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결별
    2026-03-1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6,800
  • 연애 오래하고 싶다면 트위터를 멀리하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인 트위터를 자주 사용하는 사람일수록 연인과의 관계가 빨리 끝나는 경향이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20일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인터넷판에서 이성과의 짝짓기 사이트인 ‘오케이큐피드’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한 ‘오케이트렌즈’ 조사에서 트위터를 더 자주 하는 사람일수록 이성관계를 지속하는 정도가 더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매일 트위터를 사용하는 사람의 경우 트위터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과 비교할 때 이성관계를 지속하는 기간이 약 1개월 정도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오케이큐피드 사이트 이용자 83만 3987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이 같은 현상은 전 연령대(18∼50세)에 걸쳐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오케이큐피드는 그러나 “조사결과만 놓고는 누가 결별을 선언하는지 알 수 없고, 트위터를 하는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비호감인지, 자유분방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작 트위터 이용이 잦은 사람일수록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자기애에 몰두하는 시간이 두배나 되는 것으로 분석됐다. 또 다른 흥미로운 추세로는 부모가 지출하든 스스로 지출하든지 간에 교육에 더 많은 돈을 쓰는 사람일수록 더 자주 성관계를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5) ‘북학의’ 박제가

    [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5) ‘북학의’ 박제가

    박제가(그림·1750~1805)는 ‘서얼’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서얼은 신분상의 제약과 차별 때문에 실력을 갖추어도 기량과 경륜을 펼치기 어려웠다. “우리를 믿지 않고 소인이라 하니, 무한한 마음속 계책 누구에게 말해 볼까?”라는 고민은 박제가에겐 숙명적인 것이었다. 박제가는 양반이면서 양반이 아닌, 경계인으로서 그 ‘존재성’에 대해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박제가는 사회적 차별에 굴하지 않았다. “고독하고 고매한 사람만을 골라서 남달리 친하게 사귀고, 권세 많고 부유한 사람은 일부러 더 멀리하며”(정유각집 ‘소전’편) 차라리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패기와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시대와 불화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당대의 사람들이 지당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인습에 저항했다. ‘아교로 붙이고 옻칠을 한 눈꺼풀’을 떼어내고 천하를 응시하여 ‘심지를 열고 이목을 넓히라.’고 외쳤다. ●이덕무 “답습한 시는 가짜 시다” 박제가는 출세에 연연하지 않았다. 대신 당대 최고의 지성들과 나누는 우정의 향연 속에서 학문을 배우고 시와 글씨와 그림을 연마했다. 박제가에게 친구는 ‘기운을 나누지 않은 동기요, 한 집에 살지 않는 부부’였다. ‘나와는 둘이면서 하나인’ 이덕무, 박지원, 홍대용, 유득공, 이서구, 서상수, 유금, 백동수와 같은 친구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고 두려울 것이 없었다. 이런 친구들이 있어 박제가는 세상의 시와는 다른 시를 거침없이 쓸 수 있었다. “세대마다 시가 있고 사람마다 시가 있는 법이어서 시는 서로 답습할 수 없다네. 답습한 것은 가짜 시라네.”라고 채찍질한 이덕무와 같은 친구가 그의 곁에 있었다. 1700수가 넘는 시 작품엔 박제가와 이 멘토들의 우정의 숨결이 함께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박제가는 고군분투했다. 틀에 박히고 고루하고 진부한 시와 문장을 혐오하며 나만의 글쓰기를 찾아 나섰다. 당시 선비들은 두보의 시를 최고로 여겨 배웠고, 다음은 당나라 시, 그 다음은 송나라·금나라·원나라·명나라 시를 배웠다. 박제가가 보기에 전범에 매달리는 글쓰기는 남이 한 말의 찌꺼기나 줍는 행태에 불과했다. 자기 시대의 현장을, 자기의 말로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시요 문장이었다. 역설적으로 나만의 글쓰기를 개척하는 것이 진정 고인의 글쓰기에 다가가는 길이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모두 시다. 사계절의 변화와 온갖 만물의 웅성거리는 소리, 그 몸짓과 빛깔, 그리고 음절은 그들 나름대로 존재하고 있다.”(‘형암선생시집서’·炯菴先生詩集序) 지금-여기 살아 있는 만물 각각의 미묘한 움직임과 그 지극한 경지를 포착하는 것. 이것이 시의 출발이다. 사물에 대한 미세하고도 예리한 관찰은 시인에게는 절대적인 지상과제였다. 그랬기 때문에 당대의 문장을 순정한 문체로 되돌리겠다는 정조의 강력한 의지에 부응하여 반성문을 제출하면서도, ‘자송문’(自訟文)에 어울리지 않게 반성은 하지 않고 항변에 열을 올렸다. “소금이 짜지 않고, 매실이 시지 않고, 겨자가 맵지 않고, 찻잎이 쓰지 않음을 책망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런데 만약 소금, 매실, 겨자, 찻잎을 책망하여 너희들은 왜 기장이나 좁쌀과 같지 않으냐고 한다든지, 국과 포를 꾸짖어 너희는 왜 제사상 앞에 가지 않느냐고 한다면 그들이 뒤집어 쓴 죄는 실정을 모르는 것입니다.”(‘비옥희음송인’·比屋希音頌引) 하나의 틀에 갇히지 않은 다양한 맛의 문장! 이것은 박제가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글쓰기의 보루였다. 이는 당대의 복고, 혹은 의고문에 저항하는 방식이었으며, 더 나아가 만물의 보편 원리나 질서를 따르는 당대 성리학의 이념을 무용하게 만드는 길이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을 동일하게 만드는, 오직 하나의 방식만을 강요하는 그 시대 ‘권력’에 맞서는 방법이었다. ●청나라 선진 문물 도입이 부국강병의 길 박제가는 29세 때인 1778년 사은사 채제공의 종사관 자격으로 중국에 가게 된다. 곳곳에서 맞닥뜨린 청나라의 문명은 실로 눈이 부실만큼 풍요롭고 세련되고 화려했다. 청나라는 더 이상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균·이조원·반정균·옹방강·나빙·이정원 등 청나라의 학술부흥운동을 주도한, 명망 있는 지식인들이 일개 조선의 선비와 흉금을 터놓고 학문을 논하자, 그들의 자유로움과 벽 없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제가는 패러다임을 완벽하게 전환한다. 가난한 조선, 비문명국 조선의 갈 길은 북벌이 아니라 북학이라고. 진정한 오랑캐가 누구인지 먼저 분간하고 우리 안에 있는 진짜 오랑캐를 물리치기 위해 청나라를 힘써 배워야 한다고. 박제가는 ‘가난’을 싫어했다. 권력에 아부하기 싫어 ‘차라리’ 가난하게 산 것이지 가난을 편안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 장인 이관원이 검소하게 살라고 말하자 이렇게 대꾸했다. “침향목과 단목으로 저를 조각하고 색실로 저를 수놓아 열 겹으로 싸서 간직하여 길이 후세에 전해 사람마다 보게 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집에서 소쿠리 밥에 표주박 물을 마시며 해진 솜옷을 입고 살면서도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는 듯 지내는 것이 어찌 본마음이겠습니까?” 박제가에게 ‘안빈낙도’는 자신을 속이는 말이었다. 명분에 매이지 않고 욕망에 솔직했던 박제가. 청나라에 다녀온 이후 그는 확신했다. 조선의 빈곤 타파와 갑갑한 습속의 개혁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워야만 가능함을. 이 때문에 연행을 다녀온 직후 ‘북학의’를 저술한다. 이 책에는 청나라의 수레, 기와, 벽돌, 수차, 화폐, 종이, 의복, 문화예술 등을 적극적으로 배워 조선을 부강한 문명국으로 이끌고 싶다는 박제가의 패기가 넘쳐난다. “꽃에서 자란 벌레는 그 날개나 더듬이조차도 향기가 나지만 똥구덩이에서 자란 벌레는 구물거리며 더러운 것이 많은 법이다. 사물도 본래가 이러하거니와 사람이야 당연히 그러하다. 빛나고 화려한 여건에서 성장한 사람은 먼지 구덕의 누추한 처지에서 헤어나지 못한 자들과는 반드시 다른 점이 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우리나라 백성의 더듬이와 날개에서 향기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북학의’) 가난하고, 학문은 고루하고, 견문은 좁고, 문화는 촌스럽기 짝이 없는 조선. 박제가는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조선이 풍요롭고 세련된 문명 세계가 되기를, 조선 백성의 더듬이와 날개에서 문화의 향기가 넘쳐나기를. 박제가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는 물질적으로도 풍요롭고, 문화적으로도 향기 나는 사회다. 재화의 유통이 활발하고, 사치가 가능하며, 문화적 수준도 상당한 사회. 박제가는 문화예술과 사치품에 관해 논할 때 도덕주의적 관념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예술의 아름다움과 사치스러움은 재화와 물품을 마르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 순간 조선의 선비 박제가는 소박하고 질박한 생활을 표상했던 유학적 가치와 완전히 결별한다. 박제가는 더 나아간다. 조선이 빠르게 청나라에 맞서는 문명국이 되려면 언문이 일치되는 중국어(북경어)를 사용하잔다. 영어공용론에 맞먹는 상상력이다. 중국어를 제2의 국어로 사용하자는 제안은 실로 급진적이다. 그에게는 조선 땅이 너무 좁았으며 조선의 현실이 너무 답답했다. 문명세계를 향한 박제가의 욕망은 중국어공용론으로 거리낌 없이 내달린다. 이런 정황상 북벌을 절대 이념으로 수호했던 당대 선비들이 이 열혈 북학자에게 당괴(唐魁) 혹은 당벽(唐癖)이라는 비방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으리라. ●너무 조숙한 세계주의자… ‘나’를 둘러싼 사회와 세계는 늘 살아 움직이고 변화한다. 어떤 고정된 틀에 얽매여 변화를 보지 못하고 인습적 규범에 갇혀 있다면 그건 진흙 소상을 모방하는 일과 같을 것이다. 박제가는 그 단단한 습속의 벽과 온몸으로 맞서 싸웠다. 비겁하지 않게 직설과 독설로 맞섰다. 그러나 박제가는 지나치게 조숙한 문명주의자요, 세계주의자였다. 북학파 중에 가장 급진적이었고 가장 앞서 나아갔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문명세계를 향해 돌진했다. 어쩌면 조선의 ‘현재’와 ‘새로운’ 문명 사이를 조율할 수 있는 천리안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비호해주던 정조의 죽음 직후 박제가는 대비 김씨와 노론의 영수 심환지를 비방하는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당한다. 그는 외롭게 고투했다. 그가 희망한 바, “1000년 뒤에도 1000만명의 사람들과 다른 한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길진숙 수유+너머 강원 연구원
  • 결별 후유증에···이종수 미국 어학연수 떠난다

    결별 후유증에···이종수 미국 어학연수 떠난다

     조미령(38)과 결별한 탤런트 이종수(35)가 이 달 미국으로 1년 어학연수를 떠난다.  14일 복수의 연예매체에 따르면 이종수의 한 측근은 “종수씨가 오는 20일쯤 미국으로 출국한다. 선배들에게 조미령과 결별 사실을 알렸고 더 늦기 전에 1년 정도 어학연수를 받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종수는 출국 수속을 모두 마쳤다. 갑자기 미국 유학을 결심한 것은 조미령과의 결별 때문. 1995년 MBC 24기 공채 탤런트 동기였던 두 사람은 지난 연말 연인이 됐고, 오는 6월 결혼을 위해 양가 어른의 허락을 받는 과정에서 헤어졌다.  이종수의 지인은 “종수씨가 결별 스트레스 때문에 힘들어 했고 미령씨에게 죄스러운 마음까지 갖고 있다. 머리도 식히고 평소 가고 싶었던 어학연수를 더 늦기 전에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NATE 검색어로 본 e세상 톡톡] 방사능비 문제없나 맘 졸이고 말뿐인 기름값 인하에 화나고

    [NATE 검색어로 본 e세상 톡톡] 방사능비 문제없나 맘 졸이고 말뿐인 기름값 인하에 화나고

    가슴 졸일 만한 일들이 많아서였을까. 통상 연예인들의 자질구레한 사생활과 관련된 소식이 많았는데, 지난주 검색어 순위에는 사회성 짙은 소식들이 대거 포진했다. 1위엔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로 인한 방사능비 소식이 올랐다. 지난 7일 내린 비에서 방사성물질이 검출되면서 도대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이상 없다는 정부 발표와 전문가 주장을 믿어도 되는 것인지를 두고 많은 논란이 벌어졌다. 2위에는 실생활과 가장 밀접한 기름값 인하가 올랐다. 정부의 강공에 SK에너지가 7일부터 ℓ당 100원씩 내렸다. 그러나 직영점에만 해당된다는 얘기가 알려지면서 또다시 논란을 불러왔다. ●카이스트 자살·이화여대 채플 거부도 핫이슈 4위에는 카이스트생 자살 소식이 올랐다. 연달아 4명이 자살하면서 과감한 변신을 진두지휘하던 서남표 총장의 ‘개혁’이 기로에 섰다. 논란의 핵심인 ‘징벌적 수업료’(성적에 따른 수업료 차등 부과) 제도는 다음 학기부터 폐지하기로 했지만 세계적 수준의 학생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 방향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뜨겁다. 5위는 이화여대의 채플 수업 거부 운동이 차지했다. 이대는 등록금 비싸기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올해 또 등록금이 2.5% 인상되자 총학생회는 등록금 동결을 요구하면서 아예 졸업 필수과목인 채플을 거부해 버렸다. 7위에는 재일동포 출신의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이 대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100억엔(1300억원)을 기부했다는 소식이 올랐다. 이는 일본 의류 브랜드 ‘유니클로’의 야나이 다다시 사장이 내놓은 10억엔을 훌쩍 뛰어넘는 액수다. 회사 돈이 아니라 사재를 털었다는 점에서 더 화제를 모았다. ●김혜수·유해진 결별… 이은미 결혼 희비 엇갈려 3위에는 배우 김혜수·유해진 결별 소식이, 6위에는 가수 이은미 결혼이 올라 희비가 엇갈렸다. 3년간 만나온 것으로 알려진 김-유 커플은 ‘미녀와 야수’라는 별명을 얻으며 결혼으로 이어질지 관심을 모았지만 결국 결별을 택했다. 이은미는 20년간 친구로 지내온 재미교포 사업가와 지난 1월 결혼한 사실을 뒤늦게 공개했다. 특이한 사람들을 소개하는 케이블채널 tvN의 ‘화성인 바이러스’ 프로그램에 10년 동안 이를 닦지 않은 ‘누렁이녀’의 등장 소식(9위)도 클릭을 끌어냈다. 10위에는 MBC ‘위대한 탄생’의 점수 비공개 방침이 올랐다. 지난 8일 권리세와 황지환이 첫 탈락자로 선정됐는데, 제작진은 이어지는 투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점수는 빼고 탈락자 이름만 공개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전진-채민서 결별설 ‘진실게임’…누구말이 사실?

    전진-채민서 결별설 ‘진실게임’…누구말이 사실?

     “7개월간 사귀다 최근 헤어졌다.”  “사귄적도 없는데 무슨 결별이냐.”  탤런트 채민서와 가수 전진이 결별설을 놓고 엇갈린 주장을 내놓고 있다.  채민서는 7일 일간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전진과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채민서는 “최근 드라마를 찍고 스타화보를 발표하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전진은 공익근무요원이라 활동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며 “오해를 풀어야하는데 서로 바쁘다보니 소홀해 졌던 것 같다.”고 결별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전진측은 채민서의 발언이 사실이 아니라며 반박하고 나셨다. 전진의 소속사인 오픈월드 엔터테인먼트는 열애설이 불거진 지난 11월에도 “두 사람은 절대 사귀는 사이가 아니다.”라며 “여러명이서 함께 두번 정도 식사를 했을 뿐 선후배 관계 이상은 아니다.”라고 말했었다.  이날 채민서의 갑작스러운 결별 발언에 오픈월드는 “지난해에도 분명히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했는데 왜 갑자기 이런 얘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전진으로부터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밝혔다. 이어 “소속사가 소속 연예인의 사생활까지 알고 있을 수는 없지만 채민서와의 열애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소속사는 “채민서가 왜 전진과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하는지 저의가 의심스럽다.”며 “아직 채민서측에 직접 항의는 하지 않았지만 왜 이런 인터뷰를 했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유럽·英·日 중앙은행 제 갈길 간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공조체제를 유지해 왔던 주요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결별’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세계 경제가 상당히 개선돼 국제적인 정책공조에 대한 필요성이 줄어든 데다, 각국이 처한 경제 상황에 차이가 있다 보니 공조틀이 느슨해지는 것이다. 세계금융시장의 눈은 오는 7일(현지시간) 열리는 유럽중앙은행(ECB)과 영란은행, 일본중앙은행 등 3개 주요 선진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회의에 쏠려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들 3개 중앙은행은 지금까지의 공조체제에서 벗어나 각각의 길을 선택할 것으로 전망된다. 가장 이목이 쏠려 있는 회의는 ECB 회의다. ECB는 이날 회의에서 지난 2009년 5월 이후 1%로 유지해 온 조달금리를 1.25%로 0.25%포인트 인상할 가능성이 높다. 금융위기 이후 서방 주요국 중앙은행으로는 처음으로 금리를 인상하는 것이어서 상징적인 의미가 적지 않다. ECB 측은 금리 인상 필요성의 근거로 물가 상승을 든다. 유로권 인플레이션은 지난 4개월 목표치인 2%를 훨씬 웃도는 2.6%를 유지하고 있다. 영란은행은 금리를 0.5%포인트에서 동결할 것이 확실시된다. 물가상승률이 4.4%로 목표치인 2%를 웃돌아 돈줄을 죌 필요성이 제기되지만 이보다 경제 성장에 미칠 영향이 우선적으로 고려되고 있다. 일본중앙은행(BOJ)은 사실상 제로인 현금리를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지진 여파로 당분간 경제가 침체될 가능성이 커 오히려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금융권에 돈을 풀 것으로 전망된다. 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 김혜수·유해진 “우리 헤어졌어요”

    김혜수·유해진 “우리 헤어졌어요”

    톱스타 김혜수(왼쪽), 유해진 커플이 열애 3년 만에 결별했다고 소속사가 4일 밝혔다. 김혜수 소속사인 GF엔터테인먼트 김남형 대표는 “오전에 결별설 기사가 나서 김혜수씨와 통화했는데 결별한 게 맞다고 들었다. 개인적인 일이라 자세한 것은 전혀 모르겠다.”고 말했다. 유해진의 소속사인 심엔터테인먼트의 최명규 이사도 “두 사람이 헤어진 건 사실이다. 세부적인 이야기는 나누지 못해서 언제, 왜 헤어졌는지는 모른다.”고 전했다. 김혜수와 유해진의 결별 사유는 아직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충무로 연예 관계자들 사이에선 결혼에 대한 서로의 입장 차이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이 오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두 소속사 모두 이에 대해 “결별 이유나 시기 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묻지 못했다.”고 밝혔다. 2001년 영화 ‘신라의 달밤’에서부터 인연을 맺어 온 두 사람은 2006년 영화 ‘타짜’를 촬영하면서 친구에서 연인으로 급진전됐다. 지난해 초 열애 사실을 인정해 ‘미녀와 야수’ 커플로 불렸다. 이들은 연예계 공식 커플로 사랑을 키워 가며 ‘결혼했으면 하는 커플’ 1위에 선정되는 등 관심을 받아 왔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김혜수의 동생 김동희의 결혼식에 유해진이 불참하면서 결별설이 돌았다. 한편 유해진은 지난달 홀로 한달간 호주 여행을 다녀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연예계 일각에서는 “마음 정리를 위한 여행이었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김혜수-유해진 커플 1년만에 결별···소속사 확인

    김혜수-유해진 커플 1년만에 결별···소속사 확인

    배우 김혜수(41)-유해진(41) 커플이 결별했다고 양측 소속사가 4일 밝혔다. 이들의 소속사는 “오늘 오전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이후 결별 사실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김혜수 소속사인 GF엔터테인먼트 김남형 대표는 “결별설 기사가 나서 김혜수씨와 통화하니 결별한 게 맞다고 들었다. 개인적인 일이라 자세한 것은 전혀 모르겠다.”고 말했다.  유해진 소속사 심엔터테인먼트 최명규 이사도 “헤어진 게 사실이다. 세부적인 이야기는 나누지 못해 언제,왜 헤어졌는지는 모른다.”고 확인했다.  영화 ‘타짜’에 함께 출연한 이들은 지난해 초 열애 사실을 인정해 ‘미녀와 야수’ 커플로 불렸으나 1년여 만에 결별을 선언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김혜수-유해진 결별? 만남도 이별도 ‘뒤늦게’ 이유는

    김혜수-유해진 결별? 만남도 이별도 ‘뒤늦게’ 이유는

    [스포츠서울닷컴ㅣ문다영 기자]국내 톱스타 커플 배우 김혜수(41)와 유해진(42)의 결별설이 불거졌다. 4일 스타뉴스는 김혜수와 유해진이 결별했다고 밝혔다. 소속사 측은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지 않은 상태지만 연예계 관계자들은 “이제야 알려졌다”며 인정하는 분위기다. 이들의 결별설은 지난해 연말부터 불거져 나왔다.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유해진 수상에 김혜수가 손키스를 날리는 등 애정을 과시했지만 이때부터 두 사람이 이미 결별했다는 설이 나돌았다. 뒤이어 12월 김혜수 동생 김동희 결혼식에 유해진이 참석하지 않으면서 결별설에 힘이 실렸다. 영화계 관계자들 역시 지난 연말에서 올해를 넘어오며 두 사람이 연인에서 동료로 돌아갔다고 전했다. 또 크게 감정 상하지 않고 서로 잘 지내고 있다는 전언이다. 두 사람이 이별하게 된 이유에 대해 기획사에서 공식적 입장을 밝힌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로 연기에 대한 열정이 깊기 때문에 이별하게 됐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적 의견이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김혜수는 MBC드라마 ‘즐거운 나의 집’ 촬영에 바빴고, 유해진 역시 ‘적과의 동침’ 등 영화 촬영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면서 서로에게 소원해졌고, 결국 2월 말쯤 이별하게 됐다고. 특히 두 사람의 열애가 알려질 당시에도 업계에서 소문이 파다했지만 1년이 훌쩍 지나서야 알려졌던 터라 결별마저 뒤늦게 알려진 것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그만큼 김혜수와 유해진이 서로에 대한 배려가 깊었고 신중했다는 의미다. 한편 ‘미녀와 야수’로 불렸던 김혜수-유해진 커플은 지난해 1월 김혜수가 소속사를 통해 열애 사실을 인정하며 공식 커플이 됐다. 이후 상대에 대한 애정을 보이며 당당한 사랑을 보여 왔다. 현재 두 사람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 연기에 더욱 매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결별설을 전해 들은 네티즌들은 “안타깝다”, “앞으로도 좋은 모습을 보여 달라”는 등 아쉬워하면서도 두 사람을 응원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와 관련해 소속사 측은 “개인사라 전혀 몰랐다”며 “확인 후 공식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했다. dymoon@media.sportsseoul.com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스포츠서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스포츠서울에 있습니다
  • [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3) ‘신문화운동의 기수’ 최남선

    [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3) ‘신문화운동의 기수’ 최남선

    1906년 3월, 17세의 최남선은 일본 와세다대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초행길은 아니었다. 이태 전인 1904년에도 그는 일본을 다녀간 적이 있었다. 그는 대한제국 황실유학생단의 최연소 유학생이자 반장이었다. 당시 열 다섯이었던 소년의 눈에 비친 일본은 이전까지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듣던 과거의 일본이 아니었다. 그곳은 눈부신 신세계였다. 그 신세계의 거리에서 소년은 서점 유리창 너머로 매달 쏟아지는 수십 종의 잡지들에 매혹당했다. 소년에게 그것은 문명의 상징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그리고 남들보다 비교적 일찍 시도된 그의 유학생활은 모두 짧게 끝이 났다. 도쿄부립 제1중학에서의 첫 번째 유학은 조선유학생들의 무질서와 준비 부족 때문에 석 달만에 중단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 유학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갑작스레 파국을 맞았다. 문제의 발단은 와세다대 법정학부 학생들의 모의국회였다. 망해 버린 조선왕이 일본을 방문한다면 어느 정도의 의전을 갖추어야 하는가를 주제로 했던 것. 이 사건은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 유학생들에게 심한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최남선은 조선 유학생 대표로 총퇴학을 주도하는 등 강경 대응했지만, 결국 학교를 자퇴해 버렸다. ●‘소년’ 창간 통해 대륙 중심 패러다임 바꿔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학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지만 문명에 대한 열망은 그후로도 오랫동안 최남선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소년은 스스로를 ‘신보잡지광’(新報雜誌狂)이라 자처했다. 얼마 후, 소년은 신세계로부터 최신 인쇄기를 구입하고 인쇄를 위한 전문 식자공까지 대동하여 그렇게 바다와 함께 귀국했다. 신문명의 메카임을 자부하는 인쇄소 겸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은 이렇게 탄생되었다. 그리고 1908년 11월 1일, 바다 건너편의 것이었던 문명은 지금 이곳에서 최초의 근대적 잡지 ‘소년’(少年)이 되었다. ‘소년’은 최남선 1인 잡지였다. 일본을 경유한 새로운 지식들은 편집자 최남선을 거치면서 또 한번 선별되고 분류되어 마침내 전파되었다. 이 시기 최남선은 그 자체로 근대 지식의 매체(미디어)였다. 최남선은 일본 유학 시절 구입한 많은 신간 서적들과 당대 잡지들에 등장하는 담론들을 번역했을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그만큼의 글을 썼다. 문명은 그렇듯 지식을 통해 식민지 조선으로 유입되었다. 창간호에 실린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도래하는 문명의 힘과 미래에 대한 최남선의 태도와 각오가 잘 드러나있다. ‘텰썩 텰썩 텩 쏴’ 하는 파도와 함께 밀려오는 바다의 위력 앞에서는 ‘큰 산이나 거대한 바윗돌’ 같은 무엇도, ‘아무리 권세를 가진 누구’도 힘없이 쓸려버리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돌이킬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시대의 조류이기에 끝내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그 어마무지한 새 기운이 대륙이 아닌 바다로부터 온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유사 이래 수천년간 대륙만을 바라보고 있던 반도 조선의 정수리를 내리치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日제의 만주건국대학 교수직 수락 지조냐 학자냐의 양자 중 그 일을 골라잡아야 하게 된 때에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으라고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학업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버렸다. 대중의 나에 대한 분노가 여기서 시작하여 나오는 것을 내가 잘 알며 그것이 또한 나를 사랑함에서 나온 것임도 내가 잘 안다(‘자열서’(自列書) 중). 신문관 창립 이후 3·1운동까지 10여년간, 최남선은 자타가 공인하는 신문화운동의 기수였다. 하지만 ‘기미독립선언서’의 작성자로 3년여의 수감생활을 마친 후 그는 지조와 학자의 길 사이에서 학업을 선택한다. 학자로서의 최남선은 민족주의로 나아갔다. ‘조선역사통속강화’(1922)를 시작으로 최남선은 ‘불함문화론’(1925), ‘단군론’(1926), ‘살만교차기’(1927) 등 굵직한 역사 연구 저술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이들은 모두 ‘단군에 기원한 조선 역사’라는 그의 민족주의 역사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뼈대였다. 동시에 그는 ‘풍악기유’(금강산, 1924), ‘심춘순례’(지리산, 1925), ‘백두산근참기’(1927), ‘금강예찬’(1928) 등 조선의 산천을 둘러보고 이에 대한 기행문을 남겼다. 그에게 있어 기행문은 여행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순례기였다. 민족은 그에게 이념이었고, 그는 이념에 입각한 자신의 이러한 작업을 조선학(朝鮮學)이라고 불렀다. 그가 했던 연구의 중심에는 언제나 조선 민족이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그가 버린 지조란 무엇이었을까. 대중들이 열망했던, 그리고 그 자신이 지켜오던 지조란 바다를 통해 흡수하려던 문명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최남선에게 그 문명은 일본제국주의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바다를 맞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눈을 돌려 대륙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지조를 바칠 만한 어떤 것도 없는 현실. 그렇기에 최남선은 지조있는 학자가 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지조 그 자체를 ‘휘뿌리고’ 학자의 길을 택한다. 그가 가고자 했던 학자의 길은 바다도 대륙도 아닌 새로운 지반에 대한 탐사였다. 모든 지조가 사라진 자리, 그 자리에 세울 새로운 시공간. 학자란 새로운 시공간의 발굴자들이었다. 최남선은 지조가 불가능한 현재를 버리고 과거 속으로 침잠한다. 문명화되어야 할 미래의 민족을 등지고, 대륙 바라기 조선의 시간을 넘어 순정한 시간, 그 태초의 시간인 단군으로 그는 깊숙하게 달려 들어갔다. 어느 순간 최남선은 그 태초의 시공간 속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순정한 지반이란 건 현실 위에서는 세워질 수 없었다. 문명이란 바다를 통해 조선을 덮치던 제국주의의 시대. 그 바다 앞에 쓰러져간 ‘큰 산이나 거대한 바윗돌’처럼, 그의 세계는 무력했다. 바다를 동경했던 ‘담 크고 순정한 소년’. 그 담대함으로 바다를 버리고 순정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소년. 하지만 그 소년이 도착한 곳은 결국 바다의 친구였다. 1939년 4월, 최남선은 만주 건국대학의 교수 자리를 받아들인다. ●노년엔 민족주의와 결별 최남선은 그가 도착했던 태초의 시간에서 한발 더 나아가고자 했다. 그는 샤먼(살만교) 및 민족주의와 결별한다. 그리고 1955년 최남선은 가톨릭에 귀의했다. 어쩌면 최남선에게 그곳은 샤먼과 민족 등이 없는 시공간, 아니 모든 시공간이 탈각된 지각 불가능한 무엇은 아니었을까. 최남선은 말한다. “민족이란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도 아니며, 당연히 있어도 안 될 것이요, 다만 ‘대립’의 의식으로만 성립된 것”이다. 민족 개념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며 인류의 평등한 평화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건, 진실한 마음에 입각하여 이전의 가치를 완전히 쓸어버리는 민족혁명이다. 갈등과 대립을 일으키는 모든 지조를 쓸어버릴 것! 그에게 가톨릭은 “평화가 아닌 칼을 통해 불의를 없애고 정의를 세우는 교문(敎門)”이었다. 최남선이 지조 대신 학자를 선택한 것은 격변의 시대를 피해 달아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단적인 예로 그는 일생 동안 단 한순간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학자로서 자신의 시대를 덮쳐오던 바다와 맞섰다. 현실을 뚫고 나갈 새로운 시공간을 발굴하는 지식인 최남선. 하지만 언제나 자신이 발굴한 그 시공간 속에 갇히고 방향을 잃을 위험에 놓인 지식인. 최남선은 끊임없이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숙명을 가리키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현재를 넘어서고자 하나 너무도 쉽게 현실에 포획되고 마는! 문성환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 국민참여당 참여정책연구원장 유시민 “민주당에선 정치 혁신 이룰 가능성 없어”

    국민참여당 참여정책연구원장 유시민 “민주당에선 정치 혁신 이룰 가능성 없어”

    국민참여당의 차기 당 대표로 사실상 확정된 유시민 참여정책연구원장은 “지금 다시 민주당에 가거나 민주당과 통합한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간 길을 뒤따라 가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노 전 대통령이 가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유 원장은 지난 1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이 갔던 길은 대통령이 되는 데는 유리했는지 모르지만, 정당지형·선거구도·정치문화 혁신은 결과적으로 실패하지 않았느냐.”면서 “민주당 안에서 그런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전망, 확신, 그런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의 유 원장 집필실에서 이도운 정치부장과의 대담으로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진행됐다. 대담 이도운 정치부장 / 정리 구혜영·강주리기자 ●국민참여당과 4·27 재보선 →19일 당 대표에 취임하게 된다. 어떤 목표와 비전을 갖고 당을 이끌 것인가. -중요한 건 2012년 권력교체다. 권력교체를 하려면 야권이 단결해야 한다. 우선 당의 역량을 키우는 데 주력하겠다. →야권연대에 비중을 두면 국민참여당이 임시 정당이라고 오해받지 않을까. -야권의 혁신, 정치지형의 정상화, 지역주의·양강주의를 혁파하는 것, 진보의 집권, 이런 것들이 장기적 목표다. 그러나 매 시기 국민이 강력히 요청하는 과제를 해결해야만 장기적 목표에 접근할 수 있다. →국민참여당은 ‘친노 정당’인가.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참여당의 전부를 설명하는 건 아니다. 참여정부의 정치철학을 계승·발전하면서 노 전 대통령이 못했던 것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4·27 재·보선 전체를 아우르는 흐름은 무엇이라고 보나. -내년에 의회 권력 및 정권의 교체가 어떻게 하면 이뤄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선거다. 진보개혁 정당들이 실효성 있는 야권연대를 만들지 못하면 내년 선거도 안 된다. 일종의 시금석이다. →시·도당 대회 등을 거치면서 지켜본 표심의 흐름은 어떤 것인가.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정권이 너무 못하기 때문에 남은 기간 잘하도록 경고를 주라는 요구가 많다. 두 번째는 정권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두 흐름이 중첩돼 있다. →김해을 선거가 ‘이명박 대 노무현’, ‘김태호 대 유시민’의 대결이라고도 한다. 동의하나. -김 전 경남도지사가 한나라당 후보로 확정되면 김태호와 이봉수(참여당 후보)의 대결이며, 이명박 대통령과 김해 시민의 대결이다. 결국 집권 세력과 김해 시민의 대결이다. →민주당 일각에서 손학규 대표가 분당을에 나가야 한다고 하는데. -분당을의 민심이 예전과 다르다. 지난해 6·2 지방선거에서 나와 김문수 지사의 득표율 차이가 10%포인트 밖에 나지 않았다. (유 원장은 인터뷰가 끝나고 가진 오찬에서 “손 대표가 분당을에 나가면 강원, 김해을, 순천 등 재·보선 전 지역에서 야권이 이긴다.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나의 득표율이 44%였는데, 손 대표가 44% 이상 못 받겠나.”라고 말했다.) ●2012년 대선과 야권 연대 →4·27 재·보선 이후 내년 총선과 대선까지 정치권이 어떻게 흘러갈 것으로 보나. -1987년 이후 5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3번은 보수 진영이, 2번은 진보개혁 진영이 이겼다. 그런데 지금까지 대선에서 보수 진영은 한번도 단결했던 적이 없다. 진보개혁 진영은 단일화 방식으로 보수 일부와 결합해 겨우 이겼다. 내년 선거에서도 보수는 다시 분열될 거다. 친이와 친박이 나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권교체는 진보진영이 하나로 결속할 때 가능하다. 총선과 대선까지 더 높은 연대가 이뤄지면서 단결할 것이다. →‘박근혜 대세론’을 인정하나. -박 전 대표가 여권에서 확고한 우위를 갖고 있는 후보임은 분명하지만 대세라 말하긴 어렵지 않을까. 국민의 신임을 받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지 않나. →야권은 박 전 대표에 맞서 어떤 전략으로 승리할 수 있을까. -대선은 전략으로 승리할 수 있는 선거가 아니다. 국민 스스로가 원하는 걸 가지는 선거다. 전략보다 국민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 원장이 현재 야권에서 대선후보 지지율 1위다. 만일 야권의 단일후보가 된다면 박 전 대표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안 될 것이라고 할 것도 아니다. 지금은 ‘내가 꼭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보다 국민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자원을 획득해 가는 야당 후보들이 많아져야 한다. →유 원장이 대통령을 하겠다면 민주당에 들어가는 방법 말고는 없다고들 한다. -(웃음) 지금 다시 민주당에 가면 예전처럼 혼자는 아닐 거다. 오면 도와주겠다는 분들도 계시고, 그분들의 뜻을 잘 알지만 그길은 노 전 대통령이 간 길을 뒤따라 가는 것이다. 이젠 익숙한 것들과 결별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건 혁신이다. 앞으로 정당·정치 문화·정책 발전을 이루는 도전을 해야지, 권력 도전만으로 의미를 찾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다. →내년 대선에서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는 어떤 역할을 할 거라고 보나. -그분은 한때 보수의 지도자였는데 지금은 지역의 지도자가 돼 있다. 계속해서 그런 역할을 하실 건지, 다시 보수의 지도자를 하실 건지는 그분이 선택할 거라고 본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뉴미디어가 선거에 큰 영향을 줄 거라고 보나. -그렇다. 미디어 정보화 사회니까. 과거에는 선거운동 조직이나 직능단체 조직, 친목회 같은 조직이 정보를 유통하고 정치적 의사 결정에 큰 영향을 줬다. 하지만 이제 개인이 다양한 정치적 경로를 통해 정보를 취득하는 시기다. 조직 없이도 정당을 형성할 수 있다. →경제학과 출신이다. 초과이익공유제 논란을 어떻게 보나. -정운찬 전 총리가 재임시에는 제대로 된 걸 거의 못하더니 총리 마치고 나서 오랜만에 좋은 걸 했다고 생각한다. 협력업체들의 도움 덕분에 기업이 성장한 건데, 물론 방법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토론할 만하다. 그러나 공산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식으로 나오는 건 문제다. 집권 세력에 의해 깔아뭉개지는 걸 보니 안타깝다. →이슬람채권(수쿠크)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수쿠크법은 아랍 자금 유입이 외환시장과 금융시장의 안정, 실물경제를 북돋우는 데 도움이 되는지, 금융 분야에서 자유화의 정도를 이슬람 자본까지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한지가 논쟁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슬람 자본이 율법 때문에 문제 생기는 거라며 우회로를 만들어 주기 위해 조세특례를 해준 게 아닌가. 어이가 없다. ●참여정부와 정치인 유시민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이나 ‘후계자’라는 말에 동의하나. -‘(경호실장이란 말은) 정치적인 면에서 그런 거지’라고 말해서 그러는 것 같다. 노 전 대통령을 좋아하고 그분이 하려고 했던 정치적인 목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친노는 분명하다. 후계자란 말은 적절치 않다. →노 전 대통령의 후원자였던 강금원씨가 ‘유시민은 친노가 아니다.’라고 했는데, 별로 괘념치 않는다고 대응했다. 진짜 그런가. -노 전 대통령 서거 전까지 강 회장을 잘 몰랐다. 그분과 정치적인 문제 등을 의논하는 사이가 아니다. 그분은 내가 의논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분이 참여당 창당을 부정적으로 봤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마음의 동요는 전혀 없다. →김두관 경남지사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참여정부의 지분은 노 전 대통령과 이광재·안희정 세분이 갖고 있다고 했다. 유 원장은 지분이 없나. -없다. →왜 없나. -난 사실상 혼자 대통령과 결합했다. 대통령과 정치적 행보를 했던 측근이나 참모도 아니었다. 정부와 결합할 정도의 인적 기반을 가진 세력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관계다. 실제로 정부의 인사나 공공기관에 사람 넣는 것까지 해본 적이 없다. 좀 유명한 자원봉사자라고나 할까.(웃음) →한나라당 인사들 가운데 김두관 지사를 강적으로 꼽는 이들이 있다. 유 원장이 보는 김 지사의 강점은 무엇인가. -경남에서 압도적으로 도지사에 당선된 건 잠재력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정치 기반이 적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통합의 리더십이 나보다 더 좋은 분이다. →문재인 전 비서실장은 정치적 지도자가 될 만한가. -그렇다. 말할 나위가 없다. 5년간 대통령을 모시면서 온갖 일을 겪은 분인데 자기 삶에 대한 실존적 선택, 그 문제가 남아 있다. 정치하지 않아도 아름답고, 정치해도 아름다운 분이라 생각한다. 개인적 결단의 문제다. →노무현 정부는 언론과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유 원장의 언론관은 무엇인가. -원래 불편한 거라고 생각한다. 모든 시장 권력은 국가의 규제를 받는다. 유일하게 언론 권력만큼은 어떤 규제도 받지 않는다. 만인의 언론 자유가 특정인이나 소수 언론 자본을 위해 남용될 때 어떻게 견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뒤 친노 세력의 분열은 당연한 귀결인가, 안타까운 일인가. -한 사람이나 한 정치 세력이 계승하기에는 노 전 대통령은 매우 다양한 목표를 추구했던 분이다. 참여당은 3당 합당 합류를 거부하고 새정치국민회의에 들어가기 전까지 불우했던 시절의 정치인 노무현을 계승하려는 것이다. 그 때 추구했던 정치적 목표들은 한국 정치를 발전시키기 위해 긴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koohy@seoul.co.kr
  • 유시민 “노 대통령이 가지 않은 길 가겠다”

    유시민 “노 대통령이 가지 않은 길 가겠다”

     국민참여당의 차기 당 대표로 사실상 확정된 유시민 참여정책연구원장은 “지금 다시 민주당에 가거나 민주당과 통합한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간 길을 뒤따라 가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노 전 대통령이 가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유 원장은 16일 가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이 갔던 길은 대통령이 되는 데는 유리했는지 모르지만, 정당지형·선거구도·정치문화 혁신은 결과적으로 실패하지 않았느냐.”면서 “민주당 안에서 그런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전망, 확신, 그런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경기도 파주시 출판단지의 유 원장 집필실에서 이도운 정치부장과의 대담으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국민참여당과 4·27 재보선  19일 당 대표에 취임하게 된다. 어떤 목표와 비전을 갖고 당을 이끌 것인가.  -중요한 건 2012년 권력교체다. 권력교체를 하려면 야권이 단결해야 한다. 우선 당의 역량을 키우는 데 주력하겠다.  야권연대에 비중을 두면 국민참여당이 임시 정당이라고 오해받지 않을까.  -야권의 혁신, 정치지형의 정상화, 지역주의·양강주의를 혁파하는 것, 진보의 집권, 이런 것들이 장기적 목표다. 그러나 매 시기마다 국민이 강력히 요청하는 과제를 해결해야만 장기적 목표에 접근할 수 있다.  국민참여당은 ‘친노 정당’인가.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참여당의 전부를 설명하는 건 아니다. 참여정부의 정치철학을 계승·발전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못했던 것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4·27 재·보선 전체를 아우르는 흐름은 무엇이라고 보나.  -내년에 의회 권력 및 정권의 교체가 어떻게 하면 이뤄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선거다. 진보개혁 정당들이 실효성 있는 야권연대를 만들지 못하면 내년 선거도 안 된다. 일종의 시금석이다.  시도당 대회 등을 거치면서 지켜본 표심의 흐름은 어떤 것인가.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정권이 너무 못하기 때문에 남은 기간 잘하도록 경고를 주라는 요구가 많다. 두번째는 정권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두 흐름이 중첩돼 있다.  김해을 선거가 ‘이명박 대 노무현’, ‘김태호 대 유시민’의 대결이라고도 한다. 동의하나.  -김 전 경남도지사가 한나라당 후보로 확정되면 김태호와 이봉수(참여당 후보)의 대결이며, 이명박 대통령과 김해 시민의 대결이다. 결국 집권 세력과 김해 시민의 대결이다.  민주당 일각에서 손학규 대표가 분당을에 나가야 한다고 하는데.  -분당을의 민심이 예전만 못하다. 지난해 6·2 지방선거에서 나와 김문수 지사의 차이가 10% 밖에 안났다. (유 원장은 인터뷰가 끝나고 가진 오찬에서 “손 대표가 분당을에 나가면 강원, 분당을, 순천 등 재·보선 전 지역에서 야권이 이긴다. 내가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득표율 44%였는데, 손 대표가 44% 이상 못 받겠나.”라고 말했다.)    2012년 대선과 야권 연대  4·27 재·보선 이후 내년 총선과 대선까지 정치권이 어떻게 흘러갈 것으로 보나.  -1987년 이후 5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3번은 보수 진영이, 2번은 진보개혁 진영이 이겼다. 그런데 지금까지 대선에서 보수 진영은 한번도 단결했던 적이 없다. 진보개혁 진영은 단일화 방식으로 보수 일부와 결합해 겨우 이겼다. 내년 선거에서도 보수는 다시 분열될 거다. 친이와 친박이 나눠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권교체는 진보진영이 하나로 결속할 때 가능하다. 총선과 대선까지 더 높은 연대가 이뤄지면서 단결할 것이다.  ‘박근혜 대세론’을 인정하나.  -박 전 대표가 여권에서 확고한 우위를 갖고 있는 후보임은 분명하지만 대세라 말하긴 어렵지 않을까. 국민의 신임을 받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지 않나.  야권은 박근혜 전 대표에 맞서 어떤 전략으로 승리할 수 있을까.  -대선은 전략으로 승리할 수 있는 선거가 아니다. 국민 스스로가 원하는 걸 가지는 선거다. 전략보다 국민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 원장이 현재 야권에서 대선후보 지지율 1위다. 만일 야권의 단일후보가 된다면 박근혜 전 대표를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승리할 수 있다 말하기도 그렇고, 안될 것이다라고 할 것도 아니다. 지금은 ‘내가 꼭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보다 국민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자원을 획득해가는 야당 후보들이 많아져야 한다.  유 원장이 대통령을 하겠다면 민주당에 들어가는 방법 말고는 없다고들 한다.  -(웃음) 지금 다시 민주당에 가면 예전처럼 혼자는 아닐 거다. 오면 도와주겠다는 분들도 계시고, 그 분들 뜻을 잘 알지만 그길을 노무현 대통령이 간 길을 뒤따라 가는 것이다. 이젠 익숙한 것들과 결별해야 할 시기라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건 혁신이다. 앞으로 정당·정치 문화·정책 발전을 이루는 도전을 해야지, 권력 도전만으로 의미를 찾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다.    내년 대선에서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는 어떤 역할을 할 거라 보나.  -그 분은 한때 보수의 지도자였는데 지금은 지역의 지도자가 돼 있다. 계속해서 그런 역할 하실 건지, 다시 보수의 지도자를 하실 건진 그 분이 선택할 거라 본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뉴미디어가 선거에 큰 영향을 줄 거라고 보나.  -그렇다. 미디어 정보화 사회니까. 과거에는 선거운동 조직이나 직능단체 조직, 친목회 같은 조직이 정보를 유통하고 정치적 의사 결정에 큰 영향줬다. 하지만 이제 개인이 다양한 정치적 경로를 통해 정보를 취득하는 시기다. 조직 없이도 정당을 형성할 수 있다.    정치 현안  경제학과 출신이다. 초과이익공유제 논란을 어떻게 보나.  -정운찬 전 총리가 재임시에는 제대로 된 걸 거의 못하더니 총리 마치고 나서 오랜만에 좋은 걸 했다고 생각한다. 협력업체들의 도움 덕분에 기업이 성장한 건데 물론 방법이 적절하냐는 토론할 만하다. 그러나 공산주의냐 사회주의냐는 식으로 나오는 건 문제다. 집권 세력에 의해 깔아뭉개지는 걸 보면서 안타깝다.  이슬람채권(스쿠크)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스쿠크법은 아랍 자금 유입이 외환시장과 금융시장의 안정, 실물경제를 북돋우는데 도움이 되는지, 금융 분야에서 자유화의 정도를 이슬람 자본까지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한지가 논쟁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슬람 자본이 율법 때문에 문제 생기는 거라며 우회로를 만들어주기 위해 조세특례를 해준 게 아닌가. 어이가 없다.    참여정부와 정치인 유시민  노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이나 ‘후계자’라는 말에 동의하나.  ‘(경호실장이란 말은) 정치적인 면에서 그런 거지’라고 말해서 그러는 것 같다. 노 대통령을 좋아하고 그 분이 하려고 했던 정치적인 목표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친노는 분명하다. 후계자란 말은 적절치 않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원자였던 강금원 씨가 ‘유시민은 친노가 아니다.’고 했는데, 별로 괘념치 않는다고 대응했다. 진짜 그런가.  -노 대통령 서거 전까지 강 회장을 잘 몰랐다. 그 분과 정치적인 문제 등을 의논하는 사이가 아니다. 그 분은 내가 의논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 분이 참여당 창당을 부정적으로 봤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마음의 동요가 전혀 없다.  김두관 경남지사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참여정부의 지분은 노 대통령과 이광재·안희정 세 분이 갖고 있다고 했다. 유 원장은 지분이 없나.  -없다.  왜 없나.  -난 사실상 혼자 대통령과 결합했다. 오랫동안 대통령과 정치적 행보를 했던 측근이나 참모도 아니었다. 정부와 결합할 정도의 인적 기반을 가진 세력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관계다. 실제로 정부의 인사나 공공기관에 사람 넣는 것까지 해본 적이 없다. 좀 유명한 자원봉사자라고나 할까.(웃음)  한나라당 인사들 가운데 김두관 지사를 강적으로 꼽는 이들이 있다. 유 원장이 보는 김 지사의 강점은 무엇인가.  -경남에서 압도적으로 도지사에 당선된 건 잠재력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정치 기반이 적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통합의 리더십이 나보다 더 좋은 분이다.  문재인 전 비서실장은 정치적 지도자가 될 만한가.  -그렇다. 말할 나위가 없다. 5년 간 대통령 모시면서 온갖 일을 겪은 분인데 자기 삶에 대한 실존적 선택, 그 문제가 남아 있다. 정치하지 않아도 아름답고, 정치해도 아름다운 분이라 생각한다. 개인적 결단의 문제다.  노무현 정부는 언론과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유 원장의 언론관은 무엇인가.  -원래 불편한 거라고 생각한다. 모든 시장 권력은 국가 규제를 받는다. 유일하게 언론 권력만큼은 어떤 규제도 받지 않는다. 만인의 언론 자유가 특정인이나 소수 언론 자본을 위해 남용될 때 어떻게 견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노 대통령 서거 뒤 친노 세력의 분열은 당연한 귀결인가, 안타까운 일인가.  -한 사람이나 한 정치 세력이 계승하기에는 노 대통령은 매우 다양한 목표를 추구했던 분이다. 참여당은 3당 합당 합류를 거부하고 새정치국민회의에 들어가기 전까지 불우했던 시절의 정치인 노무현을 계승하려는 것이다. 그 때 추구했던 정치적 목표들은 한국 정치를 발전시키기 위해 긴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노 대통령과 계속 연계되는 게 정치인으로서 부담스럽지 않나.  -한때 부담이 많이 됐다. 난 노 대통령과의 관계 속에서 정치에 들어왔고, 국회의원으로 있던 5년 내내 노 대통령과의 관계 속에서 일을 했다. 그러나 정부에 있었던 1년 반을 빼고는 주관적으로 과제 설정을 했다.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이 최근 사석에서 유 원장을 훌륭한 전임자로 평가했다. 스스로 무엇을 잘했다고 생각하나.  -잘 모르겠는데... 열심히 했다. 국회의원이 지역구 활동하듯이 장관 활동을 했다. 산악회, 축구팀, 낚시·당구 동호회, 매달 호프데이도 하면서 직원들과 스킨십을 열심히 했다. 장기요양보호법, 국민연금법, 기초노령연금법 등 입법을 많이 했다. 약사제도 개편의 틀을 만들어놨다. 바우처 사업을 새롭게 도입했다. 아마 그래서 평가를 좋게 해주는 것 같다.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란 책을 쓰고 있다. 책을 써보니 훌륭한 국가란 어떤 국가인가.  -첫째,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다. 국가 정의를 실현하려면 확실한 정통성이 뒷받침되는 강한 권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둘째는 사람들이 자기가 마땅히 받아야 될 것을 받게 해줘야 한다. 서유럽 국가가 비교적 거기에 근접해 있다.    정리 구혜영·강주리기자 koohy@seoul.co.kr
  • ‘노총각’ 트럭운전사, 323억원 로또되자…

    ‘노총각’ 트럭운전사, 323억원 로또되자…

    태어나서 처음 사랑에 빠진 여성에게 차인 뒤 외로운 나날을 보내던 영국의 한 노총각 트럭운전사가 300억 원이 넘는 복권당첨으로 인생역전의 꿈을 이뤘다. 영국 이스트서식스 주에 사는 매튜 브리치(37)가 영화 같은 사연의 주인공이다. 브리치는 학창시절부터 알고 지낸 케리 그레이브스(31)와 수년전부터 연인이었다가 3년 전 그레이브스가 결별선언을 하면서 헤어졌다. 당시 그레이브스는 브리치의 조용한 성격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며 그를 떠났다. 홀로 남은 브리치는 새로운 여자 친구를 만나려고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에 가입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외로워하며 지내던 지난 9일(현지시간) 브리치에게 인생일대의 행운이 찾아왔다. 무려 1780만 파운드(323억 5000만원)가 넘는 복권에 당첨된 것. 이는 역대 영국에서 나온 복권 당첨금 중 20위에 들 정도로 큰 행운이었다. 브리치는 “평범한 나에게 이런 행운이 올지는 몰랐다.”면서 “운이 좋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밖의 큰 행운이 정말 놀랍다.”고 기뻐했다. 복권이 당첨된 뒤 브리치는 연봉 2만 파운드(3600만원)가량이었던 운수회사를 그만뒀다. 아직도 여자 친구를 사귀진 않는 상황. 하지만 그가 프로필을 올렸던 해당 데이트 사이트에는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관심을 나타내는 여성들의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브리치는 “복권 당첨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건 원치 않는다.”면서 “좋은 인연이 나타나면 만나겠지만 당분간 사랑을 찾아 나서진 않겠다. 지금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만족해 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트위터(http://twitter.com/newsluv)  
  • [위기의 한국교회 종교개혁 현장서 길을 묻다] 500년이 지나도 살아 숨쉬는 ‘루터의 정신’

    [위기의 한국교회 종교개혁 현장서 길을 묻다] 500년이 지나도 살아 숨쉬는 ‘루터의 정신’

    마르틴 루터(1483~1546)의 흔적을 더듬는 여정 자체는 그다지 버거울 게 없다. 루터는 1483년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나 광부로 생계를 꾸리려는 아버지를 따라 만스펠트로 옮긴다. 그리고 마그데부르크, 아이제나흐, 에르푸르트 등에서 유년과 청년기를 보내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방향과 토대를 착실히 닦는다. 그리고 장성한 뒤 비텐베르크, 보름스, 바르트부르크성 등에 굵직한 발자국을 찍었다. 1521년 로마 교황으로부터 마지막 파문장을 받은 보름스를 제외하면 모두 독일 동북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어느 도시에서건 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이면 넉넉히 닿을 수 있는 만큼만 떨어져 있다. 그러나 그 넓지 않은 곳에서 그가 이뤄낸 업적과 생애를 따라가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종교사, 나아가 인류 역사에 광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인 까닭이다. 몇년 전 독일 정부에서 국민들을 대상으로 인류역사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에 대해 설문조사를 벌였다. 이론의 여지 없이 압도적인 1위로 루터가 꼽혔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곽교회 문에 내건 ‘95개조 명제’는 세속 권력에 대한 욕망, 금권에 대한 부패 등으로 얼룩진 중세 교회 대변혁의 신호탄이었다. 지금껏 개신교에서 종교개혁주일로 삼고 있는 이날이 2017년이면 500주년이 된다. ●신앙·믿음·개혁을 낳은 ‘정신 문화재’ 비텐베르크는 아예 ‘루터의 도시’로 통한다. 비텐베르크 교회가 대다수 루터 관광객이 찾는 첫 방문지다. 루터가 처음으로 설교를 맡아 신도들의 동의와 지지를 얻으면서 95개조 명제를 내걸고 로마 교황청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자신감을 안겨준 공간이다. 500년 전 루터 생존 당시 벽보의 흔적은 화재로 없어졌다. 대신 1857년 빌헬름 황제가 부분 재건축을 하면서 새로 철문을 만들고 거기에 ‘95개조 명제’를 촘촘하게 새겨 놓았다.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도록 루터의 개혁 정신을 영구히 남겨 놓은 것이다. 교회 안내자로 평생을 바친 베르나르트 그룰(75)은 “비텐베르크 교회는 종교개혁의 시작과 전개과정을 보여주며 신앙과 믿음, 개혁을 낳은 ‘정신적 문화재’”라면서 “이를 통해 오늘날 교회들은 내면적인 변화와 신앙을 향한 개선 등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마침 교회를 찾은 독일 신학자들 또한 그의 설명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교회당 안에 나란히 자리한 루터와, 종교개혁의 동료였던 멜란히톤의 무덤 등을 둘러보고 있었다. 교회에서 천천히 걸어 5분쯤 가면 시청 광장이 있다. 인구 2만의 도시에 찾아오는 연 20만명의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르는 이곳에는 루터와 멜란히톤의 동상이 서 있다. 또다시 도보로 10여분쯤 떨어진 곳 ‘루터의 거리’ 작은 로터리 한구석에는 이른바 ‘루터의 참나무’가 있다. 루터는 1520년 12월 10일 교황의 파문장을 불태우면서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선언한다. 그로서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감행한 곳이다. ●민중들에게 새 길을 보여준 루터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 결과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은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오던 도중 에르푸르트 근처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해 기사 행세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숨어 지내며 1521년 12월~1522년 2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독일어 성경과 성만찬 포도주의 나눔은 신과 민중들의 직접 만남을 가능하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종교개혁의 불씨가 활활 타올랐음은 물론이다. 그의 영향을 받은 토마스 뮌처(1490~1525)는 농민전쟁의 지도자로 떠오르고 종교개혁을 뛰어넘어 사회 변혁을 추진하는 세력으로 자리잡는다. 초기에는 이들에게 동정적 입장을 갖던 루터였지만 분위기가 급격히 변해가자 그들과 단호하게 결별하며 제후들의 편에 선다. 심지어 ‘반란을 일으키는 인간보다 더 유독하고 해롭고 악마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면서 자신이 이뤄놓은 결과물의 영향으로 복음서를 자유롭게 읽은 농민들에 대한 폭력 진압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루터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대목이다. 로마 교황청이라는 거대한 세력에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갓 피워낸 종교개혁의 작은 싹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동정론과, 로마 교황에서 제후들로 종교 권력이 바뀌는 ‘제후들의 종교개혁’에 불과했다는 비판이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루터와 헤어지느니 죽는 게 낫다” 마르크스에게는 레닌이 있었고, 피델 카스트로에게는 체 게바라가 있었다. 마오쩌둥 곁에는 저우언라이가 든든히 서 있었다. 마틴 루터에게는 멜란히톤(1497~1560)이라는 최고의 조력자가 있어 개혁 반발 세력과 급진개혁 세력 사이에서 종교개혁의 깃발을 꼿꼿이 세울 수 있었다. ‘독일의 선생님’이라고 일컬어지는 멜란히톤은 빼어난 라틴어, 히브리어 실력으로 튀빙겐 대학, 비텐베르크 대학 등에서 문학, 신학, 철학, 수사학 등을 강의했다.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왕자와 공작 등 귀족계급들이 오로지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어 인기를 실감케 했다. 멜란히톤이 있어 성서의 독일어 번역은 더욱 신속하고 정교해 질 수 있었다. 또한 제후들과의 갈등, 개신교 내부의 숱한 논쟁 등 주요 지점마다 루터가 거칠고 과격하며 전투적인 말과 행동으로 방향을 제시하면, 멜란히톤은 학자적인 부드러운 성격을 앞세워 조정하고 중재하며 종교개혁의 잔가지를 다듬어갔다. 그가 죽음의 공간인 무덤마저 루터와 사이좋게 나누고 있고, 기념비적인 동상 또한 루터 곁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이유다. 안타깝게도 비텐베르크 대학 바로 옆건물인 멜란히톤의 생가는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면서 최근 공사에 들어가 직접 둘러볼 수는 없다. ●수녀와 결혼한 애처가 루터 제후와 농민들 사이에서 평가가 엇갈렸던 루터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모만큼은 여전히 따뜻하게 남아 있다. 비텐베르크 루터기념관 2층 전시관에는 글 하나가 눈에 띈다. ‘케테는 프랑스나 베네치아를 줘도 바꾸지 않겠다. 1531년’ ‘케테’(Kthe)는 전직 수녀였던 그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의 애칭이다. 루터는 독신의 지옥으로부터 성직자를 해방시키고, 평범한 사람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수녀원의 수녀들을 모두 탈출시켜 결혼까지 시킨다. 그리고 1525년 마지막까지 남은 수녀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와 직접 결혼한다. 루터의 나이 42세, 보라의 나이 26세였다. 루터가 절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장례식”이라면서 장례복을 입고 나타나 루터를 깜짝 놀라게 한 뒤 “하나님이 돌아가셨기에 당신이 지금 절망하고 있지 않으냐.”고 말할 정도로, 어렸지만 당찬 여성이었기에 루터 역시 끔찍이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글·사진 비텐베르크·에르푸르트·보름스(독일)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살인범서 무죄로 법정 ‘반전 드라마’

    살인범서 무죄로 법정 ‘반전 드라마’

    만삭의 의사 부인 피살 사건을 두고 경찰은 최근 남편을 살인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나 남편은 혐의를 극구 부인하고 있어 치열한 법정 공방이 예상된다. 남의 목숨을 뺏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 엄벌로 다스려 왔다. 인권이 존중되는 현대에서도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는 경우가 많고, 가장 흉악한 범죄자로 낙인 찍힌다. 하지만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경우도 없지는 않다. 법정에서 누명을 벗었던 이들의 ‘극적인’ 이야기를 되짚어 봤다. # 가수 김성재 사건 1995년 11월 20일, 한 인기 가수가 호텔 객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오른손잡이인 그의 오른팔에서는 28개의 주삿바늘 자국이 발견됐고, 부검 결과 동물 마취 등에 쓰이는 ‘졸라제팜’이나 ‘틸레타민’에 의한 약물중독사로 추정됐다. 당시 그의 연인은 치과대학을 졸업한 재원. 사건 당시 그와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고 주변에는 곧 결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여성은 사건 발생 얼마 전, 인근 약국에서 “애완용 개를 안락사시키겠다.”며 ‘졸레틴’이라는 약품을 구입했다. ‘졸라제팜’과 ‘틸레타민’이 같은 비율로 섞인 약품이다. 그녀는 약사에게 자신이 약을 구입한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도 했다. 1심 법원은 여성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항소심 재판이 열렸다. 검사는 “형이 가볍다.”며 사형을 구형했고, 여성은 무죄라고 주장했다. 당시는 사형이 집행되던 시기. 법관의 판단에 따라 여성은 교수대에 설 수도 있었다. 그러나 2심 법원은 가수의 사망 시각과 외부 침입자의 소행 가능성, 살해 동기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뒤 무죄를 선고했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싸인’이 다뤄 화제가 됐던 ‘듀스 김성재 살인사건’이다. # 울산 청산염 살인사건 2003년 12월 1일, 울산 우정동에서 김모 여인이 잔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됐다. 발견 당시 그녀는 옷이 모두 벗겨져 있었고, 목과 턱 주위에 흉기로 26차례나 찔린 상처가 나 있었다. 직접적인 사인은 흉기에 찔리기 직전 마신 것으로 보이는 청산염(사이안화물) 중독이었다. 김씨 시신 옆에서 피우지 않은 담배 1개비가 발견됐는데, 여기에 이웃 최모(50·여)씨의 타액이 묻어 있었다. 최씨는 다른 주민 2명과 함께 김씨 시신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한 장본인. 그는 사건 전날 김씨에게 400만원을 빌려줬다. 또 김씨 집에서 22m가량 떨어진 하수구에서는 청산염이 들어 있는 100㎖ 음료병이 다른 75㎖ 병과 함께 비닐봉지에 쌓인 채 발견됐고, 75㎖ 병에서 최씨의 DNA가 검출됐다. 김씨의 수첩과 신용카드는 최씨 집 담 밑에 버려져 있었다. 누가 봐도 최씨가 범인으로 의심되는 상황. 그러나 최씨는 법정에서 “병과 수첩 등은 누군가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조작한 것이며, 담배는 시신을 발견했을 때 옆 사람에게 빌려 입에 물었다가 떨어뜨린 것”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최씨의 주장을 믿을 수 없다며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시각을 달리해 보면, 최씨를 범인으로 보기 어려운 허점이 있다.”며 판결을 뒤집었다. 대법관들은 먼저 범행 동기와 사건 현장에 의문을 품었다. 김씨가 나체인 상태로 매우 잔인하게 살해됐고, 범인이 눈에 잘 띄는 곳에 있던 귀금속은 그대로 둔 반면 일부러 가구를 부수고 방을 어지럽힌 점에 착안했다. 우발적이거나 금품을 노린 단순 살인사건이 아니라 치정 등의 원한관계에서 유발된 치밀한 범죄로 본 것이다. 같은 여성인 최씨에게는 이 같은 동기가 없었다. 여러 증거에도 의심이 갔다. 범인은 사건 현장에 지문을 전혀 남기지 않을 정도로 용의주도했다. 그런데도 침이 묻은 담배를 떨어뜨리고, 김씨의 수첩 등을 자신의 집 담 밑에 흘렸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관들이 최씨가 범인이 아니라고 심증을 굳히게 된 계기는 ‘알리바이’였다. 당시 김씨가 탄 택시와 휴대전화 기록 등을 분석한 결과, 그녀는 빨라야 오후 8시 10분쯤 집에 도착했다. 반면 최씨는 8시 30분쯤 김씨 집에서 265m 떨어진 신발가게에 있었던 사실이 확인됐다. 최씨가 20분도 채 안 된 시간 동안 김씨에게 독극물을 먹이고 흉기로 26차례나 찌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대법관들은 추리했다. 결국 최씨는 2007년 4월 27일 파기환송 상고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 영월 ‘사돈 살인사건’ 2005년 발생한 강원 영월군 ‘사돈 살인사건’ 역시 대법원에서 무죄가 규명된 경우다. 이해 4월 21일, 주천면의 한 가정집에서 조모(여·당시 71세)씨가 테이프로 양 손목이 묶인 채 질식사한 상태로 발견됐다. 조씨의 사돈 이모(66·여)씨가 범인으로 지목됐다. 이씨가 사돈을 만나러 갔다가 욕을 먹고 도둑 취급을 당하자 홧김에 살해했다는 게 경찰의 주장이었다. 시집간 딸을 조씨가 고생시킨다며 평소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 살해 동기로 추정됐다. 이씨가 범인으로 몰린 이유는 그녀가 거짓말과 의심스러운 행동을 했기 때문. 경기 이천시에 사는 이씨는 처음 경찰 조사에서 “사건 당일 경기 성남시의 병원에 있었다.”고 진술했지만 조씨 집 인근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경찰의 추궁 끝에 이씨는 범행을 자백했다. 이씨는 그러나 법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우연히 사돈 집에 갔다가 조씨가 숨진 것을 보고 ‘신고하면 내가 범인으로 몰리겠다’고 생각했다. 경찰에 거짓말을 하고 신발을 태운 것도 무서워서 그랬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범행을 자백한 이유는 “딸이 내가 범행을 저지른 줄 알고 대신 죄를 뒤집어쓰려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1·2심 법원은 이씨에게 징역 10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 깨졌고,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이 무죄를 선고했다. 법관들은 조씨가 묶인 청테이프에서 발견된 머리카락 3점 중 1점에서 ‘제3자’의 DNA가 발견된 점에 의문을 품었다. 또 같은 여성인 이씨가 조씨를 청테이프로 묶을 수 있는지에도 의심을 가졌다. 이씨의 몸무게는 70㎏, 조씨의 몸무게는 42㎏으로 차이가 많이 났지만, 여러 정황을 보면 조씨가 강하게 반항할 만큼 충분한 체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씨가 경찰과 검찰에서 한 자백 역시 “조씨의 양손을 먼저 청테이프로 묶었다.”고 했다가, “양발을 먼저 결박했다.”고 바뀌는 등 일관성이 없었다. 재판부는 결국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이씨의 범행이 증명되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처럼 법리의 세계는 언제든 반전의 드라마가 펼쳐질 수 있는 곳이다. 임주형기자 hermes@seoul.co.kr
  • 현빈-송혜교 결별은 탕웨이 때문?…소속사 반응은

    현빈-송혜교 결별은 탕웨이 때문?…소속사 반응은

    지난 8일 공식적으로 결별을 선언한 현빈·송혜교 커플이 중국 배우 탕웨이 때문에 헤어졌다는 중국 언론의 보도가 나왔다.  중국 석간지 양자만보는 9일 “영화 ‘만추’ 발표 직후부터 현빈과 탕웨이가 매우 친해보였다.”며 “ 탕웨이가 현빈과 송혜교의 관계에 개입했기 때문에 두 사람이 결별한 것이 아닌가.“라고 보도했다. 또 허베이신문망도 “지난해 2월 송혜교는 중국에서 영화 ‘일대종사’를 촬영했고 현빈도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 탕웨이와 ‘만추’를 촬영했다.”며 “두사람이 떨어져 있는 3개월 사이 현빈과 탕웨이는 ‘특별한 관계’가 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빈측은 “반박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하고 있다. 현빈의 소속사인 에이엠엔터테인먼트는 10일 언론을 통해 “(중국 언론의 보도는)말도 안되는 소리이며 거론할 가치도 없다.”고 반박했다.  ‘만추’에 출연한 현빈과 탕웨이는 지난해 미국 시에틀에서 촬영을 함께 했다. 하지만 탕웨이는 영화 홍보차 내한했을 당시 기자회견에서 “한국남자는 다 무뚝뚝한 줄 알았다.”며 “현빈은 친해지기 힘든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현빈·송혜교 “올해초 헤어졌어요”

    현빈·송혜교 “올해초 헤어졌어요”

    스물아홉 동갑내기 톱스타 현빈(왼쪽)·송혜교(오른쪽) 커플이 헤어졌다. 두 사람의 소속사인 에이엠엔터테인먼트와 이든나인은 8일 공동 명의의 보도자료를 내고 “현빈과 송혜교가 올해 초 결별을 결정했음을 공식적으로 알려드린다.”고 밝혔다. 양측 소속사는 “현빈과 송혜교는 각자 드라마 촬영과 해외활동 및 영화 촬영 등으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이전에 비해 관계가 소원해지게 됐다.”면서 “주위의 지나친 관심도 부담이었고 근거 없는 결별설 또한 말 못할 스트레스였다. 이를 극복할 시간적 여유조차 부족했고, 서로의 간격은 더욱 벌어졌다.”고 전했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현빈·송혜교 올해 초 결별…“지나친 관심에 스트레스”

    현빈·송혜교 올해 초 결별…“지나친 관심에 스트레스”

    톱스타 커플로 주목받았던 현빈·송혜교가 1년여 만에 결별했다.  두 사람의 소속사인 에이엠엔터테인먼트와 이든나인은 8일 “두 사람이 올해 초 결별을 결정했음을 알린다.”고 공식 발표했다.  양측 소속사는 “두 사람이 각자 드라마 촬영과 해외활동 및 영화 촬영 등으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이전에 비해 관계가 소원해졌다.”며 “또 주위의 지나친 관심과 근거 없는 결별설로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이를 극복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지면서 서로의 간격은 더 벌어졌다.”고 밝혔다.  이어 “결국 올해 초 서로의 협의하에 결별을 선택했다.”며 “그동안 어떠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것은 대중의 관심이 작품이 아닌 결별에 쏠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현빈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마지막 자리인 군 입대를 앞두고 개인적인 이슈로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현빈과 송혜교는 지난 2008년 KBS 2TV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연인으로 호흡을 맞추면서 실제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두 사람은 2009년 8월 교제 사실을 발표하면서 1년여 동안 공개적으로 만남을 가져왔다.  소속사는 “그동안 결별사실에 대해 좀더 일찍 말씀드리지 못한 점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두 사람은 앞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모습을 보이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현빈은 지난 1월 막을 내린 SBS TV ‘시크릿 가든’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7일 팬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해병대에 입대했다. 송혜교는 현재 홍콩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일대종사’를 촬영 중이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현빈ㆍ송혜교 “올해 초 공식 결별”…소속사 발표

    현빈ㆍ송혜교 “올해 초 공식 결별”…소속사 발표

    연예계 공식 커플이었던 톱스타 현빈과 송혜교가 결별 사실을 밝혔다. 소속사 에이엠엔터테인먼트와 이든나인은 8일 공동 보도자료를 통해 두 사람의 결별을 공식 발표했다. 다음은 보도자료 전문. 현빈과 송혜교가 올해 초 ‘결별’을 결정했음을 공식적으로 알려드립니다. 두 사람은 2008년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을 통해 만나서 조심스럽게 사랑을 인정하며 ‘공식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대중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현빈과 송혜교는 각자 드라마 촬영과 해외활동 및 영화 촬영 등으로 정신 없이 바쁘게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이전에 비해 관계가 소원해지게 되었습니다. 주위의 지나친 관심도 부담이었고 근거 없는 결별설 또한 말 못할 스트레스였습니다. 이를 극복할 시간적 여유 조차 부족했고 서로의 간격은 더욱 벌어졌습니다. 결국 올해 초 서로의 협의 하에 어쩔 수 없는 결별이라는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빈과 송혜교가 그 동안 어떠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것은 대중의 관심이 작품이 아닌 결별에 쏠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현빈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군입대 전 마지막 자리에서 개인적인 이슈로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별 사실 발표는 현빈의 군입대가 마무리되는 8일까지 미루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결별사실에 대해 좀더 일찍 말씀 드리지 못한 점 죄송하게 생각하고 이해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 모두 앞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모습을 보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진=KBS 서울신문 나우뉴스팀 nownews@seoul.co.kr
  • 亞최대 재벌가 며느리 ‘쌍둥이 출산’ 후 소박 왜?

    亞최대 재벌가 며느리 ‘쌍둥이 출산’ 후 소박 왜?

    아들 3명을 낳아 아시아 최대 재벌가의 사실상 둘째 며느리였던 홍콩 미녀배우가 최근 남편과 결별했다. 세간에는 재벌남편이 더 이상 자식을 원치 않았는데도 그녀가 쌍둥이 임신과 출산을 강행하자 부부 간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12세 때 홍콩 가요계에 등장한 량뤄스는 3년 전 22세 연상의 리쩌카이와 연인관계가 됐다. 리쩌카이는 아시아 최대 갑부이자 홍콩 창장그룹회장인 리자청 회장의 차남. 둘은 결혼식을 올리진 않았으나 량뤄스가 2009년 첫 아들을 낳는데 이어, 출산 두 달 만에 다시 쌍둥이를 가져 2010년 6월 아들 2명을 더 얻었다. 스타에서 재벌가 며느리로 안정적으로 변신하는 듯 했던 량뤄스는 쌍둥이 출산 8개월 만에 리쩌카이와의 결별을 공식 시인했다. 리쩌카이의 외도설, 재벌가의 결혼 반대설 등 다양한 소문이 이혼사유로 거론된 가운데 최근 홍콩 언론매체들이 량뤄스가 남편의 반대에도 쌍둥이 임신을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이 둘의 갈등에 큰 요인이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부 홍콩언론매체들은 “량뤄스가 정식 며느리로 인정받으려고 남편 몰래 배란약까지 복용했다.”면서 “평소 자식을 더 이상 원치 않는다고 말했던 리쩌카이가 크게 분노해 쌍둥이 출산이라는 경사에도 아내와 갈등을 빚었다.”고 보도했다. 창장그룹 측이 둘의 이혼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발표를 하지 않은 가운데 일부 언론매체들은 량뤄스가 이혼 위자료로 5억 홍콩달러(약 724억원)와 호화주택을 받기로 했다고 전하고 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트위터(http://twitter.com/newsluv)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