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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린턴,후세인에 냉철한 대응/차기정부의 대이라크정책 전망

    ◎“유엔결의 준수하면 화해협상” 시사/당분간은 부시의 강경책 답습예상 오는 20일 취임할 미국의 빌 클린턴 차기대통령은 좋든 싫든 「부시의 제한공습」이후의 후세인대책을 세워나가야 한다.어쩌면 클린턴이 대통령으로서 집무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맞닥뜨려야할 외교문제가 바로 이라크정책을 어떻게 수행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조지 부시대통령이 2년전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때만해도 후세인체제의 붕괴를 노렸으나 후세인은 오히려 건재를 과시,부시의 선거운동과정에서는 물론 재선에 실패한 이후에도 도발행위를 일삼아 왔다.말하자면 미국과 이라크의 관계가 부시와 후세인의 개인적인 감정싸움의 일면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반면 미국의 새행정부를 이끌 클린턴은 후세인과 특별한 악연이 없기때문에 미국과 이라크관계를 한발자국 물러서서 냉정하게 다룰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있다. 클린턴은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뒤 가진 뉴욕 타임스지와의 회견에서 후세인대통령이 국제규범에 따라 행동한다면 이라크와 「새로운 출발」을 모색할수 있음을 시사 한 것으로 14일자 이 신문이 보도했다.그는 후세인을 이라크의 이상적 지도자로 보지는 않지만 그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제거해야 할 구제불능의 인물로 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클린턴은 그러면서도 후세인이 걸프전 종전에 관한 유엔의 결의안을 끝내 준수하지 않는다면 지상전의 재개도 배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클린턴은 14일 리틀록에서의 기자회견에서는 『이라크 정책에 관한한 현재의 부시행정부와 내가 이끌게될 차기행정부 사이에 정책의 차이가 없다』고 말하고 『사담 후세인대통령과는 관계정상화를 모색할 의사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는 클린턴이 불과 하루사이에 입장을 달리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말이 「후세인의 유엔결의준수」에 역점을 둔것이지 「새로운 출발」에 비중을 둔것은 아니며 더더구나 「새 출발」이 「관계정상화」와 동의어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환기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클린턴행정부의 외교총책인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지명자는 이날 상원외교위원회의 인준청문회에서 차기정부의 대이라크정책에 대해 『어떠한 실질적인 변화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제한공습등 부시행정부의 시책을 전폭 지지한다』고 밝혔다.그는 「후세인이 변할수 있다」는 클린턴당선자의 생각은 아마도 기독교적 구원에 대한 침례교도로서의 믿음에서 연유한것 같다고 말해 클린턴이 혹시 갖고 있을지도 모를 「낙관적인 후세인관」을 미리 경계하는듯 했다. 따라서 다가올 클린턴행정부의 이라크정책은 상당기간 부시행정부의 노선을 답습할 것이라는게 일반론이다.적어도 이라크가 유엔의 결의에 따른 제반사항을 제대로 지키지않고 미국의 새 행정부를 시험하려 할때는 오히려 한술 더 뜨는 강경대응책을 구사할 가능성이 높다.클린턴은 후세인이 자신을 국제정치의 문외한으로 얕잡아보는 모욕에는 참을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후세인으로서는 국내의 경제궁핍과 이에따른 국민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미국내에 동결된 이라크자산의 국내 반입과 유엔의 경제제재를 풀어야하고 부시행정부와는 달리 클린턴행정부 아래서는 관계개선의 희망이 있다고 보아 상당기간 유엔의 결의를 준수할 가능성이 있다.그렇게 되면 클린턴행정부로서도 이라크와의 화해를 통해 국제골치거리를 덜어보려는 정책으로 전환할수도 있게 됨은 물론이다. 따라서 클린턴행정부의 이라크정책은 결국 「채찍과 홍당무」의 강온 양면 작전으로 나갈수 밖에 없게된다.단기적으로는 「채찍」을 앞세우고 장기적으로는 「홍당무」를 흔드는 자세가 그것이다.
  • “도발 불용” 강력한 정치성 응징/대이라크 공습의 성격과 전망

    ◎“클린턴시대 미의 주도역할 유지” 천명/영·불 공습 참가로 다국적군 결속 과시/후세인,“성전계속” 선언 불구 사실상 굴복 미국이 이라크의 계속되는 도발행위에 대해 제한공습으로 응징한 것은 군사적 의미보다는 주로 정치적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부시미국대통령이 퇴임을 1주일밖에 남겨두지않고서도 공습을 결행한것은 이라크의 후세인대통령에 대해 미국의 분명한 결의를 전달한 것이다. 후세인은 미국의 정권교체기를 이용해 ▲비행금지구역의 미사일 배치 ▲유엔항공기의 입국불허조치 ▲쿠웨이트 국경침범및 무기탈취등을 통해 유엔결의의 이행정도를 시험하고 미국에 새로 들어설 클린턴 행정부에 대해 자기 존재를 과시하려 했었다. 후세인은 지난 8월 유엔 무기사찰팀의 활동을 저지하는 등 날이 갈수록 걸프전 종전조건을 규정한 유엔결의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다가 이번에는 노골적인 도전자세로 「퇴임하는 부시」를 조롱하는 듯했다. 부시는 제한공습이기는 하지만 이번 군사작전을 통해 두가지의 메시지를 이라크는 물론 다른 분쟁지역당사자들에게도 보냈다고 할수있다. 하나는 유엔의 결의를 어길때는 반드시 응징이 따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탈냉전시대에 있어서도 국제평화질서유지에 미국이 주도적 역할을 할것이라는 것이다. 이번 군사조치는 부시대통령이 클린턴 차기대통령과 사전조율을 한데다 클린턴도 이러한 기본원칙에는 전혀 이견이 없음을 분명히 했기때문에 더욱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볼수 있다. 지금 세계는 이라크사태 말고도 미군이 이미 파병된 소말리아사태,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사태등 크고 작은 갖가지 분쟁에 시달리고 있다.이들 분쟁지역에 유엔이 개입하여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해도 웬만해서는 좀체로 결말이 나지않고있다.이번 이라크에 대한 공습에 영국과 프랑스가 함께 참가한것은 유엔다국적군의 권능을 과시하고 유엔결의가 힘의 뒷받침을 받고있음을 보여주고 있는것이다. 두번째 메시지인 세계평화를 위한 미국의 주도적 역할은 클린턴의 새행정부에서도 계승될것에 틀림없다.클린턴행정부가 미국의 국내경제문제에 총력을 기울이기는 하겠지만 외교안보문제에 있어 신고립주의로 나가지는 않을 것이란 시사가 이번 이라크응징을 전후로 부시행정부와 호흡을 맞추는 과정에서 잘 나타나고있다. 부시행정부는 1차 제한공습이 2차,3차로 확대발전할 가능성에 대해 『전적으로 후세인의 태도여하에 달려있다』는 입장을 밝히고있다.따라서 후세인이 유엔결의를 준수하지않으면 공습의 목표가 북위32도이남의 미사일등에 국한되지 않고 이라크 전역의 비행장과 통신정보기지등 주요군사시설로 확대될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미국은 이라크를 걸프전때처럼 군사적으로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전면전으로 나가지는 않을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이라크측으로서도 다국적군의 2차공습을 부를 강경대응조치는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중론이다.이같은 전망의 근거로는 우선 이라크가 즉각적으로 후퇴자세를 취하고 있는 점을 들수있다. 비록 후세인대통령이 라디오연설을 통해 「성전재개」를 선언하고 승리를 장담하고는 있지만 이라크는 이번 공습의 발단이 된 쿠웨이트 월경행위의 중지와 유엔항공기의 영공비행 허용 등을 유엔에 통보,사실상 항복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라크의 군사력은 1차 걸프전 패배로 현저히 약화돼있다.총체적인 전력평가에서 전전의 절반에도 못미치고 있고 특히 비장의 무기인 대량살상무기가 유엔사찰단에 의해 거의 폐기된 상태다.따라서 이라크가 저항능력이 없는 처지에서 전쟁을 확대시키는 무모한 선택을 할 것으로는 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번 한차례 공격으로 사태가 완전히 마무리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무력사용으로 치닫게된 양측간 쟁점사항들이 언제든 전쟁 쟁점화의 불씨로 남아있으며 이라크는 스스로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있다.다국적군과 다국적군의 행동을 뒷받침해줄 유엔 안보리의 결속력도 걸프전때와는 판이하다.더욱이 걸프지역 다국적군의 전력에 비추어 1차전때처럼 대규모작전이 벌어지려면 최소한 1개월 이상이 필요하다.
  • 소환직전 출국기도에 의혹증폭/정 대표 돌발 행동… 3당 반응

    ◎“출국금지는 수사상 적법조치”/민자/“정국구상 여행저지는 야 탄압”/국민/소환장 공조채비속 비판적 시각/민주 국민당 정주영대표가 13일 갑자기 일본출국을 시도하다 저지당해 정가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정대표는 현대중공업의 비자금 유출사건과 대선과정에서의 고소·고발건으로 14일 상오까지 검찰에 출두하도록 소환장을 받은 처지였다. 이 때문에 일본행 기도가 검찰수사를 받지 않으려는 「도피」가 아니었느냐는 의혹을 사고 있다.반면 국민당측은 정국구상과 휴양을 위한 극히 단기간의 여행을 계획했을 뿐이라며 법무부의 출국금지조치가 「야당탄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대표의 출국기도문제는 검찰소환문제와 맞물려 상당한 파문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정대표의 출국기도가 「도피」였느냐 「휴식여행」이었느냐에 따라 사안의 성격이 달라진다. 국민당의 변정일대변인은 공당의 대표이자 국내에 엄청난 재산을 가진 정대표가 해외로 「도피」하거나 「장기여행」을 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대선패배후 머리를 식힐 겸해외여행에 나서라는 측근의 조언을 대표가 돌연 실행에 옮겼다는것이다. 하지만 검찰소환시한을 하루 앞둔 시점이라는 점때문에 「일단 수사는 피해야겠다」는 사고가 없었다고 보긴 힘들다. 검찰이 정주영국민당대표소환조사문제를 둘러싸고 민자당이 「당연한 법절차」라며 강공을 펼치는데 대해 민주·국민당이 합세해 「정치보복」,「편파수사」를 외침으로써 정치대결구도가 형성되고 있었다.이러한 과정에서 일부 여론에서 정대표에 대한 동정론도 일었다. 정대표의 일본행기도는공당대표로서의 「자질」문제를 다시 제기,동정론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 됐다. 검찰소환문제에 대해서 국민당과 공조양상을 보이던 민주당도 정대표 출국문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돌아섰다. 결국 정대표는 해서는 안될 일을 함으로써 스스로 우군을 잃어버린 셈이됐다. ○…국민당은 정대표 출국시도문제와 관련,정부당국의 출국금지조치의 부당성을 집중 부각시켜 출국기도자체가 쟁점화되는 것을 막으려는 눈치이다. 국민당의 변정일대변인은 ▲정대표에 대한 검찰의 소환조사내용이 출국을 금지시킬만한 사유가 아니며 ▲출국목적이 장기체류가 아닌 휴식을 위한 단기일정이기 때문에 수사권및 공소권행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출국금지조치가 정상적 절차없이 갑작스레 이뤄졌다는 점등을 들어 「야당탄압」의 성격이 짙다고 주장했다. 국민당은 정대표에 대한 출국금지조치의 부당성을 따지기 위해 임시국회소집을 재차 요구하는 한편 법무장관에게 항의단을 파견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이에 대해 민자당측은 정대표의 출국금지조치가 『수사상 적법하고 필요한 조치』라고 반박하며 정대표의 무분별한 행동을 공격했다. ○…정대표 출국기도와 연관되어 검찰소환문제도 정치권에서 논란의 대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당은 정대표에 대한 검찰소환을 『명백한 야당탄압이며 정대표의 2선후퇴내지 정계은퇴를 유도해 제2야당을 말살하려는 민자당측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사법처리여부와 관계없이 소환자체에 응하지 않는 것이 민자당의 의도에 말려드는 것이라며 강경대응을 천명하고 있다.하지만 구체적 대응책이 없어 고민하고 있으며 강제구인이라도 당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여론의 동정심유발을 노리는 정도이다. 반면 민자당은 정대표의 실정법 위반혐의가 워낙 뚜렷하고 사안 자체가 중대하기 때문에 국민화합 차원과는 별개로 법질서 확립차원에서 엄정한 법적용을 해야한다는 입장이다. 민주당은 정대표 소환문제에 대해 『편파적인 야당탄압이며 정치적 악용』이라는데 의견을 모으고 임시국회의 즉각 소집을 요구하는 등 강경대응을 결정했다. 그러나 대선기간중 국민당의 김권선거 행태를 겨냥,『바람직한 선거운동을 하지 않은 국민당도 문제가 있다』며 양비론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 선거사범 엄정처리/대응방침 일단 유보/국민당

    국민당은 11일 최고위원·당직자 연석회의를 열고 김영삼차기대통령이 선거사범의 엄정처리를 촉구한데 대한 대처방안을 논의했으나 강경론과 신중론이 엇갈려 정부·민자당의 수사처리과정등 사태추이를 지켜본뒤 적절한 대응방침을 결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변정일대변인은 『오늘 회의에서는 강경대응 주장이 주류를 이뤘으나 며칠 추이를 더 지켜본뒤 당의 대응방침을 결정하자는 신중론이 제기돼 당분간 관망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 이라크,최후통첩 거부… 미의 대응전망

    ◎“후세인 무력화”… 내일이 고비/미사일발사대 공습 전격감행 가능성/“중동 골칫거리 제거”… 초강경책 예상/“끝내는 미 등에 순응”… 해프닝으로 끝날수도 미국등 4대강국이 이라크에 대해 48시간내 전진배치된 미사일의 철수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냄으로써 걸프지역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있다. 미국은 이라크가 남부 「비행금지구역」접경에 미사일을 전진 배치,미군항공기의 초계비행을 위협하고있는데 대해 강경하게 대응,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협의를 거쳐 6일저녁(한국시간 7일 상오) 강력한 최후통첩을 유엔주재 이라크대사에게 전달했다. 이에 대해 이라크는 7일 서방측의 최후통첩을 즉각 거부했다.사담 후세인 이라크대통령이 국가의 존엄성 수호의지를 다짐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능력과 태세를 완비하고 있다고 밝혀 왔던 점에 비추어 그동안의 반발이 현실로 드러난 셈이다. 이번 사태의 발전은 구랍 27일 이라크 남부의 비행금지구역을 초계비행하던 미국의 F­16기가 금지구역을 침범한 이라크의 미그­25기 1대를 격추하면서부터 야기된 것으로 볼수있다. 이라크측은 이 사건뒤 비행금지구역의 경계선인 북위 32도선 북쪽을 따라 3곳에 러시아제 SA­2 지대공미사일 발사대를 배치하는 한편 초계비행에 나서는 미군항공기를 레이더로 추적을 하면서 보복을 다짐해왔다. 그러나 사태의 근본적인 배경은 미국등 걸프전 참전동맹국들이 후세인체제를 약화 또는 제거시켜 중동의 평화구조를 확고히 하려는데 반해 후세인은 미국의 정권교체기를 틈타 아랍민족주의를 부추겨 자신의 체제를 강화하려는데서 비롯되고있다고 볼수 있다. 걸프전이 이라크의 항복으로 끝나면서 유엔의 결의안은 후세인의 반정부세력인 북부 쿠르드족과 남부 시아파 회교도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도록 요구했다.이에따라 걸프전 참전국들은 91년 3월 쿠르드족의 보호를 위해 이라크군용기의 북위 36도선 이북의 비행을 금지시켰다.이어 지난해 8월에는 남부에 있는 시아파 주민의 보호를 위해 북위 32도선 이남지역의 비행을 금지하는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했다.후세인이 유엔의 결의안을 외면하고 공군기와 헬리콥터를 동원,남부시아파에 대한 소탕작전을 펴왔기 때문이다. 미국등은 핵개발을 서두르는 「중동의 골칫거리」 후세인을 걸프전을 통해 무력으로 응징한데 이어 사실상 이라크의 영공권을 인정하지않고 반군을 보호함으로써 후세인체제를 제거하는 전략을 갖고있는것으로 여겨지고 있다.일부에서는 미국이 「군사대국」이라크를 3개의 국가로 분할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있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후세인은 이라크민족주의로 반미감정을 확산,이를 자신의 군사독재체제유지와 국민결속의 촉진제로 활용하고있다. 지난해 8월 유엔의 이라크에 대한 무기사찰을 거부함으로써 미국등의 반응정도를 시험했던 후세인이 이번에는 비행금지구역의 침범을 통해 역시 정권이양기의 미국 반응을 시험해본 것이라고 할수있다. 이번 최후통첩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있지만 48시간의 이행시한은 통첩전달시각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전해지고있어 최종시한은 8일 하오5시30분(한국시간 9일 상오 7시30분)이 된다. 부시대통령의 임기만료가 불과 2주도 채못남았지만 이라크문제에 대한 인식은 빌 클린턴 차기대통령도 부시대통령과 거의 같기때문에 미국이 정권교체기라는 이유로 이라크에 대한 강경대응자세를 쉽게 누그러뜨리지는 않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라크가 최후통첩을 거부,미사일발사대를 계속 존치시킬 뜻을 밝힘에 따라 오는 20일 부시대통령이 퇴임하기 전에 다국적군의 제한적인 「미사일발사대 무력화」공습작전이 감행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이경우 미국등은 거의 자체피해없이 목적을 달성,이라크에 대한 응징효과를 충분히 거둘 것으로 보인다. 미국측이 동원할 수 있는 군사적 수단으로는 비행금지구역을 수시로 침범하고 있는 이라크공군기들의 파괴,비행장폭격,지대공미사일을 유도하는 방공레이더시설 공습이 예상된다.이밖에 걸프해 항공모함이나 잠수함등에서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발사,이라크의 전략요충을 파괴하는 방안등도 거론되고 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5)

    ◎우상화 제1호 「광복의 천리길」/“14살때 독립안되면 안올 결심… 도강”/45년 수행기자 한재덕이 기사로 “창작”/「압록강의 노래」도 그이후에 만들어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1925년 1월22일에 만경대를 떠나 만주로 갔다고 하고 있다.졸업식을 몇달 앞두고 창덕학교를 중퇴했다는 것이다. ○김형직 테러사망 이런 엄동설한에 떠난 것을 김일성은 일제에 체포되었다는 부친의 소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그러나 필자가 이전에 지적한 바와 같이 만주 팔도구의 대안인 포평에서 김형직이 탈주했다든가,그 과정에서 그가 심한 동상을 입었다든가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김형직은 26년 6월에 갑자기 테러를 당해 죽었는데 그 때까지는 건강하였다.따라서 김일성이 일부러 가장 추운 1월 하순에 가야할 이유란 믿기가 어려워진다. 또 25년 당시 부친이 건강했더라면 김일성이 혼자서 만주로 갔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의심이 나지 않을 수 없다.실제로 1960년까지의 북한기록은 52년 전기의 기술대로 김형직이 그를 「데리고」만주로 간 것으로 되어 있다.그가 단독으로 간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하여간 만경대를 떠나 13일째 되는 날 포평에 도착한 김일성은 여기서 부모가 있는 팔도구를 향하여 압록강을 건너가게 된다. 그런데 이 김일성의 도강에 관하여서는 종래의 전기들이 판에 박은 듯이 사용하여 온 문장이 있다.그것은 아래와 같은 것이다. 『나는 14살 때에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그 때 나는 그 누군가가 지은 「압록강의 노래」를 부르면서 내가 언제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내가 자라나고 선조의 무덤이 있는 이 땅에 다시 돌아올 날은 과연 언제인가,이렇게 생각하니 어린 가슴에도 슬픔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 명문장은 이번 「세기와 더불어」에서 「압록강의 노래」가사까지 덧붙여졌다.그러나 그 표현은 종래와 다름이 없으므로 이 비장감이 넘치는 문장은 김일성이 실지로 그렇게 생각한 것으로도 오해할 수가 있다.그러나 이 문장은 25년의 도강 당시에 김일성이 한 생각은 아니다.이것은사실은 해방직후 작가가 만들어 낸 우상화를 위한 창작물인 것이다. 1945년 10월 한재덕씨는 김일성을 수행하여 만경대를 방문하였는데 그 2∼3일후 한씨는 평양에서 열린 「김일성장군과 그 가족환영 및 위안회」에 초대되었다.신문기자였던 한씨는 거기서 김일성이 하는 연설을 받아 썼다.그러나 한씨는 김일성의 서툴고 갈팔질팡하는 연설을 듣고서는 연필을 집어치우고 술만 마시게 되었다.한씨는 이튿날 연회의 기사를 써야했는데 이 때 무리를 알면서도 이상과 같은 명문장을 만들어 신문에 실었다는 것이다. 한재덕씨는 「평양민보」창간호에 김일성이 개선한 「군중환영대회」기사를 썼고 또 거기서 소좌에 지나지 않았던 김일성을 「장군」이라고 불러주어 일약 그의 마음에 들게 되었다.그러나 한씨는 우여곡절 끝에 1959년에 한국에 귀순하였다. ○한 기자 한국귀순 한씨는 또 이 기사를 쓴 당시는 「압록강의 노래」가 없었는데 그 후에 이러한 노래도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압록강상에서 비분강개하는 김일성,이 영웅적 장면은 역사적사실이 아니라 한재덕씨가 써 준 미사여구였다.그리고 「광복의 천리길」이란 부친을 따라 갔건 혼자 갔건 간에 그의 이 심정토로 부분을 빼버리면 사람들을 울리는 장면이 없는 한갓 평범한 이민의 이동로정에 불과하게 된다. 지금 북한에서는 매년 1월 전국에서 청소년이 선발되어 이 「광복의 천리길」을 행진하고 있다.김일성 우상화작품 제1호인 한재덕씨의 이 문장은 지금도 북한 청소년이 집단주의를 익히는 세뇌용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광복의 천리길」의 종점은 만주 팔도구에 있는 부모의 집이다.북한에서는 그가 여기에 25년2월3일에 도착한 것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앞에서 그가 1월 하순에 창덕학교를 그만둘 이유는 없다고 말하였다.또 필자는 이 만주행은 창덕학교가 졸업생을 내는 3월 하순이라고 추정한 바도 있었다.그러나 졸업식에 참가하지 않은 것 같으면 2월말이나 3월중에 갔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러므로 김일성은 전기에서 만주행을 적어도 1개월이상 앞당기고 있다.그리하여 이러한 날짜조작으로 비운 자리를 그는 이른바 「혁명활동」으로 메우게 되는 것이다.「세기와 더불어」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달이상 앞당겨 『팔도구의 집에서 나를 맞이한 모친은 저녁밥을 차려주고는 여기는 놈들의 감시가 심하니 동생들을 데리고 곧 떠나라고 하였다.그래서 우리는 발구를 타고 팔도구를 떠나 눈보라가 이는 압록강가로 오구비라는 조선쪽에 가서 거기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임강으로 갔다.우리는 거기에서 한달 가까이 객주집에서 숨어 살았다.모친이 삼촌 김형권과 임강으로 온 후 부친의 전화를 받고 비로소 우리는 무송으로 가게 되었다』 전기에서는 김일성 가족의 이러한 무송행은 1925년3월로 되어 있다. ①김일성저작집1 361면 ②「김일성을 고발한다」 1965년 내외문화사 간 96면 ③평전 61면
  • 김용신 정주시장(만나고 싶었습니다)

    ◎“전북서남권 중핵도시 발돋움 총력”/첨단공단조성 등 중·장기계획 수립/향토특색살려 「시상정립운동」 추진 「정읍사」의 고장.정주시는 요즘 시가지가 온통 단풍빛으로 가득하다.시내 주요 도로변 담장이 모두 단풍이고 건물벽과 아파트 벽면도 오색 단풍으로 물들어 있다.각종 플래카드와 전화카드·우편엽서는 말할 것도 없고 요식업소의 컵받침,간판,실내장식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단풍 일색이어서 마치 내장산 단풍이 겨울추위를 피해 내려와 있는 느낌이다.이처럼 정주시가 화사한 단풍으로,눈덮인 내장산의 설경을 더욱 비경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시상정립운동의 열매」라고 시민들은 입을 모은다.정주시는 특히 시상정립운동을 시민들의 자긍심과 진취적 기상을 드높이는 시민정신운동에 접목시켜 시와 시민들간의 거리감을 좁히고 공무원들도 공복의 자세를 더욱 가다듬는 계기로 삼고 있다.이 시상정립운동을 총지휘하고 있는 김용신정주시장(59)은 정주시를 전북서남권의 중핵도시로 발전시키기위해 오늘도 새벽마다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누비고 있다.예총정주시지부장 신태근씨(64·정주시 수성동 675)가 새로운 정주시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김시장을 만나 정주시 개발에 대한 이모저모를 들어 보았다. ▲신태근씨=시장부임 이후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상정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를 시작하게된 동기는 무엇인지요? ▲김용신시장=정주시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내장산과 현존하는 최고의 백제가요 정읍사의 고장으로 9만시민 모두가 망부의 여인상에 담겨있는 정과 의를 기리는 순박한 성품을 자랑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문명의 발달로 향토문화가 소외 당하고 도시마다 지니고 있는 독특한 개성이 퇴색되어 고향에 대한 애착심이 상실돼가고 있는 실정이지요. 이에 정주시는 지방화시대를 맞아 내장산의 단풍과 정읍사가요 등 시의 상징물을 널리 알리고 도시의 면모를 보다 특색있게 가꾸기 위해 정주시상정립 기본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신씨=시상정립을 위한 사업내용을 좀 소개해주실수 있습니까? ▲김시장=정주시는 시상정립운동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독일의 한스자이델재단의 지원을 받아 서울대 환경대학원 연구진에 의뢰해 시상정립기본계획을 마련했습니다. 서울대 연구진들은 시상이 될만한 자료를 찾기 위해 시전역과 문헌을 면밀히 조사분석하고 시민설문조사를 실시해 결국 단풍과 정읍사 망부상 등을 시상의 주제로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신씨=이같은 시상정립운동이 한때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치밀한 계획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김시장=정주시를 단풍과 망부상으로 뒤덮인 국내 최대의 상징물도시로 키워나가기 위해 9천만원을 들여 과교동에 정읍사여인의 생가를 복원하고 1억3천5백만원으로 정읍사 공원안에 정읍사사우를 건립,정읍사의 문학적 가치를 드높일 계획입니다. ▲신씨=정주시는 전북 서남권의 중심이기도 합니다.이러한 시상정립운동과 함께 정주시를 전북 서남권의 거점도시로 육성시킬 계획은 없는지요. ▲김시장=다가오는 21세기에 대비,정주시가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생활환경이 편리하며 문화적으로도 앞서가도록 장기종합개발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그 내용을 잠깐 소개하자면 오는 94년까지 제2공단을 조성하고 산업기술지원센터를 건립하며 공공직업훈련원을 세워 공업화기반을 구축할 계획입니다. 또 2001년까지는 첨단산업공단을 조성하고 관광문화센터를 건립하며 도시내 순환도로와 공원·문화·체육시설·신시가지 등을 만들어 인구 15만명이 살기에 적합한 중핵도시로 가꾸어 나갈 방침입니다. 2011년에는 인구20만의 쾌적한 도시로 성장할 수 있도록 상하수도시설·도시가스공급시설·문화시설을 대폭 확충하고 4년제 산업대학,초·중·고교 등 교육시설을 대폭 늘리며 쇼핑센터·교통·체신망확충·택지조성 등 폭 넓은 도시개발사업들이 추진될 예정입니다. ▲신씨=향토문화진흥과 문화공간확충을 위해서는 어떠한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습니까? ▲김시장=정읍사공원에 36억원을 들여 도내 최대·최고시설을 갖춘 연건평 1천19평 규모의 예술회관을 건립한 것은 시민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정읍사공원의 기능을 확대하기 위해 20억원을 들여 연건평 1천5백평 규모의 청소년수련관을 건립할 계획을 확정했으며 민속박물관·야외조각공원건립을 구상중입니다. 이로써 정읍사공원은 도서관·국악원·예술회관·청소년수련관을 갖춘 문화의 전당으로 지역문화예술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신씨=시민봉사행정에도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시민편익증진을 위한 계획은 어떠한가요. ▲김시장=시민들의 어려움을 스스로 체험해 보기 위해 지난 9월부터 매일아침 자전거를 타고 골목골목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나누고 도출된 문제점들은 가급적 현장해결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올빼미시장」 「자전거시장」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지만 소방도로개설·천변로인도개설·시내버스연장운행·교통난해소대책등 각종 사안들을 청취하면서 시의 발전계획을 수립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시산하 전공무원들에게는 민원현장을 직접 찾아가 해결해주는 발로 뛰는 행정을 실현함으로써 공직자와 시민들간에 신뢰감을 두텁게 하고 있지요. 또 지역동향과 주민불편 불만접수창구를 일원화하고 시민한가족사업을 추진하며 「1공무원 1통담당제」를 실시,주민과 공무원간에 유대를 강화토록 하는 등 공복으로서의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고 있습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4)

    ◎소년시절:5/“만경대서 야학개설” 새 전기에 삽입/한문독음 미숙… “동료학업 지도” 어불성설/“일재수업 거부”­“모범생” 상반된 기술/“외조부담당 성경·한문과목 질색” 동급생 증언 김일성이 팔도구소학교에서 전학한 창덕학교는 조선에서 제일 먼저 포교를 시작한 개신교인 북미 장로파에 속하는 대동군용산면하리교회가 1909년에 설립한 5년제 사립학교이다.학생수가 1백명이 넘는 당시로서는 큰 학교였는데 하리교회를 세우는데 공로가 있었던 그의 외조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었다.북한에서 부주석을 지낸 강양욱도 당시 교원을 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그가 담임을 한 학급에 편입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강양욱학급 편입 현재 보존되어 있는 학교를 보면 ㄱ자형인 기와집으로 교실이 세개 있고 그 모통이는 직원실로 되어 있다. 북한에서는 창덕학교시절에 대한 우상화를 극단적으로 하고 있다.「무지개 비낀 만경대」의 속편은 「조선을 알아야 한다」인데 이 책의 창덕학교시절은 크게 두 체계로 나뉘어 그의 「언행」을소설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 첫째 체계는 그가 부친의 말을 「명심」하여 둘도 없는 수재며 모범생이 되었고 지덕체가 겸비되고 있었다는 선전이다.그 중 전자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⑴공부:그는 교실에서는 학습규율을 잘 지키고 집에서는 깊은 밤까지 남포등을 켜서 공부하였다. ⑵학습조:「학습조」를 조직하여 자주 결석하는 학생의 집에 가서 학교에 나오라 하였다.또 그들을 데리고 뒤산에 올라 그들이 배우지 못한 내용을 가르쳐 주었다. 밤에 잠 자지 않는 것은 항일무장투쟁시기 이후의 김일성의 습성이다.어용학자들은 그의 이러한 후천적특성을 소년시절에까지 거슬려 올리고 있다. 「학습조」이야기는 83년에 나온 「조선을 알아야 한다」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이야기인데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새로 「야학」까지 등장시켰다. ○처음 한글 배운듯 「나는 가난 때문에 학교에 못 다니는 아이들을 생각하여 방학때 만경대에 가서 야학을 열었다.처음에는 1학년용 조선어독본을 가지고 우리 글부터 시작하였다.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되는 소박한 계몽운동이었다」 이러한 우상화를 식민지시대의 현실과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당시는 일제가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와 지리를 어느 정도 가르치게 하고 있었다.만주의 팔도구소학교에서 한글을 배우지 못한 김일성은 전기들에서 과대 선전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아마도 이때 처음으로 창덕학교에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것이다.「사인의 김일성」에는 창덕학교시절의 그의 동급생이 한 증언을 싣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성주는 별로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특히 그의 외조부가 가르치고 있던 성경공부는 싫어하는 것같았다.그분이 가르쳤던 한문도 그에게는 질색이었다」 만경대에서 우리 말로 한문을 읽어 5세때 불학이문장이었다고 선전되고 있는 김일성은 중국학교인 팔도구소학교에서 정과목인 국문(한문)을 배웠는데도 불구하고 창덕학교시절의 그의 동급생들이 보면 대체로 이런 정도의 한문실력밖에 없었다.그 원인의 하나는 한문을 중국어로는 읽어도 우리 말로는 읽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따라서 한글을 다른 아이에게 가르칠만한 실력은 그에게는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또 다른 예가 있기 때문이다.북한에서는 창덕학교가 당시 사용하고 있었던 국어독본의 「국」자를 김일성이 「일」자로 고쳐서 일어독본으로 하였다고 선전하고 있었는데 이번 회고록에서는 「나는 일본말을 익히느라고 애쓰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조선사람은 응당 조선말을 해야 한다고 깨우쳐 주었다」고 강조했다는 말이 나온다. 이 일화는 애국심의 관점에서 보면 공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일제시대는 학교 수업은 일본어로 하고 있었다.그는 교수용어가 일본어인 식민지 학교에서 일본어교과서를 거부하고,배우는데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며,학생들이 일본말을 할때마다 일일이 조선말을 하라고 막았다. 그렇다면 결국 일본말로 진행되는 수업도 소홀하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자연 그의 학업은 떨어지게 되고 학과성적도 불문가지로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학업면에서 뒤진 그가 「학습조」나 「야학」을 연다는 것도 어불성설로 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대일행적에 치중 창덕학교시절에 대한 우상화작업을 위하여 어용학자들이 설정한 체계중 둘째 체계는 김일성이 일제와 지주,자본가를 증오했다는 이야기들이다. 빈민들이 사는 평양의 보통강가 토성랑을 보았다든가 창덕학교가 있는 칠곡에 전깃줄을 치러 오는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도록 길 복판에 큰 돌을 놓았다든가,요컨대 「왜놈과 지주 자본가는 한 배속이다」는 증오심 일변도의 계급교양이다.다 아는 투이기 때문에 그 설명은 생략하겠다. ①「위대한 수령 김일성원수님의 영광스러운 어린시절2」 부제 「조선을 알아야 한다」 1983년 간 35∼57면 ②「4인의 김일성」 2백37면 ③「세기와 더불어」 85면
  • 정 대표 단절의지가 최대관건/국민당­현대고리 끊을 수 있을까

    ◎혈연·재정문제 등 얽혀 걸림돌 수두룩/2선퇴진 등 결단없을땐 재결합 소지 국민당이 「공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현대그룹과의 관계단절이 필수적이다.국민당도 이를 인정하고 창당초기부터 현대와 관계를 끊겠다고 수차 공언해 왔다. 그럼에도 이를 「사실」로서 받아들이기는 힘든 상황이었다.오히려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국민당과 현대의 유착관계는 더욱 끈끈해진 느낌을 주고 있다. 하지만 대선에서 참패이후 국민당은 「공당화」를 진정 지향할지 여부를 놓고 기로에 섰다.바꿔 말해 정주영대표가 국민당과 현대중 택일해야만 할 코너에 몰렸다고 볼수 있다.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는 재벌의 정치참여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이다.대선결과에서 나타났듯이 국민당이 현대와의 고리를 끊지 못한다면 「국민정당」으로서 입지를 확보하기 힘들것이라는 지적이다. 둘째는 새 집권자가 될 김영삼대통령당선자의 의지이다.김당선자는 재벌의 정치참여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막겠다고 강조하고 있다.국민당과 현대와의 현재와 같은 관계가 지속된다면차기 정부와 국민당·현대간 갈등이 심화될 것이고 그것은 어느 편에도 유리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정몽준의원·이병규특보를 비롯,국민당과 현대직원 3백80여명이 대선과 관련해 수사대상에 올라있는 것도 국민당과 현대로서는 대단한 고민거리이다. 국민당과 현대도 이에따라 어려운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을 알고 있다.때문에 대선이후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정대표는 국민당 운영에,현대는 기업활동에만 전념한다는 입장을 정리하고 실행에 옮기고 있다. 국민당·현대간 유착관계는 세가지 측면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인적·조직적 관계이며 둘째는 재정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심이적 밀착성을 들수 있다. 인적 분야의 단절은 비교적 쉬운 편이다.현재 현대측에서 국민당에 파견된 직원은 중앙당·지구당을 합쳐 5백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국민당은 이들중 현대복귀 희망자는 모두 돌려보낸다는 방침을 정했다. 중앙당의 경우 이제까지 실질적으로 당을 움직였던 송윤재 대선본부부본부장,박세용총괄본부장,이락경대선본부종합실장,사성문특별지원단장등이 곧 현대로 복귀할 예정이다.6백여 사무처요원중 정치성향이 강하거나 본인이 희망한 경우를 빼고 70%이상이 현대로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자금·재정부문에 있어서도 국민당은 현대와 관계를 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정대표는 당무에 복귀하는 28일 기자회견을 갖고 2천억원의 정치발전기금조성등 현대와의 「절연」의사를 다시 천명할 계획이다. 하지만 2천억원의 기금을 단시일내에 조성하는데 어려움이 많음을 정대표 스스로도 밝히고 있다.정대표 재산의 대부분은 현대주식이다.이를 매각하려면 증권감독원승인을 받아야하는등 복잡한 절차와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일정시점까지는 국민당이 정대표의 사재 혹은 현대자금으로 운영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국민당과 현대관계단절에 있어 최대 장애는 심이적 또 혈연부분이다. 정대표는 현대의 창업자이다.그가 이미 소유 주식을 공탁하고 대주주로서의 권리를 포기한다고 선언했음에도 정대표의 한마디에 현대 전 조직이 수족처럼 움직이는 현실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현대그룹 현 수뇌부는 정대표의 동생·자제들이다. 정대표가 진정 현대와의 단절의사를 가졌다 하더라도 현대수뇌부가 정대표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형식적으로 현대와 단절이 이루어졌다해도 정대표가 다시 현대조직을 필요로 할 때 국민당·현대간 밀착관계가 재연될 소지는 얼마든지 있다. 결국 국민당·현대관계가 완전 절연되기 위해서는 정대표의 결연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국민당의 「공당화」를 완료해놓고 자신은 2선으로 물러갈수 있다는 희생정신까지 요구된다고 관측된다.
  • 대선 「색깔론」해명 요구/민주,민자에/“응할 때까지 대화 거부”

    민주당은 26일 대통령선거기간중 김대중후보에 대한 용공시비와 관련,김영삼대통령당선자의 해명과 사과를 거듭 촉구하고 이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향후 여야대화에 불응하는등 강경대응키로 했다. 민주당은 이날 상오 이기택대표주재로 최고위원회의와 당무회의를 잇달아 열어 성명서를 채택,『김영삼대통령 당선자와 민자당은 지금도 제1야당이요 8백만표 이상을 획득한 민주당과 김대중후보가 용공이라고 보고 있는지,또 국민들이 민주당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북한 김일성의 지령에 따른 것이라고 보고 있는지 등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러한 주장이 단순히 대통령당선을 위한 정략에서 조작된 주장이었다면 당연히 국민앞에 공개사과하고 민주당에 대해서도 해명과 사과가 있어야 할 것』이라면서 『민주당은 이 문제의 분명한 해결을 위해 모든 당력을 동원할 것이며 김영삼당선자와 민자당이 태도를 분명히 밝히지 않는한 앞으로 여야관계에 민자당이 중대한 책임을 지는 사태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밝혔다.이날 회의에서는 특히 『우리나라 정치풍토에서 걸핏하면 상대를 용공으로 몰아 정권 연장을 꾀하고 심지어 상대를 매장시키려는 수법과 작태를 이땅에서 사라지게 해야 한다』며 「용공음해대책위」를 구성키로 하고 김영삼당선자가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때까지 민자당과의 대화에 응하지 않는 동시에 대통령취임행사 불참도 검토키로 했다.
  • 법정소란 크게 줄었다/서울형사지법/처벌 올 2명에 그쳐

    ◎민주화 진전… 시국사건 감소/「법존중」 공감대 확산 영향 법정소란이 사라지고 있다. 국가보안법·집시법·노동관계법 위반 등 시국사건 재판이 열리는 형사법정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집단적 구호·노래·욕설·소란 등이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25일 서울형사지법에 따르면 올해 법정소란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은 모두 2명뿐으로 감치명령이 1명,정식기소돼 유죄판결이 내려진 경우가 1명이었으며 즉결로 구류처분된 사람은 1명도 없었다. 이는 서울형사지법에서의 지난해 법정질서문란사범 67명(감치명령 47명,구류 13명,정식선고 5명)에 비해 크게 줄어든 것으로 특히 89년부터 91년까지 해마다 40명선에 이르렀던 감치명령이 크게 줄어 방청객들의 법정질서가 정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법정소란의 이같은 감소는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시국사건 위반사범이 수적으로 줄어든데도 영향이 있으나 지난해 7월 강경대군의 아버지 강민조씨의 법정소란 사건을 계기로 법원이 이같은 행위에 대해 단호히 대응하고 있는데다 피고인및 방청객들의 법정태도도 크게 변하고 있는 것이 큰 원인으로 분석된다. 강경대군치사사건 공판도중 경찰을 변호하던 변호인의 뺨을 때리고 재판석을 점거하려는등 최악의 소란을 일으킨 강민조씨 사건이후 대법원은 법정소란에 대한 사회의 우려를 수렴,법정소란을 사법권에 대한 중대도전으로 규정하고 법정질서 유지를 위한 예규를 제정,시행에 들어갔다. 정리(정이)외에 법정경호요원의 증원요청,피고인과 방청석 분리,방청객 입정제한 등의 구체적 근거를 마련한 이 예규는 같은해 5월 감치절차를 신속화한 개정규칙과 함께 각 재판부에 의해 적극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와함께 강씨에게 특수 법정소동죄가 적용돼 징역 1년의 실형이 선고되고 같은해 11월에는 당시 「전대협」의장 김종식피고인의 공판정에서 종이꽃가루를 날리고 박수와 노래를 부르던 대학생 31명이 무더기로 감치재판에 회부돼 이 가운데 12명이 10∼20일씩의 감치명령을 받아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그러나 올해들어서는 「남한사회주의 노동자 동맹사건」「남한 조선노동당사건」등 굵직한 공안사건의잇단 공판에도 불구하고 소란행위는 거의 없었다.좌경 지하조식 「사노맹」총책 백태웅피고인에게 사형이 구형되던 지난 10월6일 백피고인은 재판장을 향해 『충분한 발언기회를 주시고 관련증언에 대한 성실한 청취로써 법조민주화에 힘써주신데 깊이 감사드린다』며 인사를 하는가 하면 같은달 27일 재판장인 서울형사지법 김명길부장판사는 『피고인의 성실한 답변과 원만한 재판진행을 위한 방청객들의 협조에 감사드린다』고 화답했다. 또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돼 재판이 진행중인 현 「전대협」의장 태재준 피고인의 공판과정에서도 태피고인이 입장할때 들린 박수소리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소란행위는 찾아볼 수 없었고 시한부종말론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다미선교회」이장림목사에게 징역2년의 실형이 선고되던 지난4일에도 방청석에 나온 2백50명의 신도들의 소란은 없었다.서울형사지법 이영범수석부장 판사는 『이는 5공후반부터 극성을 부렸던 법정소란 행위가 민주·법치주의에 중대한 위협이라는데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결과』라고 말했다.
  • “뜨거운 감자”… 민자·민주·국민당의 입장

    ◎「부산모임」 수사향방 싸고 신경전/“도청은 사생활 침해… 철저한 규명을”/민자/“참석자 전원 구속,관권개입 밝혀야”/민주/“편파수사 의도 명백” 강경대응 태세/국민 「12·18」대선결과를 낙선후보들이 흔쾌히 수용함으로써 대선후 큰 정국위기는 없었으나 「부산기관장회식모임」과 「현대비자금사용」에 대한 검찰수사를 둘러싸고 민자·민주·국민 3당간 미묘한 신경전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부산모임사건」과 관련,민자당은 도청부분도 철저히 파헤쳐져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민주·국민당은 검찰수사가 관권개입보다 도청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비난하며 이의 정치쟁점화를 시도하고 있다. ▷민자당◁ 부산기관장 회식모임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에 대해 일체의 공식적 언급을 회피하며 사태의 추이를 주시. 민자당은 중립내각아래의 검찰이 사법적 판단에 따라 이 문제를 공정히 처리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결과를 따르겠다는 입장. 그러나 민자당은 이번 사건의 선거운동 위법여부와는 별개로 「도청」문제는 국민의 사생활보호를 위해서라도 엄격히 다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 박희태대변인은 이미 『이번에 도청문제에 대해 결연한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사업상 이유 또는 개인간 단체간에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도청이 우리 사회에 횡행,피해가 계속 늘어날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 때문에 민자당은 기본적으로 이번 사건이 검찰의 소관사항인 만큼 왈가왈부하지는 않겠지만 김영삼당선자가 표방한 신한국건설을 위해서라도 「공작」의 수단으로 사용된 도청문제는 수사당국이 확실히 짚어주고 넘어가야 한다고 보고 있다. ▷민주당◁ 검찰이 부산지역 기관장모임의 관권개입 의혹보다는 도청에 수사의 초점을 맞추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편파적인 수사라고 단정하고 연일 성명을 발표,모임참석자 전원 구속등 공정한 수사를 촉구. 물론 도청부문도 법을 위반한데 대해서는 사법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 이기택대표는 이날 기자간담회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방향을 보면 김영삼정부의 성격을 예측할 수 있다』면서 『하루이틀‘더 지켜본뒤 지금과 같은 편파적인수사태도가 계속될 경우 대응책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이 검토하고 있는 대응방안은 국민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국회 법사위원회를 공동소집,국회차원에서 다루거나 민주·국민 두 당만으로 조사단을 구성하는 것등이다. 그러나 대통령선거 직후에다 연말이라는 시점 때문에 국회를 열거나 조사단을 구성해도 별다른 성과를 얻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아 검찰의 수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맞춰 당의 중진이 현승종총리를 찾아가 항의하는 선에서 그칠 전망이다. ▷국민당◁ 국민당은 현대중공업 비자금유용및 부산기관장 모임도청과 관련,검찰이 정주영대표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이병규특보에 대해 사전영장을 발부받아 검거에 나서는 한편 정몽준의원에 대해서도 소환장을 거듭 발부하고 있는 것을 「관권을 통한 정치공세」로 판단,일체불응한다는 방침이다. 국민당은 부산기관장 모임과 관련,검찰이 정의원을 소환하려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관권선거에서 도청으로 바꾸려는 의도로 보고 있다. 국민당은 24일 낮 긴급최고위원 대책회의를 열고 검찰의이와같은 수사태도에 대해 즉각 시정할 것을 촉구했다. 정몽준의원도 『검찰이 우리당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기위해 의도적으로 편파수사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검찰의 소환에 불응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정의원의 한 측근은 『검찰이 부산기관장 모임 사건 관련자들을 무죄처리하기 위해 시간끌기작전을 벌이고 있다』며 『당국이 관련자들을 구속수사,진상규명하겠다는 의지가 확인되면 정의원이 자진출두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현대중공업 비자금유용과 관련,검찰의 수배를 받아오고 있는 이특보는 이날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되자 당사에 출근하지 않고 잠적했다. 국민당은 이와관련,성명을 내고 『민자당의 정치자금은 수사를 하지 않고 있는 경찰이 이특보등만을 정치자금법위반으로 사전영장을 발부받아 검거에 나선 것은 편파수사의 증거』라며 『당국의 편파수사가 시정되지 않으면 독자적으로 민자당의 자금을 조사,밝히겠다』며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3)

    ◎소년시절:4/“중국소학교서 애국작문 썼다” 선전/“중국에 충성” 의미… 주체사상에 정면배치/82년 전기부터 「임강시절 우상화」 본격화/김일성,“어릴때 또래애들 많이 때렸다” 인정 김일성이 임강소학교에 다녔다는 것을 똑똑하게 말하기 시작한 것은 1982년 8월에 발간된 「무지개 비낀 만경대」이후이다.그래서 임강소학교 시절의 우상화작업도 이 책부터 본격화 되었다. 이 책에서는 김일성이 만경대에 있었던 5살때부터 불학이문장이란 소문이 날 정도로 한문글에 뛰어났었다는 말이 나온다. ○새 내용 별로 없어 필자는 세종때 매월당 김시습이 거세문장이란 평판이 났다는 일화를 어디에서 본 일이 있다.그런데 「기는 놈이 있으면 나는 놈이 있다」는 격으로 김일성은 「5세때 배우지도 않았으면서 대문장가가 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임강에서는 친구들이 놀자고 하면 「오늘 배운 글을 다 외우고 놀자」라고 하며 책을 외우기 전에는 놀지 않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82년부터 시작된 우상화작업은 시간이 너무 늦어서인지 이상의 이야기 이외에는 모친에 대한 「효성」정도밖에 새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이 때문에 1년반이나 있었던 임강시절의 이야기가 20일정도밖에 있지 않았던 중강진때 이야기보다 그 양이 적다는 기묘한 현상이 생겼다. 다만 김형직이 백산무사단의 사업을 하고 있을 때인 어느날,김일성이 부친으로부터 과업을 받아 중강진에 가서 「탄알과 화약」을 운반해 왔다는 이야기가 「세기와 더불어」에 실리고 있다.경찰들이 세관에서 배를 타는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는데 그는 가방안에 탄알과 화약을 넣어가지고 태연하게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도 「무지개 비낀 만경대」에 실려있지만 「세기와 더불어」는 그 이야기의 세부를 더욱 구체화하고 있다.그러나 만8세의 어린아이에게 김형직이 이런 일을 시켰겠는가라는 의문부터 먼저 생기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팔도구일화 많아 팔도구시절은 임강시절과는 달리 「일화」투성이로 되어있다.1960년때부터 팔도구소학교에 다녔다고 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창작물도 그만큼 많아진 결과이다.그중 주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⑴소학교에서 김일성이 지었다는 작문은 이렇다.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나가자면 많은 일을 하게 된다.그 가운데서도 가장 고귀한 일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이다.예로부터 전하는 말이 나라없는 백성은 금수보다도 못하다고 하였다.그러므로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은 우리들의 영광이며 의무로 된다…」 무책임한 어용작가들은 애국이란 제목으로 이상과 같은 작문을 김일성에게 써 주었다.그리하여 소학교 2학년짜리 김일성이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복무한다」라는 개념어만으로 된 작품을 썼다고 선전하는 것이다. 그들은 중국학교에서 「애국」이란 작문을 쓰면 그것은 「중국나라와 중국백성에게 복무한다」라는 뜻으로 되어 「주체사상」과 정반대의 작문으로 되는 것도 개의치 않고 이런 글을 쓰고 있다. ⑵김일성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도중 「장키다리」라는 중국아이가 조선학생을 「망국노」라고 놀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 학생의 부친은 관청에 다니었으나김일성은 그를 혼내주었다. ⑶압록강 얼음판에 너비가 1m도 넘는 큼직한 구멍을 뚫어 놓고 그 구멍을 뛰어넘는 내기를 하였다. 보폭이 작거나 겁이 많은 아이들은 얼음구멍을 뛰어넘지 못하고 물속에 풍덩 빠지기도 하였다.그런 날이면 물에 옷을 적신 아이들의 집에서는 화로불에 옷을 말리며 저 평양집 성주때문에 온동네 아이들이 동태가 되겠다고 우는 소리를 하였다. ⑷어떤 날은 밤늦게까지 팔도구 뒷산에서 아이들과 함께 군대놀이를 하느라고 어른들의 속을 까맣게 태운 적도 있었다.그럴때면 팔도구사람들이 온밤 잠자지 못하고 우리를 찾아다녔다. ⑸한번은 그때 나하고 같이 공부하던 김종항이 자기 집 창고에서 뇌관 하나를 꺼내가지고 우리한테 자랑하였다.우리는 그날 화로불 곁에서 호박씨를 까먹으며 놀았는데 김종항이 그 뇌관을 입에 대고 휘파람을 자꾸 불었다.그러다가 뇌관에 불씨가 닿아 그만 폭발하였다.그바람에 그는 여러군데 상처를 입었다. 김일성은 어릴때부터 유·소년들을 가차없이 다루어 패거리를 데리고는 다른 아이들 두들겨 패거나 못살게 구는데 유별났던 모양이다.「세기와 더불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선천적인 폭학성 「돌이켜보면 내가 어려서 장난을 제일 많이 한 때가 팔도구시절이었다고 생각된다.어떤 날은 어른들이 혀를 찰 정도로 험한 장난을 할 때도 있었다」 「이런 일이 자주 되풀이 되었기 때문에 어른들은 아이들에 대한 단속을 무섭게 하였다.그러나 만리대공으로 날아 다니는 자유분방한 동심을 자물쇠로 잠그어둘 수는 없었다」 현재 북한에서 당원들이나 민중을 사정없이 다루는 김일성의 행패와 이 「동심」을 연관시켜 보면 그의 폭학성은 천부적인 것이었다.김일성이 본래 이런 인물이기 때문에 북한에서 「유일독재」가 가능한 것이다. ①1982년 전기 14면 ②같은 책 15면 ③같은책 같은면 ④「세기와 더불어 1」73면 ⑤같은책 73∼74면
  • 서울서 선전… 44곳중 15곳 1위/민자지구당위장의 대선득표성적

    ◎대구·경북 정호용·김윤환의원 수훈갑/영남·충청지역도 맹활약… 승리견인역/강원선 정주영바람 차단한 정재철의원 “일등공신” 14대 대선이 민자당 김영삼후보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일선 사령관으로 활약한 민자당 지구당위원장들의 「성적표」는 들쭉날쭉이다. 특히 이번 대선은 대구·경북과 대전·충남지역의 우세,그리고 서울에서의 선전이 승리의 견인차역할을 맡아 여타 지역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남재희 전의원 선전 ▷수도권◁ ○…서울 인천 경기도 어느곳도 지난 총선에서 순위를 바꾸지 못했다.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비교하면 김영삼당선자가 서울과 인천에서 미세하지만 약진을 했고 민주당의 김대중·국민당 정주영후보는 서울과 인천에서는 조금씩 후퇴한 반면 경기도에서 약간씩 더많은 표를 얻었다. ○…서울에서는 전체적으로 아파트등 중상류층이 거주하는 곳에서는 김영삼당선자가 강세였던 반면 서민층이나 「달동네」가 밀집한 곳일수록 김대중후보가 우세했다.지역별로 보면 44개 지역구 가운데 김당선자가 15곳을 이겼다. 용산(위원장 서정화)중랑을(김충일)노원갑(백남치)노원을(김용채)은평을(박완일)양천갑(박범진)강서을(남재희)구로갑(김기배)영등포갑(김명섭)서초갑(이종율)서초을(김덕용)강남갑(황병태)강남을(김만제)송파갑(김우석)강동갑(김동규)등이 그곳이다.지난 총선에서는 졌지만 이번에는 이긴 곳은 중랑을 노원을 은평을 강서을 영등포갑 서초갑 강남갑을 송파갑 강동갑 등이다. 특히 남재희전의원은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에 1천3백여표 차이로 졌으나 이번에 5천7백여표차로 눌러 가장 선전했다.박범진의원도 지난 총선에서의 7천3백여표보다 더많은 1만2천4백여표차로 이겨 「잘싸운 지역」으로 평가됐다. ▷대전·강원·충청지역◁ ○…이들 중부권지역에서 김당선자는 대전 35.2%,강원 41.5%,충북 38.3%,충남 36.9%를 획득했다.그러나 김당선자가 얻은 전국평균득표율 42%에는 모두 미달됐다. ○태백시 53%로 최고 ○…대전의 5개지역구에서 김당선자가 가장높은 득표율을 기록한곳은 남재두의원지역구인 대전동갑의 35%. 원외인 김홍만위원장(중)과 최상진위원장은34.7%를 얻어 지난 총선때 자신들이 획득한 지지표보다는 훨씬 상회한 득표를 기록. ○…강원도에서 정주영바람을 차단한 일등공신은 단연 이지역 시·도협의회장인 정재철의원이다.정의원은 자신의 지역구인 속초·고성에서 43·6%를 획득한것을 비롯,전지역의 득표도 독려해 「정풍」을 막았다.강원도 14개지역구중 김당선자가 가장높은 지지를 받은 지역구는 유승령의원의 태백시로 53·3%였다. 이지역에서 김당선자가 유일하게 2위를 한곳은 현대그룹업체가 있는 횡성·원주지역.박경수의원은 강원도에서 가장낮은 31·6%득표율을 기록,정후보득표에 못미쳤다.지난 총선에서 국민당후보에게 패했던 한승수(춘천시)홍희표(동해)김일동위원장(삼천시·군)은 평균을 상회하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전통적으로 친여성향이 강하다고 알려져 유권자들의 「반란」이 우려됐던 충청도에서 김당선자의 득표가 전체평균에는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김당선자는 20개개표소중 진천군(민태구의원)을 제외한 전지역에서 1위를 기록했다.국민당 현역의원이 2명이나버티고 있는 충북지역에서 이춘구·김종호·신경식의원등은 공조직을 풀가동해 김후보의 당선에 수훈갑역할을 했다. 충남에서는 이상재(공주)조부영(청양·홍성)오장섭(예산)박희부의원(연기)등이 선전했다.특히 이의원은 지원유세도중 교통사고에도 불구,부인이 대신 지역을 누비며 「처절한」승부를 벌였다. 또 당부대변인인 오의원은 선거기간동안 지역에 상주하며 국민당우세분위기를 역전시켰다. ○세력 결집에 한몫 ▷영남권◁ ○…김당선자의 텃밭인 부산·경남과 이번대선에서 결정적 공훈을 세운 대구·경북지역은 평균득표율이 67.5% 수준.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부산이 73%로 가장 높고 경남 72%,경북65%,대구60% 순. ○…대구에서는 강재섭 김용태 정호용 최재욱의원의 활약이 돋보였으며 특히 강의원은 60%의 득표율로 대구지역 득표율 1위를 기록. 또 김·정의원은 수성천유세로대구분위기를 발전시켜 승리의 분기점을 만들어 내는 수훈. 최의원은 중앙에서 방송홍보단장을 맡고 있었음에도 59·9%의 득표율을 기록. 가장 늦게 당에 합류한 정의원은 대구지역 민자당의원의 잇단 탈당으로 흔들리던 대구정서를 가라앉히고 지지세를 모으는데 한몫. 이 지역에서는 박준규국회의장의 동을과 김복동의원의 탈당으로 전열이 흐트러진 동갑지역이 최하위의 득표율을 기록. 또 이번 대선에서 최대 전략지로 꼽힌 경북지역은 지역 책임자인 김윤환의원의 활약으로 김후보 압승의 발판을 마련. 지역별로는 박정수의원의 김천·금릉이 70%,김상구의원의 상주 66%,서수종의원의 경주 61%등. ○…경남지역은 현대의 아성인 울산에서 선거직전 민자당에 입당한 차화준의원(울산중)과 심완구위원장(울산남)의 선전이 돋보였다. 이외에도 김기도의원의 삼천포·사천과 정필근의원의 진양 등이 80%,김봉조의원의 장승포·거제 82%,박희태대변인의 남해·하동이 76%,신상식의원의 밀양이 74% 수준으로 평균치 이상. ○무주 등 최면 유지 ▷호남·제주권◁ ○…민주당 김대중후보의 아성인 광주와 전남북은 지구당위원장의 노력을 평가하기가 곤란한 지역. 유효득표율이 거의 바닥권이어서 김영삼후보의 당선에 거의 영향도미치지 못했기 때문. 광주동구 조규범위원장과 서구갑 이환의의원(전국구)이 2.3%를 유지,선전했다고 할수 있으나 타위원장들보다 불과 0.4% 포인트정도 앞서 「도토리 키재기」수준. 그러나 전북 무주·진안·장수지역 위원장인 황인성정책위의장과 전남 동광양·광양시 위원장인 이도선위원장의 활약은 돋보였다는 평. 특히 황의장은 열악한 상황속에서도 김대중 후보표의 15.3%정도를 확보,호남권에서 최고의 성적을 기록.이위원장도 신흥도시인 동광양시의 외부 유입인구에 힘입어 김대중후보가 얻은 표의 13.7%를 기록해 체면을 유지. 황의장과 함께 전북지역 유일한 현역의원인 남원시·군 양창식위원장은 9%를 획득. ○…제주지역은 김영삼당선자가 타후보를 누르고 선두를 차지.제주시 현경대위원장과 서귀포·남제주 강보성위원장만이 각각 전국 평균을 밑도는 37.8%,38.5%를 얻는데 그쳤다.
  • 처벌법규 미비 진상규명으로 끝낼듯/「부산모임」조속마무리 추진 배경

    ◎도청수사 싼 형평성 시비 불식 겨냥/상황 봐가며 두문제 일괄처리 전망 강경방침으로 치닫던 검찰의 「부산지역 기관장 모임」의 도청사건 수사가 22일 밤 방향을 선회,도청실무를 맡았던 국민당 부산지역선거대책본부 문종렬씨(42·전 현대중공업직원)등 관련자 4명을 귀가조치 시킴으로써 불구속 입건으로 사법처리가 마무리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검찰은 문씨에 대해 계속 조사할 필요성은 있지만 아직까지 혐의내용에 대한 사실관계의 확증이 잡히지 않았고 적용법률 검토도 끝나지 않은채 48시간이 돼 일단 불구속 상태에서 돌려보낸뒤 필요할 경우 다시 불러 조사를 벌이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으나 사건이 종결국면을 맞이하고 있다는 감을 시사하고 있다. 그동안 수사결과 도청을 총지휘하고 금품까지 건네준 것으로 드러난 현대중공업부사장 안충승씨(54)가 이미 외국으로 도피해 있고 귀가조치시킨 문씨가 도청의 실무총책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도청수사」는 진상규명 차원에서 사실상 마무리 될 것이 확실시된다. 이같은 검찰의입장정리는 도청사건이 기본적으로는 「부산모임」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부산모임」에 대한 법률적 판단없이 「도청」부분만 서둘러 처리할 경우 법적용의 형평성은 물론 국민정서와도 어긋난다는 여론을 의식한 고육지책으로 풀이된다. 검찰은 당초 「부산모임」수사와는 별도로 「도청」사건도 사생활 침해에 대한 국민적 우려등을 내세워 현행법상 마땅한 처벌조항은 없지만 도청경위도 수사한다는 방침아래 발빠른 행보를 보여왔다. 이에따라 20일 문씨등을 전격연행 조사해 안기부직원 개입과 국민당 정몽준의원의 1백억원 약속사실까지 밝혀내고 엄중처벌한다는 강경입장을 견지했었다. 이같은 검찰수사는 지난 19일 김영삼대통령당선자가 당선기자회견에서 『사생활보호차원에서 도청경위는 밝혀져야 한다』고 밝힌 이후 본격화됐다.그러나 「부산모임」을 주도한 김기춘전법무장관이 21일 출두한 이후 김전법무에 대한 처리와 맞물려 도청부분관여자들만 엄중히 처리할 수 없는데다 적용 법률조차 명확하지 않다는 문제점이 제기돼 방향을 바꾼것으로풀이된다. 특히 전직 검찰총수가 연루된 「부산모임」은 극히 소극적 자세로 일관하면서 「도청」사건만은 강경대처한다는 인상을 주는것도 검찰로서도 큰부담이었다. 이같은 주변상황을 고려,검찰은 이날 도청실무책임자 문씨를 불구속조치키로 한다는 내면적인 방침을 세우고 즉각적인 입건절차없이 귀가조치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즉 조만간 매듭지어야할 김전장관등 「부산모임」관련자들에 대한 처리방향과의 형평성과 정치적 부담감등을 충분히 감안,이같은 방향으로 「도청사건」에 대한 최종적인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중립검찰의 표방과 갖 출범한 3대 임기제 검찰총장인 김두희총장체제의 검찰로서는 「부산기관장모임」사건을 「모임」과 「도청」의 두갈래로 나눠 차등 처리하기보다는 선거후의 상황변화에 따라 일괄처리하는 것이 부담이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날 서울지검 이건개검사장과 1차장·3차장이 무려 2시간 가까이 문씨에 대한 신병처리문제를 놓고 숙의한 것도 이같은 결정을 내릴수 밖에 없었던 검찰의 고민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일부에서는 검찰의 이같은 결정에 대해 「정치적 결정」이라고 의혹의 눈길을 보이고 있다. 어쨌든 검찰은 도청경위와 주모자등을 밝혀냈지만 「도청수사」가 형식논리에 빠진 의도성수사라는 비난을 면하기 위해서는 「부산모임」에 대한 확실한 성격규명과 함께 국민들이 저항감을 갖지 않는 선에서 사법처리를 해야한다는 부담감은 여전히 안고있다고 하겠다. □「부산 모임」 도청일지 12월5일:김남석씨 문종렬씨에게 「기관장」모임정보제공 7일 하오2시:김씨,문씨 초원복집위치 확인 8일 상오:도청장비 구입 8일 하오3시:문씨,안종윤씨 초원복집 내부구조확인 9일 상오9시:문씨,국민당 부산서지부에 보고하고 도청승낙받음 9일 하오3시:문씨,초원복집 예약 10일 낮12시∼하오2시:문씨 등 초원복집 도청장비설치 11일 상오7∼9시:도청 11일 상오9시30분:녹음기 회수 11일 하오11시40분:안씨등 롯데호텔에서 정몽준의원만나 1백억원 요구 12일:부산귀향 13일 상오:안종윤씨 도청장비회수 15일:국민당,기관장회식사건폭로
  • “북한,김일성사후 곧바로 무너진다”/러시아 시사지 분석

    ◎김정일체제 강권통치에 의존 불가피/관료들 독재에 심한 염증… 충성심 희박 러시아의 권위있는 시사주간지「노보예 브레미야」(신시대)는 최신호에서 김일성이 생존하는한 북한에서 개혁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으며 그의 사후에 벌어질 권력투쟁으로 김정일정권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라고 보도했다.북한문제 전문가로 북한을 여러차례 방문한 바 있는 이 잡지의 레오니드 믈레친 부주필이 쓴 「북한,더이상 가망이 없다」는 해설기사를 요약해본다. 북한의 마지막 이념적 동지인 중국의 학자들을 비롯,많은 북한전문가들이 현북한체제가 더이상 유지될 가능성이 없다는데는 의견이 일치한다.최근 구사회주의권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김일성에게 분명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따라서 김일성도 사회주의를 존속시키기 위해 개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게 많은 학자들의 추론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김일성은 북한의 사회주의를 존속시키기 위해 끝까지 개혁을 회피하려할 것이다.사회주의란 애당초 개혁이란 것을 용납치 않는다.개혁을 위해서는 자유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데 적어도 북한에서는 자유화란 체제개혁이 아니라 곧바로 체제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다.북한은 페레스트로이카도 개방화도 필요치 않다고 주장한 김정일의 최근 논문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적 교훈과 우리 당의 주요 노선」이 이를 잘 입증한다. 소련의 경우를 보자.스탈린이 죽지 않았다면 러시아인들은 아직 사회주의체제아래 살고 있을 것이다.많은 학자들은 김일성 사후 김정일체제를 유지시켜줄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와 정치적 생명을 같이해야만 할 현집권층과 만경대사관학교·김일성대학등으로부터의 충성과 족벌관계등이 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그러나 이 모든 지지·충성보다 더 중요한 수단은 국가보위부의 잔인하고 지속적인 강압통치가 될 것이다. 김정일에 대한 평가도 나는 다른 학자들과 생각을 달리한다.나는 금년초에도 김정일을 「위대한 지도자」의 골치아픈 탕아정도로 지적했었다.그러나 「타임」지를 비롯한 많은 전문가들은 내가 지나치게 김정일을 과소평가한다고 반박했다.그들은김정일이 각종 선전도구를 완전장악했고 관료계급들과도 호흡을 잘 맞추고 있으며 그 자신이 개혁을 할 준비가 돼있기 때문에 개혁지향적인 젊은 관료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인들도 김일성부자와 그들이 유지하고 있는 체제를 같은 민족이라는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이런 태도가 어느면에서는 북한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김일성부자를 가장 전형적인 사회주의 독재자로 적시하는 게 북한을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북한의 사회주의에 관한한 나는 러시아인이 한국인들보다는 더 잘 이해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북한은 한마디로 비극적인 형태의 소련사회주의 복사판이기 때문이다. 나는 북한의 변화는 김일성사후 바로 관료조직에 의해 충격적으로 도입될 것으로 생각한다.북한 관료들은 지난 수십년동안 숙청의 공포속에 살아왔다.지금도 당중앙위원급까지의 고위관리도 혁명교육이란 명분으로 일정기간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진다.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은 매순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김일성부자에게 충성하는 것뿐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받는다.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분노와 증오가 어느 정도일 것인가는 상상할 수 있다.적어도 김정일은 김일성같이 이들 관료조직을 장악하지 못할 것이다.평양의 관리들은 더이상 독재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들은 평생을 통해 잔인한 통제속에 살면서 김정일보다 훨씬 경험이 많고 「교활해져」있다. 김일성은 아들의 권력강화를 위해 원수칭호를 주고 북한군 총사령관에 임명했으며 김정일 자신도 군부의 지지를 확립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그러나 김일성만 죽으면 곧 벌어질 권력투쟁으로 김정일정권은 순식간에 허물어질 것이다.
  • 「이」­레바논국경 긴장고조/월경기도 팔레스타인인 2명 부상

    ◎양국,“난민수용 거부” 무력대치/PLO의장,“중동전화 위기” 【마르즈 에즈 주후르 젬라야 AP AFP 연합】 이스라엘과 레바논이 추방 팔레스타인 4백여명의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강경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레바논은 21일 추방민들의 강제축출에 나섰으며 이스라엘측은 이들에게 발포,최소 2명을 부상시켜 양측간 일촉즉발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레바논 남부의 이스라엘 관장지역인 이른바 「안전지대」의 친이스라엘계 남부레바논군(SLA)민병대는 이날 레바논군의 지시에 따라 「안전지대」쪽으로 집단행진해오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박격포와 중기관총사격을 가해 최소 2명의 부상자가 났다고 레바논군 소식통들이 밝혔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측의 발포가 계속되자 흩어져 사격을 피하고있으나 뒤로 물러서지는 않은채 젬라야 초소 앞 2백m 지점에서 은신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레바논군은 정부의 지시가 있은뒤 팔레스타인인 추방민들의 천막촌을 포위,짐을 꾸려 「안전지대」쪽으로 움직일 것을 명령했으며 팔레스타인인들은 젬라야 초소를 향해 집단행진하다 SLA측의 사격을 당했다. 한편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서는 지난 19일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인들의 과격시위에 맞서 발포,9세의 소녀를 포함한 7명이 사망하는등 유혈사태가 벌어졌으며 반목세력인 회교과격파 하마스와 온건노선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20일 처음으로 공동성명을 발표,『지하드(성전)를 확대해 이스라엘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19일 가자지구내 칸 유니스 마을에서는 이스라엘정부의 추방조치에 항의하는 주민들의 격렬한 투석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이스라엘군이 발포,6명이 사망하고 46명이 부상했다고 병원 소식통들이 말했으며 요르단강 서안지역에서도 시위진압과정에서 1명이 사살된 것으로 보도됐다.이들 지역에는 전면 통금령이 내려졌다. 또 PLO가 이미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추방령을 철회,이들을 귀국시킬때까지 중동평화협상을 재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데 이어 야세르 아라파트 PLO의장은 20일 중동지역은 조만간 유고사태와 같은 위기를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대해 이스라엘 정부는 유엔 안보리의 규탄결의안등 국제적인 비난여론에도 불구,추방철회 불가 입장을 재확인하고 이들 팔레스타인인들을 결코 다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다짐하고 있다.
  • 동북아 안보와 중·러 군사협력(사설)

    우리가 대통령선거 와중에 휘말려있는 사이에도 세계와 주변정세의 변화가 멈추는 법은 없다.옐친러시아대통령의 3일간에 걸친 중국방문도 그런 변화움직임의 하나라 할수있다.그것은 중러관계의 새출발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동북아는 물론 한반도 주변환경의 새변화를 보여주는 중요 움직임의 하나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옐친의 러시아가 고르바초프의 구소련과 그 소련의 대중국관계를 계승한 것은 사실이나 지난 1년간의 중러관계는 정상적인 것이라 할수없는 것이었다.옐친방한의 경우처럼 이번 방중은 그것을 재정립하고 새출발시키는 의미가 강한 것이었다.옐친은 양상곤주석등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을 우방으로 규정하고 선린관계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21개항 공동선언을 채택하고 교역의 확대및 핵을 포함하는 과학기술협력등 10여개 협정에 조인함으로써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선언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이로써 구소련시대의 이념및 국경대결의 갈등관계는 물론 중국이 옐친을 사회주의배신자로까지 비판했던 불편의 관계를 완전청산하게 되었다고 할수있다.그것은 중국과 러시아의 새로운 밀월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한것이다. 그 배경에는 국제여건의 변화가 크게 작용하고 있는것을 볼수있다.개혁을 성공시켜야하는 중국과 러시아는 불화의 근원이었던 국경의 평화적 안정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러시아는 대중무기판매등 경제적이유뿐 아니라 대일견제의 외교면에서도 중국을 필요로 하고있다.중국 입장에서도 러시아와의 밀월은 바람직한 상황이다.특히 군비증강과 국제적 발언권 강화를 위해 러시아의 협력이 필요하다.인권을 내세울 클린턴미국정부에 대응하는 카드로서 그것이 갖는 의미도 크다 할수있다.양국의 이같은 필요와 이해일치가 밀월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이미 우리의 적이 아닌 인방이다.이들이 좋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대북핵공동대응가능성등 우리에게도 바람직한 일일지 모른다.그러나 그것이 러시아및 중국과 우리의 전통우방인 미·일등간의 마찰내지는 긴장의 새불씨가 되는것은 바람직스런 일이 아니다. 중국의 군비증강에신경을 곤두세워온 일본은 러시아의 미그 31등 대중무기및 군사기술제공선언에 우려를 표시하고 나섰다.러중의 군사협력강화는 일중은 물론 남북한까지 말려들게할 동아시아의 때아닌 군비경쟁을 유발할 위험이 크다.그런 사태는 동아시아는 물론 한반도 평화안보및 우리의 통일노력에도 새로운 장애가 될것이 틀림없다. 양국뿐 아니라 한반도통일과 남북한및 미·일도 포함하는 동북아 화해공존의 새협력질서 형성에도 기여하는 러시아·중국관계의 발전을 우리는 바란다.
  • 이스라엘/레바논/「추방 팔인」 싸고 초긴장/양국,무력사용 입국저지

    ◎4백여명 모두 동사위기/아랍권,추방항의 대 「이」 봉기서언 【예루살렘 로이터 연합】 국제적 비난속에 이뤄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대거추방은 18일 이스라엘­레바논간 극한 대립과 이번 사태로 인한 아랍인들의 봉기를우려한 이스라엘이 전군에 경계령을 내리는 등 일촉즉발의 위기로만 계속 치닫고 있다. 이스라엘이 관장하는 남부 레바논의 「안전지대」를 넘어 레바논 영내로 들어섰던 추방자 4백여명은 이날 하오(한국 시간) 현재 레바논·이스라엘군간 무력 대치 상황속에 두 나라 국경 중간 지점에 발이 묶여있다.이들은 일교차가 극심한 접경 소재황무지에서 폭우속에 피신처를 찾기 위해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구호 기구 관계자들은 이들이 계속 현지에 방치될 경우 굶어 죽거나 동사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우려했다.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18일 평시로는 최대 규모인 이번 이스라엘의 추방 조치에 항의해 앞으로 열흘간을 대이스라엘 봉기를 위한 「불같은 분노의 날」로 선포했다.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전단을 통해 『앞으로 열흘간 이스라엘의 우리 영토 강점에 항의해 분연히 맞서자』고 촉구했다. 이스라엘측은 회교 기도일인 18일 아랍인들이 대거 집결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보복에 나설 것에 대비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 및 동예루살렘 등 점령지 일원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도록 전군에 긴급 지시했다.예루살렘 지역에는 이미 경찰 병력이 대거 증강 배치됐다. 레바논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대거 추방 조치를 비난하면서 자국 국경 경비대에 추방자들의 입국 저지를 위한 발포령까지 내리고 병력을 증강하는 등 초강경대응중이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22)

    ◎소년시절:3/허위로 가득한 「배움의 천리길」/외조부경영 창덕학교로 3학년에 편입/“5학년때 단독 평양행”은 날조… 부모 동행/전학기념사진엔 김일가 유복함 노출 「세기와 더불어」를 읽고 있으면 우리는 거기에서 김일성우상화의 목적에 저촉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한국이나 일본 학자들의 견해까지도 북한 어용학자들이 슬며시 추인하거나 제멋대로 자기 주장처럼 만들어 버리는 행위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로 한정하고 예를 하나만 들면 김시우가 백산무사단의 재무였다든가 김형직이 백산무사단에 관계하였다는 회고록의 주장이 그런 경우이다.또 강진석이 1920년 9월에 임강의 김형직 집에 있다가 백산무사단에 입단하였다든가,21년 4월에 평양에서 체포되었다고 하는 것도 모두 필자가 처음으로 밝힌 것이다. ○한·일학자 주장 삽입 북한의 어용학자들은 필자가 밝힌 이러한 자료를 부정할 수가 없어서 이번 회고록에서는 이것을 거꾸로 이용하며 김일성우상화 자료로 충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여기서는또 하나 소위 「배움의 천리길」의 출발날짜를 들어 본다.김일성이 부친의 말을 듣고 창덕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팔도구를 떠나 만경대로 갔다는 날짜이다. 필자는 그 출발날짜의 상이점을 평전에서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었다. ①팔도구의 4년제소학교를 졸업한 그해 여름에 창덕학교에 가서 5학년에 다녔다(1960년의 기록). ②열세살 때(1962년 전기). ③열두살 때,1923년 1월30일(1971년 기록). ④1923년 3월16일(1982년 전기). 필자는 이상과 같이 열거한 후 1923년 3월16일은 음력으로는 1월29일이라고 지적하였다.그런데 이번 회고록에서는 김일성이 「1923년 음력 정월 그믐날(양력 3월16일)」에 팔도구를 떠났다고 종래의 주장을 수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주장은 음력을 양력으로 고치는 일에 주안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김일성은 이런 계절이 아니라 1960년에 나온 「항일무장투쟁 전적지를 찾아서」에서 나오고 있는 것처럼 여름철에,그러나 연도는 23∼24년이 아닌 1922년에 팔도구를 출발하였다고 분석하였다. 이 분석은 지금의 김일성우상화를 깨뜨리는 주장이어서 북한이 묵살하고 있으므로 여기에 다시 소개해 놓는다. 필자가 김일성의 평양행을 23년 3월이 아니라 1922년 여름이라고 한 것은 이상의 북한자료 이외에 김형직의 가족사진과 두명의 한국측 증인이 있기 때문이다. ○동창생증언과 모순 먼저 한국측 증인 2명은 창덕학교시절 자기들이 제각기 김일성의 3학년과 4학년의 동급생들이라고 증언하고 있다.이 증언은 5학년에 편입되었다고 하는 김일성의 말을 부인하는 것으로 된다.또 이 증언은 팔도구소학교를 4학년으로 졸업했다는 그의 주장도 번복하고 있다. 다음으로 당시 창덕학교는 5년제학교였다. 그런데 김일성은 23년 봄 5학년에 편입되어 25년 1월에 졸업을 앞두고 창덕학교를 중퇴했다는 무리한 주장을 하고 있다. 25년초에 5년제학교의 5학년을 중퇴한 것 같으면 23년 4월에 그는 4학년에 편입되어야할 것이다.이렇게 되면 4학년때 동창생이라는 한국측의 증언에 신빙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3학년 시절의 동창생 말이 가령 옳은 것 같으면 김일성은 적어도 23년 3월 이전에 창덕학교에 있어야 한다. 김형직이나 강돈욱은 교육가이므로 그들은 적어도 학기초나 학년초에 맞추어 김일성을 전학시킬 것이다. 마지막으로 북한에서 공공연하게 소개되면서 아무런 설명도 붙이지 않는 이상한 가족사진이 있다.어떤 한옥 앞에 김명주를 안은 김형직과 강반석이 의자에 앉아 있고 김형직의 왼쪽에 김일성,부모 사이에 김철주가 각각 서있는 구도로 되어 있다.당시로서는 아주 호화로운 몸차림을 한 유복한 김형직 일가 사진이다. 이 사진에 대한 필자의 추리는 다음과 같다. ①1922년생인 김영주가 강보에 싸여 있는데 생후 7∼8개월로 보인다. ②김일성의 모자에는 교장이 있고 김철주 모자에는 그것이 없다.따라서 그들은 각각 다른 학교의 제복을 입고 있다. ③중국에서는 1921년 11월에 학제가 미국식인 6·3·3제로 바뀌었고 1922년 8월 하순에 신학기가 시작되었다. 김형직은 일본식 학제때 중국학교에 들어간 김일성이 학제 변경으로 학업리수가 늦어지는 것을 싫어하였을 것이다.마침 창덕학교는 김형직의 장인 강돈욱이 경영하고 있었다. ④이 때문에 김형직은 22년 8월경에 가족을 데리고 평양에 갔다.그는 처가집에 가서 김일성이 창덕학교에 전학하도록 부탁하고 얼마간 평양지방에 있었다가 팔도구로 돌아가게 되었다. ⑤그는 창덕학교에 전학한 김일성과 1916년생으로 8월에 팔도구소학교에 입학하게 될 김철주에게 각각 학생복을 사 입히고 김일성과 헤어질 기념사진을 찍었다. ⑥김일성은 22년 8월까지에 팔도구소학교 3학년 1학기를 수료했는데 9월에 들어가면 미국식학제로 다시 3학년 1학기를 이수해야 하였다.그러나 창덕학교에 전학함으로써 그는 일본식 학제대로 3학년 2학기를 이수할 수 있게 되었다. 김일성의 학업과 이상의 여러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는 22년 8월경.자기 혼자가 아니라 부모와 같이 팔도구에서 평양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김일성 평양 단독행이란 결국 우상화작업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①「세기와 더불어 1」61면 ②평전 86면 기타 ③평전 47면 ④「세기와 더불어1」77면 ⑤「사인의 김일성」236면⑥「역사사전Ⅱ」 ⑦724면 ⑧평전 46면 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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