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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3·1운동 진원지 서울 한복판서 ‘한성임시정부’ 수립 선포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3·1운동 진원지 서울 한복판서 ‘한성임시정부’ 수립 선포

    <1부> 새 역사 임시정부의 형성 ③서울 ‘한성임시정부’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퍼지자 일제는 헌병을 동원해 주모자를 검거·학살했다. 특히 조선의 수도이자 이번 운동의 진원지인 서울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 민족은 대담하게 적지(敵地)가 된 서울 한복판에서 임시정부 설립을 선언했다. 바로 노령정부(러시아)와 상하이정부(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수립된 한성정부다. 이 정부는 인민의 뜻을 수렴하기 위해 민주적 절차를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3·1운동 당시 감리교 전도사 이규갑(1888∼1970)은 평양 대표로 시위에 참석했다가 일제의 검거령으로 친척 집에 숨어 있었다. 3월 5일 오후 9시쯤 그에게 동지 8명이 찾아왔다. 이들은 “이번 시위로 우리나라가 독립이 될 수도 있으니 서둘러 임시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안했다. 이규갑은 “정부를 세우는 건 한두 사람의 기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민의 총의를 모을 지역 대표부터 뽑자”고 설득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임정이 만들어졌다. 임정 설립 주도자는 검사 출신 홍면희(홍진·1877~1946)와 목사 출신 이규갑 등이다. 이들은 조선 황실 인사나 독립운동가 33인 등과 관계없는 순수 민간인이었다. 17일에는 검사 한성오(생몰연대 미상)의 집에 20여명이 모여 임시정부 준비위원회를 열었다. 정부 명칭을 ‘한성임시정부’로 정하고 민주공화제에 기반한 집정관총재 제도를 택했다. 이들은 보름 뒤인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 ‘13도 대표자회의’를 열기로 했다. 각 도 대표들이 모여 민주적으로 결의하면 조선 국민 전체 의견으로 봐도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임정 준비위는 곧바로 전국 각지를 돌며 민족 대표 25명을 모집해 13도 대표자회의를 개최했다. 당시 풍경을 묘사한 이규갑의 증언이다. “당일(4월 2일) 아침 권혁채와 홍면희, 안상덕 등과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그때는 3·1운동 뒤 각 지역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나던 때라 일경(일본 경찰)의 경계가 심했다. 인천역에 내리자 불심검문을 받았다. 홍면희는 변호사여서 무사했지만 나는 검색을 당했다. 그러자 홍면희가 ‘이 사람은 약장사로 우리와 일행’이라고 둘러대 위기를 면했다.” 이날 만국공원에 찾아온 이들은 많지 않았다. 종교계와 서울·경기 지역 대표들만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13도 대표자회의 장소를 만국공원으로 정한 것은 당시 이곳이 일본인을 중심으로 외국인이 모여 살던 곳이었기에 조선 독립 의지를 보여줄 좋은 장소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대표자회의 참석자들은 같은 달 23일 서울 종로 중식당 봉춘관에서 총회 격인 국민대회를 열어 임시정부를 선포하고 보신각에서 민중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3·1운동의 여파가 끝나지 않은 때 한번 더 일제의 허를 찌르겠다는 전략이었다. 실제로 이날 종로 일대에는 임시정부 선포문과 국민대회 취지서 등이 뿌려졌다. 집정관총재 이승만(1875~1965)과 국무총리 이동휘(1873∼1935), 내무총장 이동녕(1869∼1940) 등 각료 명단도 나왔다. 이런 내용은 미국의 UP통신(현 UPI)을 통해 전 세계에 타전됐다. 덕분에 한성정부는 국내외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임시정부가 됐다.●현실적 제약으로 ‘미완의 시도’ 평가도 다만 한성정부가 완전하게 수립된 임정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인천에서 열린 13도 대표자회의는 성원을 채우지 못했고 서울의 국민대회 역시 소수 학생들이 전단을 살포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됐다는 것이다. 노령·상하이정부와 달리 국민 전체의 뜻을 반영해 민주공화정을 탄생시키고자 했지만 일제의 압박 등 현실적 제약이 많아 ‘미완의 시도’에 그쳤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이현희(1937~2010) 전 성신여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한성정부는 13도 대표나 임시정부 준비위원회 위원들을 집행부 임명에서 배제하는 등 공평무사한 인사를 단행하려고 했다. 절차적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이 덕분에 1987년 9차 개헌 당시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의 법통이 (한성정부를 계승한) 임시정부에 있음을 명확히 선언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논란의 중심에 선 임정 초대 대통령 “(해방 당시) 대한민국이 갓 도입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정부와 국민 모두 낯설고 서툴렀다. 이승만 정부는 (불가피하게 권위주의 방식으로 통치했지만) 그래도 헌법을 정지시키거나 국회를 해산하거나 언론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훼손하지는 않았다.”(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가는 (같은 진영인) 박정희·전두환 정권에서조차 좋았던 적이 없다. 그럼에도 독재·반공 이데올로기는 이승만 정권과 연관성이 높기에 그를 치켜세워야 (독재·반공 정치체제가) 합리화된다. 이승만의 재평가 시도는 반대편을 종북이나 용공세력으로 몰아가려는 의도다.”(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한성정부 집정관총재에 추대돼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오르는 우남 이승만은 지금까지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독립운동의 분열과 남북 분단, 한국전쟁 당시 그릇된 대처, 부정부패, 독재정치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꼬집는다. 하지만 이승만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마음놓고 그를 비난하는 자체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한 그의 공로”라며 “과(過)보다 공(功)이 훨씬 큰 만큼 업적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1896년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독립협회가 만들어졌다. 자주독립과 천부인권 존중, 한글 사용 등을 강조했는데, 배후에는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1858~1902) 등 서양 선교사들이 있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만들어 조선인에게 영어와 민주주의를 가르쳤다. 이승만은 이 학당의 학생이었다.●“일단 비위 거슬리면 타인 이해하려 안해” 독립협회는 종종 대중 집회인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배재학당 학생들도 대거 참여했다. 이승만은 여기서 주도적 역할을 하다가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7년간 옥살이를 했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조선사회에 환멸을 느꼈다.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면 반드시 기독교 이념에 입각한 미국식 민주주의 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믿었다. 배재학당의 경험과 기독교의 이분법적 선악 개념 등이 더해져 훗날 남과 타협하지 않는 특유의 성격이 생겨난 것 같다. 이승만을 가까이서 도왔던 정치인 허정(1896∼1988)은 “평소 장난도 잘 치고 유머러스했지만 일단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생기면 조금도 자기 뜻을 굽히거나 남의 사정을 봐주려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한성정부 집정관총재를 시작으로 중국 상하이로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첫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그는 임정 대통령 재임기간 5년 6개월 가운데 상하이에는 반년 정도만 머물렀다. 대부분 기간은 미국에 혼자 머물며 전보를 이용해 ‘원격 통치’를 했다. 이 때문에 이동휘(1873~1935), 안창호(1878~1938) 등과 마찰이 생겼고 훗날 임정 전체가 내분에 휩싸이는 원인이 됐다.●“정부가 단 한 사람 때문에 법을 바꾼 사례” 그는 또 한성정부 집정관총재에 임명된 때부터 스스로를 집정관이 아닌 ‘대통령’(president)으로 칭해 논란이 됐다. 교민 성금 유용 의혹과 윤봉길(1908~1932) 의거 비난 등으로 구설에 올랐다. 최근에는 1918년 10월 그가 미국에서 작성한 1차 세계대전 징집 카드에 국적을 한국이 아닌 일본으로 적은 것이 알려져 비난을 샀다. 당시 미국에서 일본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좋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의도적 오기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원래 상하이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였다. 하지만 이승만이 끝까지 대통령 직함을 고집해 결국 임정이 1919년 9월 개헌 때 통치제도를 대통령제로 바꿨다. 정부가 한 사람 때문에 법을 바꾼 보기 드문 사례”라고 설명했다. ●루스벨트·윌슨과 인연… 지도자로 급부상 그럼에도 이승만은 1919년 4월 15일 중국 길림성에서 선포된 고려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17일 평안도에 설립된 신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방총리로, 19일 인천에서 수립된 조선민국임시정부에서 집정관총재에 선임되는 등 거의 모든 임정에서 1, 2인자로 지목됐다. 조선 사회는 왜 이승만을 새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 여겼을까. 그는 31살이던 1905년 8월 기독교계의 주선으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를 만나 한국의 독립을 청원한 경험이 있다. 또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해 약소 민족에게 희망을 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1856~1924) 역시 이승만이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학교 총장이었다. 당시 한국인으로서 갖기 힘든 경력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 이승만은 1차 세계대전 뒤 최강국이 된 미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외교 카드’였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글로벌 In&Out] 임정 100년 다시 초심으로, 2019년 대한민국 만세/알파고 시나씨 하베르 코레 편집장

    [글로벌 In&Out] 임정 100년 다시 초심으로, 2019년 대한민국 만세/알파고 시나씨 하베르 코레 편집장

    2019년은 한국의 5대 국경일 중 하나인 3ㆍ1절이 100주년이 되는 해다. 2019년에 서울은 물론 한국인들이 엄청 화려한 기념 행사들을 개최할 것이다. 한국인과 해외동포는 100주년인 올 3ㆍ1절을 평소와 다르게 여길 것이 틀림없다. 나에게도 2019년 3ㆍ1절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터키 출신 쿠르드족인 필자는 2018년 여름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올해 처음 ‘한국 시민으로서’ 3ㆍ1절을 축하하게 된다. 필자에게는 첫 3ㆍ1절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100주년이다. 이를 계기로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그다음에 한국 역사에 관심이 있는 외국인들에게 유의미한 작업을 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한국에서 학습했던 정치외교학적 배경과 외신 기자로 활동하며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3ㆍ1절에 대해 색다른 방식으로 책을 쓰기로 했다. 그러나 책을 쓰는 과정에서 이상한 현상을 보게 되었다.최근 3ㆍ1운동의 열매로 역사 무대에 등장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가 정치권의 논쟁거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현재 대한민국의 기원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과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임정이 무슨 대한민국의 기원이야’는 반박이 맞서고 있다. 예전에도 학계에서는 이 같은 논란이 있었지만, 정치권에서 이렇게 크게 다루는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 논란이 이렇게 확대된 이유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누가 이 나라의 주된 세력이냐’의 싸움으로 전개된 탓이다. 흔히 보수우파는 임정의 중요성을 부정하며 대한민국 건국은 오직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정치적 활동에 의존한 세력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본다. 반면 진보좌파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오직 임정 등 독립운동 세력으로 설명하여 광복 이후에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세우려고 한 인물들의 공을 저평가한다. 이 주제로 오랫동안 연구해 온 교수와 연구원 등 학자들이 이러한 논쟁을 학문적으로 다루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정치적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학문적 논쟁거리를 활용한다면 과연 국가를 위해 옳은 일인가. 한국에서 기자로 일하면서 가장 아쉬운 것은 보수와 진보가 국익 앞에서 쉽게 뭉치지 못하는 것이다. 더 아쉬운 것은 정치권이 위험한 논쟁으로 여론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한 국가를 국가로 만드는 것은 돈도 아니고, 군부도 아니고, 영토도 아니고, 국기도 아니다. 국민 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봤자 그것이 국가인가. 21세기에는 국민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자금도 모으고, 자기네 나라를 세운다. 정치권이 손대면 제일 위험한 것이 국민 의식을 형성하는 요소로 여론을 뒤흔드는 것이다. 태극기, 세종대왕, 3ㆍ1운동, 이순신 장군, 6ㆍ25 전쟁, 한글, 백두산 등의 요소로 현재 한국인은 뭉친다. 이런 상징을 남용해 정치하면 단기적으로는 이득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손해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6ㆍ25전쟁 이후 휴전선 남쪽의 한국인은 사상이나 종교를 떠나서 대한민국의 ‘주인’이다. 정치권이 편을 나눠 정통성 싸움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나는 현대 대한민국의 공식적이고 법적인 출발은 1948년 8월 15일이고, 그 정신적인 출발은 1919년 3월 1일 운동을 계기로 형성된 임정이라고 본다. 이것은 한국 주재 외신 기자가 한 정리가 아니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연설에도 몇 차례로 언급된 내용이다. 형제간의 싸움에서 부모를 부정한 순간 형제들의 싸움이 아니고, 적대적인 싸움으로 전환된다. 프랑스에서 프랑스 혁명에 대한 논란이 많아도, 그 누구도 혁명 기념일을, 터키에서 케말 파샤에 대한 논란이 있어도, 그 누구도 터키 공화국 수립 기념일을 논쟁거리로 삼지 않는다. 2019년 새해에는 정치인들이 더는 부모를 부정하는 듯한 논쟁에 여론을 이용하지 말고 국민대통합 위주로 활동하기를 기원한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해방구 佛조계지서 태동한 상하이 정부… 대한민국 국호 첫 명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해방구 佛조계지서 태동한 상하이 정부… 대한민국 국호 첫 명시

    1부 새 역사 임시정부의 형성 ②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중국 상하이는 명나라 말기부터 성장해 1880년대에는 동북아시아의 최대 상업 도시가 됐다. 1910년 대한제국 국권을 빼앗긴 뒤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주목받았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이 독자적 주권을 행사하는 ‘조계’(외국인 자치구역)를 설치해 일본을 비롯한 다른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간섭을 피할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는 외국인에게도 건국이념인 자유·평등·박애 정신을 보장해 한국인에게는 말 그대로 ‘해방구’였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 민족의 두 번째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태동했다.●“첫 번째 ‘임정 터’ 못 찾아…대한민국의 숙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를 위해 지난달 중순 찾아간 상하이 최대 번화가 화이하이중루 일대. 사람과 차들로 거리가 넘쳐나고 전 세계 패션 브랜드가 건물마다 즐비했다. ‘자본주의 최전선’인 이곳이 정말 사회주의 국가의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기자와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고층빌딩이 가득 찬 서금이로(옛 김신부로) 지역을 바라보며 “100년 전 이곳 어딘가에서 독립운동가들이 프랑스 정부의 도움을 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TV에서 보는 상하이 임정 기념관은 ‘보경리 청사’로 1926~1932년에 썼던 곳이다. 이 작가는 “최근 중국인 학자가 첫 번째 임정 터를 찾았다고 간략히 발표했지만 이에 대한 고증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대한민국의 시원(始原)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이곳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1919년 3월 17일 러시아 고려인들이 프리모르스키(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를 선포했다는 소식이 퍼졌다. 때마침 서울에서도 임정 수립을 논의 중이라는 이야기가 들렸다.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같은 달 26일 프랑스 조계의 한 예배당에 모였다. “조선총독부에 맞서 서둘러 임시정부를 조직하자”는 의견과 “대표성을 갖기 위해서라도 국내 지도자들의 뜻을 들어 보고 정하자”는 반론이 맞섰다. 하지만 3·1운동 직후부터 중국과 러시아에서 거물급 인사들이 상하이로 모여들고 있어 정부 수립을 더는 늦추기 어려웠다. 앞선 노령정부에다가 서울에 임정(한성정부)이 또 생기면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놓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퍼졌다. 4월 10일 이동녕(1869~1940)과 이광수(1892~1950), 여운형(1886~1947) 등은 우리 역사 최초의 의회인 임시의정원을 꾸리고 첫 번째 회의를 가졌다. 밤을 새워 토의하던 중 신석우(1894∼1953)가 “임시정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고종 황제가 선포한 대한제국에서 ‘대한’을 따오고 공화제 국가인 중화민국에서 ‘민국’을 가져온 것이다. 여운형이 “이 나라가 ‘대한’이라는 이름으로 망했는데 또다시 ‘대한’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묻자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 보자”고 재치 있게 응수했다. 의원 다수가 이에 공감해 상하이정부의 이름이 정해졌다. 다음날 이들은 국무총리에 이승만(1875~1965)을 추대하고 내무 안창호(1878~1938), 재무 최재형(1860~1920) 등 6부 총장(장관)을 임명했다. 우리가 국가기념일로 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4월 11일)은 여기서 유래됐다.●왕 아닌 인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정 첫 공식화 그렇다면 두 번째 임정은 왜 상하이에 세워졌을까. 독립운동가 양우조(1897~1964)·최선화(1911~2003) 부부의 임정 기록을 외손녀 김현주씨가 정리한 ‘제시의 일기’(1999년)를 보면 여기가 왜 임정의 적지인지 잘 묘사돼 있다. “중일전쟁(1937~1945) 전 상하이는 서양 문물의 향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와 똑같이 살 수 있도록 조계지로 분할돼 있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조계지가 시설이 가장 좋았다. 프랑스는 자유를 사랑하는 나라답게 망명객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조선에서 온 이들이 다른 조계지에 숨으면 곧 붙들려 갔지만 프랑스 조계지에서는 안전했다. 설사 끌려간다고 해도 프랑스 정부가 항의하면 다시 풀려나올 수 있었다.”(1946년 2월 21일) 상하이정부는 우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노령·한성정부와 달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명시하고 한국사 최초로 민주공화정 국가 건설을 공식화한 것이다. 새 나라가 대한제국(조선)을 계승하면서도 국가의 주인은 왕이 아니라 인민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3·1운동 전까지 이어져 오던 복벽주의(나라를 되찾아 왕을 다시 세우겠다는 주장)를 완전히 단절시킨 것이다. 다만 상하이정부가 추구한 ‘외교독립론’은 훗날 임정이 끊임없이 갈등과 내분에 빠지는 단초가 됐다. 외교적 방법론은 당시 우리 민족의 현실적 역량을 반영한 전략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이기든 지든) 일본과의 전쟁을 수행하지 않고는 나라를 되찾을 수 없다고 믿는 무장투쟁론자들을 설득하진 못했다.●쑨원의 부인 추모 능원에 신규식 등 만국공묘 상하이지하철 10호선 쑹위안루역 2번 출구로 나오니 말끔하게 정돈된 공원이 있었다. ‘중화민국의 아버지’ 쑨원(1866~1925)의 두 번째 부인이자 ‘중국의 국모’로 불리는 쑹칭링(1893~1981)을 추모하는 곳이다. 공원 한쪽에 외국인 묘지를 모아 놓은 ‘만국공묘’가 나타났다. 묘비를 하나씩 더듬다가 낯선 한국인 이름 하나를 찾아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기획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계자’로 인정받는 신규식(1880~1922)이었다. 나라를 위해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을 만큼 불 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특히 한쪽 눈을 가린 채 카이저 수염을 기른 외모는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하지만 그가 초기 임정을 상하이에 뿌리내리게 하는데 누구보다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충북 청원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신채호(1880~1936), 신석우와 함께 ‘산동삼재’(산동신씨 가문의 3대 수재)로 불렸다. 대한제국에서 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첫 번째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가족에게 발견돼 목숨은 건졌지만 오른눈 시력을 잃었다. 지인들이 ‘애꾸눈’이라고 놀리자 신규식은 스스로를 ‘예관’(睨觀·한쪽 눈으로 흘겨봄)으로 불렀다.●신해혁명 경험삼아 민주공화정 개념 전파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두 번째로 집에서 독을 마셨다. 때마침 대종교 종사 나철(1863~1916)의 눈에 띄어 다시 한 번 구조됐다. 마음을 다잡은 그는 이듬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중국의 공화주의 노력을 한반도에 적용하겠다는 생각에 쑨원과 천두슈(1879~1942), 천치메이(1878~1916) 등 혁명가 그룹과 친분을 맺었다. 쑨원이 이끄는 ‘중국동맹회’(1905~1912·중국 국민당의 전신)에 가입하고 청 왕조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에도 직접 참여했다. 1912년 국내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하고자 ‘동제사’를 조직했다. 총재 박은식(1859~1925)을 비롯해 김규식(1881~1950), 신채호, 조소앙(1887~1958) 등 동제사 출신은 후일 임정의 초창기 멤버로 활동했다. 이들은 1917년 7월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2년 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촉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두 번째 임정이 상하이에 자리잡은 건 신규식의 노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 국호를 제안한 신석우가 바로 신규식의 조카”라며 “신규식은 자신의 신해혁명 경험을 독립지사들에게 소개해 대한민국의 토대가 된 민주공화정 개념을 설파했다”고 설명했다. 1921년 11월 쑨원이 이끄는 중국국민당이 베이징 군벌정부에 대항해 광둥에 호법정부를 세웠다. 신규식은 국무총리·외무총장 자격으로 그를 찾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국가로 승인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쑨원은 혁명동지 신규식을 극진히 예우했다. 호법정부의 정치·재정 상황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그의 부탁을 일부 받아들였다. 이는 국제적으로 정식 주권기구로 인정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던 임정이 국민당의 후원을 받아 다소나마 활로를 찾는 계기가 됐다. ●해외서 문전박대 뒤 임정 외교독립론 도마에 1922년 대통령 이승만이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고자 워싱턴회의에 갔다가 개최국인 미국으로부터 문전박대 당해 쫓겨났다. 임정의 외교독립론이 논란이 됐다. 신규식은 이런 임정의 처지를 비관해 25일간 단식하다가 같은 해 9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일각에서는 그가 1921년 쑨원을 만났을 때 황제에게 예를 표하는 ‘만세’를 외친 것을 두고 사대적 자세를 지적한다. 하지만 대의명분을 누구보다 중시하던 신규식의 평소 성격에 비춰 볼 때 그런 굴욕을 참아내며 쑨원을 대한 건 오로지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으리라. 상하이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G2 무역전쟁 3월 분수령… 2차 북미회담 ‘비핵화 빅딜’ 기대도

    G2 무역전쟁 3월 분수령… 2차 북미회담 ‘비핵화 빅딜’ 기대도

    美서 ‘中제조 2025’ 태클 땐 다시 냉전 민주당, 대대적 트럼프 공세 예고 주목올해 국제사회의 이목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호’와 중국 ‘시진핑호’가 여러 분야에서 극적 타협점을 찾을지에 쏠린다. 그만큼 주요 2개국(G2)인 미·중이 벌이고 있는 외교·군사적 경쟁과 무역전쟁의 파고에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큰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중 무역전쟁은 오는 2~3월 분수령을 맞을 전망이다. 지난해 12월 1일 미·중 정상이 합의한 휴전 마감 시한이 3월 1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중은 파국을 막기 위해 긴밀한 물밑 접촉에 나서고 있다. 오는 7일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휴전 합의 이후 첫 번째 실무협상이 진행된다. ●美, INF 탈퇴 땐 글로벌 군비경쟁 확대 그동안 중국은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를 기존 40%에서 15%로 낮추고 미국산 대두 수입을 재개했다. 또 중국 최고인민법원이 1일부터 기업 특허소송 등을 다루는 지식재산권법원을 설립하기로 하는 등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미국도 984개 중국 수입품에 대한 고율 관세를 철회하는 등 미·중 양국이 협상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 흐름이 깨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이 ‘강제 기술 이전 금지’ 등을 내세워 중국의 최첨단산업 육성책인 `중국제조 2025’에 대해 계속 태클을 걸고, 중국은 이를 방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정확한 시기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1~2월 열릴 2차 북·미 정상회담도 미국의 새해 주요 이벤트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6월 11일 역사상 처음으로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 최고 지도자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만났다. 하지만 6개월이 넘게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따라서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비핵화와 미국의 대북 제재 해제라는 ‘빅딜’이 이뤄질지 주목된다. 3일 개원하는 미 제116대 의회도 주목받고 있다. 8년 만에 하원 다수당을 거머쥔 민주당이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예고하고 있다. 개원 전부터 트럼프 대통령과 민주당은 멕시코 국경장벽 예산을 놓고 ‘셧다운’(부분 폐쇄)까지 불사하는 ‘벼랑 끝 전술’을 펼치고 있다. 또 오는 3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지난해에 이어 금리 인상에 나설지도 국제사회의 관심사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 경기 둔화가 예상되는 가운데 연준이 금리 인상을 유보하거나 인하에 나서기를 글로벌 금융시장은 내심 기대하고 있다. 2월 말 시한인 미국의 중거리핵전력조약(INF) 탈퇴 여부도 주목된다. 지난해 10월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가 INF를 위반하고 있다며 중국 참여 필요 등을 거론하며 탈퇴를 선언한 상태다. 미국의 INF 탈퇴가 현실화할 경우 글로벌 군비경쟁이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2019년은 건국 70주년을 맞는 중국에 있어 공산당이 즐겨 쓰는 표현으로 그야말로 ‘관건적’ 한 해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수교를 맺은 북한, 러시아와도 수교 70주년일 뿐 아니라 미국과도 수교 40주년을 맞았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 30일 미·중 수교 40주년 담화를 발표하고 “중·미 관계는 이미 새로운 역사의 시작점에 서 있으며 시 주석과 트럼프 대통령이 아르헨티나 회동에서 달성한 중요한 공감대를 잘 형성해 조정과 협력을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올해는 100년 전 봉건제 국가인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쑨원이 중화민국을 세운 신해혁명 100주년이자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한 70주년이기도 하다. 따라서 올해 국경절은 어느 해보다 성대하게 치러질 것이며 베이징에서 대규모 열병식이 열릴 가능성도 높다. 한반도 문제의 조정자 역할을 자처하는 중국이 남북의 지도자를 모두 초청해 톈안먼의 망루에 함께 오르자는 제의를 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中 톈안먼사건 30주년… 재평가 요구 거셀 듯 톈안먼에서는 30년 전 중국 젊은이들이 민주화된 중국을 부르짖다 피를 흘렸다. 중국 당국은 아직까지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톈안먼사건 유족단체 톈안먼어머니회는 지난해 시 주석에게 공개 편지를 보내 “6·4(톈안먼사건)는 국가의 인민에 대한 범죄이므로 반드시 새로이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30주년을 맞는 올해는 홍콩, 대만 등에 흩어져 있는 톈안먼사건의 주역들이 어떻게든 모여 점점 잊혀져 가는 역사을 살리기 위해 노력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올해는 중국 공산당 창건 99주년으로 2020년 ‘샤오캉사회’ 건립 목표를 1년 남겨둔 시기다. 13억 모든 중국 인민이 중류의 생활 수준을 누리는 샤오캉사회 건설은 시 주석이 2017년 집권 2기를 시작하며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샤오캉사회는 오는 3월 1일을 종점으로 맹렬하게 접점을 찾고 있는 미국과의 무역협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돼야만 가능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분단을 넘어, 진정한 포용국가로… 100년 전, 임정이 꿈꾸던 나라

    분단을 넘어, 진정한 포용국가로… 100년 전, 임정이 꿈꾸던 나라

    올해는 3·1운동 발발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기념비적인 해다. 우리가 ‘나라다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매진하게 된 데에는 조국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선조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이 100년 전 세운 ‘임시정부’라는 씨앗이 굴곡의 세월을 견디고 뿌리를 내려 ‘100살 대한민국’으로 성장했다. 임정의 두 거인인 김구(1876~1949)와 안창호(1878~1938), 그리고 임정의 국가건설론인 건국강령(1941년)의 기초를 짠 조소앙(1887~1958) 등이 살아 온다면 2019년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평가할까. 또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 100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임정 초기, 국가 개입 최소화한 자유주의 꿈꿔 임정 인사들이 꿈꿔 온 대한민국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확인하려면 무엇보다 이들이 직접 만든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살피는 것이 최선이다. 거기에는 ‘오래된 미래’처럼 미래 한국의 지향점도 함께 담겨 있다. 임시정부 헌법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정부 출범 당시 제정된 임시헌장(1차 헌법)을 시작으로 해방 직전인 1944년 4월 22일 충칭청사에서 개정된 임시헌장(6차 헌법)에 이르기까지 모두 6번에 걸쳐 제·개정이 이뤄졌다. 일반적으로 임시정부는 1917년 ‘2월 혁명’ 뒤 러시아·폴란드에 세워졌던 것처럼 짧은 시간 안에 정식정부를 세우고 사라지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 민족 역시 1919년 3·1운동 직후 임정을 세운 뒤 단시일 내에 새 정부를 출범시키고 해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임정 요인들은 파리강화회의(1919년)와 워싱턴 군축회의(1920년),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회의(1921년) 등을 지켜보며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일본에서 독립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잔인한 현실’을 깨달았다. 한국 임정은 당초 예상과 달리 27년을 버티며 일본의 패망을 기다렸다. 이들은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언젠가 한반도에 들어설 새 나라의 이상을 헌법에 하나씩 새겼다.1919년에 제정된 1차 헌법은 내용이 너무 간략해 선언적 수준에 머문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이 가야 할 방향성을 잘 드러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임정은 민주공화제와 대의제를 채택하고 평등권과 자유권, 참정권을 인민의 기본권으로 규정했다. ‘소유의 자유’를 명시해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고 생명형(사형)과 신체형(태형)을 폐지해 인도주의 원리도 명시했다. 다만 이때는 교육이 권리가 아닌 의무로 규정됐고 국가가 사적 영역에 개입하는 것도 최소화했다. ‘야경국가’로 불리는 자유주의 국가 모델을 염두해 둔 것으로 보인다. “조선 황실을 우대한다”는 조항도 있어 당시 임정이 구(舊)체제와 완벽히 결별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시간이 흘러 1941년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며 태평양전쟁이 시작됐다. 1차대전 승전국인 두 나라가 서로에게 총을 겨눴다. 오래지 않아 두 나라 간 전력 차가 드러났고 일본이 몇 년 안에 패망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임정 관계자들은 정식정부 수립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좀더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민족국가의 밑그림을 그릴 때가 왔다. 1944년 6차 헌법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1943년 카이로 선언(미·영·중이 일본 문제 논의)으로 조선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은 시기에 만들어져 상징성이 크다. 1941년 임정이 조선민족혁명당과의 합작을 앞두고 좌우를 아우르고자 내놓은 건국강령의 영향을 받았다.주석(대통령) 중심제를 기본으로 하되 의원내각제도 가미한 절충적 정부를 구성했다. 교육과 직장, 노약자 부양을 요구할 권리를 명시하고 파업권도 보장했다. 전문에는 “‘진보의 기본정신’에 입각해 헌법을 제정했다”고 밝혔다. 전형적인 사회민주주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임정은 설립 초기인 1919년만 해도 순수자유주의에 기초한 ‘작은 정부’를 내세웠다. 하지만 해방 직전인 1944년에는 수정자본주의를 토대로 한 ‘큰 정부’로 바뀌어 있었다. 이는 세계 대공황(1929~1933년)을 통해 제어되지 않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경험했고,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 김원봉(1898~1958) 등이 임정에 가담하면서 진보 이념을 대거 수용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이들의 생각대로 정식정부가 수립됐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스웨덴이나 독일 같은 사민주의 복지국가를 추구하고 있을 것이다. 조석곤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31일 “1948년 대한민국 제헌헌법은 건국강령의 경제조항을 계승하고 있다. 그것은 장기간에 걸친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당시 임정 요인들은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주장한 안창호는 한국이 세계 12대 경제대국이자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만 달러까지 성장한 모습에 그 누구보다 뿌듯해할 것 같다.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교육열에도 혀를 내두를 것이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밝힌 김구는 ‘방탄소년단’ 등 글로벌 대중문화를 이끄는 한류스타들의 활약이 너무도 반가울 듯싶다. ‘사민주의자’ 조소앙은 최근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포용국가 전략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들은 1945년 해방이 지금까지도 진정한 의미의 광복으로 이어지지 못한 점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 식민 지배에 이어 전쟁, 군사독재라는 험난한 길을 걸어온 것에도 가슴 아파할 것이다. 무엇보다 남북분단 상황이 고착화되고 친일잔재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현실을 개탄하리라.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앞으로 100년을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할까. 무엇보다 남북 관계 개선을 통한 통일 무드 조성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 한상진 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한민국은 상하이 임정에서 법통을 찾지만 북한은 항일무장투쟁에서 뿌리를 찾는다. 각자의 정당성으로 통일 문제를 풀려면 쉽지 않다”며 “우리와 북한이 공유할 수 있는 개념은 (임정보다는) 광복”이라는 견해를 내놨다. 김구가 강조한 혈통적 민족 개념에 대한 발전적 계승도 필요하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G2 시대’에 민족주의는 그 의미를 상실하지 않은 정치적 기획”이라면서도 “그렇다고 민족주의에 내재된 권위주의와 인종주의까지 인정해서는 안 된다. 민족과 세계시민 사이의 상반된 정체성을 어떻게 공존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새로운 100년으로 가는 대한민국의 과제”라고 설명했다. 신도시나 공공시설에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붙이고 이들을 화폐 모델로도 내세워 ‘임정 법통을 이어받은 민주공화정’의 정체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미국의 1달러 지폐 모델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조지 워싱턴(1732~1799) 초대 대통령이다. 수도인 워싱턴DC와 이곳에 자리잡은 조지워싱턴대 역시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프랑스 파리의 ‘샤를드골 공항’이나 이스라엘 예루살렘 ‘벤구리온 공항’ 역시 독립 영웅을 기리고자 명명됐다. 김상회 전 국민대(정치학) 교수는 “화폐란 국가의 얼굴이고 여기에 들어가는 문양과 인물은 나라의 정체성이자 지향점”이라며 “(5만원권 모델이) 왜 유관순이 아니라 신사임당이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김구나 안중근, 안창호 대신 조선의 유학자들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자 지향점이 돼야 하는지도 석연치 않다”고 지적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인사] 경기 성남시

    ▲ 복지국장 김선배 ▲ 환경보건국장 고혜경 ▲ 푸른도시사업소장 차상철 ▲ 맑은물관리사업소장 직무대리 연규옹 ▲ 중원구청장 임승민 ▲ 분당구청장 박철현 ▲ 교육문화체육국장 신경천 ▲ 수정구 환경위생과장 직무대리 방혜자 ▲ 수정구 신흥1동장 직무대리 서기원 ▲ 수정구 신흥2동장 직무대리 양상호 ▲ 수정구 태평1동장 직무대리 김판규 ▲ 수정구 산성동장 직무대리 윤병성 ▲ 중원구 금광2동장 직무대리 신영만 ▲ 중원구 은행1동장 직무대리 주종배 ▲ 중원구 상대원1동장 직무대리 이종빈 ▲ 중원구 하대원동장 직무대리 최대범 ▲ 분당구 분당동장 직무대리 황규범 ▲분당구 이매2동장 직무대리 이동학 ▲ 분당구 야탑2동장 직무대리 김연수 ▲ 분당구 구미동장 직무대리 주광호 ▲ 분당구 정자2동장 직무대리 유섬열 ▲ 수정구 고등동장 직무대리 민경석 ▲ 분당구 건축과장 직무대리 장춘호 ▲ 의회사무국 전문위원 이정문 ▲ 정책기획과장 최중욱 ▲ 예산법무과장 오재곤 ▲ 민원여권과장 조수희 ▲ 정보통신과장 김권병 ▲ 사회복지과장 김학봉 ▲ 노인복지과장 장현자 ▲ 여성가족과장 정은숙 ▲ 기업지원과장 엄갑용 ▲ 첨단산업과장 전동억 ▲ 세원관리과장 최동근 ▲ 문화예술과장 박성희 ▲ 관광과장 전동환 ▲ 체육진흥과장 손성립 ▲ 환경정책과장 박동화 ▲ 공공의료정책과장 이재웅 ▲ 보건행정과장 임병영 ▲ 수도행정과장 이종준 ▲ 도서관지원과장 장석령 ▲ 분당도서관장 이중백 ▲ 구미도서관장 전태갑▲ 판교도서관장 권미순 ▲ 수정구 세무과장 진명호 ▲ 수정구 가정복지과장 이봉기 ▲ 수정구 단대동장 김영만 ▲ 수정구 신촌동장 박명양 ▲ 수정구 시흥동장 박광호 ▲ 중원구 시민봉사과장 겸임 정인목 ▲ 중원구 금광1동장 정성배 ▲ 분당구 가정복지과장 이강석 ▲ 분당구 수내1동장 황연희 ▲ 분당구 정자3동장 채길자 ▲ 분당구 금곡동장 홍철기 ▲ 분당구 백현동장 양정민 ▲ 복지지원과장 김용미 ▲ 청소행정과장 이성진 ▲ 식품안전과장 함현숙 ▲ 중원구보건소장 류행기 ▲ 분당구보건소장 홍경래 ▲ 분당구 환경위생과장 박인자▲ 재난안전관 김윤철 ▲ 주택과장 최창규 ▲ 도로과장 하상래 ▲ 공원과장 윤여경 ▲ 하천관리과장 정장훈 ▲ 수질복원과장 진명래 ▲ 도시개발과장 강해구 ▲ 도시정비과장 강봉수 ▲ 시설공사과장 민병태 ▲ 수정구 건설과장 권오민 ▲ 분당구 건설1과장 이찬택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뒤집어 생각해 보면 필연인 역사는 없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필연인 역사는 없다

    현대사 몽타주/이동기 지음/돌베개/422쪽/2만원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수백만명의 유대인을 학살 수용소로 보낸 나치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의 1961년 재판을 취재한다. 재판장에 선 아이히만은 어수룩하기 그지없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상부에서 지시한 사항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고 이름 붙였다.●“악의 평범성보다 능동적 폭력 주목해야 아렌트의 생각은 옳았을까.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각종 사료와 자료, 증언에 기초하면 아이히만은 유대인 절멸을 지지했던 신념에 찬 나치였다. 그는 1941년 나치 지도부가 유대인 절멸을 결정했을 때 학살 현장을 수차례 답사하고, 더 효율적으로 학살할 수 있도록 아랫사람들을 지도했다. 나치가 패망한 뒤 신분을 숨긴 채 살며 옛 친위대 동료에게 “1000만명의 유대인을 죽였으면 만족했을 것이다. 난 일반적인 명령 수행자가 아니었다”고도 말했다.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의 신간 ‘현대사 몽타주’는 다소 도발적인 책이다. 책의 부제로 붙인 ‘발견과 전복의 역사’라는 말이 심상찮다. 현대사 사건에서 새로이 사실을 ‘발견’하고, 인습적인 역사 해석을 ‘전복’한다는 뜻에서 붙였다. 쉽게 말해 우리가 아는 현대사 사건들에 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고 권유하는 책이다. 예컨대 저자는 그동안 세상의 한켠에서 금과옥조처럼 여겨졌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관해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법정 연극에 속았다고 해서 악의 평범성 자체가 무의미하지는 않다. 아렌트의 주장대로 전체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압도하고 보편적 판단 능력을 앗아간 것은 사실”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근대 관료제나 악의 평범성 문제보다 지배 체제와 다양한 폭력 행위자들이 능동적으로 펼치는 상호작용을 통한 과격화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유대인 구한 나치 대위 ‘선의 평범성’ 사례로 저자는 악의 평범성을 뒤집는 다른 사례로 ‘선의 평범성’을 제시한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는 저서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나치 수용소에서 살 수 있었던 이유를 이탈리아인 로렌초에게서 봤다. 로렌초는 여섯 달 동안 그에게 매일 빵 한 조각을 가져다주었고, 옷과 엽서를 건네주기도 했다. 레비는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수용소 밖에는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었다”고 서술한다. 카를 플라게 나치 대위는 나치의 학살에 충격받고 독일 점령지 리투아니아에서 약 1000명 이상의 유대인을 구했다. 플라게는 나치 패망 이후 자신을 의인으로 내세우기는커녕 “나는 나치 동조자”라며 부끄러워하며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책에서는 제1·2차 세계대전, 1945년 종전, 1955년 반둥회의, 1968년 청년봉기, 1989년 독일 통일을 비롯해 주로 전쟁과 냉전 시대의 현대사 여러 사건을 제시하고, 기존 역사와 다른 시각에서 해석한다. 이를 몽타주(조합)하면서 저자는 “역사에서 구조와 필연이 아닌, 인간의 의지와 선택을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역사는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필연적 결과’임을 강조하는 E.H 카의 역사 인식론에 관한 반박이기도 하다. 예컨대 1차 세계대전은 유럽 열강의 구조적 대립과 갈등의 산물이었다는 게 기존의 평가다. 저자는 “유럽 열강의 안보동맹이 약했기 때문에 동맹끼리 신뢰하지 못했고, 정치 지도자들의 오판으로 전쟁의 방아쇠가 당겨졌다”고 주장한다.●저자의 물음… “당신이 생각하는 역사란” 우리의 역사 인식에 관해 던지는 냉혹한 질문도 다시 생각해볼 만하다. 저자는 지난 정부에서 추진했던 국정 한국사 교과서에 관해 “1920년대 이탈리아 파시즘이 권력을 장악한 뒤 역사 교육을 통제하고, 1933년 독일의 나치가 권력을 잡고 나서 시도했던 행위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한다. 건국을 둘러싼 좌우 진영의 대립에도 날 선 비판을 날린다.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하자는 뉴라이트 진영 주장을 놓고는 “친일 부역 세력에게 건국공로자의 역사적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서”라고 꼬집는다. 1919년 상하이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으로 보자는 반대 의견에 관해서도 “국민 주권의 기본적 조건과 실천 없이 국가 건설이라 부를 수 없으며, 독립운동단체나 망명정부 탄생을 건국이라 하는 사례도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1919년 건국론, 1948년 건국론, 그리고 건국론 무용론을 교과서에 그대로 싣고 학생들이 토론해 스스로 견해를 세우도록 보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국에 의미 없이 세워지는 위안부 소녀상과 우후죽순 난립하는 역사박물관에 관해서도 좀더 면밀하게 따져볼 것을 제안한다. 400여쪽이 넘는 책에서 결국 저자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생각하는 역사란 무엇인가?’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유용하 기자의 사이언스 톡] 돼지는 고기를 얻는 용도라고? 우리가 몰랐던 과학적 활용법

    [유용하 기자의 사이언스 톡] 돼지는 고기를 얻는 용도라고? 우리가 몰랐던 과학적 활용법

    한 해가 저물어가는 세밑이 되면 관행적으로 ‘다사다난’했다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2018년 무술년(戊戌年)도 돌이켜 보면 여러 사건 사고가 많았던 해였습니다.돌아오는 2019년은 12지의 마지막 열두 번째 동물인 돼지의 해 ‘기해년’(己亥年)입니다. 돼지는 신화나 민속신앙에서는 재산이나 복을 부르는 동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제수로 사용됐다고 합니다. 요즘도 개업식에서 돼지머리를 상 위에 올려놓고 절을 하는 것은 이런 풍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돼지는 탐욕스럽고 더럽고 게으르고 멍청한 동물로 취급당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돼지라고 부르는 동물은 가축화된 멧돼지입니다. 멧돼지가 가축화된 것은 신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8000~9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반도에서는 2000년 전부터 돼지를 기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멧돼지는 잡식성으로 무엇이든 잘 먹고 야생에서도 20~30마리가 함께 사는 습성이 있어 우리에 가둬 키우기가 좋고 성장속도가 빠르며 기후에 대한 적응력이 좋습니다. 사람들이 가축으로 키울 수 있었던 최적 조건을 갖춘 것이지요. 지금도 돼지는 주로 고기를 얻기 위해 길러지지만 20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돼지를 다른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알려지게 됐습니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불치병으로 알려진 당뇨를 치료하는데 돼지가 쓰인 것이 첫 사례입니다. 지금은 당뇨 환자들에게 합성인슐린이 사용되고 있지만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인슐린은 소, 개, 돼지에게서 얻었습니다. 돼지는 사람의 인슐린과 한 개의 아미노산만 다를 정도로 거의 비슷하다고 합니다. 최근 돼지는 이종장기이식 활용 가능성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사람의 장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기능이 약해지기도 하고 손상이 되기도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기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사람의 장기를 이식받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수요가 충분치 않기 때문에 과학계에서는 동물의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하는 방법이 연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과 가장 비슷한 영장류를 활용하는 것이 좋겠지만 개체수도 적고 다른 동물들은 인체 거부반응이 심해 쉽지 않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사람의 장기와 크기, 기능이 비슷하고 성장 속도도 빨라 인공장기 공급원으로 최적의 조건을 갖춘 돼지를 이용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6월 농촌진흥청과 건국대병원 공동연구팀은 바이오 이종이식용 돼지의 각막을 원숭이에게 이식한 뒤 407일간 정상기능을 유지하는 것을 확인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달 초 독일 뮌헨대 연구팀은 돼지 심장을 이식한 개코원숭이가 기존 57일을 훌쩍 넘어선 195일간 생존했다고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에 발표했습니다. 이렇듯 인간과 함께한 오랜 세월 동안 돼지는 인류에게 많은 이로움을 가져다줬습니다. 사실 돼지가 지저분하다는 편견도 돼지의 생활습성과 생태를 이해하지 못한 인간이 잘못 만든 사육환경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되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타인에 대한 편견이나 반목도 상대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2019년은 다른 사람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한 해, 아낌없이 주는 돼지만큼은 아니더라도 내 이익만큼이나 다른 사람의 이익과 권리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한 해가 됐으면 합니다. edmondy@seoul.co.kr
  • 김병섭·김호기 등 정부혁신 유공 포상

    행정안전부는 2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혁신 유공 포상 수여식을 개최한다. 정부혁신 추진 체계를 확립하고 사회적 가치를 구현한 공로로 김병섭 서울대 교수가 청조근정훈장을, 김호기 연세대 교수가 황조근정훈장을 수여받는다. 또 청렴사회를 위해 반부패활동에 공헌한 이상학 한국투명성기구 상임이사가 국민포장을 받고, 정부가 일하는 방식을 혁신하는 데 기여한 이향수 건국대 교수가 근정포장을 받는다. 이날 훈장 3점, 포장 6점, 대통령표창 12점, 국무총리표창 15점 등 36명에게 포상이 수여된다.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 “7살인데 아직도 산타를 믿니”… 동심 파괴한 트럼프

    “7살인데 아직도 산타를 믿니”… 동심 파괴한 트럼프

    산타 행방 묻는 어린이와 통화 도중 언급 코스타리카 어부 표류 3주만에 구조 기적 교황 “하나되는 한반도 기원” 성탄 메시지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어린이와 전화 통화 도중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의심하게 하는 말을 해 입방아에 올랐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산타의 행방을 묻는 어린이들과의 통화 도중 콜맨이라는 이름의 아이에게 “아직도 산타의 존재를 믿니”라고 묻고는 산타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어감으로 “일곱살이면 그만 믿을 만하지 않니”라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워싱턴DC는 트럼프 대통령의 멕시코 국경장벽 예산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한 연방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정지)으로 성탄 분위기가 엉망이 됐다. NBC뉴스 등에 따르면 성탄절의 상징으로 1923년부터 해마다 이맘때 백악관 근처를 빛내던 ‘내셔널 크리스마스트리’마저 셧다운의 여파로 점등하지 못할 뻔했다. 그러나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시민들이 국립공원재단에 기부금을 내 다행히 불을 밝히게 됐다. 같은 날 아기 예수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팔레스타인 자치지역 베들레헴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특히 예수가 탄생한 곳에 세운 예수탄생교회에 군중이 운집했다. 룰라 마야 팔레스타인 관광부 장관은 “베들레헴 호텔 예약이 매진됐다”며 “밤새 관광객 1만명을 맞이할 준비가 됐다”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방문한 것은 수년 만에 처음”이라고 밝혔다. BBC 등은 지난 2일부터 망망대해를 표류한 코스타리카 어부 2명이 21일 카리브해 그랜드케이맨섬과 자메이카 사이에서 유람선에 의해 발견됐다고 전했다. 유람선 운영사 관계자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봤다”며 기뻐했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이날 중국인들이 크리스마스이브를 뜻하는 중국어 ‘핑안지에’와 발음이 비슷한 사과를 주고받는 풍습을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중국어로 사과는 ‘핑궈’다. 중국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부채춤 공연도 한다. 배경음악은 중국 건국 40주년을 기념하는 노래 ‘오늘은 당신의 생일’이다. 크리스마스인 25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 발코니에서 발표한 크리스마스 메시지에서 “한반도를 하나로 묶는 박애의 연대가 더욱 굳건해지고 최근의 화해 분위기가 이어져 모두가 발전할 수 있는 해법에 닿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멘과 시리아 등 전쟁과 기근에 시달리는 나라에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했다. 쓰나미로 400명 이상 숨지고 1400여명이 다친 인도네시아는 침울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재난이 발생한 순다해협 근처 카리타에 있는 라메트 오순절교회는 신나는 성가를 부르는 것을 자제하고 조용히 기도했다. 서울 강신 기자 xin@seoul.co.kr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독립군 탄압 거점 부산경찰서 폭파… 의열단 거사 1호 ‘부산의 윤봉길’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독립군 탄압 거점 부산경찰서 폭파… 의열단 거사 1호 ‘부산의 윤봉길’

    “왜놈 손에 사형당하기 싫어 단식하고 있으니 도로 가져가게.” 1921년 5월 5일 대구감옥으로 면회 온 친구 최천택이 가져온 달걀꾸러미를 건네자 박재혁 의사(義士)는 이렇게 말했다. 엿새 후인 5월 11일 오전 11시 20분 박 의사는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식음을 전폐한 지 열이틀째, 사형 집행 사흘 전이었다. 며칠 후 의사의 시신은 부산진역에 도착했다. 박 의사의 노모와 친구들, 수많은 시민이 역 앞에 몰려들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천만뜻밖에 이 지경이 되니 하늘이 무너진 듯합니다.” 노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최초로 의열단 거사를 성공으로 이끈 주인공이자 ‘부산의 윤봉길’로 불릴 만한 박 의사가 순국한 지 97년이 흘렀다.취재차 찾은 부산 날씨는 바람이 심하게 불어 체감온도가 영하 10도쯤 됐다. 서봉수 박재혁 의사 기념사업회장 겸 삼일동지회중앙회장을 만나 박 의사의 생애와 기념사업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삼일동지회는 해마다 박 의사 추모제를 여는 등 기념사업을 주관하고 있다. 박 의사는 직계 후손이 없다. 박 의사 여동생 명진의 손녀인 김경은(53)씨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인데 업적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아 가슴 아프다”고 말문을 떼었다.●정부·지자체 관심 부족… 담당자도 박재혁 몰라 김씨와 서 회장은 인터뷰 내내 독립유공자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정부와 지자체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실제로 고위층은 물론 현지 담당자 중에도 박재혁이 누군지 모르는 이가 있다고 했다. 10억원 가까운 예산을 들여 조성했다는 ‘박재혁 거리’를 찾아가 보니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박 의사는 1895년 5월 17일 부산 동구 범일동 183번지에서 가난한 선비 박희선과 어머니 이치수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생가 복원은 고사하고 아직 출생지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범일동 550번지라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550번지는 1919년 이사해서 가족이 살았던 집으로 보인다. 현재 ‘183번지’는 공용 주차장이 돼 있고 ‘550번지’에는 민가가 있다. 박 의사는 1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여동생 명진과 어렵게 살았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었다. 교육열 높은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의사는 1915년 부산공립상업학교(부산상고, 현 개성고)를 4회로 졸업했다. 박 의사와 동급생 최천택, 오택(오재영)은 친형제보다 가깝게 지낸 ‘삼총사’였다. 의형제를 맺고 부모상을 당하면 같이 상주 노릇을 하자고 다짐할 정도였다. 최천택이 남긴 글에 따르면 “박재혁, 김인태, 김병태, 김영주, 장지형(장건상 조카), 오택 등 친구들과 매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전도를 모의하였다”고 한다.●고서적상으로 위장… 서장실 들어가 폭탄 던져 2학년 때인 1913년 박 의사와 최천택 등은 일제가 금서로 규정한 ‘동국역사’를 여러 학교와 학우들에게 몰래 나눠주다 발각됐다. 구한말 역사가인 현채가 지은 우리 역사교과서였다. 이때부터 박 의사는 요주의 인물로 찍혀 일경의 감시를 받게 된다. 3학년이 된 박 의사는 최천택 등 16명과 ‘구세단’을 결성, 지역 청년들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나 6개월 만에 탄로 나 1주일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았다. 구세단은 1915년을 전후해 경남 밀양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이 결성한 ‘일합사’와 교류했다. 이는 나중에 박 의사가 의열단에 가입하는 계기가 됐다. 박 의사는 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과 싱가포르를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고 항일 의지를 불태웠다. 1920년 초 박 의사는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김원봉은 “부산경찰서장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는 의열단원 다수를 체포한 악질 경찰로 경남북 경무부 관내 수석 서장인 거물이었다. 박 의사는 김원봉에게서 거사 자금 300원과 여비 50원, 러시아제 원통형 폭탄 한 개를 받아 중국 상하이를 떠났다. ●“모든 책임 진다” 편지 붓대롱에 넣어 친구에 박 의사는 감시가 심한 관부연락선을 타려던 계획을 바꿔 대마도를 거쳐 부산항에 잠입했다. 선생은 상하이 동지들에게 ‘熱落仙他地末古 大馬渡路徐看多’(열락선 타지 말고 대마도로 간다)고 적은 엽서를 보냈다. 검열을 피하려고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부산에 들어온 날은 1920년 9월 6일이었다. 폭탄은 친구 오택의 집에 숨기고 “총독부를 폭파할 것”이라고 거짓으로 얘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경은 오택을 찾아와 박 의사의 입국 경위를 캐물었다. 의사는 더 지체할 수 없었다. 폭탄을 숨겨둔 오택의 집으로 갔다. 오택은 유고집에서 이렇게 썼다. “박형이 시간이 절박하다며 맡겨둔 물건을 내어달라고 독촉했다. 나는 암실에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고 나왔다.” 박 의사는 가족을 부탁하면서 붙잡히면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홀로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박 의사가 중국 고서적상을 가장해 용두산공원 아래 부산경찰서에 도착한 것은 9월 14일 오후 2시 30분쯤이었다. 폭탄을 숨긴 짐꾸러미를 들고서였다. 최천택은 용두산공원에서 망을 보았다고 한다. 고서적상으로 위장한 것은 하시모토가 중국 고서적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박 의사는 서장실로 들어가 서장이 몸을 돌리는 순간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라며 준엄하게 꾸짖고는 폭탄을 던졌다. “꽝” 하고 폭탄이 터졌다. 폭탄은 1층 유리창과 책상을 부수고 천장을 관통할 만큼 강력했다. 하시모토는 중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의사도 오른쪽 무릎을 심하게 다쳤다.●“일본 관광객 보기 안 좋다”… 표지석도 안 세워 다친 박 의사는 현장에서 검거됐다. 투탄 후 경남 전역에 비상령이 내려졌다. 일경은 경찰서 주변을 지나던 행인 등 수십 명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들였다. 어머니와 여동생도 잡혀와 심문을 받았다. 최천택 등 친구들도 붙잡혔다. 오택은 폭탄을 숨겨준 혐의로 1년 동안 수감됐다. 응급처치를 받은 박 의사는 공범을 불라는 일경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단독범행임을 고집했다. 박 의사는 부립병원 간호원을 통해 유치장에 갇힌 최천택에게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짧은 편지를 붓대롱에 넣어 전달했다고 한다. 망을 보았던 최천택(1897~1962·건국훈장 애족장)은 모진 고문을 받아 의식을 잃은 채 풀려났다. 치안 조직의 핵심인 경찰서장실에 폭탄을 던진 박 의사의 의거는 일본 본토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일본 신문들은 “일선(日鮮) 동화를 단념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썼다. 박 의사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2심에서 사형으로 형량이 높아졌고 경성고법 상고심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사형이 선고되자 선생의 홀어머니와 누이동생은 대성통곡했다. 방청객 모두 따라 울었다. 폭탄 파편에 맞은 부상과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 생활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박 의사는 면회 온 사람들에게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아무 여한이 없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의사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고 유해도 1969년 부산에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그러나 부산에서도 박 의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데는 정부나 부산시의 책임이 크다. 동상조차 예산 한푼 들이지 않고 롯데그룹 지원으로 건립했고 그나마도 인적이 드문 부산 성지곡 수원지 맨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산길을 돌아 찾아간 동상 앞에는 등산객 몇몇이 무심하게 지나치고 있을 뿐이었다. 폭탄 의거가 있었던 옛 부산경찰서 자리엔 모텔과 상가가 들어서 있었다. 그 자리에 마땅히 있어야 할 표지석도 없었다. “개인 땅이어서 안 된다”거나 “일본 관광객들 보기에 안 좋다”는 반대에 부닥쳐 세우지 못했다고 한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행복한 돼지’ 만나서 새해 꿈 이루면 되지

    ‘행복한 돼지’ 만나서 새해 꿈 이루면 되지

    2019년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돼지의 해’ 기해년(己亥年)이다. 십이지신 가운데 12번째인 돼지는 보통 게으른 동물로 인식되지만 전통적으로 성(聖)과 속(俗)을 넘나드는 건강한 존재였다. 새해를 맞아 잡귀를 몰아내는 신장(神將·사방의 잡귀나 악신을 몰아내는 신)이자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친구인 돼지를 전시로 만나보는 건 어떨까. 국립민속박물관이 마련한 특별전 ‘행복한 돼지’는 돼지를 ‘인간의 수호신’, ‘선조의 동반자’, ‘현대의 자화상’이라는 세 측면으로 나눠서 조명한다.원시사회에서 두려운 존재로 여겨졌던 돼지가 인간의 수호신으로 등장하는 예는 ‘서유기’에서 볼 수 있다. 악신(惡神) 저팔계는 삼장법사를 만나 불교에 귀의한 뒤 선한 수호신으로 변모했고, 돼지는 기와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올리는 잡상(雜像)의 소재가 됐다. 불화에 등장하는 해신(亥神)인 비갈라대장(毘乫羅大將)은 가난해서 의복이 없는 이에게 옷을 전한 착한 신이다. 속세로 내려온 돼지는 인간의 반려자로서 마을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제의를 지낼 때 제물로도 사용됐다. 현대에 와서 저축의 상징이 된 돼지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부자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특별전에서는 시대에 따른 돼지의 이 같은 상징적 의미를 유물과 사진, 영상 등 70여점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화성 행궁에서 출토된 돼지 모양의 장식용 기와, 이성계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 조선을 건국했다는 내용이 담긴 책 ‘동각잡기’, 삶은 돼지를 담는 제기(祭器), 1970~1980년대 이발소의 번성을 위해 걸어 놓은 돼지 그림 등 다양한 유물이 소개된다. 체험 코너에서 기념 엽서에 새해 소망을 적는 기회도 놓치지 말자. 이번 전시는 내년 3월 1일까지 기획전시실Ⅱ에서 계속된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미국 같으면 현장서 체포… 국민 안전 짓밟은 ‘공항 갑질’

    미국 같으면 현장서 체포… 국민 안전 짓밟은 ‘공항 갑질’

    공항 직원의 신분증 요구에 거친 항의 金 “욕설 안 했다… 상식적인 문제 제기” 전문가 “지위여하 막론 부적절한 행동 신분증 위변조 가능성 있어 빼서 줘야”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김정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0일 김포공항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여 달라는 직원의 요청에 항의하는 등 실랑이를 벌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의 비판이 일고 있다. 김 의원은 욕설을 하거나 갑질을 하지 않았다고 부인하지만, 욕설이나 갑질 여부 이전에 더 큰 문제는 국민 안전을 위해 앞장서야 할 국회의원이 항공 안전을 위한 공항 직원의 요구를 거부했다는 데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같으면 현장에서 체포될 중대사안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22일 김 의원 측 관계자 등에 따르면 김 의원은 20일 밤 9시쯤 김포공항에서 김해공항행 국내선 항공기에 탑승하기 위해 검색대로 향하기 전 탑승권과 신분증을 제시해 달라는 공항 직원의 요구를 받았다. 김 의원이 신분증을 휴대전화 케이스 투명창에 들어 있는 채로 보여 주자 직원은 “꺼내서 보여 달라”고 했고, 김 의원은 “지금껏 항상 이 상태로 확인을 받았다”며 거부했다. 한 언론은 김 의원이 이 과정에서 “내가 국토위 국회의원인데, 이 XX들이 똑바로 근무를 안 서네” 등 욕설을 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김 의원은 22일 보도자료를 통해 절대 욕설을 하지 않았다고 부인한 뒤 “탑승권과 신분증을 모두 제시했다. 다만 규정에 없이 직접 꺼내 제시하라는 요구에 항의했다”고 해명했다. 이어 “국회의원에게도 이렇게 근거 없는 신분확인 절차가 불쾌하게 이뤄진다면, 시민들에게는 얼마나 더할까 싶은 생각이 들어 상식적인 문제 제기와 원칙적인 항의를 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김 의원의 이 같은 인식은 항공 안전이라는 특수성을 도외시한 비상식적 해명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9·11 테러에서 보듯 항공기는 불순세력에 납치될 경우 대량살상무기가 된다는 점에서 세계 각국은 승객에 대해 매우 엄격한 신분 확인 절차와 보안검색을 실시하고 있다. 특히 신분증의 위조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만져 보면서 살펴보는 게 더욱 안전하다. 실제 공항공사 매뉴얼에는 “두 손으로 탑승권과 신분증을 받고 육안으로 일치 여부를 확인하되, 위조 여부 등도 확인해야 한다”고 돼 있다. 그런데도 ‘직접 꺼내 보여 달라’는 공항 직원의 요구가 무리하다고 간주하는 것은 자신을 포함한 승객 안전을 누구보다 앞장서 신경 써야 할 공직자의 자세는 아니라는 지적이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미국 공항에서 신분 확인을 거부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면 현장에서 가차 없이 체포될 것”이라며 “이제 우리나라도 테러의 안전지대가 아닌 만큼 항공 안전에 관한 한 지나치다 싶을 만큼 엄격한 검색이 필요하다”고 했다. 미국은 2020년 10월부터는 아예 국내선 항공편을 이용할 때도 여권을 소지해야 할 정도다. 한국항공보안학회 총무이사를 맡고 있는 이강석 한서대 항공교통학과 교수는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김 의원의 행동은 부적절하다”며 “공항 직원의 입장에서는 국회의원이든 지위여하를 막론하고 신분 확인을 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방송에 출연해 “공항은 안전이 최우선시되는 곳인데, 가장 법을 준수해야 할 공복이 보안직원에게 훈계하듯 했다”고 지적했다. 백성문 변호사도 “신분증은 위·변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빼서 주는 게 맞다”며 “빼는 데 1초도 안 걸리는데 굳이 언성을 높인다는 게 정당한 행동인가”라고 했다. 손지은 기자 sson@seoul.co.kr
  • 베델 손녀집에 ‘독립유공자 명패’ 걸렸다

    베델 손녀집에 ‘독립유공자 명패’ 걸렸다

    을사늑약 부당함 폭로 글 게재 등 인정“제 집이 해외에서 처음으로 독립유공자의 명패를 부착하는 곳인 데다 한국의 국가보훈처가 여기서 공식 기념행사까지 열어주니 정말 기쁩니다. 한국인들이 우리 할아버지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에게 얼마나 감사하는지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1904년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항일언론운동을 한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의 손녀 수전 제인 블랙(62)은 22일(현지시간) 영국 스폴딩의 자택에 독립유공자 명패가 걸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처럼 감격스러워 했다. 피우진 보훈처장은 이날 이곳에서 열린 ‘독립유공자의 명패 전달식’에 참석했다. 피 처장과 수전은 문 왼편에 ‘독립유공자의 집’이라고 적힌 명패와 베델의 항일 공적을 설명하는 영문 설명판을 부착했다. 수전은 감회에 젖은 듯 연신 명패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보훈처는 해외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중 첫 명패 전달 대상으로 베델을 선정했다. 그만큼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베델의 역할을 크게 인정한 것이다. 베델은 민족언론을 창간했을 뿐 아니라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글과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글을 게재하는 등 독립운동의 ‘촉진자’로 활약했다. 1968년 한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수전은 1995년 베델의 직계 후손으로서 처음 한국을 방문해 훈장을 받았다. 수전은 “할아버지를 기리는 공식 행사 때마다 한국을 자주 찾았는데, 오늘은 한국 정부가 영국을 직접 찾아줘 감회가 새롭다”며 “이 명패로 할아버지가 조선이란 나라에 가서 특별한 업적을 남긴 사실이 이웃에 전파될 것이고, 아이들에게도 좋은 교육이 될 것”이라고 했다. 또 “내 조상이 한 나라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사실이 영광스럽다”고 덧붙였다. 서울신문과 대한광복회는 보훈처 후원으로 지난 10월부터 내년 3·1운동·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독립유공자의 명패’ 모금 활동을 벌여왔다. 한편 이날 수전은 베델 부부가 조선에서 사용하다 영국으로 가져간 수납용 가구, 우편엽서, 베델이 촬영한 당시 사진 등을 한국 정부에 기증(영구 임대)했다. <서울신문 8월 3일 27면> 스폴딩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해외 포용국가 사례와 포용국가의 발전 방향

    해외 포용국가 사례와 포용국가의 발전 방향

    “스위스의 소도시인 주크(Zug)는 600여개의 가상화폐 관련 기업들이 전세계에서 몰려 들고 있다. 세계 가상화폐 자금의 40%가 스위스로 몰렸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안성호 한국행정연구원 원장은 이에 대해 “헌법질서 측면에서 스위스는 지구촌 최고의 포용국가였기 때문에 혁신적인 블록체인 경제에 적응할 수 있었고, 주크 시 같은 도시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안 원장은 20일 서울의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혁신적 포용국가’ 포럼에서 이 같이 밝히면서 “포용적 결사질서를 가능케하는 시스템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한국의 르네상스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 헌법의 포용성 수준이 일본보다도 떨어진다”면서 “포용헌법질서를 위해서는 승자독식제에 대한 소수의 권력 강화 등 다수-소수의 권력 공유, 과잉 중앙집권제를 보완하는 연방적 지방분권, 엘리트 지배 및 대의제를 보완하는 직접참정의 확충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김종법 대전대 교수는 포용국가 형성을 위해서는 정치문화의 변화를 위한 패러다임의 변화 필요성을 지적했다. 그는 독일에서 중고생들이 수학여행을 떠날 때 부유한 집안 아이들은 다른 동급생들보다 2~3 배이상의 비용을 지불하지만 학부모들도, 학생 자신들도 이를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예를 들면서 이 같이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 처럼 제도적 효율성 만큼 정치문화, 시민의식의 변화 등이 포용국가 구축을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정우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은 독일의 경우, 시민들이 전력을 이용할 때 여러가지 생산방식으로 만들어진 전력을 선택할 수 있다면서 이 과정에서 비용을 더 내야 하지만, 환경을 위해 신재생에너지로 생산된 전력을 사용하는 시민들의 예를 들었다. 포용국가 조성과정에서 공동체 의식과 시민들의 깨어있는 의식 및 의지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이다. 정용덕 서울대 행정대학원 명예교수는 “현 정부는 온건한 변화를 추진하고 있는데에도 급진적이라는 정부란 인식을 주고 있다”면서 “포퓰리즘 논쟁의 극복방법은 구체화를 심화시키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는 “분권, 다원화 등은 세계적으로 국제기구들의 권장 사항”이라면서 그동안의 발전 모델의 폐해를 넘기위한 “인간중심, 시민사회 강조 등은 모두 꼭 필요한 사항들”이라고 밝혔다. 임춘택 에너지기술평가원 원장은 포용국가 비전과 논리는 세계적인 비전으로 확산시킬 수 있다면서 혁신과 포용의 융합적 적용에 대한 심화를 주문했다. 한편, 주상영 건국대 교수는 공공개혁 감수 등 보다 과감한 포용성장 등을 위한 방향 설정을 주문했고, 김영수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포용국가 건설 과정에서 경제지상주의에 대한 경계 등도 지적했다. 이날 종합토론의 사회를 맡았던 이정우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은 문재인 정부가 큰 기로에 서 있다면서 포용국가 추진을 위한 정책적 실천을 강조했다. 이날 포럼은 포용국가의 지향성과 구체적인 실천 방법 등을 논의하기 위해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와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함께 기획하고, 한국행정연구원이 주관해서 열렸다. 한편 정해구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은 이날 최근 문재인 정부의 정책변화 조짐 등에 대해 “정부가 상황 변화에 따라, 제조업 활성화 등으로 집중점과 강조점을 이동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선시공 후분양, 소비자 선택권 높인 ‘테라팰리스’ 분양 관심

    선시공 후분양, 소비자 선택권 높인 ‘테라팰리스’ 분양 관심

    ‘테라팰리스’는 지하 2층~지상 17층, 전용면적 52~84㎡, 2개 동, 총 78세대규모로 조성된다. 가구 수가 적은데다 수요자들의 선호도가 가장 높은 중소형 평형으로만 이뤄져 있고 주변 환경이 입지, 교통, 교육, 생활환경 등이 고루 잘 갖춰져 있어 조기 분양이 완료될 것으로 기대된다. 단지가 위치한 자양동은 도심권 직장인, 대학생, 자영업 종사자 등 풍부한 배후수요를 자랑하는 지역으로 지하철 건대입구역(2, 7호선), 구의역(2호선)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멀티 교통망을 갖췄다. 여기에 버스 노선이 집중되는 지역으로 도심 어느 지역으로나 이동이 수월하다. 차량으로도 영동대교, 잠실대교, 올림픽대교, 천호대교 등 강변북로를 통해 서울 어느 지역이든 빠르게 이동이 가능하다 생활인프라도 우수하다. 단지에서 도보 10분거리에 더블역세권과 롯데백화점, 롯데시네마, 스타시티몰, 이마트, 로데오거리, 문화예술회관 등이 자리잡고 있어 쇼핑과 문화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데다 문화예술회관, 건국대학교병원, 어린이대공원, 뚝섬한강공원도 인접해 있어 건강하고 힐링되는 주거 생활이 가능하다. 학군도 주목할 만 하다. 단지 바로 뒤에는 사립 명문학교인 건국대학교를 비롯해 인근에 화양초, 자양초∙중∙고, 동자초, 구의초∙중∙고, 광양중∙고, 건대부중∙고, 세종대 등 많은 학교들이 밀집해 있다. 명문 학교들이 모여있는 만큼 학원가도 잘 형성돼 있다. 광진구는 다양한 개발 호재를 앞두고 있다. 먼저 서울시 도심권 내 최대 개발구역 중 하나인 광진구 복합업무단지의 개발이 내년 중 착공 예정이다. 광진구 내에 위치한 구의·자양 재정비촉진구역 개발을 통해 옛 동부지방법원 터를 포함한 구의동 246번지와 자양동 680번지 일대 17만7333㎡의 노후 시가지를 지상 28층짜리 공공청사와 보건소·구의회·오피스·호텔·판매시설이 어우러진 복합업무단지로 재개발하는 사업이다. 동서울터미널 현대화 사업도 진행된다. 이 사업은 서울 동북권 광역교통의 중심지이면서도 시설 노후와 교통혼잡 등으로 불편이 많았던 동서울터미널을 터미널·호텔·업무·관광·문화시설 등이 결합된 32층 규모의 복합타운으로 개발하는 사업이다. 이어 지하철 7호선 중곡역 인근인 중곡동 국립서울병원 부지는 종합의료복합단지로 개발된다. 우선 1단계로 종합의료시설인 국립정신건강센터가 지난 2016년 완공된 데 이어, 현재 2단계 개발사업이 내년 12월 완공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다. 2단계 사업은 지하 2층∼지상 20층, 연면적 5만2,221㎡의 규모로 업무시설과 판매시설 등 사회서비스 시설과 함께 시민 공유 공간 2곳도 들어설 예정이다. 이 외에도 인근 성동구 성수동 레미콘부지는 대규모 공원으로 꾸며짐에 따라 광진구는 앞으로 업무와 상업, 문화, 주거가 새로이 어우러진 고급 복합주거지역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테라팰리스’의 분양홍보관 및 현장은 서울 광진구 자양동에 위치해 있다.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강력한 공급 시그널로 집값 안정” “3기 입지 좋아 2기 신도시 위축”

    “서울 접근성 좋아 수요 분산 기대” 3기 신도시 주민들 대체로 환영 김포 등 2기는 집값 하락 불안감 부동산 전문가들은 정부가 기존 신도시보다 서울과 인접한 곳에 아파트를 공급한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하락세에 접어든 서울 집값 안정화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박원갑 KB국민은행 수석부동산전문위원은 “정부가 수요 압박에 이어 시장에 비교적 강한 ‘공급 신호’를 보내면서 집값이 안정 국면에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면서 “광역급행철도(GTX) 등 광역교통망 조성 사업이 본격화되면 수도권에서 서울로의 접근성이 더욱 좋아져 서울 주택 수요를 다소 분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조주현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정부가 공급 시그널을 시장에 준 것은 긍정적”이라면서 “3기 신도시의 당면과제는 제대로 된 교통망을 확충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3기 신도시 후보지 주민 인근 주민들은 기대와 우려가 엇갈렸다. 부평구에 사는 최모(42)씨는 “인천은 인구가 300만명을 넘어선 이래 계속 발전하는 추세여서 계양구에 첨단 신도시가 들어서면 개발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환영했다. 연수구에 사는 이모(56·여)씨는 “인천에는 신도시가 너무 많아서 집값이 오래전부터 정체돼 있는데 서울과 가까운 계양에 신도시가 들어서면 수요가 그쪽으로 쏠릴까 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남양주시 관계자는 “그동안 교통망을 확충하려 해도 사업 타당성이 나오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는데 신도시 개발과 함께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3년 지정된 2기 신도시 주민들은 불안감을 나타냈다. 김포신도시 인근 중개업소 관계자는 “2기 신도시 인프라 구축이 미비한 상황에서 입지가 더 좋은 3기 신도시가 만들어질 경우 지역 부동산 시장이 위축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류찬희 선임기자 chani@seoul.co.kr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3기 신도시 광명·시흥-하남 유력…정보 유출 과천-고양 원흥은 제외

    GTX·BRT 등 교통 연계망 확충 포함 서울시는 유휴지 활용·용적률 상향 예정 정부가 19일 발표하는 ‘제2차 수도권 주택 공급 계획’에는 경기도 남북으로 각 한 곳씩 미니 신도시급 택지를 조성하는 방안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18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정부는 앞서 ‘9·21 주택 공급 확대 방안’을 통해 서울과 일산·분당 등 1기 신도시 사이에 330만㎡ 이상 대규모 공공택지를 4∼5곳을 조성하고 이 가운데 1~2곳을 올해 안으로 확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부동산 업계에서는 과거 보금자리주택지구로 지정됐다 해제된 광명·시흥지구와 하남 감북지구 등지가 유력 후보지로 꼽힌다. 김포 고촌, 고양시 화전동·장항동 일대, 성남, 남양주 등지도 후보지로 거론된다. 유력 후보지였던 과천과 고양 원흥 등은 정보 유출로 후보지에서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 330만㎡는 주택 4만~5만 가구가량이 공급될 수 있는 규모로, 위례신도시(677만㎡)의 절반 정도 크기다. 19일 확정되는 신도시 1~2곳을 통해 7~8만여 가구에서 많게는 10만여 가구의 아파트가 공급될 것으로 보인다. 3기 신도시 입지와 함께 교통 문제를 해결할 광역교통 대책도 발표된다. 특히 3기 신도시는 물론 2기 신도시의 광역교통개선 대책도 함께 제시된다. 광역교통망 대책의 핵심인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건설 및 도로, 간선급행버스체계(BRT) 등 교통 연계망 확충 방안이 담길 것으로 관측된다. 현재 GTX-A(운정∼동탄) 노선은 민간투자사업심의위원회를 통과했고 GTX-C(양주∼수원) 노선은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했다. 한편 서울시도 유휴부지를 활용한 택지 조성 방안과 도심 내 용적률 상향 등 도심 주택 확충 방안을 제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대책에 그린벨트 해제 방안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의 공급 확대 대책이 서울과 수도권 아파트 가격에 미칠 영향도 관심사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3기 신도시가 성공하려면 서울과의 대중교통 연계가 잘돼야 하고 직장 등 자족시설이 잘 갖춰져야 한다”며 “3기 신도시가 건설되면 집값 안정에는 매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내년도 경제정책 MB·朴정부 재탕”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와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이 18일 국회도서관에서 공동 주최한 ‘촛불정신과 문재인 정부 개혁과제 정책 심포지엄’에서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이 총체적 난국을 보였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경제부문 토론자로 나선 최배근 건국대 교수는 “경제 정책에 대한 토론문을 쓰면서 제목을 ‘무능인가 아마추어인가’로 잡았다”고 꼬집었다. 최 교수는 최근 정부가 발표한 내년도 경제정책방향에 대해 “99%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재탕으로 99% 내용이 똑같다”며 “갈증 해소를 위해 양잿물을 마시는 2기 정책팀의 경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 자리에 참석했던 이해찬 대표가 앞서 여러 번 장기 집권 의지를 밝혔던 것을 의식한 듯 “이런 상황 속에서 장기 집권이라는 몽상을 꾸지 마라”며 “스웨덴은 산업계를 우군으로 만들어 장기 집권에 성공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산업 정책은 아예 실종됐다. 야당이 자살골을 넣지 않는 한 총선서 패배한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 정신 안 차리면 제2의 폐족이 오고 민심은 싸늘히 식어갈 것”이라며 “사회·경제적으로 내부 개혁 성과를 못 거두면 한반도 문제도 동력을 잃어갈 수 있고, 1년이 지나면 ‘총선 블랙홀’에 빠져들 것”이라고 쓴소리를 쏟아냈다. 사회부문 토론자인 남찬섭 동아대 교수도 정부의 포용국가 정책에 대해 “정책적인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오래가기 어렵고 대통령이 가진 개인 이미지로서 남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평화번영부문 토론자인 홍현익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정책결정이 일률적이고 청와대가 각 부처의 역할을 다해 부처가 청와대 눈치를 보며 일하지 않으려 한다”며 “청와대가 너무 앞서가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손지은 기자 sson@seoul.co.kr
  • [인터뷰 플러스] “옳은 일엔 목숨 걸고라도 나서야죠… 평생의 마음가짐입니다”

    [인터뷰 플러스] “옳은 일엔 목숨 걸고라도 나서야죠… 평생의 마음가짐입니다”

    해방 정국과 새마을 운동, 지방의회의 출현. 학교 교과서 속에 나올 만한 이야기들이다. 정수선 선생은 이 모든 과정을 직접 살아내며 참여해 온 역사의 산증인이다. 1934년생으로 망우동 동래정씨 집성촌을 지키며 중랑구에서 25년 동안 6개 동의 동장을 역임했다. 동래정씨 승지공파 양원종중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라지만 그가 살아온 시대의 변화 폭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다양한 자리에서 사회에 참여하며 봉사하는 정수선 선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말하는 그에게서 ‘연륜’이라는 말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다. 편집자 주→1934년생이시니 그야말로 역사의 산증인이십니다. -제가 해방되던 해에 초등학교 5학년이었어요. 그때는 여기 망우동이 서울이 아니라 경기도 양주군이었습니다. 그때는 생필품이 많이 없을 때였죠. 신발이 없어서 맨발로 학교에 다니던 기억이 나요. 나막신을 신다가 끈이 끊어지면 그걸 또 손 시리게 들고 오곤 했습니다. 그런 기억을 해보면 어릴 때 참 힘들었구나 생각이 드네요. →이후에 1970년부터 망우동장으로 취임하셔서 동장으로 오래 일하셨는데 기억에 남는 사업을 꼽는다면. -제가 할 일이 많았던 때이고, 사실 제가 자랑하고 싶은 일도 많이 있습니다. 1970년에 망우동장으로 제가 발령을 받기 전엔 여기 전기도 안 들어왔었어요. 그때 제가 농어촌 가설 자금을 융자받아서 전기를 끌어왔고, 그 이후 동장으로 취임하고 상수도 추진위원회를 구성해서 수돗물도 나오게 했지요. 또 면목2동장으로 일할 때는 82개 골목을 보도블록으로 정비하기도 했어요. 그때 예산이 없으니까 종로에서 공사하는 데에 쓰던 보도블록을 밤낮 사람을 보내 실어왔습니다. 새마을사업 중 하나였는데, 그렇게 보도블록 80만 장을 가져와서 골목에 깔았습니다. →지역을 발전시키는 데에 굉장히 중요한 일들을 하셨군요. -그땐 그런 일들이 필요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런 사업들보다 더 기억에 남는 일은 따로 있습니다. 동장으로 와서 제일 먼저 시작했던 일이기도 한데, 아이들을 가르쳤던 것이에요. 옛날 중랑천변에는 무허가 건물들이 많았는데 거기 어려운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돈이 없으면 학교를 못 다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 아이들이 중학교를 못 갔던 거예요. 학교를 못 가는 그 아이들을 위해서 동사무소에 ‘새마을 학교’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3년 동안 중학교 과정을 가르쳐서 검정고시를 볼 수 있게 하고 고등학교를 보냈죠. 그게 제가 동장으로 한 첫 사업이었습니다.→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네요. 특히나 그 시절에 교육 복지를 동에서 생각하셨다는 게 놀랍습니다. -저도 그 일에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서 20명 넘는 아이들이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고등학교에 갔습니다. 제가 안 했으면 공부를 하지 못했을 거예요. 사실 그 친구들 중에 다시 만났던 건 두 명 정도밖에 없어서 어떻게들 지내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까지도 좋은 일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뭔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정수선 선생은 1970년에 망우동장으로 취임해 1995년 6월까지 25년 동안 동장으로 일했다. 면목2동, 망우1동, 중화2동 묵1동, 상봉2동장을 거치면서도 직책에 대한 욕심 없이 지역 생활을 살피는 동장으로만 지역민을 섬겼다. 제2대 중랑구의회 의원에 당선되어 지방의회에서 25년 지역 행정 노하우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는 공직을 내려놓은 이후에도 중랑구 해병사회단체 연합회, 평화대사협회 한유화 연구 협력회장으로 사회를 위한 일을 이어왔다.> →25년 동안 한결같은 모습으로 지역을 위해 일하셨다는 게 정말 대단합니다. 그 생활을 마감하실 때 아쉬움도 크셨을 것 같습니다. -공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있잖아요. 시키는 일만 하고, 안전하게 정해진 대로만 일한다는 불만이 있죠. 저는 내 마음껏 일했어요. 남이 안 하는 일을 많이 했고, 잘했다고 생각해요. 25년 동안 동장만 한 사람은 대한민국에 저밖에 없습니다. 그저 아직 할 일이 더 있다는 생각에 욕심이 남았었을 뿐이죠. 누구나 어느 자리를 떠날 땐 아쉬움이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지역과 사회를 깊이 생각하시는 성정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후로도 여러 자리에서 사회적인 활동을 해오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1961년에 지역에서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하면서 사회활동을 쭉 해왔어요. 그렇게 돌아보니 조금 남다른 성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일에서 남에게 지지 않으려 하고, 정의에 있어서는 생명을 바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옳은 일이면 나서고, 어려운 이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어요. 조상의 뜻을 지켜온 이의 당부 →망우동 정 씨 집성촌이 몇 차례 화제에 오른 적 있습니다. 동래정씨 승지공파 양원종중 회장을 지내신 바 있으신데, ‘정 씨 집성촌’에 대해 조금 말씀해주시죠. -저희 선조 할아버지께서 망우동에 오신 것이 1395년입니다. 그러니까 저희가 여기에 산 지가 620년이 넘었죠. 저는 16대손입니다. 저희 선조이신 정구 할아버지께서 고려 말에 좌간의 대부셨어요. 태조임금이 조선을 세우신 이후 공신인 할아버지께 이 일대 토지를 하사하셨고, 그때부터 동네가 ‘정서방네’라고 불려왔습니다. 현재까지 25가구가 남아서 여기 살고 있습니다. <정수선 선생의 말처럼 망우동 동래정씨 집성촌을 이룬 이들은 설학재(雪壑齋) 정구(鄭矩)의 후손들이다. 망우동은 태조와 인연이 깊은 지역인데, ‘망우동’이라는 이름의 유래 중에도 태조가 한 말에 기인한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태조가 자신이 묻힐 명당을 정하고 오는 길에 “이제야 모든 근심을 잊겠노라”(於斯吾憂忘矣)라고 한 데에서 ‘망우’(忘憂·근심을 잊음)라는 지명이 나왔다는 것이다. 또 우물물을 마신 뒤 물맛을 칭찬해 양원리(養源里)가 됐다고도 한다.> →서울 안에 25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이 모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전에는 40세대가 넘었다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1971년에 그린벨트가 발표되면서 내 땅을 가지고도 집을 못 짓게 됐으니까 땅값도 떨어지고…. 결혼하면서 나가기도 하면서 줄어들었습니다. →요즘은 가문이 모이는 일이 많지 않은데, 모임이 잘 이뤄지나요. -비교적 많이 모이는 편입니다. 종중 정기총회를 하면 설학재공 할아버지 편으로만 종친들이 한 300명 모이고, 그 아래로 중추공 150명 정도 모이고요. 전국적으로 나가 있는 건 40만 명이 넘습니다. 자손이 전체적으로는 40만 정도 되는데, 여기 양원리에 살거나 제사 지내러 오는 건 300명 정도입니다. 제가 어떤 역할을 했다기보다는 다들 부모를 섬기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기에 유지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희 대에 비해서는 많이 줄었죠. 저는 이 부분이 참 안타깝습니다. 부모가 없으면 자식이 어디서 태어났겠습니까. 부모를 생각하지 않고, 조상을 생각하지 않는 사회가 되고 만 것 같아요. 고쳐나가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역사를 지켜보셨고, 또 현실로 참여해 오신 입장에서 지금의 사회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끝으로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젊은 세대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선 어른을 섬길 줄 알고, 친구를 마음으로 믿고, 올바른 일에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참여하는 마음을 가지길 당부하고 싶어요. 국가의 미래는 젊은이들에게 달려있지 않겠습니까. 어른을 섬기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교육이 부족한 결과라고 생각하는데, 특히 가정교육·인성교육이 필요합니다. 정부에도, 정치하는 분들에게도 꼭 이 얘기를 하고 싶어요. 인성교육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정태기 객원기자 jtk3355@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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