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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기와 음악의 재발견…해부학적으로 뜯어보고 사회학적으로 살펴보고

    악기와 음악의 재발견…해부학적으로 뜯어보고 사회학적으로 살펴보고

    각기 다른 크기의 톱니바퀴가 테이블 위에 배열돼 있다. 톱니바퀴를 회전시키는 속도에 따라 다른 음계와 음파를 내며 묘하게 어울리는 음계가 만들어진다.(‘톤휠 테이블·왼쪽’) 전선이 복잡하게 얽힌 구형 구조물에 흰색 공기주머니와 센서들이 달려 있다. 센서를 손으로 가리면 공기주머니가 부풀어 오르며 오르간처럼 소리를 낸다.(‘빛이볼·오른쪽’) 작곡가와 건축학도가 만든 이 ‘악기’들은 과연 악기일까? 15일부터 17일까지 밤 9시 50분에 방송되는 EBS 다큐프라임 ‘악기는 무엇으로 사는가’ 3부작은 누구나 봐왔지만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던 악기를 새롭게 발견한다. 악기들을 해부학적으로 뜯어보고, 악기들의 앙상블을 사회학적으로 살펴보며 악기의 미래까지 그려본다. ‘악기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2012년 ‘다큐프라임-음악은 어떻게 우리를 사로잡는가’를 연출한 백경석 PD의 음악 다큐멘터리 후속작이다. 백 PD는 “피아노, 바이올린 등 서양 악기들을 가지고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고민했다”면서 “음악의 매개인 악기에 대한 사유를 넓히자는 취지로 기획했다”고 말했다. 악기 장인과 음악 전문가, 각계의 아티스트들이 머리를 맞대는 동안 시간은 1년 이상, 제작비는 3억원 이상 투입됐다. 1부 ‘악기들의 무덤’은 죽은 악기들이 장인들의 손을 거쳐 되살아나는 과정을 담는다. 강원도의 한 창고에 버려진 고장난 악기들을 악기 장인들이 손수 되살리고, 이어 연주자들이 손에 쥐며 작은 음악회가 열린다. 2부 ‘악기가 악기를 만났을 때’는 정경영 한양대 음대 교수와 함께 악기들의 만남을 인문·사회학적으로 고찰한다. 편성론, 악곡론, 해석, 조율 등 음악의 모든 지식이 총동원되며 동요에서부터 현대음악까지 모든 음악의 합주를 찾아다닌다. 수많은 명연주의 향연이 정 교수의 사고 과정을 따라 판타지 영화를 보듯 펼쳐진다. 이어 3부 ‘이것도 악기일까요?’에서는 각계 아티스트들이 모여 새로운 악기 만들기에 도전한다. 권병준 사운드 아티스트를 중심으로 미술가, 작곡가, 건축가, 조경전문가 등이 모여 3D 프린팅 기술과 기계공학적, 전기공학적, 건축학적 아이디어가 접목된다. ‘물방울 피아노’ ‘권총 실로폰’ ‘액션 기타’ 등 신개념 악기들이 탄생된다. 이들의 작업은 ‘이악(이것도 악기일까요) 프로젝트’로 이어진다. 다음달 열리는 ‘또 다른 달 또 다른 생’(10월 9~10일 서울 LIG아트홀)과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10월 24일 부산 LIG아트홀) 공연에서 합동 작업의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함혜리 선임기자의 미술관 건축기행] (6) 佛 파리 퐁피두센터

    [함혜리 선임기자의 미술관 건축기행] (6) 佛 파리 퐁피두센터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반드시 둘러봐야 할 미술관·박물관으로 루브르박물관과 오르세미술관, 그리고 퐁피두센터를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건축학적으로 볼 때 가장 독특한 곳이 프랑스국립현대미술관이 있는 퐁피두센터다. 원래 배관 설비나 전기 시설 등은 벽 뒤나 바닥, 천장에 숨겨 두기 마련인데 이 건물은 배관 설비와 통로, 전기 시설 등을 빨강, 노랑 등 눈에 띄는 색으로 강조하면서 바깥으로 드러내 놓았다. 외벽을 투명한 유리로 두르고, 에스컬레이터를 건물 정면에 층층이 배치했으며 환풍구의 구부러진 금속 굴뚝은 지면에서 위로 솟아올라 있다. 기계적인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미래의 공장 건물 같기도 하고, 추상적인 조각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파격적인 건축물이 1977년에 완성됐다고는 믿기 어렵다. 건물을 설계한 렌초 피아노와 리처드 로저스의 앞서 가는 아이디어는 당연히 탄복할 만하지만 그보다도 40년 전에 이런 새로운 개념의 초현대식 건축물을 선뜻 수용한 프랑스라는 나라가 참 대단하다. 파리의 중심부에 있는 퐁피두센터를 가려면 파리 시내와 외곽을 연결하는 급행철도인 RER의 A, B, C 선이 교차하는 환승정류장 샤틀레레알에서 내려야 한다. 정거장 이름에 붙은 ‘레알(Les Halles)’은 예전에 이 지역에 있었던 중앙시장을 가리킨다. 철제로 된 건물 레알은 수세기 동안 파리지엔들의 먹거리를 책임졌지만 너무 비좁고 비위생적이라는 이유로 1971년에 헐렸다. 그 자리에는 옛 철제 건물을 대신해 유리와 강철로 외관을 처리한 현대적인 쇼핑몰 ‘포럼 데 알’이 들어서고, 인근 보부르 지역에는 21세기형 복합문화공간이 자리 잡게 된다. 이 일을 추진한 이는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던 조르주 퐁피두였다. 퐁피두는 샤를 드골 대통령 행정부에서 모두 6년 3개월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총리를 지내다 1969년 4월 드골이 갑자기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뒤를 이어 제5공화국 2대 대통령이 됐다. 기본적으로 드골의 자주 노선을 계승했지만 실용주의적인 경향이 강했던 그는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펴고 경제개발에도 앞장서 TGV 개통과 원자력발전소 건설 등의 성과를 이뤘다. 한편 퐁피두는 근대 이후 예술가들의 도시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던 파리가 급속도로 부상하는 뉴욕이나 런던에 밀리고 있는 점을 못내 아쉬워했다. 밤잠을 설치고 고민하던 그는 1969년 12월 파리를 세계 최고의 예술도시로 부상시킬 문화센터를 레알 주변의 보부르 지역에 건립한다고 발표했다. 그가 직접 지휘하고 감독하며 국제 설계 공모를 하자 세계 곳곳의 건축가들이 공모에 참여했다. 49개국에서 제출된 681점의 응모작 가운데 국제무대에서는 신인급인 두 건축가의 디자인이 뽑혔다. 훗날 새로운 소재를 건축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세련되고 기계적인 느낌을 주는 하이테크 건축으로 유명해진 이탈리아인 렌초 피아노와 영국인 리처드 로저스였다. 이들이 공동 설계한 디자인은 당시로선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이들은 그때까지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특별한 디자인의 건물을 기획했다. 배선, 냉난방, 배관 등 기능적 설비를 모두 건물 바깥으로 빼냈다. 건물의 조연들을 무대에 내세운 다음 각자 기능에 맞게 색깔을 부여해 독특한 미를 창출하는 식이었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수용하는 데에는 퐁피두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다. 막중한 사업을 신인급 건축가들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과거 레알의 철제 건물 이미지를 담으면서도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초현대식 건물 디자인을 전폭적으로 수용했다. 계획 발표부터 8년간의 대공사 끝에 1977년 마무리됐다. 센터의 창설에 열정적이었던 퐁피두 대통령은 1974년 4월 2일 매크로글로브린혈증이라는 희귀병으로 갑자기 사망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완공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센터 명칭에는 그의 이름을 남겼다. 그의 열정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이 미술관에는 국립 조르주 퐁피두 예술문화센터(Centre national d’art et de culture Georges Pompidou), 짧게는 퐁피두센터로 이름이 붙여졌다. 피아노와 로저스가 지은 건물은 너비 166m, 폭 60m, 높이 42m 규모인데 각 층의 넓이가 7500㎡로 꽤 넓은 편이다. 공간이 이렇게 넓은 것은 배관설비와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가 정면 광장에서 볼 수 있도록 바깥으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강철 트러스와 유리의 차가운 느낌을 원색으로 커버해 난방장치와 환풍기 등 공기가 통하는 곳은 파란색, 배수관은 초록색, 전기시설은 노란색,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 등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빨간색을 칠했다. 게다가 안벽을 한쪽으로 밀거나 치울 수 있어 자유롭게 용도에 맞게 공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안에 들어가야 할 것은 밖으로 빼고 내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한 이 건물의 운영이나 기능은 ‘예술작품의 공동묘지’라고 하는 전통적인 박물관이나 미술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건물 안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컬렉션을 자랑하는 프랑스국립현대미술관(MNAM) 외에 예술전문 자료를 갖춘 칸딘스키 도서관, 도서열람실과 컴퓨터실을 갖춘 공공정보도서관(BPI), 산업디자인창작센터(CCI), 방대한 영화 필름과 시청각 시설을 갖춘 음악·음향연구소(IRCAM), 어린이들이 그림과 공예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 등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파리시가 미술관도 되고 다른 창조적 공간도 되고, 미술이 음악과 영화, 도서, 시청각 연구 등과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적인 문화예술센터를 갖기를 열정적으로 원한다”고 했던 퐁피두 대통령의 혜안과 열정이 만들어 낸 ‘21세기형 문화의 공장’이라고 할 수 있다. 퐁피두센터는 개관 당시 파리 시민들의 거센 반발을 샀지만 비난은 오래가지 않았다. 주변은 언제나 젊은이와 관광객들로 활력이 넘친다. 완공한 지 20년 만에 건물의 안전을 점검하기 위해 3년여간 문을 닫아야 했지만 2000년 재개관 이후에도 줄곧 하루 2만 5000명 이상이 찾는 현대미술의 메카로 파리의 사회와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lotus@seoul.co.kr
  • 부산 동래구서 조선시대 하수시설 첫 발견

    부산 동래구서 조선시대 하수시설 첫 발견

    부산 동래구 수안동 일대 생활하수로가 조선시대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확인됐다. 부산시립박물관은 지난달 16일부터 실시한 유적 발굴조사 결과 이 같은 결론을 얻었다고 14일 밝혔다. 부산에서 조선시대 하수 시설을 확인하기는 처음이다. 동래구는 도로 침하 원인을 조사하던 중 하수관로를 발견해 지난 6월 박물관에 발굴을 의뢰했다. 조사 대상 하수관거는 현재도 하수로로 이용되고 있어 물길 돌리기 공사 뒤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하수관거는 뚜껑과 벽체, 바닥으로 구성됐는데 조사 구간 중 5.1m 정도 뚜껑 돌이 유실됐으나 벽체와 바닥은 대체로 축조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뚜껑은 길이 100∼120㎝, 폭 35∼50㎝, 두께 10∼20㎝의 돌로 벽체의 최상단석 위에 걸쳐 놓은 후 뚜껑 돌 간의 틈은 작은 잡석과 자갈, 점토로 메웠다. 바닥은 다양한 크기의 판석을 깔고 작은 잡석과 자갈돌 등으로 공간을 메운 뒤 바닥의 부석과 맞물리게 해 벽체를 쌓아 올렸다. 평균 가로 33㎝, 높이 22㎝인 화강암을 3단으로 쌓아 벽체를 만들었다. 바닥 폭은 71㎝(2.3척) 내외, 뚜껑 돌 하면에서 바닥 돌까지의 깊이는 82㎝(2.7척) 내외다. 하수관거는 동래읍성 남서쪽에 해당한다. 남서쪽 100m에는 해자가, 서북쪽에서 남동쪽으론 온천천이 흐른다. 하수관거 위치 등으로 미뤄 조선 때 하수는 남문을 지나 온천천으로 유입되는 작은 하천으로 흐르게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물관 관계자는 “조선시대 하수로 규모와 축조 양상, 읍성 내 본선과 지선으로 이루어진 정연한 하수 배출 체계를 갖춘 사실을 파악해 의미가 크다”며 “건축학적 특징, 미조사 구간의 보존 대책 등을 계속 연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이탈리아 북부 이야기 Italy, eataly, italo① Piemonte 피에몬테주

    이탈리아 북부 이야기 Italy, eataly, italo① Piemonte 피에몬테주

    이탈리아 북부 이야기 Italy, eataly, italo 중세와 근세에 비잔틴 양식, 르네상스의 양식, 바로크의 양식이 있었다면, 현대에는 ‘이탈리아 양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이탈리안처럼 먹고, 이탈리안처럼 입고, 이탈리안처럼 노는 것. 이 유행은 좀처럼 시들해지지도 않는다. 명품 쇼핑 1번지 맥아더글렌 McArthurGlen 유럽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맥아더글렌 그룹은 1995년부터 유럽 9개국에 21개 디자이너 아웃렛을 운영 중이다. 이탈리아에는 나폴리 근교의 라 레쟈La Leggia, 밀라노 근교의 세라발레Serravalle, 로마 근교의 카스텔 로마노Castel Romano, 플로렌스 근교의 바르베리노Barberino, 베네토 근교인 베네토Veneto 소재의 노벤타 디 피아베Noventa di Piave까지 5개의 매장이 있다. 한국사무소 02-553-0822 www.mcarthurglen.com 열차 페라리 이딸로Italo 이탈리아의 제2 철도회사인 NTVNuovo Trasporto Viaggiatori사에서 운영하는 초고속열차로 지난해 4월28일부터 운행을 시작했다. 최고 시속 360km으로 운행하는 이 열차는 붉은색의 매혹적인 디자인으로 ‘열차 페라리’라고도 불린다. 현재 이탈리아의 9개 도시(12개 역)에서 매일 48회 운항하고 있으며 향후 25대의 열차를 확보해 매일 50회 운항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예약 및 문의 02-3789-6110 www.raileurope.co.kr 슬로푸드의 모든 것 잇딸리Eataly “Eat better, Live Better”라는 슬로건 아래 이탈리아 전역에 유통망을 확대하고 있다. 이곳에서 취급하는 야채와 과일류, 육류제품, 유제품, 빵, 저장식품, 와인 등 모든 식재료는 공장에서 대규모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소규모 생산자들에게 직접 공급받은 것이다. 최근 로마에는 최대 규모의 매장을 오픈했으며, 미국과 일본까지 진출한 상황. 초고속열차 이딸로의 케이터링서비스도 맡고 있다. www.eataly.it Piemonte 피에몬테주 시간의 실타래를 따라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다. 택시 밖으로 긴 주랑과 노란 불빛들, 광장의 중심에 버티고 선 검은 실루엣의 동상들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파리인가?’ 그것이 토리노Torino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도시는 생각 이상으로 컸다. 사보이공국의 수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첫 번째 수도, 이탈리아에서 인구가 4번째로 많은 도시…. 그런 단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토리노의 바로크적 풍경은 사보이 가문의 작품이다. 프랑스에서 남하해 이탈리아 북부에서 세력을 키운 그들은 사보이 공국의 수도로 지정한 토리노를 ‘작은 파리’로 만들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왕궁(1646년)은 말할 것도 없고 사냥 별장들마저도 화려하기 그지없다고 했지만 사실 가장 보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예수의 수의에 남아있는 혈흔은 소름끼칠 정도로 사람을 닮아 있었다. 성인 남자의 앞모습과 뒷모습. 그 가지런히 모은 팔과 손 모양까지 말이다. 거짓이라고 하기에도, 사실이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어 보일 정도였다. 물론 내가 본 것은 모조품이었다. 산 조바니 바티스타 성당Duomo di San Giovanni Battista에 보관되어 있는 길이 4.42m, 폭 1.13m의 예수 수의는 지난 400년 동안 불과 10여 차례밖에 공개되지 않았다. 공개가 뜸한 만큼 진위 여부는 아직도 논쟁적이다. 과학도 종교만큼이나 허점투성이라 반박에 반박이 더해진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훨씬 명료하게 다가오는 ‘기적’은 수의의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는 산 로렌조 성당의 건축학적 성취였다. 사보이 가문이 총애했던 건축가이자 수학자였던 과리노 과리니Guarino Guarini, 1624∼1683년는 수학적인 계산을 통해 8개의 반원형 아치가 교차하는 돔을 완성했다. 돔뿐 아니라 성당 내부를 채운 화려한 바로크 장식은 충격요법에 가까운 경외심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는데, 수백년 뒤에도 그 효과는 여전했다. 토리노 시내를 벗어나 살루초Saluzzo에 도착했을 때 비가 오기 시작했다. 마을 산책은 가장 높은 곳에서 시작됐다. 언덕 위의 성들과 그 주변에 모여 있는 귀족들의 저택을 정점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산책길은 마치 시간의 실타래를 거꾸로 풀어나가는 느낌이었다. 작은 마을이지만 수도원이 8개나 있었고, 그중에는 지금 호텔로 사용되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와 그 쟁쟁한 사보이의 세력 사이에서 16세기까지 꿋꿋하게 세력을 유지했던 델 파스토 후작 가문에 대한 설명은 귓가에서 자꾸만 흩어져 버렸다. 골목 끝에 서 있는 풍경들이 하나같이 매혹적이라 달려가서 만져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좁았다가 넓어지는 골목, 높았다가 낮아지는 계단, 직선이 아닌 도로들은 마치 음악 같았다. 하지만 일행을 놓치면 15세기 어디쯤에서 길을 잃겠지. 정신을 바짝 차려 현실로 돌아올 필요가 있었다. 밤 늦게 도착한 노비 리구레Novi Ligure의 시간은 다른 도시에 비해 현재에 가까웠다. 역사가 길지 않은 이 도시가 선택한 환경미화 방법은 (제노아를 포함한 리구리아 해안 도시에서 유행했던) 가짜 벽화로 벽을 장식하는 것이었다. 1910년대에 그려졌다는 프레스코화는 노비 리구레와 제노아와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농업과 어업을 기반으로 열심히 살아왔던 사람들. 그러나 그 보통 사람들 중에서 이탈리안 자전거 영웅인 파우스토 코피가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 후 암울함에 빠져 있던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그가 보내준 전승은 희망의 노래와 같았다. ‘투르 드 프랑스’와 함께 세계 2대 자전거 대회인 ‘지로 디탈리아’의 라디오 생중계가 어린 시절 최고의 가슴 뛰는 순간이었던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자전거 사랑이 여전하다. ▶travie info 질리지 않는 막대 빵, 그리시니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종종 만났던 그리시니Grissini의 본고장이 바로 토리노다. 반죽을 막대기처럼 얇고 길게 만들어 구워내는 이 빵은 1668년 토리노의 제빵사 안토니오 아메데오가 소화불량에 걸린 군주를 위해 만들기 시작한 것. 나폴레옹도 이 빵을 좋아하여 훗날 황제의 식탁까지 올라갔다. 이탈리안 자전거 영웅, 코피 유럽에 큰 혼란을 가져왔던 전쟁이 끝난 후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지노 바르탈리Gino Bartali와 함께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던 사이클 영웅 파우스토 코피가 바로 노비 리구레 출신이었다. 그의 별명이기도 했던 캄피오니시모Campionissimo·최고의 챔피언는 박물관의 이름이 됐다. 노비 리구레의 캄피오니시니는 1960년대까지 용광로로 사용되었던 곳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곳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설계했던 나무 자전거부터 페라리의 최고 기술이 적용된 자전거까지. 8,000만원이 넘는 자전거도 있다. Museo dei Campionissini | 주소 Viale dei Campionissimi, 2-15067 Novi Ligure 문의 www.museodeicampionissimi.it 글·사진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이탈리아정부관광청 한국사무소 02-775-8806, 레일유럽 한국사무소 02-3789-6110, 맥아더글랜 한국사무소 02-553-0822
  • 고양시, 일제때 반출 ‘벽제관 육각정’ 환수운동 본격 돌입

    고양시, 일제때 반출 ‘벽제관 육각정’ 환수운동 본격 돌입

    경기 고양시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이 일본으로 반출해 간 ‘벽제관 육각정’ 환수 운동에 들어갔다. 5일 시에 따르면 육각정은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사무소 부근에 있던 벽제관(중국 사신이 한성에 들어오기 전 잠시 머물던 곳)에 있었으나, 1918년 하세가와 총독이 자신의 고향인 이와쿠니시로 가져간 것으로 알려졌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벌어진 벽제관 전투에서 왜장 요시가와 히로시가 명나라 이여송이 이끄는 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묘 근처에 있는 이와쿠니시 모미지타니 공원으로 육각정을 옮겨 놓았다는 것이다. 지난해 6월 일본 현지를 방문해 조사를 벌인 시 관계자와 문화재 전문가들은 육각정이 건축학적으로나 역사학적으로 충분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특히 현지 조사에서 전문가들은 정자의 기둥 사이를 머름(모양을 내기 위해 미닫이 문지방 아래나 벽 아래 중방에 대는 널조각)으로 연결해 내부 공간으로 사용하고 바깥쪽에 아자교란(‘亞’자 모양으로 살을 짠 난간)을 설치해 회랑을 두른 점, 목 부재 보아지(기둥머리에 끼워 보의 짜임새를 보강하는 짧은 부재)와 마루 받침 보 부재의 돋을새김 형태, 목 부재 기둥에 쌍사(雙絲·기둥이나 나무 그릇의 모서리를 조금 접고 오목한 홈을 파낸 줄)를 둔 점을 통해 상당한 격식을 갖춘 조선시대 당시 건축물로 해석했다. 육각정이 벽제관과 관련해 남아 있는 유일한 건축물이라는 점도 역사적 자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시는 ‘고양 600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최근 육각정 환수위원회를 구성하고 구체적인 환수 계획을 세워 나갈 계획이다. 아울러 육각정이 언제, 누가, 왜 건축했는지도 고증해 나갈 예정이다. 시는 우선 이날부터 육각정 환수 시민 서명운동에 들어가는 한편 19일부터 3일간 이와쿠니시를 방문해 2차 현지 조사를 벌일 방침이다. 이와쿠니시 측은 공식 반환 요청이 매우 민감한 문제라며 시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서울도예공모전] 대상 권진희씨 “불필요한 장식 배제…나의 얘기 표현한 것”

    [서울도예공모전] 대상 권진희씨 “불필요한 장식 배제…나의 얘기 표현한 것”

    대상을 차지한 권진희 작가는 “든든한 내 편이 되어 준 부모님, 충고와 격려 말씀을 아끼지 않은 은사님께 감사드린다.”면서 “새로운 도전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을 힘을 함께 얻어 무엇보다 기쁘다.”고 말했다. 권 작가는 수상작 ‘콘셉추얼 코어_타임’에 대해 “특별한 의미나 주제에서 출발하지 않고 그저 반복적인 행위에 따른 결과물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색판을 만들어 길게 자른 띠를 동심원처럼 계속 쌓아나가면서 생기는 색면과 빈 공간 그 자체, 건축학적 구조 그 자체를 작품으로 삼은 것이다. 이런 불규칙적인 패턴에서 자유스러우면서도 정돈된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권 작가는 “부분적인 반복, 제한된 색상, 단순한 형태를 취해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하고 단순한 형태를 취해서 나의 얘기를 표현해 보고 싶었다.”면서 “미니멀리즘에서 받은 영향도 있다.”고 말했다. 수원대, 홍익대 대학원을 거쳐 몇 차례 단체전과 공모전 입상 경력이 있다.
  • Biutiful Spain 비우티풀 스페인

    Biutiful Spain 비우티풀 스페인

    Biutiful Spain 비우티풀 스페인 <비우티풀Biutiful>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뷰티풀Beautiful을 스페인식으로 받아 적은 것이다. 다른 유럽과는 달리 독자적인 길을 걸으며 발달해 온 스페인 사람들의 직관성을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역사를 관통하며 무엇이든 스페인식으로 소화해 버리는 그들의 당당함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글·사진 천소현 기자 800년 이슬람이 남긴 것 Sevilla 세비야 Cordoba코르도바 Granada그라나다 유럽에서 몇년을 살 수 있다면 그 선택은 당연히 스페인이다. 언젠가 긴 여행의 중반에서 스페인에 눌러 앉는 일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을 정도다. 당시 스페인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한달 반 정도였지만 마드리드 이남의 도시들은 가보지도 못했었다. 어느 도시를 가도 그대로 머물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회가 왔을 때, 선택은 당연히 스페인의 남쪽이었다. 세비야Sevilla, 코르도바Cordoba, 그라나다Granada. 이슬람 세력이 지배했던 800년 동안 가장 번성했던 도시들, 스페인 친구들도 꼭 가봐야 한다고 추천했던 그 도시들이었다. 눈을 부시게 하는 것이 태양인지 파란 하늘인지 알 수 없었다. 세비야의 강에 뜬 유람선도 오후의 난반사 때문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도시의 유람선이야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풍경이지만 세비야는 내륙으로 무려 87km나 들어와 있는 과달키비르강江의 상류 도시다. 그래도 배가 다닐 수 있을 만큼 강이 깊고 넓었기 때문에 도시는 중요한 무역항으로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강변 산책을 하다 보면 어디서나 눈에 띄는 황금탑Torre del Oro도 13세기에 이슬람교도들이 배를 검문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마젤란이 세계일주를 시작한 기점도 이곳이었고, 콜럼부스가 머물면서 항해를 준비했던 곳도 세비야였다. 그렇게 중요한 도시를 이슬람에게서 되찾은 스페인은 그 세를 과시하고 싶었다. 1248년 모든 부와 권력을 집중해서 지은 세비야 대성당은 지금도 세계에서 3번째로 크고, 고딕양식의 성당으로는 가장 크다. 성당에 안치된 크리스토퍼 콜럼부스의 무덤은 그 어떤 왕의 무덤보다 화려하다. 에스파냐의 옛 왕국인 레온,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관의 네 모서리를 메고 있는 모습이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평생 아버지의 업적을 정리하고 연구했다는 아들 페르난도 콜럼부스의 무덤도 성당 안에 있다. 고딕양식,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을 헤아려가며 성당을 둘러보느라 지친 사람들은 오렌지 나무가 도열한 정원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 모스크의 연못이 있던 곳이었다. 아직 여력이 남은 사람들은 마지막 힘을 다해 이슬람 사원의 탑을 개축한 히랄다 종탑Torre de la Giralda에 올라갔다. 땀 흘려 쟁취한 98m 높이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전경은 그만큼 달콤했다. 세비야 대성당에 비하면 코르도바의 대성당Cordoba Mezquita은 모스크의 원형에 더 가깝다.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은 이슬람 제국은 6세기에 지어진 성 빈센트 바실리카를 허물고 그 자리에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모스크 ‘메스키다’를 세웠다. 4,000여 개의 기둥이 시야를 가리고 천장도 낮지만 사실은 세비야 대성당보다 면적이 넓다. 한번에 2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성당으로 용도가 바뀐 이후에도 큰 훼손 없이 사용되다가 카를로스 5세에 이르러 200개의 기둥을 뽑아내고 돔을 설치하는 대대적인 공사를 했다. 정교한 아랍 문양에 푹 빠져 있다가 뒤로 돌아서면 화려한 로마네스크, 고딕 양식이 펼쳐진다.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은 그라나다였다. 알바이신의 언덕 위에 거대한 아랍인 주거지역이 먼저 형성되었고 1238년에 왕과 귀족들의 거주지로 아람브라Alhambra궁전이 만들어졌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기도 한 아람브라궁전은 아랍 건축의 걸작으로 평가되는데 이름만 듣고 우아한 하나의 건물을 기대했다가는 낭패를 맛보게 된다. 평균 관람 시간만 무려 3시간이 걸릴 정도로 넓은 요새이자 수천명의 귀족들이 살았던 주거지였다. 아람브라는 사실 건축학적인 가치보다는 치수의 지혜, 높은 지대까지 물을 끌어 사용했던 아랍인들의 발달된 관개 기술이 돋보이는 장소다. 지금도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궁전 곳곳의 분수와 샘, 연못은 이슬람세력이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아람브라를 찾는 관광객이 워낙 많다 보니 나스리드 궁전Nasrid Palaces은 재입장이 허용되지 않는다. 일행을 따라 종종걸음을 치다 보니 군주의 별장이자 정원인 헤네랄리페Generalife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지칠 때로 지친 상황이었다. 하지만 꽃향기가 전달되는 높이까지 계산해서 디자인했다는 그 정원에서 아름다운 알바이신을 바라보고 있자니, 언젠가 스페인에 살게 된다면 바로 저 마을을 선택하게 될 것만 같았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1 아람브라 궁전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관개기술의 발달이다. 고지대에 세워진 요새임에도 항상 물이 풍부했다 2 <아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주하고 있던 코르도바의 거리 음악가 3 투우와 플라멩고로 유명한 세비야의 투우장 돈키호테로 살어리랏다 Toledo톨레도 Consuegra 꼰수에그라 성서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읽은 책은? 답은 우기기 나름이다. <이솝우화>, <그림 형제 동화집>이 단골로 언급되고 <안네의 일기>나 <영웅문>도 유력한 후보인데다가 지인 중 한 명은 쥘 베른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스페인에 오니 그 ‘정답’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1547~1616년가 지은 <돈키호테Don Quijote>로 모아지고 있었다(원제는 <재기 발랄한 향사鄕士 라만차의 돈키호테>다). 그러면 또 하나의 질문. <성서>와 <돈키호테>의 공통점은? 끝까지 읽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돈키호테>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캐릭터 소설의 효시로 꼽히는 <돈키호테>는 기사 소설을 탐독하던 ‘키호테’라는 사람이 급기야 자신을 기사라고 착각하며 볼품없는 말 로시난데, 시종 산초 판자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은 그의 착각 속에서 벌어지는 일. 마치 디즈니 애니메이션 <슈렉>처럼 반전의 캐릭터들이 주인공인 유쾌한 풍자소설이다. 하지만 이 스토리는 사실 52장의 전편 중에서 초반에 불과하고 속편까지 출판됐다. 저자 세르반테스의 삶은 키호테의 ‘착각일지라도 행복했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레판토 해전에 참가해 부상을 입은 그는 귀국길에 해적에게 잡혀 5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는 우여곡절 끝에 마드리드 근처의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605년 소설 <돈키호테>를 발표했다. 작품이 전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인세 계약을 하지 않아 돈을 벌지 못했다. 후에 그는 74장 분량의 돈키호테 속편을 발표했으나 이듬해인 1616년에 기구한 생을 마쳤다. 그가 죽은 4월23일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인데 우연히도 대문호 셰익스피어도 같은 날 사망했다. 소설 <돈키호테>의 주 무대는 지금의 ‘카스티야라만차’ 지역이다. 도시를 이동하다 보니 우연히도 ‘루타 데 돈키호테’, 즉 ‘돈키호테의 길’이라는 테마여행코스를 지나가게 되었다. 푸른 기와를 이고 있는 하얀 회벽집들이 인상적인 작은 마을 푸에르토 라피세Puetro Lapice에는 돈키호테가 주인과 실랑이를 벌였던 여관 ‘벤타 델 키호테Venta del Quijote’가 있다. 벽에는 ‘돈키호테가 이곳에서 묵고 나서 투구와 갑옷 차림으로 만족스럽게 걸어 나왔다’라는 구절이 붙어 있었다. 돈키호테는 이곳에서 ‘두엘로스 이 케브란토스동물의 내장을 넣은 달걀부침’를 시켜 먹었다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라만차 와인을 즐긴다. 레스토랑에 들어가면 바닥을 깊게 판 넓은 저장고와 대형 와인통을 발견할 수 있다. 더 이상 묵어 가는 손님은 없지만 돈키호테에 대한 팬심으로 기념품을 구입하는 손님들로 마을 전체의 생업은 세르반테스에게 단단히 빚을 지고 있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돈키호테가 거인으로 착각해서 싸움을 벌였던 그 풍차들은 콘수에그라Consuegra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낡은 풍차일 뿐이지만 주변의 광활한 평원과 어우러져 스페인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풍경이다. 실제로 돈키호테 소설의 배경이 된 풍차는 다른 곳에 있다고 했지만 풍차의 모양은 거기서 거기인 반면, 풍경은 콘수에그라가 최고인지라 어부지리를 얻고 있다. 훼손된 상태로 오래 방치된 듯한 이슬람의 콘수에그라 성은 한창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라 더 멋진 그림을 기대해도 좋다. 돈키호테가 로시난데를 타고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던 그 ‘카스티야라만차’주의 주도는 톨레도다. 우리로 말하면 경주쯤 될까, 8~15세기까지 스페인의 수도였던 도시다. 현대식 건물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중세 시대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도시는 아랍 군주의 거주지였던 알카사르를 정점으로 고깔 모양으로 층층이 퍼져 있고, 타호 강Rio Tajo이 그 주변을 휘감아 돌면서 천연의 요새를 만들고 있었다. 도시로 들어가기 전 멈춰선 전망 포인트에서 한참이나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풍경에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고딕성당이라고 불리는 톨레도 대성당도 포함되어 있었다. 스페인을 점령한 이슬람 세력은 종교를 강요하거나 문화를 파괴하지 않았기 때문에 톨레도는 ‘스페인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만큼 이슬람, 기독교, 유대교 유적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고 성당은 박물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귀중한 작품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스 출신이지만 스페인에서 주로 활동했던 엘 그레코의 작품은 물론 고야의 그림도 전시되어 있으며 화려한 제단 장식이나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성체현시대는 이미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새로운 스페인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갱신되는 흥분이 모험에 나선 돈키호테의 마음이었을까. 끝없는 메세타이베리아 반도 중앙부의 대고원를 원 없이 달리고 싶은 충동이 더 깊어지기 전에 라만차를 떠나야 했다. 타호 강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 도시 톨레도 ▶travie info 벤타 델 키호테 세르반테스가 이용했던 여관으로 소설 <돈키호테>의 무대가 됐다. 소품과 인테리어 등으로 당시 분위기를 재현했고, 직접 만드는 와인과 돈키호테 관련 기념품을 구입할 수 있다. 2층은 객실이었지만 지금은 투숙객을 받지 않는다. 주소 EI Molino, 4 Puetro Lapice(Autovia de Andalucia) 문의 926-57-6110 영업시간 오전 9시∼오후 11시(바), 오후 1시∼오후 5시, 오후 8시∼밤 12시(레스토랑) 찾아가기 마드리드 남부 버스 정류장 Estacion de Autobus Sur 역(지하철 Mendez Alvaro 역)에서 Jaen 방면으로 가는 버스 이용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Puetro Lapice에서 하차. 버스 시간 문의 91-530-4800 1, 5 돈키호테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관 ‘벤다 델 키호테’의 오래된 나무 대문과 와인저장고가 있는 바bar 2 푸에르토 라피세 마을에서는 다양한 돈키호테 기념품을 구입 할 수 있다 3 톨레도 대성당의 성모상 4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소 모양의 대형 간판들을 종종 스쳐 지나간다 6 돈키호테가 괴물로 착각하고 결투를 벌였던 꼰수에그라의 풍차들 고야의 빛과 그림자 Madrid마드리드 Zaragoza 사라고사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허락된 시간은 단 한 시간. 마치 단거리 경주에 나서듯 신발끈을 동여매고 속사포로 설명을 난사하는 가이드 수피아씨를 따라다녀야 했다. 그곳의 수많은 보물 중에서 나를 사로잡은 그림은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년의 <개The dog>였다. 고야의 다른 그림과는 다른 화풍으로 의혹을 사기도 했던 이 그림에는 모래 언덕 위로 목만 빼꼼이 내놓은 휑한 눈의 개 한 마리가 등장한다. 마치 노년의 고야 그 자신처럼 말이다. 최후의 고전주의 작가이자 최초의 현대작가로 불리우는 그의 예술적 전이는 프랑스 군인들이 스페인 민군을 총살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 <1808년 5월3일The Third of May 1808>에서 시작된다. 초상화를 잘 그려서 왕실 화가로 이름을 날린 고야는 이 작품을 계기로 민중 화가로 추앙받게 된다. 하지만 노년에 고야의 삶은 암울했다. 마흔 중반에 청각을 상실했으며 노후에 마드리드 근처의 집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고야가 자신의 집에 그린 벽화들은 마치 귀신을 본 듯 공포에 질린 표정의 검은 군상들로 채워져 있었다. ‘블랙 페인팅’이라고 불리는 그림들이다. 그중에서도 <자기 아들을 먹어 치우고 있는 새턴Saturn devouring his Child>은 끔찍한 장면에도 불구하고 후기 작품 중 가장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 고야의 고향이 바로 사라고사다. 사라고사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시내에 들어가자마자 돌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태풍이라도 왔나 싶을 만큼 퍼붓던 비는 10분 후 거짓말처럼 개이더니 하늘이 다시 밝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고야의 삶처럼 빛과 어둠이 드라마틱하게 변화하는 그런 날씨였다. 사라고사에 있는 고야의 생가, 사라고사 뮤지엄, 이베르카 카몬 아즈나르 뮤지엄Ibercaja Camon Aznar Museum에서 그의 그림을 볼 수 있다. 거대한 바로크 스타일의 필라르 대성당Basilica del Pilar에 있는 레지나 마티럼Regina Martyrum돔의 천장화 역시 고야의 작품이다. 이 성당에는 기도를 이루어 준다는 옥으로 된 성모상이 있는데, 그 앞에서 깊은 슬픔에 잠긴 한 노부부를 만났다. 그 처연한 표정은 사연 모르는 이방인들까지 숙연하게 만들 만큼 날카로운 슬픔을 담고 있었다. 그 감정이 지금 내 방에 걸려 있는 고야의 <개>를 볼 때마다 오버랩되곤 한다. 사라고사의 랜드마크이자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가톨릭 순례지 중 하나인 필라르 대성당. 고야가 그린 천장화를 볼 수 있다 가우디에게 영감을 준 산 Montserrat 몬세라트 Barcelona 바르셀로나 누군가 볼 때마다 시루떡이 연상된다고 했던 몬세라트Tot Montserrat는 톱니바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바위산이다. 4,000만년 전에 융기된 해발 1,200m 산의 모습은 한번 보면 잊기 힘들 정도로 독특하다. 바위투성이 산의 정상부에 베네딕트수도원이 만들어진 이유는 이곳이 유서깊은 기도장소였기 때문이다. 1,000년 전부터 시작된 순례의 행렬은 12세기에 만들어진 검은 성모상 ‘라 모레네타’가 발견되면서 더욱 길어져서 지금까지도 끊어질 줄 모른다. 두어 시간 거리인 바르셀로나에 살았던 건축가 가우디Antoni Gaudi Cornet, 1852~1926년도 틈만 나면 모세라트를 찾아왔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몬세라트에 와서 영감을 얻었다는 그는 아예 바르셀로나의 중심에 몬세라트를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바로 바르셀로나의 명물 사그라다 파밀리아가족대성당 Basilica de la Sagrada Familia다. 스페인 교회 건축 사상 가장 큰 프로젝트 중 하나인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1882년 건축가 프란시스코 데 폴라 델 빌라르Francisco de Paula del Villar에 의해 시작되었다가 1년 반 후에 안토니 가우디의 손에 넘겨진다. 그후 43년 동안 가우디는 역사에 길이 남을 독창적인 성당을 완성하기 위해 일생을 쏟아 부었다. 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당 내부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마치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로 뻗어 올라간 듯한 모습의 기하학적인 기둥들이다. 직선이 아니라 자연물의 형상, 그 곡선만을 사용한 가우디 원칙들이 반영된 결과다. 라 페드레라La Pedrera, 구엘 공원Pavellons Guell 등 바르셀로나 시내 곳곳에 남아 있는 가우디의 건축물에서 그 고집스러운 독창성을 확인할 수 있다.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기업체의 도움 없이 오로지 신자들의 헌금으로만 세우기 원했기에 재정 문제는 언제나 발목을 잡았다. 결국 그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사고로 죽고 말았지만 성당은 아직도 그의 청사진에 따라 무려 130년 동안 여전히 ‘공사 중’이다. 전체 공정 중 절반 정도가 완성되었을 뿐이라지만 몇년 전 방문했을 때와 비교하면 내부 공사가 상당히 진척되어 지난 2010년 7월에 현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모시고 축성식을 가졌다. 15년내에 완공하는 것이 바르셀로나 시의 계획이다. 1 가우디는 직선을 배제하고 자연물의 형상과 곡선만을 사용했다. 시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는 구엘 공원 2 몬세라트 산에서 내려온 기운이 한데 모여 정점을 이룬다는 성당 안뜰 3 가우디는 몬세라트의 기괴한 모습에서 착안해 사그리다 파밀리아를 디자인했다 취재협조 에미레이트항공 www.emirates.com 페가수스 코리아 02-733-3441 ▶travie info 1 아람브라 안에 있는 수도원을 개조한 호텔 ‘파라도르 데 그라나다’ 2 스페인식 애저 바비큐 요리 ‘코치닐요’ 몬세라트Tot Montserrat 몬세라트로 올라가는 꼬불꼬불 산악도로의 전면 도로는 10km, 후면도로는 13km다. 주말에는 주차장이 만원이 경우가 많으므로 산악열차와 케이블카를 타는 것이 훨씬 빠른 방법. 수도원에는 뮤지엄, 레스토랑과 기념품점 그리고 호텔까지 있다. 베네딕트 수도원은 에스꼴라니아라는 소년합창단Cor de I’Escolania으로도 유명한데 미사 시간을 맞춰서 가면 합창을 들을 수 있다. 문의 (0034)93-877-77-77 www.montserratvisita.com Travel to Spain 항공편 에미레이트항공을 이용하면 두바이를 경유해서 포르투갈의 리스본이나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지로 여행할 수 있다. 인천-두바이 구간을 운행하는 에어버스 A380 기종은 ‘하늘 위의 호텔’로 불리는 최첨단, 초대형 기종. 인천-두바이 구간은 9시간 30분, 두바이-마드리드 구간은 8시간, 두바이-바르셀로나 구간은 7시간 가량 걸린다. 문의 02-2022-8400 www.emirates.com 두바이 시티투어 두바이에서 스톱오버를 신청해서 두바이 시티 투어(42달러), 사막 투어(99달러) 등을 경험하는 것도 색다른 여행이 된다. 에미레이트항공 홈페이지에서 자세한 정보와 스톱오버 안내책자를 다운받을 수 있다. 투어 문의 아라비안 어드벤처 +971-4-303 4888 aadops@emirates.com 스페인 일주상품 에미레이트항공을 이용하는 ‘스페인·포르투갈+바르셀로나 일주 10일’ 여행패키지 상품이 10월부터 10개 여행사 연합으로 시판되고 있다. 매주 목요일 출발하는 이 상품은 11월 말까지 239만원의 특가로 한진관광, 투어2000, 레드캡투어, 투어몰, 자유투어, 노랑풍선, 참좋은여행, 하나투어, 온라인투어, 롯데관광에서 예약할 수 있다. 야디네스 알베르토Jardines alberto 그라나다의 유서 깊은 카르멘(정원과 채소밭이 있는 별장식 하우스)을 개조한 레스토랑으로 야외 테이블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느긋하게 식사를 하기 좋은 곳이다. 커피 한잔과 함께 피오노노Pionono라는 그라나다의 전통 디저트도 별미다. 아람브라 궁전의 아름다운 정원 헤네랄리페 입구 쪽에 위치해 있다. 3가지 코스에 와인이 곁들여 나오는 세트메뉴는 30~45유로. 주소 Paseo de la Sabika nº 1, 18009 Granada 문의 (0034) 958-221-661 www.jardinesalberto.es 파라도르 데 그라나다Parador de Granada 그라나다의 아람브라 궁전 안에 있는 성프란치스코 수도원을 개조한 호텔로 스페인 국영 호텔 중 최고로 알려져 있다. 그라나다 수복 후 세워진 수도원 건물의 고풍스러운 멋과 특별한 위치 때문에 여행자들이 꿈꾸는 숙소지만 객실이 40여 개밖에 되지 않아 예약을 서둘러야 한다. 아람브라와 그라나다의 야경을 즐기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다. 주소 Real de la Alhambra, s/n, 18009 Granada, Spain 문의 (0034) 958-22-1440 www.parador.es 팔라시오스Palacios 5kg 정도의 크기으로 자란 새끼 돼지로 만드는 애저 바비큐 요리 코치닐요Cochinillo를 먹을 수 있는 곳. 껍질은 바삭하고 속살은 부드럽다. 팔라시오스는 레스토랑뿐 아니라 호스텔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싱글 요금은 30~45유로, 더블룸은 50~80유로 사이다. 주정강화와인인 셰리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용하고 남은 계란 노른자를 이용한 디저트인 플란Flan도 맛볼 수 있다. 주소 C/Navarro Ledesma, 4 45001 Toledo 문의 (0034) 925-28-0083 www.hostalpalacios.net 안달루 라 토레 데 오로Andalu la Torre de Oro 마드리드 마요르 광장에 있는 투우 테마의 바Bar. 가게 안에는 스타 투우사들의 사진과 희생된 소의 머리 박제 그리고 스페인 생햄인 하몬이 같이 걸려 있어서 묘한 느낌을 준다. 주소 Er 26 de la Plaza Mayor Calle del Arcode Triunfo, 28012 Madrid 영업시간 오전 10시∼새벽 2시 문의 (0034) 913-66-5016 La Torre del Oro 타블라오 엘 팔라시오 안달루스Tablao El Palacio Andaluz 세비야 최고의 플라멩고 디너쇼를 감상할 수 있는 곳. 공연은 하루 두 차례, 매일 저녁 7시와 7시30분에 시작되어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되며 와인이 곁들여진 코스 정찬이나 타파스를 선택할 수 있다. 오페라 카르멘의 일부 장면도 플라멩고로 선보인다. 문의 (0034) 954-534-720 www.elpalacioandaluz.com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목포 영산로

    [길을 품은 우리 동네] 목포 영산로

    애초에 인간은 머무르지 않았다. 삶을 찾아, 죽음을 피해 거듭된 이주(移住)는 인류의 오랜 숙명이었다. 들짐승들 역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간에게 쫓기고, 인간을 쫓았다. 그들의 발자국에 꾹꾹 다져진 길은 숲도, 들도 가리지 않고 실핏줄처럼 얽혀 있었다. 대한민국 역시 근대에 접어들며 오랫동안 인간의 발때 묻은 길을 대신하는 국도를 만들었다. 아스팔트로 널찍하게 다져진 국도의 건설은 새로운 길의 시작이었다. 대한민국의 국도 1번이 시작되는 길을 찾았다. 전남 목포시 영산로다. 영산로에서 시작해 나주, 광주, 장성을 거쳐 전주, 천안, 평택, 서울을 지나 파주까지 잇고 있다. 철책에 막혔을 뿐 북한땅 신의주까지 이어져야 비로소 1번 국도는 완성된 제 모습이 된다. 식민의 시절에 닦여 전쟁과 분단으로 가로막힌 한국 현대사 속 비운의 길이다. 길의 시원(始原)을 더듬어 갔다. 막상 찾아온 길은 시작도, 끝도 따로 없었다. 영산로는 1번 국도뿐 아니라 2번 국도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2번 국도는 목포에서 시작해 부산까지 이어진다. 목포에서 신의주, 목포에서 부산이라…. 의미심장하다. ●신의주까지 939㎞·판문점까지 498㎞ 1, 2번 국도의 시작인 영산로의 시작점에 ‘국도 1, 2호선 기점’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돌비석과 도로원표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신의주까지는 939㎞이고, 판문점까지는 498㎞임을 알려 준다. 도로원표 너머 바로 위쪽에는 얼마 전까지 목포문화원으로 쓰던 건물이 영산로를 굽어보고 있다. 원래는 목포일본영사관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르네상스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목포일본영사관은 역사적으로도 건축학적으로도 의의가 깊기에 1981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현재는 복원 공사 중인지 입구 철문은 열려 있지만 건물은 굳게 잠겨 있었다. 도로명 주소 건물번호판도 붙어 있지 않다. 그 옆에 있는 한 교회의 도로명 주소가 ‘영산로39번길 3’이니 굳이 붙이자면 ‘영산로39번길 1’쯤 되거나, 삼각형 모양으로 놓인 지형이니 옆에 있는 ‘영산로29번길 6’일 수 있겠다. 일제는 1897년 10월 1일 목포항을 개항한 이후 1900년 1월 이곳에 일본영사관을 착공한 뒤 열 달 만에 완공했다. 쌀과 소금 등 수탈 물자를 본국으로 실어 날라야 했고, 본국에서 가져온 전쟁물자를 만주 대륙으로 가져가야 했던 그들로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길이었다. 100년 전 어느 날 이 높은 곳에서 흐뭇하면서도 우려 섞인 눈빛으로 길을 주시했을 그들의 얼굴이 절로 떠오른다. 그리고 지금 무료한 표정으로 옛 식민의 수뇌부가 봤을 눈높이쯤에 놓인 벤치에 앉아 영산로를 내려다보고 있는 중씰한 사내 두엇의 시선 역시 그 길 언저리에 닿아 있다. 옛 일본영사관 돌계단 아래 도로원표 옆에는 놀이터가 있지만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노인들만 서너 명 길가에 걸터 앉아 두런거리고 있다. 이제는 쇠락했지만 한때 조선 땅 최고의 번창함을 자랑했던 목포시 영산로는 세상의 변화와 시대의 교체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쇠락한 식민지 중심가에는 고적함만 피식민의 좌절과 울분 서린 기억은 잠시만 접어 두자. 영산로는 누가 뭐래도 목포 제일의 번화가였다. 돈이 모였고, 문화와 예술이 모였고, 멋과 풍류가 모였다. 호남 최대의 일본식 정원이 꾸며진 이훈동 정원(유동로 63)과 그의 호를 딴 성옥기념관(영산로 11)은 그 시절이 시대를 어떻게 선도했는지 고스란히 증명한다. 영산로의 시작 지점과 교차하는 유동로를 따라 올라가면 지척에 있는 이훈동정원은 1930년대 일본인이 지은 집을 당시 조선내화 창업자인 이훈동이 사들여 꾸몄다. 여전히 ‘이훈동’이라는 문패가 걸려 있다. 석등과 석탑, 연못, 정원 등은 일본 여느 곳보다 더 일본의 전통을 품고 있으며 일본식 정원에 없던 벚나무, 동백나무 등 여러 꽃나무들을 심어 자신만의 뜰로 꾸며 놓았다. 호남에서 가장 큰 개인 정원이라는 설명도 덧붙는다. 너무도 유명한 곳이지만 개인 소유 건물이기에 미리 목포시 등을 통하지 않고는 들여다보기 어렵다. 이훈동 정원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바로 옆 성옥기념관에서 어느 정도 풀어낼 수 있다. 각종 개인 소장품과 당시 기록물 등은 조선내화 창업자이자 전남일보 발행인으로서 성옥 이훈동이 목포, 전남 경제권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짐작하게 하고 나아가 당시 시대상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영산로에는 더이상 외면할 수 없는 시대의 잔혹상이 있다. 영산로 도로원표에서 시작 지점으로 가다 왼쪽으로 접어드는 조그만 길이 해안로 165번길이다. 50m 남짓 올라가면 번화로를 만나고 그 길 모퉁이에 목포근대역사관(번화로 18)이 있다. 일제의 조선 수탈 전진기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을 개조해 만들었다. 당시 8곳에 이르는 동양척식회사 지점 중 소작료를 가장 많이 거둔 곳이다. 2층에는 일제의 잔혹한 만행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노약자와 임산부는 조심하라는 경고 문구까지 있을 정도다. 역사관 맞은편 모퉁이에는 적산가옥을 개조해서 만든 카페가 여행객들의 입소문을 많이 탔다. 호남선의 종착역인 목포역은 영산로 시점에서 천천히 걸어도 10분 남짓이면 도착한다. 가는 길에 초원실버호텔 오른쪽이 오랜 시절 복달임하는 음식으로 손꼽히던 민어회를 전문으로 파는 ‘민어의 거리’다. 식민의 시절은 물론 그 이전으로 거슬러 가 7~8월마다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한다. 영산로 주변에 모여 있는 이 건물들이 유달산 자락 안에 옹기종기 모여서 일제강점기 시절을 말없이 증언한다. 목포를 찾는 이라면 결코 모두 빼놓을 수 없는 곳들이다. 영산로를 모두 밟으려면 신의주, 최소한 파주까지 가야 한다. 하지만 짧은 10분 남짓 느린 걸음만으로도 100년 남짓의 시간을 단숨에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시간 이동의 길이다. 글 사진 목포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22회는 강원 삼척시 수로부인길을 소개합니다.
  • 베트남 대표적 휴양지이자 숨겨진 보석 같은 곳 다낭

    베트남 대표적 휴양지이자 숨겨진 보석 같은 곳 다낭

    가을이 오고 있던 어느 날, 베트남을 만나러 갔습니다. 우리 아버지들의 청춘이 지나온 흔적을 되짚는 시간이 될 거라 생각하고 이런 단어들을 떠올렸습니다. 전쟁, 라이따이한, 베트콩, 자전거, 아오자이…. 그런데 기대하지 않았던 바람, 구름, 그리고 시간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의 중부도시 다낭은 느리게, 하지만 선명하게 시간을 선물하는 곳이었습니다. 일상에 젖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같은 하루를 삽니다. 바람을 느끼고 구름을 올려다보고 시간에 머물러 보지 못했습니다. 여행을 통해 나를 만나고 내 시간을 선물 받고 있다는 행복, 아시아의 마지막 휴양지라는 베트남에서 느껴지더군요. 다낭은 베트남 제3의 도시로 대표적 휴양지다. 베트남 전쟁 당시엔 미군의 휴양지로 각광받았으나, 지금은 유럽인들에게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 됐다. 공항을 뒤로 한 지 20여분, 끝없이 펼쳐지는 백색 해안선이 다낭의 가치를 설명해주는 듯하다. 해안선 옆으로는 하얏트, 아나만다라 등 고급 호텔들이 이곳이 왜 ‘베트남 속 유럽’인지를 증명하려는 듯 늘어서 있다. 유명 골퍼 콜린 몽고메리의 이름을 딴 골프장 몽고메리 링크스 다낭 (18홀)도 전 세계 골퍼들을 유혹하고 있다. 사실 이곳은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 청룡부대가 주둔했던 격전지였다. 지금의 국제공항은 미군의 고엽제 창고가 즐비한 곳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전쟁의 상흔은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여행자를 위한 시간이 머물고 있을 뿐. 다낭은 새로운 문물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길목이기도 하다. 정보통신 등 베트남의 모든 국가적 정책들은 대부분 다낭에서 시험을 거친 뒤 호찌민이나 하노이 등으로 도입된다. 일종의 시범도시인 셈이다. ●다낭, 후에로 이어지는 베트남의 속살 호찌민, 하노이 등의 도시와 사뭇 다른 풍경과 인사하며 오행산(五行山)의 156개 계단을 올라 전망대에 섰다. 다낭 시내에서 20여분 거리의 오행산은 5개의 작은 산이 띄엄띄엄 솟아 있다. 산 전체가 대리석이다. 그래서 ‘마블 마운틴’이라고도 불린다. 조그만 사찰과 불상들을 지나니 발 아래로 펼쳐진 마을과 너른 바다가 가슴 한 켠을 열어준다.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있는 참 박물관에서는 참족(族)이 남긴 300여 점의 아름다운 조각품을 볼 수 있다. 보존도 복원도 제대로 된 유물은 없었지만, 참족의 예술적 감성만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미손 유적지 등 발길 닿는 곳마다 문화의 향기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이런 유산들이 관광객이 함부로 만져볼 수 있는 상품으로 방치된 점은 참 씁쓸했다. 다낭에서 후에로 넘어가는 ‘하이번 고개’(1172m)는 ‘세계 8대 비경’으로 꼽힌다. 예전엔 군사적·지리적 거점이었다. 터널을 통해 7분이면 지날 곳을 고개 따라 구불구불 40분 동안 지나는 이유는, 그 이름처럼 바람과 구름이 쉬어가는 곳이기 때문인 듯하다. 훗날 프랑스인들이 고개 꼭대기에 만든 요새는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의 관측소, 엄폐호로 이용되기도 했다. ●왕들이 잠든 도시 후에 유네스코 관계자가 “건축학적으로 극찬해 마지않을 수 없는 한 편의 시”라고 칭송했다는 후에는 ‘베트남의 경주’라 할 수 있다. 약 150년간 베트남의 수도 역할을 했던 곳으로, 유럽의 고성을 연상케 하는 카이딘 왕릉이 볼거리다. 프랑스풍의 카이딘 왕릉은 고대와 현재의 건축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로, 여행자들은 가파른 계단이 펼쳐진 입구에서부터 위용에 압도당한다. 프랑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면서도 화려한 자신의 왕릉을 짓기 위해 백성에게 고통을 안겼던 카이딘 황제. 그의 비석 뒤엔 후손들이 낙서와 욕을 써놓았다고 한다. 죽어서도 인기 없는 왕이 잠든 곳이 이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1등 관광상품’으로 부활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과거로의 시간여행 호이안 다낭에서 차로 40여분쯤 달리면 또 다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호이안 거리와 만난다. 호이안은 투본강 근처의 작은 도시로 15~19세기 유럽과 중국, 일본 상인들을 맞으며 동남아 최대 무역항으로 번성했다. 투본강 줄기를 가로지르는 내원교는 모양이 독특하다. 다리 위에 목조 지붕을 이고 있다. 이 다리를 사이에 두고 일본인 마을과 중국인 마을이 마주보고 있다. 중국적 색채에 일본, 베트남 문화가 가미되고 서구의 문화까지 덧입혀진 독특한 분위기가 어둠이 지면 더욱 진하게 풍긴다. 여행객들을 위한 카페, 상점 등의 불빛이 과거 그대로의 마을과 어우러져 꿈을 꾸듯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180년 전 옛 모습 고스란히 남아있는 마을 구석구석을 걷다보면 마치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하다. 글 다낭·후에 박은정기자 eunice@seoul.co.kr ■ 여행수첩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인천~다낭 직항편을 운항하고 있다. 소요시간은 4시간 30분. 하나투어는 ‘다낭~호이안~후에 5일 관광형’(79만 9000원부터)과 가족여행 등에 적합한 ‘다낭~호이안 6일 휴양형’(109만 9000원부터)상품을 출시했다. ▶화폐는 동(DONG)이다. 한국에서 달러로, 현지에서 다시 동으로 환전하면 된다. 1000동은 약 55원 정도. 시차는 우리나라보다 2시간 늦다. ▶스콜과 햇빛을 막아줄 전통모자 농은 필수품이다. ▶베트남 특산물인 계피와 다람쥐똥 커피가 인기다.
  • ‘시골 vs 도심’ 인천 교육博 입지 공방

    인천시교육청이 추진하는 ‘인천교육박물관’ 입지를 놓고 폐교된 시골 초등학교와 도심 초등학교가 다투고 있다. 교육박물관이 들어설 경우 지역발전의 계기가 되기에 주민들은 물론 지역 정치·문화계 인사들까지 나서 유치 당위성을 강변하고 있다. 16일 인천시교육청에 따르면 138억원의 예산을 들여 전시실, 자료실, 체험학습실, 유물보존처리실 등을 갖춘 연면적 3600㎡ 규모의 인천교육박물관 설립을 추진 중이다. 시교육청은 당초 폐교 활용이란 시대 흐름에 부응하기 위해 10년 전 폐교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 길상초교 선택분교를 염두에 뒀다. 타당성 조사에서도 군 내 7개 폐교 가운데 가장 높은 점수를 얻었다. 윤재상 인천시의원은 “교육박물관은 고대와 중세, 근대, 현대의 인천 교육역사를 간직한 강화에 건립되는 게 타당하다.”고 말했다. 우광덕 강화문화원장도 “강화는 선사시대부터 근대시대까지 걸친 다양한 유적들이 잘 보존돼 있어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리며, 이미 체험학습 인프라가 충분히 갖춰져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인천 동구 창영동에 있는 창영초등학교의 옛 교사를 박물관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해당 건물은 인천시 지정 문화재로 등록돼 교육박물관 성격과 부합되는 데다, 리모델링을 통해 사업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신현환 시의원은 “창영초교는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로 근대교육의 출발지”라며 “역사성과 인천의 어려운 재정여건, 지역사업과의 연계성 등이 고려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성진 인천교육박물관건립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은 “여러 전문가에 의해 창영초교 옛 교사의 건축학적 가치가 언급되는 등 인천교육박물관은 창영초교에 건립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학교 측과 학부모들은 학생 학습권 확보를 위해 박물관 건립을 반대하고 있다. 지난달 18일 열린 공청회에서도 다양한 견해들이 대두되면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인천시교육청은 이달 안에 자문위원회를 구성, 제시된 의견들을 검증한 뒤 올 하반기에 교육박물관 입지를 확정 지을 방침이다.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경산 상엿집 문화재 지정

    경산 상엿집 문화재 지정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경북 경산의 상엿집과 관련 문서 11건 19점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 제266호로 지정했다고 30일 밝혔다. 상엿집은 전통장례에 쓰는 상여와 그에 딸린 여러 도구를 넣어 두는 초막으로, 곳집이라고도 부른다. 경산시 하양읍 대학리 상엿집은 상량문에 ‘임금이 즉위한 지 28년인 신묘년 2월25일에 상량함(上之 二十八年 辛卯 二月 十九日 巳時 立柱 二十五日 五時 上梁)’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어 조선 고종 28년(1891)에 건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건물 내부는 상여를 보관하는 공간과 부속품 등을 두는 공간으로 나뉘어 있는데 흙벽과 평지 바닥으로 된 일반 상엿집과 달리 전체가 목재를 사용한 벽과 높은 마루로 지어져 있다는 점에서 건축학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멕시코 주차장 밑서 아스테카 문명 신전 발견

    인간을 제물로 바치던 아스테카 문명 신전이 멕시코에서 발견됐다. 멕시코 고고학자들은 “지난 수년 동안 발견된 아스테카 문명 유적으로는 가장 뛰어나고 값진 것”이라고 밝혔다. 신전은 멕시코시티 중심부의 한 호텔 주차장 밑에서 건설공사 도중 우연히 발견됐다. 호텔을 확장하기 위해 주차장 밑을 팠는데 덜컥 신전 유적이 나왔다. 멕시코 언론은 고고학자들의 설명을 인용해 “신전은 아스테카 문명 때 바람의 신인 에에카틀에 바쳐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바람의 신 에에카틀은 비의 신이라는 틀랄로크와 틀랄오케스를 도와 구름을 움직여 필요한 곳에 비를 내리게 하는 신으로 섬김을 받았었다. 신전은 아스테카 고대도시인 테노치티틀란의 일부분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전은 폭 32m 규모로 중앙에는 지름 14m짜리 원뿔형 구조물이 설치돼 있다. 멕시코 고고학자는 “둥그런 형태의 구조물이 설치돼 있는 건 신전이 바람의 신에게 바치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면서 “바람이 원을 그리면서 돈다는 당시의 우주관을 반영하는 건축학적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신전은 1486-1502년에 건설된 것으로 보이는 기초부분과 1502-1521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2차 건축물로 구성돼 있다. 발굴에 참여한 한 고고학자는 “기록을 보면 신전에선 인간을 신에게 제물으로 바쳤다는 얘기가 있다.”면서 “발견된 신전에선 아직 이를 입증할 벽면 그림 등이 발견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신전의 일부분은 인근한 건물 밑에 깔려 있다. 멕시코시티가 역사적 건축물로 지정한 이 건물은 스페인이 중남미를 지배하고 있을 때 지어진 것으로 현재 스페인이 문화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멕시코 언론은 “스페인이 중남미를 식민지로 다스릴 때 역사적 상징성이 큰 곳을 터로 골라 건물을 대거 지었다.”면서 “오래된 역사적 건축물 밑에 고대 문명의 유적이 많이 매몰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한국의 미래-위기를 희망으로] ‘슬로 시티’ 오르비에토

    [한국의 미래-위기를 희망으로] ‘슬로 시티’ 오르비에토

    동진에서 송나라 시대에 걸쳐 살았던 중국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쓴 도화원기(桃花源記)에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등장한다.무릉도원은 전란이나 다툼,번뇌가 없는 평화로운 마을로,도연명 역시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곳이라고 적었다.무릉도원이 이상향으로 그려질 수 있었던 이유는 철저하게 외부 세계와 차단돼 있었기 때문이다.그곳에서는 폭군도,관료의 부패도 없다.인간 본연의 심성이 착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상상이었던 셈이다.영국의 토머스 모어 역시 ‘유토피아’를 그렸다.화폐가 없는 유토피아에서 국민은 모두 동일한 노동을 할 뿐이고,모두가 행복하다.무릉도원과 유토피아.이런 나라는 영원히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침팬지와 함께 살아가는 제인 구달이나 티베트의 작은 마을 라다크를 찾았던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는 현실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무릉도원과 유토피아를 발견했다.그 곳에서 두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 행복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들처럼 살 수는 없다.정글이나 히말라야 산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어느 곳에나 있는 TV와 인터넷,전화는 사람을 세상과 연결시키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애쓸수록 여유와 행복은 사라져 우울증과 피폐한 감성을 양산하기 일쑤다.그럼에도 세계 곳곳에서 현실의 무릉도원과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이들은 이웃과 머리를 맞대고 좀 더 바람직하게 생각하기 위해 고민한다.또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육체의 편안함을 내려놓고 불편함을 택했다.혼자 잘 살기보다는 모두가 행복하게 함께 살기를 추구한다.완벽한 사회를 만들 수는 없지만,조금이라도 더 인간답게 살고 싶어하는 마을을 찾았다.또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사람’과 다른 소외된 성소수자들의 얘기도 들어봤다.함께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르비에토 박건형특파원|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로마 방향으로 한 시간 반가량 떨어진 곳.중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화이트와인 ‘오르비에토’의 생산지.직접 찾기 전까지 상상한 오르비에토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농촌도시였다.그러나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진 오르비에토의 모습은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여행기’ 속에 등장한 ‘하늘을 나는 섬나라’를 연상케 했다.195m 바위산 위에 갈색의 고성으로 둘러 싸인 도시 오르비에토는 고대 에트루리아의 12개 도시 중 하나로 후에 로마의 도시가 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르비에토에 오르기 위해서는 전기로 움직이는 케이블카를 이용해야 한다.무인으로 움직이는 상하행 두 대의 케이블카는 ‘자연에 최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옛날 방식’을 의미한다.실제로 오르비에토에는 곳곳을 움직이는 버스망과 자전거가 주요 운송수단이다.자동차는 몇 대 되지 않는 택시가 전부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1290년부터 건축이 시작된 오르비에토 대성당이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대성당은 예수의 수의가 보관돼 있는 것으로 유명하며 석회암과 현무암이 줄무늬 형태로 보이도록 디자인돼 건축학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대성당 앞으로는 오르비에토의 비밀로 알려진 ‘지하도시’로 통하는 입구가 있다.오르비에토는 땅속에 터널과 동굴로 이어진 미로를 갖고 있다.화산석을 뚫어서 만들어졌고 전시장과 우물,계단,채석장,지하저장소 등 과거의 신비로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최고의 관광상품 ‘슬로시티’  그러나 오르비에토가 최근 각광받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오르비에토는 전 세계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슬로시티 운동’의 발상지다.99년 10월 오르비에토와 인근의 그레베 인 키안티(그레베),브라,포스타노 등 이탈리아 중북부 작은 마을들이 세계를 향해 ‘느리게 살자.’고 호소했다.당시 그레베 시장이었던 파울로 사투르니니가 제안한 이 아이디어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세계로 퍼져나갔다.오르비에토 관광안내소장을 맡고 있는 마누엘라 카스타냐(51)는 “당초 슬로시티의 아이디어는 패스트푸드에서 벗어나 지역요리의 중요성을 재발견하자는 ‘슬로푸드’에서 시작됐다.”며 “‘먹을거리가 인간 삶의 기본이자 삶을 결정한다.’는 슬로푸드 운동의 이념이 슬로시티 운동에도 그대로 반영됐다.”고 밝혔다.  85년 이탈리아 북부의 브라에서 시작된 슬로푸드 운동은 이탈리아 로마에 맥도날드 햄버거가 진출하면서 이탈리아 전통음식이 위협받자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달팽이’로 상징되는 슬로푸드 운동을 통해 느리게 살기라는 철학을 알게 된 이탈리아인들이 삶 자체에 ‘느림’을 도입하게 된 셈이다.  카스타냐는 “슬로시티 운동은 산업화를 지상과제로 삼고 있는 인간의 삶이 환경을 파괴하고 전통을 무너뜨린다는 점을 알리고 있다.”면서 “당초 지역 사회를 중심으로 한 운동에 불과했지만,이탈리아 북부와 유럽 각국에서 공감을 얻으면서 빠르게 퍼져나갔다.”고 밝혔다.  지난해까지 전 세계 11개국에서 100개에 가까운 도시가 슬로시티 국제연맹에 가입했고,이 중에는 우리나라의 담양 창평 삼지천마을,장흥 반원마을,완도 청산도,신안 증도 등 전남 네 개 지역이 포함돼 있다. ●맥도날드 가게 없고,코카콜라 광고판도 없어  오르비에토에는 없는 것이 많다.맥도날드,버거킹,KFC,피자헛 등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패스트푸드점이 전혀 없다.태양이 내리쬐는 외부 공간이 있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레스토랑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심지어 코카콜라나 펩시콜라,스프라이트 등 거대 청량음료 회사의 광고판조차 찾아볼 수 없다.중심가에 자리잡은 상점들조차 천편일률적인 관광지 기념품 대신 직접 만든 수공예품과 접시 등을 팔고 있을 뿐이다.사람들의 생활패턴도 여유로워졌다.음식점에서 주문을 재촉하는 일도 없고 버스가 늦게 온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외지 관광객들뿐이다.편리하게 살기 위해 기계를 도입하고 도시를 바꾸는 대신,이들은 조상이 물려준 도시에 자신들을 적응시키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카스타냐는 “처음에는 주민들도 불편하다고 하소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지금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면서 “마을을 떠난 사람은 거의 없는 반면 가업을 잇기 위해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오는 2세들이 늘어 공예 등 전통산업이 부흥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오르비에토 시청에 근무하는 프란체스코 루포(36)는 “모든 도시가 슬로시티가 될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그는 “슬로시티의 존재가치는 지나치게 빨리 변화하고,사람들을 몰아가는 도시와 차별화된 곳이 있다는 점에 있다.”면서 “실제로 이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이 현실속에서 ‘느림의 미학’을 경험하고 일정을 연장하거나,다시 찾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kitsch@seoul.co.kr
  • 덕수궁 중명전 사적 지정 추진

    덕수궁 중명전 사적 지정 추진

    을사늑약이 체결됐던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53호)에 대한 사적 지정이 추진된다. 서울시는 고종 황제가 편전(便殿·왕의 집무공간)으로 사용하던 중명전에 대해 문화재청에 사적 지정을 신청했다고 16일 밝혔다. 중명전은 중구 정동 1의11번지(주한 미국대사 관저 서쪽)에 위치한 지하 1층, 지상 2층 벽돌건물로 당초 대한제국 황실의 도서관으로 건립됐으나 1904년 덕수궁 대화재 이후 고종 황제의 편전으로 사용되면서 한국 근대사의 주요 무대가 된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1905년 치욕적인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조인됐고 고종 황제가 각국에 밀서를 보내 국제사회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다 강제 퇴위당한 곳이기도 하다. 건축학적으로는 우리나라 근대 건축의 가장 초창기 풍모를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건축물 중 하나이다. 그러나 1901년과 1925년 두 차례 화재로 외형과 내부가 다소 변형됐다. 시 관계자는 “건물의 역사적 성격 등을 감안해 시 문화재로 두기보다는 이미 사적(제 127호)으로 지정된 덕수궁에 포함시켜 국가 문화재로 관리를 일원화하는 것이 낫다는 시 문화재위원회의 의견을 따라 사적 지정을 추진하게 됐다.”고 말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파주로 옮긴 ‘여기는 평양’

    동서냉전 종식후에도 유일하게 폐쇄된 사회를 고수하고 있는 북한. 일부 관광의 길이 트이긴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는 ‘보여지는’ 것이란 한계를 안고 있다. 경기 파주 예술마을 헤이리에서 열리고 있는 ‘평양리포트’는 통제되고 고립된 북한사회의 ‘보여지는(顯示) 부분’과 ‘보는(直示) 부분’의 개념적 논의를 다룬 전시다. 이번 전시 총기획자는 이미 지난해 ‘DMZ 2005’란 국제 초대전을 통해 한반도 비무장지대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재조명했던 김유연(50)씨. 그는 “기존의 북한에 대한 ‘보여지는 부분’이란 한계를 뛰어넘어 렌즈에 투영된 북한의 건축과 디자인, 북한 주민들의 일상을 통해 DMZ 너머 존재하는 고립된 사회에 대한 면밀한 고찰을 담고자 했다.”고 말했다. 헤이리의 북하우스와 정한숙 기념홀, 하스3 등 3군데서 진행되는 전시에는 톈 이빈(중국)과 툰 뷔튼(네덜란드), 아민 링케(이탈리아) 기 델리슬(프랑스), 다니엘 골든(영국), 박찬경 등 6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톈 이빈(북하우스)은 ‘38선 너머 댄스’란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현시’와 ‘직시’의 극단적인 대비를 보여준다.8·15평양축전 매스게임에 동원된 수백명의 여학생들. 그들이 하나같이 짓고 있는 미소의 작위성은 평양 거리를 오가는 주민들의 일률적 무표정의 ‘우연성’과 오버랩되며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작품들은 지난해 평양축전 때 작가가 관광객으로 가장해 들어가 찍었다. 북하우스 전시장 한 쪽에선 박찬경의 비디오작품이 스크린을 통해 상영되고 있다. 지난 2000년 김대중 대통령 방북당시 평양에 닿을 때까지 전용기 창을 통해 수행원중 1명이 담은 비디오 이미지를 편집한 것. 총 50분 분량을 10분 분량으로 압축했다. 수천m 아래 빠르게 지나가는 논과 밭, 칙칙한 건물, 무표정한 주민들의 이미지들이 때론 빠르게, 때론 느릿느릿 지나간다.10분이란 짧은 시간을 넘어 분단 50년의 역사가 스쳐가듯 길게 느껴진다. 정한숙홀에선 툰 뷔튼이 북한주민들의 일상을 담은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뉴욕타임스, 뉴스위크 등의 프리랜서 사진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는 호텔의 가라오케 내부와 어린이 캠프장 수영장 내부, 아파트 단지, 지하철 내부 등의 풍경을 통해 우연과 작위가 교차하는 평양의 일상을 보여준다. 정한숙홀 맞은편에 자리잡은 하스3에선 건축사진 작가인 아민 링케가 사람이 아닌 도시학적, 건축학적 측면에서 접근한 작품들을 보여준다.평양의 아파트들이나 고층빌딩, 거리, 체육관 내부 등은 스카이라인 혹은 기계적 배열 등에 의해 매우 균형잡힌 듯하지만, 그 이면에 도사린 획일성이 보는 이의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30일까지. 문의 북하우스(031-949-9305). 정한숙기념홀(010-6403-7784), 하스3(031-949-9300).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도서관을 살리자] (하) 시민참여가 관건

    [도서관을 살리자] (하) 시민참여가 관건

    뉴욕의 공공도서관은 시민들이 100여년 동안 차근차근 일궈낸 공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돈과 시간’을 기부하거나 지원하면서 도서관을 키워 왔다. 이 때문에 시민들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시민들의 참여가 척박한 국내 현실에서 도서관을 진정한 문화공간으로 가꾸어 나가기 위해서 깊이 새겨야 할 표본이다. |뉴욕 김유영특파원|뉴욕의 대표도서관인 인문사회과학도서관.1층에 자리한 ‘드윗 월레스 정기간행물실’은 세계 최대의 교양잡지인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창간자인 드윗 월레스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그는 1920년대 이곳을 드나들며 신문·잡지를 뒤적거리면서 ‘다양한 정보를 한눈에 읽기 쉽게 간추릴 수는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잡지를 펴내게 됐다. 잡지가 ‘대박’이 나자 드윗 월레스는 도서관에 거액의 기부금으로 보답했다. ●기부는 도서관의 경쟁력이다 같은 건물 3층의 ‘로즈 열람실’ 역시 1998년 사업가인 프레데릭 로즈 일가가 기부한 1500만달러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다시 꾸며졌다. 도서관 홍보담당자인 티모시 파렐은 “결혼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했던 로즈 부인이 자녀가 성장한 뒤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 뉴욕 공공도서관에서 공부에 몰두했다.”면서 “로즈 부인은 기부란 고마운 마음을 표시한 것일 뿐이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뉴욕 공공도서관의 역사는 이처럼 시민들의 기부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욕 공공도서관의 전신은 1849년 모피 무역상인 존 야곱 애스터의 유산 40만달러로 만들어진 애스터 도서관과 부동산 재벌 제임스 레녹스의 개인 도서관이다. 하지만 이들 도서관이 재정적인 어려움에 부딪히자 2개의 도서관이 합병됐다. 이후 재산의 90%를 사회에 환원한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기부금이 공공도서관 확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같은 기부문화는 지금까지도 잘 정착되고 있다. 뉴욕 공공도서관의 연구도서관 4곳이 받은 개인·기업의 기부금은 2758만 7000달러로 미국연방정부와 뉴욕시에서 지원한 2800만달러와 엇비슷하다. 특히 1996년 문을 연 과학산업도서관(SIBL)의 개관비용 1억달러 가운데 절반은 개인·기업들의 기부로 이뤄졌을 정도다.85개의 분관에서 받은 기부금도 1137만 4000달러에 이른다. 기업들의 기부도 두드러진다.2004년에는 주식시장인 나스닥, 미디어그룹 타임워너사, 뉴욕생명사는 100만달러 이상을 기부한 곳으로 꼽힌다. 도서관에 ‘기업회원’으로 가입된 곳은 JP모건,UBS, 메트라이프, 블룸버그, 코카콜라, 파이자, 뉴욕타임스, 폴로, 포드사 등 350여곳에 달한다. ●부자만 지원하는 게 아니다 뉴욕 공공도서관에서 눈여겨볼 점은 반드시 ‘부자’들만 ‘돈’으로 기여를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곳에서는 ‘시간’을 따로 내서 봉사하는 은퇴자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도서관마다 안내 데스크에는 자원봉사자인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도서관 이용을 도와준다. 변호사 출신의 일레인 스톤(78·여)은 일주일에 두 번가량 인문사회과학도서관에 나와서 관광객 20여명을 이끌고 ‘도서관 투어’를 한다. 가는 목소리 정도로 나이를 가늠케할 뿐 투어 내내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 나이에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아직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만족한다.”면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봉사활동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봉사 분야는 다양하다.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한 ‘영어교실’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고, 청력이 좋지 않은 노인들에게 책을 읽어주기도 한다. 봉사자들은 어린이나 청소년과 함께 도서관을 방문해 도서관 이용법을 가르쳐주고 안내책자를 보내 시민들에게 기부금을 유도한다. ●‘사자상’은 뉴요커의 자부심이다 이같은 기부문화와 자원봉사 제도의 정착에는 뉴욕 공공도서관에 대한 자부심이 깔려있다. 노벨상 수상자인 토니 모리슨은 “공공도서관이 없는 뉴욕은 상상하기 힘들다.”고 말했을 정도다. 뉴요커의 자부심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인문사회과학도서관은 여행책자마다 명소로 소개되어 있으며, 매일 아침 문을 열 때 관광객들이 줄서서 들어갈 정도로 명소로 꼽힌다. carilips@seoul.co.kr ■ 기부자를 위한 프로그램은 |뉴욕 김유영특파원|뉴욕 공공도서관 연차보고서 책자의 4분의1가량은 개인과 기업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도서관에 기부금을 낸 사람과 기업의 명단이다. 인문사회과학도서관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대리석 벽에도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역시 기부금을 낸 사람들이다. 뉴욕 공공도서관의 ‘기부금 신화’는 단지 시민의식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도서관은 기부금을 모집하기 위해 계층별로 다양한 전략을 고안해낸다. ●젊은층의 사교장 가장 눈길을 끄는 제도는 2000년부터 20·30대 젊은층을 대상으로 한 ‘영라이온스(젊은사자들)’이다.300달러 이상의 연회비를 내면 각종 행사에 초청받는다. 대표적인 행사는 4월마다 열리는 파티. 지난해 ‘소설 헤밍웨이의 아바나’를 주제로 열린 파티에서는 1950년대 헤밍웨이의 아바나에서의 생활과 그와 관련된 희귀본 등이 전시됐다. 인기 영화배우이자 소설가인 에단 호크와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원작자 캔디스 부시넬 등이 참석했다. 모두 영라이온스 회장단이다. 영라이온스는 올해에도 연애편지의 진화사,ABC방송국의 특파원 조지 스테파노폴러스의 정치저널리즘 강연, 디자이너 아이작 미즈라히와의 대화 등을 연다. 도서관 관계자는 “젊은층들은 나이가 들면서 다른 기부 프로그램으로 옮겨갈 수 있는 안정적인 고객이라는 점 때문에 신경쓰고 있다.”면서 “참가자들은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맥이 조성된다는 점에서 만족해한다.”고 말했다. ●기업의 돈을 끌어낸다 도서관은 기업을 대상으로도 1000달러에서 100만달러까지 다양한 종류의 기부금 제도를 운영한다. 회원 기업에 사서들이 방문, 도서관 이용법을 설명해준다. 또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어져 건축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도서관은 패션쇼, 기업의 만찬파티, 결혼식 등에 장소를 빌려주고 기부금을 받기도 한다. 특히 ‘금융 서비스 리더십 포럼’이라는 조찬강연에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주식투자의 귀재인 워렌 버핏,AIG보험사의 CEO인 모리스 그린버그 등이 연사로 나섰다.4회에 1200달러를 받지만, 기업이 기부도 하고 사업인맥도 쌓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도서관은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프렌즈 오브 라이브러리(도서관 친구들)’를 운영한다. 최소 가입 금액은 25달러로 6종류가 있다. carilips@seoul.co.kr ■ 기부가 기부 낳은 ‘이진아 도서관’ 서울 서대문구 구립 이진아도서관은 ‘아름다운 기부’로 태어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중소기업 사장인 이상철(59)씨가 2003년 6월 미국 보스턴에서 공부하던 둘째딸 이진아(당시 20세)양이 교통사고로 숨지자 딸의 이름을 기려 50억원을 서대문구에 기탁했다. 이 도서관은 지난해 9월5일 고 이진아양의 생일에 맞춰 문을 열었다. 이진아도서관이 기부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주민들도 나서 책 100여권을 도서관에 기부하고, 이상철씨의 친구도 도서관 로비에 걸릴 유화를 기증했다. 이진아도서관의 이정수 관장은 “기부가 또 다른 기부를 낳은 사례”라며 기부문화의 선순환 효과를 설명했다. 현행 ‘도서관 및 독서진흥법’에 따르면 도서관 운영비로 기부금을 받을 수 있다는 근거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 대부분의 도서관들은 기부금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도서관들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재원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기부금을 적극적으로 유치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만, 아직 국내에 기부문화가 정착되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 문화관광부 용역을 받아 2002년 작성된 ‘도서관 중장기 발전방안 보고서’는 “도서관 진흥기금의 모금을 위해 국가, 지방자치단체, 한국도서관협회 등에 기금위원회를 설치하고, 기금 모금을 위해 국가는 ‘목적세(가칭 도서관세)’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관할 주체 어디서도 적극 나서지 않아 아직 진행된 것은 없다. 기부문화의 미흡 외에도 도서관 자원봉사 업무도 ‘시간 때우기식’으로 운영되고 있어 눈총을 받고 있다. 한 도서관 관계자는 “정기적으로 도서관에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은 없으며, 방학을 맞이해 학생들이 봉사점수를 따려고 종종 온다.”면서 “봉사 학생들에게 서가 정리를 시키고 있지만 끼리끼리 잡담하고 일은 하는 둥 마는 둥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식목일 산불] 낙산사는 어떤 절

    [식목일 산불] 낙산사는 어떤 절

    낙산사(洛山寺)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오봉산(五峯山)에 있는 고찰이다. 신라 문무왕 재위 시절인 671년 의상대사(義湘大師)에 의해 창건됐으며 사찰 전체가 시·도유형문화재 35호로 지정돼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낙산사는 처음에 의상이 관음보살을 만나 창건했으며, 그 직후에 의상과 함께 신라 불교의 쌍벽을 이룬다고 평가되는 원효대사가 이곳을 찾기도 했다. 그만큼 유서가 깊은 사찰로서 한국 고대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낙산사는 관동팔경(關東八景) 가운데 하나로, 이곳에서 보는 동해의 일출이 빼어나기로 유명하다. 또한 인천 석모도의 보문사, 경남 남해 금산의 보리암과 더불어 3대 관음기도 도량 가운데 하나로 365일 기도를 드리는 신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낙산사는 그동안 다섯차례 화마(火魔)에 휩싸여 다시 지어지기를 반복했다.786년 화재로 사찰 대부분이 불에 탔다가 858년 범일(梵日) 스님에 의해 중건됐다. 이후 1231년 몽고의 난 때 전소된 낙산사는 조선 세조 때 중창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때도 소실됐다가 1953년에 다시 창건됐다. 낙산사에는 명성에 걸맞게 각종 유물도 많다. 보물 479호인 낙산사 동종은 높이 1m58㎝, 입지름 98㎝로 1469년 조선 예종이 아버지 세조를 위해 낙산사에 보시한 종이다. 보물 499호 낙산사 칠층석탑은 1467년에 조성됐으며, 수정으로 만든 염주와 여의주가 탑 속에 봉안됐다고 한다. 낙산사는 대웅전이 없는 대신 원통보전(圓通寶殿)이 본전 역할을 하고 있다. 건축학적으로는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팔자 모양으로 돼 있는 원통보전 안에는 보물 1362호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안동환기자의 현장+] 총각도사 3인방의 사주카페 손님들

    [안동환기자의 현장+] 총각도사 3인방의 사주카페 손님들

    “자∼지금부터 당신의 인생을 속시원히 까발려 봐. 그렇다고 운수에다 올인하진 말라고.” 서울 종로구 관철동의 한 사주카페.‘족집게’로 입소문을 타고 있는 ‘총각도사’3인방의 스타일을 한동안 TV에서 인기를 끌던 ‘우격다짐’식 개그로 풀어 보자면 이럴 것이다. 일기예보가 그러하듯 ‘인생예보’라고 어떻게 딱 맞을 수 있을까. 젊은 도사들은 “사람들이 불황에 잔뜩 움츠린 탓인지 신년운세도 크게 기대를 안하는 눈치”라고 전한다. 2002년 4월 문을 연 이곳은 건축학도 출신으로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김종선(32)씨와 같은 92학번 동문인 이동근(32)씨, 전산학을 전공한 김상현(33)씨가 동업한다. 대학 연합 사주팔자 동아리 ‘구통도가’출신인 이들은 10년 세월 동안 만만찮은 공력을 쌓은 젊은 역술인들이다. 불황이 무섭긴 도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해마다 이맘 때가 대목이지만 손님은 지난해보다도 많이 줄었다. 서양의 점성술인 타로가 주특기인 동근씨는 외국계 기업에서 해외 마케팅을 담당하는 회사원. 낮에는 넥타이를 매고 해외 바이어의 심리를 읽다가, 저녁이면 도사로 변신한다. 상현씨는 주역과 관상에 특히 밝다. 기자와 얘기를 나누던 도중 20대 여성과 상담에 나선 동근씨.“밧줄에 목덜미가 묶인 상을 보니 채무가 있군요.”이씨가 실마리를 던지자 “어쩜. 어쩜”을 연발하며 여성은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다음부터는 도사의 존재를 무시하며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술술 풀어낸다.“카드빚을 갚지 못해 상황이 어렵거든요. 올해 금전운이 어떤가요. 혹 횡재수라도 없을까요.” 어떤 대답이 나올까 잔뜩 기대를 걸었지만 동근씨의 대답은 고지식하다 못해 어이없을 지경이다.“허리띠를 졸라매고 아끼세요. 본인이 저질러 놓은 일을 어떻게 운으로 해결하겠습니까.”한바탕 ‘훈계’하고 난 동근씨는 “20대 여성들은 대개 명품을 사다 빚을 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로또 번호를 맞혀 달라.”고 간절한 표정으로 볼펜을 내미는 황당한 손님도 의외로 많다고 동근씨는 귀띔했다. 이들의 세계도 적자생존의 법칙이 존재하는 출혈경쟁 시대로 접어들었다. 사주카페가 유행하면서 종로에는 과장을 조금 보태면 한 집 건너 점보는 카페가 들어선 데다 일반 카페에도 역술인 한둘쯤은 자리잡고 있게 마련이다. 불황을 겪고 있는 동네 ‘철학관’의 역술인들도 시내로 몰려들고 있다. 20대 여성들의 최대 관심사는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연애운’. 사랑은 불황도 강추위도 이기는 묘약인 셈이다.‘취업운’과 ‘시험운’이 궁금한 취업재수생들은 타로점을 많이 찾는다. 요즘은 공무원 시험 응시생들이 대세를 이룬다. 여성의 고민은 남성보다 좀 더 복잡하다. 혼수 걱정부터 남편의 바람기, 이혼운도 상담거리가 된다. 예전에는 이혼을 해도 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어 봤지만, 요즘은 이혼을 작정하고 ‘길일’을 알려 달라는 사람이 많다. 노동시장이 불안정해지면서 회사와 재계약 여부를 점쳐 달라는 비정규직 노동자도 찾아온다고 한다. 그런 손님에게는 혹 나쁜 운을 가졌다고 해도 희망으로 포장해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최근에는 남편의 ‘연·월·일·시(年·月·日·時)’를 적어와 창업운을 묻는 40∼50대 여성도 자취를 감추었다. 경기불황이 깊어지면서 소자본 창업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탓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접신(接神)이 돼 ‘꽃몸살’을 앓는다고 호소하는 여성이나, 빙의(憑依)가 되어 귀신을 본다며 범상치 않은 정신세계를 자랑하는 남성은 어느 시절이나 가끔 찾아온다. ‘천기누설’을 밥 먹듯 하는 세 젊은 도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생의 덕목은 요행보다 정직한 노력. 횡재에는 횡액이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게 마련이라고 설명한다. 종선씨는 “사주는 넉사(四)에 기둥주(柱)자로 건축학적으로 보면 사람의 일생은 기둥 네개만 올려진 집에 지붕을 얹는 과정”이라면서 “집을 제대로 짓느냐 못 짓느냐는 자신의 노력에 달렸다.”고 단언했다. 왕후장상과 사주가 똑같아도 삶의 결과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의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 총각도사의 점괘는 언제나 “행복은 고난과 역경으로 포장돼 있다.”는 평범한 진리로 귀결된다. 같은 점괘를 두고 1만원의 복채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든, 괜한 돈 버렸다고 후회하든 결국 자신의 몫이라는 얘기다. sunstory@seoul.co.kr
  • [빌딩 X파일]종로 삼일빌딩

    [빌딩 X파일]종로 삼일빌딩

    서울 종로구 관철동에 있는 삼일빌딩은 지난해 철거된 청계 고가도로와 함께 70년대 고도성장과 현대화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지하 2층·지상 31층으로, 빌딩 높이는 114m이다. 연면적은 3만 6000여㎡(1만 1000여평). 지난 1970년 준공 때는 국내 최고 높이를 자랑했다. 당시 초등학교 교과서와 해외 홍보물 등에도 자주 등장할 정도였다.63빌딩이 등장하기 전까지 최고층의 자리를 지켰다. 삼일빌딩은 건축학적으로도 국내 최초의 ‘현대적’ 빌딩으로 손꼽힌다. 독립성과 가변성이 뛰어난 건물 내부구조와 검은색 유리로 만들어진 외벽은 미국의 마천루를 연상시킨다. 삼일빌딩을 시작으로 국내에도 본격적으로 고층건물 시대가 정착됐다. 건축가 고(故) 김중업씨의 작품이다. 당초 빌딩의 소유주는 삼미그룹.3공 시절 방위산업체로 지정돼 급속도로 성장한 삼미는 10층 빌딩이 고작이던 당시 삼일빌딩을 지어 재계를 놀라게 했다. 삼일빌딩은 84년 경영난에 시달리던 삼미에서 산업은행으로 넘어갔다. 이어 2001년 산은은 홍콩계 투자회사인 스몰락인베스트컴퍼니에 502억원에 팔아넘겼다. 하지만 2002년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이 스몰락인베스트컴퍼니의 실질적 대표인 조풍언씨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측근이라 삼일빌딩을 시세보다 200억원 이상 싼 가격에 살 수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매각 이후 내부수리를 거친 삼일빌딩은 현재 사무실로 주로 이용되고 있다. 대우정보시스템과 산업은행 종로지점, 외환은행(카드 부문), 조선해운 등이 둥지를 틀고 있다. 유일하게 일반인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은 31층의 하이마트뷔페. 점심 9000원, 저녁 1만 2000원 등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서울을 바라보며 식사를 할 수 있다. 젊은 층보다는 중장년층들이 동창회나 계모임을 자주 갖는다. 삼일빌딩의 장점은 63%로 비교적 넓은 내부 전용공간. 최근에 지어진 건물은 50%대에 불과하다. 또 청계천 복원공사가 끝나는 내년 9월 이후에는 한강변 못지않은 ‘강변 공원’을 갖게 된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빌딩을 관리하는 ㈜삼일개발 관계자는 “강·남북의 다른 빌딩에 밀려 예전보다 유명세가 떨어진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청계천 복원이 끝나면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두걸 고금석기자 douzirl@seoul.co.kr
  • SXE 잃어버린 자유, 춘화로 읽는 성의 역사

    고대 수메르의 한 사람이 사막에서 발견한 돌에 상징적인 ‘째진 모양’을 새기고,빌렌도르프의 주술사가 풍만한 몸매에 다산과 섹스라는 이중적 자극성을 지닌 비너스 상을 빚어낸 이래 에로티시즘은 인류 문화에 지속적으로 등장했다.에로티시즘의 끈질긴 생명력은 오늘까지 이어진다.‘저주의 작가’로 불리는 조르주 바타이유는 이러한 에로티시즘을 ‘악마적 충동’이라고 했다.에로티시즘을,단지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한 광기 어린 욕망으로 본 것이다.관음증·동성애·페티시즘·사도마조히즘….에로티시즘의 다양한 양상을 살펴보면 그것이 생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인간 고유의 활동임을 알 수 있다.섹슈얼리티가 생물학적 개념이라면 에로티시즘은 심리학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에로티시즘의 시대를 살아 왔고 또 살고 있다.성(性)이 온갖 화제와 감각의 중심을 차지하는 성 담론의 시대,일상을 지배하는 성의 문제를 고찰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근원을 밝히는 일과 같다. 영국의 디자인평론가 스티븐 베일리 등 20여명이 쓴 ‘SXE 잃어버린 자유,춘화로 읽는 성의 역사’(안진환 옮김,해바라기 펴냄)는 이러한 성의 해방을 인류 해방이라는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다.고대에서 현대까지 성의 역사와,문학 예술 각 장르에 나타난 다채로운 성의 모습을 200여장의 ‘춘화’와 함께 소개한다. 책은 서양의 성 풍속사에 초점을 맞췄지만 중국·인도 등 동양의 성 인식에 대해서도 언급한다.성에 대한 동양인들의 태도는 본질적으로 ‘실용주의적’이다.한 예로 중국의 필로 북(pillow book, 성애서적)은 섹스를 잘 하는 방법을 설명한 실용서로,‘소녀경’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하지만 실용주의에도 단점은 있다.고대 중국에는 ‘로맨틱한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자기가 모시는 사람의 성생활을 시중든 하녀·시녀들의 질투심도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서양인들은 중국인의 성생활보다 인도인의 그것을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힌두 성전 ‘카마수트라’와 사원마다 새겨진 성애조각의 영향이 크다.‘카마수트라’는 중국 도교학자들이 쓴 필로 북과 마찬가지로 성에 대해 관대하고 세속적이다.‘카마수트라’는 고독한 호색한이나 매춘고객의 일방적인 만족을 위한 성행위를 언급하지 않는다.섹스를 오직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벌이는 환희의 교환행위로 이해한다.힌두교나 도교 신자들이 섹스를 정신적 교화에 이르는 방편으로 여긴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기독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섹스를 경계의 대상 내지 정신을 산만하게 만드는 행위 또는 그릇된 계약으로 보지만,동양의 종교 특히 힌두교·도교는 섹스와 종교를 동반자적인 관계로 파악한다.종교를 배제한 채 중국과 인도인의 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이 책의 입장이다. 성과 무엇보다 밀접한 장르가 문학과 미술이다.초서와 보카치오,마구에리트 당골레므 등은 중세의 대표적인 음담패설 신봉자.보카치오는 현명한 교사라면 학생들에게 오비디우스가 지은 로마시대의 성 교본 ‘사랑의 기술’을 읽도록 권장해야 한다고까지 했다.르네상스 시대의 에로티카는 좀더 순화한 양상을 보이지만 성적인 분위기는 여전했다.“우리 모두는 단지 포테르(fottere,성교)를 하기 위해 태어났으니…”라고 읊조린 16세기 이탈리아 시인 피에트로 아레티노의 ‘음탕한 소네트’를 읽으면,오늘날 성에 집착하는 게 교양없는 행동이라고 믿는 것이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유럽 회화에서 가장 많이 모사된 인물화 가운데 하나가 젊은 여성의 누드 유화다.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는 르네상스의 예술과 에로티카의 진수를 보여준다.티치아노의 비너스는 매춘부였을까.놀라운 것은 그녀가 감상자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는 점이다.눈을 감고 있거나 다른 쪽을 보고 있는 당시의 누드 인물들과는 다르다.마치 ‘나를 자극해 보라.’는 듯,이 여인은 당당하고 고혹적인 눈빛을 보낸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조각가 도나텔로의 ‘다비데’ 청동상은 유혹적인 젊은 남성상을 찬미한 당시의 사회경향을 그대로 보여준다.15세기 후반 피렌체 성인 남성의 3분의1 가량은 어떤 식으로든 비역에 가담했다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레오나르도 다빈치도 그러한 비난을 면치 못했고,미켈란젤로도 자신을 추앙한 토마소 카발리에리에 대한연정을 시와 회화를 통해 표현해 비난을 자초했다.남성간의 성애를 막기 의해 피렌체와 베니스,밀라노 등 대도시에서는 여성 매춘을 장려하기도 했다. ‘건축은 힘의 표현이며,그 힘은 항상 에로틱하다.’라는 명제를 구체화한 ‘건축에 숨은 에로티시즘’이란 글도 눈길을 끈다.기원전 1세기에 활약한 로마 건축가 비트루비우스 이후 고전 건축 양식은 성적인 측면을 드러냈다.고고학자들 중에는 고대 로마의 바실리카(법정이나 교회 따위로 사용된 장방형의 회당)에서 유래한 좁고 긴 입구와 내부의 널찍한 공간 구조를 갖춘 기독교 교회를 여성 생식기에 대한 건축학적 상징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성에 관한 한,동물의 단계에서는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없었다.그러나 문명의 단계에 접어들면서 인간의 성은 소외되기 시작했다.정상이 비정상이 되고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가는,문명의 변증법 속에서 에로티시즘은 발전해 왔다.“모든 성적 일탈 가운데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순결’이다.성과 문명은 동반자로서 함께 간다.”라는 프랑스 작가아나톨 프랑스의 말은 이같은 시각을 뒷받침한다.책의 저자들은 SEX라는 말이 주는 비속어적인 느낌을 지우고 창조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철자의 순서를 바꿔 SXE라는 이름을 붙였다.3만 8000원. 김종면기자 jm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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