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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경형 칼럼]대통령의 선택

    국가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의 직무는 끊임없는 선택과 결단 그리고 설득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대통령은 의회,보좌관,각료들로부터 많은 자문을 받는다.그러나 아무리 조언자들이 많다 하더라도 최종적인 ‘결정의 수렁’에서 이들과 함께할 수는 없다.오직 고독한 대통령 혼자만 있을 뿐이다.”(시어도어 소렌슨 ‘백악관의 의사결정’)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미합중국 보존’을 선택하고 노예 해방과 남북전쟁의 결단을 내렸다.중국의 마오쩌둥은 ‘신 중국 건설’을 선택하고 만리장정을 결행했던 것이다.역사의 진행과 전개는 이처럼 지도자의 결단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2일 국회에서 이라크전 파병동의안이 통과되기 앞서 행한 국정연설을 통해 파병 결정은 명분보다는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막겠다는 일념으로 한·미동맹이라는 현실론을 택했다고 설명하면서 지지를 호소했다. 그동안 이라크전 파병 문제를 둘러싸고 국민 여론은 찬·반 양론(찬성 48%,반대 45%·동아일보 2일 여론조사)이 팽팽히 맞서 왔다.이제 파병안이국회를 통과한 만큼 국민 통합 차원에서라도 파병 반대자들에 대한 노 대통령의 설득 작업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찬성론은 이번 파병이 향후 북핵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미국이 대북 군사적 수단을 택하지 않도록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이다.반대론은 명분 없는 전쟁에 파병하는 것은 나중에 북핵 문제와 관련한 군사 행동이 있을 경우,이를 반대할 수 없는 족쇄가 된다는 논리다.찬·반 양론이 모두 북핵 문제의 군사적 해결을 피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접근 방향은 정반대다.따라서 파병 문제를 옳고 그름의 2분법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문제는 지도자의 결단이다.일반적으로 대통령이 다루는 문제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쉽게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는,갈등을 수반하는 문제를 두고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이럴 때 대통령은 역사에 대한 통찰력,국가를 이끌어 가는 비전 등을 토대로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민주사회에서 지도자의 진정한 용기는 다수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서,동시에 잘못된소수에게 분명한 거부를 말하는 데서 드러난다. 노 대통령이 국회 연설 이전,그동안 보여준 파병 결정 과정은 결코 신념에 찬 결단의 모습이 아니었다.머리로는 파병을 선택하고,가슴에는 반전이 가득한 것으로 국민들의 눈에 투영됐기 때문이다.그래서 “파병도 맞고요,반전도 맞습니다.”라는 개그가 언론에 나왔던 것이다. 노 대통령은 끈질긴 근성에 문제를 피하지 않고 맞부딪치는 정치 스타일이어서 관리형보다는 전사형(戰士型)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대통령 취임 후 서열 파괴 인사,평검사와 생중계 토론회,특검제 수용 등 개혁에 저항하는 이익집단과 맞서 초지를 관철하는 모습이 그런 것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자,정치적 코드가 같은 노사모,시민단체,네티즌,진보그룹 등의 파병 반대를 맞으면서 깊은 고뇌에 빠졌던 것 같다.노 대통령으로서는 착잡한 심경일지도 모르나 진정 용기 있는 지도자라면 이를 뛰어넘어 자신의 우군들을 상대로 맹렬하게 설득을 폈어야 했다. 만약 노 대통령이 파병 불가 결단을 내렸더라도 지금 파병 찬성의 중심세력인 한나라당과 우익 종교 단체,재향군인회 등을 상대로 불가론을 납득시켜야 했을 것이다. 외교안보문제에 있어 선택은 철저하게 현실을 바탕으로 한 국익을 우선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결단을 하기까지 수많은 조언을 듣더라도 결단 후 설득의 걸림돌이 될 말들은 안으로 삭여야 한다.그래서 지도자는 늘 고독한 것이다. 논설위원실장 khlee@
  • [이경형 칼럼]‘노무현 코드’가 뭐야

    노무현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법안을 공포하자 한나라당 당권에 도전하고 있는 강재섭 의원은 ‘정치 코드’가 맞다며 맞장구를 쳤다.그는 “노 대통령이 광복 후 세대라 그런지 정치 9단들처럼 복선을 깔지 않고 ‘쉬운 정치’를 한다.”고 격찬(?)까지 했다.반면 민주당은 구주류,신주류 할 것 없이 와글와글하고 있다. ‘노무현 코드’란 무엇인가.한마디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이를테면 파격의 정치,승부수 띄우기,발상의 전환 등등의 행동 속성을 지닌다고나 할까.평검사들과 가진 TV생중계 토론회에서 보여준,정제되지 않은 원유(原油)같은 모습도 그 한 예다. ‘노(盧) 코드’를 읽는 데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시민단체간의 논쟁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1989년에서 1997년까지 8년 동안은 경실련 중심의 시민단체협의회가 시민운동을 주도했고,2000년 이후는 참여연대 중심의 총선연대와 개혁연대가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경실련은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면,참여연대는 ‘악법은 법이 아니다.’는 인식을 깔고 있다.‘노 코드’는 후자에 가깝다.이런 코드에서 보면 ‘잘못된’ 기존 질서는 당연히 타파의 대상이 된다.따라서 기존의 잣대로 ‘노 코드’를 재단하려 들면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노 대통령의 특검법 거부권 행사도 이런 바탕에서 정치권 현실을 대입시켜 파악해야 한다.특검법 수용은 소수 정권의 생존 전략의 하나이며,기존 여권 권력운용 방식을 뛰어넘는 것이다.‘선 공포,후 제한적 특검’이라는 여야 사무총장의 ‘설익은 절충’을 리스크를 감수하며 기정사실화한 것도 ‘노 코드’ 산물이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노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정치적 행동반경은 넓지 않다.만약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한나라당의 엄청난 저항은 불 보듯 뻔하며,임기 첫해부터 국정 수행에 필요한 입법은 사사건건 야당의 제동으로 제대로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다. ‘노 코드’에 적응 못한 민주당내에서는 최근 “우리가 여당 맞아.”라는 원망이 봇물을 이뤘다.지난 19일 노 대통령은 당 지도부를 청와대로 불러 고위 당정회의를 부활키로 하는 등 ‘선물’을 주면서도 “왜 내 뜻을 모르느냐.”고 질책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의 나무람은 ‘노 코드’가 단순한 정치 스타일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민주당의 불평·불만은 청와대·여당 관계를 과거의 틀로 보는 데서 비롯된다.대통령이 집권당 총재를 겸하고,여당을 친정체제로 관리하며,국회는 다수당인 여당의 당론을 입법화하는 기관으로 전락시켰던 과거 권력 패러다임으로 ‘노 코드’를 보려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대 국회 관계도 여당을 통한 대야 관계가 아니라,행정부와 입법부의 협력·견제 관계로 풀어나가야 한다.이런 인식은 노 대통령이 소수정권의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미국 대통령과 의회 다수당이 당이 서로 달라도 타협과 협상으로 국정을 원만히 운영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여권의 당정 관계도 대통령이 당직을 갖지 않는 당정 분리 정신을 토대로 해야 한다. 청와대 고위당정회의를 정례화한다 해도 대통령이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다수당인 한나라당과의 원만한 관계 설정이 불가피하다.노 대통령은 여야 수뇌부와 자주 만나는 것도 필요하지만 개별 입법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야당 의원들도 청와대로 초청하여 의견을 듣고 설득하는 노력을 펴야한다. 노 대통령은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소수 정권의 구도를 극복하겠다는 욕심으로 무리수를 둬서는 안 된다.지역대결 구도 탈피와 ‘1인1투표’에 의한 전국구 의석 배분의 위헌판결을 반영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정치권의 협상에 맡기는 것이 낫다. ‘노무현 코드’의 청와대는 여야를 드나들면서 탈 관행의 ‘낮은 청와대’가 되어야 한다. 논설위원실장 khlee@
  • [이경형 칼럼] 기자실과 오십세주

    10여년 전 워싱턴 특파원으로 부임했을 때다.전임자의 백악관 출입증 반납과 함께 신청 서류를 낸 지 한달 여만에 출입증을 교부받았다.다시 의회 출입증을 받기 위해 신청서를 내러 갔다.한국처럼 국회 사무처 소속 한 부서이겠지 하고 찾아 갔지만 그곳은 의외로 ‘상원 기자실’(Senate Gallery)이었다.상원 본회의장 맨 위층인 3층의 좁은 회랑 같은 곳이었다.출입증 발급자는 기자들에 의해 선출되는 상원기자실 대표였다. 미 국무부·국방부 출입증은 일정 기간 출입 실적이 쌓이지 않으면 발급되지 않는다.그래서 매일 출입이 어려울 경우 의회 출입증을 제시하면 1일 패스를 즉석에서 발급해준다.미 행정부 거의 모든 부처는 기자 신분만 확인되면 브리핑 룸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청와대 출입을 했을 때는 출입증을 받기까지 2개월쯤 걸렸던 것 같다.당시 청와대는 해당 언론사로부터 복수 후보를 신청받아 ‘사돈의 팔촌’까지 신원조회를 한 뒤 출입증을 주었다.청와대출입증을 받기가 백악관 출입증보다 훨씬 까다로웠던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의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청와대 출입제도가 크게 바뀌고 있다.기자 출입을 기존의 신문·방송뿐만 아니라 잡지,인터넷 신문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전 매체에 개방하고,철저한 브리핑 제도를 도입한다는 것이다. 언론자유가 정착된 미국의 브리핑 제도에 비추어 이 같은 방향은 바람직하고,또 그렇게 가야 한다.한국 언론의 출입처 기자실의 폐쇄성 등은 문제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2년전 인천공항 기자실 간사가 취재차 들렀던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기자를 쫓아낸 사건은 출입기자단-기자실의 폐쇄성이 낳은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청와대는 기자실 브리핑제도를 활성화하는 대신 수석비서관 등에 대한 개별 취재는 되도록 제한한다.대변인실을 통해 면담을 미리 약속해야 하고,이 경우에도 기자들이 비서관 방으로 가지 않고 해당 비서관이 기자실로 와서 취재에 응하도록 한다.마치 병영에 가서 면회하는 형식이니 취재원과 기자의 만남이 감시를 받는 것과 다름없다. 벌써부터 기자들 사이에는 “청와대 출입기자가 아니라 춘추관 출입기자로 전락했다.”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오고 있다.웃어 넘길 일이 아니다.일반 방문객은 면회 신청해서 비서관들을 만나는데 정작 출입기자는 춘추관 밖을 떠나지 못하게 됐으니 그 말도 나올 만하다. 노 대통령은 취임 직전 비서관들과 워크숍을 한 뒤 포장마차에서 뒤풀이를 하면서 “기자들에게 술 사주고 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며 권언(權言)유착의 청산을 강조했다고 했다.그러면서도 “기자들과 꼭 양주를 먹어야 하느냐,소주를 마시면 안 되느냐.”고 했고,이에 한 참석자가 “오십세주(소주와 백세주를 섞어 소주보다는 값이 조금 비싸다.)는 안 되느냐?”고 하자 “괜찮겠지.”라고 했다고 한다. 마치 노 대통령의 ‘대 언론 가이드 라인’을 시사하는 것 같다.기자들과 취재원 간에는 ‘가까워도 멀어도 안된다.’는 금언이 있다.그래서 밥을 먹어도 늘 긴장감이 감돌기 마련이다.취재원들은 취재에 응하면서 정책의 문제점을 새삼 깨닫기도 하고,기자들은 깊이 있는 취재를 통해 정책입안의 배경을 이해하면서 당초의 기사 방향을 전면 수정하기도 한다. 노 대통령의언론 인식이 예사롭지 않은 것 같다.보기에 따라서는 편견이나 분노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조간신문 가판 구독 금지 등에서 특히 두드러진다.국무회의 대화내용의 공개 검토 등도 좋지만 토론 문화를 뿌리내리게 하려면 기자들의 취재 활동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그들은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최일선에서 뛰어야 하는 직업인들이기 때문이다.청와대기자실의 운영 모델이 일반 부처 기자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면 기자들의 취재 활동은 분명 위축될 것이다. 논설위원실장 khlee@
  • [이경형 칼럼]비극의 저변

    12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대구지하철 방화사건의 용의자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56세의 신체장애인이다.이번 대참사를 일으킨 장본인이 누구든 용납할 수 없는 범죄자임에는 틀림 없다. 그럼에도 이 비극의 저변을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용의자는 6년 동안 택시 운전을 해오다 2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실어증과 함께 오른쪽 마비 증세가 왔다.작년 8월에는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오른쪽 상·하반신이 말을 듣지 않아 지체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뇌졸중 치료를 했으나 잘 낫지 않자 의사의 잘못이라며 병원에 불을 지르겠다느니,죽고 싶다느니 하며 가족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해왔다고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개인의 정신질환이나 욕구 불만이 불특정 다수나 사회에 대한 증오·저주형 범죄로 폭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지난 11일 부산에서는 달리는 차량을 표적으로 삼아 총을 쏘아댄 ‘묻지마 총격’사건이 발생했다.1991년에는 여의도 광장 ‘살인 질주’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외국에서도 비슷한 사건들이 이따금 일어난다.1995년 일본 도쿄에서는 지하철 독가스 테러 사건이 있었다.신흥 종교 집단의 망상에 의한 범죄였다.지난해 10월 미국 워싱턴 DC 부근에서는 불특정 차량에 대한 조준 사격이 무려 22일 동안이나 계속돼 10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다.범인은 가정이 파탄난 중년 남자와 불법체류로 추방 직전에 있던 외국인 소년이었다.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의 원인을 두고,사회적 책임론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그 같은 사고는 자칫 일탈과 비행에 대한 사회 통제체계를 붕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개별 행위자의 책임만으로 치부하는 것 역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비행이나 범죄의 원인 가운데는 사회공동체가 함께 나눠 가져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는 데도 이를 외면하게 되는 까닭이다.사회 규범에 반하는 특정 행위자를 교도소나 정신병원으로 보내 사회로부터 격리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결코 그렇지 않다.그렇게 하면 십중팔구 제2,제3의 일탈자·범죄자가 속출하기 마련이다. 개인들이 좌절이나 울분을 사회제도의틀 안에서 해소하지 못할 경우 흔히 자살이나,마약,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된다.이런 개인들 가운데 일부는 사회를 향해 분노를 쏟아낸다.그것이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총격,무차별 테러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번 용의자도 직업 상실,우울증,지체장애 등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오면서 치솟는 분노를 방화를 통해 표출시킨 것이다.만약 그에게 총이 있었다면 총을 난사했을 수도 있고,자동차가 있었다면 인파 속으로 차를 질주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의 주변을 보면 부인은 식품 공장에 다니고 아들은 회사원,딸은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다.그는 2년전 만 해도 평범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지극히 정상적인 가장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 우리 사회를 한번 되돌아보게 된다.실직자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은 확충되고 있는가.병 든 사람을 치료하는 의료보호 체계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돌보는 보호시설은 실질적으로 운영되고 있는가.많은 물음들이 꼬리를 문다. 가진자,권력자,지식인들이과연 극빈자,노약자,장애인,가정결손 아동,외국인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소외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를 묻게 된다. 대구 지하철 대참사를 계기로 ‘더불어 사는 공동체’ 정신의 현주소를 되짚어 본다. 논설위원실장 khlee@
  • [길섶에서] 군밤

    가스 불 위에 원통형 철망 석쇠를 얹어 놓고 밤을 굽는다.밤이 튀지 않고 잘 벌어지게 밤 머리에 칼집을 살짝 낸 뒤 약한 불에 굽는다. 봄이 다가오는지 창 밖의 겨울비도 그렇게 차게 느껴지지 않는다.양철 집게로 밤을 돌려가며 불이 골고루 닿도록 한다.칼질이 서툴러 칼집의 깊이가 들쭉날쭉이었는지 어떤 것은 속살이 잘 익는데,어떤 것은 벌어지지도 않고 껍질에 불만 붙는다.적당히 촉촉한 느낌이 있는 밤은 잘 익지만 마른 것은 금방 타버리기 일쑤다. 자세히 살펴보니 벌레 먹은 밤이나 흠집이 있는 밤은 제대로 구워지지 않거나,구워도 속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는다.병든 밤을 구워보면 좋지 못한 냄새가 나고,씹어보면 역하다. 밤이 겉으로는 다 멀쩡해 보이지만,구우면 성한 밤과 상한 밤이 금방 드러난다.멍석 위에 쌓인 밤 더미에서 먹기 좋은 알밤을 찾는 것도 쉽지는 않다.하물며 요즘 한 길 속도 모르는 사람을 고르는 일이라니. 이경형 논설실장
  • [이경형 칼럼] 개혁 국회법의 시운전

    의원 기록표결제 실시해야 본회의장 유세장화 지양을 5일부터 한달간 회기로 열린 제236회 임시국회는 의회 운영 차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지난달에 개정된 개혁 국회법이 처음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새 국회법은 그동안 정권교체기에다 북핵 문제로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많은 개혁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우선 국회본회의 대정부질문은 일문일답식으로 진행되고,본회의장을 유세장화하는 ‘모두 질문(연설)’은 못하게 됐다.감사원에 대한 감사청구권을 신설,감사 결과를 3개월내 보고토록 의무화하고,내년부터 정부의 결산서를 5월말까지 제출토록 해 행정부 예산집행의 감시 기능을 강화했다. 또 의원입법을 활성화하기 위해 의원 발의 정족수를 20인에서 10인으로 크게 완화했고,각 상임위는 법률안을 현행 5일 이상에서 15일 이상 계류·검토한 뒤 상정토록 함으로써 졸속 처리를 제도적으로 억제했다.정기국회에서는 원칙적으로 예산부수법안만을 처리하고,일반 법안은 그 이전에 심의토록 분리해 정기국회 후반기에 하루 수십건씩의 법안을 처리하는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이밖에도 속기록 삭제 불가,‘저격수’ 투입으로 악용되어온 상임위원 교체를 30일 이내는 금지하는 등의 조항도 있다. 지금까지 국회가 정쟁의 장으로 전락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본회의장을 유세장화하는 대정부질문의 정치연설에 기인한 바가 크다.대선 전인 작년 10월 국회본회의에서 민주당의 한 의원이 ‘이회창 후보의 비자금 수수설’을 터뜨리자,한나라당 의원은 ‘노벨상 타기 위해 북한에 뒷돈 줬다.’고 맞받아 쳤다.이처럼 본회의장은 막말 저질 발언의 경연장이 되곤 했다. 군사정권 시절,본회의 대정부질문은 나름대로 의의가 컸었다.9대 유신 국회에서는 야당의원들이 부분적으로나마 엄혹한 독재를 비판하는 정치적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했다.그러나 문민정부 이후 최근 10년간 대정부질문은 여야의 대립과 정쟁을 가열시키는 무대로 바뀌었다.어제 김석수 총리의 국정 보고에 이어 오늘,내일 여야 교섭단체 대표연설,10일부터 12일까지 대정부질문을 벌이게 된다.이번엔 대북 2억달러 송금 문제를 두고,현 정부와 노무현대통령 당선자,원내다수 야당인 한나라당과 민주당간에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어 본회의장의 질문 답변이 매우 뜨거울 전망이다.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검사제 도입은 물론 야당이 현 정부의 대북 뒷거래 여부를 파헤치려고 벼르고 있기 때문이다. 대정부질문이 일문일답식으로 진행된다고 해서 순발력 테스트나 재치 문답식으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개정 국회법에도 질문 요지를 미리 정부에 전달하게 되어 있는 만큼 질문의 핵심을 정확하게 제시한 후 구체적인 자료를 갖고 추궁하는 질문 관행을 쌓아나가야 한다.형식만 일문일답으로 진행하고,실제로는 여야가 종전처럼 정치 공세를 벌이는 잘못된 행태가 얼마든지 되풀이될 수 있다. 새 국회법은 국정의 감시자로서 국회의 역할을 강화하고,입법부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그러나 선진 의회정치를 구현하기에는 아직도 미비한 점이 많다.무엇보다 국회의원들의 자율성 확대가 요청된다.그리고 의원들이 유권자들에게 입법 실적을 통해 의정 활동을 평가받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의원들이 표결로써 정치적 의사를 표시하고,그 기록으로 유권자들에게 심판받도록 해야 한다.그렇다면 기록표결제를 실시해야 한다.의원 개개인들의 입법에 대한 찬·반 기록표가 공개될 때,‘철새 정치인’도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투명한 의정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예결위 소위(계수조정 소위) 등 상임위 아래의 소위원회 회의록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또 선언적 조항에 불과한 자유투표제(cross voting)를 활성화하여 의원들을 ‘당론의 족쇄’로부터 가급적 자유롭게 해야 한다.이런 점에서 국회 개혁은 국회법 개정만으로는 부족하다.정당의 개혁도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논설위원실장 khlee@
  • 동갑내기 과외하기/고교짱 - 女과외선생 한판붙다

    “멜로인 줄 알았는데 찍다 보니 액션이더라.” 시사회가 끝난 뒤 기자회견에 참석한 주인공 권상우의 말대로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7일 개봉·제작 코리아엔터테인먼트)는 로맨틱 코미디와 액션이 반씩 섞인,‘애들’감각에 딱 맞춘 영화다. 닭집 딸 수완(김하늘)은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과외 전선에 뛰어든다.어머니 소개로 으리으리한 저택에 들어선 수완은 막강한 난적 지훈(권상우)을 만난다.‘학교 짱’에다 고교를 2년 ‘꿇어’ 수완과 나이가 같은 지훈은,만나자마자 반말이고 담배까지 연신 피워댄다.‘sometimes’를 ‘소메티메스’로 읽는 못말리는 지훈과 수완의 한판 대결이 시작되는데…. 영화는 날라리 고교생과 평범한 대학생이라는,동갑이라는 점 말고는 닮은 데 하나 없는 두 인물을 엮어 웃음을 끌어내는 데 일단 성공했다.거기에 지훈과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학교 건달들의 대결로 통쾌한 액션신을 덧붙였다.웃길 줄 아는 대사와 캐릭터,의리가 살아 있는 액션,닭살 돋지 않는 멜로 등 최근 잘 나가는 상업영화의 코드를 적절히배합한 솜씨가 돋보인다.특히 가식 없이 솔직함으로 무장한 지훈의 톡톡 튀는 대사는 생기가 넘친다. 주연배우들의 연기 변신도 주목할 만하다.김하늘은 청순가련형 딱지를 떼고 촌티가 폴폴 나는 과외선생을 자연스럽게 연기했다.내숭 1단이지만,화를 돋구는 제자 덕에 ‘막가파’ 선생으로 돌변하는 모습이 재미있다.영화에서 첫 주연을 맡은 권상우는 냉소적인 모습과 날렵한 발차기가 매력적이다.‘화산고’‘일단 뛰어’에 이어 교복을 입었지만 실제 나이는 28세.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통해 사회비판도 살짝 걸쳤다.지훈은 우리 사회의 관점으로 보자면 문제아로 지탄받을 학생.하지만 친구 앞에서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수완에게 “서울대 밝히는 너하고 명품만 밝히는 호경이(지훈을 따르는 날라리 여고생) 하고 뭐가 다르냐.”고 한방 날리는 지훈의 말은 허상만 좇는 사회에 대한 항변이다. 그래도 영화를 매듭짓는 건 멜로.청년기의 방황에 좀 더 무게를 뒀더라면 괜찮은 성장영화가 됐을 법도 한데,영화는 철저히 로맨틱 코미디의 법칙을 따라가는 상업적인 전략을 택했다.티격태격 싸우다가 결국 사랑을 맺는 결말은 뻔해 보이지만 유쾌하다. 영화의 원안은 통신 연재물인 ‘스와니-동갑내기 과외하기’.실제 영문학과 98학번인 최수완씨가 자신의 경험을 2000년 나우누리 게시판에 20편 올려 편당 1만 5000건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유쾌하면서도 쿨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김경형 감독은 방송 PD출신.이 영화로 데뷔했다. 김소연기자 purple@
  • 한국편집인협 회장 최규철씨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는 29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제48회 정기 대의원총회를 열고 제14대 회장에 최규철(사진) 동아일보 논설주간을 선출했다. 부회장에는 김원호 연합뉴스 영문뉴스국 고문,김진수 매일경제 편집담당 전무,문창극 중앙일보 논설위원실장,신상민 한국경제 논설주간,구영회 MBC 해설위원실 주간,유자효 SBS 라디오본부장,안기호 부산일보 주필이 선임됐으며 변용식 조선일보 편집인 겸 편집국장이 운영위원장을 맡았다.최문기 사무국장은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나머지 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감사 △문창재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이영복 인천일보 부사장 ◇이사△강신철 경향신문 전략기획본부장△백화종 국민일보주필△이경형 대한매일 논설위원실장△윤구 문화일보 논설주간△구월환 세계일보 논설실장△지영선 한겨레신문 논설위원△박무종 코리아타임스 논설주간△이경희 코리아헤럴드 주필△유균 KBS 정책기획센터장△이정식 CBS 해설위원장△김중석 강원도민일보 편집담당 상무△이희종 강원일보 상무△김화양 경인일보 부사장△조동수 광주일보 주필△최화수 국제신문 논설주간△권오덕 대전일보 주필△최종진 매일신문 논설주간△백남혁 전북도민일보 주필△김경호 제주일보 논설위원실장△민경탁 충청일보논설실장
  • [이경형 칼럼]선거구제와 ‘헤쳐 모여’

    권역별 비례대표제 효과적 정치개혁 기운 새롭게 분출 올해도 작년 대통령선거 과정에 못지않게 정치가 넘치는 한 해가 될 것 같다.내년 4월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정당 개혁,선거제도 개혁 등으로 정치권이 크게 요동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등장과 때를 같이하여 한국 정치의 큰 흐름이 대변혁의 궤도로 진입하고 있다.사회 전체의 움직임이 세대 교체의 물결을 타고 있는 가운데 ‘3김 정치’로 대변되는 지역할거주의 정치구도도 급격히 붕괴되고 있다.새로운 정치 구도는 영남·호남·충청권 등 지역 기반에 의해서가 아니라,민주노동당의 세력 확장 등 이념적 스펙트럼에 의해 형성될 수 있는 징후가 감지되고 있다. 참여 민주주의 바람은 서서히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변화를 희구하는 바람은 필경 국회의원 충원 방식도 변경하도록 만들 것이다. 노 당선자는 ‘국민과의 TV 토론’에서 내년 총선후 대통령과 총리가 권력을 분담하는 프랑스식 분권형 대통령제(이원집정제) 운영 의사를 밝혔다.그러면서 정치의 지역구도를 극복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 언급은 국회의원 선출 방식의 변경을 강력히 희망한 것으로 봐야 한다. 지역주의를 극복하려면 현행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꾸거나,전국구 대신에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그러나 소선거구를 중·대선거구로 바꾸는 것은 현역 의원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있어 매우 어렵다.또 중·대선거구제는 소선거구제에 비해 정치 신인들의 진출을 막는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에 반해 현행 시·도의회 비례대표 의원 선출에 적용하고 있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상대적으로 반발이 적을 것이다.지역주의도 극복하면서 이념적으로 차별화된 정당의 원내 진출도 촉진하는 효과를 꾀할 수 있다. 대한매일과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KSDC)가 지난 15∼17일 선거구제 등에 관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1지역구 1인 선출의 소선거구제는 51.5%의 지지를 얻은 반면,2인 이상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는 40.3%에 그쳤다.또현행 전국구 비례대표제(35.2%)보다는 ‘특정 정당의 특정 지역 의석 독식을 막는’ 권역별 비례대표제(62.4%)를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처럼 현역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정치 생명을 좌우하는 선거구제를 기꺼이 바꾸기는 어렵다.그렇다고 온 세상이 새로운 물결로 넘실거리는데 현행 제도를 철밥통처럼 껴안고 있을 수는 없다. 이미 헌법재판소도 현행 ‘1인1표식’ 투표제로 전국구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그런 만큼 ‘1인2표제’로 각기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석을 뽑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결국 소선구제와 권역별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채택하는 방향으로 갈 공산이 크다. 지역주의 구도를 깨기 위해서는 전국을 서울,인천·경기,대구·경북,부산·울산·경남,호남,충청,강원,제주 등으로 나눠 권역별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는 것이 효과적이다.이 경우 현행 광역의회 비례대표제 의석 배분처럼 제1당이 아무리 득표를 많이 해도 3분의2이상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하면제2,3당도 특정 지역에서 의석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역주의를 효율적으로 극복하려면 권역별 비례대표제로 선출되는 의석수가 지금의 전국구 의석(46석)보다는 크게 늘어나야 의미가 있다.지방분권적 역사가 깊은 독일은 지역구와 권역별 비례대표 의석이 균등하다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현재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고 있는 한나라당도 기존 선거 제도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새롭게 분출되는 정치 개혁의 기운을 잘 읽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논설위원실장 khlee@
  • [이경형 칼럼]장관 추천해 볼까요

    “인터넷으로 흥한 자,인터넷으로 망한다.결국 인터넷 형식만 빌리는 것 아닌가요?” “얼마나 참신합니까.밀실 인사를 근절하는 특효약이지요.” 대통령직인수위가 국민 참여 정치를 실현하는 방안의 하나로 인터넷을 통해 장관급 인사를 추천받겠다고 하자 사이트들마다 와글와글한다.언론들도 또 하나의 포퓰리즘,전시 행정,이벤트식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노파심에서 이런 저런 지적을 할 수는 있겠으나,한 번 해보지도 않고 부정적인 면만 강조하는 것은 성급하다.역대 정권에서 늘 ‘인사가 만사’라고 말은 했지만 결국 ‘밀실’ ‘끼리끼리’ 인사라는 뒷말을 남겼다.특히 현 김대중 정부에서는 인재풀이 너무 협소해 한 사람이 장·차관급 자리를 여기저기 돌아가면서 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개각,청와대 비서진 개편 등 중요한 인사가 있을 때 기자들은 청와대 민정·사정 비서관실 주변,당정 실세나 그 측근,혹은 정보기관 인사들을 상대로 취재를 하게 된다.그동안 하마평에 오른 인물들을 띄워보면 “아니야,그 사람 숨겨놓은 여자가 있어.” “재산이 너무 많아.” “출신 지역을 쉬쉬해 왔어.” 등의 언급을 듣게 된다. 이런 언급의 근거는 일종의 인사 자료철인 ‘존안(存案)파일’에서 나온다.이같은 정보는 일선 경찰이나 사정기관의 비공식 보고에 의해 축적되며,그 자료는 계속 쌓여간다.고위 공직자를 뽑는 데는 전문성도 필요하지만 도덕성도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에 ‘루머성 신변 첩보’도 존안 자료에 포함될 수 있다.그러나 일선 정보 요원의 잘못된 첩보 때문에 인재를 놓칠 수도 있고,정보기관의 왜곡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물론 존안 자료에 의한 인물 천거가 전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이런 관행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정보·사정기관 요원들의 권력화 현상이 나타나고,이너서클의 배타적인 인사 정보 장악에서 오는 권력의 사유화,패거리 문화의 부작용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언젠가 정권이 바뀐 후 자신의 존안 자료를 본 한 인사는 “나도 모르는 악의적인 내용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존안 자료에 의한 인물 스크린에 비해 인터넷을 통한 인재 추천은 ‘지하 벙커에 새로 창을 내는 것’처럼 신선하게 느껴진다.우리 사회는 지금 급변하고 있다.오랫동안 젖어온 권위주의적이고 타율적인 생활 방식과 수직적인 사고는 자발적인 참여와 수평적인 사고로 대체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의 혁신과 인터넷 인구의 급증으로 커뮤니케이션 방식도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향 소통으로 전환되고 있다.이런 시대 흐름을 시민 참여 민주주의 제도의 확장으로 정착시키는 것은 시의적절한 조치다. ‘인터넷 장관’의 성패는 네티즌들의 추천 내용을 실제 인재 등용 때 어떻게 반영하느냐에 달렸다.특정 이익집단의 자의적인 여론몰이를 걸러내고,빈부·세대간 정보 격차에서 오는 인터넷 소외 계층에 대해 고려하는 것은 기본이다.또 인재 발굴이 인터넷 추천의 조회 수 경쟁으로 이뤄져서는 안 되며,‘납득 안 되는 인물’을 인터넷 추천으로 위장하는 것도 막아야 한다. 인터넷 천거의 해석도 잘 해야 한다.벌써부터 “하리수씨를 여성장관으로”라는 장난끼가 섞인 내용도 게시판에 떠있다고 한다.이럴 때도 그것이 가부장적인남성 우월문화를 깰 수 있는 사람을 여성 장관으로 해달라는 희망을 표현한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메시지는 가볍더라도 그 속에는 속담처럼 정곡을 찌르는 내용이 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장관 추천 방식에 너무 제동을 걸 필요는 없다.누구든 주변에 훌륭한 인물이 있으면 인터넷에 부담없이 올리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역동적인 참여 에너지가 이제 막 분출하기 시작했다.정치 불신을 씻는 동력으로 삼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논설위원실장 khlee@
  • [이경형 칼럼]이런 ‘후보 채점표’

    투표 날 아침이 밝았다.2003년부터 5년 동안 국정을 이끌 제16대 대통령을선출하는 날이다. 이번 선거는 양자 대결 구도에다 후보의 노선 차별화도 비교적 분명하지만투표 당일까지도 섣불리 어느 한쪽의 절대 우세를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박빙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특히 선거 막판에도 유권자 5명 가운데 1명이 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부동층으로 나타나고 있다.선거 종반에 행정수도 이전,북핵 문제 등이 쟁점으로 떠오른 탓인지 선거일에 다가갈수록 오히려 부동층이 늘어나는 기현상을 보였다. 지난 1997년 15대 대선 직후 한 여론조사기관이 유권자들의 투표행태를 조사한 결과,선거운동기간 중 지지 후보를 바꾼 사람이 총 투표자의 19.6%에달했고,이 중 약 46%가 투표 당일 혹은 2∼3일전에 바꿨다고 한다.이런 추이를 미루어 볼 때,근소한 차이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현 양자 대결 구도에서도 유권자들의 ‘지지 후보 교체 여부’가 당락의 변수로 등장할 수 있다. 유권자들은 저마다 후보를 선택하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질 수 있다.그러나 이번 선거처럼 후보간 이념적 차이가 크고,주요 쟁점도 두드러지고 있는상황에서는 유권자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보다는 뭔가 ‘큰 차원’의 잣대로지지 후보를 잴 필요가 있을 것이다.적어도 어떤 후보의 TV연설 때 맨 넥타이 색깔이 좋아 그 후보를 찍기로 결심하는 투표 행태는 가급적 지양해 보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귀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전에 ‘후보 채점표’를 만들어1점이라도 높은 후보를 선택해 찍어주는 것이 투표권을 현명하게 행사하는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동시에 후보 선택의 고민을 합리적으로 푸는 방식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각 후보를 비교하는 채점 항목을 다음과 같이 10개 항으로 잡아,각 항목에 10점 척도를 적용해 합산하면 총 100점 만점 기준으로 개별 후보득점이 산출될 수 있다. ①인물 및 자질 ②국가발전 비전 제시 ③사회 통합 ④정치 개혁 ⑤세대교체 ⑥부패 청산 ⑦남북관계 ⑧시장경제 추구 ⑨서민 복지 ⑩기타(후보 참모 및 주변 인물들,후보 경력,소속 정당,후보 호감도 등)를 체크 포인트로 잡을수 있다.여기서기타 항목은 괄호 속에 든 항목을 종합해도 좋고,아니면 유권자 각자가 9개 항목 중 특별히 가중치를 두어도 좋을 것이다. 채점 항목에 사회통합을 넣은 것은 우리 사회가 고도 정보사회로 진입하면서 세대간 계층간 갈등,정보 격차 등으로 인해 분열의 요소가 급격히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또 21세기 한국을 이끌 지도자라면 미래의 한국이 어디를지향해야 하는지,국가 비전을 통해 제시해야 한다. 지역할거주의·보스 정치 등으로 대변되는 ‘3김 정치’의 부정적인 요소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권력기관,정당,국회 등 정치제도 자체를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때문에 정치개혁의 의지를 후보 평가 기준의 하나로 본 것이다. 이런 채점표는 “인물을 보면 A후보가 나은데,정책을 보면 B후보 공약이 마음에 드는” 경우에 대비해서도 필요하다.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중요한 원칙의 하나는 다수결의 원칙이다.개개인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현대 산업·정보사회에서는 51% 다수의 의견대로 의사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마찬가지로 개별 유권자 입장에서모든 정책과 공약이 마음에 꼭 드는 후보란 있을 수 없다.상대적으로 어느 쪽이 나의 가치에 더 근접해 있느냐는 것을 선택할 뿐이다. 이제 우리의 미래는 오늘 ‘한 표’를 던지는 투표함 속에 담기게 된다.진지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투표에 나서자. 논설위원실장 khlee@
  • [이경형 칼럼]후보 선택의 자(尺)

    대선 후보들의 3일 밤 1차 TV합동토론회는 유권자들에게 정책 비교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TV 토론은 각 후보가 내세우는 정책이나 현안에대한 견해를 시청자들이 즉석에서 비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장점이 있다.그러나 그 같은 순기능에 따른 후보 차별화가 이번 토론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고 보기는 어렵다.유권자들이 지지 후보를 선택할 수 있는 단서들을 충분히 공급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후보 입장에서 보면,대통령 선거운동은 유권자들에게 자신에 관한 정보를부단히 전달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반면 투표 행위는 유권자들이 이들정보를 자신의 자(尺)로써 측정하여 찬·반을 따지고,판단의 결과를 반영하는 일이다. 이렇게 볼 때,유권자들이 이번 대선에서 어떤 잣대로 후보를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우선 유권자들이 각자의 잣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 정치문화에 대해 냉철하게 인식해야 한다. 사실 이번 대선은 한국 정치사에서 큰 획을 긋는 선거다.민주-반민주 대결구도에서 민주화를 쟁취했던 양 김 시대가 가고,동시에 지역할거주의·보스정치·권력부패로 대변되는 ‘3김 정치’를 마감하는 선거인 것이다.바꿔 말해 21세기 선진 민주정치를 향한 새로운 정치문화의 틀을 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여기에서 유권자들은 각자 후보를 선택하는 잣대에 지역 정서를 부추기는후보,독선적인 후보,시스템을 존중하지 않는 후보를 걸러 낼 수 있도록 분명한 눈금을 새겨 넣어야 한다.어떤 후보라도 지역주의에 의존하는 언행을 할경우,여지없이 감점을 매겨야 한다.과거 3김이 개인적인 카리스마에 의해 정당과 조직을 움직였다면,다가오는 시대의 새로운 리더십은 회의체와 시스템에 의해 창출되어야 한다.그런 특성을 가진 후보를 잘 골라내야 한다. 다음,유권자들이 설사 후보 선택의 자를 만들었다 해도,후보가 내놓은 정책을 계량하려면 그것들의 부피와 무게와 색깔이 객관적으로 서로 달라야만 가능하다.그런 점에서 언론매체는 유권자들이 후보를 쉽게 판별할 수 있도록후보간 정책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설명해줘야 한다.이번 TV 토론은미흡한점이 없진 않지만 정책의 차별화에 관한 단서를 일부 제공했다.그 중 가장분명한 것이 대북 정책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상호주의,검증을 통한 햇볕 정책의 수정,북핵 개발의 기정 사실화,우라늄 핵폭탄의 한반도내 폭발 가능성 등의 견해를 밝혔다.이에 비해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현 대북정책을 지속해야 하며,비록 비용이들더라도 북핵 문제는 대화를 통해 풀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는 남북 화해·교류를 넘어 평화협정 체결을 강조하면서,제네바 합의는 북·미 양쪽이 모두 위반했음을 지적했다. 이번 후보 선택에서 중요한 이념적 리트머스 시험지는 바로 대북 정책이라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이런 점에서 유권자들이 대북 문제에 관한 자신의 이념적 좌표를 한번쯤 설정해보고,지지 후보를 선택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 개혁이나 부패 청산,지역주의 문제도 토론의 쟁점으로 떠올랐으나 각후보들이 강조하는 포인트만 달랐지,대북 정책처럼 분명한 차이점을 보여주지는 못했다.국정원 도청 의혹,DJ 양자론,노·정 후보 단일화,특검제 등도토론 메뉴에는 올랐으나 입씨름 수준에 그쳤던 것이다. 앞으로 경제 및 사회 분야에 관한 두 번의 TV토론이 남아 있다.후보들을 제대로 선택하기 위해서는 유권자들이 미리부터 후보들의 정책을 계측할 수 있는 자를 준비해야 한다.확대되는 빈부 격차,농업 개방,의료보험,교육 평준화 등 바로 생활과 밀접한 현안들이 후보 선택에 따라 정책의 방향이 완전히달라지게 된다. 우리의 정치문화를 바꾸고,새로운 지도력을 창출하는 것은 후보들이 아니라 바로 유권자들이다.그래서 유권자들의 진정한 선거의식 혁명이 요구되는 것이다. 논설위원실장 khlee@
  • [2002길섶에서]떠나야 할 때

    올해 달력도 이제 한 장 남았다.세모가 다가오면 여기저기서 모임이 잦아진다.자연히 술잔을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흥에 겨워 시간 가는 줄 모를 때가많다.대개 모임의 시작 시간은 예고해 주지만 끝나는 시간은 말해주지 않는다.그러나 어느 모임이든 주선하는 사람은 끝나는 시간을 대략 정해놓기 마련이다. 이따금 파티가 끝났는 데도 눈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했던 소리 또 하는’사람들이 없지 않다.자리에서 일어 설 때 분명하게 일어서는 사람은 많지 않다.사실 말처럼 그러하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그래서 ‘자리’에서 스스럼없이 물러나고,표표히 떠나는 사람의 뒷 모습은 아름답다고들 하지 않는가. 이제 정권교체기를 맞아 미련없이 떠나는 사람들을 얼마나 볼 수 있을까.요즘 대선 후보 캠프엔 ‘진작 떠났던 사람들’이 부산하게 되돌아오는 풍경을 자주 보게 된다.참으로 ‘훌훌 털고 떠나기’란 어려운 것 같다. 이경형 논설실장
  • [이경형 칼럼] 양 김, DJP, 盧·鄭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간 단일화 협상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다.두 사람이 한밤중에 포장마차에서 ‘러브 샷’으로 ‘도원의 결의’를 하는가 했더니 금방 전면 재협상이니,무산 위기니,협상 재개니 하고 있는 것이다. 단일화 협상은 왜 변덕이 죽 끓듯 하는가.그것은 기본적으로 단일화 자체에 대한 진지함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단일화를 할 수밖에 없는 처절한 당위성과 단일화를 이룩한 뒤 국민 앞에 내놓을 지향성에 대한 고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지금의 노·정 단일화는 ‘반 이회창’정서를 ‘나’에게 몰아달라는 얕은 득표 전술에 불과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각기 출마해서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에게 패할 것이 십중팔구니,여론조사든 뭐든 해서 상대방을 눌러앉히고 내가 나서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지난 1987년 대선 때 ‘YS-DJ’의 단일화 실패와 5년 전 ‘DJP 단일화’의 나쁜 점만 골라 반복하려는 것 같다.이른바 ‘1노 3김’ 대선 당시 김영삼-김대중 양 김의 단일화실패는 표면적으로는 ‘내가아니면 노태우를 이길 수 없다.’며 자신 쪽으로 단일화를 주장한 아집이 원인이었다.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각기 영남과 호남을 지역 기반으로 하여 정치적 맹주가 된 뒤 그 다음 기회에 대권을 잡을 수도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 같은 50대인 노·정 후보도 이번 대선에 패하더라도 출마를 해야만 향후 정치적 고지를 유지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앞으로 1년 반만 있으면 17대 총선(2004년 4월)이 기다리고 있어 지금의 세(勢)를 유지할 수 있고,이를 기반으로 다시 대권 도전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것이다. 노·정 단일화가 ‘DJP 단일화’보다 더 설득력이 없는 것은 당시 ‘DJP’는 하다 못해 내각제 추진이라는 명분을 연결고리로 삼았다.지금 단일화는 그런 ‘깃발’조차도 없이 단일화를 외치고 있다. 김대중 현 정권을 창출한 ‘DJP’단일화가 선거 전략적 차원에서 성공한 것은 적어도 선거 당시에는 ‘단일화-공동정부-내각제 개헌 합의’를 내걸고,일종의 연정(聯政)형태로 포장을했기 때문이다.집권 전반기 장관직을 나눠가지는 등 외형적인 공동정부는 이룩했지만,연정이 갖는 정책 노선의 조정이나 정책의 융합은 이루지 못해 결국 정치적으로는 실패한 것이다. 여기서 노·정 단일화가 얻어야 할 교훈은 두 가지다.하나는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용기와 다른 하나는 단일화 이후 정책 노선 조정의 설계도를 제시하는 것이다.이것들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의지가 있는지를 정직하게 자문해 보고,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단일화 이벤트’를 그만두는 것이 국민을 더 이상 우롱하지 않는 길이다. 노·정 진영이 유권자 여론조사 방법으로 단일화를 하기로 한 것은 사실 희한한 일이다.하지만 시간적으로 급박한 상황을 감안할 때 일단 용인한다고 치자.그럴 경우 두 사람의 그동안 지지도 추이를 보게 되면,그 결과도 오차범위 안에 들거나 근소한 차이로 우열이 판가름날 개연성이 크다.두 사람은 비록 영점 몇 퍼센트의 차이가 나더라도 승복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문제는 노·정 진영이 근소한 차이의 승패가 주는 정치적 의미를 제대로 읽을 것인지 의문이다.대통령 후보가 되고 안 되고를 보면 분명 이것은 ‘승자 독식’게임이다.그러나 단일화 이후의 정책 노선은 두 사람간의 지지도가 근접하면 할수록 ‘노무현 노선’과 ‘정몽준 노선’을 정확하게 절반씩 나눠 융합하는 정책을 만들어 대선 기간 중에 내놓아야 한다. 두 후보가 정치개혁,남북문제,시장경제,사회복지 등 제 분야에서 ‘진보와 온건’의 새로운 정책 좌표를 찍어야 한다.그래야만 ‘여론조사에 의한 단일화’의 맹목성을 순화시킬 수 있다.단일화의 패자에게 감투를 절반씩 나눠주겠다는 식으로 봉합한다면 그것은 또 한번 국민을 속이는 짓이 된다. 이경형/ 논설위원실장 khlee@
  • [이경형 칼럼] ‘포스트 3김’ 카오스인가

    민주당 의원들의 탈당 러시는 ‘노·정 후보 단일화’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한발짝만 더 들어가 보면 대선 이후 17대 총선(2004년 4월)도 겨냥하고 있다.대통령선거가 40여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탈당파의 진로 논의 수준이 단일화 방법론에서 맴돈다는 것은 이들의 속내가 여기에 머물지않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행보가 단일화 추진 외에 ‘중부권 신당’‘한나라당 입당’까지 세 갈래로 운위되고 있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이처럼 탈당의 저류는 향후 정계 개편 등 많은 변수가 얽혀 있어 매우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다.이것은 동시에 ‘포스트 3김’시대를 열기 위한 불가피한 카오스 단계로,대선 과정을 통해 극복해나가야 한다. 이번 대선을 두고 국민의 관심은 ‘1강(强)2중(中)’이니 ‘반 DJ 대 반창(反昌)연합’이니 하는 세력 대결 양상에 집중되고 있다.그러나 선거의 담론이 이 언저리에서 계속 맴돌아서는 안 된다. 오는 12월19일 치러지는 16대 대선에서 중요한 과제는 한국 정치사에서 ‘3김 시대’의 종식에 따른 정치적인 큰 공간을 어떤 리더십으로 메워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다.여기에 더해 ‘3김 정치’의 청산과 21세기 국가발전을 위해 선택해야 할 핵심 과제가 무엇인지에 관해 논쟁의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반세기에 걸친 한국 정치사에서 3김 시대는 매우 독특하다.특히 민주·반민주 대결 구도에서 YS·DJ 양김(兩金)의 정치는 자신들의 카리스마를 십분 활용,민주화를 쟁취했다.군부 개발 독재와 맞서 민주화를 추구하던 시절에는양김이 구사한 투쟁 도구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화가 이룩된 이른바 문민 정부,국민의 정부 아래서는 더 이상 과거에 사용했던 도구는 적합하지 않았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를 계속 사용한 데서 두 정권의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과거의 도구는 지역할거주의에 바탕한 보스정치,제왕적 친정(親政)체제에 의한 내부 통제,권력의 사유화 등이었고 그런 점에서 JP도 3김 정치로 묶을 수 있는 것이다.YS,DJ 정권의 권력부패 원인도 과거의 ‘도구’를 개혁하지 않은 데 있었다. 여기서 포스트 3김 시대의 새로운 리더십은 민주적이고 개방적이며 회의체등 제도와 시스템에 의해 의사를 결정하는 리더십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이런 기준에 가장 적합한 대통령후보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후보 개인의 자질도 중요하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과 그 진영의 운영 방식도 중요한 체크 포인트로 삼아야 한다. 다음은 3김 정치 청산의 과제다.이것은 3김이 구사했던 ‘도구’를 거부하고,새로운 방법론을 찾는 것이다.이를 위해서는 우선 지역할거주의를 배격하고,앞으로 지역주의에 의존하는 그 어떤 형태의 정치세력화도 반대해야 한다.그런 점에서 충청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하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는 ‘중부권 신당론’은 거부해야 한다.보스에 의한 제왕적 통제와 권력 사유화를 막기 위해서는 하의상달식으로 정당 운영을 개혁하고,참모진 운용에서 이른바 가신(家臣)요소를 없애야 하며,대통령 친인척들을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이에 관한 후보들의 분명한 복안을 들어야 한다. 국가발전 비전 제시는 보수에서 진보에 걸친 잡다한 정책의 백화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면한 핵심 과제에 대한 취사선택을 먼저 밝혀야 한다.그중에는 남북관계와 경제운영철학의 문제도 있다.남북문제는 더이상 화해 여부가 아니라 속도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다.그래서 속도에 대한 소신이 요구된다.경제 철학은 성장과 분배 가운데 어디에 체중을 실을 것인지 밝혀야 한다.누이 좋고 매부 좋은 ‘무지갯빛’ 정책이 필요한 때가 아니다. 지금의 어지러운 탈당 사태와 불확실한 대선 구도는 3김 시대가 끝나는 시점에서 새로운 리더십을 형성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도기적인 카오스가 아닌가 한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카오스를 신속하게 극복할 수 있는 어젠다를 분명하게 설정하고,그 해법을 찾는 일이다. 이경형 논설위원실장 khlee@
  • [이경형 칼럼] ‘남아공’식 북핵 해법

    부시 미국 대통령이 북핵 문제와 관련,“평화적인 무장 해제가 가능할 것”이라고 밝힌 데 이어 23일 새벽에 끝난 제8차 남북장관급회담은 핵 문제를 대화로 해결한다는 공동보도문을 발표했다.북한의 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개발문제를 싸고,각양각색의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이런 가운데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어떻게 핵 개발과 보유를 포기했는가를 보면 지금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하나의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1993년 3월 데 클레르크 당시 남아공 대통령은 그동안 자력으로 개발해 은닉했던 핵무기의 자진 폐기 결과를 공표했고,이듬해인 94년 8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핵사찰로 이를 공식 확인함으로써 객관적 사실로 인정받았다.아무런 조건 없이 스스로 핵 능력을 폐기함으로써 국제사회의 고립으로부터 탈피하고,국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70년대 초반부터 핵개발에 착수한 남아공은 핵 포기를 결정할 때까지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우라늄 원자탄과 위력이 비슷한 6개의 핵무기를 보유했다.남아공은 왜 핵 포기를 결정했으며,또 당초왜 핵을 개발하려 했던 것인가.핵 포기 배경은 오랜 흑백 인종차별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 비등과 지속적인 국제 제재로 인한 남아공 경제의 악화였다.그러나 더 실질적인 이유는 소련이 붕괴되고,나미비아 독립으로 앙골라 내전이 종식되어 5만명에 이르던 쿠바군이 철수하는 등 주변 안보 상황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남아공이 처음 핵개발에 착수한 동기는 인근 앙골라 사태로 소련의 지원 아래 쿠바군이 진입하는 등 안보가 위협받은 데서 비롯됐다.당시 남아공으로서는 유사시 외부의 원조를 기대하기 어려워 한정적인 핵 억지력을 필요로 했고,따라서 핵 전략도 실전 사용 전략이라기보다는 미국 등 대국의 분쟁 조정 개입을 유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우리가 남아공 사례에서 참고할 수 있는 시사점은 우선 특정국의 핵 포기문제는 안전보장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북한의 핵 포기 선언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북한 체제의 안전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실제로 북한은 미국이 ‘불량 국가’‘악의 축’운운하는 ‘적대적 행위’를 철회할 경우 ‘안보상 우려를 해소할 준비가 돼 있다.’는 입장이다. 또 하나는 국제 제재 문제다.남아공의 핵 포기는 장기간에 걸친 국제 제재의 누적된 효과인 점은 부인할 수 없다.하지만 국제적 고립을 강화할 초기제재 단계에서는 오히려 핵개발을 가속화했다.그리고 국제사회가 남아공의 핵 개발 의혹에 대해 지속적으로 감시를 해왔지만,남아공이 스스로 핵 시설을 밝힐 때까지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이런 점을 되돌아 볼 때,일방적인 대북 압박 조치나 북한이 수용하지 않는 국제사회의 핵 감시가 반드시 효과를 발휘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고 북한이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 당시처럼 핵 카드를 또다시 구사하도록 방치하자는 것은 아니다.무엇보다 북한에 대해 핵 포기를 선언하는 것이 ‘벼랑 끝’ 협상에서보다 훨씬 많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도록 해줘야 한다.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강한 미국’과 함께 북한이 미국에 절망감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기술적으로는모순되는 강·온 정책이 될지는 몰라도 한국의 적극적인 중재 역할과 일본의 협력을 통해 얼마든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성급하게 중유 제공을 중단하거나 경수로 건설을 철수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해법이 아니다. 북한은 남북 평화체제 구축의 형식을 통하든,안 통하든 간에 그들의 안전보장과 외부의 투자가 절실히 요청되는 상황이다.이런 상황을 잘 요리하면 북핵 해법의 묘수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경형/논설위원실장 khlee@
  • [이경형 칼럼] 軍과 ‘뻐꾸기 둥지’

    최근 6·29 서해 교전과 관련한 정보보고 ‘묵살’파문을 보면서 문득 한 영화가 생각났다.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모난 짓만 하던 맥 머피라는 사내는 어느 날 정신병원으로 이송된다.환자 아닌 환자로 정신병동에 있으면서 갖가지 소동을 벌이지만 결국은 안전요원들에 의해 전기 충격요법을 받고 식물인간이 된 끝에 사망하고 만다. 1970년대 중반 밀로스 포먼이 감독한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한 개인이 조직화된 거대한 시스템에 맞선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잘 보여준다. ‘묵살’사건은 현재 국방부 특별조사단이 조사를 진행 중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의 잘·잘못을 예단하기는 어렵다.대북 통신감청부대인 5679부대의 한철용 전 부대장 (육군 소장)은 지금도 북한군의 도발 징후 보고를 국방부가 삭제·묵살했다고 완강하게 주장하고 있다.현 시점에서 그를 이 영화 속의 맥 머피에 대입하기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군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내부자가 그 조직을 뒤흔드는 폭로를 하고,위계질서에 반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토리의구도는 비슷한 데가 적지 않다.본래 적을 멸해야 하는 군대란 기밀 유지를 생명으로 하고,상명하복을 최대의 덕목으로 삼는 조직이다. 이런 군 조직에서 적의 통신 감청 내용을 기록한 기밀 서류인 블랙 북을 국정감사장에서 흔들어대는 한 소장의 행태는 군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맥 머피 같은 말썽꾼이다.그러나 ‘뻐꾸기 둥지’ 영화는 거대한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체가 그 조직에서 일탈하거나 통제 바깥으로 나가려는 개인이나 소수 집단이나 간에 치료라는 이름으로 그것들을 어떻게 굴복시키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이번 ‘묵살’사건처럼 거대한 조직과 그 내부자의 관계를 조사하는 데 있어 먼저 유의할 점은 군이라는 조직이 한철용 개인을 조직 논리로 굴복시키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진실 규명은 뒷전으로 처지고,개인보다는 조직 우선이라는 군대 논리가 조사를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군사 기밀의 보호와 마찬가지로 내부 고발자도 보호해야 한다.이번 폭로 과정에서 ‘8자,15자로 이뤄진 첩보’운운 등 군의 첩보 수집 수단과 적 암호해석 방법이 간접적으로 노출되고,군 정보체계가 치명적으로 손상을 입은 것은 큰 문제다.이 점에 관한 한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여부를 엄정하게 조사해야 한다.이 문제와는 별개로 한 소장이 국가 안보를 우려하고 사회 정의를 구현한다는 차원에서 ‘양심의 호루라기’를 분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어느 면에서 특별조사는 그를 ‘조직에서 일탈한 자’로 보지 말고 ‘공익을 위한 내부 고발자’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조사의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번 사건에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관점의 하나는 군사 정보에 대한 판단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느냐는 것이다.군사 정보를 군사적인 요소로 분석하지 않고 군사 외적인,말하자면 정치적인 요소를 감안하여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이다. 이번 사건의 조사가 진행되면서 한 전 부대장이 서해 교전 직전인 지난 6월27일 통신 감청을 통해 도발의 징후를 포착하고도 상부에 ‘단순 침범’으로 보고한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그러나 그는 6월13일의 첫보고서가 상부의‘삭제’로 ‘단순 침범’으로 수정되었기 때문에 그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이런 경우도 정보 판단에 상부 눈치보기라는 불필요한 요소가 개입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군사 정보에 따라 취해야 할 대응 조치가 군이 결정할 수 있는 범주를 뛰어넘는 것이라면,그것은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군 차원에서 적당히 알아서 결정할 사안은 아니다. 햇볕정책은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북 기본 노선이긴 하지만 군의 각급부대가 저마다 ‘햇볕 잣대’로 작전과 전투를 수행해서는 안되는 점을 인식했으면 한다. 이경형/논설위원실장 khlee@
  • [이경형 칼럼] 美 ‘엇박자’도 藥?

    북한이 신의주를 홍콩식 자본주의 도시국가로 건설하려는 등 엄청난 실험을 하고 있다.이런 가운데 지난 24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폐막된 제4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는 ‘한반도 평화선언’을 채택,2차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대화를 촉구했다. 이에 반해 미국은 선제공격과 독자 행동을 핵심으로 한 새 안보전략을 발표하면서 북한을 ‘악의 축+불량국가’로 다시 지정했다.부시 미 행정부는 북·일 정상회담의 결과에 대해서도 마뜩찮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한반도를 둘러싸고 일본,중국과 러시아,심지어 유럽까지도 남북 화해와 협력의 평화기류를 형성하고 있는데 유독 태평양 건너 미국발 기류는 여기에 제동을 거는 듯한 분위기다. 최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 가진 회담에서 일본인 납치문제를 시인·사과하고,과거사 청산과 경제협력방식에 있어서도 사실상 일본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했다. 마치 쫓기듯하는 북한의 이 같은 태도 변화는 어디에 연유하고 있을까.흔히들 북한이 경제적 한계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에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보고 있다. 외부의 원조가 없으면 버티기가 어려워 그동안 내세웠던 온갖 구호와 명분을 접고,실리 추구 쪽으로 선회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원인 분석과는 달리 미국이 ‘악의 축’국가에 강경노선을 유지하면서도 이라크와 북한을 각기 다르게 대응한 ‘차별화 전략’이 먹혀들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미국 입장에서 보면 석유자원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중동의 정치 지도를 재편할 필요가 있고,여기에 최대 걸림돌인 이라크의 후세인 체제를 붕괴시키는 것이 전략적 목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반면 북한의 경우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요소만 제거된다면 김정일체제 유지에 대한 용인은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이 부시 미 행정부의 속내라는 풀이다. 이런 미국의 메시지는 그동안 공개적으로도 비쳐졌고,간접 경로를 통해서도 북측에 전달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최근 두 차례나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주장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이라크는 이웃나라를 침략했으며 대량살상무기를 자국민과 이웃나라에 사용했기 때문에 북한과는 구별된다고 말한 바 있다.그는 지난 7월말에도 이라크와 달리 북한의 체제 변화는 원하지 않는다고 했는데,이는 북한 정권의 안위에 대한 미국의 언질과 다름이 없다고 보여진다. 어쨌든 김정일 위원장의 ‘통 큰’변혁의 결단 배경에는 한·일 정상의 대북 화해 공조도 중요한 몫을 했겠지만,그동안 대북포용정책에 엇박자를 놓던 미국의 ‘강경 노선 속의 차별화’전략이 약효를 발휘했다는 분석은 곱씹을 맛이 있다. 이제 한반도 화해·평화의 가까운 장래는 북·미 관계 변화에 크게 좌우될 것 같다.북·미 대화는 주변에서 분위기를 돋운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동북아 평화 체제를 구축하자는 캠페인 같은 구호나 구름 잡는 식의 총론적 접근은 더 이상 해법이 안 된다.각론으로 들어가야 한다. 미국이 북한에 요구하는 각론은 테러 집단과 연계될 수 있는 대량살상무기개발 및 확산의 포기다.구체적으로는 핵 투명성 입증과 미사일 수출 금지다.북한이 미국에 요구하는 각론은 체제와 국제 자본의 유입을 보장해주고,‘무기 포기’에따른 보상이다.그런 점에서 미국은 ‘선제 공격’같은 소리는 거둬들여야 한다.북한도 과거 핵 협상처럼 ‘벼랑 끝’전술로 뭘 얻어내겠다는 낡은 생각을 떨쳐버려야 한다. 미국은 ‘21세기 로마 제국’같은 오만과 독선을 버리고,북한은 신의주 특구를 만들었다고 해서 국제 안전장치가 없는데 외국 자본과 기술이 들어올 것이라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우리는 남북화해 정책을 일관되게 추구해야 하지만 조급할 필요는 없다.한반도 평화 정책은 현 정권에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정권에서도 계승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경형/ 논설위원실장 khlee@
  • [이경형 칼럼] ‘23일간’만 참자

    선거기간 중 향우회,종친회,동창회 모임을 개최할 수 없도록 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제103조를 싸고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이 규정에 따라 대통령선거운동기간인 오는 11월27일부터 12월19일까지 23일간은 동창회 등을 열 수 없게 된다. 사실 이 조항은 2000년 2월16일에 개정된 것으로,16대 국회의원선거(2000년 4월13일)와 지난번 6·13지방선거에서도 이미 적용되었다.다만 당시에는 계절적으로 향우회,동창회 등이 많지 않아 별다른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 조항은 해석하기에 따라 위헌적 요소가 있을 수 있다.선거와 무관한 동창들의 친목모임까지 포괄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행복추구권과 집회결사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크게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 않다.동창회 등을 선거운동기간이 아닌 11월26일 이전이나 12월20일 이후에 개최한다고 해서 행복 추구가 봉쇄되고,집회의 자유가 본질적으로 박탈된다고 할 수는 없다.또 선관위도 동창,고향 사람들 몇명이 모여 간단하게 송년 모임을 하는 것까지 법률 위반으로 보지 않는다는 유권해석도 이미 내린 바 있다. 이 법의 구 조항은 선거운동 목적의 동창회 등을 금지했다.하지만 실제는 지켜지지도 않았고,수많은 유사 모임을 일일이 단속할 수도 없는 현실을 감안하여 고육책으로 선거운동기간에 한해 아예 금지토록 한 것이다.정치꾼은 동창회 등을 빌미로 선거운동을 노골적으로 했고,선거브로커들은 유사 모임을 급조해 후보 진영에 금품을 요구하는 사례가 다반사였던 것은 익히 아는 일이다. 차제에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지연,학연,혈연 등 전근대적인 연고주의의 고리를 과감하게 끊는 일대 캠페인을 벌이면 어떨까.말로만 투명한 사회,선진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하지 말고 이번 대선 기간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하면 어떨까.그런 의미에서 대통령선거운동기간에는 자발적으로 향우회나 종친회,동창회를 일절 갖지 말자. 한국 정치,특히 선거문화의 최대 고질은 이러한 연고주의다.대통령선거에 있어 영·호남간 지역감정 부추기기는 말할 것도 없고,시·군·구를 중심으로 한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읍·면·동별 대결의 소지역주의가 판쳐온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선거 때만 되면 출신 고등학교 중심으로 뭉치는 학연과 성씨(姓氏)·문중으로 단결하는 혈연이 기승을 부리고,이런 것들은 후보들의 정책이나 노선에 우선하는 맹목적인 지지 요소로 작용해왔다. 연고주의는 대의정치를 왜곡시킬 뿐 아니라 권력형 부패의 온상 구실까지 해왔다.대통령 아들들의 구속으로 이어진 각종 게이트의 저변도 따지고 보면 동향과 동창의 연고주의,‘끼리끼리 문화’와 맞닿아 있다. 동창회 등의 개최 금지 규정을 위반하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6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돼 있다.선관위는 이미 두 차례의 선거에서 모두 76건의 위반 사례를 적발,이중 2건만 검찰에 고발했다.선관위의 고발 건수가 적발에 비해 현저히 적은 것을 보면,법 운용이 잘못된 관행의 탈법선거운동을 바로잡겠다는 취지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능률만능주의의 비인간적인 현대 산업사회에서 애향심 등 공동체적인 요소는 때때로 도시생활의 활력소가 될 수 있다.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의 연고주의는 주술에 홀린 것처럼 합리와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다.오죽하면 외국 상사원들이 국내 세일즈에 앞서 필독할 자료가 동창회 명부라고 했겠는가. 이제 대통령선거는 100일도 채 남지 않았다.완전공영제 도입을 위한 선거관계법 개정 작업도 제대로 이뤄질지 미지수다.후보간 경쟁구도도 불분명하다.이럴수록 비합리적 연고주의가 선거판을 좌우할 수 있다.선거운동기간인 23일 동안만이라도 동창회 등 연고주의 모임을 참아보자. 이경형/ 논설위원실장 khlee@
  • [이경형 칼럼] 새 ‘총리론’

    국무총리지명자들에 대한 국회의 잇단 인사청문회는 한국의 ‘총리론’을 다시 쓰게 한다.국회는 어제 장대환 총리임명동의안을 표결에 부쳐 부결함으로써 총리감의 자질과 그 위상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장상씨에 이은 장대환 총리지명자 청문회는 권력체계의 운용에 따라 탄력적으로 국정을 수행할 수 있는 국무총리의 역할과 기능을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먼저 청문회 이후 국민들은 총리 자격에 높은 도덕적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우리 사회 상류층이 부의 축적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구사해온 비도덕적 행태를 이제는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다음으로 ‘제왕적 대통령’이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囊中取物)’총리를 임명하는 것을 더이상 눈 감아주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한국 헌정사에서 독특하게 자리잡아온 국무총리제는 헌법 조항을 들먹일 것도 없이 “대통령을 보좌하고 행정 각부를 통할한다.”고 하지만 대개는 ‘의전 총리’‘대독(代讀)총리’‘방탄 총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사실 따지고 보면 총리의 법적권한은 만만하지가 않다.국무위원·장관 임명제청권,국무위원 해임건의권,대통령권한 대행권,부서권(副署權),국무회의에서심의권,국회출석 발언권,총리령 발령권 등 부지기수다. 따라서 총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대통령에 대한 권력의 수직적 견제장치로서 기능도 할 수 있다.그러나 과거 문민정부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 총리의 갈등 끝에 결국 총리가 전격 해임되던 전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현실적으로는 쉽지가 않다.그래서 권위주의적 대통령제 아래서 총리는 법적으로 ‘2인자’이지만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국정원장(과거 안기부장)은 물론 실세장관이나 청와대 수석비서관보다도 더 실권이 없다는 말도 있다. 그동안 헌정 경험에 비추어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국회에 나가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대독하고,야당의원들의 대정부질문 때 ‘샌드백’이 되어 주기도 한다.대통령이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바람막이로 장렬하게 ‘전사’하거나 아니면 국정분위기 쇄신용으로 기꺼이 ‘제물’이 되는 것을 숙명으로여겨 왔다. 권위주의 체제 아래 대통령과 ‘대통령의 명을 받들어 내각을 통할하는’국무총리와의 관계는 왕조시대 군신(君臣)관계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대통령이 마음먹기에 따라 1년에도 몇명씩의 총리를,365일 어느 때라도 교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 어떤 총리는 취임하자마자 대통령을 향한 ‘붉은 마음’을 가눌 길 없어 집무실 책상을 ‘임금이 계신’북쪽으로 향하도록 재배치했고,또 어떤 총리는 매일 아침 대통령에게 문후(問候)를 여쭙는 전화를 올렸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런 총리 행태는 이제 서서히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대통령도 총리를 손쉽게 임명하기는 어렵게 됐다.국회 동의 과정의 자질 검증 절차가 녹록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런 의미에서 이번 청문회는 현행 헌법의 권력구조 아래서도 대통령-국무총리 관계에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연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거부는 이미 국민적 공감대를 이루었다.대통령 아들들 구속으로 귀결된 핵심권력부패도 권력집중형대통령제에 대한 반성을 낳고 있다.따라서 적어도 차기 정권에서 총리는 권력분산적 정부 운영의 ‘책임총리제’에 한발 다가설 가능성이 크다. 아직도 대선 경쟁구도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어느 후보든 미국의 정·부통령 러닝메이트처럼 집권시 첫 총리후보를 공개적으로 내세울 경우 유권자들의 관심을 상당히 끌 수 있을 것이다.그것은 ‘제왕적 대통령’을 거부하는 민심의 흐름을 제대로 읽고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어차피 ‘대독 총리’가 주류를 이뤄온 기존 한국형 총리론은 이제 휴지통에 버려야 할 판이다. 이경형 /논설위원실장 kh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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