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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프트 쿠데타’… 방콕은 폭풍전야

    ‘소프트 쿠데타’… 방콕은 폭풍전야

    “쿠데타가 아니니 국민은 당황할 필요가 없다.” 태국의 육군 참모총장 쁘라윳 짠오차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군은 정국 혼란을 정리할 권한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밝힌 근거는 1914년에 제정된 법으로 사문화된 것이다. 1932년 입헌군주제 실시 이후 18차례나 쿠데타를 일으켰던 군부가 100년 묵은 법을 들이밀며 또다시 정치 전면에 나섰다. 이런 가운데 과도정부 측이 8월 3일 총선 실시를 요구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군부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정부의 치안유지담당 기관과 방송국을 장악했다. 애초부터 군부 쿠데타를 원했던 옐로셔츠(반정부시위대)는 물론 과도정부 유지 및 총선을 통한 새 정부 구성을 요구해 온 레드셔츠(친정부시위대)도 군부의 위압에 눌려 예정된 시위를 취소했다. 레드셔츠 지도자는 “저항하지 마라. 아직 정부는 붕괴되지 않았다”고 시위대에 말했다. 니와툼롱 분송파이산 과도정부 총리는 속수무책으로 군의 일방적인 계엄령 선포를 지켜봐야 했다. 방콕 시내는 오히려 더 평온해졌다. 시민들은 “당분간 시위로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며 안도했다. 뉴욕타임스 등 주요 외신은 ‘소프트 쿠데타’, ‘절반의 쿠데타’라고 분석했다. 쿠데타든 아니든 태국의 운명은 또다시 군부의 손에 들어가게 됐다. 동남아 전문가 베라팟 파라왕은 뉴욕타임스에 “군부가 선거를 치를 환경을 만드느냐 아니면 과도정부를 무너뜨리느냐에 따라 태국의 앞날이 바뀔 것”이라면서도 “후자를 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군이 선거를 통한 정부 구성을 무시한다면 태국의 민주주의는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태국은 지난 7일에도 헌법재판소가 잉락 친나왓 총리를 해임하면서 ‘사법 쿠데타’를 경험했다. 잉락의 오빠 탁신 친나왓 전 총리는 8년 전 쿠데타로 실각했다. 군과 사법부가 투표로 선출된 총리를 번갈아 끌어내리면서 삼권분립은 뿌리부터 흔들렸다. 보수기득권층의 지지를 받는 야권은 국민 대다수인 농민의 지지를 받는 친탁신 세력을 선거로 누를 가능성이 없자 상원에서 투표 없이 총리를 지명해야 한다고 요구해 왔다. 야권이 다수인 상원이 재판관을 승인하는 헌법재판소와 엘리트로 이뤄진 법원, 군부, 대기업, 푸미폰 국왕까지 야당에 동조하고 있다. 군은 당분간 양쪽 시위대를 억누르면서 두 진영의 타협을 중재하는 모습을 보이겠지만, 결국에는 자신들의 뜻에 따라 정계개편을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 군부에 우호적인 인물을 새 총리로 임명하면 이번 계엄령은 쿠데타의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군부는 2006년 탁신 정권을 무너뜨린 이후 헌재를 해산한 뒤 재판관 9명 중 8명을 다시 임명했으며, 이들에게 총리·각료·국회의원 탄핵심판권, 위헌정당해산심판 권한을 줘 언제든 선거를 통한 정권을 끌어내릴 수 있도록 했다. 또 국가반부패위원회를 설립해 국가기관을 마음대로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 1946년 창당한 태국 최고(最古) 정당 민주당은 과거 군사정권에 맞섰으나 탁신 이후 집권이 불가능해지자 군부에 기대어 권력을 얻는 신세가 됐다. 이창구 기자 window2@seoul.co.kr
  •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대구시장] 권영진 vs 김부겸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대구시장] 권영진 vs 김부겸

    ■ ‘텃밭 혁신’ 非朴의 실험 권영진 새누리당 대구시장 후보는 TK(대구·경북) 출신이긴 하지만 비박근혜계로 통한다. 그런 그가 이번에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에서 쟁쟁한 친박계 후보들을 제치고 후보로 선출된 것은 그 자체로 ‘반란’이라 할 만하다. 그는 이번 경선에서 ‘변화의 리더십’을 앞세웠고, 이에 변화를 바라는 민심이 호응하면서 파란을 일으킨 것이다. 권 후보는 1962년 경북 안동에서도 40여리 떨어진 남선면 원림리 양지마을에서 태어났다. 50~60가구가 모인 두메산골에서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닌 후 안동 시내로 전학하고, 고등학교는 대구로 진학했다. 어린 시절부터 낯선 유학생활을 겪으면서 자연스레 배짱을 몸에 익혔다. 그는 “촌놈 자존심을 지키려고 친구들과 싸움도 많이 하고 아버지가 학교에 불려오기도 했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고려대 영문과에 입학한 1980년은 ‘서울의 봄’이 한창이었고 캠퍼스는 민주화 열기로 뜨거웠다. 그 역시 공부보다는 길거리 시위로 최루탄 연기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친구들이 사회·노동운동에 투신할 무렵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 총학생회 초대 학생회장에 당선되면서 전국 대학원 학생회 설립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좌파성향으로 흐르는 학생운동에 염증을 느끼게 됐고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공직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쪽으로 가치관이 바뀌게 됐다. 그는 1990년 통일부 사무관 공채로 입사해 1992년 남북 총리회담의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제정 등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했다. 정치권에는 1999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 보좌역으로 입문했다. 그는 원외 신분이었지만 남경필·김영선 의원 등 초선 의원들과 함께 한나라당 소장파 그룹 ‘미래연대’를 결성해 초대 사무총장을 맡는 등 리더십을 보였다. 당시 그가 영입했던 이들 중에 원희룡, 오세훈 등 훗날 쟁쟁한 정치인으로 성장한 이들도 끼어 있었다. 이회창 대통령 후보 보좌역으로 임했던 2002년 대선에서 패배의 고배를 든 뒤 2004년 17대 총선에 출마했지만 탄핵 역풍이 매서웠다. 그는 서울 노원을에서 선전했지만 1.9% 포인트 차이로 석패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그는 도약의 계기를 맞는다.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비서실장으로 선거를 승리로 이끈 이후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변신한 것이다. 사석에서 오 시장이 “정말 비싸게 모셔온 부시장”이라고 농담할 정도로 그는 부시장직을 끝까지 고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부시장직을 맡아서는 자원회수시설 광역화, 용산부지의 자연생태공원 보존 등의 실적을 남겼다. 18대 총선에서 노원을에서 당선된 뒤 초선들의 쇄신 모임인 ‘민본 21’ 간사를 지냈다. 비박계였지만 합리적 성향으로 한나라당 재창당 위기 때 박근혜 대통령과 쇄신파 간 만남을 주도하며 존재감을 각인시킨다. 19대 총선 때 당시 민주당 우원식 후보와의 리턴매치에서 패배했지만 기획력을 인정받아 2012년 대선 때 여의도연구소 상근 부소장에 임명된다. 이후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기획조정단장 등을 맡으며 박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 지난해 암중모색 시기를 거친 그는 자신에겐 정치적 불모지나 다름없던 대구에서 시장 출마를 선언한 이후 100여일 만에 후보 자리를 꿰차는 저력을 보였다. 권 후보는 자신의 경선 당선에 대해 “변화를 바라는 대구 시민들의 열망이 분출된 결과”라면서 “대구 시민·당원들이 친박·비박을 놓고 선택한 게 아니라 30년 넘게 발전이 지체된 대구를 바꿀 능력을 누가 갖고 있는지를 따져본 결과”라고 주장한다. 비주류인 그의 정치 실험이 성공할지 이번 선거에 관심이 집중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불모지 꽃’ 두 번째 도전 김부겸 새정치민주연합 대구시장 후보는 지난 19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갑에 출마해 낙선했지만 40%가 넘는 득표율로 기염을 토했다. 야당의 불모지인 대구에서 거둔 의미 있는 성과였다. 그에게 이번 대구시장 선거는 지역주의의 벽을 깨기 위한 두 번째 ‘겁없는’ 도전인 셈이다. 김 후보는 1956년 경북 상주군 상주읍 오대리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5대 독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성화에 고교 2학년 때 결혼하고 이듬해 김 후보를 낳았다. 그는 대구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뒤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그의 대학 시절 대부분은 유신 반대 시위, 이에 따른 두 번의 실형과 제적으로 점철됐다. 입학 이듬해인 1977년 유신 반대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제적을 당했고, 1978년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아 실형을 살았다. 1980년 ‘서울의 봄’으로 복학했으나 다시 학생운동 지도부로 활동하다가 5·17 계엄령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또다시 제적됐다. 그가 ‘아크로폴리스의 사자후’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때쯤이다. 신군부와 학생 간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서울대 학내는 재학생과 복학생이 온건파와 강경파 등으로 나뉘어 치열한 노선투쟁을 벌였다. 그는 당시 복학생 대표로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모인 1만여명의 학생을 향해 “민주화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국과 민족의 앞날을 우리 각자가 결단해 열어나가자”는 내용의 연설을 토해냈다. 그의 연설은 학생들이 상호 불신을 털어내고 일체감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명연설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2년 그는 민주화운동 동지이자 친구인 이용재 목사의 동생 이유미씨와 결혼했고, 딸만 셋을 낳으면서 ‘딸 바보’ 아빠가 됐다. 그의 둘째 딸이 탤런트 윤세인(본명 김지수)이다. 김 후보는 1988년 ‘반(反)지역주의 개혁정당’을 표방한 한겨레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현실정치에 발을 들였다. 이후 1991년 민주당에 들어갔지만 민주당은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으로 분당되면서 ‘꼬마 민주당’으로 세가 약화됐다. 김 후보는 꼬마 민주당에 남아 노무현 전 대통령 등과 함께 3김 청산, 지역주의 극복 등을 외치며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결성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들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DJP(김대중·김종필) 연합’ 참여와 한나라당 합류라는 두 개의 노선으로 갈라섰다. 김 후보는 한나라당 행을 택했고 고(故) 제정구 당시 의원의 지역구인 경기도 군포를 물려받아 16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김 후보는 이후 한나라당에서 소장 개혁파로 활동하며 국가보안법 폐지와 대북송금특검법안 반대 등을 주장, 당내 강경보수파와 갈등을 빚었다. 그는 결국 2003년 김영춘 전 의원 등과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했다. ‘독수리 5형제’라 불린 이들의 합류로 전국 정당을 표방한 열린우리당은 창당의 명분을 얻었지만 그에게는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됐다. 경기 군포에서 내리 3선을 한 김 후보가 혹독한 도전을 다시 시작한 것은 19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아성인 대구에 출사표를 던지면서다. 김 후보는 당시 “세 개의 벽인 지역주의, 기득권, 과거의 벽을 뛰어넘겠다”면서 민주통합당 간판으로 이한구 새누리당 의원과 맞붙었지만 끝내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거둔 40.4%의 득표율은 새누리당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김 후보는 지난 3월 대구시장 예비후보 등록을 마친 뒤 “대구에서는 야당 시장의 당선이야말로 대박이 될 것”이라면서 “대구 출신 대통령에 야당 대구시장이라는 하늘이 내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결기를 드러냈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태국 계엄령, 군부 “쿠데타 아니다” 주장…정치 위기 심화 분석도 [종합]

    태국 계엄령, 군부 “쿠데타 아니다” 주장…정치 위기 심화 분석도 [종합] 태국 반정부 시위 사태가 장기화 되고 있는 가운데 군부가 20일 계엄령을 선포했다. 태국 군부는 이날 새벽 군 TV 방송을 통해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군은 하지만 계엄령 선포가 “쿠데타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군은 “국민은 당황할 필요가 없다”면서 “이번 조치는 국민을 안전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국민은 평소대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자체 방송국을 갖고 있는 군은 이날 방콕 시내 민간 방송국에 진입했다. 이번 계엄령 선포로 군은 전국의 치안질서유지 권한을 갖게 됐다. 군의 계엄령 선포가 니와툼롱 분송파이산 과도총리 대행이 이끄는 내각의 승인을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번 계엄령 선포가 현 정부를 퇴진시키기 위한 ‘준 쿠데타’일 경우 정치 위기가 더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앞서 프라윳 찬-오차 육군 참모총장은 15일 반정부 시위에 대한 총격으로 3명이 숨지고 20여 명이 다치자 이례적으로 성명을 발표해 “폭력이 계속되면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군이 나설 수도 있다”며 계엄령 선포 가능성을 시사했다. 태국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반정부 시위가 6개월 넘게 이어지며 정국 불안이 지속하는 가운데 7일 헌법재판소의 권력남용 결정으로 잉락 친나왓 전 총리가 해임됐다. 반정부 시위대는 중립적인 인물을 선정해 새 과도 총리로 임명하겠다며 오는 26일까지 예정으로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친정부 진영은 선거로 구성된 현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 총리를 임명하는 것은 위험이자 반란에 해당한다며, 반정부 진영이 새 총리 임명과 새 과도 정부 구성을 강행하면 대규모 맞시위를 벌이겠다고 경고 중이다. 태국은 2월 실시한 조기 총선이 무효가 돼 오는 7월 재총선을 실시키로 잠정 결정됐으나, 반정부 진영이 새 과도정부 구성을 주장하며 선거에 반대해 재총선 시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 반정부 시위 사태가 발생한 이후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 시위대에 대한 괴한들의 공격 등으로 지금까지 28명이 숨지고 800명 가까이 다쳤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태국 계엄령 “여행 예약했는데 어쩌나” 현재 상황은?

    태국 계엄령 “여행 예약했는데 어쩌나” 현재 상황은? 정부 시위 사태로 정국 위기가 깊어지는 태국에서 군부가 20일 계엄령을 선포했다. 군부는 이날 새벽 군 TV 방송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며 이는 “쿠데타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군은 “국민은 당황할 필요가 없다”며 “이번 조치는 국민을 안전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국민은 평소대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프라윳 찬-오차 육군 참모총장은 평화질서관리센터(CAPO) 등 정부 치안유지담당 기관의 기능 정지를 선언했으며, “육군, 공군, 해군의 모든 장병은 원 근무지로 복귀하라”고 밝혔다. 자체 방송국을 보유한 군은 이날 방콕 내 몇 개 민간 방송국에 진입했다. 이로써 군은 전국의 치안질서유지 권한을 갖게 됐다. 군은 계엄령 선포 권한을 갖고 있으며, 이번 계엄령 선포를 위해 니와툼롱 분송파이산 과도총리 대행 정부와 사전에 협의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반(反)-친(親) 정부 시위대는 이날 대대적인 시위를 벌일 예정이었으나, 계엄령 선포 직후 거리 행진 시위를 바로 취소했다. 이번 계엄령 선포가 현 정부를 퇴진시키기 위한 쿠데타에 따른 것이라면 친정부 진영으로부터 큰 반발을 사고, 정치 위기가 더 깊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주요 정치 세력 중 하나인 군은 1932년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18차례 쿠데타를 일으킨 전력이 있다. 그러나 이번 계엄령은 반(反)-친(親) 정부 시위에 따른 유혈 사태 방지와 치안질서 유지를 위해 선포됐을 가능성도 크다. 친정부 시위대인 ‘레드 셔츠’ 지도자는 “계엄령 선포로 현 정부와 헌정은 여전히 존속하며, 이는 쿠데타를 반대해온 우리 입장과 배치되지 않는다”며 계엄령 선포에 대해 신중한 반응을 나타냈다. 이에 앞서 프라윳 총장은 15일 반정부 시위에 대한 총격으로 3명이 숨지고 20여 명이 다치자 이례적으로 성명을 발표해 “폭력이 계속되면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군이 나설 수도 있다”며 계엄령 선포 가능성을 시사했다. 태국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반정부 시위가 6개월 넘게 이어지며 정국 불안이 지속하는 가운데 7일 헌법재판소의 권력남용 결정으로 잉락 친나왓 전 총리가 해임됐다. 이후 반정부 시위대는 중립적인 인물을 선정해 새 과도 총리로 임명하겠다며, 오는 26일까지 예정으로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친정부 진영은 선거로 구성된 현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 총리를 임명하는 것은 위헌이자 반란에 해당한다며, 반정부 진영이 새 총리 임명과 새 과도 정부 구성을 강행하면 대규모 맞시위를 벌이겠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태국은 2월 실시한 조기 총선이 무효가 돼 오는 7월 재총선을 실시키로 잠정 결정됐으나, 반정부 진영이 새 과도정부 구성을 주장하며 선거에 반대해 재총선 시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 반정부 시위 사태가 발생한 이후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 시위대에 대한 괴한들의 공격 등으로 지금까지 28명이 숨지고 800명 가까이 다쳤다. 정부는 여행객과 재외동포의 안전을 위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급박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방문 자제를 의미하는 여행경보 상향 조정이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네티즌들은 “태국 계엄령, 여행 준비했는데 어떻게 하나”, “태국 계엄령, 무섭다”, “태국 계엄령 앞으로가 더 문제네”, “태국 계엄령, 혼란이 언제 가라앉을 지”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태국 계엄령 선포…군부 “쿠데타 아니다” 강조 [속보]

    태국 군부 계엄령 선포… “쿠데타 아니다” 강조 태국 군부가 20일 계엄령을 선포했다. 군부는 이날 TV방송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행동 나섰다”면서 “쿠데타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태국은 반정부 시위가 6개월 넘게 이어지며 불안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잉락 친나왓 총리가 실각했다. 반정부 시위로 지금까지 28명이 숨지고 800명 가까이 다쳤다. 군은 최근 시위대에 대한 총격으로 사망자가 추가 발생하자 상황이 악화하면 무력 개입을 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태국 계엄령, 군부 “반란 아니다” 장병 원대복귀 지시

    태국 계엄령, 군부 “반란 아니다” 장병 원대복귀 지시 정부 시위 사태로 정국 위기가 깊어지는 태국에서 군부가 20일 계엄령을 선포했다. 군부는 이날 새벽 군 TV 방송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며 이는 “쿠데타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군은 “국민은 당황할 필요가 없다”며 “이번 조치는 국민을 안전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국민은 평소대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프라윳 찬-오차 육군 참모총장은 평화질서관리센터(CAPO) 등 정부 치안유지담당 기관의 기능 정지를 선언했으며, “육군, 공군, 해군의 모든 장병은 원 근무지로 복귀하라”고 밝혔다. 자체 방송국을 보유한 군은 이날 방콕 내 몇 개 민간 방송국에 진입했다. 이로써 군은 전국의 치안질서유지 권한을 갖게 됐다. 군은 계엄령 선포 권한을 갖고 있으며, 이번 계엄령 선포를 위해 니와툼롱 분송파이산 과도총리 대행 정부와 사전에 협의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반(反)-친(親) 정부 시위대는 이날 대대적인 시위를 벌일 예정이었으나, 계엄령 선포 직후 거리 행진 시위를 바로 취소했다. 이번 계엄령 선포가 현 정부를 퇴진시키기 위한 쿠데타에 따른 것이라면 친정부 진영으로부터 큰 반발을 사고, 정치 위기가 더 깊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주요 정치 세력 중 하나인 군은 1932년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18차례 쿠데타를 일으킨 전력이 있다. 그러나 이번 계엄령은 반(反)-친(親) 정부 시위에 따른 유혈 사태 방지와 치안질서 유지를 위해 선포됐을 가능성도 크다. 친정부 시위대인 ‘레드 셔츠’ 지도자는 “계엄령 선포로 현 정부와 헌정은 여전히 존속하며, 이는 쿠데타를 반대해온 우리 입장과 배치되지 않는다”며 계엄령 선포에 대해 신중한 반응을 나타냈다. 이에 앞서 프라윳 총장은 15일 반정부 시위에 대한 총격으로 3명이 숨지고 20여 명이 다치자 이례적으로 성명을 발표해 “폭력이 계속되면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군이 나설 수도 있다”며 계엄령 선포 가능성을 시사했다. 태국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반정부 시위가 6개월 넘게 이어지며 정국 불안이 지속하는 가운데 7일 헌법재판소의 권력남용 결정으로 잉락 친나왓 전 총리가 해임됐다. 이후 반정부 시위대는 중립적인 인물을 선정해 새 과도 총리로 임명하겠다며, 오는 26일까지 예정으로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친정부 진영은 선거로 구성된 현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 총리를 임명하는 것은 위헌이자 반란에 해당한다며, 반정부 진영이 새 총리 임명과 새 과도 정부 구성을 강행하면 대규모 맞시위를 벌이겠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태국은 2월 실시한 조기 총선이 무효가 돼 오는 7월 재총선을 실시키로 잠정 결정됐으나, 반정부 진영이 새 과도정부 구성을 주장하며 선거에 반대해 재총선 시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 반정부 시위 사태가 발생한 이후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 시위대에 대한 괴한들의 공격 등으로 지금까지 28명이 숨지고 800명 가까이 다쳤다. 정부는 여행객과 재외동포의 안전을 위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급박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방문 자제를 의미하는 여행경보 상향 조정이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네티즌들은 “태국 계엄령, 군대가 진 치고 있는데 무섭네”, “태국 계엄령, 앞으로 여행 못 가는 것 아닌가”, “태국 계엄령, 제발 빨리 해결돼야 하는데”, “태국 계엄령, 국민들 정말 불안할 듯”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태국 계엄령 선포 “쿠테타 아니다” 여행 경보 상향 조정?

    태국 계엄령 선포 “쿠테타 아니다” 여행 경보 상향 조정? 정부 시위 사태로 정국 위기가 깊어지는 태국에서 군부가 20일 계엄령을 선포했다. 군부는 이날 새벽 군 TV 방송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며 이는 “쿠데타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군은 “국민은 당황할 필요가 없다”며 “이번 조치는 국민을 안전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국민은 평소대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프라윳 찬-오차 육군 참모총장은 평화질서관리센터(CAPO) 등 정부 치안유지담당 기관의 기능 정지를 선언했으며, “육군, 공군, 해군의 모든 장병은 원 근무지로 복귀하라”고 밝혔다. 자체 방송국을 보유한 군은 이날 방콕 내 몇 개 민간 방송국에 진입했다. 이로써 군은 전국의 치안질서유지 권한을 갖게 됐다. 군은 계엄령 선포 권한을 갖고 있으며, 이번 계엄령 선포를 위해 니와툼롱 분송파이산 과도총리 대행 정부와 사전에 협의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반(反)-친(親) 정부 시위대는 이날 대대적인 시위를 벌일 예정이었으나, 계엄령 선포 직후 거리 행진 시위를 바로 취소했다. 이번 계엄령 선포가 현 정부를 퇴진시키기 위한 쿠데타에 따른 것이라면 친정부 진영으로부터 큰 반발을 사고, 정치 위기가 더 깊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주요 정치 세력 중 하나인 군은 1932년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18차례 쿠데타를 일으킨 전력이 있다. 그러나 이번 계엄령은 반(反)-친(親) 정부 시위에 따른 유혈 사태 방지와 치안질서 유지를 위해 선포됐을 가능성도 크다. 친정부 시위대인 ‘레드 셔츠’ 지도자는 “계엄령 선포로 현 정부와 헌정은 여전히 존속하며, 이는 쿠데타를 반대해온 우리 입장과 배치되지 않는다”며 계엄령 선포에 대해 신중한 반응을 나타냈다. 이에 앞서 프라윳 총장은 15일 반정부 시위에 대한 총격으로 3명이 숨지고 20여 명이 다치자 이례적으로 성명을 발표해 “폭력이 계속되면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군이 나설 수도 있다”며 계엄령 선포 가능성을 시사했다. 태국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반정부 시위가 6개월 넘게 이어지며 정국 불안이 지속하는 가운데 7일 헌법재판소의 권력남용 결정으로 잉락 친나왓 전 총리가 해임됐다. 이후 반정부 시위대는 중립적인 인물을 선정해 새 과도 총리로 임명하겠다며, 오는 26일까지 예정으로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친정부 진영은 선거로 구성된 현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 총리를 임명하는 것은 위헌이자 반란에 해당한다며, 반정부 진영이 새 총리 임명과 새 과도 정부 구성을 강행하면 대규모 맞시위를 벌이겠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태국은 2월 실시한 조기 총선이 무효가 돼 오는 7월 재총선을 실시키로 잠정 결정됐으나, 반정부 진영이 새 과도정부 구성을 주장하며 선거에 반대해 재총선 시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 반정부 시위 사태가 발생한 이후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 시위대에 대한 괴한들의 공격 등으로 지금까지 28명이 숨지고 800명 가까이 다쳤다. 정부는 여행객과 재외동포의 안전을 위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급박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방문 자제를 의미하는 여행경보 상향 조정이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네티즌들은 “태국 계엄령 선포, 여행 가야 하는데 걱정이네”, “태국 계엄령 선포,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태국 계엄령 선포, 혼란이 언제 가라앉을 지 모르겠네”, “태국 계엄령 선포, 국민들 생업이 제대로 되겠나”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태국 계엄령 선포…軍 “쿠데타 아니다” 연신 강조

    ‘태국 계엄령’ 태국 계엄령이 선포됐다. 태국 군부는 20일 군 TV 방송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행동 나섰다”며 이는 “쿠데타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태국에서는 반정부 시위가 6개월 넘게 이어지며 정국 불안이 지속하는 가운데 최근 잉락 친나왓 총리가 실각했다. 반정부 시위로 지금까지 28명이 숨지고 800명 가까이 다쳤다. 군은 최근 시위대에 대한 총격으로 사망자가 추가 발생하자 상황이 악화하면 무력 개입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태국 계엄령 선포, 군부 “쿠데타 아니다” 강조…정국 불안 심화에 결국 계엄령까지

    ‘태국 계엄령’ 반정부 시위 사태로 정국 위기가 깊어지는 태국 계엄령이 내려졌다. 군부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날 새벽 군 TV 방송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며 이는 “쿠데타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군은 “국민은 당황할 필요가 없다”며 “이번 조치는 국민을 안전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국민은 평소대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자체 방송국을 갖고 있는 군은 이날 방콕 내 몇개 민간 방송국에 진입했다. 이로써 군은 전국의 치안질서유지 권한을 갖게 됐다. 군의 계엄령 선포가 니와툼롱 분송파이산 과도총리 대행이 이끄는 내각의 승인을 받았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이번 계엄령 선포가 현 정부를 퇴진시키기 위한 쿠데타에 준한 것이라면 친정부 진영으로부터 큰 반발을 초래하고, 정치 위기가 더 깊어질 것으로 우려된다. 주요 정치 세력 중 하나인 군은 1932년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18차례 쿠데타를 일으킨 전력이 있다. 그러나 이번 계엄령은 반(反)-친(親) 정부 시위에 따른 유혈 사태 방지와 치안질서 유지를 위해 선포됐을 가능성도 크다. 프라윳 찬-오차 육군 참모총장은 15일 반정부 시위에 대한 총격으로 3명이 숨지고 20여 명이 다치자 이례적으로 성명을 발표해 “폭력이 계속되면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군이 나설 수도 있다”며 계엄령 선포 가능성을 시사했다. 태국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반정부 시위가 6개월 넘게 이어지며 정국 불안이 지속하는 가운데 7일 헌법재판소의 권력남용 결정으로 잉락 친나왓 전 총리가 해임됐다. 이후 반정부 시위대는 중립적인 인물을 선정해 새 과도 총리로 임명하겠다며 오는 26일까지 예정으로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친정부 진영은 선거로 구성된 현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 총리를 임명하는 것은 위험이자 반란에 해당한다며 반정부 진영이 새 총리 임명과 새 과도 정부 구성을 강행하면 대규모 맞시위를 벌이겠다고 경고 중이다. 태국은 2월 실시한 조기 총선이 무효가 돼 오는 7월 재총선을 실시키로 잠정 결정됐으나 반정부 진영이 새 과도정부 구성을 주장하며 선거에 반대해 재총선 시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 반정부 시위 사태가 발생한 이후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 시위대에 대한 괴한들의 공격 등으로 지금까지 28명이 숨지고 800명 가까이 다쳤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韓·日 언제나 등거리 유지… 나쁜 관계라 생각지 않아

    韓·日 언제나 등거리 유지… 나쁜 관계라 생각지 않아

    고려신사의 60대손으로 현재 구지(宮司·신사의 대표)를 맡고 있는 고마 후미야스(47)는 59대 구지가 타계한 2007년부터 신사를 맡아 오고 있다. 다음은 고마 구지와의 일문일답 내용이다. →1300년 된 신사를 있게 한 고구려인 선조, 약광을 어떻게 생각하나. -내게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던 분이다.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대를 잇는 것은 반드시 아들이어야만 하는가. -우리 고마가(家)에서는 밖에서 사람을 받아들인 역사가 없다. 며느리는 별도지만 가계도를 보면 양자를 들인 기록도 없고 대를 이을 남자가 없는 경우도 없었다. →61대 구지가 될 아들은 있나. -14살 된 아들이 있다. →어떤 교육을 하나. -나도 그렇게 교육받았지만 고려신사의 역사나 가계에 대해서는 일상생활에서 가르친다. 고마가의 사적인 부분이 아닌 고려신사의 공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말보다 내가 매일 일을 하는 모습이라든가 신사에 오는 분들을 만난다든가 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스스로 느끼게끔 가르친다. 고마가가 계속 대를 잇는다는 이유로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고려신사에서 구지를 할 수 없다. →아들이 구지가 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가. -그런 일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웃음). 상상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들이) 61대 구지가 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한국에 언제 처음 가 봤나. -12살 때 아버지(59대)와 함께 갔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 때였는데 계엄령 시대 같은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3형제인데 아버지는 자식이 중학생이 되면 한국에 데리고 갔다. →지금 한·일 관계가 최악인데. -나는 일·한 관계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표면상으로는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고 그런 척하고 있지만 그런 관계가 될 수 없는 역사를 지녔다. 한국의 대통령과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한다면 분명히 일·한 관계가 좋아졌다고 하겠지만 정말로 사이가 좋아진 거냐 하면 그건 얘기가 다르다. 요컨대 일본과 한국은 언제나 등거리 관계를 유지하면서 과거도, 현재도 살아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관계가 특별히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1965년의 한일협정 이후라는 짧은 기간을 놓고 본다면 관계가 나쁘다고 느끼는 분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한반도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 1300년이란 역사를 염두에 두는가. -그런 느낌이 어쩔 수 없이 든다. 일본과 한국은 지리적으로 볼 때 불가분의 관계이고 영향을 서로 주고받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이 일본의 수산물이 필요하지 않다고 해서 그 관계가 단절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에 있어서 한국은 정말이지 가깝고도 먼 나라다. 한국을 잘 몰랐는데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일본인은 한국인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되고 잘 알게 됐다. 역으로 얘기하면 잘 알게 됐기 때문에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바람직한 점도, 좋아하는 점도, 싫어하는 점도 알게 됐다. →한국의 민단, 북한의 조총련이 1300주년 행사에 참가하고 싶다는데. -재일동포들이 1300주년을 함께 축하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잘 알고 있지만 각자의 정치적 주장을 하기엔 바람직한 무대가 아니라는 점을 그들에게 말했다. 글 사진 히다카(사이타마 현) 황성기 특파원 marry04@seoul.co.kr
  • 태국 반정부 시위 격화…전역에 ‘계엄령’ 선포

    태국 반정부 시위 격화…전역에 ‘계엄령’ 선포

    태국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일부 정부 청사를 점거하자 잉락 친나왓 태국 총리는 방콕 전역에 보안법을 발동했다. 26일 현지언론들에 따르면 잉락 총리는 25일 밤(현지시간) 긴급 각료회의를 연 뒤 반정부 시위와 관련해 방콕 전역과 인근 지역에 국내보안법(ISA)을 발동했다. 제1야당인 보수 민주당과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반대하는 진영이 주도하는 반정부 시위대가 25일 외무부, 재무부, 총리실 산하 공보부 등 정부 청사 3곳을 점거한 데 따른 것이다. ISA가 발동되면 경찰이 치안 유지를 위해 집회 및 시위 금지, 도로 봉쇄, 교통 통제, 통금 등을 실시할 수 있다. 방콕에서는 그동안 간헐적으로 계속된 야권의 반정부 시위로 인해 정부 건물이 밀집해 있는 중심가 3개 지역에 지난 8월부터 ISA가 발동됐었다. 잉락 총리는 ISA 확대 발동 이후 “정부는 법질서를 유지할 것이나 국민을 향해 무력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민주당 출신의 수텝 타웅수반 전 의원은 3개 정부 청사를 점거한 데 이어 26일에 정부 청사를 추가로 점거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는 잉락 총리 정부가 이미 마비돼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 퇴진을 요구하는 한편, 반정부 시위대를 중심으로 ‘국민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말했다. 타웅수반 전 의원은 “입헌군주제 아래 민주적인 국민 정부를 설립하겠다”고 주장했다. 방콕에서는 정부 및 여당이 탁신 전 총리의 사면으로 이어질 수 있는 포괄적 사면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이달 초부터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시위대는 잉락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으나 잉락 총리는 자신이 사퇴하지 않을 것이며, 의회도 해산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했다. 의회는 민주당이 제출한 잉락 총리 불신임안에 대해 26~27일 토의를 벌일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中 산시성 黨청사 옆 연쇄폭발…3중전회 앞두고 테러 초비상

    中 산시성 黨청사 옆 연쇄폭발…3중전회 앞두고 테러 초비상

    중국 시진핑(習近平) 체제의 10년 개혁 청사진을 제시할 정치 행사인 공산당 18기 3중전회(제18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를 앞두고 중국 내에서 테러로 보이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해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6일 중국 산시(山西)성 타이위안(太原)시에 위치한 산시성 공산당위원회 청사 인근 한 건물 입구에서 연쇄 폭발 사건이 발생했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지난달 28일 중국 심장부인 베이징 톈안먼(天安門)에서 차량 돌진 사건이 발생해 40여명의 사상자를 낸 지 불과 일주일여 만에 또다시 테러로 추정되는 폭발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현지 공안 당국은 이날 오전 7시 40분쯤 산시성 당위원회 청사 부근 건물에서 연속적으로 소형 폭발물이 터져 1명이 숨지고 8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이 중 1명은 위독하다. 공안 당국은 폭발 현장에서 쇠구슬과 쇠꼬챙이, 전자회로판 등이 발견됨에 따라 사제폭발물이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보고 테러 관련성 여부를 주시하고 있다고 통신은 전했다. 통신은 목격자의 말을 인용해 사고 당시 총 7차례가량 폭발음이 이어졌으며, 폭발 직후 현장에 4시간가량 계엄령이 이어졌다고 전했다. 차량 운행도 통제되면서 시민들이 걸어서 출근하는 광경도 펼쳐졌다. 특히 이번 폭발 사건은 톈안먼 차량 돌진 사건 이후 중국 당국이 주요 지역의 경비·보안태세를 대폭 강화한 가운데 터진 것이어서 충격을 더하고 있다. 3중전회가 열리는 오는 9~12일을 전후해 추가 테러 발생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계엄 치하 ‘무영장 체포’ 판결 엇갈려

    법원이 계엄령하에 이뤄진 ‘영장 없는 체포’의 불법 여부에 대해 엇갈린 판결을 해 상급심 판단이 주목된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3부(부장 박평균)는 이모(74)씨와 그의 가족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비상계엄이 전국에 확대된 1980년 6월 합동수사본부 수사관이 영장 없이 이씨를 불법 체포한 것과 가혹 행위로 인한 피해를 배상하라며 국가와 전두환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고 13일 밝혔다. 이씨는 광주에서 시민군과 계엄군이 대치하던 1980년 5월 23일 신군부 비판 유인물을 서울에 뿌리려 한 혐의로 체포돼 군법회의에 넘겨져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는 2010년 시행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재심을 청구, 지난해 5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씨는 이후 “영장 없이 불법으로 체포·구금되고 수사과정에서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며 민사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재판부는 “계엄포고 제10호에 의하면 포고령을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 또는 구속할 수 있었다”며 “영장 없이 체포된 점만으로 위법한 체포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가혹행위도 증거 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법원 민사합의48부(부장 여미숙)는 지난 7월 안중근 의사 사촌동생인 고 안경근 선생 유족이 낸 소송에서 “안 선생의 피의사실만으로는 영장 없는 체포·구금이 허용될 만한 군사상 필요가 없었다. 국가가 4억 30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5·18 당시 영장없는 체포 “전두환 죄 없다”

    5·18 당시 영장없는 체포 “전두환 죄 없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가 전국에서 자행한 ‘영장없는 체포’에 대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법적 책임이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3부(박평균 부장판사)는 이모(74)씨와 그의 가족이 “불법체포와 가혹행위로 인한 피해를 배상하라”며 국가와 전두환 전 대통령, 이학봉 당시 보안사령부 대공처장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고 13일 밝혔다. 이씨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비상계엄이 전국에 확대된 1980년 6월 합동수사본부 수사관에게 체포됐다. 수사관은 영장을 제시하기는커녕 왜 연행하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이씨는 광주에서 시민군과 계엄군이 대치하던 5월23일 신군부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서울에 뿌리려 한 혐의를 받았다. 그는 군법회의에 넘겨져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는 2010년 시행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재심을 청구했다. 광주지법 해남지원은 지난해 5월 “전두환 등의 헌정질서 파괴범죄 행위를 저지하거나 반대한 것으로서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씨는 무죄 판결을 근거로 이번에는 민사소송을 냈다. 그는 영장 없이 불법으로 체포·구금되고 수사과정에서 고문과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국가는 물론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도 “대한민국을 사실상 지배해 국가와 공동으로 불법행위를 했다”며 배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영장 없는 체포를 계엄령이 허용했기 때문에 불법행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가혹행위 주장 역시 “증거가 부족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계엄포고 제10호에 의하면 포고령을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 또는 구속할 수 있었다”며 “영장 없이 체포된 점만으로 위법한 체포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헌법상 개인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계엄령이 내려진 이상 영장제도를 무시했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다. 그러나 계엄령이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악용된 점을 감안해 정당성을 따져봐야 한다는 판례도 있다. 같은 법원 민사합의48부(여미숙 부장판사)는 지난 7월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인 고 안경근 선생의 유족이 낸 소송에서 “국가가 4억 3000여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독립운동가였던 안 선생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의 계엄 치하에서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집회를 열었다가 영장 없이 체포·구금됐다. 재판부는 “안 선생의 피의사실만으로는 영장 없는 체포·구금이 허용될 만한 군사상 필요가 없었다”며 불법성을 인정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中, 티베트 주민에 발포… ‘중화주의’ 광풍 부나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취임 이후 소수민족을 상대로 한 중앙정부의 강압 통치가 심해지면서 당국과 소수민족 간 대결이 극단적인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대표적인 소수민족 분쟁지인 티베트(西藏·시짱)와 신장(新疆)에서는 문화대혁명 시대를 연상케 하는 계엄이 이뤄지고 있다. 9일 BBC중문망에 따르면 티베트 캉(康)구 비루(比如)현에서 최근 당국의 ‘애국주의 교육운동’에 반대하다 체포된 시위자의 석방을 요구하던 마을 주민 60여명을 무력 진압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무장경찰은 시위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을 향해 최루탄을 발포했으며, 이를 맞은 티베트인 2명은 생명이 위독한 상태다. 앞서 당국은 지난달 이 지역 티베트인들에게 집집마다 중국 국기를 내걸고 애국주의 교육을 받을 것을 강제해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고 BBC가 전했다. 지금도 무장경찰이 대거 주둔 중인 비루현에서는 주민들이 휴대전화를 몰수당하고 신분증이 없는 행인들은 구류되는 등 사실상 계엄령이 선포된 상태라고 덧붙였다. 위구르족의 분리 독립 운동이 활발한 신장도 계엄 공포가 만연한 상태다. 지난 8월 말까지 유언비어를 퍼뜨린 혐의로 256명이 구속됐으며 이 가운데 139명이 독립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성전(聖戰) 참여’를 전파했다고 신장일보가 이날 보도했다. 독립 운동 세력의 테러가 빈번한 신장에서는 올 들어서만 수차례 관공서 습격 사건이 일어나 100여명의 사망자를 낸 바 있다. 앞서 시 주석이 지난 6월 위정성(兪正聲) 전국정치협상회의 주석 등을 신장으로 급파해 지역 질서를 다잡을 것을 주문한 뒤 이곳은 실질적인 계엄에 돌입한 상태다. 당국이 소수민족을 상대로 강경책을 펴는 것은 소수민족 문제가 중국을 분열 위기로 몰고 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중국 전체 인구에서 소수민족 비중은 8.5%에 불과하나 인구로는 1억 1400만명, 거주지역 면적은 중국 전체 영토의 64%에 이른다. 대부분 국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유사시 외부 세력의 암묵적 지원을 받을 수도 있다. 시 주석은 집권 초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여론 통제를 강화하는 것은 물론 이들 소수민족에 대해서도 강경 대응하고 있어 유혈 사태가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앞서 지난 9월 말에는 티베트인 집단 거주지역인 쓰촨(四川)성의 아바현에서 티베트인 스중(41)이 당국의 강압 통치에 항의하기 위해 분신 자살했으며, 이로 인해 2009년 이후 지금까지 중국 내 티베트인 분신자는 122명으로 집계됐다고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이 보도했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커버스토리-커피, 알고 드십니까?] “커피종주국에 스타벅스라니” 美와의 FTA 반대 시위 격렬…콜롬비아인에게 커피는 생존

    [커버스토리-커피, 알고 드십니까?] “커피종주국에 스타벅스라니” 美와의 FTA 반대 시위 격렬…콜롬비아인에게 커피는 생존

    지난달 29일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 수바와 보사 등 다운타운 지역에 삼엄한 계엄령이 떨어졌다. 미국과 콜롬비아의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반대하는 대규모 농민, 학생 시위가 보고타 등 전국으로 번지자 대통령이 5만명의 군대를 동원한 것이다. 훌리건에겐 발포해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지면서 시위대 가운데 사망자만 3명, 부상자도 200여명이 발생했다. 이날 시위대는 FTA를 반대하며 흥미로운 구호를 외쳤다. ‘스타벅스는 꺼져라(GO HOME STARBUCKS).’ 커피의 종주국인 콜롬비아인에게 스타벅스는 눈앞에 다가온 미국의 거대 자본을 상징한다. 가뜩이나 미국과의 FTA로 심기가 불편한 콜롬비아인들에게 얼마 전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회장은 “2014년부터 보고타 등 콜롬비아에 50여개 점포를 차릴 계획”이라며 도전장을 날렸다. 커피에 있어서만은 세계 1위를 자부하는 콜롬비아인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린다. 반(反)스타벅스로 분출 중인 콜롬비아 속 커피전쟁의 전운에 귀를 기울여 봤다. “인삼이나 김치 같은 한국 특산물을 중국이나 일본이 수입한 뒤 명품이랍시고 비싼 값에 역수출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기분이 어떨는지…. 지금 대부분의 콜롬비아 사람의 심정이 그럴 겁니다.” 지난 6일 보고타의 차피네로. 외국계 기업과 금융사가 몰려 있는 이곳의 한 커피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 레이나(21)는 최근 콜롬비아에 이는 반스타벅스 정서를 이렇게 정리했다. 한번도 스타벅스를 마셔 본 적이 없지만 콜롬비아 원두를 쓴다고 하니 맛은 뻔하지 않겠냐고도 말했다. 그는 “콜롬비아에는 무엇보다 세계 최고의 원두가 있고 이를 누구보다 잘 가공하는 훌륭한 커피 전문점도 넘쳐난다”면서 “비록 자본과 마케팅 능력에서는 좀 뒤질지 몰라도 결국 맛과 향으로 승부한다면 뒤처질 이유가 없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레이나가 일하는 곳은 후안발데스 카페다. 콜롬비아 커피를 대표하는 토종의 프랜차이즈 매장 중 하나다. 후안발데스를 중남미의 그만그만한 커피 프랜차이즈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후안발데스 카페는 2005년 미국 경제전문지 비즈니스위크의 커피전문점 브랜드 인지도 조사에서 스타벅스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56만 콜롬비아 농가를 대표하는 프리미엄 커피로 중남미에선 ‘스타벅스를 꺾을 만한 유일한 커피브랜드’라고 불릴 정도다. 실제 콜롬비아 사람 중 다수는 후안발데스가 스타벅스의 콧대를 꺾어 줬으면 하고 바란다. 사실 후안발데스란 이름은 콜롬비아 커피생산자연합회가 만든 가상의 인물이다. 연합회는 콜롬비아 커피를 홍보하기 위해 1960년대 뉴욕의 한 광고회사에 자국의 커피를 알릴 브랜드를 의뢰했고, 덕분에 카우보이 모자를 쓴 한 남성이 당나귀를 붙잡고 있는 상표 후안발데스가 등장했다. 매장 내 커피 가격은 대부분 스타벅스의 절반 정도다. 한국과의 인연도 있다. 2년 전 국내 한 재벌 2세가 후안발데스의 명성을 듣고 국내 프랜차이즈 도입을 적극 검토한 것. 하지만 대기업이 골목상권을 위협한다는 당시 여론의 질타에 사업은 구상단계에서 백지화됐다. 이날 오전 8시 차피네로 후안발데스 매장은 커피를 주문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출근 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려는 사람들이다. 이곳 사람들에게 커피는 일상이다. 회사원들은 출근길에 커피숍에 들러 틴토(진한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커피의 본고장이라 해서 커피 마시는 것에 뭔가 특별한 것은 없다. 틴토 외에 우유를 부은 카페라테는 카페 콘 레체, 모카를 넣은 카페 모카는 그냥 카페모카로 부른다. 기본적으로 커피를 한국보다 진하게 마시고 설탕 대신 사탕수수 덩어리인 파넬라나 콜롬비아식 캐러멜인 아레키페를 넣어 마신다는 것 정도가 차이라면 차이다. 외국계회사에 근무하는 디아나 니뇨(26·여)는 “개인적으로 스타벅스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스타벅스와의 경쟁을 통해 후안발데스가 좀 더 국제적 브랜드로 도약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3년간 애틀랜타 등에서 미국 유학생활을 한 그에게 스타벅스는 익숙한 브랜드이자 향수이기도 하다. 하지만 학생과 노동자 계층이 스타벅스 진입을 반대하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수의 콜롬비아인들이 최소 임금인 60만 페소(약 40만원)를 받고 일하고 있어요. 커피를 좋아하는 건 다를 바 없지만 서민이 저가의 브랜드나 싼 인스턴트 커피를 마실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이들에겐 원두 한 봉지에 2만 5000페소(약 1000원) 하는 후안발데스조차 부담스럽죠. 그보다도 비싸다는 스타벅스가 들어와 봐야 서민은 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후안발데스 같은 고급 커피를 사서 마시기가 부담되는 콜롬비아 서민은 작은 커피숍이나 노점에서 파는 커피를 이용한다. 농가에서 나오는 생두를 직접 볶아 먹거나 저가 브랜드의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도 많다. 외국계 회사에서 청소부 일을 하는 노라 로드리게스(45·여)도 그런 부류다. 즐겨 마시는 커피는 후안발데스가 아니다. 파운드당 8000페소(약 4800원) 정도 하는 저가 슈퍼마켓 브랜드다. 고맙게도 고향 실바니아의 친척들이 가끔 좋은 원두를 보내주기도 한다. 그의 가족은 집에서는 주로 냄비커피를 끓여 먹는다고 했다. 냄비에 물과 커피원두, 파넬라를 함께 넣어 커피 물을 우려낸 뒤 가루를 걸러 마시는 방식이다. 그녀는 “에스프레소 머신이나 드립커피 기계가 없는 서민층은 이런 방식으로 커피를 즐기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누구보다 소박하게 커피를 즐기는 부류였지만 자국 커피에 대한 자부심은 강했다. 콜롬비아인에게 커피는 어떤 의미냐는 질문에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떤 이에게 커피는 문화이지만 어떤 이에게 커피는 생존입니다. 그만큼 콜롬비아에는 커피 농장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스타벅스가 들어오든 FTA가 되든 부디 고향에서 농사짓는 가족에게 피해가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글 사진 보고타(콜롬비아)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 [명사가 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상)

    [명사가 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상)

    열두 살 되던 해 일제가 패망했다. 환희에 천지가 요동쳤다. 해방. 어렸지만 그게 뭔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나 조국의 운명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혼돈과 분열이었다. 국토는 남북으로 찢기고 민중은 좌우로 갈렸다. 얼마 전까지 ‘조국 해방’을 외치며 함께 어깨를 걸었던 동지들이 생각이 다르다고, 처지가 다르다고 원수가 돼 등을 돌렸다. 어제까지 한 교실에서 공부했던 친구가 좌익 프락치로 몰려 책상을 비웠다. 해방 공간의 극심한 무정부 상태를 보며 소년은 결심했다. 반드시 국가 시스템의 뼈대가 되는 헌법을 공부하겠노라고. 그 다짐대로 헌법 연구는 평생의 업이 됐고, 소년은 우리나라 헌법학의 ‘태두’(泰斗)가 됐다. 지난 1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한국헌법연구소에서 만난 김철수(80) 서울대 명예교수는 5시간에 걸친 긴 인터뷰에도 피로한 기색 없이 꼿꼿하게 여든 성상의 인생과 철학을 얘기했다. 1933년 7월 대구에서 빈농(貧農) 집안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책 읽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유복한 친구를 둔 덕에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책 읽느라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통학 기차 안에서도 그의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당시 대구지역 마사회 회장이었어요. 경마장에는 일본 사람들이 자기들 나라에서 가져온 세계 문학대전집, 세계 사상대전집 같은 책들이 그득그득 꽂혀 있었지요. 그때 읽은 책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었어요. 강의 중에 ‘레 미제라블’을 말하면 학생들은 ‘아 장발장이 빵 하나 훔쳤다가 탈옥하는 거요?’ 정도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실 이 책은 대단한 책입니다. 무려 26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형벌, 정치, 법철학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고민이 담겨 있으니까요.” 책에 빠져 살던 김 교수의 관심이 사회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나라가 광복을 맞으면서였다. ‘민주국가 건설’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어떤 민주주의를 택하느냐를 두고 극심한 분열 양상이 온나라를 휩쓸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나라가 완전히 엉망이었지요. 특히 제가 살던 대구는 당시 공산주의의 총본산인 모스크바(소련의 수도)에 빗대어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렸을 정도예요. 좌익의 활동이 국내 어떤 도시보다도 활발하고 강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극렬한 좌우 대립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어요. 경찰이 사람을 잡아가고 때리고, 또 반대되는 공공기관 테러가 일어나고. 우리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헌법이었던 것이지요.” 1947년 제헌(制憲) 헌법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법대생이나 학자들이 보던 고시 잡지 등을 읽으며 헌법학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열다섯이었다. 1950년 전쟁이 터졌다. 고도근시로 고생하던 그는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았다.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전쟁 탓에 서울의 대학들이 부산으로 피란 온 터였다. 부산의 허름한 판자촌에서 법학 강의를 들었다. 법학도들이 ‘천막 강의실’에서 힘겹게 공부하던 이 시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불법적인 개헌을 추진한다. 이른바 ‘발췌개헌’의 시작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피란 가 있는데 거기에서 임기 4년이 만료됐어요. 이 대통령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고치려 들었는데, 이걸 야당이 반대했고 그 결과로 야당 의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어요” 이 대통령은 “전시에 부산에 침투한 간첩이 많으니 소탕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간첩을 잡겠다던 당초 주장과 달리 야당 의원과 무고한 시민에 대한 검거와 폭력이 이뤄졌다. “야당 지도자였던 장면 선생도 잡아넣었어요. 3명 이상 모이면 잡아갔어요. 국회로 출근하는 버스가 있었는데 버스에 탄 채로 계엄사령부에 끌려 가기도 했어요. 옛 경남도청에 무덕관이라고 해서 유도 연습장 같은 곳을 국회의사당으로 썼는데 그 일대에 ‘백골단 깡패’들이 쫙 깔려 있었어요. 이 대통령에 반대하는 의원은 전부 계엄사령부로 소환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김 교수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질곡의 상당 부분은 친일파 등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지만 일부 불가피한 대목도 있었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 친일파 척결은 예견된 수순이었습니다. 그래서 친일파를 처벌하는 법률도 만들었는데 법률로 처벌하려다 보니까 당시 정부관료, 경찰, 군인 등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렸던 거죠. 일제강점기 때는 외국 유학자를 비롯해 능력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이 대통령이 보기에 친일파를 다 쫓아내면 행정이나 정치를 못하겠다 싶었던 거죠. 반민특위에 걸렸던 경찰들을 풀어주고, 결국 그 경찰들이 치안 등 최소한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해 전쟁통에 질서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죠. 일부 사람들은 이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없앴다는 이유로 친일파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당시의 사정도 일부 헤아릴 필요는 있을 겁니다.” 이 대통령은 연임에 성공했고 1953년 전쟁이 끝났다. 김철수는 스무 살의 청년이 됐다. 김철수는 한 살 아래 학과 동기를 만나 사랑을 키워갔다. 궁핍과 혼돈의 시대에 서울대 법대 커플의 사랑은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샀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대화 주제가 ‘첫번째 아내’로 옮겨가자 김 교수의 목소리톤이 낮아졌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 교수의 첫 번째 아내는 한국 문학계와 여성 예술인들 사이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으로 회자되는 전혜린이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맺은 인연을 서독(독일 통일 전) 뮌헨에서 키워나갔다. 전혜린이 1955년 먼저 뮌헨대 유학길에 올랐고 김 교수는 이듬해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이역만리에서 기쁨과 고통을 나눴다. 문학가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성화로 법대에 진학했던 전혜린은 독문학과에 입학해 그토록 바랐던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체계적인 법 공부에 목 말랐던 김 교수는 법학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전쟁국가 출신 동양인에게 서독은 마음 놓고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은 아니었다. 당시 누구나 그랬듯 너무도 가난했다. 나라를 벗어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삶이 됐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의 허가가 있어야만 외국 송금이, 그것도 최고 50달러까지만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장학금과 통·번역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전혜린은 훗날 유학생활의 궁핍에 대해 “물을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인에 대한 시선은 싸늘했다. 지구상에 한국, 코리아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코리아’라고 그러면 아프리카 콩고에서 왔냐고 그랬어요. 그 나라에 기차는 있느냐, 뭘 먹고 사느냐 등 질문을 해대는데, 미개인 취급을 하더군요. 교수들도 저를 보며 전쟁 중인 나라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를 했겠느냐며 일본 학생들과도 크게 차별을 뒀습니다. 약소국 국민의 설움이란 게 뭔지 당해 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소외감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1957년 그들은 뮌헨에서 결혼을 했다. 생활은 결혼 전과 다름 없이 곤궁했지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의지와 위안이 됐다. 그러던 중 전혜린은 1959년 딸을 낳고 한국으로 돌아가 이듬해 성균관대에서 강사로 둥지를 틀었다. 김 교수는 2년 뒤 모교 교수 자리를 제안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배 고프고 힘들었던 서독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에 왔지만 서울에서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5·16 쿠데타가 터졌다. 박정희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무력으로 청와대를 장악했다. 당시 박정희 군부가 취한 여러 조치 가운데 ‘군 미필자는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는 게 있었다. 시력이 나빠 군대에 못 간 김 교수는 공무원인 서울대 교수에 임용되지 못했다. 서울대는 물론 어디에서도 군 미필자인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내와의 관계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입국한 전혜린은 대학에서 강의하며 서울의 문인들과 어울렸다. 밤 늦게까지 명동에서 삶과 죽음, 예술을 논했다. “아내가 언제부턴가 문인의 죽음을 동경했어요. 처음에는 나는 사회규범과 질서를 중시하는 법학자이고 아내는 사회의 틀보다는 자유와 이상을 갈망하는 문학가라서 서로 다르겠거니 했는데 이 사람이 자꾸 ‘니체도 카프카도 일찍 죽었다’ 이러면서 빨리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거예요. 수면제도 많이 갖고 다니고. 그러다 보니 저도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결국 두 사람은 1964년 합의이혼을 했다. 그리고 1년 뒤 전혜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는 교수 임용 제한이 풀리면서 서울대 법대 학생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 김 교수는 고교 교사와 재혼을 했다. “아내는 지금도 꼬박꼬박 그 사람(전혜린)의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 자기가 낳은 아이들에게도 제사에 꼭 참석하라고 그러고. 참 고마운 사람이죠.” 그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반평생 이상을 함께하고 있는 지금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표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겪고 난 그는 다시 연구에 매진했다. 체계적인 헌법학 이론과 정력적인 강의,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헌법학계에서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새롭게 부상하는 법학자에 대해 점차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를 들이대도록 만드는 빌미가 됐다. 드디어 등장한 유신헌법의 시대. ‘학자 김철수’는 어떻게든 이 난국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김철수가 걸어온 길 1933년 경북 대구 출생(6남 1녀 중 장남) 1956년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1957년 서독 뮌헨에서 전혜린과 결혼 1961년 서독 뮌헨대 졸업 1962년 서울대 법과대학 조교수 1967년 미국 하버드대 법과대학원 수료 1971년 서울대 법학박사 1972년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1998년) 1988년 한국공법학회 회장(~1989년) 1990년 한국헌법연구소 소장(~2001년) 1995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국제헌법학회 이사 1998년 제주 탐라대 총장(~2000년)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1998년~) ■주요저서 헌법학(1972) 현대헌법론(1979) 비교헌법론(1980) 법과 사회정의(1982) 한국헌법사(1988) 법과 정치(1995) 정치개혁과 사법개혁(1998) 헌법정치의 이상과 현실(2012)
  • [DB를 열다] 1963년 전무후무한 군인들의 데모

    [DB를 열다] 1963년 전무후무한 군인들의 데모

    전무후무한 군인들의 데모 현장을 담은 사진이다. 1963년 3월 15일 낮 12시 10분 국가재건최고회의 건물 앞마당에 권총을 찬 현역 군인 6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계엄령을 선포하라, 군정을 연장하라, 박정희 의장은 민정에 참여하라, 구태의연한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즉시 중지시켜라 등의 6개 항을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지프 위에 오른 소령이 건의문을 외치자 다른 군인들이 복창했다. 사병 30여명이 이들을 호위하고 있었다. 박정희 의장은 수도방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군인들을 철수시키라고 지시했고 이에 사령관이 직접 현장으로 나갔지만, 이들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시위를 계속했다. 시위에 가담한 군인 49명은 당일 체포되어 구속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되었다. 박정희는 5·16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정치에 참여하지 말고 물러나라는 압력을 받았다. 결국, 1963년 2월 박정희는 민정에 참여하지 않고 군은 중립을 지키겠다는 선언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못해 한 것이었다. 그리고 보름 남짓 지나 군인들이 데모를 벌이는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박정희는 겉으로는 데모를 한 군인들을 엄중히 다스리라고 지시했지만 속으로는 좋아했을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주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군인 데모가 있은 바로 다음 날 군정 연장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며 중립 선언 약속을 파기하고 말았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수치 여사는 누구

    29일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을 만난 아웅산 수치(68) 여사는 미얀마 독립운동 영웅인 아웅산(1915~1947) 장군의 딸로,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동해 왔다. 15살 때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1962년 독재자 네윈 장군에 대항해 망명 생활을 했다. 1988년 어머니 킨치 여사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병간호를 위해 귀국했다가 그해 8월 8일 경찰의 대학생 구타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888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민주화 투사로 변신한 수치 여사는 그해 8월 26일 미얀마 수도 양곤의 한 공원에서 50여만명의 시위 군중이 모인 집회에서 “아버지의 딸로서 나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무관심한 채로 있을 수 없다”는 연설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렸다. 이어 야당 세력을 망라한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창설해 의장이 됐다. 수치 여사의 활동으로 미얀마 민주화 운동은 다시 불이 붙었지만 미얀마 군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철권통치를 이어갔다. 군부정권은 1989년 수치 여사를 내란죄 혐의로 가택 연금했으며, 1990년 서방의 압력에 의해 치러진 총선에서 수치 여사의 NLD가 승리를 거두자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NLD 당원들을 탄압했다. 수치 여사는 1991년 민주화 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연금 상태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어 1995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다가 2000년 2차 연금을 당하는 등 2010년 11월 연금에서 완전히 풀려나기까지 수차례 구금을 당했다. 수치 여사는 지난해 4월 재보궐 선거에서 하원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그가 이끄는 NLD도 재보선 대상 45석 가운데 43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며 제도권 정치에 진입했다. 수치 여사는 한국과도 인연이 적지 않다.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과 수행원들에게 북한 공작원이 폭탄 테러를 가했던 역사적인 현장이 수치 여사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의 유해가 안치된 아웅산 국립묘지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5월 미얀마를 방문, 수치 여사를 만난 뒤 아웅산 국립묘지를 참배했다. 수치 여사는 또 2004년 4월 ‘5·18 기념재단’이 수여하는 ‘제5회 광주인권상’ 수상자로 선정된 바 있다. 김미경 기자 chaplin7@seoul.co.kr
  • “오연천 총장·김난도 교수 옛 모습 기억나네요”

    “오연천 총장·김난도 교수 옛 모습 기억나네요”

    “오연천 총장은 서울대 교수로 처음 왔을 때부터 봤어요. ‘아프니까 청춘이다’로 스타가 된 김난도 교수는 학생시절의 모습이 기억나네요.” 서울대의 터줏대감으로 불렸던 이영기(60)씨가 얼마 전 34년간의 운전기사 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을 했다. 1978년 서울대 관리과 차량계에 입사한 그는 셔틀버스와 단과대 학장 등의 차를 몰며 서울대 학생과 교수의 일상을 매일 지켜봤다. 그는 “아침 일찍 졸린 눈으로 버스에 오르고 공부하느라 자정이 넘어서야 도서관을 나오던 자식같은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면서 “공부에 열정을 쏟아붓는 서울대 학생들이 늘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서울대는 캠퍼스가 워낙 넓은 데다 건물들도 떨어져 있어 인근 지역과 학교 또는 단과대학 사이를 연결하는 셔틀버스가 26대 있다. 이씨는 오전 7시부터 12시간 동안 셔틀버스를 몰았다. 때로는 자정부터 오전 3시까지 학생들을 실어나르기도 했다. 그는 “같은 시간에 매일 타는 학생들은 낯이 익어 반가웠다”면서 “마을버스도 끊긴 시간에 심야 셔틀버스를 타고 기숙사를 향하는 학생들을 볼 때면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고 말했다. “1980년대 최루탄 가스가 자욱한 거리에서 서울대 학생들이 시위하는 모습도 지켜봤고 신군부의 계엄령으로 정문이 봉쇄되고 군인들이 단과대 학장의 차량까지 막무가내로 막아 세우는 일도 겪었어요.” 대학원생이나 신출내기 교수로 얼굴을 익혔던 이들이 어느새 유명인이 된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도 했다. “예전의 서울대 학생들은 ‘공부벌레’ 같고 수수하고 소탈했는데, 요즘 학생들은 자유분방하고 많이 세련됐지요. ”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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