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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사 모두 강경…극한대립 치달아/직장폐쇄 이틀째…현중 어디로 가나

    ◎사측,협상위해 경찰투입 요청 자제/노조내 강경론자 설득여부가 관건 파업 28일째,직장폐쇄 2일째를 맞고 있는 「현대중공업호」는 어디로 가나. 근로의 제공을 거부하는 「파업」으로,근로의 수령을 거부하는 「직장폐쇄」로 맞서고 있는 현대중공업 노사는 각자의 주장을 관철키 위해 현행 노동쟁의조정법이 활용할 수 있도록 규정한 「강수」는 다 쓴 셈이다. 예상대로 회사측의 직장폐쇄조치에 대해 노조측은 골리앗크레인과 LNG선등 주요시설을 점거,직장폐쇄기간중 회사측과 교섭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결정,외형상 극한대립으로 치닫고 있다. 따라서 이번 사태는 극적인 타결기미가 나타나지 않는한 정부의 강경대응말고는 뾰족한 해결방법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부는 노사 자율협상에 기대를 걸고 비상사태에 해당하는 긴급조정권을 당장 발동하지는 않겠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다분히 유보적인 입장은 직장폐쇄조치이후 노조 집행부와 조합원의 격리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분석에 따른 것이다. 근로자의 상당수는 회사측이 교섭과정에서 많은 것을 내놓았다고 느끼고 있으며 정부의 긴급조정권발동으로 회사측 제시안보다 낮은 수준의 조정안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는게 그 근거의 하나다. 특히 조합원들의 이해와 관계없는 일부 이념운동가들의 정치성향을 띤 투쟁은 대량구속및 「무노동 무임금」의 피해만 자초할 것이라는 분석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때문에 노조집행부가 달라지고 있는 다수 조합원들의 뜻을 향후 투쟁및 교섭일정에 얼마나 반영하고 노조내 일부 초강경론자들을 어떻게 설득할지가 사태해결의 관건이라 할 수 있다. 회사측도 비록 직장폐쇄조치를 내렸으나 이같은 분위기를 감안해 조합원들의 회사출입을 묵인,대화를 위한 여지를 남겨두면서 공권력투입 요청도 자제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자율타결을 기대하며 정부가 현대중공업 노사에 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와관련,노동부 관계자는 『현지에서 노사대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이 노력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긴급조정권발동과 공권력투입은 시기선택의 문제만 남게 된다』고 말했다. 더욱이 현대중공업 노조의 파업을 국가기강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인식하고 있는 정부로서는 「현대그룹노조총연합」의 연대파업을 차단키 위해 긴급조정권을 발동하기 전에도 공권력을 투입,노사당사자의 의지와 관계없이 조기에 사태를 해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노사,이들 노사에 평화적인 해결모색을 위한 며칠간의 시간을 주고 있는 정부 모두 초읽기에 들어갔다.
  • 악성 노사분규속의 부국없다

    오늘날과 같은 무한경쟁시대에서 한 나라의 경제가 국제화·개방화의 거센 파도를 헤쳐가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산업평화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경쟁력을 키워가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때문에 기업주는 물론 근로자들도 치열해지는 국제경쟁을 의식해서 자제력을 발휘하고 적극적으로 협조와 화해분위기를 조성해가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다.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부존자원도 별로 없고 산업기술수준도 크게 뛰어나지 않은 상황에서는 노동생산성 향상을 통한 국제경쟁력 강화가 무엇보다 절실한 과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현실은 대기업근로자들의 장기 불법·부당파업으로 국가경제가 엄청난 타격을 받고 있으며 제2의 도약을 위한 기반조성도 어렵지 않겠느냐는 우려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더욱이 일부 대기업의 파업근로자들은 운동권학생들의 데모에 합류하는등 쟁의양상이 노사간 협상차원을 넘어 이념투쟁으로 변질되는 조짐까지 보임으로써 적잖은 사회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소지마저 보이고 있다. 김영삼대통령이 『몇몇 대기업 노사분규에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강조한 것은 이같은 상황인식에 따른 것이며 극렬한 악성노사분규의 종식이 경제활성화와 국가사회안정에 불가결한 요소임을 잘 알고 있는 국민 모두의 바람을 헤아린 경고라 할 수 있다. 노사분규에 대한 정부의 강경대응의지와 관련,업계는 직장폐쇄와 노조불법쟁의에 의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제기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이번 일을 계기로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노사협상문화가 정착되기를 촉구한다.또 「특단의 조치」가 아니더라도 노조지도자들은 더이상 이념을 내세우는 분규행태를 취하거나 불순세력에 의해 조종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이들은 또 우리나라의 임금상승률이 노동생산성증가율을 웃도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근로자들과 우리의 국민경제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자신들에게 묻는 자성의 시간을 갖도록 당부하고 싶다. 기업주들도 노사분규가 발생하면 공권력이 개입해서 해결해 줄 것이란 기대속에서 성의없이 방관하는 자세를 결코 취해선 안될 것이다.고의적으로 협상을 장기화하고노조에 대한 여론이 악화될 때까지 기다려 긴급조정권 발동과 같은 정부조치로 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미봉책일 뿐이고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경제 운용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악성노사분규가 자주 일어나는 것을 충분히 감내하면서 경제부국이 되는 사례는 찾을 수 없다. 김대통령이 지적한 것처럼 영국의 대처수상은 전쟁을 치르듯 노조파업문제를 해결했다.그렇지 않고서는 경제를 살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우리의 노조지도자들이 되새겨야 할 일이다.
  • 현대중공업 직장폐쇄/사측,어제하오 3시부터/“파업장기화로 불가피”

    ◎“현총련과 연대투쟁”… 긴장고조/1백여명 LNG선 점거 농성/노사측 【울산=이용호·강원식기자】 대규모사업장의 불법노사분규에대한 정부의 강경대응방침이 천명된 가운데 장기 파업중인 울산 현대중공업(사장 김정국)이 20일 하오 3시부터 직장폐쇄조치를 취했다. 현대중공업 사용자측은 그동안의 노사협상진행상황으로 미루어 협상타결이 어렵다고 판단,이날 경남지방노동위원회와 울산시에 직장폐쇄신고를 하는 한편 회사내에 이를 공고,전사원들에게 이를 알렸다. 회사측은 그러나 20일 밤 비상간부회의를 열어 노조원과의 충돌을 우려,21일 아침 출근하는 근로자와 노조원의 회사 출입을 막지않기로 했다. 이에대해 노조(위원장 이갑용)측은 이날 하오 3시 쟁의대책위를 열고 21일에는 전조합원이 정상출근키로 했다.또 현대그룹노조총연합(현총련)과 연대,오는 23일 하오 울산시 동구 일산해수욕장에서 「노동운동탄압저지와 임·단투승리 결의대회」를 갖고 결사항전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현총련측은 이번 주말과 내주초에 울산 현대계열사들의 쟁의돌입시기가 집중돼 있는 점을 이용,연대파업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울산지역 현대계열사의 노사분규가 확대될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 회사측은 이날 직장폐쇄 신고서에서 『노조가 무리한 요구를 계속 주장하며 일방적인 작업거부권 행사로 파업을 장기화시켜 회사경영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어 직장을 폐쇄한다』고 밝혔다.회사측은 그러나 무기한 직장폐쇄기간중에도 노사협상 창구를 열어 협상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직장폐쇄조치에 항의하는 노조원 1백여명이 이날 하오 5시쯤 건조중인 LNG선을 점거한데 이어 하오 10시쯤 노조원 20여명이 제1도크에 설치된 골리앗크레인을 점거하는등 모두 5백여명이 철야농성중이다. 노조측은 또 하오 11시쯤 장기농성에 대비,LNG선과 골리앗크레인에 비상식량을 공급했으며 21일 상오 상황에 따라 점거농성 인원을 늘리기로 했다. 선상점거 과정에서 몸싸움을 벌이던 이 회사 경비원 이현범(29)·허필호씨(31)등 5명이 선상에서 던진 쇠파이프에 맞아 부상을 입기도 했다. 현대중 노사는지난 4월20일 단체협상 상견례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임협 26차,단협 41차례등 모두 67차례의 교섭을 가졌다. 이밖에 현대그룹계열사인 현대정공노조는 이날 4시간,한국프렌지노조는 2시간씩 부분파업을 벌였다. ◎노조쟁의행위 대항 사용자의 법적권리 ▷직장폐쇄◁ 직장폐쇄는 노조의 쟁의행위에 대해 사용자가 맞대응할 수있는 권리로 집단적 해고나 휴업,정업과는 다르다. 사용자는 직장폐쇄를 통해 근로자의 노무행위를 거부하게 되나 쟁의행위가 끝나면 근로자의 취업이 보장된다. 사용자는 직장폐쇄 기간중 사업장의 출입문을 폐쇄하고 근로자들을 생산시설로부터 나가도록 할 수있는데 조합원이 회사측의 퇴거명령에 불응할 경우 형법상 퇴거불응죄에 해당된다.
  • 북체제 더 깊이 연구해야/정용길(대북정책 새 접근)

    ◎김정일도 너무 「만만하게」 보는것 아닌지 우리는 한때 김일성을 비하하는 소리를 귀에 익숙할 정도로 많이 들었다. 김일성은 가짜라느니,환갑잔치를 서울에서 한다고 하였으니 전쟁을 일으킬 지도 모른다느니,목뒤의 혹때문에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느니,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처럼 처형될 것 같다는등…. 그런데 최근 김일성 사망후 김정일의 집권이 확실해지면서 비슷한 현상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즉,김정일은 계모 슬하에서 자라서 성격이 급하고 과격하다느니,계모 김성애,이복동생 김평일과 권력싸움을 한다느니,기쁨조와 더블어 방탕한 생활을 해 건강이 나빠졌고 그래서 오래 집권하기 힘들 것이라는 등등. 그러나 이번에 죽은 김일성은 사망하는 날까지 북한을 진짜 통치해 온 김일성이었고,목뒤의 혹때문에 더 살 수 있는 수명이 짧아졌는지는 모르지만 82세까지 살았으며 차우셰스쿠처럼 처형된 것이 아니라 자연사라고 알려지고 있다. 김일성과 북한에 대한 우리들의 예상은 이와 같이 많이 빗나갔다.빗나갔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김일성이 진짜다 가짜다하고 입방아만 찧고 있는 사이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을 만나 한국전쟁의 지원 약속을 받아냈고 또 전쟁을 일으켰었다. 그 후에도 남북관계에서 우리는 북한으로부터 번번이 일격을 당했고 또 끝려 다녔지 한번이라도 우리가 주도적 입장이 된 적이 있었나 궁금할 정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의식적으로는 북한보다 우월감을 갖고 있다.남북정상 회담을 합의하였을때도 우리는 대체로 낙관적이었고.김일성 사망 이후에도 우리는 북한이 우리들의 희망사항대로 변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은 변하지 않고 있다.다만 김일성의 사망 그 자체가 변한 것으로 나타날 뿐 북한의 대남전략이나 통일정책은 변하지 않고 있다. 북한에서는 이미 김정일이 등장한 1974년부터 「유일사상체계의 10대원칙」을 세우고 그 가운데 「수령이 개척한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여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고 못 박았다.그리고 1992년 4월9일 개정된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 제9조에도 「북반부에서 인민정권을 강화하고 사상·기술·문화의 3대혁명을 벌여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하며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조국통일을 실현한다」고 정해놓고 있다. 이제 북한의 권력자 김정일의 임무는 「대를 이은 혁명」과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위한 투쟁」뿐이다.그리고 그의 주위에는 이미 20년전부터 혁명1세대와 2세대,만경대 혁명학원과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등 그의 측근들이 작게는 그들 스스로의 출세와 김정일의 권력세습을 위해,그리고 크게는 북한 사회주의체제의 공고화와 전한반도의 공산화통일을 위해 포진하고 있다.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는 김일성 장례절차를 보며 구조적으로는 김정일이 북한의 권력을 잡음은 물론 가까운 날 무너질 것 같지도 않다는 느낌이다.다만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김정일 개인의 운명 때문일 것이다.예를 들어 이제 겨우 한나라의 제1인자가 된 지금 아깝게도 건강상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다든가,아니면 계모와 이복동생 때문에 계속 마음을 써야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정치는 운명」이라는데 더 두고 볼 일이다. 북한의 핵사찰문제로비롯된 한반도 전쟁위기설에 시베리아 벌목공과 중국으로의 탈북자들 문제로 더 뒤숭숭하던 남북관계가 남북정상회담 합의로 일단 안정을 찾는 듯 하더니,김일성 사망과 김정일에로의 권력승계로 다시 조정국면을 맞고 있는 듯하다. 이제 우리들의 관심은 김정일이 얼마나 오래 집권할 수 있느냐와,또 북한이 얼마나 변화할 것이냐로 쏠리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은 김일성의 아들이고 그는 이미 20년전부터 그의 아버지 밑에서 정치수업을 해 왔다.그의 자질과 능력문제는 이미 북한에서 20년간 검증된 것이고,또 그가 장례위원 서열 1위에 우뚝 서 있는 것은 그나름대로 처절한 권력싸움에서 살아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혹 김정일이 실각하더라도 북한에는 「김일성­김정일체제의 변형」에 불과한 통치체제가 들어설 것이다.김정일 개인에 대한 연구도 중요하지만 북한체제의 연구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나무도 보고 숲도 헤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 “대학 「주사파」 북지시 직접받아”/박홍총장 폭로

    ◎팩스 이용… 테러조직도 결성/극렬좌경학생 단호조치/김 대통령/무차별 폭력 국기확립차원 대처 대학의 극렬학생들이 북한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고 있으며 이에대한 증거를 갖고 있다고 박홍서강대총장이 18일 밝혔다. 박총장은 이날 김영삼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베푼 주요대학총장 오찬석상에서 이같이 밝히고 『북한은 2학기에는 우루과이라운드 비준반대와 미군기지반환 서명운동을 벌이도록 학생들에게 지시했다』고 폭로했다. 김대통령은 이에대해 『대학생들의 무차별 폭력행사와 공산주의 맹종에 대해서는 국가기강 확립차원에서 단호히 조치할 수 밖에 없다』고 강경대응방침을 밝혔다. 김대통령은 『지금까지 문민정부는 대담한 개혁과 변화를 추진하면서 학생들에게는 계속 관용을 베풀어 왔다』고 밝히고 『그러나 이제 무차별 폭력과 낡아빠진 공산주의를 맹종하는 학생들에게까지 관용으로 대해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국민들의 동의도 없는 상태에서 극소수 학생들이 다수에서 고립된채 계속 과격 격렬해지는데 대해서는 정부로서 적당히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학교총장들과 교수들이 떳떳하게 함께 나서면 시간과 국민은 우리편』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찬에서 대다수 대학총장들은 정부의 과단성있는 조치와 극렬학생들을 선량한 학생들과 격리할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박서강대총장은 『북한은 학원안에 김정일로 연결되는 테러조직을 만들어 이에 대항하는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면서 『대학의 주사파 뒤에는 사로맹이 있고 사로맹뒤에는 「사로청」,그뒤에는 김정일이 있으며 학생들이 팩시밀리를 통해 북한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고 있는 증거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홍일식고려대총장은 학생들이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매료되는 동안 우익들의 역할이 없었다고 비판,우익의 활동강화를 역설했다. 현승일국민대총장도 『주사파를 다스리는데는 정부가 신속히 힘으로 다스리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하고 『학교와 정부가 힘을 합쳐 단속하면 효과적』이라고 밝혔다. 송자연세대총장은 농활등에 학교가 자체프로그램등을 개발,교육적으로 흡수하고 발전시켜 나가야한다고 말했다.
  • 대학총장들/“여름휴가가 다 뭡니까”/찜통더위 잊고 교외활동

    ◎개방·경쟁시대 「학교살리기」 분주/지방등서 재정난 해결·홍보 진땀 대학총장들은 여름휴가가 없다. 해마다 방학때면 학교일에서 잠시 벗어나 피서를 즐기거나 휴가를 갔던 대학총장들이 올 여름에는 「찜통더위」도 아랑곳않고 교육개방과 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학교살리기」에 동분서주하고 있다. 총장들은 대학종합평가제에 대비,교수충원방안을 짜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가 하면 학교 재정난 해결을 위해 해외동문회를 방문하거나 지방을 돌며 학교설명회를 갖는등 오히려 평소보다 더 바쁘게 뛰고 있다. 연세대 송자총장은 여름방학중의 해외방문 계획을 모두 취소,「21세기 연세대중장기발전계획 보고서」 점검에 몰두하고 있으며 19일과 26일에는 대전과 서울에서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한 학교설명회를 가질 예정이다. 학교업무뿐만 아니라 왕성한 사회활동을 해온 서강대 박홍총장은 지난달 말 중국의 연변대 학술세미나에 잠깐 다녀온뒤 「서강대 중장기발전계획안」을 직접 챙기고 있다.또 오는 29일부터 다음달 13일까지 미국을 방문,재미서강대동문회 회원들과 학교재정난 해결책을 논의한다. 에어컨도 없는 집무실로 매일 출근하고 있는 홍익대 이면영총장 역시 지난 10일부터 13일까지 「홍익대중장기발전방안」세미나를 갖고 앞으로 조치원의 켐퍼스와 본교를 특성화시켜 국제수준에 걸맞는 대학을 만들기 위한 전략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지난 5월말 「이화21세기재도약」을 발족시키면서 「이대 사위」들을 대거 초청,화제를 모았던 윤후정총장은 1천억원발전기금을 마련하느라 학부모·동문기업체를 열심히 방문하고 있다.윤총장은 18일 설악산여름휴가까지 취소하고 이날 교수충원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교무회의를 주재했으며 이달말에는 중국을 방문,북경대와의 자매결연문제를 매듭짓는다. 한양대 김종량총장은 다음달 1일부터 5일까지 4박5일간 교직원·교수등 2백여명과 함께 가나안농군학교에 입소할 예정이다. 매일 상오 6시30분에 출근해 하오 5시에 퇴근하는 중앙대 김민하총장은 「특별연구회」를 구성,학교발전방안 마련에 골몰하면서도 30일부터 8월초까지 학교발전기금마련을 위해 지방을 순회한다.
  • 3대혁명 소조/만경대혁명학원/김정일 버팀목 “쌍벽의 두집단”

    김일성 사망후 북한의 세습군주로 부상하고 있는 김정일에게는 그를 지탱해주는 2개 특수집단이 있다.만경대혁명학원 출신집단과 3대혁명소조가 바로 그것이다.만경대학원 출신들이 일종의 두뇌집단이라 한다면 혁명소조는 친위조직으로서 김정일을 돕고 있다. ◎김의 모교… 소장졸업생 대부분 직계 활약/주도권 쟁탈전땐 「돌격대」역 맡을 가능성 김정일의 모교로 졸업생들 가운데 소장그룹 대다수가 김정일의 측근을 형성하고 있다.극소수 김정일과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40∼50대는 대개 김정일파로 분류된다.김정일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만경대혁명학원이다. 만경대혁명학원은 혁명유가족의 자녀들과 당·정 고위간부들의 자녀들에게만 입학이 허용되는 특수학교다.아니 귀족학교라는 표현이 더 옳다.북한의 특수학교로는 또 강반석혁명유자녀학원 해주혁명유자녀학원이 있다. 만경대혁명학원은 지난 47년 10월21일 평남 대성군에서 문을 열고 3백35명을 수용했다가 다음해인 48년 현재의 평양 만경대로 이전하면서 수용인원도 5백22명으로 늘렸다.요즈음 학생수는 9백여명.교육기간은 유치원 상급반 1년,인민학교 4년,고등중학교 6년을 포함해 모두 11년이다.인민무력부 소속으로 학생들은 재학기간동안 장교복장을 하고 의무적으로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한다.졸업후 최우선적으로 김일성종합대학에 진학하거나 장교임관 또는 당·정의 초급간부로 기용된다.원하면 해외유학을 갈 수도 있다.이 학교에 입학만 하면 북한사회의 엘리트코스를 밟을 수 있다. 졸업생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정일말고도 강성산(정무원총리)서윤석(평남도당책겸 인민위원장) 전병호(당비서) 최태복(당비서) 연형묵(자강도당책겸 인민위원장) 김환(부총리겸 화학공업부장) 윤기정(재정부장) 오극렬(전군총참모장) 김광진(인민무력부부부장)등이 있다.김정일 오진우(인민무력부장)에 이어 당서열 3위인 강성산과 연형묵 오극렬 최태복 전병호 김광진등 사방을 둘러봐도 대부분 김정일의 직계들이다.정무원총리를 역임했으며 남북고위급회담 단장으로 서울에 왔던 연형묵도 김정일의 사람으로 분류된다.김정일과 나이가 비슷하거나 젊은 층은 당·정에 폭넓게 포진해 김정일이 혁명 1세대들에 맞서 권력을 쟁취해가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앞으로 북한 내부에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질 때 김정일의 돌격대로 나설 공산이 크다.상류층의 자제들로 구성돼 김정일과 마찬가지로 개방적인 성향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김정일의 술친구들은 대부분 김정일 또래의 만경대혁명학원 동창생들이다. ◎혁명2세대 「친위조직」… 2인자부상 기여/총10여만명… 73년 김영주 축출에 앞장도 이른바 북한의 혁명 2세대는 바로 3대혁명소조를 가리키는 것이다.김정일이 김영주 김성애를 누르고 김일성 다음가는 2인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데는 3대혁명소조의 뒷받침이 눈부셨다.김정일이 책임자인 부장에 매제인 장성택을 임명한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이 조직에 애착을 갖고 있는지 금새 알 수 있다.장성택은 김정일과 함께 김정숙에게서 태어난 김경희의 남편이다.당서열 1백위권 밖에 머루르고 있지만 실력자로 알려져 있다. 3대혁명소조는 지난72년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에 규정된 「3대혁명」에 따라 73년 2월 발족됐다.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된 것으로 알려진 72년 12월 노동당 중진들의 비밀회의가 있은지 두달남짓만이다.「3대혁명」이란 사상혁명 기술혁명 문화혁명을 이르는 것으로 3대혁명소조 역시 이들 3분야로 나누어져 있다.소조원은 당원과 국가기관종사원 대학생 대학교원 기술자 과학자 가운데 미혼남녀로 구성돼 있다.지난 83년 9월 개최된 3대혁명소조원 대회에서 현인원 4만6천명,소조를 거쳐간 인원 11만명으로 발표된 바 있으나 그 뒤에는 정확한 숫자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3대혁명소조는 당정책의 관철이라는 표면적인 명분 아래 간부들의 보수주의 경험주의 요령주의 기관본위주의 관료주의를 개조하기 위한 사상투쟁을 활동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중국으로 치자면 문화혁명을 주도한 홍위병인 셈이다.김정일의 직접 지휘 아래 각급 생산단위는 물론 행정기관 문화기관 학교등에 파견돼 기존의 당조직과 더불어 활동해왔다.하지만 사상투쟁의 실질적인 목적은 김정일의 반대세력 견제와 그의 후계체제 구축이다.3대혁명소조는 사실상 노동당 조직과는 따로 움직이는 김정일의 사조직인 것이다. 김정일은 3대혁명소조를 김영주를 제거할때 제일 먼저 이용했다.73년 당시 당조직부장이었던 김영주를 그릇된 사상의 찌꺼기를 가진 사람으로 몰아 마침내 한직으로 축출하는데 성공했다.김정일은 여맹위원장이었던 계모 김성애를 견제하는 데도 3대혁명소조를 동원했다. 하지만 유사시 김정일의 명령에 따라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칠 준비가 돼있는 김정일의 수족으로 알려져 있다.
  • 떠오르는 「김정일체제」의 기수들

    ◎당/장성택·황장엽/정/김용순·김달현/군/오극렬·이봉원/“이 인물을 주목하라”/장성택/김의 매부… 신임 전폭적/김용순/대외관계 전담 예상/강성산·연형묵·김기남·김국태등도 「활약」 클듯/황장엽/주체사상 최고 이론가/오극렬/차기 무력부장 유력 김정일시대가 사실상 개막됨에 따라 지난 20여년간 그의 후계수업 과정에서 심어둔 측근들이 급부상할 계기를 맞게 됐다. 김정일은 지난 74년 노동당의 핵심요직인 조직비서에 취임한 이래 당·정·군에 걸쳐 그의 인맥 형성에 주력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김의 권력승계가 기정사실화 됨에 따라 상당부분 감춰져 있던 그의 심복들이 속속 전진배치될 전망이다. 김정일의 친위세력이나 인맥은 그가 지난 72년 이래 줄곧 김일성의 엄호아래 단계적인 권력승계 절차를 밟아 오는동안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왔다.이들의 성향상의 편차도 김일성 주체사상을 맹종하는 극단 수구세력들로부터 조심스럽지만 개방을 주장하는 테크노크라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들중 김정일체제의 향후 노선을 결정할 기수들은 역시 당정에 깔려 있는 이른바 「혁명 2세대」,특히 경제·행정 전문가들이다. 당우위사회인 북한의 특수성과 관련해 가장 주목을 끌 인물은 장성택이다.김정일의 친동생인 김경희(경공업부장)의 남편인 그는 현재 당서열은 1백위권 밖이다.하지만 김정일의 신임도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점에서 핵심요직인 당조직비서를 맡게될 것으로 관측되며 이를 계기로 급부상이 예상된다. 김일성의 조카사위이자 김일성대학총장을 지낸 황장엽국제담당비서도 빼놓을 수 없는 김정일의 당내 브레인이다.김일성 주체사상의 최고이론가인 그는 이번에는 김정일 우상화작업을 위해 그의 지모를 총동원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구호제조기」로 알려진 김기남과 「혁명1세대」인 김책 전부수상의 아들인 김국태 등도 선전선동 및 조직 문제를 전담하는 당내 김정일 심복들로 알려져 있다. 핵문제와 대남관계를 포함한 대외 관계를 전담할 북한의 외교 3인방인 김영남외교부장·김용순대남비서,강석주외교부부장 등은 모두 김정일의 신임이 두터운것으로 전해진다.이들중 김이 가장 신임하는 인물은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김용순이다.김정일의 「술친구」로 알려진 그는 김일성사망후 정상회담 무기연기를 내용으로 하는 편지를 우리측에 보내와 김정일과 상당한 「교감」을 갖고 있음을 입증했다. 정무원 쪽에 포진한 김정일 측근에는 상대적으로 유연한 성향을 갖고 있는 인사들이 많다. 강성산정무원총리는 이들 경제·행정 관료의 대부격이다.김일성의 이종사촌 동생으로 모스크바대를 졸업한 경제통인 그는 합영법 제정과 나진·선봉특구 개발에 앞장선 개방파로서 김정일체제에서도 연형묵 전총리와 함께 중용이 예상되는 인물이다. 지난해 김정일을 대신해 경제실패의 책임을 지고 순천비날론 연합기업소 책임자로 좌천된 것으로 알려진 김달현전부총리의 화려한 재기도 점쳐지고 있다.그는 지난 11일 밤 김정일의 김일성 참배 때 함께 모습을 드러내 복귀가 초읽기에 들어간 느낌이다. 김달현은 최영림부총리겸 금속공업부장 및 박남기평양시 행정경제위원장 및 홍석형국가계회위원장 등 김의 다른 경제참모들에 비해 대남 경협에 보다 적극적이다.그와 비슷한 성향의 김정일의 고종사촌인 김정우대외경제위부부장의 중용여부도 관심거리다. 이들에 비해 군부내 김정일의 친위세력들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특히 오진우인민무력부장을 필두로 최광총참모장,이을설호위총국장,김광진인민무력부부부장 등 이른바 「빨치산 1세대」가 여전히 건재하고 있으며 이들이 김정일에게 반기를 들 조짐은 아직 없다. 그러나 김정일시대에 빛을 볼 군부내 실세로는 김정일이 오랫동안 공을 들여 지원해 온 「혁명2세대」와 해외유학파들이다.즉 김정일과 같은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의 오극렬 당민방위부장,이봉원 인민무력부총정치국 부국장 등과 구소련 군사아카데미 등을 수료한 김두남대장,김봉율 인민무력부부부장 등이 그들이다. 이중 오극렬은 김강환·김두남 당군사위원 등과 함께 김정일의 군부내 친위 트로이카의 일원이다.70년대 중반 당시 이용무 군총정치국장 등 군부내 김정일 후계체제에 소극적인 인사들을 몰아내는 데 앞장선 인물로 오진우의 뒤를 이을 인민무력부장 제1후보라는 관측이다.
  • 조선왕조때도 없던 일이…/「울음바다 평양」을 보며/이문구

    북녘 김형에게 계속되는 불볕 더위에다 북한 주민들의 딱한 모습까지 겹친 요즈음 얼마나 답답하십니까.하지만 저도 답답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여 붓을 들었으니 양해 해 주시기 바랍니다. 따지고 보면 김일성의 사망이야 말로 그리 뜻밖의 일도 놀라운 일도 아닐 뿐 아니라 아쉽고 섭섭한 일도 아니었습니다.살만큼 살다가 갈 때가 되어서 간것 뿐이니까요.더욱이 향년 여든둘은 누가 뭐래도 호상이 아닐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물론 이쪽에서도 그의 죽음에 일말의 아쉬움을 느낀 사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요.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처럼 합의를 봤던 남북 정상회담이 무산된 데에 대한 아쉬움,다시 말하면 「죽으려면 일찌감치 죽든지 아니면 좀더 있다가 정상회담이나 하고 죽든지」했어야 옳다는 평론적인 여운이 흐른 것 뿐이었고,지상의 약속보다 지하의 예약에 따라 영결종천 할 수 밖에 없었던 인생의 한계 내지 일종의 자연현상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쪽 사람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저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느닷없이 왠 기미년(1919년)고종황제의 인산장면이 다나오나 하고 착각을 했었습니다.흰저고리와 검정치마가 그렇고 남녀노소 없이 땅바닥에 부복하여 호천고지하는 호곡이 그러했습니다.그렇지만 그것은 소년소녀의 붉은 목도리와 그네들 앞에 버티고 선 것이 대한문이 아닌 높이 36m짜리 황금칠을 한 만수대 언덕의 김일성 동상이었기에 역사책에서 본 제국시대의 흑백사진이 아니라는 것을 이내 알 수가 있었습니다.한결같이 체통도 없이 인사불성이 되어 가슴을 쥐어뜯거나 이마를 땅에 짓찧어가며 몸부림치고 울부짖는 꼴도 또한 황제의 인산에 없는 장면이었습니다.따라서 저 사람들도 과연 김씨 이씨 박씨 정씨 최씨 등 2백49성의 하나로 이쪽 사람들과 똑 같이 김치하고 밥먹는 한 동포란 말인가 하고 의심하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그들의 본적지가 모두 김일성과 같이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의 만경대라고 하더라도 그토록이나 낯선 몰골로 일사불란하게 발작하여 실성할 수가 있을까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우리에 갇혀살면서 「당신이없으면 우리도 없다」는 「주체성 없는」구호가 입에 발리도록 주체사상 교육으로 세뇌당한 49년 세월을 접어 생각하면 이해를 못할 바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주체사상 교육의 본질이 저마다 타고난 주체성을 제거하고 객체성으로 대체해 우상에 대한 종속물로 처리함과 아울러 집단적인 성형수술을 겸행하여 얼굴없는 인간으로 개조함에 있었으니,오늘날의 집단적인 히스테리야말로 주체사상 교육의 성공적인 결과라고 할 것입니다.뿐만 아니라 「당신만 있으면 우리도 이긴다」고 받들어온 김정일의 재산상속을 기정사실화 하고 「슬픔을 힘으로 바꾸어 또다른 한 분의 탁월한 수령으로 오늘의 비통을 용기로 바꾸자」는 구호를 제창하게 된 것도 주체사상 교육을 가장한 「객체사상 교육」의 성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쪽도 갑자기 초상난 집에 상주가 어리석거나 줏대가 없으면 으레 집안싸움이 일어나기 십상입니다.하물며 그쪽에서 졸지에 신을 잃은 사람들의 허망과 허탈감인즉 오죽하겠습니까.쑤셔놓은 벌집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짐짓 꿀벌의사회를 생각해 봅니다.꿀법이 새 여왕벌의 등장과 함께 분봉할 때는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습니다.외부의 자극을 받아 흥분하면 주인도 못 알아보고 덤비는 것이 꿀벌의 자기방어 본능입니다.그러나 일부러 자극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그럭저럭 자리를 잡아 여왕벌을 비롯하여 수벌과 일벌도 조용히 제 일에 매달리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구태여 고종황제 인산 때의 조문객이 만세운동으로 돌아섰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없을 줄 압니다.동해와 서해에 새로운 「보트 피플」의 출현도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분봉이 안정되면 꿀을 물어나르듯이 그쪽 나름의 개방과 개혁을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 폐유무단방류 지시/대구환경대표 구속

    【대구=황경근기자】 낙동강 폐유오염사건을 수사중인 대구지검 형사1부 이의경검사는 11일 발암물질이 함유된 폐유를 방류하도록 지시한 대구시 달서구 갈산동 대구환경관리(주)대표 여환홍씨(37)를 수질환경보전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 혁명 2세대 「3인방」·「80그룹」이 직계/김정일의 군부인맥

    ◎오극렬·김강환·김두남… 대장급 실세/3인방/이봉원등 80년이후 급부상한 브레인/80그룹/혁명 1세대 제거 시도땐 큰혼란 올듯 김일성의 사망 이후 김정일이 원만하게 권력을 세습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몰리고 있다. 공산사회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모택동의 말처럼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군부의 장악이 선결조건이다. 과연 김정일은 북한군부에 어느만큼 영향력을 지니고 있을까. 김정일은 현재 당국방위원회 위원장과 군최고사령관직을 함께 맡고 있다. 김일성이 생존 당시 부자권력세습을 위해 미리부터 아들에게 군요직을 이양,군부를 장악할 수 있도록 모든 도움을 아끼지 않은데 힘입은 것이다. 김정일은 이에 따라 현재 북한군부에서 많은 지지자를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정일이 군부에 영향력을 본격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4월25일 인민군창건 60주년 기념행사때부터.이 행사에서 북한군부는 김정일에 대해 『위대한 군사전략가이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칭송하고 김정일에게 북한군 최고 계급인 원수를 부여했다. 김정일은 이어 지난 4월21일 인민군총참모장 최광,사회안전부장 백학림,남북고위급회담 북측대표 김광진과 국방위 위원인 이을설,김일성 군사종합대 총장 최인덕,국방위 위원 이두익·김봉율등 8명의 대장을 차수로 승진시켰다. 이어 4월23일 「군최고사령관 명령 제 0024호」를 발령,인민무력부장 오진우원수와 이들 차수에게 직접 계급장을 달아주는등 모두 6백64명의 군장성에게 계급장을 수여했다. 김정일이 북한군 최고지도자 위치를 굳힘에 따라 북한군 내부에는 그의 측근들이 급격히 부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정일 인맥의 선두주자는 오극렬 당 민방위부장(대장·63)·김강환 당 군수부장(대장·61)·김두남 전당 군사부장(대장·63)등 이른바 3인방이다. 이들은 김정일처럼 만경대 혁명학원 출신으로 소련에서 유학한 혁명 2세대들이다. 3인방에 이어 최근 새로 떠오르고 있는 인물들은 군총정치국 조직담당 부총국장 이봉원(65)·해군사령관 김익철(65)·공군사령관 조명록(68)·포병사령관 최상욱·당군사위원 오용방등 「80그룹」이다. 「80」그룹은 80년 김정일체제가 본격 출범하면서 군부 전면에 등장했다. 이중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은 이봉원으로 86년 12월 상장(중장)으로 진급해 당차원에서 군을 통솔하고 있으며 최근 군정책이 모두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김정일이 군부를 완전장악하기에는 아직 거리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오진우·최광·이을설·백학림등 빨치산출신의 군원로들이 군부의 최고위층을 형성하고 있어 김정일이 섣불리 혁명1세대를 제거하고 자신에게 충성을 보내는 혁명2·3세대로 물갈이를 시도할 경우 군부내에 큰 혼란이 초래될 전망이다.
  • 30m지하 대형 유리관에 보존/김일성 시신처리 어떻게 할까

    ◎작년부터 부패방지 보존실공사 착수/일반공개땐 승강장치이용 지상으로/모택동기념관 본떠 시신 영구보존 김일성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될까. 북한당국은 아직 김주석의 시신처리에 대한 방침을 발표하지 않았으나 미라상태로 영구 보존된 레닌·스탈린이나 모택동등 사회주의지도자들의 사례를 뒤따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판단은 북한이 「민족의 태양」으로 추앙한 김일성의 사망에 대비해 이미 지난해부터 대형유리관과 지하보존실및 김일성기념관 건립에 필요한 유리와 목재·특수강판등 각종 자재를 준비하고 공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져있다는 사실에서 뒷받침 되고 있다. 북한소식통은 이와관련,『북한이 김일성사후 특수유리관을 일본에 주문했다는 정보가 있다』면서 『북한은 김일성시신을 유리관에 담아 북한인민들로 하여금 추모토록 하려는 것같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에 따르면 김주석의 시신은 가로·세로가 각각 10m나 되는 대형유리관에 안치돼 지하30m의 깊이에 보존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하 보존실의 경우대형유리관을 사방벽면과 각각 5∼6m가량 떼어놓아 특수시설을 설치하는등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도록 설계된 것으로 전해졌다. 또 대형유리관은 평상시에는 지하보존실에 안치했다가 일반에 공개될 때만 자동승강장치 등을 이용,지상으로 끌어올린뒤 조문이 끝나면 원위치로 내려가게 될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지난2월 중국 북경의 소식통들은 북한이 지난해10월 지하보존실을 만들기 위해 건설전문가와 호위총국요원등 8명을 극비리에 북경에 파견,모택동중국주석의 유리관제작에 직접 참여했던 중국기술자 5명으로부터 기술자문을 받았다고 전한 바있다. 이들 소식통들은 북한이 홍콩의 건설건자재회사와 시설공사에 필요한 자재구매협상을 벌여 1차로 30만달러어치를 사기로 계약했으며 이미 지난해 신용장을 개설한 상태라고 전했으나 건축자재가 실제 북한으로 반입됐는지의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지난 91년부터 김일성이 사망할 경우에 대비,시신을 방부처리한뒤 밀폐된 유리관에 담아 지하 깊은 곳에 안치했다가 필요할 경우 일반에 공개할 계획을 세워놓고 준비를 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북한방송들은 『8일부터 17일까지를 애도기간으로 설정하고 11일부터 16일까지 조문객을 맞이 한다』고 보도하고 있으므로 김주석의 시신공개 여부는 일반 조문객을 받는 11일쯤 판가름날 것으로 보이다.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김일성주석의 업적을 후대에까지 기리기 위해 김의 시신을 영구보존할 기념관설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특히 중국의 모택동기념관을 본떠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기념관건립과 관련,이 기념관에 안치될 김의 대형유리관의 방수·방부처리등 영구보존책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는 지난 1976년 9월9일 모택동이 사망하자 중국공산당 정치국원들이 모의 시신처리를 놓고 레닌처럼 모의 시신을 미라로 보존하자는 의견과 모의 생전 희망대로 화장을 하자는 의견으로 갈라지는 바람에 이들 정치국원들의 의견이 타협될 때까지 너무 오랜 시간을 끈 탓에 모의 시신을 보존하는데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았던 것과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기념관건립부지는 평양 만경대인근의 김일성생가나 평양 주체사상탑등 김의 사상과 업적을 알리는 데에 어울리는 장소이면서도 북한인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 유력할 것이라는 게 북한관련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김일성기념관의 건립규모는 모택동이나 레닌등의 묘역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가 될지 짐작이 가능하다. 북경시내 천안문 남쪽끝에 위치한 모택동 영묘는 가로·세로 각각 1백5m에 대리석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높이 33m의 건물로 마치 그리스신전을 방불켸 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주석은 이들 보다도 재임기간이 긴 지난 49년동안 북한지역의 절대통치자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때 기념관의 규모가 일반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북한경제 누가 이끌어 갈까

    ◎개방 빨라지면 김달현 재기용 유력/강성산·홍석형도 핵심역할 맡을듯 「북한 경제를 이끄는 실세는 누구일까」 북한은 지난해 12월 경제팀을 새로 짰다.그동안 대외 경제통이던 김달현 국가계획위원장과 박남기 당 경제비서를 각각 퇴진시키고 홍석형 등 실무진들을 대거 기용했다. 중국식 개혁을 본뜬 듯한 3차 7개년 경제계획이 실패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당분간 개방보다 농업,경공업,무역 등 내실에 역점을 두겠다는 포석이다.그러나 북한 전문가들은 현 경제팀을 한시적 체제로 본다. 북한의 경제여건을 감안할 때 개방은 불을 보듯 뻔하며 현 경제팀은 개방을 준비하는 팀이라는 분석이다.김정일이 권력을 순조롭게 이어받으면 개방의 속도가 한층 빨라지며 개방 주도세력의 재부상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김달현의 재기용이 유력하게 점쳐진다.강성산 정무원 총리와 홍석형 국가계획위원장 등도 북한 경제의 핵심으로 남고 박남기,전병호의 당측 실세와 이성대,김환 등도 막중한 직책을 맡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강성산은 전총리인 연형묵·이근모와 함께 북한 경제를 진두 지휘해 온 경제 테크너크랫의 선두주자다.1931년생으로 만경대혁명학원을 거쳐 체코 프라하 공과대학에 유학한 2세대 엘리트이다.지난 84년 최고인민회의에서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경제교류」를 강력히 주장,대내외 주목을 받았다.김일성의 이종사촌이자 김정일 권력이양의 일등공신이다. 지난 92년 경제계획의 총수인 국가계획위원장을 맡아 대외개방을 주도한 김달현은 강성산이후의 총리 1순위로 꼽힌다.지난 77년 36세에 과학원 부원장을 맡은데 이어 화학·경공업 위원장,무역부장,대외경제위원장 등 주요 경제부처를 모두 거쳤다.대남 경협의 장본인이며 중국 심천특구를 수차례 방문,개방의 최전선에 나섰음을 보여줬다.김일성의 조카뻘로 김정일의 신임이 두텁다. 김달현의 후임인 홍석형은 강성산의 측근으로 김일성대학과 인민경제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정통경제관료이다. 김달현과 함께 물러난 박남기 역시 실세.김책공대와 레닌그라드공대에서 수학했으며 김정일이 중공업정책은 박남기에게 먼저 보고하라고 할만큼 신임이 두텁다.국가계획위원장을 거쳐 당에서 경제계획,상업,재정을 담당했다. 권력 서열 11위인 전병호도 경제의 막후 사령관으로 통한다.당의 경제·기계 담당비서이며 군출신이 아니면서도 국방위원 7인에 끼는 정도다.이성대 대외경제위원장은 우리 기업과 물밑접촉을 벌이는 개방 인맥으로 김달현이 차세대 주자로 키우는 측근이다. 김일성의 고종사촌이며 허답의 처남인 김정우 대외경제위 부위원장은 나이(51)와 직급에 비해 최근 주목받는 개방 주도 인물이다. 이밖에 최영림 금속공업부장과 무기화학의 전문가 김환 부총리도 진취적인 성향의 인물로 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북한의 무역현황/작년 교역 24억불… 중·일 편중/원유·식량 수입에 의존… 광산물은 수출/남북거래 7.5% 차지… CIS이어 4위 북한의 무역은 지난해 54개국과 수출 9억3천8백만달러,수입 15억3천8백만달러를 기록했다.이를 합친 총 교역액은 24억7천6백만달러.92년보다 1·1%가 줄었다.수출품은 광산물과 비금속류 등 1차 원자재가,수입품은 원유와 식량 및 재수출을 위한 수송기기가 주류이다. 북한 무역정책의 특징은 외화벌이에 총력을 집중,위탁가공 무역 주도의 수출증대 및 외화반출 억제로 인한 수입축소로 요약된다. 대한무역진흥공사가 최근 집계한 「93년 북한의 무역 동향」에 따르면 북한의 수입은 92년보다 2.12%가 줄었으나 수출은 지난 90년 동구권 붕괴 이후의 급속한 감소세(91년 25.3% 감소)에서 0.6%의 증가세로 돌아섰다. 10대 무역국(전체 교역액의 88%를 차지)가운데 중국,일본,독립국가연합(CIS)등 3대 무역국이 전체의 68.8%(17억3천만달러)를 차지한다.편중이 심한 셈이다. 중국과의 교역액은 8억9천9백만달러.중국은 러시아를 제치고 91년부터 3년 연속 북한 제1의 무역국(전체의 36.3%)이 돼 왔다.물물교환 위주의 변경무역(국경무역)이 전체의 80.7%이다. 대일무역은 핵문제에 따른 관계 악화로 수출입이 각각 14.5%가 줄어 총 4억7천2백만달러(전체의 19.1%).엔고로 수입가가 크게 올라 원부자재와 기계류 등의 수입선을 유럽으로 옮기고 있다. 단순 위탁가공 수출에서 벗어나 조총련계와 합작으로 북한에 공장을 세우는 방식이 주로 섬유류에 나타나고 있다. 남북한 교역액은 92년보다 7.6%가 늘어난 1억8천8백만달러(대북반출 1억8천만달러,반입 8백만달러)로 중국,일본,CIS에 이어 4위(전체의 7.5%). 우리의 반입품목은 철강·금속류(전체의 86.6%),농림산물(5.4%),섬유류(5%),광산물(0.8%) 순.반출은 섬유류(40%),화학제품(9.1%),전자·전기(4.9%),농수산물(4.8%) 순이다. 북한은 지난 4월 제9기 7차 최고인민회의에서 「무역 제일주의」를 천명,수출산업 육성에 힘쓰고 있어 올 수출은 5% 정도 늘 것으로 예상된다.
  • 83년 이후 「서열 2위」… 당·정·군 장악

    ◎73년 김영주축출… 공적활동 전면등장/반대세력 반발불구 통치권확보 성공/성격 독선적·일부선 “통 크다”… 영화·연극에 큰 관심,직접 제작도 김정일이 사망한 북한주석 김일성에 대한 장례위원 가운데 서열 1위로 발표됨으로써 차기 권력승계작업이 일단은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공산정권의 전례로 비추어 볼 때 숨진 최고지도자의 장례위원장을 맡은 인사가 예외 없이 차기 통치권을 맡아 왔기 때문이다. 이날 그에 대해 북한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이 혁명의 계승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김정일은 20여년동안 끈질기게 권력승계 작업을 해온 결과 지난 83년 공식서열 2위에 오른 뒤부터 김일성 사망 직전까지 김일성에 이어 2인자의 위치를 굳혀왔다.군최고 사령관,원수,국방위원장,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중앙군사위원등 그의 맡아온 직책이 이를 입증한다.이복동생 김평일과의 불화설등 반대세력과의 권력투쟁설이 끊임없이 나돌기도 했지만 통치권 장악에 거의 성공한 것으로 관측돼 왔다. ○92년부터 승계완료그는 당·정·군등 북한내 3대 기본권력구조 가운데 형식적인 통수권은 국방위원장직으로 군에 대해서만 갖고 있다.그러나 김일성이 국가주석으로 정을,당 총비서로 당을 이끌어 오면서 형식적인 통수권자였지만 김정일은 사실상 이들 기관도 통치해 왔다는 것이 북한전문가의 대체적인 의견이다.이들 전문가들은 이미 권력승계작업은 지난 92년 김일성의 80회 생일부터 이 문제가 거론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완료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영남외교부장은 같은해 9월 제47차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에 들렀다가 우리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김정일이 사실상 북한의 통치자라고 밝혔었다.앞서 같은해 4월1일 김일성생일행사의 하나로 개최됐던 주체사상토론회에서 김정일이 「당·국가·군대의 수위」로 지칭되고,김부자의 생일을 전후해 오진우인민무력부장,이종옥부주석,연형묵정무원총리등 당시의 당·정·군 간부들이 김정일에 대한 대를 이은 충성을 다짐하기도 했다.이때부터 김일성은 점차 일선에서 물러나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했다.김정일은 지난 92년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원수와 8명의 차솔진급자에게 계급장을 달아 줘 군통수권에 대한 첫 공식행사를 가짐으로써 이를 대내외에 천명했다.이어 지난해 4월에는 군 최고통수권자인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됐으며 3개월뒤 장성 99명에 대한 승진인사를 단행,혁명1세대를 퇴진시킴으로써 군을 완전 장악했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부각된 것은 지난 73년.사상·기술·문화 3대혁명소조운동과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의 실무지도자로 공적활동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같은해 9월 삼촌 김영주를 밀어내고 조직·사상담당 비서로,74년 2월 노동당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추대됐다.그는 74년 2월 노동당 제5기 8차 전원대회에서 후계자로 결정됐으나 70년대까지만 해도 「당중앙」으로 모호하게 불려졌다.그러나 80년대부터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표현되기 시작했다.83년 4월이후 오진우인민무력부장을 제치고 당서열 제2위로 부상하면서 명실상부한 후계자의 위치를 굳혔다. 85년 4월에는 「당·국가수위」로 지칭됐다.85년 7월 북한언론으로부터 「김정일시대」라는 용어가 등장하고,91년에는 인민경제대학총장 김국훈이 김정일을 「미래의 위대한 수령」으로 후계구도를 공식적으로 가시화했다.이어 91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추대된뒤 92년 4월20일 원수칭호,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5차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으로써 군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실권자로 등장했다. ○원래 이름은 「정일」 김정일은 김일성과 그의 첫부인인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난 2남1녀중 장남으로 지난 41년 2월16일생이고,원래 이름도 정일이라고 한다.그러나 뒤늦게 그를 우상화하는 편법으로 정일로 바꿨고 2년뒤 그의 출생연도도 1년 낮췄다는 설도 있다.82년은 이른바 「조선의 어머니」인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출생 90돌이자 김일성의 70돌이며,김일성이 창건했다는 조선인민혁명군의 50돌이었는데 그의 이름도 이에 맞춰 변조했다는 것이다.그의 이복동생 평일,성일에서 보듯 원래 항렬이 일자였다는 것이다. 어릴때 이름이 「슈라」인 것으로 미루어 출생지는 옛 소련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구체적인 지명은 사마르칸트,오케얀 스카야,하바로프스크등으로 엇갈린다.그러나 그를 우상화하는 과정에서 「백두미령」에서 출생해 『혁명의 준엄한 시련을 체험하면서 성장했다』고 미화됐다.북한은 이를 위해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을 할 때 백두산의 한 귀틀집에서 『백두산의 정기를 한몸에 받고 태어났다』는 이른바 「백두산정기설」을 뒷받침하는 각종 흔적들을 조작하기 시작했다.백두산의 「정일봉」,김정일의 탄생을 칭송하는 이른바 「구호나무」등이 그 흔적이다. ○3세대 평양 들어와 김정일은 세살때 광복과 함께 부모를 따라 소련함정을 타고 평양에 처음 들어왔다.43년 소련에서 태어난 남동생 「유라」(소련명)가 있었으나 2년뒤 김일성 관저 연못에 빠져 죽었다.7살때인 49년 9월 생모 김정숙이 출산중 사망하면서 여동생 김경희(46년생)와 함께 김일성의 외6촌동생 강연실에 의해 키워졌다.그의 성격은 생모와 사별후 난폭해지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성격은 괄괄하고 과격하며 독선적이나 통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김일성앞에서도호주머니에 손을 넣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그는 아버지가 너무 바빠 홀로 어린시절을 보내온 것을 자주 불평했다고 한다.66년 홍일천과 연애결혼해 딸 하나를 낳고 69년 이혼한 뒤 73년 김혜숙과 재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은 평양의 남산유치원을 나와 49년 간부 자녀들이 다니던 남산 제 4인민학교를 다녔으며 57년 8월 평양제1중학교,60년 8월 평양 제1고급중학교,64년 김일성대학 정치경제학과를 각각 졸업한뒤 노동당에 입당했다.70년 당 문화예술부장,71년 선전선동부 부장으로 진출하면서 영화촬영및 연극공연작업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온 것으로 전해진다.「피바다」「한 자위대원의 운명」「꽃파는 처녀」등 주요 영화와 가극을 직접 제작하는등 일년에 1백50∼2백편의 영화를 만들어 올만큼 북한영화계의 최고권위자로 꼽힌다.이같은 영화에 대한 애정때문에 신상옥씨 부부를 납치한 것이 깊숙이 베일에 가려져 있던 정체가 상세히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연표◁ △1941.2.16 소련 사마르칸트 출생(북한측,백두산 출생주장) △1953.2 만경대혁명학원(인민반)수학 △1960.8 남산고급중학교 졸업 △1964.3 김일성대학교 졸업(정치경제학과) △1964 노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 △1971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 △1973.11 노동당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1974.2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 △1974.2 「후계자」로 결정(노동당 제5기 8차전원회의) △1980.10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6차 당대회) △1980.10 노동당 비서국 비서 △1980.10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90.5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12.24 인민군 최고사령관(노동당 제6기 19차 전원 회의) △1992.4.20 원솔 칭호 △1993.4 국방위원회 위원장(최고인민회의 9기 5차회의)
  • 비정한 권력투쟁가… 유례없는 반세기 독재/김일성 82년의 인생역정

    ◎유년 평양·만주 전전… 20세에 빨치산 활동/해방후 구소점령군 배경업고 권력장악/도전세력 가치없이 제거… 1인체제 구축/민족통일 빙자 6·25남침… 「전범」 낙인/67년 주체사상 만들어 사회주의 통치도구로 활용하기도 김일성.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집권을 누린 독재자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난 45년 소련군을 등에 업고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땅의 통치자가 된 뒤 거의 반세기동안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둘러왔다.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과 당총비서라는 사회주의 체제 특유의 어마어마한 권력집중적 직책도 모자라 북한주민들에게 「위대한 수령」,「민족의 태양」으로 부르기를 강요한 전제군주적 독재자였다. 김은 어찌보면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주처럼 전지전능하고 무오류의 존재로 인식되도록 주민들을 세뇌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먹을 것이 모자라 하루 두끼 먹기운동을 벌이면서도 철저한 사상무장과 외부 정보통제로 주민들로 하여금 지상낙원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믿도록 만드는능력을 갖춘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기 때문이다. 김은 1912년 4월15일 평양의 한 농가에서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을 부모로 하여 철주와 영주를 동생으로 둔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본명은 성주였으나 만주에서 빨치산활동을 할 때 일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상화과정에서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엄청나게 날조되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그의 출생지가 평남 대동군 룡산면 하리 칠골에 있는 외가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을 거쳐 다시 일성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김일성의 「공식」생가는 평양 대동강변 언덕에 자리잡은 지금의 만경대이며 이른바 「혁명의 요람」으로 북한의 모든 주민들에게는 참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김은 어린 시절 한때 외할아버지가 개신교 장로를 지내는 등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외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강반석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그는 만경대에서 짧은 유년시절을 보낸 뒤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그후 김은 만주의 중국계 소학교인 모예산소학교,팔도구소학교와 평양근교 외가인 칠골에 있는 외조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던 창덕학교 등을 전전하며 파란많은 소년기를 보내다 26년 역시 중국계인 무송소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32년 유격대활동에 적극 가담하기까지의 기간은 뚜렷한 활동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다만 북한에서 나온 그의 전기들은 이 기간중 장춘과 길림 사이에 있는 가륜에서 한인농민들에게 사상교화작업을 했다고 쓰고 있다. 그는 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32년 중순부터 중국 공산당 산하의 항일 빨치산집단에 참여한다.이때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김의 항일투쟁경력은 그가 북한정권을 장악한뒤 유일체제를 강화하면서 그에 대한 우상화를 합리화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과장·미화되었다.북한의 선전용 김일성 전기들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32년 그가 조선공산당을 창설했다고 하지만 당시 불과 19세였던 그는 당시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양세봉이라는 한인이 이끄는 유격조직에 들어감으로써 항일빨치산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후 그는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사병으로 들어가 활동하다 우수한 중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나중에 대대장급으로 승진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만주 일대에서 소규모 유격활동을 벌이던 김은 37년 유격대원 2백명을 이끌고 국경 마을인 함남 보천보를 습격했다.일본경찰지서와 우체국 등을 방화하고 추격해오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일경 7명을 살해한 이른바 「보천보전투」를 벌여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김은 이 전투가 자신이 참여한 빨치산 전투중 가장 성공적인 전투였다고 자랑하며 보천보에 자신의 동상과 혁명박물관까지 세우고 북한 주민들에개 참관을 강요했다.하지만 보천보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김일성이 아니라는 소수 의견을 내는 학자들도 있다.즉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그해 11월 죽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사람이 소련으로 도피한 뒤 그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보천보사건 이후 일본이 중국 본토 침략의 전초전으로 만주의 빨친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에나서는 바람에 동북항일연군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때문에 김도 41년 8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으로 피신해야 했다. 소련은 이 무렵 만주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중국인과 한인유격대원들을 모아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등지에 「88독립저격여단」이라는 부대를 창설했다.김도 김책,최용건,이동화 등 빨치산 동료들과 함께 이 부대에 들어가 43년에는 대위급으로 진급한다. 김은 여기서 만주에서 함께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김정숙과 결혼했다.그녀는 16세 때인 35년에 김일성의 빨치산부대에 가담해 주방일 등 잡일을 보았던 여자였다. 김은 42년 그녀와의 사이에 첫아들인 정일(소련명 유라)을 낳았다.하지만 그녀는 49년 평양에서 사산아를 낳다가 사망했다. 해방과 함께 무명의 소련군 장교로 평양에 입성한 그는 이후 소련의 절대적 후원과 타고난 권모술수로 재빨리 권력을 장악한다.소련 점령군은 친소세력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의 필요성에 따라 자신들의 협조자들 가운데 하나를 북한지도자로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김이 바로 그같은소련의 의도를 기민하게 포착한 것이다. 소련점령군이 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지명하면서 정치지도자로서의 그의 기반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에서 4월까지 한달동안 자신을 도와준 소련에 감사를 표시하기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인 6월 24일 북로당과 남로당 중앙위원회연석회의를 열어 당 위원장자리를 차지했다.이 회의에서 당의 명칭도 북조선노동당에서 조선노동당으로 바꾸었다. 당과 정부기관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김일성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을 가차없이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그는 자신에게 협력했던 인사도 자신에 도전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숙청 또는 암살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는데 심지어 자신과 유격대활동을 함께했던 빨치산대원들까지 가차없이 제거하기도 했다. 그는 조만식과 같은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박헌영,김두봉등과 같이 자신에게 협력했던 수많은 인물들을 한국전쟁에 대한패전책임을 덮어씌우거나 종파주의를 부추키고 있다는등의 갖가지 죄목을 걸어 제거함으로써 결국 북한정권을 족벌체제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소련의 힘을 빌려 48년 북한정권의 초대수상에,49년 조선노동당 초대위원장에 오른뒤 도전세력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기 시작했다.그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는 물론 현준혁 등 국내파,박헌영 등 남로당계,김두봉을 위시한 연안파,허가이 등 소련파를 차례로 숙청해 결국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김은 자신의 권좌가 어느 정도 다져진 50년 6월25일 한반도의 적화통일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마침내 무력 남침을 감행한다. 그 자신이 식은죽먹기라고 여겼던 적화통일이 유엔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음에도 그는 전혀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김일성이 무력 적화통일이라는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47년부터였다.그는 신년사를 통해 『단합된 민주조선의 건설은 남한에 있는 반동적인 매국노들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군과 보안대를 강화시켜야한다』고 역설했다. 김일성은 모든 상황이 유리하다고 판단,밤도둑처럼 새벽야음을 틈타 남침을 했으나 유엔군이 참전하고 중국의용군이 자신을 도와주러 왔을때는 이미 전쟁이 자신의 관리능력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었다.국제정세를 너무 단순하게 보았던 판단착오의 결과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실수로 엄청난 결과가 빚어지자 동료들을 숙청했다.그는 1950년 12월 21일 강계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그의 빨치산 동료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그 가운데서 김일,최광,임춘추,김열,무정등은 당에서 축출해버렸다. 김일성은 뒤이어 당의 재조직문제를 놓고 자신과 이견을 보인 소련파의 거두 허가이를 숙청했으며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들도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미국을 위해 스파이활동을 했다는등의 죄목으로 체포해 사형에 처하는등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더이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세력은 여지없이 제거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김일성은 50년대 중반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도전하는 세력들을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래 67년에 「주체사상」을 만들어 냈으며 72년에 와서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에 통치이념으로 명문화시켜 통치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체사상과 김일성에 대한 극단적인 우상화가 맞물리면서 북한정권이 안에서부터 서서히 허물어지는 요인이 됐다. 북한의 선전매체들이 김일성에 대해 『가랑잎을 띄우고 대하를 건너가는 만고의 영웅이며 그가 한번 노려보기만 하면 원쑤도 가을 풀같이 쓰러진다』고 보도할 정도로 북한은 이후 유사종교집단적 사회구조를 띠면서 경직적인 김일성 1인체제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70년대 이후 김일성은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면서 철저한 폐쇄체제로 주민들을 통제하면서 다른 한편 아들인 김정일에게로 후계세습작업을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나름대로의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72년 12월 비공개리에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거쳐 김정일을 자신의 후계자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그도 소련의 스탈린 등의 전례를 보고 자신의 사후에 대해 대비를 시작한 것이다.다시 말해 스탈린 사망후 대대적인 격하운동에 충격을 받은 김이 사후 안전판으로 세계사에 유례없는 부자간 권력승계라는 희화적 구도를 상정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 이상으로 김정일에 대한 상징조작을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가면서 권력을 하나씩 아들에게 이양하기 시작했다.김정일에 대한 호칭을 「당중앙」에서부터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향도의 별」 등으로 격상시켜나가면서 노동당 조직비서(73년),노동당 정치 상무위원회 위원(80년),인민군 최고사령관(91년),국방위원장(93년) 등 핵심요직을 하나하나 물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에게 「살아있는 신」으로 우상화작업을 펴온 김일성도 끝내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한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그 자신도 70년대 이후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 건강유지에 발버둥쳐온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김일성의 질환은 지난 73년께부터 확인된 뒷머리의 혹에서부터 고혈압·당뇨·난청·신경통·뇌일혈을 비롯해 그를 8일 새벽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간 심근경색 등 10여가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그는 분단 반세기만에 초유의 역사적 사건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급사했다.그를 갑작스런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이 그의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상회담에 대한 준비과정에서의 과로 때문인지,아니면 경제난과 대외적 고립에 따른 누적된 스트레스 탓인지는 아무도 모른다.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북한주민들에게 영생불사의 존재로 신격화된 그도 죽음 앞에 아무도 예외일 수가 없다는 철리를 그의 맹목적인 추종세력들에게 마침내 일께워 준것이다. 그의 공과는 후세의 사가가 엄정하게 평가해줄 것이다.그가 역사의 장에 어떻게 기록되든 과대망상에 빠진 권력의 화신이었다는 사실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미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연표◁ △1912.4.15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출생(본명은 김성주) △1923 만주 장백현 팔도구 소학교 졸업 △1926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재학중 공청 가입 △1930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개명 △1931 중국공산당 입당 △1932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장 △1935 김일성으로 재개명 △1936 조국광복회 조직 △1937.6 함남 보천보 습격 △1937.9 함남 증평리 습격 △1940말 소련으로 망명 △1945.8 소련군 소좌 △1945.9 소련점령군 비호하 입북 △1945.10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참석 △1945.10 「김일성장군」환영 평양시군중대회에 등장 △1945.1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1946.2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7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장단 의장 △1946.8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1947.2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1948.8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48.9 수상(제1차 내각) △1949.3 경제문화 협정체결차 소련방문 △1949.6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0.6 군사위원회 위원장 △1950.7 인민군 최고사령관 △1953.2 원솔칭호 △1953.7 영웅칭호 △1956.4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7.9 수상(제2차 내각) △1957.11 당 및 정부 대표단장으로 소련 10월혁명 40주년 기념식 참석 △1959.1 소련 제21차 공산당대회 참석 △1959.9 중국 정권창건 10주년 기념식 참석 △1961.7 우호협조 및 상호 원조조약 체결차 소련 중국 방문 △1961.9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및 정치위원회 위원장 △1961.10 소련공산당 제22차대회 참석 △1962.10 수상(제3차 내각) △1966.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67.1 소련방문 △1967.12 수상(제4차 내각) △1970.11 노동당 총비서 겸 정치위원 △1972.12국가주석 △1972.12중앙인민위원회 위원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1975.4중국방문 △1975.5루마니아·알제리·모리타니·불가리아·유고 순방 △1977.11국방위원회 위원장 △1977.11인민군 최고사령관(원수) △1977.12 국가주석 △1980.5 유고 티토대통령 장례식 참석 및 루마니아 방문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총비서·군사위원장 △1982.4 국가주석 △1982.9 중국 방문 △1984.5 소련등 동구권 8개국(소련·폴란드·동독·체코·헝가리·유고·불가리아·루마니아)순방 △1986.10 소련 방문 △1986.12 국가주석 △1988.6 몽골 방문(중국·소련 경유) △1989.11 중국 방문 △1990.5 국가주석 △1991.10 중국 방문 △1992.4 대원솔 칭호 △1993.4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발표 △1994.4.8 사망
  • 비공식대좌 성사때 「제1후보지」로/대동강 「요트정상회담」 열릴까

    ◎북,중요외빈 초대때마다 애용 김영삼대통령의 평양 체류기간동안 거의 확정된 회담은 두차례이다.장소는 이른바 「주석궁」으로 불리는 금수산의사당과 김대통령이 묵을 백화원초대소가 될 가능성이 짙다.우리 쪽에서 원하는대로 상호주의원칙이 충실하게 지켜질 때 그렇다는 이야기다.우리는 한차례 회담은 반드시 김대통령의 숙소에서 열려야 한다는 뜻을 이미 북한당국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대동강을 오가는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전용 요트가 제3의 회담장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지난달 28일 예비접촉에서 합의된 두차례의 회담은 모두 공식회담이다.따라서 편안한 분위기에서 환담을 나누는 기회가 따로 마련될 수도 있다.지금까지 평양을 방문했던 외빈들의 예를 그대로 따른다면 김대통령은 요트를 타고 대동강을 유람하면서 김일성과 또 한차례 비공식 대좌를 가질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대동강 요트」는 그들이 보기에 중요한 인물이라고 인정되는 사람이 평양을 찾을 때마다 으레 안내하는 곳이다.시아누크 캄보디아국왕등 주로 그들의 제3세계 우방 지도자들이 단골손님이다.지난달 중순 평양에 갔었던 카터전미국대통령도 요트에 초대됐었다.요트는 또 김정일의 파티장소로도 애용된다.김정일이 요트에서 측근들과 어울려 술잔을 나누는 장면이 TV화면을 통해 목격되기도 했다. 요트의 제원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다만 초호화판일 것이라는 상상이 가능할 뿐이다.이른바 「위대한 수령」이 이용하는 배라면 아무렇게나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규모는 작지만 적어도 김강산·묘향산등에 있는 별장과 비슷한 수준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을 것이 분명하다. 요트는 주석궁이 있는 능나도근처 선착장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을밀대와 부벽루가 바라다보이는 곳이다.5·1경기장과 능나도유원지도 보인다.요트는 국제영화관·야구장·야외축구장이 있는 양각도와 쑥섬을 거쳐 만경대유희장이 있는 두루섬 근처까지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전해진다.평양의 풍광을 보여주는 코스로는 안성맞춤이다. 김대통령이 요트에서 김일성과 마주앉게 될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하지만 북한이 지금까지 취해온 관례와 현재의 이런저런 대화분위기를 감안할 때 그럴 가능성은 꽤 있다.북한측은 김대통령에게 평양의 보다 많은 것을 보여주려 할 것에 틀림없다.우리측도 외부행사에 일체 참석하지 않는다는 방침이기는 하지만 북한측의 요구를 마냥 거절하기만은 어려운 형편이다.거절만 하다가는 회담의 분위기를 송두리째 망칠 우려가 있다.결국 우리측이 어딘가 한 군데 방문지를 선택해야 할 때 그곳이 바로 「대동강 요트」가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대동강 요트」는 평양시민으로부터 격리된 장소인데다 김일성이 동승하기 때문에 경호상 문제가 없고 또 회담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 한중 내주 긴급조정권 발동/노동부,“파업장기화 막게 강력대처”

    노동부는 6일 현대중공업 파업사태를 조기수습하는 것이 올해 노사문제 안정의 관건으로 보고 노사간 자율교섭으로 사태가 원만히 해결되지 않을 경우 긴급조정권발동을 검토하는등 강경대처키로 했다. 노동부 관계자는 『파업 13일째를 맞고 있는 현대중공업 노조는 이달말까지 파업을 계속하고 다른 대기업 노조와 연대파업을 계획하고 있는등 파업을 장기화할 것으로 판단된다』며 『현대중공업이 우리나라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정부의 모든 법적조치를 신중히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동부는 『현대중공업 노조가 앞으로 파업에 참여하는 업체가 늘어나 전국적인 연대파업사태로 진행되기를 바라면서 파업분위기를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25일이후까지 이어간다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 기아자노조 쟁의 결의/찬반투표 가결/오늘 협상결과 보고 시기 결정

    【광명=김병철기자】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기아자동차 노조(위원장 이재남·구속중)는 5일 상오 전체조합원 1만3천6백75명중 1만2천6백9명이 참석한 가운데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74·6%인 1만2백10명이 찬성해 쟁의행위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노조는 6일의 4차 임금협상결과에 따라 쟁의행위 돌입시기와 방법등을 결정할 방침이다. 기아자동차 노사는 지난달초부터 시작된 3차례에 걸친 임금협상에서 노조측이 기본급 15.076%(9만6천원)인상을 요구한데 대해 회사측은 기본급 4.999%인상을 제시,타결점을 찾지 못했다. 노조측의 파업과 관련,회사측은 『말로만 부분파업이지 사실상 전면파업과 다름없다』며 『노조의 파업이 장기화될 경우 다음주 중에는 직장폐쇄나 노조지도부에 대한 사법조치가 불가피하다』고 밝혀 강경대응방침을 시사했다.
  • 집유석방 도굴범/항소심 법정구속

    서울형사지법 항소6부(재판장 양태종부장판사)는 2일 백제후기 횡혈식 석실 고분인 전남 함평군의 신덕고분을 도굴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석방된 추창군피고인(48·서울 도봉구 미아7동)과 김재중피고인(55)에 대한 항소심에서 원심을 깨고 징역1년의 실형을 선고,법정구속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추피고인 등이 도굴한 신덕고분은 백제후기 고분중 유일하게 내부구조가 밝혀진 고분』이라며 『피고인들의 도굴로 백제후기 고분의 내부및 매장유물들이 상당부분 훼손된 점등을 고려할때 1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은 죄질에 비해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판단,실형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추피고인등은 91년 3월25일 전문 문화재 도굴범 2명과 함께 전남 함평군 월야면 예덕리 야산에서 당시 미발굴 상태였던 백제후기의 횡혈식 석실고분인 선덕고분을 파헤쳐 국보급 문화재에 해당하는 유공3경장경대호(구멍이 3개 뚫린 도자기)3점을 비롯,도자기와 철제갑옷등 65점의 유물을 도굴한 혐의로 구속기소됐었다.
  • 올 노사안정 “가늠자”/조선3사 분규 금주가 고비

    ◎당국,“불법엔 강경대응”… 노조원도 등돌려 철도·지하철파업이후 부산·경남지역의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한진중공업등 조선 3개사가 노사분규로 또 한차례 몸살을 앓고 있다. 강성 노조집행부가 장악하고 있는 이들 3개사는 산별체제를 겨냥해 올해초 결성된 「전국조선업종노조협의회」의 핵심으로 철도등의 파업사태가 아니더라도 노동당국을 벌써부터 긴장시켜온 사업장들이다. 노동부의 예상대로 이들 3개사 노조는 6월말부터 쟁의강도를 높여 조선사 노조의 연대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대우조선 노조가 회사측의 협상안에 반발해 1,2일 벌이기로 했던 전면파업 방침을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거부하고 정상조업함으로써 일단 긴장의 수위는 낮아지고 있다. 또 현대중공업과 한진중공업도 회사측이 1일 노조에서 수용가능한 현실적인 수정안을 제시하고 조합원들이 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어 노조로서도 협상테이블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현재 조선 3개사의 분규를 보는 시각은 낙관론이 우세하다. 대우조선의 경우 지난 87,88년 극렬한 분규로 회사가 문을 닫을 지경까지 몰렸던 상황을 겪은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파업으로 회사에서 얻어낼 것이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 실리없는 파업은 자제하고 있는 것으로 노동부는 보고 있다. 또 최근 제시된 회사측 수정안에 조합원들이 대체로 만족스러워 하고 있는 점등도 대우조선의 임금단체협상의 전망을 밝게 해주고 있는 요인이다. 현대중공업노조는 2일 부분파업에 이어 다음주부터는 쟁의강도를 크게 낮추고 협상에 주력하겠다는 입장이다. 회사측도 1일 ▲기본급 7.34% ▲상여금 50%인상 ▲각 수당 5천원 추가인상 ▲성과급 1백%지급등의 대폭 양보한 수정안을 제시,노조로서도 협상에 응하지 않을수 없는 형편이다. 69년 조선공사 당시 첫 긴급조정권이 발동됐을 만큼 강성전통을 갖고 있는 한진중공업 노조의 경우 조합원 1천여명이 28일부터 건조중인 LNG선에서 농성에 돌입,파업 장기화의 조짐도 있으나 선상파업농성이 한계가 있는데다 회사측도 ▲기본급 7.3% ▲격려금 40만원 지급등의 수정안을 제시,협상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노동부는 이들 조선 3개사의 파업 장기화 여부가 노사안정을 이루는데 관건이라고 판단,한진중공업 노조의 불법파업이 장기화되고 다른 산업체로 파업확산이 우려되면 공권력투입을 포함,정부가 쓸수 있는 모든 조처를 동원해 대응한다는 입장이어서 조선사 분규는 이번주중 최대고비를 맞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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