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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일애국지사 임영선옹 별세

    항일애국지사 임영선(林永善·81)옹이 6일 오전 7시30분 서울 강동구 둔촌동 서울보훈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일제 때 함흥학병 의거를 주도해 일본 소창육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을 인정해 지난 77년 대통령표창을,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족은 부인 오화영씨와 승현(임승현비뇨기과원장)씨 등 1남3녀.빈소는 서울대병원 영안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8일 오전 7시30분이며,장지는 대전국립현충원 제2애국지사 묘역.(02)760-2011
  • 9월의 독립운동가/ 오성술 선생

    국가보훈처는 구한말 전남북 지역에서 항일의병투쟁을 벌인 죽파(竹坡) 오성술(吳成述·1884∼1910)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전남 광산군 출신인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최익현 선생의 구국 의병항쟁을 주창하는 강회에 참석,의병창의를 결심하고 귀향했다.선생은 곧바로 동지 200여명을 규합,1907년 2월 광주용진산을 근거지로 의병을 일으켰다. 선생이 이끈 의병은 호남의병부대 연합군인 ‘호남창의회맹소’에합류,전북 고창의 문수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고창읍성과 전남 영광 법성포를 탈환하는 등 큰 전공을 세웠다. 1908년부터 의병에 대한 일본군의 대대적 탄압작전이 시작되자 선생은 전남 광산군 석면산 전투,함평 대명동 전투,고막원 헌병분파소 습격,나주 거성동 전투등 전라도 지역에서 수많은 유격전을 전개했다. 1909년 7월까지 유격전을 중심으로 항일의병 활동을 벌이던 선생은나주 용문산에서 ‘남한 대토벌 작전’을 세우고 일본군 영산포 헌병대와 결사항전을 전개하다 그해 8월 체포됐다.강도죄와 살인,방화죄로 교수형을 언도받은 뒤 1910년 9월15일 대구감옥에서 26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지난 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해외항일전적지를찾아서](7)丹東 臨政 교통국과 쇼우의‘이륭양행’

    일제하 항일투쟁 대열에 섰던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국내외에 거주하던 외국인들도 적지 않았다.구한말 항일 필봉을 드날린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사람은 영국인 베델(한국명 裵說·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이었고,영국인 스코필드(한국명 石虎弼·68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박사는 3·1의거와 일제의 ‘제암리만행’을 전세계에 폭로했다. 또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한국명 訖法·50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박사는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을 지원한 주인공이다.베델과 헐버트 박사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스코필드 박사는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헐버트 박사 묘비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박사의 유언이 적혀 있다. 한편 한국독립을 도운 외국인 가운데 G.L 쇼우(1880∼1943·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라는 인물이 있다.그가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은 이유는 해방 전에 사망한데다 그의 후손도 한국과 왕래가별로 없었으며,또 그동안 그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부족했던 탓으로생각된다.그가 활동했던 1920년대초 당시 국내 일간신문을 펼치면 그의 행적이 곳곳에 남아있다.그러나 국내에선 그의 ‘흔적’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그를 만나려면 지금은 중국땅이 된 남만주로 찾아가야 한다. 백두산에서 발원해 중국과 국경을 이루며 황해로 흐르는 압록강 하류의 신의주땅 건너편에는 단동(丹東,옛 지명은 安東)이라는 도시가있다.심양(沈陽)에서 아침 7시45분발 기차를 타면 점심때인 낮 12시10분에 도착하는 거리다.취재팀은 일행의 안내차 역으로 마중을 나오신 박문호(朴文鎬·65)선생과 먼저 점심식사를 한 뒤 답사에 나서기로 했다.취재팀이 첫 답사대상으로 삼은 곳은 ‘이륭양행(怡隆洋行)’건물이었다.이 건물은 쇼우가 경영하던 무역회사 겸 중국의 태고선복공사(太古船輻公司) 대리점이었다.70년 세월이 지났건만 놀랍게도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한채 취재팀을 반겼다. 단동시내 육도구(六道口) 흥륭가(興隆街)25번지에 위치한 이 건물은 현재 단동시 건강교육소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세월의 풍상을 겪은낡은 모습이었다.겉에서 보면 2층 건물처럼 보이나 실지로는 3층 건물로,현재 이 건물은 1층만 건축 당시 그대로이며 나머지는 신축됐다고 한다.주민들에 따르면,인근에 헌 건물들이 많아서 이 건물도 곧헐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 건물의 주인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이방인 쇼우는 어떤 인물인가? 영국인들의 생몰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영국의 ‘제너럴 레지스터 오피스’에 보관된 자료에 따르면,쇼우는 1880년 1월 25일 파고다 아일랜드에서 해양조사원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1908년 부친사망 당시 그는 중국 남동부의 항구도시 복주(福州)에 살고 있었다. 1912년 당시 상업에 종사하고 있던 그는 단동에서 일본여인 후미 사이토(당시 28세)와 결혼하였는데 이듬해 장남이 태어날 당시 그는 일본 고베에 머물고 있었다.그가 한국의 독립을 돕기로 결심한 것은 이때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쇼우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돕기로 한 배경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첫째는 그의 출신과 가족구성.그는 영국 식민지인 아일랜드태생으로 자신의 고국이 식민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처지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입장을 잘이해하고 있었다.특히 모친과 부인이 모두 일본인이라 일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더욱이 그의 사무실(이륭양행)은 안동(현 단동)구시가지에 위치해 있어서 일본영사관의 영향이 미치지 않아 한국인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바로 이곳 2층에 상해 임시정부 교통부 산하 ‘안동(安東)교통국사무국’이 들어있었다.교통국은 임정초기 정보수집과 재정모금,인물소개 등을 담당하였는데 국경지역에 위치한 이곳은 교통부 산하 7개 교통국 가운데서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그는 단순히 장소만 제공해준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기도 하고,상해를 오가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배를 제공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1920년 그가 소위 ‘이륭양행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었을 때 일본 외무성에서 작성한 그의 행적자료에 의하면,그는 봉천(奉天) 주재영국 총영사가 일본당국의 요청으로 수차례 주의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대동단사건 지원 ▲독립군 무기수송 ▲독립운동 근거지 제공 ▲임정 비밀문서 전달 등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20년 7월 오학수(吳學洙) 등이 국내로 무기를 들여오기 위해 그가 소유한 계림환(桂林丸)에 숨겨두었다가 발각되자 그도 이들과 함께일경에 구속되었다.1924년 단동을 떠나는 조건으로 영국 측의 도움을 받아 석방된 그는 복주(福州)로 거주를 옮겼는데,그해 11월30일 63세로 타계하였다.그의 사후 57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그에게 건국훈장 추서한 것이 전부일 뿐 그의 묘소에 꽃 한송이 바치지 못했다. 항일투쟁 끝에 단동에서 최후를 마쳤으나 일반인들에게는 쇼우처럼거의 무명(無名)에 가까운 독립투사 한 분이 있다.바로 편강렬(片康烈·1892∼1929) 의사다.17세때인 1907년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이듬해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한 편 의사는 이후 1911년 ‘105인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여,1919년‘구월산주비단사건’으로 해주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출옥후만주로 건너가 양기탁(梁起鐸) 등과 의성단(義成團)을 결성,단장에취임한 편 의사는 이듬해 3월 장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였으며,다시1개월 뒤에는 봉천(현 심양)에서 일경과 백주에 시가전을 벌여 적 다수를 사살하였다. 1924년 길림과 하얼빈에서 각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일경에 체포된 편 의사는 국내로 압송돼 7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척추염이 발병,안동 적십자병원에서 순국하였다.불과 37세였다.구한말 의병전쟁에서 부터 독립군 투쟁에 이르기까지 청춘을 항일투쟁에 몸바쳤으나 이름을 아는 이가 적음은 물론 그의 묘소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생전에 편 의사는 ‘나라가 광복되기 전에는 내 유체를 고국에 이장하지 말라’고 유언했다.지금도 단동 진강산(鎭江山) 기슭 공동묘지 어디엔가 누워있을 편 의사를 생각하면 후손된 자로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단동은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압록강이 마지막 모습을 감추는 곳이자 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땅과 마주하고 있어 우리 민족에겐 ‘비원의 땅’이라고 할수 있다.또애국선열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조국광복을 위해 몸을 의탁하던 곳이자,살 길을 찾아 만주땅으로 향하던 유민들의 한숨이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강산(錦江山)공원(구 진강산공원) 옆에 있는 안동주재 일본영사관 건물은 아직도 그 화려한 건축미를 간직한 채 지금은 단동 경비사령부 건물로 사용되고 있었다.압록강을 가로지르는 두 철교 가운데 6·25때 끊어진 철교를 중국의 모 회사가 매입,관광용으로 꾸밀 계획이라고 한다.단동은 우리 근·현대사의 현장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중국의 경제개방 열풍속에서 나날이 변모하고 있었다. 정운현기자 jwh59@
  • 광복55돌 독립유공자 157명에 훈·포장

    국가보훈처는 11일 광복 55돌을 맞아 조선혁명당을 결성,항일투쟁을 벌인이호원(李浩源·1891∼1978)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는 등 훈·포장 대상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157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포상을 받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독립장 2명 ▲계몽소설 ‘상록수’의저자 심훈(沈熏·본명 沈大燮·1901∼1936) 선생 등 건국훈장 애국장 57명▲재미독립운동가 김용중(金龍中·1898∼1975) 선생 등 건국훈장 애족장 43명▲건국포장 16명 ▲대통령표창 39명 등이다. 포상식은 오는 15일 독립기념관에서 열린다. 애국지사중 생존자는 박찬규(朴贊圭·72·애족장) 선생 등 5명(애족장 3명,대통령표창 2명)이다.여성으로서는 근우회 등에 가입,독립운동을 편 박원희(朴元熙·여·1898∼1928.애족장) 선생이 대상자에 올랐다. 특히 민족대표 33인중 한 분인 김병조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사략’(1920)에 기초해 북한지역 3.1운동 순국자 27명이 포상자명단에 새로 포함됐다.건국훈장 독립장을 받는 의병장 이성화(李成化·1882∼1910) 선생은 전북 고부등지에서 항일 의병투쟁을 펼친 공로가 인정됐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조소앙 선생의 사위로 1926년 중국으로 망명,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광복군으로 활동한 최문용(1905∼1979.애족장) 선생과 임창열(林昌烈) 경기도지사의 조부로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한 임기반(林基磐·1867∼1932·애국장) 선생에게도 포장이 수여된다. 이로써 정부수립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사람은 모두 8,855명이며이 가운데 ▲대한민국장이 30명 ▲대통령장 92명 ▲독립장 774명 ▲애국장 2,895명 ▲애족장 3,634명 ▲건국포장 363명 ▲대통령표창 1,067명 등이다. ■건국훈장 독립장(2명) 이성화 이호원 □건국훈장 애국장(57명) 강신경 고두일 김수성 김순영 김영국 김용담 김의홍 김인성 김찬두 김효운 김희국 맹달섭 박래준 박인찬 박치율 박홍지 방윤격 백신한 백의경 손몽상 송연근 송영광 송학묵 신제원 심대섭 심칠석 안상의 오병호 유심택 유진흥 유희선 윤낙구 음성국 이남기 이범진 이복근 이석중 이성덕 이성용 이중백 임기반 임도돌 임봉구 임영화 임일권 장봉규 장봉주 정낙중 조기섭 조민찬 최문용 최석철 최성세 최재유 최훈세 허 전 황순팔 ■건국훈장 애족장(43명) 강용운 곽덕산 곽병도 김명도 김문준 김병형 김용길 김용중 김형태 김홍이 김희중 남병우 남상순 박기석 박원희 박찬규 박천흥 박학순 방인철 방학연 부덕환 서상룡 손영술 심용철 안치서 이경응 이광우 이무선 이병선 이정의 장옥만 전원숙 정소수 정주영 주유만 최덕정 최윤창 최재소 최치환 피용학 홍진근 황정연 황태갑 □건국포장(16명) 강기수 고홍석 김광언 김시추 김영철 김지수 김후식 박태규 박태근 염택눌 윤삼업 이병화 이승정 장상흠 장석구 장용호 ■대통령표창(39명) 권중윤 권창수 김금영 김성수 김위창 김흥용 김희수 남병희 박봉래 박수봉 박유성 박창선 배영직 서정규 손석봉 송기주 승병일 신영경 오놀보 오주선 유재현 윤태완 이면우 이문천 이수봉 이수열 이회식 임병률 임창원 장호명 정경순 정상용 정인행 정학균 조재학 최규철 홍철수 황윤실 황재옥. 노주석기자 joo@kdail y.com
  • ‘상록수’ 작가 심훈 건국훈장 받는다

    농촌계몽 소설 ‘상록수’와 항일저항시 ‘그 날이 오면’의 작가 심훈(沈熏·본명 沈大燮·1901∼1936)이 이번 8·15 광복절에 항일운동 공로로 건국훈장을 받는다. 보훈처가 공개한 공적심사 자료에 따르면 그는 1919년 3·1의거에 참가했다가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3개월간옥고를 치른 것으로 나와 있다.이 정도의 항일운동 경력이라면 그는 대통령표창에 해당된다.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포상은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으로다소 파격적이다.이에 대해 보훈처 당국은 “수형기간은 짧지만 선생의 초지일관한 항일문학 활동을 감안,훈격을 상향조정했다”고 밝혔다. 1901년 서울 노량진 흑석동에서 출생한 그는 18세때 경성제일고보 4학년 재학중 3·1의거에 참가했으며 출옥후 중국으로 유학,만주 지강(之江)대학에서 수학하면서 ‘동방의 애인’ ‘불사조’ 등을 썼다.귀국후 그는 동아·조선·조선중앙일보 및 경성방송국 기자로 활동하면서 시와 소설을 발표하는 등문필활동에 종사했다.1934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소설 공모에 ‘상록수’를 심훈이라는 필명으로 응모,당선돼 크게 평가받았다.그의 대표작‘불사조’ ‘상록수’ ‘그 날이 오면’(시) 등은 모두 철두철미한 항일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연재 도중 일제 경찰로부터 곳곳에 가위질을 당하거나 시집 출간이 좌절되기도 했다.특히 1936년 8월9일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10일자 조선중앙일보 호외 뒷면에 ‘오,조선의 남아여!’라는 즉흥 항일시를 쓰기도 했다.그는 1936년 9월16일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지난 93년 충남 당진군은 그의 옛집 필경사(筆耕舍) 옆에 유물전시관을 건립했으며 96년 8월 문화체육부(현 문화관광부)는 그를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그의 항일문학 활동을 기린 바 있다.유족으로는 장남 재건(在健·67)씨가 북한에 거주하고 있으며 차남 재광(在光·66)씨와 3남은 미국에 거주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운현기자 jwh59@
  • 애국지사 李光雨씨 건국훈장 받는다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할 증거자료 부족으로 건국훈장 포상이 보류돼온 한애국지사가 자신을 체포,조사한 일제 경찰의 증언으로 뒤늦게 훈장을 받게됐다.애국지사 이광우(李光雨·75·부산시 동구 좌천동)씨의 경우다.독립운동 당시 동료들의 증언으로 포상을 받은 사례는 더러 있었으나 일경 출신자의 증언이 증거자료로 인정돼 건국훈장을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대한매일1월17일자 참조). 이씨는 1942년 5월 부산에서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친우회’를 결성,모두네 차례에 걸쳐 ‘불온전단’을 살포한 혐의로 일경에 체포돼 부산지법에서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단기 1년,장기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김천소년형무소에서 복역중 해방을 맞아 출옥했다. 이같은 항일운동 경력을 토대로 이씨는 89년 정부에 독립유공자 서훈신청을 했으나 관련자료 부족으로 심사보류 조치를 받았다.이씨는 자신의 항일운동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관련자료 수집을 위해 정부기록보존소와 자신이 복역한 김천교도소를 뒤졌으나 모두 허사였다. 이에 이씨는 경찰청에 자신의 전과조회를한 결과 자신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형한 사실을 확인,이를 근거자료로 주장했으나 보훈당국은 “수형사실은 인정되나 구체적인 내용(죄명)을 알 수 없어 근거자료로는 부적합하다”는 입장이었다.이씨는 사건 당시 자신을 검거한 일경이 해방후 반민특위에 검거됐을 때 자신이 증인으로 출두한 사실 등을 관련자료로 제출했으나 이 역시 인정받지 못했다. 한편 이씨의 항일투쟁 공적을 입증한 것은 관련자료가 아니라 자신을 체포했던 일경의 ‘증언’이었다.1943년 3월 당시 경남경찰국 고등과 외사계 주임으로 근무했던 하판락(河判洛·88·부산 거주)씨는 올해 1월 본지와 단독인터뷰에서 “부하인 김소복(金小福)과 함께 ‘친우회 불온전단사건’ 관련,주동자 이광우씨를 검거,조사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본지 보도후 보훈당국은 “당사자의 증언이라 자료가치가 충분하다”면서이씨의 공적심사 의향을 밝혔고 이씨는 최근 공훈심사위원회의 공적심사에서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 서훈자로 최종 확정됐다. 보훈처 공훈심사과 오기택 과장은 “대한매일의 보도가 이씨의 공적 사실확인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이씨는 광복 55주년인 오는 8·15 광복절에 건국훈장을 받게 된다. 정운현기자 jwh59@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3)金佐鎭장군 피살지 흑룡강성 海林

    청산리전투를 지휘한 백야 김좌진(金佐鎭·1889∼1930) 장군은 독립운동 공적이나 고매한 인품에 비해 한동안 적절한 평가와 대우를 받지 못했다.기념사업회는 그의 탄생 100주년인 지난 89년에 뒤늦게 결성됐고,충남 홍성군에있는 그의 생가는 92년에야 겨우 복원작업이 이루어졌다.학계의 평가 역시한동안 공백상태로 유보돼 왔었다.1962년 지도자급 독립운동가에게 수여하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받은 그가 그동안 홀대받아온 이유는 무엇인가.한마디로 말하면 그의 피살을 둘러싼 ‘의혹’ 때문이었다고 할 수있다.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남동쪽으로 12km 떨어진 곳에는 인구 43만의 해림(海林)이란 작은도시가 있다.취재팀은 이곳에서 백야 김좌진장군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는 원성희(元聖熙·61)씨의 안내로 백야 김좌진 장군의 흔적과‘최후’를 만날 수 있었다.원 회장은 해림 현장(縣長)과 시장·인민대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지난해 정년퇴직한 지역 유지출신으로 김좌진 장군의 기념사업·유적지 보호운동을 펴고 있는 중심인물이다.해림 시내를 빠져나와 비포장길을 1시간 정도를 달리면 우리나라의 면(面)에 해당하는 산시진(山市鎭)에 도착한다.이곳이 바로 김좌진장군이 암살자의 손에 최후를 마친 곳이다.그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한동안 묻혀 있었듯이이곳 역시 한국인들에게 한동안 낯선 곳으로 남겨져 왔다.그러나 지난해말이곳에 그의 유적지가 조성되어 문을 연 이후 최근까지 500여명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취재팀은 김좌진장군이 1925년 독립군을 이끌고 들어와 개척한 대황구(大荒溝)를 지나 신흥촌(新興村)에서 잠시 차를 멈추었다.원 회장이 우리 일행을안내한 곳은 그가 1930년 1월 24일 피살당한 뒤 임시로 묻혔던 옛 무덤터였다.그의 유해는 1934년 본부인인 오숙근(吳淑根·작고)여사가 고향으로 모셔가 지금 이곳은 묘소 흔적만 남아있다.묘소터 일대는 주변의 밭들과는 달리공터로 남아 있었는데 원 회장은 “이 일대를 꽃동산으로 꾸며 한·중 양국청년들의 우호증진과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신흥촌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도남촌(道南村)에는 그의 유적지인 ‘백야 김좌진장군 구지(舊址)’가 단장돼 있다.이 ‘구지’는 지난해 11월 26일 한국측 (사)백야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와 중국측 백야 김좌진장군연구회가공동으로 단장해 개관한 것으로 대지는 500평 규모다.전통 한국식으로 만든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에 대리석으로 만든 장군의 흉상이 나타나고그 뒤로 금성(金城)정미소를 복원한 건물이 보인다. 이 정미소는 그가 인근 농민들의 편의 제공과 한족총연합회의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동청철도회사의 창고를 빌려서 세운 것으로 처음에는 연자방아를사용하다가 1928년 여름 하얼빈에서 목탄 발동기 중고품을 구입해서 사용했다고 한다.금성정미소 자리가 바로 그가 좌익청년 박상실(朴尙實)에 의해 피살된 곳이다.현재 이곳에는 연구회측에서 세운 순국추념비가 그날의 비극의역사를 전해주고 있다.흉상 좌측에는 그가 순국 직전까지 거주하던 거처와‘팔노(八老)회의실’이 복원돼 있다.이곳 거처는 그가 1927년 7월 903명의독립군과 1,000여 명의 재향군인·가족을 거느리고 이곳에 진주한 후 이듬해 8월부터 피살될 때까지 머물던 곳이다.‘팔노회의실’은 신민부의 뒤를 이어 발족된 한족총연합회에서 그를 보필하던 8명의 원로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논의하던 곳으로 1928년 10월 그가 자택 서쪽에 세웠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해림과 목단강 인근에는 ‘8노’의 후손들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으나 근거자료 부족으로 한국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구지’내 그의 옛 거처는 2m50㎝,팔노회의실은 2m70㎝,정미소는 2m90㎝로 높이가 제각각인데 거기엔 나름의 까닭이 있다.이는 그가 주도한 신민부(新民部)가 창설된 연도(1925년),신민부 본부가 이곳 산시로 옮겨온 연도(1927년),그리고 신민부의 후신인 한족총연합회가 결성된 연도(1929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그는 신민부의 군사부 위원장 및 총사령관,한족총연합회의 주석을 역임했다. 히 그는 항일독립운동의 명장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그러나 좀더 다각적인면모로 접근할 필요가 있는 인물이다.충남 홍성지방의 유지 집안에서 태어나 3세때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란 김좌진장군은 15세 되던 해인 1904년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奴僕) 30여명에게 논밭을 나누어주면서 풀어주고이듬해 서울로 올라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1907년 향리로 돌아와 호명(湖明)학교를 세워 90여칸의 자기집을 학교 교사로 활용하였으며,홍성에 대한협회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그리고 1911년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의 자금조달차 족질의 집을 찾아갔다가 붙잡혀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1918년 만주로 건너간 이후 무장항일투쟁의 대역정에 돌입했다. 이런 그를 두고 원성희씨는 “김 장군은 항일 명장이기 이전에 반봉건 선각자이자 민족개명의 위대한 교육자”라고 평가했다.특히 그가 서명한 ‘무오선언’에서 ▲한국독립 주장 ▲일본침략 폭로 ▲무력투쟁 선언 ▲독립후 공화국 건립 등을 주장한 것은 그가 “근대적 민주주의의 신봉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덧붙였다.김좌진연구회 부회장 겸 도남촌 당서기를 맡고 있는한족출신의 차유행(車有行·51)씨는 “김 장군은 한국과 중국 양 민족 모두의 영웅”이라며 “자금사정이 어려워 기념관 건립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편 김좌진 장군에 대한 평가는 국내와 북한은 물론 중국 조선족 자치지역에서 조차도 한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중국과 북한에서 그를 낮게 평가한 것은 그가 사회주의자가 아닌,공화주의자라는 점,그리고 그의 말기의‘변절의혹’ 때문이었다.그의 ‘변절의혹’은 국내에서도 한동안 유포됐었고,그의 아들 김두한이 반이승만 노선을 걸은 점 등도 한국사회가 그를 홀대한 요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물론 92년 그의 생가복원을 계기로 그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제자리를 찾았지만 그를 살해한 세력과 살해범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중이다. 만주 항일진영의 지도자였던 그를 살해한 사람은 조선인 박상실(朴尙實,본명 李福林)이었다.한때 신민부에서 활동한 이강훈(李康勳·98) 전 광복회장은 자서전에서 “일경에게 약점이 잡힌 김봉환(金奉煥)이 자기부하인 박상실을 시켜 김 장군을 살해했다”며 “당시 김 장군이 아나키스트들을 끌어들여공산주의자들로 부터 원망을 산 것은 사실이나 공산당측에서 김장군을 살해했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밝혔다.연변대 박창욱교수의 견해 역시 이와 비슷하다.서울대 신용하 교수는 한 논문에서 “김좌진이 ‘적화방지단’이란 비밀조직을 결성해 공산조직의 침투를 막자 이들 단체의 공산화를 추진하던 공산단체 적기단이 비밀단원 박상실을 시켜 암살했다”며 “적기단이 김좌진을 암살한 뒤 ‘김좌진이 변절했다’는 일제의 모략정보를 빌려 ‘김좌진이 친일파로 변절해 처단했다’고 암살동기를 퍼뜨린 것”이라고 주장했다.그의‘친일변절’ 의혹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자료로 입증된 바 없다. ‘청산리대첩’의 영웅이자 시대의 선각자로 치열한 삶을 살다간 백야 김좌진.그는 92년 생가복원을 계기로 국내는 물론 옛 활동무대인 중국 흑룡강성해림에서 찬란하게 부활하고 있었다. 해림(중국 흑룡강성)
  • 8월의 독립운동가 홍범식 선생

    국가보훈처는 30일 경술국치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의열투쟁을 확산시킨일완(一玩) 홍범식(洪範植·1871∼1910) 선생을 광복회 등 유관기관과 공동으로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충북 괴산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1888년 진사시에 합격,1902년 관직에 들어선 이후 혜민원 참서관을 거쳐 지방관으로 나가 1907년 태인군수,1909년 금산군수로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특히 태인군수 재직시 일제로부터 군민을 보호하는 한편,황무지 개척과 관개 수리사업을 펼쳐 민생을 안정시켰다. 1905년 을사조약과 1907년 정미7조약에 이어,1910년 8월29일 한일합방조약이 공포되자 선생은 “사방 백리의 땅을 지키는 몸이면서도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죽는 것만 못하다”며 목매 자결했다. 선생은 순국전 아들들에게 보낸 유서를 통해 “조선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해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하며,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마라”고 당부했다.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노주석기자 joo@
  • 구국의 뜻 되새기자/ 독립유공 이젠 이념의 굴레 벗어야

    일제하 항일독립운동을 벌인 애국지사 가운데는 명백한 독립운동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못한 경우가 상당수 있다.그 이유는대개 두 가지로 압축된다.첫째,조선공산당 등에 가입해 좌익활동을 했거나또는 해방후 월북한 자 둘째,건국후 간첩죄 등의 죄명으로 실정법상 처벌을받은 자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당국의 미포상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우선 독립유공자 포상은 일제하 독립운동 공적에 대한 포상인만큼 해방 이후의 행적을 이유로 포상에서 배제한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다.또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인 경우 좌익활동이 독립운동의 방편이었을 경우 이를이념에 구애없이 포괄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최근 남북한 관계개선을 계기로 ‘이념의 굴레’에 묶인 독립유공자에 대해 적극적인 포상정책으로 전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3·1의거 10년 뒤인 1929년 11월 발생한 ‘광주학생의거’의 주역으로 의거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 그로 인해 최종선고에서 징역 4년의 최고형을받은 인물로 장재성(張載性)이란 인물이 있다.4·19후 민주당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건국훈장을 주기로 결정했다.그러나 5·16후인 1962년 3월 1일 당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주무부처였던 내각사무처는 돌연 장씨에 대한 국민장(3등급·현 독립장)서훈를 취소한다고 발표했다.내각사무처는 서훈취소 이유로 신원조회 결과 장씨가 “해방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활약하다가 1948년 2월 월북,공산당 대표자회의에 참석했다가 남파된 후 체포돼 7년형을 받고 복역중 6·25 후퇴시 피살된 사실이 밝혀졌다”고 발표했다.동일한 사안에 대해 정권마다 독립유공자 포상에 대한 잣대가달랐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장재성이 반공이데올로기의 희생자라면 죽산 조봉암(曺奉岩)은 정치적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일제 당시 3·1의거 참가 등으로 3차례에 걸쳐 8년여동안 옥살이를 했고,해방후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 부의장을 지낸 조봉암은 독립유공 공적은 물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도 공이 적지않은 인물이다.그러나그에 대한 독립유공 포상은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그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유공자가 달고 있는 ‘빨갱이’ 꼬리표와는 또 다르다.죽산에게는‘간첩죄’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고 있다.이승만정권 시절 진보당을 창당,급진적 정치노선을 표방했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이승만을 위협하기도 했던 죽산은 ‘국가변란’을 기도한 간첩혐의로 59년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그러나 그가 이승만의 정적으로 몰려 ‘정치재판’에서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사실은 여러가지 정황·증거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한편 죽산 사후 그의 동지 및 유족들은 그의 명예회복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왔으나 아직까지 그에 대한 사면·복권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그에 대한독립유공 포상 역시 한 발자국도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보훈당국은 ‘국가안전에 관한 죄를 범한 자로서 형을 받은 자는 그 서훈을 취소한다’는상훈법에 의거,그에 대한 포상을 거부하고 있다. 보훈당국으로선 실정법에 의해 사형집행을 받은 자가 사면·복권이 안된 상태에서 포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그러나 문제는 독립유공자 포상제도가 공적 자체보다는 이념의 굴레와 정치적 잣대에 휘둘려 왔다는 사실이다.현행 독립유공자 포상제도가 적잖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보훈처 관계자들 역시 일부 수긍하고 있다.통일시대를 맞아 독립유공자포상과 관련,일대 정책전환이 요구되고 있는 시점이라고 하겠다.지난 95년광복 50주년을 맞아 그동안 이데올로기 문제로 포상에서 제외됐던 이동휘(李東輝)선생 등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이 실시된 것이 그 첫걸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달 분단후 첫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계기로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호전되면서 해방후 월북,북한정권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출신 인사들에 대한 포상문제도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임꺽정’의 저자이자 1927년 결성된 민족 단일조직인 신간회(新幹會) 부회장을 지낸 벽초 홍명희(洪命熹·내각 부수상 역임),국어학자 출신으로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돼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이극로(李克魯·조국전선 의장 역임)선생 등이 대표적 인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한 정치학자는 “통일시대를 앞두고 민족사 차원에서 이들에 대한 독립유공포상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이는 남북간 역사적 동질성을 모색하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23년 黃鈺사건 주도 金始顯의사. 생전에 무려 일곱 차례에 걸쳐 24년간 감옥살이를 한 초인적인 애국지사가있다.감옥생활 가운데 16년은 일제하에서 였으니 독립유공 공적이 결코 적지 않다.의열단원 출신으로 1923년 소위 ‘황옥(黃鈺)경부사건’의 주모자로체포된 김시현(金始顯)의사가 그 주인공이다. 김 의사는 거듭된 거사-투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해방을 맞은,몇 안되는 지사형 애국지사다.그러나 김 의사에 대한 독립유공 포상이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유족측은 “보훈처가 지나치게 신중을 기한 나머지 서훈이 지연되고 있다”며 보훈당국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김 의사에 대한 포상이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은 김 의사의 공적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해방후 김 의사와 관련된 정치사건의 ‘전과딱지’가 김 의사의 독립유공 포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김 의사는 1954년 1월 이승만 대통령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나중에 무기로 감형됨)를 받고 복역중 4·19혁명으로 풀려났다.평소 의협심이 강했던 김 의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헌정질서를 짓밟고 독재정치를 펴자 동지유시태(柳時泰)와 함께 그를 처단하려다 미수에 그쳤다.이 일로 구속된 김의사는 4·19의거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석방되었으며,특별사면(1960.6.25)까지 받았다. 김 의사의 아들 김봉년(金峯年·78)씨는 “부친이 당국으로부터 특별사면을받은 만큼 그 사건과 관련해서는 원인무효가 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 7월의 독립운동가 김한종 선생

    국가보훈처는 30일 항일의병으로 활약하고 비밀결사조직인 대한광복회에서의열독립투쟁을 전개한 일우(一宇) 김한종(金漢鍾·1883∼1921) 선생을 광복회 등 유관기관과 공동으로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883년 충남예산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충남 홍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의병으로참여했고 경술국치이후 충청지역 동지들을 모아 부여를 방문하는 조선총독암살계획을 모의했다. 선생은 1917년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정치로 의열투쟁이 여의치 않자 비밀결사체인 대한광복회에 가입,충청도지부장을 맡아 조직 확대,군자금 모금,악덕지주 및 친일부호배 처단 등 ‘독립전쟁 준비전략’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이듬해 1월 대한광복회 조직이 적발되면서 충청도지부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돼 1919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1921년 7월28일 38세의 젊은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7월의 호국인물 김홍일장군

    전쟁기념관은 29일 ‘7월의 호국인물’로 6·25 전쟁 때 한강 및 낙동강전투를 성공적으로 지휘한 김홍일(金弘壹·1898∼1980) 육군 중장을 선정했다. 김 장군은 평북 용천에서 출생,일제 당시 한국의용군사령관,중국군사단장,광복군 참모장 등을 역임했으며,이봉창 의사의 항일투쟁을 지원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한국군 육군 준장으로 임관돼 6·25 전쟁에 참여했다. 김 장군은 북한군의 남침으로 서울이 실함(失陷)되자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을 맡아 북한군 1군단을 상대로 6일동안 한강전선을 지켰다.이 전투로 국군이 후퇴하고 미국 지상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김장군은 이후 1군단 창설 군단장으로 진천전투,화령장전투,안동전투에서 낙동강방어선을 사수했다. 51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 후 중화민국 대사,7대 국회의원,신민당 당수,광복회장 등을 역임했다.건국훈장 독립장과 태극무공·을지무공·청조근정 훈장을 받았다. 노주석기자 joo@
  • 5월의 독립운동가 양진여 선생

    국가보훈처는 30일 구한말 전남 광주,담양,장성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서암(瑞菴) 양진여(梁振汝·1862∼1910)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전남 광산군 서창면 벽진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7년 일제의 만행과 봉건정부의 부패에 분개해 담양군 대치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선생은 이듬해 10월 광주 송정읍에서 일본군 의병토벌대 수백명을 격퇴했고 11월에는 전해산·강판열 의병부대 등과 연합,일본군 광주수비대를 대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선생은 아들 양상기와 함께 부자 의병장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선생은 1909년 8월 일본 군경에 붙잡혀 이듬해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확정받은 뒤 그해 5월30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선생은 “이 한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유감”이라는 유언을 남겼다.정부는지난 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4월의 독립운동가 이동녕 선생

    국가보훈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과 초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1869∼1940) 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충남 천안시 목천면에서 명문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선생은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민권운동과 국권수호운동인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하다 옥고를 치렀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결사대를 조직,대한문앞에서 연좌농성을벌이는 등 일제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민족운동을 펼쳤다. 이후 북간도 용정으로 이주한 선생은 서전서숙을 설립,독립운동가를 양성했으며 1907년 귀국,신민회를 결성해 총서기로 활동했다.경술국치 직후 서간도유하현 삼원포로 일가와 함께 망명,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이상설 선생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 정부를조직하여 독립전쟁을 계획했으며 대종교를 중심으로 연해주와 만주일대에 흩어진 민족역량을 결집,1919년 2월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 의정원 초대의장을 맡아임시정부 수립의산파 역할을 했고 통합임시정부 내무총장,국무총리,대통령직무대리, 주석 등을 역임하면서 20여년동안 임시정부를 이끌었다.1940년 3월 “민족의 대동단결만이 광복을 앞당길 수 있다”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
  • 애국지사 박영준옹 별세

    애국지사 박영준(朴英俊)옹이 27일 오전 8시10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85세. 고인은 1915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 나 38년 한국광복진선회 청년공작대를조직, 항일독립운동에 나선 이후 40년에는 오광심 김정숙 조순옥씨 등과 독립활동을 했다.광복 후 39사단,9사단장을 거쳐 한국전력 사장,백범기념사업회장,광복회 고문을 역임했다.금성화랑훈장(50년)과 건국훈장 독립장(77년)을 서훈 받았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신순호 여사와 아들 천기씨,딸 천민씨(대원예고 교사)와사위 이홍권씨(인천지법 부천지원장)가 있다.장지는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발인은 29일 오전 11시.빈소는 삼성의료원.(02)3410-3153 *언론인·영화평론가 허창씨언론인이자 영화평론가인 허창(許彰)씨가 27일 0시20분 별세했다.72세. 고인은 지난 56년 부산 국제신보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부산일보문화부장,편집부국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영화평론가로 한국예총 부산지부장과 영화진흥공사 전문위원,공연윤리위원회심의위원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제 8대 회장을 거쳤으며 95년부터는 ‘영화정의 실천을 위한 모임' 발기인 대표를 지내는 등 한국영화 발전에 많은 공을 남겼다. 유족으로는 장남 문성(의료인),차남 문영씨(씨네21 취재1팀장)가 있다.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연세장례식장에 마련됐다.발인 29일 오전 7시. 연락처(02)363-9499.
  • [오늘의 눈] 보훈처 보상확대 앞서 공적재심사를

    12일 국가보훈처가 발표한 ‘보훈정책 중·장기발전계획’은 여러가지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우선 국민의 생활속에서 보훈문화를 확산해 가겠다는 정책의지가 그것이다.그동안 보훈처는 정부부처 가운데 10위권 규모의 예산을 쓰는 부처이면서도 국민들로부터 별 주목을 받아오지 못했다.이는 보훈행정이업무특성상 일반국민보다는 일부 특정집단을 주대상으로 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행사 위주의 행정을 펴온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일반국민들은 보훈처를 3·1절,광복절,현충일,6·25 등 역사적 기념일의 행사를 주관하거나 독립유공자 심사 및 포상을 담당하는 주무부서 정도로 인식해 온 것이 사실이다.물론 보훈처의 업무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위국헌신한 국가유공자들의 공적을 자손만대에 길이 전하고 또 이를 우리사회의 ‘중심가치’가 되는 정의실현을 담당하는 부처라는 점에서 보훈업무의중요성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한편 이번 보훈처의 중·장기 발전계획은 여러 측면에서 긍정적인 요소를담고 있지만 동시에 몇가지 지적할 만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그 가운데 하나는 건국포장·대통령표창자에 대한 금전적 보상문제이다.그동안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해당자에게만 연금 등 금전적 예우를 해왔다.이번에 보훈처가 독립유공자들에 대해 금전적 예우 대상자를 확대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나 문제는 대상자가 과연 적절한가 하는 점이다.왜냐하면 현재 건국포장자347명과 대통령표창자 1,028명 가운데는 공적내용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상당수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90년 이전까지만 해도 건국훈장은 1등급(대한민국장),2등급(대통령장),3등급(국민장,현 독립장) 등 3개 등급뿐이었다.그러던 것이 90년 상훈법 개정으로 4등급(애국장),5등급(애족장)이 추가돼 5등급으로 확대됐다.이때 기존 건국포장자와 대통령표창자들은 공적 재심사를 거쳐 상당수 건국훈장 4등급,5등급으로 상향 조정됐다.당시 건국포장자와 대통령표창자 가운데 건국훈장을받지 못한 사람들은 상당수 공적내용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이들 가운데는 공적을 인정할 만한 관련서류가 전무한 사람,즉 가짜독립유공자들도 더러 포함돼 있었는데 이는 이미 90년 재심 당시 문제가 됐던 사실이다.그런데 이제와서 이들에게 금전적 보상을 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이들의 공적자료 보완이나 재심사가 선행과제임을 보훈처 당국에 지적해 둔다. 정운현 특집기획팀차장jwh59@
  • 국가유공자 예우범위 확대

    독립운동 공적이 있으면서도 훈격이 낮다는 이유로 보상대상에서 제외됐던건국포장 및 대통령표창 수상자들도 앞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되는 등 독립운동 포상자에 대한 예우범위가 크게 확대된다. 12일 국가보훈처가 발표한 ‘보훈정책 중·장기 발전계획’에 따르면 연간24억원의 예산을 확보,건국포장을 받은 유공자 347명,대통령표창자 1,028명에게도 독립유공자 보상을 하기로 했다.지금까지는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만 금전적인 보상을 해왔다. 보훈처는 또 250억원의 예산을 들여 현재 9개 등급인 상이등급 분류체계를10개 등급 체계로 바꿔 장애율에 상응하는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상이등급 분류체계가 바뀌면 전쟁이나 군복무중 경상을 입은 전·공상 군경 8,000∼9,000여명이 새로 국가유공자로 편입돼 혜택을 받게 된다.올해 전역자도 해당된다.이들에게는 연금은 물론,교육·의료·대출 등에서 각종 보훈혜택이 주어진다.대상자는 오는 5월까지 지역별 보훈병원에서 상이등급구분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 또 올 하반기중 독립운동사연구소,국사편찬위원회,정신문화연구원,정부기록보존소,법원,민간운동단체 등이 참여하는 ‘민·관 합동 사료발굴단’을 구성,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사료 및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발굴키로 했다.2003년부터 이들에게 포상을 추진할 방침이다. 노주석기자 joo@
  • 3·1절 81돌 행사 다채

    3·1절 81돌인 1일 서울 탑골공원을 비롯,전국에서 그날의 함성과 뜻을 되새기는 각종 기념행사가 다채롭게 열려 순국 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새천년민족 화해와 통일을 기원했다. 이날 오전 10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광복회원,용감한 시민상 및 효자효부상 수상자,벤처 기업인 등 4,000여명이참석한 가운데 3·1절 기념식이 열렸다.기념식에서는 3·1절 노래 합창과 윤경빈(尹慶彬) 광복회장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참석자 전원의 만세삼창이울려 퍼졌다. 3·1운동기념사업회는 이에 앞서 오전 8시 서울 탑골공원에서 순국 선열들의 위업을 기렸다. 서울 종로 1∼3가에서는 오전 11시부터 4시간 동안 교통을 통제한 가운데‘3·1절 종로 만세의 날’이 선포됐으며 흙 밟기와 만세 부르기,굴렁쇠 굴리기 등 각종 행사가 펼쳐졌다. 낮 12시에는 광복군 출신으로 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전리호(全履鎬·78)옹 등이 참여한 가운데 보신각 타종 행사가 열렸다.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은 낮 12시 서울 장충단공원 ‘3·1운동 독립기념탑’ 주변에서 기념 집회를 갖고 선열들을 추모했다.광복회 회원들도 오후 2시탑골공원에서 모여 ‘3·1운동 선열 추념식’을 갖고 새 천년 민족정기 확립과 통일을 기원했다. 국내 7대 종교지도자들의 모임인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는 오후 2시 서울 경복궁 앞에서 각계 종교지도자와 시민 등 3,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국민화합의 의지를 천명하는 ‘화해와 평화를 향한 온겨레 손잡기 운동’ 행사를가졌다.불교,기독교,천주교,원불교,유교 등 종교지도자 333명이 서명한 ‘화해와 평화선언문’을 김수환(金壽煥)추기경이 낭독했으며 참가자들의 인간띠잇기 행사가 이어졌다. 부산,대구,전주 등 전국 시·도 50여곳에서도 유관순열사 추모,통일염원 타종식 등 90여건의 기념 행사가 잇따랐다. 조현석 장택동기자 hyun68@
  • 애국지사 유적지 홍보책자 파문

    국가보훈처가 애국선열들의 항일위업을 현창하고 유적지를 홍보하기 위해제작,배포한 책의 내용 가운데 일부가 필자의 전문지식 부족과 당국의 감독부실로 오히려 선열들을 모독하고 항일투쟁사를 왜곡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가보훈처는 국내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를 찾는 일반인들에게 애국정신을현창한다는 목적으로 7,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길따라 역사탐방’ 3,000부를 제작,지난해말 전국의 학교·도서관·지자체·관광관련업계 등에 배포했다.이 책은 최근 들어 청소년을 대상으로 문화유적 답사와 테마여행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있는 점에 착안,국내 567개 독립운동·전쟁 관련 사적지를 124개 권역별로 나눠 주변의 관광명소와 함께 여행안내용으로 제작한 것. 그러나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서울편’은 대상 유적지는 물론 항일행적을 두고 논란이 있는 인물을 부각시켜 선정배경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동부편 첫장에는 어린이대공원에 대한 소개와 함께 고하 송진우 동상 사진을싣고 있다.이는 옆 페이지에 실린 남강 이승훈·유관순 동상 사진의 두 배가 넘는다. 또 북부편에는 망우산에 있는 13도창의군탑과 고려대 교정에 있는 인촌 김성수의 대형사진이 실려 있다.인촌의 경우 ‘전라북도편’에서도 생가 사진과 함께 생가내의 동상사진을 중복게재하고 있는데 대형 동상 사진을 실은경우는 두 사람뿐이다. 이에 대해 한 독립운동가는 “송진우와 김성수는 친일행적 때문에 그들이받은 건국훈장 박탈 여부를 놓고 논란이 됐던 인물”이라며 “이들을 마치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것처럼 편집한 것은 항일로 일관한 선열들에 대한 모독이자 역사왜곡”이라고 주장했다. 서울의 대표적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인 남산과 효창공원·탑골공원·장충공원·국립묘지·구서대문형무소 등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도 문제.남산에는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와 성재 이시영 선생의 동상,안중근의사기념관이,효창공원에는 백범을 비롯해 윤봉길·이봉창 등 독립운동가 7위의 사당과 묘소가 있다. 또 탑골공원은 ‘3·1의거의 성지’이며,장충공원에는 유관순·이준 열사의 동상이 있다.국립묘지에는 국내 외에서 항일운동을 한 선열의 유해를 안장한 묘역이 있고 구서대문형무소(현 독립공원)에는 애국지사들이 처형된 사형장을 비롯해 ‘유관순굴’이 복원돼 있다.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같은 유적지에 대해 서울편 말미의 ‘그밖에’ 항목에서 단 한줄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필자 선정과 책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서울시편은 추가로 수정제작해 재배포하겠다”고 밝혔다. 정운현기자 jwh59@
  • 中 장편소설 ‘船月’ 번역출간

    상해 임시정부 시절 백범 김구 선생과 한 중국인 처녀와의 인연을 다룬 장편소설 ‘선월(船月)’이 지난해말 중국서 출간된데 이어 최근 범우사에서강영매 옮김으로 번역출간됐다.‘김구 선생의 가흥(嘉興)피난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소설은 1932년 4월 ‘윤봉길의거’후 일경의 수배를 피해 상해에 이웃한 가흥으로 피신한 백범이 장진구(張震球)란 중국인 행세를 하면서 5년여 숨어지내면서 맺은,‘피난지에서의 사랑이야기기’가 줄거리다.작가는 ‘가흥일보’의 편집인이자 중국작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하련생(夏輦生·52).하씨의 형부의 부친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유평파(劉平波·건국훈장 애국장 서훈·작고)씨로,하씨는 한국과는 인연이 깊다.이 소설에는 중국인 처녀뱃사공 주애보(朱愛寶)와 백범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들리겠지만 소설에서 백범의 동거녀로 등장하는 여주인공 주애보는 실제인물이다. “남경에서 출발할 때 주애보(朱愛寶)는 본향인 가흥으로 돌려보냈다.그 후 종종 후회되는 것은 송별할 때여비 100원밖에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근 5년 동안 한갓 광동인으로만 알고 나를 위하였고,모르는 사이 우리는 부부같이(類似夫婦)되었다.나에 대한 공로가 없지 않은데,내가 뒷날을 기약할 수있을 줄 알고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다”(‘백범일지’·도진순 주해) 신분위장을 위한 것이긴 했지만 두 사람은 5년여 ‘부부처럼’ 지냈다.당시 백범은 부인과는 사별한 후 홀몸이었고 주애보는 갓 스물을 넘은 처녀였다. 5년여 같이 지낸 세월속에서 두 사람간에 인간적 정분이 없지는 않았다.60만원이라는,당시로선 거금의 현상금이 내걸린 망명정부의 지도자와 신분도 모른채 그와 5년여를 동거한 망명지의 이국처녀.두 사람의 이야기가 소설로 ‘부활’한 것은 뒤늦은 감마저 없지 않다.작가 하씨는 수 차례 백범의 차남김신 전교통부장관을 만나 백범에 관한 얘기를 들었고,또 중국에서 방영예정인 TV연속극 ‘김구’의 극본을 공동집필한 경험도 있다.하씨가 소설을 통해 그려내고 있는,백범일대기에서 야사(野史)로 기록되고 있는 주애보와의 ‘사랑얘기’는 상당부분 논픽션에 가깝다.다만 주애보의 순결한 마음씀씀이,백범의 애틋함 등을 표현하면서 소설적 기법을 가미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여느 애정소설이나 마찬가지다. 임시정부에서 문지기를 한 한 중국노인을 통해 백범이 귀국후 암살됐다는얘기를 전해듣고 주애보가 대성통곡하는 장면으로 끝맺음을 하는 이 소설의제목 ‘선월’은 ‘인생여선 수연득월(人生如船 隨緣得月·인생은 배와 같아 인연에 따라 달을 얻고)’에서 딴 것이다.‘민족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에서 ‘인간 김구’의 편린 하나가 소설의 ‘옷’을 입고 우리곁에 다가온 셈이다.값 12,000원정운현기자
  • [의열 독립투쟁](18)김상옥 의사

    1923년 1월 12일 저녁 8시.서울시내 한복판인 종로 네거리에 있던 종로경찰서(현 제일은행 본점자리)에 폭탄이 날아들어 일경과 신문기자 등 수 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당시 종로경찰서는 조선인 탄압의 대표적 기관으로 이곳에 폭탄을 던진다는 것은 엄두도 낼수 없는 일이었다.사건직후 일경은 총동원령을 내려 범인검거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사건 발생 10일만에 일경은 겨우 단서를 잡고 범인검거에 나섰는데 검거과정에서 일경측은 간부 등 수 명이 목숨을 잃었고 범인은 자결로 최후를 장식하였다.일제통치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진 범인은 당시 33세의 조선인 청년김상옥이었다. 김상옥(金相玉) 의사는 1890년 1월 5일 서울 어의동(현 효제동)에서 태어났다.본관은 김해,구한말 군관을 지낸 김귀현(金貴鉉)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태어난 김 의사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14세때부터 낮에는 대장간에서 말 발굽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가사를 도왔다.러일전쟁후 동대문교회에 나가 기독교에 입교한 김 의사는 1906년 동대문 교회안의 신군(信軍)야학교를 다니며뒤늦게 주경야독하며 시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후 어의동 보통학교를 다니면서도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며 배움의 의지를 불태운 김 의사는 20세 되던 해인 1909년 직접 동흥야학교를 세워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고,이곳에서 손정도,이종소,임용호 등을 만나 시국을 토로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갔다.1912년 김 의사는 동대문밖 창신동에 영덕철물상회를 설립,경영하였다.철물상회는 날로 번창하였으나 김 의사는 망국민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특히 삼남지방의 장터를 다니면서 약을 팔고 기독교를 전도하면서 일제의 조선침략상을 더욱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1919년 3·1의거가 발발하자 4월 1일 동대문교회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혁신공보’를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전파했다.김 의사는 이 해 12월 암살단을 조직하여 일본고관 및 친일파에 대한응징과 숙청을 기도했고 이듬해 4월에는 광복단 결사대의 한훈,유장렬 등과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파수 명을 총살하고 오성 헌병대분소를 습격,장총 3정과 군도 1개를 탈취하였다.김의사는 이 해 8월 미국의원단 일행이 동양 각 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에 접하고 5월부터 미국의원단 환영행사에 참석하는 사이토 총독을 암살키로 하였다.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일경에 탐지되어 함께 거사를 모의했던 동지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한편 상하이로 건너간 김 의사는 의열단에 입단,1921년 7월 국내로 들어와충청도·전라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한 후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김 의사는 1923년 1월 조선총독이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로 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또다시 총독을 처단키로 하였다.권총 4정과 실탄 수 백발,대형폭탄을 가지고 농부차림으로 변장한 김 의사는 야음을 틈타 압록강철교를 건너 국내 잠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상하이주재 일본영사관의 통보로 조선총독부에서 엄중한 경계를 편 데다 상하이로부터 들여온 무기를 보관하고 있던 한우석 동지가 일경에 체포되면서 거사는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그러던 중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 투탄사건이 발생했다.이 사건으로 종로경찰서 건물 일부가 파괴되고,행인 7명이 크게 다쳤다. 거사후 김 의사는 삼판동(현 후암동)에 있는 매형(고봉근)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집요한 추적을 벌이던 일경은 폭탄 투척 후 5일만인 1월 17일 새벽김 의사의 은신처를 급습하였다.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 경부(警部)의 지휘 아래 20여명의 무장 일경들이 집을 포위한 가운데 총격전이 벌어졌는데이 과정에서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다무라가 사살되고 이마세,우메다 경부 등 수명이 중상을 입었다.일경의 포위망을 뚫고 나와 남산을 가로질러 장충동쪽으로 은신한 김 의사는 왕십리의 안장사(安藏寺)에 이르러 승복으로 변장한 후 일경을 기만하기 위해 짚신을 거꾸로 신고 산을 내려왔다.무내미(현수유리) 이모집을 거쳐 19일 새벽 일경의 경계망을 피해 혁신단 동지인 효제동 73번지 이혜수(李惠受·여)의 집에 은신,동상을 치료하는 한편 앞으로의거사를 구상하였다.그러나 거사 10일만인 1월 22일 새벽 이곳 은신처도 일경에발각되고 말았다.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의 지휘 아래 시내 4개 경찰서의 기마대와 무장경찰 수 백명이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한채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안으로들이닥쳤다.이후 3시간 반에 걸친 총격전 끝에 일경 10여 명을 살상한 김 의사는 오른쪽 넓적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인근집 화장실로 피신하였다가 단한 발 남은 탄환으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는 33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였다.가족들이 김 의사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확인한 총상은 무려 열 한 군데였다고 한다.김 의사는 1남 1녀를 두었으나 장남은 해방전에 요절하였고 조카 태운(泰運·72·경기도 수원 거주)씨가 양자로 입적돼있다. 이명화 독립기념관 연구원 * '의열 독립투쟁' 연재를 마치며지난 8월부터 시작된 본 연재는 이번 회로 막을 내린다.8월 13일자 ‘매국노의 상징’ 이완용을 응징한 이재명 의사를 시작으로 그간 의·열사 열여덟 분의 위국헌신(爲國獻身)의 삶을 되새겨 보았다.일황을 처단하려 했던 이봉창·박열·김지섭 의사,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강우규·송학선 의사,일제 침략자를 처단(모의 포함)한 안중근·윤봉길·백정기·전명운·장인환·조명하 의사,일제 침략기관에 폭탄을 던진 김익상·장진홍·김상옥·곽재기·박재혁·나석주 의사,친일파를 처단한 이재명 의사,그리고 의열단원으로 일곱 차례나 일경에 붙잡혀 16년동안 감옥생활을 한 김시현 의사 등등.우리 항일투쟁사에서 찬란한 공적을 남긴 의·열사는 이 분들 외에도 무수히많다.그 분들에 대해서는 후일을 기약키로 한다. 연재를 마치면서 한 가지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은 이 분들의 후손들의 삶이다.연재 중 확인결과 대부분의 후손들은 그동안의 소문대로 생활형편이 여유롭지 못했다.대개의 경우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특히 몇몇 후손들의 경우 현행 관계법의 문제로 인해 연금수혜조차 받지 못하고 있어안타까움을 더했다.최근 이들 가운데 일부는 선대가 받은 건국훈장을 당국에 반납,사회적 논란을 야기시킨 바 있다.관계당국은 그들을 외면만 할 것이아니라 관계법령을 개정해서라도 대책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다. 조국광복을 위해 일신을 초개와 같이 국가에 바친 의·열사들의 애국적 삶은 한민족과 더불어 유방백세(遺芳百世)할 것이다. 정운현기자 j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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