 났다. 현종이 즉위하자 서인들은 다시 공세에 들어갔다. 즉위년(1659년) 관학 유생 윤항 등이 5차례 상소를 올렸고 부제학 유계 등 대간들도 차자를 올렸다. 효종 3년엔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충청도, 전라도 유생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상소했다. 현종 역시 거부했다. 우율 문묘종사 정쟁은, 당쟁을 왕권 강화에 이용한 숙종 때에야 끝났다. 경신환국(1680년·숙종 6년)으로 남인을 남김없이 쓸어버린 뒤 숙종은 서인의 요구에 따라 1682년 우율 종사를 윤허했다. 처음 청원이 있고 59년 만이었다. 숙종은 그러나 1689년 기사환국을 통해 서인을 숙청한 뒤 남인의 주장에 따라 우율의 위패를 문묘에서 철거(철향)했고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을 숙청한 뒤 위패를 복향했다. 무려 71년 만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이와 성혼은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학문적 정치적 궤적에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서인의 권력 기반은 확고부동해졌다. 서인의 노론 소론 분당 이후엔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등 노론의 종장이 차례로 문묘에 종사됐다. 조선은 노론의 천하가 되었다. 조선이 불가역적인 쇠락의 길을 걷던 조선 말(고종 20년)에는 김집의 문묘 종사가 이루어졌다. 참으로 집요했다. 그 집요함은 지금 ‘대한민국 아버지’론으로 나타나고 있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 [5·18 39주년] “계엄군 무차별 총칼, 혈투로 맞선 시민들… 5월은 잔인했다”

    [5·18 39주년] “계엄군 무차별 총칼, 혈투로 맞선 시민들… 5월은 잔인했다”

    5·18민주화운동 기간인 1980년 5월 18~27일 실상을 낱낱이 밝힌 자필 원고(200자 원고지 140장 분량)의 구체적 내용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박석무(77·당시 광주 대동고 교사)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항쟁 중심지 곳곳을 누비며 직접 보거나 들은 내용을 꼼꼼하게 정리한 ‘5·18 광주 의거-시민항쟁의 배경과 전개 과정’이란 제목의 글이다. 일자별 항쟁 상황과 발생 원인, 의의, 교훈 등 8개 소주제별로 기록돼 있다. 국회 청문회, 검찰 수사,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 등 몇 차례 조사를 거쳐 상당 부분 세상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항쟁에 참여한 교사가 직접 작성한 수기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띤다. 내용을 발췌해 그 과정을 되짚어 본다.#18일 군부에 의한 전국 계엄 확대 조치 다음날로 일요일인 이날 오전 9시쯤 전남대생 500여명은 정문 앞에서 이미 시내에 배치된 계엄군과 대치 중이었다. 돌멩이로 계엄군에 맞서던 학생들은 힘이 부치자 삼삼오오 흩어져 4㎞쯤 떨어진 전남도청(현 동구 광산동 국립 아시아문화전당)으로 몰려들었다. 학생들은 최루탄을 쏘는 경찰에 맞서 투석전을 벌이며 금남로·충장로 골목으로 흩어졌다 모였다를 되풀이하며 시위를 이어갔다. 오전 투석전 등으로 충장로파출소가 파괴되는 등 시위는 점차 과격해졌다. 계엄사 측은 오후 공수부대 병력을 시내에 투입, 젊은이들을 무차별 구타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가택 수색과 연행 등으로 숱한 학생과 시민들이 짐짝처럼 군용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19일 날이 밝자 도청 인근 골목 곳곳에서 대학생들이 떼 지어 몰려들었다.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시가전 양상으로 바뀌었다. 계엄군은 닥치는 대로 찌르고 구타했다. 시내가 온통 유혈로 물들었다. 동구 계림동 광주고 인근에서 계엄군의 첫 발포로 부상자도 나왔다. 시민들은 육탄으로 총칼 앞에 혈투를 감행했다. 금남로, 공용터미널, 광주역 인근 등에선 인산인해를 이뤄 계엄군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였다. 분노한 군중은 식칼, 낫, 몽둥이를 들기도 했다. 사망자가 쏟아졌지만 사람이 쓰러지면 곧바로 연막탄을 뿌려 시야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군용차로 실어 갔다. #20일 아침부터 휴교 중인 고교생들도 거리로 나왔다. 대학생 지도부가 작성한 ‘시민 회보’라는 전단이 뿌려지고, 신문이 없는 터에 신문 구실을 했다. 계엄군 만행과 시민 도륙 참상이 알려지고 외신기자들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해질무렵엔 도청 앞 계엄군과 대치하던 금남로 왕복 8차로 도로, 광주역~전남여고~노동청 사잇길도 인파로 메워졌다. 30만~40만 인파가 각목 등을 들고 “전두환 찢어 죽이자”며 어깨를 결었다. 영업하던 택시기사 5명이 무차별 자상과 폭행으로 숨졌다는 게 확인되자 동료 기사 80여명은 공설운동장(무등경기장)에 모여 클랙션을 울리며 차량을 몰고 금남로로 진출했다. 시민들은 밤을 꼬박 새우며 계엄군과 일진일퇴 공방전을 계속했다. 격렬한 ‘전투’로 도청을 뺀 전역이 시민들에게 넘어갔다. #21일 새벽 곳곳에서 총성과 함께 불탄 차량, 혈흔, 흩어진 보도블럭이 어우러져 잔인한 아침을 맞고 있었다. 시민들은 전날 밤 계엄군으로부터 탈취한 M16 소총 20여정으로 아세아자동차(현 기아차)를 털어 차량을 확보하고 일부 자체 무장했다. 낮 12시 30분쯤 계엄군 저지선을 차량으로 뚫으려 접전을 벌였다.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 발포로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민들은 부상자를 병원으로 나르고 헌혈을 자처했다. 아낙네들은 차량에 탄 시위대에 물과 음료수, 김밥을 날랐다. 오후 3시쯤부터는 인근 전남 화순과 나주 등지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빼앗은 칼빈 소총과 권총, 수류탄, 폭약(TNT) 등으로 무장했다. 도청을 지키던 계엄군은 오후 4시 외곽으로 철수했다. 광주는 ‘해방구’로 변했다. #22~27일 도청 앞에선 시민궐기대회가 열려 ‘독재 타도’ ‘살인마 전두환 퇴진’을 외쳤다. 도청에 작전본부와 수습대책위도 꾸려졌다. 시민군은 도시 외곽에 진지를 구축하고 야간 계엄군 침입에 대비하는 등 자체 경비와 치안을 강화했다. 도청 앞 상무관 등지에는 시신과 부상자를 확인하려는 가족으로 뒤덮였다. 매일 낮 대규모 군중이 시국을 성토했다. 광주는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며칠을 보냈다. 계엄군은 27일 새벽 지상과 공중을 이용해 살육작전을 감행해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도청을 접수했다. 항쟁 지도부는 도청 사수를 결의하고 끝까지 저항했으나 5·18은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5·18 39주년] “北특수군 침투설 날조…美 감시망 피하기 불가능”

    [5·18 39주년] “北특수군 침투설 날조…美 감시망 피하기 불가능”

    시민 폭도로 몰아 강경 진압 빌미 조장 전두환의 보안사 고도의 공작 벌인 것“오늘 드리는 말씀은 아내에게도 39년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39주년을 닷새 앞둔 13일 전직 미군 정보요원이었던 김용장(74)씨가 국회의원회관 기자회견장에서 무겁게 입을 뗐다. 그는 5·18 당시 미 육군 501여단에서 근무했던 유일한 한국인 정보관이었다. 은퇴 뒤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서 살던 그는 5·18기념재단 관계자 등의 설득으로 입국해 자신의 목격담을 털어놨다. “5·18 때 북한 특수군 침투설은 신군부가 지어낸 얘기이며 계엄군 측이 폭동을 부추기거나 자행해 유혈 진압 명분을 쌓았다”는 것이 증언의 핵심이다. 이를 근거로 당시 군부의 1인자였던 전두환씨가 직접 시민에 대한 사살 명령을 했다고도 증언했다. 김씨는 먼저 “북한군 600명이 광주로 왔다는 주장은 전두환이 만든 허위 날조”라고 말했다. 두 가지 근거를 들었다. ▲북한 특수군 수백명이 광주로 내려왔다면 당시 미군의 정보망이 완전히 뚫렸다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600명이 침투하려면 잠수정 약 30척이 필요한데 당시 북한은 그 정도 잠수정을 보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두 대의 미국 군사첩보위성이 북한과 광주를 집중 정찰하고 있었다”며 “북한군 600명이 미국의 감시망을 피해 들어오는 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광주에서 활동한 사복 군인 조직인 ‘편의대’에 대해서도 “분명히 있었고 이들의 실체가 밝혀진다면 광주의 모든 의문이 풀릴 것”이라고 증언했다. 편의대의 존재는 그동안 광주 시민들의 일부 증언으로만 알려져 왔었다. 김씨는 자신이 직접 광주에 온 편의대 대원들을 봤다면서 “20~30대로 짧은 머리에 일부는 가발을 썼다.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렸고, 일부는 거지처럼 넝마를 걸친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전두환의 보안사령부가 보낸 이 ‘남한 특수군’이 선봉에 서서 방화, 총격, 장갑차 탈취 등 시민들의 극렬 행위를 유도하거나 직접 벌였고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 시민을 다 죽이려 한다’는 등 유언비어도 유포했다는 게 김씨의 주장이다. 그는 “시민을 폭도로 몰아 강경 진압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 보안사령부가 고도의 공작을 벌인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전두환이 철저한 시나리오 속에 5·18을 폭동처럼 몰고 간 뒤 직접 광주를 방문해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주장도 재차 했다. 그는 “발포 명령과 사살 명령은 완전히 다르다. 발포는 상대방이 총격을 가했을 때 방어 차원에서 하는 것”이라면서 “(전씨가) 헬기를 타고 왔기 때문에 비행계획서를 파기하지 않았다면 자료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제가 그 당시에 쓴 보고서 40건 가운데 5건이 백악관으로 보내졌고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이 3건을 직접 읽었다”고 주장했다.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5·18 39주년] “진실 밝혀 5월 영령 영면” 노란 리본 바다… 추모 분위기 고조

    각급 학교 음악회·골든벨 대회 등 행사 전남도, 오늘 목포서 기념 문화제 개최 5·18민주화운동 39주년을 닷새 앞둔 13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 참배객 발길이 줄을 잇는 등 추모 분위기를 달궜다. 5·18민주묘지에 따르면 이날 현재 참배객이 3만 2000여명을 기록해 하루 평균 3000여명에 이른다. 한 달 새 3배 가까이 늘었다. 5·18을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 진영 및 정치권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끈 영향으로 풀이된다. 주말인 지난 11일 묘지 주차장 인근 천막에서 열린 ‘추모의 글 남기기’ 캠페인엔 ‘5월 영령들께 죄송합니다’ ‘민주주의 구현’ 등 문구를 적은 리본이 노란 바다를 연출했다. 서울에서 온 대학생 최모(22)씨는 “5·18을 맞은 지 벌써 40년 가까이 흘렀으나 아직도 왜곡과 훼, 가짜 뉴스가 판을 쳐 안타깝다”며 “이젠 영령들이 편히 잠들 수 있도록 그때의 진실이 낱낱이 밝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예전과 달리 묘지를 둘러보고 5·18 진행과정 등을 국가보훈처 관계자에게 묻는 외국인도 자주 눈에 띈다. 특히 올해엔 최근 5·18유족회 주최 글짓기 대회에 이어 18일 구속부상자회의 주먹밥 나누기, 25일 부상자회의 휘호대회가 이어지면서 추모객이 대거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 각급 학교에서도 5·18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잇따른다. 광주 살레시오고는 18일 작은 음악회를 열어 계엄군 총칼에 힘없이 스러진 명예졸업생 김평용(당시 2년)씨 등의 넋을 기린다. 또 5·18 때 시위에 가담했다가 실종된 뒤 주검으로 돌아온 양찬근(당시 숭의실업고 1년)군이 다녔던 숭의과학기술고는 오월길 역사기행, 현수막 제작과 아울러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5·18 골든벨 대회’를 마련한다. 조선대 부고, 효덕초등학교, 대동고 등도 저마다 희생된 선배들의 넋을 달래는 문화행사를 내놓는다. 전남도도 2010년 30주년에 이어 9년 만에 자체 5·18기념행사를 갖는다. 유족·전남 지역민을 초청해 14일 오후 6시 30분부터 목포역 광장에서 ‘전라남도 5·18기념문화제’를 열고 풍물굿, 5·18영상 상영, 5·18왜곡 규탄 결의문 낭독 등을 진행한다. 추모 분위기는 17~18일 절정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17일 오후 7시 30분 동구 금남로 일원에서 제39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 전야제가 시작되고, 18일 같은 장소에서 ‘5·18진상규명! 역사왜곡처벌법 제정! 망언의원 퇴출! 범국민대회’가 열린다. 5·18민주묘지 관리소 관계자는 “연간 평균 60여만명이 묘지를 찾는데 절반은 5월에 집중된다”며 “특히 올해 행사에는 예년보다 많은 추모객이 몰릴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한편 보수단체들이 18일 오전 10시 5·18민주묘지 앞과 오후 1시 금남로 5가에 집회를 신고해 긴장감도 감돈다. 경찰은 인력배치로 완전 분리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로 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전두환, 계엄군 발포 직전 광주 내려와 사살 명령”

    “계엄군, 특수조직 꾸려 시민들 총격 유도”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계엄군의 발포(5월 21일) 직전 광주를 방문해 시민군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전직 미 정보요원의 증언이 나왔다. 또 계엄군은 ‘편의대’라는 특수 조직을 꾸려 광주에서 시민들의 방화, 총격 등을 유도하거나 직접 자행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난 것처럼 계획적으로 연출한 뒤 전씨가 이를 빌미로 직접 사살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미군 정보요원 출신 김용장씨는 1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전두환이 1980년 5월 21일 K57(제1전투비행단) 비행장에 와서 정호용 특전사령관, 이재우 505보안대장 등 모두 4명이 회의한 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또 “당시 회의에서 사살 명령이 전달됐다는 게 제 합리적 추정”이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당시 미 육군 방첩부대인 501 정보여단 광주파견대 소속이었다. 김씨는 또 “편의대라고 불리는 사복 군인 30~40명이 (1980년) 5월 20일 수송기를 타고 광주 비행장으로 왔다”면서 “비행기 격납고에 이들이 주둔 중이라는 첩보를 듣고 제가 직접 찾아가 눈으로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는 편의대의 임무에 대해 “(북한특수군이 저질렀다고 일각에서 주장하는) 방화와 총격, 장갑차·군 수송차량 탈취는 일반 시민이 했다고 보기 어려운 매우 극렬한 행위인데 남한 특수군 격인 편의대가 일반 시민들을 유도하거나 직접 벌인 소행이라고 추정한다”고 주장했다.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전두환, 계엄군 발포 직전 헬기 타고 광주 왔다…발포 명령했을 것”(종합)

    “전두환, 계엄군 발포 직전 헬기 타고 광주 왔다…발포 명령했을 것”(종합)

    전두환씨가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발포(1980년 5월 21일) 직전 광주를 방문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주한미군 정보요원 출신 김용장씨는 13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980년 5월 21일 낮 12시를 전후로 K57(제1전투비행단·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 소재) 비행장에 왔다. 이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며 이를 상부에 보고했다”고 밝혔다. 5·18 민주화운동 때 금남로에서 발포가 시작된 것은 5월 21일 오후 1시쯤이다. ●“전두환, 발포 직전 헬기 타고 광주 간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 김용장씨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당시 헬기를 타고 왔으며, 오자마자 K-57 비행단장실에서 회의를 했다. 회의 참석자는 정호용 특전사령관, 이재우 505보안대장과 불상자 1명 등 4명가량이었다”고 덧붙였다. 김용장씨는 사견임을 전제로 “전두환의 방문 목적은 발포 명령, 심하게 얘기하면 사살 명령이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회의에서 사살 명령이 전달됐다고 하는 것이 제 합리적인 추정”이라면서 “헬기를 타고 왔기 때문에 비행계획서를 파기하지 않았다면 자료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지난 4월 한겨레신문은 육군본부 작전교육참모부의 ‘작전상황일지’의 ‘80년 5월 21일 항공기 지원’ 내역을 입수, 당시 특전사령관 외 2명이 오전 8시부터 10시 20분 기동용 헬기 UH-1H를 이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김용장씨는 “발포 명령과 사살 명령은 완전히 다르다. 발포는 상대방이 총격을 가했을 때 방어 차원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전두환씨 측 인사는 “광주에 가신 적이 없다. 무슨 투명인간도 아니고. (광주에) 가셨으면 본 사람이 있을 거 아니에요? (김용장씨 주장은) 뭐라고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밝혔다고 한겨레는 전했다.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도 “난 광주사태 때 광주에서 보안사령관을 만난 일이 없다. 그런데 왜 지금 와서 그런 엉터리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런 주장은 다 거짓말”이라고 부인한 바 있다. 김용장씨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제1전투비행단에서 주한미군 501여단에서 근무한 유일한 한국인 정보요원이다. 그는 5·18 때 광주에 머물면서 보고서 40건을 작성해 미 국방부에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김용장씨는 지난 3월 14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980년 5월 21일 점심쯤에 헬기를 타고 광주에 왔다. 그가 다녀간 뒤 광주에서 발포 명령이 내려졌다”고 주장했다.당시 인터뷰에서 ‘전두환씨 측은 1980년 5월 21일 서울 용산에서 국방부 회의에 참석 중이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질문에 “그 기록을 믿지 않는다. (전두환씨가) 광주에 왔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걸 본 사람들이 있고, 나는 정보원으로부터 그 사실을 전달받았다”고 답했다. JTBC는 1980년 5월 21일 전후 전두환씨가 참석했던 회의나 모임, 행사 등에는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는데 유독 당일 용산 국방부 회의에만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 의문스럽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북한군 침투설은 허위 날조…남한 특수군이 시민 교란” 김용장씨는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 등이 제기하는 북한군 침투설에 대해 “전두환이 허위 날조한 것”이라고 일축했다. 김용장씨는 “600명의 북한 특수군이 광주에 왔다는 주장은 미국 정보망이 완전히 뚫렸다는 얘기인데, 당시 한반도에는 2대의 위성이 북한과 광주를 집중 정찰하고 있었다”면서 “북한에서 600명이 미국의 첨단 감시망을 피해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북한군 600명이 침투하려면 잠수정이 약 30척 필요한데, 당시 북한은 그 정도 규모의 잠수정을 보유하지 않았다고 그는 강조했다. 김용장씨는 또 “시민 행세를 하던 사복 군인들이 실제로 존재했다. 제가 첩보를 입수하고 찾아가 눈으로 확인한 후 30∼40명가량으로 보고했다”면서 “나이는 20∼30대 젊은이들이었고 짧은 머리에 일부는 가발을 썼다.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거지처럼 넝마를 걸친 사람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편의대’라 불리는 이른바 남한 특수군 수백명이 교대로 수십명씩 광주에 주둔하면서 시민들을 교란했다는 것이 김용장씨의 증언의 요지다.그는 “이들을 광주로 보낸 것은 전두환의 보안사령부였다”면서 “북한 특수군이 했다는 방화, 총격, 장갑차 등의 탈취는 일반 시민이 했다고 보기 어려운 극렬 행위인데, 저는 감히 ‘남한 특수군’이라 부르는 이들이 선봉에서 시민을 유도하거나 직접 벌인 소행이라 추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 시민을 다 죽이려 한다는 등’의 유언비어 유포 역시 이들이 시민으로 위장해 벌인 공작일 것”이라며 “시민을 폭도로 만들고 강경 진압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 보안사가 고도의 공작을 벌인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제가 그 당시에 쓴 보고서 40건 가운데 5건이 미 백악관으로 보내졌고,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3건을 직접 읽었다”면서 “시신 소각, 헬기 사격, 광주교도소 습격, 공수부대원들에 의한 성폭행 등이 제 첩보로 40건 속에 들어 있었다”고 언급했다. ●“시신 태운 재 날아들어 인근 장독대 못 열었다” 증언도 그는 이 중 시신 소각에 대해 “가매장한 시신을 발굴해 광주통합병원에 가서 소각했다”면서 “최근 신문을 보면 시신 9구가 김해공항으로 수송됐다고 하는데, 제가 추론하기로는 틀림없이 바다에 던져 수장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각된 시신 수와 관련, “하루 20구씩 10일 동안 총 200구를 소각하지 않않나 추측한다. 증거는 없다. 최대로 했다면 한 200구 정도 소각했을 것”이라면서 “그래도 그 숫자가 터무니 없이 적은 만큼 어디론가 다른 지역으로 수송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계엄군의 헬기 사격에 대해선 “5월 21일 낮에 UH1H 소형 헬기에서 M60으로 사격했다고 보고했다. 그 위치는 도청 주변이었다”면서 “5월 27일 광주천 상공에서 위협 사격했다고도 보고했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5·18 민주화운동 때 505보안부대 수사관으로 근무했다가 1988년 광주청문회에서 양심선언을 한 허장환씨도 증언자로 함께 나섰다. 허장환씨는 이어진 증언에서 “보안사가 광주를 평정하고 제일 급박하게 한 일이 자행한 범죄를 숨기기 위한 기구를 만드는 것이었다”며 “그 기구가 511 분석대책반, 나중에 511 연구회로 탈바꿈했다”고 밝혔다. 허장환씨는 또 전일빌딩 헬기사격의 진실과 관련, “(시민군이 있는) 도청을 은밀하게 진압하러 가는 과정에서 건물에 저격병이 있다는 첩보를 듣고, 헬기로 그 저격병을 저격하는 작전을 구상했다”면서 “‘호버링 스탠스’(헬기가 한 자리에 멈춰 비행하는 것)해서 사격했다”고 증언했다. 허장환씨는 김용장씨가 앞서 증언한 전두환씨의 사살명령에 대해 “발포는 초병한테만 해당되는 말이다. 전두환씨는 절대 발포 명령권자가 아니라 사격 명령권자였다”고 말했다. 그는 “그 사격을 제가 직접 목도했다. ‘앉아쏴 자세’에서의 사격은 절대 자위적인 것이 아니었다”라며 “전두환이 사살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 강조했다. 희생자 시신 소각에 대해선 “당시 공수부대는 시신 가매장 위치를 좌표로 표시해 보안사에 면밀히 보고했고, 이를 재발굴해 간첩이 있는지 가려내려 전부 지문을 채취했다”면서 “이후 시신을 다시 묻을 수 없으니 통합병원에서 소각했다”고 말했다. 허장환씨는 “시신을 태우니 검은 재가 날아와 주변 인가에서 장독을 못 열었다. 시신을 태우다 태우다 용량이 너무 오버되니까 김해공항으로 빼서 해양 투기해버린 것”이라면서 “청소부를 동원해 소각한 유골을 모처에 매장도 하고, 보안 유지를 위해 청소부들에게 급부도 제공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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