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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12 결심공판­최후 진술·최후 변론

    ◎전·노씨 “정치·도의적 책임… 죄송”/“피고인들에게 너그러운 관용 바라”­전·노씨/“사법처리 대상 되는지부터 살펴야”­변호인 14일 열린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결심 공판의 최후진술과 변론을 요약한다. ▷최후 진술◁ ◇전두환 피고인=우선 본인의 부덕으로 국민의 자긍심을 훼손한 데 대해 국민들에게 죄송합니다.법정에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분들이 희생과 고통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당시 국정의 중요자리를 맡은 사람으로서 정치·도의적으로 책임을 느끼며 진심으로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본인이 국정최고책임자로 있었을 때 일어났던 모든 문제는 본인 한 사람에게 귀착되므로 재판장님께서는 나머지 피고인 여러분에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관용을 베풀어주시길 바랍니다. ◇노태우 피고인=재판장님,그리고 판사님들,우리에게 친절하고 원만하게 재판을 진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변호인단의 변론에도 감사드립니다.검찰도 어려운 직분 수행에 수고 많았습니다.저로인해 국민들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한데 대해 재삼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저와 연루된 많은 피고인들에게 아무쪼록 너그러운 관용을 바랍니다.마지막으로 제발 이 나라가 진실로 잘 돼 나가길 기원합니다. ◇유학성 피고인=불우했던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8·15 광복 이후 군문에 들어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습니다.전쟁터에서는 동족도 살상해야 합니다.12·12당시 우군간의 충돌이 있었다면 전쟁터가 됐을 겁니다.불행한 사태를 막기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국가를 위기에서 구하려는 일념이었습니다. ◇황영시 피고인=평생을 국가를 위해 몸을 바쳤습니다.국가의 명령을 받은 계엄군이 시위대를 진압한 것을 불법이라고 한다면 군은 생명을 잃게됩니다.재판관님의 현명한 판단이 있길 바랍니다. ◇박준병 피고인=중학교 5학년때 6·25가 발발돼 학도병으로 군에 들어가 30년동안 직업군인의 길을 걸었습니다.군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갖고 올바른 군인의 길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시대로 접어드는 시대를 준비하면서 법이 서는 사회가 되도록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이 있으시길부탁드립니다. ◇정호용 피고인=존경하는 재판관님,변호인단 여러분 그동안 고생많이 했습니다.이번 사건이 워낙 방대해 하나하나 범죄사실에 대한 진실 규명이 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저는 구체적인 죄목이 하나도 없는데 10년형이 선고 된 것에 대해 잘 이해가 안됩니다.용기와 소신있는 결단으로 국민들에게 사법부의 긍지를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최후 변론◁ ◇이양우 변호사(전 피고인)=합헌정권을 내란정부로 단죄한 1심 재판은 세계 사법사상 전무후무한 것입니다.우리사법의 현 위치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심히 회의하고 있습니다.검찰의 공소제기는 형벌불소급의 대원칙을 부정한 위헌,반인권적 행위로 사법사상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습니다.검찰은 정치권의 요구에 부합해 피고인들을 정치적인 속죄양으로 만들어 처벌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한영석 변호사(노 피고인)=검찰은 처음 12·12 사건에 대해 불기소처분을,5·18사건에 대해서는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으나 그뒤 정치적·법률적 비난이 쏟아지자 다시 공소를제기한 만큼 이 법정은 우선 이 사건이 사법처리 대상이 되는지부터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7대 쟁점 검찰­변호인측 변론 요지

    ◎정 총장 연행­“사전재가 없어 불법”·“현행범 임의동행”/비상계엄 확대­“국헌 문란시킨 폭동”·“대통령 통치행위”/강경 시위진압­“유혈사태 불러 내란 명백”·“계엄군 의무”/지위권 천명­“사실상 발포 명령”·“군인들의 고유권한”/폭동와중 살인­“내란목적 살인죄”·“내란죄에 흡수 마땅” 11일 열린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10차 공판에서 형사재판으로는 이례적으로 이 사건 7대 쟁점에 대한 검찰과 변호인측의 구두변론이 진행됐다. 검찰과 변호인측의 구두변론을 쟁점별로 요약한다. 정승화 육참총장 연행의 적법성 여부 ◇검찰=정총장은 계엄 상황에서 「대통령­국방장관­계엄사령관」으로 이어지는 군 주요 지휘라인에 있어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사전재가 없이 그를 연행한 것은 대통령의 군통수권 행사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 것이다.정총장 연행에 대통령의 사전재가가 필요한 것이지,법규정에 없기 때문에 재가가 필요없다는 것은 사건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피고인들이 사후재가를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사태를 조기 수습하기 위한 부득이 한 조치에 불과하다. ◇변호인=헌법이나 형사소송법 등 우리나라 어느 법률에도 참모총장을 연행할 때 사전재가를 받아야 한다는 명문 규정은 없고 오히려 범법자에 대한 수사의무만 명시돼 있기 때문에 정총장을 연행,수사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조치였다.다만 인신구속을 할 경우 형사소송법에 따라야 하지만 계엄하에서 정총장에 대한 영장발부 권한은 정총장 자신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지 못한 것은 자명한 일이었고,현행범은 임의동행 형식으로 연행할 수도 있다. 비상계엄 확대 선포가 폭동인가 ◇검찰=군을 배경으로 최규하 대통령의 발동을 빌려 비상계엄을 확대한 80년 5월17일부터 계엄이 해제된 81년 2월까지를 모두 폭동으로 본다.비상계엄 확대선포가 비록 법률에 근거한 것이라도 국헌문란에 이용했다면 폭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국 국헌문란 목적의 피고인들이 대통령의 국가긴급권 발동을 이용,비상계엄으로 국민을 위협하고 비상계엄하 상황을 토대로 일련의 내란과정을 일으킨 폭동이라는 입장이다. ◇변호인=비상계엄 전국확대는 적법하게 이뤄진 대통령의 통치행위이며 통치행위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다. 검찰이 기소하지 않은 최대통령의 계엄확대 행위를 갑자기 피고인의 행위로 둔갑시킨 이유를 납득할 수 없으며 여러차례 석명요구에도 검찰이 답변을 회피하고 있다. 국보위 설치가 형법 91조의 국헌문란에 해당하는 지 여부 ◇검찰=국보위는 대통령이나 국방장관 혹은 계엄사령관이 조직한 기구가 아니라,일부 보안사 참모들과 전두환 피고인의 주도로 조직된 기구이다.국보위는 80년 5월부터 10월까지 단 5개월간만 운영되면서도 공직자 숙정,언론인 해직,삼청교육대,전과기록말소 등을 추진,5·16당시의 혁명기구와 같이 국무회의와 행정각부를 통제하고 대통령을 무력화시켰다.비록 국보위가 외관상으로는 적법한 건의를 거쳐 조직된 형식을 갖춘 흔적은 많으나 실질적으로는 입법·사법·행정부를 통제,무력화시켰으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 ◇변호인=형법 91조는 국헌문란 행위에 대해 첫째,헌법이나 법률절차에 위배되고 둘째,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해 권한행사를 무력하게 하는 점을 요건으로 보고 있다.80년 10월27일 국회해산은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따라 적법하게 이뤄진 것으로 국보위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당시 국회해산을 승인권자인 대통령에게 건의한 사실만을 놓고 채택되지도 않은 국회해산 건의안에 대해서까지 국헌문란이라고 볼 수는 없다. 계엄군의 강경한 시위진압행위가 폭동 및 군사반란이라는 점 ◇검찰=신군부측이 광주시위를 통해 계엄군을 「생명있는 도구」로 이용,무고한 시민들을 유혈진압한 것은 명백한 내란행위이다. 또 군병력을 전국주요시설에 배치해 정치인과 학생들을 학살한 점은 국가권력과 시민에 대한 반란에 해당한다. ◇변호인=시위진압은 군통수권자에 따라 계엄군에 부여된 의무였다. 강경진압이든 온건진압이든 폭동이나 내란에 해당한다고 볼수 없다. 반란은 폭행·협박 등으로 국가권력에 반항하는 것인데 계엄군이 시위진압을 한 행위에 대해 반란죄의 간접정범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위권 보유천명이 사실상의 발포명령인지의 여부 ◇검찰=자위권 발동을 망설이고 있던 현장 진압군이 사실상 발포명령으로 보고 발포를 시작하게 됐다.변호인측은 발포명령으로 인해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살상 등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이를 은폐하기 위해 자위권 보유천명이라는 형식논리에 집착하고 있다.4·19때 발포명령으로 비극적 사태를 가져 온 사건을 감안해 발포명령을 선뜻 할 수 없었으며 이에 따라 자위권 보유천명이라는 것이 나왔다. ◇변호인=자위권은 군인의 고유권한이지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 발동하는 것이 아니다.광주진압 당시 자위권을 이미 발동해 행사하고 있던 계엄군에게 자위권을 보유천명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법률적으로도 효력이 없다.더욱이 자위권 보유천명과 발포명령 및 실탄배분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해 검찰은 어떠한 규명도 하지 못해 증거가 없는 상태이다.방어적·수세적 의미의 자위권 보유천명과 공격적·적극적 의미의 발포명령을 서로 혼동하면 안된다. 폭동의 와중에 행해진 살인에 대해 내란목적살인죄를 적용할 수 있는지 여부 ◇검찰=대법원은 김재규 내란사건에 대한 판결에서 요인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려운 경호실 경호원들을 살해한 경우에도 모두 내란목적살인죄를 적용했다.폭동의 와중에 일어난 살인은 모두 내란달성의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내란목적 살인죄의 객체를 요인으로 국한할 수 없다.이 문제야말로 순수하게 재판부의 판단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변호인=자위권 발동지시에 따라 살상행위가 있다하더라도 이것이 곧바로 내란죄의 구성요건인 국가기관의 기능을 방해하는 것으로 연결될 수 없다.검찰은 이를 증명하지 못했다.시위대에 대한 살상행위는 폭동행위에 수반해서 일어나거나,시위대와의 교전중에 일어난 것이므로 이는 내란죄에 흡수된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내란죄의 공소시효에 대해 ◇검찰=내란죄의 기수시기와 종료시기는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이 사건은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범죄행위를 해 왔으므로 비상계엄이 해제된 지난 81년1월24일 폭동행위가 비로소 종료된 것으로 봐야한다. ◇변호인=내란죄의 종료시점은 늦어도 80년9월1일 전피고인이 대통령에 취임하기 이전이다.정권을 잡게되면 내란을 목적으로 하는 폭동행위는 종료되는 것이지 집권이후의 행위까지 포함할 수는 없다.
  • 「12·12」 항소심 10차공판/오늘 막판 법리공방 예상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10차 공판이 11일 상오 9시30분 서울고법 417호 대법정에서 형사1부(재판장 권성 부장판사) 심리로 열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피고인 16명이 출정한 가운데 구두 변론 등이 진행된다. 재판부는 이날 공판에서 결심을 할 계획이나 구두변론 등이 예상시간 보다 길어지면 오는 12일이나 14일 11차 공판에서 결심을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따라 검찰과 변호인단은 재판부가 공소장과 항소이유서를 토대로 선정한 7개 핵심쟁점인 ▲정승화 총장 연행의 불법성 ▲계엄군 광주시위 진압행위의 내란죄 해당 여부 ▲자위권 보유천명이 사실상 발포명령인지의 여부 ▲국보위설치와 운영의 국헌문란 여부 ▲비상계엄확대를 폭동으로 보는 근거 ▲계엄군의 강경진압 ▲내란목적살인죄의 적용이 가능한지 등을 놓고 막바지 법리공방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 “계엄군 과잉진압이 시민들 감정격화”/5·18 항소심 이모저모

    ◎검찰·변호인단 공판내내 신경전 17일 열린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3차공판에서 검찰측은 5·18피해자와 목격자를 증인으로 내세워 계엄군의 과잉진압을 부각시킨 반면 변호인측은 총기사용의 불가피성을 두둔하는데 주력했다. 이날 공판에는 전남도청 사수대로 활동하다 징역 7년을 선고받은 피해자 이양현씨(47·사업)와 동아일보 전남도청 출입기자로 현장을 목격한 김영택씨(60)가 증언대에 섰으며 지난 15일 재판부로부터 「피해자진술권」을 따낸 강길조씨(54·회사원)가 당시 상황을 진술했다.5·18피해자가 증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씨는 『진압군이 현장에서 붙잡은 시위대를 팬티만 입힌채 10여명씩 줄줄이 묶어 트럭에 매달아 끌고 다님에 따라 시민들의 감정을 격화시켰다』고 주장. 김씨는 『5월21일 하오 1시 정각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연주되자 공수부대원들이 일제히 발포했다』며 『공수부대원들은 퇴각하는 시위대에게 정조준 사격을 가해 3∼4명이 쓰러지는걸 목격했다』고 증언. 변호인단은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의발포는 시위대가 관광버스와 장갑차를 몰고 공수부대원쪽으로 돌진해 1명이 깔려 죽었기 때문』이라며 『애국가는 도청직원이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틀었다』고 주장. 변호인단은 또 『당시 계엄군은 M16소총을,시민군은 칼빈소총을 사용했는데 민간인 희생자중 26명이 칼빈총상을 입었다』고 지적. 한편 피해자 진술에 나선 강씨는 『5월20일 광주역앞 차량시위때 전남대 강당으로 끌려온 한 청년은 대검에 머리를 찔려 죽었다』고 증언. ○…공판전부터 강씨에 대한 피해자진술권 채택여부를 두고 승강이를 벌인 검찰과 변호인단은 공판 내내 상대방의 말꼬리를 잡는 등 시종 신경전을 전개. 상오 재판이 끝난 뒤 『군인들이 과격하게 진압하니까 시민들이 저항한게 아니냐』는 일부 방청객들의 항의에 석진강 변호사는 비꼬는 말투로 『검찰에게 물어봐라』고 하자 김상희 부장검사는 『왜 자꾸 검찰을 걸고 넘어지느냐』며 역정을 내기도.〈김상연 기자〉
  • 「5·18」 피해자 진술권 수용/항소심 재판부

    ◎강길조씨 내일 공판때 진술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권성 부장판사)는 15일 강길조씨(42) 등 5·18사건 피해자 5명이 낸 「피해자 진술권」 청구를 받아들여 강씨를 진술인으로 채택했다. 재판부는 『80년 당시 계엄군의 시위진압 실상을 파악하려면 피해당사자의 증언도 필요하다고 판단,진술권을 수용했다』고 밝혔다. 피해자 진술권은 지난 87년 11월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명문화됐으나 법원이 이를 채택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강씨는 오는 17일 3차 공판때 법정에 나와 계엄군의 시위진압,민간인 피해상황등에 관해 진술하게 된다.〈김상연 기자〉
  • 「5·18」 과잉진압 시인/공수 대대장 등 증인 신문

    12·12 및 5·18사건 항소심 2차공판이 14일 상오10시 서울고법 417호 대법정에서 형사항소1부(재판장 권성 부장판사)심리로 열려 5·18사건에 대한 첫 증인신문이 진행했다. 공판에는 양대인 당시 11공수여단 참모장,안부웅 11공수 61대대장,이제원 11공수 62대대장 등 시위진압현장 일선지휘관과 김병엽 전교사 교리발전처장 등 5명이 증인으로 나와 지휘권 이원화,자위권 발동경위 등에 대해 신문을 받았다. 이들은 증인신문에서 『계엄사의 자위권 보유천명을 발포명령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정식지휘계통에 따라 작전이 수행됐다』고 주장,검찰측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했다.그러나 계엄군이 시위진압 교범을 따르지 않고 시위대를 과잉진압한 부분은 시인했다. 이날 법정에는 전두환·노태우 피고인 등 11명이 나왔으며 12·12사건으로만 기소된 박준병·장세동·최세창·신윤희·박종규 피고인 등 5명은 출정하지 않았다.오는 17일 3차공판에서도 5·18사건에 대한 증인신문이 계속된다.〈박은호 기자〉
  • 5·18 당시 지휘관 2명 증언

    ◎“자위권 발동 성급/오히려 시위 격화” 5·18사건 당시 공수부대 대대장 등 시위진압현장에 있었던 일선지휘관들은 14일 신군부측의 자위권 보유천명에 대해 『경솔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5·18사건의 첫 증인신문이 시작된 이날 양대인 당시 11공수여단 참모장은 『시위대와 계엄군이 급박하게 대치한 상황에서 나온 계엄사의 성급한 자위권발동결정은 오히려 시위를 격화시켰다』는 견해를 밝혔다.또 시민의 반발을 막기 위해 광주도청앞 등 진압현장에서 조속히 철수할 것을 상부에 건의했지만 철수시기가 늦어져 사상자가 늘어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일선지휘관들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계엄군의 철수가 늦어진 이유에 대해 『상부의 결정이라 알 수 없다』고 말해,사태악화를 계엄군 지휘부의 탓으로 돌렸다. 계엄군의 시위진압이 과격했다는 일선지휘관의 「회개의 증언」도 나왔다. 안부웅 11공수 61대대장은 검찰신문에서 공수부대원이 흥분한 상태에서 진압봉으로 시위대를 마구 때리는 등 계엄군의 진압이 과격하게 이뤄졌음을 인정했다.그는 『시위진압교범에 나오는 방식을 따르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며 『(특수훈련을 받은)공수부대를 진압작전에 투입한 것도 잘못』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이들은 지휘권의 이원화,특전사의 상황실운용,자위권발동지시 등 5·18사건의 핵심쟁점에 대해서는 공소사실을 전면부인,변호인측의 주장을 거들었다. 검찰은 1심에서 정호용·황영시 피고인이 내란목적살인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은 점을 의식,정피고인 등의 개입여부를 집중추궁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일선지휘관들은 『정피고인이 작전지휘에 개입하지 않았다』,『자위권 보유천명을 발포명령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박은호 기자〉
  • 「12·12」­「5·18」 선고/사건의 실체와 의미

    ◎쿠데타·권력형 부패 중형 단죄/반란·내란 잘못된 역사 법적 심판/“「자위권」이 발포명령” 살인죄 인정 12·12 및 5·18사건과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의 비자금사건에 대한 사법부의 역사적 심판이 26일 내려졌다. 서울지법 형사합의30부 김영일 재판장은 판결문을 통해 『12·12는 하극상에 의한 군사반란이며 5·17 및 5·18은 폭동을 통해 집권에 이른 내란이다』라고 규정했다. 이로써 12·12 및 5·18의 역사적 의미가 16년만에 구체적인 사실에 기초,바로잡히는 토대가 마련됐다.김재판장의 말대로 「크게 정지됐던」 역사의 흐름이 비로소 민주화라는 제 길로 들어서게 됐다. 5∼6공 정권의 정통성 결여도 사법부와 역사의 이름으로 명백히 밝혀졌다. 군사쿠데타를 통한 정권찬탈과 권력형 부정부패는 더이상 이 땅에 발붙일 수 없는 「안전판」이 설치된 셈이다. 재판부가 내린 형량은 죄질과 정상을 참작할 때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형량의 가장 큰 특징은 전·노 피고인에 대한 차등선고.전피고인에게는 반란 및 내란수괴이자2천2백여억원의 뇌물을 챙겼고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사형을 선고했다.2인자이자 2천8백여억원의 뇌물을 받았으나 직선대통령인 노피고인에게는 구형량인 무기징역보다 낮은 징역 22년6월을 선고했다. 나머지 13명의 피고인에게는 구형량인 무기징역∼징역 10년보다 낮은 징역 10∼4년을 각각 선고했다. 특히 무기징역을 구형받은 황영시·정호용 피고인에게 증거부족을 이유로 내란목적살인죄를 인정하지 않고 나란히 징역 10년을 선고해 주목됐다.박준병 피고인에게 무죄판결을 내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검찰이 적잖은 상처를 입게 됐다. 그러나 재판부가 검찰의 공소사실과 죄목 10가지를 모두 인정한 것에 검찰은 흡족해 한다. 12·12의 쟁점도 명확히 정리됐다.이른바 ▲12·12의 동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연행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병력출동 및 저지 등이다. 재판부는 12·12를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가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특히 쟁점의 핵심인 정총장의 연행은 대통령이나 국방장관의 사전승인을 거치지 않고,사전구속영장이나 사후영장 없이 무력으로 연행한 불법조치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정총장의 연행재가와 관련,당일 하오7시쯤 최대통령에게 요청한 재가가 거부됐다는 점을 불법의 이유로 적시했다.특히 13일 상오5시10분의 사후재가는 국가권력이 전피고인 등의 행위로 그 권위를 도전받고 위법상태가 발생한 이후에 이뤄진 승낙이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병력출동에 대해서는 같은 해석을 내렸다.신군부가 육본측의 지시에도 불구,당일 하오10시30분에 먼저 병력출동지시를 내리고 국방부·육본·경복궁 등에 병력을 진주시켰다는 것이다.하극상에 의한 명백한 쿠데타임을 적시한 것이다. 80년부터 81년1월24일까지의 5·17 및 5·18사건도 내란및 내란목적 살인 등의 유죄사실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특히 발포명령자를 적극적으로 명시했다. 재판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발포명령이 실질적으로 5월21일 계엄사의 자위권보유 천명으로 이뤄졌다고 지적,실질적인 발포명령자를 전두환·주영복·이희성 피고인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검찰의 주장대로 내란목적 살인죄를 인정한 것이다 재판부는 비상계엄의 확대선포가 폭동에 해당되며,선포유지행위가 포괄적으로 내란죄에 해당된다고 해석했다. 따라서 계엄군 배치와 국회의원 등원저지,광주 진압,정치인 체포,공직자 숙정,언론인 해직 및 언론통폐합,대법원 판사의 사직요구 등 일련의 과정을 내란행위로 규정했다.특히 대통령의 승인을 거쳤다 하더라도 국회해산과 국보위설치 등은 국헌문란에 해당된다고 판시하는 등 적극성을 보였다.
  • 피고인 최후진술내용

    ◎전두환 피고인/“「정치보복 재판」 본인으로 끝나야” 본인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이 법정에 서게 된 것을 본인의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며 이러한 일로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국민여러분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이 재판을 이끌어 온 재판부에 대해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검사 여러분에게도 같은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이 사건은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구호아래 과거정권의 법통과 정통성을 심판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실의 권력이 제아무리 막강하다 하여도 역사를 자의로 정리하고 재단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본인은 생각합니다. 또한 국가의 계속성과 헌정사의 올바른 발전을 위해서도 정권이 바뀌었다고 하여 그 정권의 정치적 시각과 역사관에 의해 과거 정권의 정통성을 시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한 시대의 역사는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그들 나름대로 나라를 위해 노력한 처절한 삶의 기록입니다. 우리나라가 건국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과 국정담당자는 온갖 역사적 시련을 그때마다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였기에,오늘날 우리나라가 민족의 역사상 처음으로 자급자족하며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갈 기틀을 만들어 놓았다고 본인은 확신합니다. 건국이후의 우리나라 역사가 독재와 부정축재로만 뒤덮인 암흑의 시기였다면,어떻게 오늘날의 번영이 가능하였겠습니까. 따라서 지난 반세기의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런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하며 의도적으로 매도만 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본인은 지난 89년12월30일 당시 여야 4당의 합의에 의해 국회의 증언대에 섰을때 이미 과거에 있었던 모든 잘잘못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 한사람에게 있으며 이를 위해 국민이 원한다면 감옥이든 죽음이든 그 무엇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말씀을 드린바 있습니다. 그러한 본인의 마음은 5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개인적으로는 버마에서 수많은 국가의 인재들을 잃고 이땅에 홀로귀국했던 그날부터 하루 하루의 삶을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는 뜻으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여분의 인생이라 생각하고 보내왔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본인은 생명에 연연하거나 처벌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없으며 오직 바라는 것은 본인 하나의 처벌로 국론분열과 국력의 낭비를 막을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입니다. 끝으로 본인은 과거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적인 재판이 본인에서 끝이 나고 앞으로는 과거정권을 긍정적으로 승계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높이고 보다 밝은 미래를 향하여 온 국민이 매진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 입니다. ◎노태우 피고인/“역사는 심판대상 아닌 평가 대상”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으로 국정의 책임을 맡았던 사람으로서 참담한 심경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이 이제 이루어진데 대해 국민여러분에게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역사와 국민에 무한한 책임을 지고 있던 전직 대통령으로 제 개인적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법정은 개개인의 잘잘못을 판단하는 것이아니라 우리 국민이 함께 살았던 한시대의 역사를 사법심판하는 자리가 돼 버렸습니다. 역사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지울 수도 다시 쓸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역사는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역사는 항상 암과 명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떠나서 어제의 일을 오늘에 기준해서 판단하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우리사회가 겪었던 그 어려웠던 여건을 돌아보면서 당시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있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16년전에 있었던 역사를 그것도 국민적인 정치적인 심판이 끝난 일을 구태여 심판하려고 한다면 본인은 이것도 우리 역사의 한 장이라고 믿고 무엇이든 감내하겠습니다. 다만 사법적 책임이 어떻든 그 책임은 전직대통령에게 묻는 것으로서 끝내야지 다른 사람에게 묻지 말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국민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 돈문제는 기본적으로 제 불찰에서 비롯된것입니다. 우리 정치사의 오래되고 잘못된 관행을 고치지 못한 점, 수많은 자금을 명예롭게 처리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서는 안타깝고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지난 10개월동안 수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도 많이 했습니다. 다만 돈을 한번도 뇌물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개인 축재를 하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대통령을 퇴임한 이후 이 세상을 하직하는 날까지 공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돈을 개인적으로 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이 재판은 노태우 개인 재판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 역사의 문제로 남게 됩니다. 오늘의 이 아픔이 더 밝은 내일을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타 피고인/“본분 충실… 잘못 있다면 겸허히 수용” ▲유학성 피고인=12·12 사건 당시 부대 상호간 충돌방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이를 위해 최규하 대통령에게 가서 결재해 달라고 건의도 했습니다. 그것이 죄가 된다면 처벌을 받겠습니다. 시국수습 방안도 구속되기 이틀 전 검찰에서 들어서 알게됐고 이전에는 듣지도 알지도, 설명을들은 바도 없었습니다. 권정달 증인의 증언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황영시 피고인=12·12 및 5·18사건과 관련해 심판을 받게된 것은 저의 부덕의 소치로 생각합니다. 당시 군인으로서 조국을 지킨다는 일념으로 임했고 이후 평생을 야전 군인으로서 지내오며 그때나 현재나 정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도 잘못한 것이 있다면 겸허히 처벌을 받겠습니다. ▲차규헌 피고인=본인의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겠습니다. ▲박준병 피고인=제일 큰 고통은 직업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송두리째 빼앗아 버린 군사반란죄로 기소된 것입니다. 12·12 당일 저녁을 먹는줄 알고 30경비단에 들어 갔지만 총장 연행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고 논의한 바도 없으며 참여한 적도 없었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세창 피고인=박종규 피고인은 12·12 당시 여단장인 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죄가 있다면 여단장인 제가 받아야 합니다. 더 이상 그에게 불이익이 없기를 바랍니다. ▲장세동 피고인=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허화평 피고인=12·12 및 5·17,5·18 등 일련의 사건에서 특별한 목적보다는 군인으로서 명령을 따라 수행했을 뿐입니다. 지난해 12월부터 시작된 이 공방은 이미 16년전의 일인데다 그간 4차례에 걸친 합의가 있었고 지난해 7월에는 검찰에 의해 「공소권 없음」으로 마무리된 사건입니다. 지난 87년 개정된 헌법에는 엄연히 소급입법이 금지돼 있는데도 지난해 12월 5·18 특별법을 제정한 데 이어 헌법재판소마저 이 법에 대해 합헌결정을 내려 헌법정신을 유린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허삼수 피고인=지난 80년 당시 제가 알게 모르게 한 행위가 죄가 된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이학봉 피고인=더 이상 말할 것이 없습니다. ▲박종규 피고인=당시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라는 최세창 여단장의 지시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며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었습니다. ▲신윤희 피고인=12·12 당시 보안업무 수행과정에서 하소곤 장군님께 부상을 입힌 것에 대해 하 장군님께 사죄드립니다. ▲이희성 피고인=더 이상 하고싶은 말이 없습니다. ▲주영복 피고인=광주 사태 당시 계엄군과 광주 시민간에 인명피해가 나지 않도록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정호용 피고인=지금까지 구차한 변명이나 권모술수, 비열한 거짓말로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재판에서 진술한 내용은 모두 사실입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재판장이 진실에 입각해 증거에 따라 판단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 변호인 최후변론 요지

    ▲김수연 변호사(국선변호인,12·12 및 5·18사건에 대해)=전두환 피고인 등 13명에 대한 국선변호인으로서 변론하겠습니다.우선 검찰 공소제기의 부당성을 몇가지 지적하겠습니다. 이 사건은 마땅히 역사의 심판으로 넘겨야 할 사안이지 결코 재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16년 이상이 지난 뒤 공소가 제기돼 공소시효가 완성됐으므로 면소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5·18특별법이 제정돼 비록 공소시효 정지의 규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명백한 위헌법률인 만큼 피고인들을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12·12사건의 경우 당시 전피고인은 적법절차에 따라 합수부장의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업무의 일환으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한 것입니다. 5·18사건에서는 국헌문란의 목적이 있었느냐가 초점입니다.반드시 이러한 목적이 있어야 유죄가 될 수 있습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는 적법절차에 의해 대통령이 설치한 것입니다. 또 당시 헌법에는 대통령은 언제든지 국회를 해산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광주에서 시위군중이나 민간인들의 피해가 있었더라도 이는 계엄군의 업무수행 과정에서의 발포행위이지 피고인들의 살상행위가 아닙니다. 40여명의 증인이 이 법정에서 증언을 마쳤지만 이들의 말을 증거로 채택하는데 신중을 기해 주십시오. 시류에 편승하거나 여론에 영합해 과장된 진술을 한 증인이 많습니다. 결론적으로 피고인들에게는 마땅히 면소판결이나 무죄의 선고를 내려야 합니다. ▲민인식 변호사(국선변호인,비자금 사건에 대해)=전두환·노태우 피고인의 특가법상 수뢰죄에 대해 검찰은 공소사실에 명시적으로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수뢰죄의 기본적인 구성요건은 공무원이 직무와 관련해 뇌물을 수수하였다는 증명이 있어야 합니다. 검찰은 직무관련성을 특정하지 않았습니다. 직무관련성이 있다고 해서 당연히 뇌물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적인 비난의 가능성이 있더라도 실정법규에 저촉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검찰은 변경된 공소장에서도 막연하게 「기업경영과 관련해 선처해 달라는 취지로 돈을 받았다」고 지적했을 뿐입니다.구체적인 직무관련성을 전혀 명시하지 않았으므로형사소송법에 의거해 당연히 공소기각의 판결을 선고해야 합니다. ▲서익원 변호사(이희성 피고인의 변호인)=피고인은 30년이 넘는 군생활 동안 성실과 봉사,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일관해 왔으며 79년 12월13일 혼미한 정국에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임명된 뒤에도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소신껏 일했습니다. 80년 5월초 국내의 무질서와 혼란을 틈타고 북한의 마수가 국가를 위협했을 때 나라의 안보를 책임진 피고인은 민주주의와 자유도 좋지만 나라부터 살려야 한다고 판단,5·17 계엄확대선포를 결심했습니다. 피고인이 신군부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는 검찰의 논리는 어두운 과거를 애써 외면하려는 안이하고 무책임한 평가일 뿐입니다. ▲이진강 변호사(주영복 피고인의 변호인)=피고인은 내란 및 반란의 중요임무종사자가 아닙니다. 시국수습방안의 의의, 내용 및 그 추진방안 등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 당일 권정달로부터 단순히 회의안건을 전달받아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결의, 대통령에게 건의한 것 뿐입니다. 또 회의안건 중 국회해산과 비상기구 설치는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논의할 성질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의제에서 제외시켰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드리는 과정에서도 위 두가지에 대한 헌법상의 문제점 등을 설명하는 식으로 부정적 견해를 피력, 대통령이 두 안건에 대해 반대입장을 취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민경식 변호사(박준병 피고인 변호인)=피고인이 79년 12월12일 30경비단에 간 것은 전두환피고인의 저녁초대로 간 것일 뿐,반란 지휘부 구성 등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또 자신의 20사단 병력의 출동을 막은 것은 당시 육본의 지휘와 일치하는 것으로 피고인에 대한 공소는 기각돼야 합니다.
  • 장세동 피고­국선변호인 「불협화음」/26차 공판 이모저모

    ◎방학 맞은 여고생들 재판 참관 “눈길” 12·12 및 5·18사건의 피고인과 증인들을 상대로 한 사실심리가 1일의 26차공판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5개월에 걸친 「마라톤 재판」이 막바지에 접어든 이날 방청석에는 방학을 맞은 여고생 3∼4명이 나란히 앉아 재판과정을 지켜봐 눈길. 대원외국어고 김수현양(17)은 『역사적인 재판을 직접 보는 것이 살아있는 공부라고 생각해 반 친구들과 함께 방청하게 됐다』고 소감을 피력. 전남대 송기숙 교수 등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문인 10명도 공판시작 20여분 전부터 일찌감치 방청석에 자리잡고 재판과정을 유심히 지켜봤다. ○…박종규 피고인은 증인신문 말미에서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 진술강요나 협박을 받은 사실이 있느냐』는 검찰의 질문에 한참동안 뜸을 들이다 다분히 감정적인 목소리로 『그렇다』고 답변.박피고인은 『나이도 어린 검사가 「이 사람아,그게 아니잖아」,「당신,밤새워 조사받아도 좋아?」라는 등 반말조의 말을 해 모욕감을 느꼈다』며 『협박은 아니지만 검찰로부터 자백을 유도받은 사실이 있다』고 주장. ○…장세동피고인은 국선변호인의 신문내용이 헬기의 내부구조등 지엽적인 문제로 흐르자 『변호인께서 무엇을 물어보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퉁명스럽게 답변해 변호인과 「불협화음」을 내기도. ○…현역군인(육군 중령)으로 증언대에 선 김광택 전20사단 61연대 6중대장은 『당시 시위대를 진압하면서 검문에 불응했을 경우 경고­하퇴부 조준사격이라는 수칙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고 진술,계엄군이 무차별 진압을 했다고 증언. ○…최규진 전11공수여단 62대대 4지역대장은 증언을 마친뒤 『계엄군으로 참가한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숙연한 표정. 최씨는 80년 5월24일 보병학교 병력이 철수중인 자신의 부대에 총격을 가한 사건과 관련,『사전에 아무런 신분확인 조치없이 중화기로 공격을 받아 많은 희생자가 났다』며 『육군장교로서 한없이 부끄러운 일이었으며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회고. ○…김영일재판장은 검찰이 증거로 제출한 12·12 국정조사 국방위원회 7차회의록 등 20여점과 12·12 사건당시사용된 38구경 권총탄환·M16 소총탄환 등 5점의 압수물을 증거로 채택. 특히 우국일 전보안사 참모장의 업무일지와 일기사본이 증거물에 포함됐으나 세간의 관심을 모았던 「5공전사」는 피고인들이 모두 채택에 부동의,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박은호·김상연 기자〉
  • 「12·12」 「5·18」 24차 공판­증인신문 지상중계

    ◎“공수부대 지원 요청한 일 없다”·황영시씨 유혈진압 지시 어이없어 거부­정웅 증인/참모총장 승인 받아야 특전사 출동 가능­김재명 □25일 출두 증인­괄호안은 당시 직책 ·정웅(31사단장) ·김재명(육본 작전참모부장) 12·12, 5·18사건 24차 공판이 25일 상오 10시 재판부의 입정으로 시작돼정웅 당시 31사단장 등 증인 4명에 대한 신문이 진행됐다. ○정웅 증인 ▲이부영 검사=5·18당시 공수부대의 지원을 요청한 일이 있습니까. ▲정증인=전혀 없습니다. ▲이검사=공수부대의 작전통제가 실제로 이뤄졌습니까. ▲정증인=5월 20일이후 작전상황에 대한 보고가 완전히 단절됐고 공수여단장들은 정호용 특전사령관에 직보하는 등 계엄하 작전지휘체계가 이원화된 상태였습니다.정상적인 지휘가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이검사=초기 강경진압에 대한 육본측의 지시가 있었습니까. ▲정증인=지시를 받았으나 거부했습니다.특히 황영시 육본차장은 유선으로『무장헬기 등을 동원, 버스를 공격하라』는 등 강경 유혈진압을 지시했는데하도 어이가없어 『그렇게는 못한다』고 거부했습니다. ▲이검사=80년 6월 5일 강제해임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정증인=표면상 초기진압에 실패했고 시민들에게 무기를 빼앗긴 책임 등을 물어 해임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론 신군부측의 작전지시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창렬변호사=사단장의 병력요청없이 육군본부가 공수여단을 투입할 수있지 않습니까. ▲정증인=통상은 현지 지휘관의 의견을 묻습니다. ▲전변호사=증인은 87년 7월 5일 국회본회의에서 『80년 5월 15일 육군본부 회의실에서 정호용 피고인이 김대중씨를 체포하면 광주지역에서 시위가 예상되지만 공수부대 1개 대대병력만 작전을 벌이면 충분히 진압할 수 있다는발언을 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정증인=예. ▲전변호사=당시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국회본회의에서 질의할 수 있습니까. ▲정증인=국회에서 의원들이 검증된 사실만 이야기를 합니까. ▲전변호사=5월20일 정오부터 윤흥정 전교사령관과 정호용 특전사령관으로부터 지휘권을 박탈당했다고 국회본회의에서 말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정증인=20일 하오부터 저의 작전통제권하에 있는 공수여단장을 아무리유.무선으로 호출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지휘권을 박탈당했다기 보다는지휘권 행사가 불가능했습니다. ▲전변호사=증인은 국회 광주청문회에서 80년 5월22일 박충훈 국무총리가 광주에 내려와 간담회를 열었을 때 정호용피고인이 『광주사람들은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싹쓸이 해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증언했습니까. ▲정증인=그렇습니다. ▲전변호사=간담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정호용피고인이 그런 말을 한적이 없다고 말했는데 증인은 무슨 근거에서 그런 말을 합니까. ▲정증인=법정에 있는 정호용피고인에게 물어보십시오. ▲전변호사=증인은 당시 공수부대들이 정호용 특전사령관에게 직보하는 등지휘체계가 이원화돼 있었다고 진술했는데 본인이 직접 확인한 바 있습니까. ▲정증인=직접 확인한 건 아니고 당시 시중에 공공연히 나돌던 소문과 책자 등의 내용 등을 통해 파악한 사항입니다. ▲김영일 재판장=7공수여단 33.35대대를 작전배속받고 전남대와 조선대에 배치했는데 당시 학교에 배치할 만큼 학생들 시위가 심각했습니까. ▲김재판장=정호용 피고인이 여단장이나 대대장 등 예하부대 지휘관들에게 직접 작전명령을 내리는 것을 보거나 들은 일이 있습니까. ▲정증인=보거나 들은 바는 없습니다. ▲서익원 변호사=당시 과격한 시위진압 방지를 위한 노력을 해봤나요.또 공수여단에 대한 지휘가 어려워졌다고 주장했는데 지휘권의 정상화를 위한 노력을 했었나요. ▲정증인=19일 하오 사단 작전명령을 통해 무혈작전을 지시했습니다. 지휘권 정상화를 위해서 여단장들을 계속 호출했으나 그들이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진강 변호사=5월14일 하오 2시 전교사에서 열린 학생가두시위대책 합동회의에 신우식 7공수여단장도 참석했죠. ▲정증인=그렇습니다. ▲이변호사=증인과 윤흥정사령관이 5월21일 전교사를 방문한 2군사령관에게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을 건의했나요. ▲정증인=아닙니다. ▲정호용 피고인=전남대와 조선대등에 공수부대 배치를 직접 지시한 사람은 정웅 사단장 아닙니까. ▲정증인=맞습니다. ▲정피고인=공수여단의 시위진압 작전을 본인이 직접 지휘한 걸 확인했습니까. ▲정증인=직접 확인할 필요는 없는 일입니다. ▲정피고인=강경진압을 지시한 것이 누구입니까. ▲정증인=충정훈련 교리에 나와 있는 얘기입니다. ▲정피고인=본인이 공수부대를 직접 지휘했다고 하는데 누구로부터 확인한 것입니까. ▲정증인=지휘권도 없는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정피고인=공수여단장이 제대로 보고안하면 대대단위에라도 확인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정증인=정상적인 지휘체계가 아닌 상태에서 어떻게 합니까. ○김재명 증인 ▲김상희 부장검사=11·3공수여단과 20사단 광주 증파가 광주지역의 전교 사령관이나 31사단장으로부터 건의를 받고 결정된 것은 아니죠. ▲김증인=직접 요청받은 바는 없으나 요청없이 이뤄지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봅니다. ▲김부장검사=5월25일 상무충정작전 계획을 황영시 피고인과 함께 광주를 방문,소준렬 전교사령관에게 전달했는데 2군사령관을 거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김증인=극히 보안을 필요로 하는데다 시간을 다투는 사안이었기 때문에 직접 가지고 내려간 것입니다. 좀 늦게 도착했는지는 모르지만 2군사려오간에게는 연락장교를 통해 보냈습니다. ▲전창렬 변호사=육군참모총장 승인없이 예하부대장이 자신의 부대를 출동시킬 수 있습니까. ▲김증인=부대에 따라 다릅니다. 특전사는 참모총장의 직접 지휘를 받기때문에 총장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2군사령부와 전교사가 계엄업무 수행을 위해 병력을 이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육본이 개입하지 않습니다. ▲전변호사=공소장에 따르면 전두환·이희성·황영시·정호용 피고인이 함께 전교사의 보고를 받고 광주시위 상황이 자신의 집권계획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공수부대를 투입해 시위를 강경진압했다는데 이들 피고인이 병력 투입에 간여할 수 있습니까. ▲김증인=안됩니다. 계엄사령관의 문서명령없이 병력출동은 안됩니다.
  • “광주발포 부대장 판단”/윤흥정씨 진출

    ◎전·노씨 출정… 재판받아/「12·12­5·18」 21차 공판 12·12 및 5·18 사건 21차 공판이 11일 서울지법 형사 합의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 심리로 417호 대법정에서 열려 5·18 당시 윤흥정·소준렬 전투병과교육사령관,진종채 2군사령관 등 증인 3명에 대한 신문이 진행됐다. 지난 20차 재판 때 출정을 거부했던 전두환·노태우피고인도 법정에 나왔다. 윤흥정씨는 『지난 94년 말 검찰에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육본의 상황일지를 보고 당시 특전사가 정식 지휘계통과 별도로 지휘 및 작전권을 행사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또 『당시 전교사가 계엄군에게 실탄배분과 발포명령을 내린 적은 없으나 일선부대장들의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고 진술했다.〈박선화 기자〉
  • 피고인들도 증인신문… 유리한 답변 유도/21차 공판 이모저모

    ◎전·노씨 여느때와 달리 굳은 표정 입정/국선변호인 전씨 접견… 신문사항 논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재판 불출석선언으로 파행이 우려됐던 21차 공판은 두 피고인의 출석으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특히 5·18 사건의 핵심 쟁점인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과 지휘체계 이원화 문제에 대한 증인의 신문과정에서 변호인은 물론 피고인들까지 증인신문에 나서는 등 검찰과 변호인·피고인·증인 4자간의 신경전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날 상오 10시 김영일 재판장이 입정한 뒤 『피고인 전두환』을 호명하자,법정의 모든 시선이 피고인 출입문으로 쏠리는 등 한순간 팽팽한 긴장감을 연출. 그러나 전피고인은 20여초 후 다소 굳은 표정으로 법정으로 들어섰으며 노피고인도 뒤따라 입정. 전·노피고인의 재판 참석은 재판부와 국선변호인,법무부 교정당국자들의 설득과 물밑 노력에 힘입은 것이며 본인들도 강제인치에 따른 여론의 부담을 우려해 마지못해 출석하게 됐다는 후문. ○…전·노 피고인의 국선변호인인 김수연 변호사는 지난 8일 선임된 이래처음으로 전 전투병과교육사령관 윤흥정 증인을 상대로 증인신문을 벌였으나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는 데다 이 사건의 복잡한 사실관계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 듯 신문내용이 그리 깊지 못했다는 평. ○…윤씨는 80년 5월22일자로 전교사 사령관직을 소준렬장군에게 넘겨준 소감을 물은 검찰의 신문에 『장수는 물을 건널 때에는 말을 바꾸지 말라는 격언이 있는데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자리를 뜬 것에 대해 매우 불쾌하고 유감스러웠다』고 불만을 표출. 윤씨는 체신부장관으로 옮긴 것이 영전이 아니냐는 질문에 『6·25때부터 군생활을 한 사람이 군을 떠나는데 무슨 영광이고 영전이냐』고 흥분. ○…정호용 피고인측 변호인들은 윤씨에게 『무슨 근거로 검찰에서 지휘권이 이원화됐었다고 진술했느냐』고 집중적으로 따져 윤씨가 『전교사 상황일지 보다 계엄사 일지가 더 자세한 것을 보고 독자적으로 판단,그렇게 진술했다』고 하자 흐뭇해 하는 모습. ○…소준렬 당시 전교사령관은 『사령관으로 부임한 22일부터 도청 재진입작전을 벌인 27일까지 모든책임은 내게 있다』,『정호용 특전사령관이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지휘권에 개입한 적은 없었다』는 등 책임소재를 명확히하는 발언으로 일관. 특히 전보안사령관의 메모와 관련,『분명히 메모를 받았지만 지휘권에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메모 역시 지휘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해 5·18피해자들의 야유를 받기도. ○…정피고인은 하오 재판에서도 직접 신문에 나서 소씨에게 『당시 지휘권 이원화는 없었으며 전교사령관의 지휘에 따라 작전이 수행됐다고 결론을 내려도 되겠느냐』고 질문,『예』라는 답변을 이끌어내자 『껄껄』 웃으며 여유를 과시.〈박홍기 기자〉
  • 신·최씨가 밝힌 정 총장 연행 재가과정

    ◎“최 대통령 전씨측 재가건의 완강 거부”/전씨에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나” 질책/불가피 했다는 점 남기려 시간도 명시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1일 법정 증언에서 12·12 당시 신군부가 정승화 육참총장을 연행한 것은 직속상관에 대한 하극상이라고 진술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정총장 연행을 재가할 때 신군부측의 협박이나 강압 분위기는 없었다고 밝혔다.최광수 대통령비서실장도 이를 시인했다. 신씨는 12월12일 하오 7시쯤 개각을 협의하기 위해 총리공관으로 갔다.최대통령으로부터 『조금 전에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다녀갔는데 10·26사건 관련 혐의로 정총장을 연행해 조사하겠다며 재가를 요청해 국방부장관의 결재 없이는 재가할 수 없으니 절차를 밟아오라고 했다』고 말했다는 것.신총리는 『잘 하셨다』고 답변한 뒤 30분쯤 뒤 비서실 관계자로부터 『정총장이 연행됐다』는 보고를 들었다. 최대통령은 『무슨 일을 이 따위로 처리하느냐』며 전씨에게 화를 내며 질책했다.최대통령은 즉시 경위를 알아보라고 지시,총격전 사실을 알게됐다. 하오 9시30분쯤 전두환·유학성피고인 등이 2차로 재가를 요구했다. 최대통령은 『재가를 받기 전에 행동한 것은 위법이다.국방부 장관을 데려오라』고 재가를 재차 보류했다.신총리는 『집단적인 재가요청 행위는 있을 수 없고 예의에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전씨 등이 돌아간 뒤 최대통령은 『이 친구들이 무슨 일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법을 무시하고 일을 처리하면 나라가 안된다고 걱정했다』고 털어놨다. 한편 최비서실장은 『2차 재가 요청시 장성들로부터 공관을 방문하겠다는 사전연락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신총리는 13일 상오 2시30분쯤 노재현 국방장관과 통화,『총리공관으로 빨리 들어오라』고 지시한 뒤 상오 3시30분쯤 노국방부장관을 데리러 국방부로 갔다.국방부 건물은 유리창이 깨지는 등 총격전의 흔적이 역력했다.노 국방장관이 한참후 정총장 연행보고서(보안사가 작성한 것)를 들고 최대통령을 찾아왔다.그는 『더 큰 혼란을 예방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각하께서 재가해주시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했다.숙의 후 최대통령은 재가를 하며 「05:10 AM」이라고 명시하고 서명했다. 신씨는 재가 당시 최대통령과 함께 육본의 정식지휘계통이 와해된 사실을 몰랐다고 진술했다. 신씨는 5·17과 관련,『최대통령은 전군주요지휘관 회의에서 결정한 건의사항 중 비상기구 설치와 국회해산 문제를 사실상 거부했다』고 말했다. 최실장은 『최대통령이 5월18일 계엄군의 투입과 27일 광주재진입작전시 사전에 승인했었는지도 알 수 없으며 현지 지휘관이 판단할 일』이라고 밝혔다.그는 또 『80년 7월30일 하오 6시부터 5시간 동안 청와대 본관 1층에서 김정렬 전 국방부 장관(작고)이 최대통령와 요담했으나 하야를 설득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고 진술했다.〈박선화 기자〉
  • 전씨“「광주」진압 개입 안했다”/공수부대 지휘권 2원화 사실부인

    ◎「5·18」 14차 공판 12·12 및 5·18 사건에 대한 14차 공판이 17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형사 합의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심리로 열려 전두환피고인 등에 대한 변호인 반대신문이 진행됐다.〈관련기사 18·19면〉 전피고인은 5·18 사건과 관련,『지난 80년 5월21일의 자위권 천명은 당시 진종채 2군사령관의 건의를 받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주영복 국방부장관의 승인을 얻어 발표하고 전국의 계엄군에게 훈령을 통해 지시했다』며 자신이 실질적인 발포 명령자라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전피고인은 『자위권 보유 천명 초안을 이계엄 사령관에게 전달토록 지시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5월18일부터 5월21일까지 공수부대의 시위진압도 윤흥정 전교사사령관과 정웅 31사단장의 책임 아래 이뤄졌으며,정호용 특전사령관을 통해 별도로 지휘권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진술,지휘권의 2원화를 부인했다. 전피고인은 『5·18 사건 당시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서리로서 계엄군의 작전지휘 체계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포등 진압작전에 관여한 바 없다』고 진술했다. 이날 공판에서는 거규헌·허삼수·허화평·이학봉 등 피고인 4명을 상대로 5·17 사건에 대한 반대신문도 진행됐다.〈박상렬 기자〉
  • “「5·18」계엄군 자위권 발동”/이희성씨

    ◎“안보사서류 기초해 결정”/「5·18」7차 공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사실상의 발포명령인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은 사실상 전두환 사령관의 보안사에서 작성한 서류를 기초로 결정된 것으로 밝혀졌다. 6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서울지법 형사 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의 심리로 열린 12·12및 5·18 사건 7차 공판에서 검찰은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이희성 피고인을 상대로 『80년 5월21일 하오 정도영 당시 보안사 보안처장으로부터 자위권 발동 담화문 문안을 받지않았느냐』고 추궁했다. 이피고인은 『21일 하오 4시쯤 진종채 2군사령관이 육군참모총장실로 찾아와 자위권 보유 천명을 건의했으며 이 과정에서 자위권 발동문서를 발견했다』고 진술했다. 이어 『이 문서를 언제 누가 보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보안사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겠다』고 진술,전보안사령관이 개입했음을 사실상 시인했다. 이피고인은 『문제가 너무 중대해 주영복 국방장관에게 문서를 가지고 가 보고한 뒤 하오 4시30분쯤 합참의장,한미 연합사 부사령관,각군 참모총장,정도영 보안처장 등이 참석한 대책회의를 갖고 자위권 보유천명을 발표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정호용 피고인은 『자위권 보유 천명과 실탄지급이 사실상 발포 명령으로 광주 현지에서 받아들여졌다고 봐야 한다』고 말해 자위권 보유 천명이 발포명령이었음을 시인했다.〈박상렬 기자〉
  • 시위 강경진압 지시/메모 2건싸고 설전

    ◎전두환·황영시씨 모두 “신빙성 없다” 부인/재판부 제출명령 신청 각하… 공방 매듭 5·18 당시 계엄군의 강경 진압을 지시했다는 메모를 놓고 검찰과 피고인 간에 공방이 펼쳐졌다. 당시 황영시 육군참모차장이 광주의 전투교육사령부 김기석 부사령관에게 헬기를 동원해 강경 진압하라고 지시한 메모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전교사 소준렬 사령관에게 격려의 의미로 보냈다는 친필 메모 등 두 가지이다. 검찰은 6일 5·18사건의 7차 공판에서 황피고인을 신문하면서 김부사령관이 80년 5월20∼26일 사이에 황피고인이 전화로 지시한 강경 진압 내용을 기록했다는 메모를 전격 공개했다. 32절지의 종이에 기록된 내용은 「APC(경장갑차)­코브라(전투용헬기),차량­500MD(한국형헬기),인원­병력」.시위대의 APC는 코브라로 때리고,차량은 500MD로 공격하며 시위대는 군병력으로 진압하라는 지시였다는 게 검찰의 주장이다. 황피고인은 이에 대해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 김부사령관과 대질했으나 본인이 지시했다는 점을 입증하지 못했으며,검찰도 이 메모를 보여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또 『메모에는 6하 원칙이 명시되지 않았다』며,신빙성이 약하다고 반박했다. 이에 전상석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검찰이 결정적인 증거를 왜 압수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으며,재판장에게 압수를 신청했다. 전피고인이 80년 5월23일 하오 정호용피고인을 통해 소사령관에게 전달했다고 검찰이 밝힌 메모는 「소 선배 귀하,공수부대를 너무 기 죽이지 마십시오.희생이 따르더라도 광주사태를 조기에 수습해 주십시오」라는 내용.전씨의 친필 사인이 곁들여졌다. 전피고인은 『6공 청문회 때도 이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으며,전화로 하면 되지 왜 메모로 전달하겠느냐』고 부인했다. 검찰의 직접신문이 끝나자 변호인단은 재판부에 대해 문서제출 명령을 내려 문제의 메모를 압수해 달라고 요청했다.검찰은 황피고인의 전화 지시를 김기석씨가 적었다는 메모에 대해 『김씨가 임의 제출을 거부해 복사해 둔 것』이라며 『의심이 가면 김씨를 증인으로 출두시켜 확인하면 될 것』이라고 맞섰다. 변호인단은 『그런 식으로 증거물인 것처럼 제시하며 여론을 호도하지 말라』고 쏘아붙였다.김영일 재판장은 변호인단의 응수가 충분하다고 판단한 듯 문제제출 명령 신청을 각하함으로써 공방을 매듭지었다.〈박선화 기자〉
  • 「12·12」·「5·18」 7차 공판­쟁점과 전망

    ◎“내란목적”·“정상계엄업무” 공방/검찰 “공소사실유지 진술 확보” 자신감/공판일정 순조… 8월초 1심선고 가능 5·18사건의 7차 공판은 예상 밖으로 차분하게 진행됐다.전두환 피고인 등 5명에 대한 검찰의 직접신문이 순조롭게 끝났다. 지난 달 29일 6차 공판에서 일어난 재판중단의 후유증을 지켜본 재판부·검찰·변호인단 등 법조 3륜이 자제한 덕분이었다. 검찰과 변호인단의 공방전은 공소장 변경건과 핵심사항에 대한 신문내용 두 가지로 펼쳐졌다. 하지만 공소장 변경을 둘러싼 신경전은 미미했다.검찰이 서류를 첨부해 설명하자,변호인은 석명요청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검찰 신문의 강도와 예리함이 다소 떨어진 탓인지 피고인과의 감정 싸움은 거의 없었다. 반면 쟁점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검찰은 전피고인을 상대로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 혐의를 집중 추궁했다.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초기진압을 시작으로 계엄군 증파,윤흥정 전투교육사령관의 교체,발포 개시,자위권 발동,유혈사태,시위대 재진압 과정 등에 사실상 개입하고 지시하거나 압력을 넣었는지를 신문했다. 하지만 광주 희생의 구체적 사례를 뭉뚱거려 묻는가 하면,발포지시 여부에 대해서도 직접 화법으로 신문하지 않았다.이례적이었다. 전피고인은 『당시 정보책임자로서 계엄사가 행한 작전상황에 대해서는 보고받은 사실이 없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당시의 진압은 최규하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국방부장관,계엄사령관으로 이어지는 지휘체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황영시·주영복·이희성·정호용 피고인은 「유혈진압 과정은 정권장악을 목적으로 한 시국수습 방안의 일환」이라는 검찰의 추궁에 정상적인 계엄업무였다고 맞섰다. 검찰은 이 날까지 공판에서 공소사실의 유지에 충분한 진술을 얻었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전·이피고인이 명목상 발포 책임자」라고 발표했던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할만한 새로운 내용을 밝혀내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이로써 12·12 및 5·18사건에 대한 검찰의 직접신문은 끝났다. 앞으로는 변호인의 자료검토 시간 1∼2주와 1차 구속 만기자를별건으로 구속할지 여부,변호인의 반대신문 5∼7차례,증거조사 절차가 남아있다. 이 날의 공판 속도를 감안하면,남은 일정도 순항이 예상돼 늦어도 8월까지는 1심 선고가 내려질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박선화 기자〉
  • 계엄군 발포경위에 피고인 모두 발뺌/마지막 직접신문 이모저모

    ◎전씨 공판대비 구치소서 열심히 “공부” 12·12 및 5·18사건을 검찰이 마지막으로 직접 신문한 7차 공판은 6차 공판때와는 달리 순조롭게 진행됐다.검찰은 전두환·황영시·주영복·이희성·정호용피고인 등 5명을 상대로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발포경위 등에 초점을 맞춰 신문했으나 피고인들은 발뺌으로 일관했다. ○…정호용피고인은 검찰 신문 내용 대부분을 부인하면서 『검찰에서 진술한 참고인들을 증인으로 불러 대질신문해 달라』고 검찰에 역공. 정피고인은 광주에 투입된 공수여단의 지휘관들이 정식 지휘계통에 있던 소준렬 전교사 사령관을 제치고 자신에게 중요사항을 보고했다는 일선 지휘관들의 진술과 관련,『그런 사실이 없다』며 대질 신문을 요구. ○…주영복피고인은 『광주시위 진압결과 사망자가 생길 경우 자살하려 했다』는 검찰에서의 진술을 바꿔 『그런 적이 없었다』고 부인. 주피고인은 이어 『전혀 진술하지 않은 내용이 검찰 조서에 들어있어 변호인단을 통해 문제 제기를 할 것』이라고 공박. ○…전피고인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당시 계엄군이 자위권 보유를 천명한 경위 등 검찰의 신문내용 일체를 부인. 전피고인은 『자위권 보유를 천명한 경고문은 당시 정도영 보안처장이 계엄군측에 건네준 게 아니냐』는 거듭된 검찰신문에 『아니라고 설명하지 않았느냐』고 짜증섞인 목소리로 대답. ○…당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이던 이희성피고인은 12·12 사건 이튿날 전피고인으로부터 「육참총장 이희성」이라고 적힌 쪽지를 건네받았으나 『누구 마음대로 총장을 임명하느냐』고 질책했다고 답변. 이피고인은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조치와 관련,『전쟁 또는 전쟁에 준하는 사변,적의 포위공격이라는 계엄확대의 요건이 발생한 사실이 있느냐』는 검찰의 물음에 『없었다』고 짤막하게 말해 부당하게 계엄을 확대한 사실을 시인.또 보안사에서 기안한 계엄포고령 10호로 모든 정치활동이 중단된데 대해서는 『잘못된 겁니다』라고 분명하게 인정. ○…전피고인은 최근 5·18 공판에 대비해 5·18 사건을 재구성하는 등 「공부」에 열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피고인은 이 과정에서 『계엄군이 반란군으로 규정되고 시위를 조속하게 진압하기 위해 강경하게 대처한 것이 왜 내란죄가 되는지 모르겠다』며 의문을 제기한다고 주변 사람들이 전언. ○…검찰은 이날 『신속한 재판진행을 바라는 국민정서』 등을 거론하며 재판부에 주2회 야간신문을 요구한 반면 변호인단은 『신속성보다는 실체적 진실을 가리기 위한 치밀성이 더 요구된다』고 각각 반대 주장을 피력. 재판부는 이와 관련,『검찰신문에서 피고인들이 변소를 많이 했다』며 『변호인의 신문사항이 많을 경우 「적절한」 시간을 마련하겠다』고 답변,야간에도 재판을 강행할 뜻을 내비쳤다. ○…변호인 반대신문 첫 기일이 2주뒤인 오는 20일로 잡히자 변호인단은 『인민재판을 하려는 것이냐』며 강력 반발. 한 변호인은 『재판부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재판일정을 잡았다』며 『검찰 수사기록 1장을 읽는데 30초가 걸린다고 쳐도 4개월 반이 필요한데 해도 너무하는 처사』라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박은호·강충식·이지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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