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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괴물이 되어버린 가짜 장교의 전쟁 실화…‘더 캡틴’ 예고편

    괴물이 되어버린 가짜 장교의 전쟁 실화…‘더 캡틴’ 예고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실화를 바탕으로 가짜 독일군 장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더 캡틴’ 티저 예고편이 공개됐다. ‘더 캡틴’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 탈영병 ‘헤롤트’가 나치 간부의 군복을 발견한 계기로 간부를 사칭, 탈영병 동료를 학살한 전쟁 실화를 그린 작품으로, ‘레드’, ‘플라이트플랜’, ‘시간 여행자의 아내’ 로베르트 슈벤트케 감독의 신작이다. 공개된 예고편은 탈영병의 신분으로 쫓기는 헤롤트 모습으로 시작한다. 차를 타고 쫓아오는 군인들을 피해 겨우 목숨을 건진 헤롤트는 우연히 발견한 나치 장교 복을 입는다. 순간의 선택으로 장교의 모습을 한 채 사람을 부리기 시작한 헤롤트는 예고편의 후반으로 갈수록 완벽한 나치 장교가 되어 사람을 죽이는 일도 냉정한 표정으로 바라보게 된다. 영화는 42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부분 초청, 65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촬영상 수상, 68회 독일영화상 음향상 수상, 31회 유럽영화상 유러피안 음향상 수상 등 화려한 기록을 보여주며 작품의 완성도를 인정받았다. 탈영병에서 괴물로 변해 버린 가짜 장교의 이야기를 그린 전쟁 실화 ‘더 캡틴’은 오는 2월 개봉한다. 15세 관람가. 영상부 seoultv@seoul.co.kr
  • 일자리, 반도체만 ‘맑음’… 섬유·철강·자동차 ‘흐림’

    일자리, 반도체만 ‘맑음’… 섬유·철강·자동차 ‘흐림’

    반도체 4000명↑…증가율은 둔화 조선·기계·건설은 0.1~0.6% 늘어 섬유, 해외이전 등 영향 6000명↓ 금융·보험업, 0.1% 소폭 줄어들 듯주요 10대 업종 가운데 올해 상반기에 일자리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업종은 반도체가 사실상 유일했다. 섬유 등 5개 업종은 오히려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왔다. 그나마 조선이 선박 수주량 증가와 맞물려 구조조정의 터널을 지나 일자리가 상승 반전될 것이라는 게 위안거리다. 그동안 일자리 창출의 ‘화수분’ 역할을 해온 주력 업종들이 흔들리면서 정부의 올해 일자리 창출 목표(15만명) 달성도 버거워 보인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과 한국고용정보원이 30일 발표한 ‘2019년 상반기 주요 업종 일자리 전망’에 따르면 반도체 업종의 고용 규모는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3.3%(4000명)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지난 2년간 반도체 호황에 힘입은 결과다. 다만 증가율은 둔화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경기 둔화와 공급 부족 완화에 따른 반도체 가격 하락 등으로 우리나라가 강점을 지닌 메모리 분야의 생산·수출 성장세가 한풀 꺾였기 때문이다. 조선·기계·디스플레이·건설 업종은 올 상반기에 고용 규모가 소폭 늘어나는 수준에 그칠 것으로 예상됐다. 조선업은 선박 수주량이 늘고 있지만 해양플랜트 수주 부진이 지속돼 일자리는 0.2%(200명) 증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됐다. 기계는 미·중 무역분쟁과 중국의 성장세 둔화로 성장폭이 줄어든 데다 국내 내수 부진까지 겹치면서 일자리가 4000명(0.6%) 늘어나는 데 그칠 것으로 보인다. 건설업은 건설 투자 감소로 0.1%(3000명), 디스플레이는 액정표시장치(LCD) 공급 과잉과 패널 가격 하락세로 0.3%(400명) 증가가 각각 예상됐다. 반면 섬유·전자·철강·자동차·금융보험 등의 업종에서는 일자리가 줄어들 전망이다. 섬유업의 경우 수출은 소폭 증가하지만 국내 생산기반 해외 이전 등으로 생산량 자체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올 상반기에 일자리는 3.4%(6000명) 감소가 예상됐다. 전자는 휴대폰 시장 경쟁 심화로 성장이 제한돼 일자리가 0.6%(4000명)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철강도 유럽연합(EU)과 캐나다 등의 세이프가드 영향으로 생산과 수출이 줄어 고용 규모가 1.1%(1000명) 줄어들 전망이다. 자동차는 수입차 판매 증가로 국산차 생산이 줄고 수출 증가세도 부진해 0.9%(3000명), 금융·보험업도 가계대출 규제 강화 등의 영향으로 0.1%(1000명) 각각 일자리가 줄어들 전망이다. 세종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김구, 우파정당 세워 中국민당과 연합 전선…사회주의 김원봉 “자유는 우리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김구, 우파정당 세워 中국민당과 연합 전선…사회주의 김원봉 “자유는 우리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

    대한민국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로 나뉜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대립되는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나라가 자본주의·민주주의 체제로 운영돼야 한다고 믿었던 이들이 대부분 민족주의자이다보니 역사학계에서는 그렇게 분류한다. 두 계열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기 전부터 갈라져 활동했다. 하지만 일제의 위력을 체감한 1920년대 후반부터 ‘서로 힘을 합쳐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공감대가 생겨났다. ●안창호 “대혁명적 조직으로 하나된 행동을” 지난달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를 위해 찾아간 중국 상하이 황푸구 닝하이둥루. 빌딩숲 사이로 저층의 주상복합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식당들이 많아 활기가 넘쳤다. 임정 시절 상하이 한인들의 종교 활동 공간이자 독립운동 집회 장소로 쓰였던 기독교 예배당 ‘산이탕’ 터다. 서울신문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여기서 안창호(1878~1938)가 ‘민족유일당’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그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한국 독립을 위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대인배였다”고 평가했다. 1923년 전 세계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의 미래를 논의하고자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가 아무 성과 없이 끝났다. 임정이라는 구심점이 와해되자 정치 세력들도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개별 독립단체가 일본을 상대하기에는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이상의 분열은 자멸’이라는 인식이 퍼져 나갔다. 이때 안창호가 모든 독립운동 단체·정당을 하나로 묶는 연합정당을 창설하자고 주장했다. 이것이 민족유일당 운동이다. 안창호는 1926년 7월 산이탕에서 동포들에게 호소했다. “공산주의 혁명을 하자, 무정부주의로 가자, 복벽(왕정복고) 운동에 나서자 등 각자가 자기의 의견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서로 생각이 다르다고 다투면 안 됩니다. ‘민족 혁명’을 한다는 각오로 ‘대(大)혁명적 조직’을 만든 뒤 하나의 행동을 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을 건지기 위해 개인의 사리(私利)를 버리고 큰 혁명당을 조직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민족 혁명이란 독립운동 세력이 정치·경제·종교의 차이를 떠나 민족 역량을 하나로 모으자는 것이다. 대혁명적 조직은 민족 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독립운동의 구심체를 뜻하는데, 이는 결국 임정을 대신할 새 기구를 꾸리자는 의도다. 안창호는 우리 민족의 최대 과제가 조국 독립인 만큼 모든 갈등을 잠시 접고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백가쟁명에 나서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민족유일당 운동은 독립운동계의 최대 화두가 됐다.●반임정 기치 내건 조선민족혁명당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윤봉길(1908~1932) 의거로 일본에 쫓겨 항저우로 피신했던 1935년 7월. 난징에서 의열단과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대한독립당, 신한독립당 등 5당이 모여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했다. 김두봉(1889~1961)을 비롯한 사회주의자, 김원봉(1898~1958년)으로 대표되는 무정부주의자, 이청천(1888~1957)과 신익희(1892~1956) 같은 민족주의자가 두루 모였다. 이들은 ‘반(反)임정’ 혹은 ‘비(非)김구파’라는 공통 분모가 있었다. 독립운동가 2200여명이 참여한 거대 좌파 정당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야당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는 세계적으로 좌우 통합 분위기가 거셌다. 중국에서도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제와 함께 싸우기 위해 1차 국공합작(1924~1927)을 성사시켰다. 소련에서도 한국 사회주의자들에게 “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은 이런 시대적 조류와도 잘 맞았다. 이들은 일본의 중국 침략(1931)과 독일의 국제연맹 탈퇴(1933),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1935) 등을 보며 제국주의 국가들이 다시 한 번 세계대전을 일으킬 것으로 예측하고 한국 독립의 기회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초기부터 김원봉이 이끄는 무장투쟁단체 의열단의 독단이 문제가 됐다. 통합 두 달 만인 1935년 9월 한국독립당 조소앙(1887~1958)과 신한독립당 홍면희(1877~1946) 등이 탈당했다. 1937년 3월 이청천(1888~1957)도 김원봉과 결별하고 조선혁명당을 다시 세웠다. 충칭에서 만난 이선자(55) 전 충칭임시정부기념관 부관장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시 중국 국민당이나 공산당 기밀 문서를 살펴보면 ‘한국 독립운동 세력은 힘을 합치지 못하고 분열을 일삼는다’는 내용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고 전했다.●한국국민당 창립 멤버 이동녕·안공근 조선민족혁명당은 외교 독립 노선에 매달려 온 임정 인사들을 ‘몽상가’로 여겨 줄곧 임정 폐지를 주장했다. 김구(1876~1949)는 이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과거 사회주의 세력이 ‘자유시 참변’(1921)과 ‘레닌 자금 배달사고’(1920) 등으로 독립운동 진영을 어려움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진영은 임정을 지키고자 ‘대항마’ 성격의 우파 정당을 준비했다. 김구는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당된 지 넉 달쯤 뒤인 1935년 11월 항저우에서 한국국민당을 결성했다. 창립 멤버는 이동녕(1869~1940)과 안공근(1889~1939) 등으로 대부분 그의 핵심 측근이었다. 이 정당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중국 국민당과의 연대를 중요하게 여겼다. 실제로 한국국민당은 중국 측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으며 임정의 여당 역할을 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지자 한국국민당은 중국 국민당 정부를 돕고자 조선민족혁명당 탈당파인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과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했다. 일종의 우파 연합 전선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계열도 같은 해 12월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이 모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해 맞섰다. 이로써 중국 본토에서 독립운동은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임정파·민족주의 세력과 조선민족혁명당이 주축이 된 반임정파·사회주의 세력의 두 축으로 재편됐다.●재평가 받아야 할 의열단 지도자 김원봉 난징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1시간쯤 차로 이동하자 한 산골마을에 서탕녠 저수지가 나왔다. 여기서부터 산을 타고 1㎞ 넘게 걸어 올라가니 산 중턱쯤에 폐허에 가까운 도교사원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1920년대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무장단체 의열단을 만든 김원봉이 조선혁명간부학교(1932~1935) 학생들을 훈련시킨 톈닝사다. 일본의 감시를 피해 일부러 산속 깊숙한 절에서 군사 훈련을 한 것이다.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우리가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1919~1920)를 신성시하면서 이 학교 출신이 주축인 의열단을 무시하는 것은 모순”이라며 “우리나라에서 재평가받아야 할 독립운동가를 꼽으라면 김원봉이 단연 1위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원봉은 스무 살이던 1918년 중국 난징의 진링대학(현 난징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서양 제국주의 열강이 조선 같은 약소국을 위해 일본과 싸워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깨닫고 미련없이 학업을 포기했다. 이후 무장투쟁가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그가 의열단원에게 한 말이 지금도 전해진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다. 우리(의열단)가 선구자가 돼 민중을 각성시켜야 한다.” 조국 광복의 꿈을 안고 의열단을 창단한 스물한 살 때부터 광복을 맞아 귀국한 마흔일곱 살까지 26년간 일제와 쉬지 않고 싸웠다. 조선총독과 친일세력, 한국인 밀정을 처단하고자 의열단 투쟁을 진두지휘했고, 독립운동 조직으로는 처음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항일무장 세력으로 인정받은 조선의용대도 세웠다. 그는 1919년 3·1운동을 ‘실패한 혁명’으로 봤기에 이를 계승한 임정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래도 조선 독립을 위해 1941년 김구와 과감히 손잡고 임정에 참여했다. 한국광복군 부사령관과 임정 군무부장 등을 역임하며 민족 해방을 앞당겼다.●일제, 현재 가치 300억원 넘는 현상금 걸어 일제는 그에게 100만 대양(大洋·중국 화폐단위)이라는 현상금을 걸었다. 요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300억원이 넘는 거액이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걸린 현상금이 60만 대양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김원봉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헬렌 포스터 스노(1907~1997·필명 님 웨일스)가 쓴 책 ‘아리랑’에 나오는 김원봉에 대한 묘사다. “그는 고전적 유형의 의열투쟁가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몰랐다.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다. 도서관에서 독서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가씨들은 그를 동경했다. 미남으로 빼어난 용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김원봉의 생애는 영화 ‘아나키스트’(2000)를 시작으로 ‘암살’(2015), ‘밀정’(2016) 등을 통해 꾸준히 소개되고 있다. 상하이·난징·충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가천대·중국 장춘재경대 교류협력 협정

    가천대·중국 장춘재경대 교류협력 협정

    가천대학교가 29일 대학 가천관 중회의실에서 중국 장춘재경대학교와 교류협력을 위한 협정을 맺었다고 30일 밝혔다. 이날 체결식에는 가천학원 김신복 이사장, 가천대 조효숙 부총장, 김충식 대외부총장, 장춘재경대 리수펑 이사장, 리우청리 부총장 등 20여명이 참석했다. 이번 협정으로 양 대학은 상호 우호적인 협력 정신을 바탕으로 학생·학문·문화 교류 및 공동연구 등을 통해 상호발전에 협력키로 했다. 특히 가천대는 장춘재경대 교수진을 대상으로 박사학위프로그램을 운영하기로 했다. 총 31명의 교수가 올해부터 가천대 일반대학원 글로벌경영학과에 입학해 박사학위 과정을 밟는다. 교육 과정은 총 3년으로 모든 수업은 중국어로 진행된다. 리수펑 장춘재경대 이사장은 “가천대 대학원 교육프로그램이 우수하고 박사학위과정도 중국어로 교육해 깊이 있는 학문탐구가 가능해 가천대와 협정을 맺게 됐다”며 “우리의 젊고 우수한 교수들이 박사학위 뿐만 아니라 가천대의 교육방식, 학사운영 등 선진 교육시스템을 배워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신복 가천학원 이사장은 “오늘 양 대학의 협정은 박사학위 과정 운영으로 이어져 더욱 뜻깊다”며 “박사 교육프로그램을 시작으로 공동연구, 교직원·학생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장춘재경대학교는 중국 길림성 장춘시에 위치한 대학으로 회계대학, 외국어대학 등 10개 단과대학 23개학과에 학생수는 1만1000 여명이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최만진의 도시탐구] 또 목포의 눈물인가?

    [최만진의 도시탐구] 또 목포의 눈물인가?

    ‘목포의 눈물’은 1935년 이난영이 불러 대성공을 거두었던 노래이다. 당시 목포는 일본과 중국에 가깝다는 지리적 장점으로 일제 수탈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에 일찍부터 개항을 강요당했고, 식민지 열강들 중에 일본이 유일하게 영사관을 설치했다. 강점기 동안에는 경제 수탈을 위해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과 은행 등을 설립하여 비옥한 전라도의 쌀과 목화를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이에 많은 조선인이 노동에 동원되었고 때로는 임금조차도 받지 못하는 억울함을 맛보던 곳이 목포항이었다. 억압을 몸소 느끼다 보니 항일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고, 일제는 목포형무소나 목포경찰서를 세워 잔혹하게 통치하였다. 이난영의 노래가 더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나라 잃은 한을 그 특유의 애잔한 목소리로 실어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목적이 어찌됐든 당시 목포는 도시계획과 건축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고,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런 일제의 개발은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첫째로는 당연히 식민화의 도구다. 두 번째로는 그나마 긍정적인 것으로 근대적 건축과 도시계획의 도입이었다. 특히 서양의 영향을 받은 건축가나 도시계획가에게는 제약이 많은 일본에 비해 조선은 실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이로써 목포에는 일본식 가옥 외에도 고전주의, 절충주의, 근대건축 등 다양한 형태의 서양건축물이 들어서게 되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의 유럽도시를 재현하는 듯했다. 또한 도시계획 측면에서도 1930년대에 대규모 사업인 ‘시가지계획령’ 지정을 받는 등 괄목할 만한 변화를 경험했다. 근대적 격자형 도로망과 지구가 생긴 것도 이때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설치된 방공시설도 일부 보존되어 있기도 하다. 최근 많은 화제를 낳고 있는 ‘목포 문화거리’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목포 도심은 해방 직후나 산업화과정에서 변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전체가 그야말로 근대도시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이는 당시의 도시, 건축, 생활상을 이해하고 읽어낼 수 있는 좋은 사료임에 틀림이 없다. 그간 아쉬웠던 것은 건축물과는 달리 도시공간에 대한 문화재지정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1910년대의 나진이나 진해는 유럽식 개념을 도입한 획기적 성격의 신도시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일본에서조차도 볼 수 없었던 이 계획이 가지는 의의는 상당히 크며, 향후 도시 보존과 개발에 있어 많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 도심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군대가 연합군 폭격기에 대응 사격을 위해 만들었던 방공타워가 있다. 탄환 흔적이 곳곳에 있는 이 콘크리트 덩어리는 주변 공원과 함께 생태체험 공간으로 거듭나 사랑받고 있다. 한 특정 정치인에 대한 투기 의혹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고 도심 공간 전체를 문화재로 지정하고 이를 관광, 산교육, 도시 되살리기 사업의 소재로 삼는다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따질 것은 따지되 목포에서 제2의 눈물을 쏟아내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 [포토] ‘미코 출신 맥심 모델’ 김근혜, 반전 일상

    [포토] ‘미코 출신 맥심 모델’ 김근혜, 반전 일상

    미스코리아 출신 피트니스 모델 김근혜의 일상이 화제다. 미스코리아 출신 머슬퀸 김근혜의 일상 미모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김근혜의 SNS를 통해 공개된 그의 모습은 건강미와 청순함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청순하고 우아한 외모와 반전을 이루는 식스팩과 보디라인이 대비를 이뤄 눈길을 끈다. 김근혜는 2018년 4월에 처음 도전한 머슬마니아 상반기 대회에서 미즈비키니, 커머셜모델 부문 2관왕을 차지했다. 지난해 11월에는 라스베이거스 세계대회에서 미즈비키니 미디엄 부문 4위를 차지하며 주목을 받았다. 한편, 김근혜는 통권 100호를 맞이한 ‘맥스큐’ 2019년 1월호 커버를 장식하며 전매특허인 완벽한 복근을 뽐냈다. 스포츠서울
  • 또 목포의 눈물인가?

    또 목포의 눈물인가?

    ‘목포의 눈물’은 1935년 이난영이 불러 대성공을 거두었던 노래이다. 당시 목포는 일본과 중국에 가깝다는 지리적 장점으로 일제 수탈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에 일찍부터 개항을 강요당했고, 식민지 열강들 중에 일본이 유일하게 영사관을 설치했다. 강점기 동안에는 경제 수탈을 위해 동양척식회사 목포지점과 은행 등을 설립하여 비옥한 전라도의 쌀과 목화를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이에 많은 조선인이 노동에 동원되었고 때로는 임금조차도 받지 못하는 억울함을 맛보던 곳이 목포항이었다. 억압을 몸소 느끼다 보니 항일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고, 일제는 목포형무소나 목포경찰서를 세워 잔혹하게 통치하였다. 이난영의 노래가 더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나라 잃은 한을 그 특유의 애잔한 목소리로 실어냈던 것이 아닌가 싶다.목적이 어찌됐든 당시 목포는 도시계획과 건축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고,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런 일제의 개발은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첫째로는 당연히 식민화의 도구다. 두 번째로는 그나마 긍정적인 것으로 근대적 건축과 도시계획의 도입이었다. 특히 서양의 영향을 받은 건축가나 도시계획가에게는 제약이 많은 일본에 비해 조선은 실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이로써 목포에는 일본식 가옥 외에도 고전주의, 절충주의, 근대건축 등 다양한 형태의 서양건축물이 들어서게 되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의 유럽도시를 재현하는 듯했다. 또한 도시계획 측면에서도 1930년대에 대규모 사업인 ‘시가지계획령’ 지정을 받는 등 괄목할 만한 변화를 경험했다. 근대적 격자형 도로망과 지구가 생긴 것도 이때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설치된 방공시설도 일부 보존되어 있기도 하다. 최근 많은 화제를 낳고 있는 ‘목포 문화거리’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다. 목포 도심은 해방 직후나 산업화과정에서 변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전체가 그야말로 근대도시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이는 당시의 도시, 건축, 생활상을 이해하고 읽어낼 수 있는 좋은 사료임에 틀림이 없다. 그간 아쉬웠던 것은 건축물과는 달리 도시공간에 대한 문화재지정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1910년대의 나진이나 진해는 유럽식 개념을 도입한 획기적 성격의 신도시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일본에서조차도 볼 수 없었던 이 계획이 가지는 의의는 상당히 크며, 향후 도시 보존과 개발에 있어 많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 도심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군대가 연합군 폭격기에 대응 사격을 위해 만들었던 방공타워가 있다. 탄환 흔적이 곳곳에 있는 이 콘크리트 덩어리는 주변 공원과 함께 생태체험 공간으로 거듭나 사랑받고 있다. 한 특정 정치인에 대한 투기 의혹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고 도심 공간 전체를 문화재로 지정하고 이를 관광, 산교육, 도시 되살리기 사업의 소재로 삼는다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따질 것은 따지되 목포에서 제2의 눈물을 쏟아내게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글: 최만진 경상대 건축학과 교수
  • [인터뷰 플러스] “태양광 발전 위한 생태계 조성… 대국민 홍보 선제적으로 펼칠 것”

    [인터뷰 플러스] “태양광 발전 위한 생태계 조성… 대국민 홍보 선제적으로 펼칠 것”

    지난 12월 서울플러스와 공동으로 한국리서치에 1차 국민여론조사를 실시한 태양광산업협회의 이완근 회장은 “이번 조사 결과를 토대로 2019년에는 태양광산업 발전을 위한 생태계 조성과 선제적인 대국민 홍보를 하겠다”고 새해 포부를 밝혔다. 이 회장은 태양광 제조기업들의 직면한 심각한 어려움에 대해 “시장과 산업이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산업부분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정책적 노력과 산업여건 개선에 많은 힘을 쏟고자 합니다”라며 나이를 초월한 열정과 왕성한 활동으로 기해년 새해를 열었다. 현재 협회뿐만 아니라 신성이엔지 대표이사를 맡고 있으며 지금도 한 달에 15일가량은 해외 출장으로 현장에 있다. “직원과 고객이 있는 곳이 내가 있어야 하는 곳”이라는 이완근 회장과의 일문일답이다. 편집자 주→태양광 1세대로도 유명하신데, 지난 2015년 3월 태양광산업협회 회장으로 취임하신 이후 역점을 두신 일은 무엇인지요. -태양광산업계가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만큼, 태양광산업의 여건을 개선할 수 있는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를 위해 각계에 업계의 애로사항을 알리며 정책개선이 필요한 부분을 건의하면서, 보급·수출·금융·규제·기술·세제 등 현안별로 업계가 원하는 사항들이 현장에 반영되도록 노력했습니다. 한편, 대기업, 중견 중소기업, 공기업으로 구성된 협회 회원사들의 사업분야 또한 다양하기에 기업들의 이해와 관심이 충돌되지 않고, 최대 다수의 공동이익을 추구하는데 방향을 맞추어 협회를 운영하여 왔습니다. →지난 2016년 협회 정기총회에서 “태양광·풍력 등이 미래 에너지의 70% 이상 담당할 것”이라 주장하신 것과 일치된 1차 국민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이번 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 국민들은 이념 성향과 상관없이 향후 비중을 늘려야 하는 에너지로 태양광을 제일 많이 뽑았으며 본인의 거주지에 수용할 수 있는 에너지로서도 태양광발전을 가장 많이 선택했습니다. 많은 국민은 이미 태양광발전이 미래 에너지로 수용하고 있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국민들 삶 속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다양한 여건이 개선되어야 합니다. 간헐적 발전으로 인한 부작용을 해소하며 전력계통 연계나 입지규제 등을 해결해 나가고, 국민들이 태양광발전을 이용한 에너지 프로슈머가 될 수 있도록 제도적·기술적 환경을 조성해 나가야 실제적인 미래 에너지가 될 것입니다. →가짜뉴스가 많이 있었고, 최근 들어서 줄어들었는데, 앞으로의 대책은 무엇인지. -2018년에는 잘못된 정보에 대응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면 2019년에는 좀 더 선제적으로 태양광발전의 효용성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데 노력하려 합니다. 국민들이 태양광발전과 산업의 가치를 보다 잘 체감할 수 있도록 다양한 매체와 전문가들을 활용해 보다 적극적인 태양광 홍보를 전개하려 합니다. →원자력학회에 미래 에너지에 관한 공동 콘퍼런스 개최를 제안하셨는데요. 배경을 설명 부탁드립니다. -에너지전환과 관련해 원자력과 재생에너지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양상입니다. 이 둘은 서로 대립할 관계가 아니라 보완하고 협력할 관계인데, 에너지에 주관적인 이념을 씌우고 정파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대립하는 구도가 되고 이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됩니다. 원자력과 재생에너지에 드리워진 이념의 굴레를 벗고, 보다 객관적이고 정량화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국민의 컨센서스를 모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서로 간에 소통하고, 잘못된 이해를 바로 잡으며, 이런 과정을 통해 적정한 에너지가 무엇인지 국민들이 판단할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여론조사 결과, 국민들은 이념 성향과 무관하게 재생에너지에 대한 긍정적 답변이 70% 이상 나왔는데요. 이러한 국민적 호응을 실현하기 위해 재생에너지 관련 협회와 학회 등을 총괄하는 연합회를 구성할 계획은 없으신지요. -연합회를 구성하는 것은 우선 재정적 부담이 늘고 그 재정 부담을 누가 얼마만큼 부담해야 하는지 논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태양광산업협회 뿐만 아니고, 다른 모든 재생에너지 관련 협회들이 재정 때문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거기다 재생에너지별 특성과 이해관계도 다릅니다. 한때는 하나의 협회로 모여 있다가 각기 에너지별로 흩어져서 각자 협회를 구성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업계 공동의 현안과 이익에 대해 케이스별로 연합 대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재생에너지 진흥의 날(재생에너지의 날)’을 제정하실 의사는 없으신지요. -재생에너지의 날을 제정하자는 움직임이 학계를 중심으로 있어서, 저희 협회도 그 논의하는 자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기에 국민들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2019년 협회에서 중점적으로 하고자 하는 사업은 무엇인지요. -태양광산업이 너무 어려운 상황이다 보니 협회의 재정상태가 취약합니다. 이를 헤쳐나갈 수 있는 사업들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또한 태양광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으면서 선제적으로 국민들에게 태양광의 가치를 바로 알릴 수 있는 홍보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려 합니다. 또한 그동안 정부의 보급 확대정책으로 태양광시장은 커지고 있는데 태양광 제조기업들은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시장과 산업이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산업부분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정책적 노력과 산업여건 개선에 많은 힘을 쏟고자 합니다. →지금 태양광 기업들이 어렵습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을 갖고 계신지요. -시장의 가격요구를 맞추기 위해 지난시기 태양광 기업들은 출혈경쟁 등으로 수익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산업구조에서는 비용경쟁력 확보가 핵심입니다. 이를 위해 업계 차원에서는 기술력으로 비용경쟁력을 높이는 것 외에도 수평분업, 협력영업, 공동구매 등의 비용 절감을 하려 합니다. 더 나아가 중국 대기업들이 규모의 경제력으로 비용경쟁력을 구축하는 것에 대응할 수 있도록 고효율과 제품의 차별성 확보 및 R&D 기술 개발이 절실합니다. 지속적인 기술개발과 해외시장 확대, 사업모델 개발, 사업구조 확대, 연관 산업과의 파생 효과 창출, 금융지원과 활용 등 다양한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생태계를 구축하고자 합니다. →법, 제도, 규제 개선을 위해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부분은 어떤 것이 있는지요. -지자체들의 태양광발전소 이격거리 규제로 입지확보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미 수년째 문제 되는 상황인데 규제를 적용하는 지자체는 작년까지 더 늘어난 상태입니다. 농지에도 태양광발전이 더 많이 설치되도록 휴경지 증가와 태양광발전소 입지 부족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접근이 필요합니다. 이와 관련해 건의했던 사항 중 제도적으로 개선된 사항들로서는 우선 농지와 관련된 사항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농지에 있는 축사와 같은 건물 가운데 태양광발전이 설치 가능했던 건물이 2015년까지 준공된 것으로 제한되던 것이 준공 시기에 제한을 두지 않는 것으로 조정되었습니다. 농지에 태양광발전을 설치할 때 지불되는 농지보전부담금도 2년간 한시적이며 농업인 참여가 조건이 붙기는 하나 작년에 50% 감면되었습니다. →4차 산업기술과 태양광산업과의 접목을 강조하시는데 어떤 형태로 가능한지요. -태양광발전소의 운영관리 측면에서 몇 가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태양광발전설비에 유무선 센서들을 설치해 태양광발전소의 운영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원격으로 수집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얻어진 정보를 기상정보, 지리 환경, 발전특성 등의 다양한 데이터와 연계해 대량의 데이터를 가공하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빅데이터(Big Data) 기술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리된 데이터는 클라우드 컴퓨팅(Cloud Computing)으로 공유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시스템(AI)을 활용하면 정보들을 필요에 맞게 알고리즘화해서 태양광발전시설을 보다 최적의 상태에서 운영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4차산업혁명 요소와 연결될 수 있는 것은 태양광발전이 가진 장점 중의 하나입니다. 태양광발전은 대형 유틸리티는 물론이고 용도에 맞게 다양한 용량과 형태로 설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북경협을 위한 준비는 잘 되고 있는지요. -협회도 작년에 경협 태스크포스팀을 조직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남북경협 사례를 조사하고 태양광산업에 접목하는 방안을 검토했습니다. 올해에는 좀 더 각론 단계로 들어가서 제도적 기반이나 실증사업 모델과 같은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준비하려 합니다. 단, 남북경협문제는 다양한 외부요인에 크게 좌우되고 예민한 요소들이 많아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는 곤란합니다. →2016년에 발간한 저서 ‘태양광선언’에서 “태양광 발전은 하나의 사업 아이템을 넘어서 일종의 사명감과도 같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이유인지요.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한다면 태양광사업은 하기 힘듭니다. 언제 접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태양광산업의 환경은 척박하기 때문입니다. 청정한 에너지를 공급한다는 사명감이 없으면 버티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태양광사업은 단지 에너지 사업에 그치지 않습니다.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과제를 해결하는 한 수단이며 환경복지에 기여하는 사업입니다. 이와 같은 인식과 사명이 없다면 이 어려운 사업환경에서 버티기 어렵습니다. →2019년과 이후 태양광 시장을 어떻게 전망하시는지요. -2019년 글로벌 태양광 시장 규모에 대해 Bloomberg(BNEF)는 133GW(125~141GW), IHS는 123GW, PV Infolink는 112GW의 규모가 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조사기관에 따라 수치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글로벌 태양광시장은 2019년에 반등 모멘텀을 가지며 크게 확대될 것으로 전망합니다. 시장규모의 확대와 더불어, 시장 다변화도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질적인 성장도 기대됩니다. IEA(국제에너지기구)는 2017년에 전 세계 발전량의 2%를 차지하던 태양광이 2040년에는 7~17%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그 사이 태양광시장은 다변화가 크게 진행될 것입니다. 그간 태양광시장을 주도했던 중국, 미국, 일본, 서유럽 외에도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동유럽, 중남미 지역으로 활발하게 시장이 다변화될 것입니다. →모교인 성균관대를 비롯해 기부왕으로 불릴 만큼 기부를 하셨는데요. 어떤 이유인지요. -모교의 후배들이 국가 및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글로벌 인재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후배들의 모습이 아름다워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김병식 객원기자 kbs@seoul.co.kr ■이완근 한국태양광산업협회 회장 학력 1965.02 성균관대 문리대 교육학과 졸업(1961학번) 1989.08 서울대학교 AMP 수료(27기) 2001.02 성균관대 명예경영학박사 취득 2006.03 성균관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2008.09~12 기후변화센터 리더십과정 2기 2010.03~12.08 성균관대 유학대학원 석사졸업 2012.09~13.01 삼성 리더스 헬스캠프 1기 2017.03~17.06 환경재단 4차 산업혁명 리더십과정 1기 경력 1977.01~현재 ㈜신성이엔지 대표이사·회장 2004.02~11.02 한국냉동공조산업협회 회장 2005.03~13.02 한국공기청정협회 회장 2005.01~13.03 우리기술투자 대표이사 2008.05~10.04 제31대 성균관대학교 총동창회 회장(現 명예회장) 2008.11~14.12 한국태양전지연구조합 이사장 2009.02~현재 한국기계산업진흥회 부회장 2014.04~현재 한국MAS협회 이사 2015.03~현재 한국태양광산업협회 회장 2017~현재 기후변화센터 공동대표 수상 1990.09 우수기계상(CTM) 표창 제211호 1991.04 철탑산업훈장(제24회 과학의 날) 1993.11 IR52 장영실상(FFU) 1998.07 1998 우수수출상품 대상(무역협회) 2002.12 반도체 20주년 기념 대통령 표창 2005.07 IR52 장영실상(GAA) 2005.10 금탑산업훈장(한국기계대전-우수자본재개발유공자) 2007.06 제16회 다산경영상(창업경영인부문) 2008.01 중소기업 문화대상(문화관광부/중소기업중앙회) 2009.11 PVSEC SPECIAL AWARD 2010.04 한국인사조직학회 창업기업인상 2010.09 고효율 태양전지 기술개발 국무총리 표창 2010.12 고용창출 우수기업 대통령 표창 2014.04 태양광발전학회 공로상 2014.12 5천만 수출의탑 2015.12 1억불 수출의탑 2016.12 기후경영대상 품질경영부문 환경부장관상 2017.11 친환경 기술, 제품 국무총리 표창 2017.12 3억불 수출의탑
  • ‘홀로코스트’ 기억하는 독일

    ‘홀로코스트’ 기억하는 독일

    메르켈 “과오 반복 안 되도록 노력해야”전 세계적으로 극우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이 확산되고 과거 전쟁범죄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는 가운데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인 27일(현지시간) 옛 유대인 강제수용소 등 전 세계 곳곳에서 추모행사가 열렸다.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했던 홀로코스트에서 집시와 폴란드인 등도 집단으로 살해됐다. 1945년 1월 27일 독가스실 등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갇혀 있던 유대인들이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아우슈비츠에서는 74년이 지난 이날 추모행사가 진행됐다.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총리 등 폴란드 정부·의회 인사들과 독일 대표단, 생존자, 희생자 가족들이 참석했다. 아르민 라셰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총리가 이끄는 독일 대표단도 참석해 ‘처형의 벽’ 앞에 헌화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추모객들은 당시 유대인이 입던 수용소 복장을 형상화한 줄무늬 스카프를 두르기도 했다. 모라비에츠키 총리는 “히틀러의 독일은 파시즘을 주입했고 모든 악이 여기서 나왔다”고 말했다. 추모행사 동안 아우슈비츠 수용소 밖에서는 수십명의 극우 시위대가 반대집회를 열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모든 사람은 인종주의와 반(反)유대주의에 대한 ‘인내력 제로’를 보여줘야 할 책임이 있다”면서 “우리는 과거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알아야 하고 과오가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메르켈 총리는 “독일에서 여러 종류의 반유대주의가 출현하고 있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英여왕의 98세 남편, 교통사고 피해 여성에게 사과 편지

    英여왕의 98세 남편, 교통사고 피해 여성에게 사과 편지

    영국 엘리자베스 2세(93) 여왕의 남편인 필립공(98·에든버러공작)이 자신의 차량으로 운전을 하다 교통사고를 낸 뒤 사고로 부상당한 여성에게 사과의 편지를 보낸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되고 있다. 27일(현지시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필립공은 지난 17일 영국 동부 노퍽 카운티의 왕실 별장 샌드링엄 하우스 인근에서 스포츠유틸리티(SUV) 차량인 레인지 로버를 몰다 맞은 편에서 오던 차량과 측면에서 충돌해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다. 하지만 필립공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차에서 빠져 나왔다. 병원으로 후송된 필립공은 진단 결과 건강에 큰 이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필립공은 98세의 고령으로 지난해 건강 문제로 공식 업무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필립공의 맞은 편 차에서 운전 중이던 여성 에마 페어웨더(46)는 손목이 부러지는 등 부상을 입었다. 해당 차량에는 그의 친구와 9개월 된 딸이 탑승해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필립공은 이후 페어웨더에 친필 편지를 통해 “나는 그 길을 여러 차례 통행했으며 이 주변의 교통 상태를 매우 잘 알고 있다”며 다만 사고가 발생했던 오후 3시쯤 해가 매우 낮게 비추고 있어 마주오는 차량을 볼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어 필립공은 “차가 오는 것을 보지 못했고, 나는 이 결과(사고)에 대해 크게 뉘우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사고 후 얼마간 진동이 느껴졌다며 심각한 부상자가 없어 안도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 괴로운 경험에서 빠르게 회복되길 바란다”며 “당신의 진정한 필립으로부터”라고 편지를 마무리했다.페어웨더는 데일리 메일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자신을 공적 지위인 ‘에든버리 공작’이 아닌 ‘필립’이라고 지칭한 것에 큰 감동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필립공으로부터 인간적인 친절함을 원한다고 했을 때 말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며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필립공의 사고 이후 영국 왕실에 대한 여론은 매우 나빠졌다. 특히 사고가 나고 이틀 만인 지난 19일 필립공이 안전벨트도 매지 않은 채 다른 차를 몰고 나선 모습이 발각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전문가들은 영국 왕실이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큰 도전을 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필립공의 교통사고가 알려지며 영국에서는 노인 운전을 제한해야 한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한 자동차 관련TV 프로그램 진행자는 공개적으로 필립공의 운전을 반대하고 나서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5년 운전을 배운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지금까지 운전을 하고 있지만 사고 사례는 알려진 바 없다. 영국 교통법에 따르면 70세 이상의 운전자는 의료검진을 받아야 면허를 연장할 수 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한필원의 골목길 통신] 도시재생의 실마리, 문화유산

    [한필원의 골목길 통신] 도시재생의 실마리, 문화유산

    최근 도시재생이라는 말이 부쩍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 도시재생이란 오래돼 퇴락하고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도시 구역을 환경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되살리는 지속가능한 개발 방식이다. 이렇게 목표가 타당하고 뚜렷함에도 그 방법론은 모호하기만 하다. 그래서 전국 곳곳에서 도시재생 뉴딜 사업이 본격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지금 이렇게 하다가는 말만 재생이지 결과는 재개발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도시재생 대상 지구는 대개 반세기 이전에 조성된 곳이어서 그곳 어딘가에는 오래된 건물이나 문화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 곧 문화유산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문화유산은 도시가 오늘날처럼 상업화되고 번잡해지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시기에 만들어졌기에 새로운 도시 여건에 부합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도시로서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일 터이다. 오래되고 허약한 건물이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도시재생이란 문화유산과 도시가 오랜 시간의 간극을 극복하고 자연스럽게 만나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문화재만 달랑 남기거나 법으로 보호받는 문화유산이 아니면 그마저도 없애 버리는 재개발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이런 의미에서 도시재생이 성공하려면 문화유산과 그 맥락을 철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그것에서 방향과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런 사례를 잘 보여 주는 곳이 아인슈타인이 태어난 도시 독일의 울름이다. 이 도시의 중앙인 시청 부근에는 울름대성당이 높이 솟아 도시의 정체를 말해 준다. 가톨릭 주교좌가 아닌 개신교회임에도 흔히 대성당이라 불리는 이 문화유산은 1377년에 착공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1890년에야 완성됐다. 첨탑까지 높이가 161.5미터로,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성가족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회 건물이었다. 울름대성당은 긴 역사와 높이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인테리어로도 유명한데, 특히 수백명의 흉상이 조각된 15세기의 장식적인 성가대석은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한동안 울름대성당과 그 앞 광장은 2차 세계대전의 폭격 뒤에 조성된 상업적인 도심과 어색한 관계를 유지했다. 오늘날 도시 인구가 만 명에 불과했던 시절에 지어진 이 문화유산이 인구가 그 열 배가 넘는 현대 도시의 도심과 원만하게 만날 수 있는 것은 1993년 교회 앞 광장 가장자리에 지어진 울름 슈타트하우스 덕분이다. 이 프로젝트의 설계를 맡은 미국의 유명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는 울름대성당의 네 기둥이 만들어 내는 공간, 곧 베이의 모양과 치수를 그대로 반복하는 격자를 바탕으로 건물 형태와 광장의 바닥 패턴을 디자인했다. 지붕은 길가의 오래된 건물들과 같이 박공 형태를 반복했다. 그 결과 이 현대 건물은 주변과 어울릴 뿐 아니라 대성당을 바라보는 시각의 틀을 만들어 냄과 동시에 그것이 현대 도시의 상업가로와 자연스럽게 만나도록 주선함으로써 도시의 환경을 보완하고 개선했다. 건물의 프로그램도 문화유산에서 도출했다. 지하는 교회 광장의 고고학 자료와 역사를 전시하는 상설전시장이고, 지상에는 방문자센터와 전시장, 강당 등 현대의 도시 기능을 담음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신구가 공존하는 건축이 탄생했다. 울름 슈타트하우스가 도시를 다시 살리는 건축의 상징이 된 것은 이렇게 주변의 문화유산에서 해법의 실마리를 찾아 그 지역의 프로그램과 문화적 의미를 보완하고 강화했기 때문이다. 도시재생을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성공적인 도시재생에서 산뜻한 아이디어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문화유산을 출발점이자 참조점으로 삼는 태도가 아닐까 한다.
  • 가계대출 증가 폭 꺾였다

    가계대출 증가 폭 꺾였다

    고공행진을 거듭해 온 가계대출 증가세가 지난해 한풀 꺾인 것으로 나타났다. ‘빚을 내서 집을 사는’ 주택담보대출 증가세보다는 ‘역(逆)전세난’에 따른 전세자금대출 부실화 문제로 리스크 관리의 초점이 옮아 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7일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가계대출 증가율은 5.9%(75조 1000억원)로 2017년 7.6%(90조 5000억원)보다 1.7% 포인트 감소했다. 2015년 11.5%(109조 6000억원), 2016년 11.6%(123조 2000억원) 등과 비교하면 안정세가 두드러진다. 특히 은행권에서 실행된 주담대 증가율이 6.6%(37조 8000억원)에 그친 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9월 정부가 다주택자의 추가 주택 매입을 위한 주담대를 제한한 것이 효과를 본 셈이다. 여기에 지난해 10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도입한 것도 대출 억제를 불러왔다. 금융 당국은 DSR 관리지표를 올해 상반기 중 제2금융권에도 적용할 계획이다. 다만 지난해 은행권 전세대출 증가율이 38.6%(25조 7000억원)에 달한다는 점은 당국의 새로운 고민거리다. 전세대출이 늘어난 상황에서 전세가가 떨어져 임대인이 보증금을 반환하지 못하면 자칫 전세대출이 부실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호금융과 저축은행을 중심으로 개인사업자대출이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것도 부담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가계부채가 당장 시장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은 작지만 금리 상승에 따른 상환 부담 증가, 전세대출 등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김대영의 무기 인사이드] 러시아 해군 비운의 핵잠수함 ‘쿠르스크’

    [김대영의 무기 인사이드] 러시아 해군 비운의 핵잠수함 ‘쿠르스크’

    지난 16일 개봉한 영화 쿠르스크(Kursk)가 화제다. 지난 2000년 8월 12일 노르웨이 바렌츠 해에서 발생한 러시아 잠수함 침몰 사건을 그린 영화로 우리의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한다. 세월호와 마찬가지로 구조에 필요한 골든 타임을 놓쳤고, 거기에 더해 러시아 군의 부족한 예산상황이 겹치면서 세계 해군 역사에 남을 비극이 발생했다.쿠르스크호는 소련 해군이 미 해군의 항공모함을 잡기 위해 만든 순항미사일 핵잠수함이었다. 일명 오스카급으로 불리는 이들 잠수함들은 1975년부터 1996년까지 10여 척이 건조되었다. 소련 해군은 유사시 미 해군의 항공모함에 맞서 똑같이 항공모함을 건조해 대응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소련의 경제력으로는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새로운 게임체인저가 필요했다. 이러한 게임체인저로 선택된 것은 순항미사일 핵잠수함이었다. 소련 해군은 그 전에도 순항미사일 핵잠수함을 건조해 운용했지만, 오스카급은 탑재한 잠대함 미사일과 그 크기가 상상을 초월했다. 1번함인 아르한겔스크호는 수중배수량이 2만 톤이 넘었고, 탑재된 미사일 P-700 그라니뜨는 소형 전투기 크기의 대형 대함 미사일로 750㎏의 고폭탄이나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었다.최대 사거리가 600여㎞에 달하는 P-700 그라니뜨 잠대함 미사일은 렘제트 엔진을 장착해, 마하 2.5의 비행속도로 미 해군 항공모함을 파괴시킬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초기형은 '그라니뜨급' 후기형은 '안티급'로 불리는 오스카급은, P-700 그라니뜨 잠대함 미사일을 잠수함 좌우 양 옆으로 12발씩 총 24발을 탑재할 수 있었다. 또한 이밖에 6개의 어뢰발사관을 가지고 있다. 여타 소련 해군의 잠수함들처럼 복각식 선체를 가지고 있으며, 8인치 두께의 고무패드를 부착해 잠수함에서 발생하는 소음을 차단했다. 이밖에 장기간 항해할 잠수함 승조원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작지만 수영장과 사우나 그리고 체력단련실과 휴게실을 별도로 만들었다. 2개의 원자로를 가진 오스카급은 수중에서 최대 32노트로 항해할 수 있었다. 비록 32노트의 속도를 낼 경우 적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높지만, 그 만큼 빠른 속도로 미 해군 항공모함을 추적할 수 있었다.쿠르스크호는 12번째로 건조된 오스카급 잠수함이다. 쿠르스크는 지명으로 러시아 쿠르스크주의 주도이며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최대 격전지였다. 러시아 북해 함대의 자랑이었던 쿠르스크호는 연습용 어뢰가 폭발하면서 아수라장이 되었고, 뒤이어 어뢰가 연달아 터지면서 결국 침몰하게 된다. 당시 폭발은 지진파 계측장비를 통해 미국의 알라스카에서도 감지되었다. 천만 다행인 것은 잠수함의 동력원인 원자로가 승조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정지되었다는 점이다. 만약 원자로가 정지되지 못하고 폭주했다면 쿠르스크호 침몰 사건은 대재앙이 될 수도 있었다. 어뢰 폭발과 함께 100여명의 승조원 대부분이 사망했지만 20여명은 살아남아 구조를 애타게 기다렸다. 하지만 구조잠수정이 수 차례 구조를 위해 도킹을 시도했지만, 노후된 부품으로 인해 실패하게 된다. 침몰 사건 발생 뒤 한참이 지나서야 영국과 노르웨이 구조대가 도착했고, 이 때는 남은 생존자들도 전부 사망한 시점이었다. 김대영 군사평론가 kodefkim@naver.com
  • 눈 뜨고도 현실 못보는 전쟁 당사국 향한 경고

    눈 뜨고도 현실 못보는 전쟁 당사국 향한 경고

    몽유병자들/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이재만 옮김/책과함께/1016쪽/4만 8000원1911년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침공했다. 지금은 세계사에서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는 이 전쟁에서 공중폭격이 처음 선보였고, 본격적으로 사용된 군용 탐조등은 과거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를 낸 당대의 첨단기술이었다. 케임브리지대 역사학 교수인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저서 ‘몽유병자들’은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에 있었던 유럽 각 국가의 상황에 주목하며 전쟁의 원인을 파헤친다. 1차 대전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20세기를 폭력의 악순환으로 빠져들게 한 이 전쟁이 발발한 원인에 대해 유럽 역사학계에서는 개별 국가가 모두 책임이 있다는 집단책임론과 주요한 책임이 독일에 있다는 ‘피셔 테제’ 간 공방이 이어졌다. 이 같은 논쟁에 대해 저자는 전쟁 이전 일련의 사건들이 어떤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 접근한다. 앞서 소개한 이탈리아의 리비아 침공은 발칸반도 국가들의 연이은 충돌로 이어졌고, 이는 1차 대전의 빌미가 됐다. 1차 대전은 삼국동맹(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과 삼국협상(영국·프랑스·러시아) 간 대결로 시작했다. 사실 독일에서는 러시아가 전쟁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는 관측이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한 1914년 직전,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한 편의 ‘난투극’이었던 1912~1913년 발칸의 상황, 발칸에 대한 통제가 약화됐던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정세 등을 보면 왜 이 같은 예상이 빗나갔는지 조금 이해하게 된다.이탈리아의 리비아 침공 사건에서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의 명분 없는 행동을 묵인했다. 결국 이들 동맹이 사실 내부적으로는 허술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저자는 이탈리아에 맞선 리비아의 투쟁이 “현대 아랍 민족주의의 출연을 자극한 중요한 초기 촉매 중 하나였다”(395쪽)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1차 대전을 얘기하며 1914년 6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조피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게 테러를 당한 ‘사라예보 사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페르디난트 대공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조피는 대공비 칭호도 얻지 못한 상황이었다. 대부분 누가 죽었는지보다는 사건 장소인 ‘사라예보’를 기억할 정도로 주목받지 못했던 이들의 죽음이 어떻게 당시 유럽의 여론을 바꿨는지를 설명한 저자의 서술도 흥미롭다. 1차 대전이 실제 일어나기 전까지 유럽인들은 이 같은 대규모 전쟁을 상상하지 못했다. 전쟁이 나더라도 1년~1년 6개월의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저자는 결국 당사국 모두가 눈을 뜨고도 눈앞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몽유병자들’이었다고 지적한다. 전쟁의 원인이 아닌 과정을 집요하게 연구한 저자의 접근방식은 전쟁 발발 100주년을 맞은 2014년 1차 대전을 조명한 많은 신간 가운데에서도 큰 호평을 받았다. 또한 이 책은 2017년 12월 북한을 방문한 제프리 펠트먼 유엔 사무차장이 리용호 북한 외무상을 면담하며 건넨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북한의 핵개발이 몽유병자와 같은 행동에 불과할 것이라는 경고였겠지만, 이 책을 본 독자라면 한반도를 둘러싼 모든 국가가 몽유병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설지도 모른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익숙한 무지/김성호 문화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익숙한 무지/김성호 문화부 선임기자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세월의 두께와 100년의 의미 때문일까. 곳곳에서 3·1운동 정신을 되살리자는 구호와 몸짓이 요란하다. 100년 전 아픔과 구국의 희생을 상기해 미래 한국의 발판으로 삼자는 외침이 하늘을 찌를 듯하다. 그 와중에 애국가 논란이 뜨겁다.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 말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안익태. 그의 행적이 친일을 넘어 일본과 결탁한 독일 나치 파시즘의 나팔수였다는 흔적이 속속 드러나면서 애국가 폐지의 주장이 힘을 얻어 가는 형국이다. 보수, 진보 진영의 논객들이 주거니 받거니 논쟁을 잇는 가운데 여론의 대치도 점입가경이다. 일단 세간의 입장은 ‘계속 쓰자’는 쪽이 우세다. CBS 의뢰를 받은 리얼미터가 전국 성인 502명을 대상으로 애국가 교체를 물은 결과 반대 응답이 58.8%로 찬성 24.4%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뭐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대중 인식의 우위로 읽힌다. ‘계속 쓰자’는 쪽 주장은 이렇다. 정부 수립 이후 줄곧 불러 왔던 애국가를 이제 와서 폐기 처분하려 드느냐는 관성의 대응이 주축이다. 여기에 친일인사 작품이란 이유로 써선 안 된다는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입장이 거들고 있다. 예술가와 작품의 분리다. 이를테면 친일 문인 서정주의 작품이 교과서에 계속 수록되고 있지 않느냐는 식의 항변이다. 하지만 냉철하게 따져 보면 애국가, 적어도 안익태 애국가는 그런 편의주의와는 차원이 사뭇 다르다. 많은 이들이 갖고 있는 인식과 달리 애국가는 국가(國歌)가 아니다. 이승만 정부 출범 후 국가로 정해 관습법적으로 쓰여 왔을 뿐 법적 지위를 부여받지 못했다. 70여년간 국가·공공단체의 공식 행사나 이런저런 자리에서 당연히 부르고 들어온 국가 대용일 뿐이다. 모르는 결에 몸에 밴, ‘익숙한 무지’의 흔적일 수 있다. 예술가와 작품의 분리라는 편한 원칙도 그다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국가는 국기(國旗), 국화(國花)와 함께 한 나라의 대표적 상징이다. 언제 어디서든 떳떳하게 만나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는 나라의 얼굴인 셈이다. 기왕에 국가처럼 굳어진 애국가를 굳이 폐기 처분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어 보인다. 하지만 애국가를 부를 때마다 포개지고 떠오르는 친일·친나치 작곡자의 얼굴을 힘겹게 용인할 이유 또한 없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치 독일 부역자를 가혹하게 응징한 프랑스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작품 궤적과 생애를 들춰 보면 안익태는 표리부동한 작곡가요, 지휘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적어도 나라 사랑, 즉 애국의 차원에서 보자면 그렇다. 미국에서 1936년쯤 애국가를 처음 작곡해 발표한 직후 안익태는 이런 말을 남겼다. “대한국 애국가를 부르실 때는 애국가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애국적 정신으로 활기 있게 장엄하게 부르시되 결코 속히 부르지 마십시오.” 그 말대로 애국적 정신으로 활기 있게 장엄하게 부를 수 있는 애국가를 만났으면 한다. 보수니, 진보니 편 가르기는 집어치우고 떳떳한 국가를 한번 고민해 보자. 3·1운동 100주년의 해에. kimus@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윤봉길 의거 후 일제 핍박…상하이 떠나 8년간 ‘고난의 행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윤봉길 의거 후 일제 핍박…상하이 떠나 8년간 ‘고난의 행군’

    1929년 10월 미국발(發) 경제공황이 전 세계로 퍼졌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과 영국, 일본은 그간 협력하던 자세를 버리고 각자도생에 나섰다. 내수시장 규모가 작았던 일본은 경제 위기를 탈출하고자 1931년 9월 중국 만주를 공격했다. 1932년 1월에는 상하이도 침공했다. 이 지역 이권을 선점한 미국과 영국이 철군을 요구하자 일본은 1933년 2월 국제연맹을 탈퇴하며 이들과 갈라섰다. 이 시기 임정은 일본의 공세를 피해 상하이에서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으로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마지막 정착지인 충칭에 도착하는 데 8년이 걸렸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임정의 이동시기’라고 부른다.●“임정 지도자 중 군대 편성 실현은 김구뿐” 일본이 열강 질서에서 이탈해 파시즘으로 치닫던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 히로히토(1901~1989)의 생일 축하연이 열렸다. 일제가 점령지 한복판에서 보란 듯 승전고를 울리는 모습에 중국인들은 말할 수 없는 굴욕감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스물네 살 한국인 청년 윤봉길(1908~1932)이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요시노리(1869~1932) 등 일본군 수괴들을 한꺼번에 처단했다. 그의 희생으로 한국 독립운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각지에서 지원금이 쇄도하며 임정의 권위가 되살아났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모욕을 한국이 대신 갚아준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때부터 두 나라는 항일 역사 인식을 공유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도 임정을 ‘진정성 있는 파트너’로 대하기 시작했다.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1887~1975)는 임정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중국군관학교 뤄양분교에 한인특별반도 마련했다. 한국독립군(1930년대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부대) 출신 이청천(1888~1957) 등이 교관으로 참여했다. 이곳 출신들은 1940년 9월 임정 최초 정규 부대인 한국광복군의 주축이 됐다. 장제스는 일본의 패망이 유력하던 1943년 전후처리를 논의하려고 연 카이로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의 반대에도 한국 독립 약속을 받아냈다. 임정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65)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1919년 임정이 세워진 뒤로 수많은 지도자가 있었다. 하지만 (항일투쟁의 최종 목표인) 군대 편성 계획을 실현한 이는 김구뿐이었다”며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충칭에서 광복군을 만들어 낸 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임정은 잃은 것도 많았다. 일제가 즉각 보복에 나섰기 때문이다. 윤봉길이 훙커우 공원에서 거사를 벌인 것이 오전 11시 40분쯤이었는데, 일본 경찰은 오후 1시 프랑스 조계로 들이닥쳤다. 대대적인 체포 작전을 벌여 안창호(1878~1938)를 비롯한 임정 관계자 12명을 체포했다. 그간 임정은 ‘폭력을 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프랑스 조계 당국의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윤봉길 의거에 충격을 받은 프랑스는 더이상 임정을 지켜 주지 않았다. 이때부터 임정은 상하이를 떠나 생존을 위한 장정에 나섰다. 일본 경찰과 군대, 밀정을 피해 중국 각지를 떠돌았다. 우선 급한 대로 찾아간 곳이 상하이에서 멀지 않은 항저우였다. 1932년 5월 임정 국무위원 대다수가 상하이에서 빠져나와 이곳으로 모였다. 반면 김구와 일부 위원들은 항저우 인근 자싱으로 몸을 숨겼다. 서로 흩어져 있는 것이 임정 존속에 유리하다고 판단해서였다. 중국 국민당 첩보기구 소속 천리푸(1899~2001)가 김구의 피난처를 주선했다. 그는 저장성장을 지낸 자싱의 유명인사 추푸청(1873~1948)에게 “김구를 누구보다 잘 챙기라”고 부탁했다. 이때부터 김구는 추푸청의 비서 겸 수양아들 천둥성의 별채(메이완제 76호) 등에서 숨어 지냈다. ●가장 두려운 것은 돈에 눈이 먼 ‘한국인 밀정’ 항저우는 ‘물의 도시’라는 별명답게 호수와 수로가 산재해 있다. 임정 요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고 배를 띄우고 호수 위에서 회의를 열었다. 말 그대로 ‘물 위에 떠다니던 정부’였다. 항일무장단체 의열단 리더 김원봉(1898~1958)이 배를 타고 김구를 만나러 가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 ‘암살’(2015)은 바로 이 시기 항저우 임정을 배경으로 했다. 하지만 이곳 생활도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임정이 상하이를 떠났다는 것을 눈치챈 일제가 추격에 나섰다. 특히 김구에게는 일본 외무성과 조선총독부, 중국 상하이주둔군 사령부가 각각 20만 대양(大洋·중국 화폐단위)을 걸었다. 60만 대양은 지금 가치로 150억~200억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당시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은 일본 경찰보다 한국인 밀정을 더욱 두려워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독립운동의 큰 적은 현상금에 눈이 먼 우리 자신이었다”고 씁쓸해 했다. 김구는 많은 이들에게 쫒기며 인생에서 가장 외롭고 힘든 때를 보냈다. 다음은 광복군 출신 인권변호사 태윤기(1918~2012)가 쓴 수기 ‘회상의 황하’ 가운데 일부다. “윤봉길 의거 뒤로 일본은 대(大)상금을 건 동시에 밀정 300여명을 풀어 백범을 생포하는 데 집중했다. 김구는 이를 눈치채고 2년 가까이 행적을 감췄고 임정 요인에게도 위치를 알리지 않았다. 그의 행방을 아는 이는 안공근(1889~1940·안중근의 동생)뿐이었다. 그러면 김구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는 중국옷을 입은 촌로 복장을 하고는 ‘정크’라고 부르는 작은 배로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아다녔다.”‘풍찬노숙’ 김구 지키며 생사 함께한 中 처녀 뱃사공 주아이바오 ●부인 역할하며 日검문서 보호한 주아이바오 풍찬노숙하던 김구를 5년이나 돌보며 일본 경찰과 밀정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준 중국인 여성이 있다. 자싱에서 뱃사공으로 일하던 주아이바오(1913~?)다. 사실상 김구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김구는 ‘장천’, ‘왕사장’, ‘장전추’라는 가명을 쓰며 광둥인 행세를 했다. 하지만 중국어가 서투른 데다 키도 너무 커 쉽게 의심을 샀다. 실제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가 풀려나는 등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33년 추푸청의 장남 추펑장은 그에게 신분 세탁을 위해 위장결혼을 제안했다. 김구는 자싱에서 추푸청의 집에 갈 때 우연히 만난 처녀 뱃사공을 떠올렸다. 세상 물정에 어두워 자신의 정체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김구와 주아이바오의 선상(船上) 생활이 시작됐다. 백범이 57세, 주아이바오가 20세였다.처음에는 김구에게서 매달 일정 금액을 받고 일하는 계약 관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신뢰가 쌓여 운명공동체로 바뀌었다. 주아이바오는 9년 전 아내 최준례(1889~1924)를 잃고 혼자 살던 김구를 애틋한 마음으로 보살폈다. 밤낮없이 이뤄지는 경찰 불심검문에서 그를 지켰다. 1937년 중일전쟁 때는 일제의 폭격이 극심하던 난징까지 따라가 그와 생사를 함께 했다. 이들은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았을 뿐 부부로 살았다. 둘 사이에 자녀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일본의 공세가 거세지던 1937년 11월. 김구는 주아이바오의 안전을 염려해 집으로 보냈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이었다. ‘백범일지’에도 당시 안타까운 감정이 기록돼 있다. “난징에서 떠날 때 주아이바오를 고향인 자싱으로 돌려보냈다. 지금도 이따금 후회되는 것은 그와 헤어질 때 여비를 100원밖에 주지 못한 것이다.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돈을 넉넉하게 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미안할 따름이다.” 김구는 왜 그와 재혼하지 않았을까. 가족들의 반대가 극심했다고 전해진다. 서른일곱 살이라는 나이 차가 큰 걸림돌이었다. 서울신문 중국 취재에 동행한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주아이바오는 김구의 장남 김인(1917~1945)과 네 살밖에 차이가 안 났다. 차남 김신(1922~2016)은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이 된 아버지가 이런 일로 구설에 올라 대사(大事)를 그르치지 않을까 걱정이 컸다”고 설명했다. 그런 부담 때문이었을까. 김구는 해방 뒤 주아이바오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를 한국에 데려갈 때 생길 정치적 파장을 고려한 결정이 아니었나 싶다. 김구의 경쟁자인 이승만(1875~1965)이 스물다섯 살 연하였던 벽안(碧眼)의 이혼녀 프란체스카 도너(1900~1992)와 함께 귀국한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중국 작가에 의해 소설 ‘선월’로 재탄생 중국 작가 샤녠성(71)은 김구와 주아이바오의 이야기를 소설 ‘선월’로 재탄생시켰다. 여기서 주아이바오는 1949년 김구가 살해됐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자살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샤녠성은 몇 년 전 중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1970년대까지 생존했다는 것을 최근에 들었다. (김구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혼하지 않고 평생 혼자 살았다고 한다”고 밝혔다. 이원규 작가는 “주아이바오는 백범과 함께 살며 어렴풋하게나마 그의 목에 거액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당시 현상금을 받고자 김구를 노리던 한국인이 많았지만 이 가난하고 순박한 중국 여성은 그와의 인연을 소중히 여겨 끝까지 의리를 지켰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임정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믿는다면 이 나라가 주아이바오에게도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상하이·항저우·자싱·난징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佛 “獨,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지원”… 새 우호조약 체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유럽연합(EU)의 구심력을 강화하기 위해 56년 만에 새로운 우호조약(일명 아헨조약)을 체결했다. 프랑스는 특히 독일의 숙원이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원하기로 해 2차 세계대전 이후 70여년간 기존 상임이사국(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이 주도하던 세계 안보 질서에 지각변동이 생길지 주목된다. 양국 정상은 양국 간 우호조약인 엘리제조약 체결 56주년을 맞아 이날 독일 서부 아헨 시청에서 외교·국방, 경제 등 다양한 분야의 협력을 증진하고 독일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외교정책의 우선순위로 삼기로 했다고 BBC 등이 전했다. 아헨은 중세 서유럽 통합의 기초를 마련한 샤를마뉴 대제의 거처가 있던 장소로 상징적 의미가 크다. 이번 협정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와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극우 세력의 부상에 직면한 EU의 구심력을 강화하고자 마련됐다. 2차 대전 패전국인 독일은 그동안 영국의 EU 탈퇴 이후 프랑스가 안보리 상임이사국 내 유일한 EU 회원국으로 남게 된다는 점을 들어 “프랑스는 상임이사국 지위를 EU에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프랑스가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적극 지원하는 절충안으로 타협했다. 그러나 독일이 상임이사국이 되려면 승전국인 기존 5개 상임이사국의 만장일치 동의가 필요해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양국은 이밖에도 공통의 방위·안보위원회를 만들기로 했으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내에서 활동할 유럽 방위군을 조직한다는 목표도 세웠다. 경제적으로는 공동경제구역을 설정하기로 했다. 이번 조약은 양국 의회의 승인을 받은 뒤 정식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나치 2인자 헤스 32년 전 스판다우 교도소에서 자살한 것 맞다”

    “나치 2인자 헤스 32년 전 스판다우 교도소에서 자살한 것 맞다”

    나치 독일의 2인자 루돌프 헤스는 지난 1987년 베를린의 스판다우 교도소에서 목을 매 93년의 삶을 마감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외모가 꼭닮은 사람이 대신해 56년의 수감 생활을 견디다 극단을 선택했으며, 헤스는 편안히 여생을 즐겼다는 음모론이 존재한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대학 연구진이 스판다우 교도소의 마지막 수감자이며 수감 번호 7번으로 통했던 이로부터 1982년에 채취한 유전자를 헤스의 먼 친척 남자 것과 대조한 결과 헤스와 100%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영국 BBC가 23일 전했다. 연구진의 논문은 학회지 ‘FSI 제너틱스’에 실렸다. 헤스는 2차 세계대전이 중반으로 접어든 1941년 단독 비행에 나섰다가 스코틀랜드에 불시착하는 바람에 영국 당국에 체포돼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음모론의 진원은 스판다우 교도소에서 주치의로 일했던 W 휴 토머스였다. 그는 스판다우 수감자가 헤스의 신체 특징과 다른 점이 있으며 몇년 동안 가족 면회 요청에 응하지 않은 점을 근거로 들었다. 당시 헤스는 치매를 앓고 있었다. 헤스는 히틀러가 가장 아끼는 참모였다. 영국 쪽으로 비행기를 몰고 간 것도 총통의 비밀 지시를 받고 영국과 종전협상을 벌이려 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국에서 수감됐다가 1946년 뉘른베르크 전범 법정에서 전범과 반인도주의 범죄에 대해 무죄가 선고됐지만 반평화 범죄에 유죄가 인정돼 종신형을 언도받고 그 뒤 스판다우 교도소에서 40년 복역하다 스스로 생을 마쳤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사설] ‘광화문광장’ 재조성, 시민 뜻 묻는 절차가 먼저다

    서울시가 광화문광장을 재조성하겠다면서 어제 설계도를 공개했다. 공모를 거친 설계대로라면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이 광장 바깥으로 옮겨져 거침없이 트인 공간이 된다. 대신 촛불 시위를 형상화한 바닥 장식을 새긴다는 계획이 포함됐다. 여론은 엇갈린다. 취지를 공감하기도 하지만, 멀쩡해 보이는 광장을 왜 지금 굳이 대수술을 하려고 하는지 의아해하는 시민이 적지 않다. 현 광화문광장은 오세훈 서울시장 때 700억원을 들여 2009년 8월 완공했다. 10년 만에 박원순 시장이 1040억원을 들여 재단장하려는 것이다. 광장은 지상은 최대한 비우고 땅밑은 주변을 긴밀하게 연결해 지하도시로 꾸민단다. 탁 트인 시야로 북악산을 바라보고 녹지도 늘어나면 서울시민에게는 미관과 편의가 충족되는 측면도 있지만, 교통 문제 등은 남는다. 광화문은 서울의 심장이자 대한민국 ‘광장문화’의 상징이다.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고려한다면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광장을 자택 안마당처럼 일방적으로 뜯어고칠 수 없지 않은가. 박 시장의 3선 공약 사항으로 지난해부터 문화재청 등과 논의하고 공론화 등을 거쳤다고 하지만, 광화문 광장 재조성이 금시초문인 시민들이 적지 않다. 서울시는 공모 당선 업체와 다음달 설계 계약을 맺고 내년 초 공사에 들어가 2021년 준공하겠다고 하는데, 기본설계를 거쳐 실질설계 과정까지 시간이 있으니 의견수렴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 두 동상을 한쪽 옆으로 치운다는 구상은 특별히 더 논의해야 한다. 그 자리에 촛불혁명 이미지를 새겨 역사성을 살린다지만, 두 위인의 동상 자체가 강력한 역사적 상징물이라고 논박할 시민도 얼마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진보와 보수를 소모적 논쟁에 빠트릴 위험성마저 다분하다. 서울시는 GTX-A 노선도 광화문역을 신설하겠다 하지만, 아직 국토교통부와 협의도 끝나지 않았다. 속도전이 걱정스런 이유다. 논란을 감수하더라도 추진할 사업에는 다수를 설득할 확고한 철학이 전제돼야 한다. 안 그래도 박 시장의 진중하지 못한 시정(市政)이 한창 도마에 올라 있다. 오래된 맛집 ‘을지면옥’이 철거된다는 보도에 뒤숭숭해지자 10년 넘게 추진한 을지로·청계천 재개발을 재검토하겠다고 갑자기 선언해 해당 지역에서의 혼란이 이만저만 아니다. 광화문광장은 서울시의 것도 박 시장의 것도 아니다. 서울시민을 넘어 ‘국민의 것’이다. 논의 과정에 진통이 따르더라도 국민 여론을 충분히 더 수렴해야 한다. 그래야 모두의 광장이 될 수 있다.
  • [열린세상] 2019년 일본 자위대/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열린세상] 2019년 일본 자위대/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일본은 2018년 12월 18일부로 2023년까지의 5년간 국방전략을 각의에서 의결해 공표했다. 5년간의 군사비는 약 280조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상 최대의 군사비 책정이다. 말이 자위대이지 놀라운 속도로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발표다. 일본은 미국의 오하이오급 핵잠수함도 조심해서 잠행해야 할 정도로 세계 최고의 정숙성을 지닌 소류급 잠수함을 이미 운용하는 군사강국이다. 그런데 이번 중기방위력정비계획에서 공격형 군함으로 분류되는 항공모함은 절대 보유하지 않는다고 말해 왔던 약속을 깨고 이즈모형 군함을 항공모함으로 변모시킨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의 수직이착륙 스텔스 전투기 F35B를 42기 도입해 수직 이착륙이 가능하게 갑판의 열을 견디기 위한 공사에 착수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활주로를 통해 이륙하는 F35A 전투기를 합치면 총계 147기의 스텔스 전투기를 갖게 된다는 말이다. 항공모함의 보유를 선언했기 때문에 일본의 자위대에 자위대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제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고, 일본의 평화헌법 제9조 위반이다. 일본의 군대가 공격형 군대로 변모한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장거리 순항 미사일을 도입해 적의 기지 공격 능력을 갖추겠다는 것이다. 오로지 방어만 한다는 자위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번 발표는 육·해·공군의 횡적 통합 능력을 증강시키고, 심지어는 우주 공간에서의 군사력도 염두에 두고 군사력을 증강시킨다는 것이다. 우주를 국방정책에 집어넣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미 일본은 10기의 첩보위성을 갖게 돼 있고, 북한의 주요 인사들이 어느 건물에서 나오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첩보위성들을 가동 중에 있다. 그리고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는 사이버 공격에 대한 대비 능력을 초고속으로 증강시킨다는 목표다. 2020년 도쿄올림픽을 준비하며 사이버 공격에 대비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 국가의 사이버 공격 능력을 구축한다는 목표다. 북한 미사일과 중국 미사일에 대한 대비도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 탄도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2기 도입해 한국 동해가 바라다보이는 일본 야마구치현과 아키다현에 배치하는 구상을 담고 있다. 차관급 기관인 일본 방위청을 장관급 정부 기구로 승격시킨 아베 총리가 가깝게는 북한, 멀게는 중국을 내다보며 군사력 증강에 열을 올리는 상황이다. 이처럼 일본과 중국의 군비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고 이 국가들과 경쟁해 군사비를 펑펑 써댈 수 없는 한국으로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첫째, 군비 경쟁에 휘말리지 않고 최소한의 군사비 지출, 최대한의 방어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무기체계를 사들일 수 없으니까 한반도 삼면 해역 물 밑에 리튬이온전지를 사용하는 고성능 잠수함을 개발해 증강 배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감히 일본과 중국 심지어는 북한도 한국의 바다를 함부로 넘보기 어려울 것이다. 둘째, 한국을 함부로 공격할 수 없도록 초정밀 미사일만큼은 빼곡히 배치할 일이다. 중국, 일본은 물론 북한도 한국을 공격할 수 있으니 이 분야만큼은 소홀함 없이 집중적으로 방어력을 높여야 한다. 셋째, 사이버 전력을 증강시킬 일이다. 현대의 무기체계는 고도의 소프트웨어 기술로 운용되기 때문에 고도로 숙련된 사이버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사이버전 인력의 양성은 여타의 무기체계와 달리 큰 돈 안 들이고 한국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군사 영역이다. 사이버 전력은 기술도 필요하지만, 오랫동안 컴퓨터를 사용해야 하므로 지구력이 강한 체력 싸움이기도 하다. 이 분야는 한국의 문화와도 잘 맞는 영역이다. 마지막으로 동북아 평화체제를 꿈꾸며 한국이 주변국을 설득해 항공모함 건조 등 무기 사재기에 국가 예산을 낭비하지 말고 군비 경쟁을 줄이며 그 돈을 평화 유지와 자국 국민의 복지 향상에 쓸 수 있도록 한국의 외교가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주변국을 침략한 역사도 없는 한국, 그리고 가장 적은 군사비를 쓰는 한국이 동북아 평화체제를 출범시킬 수 있는 최고 적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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