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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도신고 묵살/경관 4명 징계

    【광주=최치봉기자】 전남경찰청은 1일 강도사건 발생신고를 묵살한 광주동부경찰서 학동파출소 소장 박중엽경위(53),부소장 이정우경사(54),112순찰차근무자 박제윤경장(57)등 4명을 징계키로했다. 박경위등은 경찰자체조사결과 지난달 28일 새벽1시30분쯤 육군 모부대 박장균상병(21)이 L여관에 침입,주인 윤모씨(46)를 흉기로 위협하고 현금 15만원을 빼앗아 달아난 사건을 윤씨의 남편 김모씨(47)로부터 신고를 받고도 동부경찰서에 보고조차 하지도않고 묵살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 시민이 잡은 뺑소니범/경찰차 뺏어 도주/두차례 교통사고 내고 잠적

    훔친 차를 몰고 가다 연쇄충돌사고를 일으킨뒤 달아나던 범인을 시민이 격투끝에 붙잡아 경찰에 넘겼으나 경찰관 2명이 놓쳐 말썽이 되고 있다. 더구나 이 범인은 112 순찰차를 몰고 달아나다 다시 연쇄충돌사고까지 일으켰다. 1일 상오5시30분쯤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대림성모병원 앞길에서 경기3르7080호 엑셀승용차를 몰고가던 30대 남자가 마주오던 서울6후1548호 봉고승합차(운전자 배동철)를 들이받고 2㎞쯤 달아나다 다시 서울1아6391호 택시(운전자 이동기)와 정면충돌,이씨등 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범인은 그대로 달아나려다 사고를 목격하고 뒤쫓아온 이연모씨(26)에게 격투끝에 붙잡힌뒤 신고를 받고 출동한 노량진경찰서 112순찰차에 넘겨졌다. 그러나 대방파출소 강모경장(38)등 2명이 사고현장을 수습하기 위해 범인을 순찰차에 남겨 놓은채 차에서 내리는 순간 범인은 순찰차를 몰고 구로공단쪽으로 달아났다.범인은 이어 중앙선을 넘어 마주오던 봉고승합차와 프레스토승용차를 차례로 들이받은뒤 구로공단역 부근에 순찰차를 버리고 도망쳤다.
  • 파출소 경관이 잡은 떼강도/박찬구 사회부기자(현장)

    ◎비번날 골라 3일잠복끝에 수갑 채워 『좁은 골목길에서 20여분동안 차량 추격전을 벌이면서 강도들을 놓치면 끝이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서울 동대문경찰서 창신1파출소 소속 김인호경장(40·가명)은 1일 국민들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한 떼강도를 검거하느라 지난 닷새동안 겹친 긴장과 피로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듯 목소리마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난달 27일 평소 알고 지내던 한시민으로부터 사무실 강도들과 인상착의가 비슷한 청년들이 성남시 금광동의 현대다방을 아지트로 삼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김경장은 하루 20시간씩의 방범근무를 해야하는 짝수날짜를 피해 비번인 지난27일과 29일 하오 두차례에 걸쳐 다방주변에서 잠복근무를 하면서 사무실강도단 4명이 거의 매일 이 다방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김경장은 비번인 31일을 범인검거를 위한 D데이로 잡고 이날 하오5시30분쯤 수갑과 가스총등으로 무장하고 파출소부소장 조용필경사(54)와 신호섭경장(35·가명)등과 함께 자신의 엑셀승용차를 몰고 이 다방앞 노상주차장에 도착했다. 『하오7시쯤 일당중 1명은 쏘나타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렸고 40분쯤뒤 나머지 3명이 프린스에 올라탔습니다』 대낮에 사무실을 털 정도로 노련하고 대담한 범인들은 곧 자신들이 미행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폭6m쯤의 좁은 길을 시속40㎞의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핸들을 꽉 붙잡고 불과 1m간격으로 이들을 추격할때는 긴장감으로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왔고 10평남짓의 방 두칸짜리 연립주택에서 고생만시킨 처와 두아들의 얼굴이 눈앞에서 자꾸 아른거렸습니다』 하오8시쯤 2㎞남짓 골목길을 필사적으로 달리던 범인들의 차가 왕복2차선도로를 나서자 김경장은 중앙선을 넘어 대각선방향으로 프린스를 가로 막았다. 순간 김경장은 스프링처럼 차에서 내려 범인들이 반항할 틈도 주지않고 주범 박흥순씨(29)등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경찰의 위신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 비상령속 경관 잇단 “탈선”/윤화 뺑소니에 주점서 만취 행패도

    떼강도사건으로 전국에 방범비상령이 내려진 가운데 경찰간부등 경찰관의 뺑소니운전·음주소란등 기강문란행위가 잇따르고 있다. 31일 0시30분쯤 서울 구로경찰서 방범지도계장 곽종철경위(53)가 자신의 서울2투6031호 쏘나타승용차를 몰고가다 외환은행 양평동지점 앞길에서 무단횡단하던 노정태씨(31)를 치어 부상을 입히고 골목길로 5백m쯤 달아나다 서울6러4711호 승합차(운전자 김정만·46)를 들이받고 다시 도망가다 서울영등포경찰서소속 112순찰차에 붙잡혔다. 이에앞서 지난 30일 하오11시쯤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2가 주점에서 서울 성북경찰서 동소문파출소소속 명찬주경장(41)이 비상근무중 정복을 입은 채 술에 만취돼 집기를 부수고 손님을 폭행하는등 소란을 피웠다. 손님 10여명은 명경장의 행패에 항의,동소문파출소로 몰려가 사과를 요구하며 3시간동안 항의했다. 서울경찰청은 곽경위와 명경장을 파면조치후 형사입건하기로 했다.
  • 장터:중/칠패·배오개장터 남·동대문시장으로(서울 6백년 만상:8)

    ◎곡류·야채 취급… 서민들의 사랑받아/일제땐 일인손에 6·25땐 잿더미로/“도깨비시장” 오명씻고 이젠 하루매상 수백억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은 우리민족의 애환과 이 땅의 상거래 변천등 그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는 수도 서울의 양대 장터이다. 두 시장의 과거와 지금의 모습은 신기할 만큼 닮아있다.시장이 형성되기까지의 배경과 수세기에 걸친 부침의 세월,그리고 현재 당면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마치 일란성쌍둥이처럼 아주 흡사하다.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 철폐로 도약기를 맞은 남대문의 칠배와 동대문의 배오개장터는 뜨내기 난전형태를 벗고 급속히 성장,종로의 육의전,마포의 나루장터와 함께 서울의 상권을 분할하면서 오늘날의 남대문·동대문시장의 기틀을 다졌다. 종로가 유기와 옷감,마포가 어물과 땔감·소금을 많이 취급한데 비해 남대문과 동대문 두 시장은 당시 서민들의 애환이 깃든 장터답게 곡류와 야채를 많이 거래했다. 성장기에 들어선 두 장터는 19세기말에 또 한번의 도약기를 맞았다.개항으로 외국문물이 대거 밀려들어오고 1894년 갑오경장으로 사농공상의 신분제가 붕괴되면서 상업활동이 자유화됨을 틈타 쇠락일로에 있던 육의전을 간단히 제치고 서울의 상권을 완전히 거머쥐었다. 그러나 두 장터는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을 계기로 흥망을 거듭하는 시련속에 빠져들었다.화폐개혁과 자본을 앞세운 일제의 핍박으로 이 땅의 민족자본은 거의 도산했다.이런 가운데 동대문권의 광장주식회사,남대문권의 조선농업주식회사가 각각 발족돼 두 장터는 근대시장으로 변모하는 계기를 맞았다. 그럼에도 일인들의 상권장악을 위한 공략은 갈수록 거세져 마침내 지난 36년 남대문시장이 일인회사인 중앙물산으로 넘어가고 아울러 일제말기의 가혹한 공출로 물건이 고갈,시장기능이 다시 마비되는 곡절을 겪었다. 광복후 두 장터의 상인들은 새로운 청사진을 마련하나 이 역시 곧 전쟁으로 잿더미로 변했다.그리고 휴전뒤 폐허위에 시장을 다시 재건하지만 이번에는 엄복만과 이정재등 자유당시대의 소위 깡패들에게 곤욕을 치렀다. 두 시장은 이처럼 수시로 닥쳐온 시련들을 때로는애착으로,때로는 의지와 저항으로 차례로 극복하며 명맥을 유지,오늘날 우리나라 시장의 대명사로 자리를 잡았다. 특히 남대문시장은 지난 64,65,68,75년등 몇차례 대화재를 입었지만 한편으로는 새 건물이 들어섬으로써 시장이 현대화되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의 이같은 고된 발자취들에는 수천년을 끈기로 버텨온 우리 민족의 뜨거운 숨결이 살아 숨쉬고 있다.즉 이들의 성장과 시련은 바로 우리 민족의,우리 경제의 성장과 시련이라 할 수 있다. 두 시장의 이같은 역사의 이면에는 물론 그늘진 구석도 있다.남대문시장은 한때 미제상품과 밀수외제품이 범람,「양키시장」「자유시장」등으로 불렸다.「도깨비시장」의 달갑잖은 별명도 얻었다.도깨비방망이를 두드릴 때처럼 없는게 없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단속반을 피해 상인들이 도깨비처럼 사라졌다가 나타난다고 해서 불려진 이름이라는 설도 설득력이 있다.동대문시장 역시 전쟁뒤 외국의 원조품으로 들어온 구호물자가 빠져나와 유통되는 본거지라 해서 「구호물자시장」으로 불리고 또 단속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아예 진열대에는 상품을 비치하지 않은채 감춰놓고 판다고 해서 「깡통시장」으로도 불리는등 여러가지 오명들을 갖고있다. 최근에 들어와서도 두 시장은 고급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에 밀려 한때 크게 고전하기도 하지만 특유의 끈기로 위기를 극복,서울올림픽을 치르면서는 장터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서울의 관광명소로서 새로운 위치를 굳혔다. 어쨌든 곡절도 많고 사연도 많은 우리나라 전통 재래시장의 양대줄기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은 오늘도 하루 수백억원의 매상고를 올리면서 각기 수십만명의 장꾼을 불러들이고 있다. 닮은꼴의 공동운명체 두 시장은 그러나 과거에도 늘상 그래왔듯이 지금 또다른 시대환경에의 적응을 요구받고 있다.
  • 3인조 강도 탈취 차량 발견/청량리 부근서

    ◎범인 추정 지문 4개 채취 서울에서 3인조 떼강도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가운데 13번째 서울 방배동 3인조 강도사건때 범인들이 빼앗아 달아났던 승용차가 28일 밤 늦게 발견되고 이 차에서 범인들의 것으로 보이는 지문들이 채취됨에 따라 사건수사가 바짝 활기를 띠고 있다. 이날 하오6시쯤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1동 미주아파트 상가A동 지상주차장에서 순찰근무를 하던 청량리경찰서 교통관리계 소속 이재현경장이 지난 25일 발생했던 방배동 성주빌딩 3인조 강도사건때 범인들이 피해자 윤모씨(42)로부터 빼앗온 타고 달아나 경찰의 수배를 받아오던 서울1즈 3642호 은색 캐피탈승용차를 발견했다. 이경장은 『평소 도난차량들이 가끔 발견된 이 상가 주차장을 순찰하다가 수배차량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날 발견된 도난차량에서 범인들의 것으로 보이는 지문 4개를 채취해 감식작업을 벌이고 있다. 또 청량리경찰서는 이 차량을 관할 방배경찰서로 보내 정밀조사를 의뢰하는 한편 형사 60여명을 동원,이 일대의 여관·유흥업소 등을 상대로 검문검색을 벌였다. ◎용의자 3명수사/불심검문뒤 행방감춰 서울 관악경찰서는 28일 최근 잇따라 일어난 3인조 강도사건의 용자로 곽모씨(23)등 20대 남자 3명을 지목,수사를 펴고 있다. 경찰은 지난 24일 상오1시30분쯤 관악구 봉천9동사무소앞에서 열쇠가 꽂힌채 세워져있던 흰색 소나타 도난차량 주변에서 서성거리던 곽씨등 3명을 불심검문,이들의 신원을 확인한 뒤 일단 귀가시켰으나 이후 곽씨등이 집에 들어오지 않고 행방을 감췄다는 것이다.
  • “「이」­전아랍국 연내 평화협정”/이스라엘 사리드 환경장관 전망

    ◎시리아 등 3국과 협상재개 【워싱턴·카이로·예루살렘 외신 종합】 아랍국들의 협상대표들은 24일 워싱턴에서 이스라엘 대표와 1대1 협상을 재개할 계획이다. 시리아,레바논,그리고 요르단의 고위 협상대표는 이스라엘측 고위 대표를 언론을 피해 워싱턴의 비공개 장소에서 만나기로 돼있으며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실무대표단은 이스라엘 실무대표단과 별도로 회담을 갖도록 일정이 잡혀있다고 미국의 한 관계자가 23일 밝혔다. 이번 워싱턴 회담에서는 특히 시리아와 이스라엘간의 회담이 관심을 끌 것으로 보인다.두나라는 이스라엘이 PLO와 비밀협상을 통해 지난해 9월 평화협정을 체결한이래 양국간 협상을 중단해오고 있다. 한편 중동문제 해결을 위한 당사국들의 외교노력이 구체화되고 있는 가운데 이스라엘은 올해 전 아랍국가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으로 본다고 요시 사리드 이스라엘 환경장관이 23일 말했다. 또 하페즈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이스라엘이 골란고원에서 전면철수할 것을 약속한다면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만날 태세가 돼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런던에 본부를 둔 아랍어 경제지 알 알람 알 욤이 23일 보도했다.
  • 기후협약 후속회담 3월 베를린서 개최

    【본 AFP 연합】 지난 92년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개최된 지구 정상회담에서 기후변화협약에 조인했던 국가들이 오는 3월 독일에서 첫 후속회담을 갖기로 했다고 클라우스 퇴퍼 독일 환경장관이 18일 밝혔다. 퇴퍼 장관은 후속회담이 유엔 총회의 동의로 오는 3월27일부터 4월7일까지 열리기로 예정돼 있으며 베를린에서 개최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 회담의 목적은 기후변화기초협약이 지난해 3월21일부터 발효된 이후 한햇동안의 과정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며 이 모임은 앞으로 연례행사화 될 전망이다.
  • 경관 21명 추가전보/송파서 「떡값」 관련

    서울경찰청은 18일 「추석떡값」수수사건과 관련,물의를 빚은 서울송파경찰서 김모경장(35)등 형사과 직원 21명을 서울시내의 다른 경찰서로 추가 전보조치했다. 90년 10월 송파서 개설때부터 근무한 직원을 대상으로한 이번 인사는 지난 17일 형사과소속 반장 8명 전원과 경사급등 17명을 전보조치한데 이어 단행된 것으로 이 사건으로 전보조치된 직원은 모두 38명으로 늘었다.
  • “골란고원 철수땐 국민투표”/「이」정부,공식입장 의회에 통보

    【예루살렘·니코시아 AP AFP 연합】 중동평화회담 돌파구 마련을 위한 미·시리아 정상회담이후 주목을 받고있는 골란고원 반환문제에 대해 이스라엘측은 17일 골란고원 철수시에는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모르데차이 구르 이스라엘 국방차관은 빌 클린턴­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의 제네바 정상회담이 열린지 하루만인 이날 의회에서 이츠하크 라빈 정부의 공식입장임을 전제,『골란고원에 관한 우리측의 중요한 양보가 요구될 경우 정부는 이 문제를 국민투표에 회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정부가 골란고원 철수와 관련,법률상 의무적으로 국민투표를 실시할 필요는 없으며 요시 사리드 환경장관은 기자들에게 정부가 국민투표 실시를 확정한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 「이」,시리아 평화제의 환영/페레스 외무

    ◎월말 관계개선협상 재개 채비 【카이로 연합】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외무장관은 16일 제네바에서 하페즈 알 아사드 시리아대통령이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과 가진 정상회담후 밝힌 이스라엘과의 관계정상화 용의표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이집트의 알 아흐람지가 17일 보도했다. 페레스외무장관은 이스라엘로서는 이달 하순 시리아와 평화협상을 재개할 준비가 돼있다고 말한것으로 이 신문은 전했다. 또 요시 사리드 이스라엘 환경장관은 아사드대통령의 성명은 이스라엘과 완전 평화및 관계정상화를 위한 태세가 돼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이 신문은 덧붙였다. 사리드장관은 아사드의 발언에 만족한다면서 그가 시리아의 전략적 선택으로서 평화를 거론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고 신문은 말했다.
  • 교착상태 중동회담에 새 전기/클린턴­아사드회담의 성과

    ◎“시리아 대화상대 인정” 큰 의미/이스라엘/「아랍보이콧」 해제로 실리추구/시리아/골란고원 확보·서방원조 손짓 「아랍형제국」의 미세 시리아가 16일 대이스라엘 관계정상화 용의를 천명하고 나섬으로써 침체국면을 걷던 중동평화회담에 다시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에게 가장 껄끄러운 상대였던 아랍의 군사강국 시리아는 중동평화회담의 마지막 장애로 인식됐던 나라다.미국은 시리아의 참여 없는 중동평화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해온 터였다.시리아는 그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간의 평화협정에 불만을 터뜨려왔을 뿐 아니라 오는 24일 워싱턴에서 계속될 평화회담에도 불참할 것임을 공언해왔다. 따라서 이번 미­시리아 정상회담의 가장 큰 성과는 평화회담 테이블에 시리아를 끌어들였다는데서 찾을수 있을 것이다.클린턴 대통령은 정상회담후 기자회견에서 24일 워싱턴에서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의 협상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시리아가 지금까지 강경노선을 견지한 직접적인 이유는 골란고원문제에서 비롯됐다.골란고원을 반환하지 않으면 평화협상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시리아의 일관된 입장이었다.반면 이스라엘은 평화에 대한 확실한 담보 없이는 골란고원을 반환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왔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골란고원의 안전보장을 위해 미군파견을 요청해왔다.이와 관련,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정상회담후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요청이 있을 경우 이를 검토하겠다고 말해 평화협상의 진전 가능성을 예고했다. 시리아의 영토였다가 지난 67년 3차중동전때 이스라엘에 점령된 골란고원은 73년 시리아가 일부를 회복했으나 아직도 대부분 이스라엘 점령지로 남아있는 전략요충이다.골란고원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로부터 불과 55㎞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골란고원반환외에 또하나 시리아가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얻으려 한 것은 미국이 시리아를 테러국 리스트에서 제외,서방의 원조를 약속받으려는 것이었다.미국은 이에 대해 아직까지 확실한 약속은 하지않고 있다. 자원빈국 시리아에게 있어서 서방의 원조는 골란고원문제 못지않게 절실한 것이다.지난 90년 시리아가 미국의 이라크 제재에 협조한 것도 서방의 경제원조를 노린 것이었다. 시리아의 대이스라엘 화해제스처는 결국 경제적 실리를 노린 현실적 대안이라는 진단이 많다.이점에 있어서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이스라엘도 아랍국들의 대이스라엘 금수조치인 이른바 「아랍 보이콧」으로 영토를 강점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온 터였기 때문이다. 정상회담에 앞서 이스라엘의 환경장관이 골란고원 반환 가능성을 시사한 것도 경제적 실리에 대한 의지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정상회담을 전후해 확인된 시리아와 이스라엘 양측의 실리에 입각한 외교정책은 중동평화의 실질적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회담전 워런 크리스토퍼 미국무장관이 예견했듯이 미­시리아 정상회담이 평화정착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는 못했다.그러나 이번회담은 양국정상이 중동평화 문제를 놓고 오랜세월 서신과 전화통화를 가져온 끝에 성사된 첫번째 회담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 같다.
  • 이,골란고원 반환 시사/“중동평화협상 난관 타개위해”/환경장관

    ◎미·시리아정상 오늘 논의할듯 【예루살렘·제네바 AFP 로이터 연합 특약】 요시 사리드 이스라엘 환경장관은 15일 중동평화협상의 진전을 위해 시리아에 대해 골란고원에 대한 주권을 포기할 지 모른다고 밝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사이의 협상팀가운데 한사람인 사리드장관의 이 발언은 16일 클린턴 미대통령과 하페즈 알아사드 시리아대통령간의 정상회담에 하루앞서 나온 것이어서 주목된다. 사리드장관은 『전반적인 안전보장없이 이스라엘이 시리아에 어떤 양보조치를 준비하지 않고 있듯이 시리아도 골란고원을 되돌려받기 전까지는 어떤 양보도 없을 것』이라고 밝히고 『이스라엘쪽에서는 끝내 골란고원을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한편 클린턴 미대통령은 일요일인 16일 제네바에 전날 도착한 알아사드 시리아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2년이상 계속된 이스라엘의 대시리아 교착상태를 풀기 위해 정상회담을 갖는다. 앞서 시리아는 15일 이스라엘과의 어떠한 단독 비밀협상도 하지 않을 방침임을 재확인했다.
  • 「갑술경장」의 기운/안공혁 신용보증기금 이사장(굄돌)

    으레 원단에는 지난해의 다사다난을 거울삼아 저마다의 소망을 담은 일년지계를 호기있게 세우곤 한다.하지만 지척의 시계조차 트이지 않는 이 시대의 불확실성 앞에서는 마음가짐만 사뭇 신중해질 뿐,거친 밑그림이나마 선뜻 그려내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이럴 때는 온고지신의 혜안을 부릅뜨고 금세기의 개띠 해에 있었던 여러 시행착오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고 넘어가는 것도 상계일 수 있겠다. 당장 금세기 첫 개띠 해인 1910년에 경술국치라는 쓰라린 상처를 더듬게 된다.더욱이 UR협상안 발효를 단 일년 앞둔 지금,선진열강의 치열한 개국공세를 맞아 당시의 상황이 재현되는듯 하여 격세지감이 무색하기만 하다.1934년 갑술년에는 전 인류를 공포와 도탄에 빠트렸던 2차세계대전의 주범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했으며,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맞은 1946년 병술년에는 그 자신이 개띠인 영국의 명재상 윈스턴 처칠이 소련권과 서방세계 사이에 「철의 장막」이 가로막혀 있다는 연설을 통해 지란했던 냉전시대의 도래를 세계만방에 알렸다. 이어 1958년 무술년에주한미군의 핵무기도입 발표 공개가 한반도에서의 전쟁재발위기를 고조시키는등 금세기 중반까지 개띠 해의 세계는 대립과 반목의 역사로 얼룩져 있다.여기에 1970년 경술년에 이 땅에 새 농촌을 건설하겠다는 농촌근대화 10개년계획이 발표된 것과 아울러,1982년 임술년에는 미국산 쌀 도입에 따른 뇌물수수설에 연루되어 국제적 망신을 자초한 일도 있었다. 물론 개띠 해라고 좋은 일이 없었을까만은,주로 암울했던 과거의 궤적을 좇아봄으로써 새해의 액땜을 대신하고자 한다.부디 이번 개띠해만큼은 지난날처럼 위로부터 강요되는 일방적 개혁이 아니라,밑으로부터의 자생적 신바람이 위로 부터의 건강한 개혁 의지와 보기좋게 어우러져 진정한 「갑술경장」의 기운이 온 나라를 휩쓰는 호시절이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보탠다.
  • 떡값경관 1명 영장/경찰서장 직위해제

    경찰청은 13일 서울 송파경찰서 형사과 직원들의 추석「떡값」수수와 관련,관내 유흥업소를 돌며 1천3백만원을 받은 형사계소속 최두환경장(49)을 파면,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은 또 지휘감독 책임을 물어 당시 서장인 권령수 본청 보안2과장(총경)과 송파경찰서 이승일형사과장(경정),고경철형사계장(경감),김행곤형사1반장(경위)등 4명을 직위해제 했다.
  • 한국학 기본용어집 발간

    한국국제교류재단(이사장 손주환)은 한국학을 연구하는 외국학자들을 위한 「한국학 기본용어집」을 펴냈다. 이 책은 송기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과학연구부장을 책임연구원으로 12인의 각 부문 전문학자들이 참여해 펴낸 것.한림대 이기백교수가 쓴 「한국사신론」의 1984년판 영역본과 1897년 윌킨슨이 펴낸 갑오경장연구,그리고 대한교과서의 1991년판 「국사학습사전」에 수록된 용어와 참여한 학자들이 선택한 용어를 각 항목별로 한글 및 한자·표준 로마자 표기·용어가 지닌 뜻을 차례로 실었다.값은 1만2천원(미화15달러).
  • 떡값받는 경관 구속수사/경찰청 감사확대

    ◎5천만원 뜯은 송파서 2명 조사 경찰청은 11일 일선 경찰서에서 명절때 관내 업소들로부터 「떡값」을 받은 사례가 밝혀짐에 따라 전국 대도시 경찰서에 대해 집중 감사를 실시,이같은 비리가 밝혀질 경우 관련자들을 처벌하라고 각 시·도 지방경찰청에 지시했다. 경찰은 이번 집중감사중 비리가 발견될 경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구속수사키로 했다. 한편 서울경찰청 감찰반은 11일 서울 송파경찰서 형사과 소속 일부 경찰관들이 관내 40여개 유흥업소들로부터 5천여만원을 받은 혐의를 잡고 조사를 벌이고 있다. 송파서 형사과 최모경장(50)등은 지난해 추석을 앞두고 관내의 안마시술소와 룸사우나를 갖춘 대형 여관을 돌며 떡값 명목으로 한 업소당 1백만∼1백50만원씩을 거두어들였다는 것이다. 서울경찰청 감찰반은 최경장등 송파서 형사과소속 경찰관 12명을 대상으로 이들이 받은 돈의 액수및 이 돈가운데 일부가 상급자들에게 전해졌는지의 여부,조직적으로 상납을 받았는지 등을 캐는 한편 업주들로부터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 공무원 근속승진 확대/9년근속 8급공무원 7급으로/각의의결

    ◎올 6천명 혜택 정부는 6일 이회창국무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하위직 공무원의 자동승진 범위를 9급에서 8급까지 확대하는 내용의 「행정기관 조직정원에 관한 통칙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 개정안은 8급공무원으로 9년동안 근무한 공무원은 자동적으로 7급으로 승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기능직 공무원의 자동승진 범위도 10등급에서 9등급까지 확대됐다. 자동승진 범위의 확대는 경찰및 소방공무원에도 적용돼 9년이상 근무한 경장과 소방교는 올해부터 경사및 소방장으로 각각 진급하게 된다. 정부의 이번 조치로 올해 자동승진할 공무원은 6천여명에 이르게 된다. 또 정부조직의 확대를 억제하기 위해 기구의 신설이나 인력의 증원이 예상되는 사업을 추진할 때는 사전협의를 거치도록 했다. 각의는 이와함께 중앙행정기관의 주요 계장직위에 대한 복수직급제의 도입을 골자로 하는 각부처 직제개정안을 의결했다.
  • 갑오경장 1백주년… 그 개혁운동 재평가와 역사적 교훈

    올해는 갑오경장 1백주년을 맞는 해다.갑오경장은 1894년7월부터 1896년2월까지 약 1년반동안 지속된 제도개혁운동이었다.이 기간동안 우리나라는 구시대의 질서에서 신시대의 질서로 편입되는 엄청난 변혁을 겪었다.지난해 새정부 출범 이후 우리는 또다른 개혁의 시대를 숨가쁘게 달려왔다.1백년만에 다시 변혁의 기회를 맞이한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갑오경장이 제도의 변혁이었다면 지금은 당시의 엄청난 변화에 비견될 의식의 개혁이다.올해는 새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의 성패를 가늠할수 있는 중요한 시점.「외세에 의존한 정권탈취 및 유지책」이라는 시각에서 「기반이 확보될 때까지 시한부로 일본의 후원을 기대한 자율적인 개혁운동」으로 재정립된 갑오경장을 재조명하고 지금 추진되고 있는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 역사적 교훈을 찾아본다. ◎재평가 작업/민중지지 못얻은 미완의 제도개혁/농민 염원 수용… 국정에 새바람/민주·자립 등 근대적 이념 표명/“일제 등에 업고 권위주의적 추진으로 실패” 갑오경장은 조선조를거치며 쌓인 민중들의 원성이 1894년 동학농민봉기로 나타나자 새로 들어선 정권이 그 불만을 아우르기 위해 시도한 제도개혁운동이었다.그로부터 1백년뒤,제3공화국 이후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염원이 문민정부의 등장을 가져오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과 크게 다를바 없다. 다만 갑오개혁의 주체들은 일본이라는 외세의 무력의 도움을 받아 집권했고 「잠정적」이라는 단서는 달았지만 그들의 지원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여기에 갑오경장 주역들의 「개혁은 곧 서구화 내지 일본화」라는 소신은 그것이 비록 역사적 관점에서 옳은 판단이었다 할지라도 구성원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갑오경장이 미완의 개혁으로 끝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또 갑오경장이 그동안 그 역사적 비중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지 못해왔던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혁명적 이상추구 그러나 갑오경장이 재평가되고 있는 시점에서 되돌아 본 갑오개혁파의 개혁정책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 이상의 변혁을 추구했음을 알수있게 해준다. 갑오경장을 주도한 개화파 관료들은 집권하자마자 외무아문을 신설해 근대적 자주외교를 펼칠 준비를 갖추었다.이어 국호를 대조선제국으로,국왕을 대조선황제로 부르고 1896년부터 건양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채택해 국가적 자주 독립을 내세웠다. 이들은 민주주의적 발상에 입각한 몇가지 참신한 정치제도개혁도 실시했다.개혁추진의 핵심인 군국기무처를 입법·자문기관인 「의사부」로 만들어 행정부에 대치시키는 의회설립안을 만들었던 것도 이 가운데 하나이다.또 조선협회라는 일종의 정당을 발족시키기도 했다. ○지방제도 일원화 이들은 8도·5유수부로 대표되는 종래의 지방행정체제도 23부·3백37군으로 개편했다.지방제도를 일원화함으로써 행정의 합리화를 기함과 동시에 지방관으로부터 사법권과 군사권을 박탈해 근대관료적 색채가 농후해졌다.또 「향회조규」와 「향약변무규정」을 발포해 초보적인 지방자치제를 실시코자 했다. 경제분야에도 힘을 기울였다.개혁파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해 재정정리와 민간산업 진흥을 도모하고 근대적 자립경제의 기초를 다지는 경제개발 계획을 세웠다.이 계획은 경인철도 건설을 통해 수입을 늘리는 외에 왕실재정을 정리해 정부수입을 늘리는 한편 새로운 세원을 발굴하고 세수의 결손을 줄이며 민간상공업을 진흥한다는 내용까지를 포함한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능력본위의 평등사회를 실현하겠다는 개화파의 사회개혁 의지도 중요한 대목이다.이들은 집권하자마자 「사민동등지법」을 확립해 전통적 신분제도의 철폐에 착수했다.양반과 상민을 구별하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 같은 양반에서도 문반과 무반의 차별을 없앴다.공사노비를 풀어주고 인신매매를 금했으며 역정 광대 백정도 모두 면천케 했다.이밖에 죄인에 대한 고문이나 연좌법을 폐지하고 너무 이른 결혼과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등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해외유학 적극적 개화파는 과거제도 중심의 교육제도가 조선을 쇠퇴케 한 근본원인이라 생각해 합리성과 실용 위주로 교육제도를 개선코자 했다.이에 곳곳에 학교를 세우고 본국문,즉 한글의 사용을 장려해 정부의 공문과 관보도 국한문 혼용체나 순한글로 쓰도록 했다.또 적극적인 유학정책을 펴 1895년에는 약2백명을 국비로 도쿄에 유학시켰고 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는 배재학당에 2백명의 관비장학생을 입학시켜 신학문을 배우게 할 계획도 마련했었다. 갑오개화파의 이 모든 정책 대부분은 물론 일본과 관련한 부정적인 해석이 있어왔다.또 대부분이 민중의 의사를 도외시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만으로도 그동안 권위주의 시대에 대항해 온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시각의 존재가 필요해졌다.권위주의 시대에 역사에서 필요한 교훈이 한방향으로 귀결되었다면 문민시대에 필요한 역사적 교훈은 다양하기 때문이다.갑오경장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개혁의 교훈을 찾으려 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또 갑오경장을 일방적인 예속의 역사로 해석하는 것은 자존심을 위해서도 이제는 벗어나야 할 대목이다. ◎발단·경과/대원군추대,친일내각 수립/20개월간 전반적 혁신 단행 민씨정권은 1884년 갑신정변을 수습하고 나름대로 서구의 기술을 도입하는등 근대적 개혁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열강의 침투에 속수무책이었다.또 지배층 위주의 개혁이었기에 농민층과의 충돌은 불기피했다.1894년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자력진압이 불가능한 민씨정권은 청에 응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농민군의 요구를 일정수준으로 받아들이는 선에서 협상을 시도했다.그러나 민씨정권의 요청에 따라 청군이 아산만에 들어오자 일본은 천진조약을 빌미로 곧 이어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켰다. 민씨정권은 청·일양군공동철병론을 주장했으나 일본은 조선의 개혁에 대한 청·일공동지도론을 제의했다.이에 청이 내정간섭이라며 이를 거부하자 일본은 침략을 위한 독자적인 개혁의 원칙을 제시했다. 민씨정권은 이 요구를 거절하고 농민군의 폐정개혁요구를 반영하는 선에서 정권의 위기를 넘기려 했으나 일본은 7월23일 경복궁을 기습하여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을 추대했다.이어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계와 중립계로 정부를 개편했다. 1894년7월에서 1896년2월에 이르는 갑오경장기간 정계에서 부침하던 정파는 다섯 그룹으로 대별된다.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유길준등 갑오경장파와 박영효 서광범등 갑신정변파,박정양 이완용 윤치호등 미국·러시아등 외국공관을 배경으로 하던 정동파,대원군 이준용 이태용등 대원군파,그리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둘러싼 홍계훈 이도철 이학균등 궁정파등이었다. 이 가운데 갑오경장 전기간에 걸쳐 가장 오래 정권을 장악하고,따라서 개혁운동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세력은 갑오경장파였다. 이들은 처음에 대원군파와의 제휴로 집권해 제1개혁기(1894년7월27일∼12월17일)에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개혁을 주도했다.이어 제2개혁기(12월17일∼1895년5월21일)에는 갑신정변파와 연립내각을 구성해 공동으로 개혁을 추진했다.제3개혁기(5월31일∼7월6일)에 갑오파는 갑신파와의 알력으로 김홍집과 조희연이 내각에서 사퇴했지만 다른 멤버는 남아 박영효가 주도하는 개혁에 동참했다.갑오파는 제4개혁기(7월6일∼8월28일)와 제5개혁기에는 정동파와 궁정파의 합세로거세될 위기를 맞았으나 제6개혁기(10월8일∼1896년2월11일)에 궁정파가 실권하자 다시 득세,집권하여 개혁운동을 재개했다. 갑오경장은 그러나 과격한 개혁조치에 불만을 품어오던 고종이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대일감정이 극도로 악화된 사이 1896년2월에 러시아공사관으로의 망명(아관파천)으로 개혁정권이 붕괴되고 친러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 교훈/“민의따른 개력이 최상의 통치”/폭넓은 지지속 군사·재정 뒷받침 필수/“외세의존땐 성공 못한다” 역사의 명제 갑오경장이란 지금으로부터 1백년전 1894년에 동학농민봉기와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추진되었던 획기적인 근대화운동을 뜻한다.이 개혁운동을 통해 종래의 중국적인 우리나라 통치·행정구조 및 외교·재정·군사·경찰·사법제도 등이 일본 내지 서구식으로 크게 바뀌었다. 갑오경장때 추진된 일련의 「혁명적」개혁조치는 그후 많은 수정을 거치면서도 보존되어 오늘날 한국 사회 및 문화의 일각을 이루고 있다. 갑오경장은 1894년 봄의 제1차동학농민봉기를 계기로 서울에 불법적으로 침략해온 일본군이 7월23일 경복궁을 강점한 상황하에서 개시되었다.이때 (흥선)대원군을 받든 일군의 친일개혁관료들이 신정부를 구성하고 군국기무처라는 초정부적 입법기구를 만들어 그 곳에서 2백여개의 개혁안을 심의,채택함으로써 역사적인 「대경장」의 막을 올렸던 것이다. 이 개혁운동에는 처음부터 일본의 입김이 작용하였다.즉,갑오경장에는 「타율적」인 측면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그러나 갑오경장을 전적으로 일본의 지도와 후원에 힘입은 개혁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개혁운동 초반에 개혁을 주도했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박정양 유길준등 20여명의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1880년대 초반에 외교사절단원 혹은 유학생으로서 일본·청국·미국 등에 건너가 세계정세를 파악하고,특히 명치일본의 「문명개화」운동과 청국의 양무운동 등을 조사,연구한 끝에 조선의 자주독립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개화,자강의 방안을 고안하여 이를 실천에 옮겼던,나름대로 애국심이 강한 개명관료들이었다.그들은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을 거치면서 청국이 종주권을 내세워 대한간섭을 강화하자 정치적으로 실세하여 국내외에서 망명내지 유배생활을 강요당하가나 정부요직에서 소외당하였다.따라서 그들은 반청·독립사상이 강한 반면에 친일적 성향을 띠었으며 또 친청보수세력인 민씨척주에 대해 비판적이면서 대원군에게 호의적인 세력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개화·자강정책을 연구·실천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제도개혁을 스스로 추진할 능력과 의욕이 있었다.과연 초기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대원군의 지도하에 동학농민군이 요구한 폐정개혁안을 수렴하면서 제도개혁을 거의 완전히 자율적으로 추진했다.갑오경장 중반에 내각 대신 혹은 협판으로서 개혁운동에 참여하였던 박영효·서광범·윤치호 등은 갑신정변(1884)때 자신들이 겪은 일본정부의 배신을 귀감으로 삼되 미국·일본에서의 망명생활,유학에서 스스로 터득한 개혁사상을 기초로 자율적 개혁추진을 도모했다.이러한 점에서 갑오경장은 조선인 개화파 관료들의 「자율적」 개혁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조선의 개혁관료들은 우선 국민 상하의 존경과 지지를 얻는데 필요한 위신이 부족한 데다,자기들의 권력을 뒷받침해 줄 독자적인 군사력과 개혁의 실현에 필요한 자긍력이 없었다.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기반을 확보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일본의 후원 내지 지원을 받으려 하였다.결국 이러한 그들의 대일본 의존정략이 갑오경장을 중도반계의 실패작으로 만든 요인이 되었다. 갑오경장은 왕조의 유신과 중흥을 도모했던 조선왕조 최후의 개혁운동이었다.이 운동에서 원래 기대되었던 목적이 달성되었다면 조선왕조는 중흥되었을 것이고,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민족적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근원적으로 따져 볼 때,갑오경장은 오랫동안 축적된 조선민중들의 불만이 동학농민봉기라는 과격한 형태로 표출된 다음 정부가 서둘러서 개시한 개혁운동이다.만약 조선정부가 민중들의 불만요인을 미리 파악하여 적시에 필요한 개혁을 축적해 나갔더라면 외세의 간섭도 면하고 또 갑오경장 같은진통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여기에서 우리는 집권자가 국민들의 요망을 미리 미리 알아차려 시의적절하게 작은 규모의 개혁들을 하나 하나 펼쳐나가는 것이 최상의 국가경영 철학임을 깨닫게 된다.이것이 갑오경장에서 우리가 얻는 최대의 역사적 교훈이다.아울러서 우리는 개혁사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개혁세력을 뒷받침해 줄 튼튼한 군사력과 재정이 필수라는 사실을 확인하며,나아가 민중을 도외시한 외세의존적인 개혁운동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는다.
  • 이키섬의 성모궁(일본속의 한국문화:12)

    ◎신공황후의 신사… 임난·일제침략 악용/“궁밑에 적의 목10만구 묻었다” 악감정 촉발/성모상은 한국과 일본 잇는 “뱃길의 수호신” 신공황후를 모신 이끼섬의 성모궁은 크지도 않고 오래되어 보이지도 않았다.그러나 통신사가 이곳에 묵고 가던 3백년전에도 확실히 성모궁이 있었으니까 상당히 오래된 신사임에 틀림없다. 옛날의 통신사들은 성모를 모셨다는 설명을 듣고 일본인들의 미신을 비웃었다.그런 신공황후라는 무당이 신자를 정벌했다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한국침략의 구실로 이용되었다.한가지 신화가 이토록 오래 침략전쟁에 이용된 예는 달리 없다할 정도로 성모궁에 모신 귀신은 우리에게 무서운 마귀인 것이다. 중상씨가 두주를 찾는동안 안내판을 들여다 보았더니 엄청난 거짓말이 적혀 있었다. 중애천황의 부인 신공은 구주의 당진에서 이끼섬을 향해 3천2백70척의 군선을 출발시켰다.그때 배가 항해하는데 좋은 동풍이 불었다.일기를 그래서 풍본이라 했는데 황후는 이곳에서 잠시 바람을 기다려 다시 대마도의 악포로 갔다.삼한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황후는 이곳에 다시 들러 앞서 지어주신 풍본이란 이름 대신 승본이라 지어주셨다. ○안내판에 학살 숫자 안내판을 읽고 있노라니까 사주가 흰 제복을 갈아 입고 나왔다.손에는 항아리 하나가 쥐어져 있었는데 표면의 커피색 유약이 일부 떨어지고 깨어지기까지 한 골동품이었다. 『이것좀 보아 주십시오.혹시 도자기를 볼줄 아신다면 이 항아리의 제작연대를 가리켜 주십시오』 속으로는 웃음이 터져 나올듯하였으나 웃을수는 없었다.도자기 감정을 할 처지도 아니었지만 신공황후라는 무녀의 존재 자체가 하늘로 올라간 이마당에 이 항아리 하나를 가지고 다시 지상에 끌어내릴수 없기 때문이었다.항아리에 쓰인 글귀는 이러했다. 『진입,일본이끼섬 풍본궁 성모대보살 귀신을 위한 다항아리.이것을 바치나이다.희재 백양내촌생천정 20연 경백』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항아리가 제작되었다는 천정20연이란 해다.본시 천정은 19년으로 끝나고 임진위란이 일어나는 천정20년을 문록 1연으로 고쳤다.그래서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을 문록·경장의 역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항아리가 제작된 해가 1592연 바로 임진년이었다.그러고 보니 이 항아리의 내력을 알법도 하다. 희재 백양내촌이란 자는 풍신수길의 침략군이 대거 이끼섬에 도착하니까 기뻐서 이 항아리를 성모궁에 바친 것이다.그 뜻은 두말할 것도 없이 신공황후가 옛날에 삼한정벌을 하고 돌아왔듯이 이기고 돌아오게 해달라는 기도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안내판의 끝부분을 읽어보니 끔찍한 학살사실이 숫자로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적의 목 10만1천5백을 들고 돌아온 황후는 풍본의 해안가에 굴을 파서 묻고 그 위에 석축지를 쌓아 보전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성모궁의 기원이다』 ○조작된 역사의 표본 필자는 10만1천5백의 목을 잘라서 바로 이 성모궁 밑에다 묻었다는 구절을 보고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물론 신공황후의 이야기는 후대에 조작된 역사왜곡의 표본이지만 이 거짓말이 그뒤 정말 있었던 일처럼 꾸며져서 일본인의 대한인감정을 촉발시키고 그것을 다시 정치적으로 이용해서 침략전쟁을 자행하여 수백만명의 인명을희생시켰으니 치가 떨리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신공황후의 신화는 임진왜란때 이용되었을 뿐 아니라 19세기에 와서는 일제침략전에 이용되어 『한국은 본시 일본땅이었다』『조선은 신공황후때부터 일본의 지배를 받아 왔다.그러니 지금의 한일합방은 잃었던 우리땅을 되찾는 것이고 조선인은 본래의 주인을 찾아 돌아오는 것이다』라는 침략논리를 발전시켰다. 일본식민주의 사학자들은 신공황후의 신화만 가지고서는 증거가 불충분하니까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문을 훼손하여 1백년,2백년 틀리는 기사를 신공황후에 맞추는가 하면 백제왕이 위왕에게 하사했다는 칠지도를 거꾸로 위왕이 백제왕에게 바친 것처럼 꾸미다가 발각되었다. 지금도 비교적 양심적이라 평가되고 있는 고대사학자,예컨대 이노우에 히데오(정상수웅)와 같은 일본학자가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아주 부정하는데 망설이고 있다.신공황후의 이야기는 어린이용 만화같은 것인데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 우화 하나때문에 한 민주이 한 민주을 증오하고 죽이고 한 2천년 역사가실제로 벌어지고 만 것이다. 과거의 일은 앞으로도 일어날수 있다. 물론 일어나지 않을수도 있다.그러나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이끼섬의 성모궁 같은 것을 과감히 헐어 없애거나 본래의 성모상으로 되돌려 보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성모는 한국과 일본을 잇는 항군의 수호신의 어머니였다.뱃사공들이 그녀에게 빌고 그녀를 배안에 간직하고 떠나면 반드시 살아서 돌아온다는 해신이었다.그런데 어느듯 위구가 이바다에 득실거리게 되자 도적놈들과 침략자들의 목숨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바뀌고 말았다.성모가 어디 도적놈을 지켜주어서야 되겠는가.도적을 막아주어야 한다.침략자를 응징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한 마귀할머니란 누명은 벗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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