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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실고시원 방화용의자 무죄

    20명의 사상자를 낸 ‘잠실 고시원 화재’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됐던 피고인이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부장 심상철)는 현주건조물 방화 치사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된 정모(52)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고 18일 밝혔다. 재판부는 다만 불법 노래방 영업 혐의에 대해선 유죄로 인정,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정씨가 사건 발생 초기 불을 질렀다고 진술했다가 검찰 조사 때부터 진술을 바꿔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면서 “정씨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둘 수는 있지만, 범행을 확신할 증거가 부족해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정씨는 지난해 7월 내연녀가 헤어지자고 말한 데 격분해 건물 지하에 있는 자신의 노래방에 불을 질러 건물 안 고시원에 살던 8명을 숨지게 하고 12명을 다치게 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서울광장] 父情과 국민의 법감정 사이/황진선 편집국 수석부국장

    [서울광장] 父情과 국민의 법감정 사이/황진선 편집국 수석부국장

    한화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을 처음 접한 지난 달 24일.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재벌 회장이 폭력배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순간적인 일이지만 그보다 먼저 ‘보복 폭행’ 여부에 대해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행을 당했다는 사람들이 아무리 세상을 험하게 살아왔다 하더라도 재벌회장의 ‘일’을 거짓으로 꾸며대기는 어려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생각은 꼬리를 물어 김 회장이 구속될 것인지, 불구속 기소 될 것인지로 이어졌다. 아마 평범한 아버지가 아들이 피를 흘리며 집에 돌아온 것에 격분해 상대방을 찾아가 우발적으로 폭행을 했다면 불구속할 사안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재벌회장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사건은 점차 어려운 양상으로 꼬여갔다.3월8일 ‘보복 폭행’사건이 일어난 지 한달 반동안 경찰이 기본적인 조사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늦어도 3월20일쯤에는 6하 원칙에 따른 사건 개요를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이 경찰의 윗선에서 사건 보고를 묵살하려 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됐다. 아마 언론의 추적 보도가 없었다면 이 사건은 그대로 묻혔을지도 모른다. 이어 언론의 보도와 경찰의 본격적인 수사가 이어지면서 새로운 혐의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직 폭력배 동원, 쇠파이프 및 전기봉 사용 의혹 등이 그것이다. 김 회장 부자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피해자들도 말을 바꾸거나 입을 닫았다. 그즈음 회사 밖 지인들에게 “사건의 실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봤다.“경찰이 어느 선까지 밝혀내느냐가 문제”라는 답이 돌아왔다. 만약 보복 폭행 피의자가 일반인이었다면 혐의 사실을 확정하는 데 저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경찰의 사전구속영장 신청을 하루이틀 앞두고 사회부 기자들에게 다시 “영장이 발부될 것으로 보느냐.”고 물었다. 법조를 출입하는 후배는 “처음에는 불구속 주장을 펴는 판·검사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팽팽한 것 같다.”고 답했다. 한 변호사에게도 물어보니 “증거를 인멸할 가능성이 없고 형을 선고하더라도 집행유예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면 영장을 기각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다만 “일반인이라면 이미 구속됐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국민들의 법감정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은 고심 끝에 “증거를 인멸한 시도가 곳곳에 보이고, 앞으로도 인멸할 가능성이 있다.”며 김 회장에 대한 영장을 발부했다. 김 회장은 영장심사에서 청계산에서 피해자들을 폭행한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고 한다. 또한 폭행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맘보파’ 두목 오모씨가 사건이 불거진 뒤 캐나다로 출국한 점 등도 영장심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김 회장 사건의 본질은 사건 그 자체보다는 재벌회장이 법을 무시하고 사적으로 물리력을 동원하고 행사했느냐에 있다. 김 회장은 “앞으로 저처럼 어리석은 아비가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반성하고, 아들에게는 “새사람이 되라.”며 진한 부정(父情)을 표시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격분한 탓에 순간적으로 재벌회장에게 요구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망각했다. 한화는 김 회장이나 한화 직원만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공기(公器)라고 봐야 한다. 김 회장과 한화에게 이번 사건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한다. 사회지도층 인사들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황진선 편집국 수석부국장 jshwang@seoul.co.kr
  • [책꽂이]

    ●석류나무 그늘 아래(타리크 알리 지음, 정영목 옮김, 미래M&B 펴냄) 파키스탄 출신의 영국 좌파활동가인 저자가 아랍 역사를 알리기 위해 쓴 역사소설.1990년 1차 걸프전 당시 BBC 방송의 한 논평자가 “아랍인에게는 문화가 없다.”고 말한 데 격분해 구상했다는 ‘이슬람 3부작’ 가운데 제2편이다. 제1편 ‘술탄 살라딘’은 십자군 전쟁의 영웅 살라딘의 행적을 통해 이슬람 역사를 이야기했다. 이 책에서는 800년간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한 무어인의 비극적인 멸망사를 그린다.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카스티야 연합왕국이 스페인 최후의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를 점령하며 이슬람 탄압을 본격화한 1490년대 이베리아반도가 무대다.1만 3000원. ●쌀과 소금의 시대(킴 스탠리 로빈슨 지음, 박종윤 옮김, 열림원 펴냄) ‘14세기 만약 유럽지역이 멸망했다면’이라는 가정 아래 세계사를 재구성한 대체역사소설.14세기에 발생한 흑사병으로 유럽의 전체 인구는 3분의1가량 줄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이 유럽 인구의 99%에 달했다는 전제하에 중국과 이슬람세계가 주도하는 역사를 전개한다. 제목 ‘쌀과 소금의 시대’는 동양권의 삶, 동양이 헤게모니를 잡은 시대를 상징한다. 작가는 ‘붉은화성’‘녹색화성’‘푸른화성’ 등 화성3부작으로 권위있는 SF문학상인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받았다. 전2권 각권 1만 4500원.●순교자의 나라(박도원 지음, 예담 펴냄) 한국 천주교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801년의 신유박해와 1839년의 기해박해다. 이 두번의 박해는 자생하던 조선 천주교를 뒷걸음치게 했을 뿐 아니라 서학(西學)으로 불리던 근대문명과의 접촉도 차단했다. 이 소설에는 우리나라에 가톨릭 신앙의 씨앗을 처음 뿌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겼다.1800년 정조의 돌연한 죽음 이후 남인 시파와 노론 벽파의 정쟁에 휘말려 조선 천주교인들은 정치적 희생양이 된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관대했던 남인들은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남인을 두둔한 정조가 죽자 노론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매도하고 천주교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인다. 신유박해의 시작이다. 전4권 각권 9500원.●그들도 한때는 인간이었다(막심 고리키 지음, 서은주 옮김, 큰나무 펴냄) 러시아 자연주의 작가 막심 고리키(본명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슈코프)의 소설. 도시로 대변되는 중심부에서 추방된 사람들의 일탈적 삶을 통해 인간성 실추의 문제를 다뤘다. 주인공 쿠발다 대위가 운영하는 여인숙에 모여든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소설의 기둥을 이룬다. 저자의 예명 고리키는 ‘견디기 어려운’ ‘신랄한’이란 뜻.8500원.
  • [사회플러스] 방송국 폭파 협박범 실형

    거짓 폭파 협박전화가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법원이 ‘방송국 폭파’ 협박범에게 이례적으로 실형을 선고했다. 서울 남부지방법원은 KBS 드라마 ‘대조영’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방송국을 폭파하겠다고 협박한 김모(51)씨에게 징역 6월을 선고했다고 11일 밝혔다. 김씨는 지난 3월25일 오후 11시30분부터 2시간여 동안 드라마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KBS 제작국 통화 연결을 요구했지만 계속 교환원에게 거부당하자 격분, 안전관리팀에 전화해 3시간30분간 16차례에 걸쳐 “KBS를 폭파하겠다.”고 협박한 혐의를 받고 있다. 김씨의 협박으로 KBS 안전관리팀 직원 67명과 경찰 37명, 소방관 23명, 국정원 직원 2명,52사단 군인 2명 등 총 130여명이 출동해 건물을 수색하는 등 2시간여 동안 소동이 빚어졌다.
  • [씨줄날줄] 전두환 나무/진경호 논설위원

    삼한시대 영고(靈鼓)를 매달고 천제를 올린 소도(蘇塗)의 솟대나무까지 갈 것도 없이 조상들에게 나무는 합일(合一)의 대상이었다. 마을을 지키고, 후손의 번성을 기약하는 상징이었다. 세시풍속으로 전해 오는 대추나무 시집보내기 역시 갈라진 나뭇가지에 큼지막한 돌을 올려 놓는, 짓궂은 풍습 너머 풍요를 기원하는 염원을 담고 있다. 나무에 대한 우리 조상의 사랑은 종종 나무를 인격화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세종대왕은 경기도 양평의 1100년 은행나무에 정삼품 당상관의 벼슬을 내렸고 세조는 속리산 법주사 소나무에 정이품을 하사했다. 조선초 글과 그림에 능해 당대의 삼절(三節)로 꼽힌 인재(仁齋) 강희안(1417∼1465)은 꽃과 나무를 아홉 품계로 나누기도 했다. 자신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소나무와 대나무, 연, 국화를 1품(品)으로, 모란을 2품으로, 사계·월계·왜철쭉·연산홍·진송·석류·벽오를 3품으로 꼽았다. 으뜸 중 으뜸으로 꼽은 소나무를 통해 장부의 지조를 노래했다. 마을 노인으로부터 전 재산을 물려받은 경북 예천의 석평마을 석송령(石松靈·천연기념물 400호)이 지금도 재산세를 내고 있고, 얼마 전엔 2세까지 봤다니 나무를 사람보듯 하는 조상들의 마음은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하겠다. 광주시청 식수동산의 ‘전두환 나무’가 시름시름 앓아 오다 이젠 고사 직전에 놓였다고 한다. 전 전 대통령이 지난 1987년 2월 기념식수한 동백나무다. 경남 합천의 일해공원 조성 움직임에 격분한 5·18회원 등이 나무에 구멍을 뚫어 제초제를 부어 넣고 톱으로 가지를 잘라 내는 등 해코지를 한 결과다. 시청측은 “나무가 무슨 죄가 있느냐.”고 발을 구르지만 5·18회원들의 분노를 삭이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나무를 인격체로 보고 그 자체를 즐겼던 조상들과 달리 나무를 자신의 힘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여긴, 비천한 권위주의가 동백나무의 비극으로 이어진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이 물러난 지 20년. 한쪽에선 그의 호를 딴 공원이 지어지고, 다른 쪽에선 그가 심은 나무를 말려 죽인다. 강희안이 4품에 올려 놓은 동백이다. 세상과 주인을 잘못 만난 그가 안쓰러울 뿐이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푸틴 “美는 나치 제3제국”

    ‘미국은 제3의 나치?’ 블라디미르 푸틴(얼굴)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의 외교정책을 ‘제3제국(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시기의 독일)’에 비교하는 등 미국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였다. 푸틴은 9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나치독일 격퇴 62주년 승전 기념 퍼레이드에 참석, 이같이 말했다고 10일자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전했다. 푸틴은 “전쟁 위협은 줄어들지 않았다. 모습만을 달리할 뿐”이라면서 “(나치 독일의) 제3제국 때처럼 이러한 새로운 위협들은 동일하게 인간 생명을 경시하고 있으며 예외적임을 주장하고, 세계에 대한 독재를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들어 미국을 향해 퍼부어 온 일련의 독설 시리즈 최신판인 셈이다. 푸틴은 이라크전, 동유럽 등에 대한 미사일방위시스템 구축,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영역 확대 등과 관련해 미국의 일방주의를 비난하면서 미국에 적개심과 대결 자세를 드러내 왔다. 이날 푸틴은 “평화시기의 실수와 잘못에서 전쟁 원인을 찾아야 한다.”며 “우리는 전쟁을 잊을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고 강한 어조로 미국에 대한 경계심과 대비 태세를 강조했다. 이같은 발언에 대해 크렘린 당국은 구체적인 의미 부여와 설명을 거부했다. 그러나 크렘린 업무에 깊이 관여해 온 세르게이 마르코프 러시아 정치연구소 소장은 “푸틴의 발언은 미국과 NATO를 겨냥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러시아가 자국의 영역 확대를 반대한 서방 국가들에 반감을 드러낸 것이라고 전했다. 러시아는 최근 들어 중앙아시아 등 옛 소련과 동유럽 지역에 미국이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있는 것에 ‘생존공간이 줄어들었다.’며 격분하고 있다. 전통적인 러시아의 영향권을 미국이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고 있다는 데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또 NATO가 러시아 국경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며 압박하자 러시아의 자존과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면서 반발해 왔다. 한편 푸틴은 이날 “나치를 물리친 2차 세계대전의 숭고한 경험을 파괴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욕”이라면서 친미적인 에스토니아 정부가 옛 소련군 동상을 이전한 것을 간접 비난했다. 전승기념식을 마친 푸틴은 이날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순방길에 올랐다. 이번 순방은 중앙아시아의 에너지 자원 개발 참여 확대를 시도하고 있는 미국·중국 견제를 위한 주변국가 다독거리기용으로 알려졌다.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강유정의 영화 in] 지아장커 감독 ‘스틸 라이프’

    인민폐 10위안 안에 그려진 풍경을 카메라는 잠시 보여준다. 지폐 속에는 아름다운 싼샤(三峽)가 그려져 있다.2000년이 넘게 중국의 물길이 되었던 도시, 하지만 그곳은 2년이 채 안돼 물 속에 가라앉고 만다. 그곳이 싼샤댐이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아내를 찾아 먼 길을 온 남자 한샨밍과 남편을 찾아 온 여자 쎈 홍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딸을 데리고 자신을 떠나버린 아내를 찾아 그녀의 고향에 온 한샨밍. 그녀가 남긴 단 한장의 주소를 들고왔지만 주소지는 오간 데 없다. 아내의 집은 물 속에 가라앉은 지 오래다. 남편을 찾아 싼샤에 온 쎈 홍은 2년간 소식이 끊겼던 남편이 돈 많은 기업가와 사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를 기다렸던 2년여의 시간과 결혼생활은 싼샤댐 위에서 산산조각 난다. 영화 속의 현실은 모든 것이 너무 쉽게, 그리고 빨리 변하는 중국의 현재를 보여준다.2000년의 역사도, 아내의 고향도, 결혼생활도 2년의 시간 앞에서 무참히 무너지고 만다. 지아장커의 영화 ‘스틸 라이프’는 매몰돼 가는 삶에 대한 아름답고 아픈 별사라 할 수 있다. 이 아픔은 지아장커의 차분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인해 배가 된다. 윤리적이거나 정치적 관점에서 격분할 수 있을 조국의 사태를 그는 냉정하고 차분하게 조형해 낸다. 영화의 초반 몇 장면들은 이런 점을 충분히 납득하게 한다. 아내를 찾기 위해 배를 탄 한샨밍은 유로화를 달러로, 달러를 인민폐로 바꾸는 야바위꾼들을 만나 돈을 뺏긴다. 배에서 내리자 원하는 곳에 태워다 주겠다며 3위안을 요구하는 건달들이 기다린다. 건달은 가라앉은 주소지로 그를 데려가고 또다시 관공서로 데려다주겠다며 돈을 요구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늦게 자본주의와 조우하게 된 중국의 형편은 이 한 장면 속에 압축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소한 일 모두에 사람들은 대가를 요구한다. 보존보다 개발이, 인정보다 돈이 더 먼저 요구되는 영화속 현실은 오래 전 앓았던 근대화라는 열병을 되돌아보게 한다. 소년은 지폐에 불을 붙여 담뱃불을 붙이는 주윤발을 동경하고 남자들은 좋은 차를 얻게해 줄 여자와의 만남을 바란다. 국가의 숙원사업이었던 싼샤댐 건설은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을 유랑민으로 만든다. 10위안속 풍경화로 전락한 싼샤는 모든 삶이 지폐 속에 잠식된 중국의 현재를 보여준다. 카메라에 담긴 관광엽서 같은 아름다운 풍경 속에 피와 살을 지닌 사람들의 삶은 처참히 무너져 내린다.16살 소녀도 돈을 위해 자신을 팔러 다니고, 남편은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3만 위안을 벌어야만 한다. 사소한 움직임 하나에도 돈이 요구되는 영화속 현실은 비단 중국의 현재라고만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돈을 이용해 행복을 얻는다. 하지만 그림속 풍경처럼 이미 행복은 돈 속에 갇혀버렸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 넉넉한 풍경 속에 고단하게 가라앉는 삶, 자본주의 사회의 아이러니가 ‘스틸 라이프’ 안에 담겨 있다. 영화평론가
  • [서울광장] 회장님 주먹이 날린 것들/육철수 논설위원

    [서울광장] 회장님 주먹이 날린 것들/육철수 논설위원

    홍콩재벌 리자청(李嘉誠)은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다. 자선사업과 엄격한 자녀교육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두 아들에게 입버릇처럼 “먼저 인간이 되라.”고 했다. 아버지의 사업을 이으려면 우선 돈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아야 하고, 예의바르고 겸손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이들이 왕자처럼 행동하고 안하무인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돈보다 인간의 도리부터 가르친 덕분에 두 아들은 미국 유학시절 갑부의 아들이란 사실을 드러낸 적이 없다. 그들은 맥도널드에서 아르바이트하고 골프연습장에서 공 줍는 일을 하면서 학비를 보탰다. 리자청이 사업을 번창시키고 자식교육도 성공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다. 남과 비교하는 게 언짢을지 모르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을 지켜보면서 진정한 자식사랑이 뭔지 다시 생각해 본다. 워낙 믿을 수 없고 상상을 뛰어넘는 사건이라, 아직도 영화나 소설을 보는 것 같다. 남한테 손찌검을 당해 피투성이가 돼서 돌아온 아들을 보고 격분하지 않을 아버지는 이 세상에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평범한 아버지라도 이미 저질러진 일에 대해서는 대개 이성적인 해결책을 찾는다. 그런데 김 회장이 대기업을 이끄는 총수로서, 사회지도층으로서 지위를 깡그리 망각하고 이렇듯 비이성적으로 대응한 이유는 뭘까. 김 회장의 성격과 처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소문이 많으나, 희대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그 일면을 접하게 된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어쨌든 김 회장은 감정통제의 실패와 주먹 한 방으로 너무 많은 것을 날려버렸다. 가장 큰 손실은 자식교육의 소중한 기회를 놓친 게 아닌가 싶다. 김 회장은 이런 행동으로 아들에게 뭘 가르치려 했을까. 아들은 용감무쌍한 아버지에게서 뭉클한 사랑을 확인했을까. 속 시원하게 복수해준 아버지를 존경하고 고마워할까. 자신 때문에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만신창이가 됐는데도…. 김 회장이 아들에게 돈과 특권과 폭력의 위력을 가르치려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다. 김 회장은 자신의 명예도 한평생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훼손했다. 그에겐 앞으로 유능한 경영자가 아니라 ‘폭력 재벌’이란 무시무시한 꼬리표가 늘 따라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글로벌 궤도에 진입하기 시작한 기업 이미지는 엉망이 됐다. 한화그룹 계열사에 몸담고 있는 임직원 2만 5000명에게도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그들은 어디 가서 “한화 직원”이란 말도 못 꺼낸다고 한다. 먹고사는 게 더 중요한 그들이기에 “(회장이) 부끄럽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 더욱 갑갑할 것이다. 김 회장의 주먹은 유형의 가치도 적잖이 날렸다. 이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지난달 25일 이후 7일(거래일 기준)만에 상장 한화 계열사의 시가총액은 3295억원이나 증발했다. 상당부분은 김 회장 사건의 영향일 것이다. 사건현장이자 한화 직원들이 애용한다는 서울 북창동 상가의 상인들은 이 사건 이후 더욱 썰렁해졌다며 한숨을 푹푹 쉬고 있다는 소식이다. 김 회장은 경찰 조사에서 폭행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얻어맞은 사람들의 진술과 정황으로 미루어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김 회장은 법 앞에서 비신사적인 모습을 거두고 당당하게 양심을 걸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 남은 양심마저 주먹으로 날려 버릴 수야 없지 않은가.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사회플러스] 전남씨름협회 간부 피살

    전남도체육회 간부가 산하단체 간부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7일 경찰과 도체육회에 따르면 전남도민체전(24∼27일)이 열린 26일 오후 9시쯤 전남 강진군 강진읍 모식당에서 전남체육회 정모(61) 사무처장이 전남씨름협회 신모(51) 전무이사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뒤 달아났다. 숨진 신 이사는 도체육회 임원 9명과 식사 중에 정 처장을 식당으로 불러냈고 심한 말다툼을 하다 밥상을 엎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격분한 정 처장이 미리 준비한 흉기로 신 이사를 찔렀고 이를 말리던 백모(58) 전남씨름협회장도 손가락 등에 부상을 입었다. 정 처장은 전날 다툰 임원들이 불러내자 흉기를 준비하고 식사자리에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6) 광해군과 누르하치,그리고 명나라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16) 광해군과 누르하치,그리고 명나라 Ⅲ

    명 조정이 왕세자로 승인하는 것을 거부하면서부터 광해군은 안팎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1604년, 명나라 제독주사(提督主事) 섭운한(雲翰)은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해 달라고 온 조선 사신들에게 극언을 퍼부었다.‘임해군이 일본군에 포로가 된 것은 너희 국왕의 책임’이며 ‘맏아들 대신 둘째아들을 왕세자로 세우려는 너희들은 금수(禽獸)와 다를 바 없는 난신적자(亂臣賊子)’라고 매도했다. 신종(神宗) 황제는 명 조정의 신료들이 워낙 강경하게 반대하자 조선에 보낸 칙서(勅書)에서, 맏아들 임해군을 왕세자로 다시 세우고, 광해군에게는 물러남으로써 윤서(倫序)를 지키라고 촉구했다. 광해군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이후, 과거보다 훨씬 대하기가 버거워진 명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명의 황제가 조선에 보낸 칙서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것의 정치적 파괴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부왕 선조가 광해군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고 있었다.1600년(선조 33) 무렵부터 특히 그러했다. ●선조, 광해군의 아침 문안조차 냉대 당시 선조는 정릉동(貞陵洞) 행궁(行宮-오늘날의 덕수궁)에 거처했다. 광해군은 아침마다 선조의 처소로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지만 선조는 좀처럼 그를 방으로 불러들여 접견하려 하지 않았다. 1600년 3월30일자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선조가 워낙 엄하게 대해 광해군은 문안할 적마다 처소의 바깥문에 머물다가 돌아가곤 했다고 적혀 있다. 선조의 냉랭한 태도에 광해군이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했다.1601년의 기록을 보면 광해군은 아침에 문안하고, 점심에도 문안하는 날이 있었다. 그것은 선조의 냉랭한 태도에서 비롯된 불안감, 그럴수록 더 인정받고 싶다는 초조함이 반영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1600년, 중전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상황은 더 어려워졌다. 이듬해 10월, 예조(禮曹)는 중전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음을 들어 선조에게 재혼하라고 건의한다. 선조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이를 받아들인다. ●왕세자 책봉 재건의 거부·논공행상 제외 1602년 4월, 조정 신료들은 명나라에 주청사(奏請使)를 보내 왕세자 책봉을 다시 요청하자고 건의한다. 선조는 그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중전의 책봉을 먼저 주청하여 국모(國母) 자리를 바르게 한 다음에 왕세자 책봉을 주청해야 인륜이 바로 선다.’는 것이 이유였다. 임진왜란 시기 무려 15번이나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던 그 ‘선조’가 아니었다.1603년, 왜란 당시 국난 극복에 노력했던 인물들을 공신(功臣)으로 책봉하는 논공행상(論功行賞)이 벌어졌을 때, 신료들은 광해군도 공신으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분조(分朝) 활동의 성과를 인정하자는 주장이었다. 선조는 그것도 거부했다. 선조의 태도는 분명 광해군에 대한 견제였다. 임진왜란 시기 지존의 권위에 흠집이 생긴데다, 명군 지휘부에 의해 ‘무능한 임금’이자 ‘퇴위시켜야 할 대상’으로 매도되었던 울분이 광해군에게 향한 것인지도 몰랐다. 권력이란 분명 부자(父子) 사이에도 공유될 수 없는 것이었다. 1602년 2월, 선조는 이조정랑(吏曹正郞) 김제남(金悌男)의 딸을 새로운 왕비로 맞았다. 광해군과 화동(和同)할 수 없는 악연을 맺었던 인목왕후(仁穆王后)였다. 다시 4년 뒤 인목왕후의 몸에서 아들(永昌大君)이 태어났다. 왕세자 광해군의 앞길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왕세자 책봉’을 주청하는 것에 선조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일부 신료들은 그의 마음이 광해군에게서 이미 떠났다고 판단했다. 적자(嫡子)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아예 영창대군 앞에 드러내 놓고 ‘줄을 서는’ 신료들이 나타났다.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1607년 3월부터 선조는 잔병치레를 하더니 10월에는 쓰러져 병석에 드러누웠다.10월11일, 선조는 병석에서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광해군에게 전위(傳位)하겠다고 했다. 여의치 않으면 섭정(攝政)이라도 맡기라고 지시했다. 유영경 등은 병석에 누운 선조에게 결사적으로 매달렸다.‘이 상태로도 충분히 정사를 담당하실 수 있으니 전위나 섭정의 명을 거두시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선조가 내린 비망기의 내용을 숨기려고 시도했다. 광해군 또한 선조가 쓰러진 뒤부터 궐내에 머물면서 시질(侍疾-병구완)에 들어갔다. 긴장 속에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1608년 1월, 전 참판 정인홍(鄭仁弘)은 선조에게 상소하여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몸조리에 전념하라고 건의했다. 그러면서 유영경이 정당한 전위를 방해했으니 처단하라고 촉구했다. 또 다른 돌발상황이었다. 선조는 정인홍의 상소 내용에 발끈했다. 다시 비망기를 내려 ‘명의 승인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바로 전위하면 나중에 명에서 문제를 삼을 수도 있다.’고 했다. 쓰러진 직후에는 바로 전위하겠다고 하더니 정인홍의 상소를 접한 뒤 마음이 다시 흔들린 것이다. ●왕세자 16년… 국내외 견제 딛고 즉위 광해군은 바짝 엎드렸다. ‘변변치 못한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지위에 있는데 갑자기 전섭(傳攝)하라시니 죽으려 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유영경이 전섭을 만류한 것은 제 뜻과 다르지 않은데 정인홍이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만들어 냈으니 그저 죽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격분한 선조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광해군은 기로에 서있었다. 1608년 2월1일, 선조가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이 즉위했다. 왕세자가 된 지 16년 만의 일이었다. 이윽고 2월6일,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을 고부청시승습사(告訃請諡承襲使)로 삼아 베이징으로 보냈다. 선조의 승하 사실을 명 조정에 알려 시호(諡號)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광해군의 즉위도 승인받아 오는 임무를 지닌 사절이었다. 명 조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이호민 일행이 4월12일, 광해군의 즉위를 승인해 달라는 주본(奏本)을 올렸을 때, 명 예부는 다시 차서(次序) 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여전히 둘째아들 광해군은 승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황한 이호민은 “임해군은 중풍에 걸려 왕세자 자리를 감당할 수 없었다.”고 따졌다. 그러자 명의 예부낭중(禮部郞中)은 임해군이 왕위를 사양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주본을 다시 가져오라고 요구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명 조정은 랴오양(遼陽)에 있는 요동도사(遼東都司)를 시켜 조선에 들어가 직접 상황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중풍’ 운운한 것이 화근이었다. 6월15일, 명 차관(差官) 엄일괴(嚴一魁)와 만애민(萬愛民)이 서울로 들어왔다. 그들은 임해군을 직접 만나겠다고 우겼다. 당시 임해군은 역모 혐의를 받아 강화도 교동(喬桐)에 유배되어 있었다. ●銀 풀어 위기 넘겨 난감한 일이었다. 임해군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여차하면 명에 또 다시 결정적인 약점을 잡힐 판이었다. 그럴 경우, 또 얼마나 힘들고 지루한 실랑이를 벌여야 할 것인가? 광해군과 조선 조정은 이 대목에서 은(銀)을 풀었다. 엄일괴와 만애민에게 은 수만냥을 주었다.‘칙사 대접’을 받은 그들은 임해군을 면담한 뒤, 조선 신료들에게 말했다. “국왕에게 임해군을 잘 보호하여 박대하지 말라고 이르시오.” 그리고는 은 궤짝을 챙겨 귀국길에 올랐다. 어느 새 광해군은 ‘국왕’이 되어 있었다. 광해군은 정치적 곤경을 타개하려고 어쩔 수 없이 은을 뇌물로 썼지만 그것은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 엄일괴와 만애민이 다녀간 뒤부터 요동에 있던 명나라 관리들은 입맛을 다셨다. 엄일괴 등이 조선에서 한밑천 크게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에 오는 명사(明使)들은 예외 없이 손을 벌렸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누르하치의 군사적 위협은 물론, 명사들의 ‘경제적 위협’에도 직면하게 되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읽기] (11) 누르하치, 명(明)에 도전하다 Ⅲ

    [병자호란 다시읽기] (11) 누르하치, 명(明)에 도전하다 Ⅲ

    누르하치가 만주의 패자(覇者)로 등장하기 전까지, 명이 상대하기에 가장 버겁고 까다롭게 여긴 대상은 예허였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누르하치가 하다, 호이파, 울라를 멸망시킴으로써 예허는 고립되었다. 명은 이제 예허를 다독여 누르하치의 후금을 견제하려 했고, 위기에 처한 예허도 명에 의지하여 생존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었다. 흔히 누르하치를 청 태조(太祖)라고 부르지만, 그가 애초부터 명에게 도전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명과 후금 사이의 현저한 국력 차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명과 맞서는 것을 애써 피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명, 예허와 결탁해 만주 견제 누르하치에게 복종과 배신을 거듭했던 부잔타이는 1613년 울라가 망하자 예허로 망명한다. 같은 해 9월, 누르하치는 예허에 세차례나 사자를 보내 부잔타이를 송환하라고 요구했다. 예허가 자신의 요구를 일축하자 누르하치는 4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예허 정복에 나섰다. 다급해진 예허의 국주 긴타이시(錦台什)는 명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누르하치가 예허를 정복하고 나면 랴오양(遼陽)을 쳐서 수도로 삼고 개원(開原)과 철령(鐵嶺)을 목초지로 만들 것’이라는 ‘경고’까지 곁들였다. 명은 누르하치에게 사자를 보내 예허를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한편, 병력 1000명을 예허로 파견했다. 누르하치를 견제하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 것이다. 황제의 ‘명령’을 접한 누르하치는 명에 보내는 국서에서, 과거 예허가 주동이 된 해서(海西)연합군이 자신을 먼저 침략했던 것과 부잔타이가 배신을 거듭했던 사실을 적고 자신의 예허 공격은 정당하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명이 예허만 편드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했다. 주목되는 것은 누르하치가 국서를 들고 명군 주둔지인 푸순성(撫順城)까지 직접 가서 전달했던 점이다. 당시 누르하치는 명에게 여전히 공손한 자세를 보였던 것이다. 명과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으려는 누르하치의 바람과는 달리 명의 견제와 압박은 갈수록 커져갔다. 1615년, 명의 광녕총병(廣寧總兵) 장승음(張承蔭)은 시하(柴河), 무안(撫安), 삼차(三 ) 등지에 대대로 살았던 만주의 농민들을 내쫓고, 수확을 금지하는 조처를 취했다. 허투알라와 푸순 사이에 위치한 세곳은 누르하치가 공들여 경작하고 있던 땅이었다. 명은 경작과 수확을 막아 경제적 기반을 차단함으로써 누르하치의 숨통을 조이려 했던 것이다. 누르하치는 격렬하게 반발했다. 사실 그는 격분할 만했다. 누르하치는 1608년 푸순 지역의 명군 지휘관들로부터 과거부터 대대로 살아온 자신의 거주영역을 존중해 준다는 약속을 받아낸 바 있다. 당시 백마를 잡아 하늘에 맹서하고,‘만일 약속한 경계를 침범하면 침입자를 죽일 수 있고, 침입자를 그대로 두면 묵인한 사람이 재앙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누르하치는 명의 사자를 만난 자리에서 장승음이 맹서를 어겼다고 성토하고,“대국이 소국이 될 수 있고, 소국이 대국이 될 수도 있는 것이 하늘의 이치”라며 ‘뼈 있는’ 말을 남겼다. 명과의 정면 대결을 암시하는 발언이었다. ●‘공격´ 주장 신료 말리며 역량 키워 1615년, 명이 일방적으로 예허의 편을 들고 경작까지 금지하는 조처를 취하자 누르하치의 신료들은 격앙됐다. 그들은 당장 명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누르하치는 신중했다. 그는 신료들에게 ‘명을 치려면 하늘이 우리를 인정하여 도울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충분한 저축이 없기 때문에 명을 공격하여 약간의 승리를 얻어봤자, 백성들만 고달프게 될 뿐’이라고 공격론을 일축했다. 스스로에 대한 냉철한 진단이자 평가였다. 당시 아무리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명은 여전히 대국이자 강국이었다.‘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명의 인구는 만주보다 수백배나 많았고, 명의 대군은 만주가 갖추지 못한 화포(火砲)로 무장하고 있었다. 장승음의 ‘견제 조처’가 나온 직후의 ‘만주실록(滿洲實錄)’을 보면, 내실(內實)을 다지기 위해 애쓰는 누르하치의 모습이 부쩍 많이 나타난다. 만주의 각 니루(牛 )에서 장정 열명과 소 네 마리씩을 내게 하여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경작에 힘쓰도록 한 것, 창고를 세워 식량을 저장하고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 전담관원을 임명한 것, 신료들에게 쓸 만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강조한 것, 백성들이 소송(訴訟)을 제기한 사안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억울함을 없애라고 강조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 무렵 국가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누르하치가 보인 행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몽골과의 동맹관계를 더욱 굳게 했던 점이다.1614년 4월부터 1615년 1월까지 10개월 남짓한 기간 만주는 몽골과 모두 다섯 차례나 혼인관계를 맺는다. 1614년에는 홍타이지를 비롯한 누르하치의 네 아들들이 몽골의 자루트( 特)와 코르친(科爾沁) 부족의 딸들을 아내로 맞았다.1615년에는 누르하치가 코르친 부족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1617년 1월, 누르하치의 장인인 코르친 부족의 밍간(明安) 국주가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이 오자, 누르하치는 왕비와 모든 신료들을 대동하고 허투알라에서 100리나 떨어진 곳까지 마중을 나갔다. 밍간은 누르하치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허투알라에서 한달을 머물다가 돌아갔다. 이렇게 중첩된 사돈관계를 통해 우호를 유지했던 것은 만주에게 큰 힘이 되었다. 실제 1618년 누르하치가 명에게 선전포고하고 푸순을 공략할 때, 원정군 가운데는 그의 몽골인 사위들도 끼어 있었다. 당시 몽골은 남쪽으로 명, 동쪽으로 만주 사이에 위치한 전략 요충이었다. 누르하치가 명에 대한 섣부른 공격 대신 몽골을 회유하고 우대하는 정책을 취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7대 원한´ 내걸고 명에 선전포고 누르하치는 명과의 격돌을 피하면서 내실을 다지려 했지만 상황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가 후금(後金)의 건국을 선포하고, 칸(汗)으로 즉위했던 1616년. 명 조정은 광녕 순무(巡撫)로 이유한(李惟翰)이란 인물을 임명했다. 광녕 순무는 사실상 요동의 군사업무를 책임지는 자리이자, 누르하치 등 여진 부족들과 교섭하는 최고위급 ‘채널’이었다. 누르하치는 이유한이 새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자 신료 강구리(綱古里)와 팡기나(方吉納)를 인사차 파견했다. 그런데 이유한은 강구리를 비롯한 후금의 사절 11명을 쇠사슬로 묶어 구금해 버렸다. 이어 사자를 보내, 누르하치가 경계를 넘어온 한인(漢人)들을 죽인 것을 질책하고 ‘한인 살해’에 가담한 자들을 넘기라고 협박했다. 누르하치는 과거 ‘월경한 자들을 죽이지 않으면 재앙이 자신에게 미친다.’고 비석에 새겼던 내용을 상기시키며 사자를 설득하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결국 광녕에 억류된 강구리 등을 살리기 위해 편법을 쓴다. 후금이 구금하고 있던 예허의 포로 10명을 ‘한인 살해자’로 이유한에게 넘겼던 것이다. 강구리 등은 약속대로 풀려났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누르하치는 명을 공격할 결심을 굳히게 된다.1618년 4월13일. 누르하치는 신료와 장수들을 모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누르하치는 그 자리에서 명을 공격해야만 하는 ‘일곱가지 원한’, 이른바 칠대한을 제시했다.1583년, 이성량이 자신의 부조(父祖)를 살해했던 것이 첫 번째 원한이었다. 나머지 여섯 가지는 명이 예허를 편든 것, 맹서를 어기고 한인들의 월경을 방조한 것, 만주인들을 세 주거지에서 내쫓고 경작과 수확을 금지한 것 등이 골자였다. 명이 자신과 후금을 능멸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이윽고 제천의식이 끝나자 기병과 보병 2만명으로 편성된 원정군이 푸순성을 향해 진격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 전체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명청교체(明淸交替)의 서막이 올랐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무슨 말을 했길래…” 20대 남성 동거녀 살해

    “남자에게 할 말이 따로 있지.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중국 대륙에 한 젊은 여성이 남자친구에게 정력이 형편없다며 성능력을 조롱하는 말을 했다가 살해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다.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시 톈허(天河)구에 살고 있는 한 20대 남성은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 친구보다 정력이 떨어진다는 비아냥거리는 말에 격분,살해한 뒤 시체를 유기한 혐의로 붙잡혀 쇠고랑을 차게 됐다고 북경일보(北京日報) 인터넷신문 천룡(千龍)망이 최근 보도했다. 천룡망에 따르면 사건의 장본인은 돤양즈(段揚志·가명).그는 지난 2005년초 늘씬하고 해사한 간샤오룽(甘小龍·여·가명)씨를 처음 만났다.이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두 사람의 앙가슴에 ‘큐피드의 화살’이 꽂혔다. 첫눈에 반한 이들 두 사람은 곧바로 동거에 들어갔다.하지만 간씨는 6개월쯤 지나자 돤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급속히 식어갔다.해서 결국 두 사람은 이별을 고했다. 그런데 간씨의 남성 편력도 보통이 아니었다.두사람이 헤어진지 얼마되지 않은 그해말 간씨는 새로운 남자친구 양좡(楊庄·가명)씨를 만나 불꽃같은 사랑에 빠졌다.이들 두남녀는 곧바로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돤은 화가 머리 꼭뒤까지 치밀었다.2006년 2월 14일,그는 간씨에게 연락해 다시 만났다.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옛날로 돌아가 같이 잘 살아보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3일 뒤,돤이 간씨의 집으로 찾아갔을때 간씨는 약속을 파기하겠다고 통보했다.이들 두 사람은 한바탕 말다툼을 벌였다.화가 난 돤은 핸드폰 충전기의 줄로 간씨의 목을 조르며 “나에게 돌아오라.”고 욱대겼다.하지만 간씨는 “죽었으면 죽었지,절대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더이상 참지 못한 돤은 전선줄로 그녀를 폭행하자,간씨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다.이에 마음이 너누룩해진 그는 부드러운 말로 간씨를 달래며 다독여 ‘태풍’은 지나갔다.마음이 풀린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에 앉아 TV를 봤다. 30여분쯤 지났을까.간씨가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그녀는 돤을 보며 “양좡에 비하면 너의 정력은 형편없이 떨어진다.”고 비아냥거린 것이다.이 말을 듣자마자 돤은 화가 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거며 두 손으로 간씨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돤은 살해 흔적으로 없애기 위해 그녀의 시신의 목에 남은 지문 등을 지우고 시신을 방안으로 옮겼다.주방에서 과도를 가져와 두번에 걸쳐 그녀의 배를 찔러 완전 범죄를 가장했다. 이어 시신을 방 침대 밑으로 밀어넣은 뒤 간씨의 휴대전화를 가지고 달아났다.이후 또다른 남자친구 양씨에게 그녀의 휴대전화를 이용해 문자 메세지를 보내는 치밀함을 보였지만 돤은 끝내 덜미를 잡혀,쇠고랑을 찼다. 온라인뉴스부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치욕의 패배’ 파키스탄 크리켓 감독 돌연사

    ‘크리켓 강국’인 파키스탄 국가대표팀의 로버트 앤드루 울머(58)감독이 월드컵대회 첫 출전국 아일랜드에 치욕의 패배를 당한 이튿날, 호텔 객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1970년대 영국 대표팀 선수로도 활약했던 울머 감독은 2004년 6월부터 파키스탄 대표팀 사령탑을 맡아온 영국인 감독. 그는 18일(현지시간) 월드컵 대회가 열리고 있는 자메이카 킹스턴의 한 호텔 객실에서 의식불명인 채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절명했다고 미국 CNN이 인터넷판 톱으로 전했다. 사인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표팀의 파르베즈 미르 대변인은 “울머 감독이 오늘 세상을 떠났으며 우리 팀 모두는 충격과 슬픔에 젖어있다.”고 밝혔다. 아들인 러셀은 “아일랜드에 패배한 탓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 심장마비로 숨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1992년 월드컵대회 챔피언인 파키스탄은 이미 ‘서부 인도’에 무릎을 꿇은 바 있어 아일랜드를 꼭 꺾어야 했지만, 이날 패배하는 바람에 예선에서 탈락했다. 격분한 파키스탄 팬들은 여러 도시의 도로를 점거한 채 선수들의 허수아비나 울머 감독의 초상화 등을 불에 태웠다. 팬들은 또 크리켓연맹 회장 등의 모의 장례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선수 등에게 주어진 모든 상훈을 취소하고 이들의 은행계좌를 동결할 것을 주장하는 극렬 팬까지 있었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살인 부른 ‘커피 한잔’

    화이트데이에 커피 한 잔 마시자는 제의를 거절한 것을 놓고 부부싸움을 하다 아내가 남편을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울산 동부경찰서는 15일 “함께 커피를 마셔 주지 않았다.”며 다투는 과정에서 남편을 흉기로 살해한 A(34·주부)씨를 살인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A씨는 ‘화이트데이’인 지난 14일 오후 남편 B(38·회사원)씨와 함께 동네 고기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소주를 나눠 마시고 귀가하다 남편에게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냥 집에 가자.”며 아내 제안을 듣지 않고 귀가해 작은 방에 들어가 눕자 화가 난 A씨는 베란다에 있던 화분 두 개를 남편에게 던졌다. 이에 남편은 A씨의 뺨을 2∼3차례 때렸으며 격분한 A씨는 주방에 있던 흉기로 B씨의 복부를 찔러 B씨가 그 자리에서 숨졌다.울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 누르하치,명(明)에 도전하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 누르하치,명(明)에 도전하다 Ⅱ

    건주여진을 통일하고, 해서여진과 몽골의 연합군마저 물리친 누르하치의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하다, 호이파, 울라 등 해서의 여러 부족들을 강온(强穩), 양면으로 통제하여 가장 강한 예허부(葉赫部)를 고립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당시 해서여진이 누르하치에게 맞서려면 4부 사이의 단결이 절실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 사이의 알력 때문에 누르하치에 대해 연합전선을 펼 수 없었다. 하다, 호이파, 울라는 차례대로 누르하치에게 각개격파되었고, 혼자 남은 예허는 결국 명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누르하치는 예허의 그 같은 전략을 꿰뚫었다. 그는 해서여진을 공략하는 동안, 자신을 견제했던 명에 몸을 낮추었다. 명의 견제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하여 명분을 축적하고, 내실을 다졌다. 결정적인 기회를 엿보기 위해 숨고르기를 했던 것이다. ●하다와 호이파를 멸망시키다 1599년 하다의 국주(國主) 멩게불루는 예허와의 갈등으로 전쟁을 하게 되자 누르하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멩게불루가 셋째아들을 볼모로 보내자 누르하치는 2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하다를 원조하려 했다. 다급해진 예허는 개원(開原)에 주둔한 명군 지휘부를 움직여 멩게불루를 질책했다. 누르하치와 동맹을 맺은 것을 철회하라고 요구하고, 한편으로는 멩게불루에게 자신을 딸을 아내로 주었다. 멩게불루는 예허의 요구를 받아들여 누르하치와의 동맹을 철회했다. 누르하치와 예허, 명 사이에 끼여 있는 약소국의 ‘눈치보기’였다. 격분한 누르하치는 하다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멩게불루를 사로잡았다. 그러자 명이 개입했다.1601년 명의 만력제(萬曆帝)는 사신을 보내 누르하치를 질책하고, 하다의 유민들을 멩게불루의 아들 우루구다이(武爾古岱)에게 반환하라고 강요했다. 누르하치는 명의 요구에 따라 유민들을 송환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허가 하다를 공격하여 우루구다이를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시켰다. 누르하치는 명에 서신을 보내 항의했다. 자신이 하다를 격파한 것은 문제삼고, 예허의 침략은 그냥 넘어가는 이중적 태도를 따졌다. 하지만 명에 대해 정면으로 반발하는 것은 삼갔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호이파를 정벌하는 과정도 하다의 경우와 유사했다.1607년 9월, 호이파의 신료들이 모반하여 예허로 귀순하자, 국주 바인다리는 누르하치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7명의 볼모를 보내왔다. 그러자 예허는 바인다리에게 “누르하치에게 볼모 보낸 것을 취소하면 귀순한 자들을 송환하겠다.”고 제의했다. 바인다리는 예허에게 속아 누르하치에게 다시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누르하치는 결국 정벌에 나서 바인다리 부자를 살해하고, 호이파를 병합했다. 예허의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울라 격파와 조선에 미친 파장 누르하치와 예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해서 부족 가운데 가장 늦게까지 살아남았던 것은 울라였다.1596년, 울라에서 내분이 일어났을 때 누르하치는 자신이 억류하고 있었던 부잔타이(布占泰)를 송환하여 국주로 즉위시킨 바 있다. 부잔타이는 누르하치의 은혜에 감사하여 혼인 관계를 맺고 동맹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는 수시로 향배를 바꾸어 배신과 복종을 반복했다. 부잔타이는 국주가 된 이후 모두 7차례나 누르하치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했다. 누르하치 또한 자신의 딸을 포함한 세 명의 여인들을 부잔타이에게 아내로 주어 다독였다. 부잔타이는 끝내 누르하치와 예허 사이에서 양단을 걸치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누르하치가 압박하여 곤경에 처하면,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조선에 손을 내민 것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610년, 누르하치의 압박 때문에 위기에 처하자 부잔타이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직첩(職帖)을 하사해주고 교역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울라의 세력은 두만강 너머까지 미치고 있었는데 광해군(光海君)은 부잔타이의 요구를 일부 수용했다. 그에게 직첩을 주고, 관복을 하사했다. 광해군의 의도는 그들을 회유하여 두만강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던 상황을 탐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해군의 의도는 맞아떨어졌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보면 당시 조선 조정은 누르하치와 해서 부족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던 격변의 추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1610년 2월14일의 경우,‘이 오랑캐가 겉으로는 누르하치와 화해하고 있으나 속으로는 사이가 좋지 않은 형상이 있다. 예허와의 중간 길이 끊기고, 교역의 통로가 막혔기 때문에 우리나라 변방에서 교역하기 위해 우리의 의도를 떠보는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참으로 정확한 정세 판단이었다. 광해군과 조선 조정은 이 같은 정보를 기초로 누르하치의 실체를 명확히 인식했다. 나아가 곧 닥쳐올 ‘누르하치와 명의 대결’이라는 파장에 대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팔기제(八旗制)를 완성하다 누르하치는, 향배가 무상했던 부잔타이를 공격하여 1613년 마침내 울라부를 멸망시켰다. 예허만 빼놓고 해서여진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누르하치는 이윽고 1616년, 국호를 아이신(金)으로 고치고, 칸(汗·한)으로 즉위했다. 바야흐로 12세기 한족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아구다(阿骨打)의 위업을 계승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지배하는 종족이 다양해지고,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새로운 통치 체제가 필요했다. 주목되는 것은 바로 팔기제(八旗制)였다. 팔기제는 니루(牛)라는 만주족 고유의 조직에서 기원했다. 만주인들은 수렵 등을 나갈 때 10명을 한 조로 삼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을 우두머리로 뽑아, 그를 니루라고 불렀다.‘니루’란 ‘큰 화살’을 뜻한다. 누르하치는 성년 남자 300명을 1니루로,5개의 니루를 1자란(甲喇)으로, 다시 5개의 자란을 1쿠사(固山)로 편제했다.1쿠사는 결국 7500명인 셈인데 그것을 한자로는 기(旗)라고 했다. ‘기’는 군사조직이자 정치, 사회조직으로 모든 만주인은 예외 없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각 기에는 고유한 깃발이 있는데 황색, 백색, 홍색, 남색만으로 제작된 것을 정기(正旗), 황색, 백색, 남색 깃발에 홍색의 테두리를 두른 것과 홍색 깃발에 백색의 테두리를 두른 것을 양기(旗)라고 한다. 1616년 누르하치는 본래 4기였던 것을 8기로 확충했다. 해서여진을 통합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귀순해 오는 한족과 몽골족이 늘어나면서 한군팔기, 몽골팔기가 등장했다.“나가면 병사가 되고 들어오면 인민이 되는(出則爲兵 入則爲民)” ‘군민일체’,‘군정일체’의 팔기제의 효용성은 엄청났다. 평소 일상 생활과 전쟁에 동시에 대비할 수 있게 편제된 팔기제 아래서 후금(後金)의 백성들에 대한 통제력과 전투 능력은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당시 쇠망의 조짐이 뚜렷했던 명군이, 조직화된 팔기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았다. 실제 팔기는 1644년, 청이 베이징으로 입성한 뒤에도 중원(中原)을 제압하고 통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중원 장악 이후, 팔기에 소속된 사람들을 기인(旗人)이라 불렀는데 그들은 별도의 호적에 편입된 특수 신분이 되었다. 그들은 기지(旗地)라 불리는 토지를 하사 받고, 그들만을 위한 독자적인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중원 입성 이후 기인들은 오로지 만주어를 익히고 궁술(弓術)을 연마하여 관리나 군인으로 등용되었다. 다른 농공상의 직업을 갖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특권도 컸지만 의무도 명확했다. 기인들에게 만주어를 익히게 하고, 궁술을 연마시킨 것은 결국 만주족이 지닌 정체성과 야성(野性)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수십만에 불과한 만주족이 1억 이상의 한족을 270여년이나 통치할 수 있었던 비책이기도 하다. 요컨대 1616년, 팔기제를 완성하면서 누르하치는 명과 일전을 겨룰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마련했던 셈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아베총리 ‘日 위안부 존재 부정’ 파문

    |도쿄 이춘규·워싱턴 이도운특파원|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1일 2차대전 중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존재 사실을 부정한 것과 관련, 비난이 거세게 일고 있다. 아베 총리의 언급은 지난 1993년 일본 정부가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 명의로 위안부 문제를 공식 사죄한 ‘고노담화’를 부정한 것이다. 일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과를 촉구하는 내용의 미 의회 결의안을 추진 중인 마이클 혼다 민주당 하원의원은 1일(현지시간) 종군 위안부 만행은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거듭 밝혔다. 한국과 필리핀의 여성 인권단체, 정치권의 반발도 거세다. 혼다 의원은 성명에서 “숨길 수 없는 역사적 기록과 최근 위안부 할머니들의 미 하원 청문회 증언,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의 개인적 사죄 등은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2차대전 당시 최대 20만명의 여성을 성노예로 내몰았음을 명백히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계인 혼다 의원은 일본의 명성을 더럽히지 말고 “부인할 수 없는 과거의 잘못을 공식 사과함으로써만 자유 민주 국가의 일원으로서 일본의 입지를 증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필리핀 종군위안부 단체인 리라 필피나의 레칠다 엑스트레마두라 사무총장은 “일본 총리가 2차대전중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요한 적이 없다고 발언한 데 대해 격분을 느낀다.”고 말하고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상당액의 보상액은 받았으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법적으로 우리의 위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베 총리는 1일 밤 총리관저에서 가진 기자단과의 회견에서 ‘고노담화’와 관련해 “당초 (담화가) 정의하고 있던 강제성을 증명하는 증거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라며 구 일본군이 종군위안부를 강제적으로 모아 관리한 증거는 없다는 견해를 나타냈다고 지지통신이 2일 전했다.taein@seoul.co.kr
  • 일해공원 찬반대결 격화

    한동안 소강 상태를 보였던 ‘일해공원’을 둘러싼 찬반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경남 합천지역 새마을지도자회 등 일부 단체들이 23일 ‘일해공원 지지 합천군민대회’를 열기로 하자 ‘전두환(일해)공원 반대 대책위’도 대응 수위를 높이는 등 양측의 대결이 격화되고 있다.‘전두환(일해)공원 반대 경남대책위’는 22일 오전 경남도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23일 군민대회를)새마을지도자 협의회를 비롯한 관변단체들이 총동원된 ‘관제데모’”라고 비판한 뒤 “면피성 발언만 되뇌며 암묵적인 찬성을 표방하고 있는 한나라당은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이어 “(일해공원 추진을) 4000만 국민과의 결별선언으로 규정하며,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오는 대선에서 이를 주도한 세력을 반드시 심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책위는 또 “군민대회에 인원을 동원하기 위해 면별로 버스를 3대씩 배차하고, 식사까지 제공할 계획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이에 따른 경비의 출처를 밝힐 것”을 촉구했다. 대책위는 다음달 1일 새천년 생명의 숲에서 ‘일해공원 반대 5·18 영령 위령제’를 열고,‘안티 합천 벚꽃 마라톤’ 센터를 운영하는 등 맞대응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합천군 부정부패 고발센터’를 운영, 제보를 받기로 하는 한편 5·18 행사를 합천에서 개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광주·전남대책위도 이날 성명을 내고 “‘일해’를 공원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와 관련한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일해공원이 공식화되는 시점에 사용중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광주·전남대책위 회원 10명은 21일 오후 합천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일해공원 명칭은 철회돼야 한다고 주장한 뒤 군수와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무산됐다. 한편 새마을운동 합천군지회와 이장단협의회 등 합천지역 28개 사회단체가 주도하는 ‘일해공원 지지 합천군민대회’가 23일 오전 11시 새천년 생명의 숲에서 열린다. 행사 참가자들은 새마을지도자와 이장들의 인솔하에 주최측이 제공하는 버스편을 이용, 행사장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집회 후에는 800여m쯤 떨어진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거리행진도 벌일 계획이다.임충근 새마을운동 지회장은 “최근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공원에서 5·18과 관련된 자극적인 사진들로 전시회를 강행하는 것을 보고 군민들이 격분, 행사를 준비하게 됐다.”면서 “군청과 한나라당은 행사와 전혀 무관하며 단체 관계자들이 수차례 회의를 거치고 자체 모금을 통해 경비를 마련했다.”고 말했다.창원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챔피언스리그] ‘리버풀 난투극’ 두 주인공 함께 골맛

    #장면 1 약 4개월 만에 부상에서 돌아온 FC바르셀로나(스페인)의 스트라이커 사무엘 에토는 지난 12일 프리메라리가 라싱 산탄테르전에서 후반 막판 감독의 교체투입 지시를 거부했다. 호나우지뉴와 에토가 설전을 주고 받는 등 불화가 생겼다. 사건은 에토가 팀 훈련에 복귀하고 호나우지뉴와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며 진화됐다.#장면 2 리버풀(잉글랜드)은 바르셀로나와 대결을 앞두고 포르투갈에서 전지훈련을 했다.17일 훈련 뒤 가진 파티에서 크레이그 벨라미는 욘 아르네 리세에게 노래를 재촉했고, 리세는 신경질적으로 거절했다. 격분한 벨라미는 새벽녘 리세의 방을 찾아가 골프채를 휘둘렀다. 동료들의 만류로 큰 사고로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벨라미는 리세와 화해했고, 벌금 8만 파운드를 물었다. 22일 스페인 누캄프 스타디움에서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바르셀로나-리버풀의 16강 1차전이 열렸다. 프랑크 레이카르트 바르셀로나 감독은 에토를 엔트리에서 아예 뺐다. 에토는 사복 차림으로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반면 라파엘 베니테스 리버풀 감독은 벨라미를 왼쪽 공격수로, 리세를 왼쪽 미드필더로 내보내 호흡을 맞추게 했다. 리버풀이 2-1로 역전승했다. 벨라미는 팀이 0-1로 뒤지던 전반 43분 스티븐 제라드의 크로스를 헤딩으로 연결, 동점골을 뽑았다. 벨라미는 골프채를 휘두르는 세리머니로 동료들을 웃겼다. 벨라미는 후반 28분 문전 혼전 상황에서 공을 따냈고, 노마크 상태인 리세에게 패스했다. 리세는 침착하게 역전골을 뽑아냈다. 결승골을 합작한 두 선수는 진한 포옹을 나누며 기뻐했고, 관중석에 있던 에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한편 주제 무리뉴 감독은 첼시(잉글랜드)를 이끌고 옛 팀 FC포르투와 승부를 겨뤘으나 1-1로 비겼다.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 임진왜란,누르하치,그리고 조선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6) 임진왜란,누르하치,그리고 조선 Ⅲ

    1405년 퉁밍거티무르가 입조(入朝)해 건주위도지휘사에 임명된 이래 명의 여진족에 대한 포섭작업은 가속이 붙었다. 영락제(永樂帝)는 1409년 흑룡강, 우수리강 유역의 광활한 지역을 총괄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퉁밍거티무르를 비롯한 여진족 추장들은 노아간도사 아래 편제된 수많은 위소(衛所)들의 장(長)으로 임명돼 명의 신하가 되었다. 명은 위소 우두머리의 임명과 위소 상호간의 분쟁에는 개입했지만 위소의 통치는 여진족의 자율에 맡기는 체제를 만들었다. 만주에 대한 명의 지배는 점차 확고해져갔다. 이제 조선이 ‘고구려의 고토’ 만주를 수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명 견제하의 조선-여진관계 영락제가 만주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고히 했던 뒤에도 조선과 여진의 관계가 단절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조선은 여전히 오도리, 오랑캐, 우디캐 등 여진 종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속했다. 여진인들은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한양에 와서 조공했다. 조선은 입조했던 추장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회사(回賜)라는 명목으로 각종 물자를 제공했다. 태조부터 성종(成宗) 때까지 여진족들의 조공 횟수는 거의 1100차례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여진족 가운데는 아예 조선에 귀화를 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조선은 귀화한 여진인들을 향화인(向化人)이라 부르며, 그들을 내지로 이주시켜 집과 땅 등의 생활기반을 제공했다. 조선은 1406년 경원(慶源)에 무역소(貿易所)를 설치해 여진족들과의 교역을 허용했다. 여진족들은 말, 모피, 진주 등 자신들의 특산물을 가져와서 면포, 소금, 솥, 농기구, 소(耕牛) 등을 바꿔갔다. 주로 수렵이나 유목에 종사하다가 점차 농경의 필요성에 눈떠 가고 있던 여진족들에게 조선에서 구입한 소나 농기구는 매우 소중했다. 조선과 여진 사이의 이같은 교류가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일찍부터 조선과 여진의 교섭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명은 1458년(세조 4), 건주좌위 도독 동창(童倉)이 조선에서 벼슬을 받았던 사실을 알게 되자 양자의 접촉을 엄금했다. 하지만 여진족들은 경제적으로 이득이 컸던 조선과의 관계를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조선 또한 여진족들을 일종의 ‘울타리’로 생각했고, 그들을 초무(招撫)하여 몽골 침략 이래 보전하지 못했던 북방영토를 회복하고자 했다. 세종 연간 사군(四郡)과 육진(六鎭)을 설치해 압록강, 두만강 이남의 강역을 확보했던 것은 그같은 노력의 결실이었다. 조선은 또한 여진을 회유하여 스스로를 ‘상국’으로 자부하며 문화적 우월의식을 나타냈다.‘조선의 문물(文物)과 교화(敎化)를 사모하여 귀화한 여진인’을 뜻하는 ‘향화인’이란 말 속에 그같은 의식이 담겨 있었다. ●왜란시 절감한 누르하치의 위협 16세기 이후 여진족에 대한 조선의 관심은 15세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명이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조선의 여진 접근을 견제했던 영향이 컸다. 또 여진세력 자체가 조선 안보에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다. 이성량(李成梁)이 활약하던 16세기 후반까지는 여진족 내부에서 조선을 위협할 만한 유력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기껏 두만강 부근의 여진족들이 간헐적으로 침략하여 변경을 소란하게 하는 정도였다. 16세기 후반 선조대에 이르러 조선의 권력은 사림파(士林派)에게 돌아갔다.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지향하던 그들은 ‘고구려 고토의 회복’과 같은 대외적 팽창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명에 대해 공손히 사대(事大)만 잘하면 대외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에게 여진이나 일본은 그저 교화시켜야 할, 조선보다 한 단계 낮은 ‘야만족’일 뿐이었다. 그런 그들이 당시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누르하치에 대해 정확한 정보나 인식을 가질 리 없었다. 정확하지 못한 대외인식의 귀결은 먼저 임진왜란으로 나타났다. 1592년 9월, 누르하치의 원병 파견 제의를 받은 조선이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야기한 바 있다. 충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선에 들어왔던 명군 지휘관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누르하치 군대의 ‘위력’을 이야기했다. ‘그들 기마군단의 위력은 가공할 만하다. 일본군에게 밀리면 도주하면 되지만, 누르하치 군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선조와 조정은 바짝 긴장했다. 그 와중에 1595년(선조 28), 산삼을 캐기 위해 평안도 위원(渭原)으로 잠입했던 건주 여진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이 조선 영내에서 소를 훔쳐가자 위원 군수 김대축(金大畜)이 여진인을 사로잡아 죽인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이 사건 때문에 누르하치가 침략해 오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실제로 누르하치가 격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같은 해 10월, 선조는 신료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뾰족한 대책이 나올 수 없었다. 모든 역량을 동원해 일본군과 맞서고 있는 현실에서 서북변 방어는 거의 방치돼 있었다. 그렇다고 남방의 병력을 빼서 서북쪽으로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신충일(申忠一) 허투알라로 보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조선은 고육지책을 생각해냈다. 명의 권위를 빌려 누르하치의 침략을 견제한다는 복안이었다. 그 계책은 병조판서 이덕형(李德馨)이 주도했다. 이덕형은 명나라 장수 호대수(胡大受)를 움직였다. 호대수의 참모 여희원(余希元)을 건주여진 지역으로 들여보내 누르하치를 선유(宣諭)하도록 했다. 조선 관원에게도 중국인 옷을 입혀 동행시켰다. 1595년 11월, 여희원은 누르하치의 부장(副將)을 만나 여진인들이 조선 영내로 잠입한 것을 힐책하고, 조선에 보복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조선은 여희원을 통해 응급조치를 취한 후 다양한 대책을 마련했다. 선조는 누르하치를 회유하기 위해 비단을 제공하고, 이후 산삼을 캐기 위해 넘어오는 여진인을 죽이지 말라고 지시했다. 또 그들의 침략에 대비해 들판을 완전히 비우고 성에 들어가 방어하는 청야책(淸野策)을 연구할 것을 강조했다. 조선은 나아가 남부주부(南部主簿) 신충일(申忠一)이란 인물을 허투알라로 들여보냈다. 조선인의 눈으로 누르하치 진영의 상황을 직접 정탐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조처였다. 신충일은 1596년 1월, 허투알라를 다녀온 뒤 선조에게 상세한 보고서를 올렸다. 유명한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가 그것이다. 이는 오늘날 청 초기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로서 평가받고 있다. 신충일의 보고서를 본 뒤 선조는 “천지의 기세가 바뀌고 있다.”며 탄식했다. 이어 신료들에게 누르하치와의 충돌을 피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거듭 촉구했다. 북쪽의 ‘오랑캐’, 남쪽의 ‘왜구’ 이른바 북로남왜(北虜南倭)에 의해 포위된 조선의 현실을 새삼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정세변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해 임진왜란을 불렀던 것은 과오였지만, 선조 정권의 누르하치에 대한 대책은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누르하치를 견제할 만한 자체 역량이 없는 현실에서 명의 권위를 이용하고,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높이 살 만하다. 임진왜란이라는 커다란 위기를 겪으면서 역설적이지만 조선은 외교적 감각을 키웠던 것이다. 6자회담이 어렵사리 타결됐지만 동북아 평화를 위해 아직 갈길이 먼 오늘날, 선조대의 누르하치 정책은 소중하게 돌아보아야 할 역사의 거울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문화마당] 조정자/김지우 소설가

    교수·의사·작가·기자·경찰·주태백이 시민 둘, 도합 동물 일곱마리 우화(寓話) 한 토막. 장소 하여 그 옛날 말로 파출소, 요즈음 말로 지구대, 술 먹고 개 되는 시각.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이 땅의 대한민국 국민 두분이 사는 게 고달프더란다. 그래 한잔 걸쳤겠다, 눈앞에 외제차가 있기에 그놈 엉덩이를 한대 걷어찼단다. 그런데 하필 운전석에 앉아 있던 차 주인에게 딱 걸렸고 여지없이 사과와 배상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이미 술에 영혼을 팔아버린 악당들은 무조건 그런 적 없다며 딱 잡아떼었단다. 뿐만 아니라 여차하면 폭력도 행사할 것처럼 거칠게 굴었단다. 격분한 차 주인은 즉각 112에 신고했고 가해자 피해자 모두 싹 쓸어 졸지에 지구대까지 납시게 되었다. 지구대에 도착한 차 주인은 일절 대화를 거부하며 강경하게 나오더란다. 사과도 배상도 필요 없으니 무조건 고소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고소장을 작성하더란다. 원활한 사과나 배상을 받기 위한 제스처나 압력이 아닌 듯했단다. 경찰이 중재를 시도했으나 막무가내였단다. 오로지 처벌만을 원한다며 서슬 퍼래 날뛰더란다. 차 주인과 동행이었던 교수와 작가와 기자가 지구대로 달려갔을 땐 막 고소장이 접수되고 있었다. 작가가 경찰 손에 넘겨진 고소장을 빼앗다시피 넘겨받았다. 교수가 차 주인인 의사를 떼밀고 나가고 기자도 악당 둘을 떼밀고 나갔다. 담배 한대씩을 물려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차근한 설득과 중재에 나섰다. 그러나 1시간여를 설득해도 화해와 조정은 번번이 결렬됐다. 사과는 대충 옆구리로 삐딱이 해치우려 하고, 받는 쪽은 양반절로 곱다시 받으려 하니 될 턱이 없었다. 보다 못한 작가 한마디.“사과는 진정성을 담아 정중히 하는 겁니다.” 기자도 한마디.“대충 사과 모양 갖췄으면 못 이기는 체 받아들이는 게 현실이요.” 경찰도 한마디 “싸울 줄이나 알지 조정할 줄을 알아야 말이지.” 세계 갈등의 조정자가 되겠다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말고 나라안 갈등을 조정하는 조정자는 없단 말인가. 100년 정당을 외치며 창당한 열린 우리당이 불과 3년 만에 대나무 쪼개지듯 쪼개졌다. 대통령이 인기가 없고 정당 지지율이 곤두박질치자 잽싸게 자기 살 길 찾아 나간 것으로 그다지 곱게 보아지지 않는다. 마치 비바람 몰아치고 홍수 날 것 같으니 앞동질 쳐 피난가는 개미떼를 보는 듯했다. 적대적인 분위기를 해소시키기는커녕 분쟁과 갈등, 대립과 암투 속에서 충돌과 마찰만을 조장하더니 해체의 단계로 나섰다. 분쟁과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조정자로서의 위기관리 능력을 자생자득하지 못하면 그들이 꿈꾸는 합체란 한낱 요원한 꿈에 불과할 것이다. 정부와 대통령이 사회갈등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거나, 정부와 대통령이 갈등의 당사자가 되는 경우에 과연 누가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 국회와 시민단체와 언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자 역할에 있어 그 역할을 가장 잘못하고 있는 동네가 바로 수구보수 언론계이다. 언론이란 모름지기 객관적 시각과 냉철한 판단으로 사회 갈등을 조정하고 치유하며 통합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회갈등을 조장하고 불협화음과 불균형을 초래하며 이념대결을 선동하고 있으니, 정작 복잡한 사회의 조정자가 되어야 함에도 현실은 세치의 혀를 가진 종이권력에 불과하다. 앞의 에피소드에서 보았듯이 인생도 조정자가 필요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간하는 사람보다 중재하고 조정하는 조정자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김지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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