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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첩 李尙珍·金英福 암약상/추적 피하려 첨단 통신수법 사용

    ◎천안레이더기지·오산비행장 등 정보 수집/우표뒤쪽 접착면에 마이크로 필름붙여 北送 오스트리아 빈을 거점으로 간첩활동을 한 李尙珍·金英福은 안기부 등 정보기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최첨단 통신 수법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이들은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수집한 정보를 마이크로 필름으로 찍어 북한에 보내는 ‘특수 방법’을 쓰기도 했다. 李·金은 지난 93년 10월 1차 입북때 받은 1만달러를 비롯,모두 5만3,200달러와 40만엔으로 빈에서 아파트를 얻고 팩스,전화 등 통신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했다. 1차 방북때 ‘조국통일만세’의 준말인 ‘조일만’으로 공작명을 부여받았다. ‘두뇌난수(頭腦亂數)’를 이용한 통신방법도 교육받았다. 두뇌난수는 빈 아파트의 번지수 1538 및 방번호 06 등과 중복되지 않는 2479를 조합,1538062479로 정했다. 절대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여기에다 국내 출판사의 문고판 소설 ‘무정’과 ‘숫자·자음·모음·조사’로 짠 ‘약어표’를 토대로 문자를 암호화하거나 암호화된 문자를 풀었다.예컨대 소설 ‘무정’에서 원하는 문자가 몇 페이지 몇 행의 몇 번째 글자인가를 확인해 숫자화한 다음 보고내용을 두뇌난수로 더하고 빼서 나온 숫자를 약어표에서 문자화해 원문을 작성했다는 것이다. 긴급할 때는 평양의 지정된 장소에 5분 간격으로 두 차례 전화를 걸었다. “빈에 있는 ‘조일만’입니다. ○○무역회사 부사장과 통화하고자 합니다”라는 내용으로도 연락했다. 평상시에는 평양­본사,지성용 부부장­부사장,사람­물건,위험하다­아프다,만나자­보낸다 등 20여개의 음어를 사용했다. 李·金은 지난 94년 2차 입북때 하루에 두 시간씩 사흘동안 특수사진술까지 배웠다. 자료 등을 찍은 마이크로 필름은 우표 뒷면이나 편지 봉투의 봉함면에 붙여 평양으로 보냈다. 李·金은 이같은 통신 방법을 이용,국내의 천안 레이더기지,육군 탄약창,오산비행장,현대자동차 등 주요시설의 현황과 경제자료 등을 수집해 북에 보고했다.
  • 벤처기업 인정… 자금 지원해야/영화산업 발전하려면

    ◎영화진흥공사 경영진 시대맞게 교체 필요/연예인 아닌 전문경영인 출신 영입을 할리우드에 비하면 한국의 영화산업은 아직 초보단계에 불과하다.영화를 ‘산업’으로 인식한 것 자체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정부차원의 영화산업진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새정부들어 영화인을 고무하는 육성방안이 여럿 제시됐지만 스크린쿼터 폐지 등 현장을 외면한 목소리는 여전히 걸림돌이 되고 있다. 상반기중 영화계는 정부로부터 여러가지 선물보따리를 받았다.영화진흥법 개정,영상전문투자조합 설립,벤처영상빌딩 조성,소형·단편영화 지원책 등 그동안 영화계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영화산업진흥책과 큰 줄기면에서 대부분 일치하는 것들이다. 우선 영화진흥법 개정문제와 관련해 국민회의는 검열의 소지를 없애는 완전등급분류제 도입과 등급외전용관 허용,영화진흥기구 개편,영화진흥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방안을 최대한 반영한 영화진흥법 시안을 내놓았다. 영상투자조합은,당초 金大中 대통령이 영화계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200억원 규모의 지원자금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설립이 추진됐다.그러나 조합설립에 필요한 법적 문제가 간단치 않아 딱 부러지는 성과를 못내고 있다.그나마 또 다른 재정 지원책인 30억원의 판권담보 융자사업과 한국기술금융을 통한 20억원 투자가 차질없이 이뤄져 영화계의 숨통을 터주었다. 영상벤처조성 계획은 지난 17일 서울영상벤처가 강남에 개관함으로써 실현됐다.80억원의 돈을 들인 이 센터는 영화·애니메이션·게임 등 영상관련업체를 한건물에 모음으로써 공동 제작,공동 마케팅의 시너지효과를 노린다. 소형·단편영화 지원책으로는 연간 40여편에 편당 300만원의 제작비를 사전 지원하고 영화진흥공사 시설을 이용해 현상·녹음 등 후반작업 비용의 50%를 지원하는 등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안을 내놓았다. 현정부의 영화정책에 대해 영화계는 부분 만족하고 있다.그러나 영화산업을 벤쳐기업으로 간주,정부차원에서 상응하는 자금지원을 하는 보다 적극적 지원책을 기대하고 있다.동시에 영화산업 진흥의 실질적 견인차 역할을 하는 영화진흥공사의 경영을 전문적인 경영마인드를 가진 경영인 출신에게 맡겨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또 영화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전략적인 집중지원이 필요하다는 견해도 있다.金東虎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판권담보로 한편에 3억원씩 나눠 주는 것은 사실상 도와준 티도 안난다.편수를 줄이더라도 지원금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또 국제영화계에서 주목받는 감독들을 전폭 지원해 국제적인 명성을 쌓도록 돕고,한국영화의 고질적인 약점인 후반작업 개선을 위한 기술개발 투자 등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의견이다. 무엇보다 스크린쿼터 등 한국영화의 생존이 달린 문제를 경제 논리로 대처하려는 정부의 태도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영화계의 뼈아픈 지적이다.
  • 예리한 필봉 휘두른 항일언론인/9월의 독립운동가 張道斌 선생

    ◎대한매일신보 시절 반일 언론의 선봉/일제의 행각 발로 뛰며 낱낱이 기사화/국사연구 몰두… 황국사관 정면 반박도 “국가라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국민을 모아 이룬 것이오. 국정이란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국민이 그 일(국정)을 자치(自治)하는 것이오. 애국이란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국민이 그 몸(국가)을 스스로 사랑하는 것이라. 고로 민권이 흥(興)하면 국권이 세워지고 민권이 멸(滅)하면 국권이 쓰러지니 윗 사람이 압민(壓民)하는 권리에 힘쓰면 그 나라는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오,국민된 자가 그 권리의 신장에 힘쓰지 아니하면 그 몸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張道斌의 대한매일신보 논설중에서) 산운(汕耘) 장도빈(張道斌·1888∼1963)선생. 타고난 문재와 예리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일생을 언론활동과 역사연구에 몸바쳤던 애국자다. 반일·항일의 선봉에 섰던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 기자겸 논설위원으로 언론계 활동을 시작해 일제하에서 날카로운 필봉을 날리며 이름을 떨쳤다. 망명과 귀국을 거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굽힐줄모르는 지조와 의식을 발휘했던 빼어난 애국자·민족주의자이기도 하다. 평안남도 중화에서 태어난 張선생은 5세에 사서삼경을 통독,신동 소리를 들었던 인물. 소문을 들은 평양감사의 추천으로 대한제국의 학부가 관장하던 한성사범학교에서 수학했다. 선생은 여기서 교편생활을 했던 朴殷植의 소개로 1908년 봄 대한매일신보와 인연을 맺어 총무인 梁起鐸의 각별한 신임을 얻었다. 21세에 논설위원이 됐고 申采浩의 후임으로 논설주필을 맡아 친일내각과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당당하게 맞서 싸웠다. 대한매일신보는 일제를 신랄하게 비판해 미움을 받았지만 영국인 裵說이 사장을 맡아 항일의 강한 논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일제의 폭압이 더해가면서 신문압수와 검열이 심해졌으나 선생은 일제의 행각을 발로 뛰며 낱낱이 기사화한 장본인으로 이 시절 미국에서 돌아온 安昌浩의 신민회 비밀회원으로 가담했다. 이 때 金九·李昇薰·李商在·尹致昊 등 애국지사들과 교분을 쌓아 나중 망명생활 때 큰 도움을 받게 된다. 1910년 한일합방직후 필진들이 묶여 들어가고 신문사의 명맥이 끊어질 때까지 필봉을 늦추지 않았다. 밤엔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면서 국사연구에 몰두, 사학자의 발판을 다졌다. 선생의 사관은 당시 팽배해 있던 황국사관과 사대주의사관을 정면으로 반박해 우리의 독립적인 역사의식을 불어넣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결국 1913년 블라디보스토크행 망명길에 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까운 신한촌에서 다시 申采浩를 만나고 독립투사들과 교류했다. 그는 신병으로 安昌浩가 초청한 미국행을 포기하고 1916년 귀국했다. 평북 영변의 서운사에서 요양한 뒤 처음으로 민족혼을 일깨우는 역사서적 ‘국사’를 저술했다. 1919년 귀경후 동아일보의 발간을 출원해 허가를 받았으나 돈이 없어 운영을 양도했다. 하지만 1926년까지 잡지 ‘서울’‘학생계’‘조선지광’을 발간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이때 출판사 고려관을 설립,‘조선사요령’‘조선위인전’‘조선역사록 등 숱한 책자를 편찬했다. 1927∼45년은 고적답사를 통한 역사연구에 전념하던 시기. 일제말기 총독부의 끈질긴 중추원 참의 제의를 거부하고 고향 근처의 심산에 은둔하며 역사서적 집필에 전념했다. 그는 후학양성에도 뜻이 컸다. 1947년 한국대학을 설립한데 이어 1948년 단국대학을 설립,초대학장을 맡았다. 1949년엔 육군사관학교 국사학교수로 일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문화훈장을 수상했다. 그러나 단국대 명예교수로 강의를 가던 길에 짐수레에 치이는 사고를 당해 1년간 병원에서 고생하다 1963년 76세의 일기로 운명했다. 지난 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으며 98년 9월 국가보훈처가 지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그의 후손들/高合 회장 致赫씨 등 5남1녀/모두 재계·학계 뿌리내려 저명 선생은 늦은 나이인 33세에 평북 영변의 기독교 집안 출신 金淑姿씨(1979년 타계)와 결혼,5남1녀를 두었다. 선생의 은둔생활과 구국운동에 따라 부인 金여사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모두 재계·학계에서 뿌리를 내린 유명인사들이다. 장녀 致豊씨는 지난 60년대 결혼후 도미,76년 작고했고 장남 致榮씨는 신동아손해보험 상임이사·고려다이아몬드공업 대표이사를 지낸뒤 92년 별세했다. 삼양식품을 창설한 차남 致德씨도 지난 88년 작고했고 3남 致健씨는 신화다이아몬드공업 회장·고려합섬 이사를 거쳐 현재 BBC 영어연구원 고문이다. 고려합섬을 창업한 4남 致赫씨(고합그룹 회장)는 아버지의 뜻을 기리기 위해 81년 산운학술문화재단(현 고려학술문화재단)을 설립했고 막내 致順씨는 중앙대 사회과학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 憲裁설립 10주년 金容俊 소장 인터뷰

    ◎“5·18특별법 처리 가장 힘들어”/국민 헌법인식 달라져 보람… 기본권 보장 노력 “모든 국가기관은 헌법에 대한 최종 해석권을 가진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준수해야 합니다” 金容俊 헌법재판소장은 9월1일 헌재 창립 10주년을 맞아 헌재 결정에 맞서려는 일부 국가기관에 대해 이같이 당부하고 “헌재 스스로도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金소장과의 일문일답. ­창립 10주년을 맞는 감회는. ▲국민들에게 헌법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심어줬다는 데 보람을 느낍니다. 국민이나 국가기관의 기대에 못미치는 부분도 있겠지만 최선을 다해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사건을 꼽는다면. ▲5·18 특별법 사건입니다.쟁점이 복잡하게 얽힌 데다,재판관 9명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많았습니다.쟁점별로 의견을 수렴,결론을 도출하기까지 어려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경제 분야에서는 적극적인 결정이 많았던 반면 정치나 노동관련 사건에서는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지적이 있는데. ▲세법등 재산권 관련 헌법소원 자체가 워낙 많았기 때문입니다.경제적 사건 외에 언론출판의 자유를 보장한 ‘영화검열사건’,신체의 자유를 획기적으로 신장한 ‘변호인 접견 방해사건’,정치관련 입법으로 ‘법률안 날치기 처리사건’ 등이 헌재가 처리한 주요 사건입니다.또 ‘동성동본 금혼’도 위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처리가 늦다는 비판이 있는데. ▲헌법재판은 국가·사회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재판이면서도 단심이어서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현재 주 1회 이상 평의를 열고 월 1회 이상 선고하는 등 신속한 심판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연구인력이 확충되면 더욱 신속한 재판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헌재 결정에 대해 다른 국가기관이 준수하지 않는 사례도 있는데. ▲헌재가 헌법에 대한 최종 해석권을 가진 만큼 모든 국가기관은 헌재의 결정을 준수해야 합니다.헌재는 국민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 親日의 군상:3/3·1문화상과 皇國예술인(정직한 역사 되찾기)

    ◎민족 짓밟고 해방후 민족상까지 받아 ‘3·1문화상’이라는 상이 있다.1960년에 제정돼 올해로 39회째 수상자를 냈다.3·1문화재단(이사장 文仁龜)에서 주관하는 이 상은 대한유화 창업자 李庭林(작고)씨가 제정한 것으로 시상분야는 학술·예술·기술 등 세 분야.재단측이 밝힌 이 상의 제정취지는 “조국광복을 지향하여 거족적으로 발양된 위대한 3·1정신을 영원히 기념하여……”다.상 이름에도 ‘3·1’이 들어가고 또 매년 3·1절 당일 시상식을 갖는 것으로 봐 이 상은 3·1정신을 길이 계승할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 분명하다.그런데 이 상의 역대 수상자·심사위원 중에는 일제 당시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거나 친일 작품을 남긴 예술가 상당수가 포함돼 있다.예술분야 수상자중 13명,심사위원 중에는 20여명(일부 수상자와 중복됨)이 이에 해당된다.그들의 면면과 구체적인 일제시대 행적을 살펴보자. ◎상받은 예술인 13명의 친일행적은…/문인·화가 등 30여명 ‘위대한 3·1정신’ 왜곡/식민정책 전위대 역할… 청년 징병 내몰아 우선 예술분야 수상자가운데 문학가는 趙演鉉(13회)·安壽吉(14회)·白鐵(17회)·毛允淑(21회)·崔貞熙(24회)·李周洪(28회)등 6명,미술가는 李象範(4회)·金景承(5회)·金殷鎬(6회)·金仁承(9회)·朴泳善(10회)·金基昶(12회)등 6명,음악가는 金聖泰(22회) 1명이다. 문학 분야의 趙演鉉은 대학 재학시절부터 친일 잡지 ‘동양지광’에‘동양에의 향수’(1942년 5월),‘아세아부흥론 서설’(42년 6월)등 친일성향의 평론을 썼다.이중 아세아부흥론 서설은 ‘동양지광’이 현상공모한 ‘지상(紙上)결전 학생웅변대회’에서 3등으로 입선한 작품으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고 이 땅의 청년학도들이 아시아부흥의 투사로 나설 것을 부추긴 내용이다.‘북간도’로 유명한 소설가 安壽吉은 친일 문학잡지 ‘국민문학’(42년 2월)에 발표한 ‘원각촌’ 이외에도 ‘벼’,‘북향보’등의 친일성향의 작품을 쓴 바 있다. 평론가 白鐵은 작품보다는 친일단체에서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는 친일 문인단체인 조선문인협회(회장 李光洙) 상무간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를 지냈으며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학예부장 시절 친일 미술가 沈亨求(해방후 반민특위에 의해 구속됨)와 함께 조선미술가협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여류문인으로 이 상을 수상한 사람은 毛允淑,崔貞熙 두 사람이다.이들은 모두 조선문인협회에서 활동하였으며 41년 2월27일 부민관(현재 서울시 의회 건물)에서 개최된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에 참석해 강연을 했다. 아동문학가로 활동한 李周洪 역시 상당수의 친일 작품을 남겼다.그는 친일 잡지인 ‘동양지광’에 수필 ‘청년과 도의’(43년 7월)를 비롯해 단편소설·시 등도 남겼다.그는 유일하게 사후에 이 상을 수상했다. 미술계의 친일논쟁은 해방직후부터 시작됐다.문화예술인의 최초 조직이었던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 조선미술건설본부는 金殷鎬·金基昶·金景承·沈亨求·李象範·尹孝重 등을 친일 미술가로 규정,회원에서 제외시킨 바 있다.이들의 대다수는 41년 2월21일 결성된 조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황민문화’ 건설을 목적으로 조선문인협회·보도사진협회 등 11개예술단체와 더불어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단체로 활동하면서 전람회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내놓기도 했다.43년 1월9일∼17일 정자옥(丁子屋·일제 당시 현 미도파백화점 자리에 있던 백화점)에서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 전람회’를 열어 그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내놓은 것이 그 예다. 미술가로서 첫 수상자인 李象範(4회)은 沈亨求와 더불어 국민총력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을 지냈으며,金景承·金仁承 형제는 조선미술가협회에서 평의원을 지냈다. 특히 金仁承은 朴泳善과 함께 선일(鮮日)합작 미술단체인 단광회(丹光會)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단광회는 43년 3월 징병제 실시를 앞두고 회원 21명이 4개월에 걸쳐 공동으로 ‘조선징병제 실시’(100호 규모)를 제작,제1회 단광회 유화전에 출품하였는데 나중에 이 그림은 조선군 애국부를 경유하여 군에 헌납되었다. 순종(純宗)의 초상화를 그린 金殷鎬 역시 조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하였으며 37년 중일전쟁 무렵에는 조선여성들이 당시 용산 사단사령부 모 일본군 장성에게 금비녀·금반지 등을 바치는내용의 ‘금채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리기도 했다.金基昶은 최근까지도 친일논쟁이 있었던 인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등의 친일성향의 그림을 그린 바 있다. 음악가로는 金聖泰가 유일하다.그는 玄濟明 등과 함께 ‘가창지도대’,‘경성후생실내악단’등 친일 음악단체에서 활동하였다.이 단체들은 ‘음악보국음악회’,‘비행기헌납 음악대연주회’등을 개최,황민음악을 보급하였다. ◎‘역사의 심사’받아야 할 심사위원은… 3·1문화상의 역대 심사위원 중에도 20여 명의 일제 식민정책 협력자들이 포함돼 있다.이들중 申奭鎬와 李丙燾는 총독부·조선사편수회에 근무하면서 조선역사를 왜곡하고 식민사관을 뿌리내린 장본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의료계의 鄭求忠과 尹日善도 학병권유 논설을 쓰고 시국강연회에 참석했다. 白樂濬은 친일 ‘기독교신문’의 산파겸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경제학자 高承濟는 ‘국민문학’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등에 수많은 친일 평론을 남겼다.언론인 高在旭은 경성배영(排英)동지회와 전조선배영동지회연맹에서 상무이사를 지냈으며 여류 교육가 高凰京은 金活蘭·毛允淑 등과 같이 각종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문인중에서는 金八峰·朴鍾和·兪鎭午·郭鍾元 등도 다소 차이는 있으나 모두 친일 논설·작품을 남겼고 극작가 柳致眞·徐恒錫,음악가 金元福(피아니스트) 등도 모두 친일 예술활동을 한 적이 있다.柳致眞의 경우 친일 행적이 문제가 돼 고향 충무에 세워졌던 그의 흉상이 95년 주민들에 의해 철거됐다. ◎“아니! 이럴수가…” 독립유공자 심사까지/‘식민학자’ 등 10여명 18년간 활동 독립유공자에 대한 정부차원의 포상은 지난 62년 군사정부가 6·25 전상자를 위한 ‘군사원호법’을 제정하면서 시작됐다.정부는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세우고 독립유공자들의 공로를 후세에까지 전한다는 취지에서 매년 광복절 등 역사적 기념일에 이들에 대한 포상을 실시해 왔다. 현재까지 독립유공 공로로 포상을 받은 국가유공자는 모두 8,514명(외국인 40명 포함)이다. 그런데 그동안 정부의 독립유공자 포상을 둘러싸고 이런 저런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역대 독립유공 서훈자 가운데 ▲친일 기관·단체 등에서 활동한 사람이 포함돼 있다거나 ▲가짜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 ▲서훈자가 서로 뒤바뀐 경우 ▲형평에 어긋난 포상 등의 논란이 있어 왔다.또 이들중 일부 친일 경력자가 국립묘지에 안장돼 민족정기를 훼손하고 있다는 주장과 함께 역대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중에도 친일 단체나 기관 등에서 활동한 인사가 일부 포함됐었다는 지적도 있다. 첫 포상이 실시된 62년도 이후 80년까지의 역대 심사위원 중에는 10여명(일부 중복자 포함)의 일제 식민정책 협력자가 포함돼 있다. 1962년 문교부 산하 독립유공 공적조사위원회의 위원 7명(위원장 포함)가운데 申奭鎬·李丙燾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申奭鎬는 1930년∼37년의 총독부수사관보(修史官補)를 거쳐 37년부터 수사관으로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으며,李丙燾는 1925년∼27년에 총독부 수사관보,이후는 촉탁으로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다. 1963년에는 내각사무처 독립운동유공자 상훈심의회에서 심사를 맡았는데 심사위원 22명 중에는 4명의 친일인사가 들어 있다.高在旭·申奭鎬·柳光烈·李甲成 등이 그들이다.高在旭은 1937년 7월 12일 결성된 경성배영동지회와 같은 해 8월5일 결성된 전조선배영동지회에서 상무이사를 지냈다.柳光烈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편집국장과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조선언론보국회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친일논설 및 친일 시국해설 다수를 발표한 언론인이다.李甲成은 상해서 밀정노릇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1968년에는 총무처 독립유공자 상훈심의회가 심사를 맡았는데 심사위원 21명중 高在旭·白樂濬·申奭鎬·柳光烈·李丙燾·李瑄根·洪鍾仁·金聲均 등 8명의 친일 기관·단체 등에서 활동한 인사가 들어 있다.白樂濬은 친일 ‘기독교신문’의 산파겸 편집위원을,李瑄根은 만주국 협화회의 협의원을,洪鍾仁은 ‘매일신보’의 사회부장과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를 지낸 사람이다.金聲均은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언론·출판 검열담당)에서 근무한 기록이 있다. 1977년 원호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의 심사위원 11명 가운데도 柳光烈·李殷相 등 2명이 포함돼 있는데 李殷相은 만주에서 발행되던 친일지 ‘만선일보’에 몸담았던 인물이다.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에 포함된 친일 경력자 논란은 1980년까지 계속됐다.이 해 원호처의 독립유공자 심사위원 11명 중에는 申奭鎬가 ‘끈질기게’ 포함돼 있다.그는 62년 첫 심사부터 63년,68년,80년도에 걸쳐 독립유공자 심사에 참여했었다. 친일파연구에 일생을 바친 고(故)林鍾國씨는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논하는 자리나 대일(對日)외교 무대 등에는 친일파들이 나서서는 안될 자리”라고 강조한 바 있다.
  • 연극/무대 양적팽창·작품 기대이하(한국문화 50년:7)

    ◎등록극단수 99개·극장 서울에만 50여곳/이념대립 해소… 자율·개성시대로 전환 건국 당시 우익진영 연극인들이 모인 극예술협회가 고작이던 한국 연극계는 현재 서울에만 극장 50여곳,한국연극협회에 등록된 극단 수만 99개로 양적 팽창을 이뤘다. 그러나 이같은 연극의 대중화 추세는 상업주의,선정주의 물살에 떠밀려 과거보다 오히려 연극정신과 방법론은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정부수립 직후 우리 공연예술계는 극심한 정치·사회적 혼란속에서 반쪽짜리 예술로 출발했고 연극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50년 4월29일 연극인의 숙원이던 명동 국립극장이 문을 열었으나 개관한지 58일만에 6·25를 맞았다. 전쟁후 폐허와 가난속의 우리 연극은 그나마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힘겹게 맥을 이어오다 60년대에 접어들면서 드라마센터와 실험·민중극장 등이 생겨 활기를 보이기 시작했다. 50,60년대 우리 연극계는 명동을 중심으로한 이른바 ‘명동시대’를 구가했다. 69년 국내최초의 살롱무대인 카페 떼아뜨르가 충무로에 문을 열면서 본격적인 ‘소극장시대’를열었다. 명동시대를 주도했던 예술극장이 75년 매각되고 연극인들의 무대가 좁아지자 이같은 경향은 더욱 거세졌다. 삼일로창고극장,실험극장,민예소극장 등이 소극장 부흥에 한몫을 했다. 실험과 도전정신이 반짝거린 한국 연극의 중흥기였다. 80년대 연극계의 최대 이슈는 역시 표현의 자유와 검열문제. 84년 정치비판을 담았던 연우무대의 ‘나의 살던 고향은’이 심사대본과 공연대본이 다르다는 이유로 6개월간 공연정지처분을 받기도 했다. 또 이 시기는 81년 12월 극장허가 제한 완화 등을 골자로 한 공연법 제정으로 한국연극계가 급속한 양적 팽창을 이룬 시기이기도 하다. 81년 동숭동 문예회관 개관과 함께 막을 올린 ‘대학로 연극’은 90년대 들어 가속화됐다. 사회 전반의 해빙무드와 개방물결은 연극계에도 과거의 이념적 대립이 해소된,자율과 개성시대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상업화에 쫓겨 함량미달 공연이 늘어 오히려 작품수준은 낮아졌다. 지난해 제1회 세계연극제와 몇몇 극단들의 해외공연으로 일기 시작한 세계화바람도 IMF 영향으로 주춤한 실정이다.
  • LG상남재단 ‘일제시대 압수기시모음’ 펴내

    ◎민족언론 항일기사 ‘햇빛’/일어로 된 비밀자료 토대 원문 발굴/1년 작업 통해 1,061건 기사 수록/보도기사·논설·만화·시가 등 망라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 의해 압수된 민족언론의 항일기사가 햇빛을 보게 됐다. LG상남언론재단(이사장 안병훈)은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모음’(전 2권,정진석 엮음)을 발간했다.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기사모음’은 당시 발간된 3개 민족지(동아일보,조선일보,시대일보­중외일보­조선중앙일보)의 압수기사 원문을 발굴해 정리·해설한 것이다. 1920년부터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36년까지 압수된 보도기사를 비롯,논설 및 해설,만화,시가(時歌),기명기사 등이 실렸다. 이들 압수기사에는 6·10만세운동,광주학생 운동,폭탄과 권총으로 일제를 응징했던 김상옥과 라석주 의거 보도 등 민족언론의 진수가 포함돼 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언론신문 차압기사 집록’‘조선의 언론과 세상’‘조선 출판경찰개요’등 일본어로 된 비밀자료를 토대로 원문을 찾아냈으며,원문이 소실된 기사의 경우 일본어 자료를 번역해 실었다. 총 1억원을 들여 1년의 작업 끝에 발간된 이 모음집에는 1,061건의 기사가 수록돼 있다. 일제가 우리 신문에 삭제처분을 내리기 시작한 것은 1904년 2월 러일전쟁 직후부터. 1920년 민간지가 허가된 뒤에도 인쇄된 신문을 먼저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에 납본하는 방식은 마찬가지였다. 신문을 인쇄하거나 배포하는 중에도 도서과의 지시가 있으면 인쇄를 중단하고 문제된 기사를 삭제해야 했다. ‘출판법’에 의해 발행되는 잡지는 원고의 사전검열,조판된 잡지의 대장검열,납본검열 등 3중 통제를 받았지만 신문은 사전검열을 생략하는 대신 ‘납본검열’을 시행했던 것이다. 편저자인 한국외국어대 정진석 교수(언론사)는 “일제치하의 항일언론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치열한 것이었다”며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민족언론을 지키려는 이러한 불굴의 정신은 한말 이래의 전통인 저항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한다. 3773­2161
  • ‘행복의 나라’ 한대수(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5)

    ◎“물좀 주소 물좀 주소 목마르오/시대의 갈증 노래했는데…”/68년부터 명동·대학가 활동/통기타·청바지 문화 선도/2집 앨범 “체제전복” 낙인찍혀/75년 渡美… 음악활동 계속/지난달 일시 귀국 에세이 출간/“개인무대 갖는게 작은 소망” 1975년 한 해를 마감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인 12월 어느날 김포공항 대합실.긴 머리에 청바지 차림의 한 청년이 초췌한 모습으로 뉴욕행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한국 가요계에 파문을 일으키며 청년문화를 주도하던 가수 韓大洙(50)였다.미국 유학후 숨가쁘게 살았던 한국에서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지나갔다.자신의 음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 땅의 분위기가 한스럽기만 했다.채 피어나기도 전에 꺾여진 꽃처럼 자신의 음악을 가슴에 묻은 채 한대수는 그렇게 훌쩍 한국을 떠났던 것이다. 짧은 활동기간에 비해 뚜렷한 인상을 남긴 이색적인 경력의 싱어 송라이터.통기타와 자유의 청년문화를 생겨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당시 트로트와 사랑타령 일색이던 대중가요를 뿌리째 뒤흔들며 젊은이들의 우상이 됐던 가수 韓大洙.그는 왜 한국을 떠나야만 했을까. 어린시절부터 남달리 굴곡이 많은 개인적인 삶을 살았던 그였다.핵 물리학자인 아버지의 실종으로 7살때부터 줄곧 조부모와 함께 살았다.10살때 미국으로 이주해 3년간 미국생활을 한뒤 돌아와 한국에서 중학교를 마쳤다.17세때 미국에 사는 아버지의 소재가 확인돼 다시 미국으로 옮겨 고교를 다녔지만 적응하지 못한채 방황의 10대를 보냈다.韓씨의 재능은 이때 발견된다.상담교사의 도움으로 시와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나중에 국내에서 히트했던 ‘행복의 나라’‘그날까지’‘옥의 슬픔’같은 노래들이 모두 이때 쓴 것이다.고교졸업후 뉴햄프셔 대학 축산과에 진학했으나 적성이 맞지않아 중퇴,뉴욕 사진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귀국한 게 1968년 초.이때 한국의 가요사는 다시 쓰이게 된다.당시 국내 가요계는 트로트가 지배하던 시기.국내에선 처음으로 싱어 송라이터로 데뷔한뒤 발로뛰는 음악인의 생활로 접어든다.서울 무교동의 ‘세시봉’과 명동의 ‘오비스캐빈’에서 청바지,가죽장화 차림에 통기타 하나들고 포크록을 소개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이듬해인 69년 이렇다할 공연무대에 서기엔 아직 무명가수였던만큼 대학가를 돌기 시작했다. 총학생회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공연을 의뢰해 축제기간중 이화여대와 서울대,서강대,부산대 강당공연을 통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이때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인상지워지게 됐다.그리고 그해 겨울 그 유명한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 공연.그때만해도 드라마센터는 고상한 장르의 유명인들에게만 공연이 허용되던 곳.무명의 대중가수가 무대에 오른 것 자체가 화제거리였다.평소 韓씨의 음악에 매료된 팬들이 어렵게 마련한 데뷔 콘서트였다. 벼르고 별렀던 무대였던 만큼 혼신을 다한 공연이었다.이틀 공연 모두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대성공이었다. 74년 군에서 제대하고 나니 유명해져 있었다.자신이 곡을 쓰고 金敏基가 부른 ‘바람과 나’,楊姬銀이 부른 ‘행복의 나라’가 인기곡으로 불려지고 있었다.신세계레코드사에서 앨범제작 의뢰가 들어왔다.그래서 만든 첫 앨범이 ‘멀고 먼 길’이다.너무나도 반가운 제의라 하루만에 녹음을 모두 마쳤다.‘물좀 주소’‘행복의 나라’‘바람과 나’등 수록곡들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그리고 1년도 채 안돼 시련이 닥쳐왔던 것이다. 75년 가을 두번째 앨범을 만들었다.코리아헤럴드 기자로 재직중일 때였다. 기자로 일하면서 오후엔 남모르게 레코드 취입을 하느라 코피를 쏟기가 일쑤였다.마침내 레코드가 나왔다.이제 자신의 음악을 인정받는 뿌듯함에 마냥 들떠 있었다.기쁨은 채 2주가 못돼 좌절로 바뀌었다.당시 문공부에서 레코드 수거령이 떨어졌다.체제전복적 음악이란 낙인이 찍혔다.첫 앨범 ‘멀고 먼 길’도 함께 묶였다. “‘물좀 주소’등 히트곡들이 대학생들 사이에 번져가면서 정치·사회상 황에 맞물려 당국의 곱지않은 시선을 받았던게 사실입니다.당국이 ‘물좀 주소’에선 물고문을 연상했던 것 같아요.두번째 앨범은 표지가 문제였지요.녹슬은 철조망에 고무신이 걸려있는 모습인데 한국적 정서와 민중을 상징한 것이지요.죄수(철조망)가 흰 고무신을 신으니 박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었지요” 동양방송과 기독교방송 음악프로 출연도 막혔다.어쩔 수 없이 명륜동 자취방에서 직접 노래하고 녹음한 테이프를 만들어 매장에 내다 팔았다.테이프는 열악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려나갔다.이 테이프는 첫 앨범 취입 전부터 하나 둘씩 만들었던 것으로 이렇게 만든 테이프만도 100여개가 넘는다.하지만 그것도 잠시뿐.감시망이 좁혀지면서 테이프 제작도 할 수 없게 됐고 더이상 설 땅이 없어졌다.마침내 미국행을 결심했다. 이후 줄곧 뉴욕에서 살면서 시·사진·음악활동을 계속했다.89년 ‘무한대’,90년 ‘기억상실’,91년 ‘천사들의 담화’ 등 레코드도 세 집을 냈다.종전의 분위기와는 달리 자신의 삶을 담은 노래들이다.지난해 가을엔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록그룹 10개가 참가한 록페스티벌에도 참가했다.80년 일시 귀국해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약식 공연을 가진지 17년만의 무대였다.그리고 지난달 잠시 귀국해 자전적 에세이집을 냈다.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기록이다. 75년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는 韓씨는 이렇게말한다.“그 시대 정책 자체에 반감을 가진 적은 없습니다.어느 나라나 국가정책과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정신은 엇갈리기 쉽지요.당시 정부의 목적의식을 흐리는 활동이 제재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문화예술인들이 심한 갈증을 느끼는건 당연했구요. 오랫동안 나를 못봐온 팬들을 위해 개인무대를 갖고 싶습니다” ◎사연들/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세상을 더 보자/철조망 유신압제 상징 이유/‘고무신’·‘첫 앨범 잇따라 판금/‘행복의나라’ 희망 메시지 가득한데 68년 귀국후 세시봉과 오비스캐빈에서 시작된 韓大洙의 국내 음악활동은 불과 7년만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귀국전 미국 생활에서 반문화운동(카운터 컬쳐 무브먼트) 경향의 포크록에 심취했던 만큼 국내에서의 활동도 자연스럽게 자유와 젊음으로 대변되는 이 음악으로 시작됐다.미국 고교시절 답답한 생활을 노래에 담은 노래들이 70년대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금지곡이 된 것은 우연의 일치다.대학가를 돌면서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인상지워지고 금지문화의 한 주역이 된 것도 사실상 노래말의 상징성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물좀주소’와 ‘행복의 나라로’는 그의 대표적인 노래.“물좀 주소 물 좀 주소/목마르요 물좀 주소/물은 사랑이요 나의 목을 간질며/놀리면서 밖에 보내네/아 가겠소 난 가겠소/저 언덕위로 넘어 가겠소/여행도중에 그 님 만나 본다면/난 살겠소 같이 살겠소”(물좀 주소).“장막을 걷어라/나의 좁은 눈으로 이세상을 더 보자/창문을 열어라/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가벼운 풀밭 위로/나를 걷게 해주세/봄과 새들의 소리/듣고싶고 울고 웃고 싶소/내마음을 만져줘/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행복의 나라로) 유신정권의 압제 아래서 자연스럽게 현실 비유적인 내용으로 인식될 수 있었고 대학가에선 더욱 인기가 좋았다.물은 갈증을 해결하는 그 무엇이며 행복의 나라는 답답한 상황으로부터의 탈출과 희망의 의지가 역력한 상징임에 틀림없다.특히 金敏基 楊姬銀 등 사회성짙은 노래를 주로 불렀던 이들에 의해 불려지면서 자연스럽게 화살이겨냥됐고 마침내 철조망과 흰 고무신을 표지 사진으로 쓴 ‘고무신’ 앨범으로 피할 수 없는 족쇄가 채워진 것이다.‘자유의 길’‘병든 고아’‘술 취한 여자’‘물좀 주소’ 등 노래마다 일일이 검열을 당했고 레코딩까지 허락됐던 앨범 몰수는 韓씨를 떠나게 만들고야 말았다. ◎그의 길 ▲48년 부산출생. ▲64년 부산 경남고교 입학. ▲65년 미국 롱아일랜드 고교로 전학. ▲66년 뉴햄프셔 대학 수의학과 입학. ▲67년 뉴욕 사진학교에서 사진 전공. ▲68년 귀국.작사·작곡가·가수로 데뷔. ▲69년 드라마센터 공연. ▲70년 군입대. ▲74년 첫 앨범 ‘멀고 먼 길’ 발표. ▲75년 두번째 앨범 ‘고무신’ 발표,금지.미국으로 돌아감. ▲89년 ‘무한대’ 발표. ▲90년 ‘기억상실’ 발표. ▲91년 ‘천사들의 담화’ 발표. ▲98년 현재 뉴욕에서 사진작가및 창작활동중.자전적 에세이 출간.
  • 영상관계법 개정은 좋지만(사설)

    국민회의가 추진중인 영화진흥법,음반 및 비디오·게임물에 관한 법,공연법등 영상관계법의 개정작업은 규제완화를 그 정신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지난주 공청회를 통해 발표된 개정시안은 사전심의제도,즉 검열의 폐지를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다. 특히 영화의 경우 등급분류를 통해 연령에 따라 볼 수 있는 영화와 볼 수 없는 영화를 구별하고 등급외 영화는 별도의 전용관에서 따로 상영하도록 했다.18세 이상만 입장이 허용되는 등급외 영화는 형법상 처벌 대상이 되는 포르노 영화는 물론 아니다.사회통념상 음란성과 폭력성이 지나친 영화가 그 대상이다.등급외 영화로 규정되면 광고를 할 수 없어 관객동원을 크게 제한 받게 된다. 이같은 등급외 영화전용관의 설치는 영화에 대한 사전심의가 완전히 폐지됨을 뜻한다.물론 지난 96년 헌법재판소가 영화 사전심의에 위헌 판결을 내린 바 있고 그에 따라 지난해 영화진흥법이 개정됐지만 등급을 부여받지 못한 영화는 상영이 제한돼 실질적인 검열이 계속돼 왔다. 따라서 일제시대 사상검열을 목적으로 시작된 영화 사전검열이 반세기가 훨씬 지난 후에야 완전 폐지되기에 이른 것이다.우리 영화예술인들이 완벽한 표현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면 영상산업의 발전 또한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검열 폐지가 성과 폭력 묘사에 대한 무제한적인 범람을 가져와 우리 사회윤리와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청소년 탈선을 부채질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소리도 작지 않다.이 소리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영상물 등급 분류가 엄정하게 이루어지도록 하고 등급외 영화전용관에 대한 청소년 출입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영상물 등급 분류는 무엇보다 우리 사회와 문화적 환경에 적합해야 한다.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되 공익의 균형이 유지되도록 하려면 우리의 잣대를 확실하게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와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수입영화에 대한 등급심의에서 특히 유의해야 할 사항이다.따라서 등급분류위원회는 영화인들이 독점하는 것보다 다양한 사회여론이 반영될 수 있도록 청소년 자녀를 가진학부모등 여러 사회계층의 참여가 바람직하다. 아울러 등급외전용관의 운영실태가 사법당국에 의해 꼼꼼히 추적 관리되어야 할 것이다.지금 청소년 출입금지 업소가 법을 위반하듯이 등급외전용관이 청소년 출입을 허용할 경우 법개정은 안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 ‘섬소년’ 이정선(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4)

    ◎장발때문에… 첫 앨범 10곡 ‘연금’/‘불신풍조 조장’‘자기 비하’ 갖가지 이유/좌절… 오기… 나중엔 빠져나갈 궁리만/“음악인에 맡기면 자연스레 풀릴 문제를…”/그룹활동 하면서도 ‘언더그라운드’ 고집 ‘닥터 기타’‘국내 최고의 기타 연주가’‘언더그라운드 음악계의 대부’….우리 가요계에서 기타와 언더그라운드 가수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잔잔한 목소리로 시같은 노래말들을 쏟아내는 李正善씨(48). 20여년간 변함없이 노래를 하고 있지만 방송에서는 거의 모습을 대할 수 없는 고집스런 가수다.고교 1년때 기타를 처음 배웠고 서울대 미대 조소과 2년때 입대해 군악대에서 복무한뒤 복학전 아르바이트삼아 노래를 부른게 평생직업이 됐다.평생직업은 ‘언더그라운드 가수’.보이지 않는 다수의 군중보다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는 코 앞의 청중이 훨씬 좋아 ‘언더’를 택했다고 한다. 이 ‘언더’라는 명제가 지난 70년대와 80년대엔 가슴아픈 추억을 남겼지만…. 74년 봄.군에서 제대한지 1년이 지났을 때였다.언더그라운드를 무대로 활동하면서 대학가와 젊은이들에게 이름이 어느정도 알려져 있었다.가수생활을 일반인들에게 처음 공개적으로 알리는 앨범을 받아들고 마치 첫 아들을 얻은 것처럼 좋아했다.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6개월도 채 안돼 레코드 판매금지령이 떨어졌던 것.이미 전국에 5,000여장이 배포돼 있었다.발매금지와 함께 매장에 진열된 것들을 모두 수거하라는 당국의 서릿발같은 명령이었다.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첫 앨범 ‘이리저리’에는 타이틀곡 ‘이리저리’를 포함해 모두 11곡이 실려 있었다.예기치 않은 불호령으로 수록곡 가운데 비교적 밝은 분위기의 ‘모두 다 함께’를 빼놓곤 10곡 모두가 금지곡 운명에 처하게 됐다.실린 노래들은 ‘바보가 되어’‘비오는 날에’‘청개구리 마음’ 등 모두가 일상의 마음을 크게 흔들지 않는 평범한 가사를 담은 잔잔한 분위기의 노래들이다. 앨범 전체가 금지곡집으로 묶였지만 사실상 문제가 된 것은 ‘거리’라는 노래 한 곡의 한 소절.“서로들 믿지 않는 사람만이 거리를 덮었네”가 10곡 모두를‘듣지못할 위험한 노래’로 묶는 단서가 됐던 것이다.‘불신풍조 조장’과 ‘자기 비하’‘문맥이 안통한다’ 는 등 그럴싸한 사유가 노래마다에 붙었다.유신정권의 치부를 애써 감추려는 올가미들이었다. ‘불신풍조 조장’ 등 다양한 금지 명분이 생겨났지만 공식적인 금지사유는 ‘장발’.당시 대대적인 단속 바람에 편승해 李正善의 장발이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레코드 표지모델로 본인 李正善씨가 등장했는데 머리상태가 장발이었다.표지제작 때 돈도 아낄 겸 동네 골목의 공중화장실 앞에서 긴머리를 한채 서있는 모습을 그대로 실었는데 보기좋게 걸려든 것.나중에 이씨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제의 노래 ‘거리’를 뺀 채 같은 앨범을 다시 냈는데 이 앨범은 아무런 문제없이 통과됐다.75년 하반기 큰 반응을 얻은 ‘섬소년’판이 그것으로 이 앨범이 사실상 공식적인 첫 앨범이 됐다. 76년 6월 두번째 앨범은 또다른 시련을 몰고 왔다.이번엔 다분히 의도적이었다.처녀 앨범에서 뼈저린 고통을 맛본 뒤 일을 저지른 것이다.‘건전가요를 삽입하라’는 당국의 지시대로 당대의 유행곡인 ‘새마을노래’를 넣었는데 ‘朴正熙 작사·작곡’으로 표기했던 것.당연히 레코드는 판매금지였다.금지사유는 여전히 표지모델의 장발을 문제삼은 ‘퇴폐’.이 앨범도 새마을 노래를 빼자 통과됐다. 李씨는 당시 거듭된 금지와 심의통과,그리고 해금의 악순환을 이렇게 돌이켜 말한다.“젊은 가수들은 대부분 상황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었습니다.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맡기면 자연스럽게 불만이 해소되고 정리될 수 있는데도 강압적인 조치를 취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봅니다.저만 해도 처음엔 좌절을 느꼈고 두번째엔 오기가 생겼는데 다음엔 숨바꼭질 하는 식으로 빠져나갈 궁리를 하게 됐던게 솔직한 심정입니다.사실은 은유적인 표현이 더 위험하고 무서운데…” 레코드가 거듭 판·금 조치를 당했지만 노래는 계속했다.당시 李光祚 韓英愛 등과 함께 4인조 보컬 해바라기를 구성해 서울 명동 가톨릭여학생회관에서 매주 토요일 공연을 가졌다.공연때마다 중부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꼬박꼬박 참석했다.명동 가톨릭여학생회관은 그때만해도 젊은이들이 금지된 노래들을 찾아 부르면서 젊음을 발산하던 요주의 감찰대상지.감시 요원들과 숨바꼭질을 해가며 어렵게 모임을 가졌던 만큼 수난도 많았다.가수들이 불려가기 일쑤였고 공연전 노래목록을 제출하는 사전검열도 숱하게 당했다.“형사들도 노래를 함께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분위기를 유도해 가니까 점차 감시가 뜸해지고 나중엔 나오지 않게 되더군요” 79년 ‘풍선’,86년 ‘신촌블루스’를 만들어 활동하는 등 그룹활동을 병행하면서도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고집하고 있는 가수.요즘 흔한 ‘반짝가수’와 달리 언더그라운드를 배경으로 고집스럽게 음악에 매달려온 만큼 애환이 많다.지난 91년엔 기타 관련 전문서적 출판사인 ‘이정선 음악사’를 만들어 지금까지 40여종을 냈다.지난해까지 가끔 국악프로의 편곡과 연수를 맡기도 했지만 여러 가수들이 함께 어울려 노래하는 이른바 ‘떼창’ 프로그램 출연은 시종일관 절대사절.“언더그라운드 가수는 언더그라운드 가수 다워야 한다”는게 그 이유다. ◎사연들/말하는 사람 많아도 말 듣는 사람 없으니 말 같지 않은 말만이/은유적인 표현이 더 무서운데… ‘집권연장 연상시킨다’ 트집도/삶 얘기서 자연대상으로 변화 “말을 하는 사람은 많아도/말을 듣는 사람은 없으니/아무도 듣지 않는 말들만이/거리를 덮었네/신을 믿는 사람은 많아도/사람을 믿는 사람은 없으니/서로를 믿지 않는 사람만이/거리를 덮었네/웃음짓는 얼굴은 많아도/마음주는 사람은 없으니/아무도 받지 않는 웃음만이/거리를 덮었네” 74년 李正善씨의 첫 앨범중 문제가 된 ‘거리’의 가사다.“서로를 믿지않는 사람만이 거리를 덮었네”라는 대목이 ‘불신감을 심하게 조장한다’라는 이유로 당국의 미움을 샀다.이 노래를 빼고 앨범 표지모델의 머리를 장발에서 짧은 머리로 바꿔 다시 만든 앨범은 무난히 통과,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李正善씨의 노래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다가 나중엔 대부분 자연을 대상으로 삼게 된다.구태여 사람 이야기를 건드려 당국의 미움을 사지않겠다는 의도였다.“어리석고자 어리석고자/어리석고자 어리석고자/사랑이 지나도 그사람 떠나도/안타까움 모르는 바보가 되고저/죽음이 닥쳐도 하늘 무너져도/두려움 모르는 바보가 되고저/콩을 팥이라 미움을 사랑이라 속여도/의심을 모르는 바보가 되고저/배고프면 울음울고 배부르면 웃음웃고/속일 줄 모르는 바보가 되고저”(바보가 되어)“이제는 그만,이제는 그만해도/‘한번만 더 꼭,한번만 더’하고 미련이 남아/맘대로 해라,맘대로 해라하면/‘하기싫어 내가 왜 해’하는 고집이 있고/비오는 날이면 울음우는 청개구리처럼/후회할 것을 후회할 것을/착해져야지 착해져야지 해도/하지마라 하면 자꾸하고 싶은 청개구리 마음”(청개구리마음). ‘바보가 되어’는 유치환시 ‘바위’와 아주 흡사한 분위기의 노래.본래 가사의 의미와 동떨어지게 ‘지나친 자기비하’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그런가 하면 ‘청개구리 마음’은 ‘정서미숙’이 금지사유.청개구리 동화를 소재로 사람사는 이야기를 희화적으로 담은 노래지만 첫 귀절과 맨 마지막부분이 ‘정권연장’을 연상시킨다는 억지를 낳았다. ◎그의 길 ▲50년 대구 출생. ▲68년 용산고교 졸업. ▲68년 서울대 조소과 입학. ▲69년 군 입대. ▲73년 복학. ▲74년 첫 앨범 ‘이러저리’ 발표. ▲75년 앨범 ‘이러저리’ 수록곡 금지곡 조치.앨범 ‘섬소년’ 발표. 해바라기 공연활동 시작. ▲76년 졸업.두 번째 앨범 ‘이정선’ 발표. ▲86년 해금. ▲91년 출판사 ‘이정선 음악사’ 설립. ▲97년 MBC 국악 프로그램 ‘샘이 깊은 물’ 국악 편곡·연수. ▲현재 서울예전·동덕여대·동아전문대 출강.
  • “北 체제 저항세력 제거중”/李 안기부장

    ◎대대적 사상검열… 간부 50여명 처형 李鍾贊 안기부장은 13일 “북한이 대대적인 사상검열과 함께 당비서와 군 장성 등 고위간부 50여명을 본보기로 공개 처형하는 등 강력한 통제와 숙청을 통해 체제 저항세력의 발생소지를 원천적으로 제거해 가고 있다”고 밝혔다. 李 안기부장은 이날 국회 정보위 전체회의에 출석,“북한이 장기화된 주민들의 생활고가 한계에 봉착,체제 저항심리가 확산되자 이같은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전하고 “이봉원 무력부부국장이 간첩죄로,서관희 농업담당비서가 농정실패죄로 처형됐으며,비리혐의로 장성택 당부부장은 혁명화 교육을 받고,최용해 청년동맹 1비서는 해임됐다”고 보고했다. 또 “북한은 IMF체제하의 남한정세를 대남혁명의 호기로 평가,노동자와 학생,노동자와 농민 연대를 통한 반정부투쟁을 선동하면서 대외연락부 등 대남 공작부서를 확대해 적극적인 침투공작을 꾀하고 있다”고 밝혔다.
  • 남북 합작 드라마(사설)

    요즘 각 방송사들은 남북합작드라마 제작에 대한 꿈에 한껏 부풀어 있다. 다큐분야 대북교류에 이어 가능하면 2000년 방영을 목표로 한 방송사는 대하소설 ‘장길산’을, 다른 방송사도 고려를 개국한 王建 이야기를 현지로케로 구상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1,2년후 안방에서 남북 방송인들이 연출하고 출연한 드라마를 보게 된다는 것은 금강산 관광만큼이나 가슴 벅찬 일이 아닐수 없다. 합작드라마 추진은 다른 문화교류와 마찬가지로 통일을 향한 작지만 커다란 출발로 받아들여진다. 드라마는 대중과 가깝고 설득력이 강하다는 점에서 어떤 예술분야보다 시청자의 호응을 받는 장르다. 더구나 드라마속에는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언어 습관 사고방식은 물론 희로애락의 표정을 읽을 수 있어 각자 살아온 배경과 체제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분단 반세기를 넘어서면서 우리 남북은 생활의 기틀인 단어선택에서 맞춤법 발음 표현에까지 언어 이질화현상이 심각할 정도다. 같은 민족으로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하지만 마치 외국어를 듣는 듯한 불편함과생소함은 어쩔수 없다. 바로 이런 언어차이와 긴단절에서 온 이질의 골을 드라마가 어느 정도 극복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소재가 역사물일 경우 그 시대의 상황을 함께 공유했다는 전제때문에 오늘의 분단현실과 우리가 살아온 기본적인 배경을 이해하는 데도 공감이 용이해질 수 있다. 만약 어떤 거부감이 작용한다고 하더라도 드라마는 사실을 가공하여 반영하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양보와 이해의 폭은 얼마든지 넓어질 수 있다. 그동안 안기부는 확고한 정보공개 확대 차원에서 북한 방송청취를 허용하는가하면 리틀엔젤스의 북한공연 실황 비디오테이프를 정부의 사전검열없이 방송하게 했다. 鄭周永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통일 소’입북과 금강산 관광계획 등도 전 같으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적극적이고도 현실적인 협조로 보인다. 이번 드라마합작은 민족적 동질성 회복을 위해 다른 어떤 것보다 바람직한 방법의 하나로 보인다. 다만 남북 모두가 분단에 의한 이질화 내지 차별화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합작드라마도 남북 절대 다수 시청자들이 공감하고공유할 수 있는 내용으로 만들어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공동으로 마련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또 현지로케와 북한 배우캐스팅등 교류를 제약하는 법적 제도적 규제장치를 풀어주는 것도 중요하다. 문화예술인들이 오가며 드라마나 영화를 ‘합작’한다고 해서 당장 통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작은 출발들이 모여 이질감을 극복하고 동질성을 회복하여 모처럼의 햇살무드를 ‘통일’로 이끄는 바탕이 되게한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만화 즐기며 IMF 탈출/새달 3大 기획전

    ◎‘만화야 꼼짝마’­만화는 죽었다展·애니메이션·심포지엄/우리시대 사람展­저명인하 300여명 캐리커쳐 전시·판매/언더그라운드축제­저급성·상업성 부정 젊은 작가들의 외침 힘겨운 IMF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 웃음을 선사해 줄 만화잔치가 잇달아 마련된다. ‘우리 만화 발전을 위한 연대모임’(대표 김형배·이하 우만련)의 만화종합프로젝트 ‘만화야 꼼짝마’,참여연대(공동대표 김중배 김창국 박상중)와 한국만화가협회(회장 이두호)가 공동주최하는 ‘만화로 만나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전’,금호미술관에서 열리는 ‘대한민국 언더그라운드 만화 페스티발’이 그것이다. 우만련은 7월1일부터 7일까지 1주일동안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기획전 ‘만화는 죽었다’를 비롯,만화 심포지움,창작 애니메이션 발표회,우리 만화 일일 호프 등 행사를 갖는다. 덕원미술관(723­7771)에서 열리는 기획전시 ‘만화는 죽었다’는 최근 창작과 표현의 제한으로 위축된 만화 창작의 현실에 대한 만화인들의 시각을 대변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 전시회다. 애니메이션 발표회에는 ‘곰무리’ ‘오돌또기’ ‘서울무비’ ‘애니멀’ 등 국내의 애니메이션 창작집단들이 참여,기획 창작물과 순수 창작물 50편을 상영한다. 장소 민예총(325­6525). 1∼5일 하오 2∼8시. 또 3일 하오 3시 민예총에서 ‘정부의 출판 만화 정책의 진단과 대안’이라는 주제로 만화 심포지움이 열린다. 7월3일부터 9일까지 서울 백상기념관(724­2243)에서 열리는 만화가협회와 참여연대 주최의 ‘만화로 만나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전’에는 이현세 김수정 허영만 강촌 씨 등 50여명의 만화가들이 그린 우리사회 저명인사 300명의 캐리커처가 전시된다. 전시회에는 김대중 대통령,김종필 총리서리 등을 비롯한 정·관계 인사와 종교계,법조계,재계,문화예술계 인사의 캐리커처가 망라돼 있다. 또 참여작가들이 저마다 그린 DJ의 캐리커처를 모은 DJ캐리커처 특별전시 코너와 참여연대가 선정한 우수 시사만평 코너,연예인 문화 예술인 특별 코너가 설치된다. 참여연대측에서는 전시기간중 작품을 판매해 수익금을 참여연대의 시민운동기금과 만화가협회의 발전기금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가격 30만∼1백만원. ‘언더그라운드 만화 페스티발’은 만화의 저급성과 상업성을 부정하며 독자적인 창작 활동을 해 온 언더그라운드 만화가들이 지상에 나와 작품성으로 외치는 대규모 만화축제. 7월1일부터 8월9일까지 금호미술관(720­5114)에서 열리는 이 행사는 만화전시,애니메이션 상영,퍼포먼스,만화 포럼 등으로 꾸며진다. 만화를 독자적 예술 창작 형식으로 접근하는 젊은 작가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갖가지 형태의 ‘잔혹’적인 것을 ‘만화’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무대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검열의 잔혹성,작품성을 가로막는 상업성의 잔혹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7월5일과 19일 하오 4시에는 작가들과 대담이 있다.
  • ‘신문검열 항의’ 언론인 7명 무죄/서울고법 선고

    ◎80년 신군부에 반발 제작거부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郭東曉 부장판사)는 10일 80년 5·17계엄 당시 신군부의 언론검열에 항의,신문제작을 거부했다가 계엄포고령 및 반공법 위반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한겨레신문 朴成得 이사(48) 朴雨政 편집국장(48) 高永才 논설위원(50) 등 전·현직 언론인 7명의 재심청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들은 80년 5월9일 경향신문 편집국에서 기자총회를 열고 ‘검열이 계속될 경우 삭제 부분을 공백 처리한다’고 결의했으나 검열이 계속되자 100여명과 함께 5일간 신문제작을 거부하다 그해 9월 수도경비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3년씩을 선고받았다.
  • 金大中납치 李厚洛씨가 지휘/美국무부,73년 주한美대사 보고서공개

    ◎박 대통령 승인 아래 조직적 단행 판단/미 대사,소재파악 다각 접촉… 정부 압박 【워싱턴〓金在暎 특파원】 지난 73년 발생한 ‘金大中 납치’사건은 朴正熙 당시 대통령의 동의를 얻어 李厚洛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지휘 아래 이뤄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미 국무부가 9일 조지 워싱턴대의 전시회를 통해 공개한 金大中 납치·귀환(73년 8월8일∼18일) 사건관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필립 하비브 당시 주한 미대사는 납치사건이 “朴대통령의 명시적 또는 묵시적 승인을 얻어 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의 지휘로 이뤄졌다”고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하비브 대사는 도쿄에서 납치사건 발생직후인 8월8일 청와대,중앙정보부,총리실 등과 접촉해 피납자의 소재파악에 나서는 등 한국정부를 압박했다.이어 대사는 8월10일 미국무부장관에게 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한 것임을 보고하는 전문을 보냈다. 8월10일 전문에서 하비브 대사는 “朴正熙 대통령의 명시적·암묵적 동의를 얻어 李厚洛 정보부장의 지휘 아래 중앙정보부가 조직적으로 단행한 것”이라고보고했다. 이날 공개된 자료는 필립 하비브 당시 주한 미대사가 국무부에 보고한 날짜별 비밀전문 내용이다.미국 정부가 이 사건과 관련된 비밀문서를 공개하기는 처음이다.그러나 미국 정보기구의 문서들은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다음은 공개된 비밀전문의 주요 부분을 사안에 따라 간추린 것이다. ◇필립 하비브 당시 주한미대사가 보낸 주요 전문. ▲8월8일=도쿄로 부터 金大中씨 납치사건을 보고받자마자 청와대와 중앙정보부,총리실 등과 접촉했다.청와대는 金씨 납치사건에 대해 아는바 없다고 통보했다.한국 정부는 이 사건과 관련되지 않았다는 부인성명을 준비하고 있다. ▲8월9일=金正濂 청와대 비서실장은 전화통화를 통해 한국정부가 이번 사건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나는 이번 사건과 관련,한국정부가 수집한 모든 정보를 우리측에 알려줄 것을 요구했고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8월10일=한국 언론의 이번 사건에 대한 보도가 한국정부에 의해 통제되고 지시받고 있음이 분명하다.우리는 비공식 접촉결과 이 사건이 한국정보기관의 소행이라는 결론을 내려가고 있다. ▲8월13일=한국 언론은 보도하기 전 검열기관에 기사를 제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한 언론인으로부터 전해들었다. ▲8월14일=金씨의 갑작스런 출현과 납치과정에 대한 설명은 한국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우리 대사관은 처음에 매우 놀랐지만 지금은 그가 살아있다는데 안도하고 있다.한국인들 사이에서도 金씨의 납치와 강제귀환은 중앙정보부가 개입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확신이 퍼져가고 있다. ◇하비브 대사가 사건발생 두달 후인 73년 10월10일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사건의 개관 ▲사건 현황=한국 정부는 아직도 관련을 부인하고 있다.그러나 실제로는 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의 지시아래 납치사건이 저질러졌다.朴正熙 대통령도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승인한 것으로 보인다.한국수사기관이 수사를 한다고 밝히고 있지만 아직 진정한 수사는 벌이지 않고 있다.청와대에서 정치적 결정을 내리지 않는 한 수사와 진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金鍾泌 총리의 역할=金총리는 이번 사건이 일본과의 관계에 미치는 악영향을 깊이 우려하고 있다.그는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타협을 모색하고 있다.朴대통령은 金씨의 조기석방을 고려하고 있지 않지만 金총리는 일본 언론과 야당의 비판으로 수세에 몰려있는 일본총리를 돕기 위해 대안을 찾고 있다.이같은 金총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의 입장은 강경하다.이 노선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이며 朴대통령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레스터 울프 상원의원의 朴대통령 면담결과=8월24일 울프 상원의원은 朴대통령을 만나 이번 사건에 많은 주의를 기울여 줄 것을 요청하면서 朴대통령의 코멘트를 구했다.朴대통령은 “수사가 진행중이기 때문에 상세한 언급은 하고 싶지 않다”면서 “북한 공작원 소행이거나 일부 한국 정부기관의 개입 또는 자신을 부각시키려는 金大中씨의 자작극일 수 있다”고 말했다.
  • 梁起鐸 선생 유해 60년만에 환국

    ◎대한매일신보 창간·臨政 참여 독립운동/어제 中서 봉환… 14일 국립묘지에 안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대표적인 애국계몽 언론인이자 무장독립운동가인 우강(雩岡) 梁起鐸 선생의 유해가 8일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1938년 중국 상소성 율량 고당암에서 서거해 현지에 안장된 지 꼭 60년만이다. 선생의 유해는 이날 하오 3시30분 아시아나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손자 梁俊一씨와 손녀사위 朴維徹(독립기념관장)에 의해 봉환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영현봉안관에 임시 안치됐다. 이로써 李相龍 선생(90년),朴殷植 선생(93년) 등 국외에 안장돼 있던 8명의 임시정부 수반급 요인이 모두 국내로 봉환됐다.雩岡 선생은 민족독립을 위해 몸소 가시밭길을 걸어온 참 민족주의자였다. 평양 소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25세때인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민족운동의 길로 들어섰다.수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르는 수난의 시작이었다. 선생은 1904년 영국인 베델과 합작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으며 외국인에게 사장을 맡기면일제의 검열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십분 활용,본격적인 항일운동을 펼쳤다. 특히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격렬한 필봉을 휘두르며 을사조약을 규탄하고 즉각적인 파기를 요구했다.이와 함께 전국의 의병운동을 상세히 보도,항일독립운동에 불을 지폈다.이 때문에 대한매일신보는 애국계몽운동 뿐아니라 의병운동의 대변지로 인식되면서 국권회복운동의 중심적 언론기관으로 인정받았다. 일제에 맞설 때마다 중심축이 됐던 선생은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대한매일신보사내에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를 설치해 직접 총무를 맡으며 전국적 국민운동으로 확대해 나갔다. 이후 安昌浩·李東輝 선생 등과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를 창립해 활동하다 ‘105인 사건’으로 체포돼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933년 여러 차례에 걸친 추대에 겸양으로 거절하다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했으며 이후 조선혁명당 한국광복전선을 조직하는 등 항일공동전선을 구축하고 민족화합을 위해 온몸을 던져 일하다 과로로 1938년 이역만리에서 서거했다.유해는 일반인이 참배할 수 있도록 오는 14일 정오까지 영현봉안관에 안치되며 14일 하오 2시 안장식이 거행된다.
  • 국민회의 영상법 개정안/영화등급 세분화 ‘등급외 전용관’ 설치

    국민회의는 영화의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을 세분화,폭력과 성애장면이 지나친 ‘등급외’를 신설하여 등급외 전용관에서만 상영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국민회의 영상관계법 제·개정특별소위원회(간사 崔喜準 의원)는 26일 영화의 사전검열 및 심의제도를 폐지하는 대신 관람등급을 5개로 나누는 완전등급 분류제도를 도입하키로 했다.또 해당 등급의 영화만 상영하는 등급별 전용영화관을 설치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영상관계법 제·개정안을 확정,다음 임시국회에서 처리키로 했다.국민회의는 이에 따라 영화의 검열 및 심의기능을 맡고 있는 공연예술진흥협의회를 폐지하고,민간주도의 가칭 영상등급 분류위원회를 신설키로 했다.또 영화의 등급을 ‘전체 관람가’와 12세 미만은 볼 수 없는 ‘12 관람가’,15세 미만은 볼 수 없는 ‘15 관람가’,18세 미만은 볼 수 없는 ‘18 관람가’,섹스·폭력 묘사가 지나친 ‘등급외’ 등 5단계로 세분화하도록 했다.그러나 포르노물은 등급외 전용관에서도 상영을 불허키로 했다.
  • 길섶의 창녀/조너선 커시 지음(화제의 책)

    ◎금리시되어온 성서속 얘기 재구성 유대 율법학자들은 2천년 이상 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히브리어 성서를 연구하고 주석을 달며 미화하는 작업을 계속했다.그들의 연구업적은 유대교의 율법과 민담,전설을 집대성한 ‘탈무드’와 성서를 주석한 ‘미드라시’에 대부분 기록돼 있다. 이 책은 그동안 금기시되고 잘못 전해져온 성서 속의 이야기들을 소설기법으로 재구성,성서의 새로운 면을 부각시키고 있어 관심을 끈다.유혹과 강간,관음증과 노출증,근친상간 및 서자(庶子)생산,암살과 살인 등 서구문학을 통틀어 가장 노골적이고 격정적인 성적 일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구약성서라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서평 칼럼니스트인 커시는 이 책에서 구약성서에서 ‘금기되어온’ 내용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 일곱 가지를 소개한다. 종족보존을 위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한 롯의 두 딸 이야기,자신에게 약속된 아들을 낳기 위해 길섶의 창녀를 자청,시아버지를 유혹하는 다말의 이야기 등 그 내용은 사뭇 충격적이다.이런 내용은 유대의 서기관과신학자를 겸한 율법학자들이 성서원전을 다시 고쳐 쓰는 과정에서 삭제하거나 고의적인 오역의 남용으로 은폐됐다는 것이 커시의 지적.이 책은 각 이야기들을 그 배경이되는 시대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속에서 재현,당초 검열의 대상이 됐던 이유를 밝힌다. 커시는 “성서의 금지된 원전들은 섹스와 폭력을 노골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인간의 열정에 관한 이 이야기들 속에는 단순한 자극 이상의 교훈이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성서속 금지된 이야기들의 통찰력을 활용한다면 낙태문제에서부터 중동평화 문제,성(性)의 정치학,세계정치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대의 난제들을 해결하는 데 적잖은 암시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결론이다.오성환 옮김 까치 1만2천원.
  • ‘북풍’ 예의 주시… 공작팀 정비 나선듯

    ◎입장정리·대책마련 부심… 연루자 숙청설/안기부 해체 요구·남북 경색 구실 가능성 한국 새 정부와의 관계설정을 탐색하고 있는 북한은 ‘북풍공작사건’돌출에 내부적으로 적지 않은 충격 속에 사태추이를 주시하며 입장정리와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북풍조작 사건’에 대해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중앙방송·평양방송을 비롯,당기관지 노동신문과 중앙통신 등 공식 언론매체들은 한국에서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다만 대남지하방송인 민민전방송만이 지난 14일 이 사건 수사 진행 상황과 정치권의 반응 등을 대담 형식으로 내보냈다.북한 공식 언론매체들이 남북커넥션과 북풍조작사건에 대해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이번 사건이 남북한 모두가 관련된 민감한 사안인데다 북한 내부의 입장정리가 쉽지 않은데 따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조평통 서기국은 지난 17일 북풍조작사건에는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안기부를 해체하라고 요구하고 나왔다.중앙방송 역시 이날 시사논단프로에서 북풍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채 “안기부를 그대로 두고서는 남조선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보장될 수 없고 북남관계도 개선될 수 없으며 통일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그러나 이같은 표면적인 반응과는 달리 내부적으로는 대남공작 루트가 노출됨에 따라 대남공작팀을 전면 정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김정일에서 당비서 김용순으로 이어지는 최상층 라인은 변함이 없겠지만 당·정 실무부서장 등 중하층부에는 대폭적인 손질이 가해질 것으로 북한문제전문가들은 관측하고 있다.이와 관련,최근 중국 베이징에서 흘러나오는 첩보에 따르면 국내 모 의원과 접촉했다는 안병수 조평통 부위원장과 전금철 아태평화위원장 부위원장이 이번 북풍파문으로 경질 위기에 놓여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북한에서는 한국에서 북풍조작사건이 터지기 훨씬 전인 지난해 가을에 북한판 ‘남풍사건’의 회오리가 몰아쳤던 것으로 알려졌다.청년동맹간부 등이 한국측에 연루된 혐의가 북한당국의 집중적인 사상검열에서 발각돼 처형됐다는 것이다.청년동맹이 운영중인 은성무역상사의 이변서 총사장과 사회안전부 함운건 정치국부국장은 베이징과 마카오 홍콩 등에서 한국정보기관과 접촉했으며 금품을 수수했다는 혐의가 포착돼 국가반역죄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그리고 농업당당 비서 서관희가 간첩혐의로 처형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남북커넥션에 따른 숙청은 현재도 진행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연초에 김정일의 최측근 심복이었던 청년동맹 제1비서 최용해가 전격숙청을 당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 북한문제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북한문제전문가들은 오는 25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남북적십자회담 때 북측의 기류가 감지되겠지만 북풍사건이 남북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북한측이 남북관계 경색의 구실로 삼을 가능성이 많다고 분석했다.이와함께 한동안 당국간 대화는 계속 외면하면서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자기들이 지난 2월18일에 제안한 이른바 ‘정당·단체연합회의’제의 수락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나올것으로 전망했다.그러나 식량난과 경제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국의 지원이 절실한 만큼 식량지원·경협 등 실리를 챙길 수 있는 민간차원의 대화에는 적극 나설 것으로 내다봤다. ◎새정부 출범전후 북측 동향 ▲2월18일=정당·단체연석회의 제안 수락 촉구 ▲20일=한국의 6자회담 제안 비난 ▲28일=대통령 취임사내용 실망 논평 ▲3월9일=강인덕 통일부장관 임명 비난 ▲11일=천용택 국방장관 발언 비난 ▲11일=적십자회담 북경서 갖자 회답 ▲14일=민민전방송 북풍사건 첫 언급 ▲17일=조평통 안기부 해체 촉구 ▲17일=중앙방송 안기부 해체 요구 ▲17일=강장관 계속 비난 ▲18일=4자회담에서 한국 의중떠보기
  • 실업대책·사교육비 절감 싸고 격돌/TV합동토론회­중계

    ◎이회창­‘일자리 확보’ 노사간 신협약 필요/김대중­비자금자료 입수·공표 모두 불법/이인제­문화 사전·사후 검열제 철폐 시급 대선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실시된 14일 합동TV토론회에서 3당 후보들은 실업대책과 사교육비 절감방안 등을 놓고 열띤 공방을 벌였다.후보들의 발언을 요약정리한다. ▷과학기술 예산 확보◁ ▲김대중=과학 예산은 최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한다.낭비되고 있는 국가예산을 절감해 과학기술분야에 최우선적으로 예산을 지원해야 한다. ▲이회창=IMF기간 이후 과학기술이 경제를 살리는 원동력인 만큼 이에 대한 투자는 아낄수 없다. ▲이인제=국가생존전략 차원에서 기초과학분야에 대한 투자는 2002년까지는 6%로 끌어올려야 한다.소프트웨어 인력을 양성,과학기술역량을 높여야 한다. ▷복지예산◁ ▲이인제=IMF 이행조건 때문에 내년 7조5천억원,약 10%의 예산삭감이 불가피하다.그러나 대형국책산업 부문은 다소 삭감하더라도 복지예산을 삭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김대중=중요한 것은 실업을 방지하고 직업이 없는 사람에게 직업을 주는 것이다.반년간 임금을 동결하고 해고도 하지 않는 복지정책이 필요하다. ▲이회창=일자리 확보가 중요하다.노사 신협약이 필요하다.급여를 줄여서라도 같이 가는 것이 필요하다.김대중후보의 IMF재협상론으로 국제신인도가 떨어져 난리가 났다. ▷비자금 폭로◁ ▲김대중=이회창 후보는 국가기관의 영장이 없으면 입수할 수 없는 내 친인척 계좌를 입수,우리를 공격하는데 썼다.자료의 입수 및 공표 모두 불법이다. ▲이회창=어마어마한 제보가 들어왔다.정확한 제보처럼 보여 검찰에 수사의뢰했다. ▲이인제=5백50억원을 계약금조로 사채시장에 갖고 갔다고 했는데 그것을 살만한 기업은 없을 것이다. ▲김대중=이회창 후보께서 우연히 입수했다고 했는데 설사 그렇더라도 위법사실을 검찰에 갖다 줘야지 당에서 발표하는 것은 금융실명제 위반이다. ▷DJ 20억 수수문제◁ ▲이회창=김대중 후보는 20억원을 위문금으로 받았다는데 5.18 학살자로부터 받은 돈도 위문금인가. ▲이인제=김대중 후보가 노태우 대통령이 그 정도의 돈을 갖고 있어서20억원을 받았다는데 정말 놀랬다.김대중 후보의 경험으로 미루어 재벌의 정치자금 일부인 줄 알고 받았을 것이다. ▲김대중=이회창 후보는 3김중 하나인 김영삼 대통령 덕으로 감사원장,총리,여당대표 등 온갖 영전을 누려왔다.3김중 하나와 협력한 것을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이회창=야당이 여당 대통령으로부터 20억원을 받은 것도 민주주의인가. ▲이인제=이회창 후보가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새로운 지역패권주의가 아닌가. ▲이회창=현실적으로 이후보가 대통령이 되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 ▲이인제=학생 젊은층 등 밑으로부터의 지지는 폭발적이다.반드시 위대한 선거혁명이 이뤄질 것으로 본다. ▲김대중=‘이인제 찍으면 김대중 된다’는 말은 이인제 후보와 나에 대한 모욕이다.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다. ▲이회창=아직도 이후보를 남의 당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지금도 이후보와 손잡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이인제=이회창 후보가 나를 같은 식구로 생각한다고 했는데 이를 빨리 거두어 들이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통합방송법 처리◁ ▲김대중=통합방송법은 연내 또는 명년초에는 처리해야 한다.재벌의 위성참여는 막고 대신 중소기업이 컨소시엄을 만들어 참여해야 한다. ▲이회창=경쟁력있는 기업의 참여를 반드시 백안시해서는 안된다.재벌은 참여하되 지분을 제한해 독과점을 막는 조치가 있으면 되지 않나 싶다. ▲이인제=상당한 부분은 중소기업이 컨소시엄을 만들어하되 일정부분은 대기업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김대중=대기업과 중소기업 컨소시엄은 완전히 다르다.대기업은 독과점의 부작용이 있다.언론의 독과점을 막는게 중요하다. ▷일본 대중문화 수입◁ ▲이회창=우리 청소년들은 자신있게 일본문화를 소화할 수 있다.저급한 문화를 제외하고는 들어와도 괜찮다. ▲이인제=일본문화의 개방에 대해 나는 전부터 적극적인 생각을 피력해 왔다.해방이후 여러 세대가 지났으니 이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수출할것은 수출해서 극복해야 한다. ▲김대중=역사를 볼 때 ‘문화 쇄국주의’를 고수해서 잘된 나라는 없다.일본문화가 뭐가 그리 대단해서 받아들이면 안되는가.고급문화를 안받아들이니까 섹스.폭력 등 일본의 저급문화가 판을 치고 있다. ▲이회창=영화 등 영상산업의 경우는 예외다.우리 국내 영화산업 보호를 위한 장치가 먼저 마련돼야 한다. ▷정부의 문화간섭◁ ▲이인제=사전,사후검열 모두를 철폐해야 한다.문화는 간섭이 문제다. ▲김대중=문화검열은 사전이든 사후든 해서는 안된다.문화가 무책임하게 나가지 않도록 문화인의 자율적인 자기검열이 필요하다. ▲이회창=표현의 자유는 ‘사상의 시장’에 맡겨 시장경쟁으로 여과하면 된다.사전검열로 미리 선택한 것은 민주적인 방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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