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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독인가 동반자인가’… 주한 미국대사 70년사

    ‘총독인가 동반자인가’… 주한 미국대사 70년사

    해리스 대사, 호르무즈파병 압박 등으로 ‘총독’ 비난받아역대 23명 대사 중 유일 직업군인 출신, 국민에게 낯설어결례 논란 전임 대사도 자유롭지 않아…현대사에 영향력미국대사 과거 막후 외교관이었지만 지금은 공공 외교관변화된 역할 조정 과정서 시행착오 겪으며 논란 불거져 ●한국민에게 낯선 미국대사, 해리스 “해리스 대사는 한국 총독처럼 행세하지 않느냐. 자기가 무슨 총독인 줄 안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지난 17일 공개된 재단 유튜브 채널 ‘유시민의 알릴레오’에서 해리 해리스 주한 미대사에 대해 이같이 언급했다. 해리스 대사가 지난 7일 KBS와 인터뷰에서 “한국이 그곳에(호르무즈해협)에 병력을 보내길 희망한다”며 정부에 파병을 압박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을 ‘총독 행세’라고 비판한 것이다.해리스 대사가 16일 외신 기자 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같은 날 신년기자회견에서 남북 협력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데 대해 “향후 제재를 촉발할 수 있는 오해를 피하려면 한미 워킹그룹을 통해서 다루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당정청은 일제히 반발했다. 다음 날 “의견 표명은 좋지만 우리가 대사가 한 말대로 따라 한다면 대사가 무슨 조선 총독인가”(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 “내정간섭 같은 발언은 동맹 관계에도 도움이 안 된다”(민주당 설훈 최고위원), “대북정책은 대한민국의 주권에 해당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통일부 이상민 대변인), “대사가 주재국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언론에 공개적으로 언급한 부분은 대단히 부적절하다”(청와대 관계자)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앞서 해리스 대사는 호르무즈해협 파병과 남북 협력 사업뿐만 아니라 한미 방위비분담협상,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과 관련 미국 정부의 입장을 직설적으로 표명하면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해리스 대사는 지난해 11월 당시 국회 정보위원장인 바른미래당 이혜훈 의원을 관저로 불러 방위비분담금을 50억 달러 내라는 요구만 20번 정도 반복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외교적 결례라는 비난을 받았다. 해리스 대사는 같은 달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맞서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내린 데 대해 “한국이 한일 과거사 문제를 안보 영역으로 확대한 데 대해 실망했다”며 종료 결정을 번복할 것을 압박했다. 해리스 대사를 둘러싼 논란은 우선 대사의 개인적 성향에 기인한다는 분석이다. 해리스 대사는 첫 직업군인 출신 주한 미국대사다. 1949년 부임한 1대 존 무초 대사부터 해리스 대사까지 23명 대사 중 6명을 제외하면 모두 직업 외교관 출신이다. 비외교관 출신 6명 중 해리스 대사를 제외하고는 외교를 전공한 교수이거나 한국과 인연이 깊은 목사, 외교에 익숙한 중앙정보부(CIA) 출신 요원, 국회와 국방부에서 외교를 담당한 정치인이었다. 군인 출신으로 외교적 수사보다 직설 화법에 익숙한 해리스 대사가 한국민에겐 ‘낯선 대사’라는 것이다.외교 소식통은 “한국어에 능숙한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와 한국민과 스킨십을 즐겼던 마크 리퍼트 대사에 익숙했던 한국민에게 4성 장군으로 태평양사령관을 역임한 해리스 대사의 야전군 사령관 스타일이 낯설어 보일 것”이라고 했다. 다만 주한 미국대사의 행보와 발언이 논란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승만 정권 당시 윌리엄 레이시 대사는 한미 관계 현안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불만을 표출하는 등 거만한 태도를 보여 이 대통령의 반감을 샀다. 박정희 정권에 베트남 파병을 압박했던 윈스럽 브라운 대사는 카운터파트인 이동원 외무부 장관을 ‘패싱’하고 정일권 국무총리, 박정희 대통령과 직접 담판을 짓는 오만함을 보이기도 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는 진보적인 노무현 정부와 보수적인 조지 W 부시 정부가 마찰을 빚던 당시 노무현 정부의 남북 화해협력 정책과 어긋나는 발언을 해 정부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 주한 미국대사가 ‘한국의 총독’이라는 논란은 한국 현대사에서 미국 정부와 그의 입장을 대변하는 주한 미국대사가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불거졌다는 해석이다. 미국대사는 한국 현대사의 분기점마다 주·조연으로 등장하며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데 영향을 미쳤다. 미국대사는 한국 현대사와 한국 정치에서 한복판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국가원수급 대우 받은 초대 미국대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첫 주한 미국대사는 존 무초 대사다. 무초 대사는 1948년 8월 13일 주한 최고대표로 임명돼 사흘 후 부임했다. 미국은 이듬해 1월 1일 한국을 정부로 승인하고 4월 7일 무초 최고대표를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했다.1년 전 남북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지원이 절실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무초 대사의 신임장 제정식을 ‘장엄하게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1949년 4월 20일 무초 대사의 신임장 제정식에는 이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 이범석 국무총리, 신익희 국회의장, 김병로 대법원장 등 삼부 요인이 모두 참석했고, 무초 대사는 중앙청에 육해군 의장대의 사열을 받으며 입장했다. 국가원수급 대우를 받은 무초 대사는 1950년 이 대통령과 6·25 전쟁 첫 2년을 함께 겪었다. 무초 대사는 전쟁 발발 직전인 6월 초 미국 의회에 북한의 침공 가능성을 경고했다. 그는 전쟁 당일인 25일 워싱턴 국무부에 “북한군의 전면 공격이 시작됐다”고 보고했고 이 대통령의 관저인 경무대로 들어갔다. 무초 대사는 피난가겠다는 이 대통령을 말렸지만, 이 대통령은 무초 대사에게 알리지 않고 27일 서울을 떠나 수원으로 갔다. 무초 대사는 이 대통령의 행동에 분노했지만 이후 한국 정부를 따라 수원·대전·대구·부산으로 피난가던 도중 이 대통령을 자신의 차에 태워 피신시키기도 했다. ●이승만 하야 작전의 선봉장? 이 대통령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독립운동을 한 친미주의자였지만, 집권기에는 미국과 갈등을 빚었다. 이 대통령은 6·25 전쟁 기간 휴전 반대, 반공포로 석방 등으로 휴전을 원하던 미국과 틀어지기 시작했다. 전쟁 후에 미국은 냉전 전략의 일환으로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라고 요구했지만 이 대통령은 이를 뿌리쳤고, 미국의 우려에도 독재의 길을 걸어가면서 양측의 갈등은 악화됐다. 미국 정부는 이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한 계획도 세운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각에서는 미국대사들이 야당 인사들과 접촉하며 최전선에서 하야 계획을 수행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 대통령은 당연히 미국대사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1955년 5월 취임한 3대 윌리엄 레이시 대사는 재한 미국인 상사에 세금을 물리는 문제를 둘러싸고 한국 정부와 충돌하자 이 대통령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불만을 토로했다. 이 대통령은 반감을 느껴 이례적으로 미국 정부에 대사 교체를 요청했고, 취임 다섯 달 만에 레이시 대사는 사임했다. 후임인 4대 월터 다울링 대사는 진보당 사건, 보안법 파동 등 이승만 정권의 정치 탄압을 두고 이 대통령과 부딪쳤다. 다울링 대사는 이승만 정권이 1958년 야당 진보당의 조봉암 당수 등을 간첩 혐의로 체포해 사형을 구형하자 정권 2인자인 이기붕 국회의장을 두 차례 만나 조봉암을 구명하려 했으나 조봉암은 1년 후 사형당한다. 1958년 12월에는 이승만 정권이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기 위한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일방 통과시키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다울링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며 항의의 뜻을 표했다.1959년 12월 부임한 5대 월터 매카너기 대사는 이승만 정권의 종말에 일조했다. 매카너기 대사는 1960년 4·19 혁명 당일 “시위자들과 당국이 폭력을 자제하고 법과 질서를 되찾아 정당한 불만이 해결되기를 바란다”며 시위대에 우호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19일과 21일 경무대에 이 대통령을 찾아가 미국 정부의 우려를 전달했다. 26일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열리자 매카너기 대사는 “전국적으로 퍼진 정당한 국민의 불만 표시에 한국 정부는 즉각적인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고 미봉책을 취할 시기가 아니다”며 이 대통령의 하야 요구를 시사하는 성명을 냈다. 직후 경무대로 가 이 대통령으로부터 하야 의사를 전달 받았다. 경무대 앞에 있던 시위대는 매카너기 대사의 차가 경무대에서 나오자 그가 이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냈다고 생각하며 ‘매카너기 만세’, ‘미국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박정희 인정하되 미국 요구 관철시킨 대사들 박정희·전두환 독재 정권 하에서 미국대사들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반공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이들을 돕기도 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미국의 가치에 반하는 이들을 견제하기도 했으며, 국익과 가치의 딜레마에서 이들의 독재를 방관하기도 했다. 1961년 5·16 쿠데타가 발발하고 한 달여 후 취임한 6대 새뮤얼 버거 대사는 박정희의 쿠데타 세력을 사실상 인정하되 미국의 정책을 따르도록 설득하는 전략을 취했다. 쿠데타 발발 당일 마셜 그린 주한 미국대사대리와 카터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이 쿠데타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을 뒤집은 것이다. 버거 대사는 박정희에게 민정 이양을 위한 선거를 실시하고 한일 국교정상화를 추진할 것을 요구했다. 박정희는 전역하고 1963년 10월 대선에서 승리했으며, 2년 후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기본조약 등을 체결했다.7대 윈스럽 브라운 대사는 박정희 정권에 미국이 수행하던 베트남전 참전을 압박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4년 미국이 베트남전에 본격 개입하자 그 해 9월 베트남에 의무 요원과 태권도 교관을 파견했는데, 브라운 대사는 12월 박정희 대통령에게 증파를 요청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5년 10월부터 전투부대를 파병하기 시작했고, 브라운 대사는 이듬해 3월 한국의 추가 파병에 대한 미국의 보상을 담은 ‘브라운 각서’를 전달했다. 브라운 각서와 월남 특수로 한국은 경제·군사적 성장을 이루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지만, 국군 장병의 피를 돈을 받고 팔았다는 비난도 제기됐다. ●유신 정권과 대립했던 대사들 1970년대 미국에 닉슨·포드·카터 정부가 차례로 들어서고, 박정희 정권이 1972년 유신헌법 개정으로 독재의 길을 걸으며 양국은 충돌하기 시작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69년 냉전 완화(데탕트)를 이유로 아시아에서의 개입을 줄이고 아시아 국가들의 자력 방위를 요구하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닉슨 독트린에 따라 8대 윌리엄 포터 대사는 1970년 박 대통령에게 주한미군을 6만 명에서 4만 명으로 감축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박 대통령이 감축에 불만을 갖고 미국의 주한미군 주둔비용 지원 요구를 거부하자 포터 대사는 “(박 대통령은) 엉클 샘(미국)의 큰 젖통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질 않으려 한다”며 독설을 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 등 동맹국이 미국을 벗겨 먹는다며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을 대폭 인상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주한미군 감축까지 고려할 수 있다고 시사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닌 셈이다.1971년 10월 취임한 9대 필립 하비브 대사는 ‘미국 당대의 가장 걸출한 전문 외교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내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을 구명한 인물로 유명하다. 하비브 대사는 1973년 8월 박정희 정권이 야권 정치인 김대중을 납치하자 조용하지만 적극적으로 사건에 개입했다. 하비브 대사는 박 대통령에게 “김대중 납치 사실을 알고 있으며 김대중이 죽는다면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끝장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고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서울지부장이자 후일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하는 도널드 그레그가 회고했다. 김대중은 납치 닷새 후 서울 자택에서 풀려났다. 후임 10대 리처드 스나이더 대사는 박정희 정권이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한 사실을 알아채고 박정희 정권에 경고해 핵무기 개발 계획을 무마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독재 정권의 견제자인가 방관자인가 11대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는 1978년 7월 취임, 이듬해 10·26 사태와 12·12 쿠데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등 한국사의 주요 변곡점을 겪은 인물이다. 1977년 출범한 카터 정부는 도덕주의 외교 노선을 앞세우며 박정희 정권의 독재 정치를 비판하고 주한미군 철군을 추진함에 따라 한미 관계가 악화됐다. 이 과정에서 글라이스틴 대사는 카터 대통령을 설득해 주한미군 철군 계획을 철회하는 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박정희 정권이 1979년 10월 국회에서 여당 공화당과 유신정우회를 동원해 야당 신민당의 김영삼 총재를 의원직에서 제명하자 카터 정부는 항의의 뜻으로 글라이스틴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기도 했다.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1979년 12·12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듬해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탄압할 당시 글라이스틴 대사와 미국 정부는 이를 묵인하거나 최소 방관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전두환과 그의 참모들을 만나 광주에서의 군사 작전을 항의하기도 했으나,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이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수행하기 하루 전 글라이스틴 대사는 ‘(신군부에) 군사작전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백악관에 보고한 것으로 기밀해제 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신군부의 진압작전을 묵인했다고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999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신군부의 행동에 미국이 공모자는 아니었으나 무력했던 건 사실”이라고 밝혔다. 12대 리처드 워커 대사는 1981년 8월부터 1989년 1월까지 약 7년 5개월간 재임해 현재까지 최장수 대사 기록을 갖고 있다. 1대 무초 대사부터 11대 글라이스틴 대사까지 모두 직업 외교관이었으나, 워커 대사는 학자로서 첫 비외교관 출신 주한 미국대사이기도 하다. 워커 대사는 1980년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김대중을 석방시키는 데 역할을 했지만, 김대중 석방 대가로 전두환 대통령의 조기 방미를 성사시켜 12·12 쿠데타와 광주 학살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민주화 이행기의 CIA 출신 대사들 13대 제임스 릴리 대사와 14대 도널드 그레그 대사는 CIA 요원 출신으로, 1987년 6·10 항쟁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 1993년 문민정부 출범까지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목격했으며 민주화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의 광주 학살 개입, 방조 의혹으로 반미 정서가 고조됐던 1980년대 말 부임했던 릴리 대사와 그레그 대사는 한국민의 거센 반감에 직면해야 했다. 릴리 대사는 반미 시위대로부터 수차례 인형 화형식을 당했으며, 그레그 대사는 시위대의 관저 침입을 겪기도 했다. 특히 릴리 대사의 후임으로 연이어 CIA 출신인 그레그 대사가 미국대사로 임명되자 야당과 언론은 ‘미국이 한국을 외교 대상이 아닌 정보·공작 대상으로 본다’며 반발하기도 했다.하지만 1987년 6·10 항쟁 당시 전두환 정권이 명동성당에 강제 진입해 학생들을 연행하려 하자 릴리 대사는 13일 최광수 외무부 장관을 만나 “전 세계가 떠들썩해질 것”이라며 진입을 저지했다. 그는 전두환 정권이 계엄령을 검토하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시위를 평화롭게 해결해야 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요청해 받았다. 릴리 대사는 전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으나 청와대는 18일 거절 의사를 밝혔다. 릴리 대사는 결국 다음 날 전 대통령을 찾아가 친서를 전달하고 “무력을 절대 사용하지 마라”고 경고했으며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 계획을 백지화했다. 그레그 대사는 취임 약 4개월 후인 1990년 1월 광주를 찾아 미국의 광주 학살 개입 책임을 묻는광주민주화운동 참가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는 “레이건 대통령이 전 대통령을 취임 후 첫 외국 정상으로 초청한 것은 김대중을 사형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이라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레그 대사는 노태우 정권의 남북화해정책과 북방정책을 지지했으며 미군 전술핵무기의 한반도 철수를 추진하며 1992년 남북 한반도비핵화선언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레그 대사는 1992년 남북화해를 위해 한미연합훈련인 팀스피리트 훈련을 취소하도록 이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듬해 한미 정부는 그레그 대사와 상의 없이 훈련을 재개하면서 북한은 준선시상태를 선언했고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탈퇴했다. 그레그 대사는 2015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내가 대사로 봉직하던 기간 중에 미국이 결정한 유일한 최악의 실수”라고 했다. ●북핵 전문 외교관 전성시대 1993년 북한의 NPT 탈퇴로 1차 북핵 위기가 촉발되자 미국의 대한국 외교는 물론 주한 미국대사의 역할도 북핵 문제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1993년 11월 취임한 15대 제임스 레이니 대사는 목사 출신으로 직업 외교관은 아니었으나, 1947~1950년 서울에서 정보장교로 근무했고 1959~1964년 연세대에서 신학을 가르친 ‘지한파’였다. 레이니 대사는 1994년 북한이 영변의 핵연료봉 추출을 강행하고 미국은 영변 핵시설 정밀 타격을 시행하려 하면서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에 오르자 카터 전 대통령을 만나 대북 특사로 방북해 중재할 것을 요청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그 해 6월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냈으나, 7월 김 주석이 사망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됐다. 하지만 북미는 9월 제네바합의를 타결하며 1차 북핵 위기를 종식시켰다.레이니 대사의 후임인 16대 스티븐 보즈워스 대사, 17대 토머스 허버드 대사, 18대 크리스토퍼 힐 대사는 모두 북핵 전문 외교관이다. 보즈워스 대사는 1995~1997년 제네바합의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신 북한에 경수로를 건설하는 역할을 맡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주한 미국대사로 자리를 옮겼다. 보즈워스 대사는 2001년 주한 미국대사에서 퇴임한 이후에도 2009~2011년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대북특별대표를 맡아 북미 협상을 총괄했다. 그는 미국 대북 협상파의 상징적 인물로 꼽힌다. 허버드 대사 역시 1994년 북미 제네바협상에 실무급으로 참여한 대북 협상 전문가다. 2001년 9월 취임한 허버드 대사는 이듬해 2차 북핵 위기를 맞게 된다. 아울러 2002년 6월 주한미군 장갑차의 여중생 압사 사건, 이듬해 정부의 이라크 파병 결정, 2004년 주한미군 기지 평택 이전 반대 시위 등으로 반미 감정이 고조되고 한미 동맹의 균열 우려가 심화되자 이를 해결하는 데 임기를 보냈다.후임인 힐 대사는 2004년 9월 취임해 이듬해 2월 북핵 문제를 논의하는 6자회담의 미국 측 수석대표로 지명됐으며, 두 달 후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에 취임하면서 대사직을 내려놓았다. 힐 대사는 인터넷을 통해 한국민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반미 감정을 누그러트리는 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힐 대사는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 북한 비핵화의 이정표로 평가받는 9·19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리코드 브레이커’ 대사들의 명과 암 19대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부터 23대 해리 해리스 대사까지 다섯 명의 대사는 주한 미국대사 역사의 ‘신기록 보유자’들이다. 버시바우 대사는 직전에 주러시아 미국대사를 역임하고 주한 미국대사 중 역대 최고위급 인사로 부임했다.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는 최초의 여성이자 최초의 한국어 구사 대사, 성 김 대사는 최초의 한국계 대사였으며 마크 리퍼트 대사는 현재까지 최연소 대사 기록을 갖고 있다. 해리스 대사도 최초의 직업군인 출신 대사 기록을 세웠다. 2005년 10월 취임한 버시바우 대사는 역대 주한 미국대사 중 최고위급 인사로 부임하면서 북핵 문제 해결에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버시바우 대사는 부임 초기 북한의 인권과 위조지폐 문제를 거론하고 김정일 정권을 ‘범죄 정권’이라고 칭하며 대북 강경 기조를 보였고 당시 노무현 정부는 버시바우 대사에게 북한 비난을 자제하라고 요청하기도 했다.버시바우 대사는 2008년 5월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에 반대하는 촛불 시위가 한창이던 때에 손학규 민주당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실망스럽다”고 해 외교적 결례 논란을 빚었다. 버시바우 대사는 손 대표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 수입 금지를 주장한 데 대해 “과학적 근거도 없이 불안을 야기한 것에 대해 실망스럽다”고 했으며, 민주당 측은 이를 공개하며 반발했다. 다만 버시바우 대사는 힐 대사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을 통해 한국민과 소통하며 국민을 상대로 한 공공 외교를 이어나갔다. 스티븐스 대사는 유창한 한국어로 한국 국민과 접촉면을 늘리면서 공공 외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대사로 평가받는다. 스티븐스 대사는 미국 평화봉사단에 들어가 한국 복무를 자원, 1975~1977년 충남 예산군 예산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심은경’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었다. 그는 1978년 국무부에 입부한 후 1983~1989년 한국에 다시 와 서울 대사관과 부산 영사관에서 근무했다. 스티븐스 대사는 2008년 10월 취임하자마자 33년 전 봉사한 예산중학교를 방문, “예산은 내가 외교관으로 필요한 자질을 배웠던 곳”이라며 한국 국민의 마음을 샀으며, 블로그도 개설해 글을 연재하며 ‘파워 블로거’로서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후임 성 김 대사는 2008년부터 2011년까지 6자회담 특별대표를 역임하다 그 해 11월 주한 미국대사로 취임했다. 김 대사는 2017년 주필리핀 미국대사로 자리를 옮겼으나 이듬해 6월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판문점에서 최선희 당시 외무성 부상과 정상회담 조율을 위한 실무협상을 했다. ●‘같이 갑시다’ 한미 동맹 캐치프레이즈 만든 리퍼트 리퍼트 대사는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 보좌관을 지내다 2008년 오바마 정부 인수팀에 합류했다. 정부 출범 후 국방장관 수석보좌관,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안보담당 차관보, 국방장관 비서실장을 역임하고 2014년 11월 주한 미국대사로 취임했다. 이전 직업 외교관 출신 대사들이 ‘늘공’(늘 공무원)이었다면 리퍼트 대사는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 참모로서 관직을 맡은 ‘어공’(어쩌다 공무원)인 셈이었다.리퍼트 대사는 2015년 3월 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김기종 씨에 의해 습격을 당했을 때 의연하게 대처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미국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나아가 한미 동맹 강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습격 소식이 전해지자 리퍼트 대사의 수술은 물론 한미 관계에 대한 우려의 여론이 높아졌다. 리퍼트 대사는 사건 당일 수술을 마치고 트위터에 “한미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복귀합시다. 같이 갑시다!”라고 올리며 우려의 여론을 신속히 잠재울 수 있었다. 이후 ‘같이 갑시다’(Go together)는 한미 동맹의 캐치프레이즈가 돼 한미 동맹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인사말이나 건배사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문구가 됐다. 리퍼트 대사는 대사 부임 전 한국과 인연이 별로 없었지만, 부임 후 빠르게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익히며 한국민과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리퍼트 대사는 한국 부임 후 갖게 된 첫째 아들에게 ‘세준’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미들 네임으로 줬고, 딸에게도 ‘세희’라는 미들 네임을 붙였다. 야구팀 두산 베어스의 팬으로 유명한 리퍼트 대사는 대사 재임 기간은 물론 퇴임 후에도 야구장을 찾아 두산을 응원하면서 ‘야구 외교’를 선보이고 있다. ●막후 외교서 공공 외교로 대사의 역할 변화했지만 해리스 대사는 2018년 2월 주호주 미국대사로 지명됐다가 세 달 후 주한 미국대사로 재지명된 뒤 7월 취임했다. 전임 리퍼트 대사가 퇴임하고 1년 6개월여 만에 공석을 메운 터라 기대도 높았던 반면, 그가 대북·대중 강경파라는 점에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추진하는 문재인 정부와 마찰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도 교차했다. 하지만 해리스 대사는 2018년 6월 상원 외교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실제 협상에 진지한지 가늠하는 차원에서 주요 (한미연합)훈련을 일시 중단할 필요가 있다”며 트럼프 정부의 대북 협상 기조에 보조를 맞췄다. 해리스 대사가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에 우려를 표하고 문 대통령의 남북 협력 사업 추진에 한미 협의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개인의 신념이라기보다 트럼프 정부의 기조를 대변한 것이다. 해리스 대사뿐만 아니라 전임 대사들도 한국 정부와 이견이 있는 이슈에서 항상 미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해왔다. 버시바우 대사도 재임 기간 당시 조지 W 부시 정부의 기조대로 ‘남북 경제협력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말해 해리스 대사처럼 외교적 결례라는 비판을 받았다. 스티븐스 대사도 2010년 한미의 핵심 현안이자 2000년대 한국 내 반미 정서의 주요인이었던 한국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한국의) 시장이 완전히 개방되기를 바라지만 이 사안의 민감성을 잘 알고 있다”며 비록 정제된 톤이었지만 미국 정부의 입장을 명확히 전달했다.그럼에도 해리스 대사의 발언이 더욱 논란이 되는 것은 트럼프 정부가 방위비분담협상 등 한미 관계의 현안에 대해 한국 정부를 전례 없이 강하게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뉴욕타임스(NYT)는 공교롭게 한일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는 중에 해리스 대사가 부임하고, 그의 취임 후 트럼프 대통령이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를 계속해서 밀어붙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가 한국 정부에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번복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며 해리스 대사에게는 ‘고압적인 미국 외교관’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졌다고 진단했다. 아울러 한미 관계가 과도기를 겪는 상황에서 한국과 미국 모두 주한 미국대사의 역할을 변화한 상황에 맞게 조정하는 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이같은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한미일과 북중러가 대립하는 냉전 구도가 해체되고 한국의 국력이 급성장하면서 한미 관계가 상호 호혜적 관계로 재조정되는 가운데 주한 미국대사의 역할도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대국민 공공 외교를 통해 한미 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으로 변화할 필요가 생겼다. 하지만 과거 미국대사의 한 마디에 한국 정부의 기조가 흔들렸던 경험을 겪었던 한국민은 미국대사의 발언을 정부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로 간주하며 의심의 눈초리로 볼 수밖에 없다. 미국대사들도 한국과 미국이 불평등한 관계에 있었던 역사와 한국민의 의심을 고려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발언함으로써 오해를 자초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1990년대 초반까지 주한 미국대사는 주한미군사령관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지만, 냉전 이후 한국의 국력이 강화되면서 미국대사는 한미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역할로 변화했다”고 했다. 이어 “해리스 대사를 둘러싼 논란은 대사 개인의 성향에 기인한 것도 있겠지만, 한미 정부가 변화된 양자 관계 속에서 이견을 조율하고 자신의 입장을 정제된 톤으로 발표하는 데 서툰 모습을 보이는 탓도 있다”고 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靑 “‘계엄령 문건’ 부실수사 의혹 윤석열 책임없다”

    靑 “‘계엄령 문건’ 부실수사 의혹 윤석열 책임없다”

    “윤석열, 사건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결론청와대가 ‘계엄령 문건’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책임을 물어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었던 윤석열 검찰총장을 수사해 달라는 국민청원에 대해 윤 총장을 수사할 단서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강정수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장은 22일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한 청원 답변에서 “현재까지 밝혀진 사정만으로는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에 대한 수사를 개시할 만한 단서나 증거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24일에 제기한 청원에서 청원자는 “국민의 안전을 위협했던 계엄령 문건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는데도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은 수사 보고를 받지 못해 책임이 없다는 변명으로 일관하니 수사를 촉구한다”고 주장했다. 기무사 계엄령 문건 수사는 2018년 7월 시민단체가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내란음모 등의 혐의로 고발하면서 시작됐다. 박 전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던 촛불집회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기무사 요원들에게 불법계엄 계획 문건을 작성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에 군과 검찰이 합동수사단을 구성해 수사를 진행했지만 합동수사단은 계엄령 문건 작성을 주도한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이 해외로 도주했다는 이유로 기소중지 처분을 내렸다. 강 센터장은 “당시 서울중앙지검장 명의의 불기소처분통지서때문에 오해가 있었으나 서울중앙지검장은 사건 일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강 센터장은 “계엄령 문건 수사는 합동수사단이 수사한 사안으로, 정식직제가 아닌 합동수사단 소속 검사들은 수사단 명의로 사건을 등록해 처리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이어 “합동수사단 소속 검사들은 서울중앙지검 검사로 직무대리 발령을 받아 서울중앙지검 명의로 사건을 처리했을 뿐 수사는 독립적으로 진행됐다”고 강조했다. 강 센터장은 “전산시스템에 따라 불기소이유통지서 발신인이 자동으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출력된 것이고, 불기소결정문 원본의 검사장 결재란에는 사선이 그어져 있어 검사장이 결재한 바도 없다”고 부연했다. 강 센터장은 끝으로 “계엄문건 작성을 주도한 조 전 사령관에 대한 여권 무효화 조치, 체류자격 취소, 범죄인 인도청구 등 신속한 국내송환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신병이 확보되면 수사가 재개돼 모든 의혹의 실체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도쿄올림픽 징크스?… 1964년에도 日과 뒤숭숭, 北과 어수선

    도쿄올림픽 징크스?… 1964년에도 日과 뒤숭숭, 北과 어수선

    일본의 부당한 경제보복에 따른 한일 관계 경색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2020년 도쿄올림픽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첫 도쿄올림픽이 열렸던 1964년으로 돌아가 보면 당시에도 상황은 뒤숭숭했다. 일제강점을 벗어난 지 20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로, 국교 단절 상태여서 한일 관계라 부를 만한 것도 없었다.1963년 말 대선을 통해 군복을 벗고 사복을 입은 박정희 정부가 경제성장과 안보 문제 등을 이유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반일 감정이 치솟았다. 올림픽 개막을 넉 달 정도 앞두고 6·3 항쟁 등 반정부 시위가 절정에 달하자 정부는 50일가량 계엄령을 선포하기도 했다. 도쿄 대회는 정부 수립 이후 한국이 태극기를 앞세워 정식 출전한 다섯 번째 올림픽이다. 10월 10일부터 보름 동안 93개국 5000여명이 열전을 펼쳤다. 6·25전쟁의 상흔이 가시기 전이라 나라 살림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한국은 전체 18개 종목 중 16개 종목에 165명을 출전시켰다. 20년 뒤 로스앤젤레스 대회(175명)에 맞먹는 대규모 선수단을 보낸 것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열리고, 또 체제 경쟁을 벌이던 북한과 사상 첫 올림픽 대결까지 예상됐기 때문이었다. 1965년 한일협정을 앞두고 도쿄 대회가 더욱 성대하게 치러지도록 지원하려는 박정희 정부의 의중이 작용했다는 평가도 있다. 한국은 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에서 장창선이 은메달, 유도 80㎏급에서 재일교포 김의태가 동메달, 복싱 밴텀급에서 정신조가 은메달을 따내며 종합 26위에 올랐다. 레슬링과 유도는 역대 첫 메달이었다. 일본과 가까운 부산 정도를 제외하고 국민들은 라디오 중계를 통해 메달 소식을 들어야 했다. 4년 전 로마 대회 노메달의 아쉬움을 털어 낸 것은 물론 양정모(레슬링)가 사상 첫 금메달을 따냈던 1976년 몬트리올 대회 이전까지 역대 최고 성적을 거뒀으나 당시 기대에 견주면 아쉬운 결과이기도 했다. 개선 퍼레이드도 서울이 아닌 대전에서 열렸다. 도쿄에서의 아쉬움은 태릉선수촌 건립(1966년 개촌)으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에도 지금 못지않게 남북 단일팀 논의가 뜨거웠다. 북한이 오히려 적극적이었다. 1960년 로마에 단일팀을 보내자고 1957년 6월 먼저 제안할 정도였다. 남쪽이 정부 수립 이전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가입한 상황이라 미가입 상태인 북한은 단일팀이 아니면 올림픽 무대를 밟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해 9월 북한의 가입이 조건부(올림픽 출전 남측 동의)로 잠정 승인되며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도쿄 대회를 앞두고 다시 단일팀 논의가 진행됐는데 국기와 국가 문제 등에 대한 이견이 커 진척이 없었다. 결국 1963년 10월 IOC는 북한의 공식 가입과 독자 출전을 승인했다. 그런데 북한은 앞서 사회주의 국가 중심으로 치러진 ‘반IOC’ 성격의 신흥국경기대회(가네포)에 출전한 선수들이 올림픽 출전 금지 제재를 받자 도쿄 대회 개막 하루 전 보이콧을 선언하고 선수단을 철수시켰다. 당시 가네포에서 비공인 세계기록을 세우며 북한 육상 영웅으로 떠오른 신금단과 남한 아버지의 상봉 문제가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단 7분으로 끝난 부녀 상봉은 두고두고 회자되며 안타까움을 샀다. 이후 북한은 IOC가 올림픽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 아니라 북한(North Korea)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하자 올림픽에 나서지 않았다. IOC는 1969년에야 DPRK를 승인했고, 북한은 1972년 뮌헨 대회를 통해 올림픽에 데뷔한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기무사 쿠데타 모의 무죄판결…‘청와대의 적폐몰이’ 사죄해야

    기무사 쿠데타 모의 무죄판결…‘청와대의 적폐몰이’ 사죄해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정국 당시 계엄령 문건을 고의 은폐했다며 허위공문서 작성으로 기소된 전 기무사 장교들이 무죄판결을 받자 ‘청와대의 적폐몰이’를 사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쿠데타를 모의했다며 문재인 대통령의 직접 지시로 이뤄진 계엄령 문건 사건이 무리한 적폐몰이였음이 법원에서 확인됐다”며 “최종본도 아닌 문건을 흔들며 국민을 우롱한 청와대는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은 24일 ‘기무사 계엄 문건’ 사건과 관련해 허위 공문서 작성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소강원 전 국군기무사령부 참모장(소장) 등 3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군·검 합동수사단은 기무사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계엄령을 발동하려 했다는 ‘내란 음모’ 의혹 등을 지난해 7월 문재인 대통령 지시로 수사했다가 진전되지 않자 기소 중지 처분을 내린 바 있다. 대신 소 전 참모장 등이 계엄령 검토 사실을 숨기기 위해 위장 태스크포스(TF)를 만들고 계엄령 문건이 마치 한·미 연합 훈련용으로 작성된 것처럼 꾸몄다며 불구속 기소했지만 무죄 처분이 내려졌다. 하 의원은 “문 대통령의 지시로 구성된 합수단은 쿠데타 모의 증거를 찾는다며 90곳이 넘는 곳을 압수수색하고 204명을 조사했지만 기무사 장교 3명을 허위공문서 작성혐의로 기소하는데 그쳤다”고 지적했다. 허위공문서 혐의도 가관이라며 TF 명칭을 가명으로 사용해 1끼 8000원 총 200만원에 불과한 특근매식비를 신청하고 계엄령 은폐목적으로 계엄검토 문건을 훈련비밀로 생산했다는 것이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법원은 TF 가명은 그동안의 업무관행으로 볼 수 있고 쿠데타 모의를 감추기 위한 게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주장했다. 하 의원은 “법원의 판단이 나온 이상 기무사 계엄 문건을 이용해 국가를 분열과 혼란에 빠뜨린 청와대와 민주당은 국민앞에 무리한 적폐몰이를 사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동안 계엄령 관련 문건 사건에서 유죄로 인정된 것은 없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청와대, ‘계엄령 문건 관련 윤석열 총장 수사‘ 국민청원에 “답변 한달 연기”

    청와대, ‘계엄령 문건 관련 윤석열 총장 수사‘ 국민청원에 “답변 한달 연기”

    청와대가 ‘계엄령 문건 수사’와 관련해 윤석열 검찰총장도 수사해야 한다는 내용의 국민청원에 대해 답변을 한 달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청와대는 20일 공식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통해 “신중한 검토를 위해 답변 마감 시한을 한 달간 연기하오니 양해 부탁드린다”고 밝혔다. 이번 청원은 청와대가 지난해 7월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을 앞두고 작성했다는 ‘대비계획 세부자료’, 이른바 ‘계엄령 문건’을 공개한 뒤 검찰이 이 문건을 부실하게 수사했다며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었던 윤 총장도 수사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청원을 올린 사람은 “국민들의 안전을 위협했던 계엄령에 대한 수사가 엉망으로 진행됐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보고를 받지 못했으며 책임이 없다는 거짓말과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는 윤 총장에 대한 수사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 청원은 지난 10월 24일부터 시작해 총 20만 5668명이 참여했다. 참여자가 20만명을 넘으면 청와대의 답변 대상이 된다. 장은석 기자 esjang@seoul.co.kr
  • [장동석 평론가의 뉴스 품은 책] ‘프라하의 도살자’ 궤적으로 읽는 2차세계대전

    [장동석 평론가의 뉴스 품은 책] ‘프라하의 도살자’ 궤적으로 읽는 2차세계대전

    독일 베를린 무연고 묘지에 묻힌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묘가 파헤쳐졌다고 한다. 하이드리히는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를 창설하고, 유대인 학살 최종 시나리오인 ‘최종 해결 방안’을 입안한 인물이다. ‘프라하의 도살자’, ‘피에 젖은 사형집행인’으로 불린 잔혹한 인물이었다. 그는 1942년 체코 레지스탕스에 의해 암살됐다. 나치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암살단원 고향 마을 리디체를 완전히 파괴했다. 프랑스 작가 로랑 비네의 ‘HHhH’는 하이드리히 암살 작전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이다. 제목 ‘HHhH’는 ‘Himmlers Hirn heißt Heydrich’의 약자로, ‘힘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라는 뜻이다. 작가는 역사 기록을 꼼꼼히 찾아내 인물들을 재구성하면서 자신의 취재와 집필 과정을 작품에 녹여 내는 등 역사소설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 줬다. 나치 치하 체코의 암울한 현실과 이해득실을 따져 움직이는 사람들의 음침한 내면을 보여 주며 적나라한 인간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1942년 5월 27일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총독인 하이드리히가 테러를 당한다. 어렵사리 의식은 회복했지만 감염 때문에 일주일 만에 숨을 거둔다. 나치는 즉각 계엄령을 선포하고 암살범 색출에 나선다. 이내 체코 레지스탕스를 대부분 진압한다. ‘유인원 작전’으로 명명된 이 작전은 체코 망명정부가 잠입시킨 공수부대원 요제프 가브치크와 얀 쿠비시가 단행했다. 그들 역시 한 교회 지하실에서 격렬하게 저항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체코 레지스탕스 대원들의 행적과 내면을 따라가던 작가는 한편으로 하이드리히의 생애와 주변 인물, 즉 히틀러와 힘러, 괴링, 아이히만 등과의 접점을 자연스럽게 들춰낸다. 암살의 진상과 하이드리히 주변 이야기가 중구난방 교차하는 게 다소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집요하게 찾아낸 기록에 따른 내용으로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발로 뛰며 찾아낸 기록을 있는 그대로 기술해 당시 유럽 정세는 물론 제2차 세계대전의 막전막후 이야기를 제법 큰 흐름 속에서 읽어 낼 수도 있다. ‘HHhH’를 그저 흔한 팩션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다. 하이드리히의 묘가 헤집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HHhH’를 다시 꺼내 읽으며 연합군이 극우집단 나치 숭배를 막기 위해 묘지 표식을 지우도록 한 조치를 생각한다. 생각은 이어진다. 친일부역자들은 왜 여전히 그리고 버젓이 국립묘지 혹은 노른자 땅에 묻혀 있는가.
  • 파키스탄 법원, 무샤라프 전 대통령에게 사형 선고

    파키스탄 법원, 무샤라프 전 대통령에게 사형 선고

    2001년부터 2008년까지 파키스탄 대통령을 지낸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에 대해 사형이 선고됐다. 3인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이슬라마바드 특별법정 재판부는 2013년부터 그에게 제기된 국가전복 혐의에 대한 심리를 모두 마치고 17일 사형을 언도했다. 두 재판관은 유죄, 한 재판관은 무죄라고 판단해 결국 유죄가 인정됐다고 영국 BBC는 전했다.살만 나딤 정부 법률 대리인은 “페르베즈 무샤라프는 파키스탄 헌법 6조 반역 조항과 관련해 유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고 로이터 통신도 전했다. 그는 2016년부터 신병 치료 목적으로 법원의 허가를 받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머무르고 있어 이날 법정에는 나오지 않았다. 1999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뒤 2001년 대통령에 취임, 2007년 재임 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발동하고 헌정을 중단시켰는데 이것이 국가전복 혐의의 요체가 됐다. 그는 파키스탄 법정에 선 최초의 군부 지도자란 오명도 뒤집어썼다. 그는 이달 초 병원에서 촬영한 동영상 성명을 통해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가 근거 없다고 부인했다.  2007년 11월 헌정을 중단하고 비상계엄 통치를 시작했으나 퇴진 시위가 벌어지고 다음달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가 암살돼 정국이 걷잡을 수 없어지고 이듬해 총선 패배 이후 야권이 탄핵 심판을 추진하자 이를 피하기 위해 사임했다.  쿠데타를 일으켰던 1999년부터 정적이었던 나와즈 샤리프가 2013년 총리 직에 오르면서 반역죄로 그를 기소하겠다고 결정해 이듬해 3월 고도의 국가 전복 혐의로 기소했다. 무샤라프는 2007년 비상계엄령은 정부와 내각의 동의를 얻어 추진했다며 이런 기소 움직임은 정치적 동기로 오염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파키스탄 헌법에 따르면 고도의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 사형까지 언도할 수 있다. 군부 지도자로서 첫 국가 전복 혐의로 사형이 선고돼 국내 정치 혼란을 빌미로 늘 정권을 뒤엎던 나쁜 선례를 없애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고 방송은 이번 판결의 의미를 강조했다.  1998년 육군 참모총장에 오른 그는 이듬해 5월 카르길 전쟁을 둘러싸고 당시 총리였던 샤리프와 극심하게 갈등했다. 그가 쿠데타를 결심한 동기가 됐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뒤 숱한 암살 음모에도 살아남았다. 9·11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 호흡을 맞춰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한 일로도 유명하다. 2008년 사임 후 조국을 떠났다가 2013년 귀국해 총선에 나서려 했지만 법원이 출마를 막았다.  그는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농장과 군부대 휴양시설에서 시간을 보내다 두 차례 심리에 출두했을 뿐이었다. 2014년 4월 카라치에 옮겨간 뒤 2년 뒤 두바이로 떠날 때까지 머물렀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심재철, 서울역 회군의 주인공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심재철, 서울역 회군의 주인공

    9일 자유한국당 신임 원내대표에 선출된 5선의 심재철 의원은 한국당 내에서는 비주류로 분류돼왔다. 심 의원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큰 사건인 서울역 회군의 주인공으로 알려졌다. 1958년 광주광역시에서 출생한 심 의원은 광주제일고를 졸업한 호남토박이에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호남 운동권’으로 한국당 내부에서 주류에 끼지 못했다. 서울역 회군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 이후 광범위하게 일었던 민주화 운동인 ‘서울의 봄’의 종지부를 찍은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의 사망 이틀 이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서울의 봄’은 계엄령 이후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기까지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가리킨다.서울역 회군은 전 전 대통령의 쿠데타 발생 이틀 전에 서울역 앞에 전국대학생 10만여 명이 운집한 날이다. 심 의원은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시위 철수 결정을 내린 주역 가운데 한 명으로 분류되며 직접 학생 시위대 해산이란 회의 결과를 발표했다. 심 의원은 서울역 회군에 대해 “대학생들은 서울역 광장에 모여 전경들과 대치하고 있었으나, 시민들의 반응은 냉랭했다”며 “연락이 닿는 대로 모인 9개 대학 학생회장단 회의가 ‘난상토론 끝에 통제 불가능한 유혈사태가 날 수 있으며, 학생들의 시내 진출에 시민 반응을 보면 대국민 홍보가 좀 더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서울역 회군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2011년 저서 ‘운명’에서 광주 유혈 사태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운명’에서 “대학생들의 배신이 5·18에서 광주시민들로 하여금 큰 희생을 치르도록 했다”고 비판했으며, 독일 매체 기고문에서는 “서울역에 모인 대학생들이 철수를 결정하자, 광주의 민주화 요구가 더 불타올랐다”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은 서울역 회군 당시 서울역 현장에 있었으며, ‘(서울역 회군으로) 광주에 빚졌다’는 발언을 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서울역 회군으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피해가 커졌다는 문 대통령의 주장에 심 의원은 “역사왜곡이 대통령을 통해 반복되는 현실이 유감”이라며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10만 학생들의 열정을 ‘배신’으로 폄훼했다”고 반발하기도 했다. 서울역 회군에 참여했던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 사회부장 황광우씨는 서울신문과의 예전 인터뷰에서 “서울역 회군의 책임을 심재철 개인에게 묻는 것은 가혹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이어 “당시 학생운동의 의사결정은 (총학생회장이 아니라) 지하그룹에서 나왔다”고 설명했다. 심 의원은 이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내란 음모란 전두환 정권의 조작 사건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된다. 문희상 국회의장,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같은 사건으로 투옥되어 9일 문 의장은 심 의원을 ‘동지’라고 불렀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정치검찰’ 입맛대로 수사, 공수처 설치” 촛불…보수는 맞불 집회

    “‘정치검찰’ 입맛대로 수사, 공수처 설치” 촛불…보수는 맞불 집회

    “조국 수사 소득 없으니 유재수, 황운하 꺼내…총선 앞두고 정치 검찰 입맛 따라 수사”1개월만 검찰개혁 시민연대 여의대로 채워반대편선 보수 단체, 공수처 반대 ‘맞불’ 집회“공수처는 대통령 직할기구, 못 막으면 모든 권력 통제…공수처법 당장 폐기해야”광화문에선 민중대회 “노동법 개악 반대”횃불 사용·신발 투척 등 돌발행위도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사퇴 이후 사그라들었던 검찰 개혁 찬성 집회가 1개월 만에 여의도에서 다시 열렸다. 이들은 촛불을 들고 검찰 개혁과 함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를 강력하게 촉구했다. 이에 보수단체들은 국회 앞과 광화문광장에서 공수처 설치에 반대하는 맞불 집회를 열었다. 30일 서울 주말 도심은 노동법 ‘개악’에 반대하는 전국민중대회까지 겹치면서 곳곳에서 혼잡을 빚었다. ‘검찰개혁 사법적폐청산 범국민시민연대(이하 시민연대)’는 이날 오후 5시부터 서울 영등포구 국회 인근 여의대로에서 ‘검찰개혁, 공수처 설치, 내란음모 계엄령문건 특검 촉구를 위한 제13차 촛불문화제’를 열고 국회에 공수처 설치와 검찰개혁 관련 법안 처리를 촉구했다. 이들은 집회 후 자유한국당 당사까지 행진하기도 했다. 이번 집회는 지난 2일 12차 집회가 열린지 약 1개월 만이다. 시민연대는 사전에 10만명이 참석할 것이라고 신고했다. 이날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국회는 응답하라’, ‘공수처 설치하라’, ‘검찰개혁 국민총궐기’ 등이 써진 팻말과 노란색 풍선을 들고 “공수처 설치하라”, “자한당(자유한국당을 다르게 일컫는 표현) 해체하라” 등을 외쳤다.오후 3시부터 검찰 개혁을 요구하는 참가자들은 여의대로로 몰렸고 오후 4시에는 여의도공원 10번 출입구부터 서울교 교차로까지 여의대로 국회 방향 전차로(5개) 약 1.2㎞를 가득 메웠다. 시민연대는 “자유한국당 등은 민생법안 220여 건을 포기하면서까지 정쟁만을 일삼고 있다”면서 “민중 총궐기를 통해 이들 법안과 공수처 설치를 포함한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통과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발언자로 나선 김남국 변호사는 “검찰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을 억지로 쥐어짜도 별 소득이 없자 이제 오래 묵혀둔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과 황운하 대전지방경찰청장 수사를 꺼내 들고 있다”면서 “총선이 불과 4개월여 남으니 마치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 먹듯이 입맛 따라 수사를 벌이는 정치검찰의 행태”라고 비판했다. 김 변호사는 “죄가 있는 사람은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서도 “하지만 수사가 끝나기 전에 이미 ‘권력형 게이트’, ‘친문재인 게이트’라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그러면서 “유 전 부시장과 황 청장의 모든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도 이는 개인 비리에 불과하지 결코 권력을 사용해 이권을 챙기는 권력형 비리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김민웅 경희대 교수는 “정치검찰이 조 전 장관 가족에 이어 청와대까지 겨냥하고 있다”면서 “이들은 단순히 개혁에 저항하는 게 아니라 총선·대선 결과를 자신들이 결정해 국민의 상전이 되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촛불이나 휴대전화 플래시를 켜서 흔들고 부부젤라·호루라기를 불며 발언과 공연에 호응을 보냈다. 보수성향 단체들도 이날 서울 도심 곳곳에서 집회를 열고 문재인 정부를 규탄했다. 보수 성향 단체인 자유연대는 이날 오후 여의도 국회 앞에서 공수처 설치 반대, 문재인 대통령 탄핵, 선거법 개정안 폐지를 주장하는 ‘맞불 집회’를 열고 더불어민주당사까지 행진했다.김성진 사회정의를 바라는 전국교수모임 공동대표는 “법에 고위공직자 비리 수사를 전담할 특별감찰관제도가 있지만 3년째 공석”이라면서 “여당이 공수처 법안을 밀어붙인다. 공수처법은 당장 폐기돼야 한다”고 비판했다. 김주성 전 교원대 총장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따라서 삼권분립으로 국가가 운영된다”면서 “공수처는 대통령 직할 기구이기 때문에 공수처를 막지 못하면 모든 권력이 통제될 것”이라고 공수처 설치를 비판했다. 또한 연동형비례대표제를 언급하며 “사실 비례대표제 자체가 문제다. 비례대표제는 사람이 아니라 당을 뽑기 때문에 당 대표가 정권을 쥐게 된다”면서 “이는 사회주의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문재인 하야 범국민투쟁운동본부’도 오후 동화면세점 앞 3개 차로에서 집회한 후 청와대 방면으로 이동해 밤샘 집회를 이어갈 예정이다.이날 오후 광화문광장에서는 민주노총·한국진보연대·빈민해방실천연대 등 50여개 시민사회 단체로 구성된 민중공동행동이 ‘2019 전국민중대회’를 열고 노동법 개정 등의 정책을 추진하는 문재인 정부와 정치권을 규탄했다. 이 집회 도중 일부 참가자가 사전에 신고되지 않은 횃불을 사용하고, 미국 대사관을 향해 신발 여러 개를 던지는 돌발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종로경찰서 관계자는 “소화기로 횃불을 끄고 그물망을 설치해 신발 던지기를 막았다”면서 “주최자와 불법 행위자를 철저히 수사해 사법처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밖에도 광화문·시청·서울역 인근에서는 ‘석방운동본부’ 등 10여개 단체가 서울역·대한문 주변에서 집회한 후 오후 도심 곳곳으로 행진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씨줄날줄] 도쿄, 광주, 베이징, 홍콩/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도쿄, 광주, 베이징, 홍콩/박록삼 논설위원

    시내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서도 ‘드르륵’ 총소리가 들렸다. 헬기에서는 전단을 살포했다. ‘폭도들이 무장한 채 폭동을 벌이고 있다. 계엄군은 자위권을 갖고 있다’ 등속의 내용을 담았다. 그 시간 광주 도청 앞 상무관 바닥에는 형체도, 신원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피칠갑 된 시신들이 즐비했다. 또 11공수여단은 송암동에서 민간인을 무차별 사살한 뒤 인근 산에 암매장했다. 죽음의 공포가 지배하던 1980년 5월의 광주는 바깥으로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었다.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이 신군부의 학살극을 멈춰 주길 바랐지만, 미국은 침묵하고 방관했을 뿐이었다. 40년 전 광주는 한국 안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철저히 고립됐다. 꼬박 50년 전 일본 도쿄도 그랬다. 1968년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 줄여서 ‘전공투’라고 부르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수만명이 매일같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출발은 니혼대학의 재단 비리였다. 학생시위는 과격해졌고, 일왕의 참수를 공공연히 얘기하고, 반제국주의·반정부를 주장하는 사회주의 혁명의 움직임으로 확산됐다. 쇠파이프, 화염병에 사제폭탄까지 나왔다. 도쿄대를 점거한 학생들은 1969년 1월 8500명의 기동대가 진압작전을 개시해 72시간에 걸친 공방 끝에 모두 진압됐다. 전공투는 과격성과 폭력성으로 인해 스스로 고립을 자초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1989년 6월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앞은 어땠는가. 중국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중국 정부는 계엄령을 내렸고, 군과 탱크를 동원했다. 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875명, 부상자 1만 4550명이었고 군인은 56명이 사망, 7525명이 부상당했다. 비공식 집계로는 1만명이 넘게 사망했다는 주장들도 있다. 그 유명한 사진을 떠올리며 탱크 앞에 홀로 섰던 그 시위자는 그 후로 어떻게 됐을까를 상상한다. 2019년 11월 홍콩 이공대의 상황도 심상치 않다. 나흘째 전기와 물도 끊긴 채 경찰에 봉쇄된 이공대 안에는 지난 17~18일 이틀 동안 600명을 체포했지만, 아직도 200명 가까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이 진압에 개입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 있었던 희생보다 더 끔찍한 살상이 벌어질 수 있음을 뜻한다. 하수구를 통해 탈출을 시도하려던 이들도 있었다. 화염병, 화살 등으로 저항하고 있다지만, 미성년인 10대 청소년도 다수 포함된 시위대가 느낄 고립무원의 공포와 시시각각 조여 오는 불안감은 짐작만 할 뿐이다. 홍콩은 제2의 광주도, 제2의 도쿄도, 제2의 베이징도 돼선 안 된다. 피의 역사로 배울 교훈은 이미 충분하다. 철저히 인도주의적인 국제사회의 연대가 절실하다. youngtan@seoul.co.kr
  • ‘시위대 최후 보루’ 홍콩 이공대 뚫려… 법원은 “복면금지법 위헌”

    ‘시위대 최후 보루’ 홍콩 이공대 뚫려… 법원은 “복면금지법 위헌”

    새벽에 물대포·음향대포 쏘며 교정 진입 시위대 활·화염병 저항… 400명 이상 체포 홍콩의 대법, 마스크 시위대 체포에 제동 中은 홍콩 인접 광저우서 테러 진압훈련 시진핑, 순방 뒤 귀국… 강경 진압 가능성홍콩 시위대와 경찰이 일촉즉발의 대치를 벌이는 가운데 18일 홍콩 경찰이 시위대의 ‘마지막 보루’인 홍콩 이공대로 진입했다. 400명이 넘는 대학생이 체포됐다. 반면 홍콩 고등법원은 시위대의 마스크 착용을 금지한 ‘복면금지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홍콩 정부로서는 시위 참가자의 복면 착용을 단속할 법적 근거를 잃어버렸다. 이날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홍콩 경찰은 새벽 5시 30분부터 이공대 교정에 들어가 시위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는 이공대 밖으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경찰이 교정을 전면 봉쇄해 교정 안으로 되돌아갔다. 이들은 경찰에 맞서 화염병을 던지고 화살을 쏘며 저항했다. 수십개의 가스통을 터뜨리며 건물에 불을 질러 교정 곳곳에서 폭발음이 퍼졌다. 지난 8일 홍콩과기대 2학년 차우츠록이 경찰 진압 과정에서 추락사하자 이에 분노한 대학생들이 홍콩의 거의 모든 대학을 점거했다. 경찰 진압이 본격화되면서 대부분 학교에서 시위가 마무리됐지만 이공대는 600명 정도가 남아 있었다. 경찰은 물대포차를 동원해 파란색 물줄기를 쏘고 ‘음향 대포’로 불리는 장거리음향장치도 선보였다. 최대 500m 거리에서 150㏈ 안팎의 음파를 쏴 고막이 찢어질 듯한 아픔과 구토, 어지러움 등을 느끼게 한다. 경찰은 이날 이공대 시위대를 포함해 홍콩 전역에서 400여명을 체포했다. 시위대 측은 “교내에 먹을 것이 떨어졌고 부상자도 속출하고 있다”며 ‘인도주의적 위기’를 호소했다고 SCMP는 전했다.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대법원에 해당하는 홍콩 고등법원은 야당 의원 25명이 “복면금지법이 홍콩의 ‘기본법’에 위배된다”며 제기한 소송에서 이들의 손을 들어 줬다고 명보가 이날 보도했다. 홍콩 정부가 지난달 5일부터 시행 중인 복면금지법은 공공 집회에서 마스크나 가면 착용을 금지한다. 야당 의원들은 “복면금지법 시행의 근거가 된 ‘긴급정황규례조례’(긴급법)는 입법회(우리의 국회)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기본법에 어긋난다”고 주장해 왔다. 우리의 계엄령에 해당하는 긴급법은 비상 상황 시 행정장관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도록 규정한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은 긴급법에 근거해 복면금지법을 발동했지만 법원의 위헌 판단으로 더이상 시위대의 복면 착용을 막을 수 없게 됐다. 한편 중국 당국은 지난 16일 홍콩 주둔 인민해방군을 기지 밖으로 보내 청소 활동을 하게 한 데 이어 다음날에는 홍콩과 인접한 광저우에서 대규모 테러 진압훈련을 실시했다. 이날 글로벌타임스에 따르면 광저우 공안국은 전날 1000여명이 참가한 대규모 테러 대비 훈련을 벌였다. 광저우 공안국이 공개한 사진에는 테러범 진압과 폭발물 처리 등의 상황이 담겨 있다. 홍콩 시위대를 향한 경고성 행사로 풀이된다. 특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해외 순방을 마치고 17일 베이징으로 돌아옴에 따라 홍콩에 대한 대응 수위도 한층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 매체들은 시 주석이 브라질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홍콩 폭력을 끝내야 한다”고 말한 대목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홍콩 사태 무력 개입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홍콩시위 격화에 한국 대만 등 유학생 귀국 러시

    홍콩시위 격화에 한국 대만 등 유학생 귀국 러시

    홍콩에서 지난 6월 초 시작된 ‘범죄인인도법안’(송환법) 반대 시위가 격화하자 미국과 영국 등 전 세계에서 온 학생들이 ‘홍콩 탈출’에 나서고 있다. 한국 유학생들도 귀국길을 서두르고 있다. 14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등에 따르면 홍콩 내 대학들이 사실상 ‘휴교령’을 선언하면서 홍콩에 있는 유학생 상당수가 귀국길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홍콩 경찰은 전날 중문대에 있던 중국 본토 출신 학생 80여명을 대피시켰다. 지난 12일 이 곳에서는 경찰이 최루탄과 물대포 등을 동원해 진압에 나서고 학생들은 화염병과 불 붙인 화살, 대형 새총 등으로 맞서 ‘전쟁터’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선전시 지부는 홍콩을 빠져나오려는 중국 본토 학생들을 위해 무료로 숙박시설을 제공한다. 이미 상당수 학생들이 홍콩을 빠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대만 정부도 자국 항공기를 동원해 전날 밤 대만 유학생 126명을 홍콩에서 탈출시켰다. 자유시보와 중앙통신사 등은 대만 본토담당 기구인 대륙위원회를 인용해 홍콩에서 유학 중인 대만 유학생 1021명 가운데 284명이 우선 귀국할 것이라고 전했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전날 페이스북에 “홍콩 경찰의 대학 내 진입을 보면서 이전의 ‘백색테러’(계엄령·1949~1987) 시대를 떠올렸다”며 “대만이 어렵게 빠져나온 어둠 속으로 홍콩이 들어갔다”며 안타까운 심경을 밝혔다. 미 대학들도 교환학생으로 홍콩에 온 자국 학생을 본국으로 소환하고 있다. 영국과 캐나다 등 다른 나라 학생들도 귀국길을 서두르고 있다. 현재 홍콩 내 8개 주요 대학에는 1만 8000여명의 유학생들이 있다. 한국인은 홍콩대과 홍콩과기대, 중문대 등을 중심으로 1600여명이 유학 중이다. 주홍콩 한국총영사관은 차량을 동원해 중문대 기숙사에서 40명가량 한인 유학생들이 ‘탈출’할 수 있게 도왔다. 총영사관 관계자는 “중문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한인 유학생들을 버스를 동원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게 이동시켰다”면서 “이 가운데 30명가량은 곧바로 공항으로 향해 귀국길에 올랐다”고 전했다. 그는 “자녀의 안전을 걱정하는 유학생 학부모들의 전화가 쏟아져 총영사관의 다른 업무를 보지 못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경찰 조준사격에 쓰러진 홍콩 시위대… 친중 남성 몸엔 불 붙기도

    경찰 조준사격에 쓰러진 홍콩 시위대… 친중 남성 몸엔 불 붙기도

    첫 사망자 추모 시위서 세 번째 실탄 발사 위협상황 아닌데도 쏴 정당성 얻기 어려워 복면 남성, 말다툼 중 인화성 액체 퍼부어 전문가 “국제사회, 관심·연대 강화해야”홍콩 민주화 시위 참가자들이 11일 또다시 경찰이 쏜 실탄을 맞고 쓰러졌다. 홍콩의 정체성에 이견을 보인 남성의 몸에 불을 지르는 사건도 벌어졌다. 시위 6개월째를 맞은 홍콩 시위대의 반(反)중국 정서와 맞물려 경찰의 진압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등에 따르면 경찰의 실탄 사격은 이날 오전 7시 20분쯤 시위에서 처음 사망한 홍콩과기대생 차우츠록(21)을 추모하는 시위 도중 일어났다. 당시 사건을 촬영한 영상을 보면 경찰이 시위자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복면을 쓰고 다가온 젊은 시위자를 향해 바로 눈앞에서 실탄을 쐈고, 이 시위자는 그대로 쓰러졌다. 이후 경찰은 다가오는 또 다른 시위자를 향해 실탄을 쏘는 등 2명에게 모두 실탄 3발을 발사했고, 이들이 총을 맞고 쓰러지자 무력으로 제압했다. 실탄을 맞은 이들은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이 가운데 1명은 오른쪽 신장과 간 부근에 총알이 박혀 병원에서 긴급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총알을 적출하지 못해 이날 낮 12시 현재 생명이 위독한 상태다. 이 청년의 나이도 차우츠록과 같은 21세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당시 시위자가 경찰을 위협하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실탄이 발사돼 정당방위 차원에서 실탄을 쐈다는 경찰의 기존 해명도 정당성을 얻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홍콩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직접 실탄을 사격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지난 8월 말 경고성 사격에 실탄을 처음 사용한 경찰은 신중국 건국 70주년을 맞은 10월 1일 반중국 시위에 참여한 18세 남학생을 향해 처음으로 실탄을 사격했다. 이어 홍콩 당국이 ‘복면금지법’을 실시한 같은 달 4일 14세 소년이 경찰이 쏜 실탄에 허벅지를 맞고 병원으로 이송됐다. 실탄 사격이 시위대의 반중국 정서가 한층 높아진 상황과 맞물려 일어난 점도 주목된다. 앞서 신중국 건국 70주년과 사실상 계엄령인 복면금지법 실시 등과 맞물려 진압 수위를 높인 경찰이 시민들을 향해 위험천만한 실탄을 직접 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이날 복면을 한 남성이 홍콩의 정체성 문제로 다투던 친중 성향의 남성에게 인화성 액체를 퍼붓고 그의 몸에 불을 질렀다고 AFP, AP통신이 전했다. 이 남성은 전신 2도의 화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지난 5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난 뒤 시위 진압 수위가 더욱 강경해진 것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된다. 상하이 국제수입박람회에서 홍콩 민주화 시위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람 장관을 만난 시 주석은 시위대의 폭력행위에 대한 엄정한 법 집행을 주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3일 뒤인 8일 홍콩 시위에서 첫 사망자가 나온 데 이어 다시 3일 뒤 경찰이 시위대의 가슴을 향해 직접 실탄을 쏘는 등 무차별적인 진압이 이뤄지고 있다.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정치학 교수는 “시위가 과격해지면 홍콩 사태는 더욱 해결이 어려워지고, 중국이 강압적 정책을 펼칠 가능성이 커진다”며 “지금은 시위대를 진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홍콩 정부가 시위대가 요구하는 진상조사위원회 등을 수용한다면 현재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또 국제사회가 홍콩 사태에 대한 관심과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전광훈 “성령 들었다” 문 대통령 하야 촉구…헌금함 또 등장

    전광훈 “성령 들었다” 문 대통령 하야 촉구…헌금함 또 등장

    ‘조국 사퇴’ 집회서 헌금받은 혐의로 고발당해경찰 조사에 불응…“문 대통령 먼저 조사하라” 문재인 정부가 임기 반환점을 맞은 9일 보수 성향 단체들이 도심에서 집회를 열고 정권 퇴진을 외쳤다. 특히 전광훈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은 “하나님의 성령을 들었다”고 주장하며 문재인 대통령 하야를 촉구했다. ‘문재인 하야 범국민투쟁본부’(투쟁본부)는 이날 정오쯤부터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집회 참가자들은 광화문광장과 세종대로 청와대방면 차로에 모여 대통령과 정부가 북한에 치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전광훈 목사는 연단에 올라 예배를 진행하면서 “4개월 전 하나님의 성령을 들었다”고 주장하면서 문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고 외쳤다. 지난달 말 군인권센터가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 계엄령 준비 문건을 공개한 것과 관련해 “인권의 이름으로 대한민국 군대를 우습게 만들고 있다”며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도 비난했다. 주최 측은 이날 집회에서도 헌금함을 설치하고 참가자들에게 헌금 명목으로 돈을 받았다.전광훈 회장은 정치적 성격의 집회를 열면서 종교 행사라는 명목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돈을 모았다는 혐의(기부금품법·정치자금법 위반)로 경찰에 고발당한 상태다. 그는 지난달 3일과 9일 열린 ‘조국 사퇴’ 집회에서 참가자들에게 헌금함을 돌려 모금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개신교계 시민사회단체 ‘평화나무’는 그가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집회를 열면서도 종교행사를 빙자해 헌금을 걷고 있다고 문제 삼았다. 피고발인 신분인 그는 서울 종로경찰서의 소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경찰은 지난 7일 전 회장을 조사할 예정이었지만 그는 “한기총이 내란선동 혐의로 고발한 문 대통령을 먼저 조사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조사에 협조하지 않고 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서울포토] 군인권센터, 계엄령 수사 관련 긴급 기자회견

    [서울포토] 군인권센터, 계엄령 수사 관련 긴급 기자회견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이 6일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 교육장에서 계엄령 수사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9. 11. 06.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 “박근혜 청와대, 계엄령 문건 관여 정황 추가 확인”

    군인권센터가 “박근혜 정부와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가 2016년 말 촛불집회를 무력 진압하려 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라며 관련 문건을 추가로 공개했다. 센터는 4일 보도자료를 내고 기무사가 2016년 11월부터 국회가 탄핵안을 가결한 그해 12월 9일까지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민정수석, 부속실, 국방부 장관 등에게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상황 보고 문서 목록을 입수해 발표했다. 센터가 공개한 목록에는 ‘현 상황 보고서’, ‘현 상황 관련 기무사 활동 계획’, ‘현 상황 관련 예비역·안보단체 활동’, ‘주요 보수단체 최근 활동사항’, ‘탄핵안 가결 시 군 조치사항 검토’ 등 총 11건이 포함돼 있다. 센터는 “이 목록을 보면 박근혜 정부와 기무사는 촛불집회 초기부터 정상적인 정권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무력 진압을 위한 군 투입을 논의한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현 상황 관련 예비역·안보단체 활동’ 등의 문서는 보수단체를 활용해 여론 조작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이어 “특히 ‘탄핵안 가결 시 군 조치사항 검토’가 보고된 2016년 12월 9일은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날로,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이 직접 청와대 대통령 관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독대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센터는 “계속되는 제보로 확인된 일련의 정황은 계엄령 문건 작성 지시 과정에 박근혜 정권 인사들이 폭넓게 개입됐을 가능성에 무게를 더한다”며 “해당 문건 11건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정보공개 청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유시민 “검찰에겐 계엄령 문건이 표창장보다 못한 것”

    유시민 “검찰에겐 계엄령 문건이 표창장보다 못한 것”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2일 “검찰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80대 노모를 소환 조사하고 딸을 기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조국 일가족의 혐의점에 비해 매우 잔인하다”고 말했다. 유 이사장은 이날 노무현재단 전북지역위원회가 창립 8주년을 기념해 전주교대에서 연 시민학교 대담에서 이같이 말했다. 전날 유튜브 방송 ‘알릴레오’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발언으로 검찰 수사를 비판했다. 유 이사장은 군·검찰 합동수사단이 불기소 처분한 ‘계엄령 문건’ 수사에 대해 “검찰이 보기에는 사립학교 총장님 표창장보다 훨씬 못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군 인권센터가 지난달 24일 공개한 불기소 이유통지서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유 이사장은 “검찰이 자기들 수사를 통해서 사실로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을 정리했는데, 이게 바로 범죄사실”이라며 “이거를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이 도망가버렸다고 해서 기소 중지하고, 나머지 모든 관련자도 참고인 중지하고 올스톱시켜버렸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합동수사단은 지난해 11월 미국으로 도피한 조현천 전 사령관에 대해 소재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소중지 처분했다. 함께 고발된 박근혜 전 대통령과 황교안 당시 대통령권한대행, 김관진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한민구 전 국방부 장관 등 8명에게는 참고인중지 처분이 내려졌다.유 이사장은 “조선 시대로 가면 의금부에서 이런 수준의 역모를 이만큼 ‘무르게’ 처리한 전례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조국 전 장관 일가에 대한 검찰수사와 거듭 비교하면서 “검찰은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이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는데 날짜가 언제고, 편의를 봐준 항공사 직원을 체포하고 했어야지”라고 꼬집었다.  언론개혁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유 이사장은 “정부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스스로 바뀌어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이 없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내다봤다. 유 이사장은 책 집필을 위해 2주간 유럽 출장을 떠난다. 이에 따라 2주간 유튜브 방송 ‘유시민의 알릴레오’는 유 이사장 대신 조수진 변호사가 대신 본편방송을 진행한다. 유 이사장은 “‘유럽도시기행’ 1권을 냈고 2권을 작업 중인데 ‘조국 전쟁’에 종군하느라 진도가 참 안나간다”며 “내년 봄까지는 2권을 마무리해야 해서 앞으로 2주간 조수진 변호사가 본편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광화문에선 태극기, 여의도에선 촛불 들고 주말 집회 이었다

    광화문에선 태극기, 여의도에선 촛불 들고 주말 집회 이었다

    11월 첫 주말에도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집회와 문재인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가 여의도와 서초동, 광화문 광장에서 각각 열렸다. ‘검찰개혁 사법적폐청산 범국민시민연대(이하 시민연대)’는 이날 오후 5시부터 국회 인근 영등포구 여의대로에서 ‘사법적폐청산을 위한 제12차 검찰개혁 촛불문화제’를 열고 국회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등 검찰개혁 관련 법안 처리를 요구했다. 주최 측은 “이번 촛불문화제는 검찰개혁, 공수처 설치, 검·경 수사권 조정 등 신속처리대상 안건의 입법 촉구와 최근 문제가 되는 ‘내란음모 계엄령 문건 특검 촉구’를 위한 국민의 명령”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집회 참가자들은 여의도공원 11번 출입구에서 서울교 교차로까지 여의대로를 가득 채웠다. 집회가 끝난 직후 ‘내란음모 계엄령 문건 특검하라’, ‘응답하라 국회’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자유한국당 당사까지 행진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루리웹’ 회원들로 구성된 ‘북유게사람들’도 이날 오후 6시부터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부근에서 검찰 개혁, 공수처 설치 등을 요구하는 시민참여 문화제를 진행했다.한편 전광훈 목사가 주도하는 대한민국바로세우기국민운동본부(국민운동본부)는 이날 오후 1시부터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문재인 퇴진 국민대회’를 열고 문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세종대로 광화문 방면 6개 차선과 광화문 남측 광장,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 등에 모였다. 이들은 집회 후 “문재인 하야”, “공수처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태극기를 든 채 청와대 방면으로 행진했다. 우리공화당과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 등 단체들도 서울역과 대한문 앞 등 도심 곳곳에서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대학생 단체 ‘공정추진위원회’는 오후 6시부터 광화문역 앞에서 ‘우리가 원하는 공정한 대한민국’ 집회를 진행했다. 또 자유연대, 나라지킴이 고교연합 등은 국회의사당 대로에서 ‘맞불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공수처 반대, 문재인 퇴진” 등의 구호를 외쳤다. 곽혜진 기자 demian@seoul.co.kr
  • 노영민, 한국당 ‘벌거벗은 임금님’ 영상에 “국가원수에 예의 지켜야”

    노영민, 한국당 ‘벌거벗은 임금님’ 영상에 “국가원수에 예의 지켜야”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은 1일 자유한국당이 문재인 대통령을 ‘벌거벗은 임금님’에 빗대 풍자한 동영상을 제작한 것과 관련, “국가 원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노 실장은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 애니메이션에 대해 한국당이 사과할 뜻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더불어민주당 박경미 의원 질의에 “안타까운 일이다. 정치에 있어서도 품격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다”며 이같이 말했다. 노 실장은 국군기무사령부 계엄령 문건 의혹의 핵심 인사인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 송환 문제와 관련해서는 “송환을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다”며 “안일하게 보고 있지 않고 아주 심각하게 보고 있다”고 했다. 최근 군 인권센터가 추가 공개한 계엄령 문건에 ‘NSC(국가안전보장회의)를 중심으로 정부부처 내 군 개입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라는 문구가 등장한 것에 대해 노 실장은 “아마 정부 부처 내 권력의 핵심인 ‘이너서클’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것을 표현한 것 같다”고 했다. 이근홍 기자 lkh2011@seoul.co.kr
  • 군인권센터 “기무사, 한민구 지시 전 계엄검토… 檢, 부실수사”

    군인권센터 “기무사, 한민구 지시 전 계엄검토… 檢, 부실수사”

    제보 인용해 황교안 체제 靑개입 의혹 제기“조현천, 계엄령 보고 지시한 날 김관진 만나검찰, 진술 알고도 참고인 중지 처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가 작성한 ‘계엄령 문건’ 관련 의혹을 주장해 온 시민단체 군인권센터가 검찰의 부실 수사 의혹을 추가로 제기했다. 센터는 29일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 교육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은 한민구 전 장관으로부터 계엄령 검토 지시를 받기 이전부터 문건 작성을 지시했다”면서 “검찰은 이런 진술을 확보하고도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센터는 제보 내용을 인용해 “조 전 사령관은 한 전 장관을 만나기 일주일 전인 2017년 2월 10일 소강원 기무사 3처장을 불러 계엄령 문건 보고와 수기 작성 등을 지시했고, 같은 날 청와대에서 김관진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만났다”며 “조 전 사령관이 김 전 실장을 만난 시기가 소강원 3처장에게 계엄령 보고를 요구한 날짜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센터는 이러한 제보 내용을 근거로 “계엄령 문건의 발단은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의 청와대에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센터에 따르면 검찰은 “2017년 2월 17일 조현천을 만나 전반적인 군병력 출동 문제에 대해 관련 법령이 어떻게 돼 있는지 검토해 보라고 지시해 기무사에서 계엄문건을 만들게 됐다”는 한 전 장관의 진술을 근거로 한 전 장관을 불기소하면서 참고인 중지 처분했다. 센터는 “참고인 중지 처분의 근거가 된 진술이 사실과 다르다”며 “검찰은 당시 ‘기무사 계엄령 문건 합동수사단’ 수사에서 복수의 참고인들로부터 이런 진술을 확보했고 당시 한 전 장관이 사실관계와 다른 진술을 했음에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불기소 처분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제보가 사실이라면 검찰은 조 전 사령관 없이도 사건 전모를 밝혀낼 수 있는 상황에서 수사를 중단해 주요 피의자들을 1년 이상 방치하고 증거를 인멸할 시간을 준 셈”이라며 “검찰은 사실관계를 해명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합수단은 지난해 11월 계엄령 문건 수사와 관련해 내란음모 피의자인 조 전 사령관을 기소중지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 황교안 전 대통령 권한대행,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한 전 장관 등을 참고인 중지 처분했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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