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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약처, 소아마비·결핵 백신 제조 생물안전기준 마련

    식품의약품안전처는 29일 소아마비나 결핵 백신을 제조할 때 적용할 생물안전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가이드라인은 소아마비·결핵 백신 제조에 사용되는 미생물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감염 위험 등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백신 제조시설이 세계보건기구(WHO)의 생물안전기준에 맞춰 봉쇄시설과 관리체계를 갖추도록 기술과 장비, 시설 등을 마련해야 한다는 예방 조치를 담고 있다. 유니세프 등 국제기구에 소아마비 또는 결핵 백신의 공공 조달을 준비하는 업체에 유용할 것으로 식약처는 기대했다. 국내 업체가 국제 공공조달시장에 참여하려면 WHO의 품질인증 절차인 사전적격성평가(PQ)를 통과해야 하는데, 백신 생산시설은 WHO 생물안전기준을 만족해야 한다. 식약처는 두창바이러스·보툴리눔독소 등 고병원성 미생물 사용 제조 시설에 대한 지침도 마련할 계획이다. 세종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반세기 만에 선물처럼 온 ‘권정생의 동시’

    반세기 만에 선물처럼 온 ‘권정생의 동시’

    동화작가 권정생(1937~2007)이 생전 손수 엮은 동시집 ‘산비둘기’(창비)가 반세기 만에 정식 출간됐다. 1972년 청년 권정생은 단 두 권의 동시집을 만들어 하나는 본인이 소장하고, 다른 하나를 ‘기독교교육’ 편집인이던 오소운 목사에게 건넸다. 오 목사가 갖고 있던 책을 2018년부터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에서 소장하다 48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산비둘기’에는 유독 어머니에 관한 시가 많이 나온다. 25편 중 9편이나 된다. 결핵을 앓던 자신을 극진히 돌보던 어머니의 죽음 이후 느낀 상실감과 그리움이 시집을 이루는 주된 정서이기 때문이다. 1937년 일본에서 태어나서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온 권정생은 1955년 여름에 부산에서 점원 생활을 하던 중에 결핵을 앓기 시작했다. 몇 년에 걸친 투병 생활은 어머니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호전되지만, 이후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얼마 지나지 않아 작고했다. 권정생은 슬픔과 충격으로 거의 전신에 결핵균이 번지고 말았다. 수술을 거듭하며 겨우 살아났지만 어머니의 죽음은 그의 몸과 마음, 그리고 시에 크고 깊은 상처를 남겼다. ‘어머니가 아프셔요/ 누워 계셔요// 내 아플 때/ 어머니는 머리 짚어 주셨죠// 어머니/ 나도 머리 짚어 드릴까요?// 어머니가 빙그레/ 나를 보셔요// 이렇게 두 손 펴고/ 살포시 얹지요// 눈을 꼬옥 감으셔요/ 그리고 주무셔요// 나도 눈 감고/ 기도드려요.’(56~57쪽, ‘어머니’ 전문) 별의 목소리를 빌려 어머니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읊은 시도 있다. ‘엄마 별이/ 돌아가셨나 봐// 주룩주룩 밤비가/ 구슬피 내리네.// 일곱 형제 아기 별들/ 울고 있나 봐//.’(36쪽, ‘밤비’ 부분) 이외에는 하나님과 인간, 자연에 관한 시 등 평생을 동심으로 살았던 권정생의 내면을 정갈하게 드러내는 시편들이 많다. 아이들 눈높이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들이 기도드릴 때/ 하나님은 찾아오셔요.// 목사님 말씀이/ 정말일까?// 석아는 기도 시간에/ 살짝 눈을 떠 봤죠.//(중략)// 하나님은/ 마음속에 계셔요.’(22~23쪽, ‘마음속에 계셔요’ 부분) 시 하나하나 천진한 동심이 담겼다. 권정생은 ‘산비둘기’를 손수 책으로 꾸리면서 사인펜으로 동시를 쓰고 색종이를 활용해 표지와 본문을 꾸몄다. 정식 출간된 ‘산비둘기’도 표지와 본문의 그림 모두 작가의 생전 손길을 그대로 살리려 애썼다. 그 덕에 소박한 질감이 인상적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단독] 나눔의 집, 피해 할머니들 결핵검사도 제대로 안 해

    [단독] 나눔의 집, 피해 할머니들 결핵검사도 제대로 안 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쓰겠다며 모은 후원금을 부적절하게 사용한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이 할머니들에 대한 결핵 검진조차 제대로 실시하지 않은 사실이 확인됐다. 서울신문은 27일 정진석 미래통합당 의원실을 통해 경기 광주시가 지난달 2~3일 나눔의 집 시설을 지도·점검한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입수했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나눔의 집 시설은 광주시로부터 ▲할머니·직원들의 건강 관리 소홀 ▲보조금의 부적정 사용 ▲후원금 관리 부적정 ▲법정 비치 서류 미비 등 20개가 넘는 지적을 받았다. 노인복지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나눔의 집과 같은 노인 주거 복지시설은 입소자 및 직원에 대해 연 1회 이상의 결핵 검진을 포함한 건강진단을 해야 한다. 건강진단 결과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치료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하지만 광주시 점검 결과 나눔의 집은 할머니 전원에 대해 결핵 검진을 하지 않았다. 광주시 관계자는 “지난 5년(2015년~지난해) 동안 결핵 검진 실시 여부를 살펴보니 해마다 결핵 검사 등에서 검사 누락자가 발생하는 등 위안부 할머니 전원에 대한 결핵 검진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질병관리본부가 지난해 발표한 ‘2018년 결핵환자 신고 현황’에 따르면 2018년 결핵 신규 환자 중 65세 이상 노년층이 차지하는 비율은 45.5%로 가장 높다. 노인 주거 복지시설로서 시설 입소자에 대해 결핵 검진을 해야 할 의무가 있고, 노년층이 국내 결핵 환자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나눔의 집이 할머니들의 건강 관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단독] 나눔의 집, 할머니들 결핵 검사도 제대로 안 했다

    [단독] 나눔의 집, 할머니들 결핵 검사도 제대로 안 했다

    국내 결핵 환자 약 45%가 노년층인데5년 간 ‘할머니 전원 결핵검사’ 미실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쓰겠다며 모은 후원금을 부적절하게 사용한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이 할머니들에 대한 결핵 검진조차 제대로 실시하지 않은 사실이 확인됐다. 서울신문은 27일 정진석 미래통합당 의원실을 통해 경기 광주시가 지난달 2~3일 나눔의 집 시설을 지도·점검한 내용과 점검 결과가 적혀 있는 보고서를 입수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나눔의 집 시설은 광주시로부터 △할머니·직원들의 건강 관리 소홀 △부적정한 보조금 사용 △부적정한 후원금 관리 △법정 비치서류 미비 등 20개가 넘는 지적을 받았다. 노인복지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나눔의 집과 같은 노인주거복지시설은 입소자 및 직원에 대해 연 1회 이상의 결핵 검진을 포함한 건강진단을 해야 하며, 건강진단 결과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그 치료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하지만 광주시 점검 결과 나눔의 집 시설은 할머니 전원에 대해 결핵 검진을 실시하지 않았고, 직원 전원에 대해서도 건강검진을 실시하지 않는 등 건강 관리를 소홀히 한 사실이 드러났다. 광주시 관계자는 “지난 5년(2015년~지난해) 동안 결핵 검진 실시 여부를 살펴보니 해마다 결핵 검사 등에서 검사 누락자가 발생하는 등 할머니 전원에 대한 결핵 검진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질병관리본부가 지난해 발표한 ‘2018년 결핵환자 신고현황’에 따르면 2018년 결핵 신규 환자 중 65세 이상 노년층이 차지하는 비율은 45.5%로 가장 높다. 노인주거복지시설로서 시설 입소자에 대해 결핵 검진을 실시해야 할 의무가 있고, 노년층이 국내 결핵 환자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나눔의 집 시설이 할머니들의 건강 관리를 신경쓰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시설 ‘부적정’ 판정 항목만 25개 경기 광주시가 지난달 초 ‘나눔의 집’ 시설을 지도·점검한 결과를 보면 운영진은 시설 운영에 상당히 미흡했고, 후원금은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점검사항 63개(미해당 사항과 조사 중인 사항, 지난해 확인한 사항은 제외) 중 무려 25개 항목에서 ‘부적정’ 판정을 받았다. 서울신문이 이날 정진석 미래통합당 의원실을 통해 확인한 광주시의 나눔의 집 시설 지도·점검(지난달 2~3일) 세부 내역에 따르면, 나눔의 집 시설은 할머니들의 주·부식비로 사용해야 하는 국고보조금을 직원들의 급식비로 사용했다. 할머니들과 직원들이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할 때 직원들로부터 식대(음식값)를 별도로 받아야 하는데, 이 식대를 할머니들의 생계를 위한 보조금에서 충당한 것이다. 광주시는 “보조금을 할머니들의 부식비 비용으로 사용해 질 높은 식사 서비스 제공에 철저를 기하길 바란다”고 개선을 명령했다. 이외에도 나눔의 집 시설은 할머니들의 생신축하금, 추가 부식비, 명절위로비 등으로 사용돼야 할 보조금을 지난해 12월 말 상하수도요금(42만원)으로 지출하고, 시설운영비를 보조금 전용카드로 쓰면서 발생한 포인트를 시설 운영에 다시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시설회계로 세입 처리하지 않았다. 후원금 관리에 있어서도 나눔의 집 시설은 △후원자에게 후원금 수입 및 사용 내역을 통보하지 않고 △후원금 수입·사용 결과서를 법인(대한불교조계종 나눔의집) 및 시설 홈페이지에 공개하지 않은 점 △회계담당자인 수입원·지출원을 지정하지 않은 채 법인 회계 담당자에게 시설 회계 업무를 처리하도록 하는 등 회계 처리를 부적정하게 처리한 점 등을 지적받았다. 이외에도 시설 운영계획서와 후원금품대장을 시설에 비치하지 않고, 후원물품을 지난해 8월부터 물품관리대장에 등재하지 않아 물품 관리를 소홀히 한 사실도 드러났다. 나눔의 집 시설 일부 직원들이 민원을 제기한 ‘시설 안에서의 할머니들의 인권 침해’에 대해서는 노인보호전문기관이 조사 중이라고 광주시는 밝혔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 3월 같은 내용의 민원을 접수하고 이날 나눔의 집 시설을 방문하는 등 기초 조사를 하고 있다.안신권 소장이 시설장으로서의 의무를 위반한 사실도 확인됐다. 현행 사회복지사업법에 따르면 사회복지시설의 장은 상근시간에 다른 영리 업무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 만일 영리 업무를 겸직하고자 할 때는 시설을 운영하는 법인의 1차 판단을 받아 관할 지방자치단체에 보고해야 한다. 하지만 안 소장은 광주시와 사전 협의도 없이 2017년부터 매주 1회 대학 강의를 나가면서 외출 시 근무상황부에 기록조차 하지 않았다고 광주시는 지적했다. 앞서 나눔의 집 시설 운영상의 문제점을 공론화한 김대월 나눔의 집 역사관 학예실장 등 직원 7명은 안 소장을 배임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직원들은 안 소장이 2018년~지난해 개인 소송에 필요한 변호사 비용 990만원을 나눔의 집 시설 계좌에서 충당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안 소장은 “나눔의 집 공적인 일로 소송이 벌어졌고, 변호사와 상의해 시설 운영비에서 소송비를 댄 것”이라고 말했다. 안 소장은 지난 2월 사표를 낸 상태다. 대한불교조계종 나눔의 집은 안 소장의 후임자를 공모 중이며, 다음달 2일 안 소장을 불러 인사위원회를 열기로 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고가 항생물질 만드는 흙 속의 진주 ‘미생물’ 발견

    고가 항생물질 만드는 흙 속의 진주 ‘미생물’ 발견

    환경부 소속 국립생물자원관은 27일 암이나 각종 종양 치료제 개발에 쓰이는 ‘크로모마이신 에이3’(A3)를 합성하는 균주를 우리나라 토양에서 발견했다고 밝혔다.A3는 흙 속의 미생물에서 뽑아낸 항생물질로 1g에 약 9000만원에 달하고,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아 전량 수입하고 있다. 고가의 항생물질을 만드는 미생물이 발견됨에 따라 국내에서 대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됐다. 생물자원관이 우리나라 토양에서 유용한 균주를 발견한 것은 처음으로 ‘스트렙토마이세스 그리세우스 에스제이 1-7’로 이름을 붙였다. 연구진은 지난달 유전체 해독을 끝낸 후 5월 19일 특허 출원까지 마쳤다. 스트렙토마이세스 그리세우스는 결핵 치료에 사용되는 스트렙토마이신을 분비하며, 크로모마이신과 같은 항생물질을 합성한다. 또 아수가마이신 등 32개의 활성물질 유전자가 있어 다양한 연구가 기대된다. 배연재 관장은 “스트렙토마이세스 그리세우스 균주는 균핵병·궤양병 등 식물의 병원균 사멸 효과가 커 향후 친환경 식물병 방제제 등의 개발에도 속도가 붙게 됐다”고 말했다. 생물자원관은 2018년부터 토양 미생물 연구를 진행 중이다. 토양에는 항생제 사용 등으로 오염된 유해미생물에 대항해 생장을 억제하는 다양한 유용미생물이 존재한다. 세종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생전 모습 거의 완벽하게 유지한 ‘공룡 미라’가 박물관에 있다고?

    생전 모습 거의 완벽하게 유지한 ‘공룡 미라’가 박물관에 있다고?

    며칠 전 SNS상에서 ‘공룡 미라’가 소개돼 많은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명블로그 ‘어슬리 미션’은 19일(현지시간)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거의 온전하게 유지한 공룡 사진을 공개하고 이를 페이스북에 공유했다. 지금까지 2만5000회 이상 공유된 이 글에 따르면, 공개 사진은 지난 2011년 3월 11일 캐나다 앨버타주에 있는 밀레니엄 광산에서 광부 숀 펑크가 발견한 노도사우루스 화석의 모습이다. 이는 2017년 5월 여러 외신을 통해 지금까지 발견된 공룡 화석 중 가장 잘 보존된 화석으로 평가된다고 알려져 한 차례 화제가 됐던 화석이기도 하다. 복원 작업 전문가에 따르면, 이 공룡은 ‘결핵체’(concretion)라는 매우 단단한 암석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화석화된 이 공룡은 일종의 활석 가루처럼 부드러웠다. 처음에 발굴팀은 총 1만5800㎏에 달하는 화석과 암석을 광산에서 통째로 제거하려다 덩어리를 두 동강 내고 말았다. 그후 이들 고생물학자는 화석을 보호하기 위해 석고 등을 그 위와 암석에 바른 뒤 화석을 암석 채로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이후 화석은 트럭에 실려 12시간을 달려 로열 티렐 박물관에 도착했다. 이 박물관의 복원 전문가인 마크 미첼은 그때부터 6년 가까이 화석을 복원하는 작업에 임했다. 그는 화석이 너무 약해 눈에 보이는 모든 제곱밀리미터 면적에 접착제를 발라야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이렇게 해서 총 7000시간이 넘는 작업 끝에 무게 1360㎏의 공룡 화석이 완성됐다. 2017년 3월부터 일반 공개되기 시작한 이 화석은 거의 온전한 상태로 골격뿐만 아니라 가죽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그 옛날 공룡이 어떻게 생겼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고생물학자들의 분석에서 이 화석은 약 1억1000만 년 전인 백악기 전기에 생존한 노도사우루스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도사우루스는 1억4500만 년 전부터 6600만 년 전까지 백악기 통틀어 주로 북아메리카 대륙에 서식했던 초식공룡이다. 몸길이 5.5m에 달하는 이 공룡은 네 다리로 걷고 등부터 꼬리까지 갑옷처럼 돌기가 있어 천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한다. 하지만 뒤집히면 부드러운 복부가 드러나므로 싸울 때는 쪼그리고 앉아 배를 가린 것으로 추정된다.발굴 지역과 이 공룡의 특성을 고려해 ‘북쪽의 방패’를 의미하는 뜻하는 보레알로펠타(Borealopelta)로 명명된 이 공룡은 생전 모습을 간직할 뿐만 아니라 갑옷 모양의 피부를 덮는 케라틴(세포 골격을 구성하는 단백질 일종)이나 색소 세포의 멜라노솜 또는 소화기관 등 연한 조직이 보존돼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희소하다. 이 박물관의 큐레이터인 도널드 헨더슨은 “이런 점에서 역사상 가장 잘 보존된 공룡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화석을 넘어 미라라고 부르기에 적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화석의 보존 상태가 좋은 이유는 노도사우루스의 유해가 범람한 강물에 휩쓸려 바다까지 흘러 들어가 해저에 가라앉은 뒤 진흙 속에 매몰된 것이 원인일 것이라고 이들 연구자는 추정한다. 이에 대해 헨더슨은 “보레알로펠타가 다시 햇빛을 보기까지 1억 년 넘게 걸렸다. 그 사이 과거의 바다는 말라버려 광산으로 노출된 것”이라고 말했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실레마을에선 사랑이 이뤄지리라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실레마을에선 사랑이 이뤄지리라

    내게 강원 춘천은 ‘소설가의 분홍색 집’과 ‘소설가들’의 고장이었다. 처음 춘천 가는 기차를 탔을 적엔 이미 너무도 많은 사람과 사랑들이 다녀간 뒤였고, 102보충대에 입소하던 이를 배웅하러 오긴 왔지만 친오빠의 일이어서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울고 있는 엄마 뒤에서 오빠가 군대에 있을 동안에 그가 남기고 간 물건들을 쓸 생각에 약간 신이 났던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춘천? 노래에나 나오는 거기 아냐?” 미안한 말이지만, 여튼 그랬다.대학원 재학 시절의 단체 MT에서야 ‘춘천’ 혹은 ‘봄내’에 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됐다. 그때만 해도 아주 작았던 김유정 생가터와 소양댐, 청평사를 거쳐 자연 휴양림의 방갈로 안에서 ‘술 마시러 갔던’ MT.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교수님들이 타고 있던 앞차가 갓길에 섰다. 그리고 물안개가 짙게 깔린 소양댐을 배경으로 두 작가의 옥신각신이 이어졌다. “춘천이 고향인 최수철 소설가 집에 들렀다 가자”는 임철우 소설가의 제안, 동료 교수의 다정하고도 장난기 어린 제안을 거절하는 ‘옛날의 집주인’. 숙취가 가시지 않은 판에 흥미진진한 주거니 받거니를 보면서 “그럼 수철 교수님 생가에 가는 거예요?”라고 묻자 눈앞에 뻔히 살아 있으니 ‘생가’가 아니라 ‘본가’라고 해야 한다고 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결국 그냥 떡전거리(병점역)로 돌아가자고 했는데 봉고차 두 대가 선 곳은 어느 우아한 핑크색 주택이었다. 모두가 웃고 있는 단체사진 속에서 최수철 소설가만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 “핑크라니….” 집주인이었던 이가 내뱉은 이 한마디가 춘천의 화룡점정으로 남았다. 대학원생에서 등단한 소설가가 되는 동안 춘천은 사랑과 낭만, MT와 봄 강의 고장에서 김유정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장소로 변모했다. 그사이에 자그마했던 김유정 생가는 김유정 문학촌으로 바뀌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소설가 김유정의 고향이자 그가 병을 얻어 내려와 요양을 하며 야학을 세우고 사랑하던 이에게 끊임없이 연서를 보내던 곳이라는 사실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셈이었다.왜 김유정 문학관이 아니라 김유정 문학촌일까. 올해 문학촌장으로 부임한 이순원 소설가에게 물었더니 마을 곳곳이 김유정 소설의 배경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동시에 문학촌으로 들어오면서 내내 ‘김유정로, 김유정 우체국, 김유정역, 김유정 농협지점’ 등등의 이름들을 스쳐온 것이 떠올랐다. 2004년 12월 1일부터 신남역(무궁화호, 경춘선)은 김유정역이 됐다. 2010년 경춘선이 복선 전철로 바뀌어 다시 김유정전철역이 된 사연이 길게 이어졌다. 한국 최초로 문인의 이름을 딴 길과 마을, 전철역과 우체국이라니! 이는 가히 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서야 성립될 수 없는 크기이기도 했다.ㅁ자로 지어진 생가터에서부터 뻗어 나온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김유정 문학촌과 그 일대를 ‘소설 속 공간’으로 탈바꿈해 놓았다. 떡시루의 강원도 방언이라는 실레는 어쩌면 소설가 김유정으로부터 이야기를 빚어내기 위해 만들어진 동네가 아닐까. 김유정은 1908년생이다. 그리고 1937년 3월 29일에 이곳 실레(실제 지명은 신동면 증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2년 후에 경춘선이 처음 개통됐다. 그가 병사하지 않고 천수를 누렸더라면 실레에 기차가 들어온 것을 보고도 이야기를 지어냈을 법한 옴폭한 자리였다.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 문과에 진학한 수재였던 김유정은 어릴 적 양친을 잃고 나서 얻은 말더듬이병과 애정 결핍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던 중에 당대 명창인 박녹주를 만나 열렬한 구애를 펼쳤으나 실패했다. 박녹주의 가마를 지키고 서 있다가 마음을 전했으나 완강한 거절의 뜻을 전해 듣고 쓴 혈서는 그의 간곡한 마음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실연과 재적이라는 연이은 아픔에 고향으로 돌아온 김유정은 야학의 일종인 ‘금병의숙’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서울살이의 도회적 감수성과 연희전문까지 재학할 정도의 뛰어난 수재였던 김유정의 눈에 비친 고향 마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다. 고향에서 몸과 마음을 어느 정도 회복한 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간 그는 글쓰기에 매진해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와 조선중앙일보에 입선했다.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펼쳤고, 구인회의 후기 동인으로도 활동한다. 이때 시인 이상과의 교류가 이어지는데, 이들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타지에서 글을 쓰는 같은 처지의 동료로서 우정이 깊어졌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폐병을 얻기까지 한다. “각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치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이 대화 끝에 그들은 자살을 모의하기도 하지만 실패했다. 이상은 일본으로, 김유정은 다시 낙향해 투병과 작품 활동을 이어 간다. 이 대화를 나눈 이듬해에 그들은 다시 나란히 세상을 등졌다.김유정은 1937년 다섯째 누이 유흥의 과수원집 토방에서 투병 생활을 하며 휘문고보 동창인 안회남에게 생의 마지막 편지를 쓴다. 자신이 쓴 추리소설을 보낼 터이니 돈 백원을 융통해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닭 30마리와 살모사와 구렁이 10마리를 고아 먹고 너끈하게 일어나겠다고도 했다. 남은 생에 대한 의지가 매우 강인하게 나온 편지가 오히려 아리게 다가온다. 김유정은 그해 3월 29일 새벽에 생을 마감한다. 사인은 폐결핵과 치질. 김유정의 엽서와 유품들은 이 편지를 받은 안회남이 보관하고 있었으나, 안회남의 월북으로 인해 김유정의 흔적들은 모두 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유정 문학촌은 김유정의 유품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롯이 김유정의 소설로 다시 태어난 문학촌인 것이다.채 서른이 되기 전의 죽음이었지만 그가 남긴 30여 편의 단편소설은 아직도 빛나고 있다. 그 빛이 절정에 달하는 곳이 바로 이 김유정 문학촌이 존재하는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이다. 문학촌에서는 김유정의 소설과 생애만 담아둔 것이 아니라 기념전시관과 이야기집, 민속공예 체험방과 김유정 생가를 비롯해 그의 소설을 배경으로 한 ‘실레이야기마을’이 꾸려지고 있다. 금병산 밑의 옴폭한 시루 같은 마을 곳곳에 그의 소설의 배경과 인물들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김유정 문학촌은 ‘이야기가 복작대는 마을’이 됐고 그 이야기들을 따라 한 해에 백만 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장소로 변모했다. 그 길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들병이들 넘어오던 눈웃음길, 금병산 아기장수 전설길, 산국농장 금병도원길,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 덕돌이가 장가가던 신바람길,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던 고갯길, 춘호 처가 맨발로 더덕 캐던 비탈길, 도련님이 이쁜이와 만나던 수작골길, 산식각 가는 산신령길, 응칠이가 송이 따먹던 송림길, 응오가 자기 논의 벼 훔치던 수아리길, 근식이가 자기 집 솥 훔치던 한숨길, 금병의숙 느티나무길,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 나오던 데릴사위길, 김유정이 코다리찌개 먹던 주막길, 맹꽁이 우는 덕만이길”이 바로 그것이다. 김유정 사후에 발간된 소설집의 표지는 빨간 동백꽃이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동백꽃은 노란 동백, 즉 강원도 사람들이 부르는 생강나무꽃을 일컫는다. 촌장님의 안내에 따라 문학촌 곳곳에 있는 생강나무들을 찾아봤다. 그 ‘알싸한 향기’ 역시도 이 노란 동백꽃에서 나온 것임을 거듭 강조하는 촌장님의 생강나무 사랑이라니. 문학촌은 여러모로 이야기와 사랑이 넘치는 곳이었다. 시루에 담긴 이야기들이 작가의 품을 떠나 그곳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새롭게 읽히고 쓰여지는 공간이자 후배 문인들을 독려하고 창작의 길을 열어 주는 마을이 봄내, 춘천에 있다. 김유정의 생애는 다소 불행하고 끝내 사랑도 이루지 못했지만 그가 펼친 문학의 자리, 이야기들은 아직도 살아 있음으로 그 스스로의 힘을 증명해 냈다. 오죽하면 여태 ‘나’의 장인이 점순이의 키를 재고 있을까. 김유정은 현실에서의 사랑은 실패했지만 끊임없이 인물들에게 사랑과 인간애를 부여하는 매파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랑들이 모두 이어졌는지는 소설을 읽어 보거나 김유정 문학촌에 와서 확인해 볼 일이다.이제 내게 춘천은 김유정 문학촌과 소설가들 그리고 (여러 의미의)사랑과 아직도 분홍색인 소설가의 집이 있는 곳이다. 오정희, 전상국, 최수철 소설가를 비롯해 현재 김유정 문학촌의 상주 작가로 근무하는 전석순 소설가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멋진 소설가들의 등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김유정 문학촌의 위상이라니. 김유정의 춘천은 다소 무정했을지언정 그가 남긴 춘천에서의 이야기들은 하나의 문화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내게도, 이곳을 찾는 백만 명의 발길에게도 그리고 그의 작품을 잇는 후대의 독자들에게도. 우리들의 사랑은 부디 유정하기를!
  • “우린 참상을 알릴 유일한 외부인… 끝끝내 광주를 포기할 수 없었다”

    “우린 참상을 알릴 유일한 외부인… 끝끝내 광주를 포기할 수 없었다”

    1979년 4월 한국에 파견된 제45기 미국 평화봉사단 단원들은 광주와 전남 나주, 경기 안양 등 전국 곳곳의 병원과 보건소에서 결핵이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일했다. 영화 ‘택시운전사’로 익숙한 독일 제1공영방송 위르겐 힌츠페터 등 외신 기자들이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들과 대화할 수 있도록 통역을 맡은 것도 이들이다. 한국 정부의 항의로 평화봉사단은 조기에 해산됐지만, 단원들은 자신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 국내외에 광주의 진실을 전했다. 이들은 40주년을 맞아 광주를 방문할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오지 못했다. 서울신문은 14일 서면 인터뷰로 들은 데이비드 돌린저, 폴 코트라이트, 윌리엄 에이머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전남 영암의 작은 마을에서 결핵 환자를 돌보던 돌린저는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5월 16일 광주로 향했다. 18일 계엄령 선포 소식을 들은 돌린저는 이튿날 영암으로 돌아갔지만 21일 다시 광주를 찾았다. 한센인 자활촌인 나주 호혜원에서 봉사하던 코트라이트는 19일 환자를 병원에 데려가려고 광주로 향했다. 그는 “팀 원버그 등 동료로부터 전날 군인들이 학생들을 구타했다는 사실을 들었다”면서 “전화는 먹통이었고 광주로 유학 간 자녀를 걱정하던 나주 시민들을 대신해 다시 광주로 갔다”고 회상했다. 광주로 가는 길목마다 군용 헬기가 낮게 날았다. 도로 곳곳에 총알 박힌 버스와 승용차가 나뒹굴었다. 미국 대사관은 평화봉사단원들에게 광주에서 나오라고 명령했다. 단원들은 따르지 않았다. 코트라이트는 “광주 시민들이 참상을 알릴 유일한 외부인인 우리가 그들을 포기했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스러웠다”고 말했다.서슬 퍼런 계엄군의 언론 검열에 광주는 고립됐다. 정치적인 의사 표현은 평화봉사단원의 금기였다. 하지만 “통역은 외신 기자와 시민들의 의사소통을 돕는 것”이라고 단원들은 생각했다. 원버그는 힌츠페터를, 코트라이트는 타임지 사진기자인 로빈 모이어의 통역을 맡아 전남도청, 전남대병원을 돌아다녔다. 돌린저는 AP통신 기자 테리 앤더슨의 입과 귀가 됐다. 5월 24일, 전남도청에 안치된 시신은 대부분 청년이었다. 그중 나이 든 여성의 시신도 있었다. 모이어는 “이분은 어떻게 사망했나”라고 물었다. 한 의대생은 “군인들이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죽었다”면서 “당신들이 여기를 처음 방문한 외국인 기자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반드시 세계에 알려 달라”고 말했다. 코트라이트는 헬기 사격 사실을 부정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쓰레기라고 말해 주고 싶다”면서 “언제든 내가 본 일을 증언하겠다”고 했다.코트라이트는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알리려고 나주로 향했다. 군인들이 길목이란 길목은 다 막고 있었다. 코트라이트는 자전거를 타고 산을 넘었다. 그는 “매복하던 군인을 봤을 때는 식은땀이 났다”고 기억했다. “서울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가서 모든 일을 말하겠다”는 코트라이트에게 보건소장은 택시 운전사 문성남씨를 소개했다. 문씨는 “미국인인 게 잘 보이게 앞자리에 타라”고 했다. 호혜원에서 나주 터미널로 향하는 동안 수차례 군인들이 차를 세웠다. 그때마다 코트라이트는 차에서 내려 떨리는 손을 감추며 “평화봉사단도 미국 대사관의 소속 기관이니 나는 미국 대사관 직원”이라고 설득해 위기를 모면했다.평화봉사단원들은 5·18 민주화운동이 끝나자 추궁을 받았다. 한국 정부가 단원들의 활동에 항의했기 때문이다. 돌린저는 “미국 대사관은 단원들이 정치적 성명을 내기 위해 광주에 남았다고 (본국에) 전보를 보냈지만 이는 거짓”이라며 “우리는 미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광주를 떠나는 것이 머무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며 한국인 친구들이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한 일은 자원봉사자로서, 인간으로서 마땅한 도리였다”고 했다.전남대병원에서 봉사하며 모든 과정을 지켜본 원버그는 5월 27일 군의 진압작전 직후 도청에 들어가 시신을 수습했다. 단원 중 한국어를 가장 잘했던 그는 1987년 국외 최초로 5·18을 분석한 영문 보고서 ‘광주항쟁: 목격자의 견해’를 발표했다. 안양에 머물면서 광주에서 활동한 단원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에이머스는 1999년 최초의 5·18 외국소설 ‘기쁨의 씨앗’을 썼다. 에이머스는 “나에게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느리고 고통스러운 무수한 영웅의 이야기”라고 했다. 코트라이트는 당시 썼던 일기를 모아 이달 초 ‘5·18 푸른 눈의 증인’을 펴냈다. 코트라이트는 “5·18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토대였고 모든 국민이 자랑스러워해야 할 역사”라면서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진실을 기억하는 일이 그들에게 치유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5·18 묘지에 묻히길 바란다고 밝혔던 돌린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광주의 직접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점점 늙어간다”면서 “모든 사람들이 본 것을 말하고 고통에 공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푸른 눈의 증인들 “5·18 광주를 외면할 수 없었다”

    푸른 눈의 증인들 “5·18 광주를 외면할 수 없었다”

    외신기자들 입과 귀 돼준 美 평화봉사단원들“헬기 사격 똑똑히 봤다…언제든 증언할 것”“5·18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진실 기억해야”1979년 4월 한국에 파견된 제45기 미국 평화봉사단 단원들은 광주와 전남 나주, 경기 안양 등 전국 곳곳의 병원과 보건소에서 결핵이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일했다. 영화 ‘택시운전사’로 익숙한 독일 제1공영방송 위르겐 힌츠페터 등 외신 기자들이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들과 대화할 수 있도록 통역을 맡은 것도 이들이다. 한국 정부의 항의로 평화봉사단은 조기에 해산됐지만, 단원들은 자신의 기억을 기록을 남겨 국내 외에 광주의 진실을 전했다. 이들은 40주년을 맞아 광주를 방문한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오지 못했다. 서울신문은 14일 서면 인터뷰로 들은 데이비드 돌린저(David Dolinger), 폴 코트라이트(Paul Courtright), 윌리엄 에이모스(William Amos)의 이야기를 소개한다.전남 영암의 작은 마을에서 결핵 환자를 돌보던 돌린저는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5월 16일 광주로 향했다. 18일 계엄령 선포 소식을 들은 돌린저는 이튿날 영암으로 돌아갔지만 21일 다시 광주를 찾았다. 한센인 자활촌인 나주 호혜원에서 봉사하던 코트라이트는 19일 환자를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광주로 향했다. 그는 “팀 원버그(Tim Warnberg) 등 동료로부터 전날 군인들이 학생들을 구타했다는 사실을 들었다”면서 “전화는 먹통이었고 광주로 유학간 자녀를 걱정하던 나주 시민들을 대신해 다시 광주로 갔다”고 회상했다. 광주로 가는 길목마다 군용 헬기가 낮게 날았다. 도로 곳곳에 총알 박힌 버스와 승용차가 나뒹굴었다. 미국 대사관은 평화봉사단원들에게 광주에서 나오라고 명령했다. 단원들은 따르지 않았다. 코트라이트는 “광주 시민들이 참상을 알릴 유일한 외부인인 우리가 그들을 포기했다고 생각할까봐 걱정스러웠다”고 했다.서슬 퍼런 계엄군의 언론 검열에 광주는 고립됐다. 정치적인 의사 표현은 평화봉사단원의 금기였다. 하지만 “통역은 외신 기자와 시민들의 의사소통을 돕는 것”이라고 단원들은 생각했다. 원버그는 위르겐 힌츠페터를, 코트라이트는 타임지 사진기자인 로빈 모이어의 통역을 맡아 전남도청, 전남대병원을 다녔다. 돌린저는 AP통신 기자 테리 앤더슨의 입과 귀가 됐다. 5월 24일, 전남도청에 안치된 시신은 대부분 청년이었다. 그 중 나이 든 여성의 시신도 있었다. 모이어는 “이분은 어떻게 사망했나”라고 물었다. 한 의대생은 “군인들이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죽었다”면서 “당신들이 여기를 처음 방문한 외국인 기자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반드시 세계에 알려달라”고 말했다. 코트라이트는 헬기 사격 사실을 부정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쓰레기(rubbish)라고 말해주고 싶다”면서 “언제든 내가 본 일을 증언하겠다”고 했다.코트라이트는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알리려고 나주로 향했다. 군인들이 길목이란 길목은 다 막고 있었다. 코트라이트는 자전거를 타고 산을 넘었다. 그는 “매복하던 군인을 봤을 때는 식은땀이 났다”고 기억했다. “서울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가서 모든 일을 말하겠다”는 코트라이트에게 보건소장은 택시 운전사 문성남씨를 소개했다. 문씨는 “미국인인 게 잘 보이게 앞자리에 타라”고 했다. 호혜원에서 나주 터미널로 향하는 동안 수차례 군인들이 차를 세웠다. 그때마다 코트라이트는 차에서 내려 떨리는 손을 감추며 “평화봉사단도 미국 대사관의 소속 기관이니 나는 미국 대사관 직원”이라고 설득해 위기를 모면했다. 평화봉사단원들은 5·18민주화운동이 끝나자 추궁을 받았다. 한국 정부가 단원들의 활동에 항의했기 때문이다. 돌린저는 “미국 대사관은 단원들이 정치적 성명을 내기 위해 광주에 남았다고 (본국에) 전보를 보냈지만 이는 거짓”이라며 “우리는 미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광주를 떠나는 것이 머무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며 한국인 친구들이 무사한 지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한 일은 자원봉사자로서, 인간으로서 마땅한 도리였다”고 했다. 그러나 돌린저는 전남도청에서 하룻밤 머물렀다는 이유로 사직서를 강요당했다. 평화봉사단은 1981년 돌연 해산되면서 단원들은 한국을 떠나야 했다. 에이모스는 “한국 정부는 한국어를 쓰는 외국인들이 광주의 진실을 말하고 다니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전남대병원에서 봉사하며 모든 과정을 지켜본 원버그는 5월 27일 군의 진압작전 직후 도청에 들어가 시신을 수습했다. 5·18민주화운동을 알리는 작업도 멈추지 않았다. 원버그는 1987년 국외 최초로 5·18민주화운동을 분석한 영문 보고서 ‘1987년 ‘광주항쟁: 목격자의 견해’를 발표했다. 1993년 작고한 그에 대해 코트라이트는 “단원 중에서 한국어를 가장 잘하던 팀은 평화봉사단에게 허락된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광주 시민을 진정으로 보호하려고 애썼다”고 기억했다. 안양에 머물면서 광주에서 활동한 단원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에이모스는 1999년 최초의 5·18 외국소설 ‘기쁨의 씨앗’(The Seed of Joy)을 썼다. 에이모스는 “나에게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느리고 고통스러운 무수한 영웅의 이야기”라고 했다. 코트라이트는 당시 썼던 일기를 모아 이달 초 ‘5·18 푸른 눈의 증인’을 펴냈다.코트라이트는 “5·18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토대였고 모든 국민이 자랑스러워 해야 할 역사”라면서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진실을 기억하는 일이 그들에게 치유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5·18 묘지에 묻히길 바란다고 밝혔던 돌린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광주의 직접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점점 늙어간다”면서 “모든 사람들이 본 것을 말하고 고통에 공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질병관리본부, 다제내성 결핵 진료지침 개정

    질병관리본부, 다제내성 결핵 진료지침 개정

    질병관리본부는 다제내성결핵 환자를 신속히 진단하고 초기에도 신약을 사용할 수 있도록 결핵진료지침을 개정했다고 7일 밝혔다. 다제내성결핵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결핵약(이소니아지드와 리팜핀)에 내성이 생긴 결핵이다. 이번 진료지침 개정은 지난해 3월 세계보건기구(WHO)의 다제내성결핵 통합 가이드라인 개정에 따른 것이다. 국내 여건에 맞는 표준화된 진단 및 치료 방법을 담았다. 개정안에는 치료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환자를 보다 빨리 진단하고 초기에도 신약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신속 진단 및 신약 사용기준을 변경했다. 다제내성결핵 진단이 지연되는 것을 줄이고자 모든 결핵환자의 균주나 양성 검체에 대해 이소니지아드와 리팜핀의 신속 감수성 검사를 권고했다. 다제내성결핵이 확인된 경우 추가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퀴놀론계 약제에 대한 신속 감수성검사도 추가하도록 권고했다. 또 치료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베다퀼린(신약), 리네졸리드 및 퀴놀론계 약제를 치료초기부터 사용하도록 했다. 우리나라 결핵 신규환자는 지난해 2만 3821명으로 10만명당 46.4명 꼴이다. 2011년 이후 8년 연속 감소 추세다. 이 가운데 다제내성결핵 신규환자는 2011년 975명, 2015년 787명, 2019년 580명으로 줄어들고 있다. 치료 성공률은 2017년 64.7%로, 선진국의 70~80%에 비해 낮다.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은 “이번 결핵 진료지침 개정에 따라 다제내성결핵 신약 등의 요양급여 확대 및 신속감수성검사 제한 완화 등 관련 제도가 개선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면서 “다제내성결핵 환자의 치료 성공을 높이고자 다제내성결핵 전문 의료기관 지정과 협회(컨소시엄) 구축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개정된 결핵 진료지침은 이날부터 질병관리본부, 결핵 ZERO, 질병보건통합관리시스템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쇄본은 이달 말까지 민간의료기관과 지방자치단체 등에 배부한다. 세종 박찬구 선임기자 ckpark@seoul.co.kr
  • 코로나19 검사받도록 불법체류 단속 미루고 무료 검진치료

    코로나19 검사받도록 불법체류 단속 미루고 무료 검진치료

    정부가 코로나19 방역 사각지대에 방치된 미등록 외국인(불법체류자)과 노숙인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 미등록 외국인이 인근 보건소에서 강제 출국당할 걱정 없이 검사를 받도록 단속을 미루고, 진단·치료 과정에서 남은 기록을 단속에 이용하지 않기로 했다. 또 노숙인과 쪽방 주민이 임시보호시설에 입소하기 전에 진단검사를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찾아가는 방역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1일 이런 내용의 미등록 외국인·노숙인 방역 사각지대 대책을 발표했다. 정부 추산 미등록 외국인은 38만 7000명, 노숙인은 1만여명이다. 각국의 봉쇄 정책으로 출국길마저 막히면서 국내 미등록 외국인들은 코로나19 방역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노숙인 역시 증상이 나타나더라도 스스로 선별진료소를 찾는 일이 드물어 이들 중 감염자가 몇 명에 이르는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김강립 중대본 제1총괄조정관은 “비자 기간이 만료돼 체류 자격이 없는 외국인들이 적기에 무료로 진단과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보건소 선별진료소에서 16개 언어로 비대면 통역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법무부는 일정기간 미등록 외국인 단속을 미룰 계획이다. 지방자치단체는 외국인 지원단체 등과 미등록 외국인도 증상이 있으면 강제 출국 걱정 없이 무료 진단과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홍보하기로 했다. 반재열 법무부 이민조사과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진료받는 과정에서 기록이 남게 되는데 법무부는 그 정보를 수집하지 않을 것이며, 나중에 단속이 재개되더라도 그러한 정보를 이용하는 일은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미등록 외국인들이 강제 출국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숨거나 검사·치료를 피하지 않도록 위험 부담을 덜어줘 스스로 보건소를 찾게 하자는 게 기본 취지다. 필요하면 맞춤형 진료가 이뤄질 수 있도록 외국인 밀집지역 대상 이동형 검사도 한다. 민간 무료 진료소 등에서 요청하면 지역 보건소가 개인 보호구와 진단장비 등 검사에 필요한 물품을 지원한다. 정부는 이와함께 거리 노숙인 대상 현장보호활동을 강화하고 국가 결핵 검진사업과 연계해 엑스레이 소견상 코로나19가 의심되면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민주화·사회운동에 헌신… ‘반독재’ 선봉에 선 사제

    민주화·사회운동에 헌신… ‘반독재’ 선봉에 선 사제

    동일방직사건 대책위원장 등 활동 유신 철폐 기도회 주도하다 구속도 文대통령 “민주화 운동 대부” 애도 정부, 고인에 국민훈장 모란장 추서민주화와 사회운동에 헌신했던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이 지난 25일 선종했다. 88세. 문재인 대통령은 26일 애도 메시지를 전했고, 문화체육관광부는 ‘국민훈장 모란장’(2등급)을 추서했다. 1932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고인이 사제 서품을 받은 것은 37세 되던 1969년이었다. 1948년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과 폐결핵 투병 등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뒤늦게 1963년 가톨릭신학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고인은 반평생을 민주화와 사회운동 현장에 있었다. 지역 선교와 신앙 교육 등 본연의 사목 활동을 하면서도 1970년대 후반 동일방직 사건 대책위원회 위원장, ‘목요회’ 상임대표, 인천 굴업도 핵폐기물처리장 반대 대책위원회 상임대표 등으로 활동했다. 1977년에는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기도회를 주도했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이후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초대 위원장,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공동대표, 민족문제연구소(민문연) 이사장 등을 지냈다. 200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고인에게 몬시뇰 칭호를 내렸다. 몬시뇰은 주교품을 받지 않은 가톨릭 고위성직자에게 부여한다. 민문연 이사장 때인 2009년에는 임헌영 민문연 소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을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 바쳤다. 2018년 12월엔 회고록 ‘따뜻한 동행’을 펴냈다. 사제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현대사 한복판에서 겪은 일들을 담았다. 이후 2년여 투병 생활을 보낸 고인은 25일 0시 5분 영면에 들었다. 빈소는 인천 동구 인천교구청 보니파시오 대강당, 장례미사는 27일 오전 10시 답동 주교좌 성당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장지는 인천 하늘의 문 묘원 성직자 묘역이다. 문 대통령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김병상 몬시뇰 신부님의 선종을 슬퍼한다”며 “또 한 분의 어른이 우리 곁을 떠났다”고 했다. 이어 “신부님은 사목 활동에 늘 따뜻했던 사제이면서 유신 시기부터 길고 긴 민주화의 여정 내내 길잡이가 돼 준 민주화 운동의 대부였다”면서 “민주화를 위해 애쓰며 때로는 희생을 치르기도 했던 많은 이들이 신부님에게서 힘을 얻었다”고 떠올렸다. 문 대통령은 또한 “제가 국회에 있을 때 국회에 와서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국미사’를 주재해 주기도 했고, 청와대에 입주할 때 와서 작은 미사와 축복을 해 주기도 했다”며 고인과의 개인적 인연을 소개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민주화·사회운동에 헌신… ‘반독재’ 선봉에 선 사제

    민주화와 사회운동에 헌신했던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이 지난 25일 선종했다. 88세. 문재인 대통령은 26일 애도 메시지를 전했고, 문화체육관광부는 ‘국민훈장 모란장’(2등급)을 추서했다. 1932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고인이 사제 서품을 받은 것은 37세 되던 1969년이었다. 1948년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과 폐결핵 투병 등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뒤늦게 1963년 가톨릭신학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고인은 반평생을 민주화와 사회운동 현장에 있었다. 지역 선교와 신앙 교육 등 본연의 사목 활동을 하면서도 1970년대 후반 동일방직 사건 대책위원회 위원장, ‘목요회’ 상임대표, 인천 굴업도 핵폐기물처리장 반대 대책위원회 상임대표 등으로 활동했다. 1977년에는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기도회를 주도했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이후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초대 위원장,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공동대표, 민족문제연구소(민문연) 이사장 등을 지냈다. 200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고인에게 몬시뇰 칭호를 내렸다. 몬시뇰은 주교품을 받지 않은 가톨릭 고위성직자에게 부여한다. 민문연 이사장 때인 2009년에는 임헌영 민문연 소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을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 바쳤다. 2018년 12월엔 회고록 ‘따뜻한 동행’을 펴냈다. 사제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현대사 한복판에서 겪은 일들을 담았다. 이후 2년여 투병 생활을 보낸 고인은 25일 0시 5분 영면에 들었다. 빈소는 인천 동구 인천교구청 보니파시오 대강당, 장례미사는 27일 오전 10시 답동 주교좌 성당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장지는 인천 하늘의 문 묘원 성직자 묘역이다. 문 대통령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김병상 몬시뇰 신부님의 선종을 슬퍼한다”며 “또 한 분의 어른이 우리 곁을 떠났다”고 했다. 이어 “신부님은 사목 활동에 늘 따뜻했던 사제이면서 유신 시기부터 길고 긴 민주화의 여정 내내 길잡이가 돼 준 민주화 운동의 대부였다”면서 “민주화를 위해 애쓰며 때로는 희생을 치르기도 했던 많은 이들이 신부님에게서 힘을 얻었다”고 떠올렸다. 문 대통령은 또한 “제가 국회에 있을 때 국회에 와서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국미사’를 주재해 주기도 했고, 청와대에 입주할 때 와서 작은 미사와 축복을 해 주기도 했다”며 고인과의 개인적 인연을 소개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정부, 북한 교류협력 속도낸다…6·15 20주년 맞아 기념행사 추진

    정부, 북한 교류협력 속도낸다…6·15 20주년 맞아 기념행사 추진

    정부는 24일 올해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을 맞아 민간단체 등과 협력해 남북간 교류와 공동 기념행사를 추진한다. 통일부는 이날 남북교류협력 활성화를 위해 남북 공동행사와 스포츠 교류 등 사회문화 분야 협력 사업 재개한다는 내용을 담은 ‘2020년도 남북관계발전시행계획’을 수립했다고 밝혔다. 올해 시행 계획에는 한반도 신경제공동체 구상을 위한 법·제도 개선과 각종 사업도 주요 정책으로 담겼다. 우선 남북경제공동체의 기반을 구축하고 지역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통일경제특구법’ 제정을 추진한다. 현재 이 법안과 관련해 ‘평화경제특별구역의 지정 및 운영에 관한 법률’ 등 의원 발의안 6개가 논의 중이다.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도 남북 관계와 국제 정세의 변화를 고려해 남북관계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 개정을 추진할 계획이다. 지난 23일 남북교류협력사업으로 인정된 동해북부선 강릉∼제진 구간 철도연결사업도 한반도 신경제 구상을 위한 주요 정책으로 소개됐다. 동해선과 경의선 연결을 위해 향후 남북 당국 간 협력을 단계적이고 점진적으로 확대한다. 또한 한강하구의 공동 이용 수역 공동조사와 선박 시범 운항을 추진하고, 남북 동·서해 국제항공로 조정과 남북 해상항로대 복원을 추진한다. 대북 개별관광을 위한 제도적 여건 마련의 일환으로 ‘남북 간 관광 협력 관리기구’ 설립을 위한 협의도 계획했다. 개별관광 방식은 ‘이산가족의 금강산·개성 방문’, ‘제3국 여행사를 통한 일반 국민의 북한 관광지 여행’ 등 크게 두 가지 안이다. 더불어 ‘이산가족 상봉 20주년’을 맞아 이산가족 대면 상봉을 추진하고, 남북적십자회담 등을 통해 이산가족 교류 다각화와 정례화를 추진한다. 또 코로나19 사태로 필요성이 대두된 남북 보건 협력도 주요 과제다. 말라리아·결핵 등 시급한 감염병 분야부터 협력을 모색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세대별·직업군별 교육훈련과 기술협력 등도 준비할 방침이다. 정부는 지난 4·15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둠에 따라 북한과의 교류협력 추진에 힘을 실을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 당국자는 지난 23일 “4·27판문점 선언의 국회비준이 이뤄지면 9·19 평양 공동 선언 등 후속선언은 비준을 받지 않아도 된다”며 판문점 선언의 비준 재추진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통일부는 “시행계획에서 제시한 사업을 관계부처와 긴밀히 협업해 추진해 나갈 것”이라며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2000자 인터뷰 35]가미 마사히로 “2021년 도쿄올림픽 개최는 무리”

    [2000자 인터뷰 35]가미 마사히로 “2021년 도쿄올림픽 개최는 무리”

    도쿄 중심으로 병원, 요양시설 원내 감염 증가세 장기적으로 한국, 일본 2022년까지 코로나19 갈 것 우려했던 의료붕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어 지금이라도 일본은 PCR 검사 대폭 늘려야    일본의 코로나19 상황이 진정 기미를 보이지 않고,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중앙방역대책본부가 23일 발표한 신규 확진자는 해외 유입 4명을 포함해 8명으로 감소세가 뚜렷한 한국 상황과 대비된다. 일본의 비영리법인 의료거버번스연구소의 가미 마사히로(上昌広) 이사장은 이날 서울신문과 전화 인터뷰를 갖고 “도쿄도에서 병원이나 요양시설 등의 원내 감염이 증가하고 있다”면서 지금이라도 한국처럼 코로나 감염 여부를 가리는 PCR(유전자증폭) 검사를 대폭 늘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미 이사장은 1968년생으로 도쿄대 의대 출신. 혈액·종양내과학과 진균감염증학이 전문으로 국립암연구센터를 거쳐 도쿄대 교수를 지냈다. 다음은 가미 이사장과의 일문일답 내용. Q. NHK가 오늘(23일) 아침 보도한 데 따르면 일본의 코로나19 확진자는 이날 현재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크루즈선 탑승자를 포함해 1만 2704명이다. 일본의 신규 확진자 수는 많을 때는 하루 500명선에서 최근 300명대로 줄었다가 22일 400명대로 다시 늘었다. 이런 증가세는 언제까지 갈 것으로 보는가. A. 코로나19는 장기적으로 2022년까지 지속될 것으로 본다. 그건 일본도 한국도 마찬가지다. 단기적으로 보면 일본의 경우 원내 감염이 증가할 것이다. 도쿄도만 따지면 확진자 중 병원 내 감염이 20%에 이르고 있다. 노령자가 대부분인 요양시설 감염자도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런 곳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번 들어가면 대처가 어렵다. Q. 한국은 많을 때는 하루 2만건씩 코로나 감염을 가리는 PCR 검사를 하고 감염자를 격리하는 공격적 정책을 폈다. 그래서 많을 때는 신규 확진자가 900명 이상 증가하는 날도 있었다. 일본의 PCR 검사는 하루 몇 건 정도인가. A. 날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3000~5000건 정도이다. Q. 인구도 한국의 2.5배 많은 일본에서 PCR 검사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단 키트가 부족한가, 검체를 검사하는 기관이 모자란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가. A. 후생노동성(후생성) 방침에 따라 민간 검사회사에 검체를 보내지 않는다. 일본에서 코로나 유행이 시작된지 3개월이 지났다. 검사가 이렇게 적게 이뤄지는 것은 상식적으로 일본의 기술력으로 미뤄봤을 때 생각할 수 없다. 정부가 민간을 활용하지 않고 있다. 1998년 제정된 감염증법에 따라 코로나 등 감염자는 강제 격리하고 접촉한 사람을 국립감염연구소가 조사하는 클러스터(환자집단) 방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설사가 심해 증상이 뚜렷한 콜레라라면 모를까 잠복기가 10일에서 2주일인데다 무증상자도 많은 코로나에 이 방식을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다. 원하는 사람 모두 PCR 검사를 해준 게 아니라 고열 등 증상이 몇 일간 지속돼야 검사를 했다. 이러다 보니 확진자가 많이 나오지 않았고, 일본은 감염자가 적다고 주목을 받았다. 도쿄하계올림픽을 앞두고 아베 신조 총리가 칭찬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도쿄올림픽 연기가 결정된 뒤 검사가 갑자기 늘었다. 그 뒤 감염자가 늘어나고 있지만 지금도 검사를 제한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인은 (일본 정부가 축소한) 의도적인 숫자를 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불신감을 갖고 있다. “너희들이 숫자를 만들고 있다”고. Q. 일본이 PCR 검사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의료붕괴를 우려해서였다. 감염자 1만 2000명을 넘은 지금 의료붕괴는 일어나고 있는가. A. 원내 감염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도쿄에 대학병원만 13개 있다. 이들 병원에서 외래, 입원, 수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의사, 간호사가 감염됐기 때문이다. Q. 일본에서 중증자, 사망자가 적은 이유는. A. 그 역시 검사를 많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원인 불명의 사망자가 많이 나온다. 갑자기 집에서 사망한 사람이 코로나로 숨진 것으로 판명되는 사례도 있다. 도쿄도만 보면 2월의 사망자가 작년 같은 달에 비해 많다. 보통은 인플루엔자로 많이 죽는데 올해에는 도쿄에서 인플루엔자가 전혀 유행하지 않았다. 원인 불명 사망자는 코로나에 의한 것이라고 난 보고 있다. Q. 감염 경로가 확인되지 않는 사례가 한때 70%에 육박했다. 공표되는 확진자 숫자보다 실제 감염자가 더 많을 것으로 추측하는 근거로 봐도 되는가. A. 그렇다. Q. 한국에서는 2004년 발족한 질병관리본부가 방역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고 있으며 지금도 방역을 지휘하고 있다. 일본에는 이런 사령탑이 정부 내에 있는가. A. 일본도 의사면허를 가진 고급 관료가 있다. 하지만 한국과 다른 것은 이들은 임상이나 연구와는 거리가 먼 관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은 본부장 되기 전까지는 연구를 죽 해왔던 인물 아닌가. 일본의 의사면허 가진 관료는 전문가라 할 수 없다. 이번에는 후생성 건강국 결핵감염증과에서 지휘를 했다. 과장이 의사면허를 갖고 있지만 현장 의사 경험이 없어서 적극 대응하기 어려웠다고 본다. 한국과 일본의 결정적 차이다.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야마나카 신야 교수를 의사면허 가진 관료가 버젓이 혼내는 일이 일어나는 게 일본이다. Q. 지금 여러가지 코로나 대책을 내고 있는 전문가회의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A. 후생노동성과 가까운 학자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의사들이라 일본의 후생 행정의 법률에는 관여를 안 한다. 법률 개정은 도쿄대 법학부 나온 관료들이 하는데 이들이 의사출신 관료에게 연구비를 주는 관계다. 이들은 후생성 돈으로 세계보건기구(WHO)에 가서 간부도 하지만 대부분 B급 의사 관료이다. Q. 아베 정권의 코로나 대책을 평가한다면. A. 아베 정권은 코로나 대책을 후생성에 다 떠넘겨 버렸다. 아베 정권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힘 센 정권인데, 의사 관료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다. 사실 아베 총리가 PCR 검사를 하라고 했지만 의사 관료들이 듣지를 않았다. Q. 감염자 증가를 막기 위한 대책을 일본 정부에 제안한다면. A. 한국의 방법이 좋다. 검사를 철저히 해서 감염자를 확실하게 가려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일본인 코로나 사망자의 대부분이 요양시설과 병원 등에서 나온다. 원내 감염 대책을 철저히 할 것을 당부하고 싶다. 지금 일본 정부가 국민들에게 밀폐, 밀집, 밀접 등 3개의 밀(密)을 강조하며 행동의 자숙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것은 정확한 데이터가 있고 나서 해야 한다. 한국의 방식은 정말이지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총선도 무사히 치렀지 않나. Q. 내년 7월로 도쿄올림픽이 연기됐다. 내년에 올림픽 개최가 가능할 것으로 보는가. A. 상식적으로 보면 무리다. 일본 상황만 안정되면 뭐하나. 남미, 아프리카의 상황까지 종식되지 않으면 힘들다. Q. 한국의 방역을 어떻게 봤나. A. 잘했다고 생각한다. 검사를 철저히 했다. 질병관리본부장이 아주 믿음직스럽다. 일본도 처음에는 꺼리더니 한국 방식인 드라이브 스루를 들여왔다. 황성기 평화연구소장 marry04@seoul.co.kr
  • 팔순, 내 나이가 어때서… 전국구 꿈, 완전 찐이야

    팔순, 내 나이가 어때서… 전국구 꿈, 완전 찐이야

    중국 만주에서 태어났지만 조선인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북한으로 넘어갔고, 북에서는 중국 태생이라고 차별받아 남한으로 탈출했다. 일제강점과 해방, 분단을 거친 한국 현대사에서 그처럼 곡절을 겪은 이가 한두 명이겠느냐마는, 가수의 꿈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버텼다. 뛰어난 노래 실력으로 북에서는 노동당에서 인정받고 남한에서는 가수협회에 등록해 80세인 지금도 매년 수십 차례 행사를 뛰는 현역 가수가 됐다. 하지만 인기가수로 거듭나 한민족에게 신바람을 주고 싶다는 꿈은 놓지 않고 있다. 탈북민 어르신으로 구성된 평양실버예술단 단장으로 활동했으며, 여전히 TV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하고 있다는 김병수(80)씨를 지난 14일 서울 양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김씨는 1941년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구 투먼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애초에 투먼시와 접한 함경남도 온성에서 살았다. 두만강 건너 중국에서 싸리나무를 베어 온성으로 돌아와 장에 팔면서 생계를 꾸렸는데, 여름이 되면 두만강이 녹아 건너가기 어려웠다. 어차피 나무를 해서 살아야 한다면 중국이 낫겠다고 생각해 중국으로 넘어가 결혼하고 김씨를 낳았다고 한다. ●노래 잘하는 학생으로 소문 김씨는 투먼에서 초·중등학교를 다녔는데, 시(市)급인 현(縣)까지 소문난 노래 잘하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변변한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고 예술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기에 고등중학교 졸업 후 옌지의 재정간부학교에 입학했다. 1962년 학교를 졸업하고 훈춘시 재정국에 배치됐지만 결핵성 늑막염에 걸려 6개월을 집에서 요양해야 했다. 요양을 마치고 재정국으로 찾아갔지만 ‘집에 가라’는 말이 돌아왔다. 김씨가 실직한 당시 중국에서는 ‘반우파 투쟁’이 한창이었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조선족들은 ‘조선’을 조국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중국 공산당은 이들을 ‘우파’로 몰며 탄압했다. 직장에서는 잘리고, 조선족 사회는 불안하고, 게다가 “회계는 죽어도 하기 싫었다”는 김씨는 결국 더 나은 삶을 찾아 1965년 혈혈단신 북한으로 넘어간다. 자강도 전천의 기계공장에 배치받아 조립공, 선반공으로 일했다. 회계를 전공해 기계는 전혀 몰랐던 김씨는 남들보다 두세 배 일했다. 입북 4년 만에 노동당에 입당할 수 있었다. 김씨는 북한에서도 끼를 감출 수 없었다. “입당 후 작업반장에 임명됐는데 선전선동 업무도 겸해야 했어요. 아침조회 때 직원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신문을 독보했는데 내 시간이 됐죠. 기념일이나 연말에는 김일성·김정일 사상을 공부하고 노래·춤 등으로 표현하는 직장별, 군(郡)별 경연대회가 있어요. 그 대회에서 우리 작업장, 공장이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죠. 공장 간부들이 알림판에 ‘공부하려면 김병수처럼 하라’고 써 놓기도 했답니다.” ●선전선동 업무서 끼 발휘… 예술단 등서 스카웃 제의도 예술단이나 선전단체로 옮길 실력은 됐지만 중국 태생이라는 꼬리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공장에서 나와 같이 노래 부르던 사람들이 예술단이나 선전단체로 갔고, 나도 갈 수 있었는데 공장 간부가 잡더라고요. 내가 일을 잘해서 잡기도 했겠지만, 중국 태생이라는 점 때문에 선전선동 전문단체로 안 보낸 것 같아요.” 당시 북한에서는 중국 태생들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고 한다. “1970년대 공장에 근무하며 대학을 다녔는데 4학년 올라갈 때쯤 중국 연고자들은 높은 지위에서도 해임되고 평양에서도 쫓겨났죠.” 김씨는 공장에서 선전선동 업무를 통해 끼를 펼칠 수 있었으나 전문 가수의 꿈은 그만큼 더 커져 갔다. 1990년 전국 선전선동원대회와 전국 선전선동경연대회에 김씨의 공장이 참가할 수 있게 되자 김씨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김씨는 공장의 전문선동원은 아니었지만, 50세의 나이에도 노래와 춤을 독보적으로 잘해 참가 자격을 얻었다. 전국대회에서 입상해 선전선동원대회에 참가하게 되면 전문 가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김씨의 팀은 경연대회 3등에 올랐으나 그만 선전선동원대회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너무 분해서 공장 당비서에게 찾아갔어요.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당 비서가 그러더라고요. 중국 태생이라 그랬다. 반항도 못 했어요. 해 봐야 욕이나 더 먹겠죠. ‘여기서 더는 살 필요가 없다. 이 치욕을 나는 참을 수 있어도 자식들 보기 부끄러워서 못 견디겠다’고 생각했죠.”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탈북길 가수의 꿈도 좌절되고, 노래를 부를 의욕도 꺾인 김씨에게 1990년 중반 ‘고난의 행군’은 탈북의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김씨는 1996년 첫째 딸과 첫째 사위, 손자와 함께 탈북길에 올랐다. 전천에서 함경남도 함흥까지 12일 동안 산길을 걷고 함흥에서 온성까지 기차로 이동한 뒤 온성에서 두만강을 헤엄쳐 투먼으로 가는 험난한 장정이었다. 중국에서도 고난은 계속됐다. “둘째 딸이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다 겨우 풀려나자 결국 가족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탈북민 지원 단체의 도움으로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거쳐 2001년 남한에 온 김씨는 당시 61세라 마땅한 직업을 가지기 어려웠다. “탈북민 모임에서 주최하는 노래 경연대회를 알게 돼 참가했고, 북한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탈북민과 만나게 됐죠. 그와 소규모로 탈북민 예술단을 결성하고 공연을 다녔는데 당시 남북 관계가 좋아서 그랬는지 탈북민 공연도 인기가 높았죠.” 김씨와 그의 예술단은 많을 때는 한 해 300여 차례 공연을 했다. 북한에서 무용을 전공한 첫째 딸과 어려서 풍금에 소질을 보였던 셋째 딸도 같이 예술단 활동을 했다. 김씨의 딸들은 지금도 활발히 공연을 하고 있다. 탈북한 지 2년 만에 서울 종로구에서 열린 남인수가요제에 참가해 특별상을 받고 가수협회에 등록까지 해 정식 가수가 됐다. “탈북 후 탈북민 교육을 위한 하나원에 입소했을 때 ‘직업과 진로’라는 강좌를 들었는데 내가 남한에서 가수가 되겠다고 하니 강사가 ‘60대 늙은이가 어떻게 가수가 되겠나’라고 웃더라고요. 가수협회 등록하고 그 강사에게 전화해서 가수가 됐다고 말했죠.” ●주종목은 전통가요… 트로트 열풍 부니 해 뜰 날 있겠죠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2011년 71세 나이에 슈퍼스타K에 지원했지만, 아쉽게 3차 예선에서 떨어졌다. “TV에서 슈퍼스타K 지원자를 모집한다는데 1~99세까지 가능하다고 해서 지원했죠. 1, 2차 예선을 통과하고 코엑스에서 열린 3차 예선에 들어갔는데 심사위원으로 윤종신, 이효리, 길이 앉아 있었어요. 윤종신씨가 ‘아버님이 노래는 잘 부르시는데 이번 콘셉트와 맞지 않는다’고 해 속으로 울컥했죠. 1~99세는 모두 가능하다고 했지만 사실 30대 미만의 전도유망한 사람을 찾는 거라 생각했어요. 다만 이효리씨는 ‘저와 방송 같이해 보지 않겠나’라고 했는데 그때 대답을 못 했어요. ‘좋다’고 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김씨는 2013년 평양실버예술단을 조직했고 지난해에도 50여 차례 공연을 소화했다. 80세에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비결을 물었더니 “목소리를 위해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어렸을 땐 담배를 피웠는데, 북한 공장에서 선전선동 업무를 맡고 노래를 부를 때부터 술 줘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웠어요. 경연한다고 하면 감기 안 걸리도록 각별히 신경 썼고요. 남한에선 목을 부드럽게 한다며 생달걀을 먹던데 북한에서는 달걀을 기름에 풀어 볶아서 먹어요. 목소리가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게끔요.” 김씨의 주종목은 전통가요다. 9년 전 슈퍼스타K 때는 ‘콘셉트가 맞지 않는다’며 탈락했지만, 트로트 열풍이 불고 있는 2020년 그의 시대가 열릴지도 모를 일이다. “탈북민 예술단에서 활동하는 딸이 ‘아버지, 지금도 ‘막걸리 한 잔’ 부르면 영탁(트로트 가수)이보다 더 잘 부르고 소리도 더 맑으세요’라고 한답니다. 아직도 높은 음도 다 냅니다. 이 나이에 노래 부르고 춤추면 어르신들도 힘이 날 테고, 어르신들이 힘이 나야 젊은이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디션 프로그램에 지원하려면 죄다 온라인으로 해야 해서 딸의 손을 빌려야 하는데 떨어지면 창피하다고 안 해 줘서 걱정입니다. 하하하.”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팔순 내 나이가 어때서… 전국구 꿈 완전 찐이야

    팔순 내 나이가 어때서… 전국구 꿈 완전 찐이야

     중국 만주에서 태어났지만 조선인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북한으로 넘어갔고, 북에서는 중국 태생이라고 차별받아 남한으로 탈출했다. 일제강점과 해방, 분단을 거친 한국 현대사에서 그처럼 곡절을 겪은 이가 한두 명이겠느냐마는, 가수의 꿈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버텼다. 뛰어난 노래 실력으로 북에서는 노동당에서 인정받고 남한에서는 가수협회에 등록해 80세인 지금도 매년 수십 차례 행사를 뛰는 현역 가수가 됐다. 하지만 인기가수로 거듭나 한민족에게 신바람을 주고 싶다는 꿈은 놓지 않고 있다. 탈북민 어르신으로 구성된 평양실버예술단 단장으로 활동했으며, 여전히 TV 오디션 프로그램에 도전하고 있다는 김병수(80)씨를 지난 14일 서울 양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김씨는 1941년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구 투먼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애초에 투먼시와 접한 함경남도 온성에서 살았다. 두만강 건너 중국에서 싸리나무를 베어 온성으로 돌아와 장에 팔면서 생계를 꾸렸는데, 여름이 되면 두만강이 녹아 건너가기 어려웠다. 어차피 나무를 해서 살아야 한다면 중국이 낫겠다고 생각해 중국으로 넘어가 결혼하고 김씨를 낳았다고 한다.  김씨는 투먼에서 초·중등학교를 다녔는데, 시(市)급인 현(縣)까지 소문난 노래 잘하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변변한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고 예술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기에 고등중학교 졸업 후 옌지의 재정간부학교에 입학했다. 1962년 학교를 졸업하고 훈춘시 재정국에 배치됐지만 결핵성 늑막염에 걸려 6개월을 집에서 요양해야 했다. 요양을 마치고 재정국으로 찾아갔지만 ‘집에 가라’는 말이 돌아왔다. 김씨가 실직한 당시 중국에서는 ‘반우파 투쟁’이 한창이었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조선족들은 ‘조선’을 조국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중국 공산당은 이들을 ‘우파’로 몰며 탄압했다. 직장에서는 잘리고, 조선족 사회는 불안하고, 게다가 “회계는 죽어도 하기 싫었다”는 김씨는 결국 더 나은 삶을 찾아 1965년 혈혈단신 북한으로 넘어간다.  자강도 전천의 기계공장에 배치받아 조립공, 선반공으로 일했다. 회계를 전공해 기계는 전혀 몰랐던 김씨는 남들보다 두세 배 일했다. 입북 4년 만에 노동당에 입당할 수 있었다.  김씨는 북한에서도 끼를 감출 수 없었다. “입당 후 작업반장에 임명됐는데 선전선동 업무도 겸해야 했어요. 아침조회 때 직원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신문을 독보했는데 내 시간이 됐죠. 기념일이나 연말에는 김일성·김정일 사상을 공부하고 노래·춤 등으로 표현하는 직장별, 군(郡)별 경연대회가 있어요. 그 대회에서 우리 작업장, 공장이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죠. 공장 간부들이 알림판에 ‘공부하려면 김병수처럼 하라’고 써 놓기도 했답니다.”  예술단이나 선전단체로 옮길 실력은 됐지만 중국 태생이라는 꼬리표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공장에서 나와 같이 노래 부르던 사람들이 예술단이나 선전단체로 갔고, 나도 갈 수 있었는데 공장 간부가 잡더라고요. 내가 일을 잘해서 잡기도 했겠지만, 중국 태생이라는 점 때문에 선전선동 전문단체로 안 보낸 것 같아요.”  당시 북한에서는 중국 태생들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고 한다. “1970년대 공장에 근무하며 대학을 다녔는데 4학년 올라갈 때쯤 중국 연고자들은 높은 지위에서도 해임되고 평양에서도 쫓겨났죠.”  김씨는 공장에서 선전선동 업무를 통해 끼를 펼칠 수 있었으나 전문 가수의 꿈은 그만큼 더 커져 갔다. 1990년 전국 선전선동원대회와 전국 선전선동경연대회에 김씨의 공장이 참가할 수 있게 되자 김씨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김씨는 공장의 전문선동원은 아니었지만, 50세의 나이에도 노래와 춤을 독보적으로 잘해 참가 자격을 얻었다. 전국대회에서 입상해 선전선동원대회에 참가하게 되면 전문 가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김씨의 팀은 경연대회 3등에 올랐으나 그만 선전선동원대회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너무 분해서 공장 당비서에게 찾아갔어요.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당 비서가 그러더라고요. 중국 태생이라 그랬다. 반항도 못 했어요. 해 봐야 욕이나 더 먹겠죠. ‘여기서 더는 살 필요가 없다. 이 치욕을 나는 참을 수 있어도 자식들 보기 부끄러워서 못 견디겠다’고 생각했죠.”  가수의 꿈도 좌절되고, 노래를 부를 의욕도 꺾인 김씨에게 1990년 중반 ‘고난의 행군’은 탈북의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김씨는 1996년 첫째 딸과 첫째 사위, 손자와 함께 탈북길에 올랐다. 전천에서 함경남도 함흥까지 12일 동안 산길을 걷고 함흥에서 온성까지 기차로 이동한 뒤 온성에서 두만강을 헤엄쳐 투먼으로 가는 험난한 장정이었다. 함흥에서 첫째 딸 가족이 보안대에 붙잡혀 김씨는 홀로 투먼에 있는 여동생 집에 갔다. 다행히 첫째 딸 가족은 보안대로부터 풀려나 김씨를 뒤따랐고, 6개월 후 김씨의 다른 가족들도 탈북에 성공해 중국에서 상봉했다.  중국에서도 고난은 계속됐다. “공안들이 탈북민을 색출한다며 불시에 검문하는 통에 늘 불안에 떨며 살았죠. 둘째 딸이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다 겨우 풀려나자 결국 가족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탈북민 지원 단체의 도움으로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거쳐 2001년 남한에 온 김씨는 당시 61세라 마땅한 직업을 가지기 어려웠다. “탈북민 모임에서 주최하는 노래 경연대회를 알게 돼 참가했고, 북한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탈북민과 만나게 됐죠. 그와 소규모로 탈북민 예술단을 결성하고 공연을 다녔는데 당시 남북 관계가 좋아서 그랬는지 탈북민 공연도 인기가 높았죠.”  김씨와 그의 예술단은 많을 때는 한 해 300여 차례 공연을 했다. 북한에서 무용을 전공한 첫째 딸과 어려서 풍금에 소질을 보였던 셋째 딸도 같이 예술단 활동을 했다. 김씨의 딸들은 지금도 활발히 공연을 하고 있다.  탈북한 지 2년 만에 서울 종로구에서 열린 남인수가요제에 참가해 특별상을 받고 가수협회에 등록까지 해 정식 가수가 됐다. “탈북 후 탈북민 교육을 위한 하나원에 입소했을 때 ‘직업과 진로’라는 강좌를 들었는데 내가 남한에서 가수가 되겠다고 하니 강사가 ‘60대 늙은이가 어떻게 가수가 되겠나’라고 웃더라고요. 가수협회 등록하고 그 강사에게 전화해서 가수가 됐다고 말했죠.”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2011년 71세 나이에 슈퍼스타K에 지원했지만, 아쉽게 3차 예선에서 떨어졌다. “TV에서 슈퍼스타K 지원자를 모집한다는데 1~99세까지 가능하다고 해서 지원했죠. 1, 2차 예선을 통과하고 코엑스에서 열린 3차 예선에 들어갔는데 심사위원으로 윤종신, 이효리, 길이 앉아 있었어요. 윤종신씨가 ‘아버님이 노래는 잘 부르시는데 이번 콘셉트와 맞지 않는다’고 해 속으로 울컥했죠. 1~99세는 모두 가능하다고 했지만 사실 30대 미만의 전도유망한 사람을 찾는 거라 생각했어요. 다만 이효리씨는 ‘저와 방송 같이해 보지 않겠나’라고 했는데 그때 대답을 못 했어요. ‘좋다’고 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김씨는 2013년 평양실버예술단을 조직했고 지난해에도 50여 차례 공연을 소화했다. 80세에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비결을 물었더니 “목소리를 위해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어렸을 땐 담배를 피웠는데, 북한 공장에서 선전선동 업무를 맡고 노래를 부를 때부터 술 줘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웠어요. 경연한다고 하면 감기 안 걸리도록 각별히 신경 썼고요. 남한에선 목을 부드럽게 한다며 생달걀을 먹던데 북한에서는 달걀을 기름에 풀어 볶아서 먹어요. 목소리가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게끔요.”  김씨의 주종목은 전통가요다. 9년 전 슈퍼스타K 때는 ‘콘셉트가 맞지 않는다’며 탈락했지만, 트로트 열풍이 불고 있는 2020년 그의 시대가 열릴지도 모를 일이다. “탈북민 예술단에서 활동하는 딸이 ‘아버지, 지금도 ‘막걸리 한 잔’ 부르면 영탁(트로트 가수)이보다 더 잘 부르고 소리도 더 맑으세요’라고 한답니다. 아직도 높은 음도 다 냅니다. 이 나이에 노래 부르고 춤추면 어르신들도 힘이 날 테고, 어르신들이 힘이 나야 젊은이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디션 프로그램에 지원하려면 죄다 온라인으로 해야 해서 딸의 손을 빌려야 하는데 떨어지면 창피하다고 안 해 줘서 걱정입니다. 하하하.”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북한 코로나 발생 0은 거짓말…김정은 친서도 거짓

    북한 코로나 발생 0은 거짓말…김정은 친서도 거짓

    북한이 1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친서를 보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8일(현지시간) 코로나19에 대한 기자회견 도중 김 위원장으로부터 최근 친서를 받았다고 공개했으며 자신이 당선되지 않았으면 북한과 전쟁 위기에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북한은 외무성 보도국 대외보도실장 명의의 담화를 발표해 “최근 우리 최고지도부는 미국 대통령에게 그 어떤 편지도 보낸 것이 없다”고 반박했다. 이어 “우리는 사실무근한 내용을 언론에 흘리고 있는 미국지도부의 기도를 집중 분석해볼 계획”이라면서 “조미(북미) 수뇌들 사이의 관계는 결코 아무 때나 여담 삼아 꺼내는 이야깃거리가 아니며 더욱이 이기적인 목적에 이용되면 안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AP통신은 20일 탈북자들의 증언을 인용해 북한에 코로나19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공식 발표는 거짓이라고 보도했다.북한에서 급성호흡기증후군(SARS)과 신종 플루가 발병했을 때 의사로 일했던 탈북민 최정훈 공공정책연구소 연구교수는 “매년 계절마다 홍역, 수두, 콜레라, 장티푸스, 결핵, 간염과 같은 전염병이 창궐했는데 코로나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며 “사스와 신종 플루때도 수백명의 사람이 죽었지만 진단할 장비도 없었고 의사들조차 마스크, 장갑, 보호복도 없었다”고 AP를 통해 말했다. 북한은 수천명을 격리 조치하고 개학을 연기했으며 중국과의 국경을 지난 1월 공식적으로 닫았으나 밀수는 여전히 북중 국경을 통해 이뤄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국의 북한 인권운동가들은 북한과의 접촉 결과 코로나로 사망한 사람이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 노동당은 지난주 김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코로나 대응 정치국 회의를 열기도 했다. 북한 전문가들은 이미 코로나로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사망했지만 이들이 코로나로 사망했는지 알 수 있는 장비가 북한에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러시아 외교부는 지난 2월 북한에 1500개의 코로나 진단 키트를 기증했으며 중국도 역시 키트를 북한에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유니세프와 국경없는 의사회는 북한에 장갑, 마스크, 고글과 손 소독제 등을 보냈다고 밝혔다. 북한의 무상 공공의료는 1990년대 중반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김 위원장 집권 이후 경제 사정이 나아지면서 의료 시설을 현대화하고 있지만 수혜 계층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 인구가 밀집한 곳이 거의 없고 집회와 이동의 자유가 제한된 만큼 코로나가 심각하게 퍼지지 않았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위생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지만 정부가 요구하는 각종 집회 참석이 많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글로벌 In&Out] 소련 군정기 북한 보건제도의 발전/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글로벌 In&Out] 소련 군정기 북한 보건제도의 발전/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북한 당국이 국경을 폐쇄하고 해외에서 들어오는 자국민은 물론이고 외국 외교관들도 엄격한 검사를 한 후 수십 일간의 검역을 하고 있다. 지난 3월 러시아에서 외교우편, 약품 등을 전달하러 북한에 파견한 외무부 직원들은 도착 직후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고 러시아어 라디오조차 들을 수 없는, 외부로부터 거의 완전히 고립된 환경에서 30일간의 검역을 받았고 4월 8일에야 평양에 도착했다고 지난 9일 평양 주재 러시아대사관이 밝혔다. 이러한 감염예방조치는 일정한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으나 북한 지도부는 코로나바이러스 같은 치료하기 어려운 병 앞에서 북한 보건제도가 비교적 약하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지만 1945년 해방 직후 소련 군정에 의해 새로 도입된 북한의 보건제도는 사회의 모든 계층에 전면적으로 시행함으로써 감염자를 빨리 찾아내고 치료하는 진보적 보건제도로 발족했다. 이번에는 소련 자료를 통해 북한의 보건 제도 수립 과정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일본군을 격파하고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원래 북한 당국과 협력하면서 소련과 미국에 대해 중립적인 정부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려 했으며 북한에 새로운 정권이나 제도를 도입할 계획은 없었다. 9월에 스탈린이 소비에트 제도를 도입하지 말고 부르주아민주주의 정부의 수립을 지원하라는 지령을 하달함으로써 이를 더욱 명백하게 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치 지도부의 구상과 많이 달랐으며 특히 일제가 북한에서 세운 보건제도가 더욱 그랬다. 소련 민정청의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에 전염병이 계속 유행하고 있었다. 소련군이 확보한 일제 자료에 따르면 1940년 결핵 발병률은 1924년 발병률의 3배였고 장티푸스 발병률은 1912년의 6배, 이질(痢疾)은 2배였다고 한다. 그리고 일제가 세운 보건제도가 일본인과 부유층의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 전문의사가 거의 없었으며 해방 직후 많은 일본인이 남쪽으로 도망갔기 때문에 북한 병원의 전문인력은 극히 부족했으며 치료비가 비쌌기 때문에 환자들이 전문가 대신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병을 치료한다는 전통 의사들에게 의존했다. 한마디로 북한의 보건 상황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소련군은 각종 조치를 취했다. 가장 먼저 남한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콜레라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병원 수를 늘려 나갔다. 소련군 진주 직후 19개 병원에 686개의 병상이 있던 북한은 1946년 말 85개 국영병원에 2031개 병상을 보유하게 됐다. 1947년 말에는 133개 국영병원에 총 3412개의 병상이 있었다고 소련군이 보고하였다. 그 외 전염병 전용 병원은 10개, 산부인과 전문 병원은 1개, 결핵 병원은 2개가 새롭게 건설?다. 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 수도 1945년 약 9500명에서 1948년 7만 1500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의료간부의 문제도 해결되기 시작했다. 소련군과 소련정부, 소련 적십자사의 지원 아래 3개 의과대학을 개설했고 본격적으로 전문적 의사간부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1946년에 소련군의 지원을 받아 북한 당국은 위생·미생학 실험실, 세균학 및 미생물학 연구원 등을 설치해 전염병에 대한 연구, 치료, 그리고 건강한 생활 방식의 선전에 나섰다. 1948년 북한을 떠난 소련 민정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보건제도를 평가하면서 현재 바른 방향으로 발전됐으나 위생·방역 등의 분야에서 쇄국하기보다는 다른 나라들, 특히 소련과 협력하라고 강조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위기를 계기로 자력갱생도 좋지만 상호협력, 즉 부분적으로라도 개방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고 한 과거 소련군 장교의 말을 회고했으면 좋겠다.
  • 국제적십자위원회, 필리핀 구금소 내 코로나 확산 방지 인도적 지원

    국제적십자위원회, 필리핀 구금소 내 코로나 확산 방지 인도적 지원

    ICRC 필리핀 대표단 보리스 미쉘 단장은 “사회적 거리두기는 취약계층의 사람들이 단순하게 실천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구금시설 내 혼잡과 제한된 의료 서비스는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이 시설 내부에 빠르고 광범위하게 퍼질 수 있다”고 밝혔다. 현재 ICRC는 세계 90여개국의 구금 시설에서 활동하며, 수용자 건강 관리 시스템을 강화와 수용자 결핵 환자의 의료 서비스 개선 등에 대해 각국의 구금 시설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또한 수감자들의 건강에 위협이 되는 상황들에 대처할 수 있도록 조언을 제공하고 지원을 강화해 오고 있다. 보리스 단장은 “코로나19의 확산을 완화하기 위해 최근 필리핀 당국이 취한 조치를 칭찬한다”면서도 “감옥 및 교정관리국 산하의 구금소, 교정국의 교도소 등 모든 구금 장소에서 상황의 잠재적 위험을 파악하고 지방 교도소와 이민 구금 시설에도 포괄적 조치를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필리핀에 구금시설 코로나19 확진자를 위한 격리센터 4곳 설립 ICRC는 구금 당국과 긴밀히 협력해 코로나19 확진자나 감염 증상을 보이는 수용자를 위한 4개의 격리 센터를 설립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필리핀 교정관리국 산하 ‘케손 시티 교도소’의 격리시설은 지난 8일 시설 개소 첫날 17명의 수감자를 받았다. 필리핀 적십자사(PRC)의 지원으로 설립된 4개의 텐트와 각 28개의 병상은 물론 전기, 물, 위생 시설, 기본 의료 기기, 병상 및 위생 물품을 갖췄다. 이밖에도 팜 팡가 세 지역의 ‘산 페르난도 구치소’, 팍빌라오의 ‘케손 교도소’, 교정국 산하의 ‘뉴빌리비드 감옥’에서도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 대응을 위한 다양한 조치가 시행되고 있다. 감염 관리 교육 및 3개월 동안의 개인 보호 장비 공급, 위생·소독 키트 지원 및 응급대응팀과 격리센터 직원을 위한 기본 의료장비 지원 등을 시행했다. ICRC는 수감자의 인도적 대우와 인도적인 구금 조건 환경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ICRC는 필리핀 경찰과 협력해 마닐라 수도권 등지에서 경찰이 지정한 폐쇄 구역 내 소독을 위한 청소 용품 뿐만 아니라 2000명의 수감자들을 위한 개인위생 품목을 기증했다. 또한 코로나 사태로 인해 면회가 중단된 이후 수감자가 가족과 연락을 유지할 수 있도록 태블릿을 제공했다.분쟁지역 내 코로나19 확산 방지 지원 아울러 ICRC는 구금 활동 외에도 민다나오와 같은 분쟁 지역 내 코로나19 상황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있다. ICRC는 분쟁 지역 내 방역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의료 종사자에게 개인보호장비를 제공하고 있으며, 마라위 시 지역 수도국과 협력해 수천명의 주민과 실향민을 위한 식수 공급을 지원하고 있다. 보리스 단장은 “우리는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의 사람들이 정확한 코로나19 정보를 공유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의료진이 위협이나 차별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촉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ICRC는 사망 및 실종을 관리하는 필리핀 국가 부처에 50개의 시신운반용 부대를 기증했다”면서 “또한 민다나오 지역의 적십자 혈액 관리본부에 구급차와 마스크, 소독제 및 열 스캐너를 기증하고 이러한 필수물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재정 지원도 실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달 27일 ICRC와 국제적십자연맹(IFRC)은 분쟁 취약국에서의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대응을 위하여 8억 스위스 프랑을 목표로 공동 모금 활동을 시작했다. ICRC는 국제적·비국제적 무력충돌, 내란 혹은 긴장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혹은 제네바협약을 근간으로 피해자들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국제 인도주의 기구다.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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