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결집
    2026-04-13
    검색기록 지우기
  • 우즈
    2026-04-13
    검색기록 지우기
  • 상징물
    2026-04-13
    검색기록 지우기
  • 순환
    2026-04-13
    검색기록 지우기
  • 학습
    2026-04-1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859
  • 서울신문 영욕의 53년 나래 접으며

    ◎솔직한 참회 재탄생 초석으로 정론 벗어났던 일 냉혹히 자성/날카로운 시선·질책 겸허히 수용 서울신문이 지령 16851호,1998년 11월10일자를 마지막으로 영욕 53년의 나래를 접습니다. 11일자로 우리의 뿌리,자랑스런 항일 민족정론지 대한매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수십만 독자와 함께 해온 서울신문 반세기를 마감하며 지난날의 정도(正道)를 벗어났던 일들에 대해 냉혹한 자기반성을 하고자 합니다. 시대에 따라 국민과 독자의 애증(愛憎)이 교차되는 시선 속에 우리 서울신문 가족들은 땀과 눈물로 서울신문을 가꾸고 키워왔습니다. 53년의 연륜을 지닌 서울신문 제호를 새시대 역사의 흐름 속으로 띄워보내며 회한(悔恨)이 서리지 않을리 없습니다. 서울신문은 6·25전란(戰亂) 가운데서도 진중신문을 발행하여 국민들에게 전황을 알려주는 사명감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사회의 밝은 면을 부각시키고 약자를 부축하는 억강부약(抑强扶弱)에도 힘썼습니다. 환경지키기에 앞장서고 농촌경제 발전을 지원했습니다. 한글 전용신문 발행과학자·문필가·예술가 지원 등 민족문화 발전에도 기여했습니다. 그래서 강한 사회면,격조높은 문화면으로 언론계의 선두에 서기도 했습니다. 자본에 휘둘리거나 상업적 사익(社益)에 얽매이지 않고 국익을 우선하는 논조,센세이셔널리즘에 흐르지 않는 품위를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신문은 결코 스스로에게 관대(寬大)하려 하지 않습니다. 서울신문 구성원 개개인의 잘못은 아니었다거나 소유구조상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등의 변명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설령 열을 잘했다고 해도 하나의 잘못이 그대로 용서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성의 아픔이 클수록 재탄생하는 대한매일의 정론(正論)을 향하는 발걸음이 곧고 굳건한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유당 정권의 나팔수로 검은 것을 희다고,흰 것을 검다고 한 부분에 대한 응징으로 4·19 민주혁명 당시 사옥이 불태워지기도 했습니다. 군사정권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며 언론의 본분을 벗어난 세월이 있었음을 솔직히 인정하며 참회하고자 합니다. 한 세기 한국언론사에 이토록 진솔하게 과거의 잘못을 고해(告解)한 언론사가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비극적 식민지 역사 속에,그리고 권력의 부침(浮沈)속에 교언영색(巧言令色)의 생존술과 상술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해오며 민주언론의 선봉을 자처하는 사례가 없지 않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솔직한 참회를 재탄생하는 대한매일 앞날의 밑거름으로 삼고자 합니다. 언론의 본분을 지키는 데 피와 땀을 흘림으로써 과거의 잘못들을 속죄코자 합니다. 서울신문은 이미 공익정론지 대한매일로서의 변신을 시작했습니다. 재경부 포항제철 한국방송공사가 대주주인 소유구조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제작과 경영에 일절 간여치 않는다는 확고한 의지를 천명하고 이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편집권 독립에 관한 노사(勞使)합의라는 공정보도의 제도적 장치도 마련했습니다. 우리의 이같은 처절한 자성과 제도적 장치를 바탕으로 어느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공익(公益)정론지 대한매일로 재탄생할 것임을 국민과 독자앞에 다짐합니다. 날카로운 시선과 애정의 질책으로 대한매일을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편집권 독립을 위한 대한매일 노사 공동선언문 노조와 회사는 편집권을 존중한다. 회사는 편집권의 독립성을 침해 하거나 훼손할 수 없다. 기자는 언론의 정도(正道)나 자신의 신념과 양심에 반(反)한 기사를 쓰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기자는 공정보도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노사는 편집권 독립과 공정보도를 위해 다음과 같은 점에 합의한다. 1.편집권은 회사의 사시(社是)와 독자의 알 권리에 반하는 부당한 압력이나 간섭에 의해 침해받지 않는다. 2.노조와 회사는 외부로부터의 지면제작 개입을 배제한다. 3.회사는 객관성과 타당성이 없는 편파적인 취재와 보도를 지시할 수 없다. 4.취재기자는 자신이 취재해 보도한 내용이 왜곡되거나 잘못 전달 됐을 때에는 데스크,편집자,국장단에 시청을 요구할 수 있다. 5.언론 자유를 위협사는 사태가 생기면 노사는 합심해서 이에 적극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응한다. 6.회사는 기자에 대해 회사의 영업 및 수익활동 등 본연의 업무와는 직접관련없는 일에 대해 압력을 행사할 수 없다. 영업 및 수익활동 등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줄 수도 없다. 7.노사는 이상의 내용을 성실하고도 적극적으로 지킨다. 1988년 10월19일 ◎남긴 功/재벌 비판·신문말 다듬기 성과/국가 성장기에 국민총의 결집/문화예술 활동 전폭 지원 서울신문이 진취적으로 남보다 앞서 계획하고 이루어낸 업적은 적지 않다. 특히 한글 전용과 신문말 다듬기를 연구하고 실천한 것은 한국 신문사상 선구적인 것이다. 1956년부터 60년까지 ‘한글판 서울신문’을 부분적으로 냈던 서울신문은 23돌 창간기념일인 68년 11월22일부터는 모든 기사와 제목을 한글로 썼다. 70년 2월14일 ‘신문말다듬기위원회’를 상설기구로 신설했다. 위원회에는 국어학자와 문인 등 7명의 심의위원을 두어 신문말을 다듬거나 새로 만들었다. 심의위원은 정인승 허웅 한갑수 李應百 朴木月 柳周鉉 정재도씨였다. 신문 제작 방침이 수정돼 74년 1월4일 종전 체제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귀중한 성과를 남겼다. 위원회가 정리한 낱말은 1,600여개에이르며 71년 6월28일까지 33회에 걸쳐 지면에 연재됐다. 이때 만든 새 말 가운데 ‘사재기’처럼 널리 쓰이게 된 것이 많다. 요즘 신문들의 한글 전용 편집에도 긴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한국신문협회가 낸 ‘韓國新聞協會二十年’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서울신문이 힘쓴 이 말다듬기의 성과는 모든 신문의 신문제작현장 종사자들에게 많은 준용과 새로운 대응어를 발굴,사용해 나가게 하는 기폭제 구실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신문은 상업주의와 선정주의(煽情主義)에 휩쓸리지 않고 공익의 편에 서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면 재벌의 바람직하지 않은 행태를 비판하는 데 과감했다. 재벌에 약한 여느 신문과는 달랐다. 지난 10월9일과 10일 부산 동아대에서 열린 언론정보학회 정기 학술대회에서 박용원씨(동아대 신방과 석사과정)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서울신문은 재벌을 가장 많이 비판한 신문이다. 상업주의의 굴레에서 자유로운 서울신문은 과장,억지윤색,냄비열정의 폐풍을 벗어나 침착하게 보도하는 전통을 세웠다. 서울신문을 매개로해 수행된 공익사업은 헤아릴수 없을 정도다. 서울 세종로 한복판의 충무공 이순신장군 동상,덕수궁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은 서울신문이 애국선열조상건립워원회를 조직하여 성금을 모아 세웠다. 서울신문사 주도로 1966년부터 72년까지 세운 애국선열의 동상은 15기에 이른다. 서울신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보신각종도 서울신문의 노력으로 새해를 여는 울림을 계속하게 되었다. 금이 간 원래의 종을 대신할 새 종을 서울신문이 주도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서울신문은 보도와 행사 개최를 통해 어느 신문보다도 문화예술활동 지원에 열성적이었으며 농어촌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서울신문이 국가 성장기에 국민총의를 결집하고 국력을 집중하도록 하는 데에 큰 힘을 보탰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국가발전에 기여한 서울신문 53년의 공이 전적으로 무시될 수는 없다. ◎끼친 過/절대권력 정당화·비호로 점철/10월 유신 지지·군부정권 미화 급급/4·19혁명때 태평로 사옥 불타기도 대한매일로 새롭게 태어나는 서울신문은 지난 반세기에 걸쳐 뼈아픈 족적을 남겼다. 1960년 4월19일 오후 2시. 성난 데모대는 태평로 사옥 앞으로 물밀듯이 몰려왔다. 먼저 취재차량에 불을 질렀고 이어 윤전실로 들이닥쳐 다시 불을 질렀다. 불은 삽시간에 건물 전체에 번졌다. 곧바로 소방차가 출동했지만 데모대원들이 물탱크차를 빼앗아 다른 곳으로 몰고 사라져 버렸다. 자유당 李承晩 독재권력을 비호한 관제언론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폭발했던 것이다. 최근 언론개혁시민연대가 선정한 한국언론의 대표적인 왜곡보도사례 50건 가운데는 서울신문의 보도내용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자유당 4捨5入 개헌 정당화(56년),10월 유신 지지(72년),全斗煥 권력 장악 정당화와 미화(81년),4·13 호헌(護憲)조치 옹호(87년) 등이다. 절대권력의 정당화에 앞장서고 민주화를 외면하거나 소극적이었던 언론의 선두로 꼽혀왔다. 일반 국민들에게 각인된 서울신문의 이미지는 항상 권력의 편에서 당시의 권력자를 옹호하는 전위대였다. 10월 유신때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와 유신체제의 정당성을 위해 ‘해바라기 지식인’을 동원,유신대통령의 선출을 정당화하는 글로 지면을 가득 채웠다. 10·26사태후 80년 ‘서울의 봄’에 이르는 이른바 안개정국 시절엔 신군부 등장의 역사적 필연성을 예고하기도 했다. 5공의 全斗煥정권이 등장하자 “동천의 붉은 해가 불끈 솟았다.‥‥‥”며 그를 찬미하는 연재물을 게재했다. 광주민중항쟁 과정에서도 “북괴방송,광주사태 집중적 선동” “광주시위 선동 남파간첩 검거” “공포의 유혈 무법천지” 등으로 ‘대공(對共)’문제와 ‘파괴성’을 권력의 편에 서서 부각시켰다. 해방후 53년에 걸쳐 점철되어온 서울신문 역사를 되돌아볼 때 일관된 허물은 ‘권력의 대변지’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지나온 시대는 역대 독재권력이 한국전쟁 이후 가열된 냉전시대의 안보논리를 그들의 체제유지논리로 위장한 시대이기도 했다. 어쩌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 시대를 같이 한 한국 제도권 언론의 곡필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울신문이 적어도 이같은 독재권력을 지지하는 선두에 섰다는 사실이다. 서울신문이 언론의 본분을 벗어났던 대목은 이밖에도 숱하게 많을 것이다.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한 정치문제에서 집권여당의 논리를 지나치게 앞세우고 상대적으로 야당의 입장을 폄하하는 지면을 제작함으로써 균형감각을 잃었다는 비판도 그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정부의 정책적 입장을 심도있게 보도한다는 취지를 왜곡하여 절대권력자의 일방적인 논리를 전파하는 데만 급급했던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제 대한매일은 서울신문의 지나온 역사를 깊이 자성하면서 철저한 자기비판을 토대로 새롭게 출발할 것이다.
  • 총격요청 수사결과­발표문 요지

    ◎배후 등 공범 수사/한씨 “이회성씨에 보고” 진술 번복/피의자 3인 “총격요청 했지만 보고는 안했다” ▲수사배경=한성기가 안기부 조사 과정에서 이회성에게 무력 시위 요청 계획을 사전에 보고하고 경비 500만원을 지원받았으며 진로그룹 장진호 회장에게도 사전에 보고했다고 진술했다.오정은 한성기등이 이회창 후보 당선 시공을 인정받아 대가를 얻을 목적으로 범행에 이른점에 비추어 볼 때 추진 상황을 사전에 이후보 진영에 보고하였을 개연성이 높다고 판단돼 이회성 장진호 오정은의 비선조직과 통일부 안기부 관계자들을 상대로 배후 및 공범관계 수사를 계속해왔다. ○‘이 후보 지시’ 아직 못밝혀 ▲이회창 후보 수사 결과=오정은은 97년 10월 한성기로부터 진로의 부동산 매각과 화의신청을 도와주면 장진호가 박찬종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해 박찬종을 이후보 진영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사정비서관과 민정비서관에게 부탁했다.11월 하순 한성기와 함께 이후보의 승용차에 동승,박찬종 고문 자택까지 안내해 이후보와 박고문의 회동을주선하는 등 이후보와 지속적으로 접촉했다. 피의자 등이 모두 이후보의 휴전선 무력시위 요청을 지시받거나 보고한 사실이 없다고 극구 부인하고 있어 현재까지의 수사 결과로는 이후보가 지시했거나 보고받았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회성 관련 의혹=이회성은 대선기간동안 조선호텔 객실에서 한성기를 1회 만난 것은 사실이나 10여분 동안 선거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했을 뿐 무력 시위 요청 내용에 대해 사전 사후에 보고받은 사실이 없다고 극구 변명했다. 한성기는 안기부 조사에서는 97년 11월 하순 조선호텔에서 이회성을 만나 “이런 식으로 가면 대선에 절대 불리할 것 같다.4·11 총선과 같이 북풍을 일으켜 대선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야겠다”고 했고 12월 다시 만나 “북경에 가서 북풍을 일으켜 달라고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아 죄송합니다”라고 했다고 진술했다.그러나 검찰에서는 그 진술을 번복했다. 결론적으로 한성기와 이회성이 단둘이 은밀히 만났다면 한성기가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출국전에 무력 시위를 요청할계획을 얘기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출국전 계획보고 가능성 또 한성기는 12월8일 조선호텔에서 이회성을 만나 북풍 요청 사실을 말하려고 했으나 사람이 많아 말을 다하지 못했고 이회성의 지시에 따라 진로그룹 장진호 회장을 만나 “북경으로 가서 북한 사람과 만나 무력시위를 요청하려 한다”고 말했다고 진술한 점 등을 종합하면 한성기가 중국 출국전에 이회성을 만나 무력 시위 요청 계획을 보고했을 의심이 가므로 보고 여부에 관해 계속 수사할 필요가 있다. 한성기는 안기부 조사시 이회성고문에게 무력 시위 요청 사건을 사전에 보고하고 경비조로 500만원을 받았다고 진술했으나 검찰에서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번복했다.이회성도 자금 제공 사실을 부인하고 있으나 진위에 관해서는 계속 수사할 예정이다. ○장진호씨가 자금 지원 ▲장진호 관련 의혹=장진호는 97년 10월 한성기 오정은으로부터 이회창 후보를 돕기 위해 비선 조직을 결성할 계획이니 자금을 지원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7,000만원을 지원했으며 12월 초순에는 한성기의 북한 주민접촉 신청에 필요한 각종 서류를 발급해 주고 한성기가 북경에서 북측 인사를 만나기로 했다는 사실을 사전에 보고받은 점이 확인됐다.장진호는 안기부 조사시 97년 12월초 한성기로부터 “12월10일쯤 북경을 방문해 북한측에 모종의 부탁을 하려 하는데 앞으로 휴전선에서 시끄러운 일이 생길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으나 검찰에서는 진술을 번복했다. 전후 사정을 종합해보면 장진호가 무력 시위 요청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였을 개연성이 있으나 장진호가 한성기 등에게 무력 시위를 요청하도록 지시했거나 자금 지원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아 계속 수사할 예정이다. ▲향후 수사 계획=피의자들은 검찰 송치후 배후 관련 부분을 제외한 범행을 대부분 시인했으나 사건이 정치쟁점화되고 신체검증과 구속적부심 등을 통해 자백을 번복하고 배후를 부인하고 있어 계속 수사해 진상을 규명하겠다. ◎범행 동기/이회창 후보 당선땐 승진·채무변제 등 기대 26일 검찰이 발표한 판문점 총격요청사건 중간수사결과 발표의 주요내용을 간추린다. 吳靜恩張錫重은 94년 현대종합상사 부장인 吳모씨의 소개로 알게된 뒤 吳靜恩은 張錫重의 대북 무역업에 관한 편의를 봐주고,張錫重은 북한관련 정보를 吳靜恩에게 제공했다.韓成基와 吳靜恩은 97년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과정을 다니면서 알게 됐다. 吳靜恩은 별정직 공무원으로서 金泳三대통령 퇴임후의 신분유지에 불안을 느껴 韓成基와 함께 李會昌 후보 선거운동을 위한 비선조직을 구성키로 합의했다.한성기와 오정은은 97년 10월 진로그룹 張震浩 회장의 집을 방문하여 비선조직 운영자금 7,000만원을 제공받아 2,000만원은 韓成基가,5,000만원은 吳靜恩이 조직운영비로 사용했다. 피의자들은 대선 기간중 吳靜恩 韓成基가 李會昌 후보의 대선 승리를 위해 노력했음에도 李후보의 지지율이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자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했다.이에 따라 張錫重이 97년 10월16일 북의 아세아 태평양평화위원회로부터 방북 초청장을 받고 추진하던 金順權 박사의 방북을 대가로 북한측에 96년 4·11 총선 직전에 발생한 판문점 무력시위와 같은총격전 등을 요청하여 보수세력의 지지를 결집시켜 李후보의 지지율을 제고키로 했다. 李후보가 당선될 경우 오정은은 청와대 별정직 3급 공무원으로서 현직 유지가 가능하고 승진 또는 출신지역에서 정계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는 기회를 삼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성기는 안기부장 특보직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장석중은 대북사업 중 발생한 현대측에 대한 2억원의 채무변제 유예가 가능하고 앞으로 오정은 등을 배경으로 원활한 대북사업을 할 수 있는 등 충분한 보상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이와 같이 개인적 이익과 영달을 위하여 국기를 위협하는 판문점 총격요청 범행에까지 이르게 됐다. ◎총격요청 공모/“선거 이틀전 터트리면 야당서도 대응 못할것” 장석중은 북한에 농업용 자재를 제공하고 농산물을 받아오는 계약재배 사업을 성사시키기 위해 경북대 김순권박사의 방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오정은에게 김박사의 방북승인을 부탁했다.장석중이 현대에 대한 채무 2억원을 변제하지 못하고 담보물건에 대한 경매를 통보받는 상황에 이르러 오정은에게 그 해결을 부탁하자 오정은은 정·재계에 지면이 넓은 한성기를 장석중에게 소개했다. 오정은의 소개로 한성기 장석중이 만나 김박사의 방북을 고리로 현대의 대북사업을 지원함으로써 장석중의 현대에 대한 채무를 연기받는 방안을 논의하던중 오정은이 북한에 김박사를 보내면 장석중의 사업뿐 아니라 이번 대선과 관련해 활용할 수도 있을 것 아니냐고 제의했다. 이후 97년 11월 하순 오정은과 한성기가 만나 李후보 지지율 문제를 논의하다가 한성기가 국민회의 공작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휴전선 총격전인데 시시한 것 갖고는 안되고 한번 ‘쾅’하고 크게 터져야 한다고 말했다.이에 오정은은 만약 그런 사건을 일으키면 오히려 여당이 덮어쓸 가능성이 많다고 하자 한성기는 선거에 임박해 이틀 정도 하면 야당이 대응할 여유가 없다면서 내가 북경에 가서 북한사람들을 만나보겠다고 말했다. 97년 11월말경 삼청동 오복집에서 오정은 한성기 장석중이 만났다.이 자리에서 한성기가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서 4·11총선 때처럼 판문점에서 무력시위가 있어야 하며 홍보가 중요하므로 사전에 북측과 약속된 지점에 미리 카메라를 설치하여 북측에서 총기를 난사하고 내려오는 장면을 실감나게 찍어 방영하면 효과가 극대화될 것이라고 말했다.장석중이 그런 문제는 자신있다며 북한측과 한성기를 만나도록 주선해주겠다고 했다.또 장석중이 오정은에게 김박사의 방북승인 일정을 책임져 달라고 하자 오정은은 챙겨보겠다고 약속했다. 오정은은 통일원에서 김박사의 방북승인을 얻어내고 장석중은 한성기를 북경으로 안내하여 북측인물과 접촉을 주선하며,한성기는 북측인사들을 만나 대선 직전 북한군의 휴전선 무력시위를 요청하기로 역할을 분담했다. 97년 12월 초순 장석중이 북경 방문시 대선문제 등을 논의할 목적으로 북경 주재 북한 대외경제위원회 협력처장 리철운에게 전화하여 한성기를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고 소개하면서 김박사의 방북건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니 대선관련 요청 사항을 논의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 97년 12월9일 삼청동 오복집에서 3인이 만나 무력시위 요청에 관한 북한측과의 접촉상황 등을 최종점검하면서 만약 공안기관에 노출되면 김박사의 방북 등 남북교류 부분에만 목적이 있었다고 이야기하자고 약속했다. ◎권영해씨 직무유기/사건내용 알고도 자료인계 안해 권전안기부장은 97년 12월 한성기가 북경에서 북측 인사들을 만나 북측이 휴전선에 1개 소대를 보내 무력 시위를 일으키거나 김대중 후보의 친북활동 자료를 제공하여 주면 북한에 식량과 비료 등을 지원해주겠다고 언동했다는 보고를 받고 이대성 해외조사실장에게 진상 확인을 지시했다.이대성은 12월12일 중국에서 귀국하는 한성기를 김포공항에서 임의동행해 조사한 결과 한성기는 부인했으나 소지품 등을 통해 첩보가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이대성은 권영해에게 한성기 조사 결과와 동행한 장석중이 안기부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보고했으나 권영해의 별도 지시가 없자 한성기를 석방했다. 권전안기부장은 첩보 내용의 신빙성을 확인해 한성기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을 것으로 강하게 의심이 가는 상황이었고 특정 후보의지지율 제고를 위해 북과 내통해 휴전선에서의 무력 시위를 요청한 중대한 사안임을 인식했다.그런데도 대공수사실로 관련 첩보 및 증거물을 이첩하여 수사토록 하지 않고 퇴임시까지 아무런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아 사건의 암장을 기도,이후보의 당선을 음성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장석중씨 사전인지 의혹 권영해는 범행의 동기에 대해 함구하고 있으나 특정 후보에게 불리한 사건에 대해 은폐하려한 점에 비춰 피의자에게 어떤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는지 그 동기를 추단해 볼 수 있다.권은 자신의 조사 지시로 범행이 확인됐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정권 교체후 새 안기부 수사팀에 본건 관련 자료를 공식 인계한 사실도 없을 뿐 아니라 부장의 지시가 없을 경우 수사 부서로 이첩되지 않아 수사가 이뤄질 수 없다는 점에 비춰 범의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이 후보당선 음성적 지원 특히 안기부에서 공작원인 장석중 등이 계획을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이유는 12월12일 귀국하자마자 안기부에서 조사받은 한성기가 다음날 북경에있는 장석중에게 안기부에서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고 알렸음에도 장석중이 상급자 공작관에게 이실직고하지 않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점 등 때문이다.이 점에 대해서도 계속 수사할 예정이다. ◎총격요청 경과/북 박충 만나 무력시위 부탁/“평양에 알아보겠다” 답변 97년 12월10일 오후 장석중 한성기가 중국 북경에 도착해 캠핀스키 호텔에 투숙했다. ▲1차 접촉=12월10일 오후 6시 한성기의 호텔 방에서 장석중의 전화를 받고 찾아온 북한 대외경제위 소속 리철운과 김영수를 만났다.이 자리에서 장석중은 한성기와 같이 북경에 온 목적은 첫째 김순권 박사 옥수수 계약재배건이며,둘째는 대선에 관한 특별한 사업이라고 밝혔다. 리철운이 무엇을 도와 달라는 것이냐고 묻자 한성기는 김대중 후보의 친북자료가 있는지 알아보고 그 자료가 있으면 부탁한다고 말했다.또 판문점 무력시위 요청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사람과의 회담 주선을 부탁했다. ▲2차 접촉=같은 날 오후 8시 캠핀스키 호텔 다방에서 한성기 장석중과 북한의 리철운 김영수,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 참사라고 소개한 박충이 만났다.한성기는 이 자리에서 현재 대선상황은 전쟁상황보다 더 심각하다면서 이회창 후보 특보 자격으로 북한에 왔다고 밝혔다.또 박충에게 우리가 요청하는 사항을 들어달라고 요청,박충으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도와드리겠다는 답변을 들었다.이어 한성기는 박충과 따로 만나 TV화면이 잘 잡히는 판문점에서 무장군인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무력시위를 하여 긴장을 조성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요청했다.또 요청을 들어주면 김박사를 북한에 보내주고 신정부 출범 전까지 비료,영농자재 등을 대가로 지원하겠다고 제의했다.박충은 내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니 평양에 전문을 보내 출국하기 전에 답변을 주겠다고 말했다. ▲3차 접촉=12월11일 오전 11시쯤 캠핀스키 호텔에서 한성기 장석중과 리철운 김영수 등이 만나 계약재배건 등 대북사업계획을 논의했다. ▲4차 접촉=12월12일 오전 8시30분쯤 같은 호텔에서 한성기 장석중이 북한의 박충 리철운 김영수를 만났다.이 자리에서 박충은 한성기가 말한 부분에 대하여 우리 공화국에 전문을 보냈으나 회답이 없다고 전했다.박충은 또 지금 답변할 수 있는 것은 현재 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라는 통보를 했다. ◎결론/적과 내통 긴장 조성/자유민주주의 뒤흔든 사건 ▲사건의 성격=이번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은 제15대 대선중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공무원인 청와대 행정관 오정은과 진로그룹 고문 한성기 등이 재벌의 자금지원으로 비선조직을 가동,특정후보의 당선을 위해 북측인물과 내통,판문점에서의 총격까지 요청,국가의 안녕과 자유민주주의 뿌리를 뒤흔드는 가증스러운 사건으로 우리 사회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져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또한,‘권영해 전 안기부장의 특수직무유기 사건’은 국가최고정보기관의장이 총격요청사건을 수사에 착수도 하지 않아 대공정보·수사권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또 하나의 대표적 사건으로 지난 대선기간 중 일어난 ‘북풍’사건과 궤를 같이 한다. ▲검찰의 입장=‘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은 적과 내통해 긴장을 조성,보수계층을 결집시켜 대선에서 특정후보의 당선을 기도한 것으로국민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고 국가의 존립·안전을 위태롭게 한 사건으로 역사적 교훈으로 삼기 위해 엄정하게 사법처리 했다. 관련자들은 소속 정당,신분,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수사,배후관계 등과 관련,의심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으나 증거법상 인정되는 부분에 대해서만 기소하였다. ▲향후 수사계획=북한과 관련된 사항이 많고,피의자들이 언론에 보도된 후 정치쟁점화되고 신체검증·감정절차,구속적부심 절차와 한나라당 소속 변호인들과 접견한 뒤 자신들의 범행을 부인,배후관계 등에 강한 의혹이 있음에도 수사 애로상 충분히 규명되지 못하고 증거법상의 제약으로 기소를 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나,▲혐의자들에 대한 공모,자금 지원 여부 ▲김순권 박사의 방북카드를 대가로 무력시위 요청 경위 ▲권영해의 특수직무유기행위와 정치권과의 연관관계 ▲판문점 총격요청을 전후한 한성기,장진호,이회성 등의 접촉과 관련한 일련의 의혹 등에 대해서는 수사를 계속해 진상을 철저히 규명할 것이다. 아울러,이 사건 수사와 관련해 제기된 가혹행위여부에 대해서도 인권옹호 차원에서 엄정하게 수사하겠다.
  • 어떤 신문이었나(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

    ◎日帝 총칼에 맞선 ‘자유언론 표상’/애국지사 논객 총결집/日 침략­관료 무능 질타/국채보상운동 등 이끌어/항일투쟁·국권수호 선봉 ‘不允’(불윤).1905년 11월18일 아침.러일전쟁의 포연이 가시지 않은 서울 장안 거리의 화두는 “허락지 않으심”을 의미하는 이 한 마디였다. “韓皇陛下게옵셔 韓國獨立을 重念하시와 正大한 義理로 拒絶하신즉 伊藤 대사가 再三强請하되 强경 하신 勅語로 不允하셨다더라”(한국황제폐하께서는 한국의 독립을 중요하게 생각하시어 정대한 도리로서 거절하시자,이토 대사가 재삼 강청하였으나 강경한 말씀으로 허락지 않으셨다 한다) 이날자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된 ‘勅語嚴正’(칙어엄정) 제목하의 잡보(보도기사) 첫 기사 중에 있는 이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국민들은 일제 앞에서 “No”라고 당당히 말한 황제에 박수를 보냈다.전날 이토 일본대사가 고종 황제를 알현,소위 을사조약으로 알려진 외교권 박탈을 요청한 4가지 내용을 보도하고 이에 대한 황제의 강력한 반대를 전한 것이었다. 이는 일제의 총칼이번득이는 상황하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당시 신문중 대한매일신보만 유일하게 보도했다.특히 본문활자로 된 기사내용에서 유독 ‘不允’ 두 글자만 가장 큰 2호활자로 두드러지게 인쇄한 것은 고종의 반대 강도에 대한 표현이자 대한매일 입장의 대외적 천명이기도 했다. 1904년 7월18일 영국인 배설(裵說)을 발행인으로 내세워 총무 양기탁(梁起鐸)등 우국지사들이 모여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던 일본의 한반도 침략 야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던 상황에서 자유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으로 조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태어났다. 이후 한일합방 다음날인 1910년 8월29일 종간될 때까지 6년 1개월여간 대한매일신보는 우리민족의 국운이 백척간두에 선 역사상 가장 위급한 시기에 굳건한 자세로 항일의지를 불태웠고 국민의 든든한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대한매일신보가 이같이 민족정론지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발행인이 영국인 배설로 돼있어 치외법권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총무 양기탁과 주필 박은식을 비롯,필진 신채호 장도빈 안창호 등의 투철한 애국심과 자주의식에 따른 것이었다.그들은 일제 침략과정의 부당성을 낱낱이 공개하고 당시 무능한 대신 및 관리들의 실정과 부패상을 질타했다. 반대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지고 있던 의인들의 애국적 활동상에 대해서는 대서특필을 아끼지 않았다.국채 1,300만원을 갚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국채보상운동 캠페인을 주관했고,그 활동상 소개와 함께 매일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참가자 명단을 2∼3개 면에 걸쳐 상세히 게재함으로써 전국적인 참여의 불을 지폈다. 또 을사조약과 고종 퇴위 및 군대 해산 직후에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항일 투쟁의식을 고취해 나갔다.산발적인 보도가 아니고 ‘처처의병’ 등 고정란을 만들어 매일 소개했고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격 때는 격문을 게재,의병지원자가 구름같이 모이게 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의 실업’‘동양척식회사 설립문제’등 논설로 일제의 경제적 침투 반대와 우리민족의 자주적 산업 건설의 필요성을 일깨우기도 했다.교육의 중요성을 강조,민족교육자들의 학교설립취지서를 적극 지면에 게재,1907년 말 공사립 보통학교가 전국에 4,000개에 달하게 하는 등 교육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밖에도 대한매일신보가 순한글판 발행을 통한 국어 발전,연재소설 게재를 통한 국문학 발전,또 여성교육 필요성 제기로 여권 신장 등에 미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정부와 역적무리들의 매국은 대한매일신보의 노력을 미완(未完)에 그치게 하고 말았다.그러나 그 불굴의 자유언론 정신과 국난극복의 의지는 우리 언론사에 금자탑으로 남아있다.그리고 이제 그 숭고한 정신과 의지의 완성을 위해 ‘대한매일’의 첫걸음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대한매일신보 연표 ▲1904년 7월18일 창간.(영문판 4면,국문판 2면) ▲1905년 8월11일 영문판(The Korea Daily News) 분리 발행. ▲ 〃 11월18일 을사조약 다음날.고종의 조약거부 기사 ‘칙어엄정’게재. ▲1907년 1월16일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고종의 칙서공개.(영문판에도 번역 게재) ▲ 〃 2월21일 국채 1,300만원 보상운동 제창. ▲ 〃 5월23일 국문판 대한매일신보 별도 발간. ▲ 〃 11월말 전국 지사수 32곳. ▲1908년 3월6일 관보 전재 폐지. ▲ 〃 4월29일 신문지법 개정.외국인 발행 신문도 발매 금지 및 압수 가능. ▲ 〃 5월27일 발행인 만함(Alfred W. Marnham)으로 변경. ▲ 〃 5월말 현재 부수 1만3,400부. ▲ 〃 7월12일 통감부, 양기탁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으로 몰아 구속케 함 ▲1909년 5월 1일 배설 사망.영문판 중단. ▲1910년 5월21일 통감부,만함에게 7,000엔(700파운드) 주고 대한매일신보사 인수. ▲ 〃 8월29일 한일합방으로 대한매일신보 종간. (국한문판 1,461호,국문판 938호)
  • ‘전자정부 구현’ 공청회 주제발표/李疇憲 한국외국어대 교수

    ◎21세기형 정보국가 건설/‘특별법’ 제정 뒷받침을 21세기 지식·정보사회는 정보기술에 바탕을 둔 효율적인 전자정부 구현 여부에 따라 성패가 갈라진다.국민회의는 지난 8월 당내외 전문가를 중심으로 ‘전자정부 구현 정책기획단’을 구성,한국형 전자정부 실현을 모색해 왔다. 15일 여의도 의원회관에서 국민회의 주최로 열린 ‘전자정부의 비전과 구현정책’ 공청회에서 李疇憲 교수(한국 외국어대)가 주제발표한 ‘전자정부구현을 위한 정책’를 요약,소개한다. IMF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이 산업사회의 경제구조를 유지하는 틀에서 이뤄질 경우 더 이상의 발전에 한계가 있다.즉 기업과 정부의 단순한 조직 축소는 일시적으로 난국을 극복할 수 있으나 무한경쟁시대에서 생존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따라서 2000년 초반까지 지식·정보에 기반을 둔 전자정부를 구축,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조화를 통해 국가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이른바 ‘전자정부’는 미국 클린턴 행정부가 93년부터 정부개혁을 추진하면서 표방한 정보사회형 ‘정부개념’이다.급속히 발전하는 정보기술을 활용하여 정부의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국민들에 대한 서비스를 혁신하기 위해 세계 각국은 전자정부 구현을 국가혁신의 핵심 과제로 설정한 것이다. ○국가혁신 핵심과제 전자정부 구현은 현재 진행중인 행정개혁의 표본이 돼야 한다.즉 정보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입각하여 고객지향적,성과지향적인 새로운 정부를 재창조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단순한 행정능률 향상과 대민 서비스제고뿐만 아니라 진행중인 정부개혁과 경제위기 극복의 열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전자정부의 기본원리는 ▲변화에 대한 탄력적 대응 ▲신속정확한 결정 및 전달 ▲사명 및 결과지향적 목표 ▲통합적 운영 ▲고객 우선주의 ▲문서감축·비용절감·회의축소 등으로 요약된다.이와 함께 공적 기관(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등)에 있어서 전자문서의 생산·이용·보관·전달이 일반화되고 국민과 공적 기관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정보기술의 이용이 보편화된 미래형 정부다. ○정보기술 이용 보편화 하지만 전자정부의 길은 쉽지 않다.우선 ▲최고지도자의 전자정부에 대한 확고한 신념 ▲정보기술을 이용한 전면적인 행정개혁 추진 ▲전문지식을 갖춘 정부 관료들의 노력 ▲예산권과 통제권을 가진 전자정부추진 전담조직 ▲철저한 성과 평가제도가 필수적으로 선행돼야 한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정보화전략회의에서 행정개혁을 위한 전자정부 추진상황 및 성과를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한편 기획예산위 및 예산청에서 정보기술을 활용한 행정개혁이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각 부처의 정보화 소요예산을 뒷받침해야 한다.때에 따라서는 외부 전문가의 과감한 영입과 혁명적 조치도 필수적 사항이다. 이와 함께 현 단계에서는 ‘전자정부 구현 특별법 제정’이 필수사항이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행정개혁을 가속화시키고 21세기형 지식·정보국가 건설에 정부가 앞장선다는 목표로 모든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해선 강력한 법·제도적 뒷받침이 선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 법은 행정자치부의 특별법 형태로 현존하는 정보통신부의 정보화촉진기본법의 사상을 존중하면서 공적 기관을 대상으로 한 정보화관련 법률과 규정들을 하나로 묶는 모법(母法)으로 해석할 수 있다.
  • 金 대통령 訪日에 부쳐/安錫敎 한양대 교수·경제학(특별기고)

    ◎동아시아 협력체제 구축을 지난해 말 외환위기가 점화되면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권과 국민의 관심은 온통 우리의 내부문제에 집중돼 왔다.그러나 우리의 에너지가 국내문제 해결에 집중되는 중에 국제환경은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유럽통합이 확대 심화되고 국제금융질서의 재편 논의가 확산되고 있으며 새로운 아시아 질서 창출에 대한 요구도 절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국제환경의 이러한 변화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金大中 대통령의 일본방문은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정립뿐만 아니라 새로운 동(북)아 협력구도를 마련하는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사실 우리는 그동안 동북아의 중핵적 거점에 위치하면서도 이웃 국가들에 비해 21세기에 대비한 지역협력구도에 무관심했다. ○중핵 위치서 무관심 일본은 어떠한가.금융위기가 발생한 이후 미국으로부터 굴욕적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일본의 정치엘리트와 인텔리겐차들간에는 새로운 ‘일본의 가치’를 모색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얼마전까지만 해도 21세기는 (동)아시아의 세기일 것이라고 팡파르를 울렸던 이 지역 국가들은 심각한 경제적 위기의 늪에 빠져 있다.이 지역내에 친화력 있는 협력 구도가 정립되지 못하는 경우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지역은 미국과 유럽 중심의 국제경제적 분업체계 속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세계경제는 ‘유러’의 출범으로 상징되는 유럽 11개국 통화동맹이 결성되며 미국과 유럽권으로 양분되어가고 있다.일본은 이 때문에 ‘일본적 가치’에 기초한 동아시아 협력구도를 정립하기 위해 진력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중국 정부는 급속하게 팽창하는 경제력에 기초하여 이미 80년대 말부터 동북아질서의 새로운 틀을 마련하고 이 과정에서 중국이 기선을 잡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지난 10년간 중국사회과학원이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의 대부분은 새로운 동북아의 분업체계 형성을 다루고 있다.인문과학분야의 연구와 학술대회 역시 전통적 중화사상(中華思想)을 새롭게 조명하는 데 그 관심이 집중되었다.중국은 21세기 동북아의 군사·경제적 패권국가로 부상할 것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중핵적 위치에 자리잡은 우리의 경우는 이같은 세기적 지역협력구도에 대하여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다.이와 관련하여 아·태경제협력체(APEC) 편향적 정부정책 역시 수정할 필요가 있다.APEC은 세계의 어느 경제통합체와 비교해서도 회원국들간의 발전의 정도,산업구조 및 문화규범에 있어 현격한 이질성을 갖고 있다.회원국들이 갖고 있는 이해관계의 공통분모에 기초한 결집력과 협상력을 발휘하는 데 있어 내생적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들어서는 국제금융질서 개편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실물경제와의 연계가 별로 없는 투기성 자본의 세계화는 국제금융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이에 대한 대응전략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도 아시아 국가들의 공동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한일 공동보조 필요 일본은 이미 한·일간 자유무역지대의 창설을 제기하고 있다.이러한 문제 역시 우리가 지나치게 소극적·방어적 자세로 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이러한 경제적 통합노력은중장기적 시각에서 볼 때 비단 양국의 동태적 분업이익을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역내 협력구도를 정립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폭작용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배경에서 이루어지는 金대통령의 일본 방문이 새로운 동(북)아시아의 협력구도를 형성하기 위한 한·일간의 공동보조를 모색하는 데 역사적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 과기부 ‘사이버 기술복덕방’ 개설/이번주부터 인터넷 서비스

    ◎각종기술·아이디어 소개 민원신청·처리제도 도입/연구능력 미약 중기에 ‘기술이전의 장’ 기대 과학기술부 인터넷 홈페이지에 ‘사이버 기술복덕방’(CITA­MOST)이 뜬다. 과기부는 내주 초 민간업체나 기업,대학,출연연구소 등 기술생산자가 개발한 각종 기술과 아이디어를 기술수요자가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 볼 수 있도록 기술복덕방 사이트를 개설한다.정보는 개발보다 공유가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사이버 기술복덕방’은 독자적인 기술개발 능력이 미약한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이나 연구소로부터 기술이전을 받을 수 있는 ‘기술이전의 장’역할을 맡는다.개발기술 외에도 아이디어까지 거래대상에 포함시켰다.각계각층의 기술개발력을 결집시키기 위한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장관과의 대화’‘민원신청 및 처리제도’ 등도 새로 도입된다. 이밖에 전자결재 및 전자문서 유통체제 구축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행정정보화계획을 확정,다음달부터 단계적으로 추진한다.우선 소속기관,단체와의 문서유통을 전자우편 방식으로 바꾸고 문서의 생산·유통·보관을 모두 전자화한다.올해 말까지 전자결재 시스템을 설치해 시범운영한 뒤 내년 초부터 본격 시행키로 했다.과기부의 인터넷 주소는 http://www.most.go.kr이다.
  • 부산국제영화제/任英淑 논설위원(外言內言)

    제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이 열리고 있는 수영만 요트경기장으로 가는 길은 꽉 막혀 있었다.남포동에서부터 시작된 교통체증이 갈수록 더 심해져도 택시운전사는 짜증을 내지 않고 심상하게 말했다.“영화제 개막식 때문입니더.퇴근시간이긴 하지만 평소에는 아무리 막혀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예.” 결국 개막식 참석은 못하고 말았지만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영화팬들의 식지 않은 관심과 부산 시민들의 열정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3년째 대성공을 거두고 있다.올해 영화제는 국제통화기금(IMF) 한파에도 불구하고 개막 이틀만에 예매권이 16만장 팔려나가는 호조를 보이고 있다.예매 첫날 팔려나간 입장권이 1회 3,000장,2회 1만8,000장,3회 5만4,000장인 것만 보아도 부산국제영화제의 성장속도를 짐작할 수 있다. 헐리우드 영화만 편식해온 우리 관객들에게 아시아와 유럽의 다양한 영화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해 대표적인 문화산업인 영화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이처럼 확대시킨 것이 부산영화제의 손꼽히는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또 하나의 성과는 이 영화제가 아시아권의 대표적 영화제로 확실히 자리매김됨으로써 유럽과 미국에 한국과 아시아 영화의 창구역할을 하게 됐다는 점이다.올해 베를린·몬트리올·샌프란시스코 영화제 등에서는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됐던 영화 10∼14편이 소개됐다.국제영화제 기획자들에게 “부산영화제에 가면 한국과 아시아영화를 제대로 고를 수 있다”는 인식이 퍼져 올해도 칸·베니스등 많은 국제영화제 관계자들이 부산을 찾았다.특히 기획안을 가진 감독과 돈을 지닌 투자업자를 연결해주는 ‘부산 프로모션 플랜(PPP)’은 올해 처음 도입됐으나 독일의 휴고트 볼 펀드와 한국의 일신창업투자가 벌써 참여를 밝혀 눈길을 끌고 있다. 세번째의 성과는 21세기에 필요한 전문인력을 확실하게 갖게 됐다는 점이다.문화의 시대가 될 것으로 전망되는 다음세기에 필요한 인재는 우수한 문화창조자와 그 문화상품을 국제적으로 세일즈할 수 있는 전문가다.부산영화제는 국내외 영화인력을 결집,좋은 영화제작의 터전을 제공하고 한국 영화계를 대표할 국제적 전문가를 만들어냈다.金東虎 집행위원장이 바로 그 전문가로,1회때부터 이 영화제를 이끌어온 그는 이제 한 해의 절반을 외국 영화제에서 보낼 만큼 국제적 인정을 받고 있다.로테르담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을 비롯,인도·하와이·싱가포르·후쿠오카 영화제의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고 세계 3대 영화제인 베니스·칸·베를린 영화제의 공식초청인사로 한국영화의 탁월한 세일즈맨 역할을 하고 있다.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각 지자체가 앞다투어 열고 있는 국제문화행사들이 부산국제영화제처럼 꾸준한 성공을 거둔다면 문화한국의 미래는 밝을 것으로 기대된다.
  • 제2건국 범국민운동­특별대담

    ◎“시민사회 협력­결집 가장 중요”/자발적 동참유도로 개혁역량 극대화/‘비리 있는곳 사정있다’ 원칙 확고히 金大中 대통령이 주창한 ‘제2건국운동’은 우리 사회 전분야에 걸친 총체적 개혁선언이다.이 범국민 캠페인이 성공하기 위해선 국민과 민간단체의 적극적 동참이 절실하다.제2건국운동의 바람직한 추진방향과 예상되는 문제점을 韓相震 서울대 교수(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 간사)와 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의 특별대담을 통해 짚어 본다. ▷추진상의 문제점◁ ▲韓교수=제2건국은 정부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국민적 합의와 지원에 따라 성패가 갈라지는 것입니다.밑으로부터 국민적 비판과 감시 등 개혁운동이 없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개혁의 힘은 소진되기 쉽습니다.처음부터 끝까지 정부 중심의 개혁은 우리 현실에서 사실상 어렵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개혁 집단들이 어떻게 결집하느냐가 중요한 과제입니다. ○정부중심 개혁 어려워 ▲朴변호사=지금까지 여러 정권이 역사적으로 너무 제역할을 못했습니다.오늘의 경제위기도단순한 정책실수가 아니라 해방 50년,경제개발 30년의 최종 종착점으로서의 현 체제가 전반적으로 잘못됐기 때문에 발생했습니다.나라를 새로 세우는 기분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습니다.구체적인 방법이 도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시민사회운동에 관한 종합적 이해와 설계가 없지 않은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그렇지 않고서는 시민사회단체를 정부가 네트워킹하겠다는 발상이 나올 수 없습니다.시민사회단체 중 개혁과 관련 없는 관변단체도 있지만 공익적 단체 대부분은 정부가 요구하지 않아도 개혁의 동반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억지로 끌어들이면 국민의 오해를 살 수 있고 부작용도 생겨나게 됩니다. ▷구체적인 방법론◁ ▲韓교수=국민들의 참여 욕구와 불만을 왕성한 창조적 에너지로 유도해야 시민사회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이런 맥락에서 자유·정의·효율이라는 세가지 원리를 바탕으로 국민운동의 큰 틀을 짜야 합니다.국민들이 호흡하면서 자발적 협력을 유도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발상의전환 시급 관료집단과 재벌 등 경제세력이 너무 일방적인 힘을 행사해 왔습니다.하지만 우리 시민사회의 잠재력은 생각보다 상당합니다.이러한 시민들의 힘을 제2건국의 원동력으로 육성해야 합니다.시민단체들도 개별이익 등 협소한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제2건국이라는 큰 틀에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국민 개개인이나 시민단체들 역시 발상의 전환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朴변호사=시민사회가 과거 군사독재 하에서는 강력한 힘을 소유했지만 절차적 민주주의가 보장된 사회로 이행하면서 오히려 그 힘을 잃어가는 느낌입니다.사회개혁적 인사들이 장외투쟁을 접고 제도내의 방식과 목표를 세워서 사회개혁에 동참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그 제도는 허약하고 비빌 언덕이 없습니다.당장의 무기가 없어진 셈입니다.경제구조와 정치의 개혁에도 정부만큼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대표소송제나 주민표결제 등이 그런 예입니다.하지만 그러려면 시민단체나 개인이 개혁에 참여할 수 있는 도구를 먼저 마련해야 합니다.그러나 현재 어느 부처도이를 연구하는 곳이 없습니다.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위한 도구를 마련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유기적인 협조체제 구축◁ ▲韓교수=시민들의 참여를 촉진하려면 다양한 방향의 제도개선이 필요합니다.시민단체간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은 솔직히 힘든 작업입니다.아마도 운동단체들의 자발적 협력이 이뤄지면서 자연스런 과정을 통해 조직운동이 태동해야 할 것입니다. 참여는 제도가 허용하는 절차와 방법에 따라 이뤄져야 합니다.이러한 모델 속에서 구석구석 활용할 공간이 많아지고 (시민운동은)더욱 열릴 것입니다.우리 사회는 이런 방식으로 기업 재벌 등의 ‘전제적 권력’을 고쳐야 하며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고 있습니다.제도안으로 들어가는 끊임없는 운동들은 많은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金大中 대통령도 이런 모델을 통해 지평을 열라고 하는 것입니다. ○관료조직 개편 미흡 ▲朴변호사=위로부터의 개혁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일반국민의 자발적인 동원이 가능한가에 따라 개혁의 성패는 갈립니다.정부가 나서서 구조를 바꿔야 합니다.정부조직의 10% 감축으로 할 일이 다 끝났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하지만 뉴질랜드와 비교해 보면 그리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정부는 지금 개혁의 책임을 가계나 사기업에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먼저 개혁의 동기와 전략을 수립해 기초를 마련해야 합니다. ▷정치·사회개혁의 방향◁ ▲韓교수=많은 국민들은 개발 독재과정에서 만연된 부정부패의 핵심을 정치권에서 찾고 있습니다.일단 개혁을 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면 정파와 상관없이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야 합니다.강력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에서 개인과 사회집단을 자발적인 구조운동 개혁에 동참시켜야 합니다.정부의 개혁운동과 함께 각종 그릇된 사고방식과 관행을 고쳐가는 국민운동을 병행해야 합니다.따라서 현재의 정치개혁은 자연스레 사회의식 개혁운동으로 옮아가야 합니다.‘부패척결을 하자’‘바르게 살자’ 등이 국민운동으로 점화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朴변호사=‘개혁은 타이밍’이란 말도 있습니다.지금까지 새 정부가 너무 신중해서 개혁대상까지 아우르고 그 의견을 들어보는 민주적 절차를 중시했습니다.개혁은 어차피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의 저항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단호히 제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집권세력 내의 개혁이 선행돼야 합니다.사정(司正)도 하지만 타협의 기운도 있는 게 현상황입니다.이런 상황에서 개혁이 실패할 경우 국민들의 실망은 더욱 커집니다.오해와 편견,저항이 있어도 정치개혁과 사정은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그러면 국민 모두 결국은 공감하게 됩니다.‘비리 있는 곳에 사정 있다’는 원칙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확립해야 합니다. ▷제3섹트의 중요성◁ ▲韓교수=넓은 시각에서 정부와 재벌의 영향력에서 독립해 시민사회라는 제3섹트의 역할을 늘리는 것이 개혁 성공의 관건입니다.우선 국민적 합의로 극복돼야 할 관행과 인습에 대해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예컨대 반 인류적인 행동과 부정부패 척결,촌지 거부 운동 등 절대 부패나 부정의 행동을 하지말자는 공감대를 국민적 힘으로 형성해야 합니다.앞으로 비정부기구(NGO)의 역할이 중요해집니다.정부 못지않게 많은 권한을 시민사회에 주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릇된 관행 고쳐야 ▲朴변호사=정부와 시장에 비견되는 제3섹트로서의 민간운동이 중요하다는 점에 공감합니다.우리의 경제위기는 외국처럼 상호견제와 균형의 체계가 없기 때문에 초래된 것입니다.우리의 경우 정부는 대통령,기업은 총수 한 사람만 존재합니다.정부가 시민사회단체를 일렬로 세우려고 하는데 이러면 시민단체는 도덕성에 해를 입으면서 바로 힘을 잃게 됩니다.이런 의미에서 민간단체 지원법도 반대합니다.본의 아니게 통제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종교단체 같이 후원비에 대한 세금감면이나 우편료 감면을 하거나 미국처럼 방송총시간의 일정부분을 공익광고 명목으로 시민단체에 할애해 주는 간접 지원제도가 더 필요합니다. ▷시민단체의 참여 패러다임◁ ▲韓교수=국민적 에너지를 결집해서 동기 부여와 목표설정을 통해 자발적인 협력으로 발전된다면 제2건국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반면 참여를 빙자해 지나치게 갈등을 증폭시키거나 불신이 심화되면 국가적으로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게 됩니다.무엇보다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운동이 자발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자발성이 훼손되는 일이 생기면 안됩니다. ○민간단체 지원법 반대 ▲朴변호사=우리는 일제와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참여는 손해다’라는 인식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참여연대의 경우도 몇년간 정말 열심히 시민운동을 했지만 아직도 회원이 늘지 않고 재정적 어려움이 많습니다.정부차원에서 국민의 참여의식을 고취하는 데 필요한 제도적 절차를 마련해 줘야 합니다. ▷관료·제도개선의 시급성◁ ▲韓교수=공익운동 단체들이 현재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이는 각 부문에서 실권을 행사하는 관료의식이 구태의연하기 때문입니다.대통령의 개혁 청사진과 관료들의 체질 사이에 큰 균열이 있습니다.관료들에겐 수십년간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습득된 관행과 타성의 문화가 있습니다.이것은 근본적으로 민의 참여 촉진보다 억제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관료문화 개선 과제 따라서 관료 문화의 ‘품질개선’이 주요한 과제입니다.체계적인 노력없이,개혁주제의 설정 없이는 시행착오와 자기 한계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미래를 바라보는 정확한 그림이 아직 관료들에게 없기 때문입니다.관료들의 대대적 교육이 시급한 과제입니다. ▲朴변호사=의식개혁과 교육의 힘이 중요하다는 데 동의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전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제도의 힘이 필요합니다.예를 들어 고속도로의 오물투기가 심했지만 헬리콥터를 동원,공중에서 감시하는 등 철저한 단속을 하자 최근 들어 상당히 줄어든 것이 그 예입니다. 일본은 사회발전 시스템이 상당한 수준에 와 있습니다.그러나 일본의 사회운동가들은 많이 절망하고 또 우리를 오히려 부러워합니다.그처럼 강력한 우리사회의 활력이 참여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참여를 견인하는 제도가 미비하고 채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韓교수=우리사회는 분기점에 와 있습니다.국민적 지혜와 협력의 발전모델을 세우느냐,‘우물안 개구리’처럼 분열 갈등의 유산 속에서 쇠퇴의 길로 가느냐는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하지만 희망찬 미래로 끌어가는 궁극적 힘의 원동력은 도덕성과 전문성·비판성을 갖춘 시민사회 집단에 있습니다.정부는 시민단체를 지원하면 되지 정부가 나서서 통제하거나 지도하면 안됩니다.사회의 양식 있는 사회운동단체들이 큰 눈으로 생각하고 헌신하는 역할을 간절히 기대합니다. ▲朴변호사=시민사회단체는 정부를 비판할 때 곧 돕는 것이며 개혁 저항세력을 견제하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정부와 시민사회단체의 올바른 역할 분담이라고 생각합니다. 개혁의 성공도 마찬가지입니다.정부가 먼저 제도적 기반을 만들어줄 때 국민들의 참여의식과 개혁이 더 빨리 진전될 수 있습니다.
  • 여권 ‘司正 정보 소외’ 당혹감

    ◎당정 사전조율 없어 정국안정 새역할찾기 고심/“법대로 사정 반증” 시각도 사정정국 속에서 국민회의의 고민이 크다.정치권 사정이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는 데 따른 고민이다. 청와대와 당정(黨政)이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과거처럼 여권 상층부가 사전조율하는 징후도 없다.다만 수사상의 예우만 눈에 띌 뿐이다. 그러다 보니 당내에는 여러 얘기가 많다.당이 지도력이 없다느니,개혁의 나팔수가 되지 못한다느니 여러 비판이 끊이질 않는다.무척이나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이러한 기류는 현재와 같은 불가측의 사정한파 속에서 여권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위기감에서 출발한다.대통령의 개혁을 뒷받침해야 하고 정국안정을 꾀해야 하는 상황에서 마땅한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여권의 힘을 결집하는 정치적 역량이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한나라당을 장외로 ‘튀게’한 것도 결국 당 정치력의 현주소가 아니냐는 것이다. “야당을 국회로 끌어들이라”는 질타에도 현재로선 무력감만 표출한다. 이따금 최고지도자의 강력한 개혁의지,사정결행이 국민의 체감지수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당의 입지가 축소돼 가는 형국이다. 또 한가지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당이 정국운영의 중심축에서 밀려나 있는 인상을 주고 있다는 지적이다.이는 다분히 검찰의 사정정보 독점에서 기인하는 듯하다.최근 한나라당 李基澤 전총재대행의 검찰소환 사실이 한 예다. 趙世衡 총재대행 이하 당 지도부는 사전에 이같은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국민회의가 사정에 있어 철저한 ‘국외자’ 입장에 놓인 것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과거처럼 여권의 ‘입맞추기’가 없이 ‘법대로’사정이 이뤄지는 방증이라는 것이다.국민회의 鄭均桓 사무총장은 “당이 소외되는 인상은 사정당국의 독자성 때문이며 개혁 전선에는 이상이 없다”고 해석했다.단지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당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찾아 나서야 하는 의무가 지워져 있다는 것이다. 여권은 ‘지속적인 사정(司正)’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하지만 사정정국을 돌파할 뚜렷한 소재가 현재로서는 없다는 것이 당이 가진 고민이다.
  • 민주열사 열전:7/朴寬賢 前 전남대 총학생회장(정직한역사되찾기)

    ◎시민 민주역량 결집한 ‘광주의 아들’/5·18 당시 특유의 지도력으로 평화 시위 주도/교도소내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 단식중 사망 역사는 검은 음모를 뿌리치지 못하지만 가끔 환한 광장으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음모의 시대가 갈듯말듯 하던 1980년 봄 사람들은 광장을 찾았다. 1980년 봄 광주의 도청앞 광장은 일개 지리적 점에서 드넓은 역사적 공간으로 빠르게 변신하고 있었다.이 변신은 朴寬賢이란 촉매제 덕분이었다. 80년 5월14일 박관현이 주도하는 ‘민족민주화 성회(聖會)’가 도청앞 광장에서 개시될 때 1만명의 참가자 중 대학생 아닌 시민은 소수였다.박관현을 아는 시민은 더더구나 적었다.성회 마지막날 5월16일 야간 횃불시위를 마치고 다시 광장에 모였을 때 참가자는 5만명이 넘었고 시민 수가 학생 못지 않았다.그리고 50만명 이상의 광주 시민들이 朴寬賢을 ‘광주의 아들’‘무등의 아들’로 부르고 있었다. 朴寬賢은 광주의 희망으로 우뚝섰다.그러나 도청앞 광장은 그의 존재보다 더 큰 부피로 살아나고 있었다. “민주화의 성스런 횃불이 꺼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꺼진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朴寬賢은 “휴교령이 발동되면 정오에 도청앞 광장에 모이자”고 당부했다.광장은 광주 시민을,역사를 안을 태세가 되었다. 80년 4월9일 직선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에 뽑혔던 朴寬賢은 5·18 광주민중항쟁이란 역사의 핏빛 숲으로 똑바로 난 푸르른 길이다.광주에 박관현이 있음으로 해서,박관현의 결집력과 지도력이 있음으로 해서 5·18의 야만적 폭거와 승화된 공동사회체의 대조적인 두 측면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민주화운동에 남다른 열정 그는 한달이 약간 넘는 짧은 기간에 전남대 학생들과 광주 시민들에 잠재된 민주역량을 깊은 속까지 파내고 정연한 모양새로 다듬었다. 광주 시민들은 이 민주역량의 판석들을 꺼내 비록 가장 불행한 형태이긴 하지만 거대한 항거의 피라미드를 구축했던 것이다. 79년 10월26일 朴正熙 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유신철폐와 민주화에의 기대가 드높기만 했으나 崔圭夏 과도정부는 애매한 이원집정제의 정부주도 개헌을 고집하고 있었다.무엇보다 全斗煥 중앙정보부장 겸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는 비상계엄 상태를 유지하면서 정권찬탈의 야욕을 구체화해 갔다.분열과 대립으로 내닫는 정계보다는 대학이 민주화의 기수로 나섰으며 특히 광주의 전남대가 그러했다.박관현이 4월 27세의 나이많은 법대 3년생으로 총학생회장에 당선할 때 그의 사회 및 학원 민주화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탁월한 대중지도자 자질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소수였다. 고시 합격을 통해 사회정의 실현을 강력하게 꿈꾸었던 그는 1학년 말 야학운동에 뛰어드는 일대 방향전환을 한다.‘들불’ 야학을 통해 박관현은 尹祥源,金永哲 등 광주 빈민·노동 운동의 선구자들을 만나는데 박관현과 깊은 신의를 맺은 이들은 5·18 때 시민투쟁군의 중추로 활약했다. ○현상금 눈먼 동료 공원이 고발 朴寬賢은 5월 중순 단 며칠새 민주화를 희원하는 모든 광주 시민의 가장 믿음직한 아들로 자리잡았다.변혁에 대한 갈망은 리더에 대한 갈구를 깊게했고 민주화 변혁 갈망이 유달랐던 광주에 때마침 청중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 연설력의 박관현이 등장한 것이다.전남대와 박관현의 주도로 계엄령 아래 3일 연속 도청앞 광장에서 열린 민족민주화 성회는 비상계엄 즉각해제를 요구했으나 평화스럽게 마무리되었다.朴寬賢은 이때 방관자,구경꾼으로 머물러 있던 시민들을 민주화 희원의 역군으로 동참시키는 자력을 발휘했다. 그의 이같은 능력은 세계 역사상 드문 5·18 항쟁의 일반시민 주도 사실과 맞물려 전설이 되다시피 했으나 정작 박관현은 5·18 때 현장에 있지 못했다.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확대 쿠데타로 민주 인사들을 사전검거하자 18일 아침 격렬한 논쟁 끝에 학생회장 박관현의 피신이 결정됐다. 인간의 야수적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 만행과 함께 사람들의 더불어 같이 사는 소질이 꽃처럼 만개한 열흘간의 항쟁 상황을 여수 앞바다 돌산섬에서 전언으로만 듣게된다.몇번 잠입을 시도하다 실패한 박관현은 항쟁이 진압된 뒤 6월6일 서울로 도피한다.항쟁후 ‘공수부대원들이 조각조각내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던 朴寬賢은 82년 4월 서울 편물공장에서 현상금을 탐한 동료 공원의 고발로 체포돼 광주로 압송됐다. “도청앞 광장에서 만나자”는 자신의 ‘말’을 금쪽같이 지켜줬던 광주에 23개월 만에 발을 디딘 박관현은 드디어 ‘행동’한다.내란 중요임무 종사 죄목으로 5년형이 선고됐으나 朴寬賢의 눈은 다른 곳을 천착하고 있었다.그는 광주교도소 수감 3개월 후인 7월부터 교도소 내의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하는 단식을 실시한다.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로 육신을 택한 그의 단식은 철저한 것이었고 3개월 동안 3차에 걸쳐 50여일에 달했다. ○단식중 외부진료 한번 못받아 교도소 당국은 처우개선 약속을 조롱하듯 파기하면서 점점 한계 상태로 빠져드는 그를 외부진료 한번 없이 방치했다.10월10일 온 신경이 돌처럼 굳어 도무지 음식을 음식으로 여기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전남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급성 심근경색증에다 급성 폐부증 증세로 12일 새벽 숨지고 말았다.만 29세였다. 朴寬賢의 젊고 강한 넋은 5·18의 핏빛 숲 뒤꼍에 언제나 푸르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朴寬賢 열사 연보 ▲1953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출생 ▲70년 광주동중 졸업 ▲73년 광주고등학교 졸업 ▲74년 군입대 ▲78년 전남대학교 법대 입학 ▲78년 12월 광주공단 노동자실태 조사작업에 참여 ▲79년 광천 들불야학 강학 활동 ▲80년 4월 전남대 총학생회장 당선 ▲80년 5·17조치로 서울 피신 ▲82년 4월5일 체포,12일 광주교도소 수감 ▲82년 7∼10월 3차례에 걸쳐 50여일 간 단식투쟁 ▲82년 9월 ‘내란중요임무종사자’로 5년형 선고 ▲82년 10월12일 전남대 병원에서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사망 ◎누나 朴幸順 여사/어머니는 아들 검거된뒤 생존 사실 알아/동생 죽기전 “전면 단식” 조언 지금도 恨 朴寬賢 열사의 셋째 누나인 朴幸順 여사(49)는 광주대에서 구내매점을 열고 있다. 항쟁이 끝난 후 寬賢이 죽지 않고 서울에 은신한 사실을 서울의 큰언니를 통해 알았지만 寬賢의 부탁대로 아들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는 어머니에겐 체포 때까지 비밀에 부쳤다.아들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래도 어머니의 안색이 달라져 당국의 주의를 끌까 우려해서였다. 체포된 뒤 단식 소식을 전해듣고 찾아간 그에게 寬賢은 새벽 2시 무렵에 고문하는 소리가 수시로 들리고 수형자의 부식비를 빼먹는 비리와 함께 생명 유지도 어려울 정도로 형편없는 음식만 지급한다며 “안에서 이런 악을 해결하지 못하면 바깥에 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누나는 자신의 잘못된 조언이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며 지금도 가슴아파한다.단식이 30일째에 가까웠을 무렵 재소자 폭행 근절,주·부식 정량 지급,정치범 부당 차별대우 개선 등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았다며 다시 전면 단식을 강행할 것인가,부분 단식으로 나갈 것인가를 寬賢이 자신에게 물었다는 것이다.이때 누나는 다소라도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있으면 ‘전면’으로 나가라고 말했는데 동생이 죽기 열흘 전쯤 한 이 ‘매정한 조언이 두고두고 한이 된다는 것이다. ◎동료 宋善泰씨 회고/결벽 심해 현실적 타협 거부/뜻 정하면 끝장보는 성격… 自身에 철저/검정고무신 신고 술·노래 잘하던 학생 朴寬賢 총학생회장 아래서 제2선의 비공식 기획실장 역을 맡았던 宋善泰 현 광주 시의회 전문위원은 “결벽증이 있을 만큼 자신에게 철저했던 朴寬賢은 뜻을 정하면 끝장을 보고 말지 결코 어설프게 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학생회장 취임 직후 학원민주화 현안으로 어용교수들의 퇴진 문제가 대두됐을 때 朴寬賢은 타협안이나 다른 이슈와 함께 추진하자는 의견에 반대,어용교수의 발본색원과 문제의 완전해결을 강력 주장했다.또 학생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간 후 몇몇 집행부 학생들이 투쟁 지도를 위해 김밥을 먹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이를 빼앗아 내팽겨쳐 버렸다고 한다. 소금장수,모기장 행상,편물공장 공원 등으로 서울에 피신하고 있을 때 광주 민주인사들에게 연락을 해 고향에서 잠적하거나,자수를 해서 형을 살고 나와 ‘내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고 본 宋위원도 그의 강직한 성품이 이런 현실적 타협책을 거부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학생회장이 되기 전까지 쭉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학교에 다녔던 朴寬賢은 술도 잘 먹고 노래도 곧잘하는,놀 줄아는 젊은이였다고 한다.
  • 자민련 ‘지지율 올리기’ 총력

    ◎朴正熙 기념관 건립 등 30대 과제 선정/젊은층 공략으로 내각제 분위기 조성 자민련이 ‘30대 과제’를 내놓았다. 지지율 제고를 위한 아이디어를 모았다. 한자리 수 지지율을 두자리로 올리는 게 1단계 목표다. 종착점은 내각제 완결로 되어 있다. 30대 과제는 ‘제몫찾기’로부터 시작한다. 공동정부운영협의회를 통한 실질적 권한 확보가 핵심이다. ‘국무총리 지위와 권한 행사법’제정 필요성도 제기했다. 명예총재인 金鍾泌 총리가 고개를 내저은 사안이어서 눈길을 끈다. 정체성 확립부문에서는 내각제 추진이 요체다. 경제청문회는 문민정부와의 차별화 방안으로 제시됐다. 당 부설연구소를 설치,정책개발 기능을 강화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당 이미지 강화를 위한 아이디어는 갖가지다. 朴正熙가(家)의 결집,朴正熙 기념관 건립,‘아!朴正熙 뮤지컬’등 ‘朴正熙되찾기운동’이 이채롭다. 소장파 의원 및 사무처 요원의 출신대학 전담제는 젊은 층을 겨냥하고 있다. 홍보활동 차원에서는 미디어전략팀 운영,PC통신 홈페이지 개선,젊은 지식층대상 저널발간 등을 내놓았다. 당보는 1만부에서 6만부 수준으로 늘려야 할 것으로 강조됐다. 또 이동민원상담소 설치,도시와 농촌지구당 교환운동 등이 포함되어 있다. 새 인물 영입 필요성도 강조하고 있다. 대학생 인턴제를 도입하자는 아이디어는 그중 하나다. 마포 중앙당사를 조기 이전하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지난 6월 현재 자민련 지지율은 3.7%. 여론조사기관인 R&R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다. 12.7%가 지난 95년 창당 이후 최고였다. 지난해 1월 金鍾泌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때 잠시 기록했다. 앞으로 얼마만큼 올라갈지는 미지수다.
  • ‘DJ노믹스’ 책 발간/새 정부 경제 청사진

    ◎읽으면 개혁방향 한눈에 정부는 1일 金大中 대통령의 경제철학과 새 정부의 경제청사진을 담은 ‘국민과 함께 내일을 연다’는 제목의 책자를 발간했다. 金대통령은 발간사를 통해 “정부는 과감한 개방과 자유화를 통해 경쟁을 촉진하고 시장의 힘을 강화할 것”이라며 “자유로운 경쟁과 창의가 샘솟는 열린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우리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 발전시키는 데 모든 힘을 모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金대통령은 이어 “국민의 정부가 갖고 있는 경제철학과 개혁 청사진을 국민 모두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이 책을 펴냈다”며 “이 책이 정부와 국민이 해야 할 일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국민 모두의 역량과 저력을 결집해나가는 지침서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모두 366쪽 분량인 이 책은 1,2,3부로 나눠져 1부에서 새정부의 경제철학과 비전을 제시하고,2부에서 이의 실현을 위한 정부·금융·기업·근로자의 역할과 개혁방향을 다루고 있다.또 3부에서는 우리 경제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전략과 국민복지의 증진 등을 담고 있다.이 책은 정가 2,000원에 시중에서도 판매된다.
  • 러시아는 개혁을 포기하는가(해외사설)

    러시아는 지난 7년간의 개혁작업을 이젠 아예 포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옐친 대통령은 5개월전에 임명했던 자유시장주의자 키리옌코 총리를 해임하고 공산주의자 체르노미르딘을 다시 총리에 앉혔다. 새 총리는 내각을 공산주의자나 과두정치론자들로 채우려 하고 있다. 이들 모두 법률과 개방된 경쟁심으로 조절되는 자유시장에 혐오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라틴 아메리카와 같은 변형된 자본주의가 실현되기를 원한다.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모욕이겠지만 그 체제만이 부패와 내부자 거래등의 불법이 용이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 지금 루블화를 더 찍어내라고 함께 요구하고 있다. 이들이 장악한 은행들이 흔들리지 않게하고 공산주의 시대부터 맺어온 기업들이 더 많은 외화유입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러시아 경제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회귀하고 러시아 국민들은 빈곤의 늪으로 빠지게 될 게 확실하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 도달하면 두가지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첫째는 “뭐가 잘못됐는가”라는 지적이다. 몇몇은 서방세계가원조를 적게 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고,한편에서는 너무 많이 줬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두번째는,러시아에는 서방의 개혁 계획은 맞지 않았다는 말이 나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옐친 대통령부터 책임을 져야 한다. 다음은 개혁가들이다. 이들은 으스대고 뽐내기만 했지 국가의 부를 자기의 것으로 동일시해왔다. 야당 지도자들은 어떤가. 자신들의 부를 늘리는 데 더 관심이 있었고 문제해결에는 역시 소홀했다. 폴란드나 에스토니아,체코 등은 개혁 프로그램의 처방대로 유럽의 미래를 생각하며 민주주의 비전을 결집해 왔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공산주의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의 원천이었다. 반면 러시아는 결집 대신 분열되어 왔고 민주주의가 오히려 합법성을 갉아먹었다. 이제 클린턴 대통령이 옐친 대통령을 만나러 모스크바에 간다. 두 정상은 마치 대등한 것처럼 행동할 것이지만 원조자와 수혜자의 관계이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은 줄 게 없다. 단지 조언과 격려만 하고 돌아올 것이다.
  • 허공속에 외친 ‘대의원 혁명’/총재 경선 표 분석

    ◎초반 수도권 개표서 일찌감치 당락 결정/‘2차’ 기대했던 反昌 3후보 대세론 못꺾어 표심(票心)은 대세를 따랐다. 한나라당 ‘8·31 전당대회’에서 ‘대의원혁명’을 역설하며 2차 결선투표에서의 대역전을 기대했던 李漢東 金德龍 徐淸源 후보는 낙담했고,李會昌 후보는 15대 대선 패배의 후유증을 딛고 총재직에 복귀했다. 1차투표에는 중앙당 및 지구당 대의원 8,354명 가운데 87.7%인 7,326명이 투표에 참가했다. 결과는 李會昌 후보 4,083표,李漢東 후보 1,554표,金德龍 후보 1,283표,徐淸源 후보 392표로 집계돼 李후보가 55.7%의 득표율을 올렸다. 李후보의 당선에는 金潤煥 전 부총재의 전폭적인 지지,李基澤 총재권한대행의 합류,160여명의 원내외 위원장들의 지원 등 대세론이 큰몫을 했다. 여기에 구심점을 잃고 표류해온 당을 ‘강력한 야당’으로 만들라는 대의원들의 희망이 어우러진 결과로 풀이된다. 몰아치는 사정바람과 국민회의와 국민신당의 통합도 한 몫을 했다는 분석이다. 개표 초반 중앙당 및 수도권지역의 투표함이 열리면서 李후보의 당선이 일찌감치 예상됐다. 李漢東 후보는 표밭인 경기·인천지역에서도 李후보에 뒤졌다, 李후보는 호남지역에서도 1위를 차지하는 등 전국적으로 고른 득표율을 보였다. 영남지역에서는 70% 안팎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세 후보는 ‘대세론’에 밀려 1차투표에서 무릎을 끓어야 했다. 李漢東 후보는 2위라는 지지율을 확인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떠돈 탈당설도 표결집에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金 후보도 만족할 수 없는 결과를 얻었다. 전북지역을 제외하고 이렇다 할 지지를 얻지 못했다. 호남지역에서도 1위자리를 李會昌 후보에게 내준 것으로 알려졌다. 徐후보도 선전이 기대됐으나 득표율 5%대에 머물러 ‘뉴리더’의 출현이 시기상조임을 반증했다.
  • 한나라號 선장 李會昌씨 유력/31일 총재 경선… 후보들의 다짐

    ◎李會昌­‘1차서 승리’ 장담속 긴장/金德龍­黨 결속·재집권 위해 헌신/李漢東­최후까지 黨과 함께 운명/徐淸源­계보·줄세우기 정치 타파 거대 야당 ‘한나라호(號)’의 ‘선장’은 누가 될까. 총재 경선에 나선 李會昌 李漢東 金德龍 徐淸源 후보는 30일 각각 기자회견이나 간담회를 갖고 막판 지지를 호소했다. 李會昌 후보가 1차 투표에서의 승리를 장담하고 있는 반면 나머지 세 후보는 2차 투표까지 염두에 두고 표몰이를 계속하고 있다. 후보 기호순으로 31일 경선에 임하는 다짐과 각오를 들어본다. ▷李會昌 후보◁ 세 후보와 달리 공식 기자간담회를 갖지 않았다. 대신 여의도사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총재경선에 임하는 각오와 소회를 피력했다. 李후보는 “이번 전당대회에서 누가 당 총재가 되든 강한 야당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당이 단합·화합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으면 당원의 뜻을 저버리고 대국민 약속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李후보는 “지난 일주일 동안 전국을 돌며 대의원들을 접촉해 보니 대부분 당이변해야 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며 “특히 처지가 어려운 지역일수록 야당의 확실한 위상을 찾아주길 바라고 있었다”고 귀띔했다. 그는 “당원들의 기대와 요구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1차투표에서 55∼60%를 득표,무난히 승리할 것으로 자신하면서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다. ▷李漢東 후보◁ 李會昌 후보를 직접 겨냥해 공세를 퍼부었다. 李후보는 “유감스럽게도 이번 전당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3가지 기본조건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과장된 ‘대세론’과 명분없는 ‘줄세우기’,李會昌후보와 李基澤 총재권한대행의 밀약설,‘李會昌­金潤煥­李基澤’ 3인의 밀실합의설 등을 공략했다. 李후보는 “당내 민주화를 짓밟는 패권주의 정치행태와 불공정 경선,분열과 갈등을 부추기는 당권분할 의도 등은 3金정치의 표본이며 정치권의 환골탈태를 바라는 국민 여망을 저버리는 일”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자신과 관련한 ‘金大中 대통령 접촉설’이나 ‘경선패배 후 탈당설’등을 “허무맹랑한 흑색선전”이라고 단정하고 “마지막까지 당과 운명을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다. 1차에서 1위를 확보,최종 승리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金德龍후보◁ 金후보는 “여권이 인위적 정계개편을 노골화하고 있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당이 깨지지 않게 하는 것”이라며 “여권의 패권주의에 단호히 맞서 당의 결속과 재집권을 위해 헌신하는 총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특히 일부 후보를 겨냥,“독선적 자세로 ‘쫓아낼 사람,쫓아내겠다’고 호언하거나 내각제 개헌 문제 등으로 경선 이후 정치 행보가 불투명한 후보에게는 표를 주어서는 안된다”며 “위대한 ‘대의원 혁명’을 확신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만에 하나 총재가 되지 않는다 해도 당을 지키며 원칙과 정도의 길을 가겠다”고 경선 결과에 승복할 뜻을 분명히 했다. 1차투표에서 40% 안팎의 득표율로 2위를 확보,2차투표에서 역전하겠다는 전략이다. ▷徐淸源 후보◁ 徐후보는 “우리 당은 이제 더이상 몇몇 계파 보스의 정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면서 “이른바 ‘대세론’이라는 것은 한낱 허구에 불과하며,‘대세’가 있다면 특정인이 총재가 되는 대세가 아니라 거스를 수 없는 변화의 대세”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徐후보는 “개인의 기득권이나 지키고 적당히 타협할 생각이 있었다면 경선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총재가 되면 계보정치와 국회의원들을 줄세우는 구태정치,돈쓰는 정치,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정치를 없애겠다”고 강조했다. 또 “경선에서 패배하더라도 당에 끝까지 남아 제목소리를 내겠다”고 다짐했다. 1차에서 25%의 득표로 2위를 차지,2차투표에서 ‘이변’을 기대하고 있다. ◎D­1 캠프별 움직임/대의원 숙소 돌며 한표 호소/反李 3후보 연대 강력 시사 ‘8·31 전당대회’를 하루 앞둔 30일 한나라당은 행사준비를 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냈다. 총재경선에 나선 네 명의 후보들도 자정이 되도록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의 숙소를 돌며 한 표를 부탁했다. ○李會昌 후보 표 점검 계속 ○…李會昌 후보에 비해 ‘세불리’를 인정하고 있는 李漢東 金德龍 徐淸源 후보 등 3명은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대의원 혁명’을 역설했다. 이들은 2차투표까지 가면 ‘반 李會昌표’가 결집해 ‘대의원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해 ‘3人 연대’가 무르익었음을 시사했다. 반면 李會昌 후보는 여의도 부국증권빌딩 사무실에서 辛卿植 비서실장,梁正圭 河舜鳳 金鎭載 의원,尹汝雋 전 환경부장관 등 핵심참모들이 참가한 가운데 전략회의를 갖고,표점검을 계속하는 등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핵심참모들과 맨투맨작전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 6,000여명은 한강호텔,팔레스호텔,올림픽파크텔 등 42개 숙소에 묵었다. 4명의 후보는 핵심 참모들과 함께 밤 늦게까지 이들 숙소를 돌며 ‘맨투맨식’작전을 폈다. 그러나 대의원들은 후보들에게 전당대회의 후유증을 최소화할 것을 주문하는 등 경선보다는 앞으로 당의 진로에 대해 더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고속도휴계소서 선거운동 ○…金德龍 후보는 다른 후보들과는 달리 경부고속도로 천안휴게소에서 지방 대의원들을 맞는 이색 선거운동을 펼쳐 눈길을 모았다. 이어 잠실 롯데월드에서 수도권지역 대의원 1,000여명(후보측 주장)이 참가한 가운데 필승 전진대회를 갖고 ‘대의원 혁명’을 다짐했다. ○…鄭昌和 사무총장을 비롯한 사무국 직원들은 행사장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전당대회 예행연습을 갖는 등 행사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31일 전당대회는 조촐한 식전행사에 이어 孟亨奎 의원의 사회로 성원 보고,徐廷和 전당대회의장의 개회선언,총재 선출순으로 진행된다. ○…명예총재와 부총재 지명문제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아 상당한 진통을 예고하고 있다. 당초 李會昌 후보의 부정적인 시각으로 부총재 지명문제가 전대 이후로 연기된 듯 했으나 세 후보의 반발로 일단 방향을 선회했다. 31일 상오 8시 당무회의에서 재론키로 했으나 결과는 미지수다.
  • 새 조국 건설의 전제/조비오 신부(서울광장)

    정의구현사제단은 군부독재정권 3대에 걸쳐 진정한 민주화와 구조악 개선,특혜금융 중단,부정부패 척결,사회 정의 구현과 인권회복을 강력히 요구하며 활동해 왔다. 재야 민주인사와 지식인,학생들과 시민 양심세력은 사제단의 활동을 환영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당시 집권세력과 기득권 집단들은 사제단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부당한 감시와 박해를 일삼았다. 구조악 개선은 지금의 사회,기업,공공기관,금융기관 등의 구조조정을 뜻한 것이며,특혜금융 중단은 관치금융의 부패고리를 과감히 끊어 버릴 것을 요구한 것이다. 부정부패 척결과 정의구현은 국가 쇄신을 주장한 것이다. 그동안 정권은 여러번 바뀌었고,바뀔 때마다 집권자들은 개혁 입국이니,국가재건이니,신한국 건설이니,한국병 퇴치 등을 외치며 그럴싸하게 민심을 호도해 왔다. 그러나 결과는 국민에게는 상처만 안겨주고,국가에는 무거운 부채를 남기고 자신들은 욕심을 챙긴 채 실망스럽게 끝났다. 현정권은 50년동안의 잘못된 국가의 틀을 바로 세우는 ‘제2의 건국’을 선언하였다. 군사독재정권은 유착 관계를 통해 권력과 부를 전리품처럼 독점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쌓고 돈을 모으는 데 길들여져 왔다. 나라를 걱정하는 대다수 국민들은 대통령의 ‘제2의 건국’선언이 선언적 수사로만 그치지 않고,보다 구체화되고 가시화되어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리라 소망하며 기원한다. 그러나 기득권 수호 세력과 반개혁 세력은 저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개혁추진에 역풍을 일으키기도 한다. 사정은 부패와 비리의 근절을 위한 것이며,국정과 사회개혁 등 구조조정을 합리적 개혁수단으로 하여 국민 의식개혁과 삶의 태도변화로 이끌기 위한 처방이어야 한다. 썩은 양심에서 발생하는 공짜의식과 불로소득의 악습과 관행은 끝내야 한다. 화합과 도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정한 국민적 화합이 없으면 도약할 수 있는 힘을 모을 수 없다. 때문에 국민의 역량을 모으고자 화합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화합은 잘못을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니며,면죄부가 아니라 개선과 협력과 동반을 기대하는 것이다. 개혁은 튼튼한 법 질서회복,정의 실현,애국,진리와도덕성의 바탕 위에 효율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또 현재의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구성원이 적대적 관계가 아닌,상호협력관계로 동참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정과 개혁을 통해 부패방지법에 개혁추진 의지를 담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공정한 사정과 정의로운 법이 적용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총체적 부패와 부정비리 구조는 총체적 개혁으로만 척결할 수 있다. 여소야대의 정치판도 속에서 사정과 개혁을 이끌어 나가기에는 역부족일 수 밖에 없겠다. 개혁을 바라는 국민의 여론과 협력이 뒷받침될 때 개혁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각계 각분야의 사회 단체와 뜻있는 국민들은 한 정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국이 처한 난국을 극복하고 제2건국의 새역사 창조에 지혜와 역량을 모을 수 있는 개혁 추진세력의 결집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 와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좋은 평가는 단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보수 세력이나 정치적 대립집단이나 반개혁 세력이 평가를 하는 것도 아니다. 국민과 역사로부터 정의·자유·진실·효율·조국애와 도덕성의 척도로 평가받을 일이다. ‘하느님은 정의로 세상을 재판하시며 진실로써 만백성을 다스리신다.’ (시편 96:13)
  • 한국경제의 수호신 되소서/故 崔鍾賢 회장 영전에

    너무도 갑작스런 비보 앞에 참담한 심경을 가눌 길 없습니다. 崔鍾賢 회장님 모두가 언젠가는 가야할 길이라지만 이 무슨 벽력과 같은 떠남이십니까? 나라 경제의 중흥을 위해 하실 일이 태산같은데 그 무엇이 급해 이리도 황망히 가십니까?저희들만의 힘으로 풀어가기에는 너무도 벅찬 난제가 산적한 이때에 이처럼 홀연히 떠나가시다니 아득한 심정 형언할 수 없어 새삼 하늘이 야속해집니다. 전문경영인의 첫 세대로서 지난 개발연대 우리 경제의 도약을 이끌어오신 회장님께서는 30여 성상의 기업경영을 통해 시장경제와 경영의 세계화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 오셨습니다.또한 회장님께서 미래를 대비하자는 높은 철학으로 인재양성에 누구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시는 모습을 보며 우리 후배들은 한편 든든함을 느끼며 존경해 마지 않아 왔습니다. 특히 회장님께서는 6년전 전경련 회장으로 취임하신 이래 거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때로는 과중한 사회적 기대와 요구에도 묵묵히 우리경제의 진운을 개척해 나가는 용기와 혜안을 보여주셨습니다.회장님께서추진하셨던 자유시장경제의 창달과 세계화 확산작업은 전환기 우리 경제의 확고한 진로를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남다른 애정으로 추진해 왔던 국가경쟁력 강화사업은 우리 경제현실을 바로 보고 모든 경제주체의 역량을 결집시킨 탁월한 처방이기도 했습니다.선진국과 후진국을 오가며 경제를 통해 민간외교의 영역을 넓혀오신 회장님의 공로는 그 누구도 닮기 힘든 위대한 업적이셨습니다. 최종현 회장님 회장님은 이제 저희들의 가슴에 큰 자취를 남기신 채 영원한 안식의 길로 떠나셨습니다.이나라 이 민족을 위해 못다 베푸신 경륜과 숭고한 이상은 이제 우리 후배 경제인들의 몫으로 남았습니다.일생을 경제발전을 위해 헌신해 오신 회장님의 거룩한 유지를 받들어 나라 경제를 다시 반석위에 올려 놓도록 후배들 모두 노력하고 또 노력해 나가겠습니다. 부디 영면하시옵소서. 1998.8.26 김우중 대우회장
  • 美 對테러정책 ‘강하게’ ‘부드럽게’

    ◎군사적 응징 통해 ‘세계 경찰’ 위상 강화/반미세력 결집땐 ‘냉전향수’ 확산 우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수단에 대한 폭격과 관련,‘강·온 양면작전’으로 선회했다.테러에 대한 미국의 논리를 효과적으로 설파하기 위한 조치로 여겨진다.테러의 주범인 회교근본주의자들을 온건 이슬람권을 비롯,지구촌으로부터 고립시켜 효과적으로 공략하려는 전략 같다. 현재 드러난 상황은 강경이 주류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보복조치 직후 테러기지에 2∼3차례 정도의 추가 폭격을 강력하게 시사한 데 이어,23일 미 대사관의 담장을 넘으려던 알바니아 경찰을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윌리엄 코언 미 국방장관은 “빈 라덴이 선전포고하고 테러조직을 통제·지휘하고 있다면 죽더라도 유감스럽지 않다”며 대사관 폭탄테러의 주범으로 거론되는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하기 위해 나설 것임을 내비쳤다. 또 리비아가 지난 88년 발생한 팬암기 폭파 용의자로 지목된 리비아인 2명에 대한 국제재판 회부를 거부하면 리비아에 금수(禁輸)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하고 나섰다.미국이 강경책을 먼저 내세우는 데는 세계 초강대국의 위치를 확고히 굳혔다는 자신감과 세계 여론이 테러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 같다. 그러나 수단의 화학공장에 대한 유엔 진상조사단 파견 반대를 고수해오다가,유엔의 공식조사가 결정되면 협조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며 한발 물러섰다.일방적인 강경책은 피하겠다는 의도다. 군사적 응징 일변도는 장기적으로는 비효과적이라는 판단과 비서방세계의 러시아에 대한 ‘초강대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이슬람권의 결속을 더욱 야기시켜 이란 쿠웨이트 파키스탄 등 친미 이슬람권의 입지를 난처하게 만든 대목도 유화정책을 병행할 수 밖에 없도록 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 전문가 기고(金 대통령 취임 6개월:下)

    ◎“정부개혁 없이 민간개혁 없다” 金大中 대통령의 취임후 6개월은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엄청난 변화의 바람을 몰고온 시기였다. 전문가들은 새정부 정책수행 내용을 어떻게 평가하고,또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는지 정치,경제,외교안보통일 분야로 나눠 알아본다. ◎정치/정당정치 실패가 국회 실패로/계보주의 탈피해야 정당 개혁/文正仁 연세대 교수·정치학 출범한지 6개월밖에 되지 않는 金大中 ‘국민의 정부’를 평가한다는 것은 아직 이르다. 아무리 준비된 정부라 하더라도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내에 가시적 개혁성과를 이루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 12월의 당혹과 절망을 회고할 때,신정부 6개월에 긍정적 평가를 아니할 수 없다. 아직 진행중에 있지만 경제부문의 구조조정,햇볕론을 기조로 한 대북정책,그리고 포괄적 사회안전망 구축에 기초한 실업대책 등은 신정부의 개혁방향을 비교적 뚜렷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표류하는 참여민주주의 그러나 정치부문에 있어서는 낮은 평가를 면키 어렵다. 지난 6개월동안 정치부문만은 아무런 가시적 개선노력이 없는 개혁의 무풍지대라고 할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의 본산이어야 할 국회는 지난 6개월동안 총리인준과 국회의장 선출이라는 당리당략 때문에 개혁을 통한 국민과의 고통분담은 고사하고 산적한 민생법안들마저도 도외시하는 직무유기를 보여왔다. 국회의 실패는 정당정치의 개혁 실패에서 유래한다. 지역주의,계보주의,패권주의가 아직도 한국 정당정치의 기본적인 작동원리로 자리잡고 있다. 더욱 문제시되는 것은 정당 내부에 깊게 뿌리박고 있는 상명하복의 권위주의다. 당내 계보주의와 권위주의는 정당의 구조적 경직성을 심화,국회를 포함한 정치권의 활성화를 크게 저해해왔다. 어디 그 뿐인가. 50년만의 평화적 정권교체에 걸었던 국민적 기대와 열망 역시 식어가고 있다. ‘참여민주주의의 정착’을 표방한 현 정부의 국정지표를 무색케 하리만큼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주의가 확산일로에 있다. 민심이 떠난 풀뿌리 정치,지역주의·계보주의·권위주의가 판치는 정당정치,공전과 파국을 일삼는 의회정치­이것이 오늘날 한국정치의 자화상이라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파행이 계속되는 한 민주주의의 공고화는 고사하고 경제위기의 극복마저 어려워질 수 있다. 왜냐하면 정치의 파행은 곧 경제파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누구의 책임인가? 일차적 책임은 ‘국민의 정부’에 있다. 비록 여소야대 정국과 자민련과의 연정이 현 정부의 정치개혁에 구조적 장애로 작용해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金大中 대통령이 더 큰 관심과 지도력을 발휘했어야 했다. 경제위기 극복이 정치개혁 지연의 사유가 되어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나 현정부만을 탓할 일은 못된다. 민주정치의 주체는 국민이다. 우리가 주인의식을 갖고 개혁을 선도해 나갔다면 정치개혁은 보다 쉽게 이행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당과 정치인 역시 문제시된다. 정당개혁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당 스스로가 뼈를 깎는 아픔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움직임은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다. 정치인의 자질과 의식 역시 개혁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비록 공천은 계보정치에 의해 결정되었다하더라도 당락은 유권자에 달려 있다. 유권자,국민을 생각하는 대승적 자세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현재의 정치파행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파행이 경제실패 불러 이렇게 볼 때,정치개혁의 실패는 우리 모두를 탓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지난 8·15경축사에서 金大中 대통령은 ‘제2의 건국’ 선언을 통해 지방분권,국회제도 개혁,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망국적 지역주의 해소,그리고 신부패방지법 제정 등 구체적인 정치개혁과제를 제시하면서 정치개혁을 최우선 순위로 자리매김한 바 있다. 지켜볼 일이다. 아직 4년6개월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경제/국가에너지 결집할 비전 필요/정책집행 일관된 뚝심 있어야/宋一 외국어대 교수·경영학 신정부 출범 6개월의 경제정책은 국제통화기금(IMF)의 해법을 충실히 따르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고금리,초긴축 재정 등 IMF처방의 결함이 내장된 신정부의 경제정책은 IMF 패키지와 분리해서 평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실업률 8%,성장률 -7∼-8%라는 우울한 전망치가 이를 가리킨다. ○IMF 패키지와 분리못해 그러나 정책수단의 손발이 묶인 채 정부는 노사,금융,기업,공공부문등 4대 개혁과제를 단계적으로 진전시키면서 글로벌형 체질개선 의지를 확실히 천명했다. 그 결과 바닥이 났던 외환보유고는 400억달러를 넘어섰다. IMF 가이드라인도 크게 완화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투자 부적격국가’라는 불명예스러운 신용등급 꼬리표는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채 IMF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국난의 시기일수록 가장 절실한 것은 국가 에너지를 결집할 수 있는 국민적 합의이다. 고통과 희망의 최소공약수가 모든 국민에게 각인된 개혁 프로그램이 무엇보다 긴요하다. 국민적 컨센서스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첫째,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비전 구축이 선결과제이다. 金泳三 정부의 ‘신한국’ ‘신경제’ 등 개혁 컨셉은 중앙청을 때려 부수는 식으로 과거 파괴에만 집착한 나머지 미래 건설적 비전이 없어 실패했다. 은행과 기업,그리고 노사관행이나 실업대책 등 한국경제의 내일의 변화된 모습을 국민 모두에게 생생히 보여줄 수 있는청사진이 없으면 개혁은 표류할 수밖에 없다. 둘째,정책의 일관성이 중요하다. 한치 앞을 예단할 수 없는 오늘날과 같은 불가측성의 시대일수록 경제활동의 불확실성을 낮출 수 있는 정책 집행의 일관된 뚝심이 필요하다. 빅 뱅,빅 딜,정리해고제등 국민경제의 사활이 걸린 사안에 대한 지금까지의 정책이 국민적 신뢰와 합의를 이끌어내기에 아직 미흡하다. 셋째,시장의 힘을 키워주는 개혁이 절실하다. 우리 경제가 IMF 관리체제 신세에 몰린 주된 원인은 관리집단과 정치가 시장을 떡주무르듯 했다는 것이 불문가지이다. 정부가 할 일은 시장이 생동할 수 있도록 룰을 확립하고 경제가 관치나 정실의 고리를 벗어나 국민이 합의한 룰에 따라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시장이 없기 때문에 관치가 필요하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다. 시장경제를 국시로 삼고 있는 대한민국에 시장이 불완전하다는 말은 있으나 ‘시장이 없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정부는 시장의 룰만 확립 넷째,개혁은 정부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 개혁 성공사례의 화두가 되고 있는 영국과 뉴질랜드의 체험에서 볼 수 있듯이 개혁의 수순은 공공부문에서부터 첫 단추가 끼워져야 하며,여기에는 민간부문에 대한 존중과 함께 국민적 합의 유도라는 국가 리더십의 진의가 함축되어 있다. 국가경영의 투명성을 비롯해 정부와 국회,그리고 600여 산하 공공기관에 대한 구조조정,퇴출,다운사이징 등 정부의 개혁이 선행되어야 노사 타협과 국민화합이 담보된 개혁이 가능하다. 다섯째,한국적 가치를 복원해야 한다. 지난 30년간 한국경제가 쌓아올린 무형자산 가운데는 뜯어고칠 것도 많지만 서구의 합리주의를 무력화시켰던 한국적 가치도 헤아릴 수 없다. 이것들 가운데 옥석을 가리고 추슬러 글로벌 질서와 조화시키는 한편 한국 사회의 에너지를 통합시킬 수 있는 가치체계의 복원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 ◎외교 안보 통일/통일은 평화의 결과가 돼야/우호관계 확립후 北 돕도록/池萬元 사회발전시스템 연구소장 한국외교의 당면과제는 국제통화기금(IMF)체제에 편입된 경제난 해소와 한반도 안정이다. 한국외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미 외교에서현정부는 일단 성공적인 출발을 보였다. 金大中 대통령은 미국방문을 통해 안정된 이미지를 미국사회에 심는데 성공했다. 단기외채를 장기로 연장하거나 추가로 얼마간의 외채를 끌어들이는 데도 성공했다. ○對美 외교 성공적인 출발 북한의 연착륙을 유도하기 위한 미국의 대북 정책에도 대통령이 강력한 지지를 표현했고,더 나아가 미국에게 북한을 과감하게 포용해줄 것을 요청함으로써 종잡을 수 없었던 金泳三 정부와의 철학적 차별화를 부각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이 제스처의 성과는 앞으로 현정부가 내치에서 경제문제와 안보·통일문제를 어떻게 진전시키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국제신인도가 문제다. 그러나 신인도의 결정적인 요소들,즉 노동의 유연성,정부·기업의 구조개선,증권시장의 기율 확보 등과 같은 기술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대미 외교는 구체적 열매를 얻을 수 없다. 현정부는 아직 대북정책를 바꾸지 않고 있다. 이제까지의 대북정책 목표는 평화통일이었지만 독일과는 달리 한반도에서는 평화통일이 불가능해 보인다. 미국은 이미 두개의 한국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도,미국도 하나의 한국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한반도에서의 통일은 평화의 결과여야지 목표가 돼서는 안된다. 통일을 목표로 하면 통일은 커녕 평화마저 깨진다. 지난 50년간 서로가 통일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상대방은 ‘통일당하지’않으려고 군비를 증강시켜왔다. 통일의 길이 열려 있는 한 남침의 길도 열려 있다. 그러나 역대 정부는 통일만이 국민의 염원이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통일이 될 때까지 과도기적 평화를 유지하고 싶어 하지만,통일을 전제로 하는 한 평화는 없다. 통일을 전제로 하는 평화를 북한은 흡수통일 책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정부의 햇볕정책도 북한은 흡수통일 의도로 간주하고 있다. 만일 개방의 바람이 金正日체제를 전복시킬 수 있을 만큼 진전된다면 金正日은 주저함 없이 군사적 도발을 획책할 것이다. 죽을 바에야,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역사적 인물이 되고 싶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한국군을 단 사흘만에 굴복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북한이 그만큼 강한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북한이 그렇게 자신하고 있는 한,공격은 언제나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군은 개혁의 목소리만 높였지 개혁내용에는 북한의 이러한 자신감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통일 지상주의’ 벗어나야 아무리 동족이라 하지만 북한은 분명 우리의 적이다. 동족이면 왜 6·25비극을 저질렀는가. 적인지 아닌지는 휴전선의 긴장상태가 말해주고 도탄에 빠진 경제에서 매년 뽑아지는 15조원 이상의 국방비 규모가 말해준다. 적을 도와주는 나라는 없다. 그래서 북한을 도와주려면 먼저 ‘적대시스템’을 ‘우호시스템’으로 바꾸는 일부터 해야 한다.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한 모든 통일 노력은 의미를 잃는다. 휴전선의 그림을 바꾸고,상대방이 발뻗고 잘 수 있을 만큼의 군사력으로 상호 감군을 추진해야 한다. 통일이냐,평화냐에 대한 확실한 선택이 있어야 외교의 성과도 확실해질 것이다.
  • 한나라 당권경쟁 지역분할 양상

    ◎“텃밭 대의원 표 결집력이 승패 좌우”/지지위원장 2·3중 분류 혼전 예상 한나라당 당권경쟁이 지역간 표갈림 양상을 띨 조짐이다. 각 후보마다 서로 다른 지역 기반을 토대로 텃밭 다지기와 상대 지역 허물기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역별 대의원 표의 ‘결집력’이 주요 변수로 떠오른 셈이다. 공식 유세 첫날인 24일 후보들이 각각 전략 및 취약지역으로 직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李會昌 명예총재는 ‘대세론’으로,다른 세 후보는 ‘대의원 혁명론’으로 대심(代心·대의원의 票心)을 공략했다. 특히 각 진영은 지지 위원장 분석에서부터 신경전이 날카롭다. 조사결과 2·3중으로 분류된 인사도 많다. 특히 각 주자쪽 주장대로라면 당내 원내외 위원장은 실제 248명의 1.6배가 넘는 406명에 이르는 셈이다. 李명예총재쪽은 대구,경북과 부산,울산을 ‘절대 우세’지역으로 보고 있다. 이날 李基澤 총재권한대행 계파인 ‘민주동우회’의 지지선언을 계기로 ‘李會昌­金潤煥­李基澤’의 3자연대를 통한 수도권­대구·경북­부산·경남 연합전선을최대한 가동할 작정이다. 영남권 대의원 표의 60∼70%만 뭉치면 낙승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혼전’으로 분류한 인천,광주,대전,경기 등도 집중적으로 파고 들 태세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李명예총재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는 李漢東 전 부총재는 경기,인천을 ‘절대 우세’지역으로 자신한다. 경기,인천 대의원의 표쏠림 현상이 70∼80%로 다른 지역보다 높을 것이란 분석이다. ‘열세’로 분류한 부산·경남,대구·경북,호남은 이번 주 집중 순회로 분위기 반전을 꾀할 생각이다. 대구·경북은 26일부터 1박2일 일정으로 공략할 예정이다. 金德龍 전 부총재는 서울과 전남·북을 ‘절대 우세’지역으로 여긴다. 이날 공식 유세전의 첫 장소로 태생지인 전북을 선택한 것도 텃밭 사수(死守)를 통해 세확산을 노리겠다는 의도다. 金전부총재는 인천,강원,부산·경남에서도 선전(善戰)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대추격전을 벌이고 있다. 徐淸源 전 사무총장은 ‘절대 우세’지역 없이 부산·경남,강원에서 ‘우세’를 보인다는 주장이다. 부산·경남 민주계 대의원들의 지지를 기대한다. 특히 이날 후보등록 직후 부산으로 직행,‘1박’하며 대의원들을 접촉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