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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대문구 첫 국가유공자 명패 주인 된 유관순 열사 조카

    동대문구 첫 국가유공자 명패 주인 된 유관순 열사 조카

    文정부 전까지 연금 제외 유장부씨 혜택 1457명에 명패… 수당 2만원으로 상향“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유덕열 서울 동대문구청장은 18일 동대문구 답십리동에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인 유장부(81)씨 자택을 찾아 대문에 국가유공자 명패를 달았다. 동대문구에 거주하는 국가유공자 중 첫 번째로 국가유공자 명패를 받은 유씨는 유관순 열사의 조카다. 국가유공자 명패 달아드리기 사업은 문재인 정부 들어 실시하는 보훈 정책의 하나로 국가보훈처가 지자체와 함께 국가유공자를 존경하는 마음을 이웃들과 나누기 위해 추진하고 있다. 유씨 집안에는 유관순 열사를 포함한 독립유공자가 9명이지만 유장부씨는 문재인 정부 이전까지 연금 혜택을 받지 못했다. 독립유공자 후손 가운데 직계 선순위 유족 1명에게만 연금이 지급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연금 혜택을 못 받아 어려운 삶을 이어가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찾아 지원금을 주면서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는 설명이다. 유씨도 지원 대상으로 선정돼 올해부터 생활조정수당 및 생활지원금으로 월 70여만원을 받고 있다. D제약회사 영업직 출신인 유씨는 현재 광복회 서울시지부 보훈회관 관리인으로 있다. 유씨는 지난 3월 1일 제100주년 3·1절 중앙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유관순 열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이에 앞서 지난달 28일 유 구청장으로부터 유공자 표창장을 받았다. 동대문구는 유씨를 시작으로 올해 독립유공자 62명, 민주유공자 7명, 국가유공자 1388명 등 총 1457명의 국가유공자 집에 국가유공자 명패를 달아 줄 예정이다. 동대문구는 앞서 지난 1월부터 국가유공자 보훈예우수당을 기존 월 1만원에서 2만원으로 상향했다. 유 구청장은 이날 유씨 집을 방문하기에 앞서 광복회 동대문지회 회원 10여명과 오찬 간담회를 갖고 회원들을 격려했다. 유 구청장은 “수많은 애국지사의 희생으로 현재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라면서 “국가유공자를 예우하는 것은 이들의 헌신에 보답하는 방법으로 앞으로도 국가유공자 삶의 질 향상에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임정, 온전한 조국 독립 꿈꿨는데… 통일이 진정한 광복 완성”

    “임정, 온전한 조국 독립 꿈꿨는데… 통일이 진정한 광복 완성”

    이런 삶을 살아온 이가 있다.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이하 임정) 청사 옆에서 도산 안창호(1878~1938) 등의 축하를 받으며 태어났다. 상하이~항저우~난징~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으로 이어지는 중국 대륙을 임정과 함께 풍찬노숙하며 횡단했다. 한국인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김(金)씨 대신 진(陳)씨로 성을 바꿔 학교를 다녔고, 백범 김구(1876~1949)와 김치에 거친 밥을 겸상했다. 석오 이동녕(1869~1940)과 성재 이시영(1869~1953)을 할아버지라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던 소년이었다. 1930년대 중국 영화 황제 미남배우 김염(1910~1983)이 드나든 집에서 자란 이 소년은 훙커우공원 폭탄의거의 윤봉길(1908~1932)이 “내 아들과 동갑”이라고 사탕 사주며 예뻐했다. 엄마 손잡고 약산 김원봉(1898~1958)의 부인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인 박차정(1910~1944)이 폐병으로 세상을 뜨기 전 병문안 다니곤 했다.이 소년은 열아홉 되던 해 광복을 맞았다. 올해로 91세인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의 이야기다.만주군 장교에서 일제 패망 직후 광복군으로 신분을 바꾼 박정희(1917~1979)와 거의 같은 시기 미군 수송선을 타고 임정 식솔과 함께 상하이에서 부산으로 왔다. 귀국 뒤 이승만(1875~1965)에게 세배를 갔고, 결혼식 주례는 해공 신익희(1894~1956)가 섰다. 의용군으로 끌려가다 겨우 도망쳤더니 아버지는 전날 납북돼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말았다. 조선일보 수습 1기 기자로 일하며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한 역사적 오보를 바로잡는가 하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사법살인’을 당한 뒤 훗날 무죄로 판결난 조용수(1930~1961)와 함께 민족일보 창간멤버로서 진보언론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그의 삶 곳곳에는 현대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이 출몰한다. ●모스크바 3상회의 역사적 오보 바로잡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역사의 한복판에서 부침을 함께한 김 회장. 대한제국 법무대신 등을 지내다 가솔을 이끌고 임정으로 망명한 뒤 독립운동에 나섰던 동농 김가진(1846~1922)이 그의 할아버지고,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김의한(1900~1964)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정정화(1900~1991)가 그의 아버지, 어머니다. 2019년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은 감회는 누구와 비교할 바 아니다. 지난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김 회장을 만났다.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함께 충칭 임정 청사를 방문해 당시의 삶과 활동을 설명할 정도로 기력이 좋았지만, 지금은 거동이 좀더 불편해졌고, 청력도 많이 약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기억은 또렷했고, 또박또박 짚어내는 임정의 가치와 정신은 청춘처럼 빛났다. -올해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은 소회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임정은 조국의 독립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지금 같은 반쪽짜리 독립은 아니었습니다. 분단은 진짜 독립이 아닙니다. 분단이 있는 한 광복은 미완성입니다. 1946년 제가 귀국할 때만 해도 분단이 이렇게 오래가리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70년 동안 분단이 고착됐으니 짧은 시간 내에 통일은 어려울 듯합니다. 일단 남북의 평화로운 공존이 필요하고, 자유롭게 교류하고 협력하는 모습 자체가 통일의 과정이지요.” -젊은 사람들은 물론 많은 사람이 임정 100주년의 의미나 혹은 독립운동 자체에 대해 별 감흥이 없는 듯합니다. 그런 반응을 접하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감흥이 없는 게 당연하지요. 그렇다고 젊은 세대를 탓할 것은 아닙니다. 국가와 정치가 하기에 달려 있는 부분이고 그만큼 잘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대한민국은 헌법에서 밝히고 있듯 임정의 법통을 이어 왔습니다. 광복 이후 그 부분을 좀더 정확히 밝히고 임시정부의 목표와 강령을 실천했다면 그렇지 않았겠죠. 정치를 통한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교육을 통해 이를 후세와 공유해야 합니다.” -최근 정부가 임정 수립일인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려다 사실상 백지화하기로 한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쉽습니다. 한때 건국절 등 논란이 일기도 했던 만큼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대통령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시대인 만큼 어쩔 수 없죠. 교육기관 등을 통해 항일투쟁의 역사, 친일 인사들의 행적, 일제의 침략 역사 등을 정확히 배울 수 있게 하고 임정의 가치를 잘 공유하면 됩니다.” ●남북관계 복원 난관… 곧 좋은 소식 있을 것 기대 -통일이 광복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최근 북미 정상회담 흐름 등 한반도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지만 지난달 베트남 회담에서 확인됐듯 여전히 뿌리 깊은 북미 상호 불신을 드러낸 부분 또한 있습니다. 일본과의 관계도 악화일로고요. “일단 남과 북이 서로를 통일의 주체로 인정해야 합니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유소년 시절 서구에서 유학하는 등 서구문화의 영향이 분명히 있을 것이며, 그로 인해 안목 또한 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완전히 망쳐 놓은 남북 관계를 복원하는 작업인 만큼 난관이 있더라도 곧 좋은 소식이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야 우리의 통일에 관심이 없겠지만, 자신의 명망을 높이는 일이거나 미국에도 이익이 되는 일이니 북미 관계 정상화 및 한반도 평화를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일본이야 기대할 부분이 별로 없고, 당분간 집권당도 안 바뀔 것 같고…. 훼방하지 않도록만 우리가 잘 관리해야죠. 내 생전에 통일까지는 아니라도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남북의 모습은 꼭 봤으면 좋겠습니다.” 김 회장은 임정의 정신과 교훈을 얘기하며 평화와 통일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실제 임정은 공화주의를 지향한 좌우합작 정부였다. 좌익, 우익, 아나키스트, 유림까지 모두 모인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우익 인사인 백범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평양을 찾은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임정의 정신이 통일 지향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다음달 11일 열리는 임정 수립 100주년 기념식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 선포식’도 치러질 예정인데 이 기념관 건립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요.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그 선양사업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현재는 아무개 선생, 아무개 선생 등 개별 후손 중심으로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후대로 넘어갈수록 먹고살기 바쁘고 관심도 시들해져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념관이 만들어지면 국가가 체계적으로 독립운동 관련 자료도 한데 모으고 개별 독립운동가들의 뜻과 업적을 기릴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2021년 완공 예정인데, 늠름히 서 있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요.” -꼭 그러셔야죠. 그런데 조심스럽습니다만, 말씀하신 임정의 진정한 독립 정신을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제대로 이어 가지 못한 채 과거 독재정권과 타협하는 일도 제법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어요. 시대가 그랬고, 교육이 그랬으니까요. 또 후손들이라고 아버지, 어머니와 똑같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물론 타협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광복회를 만들어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을 권력 주변으로 많이 포섭했습니다. 유공자 서훈도 원칙과 기준 없이 남발하다시피 했고요.” 실제 김 회장의 조부(동농 김가진)는 항일 비밀조직인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해 활동했고 망명 뒤 임정 고문, 북로군정서 고문을 맡았으며, 그의 장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장으로 치러졌다. 하지만 아직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밖에 약산 김원봉 또한 독립유공 서훈이 없다. 반면 이승만 전 대통령의 비서 출신인 임병직 전 외무부 장관은 가장 높은 서훈인 대한민국장을 받아 원칙과 기준에 대한 의문을 낳게 했다. 지난 13일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포상 보류자 2만 4737명에 대해 재심사를 하겠다고 밝힌 만큼 투명하면서도 체계적인 서훈이 내려질 것인지 기대를 모으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임정 건국강령 21세기 복지국가정책 닮은 꼴 임정이 1941년 발표한 건국강령은 21세기 복지국가들이 표방하는 정책과 다를 바 없다. 1948년 제헌의 내용적 기초가 됐으며 2019년 현재도 여전히 유효한 실천적 과제를 담고 있다. 의료비 면제, 학비 면제, 최저임금제, 노동자 대표 경영관리 참여권 보장, 실업보험, 사형제 폐지, 노동자와 이익을 나누는 이익균점제, 몰수 재산 무산자 이익 위한 국영기관 이전 등을 주 내용으로 삼았다. 김 회장과의 얘기가 깊어질수록 100년 전 임시정부가 꿈꾼 나라를 우리가 잘 만들어 가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youngtan@seoul.co.kr
  • 독립운동 하다가 친일파로 변절한 오현주·이종욱

    오, 남편 안전 보장 조건 애국부인회 밀고 이, 승려 신분으로 신궁참배·일제에 헌금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와 청년외교단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한 인물도 있다. 오현주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언니 오현관, 정신여학교 동문 이정숙·장선희와 함께 혈성부인회를 조직한 인물이다. 그런데 대구지법 판결문을 보면 그는 “남편이 5월 중국에서 돌아와 조선 독립은 도저히 그 목적을 이룰 수 없으니 이런 운동은 그만두라고 엄금받아 관계를 끊을 것을 맹세했다”며 “김마리아가 주가 돼 부인회를 위해 노력해 준다고 하면 탈퇴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에는 “탈퇴를 희망하고 10월 19일 재결성 모임에 출석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김마리아 권유에 의해 출석했다. 그날 새롭게 결성한 뒤 13도 지부장을 명했고 회원은 약 2000명이 됐다. 나는 그 후는 애국부인회에 깊게 관여하지 않았다”는 자수 조서가 등장한다. 오현주는 자기 부부와 언니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애국부인회를 밀고했고, 결국 1919년 11월 28일 애국부인회와 청년외교단 수뇌부가 체포됐다. 오현주 부부도 검거됐지만 하루 만에 풀려났다. 오현주는 해방 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됐으나 불기소됐고, 남편은 기소 후 보석 석방됐다가 이후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월정사 승려로 있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참가해 청년외교단 총무와 외교특파원을 역임한 이종욱은 궐석재판을 받고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대구지법 판결문에는 “이병철이 이종욱을 만나 임시정부 정황을 들었는데, 이종욱이 상하이를 가는데 임시정부에 어느 정도 송금해 달라고 해 3명 몫을 합해서 550원을 이종욱에게 건넸다”고 돼 있다. 이런 공적이 인정돼 이종욱은 1977년 건국훈장(3등급)을 추서받았다. 그러나 1930년대 친일 행적이 뒤늦게 확인돼 2011년 서훈이 취소됐다. 후손들은 ‘친일 행적은 독립운동을 위한 위장´이라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보훈처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행정소송에서도 패소했다. 이종욱은 청년외교단 검거 사태 이후 불교계로 돌아갔다. 조선불교 총본산 주지 대표였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신궁을 참배하고 일본군을 위해 기원제를 지내라고 조선 내 각 사찰에 하달했다. 또 친일강연회를 열고 일본 외무대신의 성을 따서 창씨개명했다. 조선 승려들에게 5만 3000원을 모금해 헌금도 했다. 1941년 대동아전쟁이 일어나자 전쟁물자 조달을 위해 사찰의 범종 등을 헌납했다. 해방 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조계종 중앙총무원장과 동국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잊혀지지 않는 한국인 이미륵

    잊혀지지 않는 한국인 이미륵

    독립운동가로, 독일에서 작가와 교육자로 활동했던 이미륵(본명 이의경)을 기념하는 추모식 및 강연회가 독일 현지에서 열린다. 미륵은 그의 필명이다. 독일 뮌헨 이미륵기념사업회는 오는 23일 이미륵 추모식 및 기념강연을 연다고 12일 밝혔다. 추모식은 이미륵이 안장된 그라펠핑 시 프리드호프 묘역에서 열린다. 강연회는 뮌헨 이미륵한국문화공간에서 그의 삶과 휴머니즘에 기반한 작가 활동을 주제로 열린다. 1899년 3월 8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이미륵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다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뒤 일본 경찰에 ?긴다. 그 뒤 그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과 프랑스를 거쳐 1920년 독일에 정착했다. 당시 이미륵은 상해 임시정부 산하 비밀운동단체 대한청년외교단 편집부장을 맡고 있었다. 이미륵은 뮌헨대학에서 이학박사를 받은 뒤 같은 대학 동양학부에서 한국어와 동아시아문학, 동양철학 등을 강의했다. 1931년 소설 ‘하늘의 천사’라는 작품으로 독일 문단에 데뷔했고, 한국에 관련된 이야기 및 단편 ‘수암과 미륵’ 등을 발표했다. 1946년에는 자전적인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독일어 소설을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독일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가 됐다. 이 작품은 독일 교과서에도 수록됐고, 전쟁 직후 피폐했던 독일인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치유해준 글로서 사랑을 받았다. 또 작품이 아름다운 독일어로 쓰였다는 평도 받았다. 당시 대부분 독일인들은 그의 작품을 통해 한국을 알게 됐고 한국에 대한 친근감을 느끼게 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50년 위암으로 타계한 그는 1963년 대통령표창(독립운동공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등을 받았다. 기념사업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를 조망하는 행사를 준비해 왔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겠습니다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겠습니다

    영화 ‘암살’ 주인공 모델 남자현 의사 손자 김시복씨 자택 방문 감사 표해 보훈예우수당도 파격 인상 月 7만원“오늘의 대한민국은 독립유공자의 희생과 공헌 위에 서 있습니다. 이에 보답하기 위해 명패를 달아 드립니다.” 조은희 서울 서초구청장은 11일 여성독립운동가인 남자현 의사의 손자인 김시복(75)씨 자택을 찾아 대문 앞에 ‘독립유공자의 집’이라고 쓰인 명패를 직접 달아 드렸다. 서초구가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남부보훈지청과 함께 서초구 거주 독립유공자, 국가유공자 등 1800여명의 자택을 방문해 명패를 달아 드리는 사업의 하나로 마련한 자리다. 명패는 포스코의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로 만들어 ‘영원히 녹슬지 않는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남자현 의사는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이 맡았던 주인공 안윤옥의 실제 모델로 알려졌다. 3·1운동에 참가한 이후 만주로 건너가 무장독립단체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하며 조선총독 암살을 기도하는 등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인물이다.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며 여성독립운동가 중 가장 높은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은 바 있다. 언론인 출신인 김씨는 국가보훈처 차장,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 등을 지낸 바 있다.구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 보훈가족들을 위한 보훈정책도 서울시 25개 자치구 최고 수준으로 올린다는 목표로 강화하고 있다. 실제로 2017년 보훈회관을 건립해 복지관 등에서 셋방살이하던 서초구의 보훈단체들이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도록 했다. 같은 해 서울시 최초로 참전유공자 위문금을 신설한 데 이어 올해는 위문금액을 연 30만원에서 35만원으로 올렸다. 특히 올해는 지역 내 국가보훈대상자에게 지급하는 보훈예우수당을 서울시 최고 수준으로 파격 인상했다. 기존 월 5만원에서 월 7만원으로 높인 것. 서울시 자치구 평균은 2만~3만원 수준이다. 앞서 지난해부터 국가유공자 장례용품 지원서비스도 시작했다. 구는 오는 21일 서초문화예술회관에서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대한민국 음악제’도 연다. 대한독립선언 및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보훈가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취지에서 마련했다. 음악제는 뉴서울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아리랑 공연을 시작으로 바리톤 박경준, 소프라노 박현주·임청화, 남성성악가그룹 라클라쎄 등이 무대에 오른다. 피날레는 객석과 무대가 하나 돼 독립군가를 합창하며 새로운 100년의 장을 연다. 조 구청장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께 감사와 존경을 드린다”면서 “앞으로도 최고로 예우해 드릴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고, 대한민국 최고의 보훈 도시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데스크 시각] 도산 안창호의 마지막 바람/손원천 문화부장

    [데스크 시각] 도산 안창호의 마지막 바람/손원천 문화부장

    “나를 유상규군 곁에 묻어 주게.” 꼬박 81년 전 이맘때, 임종을 앞둔 도산 안창호(1878~1938)가 남긴 말이다. 그의 마지막 소원에 등장하는 이는 태허 유상규(1897~1936)다. 대체 태허는 어떤 사람이었길래 도산이 조상과 가족도 멀리하고 그 곁에 묻히길 바랐을까. 미세먼지가 매캐하던 봄날, 태허의 묘가 있는 망우리공원을 다녀온 까닭은 오로지 그 궁금증 때문이었다. 한때 망우리 공동묘지로 불리던 곳. 여태 이 이름이 귀에 익은 이들이 많을 터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서울시, 서울관광재단 등이 인문학길을 조성하는 등 살뜰하게 살핀 덕에 이젠 제법 명소로 발돋움한 모양새다. 망우리공원에 묻힌 유명 인사는 60명이 넘는다. 만해 한용운 등 독립지사를 비롯해 시인 박인환, ‘코리안 엘비스’ 차중락, 화가 이중섭, 여성 작가 김말봉 등의 묘가 25만여평의 공원에 흩어져 있다. 그중 하나가 도산의 묘터와 태허의 묘다. 지난 3일 찾은 태허의 묘. 이낙연 국무총리의 이름이 적힌 꽃바구니가 볕 받으며 묘 앞을 지키고 있다. 태허의 묘 바로 위는 도산의 묘터. 봉분은 사라지고 묘비만 덩그러니 남았다. 안내판과 김영식의 책 ‘그와 나 사이를 걷다’(호메로스) 등에 적힌 내용을 추려 도산과 태허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면 이렇다. 태허는 경성의전을 나온 엘리트 의사다. 요즘으로 치면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서울의대’ 출신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태허는 학업을 중단하고 중국 상해 임시정부로 건너가 도산의 비서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에 나선다. 그러다 인재가 필요한 민족이니 고국으로 돌아가 학업을 마치라는 도산의 권고로 1924년 귀국해 학업을 잇는다. 귀국 후에도 동우회, 청년개척군 등의 조직을 통해 독립운동을 계속한 것은 물론이다. 이후 의사와 독립운동가의 길을 병행하던 태허는 환자를 돌보다 세균에 감염돼 39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다. 둘의 사연은 2년 뒤 도산이 세상을 뜰 때 다시 한번 세인들의 가슴을 적셨다. 일제강점기의 잡지 ‘삼천리’는 도산이 사망하기 며칠 전에 남긴 말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나 죽거든 내 시체를 고향에 가져가지 말고, 달리 선산 가튼 데도 쓸 생각을 말고, 서울에다 무더 주오. 공동묘지에다가. 유상규군이 눕어잇는 그겻 공동묘지에다가 무더 주오.” 도산이 태허를 얼마나 아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마지막 소원대로 도산은 1938년 태허의 묘 바로 위에서 영면에 들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1973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도산공원이 조성됐고, 도산의 묘는 이장됐다. 지금 남아 있는 건 도산의 묘비뿐이다. 이후 태허는 1990년 건국훈장을 받는 등 뒤늦게 독립유공자 반열에 올랐고, 국립묘지로 이장할 수 있는 자격까지 얻게 됐다. 그러나 태허의 후손들은 국가의 호의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도산의 묘가 옮겨진 마당에 도산의 묘비가 있는 망우리공원에서 태허의 묘를 옮기는 것은 사제의 넋까지 갈라놓는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이제 도산공원으로 가 보자. 공원에 들면 도드라져 보이는 도산의 동상 둘이 객을 맞는다. 하나는 서 있고, 하나는 앉았다. 벤치에 앉은 도산이 선 도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한 구도다. 도산의 동상이 많아서 나쁠 건 없다. 한데 더 좋은 건,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도산이 앉은 자리에 태허의 동상을 두는 것이다. 두 손을 앞으로 모은 태허가 도산을 우러르고 있는 모습, 상상만으로도 좋지 않은가. 도산공원 안에 태허의 묘를 두는 것은 어렵다 해도 동상 하나 세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야 도산과 태허의 넋이 별리의 아쉬움을 다소나마 잊을 것이고, 나아가 보다 많은 이들이 둘의 사연을 알고 기리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angler@seoul.co.kr
  •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박순부·허은·이은숙 여사…그들은 ‘독립군의 어머니’였다

    [곽병찬의 역사앞에서 묻다] 박순부·허은·이은숙 여사…그들은 ‘독립군의 어머니’였다

    “네 어머니와 아내를 무겁게 대하라.” 지난달 8일 시인 이윤옥씨의 ‘서간도에 들꽃 피다’ 10권 완간 기념 ‘책 잔치’가 열렸다. 권마다 20명의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시와 산문으로 담은 책이다. 속표지에는 이런 짧은 헌사가 실려 있다. “이 책을 이 땅의 모든 남성에게 바칩니다.”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만하다. 다음은 지은이의 머리말 일부. “원고 뭉치를 들고 백방으로 뛰어다녀봤지만 선뜻 이 책을 찍어 준다는 곳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이 남성의 전유물이 돼 버린 풍토에서 여성독립운동가만의 책을 출간하는 것은, 독립운동처럼 십시일반의 정성을 모아야 가능했다.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 여성 독립운동가 이야기가 홍수를 이뤘다. 그동안 여성의 역할을 액세서리 정도로 평가절하했던 것에 대한 반성의 결과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반성치고는 너무 피상적이었다. 양적으로만 늘었지 질적으로는 달라지지 않았다. 선택 기준은 언제나 ‘남성 못지않은 활동상’이었다. 삼종지도의 억압구조 속에서 수행했던 여성 혹은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은 외면당했다. 건국훈장 서훈자 1만 5537명 가운데 여성 독립지사가 전체의 2.3%(357명)에 불과한 현실이나, 5등급의 건국훈장 가운데 대부분 마지막 등급인 애족장을 서훈했거나, 훈장이 아닌 건국포장이나 대통령 표창을 받은 것은 이런 기준 때문이었다. 일송 김동삼 선생의 며느리 이해동 여사는 1987년 독립운동기념관 개관식 때 보훈처 초청으로 중국에서 잠시 귀국했다. 개관식 치사에선 온통 일송 이야기뿐이었다. 행사가 끝난 뒤 이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시아버지께 공이 있다면 반 이상은 시어머니(박순부 여사) 몫이었다. 독립운동도 의식주가 있어야 가능한데,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건 온전히 여자의 몫이었다. 여자들은 하루 스무 시간씩 일하며 밥해 먹이고 옷 지어 입히고 땔감 마련해 추위를 피하게 했다. 공산주의 나라에서도 남녀를 동등하게 대하는데, 왜 한국에서는 여성의 역할을 하찮게 보는지 모르겠다.” 박순부 여사는 만주 벌판을 호랑이처럼 떠돌며 항일투쟁에 나섰다가 옥사한 남편 일송과 그 동지들의 후방을 말없이 지키다가 만주에서 쓸쓸하게 돌아갔다. 이 여사 역시 1989년 영구귀국할 때까지 77년간 여러 남매를 낳아 키웠지만, 둘째 중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의 맏아들 이준형은 출소한 뒤 “일본 놈들 밑에서 하루라도 더 사는 것은 치욕”이라며 자결했다. 다음은 그가 남긴 네 가지 유언 가운데 하나. “독립운동을 하면서 여자들의 고생이 심했다. 여성을 대할 때 보통으로 대하지 말고 무겁게 대하라.” 허은 여사는 조부 허형, 재종조부 허위 등 집안이 모두 독립지사였다. 어른들을 따라 1915년 만주로 망명한 허 여사는 1922년 석주의 손자 이병화와 결혼한 뒤 끝없이 찾아오는 독립군을 수발하는 ‘독립군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시집온 첫해 집에서는 서로군정서 회의가 서너 달 계속됐다. 만주의 독립지사치고 그의 집을 드나들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며, 따듯한 밥 한 그릇 먹지 않은 이가 없었다. “집에는 항상 손님이 많았는데 땟거리가 부족해 삼시세끼가 녹록지 않았다. 양식이 없을 때는 좁쌀 쭉정이로 죽을 끓였다.” “의복도 단체로 만들어서 조직원들에게 배급했다. 부녀자들이 동원되어 흑광목과 솜뭉치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대량생산을 했다. (중략) …김동삼, 김형식 어른들께 손수 옷을 지어드린 것은 지금도 감개무량하다.” 고생이 얼마나 심했던지 밥 짓다가 기절해 가마솥 안으로 고꾸라질 뻔하기도 했다. “시집온 이듬해, 한번은 감기에 걸렸으나 누워서 쉴 수가 없었다. 무리했던지 부뚜막에서 죽 솥 안으로 쓰러지는 걸 마침 시고모부가 보시고는 잡아 떠메고 방에 눕혔는데 꼬박 24시간을 혼절했다.”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시조부, 시부에 이어 남편도 7년간의 옥고 탓에 일찌감치 세상을 떴다. 남겨진 5남2녀를 키우고 가문을 지키는 것은 온전히 허 여사의 몫이었다. 형제들이 때론 고아원에도 가고, 보육원에도 보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4남1녀는 허 여사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혁명 가족의 안주인’ 이은숙 여사의 간난신고는 ‘고초당초’보다 매웠다. 결혼 당시 지금 시세로 수천억 혹은 수조 원에 달한다는 남편 우당 이회영 여섯 형제의 재산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경학사 등을 경영하는 데 모두 썼다. 불과 몇 해가 지나지 않아 “하루 잘해야 일중식이요, 한겨울에도 절화하기(불피우지 못하기)를 한 달이면 반이 넘”었다. ‘매일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했다. “언젠가 이을규 형제분과 백정기, 정화암 네 분이 오셨다. 그날부터 먹으며 굶으며 함께 고생하는데 짜도미라고 하층민들이 먹는 곡식조차 살 수 없었다. 강냉이로 멀건 죽을 쑤어 연명했다. 내 식구는 오히려 걱정이 안 되나, 노인과 사랑에 계신 선생님들에게 너무도 미안하여, 죽을 쑤는 날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상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었다.”(‘서간도 시종기’에서) 이 여사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고무공장 직공으로, 부잣집 침모로, 심지어 유곽 여인네의 옷을 수선하는 삯바느질까지 했고, 몇 푼 벌면 송금했다. 이 사실이 드러나 경찰서로 불려가곤 했다. 이 과정에서 두 손녀와 아들 규오가 성홍열로 차례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규숙, 현숙 자매는 천진 부녀구제원에 보내야 했고, 외손녀 현덕은 늑막염으로, 딸 현숙은 폐렴으로 그리고 외손자는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둘째 아들 규학은 친일파 암살 과정에서 체포돼 고문으로 청력을 잃었고, 셋째 아들 규창 역시 13년형을 받았다. 이 여사 자신은 마적떼의 총격으로 어깨에 관통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우당은 1932년 일제의 감옥에서 고문당한 끝에 세상을 떴고 첫째 시숙 이건영은 질병으로, 조선 10대 갑부로 꼽히던 둘째 시숙 이석영은 영양실조로, 셋째 시숙 이철영은 풍토병으로, 여섯째 시숙 이호영은 일본군에 의해 가족 전체가 몰살당했다. 함께 망명했던 식솔 60여명 가운데 살아서 귀국한 이는 다섯째 시숙 이시영 선생 포함 20여명뿐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는 살아서는 일제의 핍박에 시달리고, 죽어서는 단재의 호적에도 오르지 못했다. 망명 전 박 여사는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간호부로 일하던 엘리트였다. 파업 태업 등을 주도해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힌 터였기에 1922년 귀국한 뒤 온갖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나석규 의사 등 국내로 잠입한 독립운동가들의 거사를 뒤에서 도왔다. 단재는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고 둘째 아들은 1942년 영양실조로 사망했으며, 그 자신은 잦은 체포와 고문 후유증으로 1944년 단칸방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다. 단재는 일제의 호적을 거부한 탓에 2009년 가족관계등록부가 생기기까지 무국적자였다. 가족관계부가 생기고도 혼인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 하여, 단재의 가족관계부에는 지금도 아들과 손주 이름만 달랑 올라 있다.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경 15명을 사살한 김상옥 의사의 어머니 김점순 여사도 세 아들을 조국의 독립에 바쳤다. 김 여사는 평소에도 잠입한 독립지사들을 숨겨 주고, 먹여 주고, 입혀 줬다. 백범의 부인 곽낙원 여사는 시장에 버려진 배추 겉껍질을 모아 김치를 담갔고, 그것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둘도 없는 반찬이 되었다. 베트남에는 ‘어머니 영웅’이란 칭호가 있다. 항불, 항일, 항미 독립전쟁에 자식을 바친 어머니들에게 주어지는 ‘서훈’이다. 세상에 어머니를 배반할 자식은 없다. 베트남이 물질적으로는 풍부하지 않아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견고한 것은 그 덕분일 것이다. 2018년 허 여사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자 아들 이항증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가사노동에 대한 첫 서훈이며 음지에서 피와 땀과 눈물을 쏟은 여성 독립지사에 대한 첫 훈장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어머니 영웅’, ‘아내 영웅’이 있어야 한다. 어머니와 아내가 없었다면 안중근도 이회영도 이상룡도 김동삼도 김구도 여운형도 신채호도 없었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 文 “친일 땐 3대가 떵떵… 독립유공자 끝까지 찾아낼 것”

    文 “친일 땐 3대가 떵떵… 독립유공자 끝까지 찾아낼 것”

    문재인 대통령은 4일 “‘친일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리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었다”며 “이를 바로잡는 게 해방된 조국이 해야 될 일인데, 역대 정부가 부족한 점이 있었다. 그런 점을 반성하며 독립운동가를 최대한 발굴하고 그 후손을 제대로 모시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날 해외 거주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초청한 청와대 오찬에서 이같이 밝힌 뒤 “친일한 사람들은 당대에 떵떵거리며 자식을 유학 보내면서 해방 후에도 후손이 잘살 수 있었고, 독립운동 하신 분은 가족을 제대로 못 돌봐 뿔뿔이 흩어지거나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해 자식까지 오랜 세월 고생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국내외에서 마지막 한 분의 독립유공자까지 찾아내겠다”고 약속했다. 행사에는 유공자 34명의 후손으로 8개국에 거주하는 64명이 참석했다. 광복군 비행학교 교관 등 공로를 세운 장병훈 선생의 외손녀 심순복(70)씨, 서울신문 전신인 대한매일신보 발행인이자 독립운동가로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 선생의 손녀 수전 블랙(64) 등이 참석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유관순 열사 기리며… 재한 日여성들 평화 행진

    유관순 열사 기리며… 재한 日여성들 평화 행진

    국내 거주 일본인 여성들로 구성된 ‘유관순 열사 정신 선양 일본회’ 회원 300여명이 3일 서울역 광장을 출발해 서대문 독립문에 이르는 평화 행진을 하고 있다. 이날 행진은 3·1운동 100주년과 유관순 열사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가 서훈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됐다. 연합뉴스
  • 해방 뒤 경찰간부는 다 친일파?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해방 뒤 경찰간부는 다 친일파?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광복군 출신 장동식·백준기·송병철 등 다수경찰청, 독립운동가 경찰 유공자 추진‘순사’로 대표되는 일제 강점기 경찰은 3·1운동 당시 민초들을 잡아들이는 등 암울했던 시대에 부역했다. 당시 조선인 경찰 다수는 광복 뒤 미군이 진주하자 미군정 경찰로 재차 채용됐다. 무장 독립투쟁의 선봉에 섰던 약산 김원봉을 해방 뒤 체포·고문했던 친일 경찰 노덕술(1899~1969)이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우리 근·현대사에서 ‘경찰=부역’ 이미지가 있었다. 실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따르면 해방 직후인 1946년 기준으로 서울시내 10개 경찰서장 가운데 9명이 일본경찰 출신이었다. 나머지 1명은 군수 출신이다. 하지만 경찰청은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해방 뒤 경찰을 이끌었던 간부들도 많았다”며 3·1운동 100주년인 올해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 32명을 발굴해 알리고 있다. 26일 경찰청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의 면면을 보면 광복군 소속으로 일제와 싸우다 해방 이후 경찰관이 된 이들이 많다. 경찰 최고위직까지 오른 장동식 치안총감이 대표적이다. 그는 1943~1945년까지 광복군 정보장교로 복무하면서 일본군 내 한국 병사들을 탈출시킨 뒤 광복군에 합류시키는 역할을 했다. 광복 이후 순경으로 입직했다. 1954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1960년 총경으로 다시 임용된 뒤 1971년 6~12월 내무부 치안국장을 지냈다.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기도 했다.또 광복군에서 적(敵) 정보수집 등의 임무를 수행했던 백준기 경위, 광복군에 입대해 항일활동을 하다 임시정부에서 근무한 송병철 순경, 천호인 등도 광복군 출신 경찰관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비밀결사 조직이나 학생단체 등에서 활동하다 해방 이후 경찰관이 된 경우도 있다. 노기용 총경은 1920년 항일 비밀결사 조직 ‘군사주비단’에 가담해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했다. 1923년 군자금 모금 계획 도중 일제에 체포돼 7년을 감옥에서 보내기도 했다. 노 총경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24년부터 학생단체를 조직해 항일 학생운동을 하고 일본 동경에서 신간회 활동을 했던 박노수 총경, 경찰이 되기 전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활동 중 체포되어 1년 복역했던 최철룡 경무관 등도 해방 이후 경찰조직에 몸 담았다. 안창호 선생의 조카딸이기도 한 안맥결 총경, 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이었던 양한나 경감, 부산여자경찰서장을 지낸 이양전 경감도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거나 항일단체에서 활동했다. 경찰청은 자체적으로 발굴한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 가운데 서훈을 받지 못한 경찰에 대한 독립유공 심사를 보훈처에 요청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이 총리, 한용운·오세창 선생 묘소 첫 참배

    이낙연 국무총리는 1일 오전 3·1운동 100주년인 해를 맞아 서울시 중랑구 망우공원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있는 한용운·오세창 선생의 묘소와 항일의병 13도 창의군 탑을 참배했다. 역대 총리중 한용운·오세창 선생 묘소를 참배한 것은 이 총리가 처음이다. 지난 1월 손병희 선생 묘소와 지난달 26일 백범김구 선생 묘소를 참배한 데 이어 이번에 망우공원묘지를 찾았은 것은 100년 전 3월 1일 당시 뜨거웠던 만세 열기를 담아 애국선열들의 헌신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다. 만해 한용운 선생과 의창 오세창 선생은 1919년 3월 1일에는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독립선언식에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두 선생 모두 독립운동에 대한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과 대통령장을 각각 받았다. 이 총리는 일제 침략에 맞서 서울을 탈환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전국의 13도에서 모인 의병들이 서울진공작전을 펼친 것을 기념하고 순국한 의병들을 추모하기 위한 13도 창의군 탑에도 들러 참배했다. 정부는 3·1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유공자 후손의 DNA를 확보하여 묘지를 확인하는 사업과 국외에 안장된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는 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또 한용운·오세창 선생을 포함한 민족대표의 뜻을 기리자 학생과 국민들이 보다 쉽게 3·1독립선언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풀이본을 보급하고 있다. 최광숙 선임기자@seoul.co.kr/
  • 그때 그날의 함성과 눈물 따라 가볼까

    그때 그날의 함성과 눈물 따라 가볼까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된 해다. 순국선열들의 독립정신과 활약상을 되새길 전국의 역사적 장소들이 후손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독립운동의 흔적이 짙게 배인 7개 지역을 3월에 가볼 만한 곳으로 추천했다. 우리 근대사가 기억하는 선조들의 뜨거운 함성과 눈물에 귀 기울여볼 때다.① 서울 독립문… 역사박물관·경희궁 등 일제강점기 흔적 서울에는 도심 곳곳에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등 시대별로 서울의 변화상을 전시한다. 특별전 ‘딜쿠샤와 호박목걸이’, ‘서울과 평양의 3·1운동’도 열린다. 박물관 옆 경희궁은 아픈 역사가 서린 궁궐이다. 인현왕후와 혜경궁홍씨 등이 거주했던 궁은 일제가 집중적으로 파괴한 대상이었다. 경희궁을 나서면 강북삼성병원 내에 있는 경교장이 금방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이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도심재생예술을 입은 돈의문박물관 마을, 아관파천의 아픔이 서린 정동길 등으로 시간 여행이 이어진다. 3·1운동 열사들이 옥고를 치른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독립선언서를 전 세계에 타전한 앨버트 테일러가 살던 행촌동 딜쿠샤 등을 함께 둘러보면 좋다.② 서울 망우리공원… 만해 한용운·위창 오세창 넋 기린 곳 망우리공원은 뜨거운 역사를 품은 야외박물관이다. 만해 한용운, 위창 오세창, 호암 문일평, 소파 방정환 등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잠들었다.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연보비를 읽다 보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지난해 9월엔 ‘유관순열사 분묘합장표지비’가 세워졌다. 이곳은 20년 전까지 망우리공동묘지로 불렸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약 83만 2800㎡(25만여평) 규모로 문 열어 1973년까지 운영됐다. 2만 8500기가 넘는 무덤이 있었지만 꾸준히 이장해 현재 7400여기가 남았다. 이장으로 생긴 빈자리에는 나무를 심었고 울창한 생태 공원으로 변신했다. 숲이 우거져 고즈넉한 곳에 5.2㎞ ‘사색의 길’도 조성됐다. 망우리공원에는 화가 이중섭, 시인 박인환, 소설가 계용묵, 조각가 권진규 등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 묘지도 있다.③ 충북 괴산 홍범식 고택… 1919년 1500명의 함성 생생히 독립운동가 홍범식은 대한제국이 1910년 한일병탄으로 국권을 빼앗기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결했다. 그는 아들에게 “죽을지언정 친일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마라”는 유서를 남겼다. 아버지의 유훈을 받은 소설가 벽초 홍명희는 고향 괴산에서 3·1운동을 주도했다. 홍범식 고택에 들어서면 홍명희가 3·1운동을 준비했다는 사랑채를 만난다. 그의 주도 아래 1919년 3월 19일 괴산산막이시장 거리에서 1500여명이 목 놓아 만세를 외쳤다. 정면 5칸, 측면 6칸의 ‘ㄷ자형’ 안채는 조선 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고택을 둘러봤다면 진주성대첩의 명장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 괴산호의 절경이 아름다운 연하협구름다리 등을 함께 둘러봐도 좋다.④ 충남 천안 유관순 생가와 7개 전시관 있는 독립기념관 천안에는 독립운동의 함성과 결의를 되새길 수 있는 곳이 여럿 있다.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사를 살펴볼 수 있는 독립기념관이 대표적이다. 높이 51m ‘겨레의 탑’과 동양 최대 기와집인 ‘겨레의 집’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우리 역사를 시기별로 전시한 7개 전시관은 다양한 문헌자료와 체험시설로 방문객을 맞는다. 꼼꼼히 둘러보려면 5시간 정도 걸리니 미리 동선을 짜서 가는 것이 좋다. 주변 숲과 호수가 어우러진 캠핑 공간에는 꼬마열차, 어린이방 등 편의시설이 있어 한나절 가족 소풍지로도 손색이 없다.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기억할 수 있는 병천에는 유관순 열사 생가가 있다. 유관순 열사가 체포돼 옥사할 당시 전소된 가옥과 헛간을 복원했다. 가까운 곳에 그의 영정을 모신 기념관이 있다.⑤ 전남 완도 소안도 항일운동기념관… 항일운동의 성지 완도 본섬에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진 소안도에는 1년 내내 태극기가 휘날린다. 함경 북청, 부산 동래와 함께 항일운동의 3대 성지로 불릴 만큼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준 땅이다. 소안도에 가려면 완도 화흥포여객선터미널에서 하루 10~12회 운항하는 배편을 이용해야 한다. 여객선 이름부터 대한호, 민국호, 만세호다. 소안항일운동기념관에 가면 이곳이 어떻게 항일운동 성지가 됐는지 알 수 있다. 당사도등대 습격사건과 사립소안학교 설립 등을 알게 된다. 인구 6000여명밖에 안 되는 섬에서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가 20명, 기록에 남은 독립운동가가 89명에 이르는 사실도 소안도가 항일운동의 성지였음을 뒷받침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림과 몽돌해변 등도 소안도를 방문해야 할 이유다.⑥ 경북 안동 경북도독립운동기념관… 독립지사의 투쟁사 안동은 시·군 단위로 전국에서 독립 유공자(약 350명)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1894년 갑오의병부터 1945년 광복까지 줄기차게 이어진 안동과 경북 독립지사의 투쟁사를 문헌과 자료, 영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유학이 뿌리 깊은 지역이지만 의병활동이 실패한 뒤 신학문을 받아들인 혁신유림이 생겨났다. 이들은 국권을 빼앗긴 후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일제의 고문시설인 벽관 체험 등 체험 프로그램이 많아 흥미롭다. 기념관을 나서면 독립운동 성지로 알려진 내앞마을이다.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일송 김동삼 생가 등이 있다. 안동의 명소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임청각도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가다. 가까운 월영교의 밤경치도 놓치면 아깝다.⑦ 경남 밀양 의열기념관…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도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밀양은 영화 ‘암살’을 통해 재조명된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의 고향으로 항일 독립운동 요람이다. 의열단은 식민지배자와 민족반역자 처단, 조선총독부 등 식민지배기관 파괴에 집중했다. 의열단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고,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는 등 모든 투쟁의 배후에 김원봉이 있었다. 김원봉이 태어난 집터에 지난해 의열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단정하고 아담한 건물로 들어가면 영상과 자료들로 그의 삶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일대는 밀양의 만세운동으로부터 태극기 변천사 등을 살펴볼 수 있는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로 꾸며졌다. 이 지역 최초 만세운동이 일어난 밀양 관아지와 보물 147호 밀양 영남루도 독립운동과 연결되는 장소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교통·통신도 힘든 시절 민족 10%가 만세시위… 상상 어려운 대사건

    교통·통신도 힘든 시절 민족 10%가 만세시위… 상상 어려운 대사건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각종 정치 현안을 꿰뚫고 있는 정치인이 맡는 게 지금까지의 관례였다. 1963년부터 현재까지 36명의 비서실장이 거쳐 갔지만, 이낙연 총리의 초대 비서실장이었던 배재정 전 의원처럼 정치인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서울신문 등에서 재직한 언론인 출신이자 역사학자인 정운현(60) 비서실장이 임명됐다. 특히 별다른 친분이 없는 이 총리가 “내게 없는 역사에 대한 지식과 기개를 채워 달라. 길동무가 돼 달라”며 비서실장직을 제의한 사실이 알려지자 화제가 됐다.총리에게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아 ‘실세 총리의 실세 비서실장’으로 알려진 정 실장을 3·1운동 100주년을 하루 앞둔 28일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앞에서 만났다. 역사 전문가인 그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3·1운동 100주년에 대한 의미를 잔뜩 풀어놨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은 국권이 침탈된 지 9년이 지나면서 한반도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탄압과 감시 때문이었다”면서 “뜻있는 지사들은 거의 망명길에 올라 이 땅에는 소위 민초만 남은 상태였다. 그런 여건에서 뚜렷한 지도자도 없고 교통·통신 수단도 변변찮던 그 시절 인구의 10%가 만세시위에 가담한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대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이런 상황에서도 3·1 거사는 추진 과정에서 철통같은 보안이 지켜졌고, 수십 명이 가담했으나 배신자가 한 사람도 없었고 비밀 누설도 전혀 없었다”면서 “전적으로 하늘이 우리 민족을 보우하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 실장은 “3·1 운동은 대한독립 만세만 외친 것이 아니다. 얼음장 밑에도 물고기가 살아 있듯이 일제의 압제하에서도 우리 민족이 굳건히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알린 전 민족적 외침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1926년 6·10만세항쟁,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이어 독재 정권에 항거한 4·19혁명, 광주 5·18민주화운동, 최근의 촛불시위도 3·1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3·1운동 100주년 행사는 이런 정신을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친일파가 작사·작곡한 교가를 교체하는 움직임 등 몇몇 교육청이 학교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 청산 작업에 나서는 것에 대해 “만시지탄이나 반가운 일”이라면서 “생활 현장 또는 우리 의식 속에 남아 있는 식민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는 것이 3·1운동 100주년의 참뜻을 되살리는 길”이라고 덧붙였다.그는 3·1운동 100주년 남북 공동 행사가 무산된 점을 못내 아쉬워했다. “북측이 북미 2차 정상회담을 준비하느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대사를 앞두고 민족 내부의 일은 잠시 보류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 실장은 최근 ‘3·1혁명을 이끈 민족 대표 33인’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지난해 여름 한 역사 전문가와 민족 대표 33인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이와 관련한 자료가 너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집필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정 실장은 30여년 친일파·독립운동사 분야 등의 책 30여권을 펴냈다. 1년에 한 번꼴로 친일·항일 관련 책을 출간했으니 이 분야 최고 전문가인 셈이다. 경남 함양 출신인 정 실장은 대구고와 경북대 문헌정보학과, 고려대 언론대학원 신문학과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 역사와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던 그가 친일·항일 전문가가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1980년대 말 한 주간지에서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 선생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는 “임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가 대문호요, 민족지사라고 학교에서 배웠던 사실이 허구였다는 점을 알고 배신감, 분노 같은 게 터졌다”고 회고했다. 그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등 1차 사료를 뒤지면서 진실을 알게 됐고, 이후 1989년 임종국 선생이 급작스레 타계하면서 친일파 연구를 숙명처럼 이어받았다. 1990년 임 선생 1주기 관련 공저를 낸 뒤 고서점 등을 다니며 친일 관련 자료를 사 모으기 시작했고, 생존자들의 증언들을 수집했다. 30여권의 책 가운데 ‘반민특위 재판기록’(전 4권)과 1990년대 후반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주변인들을 인터뷰하며 펴낸 ‘실록 군인 박정희’를 가장 역작으로 꼽았다. 대화는 지난 26일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개최한 현장 국무회의에서 유관순 열사에게 독립운동 유공 최고 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서훈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옮겨 갔다. 정 실장은 “유관순 열사는 그간 3·1 운동, 3·1절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면서 “유 열사가 과거에 받은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은 3·1운동 당시의 공적으로 받은 것이다. 이후 유 열사가 끼친 교육적 효과 등을 감안하면 충분히 1등급감”이라고 평가했다. 독립유공자 가운데는 공적이 허위로 드러나 서훈이 취소된 사례가 종종 있었다. 그는 “이미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사람들 중에는 친일 행적, 완벽한 가짜(동명이인 포상 등), 자료 미비, 형평에 어긋난 포상 등으로 소위 ‘의심 인물’이 최대 100여명 정도로 추산된다”면서 “국가보훈처가 독립 유공 서훈자 1만 5000여명을 전수조사해 문제 있는 사람들을 가려 내겠다고 하니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정 실장은 최근 소셜미디어를 통해 ‘선진국 같았으면 우리의 애국가는 벌써 폐기했을 것’이라는 글을 썼다. 의도를 묻자 그는 “애국가는 안익태가 작곡했다. 문제는 안익태의 행적이다. 그동안 친일파로만 알려져 왔는데, 최근 이해영 교수의 노력으로 친나치 행적마저 확인됐다. 국기(태극기)와 함께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애국가의 작곡가가 반민족 행위자라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민족의 정체성, 과거사 문제 등에 엄정한 입장을 견지하는 유럽의 선진국에서라면 벌써 폐기했을 것이라고 본다. 상황이 이렇다면 애국가 문제도 한 번쯤 진지하게 토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 최악인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시대 상황이 크게 변한 탓”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그들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세계 10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고, G2로 성장한 중국의 급부상으로 일본이 동북아에서 골목대장 노릇을 하던 시대는 끝이 났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아베 신조 정권은 진지한 성찰보다는 ‘극우’라는 헌 칼을 다시 꺼내 들었다. 전적으로 일본 국내 정치용이고 자폐적이다”라고 비판했다. 한일 양국이 갈등을 푸는 해결책으로는 “선린의 시작은 가해자인 일본이 과거를 직시하고 먼저 손을 내미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면서 “신문사 도쿄특파원 출신으로 일본 전문가인 이낙연 총리의 말처럼 일본은 과거 앞에 겸허하고, 한국은 미래 앞에 겸허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거론했다. 정 실장은 지난 22일 공개된 고위공직자 재산 등록에서 재산이 7000만원인 것으로 공개됐다. “재산이 왜 이것밖에 안 되냐”며 짓궂은 질문을 던지자 “0이 하나 빠진 게 아닌가요”라며 되받아쳤다. 그는 “재산이 적은 것은 자랑도 아니지만, 수치도 아니다”라면서 “친일파 연구자들은 대학에서 마땅한 강의 자리를 찾기도 어렵고, 책도 대중적 인기를 끌기가 쉽지 않다. 내 주변의 연구자들은 대개 그렇게 지낸다”고 말했다. 그는 “더 큰 문제는 사학과 학생들 가운데서도 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 전공자가 드물다”면서 “역사학계로서도 민족사로서도 안타까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정치 입문 가능성에 대해 묻자 손사래를 쳤다. 정 실장은 “국회의원 출마 등 정치를 할 생각은 전혀 없다. 국정 고위책임자가 나를 알아주고 도와달라는데 이를 거부할 명분이나 이유가 없어서 돕기로 한 것뿐”이라면서 “나는 정치의 영역에서 일을 할 뿐이지 의도를 갖고 정치적으로 판단하는 정치인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정치 얘기가 나오는 걸 보니 인터뷰가 끝난 것 같다”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횡단보도를 건너 집무실이 있는 정부서울청사 쪽으로 발길을 총총히 옮겼다. jrlee@seoul.co.kr
  • “자랑스러운 나의 조국” 독립유공자 후손 39명 국적 취득

    “자랑스러운 나의 조국” 독립유공자 후손 39명 국적 취득

    “나의 할아버지 최재형께서 이루고자 했던 것은 ‘러시아 거주 동포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과 ‘대한민국이 조국의 침입자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실현되어 가슴 뿌듯합니다.”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인 최재형 선생은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거점으로 ‘독립단’을 조직해 단장으로서 항일 무장독립투쟁에 나서다 1920년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했다. 최 선생의 손자인 최발렌틴(81)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은 27일 대한민국 국적증서를 수여받으며 “저의 명예를 걸고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가겠다”고 밝혔다. 법무부는 이날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특별귀화한 독립유공자 19명의 후손 39명에게 대한민국 국적증서를 수여했다. 국적증서 대상 독립유공자들은 최 선생 외에도 13도 연합의병 군사장으로 활약하며 서울진공 작전을 펼치다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은 허위, 대한독립의용군을 조직하고 상하이임시정부에도 참여한 박찬익,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일사상을 선전하다 체포된 전일 선생 등이 있다. 러시아, 중국,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쿠바 등 다양한 국적을 가진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국적법 제7조에 따라 특별귀화를 허가받았다. 이여송 선생의 후손인 이천민(64)씨는 이날 국적증서 수여식에서 “할아버지께선 자주독립과 나라를 되찾고자 장백 밀림 속에서 일제와 칼날을 맞대고 총탄을 겨누어 가며 현전에 나서서 28세의 아까운 나이에 순난하셨다”면서 “그 후손인 우리들은 당당하게 대한민국의 일성원이 되어야겠다”고 말했다. 권재학 선생의 후손 김넬라(36)씨도 “외할아버지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발전된 조국을 보시면 하늘에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앞으로도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국내에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2006년부터 이날까지 모두 1157명의 독립유공자 후손이 대한민국 국적을 얻었다. 나상현 기자 greentea@seoul.co.kr
  • [김포 3·1만세운동-2] 군하리장터 만세운동중 체포돼 서대문형무소 옥살이한 여성 이살눔은 ‘김포의 잔다르크’

    [김포 3·1만세운동-2] 군하리장터 만세운동중 체포돼 서대문형무소 옥살이한 여성 이살눔은 ‘김포의 잔다르크’

    경기 김포 3·1만세운동 전개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체포돼 재판을 받은 인원은 고촌면 6명을 비롯해 양촌면 9명, 월곶면이 13명으로 모두 28명이다. 1919년 3월 23일자 조선총독에게 보내는 ‘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24보)’에 의하면 월곶면 만세시위 상황에 대해 주모자 10명을 연행했다고 기록돼 있다. 판결문을 통해서 22일 성태영·이살눔·백일환·이병린·오복영 등 5명이 재판을 받은것으로 기록돼 있다. 체포된 10명 중 5명만 기소하고 나머지 5명은 훈방처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포에 독립만세운동을 한 사람이 많은데 당시 관련 사진이나 자료가 대부분 사라져 남아있는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본다. 이경덕(1886~1948·이살눔)은 김포출신으로 성서학교 학생이었다. 이살눔은 이 지역에서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한 유일한 여성으로 김포의 잔다르크라 불린다. 월곶면 고양리에서 성태영·백일환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3월22일 군하리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배부해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 중 일경에 체포됐다. 7월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언도받고 공소했으나 경성복심에서 기각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이살눔은 옥고를 치르던 중 병을 얻어 10월27일 가출옥으로 서대문감옥에서 석방됐다. 이후 군하리에서 목회자의 삶을 살다가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2003년 8월15일 이살눔이 전도사 몸으로 실천한 뜻을 기리기 위해 박형규 목사 외 17명과 11개 교회가 참여해 현 월곶면 푸른언덕교회 내 ‘이경덕전도사 3·1운동기념비’를 세웠다. 현재 이살눔의 양아들 부인인 며느리가 생존해 있으나 석방이후 삶의 기록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어느날 알 수 없는 병을 얻어 남편이 몰래 밤중에 공동묘지에 안장했다고 한다. 현재 묘소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른다는 전언이다. 임용우(1884~1919)는 당시 통진 창신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2년 27세 당시 덕적도 명덕학교로 부임해 8년간 근무하면서 많은 애국청년들을 길러냈다. 그해 2월하순쯤 천도교회의 연락을 받고 3월1일 상경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에 참가하고 3월3일 고향인 군하리 면사무소 앞에 면민들을 집합시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또 1919년 3월29일 최복석·윤영규 등과 함께 월곶면 갈산리·조강리 일대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이날 정오 갈산리에서 최복경이 만든 태극기를 선두로 만세시위운동을 벌이고 오후 2시 군하리 향교와 보통학교·면사무소를 차례로 행진을 벌였다. 또 4월9일 자기가 재직하는 명덕학교 운동회를 덕적도 해안가에서 개최해 모인 참관들과 학생들이 앞으로 나아가 이재관·차경창 등과 만세를 선창하는 등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됐다. 이해 5월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1년6개월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일제의 잔인한 고문으로 순직했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박충서는 김포출신으로 3월23일 양곡리 장날을 이용해 박승각·박승만·안성환·전태순·오인환·정억만 등과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했다. 그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학생으로 3·1운동 파고다선언식에 참석하고 남대문과 대한문 일대에서 시위에 참여하다 귀향했다. 그는 3월19일 안성환의 집에서 박승각·박승만·전태순과 만나 양곡장날인 23일을 정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태극기와 격문·경고문 등을 작성해 오인환과 정억만에게 줘 동리에 배포하도록 했다. 23일 양곡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 앞에 나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고 장터를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됐다. 9월4일 보안법 위반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82년 대통령표창을,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런데 월곶면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 가운데 박용희와 당인표·조남선은 일제에 의해 체포되지 않았다. 박용희는 22일 만세를 주도한 후 길림성으로 망명해 한림회를 결성해 활동했다. 그는 중국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군자금을 마련해 제공했다. 1933년 7월 일인살해 사건으로 소만교 국경으로 도피생활 중 해방돼 고향 월곶면 고양이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며 6·25전까지 민족청년단에서 활동했다. 당인표는 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망명했다고 하나 행방을 알 수 없다. 조남선은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망명했으며 4년 후 고향으로 돌아와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조선헌병대사령관이 육군대신에게 보낸 ‘전국 각지의 3월 22일부터 23일까지의 시위 운동상황’ 보고서에 의하면 23일 양촌면 오라리장터 만세시위에서 60여명을 연행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60명 주모자 중 9명을 기소하고 나머지는 훈방처리됐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지 (1955)에 의하면 김포 3·1독립만세운동 과정에서 부상자 120명 체포자 200명으로 파악되고 있고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文 “유관순 열사에 1등급 건국훈장 추가 서훈”

    사상 첫 백범김구기념관서 국무회의 3·1절 특사 4378명… 쌍용차 관련 포함 문재인 대통령은 26일 “친일을 청산하고 독립운동을 제대로 예우하는 것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정의로운 나라로 나아가는 출발”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3·1절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둔 이날 오전 서울 효창공원에 있는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정부가 그동안 독립운동 역사를 기억하고 독립운동가를 예우하려고 노력한 것은 이들이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이기 때문”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정부가 전쟁 시기가 아닌 때에 공공청사가 아닌 곳에서 국무회의를 연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문 대통령은 특히 “오늘 유관순 열사에게 국가 유공자 1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를 의결하는 정신도 같다”며 “16살 나이로 시위를 주도하고 꺾이지 않는 의지로 나라의 독립에 자신을 바친 유관순 열사를 보며 나라를 위한 희생의 고귀함을 깨우치게 된다”고 말했다.<서울신문 1월 28일자 1면> 문 대통령은 또 “앞으로 남북, 혹은 남·북·중이 함께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반드시 발굴하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정부는 이날 4378명을 28일자로 특별사면(감형·복권 포함)하기로 결정했다. 일반 형사범이 4242명으로 전체의 96.9%를 차지했다. 쌍용차 파업,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시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관련 시위, 밀양 송전탑 반대 시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 세월호 참사 관련 집회, 한일 위안부 합의안 반대 집회 참가자 107명도 사면 또는 복권됐다. 이석기 전 의원·한명숙 전 총리 등 정치계 인사들은 제외됐다. 최광숙 선임기자 bori@seoul.co.kr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검찰, 손혜원 부친 지난해 독립유공자 선정 의혹 수사

    검찰, 손혜원 부친 지난해 독립유공자 선정 의혹 수사

    “손용우, 사회주의 이력에 6번 탈락…지난해 8월 선정”‘목포 부동산 투기 의혹’을 받는 무소속의 손혜원 의원이 부친이 독립유공자 선정과 관련해 제기된 의혹에 대해 검찰이 규명에 나선다. 서울남부지검 관계자는 26일 “손 의원 부친의 독립유공자 선정 과정 등의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파악할 것”이라며 “기존 수사를 맡은 형사6부(부장 김영일)에 관련 고발 사건을 배당하고 구체적인 수사 일정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손 의원 부친인 고(故) 손용우(1923~1999) 선생은 2018년 8월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 손 선생은 1940년 서울에서 일제의 패전을 선전하고, 동아·조선일보 폐간의 부당성을 성토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다 체포돼 징역 1년 6개월을 받는 등 2년3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손 선생은 광복 후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한 이력 때문에 보훈심사에서 6차례 탈락했다. 이후 지난해 7번째 신청 만에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 보훈처의 포상확대 기준에 따라 사회주의 활동 이력이 있으나 나라를 위해 헌신한 공훈이 큰 사람들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 손 선생과 같은 이력에도 유공자로 선정된 사람이 지난해에만도 11명이 더 있다.그러나 7번째 신청을 앞두고 손 의원이 당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을 만난 사실이 드러나면서 특혜 의혹이 불거졌다. 당시 이양수 자유한국당 원내대변인은 논평에서 “손 의원이 국회의원 신분일 때 부친에 대한 건국훈장 수여가 손쉽게 결정됐다.”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시민단체 정의로운시민행동은 손 의원을 부정청탁금지법 위반,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훈처는 “개선된 독립유공자 포상 심사기준에 따라 정상적으로 유공자 선정이 진행됐다.”라며 관련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보훈처 관계자는 “피 처장과 손 의원의 만남은 독립유공자 포상 심사기준 개정이나 포상자 선정에 있어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한편 검찰은 또 손 의원이 다른 기관에서 일하던 특정 전문가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도록 압박했다는 의혹도 수사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유관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가 서훈

    유관순 열사의 독립유공자 서훈 등급이 상향됐다. 유 열사는 3·1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인데도 서훈은 5단계 중 3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에 불과해 그동안 저평가 논란일면서 등급을 올려야 한다는 국민적 염원이 높았다. 정부는 26일 오전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개최한 국무회의를 통해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과 애국정신을 길러 민족정기를 드높이고 국민통합에 기여한 유관순 열사에게 1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서훈하기로 의결했다. 문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 “유관순 열사는 3·1 독립운동의 표상으로 국민들 속에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1등급 서훈 자격이 충분하다”며 “유관순 열사의 서훈 추서가 3·1 독립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한층 더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서울신문은 1월 28일자 1면에서 문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청와대에서 열린 이낙연 총리와의 주례회동에서 유 열사의 서훈을 상향 조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고, 현행 상훈법상 같은 공적으로 서훈 상향 조정이 어려운 점을 감안해 유 열사의 3·1운동 이후의 별도의 공적을 추가해 서훈을 줄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정부는 이날 회의에서 또 채무자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생계비, 급여, 예금 등에 대해 압류가 금지되는 최저한도 금액을 기존 150만원에서 185만원으로 올리는 민사집행법 시행령 개정안을 처리했다. 이어 개인파산의 경우 채무자의 신청으로 채무자 및 그 피부양자의 생활에 필요한 6개월간의 생계비에 사용할 재산을 파산재단에서 면제할 수 있는데 그 재산 한도를 900만원에서 1110만원으로 증액하는 내용의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시행령 일부개정령안도 의결했다. 정부는 이밖에 교정시설 수용자의 건강권 보호를 위해 30일 이내 실외운동 정지의 징벌을 받은 수용자도 최소한 매주 1회는 실외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형집행법 개정안도 통과시켰다. 이 개정안은 법률 개정안이어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야 최종 확정된다. 최광숙 선임기자 bori@seoul.co.kr
  • 유관순 열사 서훈 승격에 충남도 환영

    정부가 유관순(1902~1920) 열사의 서훈을 3등급에서 1등급(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상향하기로 하자 충남도 등이 일제히 반겼다. 양승조 충남지사는 26일 도청에서 긴급 간담회를 열고 “정부 결정은 조국의 독립, 자유와 평화, 인권과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국민적 열망을 반영한 것”이라며 “유 열사의 숭고한 정신이 세계 평화 정신으로 승화되고 민족사에 깊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양 지사는 유 열사의 서훈 상향 100만인 서명 운동을 중단한다고 했다. 유 열사는 천안이 고향이다. 구본영 천안시장은 “70만 시민과 함께 환영한다”며 “천안이 선조의 호국정신과 민족의 얼이 담긴 3.1운동 정신을 계승하는데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충남도와 15개 시장·군수는 유 열사의 서훈 상향 국민 청원을 시작으로 상훈법 개정 결의문 채택과 100만인 서명운동 등 서훈 격상을 위해 힘써왔다. 박완주·이명수 등 지역 국회의원들도 당적을 떠나 특별법 제정안을 발의하는 등 입법 활동을 통해 힘을 보탰다. 유관순 열사는 1962년 서훈 5등급 중 3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아 공적과 상징성에 걸맞지 않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천안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유관순 열사 서훈 ‘1등급’으로…문 대통령 “독립운동가 예우 자세 새롭게”

    유관순 열사 서훈 ‘1등급’으로…문 대통령 “독립운동가 예우 자세 새롭게”

    정부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1902~1920) 열사에게 최고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하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26일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개최한 현장 국무회의에서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과 애국정신을 길러 민족정기를 드높이고 국민통합에 기여한 유관순 열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서훈하기로 의결했다고 밝혔다. 유관순 열사에게는 3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으나 최근 유 열사의 공적을 평가할 때 훈격이 너무 낮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포상 현황에 따르면 김구·안창호·안중근 등 30명이 대한민국장(1등급)이고, 신채호 등 93명은 대통령장(2등급)으로 분류돼 있으나 유 열사는 이들보다 낮은 단계인 독립장(3등급)에 포함돼 있다.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우리 정부는 그동안 독립운동 역사를 기억하고 독립운동가를 예우하는 국가의 자세를 새롭게 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이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된 뿌리가 됐기 때문”이라고 유관순 열사 훈격 격상 배경을 설명했다. 또 “이곳 백범기념관과 함께 후손들에게 독립운동 정신과 민주공화국 역사를 건설할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도 계속되고 있다”며 “이 모두가 우리를 당당하게 세우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오늘 유관순 열사에게 국가 유공자 1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를 의결하는 정신도 같다”며 “유관순 열사는 3·1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16살 나이로 당시 시위를 주도하고 꺾이지 않는 의지로 나라의 독립에 자신을 바친 유관순 열사를 보며 나라를 위한 희생의 고귀함을 깨우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관순 열사가 3·1 독립운동의 표상으로 국민에게 각인돼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1등급 훈장 추서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번 추서가 3·1 독립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한층 더 높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국가보훈처는 “국내외 유관순 열사의 서훈 상향을 요구하는 열망에 따라 기존 독립운동 공적 외 보훈처에서 별도 공적심사위원회(유관순 열사 추가 서훈 공적심사위원회)를 구성해 참석위원 만장일치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하기로 심의·의결했다”고 전했다. 당시 공적심사위는 유관순 열사가 “광복 이후,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전 국민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워 국민통합과 애국심 함양에 기여했다”며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여 대한민국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제100주년 3·1절 중앙기념식장에서 유관순 열사 유족에게 훈장을 직접 수여할 예정이다. 보훈처는 “유관순 열사 추가 서훈과 함께 올해 100주년을 맞는 3·1운동에 대한 다양한 행사와 기념사업을 통해 100년 전 3·1운동에서 나타난 조국독립과 자유를 향한 정신을 계승하고 국민의 역사적 자긍심을 높일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정부가 유관순 열사에게 국가 유공자 1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기로 하자 충남도와 지역 정치권이 일제히 환영의 뜻을 밝혔다. 양승조 충남지사는 이날 도청 프레스센터에서 간담회를 하고 “정부의 결정은 조국의 독립, 자유와 평화, 인권과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국민적 열망을 반영한 것”이라고 환영했다. 양 지사는 “유 열사의 서훈 상향을 위해 진행했던 100만인 서명 운동은 중단할 계획”이라며 “유 열사의 숭고한 정신이 세계평화 정신으로 승화되고 민족사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박완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충남 천안을)도 논평을 내고 “문재인 정부가 대한민국이 나가야 할 새로운 100년의 이정표를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박 의원은 “이는 단순히 유 열사 개인에 대해 합당한 예우를 하는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이 앞으로 새로운 100년 동안 지향해야 할 가치를 천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며 “유 열사에 대한 건국헌장 1등급 추서가 저평가된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새로 발굴하고 합당한 예우를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관순 열사의 고향인 천안도 감격으로 들썩였다. 구본영 천안시장은 “70만 천안시민과 함께 환영을 뜻을 밝힌다”며 “선조들의 호국정신과 민족의 얼이 담긴 3.1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일에 우리 천안이 중심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인치견 천안시의회 의장은 “같은 공적에 대해 훈장을 다시 추서하거나 변경을 할 수 없도록 한 현행 법규를 개정하기 위해 지난해 ‘상훈법 개정 촉구 건의문’을 채택하는 등 노력해왔다”며 “그동안 천안시의회의 노력이 빛을 본 것 같아 기쁘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 재학 중인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고, 이어 4월 1일 충남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이후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1920년 18세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열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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