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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미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광장 명칭 변경 논란

    구미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광장 명칭 변경 논란

    경북 구미시와 지역 시민단체가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1855~1908) 선생의 이름을 따 조성한 광장과 누각 등의 명칭을 갑자기 지역명으로 변경하는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다. 5일 구미시에 따르면 한국수자원공사가 2016년부터 구미국가4산업단지 확장단지(산동면) 3만 60000㎡에 58억원을 들여 조성 중인 ‘산동물빛공원’ 내 광장·누각의 명칭을 산동광장·산동루로 변경하기로 했다. 애초 시와 수자원공사는 2016년 1~9월 주민공청회·설문조사 등을 통해 공원 명칭과 광장·누각의 명칭(왕산광장·왕산루)을 정했다. 또 1억 5000만원을 들여 광장에 허위 선생 가문 독립운동가 14인의 동상을 세우기로 했다. 구미 출신 허위 선생의 가문은 3대에 걸쳐 14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대한민국 최고의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수자원공사는 공원이 준공되면 구미시에 기부채납할 예정이다. 하지만 시의 이 같은 명칭 변경은 장세용 구미시장이 지난해 취임 이후 “인물 기념사업을 태생지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시 관계자는 “공원 사용 주체인 산동면 주민들이 명칭을 지명으로 변경해 달라는 민원을 접수해 변경했고, 이를 한국수자원공사에 통보했다”고 말했다. 산동면 주민들은 광장 내 허위 가문 14인 동상을 왕산 허위 기념관(임은동)으로 이전·설치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에 지역 시민단체가 반발하고 나섰다.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는 최근 성명을 통해 “구미를 상징하는 인물인 허위 선생의 호를 따 왕산광장·왕산루로 결정한 것”이라며 “주민공청회로 결정한 사안을 일부 주민 의견을 이유로 바꾼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왕산광장은 서울시청 앞 잔디광장(6435㎡)보다 크고, 왕산루는 안동의 병산서원 만대루보다 크다”며 “광장과 누각이 어우러진 공간에 열네분의 독립운동가 동상이 들어서는데 명칭을 바꾸면 역사와 전통을 훼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왕산 허위 선생은 구한 말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1897년과 1907년 의병을 일으켰다. 한때 ‘13도 연합 의병부대’를 결성해 서울 진공작전을 강행, 성문 밖 30리까지 진격하기도 했으나 일본군에 분패했다. 허위 선생은 작전이 실패한 뒤에도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에서 항일전을 벌이다가 1908년 결국 체포됐고, 9월 27일 교수대에 올라 51세의 일기로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고, 왕선허위선생기념사업회는 1962년 10월대구 중구 달성공원에 왕산 허위 선생 순국기념비를 세웠다. 구미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충북 女독립운동가 11명 흉상 11월부터 전시

    충북도가 지역 출신 등 충북과 인연이 있는 여성독립운동가 11명의 흉상을 만들어 전시한다.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여성들의 가치와 정신을 알리기 위해서다. 도는 이 흉상들을 순국선열의날인 오는 11월 17일부터 청주시 상당구 목련로 미래여성플라자 1층에 상시 전시한다고 22일 밝혔다. 흉상으로 제작되는 신순호·오건해·이국영(청주)·윤희순·어윤희(충주)·박재복(영동)·임수명(진천)·연미당(증평) 선생은 충북 출신으로 중국과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하거나 광복군으로 활동한 독립투사들이다. 박자혜·신정숙·이화숙 선생은 충북 출신 독립운동가인 신채호·장현근·정양필 선생의 부인들로 직접 항일운동에 참여하거나 남편의 광복운동을 적극 지원한 인물이다. 총사업비는 3억원이다. 도는 정부의 3·1절 100주년 기념사업에 이 사업을 신청해 국비 1억 5000만원을 지원받았다. 흉상은 작가 7명이 만들고 있다. 김은영 여성정책팀장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그동안 주목받지 못해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며 “건국훈장 애족장 이상 받은 분들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현재 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 1만 5689명 가운데 2.8%인 444명이 여성이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세브란스의전 출신 서영완, 전홍기 독립운동 유공자 지정

    연세의료원은 연세대 의과대학의 전신인 세브란스의전 출신 의학생 서영완과 의사 전홍기가 독립운동 유공자로 새롭게 추서됐다고 16일 밝혔다. 서영완은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을 받았다. 서영완은 1898년 부산 출생으로 1918년 세브란스의전에 입학, 이듬해 3·1운동과 3·5 만세 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됐다.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출옥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개정위원 등으로 활약했다. 전홍기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1916년 강원도 평강 출생인 그는 1938년 춘천고보를 조럽하고 세브란스의전에 입학했다. 재학 당시 독립운동을 위한 독서클럽인 ‘상록회’를 조직한 것이 발각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미결구류일수는 180일이다. 연세의료원은 세브란스 출신 의사 20명, 의학생 2명, 간호사 7명, 교직원 6명 등이 독립운동 유공자로 선정됐고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도 포함하면 60명이 넘는다고 강조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文 “日과 기꺼이 손잡겠다”… 극일 기조 속 대화 촉구

    文 “日과 기꺼이 손잡겠다”… 극일 기조 속 대화 촉구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 만들자” 다짐 “日, 과거 성찰해 번영 함께 이끌자” 압박 “북미 실무협상 모색… 판 깨지는 말아야 평화경제로 광복 100년엔 통일 코리아”문재인 대통령은 15일 “저는 오늘 어떤 위기에도 의연하게 대처해 온 국민을 떠올리며 우리가 만들고 싶은 나라,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다시 다짐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경제 극일’ 의지를 강조하면서도 “지금이라도 일본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우리는 기꺼이 손을 잡을 것”이라며 ‘대화의 문’을 열어 뒀다. 문 대통령은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아직도 우리가 충분히 강하지 않고, 우리가 분단돼 있기 때문에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이루지 못했다”며 이렇게 밝혔다. 이어 “기적처럼 이룬 경제발전 성과와 저력은 나눠줄 수는 있어도 빼앗길 수는 없다”며 “부당한 수출규제에 맞서 우리는 책임 있는 경제강국을 향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라고 했다. 또 “일본이 이웃나라에 불행을 주었던 과거를 성찰하는 가운데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함께 이끌어 가길 바란다”고 압박했다. 문 대통령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 건설을 위한 3가지 목표로 ▲경제강국 ▲교량국가 ▲평화경제 구축을 제시했다. 문 대통령은 또 “최근 북한의 몇 차례 우려스러운 행동에도 대화 분위기가 흔들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큰 성과”라면서 “3차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북미 간 실무협상이 모색되고 있으며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구축을 위한 전체 과정에서 가장 중대한 고비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남북미 모두 북미 실무협상 조기 개최에 집중해야 할 때”라며 “불만스러운 점이 있어도 대화의 판을 깨거나 장벽을 쳐 대화를 어렵게 하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아울러 “임기 내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확고히 하고, 그 토대 위에서 평화경제를 시작해 통일을 향해 가겠다”며 “2045년 광복 100주년에는 평화와 통일로 하나 된 나라(One Korea)로 우뚝 서도록 기반을 단단히 다지겠다”고 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이날 천안에 있는 유관순 열사 기념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유관순 열사에게 1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서훈한 것이 최근이라고 하는데,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분들에 대해 국민들이 더 추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아주 귀한 장소에 와서 마음을 다시 한번 다지게 된다”고 밝혔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이근홍 기자 lkh2011@seoul.co.kr
  • 황교안, 유관순 열사 기념관 방문 “힘 있는 안보·대화 필요”

    황교안, 유관순 열사 기념관 방문 “힘 있는 안보·대화 필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15일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74주년 광복절 경축식 행사 뒤 인근의 유관순 열사 기념관을 방문했다. 황 대표는 이 자리에서 북한과의 대화를 강조한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를 겨냥해 “다 지키지 못하고 무너진 채 의미있는 대화가 되겠나. 힘 있는 안보, 힘 있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날 황 대표는 연합뉴스와의 만남에서 “유비무환이다. 지키고, 그리고 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문 대통령의 ‘평화경제’ 구상과 ‘이념에 사로잡힌 외톨이로 남지 않길 바란다’는 언급에 대해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생명을 위한 안보의 문제”라고 반박했다. ‘2032년 서울·평양 공동올림픽’, ‘2045년 평화와 통일로 하나 된 나라’라는 문 대통령의 비전에 대해서는 “말잔치로 끝나서는 안 된다.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경축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이어 “(광복절 경축사에 대해서는) 좀 더 살펴본 뒤 저희들의 입장을 내놓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황 대표는 이날 양복차림으로 유관순 열사의 영정 앞에서 분향과 참배를 했다. 황 대표는 1919년 아우내장터에서 유관순 열사와 함께 독립 만세운동을 하다 순국한 마흔일곱분의 위패가 안치된 순국자추모각에서도 분향과 참배를 했다.황 대표는 “유관순 열사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몸을 다 바치신 분이다. 열사의 아버지, 어머니, 숙부도 함께 (일제에) 희생이 됐다고 한다”며 “가족들이 모두 애국자인 귀한 가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유관순 열사에게 1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서훈한 것이 최근이라고 하는데,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분들에 대해 국민들이 더 추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아주 귀한 장소에 와서 마음을 다시 한번 다지게 된다”고 덧붙였다. 황 대표는 방명록에 ‘조국의 광복을 위해 온몸을 바치신 열사님의 뜨거운 애국심,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한국인 1호 특허권자 정인호 선생의 독립운동

    한국인 1호 특허권자 정인호 선생의 독립운동

    애국지사 정인호(1869∼1945) 선생이 한국인 제1호 특허권자로 확인됐다. 특허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광복 74주년, 정인호 선생의 특허 등록 110주년을 기념해 13일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서 추모식을 개최했다. 추모식에는 선생의 후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1호 특허권자임을 알리는 ‘상징물’을 부착했다. 경기 양주 출신인 정 선생은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청도군수를 사직한 뒤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08년 초등대한역사 등 교과서를 저술해 교육을 통한 민족교육 운동에 힘쓰는 등 교육자·저술가·발명가로 활동했다. 1909년 8월 19일 통감부 특허국에 제133호 특허로 ‘말총 모자’를 등록했는데 한국인 최초 특허다. 일본에도 출원해 특허 등록했다. 말총 모자는 말갈기와 말 꼬리털로 만든 모자다. 단발령으로 착용하기 어려워진 갓을 대체한 제품으로 당시 말총 모자를 선전하는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기도 했다. 이후 말총 모자·말총 핸드백·말총 셔츠 등 다양한 제품을 일본·중국 등에 수출하며 민족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대한독립구국단을 결성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징역(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을 못 보고 세상을 떠났지만 정부는 공훈을 인정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고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박원주 특허청장은 “일본제도에 의한 한국인 1호 특허가 민족기업을 성장시켜 독립운동의 숨은 자금원이 됐다”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특허가 위기 극복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는 점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대전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광주학생운동 촉발 ‘댕기머리’ 박기옥 등 178명 독립유공자 포상

    국가보훈처는 15일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댕기머리 여학생’ 박기옥(1913~1947) 선생을 포함해 178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13일 밝혔다. 건국훈장 49명을 비롯해 건국포장 28명, 대통령 표창 101명이다. 3대 항일운동으로 꼽히는 1929년 광주 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박기옥 선생은 광복 74년 만에 독립유공자 서훈(대통령 표창)을 받는다. 박 선생은 1929년 10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등굣길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에게 댕기머리를 잡히고 모욕적 발언과 희롱을 당했다. 이듬해 백지동맹(일제강점기 시험 거부) 등 학내 항일시위에 참여했다가 퇴학을 당했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는 이봉구 선생은 1919년 4월 경기 화성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체포돼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장안면·우정면 사무소, 우정면 화수리 경관주재소 등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고 일본인 순사를 처단하며 격렬한 항일투쟁을 벌였다. 일제강점기 강연을 펼치며 한글 및 민족사의 수호와 보급 등 ‘문화 독립운동’에 앞장선 권덕규 선생과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하며 프랑스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홍재하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안중근 외손녀 만난 文 “다시는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나라로”

    안중근 외손녀 만난 文 “다시는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나라로”

    “선조들처럼 日 경제보복 의연하게 대처” 安의사 외손녀 “내 나라 묻히려 한국 와” 文, 국무회의서 근거없는 가짜뉴스 경계령 “불화수소 등 잘못된 정보 불안감만 키워”문재인 대통령은 13일 독립유공자 및 후손 초청 청와대 오찬에서 일본의 경제 보복과 관련해 “양국이 함께해 온 노력에 비춰 참으로 실망스럽고 안타까운 일”이라며 “국민들도 우리 경제를 흔들려는 일본 경제 보복에 단호하면서도 두 나라 국민 사이의 우호 관계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의연하고 성숙한 대응을 하고 있다”고 했다. ‘독립유공자·유족을 끝까지 기억하겠다’는 정부 의지를 전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에는 생존 애국지사 9명을 비롯해 독립유공자 서훈 친수자, 국적 취득 유공자 후손 등 160여명이 초대됐다. 해외 6개국 거주 유공자 후손 36명도 참석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에게 역사를 성찰하는 힘이 있는 한 오늘의 어려움은 우리가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나라로 발전해 가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 외손녀인 황은주 여사는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후 외국을 떠돌았던 가족사를 전했다. 황 여사는 “중국 상하이에서 나고 자랐는데, 마지막 가는 날 내 땅, 내 나라에서 묻히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고 영구 귀국한 사연을 공개했다. 문 대통령은 “황 여사님 이야기에서 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꿈꾼 안 의사의 높은 기개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고 화답했다. 여성 독립운동가 심명철 지사의 아들 문수일씨는 모친이 유관순 열사와 서대문형무소에서 함께 지어 불렀다는 ‘대한이 살았다’를 낭송했다. 오는 광복절 계기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 재불한국민회 제2대 회장 홍재하 선생의 차남 장자크 홍 푸앙씨는 부친이 고국을 그리워하며 불렀다는 아리랑을 선창했다. 이에 참석자들은 합창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독립유공자 홍창식 선생의 딸인 뮤지컬 배우 홍지민씨는 대중가요 ‘말하는 대로’, 뮤지컬 맘마미아의 ‘댄싱 퀸’을 열창해 눈길을 끌었다. 오찬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먹었던 대나무 잎으로 감싼 밥 ‘쭝쯔’, 간장에 조린 돼지고기 요리 ‘훙사오러우’가 올라왔다. 쭝쯔는 김구 선생이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다닐 때 휴대하기 편해 즐겼다고 한다.오찬에 초청된 김원웅 광복회장,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 회장 함세웅 신부는 예비역 장성 출신인 박삼득 국가보훈처장 내정자의 임명을 철회해 달라는 내용을 담은 서한을 청와대에 전달했다. 김 회장은 건배사에서 “잘못 길든 일본의 버릇을 고쳐 놓아야 한다”며 “정부는 일본의 경제 보복에 한 발짝도 뒷걸음질 치지 말고 국민을 믿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편 문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정부는 비상한 각오로 엄중한 경제 상황에 냉정하게 대처하되 근거 없는 가짜뉴스나 허위 정보, 과장된 전망으로 시장의 불안감을 키우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며 “(이는) 올바른 진단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우리 경제에 해를 끼치는 일”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문 대통령이 언급한 가짜뉴스에 대해 “국민은 기자가 쓴 것만을 뉴스로 보지 않는 것 같다”며 “(유튜브에 돌고 있는) 불화수소가 북에서 독가스 원료가 되고, 일본 여행 가면 1000만원 벌금 내고, 일본이 지정한 1194개 품목 모두 수입이 어려워진다는 등의 내용이 결국 불확실성을 높이는 결과를 낳기에 그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뮤지컬가수 홍지민, 독립유공자,유족 초청 청와대 오찬에서 노래 부른 까닭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제74주년 광복절을 앞둔 13일 생존 애국지사와 국내외 독립유공자의 유족 등 160명을 청와대 영빈관으로 초청해 오찬 행사를 가졌다.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당신을 기억합니다’ 부제로 진행된 행사는 독립유공자와 유족을 국가가 끝까지 기억하겠다는 정부 의지를 전하기 위해 마련됐다. 생존 애국지사 9명을 비롯, 안중근 의사의 외손녀 황은주 여사, 유관순 열사와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실에서 ‘대한이 살았다’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던 심명철 지사의 아들 문수일씨 등이 참석했다. 오찬은 기념 영상 및 공연, 참석자 인터뷰, 대통령 모두발언, 건배 제의 순으로 진행됐다. 특히 이날 오찬 중 진행된 공연에서는 뮤지컬 배우 홍지민씨가 독립유공자·유족에게 감사 의미를 담아 대중가요 ‘말하는 대로’, 뮤지컬 맘마미아의 ‘댄싱 퀸’을 열창해 눈길을 끌었다. 홍씨는 독립유공자 홍창식 선생의 딸로, 이날 행사 초청자들과 무관치 않다. 1926년 함경북도 학성 출신인 홍 선생은 1942년 비밀결사 백두산회에 가입해 함북 일대에서 활동하다 이듬해 일제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고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이런 인연으로 홍지민씨는 지난해 제73주년 광복절 및 정부 수립 70주년 경축식에서 애국가를 제창하기도 했다. 사전 인터뷰에서 황 여사는 외할아버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후 외국을 떠돌았던 가슴아픈 가족사를 전했다. 그는 “중국 상해에서 나고 자랐는데, 8·15 해방으로 내 고향 나라, 내 나라에 와서 살면서 마지막 가는 날에 내 땅, 내 나라에서 묻히기 위해서 한국으로 왔다”고 영구 귀국한 배경을 전했다. 문씨는 ‘대한이 살았다’ 가사를 직접 낭송했다. 이 노래는 처참했던 수감 생활에도 불구하고 독립 열망을 잃지 않았던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강인함이 담긴 것이다. 오는 광복절 계기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 재불한국민회 제2대 회장 홍재하 선생의 차남 장자크 홍 푸앙씨도 초대됐다. 프랑스 자택 대문에 태극기를 걸어 놓을 정도인 그는 부친이 평소 고국을 그리워하며 불렀다는 아리랑을 서툰 한국어로 불렀다. 오찬에는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즐겨먹었던 특별 메뉴가 올랐다. 김구 선생이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다닐 때 휴대하기 편해 먹었다는 대나무 잎으로 감싼 ‘쫑쯔’(찹쌀 등으로 만든 떡), 임정의 안살림을 맡았던 오건해 여사가 요인들에게 대접했다는 간장으로 조린 돼지고기 요리 `홍샤오로우‘가 제공됐다. 또 테이블마다 독립운동 당시 사용되었던 태극기 6종이 꽃장식과 함께 배치돼 행사 의미를 더했다. 독립운동가 남상락 선생의 자수 태극기, 진관사 백초월 선생의 태극기, 1923년 임시의정원 태극기,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게양됐던 태극기, 1941년 김구 선생 서명 태극기, 1945년 광복군 서명 태극기 등이다. 문 대통령은 “100년 전 선조들의 뜻과 이상은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평화 번영의 한반도라는 중대한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고, 광복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는 분단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면서 “국민의 하나 된 힘이 절실한 이 때, 독립유공자와 유족들께서 언제나처럼 우리 국민의 힘이 되어주시고 통합의 구심점이 되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독립유공자 어르신들 살아생전에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꼭 보여드리고 싶다”고 약속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연해주 독립운동 대부 ‘페치카 최’…잊힌 영웅, 그의 흔적 아로새기다

    연해주 독립운동 대부 ‘페치카 최’…잊힌 영웅, 그의 흔적 아로새기다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 항일 독립운동의 대부인 최재형(1860~1920) 선생 기념비가 순국 100주년을 앞두고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건립됐다. 제막식은 오는 12일 오후 4시(현지시간) 우수리스크 현지에서 열릴 예정이다. 기념비는 선생이 살던 고택을 단장해 문을 연 최재형기념관 안에 최재형순국100주년추모위원회 주도로 설치됐다. 비용은 국가보훈처,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최재형기념사업회가 지원했다. 기념비는 그가 생전 열망한 광복의 뜻을 기려 한반도 국토 모양 비석으로 만들었다. 태극기 문양을 또렷이 새긴 바탕에 ‘애국의 혼 민족의 별 최재형’이라는 글씨를 넣었다. 기념비 앞에는 최재형 선생의 흉상도 같이 놓았다.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최재형 선생은 가난하고 힘없는 처지의 동포들을 아낌없이 도와 ‘페치카(러시아 난로) 최’라고도 불렸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한 선생은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막노동과 선원 일 등을 하면서 성장했다. 선원 생활을 그만두고 군납사업에 뛰어들어 부를 축적한 선생은 모은 전 재산을 항일 독립운동과 한인 동포 지원에 썼다. 국내외 최초의 독립단체인 동의회를 조직하고 대한의군에 무기와 숙식을 제공했으며, 대동공보 사장과 권업회 총재로 재임하면서 30여개의 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특히 최근에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배후에서 지원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선생은 1919년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선임됐지만 1년 후인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한 일본군에 의한 ‘신한촌 참변’ 때 연해주에서 체포돼 이틀 만에 총살당했다. 시신과 묘지도 없이 오랫동안 잊힌 영웅으로 방치돼 있다가 사후 42년 만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3급)이 추서됐다. 제막식에는 최재형순국100주년추모위원회 공동대표인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김니콜라이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장을 비롯해 최재형 선생 후손, 현지 교민 등 200여명이 참석한다. 공동위원장 및 관계자의 개회사와 기념사 및 건립문 낭독, 경과보고 및 각계 주요 인사들의 축사와 답사, 추모공연이 이어진다. 추모공연에선 최재형 선생 순국 1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추모곡 ‘자유의아리아’(소강석 작사·작곡)를 테너 박주옥 교수가 부르고, 창원국악관현악단(총감독 김현호)이 특별공연을 한다. 최재형장학생으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는 닐루파르 무히디노바의 연주 속에 참석자들의 헌화로 제막식을 마무리한다. 한편 최재형기념관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기념비와 함께 연해주 항일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유적지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기념비의 관리와 운영은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가 담당하고, 한민족평화나눔재단과 최재형기념사업회도 지속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기념비는 연해주 지역의 대표적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및 역사교육 장소로 활용하는 동시에 ▲신한촌 기념비 ▲이상설 유허비 ▲안중근의사단지동맹비 등의 유적과 연계해 연해주 독립운동 역사탐방 프로그램 및 산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전망이다. 박요셉 추모위 사무총장은 “선생의 기념비를 그가 살았던 집터에 설치하게 돼 매우 감회가 깊다”고 말했다. 선생의 후손이자 러시아독립유공자후손협회 회장인 최발렌틴씨는 “그의 노력을 기억하고, 후손들에게 알릴 계기를 만든 위원회 관계자들에게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명예기자가 간다] 한국인 1호 특허가 정인호 선생, ‘말총모자’ 민족기업 육성해 독립운동 앞장

    [명예기자가 간다] 한국인 1호 특허가 정인호 선생, ‘말총모자’ 민족기업 육성해 독립운동 앞장

    국가의 명운이 걸린 경술국치 1년 전인 1909년 8월 19일. 통감부 특허국은 정인호(1869~1945) 선생의 ‘말총모자’를 한국인 최초 특허로 등록했다. 한국인 제1호 특허권자인 정 선생은 발명가이자 독립운동에 앞장선 애국지사다. 경기 양주 출신으로 궁내부 감중관과 청도군수를 지냈고 일제 침탈이 가속화되자 군수직을 사직했다. 민중 교육과 산업진흥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 믿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는 1908년 초등대한역사 등 교과서를 저술하며 민족교육운동에도 힘썼다. 한국과 일본에서 특허 등록한 말총 제품을 해외로 수출하며 민족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청량리에 5096평의 공장부지를 마련할 정도로 사업은 번창했다. 단발령 이후 머리를 짧게 깎으며 두발 관리 일환으로 모자가 대중화됐고 화학제품이 없었던 시기 말총 제품은 질기고 깔끔한 소재로 인기가 높았다. 당시 특허제도는 일본에 의해 1908년 시행된 한국특허령이다. 일본특허제도를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한국 내에서 미국·일본의 권리보호가 목적이었다. 경술국치 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일제는 한국특허령을 폐지하고 내선일체란 명목으로 일본 특허법을 시행했다. 이에 정 지사는 일본에 말총모자·말총셔츠·말총연초갑 등의 특허를 등록했다. 한국인 1호 특허권자이자 해외 특허등록 1호 주인공인 셈이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돼 종로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대한독립구국단을 결성해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했고 윤용구·한규설 등 100여명을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던 활동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 지사는 광복을 못 보고 세상을 떠났지만 정부는 독립운동가의 공훈을 인정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일제에 의한 한국인 제1호 특허가 민족기업을 성장시켜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며 독립운동의 자금원 역할을 한 셈이다.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 광복 74주년이다. 특허사에서도 한국인 제1호 특허등록 110주년이자 대한민국 200만 번째 특허 등록을 앞둔 의미 있는 해다. 한국인 제1호 특허가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며 독립운동의 숨은 조력자 역할을 했듯 새롭게 특허 등록될 우리의 발명들이 한국의 혁신성장을 이끌 원동력이 될 것으로 자신한다. 조성수 명예기자 (특허청 대변인실 주무관)
  • 명동성당 앞에서 비수로 거사… 공범 묻자 “2000만 동포가 도왔다”

    명동성당 앞에서 비수로 거사… 공범 묻자 “2000만 동포가 도왔다”

    한자까지 똑같은 동명이인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알아도 이재명 의사(李在明 義士)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완용을 처단하려다가 실패한 독립운동가 정도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이 지사는 우연히도 의사의 의거일이 자신의 생일과 같은 날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매국노를 죽이려다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교수형을 당한 의사에 대한 인식과 대접이 이렇다. 의사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지만, 직계 후손이 없어 훈장을 국가보훈처가 보관하고 있었다. 고향도 평북 선천이라 생가나 일가붙이를 찾을 수도 없다. 형이 집행된 후 시신도 수습되지 않아 유골의 행방도 묘연하니 묘소도 있을 리 없다.잊혀진 의사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것은 종친회였다. 이 의사의 본관은 진안인데 진안 이씨는 전북 진안을 비롯해 의사의 고향인 평북 등지에 집성촌이 있다. 또한, 진안 마이산은 1907년 이석용이 조직한 호남 의병 창의동맹단의 집결지였다. 진안에는 1925년 유림들이 일제에 항거해 순국한 의사와 열사 등 79위를 배향한 사당인 이산묘(耳山廟)도 있다. 말의 귀를 닮은 마이산 두 봉우리의 서쪽이다. 이산묘 영광사(永光祠)에는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 등과 더불어 이 의사도 모셔져 있다.그런 인연으로 의사의 동상과 기념관이 고향에서 천 리 길이 넘는 먼 곳 진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진안군청에서 마이산도립공원으로 들어가다 보면 도로 오른쪽에 이재명 의사 기념관이 있다. 2001년 종친회와 정치인들이 이재명 의사 추모사업회를 결성해 진안읍 군하리 6500여㎡ 부지에 조성한 시설이다. 그러나 금요일에 찾아간 기념관과 사업회의 문은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관람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홍살문은 나무가 삭아 홍살이 떨어져 뒹굴고 있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이러니 방문객은 있을 리도 없고 간혹 지나가다 들러도 관람을 할 수 없다. 몇 해 전 수리를 요청하는 민원이 제기됐지만, 군청에서는 토지보상금 사용 승인이 나지 않았다고 답했다. 뜻을 모아 거액을 들여 지은 기념관이 보상금 갈등과 무관심, 예산 부족으로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기념관 옆 타향 땅에 세워진 의사의 동상은 더 쓸쓸해 보였다. 이 의사는 1887년 10월 16일 선천에서 태어나 8살 때 평양으로 이사 가서 그곳에서 성장했다. 의사는 평양 일신학교를 졸업하고 1904년 미국 노동 이민회사의 모집에 응해 미국 하와이로 갔다. 1906년 3월에는 공부를 더 할 목적으로 미국 본토로 옮겨가 안창호가 중심이 돼 창립한 공립협회에 가입했다. 이듬해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하는 한편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에 공립협회는 매국노 처단을 결의하고 실행자를 선발했는데 거기에 지원한 사람이 바로 이 의사다.●이토 암살 실행 무산되자 이완용 죽이기로 의사는 그해 10월 9일 일본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왔다. 때를 엿보던 의사는 1909년 1월 평안도 순시를 떠난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고 평양역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거사를 실행하지 못했다. 안창호가 이토와 함께 다니던 순종 황제의 안전을 위해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이토는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에게 하얼빈역에서 사살됐다. 의사는 원래 목표대로 을사 5적을 비롯한 매국노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여러 동지와 야학당에 모여 이완용은 이 의사와 김병록· 이동수가, 이용구는 김정익이 죽이기로 했다. 그러던 중 이완용이 12월 22일 종현 천주교당(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당시 양심여학교 학생이던 아내 오인성씨와 마지막 작별의 밤을 지냈다. 오씨는 울지 않았고 남편의 거사를 만류하지 않았다고 한다. 날이 새자 김병록, 이동수와 함께 의사는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그날 오전 11시 30분쯤 의사는 성당 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이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앞으로 지나갔다. 의사는 비수를 들고 달려들었다. 인력거꾼 박원문이 제지하려 하자 그를 찔러 숨지게 하고 이어 이완용의 허리 쪽을 공격했다. 혼비백산한 이완용이 달아나려 하자 다시 3곳을 더 찔렀다. 거사 직후 의사는 현장에서 일경에게 체포됐다. “오늘 우리의 공적(公敵)을 죽였으니 정말 기쁘고 통쾌하다”고 외치며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이완용은 치명상을 입지는 않고 목숨을 건졌다. 이완용은 자신의 집으로 가서 의사를 불러 응급 치료를 받았다. 일본 경찰은 이 의사를 이완용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 와 있던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이 “네가 흉행(兇行)을 한 자냐”고 물었다. 이에 의사는 눈을 치켜 뜨며 “너 조중응은 귀중한 인사를 이 모양으로 하대하느냐”며 오히려 추상과 같이 꾸짖었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일경에게 “더러운 냄새가 코를 찌르니 권연초 한 개를 가져오라”고 하여 유유히 피웠다.●“내 목숨 빼앗을 수 있으나 충혼은 못 빼앗아” 경시청에서 조사를 받은 의사는 일경이 “공범이 있느냐?”고 묻자 “이러한 큰 일을 하는데 무슨 공범이 필요하냐. 공범이 있다면 2000만 우리 동포가 모두 나의 공범이다”고 말했다. 이듬해 4월 열린 재판에서도 “도와준 자를 말하라”는 일본인 재판장 스가하라에게 “이완용을 죽이는 것을 찬성한 자는 우리 2000만 동포 모두며 방조자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엄숙한 목소리로 역적 이완용의 8개 죄목을 거론하며 통렬하게 비판했다.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내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으나 나의 충혼, 의혼(義魂)은 절대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번 죽음은 슬프지 않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일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내 결코 죽어서 그 원한을 갚을 것이다.” 의사는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고 꼿꼿한 자세로 재판장을 꾸짖으며 이렇게 최후 진술을 했다. 부인 오씨는 ‘국적 이완용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았는데 우리 가부(家夫)는 왜 사형에 처하느냐’며 눈물을 흘렸다. 의사는 총독부 체제 발족 바로 전날인 1910년 9월 30일 순국했다. 의사는 의거를 공모한 사람들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호하면서 끝까지 단독 범행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병록 등 동지 10여명도 최고 징역 15년형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 의사는 부인 오씨를 성모여학교 교사인 함마리아의 소개로 만나 1907년 겨울 부부의 연을 맺었다. 오씨도 경찰에 끌려가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변호인을 선임하는 등 남편 뒷바라지에 열성을 다했다. 남편이 죽은 뒤 오씨도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중국 길림성과 상해 등지로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오씨는 귀국했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증거와 단서가 없어 석방되었지만, 미행과 감시를 받았다. 오씨는 다시 망명을 도모하다 병을 얻어 29세에 요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인 외과 의사의 집도로 수술을 받은 이완용은 53일 동안 입원했다. 순종과 고종은 이완용이 퇴원하는 날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종을 보내 안부를 묻고 거액의 위로금을 보냈다. 전국의 관찰사와 군수들로부터도 위로금이 답지했다고 한다. 퇴원 후 충남 온양에서 휴양을 한 이완용은 총리직으로 복귀해 데라우치 통감과 한일합방조약에 서명했다. 그 4일 후 순종 황제로부터 대한제국 최고훈장인 금척대수훈장을 받았다. 이완용은 일제의 보호 속에 백작 작위를 받고 호의호식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다 1926년 68세로 사망했다. 사인은 의사의 칼을 맞아 폐를 다친 후유증이었다고 한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그 섬에 가면 배 이름조차 대한·민국·만세더라

    그 섬에 가면 배 이름조차 대한·민국·만세더라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일본 여행 금지 분위기도 여전합니다. 피치 못해 일본을 가더라도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단체에 일정액을 기부한 뒤 가겠다는 이들이 생길 정도입니다. 아마 광복절을 앞두고 이 같은 반일 분위기는 더 뜨겁게 달아오르겠지요. 이 흐름에 호응하는 여행지는 어디일까요. 나라 안에 비교적 덜 알려진 항일 명소들을 찬찬히 되짚어 봤습니다. 태극기의 섬, 항일의 섬으로 불리는 전남 완도 소안도는 그 여정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휴가철에 가볼 만한 섬은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항일의 뜻을 되새기고 피서도 겸할 수 있는 여행지라면 소안도가 제격이지 싶습니다.완도 화홍포항. 소안도까지 가는 배가 정박해 있다. 뱃전에 ‘민국’이란 이름이 크게 써 있다. 무슨 뜻일까. 맞은편에서 오는 배 이름을 보다 무릎을 친다. ‘대한’이라 써 있다. 그럼 ‘만세’도 있을까. 당연히 있다. 화홍포항과 소안도를 오가는 카페리는 모두 세 척. 배 이름은 각각 ‘대한’ ‘민국’ ‘만세’다. ‘항일의 섬’으로 가는 배는 이처럼 이름마저 ‘애국적’이다. 섬에 들면 먼저 ‘항일의 섬, 해방의 땅 소안도’라고 적힌 푯돌이 여행객을 맞는다. 면소재지인 비자리까지 가는 해안도로에는 무궁화꽃이 즐비하다. 섬 내 모든 집에서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그것도 일년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왜 이 섬은 이처럼 예사롭지 않은 풍경을 갖게 됐을까. 소안도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자지도(현 당사도) 등대의 역사부터 살펴야 한다. 1909년 1월, 대륙 진출 야욕이 극에 달한 일제는 수탈한 미곡 등 물자들을 안전하게 실어나르기 위해 자지도에 등대를 세우고 일본인 등대수를 배치했다. 쌀을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등대를 세우는 노역에 강제 동원됐으니 그 분노가 오죽했을까. 등대가 불을 밝힌 지 두 달이 채 안 된 2월 24일, 마침내 섬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소안도 주민 7명이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등대수 4명을 처단하고 등대 기기를 파괴했다. 이것이 이른바 ‘자지도 등대 습격사건’이다. 주민들의 기개를 보여 준 이 사건은 고스란히 1920년대 소안도 항일투쟁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소안도의 부속섬 중 하나인 자지도에 얽힌 이야기 한 자락. 몇몇 섬 주민과 홍보책자 등에 따르면 자지도의 옛 이름은 항문도(港門島)였다. 육지로 드는 관문 역할을 하는 섬이라는 뜻이다. 한데 사람 몸의 “거시기한 부위”를 떠오르게 한 탓에 자지도(者只島)로 바꿨으나 이마저 “발음하기가 거시기혀서” 1982년 현재 이름인 당사도로 바꿨다.소안도 주민들의 항일운동은 1920년대 절정을 이뤘다. 당시 6000여명의 섬 주민 가운데 800여명이 일제에 의해 ‘불령선인’(일제에 순종하지 않는 조선인)으로 낙인찍혀 통제와 감시를 받았다. 수많은 항일운동가도 배출했다. 정부 건국훈장을 받은 20명을 포함해 무려 89명의 항일 독립운동가가 이 작은 섬에서 나왔다. 과목해변의 소안항일운동기념관에서 소안도 사람들의 치열한 투쟁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송내호(1895~1928) 선생 등 항일운동가의 부조와 당사도 등대 습격사건 조형물 등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 앞의 항일운동기념탑과 복원된 ‘소안사립학교’에도 항일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제 소안도의 볼거리를 말할 차례다. 소안항에서 비자리 쪽으로 가다 보면 제법 큰 규모의 저수지와 만난다. 주민들이 ‘원안’이라 부르는 호수로, 작은 섬 죽도를 끼고 섬 일주도로를 내면서 형성된 일종의 내해다. 호수 주변으로 달목공원 등 쉼터가 조성돼 있다. ‘원안’을 끼고 좌회전하면 월항리가 나온다. 월항리 해안가에 노랑무궁화 자생지가 있다. 노란 꽃잎이 인상적인 꽃으로 멸종위기종 2급이다.소안도는 완도에서 약 18㎞ 떨어져 있다. 본섬 소안도와 부속섬 당사도, 횡간도 등으로 이뤄졌다. 소안도는 동쪽으로 청산도, 북쪽은 완도, 서쪽은 보길도와 각각 인접해 있다. ‘섬의 숲’이 감싸고 있는 듯한 모양새다. 본디 남쪽과 북쪽 2개 섬이 떨어져 있었으나 길이 1.3㎞의 사주(과목해변)로 연결돼 하나의 섬이 됐다.부속섬인 당사도는 가기가 쉽지 않다. 본섬에서 사선을 빌리거나 섬사랑호를 타야 하는데, 전자는 값이 녹록하지 않고, 후자는 섬 주민조차 배시간이 헷갈릴 정도로 드물다. 당사도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은 맹선리 물치기미다. 맹선리와 진산리를 잇는 고갯길인 이른바 ‘빤스고개’ 인근에 전망대가 조성돼 있다. 물치기미 전망대에 서면 당사도는 물론 보길도와 복생도 등 바다 위에 뜬 이웃 섬들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소안도에는 천연기념물이 두 곳이다. 미라리 상록수림(339호)과 맹선리 상록수림(340호)이다. 수령 300년 안팎의 후박나무 등 다양한 수종의 노거수들이 방풍림을 형성하고 있다. 소안도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은 가학산이다. 고도 359m로 그리 높지 않지만, 산에 오르려면 해수면과 비슷한 높이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육지의 600~700m 높이의 산을 오르는 것과 비슷한 품이 든다. 고도가 낮다고 절대 얕봐선 안 된다. 산 정상에 서면 섬의 남과 북이 길다란 과목해변을 통해 이어진 장면과 마주한다. 소안도 홍보 책자 등에 어김없이 1순위로 등장하는 풍경이다. 맑은 날이면 제주도 한라산까지 눈에 잡힌다는데, 짙은 해무 탓에 그런 행운은 없었다. 미라리로 가는 고갯마루에 ‘운동장 쉼터·약수터’가 있다. 이곳 조금 위쪽으로 가면 가학산 등산로가 나온다. 표지판이 작아 꼼꼼하게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정상까지 가는 동안 풍경 좋은 암릉 전망대가 몇 곳 나온다. ‘인증샷’ 찍으며 쉬다 걷다를 반복하다 보면 정상까지 얼추 1시간 30분 이상 소요된다. 일주산행의 경우 맹선리 쪽을 날머리로 삼아야 하지만, 오가는 교통편이 좋지 않아 원점회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려올 때 길이 미끄러워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글 사진 완도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61) →가는 길 완도 화홍포항에서 소안도행 카페리가 오전 6시 40분(하절기)부터 오후 6시 20분까지 대략 1시간 간격으로 운항한다. 노화도(보길도)를 거쳐 소안도까지 간다. 여름철 성수기에는 22항 차로 확 늘어난다. 소요시간은 50분이다. 뱃삯 1인 7700원, 승용차 2만원. 이웃한 보길도와 묶어서 둘러보길 권한다. 윤선도원림(명승 34호) 등 볼거리가 많다. 소안에서 노화(보길도)까지 뱃삯은 1인 1700원, 승용차 8000원. 배시간에 맞춰 마을버스가 섬 구석구석을 오간다. 화흥포 매표소 555-1010, 1099 소안도 매표소 553-8177. →먹을 곳 소안면 소재지인 비자리에 식당들이 몰려 있다. 1인분 식사를 팔지 않는 곳이 많다. 특히 저녁 때는 일찍 문 닫는 곳이 많아 예약을 해두는 게 좋다. 소안도맛집(555-9966), 해변식당(553-7740) 등에서 1인 백반, 육개장 등을 낸다. →잘 곳 과목해변 동남펜션(553-0770), 미라리 미라펜션(552-4711) 등의 시설이 비교적 나은 편이다. 비자리에 여관이 몇 곳 있다.
  • 박열 의사 부인 가네코 후미코를 기리며…

    박열 의사 부인 가네코 후미코를 기리며…

    영화 통해 재조명… 작년 건국훈장 서훈박열의사기념사업회(이사장 박인원)는 23일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박열의사기념관에서 제93주기 가네코 후미코(1903~1926) 추도식을 열었다. 가네코는 식민지 조선의 항일투사 박열 의사의 동지이자 아내다. 행사는 추도사, 헌화, 분향에 이어 한일 간 연구 성과를 공유하는 공동 워크숍, 헌시 낭송, 문경시립합창단 합창 순으로 진행됐다. 추도식에서는 가네코의 외가가 있던 야마나시 가네코후미코연구회 사토 노부코 회장이 건국훈장 애국장을 박열의사기념관에 기증했다. 한국 정부는 사망 92년 만인 지난해 가네코에게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했다. 2017년 개봉한 영화 ‘박열’은 가네코의 업적을 재조명했다. 가네코는 1903년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출신으로, 1922년 도쿄에서 박열 의사를 만나 결혼한 뒤 재일조선인 아나키즘(무정부주의) 항일 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일제의 탄압정책을 비판하는 한편 박열 의사를 도와 일왕 부자를 폭살하고자 폭탄을 반입하다가 체포돼 옥살이하던 중 1926년 7월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24세의 나이에 의문사했다. 그는 남편 박열의 고향인 문경시 문경읍 팔영리에 묻혔으나 2003년 문경 마성면에 박열의사기념공원이 조성되면서 이장됐다. 하지만 6·25전쟁 발발 3일 만에 강제 납북돼 1974년 북한에서 생을 마감한 박열 의사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기념관은 2003년부터 일본의 가네코후미코연구회와 함께 홀수 해 7월 23일에는 국내에서, 짝수 해에는 일본 야마나시에서 추도식을 열고 있다. 문경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가짜 유공자’ 판명나도 후손이 훈장 반납·이장 거부 땐 강제 못해

    ‘가짜 유공자’ 판명나도 후손이 훈장 반납·이장 거부 땐 강제 못해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중국 랴오닝성 선양에서 군의관으로 일하던 재중 교포 김세걸(72)씨는 친구들과 노래방에 갔다가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한국 가요를 부르려고 반주기를 켜자 서울 현충원이 등장했는데, 거기에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가 있었다. 부친은 일제강점기 지린성 일대에서 항일단체 국민부의 참사(하사)로 활동한 김진성(1914~1961). 1934년 일제 밀정 김용환을 처단한 혐의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해방 뒤 출소했다. 가족을 찾으러 만주로 다시 갔지만 남북이 분단돼 발이 묶였고 1961년 선양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세걸씨는 아버지의 묘지가 왜 한국에도 있는지 너무도 궁금했다. 당시 마흔을 갓 넘긴 그가 30년 넘게 가짜 독립유공자 실태를 파헤치게 된 ‘역사 추적’의 시작이었다. 베이징대 의대를 나온 최고 엘리트였지만 1992년 한중수교가 이뤄지자 부친 묘지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미련 없이 한국으로 건너왔다. 현충원에 있던 ‘가짜 김진성’은 ‘진짜 김진성’과 생몰 연대만 빼고 나머지 공적이 같았다. 누군가 아버지의 공적을 훔쳐 1968년 건국훈장 애국장(현 독립장·3등급)을 받고 국립묘지에 안치된 것이다. 그는 정부에 여러 차례 항의했지만 그때마다 담당자는 제대로 된 조사 없이 “동명이인”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단다.세걸씨는 수년에 걸쳐 자료를 모아 가짜 김진성이 아버지 행세를 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김영삼 정부는 진짜 김진성에게 서훈을 추서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가짜 김진성에게 준 훈장은 취소하지 않았다. 현충원의 묘지도 그대로 뒀다. 세걸씨는 “가짜 김진성 묘지를 하루빨리 없애고 거짓 서훈에 가담한 이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보훈 담당 직원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인정받아 한국으로 귀화했으면 됐지 더이상 뭘 바라느냐”며 되레 그를 힐난했다고 한다.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에 화가 났지만 포기하지 않고 이 문제를 파고들었다. 결국 김대중 정부 때인 1998년 7월 가짜 김진성의 묘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부친의 유해가 안장됐다. 선양의 한 노래방 화면에서 가짜 김진성의 묘를 본 지 10년 만이었다. 김세걸씨 사례는 그간 우리나라에서 가짜 유공자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또 정부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됐지만 ‘가짜 독립유공자와의 전쟁’은 이제야 시작됐다. 문재인 정부는 “독립유공자 전수조사를 통해 가짜 유공자를 가려내겠다”고 밝히며 과거 정부와 다른 모습을 보이지만 수많은 법적·제도적 허점이 ‘역사 바로 세우기’를 가로막고 있다.●30여년 추적 끝 3代 5명 ‘가짜’ 밝혀내 1998년 세걸씨는 부친의 공적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가짜 김진성뿐 아니라 친척 상당수도 유공자로 둔갑해 ‘독립운동 명문가’ 행세를 한 것이다. ‘부친의 묘 옆에 가짜 유공자를 둘 수 없다’고 마음먹고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비밀을 캤다. 3대에 걸쳐 5명을 독립운동가로 둔갑시킨 이들 일가의 엽기적 범죄가 고구마 줄기처럼 끌려 나왔다. 가짜 김진성의 사촌형 김정수(1909~1980)는 일제강점기 중국 만주의 대표적 항일조직 참의부에서 활동한 공로로 1968년 건국훈장 애국장(현 독립장·3등급)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평안북도 초산 출신 독립운동가 김정범(1899~?)의 공적을 가로챈 것이었다. 김정수의 조부 김낙용(1860~1919·건국훈장 독립장)과 백부(큰아버지) 김병식(1880~?·건국훈장 애족장), 부친 김관보(1882~1924·건국훈장 독립장)도 거짓 행적으로 의심되는 증거로 서훈을 받았다. 가짜 유공자들은 호적을 위·변조한 뒤 연고자가 없는 진짜 유공자의 항일투쟁 공적을 가져와 훈장을 받는다. 후손 확인이 쉽지 않은 북한이나 중국에서 활동한 이들을 주된 ‘신분 세탁’ 대상으로 삼는다. 김정수 일가도 이 수법을 그대로 썼다. 세걸씨는 국가보훈처에 이들의 사기 의혹을 폭로하고 시정을 요구해 왔다. 하지만 담당자들은 늘 “검토 중”이라는 답변만 반복했다고 한다. 세걸씨는 포기하지 않고 시민단체 등과 연계해 이 사건을 꾸준히 공론화했다. 우공이산이라고 했던가. 지난해 정부는 광복절을 맞아 “김정수 일가 가짜 독립유공자 5명의 서훈을 모두 취소한다”고 선언했다. 이 문제가 처음 불거진 지 20년이 지나서였다. 그는 한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그간 정부가 왜 이 문제를 질질 끌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공무원들이 책임감이 부족해서다”라고 잘라 말했다. 세걸씨는 일생을 바쳐 김정수 일가의 가짜 유공자 행각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들의 서훈이 취소된 것 말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35조에 따르면 독립유공자가 취소되면 훈장과 독립유공자증을 반납해야 한다. 현충시설에서 철거되고 보상금 지원도 중단된다. 하지만 김정수 일가에 대해서는 이런 절차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아 보인다. 고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정부는 1968년부터 최근까지 김정수 등 가짜 유공자 유족에게 보훈급여 4억 5000여만원을 지급했다. 그간 물가가 25배 이상 올랐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 가치로 40억~5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고 의원은 “가짜 독립유공자 후손 행세를 하며 받아 간 수십억원 상당의 보훈연금을 전액 국고로 환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현행법에는 최근 5년간 지급된 금액만 돌려받을 수 있어 대부분 금액은 회수가 불가능하다.●후손들 거짓 서훈 신청해도 ‘밑져야 본전’ 지난해 보훈처는 “독립유공자 전수조사 결과 부정한 방법으로 보상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면 부당이득 반환 청구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동명이인 여러 명의 공적을 짜깁기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대전 김태원’의 후손에게 “그간 지급된 보훈연금을 반납하라”고 요구했다가 행정소송이 제기돼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일부 후손은 “국가에서 훈장을 주니까 받은 것이다. 검증을 소홀히 한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며 오히려 보훈처를 비난한다. 앞으로 가짜 유공자로 밝혀진 후손에게서 보훈연금을 회수하기가 쉽지 않을 것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가짜 독립운동가로 판명나도 후손이 자진 반납하기 전까지는 훈장이나 혜택을 되가져오기 힘들다. 현충시설 이장 역시 후손이 버티면 강제할 수 없다. 정부가 가짜 유공자 후손들에게 “제발 묘를 옮겨 달라”고 사정해야 할 판이다. 세걸씨가 찾아낸 가짜 독립운동가 김정수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그대로 묻혀 있다.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이미 안장된 자도 이장을 강제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유영옥(국민대 교수) 국가보훈학회장은 “진짜 독립유공자의 공적을 가로챈 것은 분명한 범죄행위지만 이를 처벌할 근거가 없다. 나중에 가짜로 밝혀져도 후손은 손해 볼 것이 없다. 이들에게 거짓 서훈 신청은 그야말로 ‘밑져야 본전’인 것”이라면서 “국가는 가짜 독립운동가 일가족에 대해 서훈 취소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이들이 받았던 혜택을 모두 회수하고 국가와 국민을 속인 것에 대해 형사책임도 물을 수 있게 강한 제제가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1945년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1942~1945)과 손잡고 한반도에 침투하려고 했던 광복군 소속 OSS 대원 이병돈(1914~2005)의 딸 예숙(57)씨는 자신이 겪은 유공자 심사 비밀주의를 질타했다. 그는 “보훈처는 심사 대상자가 어떤 이유로 통과했거나 탈락했는지 대략의 이유조차도 말해 주지 않는다”며 “훈장은 우리나라 최고의 영예다. 심사는 무엇보다도 공정해야 한다. 구체적인 내용을 밝힐 수 없다면 최소한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뤄지게 해 객관성을 담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광복군 대원 이병돈은 홀대…친일 밀정 송세호는 유공자 둔갑

    광복군 대원 이병돈은 홀대…친일 밀정 송세호는 유공자 둔갑

    경기 김포에 사는 이예숙(57)씨는 독립운동가 아버지에 대한 서훈을 거부하던 과거 보훈 당국의 태도에 지금도 화가 난다. 부친 이병돈(1914~2005)은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나 선진 영농기술을 배우려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1942년 1월 산시성 시안에서 광복군 제2지대 뤄양지구 초모공작(광복군 모집) 담당자를 만나 곧바로 광복군에 입대했다. 군에서 안중근(1879~1910)의 5촌 조카인 안춘생(1912~2011) 등과 함께 축구대회에도 출전해 중국군관학교 팀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당시 광복군은 미군과 함께 한반도 진공 작전을 추진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1942~1945)과 손잡고 한반도와 일본 본토에 침투해 지하공작에 나서려고 했다. OSS 특수훈련을 받은 광복군 대원을 국내에 잠입시켜 교란작전 등을 펼칠 계획이었는데, 이를 ‘독수리 작전’이라고 불렀다. 영화 ‘군함도’(2017)에서 독립운동 인사를 구하고자 일본 나가사키현 하시마섬(군함도)에 잠입한 박무영(송중기 분)이 광복군 소속 OSS 요원이다. 이병돈은 1945년 4월 OSS 훈련반에 들어가 특수무기반을 수료했다. 국내정진군 사령관 이범석(1900~1972) 휘하에서 한반도 진격 명령을 기다리다가 작전 개시 일주일을 앞두고 광복을 맞았다. 예숙씨에 따르면 부친은 1946년 6월 귀국해 충북 청주에 정착했다. 정부가 독립유공자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곤궁하게 살았다고 한다. 1985년 9월 광복군 제2지대 직속상관이던 안춘생 당시 독립기념관 건립 추진위원장이 TV에 출연한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연락했다. 안 위원장은 부친의 서훈을 돕고자 직접 인우보증(다른 사람 행적의 사실 여부를 보증하는 것)을 서 줬다. 광복군 출신 인권변호사 태윤기(1918~2012)가 쓴 독립운동 수기 ‘회상의 황하’(1975)에도 부친의 이름이 광복군으로 소개돼 있어 유공자 지정에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부친을 탈락시켰다. “객관적 사료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 구체적인 사유는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처음 서훈을 신청한 지 6년이 지난 1992년에야 어렵사리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 현재 부친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다. 예숙씨는 “내가 아는 어떤 유공자의 후손은 ‘부친이 일본경찰을 위협하려고 삽을 휘둘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훈을 받았다. 그런데 보훈 당국은 광복군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부친의 서훈 여부에 대해서는 늘 고압적 자세로 일관하며 제대로 된 설명 한 번 해 주지 않았다”면서 “정부의 무성의한 행정에 서운함이 크다. 지금이라도 사과를 원한다”고 전했다. ●친일파로 드러난 독립유공자 송세호·서춘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청산하지 못한 가짜 독립유공자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우리 정부의 부실한 검증이 빚어 낸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간 보훈 당국이 서훈을 잘못 승인하거나 거부한 사례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18일 학계에 따르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독립유공자 송세호(1893~1970)의 친일 의혹 규명 논란이 거세다. 그는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나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뒤 1919년 3·1운동 직후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임정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고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상하이지부장에도 선출됐다. 1931년에는 상하이에서 연초공장을 운영하며 임정에 군자금을 제공하기도 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추서받았다. 그러나 최근 그가 1930년대부터 친일파로 돌아섰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다. 1939년 7월 상하이에 근거한 독립의열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 관계자가 체포됐는데, 이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보고된 ‘남화한인청년연맹 관계자 검거의 건’에는 송세호가 ‘일찍부터 일본의 밀정 행위에 종사한 친일 조선인’으로 기재돼 있다. 특히 그는 상하이에서 일본군 위안소로 추정되는 ‘극동 댄스홀’을 경영했다. 당시 일본은 신원이 검증된 민간인에게만 위안소 운영을 허가했다. 이들 자료가 사실이라면 우리 정부는 위안부 동원에 가담한 친일 밀정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한 것이 된다. 가짜 독립유공자 송세호가 득세하고 진짜 독립운동가 이병돈이 홀대받던 현실을 우연으로 볼 수 있을까. 가짜 유공자가 생겨난 것이 단순 행정 착오나 일부 유공자 후손의 일탈로만 치부할 사안일까. 전문가들은 친일파가 자신의 과오를 씻고 독립유공자로 포장되는 데 저간의 사정이 있다고 설명한다.●“유공자 심사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다” 지금의 독립유공자 포상제도는 박정희(1917~1979)가 정권을 잡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이끌던 1962년 시작됐다. 대한민국 독립에 기여한 이들을 찾아내 부족한 정치적 정당성을 만회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군에 배치돼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하던 친일 행적자다. 그가 최고회의 의장이 돼 독립유공자 서훈에 나서다 보니 자연스레 친일파 출신 학자·전문가도 유공자 선정 과정에 일부 참여했다. 유공자 심사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다’고 볼 수 있다. 친일문제 전문가인 정운현 국무총리비서실장이 1990년 월간 ‘말’에 기고한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들’이란 글에는 당시의 실태가 자세히 묘사돼 있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첫 정부 포상이 실시된 1962년 문교부 독립유공자 공적조사위원회 위원 7명(위원장 포함) 중에는 (친일파) 신석호와 이병도가 들어 있었다. 이듬해인 1963년에는 내각사무처 독립운동유공자 상훈심의회가 심사에 나섰는데 심사위원 22명 가운데 고재욱과 신석호, 유광렬, 이갑성 등 4명이 친일 인사였다. 1968년에는 총무처 독립유공자 상훈심의회가 심사를 맡았는데 위원 21명 가운데 고재욱과 백낙준, 신석호, 유광렬, 이병도, 이선근, 홍종인 등 친일 인사가 7명이나 됐다. 1977년에는 원호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가 심사를 했는데 위원 11명 가운데 유광렬·이은상 등 2명이 친일파 출신이었다.” 우리 사회 전반에 친일청산 분위기가 퍼지면 자신을 지키기 힘든 친일파들이 독립유공자를 제대로 평가하려고 노력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병돈의 사례처럼 이들이 진짜 독립운동가를 심사할 때는 더 까다롭고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 탈락을 유도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제기된다.●친일파끼리 과오 덮고 유공자 포장 의혹도 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은 서춘(1894~1944)은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했지만 훗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주필 등을 지내며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했다. 당시 그에 대한 서훈을 심사한 독립운동유공자 상훈심의회가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심의회는 서춘의 친일 행적을 외면하고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이는 지금도 친일파가 같은 친일파를 챙겨 주고자 서훈 제도를 악용한 것으로 의심받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는 “가짜 유공자들이 누리던 온갖 영예와 혜택을 걷어내 우리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가짜가 숨진 독립군 행적 도용 유공 혜택… 보훈처 색출 소극적

    가짜가 숨진 독립군 행적 도용 유공 혜택… 보훈처 색출 소극적

    지난해 10월 국가보훈처 국정 감사에서 고용진(55)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은 김태원을 거론하며 보훈처의 부실 서훈 은폐 의혹을 따졌다. ‘김태원 서훈’ 논란은 그의 후손들이 이름만 같은 다른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도용한 것으로 의심받는 대표적 사례다.17일 보훈처 기록 등에 따르면 대전 출신 김태원(1901~1951)은 열일곱 살이던 1918년 중국으로 건너가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 뒤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그 산하에서 활동했다. 1922년 평안북도 삭주로 침투해 일본경찰 4명을 사살했다. 특수전 부대라고 할 수 있는 ‘벽창 의용단’을 조직한 뒤 평북 의주와 평남 대동 등지에서도 일본인을 살해했다. 1926년 신의주에서 체포돼 같은 해 5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평양 감옥에 수감돼 죽음을 기다리다가 천우신조로 탈옥했다. 이후 상하이에서 임정 요원으로 활약하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2015년 대전 지역 시민단체와 언론 등에서 “그가 평안북도 출신 김태원(1903~1926)의 공적을 가로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대전 김태원은 생년월일과 가족 관계 등이 보훈처 자료 내용과 판이했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평북 김태원은 1926년 검거 당시 사형을 당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대전 김태원은 평북 김태원의 행적을 차용한 뒤 “사형 집행을 앞두고 기적적으로 탈출했다”며 결말만 바꿨다. 1963년 대전 김태원의 후손들이 평북 김태원의 활동을 가져와 연금 등 보훈 혜택을 받았다. 재검증에 나선 국가보훈처는 유족 등록을 취소하고 최근 5년간 지급된 보훈연금도 반납하라고 결정했다. 대전 김태원의 후손들이 각종 혜택을 받아온 지 50년도 훨씬 지난 뒤였다. 대전 김태원의 아들 정인씨는 지금도 독립유공자 후손 자격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 이사직을 맡고 있다. 문제는 보훈처가 대전 김태원 논란이 불거지기 4년 전인 2011년부터 이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보훈처 자료에는 “1963년 독립장을 수여한 김태원은 평북 신의주 출신인데, 독립유공자로 등록한 김태원은 대전 출신이다. 생년과 본적, 사망일시가 다르고 인척관계도 상이하다”고 적혀 있다. 이에 대해 보훈처는 “2011년 당시 상황을 확인할 기록이나 서류, 담당자가 남아 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정부가 가짜 독립유공자를 솎아낼 의지가 진짜로 있는지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일본군 출신 한국인 광복군 위장 대전 김태원 논란은 그간 가짜 유공자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잘 보여 준다. 대한민국에 가짜 독립유공자가 많다는 지적은 1990년대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한국광복군 지원 업무를 맡았던 왕지셴 전 상교(대령)는 1994년 월간지 ‘말’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군에 있던 한국인 91명이 ‘비호대’란 단체를 결성해 중국군 9전구(후난성 소재) 사령관을 돕고자 항일전투에 참가했다던데 사실인가”라고 묻자 “비호대란 단체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나 같은 정보장교도 9전구 사령관을 만나기 힘들었다. 한국광복군 중에서는 만난 이가 거의 없다”면서 “비호대 조직설은 거의 상상에 가까운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일부 한국인이 검증되지 않은 단체 이름을 지어내 독립유공자 행세를 해왔음을 추론할 수 있다. 그는 또 독립운동가 박주대(1924~2000)가 대만성 행정장관공서(일본 패배 뒤 국민당 정부가 설치한 통치기구)가 발행한 ‘한국임시정부 및 광복군 관할 각부 인수표’를 근거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된다. 대만성 정부나 행정장관공서는 광복군 관련 자료를 가지고 있을 리 없다”고 토로했다. 대만성은 1945년까지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 대만이 자신과 관계도 없던 한국광복군 관련 자료를 정리해 따로 보관할 이유가 없다는 지적이다.왕 전 상교는 한국에서 가짜 독립투사가 대거 등장한 이유로 1945년 해방 뒤 일본군에서 활동하던 한국인이 광복군으로 들어가 ‘신분 세탁’에 나섰기 때문으로 봤다.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인 장준하(1918~1975)의 장남 호권(70·광복회 서울지부장)씨도 엉터리 독립유공자의 유래를 사이비 광복군에서 찾는다. 일본군이었다가 해방 뒤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고 떠돌던 이들 상당수가 귀국해서 광복군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듯 해방 직전인 1945년 4월 작성된 임정 문서에는 광복군 인원이 339명으로 기록돼 있다.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 김득명(1923~2009)은 “이것도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더 많은 물자를 타내려고 상당히 부풀린 수치”라고 증언했다. 하지만 현재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광복군은 600명에 달한다. 이 때문에 “광복군 상당수가 가짜”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보훈처 공적심사도 가짜 유공자 양산 한몫 일각에서는 독립유공자 제도를 처음 실시한 1960년대부터 브로커와 보훈 담당 직원 간 ‘검은 거래’를 통해 독립유공자의 서훈을 돈을 받고 내주는 일이 존재했을 것으로 본다. 2017년 “자신의 당숙(아버지의 사촌형제)이 보훈연금을 타내려고 증조부 김정필(1846~1920)을 독립유공자로 둔갑시켰다”고 폭로한 김종갑(77)씨는 “1991년 정부가 증조부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면서 후손들에게 증조부의 행적을 확인하거나 재조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전화 한 통도 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윤교병(1881~1930)의 손자인 윤석경 전 광복회 대전충남지부장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전에 돌아가신 분들이 많았다. 특히 돌아가신 분들이 북한에 있으면 당시로서는 연고 확인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일부 보훈 담당 공무원들이 대한민국 내 동명이인이나 이름이 비슷한 사람에게 해당 정보를 넘겨줬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윤 전 지부장은 “정부는 행정체계가 미비하던 1960~70년대에 가짜 독립유공자가 많이 생겨났을 것으로 보지만 실제로는 1980년대 이후에 더욱 많을 것”이라면서 “당시 유공자의 손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자신의 할아버지 공적을 새로 찾아냈다며 등록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랫동안 무연고로 있던 유공자의 가짜 후손으로 등록했을 것으로 추측한다”고 전했다. 그는 지금껏 정부가 가짜 유공자 색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에 대해 “1만 5000명이 넘는 독립유공자를 전수조사하는 것이 힘든 작업이기는 했다. 부득이하게 선배 공무원들의 과오를 들춰내야 하는 것도 불편한 일이었다”면서 “이 때문에 (정부가 조사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담당자가 바뀌었고 후임자에게 인수인계가 안 되는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현재 학계 등에서 추정하는 가짜 독립유공자 수(100명 이상)는 우리나라 전체 서훈자 1만 5000여명과 비교하면 극히 일부다. 우리 정부가 독립유공자 선정 과정에 구조적으로 개입해 비리를 저질렀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면서도 “그럼에도 전체 독립유공자 가운데 3분의1가량이 아직도 후손을 찾지 못했다. (이들의 공적을 도용해 가짜 유공자가 된 사례는 없는지) 전수조사로 확인해 우리나라 서훈체계의 미흡한 점에 대해 이번 기회에 정확히 짚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봉오동전투 최진동, 임정 김희선… 민낯 드러난 가짜 유공자

    봉오동전투 최진동, 임정 김희선… 민낯 드러난 가짜 유공자

    2017년 8월 우리 사회에 놀라운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한 70대 시민이 ‘자신의 증조할아버지가 가짜 독립유공자였다’는 사실을 솔직히 밝혀 정부로부터 이를 인정받은 것이다. 조상의 독립운동을 부풀리는 사례는 허다했지만, 그 반대로 조상의 허위 공적을 스스로 바로잡은 것은 처음이었기에 화제가 됐다. 주인공은 독립유공자에 이름을 올렸던 김정필(1846-1920)의 증손자 김종갑(77)씨. 그는 2015년 용기를 내 광복회 대전충남지부 김영진 감사를 찾아가 오랜 세월 숨겨온 이야기를 털어놨다. 국가보훈처의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김정필은 충남 대덕 출신으로 1907년 의병장 한봉수(1883~1972)의 밑에 들어가 경기 용인, 여주 등에서 격전을 치렀다. 중국 만주로 망명한 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살해됐다. 1968년 김씨의 당숙(아버지의 사촌형제)이 서훈을 신청했고 정부는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도 추서했다. 하지만 종갑씨는 모든 것이 이상했다. 자신의 증조부가 그토록 엄청난 활동을 했는데도 집안 사람 누구도 이를 알지 못했다. 증조부가 봉오동 전투에 참가했던 나이도 75세로 격한 신체활동을 하기 힘들 때였다. 공훈록에는 그가 1920년 사망했다고 나오지만 실제 증조부는 1925년 세상을 떠났다. 알고 보니 당숙이 보훈 연금을 타내려고 똑같은 행적의 동명이인 공훈을 가로채 서훈을 신청한 것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 종갑씨는 고민 끝에 국가보훈처에 “증조부에 대한 서훈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사실이 아닌 것을 묻어두는 것이야말로 선대를 욕보이는 죄악이다. 정부가 유공자 전수조사를 실시한다는 소식이 들리는데 ‘가짜 유공자’ 논쟁을 없애는 계기가 돼야 한다”면서 “가짜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하루빨리 서훈을 자진 반납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데 동참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공식적 서훈 취소 ‘가짜 유공자’는 39명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목소리가 높지만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에도 독립유공자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가짜’들을 솎아내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학계와 시민사회는 입을 모은다. 아직도 수많은 가짜 독립운동가가 버젓이 예우받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기 때문이다.●보훈처, 서훈자 1만 5180명 전수조사 17일 보훈처가 내놓은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 현황’을 보면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서훈이 취소된 ‘가짜 독립유공자’는 39명이다. 2011년에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2005~2009)가 내놓은 반민족행위자(1006명) 명단을 토대로 허위 공적자 19명에 대한 서훈을 취소했다. 2017년에도 동일인 중복 서훈 등 가짜 유공자 15명을 추려냈다. 지난해 2월에는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1891~1955)의 서훈이 박탈됐다. 학계에서는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가짜 독립유공자가 100명이 넘을 것으로 본다.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편찬실장은 “과거 자료가 워낙 부실하다 보니 같은 공적으로 이중 포상이 이뤄진다거나 흠결이 있는 분들까지도 잘못 서훈된 사례가 많았다”고 설명했다.●공적 도용 등 가짜 유공자 30~40명 추가 가짜 유공자 논란이 끊이지 않자 보훈처는 지난해 11월 “서훈자 1만 5180명에 대해 전수조사를 벌이겠다”고 약속했다. 1976년 이전 서훈자 가운데 우선 검증 대상 587명에 대한 1차 조사 결과를 먼저 발표한다. 이들 587명은 1949~1976년에 당시 문교부와 총무처가 서훈한 독립유공자 가운데 1990년 재검증에서 빠진 이들이다. 과거에는 건국훈장이 3등급(중장, 복장, 단장)이었다가 1990년부터 5등급(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으로 확대됐다. 이때 보훈처는 새로 생겨난 4~5등급(애국장, 애족장)에 해당하는 이들을 선정하고자 일부 유공자에 대해 재검증 작업을 벌였다. 그간 유공자 전수조사를 주장해 온 윤석경 전 광복회 대전충남지부장은 “이번이야말로 역사를 바로 세우고 보훈처가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강조했다. 학계에 따르면 보훈처는 이번 조사에서 독립운동 행적이 지나치게 부풀려지거나 남의 공적을 도용한 가짜 유공자 30~40명 정도를 추가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인물로는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김희선(1875~1925)과 봉오동 전투의 주역으로 알려진 최진동(1883~1945) 등이다. ●김희선의 상하이 임시정부 행적 지나치게 과장 김희선은 조선 말기 육군참령(소령)으로 활동하다가 1907년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자 항전을 주도했다. 평안도 안주군수로 있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중국 상하이로 탈출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해 군무부차장(국방부차관)을 지냈고 1920년 만주로 건너가 대한청년단연합회·대한독립단·서로군정서를 통합한 대한광복군총영을 설치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다. 그는 1925년 지린성 지안현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백범일지에는 그가 “임정 군무부차장 때 일본군에게 항복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적혀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중국에서 그의 행적이 지나치게 과장됐다”고 주장해 왔다. 최진동은 함경북도 온성 출생으로 중국 만주로 망명해 1919년부터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제19사단 보병부대와 교전해 5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다. 이후에도 북간도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무장항일운동을 이어 갔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다. 하지만 그는 1937년 중일전쟁에서 일본의 위력을 확인한 뒤 돌연 친일파로 변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군 토벌대의 선두가 돼 항일무장세력 진압에 앞장섰고 자신의 독립운동 과거를 속죄하고자 일제에 거액의 국방헌금을 냈다는 의혹도 있다. 막대한 재산으로 독립운동과 친일행각을 동시에 벌인 것으로 의심받는 인물이다. 이에 대해 최진동의 유족은 “(친일 의혹은) 몇몇 학자들이 감정에 기반해 작성한 그릇된 자료가 바탕이 됐다”면서 “특히 일제의 비행기 제조를 돕고자 헌금을 했다는 일부의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반박했다. 정부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가짜 유공자 전수조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친일 행적 인물들의 현충원 안장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고도 국립묘지에 묻히는 이들이 해마다 늘고 있다. 보훈처와 민족문제연구소 등에 따르면 현재 서울현충원에만 친일 인사 37명이 안장돼 있다. 이 가운데는 국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 인물도 7명이나 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친일 행위가 확인됐음에도 여전히 현충원에서 진짜 독립유공자들과 함께 있다. 7명 가운데 한 사람인 이종찬(1916~1983)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와 1942년 2월 일본군 최고 영예인 금치훈장을 받을 정도로 일제에 협력했다. 그럼에도 해방 이후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는 이유로 현충원에 묻혔다. 2015년 9월 안장된 김홍준(1915~1946)은 만주국이 세운 간도특설대에서 항일무장세력을 소탕하는 데 가담했다. 하지만 그 역시 대한민국 국방경비대총사령부 근무 경력을 인정받아 국립묘지 안장 자격을 얻었다.●‘김구 암살 배후 의혹’ 김창룡도 국립묘지에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친일인사 28명을 더하면 그 수는 65명으로 늘어난다. 대전현충원에 있는 친일 인사 가운데 일본군 헌병 오장(분대장) 출신 김창룡(1920~1956)은 김구(1876~1949) 암살의 배후에 있었다는 의혹을 받는다.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관계자는 “현충원에 반민족·민주행위자들이 버젓이 묻혀 있는 것은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것”이라며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하루빨리 개정해 이미 안장돼 있는 자도 이장을 강제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순종 조문 온 총독 노렸던 ‘금호문 의거’… 6·10 만세 자극제로

    순종 조문 온 총독 노렸던 ‘금호문 의거’… 6·10 만세 자극제로

    1926년 4월 28일 오후 1시 10분쯤 서울 창덕궁 금호문 앞. 사람 무리 속에서 건장한 청년이 자동차 한 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동차에는 일본인 3명이 타고 있었다. 금호문을 빠져나온 자동차는 돈화문 쪽으로 갔다가 길이 막혀 다시 금호문 쪽으로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 “사이토 총독이다”라고 수군거렸다. 청년은 비호처럼 뛰어올라 왼손으로 자동차 창을 잡고 날카로운 칼로 가운데 앉은 사람을 찌르려 했다. 왼쪽 사람이 저지하기에 그 사람을 공격하고 다시 가운데 사람을 찔렀다. 빠르기가 전광석화와 같았다. 총독 처단에 나선 주인공은 평범한 조선 청년 송학선이었다.불행히도 가운데 사람은 일본 총독 사이토가 아니었다. 송학선 의사(義士)가 사이토로 오인하고 처단한 사람은 생김새가 비슷한 일본인민회 이사 사토였다. 왼쪽 사람은 경성부협의원(국수회조선본부이사) 다카야마였다. 이들은 순종 황제 빈소에 조문하고 나오던 길이었다. 송 의사는 재동 쪽으로 달아났다. 휘문고보 교문 앞까지 달아나자 경찰 수십명이 추격했다. 일경들은 칼을 휘두르고 돌을 던지면서도 감히 근접하지 못했다. 겁에 질린 헌병 두 명이 권총탄을 서너발 쏘았다. 하지만 의사는 “오냐, 쏘아 죽여라”라고 하면서 두 팔을 떡 벌렸다. 결국 의사는 머리에 상처를 입고 일경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의사는 구경하던 학생들에게 “만세를 불러라, 만세를 불러”라고 소리쳤다. 다카야마는 사망했고 총독으로 오인받은 사토는 중상을 입었다. 송 의사가 활극 배우처럼 거사를 일으킨 날은 순종 황제가 굴욕적인 삶을 이어 가다 승하한 13일 후로 백성이 비탄에 빠졌을 때였다. 일제는 송 의사 의거 직후에는 보도를 통제해 5일 후에야 언론을 통해 의거가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송 의사의 의거는 ‘금호문(金虎門) 사건’이라 이름 붙여졌다. 비록 오인으로 실패했지만 순수한 청년의 단독 의거는 6·10 만세운동을 일으킨 자극제가 되었다.의사는 1897년 2월 19일 서울 천연동에서 태어났다. 아우들의 이름도 우학선(又學善·또학선), 삼학선(三學善)이었다. 의사가 보통학교 1학년에 다닐 때 아버지의 사업 파산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의사도 떠돌이 생활을 했고 16세 때 장사를 하러 갔던 아버지가 돌아와서 가족이 다시 모였다. 19세 때 서울 남대문에 있는 농구(農具) 회사에 취직했다. 집안 살림이 조금씩 나아졌고, 1922년 2월 애오개(아현) 마루턱 북아현동에 오막살이 같은 작은 집을 마련해 이사했다. 그러나 의사는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급성 각기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는데 치료를 한 끝에 1925년 봄에 완쾌했다. 송 의사는 고등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외유내강의 강직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고 한다. 의사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 송상도의 ‘기려수필’에는 “어려서부터 성품이 과묵하여 일생을 두고 남과 언쟁을 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의사가 반일 감정을 느낀 것은 어렸을 때부터였다고 한다. 어느 날 진고개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보았고 본받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일본인 회사에 다니며 차별을 받았고, 병으로 강제 해고당하면서 그런 의식이 더 강해졌을 것이다. 그 후 의사는 조선 총독을 목표로 삼아 거사를 계획했다. 의사는 치밀하게 준비했다. 사이토 총독의 사진을 보고 용모를 머리에 담아 두었다. 틈만 나면 집 뒷산에 올라 칼 꽂는 연습을 했다. 막내아우 송삼학선씨는 월간지를 통해 이렇게 회고했다. “형님은 평소에 남한테 싫은 얘기 한마디 않고 지내던 양순한 사람이다. 내가 놀란 것은 형님이 날카로운 비수를 꼬나쥐고 나무 앞에서 찌르는 연습을 하는 일이었다. 나는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형님은 그저 빙긋이 웃기만 했다. 형님의 칼 쓰는 솜씨는 놀라울 정도로 날카로웠다.” 칼은 집수리를 하던 사진관 부엌에서 주운 서양식 고급 과도였다. 의사는 그때 미장이 일을 하고 있었다. 의사는 “하늘이 주신 것”이라고 기뻐하며 예리하게 갈아 놓았다. 기회가 오자 순하고 불우했던 청년은 단호하게 칼을 휘둘렀다.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총독을 못 죽인 것이 저승에 가서도 한이 되겠다.”그해 7월 15일 의사의 제1차 공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법정에는 방청객 500여명이 몰려 재판을 지켜봤다. 의사는 재판장 앞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강경한 태도로 진술했다. 일제는 의거를 궁박한 생활을 못 이긴 강도질로 깎아내리려 했다. 재판장이 강도질을 하려고 칼을 주워다 둔 것 아니냐고 묻자 송 의사는 “총독을 암살할 목적으로 가지고 왔었소. 내가 밥을 굶소? 왜 강도질을 하겠소?”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무료로 변론했던 고 이인 변호사는 “의사의 얼굴에는 의연한 태도, 긍지가 보였다. 조국을 위해서 할 일을 했다는 말뿐이었다”고 회고했다. 일제는 처음에 중국에서 온 독립단원일 것으로 추측하고 배후를 캐려고 했지만,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부모도 몰랐던 일이었다. 1심에 이어 1926년 11월 10일 2심에서도 사형선고를 받은 의사는 태연자약한 태도로 “나를 사형에 처해요?”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북아현동 집에서 서대문형무소를 오가며 옥바라지를 하던 모친과 동생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1927년 5월 19일 오후, 비밀리에 사형이 집행됐다. 의사는 교수대에 오를 때도 태연했다.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주고 체포된 지 1년 만에 송 의사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시신은 화장했다. 몸져누운 모친에게는 사형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사후 92년이 지난 지금, 창덕궁 금호문으로 관광객들이 무심히 드나들고 있지만 의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의거 터 표지석도 주변 공사로 어디로 치워 버렸는지 찾을 수 없었다. 북아현동 의사의 집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5층짜리 다세대주택이 들어서 있다. 의사의 집터라는 표식도 없다. 송 의사의 유골은 서울 봉원사에 안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묘소는 가묘다. 장남이던 의사의 사형 집행 후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송 의사는 결혼하지 않아 직계 후손이 없다. 1962년 정부는 송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지만, 동생들과 그 후손들의 행방도 찾지 못하고 있다. 잊힌 의사의 충혼을 기리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2003년 ‘송학선 의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됐고 송주섭(88)씨가 지금까지 회장을 맡고 있다. 송 회장은 송 의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송 의사는 은진 송씨인데 송 회장은 근원이 같은 여산 송씨 종중 대표라는 인연뿐이다. 그러면서도 사재를 털어 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다. 김정배 전 고려대 총장이 명예회장, 송정호 전 법무부 장관이 법률고문을 맡아 송 회장을 돕고 있다. 사업회는 서울 세검정 상명대 아래에 기념관과 동상을 세울 부지 660여㎡를 마련했고 내년 6월 착공할 계획이다. 시가 6억원가량의 부지는 송 회장이 개인 땅을 기부한 것이며 사업비 10억여원도 지방의 송 회장 개인 토지를 처분해 충당할 계획이라고 한다. 송 회장은 “정부에서 한 푼도 받은 적이 없다. 안중근, 김구 선생 같은 분만 지원하려 하지 송 의사 같은 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며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글·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단체장 동정] 임병택 시흥시장, 드론복합교육훈련센터 설립 업무협약식 참석

    [단체장 동정] 임병택 시흥시장, 드론복합교육훈련센터 설립 업무협약식 참석

    임병택 경기 시흥시장은 14일 시청 다슬방에서 한국교통안전공단과 함께 드론복합교육훈련센터 설립을 위한 업무협약식에 참석했다. 이번 협약식은 드론 복합교육훈련센터 인프라를 구축해 드론 관련 산업 활성화를 위한 공동 협력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마련됐다. 시는 드론 복합교육센터 구축에 필요한 부지를 제공하고 인프라 조성과 인허가 행정지원 등 사업 수행에 필요한 제반 편의사항을 제공할 예정이다. 드론복합교육센터는 내년 상반기 준공을 목표로 오는 하반기 착공한다. 이어 임 시장은 오후 4시부터 매꼴공원에서 열리는 독립지사 장수산 기념 제막식에 참석했다. 시는 3·1만세운동에 참여해 국가로부터 훈·포상을 받은 독립지사 5인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김천복 지사 기념비를 죽율동 생금어린이공원에 건립했고 올해 윤동욱 지사 기념비를 건립한 바 있다. 세 번째로 기념비가 건립되는 장수산 지사는 군자면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해 ‘비밀통고’라는 제목의 격문을 장곡·장현·월곶리에 전달하다 사전에 발각돼 일제에 체포됐다.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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