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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호영 “사실상 코로나 계엄령”... 윤건영 “개천절 집회 세력만 보이나”

    주호영 “사실상 코로나 계엄령”... 윤건영 “개천절 집회 세력만 보이나”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가 정부의 개천절 집회 봉쇄를 비판한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이 이와 관련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고통받는 국민은 보이지 않고 개천절 집회를 주장하는 그분들만 보이시나”라고 비판했다. 이날 윤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추석 민심을 현장에서 보고 들었을 제1야당 대표의 추석 직후 첫 메시지가 놀랍다 못해 충격적”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주 원내대표께서 개천절집회를 막은 것에 대해 시비를 건다”며 “평화로운 집회를 폭력적인 방식으로 차단하려 했던 ‘명박산성’과, 군사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평범한 일상까지 제한했던 ‘계엄령’의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했다. 이어 “두 가지 모두 국민의힘의 ‘조상’격인 분들이 하셨던 일들인데 주 원내대표는 그걸 잊었나 보다”라고 덧붙였다. 윤 의원은 “‘명박산성’이 막은 것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어제 설치된 광장의 차벽은 코로나19를 막은 것이다. 분명히 다르다”며 “8·15 광화문 집회로부터 불과 두 달이 채 안 되었는데, 벌써 잊었나”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책임 있는 야당이라면, 최소한 개천절 집회는 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과격한 지지 세력의 눈치만 볼 것이 아니라 말이다”라며 “억지는 그만 쓰시고, 국민의 걱정에서부터 시작하자”고 말했다.한편, 이날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기자간담회에 참석, 개천절 집회를 막기 위한 정부의 광화문광장 봉쇄 조치와 관련해 “사실상 코로나 계엄령이 선포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주 원내대표는 “경찰버스 300대로 광화문에 산성을 쌓아 집회를 원천 봉쇄했다”며 “문재인 정권은 무엇이 그렇게 두렵나. 언제부터 경찰이 나서서 방역까지 떠맡는 나라가 됐나. 의료보건 방역은 오간데 없고 정치 경찰 방역 국가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 계몽군주는 소총 휘발유로 코로나 방역하고, 우리 대통령은 경찰버스 공권력으로 코로나 방역을 했다”며 “세계 어느 선진국에서 방역을 이유로 막대한 공권력으로 시민의 헌법상 자유를 억압한 나라가 있나”고 비판했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개천절집회 없었다...차량시위·소규모 기자회견만(종합)

    개천절집회 없었다...차량시위·소규모 기자회견만(종합)

    개천절인 10월 3일 서울 시내 곳곳에서 ‘드라이브 스루’ 차량시위가 예정대로 진행됐다. 집회 통제를 놓고 하루 전까지 보수단체들의 행정소송과 비판 성명이 이어지면서 마찰도 예상됐으나, 기자회견과 차량시위 모두 비교적 큰 충돌은 없었다. 경찰은 보수단체들이 신고한 10대 미만의 차량시위에 모두 금지통고를 내렸으나, 이들 단체가 낸 집행정지 신청 2건에 대해 서울행정법원이 일부 인용 결정을 내리면서 집회 2건은 까다로운 조건 속에 ‘차량 9대’ 규모로 허용됐다. 애국순찰팀, 조국·추미애 자택까지 진행 보수성향 단체 ‘애국순찰팀’ 관계자들이 모는 차량 9대는 이날 오전 경기도청을 출발해 정오쯤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수감 중인 의왕시 서울구치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방역조치 등을 규탄했다. 방송차를 비롯한 차량 9대에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을 비판하는 내용의 종이가 붙었다. 이들은 이어 오후 2시쯤 우면산터널을 통해 서울 서초구로 진입했다. 경찰은 터널 입구 갓길에 시위차량을 잠시 세우고 탑승 인원과 번호판 등이 미리 신고된 내역과 일치하는지 확인했다. 행렬 앞뒤로는 경찰과 언론사 차량이 동행했다. 차량시위 참가자들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방배동 자택 부근을 지나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사는 광진구 구의동 아파트 앞까지 2시간여에 걸쳐 차량시위를 벌인 뒤 해산했다. 참가자들은 당초 추 장관의 자택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 계획이었으나 집회신고 시간이 정해져 있어 실행하지는 못했다. 시위 차량들은 정해진 경로로 이동하면 때때로 서행을 했고 여러 차례 경적을 울렸다. 조 전 장관과 추 장관 자택 인근에는 시민들과 유튜버, 취재진 등 수십명이 몰리면서 잠시 소란을 빚기도 했다. 새한국도 강동서 차량시위…김문수 “인생 최고의 계엄령 상태 같아” 다른 보수단체 ‘새로운 한국을 위한 국민행동’(새한국)도 이날 오후 2시쯤부터 2시간여에 걸쳐 강동구 굽은다리역에서 강동 공영차고지에 이르는 경로로 차량시위를 했다. 새한국은 시위 전 기자회견을 할 계획이었으나 법원이 이를 제한해 인쇄된 성명서를 배포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들이 출발한 강동구민회관 앞 도로는 시위차와 경찰차, 취재차량 등이 몰리면서 한때 북새통을 이뤘다. 시위에 동참한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궁여지책으로 차량시위를 하긴 했지만, 제약이 너무 많아 시위라기보다는 고행에 가깝다”며 “여태 살면서 계엄령도 겪고 긴급조치도 겪어봤지만 제 인생 최고 계엄령 상태 같다”고 비판했다. 시위 차량을 따라나선 경찰은 참가자 1명이 운행 도중 창문을 내리자 경적을 울려 경고했다. 통행 차량이 많은 번화가 일대에서는 시위차량 행렬 사이로 일반 차가 끼어들어도 제지를 하지 못해 혼선을 빚기도 했다. 8·15비대위 기자회견 “문 대통령 코로나 이용해 자유 박탈”‘8·15참가자시민비대위’(8·15비대위)는 이날 오후 1시30분 서울 종로구 광화문역 1번 출구 앞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닌 북한의 남쪽 연락책, 문재인은 즉각 하야하라’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이날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옆 교보문고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광장 주변에 경찰 펜스와 차벽이 설치돼 진입이 어려워지자 광화문역 1번 출구로 장소를 변경했다.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담임목사의 옥중 입장문을 대독한 강연재 변호사는 “문재인 대통령이 코로나19를 이용해 우리의 생명인 자유를 박탈했다”며 “경제 실정을 코로나19에 전가했고, 코로나19를 이용해 4·15 부정선거를 저질렀으며 광화문 집회를 탄압했다”고 비판했다. 강 변호사는 이날 삼엄한 경찰 통제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언론이 있는 곳에서 3~4명이 기자회견을 하는데 왜 이렇게 난리를 쳐야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며 “대통령 하나 때문에 이 난리를 쳐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왜 대한민국 안에서 국민들에게 난리냐. 대한민국이 맞느냐. 여기까지 오는데 검문을 얼마나 하는지 모르겠다. 계엄령이 선포됐느냐”면서 “미친 정부다. 한 명 때문에 이게 뭐하는 짓거리냐”면서 격앙했다. 8·15비대위를 비롯한 10개 단체는 이날 오후 2시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 인근에서 ‘정치방역 서민경제 파탄, 자유민주주의 말살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기자회견 역시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경찰 통제로 장소가 변경됐다. 이 과정에서 성명서 낭독을 위해 기자회견장 진입을 시도하던 8·15비대위 소속 이동호 교수는 경찰의 통제에 막혀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 교수는 결국 경찰 앞에서 성명서를 낭독했다. 그는 “야외 집회는 바이러스 확산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며 “문재인 정권 국민 규탄대회를 정부가 원천 봉쇄한 것은 문재인 정권이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독재정권임을 유감없이 드러낸 폭거”라고 지적했다. 또 “깃털만한 실수를 바윗덩어리 같은 범죄로 둔갑 시켜 이명박 전 대통령을 3년씩이나 감옥에 가뒀고, 거짓 선동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했다”고 주장했다. 경찰, 90곳에 검문소 설치하고 도심 진입 저지 경찰은 경비경찰 21개 중대와 교통경찰·지역경찰 등 800여명을 동원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차량시위 참가자들이 법원이 제시한 조건을 충족했는지 여부를 확인했다. 법원은 앞서 집회를 허용하면서 집회 참가자의 이름·연락처·차량번호를 적은 목록을 미리 경찰에 내고, 집회 시작 전에 이를 확인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아울러 차량 내 참가자 1인 탑승, 집회 중 창문을 열지 않고 구호 제창 금지, 집회 중 교통법규 준수 및 신고된 경로로 진행, 참가자 준수사항 각서 제출 등을 요구했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이날 본격적인 개천절 집회 시작 전 서울지방경찰청을 방문해 “합법적인 집회는 헌법에서 보장한 권리이기 때문에 존중하되, 불법집회에 대해서는 무관용의 원칙에 따라 대응해달라”며 “불법집회를 강행하는 일부 국민들 때문에 전체 국민들이 피해를 입어선 안 된다”고 강력대응을 당부했다.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전광훈 옥중서신 대독한 강연재 “미친 정부…계엄령이냐”

    전광훈 옥중서신 대독한 강연재 “미친 정부…계엄령이냐”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담임목사가 옥중 입장문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이 코로나19를 이용해 우리의 생명인 자유를 박탈했다”고 비판했다. 강연재 변호사는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역 1번 출구 앞에서 열린 8·15참가자시민비상대책위원회의 ‘문재인은 하야하라!’ 기자회견에서 전 목사의 입장문을 대독했다. 이날 강 변호사는 회견 시작 전 경찰이 “기자회견 형태로 진행해야 한다”며 음향 장비 사용 등 제재하려 하자 “왜 대한민국 안에서 국민들에게 난리냐. 대한민국이 맞느냐. 여기까지 오는데 검문을 얼마나 하는지 모르겠다. 계엄령이 선포됐느냐”고 반발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극혐하는 사람들 한 두명도 못 모이게 하려고 이 난리 피우냐”고 소리쳤다. 이어 “그렇게 겁나면 내려와”라며 “미친 정부다. 한 명 때문에 이게 뭐하는 짓거리냐”면서 격앙했다. 옥중서신에서 전 목사는 “문 대통령은 경제 실정을 코로나19에 전가했고, 코로나19를 이용해 4·15 부정선거를 저질렀으며 광화문 집회를 탄압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많은 국민이 단순한 의심과 걱정 넘어 저들의 야욕을 간파하고, 분노하고 있다”며 “아무리 광화문 집회를 탄압하고 국민들은 억압해도 대한민국의 건국기초인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한미자유동맹 등은 절대 무너뜨릴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자유민주주의에 젖은 우리 국민들, 심지어 대깨문(문재인 대통령 적극 지지층을 뜻하는 은어)까지도 문재인 주사파의 본질이 극명하게 드러나면 완전히 돌아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 목사는 문 대통령 등을 “북한의 남쪽 연락소장”으로 지칭하면서 거센 비판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그는 “끝까지 이 나라를 지켜달라”며 “내년까지 애국운동에 총력을 다해주기를 부탁한다”고 지지자들을 향해 호소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아르메니아 “전투기 터키 공군에 격추” 국제전으로 비화하나

    아르메니아 “전투기 터키 공군에 격추” 국제전으로 비화하나

    아르메니아 전투기 한 대가 29일 터키 공군기에 격추돼 조종사가 사망했다고 주장했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남(南) 캅카스의 ‘앙숙’인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30여년 숱한 분쟁을 벌여온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둘러싼 무력 충돌이 27일부터 사흘째 이어져 100명 가까이 희생된 와중에 터키까지 끼어들어 국제전으로 확전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는다. 아르메니아 외무부는 옛 소련이 제작한 수호이(SU) 25기가 자국 영공에서 터키 공군의 F16 전투기에 격추돼 조종사가 사망했다고 밝혔다. 아제르바이잔을 대놓고 지원하는 터키는 아직 공식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앞서 이 지역을 장악한 아르차흐 공화국은 84명의 군 요원이 숨졌으며 민간인도 희생됐다고 주장했다. 아제르바이잔 군은 병력 희생 규모를 밝히지 않은 채 7명의 민간인이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아르메니아 국방부는 지난 28일 바르데니스 시에서 아제르바이잔 군의 드론 공격에 버스가 당했다고 전했다. 아직 희생자 숫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같은 날 아제르바이잔 당국은 아르메니아의 포격에 두 명의 민간인이 숨졌는데 전날에는 같은 가족의 5명이 희생됐다고 주장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옛 소련에 나란히 속했던 시절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인구 5명 중 4명을 차지하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였다. 소련이 붕괴하자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독립공화국을 설립한 뒤 아르메니아와 통합하겠다고 선포했으나, 아제르바이잔이 이를 거부하면서 1992∼1994년 전쟁을 치렀다. 아르메니아 말고는 유엔 회원국 중 단 한 나라도 승인하지 않은 나고르노카라바 흐 공화국은 2017년 ‘아르차흐’로 명칭을 바꾸었다. 아르메니아는 같은 튀르크계 국가인 터키가 아제르바이잔을 돕기 위해 시리아 용병을 대거 전선에 투입했다고 주장했다. 인테르팍스 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주재 아르메니아 대사는 이날 “터키가 시리아 북부에서 아제르바이잔으로 전투 요원 4000명을 이동시켰으며, 이들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고 말했다.그러나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실은 “시리아 무장 세력이 아제르바이잔에 배치됐다는 주장은 아르메니아의 또 다른 도발이자 완전히 허튼소리”라고 일축했다. 반면,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둔 시리아 내전 감시단체인 시리아인권관측소는 “터키가 시리아 북부에서 최소 300명의 전투원을 아제르바이잔으로 보냈다”고 주장했다. 라미 압델 라흐만 시리아인권관측소 대표는 AFP 통신에 “터키는 시리아 전투요원에게 2000 달러의 임금을 제시했으며, 아제르바이잔에서 국경 지역 보호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알렸다”고 전했다. 이번 충돌은 지난 2016년 이후 가장 커다란 규모인데 29일 늦게부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긴급 소집돼 사태 해결 방안을 논의하게 된다. 두 나라 모두 군인들 징집령을 발령했고 몇몇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도발 책임을 상대에 돌리고 있다. 캅카스 지역은 러시아와 터키의 남하를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에 군사 기지를 두고 저지하던 전략적 요충이라 다른 나라들이 더 깊숙이 개입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점증하고 있다고 방송은 전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유럽행 석유·가스 길목서… 아제르·아르메니아 전면전 위기

    양국 보복 다짐하며 계엄령 선포 등 나서러시아·터키 패권 다툼 등 뒤엉킨 분쟁지유엔 등 중재에도… 터키 “아제르 지원” ‘캅카스의 화약고’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27일(현지시간) 분쟁 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무력 충돌해 최소 39명이 숨지고 수백명이 부상했다. 양국이 보복을 다짐하는 등 전면전 비화 우려에 국제사회가 자제를 촉구하고 나섰다. AFP통신 및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양국은 이날 전투기, 탱크, 드론을 앞세워 상대 지역을 공격했고, 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 무장세력 32명과 여성·아이 등 민간인 2명, 아제르바이잔 민간인 가족 5명 등이 사망했다. 충돌 직후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는 “아제르바이잔의 권위주의 정권이 다시 우리 국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며 “남캅카스에서 전면전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위협했다.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도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이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양국은 모두 계엄령과 성인 남성 총동원령을 내리는 등 전운이 짙어졌다. 옛 소련 시절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르메니아계가 다수이면서도 영토는 아제르바이잔에 속해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아르메니아와 통합하려는 주민 움직임을 놓고 양국이 1992~1994년 전쟁을 치르며 불씨가 이어져 왔다. 현재 이 지역의 실효적 지배는 아르메니아가 하고 있다. 러시아 지원을 받는 아르메니아, 터키를 배후에 둔 아제르바이잔이 대리전을 치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러시아·터키가 패권 다툼을 벌이는 캅카스 지역은 석유·천연가스의 유럽 배급로이기도 해서 이 지역이 불안해지면 국제 에너지 시장이 출렁일 수 있다. 최근 수주간 이어진 갈등에 대해 국제사회의 중재가 부족했다는 비판도 나오면서 유엔과 유럽연합(EU), 미국, 러시아가 대화를 촉구하기 시작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파시냔 총리에게 ‘적대행위 중단’을 권했고, 미 국무부는 “외부 세력이 개입하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터키는 같은 튀르크계 민족이자 이슬람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에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터키 국민은 언제나처럼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아제르바이잔의 형제들을 도울 것”이라고 밝혔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30여년 해묵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무력 충돌로 적어도 23명 사망

    30여년 해묵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무력 충돌로 적어도 23명 사망

    옛 소련에 속했던 나라들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를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지역이 눈에 들어온다. 옛 소련 당시부터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다수인 아제르바이잔 영토’였다. 소련이 붕괴하기 전인 1988년부터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독립공화국을 수립한 뒤 아르메니아와 통합하겠다고 선포해 갈등의 불씨가 돼왔다. 카프카스 산맥 깊숙한 오지에 4400㎢ 지역이다. 아르메니아는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일파인 아르메니아 정교를 신봉하고 아제르바이잔은 튀르크계 이슬람 국가로 인종적, 종교적으로 대립해 왔다. 1992~94년 독립을 지원하는 아르메니아와 이를 막으려는 아제르바이잔이 전쟁을 벌여 100만명 정도가 삶의 터전을 잃고 유랑했으며 3만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전쟁 뒤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인접한 아제르바이잔 영토 일부를 점령했다. 이에 따라 나고르노카라바흐는 국제법으론 아제르바이잔 영토지만 아르메니아가 실효 지배하는 분쟁지역이 됐다. 30년 가까이 영토 분쟁을 해오고 있어 전 세계에서 가장 해묵은 분쟁지 중 하나다.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은 아르메니아를 빼고는 유엔 회원국 중 단 한 나라도 국가로 승인하지 않은 미승인 국가로 2017년 국민투표로 터키어에서 유래한 ‘나고르노카라바흐’라는 이름을 ‘아르차흐(Artsakh)’로 바꿨다. 옛 소련 시절에는 이 지역 인구의 5분의 1 정도를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차지했으나 2015년 인구조사(센서스)에 따르면 14만 5053명 인구 가운데 아제르바이잔 인은 한 명도 살고 있지 않고 있다고 영국 BBC는 전했다. 아제르바이잔이 터키의 지원을 받고 있지만 수니계가 대부분인 터키와 달리, 시아파를 자처하는 점도 이색적이다. 시리아 내전 때 아사드 정부를 지지하는 이란,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은 한 편에 서기도 했다. 니콜 파쉬냔 아르메니아 총리는 27일(현지시간) 오전 페이스북을 통해 아제르바이잔 군이 아르차흐지역의 민간인 정착촌에 공격을 가했다고 밝혔다. 그 뒤 아르메니아 국방부는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아제르바이잔 군의 헬기 2대와 드론 3대를 격추했다고 발표했으며, 아제르바이잔 전차를 격파했다고 주장하며 영상을 공개했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 국방부는 아르메니아 쪽이 먼저 나고르노카라바흐와 가까운 자국 영토 내 군기지와 주거지역에 대규모 도발 행위를 저질렀다고 반박했다. 아르메니아 쪽의 도발로 민간인이 사망하고 민간시설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해 자국민 보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보복했다는 주장이다.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일곱 마을을 장악했다고 밝혔으나, 아르차흐 공화국은 부인했다. 아르차흐 공화국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성인 남성들의 동원령을 선포했다. 이번 무력 충돌로 적어도 23명이 희생됐고 100명 이상이 다쳤다고 영국 BBC는 전했다.이날 무력 충돌 이후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은 대국민 TV 연설을 통해 “우리의 명분은 정의롭고 우리는 승리할 것”이라며 “아제르바이잔 군대는 우리 영토 안에서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히트메트 하지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실 대변인은 “민간인과 군인 사망자가 있다는 보고가 있다”고 전했다. 아르메니아 언론도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해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군이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수도인 스테파나케르트를 포함해 민간인을 공격했다”며 “비례적 대응”을 천명했다. 파쉬냔 총리는 “우리는 아제르바이잔의 침략으로부터 모국을 지키기 위해 군과 함께 할 것”이라며 “우리의 신성한 조국을 지킬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양측의 자제를 촉구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양측은 즉시 사격을 멈추고 사태를 안정화하기 위한 대화에 착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랑스도 양측에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즉시 대화를 재개하라”고 촉구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겠다”며 “양측이 협상을 통해 이견을 해소해달라”고 호소했다. 반면, 같은 튀르크계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해 온 터키는 아르메니아를 비난하고 나섰다. 이브라힘 칼른 터키 대통령실 대변인은 “우리는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아르메니아의 공격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며 “아르메니아가 민간인을 공격해 휴전을 깨뜨렸다”고 주장했다. 두 나라는 지난 7월에도 무력충돌을 빚었다. 아제르바이잔은 1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했으며, 아르메니아군 약 100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文대통령, 9·19선언 2주년 앞두고 “남북 대화 희망 포기 안 해”

    文대통령, 9·19선언 2주년 앞두고 “남북 대화 희망 포기 안 해”

    文 “불교 코로나 방역에 앞장섰다… 40년 만에 연등회 취소 안타깝고 감사” 불교계, ‘영원한 광명’ 의미하는 ‘만고휘연’ 휘호 文에 선물문재인 대통령이 9·19 평양 공동선언 2주년을 하루 앞둔 18일 남북관계와 관련해 “만남과 대화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평화와 통일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K방역은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불교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며 불교계의 방역 협조에 감사를 표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불교계 지도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가진 간담회에서 “내일은 9·19 평양 공동선언 2주년”이라며 이렇게 밝혔다. 문 대통령은 “2018년 저는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함께 평화의 한반도를 향해 나아가겠다고 8000만 우리 민족과 전 세계에 선언했다”며 “불교계는 법회를 열고 기도를 해줬다”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어 “불교는 고난을 이겨낸 힘이다. 호국과 독립, 민주와 평화의 길을 가는 국민들 곁에 언제나 불교가 있었다. 항상 함께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K방역,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불교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아” 문 대통령은 또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극복을 위한 불교계의 협조를 구했다. 문 대통령은 “불교가 실천해온 자비와 상생의 정신은 오랜 시간 우리 국민의 심성으로 녹아있다”면서 “이웃을 아끼고 보듬는 마음을 K방역의 근간으로 삼았다.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불교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5월에는 천년 넘게 이어온 연등회마저 전격적으로 취소했다. 1980년 5월, 계엄령 때문에 열리지 못한 이후 40년 만에 처음”이라며 “유네스코 등재를 앞둔 상황에서 용단이기에 더 고맙고 안타깝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불교가 방역에 앞장섰다. 법회 등을 중단하고 사찰의 산문을 닫는 어려운 결단을 내려줬다”며 “화합과 평화의 연등행렬은 볼 수 없었지만, 어려움을 나누면 반드시 코로나를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의 등불을 밝혀주셨다”고 높게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코로나와의 싸움은 끝을 알기 어려운 장기전이 되고 있다. 불교계가 국민께 변함없이 큰 용기와 힘이 돼 주길 믿는다”고 말했다.원행 스님 “이럴 때일수록 사회지도자, 불교계 더 낮은 자세로 보살행 실천해야” 참석자를 대표해 인사말을 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이자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장인 원행 스님은 “우직한 사람이 한 우물을 파서 크게 성공한다는 우공이산이라는 말이 있다”면서 “이런 때 대통령과 사회 지도자, 불교계가 대중에게 더 낮은 자세로 보살행을 실천해야 한다”고 화답했다. 이어 모두가 하나의 생명 공동체로 연결돼 있다는 ‘인드라망’ 사상을 거론한 뒤 “세계 평화와 국민 안녕과 건강, 코로나 종식 그날까지 불보살님께 기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합장을 했다. 또한 원행 스님은 문 대통령에게 위기 극복을 위해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자는 취지로 조계종 종정인 진제 대선사가 쓴 ‘만고휘연’(萬古徽然) 친필 휘호를 전달했다. 이는 ‘무한 세월 동안 영원히 광명하다’는 뜻이다. 간담회에는 원행 스님과 함께 대한불교천태종 총무원장 문덕 스님, 대한불교진각종 통리원장 회성 정사, 대한불교관음종 총무원장 홍파 스님, 한국불교태고종 총무원장 호명 스님 등 불교계 지도자 13명이 참석했다.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홍준표 “국방부가 추미애 방어하는 추방부로 전락”

    홍준표 “국방부가 추미애 방어하는 추방부로 전락”

    무소속 홍준표 의원이 국방부가 추미애 법무장관 아들의 특혜 의혹을 무마하느라 추 장관을 방어하는 ‘추방부’가 됐다고 비판했다. 홍 의원은 16일 “정치는 한때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한 것인데 국방부가 추미애 아들 방어의 최전선에 나간 것은 나라를 지키는 국방부(國防部)가 추방부(秋防部)로 전락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제복에 대한 존경심이 이렇게 추락하고 없어진다면 대한민국 군인들은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라며 “명예와 자긍심 없는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하다”며 군인답게 처신할 것을 요청했다. 추 장관은 지난 14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국방부에 아들 군 문제 관련 청탁을 했느냐는 질의에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당시) 군을 상대로 계엄령 준비에 대한 경고를 날린 상황”이었다며 “그런 청탁을 했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가 없는 거죠. 상황으로 봐서도 합리적이지 않고요”라고 설명했다. 15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정경두 국방장관은 “(추 장관 아들 휴가는) 면담·부대 운영일지에 기록돼 있고 승인권자의 허가를 받고 했다고 보고 있다”며 “국방부 규정을 개인에게 특혜를 주기 위해 만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서울동부지검 형사1부(부장검사 김덕곤)는 지난 1월부터 서씨의 휴가 특혜 의혹을 수사하고 있다. 야권 등에선 추 장관 측이 아들의 통역병 선발과 자대 배치 및 휴가 연장 과정에 부정한 청탁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딸 비자 발급 관련해 외교부 측에 부정청탁을 했다는 의혹도 있다. 특히 서씨의 휴가 관련 추 장관의 전 보좌관이 군부대 측에 3차례 이상 연락한 것으로 알려졌고, 일부 군 관계자도 청탁 정황을 증언한데다 국방부 민원실에 추 장관 부부 중 누군가가 연락했다는 문건도 나와 이 과정에 추 장관 지시나 인지, 개입 여부 규명이 필요하다. 지청장 출신 김종민 변호사는 “추 장관이 불법 개입한 증거가 확실하다면 비공개 소환조사라도 하지 않을까 싶다”며 “방문이나 서면 조사를 하면 특혜 시비에 휘말릴 거고 인사권자 봐주기냐는 얘기가 나올 수 있다”고 관측했다. 이어 “현직 장관 신분으로 조사를 받는 건 있을 수 없고, 사표를 내고 민간인 신분으로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추미애 “당직사병, 일방적 오해·억측 아닌가…윤석열 선택적 수사”(종합)

    추미애 “당직사병, 일방적 오해·억측 아닌가…윤석열 선택적 수사”(종합)

    “통역병 청탁? 스포츠경영 공부한 아들,충분히 해낼 수 있는 능력 가진 아이”전날 “송구하나 절차 어길 이유 없다”아들 군 복무 특혜 의혹 전면 부인정청래, 나경원 등 야당 수사 부진 지적에“윤석열, 수사 의지 본 적이 없다”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14일 아들 서모(27)씨의 군 복무 특혜 의혹을 제보한 당직사병 A씨에 대해 “제보자인 사병이 일방적으로 오해를 하거나 억측을 하지 않았나 생각도 든다”면서 “제보자가 오해하거나 공명심에 그럴 수는 있는데 때로는 합리적 의심인지 체크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당직병 공명심일 수도 있는데 합리적 의심 확인 의무 소홀해” 추 장관은 이날 국회 대정부질문에 출석해 야당이 A씨 등 군 관계자의 제보를 통해 특혜 의혹을 제기한 데 대해 “그게 국회의 권능이자 의무”라면서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국회가) 소홀했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전날 처음으로 사과 입장을 표명한 추 장관은 이날 자신의 아들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 하나씩 해명해나갔다. 추 장관은 글에서 “송구하나 딱히 절차를 어길 이유가 전혀 없었다”면서 “검은 것을 희다고 말해 본 적이 없다”며 억울함과 함께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울컥한 추미애 “입원해도 병문안도 못 갔는데” 추 장관은 대정부질문에서도 평창 동계올림픽 통역병 선발 청탁 의혹에 대해 “(아들은) 스포츠경영학을 공부했고,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이다. 굳이 청탁할 이유가 없다”면서 “제 아이인 줄 먼저 알아보고 군이 방식을 바꿔 제비뽑기로 떨어뜨렸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았다”고 말했다. 추 장관은 “아이가 어릴 때부터 공인의 아들로 돼 있어서 아이는 거의 모든 문제를 거의 스스로 해결한다”면서 “병원에 입원하거나 아파도 제가 병문안도 가보지 못했다. 엄마 역할을 제대로 해 준 적이 없는 아들”이라고 말했다. 또 “엄마의 상황을 이해하길 제가 일방적으로 바란다”며 관련 발언을 이어가다가 목이 잠긴 듯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90세 시어머니 손자 보고 싶어 갔는데40분간 청탁 말라 훈계? 반인륜적 상황” 추 장관은 추 장관의 남편이 아들의 자대 배치 당시 부대를 용산기지로 해달라고 청탁하고 아들의 후반기 교육 수료식 때 군 관계자가 추 장관 남편과 시어머니를 앉혀놓고 40분간 청탁을 만류했다는 의혹과 관련해서도 “자대 배치는 현장에서 난수 추첨으로 이뤄져 청탁 개입 소지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90세 연세인 시어머니가 손자를 보고 싶어 아픈 상황에 간신히 갔는데, 그런 분을 상대로 40분간 청탁을 하지 말라고 훈계를 했다는 것 자체가 반인륜적이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서씨가 복무한 미8군 한국군지원단 소속 관계자들은 추 장관이 민주당 대표 시절 자신의 보좌관이 아들 부대에 전화해 병가 연장 요청, 자대 배치 및 평창동계올림픽 통역병 선발 청탁 등을 했다는 핵심 의혹과 관련해 언론 인터뷰와 검찰 수사 등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었다. 최근에는 전 한국군지원단장인 이철원 예비역 대령도 실명을 걸고 의혹을 폭로했다. 특히 미2사단 지역대 지원반장 이모상사는 2017년 6월 서씨의 2차 병가 연장과 관련해 ‘부모님께서 민원을 넣으신 것으로 확인’이라고 연대 통합행정업무 시스템에 기재한 사실도 국방부 문건을 통해 밝혀졌다. 추 장관은 앞서 지난 1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보좌관이 아들의 휴가와 관련해 전화를 한 사실이 맞느냐는 야당 의원의 질의에 “그런 사실이 있지 않다”고 답해 거짓말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추미애 “나경원·尹총장 장모 사건, 윤석열 수사 의지 본 적이 없다” “선택적 수사의 한 예…국민들 많은 질타” 한편 추 장관은 보수 정당 쪽 야권 인사 등이 연루된 사건의 수사가 지지부진하다는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지적에 대해 “제가 (윤석열 검찰총장의) 수사의지를 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추 의원은 정 의원이 나경원 전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의원 고발사건, 윤석열 검찰총장 장모·부인 사건,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 사건을 거론하며 ‘윤석열 총장의 수사의지가 강력한데 장관이 만류하나’라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정 의원은 촛불집회 당시 계엄령 문건 작성을 주도한 조 전 기무사령관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는 나 전 의원 사건을 지목하며 추 장관에게 수사가 진척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추 장관은 “그런 부분을 선택적 수사가 아니냐 하는 예로 많은 국민으로부터 지탄받고 있는 부분”이라면서 “국민께서 선택적 정의와 선택적 수사에 자유롭지 못한, 검찰 상명하복 관계에서 이뤄지는 게 아닌가 많은 질타를 한다”고 말했다.정청래 “윤석열 수사 의지 확인하라”추미애 “그렇게 하겠다” 이어 정 의원이 지목한 사건에 대한 윤 총장의 수사 의지를 확인하라는 질의에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추 장관은 검찰개혁과 관련해 “수뇌부의 선택적 정의, 선택적 수사에 따라서 안 되는 사건을 크게 키우거나 봐주기, 수사 착수를 안 한다든지 그런 게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게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확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추 장관은 이날 아들의 병역 의혹을 제기한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이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와 친분이 있다는 지적에는 “굉장히 놀랍다”고 답변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계엄령 문건’ 연루 기무사 출신 군무원 “원대 복귀 부당” 소송 패소

    ‘계엄령 문건’ 연루 기무사 출신 군무원 “원대 복귀 부당” 소송 패소

    ‘기무사 계엄 문건’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원대 복귀됐던 국군기무사령부 출신의 정보사령부 소속 현직 군무원이 정경두 국방부 장관과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25일 서울행정법원 행정2부(부장 이정민)는 ‘2018년 8월 국방부의 원대 복귀 명령은 부당하다’며 무효 확인 청구 소송을 제기한 A씨에 대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소송을 제기한 지 1년 4개월 만이다. 기무사 계엄 문건이란 기무사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계엄을 선포하고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담긴 67쪽 문량의 문건으로 청와대가 2018년 7월 공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같은해 8월 기무사 해체를 지시했고, 기무사는 부대원 전원을 원대 복귀한 뒤 안보지원사령부를 새로 만들면서 부대원 수를 줄였다. 계엄 문건 연루 의혹을 받던 부대원들은 기무사 해체 전 원대 복귀 명령을 받았는데 여기 포함됐던 A씨는 이 명령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했다. A씨는 당시 “대통령은 계엄 문건과 관련해 불법행위를 하지 않은 사람까지 원대 복귀하도록 지시하지 않았다”면서 “기무사가 내부 규정을 위반하면서까지 무리한 인사조치를 했다”고 주장했다. 또 해당 조치를 ‘기무사 강제 퇴출’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로 인해 국군수도병원에서 적응 장애 진단을 받아 지속적으로 치료중이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A씨를 대리한 노수철 변호사(법무법인 한중)는 선고 후 “패소 이유에 대해 면밀히 살펴본 뒤 원고와 항소 여부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노 변호사는 ‘계엄 문건’ 사건 당시 국방부 법무관리관으로 활동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전광훈 입’ 강연재 변호사 누구?…“딸내미 하기로 했다”

    ‘전광훈 입’ 강연재 변호사 누구?…“딸내미 하기로 했다”

    강연재(45) 변호사가 사랑제일교회와 전광훈 목사의 변호인으로 나서 정부 방역을 맹비난하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강 변호사는 21일 오전 서울 성북구 장위동 사랑제일교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가짜 방역 계엄령 선포해 8·15 집회 탄압하는 문 정권 규탄한다’는 제목의 전 목사 입장문을 대독했다. 입장문에서 전 목사는 정부에 대해 “집회를 저와 우리 성도들이 참여한 단순 집회로 축소·왜곡하면서 동시에 저와 성도들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뜨렸다며 흑색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검사와 격리, 수용 등을 내세워 대대적으로 국민들에 대한 검거·체포·연행에 나서고 있다”면서 “지금 계엄령보다 더 무서운 ‘방역공안통치’를 실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강 변호사는 이날 회견 이후 한 유튜브 채널과 인터뷰에서 “정부가 정치적으로 전광훈 목사님을 완전히 죽이겠다는 건 당연해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국가기관이라면 법을 지키면서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국민 상대로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며 목청을 높였다. 그는 현행 방역당국의 진단 검사 명령, 자가격리 조치가 위법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교인과 방문자 명단을 이미 방역당국에 제출했음에도 당국이 마치 교회가 내지 않은 것처럼 여론전을 편다며 거센 비판을 가하고 있다. 또한 특정 언론사들이 사랑제일교회를 매장하고자 거짓 보도를 하고 있다며 민·형사 고소를 예고했다. 전광훈 목사와 애틋한 인연…“아버지 같은 분” 강 변호사는 비교적 최근 전 목사와 인연을 맺었다. 전 목사 측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너만몰라TV’에 올라온 영상 중에 전 목사가 강 변호사를 소개하는 장면이 있다. 2019년 12월 18일 게시된 이 영상에서 설교에 나선 전 목사는 “30, 40대들을 사탄으로부터 찾아오려고 한다”며 자신이 스카우트한 “최고의 선수”라고 강 변호사를 소개했다. 그는 강 변호사를 두고는 “우리 딸내미 하기로 했다”라고도 했다. 1956년생인 전 목사와 강 변호사와 19살 차이가 난다. 무대 위 전 목사 옆에 선 강 변호사는 “최근에 여러 가지 이유로 저를 이끌어주실 분 한 분만 주십사 간절하게 기도했다”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전광훈 목사님 아버지 같은 분을 제게 주셔서 어제,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렇게 떨림과 기쁨을 느끼면서 설교를 듣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 출신인 강 변호사는 2005년 사법연수원(34기) 수료 후 변호사로 활동했다. 방송 출연을 통해 얼굴을 알리기도 했다. 그는 2016년 국민의당 후보로 총선에 나갔다 낙선했다. 2018년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으로 둥지를 옮겨 법률특보 등을 지냈고, 같은 해 한국당 후보로 서울 노원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바이러스 테러’ 주장한 전광훈…이번엔 “방역 공안 통치”(종합)

    ‘바이러스 테러’ 주장한 전광훈…이번엔 “방역 공안 통치”(종합)

    “외부 불순분자가 사랑제일교회 코로나19 테러”“정권에 저항하는 국민들을 병원에 수용하고 있다”방역당국 현장조사엔 “사유재산 불법점거” 주장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한 서울 성북구 사랑제일교회의 전광훈 담임목사가 21일 ‘외부 바이러스 테러’ 등 음모론을 제기했다. 또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 입장문에서 “정권에 저항하는 국민들을 병원에 수용하고 있다. 계엄령보다 더 무서운 ‘방역 공안 통치’”라고 정부를 맹비난했다. 전 목사는 이날 유튜브 채널 ‘너알아TV’를 통해 밝힌 성명서에서 “저로 인해 많은 염려 끼쳐드린 것에 대해서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운을 뗐다. ●“‘바이러스 테러’ 제보받았다” 음모론 거듭 주장 이어 “사랑제일교회는 올해 초 코로나19 발생 이후 손 씻기나 집회 전 발열체크, 마스크 착용 등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며 선제적으로 대응해왔다”며 “대체 왜 사랑제일교회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인지 가만히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랑제일교회에서 대량의 바이러스 감염사태가 있기 직전, 5명 정도의 제보자로부터 ‘바이러스 테러가 사랑제일교회 안에 숨어들어온다’는 제보를 받았다”며 “제보를 들었을 때 ‘아무리 악한 공산주의자나 주사파라도 그런 짓 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런데 막상 이번 사건이 터지자 ‘이것은 반드시 외부 불순분자들의 바이러스 테러 사건’이라는 것을 느끼게 됐다”고 덧붙였다. 전 목사는 자신이 자가격리 수칙을 위반했다거나 사랑제일교회가 방역당국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15일 광화문에서 오후 3시쯤 약 5분 동안 연설을 했는데, 자가격리 통보를 받은 시간은 오후 6시였다”며 “사랑제일교회는 10년 전 명단까지 제출하며 보건소가 감동을 받을 정도로 협조를 잘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날 서울 성북구 사랑제일교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반복적으로 펼쳤다. 강연재 변호사가 대목한 입장문에 전 목사는 “현 정부는 코로나19 검사를 핑계로 대대적으로 국민을 체포하고, 정권에 저항하는 국민들은 병원에 수용하고 있다”며 “계엄령보다 더 무서운 ‘방역 공안 통치’”라고 주장했다.이어 “코로나19를 앞세워 기어코 북한식 강제수용소를 만드려는 것”이라며 “자유 국민들와 함께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 회복을 위해 싸우겠다”고 호소했다. 한편 사랑제일교회 측은 전날 교회를 대상으로 진행된 서울시와 방역당국의 현장 조사에 대해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강 변호사는 “서울시로부터 역학조사 협조요청 공문을 현장에서 받아봤는데, 역학조사 대상이 아니었다”며 “하지만 서울시는 막무가내로 교회 진입이 필요하다고 요구했고, 경찰은 무고한 시민을 끌어내며 진입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교회 명단 다 제출했는데 현장조사” 반발 이어 “당시 현장을 지휘한 서울시 공무원과 이를 지시한 서정협 서울시장 권한대행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고소하고, 교회 불법점거에 대해서도 사유재산 침해 등으로 형사상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강 변호사는 “이메일로만 총 15회에 걸쳐 교인 명단을 모두 제출했고, 교회 단순 방문자 기록까지 명단을 다 제출했다”며 “명단 제출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엉뚱한 소리가 들리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강조했다. 전 목사의 건강상태를 묻는 질문에 강 변호사는 “병원에 입원하기 전과 큰 차이가 없다”며 “전 목사의 건강상태에 대해 소문이 있다는데, 일절 정보가 공개된 적이 없다. 임의로 기사를 쓰면 의료법 위반 혐의로 의료진을 고발할 것”이라고도 밝혔다. 방역당국에 따르면 전날 낮 12시 기준으로 서울 성북구 사랑제일교회 관련 확진자는 53명이 늘어 누적 676명이 됐다. 추가 전파를 막기 위해 역학조사를 벌이고 있는 장소만 150곳에 달해 확진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전 목사도 이달 17일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서울의료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물난리에 휴가 못 떠나는 文 대통령…2년 연속 ‘휴가 반납’

    물난리에 휴가 못 떠나는 文 대통령…2년 연속 ‘휴가 반납’

    지난해 일본 수출규제로 휴가 하루 전 전격 취소재작년엔 휴가 썼지만 계룡대서 현안 보고·지시취임 첫해, 하루 전 北 미사일 도발로 늦게 출발 중부 지방을 중심으로 쏟아진 폭우 피해가 잇따르면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주 예정돼 있던 휴가 일정을 전격 취소하고 청와대로 복귀했다.윤재관 청와대 부대변인은 3일 “문 대통령은 계획된 휴가 일정을 취소하고 호우 피해 대처 상황 등을 점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부터 5일간 휴가를 쓸 예정이었던 문 대통령은 지난 주말 경남 양산에 있는 사저로 내려갔으나, 중부지방의 집중호우 피해가 심상찮고 태풍 예고까지 겹치자 휴가를 반납하고 청와대로 복귀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세균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집중호우 상황점검회의를 주재하며 실시간 대응하고 있지만, 물난리 속에 대통령이 자리를 비울 경우 나올 부정적 여론 등을 고려해 내린 결정으로 보인다. 향후 휴가 일정에 대해서는 “정해진 게 없다”고 윤 부대변인은 밝혔다. 다만 다음주부터는 다시 업무 일정이 잡혀 있고, 75주년 광복절 기념식 등도 예정돼 있어 한동안 휴가를 내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문 대통령은 지난해 여름에도 휴가를 가지 못했다. 문 대통령은 통상 ‘7말 8초’(7월말 8월초)로 휴가 일정을 잡곤 했는데, 휴가를 앞두고 꼭 굵직한 현안이 발생하면서 온전한 휴가를 보내지 못했다. 지난해에는 7월말 일본의 수출 규제조치,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도발, 러시아 독도 영공 침범 등 국내외 문제가 잇따라 터지면서 하루 전 취소했다. 2018년에는 충남 계룡대에 머물며 군 주요시설과 대전 장태산 휴양림을 방문하는 등 예정된 휴가 일정은 진행했지만, 휴가 도중 청와대 조직개편, 협치 내각 구성, 계엄령 문건 파문과 기무사 개혁 등 현안을 보고 받았다. 또 우리 국민이 리비아 무장민병대 피랍됐다는 보고를 받고는 계룡대 벙커에서 구출작전에 총력을 다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리기도 했다.취임 첫해인 2017년에도 휴가 하루 전날인 7월 28일 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휴가를 못 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으나, 문 대통령은 다음날 새벽 청와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를 주재하고 긴급 지시를 내린 뒤 예정보다 늦게 휴가를 떠났다. 그해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터라 홍보차 평창에서 하루 묵은 뒤 경남 진해에 있는 잠수함사령부를 방문해 해군사관생도들을 격려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몽골서 흑사병 의심환자 10대 소년 1명 사망…마멋 식용(종합)

    몽골서 흑사병 의심환자 10대 소년 1명 사망…마멋 식용(종합)

    몽골에서 고위험 전염병인 흑사병(페스트) 감염으로 의심되는 환자 1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13일 신화통신과 환구시보 등 중국 매체에 따르면 몽골 당국은 12일 기자회견에서 “서부 고비알타이 지역에서 흑사병 감염으로 의심되는 15세 소년이 이날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 환자는 다람쥣과 설치류의 일종인 마멋을 사냥해 먹은 뒤 흑사병 의심증상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몽골 당국은 이 환자의 샘플을 항공편으로 수도 울란바토르로 이송·검사해 흑사병이 사망원인인지 확인할 예정이다. 지역당국은 “환자 발생 지역 인근 5개 현에 긴급 계엄령을 내렸다”면서 “시민 및 차량의 출입을 금지했다”고 밝혔다. 앞서 몽골에서는 호브드 지역에서 불법 사냥한 마멋을 먹은 형제가 지난 1일 흑사병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이후 6일 바잉을기 지역에서는 개가 물고 온 마멋과 접촉한 적 있는 15세 환자가 흑사병 의심사례로 보고됐다. 현재 몽골 내 흑사병 확진·의심 환자가 나온 지역들이 인접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지역에 광범위하게 흑사병균이 퍼져 있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편 지난 5일 중국의 네이멍구 자치구 바옌나오얼시에서는 림프절 흑사병 확진 판정을 받은 목축민 1명과 밀접접촉했떤 15명이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았다. 중국 당국에 따르면 밀접접촉자들을 대상으로 한 3차례 검사에서 모두 음성 판정이 나왔으며, 이에 따라 흑사병 대응 단계를 낮추고 일부 지역에 취해졌던 격리봉쇄령을 해제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중국에서 흑사병이 잘 통제되고 있으며, 위험성이 크지 않은 것으로 판단한다고 밝힌 바 있다. WHO는 “중국의 발병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으며, 중국·몽골 당국과 협력하고 있다”면서 “흑사병은 드물고 일반적으로 풍토병으로 남아 있는 일부 지역에서 발견된다”고 설명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그리움과 두려움의 이름 가족, 그 폭력의 상흔

    그리움과 두려움의 이름 가족, 그 폭력의 상흔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냉전 세력이 벌인 갈등이자, 미국과 중국 간의 국제분쟁이기도 했다. 조금 더 시야를 좁혀 보면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서로를 부정하는 두 정치세력이 각자의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1950~1953년 민간인 학살이 200만명이나 된 배경은, 세력 간 교전이라는 관습적인 전쟁사의 시각으로는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권헌익 영국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의 ‘전쟁과 가족’은 이를 설명한다. 냉전체제 연구의 권위자로서 지난해 최고의 인류학자에게 수여하는 프랑스 레비스트로스상을 받은 그는 한국전쟁 당시 가족과 친족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폭력이 가해졌는지, 그리고 이후 긴 세월 동안 어떻게 국가적 규율 행위의 핵심이 됐는지를 좇았다.해방 이후 양쪽에 각각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긴장감이 높아진다. 남한 정부는 계엄령으로 자신의 국민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은 남한의 점령지에서 민족 해방의 대의를 내걸고 노동력을 착취하고 린치를 하기도 했다. 북한군이 밀려난 뒤 일어난 일은 적군에 협조했다고 지목된 자들에 대한 응징이다. 한쪽의 공격에 대한 상대편의 보복이 반복되면서 양민을 향한 폭력은 규모와 정도가 심해지고, 폭력의 악순환으로 지역 공동체가 초토화됐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이념 때문에, 누군가는 그저 살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남으로 혹은 북으로 이동했다. 이산가족이 생겨났고, 이후에도 ‘연좌제’라는 이름으로 연대책임을 져야 했다. 이들은 헤어진 가족과의 결합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 때문에 죄인 취급을 받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평생을 살았다.저자는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가족과 친족이 공적인 공간에서 해체되는 현상과 전혀 다른 일이 한국전쟁에서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기존 사회학·인류학 담론이 ‘시비타스’(civitas·공민사회)와 ‘소시에타스’(societas·민간사회)를 구분하고, 현대의 정치에서는 가족과 친족이라는 환경이 사적 영역에 불과하다고 가정해 온 관념을 반박한다. 한국전쟁에서 가족과 친족은 공적세계에서 독립해 존재하는 사적 영역도 아니었고, 공적세계에서 물러나 찾을 수 있는 온전한 은신처도 아니었다. 저자는 우리가 그동안 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가리느라 급급했다고 역설한다. 연좌제가 폐지된 1980년 이후에도 누군가에게 가족과 친족은 그리움이자 두려움·혐오의 대상이었다. 저자는 그러나 2003년 초 마을 위령비를 새롭게 완공한 제주 애월의 하귀리 사례를 들어, 공동체를 사회와 분리하는 근현대 세계의 경향을 이겨내고 한국에서 시비타스와 소시에타스가 겹쳐지는 놀라운 일이 이어진다고 봤다. 이곳은 4·3사건 당시 반란 진압작전에 동원돼 전사한 경찰과 반공청년단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가 서 있던 자리다. 자신의 가족과 마을에 폭력을 자행한 자들을 묻은 묘지와 추모비에 이를 바로잡는 위령비를 세운 이들을 통해 저자는 전쟁의 감춰진 상흔을 용기 있게 대면하는 노력을 유가족의 발언을 따 ‘소리 없는 혁명’으로 지칭한다. 어쩌면 우리는 고속성장이라는 그늘에 가려 억지로, 혹은 의도적으로 한국전쟁의 상처를 잊은 것은 아닐까. 참상을 온몸으로 겪은 이들의 세대가 지나가는 지금, 저자는 우리에게 ‘그들의 죽음은 과연 어떤 의미였느냐?’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오월을 지켜줘서 고마워요”… 아빠는 딸의 역사가 됐다

    “오월을 지켜줘서 고마워요”… 아빠는 딸의 역사가 됐다

    다시 오월, 父女의 이야기 1980년 5월 폭력의 기억은 여전히 트라우마다. 40년이 흘렀지만 누군가 위협을 가하는 상황이 닥치면 지금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조건반사처럼 그 끔찍한 고문과 조사관이 떠오른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매를 맞다 정신을 잃으면 고향집 앞 마당이었고, 양동이 물로 정신이 돌아오면 505보안부대 조사실이었다. 그렇게 이봉주(59) 조선대 물리학과 교수는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했다. 그의 나이 19세, 광주 금호고 2학년(1년 휴학)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소년은 중년이 됐고, 당시 소년만 한 나이의 딸이 생겼다. 딸 재민(19)양은 올해 고려대 자유전공학부에 입학했다. 이 교수는 딸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고문당한 얘기를 털어놨고, 종종 그때 얘기를 나누곤 한다. 이 교수는 딸과 그 또래에게 거창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끔찍했던 경험 탓인지 혹시라도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라고 얘기하는 것조차도 조심스럽다. 다만 “우리 사회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딸 재민양은 아빠에게 “모진 고문에도 살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아빠의 트라우마가 더는 우리 사회에서 반복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서울신문은 지난 13일 5·18민주화운동 당시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했던 옛 전남도청 앞 광주 동구 금남로의 한 사무실에서 이들을 만났다.●까까머리 소년, 계엄군 만행에 분노하다 40여년 전 소년은 사회에 관심이 많았다. 교직에 계셨던 아버지는 당시 박정희 군부 정권을 대놓고 비판은 못했다. 다만 가끔 가족에게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소년은 스스로 찾아봤다. 당시 ‘신동아’ 잡지에 실린 유신헌법을 비판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울대 김상진(당시 26세) 열사의 기사를 읽고 ‘고귀한 죽음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무고한 희생을 볼 때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끓어올랐다. 본가가 전남 나주였지만 광주에서 유학했다. 1980년 금호고 2학년 시절 3㎞ 거리에 전남대가 있었다. 비상계엄령이 확대될 무렵 등교할 때마다 대학생 형들의 시위를 목격했다. 교련복 입은 전남대생들이 “전두환은 물러가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를 외치며 전경, 군인들과 대치했다. 그리고 대학생 형들이 계엄군이 휘두르는 곤봉에 맥없이 꼬꾸라지는 모습을 봤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라고 생각했다. 그때 소년은 아버지의 혼잣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년은 17일부터 시위에 참여해 구호를 외쳤다. ●“광주는 어떠냐” 묻고 따라오라더니 고문 20일 광주 지역 중·고등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때마침 나주에 계신 부모님이 모내기 일손이 부족하다고 연락이 왔다. 소년은 본가에 내려갔다. 광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길이 없었다. 22일 오후 2시쯤 큰집 사촌 형이 영산포 시내에 시민군 버스가 돌아다닌다고 전해 줬다. 설마 싶었다. 영산포 시내로 나갔는데, 진짜였다. 손을 번쩍 들고 광주에서 영암 방면으로 향하는 버스를 세워 탔다.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구호는 세 가지였다. 이후 영암군에서 지프차와 군용레커차, 앞 유리가 깨진 광주고속버스 등을 포함해 차량 7~8대가 일렬로 행진했다. 시민군은 인근 경찰 지서(지금의 파출소)에서 카빈소총과 폭탄 등 무기를 빼냈다. 시민군은 무기를 확보하고자 전남 지역으로 내려온 듯했다. 소년도 카빈소총과 철모, 탄띠로 무장했다. 시민군은 해남 군부대로 향했으나 더는 진격하지 않고, 원래 목적지인 광주로 향했다. 그러나 광주로 가는 길목은 모두 계엄군에 의해 차단당했다. 하늘에선 헬기 소리가 들렸다. 시민군 대열은 광주 효촌동 앞 연탄공장, 송정리 광주비행장 입구, 송정기차역 등에서 모두 저지당했다. 특히 광주비행장 입구에서 계엄군 탱크가 포신을 시민군 쪽으로 돌렸을 때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이미 하루가 지난 터라 부모님이 걱정하실 것 같았다. 23일 오전 10시쯤 나주 본가로 돌아가기 위해 광주비행장에서 남쪽인 영산포를 향해 걸었다. 송정리 민가에 들러 카빈소총 등을 맡겼다. 어떤 마을 경찰 지서(파출소)를 지나고 있을 때 낯선 사람이 “광주는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데모하고 그럽디다” 하고 답했더니 잠깐 따라오라고 그랬다. 따라갔더니 파출소 숙직실이었다. 그는 무전기로 “폭도 2명을 잡았다”고 보고했다. 30분 만에 장갑차가 왔다.●19살, 인간의 잔인함과 비참함의 끝을 보다 끌려간 곳은 광주비행장 조사실이었다. 이름과 나이, 부모의 직업을 비롯해 그간의 행적을 모두 불라고 했다. 겁에 질린 소년은 빠짐없이 사실대로 다 말했다. 무장했다는 사실까지 털어놨다. 폭행은 가차 없었다. 고등학생이 공부 안 하고 시위에 참여했다고 무수히 맞았다. 한 시간쯤 조사받고 광주 서구 화정동에 있는 505보안대로 인계됐다. 백열전구 하나 켜진 조사실은 입구부터 피비린내가 났다. 2차 조사가 시작됐다. 물고문도 두 종류가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코와 입에 천을 대고 물주전자를 붓는 것과, 물을 계속 먹이고 뛰게 하는 것. 사람이 많이 맞으면 피오줌이 나온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소년은 그곳에서 인간의 잔인함과 비참함의 끝을 봤다. 매를 피하려고 개처럼 의자 밑으로 기어 들어가는 자신을, 살려 달라고 비는 소년을 비웃으며 몽둥이를 휘두르는 성인 남성을 목격했다. 돌이켜 보면 정신이 나갔었다. 눈 감으면 나주 집 마당에서 할머니와 함께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눈 뜨면 고문이 시작됐다. 조사가 끝나도 폭행은 멈추지 않았다. 수감실은 파놉티콘(원형감옥) 형태였다. 보안사 직원 한 명이 모든 재소자를 볼 수 있다. 재소자들이 이 직원을 정점으로 일렬로 무릎 꿇고 있는데, 자세가 흐트러질라 치면 보안사 직원은 군화로 무릎을 짓이겼다. 역설적이게도 27일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수복되는 날, 소년은 한결 편해졌다. 잡혀 온 사람이 많아지면서 감시도 매의 빈도도 낮아진 것이다. 그렇게 103일간 구속돼 고문을 받았다. 속으로 ‘10년 정도 옥살이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행히 검찰은 소년에게 기소유예 결정을 내렸다. ●40년 후… 진실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 소년은 1982년 조선대 물리학과에 진학했고, 일본에 유학을 가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2000년 모교로 돌아와 물리학과 교수가 됐다. 이 교수는 유학 생활이 힘들 때면 5·18민주화운동 때 받았던 고문을 생각했다. 그러면 조금은 위안이 됐다. 딸 재민양은 1993년 결혼해 낳은 둘째다. 딱 40살 차이 나는 늦둥이다. 이 교수는 딸이 초등학교 4학년일 때 5·18민주화운동 행사에 데려가 그간 겪었던 일들을 설명해 줬다. 당시 재민양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교과서에서만 듣던 얘기가 아빠의 역사일 줄은 몰라서다. 재민양은 아버지에게 자부심도 느꼈다. 중학교 때는 학교 공개수업 때 주제가 5·18민주화운동이면 본인이 발표하겠다고 자원했다. 1차 자료를 인터넷이 아닌 아버지에게 얻었다. 실제로 5·18은 재민양에게 학창 시절 내내 주요 ‘화두’였다. 이 관심은 민주화운동으로, 나아가 근현대사로 확장됐다. 진로에도 영향을 미쳤다. 광주 사람인데도 ‘북한에서 지령받은 사람들이 일으킨 폭동’이라고 오해하고 있을 때마다 진상이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께 항상 죄송하고 감사해요. 아버지가 인류애를 상실할 만한 일을 당하던 똑같은 시기에 저는 교실에서 편하게 공부만 했잖아요. 힘들다고 응석 부린 걸 생각하면 자식으로서 죄송해요. 아버지가 트라우마로 여기고 피해 사실을 계속 외면할 수도 있는데, 제게 말씀해 주신 것도 감사하죠. 덕분에 제 시야가 트였고, 인생의 목표를 찾는 데도 도움이 컸어요. 아버지는 제 은인이에요.” -딸 재민이 아빠에게 “진로에 대해 한 번도 ‘이것 해라, 저것 해라’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제 아버지도 정부가 잘못됐다는 말은 해도, 나가서 싸우라고 한 적은 없거든요. 부모가 그래요. 자기 생각을 강요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도 딸이 스스로 억울한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기특할 따름입니다. 또래 친구들도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져 줬으면 좋겠어요.” -40년 전 시민군 아빠가 딸에게 광주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광주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오월을 지켜줘서 고마워요”…아빠는 딸의 역사가 됐다

    “오월을 지켜줘서 고마워요”…아빠는 딸의 역사가 됐다

    5·18민주화 시민군 이봉주 조선대 교수계엄군에 붙잡혀 103일간 모진 고문40년 지났지만 트라우마는 여전딸 재민양, 아빠 고맙고 자랑스러워이 교수, “꾸준한 사회 관심을 가졌으면”1980년 5월 폭력의 기억은 여전히 트라우마다. 40년이 흘렀지만 누군가 위협을 가하는 상황이 닥치면 지금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조건반사처럼 그 끔찍한 고문과 조사관이 떠오른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매를 맞다 정신을 잃으면 고향집 앞 마당이었고, 양동이 물로 정신이 돌아오면 505보안부대 조사실이었다. 그렇게 이봉주(59) 조선대 물리학과 교수는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했다. 그의 나이 19세, 광주 금호고 2학년(1년 휴학)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소년은 중년이 됐고, 당시 소년만 한 나이의 딸이 생겼다. 딸 재민(19)양은 올해 고려대 자유전공학부에 입학했다. 이 교수는 딸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고문당한 얘기를 털어놨고, 종종 그때 얘기를 나누곤 한다. 이 교수는 딸과 그 또래에게 거창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끔찍했던 경험 탓인지 혹시라도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라고 얘기하는 것조차도 조심스럽다. 다만 “우리 사회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딸 재민양은 아빠에게 “모진 고문에도 살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아빠의 트라우마가 더는 우리 사회에서 반복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서울신문은 지난 13일 5·18민주화운동 당시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했던 옛 전남도청 앞 광주 동구 금남로의 한 사무실에서 이들을 만났다. ●계엄군에 구타당하는 대학생…까까머리 가슴에 불을 지피다 40여년 전 소년은 사회에 관심이 많았다. 교직에 계셨던 아버지는 당시 박정희 군부 정권을 대놓고 비판은 못했다. 다만 가끔 가족에게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소년은 스스로 찾아봤다. 당시 ‘신동아’ 잡지에 실린 유신헌법을 비판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울대 김상진(당시 26세) 열사의 기사를 읽고 ‘고귀한 죽음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무고한 희생을 볼 때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끓어올랐다. 본가가 전남 나주였지만 광주에서 유학했다. 1980년 금호고 2학년 시절 3㎞ 거리에 전남대가 있었다. 비상계엄령이 확대될 무렵 등교할 때마다 대학생 형들의 시위를 목격했다. 교련복 입은 전남대생들이 “전두환은 물러가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를 외치며 전경, 군인들과 대치했다. 그리고 대학생 형들이 계엄군이 휘두르는 곤봉에 맥없이 꼬꾸라지는 모습을 봤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라고 생각했다. 그때 소년은 아버지의 혼잣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년은 17일부터 시위에 참여해 구호를 외쳤다.●모내기철 나주 본가 내려간 이 교수, 운명처럼 시민군 버스 합류 20일 광주 지역 중·고등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때마침 나주에 계신 부모님이 모내기 일손이 부족하다고 연락이 왔다. 소년은 본가에 내려갔다. 광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길이 없었다. 22일 오후 2시쯤 큰집 사촌 형이 영산포 시내에 시민군 버스가 돌아다닌다고 전해 줬다. 설마 싶었다. 영산포 시내로 나갔는데, 진짜였다. 손을 번쩍 들고 광주에서 영암 방면으로 향하는 버스를 세워 탔다.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구호는 세 가지였다. 이후 영암군에서 지프차와 군용레커차, 앞 유리가 깨진 광주고속버스 등을 포함해 차량 7~8대가 일렬로 행진했다. 시민군은 인근 경찰 지서(지금의 파출소)에서 카빈소총과 폭탄 등 무기를 빼냈다. 시민군은 무기를 확보하고자 전남 지역으로 내려온 듯했다. 소년도 카빈소총과 철모, 탄띠로 무장했다. 시민군은 해남 군부대로 향했으나 더는 진격하지 않고, 원래 목적지인 광주로 향했다. 그러나 광주로 가는 길목은 모두 계엄군에 의해 차단당했다. 하늘에선 헬기 소리가 들렸다. 시민군 대열은 광주 효촌동 앞 연탄공장, 송정리 광주비행장 입구, 송정기차역 등에서 모두 저지당했다. 특히 광주비행장 입구에서 계엄군 탱크가 포신을 시민군 쪽으로 돌렸을 때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이미 하루가 지난 터라 부모님이 걱정하실 것 같았다. 23일 오전 10시쯤 나주 본가로 돌아가기 위해 광주비행장에서 남쪽인 영산포를 향해 걸었다. 송정리 민가에 들러 카빈소총 등을 맡겼다. 어떤 마을 경찰 지서(파출소)를 지나고 있을 때 낯선 사람이 “광주는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데모하고 그럽디다” 하고 답했더니 잠깐 따라오라고 그랬다. 따라갔더니 파출소 숙직실이었다. 그는 무전기로 “폭도 2명을 잡았다”고 보고했다. 30분 만에 장갑차가 왔다.●매를 피해 책상 밑으로…비참함의 끝, 고문의 시간 끌려간 곳은 광주비행장 조사실이었다. 이름과 나이, 부모의 직업을 비롯해 그간의 행적을 모두 불라고 했다. 겁에 질린 소년은 빠짐없이 사실대로 다 말했다. 무장했다는 사실까지 털어놨다. 폭행은 가차 없었다. 고등학생이 공부 안 하고 시위에 참여했다고 무수히 맞았다. 한 시간쯤 조사받고 광주 서구 화정동에 있는 505보안대로 인계됐다. 백열전구 하나 켜진 조사실은 입구부터 피비린내가 났다. 2차 조사가 시작됐다. 물고문도 두 종류가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코와 입에 천을 대고 물주전자를 붓는 것과, 물을 계속 먹이고 뛰게 하는 것. 사람이 많이 맞으면 피오줌이 나온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소년은 그곳에서 인간의 잔인함과 비참함의 끝을 봤다. 매를 피하려고 개처럼 의자 밑으로 기어 들어가는 자신을, 살려 달라고 비는 소년을 비웃으며 몽둥이를 휘두르는 성인 남성을 목격했다. 돌이켜 보면 정신이 나갔었다. 눈 감으면 나주 집 마당에서 할머니와 함께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눈 뜨면 고문이 시작됐다. 조사가 끝나도 폭행은 멈추지 않았다. 수감실은 파놉티콘(원형감옥) 형태였다. 보안사 직원 한 명이 모든 재소자를 볼 수 있다. 재소자들이 이 직원을 정점으로 일렬로 무릎 꿇고 있는데, 자세가 흐트러질라 치면 보안사 직원은 군화로 무릎을 짓이겼다. 역설적이게도 27일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수복되는 날, 소년은 한결 편해졌다. 잡혀 온 사람이 많아지면서 감시도 매의 빈도도 낮아진 것이다. 그렇게 103일간 구속돼 고문을 받았다. 속으로 ‘10년 정도 옥살이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행히 검찰은 소년에게 기소유예 결정을 내렸다. ●40년 후…소년이 소녀에게, 소녀는 소년에게 말하다 소년은 1982년 조선대 물리학과에 진학했고, 일본에 유학을 가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2000년 모교로 돌아와 물리학과 교수가 됐다. 이 교수는 유학 생활이 힘들 때면 5·18민주화운동 때 받았던 고문을 생각했다. 그러면 조금은 위안이 됐다. 딸 재민양은 1993년 결혼해 낳은 둘째다. 딱 40살 차이 나는 늦둥이다. 이 교수는 딸이 초등학교 4학년일 때 5·18민주화운동 행사에 데려가 그간 겪었던 일들을 설명해 줬다. 당시 재민양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교과서에서만 듣던 얘기가 아빠의 역사일 줄은 몰라서다. 재민양은 아버지에게 자부심도 느꼈다. 중학교 때는 학교 공개수업 때 주제가 5·18민주화운동이면 본인이 발표하겠다고 자원했다. 1차 자료를 인터넷이 아닌 아버지에게 얻었다. 실제로 5·18은 재민양에게 학창 시절 내내 주요 ‘화두’였다. 이 관심은 민주화운동으로, 나아가 근현대사로 확장됐다. 진로에도 영향을 미쳤다. 광주 사람인데도 ‘북한에서 지령받은 사람들이 일으킨 폭동’이라고 오해하고 있을 때마다 진상이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아버지께 항상 죄송하고 감사해요. 아버지가 인류애를 상실할 만한 일을 당하던 똑같은 시기에 저는 교실에서 편하게 공부만 했잖아요. 힘들다고 응석 부린 걸 생각하면 자식으로서 죄송해요. 아버지가 트라우마로 여기고 피해 사실을 계속 외면할 수도 있는데, 제게 말씀해 주신 것도 감사하죠. 덕분에 제 시야가 트였고, 인생의 목표를 찾는 데도 도움이 컸어요. 아버지는 제 은인이에요.” -딸 재민이 아빠에게 “진로에 대해 한 번도 ‘이것 해라, 저것 해라’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제 아버지도 정부가 잘못됐다는 말은 해도, 나가서 싸우라고 한 적은 없거든요. 부모가 그래요. 자기 생각을 강요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도 딸이 스스로 억울한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기특할 따름입니다. 또래 친구들도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져 줬으면 좋겠어요.” -40년 전 시민군 아빠가 딸에게 광주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광주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그날, 이 아이들이 죽어야 하는 이유 따윈 없었다

    그날, 이 아이들이 죽어야 하는 이유 따윈 없었다

    대검·총·군홧발에 짓밟힌 평범한 아이들 5·18민주화운동 10대 사망자 36명시민군 가담 않은 희생자도 다수계엄군 도청앞 발포 13명 사망검시기록도 조작·왜곡 가능성1980년 5월 광주에서 소년·소녀가 숨졌다. 다 자라지 못한 그 작은 몸엔 수없이 많은 총알과 대검이 관통했고 주검은 군홧발에 짓밟혔다. 아이들이 죽어야 하는 이유 따윈 없었다. 삼촌 가게에 일하러 가던 19세 소년 노동자는 대검에 찔렸고, 공부하다 귀가하던 고2 남학생은 매복한 군인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아픈 사람 살리겠다고 헌혈에 나선 17세 여고생은 총에 맞았고, 11살짜리 소년은 묘지 근처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사망했다. 서울신문은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희생된 10대 청소년들의 발자취를 정리했다. 광주민주화운동기록관이 공개한 검찰의 검시조서와 사망진단서를 확인했고, 국군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광주사태 관련 사망자 명단’과 ‘광주사태 사망자 검시 결과’를 국가기록원에 정보공개청구해 확인했다. 구술 기록을 확인하면서, 연락이 닿는 유족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어떤 죽음이 억울하지 않을까. 하지만 아이들은 특히 그랬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눈시울은 그렇게 40년간 마를 날이 없었다. 5·18 사망자 5명 중 1명은 10대 청소년 5·18 광주민주항쟁(5월 17~27일) 당시 사망한 165명 중 10대 청소년은 36명(21.8%)이다. 평균 나이는 16.7세로 정규교육을 거쳤다면 중학교 3학년이었을 나이다. 남자가 30명이었고 여자가 6명이었다. 검시조서에 기재된 직업을 보면 고등학생이 13명으로 가장 많았다. 학업 대신 돈을 벌던 소년 노동자는 10명으로 두 번째로 많았고 중학생 6명, 학교 밖 청소년(무직) 5명, 재수생 1명, 초등학생 1명이었다.사망 원인은 총상이 32명(88.9%)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검시조서를 보면 당시 계엄군이 사용한 총기인 M16에 의해 사망한 이들은 21명이었다. 시민군이 경찰의 무기고를 탈취해 사용한 카빈총으로 사망한 이도 6명이었다. 이 기록만 보면 시민군 간 오인 사격이 발생했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사망자 검시기록조차 조작·왜곡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전두환 신군부는 계엄군의 학살 책임을 덜고자 카빈총에 의한 사망을 의도적으로 늘렸다는 의혹을 받는다. 실제로 5공화국 인사들은 카빈총 희생자가 전체 사망자 165명 중 28~88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광주민주항쟁은 군인의 양민학살보단 시민군의 오인사격이 피해를 키웠다는 것이다. 이런 기록을 북한군이 개입한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아울러 총에 맞아 사망했지만, 죽음의 원인을 바꿔 분류하기도 했다. 김경환(19·점원)군은 자상 3곳, 총상 등이 발견됐지만, 검찰 보고서에는 ‘자상으로 분류할 것’이라 적혀 있었고, 보안사 검시참여보고에도 총상은 빠져 있었고 최종적으로 ‘타박상으로 인한 사망’으로 분류됐다. 검찰의 검시기록이 조작되는 삼엄한 시대였다. 한편 10대 사망자 중 차량 추락사가 3명이고 두들겨 맞아 사망한 이는 1명이다. 휴교조치 내려진 5월 20일, 10대 첫 사망자 발생 1980년 5월 17일,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를 의결한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1979년 12월 12일 군사정변을 일으킨 후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의 요구가 커지자 전두환 신군부는 이를 저지하고자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다음날인 18일 계엄군은 전남대를 봉쇄했다. 군과 학생 간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시위가 격해지자 군인은 학생을 군홧발로 짓밟았다. 학생들은 광주시내 중심가인 금남로로 이동했고, 계엄군은 쫓아와 진압작전을 펼쳤다. 19일 전두환 신군부는 11여단을 광주에 증파했다.광주시민은 분노했다. 대학생부터 시민까지 무차별적으로 폭행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광주시민들은 침묵하지 않고 돌을 들었다. 이날 오후 4시 30분 광주 동구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에 다니는 김영찬군이 계엄군이 쏜 총에 의해 부상을 당했다. 광주시내 고등학교에 휴교조치가 내려진 20일 처음으로 사망자가 나왔다. 금남로에서 택시 200여대가 경적을 울리며 차량 시위를 벌이던 날이다. 10대 사망자도 2명이 나왔는데, 동신중 3학년 박기현(당시 14)군과 상점에서 일하던 김경환(19)군이 군인의 무자비한 폭행에 숨을 거뒀다. 특히 이날은 박군이 수학여행을 다녀온 날이었다. 부산에 누나의 산후 수발을 간 어머니를 기다리다 심심해진 박군은 밖으로 나가보고 싶었다. 박군은 책을 사와야 한다며 아버지의 만류에도 자전거를 끌고 나섰고, 그 이후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계엄군이 박군을 낚아채고 무자비하게 폭행한 것을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다. 이틀 뒤 박군은 전남대병원에서 숨진 채 가족에 의해 발견됐다. 계엄군의 도청 앞 발포, 청소년 13명 숨지다 21일 오후 1시 최소 10만여명의 시민이 모인 전남도청 내 스피커에선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애국가가 끝나기 무섭게 공수부대의 사격이 시작됐다. 10분여간 지속한 사격에 최소 54명이 숨지고 500여명이 총상을 입었다. 10대라고 총탄이 피해가진 않았다. 이날 목숨을 잃은 10대 청소년은 총 13명에 이른다. 부처님오신날이었던 그날 김완봉(14·무등중3)군도 금남로에 있었다. 김군의 어머니인 송영도씨는 아들과 함께 절에 가려고 집을 나섰지만 이내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고생하는 청년들에게 빵을 먹이자는 주변의 제안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송씨는 그 길로 집에서 10만원을 들고 와 빵과 우유, 담배, 계란 등을 슈퍼에서 사 모아 도청 시위대에 건네줬다. 그러는 사이 집에 있던 아들이 금남로로 나왔던 것이다. 전남대병원과 적십자병원 등을 백방으로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다음날 새벽 송씨는 결국 적십자병원 시체실에서 아들을 찾았다. 전날 아침에 아들이 입었던 줄무늬 셔츠와 청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전교 13등을 했다며 학교에서 배지를 받아온 착한 아들이 싸늘한 주검이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들은 뒷목 쪽에 총을 맞아 사망한 상태였다.시신 담을 관 구하러 갔다…9발 맞은 소년군도 무장한 시민군의 저항에 따라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한 22일 이후에도 10대 사망자는 계속 나왔다. 이날 6명이 사망했고, 23일 4명, 24일 3명, 25일 2명,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항쟁이 있었던 27일에는 5명이 숨졌다. 계엄군의 잔혹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23일 사망한 손옥례(19·무직)양은 전남 화순으로 시신 담을 관을 구하러 가는 버스에서 매복한 군인에게 피습을 당해 사망했다. 당시 손양은 머리와 가슴 등 M16 총탄 7발을 맞았다. 그래도 부족했던지 계엄군은 손양의 가슴부위를 대검으로 찔렀다. 그렇게 손양의 주검은 2번 죽었다. 같은 버스를 탄 것으로 추정되는 황호걸(19·방송통신고3)군도 복부를 비롯해 9곳의 총상을 입었다. 절단된 10대의 시신도 있다. 시위대 차량에 탑승해 총을 들고 군인을 추격하다가 24일 사망한 김부열(17·조대부중3)군은 계엄군의 총격에 사망했다. 시신 발견 당시 심한 부패로 사인 및 상해 수단을 규명하기 어려웠지만, 목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 가슴과 한쪽 팔도 떨어져 나간 상태여서 유족은 사타구니 옆 점으로 신원을 확인했다. 김군의 시신은 광주 동구 지원동 뒷산에서 발견됐다. 광주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광주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서울 손지민 기자 sjm@seoul.co.kr
  • 5·18 40주년 文 “광주시민에 큰 죄책감…노무현 제일 생각나”

    5·18 40주년 文 “광주시민에 큰 죄책감…노무현 제일 생각나”

    문 대통령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문재인 대통령이 40주년을 맞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광주 시민들이 겪는 엄청난 고통을 들으면서 굉장히 큰 죄책감을 느꼈다”며 깊은 죄책감을 드러냈다. 문 대통령은 또 “5·18 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17일 오전 8시 광주MBC 5·18 민주화운동 특별 프로그램 ‘문재인 대통령의 오일팔’에 출연해 “제가 광주 5·18 소식을 들었을 때 민주화의 아주 중요한 길목에 다시 군이 나와서 군사독재를 연장하려고 한다, 그 사실에 굉장히 비통한 그런 심정이었다”며 이렇게 밝혔다. 이번 인터뷰는 지난 12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진행됐다. 문 대통령은 당시 서울 지역 총학생 회장단의 시위 퇴각 결정에 반대했던 경희대 복학생이었다. 반(反)유신투쟁에 참가한 혐의로 구속돼 경희대에서 제적됐다가 군 복무를 마친 후 학교를 떠난 지 5년만인 1980년 복학했다. 이후에도 반독재 민주화 요구 시위에 가담했다가 그해 5월 17일 비상계엄령이 확대되자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됐다. 문 대통령은 1980년 5월 15일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서울역에 모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가 퇴각한 ‘서울역 회군’이 광주시민의 희생을 초래했다고 돌아봤다.문 대통령은 서울에서는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가 사라지고, 광주 시민이 홀로 계엄군에 맞서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대학생들이 결정적 시기에 퇴각하면서 광주 시민이 외롭게 계엄군과 맞서야 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돼 있던 중 저를 조사하던 경찰관으로부터 광주 시민이 사상을 당한 사실을 들었다”면서 “그런 사실이 다 언론에 보도되는 것으로 알았는데 석방 후에 보니 오히려 폭도들의 폭도인 양 왜곡돼 알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떻게 보면 저는 광주 바깥에서 가장 먼저 광주의 진실을 접한 사람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들 모두가 광주에 대한 어떤 부채의식을 늘 가지고 있었고 그 부채의식이 그 이후 민주화운동을 더욱 더 확산시키고 촉진시키는 그런 계기가 되었다”면서 “당시 광주 오월 영령들을 비롯한 광주 시민들은 1980년대 이후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상징과 같은 그런 존재가 되었다”고 평가했다.文 “노무현 변호사와 제가 주동돼 광주 비디오 관람회 가져” 문 대통령은 특히 노 전 대통령을 가장 생각나는 사람으로 꼽았다. 문 대통령은 ‘5·18과 관련해 떠오르는 인물’에 대해 “광주 항쟁의 주역은 아니지만 그러나 광주를 확장한 그런 분으로서 기억을 하고 싶다”면서 “80년대 이후의 부산 지역의 민주화운동은 광주를 알리는 것이었다”며 노 전 대통령을 언급했다. 1987년 5월 무렵, 문 대통령은 당시 변호사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처참한 광주의 실상을 담은 비디오를 부산 시민들에게 보여줬다. 노 전 대통령은 광주의 진실을 알려 또 다른 민주화 운동인 ‘6월 항쟁’의 불씨를 당기는 데 함께한 ‘동지’였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은 “당시의 광주의 상황을 촬영한 동영상들, 이른바 광주 비디오라고 부르던, 거의 한 시간 정도 되는 분량이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생생하고 정말로 참혹한 것이었다”고 회고했다.이어 “누구나 그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을 할 수가 없는 그런 말하자면 확실한 증거가 되는 그런 비디오였다”면서 “6월 항쟁이 일어났던 87년 5월에는 당시의 노무현 변호사와 제가 주동이 돼서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5·18 광주 비디오, 말하자면 관람회를 가졌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광주를 알게 될수록 시민들은 그 당시 광주가 외롭게 고립되어서 희생당했는데 거기에 동참하지 못하고 그냥 내버려두었던 그 사실에 대해서 큰 부채 의식을 가지게 됐고, 그것이 이제 민주화운동의 하나의 또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은 “그러면 부산 시민들이 줄을 서서 기다려서 광주 비디오를 보고, 그때 비로소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된 그런 분들도 많았다”면서 “그런 것이 부산 지역 6월항쟁의 큰 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그런 일을 함께했던 노무현 변호사를 광주를 확장한 분으로 기억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12.12 직후 전두환, “개인적 야심 없다” 기만전술…美도움 원해

    12.12 직후 전두환, “개인적 야심 없다” 기만전술…美도움 원해

    5·18 관련 미 국무부 문건 43건 공개 전두환 전 대통령이 12·12 군사반란 직후 주한미국대사와의 면담에서 미국의 도움을 받고 싶어했던 당시 정황이 드러났다. 전 전 대통령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철저히 기만전술을 펴온 정황이 미국 측 비밀문서를 통해 재확인된 것이다. 15일 외교부는 지난 12일 미국 측으로부터 전달받은 43건 143페이지 분량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문서(사본)에 대한 검토 작업을 거쳐 ‘5.18 광주민주화운동기록관’ 웹사이트를 통해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는 기존에 누락 됐던 비밀해제 부분까지 완전한 형태로 우리 측에 전달됐다. 공개된 내용은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미국대사는 신군부 쿠데타 이틀 후인 1979년 12월 14일 전두환 당시 국군 보안사령관을 만나 나눈 대화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미 국무부로 보낸 전문에서 전 사령관이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에 대해 “길고 자세하며 의심의 여지 없이 자기중심적인 설명”을 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전 사령관이 ‘쿠데타도 아니고 반란도 아니며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에 대한 수사를 마무리 지으려는 시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고 기술했다. 전 사령관은 “사적인 야심이 없고, 개인적으로는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정치 자유화 일정을 지지하며, (쿠데타로 인한) 군부내 분열상도 한 달 내로 정리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전 사령관을 면담한 결과 글라이스틴 대사는 “세 가지 측면에서 특히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몇주 내지 몇 달 내에 매우 어려운 선택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평가를 내렸다.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 이희성 계엄사령관 면담한 기록 공개 이번에 비밀해제 된 문서에선 글라이스틴 대사가 1980년 5월 17일 자정 계엄령 전국 확대를 전후해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면담한 기록도 추가 공개됐다. 최광수 비서실장은 최규하 정부가 시민사회의 정치 자유화 요구를 받아들이려 하지만, 신군부에 완전포획된 나머지 굉장히 두려워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희성 사령관은 계엄 확대 배경에 대해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한국은 베트남처럼 공산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가피했다고 강변했다. 이 사령관은 최 대통령의 계엄령 승인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대규모 학생 시위를 통제하기 위해 비무장지대(DMZ)에서 병력을 뺄 경우 북한의 공격 위험이 커진다는 주장이 그를 설득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최 대통령이 압력 없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계엄령을 승인했다고 주장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1980년 5월 26일자 전문에서는 뉴욕 타임스 기자가 광주 학생 지도부로부터 글라이스틴 대사가 휴전을 위한 중재에 나서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그는 “대사가 이런 지저분한 상황에서 중재 역할을 맡을 경우 대사관이 한쪽이나 양쪽 모두에 끌려다닐 수 있다”고 적었다. 5·18 전문가들은 이번에 공개된 문건에는 광주에서 발포 명령을 내린 책임자나 지휘 체계에 대한 내용은 없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미국 정부가 5·18 40주년을 앞두고 자료를 준 것은 굉장히 우호적인 제스처”라며 “자료 확보의 첫 단계로 굉장히 의미 있다”고 말했다.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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