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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열사 열전:5/金景淑 YH무역 사원(정직한 역사 되찾기)

    ◎자본·독재 억압에 처절히 항거/빈농의 딸… YH무역 폐업 맞서 몸던져/노동자 권리 확보 ‘값진 희생’으로 빛나 불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던 79년 8월 11일 새벽 2시.세번의 자동차 경적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깼다. 순간 마포 신민당사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1,000여명의 경찰들이 4층 농성장으로 진입,곤히 잠들었다가 깨어 황망히 대피하려던 YH노조원들을 에워쌌다. 경찰은 여공들과 신민당 당직자들을 무차별 구타하며 한명씩 대기중인 ‘닭장차’에 쑤셔넣었다. 그러나 2시간여 전까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결의문을 읽던 金景淑 노조 상임집행위원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후 당사 뒤편 지하실 입구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을 거뒀다. 경찰은 그녀가 전경들이 진입하자 왼팔동맥을 끊고 투신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확한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경찰은 도시산업선교회를 사건 배후세력으로 지목하고 文東煥·印名鎭·徐京錫 목사,李文永 전 고대교수,시인 高銀씨 등을 구속했다. YH사건은 70년대 노동운동의 정점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金景淑 열사가 있었다. 70년대를 열며 全泰壹 열사가 노동운동의 암흑기를 깨고 그 싹을 틔웠다. 그 위에 70년대 노동운동의 기틀이 다져졌고 이를 지키려는 민주노조의 치열한 저항의 절정이 바로 YH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여야의 극한 대립을 불러와 당시 金泳三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부산·마산사태,10·26사건이 터지며 유신독재는 막을 내렸다. YH노조 농성의 직접적 원인은 회사의 일방적인 폐업방침을 철회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YH무역은 66년 재미교포 張龍虎씨가 100만원의 자본금과 10명의 종업원으로 시작한 가발수출업체였다.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70년 4,000여명의 종업원을 둔 국내 최대 가발업체로 성장했다. 한 밑천 잡은 張씨는 동서 秦東輝씨에게 사장자리를 물려주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미국 지사를 통한 무역을 구실로 여공들이 피땀흘려 만든 가발 300만달러어치를 미국에서 처분,그 대금으로 현지에서 백화점과 목장,빌딩 등을 구입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秦씨도 YH무역에서 얻은 수익금으로 해운회사를 차려 회사를 떠났다. 거기에 가발수출업이 사양화하고 석유파동이 겹치면서 회사는 79년 4월 폐업공고를 내기에 이르렀다. 76년 결성된 YH노조는 청계피복노조,동일방직노조 등과 함께 몇 안되는 ‘민주노조’중 하나였다. 당시 사회운동의 큰 쟁점거리이기도 했던 ‘민주노조’는 대부분의 산별·단위노조가 어용화한데 비해 노동자 권리를 위해 독자적 활동을 하는 노조를 의미했다. 金景淑씨는 YH무역에 민주노조가 있는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景淑이처럼 똑부러지게 일하고 노조활동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어려운 생활중에도 항상 명랑했고 후배들이 무척 따랐지요” 당시 노조사무장이던 朴泰連씨(44·주부)의 회고다. 그녀는 전형적인 빈농의 딸이었다. 세마지기의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빚보증을 잘못 서 그나마 날려버리고 광주시내에서 행상을 하다 그녀가 8세때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가 날품을 팔아야 했기에 그녀는 세살 터울의 남동생 俊坤씨(38)를 돌보며 자랐다. 국민학교 5학년부터 방학때면 누에고치 공장에 다니며 돈을 벌다가 73년 15세가 되던 해 상경했다. 그녀는 일기에서 “내가 배우지 못한 공부를 가르쳐서 동생만은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었다”고 당시의 심경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기대했던 서울생활은 한낱 꿈에 불과했다. 지독한 저임과 그나마도 떼어먹는 악덕기업주들이 많았던 것. 그때부터 모순덩어리의 사회에 눈을 뜨기 시작한 그녀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젊고 싱싱한 나이에 우리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공장 안에서 여러 형태의 억압을 받으며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혼탁한 먼지 속에 윙윙거리는 기계소리를 들으며 어언 8년동안 남은 것은 병밖에 없다.…” 20여년이 지난 오늘 YH사건과 金景淑 열사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당시 석유파동으로 인한 극심한 불황과 오늘의 IMF사태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경제적 고통의 터널은 닮은 꼴이다. 그때 자본세력과 결탁한 독재정권은 폐업·해고 등으로 그 부담을 주로 노동자들에게 지우려 했다. 金景淑씨는 그것에 저항한 격렬한 투쟁 속에 희생된 ‘한떨기 꽃’이었다. IMF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오늘의 자본세력도 임금을 낮추고 정리해고를 실시하고 있다. 고도성장을 위해 희생한 노동자들은 오늘의 IMF위기에서도 가장 큰 희생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YH사건과 金景淑 열사의 죽음은 결코 지나간 과거의 일일 수만은 없다. ◎유가족·동료들은 지금…/모친 최영자씨=아직도 딸 가슴에 묻고 ‘회한’/동료 최순영씨=법률상담소 내 권익보호 앞장 “아무것도 모르고 정부가 하라는 대로 해부렀지” 어머니 崔英子 여사의 회한의 넋두리다. 崔여사는 딸이 죽고 이틀후 강남시립병원에서 죄인마냥 ‘3분만’에 장례를 치러야 했다. 뼛가루마저도 무등산자락에 뿌렸다. ‘딸이 큰 죄를 지었다’고 하는 경찰이 시키는 대로 한 것. “너무 억울하고 불쌍하게 갔어요. 야무지고 착해 모두들 며느리 삼고 싶다고 했는데…” 崔여사는 지금도 돈많이 벌어 동생 학비 대려면 서울로 가야한다고 말하던 딸의똘망똘망한 눈망울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야 딸이 월급을 제대로 못받아 풀빵으로 끼니를 때우며 동생학비와 생활비를 보냈다는 것을 알고 통곡했다고. 누이가 보내준 돈으로 전남기계공고를 다녔던 俊坤씨는 “그때는 잘 몰라 누이가 불쌍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자랑스럽다”고 했다. 결혼해 딸 셋을 두고 있으며 광주 금호타이어에 다니고 있다. 당시 구속됐던 노조지부장 崔淳永씨와 사무장 朴泰連씨는 부천지역 여성노동자회 회장을 차례로 맡는 등 노동운동가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崔씨는 또 부천시의회 의원을 지내고 현재 가정법률상담소를 내 여성노동자들의 권익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강제 귀향조치됐던 230여명의 여공들은 대부분 가정주부가 됐고,87년부터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다. 당시 배후 ‘불순세력’으로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던 徐京錫·印名鎭·文東煥·高銀·李文永씨는 그 이후에도 활발하게 인권·통일·민주화 운동을 벌였으며 다시 감옥에 가기도 했다. ◎동료 崔淳永씨 인터뷰/“모순된 시대상황 고발”/독재정권에 우리 힘 과시… 민주노조 존재 확인/“폐업 철회 아니면 죽음을” 혈서 보고 모두 놀라 “景淑이의 죽음은 모순적 시대상황에 대한 고발이었고 민주노조의 존재 확인이었지요” 당시 노조지부장이었던 崔淳永씨(46)는 “독재정권이 그렇게도 깨뜨리려는 민주노조의 힘이 결코 약하지 않음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YH사건에 의미를 부여했다. 崔씨는 당시 농성하는 노조원들도 이미 폐업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면서,“그러나 민주노조를 깨뜨리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金景淑 열사의 투혼은 무서웠다고 한다. 4월 농성을 처음 시작할 무렵 그녀는 ‘폐업철회 아니면 죽음을’이란 혈서를 써서 노조회의에 들고 나와 모두를 놀라게 했다고. 또 “어차피 깨지는 싸움이지만 우리를 주목하고 있는 다른 민주노조들을 위해 순순히 물러나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농성장소를 신민당사로 옮긴 것도 사건을 최대한 공론화하여 정권에 큰 부담을 주려는 의도였다고 했다. 崔씨는 경찰이 배후세력으로 도시산업선교회를 지목하고 그들의 지시를 받아 자살조까지 만들었다는 등 터무니 없는 사실을 조작해 순수한 여공들을 욕보였다고 분개했다. 또 여공들을 각 도별로 버스에 태워 강제 귀향시키고 부모에게는 협박조로 ‘딸조심’을 시켰다고. 이로 인해 얼마간 대다수 여공들이 ‘가택연금’을 당했고,부모에 의해 ‘강제로’ 결혼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崔씨는 뒷얘기를 소개했다. □金景淑 열사 연보 ▲1958년 전남 광산군 비야면에서 출생 ▲1965년 아버지 김용귀씨 병으로 사망 ▲1972년 광주 남국민학교 졸업. 누에고치 공장에서 일함 ▲1973년 상경. 한풍섬유 태진산업 등 봉제공장에서 미싱사로 일함 ▲1976년 YH무역 입사 ▲1977년 노조가 세운 야학 ‘녹지중학’입학해 2년후 졸업. 검정고시 준비 ▲1978년 노조 소그룹 ‘차돌이’ 그룹장으로 활약 ▲1979년 8월11일 새벽 농성 진압중 신민당사 뒷편 지하실 입구에서 쓰러진채 발견돼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2시30분 쯤 숨짐.
  • 民和協 3일 출범… 산파역 韓光玉 위원장

    ◎“통일 논의 국민적 합의 도출에 온 힘”/170여개 통일운동단체 묶어 남북교류 뒷받침/보수·진보노선 총망라… 명실상부한 민간 구심체 “우선 통일논의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루는데 진력하겠습니다” 3일 공식 출범하는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의 韓光玉 상임위원장의 각오다. 韓위원장은 민화협의 5인 상임위원장단중의 한 사람이다. 하지만 새정부 내에서 그의 정치적 비중과 태동 단계에서부터 산파역을 맡아온 이력때문에 민화협의 ‘사실상 대표’로 꼽힌다. 민화협은 민간 통일단체로선 해방 이후 최대 규모다. 정부에 등록된 기존의 165개 통일단체와 미등록 500여 민간기구 중 현재까지 200여개 단체를 하나로 엮은 통일운동의 민간 구심체인 셈이다. 3일 결성식을 갖는 이 기구에는 이념적으로 폭넓은 스펙트럼의 단체들이 참여했다. 자유총연맹,이북5도민회 등 보수단체에서부터 진보적 노선의 민주노총,민변 등까지 망라하고 있다. 韓위원장은 과격 운동권 단체로 알려진 한총련에도 문호를 열어둘 뜻을 내비치고 있다. 물론 한총련이 변해야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다. 특히 국민회의 등 원내의석을 가진 3개 정당도 모두 참여시킨다는 입장이다. 민간차원의 남북교류를 뒷받침하는 명실상부한 범국민적 상설협의체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다. 韓위원장은 “아직 참여를 유보중인 한나라당을 설득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다만 이질적인 단체들을 하나로 아우르다보니 ‘불협화음’이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韓위원장은 타협과 조정에 능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 대선전에 金大中 후보와 金鍾泌 후보간의 이른바 DJP 후보단일화 성사의 막후 주역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선후에도 1기 노사정위원장으로서 노사정 대타협을 일궈낸바 있다. 민화협을 이끌며 남북 민간교류를 활성화하는 데 그의 ‘솜씨’가 기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특히 金大中 대통령의 신임이 각별한 현직 국민회의 부총재다. 탁월한 ‘협상력’으로 남북 문제를 푸는 데 모종의 막후 역할이 예상된다. 실세급이면서 원외라는 독특한 정치적 위상 때문인지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앞으로 대북특사역을 맡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 언론 감시­개혁실천방안 제시/언론개혁시민연대 활동 방향

    ◎법 개정·민주화 추진/우수·최악보도 공개 27일 창립대회를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 언론개혁시민연대(상임대표 金重培)는 앞으로의 활동방향을 크게 세가닥으로 잡고 있다. ▲언론법제 개선운동 ▲수용자 운동 ▲대안매체 운동이 그것이다. 언개련은 “국민 각계각층의 자발적인 참여로 언론을 감시하고 한국 언론의 발전을 위해 정책과 대안을 제시하겠다”면서 “시민행동을 통해 바람직한 언론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데 앞장서겠다”고 활동 방향을 제시했다. 먼저 ‘언론법제 개선운동’은 언론 제도권 내에서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방안이다. 정기간행물법과 방송법,정보공개법 등을 민주적으로 개정하고 언론독과점금지법(가칭) 제정을 추진하는 일 등이 포함됐다. 신문공동판매제 실시를 위해 국내 신문시장의 현황과 외국사례 조사도 시작할 예정이다. 언론사간의 과당 경쟁을 막기 위해서다.언론개혁 백서를 발간하고 신문 불공정거래 및 사이비언론 피해센터도 운영키로 했다. 독자·시청자들을 언론 개혁세력으로 흡수하기 위해 ‘수용자운동’을 추진한다. 무엇보다도 미디어 교육을 제도화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고 ‘미디어 공교육화 추진위원회’를 결성키로 했다. 회원단체 모니터를 네트워크로 연결,언론 상시 감시체계를 구축한다. 모니터 요원을 전문 인력으로 만들기 위해 실무 강좌도 연다. 분기별로 각 분야의 시민단체들과 함께 경제·노동·통일·교육 등 부문별 우수보도와 최악보도를 선정,언론사에 끊임없이 자극을 준다는 계획이다. ‘대안매체 운동’은 장기적인 사업계획이다. 언론에 대한 비판과 감시 뿐아니라 현실적인 대안도 제시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현 ‘국민주 방송 준비위원회’와 연계해 국민주 방송 설립을 추진해 나갈 방침이다. 전문매체를 활성화하기 위해 전문매체 지원센터를 설립한다. 시민단체 관계자가 시청자위원회 위원에 참여하는 것을 제도화하기로 했다. 이같은 활동 계획과 관련,언개련은 “제도권 언론과 언론사 외부의 개혁세력이 함께 손을 잡은 최초의 시도”라면서 “수많은 걸림돌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결코 발걸음을 멈추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 親日의 군상:3/3·1문화상과 皇國예술인(정직한 역사 되찾기)

    ◎민족 짓밟고 해방후 민족상까지 받아 ‘3·1문화상’이라는 상이 있다.1960년에 제정돼 올해로 39회째 수상자를 냈다.3·1문화재단(이사장 文仁龜)에서 주관하는 이 상은 대한유화 창업자 李庭林(작고)씨가 제정한 것으로 시상분야는 학술·예술·기술 등 세 분야.재단측이 밝힌 이 상의 제정취지는 “조국광복을 지향하여 거족적으로 발양된 위대한 3·1정신을 영원히 기념하여……”다.상 이름에도 ‘3·1’이 들어가고 또 매년 3·1절 당일 시상식을 갖는 것으로 봐 이 상은 3·1정신을 길이 계승할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 분명하다.그런데 이 상의 역대 수상자·심사위원 중에는 일제 당시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거나 친일 작품을 남긴 예술가 상당수가 포함돼 있다.예술분야 수상자중 13명,심사위원 중에는 20여명(일부 수상자와 중복됨)이 이에 해당된다.그들의 면면과 구체적인 일제시대 행적을 살펴보자. ◎상받은 예술인 13명의 친일행적은…/문인·화가 등 30여명 ‘위대한 3·1정신’ 왜곡/식민정책 전위대 역할… 청년 징병 내몰아 우선 예술분야 수상자가운데 문학가는 趙演鉉(13회)·安壽吉(14회)·白鐵(17회)·毛允淑(21회)·崔貞熙(24회)·李周洪(28회)등 6명,미술가는 李象範(4회)·金景承(5회)·金殷鎬(6회)·金仁承(9회)·朴泳善(10회)·金基昶(12회)등 6명,음악가는 金聖泰(22회) 1명이다. 문학 분야의 趙演鉉은 대학 재학시절부터 친일 잡지 ‘동양지광’에‘동양에의 향수’(1942년 5월),‘아세아부흥론 서설’(42년 6월)등 친일성향의 평론을 썼다.이중 아세아부흥론 서설은 ‘동양지광’이 현상공모한 ‘지상(紙上)결전 학생웅변대회’에서 3등으로 입선한 작품으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고 이 땅의 청년학도들이 아시아부흥의 투사로 나설 것을 부추긴 내용이다.‘북간도’로 유명한 소설가 安壽吉은 친일 문학잡지 ‘국민문학’(42년 2월)에 발표한 ‘원각촌’ 이외에도 ‘벼’,‘북향보’등의 친일성향의 작품을 쓴 바 있다. 평론가 白鐵은 작품보다는 친일단체에서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는 친일 문인단체인 조선문인협회(회장 李光洙) 상무간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를 지냈으며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학예부장 시절 친일 미술가 沈亨求(해방후 반민특위에 의해 구속됨)와 함께 조선미술가협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여류문인으로 이 상을 수상한 사람은 毛允淑,崔貞熙 두 사람이다.이들은 모두 조선문인협회에서 활동하였으며 41년 2월27일 부민관(현재 서울시 의회 건물)에서 개최된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에 참석해 강연을 했다. 아동문학가로 활동한 李周洪 역시 상당수의 친일 작품을 남겼다.그는 친일 잡지인 ‘동양지광’에 수필 ‘청년과 도의’(43년 7월)를 비롯해 단편소설·시 등도 남겼다.그는 유일하게 사후에 이 상을 수상했다. 미술계의 친일논쟁은 해방직후부터 시작됐다.문화예술인의 최초 조직이었던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 조선미술건설본부는 金殷鎬·金基昶·金景承·沈亨求·李象範·尹孝重 등을 친일 미술가로 규정,회원에서 제외시킨 바 있다.이들의 대다수는 41년 2월21일 결성된 조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황민문화’ 건설을 목적으로 조선문인협회·보도사진협회 등 11개예술단체와 더불어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단체로 활동하면서 전람회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내놓기도 했다.43년 1월9일∼17일 정자옥(丁子屋·일제 당시 현 미도파백화점 자리에 있던 백화점)에서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 전람회’를 열어 그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내놓은 것이 그 예다. 미술가로서 첫 수상자인 李象範(4회)은 沈亨求와 더불어 국민총력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을 지냈으며,金景承·金仁承 형제는 조선미술가협회에서 평의원을 지냈다. 특히 金仁承은 朴泳善과 함께 선일(鮮日)합작 미술단체인 단광회(丹光會)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단광회는 43년 3월 징병제 실시를 앞두고 회원 21명이 4개월에 걸쳐 공동으로 ‘조선징병제 실시’(100호 규모)를 제작,제1회 단광회 유화전에 출품하였는데 나중에 이 그림은 조선군 애국부를 경유하여 군에 헌납되었다. 순종(純宗)의 초상화를 그린 金殷鎬 역시 조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하였으며 37년 중일전쟁 무렵에는 조선여성들이 당시 용산 사단사령부 모 일본군 장성에게 금비녀·금반지 등을 바치는내용의 ‘금채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리기도 했다.金基昶은 최근까지도 친일논쟁이 있었던 인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등의 친일성향의 그림을 그린 바 있다. 음악가로는 金聖泰가 유일하다.그는 玄濟明 등과 함께 ‘가창지도대’,‘경성후생실내악단’등 친일 음악단체에서 활동하였다.이 단체들은 ‘음악보국음악회’,‘비행기헌납 음악대연주회’등을 개최,황민음악을 보급하였다. ◎‘역사의 심사’받아야 할 심사위원은… 3·1문화상의 역대 심사위원 중에도 20여 명의 일제 식민정책 협력자들이 포함돼 있다.이들중 申奭鎬와 李丙燾는 총독부·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하면서 조선역사를 왜곡하고 식민사관을 뿌리내린 장본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의료계의 鄭求忠과 尹日善도 학병권유 논설을 쓰고 시국강연회에 참석했다. 白樂濬은 친일 ‘기독교신문’의 산파겸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경제학자 高承濟는 ‘국민문학’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등에 수많은 친일 평론을 남겼다.언론인 高在旭은 경성배영(排英)동지회와 전조선배영동지회연맹에서 상무이사를 지냈으며 여류 교육가 高凰京은 金活蘭·毛允淑 등과 같이 각종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문인중에서는 金八峰·朴鍾和·兪鎭午·郭鍾元 등도 다소 차이는 있으나 모두 친일 논설·작품을 남겼고 극작가 柳致眞·徐恒錫,음악가 金元福(피아니스트) 등도 모두 친일 예술활동을 한 적이 있다.柳致眞의 경우 친일 행적이 문제가 돼 고향 충무에 세워졌던 그의 흉상이 95년 주민들에 의해 철거됐다. ◎“아니! 이럴수가…” 독립유공자 심사까지/‘식민학자’ 등 10여명 18년간 활동 독립유공자에 대한 정부차원의 포상은 지난 62년 군사정부가 6·25 전상자를 위한 ‘군사원호법’을 제정하면서 시작됐다.정부는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세우고 독립유공자들의 공로를 후세에까지 전한다는 취지에서 매년 광복절 등 역사적 기념일에 이들에 대한 포상을 실시해 왔다. 현재까지 독립유공 공로로 포상을 받은 국가유공자는 모두 8,514명(외국인 40명 포함)이다. 그런데 그동안 정부의 독립유공자 포상을 둘러싸고 이런 저런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역대 독립유공 서훈자 가운데 ▲친일 기관·단체 등에서 활동한 사람이 포함돼 있다거나 ▲가짜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 ▲서훈자가 서로 뒤바뀐 경우 ▲형평에 어긋난 포상 등의 논란이 있어 왔다.또 이들중 일부 친일 경력자가 국립묘지에 안장돼 민족정기를 훼손하고 있다는 주장과 함께 역대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중에도 친일 단체나 기관 등에서 활동한 인사가 일부 포함됐었다는 지적도 있다. 첫 포상이 실시된 62년도 이후 80년까지의 역대 심사위원 중에는 10여명(일부 중복자 포함)의 일제 식민정책 협력자가 포함돼 있다. 1962년 문교부 산하 독립유공 공적조사위원회의 위원 7명(위원장 포함)가운데 申奭鎬·李丙燾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申奭鎬는 1930년∼37년의 총독부수사관보(修史官補)를 거쳐 37년부터 수사관으로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으며,李丙燾는 1925년∼27년에 총독부 수사관보,이후는 촉탁으로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다. 1963년에는 내각사무처 독립운동유공자 상훈심의회에서 심사를 맡았는데 심사위원 22명 중에는 4명의 친일인사가 들어 있다.高在旭·申奭鎬·柳光烈·李甲成 등이 그들이다.高在旭은 1937년 7월 12일 결성된 경성배영동지회와 같은 해 8월5일 결성된 전조선배영동지회에서 상무이사를 지냈다.柳光烈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편집국장과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조선언론보국회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친일논설 및 친일 시국해설 다수를 발표한 언론인이다.李甲成은 상해서 밀정노릇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1968년에는 총무처 독립유공자 상훈심의회가 심사를 맡았는데 심사위원 21명중 高在旭·白樂濬·申奭鎬·柳光烈·李丙燾·李瑄根·洪鍾仁·金聲均 등 8명의 친일 기관·단체 등에서 활동한 인사가 들어 있다.白樂濬은 친일 ‘기독교신문’의 산파겸 편집위원을,李瑄根은 만주국 협화회의 협의원을,洪鍾仁은 ‘매일신보’의 사회부장과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를 지낸 사람이다.金聲均은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언론·출판 검열담당)에서 근무한 기록이 있다. 1977년 원호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의 심사위원 11명 가운데도 柳光烈·李殷相 등 2명이 포함돼 있는데 李殷相은 만주에서 발행되던 친일지 ‘만선일보’에 몸담았던 인물이다.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에 포함된 친일 경력자 논란은 1980년까지 계속됐다.이 해 원호처의 독립유공자 심사위원 11명 중에는 申奭鎬가 ‘끈질기게’ 포함돼 있다.그는 62년 첫 심사부터 63년,68년,80년도에 걸쳐 독립유공자 심사에 참여했었다. 친일파연구에 일생을 바친 고(故)林鍾國씨는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논하는 자리나 대일(對日)외교 무대 등에는 친일파들이 나서서는 안될 자리”라고 강조한 바 있다.
  • 남이 맡은 내 앞가림(朴康文 코너)

    셰익스피어가 쓴 것으로 돼 있는 희곡 ‘헨리 6세’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의 끝 무렵, 그러니까 프랑스 구국소녀 잔 다르크가 활약하던 때의 이야기다. 전쟁으로 국가의 치안 능력이 물렁해진 틈을 타고 영국의 한 지방에서 어중이떠중이가 패거리를 지어 기세를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 폭도 가운데 한 사람이 선동적으로 외친다. “우리가 제일 먼저 할 일은 법률가들을 죽이는 것이다” ○힘있는 곳에 부패가 15세기 서양 백성들 눈에, 법률가란 악덕의 표상으로 비쳤다. 법률가들이 양피지에 뭔가를 쓰고 나면 사람들의 목숨이 사라지는데, 까막눈인 보통사람은 뭐가 뭔지 모르고 죽는 일이 많았다. 힘이 있는 곳에 부패가 있기 쉬운 것은 예나 이제나 같다. 법률가들이 민초들이 꼽은 제거 제1순위 표적 집단이 된 것은 그만큼 전횡과 부패가 심했기 때문이다. 16세기 셰익스피어 시대에도 아마 그랬으니까 이 대목을 집어 넣었을 것이다. 성경에 율법학자 또는 율법교사들에 관한 언급이 많은데, 한결같이 부정적이다. 예수의 꾸짖음이 준열하다. “너희 율법교사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너희 스스로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사람도 막았다” 19세기 프랑스 풍자화가 오노레 도미에의 그림을 보면, 법률가는 대개 탐욕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된다. 얼마 전 새로 대법관 된 분의 청빈이 화제가 됐다. 법관 직분에 있으면서 청빈하기가 어렵다는 통념이 지금 우리 사회에도 깊이 깔려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오늘날 선진국에도 법률가, 특히 변호사에 대한 풍자적 농담이 많은 것은 여전히 그 직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직분이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그 직분의 일탈에 대한 비판은 크다.천국과 지옥 사이에 송사가 났다 하면 지옥이 이기게 마련인데, 법률가들이 지옥에 모두 가 있기 때문이라는 농담이 있다. 이런 농담도 있다. 입원한 노인이 죽음을 앞두고 의사더러 변호사를 불러 달라고 했다. 의사가 변호사를 불러 함께 병상에 다가갔다. 노인은 두 사람을 본 뒤 다시 누워 눈을 감고 아무 말이 없었다. 몇 분 뒤 의사가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노인이 말했다. “예수는 양쪽에 도둑 두 사람을 두고 죽었소. 나도 그렇게 하고 싶소” 변호사를 헐뜯는 농담이 끊임없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모든 변호사가 다 탐욕스러운 것은 물론 아니다. 물질적 풍요와 안온한 삶을 포기하고, 외롭게 의로운 투쟁을 하는 이들의 편에 서서 핍박을 받아 온 이들도 있다. ○변호사·언론 도마위에 지금 변호사 징계권을 대한변호사협회(변협)가 지니고 있으나,정부에 되돌리는 것으로 규제개혁위원회가 추진하자 변협과 변호사들이 반발하고 있다.내가 해야 할 앞가림을 남이 나서서 해 준다는 것, 자율이 다시 타율로 가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비리 변호사들을 스스로 징계하지 못한 죄로, 오랫동안 어려운 시절을 겪은 뒤 찾게 된 징계권이 5년만에 다시 관으로 넘어갈 판이다. 제 앞가림을 남이 해 주어야 할 대상으로 언론도 도마 위에 올라 있다. 어제 언론개혁시민연대(언개연)라는 시민단체가 결성되었다. 시민단체가 이제는 언론을 그대로 두지 않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해야 할 때 할 말 못한 지난 날이 부끄럽고 앞으로 어떻게 나무람당할지 두렵기만 하다.
  • ‘신문개혁 방향’ 토론회 주제발표

    ◎재벌의 언론사 소유 금지해야/독점 제한·접근권 보장으로 공공성 확보를/金瑞中 성공회대 교수·신문방송학 신문은 비록 소유 형태에서 사기업이라 할지라도 활동은 매우 공적일 수밖에 없다. 언론의 자유란 개념은 개별 언론사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사회 전체의 언론 자유와 관련된 것으로 전체 언론의 자유를 위해 언론이 소수에게 장악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신문사의 소유에 대한 제한을 통해 언론의 독과점을 해소하는 것은 강제적(법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당연하다. 문제는 구체적인 방법론일 것이다. 재벌의 신문사 소유는 원칙적으로 금지해야 한다. 이는 원칙적으로 국가의 언론 소유를 금기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사회의 언론 체계는 언론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다수에게 분산되고,언론에 현실적으로 접근할 가능성이 적은 사람들에게 기회가 많이 돌아갈수록 바람직하다. 그런데 자본,특히 대자본은 이미 정부 못지 않은 강력한 권력집단이 되어 있다. 이처럼 언론 이외에서 이미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집단이 그만큼 언론에게 접근할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을 장악하는 것은 여론의 집중화 현상을 가져올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재벌의 신문사 소유는 금지해야 한다. 단지 그 범위는 자본 중에서도 권력화하였다고 볼 수 있는 대자본에 한정되어야 한다. 우리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30대 대기업으로 한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반면 재벌의 편법에 의한 신문사 소유를 막기 위해서는 30대 대기업의 최대 주주는 물론 그 8촌 이내의 혈족과 인척,더 나아가 대기업과 계열기업에 고용되어 있는 자,그리고 대기업이 설립한 재단·사단법인의 고용인까지 포함해 신문사 지분 소유를 금지해야 한다. ◎편집권 독립에 법적장치 필요/내부 협약·강령 통한 보장으로는 미흡/姜京根 숭실대 교수·헌법 언론의 자유는 한마디로 언론의 여론형성 기능과 알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편집권의 독립’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편집권은 시민들의 인격권이나 프라이버시,반론보도 청구권이나 정정보도 청구권 등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또 국가권력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언론사의 소유자나 경영자로부터도 자유롭지 않다. 언론 종사자들은 기본적으로 근로자로서의 계약관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언론 종사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노사간 단체 협약을 체결하는 것은 편집권 독립의 한 구체적인 방법일 수 있다. 이로써 기자들은 신문사 생활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으나 이는 자칫 편집실의 관료화를 초래할 수 있다. 언론 재벌이나 재벌 언론사 기자들의 고액 연봉에 따른 언론사의 ‘직장화’나, 촌지로 상징되는 언론의 부패구조 등도 편집권의 독립에 장애가 된다. 물론 기자의 전문성과 양심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아니다. 편집권의 독립을 위해서는 편집의 전문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편집의 독립성을 확립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편집과정의 공개와 실명화 등의 방법이 있다. 기사에 대한 책임을 1차적으로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지도록 하고 사설도 기명화해야 한다. 편집의 과정은 물론 편집회의도 공개해야 한다. 하지만 언론의 자유와 편집권의 독립을 위해서는 언론사 내부의 협약이나 언론 강령,노조 결성,언론인의 자질,편집의 전문성으로만는 미약하다. 헌법은 신문의 기능을 보장한다는 형식으로 편집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이러한 취지를 구체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의 법제가 보장하는 형식이야말로 일천한 편집문화의 미숙성을 끌어올리는 최소한의 장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언론개혁 선도를 당부한다(사설)

    40여 언론 시민단체가 언론개혁을 이끌기 위한 범국민적 연대기구인 언론개혁시민연대(언개연)를 결성,오늘 하오 창립대회를 갖는다.모든 부문에서 개혁이 단행되고 있음에도 역사와 민족앞에 많은 폐해를 끼친 언론이 여전히 성역으로 남아 부도덕한 심판관 역할을 하고있다는 문제인식에서 언개연이 출범하는 것으로 안다.언개연은 “남북문제나 노동문제 보도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듯 우리 언론의 모습은 여전히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이며 권력과 자본에 유착해 곡필과 오보를 남발해왔다”고 밝히고 언론의 불가피성을 천명했다.언개연은 이를 위해 오늘부터 지하철 서울시청역에서 ‘50대 허위·왜곡보도 사진전’을 여는 것을 시작으로 언론곡필집을 펴내고 병든 언론인 청산작업을 위한 청문회 세미나 토론회를 갖는다. 언론피해법률지원본부 발족,불공정보도 감시 등 활동도 벌인다. 어느 부문보다 먼저 서둘렀어야 할 언론개혁운동이 이제라도 시작하는 데 대해 격려와 성원을 보낸다.그동안 일부 언론들은 강경 보수 기득권세력의 선봉이 되어 냉전이데올로기를 증폭시켰고,특정지역과 재계,관료집단,학계 등과 계층적 기반이 같다는 이유로 지역감정을 조장하며 지역패권주의를 즐기는 데 앞장서 왔다.균형을 위장한 교묘한 편파 왜곡보도로 국민과 독자의 가치판단을 흐리게 했고,국민 위에 군림하는 오만한 권력자의 자리에 올라앉기 위해 언론자유를 악용했다. 이들을 개혁하지 않고는 나라의 진정한 개혁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뜻있는 인사들의 일치된 견해다.그러나 이들에 대한 개혁은 쉽지 않다.노회하고 현란한 기교주의 문장으로 본질을 호도하면서 상당수의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데다 그릇된 기득권을 포기치 않으려는 일부 수구세력과 사회지도층에 속한 추종세력도 두고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이들의 청산을 바라는 인사들마저 이들 소유 매체를 통한 대대적인 반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주춤거려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언론청산운동을 벌이는 언개연에 몇마디 당부하고자 한다.엄격한 도덕주의와 진실을 무기삼아 정공법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이를 위해서는 공명정대한 논리와 증거주의가 필수적이다.이와함께 뜻을 같이하는 매체가 건강한 대항언론으로서 언개연과의 유대를 강화해야할 것이다.그동안 이들 매체들이 언론의 바른길을 강조하는 활동을 벌이긴 했지만 산발적으로 움직이다 보니 캠페인의 효율성을 높이지 못했으며 국민적 과제로 끌어올리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다. 언론개혁 운동은 역사적 책무 차원에서 펴나가야 한다.적당히 하다 그만두면 더 큰 덜미를 잡힐 우려가 있고,그러다 보면 친일청산운동이 벽에 부딪쳐 끝내 역사가 정리되지 못한 것과 같은 비극성을 또다시 떠안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언론개혁 없이는 어떤 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
  • 9월정가 대지진 예고/洪文鐘 의원 탈당 신호… 30여명 잇따를듯

    ◎한나라 과반의석 붕괴 정계개편 가속화 그동안 수면 밑에서 진행됐던 정계개편 움직임이 급류를 타는 조짐이다. ‘9월 지각변동’을 암시하는 징후들이 정치권 곳곳에서 감지된다. 여권의 야당 의원 영입과 무소속 교섭단체 구성으로 가닥이 잡혀간다. 25일 洪文鐘 의원의 한나라당 탈당이 신호탄이다. 洪의원은 “6명의 동료의원들이 조만간 한나라당을 탈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李信範 金忠一 劉容泰 李源馥 金佶煥 宋勳錫 의원 등을 아예 실명으로 거론했다.의견 조율을 마치고 ‘거사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李信範 의원은 공공연하게 “20∼30명 의원들이 한나라당을 탈당할 것”이라며 분위기를 잡고 있다. 당내 ‘새로운 정치’를 추구했던 희망연대 소속이 적지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도 金大中 대통령의 정계개편 추진 선언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영입 작업을 시작했다. 한나라당 8·31 전당대회를 전후로 10∼15명선의 의원 영입을 자신하는 분위기다. 수도권 및 강원 일부 의원들이 주요 대상이다. 한나라당 탈당 의원을 주축으로 국민신당이 가세하는 예상도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 탈당이 곧바로 여권행을 뜻하지는 않는다. 중간 정거장으로서 ‘무소속 교섭단체’나 ‘제4의 교섭단체’결성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한나라당 탈당 추진 의원들은 “정치 쇄신을 위해 제3의 정치 세력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걸고 있다. 내심 섣부른 입당이 배신자로 각인될 수 있다는 우려와 격변기를 맞아 일정 기간의 관망 기간이 필요한 탓이다. 국민신당 해체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총장직을 사퇴한 朴範珍 의원을 비롯,金學元 張乙炳 李龍三 元裕哲 의원 등 5명이 조만간 국민회의에 입당할 것이란 전망이다. 하지만 朴·張 두 의원을 제외하고 무소속 잔류를 선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 徐錫宰 韓利憲 의원 등 PK(부산·경남) 출신들은 무소속 잔류로 기울고 있다. 한나라당 탈당 의원들과 무소속 연대에 전격 합의할 가능성도 적지않다. 야권 분열이나 여권 영입 작업이 ‘암초’에 걸리는 상황도 상정할 수 있다. 한나라당이 전당대회 이후 내부 단속과 함께 당체제 정비를 가속화하는 경우다. 여권의 ‘의원 빼가기’를 이유로 강도 높은 대여 투쟁을 전개할 가능성이 높다. 9월 정계개편 정국이 정기국회를 공전으로 몰고갈 개연성도 만만치 않다. 정치권은 정계개편의 ‘뇌관’이 언제나 터질지 숨죽이며 주시하고 있다.
  • 음악/전통음악 성장 ‘주목할만’(한국문화 50년:9)

    ◎국악창작 활발­사물놀이 등 해외공연 성공 1948년 1월 정치·사회적 혼란속에서 조선오페라협회는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서울 시공관 무대에 올렸다. 이로써 우리 오페라 역사는 시작됐다. 순수성악예술이 자리잡기도 전에 오페라가 먼저 공연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정부수립 직후엔 좌익에 대한 본격적인 압박이 가해졌다. 좌익에 가담한 작곡가 김순남·이건우 등 많은 예술가들이 월북,국내 예술계는 우익계열에 의해 명맥이 유지됐다. 이런 와중에서 49년 대한음악가협회가 결성됐다. 50년 5월 일제시대 부민관이었던 국립극장에서는 한국 최초의 창작 오페라 ‘춘향전’(현제명 작곡)이 공연돼 장안의 화제가 됐다. 62년 4월에는 국립오페라단이 창단돼 68년 5월 민간 오페라단인 김자경 오페라단이 탄생하기까지 국립오페라단의 독주시대를 누렸다. 75년 2월에는 또 하나의 민간 오페라단인 서울오페라단이 창단돼 오페라단의 트리오시대가 열렸다. 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러시아동포 성악가 넬리리가 모스크바방송합창단과 함께 내한 공연을 가져 관심을 모았다. 94년 9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됐다. 그러나 윤이상은 정부측과의 마찰로 고국땅을 밟지 못했다. 음악계에서는 95년을 전후해 조수미 장영주 정경화 정명훈 백건우 백혜선 홍혜경 신영옥 등 외국에 기반을 둔 한국출신 음악스타들이 크게 부상했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외국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사람들이다. 이런 현실에서 정체성을 갖춘 음악영재 교육을 위해 탄생한 것이 93년 3월에 문을 연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이다. 98년은 한국 오페라 50주년의 해로 풍성한 기념축제가 열리고 있다. 한편 전통음악은 51년 4월 국립국악원의 개원과 64년부터 시행된 무형문화재 지정을 계기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국악 50년사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일은 60∼70년대의 김기수 백병동 강석희 등의 국악창작이다. 80∼90년대에는 전통음악의 대중화와 함께 해외공연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김덕수 사물놀이 패의 세계연주계에서의 성공은 특기할 만하다. 94년은 ‘국악의 해’와 ‘서울정도 600주년이 맞물려국악계가 전례없이 왕성하게 활동했다. 96년 10월엔 국악전용극장인 예악당의 개관됐다.
  • 동아시아 평화와 국제학술대회 기조연설

    ◎동티모르 독립투쟁 아세안도 책임 다해야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을 심도있게 논의하는 제2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학술대회가 제주4·3항쟁 50주년을 맞아 21일부터 24일까지 제주도에서 열린다. 한국위원회 대표 姜萬吉 고려대교수를 비롯 국내외 250여명의 학자와 법조인,예술인들이 참여한 이번 대회에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독립운동과 관련 96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호세 라모스 오르타가 21일 기조연설을 했다. 그의 ‘동티모르의 민족자결을 위한 투쟁과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인권’이란 제목의 연설을 요약한다. ○민주주의·법치추구는 순리 세계의 국가들은 점차 경쟁적이며 상호의존적이 되어 관리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나 국가적 이익이 단지 무역상의 우월함과 양적인 소득의 관점에서만 정의될 수는 없다. 어떤 나라든 다른 나라와 윤리,원칙에 충실하고 독립과 정직을 존중하고 우방국 간의 의견차이를 인정할 때 그 나라의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이는 바로 신중한 외교정책의 룰이 존재해야 되고 그것은 기본적인 가치와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를 향한 인권과 법치를 향한 움직임은 거역할 수 없는 순리이다. 고문이 성행하는 아시아의 국가에서도 유례없는 일들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의 타도는 민주주의와 법치를 추구하는 전체 아시아 지역에 큰 의미를 지닌다. 수십년간 독재정권을 견뎌낸 한국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에서 무력이 아닌 평화적으로 용감하게 서울과 광주에서 군대에 대항하여 값진 승리를 거뒀다. ○미얀마 강력한 제재를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인권이 침해되는 지역이 있다.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동티모르도 그중의 하나다. 동티모르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아세안 국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만약 아세안이 책임을 다한다면 많은 고통과 비참한 생명의 손실이 방지되고 국제적인 비난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미얀마에서도 인권침해가 심하다. 그러한 미얀마 상황에 대해 유엔은 비난 결의안을 매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유엔 결의안 이상의 확고한 조치가 필요하다. 미얀마 국민과 국제사회를 속인 미얀마 군사정권에 대해서는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 인종차별 정권에게 유엔총회에서 의석을 주지않은 것처럼 유엔 회원국 자격을 박탈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60년대와 70년대를 통해 우리는 기본적 인권과 근본적인 자유는 집단적인 권리를 옹호하는 공산세계에 대항한 서구의 개념이라고 들어왔다. 옛 소련이 이끈 동부와 중부유럽은 이데올로기에 인권을 주입시켜 유엔인권단체에서 탈퇴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공산주의 붕괴 후에 이런 논리는 전제주의와 군사독재가 남아있는 특정 아시아국가로 전용됐다. ○인권침해 비난 당연 인권침해는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났든 반드시 비난받아야 한다. 비정부기구(NGOs)및 남과 북의 민주정부는 세계에서 인권 최하위국들(쿠바,인도네시아,이란,이라크,수단,자이레)에 의해 결성된 동맹을 와해시키기 위해 확고한 인권수호의 의지를 나타내야 한다. 인권에 대한 논쟁은 선진국과 후진국사이의 갈등의 요소가 돼선 안된다. 그보다 오히려 민주주의 국가와 인권침해를 일으키는 몇몇 공산정권 사이에 이상과 원칙사이의 투쟁이 돼야 한다.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법치를 바탕으로 한 민주국가와 NGOs의 전략적 동맹을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 보장을 보다 확고하게 할 수 있다.
  • 법원장 6명 등 법관 15명 人事/서울고법원장 尹載植

    ◎서울지법원장 李勇雨/부산지법원장 金榮一/수원지법원장 趙容完/청주지법원장 權誠/창원지법원장 新明均 대법원은 19일 서울고등법원장에 尹載植 서울지방법원장을 승진,발령하고 서울지방법원장에 李勇雨 수원지방법원장을 전보하는 등 고법 부장판사급 이상 법관 15명에 대한 승진 및 전보인사를 오는 24일자로 단행했다. 수원지법원장에는 趙容完 청주지법원장이,부산지법원장에는 金榮一 창원지법원장이 전보됐으며 창원지법원장에 申明均 서울지법 북부지원장,청주지법원장에 權誠 서울지법 서부지원장이 각각 승진,임명됐다. 이와 함께 서울지법 북부지원장에 金曉鍾 서울고법 부장판사,서울지법 서부지원장에 朴英武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각각 임명됐다. 이밖에 고법 부장판사급 이상 법관 전보는 △서울고법 부장판사 蔡永洙 △대전고법 부장판사 李宙興 △대전지법 수석부장판사 閔亨基 △부산지법 수석부장판사 朴鏞秀 △부산지법 동부지원장 金文洙 △대전고법 부장판사 吳世彬 △부산고법 부장판사 康文鍾 등이다.◎尹載植 서울고법원장/연구하는 법원 독려 듬직한 외모에 과묵·소탈한 성품으로 의리가 강하며 이론과 실무 능력을 겸비했다는 평. 선후배들로부터 신망도 두텁다. 법원장급에서는 유일한 호남 출신. 서울지법원장 재직 때 ‘판례연구회’ 결성을 추진하는 등 연구하는 법원 분위기를 독려했다. 權孝英씨(54)와 사이에 1남2녀. ▲전남 강진·56세 ▲서울대 법대 ▲사시 4회 ▲서울지법 동부지원장 ▲광주지법원장 ▲서울지법원장 ◎李勇雨 서울지법원장/전관예우방지 주도 업무 처리가 치밀하고 매사에 적극적이라는 평. 따뜻한 마음 씀씀이로 인해 따르는 후배들이 많다. 법원장 승진 1년 만에 ‘법원장의 꽃’인 서울지법원장을 맡았다. 서울고법 수석부장 때 ‘전관예우 방지를 위한 특별재판부’ 구성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金銀子씨(53)와 사이에 2남1녀. ▲경북 의성·56세 ▲서울대 법대 ▲사시 2회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고법 수석부장판사 ▲수원지법원장 ◎金榮一 부산지법원장/全·盧씨 비자금 재판 강직한 성품으로 재판에서 균형잡힌심리 진행 솜씨가 돋보인다는 평. 96년 서울지법 형사수석부장 재직 때 全斗煥·盧泰愚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및 12·12,5·18사건 1심 재판을 맡아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6월을 선고,주목을 받았다. 李淸子씨(56)와 사이에 1남2녀. ▲서울·58세 ▲서울대 법대 ▲사시 5회 ▲청주지법 충주지원장 ▲서울지법 북부지원장 ▲창원지법원장 ◎趙容完 수원지법원장/19세에 司試 합격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하다는 평가와 함께 재판진행 솜씨도 탁월하다. 검정고시를 통해 서울대 법대에 입학,19세에 사시에 합격한 수재형. 서울지법 서부지원장,청주지법원장 재직 때 법원내의 인화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직원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다. 辛惠卿씨(50)와 사이에 1남1녀. ▲서울·53세 ▲서울대 법대 ▲사시 4회 ▲서울고법 부장판사 ▲서울지법 서부지원장 ▲청주지법원장 ◎權誠 청주지법원장/사법개혁작업 지휘 파기 환송을 두려워하지 않는 소신을 겸비한 사시 8회 선두 주자. 사법부내 대표적인 기획통으로 93년 사법제도 발전위원회 연구실장을 맡아 사법개혁 실무작업을 진두지휘했다. 한학에 조예가 깊어 판결문에 한시 자구와 고사성어를 즐겨 인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朴仁淑씨(51)와 사이에 3남. ▲충남 연기·57세 ▲서울대 법대 ▲사시 8회 ▲사법연수원 교수 ▲서울고법 부장 ▲서울지법 서부지원장 ◎申明均 창원지법원장/수재타입 ‘영국신사’ 영국 유학시절 익힌 매너로 영국신사로 통한다. 사시 8회 수석 합격의 수재로 치밀한 법논리 전개와 능숙한 재판진행으로 정평이 나 있다. 법관으로서의 자세에 조금의 오해 소지가 없도록 원칙에 충실한 처신으로 선후배 법관들의 신망이 두텁다. 張仁順씨(51)와 사이에 3남. ▲서울·54세 ▲서울대 법대 ▲사시 8회 ▲대법원 재판연구관 ▲서울고법 부장판사 ▲서울지법 북부지원장
  • “北 反민주실상보며 고국 그리웠다”/범청학련 5명 일문일답

    ◎北 분열만 부추길뿐 진지한 통일노력 외면/귀국허용 소식듣고 진정한 민주화 깨달아 朴聖熙씨 등 범청학련 관련자 5명은 19일 기자회견에서 시종 반성하는 표정으로 귀국 배경과 심경변화의 동기 등에 관해 담담한 어조로 설명했다.특히 북한의 실상을 체험한 경험을 소개하면서 북한과 한총련에 대한 비판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기자회견을 갖게된 경위는. ▲都鍾華=독일 베를린의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에서 활동을 하는 동안 한총련과 북한의 여러가지 모습을 접했다.시간이 지날수록 북한의 관료주의적 이고 반민주적인 모습을 보면서 자유의 품이 그리웠다. ­한총련에 대한 소감은. ▲崔晶南=한총련은 통일문제에 대한 편협한 사고에서 탈피, 균형적이고 현실에 입각한 통일관을 가져야 한다.한총련의 노골적인 친북 입장은 통일에 대한 국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으며,바람직한 학생운동의 성장에 장애가 되고 있다. ­북한에 체류하면서 많은 북한당국자들과 학생들을 만났을텐데 지금 시점에서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都鍾華=북한은 결코 통일사회의 대안이 아니다.오히려 남한의 분열을 부추기고 있을 뿐 전 민족을 상대로 진정한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다. ­독일에 지내면서 어려웠던 점은. ▲朴聖熙=망명자 생활자금을 받느라고 2주에 한번씩 관청을 들락거리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같이 지내던 사람들이 아무런 장애없이 한국으로 돌아갈때 내 처지를 비관,며칠동안 우울한 심경에 빠졌다. ­기자회견이 진보운동세력에 미칠 파장을 생각해 봤나. ▲柳世洪=한총련의 운동행태에 대해 많은 진보세력들이 비판하고 있지 않은가.북의 실상 등을 경험한 우리가 얘기를 꺼내는 것이 오히려 여러가지로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한다. ­현 정부에 대한 생각과 앞으로의 계획은. ▲成墉乘=귀국이 허용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민주화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학교에 복학할 수 있다면 평범한 대학생으로 지내고 싶다. ◎범청학련 5명 행적/91.8­박성희·성용승씨 2차 범민족대회에/94,95­최정남씨 김일성 100일제 행사참석/96.8­도종화·유세홍씨 7차대회 개막식에 범청학련 공동사무국 남측대표를 지낸 朴聖熙씨(29)는 경희대 작곡과에 재학 중이던 91년 8월5일 전대협 대표로 건국대 행정학과에 다니던 成墉乘씨(29)와 함께 밀입북,10월28일까지 체류했다.두사람은 8월15일 판문점에서 북한측이 일방적으로 개최한 ‘제2차 범민족대회’에 범민련 북측본부 의장 윤기복 등과 함께 참석했다. 베를린에 체류하던 두사람은 92년 8월15일 ‘주한미군 철수,국가보안법 철폐,연방제방식 통일 실현’ 등을 강령으로 채택한 이적단체 범청학련을 결성했다. 崔晶南씨(29)는 94년과 95년 두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북,범청학련 북측본부로부터 단군릉개건 준공식과 김일성주석 서거 100일제 행사에 참석했다. 연대 기계공학과 재학중이던 都鍾華씨(24)와 조선대 치의대 본과에 다니던 柳世洪씨(27)는 96년 8월10일에 밀입북해 14일 판문점에서 개최된 ‘제7차 범민족대회’ 개막식에 참석했다. 이들은 97년 12월 베를린의 범청학련 공동사무국을 자진 폐쇄했다.
  • 朴노해씨­사노맹 주역… 전향 자세보여/석방 인사 면면

    ◎金洛中씨­진보적 통일운동가 무기수/張玲子­2차례 수감… 건강 악화로 나와 이번 ‘8·15특사’에는 대형 공안사건 등 사회의 이목이 집중됐던 각종 사건의 주인공들이 다수 포함됐다. ◇權魯甲 전 의원=국정감사 선처 명목으로 한보그룹으로부터 2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해 12월 대법원 확정판결로 징역 5년이 확정돼 의원직을 상실했다.정치적 부담을 우려,지난 3·13 대통령 취임 사면에서는 제외됐었지만 이번에 잔형 면제와 복권조치로 자유의 몸이 됐다. 지난 1월 지병인 당뇨병과 고혈압이 악화돼 검찰의 형집행 정지로 풀려나 서울 강북삼성병원으로 주거지를 제한받고 있었다. ◇朴基平(필명 박노해),白泰雄씨(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자생적 사회주의세력인 사노맹의 양대 주역으로 91년과 92년에 각각 검거돼 무기징역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朴씨는 시집 ‘노동의 새벽’으로 운동권에서 일약 ‘얼굴 없는 민중 시인’으로 떠오른 인물.수감 중이던 지난해 출간한 수상집 ‘사람만이 희망이다’에서 “시장경제 옹호론자가 아니지만 결코 사회주의자도 아니다”고 공언하는 등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 화제를 뿌렸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白씨는 제헌의회(CA)그룹의 좌파 이론가로 활동하면서 운동권에서 신화적인 존재로 불렸다.지난해 ‘사노맹 결성은 사회주의체제 건설을 위한 것이 아니라 全斗煥·盧泰愚정권에 대한 이념적 저항운동’이라며 사노맹 해체 및 재건 포기를 선언,金壽煥 추기경과 재야인사 등 141명이 사면·석방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黃仁五·仁郁 형제,金洛中씨(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북한의 ‘장관급’ 여간첩 李善實과 연계,남한내에 대규모 지하당 조직을 주도하다 92년 당국의 수사끝에 실체가 드러난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의 핵심인물들이다. 전 민중당대표인 金씨는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가 55년 월북,북한에 포섭된 뒤 민주개혁과 사회진보를 위한 협의회(민사협)고문 등을 맡으며 진보적 재야인사 및 통일운동가로 활동하다 적발돼 무기수로 복역해 왔다. 중부지역당 총책으로 적발된 黃仁五씨는 사북중 2년 중퇴가학력의 전부로 ,80년4월 사북사태를 주도한 뒤 같은해 6월 부산에서 열린 미스유니버스 대회장 폭파기도사건으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반면 중부지역당 편집국장으로 적발된 동생 仁郁씨는 서울대 서양사학과 대학원에서 아프리카 역사를 전공했으며,87년1월 북한방송 청취내용을 운동권 최초로 교내 대자보로 부착해 징역 3년을 선고받은 바 있는 운동권 출신. 1심 재판 진행중이던 93년1월 서울대 교수들이 선처를 원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張玲子씨=건강악화로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張씨는 82년 이른바 ‘단군이래 최대의 사기사건’에 이어 94년에는 거액의 어음부도 사건을 일으켜 세간을 두번 놀래킨 큰 손.82년 당시 남편 李哲熙씨와 함께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뒤 92년 잔형 5년여를 남기고 가석방됐으나 107억여원을 편취하고 5억원을 부도낸 혐의로 2년여만에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다시 수감됐다. ◇鄭守一씨(무함마드 깐수)=레바논계 필리핀인으로 위장해 국내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암약한 고정간첩으로 96년 검거돼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이번에 감형됐다.
  • ‘반민특위’ 인터넷서 살아났다

    ◎96년 ‘친일논쟁’ 참가자 80명 모여 결성/‘겨레의 거울’ 개설… 친일파 100명 행적 띄워/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삶 재조명도 지난 96년 5월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때아닌 ‘친일 논쟁’이 붙었다. 이화여대의 한 신입생이 “성경시간에 金活蘭 박사에 대한 강의를 들었는데 그렇게 훌륭한 분인 줄 몰랐다”라는 글을 올린게 발단이었다. 곧 다른 대학생이 “金박사는 대표적인 친일인사”라며 반론을 제기했다. 논쟁은 다른 친일인사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한달 이상을 끌었다. 이 논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그 뒤 ‘인터넷 반민특위’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48년 정부수립 후 설치됐다 친일파의 공작으로 사라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인터넷 가상공간에서 부활한 것이다. 이 모임은 독립운동가로 잘못 알려진 친일파 인사들의 행적을 제시,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서울대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 대학원생을 주축으로 20∼30대의 미국·영국 유학생,회사원 등 80여명이 회원이다. 따로 모임은 갖지 않고 인터넷에서메일로 정보를 교환한다. 인터넷 반민특위는 96년 광복절에 ‘겨레의 거울’(banmin.ifp.or.kr)이라는 웹사이트를 개설했다. 관료,정치인,문인,여성계 인사 등 100여명의 친일행적을 그대로 실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인사가 가미카제 특공대원으로 뽑힌 조선인을 독려했던 전문(全文)을 게재해 충격을 주기도 했다. 기초자료는 일제때 신문이나 잡지에서 얻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파 99인’ 등 관련 서적도 큰 도움이 됐다. 회원들은 전자우편을 통해 정보수집,자료요약,번역,웹사이트 구축 등 업무를 분담한다. 인터넷 반민특위는 최근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삶을 재조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한국 최후의 레지스탕스’인 金始顯 선생과 광복군 총사령관 池靑天 장군의 둘째딸로 광복군의 첫 여군 소위였던 지석영 여사의 업적을 조명하는 일 등이다.
  • 민주열사 열전:2/全泰壹(정직한 역사 되찾기)

    ◎개발독재 분신 항거… 노동운동 물꼬 터/피복공장 근로자로 허울뿐인 노동법에 분노/인간 부품화 거부… 사용자·독재와 죽음의 투쟁/‘YH사건’ 등 70·80년대 노동운동 정신적 지주로 개발독재가 한창 무르익던 70년 11월 13일 하오 1시30분.동대문 평화시장 건물에서 시뻘건 불덩이 하나가 뛰쳐나오며 피끓는 절규를 뱉어냈다.“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불길에 휩싸여 쓰러져 있으면서도 그는 외쳤다.“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그 옆에는 ‘근로기준법’ 책이 불타고 있었다.허울좋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이었다. 21살의 청년 全泰壹은 그렇게 젊은 생을 마감했다.그는 이름없는 한 노동자였다.동대문시장 일대 재단사들의 모임인 삼동회 회장일 뿐이었다.그러나 그의 분신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그 이후 ‘노동자’ ‘노동운동’이란 말들이 입에 올려지기 시작하고 크고 작은 노동운동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그때까지 입에 재갈이 물린 것 같던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그해 11월청주에서 여공 50명이 상경,체불노임 청산 등을 요구하며 노동청 앞에서 ‘감히’ 농성을 벌였다.의정부 외기노조원 21명은 노조운동 방해에 항의해 전원 분신자살을 기도,사용자와 경찰을 떨게 만들었다.수많은 지식인도 위험을 무릅쓰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모두 전례가 없던 일들이었다.사건 당시 삼동회 회원이던 崔鍾寅씨(51·청우회 회장)는 “태일의 분신은 우리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함께 용기로 다가왔습니다.우리는 곧 그의 외침을 혈서로 써들고 거리로 나섰죠.경찰들에게 머리가 깨지며 끌려가면서도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쳤습니다”라고 회고했다. 全泰壹의 노동운동은 ‘全泰壹 사상’으로 승화되며 70,80년대 군사독재시절 노동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원풍모방사건’이나 ‘YH사건’,인천의 ‘동일방직사건’등 굵직굵직한 노동운동은 바로 全泰壹 열사가 지펴놓은 노동운동의 불이 꺼지는 것을 막기 위한 노동자들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그것은 어떤 저명한 노동학자의 ‘노동운동론’보다도 위대한 ‘全泰壹 정신’의 실천이었다. 全泰壹 정신의 핵심은 ‘인간선언’과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다. 그의 분신은 불의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인간은 노예일 수 없다는 진실의 증언이었다.다리 한번 제대로 못펴고 한 평에 4명이 끼어 앉아 하루 15시간이 넘는 중노동을 한다고 생각해보라.그렇게 일하고도 항상 배고픈 사람들이 바로 평화시장 일대 피복공장 노동자들이었다. 全泰壹 열사는 그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찾아주려고 했다.업주들에게 끊임없이 개선을 요구했고,시청 근로감독관실과 노동청을 수십차례 드나들며 싸움을 벌여나갔다.그러나 사용주와 권력은 결국 한편이라는 것을 깨닫고 죽음으로써 그 거대한 억압의 틀을 깨려고 했다.그는 죽어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 생애 못굴린 덩이를,덩이를/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굴리는데,굴리는데,도울 수만 있다면/이룰 수만 있다면….” 거의 30년이 지난 오늘,全泰壹 열사는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새겨지고 있는가.대답은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경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IMF시대에 全泰壹은 분명 살아 있어야 한다.경제제일주의에 의한 인간의 부품화,노동자들의 희생을 거름으로 한 경제회생 논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그리고 IMF체제의 극복을 위해서 그는 반드시 우뚝 서 있어야 한다. ◎일기에 나타난 전태일 정신/“연소자를 부자들 기름으로 쓰는 세상”/시대모순 한탄·뜨거운 민중 사랑 절절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全泰壹 열사지만 그는 일기와 낙서,소설 초고 등의 기록을 남겼다.여기에는 시대적 모순과 그의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다. “내가 보는 세상은… 인간의 본질을 해치는 비평화적·비인간적 행위이다.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1969년 12월 어느날의 일기) “선생님,여기 본능을 모르는 인간이 있습니다.그저 빨리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생명체가 있습니다.그리고 죽어가고 있습니다.그것도 미생물이 아닌,짐승도 아닌,인간이 있습니다.인간,부(富)한 환경에서 거부당하고,사회라는 기구는 그들 연소자를 사회의 거름으로 쓰고 있습니다.부한자의 더 비대해지기 위한 거름으로.”(1970년의 소설 초고) ◎전태일씨 가족들/꺾이지 않는 투쟁 의지 모친 통해 부활/이소선 여사 수차례 구속 민주투사로 70년 11월 13일 全泰壹 열사는 몸을 불살라 죽었다.그러나 그순간 그는 부활했다.그것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69)를 통해서였다. “어머니,담대해지세요….어머니,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 아들이 죽어가며 손을 붙들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그 순간부터 李여사는 ‘이소선’이 아닌 ‘전태일’이 되어 있었다.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그녀는 시신 인수도 거부한 채 아들이 그토록 이루고자 했던 8개조항(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시키려는 내용)의 이행만을 요구했다.파장을 우려한 당국이 3천만원(지금 돈으로 약 5억여원)이라는 거액으로 회유하려 했으나 어머니의,아니 부활한 전태일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여론이 진정되고 당국이 설립된 노조에 탄압을 가해오자 그녀는 청계노조 간부들과 석유통을 쌓아놓고 분신위협으로 맞섰다.그렇게 노조를 지켜냈다. 또 시국재판에서 판사에게 욕을 했다는 이유로 법정모독죄로 1년간 복역하고 여러차례에 걸쳐 구속을 당하는 등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섰다. “태일이는 비록 죽었지만,태일이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들,이 땅의 억압받는 노동자를 위하는 것이 태일이를 위하는 길이요,태일이를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장남인 전태일 열사 밑으로 남동생 태삼씨(48·봉제업)와 여동생 순옥(45·영국 유학)·순덕씨(38·주부)가 있다.어릴적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실직, 사망 등으로 모두 학교문턱을 제대로 밟아보지 못했다.순옥씨만이 늦게나마 몇몇 뜻있는 단체의 후원을 받아 영국 워릭대학에서 못이룬 형제들의 학업의 꿈을 대신하고 있다. ◎전태일 열사 연보 ▲1948=경북 대구시남산동에서 전상수·이소선씨의 장남으로 태어남. ▲1963=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 입학. ▲1965=평화시장내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 ▲1967=한미사 재단사가 됨. ▲1969.6=평화시장내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조직. ▲1970.9=왕성사 재단사로 취직.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새롭게 조직하고 회장이 됨. ▲1970.10=평화시장 노동자 근로개선 진정서를 노동청에 제출.삼동회 대표들이 평화시장주식회사 사무실에 찾아가 다락방 철폐,노조결성 지원 등 8개항 요구. ▲1970.10.24=근로조건 개선 시위 기도했으나 실패. ▲1970.11.13=‘근로기준법 화형식’ 거행하며 분신.성모병원에서 숨짐. ◎인터뷰/분신 당시 집회 참가 李承喆씨/“내 죽음울 헛되이 말라” 목소리 쟁쟁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자던 태일의 결의에 찬 눈빛이 눈에 선합니다” 全泰壹 열사의 분신 당시 삼동회 회원으로 집회에 참가해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李承喆씨(49·자영업).그는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쿵쿵 뛴다”고 했다. “태일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근로기준법을 화형시키겠다고 했을때 우리들은 순간 긴장했지요.그러나 설마 분신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李씨는 全泰壹 열사가 온몸에 화기가 올라 숨이 콱콱 막히는 지경에서도 모여든 친구들에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다고 했다.죽기전 병상에서도 “내가 이루지 못한 일을 꼭 이루어 달라”고 했고,대답이 없자 “왜 대답하지 않는가”라고 소리치며 일어나려고 했다고.그러자 친구들은 그를 붙잡고 “네 말대로 하겠다.맹세한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했다. 李씨를 비롯한 동료들은 결국 달포뒤 노조를 결성해 全泰壹 열사와의 약속지키기에 나섰다.그리고 노동자 교육을 위한 ‘노동교실’ 설립,근로시간 단축,다락방 철거 등 많은 것을 쟁취했다.많은 동료들이 감옥을 들락거리며 싸워 얻어낸 성과였다. 李씨는 최근 일부 언론에서 개발독재의 상징인 朴正熙 전대통령이 우리 경제성장의 일등공신처럼 비쳐지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그는 “우리 경제는 60,70년대 노동자들의 뼈빠진 희생 위에 이루어졌다”고 강조했다.
  • 정부와 언론/대립과 갈등… 민주화 기여(한국문화 50년:1)

    ◎초창기 서울신문­동아­경향 순 정간·폐간/5共때 강제 통폐합… 이젠 구조조정 태풍 건국 50년을 맞이하는 우리 문화 50년은 감동과 의지,그리고 희망이다.또 전쟁과 경제개발과 민주화의 험난했던 지난 반세기를 꿋꿋이 헤치고 세계 현대사에 우뚝 선 한국을 이뤄낸 힘의 원천이다.가난과 고통의 어려움 속에서도 분야분야 소중한 꿈으로 간직해온 우리 문화 50년을 장르별로 나누어 중요했던 역사적 순간들을 도설(圖說)로 엮어본다. 정부수립 이후 언론과 정부는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 관계를 보여왔다.정부는 언론의 정당한 비판을 수용하기 보다는 탄압으로 일관했고 언론은 불굴의 기개로 이에 맞섰다.이는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 신문들에 대한 신생정부의 첫대응은 정부수립 직후 ‘언론정책 7개항’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주로 좌파신문을 대상으로 국시위반,정부모략 등 보도 금지항목을 제시한 것으로 사실상 이승만정부의 정권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 정부는 이에따라 기자 검거,신문 정간을 자행했다.언론과 정부와의 최초의 집단적 대립은 49년 5월3일 정부에 비판적인 서울신문을 뚜렷한 이유없이 정간시켰을 때였다.서울의 주요 일간지 통신사 편집국장 모임인 담수회가 대통령에 재고요청서를 제출했고 중앙청기자단과 조선신문인협회 등도 일제히 정간해제를 요구했다. 56년 동아일보 무기정간,경향신문 폐간 등 정부의 탄압이 이어졌다.언론계는 자구책으로 57년 4월7일,한국신문편집인협회를 결성했다. 정부의 제도적 언론탄압은 크게 3차례.첫번째는 5.16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로 발효된 ‘사이비 언론인 및 언론기관 정화’.전국 912개 보도기관 중 82개만 남게 됐다. 두번째는 71년12월 정부는 ‘사이비기자’를 없앤다는 구실로 발행인들이 ▲프레스카드 소지 ▲지방주재기자 인원제한 등을 자율 결의케 했다.세번째는 80년11월 국보위에 의한 언론통폐합과 언론기본법 제정.소위 ‘제도권언론’시대가 열리게 됐다.5공(共)하에서 언론은 정부의 탄압을 심하게 받았다.87년 6.29선언과 그해 11월 언론기본법 폐지로 상당부분 자유를 되찾았고 신문창간 러시를 이뤘으며 대부분의 신문사에 노조가 창립됐다. 6공과 문민정부에서도 정부의 언론에 대한 간섭은 계속됐다.90년대들어 경제호황으로 인한 광고 증가로 증면경쟁이 벌어졌다.또 각사는 전자신문 등 뉴미디어경쟁시대로 돌입했다.그러나 IMF 한파로 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언론사는 구조조정에,언론인은 명퇴바람에 휩싸이는 등 우리 언론 역사상 최악의 시기를 맡게 됐다. 그러나 건국50년 아침,불쑥 자라오른 자유언론의 싹이 희망으로 다가온다. □언론계 변천사 48년 9월 정부 언론정책 7개항 발표 49년 5월 서울신문 정간으로 언론계 최초의 조직적 반발 59년 4월 한국신문편집인협회 결성 60년 7월 신문등록에 관한 법률 공포 61년 5월 1차 통폐합 언론기관 일제 정비 64년 언론의 상업화·신아·중앙 창간 71년 12월 2차 통폐합.프레스카드 발급 74년 12월 광고 탄압.동아 백지 광고 80년 11월 3차 통폐합 국보위 언론정비 87년 11월 언론기본법 폐지 88년 신문창간 러시.언론 노조 결성 94년 증면 경쟁 95년 뉴미디어 경쟁 9
  • 한총련 대체 학생기구 출범/31개대 학생회협의체 발족

    과격시위 등으로 국민의 비난을 받아 온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을 대체할 새로운 학생 운동기구가 출범했다. 전남대와 이화여대 중앙대 조선대 등 전국 31개 대학 총학생회 소속 학생 1,000여명은 12일 서울 숭실대에서 ‘새로운 전국적 학생회 연대기구’ 발족식을 갖고 빠르면 내년 초쯤 새 학생회협의체를 공식 결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날 발족식에는 전남대와 중앙대 숭실대 가톨릭대 서울교대 등 31개 대학 총학생회와 건국대 동국대 등의 일부 단과대가 참여했다.
  • 단재·백범 그리고 안기부(金三雄 칼럼)

    “이성(理性) 말고는 어떠한 주인도 인정하지 않는 자유인의 세계에만 태양이 빛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폭군과 노예,성직자들과 그들의 우둔하고 위선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는 종교의 신자들은 역사 속이나 무대 위에서밖에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진보를 위해 프랑스 혁명에 참가했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한 수학자이며 계몽사상가,그리고 혁명 사상가인 콩도르세는 ‘인간정신진보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콩도르세가 처형되고 2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대체적으로 인류사는 이성과 진보의 과정을 거쳐왔지만 프랑스혁명이 반혁명과 나폴레옹 독재의 반동기를 겪었듯이 인류는 몽매와 압제에 시달려왔다. 우리 역시 이성과 진보의 과정보다 몽매와 압제의 기나긴 터널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중세의 어둠 속에서 프랑스혁명의 횃불이 근세의 여명을 열었듯이 우리도 광주항쟁,6월항쟁,그리고 새정권의 출범과 함께 이성과 상식이 통하는 변화의 시대를 열고 있다.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변화의 가닥에는 안기부도 포함된다. 군사정권의 모태에서 태어난 안기부(중앙정보부)가 새로운 역할,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려는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반가운 일이다. 비록 ‘국가정보원’으로 개명을 해놓고도 국회파행으로 개명신고조차 하지 못한 과정에서 추구하는 변화이지만 과거 어두웠던 시절 원부(怨府)의 이미지를 씻고 새롭게 환골탈태하려는 노력은 값지다. 안기부는 힘과 권력을 상징했던 조형물을 철거하고 내곡동 청사 진입로에 시야를 널리 해외로 돌리자는 뜻에서 광개토대왕비를 원형의 크기대로 세워 8·15광복절에 제막식을 갖는다고 한다. 안기부의 변화는 조형물의 교체만이 아니라 단재 신채호,백범 김구 선생의 존영을 이종찬 부장 집무실에 걸기로 했다는 점이다. 이는 상징성의 큰 변화를 의미한다. 흔히 안기부의 연원을 일제시대 고등계경찰이나 건국 직후 악명을 떨친 육군특무대를 연상하는 잘못을 씻고,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조직된 비밀결사인 단재의 의혈단이나 백범의 한인애국단에서 뿌리를 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단재의‘조선혁명선언’으로 잘 알려진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된 항일운동단체다. 창단 직후‘공약 10조’와 뒤에‘5파괴’‘7가살(可殺)’이란 행동목표를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했다. ①천하의 정의의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등 10개조와,파괴대상으로 ①조선총독부 ②동양척식회사 등 일제식민지 통치기관을 들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백범이 한인애국단을 창설한 것은 1926년 12월, 만주사변 이후 임정지도부는 중국인의 악감(惡感)을 해소하고 독립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전개하기 위해 일제에 대한 파괴와 암살을 계획했다. 한인애국단은 바로 이런 목적으로 비밀리에 결성되고 이봉창 의사의 도쿄 사쿠라다문(櫻田門)의거,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의거 등이 감행되었다. 항일무장투쟁에 빛나는 금자탑이다. 의열단과 한인애국단이 망국기 국권회복원동의 첨병이었다면 제2국난기로 불리는 오늘 안기부는 그 정신을 이어서‘정보는 국력이다’란 부훈에 걸맞는,21세기 정보화시대를 뒷받침하는 책임과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단재·백범 정신으로 건국 반세기동안 이승만과 군사정권에 의해 단재와 백범정신이 굴절되었다. 이 분들의 애국사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안기부가 구태를 벗고 이들의 애국정신으로 국난극복의 선두에 서고자 하는 자세는 바람직하다. 문제는 실천이다. 아무리 외양이 바뀌고 구호가 요란해도 본질이 바뀌지 않고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나는 우리나라의 청년 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으라운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 바란다”(백범일지) 기왕에 백범과 단재의 정신을 안기부의 정신으로 받들기로 했다니 과거의 ‘좁으라운’생각을 버리고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분발할 것을 당부한다. 그래서 이성의 시대를 열어가자.
  • 국보법 위반자들의 귀국(사설)

    지난 91년 당국의 허가없이 북한을 방문한 뒤 베를린에 머물러온 朴聖熙씨(28·당시 경희대4년)와 成墉乘씨(29·당시 건국대4년) 등 해외체류 국가보안법 위반자 5명이 지난 7일 김포공항을 통해 자진 귀국,안기부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정부는 지난 5월 해외에 체류중인 이른바 ‘반체제인사’들에 대해 ‘반성’을 전제로 귀국을 허용하기로 밝힌 바 있다.과거 역대 독재정권 시절에 빚어진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다.현재 해외에는 朴正熙·全斗煥·盧泰愚 군사 정권 시절 유학 등 목적으로 출국했다가 독재정권의 폭압에 신음하는 조국의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거나,통일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국보법 등 실정법을 위반해서 20년 또는 30년 넘게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그들중 일부가 비록 실정법을 위반하긴 했으나 그들이 현지에서 벌인 조국의 민주화운동은 실로 힘겨운 것이었다.현지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연대해서 언론과 교회,그밖의 요로에 한국의 역대 독재정권의 반민주적 탄압상을 알리는가 하면,국내 민주화운동을 돕기 위해 대대적인 모금활동을 벌이기도 했고,양심수 석방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역대 독재정권 시절 국내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나, 국제적 압력 덕으로 석방된 양심수들은 일정부분 그들에게 신세를 졌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엄연히 실정법을 위반한 것도 사실인만큼,새 정부는 그들이 과거 행적에 대해 ‘반성’하는 것을 전제로 귀국을 허용한 것이다.그것은 그들의 ‘불행한 과거’자체가 모두 건국 50년 넘게 통일된 민주국가를 건설해내지 못한 우리 역사의 희생자들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이번에 자진 귀국한 사람들은 공안당국에서 과거 행적에 대해 조사를 받은 다음 사법처리될 것인데,새 정부 화합조처의 근본취지와 이들이 자진 귀국한 사실 등이 감안되었으면 한다. 해외체류 국보법 위반자들이 정부의 관용조처에 호응해서 자진 귀국함으로써 국민들이 50년만에 들어선 진정한 민주정부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실감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한총련이 딴죽을 걸고 나와 국민들을 실망시켰다.한총련 소속 학생 2명이8·15통일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7일 평양에 들어갔다는 것이다.국민들은 반국가 불법단체로 규정된 한총련에 대해 준열하게 꾸짖지 않을 수 없다.온 나라가 유례없는 대수재를 만나 고통을 겪고 있는 마당에, 국민정서와 동떨어진 문젯거리를 새롭게 들고나와 어쩌자는 것인가.더구나 각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총망라된 민간통일운동조직인 ‘민화협’이 결성된 시점이 아닌가.한총련의 분별있는 행동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
  • 사이비언론 퇴출과 함께 할 일/柳一相 건국대 교수(서울광장)

    마침내 진성(眞性)언론이 자신의 고결성을 걸고 사이비언론을 퇴출시키는데 직접 나서야 할 때가 됐다.언론자유의 진가를 폄훼(貶毁)하는 가짜 언론들이 극성을 부린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그러나 그동안 정통성 없는 정부는 사이비언론을 퇴출시킬 만큼 도덕적으로 떳떳한 권력이 아니었다. 과거의 정부당국자들은 사실상 반정부언론을 규제하려는 속셈을 감춘 채 소수의 올바른 언론들을 사이비언론과 함께 단속했다.그래서 과거의 사이비언론 단속은 그 내용이 변질된 적이 많았다. 사이비언론은 언론을 이용하여 돈벌이를 하는 일들과 큰 관계가 있다.예컨대 보도를 빌미로 한 공갈협박,신문잡지의 강매,광고의 강제 게재 요구,이권청탁과 로비활동,위세를 떨고 금품을 수수하는 행위 등이 그것이다.사이비언론은 국민이 누리는 기본권을 언론의 이름으로 유린하는 악덕행위다.그래서 이제 국민의 정부는 국민을 위해 사이비언론을 정리해야만 한다. 인간이 누리는 모든 자유의 근원인 언론의 자유는 인간본질을 실현하기 위한 커뮤니케이션활동을 폭넓게 보장하는 방향으로 신장되어야 한다.그러나 이 자유는 언론의 송신 주체만이 아니라 수신 주체의 자유도 평등하게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언론자유가 언론기관의 자유로만 축소해석될 때 그것은 다수국민의 언론자유를 억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오늘날의 언론자유는 국민의 알 권리에 기초하여 정보원에 대한 접근권 활성화를 요구한다.언론기관이 자기의 이익을 구하는 사적 기구가 아니라 독자와 시청자에게 유익한 정보와 오락,그리고 사회생활에 필요한 의견을 전달·교류하는 공적 기구라는 데에 이 요구의 기반이 있다. 언론자유는 권력이나 금력을 소유한 자들의 언론독점으로부터 건강한 소수의 양심이나 의식을 보호해주는 정신적 자유에 무게중심이 있다.이 자유는 단지 언론기관의 이름을 내건 일종의 변태업소를 운영하는 사람이나 이 업소에 위장 취업하여 언론을 배덕행위에 이용하는 협잡꾼들의 자유가 결코 아니다.그래서 언론의 자유를 올바로 지키기 위해 우리 사회는 사이비 언론을 퇴출시킬 수 있는 강력한 사회적 힘을 필요로 한다.이 힘은진성언론이 자신의 몫을 충실히 수행하는 데서 비롯된다. 공익성이 높은 진성언론은 다수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소수의 그것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약자가 부당한 억압을 당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의 미디어 접근이 봉쇄되어 언론이 그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 가운데 하나가 대구에 있는 미군비행장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는 주민들의 시위 문제다.미군비행장 인근주민들은 지난달 31일 용산에서 재산권 및 정신적·육체적·물질적 피해를 입고 있으니 이를 해결해 달라는 시위를 했다.그들의 요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그러나 언론은 이를 외면했다. 사이비언론을 퇴출시키라는 시민사회의 부름을 받은 언론이면 이제 단편적인 사건보도보다 사건의 전개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하고 우리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보도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결코 우리는 ‘시방’ 서방선진국이 아니기 때문이다.진정한 언론의 올바른 역할을 더욱 절실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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