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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7회 순국선열의 날 12명 포상

    오는 17일 제77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12명의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들이 새로 포상을 받는다. 15일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이번에 포상 대상으로 선정된 유공자는 건국훈장 5명(애국장1, 애족장4), 건국포장 2명, 대통령표창 5명 등이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7회 순국선열의 날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될 예정이다. 건국포장 대상자인 이응열 선생은 충무공의 14대 종손으로 1941년 서울에서 조선국자 주식회사 사무원으로 재직 중 동료 등에게 일제가 내세우는 내선일체론을 비판하고 조선독립을 역설하다 체포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10개월 이상의 옥고를 치렀다.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장학선 선생은 1920년 음력 4월 평남 덕천군 태극면에서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해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돼 징역 10년형을 받고 6년 이상의 옥고를 치렀다. 1949년 이래 지난해까지 독립유공자로서 포상을 받은 사람은 건국훈장 1만 654명, 건국포장 1178명, 대통령표창 2744명 등 총 1만 4576명이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독립운동가 김성권·강혜원 선생 유해 56년 만에 美서 귀환…대전현충원 안장

    독립운동가 김성권·강혜원 선생 유해 56년 만에 美서 귀환…대전현충원 안장

    일제강점기에 미국 내 한인의 결속과 애국정신 고취에 전력하며 독립운동을 한 김성권(1875~1960) 선생의 유해가 56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다. 흥사단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로즈데일 묘지에 안장된 김 선생과 부인 강혜원(1885∼1982) 선생의 유해를 16일 고국으로 봉환해 대전 현충원에 안치할 예정이라고 6일 전했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31~1938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민족운동단체 흥사단의 이사장을 지냈다.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 기관지 ‘독립’(1943년)을 창간하는 등 해방 때까지 민족운동에 힘썼다. 강 선생 역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미주 여성 통합독립운동단체인 대한여자애국단 초대 단장을 맡으며 매월 모은 후원금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 외교·선전·군사활동을 지원했다. 부부는 흥사단과 미주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도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미국에 사는 한인 동포 자녀를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하는 등 조국 독립에 일평생을 바쳤다. 정부는 부부의 공훈을 기리고자 강 선생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김 선생에게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번 봉환은 국가보훈처가 미국에 사는 유족의 동의를 받아 추진했다. 16일 오전 11시 부부의 유해가 들어오는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에서 봉영식을 열고 대전 현충원으로 봉송해 영결식을 한다. 유해는 애국지사 5묘역에 안장된다. 1946년 민간에서 시작된 국가유공자 유해 봉환 사업은 1975년부터 정부가 맡았고 지금까지 31차례에 걸쳐 131위가 고국 땅을 밟았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독립운동가 연병호 선생 기념 증평군에 항일역사공원 준공

    충북 증평 출신 독립운동가인 연병호(1894~1963) 선생을 기리는 항일역사공원이 31일 준공됐다. 충사업비 45억원이 투입된 이 공원은 도안면 석곡리 연병호 생가 일원에 3만여㎡ 규모로 조성됐다. 연 선생의 성장과정과 독립운동 등의 자료를 모아 놓은 전시실, 연 선생이 독립신문에 기고한 글을 응용한 조형물 등으로 꾸며졌다. 연 선생은 1894년 증평군 석곡리 555에서 출생했다.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을 결성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의 연계활동을 위해 대한정의단군정사에 합류했다. 이어 1937년 친일파인 상해거류조선인 회장 저격사건으로 상하이에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초대, 2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홍성열 증평군수는 “연병호 항일역사공원은 군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 줄 수 있는 문화관광의 명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증평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운암 김성숙 선생 기리자” 강동에 기념관 추진

    “운암 김성숙 선생 기리자” 강동에 기념관 추진

    일제강점기 중국을 거점 삼아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던 운암 김성숙 선생을 기리는 시설이 만들어진다. 18일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는 지난 4~14일 김성숙센터(조감도) 건립을 위해 강동구민 1만 6000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양준욱 서울시의회 의장, 조동탁 강동구의회 의장 등도 서명했다. 운암 선생은 1930년대 후반 중국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해 항일운동을 벌이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해 외교활동을 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내고,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운암김성숙센터는 강동구 일자산 공원 안에 지하 1층, 지상 3층(2만 1388㎡) 규모로 들어설 계획이다. 내년 3월 첫 삽을 떠 2018년 8월 15일 광복절에 완공한다는 목표다. 사업회 관계자는 “2012년부터 센터 건립이 추진됐으나 주민 반대를 이유로 미뤄져 왔다”면서 “최근 주민들로부터 서명을 받았고 서울시와 강동구로부터 사업을 진행하겠다는 답변까지 받아 차질 없이 나아갈 것으로 본다”고 주장했다. 기념사업회는 주민 서명을 포함해 홍보에 주력하고 있다. 강동구의 도움으로 구 곳곳에 현수막 20여개를 설치하고, 천호역과 둔촌역 등지에서 기념관의 취지에 대해 설명했다. 기념관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운암 김성숙 선생을 비롯해 임시정부 요인의 자료를 전시하고, 주민을 위한 도서관과 어린이집을 만들 예정이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조동빈 애국지사 숨진 채 발견…아파트서 투신 추정

    조동빈 애국지사 숨진 채 발견…아파트서 투신 추정

    광복군에서 활동했던 애국지사 조동빈(92)옹이 거주하던 아파트 화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조 옹이 투신한 것으로 보고 경위를 조사 중이다. 20일 충남 천안동남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오후 3시 55분쯤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조동빈 옹이 거주하는 아파트 화단에서 조 옹이 쓰러진 채 발견됐다. 조 옹은 천안지역의 유일한 생존 독립운동가다.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 구급대원이 조 옹을 병원으로 옮겼으나 결국 숨졌다. 경찰은 조 옹이 숨지기 전 아파트 10층 복도 난간에 걸터 앉아 있었다는 주민의 진술을 토대로 조 옹이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주민이 조 옹이 아파트 난간에 걸터앉아있다고 119에 신고했으나, 구급대가 도착하기 전 몸을 던진 것으로 보인다”며 “가족 등을 상대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천안시 관계자는 “조 옹은 평소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크셨던 분으로 공로 대부분이 인정돼 월 250만원 가량의 연금을 받으며 부인과 함께 지내며 경제적으로 어렵게 생활하지는 않으셨다”면서 “다만, 주위 분들이 모르는 개인적인 고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만 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안타까워 했다. 조옹은 1924년 평안남도 평양 출생으로 일본 도쿄에서 중학교에 다니다 강제징용을 거부하고 1945년 상하이로 건너 가 광복군에 입대해 대한독립애국단 결성과 임시정부 선전, 재정자금 조달,게릴라 임무 수행 등을 했다. 조 옹은 이같은 공훈을 인정받아 1963년 대통령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바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92세 애국지사의 투신, 왜?

    천안지역의 유일한 생존 애국지사인 조동빈옹(92)이 20일 오후 3시 55분쯤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소재 아파트 화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조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정확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조 옹은 이날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 화단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주민의 신고를 받은 119 구급대원이 조 옹을 인근 병원으로 옮겨 심폐소생술을 받았으나 끝내 숨을 거뒀다. 경찰은 조 옹이 숨지기 전 아파트 10층 복도 난간에 걸터 앉아 있었다는 주민의 신고내용을 토대로 조옹이 119 구급대가 도착하기 전 스스로 뛰어내려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천안동남경찰서 관계자는 이와 관련,“유서 등 투신의 정황을 파악 할 수 있는내용은 발견 되지 않았다”며 “주변인과 가족들을 상대로 정확한 경위를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천안시 관계자는 “조 옹은 평소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크셨던 분으로 공로 대부분이 인정돼 월 250만원 가량의 연금을 받으며 부인과 함께 지내며 경제적으로 어렵게 생활하지는 않으셨다”면서 “다만, 주위 분들이 모르는 개인적인 고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만 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안타까워 했다. 한편 조옹은 1924년 평안남도 평양 출생으로 일본 도쿄에서 중학교에 다니다 강제징용을 거부하고 1945년 상하이로 건너 가 광복군에 입대해 대한독립애국단 결성과 임시정부 선전, 재정자금 조달,게릴라 임무 수행 등을 했다. 조 옹은 이같은 공훈을 인정받아 1963년 대통령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바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열린세상] 대한민국은 언제 건국되었나/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열린세상] 대한민국은 언제 건국되었나/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대한민국 건국 시기를 두고 논쟁이 일고 있다. 단순히 시기를 둘러싼 논쟁이 아니라 독립운동사에 대한 인식 문제가 바탕에 깔려 있는 문제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임시헌장(법)’을 반포했다. 전문격인 ‘선포문’은 “한성(漢城·서울)에 기의(起義)한 지 삼십유일(三十有日)에 평화적 독립을 300여주(州)에 광복하고…임시헌장을 선포하노라”라고 밝혔다. 1919년 3·1혁명이 일어난 지 30여일 후에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했다는 것이다. 이때 ‘선서문’도 발표했는데 “(대한)민국 원년(1919) 3월 1일 아(我) 대한민족(大韓民族)이 독립을 선언”했다고 천명했다. 1919년 3월 1일 대한민국은 독립을 선언했고, 그에 따라 4월 11일 정부를 수립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서문’은 “국토광복과 방기확국(邦基確國·나라의 토대를 확실히 세움)의 대사명을 과(果·달성)하기를 자(玆·이)에 선서하노라”라고 해서 국토를 되찾아 나라의 기초를 확실히 세우는 것이 ‘대사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이 대사명은 완성됐다. 그래서 1948년 7월 17일 제정한 제헌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했다고 규정했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이 아니라 1919년 3·1혁명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고, 1948년에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했다는 것이다. 1987년 개정한 현행 헌법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이를 명시했다. 일제강점기 일왕 척살에 나섰던 이봉창 의사의 ‘선서문’ 날짜는 “대한민국 13년(1931년) 12월 30일”이고, 윤봉길 의사의 선서문 날짜도 “대한민국 14년(1932년) 4월 26일”이다. 이런 독립전쟁을 계승해 1948년 8월 15일 드디어 ‘망명’의 딱지를 떼고 ‘환국정부’를 수립했던 것이다. 1948년 6월 26일 제헌국회에서 진헌식 의원은 “대한민국은 3·1혁명 투쟁을 통하여 조성된 국호이며 이 역사적 광영을 가진 국호야말로 대내적으로는 민족 통일의 기초가 되고, 대외적으로는 민족 투쟁의 긍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 후 초대 법무장관 이인도 “(1948년) 8월 15일 이전에도 대한민국이 있었다”고 말한 것처럼 1919년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는 것은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동의하는 개념이었다. 이를 미국과 비교해 보자. 미국은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에 13개 주 대표들이 모여서 토머스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선포했다. 그 후 1783년 9월 3일 파리조약에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았고, 연방의회를 구성한 후 1789년 4월 30일 조지 워싱턴을 대통령으로 하는 연방정부를 수립했다. 미국의 건국절은 언제일까? 독립을 선언한 1776년 7월 4일이다. 1919년의 임시의정원은 각 지방 인민의 대표의원으로 조직됐는데, 인구 30만명에 1인의 의원을 선출했다. 경기·경상·충청·전라·함경·평안도는 6인씩이었고, 강원·황해는 3인씩이었다. 중국·러시아·미국 교포들에게도 3명씩의 의원을 배정했다.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고, 2조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차(此)를 통치함”이었다. 임시헌장 1, 2조는 왕정이었던 ‘대한제국’이 민주공화정인 ‘대한민국’으로 발전했음을 선포한 것이었다. 1948년의 제헌국회 개회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라고 두 차례나 ‘국가’가 아니라 ‘정부’를 수립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프리카의 여타 신생독립국들처럼 1948년 건국된 것이 아니다. 수천 년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를 잠시 일제에 빼앗겼다가 되찾은 것이다. 작금의 건국절 운운은 독립운동사를 말살하고 친일파들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1948년 건국절 제정 시도는 대한민국 헌법과 독립운동사를 부정하고, 선열을 모독하며 국론을 분열시키는 것으로 백해무익하다. 즉각 중단돼야 마땅하다.
  • “할아버지가 일제 침략 세계 알렸다니 자랑스러워”

    “할아버지가 일제 침략 세계 알렸다니 자랑스러워”

    “할아버지가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의 전신)를 창간하고 일제의 침략에 대한 진실을 세계에 알렸다니 자랑스럽습니다.” 15일 서울 중구 서울신문사를 방문한 어니스트 베델 선생의 손녀 수전 제인 블랙(60)은 “할머니는 한국에서 가져 온 가구들을 설명하며 할아버지에 대해 늘 ‘훌륭한 분’이라고 말하곤 하셨다”며 “아직 할아버지의 뜻이 한국에 살아 있는 것 같아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베델(1872~1909)은 1904년 영국 ‘데일리크로니컬’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왔다가 그해 7월 양기탁, 신채호 등과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을사조약(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이에 반대한 고종의 친서를 게재하기도 했다. 베델은 이 친서를 영국에 보내 런던트리뷴에 싣는 등 일본의 침략 행위를 폭로하는 항일언론 활동을 벌였다. 베델은 대한매일신보를 폐간시키려는 일제의 공작에 항거하다 1909년 심장병으로 별세했다. 이날 함께한 베델의 손자 토머스 오언 베델(58)은 “1968년 한국 정부가 할아버지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할 때 한국을 방문하고 48년 만에 다시 오게 됐다”며 “헌신적이었던 할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해 주는 한국에 감사한다”고 전했다. 그의 딸 메건 베델(21)은 “할아버지와의 인연으로 후손인 우리까지 따뜻하게 맞아 준 한국이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이들은 국가보훈처가 광복 71주년을 맞아 해외의 독립운동가 후손 41명(총 8개국)을 초청하면서 한국을 찾았다. 지난 12일에는 청와대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및 유족과의 오찬에도 참석했다. 이들은 사단법인 베델기념사업회(고문 이상업·감사 김덕기)와 함께 이날 오후 양화진 성지공원에 있는 베델 묘역을 참배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부고] 애국지사 전상엽 선생 별세

    [부고] 애국지사 전상엽 선생 별세

    일제에 강제 징집된 상황에서도 항일운동을 했던 애국지사 전상엽 선생이 지난 5일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평안남도 평원에서 출생한 선생은 1943년 평양 대동 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월 일본군 ‘조선인 학도 육군특별지원병제도’의 이름 아래 평양사단 내 42부대로 강제 징병됐다. 평양사단은 그해 7월, 훈련병 과정을 마치고 42부대를 중심으로 집단항쟁을 계획했다. 선생은 김완룡, 최정수, 김윤영, 박성화 등과 모의해 8월부터 동지 포섭 등의 항쟁 준비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평양사단 내 각 부대 학병들은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했고, 선생은 학병 항쟁 조직의 작전참모로 활약했다. 평양사단 병영폭파 등을 계획했지만, 폭약과 탄약 입수가 어렵게 되자 부대를 탈출해 만주 접경지대 등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때를 기다려 평양사단을 폭파하기로 했다. 그는 1944년 11월로 날을 택해 거사를 준비하던 중 발각돼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감시하던 일본 헌병을 때려눕히고 탈옥했지만 2개월 만에 체포됐다. 1945년 6월 징역 8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으로 출옥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인정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등을 수여했다. 유족으로 2남 3녀가 있다. 발인은 8일 오전 9시, 장지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 빈소 강남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3층 특실. (02)2258-5940.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헐버트, 중국에 한글 도입 설파… 中도 긍정 검토”

    “헐버트, 중국에 한글 도입 설파… 中도 긍정 검토”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가 1910년대 중국 수뇌부에 한글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글자 체계를 제안했고 중국 정부도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했다는 증언이 담긴 자료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26일 서울 종로구 YMCA에서 열린 헐버트 내한 130주년 기념 글 모음집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참좋은친구) 출간 기자간담회에서다. 저자인 김동진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장은 이날 헐버트의 이 같은 제안이 담긴 미국 신문을 공개하며 “헐버트가 살고 있던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시에서 발행되는 ‘리퍼블리컨’지에 그가 중국에 3만개의 한자 대신 한글을 바탕으로 한 38개의 소리글자 체계를 제안했고 중국 정부뿐 아니라 외국에 사는 중국인 식자층도 이 제안을 지지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며 “기사 스크랩 과정에서 신문 발행 일자가 잘려 나가 언제 발행됐는지 알 수 없지만 기사 속 중화민국 건국에 대한 문맥으로 보아 1913년쯤 쓴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어 “헐버트가 당시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 조선에 상주하던 위안스카이(袁世凱) 등 중국 고위 인사와 교류하면서 한글 사용을 제안했을 것으로 보인다”며 “헐버트는 한글이 이 땅에 제대로 뿌리내리기도 전에 한글을 중국에 수출하려는 한글 세계화의 첫걸음을 뗐다”고 평했다. 김 회장은 헐버트 손자에게서 이 신문 기사를 입수했으며, 관련 내용은 저서에도 자세히 언급돼 있다. 헐버트의 한글 예찬은 저서 곳곳에서 눈에 띈다. ‘나는 한글을 200개가 넘는 세계 여러 나라 문자와 비교해 봤지만 문자의 단순성과 소리를 표현하는 방식의 일관성에서 한글과 견줄 문자는 발견하지 못했다. 한글이야말로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문자 중 하나다.’(335쪽) 헐버트는 ‘한국사’ 등 단행본 7권, 소설 4권, 희곡 4편, 자서전 3권, 200여편의 논문 및 기고문을 남겼다. 이번에 출간된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엔 단행본을 제외한 200여편의 논문 및 기고문 중 헐버트가 1886년 7월부터 1897년 10월까지 쓴 57편의 논문 및 기고문이 수록돼 있다. 김 회장은 “200여편의 논문과 기고문을 20년에 걸쳐 수집했다”며 “나머지 150여편의 논문 및 기고문도 곧 번역해 출판할 것”이라고 말했다. 헐버트는 1886년 7월 4일 조선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 영어교사로 조선에 첫발을 디뎠다. 고종의 대미특사와 헤이그특사로 활약한 독립운동가, 한글운동가, 어문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선교사 등 헐버트를 일컫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1891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하고, 훈민정음을 학문적으로 분석한 논문을 발표해 한글의 우수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도 했다. 일제의 박해를 받아 미국으로 쫓겨난 1907년까지 AP통신 등의 특파원으로도 활동했다. 1950년 외국인 첫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에 이어 2014년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美 선교사 헐버트 “중국, 한글 공식 문자 지정 긍정 검토했다”

    美 선교사 헐버트 “중국, 한글 공식 문자 지정 긍정 검토했다”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가 1910년대 중국 수뇌부에 한글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글자 체계를 제안했고 중국 정부도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했다는 증언이 담긴 자료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26일 서울 종로구 YMCA에서 열린 헐버트 내한 130주년 기념 글 모음집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참좋은친구) 출간 기자간담회에서다.  저자인 김동진 헐버트박사 기념사업회장은 이날 헐버트의 이 같은 제안이 담긴 미국 신문을 공개하며 “헐버트 박사가 살고 있던 미국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시에서 발행되는 ‘리퍼블리컨’지에 그가 중국에 3만개의 한자 대신 한글을 바탕으로 한 38개의 소리글자 체계를 제안했고 중국 정부뿐 아니라 외국에 사는 중국인 식자층도 이 제안을 지지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며 “기사 스크랩 과정에서 신문 발행 일자가 잘려 나가 언제 발행됐는지 알 수 없지만 기사 속 중화민국 건국에 대한 문맥으로 보아 1913년쯤 쓴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어 “헐버트가 당시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 조선에 상주하던 위안스카이(袁世凱) 등 중국 고위 인사와 교류하면서 한글 사용을 제안했을 것으로 보인다”며 “헐버트는 한글이 이 땅에 제대로 뿌리내리기도 전에 한글을 중국에 수출하려는 한글 세계화의 첫걸음을 뗐다”고 평했다. 김 회장은 헐버트 손자에게서 이 신문 기사를 입수했으며, 관련 내용은 저서에도 자세히 언급돼 있다. 헐버트 박사의 한글 예찬은 저서 곳곳에서 눈에 띈다. ‘나는 한글을 200개가 넘는 세계 여러 나라 문자와 비교해 봤지만 문자의 단순성과 소리를 표현하는 방식의 일관성에서 한글과 견줄 문자는 발견하지 못했다. 한글이야말로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문자 중 하나다.’(335쪽)  헐버트 박사는 ‘한국사’ 등 단행본 7권, 소설 4권, 희곡 4편, 자서전 3권, 200여편의 논문 및 기고문을 남겼다. 이번에 출간된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엔 단행본을 제외한 200여편의 논문 및 기고문 중 헐버트가 1886년 7월부터 1897년 10월까지 쓴 57편의 논문 및 기고문이 수록돼 있다. 김 회장은 “200여편의 논문과 기고문을 20년에 걸쳐 수집했다”며 “나머지 150여편의 논문 및 기고문도 곧 번역해 출판할 것”이라고 말했다.  헐버트는 1886년 7월 4일 조선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 영어교사로 조선에 첫발을 디뎠다. 고종의 대미특사와 헤이그특사로 활약한 독립운동가, 한글운동가, 어문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선교사 등 헐버트를 일컫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1891년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하고, 훈민정음을 학문적으로 분석한 논문을 발표해 한글의 우수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도 했다. 일제의 박해를 받아 미국으로 쫓겨난 1907년까지 AP통신 등의 특파원으로도 활동했다. 1950년 외국인 첫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에 이어 2014년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보훈처 “김일성 친인척 서훈 취소하겠다”

    국가보훈처는 29일 북한 김일성 주석의 외삼촌인 강진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해 최근 논란이 된 것과 관련, “상훈법 개정을 추진해 빠른 시일 내 취소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초 “서훈 기준에 부합한다”는 해명을 내놓았다가 야당의 공세에 기존 입장을 번복한 것이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보훈처는 이날 입장자료를 통해 “2010년 추서된 김일성의 삼촌인 김형권과 2012년 추서된 김일성의 외삼촌인 강진석 등은 국가정체성·국민정서를 고려해 독립유공자서훈 공적심사위원회의 논의와 상훈법 개정 추진 등을 검토해 빠른 시일 내에 취소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김일성의 친인척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가 20대 국회에서 공론화된 만큼 김일성 친인척뿐만 아니라 ‘북한 고위층과 관련된 인물’에 대해서도 새로운 공훈 심사 기준을 마련하겠다”고 전했다. 보훈처는 지난 27일까지 강진석이 북한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고, 공적심사위원회는 연좌제 적용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서훈에 문제가 없다는 원칙을 고수했었다. 하지만 지난 28일 국회 정무위원회 업무보고에 출석한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김일성의 부모인 김형직(부)과 강반석(모)에게도 훈장을 줄 수 있느냐’는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의에 “검토해 보겠다”고 답변한 것이 논란을 더 키웠다. 박 처장의 답변이 문제가 되자 보훈처가 뒤늦게 입장을 번복한 것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포상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재의 포상 기준의 원칙적인 측면에서 답변한 것”이라면서 “지난해 공적심사위원회에서 ‘서훈 취소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해 고민하던 차에 야당이 박 처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공세를 해 와 서훈을 취소키로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보훈처, 北 김일성 주석 ‘외삼촌’에게 ‘건국훈장’ 수여 논란

    보훈처, 北 김일성 주석 ‘외삼촌’에게 ‘건국훈장’ 수여 논란

    북한 김일성 전 주석의 외삼촌으로 북한에서 ‘최고 존엄’으로 예우받고 있는 강진석이 국가보훈처의 추천으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부실 검증’ 의혹을 제기했으나 보훈처는 “강진석의 공적내용이 합당하고, 광복 전 사망해 북한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면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27일 탐사보도 전문매체 <뉴스타파>에 따르면 이명박 정권 시절이던 2012년 광복 67주년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강진석은 김일성의 큰외삼촌인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훈장은 국가보훈처의 추천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수여했다. 당시 보훈처장은 박승춘 처장이다. 건국훈장 중 4등급에 해당하는 애국장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기를 공고히 함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된다. 강진석에게 훈장이 수여된 사유는 “평남 평양의 청년회와 백산무사단 제 2부 외무원으로 활동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로 돼 있다. 강진석이 3.1운동 직후 백산무사단(‘백산’은 백두산의 줄임말)의 단원으로 독립운동을 한 것은 당시 일본 경찰의 체포 기록과 국내 독립운동사 연구 등을 통해 사실인 것으로 확인된다. 문제는 보훈처가 훈장 수여를 위한 공적심사 과정에서 강진석이 김일성의 ‘외삼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보훈처 공적심사위원회는 포상 대상자에게 흠결은 없는지, 훈격은 적절한지 등을 심사하는 기구로, 후보자들의 친일 행적 뿐만 아니라 북한 정권과의 관련 여부 등도 검증해야 한다. 독립운동을 한 사실이 있다하더라도 이후에 친일로 변절하지 않았거나 북한 정권 수립에 간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돼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강진석은 북한 내에서 김일성 3대를 포함해 ‘선생님’ 칭호가 붙여진 5명 가운데 한 명이다. 북한에서는 ‘최고 존엄’의 표현을 ‘선생’이라고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뉴스타파>는 “더 심각한 문제는 보훈처가 이 같은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고도 잘못을 바로잡기 보다는 ‘은폐’하려 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3월 기준 보훈처의 공식적인 ‘독립유공자 포상 현황’에 따르면 2012년 한 해 전체 포상은 318명으로 이 중 애국장은 50명으로 돼 있다. 그러나 현재 보훈처 홈페이지에는 2012년도 전체 포상 인원이 317명, 그리고 애국장은 49명으로 수정돼 있다. 강진석이 통계에서 빠진 것이다. 보훈처의 공훈전자사료관에서 강진석 관련 정보가 일제히 사라진 것도 지난해 3월 이후다. 보훈처는 이때까지만 해도 훈장을 전달하기 위해 강진석의 후손을 찾고 있었지만 지금은 훈장 미전수자 명단에서도 강진석을 삭제한 상태다. <뉴스타파>는 “박 처장은 2011년 2월 취임 후 보훈처 공적심사위원회 위원 50명 중 23명을 한꺼번에 교체해 물의를 일으켰다”며 “이는 선례가 없던 일로 부실 심사 가능성은 물론, 뉴라이트나 친정부 인물을 심사위원회에 포함시키기 위한 포석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며 부실심사의 책임이 박 처장에게 있음을 강조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그간 정부가 북한 정권 참여자는 물론 최고 권력자의 친인척에게 서훈한 전례가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강진석을 훈장 수훈자에 포함시킨 것은 검증 부실로 인한 ‘사고’로 추정된다”면서 “박 처장이 취임 직후인 2012년 초 정치적 의도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 위원들을 대폭 물갈이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심사가 이뤄지지 못했다”고 부연했다. 이런 의혹 제기에 대해 보훈처는 “2012년에 강진석이 추서 받은 것은 맞고, 지난해 ‘어떻게 김일성의 외삼촌에게 서훈할 수 있느냐’는 민원이 들어와 확인한 결과 김일성 외삼촌이 맞았다”면서 “그래서 재심했는데 당사자가 광복 전 사망해 북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고, 공적 내용이 포상 기준에 합당하다는 결론이나와 서훈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료관 통계 등에 빠져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재심 기간에는 일단 통계에서 빠지는데 결론이 나온 후 업데이트가 안 된 것 같다”고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내일 백범 김구 67주기 추모식

    내일 백범 김구 67주기 추모식

    백범 김구 선생 67주기 추모식이 26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용산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다고 국가보훈처가 24일 밝혔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주관으로 열리는 추모식에는 정세균 국회의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독립유공단체장, 시민 등 3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김구 선생은 자주독립을 위한 의병 활동과 계몽운동을 벌였으며 1919년 3·1 운동 이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냈다. 광복 이후 반탁운동, 남북연석회의 참가 등으로 통일된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힘쓰던 중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에서 암살됐다. 정부는 김구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 ‘韓 독립 주창’ 조지 노리스 건국훈장

    조지 윌리엄 노리스(1861~1944) 전 미국 연방 상원의원이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미국 의회에서 한국 독립을 주창한 공로로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안호영 주미 대사는 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대사관저에서 한국 정부를 대신해 노리스 전 의원의 외증손자인 데이비드 노리스 래스(49) 박사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노리스 전 의원은 1919년 7월 1일 미국 상원에서 일제에 한국 침략을 중단하라고 비난하는 연설을 하고 일제의 식민통치 실상을 기록한 증거물을 의회에 제출하는 등 한국의 독립 열망과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미국 의회의 주요 의제로 부각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독립신문 창간’ 서재필 정신 기린다

    ‘독립신문 창간’ 서재필 정신 기린다

    국가보훈처는 8일 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 창립 등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송재 서재필 선생의 65주기를 기리는 추모식인 ‘제3회 송재 문화제’ 행사를 개최한다고 7일 밝혔다. 사단법인 송재서재필기념사업회(이사장 김중채) 주관으로 전남 보성의 서재필기념공원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는 이용부 보성군수와 각계인사 등 5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서재필(1864~1951) 선생은 개화사상의 거두인 김옥균 등과 함께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조지워싱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95년 12월 귀국한 선생은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해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했고 1896년 7월 국내 동지들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부고] 애국지사 유흥수 선생 별세

    [부고] 애국지사 유흥수 선생 별세

    일제강점기 비밀결사 모임을 결성하고 항일운동을 벌였던 애국지사 유흥수 선생이 지난 12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95세.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유 선생은 대구사범학교 재학 시절인 1939년 윤독회(輪讀會)를 조직했다. 1940년 1월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작품을 모은 책자 ‘반딧불’을 발간했다. 같은 해 11월 항일 학생결사 모임인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를 조직했고, 다음해 3월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회합하며 항일의식을 다졌다. 기관지 ‘학생’도 이때 발간했다. 일제에 체포된 유 선생은 미결수 상태로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옥고를 치르던 유 선생은 1945년 8·15 광복으로 출옥했다. 1964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유족은 부인 박현이씨와 3남 2녀. 빈소는 서울 강동구 중앙보훈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 15일 오전 9시,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이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기록물로 입증된 조선 첫 女비행사

    기록물로 입증된 조선 첫 女비행사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날아가서 조선총독부와 천왕궁을 폭파하리라.” 한국과 중국에서 첫 여류비행사로 꼽히는 독립운동가 권기옥(1901~1988) 지사가 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처음 만난 도산 선생과 임시정부 군무총장을 지낸 노백린 장군에게 한 말이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권 지사의 비행사 참전활동을 입증하는 기록물이 최근 국가기록원에서 복원됐다. 2일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권 지사가 항공학교에서 받은 필업증서(졸업장·오른쪽)와 국민정부 군정부에서 받은 상위 관찰사 위임장(왼쪽) 등 권 지사 관련 기록물 7건 24개를 복원했다고 2일 밝혔다. 이 가운데 필업증서와 위임장은 권 지사의 모교이자 소장기관인 숭의여고가 복원을 의뢰했다. 평양 출신인 권 지사는 1919년 숭의여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어린 나이에 옥고를 치렀다. 일본 경찰에 쫓겨 중국으로 망명한 후 1925년 2월 중국 남서부의 운남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졸업해 한·중 양국에서 최초의 여류비행사가 됐다. 이번에 복원된 필업증서는 2005년 영화 ‘청연’을 통해 우리나라 최초 여류비행사로 잘못 알려진 박경원보다 권 지사가 2년 정도 앞선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권 지사는 1933년 국민정부군 정부 본부 항공서 교육과 편역원 겸 공군 상위에 임명됐는데, 이번 복원물 가운데 이 임명장도 포함됐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안중근 의사 의거 106주년 기념식 26일 열려

     국가보훈처는 ‘안중근 의사 의거 106주년 기념식’이 26일 오전 10시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사)안중근의사숭모회 주관으로 열린다고 23일 밝혔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1909년 10월 26일 안 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일이다.  이날 기념식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박유철 광복회장을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및 회원, 시민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다.  한편, 안중근 공원이 있는 부천시에서도 광복회 부천시지회 주관으로 26일 오전 10시 30분부터 기념식이 개최된다. 이 행사에는 이광태 인천보훈지청장, 김만수 부천시장 등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광복회원, 시민 등 3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안중근 의사(1879. 9. 2.~1910. 3. 26.)는 황해도 신천 사람으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국권 회복의 길을 강구했다. 부친상을 당하고 돌아와서는 사재를 털어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광무황제의 폐위, 군대의 해산 등 나라가 식민지 상태에 이르자 다시 해외로 나가 이범윤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908년에는 의군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해 경흥·회령 등지에서 대일 항전을 전개했다. 그 후 다시 러시아령의 브라디보스톡·연추 등지를 왕래하면서 구국의 방도를 모색했고, 1909년 봄에는 김기룡·조응순·황병길 등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단지동맹’을 결성하며 일사보국(一死報國)을 맹세했다.  1909년 9월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의거 당일인 10월 26일 9시경 하얼빈역에서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도열해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쏘아 3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일본 헌병이 그를 체포하려고 하자 하늘을 향해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안 의사는 1909년 11월 러시아 헌병대에서 여순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돼 심문과 재판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일본의 부당한 침략 행위를 공박하며 시정을 요구하였고 조국의 완전 독립과 동양 평화의 정착을 주장했다. 안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은 후 3월 26일 순국했다.  안 의사는 순국 전 “우리나라 국권이 회복되거든 내 뼈를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보훈처는 23일 케이디켐(주)·자강산업(주)의 민남규 회장이 안 의사의 유해 찾기 사업을 위해 1억원을 (사)안중근의사숭모회 안응모 이사장에게 기부했다고 밝혔다.  민 회장은 평소 안 의사의 고귀한 애국심을 존경해 왓으며, 4년 전부터는 안 의사 숭모사업에 참여해왔다.  그는 지난해 6월 안 의사의 순국 장소인 중국 뤼순 감옥과 유해 매장 추정지를 방문하고 1세기가 지난 현재까지도 안 의사의 유언을 지키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했다고 보훈처는 전했다.  민 회장은 “하루빨리 정확한 매장지 관련 기록을 찾아 유해를 발굴해 안 의사의 유언을 받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안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용산에서 부활하는 유관순 열사의 애국혼

    용산에서 부활하는 유관순 열사의 애국혼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게 유일한 슬픔이라고 유언을 남겼던 유관순 열사의 추모비를 이태원에 세웁니다.” 15일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서울시청에서 브리핑을 열고 “이태원부군당 역사공원에 가로 0.8m, 높이 2m, 세로 0.25m의 주탑 1개와 가로 0.6m, 높이 1.5m, 세로 0.25m의 보조탑 2개로 이뤄진 유관순 열사 추모비를 세운다”면서 “오는 23일 오후 3시 제막식을 포함한 추모제를 연다”고 밝혔다. 추모비 주탑에는 유 열사 유언을 새겼고, 보조탑에는 각각 추모비 건립 취지와 유 열사의 연보를 넣었다. 지난해 10월 66명의 주민과 전문가로 구성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추모비 건립을 추진한 이후 1년여 만의 완성이다. 추모제에는 주민 300여명이 참석해 유공자 포상, 추념사, 추모사, 추모비 개막식, 헌화 및 분향 등을 한다. 또 추모행사로 헌시 낭독, 살풀이 공연, 만세삼창을 진행한다. 오는 30일부터 다음달 2일까지 유 열사 추모 예술전도 용산아트홀에서 연다. 추모비를 세우는 이태원부군당 역사공원은 유 열사의 시신이 마지막으로 잠들었던 이태원 공동묘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소다. 유 열사는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 4월 1일 아우내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해 투옥됐고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같은 해 10월 14일 새벽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렀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하지만 1936년 일본이 이곳에 군용기지를 조성하기 위해 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시신이 사라졌다. 현재 이태원 공동묘지 자리는 주택가다. 성 구청장은 “유 열사는 1962년 건국훈장 3등급(독립장)에 추서됐는데 대통령 헌화는 1등급(대한민국장), 2등급(대통령장)인 경우에만 진행한다”면서 “이번 추모비 건립이 유 열사의 훈격 상향 및 역사적 재평가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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