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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일언론 활동 베델 선생, 8월의 독립운동가로

    항일언론 활동 베델 선생, 8월의 독립운동가로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은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주역 고(故) 어니스트 베델(한국명은 배설)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베델 선생은 1872년 11월 3일 영국 브리스톨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특별통신원으로 임명돼 대한제국(1897~1910년)에 첫발을 디뎠고 같은 해 7월 18일 양기탁 선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대한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일본의 검열을 받지 않고 민족 진영의 대변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선생은 영국인의 치외법권을 활용해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글을 게재하는 등 항일언론 활동을 벌였다. 특히 일본이 1905년 을사조약을 강요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1906년 2월 영국 신문 런던트리뷴에 게재된 고종 황제의 밀서 사진을 크게 보도해 조약의 신빙성을 공개적으로 부인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 외무성은 영국 정부에 그를 추방하도록 요청했고 통감부는 반일적 신문기사를 구실로 1907년 10월 주한 영국 총영사에게 그의 처벌을 요구하는 소송장을 냈지만 추방에는 실패했다. 이에 통감부는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와 논설이 일본인 배척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영국 상하이고등법원에 다시 제소했고 선생은 상하이로 호송돼 3주간의 금고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선생은 1908년 7월 서울로 돌아온 뒤 항일 활동을 계속하다 1909년 5월 1일 37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병으로 병사해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정부는 1968년 선생이 한국의 독립과 언론 자유를 위해 싸운 공적을 기려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문창극 조부 알고보니 독립유공자…일제시대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

    문창극 조부 알고보니 독립유공자…일제시대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

    각종 ‘망언’으로 자격 논란을 일으킨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독립활동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은 독립유공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조선일보는 23일 국가보훈처 관계자의 말을 빌어 “대한독립단 대원으로 활동한 애국지사 문남규(文南奎) 선생과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가 동일 인물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문남규 선생이 활동한 대한독립단은 3.1운동 이후 효과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의병운동 계열의 인사들이 1919년 3월 결성한 단체다. 대한독립단은 국내진입작전과 남만주 동포사회의 자치를 목표로 했다. 문남규 선생은 1921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했다. 보훈처는 2010년 11월 순국선열의 날에 문남규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보훈처는 문남규 선생의 유족 확인이 안 돼 훈장을 임시로 보관했다고 전했다. 보훈처에 따르면, 문남규 선생은 문창극 후보자 조부와 원적지(평북 삭주)가 같고, 한자 이름도 동일하다. 또 1989년 사망한 문창극 후보자의 아버지인 문기석씨는 생전에 “7살(1921년) 때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숨졌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기석씨는 1914년 생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문창극 후보자는 총리 지명 이후 보훈처에 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문의해 왔다”면서 “한자 이름이 동일하고, 원적지가 같은 점, 문창극 후보자의 부친 증언 등을 미뤄 문 후보자의 조부를 애국지사 문남규 선생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열린세상] 스티븐슨 고문과 총리 후보자/김정현 소설가

    [열린세상] 스티븐슨 고문과 총리 후보자/김정현 소설가

    1909년 3월 21일, 대한제국 외교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D W 스티븐슨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황실과 정부는 부패하고 타락했다. 관리들은 인민의 재산을 약탈하고 있다. 게다가 인민은 우매하기 그지없다. 하여 한국은 독립할 자격이 없으며, 일본이 통치하지 않으면 러시아의 식민지가 될 것이다. 이토 통감의 시책은 조선인민에 유익하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봉급을 받고 있는 자로서 감히 할 수 없는 말이었는데, 배후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조종이 있었다. 미국에 거주하는 교민단체는, 특히 기독교계 주도로 격렬히 반발하며 발언 취소를 요구했지만 스티븐슨은 거절했다. 이틀 뒤인 3월 23일, 대한국인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은 스티븐슨을 사살해 대한제국과 한국인의 의기를 밝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해방 후 두 의사(義士)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安重根) 독립의군 참모중장도 스티븐슨 사살 사건에 용기를 얻어 이토 사살을 결심했다고 한다. 국가와 지사(志士)의 자세는 모름지기 그러한 것이며, 공무를 담임하는 자 역시 그러한 정신이 바탕이 돼야 한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과거 발언이 국민을 기막히게 하고 있다. 당사자는 종교인으로서의 발언이었다고 일축하려 든다. 그런데 스티븐슨 발언에 대한 반발의 주축도 재미한인기독교단체였다. 대한제국 당시의 국민이었고, 나라의 위기에 가장 가슴 조리던 당사자들이었다. 그들은 기독교인이 아니었거나 그 사이 하나님이 바뀌기라도 한 것인가. 아니면 그분들 역시 무지했다는 것인가. 도무지 종교인으로서의 발언이기에 문제될 게 없다는 생각의 근거를 모르겠다. 앞뒤 맥락이 잘려 왜곡되었다는 변명도 있다. 그러나 그는 유력 신문사의 주필을 지낸 비중 있는 오피니언 리더였다. 더구나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으니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앞뒤를 잘라 왜곡된 것이라 주장하더라도 그만한 지식인으로서 선택한 ‘표현’이었으니 그야말로 ‘DNA’에 잠재된 의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솔직히 술자리의 한담에서도 그런 표현을 했다가는 귀싸대기 맞기 딱 좋은 시절 아닌가. 일본과의 관계회복이 필요하다는 원칙에는 누구나 공감한다. 그러나 도저히 그럴 수 없을 만큼 막 나가는 게 오늘의 일본이다. 일본의 근본적 자세 변화가 없는데 먼저 나서 관계개선을 도모했다가는 어떤 국민적 반발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이런 살얼음 판국에 자신의 말이 일본 극우파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음에도 총리의 직을 수행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고집이 참으로 어이없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사살한 소식이 전해지자 고종 태황제께서는 ‘이토 공작은 대한제국의 자부(慈父)와 같은데 그 흉한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탄식하시며, 이토에게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읽으면서도 어찌나 내가 구차하고 부끄럽던지! 그 생각이 왜 갑자기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위안부 청산은 이미 끝났다는 칼럼은 제목만으로도 전대미문의 압권이다. 조금이라도 민족의식과 국가관이 있다면 애당초 사양했어야 할 일이었다. 혹여 대통령의 침묵과 새누리당에 기대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모르기는 하지만 설마 그런 과거 발언이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을 테니 대통령도 난감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이미 상처도 있는데, 임명한 지 며칠 만에 지명 철회를 할 수도 없는 대통령의 진퇴양난 침묵과 집권당의 어정쩡한 소명 기회에 기댄다면 그건 비겁한 정도를 넘어 엿 먹이는 행태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지금은 국가개조가 화두가 되는, 스스로도 어찌 될지 모르는 국민감정의 초비상 시국이다. 뭉개서 자리를 얻었다가 국민감정이 폭발하는 날에는…, 새누리당도 그렇지만 먼저 당사자가 내버린 염치와 양심을 되찾아 나라를 구하는 지사가 될 마지막 기회를 버리지 말기를 바란다. 부디!
  • 일제 침략상 폭로 英 매켄지 기자 포상

    일제 침략상 폭로 英 매켄지 기자 포상

    국가보훈처는 제95주년 3·1절을 맞아 ‘런던 데일리 메일’ 기자로 구한말 일제의 침략을 전 세계에 폭로한 영국인 프레더릭 매켄지(1869~1931년)를 비롯한 106명의 애국지사들을 포상한다고 25일 밝혔다. 이번에 포상을 받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74명(독립장 1명, 애국장 14명, 애족장 59명), 건국포장 10명, 대통령표창 22명이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다음 달 1일 3·1절 기념식에서 유족에게 수여된다.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는 매켄지는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가 일제의 만행과 우리의 의병활동을 목격한 뒤 ‘대한제국의 비극’(Tragedy of Korea)을 집필해 전 세계에 일제의 잔학상을 고발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을 출간해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전했다. 1920년에는 영국에서 ‘한국친우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후원하기도 했다. 이 밖에 1923년 9월 평안북도 희천에서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이다 체포된 송영수, 김중보, 맹희준, 이찬기, 장기순 등 ‘천마산대 항일전사’ 11명에게도 건국훈장이 추서된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독립운동가 구익균 선생 국립묘지 안장 결정

    과거 조세법 등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국립묘지 안장이 취소됐던 독립운동가 구익균 선생이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구익균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비서실장으로 국내외에서 20여년간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다. 1929년 신의주 학생 의거를 일으킨 뒤 중국으로 건너가 한국독립당의 한국유학생 지도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지난 4월 8일 10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선생은 대전현충원에 모실 예정이었지만 국가보훈처가 발인을 하루 앞두고 돌연 안장을 취소했다. 선생이 1972년 사문서 위조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 1973년 조세범처벌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됐다. 선생의 막내딸 구혜란(57)씨는 지난 5월 국민권익위원회 소속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국가보훈처의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심판을 청구했다. 이에 대해 행정심판위는 29일 “도산 안창호의 비서실장 등을 지내며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 일제에 항거하다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의 형을 받는 등 고인의 생전 공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고인이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훼손한다며 안장을 거부한 국가보훈처의 처분은 부당하다”고 결정했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2013 공직열전] (32) 미래창조과학부 (하) 1차관 산하 간부들

    [2013 공직열전] (32) 미래창조과학부 (하) 1차관 산하 간부들

    미래창조과학부 1차관 산하에는 기초과학 정책을 담당하는 옛 과학기술부 소속 부서들이 포진해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유독 부침이 심했던 조직이다. 최근 10년 동안만 봐도 부총리급 단독 부처인 과학기술부, 교육부와 합쳐진 교육과학기술부, 정보통신기술(ICT) 소관 부처인 방송통신위원회와 합종연횡한 미래창조과학부로 둥지를 바꿔 왔다. 우리나라의 국가 연구개발(R&D) 투자 규모가 선진국 수준보다 낮다는 지적이 조직을 흔드는 원인이 되어 왔다. 잇따른 조직개편의 영향인지 최근 ‘국제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과학기술산업 스코어보드 2013’에서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전체 R&D 투자 비중이 4.03%를 기록, 이스라엘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양성광 미래선도연구실장은 부처가 부침을 겪는 동안 조직의 구심점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맡아왔다. 화학공학 박사로 기술고시 출신인 양 실장은 교육과학기술부에서 교육 분야 통계 분석과 사교육 대책을 수립한 뒤 다시 과학 업무로 복귀했다. 교육 관료와 과학 관료 간 화학적 결합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 교과부 체제에서 양 실장은 ‘교육 업무를 한 과학 관료’로 희소성을 가진 관료였던 셈이다. 미래부에선 과학 관료로서의 적성을 살려 과학벨트 수정안을 마련하는 등 굵직한 과학 현안을 관장하고 있다. 이근재 연구개발정책관도 교과부 시절 대변인을 맡으며 교육 정책과 과학 정책의 융합에 힘을 보탰다. 7급 공채로 과기부 근무를 시작한 이 정책관은 국립과학관추진기획단 기획과장, 우주기술협력과장, 거대과학정책과장 등을 맡으며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다. 교과부 출범 초기에 과학기술정책과장을 맡아 ‘2040년을 향한 과학기술 미래비전’을 세웠고, 거대과학정책과장으로 나로호 발사 조사위원회 구성·운영 업무를 수행했다. 용홍택 연구공동체정책관은 한양대 전기전공 석사 과정을 수석 졸업한 뒤 기술고시 26회에 수석 합격했다. 2005년 4급 서기관으로 승진하고 2년차에 과기부 혁신기획관(과장)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교과부 출범 뒤 과학기술전략과장,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기획단장을 역임하는 등 미래 과학정책 방향을 구상하고 실행 방향을 결정하는 업무를 주로 맡아왔다. 문해주 우주원자력정책관은 나로호 1차 발사 때 주무 국장인 교과부 거대과학정책관을 지냈다. 이후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전문위원, 국립중앙과학관 전시연구단장을 거쳐 다시 우주·원자력 정책을 책임지고 있다. 국내 원전 수명연장 문제와 원전비리 재발방지 시스템 마련, 우주 발사체 사업, 달탐사 등 박근혜 대통령 공약사업 등이 모두 문 정책관 소관이다. 이동형 과학기술정책국장은 대전유성우체국장, 정통부 예산담당관, 방통위 융합정책과장, 국립전파연구원장 등 정통부 업무에서 잔뼈가 굵었다. 미래부 출범 당시에도 ICT 업무인 통신정책국장으로 임명됐지만, 정통부와 과기부가 통합된 미래부 내부에서 업무 융합을 꾀하기 위한 교류 인사로 인해 과학기술 업무를 담당하게 됐다. 당시 김주한 과학기술정책국장과 이 국장이 서로 자리를 바꿨다. 장석영 과학기술인재관도 직전에 방송통신위원회 국제협력관을 지낸 정통부 출신 관료다. 행시 출신으로 1990년 법제처에서 공직을 시작했지만, 1996년부터 정통부에 둥지를 틀었다. 영상통화 등 3세대 이동통신 도입, 가입자 정보를 탑재한 SIM카드 도입 등의 업무를 했다. 을미사변 직후 의병장으로 활약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은 장진성 열사의 증손자다. 유용섭 연구개발조정국장과 마창환 심의관은 미래 R&D 투자분야와 방향을 총괄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유 국장은 R&D 예산 관련 세미나와 설명회를 소화하며 과학기술 인력 간의 알력을 무마시키고 분야별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마 심의관은 각종 예산 관련 위원회를 두루 거쳐 새로운 사업 예산을 편성하고 조율하는 데 능하다. 2000년 경기도 중소기업과장, 2007년 국무조정실 경제총괄과장, 2008년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 사무처 기금사업과장을 지냈고 2010년 기획재정부 내 자유무역협정(FTA) 국내대책본부 기획총괄과장을 맡았다. 2001년 기업 입장에서 FTA 활용법을 다룬 책 ‘FTA 이해와 활용’을 썼다. 백기훈 성과평가국장은 행시 합격 뒤 1990년 충청체신청 영업과장으로 공직에 입문한 정통부 출신 관료다. 직전 보직은 방통위 기획조정실 정책기획관이다. 인터넷 게시판 실명제 정책, 와이브로를 비롯한 방송통신 기술의 해외진출 정책 등을 담당했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보훈처, 애국지사 29명 포상

    국가보훈처는 제74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미주 지역 독립운동 명문가 출신인 강영대·강영상 형제 등 29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을 추서한다고 14일 밝혔다. 대상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17명(애국장 5, 애족장 12), 건국포장 2명, 대통령표창 10명이다. 1909년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결성에 참여해 간부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강영대·강영상 형제에게는 각각 건국훈장 애족장과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1910∼1912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후원한 강명화(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 선생이 이들의 부친이다. 앞서 이들의 형제인 강영소(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 강영문(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 강영각(1997년 건국포장) 선생도 훈장을 받은 바 있다. 보훈처는 오는 17일 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을 거행한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전두환 ‘셀프훈장’ 9개·외교관 여권 반납

    전두환 전 대통령이 보유하고 있던 훈장 9개를 정부에 자진 반납한 것으로 확인됐다. 2006년 훈장이 취소되고 나서 환수 절차가 진행된 지 7년 만이다. 안전행정부는 23일 전 전 대통령이 훈장 9개를 검찰이 측근의 재산을 압류한 뒤인 지난달 8일 자진 반납했다고 밝혔다. 전 전 대통령이 반납한 훈장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태극무공훈장 등이다. 정부는 개정된 상훈법에 따라 대법원에서 실형을 받은 전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서훈을 모두 취소하기로 하고 2006년부터 환수 절차에 들어갔다. 노 전 대통령이 반납해야 할 훈장은 내무부 장관을 하면서 받은 청조근정훈장 등 11개다. 대통령이 퇴임 이후 받는 무궁화훈장은 서훈이 취소되지 않아 두 전 대통령 모두 보유할 수 있다. 한편 퇴직 후 해외 여행 시 외교관 여권을 이용해 논란이 됐던 전 전 대통령이 외교관 여권을 반납한 것으로 확인됐다. 외교부 관계자는 23일 “전 전 대통령이 지난 6월께 외교관 여권을 자진해서 반납하고 일반여권을 받아갔다”고 말했다. 국제법상 외교관 여권 소지자는 타국에서 특권·면제권을 갖고 출입국·세관 수속 과정에서 편의를 받을 수 있어 야당과 시민단체 등은 그동안 계속 외교관 여권 회수를 요구해 왔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윤우식 선생 생가·교남 YMCA회관 문화재 등록 예고

    윤우식 선생 생가·교남 YMCA회관 문화재 등록 예고

    문화재청은 경북 예천의 윤우식 생가와 대구의 옛 교남(嶠南) YMCA회관 등 항일유적지 2곳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한다고 14일 밝혔다. 남석(南石) 윤우식(尹雨植·1906~1934)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단체인 무명당(無名堂)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33년 9월 예천 지역에서 조선인의 이익을 옹호하는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구속돼 이듬해 재판 중 사망했다. 그의 예천 생가는 영남 지역의 전형적인 가옥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ㄴ’ 자형 건물인 사랑채와 ‘ㄱ’ 자형 건물인 안채가 ‘ㅁ’ 자형 배치를 이루며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사당이 자리한다. 옛 교남 YMCA회관은 3·1독립만세 운동 당시 주요 지도자들이 회합하던 장소다. 교남 YMCA의 임원과 회원 등 17명은 해방 뒤 건국훈장 애국장 등 포상을 받았다. 또 물산장려운동과 기독교농촌운동, 신간회(新幹會)운동 등 기독교 민족운동의 거점 공간으로 사용된 역사적인 곳이다. 1914년 건립된 2층 붉은 벽돌 건물로, 1층과 2층 사이가 ‘돌림띠’(Cornice)로 장식됐다. 창 위쪽은 아치로 인방(引枋)을 만들어 사각형 창문을 설치하는 등 1910~1920년대 조적조(組積造) 건축양식을 대변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향후 30일간의 등록 예고 기간과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문화재로 등록할 예정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독립운동자금 모금 ‘여걸 4인’ 박승일 선생 등에게 건국훈장

    독립운동자금 모금 ‘여걸 4인’ 박승일 선생 등에게 건국훈장

    의학 견습생(박승일·당시 23)과 교사(이겸양·당시 24), 은행원(김용복·당시 29), 전도사(김성심·당시 26) 등 하는 일은 제각각이었지만 이들은 1910년대 말 항일 비밀결사의 동지였다. 일제의 서슬이 퍼렇던 1919년 11월, 평양을 근거로 활동하던 북장로파 애국부인회와 감리교파 애국부인회가 통합된 대한애국부인회 일원들이다. 일제 당국에 발각될 때까지 쌀 800여 가마를 살 수 있는 2400여원에 이르는 거액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냈다. 1920년 10월 검거된 이들은 20대 중후반, 가녀린 여성의 몸으로 1~3년의 옥고를 치렀다. 대부분 1심에서는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가 2심에서 2~3년으로 형량이 늘었다. 서북 지역 3·1운동의 진원지인 평양에서 항일 비밀결사를 알아챈 일제가 이후 독립운동 발생의 싹을 자르고자 했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는 제68주년 광복절을 맞아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한 대한애국부인회 박승일 선생 등 ‘여걸 4인방’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는 것을 비롯해 207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고 13일 밝혔다.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129명(독립장 1, 애국장 34, 애족장 94), 건국포장 30명, 대통령표창 48명이다. 이 중 여성은 7명이다.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에서 ‘여자 독립군’이란 칭호를 받은 장태화 선생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다. 장 선생은 1924년 11월 독립운동 선전 문서를 배포하고 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혀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배설 선생은 세계에 일제 야욕을 가장 신랄하게 고발한 분”

    “배설 선생은 세계에 일제 야욕을 가장 신랄하게 고발한 분”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대한의 동포를 구하라.”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를 창간해 항일 언론투쟁에 앞장섰던 영국인 배설(베델·1872~1909) 선생 서거 104주년 추모식이 서울 마포구 양화진 성지공원에서 1일 열렸다. 이곳은 배설 선생과 함께 외국인 선교사들이 묻혀 있는 장소다. 배설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린 추모식에는 이철휘 서울신문사 사장, 최완근 서울지방보훈처장, 스콧 와이트먼 주한영국대사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이 사장은 추모사를 통해 “언론인 배설 선생은 영국인이었지만 어느 애국지사 못지않게 우리 민족을 사랑했고 인류애를 실천했던 분”이라면서 “대한제국 말기 민족정론지 대한매일신보 창간을 통해 일제의 침략 야욕과 만행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세계 만방에 알렸다”고 소개했다. 와이트먼 대사는 “올해는 한국과 영국의 국교 수립 130주년이 되는 해”라면서 “배설 선생은 한국과 영국의 관계를 크게 증진시킨 인물”이라고 말했다. 국방부 군악대의 추모연주로 시작된 행사는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임이조 전 서울시무용단 단장은 추모춤 ‘거룩한 님이시여’를 공연했고 대한독립군가선양회는 ‘배설 송가(頌歌)’를 불러 그를 기렸다. 배설 선생의 본명은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로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나 32세 때인 1904년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한국에 왔다. 같은 해 6월 민족지도자 박은식, 양기탁, 신채호 선생과 함께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를 창간했다. 항일투쟁의 대변자 역할을 하던 배설 선생은 억울한 옥살이를 했고, 그에 따른 후유증으로 1909년 5월 1일 37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그에게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김재원 배설선생기념사업회장은 “후손들에게 배설 선생의 뜻을 전할 수 있도록 기념관 건립을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부고] ‘광복군 훈련대장’ 애국지사 전리호 선생

    애국지사 전리호 선생이 지난 25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91세.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4년 1월 일제의 의해 평양42부대 학도병으로 징집됐다. 그해 5월 일본군에서 탈출해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 한국광복군훈련반 훈련대장을 지내면서 정보교육을 담당했다. 정부는 1990년 고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광희 여사와 아들 경만·경원씨, 딸 영화·영수·영림씨가 있다. 빈소는 전북 군산 중앙장례식장, 발인은 27일 오전 11시, 장지는 군산 인피면 봉화공원. (063)464-0004.
  • 4월의 독립운동가 김붕준

    4월의 독립운동가 김붕준

    국가보훈처는 29일 김붕준(1888~1950) 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19년 서울에서 3·1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군무부 서기와 참사, 국무원 비서장 등을 역임했다. 1939년 임시의정원 15대 의장을 맡아 독립운동 세력의 단결에 힘썼다. 194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고 1945년 신한민주당을 창당하는 등 조국 광복에 헌신했다. 광복 후 신탁통치반대와 통일민족국가 건설운동에 전념하다가 1950년 6·25 전쟁 때 납북돼 전란 속에서 타계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로를 기리어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부고] ‘일제 식민교육 저항’ 애국지사 이봉양 선생

    일제강점기 식민교육에 저항했던 애국지사 이봉양 선생이 18일 오전 6시 별세했다. 89세. 평안북도 용천 출생인 고인은 1938년 7월 김원구, 전약용 등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 알리기 운동을 비롯해 역사 연구에 매진했다. 1939년 9월 지우개에 태극기를 새겨 친구들에게 나눠 주는가 하면, 신의주 중학교에 다니던 1940년 9월에는 하숙집에서 일본의 황국식민교육정책에 항거하기로 뜻을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1942년 3월 이러한 활동이 일본 경찰에 적발됐고, 고인은 태극기와 역사책을 압수당한 뒤 체포됐다. 이 선생은 이듬해 4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 2남 2녀가 있다. 발인은 20일 오전 7시,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4묘역이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영안실 1호실. (02)2258-5940.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쿠바 한인4세 “독립투사 증조부 나라 대학생…꿈만 같아”

    쿠바 한인4세 “독립투사 증조부 나라 대학생…꿈만 같아”

    독립운동가 후손인 쿠바의 한인 4세가 어려운 과정을 거쳐 할아버지 나라의 대학에 다니게 됐다. 아자리아 임(20·여)은 다음 달 4일 한남대의 영어전용 특성화 단과대인 린튼글로벌칼리지에 입학한다. 아자리아 임은 “할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한국 땅을 밟고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다. 4년간 대학에 다니면서 한국의 경제, 문화, 과학 등 놀라운 발전상을 빠짐없이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증조부는 일제강점기 때 쿠바 이주 1세대로 이역만리 타국에서 항일운동을 펼친 임천택(1903~1985) 선생이다. 경기 광주에서 태어나 일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해 멕시코 애니깽 농장으로 팔려갔다가 18세 때 쿠바로 이주한 뒤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를 설립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김구 선생이 이끄는 임시정부가 재정난에 허덕일 때는 쿠바 교민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벌여 군자금을 보냈다. 정부는 임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7년 사회주의 국적으로는 최초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그의 유해를 옮겨와 대전 현충원에 안장했다. 임 선생의 증손녀인 아자리아 임이 한국에 유학을 온 것은 한남대 중국통상학과 정명기 교수와 만나면서다. 정 교수가 2011년 쿠바를 찾았다가 교포로부터 임 선생 후손 얘기를 듣고 도운 것이다. 하지만 아자리아 임이 수시모집 외국인 전형으로 한남대에 합격하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쿠바가 사회주의 국가로 미수교국이었기 때문이다. 몇 개월간 서류 증명과 까다로운 심사를 거쳤다. 쿠바 한인협회의 도움으로 한글 공부에도 매달렸다. 우여곡절 끝에 양국 정부가 임 선생의 공적을 인정해 한국 유학을 허가하면서 길이 열렸다. 아자리아 임은 “쿠바에서 가수 싸이 열풍이 대단해 한국 피가 흐르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면서 “글로벌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해 졸업 후 한국 기업에서 일하고 싶고, 쿠바에 돌아가면 한국문화 전도사가 되겠다”고 밝혔다. 대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부고] 항일운동 애국지사 이도윤 선생

    [부고] 항일운동 애국지사 이도윤 선생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항일운동을 한 애국지사 이도윤 선생이 25일 별세했다. 89세. 경남 양산 출신인 선생은 부산 동래중학교 재학 당시인 1940년 11월 23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에서 일본인 심판들의 편파 판정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선생은 시위에서 조선독립만세 등 구호를 외쳐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배성씨 등 2남 2녀가 있다. 빈소는 부산영락공원. 발인은 27일 오전 11시. 장지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4묘역. 010-4059-4562.
  • [부고] 항일 결사체 조직 서상태 선생

    [부고] 항일 결사체 조직 서상태 선생

    일제의 민족 차별에 분개해 항일결사체인 흥맹회를 조직한 애국지사 서상태 선생이 19일 오후 10시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88세. 1924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0년 일본 호전중학교 재학 중 일제의 민족 차별에 분개해 3명의 동지를 규합한 뒤 항일결사 흥맹회를 조직해 일본 규슈(九州) 방면의 조선인 노무자들을 상대로 계몽운동을 펼쳤다. 고인은 1944년 4월 일본 경찰에 체포됐으며 그해 10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윤희씨와 1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 장례식장 8호실. 발인은 21일. 010-5314-9668.
  • [부고] 애국지사 이병희 여사

    애국지사 이병희 여사가 2일 오후 2시 25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94세. 1918년 서울에서 태어나 1933년 종연방적주식회사에서 근무하며 동지들을 모아 노동운동을 벌였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40년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했다. 의열단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 1943년 체포돼 구금됐다. 함께 독립운동을 협의하다 체포된 먼 친척 이육사도 같이 구금됐다. 1944년 이육사가 옥중에서 순국하자 그의 시신을 화장하고 유품을 정리해 국내 유족에게 전달했다.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아들 조영철씨가 있다. 빈소는 중앙보훈병원, 발인은 4일 오전 7시,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02)483-3320.
  • [부고] 애국지사 김삼 전 국회의원 별세

    [부고] 애국지사 김삼 전 국회의원 별세

    강릉 지역 독립운동가였던 김삼 전 국회의원이 18일 오전 4시 30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95세. 김 전 의원은 강원 동해안 지역의 유일한 생존 애국지사였다. 일제 강점기 때 강릉에서는 처음으로 ‘삼원당’이라는 서점을 내고 독서회를 구성, 징용반대운동 등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40년 구금돼 7개월간 고문을 당하고 함흥형무소에서 5년간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풀려나 고향 강릉에서 광복을 맞은 이후 지역 청년들과 옛 동지들을 규합해 건국청년회, 우국동지회, 한국독립당, 민족통일건국전선 등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제6대 국회의원을 비롯해 초대 강릉시 의원 및 초대 강원도 의원, 윤봉길·김창숙 의사 기념사업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90년엔 건국훈장(애족장)을 서훈받았다. 유족으로 부인 최완자(82) 여사와 4남 3녀가 있다. 빈소는 강릉 동인병원, 발인은 22일. (033)650-6165.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부고] 광복군 입대 항일운동 김정숙 여사

    [부고] 광복군 입대 항일운동 김정숙 여사

    광복군에 입대해 항일운동을 펼친 애국지사 김정숙 여사가 4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96세. 김 여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김붕준의 딸로서 어머니와 오빠, 언니, 남편이 모두 애국지사다. 1916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나 1919년 어머니와 중국으로 망명, 1937년 학생전시복무단을 조직해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1940년 충칭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해 상임위원 겸 선전부장을 맡다 같은 해 광복군에 들어가 대적심리공작을 수행했다. 1942~45년 임시정부에서 일하다 귀국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아들 고원석(사업)씨와 딸 원삼(미국 거주)씨가 있다. 빈소는 경희의료원, 발인은 8일 오전 10시. (02)958-9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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