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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민원인에게 사적 연락한 경찰관 형사처벌 대신 징계 요구

    전북지방경찰청이 업무 중 알게 된 여성 민원인의 개인정보로 사적인 연락을 한 경찰관을 형사처벌하지 않기로 해 반발이 예상된다. 19일 전북지방경찰청에 따르면 A순경은 지난 7월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 전북의 한 경찰서를 찾은 여성 민원인의 개인정보로 사적인 연락을 해 물의를 빚었다. 그는 “아까 면허증을 발급해 준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뒤 “마음에 들어서 연락하고 싶은데 괜찮겠냐”는 내용의 SNS 메시지를 민원인에게 보냈다. 이를 알게 된 민원인의 남자친구는 국민신문고와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통해 “경찰은 마음에 드는 민원인이 있으면 이렇게 개인정보를 이용해 사적으로 연락하는지 의심된다”며 해당 경찰관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전북경찰청은 19일 A순경에 대해 내사 종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북경찰청의 판단은 대통령 소속 합의제 행정기관인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유권해석 결과에 따른 것이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최근 경찰의 법률 유권해석 의뢰에 대해 “경찰서 민원실 소속 A순경은 정보 처리자로 볼 수 없다”고 해석했다. 개인정보 보호법에 따르면 ‘개인정보 처리자’란 업무를 목적으로 개인정보 파일을 운용하기 위해 스스로 또는 다른 사람을 통해 개인정보를 처리하는 공공기관, 법인, 단체 및 개인 등을 말한다. 여기서 개인은 정보를 처리하는 주체로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이 아닌, 법인의 사업자 등이 해당한다게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판단이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이를 근거로 A순경은 개인정보 처리자가 아니라 ‘취급자’ 정도로 봐야 한다며, 처리자에 대한 처벌을 명시한 관련 법을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유권해석 결과를 전북경찰청에 전달했다. 이에따라 전북경찰청은 A순경에 대한 내사 절차를 마무리하고 감사 부서에 징계 등 신분상 처분을 맡기기로 했다. 경찰 관계자는 “자체적인 내사 종결에 따른 시비를 없애기 위해 공신력 있는 타 기관에 법률 유권 해석을 의뢰했다”며 “조만간 해당 경찰서에서 징계위원회를 열어 A순경에 대한 처분을 결정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에대해 전문가들은 “경찰이 스토킹에 면죄부를 준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여성 민원인은 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 경찰이라는 신뢰할 만한 기관에 자신의 개인정보를 믿고 맡긴 것인데, 해당 경찰관은 이를 사적으로 이용했다”며 “이를 법적 근거가 없다며 처벌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민원인이 경찰에게 개인정보를 믿고 제공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최근 경찰에서 발생하는 잇따른 비위와 성범죄가 지속한다면 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크게 추락할 것”이라며 “체계적인 교육과 강력한 처벌을 통해 신뢰받는 조직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민경 전북여성단체연합 대표도 “여성 민원인에게 스토킹과 같은 행위를 한 이번 사건은 경찰의 ‘성 인지 감수성’ 결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며 “향후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상진아’ 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 네가 죽던 날,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친구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었다.(…)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길을 가던 남모르는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義士)의 삼년상을 마치던 날 대한제국 홍문관 교리였던 생부(生父) 박시규가 비통한 심정으로 지은 제문 앞부분이다. 고헌(固軒) 박상진은 1884년 12월 6일(음력) 울산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나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갔고 3세 때 경북 경주 녹동으로 가 성장했다. 의사의 집안은 조부와 생부, 양부가 모두 급제했고 재산이 7000석이나 됐던 명문가였다. 종형을 따라 경북 청송 진보에 갔다가 그곳에서 왕산 허위를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은 것이 운명을 바꾸게 됐다. 왕산은 구한말 평리원장(대법원장 격)에 올랐다가 개화사상을 수용하고 의병 투쟁을 벌인 혁신유림이었다.스승을 따라 상경한 의사는 21세에 양정의숙에 들어가 안희제 등 동지를 만나 국권 회복의 열망을 키웠다. 양정의숙을 졸업한 해인 1908년 왕산은 교수형을 당했고 서대문형무소로 들어가 버려진 스승의 시신을 포대기로 감아 안고 나오면서 의사는 무력투쟁을 다짐했다. 교남교육회, 달성친목회 등에 가입하고 의사는 투쟁 계획을 세워 나갔다. 나라를 잃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1년 의사는 스승과 가까웠던 안동 유림 이상룡, 김동삼이 설립한 만주 서간도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방문해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중국 단둥에 안동여관을 설치했는데 독립운동 연락기관이었고 나중에 광복회의 거점이 됐다. 이듬해 귀국한 의사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라는 곡물회사를 차렸다. 곡물 거래는 해외를 드나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데 감시를 덜 받는 이점이 있었다. 국내외에 연락 거점을 마련한 의사는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광복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격인 대한광복회 출범식을 가졌다. 7개 강령의 첫째는 친일 부호의 의연금을 받아 내고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한다는 것이었다. 일제 고관과 한인 반역자를 처단하는 내용도 있다. 겉으로는 회(會)였지만 사령관, 사령부, 지휘장 등 군대식 조직과 전국 각지에 지부를 갖춘 무장투쟁 단체였고 박 의사는 총사령이었다.대한광복회는 거사에 나섰다. 박 의사의 명령을 받은 우재룡은 1915년 12월 24일 엄동설한에 경주 광명동 효현교(나무다리) 일부를 파괴한 뒤 풀숲에 숨어 기다렸다. 일제가 악랄하게 징수한 세금 수송 마차가 대구로 가려면 효현교를 건너야 했다. 전날 권영만은 마부를 찾아가 대구 병원에 치료받으러 가야 한다며 애걸복걸해 짐칸에 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냈다. 마침내 효현교에 이른 마차가 부서진 다리를 보고 속도를 늦추자 그 틈을 타 권영만은 당시로선 거액인 8700원이 든 세금 행낭을 들고 유유히 빠져나왔다. 1917년 11월 10일 밤 경북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경북 구미 집에서 권총탄 소리가 터졌다. 7만 5000석을 수확하는 당시 최고의 부자이면서 악명이 높았던 장을 처단하는 총소리였다. 그는 왕산의 추천으로 관찰사가 됐는데 자금을 대겠다는 약속을 어겼을뿐더러 밀고까지 해 광복회원 채기중과 강순필이 사살한 것이다. “조국 광복을 하자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같은 뜻이니 이 큰 죄를 성토하노라.” 거사 후 두 사람은 담벼락에 이런 격문을 붙여 놓았다. 장은 광복 후 미군정 수도경찰청장과 3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다. 장택상은 아버지 일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노덕술 등 친일 경찰을 군정 경찰로 받아들였다.“우리 2000만 민족은 노예로 변하여 섬 오랑캐의 악정 폭행은 날로 더해 가고 날로 거듭해 간다. 생각하면 피눈물이 샘솟는다. 각 동포는 능력에 따라 이를 도와….” 광복회원들은 친일 행각, 재산 규모에 따라 부호들에게 이런 포고문을 보내고 모금액을 통고했다. 불응하는 친일 인사는 사살했다. 악질 친일파 도고면장 박용하, 벌교 부호 서도현, 보성의 양재성 등이다. 조선총독 암살, 직산과 상동 광산 습격도 시도했다. 박 의사도 대구 부호 서우순 처단에 직접 가담했다가 발각돼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는데 이른바 ‘대구 권총 사건’이다. 장승원 처단 후인 1917년 겨울부터 박 의사와 광복회 조직원들은 일제의 추적을 받았고 1918년 1월 충남 천안 헌병대에 주요 회원들이 체포돼 광복회의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의사는 망국(亡國)에 분개해 단식으로 순국한 이만도의 아들인 경북 안동 이중업의 집에 은신했다. 의사를 보살펴 준 사람은 이중업의 부인이며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체포돼 고문으로 실명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락이다.숨어 있던 의사는 뜻밖에도 생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도리가 아니겠는가”라며 만류도 뿌리치고 경주 집으로 갔다. 의사가 도착했을 때 생모는 눈을 감은 뒤였다. 1918년 2월 1일 장례를 치르는 중에 일경 수백명이 출동, 의사를 포박하려 했다. 의사는 “나는 내 할 일을 정당하게 했다. 너희에게 포박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고 꾸짖으며 백마를 타고 유유히 일경에 앞서 나아갔다. 물고문, 불고문과 3년이 넘는 재판 끝에 의사에게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졌다. 사형 집행 며칠 전 면회 온 가족에게 의사는 “울 까닭이 없다”며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1921년 8월 11일 오후 1시 대구감옥에서 의사는 순국했다. “어머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님 원수도 갚지 못했네. 빼앗긴 국토마저 되찾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저승길을 갈까.” 이 유시(遺詩)와 전해지지 않는 4장의 유서, 사진 1장을 남기고 간 36년 8개월의 짧은 삶이었다. 시신이 옮겨지던 청천역(경북 경산)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통곡했다. 일제는 새벽부터 기마대를 보내 길가에 줄지어 오는 조문객들을 휘몰아 쫓는 등 조문을 방해했다. 의사 집안은 195만평이나 되던 광대한 땅을 모두 날리고 풍비박산이 났다. 경주 최부잣집의 최준(의사의 처사촌)이 농간을 부려 재산을 빼앗아 갔다며 송사를 벌였지만 패소하고 말았다. 의사의 생부는 “일곱 집안 100여 식구가 갑자기 모두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고, 나도 혼자서 이 옛집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동안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썼다. 의사의 묘소는 경주 내남면 노곡리 등운산 기슭에 있다. 농로를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고 산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의 가파른 경사지를 100m 남짓 올라가니 어두컴컴한 숲속에 묘소가 나타났다. 잠시 묵념을 올렸다. 정부는 1963년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생가도 복원되고 동상이 세워졌으니 조금이나마 원혼을 달래 줄 것이다. 송정동 생가는 증손자 박중훈(65)씨가 돌보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간 생가에서 박씨는 의사의 일생과 여태 끝나지 않은 장승원가와의 악연, 후손들의 비참한 삶을 들려주었다. 박씨는 의사의 일대기이자 평전인 ‘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을 펴냈다. 평생 고통을 겪은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의 일생도 정리해 따로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박씨는 최현배 선생을 비롯한 울산 지역 독립운동가를 함께 기리는 기념관이 건립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상진아’ 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 네가 죽던 날,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친구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었다.(…)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길을 가던 남모르는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義士)의 삼년상을 마치던 날 대한제국 홍문관 교리였던 생부(生父) 박시규가 비통한 심정으로 지은 제문 앞부분이다. 고헌(固軒) 박상진은 1884년 12월 6일(음력) 울산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나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갔고 3세 때 경북 경주 녹동으로 가 성장했다. 의사의 집안은 조부와 생부, 양부가 모두 급제했고 재산이 7000석이나 됐던 명문가였다. 종형을 따라 경북 청송 진보에 갔다가 그곳에서 왕산 허위를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은 것이 운명을 바꾸게 됐다. 왕산은 구한말 평리원장(대법원장 격)에 올랐다가 개화사상을 수용하고 의병 투쟁을 벌인 혁신유림이었다.스승을 따라 상경한 의사는 21세에 양정의숙에 들어가 안희제 등 동지를 만나 국권 회복의 열망을 키웠다. 양정의숙을 졸업한 해인 1908년 왕산은 교수형을 당했고 서대문형무소로 들어가 버려진 스승의 시신을 포대기로 감아 안고 나오면서 의사는 무력투쟁을 다짐했다. 교남교육회, 달성친목회 등에 가입하고 의사는 투쟁 계획을 세워 나갔다. 나라를 잃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1년 의사는 스승과 가까웠던 안동 유림 이상룡, 김동삼이 설립한 만주 서간도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방문해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중국 단둥에 안동여관을 설치했는데 독립운동 연락기관이었고 나중에 광복회의 거점이 됐다. 이듬해 귀국한 의사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라는 곡물회사를 차렸다. 곡물 거래는 해외를 드나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데 감시를 덜 받는 이점이 있었다. 국내외에 연락 거점을 마련한 의사는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광복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격인 대한광복회 출범식을 가졌다. 7개 강령의 첫째는 친일 부호의 의연금을 받아 내고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한다는 것이었다. 일제 고관과 한인 반역자를 처단하는 내용도 있다. 겉으로는 회(會)였지만 사령관, 사령부, 지휘장 등 군대식 조직과 전국 각지에 지부를 갖춘 무장투쟁 단체였고 박 의사는 총사령이었다. 대한광복회는 거사에 나섰다. 박 의사의 명령을 받은 우재룡은 1915년 12월 24일 엄동설한에 경주 광명동 효현교(나무다리) 일부를 파괴한 뒤 풀숲에 숨어 기다렸다. 일제가 악랄하게 징수한 세금 수송 마차가 대구로 가려면 효현교를 건너야 했다. 전날 권영만은 마부를 찾아가 대구 병원에 치료받으러 가야 한다며 애걸복걸해 짐칸에 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냈다. 마침내 효현교에 이른 마차가 부서진 다리를 보고 속도를 늦추자 그 틈을 타 권영만은 당시로선 거액인 8700원이 든 세금 행낭을 들고 유유히 빠져나왔다.1917년 11월 10일 밤 경북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경북 구미 집에서 권총탄 소리가 터졌다. 7만 5000석을 수확하는 당시 최고의 부자이면서 악명이 높았던 장을 처단하는 총소리였다. 그는 왕산의 추천으로 관찰사가 됐는데 자금을 대겠다는 약속을 어겼을뿐더러 밀고까지 해 광복회원 채기중과 강순필이 사살한 것이다. “조국 광복을 하자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같은 뜻이니 이 큰 죄를 성토하노라.” 거사 후 두 사람은 담벼락에 이런 격문을 붙여 놓았다. 장은 광복 후 미군정 수도경찰청장과 3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다. 장택상은 아버지 일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노덕술 등 친일 경찰을 군정 경찰로 받아들였다. “우리 2000만 민족은 노예로 변하여 섬 오랑캐의 악정 폭행은 날로 더해 가고 날로 거듭해 간다. 생각하면 피눈물이 샘솟는다. 각 동포는 능력에 따라 이를 도와….” 광복회원들은 친일 행각, 재산 규모에 따라 부호들에게 이런 포고문을 보내고 모금액을 통고했다. 불응하는 친일 인사는 사살했다. 악질 친일파 도고면장 박용하, 벌교 부호 서도현, 보성의 양재성 등이다. 조선총독 암살, 직산과 상동 광산 습격도 시도했다. 박 의사도 대구 부호 서우순 처단에 직접 가담했다가 발각돼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는데 이른바 ‘대구 권총 사건’이다. 장승원 처단 후인 1917년 겨울부터 박 의사와 광복회 조직원들은 일제의 추적을 받았고 1918년 1월 충남 천안 헌병대에 주요 회원들이 체포돼 광복회의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의사는 망국(亡國)에 분개해 단식으로 순국한 이만도의 아들인 경북 안동 이중업의 집에 은신했다. 의사를 보살펴 준 사람은 이중업의 부인이며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체포돼 고문으로 실명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락이다.숨어 있던 의사는 뜻밖에도 생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도리가 아니겠는가”라며 만류도 뿌리치고 경주 집으로 갔다. 의사가 도착했을 때 생모는 눈을 감은 뒤였다. 1918년 2월 1일 장례를 치르는 중에 일경 수백명이 출동, 의사를 포박하려 했다. 의사는 “나는 내 할 일을 정당하게 했다. 너희에게 포박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고 꾸짖으며 백마를 타고 유유히 일경에 앞서 나아갔다. 물고문, 불고문과 3년이 넘는 재판 끝에 의사에게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졌다.사형 집행 며칠 전 면회 온 가족에게 의사는 “울 까닭이 없다”며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1921년 8월 11일 오후 1시 대구감옥에서 의사는 순국했다. “어머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님 원수도 갚지 못했네. 빼앗긴 국토마저 되찾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저승길을 갈까.” 이 유시(遺詩)와 전해지지 않는 4장의 유서, 사진 1장을 남기고 간 36년 8개월의 짧은 삶이었다. 시신이 옮겨지던 청천역(경북 경산)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통곡했다. 일제는 새벽부터 기마대를 보내 길가에 줄지어 오는 조문객들을 휘몰아 쫓는 등 조문을 방해했다. 의사 집안은 195만평이나 되던 광대한 땅을 모두 날리고 풍비박산이 났다. 경주 최부잣집의 최준(의사의 처사촌)이 농간을 부려 재산을 빼앗아 갔다며 송사를 벌였지만 패소하고 말았다. 의사의 생부는 “일곱 집안 100여 식구가 갑자기 모두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고, 나도 혼자서 이 옛집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동안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썼다. 의사의 묘소는 경주 내남면 노곡리 등운산 기슭에 있다. 농로를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고 산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의 가파른 경사지를 100m 남짓 올라가니 어두컴컴한 숲속에 묘소가 나타났다. 잠시 묵념을 올렸다. 정부는 1963년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생가도 복원되고 동상이 세워졌으니 조금이나마 원혼을 달래 줄 것이다. 송정동 생가는 증손자 박중훈(65)씨가 돌보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간 생가에서 박씨는 의사의 일생과 여태 끝나지 않은 장승원가와의 악연, 후손들의 비참한 삶을 들려주었다. 박씨는 의사의 일대기이자 평전인 ‘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을 펴냈다. 평생 고통을 겪은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의 일생도 정리해 따로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박씨는 최현배 선생을 비롯한 울산 지역 독립운동가를 함께 기리는 기념관이 건립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모랄레스도 멕시코行....멕시코는 어떻게 좌파 망명의 천국이 됐나

    모랄레스도 멕시코行....멕시코는 어떻게 좌파 망명의 천국이 됐나

    유명 좌파지도자들, 정치적 위기 때 멕시코와 ‘인연’‘스탈린 정적’ 트로츠키는 멕시코에서 생 마감하기도에보 모랄레스 전 볼리비아 대통령의 ‘멕시코행’으로 과거 좌파 지도자들의 망명지로 선호됐던 멕시코의 위상이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모랄레스 전 대통령은 지난 10월 대선에서 부정선거로 당선됐다는 의혹을 받고 불명예 퇴진한 뒤 지난 11일(현지시간) 멕시코 망명을 선언했다. 자국에서 정치적 위기를 겪고 멕시코로 떠난 좌파 지도자들은 모랄레스 이전에도 적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모랄레스의 12일 멕시코 도착 소식을 전하며 “지난 세기와 앞선 반세기 동안 멕시코는 스페인 좌파와 미국 내 사회주의자, 유럽 공산주의자들에게 안식처가 됐다”고 전했다. 멕시코 망명을 선택한 대표적인 인사로는 쿠바의 ‘건국 영웅’ 호세 마르티를 꼽을 수 있다. 19세기 스페인에 맞서 독립투쟁을 했던 마르티는 수형생활 끝에 스페인을 거쳐 1875년 멕시코로 건너가 약 2년간 생활했다. 그는 멕시코에서 ‘오레스테스’라는 필명으로 시와 글을 쓰며 활동하기도 했다. 멕시코를 거쳐간 그는 아바나 국제공항의 이름이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일 정도로 쿠바에서 최고 영웅으로 추앙받게 됐다. 1900년대 말에는 중남미 국가 인사들이 자국의 내전을 피해 멕시코로 넘어왔다. 1970년대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멕시코로 떠났고, 이가운데에는 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한 살바도르 아옌데 전 칠레 대통령도 있었다.유럽에서도 많은 좌파인사들이 멕시코 망명을 선택했다. 1930년대 스페인 내전 때 적지 않은 스페인 좌파 인사들이 멕시코로 떠났고, 이 가운데에는 초현실주의 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루이스 브뉴엘도 포함돼 있었다. NYT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수천명의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이 멕시코에 보호 요청을 했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가 예술가와 작가들이었다”고도 소개했다. 또 미국에서 매카시즘 광풍이 불 때도 미국의 사회주의자들은 국경을 넘어 멕시코행을 택했다. 일부는 망명생활 뒤 자국으로 화려하게 복귀했지만, 멕시코에서 결국 생을 마감한 이들도 있었다. 멕시코에서 사망한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러시아 혁명의 주역 레온 트로츠키다. 러시아에서 멕시코로 추방됐던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스페인 공산주의자에게 피격돼 사망했다. 프리다 칼로의 집 바로 옆에 있는 트로츠키 박물관은 멕시코를 찾는 관광객들의 대표적인 여행코스이기도 하다.이처럼 멕시코가 좌파 망명의 주요 선택지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학자 로렌조 마이어는 “멕시코 정부가 미국의 외교정책에 표면적으로 도전하지 않는 대신 (외국의 좌파지도자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의 주권을 주장했다”고 분석했다. 미국으로서는 국경 바로 옆 국가에 좌파 지도자들이 오가는 것이 불편할 수 있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문제삼기는 어려웠고, 멕시코 정부는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 최근 멕시코가 중남미 좌파정권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모랄레스의 멕시코 망명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지난달말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승리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당선인의 첫 해외방문국도 멕시코였다. 멕시코는 내년 중남미·카리브해국가공동체에서 의장국을 맡을 예정이기도 하다. 세계사 속 멕시코 망명 인사에 새롭게 이름을 올린 모랄레스 전 대통령이 앞으로 재기에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모랄레스는 15일 AP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자신은 여전히 볼리비아의 대통령이라며 “유엔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볼리비아의 위기에 중재자로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부고] 이제민씨 모친상, 김흥식씨 부친상, 조제영씨 모친상, 박윤섭씨 부친상

    ●이제민(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씨 모친상, 13일 오전 11시 30분,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8호실, 발인 16일 오전 7시. 02-2227-7572 ●김정숙·김원식(자영업)·김흥식(한국 캘러웨이 골프 전무이사)씨 부친상, 김상열씨 장인상, 정순주·권미악씨 시부상, 14일 오후 1시 25분,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3호실, 발인 16일, 장지 분당 메모리얼 파크. 02-3010-2263 ●조용남(전 건국대학교 교수)씨 부인상, 조제현(미국 A&M대 교수)·조제영(삼성증권 커뮤니케이션팀장)씨 모친상, 이시영·박강숙(구암중학교 교사)씨 시모상, 14일 오후 11시 18분,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호실, 발인 17일 오전 6시 30분. 02-3410-6901 ●박윤섭(신우S&F 대표이사)씨 부친상, 15일 오전 5시 52분, 전북 정읍아산병원 장례식장 101호 특실, 발인 18일 오전 7시. 063-530-6644
  • [부고] 조제영씨 모친상

    ●한영자씨 별세, 조용남(전 건국대학교 교수)씨 부인상, 조제현(미국 A&M대 교수)·조제영(삼성증권 커뮤니케이션팀장)씨 모친상, 이시영·박강숙(구암중학교 교사)씨 시모상, 14일 오후 11시 18분,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호실, 발인 17일 오전 6시 30분. 02-3410-6901
  • 국가보훈처, 김희식 선생 등 독립유공자 136명 포상

    국가보훈처는 오는 17일 제80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김희식 선생 등 136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13일 밝혔다.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김 선생은 평범한 농민으로 1919년 4월 1일 경기 안성 원곡면사무소 등지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고초를 겪었다. 보훈처는 “만세운동 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중형을 받은 사례”라고 했다. 현 정부 들어 재조명되고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도 이번에 재평가됐다.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최영보 선생은 1919년 11월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고자 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돼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기독교 여성으로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례로 꼽힌다. 건국포장이 추서된 송계월 선생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세 차례나 투옥됐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31명(애국장 7, 애족장 24), 건국포장 9명, 대통령표창 96명 등이다.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지익표(95) 선생뿐이며, 여성 포상자는 28명이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광진, 4년 연속 희망일자리 우수구 선정

    광진, 4년 연속 희망일자리 우수구 선정

    서울 광진구가 ‘2019년 서울 희망일자리 만들기’ 시구 공동협력사업 평가에서 4년 연속 우수구로 선정됐다고 13일 밝혔다. 서울시와 자치구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일자리사업 평가에서 구는 특히 민관학 협력을 통한 일자리 창출 확대, 청년인재 육성, 사회적경제 생태계 조성을 적극 추진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먼저 구는 지난 4월 지역 내 건국대, 세종대와 광진구 상공회 등 8개 기관이 참여한 민관 일자리 거버넌스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또 구인기업과 협력해 구직자에게 취업정보와 현장면접 기회를 제공하는 구인구직 만남의 날 19데이와 취업박람회를 개최하고 장년층과 경력단절여성을 대상으로 취업역량 강화 교육을 했다. 아울러 ‘청년인재 직무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사회적경제기업의 자립을 돕고 있다. 김선갑 광진구청장은 “앞으로도 창의적이고 지속가능한 일자리 사업을 마련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유재하 넘어서는 후배들 많이 나왔으면”...30주년 맞은 유재하음악경연대회

    “유재하 넘어서는 후배들 많이 나왔으면”...30주년 맞은 유재하음악경연대회

    지난 9일 서울 건국대학교 새천년관. 올해 30주년을 맞은 ‘유재하음악경연대회’ 직후 역대 수상자들을 비롯한 유재하 동문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유재하음악경연대회의 첫회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한 김민기 학전 대표를 필두로 가수 김광진, 유희열, 정원영, 박학기, 정지찬, 재주소년 등이 30주년을 맞은 유재하음악경연대회의 의미를 되새겼다. 김민기 학전 대표는 “30년 전 고 유재하를 기리기 위한 장학 재단으로 출발했던 기억이 생생하고 30주년을 맞아 감회가 새롭다”면서 “유재하에 머무르지 말고 유재하를 넘어서는 후배 뮤지션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후배들을 격려했다. 유재하음악경연대회는 한국형 팝 발라드를 개척한 싱어송라이터 유재하(1962~1987)를 기리는 음악대회로 싱어송라이터를 선발하는 오디션이다. 1989년 처음 개최돼 유희열, 방시혁, 김연우, 조규찬, 루시드폴, 스윗소로우, 노리플라이, 옥상달빛, 재주소년 등의 유명 가수들이 배출됐다. 2005년 재정난으로 한차례 대회가 열리지 못했지만 뜻있는 음악인들의 후원으로 현재까지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CJ문화재단이 유재하동문회와 공동 주관사로 참여하고 있다. 특히 오디션 프로그램의 범람 속에서도 자신의 음악을 하는 싱어송라이터 발굴의 장으로서 명맥을 이어오며 가수들 뿐만 아니라 제작자 등 음악 관계자들의 애정이 각별하다. 심사를 맡은 가수 김광진은 “올해는 참가 자격 요건의 변화로 문호가 넓어져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의미가 있었다”면서 “미디어 플랫폼이 다양해지는 무한 경쟁 시대에 시대에 유재하를 넘어서는 걸출한 싱어송라이터를 탄생시키는 것이 과제”라고 말했다. 진행을 맡은 박학기는 “독창성과 창의성이 있는 싱어송라이터를 뽑는 대회로서 상업성은 덜하지만 정통성 있는 음악 대회”라고 말했다. 정원영 호원대 교수는 “유재하음악경연대회 출신의 자부심도 대단하고, 출신이 아닌 가수들도 존경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30년간 대회를 끌고 왔다는 것이 대단하다”면서 “최근 몇년 동안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의 실력있는 참가자들이 많았지만, 좀더 대중적인 친구들이 많이 참가해 대회를 널리 알렸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고 말했다. 올해 유재하음악경연대회는 예선 접수에 역대 최다인 755팀이 응모해 본선에 10팀이 출전했다. SBS 오디션 프로그램 ‘KPOP스타’ 시즌 2 출신 신지훈도 본선에 올라 화제를 모았다. 한편 올해 유재하음악경연대회 대상은 ‘고향’을 부른 김효진(국제예술대학교)이 수상했다. 금상은 송예린, 은상은 이찬주, 동상은 방랑자메리·제이유나·황세영, CJ문화재단상은 코요, 유재하동문회상은 니쥬에게 돌아갔다. 이들에게는 총 2000만원의 상금이 수여됐으며 유재하음악경연대회 30기 동문 앨범 및 기념 공연 기회도 갖는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전세 보증금 지키려는 세입자, 집주인 눈치에 수수료도 부담

    전세 보증금 지키려는 세입자, 집주인 눈치에 수수료도 부담

    30대 직장인 A씨는 최근 이사를 위해 전세 계약을 하다가 집주인과 실랑이를 벌였다.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 가입 때문이었다. A씨는 전셋값 하락으로 계약 기간이 끝난 뒤 보증금을 제때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는 걱정에 전세금 반환보증 가입을 원했다. 하지만 집주인은 “그런 걸 왜 하냐”는 반응이었다. 고민 끝에 반환보증 가입을 포기한 A씨는 “알아보니 집주인 동의 없이 가능하다곤 하지만 가입한 뒤 집주인에게 통보가 되기 때문에 결국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더라”면서 “나중에 무사히 전세금을 돌려받아야 하는데 관계가 나빠질까 걱정돼 가입하지 않기로 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집값이 전세보증금보다 더 떨어지는 ‘깡통 전세’나 집주인이 새로운 세입자를 구하지 못해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역전세난’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에 가입할 때 ‘집주인 눈치보기’는 여전하다. 게다가 단독·다가구 주택은 아파트에 비해 절차가 까다롭고 보증료도 비싸 가입이 더 힘든 것으로 나타났다. 전세금 때문에 불안해하는 세입자를 제대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전세금 반환보증 가입 의무화 등 개선 방안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2일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달까지 전세금 반환보증 가입 실적은 총 13만 100건, 보증금액은 25조 5523억원으로 집계됐다. HUG에서 2013년 9월 출시한 전세금 반환보증 상품은 2015년 3941건(7221억원), 2016년 2만 4460건(5조 1716억원), 2017년 4만 3918건(9조 4931억원), 지난해 8만 9351건(19조 367억원)으로 매년 가입이 급증하고 있다. 전세금 반환보증은 계약 기간 이후 집주인으로부터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 경우 보증 기관인 HUG가 집주인 대신 전세금을 세입자에게 지급하고 차후 집주인에게 구상권 등을 통해 받아내는 제도다. 정부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세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했다. 전셋값 하락으로 보증금을 제때 받지 못해 이사를 가지 못할 경우가 걱정되는 세입자, 전세로 살고 있는 집이 경매에 넘어가 보증금을 못 받을까 우려되는 경우, 보증금 회수를 위한 법적 조치를 스스로 하는 것이 걱정될 때 가입하면 좋은 상품이다. 민간 보증기관인 서울보증보험에서도 같은 상품에 가입할 수 있다. 서울보증보험에서 공급한 전세금 반환보증 실적도 2015년 1만 4156건(1조 9459억원), 2016년 1만 5705건(2조 6354억원), 2017년 1만 7987건(3조 472억원), 지난해 2만 5115건(4조 3475억원), 올 상반기 1만 4295건(2조 5224억원)으로 점점 늘고 있다. 전세금 반환보증은 서민 주거안정을 위한 대표 상품이지만 집주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입을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HUG는 지난해 2월부터 집주인 동의 절차를 폐지해 세입자들이 더 쉽게 가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전에는 상품 가입을 위해 집주인의 확인 절차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집주인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세입자가 반환보증에 가입할 수 있다. 문제는 전세금 반환보증에 가입하고 나면 집주인에게 내용증명 등의 형태로 통지해야 한다는 점이다. 전세 계약에서 ‘을’의 입장인 세입자가 집주인이 반대할 경우 자유롭게 상품에 가입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금융권 관계자는 “전세금 반환보증 자체가 집주인이 돈을 못 갚게 되는 경우를 대비한 상품이기 때문에 기분 나빠하는 집주인들이 많다”면서 “세입자가 가입하겠다고 나서면 대부분의 집주인들이 꺼려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하지만 HUG와 서울보증보험은 사고가 났을 때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집주인 통지를 생략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HUG 관계자는 “사고가 났을 때 보증기관이 대신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준 이후 집주인이 보증기관에 돈을 돌려줘야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기 위해 통지를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보증보험 관계자도 “채권 양도는 민법에 따라 채무자에게 통지하도록 돼 있어 집주인에게 통지를 안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단독·다가구 주택 세입자에게도 가입 문턱이 높긴 마찬가지다. 구분 등기가 돼 있지 않은 단독·다가구 주택의 세입자들이 전세금 반환보증에 가입하려면 아파트나 주거용 오피스텔과 달리 추가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집주인이나 공인중개사가 확인한 ‘타 전세계약 체결 내역 확인서’를 내야 하는데 이 확인서에는 해당 주택 다른 세입자의 전세 계약 기간과 전세보증금 등을 쓰고 집주인이나 공인중개사의 확인 서명도 기재해야 한다. 사실상 집주인의 동의가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단독·다가구 주택은 보증료율도 연 0.154%로 아파트(연 0.128%)보다 높다. 아파트보다 보증 위험이 상대적으로 큰 것으로 평가돼 보증금액이 같아도 단독·다가구 주택 세입자들이 더 많은 보증수수료를 내야 한다. 예를 들어 아파트 전세보증금이 1억 5000만원이라면, 세입자가 2년 동안 38만 4000원을 보증료로 내면 전세금을 보호받을 수 있다. 반면 단독·다가구 주택의 경우 똑같이 전세보증금이 1억 5000만원이라 하더라도 2년 동안 46만 2000원을 내야 해 아파트보다 7만 8000원 더 비싸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단독·다가구 주택의 전세금 반환보증 가입 비율은 8.0%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HUG의 주택 유형별 전세금 반환보증 가입 건수 비율은 아파트(62.1%), 다세대주택(17.1%), 오피스텔(11.1%), 다가구주택(5.6%), 단독주택(2.4%), 연립주택(1.7%) 등의 순으로 집계됐다. 단독·다가구 주택 세입자들이 제대로 전세금을 보호받지 못한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HUG는 제도 개선안을 마련 중이다. HUG 관계자는 “단독·다가구 주택 등 구분 등기가 돼 있지 않은 유형에 대해 전세금 반환보증 상품 개선 작업을 진행 중이고 연내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서 “기존에 단독·다가구 주택은 선순위 채권 금액을 확인해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손실 위험을 최소화한다는 취지로 추가 서류 요건을 두고 있었다”고 밝혔다. 세입자들이 전세금 반환보증에 가입하기 쉽지 않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서민들의 전세금 불안을 근본적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아예 의무 가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성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부동산건설개혁본부 국장은 “집주인들은 임대차 시장을 투명화하는 것을 꺼리고 세입자들은 수수료 부담이 있어 전세금 반환보증 활성화가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라면서 “반환보증 가입을 의무화하면서 저소득층의 경우 국가에서 수수료를 지원해 주는 방안도 고민해 봐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집주인에게 떼이는 전세금 규모가 점점 늘고 있다는 점도 우려를 키운다. 정동영 민주평화당 의원이 HUG로부터 받은 ‘전세금 반환보증 사고 현황’ 자료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7월까지 HUG가 집주인 대신 전세금을 지급한 금액은 1681억원으로, 2016년(34억원)의 50배에 달했다. 이는 전세 계약 기간이 끝나도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아 HUG가 대신 지급한 ‘보증 사고’ 규모를 말한다. 보증 사고 액수는 2015년 1억원, 2016년 34억원, 2017년 75억원, 지난해 792억원 등으로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보증 사고 건수도 2015년 1건, 2016년 27건, 2017년 33건, 지난해 372건, 올 7월까지 760건으로 급증하고 있다. 정 의원은 “정부가 세입자들의 전세금 보증보험 가입을 의무화하고 일정 규모 이상 주택임대사업을 하는 사업자에게는 보증금을 변제할 자본금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도록 의무화해 세입자가 전세보증금을 떼일 가능성을 원천 봉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전세금 보증보험 가입 의무화를 위한 조건 등을 심도 있게 검토해야 할 시점이라고 조언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최근 서울은 전셋값이 오르고 있지만 지방은 깡통 전세 우려가 여전하고 서울도 언제든지 다시 전셋값 하락 문제가 불거질 수 있어 대비가 필요하다”고 경고했다. 이어 “전세금 반환보증 가입을 의무화하려면 비용 분담 문제를 먼저 논의해야 할 것”이라면서 “집주인에게 수수료를 물리면 세입자에게 비용을 전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최선을 기자 csunell@seoul.co.kr
  • 더 높은 곳, 더 큰 왕의 기운… ‘철강 르네상스’ 경북 고령 대가야

    더 높은 곳, 더 큰 왕의 기운… ‘철강 르네상스’ 경북 고령 대가야

    1600년 전 강력한 철기문화를 앞세워 영호남 지역을 호령했던 ‘경북의 가야문화권’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앞두고 21세기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경북의 가야문화권은 삼국유사 등 문헌에 경북의 고령(대가야), 성주(성산가야), 상주(고령가야)로 전해지며, 그 중심에는 4~6세기 고대 가야 연맹의 맹주였던 대가야가 있다.●4~6세기 연맹국… 전기는 금관가야, 후기는 대가야 중심 가야라고 하면 흔히 그 대표 세력으로 김해의 ‘금관가야’를 머릿속에 먼저 떠올리지만 가야가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4세기 전반부터 신라에 의해 562년 멸망할 때까지 그 중심 세력은 고령에 근거를 둔 ‘대가야’였다. 광개토왕비, 송서(宋書), 일본서기 등 문헌과 사료 대부분이 대가야에 집중돼 있고 고고학적 사료들도 대가야의 국력이 가장 컸던 정치세력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 학계에서는 ‘전기 가야는 금관가야 중심, 후기는 대가야 중심’이라는 통설을 부정한다. 대가야는 철 생산을 통해 경제적·군사적으로 급성장하면서 5세기 후반에는 고령뿐만 아니라 경남 합천·거창·함양, 전북 남원·장수, 전남 순천까지 세력을 넓혀 백제·신라와 대등한 단계로 발전했다. 삼국 사이에서 뛰어난 철제기술을 바탕으로 ‘철의 왕국’으로 일컬어지는 찬란한 고대문명을 꽃피웠다. 대가야는 신라가 전체 가야를 멸망시킨 후 중심지였던 지금의 고령 지역을 대가야군으로 편제한 데서 위상이 드러났다. 적대국이었던 신라까지도 인정한 이름이었다. 경북도와 도내 가야문화권 시군들은 이처럼 융성했던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재현해 가야 르네상스를 여는 것은 물론 특히 대가야의 문화유산인 지산동 고분군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12일 경북도에 따르면 도내 가야문화권의 주요 문화유적으로는 148곳(국가지정 5곳, 도지정 3곳, 비지정 140곳)이 있다. 지역별로는 고령·성주 각 73곳, 상주 2곳 등이다. 고분과 산성이 주를 이룬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추진 중인 고령군 대가야읍의 ‘대가야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호)이다. 고령에는 이 외에도 ▲‘주산성’(사적 제61호) ▲가야 유일의 벽화 고분인 ‘고아동 벽화고분’(사적 제165호), ▲대가야 왕들이 마셨던 우물인 ‘어정’ ▲대가야 가실왕(?~?)과 우륵(?~?)이 창제한 가야금 등이 있다. 2013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고, 2015년 3월엔 ‘우선등재 추진대상’에 선정된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읍을 병풍처럼 감싸는 주산(해발 310m) 주능선을 따라 길게 분포한 대가야시대 최대 고분군이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순장 묘 왕릉인 지산동 제44·45호분을 비롯해 왕족과 귀족 무덤으로 추정되는 크고 작은 704기의 무덤이 분포한다. 특히 2010년 지표조사 결과 이 일대에는 1만기가 넘는 고분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고, 한반도 최대의 삼국시대 고분군으로도 인정받았다. 대가야가 성장을 시작한 400년쯤부터 멸망할 때까지 만들어진 대가야의 무덤으로 화려했던 역사와 문화를 대변해준다. 무덤은 해발 160∼180m 구간에 직경 20m 이상의 대형분, 해발 100∼160m 구간에 직경 10∼15m의 중형분이 집중돼 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규모가 큰 것을 볼 때 왕의 힘이 점점 커지면서 더 높은 곳에, 더 큰 무덤을 만들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능선 높이에 상관없이 대형분의 주위와 능선 사면에는 봉분이 없는 소형 무덤이 광범위하게 자리잡았다.●능선 704기·흔적만 1만기…자산 고분군 세계유산 자신 경북도는 지산동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에 자신감을 보인다. 고분군이 대가야 문화를 대표하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보유한 데다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규모와 내용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인접한 성산 가야고분군(사적 제86호)도 관심을 끈다. 성주의 진산인 성산 능선에 3~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353기의 분묘가 있다. 성주지역 최대 규모이자 중심 고분군이다. 대부분 중·대형 고분군에 속하며 성산가야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지금까지 정식 발굴된 5기의 출토 유물과 묘제(墓制)의 형식이 신라 형식과 거의 유사해 학계에서는 가야의 일원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산가야의 정체성 규명이 가야 연구의 주요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성산가야는 ‘삼국유사’에 나라 이름만 있을 뿐 발전 과정이나 내부 구조, 멸망 시기 등의 역사적 사실 기록이 전혀 없다. 현재까지 미지의 나라인 셈이다. 상주시 함창면 증촌리에는 고령가야왕릉으로 전해지는 유적이 있다. 200m 거리를 두고 2개의 큰 능이 존재하고, 재사인 만세각이 있는 것으로 미뤄 왕릉으로 추정된다. 함창의 가야는 얘기로 전해지는 역사라서 공식적으로는 전(傳) 고령가야국이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함창은 본래 고령가야국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았다’고 기록했다. 이들 지역 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 때인 1910년대 후반부터 일본인에 의해 몇 차례 이뤄졌으나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아닌 침략사관에 기초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증명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뤄졌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 가야 지역에 식민 국가를 건설했다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학술적인 보고서가 작성되지 않았으며, 출토된 대부분 유물은 일본으로 유출됐다.● 독특한 ‘고분축조·장의문화’ 우리 손에 의한 발굴조사는 1977년 처음 시작됐다. 대가야고분군의 정화사업에 따른 제44·45호분의 조사였다. 44호 고분에서 32기나 되는 순장덧널이 발견됐고, 45호 고분에서도 11기의 순장덧널이 확인됐다. 이듬해부터 지산동 32~35호분 등을 발굴 조사하면서 대가야 문화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특히 2007년 3월 30년 만에 발굴조사가 재개되면서 신라와 구별되는 대가야식 고분 축조방식이 확인됐다. 여러 명을 석곽에 함께 순장한 것으로 보이는 대가야의 순장 문화도 입증됐다. 지산동 고분군의 가치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됐다. 고령 대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거나 확인된 주요 유물로는 가야금관 및 부속 금제품(국보 218호)과 1978년 고령 지산동 32호분에서 출토된 금관(보물 제2018호) 등이 있다. 올해 3월 고령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호) 내 소형 석곽묘에서 출토된 가야 건국설화 그림이 새겨진 토제방울도 고대사 특히 가야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헌으로만 전하던 고대 건국설화를 시각화한 유물이 발견되기는 국내에서 처음이기 때문이다. 지산동 고분군 발굴로 얻은 소중한 가치는 ‘독특한 고대 장의문화’다. 세계유산 잠재목록에 등재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704기라는 세계적 규모인 데다 ▲고분군 위에 인공 구조물을 짓지 않은 자연친화적인 장의문화 ▲고분군이 생전 거주지가 보이는 곳에 형성된 점으로 미뤄 엿볼 수 있는 이승과 저승이 구분되지 않는 내세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순장곽 배치 등이다.●대가야·왕릉·우륵 테마박물관, 효율적 문화재 보존·관리 경북도와 고령군은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문화재의 효율적인 보존과 관리 등을 위해 2000년 4월에 왕릉전시관을 개관했다. 왕릉전시관은 국내 최초로 확인된 순장 무덤인 지산동 제44호분 내부를 재현해놨다.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일반인들이 더 쉽고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차원이다. 관람객이 직접 들어가 무덤의 구조와 축조 방식,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 모습, 껴묻거리의 종류와 성격 등을 직접 볼 수 있다. 또 2005년과 2006년 연이어 대가야역사관, 우륵박물관을 개관했다. 대가야역사관은 대가야 고분군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유물 1만여점을 전시·소장한 국내 유일의 대가야사 전문역사관이며, 우륵박물관은 전시실과 가야금제작체험장·가야금전수교육관 등의 시설을 갖춘 전국 유일의 ‘우륵과 가야금’ 테마박물관이다. 지금까지 왕릉전시관 등 3곳을 다녀간 관람객은 모두 443만명에 이른다. 이런 가운데 2017년 6월에는 고령 대가야읍 고령향교 인근을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가야를 통틀어 왕들이 살았던 ‘대가야 궁성지’를 증빙할 수 있는 해자(폭 6∼8m, 깊이 최대 1m, 길이 16∼17m)와 성벽(폭 7m, 길이 16m)이 처음으로 발굴돼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곳의 해자, 성벽 등은 대가야 중요 거점인 궁성지를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보인다. 당시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발굴 현장을 찾아 관심을 보이며 “대가야 궁성지 발굴·정비를 적극 지원하고 주산성 복원 정비계획 수립 시 예산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경북도 등은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로 선정된 가야사 연구 및 복원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우선 도는 내년까지 ‘가야사 연구 복원을 위한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끝낸 뒤 관련 사업을 본격 추진할 계획이다. 또 2022년 가야고분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도록 고령에 있는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추진단’을 중심으로 행정력을 집중할 방침이다. 2017년 경북도, 경남도, 전북도 관계자와 학예연구사 등으로 구성된 추진단은 가야의 문화유산을 대표하는 가야고분군을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국제학술대회, 해외전문가 자문, 연구자료집 발간 등의 업무를 총괄하는 독립 기관이다. 도는 이와 함께 2028년까지 총사업비 2192억원 투입하는 기존의 가야고분군 및 산성 등의 정비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며, 도내 가야문화권의 실체 규명을 위한 문화재 조사 및 연구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나가기로 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가야는 신라·유교와 더불어 경북 3대 문화의 한 축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정체성까지 확보하고 있다”면서 “문재인 정부의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은 우리 도가 추진해온 가야 부활 프로젝트에 날개를 달아 준 셈이 됐다. 호기를 맞아 가야 유적 발굴 복원과 관광자원 기반 구축사업을 연계 추진해 지역의 신성장 동력을 창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고령·성주·상주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살처분 핏물 스며든 임진강… 주민 불안에 취수장 멈췄다

    살처분 핏물 스며든 임진강… 주민 불안에 취수장 멈췄다

    파주시, 어제부터 금파취수장 가동 중단 성과에 쫓겨 대책 부실… 101곳 점검 나서경기 연천군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 확산을 막기 위해 살처분한 돼지 4만여 마리를 쌓아 뒀다가 핏물이 새어 나와 임진강 지류 하천을 오염시키는 사고가 발생했다. 방역 당국이 살처분 속도전 성과에 급급해 사후 대책 마련에 부실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농림축산식품부는 12일 “연천군 매몰 처리 과정에서 돼지피가 유출된 것을 확인하고 긴급 차단 조치를 했다”면서 “농식품부, 환경부, 지방자치단체 합동 점검반을 꾸려 매몰지 101곳이 적합하게 조성됐는지 일제 현지 점검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경기도와 연천군은 지난 10일 연천 사육돼지 예방적 살처분을 진행하면서 매몰 처리에 쓸 플라스틱 탱크 용기 제작이 늦어지자 4만 7000여 마리의 돼지 사체를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안쪽 군부대 유휴부지의 트럭에 실은 채 쌓아 뒀다. 하지만 같은 날 많은 비가 내리면서 돼지 사체에서 핏물이 빗물과 함께 새어 나와 임진강 지류 마거천과 연결된 실개천으로 흘러들어 갔다. 당국은 실개천에 펜스를 설치하고 오염수 펌핑 작업을 마쳤지만 일부 침출수는 임진강에 유입됐다. 마거천과 임진강 수질 검사를 진행 중인 연천군은 “돼지 사체는 소독 처리됐고, 상수원인 임진강의 경우 매몰지로부터 약 16㎞ 이상 떨어져 있다”며 우려할 상황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번 사고는 시간에 쫓겨 무리하게 살처분을 진행한 게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관리감독 기관인 농식품부는 연천군에 살처분을 빨리 끝내라고 압박했지만 매몰 부지 마련과 같은 사후 관리에는 소극적이었다. 연천에선 지난 10일까지 16만 4200여 마리의 돼지 살처분이 완료됐다. 연천군은 당초 악취 등 각종 민원이 제기되는 매몰 방식 대신 돼지 사체를 고온 고압으로 파쇄하는 렌더링 방식 살처분을 진행해 왔다. 하지만 렌더링 방식은 속도가 느리다. 연천군은 지난 9일까지 완료하라는 농식품부의 독촉이 계속되자 지난 7일부터 매몰 방식 살처분으로 바꿨다. 농식품부와 환경부는 뒤늦게 매몰지 점검에 나섰지만 뒷북 대응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정승헌 건국대 축산학과 교수는 “당국이 빠른 시일 내에 살처분을 끝내려다 빚어진 참사”라고 지적했다. 한편 파주시는 연천 돼지 사체에서 새어 나온 핏물이 임진강 지류 하천을 오염시켰다는 언론 보도에 주민들이 불안해하자, 이날 오전 10시를 기해 임진강 하류에 있는 금파취수장의 가동을 전격 중단했다. 파주시 관계자는 “파주 북부지역에 공급하는 상수원을 당분간 팔당 광역 상수도로 대체 공급하고 있지만, 임진강 상수원이 오염됐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세종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파주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돼지 살처분 속도전에 임진강 오염… 방역당국 뒷북 대응

    돼지 살처분 속도전에 임진강 오염… 방역당국 뒷북 대응

    성과에 쫓겨 대책 부실… 101곳 점검 나서경기 연천군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 확산을 막기 위해 살처분한 돼지 4만여 마리를 쌓아뒀다가 핏물이 새어 나와 임진강 지류 하천을 오염시키는 사고가 발생했다. 방역 당국이 살처분 속도전 성과에 급급해 사후 대책 마련에 부실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농림축산식품부는 12일 “연천군 매몰 처리 과정에서 돼지피가 유출된 것을 확인하고 긴급 차단 조치를 했다”면서 “농식품부, 환경부, 지방자치단체 합동 점검반을 꾸려 매몰지 101곳이 적합하게 조성됐는지 일제 현지 점검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앞서 경기도와 연천군은 지난 10일 연천 사육돼지 예방적 살처분을 진행하면서 매몰 처리에 쓸 플라스틱 탱크 용기 제작이 늦어지자 4만 7000여 마리의 돼지 사체를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안쪽 군부대 유휴부지의 트럭에 실은 채 쌓아뒀다. 하지만 같은 날 많은 비가 내리면서 돼지 사체에서 핏물이 빗물과 함께 새어나와 임진강 지류 마거천과 연결된 실개천으로 흘러들어 갔다. 경기도와 연천군은 실개천에 펜스를 설치하고 오염수 펌핑 작업을 마쳤지만 일부 침출수는 임진강에 유입됐다. 마거천과 임진강 수질 검사를 진행 중인 연천군은 “돼지 사체는 소독 처리됐고, 상수원인 임진강의 경우 매몰지로부터 약 16㎞ 이상 떨어져 있다”며 우려할 상황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번 사고는 시간에 쫓겨 무리하게 살처분을 진행한 게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관리감독 기관인 농식품부는 연천군에 살처분을 빨리 끝내라고 압박했지만 매몰 부지 마련과 같은 사후 관리에는 소극적이었다. 연천에선 지난 10일까지 16만 4200여 마리의 돼지 살처분이 완료됐다. 연천군은 당초 악취 등 각종 민원이 제기되는 매몰 방식 대신 돼지 사체를 고온 고압으로 파쇄하는 렌더링 방식 살처분을 진행해 왔다. 하지만 렌더링 방식은 속도가 느리다. 연천군은 지난 9일까지 완료하라는 농식품부의 독촉이 계속되자 지난 7일부터 매몰 방식 살처분으로 바꿨다. 농식품부와 환경부는 뒤늦게 매몰지 점검에 나섰지만 뒷북 대응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정승헌 건국대 축산학과 교수는 “당국이 빠른 시일 내에 살처분을 끝내려다 빚어진 참사”라고 지적했다. 세종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연천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일왕 향해 ‘만세 48창’ 찬반 논란…인기 아이돌 아라시도 “만세!”

    일왕 향해 ‘만세 48창’ 찬반 논란…인기 아이돌 아라시도 “만세!”

    ‘섬뜩하다·집요하다’ vs ‘축하의 뜻·일체감 느꼈다’전문가 “만세는 일왕숭배·군국주의 방책이었다” 지난 9일 일본 왕궁(고쿄·皇居) 앞 광장에서 열린 나루히토 일왕 즉위 축하행사(국민제전) 때 일왕 부부가 행사장을 떠난 뒤에도 왕을 향한 만세가 수십 차례 이어진 것을 놓고 일본 내에서 논쟁이 오가고 있다. 12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3만여명이 모여든 가운데 열렸던 당일 행사에서 일왕 부부가 현장을 떤나 뒤에도 만세 삼창이 최소 16번이나 이어져 ‘만세 48창’이 이뤄졌다. 이부키 분메이 전 중의원 의장이 ‘세계평화를 기원하며’라는 설명과 함께 선창하자 참가자들이 일제히 만세를 따라 불렀다. 인기 아이돌 그룹 ‘아라시(嵐)’ 멤버 5명도 양손을 치켜들고 만세를 외쳤다. 이후에도 주최 측의 선창으로 ‘양 폐하 만세’, ‘일왕 만세’의 함성이 계속 이어졌다. 이 행사는 TV로 생중계됐다. 그러자 SNS에 관련 투고가 줄을 이었다. ‘끝없는 만세가 무섭다’거나 ‘집요하다’, 젊은 병사가 일왕만세를 외치며 죽어간 2차 대전을 언급하며 ‘섬뜩한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는 비판도 많았다. 반면 ‘경의와 축하의 뜻을 전하는 거니 좋지 않으냐’거나 ‘일체감을 느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도 나왔다. 축하행사는 이부키 전 중의원 의장이 회장을 맡고 있는 ‘봉축의원연맹’과 게이단렌 등 민간단체로 구성된 ‘봉축위원회’가 주최했다. 위원회에는 개헌을 목표로 내걸고 있는 보수계 단체 ‘일본회의’도 참가했다.홍보 담당자는 만세는 “축하하는 자연스러운 마음”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일왕 부부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 실존 여부는 확인되지 않지만 초대 진무(神武天皇) 일왕 ‘즉위’ 이후 2600년 이상의 역사가 있었다는 설명과 현존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고지키(고사기·古事記)에 나오는 일본 건국신화가 소개되기도 했다.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 ‘만세’였다. 만세의 역사는 메이지 22년(1889년) 대일본제국헌법 공포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이지 왕의 마차를 향해 만세를 부른 것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총리를 지낸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저술한 ‘메이지·다이쇼·쇼와 정계비사-고풍암회고록-’에 따르면 이때까지는 일왕을 환호하는 단어가 없어 공손하게 인사만 했으나 존경과 친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대학 교수 등이 고안해 낸 단어가 ‘만세’였다고 한다. 지난달 22일 나루히토 왕의 즉위를 대내외에 알리는 의식인 ‘소쿠이레이세이덴노기’는 국가 행사로 진행됐다. 아베 신조 총리의 만세삼창 선창을 참석자들이 따라서 불렀다. ‘일왕폐하 만세’를 부르기에 앞서 ‘즉위를 축하드리며’라는 말을 붙였다. 국민주권을 규정한 현행 헌법 하에서 이뤄진 첫 왕위 교대 행사였던 ‘헤이세이(平成)’ 때의 의식을 답습했다. 만세가 계속되자 SNS에서는 정작 일왕이 ‘곤란해 하지 않았을까’라는 글도 올라왔다. 현장을 지켜본 하라 다케시 방송대 교수(일본 정치사상사)는 “참가자들이 직접 스크린을 통해 일왕 부부의 표정을 잘 볼 수 있었을 텐데 두 분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하지 않고 만세를 계속하는 건 이상했다”고 말했다. 가와니시 히데야 나고야대 대학원 교수(역사학)는 “세계대전 전처럼 왕의 권위를 높이고 싶어 하는 보수파의 생각이 장시간 만세를 계속 부른 데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또 행사에 인기 아티스트 등을 참석시켜 왕실에 흥미가 없는 층도 끌어 들이려는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도 했다. 그는 “‘만세’라는 단어는 전에 일왕 숭배나 군국주의를 추진하기 위한 방책이었다는 걸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신임 중앙노동위원장 박수근 한양대 교수, 방통위 상임위원 김창룡 인제대 교수 임명

    신임 중앙노동위원장 박수근 한양대 교수, 방통위 상임위원 김창룡 인제대 교수 임명

    朴, 노사 관계 이론·실무 겸비한 전문가 金, 일간지 기자 출신… 가짜뉴스 전문가 문재인 대통령이 11일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에 박수근(왼쪽·62)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에 김창룡(오른쪽·62) 인제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를 각각 임명했다. 박 위원장은 부산고, 연세대 법학과 석사 졸업 후 중앙노동위원회 공익위원,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장, 한국노동법학회장을 역임했다. 변호사 출신 노동법 교수로서 노사 관계에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전문가라고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밝혔다. 2016년 10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박준성 전 중앙노동위원장은 지난달 임기가 끝나 현재는 이수영 상임위원이 직무대리를 맡고 있다. 김 상임위원은 대구 계성고, 건국대 낙농학과 졸업 후 영국 카디프대에서 언론학 박사를 받았다. 방송위원회 보도교양심의위원과 선거방송심의위원, 한국언론연구원 객원연구위원, 국민일보 기자, AP통신 서울특파원을 지냈으며 ‘가짜뉴스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김 상임위원은 임기 5개월여를 남기고 사임한 고삼석 상임위원의 빈자리를 이어받는다. 청와대는 “방송 공정성과 공공성 제고, 방송통신 이용자 보호 등 현안을 추진할 적임자”라고 기대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경찰 조준사격에 쓰러진 홍콩 시위대… 친중 남성 몸엔 불 붙기도

    경찰 조준사격에 쓰러진 홍콩 시위대… 친중 남성 몸엔 불 붙기도

    첫 사망자 추모 시위서 세 번째 실탄 발사 위협상황 아닌데도 쏴 정당성 얻기 어려워 복면 남성, 말다툼 중 인화성 액체 퍼부어 전문가 “국제사회, 관심·연대 강화해야”홍콩 민주화 시위 참가자들이 11일 또다시 경찰이 쏜 실탄을 맞고 쓰러졌다. 홍콩의 정체성에 이견을 보인 남성의 몸에 불을 지르는 사건도 벌어졌다. 시위 6개월째를 맞은 홍콩 시위대의 반(反)중국 정서와 맞물려 경찰의 진압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등에 따르면 경찰의 실탄 사격은 이날 오전 7시 20분쯤 시위에서 처음 사망한 홍콩과기대생 차우츠록(21)을 추모하는 시위 도중 일어났다. 당시 사건을 촬영한 영상을 보면 경찰이 시위자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복면을 쓰고 다가온 젊은 시위자를 향해 바로 눈앞에서 실탄을 쐈고, 이 시위자는 그대로 쓰러졌다. 이후 경찰은 다가오는 또 다른 시위자를 향해 실탄을 쏘는 등 2명에게 모두 실탄 3발을 발사했고, 이들이 총을 맞고 쓰러지자 무력으로 제압했다. 실탄을 맞은 이들은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이 가운데 1명은 오른쪽 신장과 간 부근에 총알이 박혀 병원에서 긴급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총알을 적출하지 못해 이날 낮 12시 현재 생명이 위독한 상태다. 이 청년의 나이도 차우츠록과 같은 21세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당시 시위자가 경찰을 위협하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실탄이 발사돼 정당방위 차원에서 실탄을 쐈다는 경찰의 기존 해명도 정당성을 얻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홍콩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직접 실탄을 사격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지난 8월 말 경고성 사격에 실탄을 처음 사용한 경찰은 신중국 건국 70주년을 맞은 10월 1일 반중국 시위에 참여한 18세 남학생을 향해 처음으로 실탄을 사격했다. 이어 홍콩 당국이 ‘복면금지법’을 실시한 같은 달 4일 14세 소년이 경찰이 쏜 실탄에 허벅지를 맞고 병원으로 이송됐다. 실탄 사격이 시위대의 반중국 정서가 한층 높아진 상황과 맞물려 일어난 점도 주목된다. 앞서 신중국 건국 70주년과 사실상 계엄령인 복면금지법 실시 등과 맞물려 진압 수위를 높인 경찰이 시민들을 향해 위험천만한 실탄을 직접 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이날 복면을 한 남성이 홍콩의 정체성 문제로 다투던 친중 성향의 남성에게 인화성 액체를 퍼붓고 그의 몸에 불을 질렀다고 AFP, AP통신이 전했다. 이 남성은 전신 2도의 화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지난 5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난 뒤 시위 진압 수위가 더욱 강경해진 것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된다. 상하이 국제수입박람회에서 홍콩 민주화 시위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람 장관을 만난 시 주석은 시위대의 폭력행위에 대한 엄정한 법 집행을 주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3일 뒤인 8일 홍콩 시위에서 첫 사망자가 나온 데 이어 다시 3일 뒤 경찰이 시위대의 가슴을 향해 직접 실탄을 쏘는 등 무차별적인 진압이 이뤄지고 있다.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정치학 교수는 “시위가 과격해지면 홍콩 사태는 더욱 해결이 어려워지고, 중국이 강압적 정책을 펼칠 가능성이 커진다”며 “지금은 시위대를 진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홍콩 정부가 시위대가 요구하는 진상조사위원회 등을 수용한다면 현재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또 국제사회가 홍콩 사태에 대한 관심과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홍콩 경찰이 쏜 실탄에 시위대 쓰러지는 순간 (영상)

    홍콩 경찰이 쏜 실탄에 시위대 쓰러지는 순간 (영상)

    ‘첫 희생자’ 홍콩과기대생 추모 아침 시위 중 발생경찰의 실탄 부상자 벌써 세 번째…과잉대응 논란 11일 아침 홍콩 시위 참가자 1명이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이 쏜 실탄에 맞아 쓰러졌다. 홍콩 시위대가 경찰의 실탄에 맞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AFP통신 등보도에 따르면 이날 오전 7시 20분쯤 홍콩 사이완호 지역에서 ‘시위 첫 희생자’인 홍콩과기대생 2학년 차우츠록(周梓樂)씨를 추모하는 시위가 열렸다. 온라인에 유포된 영상을 보면 이 시위 현장에서 한 경찰이 도로 위에서 시위자를 검거하던 도중 몸싸움을 벌이다가 다른 시위자가 다가오자 그를 향해 실탄을 발사한다. 이후 총에 맞은 시위자는 도로 위에 쓰러졌으며, 이 경찰이 쓰러진 시위자 위에서 그를 제압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영상 주의: 충격적인 장면이 포함돼 있습니다 http://bitly.kr/FtNbAXD) 이후 이 경찰은 다가오는 다른 시위자를 향해 실탄 2발을 더 발사해 모두 3발의 실탄을 발사했다. 다른 시위자도 총에 맞고 쓰러져 경찰에 제압당했다. 처음 실탄을 맞은 시위자는 복부에 총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고 SCMP는 전했다. 실탄에 맞은 시위자 2명은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병원 관계자는 이들 가운데 1명이 위중한 상태에 있다고 전했다. 생명이 위중한 시위자는 21살 남성으로, 오른쪽 신장과 간 부근에 총알이 박힌 상태이다. 총상으로 문정맥(門靜脈)이 파열돼 병원은 긴급 수술을 했으나, 총알을 적출하지는 못했다. 수술 때 피격자의 심정지가 일어나 심폐소생술을 받기도 했다. 다른 1명의 피격자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이다. 주위에 있는 시민들은 경찰을 향해 “살인자”라고 외쳤으며, 경찰들은 최루 스프레이를 쏘며 해산에 나섰다. 차우씨는 지난 4일 오전 1시쯤 정관오 지역 시위 현장 인근에서 주차장 건물 3층에서 2층으로 떨어져 머리를 심하게 다쳤다.이후 두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8일 오전 숨졌다. 아직 당국 차원에서 정확한 사고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부 홍콩 언론은 그가 경찰이 쏘는 최루탄을 피하려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또 차우씨가 추락해 다친 긴급한 상황에서도 경찰이 구급차의 현장 진입을 막았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홍콩 시위대는 이날 오전 차우씨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지하철 운행과 주요 도로의 차량 통행을 방해하는 시위에 나섰다. 또 총파업(罷工), 동맹휴학(罷課), 철시(罷市) 등 ‘3파(罷) 투쟁’도 전개할 계획이다. 웡타이신, 사틴 등에서도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했으며, 항하우 역에서는 시위대가 지하철 내에 불을 질렀다. 숨진 차우 씨가 다니던 홍콩과기대 내에서도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면서 폐품 등을 모아놓고 불을 질렀으며,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진압에 나섰다. 홍콩과기대와 홍콩 중문대 등 이날 홍콩 내 주요 대학은 수업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이날 오전 시위로 인해 홍콩 곳곳의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거나 차질을 빚고 있다. 홍콩 시위 참여자가 경찰이 발사한 실탄에 맞아 다친 것은 벌써 세 번째이다. 지난달 1일 신중국 건국 70주년 국경절 시위에서는 18세 고등학생이 경찰 실탄에 맞아 중상을 입은 바 있다. 당시 이 고등학생은 경찰 옆에서 쇠막대기를 휘둘렀고, 이 학생 쪽으로 몸을 돌린 경찰이 들고 있던 권총으로 실탄을 발사했다. 총알은 심장 왼쪽 3cm 위치에 박히면서 간신히 심장을 비켜 갔다. 지난달 4일 시위에서는 한 경찰관이 다수의 시위대로부터 공격받는 상황에서 실탄을 발사해 한 시위 참여자가 허벅지 쪽에 경찰의 실탄에 맞았다. 두 시위자 모두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으며,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이날은 시위대가 흉기를 들고 공격하거나 하는, 경찰이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경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실탄을 발사하는 상황이 영상에 생생히 담겨 전해지면서 거센 비난 여론이 일고 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돼지열병 급한 불 껐지만… 양돈 농가는 파산 공포

    돼지열병 급한 불 껐지만… 양돈 농가는 파산 공포

    첫 확진 50여일… 아직 감염경로 못 찾아 “멧돼지 차단망 확대보다 제거가 효율적” 피해 양돈농가 복구 최소 2년 이상 걸려 “폐업 보상·영업 손실 따른 보전금 필요”지난 9월 17일 국내 첫 아프리카돼지열병(ASF) 확진 사례가 나온 지 50여일이 지났다. 방역 당국이 그동안 42만 마리가 넘는 사육 돼지를 선제적으로 조치해 일단 급한 불을 끈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여전히 감염 경로를 찾지 못하고 있고 야생 멧돼지로 확산되고 있어 안심하기는 이르다. 살처분 조치로 초토화된 양돈 농가의 복구도 최소 2년 이상 걸릴 것으로 전망돼 농가 시름은 깊어지고 있다. 10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방역 당국은 지난 9일 기준 ASF를 예방하기 위해 경기 북부 지역 농장 261곳의 사육 돼지 43만 5628마리 가운데 35만 4745마리를 살처분하고, 비육돈 6만 5557마리를 수매해 도축했다. 모두 42만 302마리의 돼지를 죽인 것으로, ASF 발생 이전 전체 사육 돼지(1171만 3000마리)의 3.6% 수준이다. 이 과정에서 ASF 발생지인 경기 파주, 김포, 연천, 인천 강화뿐 아니라 인접한 고양과 강원 지역 남방한계선 10㎞ 이내 돼지까지 살처분됐다. 전문가들은 지난달 9일 연천군 신서면의 돼지농장에서 14번째 확진 사례가 나온 이후 한 달이 지났고, ASF 바이러스 잠복기가 4~19일인 점을 감안하면 농장과 농장 간 수평적 전파 가능성이 크게 줄었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농장과 달리 야생 멧돼지에서의 ASF 발생 건수는 총 23건으로 늘었다. 북한 접경 지역인 연천(8건), 철원(9건), 파주(6건)에 집중됐지만 번식기인 겨울철을 맞은 멧돼지들이 먹이를 찾아 남하할 가능성도 있다. 환경부는 ASF 감염 확진 멧돼지가 발견된 지점의 반경 3㎞에 국지적 울타리를 설치했고 파주~강원 고성을 동서로 연결하는 193㎞에 광역 울타리 설치를 추진 중이다. 이에 대해 정승헌 건국대 축산학과 교수는 “차단망을 무턱대고 넓히기보다는 일단 감염 지역인 연천, 철원, 파주의 멧돼지를 모두 없애는 작업을 우선해야 효율적”이라고 지적했다. 발견되지 않은 멧돼지 폐사체 중 ASF 감염 개체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현규 한수양돈연구소 대표는 “산속에 있는 멧돼지 사체를 찾는 작업은 질병 백신이 개발되기 전까지 3년 정도 꾸준히 계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초기 방역 실패로 발병 농가가 아닌데도 살처분 조치를 받은 농가들은 파산 공포에 빠져 있다. 농식품부는 살처분 돼지에 대해 8월 평균 시가로 보상하고 생계안정자금으로 월 최대 337만원을 6개월까지 지원하기로 했다. 또 가축 입식 비용 등을 빌려줄 방침이다. 하지만 ASF 사태가 당장 종료된다고 해도 살처분 농가가 실제 소득을 내려면 최소 2년 이상 걸린다는 점이다. 농가가 번식용 씨돼지를 다시 들여와 임신하고 시장에 내다 팔기까지 최소 1년 6개월 걸리는 데다 재입식 허가도 나려면 6개월가량 소요된다. 대한한돈협회 관계자는 “지금 농가에 필요한 것은 빠른 입식 허가와 영업 손실에 따른 피해 보전금, 폐업에 따른 보상금”이라고 말했다. 세종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한중수교 설계자 덩샤오핑...김일성 두 번째 남침 야욕 꺾어

    한중수교 설계자 덩샤오핑...김일성 두 번째 남침 야욕 꺾어

    올해는 중화인민공화국(신중국) 건국 70주년과 한중 수교 27주년이다. 두 나라는 한국전쟁(1950~1953) 때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등 적대 관계를 유지하다가 1992년 수교한 뒤 세계 외교가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2016년 한반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갈등을 빚으며 ‘빙하기’를 맞았다. 중국을 둘러싼 한반도 주변 정세가 ‘역사적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이에 1970년대 미중 화해를 시작으로 20여년 뒤 한중수교가 이뤄지기까지 우리나라와 중국이 어떤 진통을 겪었는지 살펴보고 두 나라 관계의 미래도 함께 전망해보고자 한다. 전·현직 중국 주재 외교관·특파원 등이 만든 계간지 ‘한중저널’ 창간호(9월)의 내용을 중심으로 여러 문헌·자료를 요약 정리했다. ●“덩샤오핑 복귀 거대한 사건...한중 수교에도 큰 영향” 한중 수교의 산실이 되는 외교부 동북아2과는 1973년 신설됐다. 기존 동남아과 한 구석에서 별도의 출입문도 없이 셋방살이처럼 시작했다. 그럼에도 박정희 대통령은 중국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청와대로 중국의 정세와 지도자들에 대한 보고가 속속 올라갔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끈 보고서는 덩샤오핑(1904~1997)의 복권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문화대혁명(1966~1976) 초기 베이징대에 반대 대자보가 붙자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실각해 유배 생활을 했다. 그 때부터 줄기차게 마오쩌둥에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편지를 보내며 재기를 노렸다. “제 잘못을 인정하오니 부디 직접 만나뵙고 지시를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1967), “죽어라고 마오쩌둥 사상만 공부했다”(1969), “제 가장 큰 잘못은 마오쩌둥 사상이란 위대한 깃발을 높이 쳐들지 않은 것이다”(1972) 등 내용을 담았다. 결국 그는 고희(古稀)를 앞둔 1973년 2월 어렵사리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외교부 동북아2과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덩샤오핑의 복귀는 중국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지 모르는 거대한 사건이다. 한중 수교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외교부의 전망은 꽤 정확했다고 볼 수 있다. 덩샤오핑이 중국 정치무대에 다시 등장한 1970년대만 해도 미국은 한중 교류를 권유하는 분위기였다. 지금이야 미국과 중국이 세계 패권을 두고 맞서는 라이벌 관계지만 그때만 해도 중국은 미국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되레 미국은 중국의 국민소득을 높여 자연스레 서구화의 길을 택하도록 도우려고 했다. 중국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성장해 자유주의 진영을 위협할 대국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시각은 일본도 다르지 않았다. 이 시기 일본 정부개발원조(ODA) 관련 전문가들은 “중국은 국토가 너무 크고 지역간 편차도 심하다. 국가 전체가 균일하게 성장하기 어렵다”면서 “중국이 발전은 하겠지만 그 속도는 매우 느릴 것”으로 보고했다. 1978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노선을 천명하지 않았다면 미일 두 나라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을 수도 있다.●덩샤오핑 “한국과 수교하면 해는 없고 이득만 두 가지” 중국이 긴 잠에서 깨어나 경제발전에 매진하던 1980년대만 해도 정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당 총서기였던 자오쯔양(1919~2005)과 후야오방(1915~1989)이 실각했고 개혁개방 방향을 둘러싼 논란도 컸다. 특히 경제성장이 본격화되면서 빈부격차가 커지자 덩샤오핑의 개방 노선을 두고 보수파 천윈(1905~1995)의 반대가 상당했다. 그가 혁명가 출신이다보니 덩샤오핑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덩샤오핑 당시 외교부장으로 한중 수교 때 중국 측 대표로 서명한 첸지천(1928~2017)은 회고록 ‘외교십기’에서 “수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온갖 반대파가 생겨났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중한수교에 대해 ‘무해양득’(손해는 하나도 없고 이득이 두 가지나 있다는 뜻)이라는 논리로 굽히지 않고 밀어 붙였다”고 적었다. 한국의 경제발전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고 한국과 대만의 외교 관계도 단절시킬 수 있어 1석2조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덩샤오핑은 ‘한국과의 수교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식으로 페타콩플리(기정사실화)하며 반대파를 모두 설득했다. 덩샤오핑은 한중수교의 설계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中, 김일성 남침 지원 요청 거부...“北, 남한과 대화해야” 특히 그는 제 2의 한반도 전쟁을 막아내기도 했다. 미 우드로윌슨센터 북한국제문서연구사업(NKIDP) 프로젝트팀이 최근 발굴한 옛 공산권 국가의 비밀 외교전문에 따르면 1975년 4월 김일성 북한 국가주석은 급히 중국을 찾아갔다. 김 주석이 방중한 전후인 4월 17일과 30일에 캄보디아 프놈펜과 베트남 사이공이 공산반군에 함락됐다. 그는 인도차이나 공산혁명에 고무돼 남한에서 군사행동을 감행하고자 중국의 지원을 얻으려 했다. 앞에서는 남한과의 화해 분위기를 띄우는 듯 했지만 뒤로는 또 한 번 전쟁을 기획한 것 같다. 자칫 한반도에서 두 번째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베이징에 간 김 주석은 건강이 좋지 않았던 마오쩌둥(1893~1976) 주석과 저우언라이(1898~1976) 총리를 각각 한차례 면담했다. 자신이 원하던 답을 얻지 못한 그는 덩샤오핑 부주석과 19, 20, 21, 25일에 걸쳐 마라톤 담판을 벌였다. 덩 부주석은 “더 이상 한반도에서 군사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지원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되레 그는 김 주석의 도발 의지를 만류하며 1971년 7·4 남북공동성명 채택으로 시작된 대화 분위기를 이어갈 것을 강조했다. 중국은 1976년 8월 북한이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벌였을 때도 유보적 반응을 보이며 김 주석을 편들어 주지 않았다. 수교 이전부터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교육부, 대입 ‘기회균형선발전형’ 확대한다…공정성 강화

    교육부, 대입 ‘기회균형선발전형’ 확대한다…공정성 강화

    교육부가 조만간 발표할 ‘대입제도 공정성 강화 방안’에 교육 취약계층을 위한 기회균형선발전형 확대 방안을 담을 예정이다. 기회균형선발전형이란 기초생활수급자 등 저소득층, 농어촌 출신, 특성화고 졸업생, 특수교육 대상자 등 사회적 약자 계층을 우대해 선발하는 전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교육 분야에 대해서 “교육의 계층 사다리를 복원하겠다”면서 모든 대학에 기회균형선발전형을 의무화하고, 기회균형선발을 20%까지 확대하는 대학에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가 2021학년도 대학입학전형기본사항에 ‘고른기회 특별전형을 반드시 실시해야 한다’는 문구를 담았다. 그러나 대학 정보공시를 살펴보면 올해 일반대학·교육대학에 입학한 34만 5754명 중 기회균형 전형으로 입학한 신입생 비중은 11.7%(4만 366명)였다. 2018년 10.4%(3만 6063명)보다 1.3%포인트(4303명) 늘어나는 데 그쳤다. 특히 수도권 대학은 기회균형선발은 9.4%에 불과해 비수도권 대학의 선발 비율(13.1%)과 큰 차이를 보였다. 서울 주요 15개 대학(건국대·경희대·고려대·동국대·서강대·서울대·서울시립대·성균관대·숙명여대·연세대·이화여대·중앙대·한국외대·한양대·홍익대)의 평균 또한 10%에 못 미쳤다. 정의당 여영국 의원이 올해 국정감사 때 이들 대학 입학생 현황을 분석한 결과, 15개 대학은 올해 고른기회전형으로 9.29%만을 뽑았다. 때문에 교육계에서는 서울 등 수도권 주요 대학부터 기회균형선발 비율을 늘려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현재 교육부는 기회균형선발을 고등교육법에 의해 의무화하고 선발 비율을 법제화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기회균형선발을 의무화하고 선발 비율을 명시하면 취약계층에게 고등교육 기회를 확대할 수 있다. 곽혜진 기자 demi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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