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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민련 ‘票반란 몽니’…내각제관련 분풀이 분석

    자민련이 ‘반란’의 진원지로 지목되고 있다.적잖은 소속의원들이 7일 한나라당 徐相穆의원 체포동의안에 부(否)표를 던진 것으로 분석된다.그 ‘몽니’로 인한 파문이 심상치 않다. 이날 ‘반란’은 무엇보다 국민회의를 겨냥한 인상이다.내각제 연기론에 대한 경고의 뜻을 담고 있다는 풀이다.그래서 충청권 의원들이 주동자로 의심받고 있다.내각제에 관한 한 강경파들이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정치적 의미는 여-여 공조의 한계다.자민련이 내각제에 관한 한 독자행보를 선언한 셈이다. 국민회의와의 결별 가능성까지 슬쩍 내비쳤다.한나라당측과 손잡을지도 모른다는 신호를 통해서다. 지도부는 ‘표단속’에 실패했다.朴泰俊총재는 비주류의 한계를 노출했다. 갈등의 심화로 6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한차례 홍역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 [제2공화국과 張勉](10)신구파 대립과 分黨(中)

    1960년 민주당은 좌절 속에서 출발한다.대통령후보인 趙炳玉이 신병치료차미국에 갔다가 2월 15일 현지에서 별세한 것이다.선거법상 후보를 교체할 수 없었으므로 민주당은 4년 전 申翼熙의 서거에 이어 또다시 대통령후보 없는 선거를 치르게 됐다. 홀로 남은 張勉부통령후보는 ‘3·15 부정선거’에서 자유당 李起鵬후보에게 패한다.득표 결과가 ‘李起鵬 833만표,張勉 184만표’라는,자유당 사람들 스스로도 너무 심했다고 인정한 부정선거였다. 분노한 국민은 ‘3·15 마산시위-4·11 제2차 마산시위-4·19 전국시위-4·25 대학교수단시위’로 이어진 4월혁명을 이룩해냈다.4월 27일 李承晩이 국회에 낸 대통령직 사임서가 수리돼 許政 외무장관을 수반으로 한 과도정부가 들어선다. 이 무렵 민주당 신·구파는 또다시 미묘한 갈등에 부딪친다.내각책임제로의 개헌문제였다.내각책임제는 원래 민주당이 창당때부터 내세운 주요 목표였다.그런데도 이를 채택하는 일이 새삼 논란이 된 까닭은 정파간 이해가 엇갈렸기 때문이다. 사실 내각책임제 개헌은 59년 초한 차례 추진된 적이 있었다.추진세력은자유당 내 온건파와 민주당 구파였다.59년 2월 자유당 온건파를 대표하는 李在鶴국회부의장이 柳珍山민주당원내총무를 방문해 내각책임제 개헌을 제의한다.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여야의 격심한 대립을 그냥둔 채 60년 정·부통령선거를 치르다가는 끝내 국민이 피를 흘리는 사태를 초래할 것 같아서”였다. 柳珍山은 물론 흔쾌히 받아들였다.이후 李在鶴과 柳珍山은 李起鵬·趙炳玉의 승인을 얻어 극비리에 개헌을 추진한다.그러다가 趙淳(자유당)·金義澤(민주당)·梁一東(무소속) 세 사람이 4월 6일 수안보에서 만나 개헌을 논의한 사실이 보도되는 바람에 만천하에 공개된다. 추진 사실을 몰랐던 민주당 신파는 큰 충격을 받고 반발한다.신파는 자유당과 구파가 손잡은 개헌 논의를 ‘張勉부통령의 대통령 승계권을 박탈하려는음모’로 보았다.개헌 추진은 자유당 내부에서도 반발이 심해 흐지부지된다. 그러나 1년 후인 60년 4월의 내각제 개헌은 전혀 양상이 달랐다.먼저 4월혁명을 이룩한 국민의 여론이 독재를 방지하려면 내각책임제를 해야 한다는 데로 모아졌다.민주당 구파와 자유당도 개헌을 당연하게 여겼다. 문제는 민주당 신파에 있었다.일각에서 “4월혁명의 원인이 3·15 부정선거에 있는 만큼 정·부통령선거를 먼저 하고 개헌은 그 다음에 해야 한다”는주장을 들고 나왔다.이른바 ‘선(先)선거 후(後)개헌’론이었다.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하면 張勉이 대통령에 당선되리라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파 쪽의 이같은 주장은 곧 무너진다.李承晩의 하야 성명이 나온 4월 26일 국회는 ‘내각책임제 개헌-국회 해산-즉시 총선거’라는 일정을 담은 시국수습결의안을 채택한다.내각책임제 개헌안은 6월 15일 국회 투표에서 찬성 208표,반대 3표의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된다. 신·구파 대립은 뒤이은 7·29 총선에서 극단적으로 표출됐다.내각책임제로 개헌한 이상 정권은 민의원을 많이 낸 쪽으로 가게 돼 있었다.총선일이 확정되자 신파는 중앙당에,구파는 삼각동 전업회관에 지휘본부를 차려 치열한경쟁에 들어간다.공식적인 당 후보는 공천심사위원회에서 선정했지만 사실은 신파 따로,구파 따로 공천했다. 심지어 張勉이 출마한 용산갑구,尹潽善의 종로갑구,金度演의 서대문갑구에도 자파 후보를 내세웠다.이들이 다른 후보의 지원유세에 나서지 못하도록발목을 잡으려는 의도였다. 이와 함께 분당론(分黨論)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선거운동이 한창이던 때구파의 중진인 蘇宣奎가 전주에서 “우리는 보수양당제를 실현하기 위해 총선거 후 분당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柳珍山·徐範錫 등 구파 중진들의 지지발언이 이어졌다.총선 결과 민주당은 민의원 219석(재선거 대상 제외)가운데 172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신·구파는 소속의원의 수를 계산하며 각각 자파가 승리했다고 공언했다. 구파는 실제로 신파를 앞섰다고 자신한 듯하다.지난해 작고한 高興門은 회고록에서 “대충 표계산을 끝내니 구파 우세가 분명해 보였다.진산 등의 계산으론 구파의 3∼4표 우세였다”고 기술했다. 8월 3일 민의원 부의장 선출을 놓고 신·구파는 처음으로 표대결을 벌인다. 신·구파는 민의원 의장에 신파의 郭尙勳,부의장 한 석에 구파의 李榮俊을추대했다.무소속 몫으로 남긴 부의장 한 자리가 표대결의 대상이었다.투표결과 구파가 지지한 徐珉濠(무소속)가 신파에서 민 李載灐(무소속)을 114 대 99의 15표차로 눌렀다.구파의 우세가 숫자상으로 확인된 셈이다. 이에 고무된 구파는 8월 4일 신파와의 결별을 선언했다.이어 6일에는 비슷한 시각에 신·구파가 당선자대회를 따로 가졌다.신파 모임에 민의원 75명,구파 모임에 83명이 참석했다. 尹潽善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구파는 내친 김에 총리까지 독점할 양으로 金度演을 지명하지만 실패한다.총리 자리는 여론의 지지와 무소속 일부의 동조에 힘입은 張勉에게 돌아갔다.張勉이 총리 인준을 받은 다음날 구파는 민·참의원 총회를 열어 국회에 별도의 교섭단체로 등록할 것을 결의한다. 한편 張勉총리는 8월 21일 청와대에서 4자회담을 갖고 신·구파를 아우르는 조각(組閣)을 논의한다.이 자리에는 張총리와 尹潽善대통령,郭尙勳민의원의장,柳珍山이 모여 신파에서 5명,구파에서 5명,무소속 2명으로 내각을 구성하기로 합의한다.구파는 이튿날 총회를 열고 7시간의 격론 끝에 張勉내각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신·구파 연립내각은 끝내 성립되지 않았다.구파 모임을 마친 金度演과 柳珍山이 자정 가까운 시각에 구파 각료 명단을 들고 張총리를 찾았을때 張총리의 입장은 그새 바뀌어 있었다.“구파가 별도의 교섭단체를 포기해야 받아들이겠다”는 새로운 조건을 내건 것이다. 신·구파 연립내각 구상은 깨졌다.張총리는 8월 23일 신파 10명,구파 1명(鄭憲柱교통),무소속 2명(朴濟煥농림,吳天錫문교)으로 구성된 각료 명단을 발표한다.조각을 둘러싼 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신·구파는 더이상 화합할 수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 ‘分黨' 세력은 역사의 죄인 10대 국회 부의장으로서 국회의장 직무대행을 지낸 閔寬植씨(81)는 1954년12월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해 자유당을 뛰쳐나온 ‘자유당 탈당파’ 12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무소속으로 남아 58년 5월 선거에서 재선 의원이 된 그는 그해 9월 1일 민주당에 들어가 趙炳玉의 참모로 구파에서 맹활약했다.그런데도 구파가총리로 金度演을 지명했을 때와 분당(分黨)을 추진할 때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끝까지 반대했다. “내가 상산(金度演의 아호) 총리 지명을 반대하자 상산이 창신동 집으로세 차례나 찾아왔습니다.‘유석(趙炳玉의 아호) 생전에는 열심이더니 왜 그러느냐’면서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閔전의장은 그때마다 金度演을 오히려 설득했다고 한다.민주당에는 엄연히신·구파가 있으니 대통령과 총리 자리를 하나씩 나눠가져야 할 것 아니냐,그런데 구파가 힘이 약해 대통령을 맡았으면 총리는 당연히 신파에게 넘겨야 한다고 했다는 것.閔씨는 “하지만 상산의 귀에는 내 얘기가 전혀 들리지않는 모양이었다”고 회고했다. 張勉이 총리가 되고 나서 농림장관으로 입각하라는 교섭을 받지만 거절한다.“개인적으로 나이 50이 되기 전에는 당에서건,행정부에서건 큰 감투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데다,어쨌든 구파의 결정을 무시하고 개인행동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張勉내각 명단이 발표되니까 제외된 사람들이 일제히 ‘도각(倒閣)운운’하며 공격에 나서더라”면서 “그때는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정말 가능한가’라는 회의가 들어 서글펐다”고 말했다.구파에서 분당 움직임이 확연해지자 閔전의장은 뜻을 같이하는 동료의원들을 이끌고 분당 반대 운동에 적극 나선다.‘합작파’라고 불린 이들은 한때 그 숫자가 30명쯤에 이를 정도로 세를 모았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 閔전의장은 “분당을 추진하는 세력들은 합작파가 張총리에게서 공작금을타다 쓴다느니,장관 자리를 약속받았다느니 온갖 중상모략을 해댔다”면서“신파는 신파대로 합작파를 냉대했다”고 술회했다. 합작파 의원 가운데 20여명이 민주당 교섭단체에 가입하고 일부는 구파의신민당에 들어가 사실상 해체된 뒤 그는 61년 2월 신민당에 합세한다.“유석(趙炳玉)선생을 따르던 대부분의 동지들이 이미 신민당에 들어가 있어 다수에 복종한다는 의미에서”였다. “제2공화국이 내각책임제였다고는 하지만 몇달 가지 못했고 게다가 신·구파 싸움으로 제대로 운영해볼 기회조차 없었다”고 말하는 閔전의장은 “지금 국민이 내각책임제에 관해 좋다,싫다를 말할 수 없는 이유가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그리고는 “신·구파가 힘을 합쳐 내각책임제를 잘 운영해 민주주의를 멋지게 꽃피우고 경제건설도 완성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아쉬워하면서 “분당에 앞장선 정치인들은 역사의 죄인”이라고 단정했다.張勉총리와 尹潽善대통령의 공과를 평가해 달라고 하자 閔전의장은 “제2공화국이 무너지는 데 두 분 다 책임이 크다”고 운을 뗀 뒤 “더이상 구체적으로 평가하고 싶지않다”고 말문을 닫았다.
  • [외언내언] 文藝峰

    한 시대를 풍미한 시인 묵객 등 예술가나 성공한 사람의 일생을 살펴보면그들이 걸어온 인생의 뒤안길은 영욕과 희비가 엇갈리기 마련이다. 슬픔이있는가 하면 성취의 기쁨이 만발하고 절망이 있는가 하면 칠전팔기(七顚八起)의 오기가 도사린다. 그중에서도 문화예술계의 경우는 예민한 감수성으로인해 시대적 아픔과 사상적 배경을 과장해서 받아들이는 예가 흔하다. 엊그제 타계한 북한배우 文藝峰의 경우는 북한 배우 이전에 1930년대와 40년대 우리 영화 초창기를 풍미한 최고의 배우였다. 지난 32년 이규환감독에게 발탁되어 ‘임자없는 나룻배’에서 나운규와 공연했고 고전적인 용모와청초미로 인해 당장 3,000만의 연인으로 부상됐는가 하면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의 타이틀롤로 인기절정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몇푼의 돈을 위해 화면에 눈물과 웃음을 팔며’ 식민지 배우로서의 설움과 고통이해방 후에도 가시지 않아 민족문화예술이 난만(爛漫)하는 이북이야말로 희망의 등대라는 판단아래 월북을 단행했다고 한 수기에서 밝히고 있다.월북의감격에 대해서도 ‘엄혹한 겨울이 물러가고 따뜻한 계절이 시작되던 그 3월의 봄은 예술가로서의 저의 인생에서 과거와 영원히 결별하고 새출발한 인생전환의 뜻깊은 봄이었다’고 했다. 월북 다음해인 49년부터 십수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나 지난 65년,영화전문지 조선영화 4월호에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를 ‘청사에 길이 빛날 천재’로 찬양한 것이 빌미가 되어 협동농장으로 추방되는 등 급속도로 쇠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80년대 이후 복권되었고 86년에는 북한 예술영화촬영소가제작한 ‘봄날의 눈속에’가 성과작으로 평가를 받긴 했지만 그의 영화의 삶은 월북 15년만에 막을 내린 셈이다. 배우는 정치적 사상이나 이념 등 자신이 맡은 역할 외엔 언제나 예술에 뜻을 두고 예술밖에 모르는 순수한 정신의 소유자다. 그래서 괴테는 ‘예술가는 그 이름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그가 엄혹한 북한체제에서 나운규를예찬한 것은 바로 예술가의 순수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50여년전 봄에 과거와 결별하고 월북으로 인생을 전환한 것처럼 금강산 관광등 남북교류의 변화가 빈번해진 봄날에 그가 파란많은 생애를 마감했다니 인생무상이 느껴진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이나 이념과는 상관없이 그의 공적이 북한에서 ‘인민배우’로 호칭된 것처럼 우리 영화사에서도 무성영화시절과 최초의 발성영화 출연배우로서의 활약상 등으로 그 이름이 기억될 것이다. 이세기/논설위원
  • 자민련 宋業敎씨 의원직 승계

    자민련 鄭相千부총재가 23일 해양수산부장관으로 입각하면서 전국구 의원직을 사퇴키로 해 예비후보 1번인 宋業敎정책연구실장(58)이 의원직을 승계하게 됐다. 宋실장은 지난 67년 공채 3기로 공화당에 들어와 30여년동안 金鍾泌총리와정치역정을 함께 해왔다.특히 87년 金총리가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한 뒤부터金총리의 각종 연설·강연 원고 집필을 맡아왔다. 민자당에 함께 있다 결별한 金泳三 당시 대통령을 겨냥한 ‘사랑에는 후회가 없다’는 95년의 국회에서의 자민련대표 연설문도 그의 작품이다. ▶전남 나주 ▶광주제일고,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공화당 의원국장 총무국장,민자당 부대변인
  • [제2공화국과 張勉](8)尹潽善과의 갈등(下)/윤보선과 평가

    1961년 5월16일 새벽2시쯤 張勉은 총리 숙소로 쓰는 반도호텔 809호실에서경호대장의 다급한 목소리에 일어났다.張都暎 육군참모총장이 급한 일로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張都暎은 “육군 30사단이 장난질 하려는 것을 막았고,현재 해병과 공수부대일부가 서울로 들어오려는 것을 한강다리에서 막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어“염려마시고 그저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아십시오”라고 덧붙였다. 張勉은 와서 직접 보고하라고 지시하고 기다리지만 張都暎은 오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총성이 요란하게 들려오자 張勉은 경호대장 등과 함께 지프를타고 반도호텔을 떠났다.거리가 가까운 미국대사관과 대사관 사택을 찾았지만 문을 열지 않아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잠시 몸을 피하려고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혜화동 수녀원으로 갔다”(회고록 중에서).그리고는 55시간이 지난 18일 낮12시쯤에야 모습을 드러내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내각 총사퇴를 발표한다. 尹潽善은 새벽 3시30분에서 4시 사이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張勉과 마찬가지로 張都暎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었다.張都暎은 “쿠데타가 일어나 헌병을 동원해 한강다리에서 저지하려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뚫렸다. 쿠데타군이 시내로 들어왔는데 진압될 것같지 않다”고 우려했다(尹潽善 회고록에서). 尹潽善은 “피신하라는 말처럼 들렸지만 일신의 안전만을 위해 300만 서울시민을 버릴 수 없고” 또 “그들하고 사리를 따져볼 수도 있을 것이요, 설령피살이 된대도 그리 부끄러울 것은 없다고 생각해” 자리를 지킨다. 5·16쿠데타가 발생해 제2공화국이 결국 무너지기까지 국무총리 張勉은 몸을 숨겼고 대통령 尹潽善은 현장에 남아 ‘유일한 헌법기관’으로서 쿠데타세력을 상대한다.쿠데타를 적극적으로 분쇄하지 못하고 자기 한몸 피신하는 데 그쳤던 張勉은 제2공화국 붕괴에 변명할 여지가 없다.그렇다면 尹潽善은 제 할일을 다한 걸까. 16일 낮 쿠데타 주역인 朴正熙소장과 柳原植대령이 청와대로 尹潽善을 찾아왔다.이 자리에는 玄錫虎국방장관과 張都暎 등이 함께 있었다.玄錫虎는 쿠데타 소식을 듣고 반도호텔로 가서 張勉을 만나고 헤어진 뒤 쿠데타군에게 체포된 상태였다. 접견실에서 朴正熙 일행을 만난 尹潽善은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말로 입을열었다.이 말은 훗날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되었다. 尹潽善을 비난하는 쪽은 “쿠데타를 기다렸다는 투의 이 표현이야말로 그가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기까지 쿠데타세력과 관련해 보여준 행동을 설명하는키워드”라고 풀이했다.현장에 있던 玄錫虎는 회고록에서,尹潽善이 이 말에이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다”면서 張勉정부에 비난을 퍼붓고 朴正熙의 거사에 찬사를 보냈다고 밝혔다. 尹潽善의 설명은 물론 다르다.“그들(朴正熙 일행)을 대하는 마음이 서글퍼나도 모르게 이 말이 떨어졌고,당시 사회적·정치적 혼란상을 생각할 때 당장 무슨 일이 터지고야 말 것같아서”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尹潽善은 “군인들끼리 피를 흘리는 일이 없도록 잘 수습하라”는 말로 발언을 끝낸다.모두 물러갔다가 朴正熙와 柳原植이 다시 들어왔다.柳原植이 “저희는 이 혁명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면서과거에도 대통령에게 충성을다했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마치 張勉내각이 물러나면 권력을 尹潽善에게 넘길 것처럼 들리게끔 하는말이었다. 尹潽善은 이 자리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미 국무부 자료를 보면,그는 白樂濬 참의원의장을 쿠데타군쪽에 보내 ‘헌법 69조에 따라 尹대통령이 새 총리를 임명한다면 군부가 권력을 이양하고 철수할 것인가’를 타진한다. 한편 朴正熙 일행에 이어 마셜 그린 주한미대리대사와 매그루더 UN군사령관이 함께 尹潽善을 방문한다.두 사람은 이미 “張勉총리 영도 하의 합헌적인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뒤였다.두 사람은 “서울시내에 들어온쿠데타군은 4,000명이 채 안되므로 4만 병력만 출동시켜 서울을 포위해 들어가면 쿠데타군이 항복할 것”이라며 무력진압을 주장했다. 그러나 尹潽善은 “국군끼리 전투를 벌여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북한 인민군이 기회를 노려 남침한다”는 논리로 끝내 반대한다.그린은 “각하의 이번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이라는 ‘경고’를 남기고 돌아간다.매그루더는 尹潽善과의 면담후 본국 합참본부에 전문을 보내“尹대통령은 張총리를 몰아내고 싶어 가능한 법적 절차를 찾고 있다”고 보고한다. 尹潽善은 이날 오후 張都暎이 요청한 계엄령을 승인했으며 17일 오후 2시에는 대국민 성명을 발표해 “군사혁명위원회가 정부 기능을 대신한다”고 밝혀 張내각 퇴진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또 쿠데타를 “애국적인 군사혁명”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편 張勉은 수녀원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사태의 전개를 알고 있었고 16일아침 그린 대리대사와 통화도 한다(그린의 증언).그는 내각 총사퇴를 결심한 이유를 “미대사관에서 尹씨의 태도를 연락받았는데 그가 쿠데타 진압을 방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회고록에서밝혔다.그러나 張勉은 尹潽善에게 직접 연락해 쿠데타 저지를 논의하거나,최소한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직접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尹潽善은 張勉의 행방을 알지도 못했지만 그와 상관없이 제2공화국을 지키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 정치적 지향과 인적 구성 등에서 이질적이었던 민주당의 신·구파,그리고 그들의 대표격인 張勉총리와 尹潽善대통령의 갈등과 대립은 갓 피어난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히게 하는 크나큰 비극을 초래한다.제2공화국 붕괴의 책임을저울질한다면 張勉과 尹潽善 그 어느쪽으로도 저울추가 결코 기울지는 않을것이다. 이용원- [기고] 張勉과 尹潽善 평가 5·16쿠데타가 일어나 張勉총리의 소재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尹潽善대통령이 “올 것이 왔다”며 쿠데타를 추인한 것은 두 사람의 비극적 결합을잘 말해준다.우리가 슈뢰더 독일총리는 알아도 대통령 이름은 잘 모르듯 내각책임제 아래 대통령은 명목상 존재에 불과하다.그런데도 尹潽善은 대통령중심제의 대통령처럼 행세하다 막상 단호한 조치가 필요한 때 “올 것이 왔다”며 쿠데타를 추인해 버렸다. 尹潽善에게 쿠데타가 ‘올 것’인 이유는 자신의 파벌이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당시 집권당은 한민당 후신인 구파와,재야 민주화세력인 신파의 연합으로 구성된 민주당이었다.申翼熙·趙炳玉같은 비중 있는 지도자가사망한 뒤 구파를 이끌게 된 尹潽善은 전형적인 과거형 정치가였다. 구파의 전신인 한민당은 우익민족주의 세력과 친일파 세력이 혼재한 정당이었다.UN한국위원단이 ‘보수적 지주정당’이라고 지적했듯이 해방직후 토지개혁에 반대하고 반민족행위처벌법에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으며,李承晩의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다.따라서 한민당이 李承晩과 결별하고 야당의 길을걸은 것은 이념과 정책상의 대립이라기보다 李承晩의 권력독점에 대한 반발때문이었다.한민당은 해방이후 좌익세력의 급진성과 李承晩의 독선이 낳은‘반감(反感)’이란 정치적 공간을 적절히 점유해 생존한 과거형 정당인 것이다. 4월혁명후 ‘대통령=구파,총리=신파’라는 합의 덕에 대통령에 선출된 尹潽善이,자파인 金度演을 총리로 지명한 것은 정치적 합의를 휴지조각으로 여기는 과거형 정치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대통령과 총리를 모두 차지하려던 계획이 실패하자 구파는 결국 민주당을 뛰쳐나가 신민당을 창당한다.尹潽善은대통령으로서 이런 분열적 행위를 제지하기보다는 부추기는듯한 처신을 보였고,정부를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해 張勉정부 흔들기에 여념이 없었다.개인과 파벌의 이익을 모든 가치보다 우선시한 행위인 것이다. 반면 신파를 이끈 張勉은 1960년대 한국상황에서는 등장이 너무 빨랐던 미래형 정치가이다.자유민주주의에의 신념과 종교적 경건함이 밴 구도자적(求道者的) 정치가인 張勉은 2000년을 눈앞에 둔 현재에도 시기상조일지 모를 정도로 선진적인 정치가였다.그는 尹潽善이 이끄는 구파의 끝없는 시비를 인내하면서,1960년 10월 제2공화국 경축식에서 말한대로 “정부의 시정목표로서경제제일주의”를 주창한 실질적이고 선각적인 지도자였다. 쿠데타 세력이 마치 자신의 업적인양 내세운 경제개발5개년계획이나 국토건설사업은 모두 張勉정부에서 경제제일주의를 실천하고자 수립한 것들이다.시장경제원리에 입각해 경제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 張勉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 실천되었더라면 5·16이후 정경유착으로 성장한 ‘재벌신화’라는 어두운 경제성장사는 ‘국민신화’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5·16후 두 사람의행보도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張勉은 쿠데타를 막지 못한 역사의 죄인이란 죄의식 속에 참회하다가 죽어간 반면,尹潽善은 ‘올 것이 왔다’던 쿠데타세력의 朴正熙 후보와 1963년과 67년 두 차례 대결했으나 패배했다.현실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꿈을 접었을 무렵인 1980년대에는 全斗煥 정권에 협력하다가 세상을 떠났다.쿠데타후 두 사람의 삶은 현재우리 정치의 낙후성의 한 원인을 말없이 웅변해준다. [李德 一 역사평론가·문학박사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
  • 예장 합동·통합 40년만에 ‘하나되기’

    국내 개신교 최대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의 합동측(총회장 길자연)과 통합측(총회장 유의웅)이 결별 40년만에 화합과 일치를 선언했다. 양 교단의 주요인사 100여명은 최근 서울 서초구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분열을 넘어 화합과 일치로-1959년 그 이후’란 주제로 포럼을 열고 ‘장로교 화합과 일치를 위한 선언문’을 채택했다.참가자들은 이 선언문을 통해 “이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의 참된 교회를 이루어 가자는 것”이라고 전제한 뒤“개혁신앙을 토대로 일치와 갱신을 실현하는 교회가 되고인류 공동체 구원에 대한 공동의 청사진을 제시하는데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포럼에는 총회장 및 총무 등 양 교단 임원을 비롯해 양교단 신학교 총장및교수,동문회 대표,목회자 대표 등이 참석했으며 분열 당시의 양교단 지도자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및 한국장로교총연합회 등 연합기관 관계자도 자리를함께 했다. 선언문 발표에 앞서서 총신대의 정성구 교수와 한국기독교학술원 이종성 박사가 양 교단의 기관지인 ‘기독신문’과 ‘한국기독공보’가 연재한 특별기획물을 중심으로 발제를 했으며 이에 대한 토론에 이어 교회 분열에 대한 죄책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순서도 마련됐다. 6,000여 교회와 220여만 신도로 교세 1·2위를 다투는 합동과 통합이 갈라진 것은 59년.광복후 신사참배 문제로 고신(고려신학대)파가 떨어져나오고 53년 자유주의신학을 둘러싸고 기장(기독교장로회)과 예장이 갈라진 이후 예장에서는 최초의 분열이었다. 논란의 핵심은 WCC(세계교회협의회) 가입을 둘러싼 보수와 진보의 문제였다.당시 공산권이었던 동유럽의 정교회들과 대화하는 것은 용공이라는 주장을내세우며 합동이 떨어져나왔으며 이후 진행된 장로교 핵분열의 단초가 됐다. 그러나 ‘IMF 위기’를 맞아 교회분열에 대한 반성론이 일어나면서 교단간화해 분위기가 조성됐고,평소 친분이 있던 길 목사와 유 목사가 총회장에 동반 당선된 것을 계기로 교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통합과 합동은 지난해 12월,올 1월 두차례 임원모임을 가진 뒤 지난달 25일 대표자 연석회의를 갖고 포럼 개최에 합의했다. 양교단은 포럼의 성과를 바탕으로 4월 22일 유의웅 통합 총회장이 시무하는 서울 도림교회에서 기도회를 갖기로 했으며 길자연 합동 총회장이 시무하는서울 왕성교회에서도 기도회를 가질 예정이다. 그러나 이처럼 활발한 교류에도 불구하고 양 교단이 진정한 통합에까지 이르기에는 난관이 많아 보인다.양 교단의 총회대의원 33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통합에 대해서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47%로 희망적인견해(38%)보다 많았다. 그만큼 해묵은 갈등이 내재하고 있으며 신학적 차이나 전례절차도 많이 달라져 있다.교권 기득권 세력들의 저항도 만만치않을 것으로 보이며 다른 교단의 견제도 예상된다.때문에 공동선언문에서도 “우리는 이 운동이 초대형교단의 형성을 목표로 하는 운동도,교회들 간의 제도적 일치를 협상하는 운동도,어떤 특정한 교회론적 신념을 전파하는 운동도 아니라고 본다”고 밝혔다.
  • 정세영 불씨는 남아/현대자동차 경영권 문제

    鄭世永 현대자동차 명예회장(사진)의 무장해제로 현대자동차의 경영체제가鄭夢九회장(MK) 쪽으로 굳어졌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鄭周永 명예회장이 지난 2일 경영권을 鄭夢九회장에게 넘겨주도록 통보했을때도 鄭世永 자동차 명예회장은 별 반응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鄭夢奎현대자동차 부회장의 한 측근도 “鄭부회장이 鄭世永 명예회장의 이사회 의장직 배제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서 “별다른 감정변화는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특히 현대가 밝힌 3인 전문인 경영체제 구도는 ‘MK체제’구축을 웅변해준다.李邦柱·李裕一·李啓安사장의 3두체제라고 하나 사실상 李啓安사장과 李銓甲부사장 등 ‘MK 측근 2인’체제다. 李사장은 기조실과 홍보실,지원본부,재경본부,연구개발본부,전략구매사업부 등 핵심업무를 李邦柱사장으로부터 넘겨 받았다.李부사장은 鄭世永 명예회장의 그림자였던 金判坤 부사장의 업무를 맡았다.전문경영인체제라는 명목으로 鄭夢奎 부회장의 경영참여를 차단하고 ‘MK 李­李 라인’으로 李邦柱사장(국내영업) 李裕一사장(해외업무)을 견제하고 있다. 그러나 MK장악으로 鄭世永가(家)가 현대자동차와 결별했다고 보는 이는 의외로 적다.불씨가 남아 있다는 애기다.8.34%에 이르는 주식 지분,끈이 떨어졌다 하나 鄭夢奎 대표이사 부회장의 직함이 가진 파괴력,곳곳에 남아있는鄭世永 명예회장의 32여년 족적이 변수라는 지적이다. 鄭世永 회장은 갔지만 그는 현대자동차에 아직은 남아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鄭周永 명예회장의 동생에 대한 배려와 鄭夢奎부회장의 행보,현대자동차의 주식지분의 추이에 따라 불씨 또한 유동적일 것으로 보인다. 金柄憲bh123@
  • 虛舟, 李총재에 노골적 反旗

    한나라당 李會昌총재가 28일 오전 虛舟(金潤煥전부총재의 아호)의 전화를받았다.지난해 11월 虛舟가 李총재와 결별을 선언한 뒤 첫 접촉이다.그러나정치적 ‘덕담’은 없었다. 虛舟는 당이 결정한 ‘31일 구미집회’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구미집회를 강행하면 불참하겠다는 의사도 분명히 했다.구미는 虛舟의 지역구다.TK(대구 경북)의 상징성을 감안하면 虛舟의 불참은 대회의 열기를 반감시킬 수있다.그럼에도 李총재는 당초 계획을 그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두 사람간 ‘불편한’심사는 이날 각각 가진 오찬모임에서 그대로 드러났다.虛舟는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기자간담회를 자청,장외투쟁으로 치닫는 李총재의 투쟁 노선을 강력 비판했다.그는 “31일 집회는 지역경제를 살리는데보탬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지역감정을 부채질해,될 일도 안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그는 “당 지도부가 빅딜의 문제점을 시정해야 한다는 현지 LG나 대우 노조를 앞세워 투쟁 효과를 높이려 한다”고 비난했다.빅딜의 문제점을 국회나 당 차원에서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뒤 “그래도 안되면 그때가서 장외집회를 하자”는 것이다.같은 시각 李총재는 전경련회관 음식점에서 대구 경북 의원들을 만나 “집회 성공을 위해 합심하자”고 다독거렸다.참석자들의 요청에 따라 구미로 가는 길에 대구도 방문키로 했다.虛舟의 반기(反旗)에 쐐기를 박은 셈이다. 그동안 李총재는 ‘조건없는’총재회담을 요구하는 여권의 압박,정계개편론,당내 비주류의 심상찮은 행보 등으로 내우외환에 시달렸다.때문에 ‘싸움만이 살길’이라며 장외투쟁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李총재가 이날 총재단·주요당직자 연석회의에서 국민회의 韓和甲총무의 ‘대구발언’을 빗대 “정계개편 얘기로 야당을 분열시키려 하면서 무슨 총재회담이냐.야당 분열기도에 동조해 당을 떠날 어리석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고 강조한 대목도 ‘위기감’의 반증이다.이날 虛舟의 반발도 ‘폭발력’은 지니지 못한다 하더라도 李총재로서는 뒷맛이 개운찮은 ‘사건’이다.
  • 박세리-김미현 LPGA 네이플스메모리얼 출전

    한국 여자골프의 쌍두마차인 박세리와 김미현이 21일 밤 올시즌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두번째 대회인 99네이플스메모리얼(총상금 75만달러)에출전,재격돌한다. 플로리다주 네이플스 펠리컨스트랜드CC에서 4일간 펼쳐질 이번 대회는 헬사우스이너규럴에서 두선수의 희비가 엇갈린 바 있어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개막대회에서 컷오프 탈락의 비운을 겪었던 박세리에게는 설욕의 기회이고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장식한 김미현에게는 상승세 디딤돌이 될 전망.특히 이번 대회에서는 국내에서 맞수대결을 펼치던 때부터 유명한 둘의 라이벌 의식이 본격적으로 점화되면서 성적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점쳐져 흥미를높이고 있다. 시즌 개막 직전 코치 및 매니저와의 결별,IMG와의 매니지먼트 계약 등 어수선한 환경 속에 첫 대회를 그르쳤던 박세리는 “첫 대회 예선탈락이 오히려약이 됐을 뿐”이라며 시즌 첫 승까지 바라보고 있다.데뷔전을 성공적으로치러 한껏 자신감이 붙은 김미현은 “자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겸손한 자세 속에 상승세를 이어가겠다는 각오다. 한편 박세리는 22일 오전 1시57분(이하 한국시간) 아웃코스에서 리셀로테노이만,웬디 워드와 같은 조로 1라운드를 시작하며 김미현은 제인 크래프터,베키 아이버슨과 함께 22일 오전 2시15분 인코스에서 첫 라운드를 시작한다. 특히 현지시간 오후인 김미현의 티오프타임은 TV 중계시간 등을 이유로 상위권 선수들이 늦게 출발하는 관례에 비추어 데뷔전 34위의 선전에 따른 배려로 받아들여진다.첫 대회였던 이너규럴 대회에서 김미현은 오전조에 편성됐었다.또 이번 대회에는 이들과 함께 재미교포 펄 신과 서지현도 출전한다.펄 신은 22일 오전1시57분 인코스,서지현는 21일 오후 9시20분 아웃코스에서 각각 출발한다.곽영완 kwyoung@
  • 박세리 ‘2년생 징크스인가’…예선탈락 충격

    ‘슈퍼스타’ 박세리가 99시즌 개막전인 헬스사우스이너규럴대회 예선탈락으로 많은 팬들에 실망을 안겼다.박세리의 예선탈락은 올시즌을 전망한다는차원에서 볼 때 그 충격은 더 크다. 성급하긴 하지만 박세리의 부진은 어쩌면 예견된 결과인지도 모른다.결론부터 얘기하면 박세리는 올시즌을 위한 준비가 허술했기 때문이다. 박세리의 부진을 경기력 측면에서 볼때 드라이버 샷의 불안정과 고질적인문제로 지적되온 퍼팅의 난조를 들 수 있다.드라이버 샷의 난조에 대해 박세리는 “대회 전날 드라이버를 신제품으로 바꿔 익숙치 못했기 때문이다”고설명했다.박세리가 교체한 드라이버는 샤프트만 바꿨을 뿐이다.교체된 드라이버의 샤프트는 평소 사용하던 것보다 재질이 딱딱한 것으로 정확도를 높여주고 공의 탄도가 낮아진다는 특성을 지닌 반면 거리가 다소 줄어드는 단점도 있다.그러나 헤드 자체에는 변화가 없어 예전의 드라이버와 별차이가 없다는게 전문가들의 얘기다.박세리는 퍼팅의 난조에 대해 설명이 없다.박세리는 이번대회 2라운드를 치르며 1.5m의짧은 퍼팅을 4차례나 놓쳤다. 많은 전문가들은 박세리의 부진을 경기외적 요인에 무게를 더 둔다.박세리는 지난해 시즌이 끝나면서 전담코치 였던 데이비드 레드베터와 결별했고 스폰서인 삼성물산과의 마찰,새 매니지먼트사와의 계약 등으로 어려운 포스트시즌을 보냈다.이같은 복잡한 문제로 인해 박세리는 포스트시즌 동안 체계적인 훈련을 하지 못했다.특히 레드베터와 결별한 후 아버지 박준철씨로부터스윙교습을 받아왔다.레드베터는 고도의 테크닉 스윙을 가르쳐 다른 코치의지도에 적응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여기에지난해에는 박세리의 모든 것을 삼성측이 대행,박세리는 몸만 움직이면 됐었다.그러나 올해부터는 매니지먼트사의 교체로 자신과 관련된 문제는 직접 나서 해결해야 한다.결국 박세리는 이같이 달라진 자신의 위상과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이번대회를 통해 드러난 셈이다.박세리가 이번대회와 같은부진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고 경기력 향상에만 몰두해야 할 것이다.다시말해 골프의 귀착점인 집중력을 높이는데 주력해야 한다.
  • 자민련 충청권 신년교례식

    자민련이 ‘내각제’관철의지를 과시했다.15일 충청권 신년교례회에서 깃발을 들었다.金鍾泌총리와 朴泰俊총재 등 ‘윗분’은 빠졌다.‘아래 사람들’의 자발적 행군으로 모양을 갖췄다. 이날은 자민련이 ‘독립기념일’로 부르는 날.4년전 충청권이 뭉쳐 金泳三정권과 결별을 선언했다.金총리가 자민련 창당을 결심케 했다.올해도 그자리인 대전 유성관광호텔에서 열렸다. 행사장 곳곳에는 내각제를 주제로 한 플래카드가 나붙었다.‘힘내세요 JP,저희들이 있습니다’‘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은 내각제’‘민심도 내각제,천심도 내각제’‘우리의 소원은 내각제’등.1,000여명의 참석자들은 ‘내각제 쟁취’라고 쓰인 리본을 달았다. 金龍煥수석부총재는 이날 두 화두(話頭)를 꺼냈다.“한 지도자는 살신성인(殺身成仁)하고,다른 한 지도자는 신의를 지켜 역사적 지도자로 남기 바란다”고 강조했다.金총리에게는 내각제를 위해 대통령후보를 포기한 것을,金大中대통령에게는 내각제 약속을 겨냥했다. 참석자들은 저마다 내각제 결의를 다졌다.李麟求부총재는 “1년간 유보한내각제개헌 공동추진위도 즉각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개항의 결의문도 냈다.첫째 현정권은 내각제 개헌합의를 반드시 이행하라고 촉구했다.둘째 내각제를 저지하려는 어떤 책략이나 음모도 철저히 배격키로 했다.셋째 내각제를 자신들의 힘으로 반드시 실현키로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개헌 이행을 촉구하면서 ‘연내’라는 시기를 뺐다.국민회의측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겠다는 뜻이다.朴大出 dcpark@
  • 金총리, YS직접증언 반대

    金鍾泌총리가 ‘YS예우론’을 제기했다.金泳三전대통령의 경제청문회 직접증언에 반대했다.‘비리청문회’에도 이의를 달았다.국민회의 기류와 다르다. 金총리는 14일 기자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순리론’을 역설했다.먼저 “강제로 끌어내서는 안된다”고 못박았다.“어떻든간에 전직대통령의 권위를생각해야 한다”고 논리를 폈다. 국민회의측이 ‘비리청문회’로 몰고가려는 움직임에도 제동을 걸었다.金총리는 “보복은 보복을 낳는다”고 지적했다.그는 이어 “(청문회 방향을)정책쪽으로 하라고 했고,그게 합리적이고 투명한 것”이라고 정책청문회를 강조했다.또 “경제위기 원인을 규명하고 새롭게 열어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시점이 흥미롭다.이날은 4년전 金전대통령과의 결별을 하루 앞둔 날이다.당시 충청권이 뭉쳐 金총리가 자민련 창당을 결심케 했다.대전 신년교례회에서 그랬다.자신을 ‘팽(烹)’시켰던 YS를 예우론으로 되받은 셈이다. 金총리는 매년 신년교례회에 참석했다.15일 열리는 이번에는 가지 않는다.스스로는 “총리란 신분때문”이라고 설명했다.속사정이 있다.행사는 ‘내각제 출정식’이 될것같다.金총리가 참석하면 선두에서 부채질하는 모양이 된다.‘몽니’에 대해 뜻풀이도 했다.‘정당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때 심술부리는 것이라고 했다.내각제 얘기를 자제하는 것은 ‘그만하면 알 때가됐기 때문”이라고 받아넘겼다.
  • ‘올해도 그린여왕’ 박세리 내일 티샷

    지난 시즌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메이저 2연승을 포함,4관왕에오르며 신인왕 타이틀을 차지했던 박세리가 15일 99시즌 개막 무대인 헬스사우스이너규럴대회에 출전,두번째 시즌을 시작한다. 총상금 55만달러,우승상금 8만2,500달러를 걸고 플로리다주 올랜도 그랜드사이프레스골프장(파 72)에서 열리는 이번 대회에는 지난해 우승자인 켈리로빈스 등 134명의 선수가 출전하며 한국선수로는 박세리와 함께 지난 시즌1승을 올렸던 재미교포 펄 신,올해 처음 LPGA투어 출전권을 얻은 김미현도출전,정상에 도전한다. 개막 대회인 만큼 올시즌 성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무대로 대부분의 정상급 선수들이 모두 출동할 예정이지만 박세리에게는 지난 시즌과 달리 여러가지 주변 여건이 변한 가운데 치르는 대회로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우선 그동안 훈련 지원에서부터 스케줄 관리까지 도맡아왔던 삼성물산측이 관리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일정만 관리하는 수준에 머물게 된 것이 첫번째 변화다. 삼성물산측은 다음주 초 세계적인 스포츠매니지먼트업체인 미국 IMG와 정식으로 계약,위탁관리 한다는 방침 아래 현재 세부적인 사항을 조절 중이다.계약이 체결되면 일정관리,광고 및 스폰서계약 등은 IMG가 하게 될 전망이다.이럴경우 박세리는 전담 매니저가 없어 스스로 일정을 조정해야 하고 코치데이비드 리드베터와의 결별 이후 새로운 코치 없이 투어를 시작하게 된 것도 부담이다.특히 리드베터와의 결별 이후에는 연습도 홀로 했기 때문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관심이다.박세리는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 우승을 욕심내기보다는 동계훈련의 과실을 점검하고 본격 투어에 들어가기전 컨디션 조절의 기회로 삼겠다”며 담담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한편 지난해 프로 입문 8년만에 스테이트팜레일클래식에서 첫 승을 거뒀던펄 신도 아마 시절에 이어 ‘제2의 전성기’를 열겠다는 각오를 보이고 있고 지난해 12월 초 부모와 함께 올랜도에 도착,일찌감치 현지 적응훈련을 시작한 김미현도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치른다는 당찬 각오를 밝히고 있다.
  • TV3사 프로그램개편 중간평가

    MBC,SBS에 이어 KBS가 8일 프로그램 개혁안을 발표함으로써 지난 연말 방송3사의 ‘프로그램 공익성 강화’선언에 따른 방송사별 실천작업이 일단락됐다.방송사들은 봄개편때 미흡한 부분을 보완할 예정이라고 밝히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결국 이번 개편안이 각 방송사의 공익성 실천의지를 재는 잣대가 될 전망이다. KBS는 이날 ●프로그램 삼진아웃제 도입 ●고급 공연물 주1회 편성 ●드라마 1편 폐지 ●옴부즈맨 프로그램 강화 등을 골자로 한 프로그램 개혁안을내놓고,시청률 경쟁과의 완전 결별을 선언했다. 삼진아웃제는 방송심의규정에서 3회 이상 경고를 받은 프로그램을 편성에서 아예 제외시키는 강도높은 제재조항이다.또 2TV에 교향악단과 국악관현악단의 연주회를 주1회 편성해 고급문화의 대중화를 꾀하고,쇼·오락부문에서 퇴폐적인 요인을 배제해 대중문화의 고급화를 선도하기로 했다. 드라마쪽에서도 지난 1일부터 2TV의 아침드라마를 중단한데 이어 한 편을더 줄이기로 했다.옴부즈맨 프로인 ‘1TV시청자 의견을 듣습니다’를 현재일요일 오전7시30분에서 오후5시로 옮기고,방송시간도 30분에서 40∼50분으로 늘린다. 이밖에 비과학적이고 선정적인 프로로 지적돼온 ‘미스터리추적’과 ‘비디오추적 놀라운 TV’(2TV)를 없애는 한편 노인·장애자 등 소수층을 위한 프로를 적극 편성키로 했다. 지금까지 나온 방송3사의 프로그램개편안을 살펴보면 외형상으론 합의사항을 비교적 잘 지킨 것으로 보인다.‘다큐멘터리-이야기속으로’(MBC)‘미스테리극장’(SBS)등 비과학적이고 미신조장이 우려되는 프로가 안방극장에서사라지고,청소년 범죄모방이 우려되는 재연프로와 연예·오락프로도 축소 또는 폐지키로 했다.‘경찰청사람들’‘음악캠프’‘10대세상 내일이 보여요’‘생방송 데이트11’‘특종 오늘의 토픽’(이상 MBC)‘특급 연예통신’‘비디오 출동Q’(이상 SBS) 등이 이런 이유로 퇴출 목록에 오른 프로들이다. 그동안 찬밥신세였던 옴부즈맨프로가 신설(SBS)되거나 좋은 시간대로 이동하는 것도 바람직하며,교양다큐멘터리 등 공익프로를 확대하겠다는 약속도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과연 방송사들이 개혁의지를 제대로 갖고 있는 지를 의심할 만한 대목들이 눈에 띈다.우선 가장 비판받고 있는 드라마에 대한 개혁이 미흡하다.현재 드라마는 KBS 11편(1TV 4편,2TV 7편)MBC 13편,SBS 9편 등으로 MBC와 SBS의 경우 전체 방송시간의 20%가량을 차지하고있다. 과다한 드라마 편수의 문제는 드라마의 불건전한 내용으로 이어진다.드라마 숫자가 많아지다 보니 내용도 비상식적이고 좀더 자극적인 쪽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늘고 있다.그런데도 방송사들은 이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안은 내놓지 않은채 기껏 편수를 1∼2개 줄이는 것으로 생색을 내고 있다.MBC의 경우방송모니터 단체와 시청자들로부터 항의를 받고 있는 ‘보고 또 보고’,‘사랑과 성공’같은 인기드라마는 손댈 생각도 않은채 아침드라마나 단막극 1편을 줄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SBS도 상대적으로 시청률이 낮은 아침드라마를 줄이기로 했다.그러나 이마저도 아직 확정짓지 못하고 ‘검토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연예·오락프로와 범죄재연프로를 줄인다고 했지만 방송위원회로부터 수차례 제재를 받은 ‘공개수배사건 25시’(KBS),‘다큐사건 파일’(SBS)‘기쁜우리 토요일’(〃) 등은 이번 개편안에 포함되지 않았다.방송사들이 지난 연말 머리를 맞대고 방송프로의 공익성 강화와 소모적인 시청률경쟁 지양을 합의한 것이 과연 순수하게 자발적인 의지였는지의 여부가 의심스러워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방송사의 개혁선언이 이번에도 헛구호에 그칠지,아니면 방송계 안팎의 우려가 기우로 판가름날지는 방송3사의 추후 행보에 달렸다.李順女 coral@
  • 75세 할머니 이혼소송 기각…순종 강요는 결별사유 안돼

    53년동안 함께 산 남편이 가부장적인 권위를 앞세워 무조건 순종을 강요한다는 이유로 70대 할머니가 낸 이혼 소송을 법원이 기각했다. 서울고법 민사10부(재판장 朴仁鎬부장판사)는 4일 A씨(75·여)가 남편 B씨(83)를 상대로 낸 이혼 등 청구소송에서 원심을 깨고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할아버지가 결혼 초부터 가부장적 권위를 내세워 할머니를 부당하게 대우하고 상당한 돈을 벌면서도 식비와 최소한의 생활비만대줘 쪼들린 생활을 하게 한 점은 인정된다”면서 “그러나 가부장적 권위는 혼인 당시의 가치기준을 감안해 볼 때 결혼생활을 파탄에 이르게 한 원인으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최근 들어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남자관계를 의심하고 각종 추태를 부린 점도 인정되지만 이는 고령에 따른 정신장애 탓인 만큼 할머니는 오히려 할아버지를 돌보고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덧붙였다.
  • 도약99 정치권 빅뱅-자민련 앞날과 내각제

    金鍾泌총리는 복귀할까.국민회의와 공조는 계속될까.새해 자민련에 던져진 정치 화두(話頭)들이다.상황은 여러 변수들로 얽혀 있어 예측키 어렵다. JP는 지난달 총리공관에 늑장 입주했다.총리로 더 있겠다는 뜻이다.올 3월 등 구체적 시기까지 거론되던 조기 복귀설은 무산됐다는 관측이 나온다.두가 지 배경이 깔려 있다.첫째 JP는 최근 ‘몽니(심술부리기)’를 화두로 던졌다 .몽니는 내각제가 목표다.맞은 편에는 金大中대통령이 자리한다.내각제 추진 에 가장 효율적인 위치가 총리자리라는 계산으로 연결된다. 둘째 당 복귀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JP는 자민련 최대 주주다.하지만 대 구·경북권 세력이 버티고 있다.중심에는 朴泰俊총재가 있다.이를 정리해야 한다.朴총재가 물러나게 되면 ‘팽(烹)’이다.金泳三전대통령에게 팽(烹)당 한 JP에게는 또다른 부담이다. 그러나 복귀설도 만만치 않다.두 사람간 자리바꿈을 주장하는 충청권 세력 들이 진원지다.朴총재체제에 대한 불만계층이다.이들은 내각제 추진을 놓고 朴총재체제에 의문을 제기한다. 자민련앞날은 내각제 개헌 성사여부에 달려 있다.그 결과에 따라 국민회의 와의 결별이 결정될 전망이다.현재로서는 개헌에 실패하면 공조를 깰 가능성 이 있다.신뢰도에 따라 가름될 것으로 여겨진다. 정계개편은 또다른 변수다.그에 따라 자민련 공조가치가 새로 매겨진다.여 전히 공동여당에 필요하다면 위상은 변함없을 것으로 전망된다.내각제 개헌 주장은 함께 거세질 수 있다.그렇지 않다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될 공산이 크 다.자민련의 소외감은 더 커질 것이고,공조도 위협받게 될 것같다. 朴大出 dcpark@ [朴大出 dcpark@]
  • 도약99 정치권 빅뱅-학자들의 전망

    대다수 정치학자들은 올해 정치권에서 대대적인 지각변동보다는 여권의 몸 집늘리기 차원에서 ‘작은’ 정계개편이 이뤄질 것으로 내다봤다.또 내각제 공론화로 다소 시끄러울 것으로 전망했다. 숙명여대 朴載昌교수는 “올 봄 정계개편은 국민회의가 의석수를 늘리는 것 으로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연세대 朴相基교수도 “국민회의는 전당대회 를 앞두고 제 1당이 되기 위해 야당의원 영입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전 망했다.다수당이 아닌 관계로 정국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그런만큼 국민회의는 개별입당을 통해 최대의석을 가진 정당 을 만드는 데 주력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숙대 朴교수는 또 “국민회의는 지역분할 전략을 쓸 것으로 보인다”고 말 했다.한나라당에서 영남권을 분리시키고 영남권도 대구·경북과 부산·경남 으로 쪼개 다당구도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서강대 孫浩哲교수는 “DJP결별은 쉽지 않다”면서 국민회의는 자민련과 연 대를 유지하면서 역(逆)3당통합구도를 시도할 지도 모른다고 전망했다. 내각제 공론화 움직임에 대해서는 엇갈린 반응이다.부산대 徐柱實 명예교수 는 “올 초부터 자민련의 내각제 공론화 공세가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가 위기상황에서 한고비 벗어나게 됨에 따라 경제를 이유로 약속한 정치 일정을 미루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설명이다.徐교수는 한나라당의 경우 정 치적 입지가 약화되면 내각제를 검토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반면 연대 朴교수는 자민련이 내각제 공론화에 불을 지피지만 큰 변동은 없 을 것으로 내다봤다.朴교수는 “자민련은 내부갈등 등으로 일사불란하게 정 치공세를 펼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이화여대 趙己淑교수는 “내각제 공론화여부는 정치적 상황에 따른 것이라기 보다 경제상황이 변수”라고 밝 혔다.서강대 孫교수는 “내각제를 고집할 것인가 아니면 대통령제로 갈 것인 가에 대한 DJP의 정치적 선택은 한나라당 내분이 변수”라고 지적했다.하지 만 내각제 문제로 여여(與與)간의 갈등이 고조될 것이라는 예상에 대해서는 한 목소리를 냈다. 崔光淑 bori@ [崔光淑bori@]
  • 도약99 정치권 빅뱅-정계개편 예상주역들

    올해의 정치무대를 주름잡을 인물은 누가 될 것인가.정치권 빅뱅을 앞두고 정가에서는 벌써부터 정계개편의 주역을 놓고 설왕설래중이다. 물론 누구도 쉽게 예단할 수 없지만 정계개편의 윤곽이 드러날 국민회의 5 월 전당대회를 주목하고 있다.요즘 정가에서 심심치 않게 터져나오는 ‘비호 남 대표설’이 단서다.동서화합과 전국정당화에 걸맞는 인물이 당의 얼굴이 돼야 한다는 당위성도 적지않다. 우선 TK(대구·경북) 출신의 李壽成전총리와 金重權청와대비서실장이 거론 되고 있다.李전총리는 ‘각계의 마당발’로서 金실장은 ‘신주류의 대표주자 ’로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중부권 대표론’으로 기치를 올렸던 李漢東의 원(한나라당)의 여권 합류설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DJ와의 전격 제휴가 성사될 경우 중부권에서의 그의 위상을 감안,상당한 ‘파괴력’을 과시할 것으로 보인다. 동교동 좌장격인 權魯甲전의원의 향배도 관심거리다.최근 ‘金重權-李鍾贊 라인’으로 이어지는 신주류 ‘강세’를 겨냥해 동교동계의 구심점이 될 것 으로 보인다.하지만 그동안 DJ 그늘에서 악역을 맡았던 權전의원으로서 전면 부상보다는 ‘막후실세’를 택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정계개편의 ‘막후 해결사’로 뛰었던 趙世衡총재권한대행,韓和甲총 무와 金令培부총재의 부상도 점칠 수 있다.비호남대표설이 현실화될 경우 韓 和甲총무의 사무총장 기용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金부총재의 경우 權전의 원 대신 동교동계의 ‘방풍역’으로 수석부총재 또는 공동대표에 전격 기용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DJ의 총애를 받고 있는 李康來정무수석도 정계 개편의 막후에서 조정역을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민주대연합 구상’이 가시화될 경우 국민회의 徐錫宰의원이나 한나라당 徐淸源의원 등도 막후 창구로서 적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반 면 李仁濟전지사의 경우 차기 대선주자를 꿈꾸며 ‘은인자중’의 모습을 보 일 것이란 분석이다. 한나라당의 경우 정계개편 과정에서의 비주류 향배가 주목된다.李會昌총재 와 결별을 선언한 金潤煥의원은 ‘TK 신당 창당’ 등 다양한 활로를 모색할 것으로 보이나 자금 등물리적 한계로 아직은 미지수다. 吳一萬 oilman@ [吳一萬 oilman@]
  • 한나라 ‘反 이회창’ 연대 움직임

    ◎기존 비주류·주류 이탈세력 합종연횡 등 모색/잦은 전화 접촉… 虛舟­李漢東 조만간 회동할듯/지분문제로 틈새 벌어진 KT도 反李 행보 태세 한나라당 내 ‘반(反)李會昌’ 기류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李漢東 전 부총재,徐淸源 의원 등 기존 비주류는 물론 金潤煥 전 부총재,李基澤 전 총재대행 등 주류 이탈세력까지 ‘반李’ 노선을 고리로 비주류 연대를 모색할 조짐이다. 계파간 이해관계가 장애요인이지만 어떤 형태의 합종연횡이든 향후 정국상황과 맞물려 李총재 체제에 적지않은 파괴력을 지닐 전망이다. 2박3일간 고향방문을 마치고 지난 5일 상경한 金전부총재는 李총재와의 정치적 결별과 비주류 참여를 기정사실화하고 사태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한 측근은 6일 “비주류 연대를 주도하거나 먼저 제의하지는 않겠지만 기존 비주류세력들과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미 李漢東 전 부총재 쪽에서 여러차례 전화로 만나자는 연락을 한 것으로 알려져 조만간 회동이 성사될 예정이다. 당직 인선 과정에서 옛 민주당의 ‘지분’문제로 李총재와 틈이 벌어진 李전대행도 “한번 총재가 됐다고 영원히 총재라는 태도로 당을 운영하면 오류를 범한다”고 李총재를 비판하며 비주류쪽을 기웃거리고 있다. 金전부총재나 李전대행은 李총재 체제 출범의 ‘주력군’이라는 점에서 선뜻 행동을 구체화하는 데 부담을 느끼고 있지만 당 안팎의 여건이나 명분이 무르익으면 언제든 본격 행보에 나설 태세다. 기존 비주류세력의 행보에도 가속이 붙고 있다. 李전부총재는 최근 경기도지역 의원과 후원조직인 ‘21동지회’ 등과 잇따라 모임을 갖고 ‘반李’ 결속을 다졌다. 徐의원과도 지난 3일 골프회동을 통해 비주류 연대와 관련,교감을 나눴다는 전언(傳言)이다. 당내 차세대 기수로 꼽히는 姜在涉·姜三載·徐淸源 의원 등도 지난 1일 회동한 데 이어 세확산에 시동을 건 상태다.
  • “내각제 개헌 대통령 임기말에”/虛舟 기자간담회서 밝혀

    한나라당 金潤煥 전 부총재는 3일 “李會昌 총재와는 더 이상 타협도,화해도 없다”며 사실상 결별을 선언했다. 金 전 부총재는 이날 낮 대구시내 음식점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하고 내각제 논의와 관련,“내각제는 현대통령의 임기말에 개헌을 통해 실현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내가 대권후보로 만들어 준 李총재가 비록 대권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지난 2년 반 동안 나는 그를 위해 정치를 해왔지 않느냐”면서 “당을 위해 굳게 약속한 정치적 신의를 저버린 데 대해 용서할 수 없다”고 李총재를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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